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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정책백서목차(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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中 東 硏 究 2006년 제25권 1호, 39-84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 7) 장 병 옥 ** 차 례 I. 서 론 II.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러시아의 외교정책 III.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이란-터키관계 IV. 미국의 정책과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V. 카라바흐 분쟁에 있어서 UN과 NATO VI. 결 론 <Abstract> The conflict of Nagorno-Karabagh and International relations Chang, Byung-Ock HUFS The antagonism between Armenians and Azerbaijanis had with time transcended cultural-religious differences. The position of Armenians in Azerbaijan resembled that of Jews in the parts of Europe where they were both threatened and feared. * 이 논문은 2006학년도 한국외국어대학교 학술연구비의 지원에 의하여 이루 어진 것임 **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

40 중동연구 제25권 1호 This paper looks to the internal and foreign relations of America, Russia, Iran and Turkey towards Armenia and Azerbaijan. Transcaucasia is a more violent region than Central Asia. And understanding of the prospects for regional stability in the Transcaucasus requires an in-depth analysis of American, Russian, Iranian and Turkish developments. As crisis between Armenia and Azerbaijan grew, Turkey had no desire to get involved in a conflict with Armenia, which would be a public relations blow in the West and damage its hopes for closer ties to America and Europe. Iran lies next to Azerbaijan and it has cultural and ethnic links to Transcaucasia. Iran still has a strong perception of its pre-islamic greatness and it is infused with Iranian nationalism independent of its Islamic faith. Its status as the only shia controlled also separates it from the other muslim nation. Key Word: Central Asia, Transcaucasia, Azerbaijan, Armenia, Nogorno-Karabagh, Iran, Turkey, America, Russia I. 서 론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분쟁은 학자 및 시사 평론가에게 많은 연구와 논문의 주제가 되어왔다. 카라바흐 는 역사적으로 남부 코카서스에 자리한 지역으로 이란 북부와 마주 하고 있다. 아르메니아의 동부와 접해 있는 아제르바이잔의 영토인 이 지역은 그 지리학적인 위치상 위기의 조짐을 보여왔다. 높고 검 은 정원과 같은 나고르노-카라바흐는 그 넓이가 4,400km2에 이른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41 1989년의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인구는 거의 189,000명으로 추측 되는데 아르메니아인이 약 77%, 아제르바이잔인이 21%를 구성한 다. 수도는 스테파나케르트이다. 1) 아르메니아인은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오랜 세대에 걸쳐 그들이 꿈꾸는 독립된 민족국가 정부의 이상을 가슴 깊이 간직하고 살아왔 다. 또한, 그들은 아제르바이잔과 이란, 레바논, 남북 아메리카 대륙 을 비롯하여 다른 지역에 흩어져 있는 모든 동족이 한 곳으로 귀향 해 올 수 있기를 갈망한다. 그러한 반면, 투르크 민족은 소아시아와 코카서스 지역, 중앙아시아의 영토를 통합하고자 한다. 소련 강점기 내내, 아제르 투르크인은 물론 아르메니아인도 그들만의 독립된 정 부를 세운다는 것은 상상하기조차 힘들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국의 갈등 지역이자 자치주인 나고 르노-카라바흐 분쟁은 1988년 2월, 그곳에 사는 아르메니아인에 의 해 거행된 일련의 파업과 시위에 뒤이어 시작되었다. 나고르노-카라 바흐 분쟁은 1988년 이래로 수천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 나고르노- 카라바흐 분쟁의 원인이 국내적으로는 영토적이고 민족적이며 종교 적인 분석이 많다. 국제적으로 이 분쟁은 몇몇의 인접국, 특히 북쪽 으로 러시아와 남쪽으로 터키와 이란, 그리고 외부세력인 미국에 지 대한 영향을 끼치며 위기를 조성해 왔다. 이 지역의 동서를 연결하는 전략적 요충지와 에너지 자원 송출루트로서의 영향력 확보를 위해 이들 열강들은 패권게임을 벌여왔다. 이 논문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둘러싼 주변 이해 당사국 이란, 터키, 러시아, 미국, 그리고 유엔을 위시한 국제기구의 역할과 국제관계를 연구하고자 한다. Ⅱ.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러시아의 외교정책 소연방 해체 이후, 러시아는 코카서스 지역의 활동에 지대한 관심 1)1923년 이전에는 칸의 마을 이란 뜻의 칸-켄디였다.

42 중동연구 제25권 1호 을 보여왔다. 몇몇 관측자들은 러시아가 아직도 제국의 야망을 가지 고 있으며 그로 인해 이 지역에 큰 해를 끼칠 것이라고 주장하고 있 다. 러시아의 외교정책은 중요한 국익의 영역으로 옛 소연방의 정 치, 지리적 영역을 포함하는 독트린에 기초한다. 처음부터 모스크바 는, 터키가 트랜스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와의 관계에서 특별히 유 리한 입장에 있다는 것을 알았다. 처음에는 트랜스코카서스에서 러 시아-이란-터키 3국의 패권경쟁에서 러시아가 가장 성공적인 외 부 세력이었다. 러시아는 과거 소연방의 모든 영토에 대한 정치적, 군사적 안보 수호국으로서의 역할을 하고자 했다. 골츠(T. Goltz)에 의하면 러시아는 의도적으로 코카서스 지방의 소수민족을 부추겨 이들로 하여금 자기들이 현재 살고 있는 영토를 담보로 민족자결주의를 요구하는 등의 분쟁을 일으키도록 하고 있 다는 것이다. 이렇게 되면 이해당사국들은 현상 유지를 위해 러시아 에 군사적, 정치적으로 기댈 수밖에 없다면서 그루지아(Georgia)와 아브하지아(Abkhazia)의 예를 들고 있다. 또한 러시아가 다른 부분 에 있어서도 이들 지역에 개입하고 있다고 하는데, 예를 들면 러시 아군이 철수하면서 무기고를 남겨 놓아 지방 군벌 후세이노프가 이 를 이용, 엘치베이를 몰아내고 친러 성향의 알리예프에게 권력이 돌 아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시사 문제 해설가 한바비안(Armen Khanbabian)은 엘치베이의 사임과 알리예프의 취임을 러시아 정책 의 주요 성과 라고 분석하였다. 그러나 이 주장은 코카서스 지역의 러시아 정책을 설명하는데 있어서 적합하지가 않다. 러시아는 코카서스에 대해 적법한 안보 이해를 가지고 있다. 러시 아가 두려워하는 것은 지역 불안정으로 러시아의 곡창지대인 Kuban 지역이 위험한 상태에 처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 관 리들은 지역의 안정을 바라거나 최소한 통제 가능한 안보 환경을 원 하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러시아는 아제르바이잔과 터키의 강한 반 대에도 불구하고 CFE 2) 조약을 완화, 수정하여 좀더 많은 자국의 2) Conventional Forces in Europe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43 군대를 러시아 남쪽 국경지대를 따라 배치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는 또한 그루지아에서 러시아의 평화유지 역할과 나고르노-카라 바흐 문제의 평화적 해결 중재 노력 등에 대한 이유이기도 하다 (Winrow 1995, 105). 분쟁의 초기 단계, 즉 소련이 건재했을 때 크레믈린은 아제르바 이잔의 입장을 지지했다. 왜냐하면 국경에 대한 신성 불가침의 원 칙에 근거했기 때문이다. 아르메니아의 완전 자치와 그 이후의 독 립 요구에 대하여 소련이 반대하면서 아제르인은 유리한 입장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모스크바는 이 지역의 분쟁으로 인한 무질 서한 상황을 통제하기 위하여 증강된 병력을 집결시켰다. 극도로 긴장되고 혼란스런 상황에서, 1988년 12월에 바쿠에 군대가 파견 되었고, 계엄령이 수도와 몇몇 다른 지역에 선포되었다. 소련 공산 당 중앙위원회 조직의 볼스키(Arkadii Vol'sky)가 이끄는 특별 행 정위원회 가 1989년 1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설립되었다. 이것 은 모스크바로부터의 직접 통치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군대의 주둔은 단지 일시적으로 분위기를 진정시켰을 뿐 이었다. 볼스키의 행동은 양측 모두로부터 비난을 받았고 사실상 상황을 더 복잡하게 했을 뿐이었다. 위기에 대한 중앙정부의 대처 가 단지 부정적인 결과만을 초래하자, 다른 측에서 조치를 취하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민족전선 대표 자간의 회담이 그들의 그루지아와 발트해 동료들에 의해 조정된 것 이다. 소련의 최고회의 지역간 조정 그룹에 속한 멤버들은 양측과 개별적으로 접촉했다. 그러나 모든 시도는 수포로 돌아갔다. 1988년 12월, 사하로프(Andrey Saharov) 박사가 주도하는 단 체가 바쿠와 예레반을 방문했다. 긴장되고 적대적인 분위기 속에 서 진행되었던 바쿠에서 베지로프(Vezirov)와 가진 회담은 실패했 고, 아제르바이잔 과학 아카데미에서의 논의도 마찬가지였다. 1990년 1월 20일, 소련 군대가 바쿠에 입성하였다. 바쿠 북쪽으 로부터, 탱크의 호위를 받은 최소 2만여 명의 소련군이 대중들에

44 중동연구 제25권 1호 의해 설치된 봉쇄 벽을 향해 진격하면서, 다른 한편 카스피 해상을 통해 수천 명이 전격 작전에 투입되었다. 그 작전은 야조프(D. Yazov) 국방부 장관과 바키탄(V. Bakatin) 내무부 장관의 지휘 하 에 수행되었다. 공식집계에 따르면, 수백 명이 사망했고 700명 이 상이 부상을 당했다. 반면, 아제르바이잔 국민전선 PFA의 주장에 의하면, 침공 기간 동안 수천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고 한다. 소련 침공 배후의 동기에 대한 아르메니아인의 생각은 아제르바이 잔인과 동일했다. 공식 성명을 거부한, 주요 민족주의자 단체인 아르 메니아의 민족운동단체는 모스크바는 아르메니아인을 지키기 위해 서가 아니라, 단지 소련의 힘이 강화되었기 때문에 폭력적 행위를 하 기로 결정한 것이다 라고 주장했다(Vaserman/Ginat 1994, 353). 바쿠에서의 대규모 잔인한 군사 도발 행위는 우익 강경파가 모 스크바의 권력 투쟁에서 승리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들은 군대를 강화하는 정책과 현상유지를 신봉하는 자들이었다. 처음부터 그들은 카라바흐 분쟁을 불안정의 요인으로 여겨 왔다. 그러나 이제, 그들의 영향력이 커지자,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 대한 모스크바의 정책도 바뀌었다. 정책 재조정의 첫 번째 중요한 단계는 1989년 11월 28일, 소연방 최고회의에 의해 나고르노-카 라바흐 특별 행정위원회 가 폐지되고,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2서 기 폴리아니츠코의 주도로 공화국 조직위원회가 설치되었다. 며칠 후인 12월 1일에 아르메니아 공화국과 나고르노-카라바흐 대표자 합동회의는 소연방 최고회의의 결의를 거부하고 통합연방을 지지 했다. 군대가 바쿠에 입성함과 거의 동시에, 비상사태가 나고르노-카 라바흐내에 선포되고, 군이 여러 곳에 배치되었다. 군대는 공화국 조직위원회와의 긴밀한 협조 하에 움직였다. 아르메니아인은 나 고르노-카라바흐의 민족 구성을 바꾸고 싶어하는 아제르바이잔 지도부의 뜻을 집행하는 자들 이라고 비난했다. 아르메니아 대의 원들과 언론, 그리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내의 아르메니아인은 점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45 령한 군대가 아르메니아인의 마을을 수색하여 무장 해제시키고, 아르메니아인을 억류 또는 추방시키며, 그 지역을 아르메니아와 외부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등, 카라바흐의 주민들을 공포에 떨 게 하고 위협한 것에 대해 비난했다. 아르메니아인들은 특히 나고르노-카라바흐 비상사태 사령관인 사포노프(Safonov) 육군소장을 비난했는데, 그는 아르메니아 민족 운동의 법정 에서 사형선고를 받은 인물이었다. 사포노프는 반아 르메니아인이라는 비난을 일축하며, 법에 따르면 나고르노-카라 바흐는 아제르바이잔 공화국의 일부이다 라고 주장했다. 아르메니 아인은 군대의 만행을 유감스럽게 생각했다. 1990년 5월 5일에 채택된 결의에서, 아르메니아 최고회의는 소연방 대통령에게 1) 나고르노-카라바흐에서 비상사태를 철회할 것, 2)내무부 산하 군 대를 나고르노-카라바흐 영토에서 철수시키고 그 지역과 아제르 바이잔 공화국의 인접한 국경지역 내의 관할구역에서 배치시킬 것 을 탄원했다. 이 당시의 카라바흐의 위기에 대처하는 모스크바의 정책은 공화 국에서 진행되던 정치적 과정과 연계되어 있었다. 아제르바이잔에 서, 공산주의자는 권력을 유지하는 가운데 군대 침공 이후 정권을 잡은 무탈리보프(Ayaz Mutalibov) 아래에서, 그들은 자신들의 지 위를 오히려 더 강화시키는 것 같이 보이기조차 했다. 아르메니아 에서는 공산주의자가 독립을 요구하던 민족주의자에게 권력을 양 도했다. 1991년 4월 초, 아르메니아 정부가 발표한 선언문에서,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분쟁과 관련된 정책에 대하여, 다음과 같 이 소련 정부의 지도력을 날카롭게 비판하였다(Vaserman/Ginat 1994, 354). 소연방의 지도부는 공화국간의 분쟁을 조장하는 데 일조해 왔다. 그들은 아르메니아 공화국의 정치적 독립의 과정을 고 의적으로 가로막았으며, 동시에 정권 유지를 위해 아제르바

46 중동연구 제25권 1호 이잔 공화국 내 주둔 소련 군대에 의존하는 아제르바이잔 지 도부를 지원하여, 나고르노-카라바흐 내의 아르메니아인과 아제르바이잔인 사이의 무력분쟁을 조장하고 있다. 관련된 각 공화국의 지도부는 그들의 군대와 카라바흐의 상황에 대한 통솔력을 잃고 있었다. 바로 이것이 9월 20-23일에 러시아 연방의 대통령인 보리스 옐친과 카자흐스탄 공화국의 대통령인 나 자르바예프에 의해 시작된 중재자로서의 역할이 실패한 이유 중 하나였다. 1991년 8월의 실패한 쿠데타 이후 소연방에서의 가장 영향력 있고 유명한 정치인인 이 두 사람은 그 지역을 방문해서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대통령 그리고 나고르노-카라바흐 대 표단 사이의 회담을 주선했다. 그 회담 마지막에 발표된 공식 성 명에서 분쟁을 끝내기 위한 첫 걸음이 예견되었다. 그 임무는 애 초에 분쟁에 대한 정치적 해결을 찾는 데 있어서 아르메니아와 아 제르바이잔 대통령의 의지만을 고려했기 때문에, 성공하지 못하였 다. 옐친과 나자르바예프는 분쟁 당사국 대통령들이 나고르노-카 라바흐의 상황을 통제하지 않는다는 것과 양쪽 모두 군사적 해결 을 모색하는 강력한 힘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간과했다. 양국간의 합의는 단지 종이 조각에 불과하게 되었으며 갈등은 계속하여 증 폭되었다. 초기 분쟁시와는 달리, 1992년 러시아는 아르메니아를 지지하기 시작했다. 모스크바의 이러한 심경 변화의 주요 원인은 위에서 알려 진 대로 엘치베이가 이끄는 아제르바이잔 민족전선이 집권세력으로 등장하면서 바쿠가 러시아에서 친 터키로의 정치 노선을 변경했기 때문이었다. 1992년 말에는 아르메니아가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을 모두 장악했고 5월에는 예레반과 바쿠가 미국, 러시아, 터키에 의해 완성된 평화안을 채택하였다는 사실에도 불구하고, 아르메니 아의 공격적 행동은 1993년까지 계속되었다. 터키와 이란은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더 이상의 아르메니아의 공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47 격을 방관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게다가 협상은 별로 효과 가 없었으므로 분쟁은 이후 1993년의 봄과 여름까지 계속되었다. 아르메니아의 공격이 1993년 여름부터 초가을까지 계속되자 나고 르노-카라바흐 군대가 이란 국경으로 진격했다. 이러한 사태에 직 면해서 테헤란 정부는 이란 군대를 아제르바이잔으로 이동시켰다. 이것은 러시아의 강한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가운데, 코지레프는 다 음과 같이 발표했다. 이란의 진의가 무엇이든지 간에, 이 행동은 우 리의 이해 관계와 상충할 수밖에 없다 (Smolansky 1995, 212). 다시 말하면, 러시아는 일찍이 터키와 미국의 개입을 거부했던 것 처럼 이제는 공식적으로 이란에게 옛 소련 국경을 침략하는 행위는 받아들여 질 수 없다는 것과 병력을 철수시켜야 한다는 것을 통보했 다. 트랜스코카서스는 점점 러시아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 시작했다. 러시아는 옛 소연방 남부 지역에서 우월한 위치에 서 다시 국익을 보호할 수 있게 되었고 모스크바가 이 중요한 정치적 승리를 거두는 데 이용한 수단이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었다. 1993년 9월 러시아 외무부는 호다 아프린(Khoda Afarin) 댐을 지킨다는 구실로 이란이 아제르바이잔을 침략한 사실을 강도 높게 비난했고, 이로 인해 양국 관계는 급속히 악화되었다. 그러나 러 시아, 아제르바이잔, 이란은 각기 코카서스 지역의 안정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러시아는 현재 아제르바이잔-이란의 밀접한 유대관계를 강력히 지지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러시아는 확실히 코카서스 지역에 계속해서 군사력을 유지하려 한다. 1993년까지 옐친 정부가 근본적인 외교정책의 접근 방식을 바꾸 었다는 것이 명백해졌다. 기본적으로 친 서구노선을 유지하는 반면, 옛 소연방 공화국들에 대해 훨씬 단호한 입장을 나타냈다. 2월에 옐 친은 러시아가 옛 소연방의 영토에 대해 평화와 안정의 수호자 로 서의 특별한 위치에 있다고 강조했다. 미국이 러시아 판 먼로 독트 린 이라고 언급하면서 그 주장에 반대하고 나서자, 모스크바는 조용 히 그 주장을 거두어 들였다. 그러나 4월에 러시아의 국방장관인 그

48 중동연구 제25권 1호 라체프(Pavel Grachev) 장군은 자국의 안보에 대한 주된 위협은 남 부 지역으로부터 확산된 것이라고 발표했다. 이것은 트랜스코카서 스와 중앙아시아에서의 국익을 적극적으로 지키기 위해 군사적 행 동을 할 것임을 분명히 시사하는 것이다. 그리고 가을에는 코지레프가 되풀이하여 중앙아시아뿐만 아니라 트랜스코카서스 지방이 러시아 영향권 하의 전략적 지역 이라며, 어떤 국제기구나 국가들도 러시아의 옛 소연방 영역에서의 평화유 지 활동을 대체할 수 없다고 발표했다. 이즈베스티야지의 시사 해설 자인 스투루아는 UN 총회에서 연설한 코지레프의 성명에 대해 이 것은 옛 공산사회에서 모스크바의 개입 권리를 주장한 브레즈네프 독트린의 축약판 이라는 적절한 평을 했다(Smolansky 1995, 218). 사실 알리예프와 아르메니아 대통령인 페트로시안이 1993년 9월 말에 모스크바를 방문해서 협상을 했으나 해결책에 도달하는 데는 실패했다. 명백하게 이번 회의에 터키, 이란, 그리고 미국의 대표는 초대되지 못하였다. 그들은 1993년 12월에 CIS 정상회의가 열리는 투르크메니스탄의 아쉬하바드에서 협상을 하는 가운데 나고르노- 카라바흐 사태의 평화적 해결을 지지했으나, 더 이상의 진전은 없었 다. 단념하지 않고 크레믈린은 트랜스코카서스에서의 외교적 주도 권을 얻기 위한 노력을 계속 했다. 그러나 새로운 요인은 협상과정 에 러시아군의 개입을 강요하였던 것이다. 1994년 2월 18일에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나고르노-카라바 흐와 러시아의 국방 장관들이 휴전과 분쟁의 평화협정 단계까지 갔 던 의정서에 서명을 했다. 전 과정을 주재했던 그라체프에 의하면 협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전투원의 교전 중지, 중립적 회랑지대 (10-20km2 정도의 넓이)의 설치, 러시아 장교에 의해 명령받은 모 든 당사국의 옵서버에 의한 35개 통제소의 설치가 그것이다. 이 모 든 조치들은 이미 점령되었던 아제르바이잔 영토로부터 아르메니아 군대의 철수 이후에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모스크바 당국자와 페트 로시안이 동의했음에도 불구하고 바쿠 정부에 의해 거부되었다. 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49 쿠 정부 대변인은 정전과 중립 지역 설치 그리고 협상 등이 아제르 바이잔 영토로부터 아르메니아 군대의 철수와 피난민의 아제르바이 잔 및 나고르노-카라바흐로의 귀환과 동시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1994년 5월 주도적 역할을 포기한 그라체프는 또 다른 모임을 국 방 장관들과 갖게 되었다. 거기에서 그들은 러시아의 계획을 수행하 는 데 있어서 첫 번째 단계를 규정하는 문서에 서명할 것을 논의했 다.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미래의 지위상태에 대한 결정, 대화의 회 복, 포로의 교환, 난민의 귀환, 점령지의 해방 등 일련의 사건 뒤에 그 부대의 철수가 이루어졌다. 그라체프는 또한 통제소의 수를 49 개로 늘릴 것과 그것들이 1,800명의 러시아 군인들에 의해 배치될 것을 주장했다. 그라체프의 평화 정착을 위한 두 번째 시도 역시 실 패로 끝났다.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 군대가 카라바흐로 들어오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단지 국제 감시단의 통제 하에서 러시아의 평화유지군 활동이 이루어질 때만 그라체프의 계획을 따를 것이라 고 했다. 널리 알려진 대로 크레믈린은 그 제안을 거절하였다. 이러 한 상황에서 트랜스코카서스를 돌아보고 나서 옐친의 특사인 카지 미로프는 오스트리아, 스웨덴, 그리고 핀란드와 같이 중립적인 유럽 국가들이 군대를 포함하는 다국적 평화유지군의 창설을 제안하기도 했다. 같은 해 10월, 민스크 그룹은 비엔나에서 회담을 개최하고 나고 르노-카라바흐 분쟁지역에 국제평화군을 파견하기로 합의했다. 이 러한 결정에 러시아 측 관계자는 러시아에 대한 명백한 배타적 행 위 라고 유감을 표명하며, 이는 분쟁지역에 러시아군의 주둔을 배제 하기 위한 계략이라고 비난했다. 즉 이것은 서방세력의 소비에트 영 토 침투로 간주되는데 그 배후에는 아제르바이잔과 서방 석유컨소 시움 간에 오고간 수십억 달러의 거래가 있었다는 것이다. 또한 이 러한 상황에서 러시아는 트랜스코카서스에서의 자국의 국익과 관련 된 영향권을 쉽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라는 것을 의미하기도 했다.

50 중동연구 제25권 1호 1994년 6월 이미 러시아 국방장관 그라체프는 이 지역을 돌아본 후 러시아가 아르메니아에 2개, 북부 아제르바이잔의 레이다 기지에 1 개, 총 3개의 군사 기지를 그루지아에 계속 주둔시킬 것이라는 협정 을 재확인 했다. 이렇게 함으로써 코카서스 지역에 통합 공중방어 시스템을 제공한다는 것이다(Winrow 1995, 106). 1994년 11월 중순, 러시아 외무성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의 외무부 차관간의 회담을 주재하였지만 별 진전이 없었다. 이와 같 은 시기에 민스크 그룹의 대표들은 모스크바에 모여서 여전히 나고 르노-카라바흐 분쟁의 해결책에 관해 논의하고 있었다. 회담이 열리 기 전 러시아 외무성과 국방성은 러시아의 주도적 역할을 가로막으 려 하는 어떠한 계략도 평화유지에는 전혀 도움이 안될 것이다 라는 경고성 발언을 하였다. 그들은 또한 UN, CSCE 그리고 CIS와 다른 관계 기관들에게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해결에 협력해 줄 것을 요 청했다. 그러나 이 회담도 성과는 없었다(Smolansky 1995, 218). 트랜스코카서스 분쟁에 대한 국제적 접근방법의 중대한 분기점은 1994년 12월, 부다페스트에서 열린 CSCE 정기총회에서 마련되었 다. 이 때 CSCE는 OSCE로 재명명되었다. 여전히 모스크바는 서방 측에 옛 소연방의 영역을 러시아의 세력권으로 인식하고 러시아군 을 분쟁 발생지의 평화유지군으로 파견하게 해 줄 것을 요구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 관하여 러시아는 OSCE 자체 내의 평화 유지군을 트랜스코카서스로 파견하는 것에 대해 반대 의사를 표명 했으나 이는 대다수의 회원국에 의해 거부되고 말았다. 대신 그들은 3,000명의 강력한 다국적군을 분쟁지역에 보내기로 결정했고, 이 과정에서 러시아군의 수가 병력의 3분의 1을 초과하지 않도록 했 다. 그러나, 몇 가지 중요한 사안이 미해결 문제로 남아있었는데 그 것은 다음과 같다. 군의 통치위임권, 파견 병력의 정확한 숫자 집계, 병력배치, 그리고 평화유지군의 역할 등이 그에 해당되었으며 가장 중요한 것은 전군의 지휘권이었다. 그 문제의 해결 여부와 해결 방 법은 오직 시간만이 말해 줄 것이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51 EU를 비롯한 서방세력이 코카서스 지역 내의 문제에 개입하는 정도가 심화되자, 동쪽으로 그 세력을 확장해 나가는 NATO와 평 화계획을 위한 파트너십 으로 뭉친 코카서스 지역 내 국가간의 단 결로 인하여 러시아는 점차 코카서스 지역에서 영향력을 잃기 시작 했다. 1997년 6월 말경, 옐친 대통령은 알리예프와 회동하고, 바로 뒤이어 러시아 외무부 장관 프리마코프(Primakov)에게 아제르바이 잔 편에 서서 카라바흐 분쟁의 종결을 도울 것을 지시했으나, 이전 의 여느 협약들과 마찬가지로 얼마 가지 않아 곧 잊혀졌다. Ⅲ.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이란-터키관계 1. 이란-터키 패권관계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의 분쟁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 었고, 특히 소련의 붕괴 이후 더하였다. 과거 이 지역의 분쟁은 CIS 의 다른 국가들뿐만 아니라 터키와 이란까지도 끌어들이도록 하는 위험성을 내포하고 있었다. 트랜스코카서스의 바로 남쪽에 있는 터 키와 이란 양국은 북부 국경인 트랜스코카서스 지역에서 우호적인 독립국가의 출현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앙카라와 테헤란은 옛날부 터 앙숙으로 지내던 러시아와 더 이상 국경을 두고 대치하지 않게 되었다. 국내 문제로 여력이 없는 러시아는 대외정책에 일관성을 갖 지 못했다. 그리고 중재자로서 행동하는 러시아의 능력은 그 자신의 제국주의 국가 이미지 때문에 제한되어 왔다. 아제르바이잔은 그 루지아와 몰도바에서와 같이 모스크바가 이 지역의 영향력을 보존 하기 위해 분쟁을 조장했다고 비난하였다. 1991년 8월 30일, 불과 며칠 전에 모스크바 쿠데타를 승인한 무 탈리보프(Ayaz Mutalibov)가 공산정권을 이끌게 되었다. 그리고 그 는 다른 소연방 공화국들의 선례를 따라,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을 선

52 중동연구 제25권 1호 언하였다. 공산당 해체 뒤, 9월 8일에 치러진 대통령 선거는 여느 선거와 다를 바가 없는 것 같았다. 무탈리보프는 단독 후보로 입후 보하여, 거의 만장일치인 98.5%라는 유효투표로 다시 정권을 잡았 다. 6개월 정도 지난 후인, 1992년 3월, 그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잘못 처리하여 의회에서의 불신임투표를 통해 불명예스럽게 대통령직에서 추방되었다. 설상가상으로 이 분쟁은 아제르 소수민 족에 대한 인종청소로 비화되었다(Swietochowski 1994b, 292). 무탈리보프의 후계자로서, 민족전선의 수장인 엘치베이는 1992 년 6월에 최초의 민주적 선거에 의한 공화국 대통령이 되었다. 그는 지식계층의 전형적인 대표자로서 과거에는 반체제 인사였다. 그는 친 터키 성향과 이란에 있는 아제르 동포와의 통합주의자로서 유명 했다. 그리고 아르메니아와의 분쟁에 대해서는 어느 정도 온건적 입 장을, 옛 노멘클라투라에 대해서는 타협적인 입장을 보였다. 그는 러시아에 관해서 선거공약 중의 하나인, 독립국가연합으로부터 아 제르바이잔의 대표를 철수시키는데 주저하지 않았다. 국제사회에서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을 가장 먼저 승인하였 다. 반면에 이란은 터키의 이러한 성급한 결정을 처음에는 비난하였 으나, 이란은 터키에 완전히 뒤지지 않으려는 의도에서 즉시 아제르 바이잔과의 외교관계를 수립했다. 그 두 국가는 공식적으로는 소연 방 이슬람 공화국들에 대하여 경쟁적 관계에 있다는 것을 부인하였 다. 그러나 어떤 이슈와 프로젝트에 대해서는 협력하려 했다. 이러 한 협력 중 가장 주목 할 만한 예로는 경제협력기구인 ECO가 있다. 터키, 이란, 파키스탄을 포함한 ECO 창설국가들이 1992년에 6개의 이슬람 공화국 즉, 아제르바이잔, 투르크메니스탄, 카자흐스탄, 키르 기즈스탄, 우즈베키스탄 그리고 타지키스탄을 가입하도록 초청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과 터키의 경쟁관계는 계속 현실로 남아 있었고, 그 중요성은 점점 증가했다. 또한 이 두 국가 중 터키가 더 우위에 있었다는 것은 명백했다. 터키가 이들 국가와 먼저 관계를 개선했기 때문일 뿐 아니라, 그 보다는 소비에트 이슬람교도와 같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53 민족 분파였기 때문이다. 그들의 대다수는 언어적으로 투르크어를 말하고, 역사적-종교적 배경을 갖고 있으며, 특이한 아제르인을 제 외하고는 시아파보다 순니파 무슬림이 많았다. 덧붙이자면 터키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과는 판이하게 다른 비종 교적 정치체제를 갖고 있다는 데 자긍심을 가졌다. 그리고, 신생 독 립 공화국의 옛 공산당 엘리트들은 앙카라에 이끌리지 않을 수 없었 다. 터키는 CIS 회원국 대부분에서 경제적 침체현상이 나타나는 것 과 대조적으로 경제를 발전시킴으로써 중앙아시아 무슬림 공화국들 의 모델 국가 중의 하나로 간주될 수 있었던 것이다. 트랜스코카서 스 지역에서, 이러한 모든 요소들 덕분에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의 민 족주의자, 반공산주의자, 반 러시아 전선에게 매력적인 모델이 되었 다(Smolansky 1995, 208). 게다가 옛 연방국가의 지배세력은 비종교적 공산주의자이었고 그 들과의 경쟁관계에 있는 지식인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글라스노스 트의 초기 단계 때 지하 출판물에는 다음과 같은 글을 찾아 볼 수 있 다. 꽤 많은 아제르바이잔 지식계층은, 이슬람 원리주의가 공화국 내에 존재할까? 라는 물음에 대해 명백하게 아니다 라고 대답한다. 이러한 관점에서, 세속적인 터키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에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그들과 가깝게 보였다. 이슬람 국가 중에서, 터키는 역사적으로 가장 현대화된 이슬람 국가로서, 이슬람 세계와 선진 서 방세계를 연결하는 가교 역할을 해왔다. 과거의 범투르크주의가 되 살아난 것을 계속해서 부인하면서도, 터키 정치가와 언론은 아드리 아 해로부터 중국까지 뻗쳐있는 지역의 문제에 대한 우리나라 터키 국가 정책의 책임을 다할 준비가 되어 있다 라고 떠들어댔다 (Swietochowski 1994b, 293). 터키 국가에 있어서 아제르바이잔은 가장 가까운 나라이며, 오랜 오구스주의(Oghusianism)의 요체이며, 중앙아시아의 상업적, 문화 적 팽창의 기반이었고, 아제르바이잔 내의 가장 확실한 정치세력이 친 터키 성향을 띠는 국가였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터키간의 강

54 중동연구 제25권 1호 한 유대관계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서의 터키의 지원을 기대 하게끔 하였다. 터키는 친 아제르 입장을 강하게 채택하고, 공식적 으로 나고르노와 카라바흐 그리고 나히체반에서의 아르메니아의 공격 을 비난했다. 투르크인과 아르메니아인 사이의 역사적 적개심 때문에 터키 정부가 아제르인을 지지하는 건 당연한 것이었다. 이런 배경 하에서 러시아는 공식적으로 중립적 위치를 선언하였으나, 현 실적으로 보장된 동맹국 인 아르메니아 쪽으로 편향된 정책을 취하 였다. 이 분쟁은 또한 영향력을 놓고 경쟁하는 지역 세력인 터키와 이란 의 무대가 되어왔다. 그 두 나라는 오래 지속되는 아제르바이잔-아 르메니아 분쟁이 트랜스코카서스 공화국들의 국경선까지 확산될 것 을 두려워한다. 동시에, 그들은 소련의 붕괴 이후, 이 지역의 세력균 형 공백기에 따른 이익을 얻기를 원한다. 터키는 분쟁의 첫 4년간 완전한 중립을 주장했고 더 나아가서 분 쟁 당사국들 사이에 중재를 시도했다. 그러나, 갈등의 증폭 및 소련 의 붕괴로 인하여 터키는 아제르바이잔을 지지하게 되었다. 이것은 아제르인이 민족적으로, 문화적으로, 그리고 언어적으로 투르크인과 동일하다는 사실에 의한 것이었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그러 므로, 터키 국내의 문제가 되었다. 정치인, 정당, 그리고 개개 시민 은 그들의 터키 형제 동족을 돕도록 정부에 압력을 가하고 있다. 터 키 정부는 매우 조심스러운 정책노선을 걸었는데, 그것은 국제회의 에서 아제르인의 입장을 지지하지만,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군사적 지원을 자제하고 평화적 해결을 계속 촉구하는 것이었다(Vaserman /Ginat 1994, 359). 이 분쟁에서 터키의 친아제르바이잔 정책의 부산물은 이란과의 영향력 경쟁에서 아제르바이잔에 대해 우호적인 조건을 만든 것이 었다. 이란이 아제르바이잔과 경제적 유대관계를 중심으로 몇 가지 중요한 협정에 서명하는 동안, 터키는 아제르바이잔과 주로 정치적 유대관계를 발전시키면서 더 성공했다. 터키와 아제르바이잔은 정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55 치, 무역, 경제, 과학, 기술, 그리고 문화협력 등 12가지 분야에서 조약을 맺었다. 1992년 말까지 100개 이상의 공동 투자 벤처기업들 이 아제르바이잔에 설립되었다. 아제르바이잔 의회가 라틴어 알파 벳을 채용하고 더 나아가 그들의 언어를 아제르바이잔어에서 투르 크어로 바꾸기로 한 결정은 현재 비종교적인 친-터키 세력들의 강 화된 영향력을 반영한다. 2. 아제르바이잔-이란-아르메니아관계 트랜스코카서스와 중앙아시아에서의 3파전 패권국가 중의 하나는 이란 이슬람 공화국이었다. 앙카라에 비교해서, 테헤란의 입장은 상 대적으로 미약한 것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란은 그 지리적 인 접성으로 말미암아 어느 정도의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그러므 로 이란은 한편으로는 아제르바이잔과 중앙아시아에서, 다른 한 편 으로는 페르시아만과 터키의 지중해에 있는 항구 사이의 수송 연결 로 역할을 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갖고 있었다. 게다가 이란인은 민족 적 및 문화적으로 타지키스탄과 관련이 있고, 아제르인과 같이 시아 파 이슬람을 신봉한다. 사실 남부 아제르바이잔은 역사적으로 이란 의 지배하에 있었다. 아무튼 모스크바 및 앙카라와의 경쟁에서 테헤 란은 상대적으로 약한 입장 때문에 그 경쟁국가들보다 평화중재자 역할을 더 끈질기게 하였으나 그 성공률은 미미했다(Smolansky 1995, 209). 그러나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은 이란에게 그 지역에서의 영향 력을 증대시킬 기회를 제공하였다. 한때 아르메니아 정부는 친-아 제르 성격 때문에 터키를 중재자로서 거부했고, 러시아는 사건들을 해결함에 있어서 무력했으므로, 이란이 양측에서 받아들일 만한 합 당한 중재자로 나타났다. 터키와의 외적인 관계와는 대조적으로 아 르메니아는 터키 영향력에 대한 균형추로 보이는 테헤란과 우호관 계를 유지했다. 테헤란 정부가 2천여 만 명으로 추정되는 이란 내

56 중동연구 제25권 1호 아제르 공동체의 감정을 무시하지 않을 것으로 가정하여 아제르바 이잔 정부 역시 이란의 중재에 호의적이었다. 초기에 아제르바이잔 국민은 분쟁기간 동안 이란으로부터의 지원 을 기대했기 때문에 정치적인 이해관계와 자국민의 불안을 인식하 고 애매한 입장을 견지한 이란에게 곧 실망하였다. 아제르바이잔보 다는 오히려 아르메니아를 지지하는 듯 보였던 이란의 불명확한 입 장은 분쟁에서 이란의 공정한 이미지를 부각시키는 역할을 했고, 이 란은 일정한 기간동안 조정자의 역할을 했으나 효과는 없었다 (Alieva 1995, 298). 그러나 이란의 중재 노력의 결과가 기대 이하였던 반면, 아르메니 아는 인상깊은 군사적 성공을 이루었고, 이것은 아제르바이잔으로 하여금 이란을 편견을 가진 중재자로 여기게 했다. 그래서, 두 국가 의 종파적 동질성에 의해서 영향력을 얻으려는 이란의 시도에도 불 구하고, 이란은 이 분쟁의 중재적 역할을 이용하는 데 실패했다. 1993년 가을까지 이란과 아르메니아의 관계는 마치 하나가 된 것 같았다. 이란에는 약 20만으로 이루어진 아르메니아 공동체가 지역 경제에 있어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며 의회에서의 발언권도 보장받 고 있었다. 아르메니아는 이란의 석유 및 천연가스에 연결하여 이란 의 페르시아만 통로를 이용하려 했으며 이란 정부는 아르메니아를 국제사회로 나아가는 경제적 정치적인 통로로 여기고 있었던 것이 다. 페트로시안 대통령 등을 포함한 고위 사절단이 양국간에 상호 왕래했다. 이란이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과의 끔찍한 분쟁에 휘 말려들게 되는데, 한때 기독교 아르메니아와 유대관계를 맺었다는 것은 코카서스 지역에서 이란이 추구한 실용주의 노선의 더욱 확실 한 증거가 되었다. 이러한 유대관계에 고무되어 이란 정부는 더욱 더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분쟁 중재를 더욱 모색하게 된다. 아제르바이잔-이란 양국이 유대관계를 강화하려고 하는 시기, 1992년 초에 이란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지속적 평화적 해 결을 위하여 캠페인을 벌였다. 2월 이란 외무장관 벨라야티는 그 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57 역을 순방한 후,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양국 대통령과 함께 회 담을 가졌다. 아르메니아-아제르바이잔 양국은 테헤란에서 3월 16 일 잠정적으로 휴전을 결정했는데 이것이 소위 테헤란 규약이다. 이 란 부총리 마흐무드 바에지(Mahmud Va'ezi)는 휴전의 세부사항 및 전쟁포로와 사망자들의 시체 교환문제 등을 협의하기 위해 바쿠와 예레반으로 향했다. 이란이 중재한 휴전으로 유엔은 이 지역에 밴스 (Cyrus Vance) 특별사절단을 파견했다. 유엔 사무총장 갈리는 벨라 야티에게 이란이 분쟁을 해결하도록 중재 역할을 해준 것에 대해 감 사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Winrow 1995, 99). 그해 4월 바에지가 다시 한번 그 지역을 방문했고, 이어 5월 8일 바쿠에서는 라프산자니의 주선으로 페트로시안 대통령과 야굽 마메 도프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권한 대행이 한데 모이게 되었다. 테헤란 에서 또 한번 협정이 이루어졌고 그에 따라 휴전은 이제 1주일 앞두 고 있었다. 이 협상으로 아르메니아에 대한 경제봉쇄의 해제, 국제 참관자들의 방문 허용, 포로 교환, 그리고 난민 문제에 대한 합의를 보기로 되어 있었다. 그러나 다음 날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마지막 아제르바이잔 본거지인 슈사가 무너지고 아르메니아 군대가 나히체 반을 위협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다시 한번 바에지는 즉시 달 려갔다. 이란 부총리는 곧 이 공공연한 침략행위 를 공식적으로 비 난하고 이란은 나고르노-카라바흐를 아제르바이잔의 일부이며 이 지역의 어떠한 국경의 변화에도 반대한다고 선언했다. 1993년 후반까지 이란과 아르메니아의 관계가 급격히 나빠지지 는 않았겠지만 이란의 일방적인 중재는 사실상 끝난 것과 마찬가지 였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 양국은 이란의 중재 역할에 고마 워하는 것 같았으나, 나고르노-카라바흐의 아르메니아인 입장에서 본다면 속박 당하는 것이었기에 그들은 간과할 수가 없었다. 엘치베 이는 이란의 중재를 그리 믿지 않았고 처음부터 터키가 이 분쟁에 좀더 적극적으로 개입하기를 바랬다. 그러나 이것은 오판이었다. 1993년 7월 아그담 시는 아르메니아에 의해 정복되었고, 이어서

58 중동연구 제25권 1호 8월에는 Fizuli, 9월에는 이란과 국경 도시인 Goradiz가 각각 아르메 니아의 수중에 들어갔다. 이제 아르메니아는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약 20%를 차지했으며 이로 인해 약 1백만 명의 난민이 발생하였다. 어쨌든 아르메니아 측의 일련의 무력 행동은 성공했고 그 결과 아 제르바이잔 난민은 이란 국경 지역으로 대거 몰려들었다. 이에 1993년 가을 이래 이란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 새로운 입장 을 취하게 된다. 1993년 9월 이란은 예비 차원에서 북부 국경지역 에 군대를 배치하기 시작했다. 이란이 호다 아프린(Khoda Afarin) 댐을 보호하기 위해 아제르바이잔에 군대를 파견했다는 보도도 있 었다. 이란은 남부 아제르바이잔과 북부 이란 사이에 완충지대를 만 들어야겠다고 판단한 것이다. 테헤란 정부는 이란 북부 국경지역의 긴장으로 인해 이란 내의 주류 소수민족인 아제르바이잔인의 악감 정이 유발될 수도 있다는 사실에 놀랐다. 아르메니아와의 관계는 악 화되었고 아제르바이잔과의 유대는 강화되었다. 라프산자니는 1993년 10월 바쿠 연설에서 이란이 아제르바이잔에게 군사적 지원 을 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이슬람 세계는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 이잔을 공격하게 놔두지는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상황이 이러하 다 보니 이란이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사이에서 중재역을 한 다는 것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그러나 1993년 가을 이래로 아르메니아-이란이 냉각 상태이긴 하지만 아르메니아는 여전히 터 키보다는 이란과 협상하기를 원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란은 계속해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평화적 해결 안을 꾸준히 제시할 수 있었다. 특히 1994년 1월과 6월에 러시아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문제 칙사인 카지미로프(V. Kazimirov)는 테헤 란에서 정부 각료들과 자문회의를 열었다. 그러나 이란이 이 문제에 있어 평화유지 세력으로 기능할 가능성은 거의 없어 보였다. 러시아 우위의 CIS 세력은 아마 OSCE의 지시 하에 전문가들과 함께 이곳 으로 파견될 것이다. 이란은 OSCE는 물론 CIS 어느 곳에도 속해있 지 않다. 이란과의 외교관계가 중단되고 아제르바이잔과는 마찰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59 빚고 있는 상태에서 미국의 코카서스 지역 개입은 부득이한 것이었 다. 심지어 실용주의 노선의 라프산자니도 미국과의 친교 회복에 대 비하지 않고 있었다. 미 정부는 계속해서 이란과의 외교관계를 불신 의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1994년 여름 크리스토퍼(Warren Christopher) 미 국무장관은 런던과 부에노스아이레스에서 발생한 對 유태인 폭발사건의 배후 세력으로 이란 정부를 전격 비난했다. 이란의 하타미 정권이 미 국민과의 대화 를 제의하여 미국의 對 이란정책에 변화의 조짐이 보였다고는 하나, 이란 국내에는 1998년 4월에 온건파의 테헤란 시장이 보수파 세력에 의해 체포되는 것처럼, 보수파의 이란정치에 대한 영향력은 막강한 것이다. 이란이 이슬람 공화국 인 이상, 보수파의 주장처럼 이슬람 정치 이데올로기를 쉽게 포기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하타미 정권의 동향과 이 에 응하려는 미국의 對 이란정책의 변화는 이란이 러시아, 중국과의 접근을 시도하고 있고, 미국- 터키-이스라엘 3국의 중앙아시아 코카 서스에의 관여를 경계하는 종래의 유라시아 구도를 점차 변화시켜 나 갈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다. 러시아와 유럽안보협력회의가 해결점을 찾으려 평화구축을 위해 노력하고 있긴 하지만 또한 이 지역에서의 주요한 지역세력 이란을 제외시켜서는 안 될 것이다. Ⅳ. 미국의 정책과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1. 미 국익과 파이프라인 전략 미국을 비롯한 서구 국가는 소연방의 붕괴를 매우 기쁘게 받아들 였다. 그들은 소연방의 영역에 있던 트랜스코카서스를 포함한 중앙 아시아의 신생 독립 공화국들이 서구 세계에 부담이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시간이 지나면 경제적 요소로서 서구 세계에 포함되는 긍정 적인 발전을 할 것으로 보았다. 아제르바이잔, 카자흐스탄 그리고

60 중동연구 제25권 1호 투르크메니스탄은 향후 풍부한 유전과 천연가스의 보고로서 기능할 것이다. 서구의 자료에 근거해 보았을 때, 그 규모와 중요성 면에서 세계 3위를 차지하는, 풍부한 석유자원의 보고로 알려진 카스피해 또한, 코카서스 지역에 해당함으로서 21세기의 에너지 확보라는 전략적 차원에서 미국은 이 지역을 주목해 왔다. 실제로, 미군은 그 지역에 자신들이 주둔할 수밖에 없도록 하는 안보상의 명분을 내세워, 그 지역에서 이란과 러시아를 효과적으로 견제할 수단을 포함한 전략 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실 자체로, 코카서스 지역은 더 이상 러시 아의 영향권 아래에만 있지 않으며, 이란과 러시아의 직접적인 협력 은 오히려 부정적 결과를 초래할 것임이 명백해진다. 미국 기업들의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경제적/상업적 이해 관계는 매우 크다. Pennzoil, Amoco, Unocol, Ramco, 그리고 McDermott 사 등은 국제석유컨소시엄 회원으로서 이들은 정치적 이유로 이란 을 경유하는 파이프라인 건설에 반대하기는 하지만 카스피해의 원 유 개발을 준비 중이다. 카스피해 연안에서는 남쪽의 이란, 북쪽의 러시아, 동쪽으로는 중국, 그리고 서쪽의 흑해나 지중해로 원유 수 출이 가능하다. 러시아가 이것을 저지하는데 실패한다면 경제적 이 해관계로 인해 미국-아제르바이잔 관계는 호전될 것이다. 알리예프 의 유엔 총회 연설 후 1994년 9월 클린턴은 백악관에서 그를 환대 했다. 1994년 9월 20일 Socar는 미국의 5개 석유회사, British Petroleum, 노르웨이의 Statoil, 터키와 사우디의 국영 석유회사 등 으로 이루어져 있는 국제석유합자회사와 계약을 체결하였다. 세기 의 계약 이라 명명된 그 계약에 따르면 아제르바이잔은 대략 수익의 80%를 받을 것이라고 되어있다. 30년 이상의 기간 동안 80억 달러 를 투자하기로 되어 있었던 합자회사 역시 아제르바이잔 측에 보너 스로 3억 달러를 지불하기로 했다. 게다가 아제르바이잔은 추출된 모든 천연가스를 받는 것으로 계약되어 있으며, 이로 인한 수익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61 계약기간 동안 어림잡아 350억 달러에 달할 것으로 추정되었다. 초 기의 하루 석유 생산량은 8만~9만 배럴 가량으로 아제르바이잔의 수도 바쿠와 러시아의 흑해 항구 노보로시스크간의 파이프라인을 통해 수송할 수 있었다. 점차 생산량이 증가하자, 새로운 파이프라 인이 필요하게 되었다. 이러한 엄청난 경제적인 이익에 더하여, 석유협약은 아제르바이 잔에 있어 주요한 정치적 이익 또한 가져다주었다. 앞서 말한 대로 서방세력, 특히 미국을 자극하여 트랜스코카서스의 정세에 관여하 게 하고, 석유협약 체결에 관한 협상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게 했을 뿐만 아니라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해결을 위해 러시아가 트 랜스코카서스에서 지배적 역할을 하는 것을 막기 위한 노력에도 가 담하게 했다. 그래서 원유 거래에 관한 최종 협상은 휴스턴에서 열 리게 되었다. 계약이 체결된 후 클린턴 미 대통령은 미국이 석유 협 약에 있어 항상 공정한 자세로 임할 것임을 알리예프에게 공언했다. 이에 더해 9월 하순에 있었던 클린턴과 옐친의 정상회담에서 클린 턴은 원유거래에 대한 러시아 외무부의 반대 의사를 철회해 줄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대해 옐친 대통령은 이 일은 러시아와 미국의 전 문가들이나 고려해 봐야 할 일이라는 식으로 말하면서 미국 측을 반 격했다(Smolansky 1995, 221). 1994년 9월, 국제석유합자회사와 아제르바이잔간의 석유협약체 결 역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에 평화종결의 실마리를 가져다주 지는 못했다. 모두가 분쟁의 평화적 해결을 계속 주장하고 있지만, 러시아 측은 석유협약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을 계속하면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키고 있었다. 실질적으로는 러시아 측의 양측에 대한 압 력이 알리예프의 역습이라는 결과를 낳았다고 할 수 있다. 알리예프 는 러시아 측이 투옥된 정치범들의 탈옥을 조작한 장본인이라고 비 난하며, 아제르바이잔은 러시아 국경 수비대가 이란 국경지대를 따 라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지 않을 것이라는 사실을 공언하고 나섰다. 미국 역시 새로 체결된 석유협약을 계기로 나고르노-카라바흐

62 중동연구 제25권 1호 대치 정국에 적극 개입하기 시작했고, 이와 관련된 주제가 논쟁거리 가 된 것은 9월 하순경에 있었던 미-러 정상회담이었다. 옐친 대통 령이 러시아군의 이란국경 주둔이 트랜스코카서스 분쟁을 평화적으 로 종결하는 데의 주요 실마리가 될 것이라고 주장한 반면, 클린턴 미 대통령은 러시아는 이 사태에 대해 기존의 국제법적 기준에 따라 야 하며 반드시 UN과 CSCE의 통제 하에서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역설했다. 이에 대하여 러시아의 시사 평론가는 마치 워싱턴이 트 랜스코카서스로 자리를 옮긴 것 같다. 클린턴 정부는 미국의 국익을 적극적으로 추구하고 수호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옐친 대통령에게 알리고 있는 것 같다 라고 표현했다. 트랜스코카서스에서 러시아의 예전과 같은 무제한적 역할 은 이로써 마침내 종말을 고하게 된 것 이다(Smolansky 1995, 216). 이러한 미국의 정책은 북쪽에서부터 이란이 포위되는, 또 다른 결 과를 가져올 수 있으며, 다른 한 쪽에서는 러시아가 숨 돌릴 겨를도 없이 남부 지역을 빼앗길 위험에 처한다. 카스피해 지역을 분할하게 되면, 이러한 상황은 더욱 악화됨과 동시에 카스피해 주변 지역에서 이란이 고립되는 정도도 심해질 것이다. 이러한 쟁점은 러시아 자국 내에서 대두하는 정치 경제 전반의 문제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발칸 반도의 분쟁과 NATO의 옛 유고슬라비아 공습 또한, 같은 맥 락에서 러시아의 큰 개입 없이 일어났다. 다시 말하자면, 러시아를 제외한 정치 구도에 대해 모스크바의 끊임없는 경고에 서구 진영은 아랑곳하지 않았던 것이다. 러시아가 유고슬라비아의 분열과 그에 이은 보스니아 크로아티아 내전, 러시아 정책 반경에서 멀어지는 우 크라이나, 흑해 어귀와 크림 반도 분할 등에 관여하느라 분주한 사 이, 코카서스 지역은 러시아의 영향권 아래에서 분리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단순한 우연의 일치가 아니며, 모두 서구 정책의 산물이었던 것이다. 다시 말하자면 옛 소련이 붕괴하는 과정에서, 미국이 이라 크를 공격한 것과 유사한 논리이다. 중앙아시아나 아제르바이잔 등 이슬람계의 옛 소련 남부제국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63 둘러싼 미 외교정책의 기본목표는 이들 제국에의 이란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반미를 주창하며 서구의 이익과 대립하는 이슬람 원리 주의 의 대두를 막는 것과 동시에 석유와 가스 등 풍부한 천연자원 을 보유하고 있는 옛 소련 남부제국과의 정치적 또는 경제적 연계를 강화하고, 미국의 에너지 안전보장을 확실히 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이와 같은 방침을 추구하였던 미국의 정책에도 점차 변화가 생기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이란과 옛 소련 남부제국과의 경제적 연결을 끊는 것이 얼 마나 어려운 것인지를 미국 정부가 점차 인식하고 나서부터의 일이 다. 이란은 지리적으로 중앙아시아제국과 아제르바이잔에서 해양으 로의 교통로와 또 이들 제국이 자원을 유럽과 아시아에 수출할 때 파이프라인의 루트를 제공할 수 있기 때문에, 이란-옛 소련 남부제 국 관계가 한층 더 발전하게 되었다. 이란이 추구해 온, 경제를 중심 으로 하는 이들 제국과의 연결, 즉 이란을 둘러싼 지리-경제적 요인 이 미국에 의한 대 이란봉쇄정책을 무력화시키고 있다. 미국 의 이란봉쇄가 경제이익의 추구에 역행하는 것은 명백한 일로서, 미 국 이외의 제국이 이란과의 경제교류를 늘려가고 있는 시점에서 미 국의 對 이란 강경노선은 한층 더 역효과를 초래할 것이다. 예를 들면 1995년 4월, 바쿠가 미국의 강력한 압력에 무릎을 꿇 어, 불과 6개월 전 테헤란과 맺은 계약을 파기함으로써 이란의 지역 정책은 좌절되고 말았다. 그 사건은 이란으로 하여금 러시아 외무부 의 입장을 옹호하고 서구와의 오일 협정의 합법성에 도전하게끔 하 였던 것이다(Smolansky 1995, 223). 투르크메니스탄도 1997년 12월에 이란에 천연가스 파이프라인을 개통시키는 등 옛 소련 남부제국은 주변의 중동제국과의 실리적 외 교를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중앙아시아와 코카서스에서 이란 주도 의 이슬람 원리주의 의 영향을 배제한다는 미국 정부의 주장은 자원공급과 수송 루트로서의 이란의 중요성에 따라, 호소력이 반감 되었다.

64 중동연구 제25권 1호 옛 소련 남부제국 독립의 기운을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 탈피하 기 위해 종래 러시아에만 의존하였던 자본송출 루트의 다각화를 꾀 하게 되면서, 그리하여 이란의 지리적 위치는 중요하게 부각되었다. 또 이란은 그루지아와 아르메니아 등 분쟁을 안고 있는 나라와는 달 리 정치 사정도 비교적 안정되어 있다. 그러한 의미에서도 이란 루 트는 자원을 보유하고 있는 옛 소련 남부제국이 적극적으로 검토하 고 있는 대상이 되고 있다. 이러한 이유로 클린턴 정부는 1997년 8월 성립한 이란 하타미 대 통령의 미 국민과의 대화 의 제안에 대해, 이에 응하는 자세를 보인 것이다. 클린턴은 하타미가 대통령으로 선출된 시점부터 이란 의 온건한 정치 지도자에 대한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고 하나, 하타미가 서구문화를 포함하는 이슬람 이외의 문화에 대한 이해를 나타내자, 미국도 상이한 문화와의 대화를 지지한다는 자세를 분명 히 했다. 이란은 옛 소련 남부제국에 대해 이슬람 이데올로기가 아닌, 경제 중심의 현실적인 실리주의 정책을 추구하여 왔다. 원래부터 70년간 이나 소련의 지배를 받아 온 중앙아시아와 아제르바이잔에서는 이 슬람 부흥의 속도가 더디고, 또 독립후의 정치 지도자들 중 다수가 옛 소련 시대의 공산당 엘리트이기 때문에 이란이 주창하는 이슬람 정치에는 관심이 없다. 또 이란 측에서도 라프산자니 전 대통령에 이어 하타미 정권 등 온건파는, 이들 제국을 자극하지 않는 정책을 취해왔다. 이란은 북쪽으로 인접하는 제국의 안정이 자국의 안보에 중요하다고 여겨, 이들 제국에 관련된 분쟁에도 조정자 역할을 하고 있다. 게다가 이란은 옛 소련 남부제국의 정치적 안정과 질서유지를 위해서는 러시아의 영향력을 용인하는 자세를 보이기 시작하였다 ( 宮 田 律 1998, 17). 미국은 이 지역에 있어서 이슬람 국가인 이란의 영향력이 증대하 여 서구의 이익과 적대되는 이슬람 원리주의 가 대두되는 것을 우려한다. 그러므로 미국은 타지키스탄에서 옛 공산주의 세력이 정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65 권을 잡는 것을 묵인하고, 또 체첸 전쟁에서 이슬람세력의 대두를 경계하여, 러시아의 군사개입을 비난하지 않았다. 미국은 타지키스 탄에서 옛 공산주의 정권이 붕괴하면 이란, 아프가니스탄, 파키스탄 에 망명한 이슬람세력이 정권을 잡고, 반서구를 정치의 기조로 삼 아, 그 영향이 다른 중앙아시아 코카서스에도 파급해 나갈 것을 두 려워한 것이다. 이런 미국의 의도에 가장 잘 응한 나라가 아제르바이잔이다. 아제 르바이잔의 알리예프 대통령이 1997년 8월에 미국을 방문했을 때, 아제르바이잔은 이란과 이슬람 원리주의 의 영향이 코카서스에 침 투하는 것을 막는 방파제의 역할을 담당할 것이라는 결의를 명백히 밝혔다. 이러한 아제르바이잔의 자세에 대해 이란은 미국과 이스라엘 의 환심을 사기 위한 것이라고 비난하고 있다( 宮 田 律 1998, 26). 이란은 북쪽의 인접국가인 아제르바이잔이 미국 주도의 안전보장 체제에 속하여 친미, 더 나아가 친이스라엘 국가로 변모해 가는 것 을 경계하고 있다. 이란-아제르바이잔 양국은 시아파 이슬람을 신 봉한다는 공통점이 있기 때문에, 이란은 시아파 종주국으로서 아제 르바이잔에 대한 종교적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다. 그러나 아제르바 이잔 정부는 이란이 주창하는 이슬람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러시아 의 영향에서 벗어나 미국 등의 서방세계에 합류함으로써 경제발전 과 안전보장을 확실하게 하려는 의도가 있다. 그래서 아제르바이잔 은 아르메니아와의 현안이 되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해결도 미국 등의 서구를 배경으로 해결하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아제르바이잔의 자세로 이 지역에 미국 및 이스라엘의 영향 이 미치기 때문에 이란이 아제르바이잔의 외교정책에 주목하고 있 는 것에는 재론의 여지가 없다. 1997년 9월 초순, 카라바흐에서 열린 대통령 선거에서 독단적인 코차리안이 아르메니아의 대통령으로 당선되었고, 이는 아제르바이 잔을 뒤흔들어 놓는 결과를 가져왔다. 카라바흐 외무부 장관 구카시 안(Ghukasian)은 카라바흐가 아제르바이잔 영토의 일부가 될 수 없

66 중동연구 제25권 1호 다고 선언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미국 의회는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원조를 보류하는 한편, 아르메니아에 대한 경제적 지원은 확대하는 것으로 합의했다.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당황하는 것은 당연히 아제르바이잔의 정부 관료들이었다. 카라바흐 분쟁은 남부 코카서스 중심지와 코카서스 서부의 아부 하지아 지역에서 발발한 연유로 흑해에 닿는 아제르바이잔 송유관 경로의 안전성을 위협한다. 그러므로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은 가 능한 한 단기간 내에 카라바흐 분쟁을 해결할 방법을 강구하며, 이 목적의 달성을 위해서 그는 노골적으로 미국에 도움을 청해왔다. 이 와 마찬가지로, 그루지아 대통령인 세바르드나제(Shevardnadze)도 1997년 방미 기간 중, 미국이 아부하지아 문제의 중재자로 나서줄 것을 요청했다. 그는 그 후에도 미국을 방문할 때마다 중재해 줄 것 을 잊지 않고 청했다. 그러나 정작 미국의 반응은 이렇다할 만한 것 이 없었다. 알리예프와 세바르드나제 두 대통령은 모두, 석유 수출 을 통해 외화의 유입을 촉진시켜 그들 국가가 경제 군사적 발전을 이루는데 발판이 되는 안전성을 확보하고 싶어한다. 그들은 또한, 빼앗긴 영토를 되찾길 원한다. 이러한 반면, 미국은 코카서스 지역 의 자원에 마음이 있다기보다 어떻게 하면 코카서스 지역 내에서 자 신들의 입지를 확고히 할 것인가에 관심을 집중시킨다. 중앙아시아의 산유국들의 경우는 정치, 경제 두 가지 측면에서 미 국의 관심의 대상이 되고있다. 그러나 미국은 빼앗긴 영토를 재탈환 하는 것은 빠른 시일 내에는 불가능하며 카라바흐를 지나는 석유 수 송 파이프라인 건설은 여전히 먼 훗날의 이야기일 뿐이라고 말한다. 아르메니아인은 그러한 파이프라인 건설을 수락하지 않은 것임을 명확히 해왔다. 옐친은 코카서스 지역이 러시아의 국가 안보와 직결 된 전략적 위치임을 강조하면서, 미국의 코카서스 분쟁 개입에 경고 했다(Amir-Ahmadian 2000, 504). 1999년부터 아제르바이잔과 그루지아를 거쳐 흑해에 이르는 이 동 경로를 통해 원유 수출이 시작된 것은 미국과 유럽연합이 그 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67 역에 정치적인 의도를 투영하고, 이미 짜여진 각본에 따라 움직이도 록 하는 그들의 결의가 상당히 확고한 것임을 드러낸다. 가장 신속 하면서도 안전하고 또한 가장 경제적인 운송 경로가 이란을 통한 것 임은 누가 보아도 명백한 사실이다. 그러나, 그 원유 수출 경로에서 이란과 러시아, 아르메니아는 제외되었다. 터키에 닿는 원유 수송 경로의 경우에도, 터키에서 시작하여 지중해 지역에 이르는 경로가 아르메니아와 이란을 통과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말할 필요도 없는 데도 말이다. 2. 미국정책 트랜스코카서스에 대한 제3자의 개입을 논의할 때 서방세계에 대 해 언급하지 않는다면 그것은 불완전한 것이 될 것이다. 1993년 초, 전반적으로 서방은 모스크바처럼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결과 에 대해 큰 관심이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았다. 유고슬라비아 사태 에서 보여주었던 무기력 때문에 서구 열강은 아르메니아-아제르바 이잔 전쟁에 개입하는 것을 원치 않았다. 이들 국가는 유엔안보리 회의에서 강한 어조로 결의안을 통과시키는 방법으로 그들의 우려 를 표시하였고 유럽국가들에 의해 계속되어 온 외교적 노력을 지지 하였다. 그러나 서구의 이익이 크게 존재하지 않는 트랜스코카서스 에 대한 군사적 개입은 준비되지 않았다. 냉전 후 미국의 외교관계에 있어서도 코카서스 지역의 중요성은 상대적으로 그리 높은 것 같지 않았다. 미 정부는 중앙아시아-코카 서스 지방이 러시아의 영향력 하에 있다는 것을 묵시적으로 인정하 고 있다. 러시아의 안보 이해관계를 알고 있는 클린턴 행정부는 이 지역이 불안정하지 않다는 가정 하에 러시아의 영향력을 용인하려 는 듯하다. 코카서스 지역에서 이와 같은 일에 대한 미국, 보다 일반 적으로는 서방의 우려로 유엔안보리는 이전에도 그루지아에 러시아 평화군을 파견했었다.

68 중동연구 제25권 1호 카라바흐 전쟁은 점점 모든 아제르바이잔 지도자의 운명에 영향 을 미치는 지배적인 요소가 되어가고 있다. 1992년 10월 자유지원 법안 3) 의 제907조의 발효로 미국과 아제르바이잔의 관계는 심각하 게 악화되었다. 미 의회는 아제르바이잔의 아르메니아 봉쇄를 이유 로 공식적인 모든 인도주의적인 對 아제르바이잔 원조를 금지했다. 당연히 이는 엘치베이 정부의 지위를 취약하게 만들었다. 아르메니 아 또한 나히체반을 봉쇄했지만 말이다. 원조금지는 분명히 고도로 조직화된 아르메니아의 對 미국 로비활동의 결과였다. 1992년 러시아와 미국, 터키를 추진국으로 하는 CSCE의 민스크 그룹이 창설된 이후에 모스크바는 바쿠와 예레반에 미국-러시아 합동 외교사절을 급파할 것을 제안했다. 미 국무성은 그 제안을 거 절하였는데, 이것은 러시아로 하여금 미국이 동등한 협력자 관계에 관심이 없다고 결론짓게 하였다. 대신 워싱턴은 모스크바가 비공식 적인 3국 협력체제인 미국, 러시아, 터키 트로이카 체제의 형성에 동의할 것을 요구했다. 이런 조정 과정으로 미국은 중재자로서의 역 할을 하길 원했다. 알려진 바와 같이 터키와 미국이 모스크바와 동 등한 관계에서 협력하는 것을 꺼려한 사실로 인하여 크레믈린 당국 은 주도권을 잡고 트랜스코카서스 지역에서의 지배적 위치를 재 구 축하는 또 다른 자극제 역할을 했을 지도 모른다. 1993년 후반부에 옐친의 강경해진 대외정책의 일환으로서 모스 크바는 나고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워싱턴의 입장에 대해 공개적으 로 비판을 가하였다. 특히 외무부의 익명의 관리에 의하면 특히 미 행정부는 최근 러시아 외교정책에 대해 불만족을 나타내 왔다. 이것 은 미국과 그 동맹국들이 러시아의 트랜스코카서스에 대한 영향력 이 강화되는 것에 분개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러시아 외교정책 의 근본은 적대관계를 청산하고 다른 중요한 문제, 예를 들면 난민, 그리고 아르메니아의 경제적 봉쇄 같은 문제가 전쟁이 끝나기 전에 는 해결될 수 없다는 가정 하에 휴전을 성립시키는 것이었다. 이와 3) Freedom Support Act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69 반대로, 미국과 유럽의 동맹국은 전체 평화정착 해결안을 냉정하고 학문적으로 개진할 뿐이었다(Smolansky 1995, 210). 그러나 클린턴 행정부는 아무런 제지 없이 팍스-러시아 (Pax-Russia)가 코카서스 지역을 휩쓸게 해서는 안 된다며 직접적 인 연관이 없다고 하더라도 유럽안보협력회의를 이용, 러시아를 계 속 지켜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미 정부는 현재 이란-아제르바이 잔 유대가 지역 안보에 중요하다는 사실을 좀더 확실히 인식해야 할 필요가 있다(Winrow 1995, 108). 1993년 5월 미국은 러시아/터키와의 3자 위원회에 즉각 개입하 여 나고르노-카라바흐 지역 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해결책을 찾 고자 했다. 그러나 물론 미국이 이 민스크 그룹의 10개 회원국 중 하나라는 사실을 고려해야 한다. 5월의 미국-러시아-터키간의 합 동 평화안은 비록 나고르노-카라바흐의 당사자이긴 하였지만 아제 르바이잔이 아닌 아르메니아에 의해서 거부되었다. 이러한 가운데 아제르바이잔 주재 미국 대사관은 두 나라 사이에 있던 잘못된 인식의 벽을 허물어 나갔으며, 1993년 5월 아제르바이 잔 의회 대변인 겜바르(Isa Gambar)가 이끄는 대표단이 미국을 방 문하기에 이르렀다. 대표단은 미국 의회와 국무부에서 회의를 가졌 으며, 아제르바이잔 대사관 개관식에도 참석하였다. 이 방문은 두 나라의 관계 변화의 시작처럼 보였고, 새로운 아제르바이잔 정부에 대한 미국 정치가들의 태도에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켰다. 1993년 9월, 스트롭 탈보트가 이끄는 미국 국무성 대표단은 바쿠 를 방문하였다. 알리예프 대통령과의 회담에서 그는 방문의 가장 큰 목적이 이 지역에서의 평화 정착에 도움을 주고, 아제르바이잔의 독 립을 지지하는 것이라고 말했다. 알리예프는 이에 화답하여, 민주주 의적 발전, 독립, 시장경제, 그리고 평화적인 관계의 주요한 원칙을 고수할 것임을 탈보트에게 확인시켰다(Alieva 1995, 305). 알리예프의 모스크바의 평화 중재안에 비타협적인 태도는 1994 년 중반까지 미국을 위시한 서방 세계로부터 확실한 지지를 받았던

70 중동연구 제25권 1호 것이다. 5월경 일련의 협상이 실패로 끝나기 전에 아제르바이잔 주 재 미국 대사가 카라바흐 사태를 조정할 수 있는 어떤 계획도 민스 크 그룹을 통해서만 수행되어야 한다 라고 주장하자, 이에 모스크바 는 불쾌함을 표시했다. 이것은 분쟁의 관련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서 방 세계 역시 그 지역 이익에 대한 야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뜻 한다(Smolansky, 1995, 214). 1994년 8월 클린턴이 페트로시안 대통령에게 대대적인 원조를 약속한 이후 아르메니아는 미국의 지속적인 원조를 받고 있다. 현재 아르메니아에 대한 미국의 1인당 원조액은 옛 소비에트공화국들 중 최고 수준이다. 미국과 터키 등 그의 맹방들은 카라바흐 분쟁의 평화로운 종결에 지대한 관심을 보인다. 제이한-바쿠 사이의 석유 수송관 건설 계획 달성은 코카서스 지역의 안전이 확보된 다음에야 가능하다. 현재의 상황이 미국에게 적지 않은 도전이 되기 때문에 이러한 정황에서 미 국과 터키, 아제르바이잔은 분쟁을 잠재울 수 있는 갖은 방법을 모 색하고 있다. 아제르바이잔은 미국이 아르메니아에 대한 압력을 더 욱 더 가함으로써, 그들이 현 점령지에서 철수하여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반환하도록 힘써 줄 것을 바란다. 그런 중에, 아르메니아가 러시아와 동맹했다는 사실과 미국 내에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하 는 아르메니아의 로비활동은 아제르바이잔의 앞길을 막는 큰 골칫 거리가 아닐 수 없다. 아제르바이잔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천명하면 서도 미국은 아제르바이잔에 대한 원조를 늘리는 것을 꺼리는 반면, 미국의 의회에서는 2000년 對 아르메니아 원조 금액을 8천9백6십만 달러로 증가 책정하여 아제르바이잔의 불만을 샀다. 1998년은 코카서스가 소란으로 얼룩졌던 한 해였다. 아제르바이 잔과 미국의 친밀한 관계와 아제르바이잔의 석유산업에 투자하는 미국 기업들의 움직임과는 별개로 미국은 카라바흐 분리주의자들에 대한 자금 지원 규모를 1천2백5십만 달러로 증액하였다. 게다가, 아 제르바이잔에 대한 미국의 원조를 정지하여야 한다는 내용의 미 의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71 회 법안 제907조를 무효화하라는 아제르바이잔의 반복되는 요구를 미국은 무시하여 왔다. 오히려, 미국은 아르메니아에 경제 지원을 7 천9백만 달러 더 늘렸다. 이러한 양상은 모두 아르메니아 로비스트 들의 활발한 활동의 결과이다. 다수의 미 의회 의원들은 아제르바이 잔 정부에게 카라바흐 분리주의자와 직접적인 협상에 나설 것을 강 력히 권고하는데, 사실 이는 카라바흐의 독립을 승인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다. 이러한 전개 양상은 결국, 알리예프의 정책이 잘못되었 다는 신랄한 비판을 불러 일으켰다. 1999년 11월, 이스탄불에서 OSCE의 회담이 거의 끝나갈 무렵, 많은 국제 저명인사들은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 양국 사이의 평화를 이끌어 내려고 노력했다. 미 국무장관의 터키 방문, 터키 대 통령의 바쿠 행과 그에 뒤이은 알리예프와의 회합 등의 시도는 민스 크 그룹이 제안한 강화 조건을 알리예프가 준수할 것을 공고히 하기 위함이었다.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의 대통령이 한 자리에 모인 OSCE의 11월 이스탄불 정상회담은 카라바흐 분쟁의 해결이 거론된 최초의 회합 장소인 듯했다. 그러나, 양국 정상간의 회담을 비롯해 클린턴 대통령의 단독 회담까지 개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실질적인 성과 는 얻지 못했다. 그렇지만, 코차리안 대통령이 코카서스 지역에 위 치한 국가들과 더불어 안보방위체계를 조직하겠다는 안( 案 )을 내 놓기도 하는 등의 이득이 있기도 했다. 이러한 종류의 정책이 평화 를 되찾고, 카라바흐 분쟁을 해결하는데 일조를 할 것이며, 결국에 는 분쟁 당사국 모두에게 이익을 가져오게 되리라는 것이 그의 견해 이다. 마찬가지로 알리예프 대통령 역시 미국, 터키, 아르메니아, 아 제르바이잔, 그루지아, 그리고 러시아가 참여하여 코차리안이 제안 한 것과 유사한 조약을 체결해야한다고 강조했다. 미국은 비록 조약 체결국으로 고려되고 있기는 하지만, 이 문제의 직접적인 관련 당사 국이 아니며, 이 지역적 구도에 편승하길 원하는 것도 아님을 확실 히 밝히는 발언을 한 바 있었다(Amir-Ahmadian 2000, 495).

72 중동연구 제25권 1호 전반적으로 볼 때, 이스탄불 회담은 카라바흐 분쟁과 아르메니아 -아제르바이잔 양국 평화와 관련된 만족할 만한 성과를 얻지는 못 하였다. 결국, 분쟁의 진정한 종식은 연기되었고, 이 지역의 앞날은 불투명한 상태로 남아 있다. V. 카라바흐 분쟁에 있어서 UN과 NATO 1. UN 아제르바이잔 정부는 아르메니아의 공격을 비난하고 미국과 UN 에 중재를 요청하였다. 워싱턴은 전쟁 행위의 확대를 비난하였고, 평화적 해결을 위한 노력을 재개하였다. CSCE의 52개국 회원국에 의해 평화적 해결안이 논의되었으나, UN으로부터 아르메니아의 공 격에 대한 비난을 끌어내려던 아제르바이잔 정부의 시도는 UN 안 전보장이사회의 5개 상임 이사국 중 러시아, 프랑스, 미국에 의해 거부되었다. UN을 통한 평화적 해결의 전망이 희미해지자, 엘치베 이 정부는 CSCE를 통한 분쟁의 해결에 초점을 두었다(Alieva 1995, 294). 온건한 지도자로 알려진 두 공화국의 지도자 즉, 아르메니아의 페 트로시안과 아제르바이잔의 엘치베이는 CSCE의 민스크 그룹의 틀 속에서 기나긴 협상의 과정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일련의 합의는 아 르메니아 측이 새로운 공격을 감행함으로써 깨어졌다. 1993년 4월, 5개국의 대표들은 아르메니아 군대가 켈바자르 지역을 점령하는 동 안 그 분쟁에 관한 논의를 위해 제네바에 모였다. 1993년 7월, CSCE의 민스크 그룹의 의장인 라파엘리(M. Rafaelli)는 아르메니 아 군대에 의해 점령되었던 아제르바이잔의 아그담 지역을 방문했 다. 마레스카(John Maresca) 대사에 따르면, 켈바자르 지역의 점령 으로 인해 아르메니아인은 그들의 군사적 행동의 정당화 수단으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73 써 자국의 방어라는 명분을 더 이상 사용할 수 없었다. 또 그 전쟁 은 위협을 느낀 소수민족의 방어가 아니라, 아제르바이잔을 파괴하 는 전쟁이었다고 했다. 1993년 8월부터 10월까지, 아르메니아 군대 는 다섯 지역 4) 을 더 점령하였다. UN 안전보장이사회는 아르메니아 군대의 점령지로부터의 즉각적인 철수를 요구하면서, 4개의 결의안 -822, 853, 874, 그리고 884호-을 채택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결의안은 아르메니아 측에 의해 무시되었으며, 전 혀 이행되지 않은 채, 그 기나긴 협상의 과정은 막다른 골목으로 가 는 것으로 보였다. 대부분의 합의서와 휴전협정이 파기되었다는 사 실은 전쟁에 의해서만이 분쟁이 해결될 수 있다는 양국 정부의 믿음 을 보여준다. 아르메니아 측은 협상에 있어서 많은 부분을 차지할 수록 그 결과로서 얻는 것이 많아진다 라는 원칙에 근거하여, 협상 에서 좀더 유리한 고지를 점하기를 원한다. UN 결의안 822호가 처음 발표된 것은 1993년 4월 30일이었다. 그것은 아르메니아가 아제르바이잔의 켈바자르 지역을 점령한 뒤의 일이었다. 그 결의안은 양국이 각각 영토 보전 원칙을 준수함과 동 시에, 분쟁 당사국이 곧 정전을 합의 도출하고 인권을 존중할 것을 주요 골자로 하고 있다. 또한 양국은 CSCE의 민스크 그룹 체제 안 에서 서로의 상이한 견해를 조정해야 한다는 것도 명시되었다 (Amir-Ahmadian 2000, 512). 1993년 7월 29일 두 번째 결의안이 발표되었다. 아르메니아가 아 그담 지역을 빼앗은 후에 발포된 결의안 제853호였다. 그것은 두 나라 사이의 분쟁이 계속될 것을 염려하는 내용이 담긴 민스크 그룹 보고서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결의안이었다. 이 결의안은 양국이 모 두 인권을 존중해야 하며, 정전을 이끌어 내야 한다고 밝혔다. 또한, 결의안 822호에 명시된 조항을 이행할 것을 촉구했다. 주민들의 강 제 이주를 심히 염려하여, UN은 두 나라에 모두 우선적으로 상대방 의 영토 보전 원칙을 준수할 것을 촉구했고, CSCE 테두리 안에서 4) Fizuli, Gubadi, Zangelan, Goradiz, Djabrail

74 중동연구 제25권 1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더하여, 아르메니 아는 아그담으로부터 군대를 철수시켜야 한다고 했다. 타 국가들도 교전 양측에 무기를 지급하는 일이 없도록 할 것을 당부했다. 분쟁이 돌발하자 아제르바이잔 동부에서 새로운 난민들이 속출하 였다. 이에 따라 1993년 10월 14일, 또 다른 결의안 874호가 나온 다. 이 문서에서 UN은 1993년 10월 8일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양국 고위급 회담을 언급하면서 두 나라가 협상을 계속하여, 평화 구축과 분쟁 종식을 위해 끊임없는 노력을 쏟기를 바란다는 입장을 표명하 였다. 그 뿐만 아니라 다른 결의안과 마찬가지로 이 결의안 또한 분 쟁에 얽힌 양측이 CSCE의 민스크 그룹 후원 하에서, 상호간에 영토 보전 원칙을 준수하여 정전을 이끌어 내어야 함을 명시했다. 네 번째 결의안 884호는 1993년 11월 11일, 아르메니아가 Zangalian을 비롯한 카라바흐 남부 지역, 그리고 아락세스 강과 이 란 국경에 이르는 지역의 시민을 공격하자 그에 뒤따라 발포된 것이 었다. 이 전쟁 기간 동안 점령 지역과의 통신이 두절되었고, 이란과 맞닿은 아르메니아의 국경은 원래의 40km에서 120km까지 확대되 었다. 이란과 접한 이 국경선은 아제르바이잔과 아르메니아를 연결 하는 국경 지점부터 동부에 위치한 Huradiz까지 펼쳐졌다. 결의안은 교전국들이 민스크 그룹의 지도 아래 회담을 재개할 것과 이전 관련 결의안에 명시된 조항을 준수할 것을 다시 한 번 촉구하는 내용이었 다. 아르메니아는 Zangalian 지역과 Huradiz시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을 요구받았다. 모든 결의안에서, 아르메니아는 침략국으로 명확히 명시되지는 않 고 점령군 으로 표현되었다. 또한 그 어떤 결의안도 전쟁의 발발과 전개과정에 대해서 영향을 미치지 못하였던 것은 특이한 경우이다. 이러한 일련의 침략은 여러 차례 UN 안보리 결의안이 통과되었음에 도 불구하고 계속되었다. 이 결의안은 아르메니아 군대가 최근 점령 한 아제르바이잔 영토에서 즉각적으로, 완전하게, 무조건적으로 철 수할 것을 요구하고 있으며, 아르메니아가 이러한 요구에 응하지 않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75 을 경우에는 적절한 조치가 있을 것임을 경고하고 있었다. 아르메니 아의 공격적인 행동이 계속되자 터키와 이란은 계속 경고를 했고 결 국 Goradiz가 점령된 후에는 이란 군대가 아제르바이잔에 실제로 침 입을 했다. 이것은 모스크바의 강한 반발을 불러 일으켰다. 12월 중 순에는 아제르 군대가 점령지 일부에 대해 거주하던 아르메니아인을 쫓아내기 위해 공격했으나, 1994년 초에 흐지부지 끝나 버렸다. 1994년 10월말 UN 사무총장 갈리는 바쿠와 예레반을 방문하고 평화유지를 기본으로 한 아래와 같은 원칙을 천명했다(Smolansky 1995, 217). * 아제르바이잔의 영토를 보전하고 유지한다. * 아제르바이잔 국경을 불가침 지역으로 선포한다. *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해결 방법의 하나로 무력사용을 금지 한다. * 군사작전 수행 중 불법적으로 빼앗은 모든 아제르바이잔 영토 를 해방한다. 갈리 유엔 사무총장은 이 원칙이 UN 안보리 결의안 822, 853, 874 그리고 884호에 의거하여 만들어진 것임을 밝혔다. 아제르바이 잔 측은 이에 대해 충분한 이해를 표명했으나, 이러한 문서상의 원 칙이 이행된 적이 한 번도 없음에 대해 우려를 나타내었다. 또한 아 제르바이잔 측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의 종결을 위해 국제평화 유지군의 창설을 추진하고 있는 유럽안보협력회의에 대해 지원해 줄 것을 UN 측에 요청했다. 알리예프는 특히 아제르바이잔 측의 입 장을 다시 한 번 밝히면서 이와 더불어 아제르바이잔 내의 아르메니 아인 거주자에게는 아무런 피해가 없도록 보호하겠다고 덧붙였다. 아르메니아 측은 유엔 사무총장의 견해나 요구에 거의 무관심했다. 실패로 끝난 여러 번의 평화중재 시도와 3번 이상의 UN 안보리 결 의안 덕분에 마침내 1994년 후반에 모스크바에서 휴전 중재안이 타 결되었으나, 당사자들의 이해관계 문제는 해결될 기미가 보이지 않았 다. 한 치도 양보할 수 없는 원칙의 차이 때문에 협상에는 어려움이

76 중동연구 제25권 1호 많았다. 그 원칙은 다음과 같은 것이었다(Smolansky 1995, 203). * 아제르바이잔 군대에 의해 확정된 국경에 대한 불가침의 원칙 * 민족자결권 (아르메니아 측이 강조) * 소수민족의 독립된 존재로서의 권리: 즉, 국가의 지위 (아르메 니아 측이 강조) * 개인의 인권 존중 및 보장을 위한 필수조건으로서 안정을 이룰 필요성 그러나,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 조정 실패의 주요 원인은 각 당 사자에게 상호간의 합의 가능한 협상안을 만들려는 정치적 의지가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협상을 중재하기 위한 모 든 시도가 실패로 끝나는 것이 다반사였다. UN과 특히 민스크 그 룹, 카자흐스탄의 대통령 나자르바예프의 알마아타 중재안, 그리고 미, 러, 터키, 이란에 의해 이루어진 중재안 역시 실패로 끝났다. 가 끔 공통의 의견을 보였던 이러한 의안들의 주요 문제는 결정된 사항 을 채택하고 시행하는데 소홀히 했다는 것이다. 2. NATO 코카서스 지역의 중요성은 그 자체로 전략적 성격을 띠는 지리학 적 위치에 기인한다. 이 지역의 전략적 중요성에 대한 이해 없이는, 카라바흐 분쟁에 관하여 면밀히 분석하기는 어렵다. 코카서스는 냉 전시대에 양대 군사 동맹의 교차로였다. NATO와 바르샤바 (Warsaw) 조약으로 구성된 양 진영은 코카서스의 중심부에서 대치 했다. 흑해의 동해안과 카스피해의 서해안을 연결하는 코카서스의 자연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이 지역은 공격에 쉽게 노출되는 취약성을 가 진다. 이란과 카스피해를 둘러싼 지역에 닿으려면 반드시 코카서스 의 회랑 지대를 거쳐야 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이유로, 유럽이 이 지 역에 펼치는 모든 지상 군사 작전은 코카서스에서 실시된다.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77 사실상, 코카서스는 러시아의 직접적인 영향력 아래 있다. 이러한 배경에 힘입어, 제정 러시아와 소련 시절, 코카서스는 정치 경제적 면에서 상당히 중요한 지역으로 간주되었다. 코카서스의 산맥은 남 부와의 자연적인 경계를 형성하여, 러시아에 이르는 전략적 요충지 이다. 이러한 사실만으로도, 러시아는 코카서스 대( 大 )산맥과 일치 하는 남부 국경 방어에 매우 세심한 주의를 기울인다. 그루지아와 아제르바이잔 두 국가는 산맥의 남쪽에 위치하며, 그 나머지 5) 는 산 맥의 북쪽으로 자리잡고 있다. 카라바흐 지역은 산맥의 남쪽에 위치 해 있어서 러시아와 서방 모두에게 전략상 중요하다. 아제르바이잔 과 그루지아는 나토에 가입하길 원해왔으며, 이들이 NATO와 유럽 회의 6) 의 회원국으로 가입할 경우, 이 지역은 미국의 영향권으로 편 입하게 된다. 이렇게 되면, 러시아와 아르메니아의 관계는 악화될 것이다. 또 한편에서는, 아제르바이잔을 지나는 이란과 러시아 사이 의 지상 연락망 또한 그에 못지 않은 악영향을 받게 된다(Amir- Ahmadian 2000, 498). 아제르바이잔은 NATO의 안전보장체제에 참가하기를 바라고 있 으므로 서방제국의 강한 관심의 대상이 되고 있다. 1994년 5월 4일 아제르바이잔은 NATO의 평화계획을 위한 파트너십 프로그램에 참가하였다. 1997년 2월 소라나 NATO 사무총장이 바쿠를 방문했 을 때,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이 NATO에 참가할 의향이 있음을 공식적으로 전했다. 알리예프 대통령은 아제르바이잔이 유 럽의 동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확대 NATO 에 포함되는 것 은 당연하다는 생각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아제르바이잔은 독립국가 연합국 중에서 NATO의 일 원이 되고자 하는 최초의 국가이다. 알리예프는 NATO의 가입을 통 해, 잃어버린 영토를 되찾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 이에 대해 러 시아 국방장관은, 아제르바이잔의 NATO 가입이 그들의 영토 재탈 5) Dagestan, Chechenya, Ossetia, Kabardabalker, Qarachai Cherex 6) Council of Europe

78 중동연구 제25권 1호 환에 그리 큰 도움이 되지 않으리란 사실을 깨달아야하며, 러시아와 협력 구도를 이룩하는 것만이 좀 더 빨리 문제 해결에 접근해나가는 길임을 시사했다. 1999년 2월 초,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 고문, 콜리자데는 기자회 견에서 자국 영토에 NATO 군사 기지의 설치를 희망했다. 콜리자데 는 아제르바이잔의 국가 안보가 위험한 상황이므로, NATO와 터키 그리고 미국의 군사적인 보호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또한 아제르바 이잔은 러시아의 의도를 신뢰하지 않으며, 만약 러시아가 아제르바 이잔과 터키를 상대로 하는 전쟁을 유도하려고 한다면 그 의도를 명 백히 드러내야 할 것이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러시아의 의심스러운 움직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터키 정부는 그에 대한 적절한 조치를 취하길 꺼리고만 있다고 불만을 토로하기도 하였다. 아제르바이잔 의 관료들은 자국의 정치 군사 경제적 안전 보장을 위하여 미국, 이 스라엘, 터키와 같은 탈( 脫 )지역적 동맹의 도움을 간절히 바란다. 아제르바이잔은 군비를 증강하여 러시아와 이란 그리고 아르메니아 에 직접적인 도전을 하고자 할 것이다. 이러한 현 상황을 두고, 알리 예프는 카라바흐 라는 지렛대를 이용하여 그의 정치적 입지를 굳히 려고 할 것이다. 터키와 NATO에게 군사 기지를 제공하겠다는 발상은 러시아로부 터 군사적 지원을 받고 있는 아르메니아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에서 나온 것이다. 1999년 3월, 아제르바이잔 국방장관과 미국 대사 그 리고 대사관 무관이 모인 회담에서 아제르바이잔 국방장관은 카라 바흐 분쟁의 해결이 자꾸만 미루어지는 것은 최근 MIG 29전투기와 S-300 미사일을 러시아로부터 사들이는 등 아르메니아가 군사력 강화를 추진하고 있는 것에 기인한다고 발표했다. 코차리안이 실권을 장악하게 되자, 아르메니아의 비타협적인 자 세는 더욱 심화되었다. 아르메니아는 그들이 지역 내에서 막다른 골 목에 다다랐다는 사실을 알아차렸고, 그러한 이유로 그들은 러시아 와의 협력관계를 강화하였다. 아제르바이잔과 그루지아가 서방진영,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79 그 중에서도 NATO에 의지하는 것은 아르메니아가 위협을 느끼기 에 충분했다. 그러나 아르메니아 역시 NATO에 가입할 경우, 그들 은 현 점령지를 아제르바이잔에 반드시 반환하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미 언급한 바 있듯이, 아제르바이잔은 빼앗긴 영토의 회복을 위해 서 서방세계에 호소하고 있다. 1999년 4월 17일 Baku-Supsa 사이의 송유관 건설의 탐사를 마 친 후, 아제르바이잔은 석유 수송로를 지켜줄 탈( 脫 )지역적 방위군 의 지원을 요청했다. 아제르바이잔 정부가 터키와 NATO를 불러들 여 Abeshrun 반도에 군사 주둔을 요청한 것도 같은 맥락에서 이해 할 수 있다. 반도의 전략적인 위치 상, 아제르바이잔의 요구에 응하 게 될 경우, 반도를 섭렵한 군사력을 가진 나라는 카스피해의 유전 지대와 해변까지 손안에 넣을 수 있다. 이러한 성격을 고려해 보았 을 때, 남부지역의 무장해제만이 코카서스 지역에 평화와 안정을 가 져다 줄 것임은 자명하다. Ⅵ. 결 론 러시아가 당면하고 있는 가장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바로 나고 르노-카라바흐에 대한 아르메니아와 아제르바이잔간의 분쟁이었 다. 러시아 내의 인종적 무슬림 민족주의로 인해서, 동시에 역사적 으로 러시아의 우방이었던 기독교 국가인 아르메니아를 포기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 지역 내에서 자국의 정치적 입지를 불안정하게 만 들었다. 무엇보다도 강력한 중심 세력이 없는 상황은 분쟁을 국제적 인 문제로 만들었고 간접적으로 관계된 국가들의 숫자도 증가하게 하였다. 이러한 상황의 변화가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더 조정 하기 힘들고 통제하기 어렵게 만들었다. 러시아는 자국을 소련의 법 적 계승자로 여겼으므로, 분쟁의 초기 단계에서 그것을 해결하지 못 한 소련의 실패에 대해 어떤 책임을 느꼈다.

80 중동연구 제25권 1호 이란이 호메이니 사후 중앙아시아 지역과 코카서스 지역에 대해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고 있다. 또, 이란은 이슬람계의 옛 소련 남 부제국에 대해 종교적 대의( 大 義 )보다는 오히려 경제적 관계를 중 시하여, 실리적인 외교정책을 추구하여 왔다. 옛 소련 남부제국에 있어서도 이란은 지정학 적으로 중요하다. 옛 소련 남부제국은 미국에 동조할 강한 동기가 없는 한, 미국의 이란봉쇄에 가담할 리 없다. 예를 들어 아제르바이잔이 미국과의 친밀한 관계를 구축하려 는 것은 자원을 둘러싼 미국과의 경제적 관계를 강화함과 동시에 아 르메니아와 쟁점이 되고 있는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을 미국과 NATO의 영향 아래에서 해결하려는 의도가 있기 때문이다. 이에 비 해 투르크메니스탄은 미국을 뒷 배경으로 해결할 필요가 있는 정치 적 과제를 갖고 있지 않고, 오히려 자원의 송출 루트를 다양화함으 로 인해 러시아, 미국 등 강대국의 독점적인 영향권에서 벗어나려는 의도를 지니고 있다. 해양으로의 출구가 없는 옛 소련 남부제국에 있어 이란이 중요한 이유는 역시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으로 자원의 송출 루트를 확보하 여 지금까지 기존의 러시아의 파이프라인에 의존하여 왔던 루트를 다각화함으로써 모스크바의 영향권에서 벗어날 수 있고, 새로운 경 제발전의 가능성을 가져다준다는 요인 때문이다. 미국이 옛 소련 남부제국을 둘러싸고 이란에 대한 봉쇄정책을 계 속 고수한다면, 이들 제국은 옛 소련 시대처럼 러시아에 경제적 의 존이 유지되고, 미국 등의 서방제국에 대한 에너지 공급이 막힐 가 능성이 있다. 그러한 사태가 되는 것을 미국 역시 피하고 싶어하는 이유는 미국에게 있어 카스피해 연안의 자원이 너무나 중요하기 때 문이다. 미 국민의 석유소비는 계속 증가하고 있어, 미국 국내에 매 장되어 있는 석유만을 소비해 나간다면 향후 5년 반만에 고갈될 것 이라고 한다. 그래서 미국은 에너지의 안전보장을 확실히 해 두기 위해 자원의 구입선을 다양화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러한 이유로 미 국이 카스피해 연안의 자원에 주목해 왔으나 이란에 대한 봉쇄를 계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81 속 유지한다면, 이 지역의 자원의 획득은 곤란해 질 것이다. 신 중동으로 떠오른 중앙아시아-코카서스 지역은 이러한 에너지 를 중심으로 하는 경제적 국익과 전략적인 측면에서 미국, 러시아, 이란, 터키 등 이해 당사국들의 치열한 패권경쟁 무대가 되고 있다. 이러한 복잡한 국제정치역학관계 속에서 결국, 아제르바이잔-아르 메니아 양국 스스로가 이 복잡한 분쟁을 해결해야 할 것이다. 여기 에 대해 외세가 취할 수 있는 최악의 행동은 공정성이 결여된 개입 일 것이다. 그와 더불어 탈 식민지화의 역사적 과정은 계속될 것이 다. 옛 소연방의 일부였던 이 지방에 대해서는, 약 2세기 전에 분리 되었던 트랜스코카서스가 중동으로 재편입될지는 시간이 말해줄 것 이다. 주제어: 중앙아시아, 트랜스코카서스, 아제르바이잔, 아르메니아, 나 고르노-카라바흐, 이란, 터키, 미국, 러시아

82 중동연구 제25권 1호 참고문헌 宮 田 律 (1998). 이란- 옛 소련 남부 제국관계의 현실적 전개와 그 영향: 미국의 對 이란 봉쇄를 공동화( 空 洞 化 )하는 지정학, 海 外 事 情 Vol. 46, No.5.. Alieva, L.(1995). The Institutions, Orientations, and Conduct of Foreign in Post-Soviet Azerbaijan, A. Dawisha & K. Dawisha(eds.) The Making of Foreign Policy in Russia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Armonk: M. E. Sharpe. Ginat, R. & Vaserman (1994). National, Territorial or Religious Conflict? The Case of Nagorno-Karabakh, Studies in Conflict and Terrorism, Vol. 17. Huttenbach, H. R. (1995). Post- Soviet Crisis and Disorder in Transcaucasia, V. Tismaneanu(ed.), Political Culture and Civil Society in Russia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Armonk. M. E. Sharpe. Odom, W. E. & Dujarric R.(1995). Commonwealth or Empire? Russia, Central Asia, and the Transcaucasus, Indianapolis, Hudson Institute. Saroyan, M. (1992). Azerbaizan: New Trends in Relations With Iran & Turkey, The Iranian J. of International Affairs, Vol. IV, No. 1. Swietochowski, T.(1994 a). The Problem of Nagorno-Karabakh: Geography Versus Demography under Colonialism and in Decolonization, H. Malik(ed.) Central Asia, N. Y., st. Martin's Press. (1995 b). Azerbaizan: A. Borderland at the Crossroads of History, S. F. Starr(ed.), The Legacy of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과 국제관계 83 History in Russia and the New States of Eurasia, Armrok, M. E. Sharpe. Smolansky, O. M.(1995). Russia and Transcaucasia: The Case of Nagorno-Karabakh, A. Z. Rubinstein & Smolansky(eds.), Regional Power Rivalries in the New Eurasia, Armank, M. E. Sharpe Winrow, G. M (1995). Azerbaijan and Iran, A. Z. Rubinstein & Smolansky(eds.), Regional Power Rivalries in the New Eurasia, Armank, M. E. Sharpe. Zinin, Y. N. & Maleshenko, A.V. (1994). Azerbaijan, M. Mesbahi(ed.), Central Asia and the Caucasus after the Soviet Union, Gainesville, University Press of Florida. 장병옥 한국외국어대학교 이란어과 교수 Tel: (02)961-4792 changbo49@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