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저명인사 인터뷰 체험기 / 휴먼 커넥션의 중요성 거듭 거듭 실감 343호 : 42-50 It-making interview request-is always a long shot. But you get nothing by not asking. - Harrison Salisbury - 어쩌다가 나는 인터뷰 전문기자나 되는 것처럼 인터뷰를 많이 하 고 있다. 1995년 3월 상무급 대기자 로 발령을 받아 언론인들간 에 화제가 되었을 때만 해도 중앙일보의 제작책임 자들이나 나나 대기자가 구체적으로 어떤 일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서는 정확한 정의( 定 義 ) 를 갖고 있지 않았다. 중앙일보가 내게 맡긴 한가지 확실한 직무는 국제부와 해외에 나 가 있는 특파원들을 지휘하라는 것이었다. 비유를 하자면 국제보 도 담당 편집국장 같은 성격의 일이었다. 그러나 이 부분은 바로 실패로 판정났다. (사진설명) 1970년대초 워싱턴 특파원 시절 제임스 레스턴과의 인터뷰. 편집국장과 국제부장의 중간에 위치하고, 국제부 기자들이나 특파원들에 대한 인사에 발언권이 없는 현실에서 지난날 외신부장과 워싱턴특파원과 편집국장을 지냈다는 관록 하나만으로 국제보도 분야를 만족스럽게 관장한 다는 것이 현실적으로는 어려운 일이었다. 국제부 기자들은 국제담당 대기자라는 사람이 와서 국제부장의 권위 를 국제부 차장 정도로 격하시키는 게 아닌가 경계했다. 나는 국제보도 전체를 관장하는 것 말고는 틀( 定 型 )을 미리 정해놓고 대기자 발령을 받은 게 아니었다. 그런데 이 부분이 떨어져 나갔다. 내게 남은 일은 무엇인가를 진지하게 생각해야 했다. 실천 속에서 틀을 만들어가자는 자세로 일을 시작하자고 자세를 고쳐 잡았다. 그때 나는 한가지 각오를 단단히 했다. 그것은 한국에서 처음 시도되는 대기자 제도를 꼭 정착시켜야겠다는 것이었다. 적극적 사고가 첫째 조건 나는 다음의 세 갈래로 방향을 잡았다. 칼럼 쓰기:정보가 많이 들어 있는 칼럼을, 국내문제는 국제적인 문맥과 배경에서, 국제문제는 한국과의 관련 에서 쓴다. 해외취재:해외에서 일어나는 주요 행사나 사건을 현장취재하되 대기자 아닌 기자들의 취재보도와 차별화를 해야 한다. 말은 쉬워도 참으로 스트레스 받는 일이다. 무엇으로 차별화를 한단 말인가. 인터뷰:외국 각 분야의 유명인사 인터뷰를 활발하게 한다. 정치, 경제, 안보뿐 아니라 사회, 문화 쪽으로 시 선을 돌려 독자를 창출하자. 이 세 가지 중에서 세 번째의 인터뷰 가 바로 이 글의 주제다. 서두에 인용한 말은 뉴욕 타임스의 영원한 대기자 솔즈베리의 것이다. 의역을 하면 이렇다. 인터뷰를 요청하는 것은 멀리 있는 과녁을 맞히는 것과 같다. 성사될 수도 있고 안될 수 도 있다. 그러나 인터뷰를 요청하지 않고서 는 아무 것도 얻는 게 없다. 정말 옳은 말이다. 나는 이 말에서 큰 자극을 받았다. 영국의 총리 토니 블레어를 언감생심 어떻게 인터뷰한단 말인가. 유럽의 경제대통령이나 다름없는 독일 연방은행 총재 한스 티트 마이어가 한국이라는 나라의 기자를 위 해서 시간을 할애할 것인가. 네타냐후는 또 어떤가.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은. 빌리언셀러 작가 시드니 셸던 은. 일본의 노벨상 수상 작가 오에 겐자부로( 大 江 健 三 郞 )는. 월가의 큰손 조지 소로스는. 이런 궁량 끝에 적극적, 긍정적, 낙관적 사고( 思 考 )가 국제적인 인터뷰어로 성공하는 첫 번째 조건이라는 생각에 당도했다. 독자들을 위해서, 중앙일보를 위해, 그리고 나 자신을 위해서 만날 가치가 있는 사람이면 일단 만나자 고 요청을 하자. 한국사회에서는 한 사람 또는 두 사람 건너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고들 한다. 국제사회에서 도 정도의 차이가 있 을 뿐 사정은 마찬가지다. 올해로 기자생활 41년째. 그것도 편집국장 3 년과 출판본부장 2년을 제외하고는 모두 국제보도 분야의 일을 했다.40개 성상( 星 霜 )에 내가 만난 외국인들도 적은 수는 아닐 터이다. 한번 해보자. 대강 이런 자세로 인터뷰하는 일에 많은 시간과 정력을 쏟고 있다. 구체적으로 대표적인 사례를 들면서 이야기 해보자. 부끄러운 기억
내가 생애 최초로 외국인 저명인사를 인터뷰한 것은 무모하게도 입사 3년차에 미숙약관의 나이 25살이던 1961 년 대만에서 후시( 胡 適 ) 작사를 만난 것이다. 그는 철학자로 중국의 백화문( 白 話 問 =구어체)운동을 지도한 근대 화의 선구자요 대표적인 지식인이었다. 당시 그는 대만의 한림원 격인 중앙연구원의 원장이었다. 한적한 대만, 바쁠 것 없는 중앙연구원장 자리. 그의 건강이 좋지 않았던 것 말고는 인터뷰는 어려울 것이 없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후시와의 인터뷰는 그로부터 4년 뒤인 65년 런던에서 가진 역사학자 아놀드 토인비와의 인터 뷰와 함께 아무런 준비도 없이 빈손으로, 더 정확하게는 빈 머리로 가서, 주로 국제정치에 관한 수박겉핥기식 질 문으로 일관한 저질 인터뷰의 전형이다. 국제정치에 관해서인들 초년생 기자가 무엇을 얼마나 알았겠는가. 지금 도 그때 일을 생각하면 얼굴에 모닥불을 붓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토인비를 만날 때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영국정부 초청으로 영국을 방문한 기회에 겁도 없이 철학자 버트런드 러셀에게 전화를 했다. 송구하게도 러셀이 직접 전화를 받았다. 인터뷰를 좀 하자고 했더니 좋다면서 인터뷰로 500달러 내라고 하지 않는가. 한국의 1인당 국민 소득이 200달러 수준인데 500달러라니 좀 심하지 않느냐고 항의를 했더니 그는 그 돈은 러셀 평화재단에 들어가서 세계평화를 위해서 쓰여진다고 응수했다. 홧김에 토인비한테 전화를 했더니 인터뷰를 쾌락했다. 러셀 대신 만난 토인비에게 준비된 질문이 있을 리 없 다. 토인비가 누구인가. 그는 당대 최고의 역사철학자다. 나는 속기사와 사진사까지 대동하고 갔다. 홍안의 이 사가( 史 家 )는 멀리 한국에서 온 무모한 젊은 기자를 따뜻이 맞아서 성의있게 인터뷰에 응했다. 그때 찍은 인터뷰 사진은 내가 가진 가장 잘된 사진의 하나지만 나는 지금도 토인비 및 후시와의 인터뷰기사는 외면 한다. 그 뒤 오랜 세월을 두고 토인비의 역사의 연구 를 읽는 것은 그때의 무례를 사죄하는 의미에서이기도 하 다. 거물급 인사와의 인터뷰가 성사되는데는 커넥션과 시리( 時 利 )가 따라야 하는 것 같다. 1965 년 9월 중앙일보가 창간된 뒤 나는 그해 11월 동남아시아 순회 특파원이라는 타이틀로 베트남에 파견되었다. 종군기자는 따로 있었 기 때문에 사이공에 베이스를 둔 내가 할 일은 베트남과 동남아시아 전체의 정치와 경제를 취재하는 것이었다. 사이공에 도착해 보니 거의 모든 한국 특파원들이 구엔 반 티우 대통령 인터뷰를 신청해 놓고 있었다. 나도 일단 신청을 했다. 그리고는 미국 대사관의 필립 하비브 정치담당 참사관에게 전화를 했다. 하비브는 전형적인 지한 파( 知 韓 派 ) 인사였다. 그를 만나 체면 불구하고 티우 인터뷰를 주선해달라고 부탁했다. 그때의 미국대사는 헨리 캐봇 로지였지만 베트남 정치를 막후에서 움직이는 사람은 하비브였다고 해도 큰 과장 이 아닐 만큼 베트남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막강했다. 하비브가 대통령궁에 전화하여 결국 대망의 티우 단독회견을 했다. 알고 보니 뉴욕 타임스의 외신부장 다음으로 내 순서를 앞당겼던 것이다. 베트남 대통령과의 인터뷰는 준비하기가 쉬웠다. 전쟁과 관련된 문제, 한국의 역할 등을 중점적으로 물으면 되었다. 이것이 커넥션 활용으로 어려운 인터뷰를 한 최초의 케이스다. 그러는 동안 필리핀에서는 페르디난드 마르코스가 대통령에 당선되었다. 66년 2월 마닐라로 달려가 보니 마르 코스는 마닐라 교외 퀘존에 있는 백만장자인 그의 친구 집에 정권인수 본부를 차려놓고 조각을 하고 있었다. 인 터뷰를 신청했더니 선뜻 좋다는 반응이다. 웬 횡재인가 싶었다. 그 사연은 그를 만난 자리에서 밝혀졌다. 그때 아시아개발은행이 창설되어 마닐라와 도쿄가 본부 자리를 놓고 치열한 경합을 벌이고 있었다. 인터뷰는 황 공하게도 조찬을 겸한 것이었고 식사시중은 다른 사람도 아닌 이멜다 마르코스가 들었다. 지금부터 35년 전의 이멜다는 블루 계통의 원피스를 입고 있었는데 그 미모, 그 글래머는 젊은 기자의 넋을 뺏을 만큼 눈부셨다. 인터뷰가 끝날 무렵 마르코스는 내 손을 꽉 잡고는 마닐라가 아시아개발은행의 본부로는 도 쿄보다 훨씬 조건이 좋다고 설명하면서 그렇게 기사를 좀 써달라고 부탁했다. 이것이 시리의 작용으로 인터뷰가 성사된 경우다.20 대의 젊은 기자에게 아무 영향력이 없다는 것은 나의 사정이었고 마르코스로서는 그런 나라도 붙들고 로비를 하 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나는 지금도 아시아개발은행의 탄생을 축하한다. 150달러 어치 인터뷰(?) 세월이 흘러 시대가 70년대로 바뀐다. 나는 70년에서 71년까지 컬럼비아대학 저널리즘 스쿨에서 장래의 해외특 파원들을 위해서 특별히 만들어진 아주 좋은 프로그램인 국제보도과정을 마치고 바로 워싱턴특파원이 되었다. 70년대의 미국은 닉슨의 역사적인 중국방문, 워터게이트 사건, 코리아게이트 사건, 베트남 전쟁의 종식 등으로 뉴스의 홍수를 이루던 시절이고, 특히 한미관계는 주한미군 감축과 코리아게이트와 카터의 인권외교로 긴장의 연속이었다. 설상가상으로 나는 중앙일보와 동양방송(TBC) 양쪽 일을 같이 하고 있었다. 지금도 크게 달라진 건 없지만 그때 한국 신문들은 창간기념일 특집과 신년특집에는 으레 해외석학의 글이나 인터뷰를 실었다. 나도 71년에서 78년까지 워싱턴특파원을 하는 동안 참으로 많은 미국의 석학 들과 인터뷰를 했다. 생각나는 대로 이름을 열거하면 컬럼비아대학 교수시절의 브레진스키, 하버드대학의 중국 전문가들인 존 페어뱅크와 제롬 코언, 정치학 의 새뮤얼 헌팅턴, 뉴욕 타임스의 제임스 레스턴, 칼럼니스트들인 조지 윌, 조셉 크래프트, 로버트 노박, 아시아 전문가인 랠프 클래프, 국무차관이 되어 있는 필립 하비브 등이다.
이들 이름에서 나타나는 것은 페어뱅크와 브레진스키 정도를 빼고는 이른바 거물급이 별로 없다는 사실이다 교수들에게는 인터뷰료를 준다. 지식을 상품으로 파는 그들에게 인터뷰료를 지불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본 사의 간부들에게 그걸 인식시키는 일은 간단치가 않았다. 브레진스키를 만났을 때의 일을 생각하면 지금도 웃음이 절로 난다. 미국의 교수들은 인터뷰를 하자고 하면 사 례를 하느냐?(Is there payment?) 고 묻는다. 브레진스키도 예외가 아니었다. 100달러를 주겠다고 했더니 망설 인다. 결국 150달러를 주기로 했다. 그의 연구실에서 녹음기를 틀어놓고 인터뷰를 하는데 30분이 지나자 질문에 대답을 하지 않고 그만하면 됐다 (That s enough). 고만 말한다. 시치미를 떼고 계속 질문을 했더니 이번에는 좀더 구체적으로 그만하면 한 페이 지를 메우기에 충분하다 (That s enough for one full page). 고 말했다. 그는 컴퓨터 같은 두뇌를 가진 사람이다. 아닌게 아니라 한 페이지 채우기에 충분한 대담을 했다. 그러나 그의 언중( 言 中 )에는 그만하면 150달러 어치는 된다는 의미가 들어 있었을 것이다. 녹음기는 중요한 인터뷰 장비인데 그때는 사이즈가 지금보다 훨씬 컸다. 아시아 태평양지역 담당 국무차관보를 지낸 로저 힐스먼을 코네티컷에 있는 그의 집으로 찾아가서 인터뷰할 때 다시는 되풀이하고싶지 않은 불상사가 일어났다. 녹음기를 틀어놓고 대담을 하는데 힐스먼이 자꾸 녹음기 쪽을 쳐다 보는 게 아닌가. 자세히 보니 테이 프가 엉켜서 돌아가지가 않는다. 시간상으로 인터뷰가 거의 끝날 무렵의 일이다. 불상사 - 엉킨 녹음기 테이프 나는 기계의 음치다. 아무리 들여다봐도 아무 것도 모른다. 힐스먼도 나보다 크게 나을 바 없었다. 그는 아들을 불렀다. 힐스먼과 내가 커피를 마시는 동안 그의 아들이 녹음기를 고쳤다. 나는 죽는 시늉을 하면서 힐스먼에게 처음부터 다시 하자고 간청했다. 힐스먼의 넓은 아량은 지금도 잊을 수가 없다. 그때의 쓴 경험으로 나는 지금도 인터뷰를 할 때는 반드시 테이프와 건전지를 새 걸로 끼우고 테이프는 앞뒤로 한번씩 처음부터 끝까지 돌려보는 걸 잊지 않는다. 그때는 왜 유비무환 ( 有 備 無 患 )을 몰랐던가. 그래도 실수에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못한 게 인간이다. 1980년 동양방송이 미국과 프랑스와 일본의 전문가들 을 인터뷰하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대담을 내가 맡았다. 하버드대학에서 헌팅턴 교수와 대담을 하는데 3분의 2 쯤 진행되었을 무렵 녹화테이프가 제대로 안 돌아가는 걸 발견했다. 카메라맨이 테이프를 갈아 끼우는 동안 PD 와 나는 헌팅턴의 비위를 맞 춰 원점에서 대담을 다시 시작할 수가 있었다. 그 시절 미국의 고위관리들은 한국의 언론과 기자들을 홀대했다. 외교관과 비즈니스맨들의 경우도 그렇겠지만 기자들이 외국인 뉴스소스한테서 받는 대접은 한국의 국력에 준한다. 70 년대를 통틀어서 한국 기자가 미국에서 차관급 이상의 관리와 인터뷰를 한 경우는 한 두건을 넘지 않을 것이다. 인터뷰에 관한 한 나의 80년대 전기간과 90년대 전반부는 공백기간이다. 80년에서 83년까지는 논설위원, 83년 에서 86년까지는 편집국장, 미주리대학에서 석사과정을 마치고 돌아온 88 년부터 94년까지는 문화사업 담당, 뉴스위크 한국판 편집인, 출판본부장, 삼성경제연구소 근무(94-95년)로 인터뷰와는 거리가 먼 곳에 있었기 때 문이다. 95년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인터뷰 행각에서 헤비급과의 인터뷰를 위해서는 커넥션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거 듭 거듭 실감한다. 1995년 8월 당시의 유엔 사무총장 부트로스-갈리를 인터뷰한 것은 전적으로 70년대 코리아 게이트의 주인공 박동선( 朴 東 宣 ) 씨의 주선에 의한 것이다. 그들 두 사람 사이는 꼭 부자관계 같다. 지압 장군 인터뷰 60년대에 베트남전쟁을 취재한 기자라면 누구나 그때 우리가 월맹이라고 부르던 북베트남의 전쟁영웅 보구엔 지압 장군과 인터뷰하기를 갈망할 것이다. 그는 1954년 저 유명한 디에비 엔푸 전투에서 프랑스군을 대파하고, 75년에는 결국 미국을 베트남 땅에서 패퇴시킨 동양의 나폴레옹 으로 불리는 사람이다. 나도 60년대 이후 지 압을 한번 인터뷰했으면 하는 생각을 굴려 왔다. 대기자 발령을 받고 가장 먼저 생각한 것 중의 하나가 지압과의 인터뷰였다. 그러나 베트남에는 인맥이 없었다. 그러다가 한국외국어대학 베트남어학과의 조재현 교수를 알게 되었다. 그는 베트남어에서는 한국의 제1인자일 뿐 아니라 베트남 요로의 많은 사람들과 친분을 갖고 있었다. 그에게 내 희망을 말했다. 그리고 얼마 뒤 하노이 사범대학의 여자 교수가 한국을 방문했는데 그녀가 바로 지압 장군의 처제였다. 조 교수 와 함께 점심을 대접하면서 도움을 청했더니 해볼만하다고 말했다. 하노이로 돌아간 그녀로부터 소식이 없는데 조 교수가 조직하여 해마다 하노이에서 그곳 사회과학연구소와 공 동으로 개최하는 세미나가 열리게 되었다. 무조건 참가했다. 가서 보니 세미나에 참석하는 베트남 쪽 학자들 중 에 다른 사람도 아닌 지압 장군 부인이 들어 있었다. 그녀는 사회과학연구소 소속의 역사학자였던 것이다. 세미
나 기간 동안 내가 그녀에게 어떤 아부를 했을 것인가는 상상에 맡긴다. 지압 장군 처제의 남편이 갑자기 나를 집으로 불렀다. 옳거니 하고 갔더니 말을 빙빙 돌려서 지압 장군이 외국기 자를 자유롭게 만날 처지가 아니라고 암시했다. 베트남 공산당과 군부와 정부 지도자들의 입장에서 보면 그는 존경할 국가원로이지만 좀 부담스러운 것 같았 다. 거기에 지압 장군은 베트남 공산당 안에서 친중국파로 분류되어 베트남의 캄보디아 침공과 중국과의 전쟁에서 어려운 입장에 있었다. 95년 당시의 지도부는 친소련파가 주류를 이루고 있었다. 세미나가 끝나는 날 돌연히 지압장군이 회의장에 나타났다. 나를 집으로 불러서 만나기보다는 자신의 부인도 참 가하는 세미나에서 만나는 게 부담이 적다고 판단한 것 같다. 그러나 세미나는 세미나다. 양쪽 참가자들이 모두 그를 기다리고 있다. 한국의 참가자들에게 양해를 구했다. 그들은 모두 선선히 협조를 하여 사회자가 앉는 자리의 중앙에 지압 장군 을 앉히고, 그 왼편에 통역을 할 조 교수, 그 오른편에 내가 앉아서 준비한 질문을 쏟아냈다. 두 나라 학자들은 세미나의 청중들같은 위치에서 이 광경을 지켜봤다. 사진도 잘 찍혔고 녹음도 잘되어 인터뷰는 성공했다. 지압 장군은 80 고령이었지만 목소리는 우렁차고 얼굴은 혈색이 잘 도는 동안이었다. 그런데 아직까지도 안 풀린 수수께끼가 있다. 지압 장군을 그곳으로 오게 만든 사람이 그의 부인인가, 그의 처제 인가. 어느 쪽이라도 좋다. 나는 오랜 숙원을 풀었다. 시드니 셸던은 한국에서는 가장 인기 있는 외국작가다. 나도 그의 소설은 빼놓지 않고 읽는다. 그의 대중적인 인 기를 생각해서 인터뷰를 하기로 마음먹고 미국대사관에 주선을 청해 운좋게 성사가 됐다. 중앙일보의 출판부분 이 크고 중앙일보가 로스앤젤레스에서도 발행된다는 사실이 셸던 의 마음을 쉽게 움직였다는 것을 그를 만나서 알았다. 그는 캘리포니아의 팜스프링스에 있는 화려한 자택으로 오라고 했다. 그때 마침 소설가인 나의 아내 박영애가 로스앤젤레스를 방 문중이어서 잘됐다 싶어 함께 갔다. 셸던은 넓은 저택을 안내했 다. 중국인 요리사가 만든 점심에는 화가인 셸던의 젊은 부인도 동석하여 인터뷰하러 온 사실을 잠깐 잊을 정도로 화기애애한 분 위기가 연출됐다. 그와 함께 보낸 시간은 3시간 남짓. 파격적인 대접이었다. -- (사진설명) 1996년 2월 빌리언셀러 작가 시드니 셸던을 캘리포니아 팜스프링스 자택에서 만나 3시간동안 오찬 을 겸한 인터뷰를 가졌다. -- 그의 친절은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나는 그 무렵 미디어 황제 루퍼트 머독을 꼭 만나고싶어 편지를 냈는데 감감 무소식이었다. 셸던이 할리우드에서 영화제작에도 활발히 참여하고 있는 문화계의 마당발이라는데 착안하여 혹 시 머독을 아느냐고 물었다. 아는 정도가 아니라 두 사람은 아주 가까운 친구라고 하지 않는가. 사정을 설명하고 추천을 부탁했다. 그도 쾌락을 했다. 귀국해서 며칠 지나지 않은 어느 날 셸던한테서 머독에게 보낸 팩스편지의 사본이 날아오고, 다음날 머독한테서 연락이 왔다. 자기 비서에게 원하는 인터뷰 날짜를 알려 주라는 내용이다. 날짜를 비교해 보니 머독은 셸던의 편지를 받는 즉시 내게 인터뷰에 응하겠다는 연락을 했다. 테오 좀머는 독일 함부르크에서 나오는 권위 있는 주간신문 디 차이트(Die Zeit)의 공동발행인이요 독일뿐 아니 라 유럽을 통틀어서도 가장 영향력 있는 언론인의 한사람이다. 그와 나는 친구 사이다. 매년 한 번 또는 두 번 정도 한국을 방문하는 좀머에게 독일 연방은행총재 한스 티트마이어 및 전 대통령이며 독 일의 양심의 소리 라는 리하르트 바이츠제커와 인터뷰를 하고싶다고 했다. 사회민주당 정부의 총리를 지낸 헬무 트 슈미트는 좀머와 함께 디 차이트의 공동발행인이다. 기민당 계열인 티트마이어의 통화정책은 슈미트의 비판 을 받아왔다. 그래서 티트마이어는 디 차이트 사람들에게 호감을 갖고 있지 않았다. 그게 마음에 걸렸지만 좀머 는 그에게 편지를 썼다. 티트마이어 쪽에서는 좀머가 그런 부탁을 하는 것을 오히려 환영한 것 같다. 그는 나에게 장장 90분의 시간을 내주었다. 자리에 앉자마자 그는 대뜸 그래 귀하가 좀머 박사의 친구란 말이 죠. 라고 말문을 열어 그 인터뷰는 순전히 좀머의 부탁이 있었기에 성사된 것임을 확실히 했다. 좀머의 편지 한 통으로 바이츠제커와도 화기애애한 가운데 60분간 인터뷰를 했다. 레이디 Q와 블레어 총리 인터뷰 인터뷰 상대(Interviewee)가 초거물일 때는 상무급 대기자의 직함 으로는 약할 때가 있다. 그럴 경우에는 홍석현( 洪 錫 炫 ) 사장의 이 름으로 교섭을 한다. 홍 사장은 영어가 완벽한데다 스탠퍼드 경제 학 박사, 세계은행과 재무부와 청와대, 그리고 삼성코닝 근무의 경
력이 화려하여 외국인들에게 세일하기에 좋은 상품 이다. 그리고 다방면의 독서로 뒷받침된 그의 문화적 상식(cultural literacy)이 세계의 누구와도 자연스럽게 대화를 하 기에 충분한 수준인 것이 큰 무기다. 나는 참가하지 않았지만 중국의 장쩌민( 江 澤 民 ) 주석과의 단독회견도 홍 사 장의 이름으로 신청해서 성사되었다. (사진설명) 지난 4월 홍석현 중앙일보 사장과 함께 토니 블레어 영국 총리를 단독회견하고 있다. 영국 총리 토니 블레어는 아마도 전세계의 기자들이 인터뷰하고 싶어 하는 사람 다섯명 안에 들 것이다. 나도 그가 집권할 때부터 인터뷰를 하고 싶었다. 그래서 그와 가깝다고 생각되는 사람을 통해서 접근을 했지만 끄떡도 하지 않았다. 그러는 사이에도 제3의 길 이 나오고, 프랑스와 독일에서도 사회민주당 세력이 집권하여 블레어의 주가( 株 價 )는 계속 올라만 갔다. 그건 인터뷰의 동기가 강해지고 동시에 인터뷰하기가 더 어려워진다는 의미도 된다. 그러다가 엘리자베스 여왕의 방한 소식을 들었다. 다행히 여왕의 방한을 알게 된 것은 공식 발표가 있기 훨씬 전 이었다. 여왕 방한을 블레어 인터뷰의 계기로 삼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누가 블레어를 움직일 수 있는가. 시간이 흐르는 동안 다른 언론사에서도 블레어 인터뷰를 시도한다는 사실을 알았다. 레이디 Q 가 블레어와 직접 얘기할 수 있는 인물로 떠올랐다. 그녀는 세상에 알려지는 것을 싫어하여 실명을 밝 힐 수가 없다. 그녀와 줄이 닿는 사람을 찾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전화가 가고 편지가 갔다. 영국 대사관쪽으로도 신청을 했더니 즉각 불가( 不 可 )하다는 회답이 왔다. 레이디 Q는 다우닝가 10번지로 블레어를 직접 방문하여 중앙일보와 홍석현 사장을 소개하고 인터뷰에 응해달라 고 요청했다. 그런 뒤에도 그녀는 블레어가 지명한 개인비서에게 계속 전화를 걸어 압력을 넣었다. 블레어와의 인터뷰는 그를 직접 만날 수 있는 사람, 그리고 계속 독촉을 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니고는 도저히 성사될 수 없다 는 것을 다우닝가 10번지에서 도 확인할 수 있었다. 블레어는 코소보사태에 클린턴 다음으로 깊이 개입하고 있 었다. 인터뷰 당일에도 코소보 관계로 회의가 꼬리를 물고 있었다. 힘이 들어도 즐겁다 이야기를 정리해보자. 외국의 거물급 인사들과 인터뷰를 하는 데는 휴먼 커넥션이 필수적이다. 정공법으로 원하는 인터뷰를 하기에는 한국과 한국 언론의 국제적인 위상이 아직 낮다. 체코 대통령 바슬라프 하벨은 그의 대변인이 승낙하여 날짜 결 정만 남겨두고 있던 나와의 인터뷰를 불문곡직하고 거절했다. 동유럽의 지식인인 그의 관심의 지평에 한국이 떠 오르지 않는 것이다. 나는 외국인을 만나 명함을 받으면 뒷면에 그를 만난 날짜와 어떤 계기로 누구와 만났는가를 적어둔다.언제 어 떤 경우로 그에게 팩스를 보낼 일이 생길지 알 수 없는 일이다. 인터뷰 준비는 항상 200% 한다는 각오다. 인터뷰 당하는 사람이 쓴 저서, 논문은 말할 것도 없고 그에 관해서 쓴 책과 논문과 기사는 원칙적으로 모조리 섭렵한다. 그런 의미에서 작가와의 인터뷰 준비에 시간이 가장 많이 걸린다. 그의 작품을 읽는 것만 해도 보통 일이 아니다. 요즘은 인터넷 이 있어서 준비의 절반은 되어 있는 것과 같다. 힘이 들어도 인터뷰는 즐겁다. 각 분야의 대가들이 평생 동안 연구하고, 생각하고, 실천한 것을 한꺼번에 설명을 듣는 보람을 어디에 비교할까. 인터뷰 대상을 적은 나의 리스트는 아직도 길다. 97년 금융위기를 맞은 뒤로는 직접 가서 하는 인터뷰보다 전화로 하는 인터뷰가 더 많다. 전화인터뷰에는 큰 장 점이 하나 있다. 미국 유럽 또는 아시아에 있는 사람을 동시에 연결하여 삼각대담이 가능한 것이다. 나는 이 방 식을 애용한다. 역사의 종말 을 쓴 프란시스후 쿠야마와 좀머, 미국의 국방차관보를 지낸 전략전문가인 하버드 대학 케네디 스쿨의 조셉 나이를 엮은 삼각대담은 성공적이었다고 자평한다. 한번 인터뷰를 한 사람은 그가 전공하는 분야의 사건이 일어났을 때 전화로 의견을 듣고 필요하면 간단한 일문 일답을 할 수 있는 이점도 있다. 가령 99년 신년특집용으로 전화대담을 한 케임브리지대학의 존 던 교수는 코소 보사태로 논평을 구했을 때 자신의 논문까지 팩스로 보내주고 주권의 문제에 대해서는 존 로크와 토머스 홉스의 입장의 차이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98년 여름 북한이 대포동 미사일을 발사했을 때는 조셉 나이의 논평을 전 화로 들었고, 코소보사태가 터진 뒤에는 좀머와 전화로 일문일답을 했다. 나는 오늘도 해리슨 솔즈베리 선배의 충고대로 멀리 있는 과녁을 향해서 인터뷰 요청이라는 화살을 날리고 있 다. 명중할지도 모르고 명중하지 않을지도 모르지만.
김영희 / 중앙일보 국제문제 대기자 상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