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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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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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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Transcription:

서 평 1) 정희진 엮음 성폭력을 다시 쓴다: 객관성, 여성운동, 인권 (한울아카데미, 2003, 257쪽) 양 현 아 * 이 땅의 여성들이 이름으로 불린 것이 언제부터인가. 출신 가문이나 지역에 따라, 무 슨 씨로, 아니면 무슨 댁으로, 딱히 이렇다 할 가문의 출신도 아닌 대다수 여성들은 흔 히 누구 엄마로 불렸던 것이 그리 먼 옛날의 일이 아니다. 이렇게 불릴 때 그 여성은 출신지의, 남편의, 혹은 자녀에 의해 설명되는 누구 이다. 아니 그 여성은 아직 누구 가 아니고 이름 부쳐지지 않은 무엇 이다. 그래서 오늘날 부상하는 동아시아 페미니즘에서 는 이 지역의 여성들이 언제부터 여성 이 되었는지 또는 이때의 여성이란 어떤 의미인 지를 묻는다. 어쨌든 여성이라는 주체가 누구를 지칭하는지 그 주체성격이 분명하지 않 다면, (법학은 차치하고라도) 어찌 문학에서, 정신분석학에서, 종교에서, 여성은 미스테 리이고 모순이고 블랙박스가 아닐 수 있을까. 하지만 호명과 분류(classification)의 끝언 저리에 닿아있는 느낌은 단지 여성 의 운명만은 아니라고 푸코(M. Foucault) 역시 말하 였다. 인간의 인식, 알 수 있음은 이미 언제나 배제(타자)를 그 안에 내포하는 분류체계 에 기반하므로, 분류와 인식의 체계가 가지는 불완전성은 항상적 운명일 따름이다. 여성 과 같이 너무 가까이에, 너무 많이 있는 타자들은 단지 그러한 운명을 자주 상기시키는 체제의 불안요소들이다. 여성의, 그것도 섹슈얼리티를, 말한다는 것은 알려지지 않은 미스테리를 주체로 삼는 다는 것이기에 호명과 분류체계와 싸워야 하는 일이다. 그래서 오랫동안 정신분석학의 풀리지 않는 숙제가 여성의 섹슈얼리티(feminine sexuality)가 아니었던가. 이 미스테리 가 실정법학과 만나면 무슨 일이 일어날까. 서로 대화를 할 수 있을까. 이 멀고도 가까 운 사이를 탐사하는 것이 법여성학의 과제라고 하겠다. 한국여성의 전화(이하 전화 ; 상 * 서울대학교 법과대학 조교수.

양현아 / 서 평 185 임대표 박인혜)가 기획하고 정희진이 엮은 이 책은, 이런 물음을 가진 이들에게 무척 반가운 것이리라. 이 책은 동 전화 가 기획했던 한국여성인권운동사 1(1999)에 이어 2003년 12월 한국여성인권운동사 2로 출간된 기획물이다. 전화 는 가정폭력, 성폭력을 당하는 여성들의 호소처가 되어온 만큼 여성기층의 감각의 대지와 가까이 맞닿아 있는 단체이다. 매트릭스에서 전화는 다른 경계로 이전하게 하는 매체이듯이, 이 전화 역시 여성들을 다른 현실로 인도하고자 힘겨운 노력을 해 왔다. 엮은이 정희진은 오랫동안 이 단체에서 활동가로 일했고, 현재 이화여자대학교 여성 학과박사과정에 재학 중이다. 가정폭력을 다룬 그의 저서, <저는 오늘 꽃을 받았어요(또 하나의 문화, 2001)>는 그녀의 현장 활동과 이론적 고민을 오랜 시간 달이고 달여 만든 작품으로 이미 이 방면 연구에서 빠질 수 없는 연구서이다. 폭력에 관한 성찰은 사회의 비리 뿐 아니라 인간의 상처에 대해 깨어있어야 하는 것이기에, 저자 또한 오래 아프고 피해생존자와 연구자의 치유를 향하는 노고는 독자를 성숙하게 만든다. 그 정희진 선생 님이 편자임을 보고 심상치 않은 책일 것이라고 직감하였다. 이 책은 주로 2000년대 이후 최근에 발생한 성폭력 사건을 중심으로 해당 사건에 직 접 참여했던 여성단체 활동가, 기자, 연구자들이 쓴 논문으로 엮여져 있다. 평화운동, 성 폭력 가해자 실명공개, 아내폭력, 여자 연예인 비디오 사건, 성희롱, 미혼모, 성매매, 여성 인권 등의 주제를 다룬 여덟 편의 논문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렇듯 구체적 사건을 중심으로 한 공동작업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우선 값지다. 또한 이 책이 전문가와 실 무자, 경험과 이론의 이분법을 문제삼듯이(11-12쪽), 필진들은 활동가이자 이론가이며 스스로 피해자이자 지원자라는 다중적 정체성을 가지고 현장에 있었고 글쓰기를 하고 있다. 이는 필자들이 각 사건 속에서 영역을 넘어선 전방위적 투쟁으로 벌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이 책은 그러한 투쟁의 기록이자 투쟁 속의 깨달음의 보고서라고 할 수 있다. 이 책이 다양한 사건을 다룬 만큼 일반적으로 요약하기보다는 각 논문을 중심으로 그 깨달음을 소개해 볼까 한다. 엮은이 정희진은 <법제화 이후의 여성운동을 위하여>라는 서문에서, 성폭력을 여성 개인 의 동의와 비동의라는 개인 의지로 환원하는 것에 대해 문제제기한다. 즉, 젠더 계 급이 존재하는 현실의 억압을 개인의 의지 문제로 환원하고, 여성과 남성과의 구조화된 경제적 정치적 심리적 억압조건을 무시한 채 순수한 개인 의지로 싫다 와 좋다 를 해석 하는 패러다임에 일침을 놓는다. 이러한 시각은 이 책 전체를 아우르는 틀이 되지 않나 싶다. 남성에게는 사랑고백 행위 혹은 장난이 여성에겐 성폭력일 수 있는 남녀의 차이

186 공익과 인권 제1권 1호(2004) 가 의지로 극복될 수 있는 개별적이고 개인적인 인식 차이인가. 아니라면 체계적이고 제도화된 원리가 성차(sexual difference)를 사회적으로 생산하는 것인가. 이 경우라면 구조화된 성별 차이에 법은 어떻게 개입해야 옳은가. 이어지는 <인권과 평화의 관점에서 본 여성에 대한 폭력>이란 정희진의 글에서는 2002년 미군 장갑차에 희생된 두 중학생을 추모하는 촛불 시위에서 애창된 <Fucking USA>과 기지촌 성매매 여성으로서 미군에게 살해된 고 윤금이씨 사진 전시 분석을 통 해 한국의 평화운동이 남성적 위치에 서 있다고 비판한다. 가부장제 사회에서 여성의 몸은 남성들간의 권력 관계의 표지이자 점령지로 의미가 부여된다. 기지촌 성매매나 정 신대 문제는 남녀관계가 아닌 민족 모순으로 환원되고, 1986년 부천 성고문 사건 은 여 성운동을 포함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여성에 대한 폭력이 아니라 민주화 탄압 운동으 로 인식되었다. 여성에 대한 폭력은 이렇게 여성의 인권보다는 남성의 입장과 이해관계 에 따라 부계가족으로 대표되는 남성 공동체의 이해의 관점에서 이해되었다는 것이다. 국가, 지역 등 공동체의 이름 아래 개인에게 자행된 억압을 덜어줄 수 있는 무기라는 의미에서 인권법이 여성에게 의미를 가지려면 여성주의 인권 법리는 필수적이다. 하지 만 보편화된 인권 개념이 성별 차이 를 어떠한 법리로 포용할 것인가. 여성주의적 인권 운동의 개념을 모색하는 이론서(11쪽)이라고 스스로 의미를 부여하는 본 서에서 이러한 질문은 근본적이다. 가부장제 사회는 여성의 말을 신뢰하지 않는다. 성폭력에 대한 여성의 말은 여성 인 식의 예민함과 정신착란의 결과라고 한다. 성폭력 문제의 가시화는 여성의 말을 믿고 여성을 인식 주체로 간주할 때 가능하다. 이러한 깨달음은 전희경(시타)의 글에서 더욱 유효하다. KBS 노조 간부 성폭력 사건을 다룬 이 논문은 운동사회성폭력뿌리뽑기 100 인위원회 (이하 백인위 )의 회원이면서 피해자들을 지원했고 피해자들과 함께 명예훼손 역고소를 당했던 필자의 뼈아픈 기록이다. 백인위 는 진보를 표방하는 운동사회에서 성 별간 위계관계가 일종의 치외법권으로 남아있는 현실에 문제제기하고자 2000년 7월에 결성된 여성주의자 연대이다. 이들은 학생운동, 노동운동의 남성중심성과 성폭력 사건을 조직을 보호한다는 논리로 은폐해 왔던 그 베일을 열어제치고자 했다. 그 구체적 행동 이 2000년 12월 11일과 2001년 2월 8일에 감행한 인터넷상 가해자실명공개 였다. 이는 운동사회 안팎에서 큰 파장을 불러일으켰고, 그 중 한 사건이 본 논문에서 다루는 강모 씨 사건이다. 성폭력 사건 자체는 이미 고소 시간인 1년을 경과한 상태였고, 실명공개 를 통해 피해자와 지원자들이 원했던 것은 성폭력 가해 사실을 알리고 노동조합에서 강

양현아 / 서 평 187 모씨를 퇴진하게 하는 것이었다. 이때 오히려 법을 힘을 얻고자 한 측은 강모씨로서, 피해자들과 백인위 구성원을 명예훼손으로 고소하였다. 이에 피해자들은 피고인 으로, 자신의 무죄 를 입증해야 하는 입장에서 법정에 서게 되는 역설적 상황에 놓이게 되었 다. 이 싸움은 2002년 10월 31일, 사태가 자신에게 불리하게 되자 공판을 1주일도 남겨 두지 않고 가해자가 고소를 취하함으로써 종결 되었다. 성폭력 가해자로 지목된 자들의 피해자에 대한 명예훼손, 무고, 간통 등의 역고소는 어제 오늘의 이야기가 아니다. 1986년 부천서 성고문 사건(명예훼손). 1988년 강정순 씨 피해사건(무고 및 간통죄로 피해자 구속), 1993년 서울대 신정휴 성희롱 사건(명예훼 손) 등이 그것이다. 또한 백인위 가 공개한 KBS 사건을 시작으로 지난 2-3년간 명예훼 손 역고소 사건이 급증하여 여성단체에서는 성폭력 상담보다 역고소에 대한 상담이 더 많은 상황(64쪽) 이라고 할 정도이다. 이때에 법정 공방의 초점은 피해자가 당한 성폭력 이 아니라 명예훼손 여부가 되고, 여성의 피해가 아니라 가해자의 인권과 공익성이 핵 심 사안이 된다. 명예훼손 역고소에서 피해자들은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오지 않기를 바 라는 마음에서 라는 등 공익적 목적 으로 성폭력 공론화의 이유를 설명하지만, 가해 남 성은 인권의 이름으로 여성 피해자를 명예훼손 역고소 하는 상황이 연출된다. 과연 성 폭력과 명예훼손 역고소 사건의 전개과정에서 피해자와 가해자의 명예와 인권은 균등하 게 다루어져야만 하는가. 구조화된 불평등을 고려할 수 있는 인권법적인 비교형량 법리 가 요청된다. 정춘숙의 글은 가정폭력 특별법 제정 이후에 발생한 가정폭력 피해자(김정미; 가명) 의 가해자 살인 사건을 다루고 있다. 살인 사건 당일인 2000년 4월 23일부터 2001년 5 월 대법원 판결에 국한하지 않고, 본 논문은 살인으로 치달은 아내폭력과 정당방위의 법리라는 주제를 검토한다. 이 사건에서는 그 적용 법조를 살인 이 아니라 상해치사 로 요구한 변호인의 요청이 검찰에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졌지만 끝내 정당방위 는 받아들여 지지 않았다. 이 과정을 지원한 필자는 한국의 사법 체계가 누구의 경험을 기준으로 받 아들이고 있는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한다. 정당방위로 인정되기 위해서는 형 법 제21조 1항에 의거 상당성 유무를 따지게 되는데, 검사는 기소장에서 김정미가 평 소와 달리 피해자의 언도에 과대하게 받아들여 10여 년을 같이 살아온 남편을 사망하 게 했다 고 쓰고 있다. 필자는 활동 경험상, 지난 10여 년간 남편이나 아버지의 폭력에 시달린 피해자들이 가해자를 살해한 경우 폭력 피해자들의 행위가 정당방위로 인정받은 경우는 거의 없었다고 한다. 이 사건 역시 호명의 권력성을 드러내는데, 폭력이 가정사

188 공익과 인권 제1권 1호(2004) 로, 아내에 대한 강간이 부부관계 내지 성관계 로 혹은 변태적 섹스 로 불리는 것 등 이다. 왜 여성에 대한 폭력은 폭력 아닌 다른 이름으로 불러지는가. 왜 그 폭력이 발생 된 맥락과 관계는 사상되고 남성의 경험칙 의 틀에서 특정행위만을 보는 것인가. 강김아리의 <미디어, 섹슈얼리티, 여성인권>은 여성연예인의 비디오 피해 사건을 다 룬다. ㅂ양 비디오 사건과 O 양 비디오 사건을 중심으로 하는데, 여기에서도 여성 연예 인의 성행위가 찍힌 비디오를 섹스 비디오 사생활 비디오 또는 포르노 라고 명명하는 것에 문제를 제기한다. 필자는 오히려 이를 성폭력 비디오 라고 불러야 옳은 것이 아닌 가 묻는다(성폭력범죄처벌및피해자보호등에관한법률 제14조의2에 의거). 실제로, 몰래 카메라를 통한 폭력은 여성에 대한 감시와 통제 수단이 된다. 피해자가 오히려 죄인 으 로 용서를 구해야 하고, 피해사실을 숨긴다. 뿐만 아니라, 일반 여성으로 하여금 공포를 느끼게 만듦으로서 여성의 몸을 규율 통제한다. 필자는 표현의 자유 는 약자의 권리이 지 강자의 권리가 아니며, 강자의 권리일 때 그것은 폭력으로 된다고 하며 글을 맺는다. 김효선의 글은 2002년 2월에서 8월간에 벌어진 제주도 도지사 성추행 사건에 관한 것으로서 성추행에 대한 피해자 고발이 도지사 선거를 앞두고 정치적 음해론으로 발전 하는 과정을 조명한다. 도민의 얼굴에 먹칠한다 는 식의 도민 통합, 제주발전 담론과 같은 사회적 통념에 가해자의 담론이 부합하면 가해자의 의도는 성공한다고 저자는 지 적하며, 특히 지역 에서 여성운동하기의 난점을 드러내고 있다. 박이은경의 <가족을 구성할 여성의 권리>에서는 이른바 미혼모의 권리에 대해 논의 한다. 출산을 반대했던 생부에게 딸을 빼앗기고 제3자에게 입양된 딸을 찾았던 진현숙 씨의 투쟁을 중심으로 한다. 진현숙씨 사건은 1999년 3월 호소할 곳 없는 진씨가 여성 신문을 찾음으로써 공론화되고, 대중언론도 관심을 보임으로써 문제가 크게 가시화하였 다. 다른 한편 진 씨를 지원하는 여성단체들은 공동변호인단이 구성하였고, 진씨는 입양 무효확인소송과 유아인도청구소송에 돌입하였다. 이 과정에서 양부모가 아이를 생모에 게 인도함으로써 사건이 종결되었다. 필자는 이러한 해결에도 불구하고 가족법상 불안 정한 어머니의 권리, 특히 아버지의 인지 만 있으면 아버지의 호적에 올라 생모와 아버 지의 현부인의 권리를 박탈하는 제도적 문제점을 지적한다. 정미례의 <자발과 강제의 이분법으로 넘어서>는 군산 성매매업소 화재 사건을 중심 으로 감금 성매매의 현실을 고발한다. 2000년 9월 19일 군산 유곽 지역인 대명동의 성매매업소 화재참사에서 5명의 성매매 여성이 사망하는 사건이 있었다. 이 사건을 계 기로 2001년부터 윤락이나 매춘이 아닌 성매매라는 용어가 자리잡고, 국가가 유가족에

양현아 / 서 평 189 게 손해배상 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오게 되었다. 그럼에도, 2001년 1월 19일 군산 개복 동에서 다시 대형 화재가 발생하여 12명이 사망하고 이외에도 2001년 충북 청원군의 노예 성매매 사건, 부산 완월동 성매매업소 화재사건, 성남의 감금 성매매, 청량리 여관 화재사건, 익산 찜질방 화재 사건, 2003년 전북 장수군 룸싸롱 숙소 화재 참사 등을 통 해 성매매 여성들의 무참한 인권상황이 드러났다. 이러한 상황에서 필자는 성매매 일반 을 강제가 아닌 성문제 로 보는 시각은 남성중심적이라고 비판한다. 필자는 성매매를 우리 사회의 구조, 국가와 공권력의 문제, 성매매에 대한 일반인의 인식 등이 함축된 것으로 접근해야 함을 강조한다. 마지막으로 인권, 보편성과 특수성의 딜레마 라는 정희 진의 논문은 아시아인의 위치에서, 또 여성주의적 시각에서 인권 개념을 비판하며 재구 성을 하고자 한다. 이제까지 논문에서 나타나듯 보편적 인권이 여성과 같은 소수자를 끝내 특수성 으로 포섭할 때, 과연 여성주의 인권법리가 가능할지 필자는 묻는다. 실제 로 이러한 질문은 여성에 국한하지 않고 모든 소수자와 인권법의 관련성에 있어 타당할 것으로 생각한다. 이렇게 개별 논문의 치열성을 넘어서 전체적으로 보아도 본 서의 의미는 깊다. 먼저, 이 책은 2000년대라는 동시대의 사건들을 다룬다는 점에서 성폭력 사건의 현주소를 알려주는 유용한 지침서이다. 게다가 이 책은 특정 사안의 사회적 공론화, 새로운 판결, 법제정 운동의 선도 등을 통해 한국의 여성운동과 여성주의 법학에 있어 큰 의미를 새 길 수 있는 사건들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개별 사건들을 한 자리에 모아 구성한 것은 일종의 동시화(synchronize) 효과를 낳고 있다. 개별 논문 역시 귀중한 사건사의 기록 이지만, 사건들을 서로 엮어서 음미하면 오늘의 한국사회 젠더 구조라는 큰 그림이 그 려질 수 있을 것 같다. 이는 이와 같은 공동작업이 가지는 큰 의미이다. 또한, 이 책에는 피해생존자, 활동가, 법률가들의 노력이 기록되어 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다. 특히 침묵을 뚫고 앞으로 나와 준 피해생존자는 이러한 기록의 토대이다. 또한 여성 인권의 사각지대에서 전방위적으로 뛰어온 활동연구가들의 귀중함을 절감하 게 하는 대목 역시 요소요소에서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저자는 여성이고 어머니이고 활 동가인 자신의 힘겨움을 피력하기도 한다. 사회운동에 대한 자신의 헌신 은 남편이 아 니라 다른 여성의 희생과 도움으로 해결 된다고 하면서, 밑 빠진 독에 물 붓기 인 성매 매 문제는 국가가 해야 할 엄청난 일인데 민간단체가 왜 고생해야 하는가라고 자문한 다. 그런가 하면, 각 사건을 통해 맺어지는 피해자, 활동가, 법률가, 연구자들 간의 연대 (solidarity)에 대한 기록도 소중하다. 이 책에서 다룬 사건들이 대부분 법적 투쟁으로

190 공익과 인권 제1권 1호(2004) 이어지는데, 대부분의 논문이 열정적인 변호사들의 기여가 얼마나 주요했는지를 적고 있다. 그들은 김진, 박원순, 배금자, 안귀옥, 이상희, 이석태, 이정희, 정연순, 진선미, 차 병직, 최은순, 최일숙, 하승수 변호사 등이다. 앞으로 더 많은 법률가들이 이런 맥락에서 거명되기를 기대한다. 이렇게 여성운동, 법, 문화 비판 등 어느 한 분야에 국한되지 않는 다분야적 균형감 각이 이 책의 또 다른 미덕이다. 이런 노력은 닫혀있던 분야간의 문을 열고 대화할 수 있는 물꼬를 트는 동력이 될 것이다. 한편, <법제화 이후의 여성운동을 위하여>라는 서문에서 정희진은 법 제정 이후 여 성운동의 언어를 한 단계 도약시키고자 한다고 본 서의 의도를 밝힌다. 법이 운용되는 과정에 개입된 사회적 권력의 압도적인 남성성은 여성폭력관련법 자체를 무력화시키고 법 제정으로 문제 해결이 완성된 것처럼 보이게 함으로써 오히려 여성의 저항을 침묵시 키기 위해 기능하기 쉽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현 단계의 여성운동은 과연 법제화 이후 인가, 여기서 이후 란 어떤 의미일까. 법제정 운동의 종결 이라는 의미에서 이후라면, 그것에 동의하기는 어렵다. 법제화 이후의 여성운동의 노력은 어떤 것인지, 그것이 법을 비껴가는 어떤 것인지, 과연 이 책에서 제기된 사건들이 법제화의 한계를 드러내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 책 이야말로 성폭력, 미혼모, 성매매, 성희롱, 가정폭력 등 모든 사건에서 관련자들은 법을 활용했고 이 과정에서 더욱더 여성주의적인 법 개정, 해석, 적용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 하고 있지 않은가. 특히 법원 뿐 아니라 경찰, 지역단체, 언론에 있어서의 여성주의 법 학의 지식과 시각의 부재를 지적하고 있다. 오히려 한 때 여성운동이 법제정 노력으로 치달았다면 이제 보다 성숙하게 법과 사 회, 법과 문화운동이 서로 교류해야 하는 단계에 왔다고 하는 편이 옳지 않을까 한다. 편자는 비가시화된 사회적 문제를 법제화할 때, 법은 가장 대중적인 인식을 반영할 수 밖에 없기 때문에 성폭력에 대한 운동이 법제정 중심으로 수렴될 때 성폭력 근절은 실 패한다고 한다. 그렇다면 문제는 법제(개)정 노력 자체가 아니라, 법제(개)정에 대한 법 조인, 관련자, 일반인들의 참여와 교육의 부족, 여타 관련 제도의 미비가 아닌가 한다. 법제화는 종결되고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의 문제들과 함께 끝없이 호흡하는 것일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들이 인정하듯이, 법은 명명과 호명의 권력으로부터 벗어나 있지 않다. 법제도는 법원 안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라 사회의 지배적 언설로 기능하고 일 반적 인식을 만들어 낸다.

양현아 / 서 평 191 이런 의문점에도 불구하고 이 책의 미덕이 매우 크다는 것은 이 서평을 통해서도 잘 알 수 있으리라. 실제로 이 책은 이미 많은 새로운 언어를 생산하고 있고, 여성운동과 여성주의 법학, 인권법학에 과제를 던져 주고 있다. 예컨대, 피해자 인권, 가해자 인권, 공익, 호명되지 않은 여성의 성적 권리, 조직화된 반격(backlash) 등과 같은 문제는 바 로 오늘의 과제이다. 필자들이 자신의 정체성을 하나로 고립시키지 않았듯이, 앞으로도 법과 사회와 언어의 변화를 위해서 활동가, 연구자, 법률가, 미디어 관련자 등의 연대가 지속되고 또 새로운 지평이 열리기를 희망한다. 한 개의 물방울이 수면 위로 끝없이 번 지는 원을 그리듯이, 한 톨의 쌀이 저울추를 기울게 만들듯이, 하나의 행위가 구조의 변동을 가져올 수 있다. 이 책이 이분법을 피하듯, 정의 추구에 열정적인 변호사들은 존재하지만 법체계는 균질적으로 보수적이라는 이분법도 설득력을 잃어갈 것이다. 사회 구조란 멀리 있는 추상물이 아니라 오로지 인간들의 행위 속에 구현되고 재생산되기 때 문이다. 언젠가부터 좋은 것은 늘 아름답다는 것을 알았다. 셀 수 없는 땀과 눈물, 사랑 이 배어있는 이 책은 무척 아름답게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