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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한국인의 모습, 나를 감동시키다 3 양해승 값진 경험, 소중한 추억으로 8 타타우 나에게 성공이란 13 Rahil Ahmadova 한국봉사활동을 통해 느낀 행복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길! 17 Abou AbdouLaye Tall 즐거운 만남으로 한국을 배워라! 22 재키 한국유학생활의 뜻을 찾았다! 27 선저이 꾸마르 꿈을 향해 32 인진륀 응답하라 2012 36 라시드 라파엘 울릉도, 독도 탐방 41 부티투짱 나만의 무대를 세우기 위한 발돋움 44 아리운자야 매순간 황금같은 추억들 48 니키아 브라운 1

GKS 유학생활의 소중한 재산 52 BUI THI BICH THUY 휼리아, 희망의 날개를 펴서 한국을 날다 56 휼리아 울지 마! 정신을 차려라, 너도 이제 남자다 59 AFOLABI AANUOLUWAPO OKIKI 공부도 열심, 경험도 열심, 모든 것에 전력 질주한 내 한국 유학 생활 62 MIZUMA IKUMI 가봉에서 강남스타일 나라까지 66 Gislain Mossavou(기슬라인) 오늘이야말로 가장 행복한 날 73 수파펀 분룽 Quest for Acceptance 77 Amirhossein Goudarzi Life of a Student Reporter: My Place under the Sun 81 Rigoberto Banta Jr. Arrays of Insightful Academic, Cultural, and Social Engagement I have in Korea 85 Suray Agung Nugroho 한국에서의 아름다운 유학생활 90 LE HOANG THU TRANG 한국과 밝은 미래 (Korea and Bright Future) 94 소 분티안 한국이 이래서 좋다. 98 WAIYATHIRA PRANOT 보람차게 끝나가는 1년, 넘치는 열정과 자긍심으로 기대되는 3년. 103 마마자노브 조히드 2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최우수상 한국인의 모습, 나를 감동시키다 양해승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박사과정 세월이 쏜살같이 빨리 지나가는 것 같습니다. 저는 한국어를 배운 지 10년이 다 되었습 니다. 이번 한국에 유학하러 온 것은 세 번째입니다. 이번에 한국에 온 지도 눈 깜빡할 사 이에 벌써 1년이 다 되어갑니다. 한국어를 처음 배웠을 때 한국을 전혀 모르면서도 그냥 한국어의 부드러운 뉘앙스와 아름다운 리듬감에 깊이 반하고 그렇게 밤낮없이 열심히 공부 해 왔습니다. 유학하기 전에 한국친구를 많이 사귀면서 다정한 한국 사람의 성격에 점점 반하고, 한국을 소개하는 책 및 한국친구를 통해 배우면서도 아는 듯 모르는 듯 했습니다. 그래도 한국 친구덕분에 꼭 한번 한국에 가서 한국 풍토경험을 실컷 느끼겠다고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그런 소망을 가지고 열심히 공부한 끝에 학부 때 한국에 연수하러 온 첫 번째 귀중한 기회를 얻게 되었습니다. 비록 6개월밖에 안 되는 시간이었지만 저에게 한국 에 대해 직접 느끼는 소중한 인생 시기가 되었습니다. 6개월 연수 기간이 한국생활을 즐기 며 충실하게 지내는 저에게 너무 빨리 지나간 것 같습니다. 지금도 한국친구의 손을 꼭 잡 고 아쉬워하면서 다시 오겠다고 약속한 그 때의 추억이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약속을 지키는 것도 중요하였지만, 6개월 한국 연수 기간 덕분에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 국 전통 문화에 완전히 빠져 버렸습니다. 제가 경험한 한국의 매력 때문에 결국 저는 대학 원에 진학해서 계속 한국어를 공부했고, 석사 때 다시 한국에 연수하러 오는 귀중한 기회 를 또 다시 얻게 되었습니다. 3

GKS 아무래도 학부 때보다 언어소통이 더 잘 되기 때문에 한국 전통 문화뿐만 아니라 한국사 회에 대해 더 잘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때로는 친구들에게서 이런 질문을 받 았지요! 한국어를 배운 지 10년이 거의 다 되었는데 질리지 않니? 라고 했습니다. 만약에 제가 한국에 오지 않았다면 바로 한국어를 좋아하기 때문에 질리지 않다 고 대답할 수 있 습니다. 하지만 이제는 대답하기가 좀 어렵게 되었습니다. 글쎄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저 는 이제 한국어를 배운 지 10년이 다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계속 빠져 들고 있나? 이제 저 는 서울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하면서 똑같은 질문을 가지고 자신에게 많이 되물어봤습니 다. 지금까지 박사과정을 한지 거의 1년이 다 되면서 점점 그 답을 찾게 된 것 같습니다. 바로 저를 감동시키는 한국인 모습들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이것은 점점 제가 앞 으로 나아가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한국 사람은 정이 많다는 걸로 유명합니다. 그리고 한번 정이 들게 되면 영원히 친하다 는 것입니다. 박사 과정으로 진학한 후에 얼마 안 되었을 때 수업 진도를 따라가기가 매우 힘들었기 때문에 많이 고민했습니다. 그런 참에 선배님께서 제 고민을 눈치 채시고, 주말 때 스터디가 끝나고 나서 저를 위해 신입생 환영회를 같이 하자고 제의했습니다. 처음에 저는 그냥 신입생이 올 때마다 이런 환영회를 거듭 가지는 게 당연한 일인 줄 알 았습니다. 왜냐하면 며칠 전에 과에서 저희 신입생을 위해 환영회를 마련해 주었습니다. 그 때 선배님을 따라 식당으로 가는 길에서 저보다 1학기 먼저 들어온 석사생 두 명은 선 배님에게 질문을 던졌는데 오빠, 왜 저희들은 과에 들어왔을 때 이런 대우를 못 받았지요? 그때 우리는 그냥 과에서 신입생 환영회만 받았을 뿐이었잖아요. 해승 오빠는 좋겠어요. 라고 했습니다. 선배님 말씀이 너희들도 외국학생이니? 수업을 듣는 것이 그렇게 힘드니? 해승이는 매번 수업 들을 때 눈살 찌푸리는 것 못 봤니? 우리는 해승 덕분에 맛있는 거나 먹자. 그날 선배님 덕분에 마음에 걸렸던 것이 다 풀리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삼차까지 갔 습니다. 우리들은 건배할 때 해승, 파이팅! 이라는 말을 듣고 감동을 못 이겨서 눈물까지 흘렸습니다. 그날부터 저는 스터디 한국친구들과 친하게 되었고, 선배님 덕분에 저도 때로는 선배답 게 후배들에게 술도 사 주기도 하며, 후배가 힘들 때는 위로를 해 주기도 합니다. 이제는 저도 형 오빠 소리를 과에서 항상 듣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런 정은 외국인인 저로 하여 금 한국 사회의 따뜻함을 느끼게 되었고, 한국어를 배우면 배울수록, 한국에 유학 오면 올 수록 그윽이 풍기는 그런 향기에 완전히 반해 버렸습니다. 4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한국 사람은 항상 긍정적인 생활태도를 가지고 사는 모습도 감동적입니다. 가족마다 나 름대로 뜻 깊은 가훈도 있고, 유교 사상인 오륜사상도 한국 사람의 일상생활에 깊이 배어 있습니다. 그리고 한국 사람에게 취미가 뭐냐고 물어볼 때 거의 다 폼이 있는 여행이나 음 악 감상 식으로 나오기 마련입니다. 이러고 보니 세계무대에서 활동하는 유명한 한국 사람 이 점점 많아지는 것은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저는 한국 사람이 죽을 때까 지 배우자 는 긍정적인 생활태도가 제일 인상적입니다. 저는 한국어학계 대가이신 이익섭 선생님과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 계기는 제가 중국 대 련외국어대학원에서 석사 과정을 공부할 때 저희 대학원에서 이익섭 선생님을 석학 강좌로 모셨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해 주신 강좌는 2시간이었지만, 저에게 큰 학문과 인생격려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는 연세가 69세이셨습니다. 2년 후에 저는 교환학생 으로 한국학 중앙연구원에 연수하러 왔을 때 다행히 이익섭 선생님의 수업을 한 학기 동안 들을 수 있었습니다. 선생님께서 직접 쓰신 국어학개설 이라는 대작을 가지고 저희들에게 가르쳐 주셨을 뿐만 아니라 선생님에 관련된 어린 시절 이야기, 학문 닦는 길 등 귀한 이야기도 많이 나눠 주셨습니다. 매번 수업은 너무 재미있어서 시간이 가는 줄 몰랐습니다. 그 한 학기 동안 선 생님과 같이 지내는 것은 저에게 학문 닦는 길을 열어 주었습니다. 그때 선생님께서 71세 이셨습니다. 작년에 2012 국어학회에서 다시 이익섭 선생님을 만나 뵈었습니다. 그 때 선 생님께서 석학강좌로 나오셨는데, 역시 정정하시고 부드러우면서도 힘 있는 목소리로 방언 조사에 관련된 방법, 태도 그리고 성과를 강의해 주셨습니다. 학문연구에 미친 듯이 공부 하는 사람이 필요하다는 논단이 매우 인상적이었습니다. 선생님께서 후학들에게 몸소 그렇 게 실천해 오고 계십니다. 올해 선생님께서는 연세가 75세이신데 학문에 대한 열정이 하나 도 덜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더 열심히 논문을 쓰시고 책을 열심히 내시는 분입니다. 저는 공부가 힘들 때마다 선생님의 모습을 생각하면 피로감이 싸~악 사라지고, 다시 정 신을 차려서 열심히 공부할 수 있습니다. 그 동안 저는 운이 좋게 이익섭 선생님 같은 분 을 많이 만나 뵈었고, 예를 들면, 이광호 선생님, 이현희 선생님 등입니다. 덕분에 많은 것 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죽을 때까지 배우자 는 정신은 이익섭 선생님, 이광호 선생님 등 훌 륭하신 분들을 비롯하여 온 한국 국민들의 정신입니다. 이것 덕분에 한국 사회의 내적 발 전 원동력이 생기게 되는 것 같습니다. 한국 사람들은 이 사회가 나에게 무엇을 해 주었는 가를 따져 보는 게 아니라, 내가 배워서 이 사회에 어떻게 더 기여할 수 있는가를 먼저 생 5

GKS 각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연세가 많으신데도 불구하고 열심히 공부하시는 분들을 생각하 면, 외국인인 저로서는 어떻게 감동을 안 받을 수가 있겠습니까? 뿐만 아니라, 그 동안 저는 한국 사람과 더 잘 어울리기 위해 많은 행사활동에 적극적으 로 참여해 왔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바로 한국 사람을 단합이 잘 된다 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백지장도 맞들면 낫다 는 속담이 있는데 이걸로 한국 사람의 단합을 말하면 적절한 표현일 것입니다. 한국 친구들은 같이 식사를 하고, 같이 스터디를 하고, 같이 회식을 하고 같이 어려움을 이겨내고 같이 앞으로 나아가는 것입니다. 서울대학교 언어교육원에서 주최했던 2012 겨울방학 영어 캠프 활동이 저에게 매우 인 상적이었습니다. 그때 한국친구들과 같은 팀으로 편성되었고, 처음에 저는 영어를 잘하지 못하니까 그냥 들러리로 서 주면 되겠다고 생각했었는데요. 실제로 아니더군요. 저는 영어 를 잘하지 못하지만 영어 대신 한국어로 주장을 팀에게 제출하고 관련 한글 자료도 저에게 맡겨 주었습니다. 그리고 주제에 관련된 중국 자료도 저에게 맡겨 주었습니다. 다른 분들 도 자기의 약한 부분을 피하고, 잘하고 자신 있는 것을 살려서 서로 격려해 주면서 같이 준비해 왔습니다. 그러는 동안 같이 회식했고, 같이 토론했고, 같이 자료를 준비했고, 같이 발표 연습했습니다. 같이 주제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팀원들은 저에게 격려를 많이 해 주었 습니다. 덕분에 제 약한 영어도 점점 나아졌습니다. 결국 우리 팀은 마지막으로 우승을 차 지하고 말았습니다. 바로 이와 같은 단합덕분에 1997년에 한국 외환위기에 처해 있을 때도 국민들은 스스로 황금제품을 200톤을 모아서 정부에 기증해 주고, 온 한국 국민들은 같이 큰 난관을 넘겼습니다. 또한 이런 의지와 단합덕분에 역사상 외국의 침략을 많이 당했는데 도 불구하고 꿋꿋하게 일어서 점점 강국이 되어 가고 있습니다. 한국인구가 5000천만 명밖 에 안 되는데 경제실력이 이제는 세계 11순위로 올라가게 되는 것은 우리 문화, 즉 단합 정신과 뗄래야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고 있답니다. 공부 외에 저는 한국인이 사는 모습을 더 잘 느끼려고 삼천리금수강산 여행도 많이 다 녀봤습니다. 서울에 있는 궁전들, 남이섬, 죽녹원, 남원, 월정사, 불국사, 석굴암, 설악산, 속리산, 관악산 등 여러 곳을 가 봤습니다. 저에게 정말 너무 아름다운 추억들을 많이 남겨 주었습니다. 여행을 다니면서 인상이 아주 깊은 것은 세 가지가 있는데, 즉, 첫째, 한국 사 람은 환경보호 의식이 대단합니다. 지금도 월정사, 설악산 공원에 흐르는 거울처럼 맑고 깨끗한 계곡물, 죽녹원에서 담배꽁초를 줍는 소년, 설악산 밑에서 모래 주머니를 메고 산 정상으로 가서 흙이 빗물에 씻겨 내려가 밖으로 드러난 나무뿌리를 덮어주는 아줌마들이 6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생생하게 기억납니다. 환경을 마치 자기 생명처럼 대해 주는 한국인 모습을 보고 저는 많 이 부끄럽고 반성도 많이 했습니다. 앞으로 우리 중국 사람도 이렇게 환경을 보호해 주면 얼마나 좋을지 모르겠습니다. 둘째, 한국 명승지는 중국보다 작지만 공을 많이 들여 정교하게 만들어 냈습니다. 곳곳마 다 역사의 미가 향기를 풍기면서 아름다운 전설이나 이야기가 담겨 있습니다. 스토리텔링 식으로 한국의 아름다움을 세계 사람에게 전해 주고, 세계 사람들은 그런 뜻 깊은 줄거리 나 재미있는 이야기 때문에 감동을 받고 있습니다. 얼마 전에 저는 담양에 있는 소쇄원에 가 봤습니다. 사실 소쇄원을 공간적으로 보면 얼마 안 되어서 너무 좁다고 생각합니다. 하 지만 조선시대 선비들의 생활모습을 상상하면서 서서히 산책하면 그 안에 담겨 있는 건축 물과 조경물의 조화, 자연과 인공의 조화, 석축과 담장의 조화, 나무들과 풀들의 조화가 바 로 눈으로 들어오게 됩니다. 셋째, 가는 곳마다 축제를 맞이할 때 거의 다 사물놀이나 판소리나 농악무를 공연합니 다. 한국 사람이 자기의 고유문화재에 대해 중요하게 여기며, 보호하는 모습을 보고 저는 중국 사람으로서 정말 많이 반성했습니다. 왜냐하면 중국에서 옛 문화에 대해 거의 다 먼 저 없애 버리고, 그 다음에 새로운 문화 형태를 세우고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요즘 중국에 서도 한국처럼 옛 문화를 현대문화와 어울리게 개선화하며 많이 보호하지만, 그래도 한국 보다 좀 뒤떨어지고 있습니다. 이런 방면에 있어서 중국은 아직도 노력해야 할 것이 많고, 한국에서 배워야 할 것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저를 감동시키는 한국인의 모습들은 더 많이 있는데, 예를 들면 사회봉사정신, 이웃사랑 정신, 다문화존중정신, 예의와 겸손 정신 등이 담겨 있는 여러 감동적인 모습들입니다. 저 는 한국어를 좋아하는 이유는 더 이상 그 언어 자체가 배어 있는 매력이 아니라 그 사회에 서 사는 사람들, 즉, 한국인들이 풍기는 아름다운 향기 때문입니다. 앞으로 저는 꼭 이런 한국인 모습들을 제 학생, 제 친구 내지 모든 중국 사람에게 전해 주며, 더 크게는 그런 뛰어난 한국적 정신을 더 멀리 전해 주며 이걸로 우리나라를 부흥시 키는데 한 평생을 기여하기로 마음을 먹게 되었습니다. 7

GKS 우수상 값진 경험, 소중한 추억으로 타타우 경북대학교 사회학과 2008년 한국에 처음 왔을 때가 아직도 기억에 생생한데 벌써 5년이 지나 졸업을 앞두고 있습니다. 저는 어떤 식으로 체험 수기를 작성하면 다 함께 공감하면서 재미있게 읽을 수 있을까 고민을 많이 했습니다. 지난 5년간 유학생활을 하면서 행복했던 추억들이 있는가 하면 힘들고 괴로워했던 시간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의 경험과 추억들을 외국인 장학생들, 국립국제교육원의 KGSP 운영자 선생님들과 함께 공유하고자 이번 체험 수기를 작성했습니다. 한국으로 유학을 오기까지 제가 고등학교 3학년, 대학 입학시험을 치기 몇 달 전에 아버지께서는 심장 마비로 세상 을 떠나셨고, 얼마 후 함께 살아온 외할머니께서도 암에 걸리셔서 불행이 연속되었습니다. 어머니께서는 공무원(감사원)이셨는데, 미얀마에서는 공무원들의 월급이 적은 편이라 혼자 서 모든 식구의 생계를 유지하기가 보통 일이 아니었습니다. 할머니의 비싼 치료비, 저와 언니의 교육비 등으로 가난에 처하게 되었고, 정말 힘든 시기였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어 머니한테 막내딸인 저를 대학교 보내지 말고, 전문대나 보내서 취직 시키는 것이 낫다고 계속 충고를 했습니다. 그 분들의 말도 틀린 말은 아니었습니다. 미얀마에서 의대가 아닌 8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한, 어느 대학교를 졸업하든 좋은 월급을 받아 성공하기가 어렵고, 앞길이 그리 밝지가 않 습니다. 하지만 어머니께서는 결코 저를 포기하지 않으셨고, 저를 믿어 저에게 대학 교육 이라는 날개를 달아 주셨습니다. 어머니께서 돈이나 부동산 같은 재산을 줄 수는 없지만 교육을 마지막 재산으로 줄 것이니 최선을 다해 현재 처해 있는 상황에서 탈출하라 고 말 씀해 주셨습니다.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가을동화 드라마를 통해 처음으로 한국을 알게 되었는데 한국에 대한 호기심과 매우 좋은 이미지를 갖고 있었습니다. 대학입학 했을 때 자연스럽게도 만달 레이 외국어 대학교 한국어학과에 들어가서 공부했습니다. 한국어학과에 들어가 공부하면 서 여러가지 고민을 하였는데, 끝내 그때 당시로서 제가 최선으로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한국으로 유학을 떠나 더 배워서 큰 사람으로 성공하는 것이 어머니께 보답하는 것이다 라는 판단을 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독재정부와 억압적인 사회, 아이들의 알 권리와 창의 력을 금지하는 교육제도 하에 자란 저는 KOICA를 통해 봉사활동 하러 오시는 한국 선생님 들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면서 자유로운 민주주의 국가, 빠른 경제 성장으로 유명한 한국에 서 유학을 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졌습니다. 또한 미얀마는 경제가 아직은 성장되지 않아 국민소득이 매우 낮았는데, 보통 미얀마 국내 대학을 졸업해서 성공적인 인생을 살아가기 가 어려워 보였고, 국제 사회로 나가 더 좋은 교육을 받아 지식을 넓히고 스스로를 발전시 킬 필요가 있다고 저는 확신했습니다. 양곤시에서는 매년 12월에 전국 한국어 말하기 대회가 열리는데 그 대회에서 대상, 또는 금상을 타는 자에게 한국 유학의 기회가 주어집니다. 미얀마에는 2개의 외국어 대학교가 있는데 총 200명쯤 되는 학생들, 그리고 이미 졸업한 선배들과 경쟁하여 최종 우승자 2 명 만이 기회를 잡을 수 있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최종 말하기 대회까지 뽑혔는데 대상이 나 금상을 놓치면 다시는 도전할 수 없는 엄격한 규칙도 있었습니다. 우선 한국어 능력시 험에서 성적이 가장 우수한 학생들을 모아 예선을 거친 후에 최종적으로 양곤시에서 본선 말하기 대회가 열리게 됩니다. 저는 여러 단계를 이겨내고 모든 선후배 친구들과 경쟁하여 최종 말하기 대회에서 대상을 타게 되어, 저의 꿈을 이루었습니다. 그날 밤 무대에서 상을 받았을 때의 순간을 아직까지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한국에 와서 5년 동안 열 심히 공부했고, 한편으로는 장학금으로 받는 생활비를 알뜰하게 사용하여 아르바이트도 하 면서 어머니와 가족에게 4년 동안 용돈을 보내줄 수 있었습니다. 힘들고 외로운 시간들, 지쳐서 포기하고 싶어지는 순간에는 한국에 오기 전에 간절했던 마음을 다시 생각하면서 9

GKS 견뎌낼 수 있었습니다. 남들에게는 그저 장학금일 뿐이었을지 모르겠지만, 저한테는 지옥 탈출의 기회, 하늘에서 내려준 동아줄, 더 큰 사람이 될 수 있는 기회였습니다. 저는 제게 주어진 한국정부 초청 장학생이라는 기회를 늘 소중하게 생각하고 있으며 진심으로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나의 한국 유학 생활 5년 동안 저의 유학생활을 정리해 봤을 때 물론 아쉬운 점들도 있었지만 만족하고 좋았 던 점들이 더 많았습니다. 우선 그동안 많은 것을 배우고 많은 사람들을 만나면서 다양한 지식들을 습득할 수 있었고, 해방적 상상력과 자유로운 사고방식을 가지게 되어 좋습니다. 물론 미얀마가 지금은 민주주의로 이행중이지만 제가 한국으로 유학을 오기 전만해도 독재정부가 철저히 통제하는 나라였습니다. 그런 나라의 작은 도시에 있는 평범한 집안에 서 자란 저는 많은 지식을 접근할 기회가 잘 없어 좀 무식한 편이었고, 사고방식도 자유롭 지 못한 보수적인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제가 한국이라는 자유 민주주의 사회 속에 생활 하면서 개인/국민의 권리와 그에 따른 책임감을 피부로 느꼈습니다. 학교 수업 및 강좌, 조 별 활동, 토론과 개인 보고서 등을 통해 자신의 생각을 자유롭게 펼칠 줄 알게 되었고, 사 회와 세상을 분석하여 비판적으로 보는 법도 배웠습니다. 미얀마에서 과외를 하는 것 외에 는 아르바이트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잘 없기 때문에, 한국에 와서 유학을 안 했으면 아르바 이트를 해볼 기회가 없었을 것입니다. 물론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힘들고 속상한 일들도 있 었지만 그런 모진 경험들이 피와 살이 되어 오늘의 저를 만들어 왔다고 생각합니다. 아르 바이트를 하면서 한국의 고객을 모시는 서비스 문화를 몸으로 배우게 되었고, 겸손하게 행 동하는 것도 배웠으며, 인생 공부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동안 저에게 한국과 경북대학교 는 단순히 학문적인 지식뿐만 아니라 사회와 인생에 대한 지식과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이글을 쓰기 위해서 유학생활 동안에 있었던 좋았던 점, 만족했던 점들을 정리해보던 중 에 어떤 교수님의 말씀이 머리에 떠올랐습니다. 교수님께서는 과제를 많이 내주시는 편인 데, 과제 하나 하나 주실 때마다 여러분, 저는 여러분이 많이 고민하고 괴로워하시기를 바 랍니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말씀의 뜻은 학생들이 과제물을 받으면 고민을 해서 자 신의 머릿속에 있는 생각과 의견들을 꺼내게 되고, 그것을 노력과 결합하여 글을 작성하게 10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된다는 의미일 것입니다. 따라서 과제물이나 보고서들이야말로 진정한 우리 머릿속의 생각 들과 우리의 노력들이며, 한 학기 동안 많은 양을 작성했다면 그만큼 많이 생각했고, 노력 했다는 뜻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당시에 그 말씀이 너무 싫었고, 원망하기도 했었는 데 이제 생각해 보니 정말 맞는 말씀인 것 같습니다. 제 컴퓨터에 5년 동안 제가 작성한 과제물과 보고서들을 파일별로 정리해서 보관하고 있습니다. 물론 많이 부족하겠지만 그래 도 그동안 내가 그만큼 고민해서 생각해 냈고, 노력해서 작성했구나! 라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집니다. 마지막으로 제게 남은 것은 행복했던 소중한 추억들입니다. 미얀마로 가는 비행기 티켓 이 비싸고, 또 방학동안 아르바이트도 하고 싶었기 때문에 시간과 돈관계로 5년 동안 고향 에는 한 번만 다녀왔습니다. 그 대신 학교 국제교류원을 통해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 리더 십 캠프와 탐방 여행 등에 참여했고, 개인적으로도 한국 국내 여행을 많이 다녔습니다. 캠 프와 프로그램들에 참석하고, 친구들과 함께 여행을 다니면서 많은 것을 보고 느끼고 여러 나라 친구들과 문화 교류를 할 수 있어 정말 좋았고, 최고로 행복했던 순간들이었던 것 같 습니다. 부산과 서울은 물론, 안동, 포항 호미곶, 보성 녹차 밭, 지리산, 설악산, 동해, 제주 도, 울릉도, 독도까지 전국 여행을 친구들과 함께 다니면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보고 아름 다운 자연경치들을 저의 추억상자에 담아 보았습니다. 가장 기억에 남은 여행은 2008년 12월 서울 경희대학교에서 열린 KGSS 시상식 및 송년의 밤, 2010년 여름에 참여했던 독도 일일 등대장 체험 프로그램, 2010년 가을 무주에서 참여했던 LCIS (leadership conference for international students) 프로그램, 2012년 초가을에 갔던 한국 DMZ 탐방 여행 등입니 다. 여행을 다니면서 만나게 된 많은 분들과, 여행을 통해 보고 느꼈던 것들이 저에게 지식 과 경험뿐만 아니라, 충분한 휴식과 앞으로 살아가기 위한 희망을 주었고, 제 마음속에 영 원한 추억들로 남겨질 것입니다. 한국 국립국제교육원(NIIED)에서 5년 전에 저를 믿고 기회를 주신 덕분에 한국에서 유 학하고 싶다는 간절한 소망을 이룰 수 있었습니다. 지난 5년간 행복했던 시간들이 많았지 만, 외롭고 힘든 시간들도 가끔 있었습니다. 그럴 때마다 저에게 주신 기회의 소중함을 다 시 생각하면서 이를 악물고 어려운 시간들을 견뎌내곤 했습니다. 이제 졸업을 앞둔 채 저 는 후련한 마음과 함께 슬프고 그리운 마음도 가지고 있습니다. 지난 5년간 KGSP라는 프 로그램을 통해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과 우정이 넘치고 행복한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 습니다. 무엇보다 한국의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을 매년 맞이하는 것이 매우 기쁜 일 11

GKS 이었고, 가을의 은행나무, 단풍나무, 겨울의 눈꽃, 봄의 신선한 바람과 꽃들이 한국에서 제 가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축복이었습니다. 그동안 소중한 인연을 맺게 된 경북대학교, 정이 많은 한국 분들과 사랑하는 친구들, 한국의 사계절이랑 결국 이별해야 겠구나! 라고 생각하 니까 마음이 슬프고, 벌써부터 모든 것이 그리워지는 듯합니다. 한국 유학 생활동안 어렵 고 힘들어했던 것도, 즐겁고 행복했던 것도 결국은 다 값진 경험이자 소중한 추억이 되어 제 가슴속에 영원히 자리 잡고 있을 것입니다. 12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우수상 나에게 성공이란 Rahil Ahmadova 계명대학교 경영학과 성공 사람들은 누구나 다 성공하려고 노력합니다. 아주 어렸을 때부터 시작하는 성공 이라는 욕구를 누구나 가지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늘 궁금해온 질문이 있습니다. 성공 이란 것은 과연 무엇일까요? 돈을 많이 벌고 명예를 가지는 것? 행복한 가정을 만드는 것? 아니면 건강한 몸을 가지는 것? 이 질문에 대한 답은 개인마다 다 다를 것입니다. 하지만 대상이 다를 뿐일 것이고, 공통점은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얻는 것, 그것이 바로 성공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이 과연 성공한 인생일까요? 이 질문에 답을 찾기 위해서 아 래 글을 쓰려고 합니다. 성공한 사람이 되지 말고 가치 있는 사람이 되리라는 아인슈타인의 명언이 있습니다. 성공 은 나 자신을 위해서만 노력한다고 될 것이 아니라 사회에 도움이 되는 사람이 진정 한 성공자입니다. 저는 지금까지 살아온 24년의 세월 동안 여러 가지 인생 경험을 많이 했 습니다. 부모 사랑을 많이 받고 자랐으며 어머니-아버지와 떨어져 산 적이 없었고 늘 부모 님의 보호를 받고 자랐습니다. 이러한 삶은 편하고 안전했습니다만 나의 미래에 도움이 되 지 않으며, 마치 우물 안 개구리 와 같은 삶을 사는 생각이 들곤 했었습니다. 하지만 생각 을 한 것뿐이고 실천에 옮기는 것은 어려웠습니다. 고등학교 마치고 대학교 진학하면서 세 상을 더 넓은 시야로 보아야 한다는 마음이 커졌습니다. 그 당시 공부 중이었던 한국어 학 과에서 한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 주는 대한민국 정부초청장학생 프로그램에 대 13

GKS 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사진이나 영화를 통해 알게 되고 소문으로만 들었던 한국이라는 나 라에 갈 수 있다는 소식에 너무나 설레었습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멀리 떨어진 적 없는 부모님과 사랑스러운 우리 집, 친구들을 떠나고 멀리 가는 것은 제일 어려운 결정이었습니 다. 그러한 결정을 내릴 수 있는 동기는 우리 어머니의 말씀에서 받을 수 있었습니다. 귀하 게 키운 딸을 멀리 보낸다는 생각에 비록 어머니는 눈물을 멈추지 못하셨지만 나의 미래를 위해서, 성공한 사람이 되기 위해서 모든 것을 참아내셨습니다. 저의 꿈은 한국과 아제르 바이잔의 대외 관계에 큰 도움이 되는 대사가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꿈을 가지며 2008년 어느 무더운 여름날에 한국에 도착했습니다. 창밖을 보며 새로운 꿈이 활짝 피기 시작했습니다. 무슨 일이 있어도 포기하지 않고 끝 까지 열심히 살아야겠다는 약속을 자기 자신에게 속삭이었습니다. 처음에 많이 서툰 한국 어 때문에 의사소통도 잘 안되었고, 아는 곳도, 아는 사람도 없었기에 세상이 매우 두려웠 습니다. 알고 믿을 사람은 학교 선생님들뿐이었습니다. 모든 것 하나하나를 학교에서 지원 해준 도우미 친구들이나 학교 선생님들에게 여쭤보고, 한국어를 가르치는 학당에 열심히 다니며 하루 빨리 한국어를 배워야겠다는 목표를 세웠습니다. 문화도, 음식도, 언어도 다른 나라 삶에 적응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첫 6개월 동안 음식 때문에 힘들 어하고, 몸이 많이 약해졌으며, 몸살도 자주 나곤 했습니다. 어머니와 가족도 보고 싶고, 모든 것이 낯설었습니다. 그러나 곧 깨달은 것은 이러한 마음을 다른 외국인 학생들도 똑 같이 가지고 있는 것이었습니다. 다른 친구들도 가족 그리워하고, 음식 때문에 힘들어하는 것은 공통점이었기 때문에 그러한 친구들과 친해지기 시작하였습니다. 기숙사 식당 음식이 입에 안 맞으면 다 같이 다른 식당을 찾아가서 먹을 수 있는 음식을 찾았습니다. 이러한 삶이 갈수록 재미있어지기 시작하며 이제는 덜 힘들어하기 시작했습니다. 몇 달이 지났는 데도 적응을 못하여 공부 포기하고 고향 돌아가려고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며칠 에 걸쳐 이야기를 나누어 힘을 낼 수 있게 도와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 친구도 먹을 수 있는 식당 알아보고 한국 삶에 관심을 가질 수 있게 같이 놀러 다니곤 했습니다. 문화와 생활 습관이 완전히 다른 나라에 와서 사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기에 그 친구 마음이 충분히 이해되었습니다. 저는 다른 외국인 친구들에 비해서 빠른 시간 내에 깨달을 수 있었던 것은 한국을 먼저 이해하고, 한국의 문화에 빠져드는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이었 습니다. 한국인의 생활 방식을 이해 못하고 내 나라 문화의 입장에서만 고집한다면 한국에 서 진정한 행복을 찾을 수 없을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14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저의 응원과 그 친구 자신의 노력의 결과로 한국을 안 떠났고 열심히 노력하며 유학 생 활을 하기 시작했습니다. 한국에서 유학 생활한 지 1년이 지나고 나서 완벽하지는 않았지만 한국어로 소통이 어느 정도 되었기 때문에 생활하는 데 지장이 없었습니다. 한국어학당을 마치고 경영학과에 진 학하였습니다. 교수님들의 말을 이해하는데 많은 노력이 필요했습니다. 수업 시간에 가장 앞자리에 앉아 교수님 말씀에 집중하였고, 필기를 하는 동시에 교수님이 하시는 말씀을 녹 음하였고 공부를 할 때 좋은 자료로 사용했습니다. 다른 외국인 학생들과 비교했을 때 한 국어를 잘한다는 칭찬을 교수님들에게 자주 들었습니다. 2-3학년에 올라가 학교 공부뿐만 아니라 다른 활동을 하면서 효율적인 유학 생활을 보냈습니다. 여러 봉사 단체에 가입하였 는데 그 중에 하나는 가정 형편이 어려운 어린이들에게 영어 지도를 해주는 것이었습니다. 강의 첫날에 공부에 관심 없고 안색이 어두웠던 아이들과 많은 이야기를 나누어 공부를 사 랑할 수 있게 도움을 주었습니다. 몇 달이 지나고 나서 아이들의 알차게 웃는 얼굴과 열심 히 하는 모습을 보고 보람을 느꼈습니다. 저는 이 외에도 대한적십자사의 봉사원이 되어 어려운 사람들에게 도움을 주러 달리고 있습니다. 대구 지역에 사는 외국인들로 구성된 적십자 봉사 단체를 만들어 봉사활동을 하 는 아이디어를 제시하였는데, 그것을 꼭 실천하라는 대구적십자사 처장님의 말씀에 기뻐져 그러한 단체를 만들기 위해서 지금 노력하고 있습니다. 한국에서 유학 생활을 하면서 봉사활동 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경력을 많이 쌓았습니다. 대구상공회의소에서 개최하는 외국인 통상모니터링 프로그램에 참여했습니다. 2011년 5 월부터 12월까지 대구상공회의소에서 대구광역시의 국제통상 및 교류활동을 지원하기 위 한 프로그램인 통상모니터요원으로 활동하였는데, 저는 그 기간 동안 아제르바이잔의 무 역, 통상 현황 그리고 한국과의 관계를 매달 파워포인트로 보고했으며, 프로그램의 일환으 로, 대명동에 위치한 DG Entertainment라는 게임 콘텐츠 회사에 파견되어 2달 동안 SDK 문서 작성 및 통-번역 업무를 수행하였습니다. 저의 업무는 주로 게임을 제작하는 데 필요 한 서류를 번역하는 것이었고, 업무와 관련된 이메일 번역 및 해외 업체와 영어 등으로 통 화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돈을 번다는 생각은 버리고 평생 한번 있을지 모르는 기회 라고 생각하며, 최선을 다하였고 이러한 저의 노력의 결과 DG Entertainment가 아시아 지 역 최초로 마이크로소프트(MS)의 비즈스파크원 (BizSpark One) 정회원사로 승인을 받을 수 있었으며, 이러한 내용은 신문에도 보도되었습니다. 저는 이 프로그램이 끝나는 날, 대 15

GKS 구시장님에게 다른 20명의 요원 중 가장 우수한 1등상을 수여받을 수 있었습니다. 올해 정부초청 장학생 조교로 선정되어 새로 들어오는 정부초청 후배들을 위해 개최하 는 오리엔테이션 때 후배들에게 도움을 주기 위해서 활동하였습니다. 또한, 이번 달에 NIIED 선생님들이 우리 학교를 방문하러 서울에서 내려오셨는데 저는 그 분들과 함께 버 스를 타고 캠퍼스 투어를 하며 우리 학교 소개를 해드렸습니다. 저는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바로 저의 한국어에 대한 사랑입니다. 대부분의 친 구들이 대학교에 진학을 하면 모든 수업을 영어로 진행 하는 국제경영학과로 진학하였지 만, 저는 한국에 온 이상 비록 힘들더라도 한국어로 수업을 듣고 싶어 그냥 경영학과로 진 학하여 한국 학생들과 똑같이 공부하였습니다. 그 결과 저는 한국어능력시험 6급과 우수한 성적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저의 학업에 대한 욕심의 끝이 없는 것 같습니다. 한국 어를 너무나 사랑하며 한국어 공부는 계속해서 열심히 하고 있으며 저의 후배들에게도 한 국어 공부를 할 때 도움을 주고 있습니다. 저는 정부초청 장학생으로서 제 자신을 성찰할 수 있도록 한 한국 생활이 진정한 성공한 생활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저 자신만을 위해서 노력한 것이 아니라 할 수 있는 한 주변 사람들을 도우려는 가치 있는 삶을 보냈다고 생각합니다. 그 무엇을 하든지 저의 옆에 있 고 저의 인생에 빛을 비춰준 한국 정부, 학교에서 저를 가르친다고 고생하신 선생님들, 제 가 감기 걸려 아플 때 따뜻한 대추차를 타 주신 옆집 할머니, 멀리 있지만 늘 저를 응원하 고 있는 아제르바이잔 정부, 그리고 우리 가족 모두에게 감사의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그 분들 중 한명이라도 없었다면 저는 지금 이 자리에 서 있지 못하고 옛날에 이미 포기했 을지도 모릅니다. 사람(인)이라는 한자는 사람은 서로 기대어야 한다는 뜻입니다. 저는 그 분들에게 기대어 일어설 수 있었습니다. 비록 이번 학기는 제가 한국 정부초청 장학생으로 서 보내는 마지막 학기입니다만, 졸업하고 나서도 그들의 가르침을 있지 않고 그분들처럼 남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기로 결심했습니다. 지금의 저를 있게 해준 모든 것들에 진 심으로 감사하며 이 글을 마무리합니다. 16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우수상 한국봉사활동을 통해 느낀 행복 그리고 내가 가고 싶은 길! Abou AbdouLaye Tall 부경대학교 정보통신공학과 저는 이름도 생소한 한국에서 멀리 떨어진 나라, 아프리카 모리타니아에서 온 아부라고 합니다. 한국에 온지 2년 반이 지났고, 지금은 부경대학교 정보통신공학과 2학년에 재학 중입니다. 맨 처음 한국정부초청장학생 프로그램에 합격했다는 것을 알았을 때, 한국정부 에서 받게 될 장학금과 좋은 환경에서 공부할 수 있다는 것에 기뻤습니다. 인터넷에서 사 진으로만 보던 한국에 처음 도착했을 때, 한국의 발전된 모습과 좋은 교실, 친절한 사람들 에게서 생각했던 많은 것들을 얻을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습니다. 부경대학교에서 한국어 수업을 열심히 들어 1년 만에 한국어능력시험 4급을 땄습니다. 그리고 지금 정보통신공학과에 입학하였습니다. 사실 모리타니아에서는 지질학을 공부했 고, 모리타니아에는 정보통신공학 관련한 학과가 없어서 수업 내용이 생소했지만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렇지만 대부분 한국어로 하는 수업이라 알아듣기 힘든 내용이 많았습니 다. 하루는 학과 교수님에게 제가 힘들다고 말을 하니 교수님께서 한국 친구들을 소개시켜 줘서 지금은 모르는 것은 물어보면서 열심히 하고 있습니다. 공부를 제외하고 한국 생활에 서 어려운 점이 있거나 머리 아픈 일이 있으면 저는 축구동아리 스타피쉬 에서 동아리 친 구들과 축구를 하면서 스트레스를 풉니다. 마지막으로 학교생활에서 힘든 점이 있으면 학 교 국제교류본부에 있는 선생님을 찾습니다. 선생님들은 바쁘시지만 항상 친절하게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을 잘 알려주십니다. 17

GKS 스타피쉬 활동 그렇습니다. 저는 한국에 있으면서 너무 많은 도움을 받고 있습니다. 한국 정부에서는 충분한 경제적인 도움을 받고 있고, 학과에서는 교수님과 학과 친구들에게 공부하는 데에 도움을 받고 있고, 동아리에서는 정말 좋은 친구들과 한국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데에 도움을 받고 있고, 학교에서는 제가 궁금해 하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 모든 게 제가 먼 외 국에서 온 유학생이라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저는 그 동안 이것들을 너무 당연하다 고 생각해왔습니다. 나는 외국사람이니까 한국사람들이 나를 도와주는 것이 당연해, 이런 생각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차에 작년 여름 학교 선생님을 통해 부경대학교에서 하는 UN SUPPORTERS (PKNU) 라는 프로그램을 알게 되었습니다. UN SUPPORTERS 는 세계 평화를 지키는 대 학생 봉사단이라는 의미를 가진 프로그램입니다. 부경대학교 근처에 있는 세계에서 유일 한 UN 평화군 공동묘지인 UN 공원을 기념하며, 평화의 의미를 되새기자는 뜻을 가지고 있는 프로그램입니다. 처음에는 왠지 재밌을 것 같기도 하고, 한국 문화를 체험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시작했습니다. 참가자 대부분이 한국 친구들이었지만, 말레이시아에서 온 제 임스, 세네갈에서 온 아네스, 인도네시아에서 온 티아와 같은 외국인 친구들도 많이 있었 습니다. 18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UN SUPPORTERS 발대식 UN기념공원 추모식 처음 프로그램 발대식에서 많은 친구들도 만나고 부경대학교 총장님도 만났습니다. 총장 님을 만나서 악수도 하고 이야기도 나누면서 제가 더 특별하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리 고 처음 봉사활동을 갔습니다. 처음에 간 곳은 김해에 있는 요양병원이었습니다. 30명의 19

GKS 친구들과 같이 요양병원 청소를 했습니다. 침대도 청소하고 쓰레기통도 비우고 병실을 하 나씩 청소했습니다. 청소가 끝나고 할아버지, 할머니 식사 준비를 도와드렸습니다. 특히 어 떤 할아버지는 혼자 식사하시기 어려우신 것 같아서 제가 옆에서 식사를 도와드렸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식사를 다하시고 양치질도 도와드렸습니다. 식사가 끝난 뒤에는 바람을 쐬고 싶다고 하셔서 휠체어로 병실 밖을 나와 산책도 하였습니다. 할아버지께서는 낯선 외국인에게서 받는 도움을 처음에는 꺼려하셨지만 그 다음에는 제 게 궁금한 것도 물어보시고 하셨습니다. 산책을 끝내고 다른 할아버지, 할머니들과 함께 노래도 부르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들께서는 매일 오라며 밝게 웃 어주셨습니다. 저에게 아들 같다는 말씀도 해주셨습니다. 봉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 내내 아쉬웠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모습이 계속 떠올랐 습니다. 그리고 고향에 있는 가족들도 많이 생각났습니다. 다음에 꼭 다시 할아버지, 할머 니에게 찾아가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UN SUPPORTERS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동안 다양한 봉사활동이 있었지만 다시는 같은 요양병원에 갈 일이 없었습니다. 그것이 제 마음에 항상 남아있었습니다. 할아버지와 할머 니께 다시 찾아가겠다고 한 약속을 지키지 못해 계속 신경이 쓰였습니다. 할아버지, 할머 니께서 기다리지 않으실지 걱정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올해에도 프로그램을 신청했습니다. 사실 같은 프로그램에 두 번 신청할 수 없었지만, 담당하는 선생님께 계속 부탁을 드려 다 시 한 번 프로그램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습니다. 그리고 다시 김해에 있는 그 요양병원을 방문했습니다. 병원 앞에서 그 때 그 할아버지 와 할머니들께서 계속 계시는지 걱정되는 마음도 들었고, 뵙고 싶은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 렸습니다. 병원을 들어서자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모습이 두 눈에 들어왔습니다. 반가운 마 음에 얼른 달려가 인사를 드렸습니다. 아무래도 눈에 띄는 외모라서 그런지 할아버지, 할 머니께서는 저를 기억하고 계셨습니다. 할아버지께서 우리 학생, 또 왔네 하시는데 고마 운 마음에 눈물이 날 뻔 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와의 반가운 재회를 뒤로 하고, 예전처럼 침대도 청소하고 바닥도 청소 하고, 똑같이 청소를 했지만 두 번째라 많이 익숙해졌습니다. 처음이라 서툰 한국 친구들 에게 어떻게 해야 된다고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작년처럼 청소가 끝나고 음식을 준비해서 식사를 도와드렸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도 웃고 저도 웃었습니다. 큰 방에서 한국노래도 부르고 춤도 췄습니다. 노래는 서툴렀지만 열심히 불렀습니다. 아무 것도 아닌 작은 저의 20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노력에 할아버지, 할머니께서 즐거워하시는 모습을 보니 저도 즐거웠습니다. 고향에 있는 가족과 함께 있는 것과 같이 즐겁고 편안한 기분이었습니다. 다시금 헤어질 시간이 되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께서는 다시 또 놀러오라고 하셨습 니다. 저는 당연히 다시 오겠다고 했습니다. 이번에는 인사를 나누는 데 섭섭하지 않았습 니다.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한 번씩 찾아와서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만나서 기쁘게 해드 려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제가 한국에서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많은 것들이 모두 많은 사람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에 가능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제가 힘들었지만 한국어도 빨리 배울 수 있었던 것이나 학교 수업을 따라갈 수 있는 것 들, 한국 생활에 큰 어려움 없이 지낼 수 있었던 것들 모두가 다 제가 잘 해서 그런 것이라 기보다는 친구와 선생님, 교수님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봉사활동은 즐거웠습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저도 많은 것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제가 가진 것에 고마워할 줄 알게 되었고, 제 주위에 있는 사람들의 도움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 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물론 그 중에서도 제가 한국에 올 수 있게 해주고 더 성숙할 수 있 는 기회를 주신 한국정부에는 더욱 고맙습니다. 앞으로 저는 남은 UN SUPPORTERS 프로 그램도 열심히 참여하여 다른 사람에게 즐거움을 주고 작게나마 도움이 되는 사람이 되도 록 하겠습니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초청장학생으로 자부심을 가지고 더 열심히 공부할 것입니다. 마지막에 대학교를 졸업하고 제 고향 모리타니아에 돌아가서 한국을 알리고 양 국이 더욱 발전하는 데에 도움이 되겠습니다. 21

GKS 장려상 즐거운 만남으로 한국을 배워라! 재키 강릉원주대학교 지역개발학과 석사과정 처음 한국에 왔을 때 쌀쌀한 날씨로 시작했던 기억이 아직도 새록새록 나곤 한다. 그 때 가 바로 나에게 있어서는 처음 맞는 가을이었다. 가을이 시작되면서 나의 꿈이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나의 꿈은 바로 한국이다. 한국이 발전을 한 것에 대해 많이 궁금해서 대학교에 다녔을 부터 한국에 가기로 마음을 먹었었다. 뜻밖에 운이 참 좋아서 드디어 2010년에 한 국에 오게 되었다. 한국으로 멀리까지 공부하러 왔는데 여기저기 아직 모르는 것이 많기 때문에 힘든 느낌이 자꾸 들었다. 한국이 나의 꿈이라도 새로운 분위기에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고민이 되었다. 왜 한국에 왔냐고, 왜 한국에서 공부를 하냐고 스스로에게 물어봤 었다. 여기에서 무엇을 할 수 있느냐고 계속 자문했다. 자문만 했지 해답은 없었다. 고민하 면서 기온이 점점 떨어지고 찬바람도 많이 불었다. 친구가 옆에 있어도 추운 가을 날씨처 럼 나의 마음이 차갑고 기분이 외로웠다. 공부가 무엇인가? 한국까지 멀리 와서 왜 공부하려고 했는가? 이것은 쉬운 질문이 아니 다. 그런데 나는 처음 한국에 왔을 때 특히 춘천 한림대학교에서 한국어를 공부하는 동안 좋은 대답을 찾아냈다. 공부는 즐거운 만남이다. 한국어를 공부했을 때 새로운 언어를 배 울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새로운 친구가 생기고 새로운 세상이 나타났다. 그리고 또 훌륭한 선생님들을 만나고 다른 외국인 친구들이랑 같이 공부하면서 즐거운 마음을 가지게 되었 다. 언어 수업을 들으면서 제일 재미있는 것은 한국 문화에 관한 것뿐만 아니라 다른 문화 22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를 다양하게 볼 수 있어 신기하다고 느꼈다. 처음에는 그 다양한 문화에 대해 잘 몰랐지만 한국어를 통해서 그 문화를 다시 보게 되고 더 재미있게 알아듣게 되었다. 살펴보면 공부 는 바로 즐거운 만남으로 인해서 우리가 모르는 것들을 배우면서 아는 것으로 변화는 과정 이다. 그런 생각이 들었을때 겨울이 시작되고 있었고 밖은 너무 추웠지만 나의 가슴은 따 뜻하고 즐거웠다. 나는 즐거운 마음으로 나의 첫 겨울을 맞았다. 처음 겨울을 접했을 때 한 단어가 마음속 깊이 들어왔다. 눈! 바로 그것이었다. 본국에 사계절이 없기 때문에 반짝반짝 빛나는 눈을 보기만 해도 기분이 좋고 정말 신기하다고 생각했다. 펑펑 내리는 하얀 눈을 보자 순수한 느낌이 찾아왔고 마음이 평온해져 세상에 다시 태어난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인간과 눈 은 다르지 않다. 원래부터 인간은 순수하게 태어나고 배우는 과정을 거쳐 훌륭한 인간이 되는 것이다. 눈처럼 하늘에서 내리면서 원래는 하얗고 깨끗하게 보이지만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땅과 같이 섞여서 더럽게 변화했다. 여기에서 그 더러운 변화란 말은 바로 배우 는 과정이란 뜻이다. 인간이 살아오면서 교육을 받고 또 계속 배우고 죽을 때까지 배울 거 라고 믿는다. 배우는 것을 통해 모르는 것에서 아는 것으로 변화해서 인간이 다시 태어나 고 더 상세하게 알게 될 수 있다. 언어를 배우는 것도 마찬가지이다. 한국어 공부를 시작했 을 때 세상에서 다시 태어난 것 같다. 나의 모국어와 전혀 다르기 때문에 새로운 것들을 많이 배우고 더 알 수 있어서 세상이 더 넓게 보인다. 한국어를 공부하기 위해서 매일매일 새로운 단어를 외워야 한다. 가끔씩 실수를 만들고 그 실수를 고치고 반복하면서 알게 되 었다. 연습을 통해서 몰랐던 것들을 배우고 한국에 대해 새롭게 깨달았다. 1년 4개월동안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한국의 사계절처럼 나의 인생도 많이 변화했다. 우 선은 말이다. 말이나 언어는 사실 우리의 생각이다. 그래서 한국어로 말하면서 나의 생각 도 바뀌었다. 뭐가 바뀌었는가? 한국 사람은 말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이유이다. 한국어로 문장을 만들기 위해서 이유가 보통 항상 앞에 놓아야 하지만 우리말로는 보통 문장 뒤에서 붙어야 한다. 문법이 다르기 때문에 이런 상태가 나타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나의 생각 은 이유가 먼저 나오면 결과를 아마 더 쉽게 예상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오늘 배가 아파서 학교에 못 갔다, 그럼 배가 아픔 은 이유이고 그 결과는 학교에 못 갔다 라고 나타냈다. 이 결과는 이유를 말하면서 미리 생각할 수 있다. 나의 인생에서 이런 표현을 처음 만났는 데 이 표현을 통해 나는 한국 사람의 사고방식에 대해 더 알게 되었다. 이런 표현에 대한 만남은 내게 즐거운 만남이었다. 23

GKS 그리고 또, 한국어를 공부하면서 나는 공부할 마음도 자연스럽게 익혀졌다. 한국어를 매 일 공부해서 매일은 시험인 것 같다. 그런데 쉽게 생각하고 싶어도 한국어는 쉬운 시험이 아니었다. 그래서 나의 마음속에서 항상 한국어는 장애물이 아니라 도전이라고 생각해야 한다 라고 반복하여 말했다. 즉, 모두 시험이 바로 도전이다. 한국어능력시험도 마찬가지 다. 대학원에 입학하기 위해서 한국어능력시험 3급을 반드시 합격해야 한다고 했다. 얼마 나 어려운지 모르겠지만 한국어능력시험을 준비하면서 나의 한국어 실력은 점점 늘고 이 시험으로 한국 문화에 대해 더 재미있게 알 수 있었다. 그런데 사계절이 지나는 동안 3급 을 아직 못 받아서 기분이 속상하고 자신도 없고 정말 슬펐다. 시험이 자꾸 떨어지는 바람 에 고민이 많고 포기할 생각이 많이 들었다. 겨울이 지나 봄을 만나고, 세상의 색깔이 새롭게 바뀌고, 답답한 여름이 지나가고 드디 어 두 번째 가을이 왔다. 시간이 오래 걸려도 나는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결심했다. 그 때는 한국어능력시험이 계속 떨어졌는데 나는 예전보다 공부를 더 열심히 했다. 어떤 한국 어 선생님은 나에게 아름다운 속담을 가르쳐 주었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이다 라는 속 담이었다. 나는 아직은 실패이지만 나중에 성공할 거라고 믿는다. 나는 한국어 덕분에 긍 정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마음을 더 많이 배웠다. 한국어능력시험을 자꾸 불합격해도 배운 것들이 더 많아지고 유리한 점도 많아서 불합격이 나의 실패는 아닌 것 같다. 나는 한국어 를 공부뿐만 아니라 김치를 담그는 비법도 배우고 한지를 만들고 판소리도 깊이 알아듣고 한국 문화와 역사에 대해 많이 이해했다. 그렇게 때문에 속상한 마음이 필요 없다고 생각 했다. 실패도 배우는 과정이다. 나는 이런 경험으로 더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는 사람이 될 거라고 믿는다. 긍정적으로 생각하는 것은 좋은 약이다. 점점 나의 사고방식이 변화되 고 새로운 자신이 생겼다. 드디어 나는 네 번째 도전한 한국어능력시험을 합격할 수 있었 다. 그 때는 이런 생각이 들었다. 사람은 자기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 사람은 도 전으로 자신을 극복할 수 있다. 그 때는 얼음이 아직 녹지 않아도 나의 마음이 활발해서 모든 겨울 얼음이 녹은 것처럼 느껴졌다. 두 번째 봄이 왔다. 이것이 제일 기다렸던 순간이었다. 그 때 강릉원주대학교에서 나의 대학원생활이 시작되었다. 나의 전공은 지역개발이다. 대학원생활은 어학생활보다 많이 달 라졌다. 수업 시간, 공부하는 방법, 그리고 공부하는 내용은 모두 변화해 가지고 새로운 생 활이 또 다시 시작됐다. 강릉에 봄이 시작되었을 때 강풍이 심하게 불어 내 마음도 다시 흔들렸다. 착한 교수님들을 만나고 즐거운 만남으로 다시 느껴져도 눈물을 흘렸다. 밖에서 24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벚꽃들이 피웠는데 그 때는 내 마음이 너무 속상하고 답답했다. 대학원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에는 항상 힘들다고 생각했지만 나는 대학생활을 어학생활과 자꾸 비교했기 때문에 새 로운 분위기가 쉽게 익숙하지 않았다. 그러나 지금은 과거가 아니다. 대학원생이 되어서 수업 내용에 대해 스스로 준비해야 하고 어려운 것이 있으면 빨리 물어보고 빨리 알아야 된다. 이것은 쉽지 않지만 계속 노력할 수밖에 없었다. 살펴보면 다른 친구가 나보다 더 어 렵고 힘들다고 생각됐다. 어떤 친구는 수업뿐만 아니라 가족이나 형편 문제도 있어서 스트 레스를 더 많이 받았다. 내 문제는 수업만 열중하면 되는 것이었다. 친구들과 비교하면 내 문제는 별일이 아니다. 이렇게 생각하면 마음이 가볍게 느껴졌다. 수업을 아직 어렵게 알 아들어도 대학원생활을 즐기고 추억을 만들자고 결심했다. 여름이 시작되었을 때 내 첫 학 기가 끝났다. 그 때 바람이 많이 불어 하늘에 날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드디어 여름 방학 이 시작되고 즐거운 마음으로 지나갔다. 사실은 여름방학도 쉬는 시간이 아니었다. 쉬는 시간도 공부하라고 했다. 나는 여름방학 동안 춘천에서 살아온 추억을 모으고 일기를 만들었다. 그런데 이것은 보통 일기가 아니었 다. 나는 춘천에서 세계로 보여주고 싶어서 어떤 국제 웹 사이트에서 그 춘천 도시의 이야 기를 출판하였다(www. urbanvignettes.com). 3개월동안 일주일에 한번 춘천의 이야기를 영어로 쓰고 웹 사이트에서 세계적으로 보여줄 수 있었다. 춘천시는 내가 첫 번째 살았던 도시다. 그래서 춘천의 추억은 얼마나 많은지 모르겠고 그 추억이 떠오르면 기분이 즐겁고 이 추억을 쉽게 잊지 못했다. 나는 춘천의 이야기를 다른 외국인에게 알려주는 반면에 나 도 다른 도시의 이야기를 읽고 매주 새로운 이야기를 재미있게 배웠다. 여름방학동안 나는 춘천 이야기를 통해 세계를 즐겁게 만날 수 있었다. 세상의 색깔이 다시 한 번 바뀌면서 세상에 가을이 나왔다. 강릉은 가을이 되면 정말 아 름다워서 이 기간은 강릉에서 많은 축제가 열렸다. 잎색깔이 변색되면서 흥미롭게 보이고 내 인생도 그렇게 느꼈다. 이 가을이 엄청 바빴다. 수업은 더 어렵고 새로운 과목을 집중해 야 했는데 한편 이번 가을에는 새로운 경험을 열심히 해 봤다. 어떤 친구가 나를 추천해 2012년 강릉 ICCN 세계무형문화축전에서 통역사 자원봉사자가 되었다. 십일 동안 땀이 빠 르게 났을 뿐만 아니라 눈물날 만큼 기분이 즐거웠다. 축전 때 나는 인도네시아의 유산에 대한 특히 바틱과 와양을 소개해 줬다. 이런 문화축전에서 우리나라의 대표 유산을 세계적 으로 보여줄 수 있어서 정말 자랑스럽게 여겼다. 통역사가 되면서 분명히 쉽지 않지만 나 는 진심으로 도와주고 싶어서 어려운 것들은 극복하며 끝날 때까지 함께 했다. 한국인과 25

GKS 외국인들에게 바틱을 직접 가르치고 한국방송도 직면해야 해서 정말 멋진 경험이었다. 그 리고 또 새로운 한국 친구와 많이 사귀고 따뜻한 마음을 주고받고 정말 아름다운 추억이었 다. 그 때도 착한 시청 분들을 만나 나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되었다. 한국 사람과 일하면 서 한국 사람의 특징을 많이 배웠다. 한국 사람은 약속 시간을 잘 지킨다. 이번 경험으로 배운 것은 반드시 잊지 않을 것이다. 당연히 이 가을도 그렇게 도전하고, 극복할 것이다. 한국의 사계절을 통해서 나는 즐거운 만남으로 한국을 배울 수 있었다. 원래부터 한국에 대해 관심이 많고 호기심도 많았지만 한국을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다. 그러나 한국을 공 부하는 것은 즐거운 만남이라고 믿는다. 사계절처럼 내 마음도 가끔 변화해도 모든 배움의 과정을 극복하며 내 인생을 더 아름답고 즐겁게 만들 것이다. 26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장려상 한국유학생활의 뜻을 찾았다! 선저이 꾸마르 강원대학교 일반대학원 외국인을위한한국학과정 유학생활은 인생에 있어서 매우 뜻 깊은 기회입니다. 왜냐하면 유학생활은 그 나라의 문 화를 직접 체험할 수 있게 해주기 때문입니다. 대한민국 정부초청 학생으로서 저도 한국유 학생활을 하면서 한국문화의 많은 것을 느끼고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27

GKS 우리는 할 수 있다! 한국에는 세계유산이 많습니다. 그 중 제가 가장 먼저 가 본 곳은 경주였습니다. 그 중 경주의 불국사와 석굴암에 가 보았습니다. 사실 2년의 한국 유학 생활기간 동안 한국의 문 화유산에 대해서는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러던 중 한국사 수업 시간에 조선의 종묘 역 시 유네스코 세계유산에 등재되었다는 것과 요즘도 옛날처럼 제사를 지내고 있다는 점을 처음 알게 되었습니다. 2011년의 활기찬 여름날이었습니다. 종묘에 가보려고 기회를 찾던 중 국가브랜드위원회 의 웹 사이트에서 유네스코한국위원회, 문화재청과 국가브랜드위원회가 공동으로 개최하는 청년유네스코 세계유산 지킴이 의 모집 공고를 접하게 되었습니다. 지킴이 라는 단어는 저 의 첫인상은 영어의 가드 guard 였습니다. 그래서 무척이나 고민이 많았습니다. 문화재의 보디가드가 되는 것인가? 어떻게 하는 거지? 꽤 심각하게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지킴이의 뜻을 알고 봤더니 한국의 세계유산보존에 대한 책임감과 지킴이라는 자부심도 생기고, 세계유산이 좀 더 친근하게 느껴지는 것 같았습니다. 한편으로는 대한민 국정부초청학생으로서 한국학을 공부하는데도 종묘를 몰랐다는 점이 속상했습니다. 주변 의 다른 외국인 유학생들에게 물어봐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정말 안타까웠습니다. 지킴이 활동을 하면 종묘도 방문할 수 있고, 조선시대문화에 대한 지식도 넓힐 수 있지 않을까 생 각했습니다. 또 이런 저의 노력으로 한국의 세계유산을 더욱 널리 알릴 수 있다면 정말 보 람 있는 일이 아닐까라고 생각했습니다. 종묘를 알아보자! 인도, 중국, 몽골에서 온 친구들과 함께 한 팀을 만들었습니다. 한국문화글로벌화 팀입 니다. 우리 팀은 글로벌 시대이니 만큼 종묘를 전 세계에 알려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어 려운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불가능 일은 아니었습니다. 팀원들은 몽골, 인도 그리고 중국 등 큰 나라에서 한국으로 유학을 왔습니다. 우리들의 고국에 한국의 세계유산을 알리는 것 도 매우 보람찬 일이 될 것이라 생각했습니다. 사실 부족한 점이 많았지만 우리 유학생들 이 최선을 다 한다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고 믿었습니다. 28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먼저 우리는 한국에서 세계유산을 경험하고 공부해야 했습니다. 기회가 닿는 대로 봉사 활동을 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하면 종묘를 더 널리 알릴 수 있을까를 고민한 끝에 한국 에 거주하는 외국인과 한국에 여행 온 관광객들을 대상으로 그리고 소셜 미디어 등을 이용 해 종묘를 알렸습니다. 종묘에 가서 우리는 그곳을 방문하는 관광객들을 만나서 종묘에 대 해 얼마나 알고 있는지를 조사했고 종묘를 소개했습니다. 관광객들의 반응, 특히 서양 관 광객들의 반응은 정말 좋았고 우리의 지킴이 활동을 신기해했습니다. 우리에게 편지를 보 내준 이도 있었습니다. 그들은 외국인유학생이 한국의 세계유산을 홍보한다는 것이 너무 인상적이었다고 했습니다. 오히려 한국인들 가운데 종묘가 세계유산인지 모르는 분들도 많 았고 또 함부로 들어가면 안 되는 지역을 아무렇지 않게 들어가는 분도 있었습니다. 안타 까웠습니다. 우리는 그런 분들에게 종묘에 대한 안내를 했습니다. 봉사활동은 거창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우리가 종묘의 중요한 전통을 잘 알아보고 그를 스토리텔링해서 다른 사람 들에게 들려주는 것이었습니다. 종묘에서 진행하는 제사 교육 행사 등에도 참여해 일손을 보탰습니다. 특히 한국어에 서 툰 외국인 방문객들에게 제사문화에 대해 많은 설명을 했습니다. 종묘 밖에서도 한국에서 사는 외국인들에게 종묘를 알아보자 캠페인을 펼쳤습니다. 학교 친구들과 교수님들께도 종묘가 세계유산임을 알리고 꼭 방문해보기를 권했습니다. 정보화시기의 매우 중요한 도구 가 된 SNS와 블로그도 종묘를 소개하는데 활용했습니다. 우리는 블로그를 비롯해서 페이 스북에 세계유산인 종묘 팬클럽 까지 만들어 전 세계인을 대상으로 종묘를 알리는 역할을 29

GKS 했습니다. 인터넷 상의 아주 작은 공간이지만 이 작은 웹페이지를 통해 종묘가 더 사랑받 는 공간이 된다면 얼마나 기쁜 일일까요. 뿐만 아니라 우리는 고국의 친구, 가족들에게도 편지를 보내 종묘를 알려주기도 하였습니다. 이후 팀원 중 몽골학생인 보이나의 어머니가 깊은 관심을 갖고 한국 그리고 종묘를 찾았습니다. 몽골의 제사문화와도 비슷해 더욱 친근 하게 느껴졌다고 합니다. 그래서 몽골에 돌아가서도 지인들에게 종묘를 많이 자랑하셨다고 합니다. 종묘에서 지킴이 활동하면서 저는 효도에 대한 중요함을 배웠습니다. 종묘의 제사전통은 인도에 아직 남아 있는 카스트제도와 집안의 매우 어려운 형편에도 불구하고 저를 교육시 킨 부모님께 은혜를 갚아야 한다는 생각이 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습니다. 저같은 하층계 급학생에게도 고등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를 마련해 준 한국은 하늘이 내려주신 기적의 산물이며 종묘는 저에게 도덕성과 은혜에 대하여 깨닫게 해 준 소중한 기억이었습니다. 또한 지킴이 활동하면서 인류 역사의 변화 속에 사라진 문화유산에 대해 더욱 깊이 생각 해볼 수 있었습니다. 또 고국의 문화유산에 대해서도 다시 한 번 생각해볼 수 있었습니다. 인도에 있는 동안 타지마할 등 인도의 세계유산을 수시로 방문했지만 그 가치나 중요성을 크게 느끼지 못했기 때문에 인도로 돌아간 후에도 한국의 문화와 전통을 알리는 홍보대사 로 역할을 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는 나와 팀원들이 한국 문화에 젖어 들었기 때 문에 가능한 일이 아닐까요. 저는 온고지신이라는 말을 참으로 좋아합니다. 이 활동을 통 해 저는 자연 속의 한국 옛날 유교사상과 조선의 모습을 익힐 수 있었고 그것을 통해 당 시대 세계유산으로서 종묘의 가치를 알 수 있었습니다. 아니 종묘의 전통을 엿본 것이 책 에서는 배울 수 없었던 정말 살아있는 한국의 정말 살아있는 역사를 배운 것이라고 생각합 니다. 또한 종묘에서 배우게 된 삼강오륜과 사단칠정의 개념은 한국사회와 문화를 이해하 는데 많은 도움이 되고 있습니다. 유학생활의 주요 목적은 그 나라의 언어와 학문을 익히는 것이지만 지킴이 활동을 하면 서 4천 년 이상의 역사와 전통을 가진 한국에 대한 이해도를 많이 높일 수 있었습니다. 그 리고 한국유학생활을 하면서 인류의 기록과 옛 문화를 보존하는데 작더라도 기여하는 것이 매우 행복한 일이었습니다. 30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제수 준비 시간 종묘는 한국의 세계 그 어떤 문화유산보다도 도덕 윤리적인 면으로 저에게 잊을 수 없 는 인상을 남겨주었습니다. 원래 저는 한국을 보다 체계적인 방식으로 연구하고 살펴보고 싶었는데 그 이유는 한국이 21세기에 들어서 국제 사회에서 경제적으로 세계에 끼치는 영 향력이 커져서였습니다. 그러나 종묘에 대한 호기심이 더욱 커지면서 더욱더 한국에 대한 연구를 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간절히 들게 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저는 한국학연구생으로서 많은 관심과 애정을 쏟아 열심히 공부하면서 한국의 세계유산을 더 널리 알리고 더 의미있 는 한국유학생활을 할 것입니다. 감사합니다. 31

GKS 장려상 꿈을 향해 인진륀 경희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석사과정 사람마다 자신만이 가지고 있는 꿈이 있기 마련입니다. 꿈은 자유라고 할 수 있습니다. 농사짓는 사람이 대통령이 되려는 꿈도 가질 수 있고, 매우 가난한 사람이 세계 제1위의 부자가 되고 싶은 꿈도 가질 수 있습니다. 꿈은 이루지 못하더라도 가지고 있으면 행복하 게 해 준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저에게도 아주 어렸을 때부터 꿈이 있었고, 그 꿈의 제목은 지금까지 제 방 책상 벽에 써져 있습니다. 제 평생 꿈꿔 왔고 지금도 간절히 그 꿈을 향해 날마다 숨을 쉬고 있습니다. 저는 경찰이신 아버지와 선생님이신 어머니의 외동딸로 엄격하고도 자상한 사랑을 한 없이 받고 자랐습니다. 부모님께서는 형제가 없는 저에게 때로는 무서운 선생님이 되고, 친구가 되어주고, 때로는 제 인생의 지도자가 되어주기도 합니다. 저희 집이 넉넉하지는 못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부족함이 없는 가족입니다. 부모님께서는 제가 어려서 부터 부모님께 의존하지 않고 스스로 살아갈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주셨고, 모든 일에 있 어 항상 자신감을 가지고 신중하게 처리할 수 있도록 배려를 해주셨습니다. 그리고 저를 신뢰해 주셨습니다. 자식의 의견을 존경해주시고 믿고 맡겨주심에 저 또한 부모님을 존경 하며 책임감 있는 행동을 배웠습니다. 사실 제가 어렸을 때 제 부모님께서 제가 의과대학 을 입학해서 의사가 되기를 바라셨습니다. 그러나 한국어와 인연이 있었던 저는 대학교에 한국어과 전공으로 입학하게 되었습니다.(미얀마의 교육정책에 따르면 대학이나 전공은 점 32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수에 의해 정해져 있습니다.) 그때 제 부모님은 졸업하면 무엇을 할 것이며, 또 앞날이 어 떨지 모를 저에게 실망스러운 모습이었습니다. 그때 제가 제 부모님께 말씀 한 마디만 했 습니다. 제가 언제가는 꼭 엄마, 아빠가 자랑스러운 딸이 되도록 노력하겠으니까 엄마, 아 빠 저를 믿어주십시오 라는 말이었습니다. 솔직히 그때 제 스스로도 앞날이 어떻게 될지 몰랐습니다. 다른 기술학과, 컴퓨터 학과 등에 입학이 가능했지만 한국어과를 다니기로 했 습니다. 그 때는 한국이라는 나라를 TV드라마 몇 개를 통해 아는 것 밖에 없었지만, 제 마 음 깊숙히 한 가지 굳게 믿었습니다. 그 믿음이 뭐냐면 무엇이든지 최선을 다 하면 언제가 는 보람을 느끼게 되고 최고가 될 것이라는 겁니다. 그렇게 다짐했기에 한국어를 처음 배 우는 날부터 피눈물 나게 열심히 공부했습니다. 그 결과 2학년 때 한국어 능력시험 4급을 합격하여 주 미얀마 대사관에서 운영하는 한국어 말하기 대회에 참가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2006년 제4차 한국어 말하기대회에서 제 친구 2명을 제외한 다른 참가자들은 모두 저의 1년 선배들이었습니다. 선배들과 경쟁하기 위해 어느 때 보다 더 열 심히 노력하였습니다. 그 결과 동상을 수상했습니다. 비록 동상이었지만 저에게는 금상 이 상의 소중하고, 아주 귀한 가치였습니다. 그리고 수상한 그 날 밤은 정말 즐겁고 행복한 밤 이었습니다. 그 말하기 대회를 개최하는 식장에 저의 아빠는 출장 가셔서 못 오셨지만, 저 의 엄마가 나와 주셨습니다. 그날 밤 한국어 말하기대회의 저의 발표주제는 저에게 소중 한 사람 이라는 제목으로 저의 엄마, 아빠에 대한 얘기로 대회에 참가했습니다. 제가 엄마 얘기를 하면서 엄마를 보는 순간 엄마는 매우 뿌뜻한 표정, 자랑스러운 표정으로 저를 보 고 있었습니다. 저의 엄마는 한국어를 모르는 사람이지만 엄마라는 소리만 듣고, 그리고 저의 표정을 보고 제가 무슨 얘기를 하는지 눈치를 챈 것 같았습니다. 그날 집에 가서 제 가 대상을 못 받아서 죄송하다고 아빠에게 연락을 드렸는데, 아빠는 그런 대회에서 당당 하게 아빠, 엄마 얘기를 해주어서 우리 딸이 얼마나 자랑스럽고 행복했는지 모른다 고 저 에게 말했습니다. 그날 밤에 한국어는 저에게 발전의 열쇠이자 제 꿈을 실현시켜주는 유일 한 길이라는 것을 믿었습니다. 그러다가 제가 졸업하고 한국국제협력단 코이카에서 마련해 주신 2008년도 코이카 프로 그램에 참가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받았습니다. 그때 저의 나라 미얀마에서 저 혼자만 참 가할 수 있었습니다. 제 평생 다시 생각해도 행복하고 정말 보람 있는 그 코이카 프로그램 에서 최우수상을 받았습니다. 그때 제 부모님을 위해 제 나라를 위해 제가 최선을 다했기 33

GKS 에 그 결실을 얻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엄마, 아빠에게 수료식이 끝나자마자 전화해서 알려 드렸습니다. 엄마, 아빠의 기뻐하시는 웃음소리는 저에게 세상을 다 가진 듯했습니다. 또한 2008년 코이카 프로그램에서 인진륀이 최우수상을 받는 것보다 미얀마학생 인진륀이 최우 수상을 받는다는 말이 더 귀에 달콤했습니다. 그 프로그램 끝난 후 미얀마 다시 돌아가는 날 언제가는 한국에 다시 와서 한국 대학에 서 공부해야 하겠다고 다짐했습니다. 미얀마에 다시 돌아간 후 저는 미얀마 현지 코이카, 굿네이버스라는 한국 NGO, 미얀마에 들어가 있는 한국 회사 중 최고 한국 회사라고 할 수 있는 미얀마 포스코 회사 등 다양한 분야를 통해 한국어와 한국관련 경험들을 꾸준히 쌓았 습니다. 한국에서 대학원을 다니고 싶은 저의 다짐은 그 사이에 하루도 변하지 않았습니 다. 그러다가 경희대에서 제가 연수를 다녔을 때 가르쳐주셨던 한국 선생님한테서 연락이 왔습니다. 그 선생님께서 국립국제교육원(NIIED) 장학생으로 대학원을 다니고 싶은 생각 이 있으면 지원해 보라 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너무 간절한 마음으로 경희대에 대학 추천 으로 국립국제교육원 장학생을 지원했습니다. 해외에 그렇게 대학원을 다닐 수 있다는 기 회는 상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소중한 기회라 정말 많이 기대하며 지원했습니다. 몇 주 후에 제가 최종 합격자 중에 선발됐다는 소식을 듣고 너무 기뻐서 눈물이 났습니다. 미얀 마의 한 평범한 집안에서 자란 저 같은 사람이 저의 자비로는 공부 못할 값진 기회이었습 니다. 그 기회가 제 꿈을 실현시켜 줄 기회였다는 것은 제가 경희대학교에서 지금 대학원 을 다니면서 본격적으로 매일 매일 느끼고 있습니다. 처음 2012년 정부초청장학생 오리엔 테이션 하는 날에 미얀마에서 오는 친구들과 함께 Talent Show에 미얀마 전통옷을 입고 한국 노래를 했습니다. 여러 나라에서 온 수많은 친구들 중에 미얀마라는 이름을 들어본 적도 없는 친구들도 아마 많이 있었을 겁니다. 그런 사람들 앞에 미얀마를 조금이나마 알 릴 수 있게 되어 정말 기쁘고 자랑스러웠습니다. 저의 자랑스러움으로 시작한 한국 유학생 활은 지금이면 거의 1년쯤 넘었고 이제 3학기를 다니고 있습니다. 매일 매일 유학 생활을 하면서 한국을 본격적으로 느끼고 있습니다. 미얀마와 같은 더운 나라에서 온 저에게 제일 힘든 한국의 추운 겨울에도 열정이 넘친 한국 학생들을 본받아서 저도 열심히 공부하고 있 습니다. 한국어학 전공인 저는 한국어뿐만 아니라 한국의 문화, 역사, 문학 등도 다양한 수 업을 통해서 배울 수 있었습니다. 또한 때에 따라 학교에서 친절하게 마련해 주신 수학여 행 및 행사 등도 많이 참여할 수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저의 제일 가까운 친구이라고 할 34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수 있는 경희대의 멋진 도서관 무엇보다 소중하고 아낀 곳입니다. 미얀마에서 그렇게 크고 대단한 도서관이 없는 것을 많이 아쉬움을 느끼며 언제가는 저희 미얀마에도 경희대 도서 관처럼 좋은 도서관들이 생겼으면 하는 마음이 늘 생기곤 합니다. 무엇보다 수업을 같이 들으면서 다양한 여러 나라에서 온 친구들을 만나 좋은 관계를 만들 수 있고 미얀마를 전 혀 몰랐던 친구들에게 미얀마에 대해서 알려 줄 수 있고, 그 친구들의 나라에 대하여 제가 잘 몰랐던 것들에 대해서도 많이 배울 수 있습니다. 미얀마라는 나라가 어떤 나라이라는 것을 외국인에게 알려 줄수 있다는 것 자체가 저에게는 정말 자랑스러운 일입니다. 또한 미얀마 사람을 처음 본다고 하는 친구들에게 최대한 좋은 인상을 주도록 노력하고 있습니 다. 왜냐하면 그때마다 제 마음에 저는 미얀마의 얼굴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매일 매일 그 마음을 품고 한국의 많은 좋은 것들을 생활하면서 배우고 유학 생활에 하루 하루 가 후회 없도록 사는 것이야말로 저에게 국립국제교육원(NIIED)에서 주신 최고의 상이자 평생 다시 생각해도 제일 가치와 보람 있는 멋진 날들이라고 생각합니다. 한국으로 오는 날 공항에서 펑펑 우시던 엄마에게 그 눈물만큼 다시 웃게 해주겠다고 약속했습니다. 보다 더 한 노력을 통해서 제 엄마, 아빠가 저를 위해서 웃을 수 있도록, 또한 저의 나라 의 명예를 나타낼 수 있도록 하겠습니다. 그것이 바로 어렸을 때 가졌던 저의 유일한 꿈이 고 이제 그러한 저의 꿈에 한 가지 꿈이 더 추가되었습니다. 제 인생의 밝은 길을 열어 주 시고, 제가 노력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신 국립국제교육원(NIIED)의 은혜를 갚을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을 제 새로운 꿈을 향해 약조합니다. 35

GKS 장려상 응답하라 2012 라시드 라파엘 고려대학교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2012년은 정말 다사다난한 해였습니다. 저의 2012년은 두 가지 큰 일로 나누어 볼 수 있 습니다. 제가 학부를 다닐 때, 제 전공은 일본학, 한국학이었지만 기본적인 내용만 배우고 깊이가 부족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한국어 실력도 늘리고, 석사 학 위 과정을 하기 위해 한국에 오기로 했습니다. 한국에 오기 전에는 어떤 일들이 저를 기다 리고 있을지 생각도 하지 못했는데 오늘까지도 저는 잊지 못 할 추억들을 만들어 나가고 있습니다. 영국에서 한국에 대한 뉴스가 나오면, 그것들은 대부분 부정적이거나 북한에 관한 뉴스 들이었습니다. 하지만 저는 그것들이 한국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또, 우리는 북한에 대해서 항상 충격적인 소식만을 들었기 때문에 북한이 핵 보유국가라는 것 이외에는 몰랐습니다. 그래서 저는 서울과 매우 가까운 그 나라를 알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 북한 사람(새터민)들을 만나보는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저는 그들이 남한에서 여 러 선입견으로 인해 힘들어 하고 남한 생활에 적응하는 것도 매우 힘들다고 들었습니다. 저는 어떻게 남한에서 100km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에 살았었던 사람들이 한국 사회에서 많은 선입견에 시달리고 있는지를 상상하기 힘들었습니다. 2012년 1월, 고려대학교 어학당에서 한 학기 동안 한국어 실력을 쌓고, 저는 탈북 주민 에게 자원봉사로 영어를 가르치는 일을 하기로 했습니다. 저는 신촌으로 봉사활동을 갔는 36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데 그곳에서 저와 또래인, 4년 전에 탈북한 한 여학생을 만났습니다. 우리는 좋은 친구가 되었고 서로의 문화에 대해서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연세대 동아리를 하 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그 동아리에서는 남북한 학생들이 함께 어울리며 밝은 분 위기 속에서 서로의 문화를 교류하고 있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결국에는 서로가 큰 차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아가고 있다고 이야기해주었습니다. 저는 그 동아리에 가입했고 그들의 따뜻한 환영에 매우 감동하였습니다. 제가 남한 출신도 북한출신도 아니었고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도 없었기 때문에 저는 동아리에 갈 때마다 더 열심히 한국어를 배우려고 노력했 습니다. 매주 우리는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나누었습니다. 북한의 대학생활, 북한 요리, 북한에서 있었던 로맨스 이야기까지, 하지만 무엇보다도 우리는 엠티를 포함해서 함께 재 미있는 추억들을 많이 만들었습니다. 이 경험으로 인해 한국과 한국 사회에 대해 여러 중요한 점들을 배우게 되었습니다. 첫 째로, 북한 사람들이 남한 사람들과 많이 다르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통 일에 대해서 남한 사람들은 왜 그렇게 이상한 반응을 보이는 것일까요? 대부분의 동아리 사람들은 가족들이 부끄러워할까봐 동아리에 가입했다는 사실을 비밀로 했습니다. 왜 그랬 는지 이해는 되지만 그런 차가운 인식을 가진 상태에서 통일을 이야기하는 것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한국에서 북한 과 통일 이라는 단어들은 굉장히 정치적이고 위험한 용어입니 다. 하지만 저는 그래서는 안 될 것 같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제3자이고 외국인이기 때문 에 다행히 사람들이 북한과 통일에 대한 저의 가치관을 평가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저의 친한 고대 호랑이들을 동아리에 초대할 수도 있었습니다. 시간이 지난 뒤 저는 이화여대, 서강대, 그리고 외대에까지 비슷한 동아리들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지만, 제 학교인 고대에는 왜 그런 동아리가 없는지 궁금했습니다. 너무 위 험해서 없는지, 아니면 쓸모가 없어서 없는지, 고대에는 북한 사람들이 있는지, 그리고 다 른 고대 친구들은 그런 동아리에 관심이 있는지 알고 싶었습니다. 이 궁금증을 없애기 위 해 저는 직접 동아리를 만들었습니다. 5월에 학교 축제가 있었는데, 저와 제 친구들은 부 스를 설치하고 동아리를 만들기 위해 상의했습니다. 고대에 다니는 북한 사람은 아무도 모 르는 상태였습니다. 어느 날 어떤 여학생이 저에게 연락했습니다. 그 친구는 연세대에 다 니는 자신의 친구로부터 우리가 동아리를 만들려고 한다는 것을 들었다고 했습니다. 이 사 실이 그 친구가 입학한 뒤 들은 가장 행복한 소식이라고 했습니다. 이제는 대한민국 사람 이 되었고 재교육도 받았지만, 대학생활이 버겁다고 했습니다. 적응하는 것이 너무 힘들다 37

GKS 고 했고 동아리에 들어가고 싶었지만 어떻게 들어갈 수 있을지 몰랐다고 했습니다. 그 친 구는 북한에서 온 다른 고대생들을 소개해주었고 우리는 부스를 만들기 위해 2주 동안 열 심히 일했습니다. 우리 동아리의 목표는 고려대에 다니는 북한과 남한 학생들이 모두 게임 도 하고, 서로에 대해서 알아가며 친하게 어울리는 환경을 만드는 것입니다. 제가 아는 어 떤 교수님은 그 일이 시간 낭비일 것이라고 했고 아무도 관심이 없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래도 우리는 계속 노력했고 밤을 새우며 일한 결과, 드디어 모든 준비를 끝냈습니다. 우 리의 목적은 동아리에 사람들을 가입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이 이런 동아리에 관심 을 가지는지 보려는 것이었습니다. 이런 일들에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는지 궁금했습니다. 결국, 그 날이 왔습니다. 두부밥과 토마토 화채를 팔면서 우리는 북한의 놀이도 했고 많 은 사람들로부터 관심을 끄는데 성공했습니다. 남한 사람들이 만약 자신들이 북한사람을 만난다면 어떻게 반응해야 할 지 모르겠다고 말을 했지만, 사실 그들이 이야기나누던 상대 는 북한 사람들이었습니다. 이 날은 저 뿐만 아니라 모두에게 감동적이고 보람찼습니다. 지나가시던 많은 고려대 선생님들도 저희를 축하해주었습니다. 사람들이 통일이 무엇인지 도 모른 채로 통일을 논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때의 부스 행사 를 통해 저는 사람들이 충분한 관심이 있으나 단지 어디서 그러한 것들을 찾아야 하는지 모른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둘째 날에는, TV 방송사, 라디오 쇼, 심지어 신문사에서 도 저희를 인터뷰하기 위해 찾아왔습니다. 이런 일들을 겪으며 제가 조금이나마 고려대를 아니, 한국을 조금 더 나은 방향으로 도움을 주지 않았나 하는 생각에 정말 기뻤습니다. 우 리가 이 동아리를 시작하기 전에는, 많은 남한 친구들은 북한 사람을 만나는 것은 불가능 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하지만 지금은, 이 친구들은 동아리를 통해서 서로 좋은 친구들이 되었습니다. 아직 우리 동아리가 작고 갈 길이 많이 남아 있지만 저는 한국의 미래에 큰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이 프로젝트의 일원이라는 것이 너무도 기쁩니다. 축제 이후에도 정기적으로 동아리 모임을 가지며 고려대학교 내의 새터민들과 교류를 하며 서로를 이해하는 노력을 하고 있습니다. 이번 해의 또 다른 사건은 제가 한국에 대한 웹사이트를 만든 것입니다. 저는 영국에 있 을 때 항상 KPOP과 김정일에 관한 뉴스만을 듣는 데 질려있었습니다. 저는 이렇게 단편적 인 시각만을 전달하는 서양 언론들에 불만스러웠습니다. 그래서 지난 2월 저는 친구와 함 께 koreabang이라는 웹사이트를 만들었습니다. 이 사이트의 컨셉은 단순합니다. 한국 사 회에서 가장 많은 관심을 받고 가장 많이 논해지는 한국의 뉴스들을 영어로 번역하는 것입 38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니다. 처음에는 취미활동으로 사이트 운영을 시작했기에, 앞으로 어떤 일들이 일어날지 상 상하지 못했었습니다. 몇 주 후에, 저희는 한 유명 신문사에 특집으로 인터뷰를 하게 되었 습니다. 그리고 5월에는, 한 영국 방송사에서 한국 패션에 대한 다큐멘터리의 토픽을 찾기 위해 저희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이러한 접촉을 통해, 저희는 연예인들, 한국의 유명 디자 이너들과 성형외과 전문의들과도 만났고 영국의 유명 다큐멘터리의 공식적인 협력자로서 활동했습니다. 처음에는 저희 사이트가 어떤 반응을 불러일으킬지 확신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곧, 방문자 숫자도 늘어나기 시작했고 많은 한국인들이 적극적으로 이 일에 참여하게 되었습니 다. 한국이 세계적으로 유명세를 더하고 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도 그만큼 늘어나게 되 었습니다. 하지만 KPOP을 제외하고는 서양사회에서 한국에 대해 접할 수 있는 정보는 매 우 적습니다. 사람들은 꼭 예쁜 아이돌 가수들이나 김치 이외에도 더 많은 것들을 알고 싶 어합니다. 이것이 아마도 제 웹사이트가 성공적으로 운영되고 있는 가장 큰 이유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한번은 저희 사이트가 한국에서 가장 많이 본 웹사이트 top 2000에도 뽑힌 적 이 있습니다. 이것은 외국인들이 그만큼 외국인들에 의해 전해지지 않는 뉴스라 하더라도 한국에서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 관심이 많다는 것을 보여주었습니다. 우리가 운영을 시작 한 이래로 전 세계의 많은 사람들이 저희 사이트에 도움을 주고 있고, 그 중 반은 자신들의 나라 이야기를 공유하고 싶어하는 한국인들입니다. 또한 더 놀라운 사실은, LA TIMES, WALL STREET JOURNAL, NBC NEWS 등을 비롯한 세계의 유명신문사들이 제 사이트를 참조한 기사들을 실었다는 것이었습니다. 저는 라디오 방송에도 인터뷰이로 나오게 되었 고, 영국 유명 잡지를 도와 한국에 대한 기사도 만들었습니다. 앞서 얘기한 한국 생활의 두 에피소드를 통해 개인적으로 한국에 대해 더 많이 배울 수 있었습니다. 매일 한국 사람들과 소통하면서, 같이 활동하고 프로젝트를 구상하는 것들이 교실 밖에서, 교과서 밖에서 한국문화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는 경험이 되고 있습니다. 또 거의 매일 제 웹사이트를 통해 한국의 기사들을 번역하는 것 역시 영국 신문사들이 전달해 주는 것들을 넘어서 한국의 소식들을 알아가고 여기서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지, 또 사람들 이 어떤 것들에 대해 이야기하는지를 잘 알 수 있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저는 이러한 것들 이 제 학업적인 성공에도 아주 중요한 것들이 된다고 여기고 있습니다. 저는 이번 9월에 대학원을 진학했습니다. 제가 듣는 수업들은 국제 인권, 남북한 관계 그리고 한국 정치입 니다. 저는 지난 몇 해 동안의 경험을 통해서 다른 사람들보다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더 39

GKS 잘 이해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인권 수업에서는 우리는 북한의 탈북자와 기근 문 제에 대해서 이야기를 했습니다. 저는 이러한 주제들에 대해 실제로 경험을 했던 제 친구 들로부터 이야기들을 종종 들었기 때문에, 이 수업의 토론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었 습니다. 남북한 관계 수업에서는 대부분의 반 친구들은 시대가 지난 책들에서 읽은 것들에 대해 이야기했지만, 저는 책들의 내용을 바탕으로 제가 직접 들었던 진짜 이야기들을 논할 수 있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정치학 시간에는 매일 같이 한국의 기사들을 읽고, 이해하고, 번역한 덕분에 현재 한국의 정치적인 분위기와 대선에 대해 자세하게 리포트를 써 나아갈 수 있었습니다. 제가 해왔던 여러 가지 활동을 통해서 한국에 대한 이해를 높일 수 있었고 동아리 활동, 봉사활동을 통해서 고려대학교와 한국 사회에 다양한 방식으로 기여할 수 있었습니다. 이 러한 경험은 제가 미래에 어떤 일을 하고자 하는지에 대한 길을 알려주었습니다. 저는 통 일부에 인턴십 프로그램이 있다고 들었기 때문에 내년 여름방학 기간에 인턴을 하기 위해 서 인턴십에 지원할 예정입니다. 지금까지의 2012년은 저에게 정말 환상적이었고 내년 2013년에는 무슨 일이 저를 기다리고 있을지 기대가 됩니다. 40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장려상 울릉도, 독도 탐방 부티투짱 대전대학교 국어국문학과 너는 사랑이다/ 너는 우리의 희망이다/ 너는 외롭지 않다/ 네 곁에 내가 있고/ 조국의 뜨거운 가슴이 있다/ 동해바다 푸른 물결/ 힘차게 가르자/ 사랑하는 독도여/ 거친 파도를 타고 동해바다/ 끝까지 달려 나가자 장수남의 내가 좋아하는 독도에 관한 독도, 사랑 이 라는 시이다. 독도를 사랑하는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이 시의 어조가 얼마나 아름다운가. 독도문제는 연일 언론에 핫이슈로 오르내리고 있어 한국에서 생활하고 있는 나는 독도 로 눈길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다른 외국인들이 독도에 대해 무슨 생각을 갖고 있는지 굉 장히 궁금했다. 그래서 중국과 러시아에서 온 친구들과 한자리에 모여서 The Rising Sun" 팀을 지어 대구대학교에서 개최한 2012 외국인 독도 사랑 말하기 대회 에 나가기로 하였다. 대회 날이 아직도 눈앞에 아른거린다. 국적이 다른 12팀의 외국인 학생들이 두말 할 필 요 없이 하나같이 독도문제와 울릉도에 대해 뜨거운 열정을 갖고 있었다. 내 이름은 독 도, 독도는 누구의 땅인가?, 독도-세상을 향한 날갯짓 독도의 영토권 분쟁 등 다양한 주제로 자신의 생각을 드러냈다. 모든 팀은 독도가 한국 땅임에 틀림없다고 주장하였으나 우리 팀은 유달리 시를 통하여 아름다운 울릉도와 꿈과 희망의 상징인 독도를 소개하고자 하였다. 그래서 시( 詩 )로 보는 울릉도와 독도 라는 주제를 잡아 발표하였다. 한국을 하면 흔히 한복, 사물놀이 혹은 태극기가 떠올랐지만 이제 한국 사람의 사랑에 대해 한층 더 알 게 되었다. 그것은 바로 독도이다. 한국인들이 독도를 막내 땅 이라고 부른다. 정말 정겹고 41

GKS 친근감을 주는 부름이 아닐까. 한국에서 해가 처음 뜨는 곳도 독도라고 한다. 독도의 시민 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도 그 태양으로부터 강렬한 힘과 굳은 믿음을 받아서 모든 고난과 역경을 이기며 희망이 찬 미래로 달려가고 있는 것이 아닌가 싶다. 마치 거친 파도를 타고 먼 바다로 나가는 배들의 모습처럼! 대회가 끝난 다음에 울릉도, 독도를 탐방하러 경상북도 울릉군으로 떠났다. 투어가이드 가 그곳에서 신비로운 섬의 맛과 멋을 마음껏 즐길 수 있다고 해서 기대감이 가득 찬 마음 으로 썬플라워호 를 탑승했다. 울릉도에 도착할 때 점심시간이 다 되어 섬의 별미 홍합밥 을 맛보았다. 제일 보람을 느꼈던 것은 바로 널리 알려져 있는 한국의 유일한 영토박물관 인 독도 박물관 을 방문하는 것이다. 박물관에 올라가면서 울릉도는 오르막길과 계단만을 지닌 섬의 특징을 실감하였다. 그칠 줄 모르는 비 때문에 그리 가고 싶었던 독도까지 못 가게 됐지만 독도 박물관을 방문하는 것 자체도 참으로 의미심장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 곳에서 <팔도총도>(1530년), <조선국지리도 소재 팔도총도>(1592년), <삼국접양지도>(1785 년)등과 같은 지도들하고 값진 역사증거들이 나란히 전시되어 있어 이를 통해서 독도와 울 릉도에 대하여 처음 알게 된 것은 수두룩하다. 실은 독도는 한국의 땅인지 아닌지 오랫동 안 회의를 품었으나 삼봉도를 형상화한 독도 박물관은 내게 진실을 말해주었다. 독도는 한 국의 고유 땅이라는 진실! 이러한 귀중한 자료들은 한국 사람에게 조국의 영토의식과 민족 정신을 고취할 뿐더러 외국인한테 독도는 한국 땅이라는 사실까지 알리는 데 요긴한 역할 을 한다. 우리나라 베트남은 남중국해에 위치한 스프래틀리 군도(쯔엉사 군도-베트남명) 영 유권 문제 때문에 다른 나라와 긴장된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한국처 럼 영토박물관 하나가 생겼으면 얼마나 좋겠는가. 그 다음날 버스로 울릉도 한 바퀴를 돌아봤다. 창밖을 내다봤더니 울릉도 섬 전체에서 쉽사리 찾아볼 수 있는 부지깽이나물이 울릉도를 초록빛으로 뒤덮고 있었다. 이들이 빗속 에서 더더욱 신선해 보였던 것이 아닌가 싶다. 뿐더러 죽도 또는 관음도와 같은 주변에 있 는 작은 섬들도 볼 수 있었다. 울릉도, 독도, 죽도, 관음도와 같이 동해에 있는 섬들과 육지 에 떨어져 있는 하나의 섬 가족을 이루는 것인 것만 같았다. 때문에 개인적으로 나는 이 섬들이 외로운 섬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이 날 탐방의 가장 인상 깊은 것이 다름이 아닌 해안 산책로 도보하는 것이다. 그곳에서 한걸음 한걸음씩 걸어가면서 눈앞에서 펼쳐 있는 푸른 바다와 한쪽은 우뚝 서 있는 드높은 산이 육지에서 보기 여간 힘들지 않은 절경을 이 루었다. 기가 막혔다. 울릉도의 멋은 바로 이곳이 아닐까. 저녁에 숙소에 들어가서 독도사 42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랑 퀴즈대회에 나갔다. 모든 외국학생들이 다 같이 하는 것이다. 대회라기보다는 재미도 느낄 수 있는 동시에 새로운 지식을 섭취할 수 있는 게임이었다. 독도사랑의 열정은 대회 의 분위기를 뜨겁게 끌어올려주었다. 마지막 날이었다. 일단 울릉도의 평지인 나리분지로 발길을 옮겼다. 그곳에는 안개가 자 욱해 멋진 풍경을 연출해 주었다. 울릉도의 대표적인 너와집을 볼 수 있었다. 너와집과 처 음 만났을 때 우리 나라의 초가집과 같다고 생각했지만 그렇지 않은 것 같다. 너와집은 지 붕에 너와가 얹어져 있다는 특징 때문에 불린 이름이며 너와의 재료로는 소나무, 전나무, 굴참나무라고 한다. 이로써 한국 문화에 대해 한층 더 알게 되었다. 다시 생각해보니 그칠 줄 모르는 비는 오히려 좋은 것인지도 모른다. 비가 많이 내렸기 때문에 또 다른 울릉도의 멋진 절경을 즐길 수 있었다. 봉래폭포였다. 잠시 폭포 앞에서 가만히 서 있었다. 폭포소리 가 골짜기를 무상무념의 경지에 이르게 한다. 떨어지는 물줄기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며 내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는다. 철썩철썩 치는 파도 소리, 시원한 바닷바람, 널따란 나리분지, 봉래 폭포 그리고 인상 깊 은 너와집 등 모두가 한 폭의 우아한 풍경화를 연상케 하였다. 육지에 동떨어져 있는 이 섬들이 많이 외롭겠고 생각했으나 직접 가보니 그러한 것은 헛생각에 불과했다는 것을 나 는 깨달았다. 울릉도, 독도, 죽도, 관음도는 동해에 있는 다른 섬들과 같이 하나의 섬 가족 을 이루는 것을 봤기 때문에 더 이상 이 섬들은 외로운 섬이라고 여기지 않는다. 한국엔 백 번 듣는 것이 한 번 보는 것만 못하다 라는 속담이 있다. 오감으로 섬의 모든 것을 체험 하고 몸소 독도박물관에 가서 자료들을 목격하는 것은 내게 천금과도 바꿀 수 없는 경험이 었다. 섬에 첫 발을 디디는 순간부터 돌아올 때까지 늘 같은 생각이었다. 독도는 다름이 아 닌 한국인의 막내 땅이라는 생각! 너는 사랑이다/ 너는 우리의 꿈과 희망이다/ 너는 외롭 지 않다 시가 또 다시 노래처럼 내 머릿속에 떠오른다. 43

GKS 장려상 나만의 무대를 세우기 위한 발돋움 아리운자야 서울대학교 경영학과 2012년 2월 23일, 나는 기대에 부푼 가슴을 안고 한국에 도착했다. 나에게 나만의 무대 를 세우기 위한 밑거름이 될 정부초청장학생이라는 큰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이와 같은 기회를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하여 그간 나는 더욱 책임감 있게 생활해왔다. 어느덧 시간은 흘러 한국에서의 생활도 벌써 1년이 되어간다. 그 동안 크고 작은 변화들이 있었고, 나는 그와 같은 변화들에 울고 웃으며 이곳에서의 생활에 적응해나가고 있다. 때로는 미처 예상 치 못했던 난관을 만나 슬퍼하기도 하고, 또 때로는 생각지 못하게 찾아오는 소소한 기쁨 들에 행복하게 하기도 하면서. 낯선 환경, 새로운 문화, 그리고 정 많은 한국 사람들과의 만남은 나에게 많은 깨달음을 주었다. 이에 나는 이 글을 빌어 앞으로 한국에서 생활하게 될 유학생 친구들과 나의 한국에서의 경험을 나누고자 한다. 한국으로의 유학은 나에게 있어 부모님의 곁을 떠나 스스로 자립할 수 있는 기회로 다가 왔다. 천방지축의 10대를 지나 스무 살이 되던 날, 나는 부모님의 안전한 품에서 나와 스스 로 인생을 개척하고, 스스로의 선택에 책임을 지는 멋있는 어른이 되어야겠다는 다짐을 하 였다. 남에게 예속되거나 의지하기보다 자기 스스로 서고 싶다는 자립심이 생긴 것이다. 한걸음, 한걸음, 나는 나만의 무대를 세우기 위한 여정을 시작하고 있었다. 정부초청장학생 프로그램에 대한 지원은 일종의 도전이었다. 이후 정부초청장학생으로 선발되어 한국에 와 서 생활하면서 나는 누구도 가르쳐 준 적 없었던 자립심과 독립심을 스스로 키울 수 있는 44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기회를 얻게 되었다. 이는 유학 생활에는 물론, 나의 인생 전반에 있어서도 가장 값진 경험 이 되리라 믿는다. 외국에서 이처럼 오랜 기간 생활해보는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이전에 외국 여행을 해보 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모두 짧은 기간이었고, 또 늘 부모님과 동행했었기에 고향을 그 리워하는 마음은 그리 크지 않았었다. 내가 이처럼 조국을 절실하게 사랑하고 고향을 그리 워하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고향에 대한 향수를 극복하며 낯선 환경에 적응 하는 것은 생각처럼 쉽지 않았다. 하지만 내게 선뜻 도움의 손길을 내밀어 준 친구들 덕분 에 나는 곧 새로운 환경에서의 생활에 적응할 수 있었고, 지금은 한국이 너무나 편해졌다. 마치 제2의 고향이 된 듯하다. 한국문화를 조금씩 접하면서 모국의 문화에 관심이 더 커지는 신기한 경험을 하기도 했 다. 한국인 친구들은 물론 다른 외국인 친구들과도 친해지면서 나는 내가 단순히 한 개인 이 아니라 몽골 이라는 한 국가를 대표하는 사람임을 깨닫게 되었다. 나에게는 사람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우리나라 몽골을 알릴 의무가 부여된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 나의 책 임이 막중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런 책임이 부담스럽다거나 싫은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다른 나라 사람들에게 조국을 알릴 수 있는 기회가 내게 주어졌다는 사실에 뿌듯했 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종종 몽골을 세계 역사 속에서 잠깐 반짝였다가 이제는 다른 나라 에 속하게 된 것으로 오해하곤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예전에 배웠지만 크게 관심이 없어 그간 신경 쓰지 않았던 우리나라의 역사와 문화를 다시 공부하기 시작했다. 유학이라 는 새로운 경험을 통해 애국심이 더 커진 것이다. 예전에는 너무나 지루하고 딱딱하기만 했던 뉴스, 읽다 보면 세상에 살기가 무서워졌던 신문 기사들, 거의 강제적으로 외워야 했던 시와 뻔하게만 느껴졌던 문학들도 한국에서 생 활하게 되면서 다르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한국의 사회와 문학을 여러 가지 방법으로 접하 게 되면서 편견을 버리고 새로운 시각을 가지게 되었다. 내가 무시했던 것들은 얼마나 중 요한 것이었던가! 지루하다 생각했던 인문사회 지식들은 내가 한국사회에 빠르게 적응할 수 있도록 큰 도움을 주었다. 대학수업에서 만난 교수님과 친구들은 내가 몰랐던 것을 친 절하게 설명해주어 내게 큰 도움을 주었다. 그래서 나 또한 그들에게 도움이 되고자 노력 하는 동시에, 이와 같은 호의가 헛되지 않도록 열심히 설명을 듣고, 새롭게 접한 지식들을 외우기 위해 시간을 투자한다. 1학기 때 대학국어를 수강했었는데, 교수님은 외국친구들이 한국어로 학술적인 글을 쓸 수 있도록 많은 노력을 기울이셨지만 많은 학생들을 제한된 시 45

GKS 간 안에 효율적으로 가르치는 것은 힘들 것이라 판단하셨다. 그래서 수강생들에게 도움을 줄 수 있는 튜터링 프로그램에 지원하도록 권유하셨다. 튜터들은 외국인 친구들의 글을 일 차적으로 교정해주거나 새로운 단어를 설명해주고, 교수님은 이차적으로 글을 다듬거나 튜 터가 설명해주지 못한 부분을 설명해주셨다. 이러한 시스템은 외국인 나에게 여러모로 도 움이 되었다. 나는 튜터와 기사를 읽고 요약하거나, 한국의 문학을 읽고 감상문 쓰고, 한국 의 문화를 접할 수 있는 곳에서 체험을 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했다. 튜터의 열정으로 나 는 기사읽기에 대한 거부감을 극복할 수 있었고, 한국의 문학을 통해 한국에 대해 더 잘 이해할 수 있었다. 한국기사들을 읽으면서 나는 한국사회를 조금이나 알 수 있었고 이와 동시에 우리나라의 기사와 사회에도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이에 따라 우리나라가 현재 마주 하고 있는 문제점들과 이에 대한 개선 방안 등에 대하여 진지하게 생각하게 되었다. 또한 그 뻔한 스토리를 가졌던 문학을 이제는 사랑하게 되었다. 특히, 한국과 몽골의 고전문학 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두 나라의 고전문학을 비교하면서도 그 안에서 지혜를 얻는 것이 즐겁다. 한국에 와서 정부초청장학생으로 생활하며 다양한 사람들과 만날 수 있었다. 푹 넓은 인 간관계를 가지게 된 것이 큰 자산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호기심이 많은 사람이다. 그래서 다른 정부초청장학생 친구들과 교류하면서 서로 다른 문화에 대하여 알아가고자 하였다. 너무나 소중하고 즐거운 시간들을 보낼 수 있었다. 대학교에서 같은 학과이자 같은 반인 친구들과 친해질 수 있었던 것은 너무나 다행인 일이었다. 그들은 나와 같은 길을 걷는 동 반자이고 비슷한 목표를 꿈꾸기도 한다. 그들이 있어서 너무나 든든할 때가 많다. 처음에 는 친구들과 친해지기 어렵기도 했지만, 여러 활동을 통해서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 질 수 있었다. 또한 한국대학생들의 문화를 같은 반 친구들을 통해서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너 무나 새로운 문화였으나, 너무나 잘 맞는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처음에는 잦은 만남을 꺼려했지만 그 친구들과 조금 친해진 후에는 오히려 만남이 좋아졌다. 함께 장터, 일일호 프 등을 하고, MT를 가면서 하면서 친구들과 더욱 친해질 수 있었고 대학생활의 즐거운 추억을 많이 남길 수 있었다. 또한 한국에서는 선후배 사이가 돈독하고 질서가 있다. 그래 서 이 점은 나에게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선배들은 후배들에게 조언을 아끼지 않고 후배들 은 선배들을 존경하고 따른다. 이러한 점은 우리나라의 대학생활에서도 있었으면 하고 바 라게 되었다. 이제 몇 달이 지나면 일 년 전의 나와 같은 신입생들과 만나게 된다. 그래서 나는 나의 선배들이 보여준 모습처럼 신입생들에게 멋진 선배가 되고자 노력하고 있다. 신 46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입생이기도 하면서 유학생이었던 나와 같은 처지에 있는 친구들을 도와줄 수 있었으면 한다. 한국에 와서 겪었던 특별한 경험 중에는 공동체 생활이 있다. 나는 외동딸로 태어나 부 모님, 그리고 할머니와 할아버지랑 살았다. 그래서 지금까지 또래 친구들과 같이 생활한 기억이 많지 않다. 비록, 몽골에서 방학 때 또래 친구들과 수학여행을 10일간 갔던 경험이 있으나, 지금처럼 오랫동안 함께 생활하진 않았다. 나는 기숙사에서 같은 신입생 한국인 4 명과 우리보다 선배인 한국인 3학년언니와 같이 생활한다. 그렇다고 한방에 6명이 함께 사 는 것은 아니고, 2명씩 한방에서 생활하고 6명이 공동으로 거실이나 욕실, 화장실을 사용 한다. 이는 재미있으면서도 배울 수 있는 것이 많은 환경이다. 거기다 나는 운 좋게도 사이 가 참 좋은 룸메이트들을 만날 수 있었다. 다들 한국인이지만 관심과 학과는 서로 다 다르 고 생활 패턴도 다르다. 하지만 우리는 서로의 다른 점을 이해하고 배우려고 하며 생활 패 턴을 서로 맞추려고 노력한다. 나의 룸메이트 친구는 부산에서 온 친구다. 그래서 처음에 우리는 서울이라는 곳에서 처음 산다는 이유로 많은 것들이 통했고 서울대에 2012년에 입 학한 신입생이라서 빠르게 친해질 수 있었다. 지금은 나에게 기숙사는 집과 다를 바 없는 편한 곳이고 룸메이트 친구들은 나의 가장 친한 친구들이다. 특히, 매일 얼굴을 보며 같이 기쁨과 슬픔을 같이하는 룸메이트는 이제는 가족과 같은 친구이다. 나는 나만의 멋진 무대를 세우기 위한 발돋움을 열심히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나는 성 숙할 것이고, 값진 경험들로 다듬어질 것이며, 멋진 사람들과 교류하며 꿈은 더욱 커지고, 목표는 뚜렷해져갈 것이다. 정부초청장학생이 된 것은 지금까지 나의 삶에서 큰 전환점이 되었고, 내 자신에게 자부심을 느낄 수 있는 좋은 경험이 되었다. 하지만 나는 여기서 멈추 지 않고 나는 나 자신을 더 크게 키워나갈 것이다. 고생 끝에 낙이 온다. 는 말처럼 비록 처음에는 한국에 와서 서툴고 힘들었지만 적응하고 극복하면서 더 멋진 나로 변하는 과정 이 흥미롭다. 나는 나를 빛낼 수 있는 나만의 무대를 끊임없이 만들어갈 것이다. 47

GKS 장려상 매순간 황금같은 추억들 니키아 브라운 성균관대학교 사회학과 석사과정 어렸을 때부터 부모님과 선생님들로부터 이런 이야기를 많이 들었다. 추억은 값을 매길 수 없기 때문에 항상 소중히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이 이야기는 지금까지도 내 삶에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다.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은 추억이다. 추억은 마음 속에서 그림을 그 린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도 쉽게 잊혀지지 않는다. 나는 한국에 두 번이나 오는 기회를 누 릴 수 있었고 많이 소중한 추억을 갖게 되었다. 첫 번째는 일 년 동안 인천 영어 마을에서 영어를 가르치는 교사로 왔었다. 딱, 일 년동 안 한국에서 살 줄 알았는데 2년이나 살았다. 한국에서 살아보기 전에는 한국이 그렇게 매 력적인지 몰랐기 때문에, 한국에 빠져가는 내 모습에 스스로 많이 놀랐다. 2년간의 한국 생활을 마치고 한국을 떠나야 하는 시간이 다가왔을 때, 나의 마음이 너무나 슬퍼서 한참 을 울었었다. 내 고향인 미국에 돌아갔을 때도 한국에서 겪었던 많은 경험과 소중한 인연 을 맺은 친구들 그리고 아름다운 추억이 매 순간 떠올랐다. 그때마다 한국에 다시 올 기회 가 생길지 아닐지 몰랐기 때문에 마음이 참 허전했다. 내가 태어나고 자란 나의 고향이었 던 미국에 있음에도 나는 미국과 한국, 두 나라에서 동시에 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 의 마음 속에 한국이 늘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어느 날, 한국의 NIIED 장학금 프로그램에 대해서 알게 되었다. 한국에 다시 올 수 있는 기회가 생겼을 뿐만 아니라 나 자신을 발전할 수 있겠다는 희망이 생겨났다. 나는 NIIED 48

2012 정부초청 외국인장학생 유학 체험 수기 수상작 장학금 프로그램을 신청하면서 합격할 수 있을지 자신할 수는 없었지만, 이 길이 나의 운 명이라면 꼭 내게 올 것이라고 믿었다. 내가 합격했다는 것을 알게 된 순간 한국이 내 삶 에서 중요한 운명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2010년 8월, 한국에 다시 돌아왔을 때, 나는 첫 번째 한국에서의 내 모습과는 역할이 바뀌게 되었다. 첫 번째는 영어를 가르치는 선생님으 로 왔는데 이번에는 배우는 학생이 된 것이다. 그 때, 왠지 모르게 나의 한국에서의 첫 경 험과 두 번째 경험이 많이 다를 거라는 느낌이 들었다. 2012년, 한국에서 공부한지 벌써 2년에 접어들었다. 미국에는 이런 말이 있다. 재미있 게 놀면 시간이 빨리 간다. 그런데 나는 공부할 때도 시간이 꽤 빨리 간다는 것을 확실히 알게 되었다. 내가 성균관어학원에서 1년 반 동안 한국어 공부를 하면서 느낀 것이다. 한 국어를 공부하는 것은 쉽지 않았지만, 힘들 때마다 도와주시는 선생님들과 한국에 유학 온 든든한 친구들이 늘 옆에서 응원해 주었기 때문에 어려움을 다 극복해 낼 수 있었다. 또한 한국어를 처음 배웠을 때 말이 너무나 서툴러서 한국 사람과는 같이 이야기하기도 싫었다. 나는 원래 남들에게 나의 틀린 점과 약점을 보여주는 것을 창피하게 느끼기 때문이다. 어 학원 선생님께서 이런 나를 아시고, 언어는 실수를 통해서 늘 수 있고 지금 한국어를 연습 하지 않으면 나중에는 더 시작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애정 어린 말씀을 해 주셨다. 그 선생 님의 한 말씀 덕분에 내가 남들 앞에서 언제든지 한국어 말해보기에 도전하였다. 그렇게 하면서 한국어 공부에 관심과 열정이 많이 생겨났다. 그 결과, 한국어 과정 1급 때 한국어 사랑상도 받게 되었고, 2급 때도 일등을 하였다. 또한 우정상 2번을 수상하였고, 4급 때도 재학생들을 대표해서 6급 선배님들 앞에 영광스러운 송사를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 이 모든 것이 운이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내 노력에 대한 결과를 돌려받은 것 같다. 성균관어학원에서 보낸 시간들 중에서 특히 기억에 남는 일은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한국어 과정 1급 때에 선생님들과 유학생들과 모두 다 같이 용인의 한국 민속촌에 갔을 때 이다. 그 날, 여전히 서먹하고 낯설었던 반 친구들과 한국 옛날 모습을 구경하고 한국 전통 게임도 같이 하면서 다양하고 맛있는 한국 음식도 먹었다. 우리들 모두는 함께 했던 그 시 간이 너무 너무 즐거워서 그 날이 다 가는 것을 아쉬워했다. 그래서 한국 민속촌 체험을 마치고 우리끼리 삼삼오오 모여 노래방으로 가 밤늦게까지 신나게 놀았다. 그 날의 시간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두 번째 기억에 남는 일은 어학원에서 개최한 한국어 한마당 행사였다. 그 날은 늘 수 업만 하는 장소로 생각했던 어학원 교실에서 여러 나라의 음식과 게임 등으로 웃음소리 가 49

GKS 득한 하루를 보냈다. 한국어를 배우기 전에는 선생님들 그리고 반 친구들과 이렇게 가족처 럼 지내게 될 줄 몰랐는데 그런 일이 실제로 내 눈 앞에서 일어나니 정말 놀라웠다. 내가 한국어 과정을 수료하게 되면서 얻게 된 나의 한국어 실력과 그 과정에서 함께 했던 모든 시간과 친구들은 내 마음 속에서 영원히 살아있을 것이다. 2012년 3월. 나는 드디어 성균관대학교 대학원 사회학과에서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긴장을 많이 하였는데 교수님들과 동기들이 나를 따뜻하게 대해주어 한결 편안해 질 수 있었다. 솔직히 말하면 나의 첫 학기는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정신적으로나 감정적 으로 많이 힘들었다. 내 스스로에게 뿐만 아니라 교수님과 미국에 있는 가족들에게 자랑스 러운 내가 되어야겠다는 부담감이 컸다. 내가 잘할 수 있을까? 라는 고민을 하면서 걱정 을 많이 했다. 수업들이 한국어로 진행되면서 나는 열심히 들어도 잘 이해되지 않는 경우가 꽤 많았다. 특히 첫 학기 때, 내게 가장 쉽지 않았던 통계학 수업이 있었기 때문에 이 과목을 통과하기 위해서 일주일 1-2번 정도 밤을 새워가며 과제를 했다. 당연히 포기하고 싶은 마음도 생겼 지만 그럴 때마다 주변 친구들의 격려를 받으면서 더 열심히 노력하였다. 통계학을 남들만 큼 잘하지는 못했어도 포기하지 않고 공부하였고 친구들이 많이 도와주어서 마침내 통계학 강의를 이수하였고 교수님께도 칭찬을 받았다. 이를 통해 노력과 믿음 그리고 인내심이 있 으면 해낼 수 있다는 것을 느꼈다. 첫 학기 끝나면서 마음이 한결 편해졌다고 생각했다. 어느 날, 도시 사회학의 김석호 교 수님께서 부산에서 열리는 가을 학기 인구학회에서 내가 발표해 볼 수 있는 기회를 주셨 다. 교수님의 그 말씀을 듣자마자, 첫 학기에 가졌던 부담이 없어지려는 순간 다시 어깨가 무거워졌다. 물론 교수님이 나한테 그런 기회를 주신 것에 감사하면서도 실력이 부족한 내 가 그런 자리에서 발표할 수 있을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이렇게 많은 일들이 짧은 시간에 몰려왔다. 첫 학기가 끝난 다음에 교회 선생님들과 교회 청소년들과 함께 봉사활동을 하러 태국에 갔다. 치앙라이에 가서 내가 다니던 교회와 연결이 되어 있었던 고아원에서 열흘 동안 다 양한 일을 했다. 고아원 아이들의 숙제를 도와주고 공예를 가르쳐 주고 숙제를 도와주는 등의 여러 가지 손으로 하는 일을 같이 했다. 일이 좀 힘들었어도 귀여운 아이들을 사랑하 고 돌볼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서 너무 감사했다. 태국에서 돌아와서 인구학회 학술대회의 발표를 계속 준비했고 8월에 MC (Multicultural) 5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