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송비평 TV 다큐멘터리의 화려한 외출 윤호진 한국방송영상산업진흥원 책임연구원 KBS스페셜 의 파격적 포맷 실험 1922년 미국인 로버트 플레어티가 북극의 나 눅(Nanook of North) 을 제작하면서부터 시작된 다큐멘터리의 역사는 1951년 미국 CBS가 지금 그것을 보라(See It Now) 를 방영하면서 본격적 TV 다큐멘터리의 시대로 전환되었다. 다큐멘터리 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던 플레어티가 탐험가 이자 인종학자로서 고립된 문화에 대한 지속적인 탐사에 심혈을 기울였다면, 그와 견줄 만한 초기 거목인 존 그리어슨은 당대의 사회가 직면하고 있 는 문제들을 진지하게 분석하고 대안을 모색하고 자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두 가지 시각 이처럼 다큐멘터리는 태동기부터 이어져 온 두 개의 흐름, 즉 소재의 사실성 또는 있는 그대로 의 자연스러움 대 강한 목적의식 또는 창조적 인 재해석 이 면면히 흐르고 있다. 즉, 플레어티가 일종의 반영(mirror)으로 그의 작품을 만드는 데 관심을 가졌다면, 그리어슨은 일종의 망치 (hammer)로 그의 작품을 이용했다. 플레어티에 게 다큐멘터리가 카메라의 창작물이었다면, 그리 어슨에게는 사전각본과 편집이 더욱 중요한 요소 였다. 따라서 이 글의 주제이기도 한 포맷실험적 장르혼합적 퓨전성 다큐멘터리는 바로 그리어슨 의 제작철학과 맥을 같이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사실성과 객관성 그리고 일정한 거리두기를 다 큐멘터리의 철칙으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픽션이 가미되고, 각종 CG를 활용한 페이크기법이 난무 하는 다큐멘터리는 그 자체가 신성모독임에 분명 하다. 그러나 다큐멘터리의 생명이라 할 수 있는 사실 0 86
소재와 장르의 벽을 넘다 라는 제작진의 모토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지금까지 KBS 스페셜 은 내레이션의 생 략, 팩션 드라마, 뮤지컬 다큐, 사실을 가장한 페이크기법 등 다양한 실험과 포맷 변화를 통해 다큐멘터리의 지 평을 확대하고 새로운 영상미학을 추구해왔다. 성을 단순한 현실반영과 등치시켜서는 곤란하다. 이러한 사실성은 사회의 표면적인 현상을 사진 찍 듯이 묘사할 뿐, 현상의 본질을 파헤치는 수준에는 도달하지 못한다. 다큐멘터리가 추구하는 객관성 역시 외형적인 가치중립적 태도가 아닌, 시시비비 를 분명하게 구분하는 심층적 분석을 전제로 한다. 바로 이 점에서 정통 다큐멘터리의 경계를 넘 나드는 다양한 포맷실험은 상호텍스트성과 장르간 혼합, 패스티시(pastiche)와 패러디(parody), 시 청자의 참여를 북돋우는 열린 텍스트, 대서사의 전 복 가능성 등 다양한 철학적, 미학적 특성을 지니 고 있다. 즉, 고정되고 일관성 있는 텍스트를 일방 적으로 건네주는 것이 아니라, 변화무쌍하고 다양 한 해석이 가능한 텍스트를 조심스럽게 전해주는 것이다. 또한 포스트모던의 시대정신을 토대로 거 대담론의 해체와 창조적 모방이 자연스럽게 이루 어지는 지점이기도 하다. 물론 정통 다큐멘터리 형식을 고수하지 않고 다양한 포맷실험을 하는 작업에는 야누스적인 성 격이 내포되어 있다. 작가정신이 담기지 않은 채 피상적인 수준에서 기교를 부리거나, 이와는 반대 로 시청자들의 이해수준을 무시한 채 자신만의 세 계를 구축하고 강요하는 작품으로 전락할 수도 있 기 때문이다. 우리 시대의 가장 대중적인 미디어인 텔레비전에서 방영되는 다큐멘터리라는 점에서 다 양한 포맷실험이 지닌 한계와 위험성을 제작진들 은 분명하게 인식할 필요가 있다. 소재와 장르의 벽을 넘다 바로 이 점에서 현재 가장 주목받고 있는 프로 그램이 바로 KBS 스페셜 이다. 소재와 장르의 벽을 넘다 라는 제작진의 모토에서 확인할 수 있 듯이, 지금까지 KBS 스페셜 은 내레이션의 생 략, 팩션 드라마, 뮤지컬 다큐, 사실을 가장한 페이 크기법 등 다양한 실험과 포맷 변화를 통해 다큐멘 터리의 지평을 확대하고 새로운 영상미학을 추구 해왔다. 예컨대, 2005년 성탄절 전야에 방송된 영원 과하루 는 정통 다큐멘터리의 필수조건이라 할 수 있는 내레이션을 파괴하고, 등장인물 간의 대화 만으로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한국에 천주교가 전 래된 지 200여년이 흐른 지금, 가톨릭신학교 입학 식에서부터 모라토리움(해외봉사활동)을 거쳐 사 제서품에 이르기까지 10년간의 사제 양성과정을 방송사상 최초로 공개한 이 작품은 잔잔한 침묵과 차분한 발언이 주제의 엄숙함과 조화를 이루면서 깊은 공감을 안겨 주었다. 0 87 2006.12
KBS 스페셜 이 시도한 또 하나의 실험으로 는 이른바 팩션(fact+fiction) 드라마를 들 수 있 다. 2006년 5 18 특별기획으로 제작된 오월의 두초상 에서는 작가 정찬의 두 소설, 즉 5월 광주 의 희생양이었던 무구한 영혼 장인하를 주인공으 로 하는 완전한 영혼 과 계엄군으로 가담했던 박 운형을 주인공으로 하는 슬픔의 노래 를 배경으 로 진행되었다. 이 두 인물의 내면 풍경을 따라 광주항쟁을 팩 션 드라마의 형식으로 재조명하고, 이를 통해 평범 했던 개인들이 역사의 거대한 비극을 극복하는 과 정을 그려내고자 했다. 광복절 2부작으로 기획된 가네코 후미코 역 시 팩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광 복절 특집기획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파격적이었다. 아나키스트 독립운동가인 박열의 연인이자 동지였 던 가네코 후미코는 조선의 독립운동사에 종종 등 장하는 실제 인물이다. 기구한 어린 시절을 보내고, 식민지 남자인 박 열에게 모든 것을 바친 가네코 후미코의 파란만장 한 인생은 사실과 픽션의 절묘한 조화 속에서 시청 자들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갔다는 평가를 받을 만 했다. 팩션 드라마, 페이크 기법도 응용 그밖에도, KBS 스페셜 에서 올 4월부터 8월 사이에 방송했던 전향 세상의 모든 라면박스 가객 김광석, 10년 만의 초대 뮤지컬 다큐 - 캐 비닛 속의 도시 이야기 등은 CG와 삽화, 뮤직비 디오 등 다양한 전달방식을 통해 주제 전달력을 높 이고자 했다. 때로는 낯설기도 했고, 때로는 완성 도 측면에서 부족한 점도 있었지만, 전체적으로 보 았을 때, 신선하고 참신한 시도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마지막으로 2005년 10월 16일에 방송된 한 국야구 100년, 사상 최대의 프로젝트 백년드림팀 평가전 은 사실을 가장한 페이크기법을 적절하게 활용한 사례이다. 한국야구 100년을 통틀어 가장 뛰어난 활약을 한 선수들로 구성된 드림팀인 만 큼, 그라운드에서 뛰는 모습을 실감 있게 담아내 기 위해서는 CG를 적절하게 배치한 페이크 기법 표 KBS 스페셜 의 실험적 제작 사례 특징 제목 방영일 내레이션 생략 영원과 하루 2005년 12월 24일 팩션 드라마 5 18 기획 오월의 두 초상 광복절 기획 2부작 가네코 후미코 전향 2006년 5월 14일 2006년 8월 26일 / 2006년 9월 2일 2006년 4월 23일 삽화, 뮤직비디오 등 세상의 모든 라면박스 2006년 6월 3일 다양한 전달방식 도입 가객 김광석, 10년만의 초대 2006년 7월 1일 뮤지컬 다큐 캐비닛 속의 도시 이야기 2006년 8월 5일 사실을 가장한 페이크 기법 한국야구 100년, 사상최대의 프로젝트 백년드림팀 평가전 2005년 10월 16일 0 88
무엇보다도 KBS 스페셜 은 매주 토 일 저녁 8시라는 프라임타임에 편성되어 있다는 점에서 시청접근성이나 사회적 파급력이 크다. 이 시간대의 시청률 경쟁과 평균적인 시청취향에 안주하기보다는, 관행적인 제작방식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TV 프로그램의 질적 수준을 고양하고 문화 다양성을 확대했다. 이 필수적으로 요구된다. 특히 이 프로그램은 한 시즌 30승이라는 전무후무한 기록을 남겼지만, 이후 불운하게 인생을 마감한 장명부 선수에게 각 별한 관심을 보이는 등 패자에 대한 관심과 배려 가 돋보였다. MBC 스페셜 과 SBS 스페셜 공교롭게도, 지상파 방송 3사의 대표 다큐멘 터리 프로그램 제목은 모두 스페셜 이다. 우리 방송사들이 전범으로 삼고 있는 일본의 대표 다큐멘터리도 NHK 스페셜 이라는 점을 감안하 면, 상상력의 빈곤이라는 비판을 받을 만하다. 어 쨌든, KBS 스페셜 이 다양한 포맷실험 속에서 다큐멘터리의 지평을 확장하되, 대중성 측면에서 는 다소 취약한 면을 노정하고 있다면, MBC 스 페셜 과 SBS 스페셜 은 시청자들이 일상생활 속 에서 관심을 가질 만한 주제를 비교적 평이한 방 식으로 전달한다는 점에서 좋은 대비를 이루고 있 다고할수있다. 먼저 MBC 스페셜 은 상상 그리고 진정성 을 모토로 내건 MBC의 대표 프로그램으로서, 다 큐멘터리도 충분히 흥미롭고 재미있을 수 있다는 점을 입증해왔다. 특히 2003년 9월 21일부터 10 월 12일까지 방송된 인터뷰 다큐멘터리 가족 과 2004년 신년특집기획 10부작으로 방송한 세계 의 국회의원, 창사특집 2부작 출가 등은 작품 성이나 문제의식에서 공히 수작으로 평가받을 만 했다. 한편 2005년 7월 10일에 산악인 김영석의 북 극탐험기인 그랜드슬램 대탐험, 걸어서 지구 끝 까지 로 첫 선을 보인 SBS 스페셜 은이후광복 60년 특별기획 6부작 메이드인 코리아 와 노르 망디의 코리안 그리고 환경과 건강을 다룬 충격 적인 프로그램들을 연이어 제작하여 사회적 반향 을 일으켰다. 그동안 정통 다큐멘터리에 상대적으 로 소홀했던 SBS가 HD카메라로 야심차게 준비 한 프로그램답게, 지금까지 SBS 스페셜 은 영상 과 주제의식 측면에서 모두 긍정적인 평가를 받아 왔다. 다만 상업방송의 한계 때문인지, 시청률을 의식하여 비교적 부드럽고 선정적인 주제에 치우 친다는 지적을 향후 어떻게 극복하느냐가 프로그 램 성공의 관건이 될 것이다. 정교한 구성, 강렬한 주제의식 사실 TV 프로그램의 장르혼합 현상은 어제 오 늘의 일이 아니다. 지금은 독립된 장르로 정착된 0 89 2006.12
광복절 2부작으로 기획된 KBS 스페셜 의 가네코 후미코 (2006.8.26, 9.2) 역시 팩션 드라마로 제작되었다는 점에서, 기존의 광복 절 특집기획과 비교해 볼 때 매우 파격적이었다. 시트콤도 처음에는 드라마와 코미디가 결합한 시 츄에이션 코미디로서 출발한 바 있다. 같은 맥락에 서 다큐멘터리와 드라마 역시 다큐드라마나 드라 마 다큐라는 일종의 퓨전형식으로 간헐적이지만 제작되어왔다. 프라임타임대 편성의 미덕 그러나 2006년한해동안 KBS 스페셜 이 보여준 다양한 포맷 실험은 지금까지 보아왔던 장 르 혼합에 비해, 정교함이나 완성도 그리고 주제의 식의 강렬함 측면에서 한층 수준이 높아졌음을 확 인할 수 있다. KBS가 이 프로그램에 쏟는 관심과 지원을 반영이라도 하듯, 해당분야의 전문가와 견 줄 만큼 충분히 사전학습을 한 담당 PD와 작가가 오랜 시간동안 프로그램의 구성과 내용을 고민한 흔적이 느껴진다. 첨단 디지털 방송기술을 활용하 고, 각 분야의 전문가들이 자문하거나 실제로 제작 에 참여함으로써, 프로그램이 지닌 중량감이 한층 배가되었다. 무엇보다도 KBS 스페셜 은 매주 토 일요일 저녁 8시부터 9시라는 프라임타임에 편성되어 있 다는 점에서 시청접근성이나 사회적 파급력이 큰 프로그램이다. 이 시간대의 시청률 경쟁과 평균적 인 시청취향에 안주하기보다는, 관행적인 제작방 식에 과감하게 도전하여 TV 프로그램의 질적 수 준을 고양하고 문화 다양성을 확대했다는 점에서 KBS 스페셜 제작팀의 용기와 전문성에 찬사를 보내고 싶다. 앞으로도 KBS의 공영성을 상징하는 프로그램 으로 자리매김할 수 있도록 KBS 스페셜 에대한 인적, 물적 지원을 충분히 할 필요가 있다. 또한 애 프터서비스 차원에서, 인터넷을 통한 VOD 다시 보기 서비스 수준을 지금보다는 많이 개선해야 할 것이다. KBS 스페셜 을 정점으로 MBC 스페 셜 과 SBS 스페셜 이 삼두마차가 되어 한국의 TV 다큐멘터리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견인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0 9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