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9주년 광복절 기념 기획전 1935 1924 경북인의 1927 의열투쟁 1919 2014. 8. 13 2015. 2. 26 주최 I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후원 I 경상북도 광복회 경상북도지부 안동보훈지청 안동시
경북인의 의열투쟁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학예연구부 1927 3 1운동 이후 의열투쟁사의 앞머리에는 27결사대의 국내거사 가 자리하고 있다. 27결사대는 고종의 장례일을 기해 을사5적과 정미7적을 응징하고자 서 간도 류허시엔 柳 河 縣 에서 결성된 조직이다. 여기에 울진의 손창준과 주병웅이 참여하였다. 그 뒤 의열투쟁을 이끌었던 대표적인 단체는 의열단 이다. 1919년 지린 吉 林 에서 만들어진 의열단은 1920년 중국 관내지역으로 옮겨 활동하면서 항일투쟁의 선봉에서 활약하였다. 김원봉을 비롯한 17명이 창립에 참여하였는데, 그 가운데 경북출신이 5명이나 된다. 권준(상주) 서상락(달성) 신철휴(고령) 이종암(대구) 이수택(칠곡) 등이 그들이다. 1919 1920년대 들어 의열단에 참여하여 활약한 경북인이 많았다. 이들이 펼친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이수택과 신철휴의 1920년 제1차 암살파괴계획 참여와 최수봉의 밀양경찰서 투탄 의거 지원, 1923년 김시현(안동)과 황옥(문경)이 주역이 된 의열단의 제2차 의거, 같은 해 이종암과 김정현(안동)이 참가한 제3차 의거, 1924년 김지섭이 펼친 도쿄 일본 왕궁 입구 니주바시(이중교) 투탄 의거, 1926년 경북의열단 사건 으로 불린 활동 등이 있다.
1924 1920년대 전반기 나라 밖에서 이루어진 박열(문경)의 활약도 빼놓을 수 없다.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활동한 박열은 1923년 일왕을 암살하려고 하였다가 20여 년간 옥고를 치렀다. 한편 나라 밖의 독립운동 조직과 연계된 경북 인의 의열투쟁도 다양하다. 신흥학우단원 문상직(고령)의 폭탄거사 추진과 대한 민국 임시정부를 지원하기 위한 조기홍(대구)의 폭탄제조 시도 등이 주목된다. 또 송두환 최윤동이 주도한 군자금모집활동과, 대한통의부원 이덕숙의 창수 의거, 의성단원 김홍진의 장사동의거, 김창숙의 군자금모집과 나석주 의거 지원 등은 의열투쟁사에 큰 발자취를 남겼다. 1935 1920년대 후반의 대표적인 투쟁으로는 단연 장진홍의거가 꼽힌다. 1927년 10월 18일 조선은행 대구지점에 도화선에 불을 붙인 폭탄이 전달되고, 대구 도심 을 뒤흔든 거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는 일제 통치기관을 공격했던 전형적인 의열 투쟁이었다. 1930년대 들어서는 청도역 부근에서 군용열차 전복 시도 가 있었다. 1931년 만주로 파견되는 일본군과 무기를 실은 군용열차를 전복시키려 하였으나 목적을
이루지 못한 의거였다. 나라 밖에서도 의열투쟁이 있었는데 일본 전권대사를 처단하고자 했던 남자현(영양), 친일파 이용로를 처단한 엄순봉(영양) 등이 바로 그들이다. 1927 일제의 전시 수탈과 압제에 눌려 10년 정도 잦아들었던 의열투쟁은 1940년대 들어 다시 불타올랐다. 청도의 동진회, 대구 24부대 학병들, 안동의 조선독립 회복연구단 등의 과감한 의거계획과 경산 결심대의 항쟁이 그 범위에 들어간다. 일제의 황민화정책과 전시체제의 급소를 공격하려고 나선 것이 특징이다. 1919 3 1운동 이후 경북인의 의열투쟁이 쉼 없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요인은 다음 세 가지로 짚어볼 수 있다. 첫째 의열단운동 초기부터의 경북인의 적극적인 참여, 둘째 대한민국 임시정부 및 재만 독립운동조직들과의 지속적인 접촉과 연계, 셋째 지역민 스스로의 심성 속에 오래 동안 내재해 온 진취적 정의감과 특출한 저항정신이 바로 그것이다. 그러한 운동사적 기맥과 정신사적 전통이 지역의 젊은 지성들과 민초들에게 면면히 이어져, 1940년대의 엄혹한 상황에 꺾이지 않고 민족해방과 독립자유의 날을 그리며 정의를 불태울 수 있었던 것이다. 참고문헌 : 김영범, 경북인의 국내 의열투쟁, 경북독립운동사Ⅴ, 경상북도, 2014
1927 경북인의 의열투쟁 1919 1935 1924 의열투쟁을 이끌었던 의열단의 이름은 천하의 정의 義 로운 일을 맹렬 烈 히 실행 하겠다는 공약 의 문구에서 한 글자씩 따온 것이다. 이처럼 의열투쟁은 올곧은 뜻과 죽음도 무릅쓰는 희생을 전제로 한 공격적 투쟁방식이었다. 의열투쟁은 테러와는 다르다. 의열투쟁가들의 공격은 아무런 관계가 없는 사람들이 아닌, 일제의 침략 기관이나 책임자에 대해서만 제한 적으로 이루어졌다. 또 한 치의 숨김도 없이 정정당당하게 거사의 목적 이유 주체를 밝혔다. 한국독립운동사에서 위기 때마다 불꽃으로 타올랐던 의열투쟁의 대열에는 어김없이 경북인이 앞장섰다. 의열투쟁의 본질은 침략 세력 에 맞서 싸우는 평화주의요, 인류를 향한 정의의 실천에 있음을 잊 어서는 안 될 것이다.
1915 대한광복회에서 활약한 채기중 권영만 채기중 1915년에 결성된 대한광복회의 친일부호 처단활동은 의열 투쟁의 성격을 지닌다. 대한광복회 경상도지부 책임자 였던 채기중 蔡 基 中 (상주)은 1917년 친일 부호인 장승원 처단 을 직접 지휘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붙잡힌 그는 1921년 사형을 받고 순국하였다. 1909 권영만 권영만 權 寧 萬 (영양)은 1915년 대한광복회에 참여하여 경주에서 세금 수송 우편마차를 습격해 8,700원의 군자금을 확보하 였다. 그 뒤 주비단에 참여하여 활동하다가 붙잡혀 8년의 옥 고를 치렀다. 1909년 안중근 의거 1915년 대한광복회 결성 1919년 27결사대의 국내 의거 의열단 결성, 문상직의 폭탄거사 추진 안중근 의거에 참여한 김형재 金 衡 在 (안동) 1919 의열투쟁의 꽃, 의열단 결성과 경북인 의열투쟁의 상징적인 존재인 의열단은 1919년 11월 만주에서 결성되었다. 최초 구성원 17명 가운데 5명(권준 權 晙, 서상락 徐 相 洛, 신철휴 申 喆 休, 이종암 李 鍾 巖, 이수택 李 壽 澤 )이 경북 출신 이다. 이들은 대부 분 신흥무관학교 를 졸업했거나 광 복회에 참여한 인 물들이었다. 의열단의 이념과 투쟁방략을 제시한 조선혁명선언
권영만 의거 보도기사 (매일신보 1915년 12월 26일자) 채기중 판결문(1920년 3월 1일 고등법원) 경주 우편마차 습격 의거지(경주에서 대구로 넘어가는 소태고개) 채기중의 추모비 1922 1920년 의열단 제1차 의거(신철휴 등) 조기홍의 폭탄거사 추진 송두환 등 군자금모금 활동 김종철 김봉규의 일경 사살 의거 27결사대를 이끈 손창준 주병웅 3 1운동 이후 의열투쟁사에서 첫 장을 차지하는 것이 서간도에 서 만들어진 27결사대의 국내 의거이다. 결사대는 광무황제의 국장일을 기해 을사5적과 정미7적을 처단하고자 1919년 2월 서울로 들어왔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붙잡히고 말았다. 이때 울진 출신의 손창준 孫 昌 俊 은 징역 10년, 주병웅 朱 秉 雄 은 8년을 언도받았다. 27결사대 재판 보도기사 (매일신보 1921년 1월 20일자) 주병웅 집 터(울진 죽변면)
김시현, 국내에 대규모 폭탄을 들여오다 z 안동출신 권정필 權 正 弼 류병하 柳 秉 夏 류시태 柳 時 泰 는 거사를 위해 서울에서 자금마련 활동을 펼침 c 김사용 金 思 容 (상주)은 서울로 들여온 무기 가운데 폭탄 5개를 자신의 집에 보관 1923년 김시현 金 始 顯 (안동)의 국내 폭탄 반입 거사 준비 x 이현준 李 賢 俊 (대구)은 천진역에서 김시현으로 부터 대형폭탄 3개가 들어있는 트렁크를 받아 안동현의 홍종우에게 전달 v 이경희 李 慶 熙 (대구)는 혁명선언서 및 격문 수백 장을 각 도지사와 경찰부에 발송하고, 서울 시내 곳곳에 뿌림 권총과 폭탄 등 무기 사진 (매일신보 1923년 4월 13일자) 재판을 받는 김시현 의열단 제2차 의거 관련 기사 (동아일보 1923년 4월 12일자) 1923년 의열단 제2차 의거(김시현 등), 최윤동 등 군자금모금 활동, 박열의 일왕 암살 계획, 의열단 제3차 의거(이종암 등) 1923 일왕 암살을 계획한 박열 박열 朴 烈 (문경)은 1919년 일본으로 건너가 아나키즘을 수용하고, 흑도회 黑 濤 會 흑우회 黑 友 會 를 조직하여 활 동하였다. 1923년 9월 일본 황태자의 결혼식에 참석 하는 황족과 고관 등을 폭살하려는 계획을 세웠으나 일제에게 붙잡히고 말았다.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1926년 4월 무기징역으 로 감형되어 20여 년간 옥고를 치렀다. 박열 재판장의 박열과 아내 가네코 후미코 이치가야형무소 터 안에 있는 사형자 위령탑 1926년 1월 1일에 이치가야 형무소에서 박열 부부의 보도기사(조선일보 1936년 3월 26일자)
1924 김지섭, 일본 왕궁 앞에서 폭탄을 던지다 1922년 의열단에 가입 1923년 김시현과 함께 국내 폭탄반입의거 1924년 1925년 1927년 1928년 1월 5일 일본 왕궁으로 들어가는 니주바시[ 二 重 橋 ]에서 폭탄을 던짐 사형선고 무기징역으로 감형 옥중에서 순국 김지섭 일본 왕궁으로 들어가는 이중교 1924년 김지섭의 이중교 의거, 김만수의 하얼빈 의거, 이덕숙(대한통의부)의 창수 의거, 김홍진(의성단)의 장사동 의거 김지섭에 대한 의열단 신임장 김지섭 재판 광경 1924년 10월 16일에 열린 3차 공판에서 하얼빈을 울린 의사 김만수 김만수 金 萬 秀 (안동)는 1913년 만주로 망명하여 서로군정서 에서 활동하였다. 1924년 서로군정서의 임무를 띠고 하얼 빈에 체류 중 일본경찰에 발각되자 이들과 총격전을 벌여 일본 경찰 10여 명을 살해하고 현장에서 순국하였다. 김만수 의사 생가지 표지석 義 義 士 김만수 의거의 장렬한 투쟁을 쓴 이상룡의 삼의사합전 중에서
경북인의 의열투쟁 현장 하얼빈 김만수 의거 남자현 의거 서울 27결사대의 을사오적 처단 계획 의거 김시현의 대규모 폭탄 반입 의거 상해 엄순봉의 상해 조선인 거류민 부회장 처단 의거 동경 박열의 일왕 암살 계획 의거 김지섭의 이중교 의거 대구 문상직 조기홍의 폭탄거사 추진 장진홍의 조선은행대구지점 폭탄 투탄 의거 영덕 이덕숙(대한통의부)의 창수 의거 김홍진(의성단)의 장사동 의거 경남 의령 김종철 김봉규의 가이히데[ 甲 斐 秀 ] 순사 사살 의거 경주 권영만의 우편마차(세금 수송) 습격 의거 청도 박근이 전팔룡 추진구의 청도역 부근 군용열차 전복 의거
의열투쟁을 펼친 경북인 지역 이름 생몰연대 훈격 김봉규 金 鳳 奎 1892~1968 애국장(90) 경주 김종철 金 鍾 喆 1888~1941 애국장(90) 정내영 鄭 騋 永 1900~1961 애국장(90) 고령 문상직 文 相 直 1920(28세)~ 신철휴 申 喆 休 1898~1980 애국장(90) 구미 황진박 黃 鎭 璞 1888~1942 애족장(90) 서상락 徐 相 洛 1893~1923 애국장(90) 송두환 宋 斗 煥 1892~1969 애국장(90) 이경희 李 慶 熙 1880~1949 애국장(90) 이덕생 李 德 生 1900~1939 애족장(90) 대구 이종암 李 鍾 巖 1896~1930 독립장(62) 이현준 李 賢 俊 1902~ 애국장(95) 정동석 鄭 東 錫 1885~1968 애족장(92) 조기홍 趙 氣 虹 1883~1945 애족장(90) 최윤동 崔 允 東 1897~1965 애국장(91) 문경 박 열 朴 烈 1902~1974 대통령장(89) 권 준 權 晙 1895~1959 독립장(68) 상주 김사용 金 思 容 1893~1941 애국장(91) 김재수 金 在 洙 1888~1955 애족장(98) 채기중 蔡 基 中 1873~1921 독립장(63) 지역 이름 생몰연대 훈격 권정필 權 正 弼 1886~1935 애국장(90) 김만수 金 萬 秀 1894~1924 독립장(63) 김시현 金 始 顯 1883~1966 안동 김정현 金 禎 顯 1903~1964 애족장(90) 김지섭 金 祉 燮 1884~1928 대통령장(62) 류병하 柳 秉 夏 1898~1987 애국장(90) 류시태 柳 時 泰 1891~1965 이덕숙 李 德 淑 1894~1960 애국장(90) 영덕 이겸호 李 謙 浩 1895~1942 애국장(90) 권영만 權 寧 萬 1877~1950 독립장(63) 영양 남자현 南 慈 賢 1872~1933 대통령장(62) 엄순봉 嚴 舜 奉 1906~1938 독립장(63) 영천 김기용 金 基 用 1883~1938 애국장(90) 울진 손창준 孫 昌 俊 1899~ 독립장(63) 주병웅 朱 秉 雄 1883~1925 독립장(63) 박근이 朴 根 伊 1908~1933 애국장(90) 청도 전팔룡 全 八 龍 1911~1963 애국장(90) 추진구 秋 振 求 1909~1974 애국장(90) 이내성 李 乃 成 1893~1927 애국장(90) 칠곡 이수택 李 壽 澤 1891~1927 애국장(90) 장진홍 張 鎭 弘 1895~1930 독립장(62) 포항 김홍진 金 洪 鎭 ~1924 애국장(95)
경북의열단 의거를 이끈 이종암 1925 이종암 이종암 李 鍾 巖 (대구)은 1919년 의열단 결성에 참여하 고 부단장으로 활약하였다. 1922년 상해 황포탄에 서 일본 육군대장 다나카 기이치[ 田 中 義 一 ]를 처단하 려고 하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25년 국내로 들어와 경상도를 중심으로 모금 활동을 벌이다 이른 바 경북의열단사건 으로 붙잡혀 징역 13년을 받았 다. 1930년 병세가 악화되어 가출옥하였으나 열흘 만에 순국하였다. 1925년 이종암의 경북의열단 의거 1926년 김창숙의 국내 의열투쟁 (나석주 의거) 1926 판결문(1926년 12월 28일 대구지방법원) 대한민국 임시정부 관련 요시찰인명부 이종암의 어록비(독립기념관) 재판 보도기사(동아일보 1926년 12월 20일자)
조선은행대구지점에 폭탄을 배달한 장진홍 1927 1927년 4월 장진홍 張 鎭 弘 (칠곡)은 이내성 李 乃 成 (칠곡)의 소개로 호리키리 시게사부로[ 堀 切 茂 三 郞 ]로부터 폭탄제조법을 배움 대구지역 일제기관 9개소를 목표로 삼고 첫번째로 조선은행대구지점에 폭탄이 담긴 상자를 배달 은행원 경찰관 5명 중상, 은행 창문 70여 개 파손 장진홍 의거 당시 조선은행대구지점 거사 후 황진박 黃 鎭 璞 (구미)의 집에 숨어 있던 장진홍은 김기용 金 基 用 (영천)과 함께 영천경찰서 투탄의거 계획 수사망을 피해 일본으로 건너가 활동 하던 중 1928년 붙잡힘 사형선고를 받은 장진홍은 1930년 자결순국 1927년 장진홍의 조선은행대구지점 투탄 의거 1931년 청도역 부근 군용열차 전복 의거 1931 김기용 장진홍의 사형 선고 보도기사 (동아일보 1930년 2월 18일자) 1930년 2월 장진홍이 대구형무소 수감 중에 쓴 옥중서신 (독립기념관) 장진홍의 가족사진과 집 (매일신보 1929년 12월 29일자)
1933 만주 의열투쟁의 열혈 여장부, 남자현 1 1927년 사이토 총독 암살 시도 2 1931년 하얼빈 일본총영사관에 갇혀있는 김동삼 구출 활동 전개 3 1932년 국제연맹조사단에 혈서 전달 시도 남자현 南 慈 賢 (영양) 4 1933년 만주국 주재 일본 전권대사를 처단 하고자 하였으나 계획이 드러나 붙잡힘 5 일본 영사관 감옥에서 단식투쟁 끝에 병보석으로 풀려 났으나 곧 순국 1933년 남자현의 일본 전권대사 처단 계획 1935년 엄순봉의 상해 거류민회 부회장 처단 의거 1935 아나키스트 엄순봉, 친일 모리배를 처단하다 엄순봉 嚴 舜 奉 (영양)은 만주로 망명하여 1933년 재만조선인 아나키스트연맹에 가입하여 활동하였다. 그 해 상해로 가 서 8월 흑색공포단 黑 色 恐 怖 團 에 가입하고 옥관빈 玉 觀 彬 처단 에 참여하였다. 이어 일본 공사 아리요시[ 有 吉 明 ]를 암살하려 고 하였으며, 1935년 3월 상해 조선인 거류민회 부회장 이 용로 李 容 魯 를 총살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사형을 언도받고 1938년 4월 9일 순국하였다.
순국 직전 남자현 모습 (독립혈사 제2권) 하얼빈의 남자현 묘지 (1933년, 뒷줄 좌측이 남자현의 아들) 남자현 생가터(영양 석보면) 남자현 활동 신문기사 (조선중앙일보 1933년 8월 26일자) 엄순봉 공판기사(동아일보 1936년 2월 5일자) 엄순봉 생가 터(영양 영양읍) 일본 공사[ 有 吉 明 ] 처단 시도 현장(상해) 판결문(1936년 10월 15일 고등법원)
찾아오시는 길 안동시내에서 18km (25분 소요) 자 가 용 : 안동시내 안동대학교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버 스 : 11번, 33번 천전 방면 고속도로 : 경상북도독립운동기념관 홈페이지 참조 760-833 경북 안동시 임하면 독립기념관길 2 Tel. 054-823-1530 Fax. 054-823-1550 www.815gb.or.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