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들 일시 : 2010년 5월 1일(토) 오후 3시 장소 : 흥사단 강당 흥사단창립 100주년 기 념 사업 추진 위원회
2 - 식 순 진행사회 : 박화만(100년사위원회 상임위원) 개 회 인 사 말 박의수(100년사위원회 위원장) 발제 및 토론 사 회 : 강용찬 (비전위원회 위원장) 발 제 이규태(아세아역사문화연구소 소장) 조성두(한우리공동실천연대 사무총장) 이건범(위즈덤하우스 기획위원) 장동현(흥사단중앙수련원 부원장) 토 론 주제별 토론 / 종합토론 발제자 사회자 발언 정리 광고 및 폐회
3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제1주제 : 흥사단과 독립운동 이규태(아세아역사문화연구소장. 고대 아카데미 78학번) 1. 문제제기 도산의 사상과 행동 속에서의 흥사단 위치 : 관계설정 문제 역사 속에서(특히 1932년 이후) 조직으로서의 흥사단의 역사와 단우들의 개인적 활동과의 관계설정 문제 다양한 성향의 조직구성원들의 활동 기존에 별로 언급되지 않았던 사항을 중심으로 문제제기 2. 도산 안창호의 기독교 사상 1894년 서울의 밀러스쿨에 입학, 기독교 입문, 1897년에 독립협회 및 만민공동회 활동, 쾌재정 연설, 1899년 점진학교 설립 1902년 미국 샌프란시스코로 유학, 1903년 교포의 단결과 계몽을 위한 한인친목 회 조직, 1905년 한인친목회를 발전시켜 공립협회 창립, 공립신문 발행 도산의 기독교 이해와 그 의미, 신앙의 논리구조 이승훈, 손정도, 전덕기, 이상재, 윤치호 등과 비교 필요 3. 도산의 신민회 활동과 의병투쟁에 대한 인식 1907년 귀국, 신민회 창립, 평양에 대성학교 설립, 태극서관, 자기제조주식회사 ( 瓷 器 製 造 株 式 會 社 ) 설립, 이등박문과 회견하고 소위 안도산 내각의 조각을 일축 1908년 경향각처를 순행하며 국민조직화운동을 위한 유세활동 1909년 국내최초의 청년운동 단체인 청년학우회 창설, 육당 최남선이 중앙총무 로 도산을 도움 의병투쟁에 대한 도산의 인식 신민회는 와해된 독립협회 청년회원들을 조직, 중심인물로는 윤치호, 장지연, 신채호, 박은식, 이동휘, 이갑, 이종호, 이승훈, 안태국, 이동녕, 이회영, 김구, 유동열, 양기탁 등
4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회원은 전국에 걸쳐 800여 명, 서북지방의 기독교인이 압도적 다수 신민회의 목표는 교육구국운동, 계몽강연 및 출판운동, 민족산업 진흥운동, 독 립군 양성운동 4. 안중근 의거와 도산의 망명, 그리고 그 영향 안중근 의사 사건으로 용산 헌병대에 수감, 2달만에 석방 1910년 4월 7일 망명의 길을 떠나면서 거국가 를 남김, 위해, 북경, 청도, 상해, 블라디보스토크 등지를 유랑, 청도회담 개최 1910년 이후 신민회 운동방향을 새로이 모색, 양기탁, 이동녕, 안태국, 김구 등이 서울의 양기탁 집에서, 망명중인 도산, 신채호, 이갑 등은 중국 산동성 청도에서 모임, 독립전쟁론이 결정, 신민회는 독립전쟁에 대비한 만주이민계획과 무관양성 을 위해 청년 모집, 자금조달 계획 수립 1911년 북만주에 무관학교를 세울 계획이었으나 여의치 못해 러시아, 독일, 영국 등을 거쳐 미국으로 다시 망명 1911년 105인 사건을 계기로 신민회 조직 와해 안중근 의거와 신민회 조직과의 관계 안중근 의사 사건수사과정에서 일제는 신민회 조직 거의 파악 신민회 활동의 좌절과 장기전을 대비한 새로운 구상 흥사단 결성의 배경 5. 상해임시정부의 수립과 몽양 여운형, 그리고 도산 여운형이 조직한 신한청년당(1918.08.20)의 구성원 : 여운형, 김규식, 서병호, 신규 식, 신채호, 장덕수, 이광수, 김철, 선우혁, 한진교, 문일평, 조동호, 한원창, 김순 애, 안정근 등 1918년 11월 윌슨대통령의 특사 크레인(Charles R. Crane)이 상해 영파로( 寧 波 路 ) 칼튼(Calton) 카페에서 연설, 여운형이 크레인을 만나 호소, 자체적으로 식민 통치에 대한 항거를 한다는 무언가를 강하게 보여준다면, 그것을 빌미로 미국을 압박할 수도 있고 세계여론에 호소할 수 있는 길이 생기지 않겠느냐는 조언을 듣고 몽양은 거기서 힌트 여운형은 신한청년당 조직을 활용해서 영어에 능통한 김규식을 파리로 파견, 장 덕수를 국내에 파견해 자금을 모집, 이광수를 일본에 파견해 동경 2.8독립선언서 를 이끌어내고, 몽양 자신은 길림으로 가서 무오독립선언서의 촉매 역할, 간도 간민회의 김약연, 정재면 등과 만나 상황 설명, 그것이 나중에 대한국민회로 발
5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전하는 계기, 그리고 블라디보스토크에 가서 박은식, 이동녕, 조완구 등을 만나 상의, 이런 일련의 몽양의 활동이 연해주의 대한국민의회(최초의 대한민국임시정 부)를 탄생시키는 계기 선우혁이 국내에 들어가 남강 이승훈을 만나 천도교 측과 접촉, 상황 설명, 그 결과 파고다공원 계획이 구체화, 북간도 3.13의거, 필라델피아 4.16의거 조선이 독립국임을 선언, 독립국가란 정부가 있어야 하는 것, 국내외 각지에서 8 개의 임시정부가 수립, 불분명한 정부를 제외하고 실제적으로는 연해주(대한국 민의회), 한성(한성임시정부), 상해(임시의정원) 등 3곳의 임시정부가 수립, 통합 의 필요성, 통합의 주역이 바로 도산 안창호와 몽양 여운형 논의를 거쳐 한성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정부 위치는 상해에 둔다는 원칙에 합의 독립운동의 하부구조가 전무했던 상해에 임정이 만들어질 수 있었던 것은 일본 의 힘이 닿지 않은 활동의 여백이 있는 유일한 도시(프랑스 조계)였기 때문이지 만, 그 배후에는 여운형의 스승이라 할 수 있는 예관 신규식의 활동과 경험이 존재, 신규식은 손문의 신해혁명 참가, 신아동제사, 박달학원, 신한혁명당 창립, 여운형을 비롯한 수많은 인물을 키움, 터전을 닦아놓은 거물 프랑스조계는 영일동맹 속에서 영국을 견제하려는 프랑스의 입장 때문에 많은 중국뿐만 아니라 많은 아시아 식민지 독립운동가들의 주요한 활동무대, 프랑스 조계 진독수( 陳 獨 秀 )의 신청년 잡지 편집부 자리 건너편 집이 신규식의 집, 신 규식과 진독수는 동갑, 둘도 없는 친구 신규식은 진기미( 陳 其 美 ) 집에서 생활, 둘은 같이 신해혁명에 참가, 같이 신아동 제사를 조직, 신아동제사는 중국혁명의 중심인물로 구성, 한국독립운동을 적극 지원하기 위해 신규식이 결성한 단체, 회원에 송교인( 宋 敎 仁 ), 호한민( 胡 漢 民 ), 진 기미, 대계도( 戴 季 陶 ), 진과부( 陳 果 夫 ), 호림( 胡 霖 ), 오철성( 吳 鐵 城 ) 등과 같은 인 물로 구성, 중국국민당의 적극적인 지원 1919년 4월 11일 상해에서 임시정부 대표 29명이 모여 통합 임시정부를 수립하 기 위한 회의 개최, 임시의정원을 구성, 대한민국 국호와 민주공화제 표방하는 임시헌장 10개조를 제정 공포, 국무총리에 이승만을 추대하고 내무총장에 안창 호, 외무총장에 김규식, 군무총장에 이동휘, 재무총장에 최재형, 법무총장에 이시 영, 교통총장에 문창범 등 6부 총장을 임명한 뒤 4월 13일 정부수립을 선포 1919년 5월 안창호는 자금을 가지고 상해에 도착, 임정통합과 체제구축에 돌입, 3개 정부의 통합원칙에 의해 1919년 9월 11일 58개조에 이르는 임시헌법을 공 표, 9월 15일 통합정부를 구성, 그리고 대통령에 이승만, 국무총리 겸 군무총장 에는 대한국민회의를 이끌었던 이동휘, 외무총장에 김규식, 내무총장에 안창호, 법무총장에 신규식 등을 선출 문제는 이승만, 독선과 자금 독점으로 임정은 내부분열, 신규식은 실망해서 곡기 를 끊어 자결, 1922년 9월 25일 순국, 신규식 사후 임정은 유명무실하게 됨
6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국민대표회의 무산 : 개조파와 창조파 대립, 임정과 거리를 두면서 이상촌 건설 구상 도산의 이후 행보-통일전선운동 : 1926년 미국에서 다시 중국으로 건너와 가을부 터 만주 길림성 일대를 답사, 이상촌 사업을 추진, 1927년 길림에서 군사행동단 체의 통일과 대독립당의 결성을 협의, 연설 중 중국경찰에 감금되었다가 20일 만에 석방, 1928년에는 이동녕, 이시형, 김구 등과 상해에서 한국독립당을 결성 하며 대공주의 를 제창, 일제 만주침략으로 이상촌 사업 사실상 좌절 6. 윤봉길 의거와 도산의 체포 : 석원화( 石 源 華 ) 교수의 주장 석원화 교수 : 상해 复 旦 大 學 한국조선연구센터, 상해지역 조선인 반일투쟁에 대해 연구, 한국독립운동과 중국, 김약산 장군 등 여러 편 1932년 제1차 상해사변(1932년 1월-5월) 당시 상해에 주둔하고 있던 국민혁명군 19로군은 일본군의 공격을 맞아 치열한 전투를 전개했으나 패배, 반격을 준비하 던 중 중국국민정부는 강대국의 압력에 굴복해 일본과 굴욕적인 정전협정을 맺 게 되었음, 19로군 장병들은 이에 큰 불만을 가지고 있었으나 외교적인 문제로 중국인은 공개적으로 일본에 대항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음, 그래서 19로군은 상해의 민간조직을 찾아 도움을 청했고, 그 결과 임정의 도산 안창호와 연결됨, 안창호는 김구를 추천했고, 중국 국민정부는 4만원을 임정에 제공해 그중 2만원 은 폭탄제조에 사용했다고 함 구체적인 사료 검증 필요 구익균 선생의 증언(1) : 흔히 도산 선생을 사상가로만 알고 있는데 도산 선생 은 정치가이며 혁명가이자 사상가로 임시정부의 핵심이었습니다. 임시정부로 들 어오는 모든 군자금은 직접 도산 선생에게 절달되었고, 김구 선생의 한인애국단 창립에서부터 윤봉길 의사의 의거까지 모두 도산 선생의 재정지원을 통해 이루 어졌습니다. 구익균 선생의 증언(2) : 그날은 화창한 봄 날씨였습니다. 평소와 다름없이 흥사 단 단소에 나와 도산 선생과 마주앉아 업무를 보고 있었는데 도산 선생이 정오 쯤 되자 무슨 소식이 왜 없는지 모르겠다고 궁금해 하셨습니다. 나는 점심 약속 이 있으신가 하고 짐작했습니다. 그러다 정오가 조금 지나자 선생의 모습이 초 조해지시면서 나를 쳐다보고는 무슨 일이 있을 텐데 소식이 없으니 매우 궁금 하구려 하셨습니다. 손님을 기다리십니까 라고 물었더니 아니, 손님을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무슨 일이 있을 것이라 해서 그 소식을 기다리고 있네 하시고는 잠깐 바깥에 나갔다 오시겠다는 말을 남기며 방문을 나섰습니다. 그때가 12시 30분쯤 됐던 거 같습니다. 잠시 후 윤봉길 의사 의거를 보도한 신문호외가 나오 고 사람들이 사사람에 앉아 있던 나를 붙들고 어떻게 된 일이냐쟠 남꾸 묻기에 상황이 파악됐습니다. 그때 백범 선생이 도산 선생의 집에 사람을 보내 피신
7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하라고 연락을 했는데 공교롭게도 도산 선생님은 이유필 단장의 집에 있다가 체 포가 됐습니다. 당시 민단장이 백범에서 이유필 단장으로 바뀐 직후였는데 뉴다. 몰랐던 윤봉길 선생이 체포 직후 배후를 묻는 일경에게 거류민단장이라고 말했 고, 거류민단 동태를 환히 파악하고 있던 일경이 신속하게 이유필 단장의 집을 급습하는 바람에 도산 선생이 체포되었던 것입니다. 도산과 백범의 관계 : 김구와 도산의 여동생 안신호( 安 信 浩 )와의 혼담, 도산이 백 범을 임정 경무국장으로 임명( 백범일지 ) 7. 나가는 말 윤봉길 의거는 임정의 새로운 활로를 개척 역설적으로는 윤봉길 의거에 의해 도산이 체포됨으로써 죽음에 이름 도산의 민족통일전선 사상을 총체적으로 규명할 필요 민족문제가 국제관계에 의해 결정되는 측면의 중요성을 인식 안창호-여운형-신규식-김규식 등 구체적 관계 검토 필요
8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제2주제 : 흥사단과 정치운동 조성두 (한우리공동실천연대 사무총장. 서울대 아카데미 74학번) 1. 해방 이후 상황에 대한 흥사단의 대응 - 1945년 일제로부터의 해방은 식민지 조선에 살고 있던 모든 개인, 단체, 세력을 피할 수 없는 변화의 소용돌이 속으로 몰아넣게 됨. 이 격랑의 변화 속에서 각 주 체는 어떻게 상황을 읽고 대응해 가느냐에 따라 자신의 사회적 위상이나 영향력 나아가 명운이 정해지는 역사의 드라마를 개별적으로 또는 함께 써나가게 되었음. 그리고 이러한 변화는 한국전쟁이라는 또 다른 비극의 무대를 거치는 동안 더욱 증폭되었으며, 이 변화는 전후 이승만 정권의 독재 시기, 4.19혁명, 5.16쿠데타로 이어지는 기간 동안 광란의 춤을 멈추지 않았음. - 흥사단에게도 해방은 존재론적 변화를 가져옴. 더 이상 식민지 하의 흥사단 이 아니라 독립국가 환경에서의 흥사단 으로 바뀌게 됨. 이제 흥사단은 독립운동 단 계에서가 아니라 국가건설 단계에서 자기의 정체성을 확인하고 조직을 정비하며, 자기의 존재 의의와 목표에 맞추어 자기를 변화시켜 나가야 하는 과제에 직면하 게 됨. - 흥사단은 이에 부응하여 먼저 국내위원부를 1946. 1. 2 발족하고, 창단 이래 35년 간 미주에 있던 본부를 48. 7. 서울로 이전하고, 국내외 9개 각 조직을 재정비하였 으며, 47. 10. 에는 약법을 개정하여 독립 국가 환경에서의 자기 규정을 확보하게 됨. 46. 9. 28 제1차 단대회 이래 정기적으로 단대회를 열고, 해방 후 수 삼년 동 안 단우의 수를 배증하였으며, 월례회 초독회 등의 정기적 활동 틀을 마련해 나갔 음. 마침내는 단소를 을지로 2가 옛 대성빌딩에 마련하여 6. 25가 발발하는 날 이 전하게 됨. - 한편 상당한 수의 단우들이 미 군정청의 고위직에 임명되어 흥사단의 정치세력화 에 대한 오해와 우려의 시선이 커가면서 정치 불관여 원칙을 약법에 삽입하는 조 치를 취하고 이후 몇 차례의 정치 비개입 입장을 표명해야 하는 상황에 처하게 됨. 또한 이승만 정권으로부터 정치적 견제가 자심하여 이승만 정권 내내 감시와 탄압의 대상이 되었으며, 단보가 폐간된 적도 있고, 단우들의 활동이 위축되거나
9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심지어 탈퇴하는 등의 일도 발생하였음. - 다른 한편 문화부문의 활동에는 특기할 사항이 많은데, 1954. 4. 9 첫 금요강좌를 가진 이래 이후 약 1천5백회에 이르는 기록적 강좌수를 시현하였으며, 국민교양 강좌(1959.3-60.11)를 개설 운영한 적도 있고, 또한 국민일보 한국일보의 창간 및 운영을 시도한 바 있으며(1949), 한국공인사(1949-54), 태극서관(1949.4), 대성문화 사(1954.1) 등을 통해 출판 사업을 펼쳐나기도 했음. 기관지 및 소식지인 단보와 공함을 발간하고, 특히 새벽(1954.9-1961.1)을 발행하여 4.19 혁명의 불을 지핀 것 등은 특기할 만한 일이었음. - 하지만 5.16쿠데타는 흥사단에게 다시 2년 2개월의 활동 정지 기간을 가져오고, 1963. 7. 에 이르러서야 활동이 재개되는 수난을 안겨주었음. 2. 8.15-5.16 기간의 흥사단 역사에서의 의미 - 1945-1961 기간의 흥사단 운동은 1945 이전의 흥사단 운동과 아카데미운동 으로 특징지어지는 1963 이후 운동을 이어주는 과도적 시기의 운동으로 파악됨. - 하지만 이 시기 운동은 해방 전 흥사단 운동의 유산을 이어받아, 그것에 변화를 추구하면서 1963년 이후 운동의 성격을 틀 지우는 성격을 지녔기에, 이 시기의 흥 사단 운동에서 흥사단의 정체성에 영향을 준 요소와 조치들의 의미를 따져보는 것은 오늘의 흥사단운동을 이해하고 발전안을 찾는 데 긴요함. - 여기서는 이 시기 쟁점이 되는 사항으로 먼저 47년 약법 개정을 통해 읽을 수 있 는 흥사단의 자기 정체성 인식을 살피고, 이어서 정치 불개입 조항과 관련한 문제 를 살피고자 함. 3. 쟁점 1: 약법 개정 중 목적 조항의 성격과 내용 - 1947년 10월의 약법 개정은 1933년 1차 개정에 이은 2차 개정으로서, 목적, 실무 및 공약, 기관, 단우, 기타 영역에 걸쳐 다수의 개정이 이루어졌지만, (1) 목적 조항을 창립원안으로 환원하는 동시에 약간의 자구 수정을 한 점 (2) 정치 운동 불참의 원칙을 가입( 加 入 )한 점 1) 등이 특징으로 꼽아짐. 1) 흥사단운동 70년사,
10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 우선 목적 조항의 변천을 보면, 창단시 표현 -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 며 덕체지 3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의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대업( 大 業 )의 기초를 준비함 33년 표현 - 전 민족의 행복을 위하여 헌신할 신의 있는 조선의 남녀를 굳게 단 결하여 본단의 강령을 실천함으로써 우리 민족의 신흥 역량을 증장케 함 47년 표현 - 무실역행으로 생명을 삼는 충의 남녀를 단합하여 정의를 돈수하며 덕체지 3육을 동맹 수련하여 건전한 인격을 지으며 신성한 단체를 이루어 우리 민족 전도 번영의 기초를 수립함에 있음 이렇게 차례로 바뀌어 47년 2차 개정은 창단시 표현에서 전도 대업의 기초를 준비함 의 대업 을 번영 으로, 준비함 을 수립함에 있음 으로 수정한 것임을 알 수 있음 - 이러한 수정의 의미나 취지를 수정 약법 해설 (1948. 2,6,7 단보)은 창립 목적의 목적 조문은 도산 선생의 親 意 로 된 것으로 비록 미흡한 점과 구식 표현이 있으나, 역사적으로 깊은 의의가 있고 많은 동지들이 잊을 수 없 는 애착을 가지고 있으므로 가볍게 고치지 않는다 는 다수의 의사로 창립 약 법을 부분적 자구 수정만 하게 되었다 며, 첫째, 흥사단은 무실의 정신에 입각하여 자구와 文 意 에 구애됨 보다 근본정 신에 치중하여 실천궁행하고 내용적인 이념 구현에 노력한다 둘째, 본단의 기본정신은 이미 다년간 갈고 닦아서 광범위한 체계를 구성하 고 있으므로 문자와 문맥을 고친다고 하더라도 완전히 이를 포용하기 어려우 므로 부분적 수정이 필요하지 않다 세째, 전통 존중의 정신을 배양하여 굳건한 역사적 기초 위에 새로운 해석과 이념을 소화함으로서 뿌리 있는 생성 발전을 기하도록 해야 한다 2) 고 설명하고 있음. 이 설명에서는 도산에 대한 깊은 흠모의 정과 그 지도력에 대한 변함없는 오랜 감명을 잘 느낄 수 있지만, 일반적으로 조직의 정관 또는 약법 등의 목적 조항이 가지는 의미와 규정력을 감안할 때 간과하기 어려운 몇 가지 문제점을 안고 있는 것으로 보임. 2) 흥사단 70년사, 243-244쪽
11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우선, 약법이 창단 시 전제한 것은 식민지 상황인데, 이제 그 식민지 상황이 종식 되고 독립 국가(비록 분단으로 인해 독립의 완성된 형태는 아니지만) 상황이라는 새로운 국면이 도래한 마당에, 약법을 개정하면서 이러한 상황 변화를 반영하려는 심모원려의 흔적을 특별히 보여주지 못한 채, 창립 약법을 자구 수정만 으로 한 다는 태도로 임한 것은 다소 적절한 것이었는가 하는 의문을 남겨 줌. 둘째, 단순 자구 수정이라고는 하지만, 민족 전도 대업 을 민족 전도 번영 으로 바꾼 것은 암묵 중 8.15 해방으로 인해 혹시 이미 대업의 내용이 실현되었다 고 간주하거나 전제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들며, 기초를 준비함 을 기초를 수 립함에 있음 으로 바꾼 것 역시 준비하는 단계를 어느덧 지나 이제 수립하는 단 계로 나아간 것 이라고 간주한 것은 아닌지 하는 의문이 듦. 만일 이러한 것들을 실제로 전제하여 이러한 수정들을 한 것이라면 이는 단의 향후 과제 내용, 실천 어젠다, 나아가 존재 의의와 목표 등의 내용을 결과적으로 크게 바꾸는 것을 의미 하기 때문에 단순히 자구 수정만 하였다면서 가볍게 설명하고 넘어갈 사안은 아 닌 것으로 보임. 셋째, 앞서의 파악이 수정 제안자의 의도를 바르게 이해하였다면, 제안자에게 있 어 흥사단운동은 포괄적인 민족운동이라기보다는 민족부흥운동 류의 제한적 민족 운동의 것으로 인식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하며, 그것은 독립되었지만 분단 이라는 상황이 도래한 현실에서 따라서 독립된 민족국가의 완성을 아직 기하지 않은 속에서 식민지 시기부터 흥사단이 추구해온 독립민족국가의 실현이라는 목 표를 그것이 미처 다 실현되지 않은 단계에서 그것을 해소한 것으로 되는 것은 아닌가 하는 우려를 갖게 됨. 물론 이러한 필자의 생각이, 흥사단 단우 제현께서 근본정신이 충일한 가운데 실 제 그러한 방향으로 해석되는 것은 아니었으며, 또한 그러한 방향에서의 영향이 없었던 것이었기를 바라마지 않으나, 적어도 약법의 목적 조항과 같이 그 내용은 물론이고 문법상으로도 엄밀성을 가져야 하는 규정에서는 최대한 다른 방향의 해 석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하도록 표현되는 것이 바람직했다고 봄. 4. 쟁점 2: 약법 중 흥사단의 정치 불개입 조항 문제 - 이 시기 흥사단의 괘적에서 특별히 자주 지적되는 것이 바로 약법 제6조로 개정 과정에서 加 入 된 정치 불개입 조항 문제임.
12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 이 조항의 삽입은 해방후 정치 범람의 시대 에 흥사단이 정치세력화 하는 것에 대한 의혹을 받는 가운데, 또 내부로부터도 정당화하는 것에 대한 주장이 있는 가 운데 취해진 조치임. 이승만 정부로부터는 이 조항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치적 핍박이 잇따라서 별도의 정치 불개입 입장을 밝히는 성명을 48년과 53년에 내야 할 정도였음. - 이 조항은 궁색한 자구책이었지만, 민주주의적 원칙이 유린되던 한국의 정치적 현실에서 흥사단이 정쟁과 정변의 소용돌이에서 비껴나서 존립을 유지하는 데는, 이 조항의 대외적 효과와 이 조항으로 인한 내부적 自 戒 효과가, 일정한 역할을 하였다고 판단하여, 필요악처럼 그 의의를 인정할 수 있는 측면이 있는 것이 아닌 가 생각함. - 다만 일부 단우 3) 가 주장하듯이 흥사단이 정치단체가 아니라는 방어적 입장의 천 명이 그 후 흥사단 운동을 극도로 위축 시킨다든지, 흥사단이 사회단체 또는 사 회운동 단체라는 사실에 대한 명확한 인식을 갖지 못하게 한다든지, 나아가 "흥 사단의 사회운동 지향성이 침체됨에 따라 흥사단의 고유한 사업으로 간주되는 수 련과 수양이 과연 무엇을 위한 것인가 불명료 해지는 현상 등은 운영 과정에서 나타나지 않도록 이 문제에 대한 단 내부의 이해가 있어야 할 것으로 봄. - 정치에 대한 단 내부의 이해가 도산과 흥사단에게서 정치란 공의와 이상을 달성 하기 위해 조직을 경영하는 능력을 일컫는다 4) 는 지적 즉 정치는 헤게머니 쟁 탈에 몰두하는 하급의 기술이 아닌 비젼을 공유하여 대공의 이상을 실현해 가기 위해 구성원들의 바탕을 키워주고 공동의 목표를 향해 매진해 나갈 수 있도록 해 주는 고도의 기술, 즉 조직 관리와 운영을 가리키 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내부의 기준이 되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봄. - 그리고 30년대 도산도 단의 초점을 기본적 민족성 훈련 에 두느냐 또는 혁명 투 사 양성 에 두느냐 라는 문제를 가지고 갈등하고, 이 과정에서 많은 단우들이 본 연의 전통을 고수하는 쪽으로 기울었다는 점을 들어 흥사단의 정치 개입 문제를 논하는 차원이 존재했으나, 이 문제는 도리어 이처럼 단우들 사이에 문제를 두고 갈등하는 양상 자체가 단의 건강성을 증명하는 것으로서 정치 문제로 인한 폐해 라고 할 수 없다는 점을 지적하고자 함. - 아울러 단체로서의 정치활동을 엄격히 배제 하는 한편, 정치적 성격을 갖는 건전 3) 이석희, 흥사단 시민사회운동론, 21세기 흥사단 운동의; 과제와 비전,106쪽 4) 이명화, 흥사단 100년사 편찬을 위한 제안
13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한 활동이 용인되며, 정치 훈련으로서 정치교육의 중요성을 (내부에서) 매우 중 요시 5) 한다면 문제는 없을 것으로 봄. - 다른 한편, 단 바깥에서 정치 행위를 하는 것에 대해서는 책임이 그들에게 있는 것으로 선을 긋고 있지만, 해방 후 시기 최능진 단우와 조병옥 단우의 정치 행위 에 대해 과연 그렇게만 치부하고 넘어갈 수 있는지 하는 문제를 남김. 또한 이 문 제는 약간 성격이 다르기는 하지만 70-80년대나 최근의 시국 사건에 연루된 아카 데미 회원이나 단우에 대한 단의 태도와도 연관되는 문제로서 현명한 검토가 필 요하다고 봄. 5) 흥사단운동 70년사, 271쪽
14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제3주제 : 흥사단과 학생운동 이건범(위즈덤하우스 기획위원. 서울대 아카데미 83학번) 1. 이 글의 한계 오해를 피하기 위해 이 글이 갖는 한계를 미리 밝히고 간다. 이 글은 오로지 1980년대 초 중반에 내가 경험했던 서울대 아카데미 운동, 그리고 1993년 아카데미 30주년을 맞아 동문명부와 사료를 정리하며 얻었던 느낌과 기억에 기초를 두고 있 다. 따라서 구체적인 정황이나 자료, 그리고 증언에 근거를 두지 않고 있기 때문에, 매우 추상적이고 한 쪽으로 치우쳐 있을 수 있다. 특히 서울대와 다른 대학 아카데 미의 차이, 그리고 고등학교 아카데미 운동과의 연관성 등은 전혀 담지 못하고 있 다. 2. 한국 학생운동의 흐름 1) 한국의 학생운동을 보는 기본 시각 1960년대 말부터 불붙기 시작하여 1980년대 후반에 정점에 이르렀던 한국의 학생 운동은 2000년대에 들어 급속하게 퇴조하는 모습을 보였다. 학생운동은 사회경제적 이해관계에 뿌리를 두지 않은 운동이기에 한국 사회의 정치적 지형도 변화에 따라 이같은 변화를 보였을 것정점 추측한다. 흥사단과 학생운동, 특히 (대학생) 아카데미 운동의 역사를 정리하는데 전제로 삼아야 할 사실은 바로 정치사회적 변화가 아카 데미와 흥사단의 관계에 주요 변수로 작용하였다는 점이다. 아카데미 운동은 한국 현대 정치사와 너무나도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흥사단이 아카데미를 낳은 배경 도 거기에 있었렀던 흥사단과 아카데미가 갈등을 겪었던 는 도 바로 거기에 있었다. 2) 한국 현대 정치와 학생운동 개괄 해방 이후 남쪽에서 치열하게 벌어졌던 좌우 대립은 남과 북의 단독정부 수립 및 한국전쟁을 거치면서 남북의 대립으로 전환되었다. 사회주의 국가 북의 존재는 남 쪽 정부의 존립 근거이자 정통성을 강화하는 축이었으며, 좌파가 모두 제거된 상황 에서 정치적 대립은 자유당과 한민당 같은 보수 우파 정당 사이의 대립으로 제한되 었다. 휴전 후 7년이 지나 4.19혁명이 일어났다. 비록 당시 대학생들이 가자, 북으로!
15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오라, 남으로! 와 같은 구호를 연호하며 남북교류와 평화통일의 염원을 표출하였지 만, 이는 어떤 좌파적 이념 위에 서 있던 운동이라기보다는 다분히 민족적 감상에 뿌리를 둔 운동이었다. 4.19는 이승만 정부의 부패와 독재에 항거한 자유주의적 민 주혁명이었다. 4.19 민주혁명을 뒤엎은 5.16 군사쿠데타 이후 한국의 우경화는 점차 그 강도를 더해갔다. 남과 북의 경쟁 속에서 박정희는 경제성장과 안보에 총력을 쏟았고, 그 때문에 민주주의와 인권, 민생은 극도로 제약되었다. 이 체제는 1960년대 말부터 민 주화를 요구하는 대학생과 국민의 저항에 부딪히지만, 박정희 정부는 이를 반공법 과 긴급조치법을 위반한 불순세력으로 몰아 탄압했다. 박정희 군사통치 아래서 정치적으로는 과거 한민당의 맥을 잇는 보수야당인 신민 당이 정권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는 재야 민주화세력과 대 학생을 중심으로 삼선개헌(1969) 반대, 유신헌법(1972) 철폐, 긴급조치 철폐 등 민주 주의의 실현을 지향하는 자유주의적 반독재투쟁이 격화되어갔고, 그 속에서 사회주 의에 대한 관심도 조금씩 커졌다. 특히 1970년 청계천 평화시장에서 분신한 전태일 의 죽음은 이들에게 산업화 시대에 노동문제를 중심축으로 삼는 사고의 확대를 가 져다주었다. 이른바 민청학련 세대(60년대 후반~70년대 초반)를 전후로 하여 일부 대학생과 지식인 사이에서는 자유주의를 넘어서는 급진적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적 지향이 싹 트기 시작했다. 특히 민청학련 세대 이후의 대학생들은 박정희 독재 정권에게 대항 할 중심사회세력으로서 노동자계급을 주목하여 이의 조직화를 위해 노동 현장으로 들어가고, 노동운동과 학생운동의 연계를 시도하기도 했다. 한국의 우파는 이제 군부 엘리트 정치관료와 자본가들의 유착을 중심으로 경제성 장과 반공 이데올로기를 내건 권위주의적 개발독재체제를 굳힌다. 그러나 1970년대 말에 이르러 민주화 요구는 더 거세어지고, 야당 총재 제명 사건을 계기로 터진 부 산 마산 지역 시민들의 대규모 시위에 대응하는 과정에서 박정희 정권은 무너졌다. 박정희의 뒤를 이어 군사 쿠데타로 등장한 전두환 정권은 1980년 5월 광주 민중 의 민주화요구를 대량 살육으로 짓밟고, 박정희 체제 못지않은 무단정치를 폈다. 유 신헌법 이후 시행된 대통령 간선제 유지, 공작 정치 강화, 야당 매수 및 정치활동 규제, 대학생 사찰, 집회 및 시위와 노조 설립에 대한 탄압 등 일련의 권위주의적 정치행태가 강화되었다. 이 시기 대부분의 정치적 반대 행위나 노동자의 기본권 보 장 요구는 좌경용공 세력이 개입된 이적행위 로 매도되었다. 한국의 학생운동은 1980년대를 거치며 급속하게 이념적 변화를 겪게 된다. 1980 년의 광주항쟁에서 군사정권의 무자비한 동족 살육을 목격한 지식인과 대학생은 더 욱 강고한 반독재 민주화투쟁을 수행하기 위해 철저하게 사상적으로 무장할 필요를 느꼈다. 이들은 자유주의나 급진적 민주주의 수준을 넘어 사회주의 이념을 본격적 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했다. 1987년 1월에 벌어진 서울대생 박종철 고문치사 사건을 계기로 대통령 직선제 개
16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헌을 앞세운 국민들의 광범위한 민주화 요구가 폭발함으로써 권위주의 체제는 퇴 조하기 시작했다. 6월 민주항쟁은 1970년대 박정희 독재체제를 경험하고 전두환의 광주학살 만행과 폭압정치에 환멸을 느낀 지식인과 화이트칼라의 전폭적 동조에 힘 입었지만, 그 선두에는 역시 학생운동이 있었다. 이 당시 학생운동의 주도세력은 1970년대 선배들의 영향을 입어 대부분 사회주의적 이상을 지니고 있던 급진적 민 주주의자들이었다. 민주화가 진전되면서 지위개선 및 자유권적 기본권 확대를 요구하는 노동자와 일 반 국민의 투쟁이 증폭되는 가운데, 학생운동의 주요 관심사는 통일운동으로 이동 한다. 1989년 임수경 양의 평양청년축전 참가 등으로 정점에 오른 통일운동은 이후 민간 차원의 통일운동 대중화를 부르기도 했다. 그러나 1991년 소련의 몰락은 학생운동에 매우 커다란 이념적 혼란과 운동의 퇴 조를 가져온다. 물론 운동의 퇴조는 단지 사상적 혼란 때문만은 아니었다. 사회운동 의 중심이 학생운동으로부터 노동자운동으로 넘어간 사정, 그리고 자유민주주의의 확대에 따라 전통적 학생운동의 가치가 상대화된 사정 등이 함께 작용했다. 이후 김영삼 정부가 주창한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적 가치의 유입은 학생운동의 퇴조를 더 욱 빠르게 만들었고, 1997년 외환위기와 그 여파로 점증한 취업난은 학생들의 눈을 사회로부터 취업교재 속으로 돌렸다. 3. 흥사단과 아카데미 운동 1) 아카데미 운동의 변화 1963년 출범한 흥사단 아카데미는 흥사단 운동의 새로운 세대를 발굴하고 키워가 려는 부흥운동의 성격을 띠고 있었다고 보인다. 따라서 흥사단이 창립 이래 내걸었 던 건전한 인격 과 무실역행 으로 대표되는 가치에 입각하여 민족 일꾼을 육성하 려는 운동으로 출발했을 것이다. 아카데미 창설 초기에도 한일회담 반대와 같은 전 민족적 문제가 있기는 했지만, 당시는 박정희 정부가 경제개발계획을 통해 근대화 를 이루려 막 발걸음을 떼던 시기인지라, 어찌 보면 아카데미 운동과 박정희 정부 가 내건 가치 사이에 격렬한 갈등은 적었을지도 모른다. 즉 아카데미 운동은 자신 의 수련 방법으로 정의돈수와 함께 계몽운동을 택했을 터이며, 이같은 계몽적 성격 은 이른바 공적 차원에서 추진된 근대화 요구와 크게 배치되지 않는 민간 차원의 운동이라는 특징을 부여했을 것이다. 중앙권력 외에는 모든 면에서 취약했던 국가 가 아직 손길을 뻗칠 수 없는 영역에서 국가보다 한 걸음 앞서 진행한 민간 차원의 운동이라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1960년대 말부터 박정희의 영구집권 기도로 첨예해진 정치적 갈등과 산업 화에 따른 사회경제구조의 변화(농업으로부터 공업으로의 산업 중심 이동 및 인구 이동)는 아카데미 운동의 급진화 요인으로 작용한다. 한국 학생운동의 전체적 흐름
17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과 유사하게 1970년대 초부터 아카데미 운동에도 급진 민주주의적 혹은 사회주의적 사상이 흘러들어오고, 몰락하는 농촌과 산업사회의 무자비함을 목격한 아카데미 회 원들 중 일부는 이런 이념을 사회개혁과 인간화를 위한 운동의 중심해 놓고자 했 다. 특히 흥사단 아카데미 운동은 일개 대학에서 고립적으로 벌어진 운동이 아니라 전국적 망을 갖고 있던 운동이었기에 새로운 이념의 전도사 역할을 수행하기도 하 였고, 대학 사이의 물리적 연합을 주도하는 끈이기도 했다. 이런 역할은 1980년대 중반에 공개적인 대학생 연합조직(학생회 연합 등)이 만들어질 때까지 비밀리에 계 속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 정점에 있었던 사건은 아마도 1981년에 있었던 이른바 학림 사건, 즉 공안당국에 의해 한국 최초의 자생적 사회주의 운동이라 규정된 학 생-노동자 연합 조직 사건이었다. 학생운동의 중심이 동아리로부터 학생회와 같은 학생대의기구로 넘어간 1980년대 중반 이후 아카데미는 점차 소멸의 길을 걷는다. 2) 흥사단과 아카데미의 갈등 흥사단과 아카데미(주로 대학생)의 갈등은 아카데미의 급진화 및 박정희 전두환 군사정권의 정치적 탄압이 강화될수록 더 거세어진 것으로 보인다. 특히 유신 이후 긴급조치 상황에서 꾸준한 갈등을 겪다가 전두환 집권 이후로는 최악의 갈등과 결 별로 마무리되었다. 물론 이 결별은 흥사단의 결정이었으며, 이 결정은 1987년 민주 화 이후로도 아카데미 세대를 흥사단으로 귀속시키지 못하는 주된 이유로 작용했 다. 또한 아카데미 세대와의 단절은 학생운동에서 축적된 경험 및 역량과의 단절을 의미하였으며, 이 때문에 1990년대 이후 꾸준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카데미의 활 성화는 결실을 거두지 못했다. 4. 역사 기술을 위한 방안 역사를 객관적으로 기술하기란 불가능하다. 우리는 기록된 것, 말로 전해지는 것 만을 참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먼저, 기록이란 당대의 운동이 펼친 일 상적인 일들을 담기보다는 특별한 사건 중심으로 씌여졌을 가능성이 높다. 따라서 기록을 정리하는 일이 무의미하지는 않지만, 기록보다는 증언에 의지하는 게 흥사 단이 학생운동에 미친 영향이나 아카데미 운동의 성과를 정리하는데 더욱 요긴하리 라 생각한다. 증언의 수집은 시간축과 공간축을 기준으로 이루어져야 할 것 같다. 즉 시간축으 로는 대략 1960년대, 1970년대 전반, 1970년대 후반, 1980년대 전반, 1980년대 후반, 1990년대 등 6개 시기를 두는 게 좋을 것 같으며, 공간축으로는 고교(이는 지역단위
18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가 무난할 듯), 전투성이 강했던 대학, 계몽성이 강했던 대학 등 세 집단으로 나누 는 게 바람직하리라 본다. 또한 흥사단 내부에서 아카데미 운동을 지도하던 선배 단우의 증언도 필수적이다. 가장 큰 문제는 이같은 증언을 어떤 관점에서 정리하느냐 하는 사관의 문제일 것 이다. 나는 흥사단과 아카데미가 갈등을 겪고 결별한 데에는 양자에게 모두 정당성 이 있었다고 본다. 일례로 천주교나 개신교 계열의 학생운동 역시 급진화의 길을 걷기는 아카데미와 별 차이가 없었다. 다만 이들에게는 정권으로부터 학생들을 보 호할 수 있는 대중적 기반과 정치적 힘이 있었다. 그러나 흥사단에게는 이러한 기 반과 힘이 없었다. 마찬가지로 아카데미가 급진화의 길을 걸으며 당대의 시대정신 을 끌어안지 않았다면, 아카데미 역시 회원의 지속적인 확대재생산을 이루지 못하 였을 것이고, 이는 정치적 양극화 구조 속에서 스스로 조로하는 운명을 재촉했을 것이다. 물론 첨예한 갈등 속에서 아무래도 형식적 주도권과 책임성을 갖고 있던 흥사단 의 행동과 결정에 대한 판단이 좀 더 비중있게 다뤄질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흥사 단은 아카데미와의 결별을 통해 조직을 보존하였고, 반면 아카데미는 흥사단과의 결별 이후 한국 학생운동의 일반적 흐름과 함께 소멸했기 때문이다. 얻는 것이 있 으면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그렇다면 이런 과정을 거쳐 민주화 이후 흥사단이 아카데미 운동, 학생운동에 대 해 들인 노력의 양과 방향을 평가하는 일이야말로 흥사단이 창립 이래 20여년에 걸 친 아카데미 운동의 전성기를 어떻게 보았는가를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 될 것 같 다.
19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제4제 : 흥사단과 시민운동 장동현(흥사단중앙수련원 부원장. 성대 아카데미 77학번) 1. 문제의 성격 시대적 배경 : 시민운동 부상의 배경 1980년대 말 한국사회의 시대적 분위기에서 시민운동이 부상하였다. 1 1987년 체제 : 1987년 6월 항쟁과 정치적 협약으로 만들어진 민주화 체제. 이후 한국사회는 중도적 민주개혁세력의 주도 하에 정치적, 절차적 민주화 진전 2 한국사회 민주화 투쟁의 성과로 정권교체, 군부독재 종식 --> 자유화의 단계로 나아가는 전환점, 포퓰리즘이 장애물(박세일) --> 급진적 노동운동 위축(계급론적, 급진적 사회운동 약화), 대의기능 미흡한 정치권에 대해 시민적 권리 대변하는 시민운동이 각광 3 1997년 체제 : 신자유주의의 파고와 한국사회의 위기 심화 --> 불평등 심화와 양극화, 경쟁의 심화, 공동체의 붕괴 --> 시장의 확대와 시장원리의 강조 흥사단, 시민운동에의 참여와 정체성 질문 흥사단은 시대의 흐름에 따라 시민운동에 참여하고, 합류했다. 여기서 검토할 문제는 정체성과 관련된다. - 시대적 추세 속에서 흥사단이 시민운동에 참여했고, 점차 참여 수준을 높여 나 가게 되었다. 대체로 말해, (경실련과 같은 시민단체들의 활약과 더불어) 흥사단의 시민운동 참여는 흥사단에 새로운 운동의 활력소이면서 동시에, 일부 중견 단우들 에게나 젊은 단우들 모두에게 불편한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다시 말해, 일부 단우 들의 관념 엘리트적이고 수련중심적인 흥사단의 전통적 활동 에서 보면, 시민운 동은 언론매체에 의존하는 시류에 치우친 대중(적) 운동으로 전통적인 흥사단 운동 과의 불연속성과 거리감을 주는 것이고, 흥사단 운동이 시민운동에 치우치는 것에 대하여 일부 임원들은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하였다. 다른 한편으로 젊은 단우들은 더 확실하게 시민운동에 몰입하지 못하는 것에 대한 불만도 있었다. 이처럼 세대 간에, 또는 관점에 따라 흥사단 시민운동을 바라보는 인식차이, 흥사단 운동의 목적 과 방향에 대한 단우들의 의견 불일치가 내면에 상존하였다. 임원과 실무자간에는
20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세대 간의 차이와 더불어 정세 인식의 차이가 있고, 한편으로 약법에 규정된 목적 과 시민운동 관련 사업 간의 관계에 대해 서로 다른 생각을 할 수도 있을 듯하다. 이러한 평가적 단상들은 인상적인 수준에서 주관적으로 묘사한 것이다. 그러나, 그 것이 활동과정에서 미묘하게 드러나고, 이를 적절한 수준에서 드러내어 소통하고 토론하는 장이 충분히 마련되지 못한데서 정체성에 대한 혼란이나 고민 좌절도 있 었다고 보인다. - 결국 문제는 <흥사단 운동과 시민운동의 관계를 어떻게 설정할 것인가?>인데, 여기에는 다양한 질문이 내포되어 있다. 예컨대, 흥사단 운동은 시민운동인가? 흥사단은 시민운동단체인가? 시민운동단체의 정체성은 무엇인가? 흥사단의 교육단체적 성격과 정체성(민족운동과 국민교육, 아카데미육성, 사회교육, 청소년지도단체)은 (시민운동의 부상과 참여과정에서) 어떻게 유 지, 변화되어야 하나? 흥사단 시민운동에서 단우들의 역할은 무엇인가? 3대 시민운동은 흥사단 운동의 전개에 어떤 영향을 미쳤나? 구성원(일반 단우와 임원, 활동가)들은 시민운동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나? * 100주년을 앞두고, 이들 질문에 대하여 체계적인 검토와 정리된 답변이 요구된 다. 이는 흥사단의 향후 운동 방향과 과제를 설정하기 위해, 구성원간의 단합과 협 동을 위해 중요한 과제다. 시민운동에 대한 이해와 합의는 정체성을 명료하게 하는 데 도움이 된다. 단내의 갈등과 분열을 줄이고, 소통을 촉진하는 핵심적 요건이 될 것이다. 2. 흥사단 시민운동에 대한 인식 차이 흥사단 운동 평가 흥사단 운동에 대한 개괄적 평가를 가장 크게 간추린다면 대체로 다음 몇 가지로 요약할 수 있을 듯하다. 1 도산 생존 시에는 활발했고 성공적이었으나, 도산 사후에는 활동력이 약화 되었다. 2 특히 해방 후에는 인격과 수양을 강조하는 흥사단운동(론)이 우세했다. 3 아카데미 운동은 인물기르기에 성공했고, 민주화에 기여했다. 4 3대 운동은 시대에 부응하는 (시민)운동이다. 3대운동과 관련하여 대세는 시민운동으로서 중대한 방향전환이고, 진전이었다고
21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보는 견해가 우세하지만, 민족운동을 강조하는 등 다른 견해도 있다. 흥사단 시민운동은 다양한 운동 방식 수련과 교육, 집회 시위, 성명, 여론화 등 이 가능한데, 어떻게 할 것인지 여러 견해가 있어 논란이 야기되고, 이념적으로 보수냐 진보냐 어떤 선택을 할 것인지에 따라 갈등이 있을 수도 있다. 평가의 근거와 논리 평가의 주요한 근거로는 도산의 애국적, 헌신적 생애, 독립이라는 명료한 목표, 사 회와 시대의 요구 등이 제시된다. - 이윤배, 2010; 인재양성의 관점 1) 일제강점기 o 일제 강점기에는 사회가 요 구하는 인재 양성을 성공적으로 수행 o 확실한 시대적 요청- 일제 강점기하에서 혁 명(독립)이라는 확실한 명제에 부응 o 도산의 교육 - 도산과의 만남이 학습이었고 그는 모든 단우들의 롤 모델 2) 광복후 3)1963년 이후 o 흥사단 후속 세대 양 성에는 미흡 o 현재 흥사단 지도층 형성에 기여 o 한국 사회의 요구에는 일정 부 분 역할 4)21세기 운동방향 o 사회변혁을 위한 실천활동을 수반한 인재 양성론 제안 o 비전 2013의 통합 - [사회개혁운동(실천활동) +일꾼 양성]의 통합 (2005년 에도 흥사단 운동의 논쟁을 개관하면서, 사회변혁을 위한 구체적 실천활동으로서 3 대 운동 전개가 필요함을 주장함. 도산의 무실역행주의를 총체적으로 계승하는 일 임) - 구치모, 2006; 구조론적 접근 해방 후 1947년 흥사단 제2차 약법 수정에서는 민족전도대업 이라는 용어 가 민족전도 번영 이라는 용어로 대체되면서 흥사단의 구체적 목표가 상실됨에 따 라 사회제도 개혁이라는 구조론적 요소는 약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1964년 흥사 단 약법 3차 개정시에 추가된 약법 전문에서는 이러한 정신적 자세는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 모든 분야의 여건의 변화에 영향을 받으나 사람은 또한 환경을 개선, 창조하는 원동력을 가졌다. 그러므로 민족을 부흥시키려면 참되고 진취 부며 협동 부고 용기 있는 일꾼들이 민족적 사명감을 가지고 실천 봉사하여야 하며 이 런 일꾼의 양성을 위한 의식 부요 계속되는 노 협동필요하다 라는 내용협동삽입되 면서 흥사단 운동에서 구조론적 접근법은 부차적인 요소가 되고 행위주체론적 요소 는 강화되었다. 위의 구절을 해석하면 정치, 경제, 교육, 문화 등 사회적 환경을 부 차적인 요소로 간주하고 있고 일꾼의 양성이 주된 요소로 자리잡았다고 볼 수 있 다. 이는 흥사단 운동이 가일층 인물기르기 운동의 방향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었음 을 의미한다. 흥사단 운동은 수양동우회적 성격의 인격수련운동에 함몰되었고 필연적으로 사회의 모순과 제도 개혁에 둔감해질 수밖에 없었다
22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 구치모 전이사장은 인물기르기와 인격수련을 동격으로 보고, 나아가 시민운동도 이런 행위주체론적 맥락에서는 의식개혁 차원에 머물고 제도개혁 차원으로까지 크 게 나아가지 못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비판적으로 인식하고 있다. - 이상진, 2008; 도산정신, 인격론적 접근 공직을 마치고 흥사단에 입단해 보니까, 국가의 번영을 위하여 자신을 희생할 각오가 되어있는 애국지사들이 모여서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토론하고, 반성하고, 수련하는 분위기 는 보이지 않고, 반미.친북 이념에 매몰된 좌파인사들이 흥사단 의 주류를 형성하여 숭고한 흥사단을 일개의 좌파시민단체로 전락시켰다는 느 낌을 지울 수가 없었다. 興 士 團 精 神 이란? 島 山 思 想 의 核 心 l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가 된 것은 우리가 힘이 없었기 때문 l 힘이란 : (1) 健 全 한 人 格 을 갖춘 國 民 (2) 蓄 積 된 資 本 (3) 信 用 이 있는 社 會 l 힘을 어떻게 기르나? : 敎 育 을 통해서 l 日 帝 下 에서 어떻게 교육을 하나? : 興 士 團 運 動 을 통해서 問 題 點 l 현재 흥사단이 하고 있는 활동에는 흥사단정신을 느낄 수가 없다. l 흥사단에서 하고 있는 3개 운동본부 중심의 활동은 흥사단을 일개 시민 운동단체로 전락시켜 흥사단의 격을 떨어트렸다. l 해가 거듭됨에도 불구하고, 흥사단 단우의 수는 증가하지 않고, 기존의 단 우들도 흥사단원으로써의 자긍심이 미약하다. l 단우들이 흥사단의 발전을 위하여 의견을 개진하고 단우들과 더불어 토론 할 기회가 너무 부족하다. 改 善 方 向 l 흥사단 활동의 목표와 방향을 흥사단정신에 맞추어 재정립할 필요가 있 다. l 흥사단정신과 거리가 먼 활동에 흥사단의 한정된 자원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예 : 민족통일운동, 투명사회운동, 시민단체운동 등) l 단우의 인격수련을 강화하고, 단우는 국가 번영을 위한 엘리트라는 자부 심을 가지도록 해야 한다. 단우들에게 보람 있는 임무 부여 l 단우들이 흥사단의 발전을 위하여 자신의 의견을 쉽게 제시하고 이를 단우 들과 더불어 토론할 수 있는 장을 만들어야 한다. l 흥사단은 국민 개개인의 건전한 인격과 품격 높은 선진조국과 세계인류의 평화에 대해서 항상 연구하고 토론하는 격조 높은 위상을 유지하도록 해 야 한다. l 일제 시대에는 나라가 없었기 때문에 흥사단이 정부가 해야 할 모든 일을
23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맡을 수 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나라가 있으므로, 문제 해결은 정부가 맡도 록 하고, 흥사단은 정부의 잘못된 정책을 비판하고 올바른 정책대안을 제 시하는 일을 해야 한다. 오평석(2006) 21세기 서막을 여는 운동의 재맥락화는 최소 10년 최대 30년을 견인할 이 념의 재구성일 것입니다. 3대운동이 교육사업에 경도되어 있는 현 상태로 운동발전은 절대 기대할 수 없습니다. 정체성은 변화합니다. 하지만 지금은 그 정체성이 정립되어 있지 못한 게 가 장 큰 결함입니다. 단의 정체성을 담고 있는 형식은 약법입니다. 과연 약법(형 식)으로 현 시대(내용)을 담을 수 있을까? 단은 왜 민족이 독립된 마당에 지속 적으로 존재해야 하는가? 이 답변에 대해 통일운동본부의 결성을 답안처럼 이 야기합니다. 하지만 과연 통일 국가의 모델을 설정하고 있는가? 그러하지 못합 니다. 강령의 재구성이 필요합니다. 단 운동 목적의 재설정을 통한 정체성 재구성을 해야 합니다. (흥사단 운동 논쟁(이윤배)에 대한 토론 중에서) * 흥사단 운동에 대한 인식차이는 회자되고 있지만, 시민운동이 아니면 시민 운동에 무게 중심을 두지 않으면 어떻게 하여야 할까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정 리하고 주장하고 토론한 것은 많지 않다. 문서화된 수준에서 시민운동에 적 극 동참하자는 주장이 대세라 할 수 있음. * 비중 있는 검토와 논의는 흥사단운동연구소에서 비전포럼을 묶어 발간한 <21세기 흥사단 운동의 과제와 비전>(2006)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에는 방대 하고 깊이 있는 논의가 많다. * 외부의 평가? - 경실련, 참여연대가 대표적인 단체. 구체적 열거시에는 YMCA 등과 더불 어 종합적 시민단체로 분류. - 한 마디로는 시민운동의 성과, 평가적 분류로는 등 단체 분류 가능성 큼. 현실적 활동 수준의 활동 역량(여건과 가능성) 평가에서는 규모와 단체 특성(역사성과 단우제도와 동원력등)상 메이저 단체로 인정되고, 주요 임원 단체(예, 운영위원단체)로 동참. 3. 흥사단 시민운동의 전개 가. 초기 시민운동에의 참여
24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사회운동과 시민운동은 1990년대에 매우 역동적인 방식으로 새로운 시대적 변화 에 대응하였다. 새로운 시민운동은 이전의 저항위주의 정치투쟁에서 시민생활의 민 주화와 제도화 등을 주요 의제로 올리게 되고, 생활 민주화와 대안적 정치 사회적 제도화의 과제를 전면에 내세우는 시민참여적 운동으로 활성화되었다. 1989년 경실 련(경제정의실천시민연합)의 창립을 필두로 많은 신생 시민단체들이 속속 발족하였 는데, 정치, 환경, 경제, 문화, 교육, 교통 등 시민생활의 거의 전 분야에 걸쳐 수 많 은 시민단체가 시민운동의 시대, 시민단체의 전성시기 를 열어갔다. 1980년대 말부터 1990년대 말까지 약 10여 년간 흥사단운동은 전과 다른 두 가지 의 새로운 특징적 전환을 보인다. 하나는 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여 운동의 외연을 넓히면서 대중적인 조직 확대를 꾀하는 노력을 보인 점이고, 다른 하나는 통일에 대한 인식의 심화와 더불어 흥사단 통일운동을 대사회적, 시민운동적 차원에서 본 격적으로 전개한 일이다. 시민운동으로의 대중적 전환 아카데미 조직 창립 이래, 흥사단은 군부독재와 권위주의 정권 하에서 감시와 탄 압을 받았기에 흥사단 조직이 직접 적극적으로 사회문제 해결에 나서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흥사단 운동은 전국적 조직과 민족발전의 심오한 이념을 지닌 운동임에도 불구하고 활동의 중심이 아카데미 운동과 금요개척자 강좌 등을 위시한 시민사회교 육으로 한정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시대의 모순 해결에 적극 참여하지 못하는 데서 오는 시대와의 거리감은 공선협 활동을 계기로 크게 달라진다. 즉, 본격적으로 시민과 직접 소통하는 시민사 회운동에 연대하여 참여함으로써 새로운 대중운동으로의 전환을 가져온 것이다. 1991년 30년 만에 다시 실시된 기초 및 광역 자치단체 의원 선거를 기해, 흥사단 은 경실련, 자유지성300인회, 한국노총, 여성유권자연맹, 공명선거실천기독교대책위 원회와 공명선거실천불교추진위원회 등 7개 단체와 공동으로 공명선거 캠페인을 전개하였다. 이후에 공선협은 1992년 총선에서 57개 시민단체로 구성되고, 전국 39 개 지역 400여개 단체가 참여하는 범시민단체 연대기구로 발전하여 2007년 5.31 지 방선거까지 활발하게 활동하였다. 흥사단은 공선협 운동 기간 내내 사무처 운영 등 을 통해 이 운동을 주도하였다. 이외에도 흥사단은 직능단체나 협회 이외에 시민운 동단체로서 1990년대에 시민협(시민단체협의회), 교육연대(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등 여러 연대 모임의 중추 단체로서 활약하였다. 흥사단은 1989년에 부설기관으로 도산아카데미연구원을 발족하여 사회발전을 위한 정책연구를 담당하고 사회 지도층의 재교육을 위해 노력함으로써 직 간접적 으로 흥사단 운동에 참여하는 전문가 및 사회지도층의 폭을 넓혔다. 또한 시민운동 을 조직적으로 추진하기 위해 1993년 시민실천위원회를 발족하여 이 위원회를 창 구로 하여 교육과 환경등 여러 분야의 시민운동 연대기구에 적극 참여하면서 운동 의 외연을 시민운동의 여러 영역으로 넓혀 나갔다.
25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한편, 흥사단 내부적으로는 1990년대를 통해 조직확대와 단우제도 개편을 위해 체계적인 노력을 기울였다. 1991년과 1996년에 두 차례에 걸쳐 흥사단 발전 5개년 계획(제1차 1991~1995, 제2차 1996~2000)을 수립 시행하면서, 흥사단 운동의 확산 을 위해 흥사단의 문턱을 낮추어야 한다는 공감대를 형성하고 창립 이후 줄곧 고수 해 온 엄격한 입단제도를 고쳤다. 즉, 다른 단체의 입회원서처럼 간단한 입단청원서 와 신원확인 및 임원회 승인 절차로 예비단우가 될 수 있도록 1995년에 약법을 개 정하였다. 그리고 전국적으로 지부조직을 정비 확대하고, 단우배가운동을 지속적으 로 펼쳤으며, 1995년에는 미국 워싱턴 D.C.에도 지부를 조직하여 미주 조직 발전과 확산의 전기를 마련하였다. 청소년 운동 분야에서도 주요한 변화가 있었다. 1980년대 중반부터 일부 지부에서 청소년 민속캠프등 일반 청소년들이 참여할 수 있는 사회교육 프로그램을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서울지부의 청소년상담실 개설(1987)과 청소년 대학로 축제(1991) 실시, 본부의 제1회 통일꾼 수련대회(1991) 및 제1회 통일백일장(1992) 개최, 본부와 지부 가 공동으로 추진한 나라사랑 대행진 과 여러 지부의 다양한 역사탐방, 119 캠프 등 매우 다채로운 캠프 및 체험교육 프로그램이 지속적으로 확대 실시되었다. 한편, 청소년연구원 설립(1992), 강서청소년 회관 수탁운영(1993), 1995년부터 본부 및 지 부에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설립(1996 광주광역시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수탁, 1997 경 상남도 청소년자원봉사센터 수탁), 도산청소년재단 설립(1996), 청소년 5년부터지원 하는 문화사업단 설립(1997) 등 다양한 기관 설립과 여러 개의 수탁시설 운영이 이 어졌다. 이와 ),청소년 프로그램의 실시와 기관 설립 및 사업 전개는 흥사단 청 소년 운동이 아카데미 운동 중심으로부터 일반 청소년을 대상으로 한 대중적인 사 업과 활동을 전개하는 쪽으로 확대, 전환되어갔음을 뜻한다. 2002년 가장 늦게 흥사단 교육운동본부가 설립된 이후, 흥사단 통일운동본부, 투 명사회운동본부와 더불어 3대 운동본부에서는 중 고생등학생 및 대학생을 대상으 로 한 통일강좌, 백일장, 청소년의회, 경연대회, 학교를 찾아가는 반부패 투명사회 교육 등 다채로운 프로그램을 실시하였다. 즉, 지역과 학교를 중심으로 조직되어 상 시적으로 움직였던 과거 상설의 아카데미 운동조직의 형태에서, 시민운동의 활성화 분위기에 따라 학교와 일반 사회에서 관심을 가지는 주제별 교육 및 경연 프로그램 중심으로 활동을 전개하는 새로운 청소년 운동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청소년 사업과 활동의 대중화 과정에서 아카데미 운동을 다시 활성화시키 거나 새롭게 전개하려는 노력도 병행되었으나, 실효를 거두지는 못하였다. 통일운동의 본격 전개 다음으로 1990년대의 두 번째 전환기적 특징인 흥사단 통일운동의 전개에 대하여 살펴본다. 흥사단은 1983년 제70차 대회에서 민족의 주인되어 통일의 길을 닦자 란 표어를 채택한 이래, 1988년 제75차 대회(표어 민족통일과 흥사단 운동 )에서부 터 1991년 제78차 대회(표어 통일을 준비하는 흥사단 )까지 연속으로 4년간 대회표
26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어를 통일과 관련한 주제로 내걸고, 우리 민족과 한국사회의 최대의 숙제인 통일에 지대한 관심과 의지를 표시하였다. 흥사단은 1990년에 통일문제특별위원회를 발족하고, 본격적으로 통일문제에 대한 연구와 활동을 전개한다. 예컨대, 통일강좌(서울지부, 1989), 제1회 통일문제세미나 (도산아카데미연구원, 1989), 시민강연회(부산지부, 1990), 제1회 통일백일장(본부, 1992), 남북인간띠잇기 대회참가(1993, 1994), 중국교포상담센터 설립(1994), 통일교육 세미나(도산아카데미, 1995), 통일강연회(평택, 1995), 겨레사랑방(통일특위, 1996) 등 본부 통일특위 및 각 지부에서 다양한 프로그램과 사업을 전개하다가, 마침내 1997 년 3월 8일 흥사단 통일운동본부(약칭 흥민통)를 발족하였다. 흥사단 민족통일운동 본부는 통일정책의 연구와 교육사업등 민족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범국민적인 통일 운동을 위하여 기독교, 불교, 원불교 등 종교단체 등이 참여한 가운데 범시민적 규 모로 창립되었다. 흥민통의 창립은 1989년 독일 통일과 이후 소련 및 동구 사회주 의의 붕괴, 북한의 빈곤과 기아에 대한 시대적 과제 인식을 반영한 흥사단의 조직 적 대응이었다. 나. 흥사단 3대 시민운동의 전개 흥사단의 여러 부설조직 가운데, 3대 운동본부가 있다. 흥사단 민족통일운동본부 가 1997년 3월 8일에 가장 먼저 설립되었고, 투명사회운동본부는 2001년 5월 12일, 교육운동본부는 2002년 10월 5일에 설립되었다. 1990년대 시민운동의 전성기를 거치면서, 흥사단은 활동과 사업의 외연을 일반대 중에게로 넓히면서 공명선거, 사회, 교육, 환경, 교통 등 다양한 분야의 시민운동에 참여하였다. 흥사단은 21세기의 사회변화를 맞이하여 다양한 시민운동에 관여하면 서 운동 역량의 한계와 운동의 효율성 문제를 고민하고 흥사단 운동의 진로를 진지 하게 모색하였다. 흥사단은 내적으로 임원들의 고민과 자료수집 및 연구, 여러 차례 의 논의를 거쳐 공론화하는 과정을 거치게 되었다. 이 논의의 분기점이 새로운 밀 레니엄이 시작된 2000년에 이루어졌다. 2000년 4월 15일과 16일 양일간 창립 87주 년 기념 세미나에서 전국의 임원들이 모여 흥사단이 시대에 부응하기 위해 중점적 으로 전개해 나갈 3대 운동 과제를 설정하고, 그 운동에 주력하기로 의견을 모았다. 같은 해 5월 광주에서 개최된 제 87차 대회에서 3대 운동 과제를 공표하였다. 이후, 2003년 흥사단 창립 90주년을 기해 공표된 <흥사단 비전 2013>에서 흥사단 3대 시 민운동의 개념이 더욱 분명하게 자리 잡게 되었다. 비전 2013은 흥사단 운동의 미 래를 내다보면서 첫째, 일꾼 양성을 위한 청소년 운동, 둘째, 사회변화와 개혁을 실천하는 시민운동에 매진하겠다는 2대 목표를 제시하고, 이를 달성하기 위한 10대 과제를 제시하였다.
27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통일운동은 흥사단이 일찍이 민족문제의 일환으로 관심과 노력을 기울여 왔기 때 문에 가장 먼저 범사회적 기구로 1997년에 운동본부를 발족하게 되었다. 이는 1990 년대 시민운동의 흐름 속에서 흥사단이 시대적 과제에 적극 응답하는 방식이었다. 흥민통은 민주통일, 평화통일, 조기통일 의 이념 하에 시민 대중과 함께 만들 어 가는 통일의 길 이란 표어 아래 통일포럼, 통일아카데미 강좌, 한중청소년친선 문화제 등의 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쳤다. 특히 흥민통은 북한 동포 돕기와 정책연구 사업 등을 비롯해서, 통일시대의 주역이 될 청소년들에게 통일에 대한 바른 가치관 과 의지를 심어주기 위해 통일백일장을 개최하고, 통일교육 강연과 프로그램 등을 실시하였다. 아울러 2000년대 이후 독도분쟁과 일본의 역사교과서 왜곡, 중국의 동 북공정등 역사왜곡에 대응하는 연대활동을 지속적으로 펼침으로써 올바른 역사의식 의 확립과 동북아의 평화기틀을 조성하는데 일조하고 있다. 통일운동본부는 흥사단 3대 시민운동의 개념이 형성되기 이전에 이미 선도적으로 시민운동을 펼쳐나감으로 써 흥사단의 대중적인 시민실천운동을 개척하였다. 투명사회운동본부는 한국사회가 선진국으로 발돋움하기 위해서 필수적으로 해결 해야 할 시대적 과제의 하나로 반부패투명사회운동이란 이름으로 시작되었다. 흥사 단은 도산사상과 흥사단 이념에 따라 부패 방지와 치유를 위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 데, 2000년도에 이르러 본부와 전국 각 지부에서 반부패청소년 학교, 반부패 시민토 론회, 부패방지법 제정 서명운동과 제정촉구 운동을 활발하게 펼쳤다. 2000년 7월 인천의 부평공고 학생 600명을 대상으로 반부패청소년 학교 프로그램을 교육하고, 이어 전주, 대구, 울산, 창원, 대전, 부산에서 단우, 시민, 청소년 대상의 토론회와, 강연회, 시민한마당, 청소년 교육등을 실시하였다. 특히 본부는 전국 각 지부와 공 동으로 2000년 10월 15일부터 29일까지 부패방지법 제정 촉구 전국 자전거대행진을 실시하여 300여명의 주자가 서울 여의도에서 출발하여 총1,397Km에 이르는 거리를 전국 일주함으로써 흥사단 투명사회운동의 불을 지폈다. 계속해서 전국 각 지부에 서는 반부패 투명사회 만들기 토론회와 반부패청소년학교 교육프로그램을 십여 차 례 실시하였으며, 마침내 2001년 5월 우리나라 최초로 투명사회운동본부 란 명칭 의 기구를 창립하게 되었다. 이후 한국사회에 반부패 란 접두어를 뺀 투명사회운 동 명칭이 공식 명칭으로 빈번하게 사용되었다. 투명사회운동본부는 부패방지를 위한 환경조성, 생활개혁운동 및 민주시민교육, 반부패학교 운영등 정직하고 깨끗한 사회, 투명하고 공정한 사회를 만들기 위한 여 러 방면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국가, 기업, 사회단체의 투명성 제고를 위하여 입 법 촉구활동과 예산감시활동, 시민윤리 확립 및 기업의 윤리경영운동, 투명상 제정 및 시상, 각종 제도 및 의식개혁 프로그램을 활발하게 개발 보급하고 있다. 교육운동본부는 2002년 10월에 발족하였다. 교육운동 영역은 흥사단에서 아카데 미운동과 더불어 오래 전부터 지속적으로 활동을 전개해 온 친숙한 영역이다. 흥사
28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단 영문 명칭인 YKA(Young Korean Academy)와 1963년 학생 아카데미의 창립과 부흥에서 보듯이 흥사단은 청(소)년 인물양성과 교육에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다. 흥사단은 청소년 교육문제의 해결과 발전을 위해 1995년에 시민실천위원회에 교육 분과로서 교육실천위원회를 두어 활동하였다. 이후 1995년과 1996년에 YMCA, YWCA, 인간교육실현학부모연대 등 6개 단체가 공동으로 인간교육실천캠페인을 전 개하면서 교육민회 의 이름 하에 교육시민운동에 적극 참여하였다. 1998년에는 흥 사단을 비롯한 시민단체, 교사단체, 학부모단체 등 12개 단체가 함께 하는 교육시민 운동 연대기구 결성에 주도적으로 참여하여 교육연대(교육개혁시민운동연대) 의 창 립을 보았고, 이 단체는 오늘까지 지속적으로 활동하고 있다. 1990년대는 사회적으로 교육개혁의 바람이 거센 시기였다. 1989년에 전교조가 출 범하고, 입시위주 교육이 여전히 맹위를 떨치는 가운데 교육문제가 미해결의 중대 한 사회적 과제로 부각되었다. 문민정부와 국민의 정부는 교육개혁을 위한 적극적 인 노력을 기울였으며, 전교조, 학부모단체, 시민단체는 공교육의 정상화를 촉구하 는 한편, 바른 교육정책과 교육발전을 위한 다양한 활동을 전개하였다. 흥사단은 1999년에는 교육재정 GNP 6% 확보 운동에 참여하고, 2002년에는 교육 자치 활성화와 교육감 후보 초청토론회등을 실시하면서 교육발전을 위한 시민참여 운동을 펼쳤다. 그 후 2002년 10월 청소년과 시민이 함께 하는 희망의 교육 이란 슬로건을 내걸고 흥사단 교육운동본부를 발족하여 본격 활동에 들어갔다. 흥사단은 교원단체, 학부모단체와 연대하고 운동을 함께 하면서도 학부모나 교사라는 특정 교육주체의 관점이 아닌 청소년과 시민의 관점에서 교육문제를 바라보는 운동단체 의 역할을 하고자 노력하였다. 흥사단 교육운동본부는 바른 교육정책 수립을 위한 교육시민운동으로서 정책토론회, 저자초청독서회 등 정책수립을 위한 비판과 제안 활동, 그 외에 건전 청소년 육성을 위한 대한민국 청소년의회, 청소년인권교육 등 청소년 문화운동을 병행하며, 시민교육지도자 과정, 인성교육지도자 과정, 학부모 교육과정, 청소년 리더십 과정 등 시민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 흥사단 3대 시민운동은 흥사단 운동의 전기를 마련하는데 기여하였다. 3대 시민 운동은 흥사단 운동을 소수 엘리트 중심운동, 아카데미 조직 중심의 운동, 수양과 인격에 비중을 둔 운동으로부터 대중적 시민운동 조직으로 자리매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한 분수령이었다. 3대 시민운동은 흥사단 운동을 역동적인 시민사회 속에 배치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흥사단이 사회적 의제에 대하여 적극적으로 조직적으로 자기 목소리를 내게 하는 전환점을 만들었다. 다. 흥사단 운동의 변화와 흥사단 시민운동의 양상 앞서 살펴본 시민운동의 전개과정을 몇 가지 주제를 중심으로 재정리 고찰하고자
29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한다. 이는 흥사단 시민운동으로의 변화를 입체적으로 이해하고 시사점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1) 흥사단 운동의 외연의 확대 및 새 내용 확보 앞서 살펴보았듯이, 1990년대부터 흥사단은 본부 차원에서 본격적으로 시민운동에 참여하여 중앙 공선협의 사무처를 운영하고, 마침내 흥사단 밖의 외부 단체까지 아 우르는 범시민적 통일운동본부까지 출범시키게 되었다. 공선협 활동은 당시 시민운 동의 지형에서 언론의 조명을 받는 연대체로서 큰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이러한 활동은 내부 활동 중심의 기존 흥사단 운동을, 사회적 의제를 다루는 시민운동으로 운동의 외연을 확장하는 의미를 지닌다. 아울러 공선협 운동의 경우 지역 지부도 적극 참여함으로써 광역시 수준의 주요 지역 흥사단도 중앙과 더불어 시민운동의 중심에서 시민운동에 동참하는 형세를 만들게 되었으며, 오히려 일부 지방에선 서 울보다 흥사단 (단체)의 영향력은 비중이 더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이런 변화를 조금 더 분석적으로 살펴보면 다음 표와 같이 정리할 수 있을 듯하 다. <표 1> 흥사단 운동의 변화 : 외연 확대와 새 내용 확보 구 분 전통적 흥사단 운동 시민운동적 흥사단 운동 비 고 주체 (활동중심) (학생)아카데미 운동 중심 (성인)단우 중심 활동 (학생)아카데미 활동유지 (청년)청년활동참여 확대 (성인)일반시민 참여 기회 아카데미->성인쪽 으로 중심 이동 이념 지향 개인 인격수련, 자기혁신 지향 대중적 사회운동 사회변혁 지향 개인->사회, 공동 체로 중심 이동 관심 이슈 민족, 민주화 (대중사업-강좌, 토론회) 시민생활, 정치, 경제 거대담론->생활 문제(경제, 환경) 활동 형태 독자적 교육 프로그램 - 수련회등 연대 형태, 행동적 표출 - 선언, 캠페인, 시위등 내부적(독자적)->외 부와 협력 활동 기 타 금요강좌 등 교양 위주 국가(정부) 권력과 소통 사회단체(독립적) ->시민단체(연계적) 전통적인 흥사단 운동에 견주어 볼 때, 시민운동적 흥사단 운동으로의 중심 이동 은 활동주체, 이념의 지향성, 관심 이슈, 활동형태 등에서 전과 다른 것이다. 예전 것을 새 것으로 완전히 대체하는 수준에는 미치지 못할지언정 상당한 정도로 중심 이동이 이루어졌고, 그것은 한 마디로 흥사단 운동이 시민사회의 의제를 가지고 직 접 시민들에게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는 점에서 시민사회와의 (사회적) 접촉면을 넓 히는 의미를 지닌다고 평가할 수 있다.
30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2) 실무자 역할의 증대 및 임원-실무자 관계의 변화 본부 실무인력의 경우, 1980년 중반에는 총무부, 조직부, 청소년부, 출판부를 갖추 고 흥사단의 실무 인력은 총무(현 사무총장)밑에 5-6명 정도가 겸직형태로 부장을 맡고, 부장-(과장)-간사 체제를 유지하였다. 이후 1990년대 들어서도 사정은 크게 달 라지지 않았으나, 운동 외연을 넓혀가면서 서서히 부장, 차장, 간사 체제로 정착되 고 사무처 실무인력도 늘었다. 특히 사정이 열악한 지방지부의 경우, 지역별 편차가 있으나 전반적으로 사업과 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된 1990년대 전반기를 지나면서 전 국의 주요 지부에서 실무인력이 늘어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본부에서는 전국 실무 자 연수회를 매년 개최하게 되었다(때로는 임원, 실무자 합동 연수회 실시). 시민운동 활성화 시대인 1990년대에는 급성장하는 시민운동과 연대활동 와중에서 상근실무진의 집회 및 회의 참가가 많아짐으로써 비상근 임원들의 시민운동 참여와 이해도가 상대적으로 낮을 수밖에 없는 구도가 형성되었다. 그렇다고 상근 실무자 가 활동을 주도하고, 임원들은 그냥 위임하는 형태로 단 운영이 되었다고 하기엔 흥사단 임원의 경륜과 무게가 큰 것이다. 하지만 90년대 이전과 비교해 급속하게 변화하는 사회환경을 실무자가 더 많이 감당하는 방향으로의 변화흐름이 속도를 내 기 시작했다. 임원들과 실무자가 특별히 불화하지 않는 경우는 운동의 중심이 실무 자라고, 실무자가 중요하다는 인식이 많아졌다. 이에 따라 임원 실자간 협의와 위 임 구조가 확대되었다. 실무인력의 증대에는 흥사단 시민운동의 활성화와 더불어 수탁시설 운영의 증대 도 한 몫을 하였다. 공선협과 같은 전국적인 시민운동 의제의 대두와 중앙-지역 동 시 연계 활동의 증대, 지부 사회교육 프로그램 사업, 1993년 이후 서울, 광주, 부산, 창원(거창) 등지에서 수탁운영하는 청소년 시설의 개수가 늘어나면서 지부에서는 지 부 간사와 수탁시설의 운영인력을 겸임운영하는 경우가 늘어나 지부의 인력활용에 도움을 준 측면도 컸다. 그러나,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지만, 수탁시설이 점차 더 전문적인 경영을 요청하게 되면서, 나중에는 흥사단과 수탁시설의 인력 겸직 활 용이 흥사단 운동에 플러스 효과보다 오히려 흥사단 활동의 전력손실 효과로 나타 나는 수도 있었다. 3) 조직 내부 긴장의 증대 사회운동에서 시대적 과제에 대한 참여수준과 몰입도가 낮으면 긴장은 없거나 매 우 적을 것이다. 임원과 실무자 간에는 적절한 수준의 지시-과제수행의 협력적 관계 가 일반적일 것이다. 한편, 시대적 이슈에 관여하는 역동적 운동을 지향한다면, 다양한 긴장이 발생할 가능성이 높다. 우선 실무자의 전문성이 요구되고, 이에 따른 스트레스가 증대된다. 운동의 현재성과 긴급성 때문에 이슈에 참여여부를 신속히 결정해야 하는 긴장이 발생한다. 때로 단체간의 주도권과 전문성등 경쟁이 개입되기 쉽다. 속성상 여론을
31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통한 영향의 정치 를 지향하기 때문에 은연중 경쟁구도가 야기된다. 참여 이슈에 따라서는 단체 구성원간 내부 토론이 활성화되고, 여기서 다양한 생산적, 또는 소모 적 긴장이 발생할 수도 있다. 흥사단 시민운동의 경우에는, 90년대 이후 지금까지 이런 내부적 긴장을 어떻게 그려볼 수 있을까? 정확히 계량화하긴 곤란하지만 긴장이 높아지는 방향으로 진전 되었을 것이라고 본다. 단, 긴장이 직접적 사안(구체사업이나 의제 등)을 놓고 야기 되는 조직 자체의 생산적 긴장의 성격보다는, 조직의 여러 일을 수행하는 가운데 생기는 임원 실무자간의 업무와 관계를 둘러싼 복합적이고 우회적인 긴장의 성격 인 경우가 더 많았을 듯하다. 상근 활동가의 입장에서 보면, 조직과 임원의 무게에 눌린 피로감과 상실감으로 표현하면 어떨까 싶다. 2005. 흥사단 활동가 설문조사 결과(46명) 흥사단은 새로운 이사장 체제에서 새로운 새로운 과제와 개혁의 길을 가고자 하 고 있습니다. 현재 흥사단이 가장 시급하게 해결해야 할 과제가 무엇이라고 생각하 십니까? 1 임원과 활동가 간의 의사소통 구조 20.5%(17명) 2 지역지부 활성화와 본부와의 연계강화 19.3%(16명) 3 활동가들의 처우개선 18.1%(15명) 4 의사소통구조의 민주화 14.5%(12명) 흥사단의 상황을 위기 라고 인식하는 사람이 56.5%, 과도기 라는 인식이 37% 본부 근무자는 활동가가 아니다 라는(행정요원이라는 인식) 비율이 60%, 부설기 관은 50%, 전체평균은 23.9% * 이러한 설문과 응답의 수치는 자체로서도 의미를 지니지만 전반적인 경향성과 응답의 배경과 분위기가 주목된다. 비상근 임원들의 시간적 한계 등을 감안하면, 조 직의 활동가들이 비전을 갖지 못하고, 회의와 행정실무 등으로 피곤하게 쫓기는 상 황을 볼 수 있다. 현실적으로 실무인력의 수를 타 종합 시민단체와 비교하면 절대 부족한 실정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전문성-성과-보람의 선순환 구조가 아니라, 단순 업무-낮은 성과-소진 현상이란 악순환의 불가피한 고리가 존재한다. 이런 악순환의 여건을 고려해 볼 때, 소통의 민주화가 매우 중요하지만 그것으로 문제의 대부분을 해결하기는 곤란하다고 보인다. 더 근본적인 시민운동의 비전과 설계를 종합검토하 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32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4. 향후 과제와 방향 : 정체성 확립을 위한 과제와 함의 앞에서 흥사단 운동의 변화 현실을 시민운동으로의 전환이란 관점에서 기술하였 다. 또한, 거기서 야기되는 현실 문제들을 살펴보았다. 이제 흥사단 운동이 왜 시민 운동인가? 어떤 시민운동이어야 하는가? 에 관련된 정체성 확립을 위한 과제와 함 의를 논의하고자 한다. 첫째, 왜 시민운동인가 또는 시민운동이 아닌가의 문제에 답할 필요가 있다. 왜 시민운동인가는 두 가지 점에서 정당화할 수 있을 듯하다. 첫째는 도산의 총 체적 계승 을 통한 변혁운동을 들 수 있다. 인물양성을 뛰어 넘는 사회변화와 개혁 의 실천에 직접 참여하는 운동이 흥사단 운동이었다면, 오늘 현대적 재해석은 흥 사단은 사회변혁을 촉진하는 시민운동을 적극 펼쳐야 한다 로 될 것이다. 이런 시 대적 과제에 대한 단 지도부의 고민이 2000년에 3대 운동으로 구체화되었으며, 2003년 <비전 2013>으로 재정리되었다. 둘째는 역사적으로 근현대 사회의 전개과정 에서 국가와 시장과 시민사회의 관계에서 근거를 찾을 수 있다. 근대 사회의 전개 는 경제적 자본주의 발전과 정치적 국민국가 형성이라는 양면적 과정으로 이루어져 왔다. 이는 정치적으로 국가, 경제적으로 시장, 정치사회와 경제사회에 대응하는 잔여범주로서 시민사회 의 세 영역으로 나뉘어 시 공간적으로 성장해 왔다. 흥사 단이 시민사회 영역에 속하는 자발적 단체의 정체성을 갖고 시민사회의 성숙에 기 여할 수 있다면, 이는 바로 시민사회의 건강성 회복과 성숙을 위한 시민운동을 펼 쳐야 한다고 할 수 있다. 발전된 선진국의 사회는 세 영역이 조화와 균형과 견제의 모습을 갖추고 있다. 달리 말하면, 한국사회가 광복 이후 역사적으로 강한 국가, 약한 시민사회 또는 강한 시장, 약한 시민사회 라는 유형으로서 발전해 왔기에 왜곡된 과잉 국가 주도성과 과잉 시장주의를 바로 잡고, 균형을 찾는 일이 필요하 다. 이 글의 맨앞에서 시민운동의 배경을 설명하는 가운데, 설명한 87체제와 97체제 는 각기 바로 이런 강한국가 에서 시민사회의 자율성 증대시기로의 변환점, 강한 시장 의 전개라는 변곡점의 의미를 지닌다. 이런 뜻에서 사회발전과 변혁의 과제가 시민사회의 자발성과 역량을 증진, 강화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도산의 애국, 애족, 애민 사상과 일치하며, 자발적이고 자율적인 결사체로서 시민사회 영역에 속 한 흥사단이 오늘 해야 할 과제이기도 하다.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강한국가의 조건 에서 이렇게 말한다. 비공식적 습성이 공식제도에 영향을 끼치는 방식에 대한 또 하나의 예는 정부와 국민의 관계에서 사회자본이 맡는 역할과 관련이 있다. 정부 기관들에 공공이익을 증진할 책무를 지우는 것은 어느 정도 제도 설계와 내부 견제 및 균형의 문제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정 부 기관들의 업무 수행을 감시하고 적절한 행동 양식을 요구할 책임은 정부가 섬긴다 고 하는 국민에게 있다. (사친회, 감시단체, 지지 단체 등 그 형태에 관계없이) 결집력
33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있는 단체가 많이 활동하는 사회일수록 무질서한 개인으로 구성된 사회보다 책임을 요 구하고 책임을 지는 성향이 더 높게 나타난다. 반면에 시민사회는 대의적인 책임에는 관 심 없고 오로지 정부 보조금의 범위나 정부를 시민사회로 대체하는 범위의 증가만을 도모하 는 착취적 이익집단들로 퇴락할 수도 있다. 이 두 가지 결과 중 어느 것이 만연하게 되느냐 는 제도 설계보다는 시민사회 자체의 본성에 좌우되는 것이다. 그는 강한 국가의 조건으로 제도적 역량의 구성요소 4가지(조직설계 및 관리, 제 도 설계, 합법성의 토대, 사회문화적 요소) 가운데, 규범과 문화적 가치관 같은 사회 문화적 요소는 이전 가능성은 낮고, 장기간의 교육과 다른 사회와의 상호작용 속에 서 형성되며, 변화하는데 엄청난 시간이 걸린다고 한다. 투명성과 책임감을 내면화 하고 다른 사람에게 영향을 끼치는 전반적인 사회 변화에는 장기간의 시간이 필요 하다는 것이다. 흥사단은 다른 시민운동 단체와 달리 이와 같은 장기적 시민의식 형성 과제의 수행에 노력할 필요가 있다. 흥사단이 시민운동이 아니면 무엇인가에 대하여도 논의가 필요할 듯하다. 하지만 이는 명쾌한 답을 제시하기가 어렵다. 도산의 구상과 사상과 활동을 시민운동 이 외의 분야에서 현재적 사회적 실천의 장으로 끌어들이는 단서와 맥락을 찾기가 어 렵다. 민족운동은 여전히 의미 맥락이 있다고 인정하더라도 이제 전면에 내세우기 에 시대적 적합성이 떨어진다. 엘리트적 활동과 국민교육, 인격과 수양은 리더십 이 강조되는 요즘의 추세에서 보면 적절히 강조될 수 있겠다. 하지만 참여 와 동시 성 이 강조되는 정보화 시대와 어울리지 않는 측면이 있다. 인격과 수양은 타 시민 단체와 달리 입단과정(실제로는 예비단우에서 통상단우 서약에 이르는 과정)에서 내 적으로 요청하는 필수적인 조건으로 부과하는 것이 흥사단 운동의 특성을 살리는 것이 된다고 본다. 이 때, 인격 과 시민 의 통합적 프로그램이 작동하고, 진정한 시 민실천, 사회적 실천의 영역이 열린다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흥사단 운동의 핵심인 통상단우들에게는 인격의 수련이 필수적이지만 사회적, 외부적 목표로는 적절해보 이지 않는다. 둘째, 민족 과 시민(운동) 의 결합 문제다. 21세기 세계화 시대에는 민족담론 및 국민국가가 쇠퇴, 소멸한다는 주장과 여전히 영향력을 가질 것이라는 유효론이 맞선다. 흥사단은 민족운동단체로 정체성을 형성 하여 왔다. 이제 21세기에 정신적 지주와 브랜드가 되다시피한 민족 을 어떻게 소 화하고 처리할 것인가? 김호기 교수의 정리가 판단에 도움이 될 듯하다. 장기적으로 정보혁명의 가속화, 초국적 기업 및 비정부 조직의 활동 증대 등은 국민국가의 경계를 약화시킬 가능성 이 크다.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 중단기적 차원에서는 새로운 헤게모니 경쟁으로 국 민국가의 위상이 강화될 가능성 또한 존재한다. 세계에서 유일한 분단국인 특수 현실, 세계화가 가속화되는 가운데 국제금융 위기를 겪은 경험 등에 비추어 보면, 민족 의 범주는 근대국가 형성기의 기획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오늘의 운동에
34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서도 여전히 유지되고 고려되어야 할 것으로 보인다. 이 점에서 심성보 교육운동본부 대표는 인격 과 시민 과 민족 의 통합을 과제 로 제시하여, 시사하는 바 크다. 인격은 성실, 정직, 개체성, 사람됨 등을 핵심적 요소로 하는 가치이며, 시민은 권리, 공 정, 공익, 자율, 참여, 봉사, 등을 핵심적 요소로 하는 가치이며, 민족은 모국어, 문화, 역사, 공동체, 통합성, 일체성등을 핵심적 요소로 하는 가치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시민을 시민운동의 핵심 개념으로 하는 흥사단 운동을 지향한다면 인격적 시민, 민족적 시민, 세계적 시민을 모두 모함하는 통합적 운동이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세 가지 개념과 담론을 중심으로 현재 충돌하고 갈등하는 요소가 무엇인지 드러내어 합의점을 찾아 가는 공론의 과정을 필요로 한다. 심성보(2006) 셋째로, 시민운동에서 이념적 편차를 조정하고 경계짓는 문제이다. 궁극적으로 는 흥사단 시민운동의 이념적 좌표를 설정해야 한다는 과제가 있다. 이는 낡은 이 념의 틀로 들어가자는 의미가 아니라 사회개혁과 변혁의 비전을 설정해야 한다는 의미이다. 우리 사회에서 시민운동은 계급적, 투쟁적, 저항적 노동운동과의 경계짓기를 하면 서 성장하였다. 80년대 후반부터 90년대 중반까지 시민운동은 반독재민주화 투쟁을 주도하였던 민중운동 진영에 대해 반민중운동과 비민중운동적 정체성 을 강하게 추구하는 보수지향의 온건한 시민운동으로 분류된다. 또한 계급 에서 시민 으로 걸 음을 옮긴 것으로 평가된다. 이런 초기 시민운동의 입각점을 보면, 거의 대부분의 시민운동 또는 NGO로 불리는 실천활동은 이미 급진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노동 운동을 배제하고 있다. 경실련 활동이 대표적인 경우인데, 자유주의적 시민사회론적 입장은 초기 선언문에 잘 드 러나 있다. 국민적 공감대의 지원을 받으며 말 그대로 보통 시민이 주체가 되는 운동을 전 개 하겠다고 선언했다. 경실련은 기업인이든 중산층이든 할 것 없이 운동의 구성원이 될 수 있다며 특정 계급 계층의 이해관계를 대변하지 않고 사회 전체의 이익이 되는 공동선 을 대변하겠다고 강조했다. 이것은 뒤집어 말하면 특정 계급, 즉 노동계급의 이해 관계를 대변하는 운동은 공동선이 아니라 계급 이기주의라는 뜻이기도 했다. 조희연 교수 는 경실련이 대표하는 초기 시민운동의 출현을 진보주의로부터 자유주의의 분립과 독자화 로 규정한다. 또 그는 보수 언론은 이러한 초기 시민운동의 비민중적, 반민중적 정체성을 부각시킴으로써 사회운동의 분화를 촉진하는 방향에서 기성체제를 안정화시키고자 했다 고 지적했다. 실제로 민중운동이 탄압받는 동안 경실련은 스포트라이트를 받으며 성장했다.(김 하영, 2009). 김하영은 이후 민중운동 진영의 일련의 실패(민중당 실험 실패)를 겪으며, 새롭게 진보진영의 새로운 의제를 가지고 사회개혁의 실천에 개입하자는 취지에서 조희연 교수를 중심으로 소장학자, 인권변호사, 학생운동 출신 활동가등이 모여 진보 성향
35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의 참여연대를 창립하게 되었음을 소개한다. 조희연 교수는 이제 민중운동은 다계급적 문제 영역과 소비 생활상의 문제 영 역 에 효과적으로 개입해 진보적 정책대안을 제시해야 한다. 민중의 삶은 생산 영역 외 에도 소비자, 무주택자, 납세자, 환경공해 피해자 등의 다양한 측면에서 규정되기 때문이 다. 또 지방자치제를 둘러싼 새로운 문제 영역, 주민자치의 문제 영역 에 더 개입해야 한다. (그는) 경실련 등이 민중운동과 대립각을 세우는 데 반대해 진보적 시민운동은 체제 변혁적 민중운동과 연대 해야 한다고 주장했다.(김하영, 같은 책) 김호기 교수는 위에 언급한 경실련과 민중진영, 경실련과 참여연대의 대비와 경 합, 그리고 활동전개 과정에서 있었던 논쟁을 자연스러운 것으로 보는 한편, 그것이 정치화되어 있으며 이데올로기적 성격이 크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그는 국가, 시 장, 시민사회를 분석적, 경험적 범주로 이해하는 일이 필요하다고 보고, 한국 시민 사회의 두드러진 특징을 이중적 속성 에서 찾고 있다. 이중적 시민사회란 한편에서의 전통주의, 보수주의, 집단주의와 다른 한편에서의 근대주 의, 진보주의, 개인주의가 공존하고 결합되어 있는 것을 말한다. 현실영역에서의 시민사 회는 전통과 근대, 보수와 진보,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이 착종되어 있기 마련이며, 이런 점에서 한국의 시민사회는 이중적 시민사회이자, 풀뿌리 보수주의 와 풀뿌리 민주 주의 가 혼재되어 있는 공간으로 볼 수 있다. 시민사회의 이러한 이중적 성격은 지난 20세기에 진행되어 왔던 시민사회의 역사적 형성 과정에서 구조화되어 온 만큼 단기간 내에 변화되기란 쉽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흥사단 시민운동의 이념의 좌표를 찾기 위한 논의에서 세 가지의 인용을 길게 제 시했다. 초기 시민운동의 대표이자 민중운동과의 경계를 확정하고 온건 시민운동의 비조가 된 경실련의 이념 성향이 하나다. 둘째는 김하영이 조희연 교수의 설명을 인용하면서 드러낸 진보적 시민사회운동의 입장이다. 이는 적어도 참여연대 수준 이상의 진보적인 활동을 의미하며, 사회체제변혁을 위해 민중운동 진영과 연대해야 한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셋째로는 김호기 교수의 입장인데, 이는 정치화된 이데올 로기적 논쟁보다 실질적인 분석적 접근으로 한국사회의 현상을 정확하게 분석, 파 악하는 것이 시민사회 민주화의 출발점이라는 주장이다. 세 입장은 각각 자유주의 시민사회론, 마르크스주의적 시민사회론, 이중적 시민사회론 의 입장을 나타낸다. 단순하게 일정 선분위에 표시한다면, 흥사단의 입장은 어느 지점에 어울릴까? 흥 사단의 단체 특성과 정체성은 어떤 입장으로 표현될 수 있는가? 흥사단 자체는 그 어느 운동의 입장과도 다른 지형 속에 놓인 것이 아닌가 생각한다. 흥사단의 역사 성, 조직과 제도, 주체들의 다양성 등이 독특하기 때문이다. 세 논의는 명백히 종합 시민단체적 성격의 적극적인 행보를 가진 경실련과 참여연대를 대표적으로 예시한 것이다. 또 다른 규모가 큰 여러 대변형 단체와 비교해 보면, 더 입체적으로 우리
36 - 흥사단 운동 100년의 쟁점 입장을 생각하는데 도움이 될 것이다. 흥사단 운동이 도산의 총체적인 계승에 충실한다면, 적어도 매우 폭넓은 이념과 정치적 스펙트럼을 사회발전의 비전과 안목에 따라 구사할 수 있을 것이다. 도산 선생은 상해에서 사회주의 공산주의까지 아우르는 폭넓은 거국적 통합을 시도하였 고, 일평생 통일과 통합을 위해 이념을 초월하여 장기적, 민족적 안목에서 독립운동 과 사회적 실천을 수행하였다. 현재 흥사단은 중심(본체)에 해당하는 본부조직과 3 대 운동본부가 조직구조상 분리된 형태를 띠고 시민운동을 주제별로 특화, 전문화 한 형태로 존재하고 있다. 그러므로 전문 운동을 통해 사회발전에 기여하고자 하는 설립취지에 비추어 운동본부는 흥사단 본부나 지도부와 극단적인 이념의 차이가 아 니라면 해당 영역의 전문적 비전과 판단에 따라 자율적으로 이슈와 이념적 선택을 하여 시민운동에 나설 수 있어야 한다. 물론 서울에 국한된 것이고, 또한 본부와 운 동본부, 운동본부간 유기적인 협력과 연계가 전제되어야 한다. 오히려 더 근본적인 문제는 단일 주제 운동에서 쟁점을 다루는 방식이다. 체제의 다른 문제들에서 떼어내 그 쟁점에만 주목하는 것이 문제인 것이다. 여성 차별은 착취와 관계가 없고, 환경파괴는 자본주의와 관계가 없으며, 이 모든 쟁점들은 서로 연관이 없고 해결책이 저마다 서로 다른 별개의 문제라는 식으로 말이다. (김하영) 이런 경향은 자율성, 정체성을 추구하는 개별운동을 자율적으로 조직한다는 점에서 많은 NGO들에서 선호되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사회변혁운동의 전체적 조망에 서 운동을 디자인한다면, 이런 분절적이고, 파편화되고, 분산적인 경향은 유기적인 통합과 구심력의 조절이 필요하다. 이런 점에서 흥사단 시민운동 내지 사회변혁운 동의 전체적 조망을 연구하고 대안을 제시하는 기능을 담당할 정책연구소 등이 요 청된다. 2005년에 출범했다가 현재 중단된 흥사단운동연구소가 이런 기능을 담당하 고자 했다. (가칭)정책연구소에서는 통일운동과 투명사회운동과 교육운동을 관통하 고, 흥사단과 운동본부의 통합적 연계를 가능하게 하는 사회발전의 전반적인 모델 과 지향을 연구하고 설계할 수 있을 것이다. 단일 주제 운동에서 다루기 어려운 사 회 전체의 비전에 관한 문제, 여러 분야간 정책이념의 혼선과 갈등 문제, 각종 영역 간 이념의 편차 문제 등 전체 그림과 조율을 통하여 전체 흥사단 사회운동의 전망 을 확보하는데 기여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흥사단 시민운동의 특징을 발굴하고, 정립하는 일을 다시 한번 강조 하고 싶다. 흥사단은 다른 시민단체와는 본질적으로 차별화되어야 하며, 보다 창의 적이며 전통적인 운동의 모델을 만들어야 한다. 흥사단 운동의 정체성을 회복하 여 흥사단 운동과 우리 사회에 기여하는 새 인물 양성 및 실천하는 시민(민족)운 동 을 주체적으로 실천해 나가는 흥사단으로 재탄생되어야 한다. (이창걸, 2006).
37 - 비전위원회 100년사위원회 합동 세미나 참고문헌 김호기(2007). 한국시민사회의 성찰. 아르케. 김하영(2009). 한국NGO의 사상과 실천 마르크스주의적 분석. 책갈피. 구치모(2005). 흥사단운동의 재맥락화. 21세기 흥사단과 시민운동 흥사단 수련 자료 제2집. 심성보(2006). 흥사단 운동 재맥락화에 대한 토론. 21세기 흥사단운동의 과제와 비전 흥사단운동연구소. 오평석(2006). 흥사단 상근활동가의 꿈 그리고 전진. 21세기 흥사단운동의 과제 와 비전 흥사단운동연구소. 이상진(2008). 흥사단 정신에 비추어본 현 교육제도의 방향. 흥사단 교육운동본부 워크숍 발표자료. 이윤배(2006). 흥사단운동의 논쟁. 21세기 흥사단운동의 과제와 비전 흥사단운 동연구소. 이윤배(2010). 흥사단은 사회가 요구하는 인재를 양성했나?. 제2회 100년 비전포럼 주제발표 자료. 이창걸(2006). 흥사단운동, 무엇을 할 것인가?. 21세기 흥사단운동의 과제와 비 전 흥사단운동연구소. 조희연(2000). "한국 시민사회단체(NGO)의 역사, 현황과 전망. NGO란 무엇인 가. 아르케 프랜시스 후쿠야마(2005).(안진환 옮김) 강한국가의 조건. 황금가지. 흥사단(2004). 흥사단운동 최근 20년 자료집(1984~2003년). 흥사단(2005). 21세기 흥사단과 시민운동 흥사단 수련자료 제2집. 흥사단운동연구소 (2006). 21세기 흥사단운동의 과제와 비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