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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주제어 : 베니아미노프, 정교회, 알래스카, 야쿠츠크, 한인선교 Keywords : Veniaminov, Orthodox Church, Alaska, Yakutsk, Mission for Koreans 투 고 일:2014. 7. 30 심 사 일 : 2014. 8. 5 2014. 9. 5 게재확정일: 2014. 9. 15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민족 선교활동 연구(1823-1868)* -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И.Вениаминов) 주교의 선교활동을 중심으로 - 이 병 조** 목차 >>> Ⅰ. 머리말 Ⅱ. 위대한 선교사의 탄생과 알래스카 선교(1820-30년대) Ⅲ. 캄차카 주교구 설립과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 선 교(시트카 주교구청 시기: 1840-53) Ⅳ. 시베리아-극동 선교(야쿠츠크 및 블라고베셴스크대주 교구청 시기: 1853-68) Ⅴ. 맺음말 1) 국문요약 본 연구의 목적은 19세기, 1820-60년대 말 시기 동안에 러시아 정교회의 인노켄티 베니아미 * 이 논문은 2011년도 정부(교육과학기술부)의 재원으로 한국연구재단의 지원을 받아 연구되었음(N RF-2011-35C-20112280001)(This work was supported by the National Research Foundation of Korea Grant funded by the Korean Government(NRF-2011-35C-20112280001)). ** 한국외국어대학교 사학과 및 교양학부 강사.

90 제30권 3호 2014년 노프(И.Вениаминов, 1797-1879) 주교의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의 한인을 포함한 이민 족 선교활동을 살펴보는데 있다. 이를 통해 궁극적으로는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해당 지역 이민 족 선교활동의 성격을 규명하고, 나아가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이민족 선교활동에서 나타나는 재 원조달체계를 파악해 보는데 있다. 필자는 연구를 통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도출해 내었다: 우선, 베니아미노프 이민족 선교의 성 격과 관련하여, 외적인 측면에서 베니아미노프 이민족 선교활동 또한 국가-정치적인 성격의 선교 에서 크게 자유롭지 못하다. 하지만 선교 형식은 국가-정치적이었을 지라도 선교 내용에 있어서는 지극히 비국가-정치적 성격의 선교활동이었다고 여겨진다. 이는 이민족 선교활동에서 보여 준 베 니아미노프의 순수함과 인간애, 그리고 헌신성과 토착화에 바탕을 둔 선교활동(이민족 언어로 성 서, 복음서, 교리문답서 번역 및 보급, 정교신앙 교육 등)에서 그 근거를 찾아볼 수 있다. 다음으로 베니아미노프의 선교활동에서 나타나는 재원조달체계 관련하여, 알래스카와 시베 리아-극동지역에서의 선교활동에서 나타나는 재원조달체계에는 차이가 있었다. 알래스카에서는 사제의 봉급, 숙소 및 난방, 전기에 이르기까지 러 미회사에 대한 의존도가 절대적이었다. 하지만 시베리아-극동지역에서는 신성종무원(중앙)의 재정지원 외에 종무국(지방)이나 교회 및 교구 자 체적으로 재정을 보충해 나가는 경우가 적지 않았고(양초 판매 등), 경우에 따라서는 교구민의 기부금까지도 투입되는 경우가 적지 않았다. Ⅰ. 머리말 러시아는 1천년의 역사가 넘는 기독교(동방정교회) 국가이다. AD988년 러 시아의 고대국가 키예프루시의 블라디미르Ⅰ세(980-1015)가 비잔틴제국으로 부터 동방정교회를 수용하면서부터 러시아 정교회의 역사는 시작되었다. 비 잔틴제국은 동서로 로마제국이 분리(395)되고, 형제국인 서로마제국이 멸망 (476)한 이후에도 오스만 투르크족에 의해 멸망(1453) 할 때까지 1천년이 넘는 동안 제국을 유지해 나갔던 선진문명권의 선두 주자였다. 1) 로마-게르만적인 새로운 질서 속에서 국가와 교회라는 이원적인 지배권력 구조가 형성되었던 서유럽(서로마제국)과는 달리, 비잔틴제국(동로마제국)은 과거 오리엔트 문 명국들(이집트왕국, 바벨론왕국)의 전제정치체제를 받아들였다. 이를 바탕으 로 비잔틴제국은 황제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해 나가며 교회의 성직자임명권을 장악했고, 교회를 세속권력에 예속시킨 채 황제교황주의(Caesaropapism, 皇 帝 敎 皇 主 義 )적인 지배권력을 유지해 나갔었다. 2) 그런 연유로 비잔틴제국으로 1) 한편 서로마제국은 멸망 이후 프랑크왕국을 중심으로 한 게르만 세력들과 손을 잡고 새로운 로마- 게르만적인 (서)유럽의 새로운 질서를 열어놓았고, 국가(세속권력)와 교회(종교세력)라는 이원적인 지배체제 하에 서유럽의 역사는 전개되어 나갔다. 2) 비잔틴제국으로 대표되는 동방정교회의 황제교황주의적인 특성은 과거 비잔틴제국의 황제들인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91 부터 수용된 러시아 정교회 또한 황제교황주의적인 특성을 갖고 있는가에 대한 여러 시각들이 존재하고 있다. 3) 비잔틴 교회의 황제교황주의적 특성, 즉 국가-정치적인 성격은 18세기 초 러시아에서 강력한 왕권으로 서구화 개혁 을 단행하고, 교회개혁을 통해 총대주교 체제 대신 신성종무원(Святейший 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инод) 체제를 수립했던 표트르대제(1682-1725) 시기에 두드러지기 시작했다. 4) 국가에 대한 교회의 완전한 예속의 시대는 1917년 러시아혁명 시기까지 이어졌다. 하지만 그러한 상황 속에서도 러시아 정교회 는 자국(특히 시베리아-극동) 내 뿐만 아니라, 오토만제국(현재 이라크)의 네스토리우스교도인 앗시리아인들 사이에서, 그리고 특히 일본, 청, 조선 등지 에서의 국가-정치적 성격의 이민족 선교활동에서 적지 않은 성과들을 거두어 왔다. 5) 이에 대한 기존의 연구성과물들은 선교활동에서 나타나는 러시아 콘스탄티누스 대제(306-337)로부터 시작하여 특히 유스티니아누스 대제(527-565)와 레오 3세 (717-741) 시기를 거치며 강화된 측면이 있다. 비잔틴제국의 선교는 비잔틴 교회의 그러한 특성 속에서 제국을 위한 봉사적 차원에서 이루어 졌다. 또한 비잔틴제국이 기독교 세계의 표준이 되고 중심이 되어야 한다는 확신 속에서, 이민족들이 기독교를 받아들이는 것은 단순히 기독교 신자를 만드는 일 이상으로 받아들여졌다. 선교는 국가와 교회의 공동사역으로 간주되었고, 정교가 다민 족으로 구성된 제국을 하나로 통합시켜준다고 믿었다. 따라서 식민지화 정책과 동시에 선교사역을 추진하여 제국의 평화와 일치를 꾀하고자 했다. 3) 기연수, 끼예프 時 代 의 敎 會 와 國 家, ꡔ슬라브연구ꡕ, 10호 (러시아연구소, 1994); 기연수, 슬라브주 의와 정교사상, ꡔ슬라브연구ꡕ, 12호 (러시아연구소, 1996); 임영상, 황제교황주의와 러시아정교 회, 歷 史 學 會 편, ꡔ 歷 史 上 의 國 家 權 力 과 宗 敎 ꡕ (일조각, 2002); 임영상, 제정러시아의 교회와 국가, ꡔ외대사학ꡕ (역사문화연구소, 1992); 임영상, 동방교회와 서방교회, 임영상, 황영삼 편, ꡔ소련과 동유럽의 종교와 민족주의ꡕ (서울: 한국외국어대학교출판부, 1996); 황성우, 러시아의 基 督 敎 수용 과 성격, (한국외대 박사학위논문, 2000). 4) 러시아 국가와 교회 간의 관계는 18세기에 표트르대제 시기에 급격하게 기울기 시작했다. 표트르 대제의 교회개혁 차원에서 발표된 1721년 종교법(Духовный регламент)으로 교회의 권위를 대표하 는 총대주교제가 폐지되고, 차리(Царь, 군주)에 의해 임명된 행정관 성직자의 감독을 받는 11명의 성직자로 구성된 신성종무원 체제가 확립되었다. 교회는 국가의 한 행정부서로 전락했으며, 차리 는 교회의 수장으로 간주되었다. 또한 사제는 군주에게 충성서약을 했으며, 고해성사시에 국가에 대한 공개적인 배반, 폭동에 관해 알릴 의무가 주어졌으며, 출생과 결혼, 죽음 등의 민원업무기능을 수행함으로써 점차 행정적인 예속도 심화되어 갔다. 러시아 정교회는 국가법에 의해 지배적인 위 치를 보호받았고, 상당 부분의 재정적인 지원을 받았으며, 종교적 선전, 선교, 종교서적 출판 등 모든 종교적 제반 영역에서 독점권을 보장받게 되었다. 또한 신성종무원장(Обер-Прокуратор)은 대신회의의 일원이 되었으며, 주교들은 교회의 이익을 지키기 위해 젬스트보(Земство, 지방의회)에 참가하였고, 정부 관료들은 교회의 이익을 지키도록 요청받는 상황에 있게 되었다. 5) 러시아 정교회의 국내외 이민족(한인 제외) 선교활동을 다루는 연구물들(단행본류): DmitryV. Pospielovsky, The Orthodox Church in the History of Russia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98), pp. 159-190; D.N. Collins, Colonialism and Siberian Deveolpment: A Case Study of the Orthodox Mission to the Altai 1830-1913, in The Development of Siberia: Peoples and Resources, ed. A. Wood and R.A. French(London: St. Martin's Press, 1989), pp. 50-71; James Forsyth, A History of the People of Siberia: Russia's North Asian Colony 1581-1990 (New York: Cambridge Univ. Press, 1992); N.K. Gvosdev, An Examination of Church-State Relations in the Byzantine and Russian Empires with an Emphasis on Ideology and Models of Interaction, Studies in Religion and Society (Edwin Mellen Press, 2001); В.А. Федоров, История России 19-начала 20вв. (М., 2000), с. 625-628; Пётр Смирнов,

92 제30권 3호 2014년 정교회와 국가 관계, 정교회의 역할, 기독교화 및 러시아화 방법, 선교사와 토착민 간의 관계 등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다. 이상의 상황들에 주목하며, 필자는 이미 선행연구들을 통해서 19세기 중반 -20세기 초(1917년 혁명 이전)에 극동에서 한인을 중심으로 수행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선교 활동을 현상적인 측면에서 살펴본 바가 있다. 6) 또한 이러 История христианской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М.: Православная Беседа, 1994), с. 160-164; П.В. Знаменский,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церкви, книга 10 (М., 1996), с. 352-440; И.К. Смолич, История Русской Церкви, 1700-1917, Часть Вторая (М., 1997), с. 200-283;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устройство, Положение, Деятельность), Издание Московской Патриархии, 1958, с. 141-164 등; (논문류): A.A. Znamenski, Shamanism and Christianity: Native Encounters With Russian Orthodox Missions in Siberia and Alaska 1820-1917 (Westport, Connecticut London: GREENWOOD PRESS, 1999); A.A. Znamenski, Strategies of survival: Native encounters with Russion missionaries in Alaska and Siberia, 1820s-1917, Ph.D. diss. (University of Toledo, 1997); A.Neil Michaelson, The Russian Othodox Missionary Society, 1870-1917: A study of religious and educational enterprise, 1879-1917, Ph.D.diss. (University of Minnesota, 1999); Oleg Kobtzeff, Ruling Siberia: The Imperial Power, the Orthodox Church and the Native People, St Vladimir's Theological Quarterly, 30, No. 3 (1986), pp. 269-280; P. Christopher Bruce Armstrong, Foreigners, furs and faith: Muscovy's expansion into western Siberia, 1581-1649, Ph.D. diss. (University of Dalhousie(CANADA), 1997); P. William Werth, Orthodox mission and imperial governance in the VolgaKama region, 1825-1881, Ph.D. diss. (University of Michigan, 1996); Robert Geraci, Window on the East: Ethnography, Orthodoxy, and Russian Nationality in KAZAN 1870-1914, Ph.D. diss. (University of Berkeley in California, 1995); Robert P. Gerasi, Michael Khodarkovsky, Of Religion and Empire(mission, conversion, and Tolerance, in Tsarist Russia (Cornell Univ. Press, 2001); Yuri Slezkine, Savage Christians or Unorthodox Russians? The Missionary Dilemma in Siberia, Galya Diment, Yuri Slezkine, Between Heaven and Hell: The Myth of Siberia in Russian Culture (New York: St. Martin's Press, 1993), pp. 15-31; Н.А. Смирнов, Миссионерская деятельност церкви(вторая половина XIXв.-1917г.), А.И. Кливанов(ред.), Русское православие: Вехи истории (М., 1989), с. 438-463; 러시아 정교회의 극동지역 한인 선교활동을 다루는 연구물들(단행본,논문,보고서류): M. Belov, The Experience of The Russian Orthodox Church among Koreans 1865-1914, (Seoul: Yonsei International Univ., December, 1991); Ross King, Blagoslovennoe: Korea Village on the Amur, 1871-1937, Review of Korean Studies, Vol. 4, No. 2 (2001), pp. 133-176; А.В. Кириллов, Корейцы села Благословенного, (историко-этнографический очерк), ꡔПриамурские ведомостиꡕ, 58, 59, Приложения (1895), с. 1-13; Августин Никитин, Православие у корейцев Приамурья и Забайкалья, ꡔМиссионерское обозрениеꡕ, No. 4, Апрель (1998), с. 18-23; А.И. Петров, Корейскя диаспора на Дальнем Востоке России 60-90е годы 19века (Владивосток, 2000); он же, Корейскя диаспора в России 1897-1917гг. (Владивосток, 2001); он же, Школа культуры и нравственности: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миссия в Корее, 1897-1917гг., Россия и АТр, No. 4 (Владивосток, 1995); он же, За любовь и справедливость к корейскому народу, Утро России, 4 февраля (Владивосток, 1998); он же, Когда же началась корейская иммиграция в Россию?, Россия и АТр, No. 2 (Владивосток, 2000); он же, Корейская иммиграция на Дальний Восток России в 1860-1917гг., Вестник Дальневосточного отделения Российской Академии наук, No. 5 (Владивосток, 1998); В. Вагин, Корейцы на Амуре, (Сборник исторических и статистических сведений о Сибири и сопредельных ейстранах), СПб., Т. 1 (1875), с. 1-29; О.Б. Лынша, Зарождение школьного образования среди корейского населения Южно-Уссурийского края во втор. пол. XIX века, ꡔ역사문화연구ꡕ, 24집 (서울: 한국외대 역사문화연구소, 1992), pp. 3-72 등; 러시아 정교회 한인선교를 다루는 국내 연구물들: 남정우, 동방정교회의 선교역사 연구, ꡔ선교와현장ꡕ, 제10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연구원, 2005); 이상근, ꡔ 韓 人 露 領 移 住 史 硏 究 ꡕ(서울: 탐구당, 1996); 정균오, 정교회와 개신교회의 러시아 한인 디아스포라 선교 비교 연구, (장로회신학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등. 6) 이병조, 러시아정교회의 러시아 극동 한인선교(1863-1916), (한국외대 석사학위논문, 2002).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93 한 선행연구를 토대로 해당 시기 러시아 정교회의 극동지역 한인을 중심으로 한 선교활동의 국가-정치적인 성격 또한 규명한 바가 있다. 7) 하지만 바로 앞서 제시한 필자의 선행연구는 해당지역 선교활동의 근본적인 기반이자 동력이 되었던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И. Вениаминов, 1797-1879, 이후 베니 아미노프 로 칭함) 주교의 구체적인 행적(선교적 헌신과 공헌)에 대해서는 다루고 있지 못함으로써 당시 극동지역 한인을 포함한 이민족 선교활동의 재원조달체계 파악에는 한계를 안고 있다. 8) 따라서 필자는 캄차카 주교구의 초대 주교로서, 극동지역 이민족 선교의 체계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던 러시아 정교회의 위대한 사도 로 불리는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행적을 중심으 로 살펴볼 것이다. 이를 통해 국가-정치적인 선교활동이 지배적이었던 당시의 상황에서,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이민족 선교활동의 본질(성격)을 재조명 및 재확인 할 것이다. 나아가 궁극적으로는 베니아미노프의 선교원칙과 정신이 강하게 투영되었던 당시 이민족 선교의 재원조달체계를 파악해 볼 것이다. 재원조달체계 문제는 선교 재원의 출처에 따라서도 선교의 성격을 가늠해보 는데 좋은 척도가 될 수 있다. 다시 말해 당시 정교회 지도부와 베니아미노프 개인의 이민족 선교활동의 성격을 가늠해 볼 수 있는 중요한 요소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 정교회의 토착민 선교와 관련해서는 언제나 긍정적인 시각과 비판 적인 시각을 존재하고 있다. 즉 사제는 제국주의의 충복이었고, 토착민의 기독교화와 번영과는 무관했던 사업가 였으며, 선교부와 수도원은 토착민의 7) 이병조, 러시아 프리아무르 한인사회와 정교회 선교활동(1865-1916), 한국외대 박사학위논문, 2008. 해당 연구에서 필자는 당시 러시아 중앙정부의 동아시아 및 한반도 정책과 극동 지방정부의 한인정책, 그리고 블라디보스톡 주교구 간의 관계망 속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극동 한인선교활동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러시아 정교회의 극동 한인선교는, 극동의 개발 및 태평양 지역의 안보구축 이라는 정치-경제적인 상황과, 다른 한편으로는 한인의 우수한 농업경영 능력은 인정하면서도 토 지정착에 대해서는 두려워했던 극동 지방당국의 한인에 대한 이중정책 속에서 수행되었다. 또한 극동 지방정부는 한인들을 극동개발의 식민요소로 활용하려고 했으며, 이를 위해 안고 있던 근본 적인 문제와 한계에도 불구하고 정교회의 선교활동을 통해 한인을 기독교화 및 러시아화의 대상으 로 삼고자 했다. 결론적으로 러시아 정부는 한인의 존재를 끌어 안고가야 할 포용의 대상이자 기독 교화 및 러시아화의 대상으로 여겼으며, 한인들을 국가-정치적인 선교의 대상으로 인식하고 한인 선교를 수행해 왔다 는 점을 연구의 결과로 제시했다. 8) 반면, 러시아 내에서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에 대한 연구는 혁명 전후로, 그리고 소련방 붕괴 이후 에도 적지 않게 이루어져 왔다. 그 중 대표적인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 연구자로 바르수코프(И.П. Барсуков)와 그의 저작물(Иннокентий, митрополит Московский и Коломенский, по его сочинениям, письмам и разсказам современников (М., 1883), с. 805)을 들 수 있다. 또한 총 7권으로 완성될 예정으로 2014년 현재 6권까지 나와있는 사료집(Святитель Иннокентий (Вениаминов) просветитель Америки и Сибири-Cобрание сочинений и писем в 7 томах)도 대표적인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 관련 연구물이다.

94 제30권 3호 2014년 토지를 점유했다, 선교사는 토착민들을 노예화시켜서 이익을 취하라는 차 리의 의지를 이행한 하수인이며, 선교부는 토착민 문화발전에 아무 것도 한 바가 없이 단지 상인들이 토착민들을 약탈하도록 도왔다 9) 는 비판적인 시각 이 존재한다. 이에 반해 선교부는 당국의 식민정책의 충실한 대리인 으로 활동을 했지만 토착민의 문명화에 많은 부분 기여했다 10) 는 다소 긍정적인 시각도 존재하고 있다. 베니아미노프의 선교활동 또한 이러한 시각적 평가에 서 자유로울 수 없을 것이다. 다만 이 글에서는 필자는 비판적 시각에서 보다는 베니아미노프의 독보적이고 헌신적인 행보에 더 초점을 두고 그의 행적을 살펴보고자 한다. 필자는 이러한 후속 연구가 가시적으로는 그간 다루어지지 않아 왔던 해당 시기 이민족 선교의 재원조달체계를 파악하는데 기여를 할 것으로 본다. 나아 가 해당 시기 러시아 국가에 의해 모든 이민족에 대한 러시아화와 국가-정치적 성격의 기독교화(정교화) 원칙이 추구 및 고수되어 가는 시점에서, 극동지역 이민족 선교활동에서 나타난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선교원칙과 정신을 국가- 정치적인 성격의 시각에서 벗어나 더 큰 틀에서 바라보게 하는데 기여하리라 본다. 이상의 후속 연구를 위해 필자는 그간 국내의 해당 주제 및 유사연구 과정에 서 국내에서는 공개된 바가 없는 현지 기록보존소의 1차 사료들을 주요 분석자 료로 활용을 했다. 11) 이들 1차 사료문헌들은 필자가 직접 입수한 것이고, 대주교구청(1853-62)이 위치하고 있었던 러시아 사하(야쿠티야)공화국 국립 기록보존소(НАРС(Я))에 출처를 두고 있으며, 총 11건 100쪽 분량(심한 필기체 형태)으로 이루어져 있다. 또한 이 사료들은 1850~60년대 베니아미노프 주교 가 야쿠츠크에 대주교구청을 두고 극동 이민족 선교를 이끌어 가던 시기에 9) A.A. Znamenski, Shamanism and Christianity: Native Encounters With Russian Orthodox Missions in Siberia and Alaska 1820-1917 (Westport, Connecticut London: GREENWOOD PRESS, 1999), p. 194. 10) Ibid., pp. 194-195. 11) 사하(야쿠티야)공화국 국립기록보존소(НАРС(Я))의 폰드(Фонд; 기록군, 즉 문헌 생성기관) 225, 227, 230에 소장된 베니아미노프 주교 관련 사료들이다. 러시아 내에서 해당 자료들이 얼마나 활용, 연구되었는지에 대한 확인은 애석하게도 하지 못했다. 따라서 필자의 자료발굴과 입수가 어느 정 도의 의미를 갖는지는 확신할 수가 없지만 적어도 국내에서는 그간 활용되어 오지 못한 자료들이 라 할 수 있다. 당초 활용이 예정되었던 모스크바 인문사회과학도서관(ИНИОН)에 소장된 러시아 동시베리아 선교역사 자료(총4권) 는 현장방문을 통해 수 차례에 걸친 입수 시도에도 불구하고 이루어지지 않았다. 방대한 검색목록카드 열람 방식과 전산상의 검색에 따른 한계와 어려움으로 인해 해당 사료들의 소장 여부와 위치가 마지막까지 파악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95 직접 작성한 다양한 형태의 문서들(선교보고서, 서신 등)이며, 대부분 심한 수기 필기체 형태로 되어 있다. 이외에도, 베니아미노프 주교 저작집(선교순례 보고서, 서신, 일기, 기행문) 12) 에 수록된 사료문헌들과 하바로프스크 국립기 록보존소(ГАХК)에 소장된 해당 주제 관련 법령, 보고서, 신문, 잡지 등의 사료문헌들이 분석자료로 활용되었다. 다만, 당초 계획했던 자료들 중 일부를 확보하지 못했고, 여전히 직접적인 국외 자료들에 대한 연구사 검토가 보다 더 충분히 이루어지지 못한 부분이 있음을 고백하는 바이다. 제Ⅰ장에 이어, 제Ⅱ장에서는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정교 입문과 첫 사역지 인 알래스카에서의 이민족 선교활동에 대해서 살펴보고, 제Ⅲ장에서는 캄차 카 주교이자 주교구 관할 내의 선교 총 책임자로서 알래스카와 극동-시베리아 지역에서의 이민족 선교활동에 대해서 살펴볼 것이다. 또한 제Ⅳ장에서는 야쿠트족 선교에서 나타나는 베니아미노프 선교의 성격과 재원조달체계와 1860년대 초 베니아미노프 주교와 한인과의 역사적인 만남(접촉 순간)에 대해 서 살펴보고, 마지막으로 제Ⅴ장에서는 전 장에서 나타난 베니아미노프 주교 의 선교활동을 바탕으로 조심스레 결론을 도출해 보고자 한다. Ⅱ. 위대한 선교사의 탄생과 알래스카 선교 (1820-30년대) 1. 정교회 입교와 선교사 입문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는 1797년 자녀가 많이 딸린 가난한 종지기의 아들 (성은 포포프)로 이르쿠츠크주 안긴스코예(с.Ангинское) 마을에서 출생했다. 세례받기 전 유년시절의 이름은 이반이다. 어린 이반은 6세가 되던 해에 아버 지를 잃은 후 더 어린 형제자매들과 남겨진 채 어머니 슬하에서 가난의 고통을 맛보며 자라났다. 이후 이반은 삼촌의 강청과 노력 덕분에 정부 지원을 받는 이르쿠츠크 신학교(Иркутская духовная семинария)에 입학하게 되며 학교생 12)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святителя Иннокентия митрополита Московского, апост ола сибири и Америки (М., 1997).

96 제30권 3호 2014년 활을 시작하게 되었다. 하지만 먹을 것이 적고, 잦은 구타까지 행해지는 등 신학교 기숙사에서의 삶은 힘들었다. 방학이나 휴식이 주어지는 기간에 이반 은 목공과 철공, 대장간 일에 관심이 많았던 신학교 수도사의 삼촌집에 가서 일을 도우며 공부를 하곤 했다. 명석한 두뇌와 근면성으로 인해서 이반은 최우수 학생이 될 수 있었고, 머지않아 큰 주목을 받게 되었다. 한편 이반이 신학교에 들어가기 얼마 전에 많은 이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아왔던 성직자 베니아민(Вениамин) 주교가 이르쿠츠크에서 사망을 했다. 이때 이반은 신학교에서 가장 우수한 학생의 자격으로 베니아민 주교를 기리 는 의미에서 베니아미노프 (Вениаминов)라는 이름을 부여받게 되었다. 가장 우수한 성적으로 신학교를 마친 직후 이반은 동창생 한 명과 더불어 모스크바 신학아카데미(Московская духовная академия)에 유학을 갈 기회를 부여받았 다. 하지만 모스크바로 떠나려던 해에 앙가라강이 범람하는 큰 재해가 일어났 고, 이로 인해서 신학교 교장이 거처하고 있던 수도원과 신학교 간에 교통 및 교류 상황이 한동안 완전히 단절되면서 모스크바행 일정은 실행에 옮겨지 지 못한 채 자연스레 사라지고 말았다. 바로 이 무렵에 이반, 즉 베니아미노프 는 한 여인을 알게 되었고, 학교장의 허락없이 곧바로 결혼을 하게 되었다. 이에 대한 징계로 베니아미노프는 사제(священник)직을 받지 못했고, 대신 이르쿠츠크에 있는 성모수태고지 교회에서 보제(дьякон) 13) 직을 받고 그곳에 서 4년 간을 봉사했다. 14) 하지만 징계로 인한 베니아미노프의 보제직 수행은 그리 오래 이어지지 않았다. 1821년에 베니아미노프가 봉사하고 있던 교회의 사제가 사망을 하자 그 뒤를 이어 사제가 된 것이다. 이때 인노켄티 (Иннокент ий)라는 사제명을 부여받게 되었는데, 바로 이때부터 베니아미노프에게 불후 의 명성을 가져다 준 본격적인 사제-성직자로서의 삶이 시작되었다. 훤칠하고 준수한 외모를 지녔던 젊은 사제 베니아미노프는 교구민들의 큰 사랑과 관심 을 받았다. 무엇보다 그는 훌륭한 말솜씨와 심금을 울리는 설교와 예배로 인해 교구민들로부터 큰 사랑을 받았다. 많은 교구민들이 예배에 참석해 그의 13) 성직자 중 첫 번째의 가장 낮은 단계에 해당하는 직분이다, 보제는 사제나 주교에 의해 행해지는 성례( 聖 禮 )에 직접적으로 참여할 수는 있지만, 독자적으로 이를 행할 수는 없다(부득이한 경우에 속인들도 할 수 있는 세례를 제외하고는). 보제는 또한 예배동안에 성기( 聖 器 )(성스러운 용기들; священные сосуды)를 준비하거나 기도를 인도하기도 한다. 14) ГАХК(하바로프스크 국립기록보존소), ꡔПриамурские Ведомостиꡕ, 194, 21 сентября, Жизнь и деяния высокопреосвященного Иннокентя(Вениаминова), с. 13-15.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97 설교를 들었고, 많은 사랑과 존경을 한 몸에 받았으며, 교회 지도부에 의해서도 큰 총애를 받았다. 15) 자연스레 좋은 주택과 최상의 생활 편의시설을 제공받는 등 젊은 사제 베니아미노프는 사제로서도, 그리고 평범한 한 명의 속인으로서 도, 모든 면에서 인생 최고의 황금기를 보내고 있었다. 사제로서, 한 범인( 凡 人 )으로서 인생의 황금기를 누리고 있던 베니아미노프의 삶에 큰 변화를 가져다 준 것은 크류코프(Крюков)라는 한 인물의 등장이었다. 1820년대 초기에 알래스카에 있는 러 미회사(Русско-Американская компания) 16) 의 전권대리였던 크류코프는 교역문제로 해마다 이르쿠츠크를 왕래하고 있었 다. 1823년, 이르쿠츠크를 방문한 크류코프는 베니아미노프를 만나게 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는 베니아미노프에게 러시아의 식민지인 알래스카와 그 주변 지역에 대해서, 그리고 지역 원주민들(알레우트, Алеут, 콜로쉬, Колош)에 대해 서 많은 이야기를 해주었고, 특히 원주민들이 기독교(정교) 신앙을 원하고 있지만 선교사의 부재로 방치되어 있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다. 한편 1823년에 는 알래스카의 우날라쉬카(Уналашка) 섬은 러시아에 편입이 되던 상황이었 고, 마침 러 미회사의 선교사 파송 요청이 있었지만 희망자가 부재한 상황 속에 있던 차였다. 17) 당시 사제들은 만약 알래스카 대륙에 파송되느니 차라 리 군대에 들어가는 더 낫다 18) 고 할 정도로 극도로 알래스카 대륙으로의 파송을 꺼리고 있었다. 베니아미노프의 마음을 결정적으로 알래스카 대륙으로 향하게 만든 것은 크류코프가 떠나며 던진 한 마디의 말 때문이었다. 용무를 마치고 떠나기에 15) ГАХК, ꡔПриамурские Ведомостиꡕ, 195, 14 сентября, Жизнь и деяния высокопреосвященного Иннокентя(Вениаминова), с. 13-14. 16) 19세기에 러시아령 아메리카, 주로 캘리포니아와 알래스카에서 활동했던 러시아의 독점무역회사 이다. 이 회사는 1799년 레자노프 니콜라이와 셀레크호프 그리고리의 후계자들에 의해 골리코프셀 레크호프사( 社 )를 재편하여 설립되었다. 러시아 황제 파벨 1세는 이들에게 북위 55 이북에 대한 독점적인 무역권을 주고, 그들에게 러시아 정착촌의 행정을 책임지도록 했다. 바라노프 알렉산드 르는 처음에는 코디액에 본사를 세웠으나, 1804년 본사를 노보-아르한겔스크(뉴아르한겔, 지금의 시트카섬)로 옮기고, 1812년에는 캘리포니아 포트로스에 이 회사의 전초기지를 세웠다. 1824년경 미국 스페인 영국과 체결한 협정으로 이 회사는 북위 54 40 이북의 영유권을 확정받았다. 그러나 영국과의 상업적 정치적 경쟁이 치열해지고 식민지로부터 수입이 감소하자 러시아는 미국에 이 영토를 팔기로 결정했고, 황제 정부는 1862년 만기가 된 회사의 면허권을 갱신해주지 않았다 (http://100.daum.net/encyclopedia/view.do?docid=b06r0201a(다음 백과사전) 참조). 17) 알래스카 지역은 18세기 중엽 러시아인들에 의해 개척된 곳이다. 기록에 따르면, 18세기 후반 러시 아인들의 이주와 함께 정교회 선교도 시작되었다. 즉, 베니아미노프 선교사가 도착하기 이전에 알래스카에는 1794년에 발람 수도원(성-페테르부르그 북동쪽)에서 온 2명의 러시아인 수도사들이 이오사프(Иосаф) 수도사제 하에서 활동하고 있었다. 18) ГАХК, ꡔПриамурские Ведомостиꡕ, 195, указ. соч., с. 13-14.

98 제30권 3호 2014년 앞서 크류코프는 축복을 받기 위해 교회 고위 성직자 집무실에 들어갔고, 이때 접견실에서 베니아미노프가 둘의 대화를 우연히 듣게 된 것이다. 크류코 프는 축복을 받는 자리에서 매우 유감입니다. 그곳은 정말이지 그리스도의 천국 과수원을 가꾸고자 하는 사람에게는 딱 맞는 축복받은 땅입니다! 원주민 들의 복음을 듣고자 하는 의욕과 열정은 이루 말할 수 없습니다. 19) 크류코프 의 마지막 말은 그대로 베니아미노프의 가슴에 내리 꽂혔고, 그 길로 알래스카 대륙으로 떠나기로 결심을 하게 되었다. 그 결정은 비록 당시에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는 결정이었으나 이후 알래스카 대륙과 시베리아-극동지역의 원주민들에게는 가장 의미있는 역사적 만남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다. 2. 알래스카 선교활동 교회 고위성직자의 허락과 알래스카 지역 선교사 직분을 부여받은 베니아 미노프는 지체없이 집과 소유물을 포함한 전 재산을 처분했다. 1823년 5월 7일, 베니아미노프는 이르쿠츠크를 떠나 고향 안긴스코예에 있는 선친의 묘소 를 찾아 작별을 고했고, 곧 바로 첫 선교지 알래스카의 우날라쉬카섬으로 먼 여정을 떠났다. 긴 여정 끝에 베니아미노프 일행은 힘들게 우날라쉬카섬에 다다랐다. 20) 이 섬의 구성원들은 알레우트와 콜로쉬 등의 원주민들로 이루어 져 있었고, 게다가 서로 간에 반목관계에 있던 야생의 원주민들이었다. 원주 민들 간의 반목이 이어지고, 유행병 및 천연두 등으로 인해 섬 원주민들은 해마다 감소하고 있는 그런 곳으로 젊은 정교회 선교사 베니아미노프가 복음 을 전하기 위해 들어 온 것이다. 문명인의 요구에 부합할 만한 그 어떤 것도 우날라쉬카섬에는 없었던 것이다. 도착 직후부터 베니아미노프는 손수 토굴 을 파고 본인과 가족이 살아갈 거처를 마련했다. 정상적인 생활이 불가능한 조건이었지만 베니아미노프는 낙담해하지 않았고, 있는 그대로 현실을 받아 들여 나갔다. 1824년 8월 1일, 베니아미노프는 러 미회사에 의해 지어진 유일한 목조건물 19) Там же, с. 13-14. 20) 베니아미노프 이전도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위한 초석을 마련한 선교사들이 있다. 일례로, 알래스 카 지역 선교사인 게데온(Гедеон)은 기도서를 현지어로 바꾸는 등 현지 교육체계의 기초를 마련하 기도 했고, 이어 게르만(Герман)이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수행하고 이후 러시아 정교회의 성인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이 글에서는 베니아미노프의 행적을 중심으로만 다루기로 한다.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99 내의 기도소(часовня) 21) 에서 첫 예배를 올렸다. 그러나 예배에 참석한 것은 본인과 가족구성이 유일했고, 22) 그의 알래스카 대륙에서의 성직활동은 그렇 게 시작되었다. 베니아미노프가 우날라쉬카섬 선교사역을 시작하며 가장 먼 저 착수한 것은 원주민들의 언어와 신앙, 풍습과 관습(전통)을 익히는 것이었 다. 이러한 선교사역의 원형은 AD9세기비잔틴제국의 선교사들이었던 키릴과 메소디우스의 토착어를 통한 이민족 선교전통을 이어받은 성 스테판의 사례 에서부터 찾아볼 수 있다. 성 스테판은 토착어를 통한 이민족 선교활동의 전통을 살려 14세기 우랄 북서쪽의 코미-페름의 핀족들을 상대로 선교활동을 했다. 그는 페르먀크어(Permiak language) 알파벳과 문법을 고안해 내었으며, 성서와 기도서를 번역하여 핀족들을 기독교화 시켰던 것이다. 23) 이러한 토착 화를 통한 선교방식은 동방(그리스)정교회와 서방카톨릭 간의 큰 차이점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당당한 외모에 원주민어를 구사하고 능숙하게 카누를 조정하거나 무엇이든지 능숙하게 잘 만들어 낼 줄 알았던 베니아미노프의 다재다능한 솜씨는 원주민들에게 깊은 인상을 심어주었다. 원주민들은 베니 아미노프를 가리켜 그는 지혜롭고, 무엇이든지 다 할 줄 안다 고 점차 신뢰를 보내기 시작했다. 24) 점차 베니아미노프의 토굴집에 원주민들이 모여들기 시 작했고, 원주민어를 사용하는 베니아미노프에 대해 원주민들은 점점 더 마음 의 문을 열어 나갔다. 우날라쉬카섬 원주민을 대상으로 한 베니아미노프의 선교는 지극히 토착화 에 바탕을 두고 진행되었다. 그 스스로가 원주민화가 되어갔고, 그들과 하나가 되어나갔다. 주변에서 관망만 하던 원주민들도 주택과 교회 건축에 기꺼이 거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통나무를 나르거나 켰고, 벽과 지붕에 붙이고 얹을 널빤지를 만들었다. 그 과정에서 베니아미노프는 원주민들을 기독교 신앙의 추종자들로 변모시켜 나갔다. 1824년 겨울 동안에 건축을 토대작업은 거의 마무리 되었고, 이듬해 봄 무렵에는 손수 제작한 벽돌과 돌을 포함해 대부분의 21) 기도소(часовня)는 집전사제가 없는 단지 기도를 위한 작은 규모의 공공 기도장소로서, 교회와는 달리 정식예배가 행해지지 않으며 제단이 없다(А.М.Прохоров (глав ред.), Большой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М., 1998), с. 341; http://www.diam4.npi.msu.su/calendar/ (검색일: 2003.3.21) 참조). 22) ГАХК, ꡔПриамурские Ведомостиꡕ, 196, 28 сентября, Жизнь и деяния высокопреосвященного Иннокентя(Вениаминова), с. 15-16. 23) D.V. Pospielovsky, The Orthodox Church in the History of Russia (New York: St Vladimir's Seminary Press, 1998), p. 160. 24) ГАХК, ꡔПриамурские Ведомостиꡕ, 196, указ. соч., с. 15-16.

100 제30권 3호 2014년 건축재료가 준비되었으며, 마침내 1825년 6월 1일에는 교회 건물의 토대가 놓여지기 시작했다. 마침내 11개월이 지난 1826년 여름 무렵에 주택과 교회의 건축이 완료되었다. 성상화를 제작하고 이에 황금색 도금을 입히는 일은 베니 아미노프가 직접 했다. 25) 그렇게 다양한 기독교 선교역사에서도 선례를 찾아 보기가 힘든 원주민이 동참한 교회 건축작업이 우날라쉬카섬에서 이루어졌 다. 아직 기독교 신앙도 모르고 기독교인도 아닌 원주민들의 동참을 통해 교회와 주택 건축이 이루어진 것이다. 원주민들에게 있어서 베니아미노프는 단순히 한 명의 선교사가 아니었다. 그는 문명인이었지만 원주민들에게 가까 이 다가가고자 했고, 원주민들의 삶에 훌륭한 조언자이자 교사로서 인정을 받고자 했다. 알래스카 우날라쉬카섬 원주민들의 삶과 함께 하는 베니아미노프의 토착화 에 바탕을 둔 선교는 그렇게 20년 가까이 지속되었다. 과거 신학교 시절 신학교 수도사의 삼촌집에서 경험을 했던 목공, 철공, 대장간 일에 대한 경험은 그와 원주민들을 묶어주는 귀한 매개체가 되었다. 그는 성직자이면서도 인간과 자연 생태계의 모든 것에 대해 그 누구보다도 많은 호기심과 탐구심을 지닌 인물이었다. 베니아미노프는 알래스카 대륙에서 살아가며 섬 내의 양서류와 해조류 등의 동식물계, 원주민의 발생 근원지 문제, 심지어 지진과 화산활동에 대해서 까지 연구를 했다. 26) 무엇보다 베니아미노프는 원주민인 알레우트와 콜로쉬인들의 특성과 신체적 능력, 신앙 및 종교관 등 원주민들의 삶에 대해 큰 관심을 갖고 연구를 했다. 도착 당시 첫 선교지였던 우날라쉬카섬 내의 알레우트들의 규모는 대략 1,500명 정도였다. 흥미로운 것은 이들 모두가 1,500베르스타(1베르스타-1,067미터)에 걸쳐 흩어져 거주하고 있었고, 그로 인해 서로 간에 평생 단 한 번도 보지 못하거나 잘 알지 못하는 경우가 많았고, 심지어는 기질 또한 다양해 반목하는 경우도 있었다는 점이다. 27) 베니아미노 프의 선교활동이 결코 순탄하지만은 못했음을 예상해 볼 수 있는 단적인 예가 아닌가 생각되어 진다. 그럼에도 베니아미노프의 눈에 비친 원주민들은 가장 축복을 받을만한 때묻지 않은 순한 양들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원주민인 25) Там же, с. 15-16. 26) И. Вениаминов, Записка об островах Уналашкинского отдела: Обшие замечания об Уналашкинском отделе,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святителя Иннокентия митрополита Московского, апостола сибири и Америки (М., 1997), с. 204-213. 27) Там же, с. 217.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01 알레우트의 경우, 믿기 힘들 정도의 인내심을 지니고 있었다. 가령, 오랜 배고 픔 뒤에 첫 식사를 할 때의 침착한 모습이나 여우덫에 걸려 신음소리 한 마디없이 쇠갈고리를 빼내는 모습, 혹은 추운 겨울에 육지나 바다를 이동하며 배고픔을 견뎌내며 천막도 없는 곳에서 밤을 지새우는 강인함을 소유하고 있었다. 이런 강인함과 인내심은 유년기에 아버지보다는 더 많은 시간을 함께 하는 어머니로부터의 영향이 컸고, 자연스럽게 고통을 참아내며 육체적으로 나 정신적으로 자연과 신에 순응해가는 법을 터득해 나갔다. 28) 베니아미노프 는 그러한 원주민들의 인간적 특질을 잘 관찰 및 연구했고, 자연스럽게 기독교 세계관으로까지 연결한 듯 보인다. 베니아미노프는 원주민들의 신앙관과 세계관 속에서도 기독교적 가치관의 이식에 대한 가능성을 찾은 듯하다. 부연하면, 알레우트들은 샤마니즘에 가까 운 신앙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들은 창조주라고 하는 존재가 반드시 있다고 믿고 있었다. 하지만 원주민들은 그러한 창조주의 무한한 능력과 특성에 대한 개념은 갖고 있지 못했고, 창조주를 인간 삶의 지배로부터 분리해 생각함으로 써 정작 그 창조주에게는 어떠한 경배도 행하지 않는 종교관을 갖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원주민들은 인간의 삶, 즉 선과 악에 관여하는 두 개의 영이 있다고 보았다. 그러나 여기에서도 선과 악에 대한 더 진전된 개념은 갖고 있지 못했다. 또한 원주민들은 우주를 크게 세 부분(천상과 지하세계, 그리고 이승)으로 구분하고 있었다. 그들은 천상에는 낮밤이 없고, 많은 사람들이 살고 있으며, 지하세계에는 죽거나 영원히 죽지 못한 사람들이 살아가는 곳이 라고 여기고 있었다. 이외에도 신전이나 형상은 없었지만 신성시하는 장소와 이에 바치는 헌물들은 존재했다. 29) 베니아미노프는 원주민들의 그런 신앙과 종교관, 세계관을 기독교, 즉 정교 신앙과 종교체계 속에 받아들이고, 그들의 마음 속에 정교신앙을 심어놓은 것으로 보인다. 이는 마치 비잔틴제국으로부 터 수용(AD988년)된 정교 신앙 속으로 러시아인들의 이교 및 토착신앙이 흡수되면서 굳건한 민중종교로 탈바꿈되는 것과 일면 유사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니아미노프는 비체계적인 원주민들의 신앙 및 종교관, 우주관, 내세 관에 체계성을 불어 넣었고, 이는 자연스럽게 종교성이 강한 원주민들의 마음 에 합치가 되어간 것으로 보인다. 28) Там же, с. 217-219. 29) Там же, с. 224-225.

102 제30권 3호 2014년 알래스카 원주민들의 인간 그 자체와 그들의 삶에 대한 연구와 알고자 하는 진지한 태도는 베니아미노프의 원주민 선교를 성공적 결실 에 이르게 하는데 큰 밑거름이 되었다. 하지만 더 큰 업적과 성공의 원동력은 원주민들의 언어 습득과 이를 통한 성서 번역과 복음 전달이라는 토착화 선교방식에서 찾아볼 수 있다. 베니아미노프는 알래스카 대륙 도착 첫날부터 알레우트의 언어를 공부하고 연구에 착수했다. 그는 해당 언어의 문법서를 제작했고, 이를 바탕으로 여러 성서들을 알레우트어로 번역하여 원주민들로 하여금 자신들의 언어로 된 복음서를 읽고 깊은 이해와 더불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 이도록 했다. 30) 그린란드어 계열의 알레우트어는 15개 알파벳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아직까지 기원 언어에 대해 정확히 알려진 바가 없다. 알레우트어를 발음하거나 대화하기에 유럽인에게는 어려운 편이나 영어권 언어보다는 쉬운 편이다. 수는 단수와 복수, 다수로 구성되었고, 성은 통성, 격은 3격으로 이루어 져 있다. 비록 러시아어가 많이 보급되고, 시간이 지나면서 알레우트어 자체도 많은 변천을 겪어 왔지만, 알레우트어는 많은 것들을 설명해 내는데 결코 부족함이 없는 풍성한 표현과 어휘를 지닌 언어라고 베니아미노프는 기록하 고 있다. 31) 순전히 선교와 복음전달을 목적으로 베니아미노프는 미지의 세계 에서 미지의 언어를 습득했다. 토착화에 바탕을 둔 베니아미노프의 원주민 선교의 진정한 진수를 느껴볼 수 있는 대목이 아닌가 생각해 본다. 이르쿠츠크 출신의 베니아미노프의 알래스카 원주민 선교활동은 1830년대 말까지 15년 이상 이어졌다. 알래스카 대륙에서 베니아미노프는 본인을 포함, 총 4명의 사제-선교사들과 더불어 40,000명에 이르는 원주민들을 상대로 정교 회 선교활동을 수행했다. 이때 부족한 인력과 재정상황에서 베니아미노프 일행은 그곳의 무역독점권을 행사하고 있던 러 미회사로부터 재정 및 물질적 인 지원을 받았다. 사제들은 회사로부터 적지만 소액의 봉급을 받았고, 32) 숙소와 봉급, 난방과 전기, 심지어는 급사까지 제공받았다. 또한 앞서 언급된 바 있는 1825-26년도의 우날라쉬카(Уналашка) 교회와 이후 목조로 된 아트하 (Атха) 교회(1830)와 카댜크(Кадьяк) 교회(1841), 그리고 각지의 기도소 건축에 30) ГАХК, ꡔПриамурские Ведомостиꡕ, 196, указ. соч., с. 15-16. 31) И. Вениаминов, Записка об островах Уналашкинского отдела: Обшие замечания об Уналашкинском отделе,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указ. соч., с. 249-252. 32) Вера Глушкова, Люди и монастыри: Реальные исторические личности-русские Святые (Воронеж, 1997), с. 380.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03 도 베니아미노프의 요청에 따라 이 회사의 지원이 크게 작용했다. 33) 알래스카 원주민을 향한 베니아미노프의 특별한 선교적 열정은 그 누구도 따라오기 힘들 정도로 독보적이었다. 베니아미노프는 첫 선교지인 우날라쉬카섬과 1834년부터 시작된 시트카섬(о.Ситка, 알래스카 최남동부, 현재의 캘리포니아 해안지대)의 선교활동에서 대부분의 알레우트와 콜로쉬들을 평화적인 개종 으로 이끌었다. 그는 학교를 세워 손수 제작한 교과서로 학생들을 가르쳤고, 원주민들에게 대장간 일과 목공일, 종두접종법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34) 그밖 에도 원주민들의 언어와 생활방식, 문화 등의 학술연구물들을 저술해 냈으며, 많은 교회서적들을 원주민 언어로 번역해 내었다. 35) 그의 노력의 결실로 1840 년대 들어서서 알래스카의 여러 지역에 교회가 세워지고, 오랫동안 러시아인 들에게도 위협적인 존재였던 샤만이나 샤만행위가 근절되었고, 원주민들 사 회 내에서도 기독교식의 교회 결혼식이 점차 자리잡아 나갔다. Ⅲ. 캄차카 주교구 설립과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 극동 선교(시트카 주교구청 시기: 1840-53) 1. 19세기 러시아화와 기독교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국가와 교회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역사를 통해서 볼 때, 교회가 비록 국가 예속상태에서 존재해 왔지만 교회와 국가는 각각 기독교화와 러시아화라는 지향점이 다른 선교목표를 추구해 왔음을 알 수 있다. 이 양자 간의 서로 다른 목표는 항상 공존해 왔다. 기독교화란 비기독교(정교) 이민족(소수민족, 토착민 등)의 언어 와 문화를 존중하고, 토착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통해 신앙교리를 전하는 등 33) И. Вениаминов, Миссионерские записки из путевого журнала Иннокеннтия, епископа Камчатского, Курильского и Алеутского, веденного им во время первого путешествия его по вверенной ему епархии в 1842 и 1843 годах,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святителя Иннокентия митрополита Московского, апостола сибири и Америки (М., 1997), с. 137-142. 34) Сергий, еписков Новосибирского и Бердского (под ред.), Жития Сибирских святых (Новосибирск, 1999), с. 261-263. 1836-37년 시기에 천연두로 6,450명의 원주민 중에서 2,000명 정도가 사망했는데, 원주민들에 대한 천연두 치료는 원주민들과의 관계 증진의 큰 계기가 되기도 했다. 35) 베니아미노프가 알래스카의 우날라쉬카섬과 시트카섬에서 15년 간의 선교활동 동안에 출간해 낸 저술물로는 Записка об островах Уналашкинского отдела 와 Замечания о колошском и кадьякском языках и отчасти о прочих наречиях в Российско-американских владениях 가 있다.

104 제30권 3호 2014년 토착화 에 근간을 둔, 러시아화가 아닌 기독교화에 역점을 둔 선교사역을 의미한다. 36) 러시아 교회사가인 니콜라스 제르노프(N. Zernov)는 19세기에 이민족 선교의 토착화와 기독교화의 대표적 인물로, 1830년대 알타이 선교의 마카리 글루하료프(М. Глухарёв, 1830-44)와 알레스카 및 시베리아-극동 선교 의 인노켄티 베니아미노프(И. Вениаминов, 1823-68), 19세기 말 일본 선교의 니콜라이 카사트킨(Н. Кассаткин, 1836-1912)을 꼽고 있으며, 37) 이들 3인의 선교사역의 원형을 14세기 코미-페름의 성 스테판에게서 찾고 있다. 하지만 이민족의 기독교화가 반드시 러시아화로 이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19세기 후반들어 러시아 정부는 정교신앙을 통해서만이 아닌, 러시아 어 및 문화 교육을 통한 이민족의 러시아화 정책에도 관심을 쏟기 시작했다. 로만 스즈포르럭(Roman Szporluk)은, 러시아화의 목적은 다름 아닌 비러시아 인들을 언어와 정체감에 의해서 제국 러시아의 신민을 만드는 것이다. 즉 변방 민족들로 하여금 러시아인의 언어, 문화, 그리고 정교회 신앙을 받아들이 도록 만드는 것이 문화적인 차원에서의 러시아화이다 38) 고 전통적인 차원의 러시아화에 대해 개념을 정의하고 있다. 19세기 초 카람진 또한 정부관리들에 게 변방지역 민족들의 러시아화 방법과 관련, 성공적인 러시아화를 위해서는 반드시 이민족의 특성을 알아야 하고, 이민족이 수용할 수 있도록 정신적인 준비작업이 필요하며, 중요한 것은 힘으로 바꾸려 하지 말고, 지혜롭게 시행시 기와 추진 기간을 정해야 한다 39) 고 충고하고 있다. 러시아화의 방법에 대해 서 다양한 견해가 존재하고 있다. 하지만 궁극적인 목표는 이민족의 언어, 문화, 신앙, 인종적인 충성심을 점차적으로 약화시켜 자신들의 정체감을 없애 고, 궁극적으로 러시아 민족으로 동화시킨다는 점에서는 일치하고 있다. 정교회의 이민족 선교활동에서 러시아화가 공식적인 정책이 된 것은 19세 기 후반 알렉산드르 Ⅲ세(1881-94) 시대이다. 중앙정부는 러시아인과 러시아 어가 제국의 주인이 되어야 하고, 이민족들은 제국의 이익을 좇아서 러시아인 이 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40) 알렉산드르 Ⅲ세의 정책은 신성종무원(Святейший 36) 남정우, 동방정교회의 선교역사 연구, ꡔ선교와현장ꡕ, 제10집 (서울: 장로회신학대학교 세계선교 연구원, 2005), pp. 90-91. 37) N. Zernov, Eastern Christendom (New York: G.P.Putnam's Sons, 1961), pp. 180-184. 38) Eli Weatherman, Russification in imperial Russia: The search for homogeneity in the multinational state, Ph.D. diss. (Indiana University, 1996), p. 213-214. 39) Ceymour Becker, Contributions to a Nationalist Ideology: Histories of Russia in the first half of the Nineteenth Century, Russian History/Histoire Russe, 13-4 (1986), p. 351.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05 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инод)의 포베도노스체프(К.П. Победоносцев)에 의해 구체화되었다. 포베도노스체프는 러시아화 정책의 상징적인 인물이자 열렬 한 정교 지지자였다. 러시아화 정책은 부분적으로 국가의 통일성에 대한 위협 을 내포하고 있는 제국 내 이민족들의 점증하는 민족감정에 대한 반응이었으 며, 어떤 의미에서는 대러시아인들 자신의 성장하는 민족주의에 대한 응답이 었다. 강한 민족주의 성향의 알렉산드르 Ⅲ세는 통치 기간 동안 반란을 일으킨 폴란드인들뿐만 아니라 그루지야인, 아르메니아인, 그리고 점차 충성스런 핀란드인들에게로 까지 러시아화를 위한 조치는 확대되었다. 41) 알렉산드르 Ⅲ세의 민족주의적인 조치와 포베도노스체프의 교육 정책은 이후 1880년대 후반부터 등장하기 시작한 교회교구학교를 통해서 프리아무르(극동 지역)의 한인교육 현장에서도 반영되기 시작했다. 당연히 이민족의 기독교화보다는 국가의 목표인 러시아화를 위하여 봉사를 수행한 정교회 선교사들의 예가 훨씬 많았다. 19세기 후반에 러시아의 변방에서 선교활동을 수행한 사제나 선교사들은 대부분 국가로부터 봉급을 받으면서 러시아화의 한 방편으로 선교활동을 수행했던 것이다. 42) 이러한 상황을 주목해 볼 때, 국가주도의 선교활동 체제 하에서도 이민족들의 기독교화에 더 역점을 두었던 베니아미 노프의 선교활동이 더 주목을 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하겠다. 한편, 19세기 전후반을 거치며 러시아 국가와 정교회를 이끈 통합된 가치체 계는 관제국민주의 정책이었다. 이 관제국민주의 이데올로기는 전제주의(Са модержавие), 정교(Православие), 국민성(Народность)을 골자로 모든 러시아 제국민들이 정교회를 믿음으로 황제에게 충성케 하고, 나아가 러시아제국의 통합을 이루는 것을 목표로 삼고 있었다. 43) 이러한 정책은 러시아 제국민들로 하여금 정교를 강조하는 근간이 되었다.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는 이와 같은 관제국민주의 정책 속에서 수립되고 이행되어 나갔고, 19세기 초반 정교회의 선교정책은 제국변방의 강화책으로 러시아 정부의 관심을 받았고, 이는 이후 시베리아-극동 이민족 선교의 큰 축으로 작용했다. 가장 큰 변화는 선교부(миссия) 40) 남정우, op. cit., pp. 114-115. 41) 니콜라이 V. 랴자노프스키, 김현택 옮김, ꡔ러시아의 역사Ⅱ, 1801-1976ꡕ(까치, 1994), p. 123. 42) 남정우, op. cit., p. 110. 43) 니콜라이 V. 랴자노프스키, 김현택 옮김, ꡔ러시아의 역사Ⅱꡕ, op. cit., p. 37. 관제국민주의 정책은 니콜라이 Ⅰ세 시기인 1833년에 교육부대신 우바로프(С.С. Уваров, 1786-1855) 백작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다민족을 거느린 광활한 러시아제국을 통치해 나가는 일종의 민족주의적인 통치이념이었다.

106 제30권 3호 2014년 설립을 통한 체계적인 선교정책의 추구였다. 1828년 알타이 선교부를 필두로 최초의 선교사 파송이 시작되었다. 또한 카잔과 이르쿠츠크 등지의 15개 신학 교(духовная семинария)에서는 토착어 교육이 실시되었고, 선교활동에서 의 료진료나 심지어는 토착민들에 대한 물질적인 원조도 선교사의 의무로 규정 하기에 이르렀다. 44) 이러한 움직임은 이전 시기의 맹목적인 선교활동에 대한 자성과 교육적이고 체계적인 선교활동의 필요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하지만 19세기 후반 들어서 정교신앙을 통한 이민족 기독교화 정책에는 수정이 가해지기 시작했다. 정교회의 내부적 결속과 체제 정비를 강화해 나가 는 한편, 정교회 지도부는 특히 교육을 통한 이민족의 러시아화에 더 역점을 둔 선교정책을 추진해 나가기 시작했다. 특히 신성종무원장 포베도노스체프 (1880-1905) 체제 하에서 정교회 선교는 일종의 국가 정책으로 이민족들 사이 에서 강력히 추진되어 나갔다. 이는 19세기 후반 몇 가지의 상황변화에 따른 것이었다. 첫째로 기존의 정교신앙을 통한 선교활동이 국가의 입장에서 볼 때 이민족의 기독교화와 러시아화라는 두 측면에서 만족할 만한 결과를 가져다주지 못했다 는 인식의 변화 때문이다. 따라서 정교회 지도부는 우선적으로 선교조직과 선교사의 자격을 강화시키는 조치를 취하는 한편, 일민스키(Н.И. Ильминский, 1822-91)의 일민스키 시스템 을 통한 이민족 교육을 추구해 나갔다. 일민스키 시스템은 토착민의 언어는 살리되 타타르식 문자나 이슬람과 관련된 문자를 폐기하고, 러시아어 알파벳을 사용한 새로운 문자를 통해 교육하는 시스템이 자 체계적인 교육을 통한 개종화 시스템이다. 45) 이는 각종 혜택을 받고 개종한 타타르족 등의 이민족들이 개종 이후에 상황에 따라 다시 원래의 신앙으로 되돌아가는 것을 막는데 큰 의미가 있었다. 둘째로 18세기에 집단 개종되었던 볼가-우랄지역의 무슬림 타타르인들의 무슬림으로의 회귀 움직임 때문이다. 이전 시기에 러시아 정부에 의해 자유농 지 부여, 농노신분 및 군징집 면제 등을 통한 해당 지역 무슬림 타타르인들에 44) В.А. Федоров, Рус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 и государство(синодальный период 1700-1917) (М., 2003), с. 625. 시베리아 최초의 알타이 선교부가 설립되었는데, 이는 1820년대 경건파의 복음화 영향에 직면한 가운데 기독교화 활동을 등한시해왔다는 정교회 측의 인식에서 나온 결과물이었다. 45) 남정우, op. cit., p. 85.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07 대한 개종노력으로 18세기에 25만명의 타타르인들이 개종되었다. 하지만 1861년 농노제 폐지 이후 정교도와 타타르인들을 포함한 군징집이 재개되면 서 타타르인들이 다시 무슬림으로 돌아서기 시작한 것이다. 46) 전통적으로 러시아 내에서 무슬림을 주요 적( 敵 ) 중의 하나로 보아온 러시아 정부와 정교 회 지도부로서는 세례받은 타타르인들의 정교회로부터의 대량 탈퇴를 간과 할 수 없었던 것이다. 셋째로 고의식주의자들(старообрядец, 구신도, 분리파)과 흘르이스트이 (Хлысты), 스코프츠이 (Скопцы), 몰로카네(молокане), 슈툰디스트이(Штундисты) 등 분파교의 영향력 확대에 따른 정교회 지도부의 우려와 위기의식을 들 수 있다. 이 무렵 중앙에서 멀리 떨어진 동시베리아의 캄차카 주교구에 고의식 주의자, 몰로카네 등 분파교도들이 시베리아-극동지역으로 대량 유입되고 있었다. 이들은 18세기 말까지만 해도 주로 서시베리아 남부 알타이 지역과 동시베리아의 자바이칼주 지역에 거주하고 있었다. 분파교도들이 프리아무 르 지방으로 이동하자 캄차카 주교구의 지도부는 긴장했다. 이에 베니아미노 프는 톨스토이(Д.А.Толстой) 신성종무원장에게, 분파교도들의 가르침은 거짓 이고 근거없음을 밝혀주는 것이 중요하다고 언급하며, 대안으로 교육을 통한 교화를 강조하고, 이를 위해 관련서적을 보내달라고 요청하는 서신을 보내기 도 했다. 47) 정교회 분파교의 문제는 19세기 후반 들어 정교회 지도부를 가장 긴장시킨 문제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당시 정교회 지도부의 선교대상은 토착 민 이민족들에게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고, 정교분파 세력들도 재개종의 범주 에 포함시키고 있었다. 정교회 지도부의 이러한 국가의존적인 성향은 19세기 후반을 거치며 더욱 강해졌다. 이러한 성향은 1860년대 초반 러시아땅에 유입되기 시작하는 한인 과 시베리아-극동의 모든 비러시아계 이민족이나 원주민들을 대상한 선교활 동에서 반영되어 나갔다. 46) D.V. Pospielovsky, op. cit., p. 160. 47) И. Вениаминов, Письмо Толстому Дмитрию Андреевичу, 20 февраля 1867г.,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Избранные труды святителя Иннокентия митрополита Московского, апостола сибири и Америки (М., 1997), с. 349.

108 제30권 3호 2014년 2. 캄차카 주교구 설립과 알래스카 선교활동(1차 선교순례) 1) 캄차카 주교구 설립 19세기 중후반인 1880년대 초반까지만 해도 시베리아-극동, 특히 자바이칼 너머 지역의 다수자는 러시아인이 아닌 한인을 포함한 본래의 야쿠트족(Якут), 나나이족(Нанай), 니프히족(Нивх), 코랴크족(Коряк), 축차족(Чукча, 축치), 타 즈족(Таз), 올류토레츠족(Олюторец) 등의 원주민들이었다. 1820-30년대 알래 스카에서 알레우트, 콜레쉬 등의 원주민을 대상으로 성공적인 선교활동을 수행해 온 베니아미노프는 1840년대 들어서 이제는 시베리아-극동의 원주민 들에 대해서도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한반도로부터의 한인 의 이주는 시작되지 않았던 시기임을 주지할 필요가 있겠다. 베링해를 건너 시베리아-극동지역의 원주민에 대해서까지 베니아미노프의 관심과 선교영역 의 확장을 가능하게 한 것은 전격적으로 이루어진 캄차카 주교구(Камчатская, Курильская и Алеутская епархия, 초대 주교-베니아미노프, 주교구청-시트카; 옛지명은 노보-아르한겔스크)의 설립 덕분이었다. 캄차카 주교구의 설립은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의 한인을 포함한 이민족 선교의 한 획을 긋는 대형 사건이자 해당 지역 이민족 선교활동에서 가장 기념비적인 해 중의 하나로 선교역사에서 기억되고 있다. 또한 19세기 중반 러시아 정부가 바이칼 너머의 아무르강 및 우수리강 유역을 중심으로 한 극동지역에 대한 지리적 지배권을 확보해 나가는 시점에서 캄차카 주교구의 설립은 특별한 의미를 주고 있다. 캄차카 주교구는 이르쿠츠크 인노켄티 알렉산드로프(И. Александров, 1835-38) 대주교의 설립 청원에서부터 비롯되었다. 알렉산드르 대주교는 신성 종무원에 캄차카 주교구 설립문제를 제기했었고, 이후 닐(Н. Исакович) 수좌 대주교 시기인 1840년 12월 21일에 마침내 황제령에 따라 설립되었다. 48) 캄차 카 주교구의 설립 문제는 이미 오래 전부터 논의되어 온 사항이었는데, 동시베 리아의 인구증가로 방대해진 이민족 선교업무를 원활히 수행할 필요성이 내부적으로 제기되어 왔던 것에 대한 결과물이라 할 수 있다. 캄차카 주교구의 48) Polnoe sobranie zakonov rossiiskoi imperii s 1649 goda, Second Series, Vol. 15, No. 14073, Basil Dmytryshyn (ed.), Russian American Colonies, 1798-1867: To Siberia and Russian America, Three Centuries of Russian Eastward Expansion, A Documentary Record, Vol. 3 (Oregon Historical Society Press, 1989), p. 429.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09 주교구청은 러 미회사가 있던 알래스카 시트카섬(о.Ситка, 과거 노보-아르한 겔스크)에 위치하게 되었다. 이곳을 중심으로 캄차카 주교는 1840-53년 시기 동안 알래스카를 포함, 추콧카, 마가단, 연해주, 아무르주 등 광활한 지역을 관할했다. 캄차카 주교구의 설립은 동시베리아의 토착민 선교에 일대 전환점 을 가져다주는 큰 계기가 되었고, 정교회의 지도부인 신성종무원으로 하여금 동시베리아 전역의 이민족 선교의 길을 열어 놓게 하는 동력으로 작용했다. 무엇보다 가장 큰 의미는 국가-정치적 선교가 지배적이던 상황에서 토착화와 신앙에 바탕을 둔 선교활동과 기독교화를 추구했던 베니아미노프가 초대 주교에 임명되었다는 점이었다. 바야흐로 베니아미노프의 이민족 선교활동 의 제2막이 도래한 것이다. 2) 알래스카 선교활동(1차 선교순례: 알래스카 최남부 섬들 중심) 1840년 12월 15일, 베니아미노프는 캄차카 주교구의 초대 주교로 서임되었 다. 하지만 고위성직자의 반열에 오른 이후에도 베니아미노프의 선교적 행보 에는 크게 변함이 없었다. 오히려 더 헌신적이고 열정적이며, 더 강한 모습으로 선교현장을 누볐다. 캄차카 주교구의 주교가 된 이후의 그의 선교적 행보는 크게 두 지역(알래스카와 시베리아-극동)에서 진행되었다. 우선 그는 1840년대에는 1820년대 초부터 몸담아 왔던 알래스카 원주민 선교의 영적인 완성도를 제고시키기 위해 노력했다. 이를 위해 베니아미노프 가 보인 행보 중 주목할 만한 것 중에 하나는 1842년 초에 시작된 알래스카 최남단의 주요 원주민 집거지 및 교회들과 캄차카 반도에 있는 일부 교회들에 대한 1차 선교순례였다. 49) 베니아미노프는 주교구청이 있는 시트카를 기점으 로, 크게 세 지역을 대상으로 약 1년 반에 걸쳐 선교순례를 수행했다. 즉 그는 1단계로 알래스카 최남단 정남쪽에 위치한 카댜크(Кадьяк) 지역을 중심 으로 약 50일에 걸쳐 선교순례를 수행했고(1842년2월19일~4월9일), 이어 2단 계로 알래스카 최남단 서쪽에 위치한 알레우트군도(운가(Унга), 우날라쉬카, 49) 머리말에서 밝힌대로 당초 계획되었던 자료의 일부가 현지 기록보존소 사정으로 입수되지 못했다. 따라서 1840년대 초에 수행되었던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알래스카 주요 원주민 집거지와 교회들에 대한 1차 선교순례 관련 정보와 3절에서 언급되는 2차 선교순례 관련 정보, 그리고 이어 제시되는 러시아 사하(야쿠티야)공화국 국립기록보존소(НАРС(Я) 자료들을 중심 자료로 활용했다. 이는 열 거된 중심 자료들만으로도 본 논문에서 추구하는 바를 파악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판단이 되었기 때문이다.

110 제30권 3호 2014년 프리브일로프군도(성 게오르기섬, 성 파벨섬), 아트하(Атха))와 베링해 건너 페트로파블로프스크(Петропавловск)를 중심으로 한 캄차카 반도 주변 교회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총 105일에 걸쳐 선교순례를 수행했다(1842년 5월 5일~8 월 19일). 그리고 마지막 3단계로 그는 베링해 건너 오호크츠주의 원주민과 교회를 대상으로 1개월여에 걸쳐 선교순례를 수행했다(1843년 4월 3일~5월). 50) 선교순례의 목적은 현지의 원주민 교회와 사역자들의 활동 및 종교 활동 상황을 직접 목도하고 살피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거친 바다의 자연환경과 방대한 지역과 거리 등으로 인해 선교순례여행은 늘 위험요소가 뒤따르는 일정의 연속이었다. 1단계 순례단은 베니아미노프 본인 외에 수도보제(1인), 도우미(1인), 성가 소년(3인), 사제 및 그 가족, 기타 인력 등을 포함, 총 13명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1842년 2월 12일 시트카를 출발해 동월 19일에 마침내 카댜크에 도착 한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현지 카댜크 교회와 원주민 정교도들의 영적 상황을 살폈다. 당시 카댜크에는 이전에 세워졌던 목조교회를 대신하여 러 미회사의 지원으로 건립된 새 목조교회가 존재하고 있었다. 카댜크 교회는 러 미회사의 지원과 행정책임자(인노켄티 코스트로미티노프)의 노력에 힘입어 성상화를 비롯 모든 성물들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또한 러 미회사의 지원으로 사제를 비롯한 교회 소속 인력의 봉급 또한 나쁘지 않았고, 러 미회사가 소유하고 있는 좋은 숙소에서 생활을 하며 봉급 외에 난방과 전기까지 공급받고 있었 다. 51) 카댜크 교회는 세례자 수와 교회 규모면에서 알래스카 내 원주민 교회들 중에서 가장 큰 곳이었다. 하지만 베니아미노프 방문 당시 교회와 원주민 정교도들의 영적 상태와 생활은 잘 갖추어진 교회의 모습과는 많은 면에서 차이가 있었다. 전염병이 돌았던 1836-37년 이전에 원주민의 규모는 6,450명이 었으나 1841년 현재 그 수는 3,628명에 불과했다. 게다가 이중 세례를 받은 원주민은 2,650명이었고, 나머지는 비세례자들이었다. 52) 무엇보다 심각한 것 은 1841년도에 현재의 사제가 오기 전까지 비세례자는 차치하더라도 기존의 50) И. Вениаминов, Миссионерские записки из путевого журнала Иннокеннтия, епископа Камчатского, Курильского и Алеутского, веденного им во время первого путешествия его по вверенной ему епархии в 1842 и 1843 годах,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указ. соч., с. 120-145. 51) Там же, с. 122, 125-126. 해당 교회 이전에 카댜크에는 이전의 선교사들에 의해 1796년, 1824년도에 세워진 교회들이 존재해오고 있었다. 52) Там же, с. 126. 카댜크 인구 3,628명 중 러시아인은 73명, 크레올 482명, 카댜크인 1,489명, 케나예츠 인(кенайцы) 794명, 추르가치인(чургач), 알랴크시네츠인(аляксинец) 342명이었다.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11 세례자 원주민들의 영적 상태가 현저히 낮은 수준에 있어 왔다는 점이었다. 그 면면을 살펴보면, 100명에 이르는 2-10세 유아들이 비세례 상태였고, 전체 인구에서는 1천명 이상이 비세례 상태 하에 있었다. 또한 많은 경우 여전히 비기독교식 결혼이 행해져 왔고, 교회 참회식이나 기타 의식에 참여하는 원주 민 세례자들의 수도 지극히 희박했다. 심지어 교회 주변에 거주하고 있으면서 도 10-30년 동안 교회 의식이나 의무를 이행하지 않는 러시아인의 경우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교회의 축일이나 축제 기간의 경우에도 교회를 찾는 원주민이나 심지어 러시아인의 수 조차도 극히 희박할 정도였다. 가령 알레우 트들의 경우, 교회 주변까지는 오더라도 정작 교회 내부는 들어오지 않고 주변에 앉아 관망하는 경우가 많았다. 53) 약 20여년 간 교회가 기능해 왔음에도 불구하고, 한편으로는 이르쿠츠크 주교구 지도부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사제 와 교회의 부족과 교회와 거주지 간의 거리상의 문제 등으로 큰 성과로 이어져 오지 못했던 것이다. 카댜크 지역의 교회와 러시아인을 포함한 원주민들의 낮은 영적 상황을 목도한 베니아미노프는 주교구 관할지역의 주교로서 현장 사역자-사제와 보 제(표트르 리트빈체프, 일랴 트이쥐노프) 및 행정책임자(인노켄티 코스트로 미티노프)와 더불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특히 교회 축일이나 축제 기간 시에는 5세 이상의 유아들을 초대하여 연령대에 맞는 교회 의식과 규칙들을 가르치도록 교회에 지시 및 조치를 취했다. 특히 가르치는 과정에서는 칭찬을 수반한 교육이, 그리고 듣지 않는 아동들에게는 강압보다는 주의와 반복적인 교육을 통해 정교 신앙에 대한 인식을 높여가도록 특별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베니아미노프의 지속적인 관심과 지시, 그리고 러 미회사를 통한 지원에 힘입어 카댜크 교회와 원주민들의 영적 상황은 점차 개선되어 나갔다. 우선 원주민들 사이에서 여전히 사라지지 않고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쳐왔던 샤마니 즘이 근절되어 나갔는데, 샤만 스스로가 세례를 받고 개정하는 사례 또한 적지 않았다. 또한 베니아미노프 주교 방문 시기에 200여명이 세례를 받는 등, 세례자 수가 점차 증가해 나갔으며, 비기독교식 결혼이 근절되기 시작했 다. 뿐만 아니라 진심으로 회개 의식에 참여하는 원주민의 수가 늘었고, 무엇보 다 교회 안에 들어와 예배에 참석하는 원주민 세례자들의 수가 점차 증가해 53) Там же, с. 127.

112 제30권 3호 2014년 가기 시작했다. 54) 이외에도 베니아미노프는 카댜크지역의 교구를 분리하고, 각 교구마다 책임 사제를 두어 교회로부터 멀어지거나 영적인 침체가 발생하 지 않도록 하는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그의 카댜크 방문은 잠자고 있던 원주민 모두의 영성을 깨우는 대 사건이었고, 이는 2, 3단계 순례 방문 시에도 그대로 이어져 나갔다. 2, 3단계 순례는 알래스카 최남단 서쪽의 알레우트군도와 베링해 건너 극동 의 캄차카 반도 및 주변, 그리고 오호츠크의 교회와 원주민들을 대상으로 진행되었다. 이번 선교순례 또한 대상 지역 행정책임자와의 사전 논의와 캄차 카 주교구청 및 산하 기관의 지시와 지원이 뒤따랐다. 1842년 5월 5일 오전 10시에 상선 <오호츠크>에 몸을 실은 베니아미노프 주교 일행(수도보제 1인, 도우미 1인, 성가 소년 4인)은 예정보다 조금 늦은 5월 20일 아침에 첫 방문지인 운가(Унга)섬에 도착했다. 5월 16일까지 잠잠하던 바다가 거센 풍랑에 휩싸이 면서 제대로 배가 운항을 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첫 도착지인 운가섬의 원주민들(알레우트, 크레올)은 베니아미노프를 열렬히 환영을 했다. 그들은 베니아미노프를 마치 아버지를 맞이하듯 대했고 모두가 과거의 베니아미노프 를 기억하고 있었다. 베니아미노프 주교 또한 마치 사랑스런 자식이나 형제, 친구를 대하듯 그들과의 만남을 축복했다. 베니아미노프 주교를 더욱 감동시 킨 것은 과거에 원주민들에게 건네주었던 알레우트어로 된 첫 성서 번역물들 이 그냥 방치된 것이 아니라 여인들에게까지도 읽혀지고 있었고, 한 크레올 여자는 분명하고 총명하게 성서를 읽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모든 일행을 놀라게 만들기도 했다. 첫 도착지인 운가섬에서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사흘 동안 원주민들과 더불어 감격의 예배를 집전했다. 55) 5월 23일 이른 아침, 베니아미노프 주교 일행은 운가섬의 원주민들을 뒤로 한 채 주요 방문지인 우날라쉬카섬을 향해 닻을 올렸다. 이후 주교 일행은 5월 28일, 출발 전에 그토록 희망했던 예수승천절(День Вознесения Господня, 부활제 후 40일째 목요일) 이른 아침에 우날라쉬카 항구에 닻을 내렸다. 베니아미노프 주교가 과거 사제-선교사 신분으로 우날라쉬카섬 마지막으로 밟은 것은 1834년 이었 다.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닻을 내리자마자 환영나온 원주민들과 더불어 감격 54) Там же, с. 129-132. 55) Там же, с. 134-135. 확보된 자료의 부족으로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1차 선교순례 3단계 오호츠크에 서의 행적에 대해서는 생략하기로 한다.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13 과 감사의 예배를 올렸다. 우날라쉬카 교회 또한 러 미회사의 지원으로 1825년 에 세워진 것으로 이전까지는 15년 동안 기도소만 존재해 왔다. 교회의 내부는 아름답게 채색이 되었고, 성물이나 성상화 등이 잘 갖추어져 있었다. 주목할 점은 러 미회사의 지원으로 사제는 충분한 봉급을 받고 있었고, 교회 인력들 또한 나쁘지 않게 생활을 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러 미회사에 속한 숙소 외에 난방과 전기까지 지원을 받고 있었다. 방문 당시 원주민 세례자들은 1,500명 정도였고, 알레우트, 크레올, 그리고 일부의 러시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다만 1,500베르스타가 넘는 거리에 걸쳐서 거주를 하고 있는 점이 원주민 정교도들의 영성유지에 어려움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56) 우날라쉬카 교회는 비교적 안정적이고 무엇보다 원주민 정교도들의 영성이 잘 유지가 되고 있었다. 이는 러 미회사의 지원이 풍족해서만은 결코 아니었다. 원주민 선교에서 풍족한 물질과 사제나 원주민들의 영성과는 비례하지도 않거니와 오히려 경우에 따라서는 해로운 요인으로 작용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방문 기간 동안 원주민 어린이들을 위한 실제적인 지시와 조치를 취했다. 그는 앞서 카댜크 교회 사제에게 그랬던 것처럼, 교회 축일 기간이나 혹은 개인적으로 라도 어린이들을 초대한 후 알레우트어를 아는 사제나 보제가 아이들에게 정교도로서의 의무나 규칙을 가르치도록 지시했다. 또한 예배나 슬라브어로 된 복음서를 읽고 난 이후나 재계( 齋 戒 ) 이후에는 반드시 복음서나 교리문답서를 읽어 줄 것을 지시했다. 57) 우날라쉬 카 교회의 외적, 영적인 발전의 주요 요인은 사실상 약 20년에 걸친 베니아미노 프 주교의 위와 같은 지속적인 관심과 노력 속에서 찾아볼 수 있을 것이다. 물질적인 측면은 러시아 정부와 특히 러 미회사의 지원에 힘입은 바 크다. 하지만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헌신적인 노력과 지속적인 관심 덕분에 우날라 쉬카 교회의 원주민 정교도들은 회개와 예배생활을 꾸준하게 유지해 나갔다. 특히 베니아미노프에 의해 자신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서를 아주 열심히 읽고 자 했고, 글을 모르는 경우는 글을 배워서까지 번역 성서를 읽고자 했다. 또한 원주민들의 영성이 높아지자 원주민 공동체 내에서는 범죄나 죄행 등도 56) Там же, с. 135-138. 베니아미노프 주교가 기록한 또 다른 자료에 보면, 비슷한 시기 우날라쉬카 교회의 원주민 정교도 수는 총 1,751명으로, 이중 러시아인과 그 가족이 42명, 크레올 212명, 나머지 는 알레우트 1,479명으로 기록되어 있다(И. Вениаминов, Записка <Состояние православной церкви в Российской Америке,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указ. соч., с. 156 참조). 57) Там же, с. 139.

114 제30권 3호 2014년 거의 사라져 갔다. 토착화와 원주민의 언어를 기반으로 한 인내심있는 선교활 동이 얻어 낸 결과물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베니아미노프의 선교순례는 계속되었다. 1842년 7월 5일 저녁 6시, 베니아 미노프 주교 일행은 성 게오르기섬에 도착했다. 닻을 내린 직후 베니아미노프 는 다수의 알레우트 정교도들과 예배를 올렸고, 그들에게 경건함에 대한 설교 와 복음에 대한 확신을 심어주었다. 이튿날일 7월 7일 아침에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성 게오르기섬을 떠났고, 다음 날인 7월 8일 아침 무렵에 성 파벨섬에 도착했다. 성 게오르기섬과 성 파벨섬에는 교회는 없었고, 대신 러 미회사의 지원으로 세워진 기도소만 기능을 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두 섬 원주민들의 정교신앙에 대한 열정은 낮지 않은 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특히 성 파벨섬 원주민들의 경우 열렬한 환영 속에 베니아미노프 일행을 맞이해주었을 뿐만 아니라, 감격의 웃음과 눈물 속에 베니아미노프 주교를 동행하며 여기저기 안내와 소개를 했다. 그들은 또한 베니아미노프가 떠나기 전에는 자신들이 직접 봉급을 줄 용의가 있으니 사제를 직접 파송해 달라고 까지 요청을 했다. 58) 비록 선교 인력의 부족으로 부족한 측면들이 곳곳에서 노출되고는 있으나 정교신앙에 대한 원주민들의 관심과 열의만큼은 가는 곳마다 뜨거웠다. 토착 화에 바탕을 두고 1820년대 초부터 시작되어 온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원주민 선교가 비로소 결실을 맺어가는 대목 중의 하나라 할 수 있을 것이다. 1842년 7월 9일 아침, 베니아미노프는 아트하섬을 향해 다시 닻을 올렸다. 다행히 바다는 잠잠했고 바람은 순풍이 불었다. 7월 14일 아침 8시에 아트하섬 항구에 닻을 내린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원주민 정교도들과 예배를 올렸다. 아트하섬의 교회 또한 1830년에 러 미회사의 지원으로 건립된 것으로 비교적 상태가 양호하게 보존되어 있었다. 종과 교회 운영 도구들의 경우는 보수가 필요하고 보충되어야 할 부분이 있었지만 베니아미노프 주교에 의해 바로 그에 따른 조치 지시가 내려졌다. 교회 인력은 사제 1인과 교회 봉사자 2인이었 는데 모두가 현지 출생자들이었다. 이곳의 교회를 비롯한 인력 모두가 러 미회 사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사제의 경우 봉급 외에 숙소와 난방, 전기, 그리고 도우미까지 제공받았다. 59) 이후 아트하섬에서 10일 간 체류하며 베니아미노 프는 교회와 원주민들의 영적 상황을 살폈다.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앞선 교회 58) Там же, с. 139-141. 59) Там же, с. 141-142.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15 들에서처럼 원주민 성인들의 영적 성장과 어린 아이들의 정교신앙 전달에 큰 관심을 두었다. 베니아미노프는 독서용으로 성서를 알레우트어로 번역하 고, 먼 지역의 교회에 보낼 용도로 알레우트어로 된 기도서를 만들도록 현지 교회 사제에게 지시를 내렸다. 뿐만 아니라 축일이나 축제 기간 동안에는 어린아이들을 초청하여 정교도로서의 의무나 규칙 등을 가르치도록 지시를 내리기도 했다. 60) 베니아미노프 주교가 관심을 쏟은 것은 여기에 그치지 않는 다. 그는 현지 교회 사제들이 사역현장에서 높은 영성을 유지하고, 또 제대로 교육받은 사제로서 현장에서 사역을 해 나갈 수 있도록 정교회 지도부와 상의하여 다양한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3. 시베리아-극동 선교활동(1,2차 선교순례) 1) 1차 선교순례(캄차카, 오호츠크 중심) 1840년 12월에 캄차카 주교구가 설립된 이후, 1820년대부터 알래스카 원주 민 선교를 주도해 온 베니아미노프는 이제 사제가 아닌 고위성직자, 즉 주교로 서 알래스카 선교를 이끌어 왔다. 이때까지 캄차카 주교구의 중심인 주교구청 은 알래스카 최남단에 있는 시트카섬(노보-아르한겔스크)에 위치하고 있었고, 자연스럽게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주요 선교 무대는 시베리아-극동보다는 알 래스카에 맞추어져 있었다. 하지만 캄차카 주교구의 주교구청이 1853년에 극동의 야쿠츠크로 옮겨지게 되면서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원주민 선교는 알래스카에서 시베리아-극동으로 더 확장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실제적으 로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시베리아-극동지역 원주민들에 대한 관심과 첫 행보 는 1840년대 중반인 1차 선교순례 수행 때부터 이미 실천으로 옮겨지고 있었다 는데 주목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 짧게나마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시베리아-극동 선교활동의 첫 발이 디뎌지는 순간을 살펴보도록 하자. 1차 선교순례가 진행되던 7월 24일 이른 아침에 베니아미노프 일행은 마침내 아트하섬을 출발하여 베링해 건너 캄차카 쪽으로 방향을 잡았다. 그러나 도중에 다시 한번 악천후와 역풍까지 만나면서 위험고비를 넘겼고, 지체된 끝에 8월 10일 점심 무렵에서야 베린고프(Берингов) 60) Там же, с. 143.

116 제30권 3호 2014년 섬에 도착을 했다. 이곳 섬에는 교회는 없었고, 잘 정돈되어 있는 기도소만 기능을 하고 있었다. 원주민들의 규모는 137명이었는데, 대부분 앞서 거쳐 왔던 아트하섬 출신의 이주 원주민들이었다. 예배와 설교를 전한 후 베니아미노프 일행은 8월 12일 오후 3시 경에 다시 캄차카를 향해 닻을 올렸다. 캄차카로 향하는 도중 다시 심한 풍랑을 만났고, 우여곡절 끝에 8월 18일 저녁 7시 경에 페트로파블 로프크에 도착을 했다. 그날 저녁 캄차카 구역교구장(благочинный) 61) 프로코피 그로모프(П. Громов)가 선체에 머물고 있던 베니아미노프에게 다녀갔고, 이 튿날 이른 아침에는 캄차카 행정책임자 스트란놀류프스키(Г. Страннолюбски й)가 베니아미노프 주교를 방문하고 서로 인사를 나눴다. 이후 뭍으로 나온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그 길로 캄차카 교회를 방문했고, 많은 참석자들이 함께 한 가운데 감사의 예배를 올렸다. 62) 1차 선교순례 기간 중 캄차카 주교구청이 있는 시트카에서 시베리아-극동의 캄차카까지 이어진 2단계 순례방문은 총 105일에 걸쳐 진행되었다. 이 기간 동안 51일은 항해하는데 할애가 되었고, 총 6,000베르스타가 넘는 거리를 넘나들며 베니아미노프 주교에 의해 순례방 문이 수행되었다. 원주민 사역에 대한 확고한 종교적, 신앙적 신념과 인간애가 없었더라면 감히 흉내내기조차 어려운 행보였으리라 생각된다. 2) 2차 선교순례(캄차카, 오호츠크, 추콧카 중심) 한편 1840년대 중후반인 1846-47년 시기에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2차 선교순 례가 시베리아-극동지역을 중심으로 수행되었다. 이는 시베리아-극동지역에 대한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선교무대가 한 단계 확장되는 계기가 되었다(알래 스카 시트카에 캄차카 주교구청이 위치하고 있던 시기). 2차 선교순례의 주요 선교대상 원주민은 캄차달족(Камчадал), 코랴크족, 축차족, 야쿠트족 등이었 다. 2차 선교순례(1846년 9월~1847년 9월) 기간 동안에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2개의 성당(собор, 캄차카 성당, 오호츠크 성당)과 13개 교회, 3개 기도소를 61) 구역교구장은 18세기부터 러시아 정교회 내에서 존재해온 주교 밑의 직책으로서, 교회와 수도원 등의 성직자들을 감독하는 임무를 맡고있는 성직자이다(http://www.diam4.npi.msu.su/calendar/ (검색 일: 2003.3.21); А.М. Прохоров (глав ред.), Большой энциклопедический словарь (М., 1998), с. 133 참조). 62) И. Вениаминов, Миссионерские записки из путевого журнала Иннокеннтия, епископа Камчатского, Курильского и Алеутского, веденного им во время первого путешествия его по вверенной ему епархии в 1842 и 1843 годах,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указ. соч., с. 144-145.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17 둘러 보았다. 1차 선교순례 시기에 있었던 첫 방문 이후에 캄차카와 오호츠크주 에는 2개의 새 교구(приход) 63) 가 신설된 바가 있는데, 둘 다 오호츠크주에 위치하고 있다. 2차 선교순례 기간에는 아나드이르스크(Анадырск)에 새롭게 세례를 받은 축차(축치)족들이 중심의 3번째 교구가 신설되었다. 뿐만 아니라, 앞선 2개의 교구 내에는 교회가 이미 건립되었고, 이번에 신설된 교구 내에도 새 교회와 기도소가 건립되었다. 전체적으로 첫 방문 이후로 9개의 교회건물 (교회-5개, 기도소-4개)이 건축되었고, 특히 기쥐가(Гижига), 우다(Уда), 아얀 (Аян) 등의 교회와 기도소들이 자체적으로, 혹은 러 미회사의 지원 하에 새롭 게 보수가 되기도 했다. 상황을 보면, 기도소들의 경우 정교도들의 지원으로 건립되는 경우가 많았고, 우다 교회를 제외하고는 교회 지원과 교구민들의 기부금으로 건축되었고, 아얀 교회의 경우는 러 미회사의 지원으로 건립이 되었다. 우다 교회의 경우는 양초판매대금으로 건립이 되었고, 아얀 교회의 경우에 은화 700루블이 국고지원 되기도 했다. 64)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2차 선교순례 당시 캄차카주와 오호츠크주 내의 주요 교회 시설 및 선교인력 상황과 물질 지원 상황을 더 살펴 보도록 하자. 베니아미노프 방문 당시 캄차카 주와 오호츠크주 내에는 3개 교구와 15개 주요 교회가 자리하고 있었는데, 이중 9개 교회는 캄차카에, 나머지 6개 교회는 오호츠크주에 위치했다. 여기에 사역 인력은 수도사제(протоиерей) 2명, 사제 17명, 보제 2명, 도우미 38명이 활동하고 있었다. 베니아미노프는 방문 기간 동안 사역에 부적절한 2명의 사제는 해직하거나 대기근무 조치를 취하기도 했다. 반대로 모범적인 사역을 해 오고 있는 캄차카 성당의 로기노프(Г. Логинов) 사제와 아나드이르 교회의 볘레샤긴(Р. Верещагин) 사제, 수도사제 중 베니아미노프(С. Вениаминов) 등 의 경우는 큰 칭찬과 격려를 통해 사역활동에 힘을 실어 주기도 했다. 65) 베니아 미노프 주교는 교구민들의 신앙과 영성활동에 가장 직접적인 영향을 미치는 부류가 바로 사제직이라고 보았다. 따라서 부적합한 사역자의 경우 과감히 시정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사제를 포함한 교회 인력의 숙소들 또한 대부분 63) 교구는 교회와 신도공동체를 포함하고 있는 가장 낮은 형태의 교회-행정 단위이다(А.М.Прохоров (глав ред.), там же, с. 961; http://www.diam4.npi.msu.su/calendar/ (검색일: 2003.3.21) 참조). 64) И. Вениаминов, Миссионерские записки из путевого журнала Иннокеннтия, епископа Камчатского, Курильского и Алеутского, веденного им во второе путешествие его по Камчатке и Охотской области в 1846 и 1847 годах,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указ. соч., с. 146-147. 65) Там же, с. 148-150.

118 제30권 3호 2014년 기쥐가 교회를 제외하고는 국고지원을 받고 있었다. 즉 페트로파블로프스크 에 있는 숙소들은 신성종무원의 지원으로 구입된 것이었고, 그 외 지역들에 있는 숙소들은 일부는 교회 지원, 일부는 교구민들의 지원으로 건립 혹은 구입된 것들이 대부분이었다. 아얀에 있는 숙소의 경우 러 미회사의 지원을 받고 있었고, 봉급 또한 넉넉하게 받고 있었다(은화 780루블). 66)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선교순례 기록에서 언급된 내용들만 보더라도 알래스카나 시베리아- 극동 지역 원주민 선교활동에서 물질적인 부분은 대부분 국고나 특히 러 미회 사의 지원이 절대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즉 교구 내의 교회 및 기도소(성물, 성상화, 종 등), 숙소(난방, 전기 등) 등의 운영비와 사제 및 기타 사역자들의 봉급 등이 이에 해당된다고 할 수 있다. 하지만 그러한 물질적인 지원 조건과 선교사역의 열매가 반드시 비례하는 것은 아니었다. 앞서 언급한 알타이지역 의 마카리 글루하료프, 일본지역의 니콜라이 카사트킨의 경우도 그러했듯이, 본 논문의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사례를 보더라도 세례를 받고 영성있는 진정 한 원주민 정교도를 배양해 내기까지는 선교사 그 자체의 엄청난 인내와 노력, 그리고 헌신이 투입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국가-정치적인 성격의 선교활동 속에서도 사역자만큼은 비국가-정치적인 성격의 헌신이 더 우선함 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시베리아-극동의 원주민들에 대한 2차 선교순례 당시 베니아미노프 주교가 가장 많은 관심을 기울인 것은 캄차달족, 코랴크족과 축차족, 야쿠트족이었다. 이들은 오랫동안 러시아인들에게 대해서 적대적인 반응을 보여왔기 때문이었 다. 이는 과거 러시아 정부의 시베리아 개척 과정에서 러시아 정부와 원주민들 과의 만남 속에서 그 원인을 추적해 볼 수 있다. 1580년대 예르마크에 의해 시작된 시베리아 동진 정책은 승승장구하며 아무르강 연안으로 까지 이어졌 다. 하지만 알바진 요새를 둘러싼 청과의 충돌(1685)로 러시아의 아무르 진출 은 실패로 끝났고, 결국 네르친스크 조약(1689)으로 러시아의 아무르 진출은 19세기 중엽 아이훈조약(1858)과 북경조약(1860)이 체결 될 때까지 발이 묶이 게 되었다. 아무르 진출이 어렵게 된 러시아 정부는 캄차달족, 코랴크족에게 모피와 상아 등을 징수하며 캄차카와 추콧카 방면으로 진출을 시도했다. 캄차 카의 식민진출은 1687-99년에 걸친 아틀라소프(В.В. Атласов)의 원정탐험으 66) Там же, с. 151.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19 로 시작되었는데, 반세기에 걸쳐 러시아들은 잔인함과 약탈성을 보여주었다. 한편으로 캄차카의 완전한 식민화와 알래스카 진출에 있어서 큰 장애가 되고 있던 추콧카의 축차족에 대한 원정도 이어졌다. 결국 캄차카 반도는 1789년에 평정되었지만 축차족들은 완고하게 러시아 정교신앙을 거부했으며, 67) 1862 년까지도 인구수가 파악되지 않았고, 여전히 야삭납세의무를 지고 제국신민 서약을 하지 않은 채 남아있었다. 68) 축차족의 러시아 지배에 대한 당당함의 배경에는 나름의 원인이 있다. 그들은 18세기 말부터 충돌보다는 러시아인과 알래스카 원주민사이의 모피중개자로서 역할을 했고, 러시아인과 혼인관계 를 맺어오기 시작했다. 또 한때 인구수에 있어서 러시아인들을 압도했던 축차 족에게 식량공급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러시아인들로서는 축차족과의 원만 한 상호관계를 유지하지 않을 수 없었고, 이는 북동시베리아에서 축차족들의 헤게모니를 증가시켜 주는 요인으로 한때 작용하기도 했었다. 69) 여기에 한때 가장 인구 규모가 큰 야쿠트족의 경우도 러시아인들에 대해 비우호적인 태도 를 취해오고 있었다. 70) 이는 러시아인들이 야쿠트족과의 만남에서 야삭 징수 를 목적으로 야쿠트족의 인구수에 먼저 관심을 보이는 등 야쿠트족을 선교의 대상으로 보다는 야삭 납부자로 보려는 경향이 존재해 왔기 때문이다. 71) 하지 만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이들 원주민들에 대한 지속적인 관심과 헌신은 점차 결실로 이어졌다. 1846-47년 캄차카와 오호츠크, 추콧카 지역의 선교순례 과정 에서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코랴크족이 더디게 정교신앙을 받아들일 뿐 퉁구 스족, 축차족, 심지어 야쿠트족까지도 개종을 받아들이고 있음을 확인했다. 또한 원주민 세례자들의 이교적인 샤만행위도 사라져 가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72) 또한 비록 세레와 개종 성과는 아직은 미약했지만 오랫동안 러시아인과 러시아적인 것에 적대관계에 있던 코랴크족과 축차족들의 마음에 도 정교신앙을 불어넣는 한편, 유목민인 올류토레츠족과의 끊임없는 접촉을 67) J.J. Stephan, The Russian Far East: A History (California: Stanford Univ. Press, 1994), p. 24. 68) М.А. Тырылгин, Истоки феноменальной жизнеспособности народа Саха (Якутск, 2000), p. 45. 69) A.A. Znamenski, op. cit., pp. 141-144. 70) J.J. Stephan, op. cit., p. 22. 71) М.А. Тырылгин, указ. соч., с. 42. 야삭은 15-20세기 볼가강 연안과 시베리아의 비러시아계 민족들 에 부과되었던 현물세이다. 72) И. Вениаминов, Миссионерские записки из путевого журнала Иннокеннтия, епископа Камчатского, Курильского и Алеутского, веденного им во второе путешествие его по Камчатке и Охотской области в 1846 и 1847 годах, Б. Пивоваров (Сост.), указ. соч., с. 152.

120 제30권 3호 2014년 통해서 샤만들로부터 세례와 개종 약속을 받아 내는데 성공했다. 73) 베니아미 노프 주교의 노력으로 1851년 경에는 2,940명의 축차족에게 세례가 주어졌 고, 74) 1871년에는 최초의 축차족 선교부가 조직되었고, 이를 중심으로 1870-80 년대에는 디오니시(Дионисий, 1873-83)와 아나톨리, 아가판겔 같은 사제들은 688명의 축차족에게 세례를 베풀었다. 75) 이후 1870년대부터 19세기말까지 이 지역에서 17,500명이상의 원주민들이 개종을 했으며, 1899년 한 해 동안에 만 626명의 원주민들이 세례를 받았다. 76) 이렇게 시베리아-극동의 북동부지 역에서 코랴크족, 축차족들에 대한 선교가 성공적으로 지속되어 나갈 수 있었 던 요인 중의 하나는 1860년대 말 베니아미노프 주교가 성-페테르부르그로 복귀한 이후에도 모스크바정교회선교협회 를 통해서 시베리아-극동의 원주 민 선교에 지속적으로 관심과 지원을 쏟았기 때문이었다. Ⅳ. 베니아미노프(대주교)의 시베리아-극동 선교 (야쿠츠크 및 블라고베셴스크대주교구청 시기: 1853-68) 1. 야쿠트족 선교에서 나타나는 베니아미노프 선교의 성격과 재원조달체계 1850년에 베니아미노프 주교는 대주교에 서임되었다. 이는 베니아미노프 주교의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 원주민 선교의 눈부신 공로가 정교회 지도 부와 러시아 정부에 의해 받아들여지고 인정받았음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1853년에 캄차카 주교구의 중심인 주교구청은 알래스카 시트카에 서 시베리아-극동의 북동부에 있는 야쿠츠크로 이전되었다. 이는 시베리아-극 동 북동부에서 가장 규모가 큰 야쿠트족과 주변의 원주민들에 체계적이고 본격적인 선교활동을 알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73) Вера. Глушкова, указ. соч., с. 382. 74) A.A. Znamenski, op. cit., p. 159. 75) Ibid., pp. 167-168. 러시아인과 축차족의 관계가 남달랐던 만큼 축차족의 개종과정과 그 결과에 대해서는 일부 회의적인 시각도 있다. 축차족이 개종을 받아들이는 데에는 두 가지 목적, 즉 1)개종 은 러시아인과의 상업관계, 다시 말해 전통적인 상호관계의 표현이었으며, 2)축차족은 흔히 개종 시에 주어지는 선물(설탕, 담배, 옷, 금속제 생활용구 등)을 받는데 있었다는 것이다. 76) 1900년 경 캄차카 주교구는 선교지구 24개, 사제 17명, 전도사 17명, 학생 500명, 교구학교 23개를 보유하게 되었다.

19세기 초중반 러시아 정교회의 한인을 포함한 알래스카 및 시베리아-극동지역 이 병 조 121 1853년, 야쿠츠크(현재 러시아 야쿠티야(사하) 공화국 수도)로 대주교구청 이 이전되어 온 이후에도, 그리고 더 높은 지위에 올랐음에도 베니아미노프 대주교의 원주민 선교에 대한 열정은 식을 줄을 몰랐다. 오히려 그는 더 높아진 지위를 이용하여 더 체계적으로, 러시아 정부 및 정교회 지도부와의 연계를 통해 더 많은 지원을 확보하여 원주민 선교현장에 쏟아 붓고자 몸부림 쳤다. 10년에 걸친 야쿠츠크 체류와 선교활동에는 바로 베니아미노프의 이민족 선교의 성격과 특성, 그리고 선교활동에 중요하게 작용했던 재원조달체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이하에서 10년에 걸친 그의 헌신적인 야쿠트족 선교를 살펴보도록 하자. 베니아미노프 대주교는 부임 직후 야쿠트족을 상대로 한 선교활동에 집중 했다. 또한 그는 한편으로는 아무르강(흑룡강)과 제야강(아무르강 지류) 유역 의 골드족과 길랴크족 내에도 선교지구를 열어 놓으며 선교의 영역을 확대해 나갔다. 베니아미노프 대주교의 아방가르드식 선교활동에 1856년에는 신성 종무원(Святейший Правительствующий Синод) 또한 아무르 지역의 이민족 (원주민 포함)에 대한 공개적인 정교회 선교를 공식 허가했다. 77) 야쿠트족에 대한 베니아미노프 대주교의 선교방식은 과거 1820-30년대 그 자신이 알래스 카 원주민을 상대로 취했던 방식과 동일했다. 가장 규모가 큰 야쿠트족의 경우 러시아 정부의 시베리아 진출 과정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할 정도로 야쿠트족의 위상은 컸었다. 가령, 18세기 초반 베링의 캄차카 탐험대의 활동시 기에는 야쿠트족의 많은 식량과 인력, 말들이 동원되었고, 캄차카로 들어가는 정교회 선교사들을 이송시켰으며, 오호츠크로 들어가는 관리나 유형자, 제염 공장 건축설비 등을 운송했다. 또한 18세기 중반부터는 알래스카로 들어가는 러 미회사의 산업가와 상인, 상품과 화물 등을 운송하기도 했었다. 78) 따라서 베니아미노프 대주교는 야쿠어로 된 성서 번역과 이를 통한 체계적인 정교신 앙 전달과 토착화에 바탕을 둔 선교만이 가장 규모가 크고 자존심이 강한 야쿠트족을 확실하게 정교신앙으로 이끌 수 있다고 보았다. 하지만 상황은 녹록치 않았다. 1840년대 중반에 2차 선교순례 시에 베니아 77) ꡔМиссионерꡕ, No. 6 (1874), с. 63-67. Миссионерская деятельность между корейцами в Камчатской епархии в 1872г. ; П. Ивановский, Краткий очерк развития миссионерского дела среди корейцев Южно-уссурийского края, Д. Поздняев(Сост.), История российской духовной миссии в Корее (сборник статей) (М., 1999), с. 125. 78) М.А. Тырылгин, указ. соч., с. 260-26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