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서평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 와다 하루끼 저, 남기정 역, 와다 하루끼의 북한현대사, 파주: 창비, 2014. 김태우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I. 머리말 현대 북한 연구에서 와다 하루끼( 和 田 春 樹, 이하 와다 )를 거론하는 것 은 다소 진부하게 느껴질 수도 있다. 북한에 관한 그의 첫 번째 연구논문 이 1981년 일본에서 처음으로 발표되었고, 그 번역본이 1983년 분단전 후의 현대사 에 수록되어 한국인들에게 알려진 지도 어느새 만 30년이 넘었다. 그리고 현대 북한에 대한 대표적 해석인 그의 유격대국가론이 1993년 일본의 진보성향 월간지 세카이( 世 界 ) 를 통해 공식적으로 발표 된 지도 20년이 지났다. 1) 와다가 오랜 기간 동안 북한사 연구를 선도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도대체 언제 적 와다인가, 아직도 와다인가 라는 연 구자들의 원성이 나올 법도 하다. 1) 和 田 春 樹, ソ 連 の 朝 鮮 政 策, 社 會 科 學 硏 究, 第 33 卷 4 號 (1981); 와다 하루끼, 소련의 대북한정책 1945-1946, 분단전후의 현대사 (서울: 일월서각, 1983); 和 田 春 樹, 遊 擊 隊 國 家 の 成 立 と 展 開, 世 界, 1993 年 10 月 號.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67 그런데 최소한 나의 관점에서 보자면, 이 노학자의 주장은 전혀 진부 하지 않다. 오히려 그의 주장들은 여전히 새롭고 도전적이다. 그는 여전 히 다양한 국가들의 새로운 자료들과 논저들을 누구보다 열심히 읽고 있 다. 그리고 깨어있는 젊은 정신으로 학술적 비판의 창끝을 날카롭게 벼 려, 새로운 역사적 전망을 끊임없이 제시하고, 심지어 과거 자신의 주장 들까지 거침없이 비판하곤 한다. 그는 불과 수개월 전 발표된 자신의 주 장을 스스로 전복시키기도 한다. 그리고 자기 연구의 연장선상에서 연구 대상의 미래에 대한 전망과 현시대 사람들의 실천적 목표까지 구체적으 로 제시하곤 한다. 그는 여전히 젊다. 한국에서 와다는 유격대국가 라는 현대 북한(정확히는 김일성시대 의 북한)에 관한 대표적인 해석을 제시한 연구자로 잘 알려져 있다. 그러나 사실 와다는 일본 내의 최고의 러시아 연구자로 유명했다. 그는 도쿄대 학교 서양사학과에서 러시아사를 전공했고, 도쿄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에서 교수로 재직했다. 따라서 매우 당연한 사실일 수도 있지만, 그는 러 시아어에 능통하다. 그런데 그는 러시아어뿐만 아니라, 한국어와 중국어 문헌도 읽을 수 있다. 이는 역사학자로서 대단한 강점이 될 수 있는데, 실제 그의 책에는 그의 모국어인 일본어를 포함해 영어, 러시아어, 중국 어, 한국어, 독일어 등 최소 6개 국어의 1차 자료와 논저들이 방대하게 인용되는 것을 볼 수 있다. 한국에서 출간된 한국인 소장학자들의 최신 논저들이 직접적으로 인용되고, 수개월 전 로동신문 사설의 내용이 구 체적으로 분석된다. 미국은 물론 동유럽과 러시아에서 새롭게 공개된 1 차 자료나 저서의 내용이 세세하게 등장한다. 이처럼 다양한 국가의 방 대한 자료와 논저를 끊임없이 읽고 있는 연구자의 최신 논저가 어찌 진 부할 수 있겠는가? 끊임없이 새로운 자료와 논저를 읽는 과정에서 자기 자신에게까지 비 판의 창끝을 돌린 사례는 한국에서 북조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
168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로 를 출판하는 과정에서 대표적으로 살펴볼 수 있다. 이 책은 원래 1998 년 일본에서 북조선: 유격대국가의 현재( 北 朝 鮮 : 遊 擊 隊 國 家 の 現 在 ) 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런데 일본에서 책이 출간된 직후 한국에서 개최된 학술회의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유격대국가론이 김 일성 사후의 북한을 이해하는 데 부적절하다는 판단에 이르게 되었다. 이에 와다는 서둘러 정규군국가 라는 새로운 모델을 만들어 김정일시대 의 북한 정치문화에 대해 설명했고, 이를 한국에서 출간된 번역서 북조 선: 유격대국가에서 정규군국가로 에 직접적으로 반영했다. 와다의 정규 군국가론은 발표 초기에 한국 학자들에 의해 아무런 호응도 얻지 못했지 만, 1999년 6월 북한에서 선군정치( 先 軍 政 治 ) 라는 개념을 전면화함으로 써 와다의 해석은 놀라운 혜안이자 선견지명으로 간주되었다. 이 같은 사례들을 되짚어 보며, 우리는 십여 년 만에 한국에서 출판된 와다의 새로운 북한 관련 서적에 또 다시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2012년 와다는 자신의 북한 연구를 총괄하는 북조선현대사( 北 朝 鮮 現 代 史 ) 라 는 얇은 저서 한 권을 일본에서 출판했고, 2014년 이 책을 한국에서 와 다 하루끼의 북한현대사(이하 북한현대사 ) 라는 제목으로 번역 출간 (남기정 번역)했다. 그런데 이 책은 이전 저서와는 달리, 그만의 새로운 역사자료의 발굴을 통해 북한에 관한 새로운 역사상을 제공하거나, 그 전에 제시된 적 없는 북한에 관한 새로운 모델을 제공하는 책이 아니라 는 점에서 실망스러운 측면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다는 지난 십 여 년의 기간 동안 새롭게 발표된 학계의 연구성과들과 급변하는 동북아 의 역사상을 반영하여 현대 북한에 관한 그만의 독특한 관점과 인식을 이 얇은 책에 거침없이 풀어놓았다. 과연 이 젊은 노학자가 우리에게 전 달해주고 싶은 북한사는 어떤 내용들로 구성되어 있는지, 현재 시점에서 중요한 역사상은 무엇인지, 이 얇은 책이 건네는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경청해볼 필요가 있다.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69 Ⅱ. 저서에 반영된 역사관과 연구방법론 북한현대사 는 총 9장 체제로 이루어져 있다. 여기에 일본의 원저에 없는 <보론: 김정은 시대의 북한>이 추가되었다. 자신의 연구를 끊임없 이 갱신해나가는 학구적 모습을 이 보론의 존재를 통해 다시 한 번 확인 할 수 있다. 보론에는 최근의 장성택 숙청과 관련된 내용까지 검토된다. 1~9장의 목차 구성내용은 북한현대사에 대한 그의 관점을 직접적으로 투영한다. 1장 <김일성과 만주항일무장투쟁(1932~1945)>은 현대 북한의 역사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일제시기 김일성의 활동이 지니는 중요성을 강조했던 그의 역사관이 직접적으로 반영되어 있다. 2장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탄생(1945~48)>은 해방 직후 북한 정치와 사회의 역동적 변화양상을 세밀하게 추적한다. 뒤에 자세히 후술하겠지만, 2장에서는 김일성 일인지배의 강화와 분단 과정에 대한 그의 고유한 관점을 흥미롭 게 살펴볼 수 있다. 3장 <한국전쟁(1948~53)>과 4장 <부흥과 사회주의 (1953~61)>는 한국전쟁의 전개과정뿐만 아니라, 전쟁을 전후하여 북한의 독특한 정치질서와 국제관계가 구축되는 과정을 정밀하게 추적한다. 그 리고 5장 <유격대국가의 성립(1961~72)>과 6장 <극장국가의 명과 암 (1972~82)>은 베트남전쟁이라는 동아시아의 위기상황을 전후하여 유격 대국가가 수립되고, 김정일 후계체제가 강화되는 과정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마지막 7장 <위기와 고립 속에서(1983~94)>, 8장 <김정일의 선군 정치 (1994~99)>, 9장 <격변 속의 북한(2000~12)>은 국제적 탈냉전을 전후 하여 북한이 위기상황을 극복해나가는 과정을 묘사하고 있다. 이상과 같은 전체 9장 체제는 1961년 을 기준으로 다시 한 번 크게 양 분될 수 있다. 와다는 현대 북한을 역사적 관점에서 이해하는 데에서 1961년이라는 시점이 중요할 뿐만 아니라, 1961년 이전과 이후 시기 북
170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한에 대한 연구자들의 분석 방법이 완연히 바뀐다는 사실을 강조한다. 와다에 의하면, 1961년까지의 북한 역사는 국가사회주의체제, 당=국가 체제 의 형성의 역사이고, 1961년 이후 북한 역사는 국가사회주의체제 위 에 구축된 2차적 구조물로서의 유격대국가의 형성과정사였다. 요컨대 와다는, 현대 북한이 1961년까지 여타 사회주의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보 편적인 국가사회주의 체제의 형성에 집중한 반면, 그 이후 시기부터는 지금의 북한 사회를 특징짓는 독창적 형태의 이데올로기와 체제 형성에 골몰한 것으로 평가한다. 그런데 앞서 언급했듯이, 1961년은 북한 연구자들의 연구방법론을 양 분하는 시점이라는 측면에서도 중요하다. 와다의 표현에 의하면, 1961 년까지의 역사에 대해서는 완전하다고 해도 좋을 정도로 명확한 역사상 을 갖게 되었는데, 그 결정적 이유는 냉전의 종언에 따른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의 내부자료 방출 때문이었다(9쪽). 2) 와다는 줄곧 북한을 알 수 있는 가장 좋은 방법이 역사적으로 생각하기 라는 사실을 강조해 왔는 데, 최소한 1961년까지는 사회주의국가 내부자료와 공식자료에 기초한 역사적 사실의 재구성이 상당 정도 가능해졌다는 것이다. 3) 반면에 와다 는, 1960년대에 이르면 소련 대사관도 북한의 내부사정을 파악하지 못하 게 되고, 1970년대 이후에는 내부자료를 아예 얻을 수 없기 때문에 현재 로서는 역사학적 연구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13쪽). 이러한 이유로 1960년대 이후 북한사회 연구를 위해서는 유격대국가론, 코포라 티즘국가론(브루스 커밍스), 수령제론(스즈키 마사유키) 등과 같은 모델 2) 앞으로 서술과정에서 본문 괄호 안의 쪽수 표시는 모두 와다 하루끼의 북한 현대사 의 페이지를 지칭하는 것임을 밝혀둔다. 3) 와다의 지도하에 완성된 서동만의 박사논문은 자료활용과 내용의 측면에서 그 대표적 사례 중 하나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서동만의 박사학위 논문을 수정 보완한 대표 저서는 다음과 같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 (1945~1961) (서울: 선인, 2005).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71 분석 에 의지할 수밖에 없게 된다. 이렇듯 이 책에서 1961년은 여러모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며, 책의 내용과 형식을 크게 양분한다. 또한 와다는 반세기 이상의 북한사 연구를 위해 기본적으로 내재적 관점 을 견지한다. 그는 이 같은 자신의 관점을 다음과 같은 문장을 통해 넌지시 제시하고 있다. 북한이라는 나라가 걸어온 곤란한 여정과 사람 들의 긴장된 생활방식은 간단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지만, 나는 같은 인 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분이 결코 적지 않다고 확신한다. 이 책은 이 런 마음으로 쓰게 되었다. (4~5쪽) 같은 인간으로서 이해할 수 있는 부 분 이 적지 않다는 말은 이 책이 북한과의 이성적인 관계를 생각하는 사 람들에게 조금이나마 참고가 될 수 있다면 다행 (6쪽)이라는 그의 기대 와도 상통한다. 그는 북한에 대한 무조건적인 적대감이나 편견을 배제한 채, 있는 그대로의 북한을 역사적 관점에서 보고 싶어 한다. 그래야만 현 대 북한의 정책들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제 그의 책에 등장하는 일부 표현들은 강고한 반공주의(혹은 반북주 의)적 입장의 한국인들에게 적잖은 거부감을 유발할 수도 있다. 예컨대 그는 김정일의 사망에 대해 북일 국교정상화를 희망해온 일본인의 한 사람으로서 나는 지난 10년 동안 국교정상화의 실현을 절실히 원했을 이 웃나라 지도자의 죽음에 대해 비통한 감정을 갖지 않을 수 없었다 (5쪽) 고 말했다. 일제시기 김일성의 만주지역 항일유격활동에 대해서도 당대 자료를 인용하며, 중국인과 조선인이 하나가 되어 협력할 것을 주장한 데서 김일성의 정치적 성숙성을 엿볼 수 있다 (30쪽), 김일성은 유능했 으며 적극적이었다 (41쪽), 일본의 엄혹한 토벌작전을 견뎌내고 살아남 아 60명의 부하와 함께 조국의 땅을 밟았다는 사실은 역시 김일성이라는 인물의 비범한 능력을 보여주는 것 (44쪽)이라고 평가한다. 이상과 같은 표현은 수십 년간 국가보안법 체제 하에서 살아온 적잖은 한국인들에게 거부감을 일으킬 수 있다. 그러나 와다의 표현은 최대한
172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역사주의적 관점에서 역사적 사실을 평가하려는 그의 관점의 발현으로 평가하는 것이 가장 정당할 것이다. 실제 이 글의 다음 장에서 자세히 분 석되겠지만, 와다는 해방 직후 소련이나 김일성세력의 분단정부 수립 과 정이나 김일성 일인독재의 형성과정을 기존의 연구논저들에 비해 훨씬 더 이른 시기에 계획적으로 추진된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사실상 분단 과 독재 문제에 있어서, 와다는 기존 논저보다 더 강하게 소련과 김일성 을 비판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남북한의 적대적 분단구조에서부 터 자유로운 이방인 역사학자 와다 하루끼는 친북도 반북도 아닌, 제3자 의 관점에서 최대한 역사주의적으로 북한을 바라보고자 한 것이다. 그런데 와다의 관점은 완벽한 역사주의적 관점이나 제3자의 객관적 관점이라기보다는, 한반도 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통한 동북아시아의 공 고한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사학자 의 관점으로 보는 것이 보다 적절할 것이다. 평화사(peace history)란, 1930년대 전반기 유럽에서 발흥한 평화 학(peace studies)의 영향을 받으며 싹튼 역사학의 분야로서, 1960년대 후 반 베트남 반전운동이 전세계적으로 확산되던 시기에 미국과 유럽을 중 심으로 대폭 성장한 학문분과를 일컫는다. 4) 그런데 실제 와다 하루끼 또 한 1960년대 베트남 반전운동의 영향을 직접적으로 받으며 성장한 대표 적 학자로 잘 알려져 있다. 5) 게다가 와다는 동북아 공동의 집 이라는 평 화체제의 구축을 주장하며, 아시아 지역협력의 중요성을 지속적으로 강 4) 1960년대 베트남전쟁의 영향에 의한 미국 및 유럽 평화사의 급성장에 대해서 는 다음 논문을 참조하시오. 이동기, 평화사란 무엇인가, 역사비평 106호 (2014). 5) 와다의 제자이자 이 책의 번역자인 남기정은 와다를 미국에 의한 일본의 후방 기지화 문제를 제기하며 1960년 안보투쟁과 베트남전쟁 반대운동의 전면에 섰 던 인물로 설명한다. 와다의 실천적 문제의식은 일본의 재군비 반대와 평화헌 법을 옹호하는 태도에서 비롯된 것이었으며, 더 나아가 그 근원에는 일본의 침략 전쟁과 식민지배에 대한 깊은 반성이 자리잡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326쪽).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73 조하고 있다. 6) 그리고 이 같은 관점은 북한현대사 에도 직접적으로 반 영되어 있다. 요컨대 와다는 자신의 논저를 평화사 적 연구성과로 표방하고 있지는 않지만, 문제의식과 연구내용 전반에 걸쳐 완연히 평화사학자(peace historian) 로 분류할 수 있는 인물이다. 와다는 일본지성사의 관점에서 보 자면, 다케우치 요시미( 竹 內 好 )에 그 사상적 기원을 갖는 진보적 아시아 주의자 의 계보에 속하는 지식인으로 분류될 수 있겠지만, 역사학의 관 점에서 보자면 러시아사학자이자 북한사학자임과 동시에 완연한 평화사 학자로 분류 가능한 인물이다. 북한현대사에 관한 그의 애정 어린 시선 이나 날선 비판의 기저에는 한반도와 동북아 평화 에 관한 그의 갈구가 존재한다고 평가해야 할 것이다. Ⅲ. 역사학적 연구를 통한 북한 이해(1945~1961) 1961년은 이 책에서 매우 중요한 시점이다. 앞서 지적했듯이, 와다는 국가사회주의의 완성과 유격대국가 형성의 시작이라는 관점에서 1961년 을 중시한다. 와다에게 국가사회주의란 소련형 사회주의를 모델로 한 전 세계 사회주의국가들의 일반적 형태를 일컫는 것으로서, 북한 또한 이 같은 보편적 조건(국가사회주의) 하에 특수성(유격대국가)이 추가된 체 제로 이해되고 있는 것이다. 또한 1961년 이전 시기에 대한 북한 연구에 서는 역사학적 연구가 중심인 반면, 1961년 이후 시기에 대해서는 모델 6)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글을 참조하시오. 와다 하루끼,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과 조선반도, 창작과비평, 87호 (1995).
174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분석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다는 관점에서 또 다시 1961년을 강조한다. 그렇다면 과거 사회주의국가들의 아카이브에서 쏟아져 나온 적잖은 1차 자료들은 1945~1961년 북한의 역사에 대해 어떻게 묘사하고 있을까? 와 다의 책에서 새롭게 제시된 역사상으로는 어떤 것이 있을까? 우선 와다는 기존 자신의 저서인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과 한국전 쟁 의 내용에 근거하여 일제시기부터 한국전쟁기에 걸친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의 초기 형성사를 구체적으로 그려내고 있다. 7) 와다는 김일 성을 북한이라는 국가의 알파요 오메가 (23쪽)라고 표현하면서, 국가의 신화가 되어버린 만주항일유격전쟁에 대한 이해야말로 현대 북한 이해 의 필수불가결한 전제라고 주장한다. 와다는 김일성의 만주 활동을 되도 록 과장하지도 축소하지도 않고 되도록 있는 그대로 보여주기 위해 노력 한다. 예컨대 일제시기 김일성을 조선의 영웅 으로 만든 보천보전투에 대해서도, 전투 희생자가 어린아이와 요릿집 주인뿐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그리고 김정일의 백두산 밀영 탄생을 주장하는 북한의 공식적 주장에 대해서도, 1942년 자료에 근거하여 러시아 보로실로프 근 처 남야영 출생설을 확고하게 강조한다. 또한 소련 제88특별저격여단의 조선인 지도자들 중에서 최용건과 김책이 김일성보다 거의 열 살 연상이 었으며 투쟁 경력이나 당력도 김일성보다 고참이었다는 사실을 제시한 다. 반면에 당시 김일성이 만주의 가혹한 기후를 견뎌낼 수 있는 강한 신 념과 육체를 지닌 사람이었고, 가장 훌륭한 군사간부이며, 중국공산당 고려인 동지 가운데 최우수 분자 (41쪽)라는 평가를 중국군으로부터 받 고 있었으며, 일본의 엄혹한 토벌작전을 견뎌내고 살아남은 비범한 능 력 (44쪽)을 지닌 인물이라는 사실도 가감 없이 드러낸다. 7) 와다 하루끼 저, 이종석 역, 김일성과 만주항일전쟁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2); 와다 하루끼 저, 서동만 역, 한국전쟁 (서울: 창작과 비평사, 1999).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75 흥미롭게도 와다는 해방 직후 북한지역 분단 정권의 형성과 김일성 우 상화의 형성 시점과 관련하여, 기존 학계의 주장보다 좀 더 이른 시점에 주목한다. 예컨대 와다는 1945년 9월 20일 스탈린의 북한 점령 방침을 소련이 점령한 북조선에 정권을 만들라는 지시 (50쪽), 즉 소련의 북한 지역 분단 정권 수립 지시로 이해한다. 그런데 이 같은 해석은 해당 지령 에 대한 가장 보수적 해석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 지령의 내용은 당대 시점의 북한에 소비에트 질서를 도입하지 말 것 을 지시함과 동시에, 북조선에서 모든 반일적 민주 정당 및 단체의 광범한 블록을 기초로 부 르주아 민주주의적 권력을 수립할 것을 원조 하라는 것이었다. 문서의 내용만으로 보자면, 분단정부 수립 지시라기보다는 통일전선 결성과 인민전선정부수립노선 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다는 이 지령을 근거로 사실상 소련과 북한의 공산 주의자들이 매우 이른 시기부터 북한지역만의 정부 수립에 골몰한 것으 로 평가한다. 더불어 와다는 북한지역의 분단 정권 수립과 관련하여 1947년 북조선 인민위원회의 수립을 중시한다는 측면에서 매우 독창적이다. 여기서 본 연구자가 독창적 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1947년 북조선인민위원 회의 역사적 성격에 관한 와다의 해석 때문이다. 와다는 1946년 11월 3일 북한지역의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 실시와 그 결과로 형성된 입법 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와다에 의하면, 1947년의 북조선인민위원회의 가장 중요한 성격은 선거로 형성된 입법기관(북조 선인민회의)의 승인을 받아 구성된 최초의 중앙 행정기구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와다는 1947년 북한 지역에서 의회와 내각을 갖춘 조선인 정권 이 탄생 (69쪽)한 것으로 해석한다. 이렇듯 선거와 의회의 구성, 그 의회 에서 승인 받은 정권기구의 형성을 강조하는 관점은 기존 논저에서 보기 힘든 와다의 독창적 관점이다. 8)
176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와다는 김일성의 일인 지배 강화나 우상숭배 현상 또한 매우 이른 시 기부터 등장한 것으로 본다. 예컨대 와다는 1946년 2월 김일성의 북조선 임시인민위원회 위원장 취임을 당의 수장이자 정권 최고의 권력자 로 올라선 것으로 파악함과 동시에, 1946년 3월 토지개혁을 통해 김일성의 권위가 강화된 사실을 강조한다. 여기까지는 기존 논저의 주장과 큰 차 이가 없다. 그런데 이후 와다는 김일성 주변 인물들의 김일성 우상화를 낱낱이 드러낸다. 1946년 5월 1일 메이데이 축전 준비위원회는 일찌감 치 개인숭배 작업에 착수하여 김일성장군 이라는 소책자를 간행 (63쪽) 했고, 같은 해 6월 김창만은 우리 민족의 위대하신 령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63쪽)라는 구호를 처음으로 선보였으며, 같은 해 8월 북조선예술총 동맹은 우리의 태양 이라는 책을 간행하여 김일성 장군의 노래 를 수 록 발표하기도 했다. 같은 달 김두봉은 북조선로동당 합당 대회에서 우 리의 지도자 김일성 장군 만세 (66쪽)라는 구호를 열창했다. 이렇듯 와다 는 스탈린이나 마오쩌둥에 대한 우상화와 유사한 김일성 우상화가 1946 년 시점부터 구체화되었다는 사실을 적시한다. 한국전쟁과 관련하여 기존 연구와 가장 구분되는 부분은 한반도 내전 이자, 동북아시아 지역전쟁이라는 관점을 상대적으로 강조하는 그의 한 국전쟁관일 것이다. 이 같은 관점은 시기구분에서도 분명하게 드러나는 데, 와다는 3장 <한국전쟁>의 시기를 1948~1953년으로 설정하고 있다. 와다는 1948년 서로 받아들일 수도, 화해할 수도 없는 존재 인 대한민국 8) 기존 학계의 주된 입장은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을 강조하는 관 점과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을 중시하는 관점으로 대별된다.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사실상 분단정권의 수립으로 보는 관점은 최 근 뉴라이트 진영으로 구분되는 지식인 그룹에서 특히 강조하는 입장이다. 뉴 라이트 지식인들의 역사인식을 반영한 소위 교학사 교과서 또한 1946년 북조 선임시인민위원회의 수립을 북한지역 분단정권의 등장으로 해석한다. 권희영 외, 한국사 (서울: 교학사, 2014), p.306.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77 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수립 자체를 중시한다. 양국은 수립 직후 부터 무력으로 상대방을 제거하여 국토를 통일 하겠다는 구상으로 불타 게 되는데, 흥미롭게도 와다는 그 같은 구상이 이웃 국가 중국의 경험 에서부터 나왔다는 사실을 강조한다(79~80쪽). 그는 남한의 북진통일과 북한의 국토완정이라는 용어 자체도 중국의 경험에서 나왔다고 주장한 다. 북한의 지도자는 중국 국공내전의 진전에 크게 자극 (81쪽)을 받아 이 전쟁으로 나아갔고, 전쟁의 실제 진행과정 또한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이후 미중전쟁으로 변화함으로써 이 전쟁은 동북아 지역전쟁이라는 성 격을 더욱 강화하게 된다. 물론 와다는 한국전쟁사 서술에서 스탈린의 역할을 결코 간과하지 않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와다는 미국과 중국에 의해 주도된 정전협정의 체결에 대해, 미중전쟁으로 전화한 한반도의 내전은 무승부로 막을 내렸다 (104)고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전후 1961년까지 북한 역사는 경제 부분의 사회주의적 개조와 정치 부 분의 주류파에 의한 일원적 지배의 달성 과정으로 설명된다. 다시 말해 1953년 이후 전후 복구와 함께 진행된 농업협동화, 1950년대 치열한 권 력투쟁의 귀결로서의 만주파 에 의한 당 정 군의 장악 과정으로 국가사 회주의 체제가 완성되었다는 것이다. 이 같은 설명 과정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흥미로운 설명 중 하나는 주 체 의 등장 시점에 관한 와다의 설명이다. 와다는 과거 자신의 저서 북 조선 을 통해, 주체의 등장시점을 1955년으로 전제한다. 9) 이 같은 관점 은 주체사상에 대해 논하고 있는 대부분의 논저들의 일반적 설명이다. 그런데 와다는 이번 저서를 통해 민족주의의 견지에서 비판하는 내용의 연설이 1955년 12월 시점에 나왔을 리가 없다 (122쪽)고 단정한다. 그는 9) 1955년 주체 의 제기는 소련에 대해 자주성을 세운다는 형태로 나온 것이었으 나 이는 동시에 중국을 겨냥한 것이기도 했다. 와다 하루키 저, 서동만 남기 정 역, 북조선 (서울: 돌베개, 2002), p.159.
178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북한에서 1960년 시점에 이르러서야 조용히 주체선언에 나섰다 (141쪽) 고 주장한다. 여기서 조용히 라는 표현을 사용한 이유는 1955년 12월에 이루어졌다는 주체 연설 을 1960년 5월에 간행한 김일성 선집 제4권을 통해 요란스럽지 않게 발표한 사실을 일컫는다. 와다가 볼 때, 1960년 발 표된 주체 연설은 소련계와 연안계를 완전히 일소한 뒤 소련 및 중국과 의 관계에서 자주적 태도를 강조한 1960년 김일성 정신의 구현 (142쪽)이 었다. 그러나 자신의 제자인 서동만의 입장과도 상이한 이 같은 관점은 이 책의 설명만으로는 여전히 부족한 추측 의 영역에 머무르고 있다. 10) Ⅳ. 모델 분석 을 통한 북한 이해: 유격대국가론에서 정규군국가론으로(1961~현재) 와다는 1961년 국가사회주의 완성 이후의 북한을 유격대국가와 정규 군국가라는 개념으로 해석한다. 여기에서 유격대국가는 국가사회주의 체제 위에 구축된 2차적 구조물 이며, 베트남전쟁에 호응하여 남조선혁 명을 일으키고, 이를 지원하여 혁명적 통일을 실현하겠다는 목표로 구 축 된 체제이다(176쪽). 요컨대 유격대국가는 베트남전쟁으로 형성된 전 통적 피포위의식의 확산 속에 형성된 강력한 국가체제로서, 1970년경에 그 상부구조가 구축되고, 1972년 헌법으로 그 제도적 완성이 달성된 것 으로 분석된다. 와다는 그 뒤 이 유격대국가 위에 새로운 국가디자인 이 10) 서동만은 1955년의 주체 연설 이 당시 북한에서 실제 진행되었다는 전제 하에 서, 1955~56년 소련계 비판과 당내 역관계의 변화를 설명한다. 그는 1955~56년 의 북한 국내 정세변화와 1955년의 주체 연설이 밀접한 상관성을 지니는 것으 로 판단한다. 서동만, 북조선사회주의체제성립사(1945~1961), pp.520~528.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79 덧칠되는 것으로 본다. 국가디자인의 대표적 예로는 1970년대 영도예술 로 대표되는 극장국가론, 가족국가론, 전통적 국가관 등이다. 이 같은 와다의 유격대국가론이 지니는 가장 중요한 의의 중 하나는 김일성의 만주항일투쟁 경력이 북한에서 현실적 규정력으로 작동하는 방식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제공해주었다는 사실일 것이다. 해방 직후 강력한 지도력을 확보한 김일성은 1950~60년대 북한 역사의 전개과정 속 에서 과거 자신과 함께 항일무장투쟁을 벌였던 오랜 동지들을 권력의 핵 심으로 부상시켰고, 이들 만주파들의 역사와 이데올로기를 중심으로 북 한만의 독특한 정치권력구조와 사회구조를 만들어내는 데 성공했다. 1967년 대외적 위기상황 속에서 항일유격대원처럼 혁명적으로 살고 일 하자 는 구호나, 1974년 생산도 학습도 생활도 항일유격대식으로 라는 구호는 북한사회의 독특한 역사적 성격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 사 례일 것이다. 그런데 이 같은 모델 분석은 아무래도 그 강력하고 분명한 이론의 전 제조건으로 인해 한계나 모순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다. 그 대표적 예는 북한의 내적 변화나 추후 변화 가능성의 설명에 대한 설득력의 부족을 지적할 수 있다. 와다는 북한 체제의 변화 과정을 하나의 커다란 집을 짓 는 과정으로 설명하기를 좋아한다. 앞서 언급했듯이 와다의 설명에 의하 면, 북한은 1961년까지 보편적 사회주의국가로서 기초 구조물의 건축을 마쳤고, 그 위에 유격대국가라는 2차 구조물을 완성했다. 그리고 가족국 가론과 같은 국가디자인들이 유격대국가라는 건물 위에 간판처럼 내걸 렸다. (198쪽) 물론 이 같은 설명은 유격대국가론의 구조를 분명하게 드러내주는 부 분이 있다. 위와 같은 비유적 설명은, 현재의 독특한 북한 체제가 어느 날 하루아침에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건물을 축조하듯 기나긴 역사적 과정을 거쳐 형성된 체제라는 것을 알기 쉽게 드러내준다. 그러나 6장의
180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제목을 <극장국가의 명과 암(1972~82)>과 같이 설정했을 때에는, 극장국 가론과 같은 소위 국가디자인과 유격대국가론의 관계가 보다 구체적으 로 분석될 필요가 있을 것이다. 상호관계에 대한 구체적 설명 없이, 유격 대국가는 클리퍼드 기어츠(Clifford Geertz)가 말하는 극장국가 다 (181쪽) 라는 단정적 명제의 제시만으로 그쳤을 때, 독자의 입장에서는 당혹스러 울 수밖에 없다. 더불어 유격대국가론은 그 형성의 원인을 외적인 조건에서 살피고 있 는 외인론 에 가까운 체제형성이론으로서, 애초 그 체제 변화 가능성 또 한 외인론적 관점에서 설명해 왔다는 사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기존 에 와다는 국제환경의 근본적 변화를 통해 북한의 변화가 가능할 것으로 판단했다. 그리고 그 같은 변화의 연장선상에서, 국가사회주의 위에 유 격대국가 대신 보다 개방적인 구조가 구축될 수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 와다는 이 모든 변화의 가능성을 현실화시킬 수 있는 최대계기로서 북한 과 일본의 화해를 지목한다. 그런데 와다 자신이 잘 보여주고 있듯이, 유격대국가를 대신하는 새 로운 국가상 으로서의 정규군국가의 등장은 외적 변화가 아닌 내적 변화 로부터 초래된 것이었다. 와다가 설명하듯이, 유격대국가의 해체는 사령 관의 부재(김일성의 죽음)가 가장 중요한 원인이었다. 김일성은 사망 후 영생불멸의 영원한 수령으로 자리매김했다. 김정일은 수령이라는 직책 을 계승할 수 없었다. 따라서 수령만이 유격대국가의 사령관인 북한 체 제에서, 김일성 사망으로 인해 북한은 갑자기 사령관 없는 유격대국가가 되어버리고 말았다. 와다는 이 같은 북한 내적 변화 를 유격대국가 해체 의 근본원인으로 제시한다. 여기서 와다는 외적 환경의 변화를 강조하는 기존의 유격대국가 변화나 해체 가능성에 대한 자신의 설명에 대해 어떤 추가적 설명도 제시하지 않는다. 나는 개인적으로 와다의 정규군국가론이 선군정치 를 표방하는 현대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81 북한사회 분석에 매우 유용한 모델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굳이 와다 자신의 유격대국가론을 해체시키면서까지 정규군국가론을 제시할 필요할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을 여전히 갖고 있다. 사실상 유격대 또한 군사활동을 수행하는 군인 조직으로서, 일면 선군정치와 같은 현대 북한 의 지배구조는 유격대국가의 완성체라고 볼 수 있는 측면도 있기 때문이 다. 또한 비록 수사에 불과하긴 하지만, 김일성이 영생불멸의 사령관으 로서 북한에 존재하고, 그 지배집단과 지배이념에 근본적 변화가 없는 상태라면 유격대국가는 여전히 굳건하게 북한에 자리잡고 있는 것일지 도 모른다. Ⅴ. 맺음말 통상적으로 집짓기는 적잖은 고통을 수반하는 지난한 과정이다. 건축 설계도를 작성하고, 양질의 자재를 확보하며, 풍부한 노동력을 투입해 벽돌을 하나하나 쌓아나가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집짓기는 철저한 계획 과 실행이 동반되어야만 하는 지난하고 고통스러운 작업임에 틀림없다. 와다는 현대 북한의 독특한 체제의 형성 과정을 집짓기의 과정에 빗대 어 설명한다. 우선 와다는 북한사회가 기반을 둔 역사적 보편성 에 주목 한다. 여기서 말하는 보편성이란, 1945년부터 1961년에 걸쳐 완성된 북 한의 국가사회주의 체제를 지칭한다. 북한은 이 같은 국가사회주의라는 기초 구조물 위에 유격대국가 라는 2차적 구조물을 축조했는데, 이는 1960년대 후반의 혁명적 대사변 에 대비한 체제로서 구축된 것이었다. 이후 1970~80년대 국가사회주의의 근간 위에 수립된 유격대국가라는 건 축물 위에는 극장국가, 가족국가, 전통적 국가 등과 같은 국가디자인들
182 통일과 평화(6집 2호 2014) 이 간판 처럼 내걸렸다. 와다는 북한의 지난 과거 역사를 집짓기에 비유하여 설명하는 데 그치 지 않고, 동아시아 평화 또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이라는 집짓기를 통 해 달성될 수 있는 것으로 전망한다. 지금으로부터 약 20년 전인 1995년, 와다는 자신의 글을 통해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축조의 필요성을 역설 했다. 이 글에서 동북아시아 는 기본적으로 중국, 타이완, 러시아, 남북 한, 일본, 미국을 지칭하며, 동남아시아와 APEC과의 연결을 당연하게 생 각하는 열린 개념으로 설정되었다. 와다는 동북아시아가 평화적으로 협 력하면 세계가 평화적으로 협력할 수 있을 것 이라고 역설함과 동시에, 한반도가 그것의 가교이자 중심이 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1) 최근 와다 는 자신의 학술활동 전반을 회고하는 인터뷰를 진행했는데, 위와 같은 20년 전의 동북아 지역주의 유토피아 구상을 여전히 굳건하게 견지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시켜 주었다. 12) 평자 개인의 관점에서 볼 때, 이 책에서 와다 하루끼 개인의 주관적 감 정이 가장 많이 투영된 부분은 마지막 9장 <격변 속의 북한(2000~12)>의 앞부분에 제시된 몇 개의 절들이었다. 이 절들은 21세기 초반 김정일 정 권 하의 북한이 러시아, 남한, 미국, 일본 등과 매우 적극적으로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고자 했던 일들에 관한 이야기로 구성되어 있다. 와다는 2000년 러시아와의 관계 정상화에 대해 북한으로서는 큰 전환 이었다고 보고, 남북정상회담에 대해서는 정말로 역사적인 순간 이었다고 높게 평가한다(268쪽). 또한 미국과의 관계 정상화 시도가 좌절된 순간을 묘 사하며, 불행하게도 고어가 부시에게 패배했다고 안타까워한다(270쪽). 일본 고이즈미 총리와의 북일교섭이 좌절되는 과정을 설명할 때에는, 일 11) 와다 하루끼,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과 조선반도, p.50. 12) 와다 하루키 남기정, 유토피아로서 지역주의와 역사가의 임무, 역사비평 109호, 2014.
일본 평화사학자의 북한에 관한 내재적 이해 183 본의 약속 파기를 배신적 행위 라고 반복적으로 표현할 정도로 불편한 감정을 고스란히 드러낸다. 이 같은 감정의 표출은 아마도 자기 학문의 궁극적 실천 목표인 한반 도 문제해결을 통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이라는 평화의 집 건축의 기 회가 좌절된 데에서 온 안타까움의 표현일 것이다. 우리는 이 같은 노학 자의 안타까움과 분노의 표출을 지켜보며, 여전히 식지 않은 그의 열정 을 엿볼 수 있다. 그는 여전히 수십 년 전의 신념과 희망을 굳건히 견지 하고 있고, 이를 실현하고자 노력하며, 이의 좌절에 분노한다. 과연 그의 생애에서 동북아시아 공동의 집 을 볼 수 있을지 모르겠지만, 평자 또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를 갈구하는 평화사학자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희망이 현실로 다가올 날을 손꼽아 기다려 본다. 그리고 지칠 줄 모르는 그의 저술 활동의 다음 편 또한 기대해 본다. 김태우(Kim, Tae-Woo) 서울대학교 국사학과에서 한국전쟁기 미 공군의 공중폭격에 관한 연구 로 박사학위를 받 았다. 주요 연구 분야는 한국현대사, 북한사, 평화사이다. 현재 서울대 통일평화연구원 HK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대표 논저로는 폭격: 미공군의 공중폭격 기록으로 읽는 한국 전쟁 (창비: 2013), 평화인문학이란 무엇인가(공저) (아카넷, 2013) 등이 있으며, 최근 논문 으로는 냉전 초기 사회주의진영 내부의 전쟁 평화 담론의 충돌과 북한의 한국전쟁 인식 변화, Limited War, Unlimited Targets: U.S. Air Force Bombing of North Korea during the Korean War, 1950-1953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