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 구술사 대담 :구술자+연구자 다시 만나다, 다시 말을 섞다 구술자 박순녀 + 연구자 박선애 대담 정작 원로 예술인들은 구술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할까. 특히나 구술채록 작업에 직접 관 여했던 원로 예술인들은 어떤 평가를 내리고 있을까. 한국사회에서 거의 시도되지 않은 작업이었던 만큼 구술 당시에 미처 전하지 못한 이야기는 없을까. 이에 원로 작가 박순녀 선생과 연구자 박선애가 재회했다. 구술자와 연구자로 만난 지 꼭 3년 만이었다. 오랜만 에 얼굴을 마주한 두 사람은 예전보다 한결 더 편안하게 풀어진 모습으로 허심탄회하게 이야기를 해나갔다. 3년 전 함께 해나갔던 구술사 작업에 대한 감회와 논평, 못다 한 이야 기까지. 정리 박선애 예술 구술사 연구자 사진 박정희 104
박선애 안녕하세요, 선생님. 선생님과 제가 만나서 구술채록을 진행했던 게 2005년 9월이었는데, 벌써 3년이 흘렀어요. 박순녀 그러게요. 박선애 처음 뵈었을 때 연세에 비해 무척 고우시다고 생각했었는데, 오늘도 건 강하신 모습 뵈니 제 마음이 무척 좋네요. 사실 3년 전 선생님 자택에서 처음 뵙고 작품 분위기와 선생님 모습이 무척 다르다고 느꼈어요. 물론 본격적으로 면담하며 얼마 안 가 그 느낌이 틀렸다는 걸 알게 됐지만 요. 조용하신 것 같아도 힘이 있고 논리적인 모습이 채록이 끝난 후에 도 오랫동안 제 기억 속에 남았거든요. 이렇게 좋은 모습을 다시 뵐 수 있어서 너무 반가워요. 선생님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어요? 박순녀 뭐, 그때나 지금이나, 그저 그래요. 변함없이 늘 그래요. 박선애 제가 2005년에 선생님을 첫 구술자로 모셨던 이유는 1960, 1970년대에 왕성하게 작품 활동을 하셨고, 남성 문인 못지않은 날카롭고 비판적 시 각을 작품 속에서 보여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기존 문헌기록에서는 선 생님에 대해 제대로 서술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어요. 이런 점들이 구술사 연구의 목적과도 맞았고요. 게다가 선생님께서도 구술사 연구 > 대담 구술자+연구자 1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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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 취지를 잘 이해하시고 선뜻 허락해주셔서 진행이 잘 이루어졌던 것 같아요. 사실 많은 문인들이 글로 자신의 삶과 생각들을 많이 표현하기 때문에 구술 작업을 꺼리거든요. 특히나 생애사 구술이라고 하면 주 저하는 경우도 꽤 있고요. 그러니 선생님께서 연구자의 첫 부담을 상당 히 덜어주신 거지요. 선생님 덕분에 그 이후에 다른 원로 여성 문인들의 구술 허락도 어렵지 않게 받을 수 있어서 더욱 감사했어요. 오늘 이 자리는 그동안 구술채록에 참여해주신 원로 문인께 구술채록 을 마친 후의 소감과 못다 한 이야기를 들어보는 자리예요. 무엇보다 원로 여성 문인의 구술사 연구에 많은 도움을 주셨던 박 선생님과 말 씀을 나누는 것이 뜻깊을 것 같아 자리를 마련하게 되었어요. 선생님께 서 구술 작업을 마치고 어떤 느낌이셨는지도 무척 궁금하고요. 다섯 번 에 걸친 구술채록 과정이 힘들진 않으셨는지, 그 당시 느낌이나 시간이 좀 흐른 뒤의 소감을 얘기해주세요. 박순녀 구술채록이라는 게, 제가 글을 써오면서 보니 이런 게 있더라고요. 글 은 작가가 아니다 이런 주장도 있고, 글은 곧 작가다 이런 주장도 있 더라고요. 전에는 내가 그거에 대해 판단을 못하겠더라고. 글이 곧 작 가인지 아닌지. 당시엔 깊이 생각할 그게 아니었거든요. 작가들이 그때그때 무슨 이슈가 생기면 인터뷰도 하게 되고, 앙케이트 도 좀 하고 그러잖아요. 물론 난 앙케이트 같은 건 일체 해본 일이 없어 요. 그런데 인터뷰는 좌담회니 뭐니 이런 형태로 그럭저럭 하잖아요. 그 럴 때 대개 작가들은 그 지면의 성격이나 기회에 따라서 가만히 그냥 넘어가자, 혹은 이건 그래도 어느 정도 선에서는 말하자 뭐 그런 식으 로 마음먹죠. 또 프라이버시는 노출되는 게 자기한테 별 도움이 안 돼 요. 그러니 이런 작업에 응하느냐, 응하지 않느냐, 그건 자기 스스로 정 해야겠죠. 박순녀 함남 함흥에서 태어났다. 원산 여자 사범학교, 서울대 사범대학 영어과를 졸업했다. 1960년 단편 <케이 스 워커>로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입선하고, 1964년 단편 <외인촌 입구>로 <사상계>의 신인상을 받으며 등단했다. 주요 작품으로는 <어떤 파리>, <시간의 기둥>, <아이 러브 유>, <기쁜 우리 젊은 날> 등이 있다. 1970년 현대문학신인상, 1988년 제 14회 한국소설문학상, 1999년 제15회 펜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 대담 구술자+연구자 107
내가 이 사업에 응했을 때는 나름대로 나한테도 도움이 되고, 그쪽에 서 하시는 분들도(아르코예술정보관) 이런 자료를 수집하는 게 참 좋 을 것 같아서 하기로 한 거예요. 일단 하기로 했으니까 내가 하기로 한 만큼 여기서는 나를 드러내자 그런 생각을 했어요. 이제 날 드러낼 수 있는 시기가 온 것 같고. 아마도 그 전이었다면 나도 이런 주제는 싫고, 이런 건 좀 덮어두자 이러기도 했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난 그런 게 거 의 없거든요. 이건 덮자, 이건 강조하자, 이런 걸 완전히 떠나버렸어요. 그래서 난 그때 굉장히 편하게 했어요. 생각이 안 나서 말을 못한 것은 있을지언정, 뭐이든지 내가 못 할 말이 없더라고요. 굉장히 편하게 얘기 했어요. 그렇게 편하게 얘기하다보면 약점이 나오지만. (웃음) 박선애 안 그러셨어요. (웃음) 저희는 편안하게 들었어요. 선생님. 박순녀 세월이 흘러버리니깐 사람이 그렇게 되는 것 같아요. 편안하게 되고, 욕 심이 없어지는 거죠. 욕심이 있으면 걸리는 게 있으니깐 방어하고 자르 고 그러죠. 박선애 그러실 거예요. 박순녀 그게 전혀 없다는 건, 내가 말하자면 현역에서 완전히 물러났다는 얘기 가 되는 거예요. 그건 작가로서 굉장히 바람직하지 않은 거죠. 박선애 아니 그건. 그런데 저는 선생님 말씀을 들으면서 원래 선생님의 성품 이 그러신 것 같다고 느꼈어요. 남한으로 홀로 용감하게 내려오신 것도 그렇고, 항상 주관이 분명하시고, 또 삶을 투명한 태도로 살아가시고자 했던 모습 같은 것, 그런 것들을 구술 내내 느낄 수 있었거든요. 많은 얘기를 해주셨지만, 특히 마지막 구술 면담에서 고향 함흥의 기억 과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을 강조해서 표현하셨던 게 기억에 남아요. 그 때 앞으로 가장 쓰고 싶은 작품이 어머님에 관한 거라고 하셨는데, 구 체적인 작업을 좀 진행하고 계신가요? 박순녀 그게 다 놔버렸어요. 포기해버렸어요. 그게 진짜 내 집필 생활에 있어 서, 후반에 와서는 나한테 제일 큰 주제였어요. 그래서 내 어느 작품에 서는 꿈에서 이북을 가기도 했어요. 길게 쓰진 않았지만, 꿈에서 내가 (어렸을 때) 다녔던 다리를 가고, 내 동네에 가고. 그런데 뭐가 있냐 하 면은, 심리적으로 이제 우리 어머니가 돌아가셨다고 생각하니깐, 이제 는 아주 그렇게 절실하게 오지 않는 거예요. 참 그거 이상하더라고요. 어머니가 있다고 생각할 땐 꿈에서라도 어머니한테 접근하고, 진짜 가 108 예술 구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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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하면 한번 가고 싶었어요.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고 싶은 거야. 그런 데 지금은 이북에 대해서 그렇게 간절한 뭐가 없어졌어요. 가족 이야기 를 떠나서 6.25라든지 그렇게 확대해서 쓸 수는 있죠. 그런데 그렇게 작 품화하려면 내가 힘이 너무 부쳐가지고서. 박선애 해방 후에 선생님께서 공부하기 위해 가족을 북한에 남겨두고 남한으 로 내려오시는 이야기는 정말 드라마틱하잖아요. 그 얘기를 작품으로 쓰시면 재미있을 것 같다는 생각은 예전에도 했었어요. 선생님처럼 월 남하신 문인들의 경우, 작품의 소재나 주제가 항상 거기에 가 있더라고 요. 그것이 늘 창작의 동력이 되는 것 같아요. 개인적으로는 이데올로기나 분단 문제 외에도, 김이석 선생님과 사별 하시고 혼자 가정을 돌보며 느낀 여성 문제에 관해 말씀하신 것도 참 인상 깊었어요. 또 젊은 비평가들의 애정 어린 평에 대해 고마움을 표현 하셨던 것이 기억나는데요. 특히 김현 선생님이 선생님의 작품을 평하 면서 계속 혼자서 이런 글을 쓰시길 했다고 하셨는데, 김 선생님 말 씀대로 혼자서 글 쓰며 살아오시기를 잘했다 싶은지요? 박순녀 아니에요. 그런데 그 무렵 내가 굉장히 열심히 썼어요. 진짜 내가 가지고 있는 역량을 모두 전력투구해서 현대문학상 을 탔어요. 그때는 현대문 학상이라는 게 있는지도 몰랐어요. 상을 탄다는 개념이 나한테는 없었 어요. 현대문학상 딱 타니깐 그때 뭐인가 점 하나가 찍힌 것 같더라고 요. 내 스스로가 야~ 내가 굉장히 열심히 했지 이런 게 있는 거예요. 내 가 나한테 상을 줘야 하지 않는가. 뭐 작품을 잘 썼다, 못 썼다를 떠나 서. 내가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것에 대해서 내 스스로가 상을 줄 만하 다. 나는 좀 놀아도 된다. 이런 마음이 생기더라고요. 그러니 사람이 풀 어지더라고요. 진짜 그때 딱 풀어져가지고 김현 씨가 들으면 굉장히 유 감이지만 (웃음) 딱 풀어져가지고 흐트러지더라고요. 또 흐트러진 데에 대한 자기변명을 하는 거죠. 사람에겐 휴식도 필요하다. 그러면서 고 비를 자꾸 넘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계속 긴장한 상태로 작품을 썼으 면 좀더 나은 작품을 쓰지 않았을까, 하는 반성을 할 때도 있어요. 난 딱 쓰기 시작하면 일체 활자를 안 읽었어요. 신문도 안 읽고 다른 사람 작품도 일체 안 읽고, 그 작품을 하나 끝내놓고 나면 그 다음에 비로소 다른 활자도 눈에 들어오고 그랬는데. 박선애 완전히 몰입해서 작품을 쓰셨구나. 110 예술 구술사 >
박순녀 완전히 집중을 했는데. 진짜 항상 대기하는 상태에서, 밤에 자다가도 메모하고, 작가들이 거의 다 그럴 거예요. 아무튼 우리 아이들이 좀 불 쌍한 게, 밤에 내가 책상 앞에 있으면 우리 애들이 숨을 크게 못 쉬어 요. (웃음) 나중에 그게 미안하더라고요. 그렇게 내 모습이 비장한 거예 요. 그러니깐 당시엔 9시에 뉴스 한다는 거도 모르고 살았다니까요. 박선애 현대문학상 수상작인 <어떤 파리> 그 작품은 워낙 많은 사람들에게 주 목을 받았고, 일본에서도 번역되어 발표되었던 걸로 알고 있어요. 박순녀 그건 이렇게 생각해요. 김윤식, 김병익 씨가 내 작품을 굉장히 많이 평 했어요. 그런데 김윤식 씨는 뭐랄까, 그 어떤 특이한 느낌보다는 종합 적으로 괜찮다 였고, 김병익 씨나 김현 씨는 저 여자한테 뭐가 있다, 해 서 나한테 독특한 것을 끄집어내고 했어요. 자기 나름으로 느껴가지고 나를 좋아했던 거예요. 그분들이 내 작품을 그렇게 취급하지 않았으면 난 만날 그저 그랬을 거예요. 그런 생각이 들어요. 박선애 평론가들의 몫이 중요하다는 말씀이군요. 박순녀 그때는 한 달에 한 번씩 신문에 <월평> 같은 거 나오는데, 딱 보면 내가 알 수 있어요. 다른 평론가들은 다른 데서 언급하니깐 언급하지 않을 수 없어서 나에 대해 쓰는 거예요. 그런 평론가들한테는 말하자면 줄 을 서야지 평론을 해주는 거고. (웃음) 만일 다른 평론가들(김윤식, 김 병익, 김현 등)이 나를, 말하자면 취급해주지 않았다면, <월평> 쓰는 사 람들 중엔 내가 작품을 쓴다는 것도 전연 파악하지 못하는 평론가들 도 많았을 거예요. 요행히 좋은 평론가들이 평론을 해주었어요. 아무런 뭐도 없이 정말 젊은 사람들이 해주니깐, 굉장히 고맙죠. 그런데 나중에 좀 실망했을 거야. 내가 기어 들어가서 작업을 잘 안하니깐. 박선애 선생님께서 구술 과정에서 많이 얘기하셨던 부분 중 하나가 남편 분이 신 김이석 선생님에 관한 거예요. 두 분이서 홍제동 문화촌에서 생활하 신 거, 김 선생님과 친하셨던 시인 김수영과 화가 이중섭 이야기도 무척 흥미로웠고요. 김이석 선생님을 만나신 것을 생애 최고의 행운이라고 표현하셨는데 그 마음 여전히 변함없으세요? 박순녀 그러니깐 그이가 이를테면 나한테 없는 문화의 질을 높여줬어요. 나는 기본적으로 말하자면 그래요. 내가 어떤 열정이 있고 어떤 꿈이 있고 내 나름대로 있는데, 그게 그냥 엮어지지 않은 채로 있는데, 그 사람은 방 향이 있었던 것 같아요. 방향이 딱 있어서 삶의 질, 문화의 질 그런 걸 높 > 대담 구술자+연구자 111
여준 거지요. 내 음악적 감수성에도 영향을 주었어요. 박선애 선생님, 그럼 다섯 번 구술채록 과정에서 혹시 못다 한 얘기가 있으시면 이번 기회에 이야기해주세요. 박순녀 그런 건 하나도 없어요. 2~3일 전에요, 어느 신문에 나왔는데, 일본 작 간데 너무 유명한 일본 작가이기 때문에 이름을 안 댈게요. 그 작가가 육십 세 정도 될 거예요. 기사를 봤을지 몰라. 그 작가가 마라톤을 했 다 이거예요. 마라톤을 평생 했다 이거예요. 자기 건강을 위해서. 그 사 람은 뭐를 쓰려면 몸을 만들고 그랬다는 거예요. 외국에 나가도 반드 시 마라톤을 했다는 거예요. 내가 그 기사를 읽고 아주 감탄을 했어요. 내가 너무 감탄을 했는데, 한 10년 정도 전부터 작가가 글 쓰는 건 진짜 체력하고의 싸움이라 생각했어요. 내가 뭐를 쓰려고 생각하면 혈압이 막 오르는 거예요. 그거를 의식하기 시작한 게 한 10년이 돼요. 그러니 깐 겁이 나는 거예요. 의학적으로 혈압의 제일 큰 원인이 스트레스라는 걸 그때까지는 몰랐는데, 스트레스가 제일 큰 원인이라고 그래요. 박선애 김이석 선생님도 혈압으로 돌아가셨잖아요. 박순녀 글쎄 말이에요. 그때 내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는데. 이젠 내가 뭔가 시작하려고 하면, 어떨 때는 핑계 같다는 생각이 스스로도 드는 거예요. 이걸 하면 혈압이 높아질까? 이런 생각이 나면 실제로 혈압이 오르는 거예요. 그러니깐 한 10여 년 전부터 건강에 대해서 자신이 없는 거예요. 그런데 일본 작가가 마라톤을 지금까지 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면서 이 건 차원이 다르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이 사람은 글을 쓰기 위해서 젊 었을 때부터 자기 몸에 그렇게 투자를 했구나. 운동선수들만 운동을 하는 게 아니라, 우리 작가들도 앞으로는 진짜 작품을 꾸준히 하려면 체력을 가져야 된다는 걸 생각하게 됐어요. 예전엔 체력 같은 건 나이 먹으면 자연스럽게 떨어지는 거다, 그 정도로만 생각했어요. 자기가 관 리해야 하는 거라는 걸 알게 된 거죠. 내가 그걸 못했어요. 박선애 선생님, 혈압이 좀 높으시구나. 겉으로 뵙기엔 괜찮으신 것 같아서 특 별한 지병이 없으신 줄 알았어요. 요즘에 모임 자리에는 자주 나가시나 요? 선생님의 일상생활 좀 얘기해주세요. 박순녀 예전에는 글 쓰는 거 외에는 다른 거 없었어요. 문단에서 같이 뭐 하는 것도 거의 안했어요. 이제 내가 매진할 그게 줄어버렸잖아요. 그래서 취 미생활을 많이 하는 거죠. 문단 친구들도 돌보게 되고, 어떤 문학 모임 112 예술 구술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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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데서 우리 같은 원로를 원하면 원로로서의 몫, 기왕 할 수 있으면 그 몫이라도 하자 그런 맘이 돼요. 또 알음알음으로 아무런 목적 없이 모여온 하나의 모임이 있는데, 10년 정도 계속되니깐 거기 사람이 소중해지는 거예요. 옛날에 같이 글 썼고, 다 문단에 있었던 분들인데. 그저 뭐 시가 좋고, 글이 좋아서 모임이 되 었는데, 지금은 스무 명 정도 돼요. 두 달에 한 번씩 모이는데, 문집 같 은 거 내야 하지 않을까 이런 얘기를 해요. 박선애 최근에 발표하신 작품이 있으면 소개해주세요. 박순녀 요 한 3~4년은 안 썼어요. 요새 쓰는 건 어떤 글이냐 하면, 우리 때의 문 단이라든지, 말하자면 무슨 새삼스럽게 난 누구인가? 그런 걸 써달라 고 그래요. 그건 그렇게 부담되는 글은 아니니깐, 그리고 내가 걸어온 길이니깐. (웃음) 그거 말곤 작품을 못 썼어요. 박선애 구술채록 연구에 직접 참여해보시니까, 창작하는 입장에서 구술 작업 이 문학사나 예술사 연구에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하세요? 박순녀 그게, 말하자면 이런 작업들이 작가 연구가 되는데, 그걸 이제 국가적 차원에서 진행하고 있는 점은 바람직하다고 봐요. 해방 이후 등단한 작 가들에 대한 것들을 이렇게 정리하는 단계에 와 있다는 걸 느껴요. 좋 은 프로젝트인 거 같아요. 박선애 오늘 인터뷰 서두에서도 선생님께서 글은 작가가 아니다, 글은 작가다, 이런 것들을 생각하게 됐다고 하셨는데, 저 역시 여러 문인 선생님들과 구술채록 연구를 하면서 문학 작품과 작가 연구에 대해 다시 한 번 깊 게 생각하는 계기가 되었어요. 박순녀 그게 필요할 거예요. 말하자면 작품이 어떻게 창작되었는지 알 수 있죠. 작가 연구는 많이 될수록 좋은 거죠. 박선애 작가 연구이면서 작품 연구도 되지요. 박순녀 그렇죠. 절로 그렇게 되는 거죠. 필연적으로 작가하고 작품이 같이 이렇 게 묶여서 배경 같은 것들이 되죠. 박선애 저는 이 연구를 하면서 선생님 같이, 구술자로 참여하신 문인들에겐 이 작업이 어떤 의미가 될까 궁금했었거든요. 혹시 이 연구에 참여하시고 불편한 마음이 생기지는 않으셨는지도 알고 싶고요. 박순녀 저는 그런 게 전연 없었어요. 그런데 나혜석 같은 분의 작가 드러내기 작업의 경우, 유족들이 꺼린다고 들었어요. 저는 그분을 자세히 모르거 114 예술 구술사 >
든요. 거의 몰라요. 그러나 나혜석 같은 분들의 구술 작업은 해야 할 거 같아요. 그 사람이 어떻게 살았고 뭐를 했었는지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유족들이 아직도 그렇게 거부한다는 것 은 굉장히 충격이에요. 그건 뭐냐 하면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잘못된 잣대들 때문이거든요. 자유스럽게 해줘야 할 것 같아요. 그 사람도 얼 마나 힘들게 살았겠어요. 잣대대로 살 수 없는 사람을 그렇게 매도해선 안 된다고 봐요. 그동안 많은 부분 짓밟고 그랬으니깐, 작가(나혜석) 연 구 작업은 해야 될 것 같아요. 얼마 전에 버지니아 울프의 생애를 다룬 영화도 나왔잖아요. 얼마나 좋아요? 이런 구술자료를 비롯한 작가들 에 대한 자료를 잘 활용해서 또 다른 예술 형태로 조명될 수 있다면 더 욱 좋지요. 최정희 선생님 같은 분에 관한 구술채록을 해봐도 좋을 것 같아요. 최 선생님 주위에 있었던, 최 선생님의 추천을 받았던 문인들이나 지인들 의 구술을 받아서 최 선생님을 조명해보는 작업도 좋을 듯하네요. 그분 이야기는 참 재미있을 거예요. 인간 최정희라는 사람 자체가 재미있거 든요. 박선애 구술채록 연구는 연구자의 의지로만 되는 것이 아니고, 구술자의 적극 적인 참여가 무엇보다 중요한데, 선생님께서 정말 주체적으로 참여해 주셔서 너무나 감사했다는 말씀 다시 한 번 드려요. 오늘도 이렇게 뵙고 구술채록 이후의 이야기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어요. 3년이 지났는데 도 그때 선생님과 나누었던 마음이 전해져 어제 만나 뵌 것처럼 친근한 마음이었어요. 선생님 앞으로도 건강하시고, 자주 뵐 수 있었으면 좋겠 습니다. > 대담 구술자+연구자 1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