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장 청일 전쟁과 대만 할양 ( 上 ) 아편 전쟁 등 서구 여러 나라들과의 잇따른 전쟁으로 청나라가 곤경에 처하는 상황을 지켜보면서, 위기감을 느낀 메이지( 明 治 ) 시기의 일본은 근대화를 서둘렀다. 제 2 장은 이러한 일본이 스스로 아시아를 침식하고, 열강으로 변모하게 된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을 주제로 한다. 일본인은 잊어버리기 쉽지만, 이 전쟁은 한반도( 朝 鮮 半 島 )를 무대로 시작되었고, 일본군은 청나라 군만이 아니라 조선 민중도 적으로 돌렸다. 청일 전쟁은 1894 95 년, 중국(당시 청나라)과 일본은 조선의 지배권을 둘러싸고 전쟁을 벌였고 일본이 승리하였다. 일본 측은 1만 3000 여명의 전사자 및 병사자가 발생하였으며, 전쟁 비용은 약 18억 원이었다. 중국 측은 미상이다. 당시의 일본 정부는 왜 조선의 지배권에 집착하였는가? 그것은 1890 년, 제 1 회 제국 의회에서 행한 야마가타 아리토모( 山 縣 有 朋 ) 수상의 시정 방침 연설에서 알 수 있다. 야마가타( 山 縣 )는 이익선( 利 益 線 ) 을 지켜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국경이라는 주권선 뿐만 아니라, 그것을 위협할 수 있는 이익선 까지 수비 범위를 넓혀야 한다는 주장으로, 그 이익선이 조선이었다. 배경으로는 시베리아 철도 착공을 목전에 둔 러시아가 조선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는 위기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1876 년의 한일 수호 조약 이후, 일본은 조선의 독립 을 기치로 내걸어 청나라와의 종속 관계를 끊게 하려는 한편, 시장으로서도 중요한 조선을 마음대로 조종하려 하였다. 조선 내부에서도 청 일과 연결된 각각의 세력이 다툼을 벌였으며, 1884 년에는 일본의 지원을 받은 김옥균 등이 일으킨 쿠데타를 청나라 군이 진압하였다. 조선을 사이에 둔 줄다리기는, 청일 전쟁이라는 정면충돌에 이르게 된다. 청일 전쟁은 경복궁에서 시작되었다 이쪽에서 먼저 화제로 삼은 일도 있고, 상대편이 먼저 말을 꺼내는 경우도 있다. 상대방의 입을 1
통해 나온 것은 같은 말이었다. 어째서이지요. 청일 전쟁의 흔적을 찾아, 나는 한국과 중국을 돌아 다녔다. 거기에서 만난 정치가와 학자가 고개를 갸우뚱 했던 것은, 청일 전쟁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무렵 미국에서는 위안부 문제로 일본의 사죄를 요구하는 결의가 하원 위원회에서 막 가결되었다. 아베 신조( 安 倍 晋 三 ) 수상이 위안부 문제의 강제성을 광의인가 협의인가 로 나눈 점, 미국에 가서 부시 대통령에게 `사죄의 뜻을 표한 것, 여, 야당 국회의원을 포함한 사람들이 미국 신문에 반론 광고를 낸 것. 특히 광고에 관해서는 상식을 넘어 섰다 라고 한국의 강창일( 姜 昌 一 ) 의원은 말했다. 울분이라기보다는, 놀라움에 어처구니가 없다는 표현에 가깝다. 단지, 이러한 일본의 행동이 아시아의 사람들에게 좋게 비춰 질 리가 만무하다. 강 의원은 원래 동아시아의 근현대사에 대한 저작도 가지고 있는 학자 출신으로, 한국과 중국, 일본은 아직도 100 년의 불신 속에 있다고 말한다. 정확하게는 종결된 지 112 년이 지난 청일 전쟁도, 거기에 포함되어 있다. 일본과 중국이 정면충돌했다는 것만이 아니다. 청일 전쟁은 한국인들에 있어서 일본이 조선을 침략한 전쟁 으로 기억되고 있다. 먼저, 전장은 한반도( 朝 鮮 半 島 )였다. 조선 왕궁을 점령 / 청나라 군 축출 작전 1894 년 7 월 23 일 미명. 어둠속에서, 한 무리의 일본군이 경복궁의 문 하나를 폭약으로 파괴하려 하였다. 그러나 잘 되지 않자, 기어오르고, 도끼로 부수는 등, 갖은 방법 끝에 난입에 성공하였다. 다른 문도 활짝 열고 왕궁을 지키는 조선 병들과의 약 3 시간에 걸친 총격전 끝에, 왕궁을 제압한 것은 동이 틀 무렵이었다. 마치 활극 영화와 같았던 전투였는데, 일본군의 공식 전사에는 기록이 없다. 우발적으로 벌어진 소소한 전투였다고 간주되어 왔지만, 후쿠시마( 福 島 ) 현립 도서관에서 상세한 전사 초안을 찾아내어, 100 년 후의 세상에 진상을 알리고자 한 사람이 나라( 奈 良 ) 여자대학의 나카쓰카 아키라( 中 塚 明 ) 명예교수였다. 서울에 있는 경복궁. 1984 년, 이곳에 일본군이 난입해서 전투를 벌인 끝에 점령하였고, 후에 청일 전쟁으로 이어졌다. 사진은 흥례문으로, 동서남북 4군데에 있는 대문의 안쪽에 있다. 15 세기 당시에 궁전의 수비를 담당했던 병사들의 의상과 무기가 관광용으로 재현되어 있다 = 사진 후쿠다( 福 田 ) 2
왜 왕궁을 점령한 것인가? 한마디로 말하자면, 뜻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위정자를 바꾸어, 일본에게 청나라 군을 조선에서 축출해 달라는 요청을 의뢰하도록 하기 위해서였다. 너무나도 난폭한 수법이라고 지금은 생각되지만, 당시는 그런 난폭한 일들이 비일비재하였던 것이다. 그 후, 일본은 더욱 난폭해 져서 1945 년 파국에 이르게 되지만. 우선은 이 전쟁이다. 당시, 조선에는 청나라와 일본, 쌍방의 군대가 있었다. 직접적인 계기는 그해 봄, 조선 남부에서 전봉준을 지도자로 하는 농민 중심의 동학(키워드 참조)교도 들이 봉기한 일이다. 온갖 착취에 더 이상 참을 수 없는 지경에 이르자, 조정에 반기를 들고 일어선 사회 개혁 운동 이었다. 현재는 갑오 농민 전쟁이라고 불린다. 대처 능력이 없었던 조선 정부는 종주국인 청나라에 출병을 부탁했는데, 그 와중에 일본도 멋대로 군대를 출동시켰다. 동학 농민군은 청나라와 일본의 움직임을 보고 조선 정부와 원만한 협상을 벌여, 일단은 소동을 정리하였다. 그러나 일본군은 철군 의사가 없었다. 왕궁을 점령하고 조선 정부를 일본의 의지대로 움직이도록 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2 일 후 인천 근처의 풍도( 豊 島 ) 연안에서 청나라와의 교전에 돌입했다. 일본은 어찌하였던 간에 개전의 구실이 필요했다. 정부 내에는 신중론도 있었지만, 주도한 것은 외무장관 무쓰 무네미쓰( 陸 奧 宗 光 )이었다. 무쓰 무네미쓰( 陸 奧 宗 光 )(1844 97 년) 메이지( 明 治 )시대의 외교관이자 정치가. 기슈번(지금의 와카야마현( 和 歌 山 縣 ))출신으로, 사카모토 료마( 坂 本 龍 馬 )의 해원대( 海 援 隊 )에 참가하여 행동을 함께 했다. 불평등 조약의 개정에 힘을 쏟는 한편, 청일 전쟁을 외무장관으로서 주도하였다. 뛰어난 수완을 평가하여 지금도 외무성에는 동상이 서 있지만, 청일 전쟁 때 학살 사건이 있었던 중국의 여순 기념관에는 악인으로 초상화가 걸려 있다.(사진 일본 국립 국회 도서관 제공) 왕궁 점령만으로 끝나지 않았다. 조선은 전장으로 변했다. 일본군은 청나라 군과 싸우면서 쾌조의 진격을 하는 한편, 동학 농민군을 섬멸시켜 버린다. 왕궁 점령을 계기로, 농민군은 타도 상대를 부패한 조선 정부 에서 일본 침략군 으로 변경하고, 재봉기하기에 이르렀다. 동학 1860 년에 최제우=사진=가 창시했다. 한국의 원광 대학교에서 동학을 강의하는박맹수( 朴 孟 洙 ) 교수는 신분 제도가 남아 있는 당시의조선에서, 모든 사람이 평등하고 귀중하다는 주장에, 차별을 받고 있던 농민들이 반응했다 고 말한다. 또한, 이들이 일으킨 갑오농민전쟁은 악정을 바로 잡는 것을 근간으로 하였으며, 척외척양 을 외쳤다. 3
민중 봉기의 효시 / 동학 농민 혁명 서울에서 고속철도로 3 시간을 남쪽으로 내려가면, 동학 농민군의 발상지인 전라도에 이른다. 어차피 가는 길이라 광주 민주화 운동(키워드 참조)의 기념 묘지에 들렀다. 여기는 한국 민주주의의 심장부다 라고 쓰여 있었다. 상영되고 있는 비디오에는 동학 농민군의 싸움도 소개되어, 광주 민주화 운동으로 이어진 민중 투쟁 의 효시라고 찬양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동학당의 난 으로 오랫동안 불려 왔지만, 동학 농민군 투쟁은 한국에서는 난 으로 취급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역적으로 간주하여 왔지만, 100 년의 세월을 거치고야 재평가가 진행되었다. 포괄적으로 역사의 재검토를 추진하는 노무현 정부 하에서, 2004 년에는 명예 회복 특별 입법까지 제정되었다. 지금은 동학 농민 혁명 이라 부르며, 그 기념관에서는 프랑스혁명과 동등하게 평가하고 있을 정도다. 처음에는 조선의 신분 사회에 이의를 주장하였고, 다음에는 군화발로 짓밟으며 들어오는 일본을 밀어 내고자, 농민군은 싸웠다. 동학 농민군의 세력 하에 있었던 지역에서는, 오늘날의 지방 자치의 원형과 같은 체제를 유지한 것을 보면, 확실히 민주화의 선구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군사적으로는 일본군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기념관의 이영일( 李 永 日 )연구원에게 물었더니, 농민군의 주된 무기는 죽창으로써 화승총을 겨우 면한 정도의 것을 지고 있으면 좋은 편이었다고 한다. 6 연발총을 주력으로 하는 일본군은, 병사 1인당 농민군 100명과 필적했다. 농민군 측의 희생자는 만 명이라고도 5만 명이라고도 말하지만, 한국에서는 그 10배에 달한다는 설도 유력하다는 말을 복수의 전문가로부터 들었다. 하지만 확실한 것은 판명 되지 않고 있다. 명예회복에 즈음하여, 그 자손에 대한 조사도 정부 주도로 2009 년까지 계속된다. 광주 민주화 운동 한국에서 1980 년 5 월, 쿠데타로 실권을 잡은 전두환 씨 등의 신 군부가, 계엄령 하에서 야당 지도자인 김대중 씨 (후에 대통령) 등을 체포했다. 이를 계기로, 전라남도 광주시에서 학생과 시민이 민주화를 요구하는 대규모의 민주화운동을 일으켰다. 이에 대해 한국군은 전차까지 동원하여 진압을 해 다수의 사상자를 냈다. 한국 정부는 사망자 193 명으로 발표하였다. 4
화이질서의 붕괴 / 그 숨통을 끊다 외적 배제를 주창한 동학 농민군이지만, 청나라 군과는 싸운 흔적이 없다. 왜 그들은 일본군만을 눈앞의 적으로 삼은 것일까? 당시 청나라는 조선의 종주국이며, 조선은 청나라의 속국과 같았다. 조선은 청나라에 사절을 파견하여 조공을 받치고, 청나라는 답례로 선정을 베풀도록 하시오 라며 조선의 왕임을 인정해 준다. 조공 체제라고 하는 것으로, 상전 부하의 관계이기는 하지만, 부하라고 할지라도 독립국인 것이다. 중국 다이렌( 大 連 )에서 만난 랴오닝( 遼 寧 ) 사범대학 역사학부의 꾸어티에춘( 郭 鐵 椿 ) 부교수는 조공 체제는 지배와 착취의 관계가 아닙니다. 속국의 내정에는 간섭하지 않았습니다 라고 한다. 대등한 관계가 아니기에 근대의 관점에서 보면 여러 가지 결점은 있었다 할지라도, 속국 쪽에도 그리 거북한 상황은 아니었다는 것이다. 중국을 상전으로 섬겼던 것은 조선뿐만이 아니다. 거슬러 올라가면 동아시아의 부근 일대 가 그러했다. 베트남과 일본의 류큐( 琉 球 ), 모두가 중화 세계의 주민이었고, 원래 중국 이라는 것은 현재의 국제법 체제에서 말하는 국명이 아니었다. 그 경계는 지금까지도 애매한 것으로, 엷은 먹물로 쓴 것 같이 어렴풋한 것이었다. 화이질서 라고 불리는 이 국제관계는 서구 열강이 끼어들면서 무너지기 시작했지만, 숨통을 끊은 것은 청일 전쟁이었다. 여기가 세계의 중심이고, 내가 인정해 줄 테니 그쪽은 그쪽 나름대로 잘 해 봐 라며 떡 버티고 있는 것이 중국이라면, 일본은 여기까지는 내 것이다, 이 안에서는 내 맘대로 하겠다 라며 제국주의의 선 긋기 전쟁에 참여했고, 거기서 큰 싸움이 벌어진 것이다. 물론 청나라도 단지 느긋한 종주국이었던 것만은 아니었고, 조선만 해도 현상 유지인가, 변혁인가를 두고 내부 싸움 게다가 아주 격렬한 싸움이 있었다. 일본이 조선을 화이질서로부터 떼어 버리기 위해, 이것은 문명인가, 야만인가의 싸움이라고 호소하며 내외의 지지를 얻으려 한 것도, 19 세기 말의 세계에 있어서는 완전한 억지 이론은 아니었다. 그러나 예를 들면 일본이 침공한 중국의 웨이하이( 威 海 ) 연안에서 푸른 바다를 바라보고 있자면, 그 무렵의 동아시아가 갖고 있었을 느슨한 일체감 을 버리기 어려운 생각도 든다. 청일 전쟁으로 아시아 침략의 발을 내디딘 일본은, 그 후에도 머릿속에서 아시아는 외부에 두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든다. 5
서울 시립대학을 방문했을 때, 정재정( 鄭 在 貞 ) 교수는 주변국의 위협을 강조하여 국내를 한데 모은 것 이 일본이라며, 청일 전쟁 이후에 일본을 돌이켜 보았다. 아시아인에게 공감을 주는 슬로건, 즉 아시아의 공통된 가치관. 그것을 일본은 결국 제시 못 하였다 100 년의 불신. 한국에서도 중국에서도 내가 만난 사람들의 일본 비판은, 원한보다는 답답함에서 나오는 탄식에 가까운 것으로 나에게는 들렸다. (후쿠다 히로키( 福 田 宏 樹 )) * * 조선을 마구 짓밟으며 진행된 청일 전쟁. 양국의 무력 충돌이란 어떤 것이었을까? 대만은 어떻게 해서 일본의 최초 식민지가 되었는가? 내일은 그것을 돌이켜 본다. 시모노세키( 下 關 ) 조약 일본군은 육지와 바다에서 계속 청나라에게 승리를 거두며, 1895 년 4 월에는 일본 측이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와 무쓰 무네미쓰( 陸 奧 宗 光 ), 청나라 측은 리훙장( 李 鴻 章 ) 등이 전권 대표로 시모노세키( 下 關 )에서 강화 조약을 맺는다. 청나라는 1조선의 독립을 인정한다 2요동 반도 및 타이완을 할양한다 3배상금 2 억 량(약 23 억 원)을 지불한다, 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러 독 불의 삼국 간섭으로 인해 일본은 요동 반도를 포기하게 되었으며, 이 때의 와신상담 이 러일 전쟁으로 이어진다. 미니 칼럼 그 당시 세계는? 청일 전쟁이 일어난 19 세기 말은, 서구 열강의 제국주의가 세계를 석권하던 시대였다. 공업화가 진행되면서, 제품을 팔 시장과 원재료의 공급처가 필요했던 열강들은, 갖은 방법을 동원하여 식민지 획득 경쟁을 벌였다. 청일 전쟁보다 조금 빠른 1880 년대에는, 아프리카 대륙이 영국과 프랑스, 독일 등에 의해 분할 지배되었다. 1890 년대에 접어들면, 영국의 아프리카 종단 정책과 횡단 정책을 펴는 프랑스가 수단에서 충돌하였고, 영국이 금과 다이아몬드 광맥을 확보하기 위해 남아프리카(보아) 전쟁을 일으키기도 하였다. 6
열강은 아시아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프랑스는 1884 년에 청나라와 전쟁을 일으켜, 청의 속국이었던 베트남의 보호권을 얻었으며, 3 년 후에는 프랑스령 인도차이나를 성립시켰다. 영국과 러시아는 아시아 진출을 놓고 서로 견제하였으며, 청일 전쟁으로 새롭게 열강의 일원이 된 일본은 영국과 동맹을 맺어 러일 전쟁으로 나아가게 된다. 미국은 이 시기, 아시아에서는 유럽 각 국에 비해 희미한 존재였지만, 1893 년에 하와이의 왕정을 폐지시키고, 5 년 후인 1898 년에는 병합해 버린다. 같은 해에 스페인과 전쟁을 벌여, 필리핀과 괌을 획득하였다. 카리브해 제국에 대해서도 군사력을 동원하여 억지로 자신의 세력 하에 두어, 당시 미국의 대외정책은 곤봉 외교 라 불리었다. 이 시기의 동아시아 1840 아편 전쟁 1867 일본에서 막번( 幕 藩 ) 체제가 끝나고, 새 정부가 성립 1871 일청 수호 조약. 서로 대등한 내용 1873 일본 메이지( 明 治 )6 년의 정변 으로 정한론 패배 1874 일본 대만으로 출병 1875 강화도( 江 華 島 ) 사건. 다음 해, 한일 수호 조약으로 조선 개국 1882 조선에서 임오 군란.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짐 1884 청 불전쟁. 베트남이 프랑스의 보호국으로 1884 조선에서 갑신 정변 일어남. 일본 군과 청나라 군이 충돌 1885 일본과 청나라가 텐진( 天 津 ) 조약. 갑신 정변으로 인한 조선으로의 파병 시는 서로 통지하기로 정함. 1894 조선의 갑오 농민 전쟁을 계기로 청일 전쟁 발발 1895 조선 황후인 명성황후, 일본인에게 살해 당함 7
[청일 전쟁과 대만 할양 上 ] 각국의 교과서를 비교하다 근대 일본과 중국의 최초 전쟁은 한반도가 무대가 되어 대만의 운명을 크게 바꾸었다. 각국의 중학교용 교과서에서는 이 전쟁을 젊은 세대에게 어떻게 전하고 있을까? 일본, 일본 측의 논리 를 설명 도쿄( 東 京 ) 서적의 새로운 사회 역사 에서 청일 전쟁 은 2페이지에 걸쳐 기술되어 있으나, 바로 앞 구미 열강의 침략과 조약 개정 의 항에서, 자세하게 청일 전쟁 개전에 이르기까지의 국제 정세를 설명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열강이 아시아와 아프리카를 식민지화 하는 일련의 과정을 제국주의 라 설명하는 한편, 한반도 정세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조선에서는 한일 수교 조약을 맺은 일본과, 조선의 지배권을 주장하는 청이 세력 다툼을 펼치고 있었습니다. (중략) 1884 년에 일어난 정변 이후, 청나라의 영향력이 강해지면서, 일본은 구미 열강의 아시아 침략이 노골화되는 가운데, 조선으로의 진출이 막히면 일본의 앞날도 위험하다고 판단하고, 청나라에 대항하기 위한 군비 증강을 계획하고 실행해 나갔습니다. 열강의 중국 침략을 그린 풍자화. 일본의 교과서에 실려 있다. 일본의 조선 진출은 구미 열강에 대한 위기감에서 기인한다는 설명이다. 도쿄( 東 京 ) 서적의 와타나베 노리오( 渡 邊 理 夫 ) 사회 편집부장은 일본의 정책에도 여러 가지 가능성은 있었지만, 청일 전쟁부터는 러일 전쟁, 조선 침략으로 이어지는 일직선을 달렸다. 이 과정을 말하기 전에 일본 측의 논리 를 설명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라고 말한다. 청일 전쟁 의 항목에서는 개전의 계기가 된 농민 봉기에 5줄을 할애하는 한편, 청일 전쟁에 관한 기술은 전쟁은 우세한 군사력을 가진 일본이 승리하였고, 1895 년 4월, 시모노세키( 下 關 ) 조약이 맺어졌습니다 라고 짤막하다. 계속해서, 조약의 내용이나, 열강이 8
청나라에서 세력 확대 경쟁을 한 것, 일본에서는 삼국 간섭을 받아 러시아에 대한 대항심이 높아졌다고 쓰여 있다. 대만의 식민지화에 대해서는 2줄밖에 쓰지 않았다. 다음과 같다. 대만을 영유한 일본은 대만 총독부를 설치하고, 주민의 저항을 무력으로 진압하여, 식민지 지배를 밀고 나갔습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吉 澤 龍 彦 )) 중국, 침략 전쟁으로 평가 중국의 인민교육출판사 판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 은 침략과 반항 이라는 단원에서 4 페이지 분량으로 다루고 있다. 일본의 교과서와 비교해 크게 다른 점은 중국으로의 침략 전쟁 이라 평가하고 있는 점이다. 첫머리 3줄에 이렇게 쓰여 있다. 1894 년에 일본은 조선을 정복하고, 중국을 침략하여 세계의 패권을 잡겠다는 몽상을 실현하기 위해, 조선의 수도 한성으로 출병하여 점령하고, 이어서 중국 침략 전쟁을 발동했다. 이러한 위치 부여는 중국에서 2번째로 많이 사용되는 베이징 사범대 판에서도 마찬가지다. 갑오 전쟁은 일본이 중국에 대하여 발동한 최초의 대규모 침략 전쟁이다, 1894 년 7 월, 일본은 선전 포고도 하지 않고 전부터 미리 계획하고 있었던 대중국 전쟁을 발동했다 라며, 일본 측이 주도면밀하게 준비해 온 전쟁인 것을 강조하고 있다. 인상적인 것은, 두 교과서 모두 청나라 해군 함장인 덩스창( 鄧 世 昌 )에 대해 기술하고 있다는 점이다. 탄약이 다 떨어지자, 우리가 희생이 된다 할지라도, 국가의 명성을 높이게 될 것이다 라며 일본 군함에 돌진하여 장렬한 전사를 한 사실을 상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쟁 묘사가 간결한 일본 교과서와의 차이가 두드러진다. 이는 중국의 학습 지도 요령에 해당하는 역사 과정 표준 에서, 학습 목표로서 덩스창의 주요한 업적을 기술하여, 중국 인민의 외국 침략에 저항하는 민족적 기개와 투쟁 정신을 실감한다 라는 기술에 기인한다. 대만 할양에 대해서는, 대만 사람들이 진주해 온 일본군에 대항하여 무장 투쟁으로 일본군에 타격을 입힌 것을 반 페이지 정도로 기록하며 이렇게 끝맺음을 하고 있다. 9
얼마 되지 않아 대만의 전 국토가 상실되었다. 그러나 대만의 여러 민족은 일본의 식민지 지배에 저항하며, 조국 복귀를 쟁취하려는 투쟁을 한순간도 멈추지 않았다. (사토 가즈오( 佐 藤 和 雄 )) 한국, 항일 농민 운동에 초점 한국은 이 전쟁을 청일 전쟁 이라고 부른다. 세계사를 취급하는 금성 출판사의 사회 2 는 일본의 대륙 침략 항목에서 다음과 같이 간단하게 기술하고 있다. 강화도( 江 華 島 ) 조약으로, 한반도에 침략의 발을 내디딘 일본은, 청일 전쟁에서 승리한 후, 중국으로부터 요동(랴우둥) 반도와 타이완을 할양받았다. 세계사 부분에서는 이 전쟁이 왜 일어났는지는 언급하지 않고 있다. 이 부분에 대한 언급은 국정 국사(자국사) 교과서에 나온다. 청일 전쟁은 1894 년에 시작된 동학 농민 운동과 뒤에 이어지는 내정 개혁의 항목에 등장한다. 어디까지나 전쟁이 아니고, 농민 운동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농민들은 기세를 올려, 마침내 전주를 점령하였다. 다급해진 정부는 농민군을 진압하기 위해, 청에 원군을 요청하였고, 이 틈을 이용하여 일본도 우리나라에 군대를 보냈다. 동학 농민 운동의 기술은 7페이지에 달하며, 일본과 청에 의한 내정 간섭, 농민 생활의 곤궁, 정부의 부패라는 상황 속에서, 봉기한 농민의 전투 상황 등과 운동의 의의를 자세히 기술하고 있다. 전쟁 자체보다도 전쟁의 계기와, 일본군과 싸운 조선 농민군의 역사를 중시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일본과 청나라가 맺은 강화 조약에 대해서도 취급하지 않았다. 전주 화약을 맺은 후, 농민군이 해산하자, 정부는 일본군의 철수를 요구하였다. 그러나 일본은 이를 거부하고 오히려 궁궐을 침범하였으며, 청일 전쟁을 일으켰다. 이처럼 일본군의 침략 행위가 노골화 되자, 농민군은 일본군 타도를 내세우며 다시 일어섰다. 국사 편찬 위원회의 구선희( 具 仙 姫 ) 사료조사실장은 수탈만을 당했던 농민들이 목소리를 높여 정부에 항의하고, 개혁을 요구한 운동으로서, 한국 역사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라고 설명한다. 동학 농민군이 후에 일본의 지배에 저항하는 의병 투쟁에 참전하여 항일 투쟁의 전통을 이었다 (국사 교과서)라는 점도, 중요시하는 하나의 이유다. (사쿠라이 이즈미( 櫻 井 泉 )) 10
대만, 식민지의 공죄( 功 罪 )를 상세하게 대만에서는 국민 중학 사회 (남일 서국( 南 一 書 局 ))의 중국사 부분 청말 개혁의 좌절 에서, 전쟁에 대해 1페이지를 할애하고 있다. 전쟁 국면은 지도로 표시하고, 기술은 20수년 전의 교과서와 비교해 간단히 설명하고 있으며, 패전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정리한다. 갑오 전쟁의 실패는 총포와 군대 장비 수준의 개혁만으로는, 스스로를 강하게 하기에는 모자랐다는 것을 증명했다. 한편, 전쟁으로 초래된 대만의 일본 할양은, 중학교 1학년 대만사 부분에서 공부한다. 50 년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를 16페이지에 걸쳐 다루고 있다. 대만의 지방장관 등이 주도했던 대만 민주국 건국과 선주민의 봉기 등, 일본에 대한 저항에서 시작하여, 경제 발전과 사회 제도의 정비에서 황민화 운동에 이르기까지, 식민지의 공죄( 功 罪 )를 기술하고 있다. 그 중, 할양 당시에 대한 기술은 이러하다. 대만의 명사와 평민은 탕칭숭( 唐 景 崧 )과 치우펑짜( 丘 逢 甲 ) 등을 옹립하여 대만 민주국 을 만들고, 외부에 지원을 요청하려 했지만 성공하지 못했다. 살아서 잡히는 것 보다, 죽어서 의민이 되겠다 대만 각지에서는 항일 운동이 끊임없이 일어났다. 교육부(교육성) 국민 교육국의 역사 교육 담당 린추엔루( 林 純 如 ) 씨는 교과서 기술이 개방적이고 중립적이 되었다. 일본 시대에 대해서도 일본의 점령 과 일본의 통치 라는 말이 있지만, 최근에는 통치 라는 표현이 증가했다. 국민당 시대에는 일본과 단교도 있어서, 은혜를 원수로 갚았다 라는 감정적인 기술이었다 라며, 신구의 차이를 설명했다. (다무라 히로쓰구( 田 村 宏 嗣 )) 11
한도 가즈토시( 半 藤 一 利 ) 작가 시리즈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3) --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1930 년 출생. 문예 춘추 편집장 등을 역임. 역사 연구로 왕성한 집필 활동 중이다. 쇼와역사( 昭 和 史 ) (헤이본사( 平 凡 社 )) 등 다수의 저서.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1중일 전쟁 2러일 전쟁 3태평양 전쟁에서 일본 패배 4만주 사변과 만주국 건설 5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 6청일 전쟁과 타이완 할양 7한국 전쟁 8한반도( 朝 鮮 半 島 )의 분단 9일본의 한국 병합 문제 알고도 손쓰지 않는 내각 ( 10 대 사건 에) 순번을 붙인다는 것은 어렵습니다만, 첫번째로 중일 전쟁을 들었습니다. 근대국가로 전환한 일본의 제국주의가 확실하게, 구체적으로 야심을 드러낸 시기입니다. 그 때까지의 일본과 중국의 흐름으로 보아, 터질 일이 터진 것입니다. 아쿠타가와 류노스케( 芥 川 龍 之 介 )의 시나 유기 ( 支 那 游 記 ) 에서 아쿠타가와( 芥 川 ) 씨는 이러한 일은 전혀 의식하지 않고 쓰고 있습니다만, 중국이 얼마나 반일이었는지를 잘 나타내고 있습니다. 언젠가 충돌하리라는 것은 당연히 걱정했지요. 그러나 일본의 역대 내각은 문제 해결의 의사가 없었습니다. 난징( 南 京 )을 취했으니 전쟁은 끝났다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습니다. 한코우( 漢 口 )를 점령했으나 이 또한 끝나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군대를 내륙으로 전진시키는 것은 어려운 일임을 알면서도, 화평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문제를 알고 있으면서도, 결국 손을 쓰지 않았다. 가장 큰 교훈이 아니었겠습니까? 러일 전쟁의 문제는 전쟁 그 자체보다, 이긴 일본이 중국에 대해 우월감을 노골적으로 표한 것입니다. 그 때까지는 중국에 막연한 경의를 표해 왔지만, 상당한 우월감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많은 중국 유학생이 와 있었습니다만, 러일 전쟁에서 승리를 확정 지을 무렵에는 유학생들을 탄압하기 시작했습니다. 고양된 기분에 의식이 바뀌어 버렸습니다. 신해혁명 때의 지사들 중에는 일본 유학생 출신이 많습니다만, 모두 쫓겨나 버렸습니다. 이들을 소중히 여겼더라면. 12
3 번째로 든 일본의 패배는 아시아 여러 나라에게는 기쁜 일이었습니다. 대동아 공영권이라는 말은 슬로건에 지나지 않을 뿐으로, 일본인의 마음 속에 있었다고는 생각되지 않아요. 1944 년에 나온, 동남아시아 각국에 예의를 가르친다는 책에는 토인( 土 人 ) 이라는 표현이 있습니다. 교만을 부리고 있었지요. 러일 전쟁 후의 일본이 강국, 대국 의식을 가진 끝에 벌어진 사건이 만주 사변으로, 모략으로 문제를 해결하려 했습니다. 일만의정서( 日 満 議 定 書 )를 보면, 미일 안보 조약 내용과 비슷합니다. 일만 공동 방위를 위해서 만주국 내에 일본 군대를 언제든지, 어디든지, 얼마든지 주둔시킬 수 있다고 했습니다. 완전한 괴뢰 국가였습니다. 잠자는 대국에게 이긴 청일 전쟁은, 일본이 아시아의 맹주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한 계기가 되었습니다만, 카쓰 카이슈( 勝 海 舟 )는 중국은 그 정도의 나라가 아니다, 우쭐해서 깔보는 것은 큰 실수다 라고 소리 쳤습니다. 판단력이 흐려지지 않은 사람들에게는, 아직 그런 판단이 가능했던 것입니다. 한국 전쟁은 말 그대로 전후 일본에 있어서 가미가제( 神 風 )였습니다. 일본인들이 주로 마시던 술은 소주에서 토리스로, 오션, 산토리 등의 양주로 바뀌어져 갔지요. 한국 전쟁이라는 특수가 없었더라면, 전후 부흥은 쉽지 않았을 것입니다. 조선 사람들에게는 이만큼 비참한 전쟁도 없었습니다만. 별로 말하고 싶지 않은 것이 한국 병합(*)입니다. 국제적으로도 인지되었다고 말을 하지만, 문제는 그 후 일본의 정책을 보면, 타 민족과의 관계 만드는 법에 대해서는 정말로 무지한 나라라는 것을 증명한 것과 같습니다. 민족의 긍지가 얼마나 강한 것인지를 헤아리지 않았고, 정확한 정치 책략도 전혀 없었습니다. 마지막으로 아편 전쟁입니다. 일본인으로 하여금 근대 국가를 만들어야 한다는 의식을 가지게 하여, 메이지( 明 治 ) 유신을 촉진한 점에서는 큰 영향을 미쳤습니다. 지금 일본인은 일찍이 조선인이나 중국인에게 아픔을 준 사실을 그다지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만, 인간은 역사를 바탕으로 살아갑니다. 자연스러운 교류를 위해서도, 잊지 말고 알아 두어야 할 것은 있습니다. (인터뷰: 후쿠다 히로키( 福 田 宏 樹 )) *한국에서는 병합 조약을 인정하지 않으며 강점 이라고 표현한다. 13
제 2 장 청일 전쟁과 대만 할양 ( 下 ) 수상함이 감도는 바다 청일 전쟁(중국에서는 갑오 중일 전쟁)으로 일본과 중국은 어떤 싸움을 펼쳤는가. 그 결과는 중국과 대만에게 무엇을 가져 왔는가. 그 대답을 찾아서, 일본군이 일찍이 쳐들어 간 중국과 대만의 두 개의 해변을 방문했다. 조용한 바다가 여름 햇살에 빛난다. 황해에 돌출한 산둥( 山 東 ) 반도의 끝에 위치한 웨이하이시( 威 海 市 ). 선창과 만 안의 작은 섬들, 류공다우( 劉 公 島 ) 사이를 많은 관광객을 태운 페리가 왕래한다. 웨이하이웨이( 威 海 衛 )로 불리던 19 세기, 이곳에는 청의 북동부 바다를 지키는 북양 함대의 기지가 있었다. 바다를 둘러싸고 포대가 만들어 지고, 류공다우( 劉 公 島 )에 사령부가 설치되었다. 1880 년대까지는 동양 제 1 의 함대라고 불렸지만, 청일 전쟁에서 패배한다. 일본 함대가 이 바다를 내습하여, 북양 함대는 투항했다. (왼쪽) 1895 년에 일본군이 상륙한 대만 동북부의 아우디( 澳 底 ) 해변이다. 유리로 된 설명 판에는 상륙 시 사진의 설명이 새겨져 있었다. 해변으로 상륙해 오는 일본군의 망령을 보는 듯하다=이소가와( 五 十 川 ) 촬영 (오른쪽) 복원된 딩위안( 定 遠 ) =산둥성 웨이하이시( 威 海 市 )에서, 고미야지 마사루( 小 宮 路 勝 ) 촬영 페리 선창으로부터 몇 분 걸었다. 선창에 낡은 군함이 보였다. 북양 함대의 기함이었던 전함 딩위안( 定 遠 ) 이다. 실물과 거의 같은 형태와 규모로 만들어져 길이는 91 미터이다. 2005 년 4 월에 선을 보였다. 군함 내에 역사 자료를 전시하고 있었다. 이 배를 소유하는 웨이하이 북양수상 웨이하이발전유한공사( 威 海 北 洋 水 師 旅 遊 発 展 有 限 公 司 )의 짱페이치( 姜 培 旗 ) 사장을 만났다. 중일 관계에 영향을 줄 생각은 없습니다. 역사를 객관적으로 반영하는 것이 목적입니다 라고 말했다. 2 년 간, 약 60 만 명이 방문해 관광 진흥에도 14
일익을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서로 경계하는 일본과 청 / 겨루어 해군을 증강 딩위안( 定 遠 )은 일본에 있어서, 복잡한 사연이 있는 배다. 1886 년에 다른 함선과 함께 나가사키( 長 崎 )에 기항했다. 그 때, 수병들이 거리에서 소란을 피워, 경찰과의 대난투가 벌어져 쌍방에 사망자가 나왔다. 일본 측은 청나라 함대의 위용을 보게 되는 한편, 수병들의 행동에 국가의 치욕이다 라는 반발도 나와, 해군 증강에 박차를 가하는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먼저 청나라 정부에 경계심을 갖게 한 것은 일본이었다. 12 년 전, 일본의 대만 출병을 경험한 청나라 정부는 해군 증강에 거액을 쏟아 부었다. 일본과 청은, 군비 확장 경쟁에 여념이 없었다. 딩위안( 定 遠 )의 내부를 안내해 준 공사의 연구자에 의하면, 전쟁 당시에는 일본 해군이 우위에 있었다. 일본 배는 대포의 수가 많은데다가, 발사 속도도 좋았다 라고 말한다. 한편, 북양 함대의 증강은 1880 년대 말경부터 멈추어 있었다. 왜, 청은 증강을 멈추었는가. 현지 전문가들의 저서 북양 함대와 류공다우( 北 洋 海 軍 と 劉 公 島 ) 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청나라 정부는 1891 년, 재정난으로 인해서 북양, 남양 함대의 함선과 대포 구입을 2 년 간 금지해, 북양 함대는 한 척도 증가하지 않았다. 청나라 정부가 해군력을 자만하고 있던 것이나, 최대의 실력자인 서태후( 西 太 后 )가 별궁 보수건축 등에 거액을 소비하여 재정난을 부른 것이 배경이라고 한다. 청조 제 9 대 황제인 함풍제( 咸 豊 帝 )의 왕비로, 동치제( 同 治 帝 )의 어머니이다. 젊은 황제의 옥좌뒤로 늘어뜨린 발 안쪽에서 정치에 관여했다. 동치제가 사망한 후, 여동생의 아들인 광서제( 光 緒 帝 )를 세운다. 약 반세기에 걸쳐 권력을 잡았다. 여름의 별궁인 이화원( 頤 和 園 )을 타이베이( 北 京 )에 수리 건축하고, 탄생 60 주년 축하 행사 등에 거액을 쏟아 부어 재정을 압박했던 것이, 청일 전쟁의 패배로 이어졌다는 비판을 받는다. 1898 년에는 정치 개혁 무술변법( 戊 戌 変 法 ) 을 시작한 광서제를 유폐하는 등, 청조 멸망 직전까지 영향력을 그렇다고 하면, 정부의 자만심이나 서태후( 西 太 后 )의 가졌다. 이기심이 패전의 원인이 된다. 물론, 그 외에도 이유는 있다. 광서제( 光 緒 帝 )와 서태후( 西 太 后 )의 옹고집, 두 사람의 세력에 줄을 선 고관들의 대립 등, 여러 가지 요소들이 음으로 양으로 대일 전략과 관련되었다고 한다. 중국에서는 대체로 정치적 근대화의 지연을 원인으로 보는 것이 보통이다. 백수십년 전의 군비 확장의 역사를 보면서, 동지나해에서 서로 견제하고 있는 지금의 15
일본과 중국의 모습이 겹쳐졌다. 중국의 군비가 19년 연속해서 2자리 수 증가한 것이나, 착실하게 잠수 함대의 능력을 높이는 것 등을 지켜보며, 일본은 동지나해에서의 경계를 강화하고 있다. 한편, 중국은 일본이 헌법을 개정하여, 해외에서의 무력행사의 방법을 모색하고, 일 미 공동 미사일 방위 망을 대만에까지 넓히지나 않을까 걱정이다. 물론, 약육강식의 제국주의 시대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이 바다에서 멀지 않은 장래에 일본과 중국이 다시 싸우는 것은 상상하기 어렵다. 하지만, 몇 차례나 상호 불신에 빠져, 상대 군사 동향에 신경을 쓰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서로의 내셔널리즘에 불이 붙기 쉬운 것도 신경이 쓰인다. 중국의 청일 전쟁 연구의 제 1 인자는 청나라의 패배 원인의 하나로 외교의 실패를 든다. 산둥성( 山 東 省 ) 역사학회 명예회장인 치치장( 戚 其 章 ) 씨를 만나기 위해, 성도( 省 都 )의 찌난시( 済 南 市 )로 향했다. 치씨에 의하면, 북양 함대의 책임자인 리훙장( 李 鴻 章 )은 전쟁을 회피하려고, 영국과 러시아의 알선에 기대를 하고 움직여 보았지만, 생각했던 대로 되지 않았다. 대만 할양에 관해서도, 영국에 대만의 권익을 주는 것으로써 일본으로의 할양을 막아 보려 하였지만, 영국 측에 거절당했다고 한다. 일본은 열강의 관계를 잘 알고 있었다. 청나라보다 스스로가 러시아의 진출을 막을 수 있다고 영국에 선전했다 라고 치씨는 말한다. 열강의 태도도 간파하지 못하고 있었던 청의 전략이 잘못이었다고 본다. 또 하나의 해변으로 향했다. 본성인과 외성인 / 부딪치는 대만인의 역사관 대만 북동부에 있는 아우디( 澳 底 ). 해수욕장에 작은 물결이 일고 있었다. 태풍의 영향으로 수영은 금지되고 해변에 마련한 풀장에서, 아이들이 장난치는 목소리가 들려온다. 1895 년 5 월, 이 바닷가에 일본군이 상륙했다. 대만은 일본과 청의 강화조약에 의해서 일본에 할양 되었지만, 식민지 지배가 순조롭게 시작된 것은 아니다. 대만의 관료와 명사들이 만든 대만 민주국( 台 湾 民 主 国 ) 군이나 지주 세력 등과의 싸움이 가을까지 계속 되었고, 그 후에도 무장 봉기가 자주 일어났다. 16
해변에는 항일기념비가 서 있었다. 이전에는 일본군의 상륙 기념비가 있었지만, 70 년대에 바꾸었다. 대만 할양 역사에 대한 대만인들의 생각은 복잡하다. 국민당 정권 전부터 있었던 사람들은 대만인이란 의식이 강하고, 그 이후에 해협을 건너 온 사람들은 중국인이란 의식이 강한 경향이 있다. 양자 간에는 역사관에도 정치적 입장에도 차이가 있다. 민진 당( 民 進 党 )은 계속해서 대만인 의식을 호소한다. 국민당은 중국인 의식이 강하여 중국 대륙과의 통일도 시야에 넣는다. 타이베이( 台 北 ) 교외의 국사관은 대만사를 편집하는 총통부의 직속 기관이다. 민진당 정권이 들어선 이래, 관장을 맡고 있는 장옌시엔( 張 炎 憲 ) 씨는 대만인에게는 청나라에 버림을 받았다는 슬픈 정서가 있습니다 라고 한다. 청에서 대만으로 파견된 오늘날의 지사에 해당되는 관료가 일본군이 도착하자마자, 곧바로 대륙으로 돌아간 것을 지적한다. 하지만, 한편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청일 전쟁 이후, 대만은 중국과는 다른 길을 걸어 왔습니다. 자본주의 경제를 발전시켜, 민주와 자유를 포함한 현대 사회화를 목표로 해 온 일관된 흐름이 있습니다. 한때는 일본의 통치를 받으면서도, 대륙과는 별도로, 독자적으로 발전해 왔다는 자부가, 중국과 대만 문제에 영향을 준 것은 틀림이 없다. 한편, 국민당 안에서는, 대만할양의 실상이란 일본이 무력으로 청으로부터 대만은 잡아뗀 것으로, [일본의 침략]이라는 시각이 있다. 국민당 중앙당사위원회의 전 주임 위원이었던 첸펑옌( 陳 鵬 仁 ) 씨는 타이베이( 台 北 ) 사무소에서 이렇게 말했다. 일본은 남진을 하기 위한 징검돌이라는 군사적 이유와 차와 방충제등으로 쓰인 장뇌( 樟 脳 )의 생산지이며, 더불어 일본의 시장을 확보하려는 경제적 이유에서 대만을 요구했겠지요. 일본이(제 2 차 대전) 패전했을 때, 60 세 이상의 사람들은 다시 중국으로 돌아간다고 기뻐했습니다 대만을 할양한 청에 대해서는 일본과 계속 싸울 실력은 없었다. 어쩔 수 없었겠지요 라고 이해를 한다. 대만에서는 내년 3 월로 임박한 총통 선거의 열기가 높아지고 있다. 7 월 초순에는 일본 통치시기의 대만인 활동가를 주제로 한 심포지엄 역사와 정치의 대화 가 타이베이( 台 北 )에서 열려, 민진 당의 셰창팅( 謝 長 廷 )후보와 국민당의 마잉주( 馬 英 九 ) 후보가 불꽃을 튀겼다. 일본에게 저항한 활동가를 마 씨가 평가하면, 셰 씨는 일본도 국민당도 외래 정권이었다, 라고 언급했다. 당장 역사관에서 부딪치고 있다. 17
이러한 대만사회의 행방을 중국이 주시하고 있다. 만약, 독립의 움직임을 보이면, 중국은 무력행사도 불사할 자세다. 대만 쪽 해안에 다수의 미사일을 배치하고 견제하며, 해군도 증강한다. 대만군도 중국과의 전쟁을 상정한 연습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내가 방문한 아우디( 澳 底 )는 한가로운 풍경이었다. 하지만, 11 년 전 이곳 가까운 바다에 미사일이 날아 왔다. 첫 총통 선거를 앞두고, 중국이 연습 이라는 명목으로 발사를 했던 것이다. 이 바다가 왠지 수상한 것은 110 년 전과 그다지 변함이 없다. (이소가와 토모요시( 五 十 川 倫 義 )) 대만영토를 손에 넣은 일본은 조선의 지배를 놓고 러시아와 싸운다. 이 이야기는 다음번에 하자. 대만의 역사 남태평양계 등의 민족이 옛날부터 정착해 살았다. 17 세기가 되면서 네들란드가 남부를, 스페인이 북부에 거점을 구축했다. 네들란드가 스페인을 격퇴하고 지배하였으나, 명나라 왕조의 재건을 목표로 삼은 쩡청공( 鄭 成 攻 )이 네들란드 세력을 축출하여, 쩡씨 일족의 통치로 넘어갔다. 이를 청이 쓰러뜨리고 자국의 영토로 편입하였다. 이 시기부터 대만 건너편 해안인 복건성( 福 建 省 )을 중심으로 대륙으로부터의 이민이 급증했다. 청일 전쟁으로 일본이 대만 서방의 펑후( 澎 湖 )섬을 점령하였다. 1895 년의 시모노세키( 下 関 ) 조약으로 일본으로의 대만 펑후섬의 할양이 결정되면서, 반세기에 이르는 식민지 시대가 시작된다. 제 2 차 대전의 패전으로 일본이 철퇴한 후, 국민당이 이끄는 중화민국정부의 지배하에 들어갔다. 이로 인해, 잇달아 대륙에서 건너 온 사람들(외성인)과 원래의 주민(본성인) 사이에 골이 깊어져, 1947 년 2월 28 일부터 계속된 정권과 주민의 충돌(2 ㆍ 28 사건)로, 다수의 주민이 희생되고, 균열은 결정적이 되었다. 49 년, 대륙이 내전 끝에 공산당이 중화인민공화국의 성립을 선언하였다. 중화민국정부는 타이베이( 台 北 )로 수도를 옮기고, 수백만 명이 대만으로 피했다. 국민당정권이 계속 되지만, 80 년대부터 서서히 민주화가 진행되어, 96 년에는 총통 직선제를 도입하고, 2000 년, 본성인의 지지가 높은 민진 당이 정권을 잡았다. 18
미니 칼럼 일본인의 아시아관 청일 전쟁으로 멸시 감정 퍼지다 청일 전쟁은 일본인이 가진 중국과 조선의 이미지를 크게 바꾸어 놓았다. 예를 들면, 후쿠자와 유키치( 福 沢 諭 吉 )가 이끄는 지지( 時 事 )신보 에, 개전 직후인 1894 년 7 월 29 일 청일 전쟁은 문야( 文 野 )의 전쟁 이라는 제목으로 사설을 게재했다. 문야 란 문명 과 야만 이다. 전쟁을, 문명개화의 진보를 도모하는 일본과 진보를 막으려는 청나라의 싸움이라고 평가했다. 11 월에는 조선에 대해서도, 문명류 개혁을 위해서는 협박 이라는 수단도 불사하며, 국무의 실권 을 일본이 잡아야 한다고 사설을 실었다. 반전 주의자로 유명한 우치무라 간조( 内 村 鑑 三 )조차, 그 시점에서는 같은 인식이었다. 같은 해 8 월, 일본은 동양의 진보주의의 전사 이고, 중국은 진보의 강적 이라 주장하는 영어 논문을 구미 잡지에 발표했다. 일중 관계를 연구하는 지바( 千 葉 )현 소재 게이아이( 敬 愛 ) 대학의 이에치카 료코( 家 近 亮 子 ) 준 교수는 청일 전쟁의 승리로 일본에서는, 아시아는 뒤떨어져 있다는 인식이 뿌리 내렸다. 멸시 감정도 퍼졌다 고 지적한다. 그 의식은 10 년 후의 러일 전쟁으로 한층 더 강해져, 중국 침략이라는 행위로 이어진다. 이런 의식은 지금도 어디엔가 남아 있지는 않을까. 이에치카씨는 7 월, 학생들에게 당신은 아시아인이라고 의식했던 적이 있습니까 라는 앙케트 조사를 했다. 교실의 반 정도를 차지하는 아시아인 유학생들은, 86%가 있다 라고 대답했다. 이에 비해, 있다 라고 대답한 일본인은 63%에 머물렀다. 오히려 구미인 이라면 좋았겠다 라고 적은 학생도 있었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吉 沢 龍 彦 )) 19
[청일 전쟁과 대만 할양 下 ] 기억을 만드는 것 메이지 태생의 탈아론 은 올 봄에 122 살이 되었지만, 아직도 건재하다. 인터넷으로 검색하면 수만 건이 히트된다. 이번에는 알고 있을 것 같으면서도 사실은 잘 모르고 있는 탈아론 을 해부해 본다. 혼자걷기 하는 탈아론 중국 조선과의 절교 선언 탈아론 은 1885 년 3 월 16 일자, 일간지였던 지지( 時 事 )신보 1 면에 게재된 사설 제목이다. 특별히 이날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은 아니고, 당시 일간지의 상당수는, 사설을 1 면에 싣는 스타일이었다. 서명은 없었지만, 필자는 후쿠자와 유키치( 福 沢 諭 吉 )로, 오늘날로 치자면 주필 겸 논설 주임이라 할 수 있다. 분량은 2,000 자 정도. 별권까지 포함해 22 권인 후쿠자와 유키치 전집 에 실린 것은 3 페이지의 짧은 문장이다. 요점은 이러하다. 서양 문명은 홍역 이 유행하는 것처럼, 막을 방법이 없다. 일본은 문명화를 받아 들여, 아시아에서 새로운 축을 마련했다. 그 주의는 탈아 이다. 탈아론이 게재된 지지( 時 事 )신보. 일본에 있어서 불행한 점은 근린의 중국, 조선이라는 당시의 신문이 게이오의숙( 慶 応 義 塾 ) 국가가 근대화를 거부하고 있다는 점이다. 서양 문명이 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밀려오는데, 변혁을 거부하고 옛것에 집착하고 있다. 즉, 국가의 독립을 유지할 방법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양국이 메이지 유신과 같이 정치 체제를 변혁할 수 있다면 모르되, 그렇지 않으면 몇 년 이내에 망국 하여, 서양 제국에 분할되어 버릴 것이다. 지금의 중국, 조선은 일본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서양에서는 3 개국이 20
지리적으로 가깝기 때문에, 일본도 중국이나 조선과 같은 취급을 받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일본의 큰 불행 이다. 중국과 조선이 서양 문명을 받아들일 때까지 기다려 함께 아시아를 진흥시킬 여유가 없다. 오히려 그들과 헤어져 서양 열강과 함께 움직이자. 중국, 조선은 근린 국이라고는 하지만 특별 취급을 할 필요는 없다. 그리고 마지막 끝맺음은 이러하다. 악우와 친하게 지내는 사람은 함께 악명에서 벗어날 수 없다. 우리는 마음속으로부터 아시아 동방의 나쁜 친구를 사절해야 할 것이다. 나쁜 친구와 사이좋게 지내면 평판도 나빠지기 때문에 이제는 안녕 이라는 절교 선언 이었다. 당시는 평판을 얻지 못하다 그럼, 이 사설이 어떻게 해서 태어났는가. 1884 년 12 월, 조선의 근대화를 목표로 하는 김옥균 등 친일파가 서울에서 쿠데타를 결행하였다.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한때는 왕궁을 점거하고 반대파를 숙청했다. 그런데 3 일째 되던 날, 청나라 군에 진압되어 쿠데타는 실패하였다. 일본 공사관도 소실되었다. 일본인 사망자도 있었다. 이 큰 사건을 일본의 신문들이 앞 다투어 알리는 와중에, 지지( 時 事 )신보 의 지면은 특별히 더 열을 내었다. 후쿠자와( 福 沢 )는 김옥균 등과 친교가 있었고, 활동 지원을 위해서 게이오의숙( 慶 応 義 塾 )의 문하생들을 조선에 보내고 있었다. 탈아론 은 친일파의 쿠데타 실패에 대한 실망에서 쓰인 것이었다. 그러나 게재 당시는, 그다지 평판을 얻지 못한 것 같다. 지지( 時 事 )신보 의 역사를 잘 아는 무사시노( 武 蔵 野 ) 학원대의 도쿠라 타케유키( 都 倉 武 之 ) 강사에 의하면, 지지신보 는 당시, 창간 3 년 만에 7 천 부 이상 부수가 급증했다. 인텔리 층을 대상으로 하는 신문으로서는 톱클래스로 성장하고 있었다. 조선에 관한 보도로 더 한층 신뢰를 높였지만, 탈아론 이 단독으로 주목 받은 적은 없는 것 같다. 후쿠자와도 이후에는 탈아론 에 대해 한 번도 거론하지 않았고, 탈아라는 말도 사용하지 않았다고 한다. 도쿠라씨는 지지( 時 事 )신보 사내에서도 인용된 적이 없었으며, 그 존재는 잊혀졌다 라고 보고 있다. 침략의 논리로서 전후에 부활 잊혀졌던 탈아론 이 재발견된 것은 제 2 차 대전 이후이다. 그 과정을 자세하게 밝힌 시즈오카( 静 岡 ) 현립대의 히라야마 요우( 平 山 洋 ) 강사에 의하면, 최초로 인용된 것은 1951 년이었다. 역사학자 토오야마 시게키( 遠 山 茂 樹 )가 쓴 21
청일 전쟁과 후쿠자와 유키치 라는 논문이었다고 한다. 후쿠자와 유키치( 福 沢 諭 吉 )의 외교 론이 재검토되는 가운데, 중국과 조선에 강경 자세를 취하는 탈아론 이 연구 대상이 되어, 그에 따른 지명도가 올라갔다. 1983 년에는 야마카와( 山 川 ) 출판사의 고등학교 일본사 교과서에서도 다루어 졌다. 중국과 한국에서도 탈아론 은 차츰차츰 퍼져 나갔다. 서울대 국제 문제 연구소의 강상규( 姜 相 圭 ) 연구원에 의하면, 한국에서 연구 논문에 탈아론 을 인용한 예는 1970 년 이후라고 한다. 80 년대에 일본의 역사 교과서 문제가 일어나면서 탈아론 은 일본의 침략 논리로서 재차 클로즈업 되었다. 현재는 고등학교 세계사 교과서에도 인용된다. 중국에서도 2003 년, 장쑤성( 江 蘇 省 ) 등에서 대학 입시 문제에 나왔다. 일본어 인터넷에서도 탈아론 이라는 말은 난무한다. 야스쿠니 참배 등이 계기가 되어 시작된 근린 외교의 알력을 둘러싸고, 혹은 동아시아 공동체 만들기에 관한 논쟁 중, 중국이나 한국에 강경 자세를 요구하는 의견들 중에서 등장하는 경우가 눈에 띈다. 토오쿠라( 都 倉 ) 씨는 탈아라는 말이 후쿠자와( 福 沢 )로부터 떨어져 나가 독보하고 있다. 아시아와의 관계에서, 자신의 생각에 권위를 부여하거나 보강하려 할 때에 이용하기 좋게 사용되어 버린다 라고 말한다. (요시자와 다쓰히코( 吉 沢 龍 彦 )) 후쿠자와 유키치(( 福 沢 諭 吉 ) (1834~1901 년) 근대 일본을 대표하는 계몽 사상가이다. 나카쓰( 中 津 )번의 하급 무사의 집에서 태어나 오가타 코안( 緒 方 洪 庵 )의 데키주쿠( 適 塾 )에서 난학( 蘭 學 )을 공부했다. 에도에 나와 영어를 배워 1860 년에는 간린마루( 咸 臨 丸 )를 타고 미국으로 건너갔다. 막부가 유럽에 파견한 사절단과 미국 견학 사절단에도 수행하였다. 처음에는 번( 藩 )의 요청으로 시작된 사설 교육시설을 1968 년에 게이오의숙( 慶 応 義 塾 )로 고쳐, 현재의 게이오( 慶 応 ) 대학이 되었다. 정부의 요직을 맡은 일은 없다. 언론과 교육계에서 활약했다. 서양 사정 을 비롯하여 많은 저작이 있다. 하늘은 사람 위에 사람을 만들지 않는다 라는 글을 쓴 학문의 권장 은 메이지 시대 초의 대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82 년에는 일간지, 지지( 時 事 )신보 를 창간하였다. 이 신문은 후쿠자와( 福 沢 )의 사후에도 1936 년까지 존속되었으며, 제 2 차 대전 후에도 일시 복간되었다. 22
미니 칼럼 지폐 국가의 이미지를 대표하는 얼굴 후쿠자와 유키치( 福 沢 諭 吉 )라고 하면 만 엔 지폐의 초상화이다. 1984 년에 쇼토쿠 태자( 聖 徳 太 子 )로부터 그 자리를 계승하였다. 지폐에 어울리는 품격이고, 국민 각층에게 잘 알려진 인물이며 국제적으로도 지명도가 높다 고 (일본 재무성 통화 기획 조정실) 선택한 이유를 설명한다. 그 말대로라면, 지폐의 초상화는 나라의 얼굴 이며, 국가 이미지를 어느 정도 담당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중국, 한국, 대만, 일본의 지폐 중국은 어떠한가. 건국 50 년 인 1999 년에 디자인을 일신하여, 1 원( 元 )에서 100 원( 元 )까지를 모두 건국 초기의 마오쩌둥( 毛 沢 東 ) 의 초상화로 통일했다. 이전까지는 저우언라이( 周 恩 来 )의 초상화나, 소수 민족도 사용되었다. 왜 통일했는지의 공식 설명은 없다. 한국은 만원에는 한글의 창시자인 세종대왕을, 5 천원과 천원에는 각각 유학자 이율곡과 이퇴계의 초상화를 사용한다. 2009 년에는 10 만원, 5 만원 지폐를 발행할 예정으로, 누구의 초상화로 할까에 관심이 모여 진다. 정부와 한국은행은 여론 조사 등을 통해 선정할 방침이다. 일본은 일찍이 쇼토쿠 태자( 聖 徳 太 子 )외에 이토 히로부미( 伊 藤 博 文 )와 이와쿠라 도모미( 岩 倉 具 視 ) 등, 메이지 유신기의 정치가의 초상화를 사용했지만, 84 년 이후에는 오로지 문화인이다. 재무성은 다른 외국에서도 문화인 초상의 이용이 증가했기 때문 이라고 설명한다. 대만은 나라의 아버지 라 불리는 쑨원( 孫 文 )이 100 원( 元 )에,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 蔣 介 石 )가 200 원( 元 )이다. 보다 고액의 지폐에는 소년 야구팀이나 지구의를 보는 아이 등의 도안을 사용하고 있다. 쑨원( 孫 文 )과 장제스( 蔣 介 石 )의 지위를 유지하면서 정치적인 메시지를 약하게 했다 (대만중앙은행) 고 말한다. 23
프핀( 步 平 ) 중국 사회과학원 근대사 연구소장 -시리즈 지식인 20명에게 듣는다 (4) 동아시아 근현대사의 10대 사건은? 중일 대등한 모습에 익숙해 져야 할 시기 프 핀. 1948 년생. 중일 역사 공동 연구의 중국 측 단장. 민간의 역사공통 부교재 만들기에도 참가했다. 저서에는 일본의 중국 침략과 독가스 병기 가 있다. 내가 선택한 10 대 사건 (1) 아시아의 개국 (2) 일본의 메이지 유신과 러일 전쟁 (3) 중국의 신해혁명 (4) 중일 전쟁 (5) 태평양 전쟁 (6) 일본의 패전과 냉전의 시작 (7) 중화 인민 공화국의 성립 (8) 중일 국교 정상화 10 대 사건 에서는 동아시아 전체의 분기점이 된 사건들을 들었다. 사건의 연결성을 중시한 관계로, 거의 시간 순이다. 가령 중요도 순으로 열거한다 할지라도, 최초로 들 것은 개국 이다. 그때까지 동아시아에는 화이질서가 존재하여 서양 제국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었으나, 개국으로 인해 단번에 세계와 연결되었기 때문이다. 일본과는 달리, 중국에서는 개국 이라는 표현은 쓰지 않는다. 아편 전쟁이 있었던 관계로, 서양 열강에게 무력에 의한 타의로 개방되었다 라는 표현을 써 왔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동아시아에서의 서양 열강의 강한 인상은 마찬가지이다. 이러한 의미에서 본다면 동아시아의 공통 사건으로 보더라도 무방할 것이다. (9) 냉전 종결 그 후, 일본은 메이지 유신과 러일 전쟁을 거쳐 가장 (10)동아시아 여러 나라의 경제 먼저 강국이 되었다. 이는 동아시아 체제를 바꾸었다는 발전과 정치 구조 변화 점에서 큰 변혁이었다. 황색 인종이 백인을 패배시킨 최초의 전쟁이 되었다. 한편, 중국의 눈에 비친 일본은 아시아가 아니라 서양 열강 쪽에 섰다라는 점이다. 한반도의 식민지화는 서양 열강화로 가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행위이다. 신해혁명의 중요성에 대해서는, 중국 이상으로 일본과 한국의 학자가 주목하고 있다. 24
중국에서는 황제 제도가 2 천년이나 계속 되었지만, 신해혁명에 의해 아시아에서 최초로 공화제 국가가 탄생하였다. 이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다만, 중국은 그 후, 긴 시간 혼란에 빠졌다. 이로 인해, 실패한 혁명이라는 점에 비중을 두어, 혁명 그 자체의 중요성이 별로 인식되어지지 않았다. 만주 사변으로부터 14 년 간 계속된 중일 전쟁(전면 전쟁은 1937 년부터)은 아시아 2 대 대국의 전쟁이며, 양국에 있어서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점차 강국이 되어 서양 열강 쪽에 서게 된 일본은 아시아를 상대로 전쟁을 일으켰다. 한편, 약해진 중국은 열강과의 전쟁에서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데 중일 전쟁을 계기로 여러 세력이 재편성 되었다. 국민당과 공산당도 결속하여 간신히 승리를 할 수 있었다. 중국에서는 중일 전쟁은 부흥을 향한 전환기였다고 생각한다. 일본은 더욱 에스컬레이터 하여 미국과의 전쟁까지 일으켰다. 이 시점부터 전쟁은 세계로 확대되고, 침략 전쟁에서 파시즘 전쟁으로 전환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계속된 일본의 패전은 전쟁의 일부이지만, 구별하여 강조한 것은, 여러 가지 변화가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본에서는 패전을 계기로 민주주의화가 진행되었다. 또, 패전 후에도 여러가지 문제가 남은 상태이다. 아시아 제국과의 관계도 그렇고, 아직 처리되지 않은 문제가 있다. 아시아에서의 냉전의 상징은 한국 전쟁이지만, 그러한 구체적인 사건보다도 장기간에 걸쳐 계속된 상황이 중요하다. 일본은 미국 일변도가 되어 중국과 대립했다. 중국의 정책도 냉전에서 출발한다. 이러한 상황이 진짜로 바뀐 것은 1989 년의 냉전 종결이었다. 이전에 중국의 문화 대혁명이나 한일 국교 수립도 있었다. 이 가운데, 중일 국교 정상화는 중요하다. 이로 인해, 아시아는 냉전 완화로 향하였다. 한편, 중소 대립과 미소 대립은 격화했다. 이 일들은 냉전이라는 커다란 배경 속에서 일어난 것이다. 냉전 종결 후, 중국 경제가 비약하는 한편, 일본 경제는 침체기에 들어갔다. 1990 년대 이후, 중국이 강대해져 일본과 대등하게 되어가는 경향이 주목을 받는다. 양국 국민은, 그들 눈에 비치는 상대의 모습에 아직 익숙하지 않다. 이 구조 변화에 적응하는 시기가 현재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인터뷰:요시자와 다쓰히코( 吉 沢 龍 彦 )) 2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