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이혼과 재혼 권 순 형 * 목 차 Ⅰ. 서론 Ⅱ. 왕실의 이혼과 재혼 Ⅲ. 일반인의 이혼 원인과 특성 Ⅳ. 이혼 뒤 일반 여성의 삶과 재혼의 문제 Ⅴ. 결론 Ⅰ. 서론 이혼과 재혼은 인류가 혼인을 시작한 이래 계속되어 왔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한 사 회의 혼인 제도나 이혼 및 재혼에 대한 의식과 태도, 가족 친족 관계 등과 연관되어 있어 시대마다 그 내용에 차이가 있다. 예컨대 가부장적 가족 제도를 가지고 있던 조선시대에는 여성이 아들을 낳지 못한다거나 질투가 심하면 쫓아내는 칠거지악이 있었다. 그리고 여성 이 재혼을 하면 그 자식의 과거응시 자격을 박탈했다. 순수한 부계혈통 중심의 가족제도를 유지하기 위해 이러한 것이 요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조선시대와 같은 남 성 중심의 이혼 및 재혼 제도는 존재하지 않는다. 부계 중심의 대가족제도가 붕괴하고 여 성들의 지위도 높아졌기 때문이다. 고려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서는 연구가 그다지 많지 않다. 가족이나 친족, 혹은 여성을 다룬 몇몇 개설서에서 간단히 언급된 정도이며, 그 외 권순형의 글이 있다. 1) 권순형의 글 * 강릉대 한경대강사 1) 김두헌, 1969, 한국가족제도연구, 서울대학교출판부. 이태영, 1968, 한국이혼연구, 이대출판부. 배경숙, 1988, 한국여성사법사, 인하대학교출판부. 최숙경 하현강 공저, 1972, 한국여성사(고대~조선시대), 이대출판부.
8 민속학연구 6 호 은 고려시대 이혼에 대한 최초의 본격적인 글이라 하겠으나 왕실과 일반인의 차이 및 재 혼의 문제 등 좀 더 보완할 점이 있다고 여겨져 재론하고자 한다. Ⅱ장에서는 고려시대 왕실의 이혼과 재혼의 문제를 고찰하고, Ⅲ장에서는 일반인의 이 혼 문제를 살펴볼 것이다. 그리고 Ⅳ장에서는 일반 여성들의 이혼 뒤 삶 및 재혼의 문제를 다루고자 한다. 이로써 고려시대 이혼의 원인과 특질, 이혼의 권리 면에서 여성의 지위, 이 혼한 여성의 생활과 재혼의 문제, 왕실과 일반인의 차이 등 다양한 면을 고찰하게 될 것이 다. 이는 고려시대인들의 생활에 대해 좀 더 다가갈 수 있는 계기가 되며, 고려사회의 특 성 및 고려 시대의 역사적 성격을 밝히는데도 일조할 수 있으리라 기대된다. Ⅱ. 왕실의 이혼과 재혼 고려시대에는 어떤 경우에 이혼을 했을까. 우선 왕실의 경우부터 보도록 하겠다. 고려시 대 왕실의 이혼 사례는 표 1 과 같다. 표 1 고려시대 왕실의 이혼 사례 시 기 이혼의 내용 이혼 원인 출 전 문 종 문종이 며느리를 미워해 내쫓음 고려사 후비전 선희왕후 김씨 인 종 이자겸 난으로 폐비 정 치 고려사 인종세가 4년 6월 을묘 명 종 은평왕후 이씨 이의방 사후 폐비 고려사 후비전 은평왕후 이씨 공민왕 사돈(안극인)이 馬 巖 의 役 事 를 불가하다고 간하자 며느리 쫓음 고려사 후비전 정비 안씨 표 1 에 의하면 고려시대 왕실의 이혼 사례는 많지가 않으며 대부분이 정치적 이유로 이혼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인종 때 폐비된 두 왕비는 각각 李 資 謙 의 셋째, 넷째 딸이다. 이 자겸은 딸을 예종의 비로 들인 뒤 벼슬이 높아졌으며, 자신의 딸 소생 왕자가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인종) 세력이 더욱 커졌다. 그는 다른 집안의 딸이 왕비가 되면 자신의 세력이 축소될 것을 우려해 다시 셋째, 넷째 딸을 인종의 왕비로 들이게 했다. 그리고는 급기야 왕위를 넘보기까지 했으나 결국 패망했다. 2) 이자겸의 난이 진압된 뒤 그녀들은 임금에게 권순형, 1997, 고려시대 혼인제도 연구, 이화여대 박사학위논문.
고려의 이혼과 재혼 9 이모가 되므로 배필이 될 수 없다 는 논리에 의해 폐비되었다. 3) 恩 平 王 后 이씨는 아비 李 義 方 이 무신란을 일으킨 뒤 태자(뒤에 강종)의 비가 되었다. 그 러나 무신들 간의 세력 다툼 끝에 이의방이 정중부에 의해 죽임을 당하자 적신의 딸을 동 궁에 둘 수 없다 며 폐비되었다. 4) 정중부의 아들 정균도 尙 書 金 貽 永 의 딸을 꾀어 처로 삼 고 전처를 버렸으며, 다시 무신란 뒤에는 공주와 결혼하려고 하였다. 5) 최씨 집권의 막을 연 崔 忠 獻 의 동생 崔 忠 粹 역시 기왕의 태자(뒤에 희종)비를 내쫓고 자기 딸을 비로 들이 려했다. 6) 비슷한 예로 공민왕비였던 정비 안씨는 아비 안극인이 노국공주의 능묘를 크게 짓는 일에 대해 왕에게 간언하자 진노한 왕이 너를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네 아비를 미워 함이라 며 쫓아내기도 했다. 7) 그녀는 다시 소환되었지만 이 역시 정치적인 이유로 이혼된 것이라 하겠다. 유일하게 정치적인 이유가 아니었던 것이 선희왕후 김씨의 경우이다. 그녀는 순종이 태 자 때에 비로 뽑혔으나 시아버지였던 문종이 미워해 궁 밖 사저로 쫓아냈다. 8) 그러나 사 실 그녀의 경우도 정치적 이유 때문에 기피되었는지 아니면 단순히 문종의 감정에 의한 것인지 잘 알 수 없다. 이처럼 왕비나 태자비 등은 대부분 정치적 이유로 이혼되었다. 이는 그녀들 자신의 허 물보다 친정 아비나 오라비 등의 정권욕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이미 신라 시대에도 아들을 낳지 못해 이혼 당한 왕비의 사례가 나타나고 있는데, 9) 고려 시대 에는 이러한 이혼 사례가 왜 보이지 않는 것일까. 아들의 존재는 왕권의 안정과 직결되었 기 때문에 고려 왕실에서도 아들을 얻으려 노력했다. 의종은 아들이 없자 왕비와 함께 절 에 가서 만일 아들을 얻으면 금과 은으로 화엄경 4부를 써서 받치겠다고 誓 願 하기도 했 다. 10) 그러나 아들이 없어 쫓겨난 왕비의 사례가 보이지 않는 것은 고려 왕실이 다처 내 2) 고려사 권 127, 열전 40, 반역 이자겸. 3)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인종 폐비 이씨 폐비 이씨. 4) 고려사 권 128, 열전 41, 반역 이의방.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강종 은평왕후 이씨. 5) 고려사 권 128, 열전 41, 반역 정중부. 6) 고려사 권 129, 열전 42, 반역 최충헌. 7) 고려사 권 89, 열전 2, 후비 공민왕 정비 안씨. 8)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순종 선희왕후 김씨. 9) 경덕왕은 아들이 없는 왕비를 폐해 沙 梁 夫 人 으로 봉했으며( 삼국유사 권 2, 기이 2, 경덕왕 충담 사 표훈대덕), 신문왕 역시 왕비였던 金 欽 突 의 딸이 아들이 없고 아버지가 난을 일으키자 폐비했다 ( 삼국사기 권 8, 신라본기 8, 신문왕). 10) 고려사 권 18, 세가 18, 의종 10년 4월 갑오.
10 민속학연구 6 호 지 다첩을 취하고 있었던 것과 관련될 것이다. 태조이래 고려 왕실은 여러 명의 비를 취했고, 이들은 호칭도 왕후 가 2명 이상으로 나 타나는 등 누구 한 사람이 국왕의 유일한 정처라 보기 어려운 경우가 많다. 이는 신라 중 대에 嫡 統 을 강조하면서 아들이 없을 경우 次 妃 나 小 后 를 얻기보다 왕비를 폐하고 새로 왕비를 들였던 것과 비교된다. 11) 이러한 경향은 신라 하대이래 존속되지 못하고 고려에 들어와서도 호족에 대한 대책으로 다처를 취하면서 상대적으로 폐비될 가능성이 줄어든 것이 아닌가 여겨진다. 고려말 성리학이 수용된 뒤에도 공민왕이 아들이 없자 신하들은 명 문가의 딸로서 아들을 낳을 만한 여자를 얻을 것을 청해 李 齊 賢 의 딸로서 惠 妃 로 봉했다 는 예도 있다. 12) 이혼의 주관은 왕에 의해 행해졌다. 문종이 며느리를 쫓은 것, 공민왕이 정비 안씨를 내 보낸 것 등이 남성측에서 이혼을 주도했음을 잘 말해 준다. 왕비 측에서 이혼을 제기한 경 우도 있었을까. 전근대 전제 왕권 체제하에서 이러한 일은 가정하는 것 자체가 무리이다. 혹 충선왕비 薊 國 大 長 公 主 의 예는 이에 해당한다고도 하겠으나 이것도 엄밀하게는 시아버 지가 며느리의 이혼 및 재혼을 추진한 경우라 하겠다. 충렬왕은 며느리 계국대장공주를 종 실 瑞 興 候 琠 에게 출가시켜 아들 충선왕을 폐위시키고 서흥후를 후계자로 삼으려 하였 다. 13) 이는 지극히 정치적인 사건으로 충렬왕과 충선왕이 서로 즉위와 복위를 반복하는 과정에서 정치적 목적하에 며느리의 이혼과 재혼을 추진한 것이라 하겠다. 이는 원 공주의 위치가 정치적으로 얼마나 큰 힘을 갖는가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혼이 여성 자신의 애정에 의해 결정되는 것이 아님을 잘 말해 주고 있다. 이처럼 왕실의 이혼은 정치적 이유로 행해 졌다 하겠다. 이혼된 왕비들은 어떠한 삶을 살았을까. 순종비 김씨는 外 第 에서 살았으므로 끝내 자식 이 없었다. 그녀는 延 福 宮 主 로 불렸으며 죽은 뒤 왕후로 추증되었고 순종 사당에 합사되었 다. 14) 즉 그녀는 시아버지의 미움을 받아 대궐을 떠나긴 했으나 여전히 궁주 라는 작호를 11) 홍완표 권순형, 1 9 98, 고대의 혼례식과 혼인규제, 안성산업대학교 논문집 제30집 2호, 79~84쪽. 12) 고려사 권 39, 세가 39, 공민왕 8년 4월 병술. 13) 고려사 권 89, 열전 2, 후비 충선왕 계국대장공주. 고려사 권 91, 열전 4, 종실 왕전. 고려사 권 122, 열전 35, 환자 이숙. 고려사 권 125, 열전 38, 간신 왕유소. 위의 책 송방영. 14)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순종 선희왕후 김씨.
고려의 이혼과 재혼 11 가지고 있었고, 시집과의 인연도 완전히 끊긴 것은 아니었다고 하겠다. 이자겸의 딸인 인 종의 비들도 이자겸의 난으로 폐비되었으나 그녀들에 대한 대우는 두터웠다. 특히 자겸의 넷째 딸이었던 폐비 이씨는 왕의 독살을 막은 공을 인정해 토지와 저택, 노비를 주는 등 은총이 두터웠고 죽은 뒤 왕후의 예식으로 장례지냈다. 15) 즉 고려 시대에는 폐비된 왕비 라 해도 일정한 경제적 대우를 했다 하겠다. 그리고 이는 정치적 이유로 폐비되긴 했으나 당사자에 대한 애정이 계속되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기도 하겠다. 이혼한 왕비들 혹은 왕과 사별한 왕비들은 재혼을 했을까. 왕비의 재혼 사례는 거의 찾 아지지 않는다. 왕 사후에 왕비들은 궁이나 외궁에서 거처하는 경우가 많으며, 승려가 된 사례도 있다. 경종비 獻 貞 王 后 황보씨는 왕 사후 대궐에서 나와 왕륜사 남쪽 私 第 에서 살 았다. 16) 예종비 文 貞 왕후는 종실 진한후 愉 의 딸로서 왕 사후 나와서 永 貞 宮 에 거주했 다. 17) 그리고 왕비라 하기는 어렵지만 태조와 하룻밤씩의 인연을 맺었던 김행파의 딸 大 西 院 小 西 院 부인은 승려가 되었다. 18) 공민왕비 惠 妃 이씨와 愼 妃 염씨도 여승이 되었 다. 19) 이를 통해서 볼 때 대부분의 왕비들은 궁이나 외궁에서 거주했으며, 승려가 되는 사 례는 별로 없었음을 알 수 있다. 승려가 되는 사례가 의외로 적은 것은 고려 시대에 왕실 혼이 정략적 성격을 강하게 띠었다는 점과 관련되는 것 같다. 즉 왕비가 정치적으로 중요 한 자리였으므로 왕 사후 그녀가 승려로 되어 왕실을 떠나는 것이 친족에게 득이 되지 못 했기 때문이 아닐까 추측된다. 재혼한 왕비를 찾기 어렵다는 것은 왕비의 수절이 당연한 것으로 여겨졌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할 것이다. 아래의 기사는 이를 잘 말해 준다. A-1. 獻 貞 王 后 황보씨도 戴 宗 의 딸인 바 경종이 죽자 대궐에서 나와 왕륜사 남쪽에 있는 자기 집에서 살고 있었다. 어느 날 꿈에 鵠 嶺 에 올라 소변을 누었더니 소변이 흘러 온 나라에 넘쳤으 며 그것이 모두 변해 온 바다가 되었다. 이 꿈을 깨고 점을 치니 아들을 낳으면 왕이 되어 한 나 라를 가지게 되리라 고 말하였다. 왕후가 나는 이미 과부로 되었으니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 라고 말했다(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경종 헌정왕후 황보씨). 15) 위의 책, 인종 폐비 이씨. 16) 위의 책, 경종 헌정왕후 황보씨. 17) 위의 책, 예종 문정왕후. 18) 위의 책, 태조 대서원부인 김씨 소서원부인 김씨. 19) 고려사 권 89, 열전 2, 후비 공민왕 혜비 이씨 신비 염씨.
12 민속학연구 6 호 나는 이미 과부로 되었으니 어찌 아들을 낳겠는가 라는 말에서 알 수 있듯이 헌정왕후 는 재혼을 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당시 그녀의 집이 안종의 집과 가까워 자 주 왕래하다 간통해 임신을 하게 되었다. 왕비 중에는 이 외에도 왕 사후 간통을 한 경우 가 보인다. 경종비 獻 哀 王 太 后 황보씨는 아들 목종이 어린 나이에 즉위하자 자신이 섭정하 면서 外 族 이었던 金 致 陽 과 간통해 아들을 낳았다. 그녀는 그 아들을 왕위 계승자로 정하려 하기도 했다. 20) 순종비 長 慶 宮 主 이씨는 왕 사후 外 宮 에 거처하면서 宮 奴 와 간통해 폐비 되었다. 21) 재혼 이야기가 나왔던 유일한 왕비는 충선왕비 계국대장공주이나 이 역시 정치 적 이유에서 거론된 것이고 당사자의 애정과는 무관했다. 이처럼 왕비들의 재혼은 힘들었지만 재혼녀가 왕비가 된 경우는 있다. 성종비 文 德 왕후 유씨는 처음에 弘 德 院 君 에게 시집갔다가 뒤에 성종비가 되었다. 22) 숙창원비는 進 士 崔 文 에게 시집갔다가 청춘에 과부가 되었다. 충선왕이 어머니 제국대장공주의 죽음을 빙자해 충렬왕이 총애했던 무비 일당을 제거한 뒤 부왕을 위로하기 위해 그녀를 맞게 했다. 23) 順 妃 허씨는 평양공 眩 에게 시집 가 3남 4녀를 낳고, 남편 사후 충선왕과 결혼했다. 24) 壽 妃 권씨는 全 信 의 아들과 결혼했었는데, 아비가 이혼시켜 왕에게 바쳤다. 25) 과부가 된 여성이 왕비로 재혼하는데는 그녀들의 미모가 일차적인 역할을 한 것 같다. 성종비 문덕왕후의 경우는 잘 모르겠으나 숙창원비는 용모가 아름다웠다고 한다. 충렬왕이 죽자 충선왕이 그녀를 간음하고 다시 자신의 비( 淑 妃 )로 삼았는데, 그녀는 밤낮으로 왕에 게 백가지 자태로 아양을 부려 왕이 그에 미혹되어 정사도 친히 보살피려 하지 않았다 고 할만큼 매력적인 여성이었다. 26) 순비도 자식을 일곱이나 낳은 여자가 재혼할 때는 그녀의 미모가 예사롭지 않았음을 짐작케 한다. 그녀는 영특하고 깨끗하여 아름다운 바탕이 마치 선녀 같았다 고 묘사되고 있다. 27) 그녀와 숙비는 연회시 다섯 번씩이나 옷을 갈아입으며 미모를 겨루기도 했다. 28) 수비 권씨 역시 충숙왕 사후 아들 충혜왕이 간음했다는 기사 29) 20)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경종 헌애왕태후 황보씨. 21) 위의 책, 순종 장경궁주 이씨. 22) 고려사 권 88, 열전 1, 후비 성종 문덕왕후 류씨. 23) 고려사 권 89, 열전 2, 후비 충렬왕 숙창원비. 24) 위의 책, 충선왕 순비 허씨. 25) 위의 책, 충숙왕 수비 권씨. 26) 앞의 책, 충렬왕 숙창원비. 27) 왕순비 허씨 묘지. 28) 위의 책, 충선왕 순비 허씨. 29) 앞의 책, 수비 권씨.
고려의 이혼과 재혼 13 를 볼 때 상당한 미모의 여성이었으리라 추측된다. 그녀들로 인하여 그 친족들은 정계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할 수 있었다. 예컨대 숙창원 비의 오라비 金 文 衍 은 어려서 중이 되었다가 환속했다. 나이 30이 넘도록 자기 힘으로 출 세를 못하다가 누이 숙창원비가 충렬왕의 총애를 받게되자 그의 덕으로 벼슬자리에 나갔 으며, 다시 숙창원비가 충선왕의 총애를 받아 숙비로 책봉되자 크게 출세하고 彦 陽 君 으로 봉해졌다. 30) 金 琿 은 敬 順 王 后 의 從 弟 로 충렬왕의 총애를 받았으며, 淑 妃 와 連 戚 관계가 있 어 충선왕의 사랑도 받았다. 그는 숙비를 대단히 근실하게 섬겼는데, 그가 만년에 직위와 君 에 봉해진 것은 모두 숙비의 주선으로 된 것이라 한다. 31) 충숙왕은 수비를 맞은 뒤 아 비 권렴을 玄 福 君 으로 봉했다. 32) 재혼녀가 왕비가 될 수 있었다는 것은 재혼이 악덕시 되지 않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고려시대의 정절관념이 남편 사후까지 연결되는 것이 아니었음을 의미한다. 그렇지만 재혼녀가 왕비로 된 사례는 많지 않으며 그나마도 정치적 혼란이 심하던 고려말 에 집중되어 있다. 또 하나같이 미모의 여성들이었다는 점에서 재혼녀가 왕비가 되는 것이 그리 흔한 일은 아니었던 것 같다. 대부분의 왕비들은 왕 사후 수절하였다. 반면 왕의 경 우는 왕비가 죽은 뒤 재혼하는 것이 당연시되었다. 아니 재혼 정도가 아니라 다처를 취하 고 있었으므로 왕비의 생존 여부가 별 문제로 되지 않았다. 재혼을 하지 않은 단 한 명의 왕이 있는데, 그가 명종이다. 명종은 즉위 전에 光 靖 왕후가 일찍 죽자 다시 왕후를 세우지 않았다. 33) 그런데 명종은 무신란 뒤 무신들에 의해 옹립되었다. 그가 왕후를 다시 얻지 않았음은 죽은 왕비에 대한 사모의 정이 지극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당시의 정국이 더 큰 관련이 있을 것이다. 명 종은 나라일과 전쟁에 대한 기밀한 정무를 모두 무신들에게 견제당하고 음악과 여색조차 마음대로 하지 못했다. 정중부가 죽고 나서야 여자들과 사랑에 빠졌으며, 그 중 純 珠 와 明 春 두 후궁이 죽자 목을 놓아 통곡했다는 기사가 이를 말해준다. 34) 즉 쿠데타를 일으킨 무신들 간에 서로 견제하느라 왕비를 들이지 못하게 했거나 왕 자신이 눈치를 보느라 왕 비를 맞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특수한 경우라 하겠다. 30) 고려사 권 103, 열전 16, 김취려 부 김문연. 31) 고려사 권 103, 열전 16, 김경손 부 혼. 32) 고려사 권 107, 열전 20, 권단 부 렴. 33) 고려사 권 20, 세가 20, 명종 14년 12월 갑신. 34) 위의 책, 명종 10년 6월 경술.
14 민속학연구 6 호 Ⅲ. 일반인의 이혼 원인과 특성 1. 이혼의 원 인 일반인의 이혼은 왕실의 그것에 비해 보다 다양한 사례가 나타난다. 우선 이혼의 원인 으로 칠출( 七 出 )의 예가 보인다. 칠출이란 소위 칠거지악으로서 처에게 일곱 가지의 잘못 이 있을 때 처를 내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처가 아들을 낳지 못했다거나 음탕하다거나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한다거나 말이 많다거나 도둑질을 한다거나 질투가 심하다거나 나 쁜 병이 있을 경우 처와 이혼할 수 있었다. 35) 이것은 중국의 이혼규정으로서 가부장적인 가족제도의 유지에 적합한 것이었다 하겠다. 부계 중심의 가족 친족구조에서 대를 이을 자식을 낳지 못한다거나 음탕하여 낳은 자식에 대해 자기 가문의 혈통임을 보장할 수 없 다거나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하는 것은 큰 죄에 해당했을 것이다. 또 말이 많아 친족간의 관계를 이간한다거나 도둑질을 하여 문제를 일으킨다거나 질투를 하여 처첩제가 잘 운영 될 수 없게 한다거나 나쁜 병이 있어 주부로서의 역할을 다할 수 없는 것도 큰 허물이었 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칠출에 의한 이혼 사례가 고려에서도 보이고 있다. B-1. 梁 元 俊 의 字 는 用 章 이며 충주 사람이다. 서리에서 시작하여 監 光 州 務 가 되었다. 아내가 시 어머니를 잘 섬기지 않자 그를 黜 하였다. 처와 아들이 울면서 애걸하였으나 끝내 허락하지 않고 처를 혼자 돌아가게 하니 사람들 중에는 그가 인자하지 못하다고 비난하는 자도 있었 다( 고려사 권 99, 열전 12, 제신 양원준). B-2. 沆 이 전에 大 卿 崔 昷 의 딸에게 장가들었으나 병이 있다하여 棄 하고 다시 左 承 宣 趙 季 珣 의 딸에게 장가드니 ( 고려사 권 129, 열전 42, 반역 최충헌 附 항). B-3. 과거에 康 允 忠 이 재신 趙 碩 堅 을 방문하여 함께 이야기하는데 석견의 처 장씨가 엿보고 그를 잘 생겼다고 여겼다. 석견이 죽은 뒤 여종을 시켜 윤충을 청하였으나 윤충이 응하지 않다가 종이 세 번이나 오자 이에 가서 사통하였다. 뒤에 다시 추문이 있자 윤충은 장씨를 버렸다. 영검은 처음에 安 珪 의 딸에게 장가들어 두 아들을 낳았으며 다시 金 子 章 의 딸에게 장가들어 아들 둘 딸 다섯을 낳았다. 마침 김씨가 죽자 장씨는 굳이 영검을 불러들여 사통 하고 남편으로 삼았다. 영검이 柳 濯 등과 高 郵 를 정벌할 때 장씨가 또 행실이 좋지 못하여 영검이 돌아와 (관계를) 끊으니 장씨가 원망하였다. ( 고려사 권 114, 열전 27, 제신 구영 검). 35) 唐 律 疏 議 권 14, 戶 婚 妻 無 七 出.
고려의 이혼과 재혼 15 B-4. 雲 海 의 처 권씨는 성품이 질투가 심하고 사나왔다. 광주에 있을 때 투기를 하여 운해의 얼 굴에 상처를 내고 옷을 찢었으며 良 弓 을 꺾어버리고 칼을 빼어 말을 찌르고 개를 쳐서 죽 였다. 또 운해도 쫓아가서 치려고 하여 운해가 달아나 면하였다. 곧 그를 버렸으나 의가 채 끊어지지 않아 권씨가 永 興 君 環 에게 시집갔으므로 門 下 府 에서 헌사에게 통첩하여 국문하 였다( 고려사 권 114, 열전 27, 제신 최운해). B-1은 시어머니를 잘 섬기지 못하는 처를 버린 사례이다. 양원준은 처가 시어머니를 잘 모시지 못하자 아들과 처가 울며 애걸함에도 불구하고 처를 내쫓았다. 이러한 사례는 서민 층에서도 보인다. 雲 梯 縣 祗 弗 驛 民 車 達 삼형제는 함께 늙은 어미를 봉양했는데, 차달은 그의 아내에게 시어머니 모심이 근실하지 못한다 며 곧 이혼했다. 두 동생도 결혼을 하지 않고 마음을 함께 하여 어머니를 효성스럽게 봉양하였다. 36) 이미 고대이래 효는 매우 중 요한 덕목이었고, 고려시대에 들어와서도 역대 왕들은 효자에 대한 표창을 계속하였다. 차 달 역시 효자로서 상을 받았다. 이처럼 고려에서는 효도를 장려했으므로 불효는 기처 사유 가 될 수 있었다. B-2는 처가 병이 있다하여 버리고 재혼한 기사이다. 병든 처를 버리고 재혼한다는 것은 오늘날의 관념에서는 도덕적으로 용납되기 어려우나, 이는 음란과 함께 삼불거( 三 不 去 ) 규 정 37) 에도 들지 않는 이혼 사유였다. 주부의 역할을 제대로 해낼 수 없다거나 대를 이을 건강한 아들을 낳을 수 없다는 점에서 취해진 조처로 보인다. B-3은 행실이 좋지 않은 처를 내쫓은 예이다. 재신 조석견의 처 장씨는 남편 친구 강윤 충에게 마음을 두고 있다가 남편이 죽자 불러들여 사통하였다. 뒤에 장씨가 다른 남자와 추문이 있자 윤충은 장씨를 버렸고, 장씨는 다시 구영검과 혼인하였다. 그러나 구영검 부 재 시에 다시 음행을 하자 구영검도 장씨를 내치고 있다. 음란함은 예외 없이 이혼 사유였 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음란함은 심지어 혼전간음조차 이혼 사유가 되었다. 우왕은 얼굴이 곱다는 이야기만 들 으면 신하의 딸들을 가리지 않고 음행하였다. 護 軍 宋 千 祐 가 知 門 下 都 吉 逢 의 딸에게 장가 들었는데 그녀 역시 그 중의 하나였다. 송천우는 자신의 아내에 대해 일찍이 정조를 잃은 36) 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9년 9월 병자. 37) 삼불거란 부모의 삼년상을 같이 치렀다거나 빈천할 때 시집와 뒤에 귀하게 되었다거나 쫓아내면 돌 아갈 곳이 없다거나 하는 경우이다. 처에게 칠출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어도 삼불거에 해당하면 처를 내칠 수 없었다. 단, 처에게 나쁜 병이 있는 것과 음란한 것은 예외로 했다( 당률소의 권 14, 호혼 처무칠출).
16 민속학연구 6 호 여자라고 드러내놓고 말을 하면서도 처가의 세력이 두려워 감히 버리지 못하였다. 38) B-4는 질투가 심한 처를 버린 사례이다. 최운해의 처 권씨는 질투가 심해 남편 얼굴에 상처를 내고 옷을 찢는 등 횡포를 부려 이혼되었다. 한편, 아들을 낳지 못해 이혼 당한 사례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혹시 고려사회의 특성과 관련되어 있는 것은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고려는 중국이나 조선과 달리 비부계 적 친족구조를 가진 사회였다. 따라서 여자가 결혼 뒤에도 친정에서 산다거나 친정 부모를 모신다거나 딸이나 외손이 친정이나 외가의 제사를 지내는 것이 가능했다. 그러므로 부계 위주 사회였던 중국이나 조선에 비해서는 상대적으로 아들의 중요성이 덜했다 할 수 있다. 그렇지만 이들보다 좀 더 우선했던 것은 아들이었다. 음서나 공음전 지급은 물론 아들과 사위를 같이 포상할 경우에도 좀 더 비중을 두는 것은 아들이었다. 이에 고려시대에도 아들을 원한 사례가 보인다. 문종 때 정승의 자리에까지 올랐던 鄭 倍 傑 의 처 최씨는 賢 妻 였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였다. 정씨는 일가집 딸을 데려다 길러 그 녀가 성년이 되자 남편에게 권하여 첩으로 삼게 하였다. 39) 즉, 남편에게 축첩을 권유해서 라도 아들을 얻고자 하는 강한 집념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아들을 낳지 못했다는 것 역시 이혼 사유가 될 수 있었겠으나 당시가 축첩이 허용된 사회였으므로 상대적으로 이혼될 가능성이 적었을 뿐이라 하겠다. 고려시대에 일반인은 왕실과 달리 다처를 취하지 는 않았으나 40), 축첩은 허용되었다. 당률 에서도 축첩을 전제로, 처가 50세 이상이 되도 록 아들이 없어야 쫓아낸다고 풀이하고 있다. 41) 이 외 절도로 버림을 받은 것으로는 시누이동생( 娣 ) 집 재산을 훔친 예가 보인다. 都 評 議 錄 事 金 溫 의 처가 밤에 몰래 그 시누이동생의 집 재산을 훔치다가 붙잡혔다. 시누이 동 생의 남편은 趙 仁 規 와 인척간이었으므로 조인규가 김온의 처를 얽어매고 곤장을 쳤다. 사 람들이 모두 조인규가 옳지 않다고들 하였다. 42) 이혼 여부를 잘 알 수는 없으나 데려다 곤장까지 쳤다는 것을 보면 이혼되었으리라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고려사회에서도 칠출이 적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칠출은 법적인 강제력이 있는 것이 아니었다. 이러한 사안이 있을 때 쫓아내도 된다는 것이지 쫓아내지 38) 고려사 권 135, 열전 48, 반역 6, 신우 11년 1월. 39) 고려사 권 95, 열전 8, 제신 정문. 40) 장병인, 1997, 고려시대의 혼인형태,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21~53쪽. 41) 問 曰 妻 無 子 者 廳 出 未 知 畿 年 無 子 卽 合 出 之 答 曰 律 云 妻 年 五 十 以 上 無 子 聽 立 庶 以 長 卽 是 四 十 九 以 下 無 子 合 未 出 之 ( 당률소의 권 14, 戶 婚 妻 無 七 出 ). 42) 고려사 권 105, 열전 18, 제신 조인규.
고려의 이혼과 재혼 17 않으면 처벌을 당했던 것은 아니다. 칠출에 해당하는 데도 처를 쫓아내지 않은 사례들이 보인다. 충렬왕 때 사람 崔 世 延 은 처가 사납고 질투가 심하자 스스로 거세하여 환관이 되 었다. 43) 즉, 질투하는 처를 무조건 내쫓지 않고 이처럼 다른 방식으로 대응할 수도 있었던 것이다. 칠출 중 단지 간통의 경우만 형사처벌의 대상으로서 다른 것과 달리 처리하였다. 간통은 B-3처럼 처를 내치는 선에서 끝낼 수도 있지만 법적 처벌을 받게 할 수도 있었다. 그렇게 되면 간통녀는 姿 女 案 에 올라 針 工 이 되어 자동적으로 이혼이 되었다. 44) 또 여자 집의 세력이 강할 경우 칠출에 해당하는 사유가 있어도 아내와 이혼을 못하기도 한 것 같다. 앞서 보았듯이 도길봉의 딸이 이미 결혼 전에 정조를 잃었고 남편도 이를 알 고 있었지만 여자집 세력을 두려워해 버리지 못했다는 것이 그것이다. 또 李 義 旼 의 딸의 경우도 이에 해당한다. 그녀는 承 宣 李 賢 弼 의 처였는데 음탕하기가 어미와 같았다 한다. 이 의민의 처는 종과 간통해 이의민에 의해 쫓겨났었다. 그러나 이현필은 더러워서 그녀와 동 거를 하지 않는 선에서 끝내고 있다. 45) 무신집권기 당시 최고 권력자의 딸을 함부로 버리 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그런데, 가부장적인 이혼을 규정하고 있는 당률 에서는 칠출에 해당하는 사유가 없는 데도 처를 버리면 처벌되었다. 46) 그러나 고려에서는 정당한 사유없이 처를 버린 사례가 많이 보인다. B-5. 宋 有 仁 은 의종 말엽에 대장군이 되어 문관들과 교제를 많이 하니 무관들이 항상 그를 미 워하였다. 이때 중부가 정권을 잡자 유인은 스스로 고립되어 위태로운 것을 깨닫고 화가 자 기에게도 미칠까 염려하여 그 처를 섬으로 쫓아내고 중부의 딸을 처로 삼기를 구하였다 ( 고려사 권 128, 열전 41, 반역 2, 정중부 附 송유인). B-6. 都 房 別 抄 는 말안장 의복 창 및 화살을 거란의 풍속에 따라 다투어 아름답게 하는 것으로 써 자랑삼았다. 都 下 의 자제들도 역시 다투어 사치함을 일삼아 가난하기 때문에 버림받은 아내들이 많았다( 고려사 권 129, 열전 42, 반역 최충헌). B-7. 李 英 柱 의 아비는 應 公 이다. 영주는 처음에 중이 되었다가 훗날 속세로 돌아와 양갓집 딸에 게 장가들어 아들 하나를 낳고 管 城 縣 令 이 되었다. 충렬왕이 세자였을 때 鞋 工 金 准 提 의 처 가 미인이라는 소리를 듣고 그녀를 맞아들이니 이 때 임신 몇 개월이었다. 딸을 낳자 충렬 43) 고려사 권 122, 열전 35, 제신 최세연. 44) 고려사 권 84, 지 38, 형법 1, 호혼 예종 3년. 45) 고려사 권 128, 열전 41, 반역 이의민. 46) 諸 妻 無 七 出 及 義 絶 之 狀 而 出 之 者 徒 一 年 半 雖 犯 七 出 有 三 不 去 而 出 之 者 杖 一 百 追 還 合 若 犯 惡 疾 及 姦 者 不 用 此 律 ( 당률소의 권 14, 호혼 처무칠출).
18 민속학연구 6 호 왕은 그 아이를 기르면서 마치 자기의 딸처럼 여겼다. 영주가 자기 처를 버리고 그 딸에게 장가드니 당시에 國 胥 라 불렀다( 고려사 권 123, 열전 36, 폐행 1, 이영주). B-5는 정치적 이유로 이혼한 사례이다. 송유인은 평소 무신들과 사이가 좋지 않았다. 무신정권이 들어서자 그는 몸을 보전하기 위해 아내를 버리고 새 정권의 실력자인 정중부 딸과 재혼하였다. 또 王 珪 는 처음에 李 之 茂 의 딸과 결혼했는데, 이지무의 아들이 金 甫 當 의 사위였으므로 난에 연좌되었다. 왕규는 정중부의 집으로 피해 화를 면했으며, 결국 처를 버리고 정중부의 딸과 결혼했다. 47) B-6은 부귀를 구하기 위하여 처를 버린 예이다. 최충헌의 아들 최이는 人 家 를 강점, 격 구장을 만들고 매일 별초들을 모아 격구와 활쏘기 말달리기 창쓰기 등을 시켜 재능 있 는 자에게 벼슬을 주었다. 이에 별초들은 의복이나 武 具 를 화려하게 꾸며 돋보이게 하였 고, 이러한 풍조는 널리 퍼져 비용을 댈 수 없는 가난한 처들이 많이 버림받았다. B-7은 출세를 위하여 처를 버리고 재혼한 사례이다. 이영주는 처를 버리고 충렬왕의 서 녀에게 장가들었다. 그 후 그는 궁중 출입을 하며 권세를 부려 지방과 중앙에 英 柱 難 이라 할만큼 많은 해를 끼쳤다. 이처럼 고려시대에는 남성들이 정치적 이유로, 혹은 부귀나 출세를 구하기 위하여 함부 로 아내를 버린 사례들이 많다. 이는 주로 남편의 의사에 의해 일방적으로 행해졌다 하겠 는데, 그렇다면 처도 필요에 따라 남편을 버릴 수 있었을까. 아래의 사료는 이에 대한 해 답을 준다. B-8. 이 때 判 書 金 世 德 의 처 윤씨가 수년 동안 과부로 지내면서 깨끗하지 못한 행실이 있었으 므로 그의 어머니가 그를 전 洪 州 牧 使 徐 義 에게 개가시킨 지 겨우 수일 지난 후에 윤씨가 서의를 미워하여 쫓아냈다. 사헌부가 그를 추궁하는 한편 나졸을 보내어 그 집을 지키고 있 을 때 李 仁 任 등은 윤씨에게서 후한 뇌물을 받고 그것을 그만두게 하려고 꾀한 끝에 李 豆 蘭 은 누차에 걸쳐 변경을 지키는 공로를 세운 사람이다 라고 말하고 윤씨를 그에게 시집보 냈다( 고려사 권 116, 열전 29, 제신 이두란). 김세덕의 처 윤씨는 재혼한 남편이 싫어 남편을 쫓아냈다. 그러자 사헌부에서 사건을 조사함은 물론 군사들을 시켜 그 집을 지키게까지 하고 있다. 똑같이 배우자를 버린 행위 47) 고려사 권 101, 열전 14, 제신 왕규.
고려의 이혼과 재혼 19 이나 처와 남편간에 전혀 다른 가치 기준이 적용되었던 것이다. 그리고, 처의 도망 역시 처벌되었다. 처에게 적용되는 칠출 도 남편에게는 적용되지 않 았고, 棄 妻 는 허용되면서 棄 夫 는 처벌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편과 헤어지고 싶은 여성 이 취할 수 있는 방법은 남편을 피해 도망가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이것은 범죄로서 도망 해 잡히면 徒 2년, 도망해 재혼까지 했으면 流 2천에 처하였다. 48) 실제로 典 理 摠 郞 裵 仲 倫 의 처는 친척인 중 云 珪 와 사통하여 연안부로 도망하였다. 이에 그들을 체포하여 국문한 뒤 중륜의 처는 매를 치고 적몰하여 노비로 삼았다. 운규는 옥중에서 죽었다. 49) 반면, 남편들은 기처가 허용되었을 뿐 아니라 구태여 이혼까지 가지 않아도 동거를 하 지 않는다거나 소박하는 등 또 다른 형태로 혼인생활을 계속하지 않을 수 있었다. 이의민 의 사위 이현필이 음탕한 아내를 더럽게 여겨 동거를 하지 않았다는 기사 50) 등이 이를 말 해준다. 반면 아래의 사료를 보면 처에게는 이러한 권리가 없었음을 잘 알 수 있다. B-9. 왕의 사랑을 차지한 여성은 5명인데 특히 사랑하였던 사람은 오로지 純 珠 와 明 春 두 사람 이었다. 작년 겨울부터 순주가 죽고 명춘이 또 죽으니 후궁으로서 마음을 즐겁게 하여 줄 사람이 없게 되었다. 이에 두 공주를 불러 내전으로 들어오게 하여 임금의 의복에 관한 일 과 그 밖의 모든 일을 관장하게 하고 아침 저녁으로 곁을 떠나지 못하게 하였으며 때로는 한 잠자리에서 같이 잠을 자니 염려함이 있어도 말하지 못하였다. 왕의 사위 令 公 이 몇 달 동안 혼자 있게 되었으므로 분한 마음을 참지 못하여 마침내 이혼하려 하니 왕이 이 말을 듣고 영공을 불러 수창궁의 동쪽에 있는 태후의 행궁에 거처하게 하고 매일 공주로 하여금 신분을 감추고 보통사람과 같은 옷을 입고 가서 위로하게 하더니 11월에 이르러 공주를 私 家 로 돌려보냈다( 고려사 권 20, 세가 20, 명종 10년 6월 경술). 명종은 본래 성품이 잔악한데다 무신란 이후 수 차례의 정쟁을 겪으면서 자칫하면 놀라 고 두려워하였다. 순주 명춘이라는 두 시녀에게 마음을 의지하고 있었는데 그녀들이 죽자 공주를 곁에 두고 위로받았다. 이에 공주가 오래 집을 비우게 되고, 여러 달을 혼자 있게 된 공주의 남편은 화가 나 이혼하려 하였다. 즉 처는 집을 오래 비우는 것만으로도 이혼사 유가 되었던 것이다. 부부간에 권리와 의무의 차이가 매우 컸음을 보여준다 하겠다. 48) 아내가 擅 去 하면 徒 刑 2년이고 改 嫁 하면 流 刑 2천리에 처하고 첩이 함부로 떠나면 도형 1년 반이며 개가하면 2년 반에 처하며 그 여자를 취한 자도 그 여자와 같은 죄로 처벌한다. 다만 본남편이 있는 줄 모르고 취한 사람은 죄에 걸리지 않는다 ( 고려사 권 84, 지 38, 형법 1, 호혼). 49) 고려사 권 135, 열전 48, 반역 신우 9년 3월 기유. 50) 고려사 권 128, 열전 41, 반역 이의민.
20 민속학연구 6 호 이같이 고려시대에는 이혼의 원인을 볼 때 매우 남성 중심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칠출 이 존재했고, 처에게 아무 잘못이 없어도 남편의 일방적 의사에 의해 버림을 받을 수도 있 었다. 뿐만 아니라 남편에게는 소박 등 이혼과 다름없는 행위도 허용된 반면 처에게는 이 러한 행위가 용납되지 않았고, 남편을 버린다거나 남편을 피해 도망하는 것도 법에 의해 무겁게 처벌받았다. 고려도경 의 부자 집에서는 아내를 3~4인씩 맞아들이고 조금만 맞 지 않으면 곧 이혼한다 51) 거나 남자와 여자의 혼인에도 경솔히 합치고 헤어지기를 쉽게 하여 전례를 본받지 않으니 진실로 웃을 만한 일 52) 이라는 기사는 남편에게는 이혼의 권 리가, 처에게는 이혼당할 의무만이 있었음을 잘 보여주고 있다. 2. 이혼의 특 징 일반인의 이혼도 남자측 가장에 의해 주도되었을까. 전근대사회에서 혼인은 당사자 쌍 방의 의사가 아니라 양 가문 主 婚 者 의 의사가 중요했고, 그런 면에서 이혼 역시 당사자간 의 감정문제보다도 양가의 의견이나 가장에 의해 처리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러나 같은 주 혼자라도 여자 측에서 이혼을 제기하는 것은 매우 어려웠다. B-10. 壽 妃 權 氏 는 福 州 사람으로 左 常 侍 衡 의 딸이다. 처음에 密 直 商 議 全 信 의 아들에게 시집갔 다. 衡 이 全 家 를 불초하게 여겨 離 하려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가 충숙왕 복위 4년에 內 旨 를 칭탁하여 絶 하고 드디어 왕에게 바치니 수비로 책봉되었다( 고려사 권 89, 열전 2, 후비 수비 권씨). 수비 권씨의 아비는 사돈 집안을 마음에 들어하지 않았으나 이혼시킬 방도가 없었다. 결국 그는 왕의 뜻이라 핑계하고 이혼시켜 딸을 왕에게 바쳤다. 이는 고려시대에 여자측에 서 이혼을 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웠는지를 잘 보여주고 있다. 고려시대에 이혼은 남편이나 시가에 의해 주로 행해졌고 여자측에는 거의 권리가 없었던 것이다. 이 외 이혼은 왕이나 권세가 등 제3자에 의해 강요되기도 하였다. 환관 楊 安 吉 이 황제 의 측근에 있으면서 권세를 누리자 충숙왕은 그에게 도움을 얻으려고 안길의 누이가 시집 간 지 이미 오래되었으나 그의 남편을 내쫓고 자기 측근인 朴 仁 平 에게 시집보냈다. 53) 또 51) 고려도경 권 22, 잡속 1. 52) 고려도경 권 19, 민서.
고려의 이혼과 재혼 21 무신집권기 실력자 林 衍 은 사사로운 원한으로 나유의 장인 趙 文 柱 를 죽이고 나유에게 이 혼하도록 위협하였다. 54) 이처럼 고려시대의 이혼은 가족의 요구나 정치적 필요에 의해 행 해졌다. 그러나 어떤 경우에도 처측의 이혼권이 약해 남성 중심 사회로서의 성격을 잘 보 여주고 있다. 55) 이같이 이혼의 청구가 남편측에 유리했을 뿐 아니라 이혼의 유형도 대부분이 기처였다. 사료에 나타난 이혼의 여러 유형들을 도표화해보면 명확하다 표 2 일반인의 이혼 사례 시 기 내 용 분 류 출 전 성종 백성 車 達 이 불사구고로 기처 7출(불효) 절요 성종 9년 9월 1 의종 梁 元 俊 이 불사구고로 기처 7출(불효) 절요 의종 12년 11월 2 명종 고종 宋 有 仁 이 무신정권 성립 뒤 기처하고 정중부 딸과 재혼 정치 (고려)사 반역전 정중부 부 송유인 3 于 學 儒 무신정권 성립 뒤 李 義 方 누이와 혼인 정치 사 제신전 우학유 4 王 珪 가 金 甫 當 亂 에 연좌, 기처하고 정중부 딸과 재혼 정치 절요 명종 7년 3월 5 李 義 旼 처 崔 氏 종과 간통해 기처 칠출 사 반역전 이의민 6 崔 沆 이 병으로 기처 칠출(병) 사 반역전 최충헌 부 항 7 사치풍조로 가난한 처 기처 부귀 사 반역전 최충헌 부 이 8 원종 삼별초란으로 점령당한 지역의 여성들 기처당함 정조 사 형법지 호혼 원종 13년 정월 9 충렬왕 기처하고 충렬왕 서녀와 혼인 출세 사 폐행전 이영주 10 아비가 딸을 이혼시켜 왕에게 바침 출세 사 후비전 수비 권씨 11 충숙왕 왕이 환관 楊 安 吉 누이의 남편을 내쫓고 朴 仁 平 과 재혼시킴 정치 사 반역전 조적 12 충목왕 정천기 처를 버리고 창녀 집에서 삶 절요 충목왕 4년 8월 13 길재 누이 기처당함 야은집 길재행장 14 공민왕 趙 碩 堅 의 처 張 氏 는 康 允 忠 과 재혼 뒤 음질로 기처 당하고 具 榮 儉 과 三 婚 뒤 다시 음질로 기처당함 칠출(음일) 사 제신전 구영검 15 崔 雲 海 처 질투로 기처 칠출(질투) 사 제신전 최운해 16 신우 환관 金 實 이 기처하고 사족녀와 재혼 명예 사 반역전 신우 17 尹 氏 재혼한 남편을 내쫓음 기부 사 제신전 이두란 18 裵 仲 倫 처 간통하고 도망해 처벌 천거 사 반역전 신우 19 53)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적. 54) 고려사 권 104, 열전 17, 제신 나유. 55) 처측에서 이혼한 경우는 수비 권씨 및 양안길 누이의 예가 전부이다. 이 모두 왕의 명령에 의해야 가능했다는 점에서 처측의 이혼이 매우 어려웠음을 알 수 있다.
22 민속학연구 6 호 표 2 에 의하면 고려의 이혼은 기처가 압도적이었다. 기부는 단 1건(18)이 보일 뿐이 며, 처가 도망해 처벌된 것(19) 역시 1건 뿐이다. 이처럼 고려의 이혼은 곧 기처라 할만큼 기처가 대부분이었는데, 기처의 사유는 앞에서 보았듯이 처가 칠거지악을 범했을 때 및 그 외 남편의 요구에 의한 것이었다. 처가 칠거지악을 범해 이혼 당한 사례는 고려 전후기에 모두 나타나는데 고려 전기에는 불효(1 2)와 음란(6 15), 투기(6 16)와 병(7) 등이 보인 다. 한편 전기에는 전쟁을 겪어도 점령지에서 정조를 이유로 처를 버리는 사례가 나타나지 않는 반면, 후기에는 삼별초란으로 부득이 정조를 잃었음에도 불구하고 기처하는 예(9)가 보임을 생각할 때, 여성 정조에 대한 관념이 후기로 갈수록 점점 강화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칠출 이외의 기처 사유로는 정치적 요인이 압도적이다. 특히 무신란으로 정권이 바뀐 명종 때는 정치적 이유로 기처한 사례(3 4 5)가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정권이 바뀌자 생명에 위협을 느껴 처를 버리고 재혼하였다. 우학유는 처음에 李 高 李 義 方 등이 난을 일 으키려할 때 병사를 주관할 사람으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거절하였다. 무신란 성공 뒤 생명 의 위협을 느낀 그는 이의방의 누이와 혼인, 화를 면하였다. 왕규는 평장사 李 之 茂 의 딸을 娶 하였는데 이지무의 아들 世 延 은 金 甫 當 의 매부로서 정중부의 난에 죽었다. 이의방은 왕 규마저 죽이려 하였으므로 왕규는 정중부의 집에 숨어서 목숨을 부지하였다. 여기서 그는 정중부의 과부 딸과 사통, 결국 본처를 버렸다. 원 간섭기에 들어가서도 이러한 경향은 계 속되었다(12). 또한 무신집권기 및 원 간섭기에는 부귀나 출세 등 남편 편의에 의한 기처가 많았다 (8 10 11 17). 도방별초의 사치풍조가 일반인에게까지 번져 가난한 처를 버리는 풍조가 만연하기도 했고(8), 자기 처를 버리고 왕의 서녀와 재혼하기도 했으며(10), 자기 딸을 이 혼시켜 왕에게 바치기도 하였다(11). 이러한 현상은 모두 이 시기가 정치적으로 변동이 심 하고 사회기강이 문란했기 때문이라 생각된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시기에 따라 조금씩 그 사유가 다르긴 하나 고려의 이혼 은 곧 기처라 할만큼 기처가 대부분이었다. 처들은 칠거지악을 범했을 때 뿐 아니라 정치 적 요인으로, 또 부귀와 출세를 구하는 남편의 요구에 의해 이혼당했다. 당시인들의 기처 에 대한 인식은 아래의 사료에서 잘 나타난다. B-11. 이 때에 權 貴 의 자제로서 牽 龍 에 補 하는데 守 平 이 隊 正 으로부터 견룡에 보함을 얻었으나
고려의 이혼과 재혼 23 집이 가난하다는 이유로 사양하니 친구들이 말하기를 이는 榮 選 이다. 그러므로 대체로 아 내를 버리고 다시 장가들어 부자 되기를 구하는 사람이 많은데 그대가 만약 다시 장가들 려고 하면 부잣집에서 누가 사위로 삼지 않겠는가 하였다. 대답하기를 빈 부는 하늘에 달린 것인데 어찌 차마 20년이나 같이 살던 조강지처를 버리고 부잣집 딸을 구하겠는가 하니 말 한 자가 부끄러워 굴복하였다( 고려사절요 권 16, 고종 37년 7월). 권수평은 견룡에 보해졌으나 가난하여 그 직을 포기하였다. 그러나 친구들의 말을 빌면 이 경우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내를 버리고 다시 장가들어 부자되기를 구하였고, 부잣집에 서도 사위 삼기를 거절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고려시대에 기처하고 재혼한다는 것은 보편적인 일로서 그다지 죄스러운 것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러나 권수평은 20년이나 같이 살던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 하여 말한 이가 부끄러워 굴복했다 한다. 즉 이 시기에도 처를 버리지 않는 것이 좋은 일이라는 관념이 있기는 했으나 그것은 단지 이상일 뿐이었 고, 실제로는 기처에 대해 당연시했던 것이다. 심지어는 세 번 혼인해 세 번 다 기처한 사 례도 보인다. 56) 기처에 대해 고려 정부에서는 어떠한 규제책을 가지고 있었을까. 형법지에 의하면 부모 와 의논하지 않고 까닭없이 처를 버린 자는 벼슬을 빼앗고 부처하였다 57) 한다. 그러나 이 는 삼별초란으로 점령당한 지역에서 기처가 빈번해 사회문제가 되니 이를 무마하기 위한 조처였을 뿐이다. 당시 점령당한 지역의 관리들은 거의 재취하였고 적이 평정되어 처가 돌 아와도 더럽혀졌으리라 생각해 받아들이지 않았다. 위의 조치는 이러한 특수한 상황에서 나온 것일 뿐이었던 것이다. 58) 더구나 이 조항을 뒤집어 생각하면 부모와 의논하면 어떤 상황에서라도 처를 버릴 수 있다 고까지 해석할 수 있다. 고려정부는 기처에 대해 별 대책 을 세우지 않았다 하겠다. 이같이 고려에서 기처가 빈번히 행해지고, 국가에서도 별 제약을 가하지 않은 것은 무 56) 吳 世 材 는 세 번 결혼했으나 번번이 棄 去 하여 자식이 없었고 송곳 꽂을 만한 땅도 없어 끼니를 잇 지 못하였다 ( 파한집 권 하). 57) 고려사 권 84, 지 38, 형법 1, 호혼. 58) 이는 원종 13년 정월에 어사대에서 제의하기를 경오년의 변란 때에 정부 관리들은 자기 가족이 적 에게 함몰되었다하여 거의 다 재취를 하였습니다. 이제 적이 평정되어 자기 본처가 돌아오기는 하였 으나 몸을 더럽혔으리라고 의심하고 혹은 신혼에 정이 들어 마침내 본처를 버리고 돌보지 않음으로 써 인륜을 훼손시키고 많은 원망을 일으키고 있으니 청컨대 이것을 금지하소서 라고 하니 왕이 이 말을 좇았다 ( 고려사 권 84, 지 38, 형법 1, 호혼)라는 기사에 이어 나와 이에 대한 대책이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앞장의 기처 사례들이 원종 때 뿐 아니라 그 전이나 후 모두 계속되고 있었다는 점 역시 이를 뒷받침하는 것이라 생각된다.
24 민속학연구 6 호 엇 때문이었을까. 첫째는 고려의 혼인제도가 신분적 계급 내혼적 성격을 띠는 정략적인 것이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혼인은 특권을 유지하거나 특권을 얻기 위한 수단이었으므로 정권이 바뀐다거나 하면 오히려 혼인관계가 파기될 가능성이 높았다. 표 2 에서 본 송유 인(3)과 왕규(5)의 경우처럼 정치적 이유로 기처하거나 재혼한 사례들이 많음이 이를 말해 준다. 둘째는 고려가 처계나 모계와 상당히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라는 점도 들 수 있 다. 고려의 혼속을 서류부가혼이라 하고 친족제도를 兩 側 的 親 屬 59) 이라거나 非 單 系 的 父 系 優 位 社 會 60) 라고 표현한다. 음서 면에서 외손과 사위는 특권을 부여받았으며 61), 공음전 도 아들이 없을 경우 사위가 받을 수 있었다. 62) 또 재산상속 면에서도 아들과 딸이 차이 가 없었다 한다. 羅 裕 는 어머니가 일찍이 재산을 나누어 줄 때 따로 노비 40구를 주니 아 들 하나가 딸 다섯 사이에 있는데 어찌 차마 구차하게 탐하여 어머니의 자식 사랑하는 마 음에 누를 끼치겠습니까 라며 사양하고 있다. 63) 뿐만 아니라 외조부나 장인, 사위에게도 봉작을 한다든지 관직을 상으로 주기도 하였다. 인종이 李 瑋 의 외손녀를 맞아들여 왕비로 삼자 이위에게 中 書 令 의 관작을 더해주고 鎭 定 功 臣 號 를 내렸으며 식읍 2천 5백호를 주었다. 64) 김은부의 세 딸이 왕비가 되자 왕은 김은 부 및 그의 처, 부모에게 뿐 아니라 장인인 李 許 謙 에게도 尙 書 左 僕 射 上 柱 國 邵 城 縣 開 國 候 에 봉하고 식읍 1천 5백호를 주었다. 65) 權 施 는 崔 怡 의 기생첩이 낳은 딸에게 장가들어 僕 射 에 제수되었고, 아들 守 鈞 은 장군에 임명되었으며 수균의 사위 文 璜 도 少 卿 에 제수되었 다. 66) 이처럼 처계나 모계친은 관직이나 봉작의 대상이 되었을 뿐 아니라 함께 형벌에 연좌되 기도 하였다. 金 景 庸 은 그의 딸이 이자겸의 아들 彦 에게 시집갔으므로 자겸이 패하자 知 春 州 事 로 강등되었다. 67) 이영은 이자겸이 한안인을 죽일 때 한안인의 매부였기 때문에 연좌 되어 진도로 유배되었다. 68) 이런 점에서 볼 때 딸 사위 외손은 출가외인이 아니고 같은 59) 노명호, 1988, 고려사회의 양측적 친속조직 연구, 서울대 박사학위논문. 60) 최재석, 1983, 고려시대의 가족과 친족, 한국가족제도사연구, 일지사, 359쪽. 61) 고려사 권 75, 지 29, 선거 3, 전주 음서. 62) 고려사 권 78, 지 32, 식화 1, 전제 공음전시. 63) 고려사 권 104, 열전 17, 제신 나유. 64) 고려사 권 98, 열전 11, 제신 이숙 附 위. 65) 고려사 권 94, 열전 7, 제신 김은부. 66) 고려사 권 130, 열전 43, 반역 金 俊. 67) 고려사 권 97, 열전 10, 제신 김경용.
고려의 이혼과 재혼 25 가족의 일원으로서 영욕을 함께 누렸다 하겠다. 그러므로 남자들은 출세나 정치적 이유로 보다 나은 여성과 결혼을 원했고 이것이 빈번한 기처로 나타날 수도 있었던 것이다. 가난 해서 혼인을 못하고 여승이 된 사례는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金 之 淑 은 충선왕 2년에 73세로 죽었는데 성품이 청렴결백하고 강직하여 내외직을 두루 거치고 모두 명성과 공적이 있었다. 그러나 두 딸은 집이 가난하여 시집가지 못하고 여승 이 되었다. 69) 또 종실인 王 璿 은 물욕이 적어 불교만 독신하고 생업을 돌보지 않았다. 고종 3년 죽었는데 딸이 둘 있었으나 집안이 가난해 시집보내지 못하였다. 70) 이것은 혼수비용 이 과다하여 이를 마련하지 못해서라고 할 수도 있겠으나 처에게 경제적인 것, 즉 富 를 요 구했다는 점은 차이가 없는 것이다. 또 하나의 원인은 고려가 재혼이 금지된 사회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재가가 죄악시된다 면 기처한 여성의 생활보장문제 등으로 쉽게 처를 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고려는 재가가 가능한 사회였으므로 상대적으로 기처하는데 부담이 덜했던 것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이유로 고려에서는 기처가 성행했다. 그런데 이 요인들은 모두 기존 연구에서 고려 여성의 지위가 높다고 주장할 때 근거로 들던 것들이다. 이러한 요소들이 역으로, 오히려 기처를 조장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했던 것이다. Ⅳ. 이혼 뒤 일반 여성의 삶과 재혼의 문제 이혼 뒤의 여성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길재 집안의 이야기는 이에 대해 하나의 실마리 를 제공해 준다. 길재의 막내 누이는 千 戶 方 思 桂 에게 시집갔다가 버림을 받았다. 갈 곳이 없자 선생이 집으로 맞이하여 함께 몇 년을 같이 지냈다. 사계가 다시 맞이하여 데리고 가 고자 하니 선생이 의리없이 버리고서 또 무례하게 맞으려하니 돌아가도 반드시 또 버릴 것이다 라고 하며 보내지 않았다. 71) 여기서 이혼 당한 여성들은 일단 친정으로 돌아왔고, 드물지만 남편이 기처를 후회해 다시 데려가기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비슷한 예로 다음의 사례도 있다. 고려말 성리학자 안향의 아들 안목은 일찍이 자기 처 를 쫓아냈다. 원나라 사신 禿 萬 이 그 집에 숙소를 정하고 있으면서 그 까닭을 물었더니 안 68) 고려사 권 97, 열전 10, 제신 이영. 69) 고려사 권 108, 열전 21, 제신 김지숙. 70) 고려사 권 90, 열전 3, 종실 1, 대방공 보 附 선. 71) 야은집 권 상, 행장.
26 민속학연구 6 호 목이 구체적으로 말해주었다. 독만은 부인들이란 머리칼은 길지만 생각하는 바는 짧은 것 인데 무엇을 그렇게 나무랄 것이 있겠는가. 잘 생각해보라 고 해 안목이 다시 부부로 살았 다 한다. 이는 고려의 이혼이 상대적으로 쉽게 이루어졌음을 보여주는 예이기도 하다. 조선시대 사대부들처럼 이혼을 하기 위해 예조( 禮 曹 )의 허락까지 받아야 하는 처지였다면 여간한 이유로는 이혼을 할 수 없었고, 그렇게 이루어진 이혼이라면 다시 재결합한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혼 당한 여성에게는 친권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앞의 A-1 사례에서 양원준이 처를 쫓아내면서 아들을 두고 가게 한 데서 이를 알 수 있다. 또 이혼시 재산에 대한 권리도 지 켜졌는지 의심스럽다. 고려시대에는 남녀균분상속이었다 하며 佛 寺 에 기증한 사례를 보면 여성의 재산이 독립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72) 그러나 아래의 사료와 같이 재산을 얻기 위해 불법적으로 처를 취한 사례도 나타나고 있다. C-1. 金 倫 李 齊 賢 朴 忠 佐 등이 왕에게 상소하여 이르기를 ( 康 允 忠 은) 현재 본처가 있는데도 아직 상복도 벗지 못한 故 密 直 趙 石 堅 의 처에게 장가들어 석견의 유산을 횡취하였읍니다 라 하였다( 고려사 권 121, 열전 37, 제신 강윤충). C-2. ( 池 奫 은) 우왕 때에 門 下 贊 成 事 로 임명되어 判 版 圖 司 事 의 직무를 겸하고 있었는데 姜 乙 成 이 란 자가 금을 판도사에 바치고 값을 받기 전에 범죄하고 사형을 당했으므로 池 奫 은 그의 처를 첩으로 삼고 금값으로 포목 1천 5백필을 받았다. 또 宰 臣 辛 順 이 사형당하자 지윤은 그의 아들 益 謙 을 신순의 딸에게 장가들여서 이미 몰수당했던 신순의 집과 재산을 찾아내 어 자기 아들에게 주었다. (지윤은) 크게 세도를 부리면서 거의 30명이나 되는 많은 첩을 거느렸는데 오직 부자만 취하였고 색은 문제삼지 않았다( 고려사 권 125, 열전 38, 간신 지윤). C-1에서 강윤충은 조석견의 재산을 빼앗으려 상중에 있는 조석견의 처와 혼인하였다. C-2을 보면 지윤은 강을성의 처를 취해 관청으로부터 금의 대금을 받았으며 아들을 신순 의 딸과 혼인시켜 재산을 취하게 하였다. 이러한 사실에서 볼 때 여성에게 상속권은 있었 다고 보여지나 어느 정도의 재산관리 처분권이 있었는지는 의문이다. 여성의 재산은 여성 사후 자손에게 상속되었다. 이혼시 혹 합의이혼이라면 모르겠으나 기처 당한 여성의 경우 72) 또 시주한 田 地 중 富 平 府 金 浦 縣 守 安 縣 童 城 縣 에 있는 것은 공의 祖 業 이고, 김포 동성에 있는 것은 부인의 조업이다 ( 목은집 보법사기).
고려의 이혼과 재혼 27 그 재산을 찾아갈 수 있었다고는 생각하기 어렵다. 더구나 간음의 경우는 형사처벌의 대상 이었고 자녀안에 올라 침공이 되었음을 상기하면 더욱 그러하다. 그리고 실제로 재산을 몰 수당한 사례도 보인다. 상장군 全 普 門 의 처 宋 氏 는 남편의 族 姪 曹 復 生 과 간통하였으므로 옥에 가두고 문초하여 자백을 받아 각각 곤장 87대를 때렸다. 73) 그녀의 노비는 속공되었 다. 74) 이혼당한 여성들은 재혼이 금지된 사회가 아니었으므로 재혼을 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모든 여성들이 재혼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특히 정치적 이유나 신분, 부귀 때문에 이혼 당했다면 더욱 재혼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고려시대의 재혼 사례는 이혼녀의 경우보다는 과부의 것이 더 많이 보인다. 남편과 사별한 여성들도 역시 이혼녀들과 마찬가지로 친정으 로 돌아왔던 것 같다. 충렬왕이래 충혜왕 때까지 높은 관직을 여러 차례 역임한 金 台 鉉 은 10세에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어머니를 따라 외가로 갔다. 75) 또 앞서 보았듯 정중부의 딸이 과부가 되어 정중부의 집에 머물렀다는 것도 이를 말해준다. 이들은 친정에서 재혼을 하기도 했다. 鄭 諴 이 의종의 유모와 결혼 76) 했다는 데서 그가 재혼녀와 결혼했음을 짐작할 수 있다. 정함이 초혼이었는지는 알 수 없으나 그가 환관이었음을 상기하면 일반적인 경우는 아니 었다고 하겠다. 또 정중부의 과부 딸은 무신란이 일어난 뒤 집에 숨어 든 王 珪 와 결혼했 다. 77) 명종 때 관리였던 李 勝 章 의 어미는 남편 사후 아들을 데리고 재혼했다. 78) 최충헌은 장군 孫 洪 胤 을 죽인 뒤 그의 처 임씨가 아름답다는 소문을 듣고 그녀와 재혼했다. 79) 최이 는 大 集 成 의 딸이 과부가 되었는데 역시 아름답다는 소문이 나자 후처로 취했다. 80) 우왕 때 왜구를 물리치는 데 많은 공을 세운 黃 裳 은 아버지의 기일에 원씨와 결혼했다. 그런데 그녀는 남편 상중이었다는 데서 재혼녀임을 알 수 있다. 81) 재신 趙 碩 堅 의 처 장씨는 남편 이 죽은 뒤 강윤충과 결혼하고, 다시 그에게 버림을 받자 具 榮 儉 과 결혼했다. 82) 73) 고려사절요 권 26, 공민왕 원년 9월. 74) 처음에 전보문의 처 송씨가 淫 奔 하다가 죄를 입게되니 그 노비가 모두 속공되었었다 ( 태종실 록 권 8, 태종 4년 8월 경진). 75) 김용선 편저, 김태현묘지, 앞의 책, 472~479쪽. 76) 고려사 권 122, 열전 35, 환자 정함. 77) 고려사 권 101, 열전 14, 제신 왕규. 78) 김용선 편저, 1993, 이승장묘지,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74~276쪽. 79) 고려사 권 129, 열전 42, 반역 최충헌. 80) 고려사 권 129, 열전 42, 반역 3, 최충헌 부 怡. 81) 고려사 권 114, 열전 27, 황상.
28 민속학연구 6 호 이처럼 여자의 재혼은 여러 건이 보이지만 대부분 남편 사후 재혼한 것임을 알 수 있 다. 그렇지 않은 것은 조석견 처 장씨 및 왕에 의해 이혼과 재혼이 이루어진 환관 양안길 의 누이 경우 83) 뿐이다. 또 고려시대 여성 묘지명에 보면 남편 사후 물론 그녀들의 나이가 젊지 않다는 점도 있겠으나, 거의 재혼한 사례가 없다. 이는 고려시대 때 여성들의 재혼이 허용되긴 했으나 아름다운 일 로 여겨지지는 않았음 을 말해준다. 고려시대에도 국초부터 역대 왕들이 효자 順 孫 과 함께 남편 사후 정절을 지 킨 여성에 대해 상을 주었다. 예컨대 성종 때 慶 州 延 日 縣 에 사는 사람 鄭 康 俊 의 딸 字 伊 와 京 城 宋 興 坊 에 사는 최씨의 딸은 일찍이 과부가 되었으나 개가하지 않고 시부모를 효 성스럽게 섬기고 어린 자식을 길러 상을 받았다. 84) 재혼에 대한 관념은 이승장의 어머니 말에서도 알 수 있다. 그녀는 재혼한 남편이 전남편의 자식 이승장에게 집이 가난하다는 것을 이유로 다른 곳에 공부하러 가는 것을 허용하지 않자 자신이 먹고사는 것 때문에 수 절하지 못했다 며 아들에게만은 아비의 업을 잇게 하겠다고 주장했다. 85) 이처럼 재혼을 좋 은 일로 여기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하여 법적으로 재혼을 금했다거나 재혼을 악덕시 한 것은 아니었다. 여성들은 과부가 된 뒤 재혼을 하지 않고 승려가 되기도 했다. 충렬왕 때 재상이었던 洪 休 의 딸은 남편이 죽은 뒤 승려가 되었다. 제국대장공주는 바깥 사정을 들으려고 그녀를 궁중에 출입하게 했다. 86) 충선왕비 順 妃 의 언니였던 金 賆 의 처 陽 川 郡 夫 人 허씨는 47세에 과부가 된 뒤 남편의 삼년상을 마치고 1315년(충숙왕2) 머리를 깎았다. 법명을 性 曉 라 하 고 전국의 여러 곳을 여행하며 신앙생활을 했다. 1324년(충숙왕11) 사망하자 나라에서는 卞 韓 國 大 夫 人 眞 慧 大 師 를 추봉했다. 87) 일반 여성들이 승려가 된 사례는 왕비가 승려가 된 사례에 비해서는 많다. 그렇지만 고려시대 묘지명을 볼 때 훨씬 많은 여성들이 승려가 되 지 않은 채 세속의 신자로 만족하였다. 이는 고려시대에 국가에서 여성이 승려가 되는 것 을 금하는 법 88) 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으나 불교 자체에서 여성의 가정내 역할을 강조 82) 위의 책, 구영검. 83) 고려사 권 131, 열전 44, 반역 조적. 84) 고려사 권 3, 세가 3, 성종 8년 12월. 85) 김용선 편저, 1993, 이승장묘지, 고려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274~276쪽. 86) 고려사 권 123, 열전 36, 페행 임정기. 87) 김용선 편저, 1993, 김변 처 허씨묘지명, 앞의 책, 445~447쪽. 88) 8년 정월에 중앙과 지방 관리들에게 지시하여 고의로 남의 집을 불사르고 재물을 훔치는 자를 잡아 들이게 했으며 개인주택을 절로 만들거나 부녀자가 여승이 되는 것을 금하였다 ( 고려사 권 85, 지 39, 형법 금령 현종 8년 정월).
고려의 이혼과 재혼 29 한 이유가 더 컸을 것이다. 원시불교의 경전에서는 여성들이 성을 잘 내고 질투가 심하고 물건을 아끼고 어리석어 사회생활을 할 수 없다 한다. 89) 이는 곧 여성의 종교적 성취에도 적용되어 승려로서의 삶보다는 가족의 안녕을 기원하는 신자로서의 삶을 살게 했던 것으 로 보인다. 과부의 경우 남편에 대해 수절한다는 명분에서 승려가 되는 것을 막지는 않았 지만 바람직하게 여기지는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여성들은 남편 사후 정절을 지킨 경우가 많은 반면 남성들은 처와 사별한 뒤 대 부분 재혼했다. 뿐만 아니라 그들은 자신들의 필요에 따라 기처하고 재혼하기도 하고 고려 말에는 다처를 취하기도 하는 등 성적인 자유를 누리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시대에는 정치 적으로 여자를 이혼시키고 재혼시킬 수도 있었다는 점, 그리고 이 경우 여성들이 재혼시 격이 떨어지는 결혼을 한 것도 아니라는 점, 또 남편 사후 재혼할 때 자식을 데리고 가기 도 했다는 점 등을 볼 때 여성의 재혼을 악덕시하고 실행으로까지 간주하던 조선시대와는 크게 관념이 달랐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불교의 여성관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불교에서는 쌍무적 정절 이데올로기를 강조 하여 재혼을 규제하지 않았다. 즉 부부간에 서로 도리를 지켜 간음은 물론 자기 아내와 남 편이외의 사람에게 마음을 두지 말라한다. 그러나 죽은 뒤까지의 정절을 이야기하고 있지 는 않다. 유교도 춘추좌전 에서는 부부관계의 덕목으로 신( 信 )을 제시했는데 이는 정( 貞 ) 과 통하는 것으로서 부부가 함께 지녀야 할 쌍무 도덕이었다. 따라서 남편이나 아내 모두 정절이 중시됨은 물론 남편과 마찬가지로 부인의 개가 역시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한나라 초에 부부중심 소농가족이 일반적 가족형태로 자리잡고 가부장에 대해서는 효와 정절이, 절대군주에 대해서는 충이 도덕으로 이념화되었다. 절대군주에 대한 권한 강화와 함께 효 와 정절이 점점 강화되어 송나라 시대에 들어와서는 굶어 죽는 것은 지극히 작은 일이나 절개를 잃는 것은 큰 일 이라는 이념으로까지 여성의 정절 이데올로기가 심화되었다. 90) 고 려는 한당( 漢 唐 ) 유학을 정치이념으로 받아들였으므로 여성의 재가가 흔히 이루어졌다. 그 러나 고려말 성리학이 수용되면서 수절이 강조되고 고위층 관리부인들의 재가금지가 논의 되기에 이르는 것이다. 91) 12월에 사람들이 제 마음대로 중이나 여승이 되는 것을 금지했다 (같은 책, 공민왕 9년 12월). 89) 한국여성불교인연합회 편, 1993, 불교의 여성론, 불교시대사. 90) 이숙인, 1995, 유교윤리와 한국여성, 여성신학논집 1. 91) 김영미, 1997, 불교의 수용과 여성의 삶 의식세계의 변화: 고려시대 여성의 가정생활을 중심으로, 역사교육 62.
30 민속학연구 6 호 고려시대에 재혼한 어미에 대한 대우는 어떠했을까. 상복 규정을 보면, 어머니가 죽었을 때 아들은 3년 상복을 입고 100일의 휴가를 받는다. 그러나 개가한 어머니에 대해서는 1년 복을 입으며 30일의 휴가를 받는다. 더욱이 그 아들이 부친의 후계자가 될 경우에는 재혼 한 어머니에 대해 상복을 입지 않아도 됐다. 92) 물론 법제가 그대로 현실이라고는 말할 수 없겠으나 재혼한 어미에 대한 차별을 엿볼 수 있다. 고려말이 되면 이혼에 대한 관념이나 재혼에 대한 대책이 달라진다. 기처에 대해 부끄 럽다거나 바람직하지 못한 행위라는 생각은 이전부터 있었다. C-3. ( 孫 抃 의) 처가 國 庶 이기 때문에 臺 省 政 曹 學 士 典 誥 에 오를 수 없었다. 처가 변에게 말 하기를 공께서 저의 천함으로 말미암아 儒 林 의 淸 宦 과 중요한 관직을 밟지 못하시니 감히 청하옵건대 저를 棄 하시고 다시 世 族 에게 장가드십시오 라고 하였다. 변이 웃으면서 말하기 를 자기의 벼슬길을 위하여 30년 동안의 조강지처를 棄 한다는 것은 내가 차마 행할 일이 못되며 하물며 자식이 있는데 어찌 그렇게 하겠소 라고 하며 끝내 듣지 아니하였다. 아들 世 貞 역시 과거에 나갈 수 없었다( 고려사 권 102, 열전 15, 제신 손변). 손변은 처가 천한 출신이라 중요한 관직에 나아갈 수 없었고 아들도 과거를 볼 수 없었 다. 그 처가 자기와 이혼하라고 했지만 그는 30년 조강지처를 버릴 수 없다며 이혼을 하지 않고 있다. B-11의 권수평 사례도 이와 같으며, 또 왕규의 사례는 이를 보다 명확히 보여 준다. 왕규는 金 甫 當 의 난에 연좌되자 처를 버리고 정중부의 딸과 결혼했다. 그가 금나라 에 사신 갔다 돌아오는 길에 靜 州 에서 중랑장 金 純 富 등이 그에게 당신이 양반가문 출신 으로서 본처를 버리고 세도 재상의 딸과 결혼해 비루하게 목숨을 살고 있으니 명망과 절 조는 이미 추락되었다. 장차 무슨 면목으로 사대부들과 함께 조정에 있겠는가 라고 하자 그는 부끄러워 대답을 못했다 한다. 93) 이처럼 처를 버리는 것이 나쁜 일이라는 생각은 이전부터 있어왔지만 고려말이 되면 이 것이 도덕적인 차원이 아니라 실제 처벌로 나타난다. C-4. 8월에 獻 納 元 松 壽 와 郭 忠 秀 가 찬성사 鄭 天 起 는 告 身 이 아직 나오지도 않았는데 공공연히 정방에 들어가 인물을 평정하고 있으며 본처를 멀리하여 버리고 늘 창녀의 집에 가 있다. 고 탄핵하였다. 왕이 노하여 송수와 충수를 행성에 내려보내어 국문 하게 하고 그 관직을 92) 고려사 권 64, 지 18, 예 6, 오복제도. 93) 고려사 권 101, 열전 14, 제신 왕규.
고려의 이혼과 재혼 31 파면하였으므로 재상과 대간이 대궐에 나아가 구제하려고 하였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고려 사절요 권 25, 충목왕 4년 8월). 정천기는 고신이 나오기도 전에 정방에 들어가 인물을 평정하고, 본처를 소박해 버리고 는 창녀 집에 가 있어 탄핵되었다. 여기서 정천기가 탄핵된 이유가 꼭 본처를 버린 것 때 문만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기처행위가 공적인 탄핵의 한 요인이 되었다는 점에서 이전 시기와의 차이를 알 수 있다. 고려말의 이러한 기처에 대한 조치는 재혼에 대한 규제 및 수절 장려 정책과 짝하는 것이라 하겠다. 봉작을 받은 여성은 재혼을 못하게 했고 6품 이 상 고위관직자 부인은 남편 사후 3년 이내 재혼을 못하게 했다. 94) 또 과전법에서는 재가 녀의 수신전 지급금지도 규정했다. 95) 즉 이 시기에는 처를 함부로 버리지 않으면서 반면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 정절과 재가금지를 요구하는 형태를 지향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성리학의 영향 때문이었으리라 여겨진다. 성리학에서는 강상을 바로잡는 것을 으뜸으로 삼았고 부자 부부 군신 중 제일 우선되 어야 할 것은 부부로 보았다. 부부가 있어야 부자가 있고, 부자가 있어야 군신이 있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며 風 化 의 근원이라 여겨졌다. 96) 이러한 관념 때 문에 조선에서는 어느 시대보다도 혼인이나 부부관계에 대해 많은 관심을 기울였다. 그러 나 그 부부관계는 하늘과 땅의 관계처럼 남편은 높고 처는 낮은 것이었으며 남편에 대해 정렬해야 하는 것이었다. 97) 그리고 남편에 대한 정렬은 부부는 인륜의 근본이기 때문에 부인은 삼종의 의리는 있어도 개가하는 도리는 없습니다 98) 라며 재가조차 금지하는 것이 었다. 이처럼 남편 생전 뿐 아니라 남편 사후에도 정절을 지키려면 남편측도 기처를 자제할 수밖에 없었다. 기처당한 여성의 생존과 생계를 위해서였다. 이러한 이유로 고려말부터 기 94) 공양왕 원년 9월에 도당에서 제의하기를 散 騎 이상 관리의 처로서 封 爵 을 받은 자는 재가를 하지 못하게 하며 判 事 이하 6품 관원의 처는 남편이 죽은 후 3년 이내에는 재가를 하지 못하게 하되 위반 하는 자는 절개를 잃은 것으로 논죄할 것이며 산기 이상 관원의 첩과 6품 이상 관원의 처첩으로서 수절하기를 자원하는 자는 마을 거리에 旌 門 을 세워 그를 표창하는 동시에 상을 주게 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 고려사 권 84, 지 38, 형법 1, 호혼 공양왕 원년 9월). 95) 在 內 諸 君 및 1품부터 9품까지의 관원은 현직 산직을 물론하고 품계에 따라 口 分 田 을 주고 添 設 職 을 받은 자에게는 그 實 職 을 조사해서 주되 모두 그가 죽을 때까지 준다. 그 처가 수절하면 역시 종신 토록 허락한다 ( 고려사 권 32, 지 32, 전제 녹과전, 공양왕 3년). 96) 세조실록 권 43, 세조 13년 8월 乙 未. 97) 세종실록 세종 14년 6월초 9일 병신. 98) 태종실록 권 11, 태종 6년 6월 정묘.
32 민속학연구 6 호 처행위가 규제되기 시작, 조선시대에 들어가서는 한층 금제가 강화되었던 것이다. 조선시 대에는 이유없이 처를 버리면 사안을 조사, 처벌하고 다시 합치게 하였다. 99) 함부로 기처 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고려시대보다 여성의 처지가 나아졌다고도 할 수 있으나, 또 한편으 로는 이에 대한 반대급부로서 사상 유례없는 정절 이데올로기에 매이는 결과가 되기도 하 였던 것이다. Ⅴ. 결론 지금까지 고려시대의 이혼과 재혼에 대해 살펴보았다.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고려시대 왕실의 이혼은 대부분 정치적 이유로 이루어졌다. 이는 당사자의 애정이나 여 성의 허물 때문이 아니라 아비나 오라비 등의 정권욕 등에 의해 희생된 것이라 하겠다. 왕 실의 이혼은 왕에 의해 주도되었다. 이혼된 왕비들은 대궐을 떠나긴 했으나 경제적 대우를 받았고 사후 왕비로 복귀되기도 했다. 이혼한 왕비나 사별한 왕비는 재혼을 한 사례가 보 이지 않는다. 그들은 궁이나 외궁에서 거처하거나 혹은 승려가 되어 수절했다. 그러나 재 혼녀가 왕비가 된 경우는 있다. 이는 고려시대에 정절관념이 남편 사후까지 연장된 것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다. 반면 왕들은 재혼 정도가 아니라 다처를 취해 둘 간의 지위 격차 를 엿볼 수 있다. 일반인의 이혼은 보다 사례가 다양하다. 우선 칠출을 원인으로 들 수 있다. 이는 처가 아들을 낳지 못한다거나 음란하다거나 시부모를 잘 섬기지 못한다거나 말이 많다거나 도 둑질을 한다거나 질투가 심하다거나 병이 있는 경우 아내를 버릴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 나 법적인 강제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으며 처가의 세력이 강성할 때도 설사 처에게 칠출 사유가 있다해도 처를 버리지 못하였다. 한편 칠출 사유가 없어도 처를 버리기도 했다. 고려시대에는 남편들이 정치적 필요나 경제적 요구에 따라 처를 버린 사례들이 보이는데 이는 고려 친족구조의 특성과 관련된다. 즉 처계나 모계를 통해서도 특권을 받을 수 있었고 형벌에 연좌될 수도 있었다는 점이 기 처의 원인이 될 수도 있었던 것이다. 또 재혼이 금지되지 않았다는 점 역시 처를 상대적으 로 쉽게 버릴 수 있는 계기로 작용했다. 이에 고려시대 이혼의 대부분은 남편이 일방적으 로 처를 버리는 기처였다. 일반인의 이혼 역시 남편측 주혼자에 의해 이루어졌으며 처측에 99) 조선시대 기처나 이혼에 대해서는 장병인 지음, 1997,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참조.
고려의 이혼과 재혼 33 서는 이혼을 주도한 경우는 거의 없다. 또 이혼은 왕이나 정치적 실력자 등 제 3자에 의해 요구되기도 했다. 이혼을 하거나 과부가 된 여성들은 친정으로 돌아왔다. 그녀들은 재혼을 하기도 했는데 이혼녀보다는 과부의 재혼사례가 더 많다. 이혼녀의 경우 만일 정치적 이유나 부귀 출세 등을 이유로 이혼 당한 것이라면 재혼할 가능성이 희박하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과부의 재혼 사례 역시 썩 많지는 않다. 이는 국가에서 재혼을 금하지는 않았지만 재혼을 아름답 게 여기지는 않았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러나 여성이 재혼을 할 수도 있었고, 재혼시 격 이 떨어지는 결혼을 한 것도 아니며, 자식을 데려갈 수도 있었다는 점 등을 고려하면 재혼 금지를 법제화하고 재혼을 실행으로까지 간주하던 조선시대와는 크게 다른 사회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말이 되면 이혼제에도 변화가 보여 공식적으로 기처를 탄핵하는 사례가 나타난다. 아울러 고위관직자 부인들의 재혼 금지도 논의된다. 즉 함부로 기처하지 않는 대신 정절과 재가금지를 그 반대급부로 요구했던 것이다. 이는 여성의 입장에서 볼 때 기처가 제한되었 다는 점에서는 처지가 나아졌다고도 하겠으나 한편으로는 재혼조차 억제당하는 등 사상 유례없는 정절이데올로기에 매이는 결과가 되기도 했던 것이다.
34 민속학연구 6 호 참고문헌 고려사 고려사절요 고려도경 당률소의 춘추좌전 권순형, 1997, 고려시대 혼인제도연구, 이화여대박사학위논문. 김두헌, 1969, 한국가족제도연구, 서울대출판부. 김영미, 1997, 불교의 수용과 여성의 삶 의식세계의 변화 : 고려시대 여성의 가정생활을 중 심으로, 역사교육 62. 김용선 편저, 1993, 고려 묘지명집성, 한림대학교 아시아문화연구소. 노명호, 1988, 고려사회의 양측적 친속조직 연구, 서울대박사학위논문. 배경숙, 1988, 한국여성사법사, 인하대학교출판부. 이숙인, 1995, 유교윤리와 한국여성, 여성신학논집 1. 이태영, 1968, 한국이혼연구, 이대출판부. 이화여자대학교 한국여성연구소 편, 1983, 한국여성관계자료집 중세편 상 중 하, 이대출판부. 장병인, 1997, 조선전기 혼인제와 성차별, 일지사. 정용숙, 1988, 고려왕실족내혼 연구, 새문사. 최숙경 하현강 공저, 1972, 한국여성사(고대-조선시대), 이대출판부. 최재석, 1983, 한국가족제도사연구, 일지사. 홍완표 권순형, 1998, 고대의 혼례식과 혼인규제, 안성산업대학교 논문집 제30집 2호.
고려의 이혼과 재혼 35 ABSTRACT A Study on the Marriage Institution of Koryo Kwon, Soon- Hyung This study tried to find out the characteristics of Koryo society, lives and the status of Koryo women by investigating the marriage institution of Koryo period. Chapter II dealt with the divorce and remarriage of the royal family. The divorce of the royal family was caused mostly due to the political reason. And it connected with the royal family s marriage of convenience. It was impossible to find the case of the divorced queen s remarriage or widowed queen s remarriage. However, chastity ideology was not extended after the husband's death in that some women became the queen by remarriage. In chapter III I reviewed the cause and characteristics of divorce of the general. Most divorce cases resulted from kicho(deserting his wife) by the husband at his convenience. Wives were deserted not only if she had one ofchilgoh(the seven causes for deserting his wife) but al so if their husband s pol itical need or economic demand. A man shared not only the honors but the punishments of his wife s famil y, because Koryo society admitted the close relationships with his wife s as well as his father s and his mother s family. A man could easily desert his wife and remarry another woman with the higher status to escape the dangers in the power struggles of the ruling class and to preserve his wealth and political advantages. But women couldn t desert her husband for the same reasons and should be punished severel y if she run away from her husband, so the status of women s right to divorce was very low. In chapter IV the lives and remarriage of the women after divorce were reviewed. Women who divorced or became widow came back to their home. Sometimes they remarried and more widow remarried than the divorced. It would be almost impossible for the divorced women to remarry if they were divorced from their husband for the
36 민속학연구 6 호 political ambition and wealth etc. However, the cases of widow s remarriage were not common. That is, the remarriage was not prohibited in Koryo society but was not considered positively. But Koryo society was widely different from Chosun society in that women could remarry, remarry in the same level as the first marriage, and bring their children with them when they remarried. In Chosun society the prohibition of remarriage was legalized and remarriage was considered as a l oss of chastity. In the late Koryo period the divorce and remarriage began changing due to the acceptance of Songnihak(Neo-Confucianism). There were some cases which were impeached of deserting wife in public and discussion on the remarriage prohibition of high officials wives. The society ensured married women s right as a wife but it demanded her to keep her chastity after the death of her husband and prohibition of remarriage. From the feminist perspective, women's status became better in that the prohibition of deserting wife was restricted. On the other hand, the remarriage was prohibited and women had to subject to chastity ideology, exceptional one in the h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