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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합뉴스) 마이더스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내지 뒷

Transcription:

抗日獨立運動期의 人物 硏究 -金奎植의 一生- 宋 建 鎬*37) Ⅰ. 亡國의 風雲 속에서 Ⅱ. 靑雲의 뜻을 품고 Ⅲ. 亡命과 抗日闘爭 Ⅳ. 混亂 속의 獨立運動 Ⅰ. 亡國의 風雲 속에서 尤史 金奎植은 1881년 1월 27일 경남 東萊에서 태어나 1950년 12월 10일 북한 만포진 부근에서 돌아갔다. 그의 평생은 민족과 운명을 같이 한 위대한 애국자였으나 그가 추구한 민족노선은 이승만의 노선과 대립되는 입장에 있었기 때문에 정당한 평가를 못받고 그간 학계에서조차 외면된 채 제대로 연구대상이 되지 않았다. 그러나 40여 년이 지난 오늘날 그의 민족노선에 대한 재평가가 일어나고 있으며 최근에서야 우사에 대한 관심이 새로와지 고 있다. 白凡 金九와 더불어 해방 한국의 3領袖의 한사람으로서 민족의 자주 독립을 위해 큰 활동을 했다. 그는 기독교인으로 민족주의자였으며 동시에 진취적 민주주의를 신봉하는 현대적 정치인이었으며 평생토록 항일민족운동으로 시종하였다. 우사의 아버지는 金智性이 라고 했고 동래부의 하급관리였으므로 본래 강원도 洪川태생이었지만 김규식을 동래에서 낳았다. 김지성은 청풍 김씨로 신라 金閼智의 후손인 金大猷를 시조로 하는 조선조 후기의 명문거족이었으나 숙종 영조 정조 때에 노론계에 속하면서 당쟁에도 관여하고 그간 많은 벼 슬을 한 유명한 가문이었다. 한말 외무대신을 지낸 김윤식도 역시 같은 가문 출신이다. 이러한 전통으로 미루어 볼 때 김지성은 사대부요, 가풍과 권위를 이어받았을 것이 틀림 없고 김규식도 능히 그런 환경과 신분을 누릴 수 있었으나 김규식은 그렇지 못했던 것 같 다. 떠도는 말에 의하면 그는 혈통이 적손이 아니라는 말도 있다. 우사 김규식이 태어난 이 듬해인 1882년에는 임오군란이 일어났고 그가 미국으로 가기 3년전인 1894년에는 동학란 이 일어났다. 이러한 상황은 한마디로 한시대의 종말과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뜻하는 것으 로 이러한 시기에 태어난 김규식은 나면서부터 파란이 운명지워져 있었다. 그는 태어나면 * 한겨레 신문사 대표이사.

- 106 - 國史館論叢 第18輯 서부터 서양 선교사의 지도를 받았으며 일찍부터 개화인텔리로서 주목을 받게 되었다. 김규식은 4 5살 되던 해 그의 아버지 김지성이 어떤 정치적 사건에 연루되어 유배를 당하 게 되고 9살되던 해에는 그의 어머니마저 세상을 떠나 혈혈단신의 고아가 되었다. 고아가 된 우사는 큰 비극이었으나 보기에 따라서는 이 불행이 훗날의 김규식이 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해 주었다고도 할 수 있다. 어린 나이에 갑자기 고아가 된 김규식은 서울에 있는 숙부 댁에 몸을 의탁하게 되었으나 어느날 큰 병에 걸려 생명이 위독하게 되었다. 숙부댁에서는 어린 규식이 죽을 것으로 생각하고 포대기에 싸서 병풍 뒤에 내놓았었다 한다. 이때 언더우 드 목사내외가 그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1885년 한국에 도착했다. 한국에 도착한 그는 의사 알렌이 개원한 광혜원에서 화학과 물리학을 강의했다. 이듬해 즉 1886년에는 고아원과 학교를 창설했는데, 이 고아원에 들어 온 아이들 가운데 김규식이 들 어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 목사는 김규식에게 있어서 생명의 은인이며 동시에 부모나 다름 없었다.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로부터 교육을 받게 되었으며 종교적 감화를 받았다. 고아원 에는 25명 가량의 원아들이 있었으며 그들은 자기 방의 관리와 자기들의 먹을 취사를 해결하 면서 학교운영상 필요한 여러가지 일들을 했다. 새벽 3시에 일어나 방을 정리하고 청소를 한 다음 8시까지 한문 공부를 했다. 이때 한 외국인이 와서 아침기도를 인도한 다음 기도회가 끝나면 아침식사를 했다. 다음으로 영어공부를 했다. 영어공부를 하고 다음 성경공부를 했다. 오후에는 오락과 습자시간과 한문시간이 있었다. 이 당시의 교직원과 학생이름을 보면 선생 에는 언더우드를 비롯해 알렌내외 睦源弘 尹致景 鄭泰容 등이 있었고, 학생으로는 宋淳明 安 昌錫 金裕淳 김규식 등이 있었다. 이상의 학생생활로 미루어 보면 김규식은 대단히 힘겨운 훈 련을 받았으며 새벽 3시에 기상한다는 것은 불교나 천주교의 수도원보다도 더 엄격한 것이고 어린나이에 한문뿐 아니라 성경과 영어까지 배우며 신식공부를 했다는 것은 드문 일이었다. 1890년에 김규식의 아버지 김지성이 사망하였다. Ⅱ. 靑雲의 뜻을 품고 1891년에는 학당이름을 耶蘇敎 학당이라 개칭하고 교과과목은 체육 작문 문법 독서 산 술 역사 번역 지리 등이 추가되었다. 그리고 교육목표도 장차 민족의 계몽과 기독교 선도에 전념할 인재양성에 주력했다. 김규식이 훗날 개화와 기독교 사상과 민족주의자로 성장하게 된 이면에는 이같은 어릴 때의 훈련이 있었던 것이다. 언더우드 부부의 총애를 받았다고는 하나 고아가 된 어린 김규식이 행복할 리가 없었다. 아주 극단적으로 배타적이었던 한국사회에서 외국선교사가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산다는 것 은 여러가지 심리적 억압과 고통을 주었을 것이다.

- 107 - 그 당시는 서양 선교사들이 어린 아이들을 키워 잡아먹는다느니 무슨 실험에 사용할 것 이라는 등 여러가지 유언비어가 나돌았고 때로는 고아원 아이들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일 도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신분을 아직 중요시하던 사회에서 고아원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더욱이 서양인의 신세를 진다는 것은 어린 아이들 간에 큰 경멸과 천대의 대상이 되었으며 이웃 아이들의 놀림감이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어린 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의 친절에도 불 구하고 많은 심적 고통을 느끼며 자랐다. 그러던 중 하루는 서울거리에서 우연히 아버지를 만나 그 길로 고향인 홍천까지 갔으나 아버지를 만난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그가 9살 되던 해에 아버지마저 세상을 떠나 어린 규식은 완전히 고아가 되고 말았다. 어린 김규식 의 주위에서 걷잡을 수 없이 일어나는 비극과 철없는 이웃 아이들이 보여준 멸시와 차별은 그의 성격형성에 많은 작용을 했다. 그는 성인이 된 후에도 언제나 냉정하고 찬 인간이라 는 평을 받았는데 아마도 이런 성격의 원인은 어린시절 소년기에 형성되었을 것이다. 그는 1896년에서 1897년 사이에 미국 유학의 길을 떠난다. 어떠한 경로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지는 확실치 않다. 그가 미국에 유학을 가게 된 데에는 언더우드 목사의 도움이 별로 없었던 것 같다.1) 독립협회를 조직해서 계몽운동에 종사하던 서재필 박사의 영향을 받았을 런지도 모른다. 김규식은 서재필 박사가 경영하던 독립신문사에 잠시동안 근무한 일이 있었 는데 서박사는 이때 젊은이들에게 미국유학을 적극적으로 권고했었다고 한다. 그 당시 한국 이 개화를 하고 열강의 침탈에서 독립을 하기 위해서는 미국에 가는 것이 제일 좋다는 권고 를 하였다고 한다. 김규식이 미국으로 출발한 것은 서재필이 한국에 머물러 있었던 1896년 에서부터 1897년 사이였다. 하여간 김규식은 1897년 가을 미국 동부에 있는 버지니아 주의 로녹(Roanoke)대학 예과에 입학하였다. 1903년 학부를 졸업할 때까지 만 6년간 이곳에서 생활했다. 로녹대학은 한폭의 풍경화와도 같이 아담하고 깨끗한 소도시인 세이럼에 위치하 고 있는데 세이럼 바로 옆에 있는 로녹시는 당시 인구가 5천명 정도로 철도와 국도의 교차 점으로 상업이 발달하고 비교적 높은 문화수준을 유지하고 있었다. 김규식의 미국 유학은 1897년부터 1903년까지이며 1904년에 귀국하였다. 미국에서의 6년 간에 걸친 유학은 김규 식으로 하여금 그때 조선에서 단연 선각적인 지식인으로 만들었고 암담한 조국의 운명을 이 끌어 나갈 지도자의 자리에 앉혀 놓았다. 이제 그는 고아시절과 학교 훈련기간을 청산하고 한 사람의 선각적 지식인으로서 민족의 봉사자요 교사로서 활동할 단계에 도달했다. 그 당 시 국내사정을 보면 서울에는 러시아 일본 청국 등 주변열강들이 물밀듯 들어와 있었고 이러 한 열강의 침입에 그때의 나라 지도층은 역사적 방향감각을 잃고 할 바를 모르고 있었다. 김규식이 서울에 돌아왔을 때 서울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그를 우러러 보았고 또 그를 포 섭하고자 하였다. 더욱이 그때 한국땅에 처음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열강의 상사들에게는 청년 김규식과 같은 존재가 얼마나 필요한 인물이었는지 모른다. 여러 은행이나 광산회사 1) 李庭植, 金奎植의 生涯 p. 18.

- 108 - 國史館論叢 第18輯 에서는 많은 봉급을 주겠다는 등 좋은 조건을 내세우며 그를 자기회사에 끌어 들이려고 했 다. 그러나 그는 이러한 좋은 취직권고를 받아들이지 않고 잠시 정치정세를 살피고 있다가 1905년 1월 2일에 일본이 러시아 제국의 여순을 함락시키자 1월 8일자로 모교인 대학에 하나의 논문을 보냈다.2) 김규식은 이 논문속에서 여순의 함락으로 말미암아 러일전쟁도 곧 끝날 것이라고 전망하였다. 김규식은 러시아와 일본의 강화조약이 체결될 회의를 참관할 예정으로 서울을 떠났으나 미 쳐 포츠머드에 도착하기 전에 강화조약이 체결되고 말았다. 그가 누구와 상의하고 또 어면 목적으로 포츠머드에 가려고 했는지는 알 길이 없으나, 1903년에 발표한 글에서와 같이 이 미 일본의 야욕을 환히 내다보고 있던 그로서는 각국에 호소하여 일본이 조선 왕국을 점령하 지 않도록 설득해 보려는 생각에서였는지도 모른다. 아직 24 5세의 나이 어린 청년으로서 그렇게 중요한 국제회의에 나서려고 했다는 것은 그가 보통 젊은이와 다른 피끓는 애국 청년 이었다는 것을 말해 준다. 다 아는 바와 같이 러 일 강화조약이 체결된 지 불과 2개월 후인 11월 17일에는 이른바 을사조약 이 체결되어 한국은 외교권을 박탈당하고 만다. 이처럼 막막한 처지에서 그는 뉴욕에 가서 대학원에 입학할 작정으로 출국하려고 했으나 이미 외교 권을 장악한 일제는 김규식의 여권신청을 거절하여 대학원에 가려는 그의 희망은 실현되지 못했다. 을사조약이 체결된 후 그는 미국의 모교에 머물러 있는 한국 동창에게 편지를 보내 일본통치에 들어 간 한국은 민족으로서의 특수성 또는 그 존재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다고 우려하였는데 로녹대학 잡지는 그의 편지 내용을 발표하였다. 나라 사정이 이렇게 어지럽게 변하고 있을 때 청년 김규식은 언더우드 목사의 비서로 일하게 되었다. 그가 언더우드 목사 의 비서로 일한다는 것은 곧 자유민권운동의 일환으로써 교회활동과 근대적 학교경영 및 청 년교육운동에의 참가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하면, 그는 경신학교 경영에 참여하였으며 새문안교회에서 활동했고 YMCA 교사활동 및 연희전문 등 몇몇 학교에서의 교편생활을 했다. 김규식의 이러한 각종 사회활동은 물론 따로 따로 떼어 생각할 문제가 아 니다. 개화기에 들어선 후의 사회 각층의 지도적 인물을 살펴볼 때 일부 천도교 신자들을 제 외한다면 대부분이 기독교인이었다. 즉, 서재필 안창호 이상재. 이승만 김구 여운형 등 많은 젊은 지도자들이 모두 기독교신자라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따라서 정치면에 많은 관심을 품 었던 청년 김규식이 선교와 교육사업에 헌신하게 된 동기를 능히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 당시는 정치활동 즉 개화와 선교와 교육사업에서 뚜렷한 구별을 찾을 수 없었다. 로녹대학 잡지 (1906년 7월호)에 의하면 그는 언더우드 목사를 돕는 한편 연구논문을 쓰기 시작하였는데 그는 한글문법에 관한 책을 출간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그는 다분 히 학자로서의 소질을 구비한 인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이승만은 獨立精神과 영문으로 된 일본의 내말 을 썼는데 두 권 모두 해설과 계몽을 목적으로 하고 있는데 2) 李庭植, 앞의 책 p. 31. 金奎植은 이 글 속에서 旅順의 함락으로 露日戦爭의 結果를 예언했다.

- 109 - 반해 김규식의 저서는 교과서적 성격이 농후했다. 이때 김규식은 종교와 계몽사업을 하는 데 있어서 자기 맡은 바 일에 누구보다도 충실하였다. 당시 그는 영어를 잘하고 어질고 친 절하며 퍽 자상한 선생님이라는 호평을 받고 있었다. 이와 같이 청년 김규식이 선교와 계몽사업에 젊음을 바치고 있을 때 결혼에 관한 얘기가 오르내리게 되었다. 개화라는 말이 통용되고 서양문물이 물밀듯이 밀려들어 오고 있던 당 시에 미국에서 최고학부를 마치고 패기와 정열이 넘쳐흐르는 청년 김규식이 많은 사람들의 화제의 대상이 되었으리라는 것은 추측하기 어렵지 않다. 당시 세브란스 병원 의사로서 사 회적 명망이 높던 김필순 박사의 동생인 김순애 여사와도 혼담이 있었으나 김순애는 아직 정신학교에 재학 중이어서 혼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27세의 청년 김규식은 미국에서 돌아온 지 3년 후인 1906년 5월 21일 같은 새문안교회 교인이며 과거에 군수를 지냈다는 조순암의 15세 된 무남독녀 趙恩愛와 화촉을 밝히게 되 었다. 새문안교회에서 거행된 이 결혼식은 우사 김규식을 큰 화제거리로 만들었다. 외국에 서 교육을 받고 선교사와 같이 일하고 있는 청년의 결혼식이라면 의례 서양식의 신식결혼 식이 될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상식이나 김규식은 사모관대 차림에 신부는 족두리를 쓰고 연지를 찍고 혼례를 치르는 전통적인 의식에 따랐던 것이다.3) 이 광경을 본 하객들은 이것 은 청년 김규식이 가진 애국심의 발로라고 칭찬해 마지 않았다고 한다. 외국에 오랫동안 살다 온 김규식이 한국 고유의 미를 되새기고 전통을 살리려고 하는 의도를 엿볼 수 있다. 결혼 후 김규식은 부인이 구식 선비댁에서 자라 두문불출하는 생활을 하고 있었으므로 그 는 부인을 정신학교에 입학시키고 신문학을 배우게 하였다. 1909년에 김규식 부부는 장남 을 보았으나 6개월만에 죽었고 그후 1912년에 또 아들을 낳았으니 金鎭東이다. 김규식이 유학에서 돌아온 후 두 가지 주요한 사업을 했다. 하나는 원더우드 목사가 창설 한 경신학교 일을 맡아 보았다는 점이다. 경신학교는 그 때 지금의 서울시 蓮建洞의 근처에 있었는데 김규식은 그 학교의 경영을 거의 떠맡다시피 했다. 그의 교육이념은 실업을 중시 하는 일이었다. 김규식은 학감이 된 후 당시의 쟁쟁한 기술선각자들을 학교교사로 많이 초 빙했다. 김규식은 경신학교 건물을 증축하고 건물지하실에는 수세식 변기를 설치했다. 수세 식 변소를 설치한 것은 경신이 아마 한국에서 첫 번째가 아닌가 한다. 신식교육이념에 투철 했던 김규식은 체육을 중시했다. 경신학교에는 대학부가 창설되어 이것이 훗날 연세대학교 로 발전했는데 김규식은 여기에서도 영어강사로 후진을 양성했다. 김규식의 제자인 조병옥 을 비롯한 많은 청년학생들이 미국유학을 결심하게 된 것은 김규식 신흥우 백상규 등 그때의 교사들의 감화에 기인했다. 그러나 1911년 일본이 조선교육령을 발표하면서부터 경신학교에 탄압의 손이 뻗쳤다. 특히 기독교계 학교의 경우 일제탄압은 심했다. 일제의 한국사립학교 탄압과 관련해 김규식은 훗날 파리강화회의에 낸 독립청원서에 이 사실을 신랄히 비난했다. 3) 李庭植, 앞의 책 p. 36.

- 110 - 國史館論叢 第18輯 교육을 통해 청년들에게 민족의식을 양성하여 그 힘으로 잃어버린 조국을 되찾으려 한 김규 식의 꿈은 결국 일제의 탄압으로 좌절되고 말았다. 김규식은 더 이상 교육의 길을 갈 수 없 다는 결론에 도달했으며, 그 결과 교육자 김규식을 독립운동가로 방향전환을 하게 하였다.4) 김규식이 전념한 또 한 가지 중요한 활동분야는 YMCA를 근거로 한 청년학생 운동이었 다. 김규식은 한국 YMCA 창립멤버 중의 한 사람이었다. YMCA는 1903년 10월 28일 황 성, 기독교 청년회란 이름으로 한국 YMCA를 창설했는데 1904년에는 월남 이상재를 비롯 해 한 때 독립협회에서 자유민권운동을 하던 투사들이 대거 합류하였다. YMCA는 일제탄압 으로 설 땅을 잃은 그 당시 한국의 지식층 민족운동가 자유사상가 기독교신자들의 방편적 집 결체가 되었다.5) 따라서 초기 YMCA에는 강렬한 사회참여 의식과 개혁의지 및 계몽주의적 성격을 띨 수밖에 없었고, 지식층과 청년학생들은 YMCA의 각종 사회활동과 교육활동을 통 해 억압된 불만을 표출할 수 있었다. 김규식은 1904년 교사로 봉직하다가 초대 학관장이 되 었으며 1910년에는 YMCA 학생부 담당 간사 겸 이사가 되었다. 1908년경 김규식은 경신 학교 경영보다도 YMCA 일에 더 많은 정열을 쏟았다. 남대문 밖 세브란스병원 근처에 살고 있던 김규식은 학생들에게 늘 새 시대에 맞게 생각하고 활동할 것을 권유했으며 인쇄 목공 사진 등 기능교육의 필요성을 기회 있을 때마다 역설했다. 그때 YMCA 학관에는 鄭求暎 卞 榮魯 李源喆 李寬九 등 명문 대가의 자제들이 다니고 있었는데 이들은 그때 양반식 사고로 체육과목을 싫어해 일제히 동맹휴학을 일으킨 일도 있었다. 이에 학관장 김규식은 강경책으 로 맞서 15명을 퇴학처분하면서 스포츠를 경시하는 사대부 풍토를 개탄했다. 체조과목을 의 무화한 장본인은 개화론자 김규식이었던 것이다. 우사는 YMCA에서도 영문법을 가르쳤다. 그 당시 김규식은 무척 꼼꼼하고 용의주도했으며 빈틈이 없는 사람이었다고 한다. 복장도 한복보다는 양복차림을 하고 다녔다. YMCA에서 근무하면서 김규식은 두 번 해외여행을 했 다. 첫번째는 1907년 일본 동경에서 기독청년학생연맹 세계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이때 김 규식은 윤치호 등과 함께 대회에 참가하여 쇠퇴해 가는 조선 왕조하의 민간외교사절로서 한 국을 대변했다. 두번째는 1912년 북경에서 극동지역 YMCA 대회가 열렸을 때였다. 대회에 참가한 나라는 중국 홍콩 한국 등 이었는데 김규식은 그때 YMCA 총무일을 보았던 질레트 와 신흥우와 함께 한국대표로 활약했다. 이 무렵 한국 YMCA는 심각한 존폐의 기로에 직면 해 있었다. 학생계몽활동은 점차 지역적으로 전국 규모로 확대되었고 비기독교학생에까지 그 영향력이 미치게 되었다. 그때는 일제의 한국병합이 강행된 시기였던 만큼 다른 많은 사 회단체가 일제의 탄압으로 강제해산된 직후여서 민족계몽운동을 계속하던 한국 YMCA는 점 차 일제의 날카로운 감시를 받게 되었다. 이래서 일제는 한편으로는 105인 사건을 조작하여 YMCA 지도급 인물들을 투옥시키는 한편 한국 YMCA를 일본 YMCA에 흡수시키려는 음 4) 柳根一, 理性의 韓國人 p. 42. 5) 宋建鎬, 한국그리스도교운동사 ( 한나라 한겨레를 위하여 ) p. 134.

- 111 - 모를 꾸였다. 일제의 앞잡이들은 한국 YMCA 안에 維新會란 괴뢰조직을 부식해서 그것을 온상으로 항상 기독청년회를 조선기독중앙청년회로 개칭하여 이를 일본 YMCA에 통합시켜 버렸다. 이런 강압은 일본 앞잡이들과 일본헌병대의 폭력으로 진행되었으며 김규식의 두번 에 걸친 해외여행도 일제의 이런 음모를 방해키 위한 필사적 저지공작이었던 것으로 생각된 다. 한국 YMCA가 간판을 빼앗기고 선교사 등이 잇따라 추방 또는 투옥되자 한국 YMCA 을 근거지로 모였던 선각자들은 망명의 길을 가거나 국내에 잠입하여 명맥을 이어나가지 않 을 수 없었다. 김규식은 망명의 길을 떠났다.6) YMCA는 김규식에게 있어 최초의 사회활동의 근거지였다. 이것이 허물어지자 그는 보 다 근본적인 활동 즉, 민족독립운동을 하기 위하여 망명의 길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 청년 김규식은 적극적인 반일투쟁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민족의 원수인 일본인들에게 포섭당한다 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었다. 유능한 항일투사라는 낙인이 찍힌다는 것은 치명상이 아닐 수 없었다. 이러한 사정으로 해서 32세의 청년 김규식은 마침내 망명의 길을 떠나고 야 말았다. 김규식은 압록강을 건널 때 중국에서 청조를 타도하고 중화민국을 세운 계기를 만든 辛亥革命의 주동자인 손문을 만나서 일을 같이 하길 원했었다. 조국을 잃은 그 당시 한국청년들 사이에는 중국에서의 신해혁명에 대한 뉴스에 큰 감명을 받았던 것이다. Ⅲ. 亡命과 抗日闘爭 미국에서 배운 개화된 지식과 학구적인 탐구력 등을 민족을 위해 교육사업에 쏟고 있던 청 년 김규식은 일제의 주목의 대상이 되지 않을 수 없었고 김규식은 그들의 회유의 마수를 뿌 리치고 망명의 길을 떠났던 것이다. 청년 김규식이 망명의 길을 가기는 했으나 발붙일 곳은 없었다. 망명을 떠난 김규식은 우선 상해에서 그 해를 보냈다. 당시 상해에는 벽초 洪命熹 호 암 文一平 소앙 趙鏞殷 단재 申采浩 그리고 신성모 등이 모여 있었는데 이때 춘원 李光洙도 상해에 와 있었다. 그는 세계여행을 할 목적으로 전주 오산학교를 떠나 신의주 대안인 안동 에서 위당 鄭寅普 선생을 만났는데 위당은 상해에 여러 인사들이 있다고 하여 상해로 가기를 권했다.7) 김규식은 안동에서 청복을 사입고 상해로 가는 배를 탔다. 나라를 잃은 우국지사들 이 이국 땅에 모여 앉아 매일같이 의논한 것이 무엇일 것인가는 길게 논할 필요가 없다. 이 광수가 11월말 경에 상해에 도착했을 때 김규식은 단재 신채호에게 영어를 가르치고 있었다. 단재는 우사에 대한 불평이 대단했다.8) 그는 김규식이 원래 성격이 깐깐하고 영어발음을 대 6) 柳根一, 앞의 책 p. 48. 7) 李庭植, 앞의 책 p. 44. 8) 李庭植, 金奎植의 生涯 p. 45.

- 112 - 國史館論叢 第18輯 단히 까다롭게 말하기 때문에 춘원에게서 영어를 배우겠다며 찾아갔다. 그는 발음은 쓸데없 고 뜻만 가르쳐 달라고 해도 김규식이 발음에 대해서도 까다롭게 굴었던 모양이다. 양력설에 는 이들 30여 명이 한자리에 모여 신년회를 가졌다. 은사 단재 벽초 소앙 호암 춘원 등 그후 30 40년 동안 한국 민족의 상징적 존재였던 인물들이 한 자리에 모였던 것이다. 망명의 길을 떠날 때 다소의 금전을 가지고 가긴 하였으나 이국땅에서 이 돈이 오래 갈 리 만무하다. 그래서 그는 생계의 방법을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다행히 그는 영어가 능숙한 덕분에 당시 중국 각 지에 진출하기 시작한 서양 상사들과 쉽게 접촉할 수 있었다. 이러한 연결로 그는 1914년 가을에 몽고에서 장사를 시작했다. 몽고에서는 가죽을 팔았고 화북에서는 성경을 팔았으며 상해에서는 발동기를 팔았었다. 그는 1916년 자기 사업은 그 만두고 앤더스 마이어 회사에 입사하여 張家口에 2년간 머물렀다. 상사에 취직하고 있었음 으로 생활형편은 국내에서 보다 나았던 것 같다. 한편 김규식이 부인과 어린아이를 남겨 두고 망명을 떠났기 때문에 부인은 어린 아들과 함께 남편을 찾아 장가구까지 와서 다시 가정살림을 하였다. 그러나 그의 부인은 당시 불치병으로 알려졌던 폐병으로 인해 재회의 기쁨을 나눈 지 얼마 안되어 1917년에 작고하였다. 그러던 중 1918년 3월에는 일하던 미 국회사에서 외몽고의 수도인 고린에 지점을 열기로 되어 김규식은 또 몽고를 향해 떠났다. 그 길은 약 1,000km 나 되는 거리인데 꼭 목적지에 도달할 때까지 55일 걸렸다고 한다. 자동차로 가기도 하고 눈이 쌓여서 10여 일간 중도에서 머무르기도 하고 37일간 낙타를 타고 사막을 건너야 하기도 했다. 이 시기야말로 인간 김규식에게 있어 가장 번민이 많았 던 시절이었다. 그는 몽고에서 오래 있을 계획은 없었다. 김규식이 장가구에 정착한 직후인 1914년 7월에는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 국내외에 걸쳐 항일지사들이나 학생들은 한국 독립에 대한 일류의 희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은 전쟁이 일어난 직후부터 이번 사태가 한국독립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추측하고 그날 그날의 정세를 주시하고 있었다. 그 때 李東輝 朴殷植 등 항일투사들은 1915년 초에 고려혁명당을 조직하였는데 그들은 독일이 승리할 것으로 보았다.9) 이때 일본은 프랑스 영국을 도와 독일에 선전포고를 하였고 중국 에 대하여는 1914년 21개 조항의 굴욕적인 요청을 강요한 바도 있으므로 독일과 중국을 반드시 일본을 칠 것이며 일본은 그 결과 패전할 것으로 보았다. 이때 한국사람들이 독일과 중국에 협력한다면 독립을 얻을 수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일 본에 유학중인 학생들도 같은 문제를 논의하였다. 이러한 해석들은 독립을 열망하는 한국 지사들에게 희망적이고 아전인수격인 전망이었던 것만은 사실이나 몽고에 떨어져 있던 김 규식의 마음속에 어떤 생각이 있었는지는 알려지지 않았다. 전쟁 중에 그때까지 중립을 지 키던 미국이 영 불 측에 가담함으로써 정세는 돌변하여 1918년 11월 3일에는 오스트리아 9) 위의 책 p. 48.

- 113 - 헝가리 제국과 독일이 항복하고 전승국인 27개 국가의 대표 70여 명이 1919년 1월 18일 파리에 집결하여 강화회의를 열고 전후대책을 논의하였다. 항일독립지사들의 독일이 승리 할 것이라는 가냘픈 희망은 미국의 참전으로 대세가 역전되고 말았던 것이다. 미국이 참전 한 후에 전세계 사람들의 주목과 인기를 끈 것은 1918년 1월 8일 미국의회에서 선포한 윌 슨대통령의 14개 조항으로 된 평화대책이었다. 윌슨의 이러한 제안이야말로 그 당시 국제 적인 이상주의를 대표하는 것이었는데, 여기에서 윌슨은 국제연맹을 제창하였고 식민지문 제를 처리함에 있어서 통치하는 정부의 주장과 통치받은 민족의 이익이 동등하게 다루어져 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윌슨대통령의 이 성명은 한국지사들에게 큰 용기를 주었음은 물론 이다. 상해에 있던 몇몇 한국애국지사들 사이에서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대표에 대 한 문제가 토의되었다. 이러한 일에 직접 계기가 된 것은 윌슨대통령의 비공식 대표인 차 알즈 크레인의 중국 방문이었다. 그는 1918년 11월 말이나 12월 초에 상해에 도착하였고 사업가로서 윌슨대통령의 선거비용을 부담했으며 장차 騎中 대사로 기대되는 사람이었다. 몽양 여운형은 크레인을 따로 만나 한국독립의 가능성을 문의하였던 바 그는 윌슨선언 의 제 5항은 모든 약소민족에 해당된다고 했으며 몽양이 한국대표 派送의 가부를 물었을 때 이에 찬성하였고 적극 협조하겠다는 약속을 하였던 것이다. 이에 극도로 흥분한 몽양은 당 시 일본에서 와세다대학을 마치고 상해에 체류하고 있던 설산 장덕수 등 여러 동지에게 크 레인과의 회견내용을 설명하고 대표파견과 독립청원서 제출문제를 토의하였다. 이 당시는 아직 임시정부가 수립되지 않았을 때이므로 대표파견과 청원서제출의 단체설립이 필요하게 되어 신한청년단이라는 단체를 급조하였다. 이 모임에서 대표로 선출된 이가 김규식이었으 며 여운형은 김규식박사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영어에 능하기 때문이라고 진술하였다. 몽 고에 살고 있던 김규식은 그때 상용으로 천진에 와 있었는데 연락을 받고 곧 상해로 왔었 다. 1918년에 많은 기대를 모았던 독일이 패전하여 강화회의가 열리게 되자 미국에 있는 이승만 안창호 등 동지들이 강화회의에 가서 무슨 발언권을 얻을 수 있을까 생각하였다. 우사 김규식이 여비로 수 천원을 가지고 왔고 설산 장덕수도 부산을 경유하여 국내에 들 어가 2,000원을 모금했고 상해에 있는 동지들도 2천원 정도를 거두었다고 한다. 이보다 조 금 앞서 김규식은 김순애라는 여성과 결혼식을 가졌었다. 새로 결혼한 김순애는 김규식이 새문안 교회에서 일하고 있을 당시 그 교회의 교인이었기 때문에 서로 낯선 사이는 아니었 다. 김순애의 오빠인 김필순과 김규식은 서로 극친한 사이였고 앞서 지적한 바와 같이 김 규식의 첫번째 결혼 때에도 김순애와 김규식 사이에는 혼담이 오간 일이 있었다. 또한 김 규식은 결혼 후 자기 부인을 정신학교에 다니게 했으므로 당시 정신학교에 다니던 김순애 와는 동창관계에 있었다. 그후 김규식의 부인이 임종할 때 장남 진동의 장래를 염려하여 당신에게 좋은 여자를 소 개해 줄 터이니 꼭 김순애와 결혼하라고 부탁까지 하였다고 한다. 그 당시 김순애는 독신

- 114 - 國史館論叢 第18輯 주의를 고집하였으나 병석에 계신 노모께서 너를 시집보내지 않으면 죽어도 눈을 감을 수 없다고 애원하여 결혼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첫 부인이 돌아간 지 1년 후인 1918년에 김 규식은 그 당시 남경 明德학교에 다니던 김여사와 약혼을 하였는데 파리파견문제가 제기되 자 김규식은 남경 어느 선교사 댁에서 3 4인의 증인 앞에서 신에게 서약하는 결혼식을 가 졌다고 한다. 결혼 한 당일로 상해에 가서 파리파견문제를 의논하고 약 2주일 후에 그는 파리를 떠났다. 파리를 떠나는 김규식의 여비를 마련해 주려고 상해에 있던 동지들은 각자 가지고 있던 푼돈을 내놓고 예복있는 사람은 예복까지 희사해서 돈을 모았다고 한다. 김규 식이 상해에서 파리에 가기로 결정하고 여러가지 문제를 토의하던 중 그는 어떻게 하면 한 국민족의 주장과 청원이 보다 더 효과적으로 전 세계에 알려질 것인가 하는 문제를 연구하 는데 골몰하였다. 그는 이런 말을 했다고 한다. 내가 떠나기는 하되 세계 각국의 대표들이 내가 누군지 알 리가 없다. 지도상에 보더라도 한 반도는 쌀알크기밖에 되지 않고 한국이라는 나라는 거의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내가 만일 정식 대표라면 회의석상에 좌석이 있고 발언권도 있겠지만 나는 방청인에 불과한 것이므로 내가 한 일은 일제의 학정을 폭로하는 선전이다. 그러나 나 혼자의 말만을 가지고는 세계의 신용을 얻 기가 힘들다. 그러니까 신한청년단에서 서울에 사람을 보내어 독립을 선언해야 되겠다. 그 사 람은 희생이 되겠지만 국내에서 무슨 움직임이 있어야 내가 맡은 사명이 잘 수행될 것이고 우 리나라 독립에 보탬이 될 것이다. 이런 토의결과 徐丙浩 이화전문 출신 김순애가 국내에 잠입하여 활동하기로 결정되었 다.10) 결혼한 지 불과 며칠되지도 않은 이 신혼부부가 남편은 파리에의 험난하고 먼길을 떠나야 했고 아내는 파리에의 대표를 수호하기 위해 국내에서의 활동에 비장한 각오를 하 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시 김순애는 가진 모든 돈을 파리로 가는 남편을 위해 내놨기 때문 에 여비를 마련할 길이 없었다. 그래서 생각다 못해 상해에 있는 어떤 선교사와 중국인에 게 희사할 것을 요청하였다. 이에 서양 선교사와 중국인은 기꺼이 자금을 마련해 주었고, 그 자금으로 그는 무사히 부산항에 잠입할 수 있었으며 여러 친지들에게 수소문한 결과 이 미 국내에서는 3 1 운동의 준비가 다 되어있음을 알 수 있게 되었던 것이다. 그후 혹룡강 에 망명 중인 오빠 김필순의 힘으로 그 곳 사범학교의 교감으로 일하게 되었으나 일본 영 사관 경찰에 의하여 납치되고 말았다. 그러나 김순애는 증국 국적을 가지고 있었으므로 즉 시 재판에 회부되지 않고 얼마되지 않아 석방되었다. 중국 경찰의 도움을 받아 탈출에 성 공 마침내 상해로 돌아왔다. 파리강화회의에 가려던 이승만이 여권을 얻지 못해 파리에 가 지 못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라 잃은 망명객의 슬픔을 추측할 수 있다. 중국에 망명했던 항일애국지사들은 너나 없이 중국인 행세와 중국여권을 지녔으며 파리로 가는 차편도 쉽게 10) 李庭植, 앞의 책 p. 54.

- 115 - 얻을 수가 없었다. 상해에서 유럽을 가기 위해서는 태평양과 대서양을 건너는 것과 만주와 러시아를 거쳐 가는 방법이 있었는데 첫번째 것은 일본 요꼬하마를 기항해야 해서 위험했 고 두번째는 시베리아 일대에 아직 전쟁이 계속되어서 위험하였다. 나머지 유일한 길은 선 편이 자주 있지 않아 배표를 구하기 힘들었다. 만일 이때 중국인들의 각별한 도움이 없었 다면 우사 김규식의 파리방문도 퍽 늦었을 것이다. 상해의 길에 익숙하고 또 김규식을 파 견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여운형이 배표를 사기 위해 선박회사에 가니 한 여자가 여운형 에게 무엇때문에 왔냐고 물어 파리가는 배편을 사러 왔다고 하니, 그 여자는 대뜸 말하기 를 당신을 보건대 한국사람이요 여기에서 배표를 사면 일본 요꼬하마를 거쳐가야 할 터인 데 거기서 잡히면 대서양까지 어떻게 갈거요, 당치도 않은 얘기요 하고 말리더라는 것이다. 여운형이 그럼 어떻게 가느냐고 하니 인도양을 거쳐서 가라고 하는 것이었다. 배표를 살 수 없는데 어떻게 가느냐고 했더니 서슴지 않고 내가 동행자의 배표까지 사 놓았는데 그것 을 가지고 가라고 하여 두 장의 배표를 주더라는 것이다. 알고보니 그 여자는 손문을 영수 로 하는 광동혁명정부에서 王友仁과 같이 파리에 파송한 鄭毓秀라는 여자인데 남자 못지않 게 활발하고 외국어에 능한 애국자였다. 그는 나중에 프랑스에서 법률공부를 하고 상해에 서 대법원장까지 지냈다고 한다. 이런 일을 회고하면 김규식이 파리까지 가는 데는 정육수 의 도움이 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물론 신한청년단측에서는 대서양 경유의 배표를 구입 하여 정육수로 하여금 파리강화회의에 참석토록 하였다. 우리는 이 일을 통해 중국인사들 의 한국에 대한 동정심을 알 수 있었다. 하여간 정육수의 도움으로 김규식은 1919년 2월 1일 상해를 떠났고 인도양을 거쳐 드디어 3월 13일 파리에 도착하였던 것이다. 파리에 도착한 김규식은 샷또당로 38번지 자리에 위치한 집 한채를 세내어 평화회의 한국 대표관으로 결정했다. 이어 3월 17일에는 친한인사로 이름이 나 있는 헐버트교수를 만나 협 조를 당부하고 스위스의 쮜리히대학에서 공부하고 있는 李灌鎔을 급히 불러 대표단 사무를 담당케 했다. 그후 5월 초순에는 중국 상해로부터 金湯이 왔으며 미군 지원병으로 유럽에 출전하여 현지에서 제대한 黃玘焕이 6월 3일 독일로부터 달려왔으며, 이어 6월 하순에는 趙 素昂, 7월 초에는 呂運弘이 상해로부터 파리에 도착하여 일행과 합류했다. 평화회의에서의 한국대표단은 인원부족과 일본의 집요한 방해와 그리고 연락 불충분과 자료의 부족으로 여 러 번 심한 어려움에 봉착하였다. 그러나 한국 대표부는 4월 10일 공보국회보 제 1호를 등 사본으로 출간하였다. 당시 김규식의 활동 윤곽은 다음과 같았다. 강화회의에 출석한 각국 대표들을 접촉하여 한국에 대한 관심과 지지를 얻는 일, 일제 무단통치 아래의 한국의 정치 경제 교육 및 종교의 여러가지 사정을 알리는 일, 일본의 몽고, 시베리아, 중국 산동 복건 양 자강, 태국, 필리핀 및 인도에 대한 야욕을 폭로하는 일, 한국은 중국문제를 해결하는데 있 어서 지극히 중요한 위치에 있다는 것을 역사적 지정적 전략적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미국 영국 프랑스 및 이탈리아의 유력한 신문기자들의 동정적인 협력을 얻어 한국독립에 대한 국

- 116 - 國 史 館 論 叢 第 18 輯 제적인 여론을 환기하는 일, 한국사람이 자치할 능력이 있다는 것을 선전하고 강화회의에서 의 대표로서 한국 대표단이 인정을 받을 것을 정식으로 요구하고 한국독립에 대한 정식 청 원서를 제출하는 일 등이었다. 김규식을 수반으로 하는 한국 공보국은 4월 중으로 평화회의 에 제출할 한국독립에 대한 청원서와 이 청원서에 침부하여 제출될 한국 민족의 주장이라는 문서를 작성하여 인쇄하였다. 신한청년당 대표, 대한국민회 대표 김규식의 명의로 작성된 청 원서는 20개 항목으로 나뉘어져 있다. 요약해서 말하면 다음과 같았다. 한국민족은 4,200년 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침범하였다. 일본 통치에 대하여 한민족의 저항 은 계속되고 있다. 한국의 교육과 사상은 일본의 통제와 억압을 받고 있다. 한국에서의 기독 교는 일본정부의 박해를 받고 있다. 일본이 한국에서 자랑하고 있는 개혁은 형무소안에서의 개혁과 같은 것이며 일본을 위한 것이다. 일본이 한국에서 갖는 목적은 일본의 이익만을 위 한 것이다. 한국민족의 독립은 영국이나 프랑스의 이익을 위해서도 필요하다. 일본은 한국에 서의 구미 각국의 무역통상을 배제하고 있다. 한국국민의 일본통치에 대한 반항은 3 1운동 으로 실증되고 있다. 한국 임시정부가 조직되어 있다. 한 일 병합에 대한 조약은 무효이다. 이 탄원서와 함께 첨부된 한국민족의 주장이라는 인쇄물은 이러한 조항들을 더욱 세밀하 게 설명하고 왜 한국의 독립이 인도적인 견지에서 타당하며 일본의 팽창정책과 침략정책이 구미 각국에 불리한 이유를 조리있게 설명하였다. 김규식의 능숙한 영어와 풍부한 표현력 은 그의 글을 읽고 모두 공명하였으며, 한국에 대한 동정을 불러 일으키는데 큰 역할을 했 다. 김규식은 5월 12일자로 탄원서 등 서류를 윌슨대통령, 로이드 조지 영국수상, 강화회 의 의장 클레망소 등에 보냈다. 김규식은 또한 한국의 독립과 평화라는 35면에 달하는 유 인물을 만들어 한국이 개방 후 구미 각국 및 중국, 일본 등과 체결한 조약들을 분석하면서 그들이 한국에 주었던 약속을 환기시키고 일제 침략과 학정의 부당함을 공박하였다. 김규 식은 또한 강화회의를 취재하려 모여든 여러 나라의 신문기자들과 외교사절들, 그리고 프 랑스의 국회의원 등과도 수시로 접촉하고 그들의 관심과 지지를 불러 일으켰다. 단신 프랑스를 방문한 김규식은 여러 나라에서 모여든 애국지사들과 함께 파리에서 얼마 나 눈부신 활약을 하였는지를 알 수 있다. 김규식이 파리에 체류한 기간은 4월부터 8월 9 일까지 불과 4개월밖에 되지 않았다. 김규식이 파리에 있는 동안 신한청년단에서 3만 원의 돈을 모금해 파리로 발송하였고 미국에 있는 한국인들의 국민회에서도 3천 달러를 보냈다. 그러나 재정이 넉넉지 못한 데다 강화회의가 6월 28일 일단락되었으므로 김규식은 뒷일을 이관용 등에게 맡기고 여운홍 등과 함께 그해 8월 9일 대서양을 건너 미국으로 향하였다. 파리에서 뉴욕으로 가는 동안 약 15일간 김규식은 파리에서의 활동보고서를 작성하기 위해 서 밤낮으로 타이프를 쳤다고 한다. 이러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김규식은 투철한 책임감과 부지런함을 엿볼 수 있다. 미국에 도착한 후 김규식은 유럽에서 한국문제를 어떻게 보느냐 하는데 대하여 글을 발표하였다.

- 117 - 그의 말에 의하면, 한국대표단이 3월 파리에 도착하였을 때에는 프랑스나 영국 등 전 유 럽의 신문들이 극동문제에 대해서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았었는데, 한국에서 3 1운동이 벌 어진 후 프랑스 이탈리아 영국 그리고 유럽의 군소국 신문들이 일본의 팽창정책에 대해서 관심을 기울이게 되었다. 김규식은 중국 각지에 뻗친 일본의 경제적 침략을 일일이 지적하 고 일본이 중국을 지배하려 하고 있다고 경고한 후 오로지 한국의 독립만이 이러한 위험성 을 막을 수 있다고 강조하였다. 그러나 파리에서의 한국문제해결은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 다. 다만 김규식의 눈부신 활동으로 말미암아 국제무대에 한국문제를 소상히 소개하고 많 은 동조자를 얻게 된 것은 결코 무의미한 일은 아니었다. 만약 김규식의 이러한 활동이 없 었다면 프랑스 상원 외교위원회나 영국 하원에서 한국 3 1운동의 진행에 대해서 일제가 잔 인한 탄압을 가한데 대한 논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김규식의 파리에서의 활동은 외 교라는 관점에서보다도 망명단체의 해외에서의 국제연대활동이라는 관점에서 새롭게 평가 되어야 하며 그런 점에서 본다면 김규식의 파리활동은 좌절이라고 하기 보다 엄청난 활동 이었다고 보지 않을 수 없다. 김규식이 파리에 가 있는 동안 이승만은 워싱톤에서 정 재계 인사들을 상대로 상당한 노 력을 하고 있었고, 서재필도 필라델피아를 중심으로 각 지방의 유지들과 교회를 상대로 광 범위한 선전을 하고 있었다. 미국에 있는 한국독립 구미위원부는 필라델피아에 설립된 한 국 홍보국과 한국 친우 동맹 그리고 샌프란시스코의 국민회와 연합하여 대대적인 선전 및 계몽활동을 폈다. 미국 각지에서 강연회를 열어 한국의 억울한 사정을 알리고 미국 국민의 동정을 구했으며, 또 각 단체로 하여금 미국정부 여러 기관에 편지를 보내어 미국이 일본 의 침략정책과 야만적인 탄압을 견제하도록 요구하였다. 김규식은 다른 지사들과 함께 미 국 각지를 순회하면서 강연을 하였다. 워싱톤에서 김규식은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그는 로 이드 조지 영국 수상의 글을 인용하면서 이상적인 세계의 건설이라는 목표를 전하고 이러 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극동에서 일본의 팽창정책을 막아야 한다고 역설하였다. 일 본의 팽창이 그대로 방치된다면, 영국과 미국이 극동에서 일본에 의해서 추방될 것이며 앞 으로 15년 후에는 일본은 중국 시베리아 및 한국의 인적 자원을 이용하여 영국과 미국 등 에 무력으로 대항할 수도 있을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만약 서구의 강대국들이 당면한 이익 에 눈이 멀어 약소국가를 희생시키는 일본의 팽창정책에 관심을 기울이지 않으면 앞으로 미 영 등의 국가이익을 위해서도 위험한 결과를 초래할 것이라고 경고하였다. 1919년 2월에 국제회의에 참석키 위해서 상해로 떠났던 김규식은 그후 미국에 가서 거 주하다가 1920년 10월 만 2년만인 1921년 1월에 중국 상해에 다시 돌아왔다. 김규식이 파리에서나 미국에서 활동하고 있던 사이에 중국 시베리아 일본 및 국내외 여러 운동가들은 상해 임시정부를 조직하여 한 때 활기를 띠었지만 김규식이 상해로 돌아 올 무렵인 1921 년에는 임시정부는 커다란 난관에 봉착하고 있었다. 초기에 계획하였던 여러 사업들은 대

- 118 - 國史館論叢 第18輯 부분 수포로 돌아갔고 국내에서의 모금운동도 일제의 탄압으로 부진하였으며 상해에 있는 운동가들 사이에도 견해차가 점점 표면화되면서 알력이 커져가고 있었다. 특히 임시정부 대통령이란 직함을 가지고 있으면서 미국 워싱턴에 주저앉아 있던 이승만을 에워싼 문제로 임시정부 간부들 사이에는 개혁과 개편을 부르짖어 임정의 앞날은 암담해졌다. 상해에 있 는 임정 요인들의 여러차례에 걸친 요청으로 이승만은 처음으로 1920년 12월 상해에 왔으 나 오히려 이승만이 한국을 미국의 신탁통치하에 두어 달라는 진정 때문에 반대파의 공격 을 받아 임정내는 더욱 어수선했다.11) 이 싸움에 1921년 1월 26일 李東輝 安昌浩 등 간부 의 사임으로 오랫동안 계속되어 오던 내부의 불꽃은 마침내 표면화되었으며 그 무렵 학부 총장이라는 직함을 가졌던 김규식도 사태수습이 불가능함을 깨닫고 사표를 제출했다. 이리하여 임시정부는 일대 위기에 빠졌으며 그는 임시정부를 존속시키기 위해 온갖 노력 을 기울였다. 당시 이승만과의 알력으로 사퇴한 국무총리 이동휘의 후임문제, 중국 여러 곳 에서 일어나고 있는 임정에 대한 반대운동, 그리고 직제개편에 관한 문제들을 토의하였다. 그 결과 1921년 2월 10일에 제도변경 기초위원회를 구성 김규식 신규식 안창호 등 선출되 었다. 그러나 이승만은 제도변경 기초위원회의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승만은 자기 주장을 따르지 않는 사람은 정적으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그는 대통령직을 사퇴하기를 원 치 않았으며 또 집정관총재라는 직함도 원치 않았다. 그는 워싱턴에서 김규식을 구미 위원 장으로 등용하였으며, 이승만은 김규식이 자기의 도움을 받았는데도 자기와 정적사이에서 타협적이고 중도적 입장을 취하는 것이 큰 불만이었다. 실상 김규식과 이승만 사이는 워싱 턴시절에도 그리 좋지 않았다. 즉 김규식은 명색이 구미 위원장이며 위원회의 모든 일을 주관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실질적으로는 위원장이 해야 할 일을 이승만이 도맡아 하는 적 이 많았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한국독립운동가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모금 선전 계몽운동 정도였는데, 이승만은 모든 일을 결정함에 위원장인 김규식과 상의하기보다는 그의 심복 비서인 林炳稷과 상의하는 일이 많았다. 이런 사정으로 이승만과 김규식 사이에는 관계가 원만치 않았다. 김규식은 혼란에 빠진 임시정부를 수습하려고 노력하는 한편 서병효와 중 국 친구 몇 사람과 함께 상해 南華학원을 설립하여 중국으로 들어오는 한국청년들에게 영 어를 가르치기도 했다. 김규식은 모스크바에서 열린 극동노력자회의에 참석키 위해 1921년 말에 상해를 떠나게 되어 南華학원에서의 한국인 주주들의 입장은 불리해졌다. 우사가 상해 임시정부에 다시 왔을 때에는 임정은 심각한 내분에 휘말려 있었다. 이승만 계와 이동휘계의 대립이 그것이다. 이승만이 가장 큰 공격을 받은 것은 한국이 미국의 위 임통치를 받도록 해달라는 청원을 미국정부에 한 것이 문제였으나 다른 각도에서 보면 외 교파와 무력항쟁파의 대립, 또는 보수파와 급진파간의 대립이기도 했다. 이러한 노선싸움의 11) 安昌浩, 島山日記 pp. 730 787. 臨政內幕을 가장 소상하게 알려 준 자료이다.

- 119 - 분쟁은 항일운동의 전 과정을 통해서 반복 지속되었으며 특히 이 분쟁은 해방 후의 분열과 갈등으로까지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다. 김규식이 처음으로 상해에 돌아왔을 때 임시정부 에서는 그를 대뜸 이승만 안창호 계열의 인물이라고 하여 경원했었다고 한다. 이러한 오해 를 피하기 위해서 김규식은 환영회마저 사양했으나 이것은 오히려 상대방의 험담을 더욱 자초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상해 정부를 어떻게 하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 김규식은 처음 임정고수파의 입장을 지지했었다. 그는 처음에는 대외적인 이미지를 위해서도 이승만을 대 표로 내세우는 것이 좋겠다는 견해를 안창호에게도 피력한 바 있지만 이러한 그의 태도는 상해에 돌아온 직후 김규식이 朴殷植과 가졌던 언쟁사실에서도 단적으로 드러났다. 그러나 김규식은 갑자기 대회파로 전신하였다. 그가 전신한 이유는 아마 이승만 때문이 아니었던가 싶다. 그의 위임통치 청원설이 유발한 불쾌감과 과거 미국에서 목격한 여러가 지 개인적 혐오감이 그로 하여금 이승만과의 결별을 하게 만드는 계기가 되지 않았나 한 다. 그래서 4월 13일 열린 국무위원회에서 김규식은 이승만에게 정식 도전하여 그의 사임 을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무렵 상해 임정에 반대하는 국민대표 대회파에서는 북경을 근 거로 하여 계속 이승만 안창호 등의 사임을 성토하는 한편 상해로 속속 사람을 파견하였다. 북경의 대회파는 이승만의 사임을 강권하는 성토문을 보냈다. 안창호는 자신이 지금까지 임정 고수파에 동조한 이유가 어디까지나 양심에 근거한 행위였지 결코 권력욕 때문이 아 니었다고 해명하고 각 파간의 조직의 통일과 노선간의 통일이 무엇보다도 시급한 과제라고 역설했다. 이 연설은 이승만의 고립을 결정적으로 굳혀 버렸으며 안창호 김규식 등 과거의 이승만 지지세력 중 유력한 인물들을 대회파로 전신시키는데 중요한 기폭제 구실을 했다. 결국 이승만은 5월 19일에 다시 미국으로 돌아갔으며 김규식은 국민대표 대의원 20명 가 운데 하나로 피선되었다. 결국 임정은 북경의 강경파와 상해의 이탈파들의 연합세력에 의해 전면적인 도전을 받게 되었다. 북경측의 대표는 朴建秉 崔穆 등이었으며 상해측 대표는 김규 식 元世勳 呂運亨 등이었다. 북경측이 중도좌파 경향이 있었다면 상해 이탈파 는 중도우파였 다고 할 수 있지 않은가 한다. 이에 대해 임정 고수파, 이 중에는 申圭植 등이 있었는데 그 들은 따로 협의회라는 것을 조직하여 상해임정을 장차 미국으로 옮기는 문제를 암암리에 밀 의했다는 것이다. 이 사이에 김규식은 북경과 상해를 왕래하며 두 지역의 연합운동과 안창호 의 이탈방지를 위해 노력하면서 한편 워싱턴회의의 추이를 주시하면서 국민대표 대회개최 준 비를 서둘렀다. 워싱턴 회의는 1921년 11월 12일부터 다음해 1922년 2월 6일까지 미국의 하딩대통령 주도하에 열렸다. 이 회의는 일부 한국인 운동가들의 기대를 부풀게 만들기도 했 으나 회의의 성격상 민족문제보다는 열강의 세력권 유지문제가 더 중요한 관심사로 되었기 때문에 김규식의 실망은 더욱 클 수밖에 없었다. 워싱턴에서 태평양회의가 열릴 것이라는 소 식이 전해지자 임정고수파에서는 이 기회를 틈타 독립운동의 기세를 다시 한 번 올리려고 했 으나 이 회의에 대표를 파견하는 문제로 의견이 대립되었다. 국민대표대회 준비파에서는 만

- 120 - 國史館論叢 第18輯 약 이승만 등을 대표로 보내면 그들이 임정의 대표가 아니라는 사실을 워싱턴측에 통보하겠 다고 했다. 결국 양파는 절충안으로 정부측과 반대파와 공동으로 대표를 파견한다는데 합의 하였다. 이때 타협에 나선 사람이 정부측엔 이동녕 신규식이었으며 민간측에선 안창호였다. 8월 13일 양파 공동주최로 상해에서 강연회를 열었는데 연사로 나온 안창호는 성패를 불 문하고 이 기회에 다시 한번 최대의 외교활동을 벌여보자고 주장했다. 연설회를 마친 후 좌 중은 태평양외교후원회라는 것을 만들기로 하여 기초위원 7명을 선임했다. 그리고 정부 측 에선 따로 외교연구회를 구성, 그 회장에 안창호를 위촉했다. 그러나 양파는 태평양회의를 계기로 일시 공동보조를 취하는 듯이 보였으나 내분이 그치지 않았다. 하여간 甲論乙駁 끝 에 서재필을 정사로 하고 김규식을 별사로 파견하기로 내정했으나 비용을 충당할 길이 막연 했다. 워싱턴에 가든 안가든 관계없이 김규식은 자기가 할 일은 혼자서 실천했다. 中韓國民 互助社統社의 일이 바로 그것이다. 이 통사는 상해에 있는 학생을 중심으로 조직된 단체인 데 김규식은 그 단체에서 한국측 부이사장으로 피선되었다. 이 단체는 9월 들어 태평양회의 에 제출할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김규식이 그것을 영문으로 번역하였다. 그런데 구미 열강은 눈앞의 이익만을 생각하여 일본과 더불어 약소민족의 이익을 외면하고 한 중 두나라 국민의 반발을 샀다. 김규식과 그 동지들의 워싱턴 회의에 대한 기대는 결국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 다. 한반도문제 아시아의 문제 세계문제를 생각하는 그의 안목은 더욱 민족주의적 입장을 굳 혀 갈 수밖에 없었다. 김규식을 포함한 한국인 민족주의자들은 한때 소련을 역이용해 보려 고 하였으나 결국 여기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했다. 김규식과 많은 민족주의자들은 사상적으 로는 공산주의자가 아니었으나 한국독립을 위한 항일민족운동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는 나 라로 간주되면 그것이 미국이든 소련이든 그것에 기대의 손길을 뻗치지 않을 수 없었고, 그 는 이 무렵 소련이 주최한 극동피압박민족회의에 참석하고 돌아왔다. 이 대회에 참석을 하기 위해서 김규식은 여운형 나용균 등과 아울러 1921년 말에 상해를 떠났다. 이 대회에는 소련 중국 몽고 일본 인도 등 나라에서 144명의 정식대표들이 참가하였 는데 한국 대표수는 그중 제일 많아 52명이었다. 李東輝 金始顯 張建相 呂運亨 金奎植 羅容 均 金丹冶 朴憲永 등을 포함한 한국측 대표 52명 중 37명을 공산청년동맹원으로 등록되었 다. 그중 25명은 직업을 농업이라 등록하였고 3명은 노동자라고 하였으며 18명이 지식인라 고 등록하였다. 공산당원이 37명이라는 우세를 차지했으나 실질적 당원이 아니라 아마도 주 최자인 레닌정부의 환심을 사기 위한 방편이 아니었던가 한다. 일행은 행색을 감추기 위해 정거장에 서 있는 차량 속에서 하룻밤을 보내기도 했는데 황 량하고 먼지쌓인 차량 속에 앉아있는 일행을 위해서 러시아인 한명이 검은 나무토막을 가슴 에 안고 들어오더니 가지고 온 도끼로 패기 시작하더라는 것이다. 일행은 스토브에 땔 나무 인 줄 알았는데 사실은 그것이 흙빵이었다고 한다. 이 흙빵은 워낙 오래 묵힌데다가 얼어서 나무 패듯이 도끼로 찍기 전에는 도저히 쪼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흙빵 외에 연어알과

- 121 - 이름모를 소금에 절인 생선 그리고 때묻은 양철 찻잔에 누르스름하고 텁텁한 찬물이 그들 반찬의 전부였다. 그들은 그것을 먹고 영하 30도 추위에 떨면서 차량 속에서 야영용의 침구 에 몸을 묻고 갔다고 한다. 그 다음날 아침에는 이르쿠츠크행 열차에 올랐는데 다행히도 스 토브 장치도 있고 도끼도 필요치 않은 흙빵과 고기도 먹을 수 있었다. 이들은 황량한 고원, 우울한 밀림의 침묵도 계속됐으나 바다와 같이 넓은 바이칼호에 도착했을 때는 모두 환호성 을 질렀다고 한다. 그들은 또 부근 농촌에 사는 한국동포들을 발견하고 놀라는 한편 슬프기 도 하였다. 그들은 다 쓰러질듯한 시베리아식 농가에서 물동이를 이고 조선옷을 입은 부인 네가 가까이 있는 우물로 물을 길러 가는 것을 보았던 것이다. 먹을 것을 찾기 위해 고국산 천을 버리고 머나먼 시베리아 땅까지 왔다가 전쟁과 기로에 시달리는 그들의 모습을 보는 것은 비통하기만 했으나 그들의 마음을 더욱 안타깝게 한 것은 일행이 이르쿠츠크에 도착한 후의 일이었다. 도착한 며칠 후 흑하사변 또는 자유시 사건으로 알려진 민족의 비극을 보아 야 했던 것이다. 자유시 사건의 단서는 시베리아에 출전했던 일본군이 대거 간도지방으로 파견되자 그 곳에 산재했던 한국 독립군들이 시베리아로 퇴각 집합한 때였다. 당시 상해파로 알려진 이동휘의 고려공산당과 관계를 맺었던 대한독립군단은 러시아 2세 들을 중심으로 한 소위 이르쿠츠크파와 연합하였던 것인데 헤게모니 의 문제로 의견충돌이 생기게 되어 이르쿠츠크파에서는 소련군의 협조를 얻어 독립군의 무장을 해체하려 하였다. 이런 계획을 알아 차린 독립군들은 무력으로 저항하였으므로 거의 100명의 독립군이 아무런 의미도 없이 죽은 것이었다. 이 일은 1921년 6월 27일에 있은 일인데 그때 소련군과 이르 쿠츠크파에 생포된 많은 독립군 간부들은 감옥에 구금되고 고생 끝에 그해 12월에 이르쿠츠 크에서 최종재판을 받았었다. 재판장은 유명한 의병대장 홍범도였고 극동피압박민족대회에 참석코자 모였던 한국대표들은 배심원의 자격으로 참석하였던 것이다. 수 십 명의 용사들은 먼 지방으로 유배되거나 몇해 동안 징역을 살거나 또는 단순한 징계처분을 받기도 하였다. 여운형은 이 재판을 겪고나서 말할 수 없이 안타깝고 애석한 정과 암담하고 우울한 나의 마 음을 몹시 누른 사건이었다 고 개탄했다. 우사 김규식의 마음도 여운형과 다를 바 없었다. 12월 하순 경 대외준비에 분주하던 그들에게 뜻밖의 명령이 내려졌다. 즉 이르쿠츠크에 서 열릴 예정이던 대회가 모스크바에서 열리니 그곳으로 가라는 것이었다. 원래 이르쿠츠 크 대회는 11월 워싱턴대회에 대항하여 열려고 계획되어 온 것이나 시일이 늦어지기도 했 으니 모스크바까지 극동의 대표들을 초청하여 건설기에 들어선 새로운 러시아의 공기를 충 분히 호흡케 하려는 의도였다. 하여튼 모스크바 방문 기회를 얻은 일행은 이 소식을 기쁘게 받아들이고 10일 이상 걸려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차속에서 한국대표들은 대회준비를 하였다. 이르쿠츠크에서 편성한 분 과위원별로 차실을 차지하고 매일 토의를 하고 저녁식사 후에는 식당차에서 전원 회의를 가 지기도 하였다. 차창 밖으로는 거대한 우랄산맥이 보였으며, 정거장마다 눈에 띄는 것은 이

- 122 - 國 史 館 論 叢 第 18 輯 광대한 나라를 한 가지로 쓸어덮고 있는 처참한 빈곤과 결핍의 상태였다고 여운형은 회고했 다. 일행이 모스크바에 도착했을 때 러시아는 말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형편이었다. 연합군의 봉쇄 이후의 내전, 새 정권의 경제정책의 실패, 그리고 1921년과 1922년의 흉 년 등 거듭된 천재와 인재는 농업과 공업을 극도로 쇠퇴와 혼돈을 이루게 했고 각 처에서 는 농민폭동과 노동자폭동이 연발하여 레닌정부는 1921년 3월 17일 소위 신경제정책 을 선포하여 그때까지의 과격한 공산화정책에서 일부 후퇴함으로써 난국을 모면해 보려 하였 다. 김규식이 도착했을 때 러시아 형편은 그전보다 호전되긴 했으나 역시 그들 눈에 보이 는 러시아 상황은 처참하기 이를데 없었다. 그러나 이러한 광경을 보면서도 언젠가는 국력 을 회복하여 한국민족을 도와 일제침략을 물리쳐주리라는 기대를 가지고 한국 대표들은 1 월 21일 밤에 크레믈린 내의 극장에서 열린 회의에 참석했다. 김규식 일행이 모스크바에 도착한 것은 1월 7일이었고 2월 2일까지 계속된 회의에서 김규식 여운형 두 사람이 의장단 에 선출됐으며 당시 제 3국제공산당의 위원장인 지노비에프가 기조연설을 하였다. 그는 세 계혁명을 통한 공산주의 승리를 부르짖고 서구의 개혁자들이나 사회주의자의 유럽중심주의 를 공격하였으며 아시아가 서구 식민지로부터 해방돼야 한다고 주장했다. 지노비에프는 특 히 한국인사들의 환심을 사는데 노력하여 한국이란 단어가 워싱턴회의에서는 언급조차되지 않았다고 역설했다. 수 명의 한국대표들도 여기에 호응하는 연설을 하였는데 몽양 여운형 의 진술에 의하면 이 대회의 한국에 대한 결론은 한국 혁명은 임시 정부를 지원하고 그 정 부를 격려하고 수정함으로써 수행되어야 한다. 한국은 공산주의에 관한 지식이 없는 농업 국가이기 때문에 민족주의를 강조해야하며 일차적 목표를 농민에게 두어야 한다 는 것이다. 회의가 끝난 후 한국대표들은 레닌과 트로츠키를 포함한 소련 공산당의 주요간부들을 면 접하고 귀국했다. 이처럼 레닌정부와 식민지 해방문제, 특히 한국의 해방문제에 대해서 적 극성을 보일 때 많은 한국의 애국지사들이 레닌정부와 공산당에 대해서 동조적 태도를 취 한 것은 당연한 일이다. 따라서 시베리아와 만주지방에 거주하던 많은 한국인들은 공산당 에 가입하여 레닌정부를 돕기도 하였다. 독실한 기독교신자인 김규식은 공산당의 유물론에 동조할 리는 없었지만 그들이 내세운 반식민지정책에 동조하였으리라는 것은 가히 추측할 수 있다. 극동노력자 대회가 열려있는 동안 김규식은 여운형과 자주 만나고 회의에도 참석 한 에반스라는 미국기자가 특히 김규식에 관해 상세히 묘사하고 있어 우리들이 당시의 김 규식의 심정을 살피는데 도움을 주었다. 그는 미국잡지 아시아 라고 하는 월간에 1922 년 12월에 극동노력자 대회에 관한 글을 쓰는 가운데 한국대표가 제일 열성적으로 보였고 제일 많은 대표를 보냈다고 하며, 한국대표들 중에는 가죽띠를 차고 투지가 만만한 한국 군인들이 그들은 시베리아의 빨치산 부대원들 많이 끼어 있었다고 하였다. 한국 대표 단의 단장인 김규식은 시베리아에 있는 한국 독립군이 수 천명에 달할 것이라고 추산했다. 만일 미 일 전쟁이 일어나면 우리나라의 비정규부대들이 미국에게 만만치 않은 동맹국이

- 123 - 될 것이다 고 그는 말했다. 한국사람들은 시베리아에 개입한 일본군대에 대항하여 러시아군 과 협력하여 꾸준히 싸워왔는데 어떤 한국사람들은 이런 전투에서 귀중한 경험을 얻었다고 도 하고 또 어떤 사람들은 러시아를 위해서 국력을 소모했다고도 주장하였다. 김규식은 로녹대학 졸업생이며 한국임시정부 각료로서 파리강화회의에 갔는데, 상해의 지도자들 중에는 윌슨대통령에게 끈질긴 희망을 거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런데 그의 경험 은 그로 하여금 시니컬한 사람이 되도록 하였다. 만일 미국이 한국을 위하여 대일전쟁을 벌릴 것이라는 희망을 품지 않았던들 그처럼 시니컬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공산주의자를 자칭하는 사람이 되었다. 그는 공산주의자들의 세계정세 판단을 보았고 러시아 공산주의자들이 말하는 바와 같이 등방에서는 개혁적인 전술로는 아무 것도 될 수 없다는 것을 믿게 되었다. 그보다도 더 중요한 것은 만일 한국이 모스크바에서 정신 적 또는 물질적 소망을 가질 수 없다면 한국은 갈 곳이 없게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는 최후의 희망처를 찾아 온 것이다. 나는 한국대표들 숙사에서 그 사람들과 마주앉아 그들 나라의 장래를 논하면서 그가 이 길을 쓸쓸한 마옴으로 택한 것이라고 느꼈다. 하여간 김규식은 1921년을 고비로 만주운동에 대한 구미자본주의 여러 나라의 소극적인 태도와 무관심에 대해서 크게 실망을 느끼고 점차 민족주의로 기울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이러한 태도변화는 자연 그의 교육관계에도 영향을 끼쳤다. 김규식은 여운형 원세훈 등 급 진파 내지 중도좌파 계열과의 교분이 상당히 밀접해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국민대표 대회 문제로 북경을 자주 내왕하는 사이에 북경을 근거로 한 급진파의 독립조직인 군사통일회의 와의 상호이해도 상당히 넓어졌던 것으로 추측된다. 김규식이 이런 방향으로 흘러감에 따 라 그와 서병호 여운형이 주도하고 있던 신한청년단도 점차 분화되기 시작하여 김구 이유 필 안정근 등 우파계 인사는 이 단체에서 탈퇴해 나갔다. 그 무렵 한인과격파들은 처음에는 사회당이라고 하는 단일조직을 가졌으나 뒤에 와서 레닌이 준 50만원 상당의 지원자금 횡 령사건을 계기로 이동휘파와 김만겸파로 양분되었다. 이동휘파는 대체로 김립 김화구 등 약 50명을 포용하고 있었고, 김만겸파는 여운형 최창식 고창일 등 40여 명을 거느리고 있었 다. 이중에 상해와 북경방면을 내왕하며 당세확장을 도모하던 이는 이동휘파의 박치순과 김립으로 김규식 역시 이들과의 접촉이 없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동휘파는 그후 고려 공산당이라고 하여 소련공산당 이르쿠츠크 지구당비서부와 더불어 협정을 맺고 각종 재정적 군사적 지원을 받고자 바삐 돌아다녔다. 이무렵 김규식이 과연 어 느 정도로 급진파가 됐느냐는 것은 보는 이에 따라 다를 것이나 그는 민족주의 테두리를 벗어나지 않은 것 같으며 중도파 이상으로는 기울지 않았으며 그것도 상당부분이 그때 그 때의 문제에 따라 행동이 달랐다. 이와 같은 경향은 김규식 외에도 다른 과격파 인물들도 대부분 해당될 수 있다고 판단되 었다. 김규식이 이르쿠츠크로 향할 무렵의 사상적 동향은 바로 이상과 같은 어느 면에서는

- 124 - 國 史 館 論 叢 第 18 輯 모호한 상태에서 표류하고 있지 않았나 한다. 그러나 어쨌든 김규식은 이승만적 전통 보수 파는 아니었으며 안창호식의 장기적 점진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리고 김구 류의 전투적 우익 이거나 고전적 자유주의자도 아니었다. 그는 자유주의와 기독교사상을 원칙적으로 포기하지 는 않았으나 어느덧 진보적이랄까하는 민족주의자로 기울고 있었다. 모스크바에는 상해와 한국으로부터 약 120여 명의 한국인이 몰려들어 각국 대표 중 가장 대규모의 대표단을 이루 고 있었다. 나용균이 밝힌 바에 의하면 우사는 이 대표단의 의원장격이었다하며 부의원장은 여운형, 간사는 최창식이 맡았다고 한다. 한국대표단은 모두가 공청이나 기타 좌경단체의 소 속자로 일단 등록했는데 유독 나용균만은 당원이나 맹원이길 끝내 거부해서 모스크바 도착 즉시부터 여러가지 위험을 당했다. 나용균은 다른 한국인 일행과 격리되어 따로 숙사를 잡 았으므로 회의의 진행과정에 대해 자세히는 알 수 없었으나 이 회의 역시 우사에겐 커다란 실망감을 안겨 주었다. 모스크바 회의는 피압박민족의 혁명과 관련된 전략전술을 토의한 회 의였다 하나 그 자체가 소련의 이익추구라는 이기적 동기에 서 있었을 뿐 아니라 소련과 일 본 및 구미열강 사이의 미묘한 흥정관계로 회의 분위기가 수시로 바뀌어 피압박민족의 독립 문제는 오히려 뒷전으로 밀려나는 웃지 못할 사태가 여러번 있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나영 균은 격리되었던 숙사에서 김규식 의장 앞에 불려나갔다. 그 자리에는 김규식 여운형 최창식 등이 있었는데 최창식은 선언문이란 것을 나용균에게 주면서 거기에 서명할 것을 요구하였 다. 나용균이 읽어보니 내용이 너무 어처구니 없었다. 즉 동학란도 공산혁명이요, 활빈당의 의적도 공산혁명이며 3 1운동도 공산혁명이었으니, 앞으로 한국의 독립운동도 마땅히 공산 혁명을 지향해야 한다는 것이다. 나용균이 이에 서명을 거부하자 최창식이 죽여버리겠다고 흥분을 하며 협박했다. 그러나 나용균은 이에 굴하지 않고 옆에 놓인 재떨이를 집어 던져서 좌석은 그만 유야무야 끝나버렸다. 이런 살벌한 과정에서 한국에서는 공산혁명보다 반식민 주의 운동을 먼저 수행해야 한다는 충고가 한국대표단에게 전해졌는데 김규식이나 몽양은 시종 말한마디 없이 묵묵히 따라 다녔을 뿐이라고 한다. 다만 김규식은 소련지역의 과격파 와 만난 자리에서 국민대표회라는 것을 열어 임정의 새로운 창조작업에 이들을 참여시키려 는 작업을 했다. 김규식의 집념은 모든 파벌들을 통합시켜 임정을 새롭게 보강하여 강력한 단일조직에 의해 독립운동을 벌여보자는 것이었다. 한국의 정치가나 민족운동가들은 대개 어떤 하나의 주의 주장을 외골수로 밀고 나가는데는 익숙했지만 여러 상이한 입장들을 한가 지 목표하에 끌어모아 타협시키는데는 서투른 경향이 있다. 이승만 김구 안창호 등 지도자들이 모두 자기 자신의 입장과 자기세력을 줄기차게 밀어 나가는데는 커다란 솜씨를 보였지만 타협과 조정에는 이렇다 할 솜씨를 발휘하지 못했다. 이에 대해 김규식은 자기 개인의 주의 주장을 배타적으로 고수하려 하기 보다는 항일과 독립이라는 공통의 지상목표를 위해 모든 항일세력을 단일조직으로 묶어야 한다는 입장이 었다. 이런 조정의 필요 때문에 김규식은 이승만이나 김구 또는 안창호와 달리 과격파라기

- 125 - 보다는 매우 유동성 있고 신축성 있는 지도자였다. 이 점에서 그는 당시의 어떤 인사보다 도 정치적 활동영역이 넓었고 고정불변한 보수파나 확고부동한 과격파라기보다는 매우 융 통성 있고 신축성 있는 전천후인물이었다. 파리평화회의와 미주에서의 활동기간이 그의 자 유주의 시기였다면 모스크바회의 기간은 일종의 정신적 방황기였다. 그는 불과 2 3년 사이 에 두 개의 상반된 세계에 살아보았고 두 개의 급격한 역사적 체험을 겪었던 것이다. 또한 지구상에서 상대가 서방국가이든 공산소련이든 강대국에의 의존이 독립운동에 큰 도 움이 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는 이 무조건적인 서구라파 추종이나 무비판적인 좌경편향 보다는 오직 민족자주역량의 축적만이 해방의 길을 열어주는 유일한 힘이라는 것을 믿게 되 었다. 모스크바 회의는 결국 김규식에게 구미자본주의 열강과 소련에의 기대는 더 이상 가져 서는 안된다는 것을 가르쳐 준 교훈이 되었고, 이후 그의 집념도 한국과 중국 두 나라 피압 박 민족의 단결이라는 새로운 아시아적 방향으로 지향되었다. 이런 점에서 그의 모스크바 여 행은 고전적 자유주의자로서의 그의 제 1단계를 마감한 여행이기도 했으며 동시에 막연한 급 진적 호기심을 탈피하여 민족자주론자로서의 자기확립의 한 계기가 됐다고도 볼 수 있다. 그 는 남을 믿고 남의 힘에 의지하려는 태도가 얼마나 부질없는 것인가를 뼈저리게 느꼈던 것이 다. 아무리 오랜 세월과 고난을 겪는다 해도 민족적 해방과 자기 개인의 인간적인 해방이 되 는 유일한 길은 오직 자기 자신의 힘을 축적시키는 데서만 이루어짐을 깊이 느꼈던 것이다. 공산당의 주의 주장과 실제 행동에는 너무나도 먼 거리가 있었다. 그들은 사람을 현혹시 키는 거창하고 고상한 꿈과 이론이 있었으나 실제 현실에 부딪혔을 때에는 소련 공산주의 자들은 너무나도 가혹한 실리주의자들이었다. 자유시사건 때에도 그들은 수 백의 한국독립 군 장병들을 희생시키고 혹사하였다. 심지어 1925년에는 카라한이라는 소련에서 일본외상 요시자와와 밀약을 맺고 소련 안에 있는 모든 한국 민족주의자들을 축출하거나 체포할 것 을 약속하였었다. 그런데 이때 축출당한 독립운동가들 가운데에는 김규식도 끼여 있었다. 설마하는 마음으로 기대와 희망을 걸었던 소련공산당에게 추방당한 김규식의 심정은 가히 짐작하고도 남음이 있었다. 이와 같이 소련공산당에 걸었던 희망도 실리를 위해서는 약소 민족의 희망을 헌신짝처럼 버리는 그들 앞에 김규식의 심정은 매우 답답하고 분노에 차 있 었다. 김규식이 해방 후에 미국군정당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국의 말을 믿지 않고 남북통일을 위해 그들을 멀리 하였다는 것은 이러한 체험에서 나온 결정이었다. 이 말은 단지 미국만을 지적하는 것이라기보다도 모든 외국세력을 믿지 않고, 자기 힘만 을 믿어야 한다는 깊은 민족적 자각에서 나온 태도였다. 해방 후에 김규식은 민족자주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해왔었다. 소련에서 중국 상해로 다시 돌아 온 김규식은 매우 피로하였다. 이유는 모스크바에 간 목적이 제대로 실현되지 않은 때문이었다. 상해로 돌아 온 극도로 피로한 김규식에게는 너무나도 벅찬 많은 일들이 기다리고 있었다. 무엇보다도 시급한 일 이 임시정부의 분열된 상태였다. 김규식이 하는 일은 여러갈래로 분산되어 무력하게 된 독

- 126 - 國史館論叢 第18輯 립운동을 규합하여 새로운 세력을 구축하는 일이었다. 김규식은 우선 각 지에 흩어져 있는 운동가들을 한 곳에 모아야 했다. 이러한 필요성은 임시정부가 분열된 직후의 1921년부터 있어 왔으나 모스크바회의 후에는 더욱 표면화되었다. 결국 1923년 1월에 국민대표대회가 설립되었다. 국민대표회의에는 국내를 비롯하여 러시아 북경 만주의 간도 등 먼 지방의 대 표들도 참석하였다. 이 회의를 소집하는데 있어서 김규식도 많은 노력을 하였다. 회의는 동년 1월 3일 김동삼회장 안창호부회장 사회 아래 92차의 회합을 열고, 3개월 동안 토의를 하였으나, 유감스럽게도 통일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간 각종 사건이 터진 데 다 임시정부의 운영문제에 관해 갑론을박하여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결국 대회는 임시정 부를 다시 시작하자는 창조파와 현재의 테두리 밑에서 지도자들을 개편하고 강화하자는 개 조파가 치열하게 논쟁하였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하고 개조파는 대회에서 탈퇴하고 말았다. 나머지 창조파는 임시정부를 부정하는 태도를 밝히고 임시의정원대신에 국민위원회를 설치 하기로 하였다. 김규식은 여기에서 국민의원직과 내무의원장직을 추대받았다. 하여간 창조 파가 설립하려던 정부는 발족되지 않았으며, 별다른 성과를 이루지 못하였다. 그나마 희망 을 걸었던 소련이 제나라의 이익을 위해서 한국의 민족주의자들을 추방하자 구국의 정열로 정치활동을 벌렸던 김규식도 큰 실망을 안은 채 정치에서 손을 떼었다. 정치활동을 중지한 것은 김규식만이 아니었다. 임시정부위원들도 그러하였다. 상해에 모였던 인사들은 혹은 영 국으로 혹은 미국으로 학업의 길을 따라 떠나가기도 하였고 그중 많은 사람들은 국내에서 의 활동을 위해 돌아오기도 하였다. 1921년 경부터 상해중심시기는 지나갔고 1931년까지 의 독립운동의 무대는 만주로 옮겨갔으니 이 시기는 독립운동의 침체기라 할 수 있다. Ⅳ. 混亂 속의 獨立運動 정치활동을 중지한 김규식은 우선 교육계에 들어갔다. 그는 상해 프랑스 租界에 살면서 상해 복단대학 등에서 영문학 강연을 했다. 그러나 그는 한 학교에서 오랫동안 근무할 수 없었다. 첫째 이유는 일본탐정들의 꾸준한 추적 때문이었다. 물론 김규식은 變姓名을 했지 만 일본 총영사관에 탐지될 위험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둘째는 건강 때문이었다. 1923년 김규식은 장녀 한해를 낳았고 1924년에는 2녀 만해를, 다음 1925년에는 구해를 낳았다. 천진으로 옮긴 후 2남 진세를 낳았다. 그러나 2녀 만해는 1927년 세살 때 병사했고, 장녀 한해는 1930년 8살 때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 3녀 구해와 두 아들은 해방 후 부모와 같이 귀국했다. 장남 진동은 귀국 후 일본 에서 언론인으로서 일하고 있고 3녀 구해는 미국으로 유학하여 화학을 연구하여 현재는 예

- 127 - 일대학 연구소에 근무하고 있다. 천진에서 김규식 가족의 생활은 비교적 안정적이었다. 이 처럼 독립운동이 침체기에 있는 동안 김규식은 가족을 위해서 생활할 수밖에 없었으나 그 는 항상 한국 또는 외국기자들과의 관계를 끊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시대의 변화와 주위 의 동지들은 그를 언제까지나 그렇게 안일한 생활을 하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1931년 9 월 18일 만주사변이 일어나고 중국에 대한 일제의 침욕이 노골적으로 전개되면서 중국인들 의 반일감정이 높아졌고 한국민족운동도 활기를 더하게 되었다. 독립운동의 일선에서 물러 나 교육생활에 들어가 있던 김규식에게도 새생활이 시작되었다. 그 무렵 북경에는 원세훈 장건상 안광천 등 몇몇 운동가들이 활동하고 있었는데 이들은 김구 최동호 이청천 등 우파 와 서로 연대하여 구국항일회 등 각종 활동을 하고 있었으며 김규식도 이런 운동에 직접 간접으로 관여하게 되었다. 그는 만주사변을 계기로 중국인의 반일감정을 이용하여 한 중 두 민족의 공동전선을 이룩하려 생각하였다. 그는 우선 북경의 조성환 이천민 등과 연락하 여 북경항일의용군 을 조직하고 다시 김구와도 연락하여 한국청년 20여 명을 중국 군관학 교에 입학시키기로 하였다. 그는 각지의 독립운동 단체를 하나로 끌어 모으기 위해서 상해 북경 남경 등을 동분서주하였다. 김규식은 우선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 이라는 조직결성을 적극 추진, 대외적으로는 중한 민중대동맹 결성의 산파역을 도맡았다. 그 결과 1932년 10월 12일 상해에서 각 단체 대표 들의 간담회가 열리게 되었다. 참가한 사람들은 이유필 송병조 등 한국독립당 대표와 韓一 來 박건웅 등 의열단 대표, 그리고 김규식을 포함해 9명이었다. 준비위원회는 11월 13일 재차 회동하여 이들을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으로 합의하고 기구의 성격은 협의적 기능에 한정키로 했다. 25일에는 참가단체인 한국독립당 조선혁명당 한국혁명당 조선의열단 광복단 (김규식이 대표)들이 이 동맹결성취지에 찬성의 뜻을 표명하여 김규식의 뜻은 마침내 실현 을 거두고, 그후 이 동맹에는 열거한 단체 외에 신한독립당 한국동지회 광복동지회 대한인 동지회 미국대한인독립당 대한인국민회총회 뉴욕대한인교민회 등 수 많은 단체들이 속속 가 담했다. 1933년 1월 16일에는 미국의 대한민국민회총회가 가입하여 그후 미국의 단체들로 부터 정기회비가 우송해 왔고 3월 1일을 기해서는 남대문에서 2차대표대회가 열렸다. 임시 정부 폐지주장은 토론과정에서 격렬한 논란을 일으켰으나 결국 회의에서 채택됨으로써 단 합의 기운과 균열의 기운이 동시에 싹트는 사태가 벌어졌다. 임정폐지 주장에 대해 신한독 립당과 의열단은 찬성의 입장을, 한국독립당은 반대의 입장을 취했다. 김규식은 1932년 11월 초 최동오와 함께 상해로 와서 한교회를 기간으로 중국측 화교연 합회와 중한연합회를 만드는 일에 몰두했다. 이 결과 김규식은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과 중 한연합회를 동시에 주도했고 그것이 결성된 후인 1933년 1월 하순 미국으로 건너갔다. 김 규식은 남해안을 경유 미국으로 갔다하나 아마도 상해서 기선을 타고 남태평양을 통과해

- 128 - 國史館論叢 第18輯 미국으로 가지 않았나 한다. 김규식의 도미목적은 중 일관계 악화에 따른 새로운 국제정세 를 배경으로 한국민족운동의 통합과 중 한 두 민족의 공동전선협상 가운데 기운을 널리 선 전, 그에 대한 대외 한중관계지원과 재정적 지원 호소를 위한 것이었다. 김규식은 미국 동서부 각 지의 대학과 교포단체를 순방하였으니 세번째 미국 방문이었 다. 그가 미국대학에서 강연했을 때 청중들의 열렬한 환영을 받았다. 그는 미국의 교포로부 터 약 7천 달러의 모금을 할 수 있었다. 이들은 그가 8월 상해로 돌아온 후 대일 전선통일 동맹의 사업과 이청천의 후진양성사업에 투입되었다. 미국에서의 선전활동과 모금에 용기 를 얻은 김규식은 중국으로 돌아온 후 1933년 8월 말 대일전선통일동맹본부를 남경으로 옮기고 중국인의 항일운동과 제휴, 보다 적극적 운동을 펴나갔다. 김규식은 그 곳에 간 후 韓再剛이라는 가명으로 행세했다. 대일전선통일동맹은 1934년 3월 1일 2차 대표자회의를 열었다. 이 회의는 김규식을 중심적 조직자로 한 운동체였다. 제 2차대회에서는 대동단결 조선방침안을 발표, 새로운 정세에 부응한 항일운동단체 각 파의 통합운동이 제창됐다. 이 방침안은 서로 비슷하거나 같은 주의 강령을 지닌 단체는 자진 해체하고 한 단체로 통합할 것을 요구했다. 2차 대표회의는 새로 탄생할 통일조직의 주의 강령 정책 규약 대강을 결정 할 것을 위임하고 성립과 때를 같이 해 각 단체와 대일전선통일동맹의 해체를 즉시 발표토 록 규정했다. 처음부터 통합운동의 순수성을 의심했던 김구는 의열단계열의 계략에 대노하 여 김규식이 의열단에 현혹당하고 이용만 당하고 있다고 분개했다. 연합정당의 헤게모니가 의열단이냐 한독당 계열이냐에 따라 새 연합체의 향방이 적잖은 영향을 받게될 것인데, 자꾸만 의열단 쪽으로 기울어짐에 따라 다른 쪽의 불만이 높아졌고 김규식 자신의 비중도 점차 약해져 가는 것 같았다. 하여간 김규식은 김구나 의열단과 다 름없이 항일무력투쟁을 정당시 했던 것이 사실이다. 이 민족운동 통합노력은 민족혁명당의 창당으로 발전, 이 조직은 한독당 의열단 중도파(김규식)의 여러 세력이 항일의 단일목표를 위해 조직을 통합한 것이나 이것 역시 내부대립과 불신 때문에 곧 깨져 버렸다. 한국대일전선통일동맹의 모체로 창당된 신당은 6월 20일부터 남경 소재 신한독립당사무 실에서 있었던 각파 간담회에서 태동됐다. 여기서 의열단계열과 한독당계열의 암투가 끊임 없이 반복됐다. 의열단계열은 당내 급진파에 속하는데 의열단이 과연 민족주의에 가까우냐 좌익에 가까우냐 하는 데에 이론이 분분해서 그때로서는 그냥 민족적 급진파로 간주돼 있 었던 것 같다. 의열단계열은 혁명단 계열에 큰 호응을 보였다. 민족단일조직에 참여함으로 써 중국쪽으로부터 자금을 원조받는데 유리한 조건을 만들 수 있다고 보아서이다. 그러나 한독당은 신당이 의열단계열에 독점될까 상당히 경계했는데 대세가 신당결성으로 기울어지 자 다소 완화되는 반응을 보였었다. 한편 신한독립당은 원래 신당움직임에 호의적이었다. 한독당은 분열돼 암투를 벌였으나 신당의 주도권을 우파 민족주의 진영의 장악에 노력한다

- 129 - 는 조건으로 참여했다. 이런 방식은 급진파 의열단이나 우파 한독계열이 한결같이 수긍하 고 있던 바이기 때문에 중간파인 김규식 역시 이 노선에 동조했다. 1930년대의 민족운동 각 파는 이념과 사상에 상관없이 모두가 무력투쟁방식에 합치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여진 다. 신당의 절충론적 정강은 결국 서로 다른 파를 하나로 조직화하기 위한 타협의 산물이 며 이런 절충주의는 당권을 어느 계파가 잡느냐에 따라 보다 보수화 될 수도 있고, 보다 급진화 될 수도 있는 신축성을 보였다. 신당은 입당경위가 다소 까다로워 당원 두 사람 이 상의 소개로 상급간부의 인가를 얻은 뒤 3개월 간의 후보당원 생활을 규정했다. 이것은 대 중정당으로서는 어울리지 않는 엘리트 중심주의라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한편 당시 일제 첩자들의 공작이 많았던 것을 생각하면 이 정도의 경계심은 필요하였을 것이다 이렇듯 탄생한 신당은 그후 의열단의 독단이 심해져서 결국은 격심한 내분 끝에 한독당 계의 조수항 박창세 등이 탈퇴를 선언하게 되었다. 한독당계가 나간 후에도 의열단계와 우 파 이청천계 사이의 알력은 계속돼 당은 심한 혼란을 일으켰다. 그래서 오랜 산고 끝에 민 족혁명당 도 결국 수포로 돌아갔다. 이런 과정에서 김규식은 처음부터 각 파 연합의 산파역 을 떠맡았다. 그는 처음 신당의 주석자리에 있었으나 그의 역할은 선전부장에 준하며 실권 은 의열단계열이 거의 장악했다. 신당은 통합정당의 구실을 못하였으며 성격도 의열단적 색채를 짙게 띄어 간 탓으로 김규식을 비롯한 중도파와 우파들은 점차 조직으로부터 이탈 돼 나간 것 같다. 하여간 이 신당운동과정을 통해 김규식의 정치적 입장은 뚜렷해졌다. 그는 신당에 적극 참여한 점에서 이승만 및 김구와의 입장상 차이를 선명히 드러냈다. 반 면 그는 의열단 주도의 당권파에도 속하지 않은 점에서 급진파와의 노선상 차이도 분명했 다. 그렇다면 그의 정치적 입장은 무엇인가 어떤 이는 김규식을 보고 좌경인물이라고까지 하고 심지어는 사회주의라고 몰아 부치는 사람도 간혹 있었으나 그는 소련으로부터의 강제 추방을 계기로 확고한 반공의식을 드러냈던 이념적 우파였다. 이런 점에서 김규식의 사상적 입장을 자유주의적 기본질서 존중의 민족주의자 이상으로 급진시하는 것은 정확치 못할 것 같다. 다만 그는 민족운동 각 파의 연합을 위해 폭 넓게 동분서주해서 양극단의 입장에 서 는 그를 불신 등안시 했었던 것 같다. 1935년은 민족혁명당 이 창당된 해였으나 다음해 김 규식은 다시 소란스런 정계에서 몸을 빼 四川省 成都로 멀리 이사를 떠났다. 남경 상해 등의 정세는 날로 험악하여 국민당 정부가 솔선 사천대학의 교수직을 알선해 주었다. 이를 계기로 하여 김규식의 제 3이기 정치운동도 마감을 고했다. 파리강화회의 시절과 미 국에서의 활동을 제 1이기 정치생활이라면, 그의 모스크바회의 참석과 국민대표회의 운동 및 불라디보스톡시기는 제 2기, 천진 및 남경에서의 대일전선통일동맹운동 중한민중대동맹 운동 및 민족혁명당 창단은 제 3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이다. 제 1이기는 자유민권사상과 계몽사상이 기초인 시기, 제 2기는 일종의 방황기라 할 수 있으며 제 3이기는 그의 민족주

- 130 - 國 史 館 論 叢 第 18 輯 의가 김구나 의열단과 비교해 중도적 위치에 정착한 원숙기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김규 식이 교조적 사회주의나 소련에 크게 실망했던 사실은 이에 다 알려졌다. 오랜 방황 끝에 그는 마침내 눈을 자신에 돌리고 자주적 민족독립운동이라는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이 자 주정신은 그의 정치노선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이런 귀중한 자기 발전의 체험에도 불 구하고 벽지 사천성에서의 교직생활로 돌아갔다. 그는 본질적으로 직업 정치인은 못되는 타 입이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선비요, 지사였으며 권력지향적 정치가는 아니었다. 또 바로 그 런 비정치적 사고방식과 행동 때문에 그가 권력투쟁이나 정권투쟁에서 실패했다고 보는 사 람도 있다. 그는 의견을 주장하고 관여하긴 하나 자기 자신의 조직을 튼튼히 하고 관리하는 데는 무관심하다는 평도 들었다. 그는 고상한 이상과 견해를 가진 양심적이고 신사적인 선 비이며 지사였지, 이승만과 같은 정치수완도 없었고 김구와 같은 영웅적 행동력도 없었던 사람이다. 그래서 김규식에게는 당권이나 정권을 장악하여 자기식으로 천하를 주도한 욕망 이나 아집이 없었다. 김규식에게 있어 정치란 서로 다른 철학의 사람들과 각자의 공통 목표 를 위해 단결 또는 제휴시키는 기술이지 주장고집과 욕망실현의 기술이 아니었다. 당시 많은 민족운동가들이 완강한 이념형 인간이거나 카리스마적이고 권위적인 지도자상 을 보이고 있었던 점에 비추어 김규식의 그런 현대적 정치감각과 행동스타일은 분명히 희 소가치가 있는 자질이었다. 김규식의 이런 활동방식과 정치적 자질은 8.15 후 그가 고국에 돌아 온 후에도 발휘되어 다채로운 정계판도를 조합시켜 내는데 큰 계기를 마련했다. 그가 추구한 독특한 대화의 정치 (타협의 정치), 공존의 정치는 한국현대정치사상 희소한 행동 방식이었던 것으로 주목할 만했다. 그러나 그 무렵의 항일운동가들은 거의가 강렬한 투사 아니면 영웅형의 인물이었던 만큼 김규식과 같은 조정자로서의 정치방식이 제대로 통용되 긴 어려웠다. 그런 때문에 김규식은 여러차례 다시 서재로 되돌아가곤 했다. 그런 가운데서 도 김규식은 한가닥 타협할 수 없는 원칙을 견지했으며 그것의 관철을 위해서는 극한 투쟁 의 불가피성을 인정한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한 예로 그리스치 대령사건을 예로 들 수 있다. 12) 이승만이 정치적 집념과 능력의 소유자였다면 김구는 강인한 신념과 행동력의 소 유자였고 안창호는 도덕적 성실성과 백년대계의 신봉자였다고 할 수 있는데 김규식은 현대 학문의 세례를 받은 세련된 정치감각의 바탕위에서 자신의 도덕적 정치적 의지를 객관적 정세에 맞춰 적절히 컨트롤 할 수 있는 이성의 인물 극기의 인물 자제의 인물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그의 정치적 행동양식에 미친 또 하나의 영향은 건강이었을 것이다. 위장병 두통 및 만성적 허약증은 그의 행동력과 적극성을 손상시키고 그의 심정을 다소 신 경질적인 양상으로 만들었기 때문에 그가 한 사람의 강력한 조직지도자로 정착함은 다소 힘 12) 1925년 상해에서 그리스치 대령이 무기밀수 혐의로 구속되었는데 그 무기는 김규식에게로 전할 목적이어서 김규식이 한때 도피한 적이 있었다.

- 131 - 들었던 것 같다. 그리고 그가 한번 역정을 냈다 하면 대단할 정도여서 상대방의 어깨를 두드 리며 자네만 믿네 하는 이승만의 정치적 수완을 능가하기는 꽤 어려웠을 것이다. 때문에 김 규식은 수단을 가리지 않은 권모술수로서의 정치나 권력의지의 충족수단으로서의 정치는 경 멸했거나 등안시 했다고 보여진다. 권력투쟁에서 승리하느냐 패배하느냐의 승부 관념도 그에 있어서는 큰 관심의 대상이 아니었던 것 같다. 가장 합리적 양심에 따라 최선을 다하다 실패 하면 표연히 정치투기장을 떠나버리는 것 우사의 정치 생애는 바로 그런 것으로 생각된다. 정치는 그에게 있어 직업이 아니었다. 정치는 자신의 가장 고매한 이상 관철의 도덕적 실천 수단이지 생계수단이 아니었다. 그가 정당에 몸담은 것은 민족혁명당 창당기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었다. 김규식의 정치생활은 봉사로 일관한 것이다. 민족을 위해, 어떤 가치와 이상을 위해 그것을 향한 민족진영의 단합과 제휴를 위해서 노력한 것이었다. 그의 정치활동은 자기 자신의 당권장악이나 정권장악보다는 일 자체의 성사를 더 중시하고 앞세우는 것으로 일관했 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김규식의 정치활동은 후세의 지식인 정치인들에게 하나의 교훈과 모범을 보여주었다 할 것이며 바로 여기에 그의 생명력과 역사적 의미가 돋보이기도 하였다.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오래전부터 중 일전쟁이 일어나게 되길 원했고 그렇게 되면 미국이 중국측에 가담함으로써 일본이 그만큼 빨리 패망할 것이라고 기대했으나, 1937년 중일전쟁 이 일어났음에도 미국은 오랫동안 이 전쟁에 개입하지 않았으며 중국군은 예상외로 패전을 거듭해 한국독립운동가들은 중국정부와 더불어 피난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당초 김규식 은 중일전쟁 전인 1935년에 四川省 成都로 이사를 하여 교편생활을 하고 있었기 때문에 피 난의 고생은 모면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8년 10월 10일에 한국에서 조직된 김원봉의 조 선의용대나 중국 강릉에 있었던 민족혁명당 정당대회와는 아무런 관계를 갖지 못했다. 성도 의 사천대학 시절에는 김규식의 가정생활은 비교적 여유가 있었고 학생들 간의 인기도 비교 적 좋았던 편이다. 김규식의 중국어 실력은 유창하진 못했지만 방언의 차가 심한 중국에서 는 김규식이 언어문제로 고통을 겪지는 않았다. 그는 사천대학에서 영문학을 강의했는데 그 곳에서 에리자베스시대의 연극입문 과 같은 책을 출판하여 교재로 사용하기도 했었다. 1942년도에 김규식은 중경으로 가서 임정의 부주석이라는 중책을 맡기도 했고, 1944년 실용영문작법 이란 책을 1945년도에는 실용영문 이란 책을 성도에서 출판했다. 김규 식은 오랫동안 중국에서 항일투쟁에 종사했지만 그는 정치보다도 교육에 더 많이 관여했 다. 그는 전형적인 정치인으로서 보다 정치에 많은 관심을 가지고 주도적 활동을 한 바 있 는 교수였다는 평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는 교수생활 속에서 오히려 생활의 안정을 얻었 으며 마음의 안정도 얻었다. 생활의 모든 것을 정치와 결부시킨 이승만이나 백범 김구와는 대조적이었다. 그는 대중 앞에 나서서 연설하기를 좋아하지 않았다. 김규식이 본성에 맞지 않는 정치일선에 나서야 했다는 것은 김규식 자신은 물론 그의 가족을 위해서도 불행한 일

- 132 - 國 史 館 論 叢 第 18 輯 이었다. 원래가 학자적 성품을 가졌고 건강도 좋지 못해 그는 정권의욕도 가지지 않았다. 1937년부터 중국공산당과 대일연합전선을 펴고 있던 국민정부는 1938년 말부터 좌우로 갈렸던 한국독립운동가들에게 역시 연합전선을 펼 것을 권유하기 시작했다. 중국에서의 좌 우파는 김원봉 중심의 민혁당과 백범 중심의 한국독립당과 임시정부였다. 김구 김원봉 두 사람은 1939년 5월 동포와 동지들에게 보내는 공개장을 발표하여 앞으로 공동전선을 펼 것을 다짐하였다. 그러나 양측 내부에서 심한 반발이 있어 한때 공동전선은 실현되지 못했 으나 중국측의 끈질긴 권고로 양측의 합작은 마침내 실현됐다. 이는 새로운 조직체를 만드 는 게 아니라 민혁당이 임정에 참가하는 일이었다. 1942년 10월 장건상과 더불어 김규식 은 임정국무위원으로 보선되었으며 1944년 2월에 부주석으로 임명되었다. 부주석으로 선임된 이후인 1944년 8월 12일에 김규식은 한 친구에게 보낸 편지에서 자 기는 임정의 부주석으로 있지만 투표권도 없는 애매한 자리이며 대체로 선전사업에 주력하 고 늘 군사 외교 기타 사업계획을 세우는데 힘쓰고 있다고 말했다. 해방을 맞이한 임정내에 서는 비록 합작을 하였으나 좌우간에 호흡이 맞지 않았다. 처음부터 임정을 사수해 온 백 범과 한독당계열은 임정기구를 그대로 유지한 채 귀국할 것을 주장했으나 민혁당계에서는 임정의 총사직과 입국 후 국내 각파와 의논해 임정의 장래를 결정할 것을 주장하였다. 임정내의 이런 대립은 귀국에 앞서 미군정청으로부터 정부로서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 각료들이 개인자격으로 귀국했기 때문에 양파의 대립은 실질적 문제가 되진 않았으나 귀국 후 임정내의 불협화음은 그치지 않았다. 김규식이 민혁당 내부에서의 역할은 선명하게 나 타나 있지 않았다. 이러한 감정은 임정에 모여있던 요인들 중 누구나가 느낄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요인들은 이런 착잡한 감정을 명확히 표명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나 많은 파란 곡절을 겪는 동안 뚜렷한 조직체와 지도자를 가지지 못하고 해방을 맞이한 국내동포들의 임정에 대한 기대는 절대적이었고 좌 우익을 막론하고 전국민이 임정의 귀국을 열광적으로 환영하였다. 임정 대표들의 제 1진은 1945년 11월 23일 돌아온 후 매일같이 환영회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정치는 감격과 눈물만으로 이루어지는 것은 아니었다. 열광적인 환영과는 달리 임 정요인들이 당면한 현실은 매우 냉혹했다. 우선 3 8 이남에서 권력을 장악한 미군정은 임 정을 정부로 인정하지 않았고 해방을 맞이한 국내의 정계는 여러가지 정치집단으로 분열되 어 혼란이 극에 달하고 있었다. 11월 23일 귀국한 김규식 등 임정요인들은 이렇다 할 노선 을 세우지 못하고 의논해서 결론을 짓기로 하겠다고 확실한 대답을 보류하였다. 우사 김규 식은 중국에서의 오랜 항일독립투쟁에서 우방이라는 나라들을 믿지 못한다는 것을 뼈저리 게 경험한 그로서 그가 갈 길은 외세가 개입한 분단국가 수립보다도 민족자주에 의한 통일 을 지향하는 것이 성패에 관계없이 그가 갈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