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과 노량해전 발간사 축간사 임란 남해 유적지 화보 01. 글을 시작하면서 3 0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8 1) 임진왜란 8 2) 정유재란 39 03. 노량해전 이전 상황 45 1) 조선 진영 45 2) 명나라 진영 51 3) 일본진영 54 04. 노량해전 발단 57 05. 노량해전 전야 66 06. 임진왜란 최후 최대전투 노량해전 72 07. 이순신의 순국 82 1) 이순신의 순국해역 관음포 89 08. 노량해전 이후 100 09. 이순신 자살설과 은둔설은 망언 104 10. 이순신 정신을 선양하고 계승하자 110 11. 이순신 명언과 후대인들의 찬문 헌시 128 1) 이순신 명언과 어록 128 2) 후대인들의 찬문과 헌시 139 목 차 1
12. 임진왜란 남해 유적지와 전설 152 1) 관음포이충무공전몰유허 152 2) 남해충렬사 165 3) 선소왜성지 173 4) 장량상동정마애비 175 5) 임진성 177 6) 가청곡 178 7) 창선왕후박나무 179 8) 임진왜란과 군영관련 남해지명 및 전설 179 13. 임진왜란 조 명 일 인물들 187 1) 조선 인물 187 2) 명나라 인물 246 3) 일본 인물 250 14. 이순신 일대기 261 15. 글을 맺으면서 279 참고문헌 286 < 부록> 선조실록 중 남해편 289 2 이순신과 노량해전
1. 글을 시작하면서 민족의 성웅으로 추앙받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은 태양의 빛이며 만인이 존경하는 위대한 지도자로서 오로지 구국일념으로 일생을 보내 다 육지가 아닌 해상에서 지금 전쟁이 한창이니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면서 죽음이란 두 글자를 두렵게 생각하지 않고 오직 나라의 앞날을 걱정하다 순국하였다. 이렇게 위대한 업적을 남기신 충무공 이순신에 관해서 후대인들은 너 도 나도 셀 수 없을 정도로 수없는 글들을 남겨 추앙하고 있으며 곳곳 마다 성역화하여 충무공 이순신 정신을 선양할 뿐 아니라 계승하고 있 다. 그러나 임진 정유왜란의 7년 전쟁 중 가장 치열하였고 최후 최대 전투인 노량해전에 대하여 세밀하게 분석 연구하거나 심도 있고 비중 있는 논문이 발표된 것이 없다. 노량해전은 조 명 연합 함대의 해상연 합 작전이었고 조 명 일 삼군의 전선 8백8십여 척이 서로 엉켜 각종 전략과 전술로 7년 전쟁을 종식시킨 대 해전이었기에 역사의 현장으로 불러짐에도 불구하고 남해지역의 무관심으로 학계의 조명을 받지 못한 안타까움을 생각하면서 호국의 얼이 깃든 노량해협 관음포를 성역화 하 여 호국정신을 계승하는 교육의 장으로 발돋움하기 위해 임진왜란과 노 량해전 전반에 관한 전사( 戰 史 ) 를 정리하고자 한다. 우선 임진왜란의 발발 동기부터 알아보자 임진왜란 전부터 일본은 대 륙을 침범하고자 철저하게 준비를 하면서 대륙과 연결하는 통로 지역인 조선을 침범하겠다는 암시와 호시탐탐 조선을 찬탈하려는 예고가 있었 지만 앞날의 불행을 예측하지 못한 채 일본을 가볍게 보고 있던 중 그 결과 전 국토가 무참히 유린당하는 수모를 겪게 된 역사의 아픔을 간직 하게 되었다. 글을 시작하면서 3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일본의 동향은 다음과 같다. 일본의 풍신수 길은 일본 66 주( 州 ) 를 통합하고 다른 나라를 침략하려는 뜻을 가지고 있으면서 1586 년에 사신 귤강광( 橘 康 廣 ) 을 조선에 보내 우리 사신은 늘 조선에 가는데도 조선 사신은 오지 않으니 이는 곧 우리를 업신여기 는 것이다( 我 使 每 往 朝 鮮 而 朝 鮮 使 不 至 是 鄙 我 也 ) 라고 하면서 조선통 신사를 일본에 보낼 것을 요구했다. 그리고 예조판서가 베푸는 연회석에서 너희 나라는 망하겠다. 기강 ( 紀 綱 ) 이 이미 허물어졌으니 망하지 않기를 어찌 기대하겠는가?( 汝 國 亡 矣 紀 綱 巳 毁 不 亡 何 待?) 라는 말들로 시비를 걸었고 서슴없이 조선을 무시하는 망언을 했지만 조선에서는 예사롭게 듣고 마음에 새기지 않은 것이었다. 그리고 1590 년에 평의지( 平 義 智 ) 가 일본국사( 日 本 國 使 ) 로 왔다. 평 의지는 대마도주로서 주병대장( 主 兵 大 將 ) 평행장( 平 行 長 ) 의 사위이고 풍신수길의 심복이었는데 평조신( 平 調 信 ) 과 중 현소( 玄 蘇 ) 와 같이 왔 다. 사신으로 온 이유는 조선에서 일본으로 통신사가 오는데 물길이 어둡 다고 하니까 바닷길에 익숙한 평의지를 보내니 함께 오라는 것이었다. 이에 조선 조정에서는 어쩔 수 없이 사신으로 첨지( 僉 知 ) 황윤길( 黃 允 吉 ) 과 사성( 司 成 ) 김성일( 金 誠 一 ) 을 상사( 上 使 ) 와 부사( 副 使 ) 로 삼고 전적( 典 籍 ) 허성( 許 筬 ) 을 서장관( 書 狀 官 ) 으로 삼아 1590년 3월에 평 의지 등과 함께 일본으로 떠났다. 5개월 정도 머물다가 조선으로 돌아 와 부산에서 황윤길이 장계를 올리면서 반드시 병화( 兵 禍 ) 가 있을 것 입니다 라고 했으나 김성일은 신이 그 곳에서 그러한 징조( 兵 禍 ) 가 있는 것을 보지 못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왕명으로 같이 일본을 갔다 온 사신들의 보고 내용이 틀린다는 것은 애국심보다 사심( 私 心 ) 이 앞을 가리고 있었기에 앞날의 국가 존망에 따 른 중대사를 사사로이 처리하는 오류를 범하고 만 것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의 일이다. 일본의 평조신과 현소 등이 통신 사와 함께 부산 동평관( 東 平 館 ) 에 묵고 있었다. 황윤길과 김성일은 술 과 안주를 마련하여 사신들을 위로하는 체 하면서 일본의 정세를 살펴 4 이순신과 노량해전
보았는데 현소가 비밀히 말하기를, 중국이 오랫동안 일본과의 국교를 끊고 조공을 바치지 않았으므로 풍신수길은 이것을 마음속에 품어 분하 고 부끄럽게 여겨서 전쟁을 일으키려 합니다. 조선이 먼저 이 사정을 중국에 알려서 조공하는 길이 트이게끔 주선한다면 반드시 아무 일도 없을 것이며 일본 66 주( 州 ) 의 백성들도 역시 전쟁의 수고로움을 면하 게 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조신과 현소는 스스로 돌아가고 말았다. 그리고 1591 년 여름에 평의지가 부산포에 와서 변장( 邊 將 ) 에게 말하 기를, 일본은 명나라와 국교를 통하고자 하는데 만약 조선이 이를 위 하여 그 뜻을 알려 주면 아주 다행스러우나 그렇지 않으면 두 나라는 장차 화기( 和 氣 ) 를 잃게 될 것입니다. 이는 곧 큰일인 까닭에 와서 알 려 드립니다 말하고 10일 동안 부산포에서 답변을 기다리기 위해 배 에서 머물다가 앙심을 품고 돌아가 버렸다. 이 뒤로 왜인들은 다시 오 지 않고 부산포 왜관에 머물던 수십 명의 왜인도 차츰 돌아가 버리니 왜관 전부가 비어 있었다. 일본에서는 1586년부터 임진왜란 전까지 7년 동안 선전포고를 한 셈이었다. 이에 대응하기 위해 조선은 풍신수길이 품고 있는 야망과 야 심을 꿰뚫었다면 임진왜란을 미리 막을 수 있었을 것일지도 모른다. 임진왜란을 볼 때 단순하게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으로만 보기에 는 힘들다. 당시 동북아시아 세 나라인 조선과 일본 그리고 명나라가 참전한 국제 전쟁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궁극 적 이유도 가도입명( 假 道 入 明 ) 으로 일본이 명나라를 칠 테니 길을 빌려 달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조선에서는 일언지하에 거절하였다. 그러자 일본은 선전포고도 없이 조선을 침략했고 파죽지세로 치달은 일본군 선봉은 전쟁 발발 후 20여일만인 1592년 5월 3일에 수도 한양 을 무혈점령하였고 6 월 중순에는 평양까지 함락시켰다. 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을 떠난 국왕 선조는 명나라로 내부( 內 附. 망명) 하겠다는 뜻을 밝힐 정도로 전황은 조선에 극도로 불리하게 전개 되었다. 어쩔 수 없는 상황에 이르자 조선 조정은 명나라에 파병을 요 청하였고 명군의 선발대는 7 월 중순에 입국하게 되었다. 글을 시작하면서 5
그러나 조선의 백성들은 국난의 위기를 그대로 보아 넘기지 않고 의 병으로 항쟁이 계속되었으며 수군의 활약도 대단하였다. 특히 제해권을 장악한 조선수군과 의병들은 일본군의 후방을 교란하고 보급로를 차단 함으로서 일본군은 불안하기 시작하였기에 매우 큰 전략적 의의가 있다 고 본다. 1596년 가을 무렵 강화협상의 결렬로 일본군은 재침을 준비하였고 정유재란의 신호탄을 낳게 되었다. 1597년 재침과 동시 칠천량해전에 서 조선 수군은 전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였다. 이 해전으로 일본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고 경기도 지역까지 진출하였다. 그러나 백의종군하던 이순신이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하여 명량과 노량해전에서 승전함으로 서 한번더 일본군의 침략의도를 좌절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순신은 진실 되고 거짓됨이 없는 완성된 인격을 가지고 있었기 때 문에 조선 수군은 물론 의병, 승병, 백성들이 모두 감복하여 그를 따랐 으며 명나라 도독 진린과 병사들까지 이순신을 흠모할 정도였다. 그래 서 조선의 군 관 민이 힘을 합하여 전란을 극복할 수 있었다. 어떻게 보면 이순신의 완성된 인격이 나라를 구한 셈이다. 우리는 임진왜란을 통하여 한민족의 저력을 과시하였지만, 수많은 인 적 물적 피해는 물론 정신적 고통을 당해왔다. 국가의 존속을 위해서 무엇이 필요한 것인가에 대해서는 각자가 알고도 남음이 있다. 임진왜란 중 노량해전은 크나큰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 직까지 정리된 논문이나 저서가 없기에 자료를 수집하고 연구하여 정리 해 보고자 한다. 세계적인 영웅이요 한민족의 성웅으로 추앙하고 있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순국지 이충무공전몰유허는 호국정신이 살아 숨 쉬는 산교육의 장이기에 이순신 정신을 충분히 이해시키는 중요한 유적지이다. 물론 남해군에서는 성역화 사업을 계속 추진하고 있으나 그 방법은 여러 가 지 방향으로 추진되어져야 옳은 것으로 본다. 그래서 필자는 자료정리가 시급함을 인식하고 자료를 취합하여 편찬 사업을 추진하는데 정성을 집결시키고 내용으로는 임진왜란의 전반적인 사항을 분류하여 간략하게 언급함과 동시 노량해전의 발단에서부터 종 6 이순신과 노량해전
전 및 이순신 순국까지를 문헌에 의해 세밀하게 정리할 뿐 아니라 임진 왜란과 관련된 주요 사항, 당시 인물은 물론 후대인들의 찬문을 조사하 여 정리하고 남해의 임진왜란 유적지를 일일이 소개하고자 한다. 종합적인 자료를 정리하기에는 너무나 방대하기에 노량해전을 중심으 로 정리하는 국부적이기도 하지만, 본 자료가 앞으로 임진왜란과 노량 해전 그리고 충무공 이순신의 순국에 대한 참고자료로 활용되길 바라며 끝으로 충무공 이순신 순국해역에 만인이 추모할 수 있는 조형 설치물 이 건립되길 바란다. 노량해전이 종전되고 충무공 이순신이 순국하였다는 소식을 들은 명 나라 지휘관 형개가 남긴 기록이 있다 마땅히 그 사당을 바다 위에 세워서 그 충혼을 표창하여야 한다( 邢 軍 門 謂 當 立 祠 海 上 以 獎 忠 魂 ) 라 하였다. 아주 좋은 발상이라 생각한다. 비록 바다 위에 사당은 건립하 지 못할지언정 그 뜻이 지극하므로 순국해역 해상에 사당의 역할을 수 행할 수 있는 충혼 조형물을 설치하고 군 관 민이 합심하여 거룩한 이순신 정신의 깊은 뜻을 계승하는데 전 국민이 동참하도록 문을 열어 새 역사를 창조해야 할 것이다. 전 인류가 추앙하는 이순신의 순국해역이 이순신을 비롯하여 산화한 애국 수군들의 영령을 추모할 수 있는 명소로 거듭나기 위해 한민족의 저력을 발휘해야 할 때이다. 때를 같이하여 전쟁이 인류에게 준 막대한 악영향과 아픔의 흔적은 지울 수 없음을 세삼 깨닫게 하고 국가에 충성을 다한 위인의 전기를 통해 애국심과 충성심의 정신을 함양시켜야 겠다는 중요한 의미를 가지 고 있기에 더욱 비중을 높여 연구를 활발히 해야 하는 역사적 사명감을 가져야 하겠다. 이에 충무공 이순신의 업적에 만분의 일이라도 보답하는 차원으로 글 을 짓고 자료를 정리하여 그의 혼을 위로하기 위해 전 이라는 제목으로 글을 엮어 바치고자 한다. 이순신과 노량해 글을 시작하면서 7
2.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1) 임진왜란 (1) 20일 만에 도성 함락과 의주 파천 일본의 대륙진출이라는 명목으로 한반도를 가교로 만들기 위해 조선 땅에 일본 수군은 1592 년( 선조25) 4월 13일 오후 5시경 부산 앞 바 다까지 침입했다. 이런 상황인데도 조선 조정에서는 당파싸움으로 의견 이 엇갈리고 있으니 나라의 운명이 일각을 다투고 있었다. 남해의 최남 단 가덕도 응봉 봉수대에서 일본군이 침입하고 있다는 긴급 상황보고가 전달된다. 왜선의 수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대략 90여척의 배가 가덕도 남쪽에서 부 산포를 향하여 항해 중인데 그 뒤를 계속 따라오고 있습니다 고려 후반기부터 일본 왜구들은 한반도 남해안에 자주 출몰하여 약탈 을 했기에 조선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였지만, 일본에서는 큰 목표를 정하고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세밀하고 조직적인 조선 침략은 무척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4월 13일 오전 8시경에 일본수군은 대마도의 이즈하라( 嚴 原 ) 항을 출발하였는데 고니시 유키나가의 선봉 제1진은 18,700명을 태운 7 백여 척의 함대가 부산포로 입항하고 있었다. 조선 은 당파싸움으로 얼룩진 상황에서 이러한 침입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 다. 먼저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의 준비사항은 치밀하였는데 그 동기를 알아보자.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1년 전인 1591년 8월에 일본 다이묘 ( 大 名 ) 들은 교토에 소집되어 조선 침략을 결의하고 10월에 규슈 나고 8 이순신과 노량해전
나( 名 護 屋 ) 에 성( 城 ) 을 구축하였다. 바로 이곳이 임진왜란을 총 지휘 할 대본영이다. 그리고 조선을 침략할 부대편성은 제1진에 9개군 158,700명으로 편 성하였는데 이 부대는 조선 출정부대이고 제2진은 8개군 102,960명으 로 편성하여 대본영에서 대기하는 병력이었다. 또한 수군 4개군 9,200 명은 해상작전과 엄호부대이고 대본영 직속부대 5개군 29,000명과 교 토 수비대 3만 명을 편성했는데 모두 합치면 33 만이란 대군이었다. 일본군은 1592년 3월에 나고야 대본영을 출발하여 중간지점인 쓰시 마로 가서 1개월 정도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본격적으로 조선을 침략 하게 하였다. 일본군은 쓰시마를 출발하여 아무런 저항 없이 4월 13일 에 부산을 도착하여 본격적인 침략행위를 자행하기 시작했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침략과 부산진성의 함락 등에 관한 상황을 상세하게 기록하고 있는데 내용은 이러하다. 왜구( 倭 寇 ) 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 賊 酋 ) 평수길 ( 平 秀 吉 ) 이 관백( 關 白 )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 공( 朝 貢 ) 을 허락하지 않는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 玄 蘇 ) 등 을 파견하여 요동( 遼 東 ) 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나라 에서는 대의( 大 義 ) 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 동원하여 현소, 평행장 ( 平 行 長 ), 평청정 ( 平 淸 正 ), 평의지 ( 平 義 智 ) 등을 장 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 왔다. 적선( 賊 船 ) 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 정발( 鄭 撥 ) 은 마침 절영도 ( 絶 影 島 )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 鎭 ) 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 撥 ) 은 난병( 亂 兵 )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 ( 東 萊 府 ) 가 함락되고 부사 송상현 ( 宋 象 賢 ) 이 죽었으 며, 그의 첩( 妾 ) 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 金 海 ), 밀양( 密 陽 ) 등 부( 府 ) 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 李 珏 ) 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 郡 縣 ) 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부사 박진( 朴 晉 ) 과 우병사 김성일 ( 金 誠 一 ) 이 적을 진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9
( 晉 州 ) 에서 맞아 싸웠다. 성일이 아장( 牙 將 ) 이종인 ( 李 宗 仁 ) 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 물러났다 일본에서는 조선 침략을 위해 세밀한 계획을 사전에 수립하고 체계적 으로 추진했던 것이다. 부산진의 당시 병력은 겨우 1천명으로 일본군에 대항하기엔 역부족하였다. 4월 14일에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함락시키 고 인근 서평포와 다대포성을 공격하여 점령해 버렸다. 이렇게 조선의 첫 관문인 부산진을 장악한 일본군은 15일 오전 6시경 에 동래성을 침범하였다. 부사 송상현, 조방장 홍윤관, 양산군수 조영 규, 울산군수 이언성 등이 방어 태세를 갖추고 대항하기에 이르렀는데 일본군의 사기는 하늘을 찌를 듯 그 기세가 왕성하였다. 일본군은 남문 밖에서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내 놓아라( 戰 則 戰 矣 不 戰 則 假 道 ) 라는 팻말을 높이 세우고 조선군에게 항복을 요구하는 통 첩을 보냈다. 이에 부사 송상현은 대응하기를 싸워서 죽기는 쉬워도 길을 내 주기는 어렵다( 戰 死 易 假 道 難 ) 라는 글을 쓴 후 깃발을 성 밖 으로 던지면서 단호하게 일본군과 싸울 의사를 표명했다. 그래서 전투가 시작되었다. 동래성에 주둔하고 있던 조선군은 물론 심지어 부녀자들까지 기왓장을 뜯어내어 던지는 등 적극적으로 항전했 으나 결국은 15 일에 성은 함락되었고 부사 송상현은 순절하였다. 동래 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그 기세로 양산, 밀양으로 진출하였다. 때를 같이하여 4월 18일에 일본군 제2진 22,800명이 부산으로 상륙하 였고 제3진 11,000 명이 낙동강 하구 죽도에 상륙하였다. 제1진이 중로 로 북상하였고 제2 군은 동로로, 제3진은 서로로 각각 한양을 목표로 북 상하였다. 이러한 상황이 선조에게 보고되자 이일( 李 鎰 ) 을 순변사( 巡 邊 使 ) 로 삼 아 정예병을 이끌고 상주( 尙 州 ) 에 내려가 적을 막도록 하였으나 역부족 으로 싸움에 패하자 이일은 단기( 單 騎 ) 로 도망쳤다. 선조는 즉시 신입 ( 申 砬 ) 을 삼도순변사( 三 道 巡 邊 使 ) 에 제수하고 보검( 寶 劍 ) 한 자루를 하 사하면서 이르기를 10 이순신과 노량해전 패전한 이일이하 그 누구든지 명을 듣지 않는 자 는 경이 모두 처단하라. 중외( 中 外 ) 의 정병을 모두 동원하고 자문감( 紫
門 監 ) 의 군기( 軍 器 ) 를 있는 대로 사용하라 는 전교를 내렸다. 신입은 충주( 忠 州 ) 에 이르러 적과 싸웠으나 역시 패전하고 말았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17 일에 패배한 기록을 이렇게 적고 있다. 신입이 충주에 이르렀을 때 제장( 諸 將 ) 들은 모두 새재( 鳥 嶺 ) 의 험준함을 이용하여 적의 진격을 막자고 하였으나 입( 砬 ) 은 따르지 않고 들판에서 싸우 려고 하였다. 27 일 단월역 ( 丹 月 驛 ) 앞에 진을 쳤는데 군졸 가운데 적이 벌 써 충주로 들어왔다 고 하는 자가 있자 신입은 군사들이 놀랄까 염려하여 즉시 그 군졸을 목 베어서 엄한 군령을 보였다. 적이 복병( 伏 兵 ) 을 설치하여 아군의 후방을 포위하였으므로 아군이 드디어 대패하였다. 입은 포위를 뚫고 달천 월탄가에 이르러 부하를 불러서는 전하를 뵈올 면목이 없다 고 하고 강에 빠져 죽었다. 그의 종사관 김여물과 박안민도 함께 빠져 죽었다 라 하 였다. 끝내 신입이 지휘하는 조선군의 전세는 기울었고 신입은 최후의 결전 을 결심하고 전 병력에 공격 명령을 내렸으나 패전의 마지막 순간이 눈 앞에 이르자 남한강에 투신하여 자결하였다. 종사관 김여물과 박안민도 신입의 자결과 동시 적진으로 돌격하다 신입에 따라 남한강에 빠져 죽 었으며, 충주목사 이종장도 마지막까지 용전분투하다 전사하였다. 결국 한강 이남지역에서 마지막 기대를 걸었던 신입군의 항전도 패전으로 끝 났다. 충주에서 합류한 일본군 제1진과 2진은 용기백배하여 한양으로 계속 진군하였다. 4월 29 일에 신입이 패전했다는 보고를 선조는 받고 파천( 播 遷 ) 할 것 을 결심했다. 광해군을 세자로 삼았고 동시에 왕자 임해군과 순화군을 함경도와 강원도에 각각 파견하여 근왕병을 모집토록 지시하였으며 30 일 새벽에 선조는 세자 광해군과 함께 1백여 명의 수행원을 대동하고 돈의문을 나서 파천 길에 올랐다. 선조가 도성을 빠져 나가자 관노와 일부 백성들은 방화와 약탈을 하는 등 난동을 일으켜 도성은 수라장이 되어 버렸다. 도성을 버리고 파천하는 선조와 일행들의 모습은 처량하고 슬프기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11
하고 매우 다급했다. 선조실록 1592년 4월 30일에 나타나는 선조와 대신들의 파천 광경은 이러하다. 저녁에 임진강 나루에 닿아 배에 올랐다. 상이 시신( 侍 臣 ) 들을 보고 엎드 려 통곡하니 좌우가 눈물을 흘리면서 감히 쳐다보지 못하였다. 밤은 칠흙같 이 어두운데 한 개의 등촉( 燈 燭 ) 도 없었다. 밤이 깊은 후에 겨우 동파( 東 坡 ) 까지 닿았다. 상이 배를 가라앉히고 나루를 끊고 가까운 곳의 인가( 人 家 ) 도 철거시키도록 명했다. 이는 적병이 그것을 뗏목으로 이용할 것을 염려한 때 문이었다. 백관들은 굶주리고 지쳐 촌가( 村 家 ) 에 흩어져 잤는데 강을 건너지 못한 사람이 반이 넘었다. 5월 2 일 정오경 일본군이 한강 남쪽에 이르렀다. 이 일본군은 가토오 의 2 진으로 충주에서 신입군은 격파하고 죽산, 용인을 거쳐 북상한 것 이다. 5월 3일에는 가토오군은 남대문 쪽으로 입성하였고 고니시군은 동대문 쪽으로 입성하였으며 제3진과 제4 진도 무혈입성 하였다. 일본군 은 부산에 상륙하여 20 일 만에 도성을 함락시킨 것이다. 서울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다시 재정비하여 북진계획을 세웠다. 고니 시는 평안도 지역, 가토오는 함경도, 구로다는 황해도로 계속 진격하도 록 편성하고 나머지는 후방지역을 분담하도록 하였다. 북진한 일본군은 6월 15 일에 평양성에 입성하였다. 한편 조선 조정은 5월 7일에 개성을 떠나 평양에 이른 선조는 명 ( 明 )에 원병문제를 의논하였는데 당시 병조판서 이항복과 대사헌 이덕 형 등은 명에 원병을 요청할 것을 주장하였고 좌의정 윤두수는 반대하 였으나 이러한 상황에서는 조선의 힘으로는 역부족하다는 것을 알았다. 결국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29일에 왕자 신성군과 정원군을 영 변으로 보내고 유몽정을 요동으로 보내어 명나라에 원병을 청하였다. 선조는 6월 14일에 영변에서 왕세자 광해군을 강계지역으로 보내어 분조를 하고 박천, 가산, 곽산, 선천, 용천을 거쳐 22일에 국경지대인 의주에 도착하여 의주목사의 관아를 행궁으로 삼았다. 12 이순신과 노량해전
(2) 명나라 지원군과 일본과의 협상 궁지에 몰리던 조선이 수군의 한산해전과 진주성대첩 등에서 대승을 거두고 곳곳에서 활동하고 있는 의병들의 활약으로 일본군의 기세는 차 츰 꺾이니 평양성에 주둔한 일본군은 안전할 수가 없었다. 명나라 군대 가 최초로 조선에 지원한 것은 1592년 5월 15일인데 이때 명군 지휘 관은 조승훈( 祖 承 訓 ) 으로 휘하에 5천여 명의 군사를 거느리고 조선으 로 넘어와 의주에 파천되어 있는 조선 임시 조정을 경비하는 임무를 맡 고 있던 중 일본군이 서울로 퇴군한다기에 공격을 하였으나 대패하고 말았다. 명나라 조승훈에 대한 징비록 기록이다. 조승훈은 순안에서 삼경에 군사를 출발시켜 평양성을 공격했다. 마침 큰 비가 와서 성 위에서 지키는 군사도 없었다. 명나라 군사는 칠성문을 통해 성 안으로 들어갔는데 길이 좁고 꼬불꼬불한 골목이어서 말을 달릴 수가 없 었다. 왜적들은 이러한 지형을 이용하여 어지럽게 조총을 쏘았다. 그리하여 선봉 장 사유격은 총알을 맞고 그 자리에 쓰러져 죽고 군사와 말도 많이 죽었다. 조승훈은 드디어 군사를 후퇴시켰다. 적은 바로 추격하지는 않았으나 뒤에 있는 군사 가운데 진흙 구덩이에 빠져서 나오지 못한 사람들은 모두 적에게 붙잡혀 죽고 말았다 ( 自 順 安 三 更 發 軍 進 攻 平 壤 適 大 雨 城 上 無 賊 守 兵 天 兵 從 七 星 門 入 城 內 路 狹 多 委 巷 馬 足 不 可 展 賊 依 險 阨 亂 發 鳥 銃 史 遊 擊 中 丸 卽 斃 軍 馬 多 死 祖 遂 退 軍 賊 不 急 追 後 軍 陷 泥 潦 中 不 能 自 拔 者 悉 爲 賊 所 害 ) 제1 차 평양성전투에서 명나라군은 대패하고 말았다. 그리고 1592년 8월 1일에 조선군 2만여 명이 단독으로 평양성 수복작전을 펼쳤지만 역시 패배하고 말았다. 그러자 1592년 9 월에 명나라 유격장 심유경( 沈 惟 敬 ) 이 조선으로 건 너와 일본 고니시와 협상을 하였는데 그 협상내용을 조선 조정에 통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13
했다. 징비록 기록이다. 내 돌아가서 우리 황제( 명의 신종) 에게 보고하면 마땅히 처분이 있을 것이 니 50일을 기한으로 하여 일본군은 평양성 북쪽 10리 밖으로 나와 재물을 약탈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조선 군사도 그 도록 할 것이다 10리 안으로 들어가서 싸우지 말 ( 吾 歸 報 聖 皇 當 有 處 分 以 五 十 日 爲 期 倭 衆 無 得 出 平 壤 北 十 里 外 搶 掠 朝 鮮 人 母 入 十 里 與 倭 鬪 ) 이것은 명나라군과 일본군과의 휴전 협정 내용이다. 50일이라고 기한 을 정한 것은 심유경이 명나라 황제를 뵙고 오는 기간이다. 그러나 1592년 12월 25일에 명나라 사절단이 명나라에서 가지고 온 것은 예 상과는 달리 제독 이여송이 거느리고 온 명군 4 만 명이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 李 如 松 ) 이 4만3천여 명의 명군을 거느리고 1592 년 12월 25일에 압록강을 건너와 1593년 1월 6일에 평양성 공격에 돌입했다. 이때 조승훈 휘하 잔여 병력과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 우방 어사 김응서, 좌방어사 정희현의 8 천여 명, 서산대사 휴정 승병, 사명대 사 유정 승병 2 천여 명도 합류했다. 명군 이여송은 1월 8일 평양성을 탈환하고 그 기세로 서울로 진격하 는 한편 독성산성( 禿 城 山 城 : 경기도 수원의 독산성) 에 있던 권율은 서 울 수복작전에 합류하려고 2,300여 명의 관군과 승병을 이끌고 한강을 건너 행주산성( 幸 州 山 城 : 경기도 고양군) 에 진군해서 산성에 이중으로 목책을 설치하고 각종 포를 점검하는 동시 화살과 돌을 모으면서 전투 태세를 전비하였다. 1593년 1월 22 일에 이순신은 여수에서 우부승지의 서장을 받았다. 명나라 대장 이제독 ( 李 提 督 ) 이 왜적을 소탕할 계획으로 수십만의 정예군 사를 거느리고 평양, 황해도와 서울을 차례로 회복할 것이다. 대병이 진격하 면서 마구 무찌르면 많은 왜적들이 도망쳐 돌아갈 것이므로 적이 돌아갈 길 을 끊고 섬멸하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니 그대는 수군을 거느리고 기회를 따라 14 이순신과 노량해전
길목을 잡아 누르고 힘을 합쳐 적을 무찔러 죽이도록 하라 는 명령서이다. 제2차로 평양성을 조명연합군이 공격을 했는데 일본군은 대패하여 성문을 빠져나가 필사적으로 도주했다. 정월의 매서운 북풍이 몰아치는 속에서 떨리는 발길을 남쪽으로 재촉하는데 조명연합군의 추격전으로 5 백여 명의 일본군은 참살되었다. 그때 상황을 기록한 징비록을 보자 왜적의 장수 평행장 ( 平 行 長 ), 평의지 ( 平 義 智 ), 승려 현소( 玄 蘇 ), 평조신 ( 平 調 信 ) 등은 남은 군사를 거느리고 밤을 새워 도망쳤다. 그들은 기운이 빠지 고 발은 부르터 절룩거리면서 걸어갔으며 혹은 밭고랑을 기어가기도 하고 입 을 가리키며 밥을 빌어먹기도 하였으나 우리나라에선 한 사람도 나와서 치는 일이 없었고 명나라 군사도 또한 이를 추격하지 않았으며, 홀로 이시언 ( 李 時 言 )이 그 뒤를 밟았으나 감히 가까이 다가서지 못하고 다만 굶주리고 병들어 뒤떨어진 놈들 60 여 명의 목을 베었을 뿐이다 ( 賊 將 平 行 長 平 義 智 玄 蘇 平 調 信 等 率 餘 衆 連 夜 遁 還 氣 乏 足 繭 跛 躄 而 行 或 匍 匐 田 間 指 口 乞 食 我 國 無 一 人 出 擊 天 兵 又 不 追 之 獨 李 時 言 尾 其 後 不 敢 逼 但 斬 飢 病 落 後 者 六 十 餘 級 ) 일본 고니시가 서울로 철수하자 이북 지역에 주둔했던 황해도 구로다 나가마사, 강원도 모리 요시나리 등도 서울로 철수 하였다. 곧 일본군 은 재편성하여 선봉대를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맡게 되는데 제1대는 3 천명으로 다치바나 무네토라( 立 花 統 虎 ), 제2대는 8천명으로 고바아카 와 다케가게, 제3대는 5 천명으로 고바야카와 히데카네, 제4대는 4천명 으로 깃카와 하로이에로 전체가 2 만명에 이르렀다. 그리고 선봉대에 후원할 제5대는 5 천명으로 구로다 나가나사, 제6대 는 5 천명으로 이시다 미쓰나리, 제7대는 3 천명으로 가토 미츠야스, 제 8대는 8천명으로 우키다 히데이에로서 2만 1천명에 달하는 대군이었 다. 1월 27일에 조명연합군 2만여 명과 일본군 4만 1천여 명은 좁은 협 곡인 벽제( 碧 蹄 : 고양군) 전투를 시작하였는데 일본군의 결사적 공격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15
로 전세가 불리한 조명연합군이 패하여 파주로 퇴각하였다가 1월 29일 에 개성으로 철군하였다. 전투상황이 계획과는 달리 전개되자 권율은 행주산성에서 일본군의 공격을 단독으로 막아야 하는 처지에 놓이게 되 었다. 일본군의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가 지휘하는 7개부대의 병력은 3 만여 명이었다. 1593년 2월 12일 여명이 밝아오면서 일본군은 행주산 성에 모습을 드러냈다. 제1대부터 공격이 시작되어 어둠이 밀려오는 저 녁 6시까지 화력에서 백병전에 이르기까지 서로 뒤엉켜 피를 튀기는 처참한 접근 전이었지만 권율은 한 치의 땅도 허락하지 않기 위해 진격 명령을 내려 행주산성을 사수하였다. 마침 조선 전선 40여척이 한강을 타고 들어오니 일본군은 총사령부가 있는 서울을 비워둘 수가 없기 때 문에 행주산성 전투에서 철수하기 시작했다. 행주산성 전투에 대한 징비록 기록이다. 마침내 날이 저물자 왜적들은 돌아서서 서울로 들어갔다. 권율은 군사들 을 시켜 왜적의 시체들을 가져다가 사지를 찢어 나뭇가지에 걸어 놓아 그 맺 혔던 한을 풀었다 ( 會 日 暮 賊 還 入 京 城 慄 令 軍 士 取 賊 屍 磔 裂 肢 體 散 掛 林 木 以 泄 其 僨 ) 이 얼마나 적개심이 폭발한 장면의 기록인가? 이 전투에는 부녀자까 지 동원되어 가세하였다. 부녀자들은 긴 치마를 잘라서 짧게 입고 돌멩 이를 날랐다. 이 돌멩이들은 화살과 탄환이 떨어진 조선군에게는 크나 큰 무기가 되었던 것이다. 패배한 일본군은 서울로 압박해 올 조명연합 군과 대치하기 위해 심각하게 고심해야 할 상황에 처하였다. 1593년 3월초 일본 총사령관 우키다 히데이에는 여러 장군들을 모 아놓고 회의를 시작했다. 회의 본론은 현재 일본군들은 서울에서 군량 미를 구해 잡탕죽을 끊여 먹고 있으며 4월 11일까지는 견딜 수 있지만 그 이후는 보장할 수 없고 부산포의 군량미를 서울까지 보급하는데 10 일 이상이 걸린다는 등의 고충을 적은 문서에 대 서명하여 일본 도요토미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16 이순신과 노량해전 17명의 일본 장군이 연
도요토미는 이 문서를 보고 냉정하게 판단하여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 을 경상도 남부지역으로 철수하도록 허가했다. 서울에 주둔한 장수들은 도요토미의 승인을 받아 두고 서울 철수를 극비로 한 채 조명연합군과 협상을 벌이기로 했다. 일본군은 서울을 내어 주는 대신 안전 철수를 보장 받는 것이 목적이었다. 명나라 역시 속셈을 드러내는데 조선을 구하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일본이 명나라를 침입하는 것을 저지하는데 목적이 있었기 때문 에 오히려 협상을 반갑게 받아들일 계획이었다. 그러나 조선군은 아무 런 이유 없이 조선 땅을 침입한 일본군을 마지막 한명까지 철저하게 죽 여 없애야 한다는 의지를 보였다. 1593년 3월 16 일 선조실록에 선조가 유성룡에게 말하길 무릇 강 화를 말하는 자는 바로 간인( 姦 人 ) 의 행위니 반드시 먼저 베어 효수하 고 나서 계문( 啓 聞 ) 하라 는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이미 병권을 잃어 버린 조선군이라 무기력함을 한탄할 수밖에 없었다. 1593년 4월 8 일 강화회담이 타결되었다. 명의 강화사절단은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에게 통보하고 또 일본에 가서 도요토미의 요구사항을 받 아 명의 조정에 전해야 하는 임무를 띄고 있는데 협상 조건으로 명군과 일본군은 각자 자기 땅으로 철군하고 일본군에 포로가 되어 있는 조선 의 두 왕자( 임해군 순화군) 를 석방하기로 했다. 그래서 4월 18일부터 19 일 사이 일본군은 서울 철수가 시작되었다. 그리고 4월20 일에 유성룡은 명의 군사와 함께 서울에 입성했다. 일 이야 어떻게 되었건 서울 수복인 것은 틀림이 없다. 일본군이 주둔했던 서울은 그야말로 지옥을 연상케 했다. 백성들의 비참함은 극에 달해 있었다. 일본군이 서울에서 철수하기 전 에 미래의 근심거리를 자른다는 명분으로 조선의 남자라면 민간인을 막 론하고 학살했던 것이다. 징비록에 그 때 상황을 잘 기록하고 있다. 나도 명나라 군사를 따라 도성으로 들어 왔는데 성 안에 남아 있는 백성 들을 보니 백 명에 한 명만 살아남았을 정도였다. 그 살아 있는 사람도 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17
굶주리고 야위고 병들고 피곤하여 얼굴빛이 귀신과 같았다. 이 때는 날씨가 몹시 무더웠는데 죽은 사람과 죽은 말이 곳곳에 드러나 있어서 썩는 냄새가 성 안에 가득 차서 길에 다니는 사람들은 코를 막고서야 지나갈 형편이었 다 서울에 주둔한 일본군은 모두 물러나고 조선이 입성하였으나 앞에서 이루어진 협상에 문제점이 있었다. 결국 급조된 사절단의 파견은 일대 혼란을 초래했고 급기야 애당초 강화협상이 없었던 것으로 결론이 나면 서 다시 전쟁으로 돌입하게 되는데 정유재란이다. (3) 의병들의 활약 의병은 1592년 4월 하순 일본군이 상주를 점령한 직후부터 유생 곽 재우가 의령에서 기병한 것을 효시로 전국에서 잇따라 일어났다. 임진 왜란 중 일본군은 조선의 중요한 거점만을 연계하는 점선 점령을 하였 을 뿐이지 결코 전면 점령을 한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각 지역에서 일 어난 의병운동은 승패를 떠나서 전쟁사적으로 큰 의의를 갖는다고 볼 수 있다. 의병들은 일본군의 세력이 미쳐 닿지 않은 경상도 서남부지역과 동부 지역, 전라도 일원에서 두드러진 활약을 하였고 충청, 황해, 평안, 함경 도 지역에서도 침략자 일본군에 대항하여 항전하는데 중추적 역할을 했 다. 조정에서는 18 이순신과 노량해전 6 월 하순에야 의병봉기를 알고 의병장들에게 초토사( 招 討 使 ), 토적사( 討 賊 使 ), 창의사( 倡 義 使 ) 등의 직함과 상응하는 관직을 주어 격려했으나 실질적으로 의병을 지원할 조치는 취하지 못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의병들은 오직 충군애국의 의지로 전세를 바꾸는데 혁 혁한 공을 세웠다. 특히 곽재우는 가산을 정리해 의병을 일으켰는데 붉은 비단으로 전포 를 만들어 입고는 천강홍의장군( 天 降 紅 衣 將 軍 ) 이라 하였다. 전 지역 의 병들의 활약상을 일일이 설명하기에는 지면의 부족으로 몇 군데 의병활 동만 대표적으로 소개하고자 한다.
5월 24일 일본군이 창원에서 함안을 거쳐 정암진 대안에 도착하였 다. 일본군은 도하지점을 선정하고 나무를 꽂아 이동로를 표시하였는데 곽재우는 야음을 타서 표지목을 늪지대로 옮겨 놓았다. 이것을 모르는 일본군은 이튿날 표지목을 따라 이동하다가 늪지대에 빠지자 곽재우군 은 일본군을 기습 공격해서 궤멸시켰다. 곽재우는 여러 전투에서 혼란작전으로 총 공격을 하였고 횃불을 켜고 북을 치며 함성을 질러 심리적인 위협을 가했을 뿐 아니라 교란작전으 로 일본군들을 무찔렀다. 고령에서는 전 사헌부 장령이었던 정인홍( 鄭 仁 弘 ), 합천에서는 전 공 조좌랑 김면( 金 沔 ) 이 의병을 일으켰다. 고령 의병장 정인홍은 무계와 성주를 탈환하였고 김면은 일본군의 거창 침입을 좌절시키고 지례를 확 보함으로서 일본군의 전라도 진출을 차단하였다. 호남지역에서도 의병장 고경명( 高 敬 命 ) 은 5월 22일에 선조의 파천 소식을 듣고 비분강개하여 5월 26 일에 김천일( 金 千 鎰 ) 과 더불어 의병 을 일으키기로 합의하고 5월 29 일에 담양에서 유팽노, 안영, 양대박 등 과 함께 기병하여 6월 11 일에 진주로 이동하였다. 6월 22일에는 7천명의 병력으로 여산에 도착한 고경명은 일본군이 금산, 무주지역으로 침입함에 따라 북상계획을 바꾸어 방어사 곽영군과 합심하여 전라도로 침입하는 일본군을 먼저 섬멸하기로 작전을 바꾸었 다. 의병장 고경명과 방어사 곽영은 금산성에 도착하여 공격을 가하고 성 밖 가옥에 불을 질러 일본군의 시야를 가린 다음 화공작전을 써 성안으 로 진입을 하려고 했으나 실패했다. 이 금산성 전투에서 고경명은 전사 를 했다. 고경명의 순절 소식을 들은 전 보은현감 조헌( 趙 憲 ) 은 8월 중순에 금산성에 주둔한 일본군을 공격하기 위해 먼저 8월 2일에 군사 1,600 명으로 영규가 이끄는 승병 1 천여 명, 충청도 방어사 이옥의 관군 500 여명이 청주성을 공격하여 탈환하였다. 조헌은 8월 18 일 아침에 단독으로 금산성 공격을 단행하였다. 조헌 군은 선제공격을 감행하였으나 결국 포위를 당하여 조헌과 승병장 영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19
를 비롯한 7 백여 명이 연곤평야 벌판에서 전사하였다. 9월 중순에 일본군이 또다시 진주성을 공략한다는 대대적인 계획에 진주목사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 곤양군수 이광악 등이 3,800여 명의 병력으로 결전태세를 갖추었고 성 외곽에서는 의령 의병장 곽재우가 급 파한 심대승군, 고성의병장 최강 및 이달군, 전라 좌의병장 임계영과 우의병장 최경회 등이 의병을 이끌고 지원태세를 하고 있었다. 10월 3일에 일본군 1만여 명이 진주성 외곽 마현에 도착하여 8일부 터 진주성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일본군은 사다리와 나뭇단을 밟고 성벽을 기어올랐으며 바퀴가 달린 3층 누각을 만들어 그 위에서 조총 사격을 가했으나 목사 김시민의 지휘아래 총통과 활로 방어하고 성벽을 오르는 적에게 돌을 던지거나 뜨거운 물을 부어 물리쳤다. 다음날 일본군은 배후에서 위협을 하고 있는 의병지원부대를 공격하 였으나 오히려 의병부대의 적극적인 공세로 피해만 컸다. 진주성 전투 가 아군의 승리로 끝나자 경상우도 의병들은 성주, 개령지역의 일본군 을 격멸하는데 주력하였고 김면군은 전라 좌우병의 지원을 받아 김천으 로 북진하여 개령의 일본군 본영을 위협하였다. 또한 정인홍, 임계영 의병부대와 운봉, 구례의 전라도 관군은 성주성 을 수복하였다. 이와 같이 후방지역에는 의병부대와 근왕의 관군에 의 해 전세는 역전되기 시작했다. 영남지방의 의병운동 임진왜란 의병운동의 성격을 충의군( 忠 義 軍 ) 으로 보는데 의병운동의 주도론은 사족주도론( 士 族 主 導 論 ) 에 입각하고 있다. 특히 의병 상층부 는 학연( 學 緣 ) 으로 형성된 것이 보편적으로 경상우도의 의병운동이 성 공적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남명학파( 南 冥 學 派 ) 의 힘이 주도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즉 남명사상 중 의리와 대일 강경론이 문인들에게 영 향을 미쳐 의병운동에 적극적으로 가담하게 하였다. 그리고 의병조직이 가능했던 것은 사족( 士 族 ) 들의 향촌 지배로서 유 향소( 留 鄕 所 ), 향교( 鄕 校 ), 서원( 書 院 ) 을 통한 사족간의 유대와 향약 20 이순신과 노량해전
( 鄕 約 ), 동약( 洞 約 ), 촌계( 村 契 ) 를 통한 민( 民 ) 과의 유대라는 입장에서 의병의 모병( 募 兵 ) 이 가능했다. 경상우도의 경우 의병장들이 관직을 제수 받아 활동한 1592년 10월 까지를 초기 의병이라 하는데 전형적인 의병으로 보고 1592년 11월부터 해체까지를 후기 의병이라 하는데 준군관( 準 軍 官 ) 으로 구분하고 있다. 주요 의병장의 관직 제수 시기 이 름 기병처 창의 시기와 직역 창의 후의 제수 관직( 부임 시기) 郭 再 祐 의령 1592년 4 월 幼 學 金 沔 고령 1592년 5 월 前 佐 郞 鄭 仁 弘 합천 1592년 5 월 前 佐 郞 權 應 銖 영천 1592년 5 월 前 訓 練 奉 事 幽 谷 察 訪 ( 임진6), 刑 曹 正 郞 ( 임진7), 折 衝 將 軍 兼 助 防 將 ( 임진10 부임), 星 州 牧 使 兼 助 防 將 ( 계사12), 晋 州 牧 使 ( 을미), 防 禦 使 ( 정유) 陜 川 郡 守 ( 임진6), 掌 樂 院 正 ( 임진10), 慶 尙 右 道 兵 使 ( 임진11 부임), 義 兵 都 大 將 ( 계사1) 晋 州 牧 使 ( 임진6), 濟 用 監 正 ( 임진7), 星 州 假 牧 ( 임진8), 義 兵 大 將 ( 계사9), 星 州 牧 使 ( 을묘9), 鄕 兵 將 ( 정유) 慶 尙 道 兵 馬 使 兼 防 禦 使 ( 임진10 부 임), 密 陽 府 使 ( 병신) 高 敬 命 광주 1592년 6 월 前 府 使 工 曹 參 議 兼 招 討 使 ( 임진8 부임) 金 千 鎰 나주 1592년 6 월 前 府 使 趙 憲 옥천 1592년 6 월 前 提 督 官 鄭 文 孚 종성 1592년 7 월 前 提 督 官 李 延 馣 연안 1592년 8 월 吏 曹 參 議 掌 禮 院 判 決 事 兼 倡 義 使 ( 임진8 임), 議 政 府 左 贊 成 ( 계사 추증) 부 奉 常 寺 僉 正 ( 임진8 순절), 嘉 善 大 夫 吏 曹 參 判 兼 同 知 經 筵 春 秋 館 義 禁 府 事 ( 임진12 추증) 北 道 兵 馬 評 事 ( 임진7 부임), 吉 州 府 使 ( 계사1) 海 西 招 討 使 ( 임진8 부임), 使 ( 임진9) 海 西 巡 察 * 출처 : 임진왜란과 경상우도의 의병운동( 김강식 저. 혜안 2001) 의 저자가 선 조실록과 의병장 문집을 통하여 1592 년~1598 년 사이 제수 받은 관직 을 정리한 내용임. 경상우도 의병들은 경상좌도를 점령한 일본군의 호남 진출을 지연시 키고 방어시켰다는 점에서 큰 의미를 부여할 수 있으며 이로 인하여 육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21
상운송에 발달하지 못한 일본군은 원거리 해로운송을 선택하였으나 이 순신의 차단과 각 해전 승리로 운송이 불가했다. 의병장 활동이 두드러지게 나타난 김면과 곽재우의 기록을 보자. 김 면( 金 沔 ) 의 연려실기술( 燃 藜 室 記 述 ) 권17. 총론의병( 叢 論 義 兵 ) 과 김면 조( 金 沔 條 ) 에 이르기를, 경상우도 의병장 김면이 1592 년 7 월 우척현 전투 때, 지례의 일본군이 우 척현을 넘으려 하자 거창을 보전하지 못하면 12여 고을을 보전키 어렵기에 장수를 정해 고령을 지키게 하고 자기는 거창의 군사를 데리고 적을 방어하 겠다고 하였다 라 하였고 병력을 나누어 우현( 牛 峴 ), 마령( 馬 嶺 ) 을 지키게 하고 스스로 군사를 이끌 고 고령에 나가 진을 쳤다. 적이 강을 따라 내려온다는 것을 듣고 맞아 공격 하였다. 드디어 배 두 척을 잡고 적80 여 명을 베었는데 적의 선박에 실려 있 는 것은 모두 내탕고 ( 內 帑 庫 ) 의 보물 이었다 김면은 경상우도는 전라도로 진출하는데 중요한 요목으로 보았기 때 문이고 적이 약탈하여 도주하려는 적선을 포획 참수하고 물건을 빼앗았 다. 정인홍( 鄭 仁 弘 ) 도 영남이 없으면 호남도 없다는 점을 난중잡록 권2 임진8월 4 일 기록에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의병장 곽재우( 郭 再 祐 ) 는 낙동강에 목장( 木 杖 ) 을 설치하여 수 로를 막은 사실이 징비록 권4. 경상도 응행사의계( 應 行 事 宜 啓 ) 에 나타 나고 있다. 임진 계사년에 적병이 배로써 군량과 군기를 운반하면서 거리낌 없이 왕 래하였으나 사람들은 강을 따라 장애물을 설치할 줄을 알지 못하였습니다. 오직 곽재우 만이 강중( 江 中 ) 마수원 ( 馬 首 院 ) 등에 목장( 木 杖 ) 을 설치하여 적 의 배가 흘러내려 올 때에 몽둥이에 막히면 이내 언덕 위에 숨어 있던 복병 이 급히 쳐서 적의 배 40 여척을 잡았습니다 22 이순신과 노량해전
의병들은 그 지역의 지형을 잘 알기 때문에 일본군이 이용하려는 진 로를 차단하고 방어했을 뿐 아니라 관군들보다 더욱 큰 활동을 했다고 본다. 일본군이 부산에 상륙하여 호남으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은 정상로 와 우회로였는데 정상로는 창원 함안 정암진 남강 의령 삼가 거창 안음 육십령을 넘는 길이고 두 번째는 창원 진주 단 성 산음 함양 팔량치를 넘거나 함양 거창 안음 육십령을 넘어 야 하였고 세 번째는 진주 하동 섬진강 광양 구례로 가는 길이 었다. 우회로는 영산 창녕 낙동강 초계 합천 거창으로 가는 길이 고, 또는 창녕 적포 낙동강 합천 거창으로 나가는 길과 무계 고령 성주 거창으로, 지례 우척현 거창에 이르는 길과 지례 부항현 대덕현을 넘어가는 길이다. 영 호남 경계에는 덕유산과 지리산으로 뻗은 소백산맥의 준령이 있 었기 때문에 넘나들 수 있는 목은 섬진강과 팔량치 그리고 육십령과 부 항현 뿐이다. 그리고 각 목에 도달할 수 있는 외곽 요충지는 의령의 정 암진과 초계의 적포, 구령의 무계, 성주 지례의 우척현인데 길목마다 의병들이 지키고 있기 때문에 일본군은 진출할 수 없었다. 정상로인 의령에는 곽재우, 정인홍, 김면 등의 의병들이 있었기에 일 본군은 우회로를 이용하여 호남으로 진출하려고 했던 것이다. 호남지방의 의병운동 호남지방 의병은 활동대상에 따라 세 가지로 구분하는데 첫째로 한성 수복 혹은 근왕( 勤 王 ) 을 목표로 북상 진군하여 활동한 제1차 호남의병 김천일( 金 千 鎰 ) 주도하의 나주의병과 제2차 호남의병이라 지칭하는 고 경명( 高 敬 命 ) 중심의 전라도 연합의병이고, 둘째로 경상도지역에 진출 하여 의병활동한 임계영( 任 啓 英 ), 최경회( 崔 慶 會 ), 변사정( 邊 士 貞 ), 김 덕령( 金 德 齡 ) 등이 주도한 의병과 김천일의 제2차 진주성전투에 참여 한 의병 등이다. 셋째로 소규모의병으로 전라도내에서 활동한 채홍국 ( 蔡 弘 國 )을 중심으로 한 흥덕의병과 각 읍의 사림을 주축으로 향리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23
방위한 의병으로 나눌 수 있다. 의병운동이 일어나게 된 동기는 1592년 5 월초 전라관찰사 이광( 李 洸 ) 이 8 천여 명의 근왕군( 勤 王 軍 ) 을 소집하여 적군 토벌을 위해 북상 하던 중 공주에 이르렀을 때 임금이 서천( 西 遷 ) 했다는 소식과 한성이 실함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이광군은 퇴군하였다. 이에 전라도민은 충격을 받아 분노하여 김천일( 金 千 鎰 ) 은 의병을 일 으켰다. 김천일은 고경명( 高 敬 命 ) 에게 보낸 서간에 먼저 관찰사 이광 을 쳐 그 죄를 바로 잡은 다음 의병을 모아 북상하겠다 고 연려실기술 권15 임진의병( 壬 辰 義 兵 ) 에 기록하고 있고 고종후가 이적( 李 適 ) 에게 보낸 서장이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임진 7월 10 일에 기록하고 있다. 이광( 李 洸 ) 이 금강( 錦 江 ) 에서 군사를 돌린 후에 인심이 흉흉하여 이를 장 차 수습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을 때, 나주의 김천일 령공( 令 公 ) 이 글을 보내어 언약하기를 격문을 돌려 군사를 혁파한 연유를 물어 그 죄를 성토 한 다음에 의병을 일으켜 군사를 모으려 한다 하였습니다 ( 李 洸 錦 江 退 兵 之 後 人 情 洶 洶 將 不 可 收 拾 羅 州 金 千 鎰 令 公 傳 書 相 約 欲 傳 檄 聲 罪 問 其 罷 兵 之 由 然 後 擧 兵 收 兵 ) 호남의병의 동기는 이광의 근왕군 퇴군에서부터 비롯되었다. 김천일 이 의병을 일으키자 이광은 근왕병을 재 모집하고 충청도관찰사 윤선각 ( 尹 先 覺 ) 과 경상도관찰사 김수( 金 睟 ) 의 협력으로 삼도연합군 5만 병력 이 2 차로 북상하였으나 용인에서 패하고 퇴각하였다. 이에 더욱 전라도 민은 스스로 의병장의 창의에 가담하였다. 호남지방의 임진년 의병장 현황을 선조수정실록( 宣 祖 修 正 實 錄 ) 난중잡록( 亂 中 雜 錄 ) 연려실기술( 燃 藜 室 記 述 ) 동국전란사( 東 國 戰 亂 史 ) 의 기록을 토대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24 이순신과 노량해전
임진년 호남지방 창의기병 현황 거병시기 지역 병력 의병장 인 적 사 항 출신읍 비 고 5월16일 나주 3 백여명 金 千 鎰 前 府 使, 李 恒 문인 나주 의병장 전라도 최초 의병 출병 高 敬 命 문과, 前 府 使, 奇 大 升 문인 광주 맹주 柳 彭 老 문과, 學 諭 옥과 從 事 官, 최초거병 楊 士 衛 문과, 前 直 長, 盧 稹 문인 순창 募 糧 有 司 梁 大 樸 前 府 使, 李 恒 문인 남원 종사관 5월29일 담양 6천여명 李 大 胤 문과, 召 募 使 남원 在 鄕 運 糧 將 문과, 前 牧 使, 崔 尙 重 남원 在 鄕 運 糧 將 丁 熯 문인 赴 戰 運 糧 將, 楊 希 迪 前 萬 戶 남원 在 鄕 運 糧 將, 士 衛 三 從 弟 문과, 前 縣 監, 모병 및 군수물 朴 光 玉 李 珥 문인 광주 모취 6월 전주 7 백명 李 廷 鸞 문과, 召 募 使 전주 수성장 ( 전주읍성 ) 6월 남원 丁 문과, 前 牧 使, 鄕 兵 將 焰 丁 熯 문인 남원 ( 남원읍 수성) 6월 전주 2 백명 黃 璞 前 萬 戶 함열 伏 兵 將 ( 웅치전) 任 啓 英 문과, 前 縣 監 보성 좌의병장 前 王 子 師 傳, 7월 보성 1천여명 朴 光 前 李 滉 문인 보성 문과, 綾 城 縣 令, 金 益 福 盧 守 愼 문인 남원 7월 광주 8 백여명 문과, 前 府 使, 崔 慶 會 奇 大 升 문인 화순 우의병장 9월 순천 2백여명 강희열 무과, 前 奉 事 광양 奮 義 將 9월 남원 2천여명 변사정 前 參 奉, 李 恒 문인 남원 敵 愾 義 兵 將 10월 해남? 선천지 前 判 官 해남 雷 震 將 10월 태인 2백명 민여운 前 主 簿 태인 飛 義 將 10월 해남 수백명 임희진 진사 해남 虎 義 將 10월 영광 수백명 심우진 무과, 前 僉 正 高 敬 命 문인, 영광 彪 義 將 11월 광주? 고종후 문과, 前 縣 令 高 敬 命 장자, 광주 復 讐 義 兵 將 12월 광양? 방처인 진사, 前 參 奉 鄭 逑 문인, 남원 陶 灘 義 兵 將 * 출처 :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조원래 저 아세아문화사 2001)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25
삼도연합군 2차 퇴각 직후인 1592년 5월 29일 담양에서 봉기한 고 경명 휘하의 6천여 명의 호남의병은 6월 11일에 북상하였는데 그 규모 는 아주 대단하였다. 그리고 고경명에 소속되어 있던 채홍국( 蔡 弘 國 ) 은 흥덕에서 남당창의를 했는데 고경명과 김천일 등의 창의 격문에 호응하 여 족질 채우령( 蔡 禹 齡 ) 등과 함께 군사를 모아 제1차 금산성전투에 참전하였다가 고경명의 패몰과 더불어 산졸( 散 卒 ) 을 수습하여 향리로 돌아온 것이 그들의 최초 의병활동이었다. 라고 호남절의록 권2 일도순 절제공사실( 一 道 殉 節 諸 公 事 實 ) 에 기록하고 있다. 호남의병장들은 대부분 고령에도 불구하고 의병을 모집하고 활동하였 는데 의병장 채홍국을 보면 59 세의 노령인데 평소에 나는 이미 입신 하지 못하여 광국사군( 匡 國 事 君 ) 의 도리를 진실로 베푼 바 없으나 집안 에는 양친을 두었으니 마땅히 자식 된 도리를 다할 뿐이다 라고 하였 다. 그리고 아직 나라를 위해 효충( 效 忠 ) 의 원( 願 ) 을 이루지 못하였 으니 너희( 자식) 들은 이 마음을 저 버리지 말라 하였다. 즉, 초야의 선비가 품은 입사( 入 仕 ) 의 열망이 컷음을 알 수 있고 국난에 임하여 봉 기한 의병장들의 정신적 지주가 유교이념의 충( 忠 ) 사상에 기인한 근왕 정신에 있었다고 보아진다. 50세 이상 호남 의병장 의병장 고경명 김천일 변사정 임계영 김제민 최경회 박광옥 박광선 연령 60 56 63 64 65 60 66 66 仕 宧 여부 前 府 使 前 府 使 前 參 奉 前 縣 監 前 都 事 前 郡 守 前 奉 常 寺 正 前 縣 監 * 출처 : 임진왜란과 호남지방의 의병항쟁 조원래 저. 아세아문화사.2001 채홍국의 의병 주축은 동족일문을 움직여 주위의 인척과 가동을 동원 하는 방법을 선택했다. 그의 3형제와 4 부자 그리고 종숙, 종형제, 재종 형제, 내종형제, 종질, 재종질 등 33 인의 동족인사들과 혼척( 婚 戚 ) 과 사돈까지 총 92명의 동맹체를 결성하여 남당촌사에 의병청을 설치하였 다. 임진년에 잠시 의병활동을 중단하였다가 왜군의 재침을 대비하여 26 이순신과 노량해전
1597년 1월 27 일에 정유갱창동맹( 丁 酉 更 倡 同 盟 ) 을 결성하였다. 채홍 국은 63 세에도 불구하고 세 번째 봉기에 앞장선 것이었다. 전반적인 호남 의병활동의 주요사항을 요악해 보면, 임진년 7월 제1 차 금산성전투에서 고경명이 이끈 의병군이 왜군을 공격한 후 이듬해 6월에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의병전을 감행하였는데 김천일군과 영남 지방에 주둔해 있던 임계영 휘하의 전라좌의병, 최경회 휘하의 전라우 의병 그리고 장성 남문의병 등 전라도에서 봉기한 의병 전군이 진주성 에서 합류 임란 최대의 혈전을 펼친 곳이 제2 차 진주성전투이다. 여기 에서 김천일을 주장으로 한 호남의병은 수성군( 守 城 軍 ) 의 주축을 이루 어 최후까지 항전하다 성의 함락과 동시 의병지도층은 순절하였다. 이 전투로 의병이 사라질 듯 하였으나 뒤를 이어 충용장( 忠 勇 將 ) 김 덕령( 金 德 齡 ) 과 계의장( 繼 義 將 ) 최경장( 崔 慶 長 ) 이 잇달아 봉기하였다. 후일 전라도 관찰사가 김덕령을 조정에 추천함으로써 장이 탄생케 되었다. 김덕령은 20대 청년 의병 26 세의 청년 의병장 이었을 뿐 아니라 용력과 군략( 軍 略 ) 이 뛰어난 신장( 神 將 ) 으로 알려져 있었다. 전라도관찰사 이정암( 李 廷 馣 ) 은 직접 김덕령을 만나 기복종군( 起 復 從 軍 ) 할 것을 권유한 뒤 장계 를 조정에 올렸다. 선조실록 권46. 26년 12 월 임술조를 보자. 신이 직접 담양에 가서 덕령을 불러 이르기를 기복종군 ( 起 復 從 軍 ) 하여 나 라의 위급함을 구하도록 권하였더니 금방 의병을 불러 모으고 있는데 원근이 다투어 래부( 來 附 ) 한다고 합니다. 동지 수백을 모집하게 되면 적의 예봉을 꺾 고 적진을 무너뜨리기 위해 일사전 ( 一 死 戰 ) 을 결행하겠다는 것입니다. 그 뜻 이 매우 가상하거니와 이 같은 인재는 조정에서 특별히 장려하여 그 공효( 功 效 ) 를 책임지게 했으면 합니다 ( 臣 巡 到 潭 陽 招 見 德 齡 勸 使 起 復 從 軍 以 循 國 家 之 急 則 今 方 招 集 義 旅 遠 近 爭 附 募 得 同 志 數 百 則 催 鋒 陷 陣 決 一 死 戰 云 其 志 極 爲 可 嘉 如 此 之 人 自 朝 廷 令 加 獎 勵 以 責 其 效 ) 이래서 김덕령은 1593년 윤11월에 담양에서 3천명 의병의 기치를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27
세우게 되었다. 그는 기병 직후 도원수 권율로부터 초승장( 超 乘 將 ) 이란 칭호를 받았으며, 전주의 세자분조( 世 子 分 朝 ) 로부터 익호장( 翼 虎 將 ) 이란 사호( 賜 號 ) 가 있었고 조정에서도 충용군( 忠 勇 軍 ) 이란 군호를 하사하였다. 그리고 비변사에서는 교사충용군( 敎 賜 忠 勇 軍 ) 이라고 대서( 大 書 ) 하여 제작한 호기( 號 旗 ) 까지 내려 주는 것이 마땅하 다는 논의도 있었고 선조가 선전관( 宣 傳 官 ) 에 제수함으로써 공식적인 관직까지 내렸으니 김덕령에게 거는 기대가 컷음을 알 수 있다. 1594년 이후 김덕령군은 진주 관내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장기적인 군량해결을 위해 둔전을 실시하였고 선조의 명에 의해 제도의병( 諸 道 義 兵 ) 전 병력이 충용장 휘하로 들어와 김덕령이 의병총수가 되면서 그의 명성은 더욱 높아졌다. 몇 가지 전과를 보면, 고성전투에서 적병 90 여명 사살, 창원전투에서 20 여명 참살, 고성지방에서 2백여 명의 적을 요격하고 포로가 된 남여 50 명을 빼앗았다. 그리고 조정에서는 김덕령, 곽재우, 이순신, 원균 등 육해상의 제장( 諸 將 ) 에게 명하여 수륙연합작전을 꾀하였다. 이런 상황에서 김덕령에 대한 옥사( 獄 事 ) 가 두 차례 일어났다. 한번은 군졸들 간에 범죄자가 있을 경우 이를 엄치( 嚴 治 ) 했다는 것이고 둘째는 도망한 군졸의 아버지를 잡아들인 것이 당시 체찰사 윤근수( 尹 根 壽 ) 의 종이었다. 체찰사가 종을 석방하라고 했는데 종이 죽음으로써 체찰사의 노여움을 사게 된 것이다. 이에 윤근수가 말하길 김덕령은 신의가 없고 학살을 좋아하는 장수라고 하면서 엄벌을 주장하였으나 선조의 특혜로 풀려났다. 그러나 김덕령이 군률행사( 軍 律 行 使 ) 로 살인죄에 적용된 사건이 있었 다. 무고사건의 발단은 충청도 관찰사의 종사관이었던 신경행( 辛 景 行 ) 의 서장( 書 狀 ) 에 이렇게 적고 있다. 김덕령의 이름이 누차 역적의 입에서 나오니 반드시 그 연유가 있을 것이 다. 일변 도원수와 전라도 순찰사에게 전하여 그를 불시에 체포하여 조정의 처치를 기다리도록 이문( 移 文 ) 하였다 ( 忠 淸 道 巡 察 使 從 事 官 辛 景 行 書 狀 金 德 齡 累 發 賊 口 必 有 其 由 一 邊 都 元 帥 及 全 28 이순신과 노량해전
羅 道 巡 察 使 處 不 意 捕 捉 以 待 朝 廷 處 置 事 移 文 ) 선조실록 권77. 29년 7 월 계미조에 기록된 내용이다. 그리고 충청병 사 이시언( 李 時 言 ) 과 경상우병사 김응서( 金 應 瑞 ) 는 평소부터 김덕령을 시기하고 모살( 謀 殺 ) 의 기회를 엿보던 중 때에 맞춰 덕령이 모반하였다 고 밀계( 密 啓 ) 함으로써 결국 그들의 계획을 달성시킨 것이다. 김덕령은 무능한 조정과 용겁한 국왕, 조정대신들의 경륜 없는 작태 와 무책임한 발언, 무자비한 고문으로 짐승처럼 온몸이 부서진 끝에 마 침내 옥중에서 죽음을 당하였다. 20여 일간의 계속된 여섯 차례의 형문 ( 刑 問 ) 과 수백 회에 달하는 혹독한 형장( 刑 杖 ) 을 맞았다고 한다. 20대 의 젊은 나이에 신장( 神 將 ) 으로 명성을 떨쳤던 그는 결국 의병활동의 좌절과 함께 정치적인 모살( 謀 殺 ) 을 당한 것이다. 김덕령의 의병활동은 1593 년( 선조26) 11월 담양에서 기병한 후 1596년 8월 옥사하기 까 지 2년 10 개월이며, 26세에 시작하여 29 세에 끝난 활동이었다. 김덕령이 옥사( 獄 死 ) 하게 된 이유는 이몽학( 李 夢 鶴 ) 반역사건에 참여 했다는 것이다. 이몽학 사건에 관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이몽학은 왕족이었으나 서얼 출신이라 차별대우에 시달렸다. 임진왜란 이 일어나자 이몽학은 한현( 韓 絢 ) 의 막하로 들어가 양곡을 모으는 모속 관( 募 粟 官 ) 으로 충청도 일대에서 양곡을 모아 관군과 의병에게 보냈다. 그리고 여러 번 공을 세웠으나 조정에서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변란 을 도모하기 위해 동갑계( 同 甲 契 ) 를 만들어 부여 도천사( 道 泉 寺 ) 승속 장군( 僧 俗 將 軍 ) 이라 칭하고 2백여 명의 중과 농민을 합쳐 연합군을 결 성했다. 얼마 후 6 백여 명의 장정이 모여 들었다. 1596년 7 월에 이몽학은 무리를 이끌고 홍산, 임천 관아를 무혈점령 하고 이어 정산, 청양, 대흥을 차례로 점령하여 관아의 방화, 부호집의 약탈이 계속하였다. 이에 대흥현감 이현수( 李 賢 粹 ) 는 이러한 사실을 반 란군들에게 들키지 않고 어렵게 조정에 급보로 전달했다. 한편, 이몽학 반란군은 다섯 도( 道 ) 에서 한날에 군사를 일으켜 서 울로 쳐 올라간다. 김덕령과 곽재우와 홍계남이 모두 군사를 일으켜 도 와주며 병조판서 이덕형이 서울에서 내응하고 각 도의 병사와 어사들이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29
호응 한다 라는 소문을 민중들의 입을 통해 널리 퍼지게 선동하였다. 7월 10일에 반란군은 홍주성으로 쳐 들어갔다. 이때 충청수사 최호 (崔湖)가 남포, 보령 군사를 이끌고 홍주성으로 들어왔고 충청병사 이 시언(李時言), 순안어사 이시발(李時發), 중군 이간(李侃)도 홍주성으 로 출발했고 권율과 전라감사 박홍로와 김덕령이 군사 수만 명을 이끌 고 이곳에 이르렀다. 반란군 제압 군사는 반란군에게 협박하기를 내 일 모조리 섬멸해 한 사람도 남기지 않고 죽일 것이다. 너희들 가운데 협박에 못 이겨 따라 다니는 자가 역적의 장수 머리를 베어 오면 몰살 을 면할 것이다 라고 설득했다. 이에 반란군들은 자기들이 내세운 김덕령이 군사를 이끌고 왔다는 사 실에 동요하기 시작하여 반란군 몇몇 장수가 이몽학의 장막으로 들어가 머리를 베어 관군에게 바치고 나머지 반란군들은 모망을 치기 시작했 다. 수성군들은 추격하여 닥치는 대로 잡아 죽이고 포박하였다. (4) 수군들의 활약 1591년 이순신은 전라 좌수사, 이억기(李億祺)는 전라 우수사에 임 명되어 약 1년 동안 수군을 양성하고 나름대로 전쟁 준비를 했다. 그러 나 박홍(朴泓) 경상좌수사는 언제 부임했는지 알 수가 없고 우수사 원 균(元均)은 1592년 초에 부임하여 전쟁에 대비할 시간이 부족했던 것 은 사실이다. 개전초기 경상도 수군의 동향이 징비록에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면 아래와 같다. 좌수사 박홍은 적의 세력이 큰 것을 보고 감히 출병하지 못한 채 성을 버 리고 도주했고 좌병사 이각(李珏)은 소식을 듣고 병영에서 동래성으로 들 어 갔다. 부산성 함락 소식이 이르자 이각은 겁에 질려 어찌할 바를 모르고 성 밖에서 구원하겠다고 둘러대고 성을 떠나 소산역으로 물러났다. (左水使朴泓 見賊勢大 不敢出兵棄城逃 左兵使李珏聞聲息 自兵營入東萊 及 釜山陷 珏恇拜失措 託言欲在外掎角 出城退陣于蘇山驛) 30 이순신과 노량해전
이렇게 개전 초기부터 경상도 좌병사 이각과 좌수사 박홍은 일본군에 맞서 싸우지 못하고 도주하거나 퇴각하였다. 그러나 임진왜란이 발발하 자 제일 먼저 조정에 보고하고 인근 장수들에게 통보한 사람은 경상좌 수사 박홍이었다. 그렇지만 박홍은 본영을 포기하고 후퇴를 거듭하다가 서울로 쫓겨 왔 고 도원수 김명원( 金 命 元 ) 휘하에 들어가 임진강 방어전에 참가했다. 이후 전공은 세우지 못하고 이듬해 병사했다. 그리고 일본군과 대적하 다 순절한 정발( 鄭 撥 ) 은 경상좌수사 박홍 휘하의 첨절제사로 좌수영에 속한 부산진관( 釜 山 鎭 管 ) 의 지휘관이었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 발발 일에 절영도로 사냥 갔다가 부산진성에서 항전하다 전사했고 같은 소속 다대포 첨사 윤흥신( 尹 興 信 ) 도 임지를 지키다 전사했다. 이와 같 이 박홍 휘하 장수들은 일본군과의 전투에서 포기하거나 도주 또는 후 퇴한 것으로 추정된다. 경상우수사 원균도 세력을 결집하여 함대를 구성하는데 실패했다. 그 렇지만 곤양해구를 지키고 있었다는 기록이 통제사원균증좌찬성공행장 에 언급하고 있다. 원균 휘하의 전선 4 척으로 적과 싸움이 불능하기에 본영 수비를 우후( 虞 侯 ) 우응진 ( 禹 應 辰 ) 에게 맡기고 옥포만호 이운용 ( 李 雲 龍 ), 영등포만호 우치적 ( 禹 致 績 ), 남해현령 기효근 ( 寄 孝 謹 ) 등과 곤양 해구로 물러나 지키고 있었 다 ( 公 手 下 只 有 四 船 知 勢 孤 不 能 敵 留 虞 侯 禹 應 辰 守 本 鎭 與 玉 浦 萬 戶 李 雲 龍 永 登 浦 萬 戶 禹 致 績 南 海 縣 令 寄 孝 謹 退 保 昆 陽 海 口 ) 부산과 경남지역의 수군상황을 알아보았는데 개전초기에는 해전이 있 었다는 기록은 없고 단지 1592년 4월 29일 원균이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는 공문이 있을 뿐이다. 기록 역시 일본 수군의 세력과 원균의 전과를 적은 것이다. 이순신의 임진장초 1592년 4월 30 일자 기록이다. 일본 수군 5 백여 척이 부산, 김해, 양산강, 오지도 등처에 주둔하고 정박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31
하고 있는데 경상우도 전선이 적선을 추격해서 10 척을 분멸했다 ( 賊 倭 五 百 餘 艘 釜 山, 金 海, 梁 山 江, 嗚 旨 島 等 處 屯 泊 本 道 舟 師 抄 發 追 擊 賊 船 十 隻 焚 滅 ) 앞의 성과는 본격적인 작전 해전이 아니었고 구원을 요청하면서 원균 의 전과를 기록한 것이다. 당초에 해전이 없었던 것은 일본군에서 해전 을 목적에 둔 것이 아니라 수군은 단지 상대방의 보급로를 차단하고 병 력과 군수품 운반을 목적으로 한 수송역할이었다. 이러한 내용을 볼 때 수군 섬멸은 처음부터 목표로 삼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의 히데요시는 1591년 1월 20일에 최초로 작전명령을 내렸는데 그 내용 중에 선박이 중요한 것은 부대를 이동하는데 필요하기 때문에 조선 땅에 도착하면 군사를 상륙시키고 쓰시마로 돌아와 후속부대가 건 너가도록 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순신의 첫 번째 옥포해전 출전인 5월 4일까지는 20여일이 라는 시간적 여유가 있었고 이순신은 병력모집, 병기점검, 함대집결, 정 찰활동 등의 긴요한 조처들을 취할 수 있었다. 이순신의 대표적인 해전 일했다) 13 군데는 다음과 같다.( 명칭을 해전으로 통 해전명칭 일 시 조선 참전세력 일본 위 치 전 과 옥포핸전 1592. 5. 7. 전선28 협선17 30여척 거제도 옥포만 일본대선 13 척, 중선6척 격 파, 사살다수, 서전완성 합포해전 1592. 5. 7. 상동 5척 웅천 합포 대선4 척, 소선1 척 분멸, 사살다수, 왜선도주 추격전 적진포해전 1592. 5. 8. 상동 13척 고성 당동만 대선9 척, 중선2 척 등 격파, 양미노획 사천해전 1592. 5.29. 전선26 협선20 여 척( 추정) 13여척 사천 선창 대선12 척, 기타1척 등13 척격파, 사살다수, 이순신 부상 32 이순신과 노량해전
해전명칭 일 시 조선 참전세력 일본 위 치 전 과 당포해전 1592. 6. 2. 상동 21척 당포 선창 대선9 척, 중선12 척 등21 척 격파, 사살다수 당항포해전 1592. 6. 5. 전선51 협선50 여 척( 추정) 26척 당항포 포구 대선9 척, 중선4 척, 소선13 척 등26 척격파, 사살다수, 유인작전, 조선연합함대형 성 율포해전 1592. 6. 7. 상동 7척 거제도 율포 앞바다 대선5 척, 중선2 척, 등7척 격파, 적장 등 사살다수 한산도해전 1592. 7. 8. 전선59 협선50 여 척( 추정) 73척 한산도 앞바다 대선35 척, 중선17 척 등 59 척 분멸, 340여급 사살 다수, 와키사카 14척으로 탈출 안골포해전 1592. 7.10. 상동 42척 안골포 포구 20 척분멸, 사살다수 부산포해전 1592. 9. 1. 전선81 협선92 척 이상 대소 470 여척 부산포 일대 대선30 여척 등 100척분멸 모두130 여척격파, 사살다 수, 임란 중 가장 적극적 이 공세 칠천량해전 1597. 7.16. 거제도 칠천량 임진, 정유왜란 중 유일 조 선 수군 패전, 원균함대 궤멸, 원균 이억기 최호 등 수군지휘부 전사, 경상우 수사 배설 12척 탈출 명량해전 1597. 9.16. 전선13 133척 진도 해남군의 명량해협 대선31 척 분멸, 일본 서해 진출 기도 저지 노량해전 1598.11.19. 전선380 여척 ( 추정) 500척 남해 노량해협 200 척분멸, 이순신 및 휘 하 장수10 여명 전사, 진린 부상, 7 년전쟁 종전, 조명 연합함대 협공, 가장 치열 한 전투 계 13해전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33
옥포해전 이순신 함대는 1592년 5월 4 일 출전을 시작했다. 함대 세력은 전선 ( 판옥선) 24 척, 협선 15 척, 포작선 46척으로 모두 85 척이었다. 협선은 승선인원이 5 명 이하 소형 부속선이고 포작선은 어선에 불과했다. 종일 항해해서 날이 저물 무렵에 경상우도 소비포 앞바다에 정박하여 첫날 밤을 지내고 원균과 합류하기로 한 당포에 도착했으나 오지 않아 머물 다가 5월 6 일에 원균 전선이 도착하였는데 남해현령 기효근, 미조항첨 사 김승룡, 소비포권관 이영남, 영등포만호 우치적, 옥포만호 이운룡 등 경상우도 소속 장수들이 전선 4척과 협선 2척에 나누어 타고 와서 합 류했다. 이튿날인 7 일 새벽에 출발하여 일본 군선이 있다는 천성( 天 城 ), 가덕 도( 加 德 島 ) 로 향하다가 정오경 옥포 앞바다에 이르렀을 때 우 척후장 사도첨사 김완( 金 浣 ) 등이 신기전을 쏘아 올려 일본 군선이 있다는 보 고를 받았다. 일본 함선은 30여척이었는데 약탈 중이던 일본 수군들은 급히 배에 올라타 6 척이 먼저 조선 함대에 맞섰다. 이순신 함대는 총통 등 우세한 화기와 궁시( 弓 矢 ) 로 적선을 격파하였다. 이 해전에서 일본 대선 13척 과 중선 6 척, 소선 2척 모두 26 척을 분멸하였다. 합포해전 옥포해전을 승리로 이끈 이순신 함대는 거제도 북단에 위치한 영등포 로 이동하여 정박하려 했는데 오후 에 일본 대선 4시쯤에 이곳에서 멀지 않는 바다 5척이 지나가고 있다는 척후장의 급보를 듣고 이순신 함 대는 곧바로 추격하여 웅천 합포( 合 浦 ) 에 이르렀다. 일본 수군은 전선 을 버리고 상륙하여 도망하자 일본 수군 전선을 모두 불태우는 전과를 올리고 밤중에 건너편 창원 남포에 이르러 정박하였다. 34 이순신과 노량해전
적진포해전 이튿날인 5월 8 일에 진해 고리량( 古 里 梁 ) 에 일본 군선이 머물고 있 다는 첩보를 받고 출발하여 저도( 猪 島 ) 를 지나 고성 적진포( 赤 珍 浦 ) 에 이르러 대선 중선 13 척이 포구에 정박해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조선 수군의 공격에 놀란 일본군은 육지에서 조총을 사격했지만 빈 배를 공격하여 대선 9척과 중선 2척을 격파하는 등 13 척을 분멸했다. 아침을 먹고 전선을 정비하여 출발하여 5월 9일 정오 무렵에 전라좌수 영으로 돌아왔다. 사천해전 5월 27 일에 일본 배 10 여척이 사천, 곤양 등지에 육박해 왔기에 함대를 노량으로 이동했다 는 경상우수사 원균의 급보가 왔다. 이에 이순신 함대는 5월 29 일 새벽에 노량으로 가서 원균과 합세하였다. 이날 일본군선 1척을 추격하던 중 사천 선창에 일본군선 12척을 발 견하였으나 썰물이라 이순신 함대는 진입을 하지 못하고 전투를 시작했 는데 일본 수군 병력 2 백여 명이 조총으로 대항했다. 마침 조수가 밀물 로 바뀌어 판옥선이 포구 안으로 진입할 수 있게 되었다. 처음으로 거 북선이 등장하여 공격하자 일본 수군은 후퇴하였고 이순신 함대는 정박 해 있던 군선 13 척을 분멸하였다. 이 해전에서 이순신은 왼쪽 어깨를 관통하는 총상을 입었고 군관 나 대용과 다수의 사부( 射 夫 ) 와 격군( 格 軍 ) 이 부상당했다. 사천해전이 끝 나자 배를 돌려 사천 모자랑포( 毛 自 郞 浦 ) 에 정박하였다. 당포해전 6월 1 일 함대를 이동하여 고성 사량도( 蛇 梁 島 ) 뒤 바다에 진을 치고 밤을 지냈다. 이튿날 아침 8 시경 일본 군선들이 당포 선창에 정박하고 있다 는 소식을 듣고 함대를 이동하여 10시쯤에 선창에 도착하니 일본 함대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35
대선 9 척과 중 소선 12 척이었다. 이순신은 거북선으로 일본 층루선을 들이 받으면서 용머리 입으로 현자 철환을 쏘고 천자, 지자, 대장군전 을 쏘아 층루선을 깨뜨렸다. 왜선 21 척이 분멸하였다. 도망하는 일본 수군을 추격하기 위해 상륙하려고 할 때 탐망선으로부 터 일본 대선 20 여척이 소선을 이끌고 거제로부터 오고 있다 는 보 고를 받았다. 이순신은 급히 바다에서 요격하기 위해 바깥바다로 나가 니 일본함대는 신속히 부산 쪽으로 도주했다. 날이 저물어 접전할 수 없었기에 진주 창신도에 정박하였다. 당항포해전 6월 4일 전라 우수사 이억기 함대 25척이 당포 앞바다에서 합류했 다. 6월 5 일에 주변 지역 귀화인 김모( 金 毛 ) 등이 당포에서 쫓긴 일 본 군선들이 고성 당항포( 唐 項 浦 ) 에 있다 는 소식을 알려 주었다. 그 래서 이순신 함대는 급히 함대를 당항포로 이동하여 한꺼번에 포구로 들어가 일본 수군 대선 9 척, 중선 4 척, 소선 13척 등 26척과 해전을 펼쳤는데 이순신은 유인작전으로 일본군을 바다로 끌어내어 거북선이 층각선을 깨뜨리고 대장선의 장수를 사살했다. 한편 일본 군선을 포위하고 섬멸하여 수급 43개를 베고 한척만 남겨 둔 채 군선 전부를 분멸했다. 6월 6 일에 방답첨사 이순신( 李 純 信 ) 은 나 머지 한척을 급습하여 장( 亇 乙 干 場 ) 으로 옮겨 정박했다. 50급 이상을 참획하고 저녁 무렵에 고성 마을간 율포해전 율포에서 부산 쪽으로 도망하는 일본 대선 5척과 중선 2척을 발견하 고 추격하여 일부를 바다에서 분멸하였고 나머지는 육지로 도망하니 빈 배를 모두 격침시켰다. 이 해전에서 수급 30여개를 베고 7척을 모두 분멸하였다. 거제 온천량( 溫 川 梁 ) 의 송진포( 松 珍 浦 ) 로 이동하여 정박하 였다. 36 이순신과 노량해전
한산도해전 가덕, 거제 등지에 일본군선 10여척 내지 30 여 척이 출몰 한다 는 첩보와 함께 전라도 금산( 錦 山 ) 지경에도 일본군이 다가와 수륙으로 침 범할 조짐이 있다는 정보를 얻은 이순신 함대는 이억기 함대와 일 좌수영에서 합류하였다. 7월 4 6일에 이순신 함대는 출전하여 남해 노량에서 경상우수사 전선 7척 과 합류하여 진주의 창신도에서 정박하고 밤을 지냈다. 조선 수군 연합 함대는 원균 전선 7척과 전라좌우도 전선 49 척, 거북선 3척이고 일본 함대는 대소 70 여척이었다. 7월 7 일 해가 저물 무렵 고성 당포에 도착하니 섬의 목동 김천손( 金 千 孫 ) 이 일본 군선 70여척이 오늘 오후 2시쯤 영등포 앞바다를 지나 고성과 거제도의 경계인 견내량( 見 乃 梁 ) 에 머물고 있다 는 정보를 제 공했다. 연합 함대는 7월 8일에 일본 함대 쪽으로 출발했는데 견내량에 일본 군선 73 척이 대열을 이루고 있었다. 이순신은 넓은 바다로 유인하는 전 술을 구상하고 먼저 5~6척으로 일본 함대의 선봉과 전투를 하다 도망 을 치니 일본군은 추격하여 한산도( 閑 山 島 ) 앞 넓은 바다로 나왔다. 이 때 이순신 함대는 학익진( 鶴 翼 陣 ) 을 형성하여 일본 함대에 돌격하도록 명령을 내렸다. 이순신은 이때 전투 상황을 임진장초에 적고 있다. 장수들과 군사들이 승기를 타고 서로 다투어 돌진하며 철환과 화살을 발 사하기를 풍뢰와 같이하여 적선을 불사르고 적병을 사살하는 것을 일시에 모 두 다 해 버렸다 ( 諸 將 軍 吏 乘 勝 踊 躍 爭 先 突 進 箭 丸 交 發 勢 若 風 雷 焚 船 殺 賊 一 時 殆 盡 ) 한산도대첩의 전과는 일본 대선 35 척, 중선 17 척, 소선 7척 등 59척 을 격파했고 나머지 대선 1척과 중선 7척 등 14척과 상륙한 4백여 명 은 겨우 탈출해 갔고 일본군 추정하고 있다. 3천여 명 이상의 군사가 전사한 것으로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37
안골포해전 7월 10일에 안골포에 도착하니 일본 함대의 대선 21 척, 중선 15 척, 소선 6척 모두 62 척이 정박하고 있었다. 안골포는 지세가 좁고 수심이 얕아 판옥선이 들어가기에는 어렵기 때문에 유인하기로 하고 이순신은 몇 척으로 하여금 교대로 출입하면서 총통을 발사하고 장편전과 화전으 로 집중 공격을 했다. 일본 군선은 대항하지 못하고 분멸하면서 장수들을 비롯하여 일본군 다수가 살상되었다. 정확한 기록은 없다. 일본 기록에 의하면 일본군선 20척을 잃었다고 기록하고 있으며 항해가 가능한 군선은 야간을 이용 하여 부산으로 도주하였다고 한다. 부산포해전 경상우도 순찰사 김수( 金 晬 ) 는 공문을 보내 일본군이 양산과 김해 등지로 내려오는데 도망치려는 것 같다 는 정보를 제공했다. 이에 이 순신 함대는 8월 24 일에 좌수영을 출발했다. 첫째 날은 남해 관음포 ( 觀 音 浦 ) 에 닿았다가 사천 모자랑포에 정박했고 25일에는 사량바다에 서 원균과 합세하여 당포 앞바다에서 정박했다. 26일에는 거제도 근처 로 이동하여 밤을 보내고 27 일에 웅천 원포( 院 浦 ) 로 이동하였다. 28일 에 김해와 양산 쪽으로 전진하다가 천성보( 天 城 堡 ) 에서 밤을 보냈다. 29 일에 동래 장림포( 長 林 浦 ) 에서 일본 대선 4척과 소선 2척을 만나 분멸하고 가덕도 북쪽에서 정박했다. 9월 1일에 화전구미에서 대선 5 척, 다대포에서 대선 8 척, 서평포에서 대선 9 척, 절영도 앞바다에서 대 선 2 척을 모두 분멸하였다. 계속 정탐하다 부산포에 일본군선 470여척이 정박 중인 것을 발견하 고 총 공격을 감행했는데 이순신이 이 전투를 평가하기를 작은 함대를 이끌고 4~5배가 넘는 대규모 세력에 맞선 해전이었을 뿐 아니라 일본 수군의 근거지를 공격한 의미 있는 일전이었다. 전투 결과는 연합 함대 가 일본군선 1백여 척을 격파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지만 핵심 참모인 용장 정운( 鄭 運 ) 이 전사하는 큰 손실을 입었다라고 임진장초에 기록하 고 있다. 9월 2 일에 본영으로 돌아왔다. 38 이순신과 노량해전
2) 정유재란 (1)정유재란의 발단 1597년 2월 25일에 통제사 원균은 통제영에 부임하여 이순신과 교 대한 것으로 보는 것은 이충무공전서 권9 행록에 이순신은 2월 26일 서울로 출발했고 3월 4일 저녁에 하옥되었다라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 이다. 이순신은 1597년 4월 1일 백의종군하라는 명령을 받고 출옥하여 남하하기 시작하였는데 4월 27일에 도원수 권율이 주둔하고 있는 순천 에 도착했다. 당시 수군 전력에 대해서 체찰부사 한효순은 4월말 현재 한산도에 집결한 전선이 134척이고 격군은 13,200 여 명이라고 보고했으며, 원균 이 통제사로 부임한 후 3월 29일에 장계를 올려 안골포와 가덕도 등의 일본 세력이 약하므로 육군이 먼저 이 지역을 공격하면 수군이 일본군 을 섬멸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으나 도원수 권율은 원균 통제사의 의견 이 타당하다고 보나 두 곳은 해안 깊숙이 위치하고 있어 공격할 수 없 다는 의견을 올렸다. 비변사는 도원수의 의견을 들어 수군으로 하여금 부산 앞바다를 왕래 하면서 일본군이 자유롭게 건너오는 것을 저지해야 된다는 해로 차단 전술을 지지하는 입장 취했다. 이때 비변사에서 수군 전력을 분석하였 는데 한산도 전선 134척 외에 도착할 5~6척의 전선과 5월 20일까지 추가로 건조될 48척의 전선을 모두 합하면 180여 척의 전선이 되고 그 외에 소형 병선들이 많은 것으로 파악하고 있었다. 수군의 전력과 작전 상황을 분석한 원균은 수륙 병진 전술을 주장하 는 한편 조정 신료와 선조는 해로 차단 전술을 주장하므로 도체찰사 이 원익은 수군을 반으로 나누어 한편은 한산도에 머물도록 하고 나머지 한편은 해로를 차단하라는 명령을 원균에게 내렸다. 그런데 원균은 체 찰사와 도원수의 출전 명령에도 불구하고 해상 출동을 거부하다가 18 일에야 부산으로 출항했다. 6월 원균의 휘하 함대는 6월 19일에 안골포와 가덕도에서 소규모 해전을 치렀는데 일골포에서 일본군선 2척을 빼앗고 가덕도에서도 추격 끝에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39
군선 여러 척을 포획하였다. 전투를 마치고 회항하려고 할 때 일본 수 군이 역습하여 격렬한 전투 중에 평산포 만호 김축( 金 軸 ) 은 눈아래 총 상을 입었고 보성군수 안홍국( 安 弘 國 ) 은 머리에 탄환을 맞고 전사하였 다. 7월 4~5일 출동에는 원균이 참여하지 않았고 도원수 등의 명령대로 세력을 나누어 다른 함대가 출동하였다. 7월 8일에 일본군선 10여 척 을 격파했다. 그리고 풍랑으로 조선함대 일부 군선 5척을 두모포에 정 박하고 7척은 서생포에 정박하였으나 서생포 조선 수군들은 상륙을 시 도하다 일본군에게 전멸 당했다. 원균은 6월 18일부터 7월초까지 조정의 지시대로 함대를 나누어 부 산 앞바다까지 왕래하면서 몇 차례 해전을 벌여 소소한 전과를 거두기 도 했지만 조선 수군도 적지 않은 피해를 입고 있었다. 칠천량해전 직전에 도원수 권율이 통제사 원균을 불러 곤장을 때리면 서 출전을 종용했다. 도원수 권율은 통제사를 장벌한 것은 도체찰사와 조정의 지시와 같이 원균을 출전시키라는 선조의 명령이 있었기 때문이 다. (2) 수군들의 활약 칠천량해전 원균 장벌사건 직후인 1597년 7월 14일 원균 통제사가 한산도에서 함대 전체를 이끌고 출전하기 시작했다. 부산 앞바다에서 일본 함대와 해전을 시도했으나 일본 함대는 회피하여 원균 함대를 지치게 만들었 다. 원균은 일본 함대를 추격하다 물마루( 水 宗 ) 를 지나 가덕도에 도착 하였다. 가덕도에 도착하자마자 각 전선은 기갈( 飢 渴 ) 때문에 물을 구 하려고 서둘러 상륙하였는데 일본 육군이 매복하고 있다가 격하여 약 4 백여 명이 살해되었다. 일시에 공 원균 함대는 항로를 돌려 거제도 북단 영등포로 이동하였는데 이곳에 도 일본군이 매복하고 있었다. 이때 일본군은 조선 수군을 공격하기 위 해 남해안 연안 일대에 육군을 배치하여 수륙합동 작전을 펼쳤던 것이 40 이순신과 노량해전
다. 7월 15일 원균 함대는 풍랑을 무릅쓰고 함대를 영등포에서 칠천량으 로 이동하였다. 이때 일본 수군은 야간에 출동하여 칠천량 주변을 에워 싸기 시작했다. 수백 척으로 조선 함대를 습격하기 위해 포위를 마친 후 16일 새벽 4 시쯤에 공격을 시작했다. 선조실록 권90 1597년 7 월. 선전관 김식( 金 軾 ) 이 올린 전황보고이다. 15일 밤 10시쯤 일본 함대가 습격하여 우리 전선 4척이 완전히 불타 침 몰하였고 그 뒤 어렵게 진을 치고 밤을 보냈다. 그리고 이튿날 새벽닭이 울 무렵에 헤아릴 수 없는 많은 일본 군선이 몰려와 서너겹으로 에워싸고 전투 를 시작하였다 조선 수군은 계속된 이동으로 식수 부족과 피로와 기갈로 지쳐 경계 를 소홀히 했고 이 틈을 이용한 일본군은 원균 함대를 포위하여 습격하 기에 이르렀다. 의병장 조경남의 난중잡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밤중에 저기 가만히 비거도 ( 鼻 居 舠 ) 10여척으로 우리 전선 사이를 뚫어 형 세를 정탐하고 또 병선 5~6 척으로 우리 진을 둘러쌌는데 우리 복병선의 장 수와 군사들은 모두 모르고 있었다. 이 날 이른 아침에 복병선이 이미 적에 게 불태워져 없어졌다. 원균이 크게 놀라 북을 치고 바라를 울리고 불화살을 쏘아 변을 알리는데 문 득 각 배의 옆에서 적의 배가 충돌하며 총탄이 발사되니 군사들이 크게 놀라 서 실색하였다 이렇게 칠천량해전은 일본 수군이 계획한 전술대로 진행되었던 것이 다. 16일 새벽에 시작된 전투는 오전 8시경에 칠천량 남단 근처에서 탈 출하려던 조선함대와 막으려는 일본 함대와의 격전이었다. 조선함대는 두 방향으로 나누어 탈출을 시도했는데 하나는 진해 쪽이고 하나는 한 산도 쪽이었다. 진해 쪽은 일본 수군의 추격을 받아 참패하였고 다른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41
쪽은 칠천량을 빠져 나와 거제도 해안으로 탈출한 원균과 배설( 裵 楔 ) 함대였다. 배설은 견내량을 거쳐 한산도로 먼저 탈출했고 원균은 고성 추원포 ( 秋 原 浦 ) 로 물러나 상륙하였다. 통제사 원균은 이곳에 상륙했다가 일본 군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근처 해안으로 상륙한 전선들은 모두 일본 군의 공격을 받아 분멸되었다. 칠천량해전에서 통제사 원균, 전라우수사 이억기, 충청수사 최호 등 수군 지휘부가 모두 전사하고 경상우수사 배설과 함께 탈출한 십여 척 전선을 제외한 대부분이 일본 함대에게 분멸되거나 탈취 당하는 참패로 끝났다. 명량해전 먼저 칠천량해전에서 명량해전 직전까지의 내용을 기술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이순신의 복귀와 수군의 복원에 대해 설명하고자 한다. 칠 천량해전 이후 2개월만인 1597년 9월 16일에 있었던 명량해전의 승리 는 정유재란의 국면 전환에 크나큰 계기가 되었다. 이순신이 통제사로 재임명된 1597년 8월 3일에 군관 등 10여명을 거느리고 진주 굴동( 屈 洞 ) 의 이홍훈( 李 弘 勛 ) 의 집을 출발하여 같은 날 구례현에 도착하였다. 4일에 곡성에 머물렀고 5일에 옥과현에서 이기남 ( 李 寄 男 ) 부자와 정사준( 鄭 思 竣 ) 형제, 옥과현령을 만났으며 6일에 옥과 현에 머물렀는데 송대립( 宋 大 立 ) 이 일본군을 정탐하고 돌아왔다. 7일에 순천으로 향하던 중 흩어진 병사( 兵 使 ) 의 군사들로부터 말 3 필과 활, 화살 약간을 탈취하였다. 8 일에 순천부로 들어가 광양현감, 나주판관, 옥구현감 등과 조방장 배경남( 裵 慶 男 ) 을 불러 만나고 가벼운 장전( 長 箭 ) 과 편전( 片 箭 ) 등은 군관들이 나누어 소지하게 하였다. 9일에 낙안을 거쳐 보성에 이르는 동안 순천부사 우치적 등이 합류 해 왔다. 그리고 순천과 보성을 지나면서 장병을 취합하여 그 숫자가 60명에서 120명으로 늘어났는데 대부분 자원해서 이순신 휘하에 합류 한 병력이다. 42 이순신과 노량해전
8월 11 일에 송희립이 최대성( 崔 大 晟 ) 과 함께 합류하였으며 12일에 거제현령 안위( 安 衛 ) 와 발포만호 소계남( 蘇 季 男 ) 등이 오고 경상 우후, 이용구도 나타났다. 16 일에 군장( 弓 匠 ) 인 지이( 智 伊 ) 와 태귀생( 太 貴 生 ) 등이 들어왔고 김희방( 金 希 邦 ) 과 김붕만( 金 鵬 萬 ) 등도 합류하였다. 19일에 회령포에서 경상우수사 배설로부터 10여척의 전선을 인수하니 각처에 흩어져 있던 수군 장병들이 이순신 휘하로 속속 모여 들었다. 명량해전 직전에 모여든 장병들과 주변 지역의 병력은 당시 13척의 소규모 함대를 극대화 한 중요한 요소이며 순천과 보성 등지에 산재해 있던 화기를 비롯한 무기들은 함대의 화력을 증진시킨 전력의 큰 힘이 었다. 조정에서는 수군 재건을 맡겼지만 세력이 약해져 해상에서 버틸수 없 으면 육지로 올라와 육전을 도와도 좋다는 명령을 선전관 박천봉( 朴 天 鳳 ) 에게 8월 7 일 성첩( 成 貼 ) 으로 보냈는데 15일경에 이순신은 받아보 고 답장을 보냈다. 이충무공전서 권9. 이분 찬 행록에 기록된 것을 보 면 다음과 같다. 아직도 전선이 12척이나 있으니 있는 힘을 다해 싸우면 오히려 할 수 있 는 일이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해전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 時 朝 廷 以 舟 師 甚 單 不 可 禦 賊 命 公 陸 戰 公 啓 曰 自 壬 辰 至 于 五 六 年 間 賊 不 敢 直 突 於 兩 湖 者 以 舟 師 之 抱 其 路 也 今 臣 戰 船 尙 有 十 二 出 死 力 拒 戰 則 猶 可 爲 也 ) 이순신은 배설로부터 함대를 인수 받은 8월 20일에 진영을 회령포에 서 이진( 梨 津 ) 으로 이동하였고 24일에 다시 어란포로 이동하였는데 28 일 오전 6시경에 8척의 일본군선이 불의에 어란포 진영으로 돌입하는 상황이 벌어졌다. 이순신 함대는 해남반도 남단 갈두( 葛 頭 ) 까지 추격하 다가 돌아와 진영을 장도( 獐 島 ) 로 옮겼고 명량해전 직전까지 주둔했다. 배설은 해전 자체가 불가능하다고 판단하고 8월 30일에 병을 핑계로 우수영에 상륙하였다가 9월 2 일에 도주했으나 종전 후 고향인 선산( 善 山 ) 에서 체포되어 참형되었다. 명량해전 직전까지 이순신이 확보한 세 력은 전선 13척과 조탐선 32 척이 전부였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개요 43
조선 함대가 벽파진에 머물고 있던 9월 14일에 임준영이 일본함대 2 백여 척 중 55척이 어란포에 도착한 사실을 알려왔고 붙잡혔다 도망쳐 온 김중걸( 金 仲 傑 ) 은 일본 수군이 우리 함대를 공격하기 위해 접근 중 이라는 소식을 전해왔다. 이 정보를 받은 이순신은 즉시 전령선을 보내 주변의 피난 선박들에게 육지로 대피하도록 명령하였다. 상황이 급박해지자 이순신은 9월 15일에 진영을 벽파진에서 전라 우 수영으로 옮겼다. 이날 장수들을 소집하여 명량 해로를 막아 지켜야 한 다는 이진( 移 陳 ) 경위와 해전 전술을 설명한 후 명령을 위반할 때에는 조금도 용서하지 않겠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이와 함께 이순신은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살려고만 하면 죽는 다( 必 死 則 生 必 生 則 死 ) 라는 훈시로 장병들은 필사의 각오와 승전에 대 한 자신감을 갖게 하였다. 9월 16일 이른 아침에 일본군선 133척이 우리 진영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일본군선이 통과한 명량해협은 진도와 해남군의 화원( 花 源 ) 반 도 사이에 있는 수로로서 길이가 약2km내외이고 가장 좁은 폭은 300m 정도이다. 이곳 최저 수심은 1.9m이고 조류의 속도는 최대 11.5 노트로 매우 빠르다. 20리 밖에서도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린다 하 여 울둘목 이라 불리는 협수로( 狹 水 路 ) 이다. 이순신은 오전 9~10시경에 전투 준비를 마치고 우수영 앞바다로 나 와 작전대로 진영을 갖추고 일본 함대를 기다렸다. 일본 함대는 어란진 에서 명량 근처까지 전진한 후 하였다. 133척의 함대만으로 명량 해협을 통과 이순신 함대가 선두에서 공격하자 일본군이 포위하여 집중 공격하므 로 분리한 상황으로 해전이 시작되었는데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 김응함 ( 金 應 諴 ) 등이 먼저 전진해 와서 일본군선을 공격하니 나머지 전선들도 돌진하여 본격적인 접전이 펼쳐졌다. 이때 조류가 이순신 함대가 유리한 남동류로 바뀌자 안위 전선이 선 두로 돌격하여 31척을 격파하는 성과를 올렸고 이순신은 해적출신 일 본 장수 구루시마 미치후사를 사살하고 효시( 梟 示 ) 하니 일본 수군은 기 세가 꺾였다. 한동안 양측이 대치하다가 일본 함대가 저물 무렵 조류를 타고 후퇴함으로서 명량해전은 조선함대의 승리로 끝났다. 44 이순신과 노량해전
3. 노량해전 이전 상황 1) 조선 진영 1597년 7월 치욕적인 칠천량해전의 패배로 시작된 정유재란은 명량 해전(1597년 9 월) 에서 극적인 반전으로 국난의 위기에서 탈출하였다. 다음해인 무술년(1598) 11월 19일에 길고 긴 7년 전쟁의 종지부를 찍는 노량해전을 맞게 되는데 노량해전은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지니고 있다. 그 중에서 대표할 수 있는 것은 조 명 연합 함대가 합동으로 해상투 를 하였다는 것과 7년 전쟁의 최후 최대전투였으며 이순신 삼도수군통 제사가 오로지 구국의 일념으로 싸우다 해상에서 순국하였다는 것이다. 이러한 역사적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순신의 자살 설과 은둔설 등이 난무하다는 것은 가슴 아픈 일이다. 물론 주장하는 자들의 나름대로의 학설이라고 하지만 이순신의 생애 전체를 볼 때 이 순신의 진실 된 마음을 읽을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자살설 또는 은둔 설은 당시의 전투 상황을 보드라도 용납되지 않고 이해하기에 어려운 주장설이라 본다. 이러한 의문점을 해결하기 위해서는 노량해전에 대한 정확한 자료의 분석과 명분을 내 세울 수 있는 기록문들이 필요로 하기 때문에 구체적 으로 정립하고자 한다. 우선 조선 전선과 수군에 대하여 정리해 봄이 좋을 것 같다. 전선의 수는 칠천량해전이 패전함에 따라 조선 수군은 폐군에까지 이 르게 되었지만 13척의 전선이 남아 있어 13척으로 왜선133척을 격멸 시킨 명량해전이 있었다. 또한 13척 외에 40여척이 추가로 건조되었다 는 사실이다. 선조 31 년(1598) 2월에 경리 양호에게 군량 운반선의 노량해전 이전 상황 45
건조 상황을 보고한 내용에 병선은 양호( 兩 湖 ) 의 민력( 民 力 ) 이 이미 고갈되어 더 만들도록 독촉할 수가 없는데 수군이 이미 40여 척을 만 들었다 고 하였다. 이 내용은 고하도에서 고금도로 이동하기 전에 보 고된 것이다.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은 당사도 어외도 칠산 법성포 홍농 위도 고군산도로 진을 옮긴 것을 알 수 있는데 이렇게 자주 진을 자 주 옮기게 된 것은 조선 수군의 형편이 위태롭고 다급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렇지만 일본군이 계속해서 전투를 하지 않은 것은 전투의 화신 같은 조선 수군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감 때문에 전의를 상실했을 것이고 명량해전에서 보았던 전략 전술은 상상을 초월하였기에 감히 단 순하고 쉽게 판단하여 전투에 임하기에는 일본군의 사기가 저하되어 있 었던 것이다. 전투는 전력도 중요하지만 정신적인 요소도 전력을 뒤 덮 을 수 있는 것이다. 1597년 10월 3일부터 이순신은 고군산도에서 남하하기 시작하여 법 성포 어외도 해남 좌수영에 도착하였다가 10월 11 일에 발음도( 팔 금도 또는 장산도라고도 함) 로 옮겼으나 10월 29 일에 다시 보화도( 고 하도) 로 진을 옮겨 전선을 건조하고 군량미와 병력을 확보하는데 전력 을 기우렸다. 1598년 2월 17일에 다시 고금도로 진을 옮긴 것이 노량 해전 전까지 이순신 전선의 본 진영이었다. 선조실록 1598년 3월 18 일 기록에 당시 보화도에서 고금도로 진을 옮긴 것과 고금도가 군사적 으로 요충지라고 하였다. 우리 수군은 멀리 나주 경내의 보화도에 있으므로 낙안과 흥양 등의 바다 에 출입하는 왜적이 마음 놓고 마구 돌아다녀 매우 통분스럽습니다. 그리고 바람이 잔잔하니 이는 바로 왜적이 소란을 일으킬 때이므로 2월 16일에 여 러 장수들을 거느리고 보화도에서 바다로 나아가 로 진을 옮겼습니다. 46 이순신과 노량해전 17일에 강진 경내의 고금도 고금도 역시 호남 좌우도의 내외 바다를 제어할 수 있는 요충지로 산봉우리 가 중첩되고 후망( 堠 望 ) 이 잇대어져 있어 형세가 한산도보다 배나 좋습니다. 남쪽에는 지도가 있고 동쪽에는 조약도가 있으며 농장도 많지만 직업을 갖지
않은 사람도 거의 다. 라 적고 있다. 1,500 여호나 되기에 그들로 하여금 농사를 짓게 하였습니 고금도로 진을 옮긴 후로는 큰 접전이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만 3 월에 장흥에 주둔하고 있는 적군이 인근을 돌아다니며 살육과 노략질을 하므로 이순신은 녹도 만호 송여종에게 군사를 이끌고 가 무찌르게 한 것과 가까운 바다까지 몰래 들어와 고기를 잡던 왜선 격파한 것 정도이지 규모가 큰 전투는 없었다. 이때 이순신의 수군은 16척을 모조리 8천명이나 되었는데 그동안 이순신은 군비와 군사를 보완하는데 최선을 다한 것으로 보인다. 징비록에도 이순신에 게는 이미 군사 8 천명이 있어서 고금도에 나아가 주둔하였다 라 기록 하고 있는데 명량해전 때 13척의 전선과 2천명도 되지 않은 군사가 갑 자기 증가된 것은 그동안 이순신은 꾸준히 수군을 확충하였다는 것을 여러 문헌에서도 나타난다. 선조실록 1598년 10월 12일에 수군이 7,328 명이라 기록하고 있어 과장된 숫자가 아님을 알 수 있다. 명량해전 이후 수군 재건은 아주 중요한 일이었기에 급진적으로 활발 하게 움직이는데 군사들이 먹을 군량미와 전선, 무기였다. 군량미를 조 정의 도움 없이 해결하기 위해 이순신은 해로통행첩( 海 路 通 行 帖 ) 을 발 행하여 크고 작은 배들에게 쌀을 받고 통행첩을 발행하니 군량도 확보 되었고 어민들도 마음 놓고 고기를 잡아 생계를 꾸려 나가게 되니 서로 이익이 되었다. 상세한 기록이 징비록에 쓰여 있다. 이순신에게는 이미 군사 8천여 명이 있어서 고금도로 나아가 주둔하였는 데 식량이 궁핍할 것을 근심하여 해로통행첩을 만들고 명령하기를 3 도( 경 상 전라 충청) 의 연해를 통행하는 공사( 公 私 ) 선박으로 통행첩이 없는 것 은 간첩선으로 인정하고 통행할 수 없게 한다 고 하였다. 그리하여 난을 피 하여 배를 탄 사람들은 다 와서 통행첩을 받았다. 이순신은 배의 크고 작은 차이에 따라서 쌀을 바치고 통행첩을 받게 하였는 데 큰 배는 3 섬, 중간 배는 2 섬. 작은 배는 1 섬으로 정하였다. 이때 피란하는 사람들은 재물과 곡식을 다 싣고 바다로 들어오는 까닭으로 쌀 바치는 것을 노량해전 이전 상황 47
어렵게 여기지 않았으며 통행을 금지하는 일이 없는 것을 기뻐하였다. 그래 서 10여일 동안에 군량 1 만여 섬을 얻었다 ( 是 時 舜 臣 巳 有 軍 八 千 餘 人 進 駐 古 今 島 患 乏 糧 作 海 路 通 行 帖 令 曰 三 道 沿 海 公 私 船 無 帖 者 以 奸 細 論 母 得 通 行 於 是 凡 避 亂 乘 船 者 皆 來 秀 帖 舜 臣 以 船 大 小 差 次 使 納 米 受 帖 大 船 三 石 中 船 二 石 小 船 一 石 避 亂 之 人 盡 載 財 穀 入 海 故 不 以 納 米 爲 難 而 以 通 行 無 禁 爲 喜 旬 日 得 軍 糧 萬 餘 石 ) 피란민들은 신변을 보호 받기 위해 이순신 전선을 따라 다녔는데 그 들은 재물과 곡식을 모두 배에 싣고 다녔기 때문에 해로 통행첩으로 군 량이 해결되었으나 장기적인 해결책이 아니라 둔전을 경영하였 고 소금 을 관리하고 판매하면서 군량을 마련하기도 했다. 군량은 해결되었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전투에 반드시 필요한 무기와 대포 제작과 전선( 판옥선) 건조이다. 징비록에 이순신은 백성들이 가 지고 있는 구리, 쇠를 모아다가 대포를 주조하고 나무를 베어다가 배를 만들어서 모든 일이 잘 추진되었다. 이 때 병화를 피하려는 사람들이 모두 이순신에게 와서 의지하여 집을 짓고 막사를 만들고 장사를 하며 살아가니 이들을 성 안에 다 수용할 수가 없었다( 又 募 民 輸 銅 錢 鑄 大 砲 伐 木 造 船 事 事 皆 辨 遠 近 避 兵 者 往 依 舜 臣 結 盧 造 幕 販 賣 爲 生 島 中 不 能 容 ) 라 하였다. 전쟁의 피해자는 역시 힘없는 백성들이다. 백성들은 의지할 곳은 오 직 이순신이 지휘하는 군영지역이기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모여들기 시작했고 임시로 거주할 수 있는 막사를 칠 수 있는 자리조차 없을 정 도이니 백성을 사랑하고 아끼는 이순신은 밀려드는 수많은 인파를 보면 서 몹시 괴로워했을 것이고 누가 감히 헤아릴 수 있을까? 48 이순신과 노량해전 보호하고 수용하지 못한 이순신의 마음을 한편 바다에서의 전투는 전선이 중요한데 고금도 수군기지 설치 이후 5 개월 동안 건조한 판옥선의 수는 점차적으로 늘어났다. 1598년 10월 12 일 선조실록에 수로의 중국 군사는 1만9,400명이고 우리 군사는 7,328 명 이라 하였다. 판옥선의 정원이 125명으로 본다면 수군 7,328명을 한척 당 125명으로 나누니 58 척 정도가 된다. 58척 전선의
숫자는 고금도로 진을 옮길 때 15척이었고 43 척은 고금도로 이진( 移 陳 ) 하기 전에 건조되었다고 보아진다. 그래서 부속선 등을 포함하여 80 여척이 노량해전에 임했던 것이다. 노량해전에 출전하기에는 작은 규모지만 군량미 확보와 무기, 전선이 어느 정도 준비가 된 셈이다. 1598년 7월 16일에 고금도의 조선 수군에게 임진왜란 사상 처음으 로 명나라 전선이 합류되어 조 명 연합 함대가 구성되었다. 그런데 연합함대가 편성하기 전까지 명군은 조선의 장수와 군사를 마 음대로 하였고 그 횡포가 심할 정도였다. 심지어는 조선 관원까지 동물 과 같이 취급하였으니 다른 횡포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울 정도였을 것 이다. 징비록에 도독 진린과 명나라 군사들의 과격한 행동을 적고 있 다. 명나라 수병 도독 진린이 나와서 남쪽으로 고금도에 내려와 이순신과 함 께 군사를 합세하게 되었다. 진린은 성질이 사나워서 남과 거슬리는 일이 많 으므로 사람들은 그를 두려워하였다. 임금께서는 그를 내려 보낼 때 청파 들 판까지 나와서 전송하였다. 나( 유성룡 ) 는 진린의 군사가 고을의 수령을 때리 고 욕하기를 주저하지 않고 새끼줄로 찰방 이상규의 목을 매어 끌고 다녀서 얼굴이 피투성이가 된 것을 보고 통역관을 통하여 풀어 주도록 하라고 권하 였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 天 朝 水 兵 都 督 陳 璘 出 來 南 下 古 今 島 與 舜 臣 合 兵 璘 性 暴 猛 與 人 多 忤 人 多 畏 之 上 餞 送 于 靑 坡 野 余 見 璘 軍 人 毆 辱 守 令 無 忌 以 繩 繫 察 訪 李 尙 規 頸 曳 之 流 血 滿 面 令 譯 官 勸 解 不 得 ) 진린 군사가 조선 관리의 목에 새끼줄로 매어 끌고 다녔다는 것은 얼 마나 조선을 무시 하였으면 이런 행동을 하였고 이런 행동을 보고도 진 린은 당연한 일이라 생각했지만 조선 조정에서는 감히 말 할 수가 없었 다. 유성룡의 진언에는 아랑곳 하지 않았다. 정말 통분할 일이다. 진린은 성격이 매우 난폭하고 오만무례한 자였다. 그는 다른 명나라 장수들과 마찬가지로 무지하고 무식한데다가 헛된 자만심에 가득 차 강 노량해전 이전 상황 49
화도에서부터 조선 백성과 관리들을 짐승 다루듯 했다. 그러나 위급한 조선을 도우려고 파견된 군사인 만큼 조정 대신들은 진린을 특별히 잘 대접하여 화를 내지 않게 하라는 당부에 이순신은 군사들로 하여금 사 슴과 멧돼지와 물고기들을 많이 잡아 오도록 하고 술도 넉넉히 준비하 여 풍성한 환영 잔치 준비를 했다. 이순신은 대의( 大 義 ) 를 위해 자존심을 버리고 오직 나라를 구해야 한 다는 신념으로 거만한 진린을 접대하기로 했다. 그래서 진린이 도착했 다는 소식을 듣고 소홀함이 없이 극진히 접대를 하였던 것이다. 진린의 배가 바다로 들어올 때 이순신은 군사적 위의를 갖춰 멀리까지 나 가서 맞아 들였다. 그리고 진린이 도착하자 그 군사들을 크게 대접하니 여러 장수들이 흡족하게 여기지 않은 사람이 없었다. 그래서 사졸들은 서로 이야 기하기를 이순신은 과연 훌륭한 장수다 라 하였다. 진린도 마음속으로 매 우 기뻐하였다 ( 璘 船 入 海 舜 臣 備 軍 儀 遠 迎 凱 到 大 享 其 軍 諸 將 以 下 無 不 沾 解 士 卒 傳 相 告 語 曰 果 良 將 也 璘 亦 心 喜 ) 고금도로 군영이 옮겨진 후에도 계속적인 군선 축조와 군량과 병력의 모집은 중요한 과제였다. 이순신은 밤낮으로 걱정만 한 것이 아니라 확 충을 위해 가능한 최선을 다하였고 끈질긴 노력으로 어느 정도 전선을 비롯하여 군사까지 증가되었고 확보가 되었던 것이다. 선조실록 기록을 보자. 선조33 년(1600) 1 월에 의하면 좌의정 겸 사도체찰사 이항복( 李 恒 福 ) 이 남부지방으로 떠나기 전에 어전에서 나눈 대화 중 당시 전선의 척수가 삼도( 三 道 ) 를 합해 80 여척이라고 했다 짧은 기간에 50 이순신과 노량해전 80여척의 전선을 확보한다는 것은 이순신의 지휘아래 군 사들이 단결하지 않으면 이룰 수 없는 성과물이다. 마지막전투인 노량 해전에 참전했던 전선 수를 정확하게 모르는데 이때 축조된 전선의 수 가 정확하지는 않지만 노량해전에 참가한 전선 수로 보고 있다. 병력의 규모도 마찬가지이다. 전체 전선을 80척으로 볼 때 전선에 승 선할 병력을 척당 125 명으로 계산한다면, 1만 명이고 부속된 선박에
승선한 인원까지 합하면 1 만 여명이 넘었다. 이 기준치는 임진장초 만 력22 년(1594) 3월 10일자 계본에 의한 것이데 전선110척일 때 사격 ( 射 格 ) 이 모두 1만7천명이었다고 하니 약간 과장된 수치이기는 하지만 1 만 여명은 이것과 비교한 대략적인 수치인 것이다. 군량은 통제사 이전 시절처럼 둔전을 시작하였는데 고금도와 여러 주 변에 옛날 둔전이었던 곳이 있어 많은 사람들이 모여 생활하므로 예전 처럼 성공적으로 군량을 확보할 수 있었다. 그리고 염전에서 생산된 소금도 관리하고 판매하여 군량을 마련하는 데 일조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이충무공전서 권13. 부록5 기실 상편에 기록되어 있다. 자염무판 수삭지내 득곡수만석 장사운집 군성복진( 煮 鹽 貿 販 數 朔 之 內 得 穀 數 萬 石 壯 士 雲 集 軍 聲 復 振 ) 이라 하였다. 이순신은 노량해전을 위해서가 아니라 7년 전쟁이 곧 마무리가 된다 는 것을 예언이라도 했듯이 유비무한의 정신으로 군사들의 임전무퇴 정 신을 고취시키면서 장비 점검과 준비 뿐 아니라 언제 어디에서나 임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을 확보하고 있었던 것이다. 2) 명나라 진영 명나라는 정유재란 이전에 이미 파병을 결정한 상태였다. 그런데 칠 천량해전에서 패하고 연이어 남원과 전주가 함락되자 위급함을 알고 급 히 실행에 옮겼던 것이다. 정유년(1597) 에 파병된 명나라 수군은 계금 ( 季 金 ) 이 거느린 절강( 浙 江 ) 수병 3천2 백 명이 전부였다(( 季 金 ) 以 欽 差 統 領 浙 直 水 兵 遊 擊 將 軍 署 都 指 揮 僉 事 領 舟 師 三 千 二 百 丁 酉 十 月 由 海 路 到 古 今 島 露 梁 之 捷 斬 獲 頗 多 乙 亥 四 月 回 去 ) 라고 기록하고 있다. 명나라 수 군의 본격적인 파견은 무술년(1598) 1월 20 일경 복건( 福 建 ) 의 수병이 파견되면서 시작되었다. 이것은 그간 실추된 명나라의 위신 회복과 전 쟁을 조속히 끝내려는 방법으로 사로병진 작전을 계획하였다고 볼 수 있다. 진린 도독과 군사 5천명은 4월 27 일에 요동( 遼 東 ) 에 도착했고 서울 에 들어 온 것은 6 월 중순이었다. 진린의 수군은 잠시 서울에서 머물다 노량해전 이전 상황 5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