1 9 8 7 년 1 월 에 서 6 월 까 지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너의 죽음을 마주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곁에 맴돌 빼앗긴 형제의 넋을 앞에 하고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김 정 남 지 음 는 민주화운동을 기념하고 그 정신을 계승하기 위한 사업을 수행함으로써 민주주의 발전에 이바지함을 목적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법 제1조)으로 설립되었으며 국민과 더불어 민주화운동기념사업을 펼쳐나가는 특수공공법인입니다. 값 8,700원 김정남 지음 김정남(金正男)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 1964년 6 3한일회담반대운동 때 배후인물로 구속된 이래 30여 년 동안 민주화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 등 민주화 운동 단체 결성에 참여했으며,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1987년) 등 각종 성명서 작성, 구속인사에 대한 변론 자료 준비와 구명운동, 구속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 해외 지원세력 과의 연대, 수배자에 대한 은신처 마련과 수발 등 민주화운동을 뒷 받침하는 활동을 했다. 1987년 6 29선언 이후 평화신문의 창간을 주도하고 편집국장을 지냈으며,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 을 역임했다.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1987년 1월에서 6월까지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1987년 1월에서 6월까지 김정남 지음
저자 약력 김정남( 金 正 男 ) 서울대학교 문리대 정치학과 졸업. 1964년 6 3한일회담반대운동 때 배후인물로 구속된 이래 30여 년 동 안 민주화운동을 막후에서 주도했다. 민주회복국민회의, 민주주의와민족통일을위한국민연합 등 민주화운동 단체 결성에 참여했으며,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 다(1987년) 등 각종 성명서 작성, 구속인사에 대한 변론자료 준비와 구 명운동, 구속자 가족들에 대한 지원, 해외 지원세력과의 연대, 수배자 에 대한 은신처 마련과 수발 등 민주화운동을 뒷받침하는 활동을 했다. 1987년 6 29선언 이후 평화신문의 창간을 주도하고 편집국장을 지냈으 며, 김영삼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 교육문화사회수석비서관을 역임했다.
발간사 6월민주항쟁의 정신을 다시 생각합니다 1987년 6월. 그 청명한 하늘 아래서 우리 모두는 민주주의라는 희 망을 가슴에 새기고 독재타도, 민주쟁취 를 목청 높여 외쳤습니다. 사람들이 모일 수 있는 곳이라면 어디에서든 지역과 계층, 세대를 넘 어 모두가 손을 맞잡고 하나 된 마음으로 민주주의를 염원했습니다. 6월민주항쟁이 있은 지 벌써 스무 해가 되었습니다. 6월민주항쟁 은 독재정권의 혹독한 압박과 탄압에도 굴하지 않고 민주주의를 쟁 취하기 위해 기꺼이 자기희생을 감수했던 숭고한 물결이었습니다. 그 속에 박종철이 있습니다. 대학생이라는 자신의 신분을 벗어던지 고 민주화된 세상을 만들기 위해 헌신했던, 모진 고문 속에서도 동 지들을 지키다 홀로 세상을 등진 그의 죽음으로부터 6월민주항쟁은 시작되었습니다. 그리고 항쟁의 기간 내내 박종철은 우리와 함께 있 었습니다.
6월민주항쟁 이후 우리 사회는 많은 변화를 겪었습니다. 헌법이 보장하는 국민의 자유와 권리가 꾸준히 신장되었으며, 민주적인 선 거를 통해 민주정부가 수립되었고, 국가공권력에 의한 억압이 약화 되는 등 정치적 민주주의의 성장을 이룩하였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에 머무르지 않고 한 발 더 나아가 시민참여의 민주주의, 일상 생활에서의 민주주의, 풀뿌리 민주주의 그리고 사회경제적 민주주 의로 발전을 도모해야 합니다. 또한 민주주의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 과 성취를 기억하고 그 소중한 경험과 정신을 미래 세대에게 올바르 게 물려주고자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6월정신의 올바른 계 승일 것입니다. 6월민주항쟁 스무 돌을 맞이하여 아직도 귓가에 쟁쟁한 그날의 함 성을 기억하고 되새기기 위해 이 책을 마련했습니다. 민주주의를 향 한 열정으로 하나가 되었던 그날의 정신이 한국 사회의 희망을 만들 어가는 밑거름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2007년 1월 14일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이사장 함세웅
차례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9 1월 14일, 11시 20분 17 박종철, 그는 누구인가? 35 카인아! 아벨은 어디 있느냐 45 적반하장 4 13호헌조치 61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75 6 10고문살인 은폐조작 규탄 및 5 호헌철폐 민주헌법쟁취범국민대회 95 명동성당 농성투쟁 111 이한열과 최루탄 추방의 날 127 민주화 대행진 그리고 장엄한 승리 141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었다 159
없 다 너 를 빼 앗 길 수 우 리 는 결 코
없 너 우 다 를 리 빼 는 앗 결 길 코 수 우리는 결코 너를 빼앗길 수 없다 오늘 우리는 뜨거운 눈물을 삼키며 솟아오르는 분노의 주먹을 쥔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바람 속으로 날려진 너의 죽음을 마주하고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 곁에 맴돌 빼앗긴 형제의 넋을 앞에 하고 우리는 입술을 깨문다 11
누가 너를 앗아 갔는가 감히 누가 너를 죽였는가 눈물조차 흘릴 수 없는 우리 그러나 모두가 알고 있다 너는 밟힌 자가 될 수 없음을 끝까지 살아남아 목청 터지도록 해방을 외칠 그리하여 이 땅의 사슬을 끊고 앞서 나아갈 너는 결코 묶인 몸이 될 수 없음을 너를 삼킨 자들이 아직도 그 구역질나는 삶을 영위해 가고 있는 이 땅 이 반도에 지금도 생생하게 생생하게 살아 있는 너 철아 살아서 보지 못한 것 살아서 얻지 못한 것 인간, 자유, 해방, 죽어서 꿈꾸어 기다릴 너를 생각하며 찢어진 가슴으로 네게 약속한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너의 죽음까지 거짓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다 12
그리고 말하리라 빼앗긴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일어서서 말하리라 오늘의 분노, 오늘의 증오를 모아 이 땅의 착취 끝날 줄 모르는 억압 숨쉬는 것조차 틀어막는 모순 덩어리들 그 모든 찌꺼기들을 이제는 끝내 주리라 이제는 끝장내리라 철아 결코 누구에게도 빼앗길 수 없는 우리의 동지여 마침내 그날 우리 모두가 해방 춤을 추게 될 그날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이 되어라 그리하여 무진벌에서 북만주에서 그리고 무등에서 배어난 너의 목소리를 듣는 우리는 그날 비로소 그날에야 뜨거운 눈물을 네게 보내 주리라 13
이 시는 1987년 1월 20일,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 거행된 박 종철 군 추모제에서 박종철이 과( 科 )회장으로 있던 인문대학 언어학 과 학생들이 바친 추모시이다. 언어학과의 한 여학생이 이 추모시를 읽을 때, 그 자리에 참석했던 1천 5백여 명의 학생들은 다 같이 눈물 을 뿌렸다. 이 추모시는 경기도 마석 모란공원 묘역에 있는 박종철 의 묘비와 서울대학교 교정에 세워진 추모비에도 새겨져 있다. 박종철의 죽음은 30여 년에 걸친 민주화투쟁의 가장 비극적인 정 점( 頂 点 )이었다. 그 비극의 정점에서 그는 산화한 것이다. 그러나 바 로 그 비극의 정점으로부터 역사는 위대한 반전을 시작한다. 박종철 의 죽음으로부터 6월 항쟁에 이르는 6개월은 한국 민주화운동에서 가장 역동적인 기간이요, 그 클라이맥스(climax)라고 할 수 있다. 그 모든 것이 박종철로 하여 비롯되고, 박종철로 하여 이어지고, 박종 철로 하여 승리로 귀결된 것이다. 이 추모시에서 다짐한 것처럼 이 나라 국민은 죽은 박종철로 하여 금 더 이상 밟힌 자가 되지 않게 하였고, 더 이상 묶인 몸이 되어 있 지 않게 하였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죽음마저 거짓으로 묻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추모시에서 박종철에게 약속했던 다짐은 마 침내 이 땅위에서 실현되었다. 14
그리고 말하리라 빼앗긴 너를 으스러지게 껴안으며 일어서서 말하리라 오늘의 분노, 오늘의 증오를 모아 이 땅의 착취 끝날 줄 모르는 억압 숨쉬는 것 조차 틀어막는 모순 덩어리들 이 모든 찌꺼기들을 이제는 끝내 주리라 이제는 끝장내리라 과연 박종철은 우리 모두가 해방 춤을 추게 될 그날 / 척박한 이 땅 마른 줄기에서 피어나는 / 눈물뿐인 이 나라의 꽃 이 되었다. 30여 년에 걸친 민주화투쟁의 전 과정을 뒤돌아보면, 발자국마다 피와 눈물이 고여 있다. 그러나 우리가 마침내 쟁취한 이 나라의 민 주화는 당대를 살고 있던 사람들의 최선과 역사의 힘이랄까, 보이지 않는 손의 힘이 오묘하게 합해져 만들어진 한편의 장엄한 서사시요, 드라마였다고 할 수 있다. 굽이굽이마다 사건이 있었고 그것을 감당하는 사람이 있었다. 결 코 이대로는 안된다고 했을 때 이심전심으로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떨쳐 일어났고, 말이 있어야 할 때 있는 힘을 다해 외쳤으며, 울어야 할 때 더불어 함께 손잡고 통곡했다. 맡아져야 할 짐이 있을 때 그것 15
을 맡아지는 사람이 반드시 나타났다. 심지어 죽음까지도 기꺼이 짊 어지는 사람도 있었다. 박종철은 이 나라의 민주화를 위하여 태어났고, 그 민주화를 위하 여 살다가 죽었다. 죽은 박종철 하나로 온 국민이 하나가 될 수 있 었고, 그렇게 다시 하나로 되는 과정이 곧 민주화의 길이었다. 하나 가 곧 여럿이요, 여럿이 곧 하나 되는 과정, 곧 1987년 1월 14일 박종 철의 죽음으로부터 그해 6월 말까지의 장엄한 역사를 기록하는 것이 이 책의 내용이요, 목적이다. 16
11 시 1 월 20 분14 일,
1 11시 월 20 분14 일, 1987년 1월 15일 오전, 중앙일보 검찰청 출입기자 신선호는 흔히 그랬듯이 검찰 간부들의 방을 한바퀴 돌다가 우연히 경찰 참 큰일 났어! 라고 말하는 한 간부의 소리를 들었다. 그는 그것이 결코 예사 롭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이로부터 숨 가쁜 취재와 신문 사 데스크와의 피 말리는 신경전 끝에 그날 중앙일보 석간의 1.5판 부터는 2단짜리 기사 하나가 실렸다. 그때가 전두환 정권의 한가운 데였고, 더구나 보도지침 이 엄존하던 시대였기 때문에 기사 하나를 쓰고 싣는 것이 결코 만만치 않았다. 경찰에서 조사받던 대학생 쇼 크사 라는 제목 아래 이제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닌 박종철의 이름과 그 죽음이 세상에 알려지는 순간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죽음에 대한 의혹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19
14일 상오 11시 20분쯤, 서울 남영동 치안본부 수사실에서 조사받던 서 울대생 박종철 군(21세, 언어학과 3년)이 조사도중 갑자기 쓰러져 숨졌다. 경찰은 박 군의 사인을 쇼크사라고 발표했으나, 검찰은 박 군이 수사관의 가혹행위로 인해 숨졌을 가능성에 대해 수사 중이다. 이 보도가 나가자 경찰로서는 어떠한 형태로든 해명을 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6일 오전에 있었던 강민창 치안본부장의 발표는 이 렇게 되어 있다. 1월 14일 오전 8시 10분경, 서울 관악구 신림동 하숙방에서 연행하여 오 전 9시 16분경 조반으로 밥과 콩나물국을 주니까 조금 먹다가 어젯밤 술 을 많이 먹어서 밥맛이 없다고 냉수나 달라고 하여 냉수를 몇 컵 마신 후, 10시 51분경부터 심문을 시작, 박종운 군 소재를 묻던 중 갑자기 억 소 리를 지르면서 쓰러져 중앙대 부속병원으로 옮겼으나 12시경 사망하였음. 이때 경찰이 배포한 보도자료의 책상을 탁 치니 억 하고 죽었다 는 말은 한때 세간의 비웃음과 더불어 분노를 자아내게 하는 유행어 가 되었다. 어쨌든 이 같은 과정을 거쳐 박 군의 죽음은 세상에 알려 지게 되었다. 20
이보다 앞선 1월 14일 오전 11시 40분, 중앙대 부속병원 의사 오연 상은 간호사와 함께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에 불려갔다. 동행한 수사관은 꼭 살려야한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이들이 도착한 곳은 5 층 9호 조사실이었는데, 욕조와 세면대, 양변기와 침대까지 그 안에 있었다. 뒷날 그가 언론에 소개했던 조사실은 이런 구조였다. 두어 평 되는 방 오른쪽으로 간이침대가 놓여 있고, 왼쪽으로 걸상이 두 개 달린 책상이 있었다. 그리고 취조실 안쪽으로 높이 80센티미터 가량 되는 나지막한 칸막이가 있고, 칸막이 뒤로 타일바닥에 양변기와 욕조가 놓여 있는 것이 한눈에 들어왔다. 화장실은 문이 닫혀 있지 않아 양변기와 욕조가 취조실에서 훤히 보이도록 설치돼 있는 게 특이했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 7~8명 되는 수사관은 초조 한 기색으로 서성대는가 하면 어떤 이는 누워 있는 한 청년에게 열심 히 인공호흡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오연상의 눈에 그 청년은 이미 숨져 있었다. 그들은 살려낼 길이 없겠느냐 며 계속 허둥댔다. 그 들의 요청에 따라 의사는 심장쇼크요법을 시행했다. 기관지에 튜브 를 집어넣어 인공호흡을 시킨 데 이어 캠플주사를 놓고 30분 동안이 나 심장 마사지를 했다. 그러나 이미 죽은 청년을 되살려 낼 수는 없 었다. 수사관들의 요청으로 그 청년은 중앙대학교 용산병원 응급실 21
로 후송되었다. 거기에 가 면 혹시 살려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그들의 조바 심으로 병원 응급실까지 는 갔지만, 죽은 사람은 받을 수 없다는 병원의 규 물고문이 이루어진 대공분실 수사실 현장 정에 따라 시신은 경찰병 원 영안실로 옮겨져 안치 되었다. 17일자 동아일보에는 의사 오연상이 대공분실 조사실에 들어갔을 때 청년은 이미 죽어 있었고, 방안에는 7~8명의 수사관이 서성이고 있었으며, 바닥에는 물기가 흥건하게 고여 있었다는 그의 증언이 실 려 있었다. 박 군은 복부팽만이 심했으며 폐에서는 수포음이 들렸 다는 내용도 있었다. 오연상은 자신이 보고 확인한 사실만을 말했을 뿐이지만, 이 보도를 보고 많은 사람들은 직감적으로 물고문이 있었 다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다만 경찰만이 이 사실을 애써 숨기고 있 었을 뿐이다. 경찰은 아들의 갑작스런 죽음에 얼이 빠져 있는 아버지를 회유, 협박하여 합의하에 화장 처리해 버릴 예정이었지만 검찰의 지휘로 15일 저녁 9시에 한양대병원에서 시신부검이 이루어졌다. 부검에는 부검의로 국립과학수사연구소의 법의학과장 황적준 박사 외에 안상 수 검사, 한양대병원의 박동호 교수 그리고 가족으로는 박종철 군의 22
삼촌 박월길 씨가 입회했다. 황 박사와 박 교수의 의견과 뒷날의 증언이 이 사건에 결정적인 단서를 제공하게 되는데, 부검의인 황적준 박사는 물고문 도중 질식 사한 것 같다는 의견을 피력했다. 그러나 경찰 측은 부검 감정서에 사인을 심장마비로 해달라는 협박을 서슴지 않았다. 1년 뒤인 1988 년 1월에 공개되어 다시 한번 세상을 들끓게 만들고, 결국 당시 치안 본부장 강민창을 구속시키게 만든 그의 일기는 그때의 정황을 잘 말 해주고 있다. 1월 15일 오후 4시 40분 이기찬 경정으로부터 치안본부장 지시이니 사체부검팀을 구성하라 라는 연락을 받음. 모두 4명으로 부검팀을 구성, 오후 6시 20분경 치안본부에 도착, 바로 본부장 방으로 갔다가 5차장 박처원 치안감실로 안내됨. 이 때 박 치안감은 박 군의 사체에 외상이 없고, 3~4회 욕조에 담갔으니 익사 일 것 이라고 설명. 밤 8시 30분경 한양대 영안실에 변사체 도착. 밤 9시경 사체가 부검대에 올려지고 안상 수 검사, 한양대 박동호 교수, 박 군 삼촌만 참가한 가운데 부검 시작. 밤 10시 25분 부검 끝내고 영안실 사무실에서 안 검사에게 약 40분간 외상부위와 사인 에 대해 경부압박에 의한 질식사임을 배제할 수 없다 라고 설명. 23
밤 11시 30분경 5차장 승용차로 치안본부에 도착. 본부장 소집무실에서 와이셔츠 차림의 강민창 본부장과 차장 등 간부들을 만나 부검 소견을 설명. 16일 새벽 2시 아침에 있을 급한 불(본부장의 기자회견)부터 끄자 라는 간부들의 설득 에 따라 착잡한 심정으로 외표검사상 사인이 될 만한 특이소견 보지 못함, 내경 소견은 오른쪽 폐하엽 하면에서 출혈반 소견 으로 발표용 부검 소견 작성에 동의. 아침 7시 40분경 본부장실로 직행, 잠옷 차림의 강 본부장 만남. 가슴부위와 목 부위의 압 박에 의한 피하출혈 사진을 제외한 나머지 부검 사진 13장을 본 강 본부장 은 만족한 표정. 오후 3시경 부검에 입회한 한양대 박 교수와 박 군 삼촌의 목격담이 동아일보에 비교 적 상세히 보도된 것을 읽고 어떤 일이 있어도 부검감정서 만은 사실대 로 기술 해야겠다 라고 결심. 오후 3시 20분 본부장 소집무실과 5차장실을 왕래하면서 대기하는 동안 강 본부장, 박 5 차장, 주 4차장, 유 2차장이 나에게 19일까지 감정서를 심장쇼크사 로 보고하라 라고 회유. 결론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강 본부장이 목욕이나 하라 며 국과수 간부에게 100만 원이 든 봉투를 건네 줌. 인사하고 나오 는데 강 본부장이 당신 은혜는 잊지 않겠다 라고 말함. 24
저녁 7시 20분 여의도 모 호텔에서 목욕을 하고 귀가. 잠자리에 누웠으나 잠 이루지 못함. 17일 아침 6시 10분경 애들을 스케이트장에 데려다 주면서 아내에게 정의의 편에 서서 감정서 를 작성 하겠다 라고 결심을 밝힘. 오후 5시경 형님을 만나 조언을 들은 뒤 함께 친구인 배 모 검사를 만남. 배 검사는 정 치적 문제이니만큼 신중하게 처리하라 라고 말함. 돌아오는 길에 형님은 사실대로 알리는 것이 내 생각이다 라고 조언해 주며 격려. 밤 9시 55분 국과수 간부의 연락을 받고 워커힐호텔 커피숍에 도착. 이 간부는 3차장 에게 모든 사실을 정확히 밝히겠다 고 최종 보고했다 라고 전했으나 3차 장(이경조 치안감)은 국과수에서 사인문제를 어느 정도 묵인해 줄 수 있는 가 물었다고 한다. 밤 10시 10분경 국과수 간부에게 워키토키로 연락이 옴. 신길산업(특수수사 2대)으로 부 검의 조서를 받으러 오라는 통보. 새벽 4시 특수수사 2대 김기평 수사관에게 참고인 진술을 통해 모든 것을 사실대로 털어 놓음. 25
박종철 군의 시신은 16일 오전에 벽제로 옮겨져 9시 10분에 화장 되었다. 그때 동아일보의 창( 窓 ) 이라는 기사는 화장에서 임진강에 그 유골이 뿌려지는 일련의 과정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16일 오전 8시 25분 박 군의 시체는 영안실을 떠나 벽제 화장장으로 옮겨 져 오전 9시 10분 화장됐다. 두 시간여 화장이 계속되는 동안 아버지 박 정기 씨는 박 군의 영정 앞에서 정신 나간 듯 혼잣말을 계속했고, 어머니 정차순 씨는 실신, 병원으로 옮겨졌다. 화장이 끝난 박 군의 유골은 분골실로 옮겨졌고, 잠시 뒤 하얀 잿가루로 변해 형 종부 씨의 가슴에 안겨졌다. 종부 씨는 아무 말 없이 박 군의 유해 를 가슴에 꼭 끌어안은 채 경찰이 마련한 검은색 승용차에 올랐다. 잠시 후 일행은 화장장 근처의 임진강 지류에 도착했다. 아버지 박 씨는 아들의 유골가루를 싼 흰 종이를 풀고 잿빛 가루를 한 줌 한 줌 쥐어 하염없이 샛강 위로 뿌렸다. 철아, 잘 가그래이. 아버지 박 씨는 가슴 속에서 쥐어짜는 듯한 목 소리로 말했다. 아버지 박 씨는 끝으로 흰 종이를 강물 위에 띄우며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라고 통곡을 삼키며 허 공을 향해 외쳤다. 이를 지켜보던 주위 사람들은 흐느끼거나 눈시울을 붉혔다. 26
경찰병원 영안실에서 막내아들 종철의 시신을 붙들고 내 아들이 대체 왜 죽었소? 못돼서 죽었소? 똑똑하면 다 못 된 거요? 라는 독 백을 거듭했던 어머니 정차순 씨의 말과 임진강 지류에서 잿빛 유골 가루를 샛강위로 뿌리면서 철아, 잘 가그래이. 아부지는 아무 할 말이 없대이. 하고 허공에 대고 외쳤다는 아버지 박정기 씨 의 말은 절창이 되어 두고두고 많은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다. 그리 고 많은 사람들로 하여금 박종철 군의 죽음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어쩌면 곧 자기 자신의 일일 수 있다는 느낌을 주었다. 그만큼 그 말 은 시대적인 호소력을 가지고 있었다. 거창한 웅변이 어떻게 이 말 의 진실을 당할 수 있으랴. 부검에 입회했던 한양대병원 박동호 교수와 삼촌 박월길 씨는 자 신이 듣고 본 것을 언론에 증언했다. 동아일보 1월 16일자는 그들의 증언을 인용해 숨진 박 군은 머리에 피하출혈과 목, 가슴, 하복부, 사타구니 등 수십 군데에 멍자국이 있었다 고 보도하였고, 이어서 각 언론은 경쟁적으로 박종철 군에 대한 고문의혹을 제기하여 국민 의 양심을 자극하였다. 이렇게 하여 고문사실은 기정사실화되었다. 이제 국민은 박종철 군이 고문으로 죽었다는 것을 너무나도 당연한 사실로 받아들였다. 당국으로서도 이제 더 이상 고문사실을 숨길 수 없게 되었다. 전 두환 정권의 고위 관계자들은 1월 17일, 관계부처 장관과 유관기관 책임자가 참석한 정부대책회의, 이른바 관계기관 대책회의라는 것 을 연다. 그러나 여기서 결정된 것은 경찰로 하여금 자체조사토록 27
박종철의 1주기 때 유해를 뿌린 임진 강 가를 찾은 아버지 박정기 씨 한다는 것이었다. 내무부와 치안본부 측은 이미 이때부터 대공수사 요원의 사기 운운하면서 경찰에 의한 자체조사를 강력히 요구했다. 관계기관 대책회의에서의 결정은 권력기관 내부에서 누가 힘이 더 센가에 따라 좌우될 수밖에 없다는 것은 상식에 속한다. 경찰로 하 여금 자체조사토록 결정하는 바로 그 순간부터 사건조작의 개연성 은 상존하는 것이었다. 그리고 경찰이 그토록 집요하게 자체조사를 요구한 이면에는 사건 조작의 음모가 숨어 있었다. 그것을 전두환 정권 자체가 사실상 양해하고 추인해 준 셈이다. 이리하여 18일, 경찰은 자체조사에 들어갔고, 요식적인 절차를 거 쳐 두 명의 수사관이 물고문을 자행한 것으로 조사를 마무리지었다. 신길동 치안본부 특수수사 2대에서 조사할 때부터 재조사 요원들은 상부로부터 조한경 경위 등 2명을 조사하라 는 지시를 받았다. 이는 경찰 상층부가 이미 조작은폐 사실을 알고 그렇게 지시했거나 아니 28
면 처음부터 조작에 개입했음을 확인해 주고 있는 증거이다. 19일, 치안본부장은 자체조사 결과를 다음과 같이 발표하면서 이 번 사건은 일부 수사관들의 지나친 직무의욕 때문에 빚어졌다 는 말 을 빼놓지 않는다. 이는 참고인 자격으로 연행된 사람도 경찰의 지 나친 직무의욕 이 발동하면 죽을 수도 있다는 것이어서, 경찰 총수가 할 말은 아니었다.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박종철 군이 서울대 민주화추진위원회 사 건 주요 수배자인 박종운 군의 소재를 알고 있음이 확실함에도 진술을 거 부하자 사실을 알아내기 위해 위협수단으로 대공수사 2단 5층 9호 조사 실에서 박 군의 머리를 욕조 물에 한차례 잠시 집어넣었다가 내 놓았으나 계속 진술을 거부하면서 완강히 반항하여 다시 머리를 욕조 물에 넣는 과 정에서 급소인 목 부위가 욕조 턱에 눌려 질식 사망한 것으로 밝혀졌다. 연행 시간은 8시 10분, 사망시간은 11시 20분경. 사망원인은 경부압박 에 의한 질식사, 복부팽만은 조사관의 인공호흡과 초진 의사의 호흡기 주 입으로 인해 공기가 위장에 들어가 생긴 일시적 현상임. 폐 조직검사 결 과 수분이 검출되지 않았으며, 폐결핵 병력에 의한 폐 손상 흔적이 있었다. 왼손 부위의 타박상은 연행 과정에서 저항으로 생긴 부상이다. 부검내용 중 경부압박 이외의 사항은 박 군의 사망원인과 직접적인 관계가 없는 것 으로 판명됐다. 29
같은 날 내무부 장관과 치안본부장이 해임되었다. 22일에는 고문 경관의 직속상관인 유정방 경정과 박원택 경정에 대한 징계가 결정 되었다. 19일 오후 5시 30분경에는 서울 형사지방법원에서 이들 경 관 2명에 대한 구속영장이 발부되었다. 그날 경찰이 벌인 피의자 호 송작전은 일찍이 그 유례를 볼 수 없었던 기상천외의 것이었다. 두 경찰관은 신길산업 이라는 위장간판이 달린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 연행되어 있었다. 저녁 9시 40분경에 나타난 두 대의 미니버스 안에는 20여 명이 똑 같은 점퍼를 입고, 모자로 얼굴까지 가린 채 고개를 푹 숙이고 앉 아 있었다. 고문 경관으로 지목된 조한경, 강진규의 얼굴을 언론에 노출시키지 않기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그것은 지나친 쇼였다. 경 찰은 그들이 대공수사관들이기 때문에 북한 측에 그 얼굴이 알려지 는 것을 막기 위한 것이라고 거창하게 둘러댔다. 어떻게 보면 그것 은 가짜로 두 사람을 고문 경관으로 내세운 데 대한 배려요, 예의였 을 것이다. 이들 두 사람은 이러한 작전 끝에 서대문경찰서 유치장 에 수감되었다. 그러나 이 호송작전으로 국민들의 의혹은 더욱 증폭 되고, 여론은 더욱 악화되었다. 20일 낮 1시 40분, 서울대학교 학생회관 2층에서는 박종철 군의 추모제가 거행되었다. 방학 중인데도 1천 5백여 명의 학생들이 모여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였고, 조속한 진상규명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우리의 박종철이를 두 번 죽이지 말라, 고문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다 는 구호를 외쳤다. 언어학과 학생들의 추도시 우리는 결코 너 30
1987년 1월 20일, 서울대학교 내에서 치러진 박종철의 추모제 (사진제공 박정기) 를 빼앗길 수 없다 가 여학생에 의해 읽혀질 때는 누구도 눈물을 감 출 수가 없었다. 학생들은 종철형을 보내며 라는 성명을 낭독하고, 꽃상여 타고 라 는 노래를 합창했다. 박종철 군이 생시에 이 노래를 즐겨 불렀기 때 문에 친구들은 더욱 북받치는 감정으로 노래를 불렀다. 그가 좋아하 던 노래를 장송곡으로 부르게 될 줄은 이전엔 아무도 몰랐던 것이다. 꽃상여 타고 그대 잘 가라 세상의 모진 꿈만 꾸다 가는 그대 이 여름 불타는 31
버드나무 사이로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가슴에 돋는 칼로 슬픔을 자르고 어이 어이 큰 눈물 땅에 뿌리고 그대 잘 가라 꽃상여 타고 종철형을 보내며 우리는 또 다시 끌어 오르는 분노를 느낀다. 우종원, 김세진, 이재호, 이 동수. 부를 때마다 슬픔과 분노가 솟아오는 이름들. 우리는 그 이름들 위에 또 다시 박종철 학형의 이름을 더해야 한다. 가장 인간적인 모습으로 하늘을 우러러 한 점 부끄럼 없는 자세로, 한치의 타협도 없이 치열하게 싸워 왔던 형을 보내며, 역사 속에서 능동적인 주체로 살아가는 삶을 강조 했던 형의 말을 가슴깊이 되새긴다. 이제 형을 보내며, 우리는 지난 며칠 간의 모든 슬픔과 경악과 분노와 충격은 아무 것도 아님을 안다. 이제 우 리는 모든 의미없는 슬픔의 조각들을 던져 버려야 함을 안다. 하루하루 살 32
아 기억되는 형의 죽음을 두 손 불끈 쥔 채로 가슴 속에 채워 두어야 함을 안다. 절대로 눈물로 형의 죽음을 보내버리지 말아야 함을 안다. 우리의 가슴 속에, 우리의 핏발 선 두 눈 속에 새겨두어야 함을 안다. 지금 우리는 형의 영정 앞에서 생각해 본다. 누가 형을 죽였는가? 형의 목덜미를 쥐고 욕조에 머리를 처박고, 전기줄 을 형의 몸에 휘감은 두 살인마인가? 본시 인간이었을 그들을 살인마로 변모시키기 위해 찬바람 부는 동안 모든 민주하는 이들을 다 잡아 족치라 고 채근한 치안본부장, 내무부 장관인가? 우리들은 안다. 종철형을 죽인 자, 바로 자신의 존립을 위해 성고문 등 온갖 끔찍한 고문과 살인행위를 서슴지 않는 현 군사파쇼정권이라는 것을. 또한 그들이 바로 종철형이 이 땅에서 몰아내고자 했던 무리들이라는 것을. 80년 5월 잔인하도록 눈부 신 햇볕이 내리쬐는 금남로에서 수천의 공수부대 를 동원해 이천여 광주 민중을 학살한 전두환 군부파쇼집단이며, 이를 뻔히 알면서도 방조하고, 사주하면서 끊임없이 이 땅을 짓밟아 온 미제국주의자들이 종철형이 끝내 이 땅에서 영원히 몰아내고자 했던 놈들이라는 것을 우리는 안다. 이제 우 리는 종철형의 죽음 앞에 선언하고자 한다. 아무리 우리가 가는 길이 험할 지라도, 형이 그렇게 하신 것처럼 두 눈 똑바로 뜨고, 두 주먹 불끈 쥐고, 끝까지 싸워 나가고야 말 것임을! 이제 한치의 감상도, 한점의 회의도 없이 싸우는 이들의 단결을 믿으며, 싸우는 이들의 승리를 믿으며, 앉아 있는 이들의 일어섬을 믿으며, 함께 싸워나갈 것임을! 저들의 폭력성이 형의 죽음으로 인해 반성으로 약화될 것이라는 비겁하고, 나약한 모든 감상들을 뿌리치며, 그들은 절대로 반성 33
하지 않을 집단, 절대로 민중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집단, 절대로 민족 의 뜻을 받아들일 수 없는 집단, 절대로 민주의 옷을 걸칠 수 없는 집단, 반드시 반드시 살아남아 처단해야만 할 집단임을 가슴깊이 새겨 넣으며, 우리는 종철형을 보내면서, 오늘을 마지막으로 이제 더 이상 눈물을 보이 지 말아야 함을 안다. 그리하여 형의 짧았던 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역사 앞에서 증명해 보일 그날, 임진강변에서 마음껏 눈물 흘릴 수 있는 그날을 맞이하고야 말 것이다. 1. 살인고문 자행하는 군부독재 타도하자!!! 1. 살인고문의 본거지 치안본부, 보안사, 안기부를 즉각 해체하라!!! 1. 노동자, 학생, 민주인사를 즉각 석방하라!!! 1. 민족민주운동 탄압하는 살인정권 타도하자!!! 1. 박종철 학형을 살려내라!!! 1987. 1. 20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4
누 구 인 가? 그 는 박 종 철,
누 그 박 구 는 종 인 철, 가? 그 끈끈하고도 치열했던 21년의 삶을 돌아보며 박종철은 1965년 4월 1일 부산에서 공무원을 하는 아버지 박정기 씨와 어머니 정차순 씨의 2남1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산 도성초등학교, 영남 제일중학교, 혜광고교를 졸업할 때까지 그는 보통의 공부 잘하는 학생이 걷는 평범한 길을 걸었다. 하얀 얼굴과 재치 있는 언행으로 주위사람들의 사랑을 받으며 자랐다. 1979년, 부산에서 일어난 부마항쟁의 열기를 온 몸으로 느끼며 그는 막연 하게나마 자기가 살아가야 할 삶의 방향을 잡았다. 1983년 서울대학교에 응시했다가 실패, 재수를 하면서 당시 서강대 운동권에서 활동했던 형의 생활을 지켜보면서, 또 형의 서가( 書 架 )에 꽂혀 있는 책들을 틈틈이 보면 서 나름대로의 뜻을 세우게 되었다. 37
1984년, 그는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입학해서 그의 짧은 생을 마감할 때까지 그는 오직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을 위해 자신을 투 신하기로 결심한다. 몸소 농촌생활도 체험했고 스스로 노동자가 되어 일 하기도 했다. 이로부터 억압받고 착취당하는 사람들이 그들 운명의 주인 이 되는 사회를 위해 한 치의 타협 없이 치열하게 싸워 나갔다. 그는 대학 1학년 등 저학년 학생이 흔히들 가질 수 있는 두려움과 회의를 자기와의 끊임없는 투쟁 속에 극복하면서 1984년 봄의 도서관 철야농성, 4 19기 념식을 마치고 4 19희생자 묘소가 있는 수유리에서의 투쟁 등 학교에서, 거리에서, 농촌에서 싸웠다. 2학년에 들어서는 언어학과 2학년 대표가 되어 선배, 후배와의 격의 없는 대화를 통해 과 분위기를 새롭게 하면서 과 구성원들을 굳게 결속시키는 역할을 했다. 그러던 그는 1985년 5월, 사당동 가두시위와 관련 구류 5일, 6월의 구로 가두시위로 구류 3일을 살기도 했다. 이런 일련의 시련을 겪 으면서도 그는 조금도 위축됨이 없이, 오히려 그가 막연하게 설정했던 삶 의 방향을 한층 구체화시키고 확고히 하는 계기로 삼았다. 그는 항상 노동 자, 농민, 도시빈민의 문제를 자신의 문제로서 고민했으며, 날로 심화되어 가고 있는 이 땅위에 축적되고 있었던 모든 모순을 척결하기 위해 끝까지 투쟁하겠노라 다짐했으며, 그것을 몸소 실천했다. 3학년이 되면서 과 회장으로 선출되었고, 인문대학의 제반 학생활동에 적 극적으로 참여하면서, 1986년 4월에는 청계피복노조 합법성쟁취대회와 그 시위에 참가, 구속되기에 이르렀다. 그는 감옥에서도 학습(현실에 대한 올바른 인식을 위한 독서)을 멈추지 않았고, 꾸준히 운동을 하는 등 심신 38
을 단련하기를 게을리 하지 않았고, 쉬지 않고 자기의 주장을 밝히면서 투 쟁의 의지를 강고히 했다. 7월 중순에 집행유예로 나와서는 3개월 동안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 보이지 않는 노력을 했다. 1984년 봄부터 86년 4월 그가 구속되기까지 그의 행적은 타오르는 불꽃 그 자체였으며, 오직 하나의 목표를 추구하며 끊임없이 자신을 반성하고, 이 땅의 모순을 직시하는 삶이었다. 우리는 그의 짧았던 생의 편린들을 통 해 우리사회 안의 첨예한 모순을 그대로 두고 보지 못하고, 그것을 개선 광정하고자 했던 한 젊은이의 처절한 투쟁을 볼 수 있는 것이다.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우일동 이상은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학우일동이 엮은 박종철 군의 일대 기이다. 간략하지만 그의 일생이 일목요연하게 정리되어 있다. 그는 재수하면서 서강대학교에서 가톨릭학생회장을 역임하며 학생운동 에도 깊이 관여하였던 형 종부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재수 끝에 서 울대 언어학과에 입학하기는 했지만 학생운동에 관하여 순수한 새 내기만은 아니었던 것이다. 그는 대학 1학년 때 이미 전태일의 전기 어느 청년 노동자의 삶과 죽음 을 읽고 깊은 감동을 받고, 열사라 는 단어는 저를 비장하게 만듭니다 라고 말할 정도로 성숙한 청년이 었다. 그리고 그는 모든 일에 솔선하는 원칙주의자였다. 농촌활동에서 식사할 때는 그 자신 기꺼이 주방장이 되어 동료들 39
의 식사를 챙겼고, 정리 하고 토론하는 시간이 되면 어김없이 철저한 호랑이 감독이 되었다. 농활 때 농민이 차려주 는 새참을 먹을 것인가 말 것인가를 놓고 토론 5살 때 형, 누나와 함께 찍은 사진 이 벌어졌을 때 농민에 게 폐를 끼치는 일은 하 지 않아야 한다면서 새참 먹기를 반대했다. 국수가 불면 버려야 한 다면서, 성의를 받아주어야 한다는 주장이 대세였음에도 그는 한사 코 새참 먹기를 거부했다. 학생들의 마지막 투쟁이라 할 시험거부 문제가 나왔을 때, 그는 단호히 시험을 거부해야 한다는 주장에 확고히 섰고, 또 그것을 관 철했다.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구류를 살면서도 거리투쟁에는 어김 없이 참석, 가장 열렬하게 싸웠다. 그래서 그에게는 억세게 재수 없 는 싸움꾼 이라는 별명이 붙었다. 성동구치소 수인번호 80번으로 감 옥을 살 때도 학습을 게을리하지 않았으며, 감옥에서는 단전호흡과 요가를 익혔고, 그는 또 그것을 아주 자랑스럽게 이야기했다. 아마 도 그는 사회현실을 알면 알수록, 부딪치면 부딪칠수록 이 사회 이 대로는 안 된다 는 생각을 더욱 짙게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는 학내 에서 자신이 참여했던 서클의 표어요, 목표였던 먼저 인식한 자가 40
먼저 실천한다 는 데 철저했다. 그리고 그는 자기 자신에게는 엄격 했고, 남에게는 비교적 관대했던 리더십의 소유자였다. 그러나 그는 누구보다 따뜻한 사람이었다. 세미나를 하려는데 책 이 없어 고생하는 후배에게 선뜻 책을 사준다거나, 1986년 말 건국 대에서의 농성으로 구속된 과 후배에게는 한 벌 밖에 없는 자신의 겨울외투를 선뜻 차입시켜 준 일도 있었고, 한겨울에도 얇은 바지를 입고 다니는 후배에게 두터운 겨울바지를 사다준 일 등 그는 비록 가난했지만 베푸는 삶에 익숙했다. 그와 하숙생활을 같이 했던 한 동료는 박종철을 이렇게 회상했다. 남들을 위해 뭔가를 해주려는 늘 바쁜 종철은 그렇게 부자 였습니다. 그의 서클 사람들은 그를 운동권의 자선 사업가 라고 부르기도 하더군요. 자신 을 위해 뭔가를 끝까지 소유하려 하고 집착하는 일은 종철에게 있을 수 없 는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종국에는 그렇게 자신의 목숨까지 바친 것이겠 지요. 우리는 박종철과 박종운과의 관계를 살펴 볼 필요가 있다. 박종운 이라는 이름은 종철이 목숨을 걸고 지키고자 했던 모든 동지를 대표 하는 이름이라고 할 수가 있다. 그가 박종운의 거처와 관련해 빌미 를 줄 만한 말을 끝까지 하지 않은 것은 그의 강한 책임의식을 엿보 41
게 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살아서의 품성이었다. 평전에 의하면, 박종철이 박종운을 처음 만난 것은 1985년 1월, 팀 동료들과 함께 겨울 합숙을 하던 때였다고 한다. 오류동의 자취방에 서 합숙을 했는데, 갑작스러운 정전으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어둠 을 피해 간 곳에 박종운이 있었다. 운동권 선배였던 박종운은 후배 들에게 그 정체가 밝혀져서는 안 될 사람이었다. 그러나 박종철에게 그 얼굴은 알 만한 사람, 시위대의 선두에 서 있던 바로 그 사람이었 다. 그들은 인사를 주고받았고, 그 이름도 형제 같은 두 사람은 이내 친해졌다. 그로부터 얼마 후인 1985년 여름, 박종운은 민주화추진위 원회(민추위) 사건으로 지명수배를 받아 쫓기는 몸이 된다. 1986년 11월 말, 박종철은 하숙방에서 서클 선배를 기다리고 있었 다. 기다리는 종철이 앞에 나타난 사람은 엉뚱하게도 박종운이었다. 박종운은 얼마 전 호구조사 때 동사무소 직원과 경찰에게 신분이 노 출되자 책과 옷가지를 남겨둔 채 도망쳐 나와 아는 사람들의 집을 전전하면서 하룻밤씩 신세를 지고 있었다. 이런 생활 중 박종철이 하숙하고 있다는 얘기를 듣고 찾아온 것이었다. 박종운이 다시 찾아온 것은 1987년 1월 8일이었다. 박종운은 한차 례 구속사태가 몰고 간 뒤끝, 연락이 끊긴 사람들과의 연결을 박종철 에게 부탁하기 위해 찾아온 것이었다. 종철이는 기꺼이 박종운의 청 을 받아드렸다. 그리고 종철은 한사코 마다하는 그에게 자신의 목도 리를 풀어 주었다. 그것은 누나 은숙이가 직접 떠 준 것이었다. 이것 이 그들의 이승에서의 마지막이었다. 42
1987년 1월 14일 새벽, 전날 오랜 만에 친구들과 술을 마신 종철이는 자고 있었다. 그 하숙집에 경찰이 들 이닥쳤다. 그들은 종철을 억지로 깨 운 후 차에 밀어 넣었다. 그리고 남 영동 대공수사 2단 5층 9호실로 끌 고 갔다. 거기서 고문을 당하고 14일 오전 11시 20분 박종철은 숨졌다. 그와 부산의 아버지가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1월 12일이었다. 13일부터 일본어 강의를 듣기 위해 학교로 간 다면서 하직한 것이 마지막이었다. 그때 아버지는 직장의 숙직실에서 바둑을 두고 있었다. 아버지 저 올라갑니다. 1987년 초, 하숙집 식구들과 함께 백 마에 놀러가 찍은 사진. 생전의 마지 막 모습이다 응, 그래라. 그것이 부자가 나눈 마지막 대화였다. 박종철은 자신이 속한 서클이었던 사회사상연구회의 선배였던 박 종운을 자랑스럽게 동료들에게 말하곤 했다. 수배 중에도 잡히지 않 고, 그 속에서도 당당히 운동을 조직해 나가는 그가 자랑스러웠던 것이다. 수배 중이었던 박종운이 1주기 추모 때 박종철의 가족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을 소개한다. 43
저는 종철이의 원혼 앞에 죄인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종철이의 따뜻한 마음씨와 불굴의 의지에 대한 추억이 휘몰아쳐 오면 휘몰아쳐 올 수록 저에게는 죄책감과 함께 끝내는 일어서고 말리라는 결의가 더욱 굳 어집니다. 종철이는 생전에 따뜻하고 온유하고 명랑하면서도 불의에 무릎 꿇지 않는 기개를 가졌습니다. 감옥에 갔다 와서 그 어려운 시기에도 친구 가 차비가 없으면 차비를 마련해 주고, 누울 곳이 없으면 하숙집에라도 데 려와 재웠으며, 이 못난 선배도 따뜻이 맞아주고, 처지를 함께 걱정해 주 었습니다. 누나가 손수 짜 주었다는 목도리도 추워 보인다면서 선뜻 제 목 에 감아주던 그런 애였습니다. 종철이는 저의 가슴속에 영원히 살아 있습 니다. 종철이는 그 모진 물고문 속에서도, 전기고문 속에서도 동료, 선배 를 지켜내는 불굴의 의지를 보였습니다. 종철이는 우리 모두의 기개로 살 아 있습니다. 박종운이 종철이의 가족 앞에 처음 나타난 것은 2주기 추모식이 있기 얼마 전으로, 한겨레신문 기자의 주선으로 그 신문사에서 만 났다. 그리고 박종운이 박종철 추모식장에 공개적으로 나타난 것은 1989년 명동성당 문화관에서였다. 박종운이 수배를 벗고, 공식적으 로는 처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4년 동안의 수배생활 끝에 비로소 자 유로운 몸이 되었던 것이다. 그 이후 박종운은 박종철이 없는 그 가 족의 한 식구가 되었다. 44
어 디 있 느 냐 아 벨 은 카 인 아!
어 아 카 디 벨 인 있 은 아 느! 냐 1월 22일, 김만철 씨 일가의 탈북사건이 터졌다. 북한 청진의대 병 원에서 의사로 근무하던 김만철(46세) 일가 11명이 1987년 1월 15일 새벽 1시에 청진호(50톤급)를 타고 북한을 탈출, 1월 16일 엔진고장 으로 표류하다가 20일 하오 6시경 일본의 후쿠이 외항에 도착하였다. 일본 해상보안청의 조사에서 그들 일행은 따뜻한 남쪽나라, 곧 한 국행 의사를 표명하였다. 조총련의 협박이 있는데다가 가족간에 의 견이 엇갈리고 있는 가운데, 한국 정부가 신속히 개입, 2월 3일 일본 정부로 하여금 대만에서의 단기체류 후 한국행이 결정되었다. 2월 7 일 새벽 김만철 일가는 오키나와를 거쳐 대만에 도착하였고, 이튿날 오후 다시 대만을 출발, 오후 10시에 김포공항에 도착하였다. 세계 의 이목을 집중시키면서 25일 만에 막을 내린 김만철 일가의 망명은 분단 후 첫 가족단위의 탈출이자 목숨을 건 세기의 탈출 드라마였다. 47
언론은 이 사건을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했다. 국민적 관심의 초점 은 김만철 씨 일가 망명사건으로 쏠리고 있었다. 전두환 정권도 은 근히 그런 방향으로 나아가기를 바랐고, 또 그런 분위기를 조성했다. 김만철 사건으로 박종철 사건이 언론에서 한때 묻히자 항간에는 종 철이가 종을 치니, 만철이가 그만치라 했다 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그러나 박종철의 죽음은 결코 묻히거나 잊혀지지 않고 계속 불타오 르고 있었다. 박종철의 죽음 앞에 맨 먼저 분노한 사람들은 민주화실천가족운 동협의회의 어머니들이었다. 그들은 민주화운동으로 구속된 사람들 의 가족들이었기에 박종철의 죽음을 누구보다 안타까워했다. 간간 이 눈발이 날리는 16일 오후 어머니들은 남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앞으로 몰려가 통곡하며 외쳤다. 우리의 아들 박종철을 살려내라! 살인수사 사주하는 군사독재 몰아내자! 그리고 그들은 국민들에게 보내는 호소문을 발표했다. 박종철은 정의를 사랑하고 민주주의를 갈구하는 바로 여러분의 아들이자 형제자매입니다. 그의 죽음은 단순한 고문 살인이 아니라 저 야수와 같은 군사독재가 국민의 힘으로 처단되어야 함을 알려주는 역사적인 죽음입니 다. 군사독재가 멸망하지 않는 한 누구도 이러한 죽음의 공포로부터 자유 로울 수 없습니다. 48
우리 모두 각자 서 있는 그 자리에서 고문살인을 규탄하고 군사독재 의 퇴진을 요구합시다. 한줌도 안되는 저 불의한 무리를 우리 손으로 몰아 냅시다. 그동안 일체의 정치, 사회의 현안문제와 관련하여 침묵을 지켜오 던 대한변호사협회도 1월 19일, 유례없이 강력한 성명을 채택했다. 우선 1월 17일, 관계기관 대책회의를 통하여 고문살인 범죄의 조사를 경찰에 맡긴 검찰을 질타했다. 그것이야말로 검찰이 스스로 인권옹 호의 책임을 포기한 처사라고 비난하였다. 또한 이처럼 국가공권력 이 야만적인 가혹행위와 살인도구로 변한 상황 아래서 우리 헌법의 기본이념인 민주적 기본질서와 인간의 존엄성을 수호하기 위해서는 고문 근절을 위한 전 국민적 결단과 노력이 있어야 함을 호소했다. 더 나아가 국민의 혈세로 유지되는 공권력이 무엇 하고도 바꿀 수 없는 귀중한 젊은이의 목숨을 앗아간 이 끔찍하고 처참한 사태에 대한 국민적 분노는 가장 강력한 방법으로 표시되어야 하며, 모든 국민개인과 정당, 사회단체, 종교단체들은 일치단결하여 다시는 이 처럼 치욕스런 고문 범죄가 이 땅에서 재발하지 않도록 대대적인 고 문 반대운동을 전개할 것을 호소한다 고 하였다. 개신교의 원로격인 김재준 목사와 함석헌 선생은 1월 19일, 시시 각각으로 어둠속으로 치닫는 정국을 보다 못해 우리는 한국의 늙은 이들의 대표로 자처하면서 온 마음을 모아 탄원합니다. 사람에 49
게 가혹행위를 할 수 없거니와 고문으로 사람을 죽였다면 여러분은 지금 하나님과 국민, 죽임을 당한 박종철 군 앞에서 지금 무엇을 해 야 하겠는지 깊이 생각하고 어떤 결의를 나타내 보여야 합니다 고 정권당국을 질타하면서 국민 여러분 밖에 이 나라를 바로 잡을 힘 을 가진 자가 없습니다. 여러분의 힘이 곧 우리의 힘이요, 그것을 바 로 쓰는 데 우리 민족의 운명이 달려 있습니다 고 하여 국민의 궐기 를 호소하고 나섰다. 이러한 호소에 호응한다는 듯이 1월 19일 함석헌, 홍남순, 김영삼, 김대중 등 전국에서 각계대표 9천 7백 82명으로 박종철 군 국민추도 회 준비위원회 가 발족했다. 이와 같은 범국민적인 조직이 단시간 내 에 발족할 수 있었던 것은 그동안 축적되어온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 다. 1985년 9월 김근태에 대한 고문사실이 밝혀졌을 때 고문, 용공 조작저지 공동대책위원회 가 결성되더니 1986년, 부천경찰서 성고문 사건을 거치면서 그것이 더욱 확대 발전되었고, 이번 박종철 군 고 문치사 사건을 맞이하면서는 더 큰 규모의 준비위원회를 즉각적으 로 구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준비위원회 측은 2월 7일 범국민추도 회를 갖기로 했다. 이와 함께 각계각층에서 성명과 호소가 뒤따르고, 기도회가 연이 어 열린다. 1월 26일 저녁 명동성당에서 열린 박종철 군 추도 및 고 문 근절을 위한 인권회복 미사 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의미심장한 강 론을 통해 이례적으로 강한 어조로 박종철 군의 죽음을 애도하고, 전두환 정권을 통렬하게 질타한다. 50
야훼 하느님께서 동생 아벨을 죽인 카인에게 네 아우 아벨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 카인은 제가 아우를 지키는 사람입니까 하고 잡아떼며 모 른다고 대답합니다. 창세기의 이 물음이 오늘 우리에게도 던져지고 있습니다. 너의 아들, 너의 제자, 너의 젊은이, 너의 국민의 한사람인 박종철은 어디 있느냐 하고 물으니 탁 하고 책상을 치자, 억 하고 쓰러졌으니 나는 모릅 니다, 수사관들의 의욕이 지나쳐서 그렇게 되었는데 그 까짓 것 가지고 뭘 그러십니까, 국가를 위해 일하다 보면 실수로 희생될 수도 있는 것 아 닙니까, 그것은 고문 경찰관 두 사람이 한 일이니 우리는 모르는 일입니 다 하고 잡아떼고 있습니다. 이것이 바로 카인의 대답입니다. 박 군을 고문치사케 한 수사관은 물론이요, 그 밖의 경우에도 고문을 한 모든 수사관들, 그들의 일을 잘 알면서도 승인 내지 묵인한 상급자들, 공 권력을 행사하는 모든 이와 위정자들 그리고 이런 사실이 우리나라 안에 있다는 것을 거듭 들으면서도 지금까지 남의 일처럼 무관심했던 우리 모 두가 도스토예프스키의 죄와벌 에 나오는 로디옹처럼 큰 네거리에 가서 사방 온 세상을 향하여 곧 모든 것을 아시고, 공의로우시면서도 자비로우 신 하느님께 우리는 살인죄를 범하였습니다. 우리는 살인죄를 범하였습 니다 라고 소리치며 진심으로 참회의 눈물을 흘려야 합니다. 오늘 우리의 가슴에 이런 참회와 속죄의 눈물이 흐를 때 그리고 하느님의 용서가 있을 때, 우리와 우리 사회는 비로소 구원될 수 있습니다. 이때 비로소 우리는 51
참으로 새사람으로 태어나고, 우리 사회와 나라도 새롭게 태어날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정권의 뿌리에 양심과 도덕이 도대체 있느냐, 아니면 총칼의 힘뿐이냐 하는 회의가 근본적으로 야기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것은 다시 국민인 우리에게 이런 정권을 그대로 따라야 하는지 아닌지에 대한 중대한 양심 문제를 던지고 있습니다. 이제 박종철 군의 희생이 우리의 정의로운 민주 회복의 도정에 승리의 분기점이 되고, 저력이 되어 줄 수 있기를 하느님께 간절히 기원합니다. 2월 3일 한신대학교 교수단은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에 즈음한 우 리의 견해 라는 제목으로 성명을 발표한다. 우리들은 이미 지난해에 부천경찰서의 권양 성고문 사건을 통해 인간이 인간이고자 하는 마지막 피어린 절규를 들었었다. 너네도 딸이 있고, 너 네도 사람이냐 고 외친 목소리, 이것은 이데올로기도 아니고 사람의 도리 이기 때문이라고 외친 권양의 목소리는 이미 우리 민족의 긍지와 우리 사 회의 정의와 현 정권의 정당성에 대한 마지막 조종처럼 메아리치고 있었다. 그런데도 다시금 이 땅의 민주화를 외치던 꽃다운 한 생명이 야만적 폭력 앞에 끊어졌고, 그 부모는 똑똑한 것이 죄라고 울부짖고 있다. 이 앞에서 우리가 어찌 대한민국 국민임을 자부하며, 이 땅의 민주화를 이야기하며, 52
인간의 존엄성을 운위할 수가 있겠는가? 우리 한신대학 교수 일동은 진심으로 이번 박종철 군 사건을 계기로 삼아 국민들은 인간의 인간됨과 인간의 존엄성이 보장되는 새로운 민주 정권을 창출하려는 범국민적 운동으로, 권력자는 권력의 출발점과 속성 을 뼈아프게 반성하며 역사적 전환을 준비하는 출발점으로 삼을 것을 촉 구한다. 한편 언론도 닫혔던 입을 열기 시작, 이제 박종철의 죽음을 통곡 하고 공개적으로 애도와 분발의 목소리를 높인다. 1월 16일자 동아일보 김중배 칼럼은 그 대표적인 글이라 하겠다. 하늘이여, 땅이여, 사람들이여, 저 죽음을 응시해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끝내 지켜주기 바란다. 저 죽음을 다시 죽이지 말아주기 바란다. 그의 죽음은 이 하늘과 이 땅의 사람들의 희생을 호소한다. 정의를 가리지 못하 는 하늘은 제 하늘 이 아니다. 평화를 심지 못하는 땅은 제 땅 이 아니다. 인권을 지키지 못하는 사람들은 제 사람들 이 아니다. 그의 죽음은 이 제 나라의 일이다. 겨레의 일이다. 한 젊음의 삶은 지구보다도 무겁다. 죽 음의 무게도 그보다 가벼울 수 없다. 그의 죽음과 삶은 그 한 젊은이만의 죽음과 삶일 수 없다. 우리 모두의 죽음과 삶이다. 53
서울대 교수 1백여 명은 2월 5일 밤, 박종철 군에 대한 추도의사의 표시로 밤 9시까지 퇴근하지 않고 각자 연구실에 있다가 귀가했다. 교수들은 2월 2일경부터 인문대, 사회대 교수들을 중심으로 모교의 교수로서 박 군의 죽음에 대한 추모의 뜻을 표시하자 고 의견을 모 으고 알리는 말씀 을 통해 교수들에게 그 뜻을 전달하였던 것이다. 한편 2 7국민추도회는 추도행사는 질서 있고 평화적으로 거행할 것 을 다짐하면서 각계각층에서 차분하게 준비되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원천봉쇄와 사법조치를 거듭거듭 내세우고 있었다. 정부와 여당이 진심으로 이번 기회를 계기로 그 잘못을 뉘우친다면 마땅히 박 군의 죽음을 애도하는 온 국민의 간절한 마음을 불온시하 거나, 그 집회를 막아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이 온 국민의 탄식과 애통의 소리가 하늘에 사무치고 있는 이때, 추도 회마저 불법시하고, 참가자들을 범죄시하며, 순수한 평화적 애도의 집회를 탄압하는 행위는 또 하나의 인권탄압이요, 기본권에 대한 도 전이었던 것이다.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는 이런 전두환 정권의 행 태에 대해 시국대책위원회 이름으로 박 군을 애도하고, 고문을 추 방하자는 일에 여야, 재야, 종파, 교파, 남녀노소가 따로 나뉠 수 없 고, 이 일에 반대하는 자가 있다면 하느님과 역사의 심판을 면할 수 없을 것 이라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한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도 2월 4일자로 된 내부공한을 통해, 명동성당 측이 장소사용을 불허했다 는 당국의 발표가 거짓임을 분 명히 밝히고, 전국의 사제들로 하여금 범국민추도회 준비위원회에 54
서 마련한 추도회 참가요령에 따라 전국 각지에서 개최되는 추도회 에 참가해 줄 것을 당부하고, 추도회에 참가할 수 없는 경우 모든 성 당은 2월 7일 오후 2시 정각 타종하고, 신자들은 1분간 묵념하고, 자 동차를 타고 있는 사람은 경적을 울리도록 권고하여 달라고 호소했 다. 또한 추도회가 끝난 뒤에도 박 군을 기리고 고문종식을 염원하 는 뜻으로 2월 한 달 동안 모든 신자들이 검은 리본을 달도록 권고하 여 달라고 당부하면서, 민주제단에 바쳐진 젊은이의 이 고귀한 희 생이 결코 헛되지 않도록 우리를 깨어 있게 하시고, 우리 모두 자유 와 진리를 위해 목숨을 바치는 주님의 충실한 사도되게 하소서 (정 의평화위원회 기도문) 하는 기도도 잊지 않았다. 전두환 정권은 2 7집회를 불법집회로 규정하고 원천봉쇄 3일 작 전을 벌였다. 당일에는 전국에서 2만 5천 명의 전경을 차출해 저지 에 총력을 기울였지만, 박종철의 죽음을 추모하는 시민들은 집회대 신 시가전으로 곳곳에서 시위를 벌였다. 오후 2시 정각 명동성당에 서 종이 울렸다. 박종철의 나이와 같은 스물한 번이었다. 이날의 투 쟁은 규모면에서는 경찰의 원천봉쇄로 그렇게 대단한 것은 아니었 지만, 광범위한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눈에 띄었다. 수백 대의 자동차가 경적을 울렸다. 연도와 빌딩의 창가에 빽빽이 늘어선 시민 들은 시위대에 박수를 보내고, 애국가와 우리의 소원은 통일 등의 노래를 같이 불렀다. 경찰이 시위대를 연행하면 시민들이 우 - 하 는 야유를 보내는가 하면, 직접 경찰과 몸싸움을 벌여 이들을 구출 해 내기도 했다. 이날은 서울에서만이 아니라, 부산, 대전, 광주, 마 55
박종철을 살려내라 라고 적힌 종이를 들고 시위에 참가한 시민 (사진제공 박용수) 산, 전주 등에서도 추도시위가 열렸고, 전국에서 연행된 사람이 7백 98명이나 되었다. 3월 3일, 박종철 49재와 고문추방 민주화 대행진 이 서울을 비롯 하여 부산, 대구, 광주, 대전, 전주 등 주요 도시에서 추진되었다. 경 찰은 6만여 명을 동원하여 원천봉쇄에 나섰다. 불교 5단체의 승려와 신도 2백여 명이 박종철의 영정을 앞세우고, 조계사 부근에서 재야 인사들과 신민당원들은 침묵을 상징하는 十 자 모양의 검은 반창고 가 붙은 마스크를 쓰고 시가지 진출을 시도했다. 풍선을 들고 행진 하는 시위형태도 선보였다. 2월 7일의 추도회와 3월 3일의 49재는 전 국에서 동시다발로 이루어졌고, 또 다수의 시민들이 동참했다는 점 에서 6월항쟁의 전초전이자 예고편의 의미를 지닌다. 56
고문없는 나라에서 살고 싶어요 라는 현수막을 앞세우고 가두시위를 벌이는 시위대 (사진제공 박용수) 박종철 군의 아버지 박정기 씨 내외는 원래 독실한 불교신자였다. 1월 16일 화장된 박종철 군의 영정을 부산 사하구 괴정동에 있는 사리 암에 안치했다. 종철의 영정을 받아준 사리암의 스님은 백우스님이었 다. 그 스님은 이 일로 해서 언론의 조명도 받았지만, 그와 동시에 많 은 고초를 겪어야 했다. 가족이 참석한 가운데 2 7추도식과 3 3 49 재가 열린 곳은 사리암이었다. 사리암은 이 일로 해서 전국에 알려지 게 되었다. 그 두 번의 추도식을 치러낸 것은 백우 스님이었다. 사리암의 행인통제도 극심했다. 그래도 2천 3백 명의 군중이 모 였고, 특히 부산시내 각 사찰의 스님들이 대거 몰려와서 종철의 재 를 올렸다. 기관원이 회유하고 협박하고 방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스 님과 군중이 법당의 안과 밖을 가득 메웠다. 당시 생존해 있었던 부 57
산문학의 거두, 요산 김정한 선생이 추도사를 했다. 경찰당국에서는 사리암 주지스님에게 시간을 줄여라, 당일 절차를 생략하라는 등 유 형무형의 압력을 가했다. 그러나 참석한 사람들은 님을 위한 행진곡 을 부르면서 당일의 행사를 마무리했다. 그러면 왜 이 나라 국민들은 박종철의 죽음을 마치 내 자식의 일 인 것처럼 애통해 하고 박종철 군을 고문치사케 한 전두환 정권에 대하여 항의하고 분노하였는가. 그것은 첫째, 고문에 대한 새삼스러 운 각성이 높아진 데 연유해 있었다. 그동안 밝혀진 고문이 있어왔 지만 남의 일로만 여겨지던 것이 박종철 군의 죽음을 보고는 그것이 결코 남의 일도 아니요, 고문이 마침내는 죽음으로 나타날 수 있다 는데서 국민은 몸서리쳤던 것이다.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을 비롯한 사회 각계각층에서 발표된 성명은 한결같이 다시는 이 땅에서 고문 은 없어야 한다는 결의와 호소를 담고 있다. 우리는 81년 9월 이른바, 민학련, 민노련 사건 으로 남영동 치안본부 대 공분실에 끌려간 관련자들은 공산주의자임을 허위자백토록 물고문, 전기 고문 등 모진 고문을 당했습니다. 뒤이은 부산 미문화원 방화사건 관 련자들에 대한 고문, 85년 9월 역시 치안본부 대공분실에서 20여일동안 민주화운동청년연합 의장 김근태씨가 전기고문, 물고문, 고춧가루물먹이 기 등 살인적인 고문을 당했습니다. 정신이상까지 일으켜야 했던 민청련 이을호씨에 대한 고문, 허인회군등 삼민투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 해를 바 58
꿔 86년 송파보안사에서 당한 김문수씨 등 서울노동운동연합 관련자들에 대한 고문, 그리고 부천경찰서 성고문사건 등 크고 작은 고문사건들이 꼬 리를 물고 일어났습니다. 그러나 빗발치는 가족들의 항의와 종교단체 및 재야단체의 진상규명 요청에도 불구하고, 정부당국은 항상 고문 사실은 있지도 않았고, 있어서도 안된다 고 강변해 왔습니다. 이번 박종철군의 죽 음은 그동안 한번도 밝혀지지 않았던 고문의 실체가 무엇인지, 수없이 되 풀이 된 불법연행자 가족들의 호소가 얼마나 진실된 것인지를 극명하게 밝혀 주고 있습니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고문살인의 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87.1.24) ) 둘째, 공식으로 수배되거나 범죄혐의가 드러난 피의자가 아닌 사 람일지라도 권력기관이 저희들 필요에 따라 시도 때도 없이 마음대 로 체포 연행해 가는 것은 물론, 수사기관에서 거리낌 없이 고문을 자행할 뿐만 아니라, 마침내는 죽음에 이르게 할 수 있다는데서 국 민들은 이런 일이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그 것은 결코 남의 일이 아니라 나에게, 내 자식에게도 닥칠 수 있는 일 이라는 데서 적어도 이런 일이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겠다는 각성 의 이심전심의 표현이었다. 오늘의 박종철 군은 내일의 나, 내일의 나의 형제, 나의 자식이 될 수 있는 일이라는 데서 아무 일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던 것이다. 셋째로, 그것은 우리들의 비겁함과 무력함에 대한 반성과 통회의 59
의미를 담고 있었다. 스물한 살 꽃 다운 나이에 한줌 재가 되어 강 에 뿌려진 박종철 군의 죽음은 어느 한 개인의 죽음이 아니라, 이 어 두운 시대를 외면한 우리 모두의 양심의 죽음이었습니다. 대낮에 남 영동 치안본부 대공분실, 밀폐된 취조실에서 두 팔이 뒤틀린 채 욕 조에 머리를 처박혀, 몸부림치며 죽어가는 박종철 군의 죽음은 진실 을 증언하기를 외면한 우리 모두의 비겁함의 죽음이었습니다 ( 고 문종식을 위한 우리의 선언 )는 고백이 그것을 잘 말해준다. 넷째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건을 숨기고 줄이기 위해 거짓말을 서슴지 않았던 권력 당국의 태도에 대한 항의와 분노의 표시였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것은 박종철 군을 다시 한번 죽이는 결과를 가져 올 뿐이었다. 지나친 직무의욕, 빨갱이를 잡다가 저지른 실수 라느 니, 경찰의 사기를 먼저 참작해야 한다 느니, 심지어는 극소수 좌경 용공분자들을 완전히 척결할 때까지 경찰에게 주어지 책무를 성실 히 수행하겠다 는 등 이 사건을 우발적인 사건 또는 충분히 일어날 수 있는 사건으로 몰고 가는 당국의 태도는 뼈를 깎는 각오로 새롭 게 태어나는 권력당국의 모습은 아니었던 것이다. 이제 도덕성을 완전히 상실한 전두환 정권에 대한 전면적인 반대 투쟁이 불가피하다고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고 있었다. 고문반대투쟁 이 이제는 전두환 정권에 대한 반대투쟁, 군부독재의 타파라는 쪽으 로 기울고 있었다. 그러나 전두환 정권은 전혀 다른 길을 가고 있었다. 나 다음에는 너 하는 식으로 군부독재를 계속 승계시켜 나가겠다는 음모를 진행시키고 있었던 것이다. 4 13호헌조치가 바로 그것이었다. 60
4. 13호 헌 조 치 적 반 하 장 61
4. 적 반 13호 하 헌 장 조 치 2 12총선이 있은 지 1주년이 되는 1986년 2월 12일, 신민당 중앙 당사에서 있은 2 12총선 1주년 기념식 에서 2 12총선과 그 이후 야 당인 신민당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김영삼은 전격적으로 1천만 개헌서명운동에 즈음하여 라는 성명을 발표함과 동시에 자신이 맨 먼저 서명용지에 서명한다. 이로써 민주제 개헌운동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하는 것이다. 사회 각계각층에서도 열띤 지지가 뒤따 랐다. 재야 민주화세력도 이에 동조했다. 이리하여 1986년 봄, 개헌 열기는 뜨겁게 달아올랐다. 이 무렵, 필리핀은 피플파워를 통해 마르코스 정권이 무너지고 아 키노 정권이 들어섰다. 그것은 한국의 민주화운동 세력에게 고무적 인 일이었다. 신민당에 의해 점화된 개헌 서명운동은 3월 23일 개헌 추진 부산시지부 결성대회를 시발로 광주(3월 30일), 대구(4월 5일) 63
를 거쳐 뜨거운 바람을 일으키면서 북상했다. 부산에서 4만, 광주에 서 10만, 대구에서는 2만여 인파가 모였다. 외신들은 1980년 5월 17 일 이후 최대의 반정부 집회였다고 보도했다. 이러한 개헌투쟁의 열기에 당황한 전두환은 4월 30일에 있었던 이 민우 신민당 총재와의 영수회담에서 개헌논의를 허용하겠다는 입장 을 밝힌다. 이어서 열린 여야협상은 전두환 정권이 대통령직선제 대 신 내각책임제를 대안으로 제시해 결렬되었다. 그러나 전두환의 개 헌논의 허용발언은 긍정적인 것으로 받아들여졌다. 하지만 내각제 의 제시는 신민당과 재야의 분리 그리고 야당 자체를 분열시키는 결 과를 가져왔다. 이민우 파동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1986년 12월 24일, 신민당 총 재 이민우는 삼양동 자택에서 기자들과 만나 정부, 여당이 진실로 민주주의를 발전시키겠다는 신념에서 내각제를 주장한다면 여당과 다시 협상할 용의가 있다 는 의사를 표명했다. 이른바 선( 先 ) 민주 화 실천, 후( 後 ) 내각제 협상용의 였다. 대다수 언론은 이를 내각제 개헌협상 긍정검토 등의 제목으로 일면 머리기사로 다루었다. 민정 당 대표 노태우는 기자간담회를 통해 이민우 구상을 긍정적으로 검 토해 보겠다는 내용으로 발언했다. 김영삼은 곧 이민우 총재와 회동 이민우 총재의 발언은 당론 변 경이 아니라 민주화를 보다 강력히 촉구한 것에 불과 하다는 데 의 견의 일치를 보고, 그 결과를 내외에 발표하지만 신민당은 걷잡을 수 없이 내분에 휩싸여 가고 있었다. 이런 가운데 김영삼과 김대중 64
은 분당을 결심한다. 1987년 4월 8일 오전 9시, 서울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 분당선언과 함께 새로운 신당의 창당을 선언한다. 신민 당 소속 현역의원 90명 가운데 74명이 탈당, 신당 창당에 나섰다. 신당 창당은 쾌속으로 진행되었다. 1987년 4월 13일 오전, 무교동 민추협 사무실에서 5백여 명의 정치인이 참석한 가운데, 창당 발기 인대회가 열렸다. 바로 이 날은 전두환이 호헌조치를 발표하는 날이 기도 했다. 강경한 야당의 출범에 따라 임기 중 내각제 합의 개헌이 불가능하다고 판단한 전두환은 이날 특별담화를 통해 현행 헌법에 따른 정부이양 이라는 중대결단 을 선언한 것이다. 1986년 4월 30일, 이민우 신민당 총재와의 회담에서 임기 내 개헌 을 약속해 놓고 돌 연 태도를 바꾸어 개헌불가 조치를 취한 것이다. 통일민주당은 창당요건의 핵심사항인 지구당 창당과정에서 이른 바 용팔이 사건 이라는 깡패들의 테러와 방해를 받지만, 1987년 5월 1일 서울 동숭동 흥사단에서 김영삼을 총재로 창당을 마친다. 전두환 의 4 13호헌조치는 민주당의 창당과도 깊은 연관이 있는 것이었다. 취임사에서 김영삼은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실질대화를 위하 여 통일민주당을 창당하려 하자 저들은 우리와의 대화를 서둘러 포 기, 거부하였습니다. 호헌이란 무엇입니까. 광주사태의 역사적 인 비극 속에서 계엄령을 선포해 놓고, 대통령의 임기를 어제는 5년, 오늘은 6년, 내일은 7년 하는 식으로 멋대로 제정된 그 헌법, 특정한 사람을 대통령으로 만들기 위해서 유신체제를 거의 그대로 복사한 대통령 간선체제의 그 헌법, 군사독재체제의 출범을 위해서 급조된 65
그 헌법으로 되돌아가자는 것입니다. 다른 한편으로 전두환의 4 13호헌조치는 이제까지와 같은 협박과 기만 술책으로 당시의 정국을 적당히 수습해 나갈 수 있다는 자신감 의 표현이었다. 김영삼과 김대중이 이끄는 야당의 직선제 개헌요구 와 그에 호응하는 국민들의 의사를 경찰력으로 봉쇄해 나갈 수 있다 고 믿었고, 박종철 군 추도집회인 2 7과 3 3 대중집회도 효과적으 로 분쇄했다고 생각했다. 박종철 군 죽음 이후에 전개된 일련의 사 태도 이제는 원만히 수습되었다고 판단한 것이다. 그러면서 호헌의 명분을 평화적 정부이양과 88올림픽의 성공적 개최에 두었다. 전두환의 이 호헌선언에 대해 전국경제인연합회, 한국반공총연맹, 한국노총, 한국문인협회 등은 민주화의 획기적인 이정표 라며 적극 지지하고 나섰다. 전두환의 56회 생일에 님은 온갖 불의와 혼란의 어둠을 씻고 / 참된 자유와 평화와 번영을 마련하셨나니 / 하늘 의 찬양이 두루 님께로 오시나이다 라는 송시( 頌 詩 )를 바쳤던 시인 서정주는 4 13호헌조치를 구국의 결단 이라고 치켜세우기까지 했다. 그러나 아무런 국민적 대표성도 갖지 아니한, 권력의 꼭두각시라 할 대통령 선거인단이 체육관에 모여 거의 100%에 가까운 찬성으로 다시 군사정권을 연장하겠다는 전두환의 선언에 국민들은 경악하고 또 절망했다. 마침 부활절을 맞아 4월 14일자로 발표된 김수환 추기경의 부활메 시지는 태양이 구름에 가려 빛나지 않을지라도 나는 태양이 있음을 믿습니다. 사랑이라곤 조금도 느껴지지 않을지라도 나는 사랑을 믿 66
습니다. 하느님께서 침묵 속에 계시더라도 나는 하느님을 믿습니다 라는 제2차 세계대전 중 독일의 쾰른 땅에 군사용으로 건설된 지하 동굴 속에 새겨져 있던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시작하면서 호헌선언이 이 나라 국민에게 주는 의미를 이렇게 절절하게 그려낸다. 국민은 있어도 주권은 없고, 신문 방송은 있어도 언론은 없으며, 국회나 정당은 이름뿐이요, 힘만이 있고 정치는 없는 공허 속에서 우리는 살고 있 습니다. 국민의 여망인 민주화가 정략의 도구로 쓰여지고, 보다 밝은 정 치의 새시대를 열 것으로 기대되었던 헌법개정의 꿈은 기만과 당리의 술 수아래 무참히 깨어졌습니다. 마지막 순간까지 우리는 통치권자의 마음을 비운 결단을 기대하였지만, 막상 내려진 이른바 고뇌에 찬 결단 은 한마디 로 말해서 국민에게는 슬픔을 안겨 주었고, 생각하는 이들의 마음은 더 큰 고뇌로 가득 차게 되었습니다. 이 땅위에는 다시금 최루탄이 그칠 줄 모르 고 터지며, 국민의 눈과 마음 속 깊은 곳에는 눈물이 마를 날이 없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부활전야 미사 강론에서 이렇게 말한다. 67
이제 우리의 정치, 사회현실은 민주화와는 거리가 먼 전제시대 가 시작되 고 인간기본권과 언론자유의 폭은 더욱 좁아질 것이며, 이 어둠이 언제까 지 지속될지 예견하기 힘들게 되고야 말았습니다. 4 13호헌조치에 대해 민주화운동 단체들도 즉각 대응하고 나섰다. 4 13조치가 있던 다음날인 14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민통련)은 전 국민이 힘 모아 장기집권 분쇄하자 는 제목의 성명을 발표한다. 민통련은 이 성명에서 이제 우리는 전두환 군부독재의 호헌 주장을 보면서, 80년 광주항쟁 이후 계속 되어온 민주화투쟁이 새로운 원점 에서 전기를 맞게 되었음을 밝히고자 한다 면서 헌법개정의 목표는 국민 스스로가 대통령을 포함한 모든 공직자를 직접 선출하는 민주 정부의 수립임을 거듭 확인하면서 이제 우리는 진정한 민주화 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모든 국민과 민주세력이 일치단결하여 단호 히 싸워나갈 것을 강력히 주장한다 고 밝혔다. 4월 18일, 민주언론운동협의회, 민주교육실천협의회, 한국출판문 화운동협의회, 민족미술협의회, 자유실천문인협의회, 민중문화운동 협의회는 공동성명 전 국민의 힘으로 호헌획책 분쇄하고, 장기집권 저지하자! 에서 분명히 경고해 두건대, 당신들이 이른바 4 13특별 담화 를 통해서 드러낸 호헌획책과 장기집권 음모는 광범위하고도 격렬한 전 국민적 저항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마지막으로 당신 들이 역사에 기여할 수 있는 최후이자 단 하나의 길은 지금 당장 스 68
스로의 판단에 의한 즉각적인 퇴진뿐이라는 것과 만일 그러하지 않 을 때 활화산같이 타오를 국민들의 거대한 저항의 불길에 휩싸여 한 줌의 재로 몰락할 수밖에 없음을 엄중히 경고하는 바이다 라고 결 연한 의지를 밝혔다. 이제 민주화운동 단체뿐만 아니라 대학교수를 비롯 사회단체 회 원들의 성명도 뒤를 따르기 시작한다. 4월 22일, 고려대학교 김우창, 최장집 교수 등 30명은 연명으로 개헌문제에 대한 우리의 견해 를 발표한다. 4월 22일에는 여성단체연합회에 이어 함석헌, 박형규, 계 훈제 등 종교 문화 여성계의 지도적 인사들 27명이 연명으로 민 주개헌 관철을 위한 국민운동 을 제창하면서 농성에 돌입하였다. 이 들은 이 성명에서 우리의 살 길은 국민이 직접 정권수립에 참여하 는 개헌 밖에 없다 고 주장하였다. 이 시점에 있어서 우리는 민주적 개헌이야말로 우리 민족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과제라고 믿는다. 우리가 민족사의 밝은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느냐 여부의 중대기로가 여기에 있다. 이번에 민주적 개헌이 이루어지지 못할 경우 앞으로의 우리 사회에서는 정치적 정통성의 취약함으로 인해 정부와 국민 모두가 참을 수 없는 고통을 받게 될 것이다. 모든 관계 인사의 심사숙고를 촉구하며 국민 모두가 민족의 대의를 소신껏 밝힐 것 을 호소한다. 69
호헌철폐와 민주개헌을 위한 단식기도에 들어간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신부들 (사진제공 박용수) 70
4월 29일에는 서강대 교수 28명이 연명으로 개헌유보조치 는 철회되어야 한다. 개헌은 우리 사회의 민주화를 위한 디딤돌이므 로 여야가 국민여망에 부응하여 개헌에 대한 논의와 대화를 계속해 야 한다 는 내용의 성명을 발표했다. 치안당국이 집계한 바에 따르면, 4월 22일부터 시작된 각계의 시국성명 서명자는 6월 25일 현재 모두 82개 대학과 사회단체의 교수와 회원 등 5천 2백 46명에 이른다. 그 구체적 내용은 48개 대학의 교수 1천 5백 10명, 34개 사회단체 회원 4천 1백 36명이며, 사회단체 회원의 구성은 전 현직 국회의원, 변 호사, 목사, 영화 연극인, 가수, 미술인, 의사, 약사, 한의사, 음악 인, 문인, 간호원, 초 중 고교 교사 등 사회 각 분야에 걸쳐 있었다. 단체명의로 발표된 성명은 제외하고 서명을 받아 발표된 것만 집계 한 내용이 이와 같았다. 성명이나 선언뿐만 아니라 농성이나 단식기도로 호헌조치에 반대 하고 나선 사람들도 많았다. 4 13호헌조치에 단식기도로 반대한 것 은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신부들이었다. 4월 21일 광주교 구 사제들이 단식에 돌입한 것을 필두로 전주, 서울, 안동, 원주, 인 천, 마산, 부산, 대전, 수원, 춘천 등 14개 교구로 확대되었으며, 연 인원 3백여 명이 이 시대의 아픔에 함께하겠다는 결의로 시차를 달 리하면서 단식기도에 돌입하였다. 4월 21일 광주교구 사제들은 직 선제 개헌을 위한 단식기도를 드리며 라는 성명에서 단식기도에 임 하는 자신들의 결의를 이렇게 표현하였다. 71
4.13특별담화는 현행 헌법에 의한 차기 대통령선출을 전제로 하는 것이 기에 유신 이래 독재권력에 의해 빼앗긴 정부를 선택할 국민의 권리 를 되 찾자는 민의를 배신하는 것입니다. 평화와 자유의 대전제인 서울올림픽이 현 독재체제의 유지의 근거가 도저히 될 수가 없습니다. 자유와 정의를 사 랑하는 모든 사람들은 우리 국민이 군사독재의 질곡에서 해방되어 국민의 광범위한 지지와 선택으로 탄생된 정부에 의해 국민의 축복 속에 서울올 림픽이 치루어 지기를 바랄 것입니다. 우리는 김수환 추기경이 부활 절 메시지에서 현실의 정치가 아무리 허망하고 사회의 모든 현상이 아무 리 어두워 보여도 우리가 실망하지 않고, 진리와 정의 및 사랑의 불을 지 피며 살면 주님은 억압된 민중의 짓밟힌 인간성을 반드시 살려 주실 것입 니다. 라고 밝히신 믿음을 함께 하면서 단식기도를 드리기로 하였습 니다. 단식기도 중 우리는 아래와 같은 우리의 기도지향이 진리와 공의의 원천이시며 역사의 주관자이신 하느님께 가납되기를 바랍니다. 이 나라의 민주화를 염원하는 여러분들께도 저희들의 기도에 함께 해 주시기를 바랍 니다. 1. 동장에서 대통령까지 우리들의 손으로 유신 이래 빼앗긴 정부를 선택 할 국민의 권리회복을 위해, 4. 집권시와 집권 이래 자행한 모든 죄과 를 속죄할 수 있는 현 집권세력의 명예로운 퇴진을 위해 단식기도야말로 진실의 목소리인데다 결연한 의지의 표현인 것이 다. 단식이라는 점에서 그 비장성과 처절성이 더해진다. 현실 정치 72
와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없는 천주교 사제들의 단식투쟁은 국민들 의 심금을 울렸고 연민의 정을 낳았다. 사제들은 단식기도에 들어가 면서 대통령 직선제 개헌을 위한 것임을 분명히 함으로써 향후 개헌 의 핵심이 직선제여야 함을 명확히했다. 또한 사제들의 단식투쟁은 5월 18일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이 조작되었다 는 성명이 발표될 때까지 투쟁의 연속성을 담보하는 역할을 하였다. 전두환의 4 13호헌조치는 결과적으로 전두환 정권에 대하여 방 관자적 자세를 취하고 있던 사람들로 하여금 그들에게 등을 돌리게 하고 정서적으로 반독재 민주화투쟁에 동정적이게 만들었다. 전두 환 정권이 체육관에서 노태우를 차기 대통령 후보로 뽑기 하루 전 인 1987년 6월 9일, 서울대 사회과학연구소가 실시한 한국 중산층 1 천 43명에 대한 의식조사 결과가 공개되었다. 4 13조치 이후인 5월 중순에 실시된 이 조사 결과는 한국의 중산층이 전두환 정권에 무척 화가 나 있음을 보여주었다. 경제성장을 늦추더라도 인권을 신장시 켜야 한다고 대답한 사람이 85.7%, 민주화가 잘 되고 있다고 평가한 사람은 불과 6%, 헌법에 저항권을 명시해야 한다는 응답자는 무려 96%나 되었다. 4 13호헌조치는 전두환 정권이 2 7추모행사와 3 3민주대행진을 성공적으로 진압했다고 보고, 이쯤해서 체육관 선거를 통해서 노태 우에게 정권을 이양함으로써 사실상의 군정을 더 연장해도 되겠다는 판단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그러나 4 13호헌조치는 국민으로부터의 엄청난 역풍을 맞기 시작한다. 침묵을 지키던 대학교수들이 일어나 73
고 의사, 한의사, 간호사, 연극인, 가수까지 들고 일어난다. 돌멩이도 일어나 외칠 지경이었다. 그러나 이 열기도 언제까지나 영원히 계속 될 수는 없었다. 호헌투쟁이 사제단의 단식투쟁 등으로 가까스로 그 투쟁의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 상황 속에서,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을 돌이킬 수 없을 만큼 치명적으로 강타하는 사건이 돌출한다. 74
조 작 되 었 다 진 상 이 고 문 치 사 사 건 의 박 종 철 군
조 진 고 박 작 상 문 종 되 이 치 철 었 사 군 다 사 건 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1.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게 한 하수인은 따로 있다. 박종철군을 죽 음에 이르게 한 범인으로 구속 기소되어 재판 계류 중에 있는 전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5과 2계 학원분과 1반장 조한경 경위와 5반 반원 강진규 경 사는 진짜 하수인이 아니다. 박종철군을 직접 고문하여 죽음에 이르게 한 진짜 범인은 학원분과 1반 소속 경위 황정웅, 경사 방근곤*, 경장 이정오** 로서 이들 진범들은 현재도 경찰관 신분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다. ** 경장 반금곤의 오기, 편집자 주. ** 이정호의 오기, 편집자 주. 77
- 고문범인은 결코 두 명일 수 없다. 최초로 고문실에 들어간 외부의사 오 연상씨의 증언에 의하여도 고문실에는 7, 8명이 있었다고 알려져 있을 뿐 아니라 종래 있었던 고문사례가 그렇고, 이와 관련된 당시의 신민당 진상 조사보고서, 동아일보 1월 26일자 사설도 이와 같은 견해를 취하고 있다. - 조한경 경위는 반장으로서 박종철군에 대한 신문을 담당한 3명(위 황정 웅, 방근곤, 이정오)에게 말 안하면 혼내 주라 는 말만 하고서 고문실을 나와 박종철군의 옆방 하숙생으로 서울대 대학원생인 하종문군에 대한 연 행과 신문 등의 일을 지휘하다가 한 시간쯤 뒤에 박종철군을 신문하는 방 에 들어갔고, 들어갔을 때에는 이미 박종철군은 늘어져 있었다. 인공호흡 등을 했으나 허사였다. 조한경 경위에게는 이처럼 반장으로서의 지휘 책 임이 있을 뿐인데, 직접적인 고문살인의 주범으로 조작된 것이다. - 강진규 경사는 1반 반원이 아니며, 강진규 경사가 소속된 반에서 찾고 있는 학생에 대해 박종철군에게 물어보기 위해 그 방에 갔었을 뿐이다. 2. 범인 조작의 각본은 경찰에 의하여 짜여지고 또 현재도 진행중에 있다. 경찰은 당초 박종철군이 쇼크에 의한 심장마비로 죽은 것으로 사건을 조작, 고문사실을 은폐하고 조한경 경위에게만 지휘 책임을 묻는 것으로 그치려 했다. 그러나 여론의 빗발치는 진상조사 요구에 의해 고문치사 사실을 인 정하면서도, 범인만은 계속 조작,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에게 덮어씌 우고 있는 것이다. 범인조작은 1월 17일 이후 두 경찰관이 외부와 철저히 차단된 가운데서 최초로 이루어지고 같은 상황 하에서 진행되고 있는 것 이다. - 조경위 등은 17일 오후 10시부터 시작된 치안본부 특수수사대에서의 78
신문과정에서도 쇼크사라는 계속 같은 입장이었으나 18일 새벽 경찰고위 간부가 직접 찾아가 전체 경찰의 사활이 걸린 문제로 부인해도 국민이 믿 지 않는다고 가까스로 설득해 고문에 대한 진술을 들을 수 있었다 (조선일 보 1월 22일자)는 당시의 보도는 사실상 이때 경찰고위간부에 의해 범인 조작이 이루어졌다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다. 3. 사건의 조작을 담당하고 연출한 사람들은 고문치사사건 직후 직위해 제 되었다가 4월 8일 버젓이 복직한 치안본부 대공수사 2단 단장 전석린 경무관, 5과장 유정방 경정, 5과 2계장 박원택 경정과 역시간부 홍승상 경감 등이다. 특히 5과장 유정방 경정은 박종철군 사건 진상은폐와 사후 처리를 지휘한 장본인이며, 지금까지도 이 각본의 집행을 지휘 담당하고 있다. 4. 검찰은 위와 같은 사건조작의 내용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를 밝히지 않 고 있다. - 서울지방검찰청 특수수사 2부 안상수 검사는 1월 15일의 박종철군 시 체부검에 입회했을 때 마땅히 고문 수사경찰관에 대한 신병확보를 했다면, 범인조작은 막을 수 있었다. - 검찰은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에 대한 송치 전후의 검찰 수사과정에서 실체적 진실을 밝히려 하지 않았으며, 사건의 조작에 협력, 동조하여 경찰 발표대로의 범인을 그대로 인정, 구속 기소함으로써 범인조작을 은폐, 방 조하고 있는 것이다. 검찰이 경찰에 의한 범인조작의 실상을 알고 있다는 믿을만한 증거와 정보가 있다. 5. 이 사건 및 범인의 조작 책임은 현 정권 전체에 있다. 79
- 당초의 검찰수사 방침을 경찰의 자체 수사 방침으로 바꾸게 한 1월 17 일의 결정은 진상은폐와 사건조작을 위한 것이었거나, 적어도 경찰로 하 여금 사건과 범인조작을 결과적으로 가능하게 하였다. - 얼굴없는 사건수사, 범인없는 현장검증, 이유없는 재판지연 등은 모두 가 범인이 조작되었기 때문에 그럴 수밖에 없었거나, 사건조작을 완벽하 게 이루어내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이다. - 정부는 뼈를 깎는 반성과 분발 이라는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을 놓고 한 국민과의 약속과 다짐을 사건조작과 진상은폐로 시작해서 범인조작으 로 끝내려 하고 있다. 6.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치사 사건은 처음부터 그 진상이 다시 규명되어 야 하며, 진상조사 활동에 방해나 탄압이 없어야 한다. 특히 구속되어 있 는 두 경찰관과 그 가족에 대한 탄압이 없어야 함은 물론 자유스런 접근이 보장되어야 한다. 진상조사 활동을 방해하고 탄압하는 경우, 그것은 사건 의 진상과 범인의 조작이 명백히 이루어진 것을 의미한다. - 구속된 조경위와 강경사에 대한 격리와 차단, 변호인과 가족접견의 제 한과 감시는 지금 이 순간에도 사건과 범인의 조작이 계속되고 있음을 입 증하는 것이다. - 박종철군을 고문치사케 한 범인이 조작된 이상 이제까지 당국에 의해 발표된 의문투성이의 진상은 모두 허구요, 거짓임이 분명해졌다. 따라서 박종철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은 국회에서의 국정조사권 발동은 물론 공 개적으로 재조사되어야 한다. 7.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에 대한 재판은 공개되어야 하며, 추호라도 80
각본에 의한 재판이라는 인상을 주는 일이 없이 모든 의문점이 철저히 밝 혀지고, 그 두 사람에 대한 신변의 위험과 보복이 없어야 한다. 첫 공판에서 공소 사실을 모두 시인, 다음 공판에서 선고하는 식으로 싱 겁게 끝나버릴 가능성이 커요. 또 법정 주변에는 만일의 불상사에 대비, 경찰병력이 대량 동원돼 철저한 경비를 펴고, 조경위 등이 사진기자들에 게 노출되지 않도록 위장작전을 하리라는 예상이 큽니다 (동아일보 1월 26일자)는 보도대로 일이 진행된다면 그에 대한 책임은 전적으로 당국자 가 져야 마땅하다. - 두 경찰관에 대한 변론은 치안본부 또는 그 관계자에 의하여 주선된 변 호인에 맡겨질 것이 아니라, 본인들과 가족의 희망과 자유의사에 따라 선 임되거나, 변호사회 또는 종교계에 의해 선임되어 활동할 수 있어야 한다. 8. 이 사건 조작에 개입한 모든 사람은 처벌되어야 한다. - 강민창 전치안본부장은 사건은폐 및 범인조작에 개입한 흔적이 확실하며, 전 현직 내무부장관, 현 치안본부장의 개입 또는 묵인여부가 밝혀져야 하 며, 검찰 관계자의 개입 또는 묵인도 규명되어야 한다. 또한 당해기관 담당 자와 책임자의 직무유기에 대해서도 응분의 책임이 추궁되어야 한다. 9. 박종철군에 대한 고문살인 행위의 범죄와 범인이 조작되어 어떠한 사 람이 억울하게 천추의 한을 안게 되는 일이 있어서는 안된다. 도덕적 책임 또는 지휘 책임은 직접적 고문살인 범죄의 책임과는 엄격히 구별되어야 한다. 고문살인 누명은 부모에게는 불효가 되고(조경위의 부친이 충격으 로 몸져 누워있다) 역사적으로는 만고의 죄인이 되며, 자식과 그 가족에게 는 천추에 원한을 남기게 되는 것이다. 81
10. 박종철군의 죽음은 결코 헛되지 않아야 하며 그 진실은 낱낱이 밝혀 져야 한다. 지난 4월 23일 죽은 지 1백일이 된 날 박종철군의 어머니는 철 저히 조사해서 진실을 밝히겠다더니 뭐가 어떻게 되어 가는지 라고 말했다고 한다. 살아남아 있는 우리 모두가 진상을 규명해야 할 공동의 책 임이 있다. 차가운 날 한 뼘의 무덤조차 없이 언 강 눈 바람 속으로 날려진 박종철군의 영혼이 죽지 않고 살아남아 우리의 곁에 맴돌고 있는 가운데 고문경찰의 핵심들은 복직되었고, 고문 살인자들은 이 땅에 버젓이 폭력 경찰로 군림하고 있다. 거짓으로 점철된 이 땅, 박종철군의 죽음마저 거짓 으로 묻히게 할 수는 없기 때문에, 고문 범인들은 처벌되어야 하며 고문진 상은 밝혀져야 한다. 지금 이 순간에도 박종철군의 어머니의 호소가 계속 되고 있다. 아들의 죽음은 결코 우연한 사고로 돌릴 수는 없습니다. 아직껏 마음 한 구석에 응어리져 풀리지 않는 것은 종철이가 무슨 이유로 연행됐고, 또 어 떤 고문을 받았는지, 그리고 어떻게 죽게까지 됐는지, 좀 더 확실한 진상 이 밝혀졌으면 하는 것입니다. 11. 이 사건 범인조작의 진실이 박종철군의 고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 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 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 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주와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 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1987년 5월 18일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82
1987년 5월 18일 오후 6시 30분에 열린 광주민주항쟁 제7주기 미 사 의 강론에서 김수환 추기경은 그러기에 우리는 그날(1980 년 5월 18일)을 슬픔과 분노의 느낌 없이 기릴 수가 없습니다. 절대 로 이 날을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그냥 지나칠 수 없습니다. 광주의 한, 그것은 곧 민족의 한이요, 역사의 한입니다. 민족의 가슴에 칼을 찔러 깊은 상처를 내고 피를 흐르게 한 그 어처구니없 는 사람들은 스스로 민족 앞에 나서서 죄를 고백하고 속죄해야 합니 다. 아마도 이 길만이 한을 덜고, 우리 겨레로 하여금 광주의 상처를 아물게 하는 길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이 또 그들 자신을 구하는 길이요, 나라를 구하는 길입니다 라고 하면서 우리 가 이처럼 하느님 앞에 함께 서서 억울하게 숨져간 영혼과 허망하게 앗겨버린 젊음을 추모하는 것은 그같이 엄청난 일이 우리 안에 있었는데도 눈감고, 귀먹고, 외면한 우리의 죄를 용서하여 주시옵 도록 빌고, 아울러 우리 마음에 진실을 추구하되 하느님이 원하시는 것은 원수 갚음이 아니요, 용서와 화해임을 깊이 깨닫게 하여 주시 도록 빌기 위해서입니다 고 절절한 목소리로 1980년 광주의 아픔과 박종철 군의 죽음을 애도하였다. 1980년 5월의 광주민주항쟁 기념일은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있는 날이 아니었다. 특히 대학생들에게는 이 날은 더더욱 그냥 보낼 수 없는 날이었다. 이날 전국 62개 대학에서 2만 2천여 명(경찰 추산)이 추모집회 또는 시위를 가졌다. 1987년 들어 가장 많은 숫자가 시위 에 참가한 것이다. 그러나 사제단이 주최한 이 미사에는 이 날을 기 83
념하는 것과 함께 보다 깊은 뜻이 숨겨져 있었다. 이날 명동성당에 는 2천여 명의 신자와 민주인사들이 참석했다. 이어서 제2부에서 김승훈 신부가 앞에 인용한 성명을 읽을 때 김 신부의 목소리는 크게 떨리고 있었고, 듣는 사람들도 놀라움으로 숨 이 막힐 지경이었다. 제단에 올라가 십자가에 절 할 때는 그 모습이 얼마나 경건하고 엄숙했던지 제의가 머리를 덮을 지경이었다. 바로 이 성명이 세상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그것은 폭 풍이었다. 김승훈 신부는 5월 17일 저녁, 함세웅 신부로부터 5월 18일에 있을 미사에서 이 성명을 발표해 달라는 부탁을 정식으로 받았고, 그것이 어떤 내용이며, 그 성명을 발표한다는 것이 얼마나 위험한 일인가를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 그것이 필경은 자신이 떠맡아질 짐이라는 것 도 예감하고 있었다. 김승훈 신부는 성명초안을 한 자 한 자 헤아리 면서 읽고 또 읽었다. 모두 3천 1백 20자였다. 함세웅 신부는 김승훈 신부가 이 성명을 발표하지 못할 경우를 대비하여 전주의 문정현 신 부를 서울에 올라오도록 조치해 놓고 있었지만 예정대로 김승훈 신 부에게 그 역사적 책무가 돌아간 것이다. 1986년 5 3사건과 관련하여 수배 중이던 이부영을 숨겨주고, 그 에게 도피자금을 마련해 주는 등 편의를 제공했다는 이유로 김정남 은 1986년 11월부터 당국의 수배를 받고 있었다. 그러던 중 1987년 3 월 중순, 기적적으로 만난 전병용으로부터 이부영이 보낸 편지 3통 84
박종철 사건의 은폐 축소 조작을 폭로한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의 김승훈 신부 (사진제공 박용수) 을 한꺼번에 받았다. 당시 전병용 역시 수배를 받고 있는 상태였는데, 편지를 전달하고 난 이틀 뒤 그는 체포되었다. 그 편지가 전달된 것 도 천우신조였다. 그 편지에는 정말 놀라운 내용이 담겨 있었다. 읽어가면서 김정남 은 세상에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가 분노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러한 천인공노( 天 人 共 怒 )할 정권을 이대로 놔둘 수는 없다는 생각 과 다짐이 저절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이 진실이 세상에 밝혀 진다면, 이 세상이 결코 전두환 정권을 그대로 놔두지 않을 것이라 는 생각이 들었다. 그 편지에는 그해 1월에 있었던 박종철 군 고문 치사 사건의 범인이 조작되었다는 사실이 적혀 있었다. 시차를 두고 쓰여진 3통의 편지는 그동안의 경과를 시간대별로 말해주고 있었다. 1987년 1월 18일, 영등포교도소 격리사동에 갇혀 있던 이부영은 간밤에 들어 온 두 명이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과 관련된 치안본부 85
대공수사단 경찰관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이부영은 당시 0.72평짜리 작은 방에 수감되어 있었는데, 이들 고문 경찰관은 멀찌감치 떨어진, 4평이 넘는 큰 방에 따로따로 수감되었다. 그들 방 옆에는 별도의 교 도관이 배치되어 특별감시를 했다. 교도소의 겨울밤은 참으로 춥고도 길다. 밤 깊은 시각, 두 경찰관 의 방에서 이상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40세를 넘긴 조한경 경 위는 찬송가를 부르거나 소리 내어 성경을 읽었고, 30대의 강진규 경 사는 간혹 소리 내어 흐느꼈다. 신분이 알려지면서 그들은 일반 재소 자뿐만 아니라 교도관들로부터도 미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런데 교 도관들을 통해 이상한 소문이 들려오기 시작했다. 가족들이 면회 왔 을 때 그들은 억울하다는 말을 했으며, 특히 강진규 경사는 시멘트 바닥에 엎드려 엉엉 울면서 칠순의 아버지에게 불효자식을 용서하라 고 하소연했다는 것이다. 그리고는 이내 그들의 가족 면회가 금지되 었으며, 곧이어 대공수사단의 간부진들이 찾아와 그들 사이에 언쟁 이 벌어지고 회유와 협박이 있었다는 얘기가 속속 전해져 왔다. 내용인 즉 이들 두 사람 말고도 고문 경찰관이 세 명이 더 있으며, 조직의 보호를 위해 두 사람만이 희생양이 되어 고문살인 경관 이라 는 오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왔다는 것이었다. 대공수사단 간부들은 두 경찰관에게 일 년만 참아라, 곧 꺼내 주겠다, 가족의 생계를 돌 봐주겠다, 입을 다물고 있으면 이 통장을 넘겨주겠다 면서 1억 원짜 리 은행통장을 보여주고 회유했으며, 또한 침묵하지 않으면 밖에 나 와서 제대로 살 수 없다고 협박했다는 것이다. 86
이부영은 감옥 안에서 나름대로 취재한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 조작의 상세한 전모를 몇 차례에 걸쳐 정리하여 그와 오래전 부터 알고 지내던 교도관 한재동을 통해 전병용에게 그리고 그것이 다시 최종 수신자인 김정남에게 전달되었던 것이다. 김정남은 이 편지를 받고, 1월 14일 이후의 신문을 모조리 뒤져 박 종철 고문치사 사건이 세상에 알려진 이래, 2 7국민추도회, 3 3 49 재 등을 비롯한 언론보도와 민주화운동 진영의 움직임을 면밀히 추 적하였다. 혹시 행간에라도 새로운 사실이 있는가 싶어 박종철과 관 련된 기사란 기사는 모두 다 스크랩했다. 수배 중이라 행동이 부자 유했기 때문에 사실을 직접 확인한다는 것은 애시 당초 불가능한 일 이었다. 이렇게 하여 얻은 정보와 이부영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종합하여 발표할 문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앞서 김승훈 신부가 발표한 성명에 서 고문에 가담한 세 명의 경찰관의 이름 가운데 반금곤, 이정호의 이름이 각각 한두 글자 틀린 것은 그들의 정확한 이름을 확인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3명 경관의 이름을 교도관이 듣고 이부영에게 구 두로 전하는 과정에서 반금 이 방근 으로, 호 가 오 로 들린 것이다. 이제 어떻게 이 엄청난 사실을 세상에, 국민 앞에 알리는가 하는 것이 문제였다. 처음에는 그 무렵 소집되는 임시국회에서 야당의원 의 본회의 대정부 질의를 통해 공개하는 방법을 생각했다. 실제로 그 때 가까스로 연락이 닿던 야당의원을 통해 질의자로 선정된 의원 들의 의사를 조심스럽게 타진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을 시 87
험에 들지 않게 해달라고 거꾸로 사정해 왔다. 그들이 비겁했다고 탓할 수는 없다. 그때는 그만큼 분위기가 살벌했다. 김정남은 곧 바 로 야당을 통한 발표 계획을 포기했다. 뒷날 야당의 지도부가 이 사 건의 축소 조작 사실을 알고도 발표하지 못했다고 정파간에 치고 받는 것을 보았지만, 이 역시 사실이 아니다. 축소 조작설의 소문 이야 들었을지 모르지만, 야당에 발표를 정식으로 요청하지도 않았 으며, 알고 있는 사실을 정리한 문건을 전달하거나 준비된 발표문을 그들에게 보여준 적이 없다. 5 18이 다가오고 있었고, 이제 사제단을 통해서 발표하는 것이 유 일하게 남은 길이었다. 그동안 민주화운동의 과정에서 우리 사회가, 특히 개인적으로도 사제단에 어려운 일을 의탁한 것이 너무나 많았 기 때문에 삼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마지막 찾아갈 곳은 거기 밖에 없었다. 그때 김정남은 고영구 변호사의 집에 은신하고 있었는데, 매번 편지를 써서 그의 부인(황국자)과 딸(고은영)을 통해 명동성당 의 함세웅 신부에게 전했다. 그때 함세웅 신부는 천주교 서울대교구 홍보국장이라는 직책을 맡고 있었는데, 일요일이면 구파발성당에 가서 미사를 집전했다. 고영구 변호사 부인은 독실한 가톨릭 신자였는데, 구파발 성당까 지 찾아가서 편지를 전했다. 사제단이 발표한 성명의 맨 마지막에 있는 것처럼, 김정남은 이 사건 범인 조작의 진실이 박종철 군 고 문살인 진상과 함께 명쾌하게 밝혀질 수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과연 우리나라에서 공권력의 도덕성이 회복되느냐 되지 않느냐 하는 결 88
말이 날 것이다. 또한 우리 사회가 진실과 양심 그리고 인간화와 민 주화의 길을 걸을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중대한 관건이 이 사건에 걸려 있다 고 보았고, 여기에 고문치사 사건의 축소 조작 사실이 발표되기만 하면, 이런 정권은 마침내 끝장나고야 말 것이라는 막연 한 기대 같은 것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최악의 경우, 축소 조작 사실을 사실로 확인, 제보한 사람이 수배 중의 김정남 이라고 밝혀 도 좋다면서, 어떻게든 발표만 해 달라고 졸랐던 것이다. 김수환 추 기경도 발표에 신중할 것을 당부할 정도였으니 사제단으로서도 조 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박종철의 원혼이 작용했던지, 이런 우여곡 절 끝에 박종철 군 고문치사 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다 는 제목의 사제단의 성명이 발표되었다. 사제단의 발표가 있고 나서, 초조한 하루 이틀이 지나고, 5월 21일 오후 6시 정구영 서울지검 검사장이 기자회견을 통하여 범인 3명이 더 있다는 사실을 인정했다(법원에서 판결로 확정된 박종철 군의 고 문치사 경위는 아래와 같다). 29일에는 검찰이 축소 조작을 주도한 대공수사 2단 단장 박처원, 5과장 유정방, 5과 2계장 박원택을 범인 도피죄로 구속수감하면서 주요 피의사실을 다음과 같이 밝혔다. 그 러나 사제단이 강력히 의혹을 제기한 축소 조작 은폐의 최고 책 임자라 할 치안본부장 강민창은 이번 재수사에서도 제외되었다. 축 소 조작과 은폐는 이때까지도 여전히 계속되고 있었던 것이다. 그 러나 사제단 성명의 파장은 날로 커가고 있었다. 89
피고인 조한경은 치안본부 대공 3부 5과 2계 소속 경위, 같은 강진규는 같은 계 소속 경사, 같은 황정웅은 1986년 11월 11일부터 같은 계에서 경 위로 근무하다가 1987년 2월 16일 경북 경산경찰서 대공과 대공 2계장 으로 전보된 자, 같은 반금곤은 1986년 11월 11일부터 위 치안본부 대공 3부 5과 2계에서 경장으로 근무하다가 1987년 2월 16일 관악경찰서 수 사과 형사계로 전보된 자, 같은 이정호는 1987년 1월 9일부터 위 치안본 부 대공 3부 5과 2계에서 경장으로 근무하다가 같은 해 2월 16일 서울시 경 공안수사단으로 전보된 자 등인 바, 피고인들은 공동하여 1987년 1월 5일경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3학년생인 피해자 박종철(남. 21세) 이 동교 민민투위원으로서 서울대학교 민추위 사건의 중요 수배자인 공소 외 박종운(남. 25세 서울대학교 사회과학대학 사회복지학과 4년 제적)을 은닉하면서 동인과 연계활동을 벌이고 있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위 박종철 을 연행 수사하여 특진대상 수배자인 박종운 등 민민투 지하 지도부 중앙 조직원들을 검거하기로 수사계획을 세운 후 1987년 1월 14일 오전 7시 20분경 피고인 조한경, 같은 황정웅, 같은 반금곤, 같은 이정호 및 공소 외 정래인(치안본부 대공 3부 5과 2계 소속 경장), 같은 김병식(같은 계 소속 순경) 등이 서울 관악구 신림9동 246의 26 소재 위 박종철의 하숙 집에 집결하여 동인을 연행, 같은 날 오전 8시경 서울 용산구 갈월동 96 의 1 소재 치안본부 대공 2부 건물 5층 제8호 조사실로 데리고 간 후 그곳 에서 피고인 조한경이 위 박종철에게 동인의 인적사항, 조직, 사상관계 등 에 관하여 1차 신문을 하고 2차로 같은 날 오전 10시 40분경 같은 층 제 9호 조사실로 신문 장소를 옮겨 그곳에서 위 조한경 및 동인의 지시로 같 90
은 날 오전 10시 25분경 수사팀에 합류하게 된 피고인 강진규가 수배자 박종운의 소재에 관하여 위 박종철을 신문하였으나 동인이 계속하여 위 박종운의 소재를 모른다고 하자 가혹행위를 가하여 진술을 받아 낼 것을 마음먹고, 피고인 조한경은 같은 이정호에게 위 제9호 조사실 안에 있는 욕조(길이 123cm, 높이 57cm, 폭74cm의 인조대리석제)에 물을 채우 라고 지시한 후, 바른 대로 말하지 않는다면서 주먹으로 위 박종철의 가슴 을 수회 때리고 발로 동인의 다리를 1회 걷어차고 위 강진규도 이에 가세 하여 주먹으로 동인의 가슴 등을 수회 때리고 옷을 모두 벗게 한 후 물이 가득 찬 욕조 앞으로 데리고 간 다음 위 조한경은 피고인 이정호에게 제 14호 조사실로 가서 그곳에서 공소 외 하종문을 신문하고 있던 피고인 황 정웅, 같은 반금곤을 불러오게 한 후 위 박종철에게 재차 박종운의 소재를 추궁하였으나 이에 응하지 않자 나머지 피고인들에게 위 박종철을 혼내주 라고 지시하여 이에 피고인 강진규, 같은 반금곤이 조사실 안에 있던 수건 을 사용하여 위 박종철의 양손과 발목을 결박하고 나서 피고인 반금곤은 위 피해자의 오른쪽에서 왼팔을 동인의 오른쪽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고, 같은 황정웅은 왼쪽에서 오른팔을 동인의 왼쪽 겨드랑이 밑으로 집어넣어 붙잡아 함께 등을 누르고 위 강진규는 욕조 안에 들어가서 양손으로 위 박 종철의 머리를 잡아 물 속으로 누르다가 한참 후에 끌어내는 가혹행위를 2~3회 반복한 후 다시 박종운의 소재를 신문하였으나 역시 모른다고 하 자 피고인 조한경이 좀 더 혼을 내주라며 재차 가혹행위를 지시하면서 피 고인 이정호에게도 합세할 것을 지시하여 동인은 위 박종철의 결박된 다 리를 들어 올리고 다른 피고인들은 앞서와 같은 방법으로 위 피해자의 머 91
리를 물 속으로 2~3회에 걸쳐 누르는 등 가혹행위를 가하는 동안 위 박 종철의 목 부분이 위 욕조의 턱(높이 57cm, 넓이 6.5cm)에 눌려 숨을 쉬지 못하게 함으로써 같은 날 11시 20분경 위 제9호 조사실에서 경부압 박에 의한 질식으로 동인을 사망에 이르게 하였다.* 축소조작 사건발생 당일인 1월 14일 오후5시경 치안본부 대공 3부 사무실에서 고문경찰관 5명이 모여 조경위 등 2명이 수사하다 박 군이 졸도 사망 한 것 으로 구두로 합의, 보고서를 작성했다. 1월 15일 오전 박원택 경 정이 고문경찰관 5명을 불러 모아 이들이 구두 약속대로 조서 받는 연 습을 하게하고 각자의 역할을 숙지하도록 했다. 1월 17일 밤 11시경 유정방 경정은 특수수사대 조사관실을 방문해 조 경위 등 2명이 범행 모두를 뒤집어쓰도록 설득했다. 1월 18일 오전 10시경 동료직원 10여 명이 조한경을 찾아가 회유를 했고, 박 치안감도 이들 2명을 찾아가 두 사람이 모두 책임지고 나가라 * 고문경찰관 조한경 경위와 강진규 경사는 1심에서 각각 15년을, 2심에서는 10년과 8년 을 선고받고, 대법원에서 그대로 확정되어 강진규 경사는 1992년 7월에, 조한경 경위 는 1994년 4월에 가석방되었다. 추가로 구속되었던 황정웅 경위는 징역 5년, 반금곤 경 장은 징역 6년, 이정호 경장은 징역 3년을 확정 선고받아 복역 중, 이정호 경장은 1990 년 5월에, 황정웅 경위는 1990년 12월에, 반금곤 경장은 1991년 12월에 각기 가석방 되었다. 92
고 설득했다. 1월 19일 오후에는 유, 박 경정이 다시 찾아가 경찰조사 때와 같이 검 찰에서 진술하라고 하는 등 범인을 축소 조작했다. 은폐공작 2월 19일 유 경정 등 6명이 교도소로 조경위 등을 면회 갔을 때 조 경 위가 양심선언을 하겠다 고 하자 박 치안감이 3월 8일 교도소로 다시 찾아가 조용히 있으라고 설득했다. 3월 9일 박 치안감이 가족들을 만나 설득해 달라고 부탁했다. 3월 19 일에는 변호사 선임을 취소하라고 종용했다. 유 경정은 3월 11일부터 5월 17일까지 10회에 걸쳐 그 가족들을 만나 사건을 은폐하도록 설득 했다. 한편, 박 치안감은 4월 2일 신탁은행 이촌동지점에 조한경과 강진규 명의로 5000만 원짜리 개발신탁장기예금 2계좌씩 2억 원을 가입한 뒤 다음 날 의정부교도소로 이들을 면회가 예금증서를 보여주면서 회 유하였다.** ** 축소은폐조작에 관여하였던 상급자 박처원 치안감은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 유정방 박원택 경정은 각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확정 선고받았다. 93
한편, 국민들의 분노가 더욱 가열차게 폭발하기 시작하자, 전두환 정권은 5월 26일 오전 전면개각을 단행했다. 노신영 국무총리가 물 러나고 대신 이한기 전 감사원장이, 장세동 안기부장이 퇴진하고 안 무혁 국세청장이, 김성기 법무장관과 정호용 내무장관의 후임으로 정해창 대검차장과 고건 민정당 의원이 들어왔다. 검찰총장은 서동 권에서 이종남으로, 치안본부장은 이영창에서 권복경으로 각각 경 질되었다. 이번의 개각은 오로지 박종철 고문치사 축소조작 사건과 관련하여 이루어진 것이었다. 특히 전두환의 후계자로 물망에 오르 던 노신영 총리와 5공정권의 2인자로서 그동안 정국을 좌지우지했 던 장세동의 퇴진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다. 94
범 국 민 대 회 민 주 헌 법 쟁 취 호 은 6 헌 폐. 철 조 폐 작10 고 규 문 탄 살 인 및
범 민 호 은 6 국 주 헌 폐. 민 헌 철 조 대 법 폐 작10 고 회 쟁 규 문 취 탄 살 인 및 5월 18일, 사제단의 박종철 군 고문치사사건의 진상이 조작되었 다 는 성명이 발표되고, 이어 검찰이 3명의 고문경관과 축소조작에 가담한 3명의 대공수사단 간부를 구속하면서 국내 언론은 연일 이와 관련된 기사로 대서특필하였고, 따라서 국민의 공분은 날로 끓어올 랐다. 전두환 정권의 도덕성과 신뢰는 여지없이 추락하였다. 이러한 분노의 국민적 분위기는 6월의 민주화투쟁으로 점화된다. 박종철 군 고문치사 은폐조작 사건은 4 13호헌조치 이후의 소극 적 분산적 개헌운동을 범국민적 차원의 적극적 통합적인 운동으 로 전환시키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5월 23일, 박종철 군 국민추도위 원회(2 7국민추도회와 3 3 49재 행사를 주도)는 박종철 군 고문살 인 은폐조작 규탄 범국민대회 준비위원회 로 확대 발족하고, 6월 10 일에 범국민 규탄대회를 갖기로 하였다. 97
4 13호헌조치 이후 신당 창당과정에서 정부 여당의 물리적 탄압 으로 계속 수세에 몰리던 민주당은 박 군 사건을 계기로 대정부 공 세를 강화하기 시작했다. 5월 23일, 민주당은 박 군 사건의 책임을 물어 내각 총사퇴와 대통령의 사과 를 요구하였고, 25일에는 박 군 사건에 책임을 지고 현 정권이 퇴진 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5월 27일에는 재야와 민주당이 연합하여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 부(국민운동분부)를 향린교회에서 발기 결성한다. 인편( 人 便 )에 구 두로 행사장소를 전달받은 150여 명의 인사들이 기습적으로 모여 8 시에 열린 발기대회는 개회사, 경과 보고, 발기취지문 낭독, 상임공 동대표와 상임집행위원 선출, 국민에게 드리는 글의 발표순으로 일 사천리로 진행되었다. 원래 다음날로 예정되었던 결성대회마저 이 날 연이어 결행하기로 하고, 김승훈 신부가 결성 선언문을 낭독했다. 우리는 용기 있는 민족만이 민주주의의 산 열매를 얻을 수 있다는 교훈을 가슴에 되새기며, 지금 이 나라의 앞길에 놓인 미증유의 난국을 타개하고 민주주의의 광명대도를 열기 위해 호헌반대 민주헌법쟁취 국민운동본부 를 발족한다. 우리 조국의 민주화는 우리의 손에 의해, 우리의 투쟁 과 사랑과 희생에 의해서만 이룩될 수 있다. 이제 우리는 이 민족을 밝고 희망찬 미래로 도약시키기 위하여, 모든 국민의 민주화의지를 총집결하여 민주헌법쟁취를 위한 운동을 힘 있게 조직하고 실천해 나갈 것임을 역사 와 민족 앞에 엄숙히 다짐하는 바이다. 98
이에 앞서 발표된 발기선언은 민주화는 이 땅에서 어느 누구도 거 역할 수 없는 도도한 역사의 대세가 된 것이다. 이제 우리는 지금까 지 고립 분산적으로 표시되어 오던 호헌반대 민주화운동을 하나의 큰 물결로 결집시키고, 국민을 향해 국민 속으로 확산시켜 나가야 한 다는 데 뜻을 모았다. 우리들 사제, 목사, 승려, 민주여성, 민주정치 인, 노동자, 농민, 도시빈민, 문인, 문화예술인, 언론출판인, 청년들 은 하나 되어 이 땅의 민주화를 위해 몸 바쳐야 한다는 뜻에서 호헌 반대 민주헌법쟁취 범국민운동본부 설립을 발기한다 고 되어 있다. 5월 28일자로 되어 있는 발기인 결의문에서는 민주화와 통일을 요 구하는 나라의 주인인 국민과 시대의 역사적 요청은 군사독재정권이 물러나고 민주민간정부 가 수립됨으로 실현될 수 있으므로 이를 역 사적 국민운동으로 기필코 성공시킬 것을 다짐한다 고 하였다. 박종철 군 국민추도준비위원회 가 그 모체가 되고, 박 군 사건의 축소조작이 밝혀지면서 그것이 국민운동본부로의 결성을 재촉한 셈 이었다. 이와 같이 발기 결성된 국민운동본부에의 참여는 광범위하 게 이루어졌는데, 2천 2백여 명에 이르는 발기인의 분포는 가톨릭 2 백 53명, 개신교 2백 70명, 불교 1백 60명, 정치인 2백 13명, 노동자 39 명, 농민 1백 71명, 문화 예술 교육분야 1백 55명, 빈민 18명, 민통 련 35명, 기타 지역대표로 되어 있다. 참여가 계속 확대되었으므로 이 수치가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것은 아니지만, 여기서도 국민 내부의 광범한 분야에서 두루 국민운동본부에 참여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많은 수의 상임공동대표와 상임집행위원을 부문과 분야별로 안배 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