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키의 생각쓰기 교사용 지침서 34호 원고 <북키의 생각쓰기> 34계단 1. 역사 논술 쓰기 1) 왜 역사 논술 쓰기를 해야 하는가? 역사 논술 쓰기 는 학생들이 역사적 관점을 가지고 자신의 주장을 정리해보는 단계 이다. 학생들이 직접 역사 속의 인물이 되어 생각을 펼쳐감으로써, 역사적 시각을 갖출 수 있다. 그동안 역사 공부에 지루함을 느껴온 학생이 있을 수 있고, 역사 논 술에 대한 개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는 학생도 있을 수 있다. 따라서, 이 수업에 서는 역사적 지식을 가르치는 데 중점을 두지 말고 역사적 사실에 대한 자기 생각 을 써가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역사적 내용을 담아 쓰는 데 신경쓰다보면 자칫 논술의 형식을 지키지 못하는 실수 를 범하기 쉽다. 서론, 본론, 결론의 순서를 지켜 내용을 전개하면서 주장과 근거를 분명히 밝히는 습관을 들이도록 한다. 문학적 내용의 논술에만 익숙해져온 학생들 이 역사 논술을 접하게 되면, 자칫 지나치게 감상적으로 글을 구성하게 될 수도 있 다. 그러므로, 역사 논술을 쓸 때 반드시 역사적 사실을 기준으로 하여 내용을 구성 하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교사는 학생들이 역사적 배경지식을 제대로 갖출 수 있도 록 도와준다. 역사 논술 쓰기의 능력이 갖추어지면, 경제 논술과 시사 논술 등 다른 분야의 논슬 을 쓸 때 훨씬 수월해진다. 또한, 역사적 사실과 인물들에게서 특징을 뽑아 자기의 입장을 적어보는 셈이므로 학생들의 역사적 가치관이 성장하게 된다. 역사 속의 특 징적인 이야기에 흥미를 가질 수 있도록 신경을 쓰면서 지도한다. 2) 이렇게 지도하세요. 3쪽: 생각의 문을 열어라 (무슨 일이 있었나요?) - 6 25전쟁의 원인에 대해 이야기해본다. - 전쟁이 우리 사회에 끼친 영향에 대해 생각해본다. 4쪽-5쪽: 세상에 이런 나라가! - 홍익인간( 弘 益 人 間 ) : 널리 인간세계를 이롭게 한다는 뜻으로, 국조( 國 祖 ) 단군( 檀
君 )의 건국이념이며, 고조선 개국 이래 한국 정교( 政 敎 )의 최고 이념. - 나라를 세운 이유, 나라의 특징, 중요한 헌법 등을 명시함으로써, 나라 세우기 계획표 를 논리적으로 쓸 수 있는 능력을 기른다. - 학생들이 평소 나라에 대하여 갖고 있던 소망을 적용하여 계획표를 작성한다. 6쪽: 옛 사람의 일기 - 순장 : 고대 사회에서 부족장이나 왕이 죽었을 때 그를 따르던 사람들을 매장하 여, 죽어서도 생시와 같이 시중들고 생활하도록 하는 신앙적 의미에서 나온 유풍이 다. - 충성과 효성 사이에서 갈등을 일으키는 사고과정이 필요하다. - 일기 형식으로 자기의 마음을 솔직하게 표현해본다. 7쪽: 임금님 전상서 - 순장의 비합리성에 대해 표현해야 한다. 즉, 지위의 상하에 상관없이 모든 사람 의 생명은 보호받아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가족관계가 파괴되는 등 순장이 낳 고 있는 폐단에 대해 언급한다. - 순장제도를 대체할 수 있는 새로운 제도를 생각하여 제시해본다. 8쪽-9쪽: 계백 장군 만나기 - 계백 : 일찍이 사로( 仕 路 )에 나가 벼슬이 달솔( 達 率 :제2품)에 이르렀다. 당시 신 라가 한강 유역을 강점함으로써 그때까지의 나제동맹( 羅 濟 同 盟 )이 결렬되자 백제는 고구려 일본 등과 친교를 맺고 신라에 대항하였다. 고립상태에 빠진 신라는 당( 唐 ) 나라와 동맹을 맺고 원병을 요청하였다. 당나라 고종( 高 宗 )은 소정방( 蘇 定 方 )을 신 구도 대총관( 神 丘 道 大 摠 管 )으로 임명하여 군사와 함께 바다를 건너 신라를 돕게 하 여, 이른바 나당 연합군의 5만 병력이 백제를 치기 시작하였다. 이 때 백제의 의자왕은 사치와 연악( 宴 樂 )에 파묻혀 충신들의 훌륭한 작전계획도 물리치고 있다가, 사태가 위급해지자 계백을 장군으로 삼아 적을 막도록 하였다. 계 백은 죽기를 각오한 군사 5,000명을 이끌고 출전하면서, 이미 나라를 보전하기 어 렵다는 것을 직감하고 살아서 적의 노비( 奴 婢 )가 됨은 차라리 죽음만 같지 못하다 하여 자기의 처자를 모두 죽여 비장한 결의를 보였다. 황산( 黃 山 )벌에 이르러 세 진 영을 설치하고 군사들에게 맹세하기를 옛날에 구천( 句 踐 )은 5,000명의 군사로써 오( 吳 )나라 70만 대군을 쳐부쉈으니 오늘날 마땅히 각자가 있는 힘을 다하여 최후 의 결판을 내자 하고, 신라의 김유신( 金 庾 信 )이 이끄는 5만의 군사를 맞아 네 차례 나 그들을 격파하였다. 이에 신라군이 사기를 잃고 있을 즈음, 신라의 장군 품일( 品 日 )은 16세의 어린 아 들 관창( 官 昌 )으로 하여금 나가 싸우게 하니, 관창은 백제군과 싸우다가 생포되었 다. 계백은 어린 나이로 용전한 관창을 가상히 여겨 살려보냈으나, 관창은 재차 나 와 싸우다가 또 붙잡혔다. 계백은 신라에 이같이 용감한 소년이 있으니 싸움은 이 미 승부가 난 것이라 예감하였다. 그는 관창의 목을 잘라 그의 말 안장에 묶어 신 라군 진영으로 돌려보냈다. 예상했던 대로 신라군은 관창의 죽음으로 사기가 올라
총공격을 감행하였고 계백은 전사하였다. 부여의 부산서원( 浮 山 書 院 )과 충곡서원( 忠 谷 書 院 )에 배향되었다. 10쪽-11쪽: 정몽주와 이방원 - 이방원 : 태종[ 太 宗, 1367~1422]. 조선 제3대 왕(재위 1400 1418). 자 유덕 ( 遺 德 ). 휘 방원( 芳 遠 ). 태조의 5남. 어머니는 신의왕후( 神 懿 王 后 ) 한씨( 韓 氏 ). 비는 민제( 閔 霽 )의 딸 원경왕후( 元 敬 王 后 ). 1382년(우왕 8) 문과에 급제하여 밀직사대언 ( 密 直 司 代 言 )이 되고, 후에 아버지 이성계( 李 成 桂 ) 휘하에서 신진정객( 新 進 政 客 )들을 포섭하여 구세력의 제거에 큰 역할을 하였다. 1388년 정조사( 正 朝 使 )의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명( 明 )나라에 다녀오고, 1392년(공 양왕 4) 정몽주( 鄭 夢 周 )를 제거하여 이성계를 중심으로 한 신진 세력의 기반을 굳 혔으며, 같은 해 이성계가 조선의 태조로서 등극( 登 極 )하자 정안군( 靖 安 君 )에 봉해 졌다. 태조가 이모제( 異 母 弟 ) 방석( 芳 碩 )을 세자로 책봉하자 이에 불만을 품고 1398년(태조 7) 중신( 重 臣 ) 정도전( 鄭 道 傳 ) 남은( 南 誾 ) 등을 살해하고, 이어 강씨 소생의 방석 방번( 芳 蕃 )을 귀양보내기로 하고, 도중에 죽여 버렸다. 이것을 제1차 왕자의난이라 하며 방원은 이때 세자로 추대되었으나 이를 동복형( 同 腹 兄 )인 방과 ( 芳 果 : 定 宗 )에게 사양하였다. 1400년(정종 2) 넷째 형인 방간( 芳 幹 )이 박포( 朴 苞 )와 공모하여 방원 일당을 제거 하려 하자, 이를 즉시 평정하고 세제( 世 弟 )에 책봉되었다. 방간 박포의 난을 제2차 왕자의 난이라 한다. 제2차 왕자의 난이 평정된 후 정종의 양위( 讓 位 )를 받아 조선 제3대 왕으로 즉위하였다. 즉위하자 사병을 혁파( 革 罷 )하고 1402년(태종 2) 문하부( 門 下 府 )를 폐지하였으며 의정부( 議 政 府 )를 설치하였다. 또 낭사( 郞 舍 )는 사간원( 司 諫 院 )으로 분립시켰으며, 삼사( 三 司 )는 사평부( 司 平 府 )로 개칭하고 삼군도총제부( 三 軍 都 摠 制 府 )를 신설하였으 며, 1405년 1월에는 의정부의 서무( 庶 務 )를 육조( 六 曹 )에서 분장( 分 掌 )하게 하는 등, 관제개혁을 통하여 왕권의 강화를 도모하였다. 한편 억불숭유( 抑 佛 崇 儒 ) 정책을 강화하여 전국의 많은 사찰( 寺 刹 )을 폐쇄한 후, 그 사찰에 소속되었던 토지 노비를 몰수하였으며, 또 비기( 秘 記 ) 도참( 圖 讖 )의 사 상을 엄금하여 미신타파에 힘썼다. 한편 호패법( 號 牌 法 )을 실시하여 양반 관리에서 농민에 이르기까지 국민 모두가 이를 소지하게 함으로써 인적 자원( 人 的 資 源 )을 정 확하게 파악하였으며, 개가( 改 嫁 )한 자의 자손은 등용을 금지하여 적서( 嫡 庶 )의 차 별을 강요하였다. 국방정책으로서 10년 여진족의 일파인 모련위( 毛 憐 衛 ) 파아손( 把 兒 孫 )의 무리를 죽였고, 노략질이 심한 야인( 野 人 :여진인)들을 회유하여 변방의 안정에도 힘을 기울 였다. 또 문화정책으로서 주자소( 鑄 字 所 )를 세워 1403년(태종 3) 동활자( 銅 活 字 )인 계미자( 癸 未 字 )를 만들었으며, 하륜( 河 崙 ) 등에게 동국사략( 東 國 史 略 ) 고려사 ( 高 麗 史 ) 등을 편찬하게 하였다. 경제정책으로서 호포( 戶 布 )를 폐지하여 백성의
부담을 덜어 주었고, 저화( 楮 貨 )를 발행하여 경제유통이 잘 되도록 유의하였다. 1402년(태종 2) 상하 국민의 남소( 濫 訴 ) 월소( 越 訴 )를 엄금하였고, 백성들의 억울 한 사정을 풀어주기 위하여 신문고( 申 聞 鼓 )를 설치하였는데, 그 뜻은 매우 좋은 것 이었으나 뚜렷한 실효는 거두지 못하였다. 고려 말기의 순군제도( 巡 軍 制 度 )를 여러 차례 개편하여 최고의 법사( 法 司 )인 의금부( 義 禁 府 )를 설치하였는데, 이것은 국왕 직속의 근위대( 近 衛 隊 )로서 모역( 謀 逆 )을 방지하는 기관이었다. 1404년 송도( 松 都 )에서 한성( 漢 城 )으로 천도하였으며, 1418년 세자( 世 子 : 世 宗 )에게 선위( 禪 位 )하고 상왕( 上 王 )으로서 국정을 감독하였다. - 정몽주[ 鄭 夢 周, 1337~1392] : 고려 말기의 문신 학자. 본관 영일( 迎 日 ). 자 달가 ( 達 可 ). 호 포은( 圃 隱 ). 초명 몽란( 夢 蘭 ) 몽룡( 夢 龍 ). 시호 문충( 文 忠 ). 영천( 永 川 )에서 태어났다. 1357년(공민왕 6) 감시에 합격하고 1360년 문과에 장원, 예문검열( 藝 文 檢 閱 ) 수찬 위위시승( 衛 尉 寺 丞 )을 지냈으며, 1363년 동북면도지휘사 한방신( 韓 邦 信 ) 의 종사관으로 여진족( 女 眞 族 ) 토벌에 참가하고 1364년 전보도감판관( 典 寶 都 監 判 官 )이 되었다. 이어 전농시승( 典 農 寺 丞 ) 예조정랑 겸 성균박사( 禮 曹 正 郞 兼 成 均 博 士 ) 성균사예( 成 均 司 藝 )를 지냈고, 1371년 태상소경보문각응교 겸 성균직강( 太 常 少 卿 寶 文 閣 應 敎 兼 成 均 直 講 ) 등을 거쳐 성균사성( 成 均 司 成 )에 올랐으며, 이듬해 정사( 正 使 ) 홍사범( 洪 師 範 )의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명( 明 )나라에 다녀왔다. 1376년(우왕 2) 성균대사성( 成 均 大 司 成 )으로 이인임( 李 仁 任 ) 등이 주장하는 배명친원( 排 明 親 元 )의 외교방침을 반대 하다 언양( 彦 陽 )에 유배, 이듬해 풀려나와 사신으로 일본 규슈[ 九 州 ]의 장관에게 왜 구의 단속을 청하여 응낙을 얻고 잡혀간 고려인 수백 명을 귀국시켰다. 1379년 전공판서( 典 工 判 書 ) 진현관제학( 進 賢 館 提 學 ) 예의판서( 禮 儀 判 書 ) 예문관제 학 전법판서 판도판서를 역임, 이듬해 조전원수( 助 戰 元 帥 )가 되어 이성계( 李 成 桂 ) 휘 하에서 왜구토벌에 참가하였다. 1383년 동북면조전원수로서 함경도에 침입한 왜구 를 토벌, 다음해 정당문학( 政 堂 文 學 )에 올라 성절사( 聖 節 使 )로 명나라에 가서 긴장 상태에 있던 대명국교( 對 明 國 交 )를 회복하는 데 공을 세웠다. 1386년 동지공거( 同 知 貢 擧 )가 되고 이듬해 다시 명나라에 다녀온 뒤 수원군( 水 原 君 )에 책록되었다. 1389년(창왕 1) 예문관대제학 문하찬성사가 되어 이성계와 함께 공양왕을 옹립하고, 1390년(공양왕 2) 벽상삼한삼중대광( 壁 上 三 韓 三 重 大 匡 ) 수문하 시중( 守 門 下 侍 中 ) 도평의사사병조상서시판사( 都 評 議 使 司 兵 曹 尙 瑞 寺 判 事 ) 경영전영사 ( 景 靈 殿 領 事 ) 우문관대제학( 右 文 館 大 提 學 ) 익양군충의백( 益 陽 郡 忠 義 伯 )이 되었다. 이 성계의 위망( 威 望 )이 날로 높아지자 그를 추대하려는 음모가 있음을 알고 이성계 일파를 숙청할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1392년 명나라에서 돌아오는 세자를 마중 나갔던 이성계가 사냥하다가 말에서 떨 어져 황주( 黃 州 )에 드러눕자 그 기회에 이성계 일파를 제거하려 했으나 이를 눈치 챈 방원( 芳 遠 : 太 宗 )의 기지로 실패, 이어 정세를 엿보려고 이성계를 찾아보고 귀가
하던 도중 선죽교( 善 竹 矯 )에서 방원의 부하 조영규( 趙 英 珪 ) 등에게 격살되었다. 의창( 義 倉 )을 세워 빈민을 구제하고 유학을 보급하였으며, 성리학에 밝았다. 주 자가례( 朱 子 家 禮 ) 를 따라 사회윤리와 도덕의 합리화를 기하며 개성에 5부 학당 ( 學 堂 )과 지방에 향교를 세워 교육진흥을 꾀하는 한편 대명률( 大 明 律 ) 을 참작, 신율( 新 律 ) 을 간행하여 법질서의 확립을 기하고 외교와 군사면에도 깊이 관여 하여 국운을 바로잡으려 했으나 신흥세력인 이성계 일파의 손에 최후를 맞이하였 다. 시문에도 뛰어나 시조 단심가( 丹 心 歌 ) 외에 많은 한시가 전해지며 서화에도 뛰어났다. 고려 삼은( 三 隱 )의 한 사람으로 1401년(태종 1) 영의정에 추증되고 익양 부원군( 益 陽 府 院 君 )에 추봉되었다. 중종 때 문묘( 文 廟 )에 배향되었고 개성의 숭양서 원( 崧 陽 書 院 ) 등 11개 서원에 제향되었다. 문집에 포은집( 圃 隱 集 ) 이 있다. 12쪽-13쪽: 위대한 인물의 조건은? - 이순신[ 李 舜 臣, 1545~1598] : 조선시대의 임진왜란 때 일본군을 물리치는 데 큰 공을 세운 명장. 본관은 덕수( 德 水 )이고, 자는 여해( 汝 諧 ), 시호는 충무( 忠 武 )이 다. 서울 건천동( 乾 川 洞 )에서 태어났다. 1572년(선조 5) 무인 선발시험인 훈련원 별 과에 응시하였으나 달리던 말에서 떨어져 왼쪽다리가 부러지는 부상으로 실격되었 였다. 32세가 되어서 식년 무과에 병과로 급제한 뒤 권지훈련원봉사( 權 知 訓 練 院 奉 事 )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어 함경도의 동구비보권관( 董 仇 非 堡 權 管 )과 발포수군만 호( 鉢 浦 水 軍 萬 戶 )를 거쳐 1583년(선조 16) 건원보권관( 乾 原 堡 權 管 ) 훈련원참군( 訓 鍊 院 參 軍 )을 지냈다. 1586년(선조 19) 사복시 주부를 거쳐 조산보만호( 造 山 堡 萬 戶 )가 되었다. 이때 호 인( 胡 人 )의 침입을 막지 못하여 백의종군하게 되었다. 그 뒤 전라도 관찰사 이광에 게 발탁되어 전라도의 조방장( 助 防 將 )이 되었다. 이후 1589년(선조 22) 선전관과 정읍( 井 邑 ) 현감 등을 거쳐 1591년(선조 24) 유성룡의 천거로 절충장군 진도군수 등을 지냈다. 같은 해 전라좌도수군절도사( 全 羅 左 道 水 軍 節 度 使 )로 승진한 뒤, 좌수 영에 부임하여 군비 확충에 힘썼다. 이듬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옥포에서 일본 수군과 첫 해전을 벌여 30여 척을 격 파하였다(옥포대첩). 이어 사천에서는 거북선을 처음 사용하여 적선 13척을 분쇄하 였다(사천포해전). 또 당포해전과 1차 당항포해전에서 각각 적선 20척과 26척을 격 파하는 등 전공을 세워 자헌대부로 품계가 올라갔다. 같은해 7월 한산도대첩에서는 적선 70척을 대파하는 공을 세워 정헌대부에 올랐다. 또 안골포에서 가토 요시아키 [ 加 珙 嘉 明 ]의 수군을 격파하고(안골포해전), 9월 일본 수군의 근거지인 부산으로 진 격하여 적선 100여 척을 무찔렀다(부산포해전). 1593년(선조 26) 다시 부산과 웅천( 熊 川 )에 있던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최초의 삼도수군통제 사가 되었다. 이듬해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죽도( 竹 島 )로 옮긴 뒤, 장문포
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적의 후방을 교란하여 서해 안으로 진출하려는 전략에 큰 타격을 가하였다.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화의가 시작 되어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었을 때에는 병사들의 훈련을 강화하고 군비를 확충 하는 한편, 피난민들의 민생을 돌보고 산업을 장려하는 데 힘썼다. 1597년(선조 30) 일본은 이중간첩으로 하여금 가토 기요마사[ 加 藤 淸 正 ]가 바다를 건너올 것이니 수군을 시켜 생포하도록 하라는 거짓 정보를 흘리는 계략을 꾸몄다. 이를 사실로 믿은 조정의 명에도 불구하고 그는 일본의 계략임을 간파하여 출동하 지 않았다. 가토 기요마사는 이미 여러 날 전에 조선에 상륙해 있었다. 이로 인하여 적장을 놓아주었다는 모함을 받아 파직당하고 서울로 압송되어 투옥되었다. 사형에 처해질 위기에까지 몰렸으나 우의정 정탁의 변호로 죽음을 면하고 도원수 권율의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을 했다. 그의 후임 원균은 7월 칠천해전에서 일본군에 참패하고 전사하였다. 이에 수군통 제사로 재임명된 그는 12척의 함선과 빈약한 병력을 거느리고 명량에서 133척의 적군과 대결, 31척을 격파하는 대승을 거두었다(명량대첩). 이 승리로 조선은 다시 해상권을 회복하였다. 1598년(선조 31) 2월 고금도( 古 今 島 )로 진영을 옮긴 뒤, 11 월에 명나라 제독 진린과 연합하여 철수하기 위해 노량에 집결한 일본군과 혼전을 벌이다가 유탄에 맞아 전사하였다(노량해전). 무인으로서뿐만 아니라 시문( 詩 文 )에도 능하여 난중일기 와 시조 한시 등 여러 편의 뛰어난 작품을 남겼다. 1604년(선조 37) 선무공신 1등이 되고 덕풍부원군( 德 豊 府 院 君 )에 추봉된 데 이어 좌의정이 추증되었다. 1613년(광해군 5) 영의정이 더 해졌다. 묘소는 아산시 어라산( 於 羅 山 )에 있으며, 왕이 직접 지은 비문과 충신문( 忠 臣 門 )이 건립되었다. 통영 충렬사(사적 제236호), 여수 충민사(사적 제381호), 아산 현충사(사적 제155호) 등에 배향되었다. 유품 가운데 난중일기 가 포함된 이충무공난중일기부서간첩임진장초 는 국 보 제76호로, 장검 등이 포함된 이충무공유물은 보물 제326호로, 명나라 신종이 무 공을 기려 하사한 충무충렬사팔사품(통영충렬사팔사품)은 보물 제440호로 지정되었 다. 이밖에도 그와 관련하여 많은 유적이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그의 삶은 후 세의 귀감으로 남아 오늘날에도 문학 영화 등의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고 있다. - 도요토미 히데요시 [ 豊 臣 秀 吉 (풍신수길), 1536~1598.8.18] : 일본의 무장 정치 가. 오와리국[ 尾 張 國 : 愛 知 縣 ]에서 태어났다. 하급무사인 기노시타 야우에몬[ 木 下 彌 右 衛 門 ]의 아들이다. 젊어서는 기노시타 도키치로[ 木 下 藤 吉 郞 ], 후에는 하시바 히데 요시[ 羽 柴 秀 吉 ]라고 하였다가, 다조대신[ 太 政 大 臣 ], 간파쿠[ 關 白 ]가 되어 도요토미 라는 성을 썼다. 1558년 이후 오다 노부나가[ 織 田 信 長 ]의 휘하에서 점차 두각을 나타내어 중용되어 오던 중, 아케치 미쓰히데[ 明 智 光 秀 ]의 모반으로 웅지( 雄 志 )를 펴지 못하고 혼노사[ 本 能 寺 ]에서 죽은 오다 노부나가의 원수를 갚음과 동시에 그 뒤를 이어 천하통일을 이룩하였다.
그러나 국제사회의 일원으로서 그가 취한 최초의 행동은 그때까지 되풀이되던 왜 구의 노략질을 국가적 규모로 확대한 임진왜란을 일으킨 것이다. 나고야[ 名 護 屋 ;현 재히젠의 가츠라 지역]에 지휘소를 차린 그는 출정군을 9개로 나누어 15만 8천 8 백 명을 선두로 조선을 침략하게 하였다. 조선은 처음에 패배하였으나 전열을 정비 한 관군과 의병 및 수군의 활약으로 왜구를 모두 퇴각시켰다. 이 전란으로 조선은 귀중한 문화재가 소실되거나 노략질당했고, 조선의 도자기도공( 陶 工 )을 납치한 일본 은 도자기 문화를 이룩하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 히틀러 [Hitler, Adolf, 1889.4.20~1945.4.30] : 독일의 정치가, 나치스의 지도 자. 오스트리아의 세관원의 아들로 태어나서, 13세에 아버지를, 18세에 어머니를 잃었다. 빈에서 예술가의 꿈을 키웠으나 실패하였고, 독신자합숙소의 공영시설( 公 營 施 設 )에서 숙박하면서 유산과 자신이 그린 그림을 팔아서 생활을 이어갔다. 오스트리아 헝가리제국( 帝 國 ) 내의 격렬한 민족투쟁의 와중에서 독일민족지상주의 자가 되어 국제주의적인 마르크스주의를 반대하였으며, 유대인과 슬라브족을 증오 하였다. 1913년 병역을 기피하여 뮌헨으로 피신했지만 생활은 더욱 나빠졌다. 제1 차 세계대전이 발발하자 독일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하고 무공을 세워 1급 철십자장 ( 鐵 十 字 章 )을 받았다. 독일이 패전한 후 뮌헨에서 공산혁명이 실패하였는데, 그 직 후에 히틀러는 군대에서 정치교육을 받고 반( 反 )혁명사상으로 정신을 무장하였다. 1919년 9월 독일노동자당(후에 국가사회주의독일노동자당, 즉 나치스)이라는 반 ( 反 )유대주의적인 작은 정당에 가입하였다. 그는 웅변에 능하였고, 그 웅변의 힘으로 선전활동을 전개하여 당세를 확장하였으 며, 1920년 4월 군대에서 제대하여 당의 선동가로서 정치활동에 전념하였다. 이어 당내( 黨 內 )의 독재자가 된 그는 군부 보수파( 保 守 派 )와 손잡고 민족공동체의 건설, 강대한 독일의 재건, 사회정책의 대대적인 확장, 베르사유조약의 타파, 민주공화제 의 타도와 독재정치의 강행, 유대인의 배척 등을 역설하였고, 특히 대중집회를 자주 열어 일반 민중의 지지를 얻었다. 1923년 11월 8 9일 뮌헨에서 봉기(히틀러의 봉 기)를 획책했으나 군부와 관료의 지지를 얻지 못하여 실패하였다. 그 사건으로 란츠 베르크 육군형무소에 투옥되었는데, 출옥 후 와해된 당의 조직을 재편하고 합법적 인 운동으로 민주공화제를 내부로부터 정복할 것을 꾀하였다. 옥중에서 나의 투 쟁 Mein Kampf 을 출판하여, 동유럽을 정복하고 게르만 민족의 생존권을 동방으 로 확장하겠다는 계획을 제시하였다. 그는 당내의 여러 가지 경향을 종합 정리하고, 1930년 9월 총선거에서 나치스는 18.3 %의 득표율로 사회민주당에 이어 제2당이 되었다. 이 시점부터 그의 일생이 바로 나치스의 역사가 되었다. 연립내각에 입각하기를 거절하고 나치스의 독재지배 를 요구하였는데, 1932년 4월 대통령선거에서 1340만 표(36.8 %)까지 득표하였으 나 P.힌덴부르크에게 패하였다. 또한 7월 총선거에서는 37.3 %를 득표하여 압도적 인 당세를 과시하면서 여전히 연립내각에 참가할 것을 거절하였다. 그러나 11월 총
선거에서는 33.1 %로 지지율이 떨어지면서 당세가 쇠퇴해졌으나, 자본가 농업계를 비롯한 지배세력의 많은 사람들이 히틀러를 지지하게 되었다. 대통령 힌덴부르크는 경제계와 정계의 혼란을 수습하기 위하여 1933년 1월 30일 히틀러를 수상으로 임명하였다. 그는 보수파와 군부의 협력을 얻어 반대파를 탄압 하고 1933년 7월 일당독재( 一 黨 獨 裁 )체제를 확립하였다. 1934년 8월 대통령 힌덴 부르크가 죽자 대통령의 지위를 겸하여, 그 지위를 총통 및 수상(Führer und Reichskanzler:약칭은 총통) 이라 칭하였다. 명실상부한 독일의 독재자가 된 그는 민주공화제시대에 비축된 국력을 이용하여 국가의 발전을 꾀하였다. 그리고 외교계 경제계 군부 요인들의 협력을 얻어 외교상의 성공을 거두었고, 경제의 재건과 번 영을 이루었으며, 군비를 확장하여 독일을 유럽에서 최강국으로 발전시켰기 때문에 국민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게 되었다. 또한 독일민족에 의한 유럽 제패를 실현하고 대생존권( 大 生 存 圈 )을 수립하기 위한 제2차 세계대전을 일으켰다. 그의 작전지령이 처음에는 효과를 거두어 프랑스에서 크게 승리하였지만 스탈린그라드의 패전 전후부터 현실을 무시한 지령을 남발하여 패전을 거듭하였다. 1944년 7월 20일 과거에 그를 돕던 장군들과 보수제정파( 保 守 帝 政 派 )의 정치가들이 반란을 기도하였으나 히틀러에 대한 암살계획이 실패하였기 때문에 반란은 제압할 수 있었다. 그러나 나치스의 퇴세는 이미 만회할 길이 없었 고, 1945년 4월 30일 그는 베를린이 함락되기 직전에 자살하였다. 그는 독신생활을 하였으나 그 동안에 질녀( 姪 女 ) 안겔라 라우발(1908 1931)을 사랑하였고 그녀가 1931년 자살한 후로는 에바 브라운(1912 1945)을 사랑하여, 그의 자살 전날에 결혼하였다. 또 그는 채식주의자이며 담배와 술도 하지 않았다. 밤에는 새벽 3,4시까지 잠을 자지 않았으며 아침에는 정오에 가까운 시간까지 침대 에 있었다. 그는 스스로를 예술의 보호자라고 생각하면서 현대문학이나 현대회화를 억압하였 고, 19세기적 예술을 애호하여, 특히 각종의 장려한 건축물을 세우는 것을 좋아하 였다. 자기 주위에는 의사 사진사 운전기사 비서, 기타 정치와는 관계가 없는 사 람들을 모아 두었으며, 개인생활에서는 정치관계자와 교제하지 않았다. 매사에 우왕 좌왕하는 타입이었고, 그의 일이 순조롭게 되어갈 때에는 남의 의견도 잘 들었으나, 일단 결정된 방침은 결코 바꾸지 않는 옹고집이었다. 사상적으로는 인종론자이었는데, 모든 인종은 우열( 優 劣 )이 분명하여 열등인종은 아무리 교육을 하고 환경을 개선해 주어도 열악한 성격이 바꾸어지지 않으므로 멸 종되야 한다는 주장을 폈다. 인종의 성격은 유전적으로 확정되어 있어서 변하지 않 는 것이라고 생각하였으며, 우수한 인종도 생존권을 확장하지 않거나 열등한 인종 과 혼혈이 되면 몰락하는 것이라고 믿었다. 또, 러시아를 정복하고 유럽을 지배한 다음에는 미국을 타도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생각하였다.
14쪽: 위대하다는 것은 - 위대한 인물들의 생애에서 본받을 점들을 정리한 뒤, 이 내용을 바탕으로 논술문 을 작성한다. - 결론에서 확실한 자기 주장으로 마무리하도록 주의한다. 2. 경제 논술 쓰기 1) 왜 경제 논술 쓰기를 해야 하는가? 논술 쓰기에 자신감을 가지고 있는 학생이라도 경제적 분야를 주제로 논술을 쓴다 고 하면 심리적 부담을 갖기 쉽다. 경제적 분야의 상식과 이론이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이때는 경제의 기본개념이 돈을 벌고 이용하는 활동 에 있다는 것을 알려주고, 학생들이 이를 쉽게 받아들이도록 신경을 쓰면서 지도한다. 우리 사회는 풍족한 생활을 하는 부유한 사람들을 보면서 부자의 환상을 갖게 만들 고 있다. 그러나 정작 그러한 부자들이 돈을 어떻게 벌고 관리하며 쓰는지에 대해 서는 관심이 적다. 경제 논술에서는 이러한 분야, 즉 돈을 다루는 방법에 대해 깊이 생각을 해보도록 지도해야 한다. 이 단원에서는 싼 물건과 비싼 물건을 구분하기, 부자되는 방법 생각해보기, 신용 불량자가 되지 않기 위한 방법 쓰기, 수입 배분상의 문제점 파악하기, 돈을 쓰는 방 법에 대한 논술문 쓰기 등의 연습을 통해, 학생들이 경제에 대한 관심을 키워가고 이러한 생각들을 소신껏 논술문으로 작성해보도록 한다. 2) 이렇게 지도하세요. 15쪽: 생각의 문을 열어라 (물만 먹고 컸대요) - 콩나물을 기르는 방법에 대해 함께 이야기해본다. - 콩나물을 덤으로 주는 행위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말해본다. 16쪽-17쪽: 콩나물과 송이 버섯 - 주어진 글에서는, 수요와 공급의 원리에 대해 설명해주고 있다. 수요는 많은데 공급이 적을 경우 가격이 올라가게 되는 원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1) (예) 싼 반찬 : 콩나물 / 단무지 / 김 이유 : 사람들이 많이 재배하기 때문에 / 공장이 많기 때문에 / 생산량이 많아서 비싼 반찬 : 햄 / 갈치조림 / 갈비찜 이유 : 육류의 원가와 가공의 단가가 합쳐져서 / 갈치가 귀해서 / 갈비의 원가가 높아서 2) (예) 싼 물건 : 종이 / 지우개 / 저금통 / 막대사탕 이유 : 공장에서 많이 만들어내므로, 생산원가가 싸므로 비싼 물건 : 꽃 / 자동차 / 웨딩드레스 / 케잌 이유 : 원하는 꽃을 구하기 힘드므로 / 부품을 구해서 만드는 데 드는 비용이 많 아서 / 높은 품질로 만드는 과정에서 비용이 많이 소요되어서 / 재료와 인건비가 비싸서 3) 앞의 문제에서 쓴 이유들을 종합하여 정리해본다. 18쪽-19쪽: 부자가 되는 방법 - 부자들의 특징을 이해한 뒤, 나의 생각을 덧붙여본다. - 한국 부자들의 일화도 함께 소개해주어 이해를 돕도록 한다. (예 : 재벌이었던 정 주영 회장은 아침에 출근할 때 자동차를 타지 않고 회사까지 걸어갔다고 한다.) 1) 근면, 성실, 정직, 용기 등의 정신적 요소와 노력 2) 동의한다. 3) 반대를 한다면 부자가 되기 위해서는 어떤 방법이 실질적으로 도움이 되는지 를 분명히 밝혀주어야 한다. 그래야 주장이 설득력을 지닐 수 있다. 찬성을 한다면 자신이 공감을 느끼는 부분들을 언급해주도록 한다. 20쪽-21쪽: 충동 구매는 거절! - 충동구매 : 사전계획 없이 순간적 충동으로 구매를 결정하는 행위. 미리 계획을 세워서 결정한 대로 물건을 구입하는 계획구매에 대립되는 개념이다. 소비자가 진 열된 상품이나 광고 등 여러 가지 자극에 의해 즉석에서 구매를 결정하는 비계획적 인 행동이다. 유형으로는 순수한 충동구매, 회상적 충동구매, 제안형 충동구매, 계획적 충동구매 등이 있다. 순수한 충동구매는 가장 일반적인 방식의 충동구매로, 일상 습관이나 패 턴을 벗어난 구매를 말한다. 회상적 충동구매는 계획에는 없지만 구매시점에서 필
요한 물건을 생각해 내거나 과거에 본 광고를 떠올려 구매하는 형태이다. 제안형 충동구매는 사전지식이 없는 상품을 점포에서 수행하는 피오피광고 등에 의해 필요성을 느끼고 구매하는 형태이며, 계획적 충동구매는 품목이나 브랜드를 결정하지 않고 점포를 방문하여 할인쿠폰을 이용하거나 세일을 하는 상품을 구매하 는 형태가 있다. 충동구매의 특징은 상품에 대한 호의적 감정이 강하게 발생하고, 구매하고자 하는 심리적 충동이 강렬하여 저항하기 어려우며, 구매시점에서 즐거움, 긴장감 등의 흥 분된 감정이 나타난다. 따라서 효용을 극대화하는 합리적 구매행위일 가능성이 낮 고, 구매 당시 부정적인 결과에 대하여 신경쓰지 않으므로 구매 후에는 후회를 하 기도 한다. 22쪽-23쪽: 돈 쓰는 법칙 - 수입배분에 있어서 균형을 이루는 것이 중요함을 깨닫도록 한다. - 돈을 버는 것도 중요하지만 돈을 어떻게 쓰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점을 알도록 지도해준다. 24쪽-25쪽: 30년 후의 가계부 - 학생들이 미래에 돈을 벌게 된다면 어떻게 수입을 배분하여 지출할지에 대해서 생각해보도록 한다. - 돈이 쓰이는 용도에 대해 자세히 적도록 한다. - 교사는 학생이 쓴 계획표를 보고나서, 비현실적인 부분이 있다면 지적해주어 학 생들이 균형있는 경제감각을 갖출 수 있도록 지도해준다. - 학생들이 수업을 통해 깨달은 점들을 정리하여 논술문을 작성하도록 한다. 26쪽: 미리 만들어 보는 내 명함 - 갖고 싶은 직업과 신조에 대해 생각해본다. 한 사람이 여러 장의 명함을 만들어 도 좋다. - 친구들끼리 서로 명함을 교환하는 시간을 가져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