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5주년 삼일절 맞이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 2014. 2. 27(목) 오후 2시 국회의원회관 제5간담회의실 자료집 공동주최 : 국회의원 김정록, 이학영, 이재영(비례), 김제남 주관 : (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 후원 : 국회의원 조현룡
발 행 처 :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추진 연대회의 참여단체 : 건강세상네트워크 기독교환경운동연대 기독교평화센터 김형률추모사업회 녹색당 녹색연합 대구KYC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인권위원회 반핵의사회 불교생명윤리협회 생명평화마중물 에너지정의행동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정국장애인부모연대 정의평화불교연대 참교육을위 한전국학부모회 참여불교재가연대 평화박물관 한국교회여성연합회 한국YMCA전국연맹생명평 화센터 한국원폭2세환우회 한국원폭피해자협회합천지부 한국교회희망봉사단 합천평화의집 이 메 일 : forhibakusya@gmail.com 웹페이지 : http://cafe.daum.net/4victim 발 행 일 : 2014년 2월 25일 편집 디자인 : 그래픽시선 본 자료집의 모든 컨텐츠에 대한 저작권은 본 연대회의에 있고, 무단 복제는 삼가 주시기 바랍니다.
책머리에 올해로 일제의 압박에 항거, 전 세계에 민족의 자주독립을 선언하고 온 민족이 총 궐기하여 평화적 시위를 전개하였던 삼일절이 95주년이 됩니다. 또한,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어느덧 69주기를 맞이합니다. 1945년 일본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식민지 지배와 강제동원으로 인하여 그곳에 가 있던 우리 동포 4만 여 명이 희생당하고, 살아남은 피폭자들도 제대로 된 치료와 구호를 받지 못한 채 원폭 방사능의 후유증과 가난, 사회적 차별과 소외 속에서 그 귀 한 목숨을 잃어갔습니다. 그러나 원자폭탄이 남긴 상흔은 거기서 끝이 아니었습니다. 그 고통은 후대까지 이어져 원폭피해2세와 3세를 통해 다양한 신체적, 정신적 질환과 후유증으로 잔인하게 되살아났고, 오늘도 그 상처가 이어지고 있습니다. 삼일절 95주년을 맞이하여, 우리가 알지 못했고 잊어버렸던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 자의 실상을 정확히 알고, 원폭피해자와 2세, 3세 환우들의 생명과 건강, 인간답게 살 아갈 기본적 권리를 위한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를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해 원 폭피해자 증언대회 개최를 준비하였습니다. 2014.2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 순서 식전행사 새누리당 김정록 의원 민 주 당 이학영 의원 정 의 당 김제남 의원 새누리당 이재영 의원 새누리당 조현룡 의원 본 행사 사회: 진경숙 사무국장 한국원폭2세환우회 사무국장 영상 - 한국인 원폭피해자, 잊혀졌던 69년의 기록 증언 증언1 : 박영표(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 증언2 : 심진태 지부장(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장) 증언3 : 김봉대(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 증언4 : 한정순 회장(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보고: 한국인 원폭피해자 실태와 해결과제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 글 싣는 순서 인사말 - 국회의원 김정록(새누리당) - 국회의원 이학영(민주당) - 국회의원 이재영(새누리당 비례) - 국회의원 김제남(정의당) - 국회의원 조현룡(새누리당) 책머리에 증언 증언 1. 1945년 8월 6일 - 박영표 (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 증언 2.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 - 심진태 (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지부장 증언 3. 소중한 아들 형률이의 뜻을 이어받아 - 김봉대 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 증언 4. 원폭의 상처와 후유증은 대물림되어 원폭2세환우의 몫으로 남았다. -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보고 한국 원폭피해자의 피해 실태와 해결과제 전은옥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 부록 원폭피해자 주요사건 연표
인사말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가 법안 제정을 위한 공감대가 폭넓게 형성되는 계기가 되길 국회의원 김 정 록(새누리당, 비례대표, 보건복지위원회) 안녕하십니까. 국회 보건복지위원회 김정록 의원입니다. 오늘 증언대회를 찾아 주신 여러분과 행사 준비를 위해 수고해 주신 관계자 여러분 께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떨어진 두 개의 원자폭탄은 전쟁을 끝낸 중요한 계기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이면에서는, 7만여 명의 한국인이 원자폭탄에 의해 피 폭을 당해 지금까지도 큰 고통을 받고 있으며 이 고통이 후세에까지 이어지고 있습니 다. 그렇게 70년 가까운 세월이 흘러, 현재 원폭 피해자는 2천 600여 명밖에 남지 않았 습니다. 더 이상 이분들에 대한 도움을 늦춰서는 안 될 시점입니다. 일본 정부는 일찍이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 을 제정하여 자 국의 원폭 피해자들을 지원하고 있었지만, 한국은 원폭 피해자를 위한 별도의 지원 법안이 마련되지 않는 등 제도적 지원이 부족하여 원폭 피해자는 긴 세월 동안 후유 증에 시달리며 힘든 시간을 보내왔습니다.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저는 지난 2012년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 실태조 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 을 동료 의원들과 함께 발의하여 원폭 피해자분들을 지 원하고자 하였습니다. 또한, 민주당 이학영 의원님, 새누리당 이재영 의원님, 정의당 김제남 의원님께서도 뜻을 같이하여 노력해 주시기도 하셨습니다. 하지만 많은 분의 도움과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 지원법의 제정이 이루어지지 않 고 있어서, 더욱더 많은 노력과 각계의 관심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이런 시점에 열린 이번 행사는 원폭 피해자 및 2세대 환우들의 진심 어린 증언을 통해, 우리가 왜 이분들의 어려움에 귀 기울이고 또한 제도 개선에 나서야 하는지 다
시 한 번 확인하는 귀중한 시간이 될 것이라 기대합니다. 오늘 증언대회가 국회와 정부 등 관계자 모두에게 법안 제정을 위한 공감대가 폭넓 게 형성되는 계기가 되길 바라며, 저는 선배 및 동료 의원님들과 함께 법안 제정을 위해 최선을 다 할 것을 다시 한 번 약속드립니다. 원폭 피해자와 그 가족 여러분. 그리고 관계자 여러분의 건강과 행복을 진심으로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2
인사말 더 이상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제도적인 뒷받침을 미뤄서는 안됩니다 국회의원 이 학 영(민주당 경기 군포, 국회 정무위원회) 안녕하십니까, 국회의원 이학영입니다. 1945년 8월은 우리나라가 일본의 식민지배에서 벗어난 경사로운 달이기도 하지만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우리 국민 7만 명 이상이 피폭되거나 희생된 달이기도 합니다. 그로부터 70여 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원폭의 피해는 당사자뿐 아니라 자녀들에게까지 현재 진행 중입니다. 그럼에도 불 구하고 원폭 피해자들은 여전히 국가로부터의 보상과 지원은커녕 관심조차 받지 못하 고 있습니다. 지난 17대 국회를 시작으로 지속적으로 <원폭피해자 지원법안>이 제출됐지만 이 같 은 정부의 미온적 태도로 인해 법률안 제정은 늦어져 왔습니다. 작년 초 경남발전연구원이 조사한 바에 따르면 원폭 피해자 자녀의 약 20%가 선천 성 기형이나 유전적 질환을 앓고 있다고 밝혔습니다. 더 이상 피폭자 자녀에 대한 유전성을 따지는 불필요한 논쟁으로 법률 제정을 미뤄 서는 안 됩니다. 국민을 제대로 보호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역사의 상처를 지금이라 도 치유하기 위해 정부가 적극적으로 나서야 합니다. 그런 관점에서 오늘 이 증언대회가 원폭피해자들과 그 자녀들의 고통에 대한 국가 의 책임에 대해 다시 한 번 강조하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루빨리 특별법 제정을 통해 후유증과 생활고 등으로 고통받고 있는 원폭 피해자 및 피해자 자녀에 대한 지원 대책 마련과 정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오랜 시간 피해자들과 자녀들의 권익을 위해 앞장서온 협회와 연 대회의 관계자분들이 계십니다. 이 자리를 빌려 진심으로 경의와 감사를 표하며, 오늘
증언을 해주실 4명의 증언자분들께도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저 역시 특별법을 대표 발의한 국회의원으로서 무한한 책임감을 갖고, 앞으로 법률 제정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참석해주신 모든 분들의 건강을 기원합니다. 감사합니다. 2014.2
인사말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지속적이고 실질적인 지원을 해야할 때입니다. 국회의원 이 재 영(새누리당, 비례대표, 국회 기획재정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2014년 올해는 잔혹한 일제의 폭압과 침탈에 맞서 민족의 평화적 시위가 있었던 삼 일절의 95주년 되는 해입니다. 뜻깊은 95주년 삼일절을 맞이함과 더불어, 매우 늦은 감이 있지만,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가 이렇게나마 개최된 점을 매우 다행스럽 게 생각합니다. 일제강점기는 참으로 혹독했습니다. 당시 일본의 억압과 강제노역 등은 수많은 우 리 선조들을 일본으로 건너갈 수밖에 없게 만들었습니다. 이후의 히로시마와 나가사 키 원폭으로 약 7만여 명의 우리 동포들이 타향에서 억울하게 희생되었으며, 그 희생 은 일회적이지 않고 그 생존자, 그리고 원폭2세에까지 그대로 전해져 이들에게 말할 수 없는 고통을 안겨 주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 일본정부와 극우정치인들은 야스쿠니 신사를 참배하며 위 안부와 관련하여 망언을 서슴지 않는 등 과거사 문제에 있어 진일보하기보다 자신들 의 책임을 부정하며 우리나라를 비롯한 주변국들에 씻지 못할 상처를 주고 있습니다. 이러한 일본이지만 정작 자국민 피해자 구제에는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1957년, 1968년 각각 원폭피해자에 대한 의료, 특별조치에 관한 법률을 제정 시행하다가, 1994 년 두 법률을 통합하여 현재까지 자국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지원을 적극적으로 시행 해 오고 있습니다. 반면 우리나라는 원폭피해자 7만여 명 중 지금까지 약 2천여 명이 생존해있음에도 불구하고, 지난 60여 년간 명확한 실태조사가 이루어지지 않고 있고, 관련법 하나 없 어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에 대한 지원 및 대책 역시 지극히 미미한 실정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원폭피해자들에 대한 정확한 실태조사를 실시하고, 그동안 국가로부
터 보호받지 못했던 피해자들에 대한 의료 생활지원 등을 보장함으로써 원폭피해자들 의 생존권 및 안전을 보호해야 합니다. 2013년 제가 발의했던 원자폭탄 피해자 및 피해자자녀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 은 이러한 시급성과 그 궤를 같이한다고 할 수 있 습니다. 95주년 삼일절맞이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에 참석해주신 내외빈 여러분, 구한 말 약소민족의 서러움으로 인해 고통받고 피해 입은 이들이 바로 원폭피해자분들입니 다. 한참이나 늦었지만, 이제는 그분들에게 지속적인 관심과 실질적인 지원을 약속해 야 할 때입니다. 이를 위한 여러분의 열정적인 활동을 부탁드리겠습니다. 저 이재영도 이에 못지않게 더 열심히 뛰겠습니다. 감사합니다. 2014.2
인사말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 증언대회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뜻깊은 자리 국회의원 김 제 남(정의당 비례대표, 국회 산업통상자원위원회, 여성가족위원회) 안녕하십니까, 정의당 국회의원 김제남입니다. 먼저, 삼일절 95주년을 맞이하여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 한 한국인 원폭피해자 증언대회 개최를 매우 뜻깊게 생각하며, 진심으로 축하의 말 씀을 드립니다.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추진 연대회의>는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에 투하된 원폭으로 인해 피해 입은 한국인 원폭피해자 1세와 2, 3세 환우 피해실태 진상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 제정과 국내 정책의 수립을 목표로 지난 2012년 9월 12일 정식으로 출범하였습니다. 출범 이후 여러 국회의원들과 협력하여 원폭피해자 1세와 2, 3세 환우 의 현실을 알 리고 이 문제를 사회적, 법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지금까지도 꾸준한 활동을 전개해오 고 있습니다. 본 의원 역시 2013년 6월, 원폭피해자와 그 자손들의 생존권을 보장하고 인간다운 삶 을 영위할 수 있도록 하는 원자폭탄 피해자 및 피해자자손 지원을 위한 특별법안 을 대표 발의하는 등 소외된 피해자들을 위해 다방면으로 지원을 아끼지 않고 있습니 다. 일제강점기 강제 이주된 한국인들 중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 에 의해 후유증을 앓고 있는 피해자는 현재 2,670여 명에 이르고 있지만, 이들 피해자 들과 그 자손에 대한 정부의 지원은 미미한 실정이기에 앞으로도 지속적인 지원과 관 심이 절실히 필요합니다. 따라서 이러한 시점에 원폭피해자 및 자녀를 위한 특별법 제정 촉구를 위한 오늘과 같은 증언대회는 참으로 시의적절하고 뜻깊은 자리라 생각됩니다.
오늘 증언대회를 통해, 원폭 피해자들의 아픔과 상처를 공유하고, 그들을 체계적으로 지원할 수 있는 실질적인 논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합니다. 또한,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두 번 다시 이러한 피해가 발생하지 않도록 증언해 주 시기 위해 한마음으로 모여주신 피해자 및 가족 여러분들과 증언대회 개최를 위해 애 써주신 관계자 여러분들의 노고에 깊은 감사와 격려의 말씀을 드립니다. 다시 한 번 뜻깊은 증언대회 개최를 축하하며, 행사에 참석하여 주신 관계자 여러분 께 감사의 말씀과 함께 가정에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시기를 기원합니다. 2014.2
인사말 원폭피해자들의 생존권과 건강권 보장을 위한 사회적 관심 제고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국회의원 조 현 룡(새누리당 경남 의령군 함안군 합천군, 국회 국토교통위원회) 안녕하십니까. 경남 의령 함안 합천 출신 국회의원 조현룡 입니다. 일본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 어느덧 70여 년이라는 세월이 속 절없이 흘렀습니다. 1945년 8월 6일과 9일, 형태도 없는 무색무취 존재의 가공할만한 위력으로 현장에서 비명에 간 귀한 목숨이 70여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 니다. 그들 중 우리 한국인이 무려 10%에 육박한다는 것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현실입 니다. 현재 국내 원폭2세에 대한 현황은 정확한 조사가 이루어진 적이 없고, 단순 추정으로 전국에 1만여 명 정도로 알려졌습니다. 원폭 1세대 생존자는 이제 3천여 명 남짓에 불과 하며 2세와 3세에까지 높은 질병 이환율과 각종 암 정신질환 등 강도 높은 후유증에 고스란히 노출되고 있습니다. 더욱이 당시 국내 피폭자 7만여 명 중 60% 이상이 합천 지역 사람으로 우리 합천은 한국의 히로시마 로 불릴 정도의 각종 정신적, 육체적 질환 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현실적으로 이들에 대한 지원 대책이 전혀 없을 뿐만 아니라 원폭피해자 2세들은 사 회적 차별을 우려하여 고통을 숨기고 사는 경우가 대다수입니다. 이렇듯 희생된 이들 의 조직적인 대응이 불가피한데도 불구하고, 한국인 원폭2세환우회의 공식적인 가입자 는 650여 명 남짓에 지나지 않습니다. 피해자 신분임에도 사회에 당당히 나서지 못하 는 이들의 생존권과 건강권 보장을 위한 사회적 관심 제고가 절실히 필요합니다. 그 들의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고, 더 이상 원폭피해자들의 고통과 피해를 외면해서는 안 될 것입니다. 최근 일본이 자행하는 정치적 행보를 보면 옳지 않은 과거를 답습하려는 의지를 서서 히 드러내고 있음을 엿볼 수 있습니다. 원폭투하는 그저 지난 세기의 먼 사건으로만 치부할 가벼운 참상이 아닙니다. 핵무기의 위험성과 대를 잇는 유전적 피해 사실을 적극적으로 알려야 하고, 암흑의 역사를 바로잡아 다시는 이러한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 록 모두가 발 벗고 나서야 합니다.
모쪼록 오늘과 같은 자리가 지속적으로 마련되어 실상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바람직 한 혜안이 범국민적 의식으로 확산되기를 바랍니다. 나아가 인류 안전 세계 평화의 진 정한 단초를 헤아리는 정부 차원의 외교적 노력 및 우리 원폭피해자에 대한 내실 있 는 지원이 하루 속히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촉구하는 바입니다. 감사합니다. 2014.2.27
증언1 1945년 8월 6일 박영표 (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장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은 돌아보기도 싫은 날이다. 아버지는 8명의 식솔을 살리기 위하여 매일 아침 집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식육 배 달을 하시러 나가고 안 계셨다. 나는 그 당시 미사사 초등학교 2학년이었다. 아침을 먹고 방안에서 형들과 학교에 갈 준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섬광이 번쩍하 는가 싶더니 부엌 쪽 지붕이 와장창 무너지면서 눈을 뜰 수 없는 흙먼지가 방안을 가 득 메웠다. 그런 가운데서도 어머니는 자식들을 살리기 위하여 어린 우리 형제들을 모두 챙기시더니 방공호로 데리고 들어가셨다. 나는 엉겁결에 어머니 손에 끌려 나오 다가 무너진 부엌 판자에 가슴을 찔려 피가 많이 흐르고 있었다. 어머니는 우리에게 꼼짝하지 말고 있으라 하시더니 앞도 잘 안 보이는 무너진 집으 로 가시어 어떻게 찾았는지 헝겊을 가지고 오셔 피가 흘러내리는 내 가슴의 상처에 붕대 같이 동여매어 주셨다. 응급 처치로 피가 흘러내리는 내 가슴을 지혈해주신 후 에는 배달을 나가신 아버지 걱정으로 연신 방공호를 들락날락하시며 아버지께서 무사 히 살아 돌아오시기를 기원하셨다. 섬광이 번쩍한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시내 전체가 검은 먹구름으로 뒤덮이더니 그믐 밤같이 깜깜해졌다. 하늘에서는 가랑비 같은 빗방울이 내리는데 그 빗방울이 모두 석 탄을 피운 뒤 나오는 새까만 물과 같았다. 매일 같이 구슈게요는 있었고 그럴 때마다 수십 척의 비행기가 떼를 지어 히로시마 하늘을 지나가고 하였다. 그날따라 구슈게요는 없었는데 갑자기 공중에서 번쩍하면서 무엇인가 떨어졌고 집이 무너지고 도시는 암흑으로 변하고 있었으나 우리는 원자폭탄 이 떨어져서 도시 전체가 잿더미가 되었으리라고는 전혀 생각해 본 적도 없고 원자폭 탄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있던 터였다. 우리 식구가 모두 좁디좁은 방공호 안에서 아버지의 걱정을 하고 있는데 아버지의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이놈들 다 살아 있나 하고 방공호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 경 황 속에서도 아버지가 살아 돌아오신 것에 감사의 눈물이 흘렀다. 하지만, 아버지가 입고 있는 옷은 때가 꾀죄죄한 거지같았다. 아버지께서 조금 진정하신 후 내 가슴에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시고는 아연 질색을 하셨다. 너희는 꼼짝 말고 있으라 하시더니 휑하니 방공호를 나가셨다. 한 참 후에야 돌아오시더니 피투성이가 된 나를 엎고는 로 달려가셨다. 에 도착을 해 보니 그동안에 다친 부상자들이 줄줄이 서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고 나도 한참 후에야 치료를 받고 집으로 왔다.
집으로 오는 도중에는 삼삼오오 모여 무엇인가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땅을 치며 대성통곡을 하고 있었다. 오는 길옆으로는 우리 집과 같이 반파된 집도 있고 전파된 집도 있었고 또 어떤 집은 불이 붙어 타고 있었으나 누구 한사람 불을 끄는 사람은 보이지 않았다. 멀지 않은 시내 쪽에는 곳곳에 불이 타고 있는 것이 보였고 시커먼 연기들이 어디라 할 것 없이 새까맣게 피어오르고 있었다. 이틀정도 방공호에서 지내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여기에 있으면 모두 다 죽을 수 있 다면서 아버지 친구분이 꽤 먼 고이 란 곳으로 갔다. 피난을 간 동네는 히로시마 시내와는 정반대로 평온한 마을이었다. 피난을 온 지 며칠이 되지 않아 동네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웅성거리며 울고 불며 우리 일본 사 람들은 패전되어 다 죽게 되었다고 야단들이었다. 3개월을 이곳에서 지내고 12월 중순 눈이 내리는 가운데 누가 기다리지도 않는 고 국 길에 올랐다. 12월의 매섭게 불어오는 겨울 날씨에 몇 차례 기차와 트럭을 바꿔 타고 도착한 곳은 시모노세키 항구였다. 벌써 이곳은 귀국하는 인파로 인산인해였고 서로 연락선을 먼저 타려고 아비규환이었다. 이 틈새에서 우리 식구들도 예방주사를 맞고 보리쌀이 많이 섞인 주먹밥을 가족 수 대로 배급을 받고 어둠 컴컴한 연락선에 몸을 실었다. 어린 나이였지만 고향이라고 찾아온 합천은 너무 썰렁하였고 친척이라고 찾아가 본 집들은 초근목피로 어렵게 연명을 하고 있었다. 귀국 후 얼마 안 되어 아버님의 몸 전체에서 피부병 같은 발진이 생기면서 온몸이 가렵고 숨이 차기 시작하여 열악한 병 원을 모두 다녀 보아도 백약이 무효이고 의사들도 방사능에 의하여 발생했다는 처방 을 내리는 의사는 한 사람도 없었다. 치료는 조약으로 하였으나 많은 고생을 하시다 가 돌아가셨다. 나중에 안 일이지만 배달을 나갔다가 그 열선을 맞았으며 원자폭탄이 어떤 것인 줄 도 모르고 피폭지를 마구 왔다 갔다 하였으니 당연한 일이라 생각이 든다. 어머니께 서도 아버님이 일찍 집에 오시지 않으니 아버님을 찾으러 시내를 두어 번 가셨던 것 이 원인이 되어 평생 많은 고생을 하시다가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형제자매들도 방 사능 후유증으로 위암 갑상선암, 전립선 암 등으로 모두 수술을 하고 사경을 헤매며 평생 고생을 하였고, 위로 형님들은 원폭증을 완치하지 못하고 여러 해 전 모두 유명 을 달리하였다. 현재 한국에 원폭피해자가 2,650여 명이 있으나 이들도 나와 같은 처참한 생활로 70 여년을 버티어 왔고 앞으로 몇 년을 더 살지가 의문이지만 80%는 더 사는 것에 미련 이 있는 것이 아니라 하루라도 덜 아프고 빨리 죽었으면 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고 보면 된다. 우리 원폭피해자들은 한때 위정자들의 잘못으로 36년간 나라를 빼앗기고 국민들은 헐벗고 굶주리다 못해 남부여장하고 목숨이라도 살기 위하여 원수의 나라에 갔다가 사상 유례없는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고 하루아침에 전 재산과 가족을 잃었다. 본인마
저도 중경상을 입고 평생 방사능 환자로 살아야했고 사회에서는 피폭자라는 불명예스 러운 인간의 권리와 명예를 상실한 채 살아왔다. 하지만, 70여 년간 정부에서는 실태 조사 한번 해 준 적이 없었고 원폭피해자들이 1965년 한일 청구권 협정에 빠져 있었 음을 시인하면서도 대일본 정부에 피해배상 협상도 없었다. 이러한 홀대를 하고서도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치를 하였다고 할 수 있을까? 또한, 헌재의 부작위 위헌 결정이 있었으나 아무런 조치도 없었고 17~18대 국회에 원 폭특별법을 발의하였으나 무산되었다. 행정입법부가 있으나 우리들의 권리와 명예를 회복하고 국민의 권리를 찾아 주겠다는 정부는 어디에 있는지 알 수가 없다. 늦었지만 우리 원폭피해자들이 무덤에 들어가기 전에라도 일본에 대한 피해배상과 정부로부터 명예와 인간의 권리를 찾아주기를 바라는 바이다.
요구 사항 1. 1945년8월6일 히로시마와 8월9일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어 4만여 명이 폭사(즉사) 하고 3만여 명이 중경상을 입고 귀국하였다. 그 후 69년의 세월이 경과하는 동안 2만7천여 명이 올바른 치료 한번 받아보지 못하고 유명을 달리하였고 현재 2,650여명도 방사능 후유증 으로 인하여 사경을 헤매고 있다. 생존자들의 평균 연령이 78세에 이르고 있으나 69년 동안 정부(외교부)는 실태조사 한 번 한 일이 없다. (지금이라도 정부가 마땅히 실태조사를 해야 한 다) 2. 일본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때 일제강점기 한국의 모든 피해자들의 피해배상 문제는 통괄 정리가 되었다 했다. 하지만, 한국 정부(외교부)는 원폭피해자,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사할린동포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고 하면서도 피해배상 문제를 해결 해주지 않는 이유가 무엇인가. 청구권협정 제3조2항과 국제사법재판소를 이용하여 피해배상 해결을 할 수 있는데 도 일본정부가 들어주지 않으면 그 효력을 발휘 할 수 없다고 계속 부작위 를 하고 있다. (빨리 해결하라) 3. 2005년 일본의 외교 문서 공개 때도 원폭피해자 문제는 포함되지 않았다는 것이 확실히 증명되었고 외교부에서도 원폭피해자들은 청구권협정에 포함되지 않았다고 인정하면서도 계속 부작위 를 하고 있다. 이 때문에 원폭협회에서는 2008년 헌재에 부작위 제소를 하였다. 헌 재는 2012년8월31일 정부(외교부)의 부작위 는 위헌이라는 결정을 하였고 외교부는 위헌 결 정에 따라 겨우 일본에 구상서 2번 보냈고 T/F팀을 구성하여 활동 중이라는 구차한 말만 하 고 있다. 구상서 내용과 T/F팀의 활동 내용이 어떤 것인지 원고들은 상세한 내용과 설명을 요 구한 바가 있으나 명확한 답을 주지 않았고 헌재의 위헌 결정을 내리기 전 67년간 외교부는 한국원폭피해자 피해배상 문제를 일본에 제기한 적이 있는지 명확한 자료를 요구한다. 4. 강제징용자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도 큰 피해자이지만 원폭피해자들은 하루아침에 전 가족과 전 재산을 송두리 채 잃어버리고 살아남은 사람들은 중경상을 입고 귀국하였다. 이들 도 지난 69년 동안 방사능 후유증과 싸우며 간신히 살아오고 있는데 정부에서는 강제징용자 나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만 news의 메카로 주목받게 하고 있다. 호불호를 가려 달라는 것 은 아니나 이런 것도 정부의 책임이다. 5. 402호 통달 폐지 소송에 대해서도 원폭협회 회장 곽귀훈씨의 꾸준한 노력 끝에 승소하 여 2004년부터 한국원폭회원들이 건강수당을 수령하고 있는데 이런 법정 문제도 한국 정부는 강 건너 불구경 하듯 하고 있다. 그 외에도 이홍현 회원이 의료비 상한선 철폐 소송(승소)등 일본을 상대로 많은 재판을 하였으나 정부는 한 차례도 도움을 준 적이 없다. 정부의 도움이 필요하다. 6. 일본 정부의 입장은 1965년 한일 청구권협정 때 한국원폭피해자들의 피해배상금 도 모두 해결되었다 한다. 일본 측의 입장이 맞다면 한국정부(외교부)가 한국원폭피해자들에게 피해배 상 을 해주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한국정부가 일본을 상대하여 피해배상 해결을 하루 빨
리 정리해주기 바란다. 7. 일본은 한국원폭피해자들을 원폭피해자로 인정을 해주고 있다. 그 이유는 402호 통달폐지 소송에서 패소를 했기 때문이다. 일본은 현재 일본 원폭피해자들과 거의 비슷하게 한국 원폭 피해자들에게 원호 수당을 지급하고 있다. 일본이 원폭피해자로 인정을 해주지 않는다면 왜 건강 수당을 주겠나? 이런 모든 점을 감안 할 때 한국 정부의 무능함에 의하여 피해배상 문 제가 해결되지 않고 있다. 하루 빨리 해결이 되도록 노력을 해주기 바란다. 8. 한국의 한센 환자들도 특별법이 제정되어 있는데 원폭피해자들은 17~18대 국회에 특별법 발의를 하였으나 모두 실패하였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었던 간 원폭피해자들도 특별법이 제 정되어 인권과 명예를 회복하도록 입법부와 행정부가 솔선수범해야 한다. 9. 강제징용자들은 정부로부터 2~3천만 원의 위로금을 수령하였는데 원폭피해자들도 똑같은 혜택을 주어야 한다. 2014년 2월 12일 (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장 박 영 표
증언2 피해자는 있지만 가해자는 없다 심진태 (사)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합천지부 지부장 나는 1943년 1월 9일 일본국 히로시마 애바마치 251번지에서 출생하였다. 태어난 지 2년만인 1945년, 원폭이 투하되어 피폭자가 되었다. 원자폭탄이 투하되자 동년 음력 9 월경 만삭인 어머니와 할아버지가 살고 있는 고향 합천에 돌아왔고, 아버지께서는 1946년 3월경에 무사히 고향에 도착하셨다. 독자인 할아버지와 아버지는 손자가 태어나 고향에 오니 무척 좋아하셨다. 그러나 13식구가 작은 농토로 살아가기에는 매우 가난했다. 그 와중에 1950년 6 25전쟁이 터졌고, 아버님께서는 반공전선에서 전사하셨다. 할아버지께서는 그 참혹함을 견디지 못해 1년도 되지 않아 단식으로 돌아가셨다. 그때부터 나는 집안의 가장이 되어 산에 있는 소나무 껍질을 벗겨 나르고, 어머니 께서는 들에 나가 쑥을 비롯한 온갖 나물을 캐며 목숨을 연명하며, 죽지 못해 살고 있었다. 살기에 너무 급급하다 보니 내가 원자폭탄 피해자란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지금에 와서 생각해보면, 어린 시절 합천시장에 가면 얼굴에 상처가 회복되지 않고 진물이 흐르는 사람, 원폭으로 화상을 입어 번쩍번쩍 빛나는 흉터 자국을 지닌 사람 들이 있었다. 그 모두가 원폭 피해자였다는 생각을 하면 너무 끔찍스럽다. 그 고달픈 세월은 흘러 결혼 문제가 거론되자 원폭피해자는 유전이 된다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더더욱 무서운 것은 가난이었다. 이 모두가 전쟁의 피해라 생각된다. 지금 세계 정세를 들여다보면, 핵무기 보유국 8개국 대부분이 잘 사는 나라이다. 핵 무기를 보유한 나라는 언젠가는 전쟁을 하겠다는 야심을 가지고 있다고 볼 수밖에 없 다. 그 중 미국은 1945년 7월 16일 핵 실험을 했다. 엄청난 피해가 발생한다는 것을 미 리 알고 있었으면서도 동년 8월 6일과 9일 일본국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폭을 투 하하여 74만 명의 인명피해와 엄청난 환경피해를 발생시켰다. 원폭을 투하한 미국은 반드시 보상해야 하며, 핵무기를 보유한 국가는 하루속히 핵 무기를 폐기처분하여 고철로 만들어야 한다. 핵을 보유하는 한 세계평화는 없을 것이 다. 또한 남을 때려 피해를 주었을 때 그 피해에 대해 반드시 보상을 해야 한다면, 약 자를 때리는 일도 없을 것이다. 일본국은 전범국으로서 한국인 원폭피해자에게 사죄 하고 보상해야 한다. 또한, 일본 원폭피해자와 재외 피폭자에게도 일본 원폭피해자 원
호법을 차별해서는 안 된다. 우리 정부는 69년이 흐르는 동안 원폭피해자에 대한 제대로 된 실태조사 한 번 하 지 않았다. 우리속담에 때리는 서방님보다 말리는 시누이가 밉니다. 라는 말이 있다. 피폭자도 국민이다. 하지만, 우리 원폭피해자는 국적이 없다. 원폭을 투하한 미국도 전범국인 일본도 피해자는 있는데 가해자는 없다. 우리 피폭자는 거지가 아니다. 1965년 한일수교 후 대일청구권 자금을 일본국으로 부터 수령하여 포항제철과 방위산업 등 경제발전에 기여했다고 한다. 그 후 외부무에 그 내용을 밝힐 것을 요구했으나, 국가 기밀상의 이유로 공개하지 않았다. 공개하지 않았던 내용의 일부가 2006년 1월 공개되었다. 정부는 37년 동안 주인인 국민에게 기만정책을 펼쳤다. 이제는 우리나라 경제도 세 계 10위권에 이르렀다고 언론은 말하고 있다. 아무리 경제 부국이라고 해도 소외된 국민을 돌보지 않는 국가는 후진국이라 할 수밖에 없다. 정부는 이제 전쟁 피해자인 원폭피해자에게 보상을 해줘야한다. 우리 피해자들은 평균 연령 79세로 죽음을 앞두고 있다. 평생을 가난과 병마와 싸워왔고, 자식에게 물 려 줄 유산이라고는 가난과 방사선에 의한 유전뿐이다. 나는 가난하여 역사 공부는 못했지만 우리나라는 일본에게 수없이 침략을 받았으 나 일본국을 침략한 사실은 없다 라고 들었다. 그런데 정부는 무엇 때문에 일본국에 한국피폭자를 대변하여 말 한마디 하지 못하는지 정말 분통이 터진다. 더욱이 우리나라에도 국민을 대표하는 국회가 있다. 제6대 국회에 이어 17, 18, 19대 국회에 원폭피해자 특별법을 상정하였으나 아무런 진척이 없다. 국회는 소외된 국민이 있는 것조차 알고 있는지 의심스럽다. 피폭자들의 실태조사 도 제대로 하지 않은 처참함이 망신이 될 것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는 국민의 대변자 가 부끄러울 뿐이다. 이번 19대 국회에서는 구술 증언이라도 할 수 있는 피폭자가 죽 기 전에 하루속히 특별법이 제정되기를 바랄뿐이다.
증언3 소중한 아들 형률이의 뜻을 이어받아 김봉대 한국원폭2세환우회 고문 1945년 일본의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에 피폭된 한국인 피해자 7 만 명 중, 69년이 지난 현재 생존자는 1세 2,600여명과 2세 약 1,200명이라고 추정하 고 있습니다. 그러나 병마에 시달리고 있는 원폭피해자 2,3세대를 위한 지원법은 현재 까지 없어 이들이 삶을 계속 이어갈 수 있을지 우려스럽습니다. 그동안 국회에 발의 되었던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 은 17, 18대 국회에서 발목을 잡아 현재까지 빛을 보지 못하고 있습니다. 저는 1938년 합천에서 태어났지만, 제 처인 형률이 엄마는 1940년 히로시마 후나이 리마치에서 태어났습니다. 부모님과 같이 목욕탕 불 때는 일과 청소 일을 했다고 하 지요. 6살 피폭당시 2층집이 폭삭 주저앉았는데 세 자매 중에서 큰언니는 1층에 있다 가 죽음을 당했고, 아버지는 목욕탕 간다고 하셨는데 거기서 돌아가셨다고 합니다. 고 향 합천으로 돌아와서 어머니는 소작 일을 하셨는데, 늘 감기가 잘 걸리고 한기 드는 병으로 고생하시다 62세에 돌아가셨습니다. 형률이 엄마는 피부병을 어릴 때부터 앓 고 등허리 종양 제거수술도 받고 골다공증으로 고생하다, 2001년 [원폭피해자협회]에 가입하고 원호수첩을 받은 뒤 히로시마로 가서 도일치료를 받았습니다. 저는 24살 때 형률이 엄마와 결혼해서 슬하에 3남 2녀를 두었습니다. 막내아들인 형률이가 1970년에 부산에서 태어났을 때 원래 쌍둥이었는데, 5분 뒤에 태어난 동생 은 열흘 뒤에 병원 생활을 하고 집에 오면 늘 감기를 앓다가 생후 22개월만에 폐렴으 로 죽었습니다. 형률이도 계속 병원 생활을 하다가 30년간 침례병원을 다녔습니다. 그 때는 폐렴인 줄 알았는데 부산대학병원 가서 한국에 2명밖에 없다는 희귀난치병인 선천성 면역글로블린 결핍증 임을 알았지요. 이것을 계기로 형률이는 원폭피해자2세 로서 명확하게 인식하게 되었습니다. 객혈이 터져 기관지 수술을 3번하고 서울대병원 에서 2번했습니다. 그렇게 아프면서도 2002년 3월에 아픈 몸을 이끌고 [대구 KYC] 사 무실에서 기자회견을 통해 한국 최초로 원폭피해자2세 환우임을 밝히면서 원폭피해자 2세문제에 대한 대책 마련을 촉구했습니다. 부산과 합천, 대구, 서울을 오가며 [한국원폭2세환우회]를 조직하고, 2003년에는 시 민사회단체와 [원폭2세환우 문제해결을 위한 공동대책위원회]를 결성한 뒤에 [국가인 권위원회]에 진정서를 제출했습니다. 그 결과 2004년 8월에 [국가인권위원회]가 원폭
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과 건강실태조사 를 시작하고 2005년 2월에 그 결과를 발표했 지요. 4월에는 [공대위]와 함께 원폭피해자 진상규명과 지원대책 촉구 및 특별법 제정 을 위한 의견청원 기자회견 을 개최하고 국회에 청원서를 제출했습니다. 5월에는 특별 법 제정을 위한 토론회에 참여했고, 일본 도쿄에서 한국의 원폭피해자문제를 알리기 위해 심포지움에서 마지막 발표를 한 뒤에 부산 집에 돌아와서 29일에 숨졌습니다. 형률이는 제게 너무나 소중한 아이였습니다. 70%의 폐 기능을 잃어 제대로 걷지 못하는 형률이를 어릴 때부터 많이 업고 다녔습니다. 형률이가 가는 곳이면 무거운 서류 든 가방을 들고 어디든지 함께 다녔지요. 목숨을 걸고 형률이가 운동한 것은 형 률이만을 위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원폭후유증으로 아프지만 아프다고 말하지 못하며 고통스럽게 살아가고 있는 원폭피해자2세 환우들과 가족들, 1세를 포함한 전체 원폭 피해자들을 위해 아픈 몸을 이끌고 호소하러 다녔습니다. 2005년 1월에 한국정부가 공식문서를 공개한 것 중에서 한국인 원폭피해자 구호 1974 를 보면 한국정부는 1974년 이미 원폭2세 자녀까지 공식적으로 파악하고 있었고, 당시 보건사회부는 원폭피해자 1세, 2세에 대한 정부 방침도 표명하고 있습니다. 특수 치료가 필요하고 유전성이 있어 피폭자들의 후손에 대한 건강관리도 우려된다고 정부 의 공식입장도 가지고 있었지요. 치료와 재활을 위해 400병상 규모의 국립원폭전문병 원도 설립할 계획도 세웠고 생계비 부담을 덜기 위해 자활의 길도 터줘야 한다고 인 식해서 의료원호와 생활원호 를 실시하겠다는 정부입장이 있었지만, 그 이후 한국정 부는 실행하지 않았습니다. 이것은 명백한 인간다운 삶을 보장하도록 규정한 헌법정 신을 외면한 국가의 직무유기이고, 지난 30년 동안 다양한 질병과 장애를 가진 원폭 피해자 2세 환우들을 방치한 채 죽음으로 내몬 국가권력의 폭력이며 인권침해입니다. 69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원폭 2,3세들은 아무 일도 못하고 매일같이 자신을 원망하 고 삶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형률이가 늘 말했듯이 한 미 일정부는 원폭2세환우들에 대한 선지원 후규명 으로 생존권과 생명권을 보장해야 합니다. 형률이의 삶은 살아있는 2세환우를 통해 계속되 어야 합니다. 형률이는 이 세상을 떠났지만 이제 저는 이 땅의 모든 2세환우의 아버 지입니다. 저는 형률이의 뜻을 이어받아 아들의 죽임이 헛되지 않도록 원폭피해자 2 세 환우들의 가족들과도 연대해서 특별법 제정운동 등 원폭피해자 2세 환우문제 해결 을 위해 끝까지 싸울 것입니다.
증언4 원폭의 상처와 후유증은 대물림되어 원폭2세환우의 몫으로 남았다 한정순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장 1945년 8월 6일과 9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이 떨어져 수많은 사람이 희 생되었던 그 날 이후 태평양 전쟁은 끝이 났다고 모두 믿고 있지만, 그날의 참혹하고 잔인함은 아직도 끝나지 않고 있습니다. 대물림으로 인해 영원히 아물지 않는 상처와 후유증은 고스란히 우리 원폭2세환우들의 몫으로 남아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68년이 지나 69년째 접어들었지만, 아직도 숙제로 남아 해결 대책은커녕 관심도 주 지 않고 어두컴컴한 터널 안에서 허덕이다 제대로 인정조차 받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 하는 실정에 놓여있는 환우들을 생각할 때면 눈물이 납니다. 원폭2세환우들의 눈물 없이는 차마 볼 수 없는 삶이 우리 눈앞에 펼쳐져 있지만 외 면당하고 있습니다. 부모님이 피폭지에 계셨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평생을 햇빛 한 번 제대로 보지 못하고 죽음을 맞이하고 있습니다. 지금 환우회원들은 죽을 만큼 고통스러워도 마음 놓고 병원도 갈 수 없습니다. 환 우회원들의 사연 몇 가지를 소개해드리고자 합니다. 엄마가 미안해... 중환자실에서 마지막 생을 마감하면서도 호흡곤란으로 나오지 않는 목소리 대신 죽 을힘을 다해 힘이 다 빠진 손가락으로 베개에 글로 내가 이렇게 죽고 나면 병원비는 어떻게 감당해 라고 겨우 몇 자 적고는 스르르 숨져가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기만 해 야 했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는 엄마가 미안해... 이제는 아프지 않은 세상에서 하고 싶은 것 다 해 보거라. 날개를 달아서 넓고 넓은 세상을 마음껏 보려무나. 수십 년 동안 아 픔을 혼자서 이겨내고 산소호흡기에 의존하면서도 어린 딸 앞에서는 강한 모습, 강한 엄마로 보이기 위해 노력하더니 이렇게 허무하게 가버리느냐... 사랑하는 내 딸아. 다음에 다시 태어나면 핵의 피해자 자녀가 아닌 행복한 가정의 자녀로 태어나 고통 없고 아픔 없는 세상을 마음껏 누리면서 살려무나. 이 엄마는 고통스러워하는 네 앞에서 아무것도 해줄 수 없고 그저 네 손만 꼭 잡아 주는 것밖에 할 수가 없어 너무나 미안해. 마음 놓고 눈물도 흘려보지 못했는데 이제 가슴에 맺힌 한을 풀어내듯이 엉엉 소리 내어 울어보련다.
하지만 고통스러워했던 너의 모습을 생각하니 가슴이 미어지고 송곳으로 찌르는 듯한 아픔이 더해지는구나. 그래도 다행인 건 영원히 너를 잊지 않게 손녀를 선물로 주고 가니, 그 손녀에 너에게 못했던 것 내가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잘 키워줄게. 그동안 엄마를 많이 원망했겠지만, 새처럼 훨훨 날아 잘 가거라. 내 딸 사랑해. 살아서 한 번 해보지 못했던 말을 너를 보내면서 해보는구나. 영원한 이별이 이렇게 아픈 것인지 몰랐다. 이름도 고통도 모두 내려놓고 편히 가거라 가족들에게 자신의 짐을 넘겨줄 수밖에 없었던 아빠 간경화 폐암으로 젊은 나이에 수십 차례 피를 토하며 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가 조금 진정되면 병원비 부담으로 퇴원해야 했던 원폭2세환우도 있었다. 늙으신 부모님과 어린 자식들 앞에서 힘없이 늘어져 누워있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돌아 누워보지만, 현실은 그를 더 비참하게 만들었다. 못난 모습만은 보여줄 수 없어 다시 한 번 더 용기와 힘을 내보지만, 그 자리에 주 저앉고 마는 처절함. 아이들이 아빠를 바라보며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이 험한 세 상을 살아가기 위해서는 열심히 사는 아빠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은데 그 기회마저 빼 앗아간 질병이 원망스럽다. 내가 세상을 떠나고 나면 과연 저 어린아이들의 마음엔 아빠의 모습이 어떻게 남 아있을까? 걱정이다. 아이들과 함께 한 번도 여행을 가보지 못한 게 너무나 미안하다. 부모님께는 자식 의 도리를, 아이들에게는 아빠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이렇게 짐이 되어버린 자신을 비난하면서, 또 한 번 피를 토하고, 비참하고 못난 모습만 남겨놓은 채 어머님 죄송 합니다. 아들아 미안해 라는 말도 끝을 내지 못한 채 생을 마감했다. 위암으로 세상을 원망하며 어떻게든 살아보려고 몸부림치다 끝내 안타까움만 남겨 놓고 자신의 모든 짐을 내려놓고 남은 가족들에게 자신의 짐을 어깨에 넘겨주며 미안 하다는 한마디 남긴 채 나머지 짐을 지고 떠났다. 세상의 빛은 나의 것이 아니었다. 태어나면서부터 뇌성마비 장애로 태어나 세상이 어떤지도 모르고, 캄캄한 방안에서 창문 틈 사이로 새어 들어오는 약간의 빛만 잠깐 볼 뿐 얼굴에 티 하나 없이 곱고 작 은 천사 같은 한 여인이 있다. 봄이면 파릇파릇한 새싹들이 싹트고, 여름이 오면 예쁜 꽃도 피우고 나뭇잎이 쑥쑥 자라 힘껏 뽐내며, 가을이면 울긋불긋 단풍이 들고 떨어지면 그 정체를 허물게 하고 겨울이면 세찬 바람과 눈보라에 파묻혀 형체만 남아 무슨 나무였는지 꽃이었는지 모 른 앙상함만이 남았다가 또다시 봄이 오기를 기다리는 한 포기 풀잎이 어떻게 생명을 유지하며, 살았다가 사라지는지 보지 못한 채 그녀는 자기 자신이 어떤 모습으로 무 엇을 기다리며 왜 아파야 하며 왜 사는지 모른다. 대소변을 어머님이 갈아주면 그 손길이 따뜻한지도 느끼지 못한 채 그 세월이 얼마
나 흘렀는지조차 헤아리지 못한지 40년이 넘었다. 자기만을 바라보며 고통스러워하는 엄마의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엄마는 그 자식의 자리가 혹시나 불편하지 않을까, 먹여주는 밥이 맛이 어떤지 걱정이셨다. 다른 자식에게 해가 될까 봐 살얼음판을 걷 는 심정으로 눈치를 보며 돌봐야 했던 처지였다. 하지만 제대로 삶과 세상을 느끼지 도 못하고 이 세상을 떠난 작은 천사 같은 딸이 남기고 간 빈자리를 볼 때마다 더 잘 해주지 못한 것이 가슴을 도려내는 듯한 아픔만 남기고 떠나버린 딸이 야속하기만 하 다. 결국, 두 아들의 손을 놓아야 했던 엄마 3남 1녀를 중 정신지체 장애를 가지고 태어난 두 아들의 손을 끝내 놓아야 했던 엄 마도 있다. 건강한 아들과 딸, 그리고 장애를 가진 두 아들. 이 두 아들을 엄마는 늘 곁에서 잠시도 떼어놓지 않고 양쪽 손에 꼭 붙잡고 다녔 다. 엄마가 이 세상을 떠나면 장애인인 두 아들은 어떻게 될까, 누가 돌봐줄 것인가 한 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으셨다. 내가 오래 살던지 아니면 두 아들이 먼저 가든지 해야 할 텐데 라고 입버릇처럼 말하고 다니셨지만, 엄마의 바람은 하나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엄마는 두 아들 때문에 자신의 몸을 돌볼 겨를도 없으셨다. 우연히 보건소에서 건 강검진에서 자궁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다. 세상은 왜 이렇게 고통만 더해주는 걸까. 그 래도 말기 암이 아니었다는 것을 다행스럽게 생각하며, 제대로 항암치료만 받으면 완 쾌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셨다. 하지만 엄마의 몸은 너무 허약해 항암치료를 견디기 힘드셨다. 기적은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니었기에 엄마는 결국 치료를 포기했고, 이제 는 모든 걸 다 내려놓고 가야 할 때가 온 것 같다고 하시면서 두 손에 쥐었던 아들의 손을 놓고 가셨다. 제대로 눈은 감으셨을까... 엄마가 그토록 걱정하시던 상황이 현실이 되어버린 모습에 안타까움이 그지없다. 제대로 돌봐주는 사람도 없고 한 번씩 방문해보면 너무나 처절해 눈물과 한숨만 나올 뿐 그 어떤 것도 해줄 수 없는 형편이다. 밥솥에 밥은 며칠이 되었는지 흰 쌀밥이 아 주 노란색으로 변해있거나 아니면 설익은 밥알이 그대로이고, 도저히 사람이 먹고사 는 것이라고 볼 수가 없을 정도다. 이게 우리 환우들의 현실이라고 다시 한 번 생각하게 한다. 원폭의 후유증이 빼앗아 간 나의 삶 대구에 사시는 A씨의 엄마는 피폭 당시 나가사키에 사셨다고 한다. 다른 가족들과 는 한국으로 돌아와 뿔뿔이 흩어져 엄마 혼자 남겨졌는데 그때 나이도 어려서 살아가 기가 너무 힘들어 여기저기 남의집살이를 하다 식당일을 하게 되셨다. 그곳에서 A씨
의 아빠를 만나 생활을 하게 되었는데, 알고 보니 유부남에 본처와 10남매나 되는 자 녀가 있는 사람이었다. 그때 이미 엄마는 A씨를 임신해있었는데 아빠가 돌아가시자 엄마와 A씨는 그곳에서 생활할 수가 없게 되었다. A씨는 엄마와 함께 수많은 고생을 하면서 살아왔다. 하지만 A씨는 사교성이 많아 친구들도 많았고, 운동도 무척 좋아해 태권도나 유도 부에 가입해 활동할 만큼 학교생활에 잘 적응해나갔다. 성적도 남들보다 뛰어나지는 않았지만, 친구들과 잘 어울렸는데 고등학교까지 졸업하고 형편이 어려워 대학진학은 하지 못하고 취업을 했다. 처음 취업한 곳은 인쇄소였는데, 30대 초반부터 근육이 조금씩 마비되는 증상이 있 었다. 이상하다, 왜 이러지. 라는 생각을 하면서 병원을 찾았는데 몸에는 아무 이상도 나타나지 않았다. 직장 생활을 하느라 운동을 소홀히 해서 그런가 보다 생각했고, 병 원에서도 이상이 없다는데 일시적으로 생긴 현상이라고만 생각했다. 시간이 점점 흐 를수록 혀까지 굳어졌고, 말을 하면 부정확해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들을 수가 없을 정도가 되었다. 그렇게 시간은 흘러가고 자꾸만 팔과 다리에 힘이 빠져나가 직장생활 을 더 할 수 없었다. 서울에 있는 큰 병원을 찾아가 원인을 발견하면 치료할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안고 서울에 있는 세브란스 병원을 찾아갔지만, 그 병원에서도 병명을 알 수 없었다. 치료 방법이 없느냐고 물어보는 말에 의사는 원인을 알 수 없어서 치 료를 할 수 없다는 답변을 했다. 그 이후 얼마 되지 않아 엄마마저 돌아가시고 혼자서 생활하기가 막막해졌고, 어떻 게 살아가야 할지 모른 채 몸은 망가져 가고 힘이 없어 걷는 것조차도 힘들어졌다. 결국, 노숙생활을 하면서 정부에서 지원해주는 장애수당으로 살아가려고 했지만, 그마 저도 다른 노숙자들이 다 빼앗아 가버려 쓸 돈이 하나도 없었다. 거리 생활을 한 지 몇 년인지도 모르게 하다 보니 흙먼지로 인해 잦은 폐렴으로 고생했지만, 병원도 갈 수 없었다. 속 시원히 펑펑 울고 싶지만, 숨이 막히고, 눈물이 나지 않았다. 세상을 원 망한들 소용없고 이제는 일어서서 걷는 것조차도 할 수 없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막막하기만 했다. 원폭의 후유증이 이렇게 무서운지 정말 몰랐다. 시각, 청각 장애를 가진 원폭2세환우 아버지가 한밤중에 주무시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가 강제 노동으로 일하다가 피폭까 지 당하셨는데 해방이 되면서 고향으로 돌아오기 위해 안간힘을 쓰다 겨우 돌아오셨 다. 화상을 입은 얼굴과 목, 팔은 정말 두 눈 뜨고 볼 수가 없을 정도로 심했다. 어려 웠던 생활은 더 어려워지고 어머니 혼자 생계를 책임지셔야 했다. 아버지의 병원비도 만만치 않았고, 아버지가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까 일을 거들어드리려 하면 마을 사람 들이 한센병 환자 취급을 하며 옆에 오는 것조차 꺼렸다. 슬하에는 3남매를 두었는데 첫째, 둘째 아들 막내가 딸이었다. 맏아들은 태어날 때는 건강하게 태어나 별 문제 없이 자라 학교도 다니고 세상도
잘 보고 다녔는데 성장을 하면서 자꾸 물체가 조금씩 흐려지고 잘 보이지 않았다. 아 버지가 고생하시다가 돌아가셨는데 이미 가정형편이 무척 좋지 않았다. 맏아들이 차 츰 앞을 보지 못하게 되더니 20대 후반에는 영영 앞을 볼 수가 없게 되고 청각장애까 지 가지게 되어도 형편이 너무 어려워 먹고 살기조차도 힘들어 병원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뿐만 아니라 둘째 남동생마저도 지금 시각을 잃어가고 있지만, 고령이신 어머니 는 알츠하이머 증상까지 가지고 있어 지금은 전문요양병원에 입원 중이고, 두 형제의 생활은 말이 필요 없을 정도로 안타깝다. 한 서린 세상살이 언제 끝이 날꼬.. 우리 한국 원폭2세환우의 현황은 이게 다가 아니다. 5남매 중 3남매가 정신질환으로 고생하고 있다. 1남 4녀를 두셨는데 첫째 딸과 둘 째 아들, 셋째 딸 3명이 태어날 때는 아주 건강하게 태어났는데 성장을 하면서 이상 한 행동을 했다고 한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직장 생활도 하던 아주 활발한 숙녀였는데, 사고로 다친 것도 아니고 특별한 이유 없이 일을 잘하다가도 멍하니 앉아있는 횟수가 늘어나 회사를 그 만뒀다. 집에 있으면서 병원을 찾아가 검사를 받아봤지만 뚜렷한 병명이 나타나지 않 고 점점 심해져 임시 처방으로 신경안정제로 겨우 살아가고 있다. 제대로 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여동생마저 같은 증상이 나타났다. 첫째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하고, 항 상 안절부절못하더니 환청까지 들리고 혼자서 알아듣지 못하는 말을 마구하고, 화를 내다가 뭔가를 쫓는 소리처럼 헉, 훅 같은 소리를 지르다가 막 웃기도 했다. 그에 비하면 동생은 항상 낮이나 밤이나 항상 한쪽 구석에 앉아 있다가 그 자리 그대로 누 워서 자고 대소변을 볼 때면 시골이다 보니 그냥 아무 곳에나 볼일을 보고 뒤처리도 하지 않고 그냥 들어가니 어머니가 따라다니며 보살펴줘야 한다. 어머니는 대체 언제 끝이 날지 막막하기만 하고, 어려운 형편에 생계와 두 딸과 아 들의 병원비, 약값까지 부담스럽다. 다행이라고 해야 하는지 모르겠지만 두 딸은 건강 에 문제가 없고 결혼 생활도 잘하고 있지만, 혹시나 아픈 두 언니와 오빠 때문에 억 울한 고통을 겪을까 봐 걱정이다. 나 정말 힘들다고 말 한마디 못한 채 차곡차곡 가슴에 담아두고 오늘이 가면 또 내 일은 어떨까, 늘 자식들 걱정이 줄어들기는커녕 늘어만 가고 몸은 안 아픈 곳이 없고 허리 한 번 제대로 펴보지 못하고 사시다 보니 이제는 좋은 것도 싫은 것도 없다. 이제는 모두 다 끝내고 싶다. 내 가슴에 멍이 들어 성한 곳이 없고, 이 설움을 어 디다가 원망하고 풀어낼지.. 아무도 없는 곳에서 소리 내면서 엉엉 한번 원 없이 울고 싶다. 저것들 두고 나만 죽으려니 불쌍한 내 새끼 누가 거둬주겠나.. 그래서 쥐도 새도 모 르게 한꺼번에 다 죽어버리고 싶다 고 말만 되풀이해보지만 나 혼자 넋두리일 뿐 해 가 뜨면 일터로 가야 한다.
원폭이 나를 이렇게 힘들게 하고, 하늘에다 원망할꼬 땅에다 원망할꼬.. 이내 신세 한탄하고 원망한들 가슴만 답답하다. 울고 또 울어 봐도 멍하니 바라보고 애미 심정 을 알 리 없는 저 자식들 다 소용없고 부질없는 일인 줄 알면서도 내 가슴 내가 치며 뜯어봐도 한이 풀리지 않네. 한 서린 세상살이 언제 끝이 날꼬, 이 세상에 태어나 누구한테도 나쁜 짓 한 것 없 고 나쁜 말 한 적도 없는데, 이 팔자 이리 못 나 서럽고 분해서 못 살겠다. 이렇게 울부짖는 소리를 들으면 우리가 해드릴 수 있는 것이 없어서 어머님 그만 하세요, 기운 빠져요. 하며 같이 부둥켜안고 별 도움이 되지 않는 위로 한마디 할 뿐 할 말을 잃어버린다. 그 외 피부병으로 머리카락부터 눈썹 온몸 전체에 털이 전혀 나지 않고 겨울에는 조금 덜하다가 봄부터 여름, 가을은 늘 뾰루지 습진으로 진물이 나고 가려움증으로 고생하는 환우도 있다. 2세대에는 아무 증세가 나타나지 않다가 3세대에서 다운증후군 증세가 나타나기도 한다. 또, 관절이 녹아내려 수차례 인공관절 수술을 되풀이하면서 아들(3세)이 뇌성마비로 태어난 환우도 있다. 아들이 32살이 되었지만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다. 팔, 다리, 온몸이 뒤틀어져 나무토막이 굳어버린 아들의 몸을 구석구석 만져보지만, 손끝이 닿는 데로 엄마의 가슴 역시 구석구석 굳어버리고 만다. 우리 한국원폭2세환우의 현실은 글로써 다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이제라도 우리 정부에서 보듬어주고 제대로 된 실태조사라도 해서 마음 놓 고 병원비 걱정 없이 진료받고 살아갈 수 있도록 해줘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배운 것도 가진 것도, 건강하지 않은 형편에 어떻게 해야 할지 난감했습니다. 그러나 저보다 더 건강문제, 가정형편 문제를 고민하는 원폭피해자분들과 지적 장애 를 가진 원폭2세 자녀를 둔 부모님들을 생각하면 그만둘 수 없습니다. 그래서 아픈 다리를 끌고 원폭2세환우회 회장이 되어 활동하고 있습니다. 우리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아픈 마음을 쓰다듬어 주면서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지친 몸과 마음을 서로 위로하며 활동하고 있습니다. 원폭 후유증으로 인해 아픈 몸 때문에 마음의 문을 닫고 계시는 분들의 이야기를 듣고, 우리의 아픈 사연을 들려주 기도 하면서 여기저기 돌아다녔습니다. 그러다 보니 환우의 아픔이 내 아픔이기도 합 니다. 한국원폭2세환우들은 일본 제국주의의 침략전쟁과 대량 살인 무기인 핵무기를 투하 한 미국정부에 의한 전쟁범죄의 피해자입니다. 인간으로 태어나 인간답게 살고 싶은
것은 누구나 가지는 작은 희망입니다. 한국원폭2세환우의 문제는 개인의 문제가 아닙 니다. 우리 원폭2세환우들은 핵폭탄 투하는 다시는 일어나서는 안 되는 인류에 대한 범죄라는 것을 증언하는 증언자입니다. 히로시마 원폭투하 이후 68년이 지났습니다. 수십 년의 세월이 흐르는 동안 핵의 피해자는 지금도 늘고 있습니다. 핵으로 인해 피해자가 된 한국원폭2세환우회는 대책 마련이 시급합니다. 하루속히 특별법을 제정하여 제대로 치료받고 함께 웃으며 함께 살아갈 수 있도록 힘써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핵 없고 평화로운 세상을 만들어 아이들이 활짝 웃을 수 있는 세상을 물려줄 수 있 는 그 날을 위하여.
보고 한국 원폭피해자의 피해 실태와 해결과제 전은옥 원폭피해자및자녀를위한특별법추진연대회의 1. 한국인의 원자폭탄 피해 배경과 그 실태 1) 원자폭탄 피해자 규모 [표_1] 원자폭탄 피해 개요 1) 구분 히로시마시 나가사키시 원폭투하 폭발시간 1945년 8월 6일 오전 8시 15분 1945년 8월 9일 오전 11시 2분 투하 원폭(이름) 우라늄형 원폭(리틀보이) 플루토늄형 원폭(팻맨) 방출 에너지 사망자수 (1945년 12월말까지, 50% 폭풍, 35% 열선, 5% 순간방사선, 10% 잔류방사능 약 14만 명(±1만 명) 약 7만 4천 명 - 피폭시 시내 소재자 추청 - 피폭시 시내 소재자 추정 패전후 첫 국세조사) 약 35만 명 2) 약 27만 명 사망률 0.5km 이내: 96.5% 1km 이내: 88.4% 0.5-1.0km: 83.0% 1.0-1.5km: 51.5% 1.0-1.5km: 51.6% 1.5-2.0km: 28.4% 1.5-2.0km: 21.9% 2.0-3.0km: 8.5% 2.0-3.0km: 7.6% 3.0-4.0km: 1.9% 3.0-4.0km: 3.6% 건물피해 피폭당시의 건물 전체 수 피폭당시의 건물 전체 수 약 76,000채 약 51,000채 전부 소실( ) 63%(47804채) 23%(11,577채) 전부 파괴( ) 5%(3,800채) 2%(1,326채) 반파 반소 대파 24%(18,240채) 11%(5,508채) 피해 건물 합계 92%(69,844채) 36%(18,411채) 1) 学 国 ミュージアム 斎 郎, ヒロシマ ナガサキ,, 2007. 広 会, 広 の,, 1979. 広 会, ヒロシマ ナガサキ,, 2005. 2) 히로시마 나가사키에서의 총 피폭자 수는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던 당시 히로시마시와 나가사키시에 있었던 사람 들만을 추산한 것이다. 따라서 여기에는 원폭 투하 후 구호와 사체처리를 위해서, 혹은 가족과 친인척을 찾기 위 해 조기에 시내로 진입하여 잔류방사능에 피폭된 사람이나 임산부의 뱃속에서 피폭된 태아의 숫자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또 전시 재해로 인한 많은 자료의 소실을 비롯해, 인구는 하루에도 1시간 사이에도 수없이 이동하며 시외에서 시내로 통근하거나 유입되는 사람도 많고, 공식 자료에는 반영되지 않고 시내에 소재했던 사람(군 관계 자 포함) 등 원폭의 폭발 시점에 정확히 시내에 있었던 인원을 파악하는 일의 어려움 때문에 자료마다 편차가 있 어 왔다. 국내뿐 아니라, 일본에서도 자주 인용되는 피폭자 통계로는 아래와 같은 통계도 있다. 히로시마 총 피폭 자 수가 히로시마시의 자료에서보다 높게 책정된 것은 군 관계자 숫자 9만 명을 반영한 결과라 한다.
일제강점기말(제2차세계대전 말기 아시아태평양전쟁의 말기이기도 함)이던 1945년 8월 6일 미국은 일본 히로시마에 인류 역사상 최초의 핵무기 원자폭탄을 투하했다. 그리고 사흘 뒤인 8월 9일, 두 번째 원자폭탄을 나가사키에 투하했다. 히로시마와 나 가사키 상공 약 600m에서 폭발한 원자폭탄은 섭씨 수백만 도의 열기를 내뿜으며 그 에너지의 50%는 폭풍, 35%는 열선, 15%는 방사선으로 지상의 살아있는 모든 것을 휩 쓸었고 단 한 발의 원자폭탄에 의해 전 도시는 순식간에 폐허와 죽음의 땅으로 변해 버렸다. 식량 배급을 받기 위해 줄을 서 있던 엄마들, 엄마 젖을 빨며 쌔근쌔근 잠자던 아 기들, 공장에서 일하고 있던 노동자들과 근로정신대 및 동원 학도들, 포로수용소에 있 던 연합군 포로들, 환자를 치료하던 의사와 연일 계속되는 공습으로 학교에 갈 수 없 어 동네에서 공부하던 학생들, 그리고 식민지에서 강제동원된 조선인과 중국인 노동 자 포로들의 머리 위로로 '가해자와 피해자', '아군과 적국', '군인과 민간인'을 구별하 지 않는 비인도적 대상 살상 전쟁범죄무기인 원자폭탄이 겨누어졌다. [표_2] 당시 조선인의 원폭 피해 상황 3) 총 피해자 사망자 생존자 귀국자 잔류(재일동포) 히로시마 50,000 30,000 20,000 15,000 5,000 나가사키 20,000 10,000 10,000 8,000 2,000 합계 70,000 40,000 30,000 23,000 7,000 2) 한국인(및 조선인)의 원자폭탄 피해의 배경 당시 일본 히로시마, 나가사키에 투하된 원자폭탄으로 인해 조선인의 피해가 컸던 까닭은 일본 제국주의의 식민지배라는 역사적 배경과 깊은 관련이 있다. 한일강제병 합이 체결되기 전에도 일본에 거주하는 조선인은 있었지만, 그 수는 790명에 불과했 다. 그러나 10년이 지난 1920년에는 3만여 명으로 늘었고, 1930년에는 29만여 명으로 증가했으며, 1938년 일제의 국가총동원법 공포 이래 폭발적으로 급증하기 시작해 피폭지 전 체 한 국 인 피폭자 사망자 피폭자 사망자 생존자 귀국자 일본체류 히로시마 420,000 159,283 50,000 30,000 20,000 15,000 5,000 나가사키 271,500 73,884 20,000 10,000 10,000 8,000 2,000 계 691,500 233,167 70,000 40,000 30,000 23,000 7,000 ( 島, と, 会, 1975;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한국 피폭자의 현황, 1985; 이치바 준코, 한국의 히로시마 에서 재인용.) 3) 이 통계는 추정치이지만 당시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시 소재의 조선인 인구와 강제동원노무자와 일반 거주자의 취업과 거주 현황, 폭심지로부터의 거리별 사망률을 비롯한 수많은 연구자료를 비교 분석해 볼 때 근거있는 통계 로 보인다. 참고: 勲, 国,, 1975,, と, 会, 1981,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한국피폭자의 현황, 1985.
1940년에는 119만 444명을 넘어섰다. 전쟁이 격화된 1944년 12월 말에는 거의 200만 명에 육박(내무성경보국, 1945.)했으므로, 원자폭탄이 투하될 당시와 일본 패전 무렵에 는 200만 명이 넘는 재일조선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조선인의 도일시기는 1920년부터 1937년 사이 와 1938년 이후 로 크게 나눌 수 있 다. 앞 시기, 특히 1920년대에는 토지조사사업과 산미증산계획이라는 명목 하에 시행 된 농촌 지역에서의 식민지적 재편성으로 인해 조선 농촌사회의 수탈과 파괴가 극심 했고, 이에 생계기반을 잃은 농민이 생계를 위해 국외로 흘러들어 가는 경우가 많았 다. 삼남지역의 대홍수와 가뭄(1920년, 1933년)이 맞물리면서 이런 상황을 더욱 촉발시 켰다. 이 시기 이미 히로시마는 군사도시로서 번영하고 있던 시기라서 군사관계시설 의 증설이나 군수산업으로서의 중공업 발전, 큰 공장에서의 무 기생산도 시작했다. 도로와 수도 확장, 댐과 발전소 건설, 하천 보수와 해안 매립 공사 등으로 일본인에 비해 값싼 조선인 노 동력이 대거 필요했고 그만큼 히로시마로 가면 일자리가 많아 히로시마로 이주하는 조선인도 함께 늘기 시작했다. 1931년 만 주사변을 기점으로 일본의 침략 전쟁(아시아태평양전쟁) 확대에 맞추어 군사도시 히로시마는 더 욱 번창했고 조선인 노동력을 더욱 필요로 했다. 그러나 1938 년 이후에는 그 앞 시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조선인의 히로시마로의 이주가 폭증했다. 1938년은 국가총동원법이 공포된 해이다. 그리고 39년부터 본격적으로 모 집-관 알선- 강제동원 의 단계로 조선인 노무자 강제동원을 노골화했다. 특히 1944년 9 월 이후에는 총독부가 발행한 징용 영장 하나로 조선인 강제연행이 대대적으로 전개 된다.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희생자등지원위원회의 히로시마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 피해 진상조사보고서 4) 에 따르면, 일제강점기를 통틀어 가장 많은 조선인이 건너 간 일본 지역은 오사카, 도쿄, 요코하마 등 취업에 유리한 대도시였으나, 1938년(국가 총동원법 공포)부터 유독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로 유입된 조선인이 급격하게 증가했다. 특히 히로시마는 1923년 이후 1차 급증 시기가 있었으나 나가사키는 1938년 이전에는 조선인 인구가 전국적으로도 최하위인 도시였다. 히로시마 나가사키로 조선인 인구 4) 대일항쟁기강제동원피해조사및희생자등지원위원회, 히로시마 나가사키 조선인 원폭피해에 대한 진상조사-강제 동원된 조선인 노무자를 중심으로, 2010.12.
가 집중적으로 이입된 1938년 이후라는 시점은 일제의 전시기 강제동원과 겹치는 시 기이다. 즉, 1920-30년대의 식민지 수탈로 인한 생계형 이주자(이 역시 일본의 불법적 식민지배에서 비롯된 결과) 및 그 가족과 더불어, 1930년대 후반부터 강제동원 등으로 일본에 끌려갔다가 원폭에 희생된 조선인이 많다는 의미이다. [표_3] 히로시마 나가사키현 거주 조선인 인구 추이(1935-1945) 5) 1935 1936 1937 1938 1939 1940 1941 1942 1943 1944 1945 히로시마현 17,385 19,491 19,525 24,878 30,864 38,221 48,746 53,951 68,274 81,863 84,886 나가사키현 7,229 7,046 7,625 8,852 11,343 18,144 22,408 34,515 47,415 59,573 61,773 조선인 원폭피해자의 출신지 등을 추적해보면, 히로시마의 경우 일찍이 농촌 피폐 화로 인해 생계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일본으로 건너간 일반이주자가 많았던 경남 합 천 6) 을 비롯해 경성부, 경기도 출신 조선인들이 강제동원으로 대량 유입되었다. 나가사 키의 경우는 전체 피폭자 2만 명 중 절반이 강제동원이었고 그중 충남, 전남지역을 비롯하여 전국적으로 동원됐는데 특히 이북출신의 강제동원 노무 피폭자가 많았다(대 일항쟁기강제동원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위원회, 2010). 결국, 일본제국주의의 아시아와 태평양지역에 대한 침략과 전쟁, 식민지배 등 불법 적인 침략행위가 이른 최종도달점에서 미국은 원자폭탄을 사용했고, 거기서 조선인은 침략자도 가해자도 아닌 피식민지 백성으로서 일본에 떠밀려 갔다가 원자폭탄 피해까 지 입게 되는 희생을 당하게 된 것이다. 즉, 조선인 원폭피해자는 일본 제국주의의 침 략과 식민지 지배, 민족수탈과 차별의 피해자이면서, 강제동원 피해자이고, 또한 (식민 지 종주국이자 침략자였던 일본이 일으킨 전쟁 때문에, 전쟁의 당사자도 아니면서) 원 자폭탄의 피해까지 입게 된 가장 극단적인 피해자인 것이다. 3) 원자폭탄 피해의 양상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상공 약 600m에서 폭발한 원자폭탄은 온도 섭씨 수백만 도, 5), 内 による, 経 済 と 経 済 学, 学, 1981. 대일항쟁기강제동원조사및국외강제동원희생자등지원회, 전게서 참조하여 작성함. 김기진 전갑생, 원자폭탄, 1945년 히로시마 2013년 합천, 선인, 2013. 6) 현재 대한적십자사에 등록, 한국원폭피해자협회의 회원인 원폭피해자들 중에는 경남 합천 출신이 절반을 넘는데, 이는 합천지역에서 히로시마로 많이 갔음을 의미함과 동시에, 해방 후 조국으로 생환했을 때 지연 혈연 등 친 인척 연줄망을 통하여 다른 지역출신의 피폭자에 비해 협회 가입이나 피해자보상문제, 일본의 원호법과 피폭자 지원제도 등에 관한 정보를 접할 기회가 훨씬 많았고 그것이 회원가입률 및 신고등록율을 높였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이에 관해서는 오은정의 2013년 박사학위논문을 참고할 수 있다. 이에 비해 나가사키로 단신 강제동원되었 던 피폭자는 생환했더라도 한반도의 전역으로 뿔불이 흩어져 원폭피해자 보상이나 원호 문제에 대한 정보 자체 를 모르거나, 본인이 원폭피해자라는 인식 자체를 거의 안 하거나, 괜히 가족에게 피해가 갈까봐 스스로 신고등 록을 꺼렸을 수도 있으며, 미디어를 통해 이미지화된 원폭피해자의 모습은 화상과 극심한 외상을 입은 모습 일색 이라서 그 정도의 피해가 아니라면 다른 질환이 있더라도 원폭과의 상관성을 의식하지 않은 채 살아왔을 가능성 도 높아, 이런 복합적 이유들이 특히 나가사키 원폭피해자의 신고접수 및 등록률 저하의 원인이 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물론 당시 사망자도 많았기 때문에 사망자 중에는 다양한 지역별 분포의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많았을 가능성도 생각해볼 수 있다.
압력 수십만 기압의 불의 고리를 형성했고, 그 에너지의 50%가 폭풍으로, 35%가 열선 으로, 15%가 방사선(그중 5%가 순간방사선, 10%가 잔류방사능)이 되어 지상을 덮쳤 다. 그리고 지상에서는 1 강력한 폭풍에 의해 각종 구조물이 파괴되고 동식물과 사 람도 깔려 죽거나 중경상을 입었고, 2 강력한 열선에 의해 광범위한 지역에 화재가 발생하여 구조물이 불타고, 동식물과 인체는 극심한 화상을 입었으며, 3 순간방사선 혹은 잔류방사능에 의해 사람을 비롯한 모든 생물의 세포파괴와 더불어 급성 혹은 뒤 늦게 나타나는 만발성 건강 피해가 계속 발생했다. 대략적인 피해의 양상은 아래와 같이 정리할 수 있다. 열선과 폭풍, 화재에 의한 피해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는 원자폭탄에서 방출된 열선에 의해 폭심지 부근 지표면 의 온도는 무려 섭씨 3,000도~4,000도에 달했다. 원자폭탄이 폭발하면서 발생한 충격 파는 고밀도와 고온도가 되어 상공의 공기를 폭풍으로 바꾸었다. 이 고온의 열선과 강렬한 폭풍에 의해 폭심지로부터 반경 1km 이내의 구역에서는 대부분 사람이 순간적으로 발생한 열선에 타죽거나 폭풍으로 압사했다. 그리고 히로 시마에서는 폭심지로부터 약 3.5km, 나가사키에서는 4km 이내에 있었던 사람의 경우 노출부위에 화상을 입었고, 폭심지로부터 4km 떨어진 지점에서도 폭풍에 의해 구조물 이 반파되거나 많은 사람이 폭풍에 날려가거나 비산물(깨어지고 부서져 폭풍에 날아 와 사람 몸에 박힌 유리파편이나 나뭇조각, 못을 비롯한 각종 비산물은 그 자체로도 엄청난 흉기가 되었다) 등에 의해서도 부상을 당했다. 또 화재로 인해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히로시마 나가사키의 사망자 중 약 60%, 전체 사상자의 약 65%가 열선 과 화재에 의한 화상이 원인이었다고 추정되고 있다. 방사선에 의한 피해 눈에 보이는 피해와 더불어 인체에 심각한 피해를 준 것은 핵폭발 때 방사된 순간 방사선과 잔류방사능(순간방사능이 지상에 쏟아져 내리는 과정에서 다양한 물질과 접 촉하면서 유도된 방사능이나, 죽음의 재 라고 불리는 방사성핵분열생성물)에 의한 피 해이다. 이는 인류역사상 초유의 경험이었다. 방사선은 인체에 강한 침투성을 가지며 조직 세포에까지 근원적인 장애를 일으킨다 고 알려졌는데, 피폭자가 살아있는 내내 건강 파괴가 진행되기 때문에, 피폭 직후에는 아무런 외상이나 증세도 없었던 사람 중에서도 5년, 10년 혹은 30~40년 뒤에 잠복한 건강피해가 발현되기도 하여 그 심각성이 위중하다. 피폭 직후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급성방사선피폭 증상이라면, 뒤늦게 나타나는 것을 지연성 혹은 만발성 장애라고 한 다. 그리고 그 방사선 피폭에 따른 건강피해는 피폭방사선량이 높을수록 심각해진다. 방사선 영향은 먼저 피폭 직후부터 약 4개월 사이에 고열 구토 출혈 백혈구 감 소 피부출혈반점 식욕부진 설사 탈모 두통 극도의 권태감과 무기력증 등 여러 가지 급성증상으로 나타났다. 다량의 방사선에 노출된 사람은 대부분 이 시기에 사망
했다. 급성증상을 이겨내고 살아남은 피폭자도 그 후 켈로이드(열선에 화상을 입은 피부 가 융기되어 열상반흔 피부종양이 됨) 백내장 백혈병 빈혈 등의 혈액질환과 암, 각 종 장기질환, 정신신경장애, 무기력증후군 등 실로 다양한 만발성 장애가 일반인보다 도 높은 확률로 발병했다. 당시 피폭지에서 직접 피폭을 당하지 않은 사람도 나중에 가족과 친척을 찾기 위해 피폭지로 조기에 들어가거나, 죽음의 재 를 머금은 방사성 비를 맞는 등 다양한 경로로 피폭을 당했으며, 음식물 오염에 따른 내부피폭도 당연 히 있었을 것으로 예상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외상없이도 갑자기 발병하여 사망하는 피폭자들의 사례가 일본에서는 다수 보고되었고 언론에도 보도되었다. 다만 외부피폭 에 비하여 내부피폭에 대한 연구와 조사는 일절 되지 않아 이에 따른 피해는 파악하 기가 어렵다. 원자폭탄 피해의 특성 이처럼 원자폭탄 투하에 의한 피해는 1 기습순간성-단 1발의 원자폭탄이 상공에 서 폭발한 순간, 광범한 지역에 걸쳐 엄청난 파괴력이 발생하고, 2 무차별전면성- 광 범한 지역에서 생물 및 환경의 전면파괴가 일어나고, 비전투원 전투원을 불문하고 무차별적으로 학살하며, 3 종합성- 피해자의 건강 생활 정신에 걸쳐 종합적 피해를 주며, 4 지속성- 방사능의 피해는 살아있는 내내 지속된다 라는 특수성이 있다. 이 때문에 원자폭탄은 국제법에서 그 무차별성과 잔혹성을 이유로 사용이 금지된 독가스 이상으로 비인도적인 무기라고 할 수 있다. 7) 더욱 심각한 문제: 세대를 넘어 미치는 악영향 방사선 피폭의 유전적 영향으로 인한 직접적인 건강상의 피해에 국한되지 않고, 피 폭자인 부모의 질환과 정신적 후유증(트라우마), 그리고 이러한 상황에 따른 사회적 기회 차단과 빈곤, 사회적 소외 고립감 등의 상황까지 후세대로 대물림되어 간접적 인 신체 정신적 피해와 더불어 사회경제적으로 열악한 조건 하의 삶이 이어지고 있 다. 원자폭탄의 피해가 과거의 역사가 아닌 현재진행형의 인권과 생명의 문제인 것은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건강피해 이외의 다양한 피해 - 원자폭탄이 투하된 지역의 사회기반과 공동체 파괴. - 가족의 몰살 또는 가족의 붕괴, 결손, 빈곤. (원폭 고아, 가장의 죽음으로 인한 빈곤 등 포함) - 심리적 피해: 외상후스트레스증후군(트라우마)을 비롯하여 건강영향에 대한 불안 과 고통이 동반하는 심리적 고통 및 차별과 멸시에 따른 정신적 피해와 사회적 소외 및 고립감. 7) 이치바 준코, 전게서.
- 사회경제적 피해: 원폭의 피해로 인한 노동능력 쇠퇴나 상실 빈곤 질병 예방 및 발병 시 치료의 어려움 건강 악화 빈곤 가족 전체와 자녀세대로까지 가 난과 불충분한 교육기회 등으로 인한 사회적 기회 차단의 대물림. - 사회적 차별과 편견, 원폭 피해에 대한 인식 부족으로 인한 2차적 피해. 4) 원폭피해자의 범주 1 일본 정부의 피폭자 원호법 에 따른 피폭자 정의 종류 내용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히로시마 혹은 나가사키의 구역 내 혹은 1. 직접피폭자 정부 시행령이 정한 이 두 도시의 인접구역 내에 있어 직접 원자폭 탄에 피폭된 사람. 원자폭탄이 투하되고 나서 2주 이내에 폭심지에서 2km 구역 내에 2. 입시( )자 들어간 사람. 원자폭탄이 투하되었을 때 또는 그 후에 원자폭탄 방사능의 영향을 3. 시체처리 및 구조에 받을만한 사정 하에 있었던 사람. 예를 들어서 구호, 시체처리, 장 출동한 사람 애물(차폐물)이 없는 해상에서 피폭된 사람. 상기 1~3에 해당하는 사람이 피폭되었을 당시 태아였던 사람. (히 4. 태아 로시마는 1946년 5월 31일 이전 출생자, 나가사키는 1946년 6월 3 일 이전 출생자) 위에 해당하는 자에게 일본 후생성이 피폭자건강수첩 (일종의 피폭자증명서)을 발 급하며, 이 수첩을 취득한 자만이 공식적인 피폭자로서 각종 원호를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피폭자이지만 그 사실을 증명하지 못해 일본정부(한국인 입장에 서는 가해책임측)가 발급하는 피폭자건강수첩 을 취득하지 못한 사람은 피폭자 로 인 정받지 못한다. 또 일본정부가 정한 피폭자 의 범주 또는 지원적용대상 또한 획일적 인 기준에 의해 배제된 사람이 발생하기 마련이어서 실제로 가장 피해를 입은 사람이 오히려 더 원호를 받지 못하는 경우도 생긴다는 지적이 있다. 2 원폭피해자의 범주의 확장된 해석 일본정부가 법적으로 인정한 피폭자이자, 당시 직접적인 원폭에 피폭된 사람이라는 의미의 피폭자 라는 단어보다, 한국사회에서 주로 사용되는 원폭피해자 라는 단어는 실제로는 주로 일본의 피폭자와 같은 뜻으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지만, 단어 그 자체 가 가진 의미는 원폭의 피해를 입은 사람들을 보다 포괄적으로 담고 있다. 참고로 원 폭투하국인 미국에서는 원폭생존자 라는 말을 주로 사용한다. 원폭피해자는 일본에서
법률로써 정한 피폭자 의 기준과는 달리, 아래와 같이 확장될 수 있다. - 직접 피폭자: 원폭 투하 당시 폭심지 근처에서 직접 피폭을 당한 사람과 원폭투하 직후 잔류방사능이 있는 폭심지 근처로 접근하여 피폭당한 사람, 피해 지역에서의 구 조와 사체처리작업 종사자 및 피폭자의 태아로서 피폭된 태내피폭자 모두 직접피폭자 로 볼 수 있다. 다만, 일본에서는 구호 및 사체처리작업을 위해서 또는 친인척이나 아 는 사람을 찾아 원폭 폭발 이후 조기에 인근 지역에 진입해 피폭된 사람의 경우는 입시( )피폭자 라는 용어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러나 어떠한 경우에도 방사능의 영 향을 직접적으로 받을 만한 사정 하에 있었던 피폭자라 할 수 있다. - 피폭2세 3세 환우 등: 피폭자의 자녀로 태어난 2세 가운데 일부 후손에게 건강피 해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부모의 원폭방사선 피폭과의 관련성을 의심할 수 있다. 의학적으로 완전히 해명되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것은 의학의 한계일 뿐이며, 의학과 과학이 실재하는 피해를 모두 잡아내지 못하므로 피폭자의 후손 중 건강피해를 겪는 일부 후세대 피해자( 2세 환우 등 후세대 원폭피해 환우)도 원폭피해자 로 마땅히 인 정되어야 한다. - 검은비 피폭자, 원거리 피폭자, 내부피폭자, 피폭체험자 등(2차 피폭자): 주로 일본에 서 사용되는 용어들인데 이들은 일본 피폭자 원호법의 지원대상 즉 피폭자건강수첩 교부대상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원폭 투하 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광범위한 지역 에 방사능을 머금은 검은 비 가 내렸으며 이 검은 비를 맞거나 그 비를 맞은 음식물 을 섭취한 사람은 피폭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 또한, 일본정부가 정한 원폭투하 당 시 5km 이내 소재, 원폭 직후 2km 이내 접근자 등이라는 기준에 부합되지 않는 원거 리에서도 핫스팟 이 존재하여 피폭선량이 높았던 사람이 있을 수 있다. 이는 현재 후 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후에도 후쿠시마에서 멀리 떨어진 도쿄와 수도권 인근에서 오 히려 더 높은 방사선량이 측정되는 핫스팟 이 여러 곳에서 발견되는 상황에 비춰볼 때도 충분히 예상 가능하다. 또한, 오염된 음식물의 장기간 섭취에 따른 내부피폭 문 제는 원폭 투하 직후부터 거의 연구 조사되지 않아 피폭자의 건강영향 연구 자료에서 도 내부피폭에 대한 고려는 완전히 배제되고 있다. - 피해자 가족(또는 유족): 원폭 방사선 피폭과는 무관한 사람들이지만, 가족의 피폭으 로 인해 사회경제적, 정서적으로 피해를 입게 된 그 가족이나 유족도 원자폭탄에 따 른 간접적인 피해자로 볼 수 있다. 2. 한국 원폭피해자 현황 - 국내외 연구 자료에 따르면, 1945년 원폭으로 피해를 입은 당시 '조선인'은 약 7만여 8) 검은비가 내린 것으로 정부가 추정한 지역은 건강진단특례구역으로 설정하여 무료건강진단을 지원하는 제도는 있으나, 이 구역 지정에 대한 논란도 많으며 검은비 피폭자 모두를 포괄하지 못하는 실정이다. 또 일반피폭자들 이 많은 종합적인 무료의료지원과 종합적 생활 복지 지원은 받지 못한다.
명(히로시마 5만, 나가사키 2만, 추정치)이며, 이중 히로시마에서 약 3만 명, 나가사키 에서 1만 명 총 4만 명이 원자폭탄에 희생(사망)되었다. 생존자 중 2만 3천여 명이 한 반도의 남쪽으로 귀국하였다고 보고되고 있으며, 대략 2,000명 정도는 북녘으로 간 것 으로 알려졌다. 9) - 2013년 12월 31일 현재 <한국원폭피해자협회>에 등록된 회원 수는 2,605명이지만, 실제로는 자신이 피폭자인 줄도 의식하지 못한 채 살다가 사망한 피폭자도 있으며, 여전히 협회에 가입하지 않았거나 가입하지 못한 미등록 생존자도 있을 것으로 추정 된다. - 북측의 원폭피해자 1세는 2,000명 가까이 되며, 그중 380여 명이 생존해 있다고 추 정된다. 10) 그러나 일본과 국교가 없어 북측의 원폭피해자 1세는 일본정부로부터 어떠 한 보상과 인도주의적 차원의 의료지원조차 받고 있지 못한 상황이다. - 원폭피해자 2세의 경우, 7500-1만여 명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나 정확한 실태를 파악 하기 쉽지가 않다. 이중 <한국원폭2세환우회> 회원으로 등록된 전국 회원 수가 현재 1,300명을 넘는다. <한국보건사회연구원>이 실시한 한국원폭피해자 실태조사(1991년) 에서는 국내에 원폭 후유증을 가진 2세 자녀의 숫자가 약 2,300여 명이 있다고 확인 된 바 있으며, 원폭피해자 1세의 31%, 2세의 28%가 자신의 건강은 물론이고 출산과 자녀 건강에 대한 불안감을 상당히 갖고 있다고 답변했다. 지난 2013년 경상남도가 실시한 도내 원폭피해자(1,2,3세) 실태조사에서는 응답자의 20.2%가 자녀의 선천성 장 애나 유전적 질환을 경험한 바 있다고 답변하기도 했다. 이뿐 아니라, 원폭피해자 1, 2세 피해자의 증언 속에서 3세대에 대한 질병과 후유증 사례도 종종 보고되고 있다는 점에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 [표 3] 한국원폭피해자협회 회원 현황(2013년 12월 31일 현재) 지역별 서울중앙지부 대구경북지부 합천지부 부산지부 경남지부 합계 등록회원수 (생존자) 595 463 613 692 242 2,605 9) 2000년 북한의 '조선피폭자실무대표단 이 방일하여, 북한에는 1,301명의 피폭자가 밝혀져 있고 당시 평 균연령은 72세라고 발표한 바 있다. 북한에서는 앞서 1995년에 반핵평화를 위한 조선피폭자협회 가 설립되어 이듬해 96년에 이 협회에 의한 피폭자실태조사가 이루어져 먼저 475명의 피폭자 존재가 드 러났고, 뒤이은 조사 등에서 1,301명까지 드러난 것으로 보인다.(참고: 이치바 준코, 2003.) 10) 2007년 12월말 기준, <조선피폭자협회>의 실태조사(2006년 12월~2007년 12월)에 따르면, 당시 재북한 피폭자 수는 1911명에 달하는데, 이중 80%인 1,529명이 이미 사망하고 생존자는 382명이라고 밝힌 바 있다. 북한의 과학원이 피폭자 200명을 대상으로 한 질병조사에서 순환기 (40.6 %), 뇌신경 (34.4 %), 소 화기 장애 (30.5 %), 감각 기관 ( 30.5 %), 말초 신경 (21.7 %), 호흡기 (16.5 %), 피부 질환 (9.1 %), 암 (7.8 %), 타 박상 화상 (6.6 %), 조혈기 (4.6 %), 내분비 (3.3 %) 질환이 있다는 조사결과도 소개된 바 있다. (출처: 원수폭금지일본국민회의 http://www.gensuikin.org/gnskn_nws/0808_1.htm)
[표 4] 한국 원폭피해자의 거주 지역별 분포(2013년 2월 28일 대한적십자사 등록 기 준) 서울 부산 대구 인천 광주 대전 울산 강원 경기 경상 합천 충청 제주 계 260 597 371 45 10 30 37 17 201 545 456 41 9 2,650 3. 한국인 원폭피해자 1세와 2세의 기초현황 및 건강실태 11) 국가인권위원회의 의뢰에 따라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가 2004년 8월부터 12월까지 실시한 원폭피해자 1세와 2세의 기초현황과 건강실태조사에 따른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원폭피해자 1세, 2세를 대상으로 한 건강 관련 우편설문조사(1세 1,256명, 2세 1,226명), 일부 피해자들에 대한 건강진단(1세 223명, 2세 49명) 및 심층인터뷰(2세 47 명) 실시. "원폭1세, 일반인보다 우울증 93배, 조혈계통 암 70배 더 많이 발병" "원폭2세 사망자 중 10세 미만이 52.2%, 과반수가 원인불명 미상" 원폭피해자 1세의 건강실태 우울증(93배), 백혈병이나 골수종과 같은 림프, 조혈계통의 암(70배), 빈혈(52배), 정신 분열증(36배), 갑상선질환(21배), 심근경색이나 협심증(19배), 위 십이지장궤양(13배), 천 식(9.5배), 자궁암(8.7배), 위암(4.5배), 뇌졸중(3.5배), 당뇨병(3.2배), 고혈압(3.1배) 등 원폭피해자 2세의 건강실태 - (1092 피폭자 가구 자녀 4,080명 기준) 원폭피해자 2세 중 7.3%인 299명이 사망, 사 망 시 연령은 10세 미만(52.2%). 사망원인 불명 또는 미상(60.9%), 감염성 질환(9.4%, 사고사 8.0%). - 빈혈 88배, 심근경색 협심증 89배, 우울증 71배, 유방양성종양 64배, 천식 23배, 정신 분열증 18배, 위 십이지장 궤양 16배, 간암 13배, 백혈병 13배, 갑상선 질환 10배, 위암 6.1배, 뇌졸중 4.0배, 당뇨병 4.0배, 고혈압 3.5배. - 원폭피해자 2세 중 부모의 피폭 사실이 드러날 경우 사회적 편견에 따른 차별과 불 이익, 결혼에 어려움을 겪을까 우려하여 자신이 원폭피해자 2세라는 것을 숨기는 경 11) 국가인권위원회, 원폭피해자 2세의 기초현황 및 건강실태조사, 2004. 경상남도(경남발전연구원), 경상남도 원자폭탄피해자 실태조사, 2013.
우도 많다. - 원폭피해자 1세도, 2세 모두 일반 국민에 비해 상대적으로 건강상태가 열악하며, 사 회적으로 소외된 삶을 살아가고 있다. 그 밖에도, 2013년 경상남도에서 실시한 실태조사(경남 도내 거주 원폭피해자 중 1 세 666명, 2세 339명, 3세 120명, 총 1,125명이 응답) 결과, 답변자 중 20.2%가 자녀의 선천성 기형 또는 유전성 질환이 있다고 답변했으며, 원폭피해자로서 가장 어려운 점 으로서 출산 및 자녀 건강 등 유전적인 불안감을 꼽았다. 또 2010년 장애인 등록률 전국 5.0%(경남 5.8%) 대비 경남 원폭피해자 조사 참가자의 약 10%가 장애인 등록증 을 소지하고 있다고 응답(1세 12.8%, 2세 9.1%, 3세 3.3%)해 원폭피해자 1, 2세의 장애 발현 위험이 클 가능성에 주의한 면밀한 의학적 조사와 대책도 필요하다는 사실이 드 러났다. 그러나 연구수행기관인 경남발전연구원에서는 이마저도 원폭피해자(1세)의 90% 이상이 이미 사망했거나 질병을 이미 치료한 경우도 많은데다, 2세 등 후손은 적 극적인 조사 참여와 사회적 노출을 꺼리므로 이번 조사에 참여한 집단이 전체 피폭자 중 상대적으로 신체적, 정신적으로 건강한 집단일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있어 실제 피해자들의 상황은 더 열악할 수도 있다는 점을 시사한 바 있다. 한편 뒤늦게나마(1990년대 이후 단계적으로) 불충분할지언정 한일정부(주로 일본정 부의 재외피폭자지원대책사업에 따른 비용 지원)로부터 의료지원과 건강관리수당을 받고 있는 1세에 비해, 2세는 체계적인 지원정책은커녕 기초적인 의료지원조차 전혀 없으며, 피해자로서 인정도 받고 있지 못해 인권과 복지의 사각지대에 놓여 있다. 이 에 따라 앞의 경남 실태조사에서 1세와 2세 모두 건강검진 및 의료비 지원 확대를 최 우선적으로 필요한 보건의료 복지서비스로 꼽았다. 4. 일본과 한국의 원폭피해자 지원제도 경과 및 현황 1) 일본정부의 원폭피해자 지원제도 1 1945년 패전 직후~1957년까지 패전 후 일본에서는 연합군의 공습으로 인해 죽거나 다친 사람들은 전시재해보호 법 에 따라 구급 구호를 받았다.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서 원자폭탄의 피해를 입은 부 상자들도 이 법에 따라 설치된 임시구호소에서 치료를 받았다. 그러나 같은 법의 규 정에 따라 재해 후 60일인 10월 5일과 9일을 기해 구호소가 폐쇄되면서 이후의 치료 와 구호는 개인들의 몫이 되어 버렸다. 일본에서 전쟁피해자에 대한 보상과 원호 문제가 대두된 것은 패전 후부터 GHQ(연 합군최고사령부, 그러나 실권은 미군이 가지고 있었음)의 점령을 받게 되었으나, 1951
년 전후처리를 위한 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이 체결(발효는 1952년 4월 28일)되고 미군 정 시기가 끝나면서, 전후처리와 관련된 문제들이 정치상의 과제로 떠올랐다. 그러나 이때도 일본정부의 전후보상과 원호법은 일본국과 고용관계를 맺어 공무 중에 피해를 입은 군인, 군속, 준군 속의 희생자만이 대상이 되었다. 즉, 민간인은 제외되었으며 원 폭피해자도 다른 민간인 전쟁희생자와 마찬가지로 국가보상과 원호의 대상에서 제외 되었다. 그러나 1954년 태평양 비키니 섬에서 미군이 실시한 수소폭탄 실험으로 피난 권고구역 밖에서 조업 중이던 일본의 참치어선 제5후쿠류마루 호가 피폭되는 사건을 계기로 인해 방사선 피폭의 심각성에 온 사회가 주목하게 되었고, 일본 내에서 국민 적인 원수폭금지서명운동과 반핵운동이 전개되고, 원폭피해자단체가 속속 결성됨에 따라 히로시마, 나가사키 원폭피해자의 처지와 구호 문제, 방사선 피폭의 특수성은 여 타의 전쟁피해와는 다르다는 여론이 형성됨에 따라 원폭피해자 지원을 위한 법 제정 이 사회 정치상의 중요한 과제도 대두되었다. 여기에 히로시마, 나가사키 지자체가 적 극적으로 피폭자 원호를 위한 법률 제정을 진정하고 촉구하는 활동에 나서면서 1957 년 원폭의료법이 제정되기에 이른다. 2 일본의 원폭3법 -. 1957년 3월 31일 원자폭탄 피폭자의 의료 등에 관한 법률(이하, 원폭의료법) 제정(4 월 1일부터 시행). 피폭자로 인정받은 사람에게 피폭자건강수첩 교부. 그 소지자에 대 한 건강진단 및 원폭 방사능에 기인하는 질병과 장애가 있다고 인정되는 경우 국가 예산으로 의료비 전액 지원. -. 1968년 5월 20일,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특별조치에 관한 법률(이하, 원폭특별조 치법) 제정(9월 1일부터 시행). 특별수당, 건강관리수당, 간호수당, 의료수당 등 각 수 당이 제도화됨. 단, 각 수당지급의 소득제한 설치(이후에 법 개정 통해 소득제한 규정 철폐). -. 1994년 11월 9일, 원자폭탄 피폭자에 대한 원호에 관한 법률(피폭자원호법) 제정. 기본적으로 지원 뿐 아니라 보상 과 국가책임 의 의미가 담긴 원호법 이라는 법명칭. 전문에 국가책임 이라는 단어 명시. 기존의 두 법을 포괄하여 피폭자 의료비 전액지 원과 각종 수당 지급 및 보건복지적 서비스와 상담, 평화기념 및 연구조사사업 실시 에 관하여 종합적이고 포괄적인 내용의 법을 체계화. - 일본정부의 2012년도 피폭자 대책 예산은 총 1,478억 엔(1조 7,178억 원)으로, 약 17 만 9천 명이 혜택을 받고 있다. 전체 예산 중 의료비(의료비 410억, 건강진단 27억 5,680만 엔)가 약 437억 7천만 엔, 각종 수당이 929억 엔 가량 된다. 그밖에 보건복지 시설 운영비, 조사연구 및 노인보건사업 추진비 등 각종 보조금도 책정되어 있다. 12)
지원제도의 상세한 항목은 아래와 같다. - 피폭자건강수첩 발행 및 건강진단 - 건강관리: 매년 건강진단 실시하고 기록 작성 및 보존, 피폭자 건강 지도 등. - 의료비(진찰, 약제 또는 치료 재료 지급, 의학적 처치, 수술, 시술과 기타 치료, 재택 요양과 간병, 의료기관 입원 및 요양에 수반되는 간병 등 비용, 이송비) 무료. - 수당 지급(2013년도): 의료특별수당(135,540엔/월), 특별수당(50,050엔/월), 원자폭탄 소두증(46,650엔/월), 건강관리수당(33,330엔/월), 보건수당(16,720엔/월) 중 요건에 따 라 1개 수당 지급, 개호수당(중증 월 104,290엔/중간 월 69,520엔 이내), 또는 가족개 호수당(21,270엔/월), 장례비(201,000엔) 13) - 복지: 상담사업, 주택 생활 지원사업, 양호사업 - 조사 및 연구사업: 원폭 방사능 영향 조사 연구 법인 및 평화기념사업 3 원폭피해자 2세에 관한 지원제도 - 매년 무료건강검진 실시 및 지자체 차원의 피폭2세 의료지원과 건강관리 일본의 피폭자원호법(1994년 11월 성립) 의 국회 부대결의를 통해 피폭자와 그 자 녀 및 손자에 대한 영향에 대한 조사, 연구 및 그 대책에 대해 충분히 배려해, 2세의 건강진단에 대해서는 계속해 시행함과 동시에, 피폭2세가 처한 상황을 이해하여 한층 충실화를 꾀한다"고 결의했다. 그러나 아직 법 조항으로서 2,3세에 대한 원호법 적용 이 제도화되지는 못한 실정이다. 단, 정부(후생노동성) 방침에 따라, 1979년부터 지자체별로 매년 피폭2세에 대해 연 1회-연 4회 무료건강검진을 하고 있다. (2012년 원폭피폭대책 예산 1,487억 1억 7천 만 엔이 피폭2세 건강검진 예산이다. 일본의 피폭2세 2만 명을 기준으로 한 예산이 다.) 또, 도쿄도, 사이타마현, 가나가와현, 시즈오카현, 오사카부의 일부 시와 야마구치현 등에서는 피폭2세에게 건강관리수첩이나 건강진단수진증을 발급하고 있으며, 이중 도 쿄도와 가나가와현, 오사카부 셋츠시는 지자체 차원에서 피폭2세를 위한 의료비를 지 원하고 있다. 히로시마현과 나가사키현에서는 지자체가 아닌 피폭자 2세단체에서 2세 건강관리표를 발행하고 그 배부과정을 지자체가 지원하는 형태(민관 협력)로 운영하고 있기도 하다. 12) 후생노동성 홈페이지, 원폭피폭자대책예산의 연도별 추이 13) 일본 후생노동성 2013년도 원자폭탄 피폭자 대책 참고
이와 관련해, 일본에서도 피폭자원호법에 2세도 적용대상으로 성문화할 것을 요구 하는 운동이 계속되고 있다. 참고로 일본에서는 피폭자원호법에 제1호~4호까지의 피 폭자가 있으며 제3호피폭자 에 대한 설명에서 방사능의 영향을 받을만한 사정 하에 있던 자 라는 법해석이 있는 가운데, 피폭2세는 바로에 방사능의 영향을 받을만한 사 정하에 있던 자 이며, 제5의 피폭자 라고 호소하고 있다. 2) 한국의 원폭피해자 지원 제도 1945년 원폭의 피해를 입고 고국으로 귀환한 이래 1981년 도일치료 지원사업 개시 까지,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의료 생활 복지상의 어떠한 지원정책도 전혀 없었 다.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본국으로 귀국한 이래 조국의 정치 경제적인 불안정과 궁핍, 한국전쟁의 전화( ) 속에서 가난과 질병에 시달려야 했고, 1965년 한일기본조 약과 청구권협정이 체결되기까지 한일회담에서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가 다뤄져 잘 해 결되기를 기대하였으나 한일협정에서 원폭피해자 문제는 완전히 배제되었다. 경제협 력자금으로 한국정부가 받아온 청구권자금 역시 군인, 군속, 노무자로 강제징용 당한 사람 중 1945년 8월 15일 이전에 사망한 사람에만 적용되어 그 유족에게 위로금 차원 의 30만 원씩을 한 번 지급하는 것으로 정부는 일제강점기하 모든 피해보상 문제를 종결지어 버렸다. 이에 따라, 1967년 한국인 원폭피해자들은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이후, 한국원폭 피해자협회로 개칭) 를 결성하여 한국정부를 상대로 국내입법을 비롯한 원폭피해자 원 호대책을 촉구했고, 일본과 미국을 상대로도 배상과 지원 등을 촉구하는 활동을 전개 한다. 또 원폭피해자 개개인들의 진정과 탄원, 일본정부로의 밀항을 통한 원폭후유증 치료 요구와 대일소송투쟁 등이 이어지게 된다. 1972년 손진두 씨의 피폭자건강수첩 재판 14) 을 시작으로,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한 국 원폭피해자들의 지난한 재판투쟁의 막이 올랐고, 1978년 손진두 재판은 결국 최종 심에서 승소판결을 얻게 된다. 손진두 씨는 피폭자건강수첩을 취득하지만, 이 수첩을 가지고 있더라도 일본에 거주하는 동안만 효력이 있기 때문에 한국으로 돌아오면 다 시 아무런 지원도 치료도 받을 수 없는 상황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손진두 재판이 계 기가 되어 그 과정에서 (대단히 지지부진하고 성과도 별로 없었으나) 한일정부 사이에 수차례 한국인 원폭피해자 문제 해결과 대책 마련을 위한 협의가 진행(비밀 해제된 한국원폭피해자 구호 외교문서, 1968~1980년도 분까지 참조할 수 있음) 되었으며, 한국원폭피해자의 도일치료 지원을 실시키로 한일 양국 간에 합의가 이뤄짐에 따라 1981년부터 86년까지 총 354명이 일본에 가서 치료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이는 피폭 자 중 일부에 불과했고, 한 번의 도일치료가 끝나면 환자의 사후관리나 재도일 지원 은 없었다. 비용은 도항비를 비롯한 여비는 한국정부가 부담하고 일본정부는 오직 일 14) 일본의 원폭의료법과 특별조치법 등 원폭2법은 일본에 있는 피폭자에게만 적용되었고, 한국의 원폭피해자들에 게는 적용되지 않았다. 그래서 당시 한국인에게는 (일본정부가 피폭자 로 인정했다는 인정피폭자 증명서 역할을 하는) 피폭자건강수첩도 발급해주지 않았고 의료지원 등은 당연히 없었다.
본에서의 의료비에만 국한해서 비용을 부담하였으며 한국정부는 기한이 만료됨에 따 라 피해자들의 연장 요구와 재치료를 위한 재방문 기회 요구 등을 모두 거절하고 1986년에 이를 중단하게 된다. 이 시기 국내에서의 원폭피해자에 대한 의료 구호의 공백은 1973년 일본시민단체의 지원으로 건립된 합천진료소와 1977~88년 한국교회여 성연합회의 지원과 요청에 따른 서울세브란스병원, 연세의료원, 경희의료원에서 국내 치료 지원이라는 민간 차원의 노력이 전부였고, 이마저도 원폭피해자의 현실적인 치 료에는 대단히 불충분하고 한계가 많았다. 그러다가 1986년 10월부터 한국정부 지원 하에 전국의 열군데 적십자병원과 고신의 료원을 지정병원으로 하여 국내 원폭피해자 치료를 개시한다. 또 1989년부터 전 국민 의료보험제도가 시작되면서 한국정부가 피폭자의 의료비의 본인부담금 중 절반을 지 원키로 했는데, 얼마 되지 않아 일본정부에서 재한피폭자대책 예산으로 2년 동안 각 각 4천2백만 엔씩, 총 8천4백만 엔을 대한적십자사에 송금함으로써 나머지 환자가 부 담해야 할 금액도 이 예산으로 무료화 할 수 있게 된다. 같은 해 한국정부는 원폭피 해자 건강진단도 실시했다. 이듬해 노태우 당시 대통령이 방일시 한일정상회담에서 일본이 인도주의적 차원 의 재한원폭피해자 의료지원기금 40억 엔을 거출한다는 한일 양국 간의 합의가 이뤄져 이후 재한원폭피해자복지기금으로서 사용되게 되었다. 이 기금은 91년과 93년 두 번 에 걸쳐 대한적십자사로 송금되었으며, 재한원폭피해자 의료지원과 합천원폭피해자복 지회관 건립기금 등에 쓰인다. 그러나 민주화의 열기와 함께, 87년도부터 일본정부를 대상으로 23억 달러 보상청구 운동 15) 을 해온 피해자들 입장에서는 손해배상청구액 23억 달러의 1%에도 못 미치며, 일본의 1년 피폭자대책예산보다도 한참 모자란 40억 엔 은 한국인 원폭피해자 원호에 쓰이기에는 턱없이 부족한 액수였을 뿐 아니라, 국가 배상이나 책임이 아니라 인도주의적 차원의 원조이므로 피해자 개개인에 대한 현금지 원은 없어야 한다는 단서가 달린 이 기금은 피해자의 명예와 인권을 더욱 짓밟는 성 격의 기금이었고 23억 달러 보상청구운동을 좌절시키는 결과를 낳았다. 그러나 일본에 있는 원폭피해자들이 자국의 피폭자원호법 에 따라 의료비 전액 지 원과 각종 수당 지급, 장례비 지원 등을 받고 있는 것과는 상반되게, 한국의 원폭피해 자들은 일본에 가야만 피폭자건강수첩을 취득할 수 있고, 역시 일본에 가야만 각종 수당 신청을 할 수 있는데 그나마 피폭자건강수첩을 받더라도 일본에서 출국하면 의 료비 지원이나 수당지급 등 일본의 피폭자들이 누리는 각종 지원과 원호대상의 피폭 자 자격을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속지주의적인 일본의 피폭자 원호법 차별을 바로 잡아 일본 피폭자원호법을 통해 의료와 생활원호를 실현하고자 한 한국인 원폭피해자 중 곽귀훈 씨는 1998년 10월 1일 일본정부와 오사카부를 상대로 국외피폭자 자격확인 소송을 제기하여, 2002년 12월 18일 최종 승소하였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한국인 원 폭피해자가 일본법에 따라 일본 피폭자와 거의 동등한 수준의 지원을 받게 되는 길이 15) 피해보상액 23억 달러 산출내역: 1984년도 일본후생성의 일본인 피폭자 1인당 1년 예산액(당시 269,297엔)*한 국인 피폭생환자 23,000명*해방후 42년간*향후 10년치의 추가예산.
점차 열리게 된다. 그 이후로도, 한국인 원폭피해자의 피폭자 인정 관련 재판, 수첩과 관련한 재판, 의료비 차별 철폐 재판 등 다양한 재판이 속속 일본 법정에서 다투어져 한국 원폭피해자들의 권리가 개선되어갔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도 여전히 한국정부는 소극적이며 방관자적, 무책임한 태도로 일관했다. 피해자 개개인이 일본정부와 싸워서 스스로 일본정부의 지원을 받게 되기 까지 방치한 것이다. 지금도 1960년 후반부터 끝없이 요구되어온 국내 원폭피해자 지 원 입법은 실현되고 있지 않으며, 한국정부는 일본과 한일청구권협정을 체결한 장본 인으로서 이 협정으로 인하여 청구권이나 보상 문제는 일괄 타결되었다는 명분을 일 본에 주었음에도 불구하고, 청구권 자금을 받아온 당시에도 원폭피해자에게는 보상금 이나 원호대책을 세우지 않는 한편 일본정부를 향해서도 한국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 에 관하여 적극적인 외교교섭과 제안을 하지 않고 있다. 지금도 외교적 노력 없이 일 본정부가 알아서 책임지도록 방관하고 있다. 이에 관해서는 2011년 헌법재판소가 한 국정부의 이러한 부작위는 위헌이라고 결정 내린 바 있다. 이와 같은 과정은 다음과 같이 요약해볼 수 있다. 즉,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제도는 1945년 이래 철저 한 무관심과 방치, 1980년 이후 일부에 국한된 도일치료와 불충분한 의료지원, 1992년 부터의 재한원폭피해자복지기금(일본 측 40억 엔)을 활용한 원폭피해자 복지사업, 그 리고 2003년 이후 일본의 법과 제도적 틀에서 피폭자원호법 과 재한피폭자지원대책사 업에 따라 한국인 피폭자들이 지원을 받게 되는 흐름으로 전개되어 왔다. 그러나 원폭피해자 중 피폭자(1세) 개개인의 고난의 삶과 투쟁으로 뒤늦게 얻어낸 성과 속에서도, 피폭자의 자녀 중 질병과 가난 속에서 살아가는 원폭2세환우 등에 대 한 보건의료적 경제적 지원과 복지서비스 등은 일절 실시되지 않았다. 이에 따라, 2005년 조승수 국회의원의 대표발의를 시작으로 17대국회부터 18대 국회, 19대 국회 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원폭피해자와 피해자 후손의 진상규명과 지원을 위한 특별 법 안이 제출되고 있으며, 후세대 피해자에 대한 명확한 진상조사와 실태파악, 의료와 생 계 지원 등에 관한 요구가 이어지고 있다. 현재는 정부 차원의 지원은 전혀 없으며, 지자체의 조례가 있으나 아직은 지원 실시단계 에는 이르지 못하고 있는 가운데 민간 차원의 인권 복지사업과 운동이 열악한 조건 속에서 이어지고 있다. [표 5] 한국인 원폭피해자에 대한 지원정책의 경과 연도 주요 내용 한일 양국 정부 차원에서 아무런 지원정책도 없었음. 1945년~ 1965년, 한일기본조약과 청구권협정 체결시 원폭피해자 보상 문제 배제. 실제 청구권협 1981년 이전 정 타결로 일본에서 받아온 경제협력자금에서도 한국정부의 원폭피해자 지원 예산은 일 (무관심 절 없었음. 무대책의 1967년~, 한국원폭피해자원호협회 결성 및 원폭피해자 단체와 개개인의 한국정부 대책 시기) 촉구 및 일본정부에 배상과 치료요구 단계. (한국정부의 일관된 무관심과 무대책으로 인 해) 손진두 피폭자수첩재판 등 한국인 피해자들은 일본정부를 상대로 한 소송을 통하여
일본 법률에 의거해 한국인 피폭자 치료와 원호를 요구하는 운동을 전개할 수밖에 없었 음. 1973년, 경남 합천에 원폭피해자 진료소 설치(일본시민단체의 지원). 1977~88년 한국교회여성연합회 요청으로 연세의료원, 경희의료원에서 국내치료 실시 (민간차원의 구호 노력) 1981 1986 1986 한일간 합의에 따라 피폭자의 도일치료 실시- 일부(총 349명)에 불과. 1986 한국정부 지원하에 국내치료 개시(대한적십자사에 치료비지원사업 위탁 실시). 1987 한국정부 원폭피해자 진료비 지원 시작(본인 10%, 정부90%) 한국에서 원폭피해자 건강진단 실시 원폭피해자 진료비 전액 지원 시작(국민의료보험 제도 실시로, 본인부담금 30% 중 절 1989 반을 한국정부가 지원하다가, 일본정부의 재한피폭자대책 예산 2년분 8천4백만엔 을 재원으로 하여 환자의 자기부담분 전액을 무료화. 일본에서 대한적십자사로 2년간 4천2백만엔씩 송금) 한일 양국간 회담에서 일본정부가 인도주의적 차원 의 재한피폭자 의료지원금(40억엔) 1990 출연하기로 합의. 일본지원금 1차분 17억엔 (1991.11), 2차분 23억엔(1993.2) 도착. 1991 대한적십자사가 일본이 보낸 재한 원폭피해자복지기금관리 위탁, 기금을 토대로 복지사 업 개시. 일본정부지원금 관리운영위원회 구성 및 개최. 1992 원폭피해자 건강진단 실시. 원폭피해자 사망 시에 유족에게 장례비용 지원 시작. 1993 진료보조비(월 10만원) 지원 시작. 1996 10월, 합천 원폭피해자 복지회관(무료생활시설) 개관. 5월 20일, 대구광역시 동구 원폭피해자 지원조례 제정. 12월 18일, 곽귀훈 재외피폭자 자격확인 소송(일본 국외에서는 피폭자원호법 적용이 2002 중지되어, 건강관리수당 지급 중단되는 데 대한 위법성 묻는 재판) 최종 승소. 한국원폭2세환우회 설립. 일본 나가사키현과 대한적십자사 간 재외피폭자 지원사업 계약 체결 수첩 교부 도일 지원, 현지 건강진단과 상담, 도일치료 지원, 의사 등 연수초청, 피폭확인증 교부 등. 2003 원폭2세환우문제해결을위한공동대책위 출범. 정부 차원의 실태조사와 진상규명을 골자 로 한 진정서를 국가인권위원회에 제출. 이후, 원폭피해자와 원폭2세환우 진상규명 및 지원 특별법 제정 운동 등을 전개해 나감. 최계철 재판(건강관리수당의 한국 현지 지급 및 과거 수당 지급, 장례비 지급 요구 등) 제기 및 도중 사망. 나가사키 지방재판소에서 승소. 2004 일본 후생성이 법외 사업인 재외피폭자보건의료조성사업 (재외피폭자의 거주국에서 의 료비를 지원하는 사업) 실시. 8월 4일, 민주노동당 조승수 국회의원 등 23인이 원자폭탄피해자 진상규명 및 지원 등 2005 을 위한 특별법안 을 17대 국회에 발의하였으나 (2008년 5월) 임기만료 폐기됨. (2005년 김근태 전 보건복지부 장관이 합천 방문해 2세 건강검진 약속함에 따라)대한 적십자사가 06년도 원폭피해자복지기금에 2세 검진예산을 편성하여, 원폭피해자 자녀들 2006 을 대상으로 건강검진 실시(9월1일~07년 3월 31일까지, 검진대상자 9,492명 중 2,46 5명 수검.) 한나라당 조진래 국회의원 등 103인이 한국인 원자폭탄 피해자와 그 피해자 자녀의 2008 실태조사 및 지원을 위한 특별법 안 을 18대 국회에 발의하였으나, 임기만료(2012년 5 월) 폐기됨. 2010 경남 합천에 순수민간단체에 의한 원폭2세환우 쉼터 합천평화의집 설립. 2세환우 치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