張 桂 香 의 실명 고증과 생애 검토 1) 배 영 동 안동대학교 민속학과 교수 1. 머리말 2. 貞 夫 人 실명 張 桂 香 의 발견 고증과 의의 3. 현명한 여성의 전형이던 장계향의 삶과 의식 4. 맺음말 1. 머리말 옛말에 사람은 죽어서 이름을 남기고, 호랑이는 죽어서 가죽을 남긴다 고 하였 다. 여기서 이름은 그 사람을 지칭하던 존재의 명명 에 한정되지 않고, 존재의 명성 으로까지 확장된 표현에 가깝다. 이름이 존재의 명명이든, 존재의 명성이든 간에 이름이 남겨지지 않은 사람은 너무나 많다. 존재의 명명은 있되, 존재의 명성 이 없다면 그 이름이 역사의 기록에 남겨지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반면 존재의 명 성이 있었음에도 존재의 명명이 구체적으로 개별화되어 남겨지지 못한 사례가 많 다. 우리 역사 속의 여인들은 일반적으로 존재의 명명이 독립적으로 개별화되지 않 고, 아버지의 딸로서, 남편의 아내로서, 아들의 어머니로서 명명되어 왔다. 여기에 는 父 系 중심의 사회구조가 짙게 깔려 있다. 父 系 中 心 社 會 에서 여성들은 일반적으 로 존재의 독립성이 차단되고 가리어진 상태에서 그와 밀접한 관계가 있는 남성들 의 울타리 속에서 그 존재성이 명명되어 왔다. 이러한 사정으로 말미암아 조선시대 여성들은 이름이 없었다 는 생각을 하기 쉽다. 그러나 사실은 과거의 역사 기록 속에서 여성의 이름을 정확히 알기 어려운 1) 이 발표문은 미완성 원고이므로 필자의 동의 없이 인용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것일 뿐이며, 살아있을 때에는 어떤 형태로든 개별적 이름을 가지고 있었다고 봐야 옳다. 개별적인 이름이 없었다면 여러 사람들 사이에서 변별적 존재로 인정, 평가 되기 어렵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여성 개개인의 이름이 없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출가 후에는 宅 號 를 부여받아서 사용하는 것이 일반적이어서 실명이 기록되지 않 은 탓이라고 하겠다. 독립적인 존재의 이름이나 그에 준하는 명명이 있을 때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 으며 어떤 인식을 가진 존재였는지에 대해서 무엇인가 설명할 수 있는 근거가 마 련된다. 이름이나 그에 준하는 명명이 없는 경우에는 그 개인이 어떤 생각을 하면 서 어떻게 살아왔는지에 대해서 알기 어렵다. 또한 특정 개인의 생애가 거론될 정 도라면 반드시 그 존재에 대한 명명이 있기 마련이다. 전통사회의 남성들에 비해서 여성들의 생애가 검토된 사례가 적다. 개인의 생애 를 검토한다고 하면, 그가 남긴 자취와 이력이 역사 속에서 반추될만한 가치가 있 어야 한다는 전제가 있다. 그런데 여성의 이력과 삶에 대해서는 구체화된 개인 실 명이 남겨지지 않은 것 이상으로 제대로 알려지거나 기록된 사실이 없다. 따라서 우리 역사 속의 인물로서 그 삶이나 의식이 검토의 대상이 된 여성은 적을 수밖에 없다. 설령 있다고 할지라도 신사임당, 김호연재, 임윤지당, 이사주당, 이빙허각, 강 정일당처럼 대부분 號 로 지칭되었다. 2) 이런 상황에서 이제 우리는 조선후기의 한 여성에 대해서 실명이 무엇이었으며, 그의 생애는 어떠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그 여성은 바로 17세기에 음 식디미방 (일명 閨 壼 是 議 方 )이라는 불후의 조리서를 남긴 貞 夫 人 安 東 張 氏 (1598~1680)이다. 3) 이 글에서는 정부인 안동 장씨의 두 가지 측면에 대해서 검 토할 것이다. 첫째, 정부인 안동 장씨의 실명 張 桂 香 이 어떤 과정을 통하여 밝혀진 것인지를 설명하고, 조선후기의 여성 실명이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는지를 해명하 고자 한다. 둘째, 조선후기의 정부인 장계향은 어떤 생각을 하면서 어떤 삶을 살았 는지에 대해서 검토하고자 한다. 4) 이 두 가지 목표에 도달하면, 우리 역사상 최초 의 한글 조리서를 저술한 조선후기의 한 여성의 이름이 장계향이라는 사실을 천명 2) 이혜순, 조선후기 여성 지성사, 이화여자대학교 출판부, 2007. 3) 이 저술은 경북대학교 金 思 燁 교수에 의해서 처음 학계에 알려졌다( 閨 壼 是 議 方 과 田 家 八 曲 ( 資 料 ), 慶 北 大 學 校 瀛 西 高 秉 幹 博 士 頌 壽 紀 念 論 叢, 1960). 4) 정부인 안동 장씨의 유품과 생애에 대해서는 효성여자대학교 金 炯 秀 교수가 처음으로 다루었다 ( 石 溪 夫 人 安 東 張 氏 에 對 하여, 女 性 問 題 硏 究, 2, 효성여자대학교 부설한국여성문제연구소, 1972). - 2 -
하고, 그의 인생과 삶이 우리에게 어떤 교훈을 주는지에 대해서 다시 생각해볼 수 있을 것이다. 2. 貞 夫 人 실명 張 桂 香 의 발견 고증과 의의 1) 정부인 안동장씨의 실명 발견과정 2001년에서 2002년까지 필자는 종가의 사당에 대한 연구를 수행한 바 있다. 우 선 경북 북부지역의 사당을 조사하여 자료를 수집하였다. 기본적으로는 종가 사당 의 배치, 건축형식, 내부공간 구성과 조상의 상징물[ 神 像 ]인 神 主 에 대해 조사하고, 궁극적으로는 사당을 통하여 한국인들의 조상에 대한 인식과 관점을 해석하고자 하였다. 여기서 미리 전제할 사항은, 사당은 경제력이 있는 종가에서 세운 조상의 공간이 라는 점이다. 물론 종가가 아니라 하더라도 흔히 맏집 이라 부르는 冑 孫 家 에서도 사당을 세울 수 있다. 그러나 이 경우에도 경제력이 수반되지 않으면 사당을 건립 하기는 어렵다. 조상을 상징하는 神 主 를 모시는 것을 바람직하게 인식하면서도 사 당을 세울 경제적 여건이 마련되지 못하면 壁 龕 을 설치하여 그 속에 신주를 모셨 다. 이것조차 여의치 못한 집에서는 제사를 모실 때만 紙 榜 을 써서 신주를 대신하 였다. 종가라고 규정할 때 가장 이상적으로는 不 遷 位 조상을 모시는 집에 한정되었다. 하지만 불천위 조상을 모시지 않는 주손가에서도 스스로 종가라고 부르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불천위 조상을 모시는 종가에서는 불천위 조상을 모시지 않는 주손가 에 대하여 종가라고 할 수 없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불천위 조상 을 모시는 것이 종가로 판정할 수 있는 중요한 기준으로 작용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다만, 이것은 종가의 이상적 요건일 뿐, 현실적으로는 많은 주손가에서 스스로를 종가로 칭하고 있다. 불천위 조상을 모시지 않는 주손가가 종가라고 자칭 할 수 있었던 까닭은, 顯 祖 와 같은 두드러진 조상을 모시는 주손가는 그 현조의 혈 연적 정통성을 계승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이러한 생각이 성립될 수 있는 근 거는 유교 宗 法 의 핵심이 혈통적, 사회적 정통성을 중시하면서 형성된 혈연집단의 중심이 되는 집이 바로 주손가이므로, 이러한 주손가를 종가로 부르지 못할 이유가 없다고 보는 데 있다. 어쨌든 이상적인 종가의 성립에서 중요한 문제로 인식된 불천위 조상을 모신 경 - 3 -
우라면, 그 불천위 조상에 대해서는 子 孫 萬 代 로 기제사를 받들어 모시게 된다. 그렇게 받들어 모셔지는 조상이 바로 불천위 조상이기 때문이다. 불천위 조상에 대 해서는 장례 때 만든 신주가 종가 사당에 모셔져 있기 마련이다. 물론 부계중심사 회에서는 당사자인 考 位 뿐만 아니라 妣 位 까지 함께 불천위 조상으로 받들어 모셔 진다. 따라서 불천위 신주에 대해서 조사하면 그 조상에 관해 일반적으로 알려진 신상정보가 어떻게 신주에 기록되었는지, 그리고 행여 알려지지 않은 사항에 대해 서도 뭔가 기록될 수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다. 신주에 대해서는 예서에 어느 정도 구체적으로 제작방법, 형식, 기록 내용 등에 관하여 규정하는 내용이 소개되어 있다. 가령 四 禮 便 覽 에 따르면, 신주는 고요한 산중에 있는 밤나무로 제작한다는 점, 그 형식은 主 身 을 前 身 과 後 身 으로 만들고 이것을 다시 받침대[ 跗 ]에 꽂는다는 점, 주신의 크기는 높이 1척2 寸 (12개월을 상 징), 너비 3 寸, 두께 1 寸 2 分, 두께의 1/3이 전신, 2/3가 후신이 되도록 한다는 점, 전신 粉 面 에 기록하는 내용과 후신 陷 中 에 기록하는 내용은 무엇이라는 점 등이 규정되고 있다. 여기서 밤나무로 신주를 만드는 까닭은 밤나무가 조상을 아는 나 무 로 인식되기 때문이다. 그 근거는 밤톨을 심어 밤나무가 자라서 밤이 열릴 때 까지 땅속에 있는 밤톨이 외형상으로는 섞지 않고 남아 있으므로, 열매 밤톨은 씨 앗 밤톨을 만날 수 있고, 이것은 곧 자손이 조상을 만난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는 데 있다. 그래서 밤나무는 근원과 뿌리를 아는 나무 로 인식되어 조상을 받들어 모시는 신주를 제작하는 데 적합한 재질로 평가되었다. 전신의 기록내용은 조상의 정체성과 그런 정체성을 가진 조상과 종손의 관계에 대해 몇 대인가 하는 사항으로 표현된다. 조상의 정체성은 고위라면 顯 代 祖 考 + 品 階 + 官 職 + 諡 號 + 府 君 + 神 主 로 표현되고, 비위라면 顯 代 祖 妣 +품계+본관+ 성씨+신주 로 표현된다. 이 기록을 題 主 라 하고, 그 왼쪽에는 旁 題 라 하여 孝 子 + 某 + 奉 祀 라고 쓴다. 반면에 후신 함중의 기록내용은 고위의 경우 품계+관직+ 字 +성명+신주 로 적고, 비위의 경우는 품계+본관+성명+신주 혹은 품계+본 관+성씨+신주 로 적는다. 5) 전신의 기록이 조상과 종손의 관계를 중요하게 밝힌 것이라면, 후신의 기록내용은 조상의 정체성 그 자체일 뿐 종손과 어떤 관계에 있 는지에 대해서는 다루지 않는다. 그럼에도 후신의 기록내용으로써 특정한 인물의 신주임을 드러내야 하는 바, 이를 위해서 후신에는 누구의 신주인지를 구체적으로 알 수 있도록 적는 것을 바람직하게 여겼다. 5) 장철수, 신주,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4,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참조. - 4 -
이러한 기초적 지식을 토대로 하여 신주에 대해서 조사한다면, 감추어진 사실을 발견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다. 이에 몇 몇 종가의 사당에 모셔진 신주에 대해서 종손이나 문중의 관계자 허락을 받고 조사를 진행하였다. 그 가운데 영양 석보면 두들마을에 있는 재령 이씨 石 溪 李 時 明 종가의 사당과 거기에 모셔진 석계 이시 명 선생과 그 배위 2분의 불천위 신주를 관찰 조사할 수 있었다. 당시에 석계 종가 관리자는 이 마을에서 지식인으로 널리 알려진 李 秉 鈞 어른이었다. 그 날은 바로 2002년 4월 1일 화창한 봄날이었다. 먼저 사당에서 두 번의 절을 올린 다음 신주를 봉심하였다. 불천위 신주를 관찰 하는 과정에서 뜻 깊고 중요한 사실을 발견하게 되었다. 석계 이시명의 선배위와 후배위 두 분의 실명이 신주의 후신 함중에 선명하게 기록되어 있었다. 타임머신을 타고 몇 백 년을 거슬러 올라가는 느낌이 들었다. 구체적인 기록내용을 옮기면 다 음과 같다. 石 溪 李 時 明 선생(1590-1674) 신주 6) 전신분면 기록 : 顯 先 祖 考 贈 資 憲 大 夫 吏 曹 判 書 兼 知 義 禁 府 事 五 衛 都 摠 管 行 宣 敎 郞 康 陵 參 奉 府 君 神 主 (1행) 十 三 代 孫 燉 奉 祀 후신함중 기록 : 故 宣 敎 郞 行 康 陵 參 奉 李 公 諱 時 明 字 晦 叔 神 主 (선배위 광주 김씨 신주의 기록) 전신분면 기록 : 顯 先 祖 妣 贈 貞 夫 人 光 州 金 氏 神 主 十 三 代 孫 燉 奉 祀 후신함중 기록 : 故 光 州 金 氏 諱 思 安 神 主 (후배위 안동 장씨 신주의 기록) 전신분면 기록 : 顯 先 祖 妣 贈 貞 夫 人 安 東 張 氏 神 主 十 三 代 孫 燉 奉 祀 후신함중 기록 : 朝 鮮 故 宜 人 安 東 張 氏 諱 桂 香 神 主 이렇게 하여 재령 이씨 석계 李 時 明 (이미 알려진 이름), 그리고 그의 선배위 광 산 김씨 金 思 安, 후배위 안동 장씨 張 桂 香 세 사람의 실명을 모두 확인할 수 있었 6) 배영동, 사당의 종가를 통해 본 조상관, 한국민속학, 제39집, 한국민속학회, 2004, 142쪽. - 5 -
다. 두 배위 가운데서 먼저 선배위의 후신 함중에서 발견한 이름을 대하니 17세기 여성들의 실명이 이런 형식이었구나, 그리고 그 뜻이 참으로 참하고 깊다는 생각이 들었다. 임란 때 안동의병장을 지낸 近 始 齋 金 垓 (1555~1593)의 따님이었던 사람 의 김사안이라는 이름을 대하니 편안하게 생각한다 는 뜻이니만큼 안온하기도 하고 남성들의 字 와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다음으로 후배위 신주 후신 함중에서 정부인 안동 장씨 이름을 보는 순간 정부인 안동 장씨 가 한 명이 아닐진대, 비 로소 음식디미방 을 저술한 정부인 안동 장씨의 실명을 찾았다 는 생각이 들고 연구자로서 뿌듯함 같은 것을 느꼈다. 장계향이라는 이름은 필시 친정아버지 敬 堂 張 興 孝 선생이 작명한 것일 터이고, 그렇다면 뭔가 깊은 뜻이 있을 법하다는 생각 이 들었다. 사실 계향 이라면 흔히 너무 화려한 이름은 아닌가 하는 느낌이 들 기도 했지만, 그것은 당시 여성들의 이름에 대한 정보 부족이나 편향된 시각일 수 있다는 생각으로 귀결되었다. 이 모두 짧은 시간에 스쳐간 것이다. 나는 사당 안에 있던 이병균 어른에게 정부인 안동 장씨 로만 알려진 석계 이 시명의 후배위는 물론이고 선배위 광산 김씨의 이름까지도 찾았다고 말씀드렸다. 이병균 어른도 조선시대 여성들의 이름이 거의 알려진 바 없는데 참 놀랍고 새롭 다고 하였다. 나는 두 여성의 이름을 다시 확인시켜 드리고, 사진을 찍고 노트에 옮겨서 적었다. 나는 다시 사당에서 두 번의 절을 올리고 물러났다. 그리고 이병균 어른께는 석계 선생 배위 두 분의 성명을 정서 하여 드린 뒤, 컴퓨터로 식자한 신 주의 기록을 우송해 드리기로 하고, 약속을 지켰다. 사당에 관한 논문의 초고를 쓰고 있을 때 석계 선생의 아들 葛 庵 李 玄 逸 (1627-1704) 선생의 아들 密 菴 李 栽 선생의 주손인 이병갑 교수님께 석계 선생 의 배위 두 분의 실명을 찾았다는 사실을 말씀드렸다. 아직도 못내 아쉽게 생각하 는 것은 당시 석계 선생 종손의 연락처를 적극적으로 물어서 이 사실을 곧바로 알 려드리지 못한 점이다. 그것은 당시 석계종택에 기거하기도 하면서 종택을 관리하 고 계신 이병균 어른께 알려드리면 문중에는 설명이 된다고 생각한 때문이고, 이병 균 어른도 그렇게 말씀하셨기 때문이다. 논문이 활자화되어 나왔을 때 이병균 어른과 이병갑 교수님께 보내드렸다. 그런 데 한편으로는 논문이 완성되고, 논문집이 배부된 이후에도 정부인 안동 장씨 의 실명을 찾았다는 사실 뿐만 아니라 실명을 공식적으로 사용하는 것이 좋은지에 대 해서 약간의 망설임이 생기기 시작하였다. 그 이유는 세 가지였다. 첫째, 문중에서 도 이때까지 알려지지 않은 사항을 문중 밖의 연구자가 찾았으니 문중 어른들에게 - 6 -
뭔가 부담을 주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 때문이었다. 둘째, 신주는 내가 아무리 관 계자의 승낙을 얻고 예를 갖추어서 관찰 조사했다 하더라도 그것이 조상의 상징물 이므로 남의 문중에 부담을 드린 일은 아닌가 하는 점 때문이었다. 셋째, 조선시대 여성들의 이름은 일반적으로 감추어져 있었는데 연구자가 들추어내는 것이 뭔가 조상의 존엄성을 떨어뜨리는 것은 아닌지 하는 점 때문이었다. 시간이 흐르면서 다시 생각해보니 이름 없이 지낸 것처럼 여겨진 여인, 혹은 이 름이 파묻혀 있던 여인에게 이름을 찾아서 밝혀준다는 것은 대단히 중요한 일이라 는 판단이 들었다. 전통사회에서 여성의 이름을 기록하지 않은 것 자체가 부계중심 사회의 여성 차별의 논리에 근거하고 있다. 더구나 정부인 안동 장씨 라고만 하 면 실제로 여러 명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구체적으로 한 사람에 한정되는 정부인 안동 장씨는 이름과 함께 적혔을 때라야만 식별이 가능하다. 그리고 남의 조상의 신주를 열어서 관찰 조사한 점에 대해서는, 신주가 조상의 상징물이고 吉 祭 를 올릴 때 전신기록을 다시 수정하기 위해서 여는 것이 일반적이기 때문에 연구자로서 심 적 부담을 가지지 않아도 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신주를 열어보는 데 연구 자가 부담을 느낀다면 신주를 만드는 일, 題 主 를 고쳐 쓰는 일도 아예 불가능할 수 있으므로 심적 부담을 그리 느끼지 않아도 된다고 판단하였다. 그래서 학술지에 게 재된 논문이 배포되고 나니 몇 군데서 문의가 들어왔을 때 사실대로 설명을 해주 었고, 논문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는 복사해서 보내주기도 하였다. 다만, 여기서 한 가지 제안할 사항이 있다. 음식디미방 의 저자 정부인 안동 장 씨처럼 역사적으로 훌륭한 일을 한 여인에게는 존중의 뜻을 담아서 호칭 또는 지 칭하는 것이 온당하다. 그러므로 아무런 존칭 없이 장계향 이라고 지칭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한국인들은 忌 諱 思 想 에 근거하여 어른들의 이름을 곧바로 부르지 않았다. 어른에 대해서는 이름 대신 字 를 부르고, 號 를 부르고, 민중들조차 宅 號 로 불렀다. 그렇다면 음식디미방 의 저자를 지칭할 때는 적어도 貞 夫 人 장계향 으 로 부르는 것이 바람직하고 옳은 일이다. 기휘사상은 여성에게도 적용되어야 하고, 그래야만 여성을 차별하지 않는 것이기 때문이다. 남녀균등의 논리는 호칭이나 지 칭에서부터 실천되어야 한다. 2) 조선 중 후기 여성 실명의 의의 조선 중기에는 여성 실명이 상당히 사용되었던 것으로 확인된다. 안동 일원에서 신 주를 통하여 확인한 여성 실명의 몇 사례를 부군의 출생 순위별로 보면 다음과 같다. - 7 -
1 退 溪 李 滉 선생(1501-1570)의 배위 7) (선배위 김해 허씨: 1501-1527) 8) 전신분면 기록 : 顯 十 代 祖 妣 貞 敬 夫 人 金 海 許 氏 神 主 孝 十 代 孫 奉 祀 후신함중 기록 : 有 明 朝 鮮 故 金 海 許 氏 第 一 神 主 (후배위 안동 권씨: 1513?-1546) 9) 전신분면 기록 : 顯 十 代 祖 妣 貞 敬 夫 人 安 東 權 氏 神 主 孝 十 代 孫 奉 祀 후신함중 기록 : 故 淑 人 安 東 權 氏 諱 淑 貞 神 主 2 臨 淵 齋 裵 三 益 선생(1534-1588)의 배위 10) (배위 영양 남씨 : 1537-1564) 11) 전신분면 기록 : 顯 十 四 代 祖 妣 貞 夫 人 英 陽 南 氏 神 主 孝 十 四 代 孫 在 溱 奉 祀 후신함중 기록 : 故 貞 夫 人 英 陽 南 氏 諱 蘭 芳 神 主 3 西 厓 柳 成 龍 선생(1542-1608)의 배위 12) (선배위 전주 이씨 : 1542-1589) 13) 7) 이 자료는 퇴계종가의 吉 祭 (2011.4.24)를 준비하던 2011년 4월 23일에 대한민국역사박물관 김시덕 박사가 촬영한 사진을 통하여 확인한 것이며, 2011년 9월 28일에 종손(이근필)으로부 터 승낙을 받아 사용하는 것임을 밝힌다. 8) 생몰연대는 退 溪 先 生 年 表 月 日 條 錄 ( 鄭 錫 胎 편저,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 2005)에서 확인한 것 이다. 9) 생몰연대는 退 溪 先 生 年 表 月 日 條 錄 ( 鄭 錫 胎 편저, 사단법인 퇴계학연구원, 2005)에서 확인한 것 이다. 10) 이 자료는 2003년 4월 27일에 조사되고 당시에 종손 배재진의 승낙을 받아 사용하는 것이다. 11) 생몰연대는 興 海 裵 氏 族 譜 (1992, 대보사)에서 확인한 것이다. 12) 이 자료는 2011년 8월 8일에 조사되고, 2011년 9월 28일에 종가(종손 류영하, 차종손 류창 해)의 승낙을 받아 사용하는 것임을 밝힌다. 13) 생몰연대는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宗 派 譜 ( 全 ) (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宗 派 譜 所, 1978),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派 生 物 世 譜 (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派 生 物 世 譜 所, 2002)에서 확인한 것이다. - 8 -
전신분면 기록 : 顯 先 祖 妣 貞 敬 夫 人 李 氏 神 主 孝 玄 孫 寧 夏 奉 祀 후신함중 기록 : 故 貞 夫 人 姓 李 氏 諱 舜 香 第 一 神 主 (후배위 인동 장씨 : 1563-1614) 14) 먼저 퇴계 선생 배위는 두 분인데, 선배위의 경우에는 실명이 기록되지 않았으 며, 후배위의 실명만 權 淑 貞 으로 밝혀졌다. 선배위 김해 허씨는 영주에 살았던 진 사 許 瓚 의 따님이고, 후배위 안동 권씨는 안동 가일마을 花 山 權 柱 (1457-1505) 선생의 아들 權 礩 (1483-1545)의 따님이다. 퇴계 선생 배위의 신주 기록에 표 시가 된 것은 2011년 4월 24일 길제를 지낼 때 題 主 를 고쳐 쓰기 직전 상태이기 때문이고, 그곳에는 당연히 봉사자로부터 몇 대인가를 밝히는 숫자가 들어간다. 퇴계 선생의 제자로 황해도 관찰사와 도산서원 초대 원장을 지낸 임연재 배삼익 선생 배위의 실명은 南 蘭 芳 이다. 배위는 역시 퇴계의 제자였던 영양 남씨 비지( 賁 趾 ) 남치리( 南 致 利 : 1543-1580) 선생의 누이다. 퇴계 선생의 高 弟 로 영의정을 지낸 서애 류성룡 선생의 배위 실명은 李 舜 香 이다. 신주에는 전신분면에든 후신함중에든 배위의 본관이 기록되지 않았지만 풍산류씨 문충공 서애파보 에 따르면 全 州 李 氏 廣 平 大 君 후손이며, 아버지는 龍 宮 縣 監 을 지 낸 李 坰 이다. 한편, 퇴계선생의 선배위와 서애선생의 선배위 신주 후신의 함중기록에는 공통적 으로 第 一 神 主 라고 썼으며 후배위에는 그런 표기가 없다. 여기서 제일신주 라는 표기는 모두 첫 번째 배위임을 나타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신주의 기록 사례를 보면, 조선중기에 여성의 실명이 후손들이 받들어 모시는 신주에는 기록되었다는 사실을 재삼 확인할 수 있다. 여성들도 당연히 이름 이 있었는데도 생시에는 공식문건에 표기되지 않은 채 죽은 후에 망자의 상징물이 되는 신주에서만 사용되었다는 데서 신주를 통한 존재의 유일성을 중요하게 생각 했다는 의식을 읽을 수 있다. 족보, 호구단지 등 여타 공식적인 문서에서는 실명이 쓰이지 않았음에도 신주 속에 기록된 것은, 실체적 조상의 구체성을 확립하기 위한 때문으로 이해된다. 14) 생몰연대는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宗 派 譜 ( 全 ) (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宗 派 譜 所, 1978),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派 生 物 世 譜 ( 豊 山 柳 氏 文 忠 公 西 厓 派 生 物 世 譜 所, 2002)에서 확인한 것이다. - 9 -
조선중기 여성의 실명이 신주에서라도 사용된 것은 그나마 여성의 사회적 지위 를 읽을 수 있는 중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 주지하듯이, 조선전기까지 여성의 사 회적 지위는 조선후기에 비해서 상당히 높았다. 여러 사람의 分 財 記 에서 드러나듯 이 재산 상속에서 아들과 딸의 차별이 없었다는 점, 아들이 없어도 양자를 들이지 않고 딸을 통하여 외손자가 제사를 받들어 모셨다는 점이 대표적인 근거이다. 이점에서 조선중기까지는 여성의 이름이 신주에라도 나타나는데, 아마도 유교의 종법이 일반화된 17, 18세기에는 여성 실명이 신주에도 기록되지 않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예상을 할 수 있다. 이 문제는 이 시기 여성들의 신주를 더 풍부하게 조사 해봐야 분명한 답을 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만일 17, 18세기 이후 여성의 신주 에서 실명이 기록되지 않았다고 하면, 종법적 질서에 따라 여성차별이 심화되고 여 성의 사회적 지위가 낮아지는 것과 호흡을 같이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렇다면, 종법이 양반가에서 일반화된 17세기 말의 신주에서 확인된 정부인 장 계향의 실명은 여성의 사회적 지위가 여전히 높았던 시기의 사회상을 담고 있는 드문 사례가 될 수 있다. 이에 대해서는 추후 다양한 사례 발굴을 한 이후에라야 해명될 수 있을 것이다. 실명을 기록한 것은 존재의 명명을 명확히 하려는 것이므 로, 개인의 존재가치를 드높이려는 의도가 분명한 셈이다. 앞에서 잠시 언급한 바와 같이, 일반적으로 조선 후기에는 여인들이 시집을 가면 택호를 부여받아서 호칭, 지칭되었기에 혼전에 일상적으로 사용되었을 실명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퇴계종가의 종손 이근필(1932년생) 어른이 들려준 이야기를 음미해보도록 하자. 외조모는 봉화 닭실[ 酉 谷 ]에서 봉화 바래미[ 海 底 ]로 시집을 왔는데, 호적에 성명이 權 酉 谷 으로 기재되어 있었다. 종조모 한 분은 봉화 石 浦 에서 시집을 왔는데 호적에 등재된 이름이 浦 였다. 그 종조모와 동서간이던 또 한분의 종조모 성명은 정애둘( 鄭 愛 口 出 )이었다. 아들을 기다리다가 계속 딸이 태어나자 애닳다 고 하여 애둘 이라는 이름을 지었다는 것이다. 15) 위의 정보는 일제강점기에 호적이 만들어진 상태에서 기재된 여성 이름의 실상 이다. 하지만 이 사례를 통해서도 조선조 말기 여성들이 어떤 이름, 혹은 이름에 준하는 호칭을 가지고 있었는지에 대해서 알 수 있는 사항이 많다. 앞의 두 여인은 기본적으로 出 身 地 名 을 따라 작명한 것이고, 마지막 여인은 가족 구성상 종법적 질 15) 2011. 9. 28 퇴계종가에서 조사함. - 10 -
서에 기초한 남아선호 의식을 토대로 작명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앞의 두 여성은 시집온 이후 부여받은 택호 또는 택호에 준하는 이름이 호적에 실린 것이고, 마지 막 여인의 애둘 이라는 이름은 택호가 아니라 시집오기 전의 이름[ 兒 名 ]이 호적 이 실린 것으로 판단된다. 원천적으로 어른들의 실명을 부르는 것이 기피되는 상황 에서, 기혼 여성의 경우 자신의 출신지를 근거로 부여되는 택호가 실명 사용의 필 요성을 지속적으로 약화시키는 작용을 하였다. 따라서 여성의 경우 혼전의 이름이 혼인 후에는 택호로 교체되다시피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런 가운데서 여성의 신주 함중에서 혼전의 이름이 나왔다는 사실은 매우 큰 의미를 지닌다. 생시에는 남성에 비해 차별을 받던 여성도 죽어서는 남자와 평등한 대우를 받은 것이라는 의미가 있다. 이를 방증하는 현상을 찾아보자. 생시에는 부 부가 한 방에서 생활하지 않았지만, 죽은 후 사당에 모셔질 때는 신주를 하나의 主 櫝 에 나란히 모셨다. 신주가 사람을 상징한다면, 주독은 그 사람이 사는 방이므로, 사후에는 한 방에서 생활하는 구조를 갖춘 것이다. 조상의 제사상을 진설할 때도, 合 設 이나 竝 設 을 한다면 그 자체가 조상 부부를 동등하게 예우한 것이며, 합설을 하는 경우에는 특히 부부겸상의 구조를 취한 것이다. 16) 생시에는 부부겸상이 허용 되지 못한 부계중심 사회에서 사후에 부부겸상으로 조상을 모시는 방식은, 사후에 는 남녀가 평등하다는 인식을 드러낸다. 따라서 생시에는 여성 어른이 이름을 쓰지 않았음에도 사후에는 신주에 이름을 기록하는 문화는 바로, 사후에는 남성이나 여 성이나 동등한 지위의 존재성을 인정하려 한 것이다. 3. 현명한 여성의 전형이던 장계향의 삶과 의식 1) 장계향의 가계와 생애 정부인 장계향은 1598년에 安 東 府 金 溪 里 (현재 안동시 서후면 금계리)에서 태 어났다. 정부인은 아버지 경당 장흥효(1564~1633)와 어머니 安 東 權 氏 사이의 무남독녀였다. 17) 어머니 안동 권씨는 僉 知 權 思 溫 의 딸이었다. 18) 권사온 가족은 16) 배영동, 전통적 기제사를 통해 본 조상관, 비교민속학, 제23집, 비교민속학회, 2002, 301 쪽 참조. 17) 이재호 역, 국역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국역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간행소, 1999, 23쪽, 69 쪽 참조. 18) 金 炯 秀, 石 溪 夫 人 安 東 張 氏 에 對 하여, 여성문제연구, 2, 효성여자대학교 부설 한국여성문제 연구소, 1972, 231쪽. - 11 -
예천 용문면 저곡리 맛질에서 살다가 정부인의 어머니가 경당 장흥효에게 출가한 후 봉화군 법전면 어지리 맛질로 이주하였고, 권사온의 묘는 봉화 맛질에 있다. 19) 張 彭 壽 ( 部 將 ) 李 殷 輔 ( 副 司 直 ) ( 後 配 ) 安 東 權 氏 === 張 興 孝 ( 贈 持 平 )===( 先 配 ) 安 東 權 氏 李 涵 ( 縣 監 )=== 眞 城 李 氏 ( 權 士 溫 女 ) 鐵 堅 石 堅 道 堅 琴 以 咸 ( 後 配 ) 張 桂 香 ==== 李 時 明 ====( 先 配 ) 光 州 金 思 安 ( 護 軍 ) ( 女, 護 軍 ) 徽 逸 玄 逸 崇 逸 靖 逸 隆 逸 雲 逸 金 石 英 金 怡 尙 逸 余 國 獻 ( 出 ) ( 吏 判 ) ( 女 ) ( 女 ) ( 女 ) <그림 1> 정부인 장계향의 가계도 20) 경당 선생은 退 溪 李 滉 의 성리학을 계승한 鶴 峯 金 誠 一, 西 厓 柳 成 龍, 寒 岡 鄭 逑 로 부터 배웠으며 易 學 에 밝았다. 21) 경당의 학문은 그의 외손자이자 정부인 장계향의 아들인 存 齋 李 徽 逸, 갈암 이현일 두 사람에게 전수되었고, 갈암의 학맥은 다시 그의 아들 밀암 이재로 이어졌다. 밀암의 학맥은 외손자인 大 山 李 象 靖, 小 山 李 光 靖 으로 계승되었으며, 대산의 학문은 定 齋 柳 致 明 으로 이어졌고, 다시 西 山 金 興 洛 에게로 전 수되어 퇴계학맥의 중심 계보를 형성하게 되었다. 22) 그런 의미에서 경당 장흥효는 퇴계의 再 傳 弟 子 로서 퇴계학파를 형성하는 데 중요한 기여를 한 인물이다. 이러한 家 學 的 분위기 속에서 생장한 정부인은 당시 여성으로서는 남다른 학업 을 쌓았다. 아버지 경당 선생은 딸 하나만 두었기 때문에, 기특하게 사랑하여 小 學 과 十 九 史 略 을 가르쳤더니 애를 쓰지 않았는데도 글 뜻을 통달하게 되었다. 19) 백두현, 음식디미방 주해, 글누림, 2009, 27-28쪽. 20) 이 가계도는 김형수의 앞의 글, 이재호 역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필자의 조사자료를 참고하 여 작성함. 21) 안동시사편찬위원회, 안동시사, 인물편, 장흥효, 1999. 22) 이재호 역, 앞의 책, 73쪽. - 12 -
장씨 부인은 아버지의 가르침을 존중하여 믿고 공경히 지키고자 노력하였고, 열 살 전후로 하여서는 시를 짓거나 글씨를 쓰는 데 있어서도 남다른 바가 있었다. 그러 나 성인이 되자 스스로 생각하기를 시를 짓고 글자를 쓰는 것은 모두 여자가 할 일이 아니다 라고 여기고 더 이상 하려 하지 않았다. 23) 정부인 장계향은 19세 되던 1616년에 아버지의 제자였던 석계 이시명 (1590~1674)의 再 娶 로 출가하였다. 석계 이시명은 안동에서 200리 떨어진 寧 海 仁 良 里 에 살던 재령 이씨 雲 嶽 李 涵 ( 縣 監 )의 셋째 아들이었다. 24) 그는 1612년(광 해군 4)에 사마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들어갔으나, 광해군의 난정을 보고 과거를 단념하였다. 게다가 1636년(인조 14) 병자호란이 발발한 이후 국치를 부끄럽게 여겨 세상과 인연을 끊고 은거생활을 하였다. 25) 정부인 장계향은 출가한 후 6남 2녀를 낳았고, 전부인 광산 김씨( 金 思 安 )의 소 생과 합하여 7남 3녀를 양육하였다. 일곱 명의 아들은 그 시대의 이름난 名 儒 가 되어 세칭 七 賢 子 로 칭송받았으며, 그 가운데 존재 이휘일과 갈암 이현일(이조판서 역임)은 특히 현달한 인물이었다. 26) 그밖에 정부인 장계향의 주요 생애는 다음과 같다. 1622년에 친정 어머니가 사 망하였고, 1631년에는 부군을 따라 寧 海 府 英 陽 縣 石 保 村 (현재 英 陽 郡 石 保 面 院 里 )으로 이주하였으며, 1633년에는 시아버지와 친정 아버지가 모두 사망하였다. 그리고 1644년에는 시어머니가 사망하였다. 병자호란으로 인한 부군의 痛 恨 으로 1652년에는 부군을 따라 英 陽 縣 首 比 로 이거하였다. 그러다가 1672년에 이 글에 서 다루고자 하는 음식디미방 을 저술하였다. 27) 이듬해 1673년에는 安 東 大 明 洞 (현재 안동시 풍산읍 壽 谷 里 )로 이주하였고, 부군도 사망하였다. 정부인은 그 후 1680년 7월 7일에 향년 83세로 영해부 석보촌에서 별세하였다. 28) 정부인이 별세할 당시에는 품계가 宜 人 이었다. 그래서 신주 함중에는 宜 人 安 東 張 氏 諱 桂 香 神 主 라고 적었던 것이다. 현전하는 敎 旨 를 보면 정부인 품계는 사후 9 년이 지나서 1689년(숙종 15) 8월 19일에 追 贈 된 것이다. 교지에서 밝혔듯이, 셋 째 아들 갈암 이현일이 顯 貴 하여 법전에 따라 사후에 품계가 올라간 것이다. 따라 23) 이재호 역, 앞의 책, 23-25쪽 참조. 24) 이재호 역, 앞의 책, 69쪽, 72쪽. 25) 민족문화대백과사전, 18, 한국정신문화연구원, 1991. 26) 이재호 역, 앞의 책, 34쪽 참조. 27) 이재호 역, 앞의 책에 실린 정부인 年 譜 에는 음식디미방 을 1672년에 저술했다고 하지만, 그 렇게 단정할 수 있는 근거를 찾지는 못했다. 28) 이재호 역, 앞의 책, 69쪽 참조. - 13 -
서 엄밀하게 말하면 贈 貞 夫 人 장계향 이 맞다. 하지만 추증된 사실을 굳이 밝히 지 않고도 품계나 관직을 표현하는 것이 통용되므로, 정부인 장계향 이라고 할 수 있다. 참고로 교지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세로쓰기를 가로쓰기로 필자가 전환 함). 29) 敎 旨 宜 人 張 氏 贈 貞 夫 人 者 康 凞 二 十 八 年 八 月 十 九 日 嘉 善 大 夫 司 憲 府 大 司 憲 兼 成 均 館 祭 酒 李 玄 逸 妣 依 法 典 贈 追 한 사람의 생애를 평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료가 있어도 쉽지 않 고, 자료가 없으면 더 어렵다. 그러나 남겨지고 알려진 제한된 자료만으로도 일정 하게 드러나는 면을 거론할 수 있다. 다행이 정부인 장계향에 대한 자료는 제법 잘 보전되어 온 편이다. 우리나라에서는 인물의 碑 文 이나 行 狀 을 봐도 남달리 긍정적인 부분만 거론되는 경향이 매우 강하다. 위인전기를 봐도 장점만을 부각시키거나 거론하는데, 서양의 위인전기는 애초에 평범하게 자라던 아이가 한 단계씩 성실하게 발전하거나, 이런 저런 시행착오를 거쳐서 훌륭한 인간으로 거듭나는 삶의 모습을 제법 진솔하게 밝 히는 것으로 안다. 이런 점을 고려하여 보면, 정부인 장계향에 대해서 아들 갈암 이현일이 行 實 記 에 적은 내용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부분이 주를 이루는 것은 당연하다. 어릴 적부터 총명하고 실수 한번 하지 않은 듯이 완벽한 인간으로 기록 된 것도 사실이다. 이것은 한국의 인물평에 관한 문화적 전통이다. 중요한 사실은, 흔히 뚜렷한 근거 없이 인물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을 하는 경우가 많은데 비해서, 갈암 이현일은 분명한 근거를 제시하면서 정부인에 대해서 서술하고 있다는 점이 29) 이재호 역, 앞의 책, 화보에 수록된 사진. - 14 -
다.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에 정부인에 대해서 작자를 달리하는 여러 편의 글이 있지만, 표현만 다를 뿐 갈암 이현일이 쓴 행실기 에 나오는 이야기를 되풀이하고 있다. 2) 장계향의 삶과 의식 정부인의 삶과 의식에 대해서는 정부인 안동장씨 실기 를 통하여 전체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많은 자료가 전해오는 것은 아니지만, 정부인의 일생은 효녀, 良 妻, 賢 母, 성현의 교훈 실천자, 實 學 的 지식인, 교육자, 봉사자, 서화가 등의 영역에 서 검토할 수 있겠다. (1) 효녀로서 장계향 정부인의 아들 갈암 이현일이 쓴 行 實 記 를 보면, 정부인은 지극한 효녀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 1> 어머니 권씨 부인이 중년에 질병이 나서 여러 해 동안 낫지 않아 고통에 시달리자 정부인이 울면서 밤낮으로 모시고 있으면서 음식을 공양할 때는 몸소 친히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30) <자료 2> 시집을 온 후에는 해마다 한 번씩 친정에 돌아가서 부모님의 안부를 살폈다. 얼마 되지 않아서 어머니 권씨 부인이 세상을 떠났는데 아버지 경당선생이 60세에 이르 렀는데도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정부인은 부군에게 요청하여 친정집에 돌아가 서 아버지를 봉양하고 경당선생이 계실을 맞이한 뒤에야 시가로 돌아왔다. 31) <자료 3> 경당선생이 만년에 아들 셋과 딸 하나를 두었는데, 경당선생이 세상을 떠날 때 맏 아들이 겨우 8세였다. 정부인은 부군에게 말하여 큰 아들을 데리고 와서 기르고 또 가르쳤으며, 조금 뒤에 친정에 가서 계모를 맞이해 왔으며, 여러 아우들을 데 리고 와서 집을 지어서 살게 하였다. 친정 조부와 아버지 신주를 모시고 와서 봄, 가을의 향사를 지냈으며 친정 아우들을 장가들이고 시집보내는 일을 시기를 놓치 지 않도록 했다. 사람들은 부군의 의리를 장하게 여기면서도 부인의 효성을 칭찬 하였다. 32) <자료 4> 정부인의 첫아들 휘일, 막내아들 운일, 딸 두 사람은 모두 불행하여 정부인보다 먼 30) 이재호 역, 앞의 책, 25쪽. 31) 이재호 역, 앞의 책, 29쪽. 32) 이재호 역, 앞의 책, 29쪽. - 15 -
저 죽었다. 사람들이 생각하기를 부인께서 반드시 슬픈 감정으로 인해 자기의 생 명을 손상시키게 될 것이다 라고 여겼으나, 정부인은 곧 감정을 줄이고 슬픈 마 음을 억제하여 지나치게 상심하는 지경에까지 이르지는 않으면서 말하기를 나는 애통이 절박하다는 이유로 돌아가신 부모님이 남긴 내 몸을 毁 傷 시킬 수는 없다 고 하였다. 33) 친정어머니 안동 권씨가 아팠을 때 울면서 성심성의껏 자신이 음식을 준비해서 봉양을 해드린 일은 일반적인 효녀의 모습에 해당한다. 효녀의 모습이 강하게 드러 나는 것은 출가한 후에 친정집과 친정부모를 위해 효행을 하는 대목이다. 처음 무 남독녀였던 정부인은 출가한 후에 어머니가 돌아가시자 홀로 된 친정아버지를 위 하여 친정에 와서 살면서 친정의 대를 이를 수 있도록 노력한 흔적이 역력하다. 친 정아버지가 뒤늦게 재혼을 하여 낳은 이복 남동생을 자신의 집에 데리고 가서 길 렀다. 그리고 친정의 제사도 정부인이 주관하여 모셨고, 나이 차이가 많은 이복 동 생들이 제 때에 成 婚 할 수 있도록 적극 도왔다. 정부인은 자기가 낳은 자식들 3명인 자신보다 먼저 죽게 되어 주변 사람들이 행 여 정부인이 몸을 상하게 할까 염려하였을 때, 부모로부터 물려받은 몸을 훼손할 수 없다고 하였다. 부모에게 불효를 하지 않기 위해서 자기의 몸을 잘 관리해야 한 다는 의식이 투철하다. 행실기 에 보면,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에는 효도하고 근신하는 절차가 갖 추어져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정부인은 시부모보다는 친정부모와 친정을 위해서 효행을 다했다고 하겠다. 그것은 부군 석계 이시명이 셋째 아들이라는 점, 친정에 는 아버지가 60세에 이르렀는데도 아들이 없었다는 점, 뒷날 아버지가 재혼을 하 여 얻은 남동생은 너무 어렸다는 점, 부군이 아버지 경당선생의 제자였다는 점 등 이 함께 작용한 것으로 이해된다. (2) 良 妻 로서 장계향 行 實 記 를 보면 정부인은 현명하고 적절하게 부군을 내조하였음을 알 수 있다. <자료 5> 시아버지와 시어머니를 섬김에는 효도하고 근신하는 절차가 갖추어져 있었으며, 부군을 받들어 섬기면서 근 60년 동안 서로가 손님을 대하듯이 공경하였으며, 모 든 일을 반드시 부군에게 먼저 아뢰어 명령을 받은 뒤에 실행하였다. 34) 33) 이재호 역, 앞의 책, 31쪽. 34) 이재호 역, 앞의 책, 25쪽. - 16 -
<자료 6> 선군자께서 성품이 엄격하셨는데, 무릇 성을 내는 일이 있을 때마다 부인께서 조 용히 성낸 일을 풀어드려서 과격한 행동에까지 이르지 않도록 하셨다. 일찍이 선 군자께서 도와서 말하기를, 당신께서는 이미 세상을 피해 살면서 집에서 생활하 고 있으니, 마땅히 詩 經 과 禮 記 로써 아들과 손자들을 가르치고 지도해야 할 것입니다. 어찌 이 세월에 맞추어서 어른과 아이들을 거느리고서 학문을 강론하고 예절을 익히도록 하여, 前 代 를 빛내고, 後 進 을 啓 發 시키는 사업을 크게 이루지 않 으십니까? 라고 하니, 선군자께서 그 말을 기쁘게 받아들였다. 그래서, 나중에 와 서는 가는 곳마다 매양 초하루와 보름에는 小 學 과 性 理 學 의 글을 강론하고, 간혹 鄕 射 禮 와 士 相 見 의 의식을 시행하여 후학들을 勉 勵 하였으니, 부인이 家 長 을 도와 준 공로가 많았던 것이다. 35) 이런 자료를 보면, 부부간에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는 모습이 매우 강하게 드러난 다. 그러면서도 정부인은 모든 일을 부군에게 설명하고 부군의 지시를 따르기도 하 고, 부군을 더 나은 길로 부드럽게 인도하는 역할도 하였다. 전자는 흔히 말하는 女 必 從 夫 의 논리이며, 후자는 비록 가부장적 사회일지언정 부인도 부군에게 국가와 사회를 위해서 더 높은 이상을 실현하도록 자극하거나 권유하는 모습이다. 특히 석 계 이시명은 병자호란으로 조선이 오랑캐의 나라에 굴복하였다고 상심하여 세상을 등지고 은둔하면서 삶의 의욕을 잃고 있었는데, 이 때 정부인은 부군에게 지식인으 로서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적절한 조언을 한 것으로 보인다. (3) 賢 母 로서 장계향 정부인은 현명한 어머니로 일생을 살았다. 특히 정부인은 상처한 부군에게 후배 위로 시집을 왔는데, 시집올 당시에 이미 선배위의 소생이 둘 있었다. 한편으로는 계모로서, 다른 한편으로는 생모로서 어떻게 자녀를 길렀는지에 대해 행실기 를 보도록 하자. <자료 7> 전부인의 아들을 어루만져 주고 사랑하기를 자기가 낳은 아들과 차별이 없었다. 아들을 가르치고 일과를 매겨 독려하기를 또한 지극하게 하였다. 전부인의 아들과 딸이 장가가고 시집갈 때에 이르러서는 혼수와 물건을 주는 것도 자기가 낳은 자 녀들에게보다 더 많이 주었다. 36) <자료 8> 정부인은 아들 6인과 딸 2인을 두었는데, 자녀들에게 베푸는 사랑은 아주 지나쳤 지만 과실이 있으면 잘못을 바로 잡아 꾸짖고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았다. 37) <자료 9> 여가가 있을 때에는 여러 아들과 딸들을 가르치면서 반드시 부모를 잘 섬기고, 형 35) 이재호 역, 앞의 책, 28-29쪽. 36) 이재호 역, 앞의 책, 25쪽. 37) 이재호 역, 앞의 책, 27쪽. - 17 -
에게 공손해야 하며[ 孝 悌 ], 마음이 성실하고 거짓이 없어야 하며[ 忠 信 ], 공경하면 질서가 서고, 태만하면 사업이 실패하며[ 敬 怠 ], 의리를 따르면 立 身 하고 욕심을 따 르면 亡 身 한다는 사실을 곡진하게 타일러 말하고 되풀이하여 설명하였다. 38) <자료 10> 내가(이현일) 평소에 일찍이 야비한 말과 버릇없는 말로 남에게 함부로 하지 않 은 것은 실로 정부인이 어릴 때부터 금지하고 경계한 덕분이다. 39) <자료 11> 여러 아들에게 경계하기를 너희들이 비록 글을 잘 짓는다는 명성은 있지마는 나 는 귀중하게 여기지 않는다. 다만, 한 가지 善 行 이 있다는 말을 듣는다면 나는 문 득 기뻐하면서 잊지 않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40) <자료 12> 정사년(1677)에 현일이 선대의 음덕으로 국왕을 시종하는 관직에 외람히 뽑혀서 궁중에서 베푸는 잔치에 참여하고, 정부인에게 推 恩 하여 쌀, 콩, 명주, 솜과 음식 물을 하사받았다. 사람들은 모두 영화로 여겼으나, 부인께서는 안색에 기쁨을 나 타내지 않고 현일을 돌아보고 말하기를 나는 이 영화가 너의 돌아가신 아버지가 생존했을 때의 일이 아닌 것을 슬프게 생각한다 고 하면서, 더욱 행실을 닦아서 착한 일을 하라는 뜻으로 곡진하게 되풀이하였다. 41) <자료 13> [아들 휘일에게 보내는 편지] 여섯째 아이( 李 隆 逸 )로 인해서 네가 물을 많이 마시 면서 形 體 가 매우 야위어졌다는 말을 들으니 그 근심을 말할 수가 있겠느냐? 너 는 부모가 너를 생각하는 마음으로써 너의 마음을 삼고서 마음과 정신을 편안하 게 가지고서 병을 調 攝 해야 한다. 부모가 마음으로 기뻐하게 되면 네가 효자가 되 는 것이니, 학문에 힘써서 천하의 큰 才 幹 을 이루어야만 한다. 무신년(1668) 2월 2일. 언문 편지는 세상에서 信 用 하지 않기 때문에 이 한문편지 를 써서 보낸다. 42) 이런 자료에서 보면, 전처소생 잘 기르기, 아이들에게 바르고 공정하게 대하기 위해 서 많은 노력을 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특히 친자식보다 전처소생에게 더 깊은 관 심을 가지고 더 많은 사랑을 베푸는 지혜를 발휘하였다. 그러면서도 자녀들이 잘못하 는 일이 있으면 대단히 엄정하게 대처하는 교육자의 면모를 보인다. 정부인은 부드러 운 사랑과 단호한 엄정성을 동시에 구사하는 교육자적 자질을 갖춘 어머니였다. 아들 존재 이휘일을 친정아버지께 보내서 공부를 시킨 것도 이와 맥락을 같이 한다. 38) 이재호 역, 앞의 책, 27쪽. 39) 이재호 역, 앞의 책, 27쪽. 40) 이재호 역, 앞의 책, 28쪽. 41) 이재호 역, 앞의 책, 31쪽. 42) 이재호 역, 앞의 책, 19쪽. - 18 -
(5) 奉 仕 者 로서 장계향 행실기 를 읽으면 정부인은 좁게는 가정 안에서, 넓게는 문중과 이웃 사람들 가 운데서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말없이 돕는 봉사자의 면모를 보인다. <자료 14> 어린 여종[ 小 婢 ]을 돌보아 주기를 마치 자기 딸처럼 하였다. 그들에게 질병이 발 생하게 되면 반드시 그들을 위하여 음식을 먹여주고 간호하여 온전히 편안함을 얻도록 하였다. 그들이 과실과 나쁜 일을 저지르게 되면 조용히 가르치고 타일러 서 그들로 하여금 모두가 감화하여 복종하도록 했다. 그래서 남의 집 종들도 이런 일을 듣고서는 모두가 종이 되어 심부름하기를 원하지 않는 자가 없었다. 43) <자료 15> 가는 곳마다 어려서 부모를 잃은 아이, 늙어서 자녀가 없는 사람, 늙어서 아내 가 없는 사람, 늙어서 남편이 없는 사람, 늙어서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이 있으 면 불쌍히 여겨서 구휼하고 도와주었다. 이런 일을 하는 데 마치 남이 알지 못 하는 자신의 근심처럼 여기고는 자신이 가난하고 곤궁하다는 이유로 게을리 하 는 일이 없었다. 44) <자료 16> 간혹 몰래 남에게 음식물을 보내고도 다른 사람에게 알리지 못하게 하였다. 그 래서 이웃의 늙은이와 마을의 할머니들이 모두가 그의 은덕에 감동하여 오래 살 고 복받기를 빌고서 죽어서도 반드시 은덕을 보답하겠다고 축원하는 사람까지 있었다. 45) <자료 17> 媤 家 친족의 여러 부녀들과 남자들 가운데 成 人 하지 못한 사람들에게까지도 반 드시 옛날의 義 理 를 설명하면서 善 行 으로 인도하여 그들에게 道 義 에 어긋난 일 에 들어가지 못하게끔 정성스럽게 지도하기를 쉬지 않았다. 46) 이런 자료를 보면, 정부인 가정의 노비, 이웃, 집안, 문중을 가리지 않고 의지할 곳이 없는 사람들, 병든 사람들, 구휼해야 하는 사람들에게 의로운 봉사를 하였다 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당시로서는 드물게 계집종을 자기 딸처럼 대한 점, 불쌍한 사람을 돌보아주는 점, 선행을 해도 남들에게 알리지 않은 점, 친족 구성원들에게 는 도의에 맞게 행동하도록 유도한 점이 봉사자의 모습이다. 얼마나 아랫사람들한 테 호평을 받았으면 남의 집 종도 모두 정부인의 심부름을 해주기를 원했겠는가? 43) 이재호 역, 앞의 책, 25-26쪽. 44) 이재호 역, 앞의 책, 26쪽. 45) 이재호 역, 앞의 책, 26쪽. 46) 이재호 역, 앞의 책, 27쪽. - 19 -
여기서 가난하고 외롭고 어려운 상황에 처한 사람을 위해서 나눔과 베풂을 실천하 는 봉사자 장계향의 진면목이 떠오른다. (6) 聖 賢 의 가르침 실천자로서 장계향 정부인은 성인의 가르침이 몸에 배어 있었던 것 같다. 물질보다는 바람직하게 사 는 법, 순간의 기쁨보다는 오래 음미될 수 있는 옳은 길을 선택하고, 화를 내기보 다는 잘못한 사람이 느낄 수 있도록 하는 유순한 도량, 그리고 의리와 선행을 중요 하게 생각하고 실천하였다. 정부인 행실기 를 보도록 하자. <자료 18> 정부인이 평소에 생각하기를 옛날의 성인과 현인들의 말씀은 반드시 존중하여 본받아야만 될 것이다 라고 여기고 있었으나, 매양 글은 글대로 읽고 사람은 사람대로 행동하는 폐단을 탄식하였다. 자신이 아기를 갖게 되자 옛날 烈 女 傳 에 있는 경계를 생각하고는 비록 과일과 채소 등의 식물일지라도 모양과 빛깔이 완전하고 바르지 않은 것은 모두 입에 대지 않았다. 47) <자료 19> 같은 마을에 어머니의 장수를 축하하는 잔치가 있어서 族 親 과 姻 戚 의 內 外 사 람들이 모두 모이고, 기생과 음악이 함께 펼쳐지고 處 容 舞 의 鬼 面 戱 가 번갈아 펼쳐졌다. 정부인은 아기를 갖고 있었으므로, 즉시 머리를 숙이고 관심을 두지 않았으며 종일토록 쳐다보지 않았다. 친정아버지 경당선생이 이 이야기를 듣고 감탄하면서 너는 나에게 배운 바를 져버리지 않았구나 라고 하였다. 48) <자료 20> 늘 말하기를 善 行 은 사람들이 다 하고자 하는 바이다. 어린아이에게도 네가 착하다 고 하면 아이가 기뻐할 것이고 네가 착하지 못하다 고 하면 아이가 성을 낼 것이다. 그러므로 선행을 당연히 해야 할 것은 사람들 마음이 다 같이 그렇게 여기는 바이다 라고 하였다. 또 말하기를 성인이 된 사람은 세상에 살 아있는 사람이 아니고 보통사람보다 아주 뛰어나다면 진실로 따라갈 수 없겠지 만, 성인의 용모와 언어가 처음부터 보통사람과 다른 데가 없으며, 성인의 행동 도 또한 모두가 인륜의 날마다 하는 일이라면, 사람들이 성인을 배우지 않는 것 을 근심할 뿐이지, 진실로 성인을 배우게 된다면 무엇이 어렵겠는가? 라고 하 였다. 49) <자료 21> 정부인이 말하기를 나는 일찍이 세상 사람들이 物 慾 으로써 의리를 해치는 일 을 근심하고 있었는데, 의리는 소중한 것이 되고 물욕은 가벼운 것이 되니, 어 찌 소중한 의리를 버리고서 가벼운 물욕을 취할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50) <자료 22> 부군이 時 事 에 대해서 즐거워하지 않았기 때문에 世 間 의 營 利 에 관한 일에는 뜻 47) 이재호 역, 앞의 책, 26쪽. 48) 이재호 역, 앞의 책, 26-27쪽. 49) 이재호 역, 앞의 책, 28쪽. 50) 이재호 역, 앞의 책, 28쪽. - 20 -
을 끊고 있었는데, 정부인이 부군과 뜻을 같이하고 있었기에 자주 거주지를 옮기 고 이사하여 곤란을 겪었지만, 끝내 원망하고 탓하는 기색이 없었으며, 음식과 의 복은 간소하고 담박하며 완전하고 청결한 것만 취할 뿐이었다. 그런 이유로 世 俗 에서 숭상하는 화려하고 珍 奇 한 것에 대해서는 좋아하는 것이 없었다. 51) <자료 23> 정부인이 타고난 성품과 도량이 너그럽고 유순하였으므로, 비록 급작스러운 일 을 당하더라도 빨리 말을 하고 당황하여 안색이 변하는 일은 없었으며, 또한 기 쁨과 노여움에 마음이 움직이지 않았다. 젊었을 때 한번은 베 짜는 일을 하는 데, 어린 여종이 잘못하여 불을 내어 베를 절반이나 태웠으나, 정부인은 어린 여종을 조금이라도 꾸짖거나 성내지 않았으니, 사람들이 그 도량에 감복했다. 52) <자료 24> 정부인이 타고난 성품이 이미 풍부한데, 게다가 學 力 까지 첨가하였으며, 仁 愛 하 고 懇 惻 하며, 착한 일을 하기를 즐거워하고 옳은 일을 하기를 좋아하였는데, 젊 을 때부터 늙을 때까지 처음과 끝이 한결같았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비록 기력 이 쇠약하여 하는 일에 게을러져서 생각이 다른 일에는 미치지 못하였으나, 오 직 사람들을 인도하여 착한 일을 하도록 하는 뜻만은 끝내 조금도 줄어들지 않 았다. 53) 정부인은 물욕 때문에 도리를 그르쳐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으며, 선행을 하기 위 해 노력하면 누구든지 점진적으로 성인의 길을 갈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성인에 대해서는 처음부터 있는 것이 아니라 노력하는 가운데 성인이 될 수 있다는 교육 관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가치관은 아들 갈암 이현일이 평했듯이, 정부인의 타 고난 성품과 후천적 학습이 결합되어 형성된 것이며, 그것이 언제나 한결같은 마음 이었기에 줄곧 변함이 없었다는 데서 더 큰 의의가 있다. (6) 實 學 的 여류 지식인으로서 장계향 정부인은 10세 전후에 글 짓고 학문하는 것에 대해서 타고난 소질을 발휘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정부인 행실기 에 잘 나타나고 있다. <자료 25> 경당선생이 小 學 과 十 九 史 略 을 가르쳤더니, 애를 쓰지 않는데도 글 뜻을 통 달하게 되었다. 경당이 일찍이 門 人 小 子 들과 元 會 運 世 의 運 數 를 말하자 이 학설 을 깨달아 아는 사람이 없었다. 조금 뒤 안방에 들어와서 딸(장계향)을 불러서 그 학설을 물으니 나이가 겨우 열 살 남짓한데도, 잠시 동안 잠잠히 앉아 있다 가 그 수를 낱낱이 세어 대답하니 선생이 매우 기특하게 생각하였다. 이로부터 51) 이재호 역, 앞의 책, 30쪽. 52) 이재호 역, 앞의 책, 30쪽. 53) 이재호 역, 앞의 책, 31쪽. - 21 -
선생이 아침저녁의 여가에 면전에서 가르치고 말로써 전하여 주니, 이것이 모두 성현의 격언이 아닌 것이 없었다. 54) 이 일화를 보면, 정부인은 어릴 적부터 아버지 경당선생으로부터 다른 제자들과 마찬가지로 일정하게 수학을 했을 뿐만 아니라 그 수준이 다른 제자들보다 앞서있 었다는 사실을 엿볼 수 있다. 그리고 10세 전후에 蕭 蕭 吟, 敬 身 吟 과 같은 시를 지었다. 55) 또한 經 史, 학문에 정통하고 초서에 능했던 淸 風 子 鄭 允 穆 이 일찍이 부 인이 쓴 赤 壁 賦 의 필체를 보고 筆 勢 가 굳세고 강하므로 우리나라 사람이 쓴 것이 아니라 중국 사람이 쓴 筆 跡 이 아닌가 라고 했다는 일화도 전해온다. 56) 아버지 경당의 가르침도 적절했을 것이지만, 정부인은 타고난 재주가 있었다. 그 런데 성년이 되자 자신이 생각하기를 시를 짓고 글자를 쓰는 것은 모두 여자가 해야 할 일은 아니다 라고 여기고는 마침내 그것을 중단하였다. 57) 이를 보면 정 부인이 기본적인 공부를 했지만, 남성본위의 사회에서 바람직한 여성의 역할이 무 엇인지를 알게 되면서 실생활에 관한 실용적인 지식으로 관심을 돌린 것 같다. 그럼에도 정부인이 남긴 시로는 백발 늙은이의 딱한 사정을 대변하는 鶴 髮 詩, 성인에 대해 읊은 聖 人 吟, 솔솔 내리는 빗소리에 대해 읊은 蕭 蕭 吟, 몸가짐을 조심할 것에 대해 읊은 敬 身 吟, 손자 신급( 李 檼 의 兒 名 )에게 지어준 贈 孫 新 及, 손자 성급( 李 栽 의 아명)에게 지어준 贈 孫 聖 及, 드물고도 드물게 오래 사는 慶 事 에 대해 읊은 稀 又 稀 등이 남아 있다. 58) 그 밖에도 아들 휘일에게 보내는 편지 [ 寄 兒 徽 逸 ] 한 통이 전해오는 바, 건강관리와 함께 학문에 정진할 것을 부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런 글을 보면 어릴 때부터 총명하였고 일정한 학업을 하여 식 견이 풍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다음 자료는 이를 뒷받침한다. <자료 25> 정부인은 학문과 재능을 숨겨서 스스로의 지조를 지키고 자기 몸을 낮추고 순 종하면서 스스로 처신하고 있었지만, 기상과 품격은 호방하고 쾌활하며 식견과 도량은 청아하고 원대하였기에 古 今 의 事 變 에 대해서도 모두 이해하지 않은 것 이 없었다. 매양 오랑캐들이 우리나라를 능멸하여 나라의 위엄이 떨치지 못한 것을 듣고 慷 慨 하면서 탄식을 하지 않은 적이 없었다. 59) 54) 이재호 역, 앞의 책, 23-24쪽. 55) 김형수, 앞의 글, 244쪽; 이재호 역, 앞의 책, 24쪽. 56) 이재호 역, 앞의 책, 24쪽. 57) 이재호 역, 앞의 책, 24쪽. 58) 이재호 역, 앞의 책, 15-19쪽. - 22 -
무엇보다 정부인의 두드러진 지적 작업의 결실로 음식디미방 을 꼽을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노년기에 눈이 어두운 가운데 쓴 음식디미방 은 우리나라 최초의 한글 조리서이다. 당시로서는 여성이 이런 책을 쓴다고 하는 것 자체가 선각자적인 것이다. 그 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조리는 일상용, 접빈용, 의례용 음식을 만드는 지식체계로서 여성이 담당하 는 가사활동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인데, 우리 역사상 여성으로서는 처음으로 조리 법을 글로 남겨서 여러 사람이 두고두고 배울 수 있도록 한 점이다. 둘째, 다른 조 리서를 참고하여 쓴 글이 아니라, 전적으로 자기 평생의 경험을 토대로 하여 창의 적으로 상세하게 쓴 점이다. 이 속에는 친정어머니한테서 배운 것, 외갓집에 전해 오는 조리법, 자신이 축적한 조리법이 모두 포함되어 있다. 특히 17개 항목의 음식 에 대해서는 맛질방문 이라고 60) 의도적으로 밝히고 있어서 자료의 출처에 대한 학문적 의식의 일단도 보인다. 셋째, 자신이 당대의 지식인으로서 조리에 관하여 한문으로 쓸 수도 있었지만, 조리를 담당하는 여성들이 보고 실행하기 쉽도록 하기 위해서 한글로 쓴 점이다. 한글로 저술함으로써 한문으로 쓰는 것보다 훨씬 구체적 이고, 상세하게 조리의 과정과 상태를 쉽고 정확하게 표현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인쇄를 하지 않더라도 복사나 전파가 쉽게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음식디미방 을 딸자식들은 베껴가되, 가지고 가지는 말라 고 한 당부가 이를 입증하는 것이기 도 하다. 음식디미방 은 바로 현실 생활에 절대적으로 필요한 문제에 관하여 학술적으로 정리한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에 성행한 實 學 的 관점에서 저술된 것이다. 특히 조 선시대 기라성 같은 실학자들의 저술은 한결같이 한문으로 저술되었기에,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이 제한적이었다는 한계를 가진다. 그러나 정부인은 읽을 독자를 생각 하여 한글로 음식디미방 을 저술하여 널리 읽힐 수 있도록 배려하였다. 이러한 사 실은 정부인의 저술 정신이 후대의 실학자들보다도 앞선 실학의 정신 이라고 평 가되어야 한다. 결국 음식디미방 을 통해서 볼 때 정부인은 우리나라 최초의 여 59) 이재호 역, 앞의 책, 29쪽. 60) 맛질방문 이라 할 때 맛질이 무슨 뜻인지를 해명하면서 황혜성 교수가 1980년에 규곤시의 방 을 해설하면서 처음으로 예천 맛질이라는 지명으로 고증하였다. 그 후 학계에서 맛질은 예천 맛질로 통용되었다. 그런데 2009년에 백두현 교수가 음식디미방 주해 를 간행하면서, 맛질의 위치에 대해 상세히 재검토를 한 후 역시 예천 맛질로 규정하였다. 하지만, 예천 맛질과 봉화 맛 질 가운데 택일되는 것이라기보다는 두 군데 맛질을 아우르는 맛질로 보는 것이 더 타당할 수 있다. 외가가 예천 맛질에 살다가 봉화 맛질로 이사를 갔기 때문이고, 결국 맛질방문은 외가가 있던 맛질의 음식방문 으로 이해하는 것이 더 적절하기 때문이다. - 23 -
류 실학자 라는 평가도 가능하지 않을까 한다. 갈암 이현일이 정부인 행실기 를 쓰면서도, 이 귀중한 저술에 대해서 전혀 언급하지 않은 것도 정통유학의 관점에서 는 중요하지 않은 생활의 지혜 정도로 인식되었기 때문일 수 있다. (7) 書 畵 家 로서 장계향 정부인은 조선시대 남성 문인들처럼 書 畵 에도 조예가 깊었다. 남성 선비들에게도 書 는 필요조건이고 畵 는 충분조건이었데, 정부인은 서와 화에 각기 일가견이 있었다. 서예작품으로는 문중에 전해오는 것으로서, 10여세에 지은 시를 친필로 쓴 鶴 髮 帖 이 대표적이다. 61) 이 글씨는 상당한 書 歷 을 느끼게 하는 草 書 인데 여성미가 배어있는 유려한 서체로 평가할 수 있다. 다음은 1972년 당시 대구시 대명동에 살던 石 文 圭 옹이 소장하고 있던 張 夫 人 筆 帖 을 들 수 있다. 62) 필첩의 크기는 가로 26cm, 세로 38.2cm인데 한지를 몇 겹으로 한 두꺼운 표지에 장부인필첩 이라 題 하였고, 앞쪽 內 表 紙 에는 작첩자의 글씨인 듯한, 光 海 時 張 夫 人 葛 庵 李 玄 逸 母 堂 이라는 毛 筆 기록이 있고, 그 다음 면 부터 4면에 걸쳐 古 詩 가 초서로 게재되어 있고, 그 다음 뒤쪽의 內 表 紙 面 에 七 言 律 詩 가 초서로 되어 있다. 고시는 無 題 이고, 칠언율시는 示 甥 이란 제목이 붙었 다. 63) 이 필첩에 있는 글씨 또한 학발첩 의 서체와 같다고 하겠다. 게다가 음식디미방 의 글씨를 보면, 또박또박 썼을 뿐만 아니라 미려한 감각을 살려서 쓴 매우 단아한 한글 서체임을 알 수 있다. 글씨가 마음가짐을 표현하는 것 이라고 하고, 그래서 사람을 평가할 때 身 言 書 判 을 중요하게 여긴 전통사회에서 글 씨를 단아하게 썼다는 것은 성품이 단정하다는 것을 느끼게 한다. 정부인의 그림으로는 猛 虎 圖 가 전해온다. 이 그림은 정부인이 미혼 시에 그린 그림으로는 유일하게 남아 있다. 64) 입을 크게 벌려서 포효하는 호랑이의 모습이 강한 생동감을 느끼게 한다. 그런데 큰 소나무 아래 호랑이가 서 있는 구도는 마치 조선후기에 널리 유행하던 雀 虎 圖 (까치호랑이그림)의 화풍과 흡사하다. 작호도 에서는 일반적으로 소나무 가지에 까치가 앉아 있는 내용이 포함되는데, 정부인의 맹호도 에서는 까치가 보이지는 않는다. 그럼에도 전반적으로 이 맹호도 는 文 人 畵 라기보다는 한국적 民 畵 에 더 가깝다. 61) 이재호 역, 앞의 책, 화보편. 62) 김형수, 앞의 글, 249쪽, 256-260쪽. 63) 김형수, 앞의 글, 249쪽. 64) 이재호 역, 앞의 책, 화보편. - 24 -
한편 1972년 당시 대구시 동구 파동에 살던 정부인의 11대손 李 長 浩 님의 말에 따르면, 전 마산중학교 교감 李 淳 燮 님이 정부인의 烙 畵 ( 山 水 畵 )를 소장하고 있다 고 한다. 65) 공개된 자료를 보지는 못해서 정확하지 않을 수 있겠지만, 조선시대에 일반적으로 산수화는 문인화이지만, 인두로 지져서 그리는 낙화는 민화에 속하고, 낙화기법의 산수화도 민화의 한 갈래이다. 맹호도와 낙화산수화 이 2점의 그림으로 유추해보건대, 정부인은 당시의 한국적 정서와 산수, 한국인의 의식에 기초한 민속과 전통에 대해서 미감을 살려 그림으로 표현한 것으로 판단된다. 어쨌든, 정부인은 서예와 그림에 상당한 조예를 가진 여성이었음에 틀림이 없다. 조선시대 지식인 가운데서 書 畵 작품을 남기고 있는 남성은 많아도 여성은 대단히 드물다. 그런데도 정부인이 서화를 남기고 있는 바, 이로 볼 때 정부인은 서화에도 능한 교양인이었다고 할 수 있다. 4. 맺음말 17세기 한글조리서로서는 세계에서 유일한 음식디미방 의 저자 정부인 안동장 씨의 실명은 張 桂 香 이었다. 조선시대 공식 기록에 여성의 이름이 사용되지 않았음 에도, 不 遷 位 신주의 後 身 陷 中 기록에서 안동장씨의 실명이 2002년에 발견되었 다. 신주의 前 身 粉 面 기록은 길제를 올릴 때 부분적으로 수정되는 데 비해서 후신 함중의 기록은 장례를 치를 당시에 기록된 내용이 그대로 보존된 것이다. 따라서 장계향이라는 이름은 정부인이 살아있을 때의 신상 정보를 담은 내용이라서 틀림 없는 실명이다. 신주에 실명을 사용한 까닭은 다음과 같다. 첫째, 정부인 안동 장씨라고 하면 복 수의 인물이 있을 수 있는 바, 특정한 인물에게만 한정되기 위해서는 실명을 밝힐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기록되었을 것이다. 둘째, 죽은 후에는 부부무별 의 논리 에 따라서 남성들처럼 부인들에게 시집오기 전의 실명을 사용하여 존재의 개별적 위상을 높여준 것이다. 정부인 장계향이라는 실명은 어쩌면 신주에 기록된 여성의 실명 가운데서 제법 후대의 것일 가능성이 있다. 그 이유는 앞으로 더 많은 조사를 해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조선후기에 유교의 종법이 향촌사회에 널리 실행되자 여성차별이 심 65) 김형수, 앞의 글, 261쪽. - 25 -
해지면서 자꾸만 여성의 실명 사용이 약화되었을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정부인 장계향의 삶의 의식을 중심으로 생애를 검토해 본 결과 그는 조선후기 체제의 현명하고 덕성을 겸비한 여성 가운데 대표적인 인물이라고 평가할 수 있 다. 그의 아들 갈암 이현일이 쓴 행실기 의 내용을 살펴본 결과 정부인은 다방면 에서 소질과 능력, 덕성을 갖추고 있었다. 후손이 끊어질 상황에 처한 친정 부모를 위해 성심성의를 다해 노력한 孝 女, 부군을 위해서 조력을 아끼지 않은 良 妻, 전처 가 낳은 아이와 자신이 낳은 아이를 차별 없이 모두 잘 기른 賢 母, 가난하고 못 배 우고 어려운 처지에 있는 사람들을 보살피는 奉 仕 者, 성현의 가르침을 따라 선행을 실천하는 사람, 여성으로서 현실생활에 바로 쓸 수 있는 학술적 작업을 하는 실학 적 지식인, 서화에 조예가 깊은 書 畵 家 등의 면모를 동시에 갖추고 있었다. 이점에서 정부인은 한국에서 가장 모범적인 삶을 산 여성이라고 할 수 있다. 특 히 정부인은 음식디미방 이라는 한글 조리서를 남겼기 때문에 한국 최초의 여류 실학자 로 평가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정부인의 삶과 의식에 대해서는, 비록 아 들 갈암 이현일이 쓴 행실기 에 의존하여 살펴보았지만, 그것은 상당한 근거를 제 시하면서 서술된 것이어서 객관적 신뢰도가 높다. 다만, 우리나라의 行 狀, 墓 碣 銘, 墓 誌, 傳 記 등이 일반적으로 인물의 장점을 서술함으로써 후세들에게 귀감이 될 수 있다는 논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문화적 전통 속에 정부인 행실기 가 놓여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다. - 26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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