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Ⅰ. 총 설 이 해제집은 영국 국립기록보존소(The National Archives ; TNA)에 소장되어 있는 188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 관련 기록물을 대상으로 소개한 것이다. 이 문서 들은 주로 외무성 및 육군성에서 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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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회보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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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_KEEI_연차보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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Ⅰ. 총 설 1. 19세기 말 20세기 초 관련 문서 2. 한국전쟁 전후 관련 문서 3. 1960 ~ 1970년대 관련 문서 N a t i o n a l A r c h i v e s o f K o r e a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Ⅰ. 총 설 이 해제집은 영국 국립기록보존소(The National Archives ; TNA)에 소장되어 있는 1880년대부터 1970년대까지의 한국 관련 기록물을 대상으로 소개한 것이다. 이 문서 들은 주로 외무성 및 육군성에서 생산하거나 소장하고 있던 문서와 전문들이다. 1910년 이전의 문서들은 조선에 있었던 영국 공사 및 영국인들과 외무성 사이의 전문들이 대부분을 차지하며, 1945년 이후의 문서들은 크게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문서, 1960년대 이후 박정희 정부와 영국 사이의 교류 및 협력에 관한 것이 대부분이다. 국가기록원이 현재까지 TNA에서 수집한 한국 관련 기록물은 마이크로 필름, 피쉬 110롤(문서 407권 / 1,150건 / 47,412매)에 달한다. 이 문서들은 크게 세 시기로 구분이 가능하며,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문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의 문서, 그리고 1960 ~ 1970년대 한국과 영국 사이의 교류에 대한 문서로 나눌 수 있다. 1. 19세기 말 20세기 초 관련 문서 한국과 영국의 관계는 매우 특수한 관계였다. 영국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한국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당시 영국은 청나라와 일본을 통해 조선과 관계를 맺고 있었다. 영국은 유럽대륙에서와 마찬가지로 동북아시아에서 러시아를 봉쇄하면서 해밀턴 섬(거문도)을 직접 점령한 경우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경우 청과 일본과의 일차적인 관계를 통해서 조선과의 관계를 설정하고 있었다. 따라 서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영국 문서들이 조선에 대한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보여주고 있지는 않다. 그러나 영국이 청과 러시아에 대해 깊은 이해관계를 갖고 있다는 점은 이 시기의 문서들을 이해하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전제조건이 된다. 왜냐하면 청과 러시아가 모두 조선에 대해 이해관계를 갖고 있기 때문에 이들의 대조선( 大 朝 鮮 ) 정책이 영국의 대청( 對 淸 ), 대러시아 정책에 영향을 미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밀턴 섬(거문도)의 점령 역시 이의 연장선상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영국이 제3자의 관점에서 청과 일본의 조선정책을 살펴볼 수 있기 때문에 보다 객관적인 자료가 될 수도 있다. 1) 1) 1883년 11월 26일 조선과 영국 간 우호통상조약 및 부속장정이 조인된 이후 영국은 파크스 경(Harry Smith Parkes)을 총영 사로 임명하였다. 1900년에는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공사관으로 격상되었다. 1901년 주영국 공사관이 개설되고 그 해 7월 민영돈( 閔 泳 敦 ) 초대 공사가 런던에 부임하였다(한승훈, 조선의 불평등조약체제 편입에 관여한 영국 외교관의 활동과 그 의의, 2

Ⅰ. 총설 영국은 1898년까지 북경 공사가 한성 공사를 겸임하였다. 1888년 한성과 제물포에 독립적인 자리가 필요하다는 건의가 북경 공사로부터 영국 정부에 전달되었지만, 독 립적인 영사관이 설치되지는 않았다. 영국인으로서는 1890년에 비숍(Bishop) 여사와 커즌(Curzon) 경이 조선을 방문한 적이 있었으며, 1896년에는 영국의 기술자가 경복궁 의 전기 사용에 대한 기술적인 책임을 맡기도 하였다. 1896년에는 상하이( 上 海 ) 경찰 에서 일했던 스트리플링(Stripling)이 조선 정부의 새로운 보안 조직에서 고문으로 임 명되기도 하였다. 1898년 북경과 한성의 대표부가 서로 분리되면서 존 조단(John Jordan)이 참사관으로 처음 임명되었으며, 1901년 영사가 되어 1905년까지 활동하였다. 이 시기에 먼저 주목되는 것은 영국이 한반도에 교두보를 세우기 위한 정보 수집과 관련된 문서들이다. 영국이 본격적으로 한반도에 진출하고자 한 것은 아니었지만, 중국이나 일본에서와 마찬가지로 일정한 지역에 교두보를 세우려고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당시 정보 보고와에 가장 많이 언급된 곳은 서울과 가까운 제물포 지역이었으며, 영국 해군이 1885년부터 2년여간 점령했던 거문도와 관련된 문서도 포함되어 있다. 둘째로 주목되는 것은 영국의 경제적 진출을 위한 문서들이다. 여기에는 각 지역의 인구현황과 교통 등에 대한 정보가 포함되어 있는데, 영국이 직접 조사한 것도 있겠 지만 청으로부터 받은 정보에 근거한 것 역시 많은 것으로 보인다. 경제적 진출은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는데, 하나는 조선으로부터 천연자원, 특히 금을 포함한 광물을 채취해 가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상품 판매를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전자와 관련해서는 운산 지역의 금광에 관련된 문서들이 많으며. 특히 구한말 운산에서 발생한 범죄 사건과 관련된 문서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운산에서 발생한 범죄와 관련한 내용은 영국이 조선 정부에게 사건의 해결을 촉구하는 문서들이다. 조선 정부는 이에 대해서 적절한 조치를 취하고 있다는 답변을 보내고 있는데, 실제로 적극적으로 문제 해결에 나섰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상품 판매를 위한 교두보로는 평양 근교를 염두해 두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평양이 교역의 중심지가 되는 것이 적절한가에 대해 조사한 문서가 있는가 하면, 이 지역과 운산의 주택매매, 입지 조건 등에 대해 조사한 문서, 그리고 평양 지역에 통신을 비롯한 인프라를 구축하는 것과 관련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한편, 서울 이외에 마산과 목포에도 영사관을 설치하고자 하는 문서가 있는 것으로 미루어, 청의 상인들이 한국근현대사연구 52집, 2010). 을사늑약 체결 후 1906년 공사관이 총영사관으로 격하되었지만, 1910년 한 일합병 이후 에도 총영사관은 계속 유지되었다. 1945년 해방 그 이듬해 주한 영국 총영사관이 재개설되었고, 1949년 1월 18일 영국 정부는 미국, 타이완에 이어 세계에서 세 번째로 대한민국 정부를 정식으로 승인하였다. 1949년 3월 17일 Vyvian Holt 주한 영국 공사의 신임장이 제정되고, 주한영국 공사관이 설립되었다. 3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상권을 장악하고 있던 제물포(인천)나 일본이 장악하고 있던 부산 지역 이외에 있는 항구 도시에 일정한 교두보를 확보하기 위한 영국의 시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 주목되는 것은 정치 관련 문서들이다. 조선과 청, 그리고 일본에 있었던 영국 관리들은 우선 청과 러시아, 그리고 일본의 조선에 대한 내용을 보고하면서 조선에서 일어난 사건에 대해서도 직접 보고하고 있다. 1884년 갑신정변 관련 보고는 그 대표 적인 예로, 이 사건의 경우 일본으로부터 많은 정보를 얻은 것으로 보인다. 2) 아울러 대한제국 수립 이후 영국과 대한제국 사이에 상호 대표를 초청하는 내용의 문서들이 주목되는데, 영국의 경우 대관식에 대한제국 정부를 초청하고, 이에 대해 대한제국은 왕자 중의 한 사람인 이재각( 李 載 覺 )을 축하사절로 파견할 것을 결정, 통 보하였다. 대한제국 정부는 고종의 왕위 계승 40주년을 맞이하여 영국에 축하사절단 파견을 요청하였는데, 이에 대해 영국은 곧바로 화답하지 않았다. 그런데 당시 왕위 계승 40주년 축하기념식을 거행하기 한 달 전 서울 지역의 콜레라 발생으로 인하여 왕위 계승 축하식이 연기되었기 때문에 영국의 사절단 파견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1902년 일본의 침략으로 암울했던 당시, 대한제국의 고종황제는 영국의 에드워드 7세 (Edward Ⅶ ; 엘리자베스 2세(Elizabeth Ⅱ)의 증조부)의 대관식에 단장 의양군 이재각 ( 李 載 覺 ), 부단장 이종응( 李 鍾 應 ) 등 4명의 축하사절단으로 파견하였다. 3) 이상과 같이 구한말의 문서들은 당시 조선(이후 대한제국)과 영국과의 관계를 보여 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조선 사회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매우 소중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그 당시 조선 사회의 모습과 인구 분포, 전염병 발생과 범죄 등 사회적인 상황을 말해주는 각종 문서들은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선의 사회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이용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구한말 영국 측의 문서들 가운데 일부는 영국 영사관과 공사관에서 본국에 보 내는 문서였고, 다른 일부는 대한제국 정부와 영국의 현지 기관 사이에 오고 간 문서 였다. 전자의 경우에는 영어 문서만 있고, 후자의 경우에는 한문으로 된 대한제국의 2) 대한제국의 정치 상황과 관련해서 청의 '의화단의 난'의 영향으로 인해 조선에도 불안정한 정치적 상황이 초래될 가능성이 있 다고 예측하는 문서가 주목된다. 실제 의화단의 난이 대한제국에 미친 영향은 거의 없었지만, 서양에서는 인접국의 정치적 불 안정이 인근 국가에 영향을 미친 경우가 적지 않았다. 이 부분은 당시 영국인들이 자신들의 경험에 의거해서 아시아 지역을 바라보고 있었던 점을 보여주는 하나의 예라고 할 수 있다. 3) 축하사절단은 이재각을 대표(특명 영국대사)로 해서 정3품 이종응이 부대표, 예식원 외무과장 고희경( 高 羲 敬 ), 참리관 김조현 ( 金 祚 鉉 ), 인천주재 영국 부영사 고프(H.Goffe, 葛 福 )으로 구성되어 파견되었으며, 귀환 후 고종에게 '서사록'이라는 공식 보 고서를 제출하였다. 축하사절 5명은 한국을 떠난 지 60일만에 런던에 도착하였다. 1902년 4월 7일 인천항을 출발, 일본 요코 하마를 거쳐 캐나다 밴쿠버에 도착했고, 기차로 미주대륙을 횡단한 후 퀘벡에서 다시 대서양을 건너 60일만인 6월 5일 영국 리버풀 항구에 도착하였다. 영국에 한 달 남짓 있다가 7월 7일 런던을 출발하여 파리, 제노바, 나폴리를 거쳐 수에즈운하와 홍해를 통과, 콜롬보, 싱가폴, 홍콩, 상해, 나가사키를 거쳐 인천항으로 귀환하였다. 이들의 방문 기록은 조선왕조실록과 황성 신문에도 실려 있으며, '서사록'은 최근 후손들에 의해 공개되었다. 4

Ⅰ. 총설 문서가 함께 수록되어 있는데, 이 중 일부는 서울대학교의 규장각에도 소장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구한말 문서와 한국전쟁 시기 문서의 사이에 일제 강점기 관련 문서가 있는데, 문서의 수량도 많지 않고 내용도 개괄적인 것으로, 대체로 일제 강점기 조선인들의 독립운동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다. 일본 내에서의 2.8 독립선언, 한국의 3.1 운동, 임 시정부의 수립 등의 주요 내용으로, 이들 문서 가운데 코민테른 극동지역 책임자가 한국에서 활동하는 공산주의자들에 대하여 설명하는 문서를 보낸 것이 주목된다. 4) 2. 한국전쟁 전후 관련 문서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도 한국과 영국의 관계는 19세기 말 20세기 초의 관계와 비슷하다. 영국의 일차적인 관심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영국을 재건하는 것이었고, 전쟁 이전의 식민지 지역에 집중되어 있었다. 5) 따라서 전후 미국이 직접 점령한 지역에 대하여 영국은 직접적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못하였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북아 지역은 미국이 소련과 함께 전쟁을 한 유럽과는 달리 미국의 독점적인 이해관계가 확보되어 있는 지역이었다. 따라서 1945년 직후 영국은 한국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1945년 12월에 제출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모스크바 3상회의 결정서 에서 신탁통치를 담당할 4개 국가 중 하나로 등장한다. 영국은 미 소 공동위원회가 조선임시민주정부와 협의를 거쳐 신탁통치 문제에 대해 의견을 제출할 4개국 가운데 하나로 지정되었다. 이후 영국은 1950년부터 1953년 사이 한국에 파병한 유엔군 중 미군 다음으로 큰 규모의 군대를 파견한 국가였다. 또한 정전협정이 조인 된 이후에도 1957년 10월까지 영국군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한국에 주둔하였다. 이와 같이 한국전쟁을 전후한 시기에 영국이 한반도 문제에 개입하게 된 것은 물론 미국과의 관계를 고려한 것이었다. 유럽에서의 제2차 세계대전을 승리로 이끌고 1947 년의 마샬 플랜(Marshall Plan ; 유럽부흥계획)과 1949년 북대서양 조약기구(NATO)를 통해 영국의 국내외적 부흥을 원조하고 있었던 미국의 대한( 對 韓 )정책에 영국이 적극 4) 특히 이 문서에서 공산주의자들과 개량주의자 사이에서의 갈등에 대해 언급하면서 1928년에 해체된 조선공산당을 다시 조직하는 것이 유일한 해결책이라고 진단한 것이 주목된다. 5) 1949년에 콜롬보 플랜(Colombo Plan)을 만들어서 과거 영국의 식민지였던 지역에 대해 경제원조를 실시하는 것 역시 과거 영국 제국이었던 지역에 대한 영국의 관심을 잘 보여주고 있다(박태균, 1950년대 미국의 대아시아정책과 ECAFE, 국제 지역연구 12권 2호, 2003 ; 박태균 박태호, 1960년대 아시아개발은행의 창립과정에 대한 연구, 국제지역연구 13권 2호, 2004). 5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협조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한 가지 고려해야 할 사항은 영국이 단지 미국의 정책을 그대로 따르지는 않았다는 점이다. 큰 틀에서 영국은 미국의 대소련 봉쇄정책에 협조하였지만, 각론에서는 이견이 있었다. 영국은 한국에 대한 미국의 신탁통치안에 대해 반대하지 않았지만,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독립된 모든 지역에 신탁통치를 실시하는 방안에 대해 서는 반대 입장을 갖고 있었다. 또한 한국전쟁 시기에도 미국과 영국 사이에는 몇 가지 이견이 발생하였다. 하나는 중국에 대한 정책이었다. 영국은 미국과 달리 중국에서 혁명이 성공한 후 대륙의 공산 정부를 공식 정부로 승인하였다. 6) 그렇기 때문에 미국이 한국전쟁 시기 중국군을 대상으로 핵무기를 사용하려고 하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따라서 한국전쟁 시기에 해당하는 영국의 문서들은 당시 미국의 정책을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단초를 제공해 주고 있다. 이 시기의 문서 가운데 가장 먼저 눈에 띄는 것은 미국이 추진하는 신탁통치안 및 대일( 對 日 )정책에 대한 영국의 반발이다. 흥미로운 점은 이에 대해 반발하는 방식으 로, 영국의 처칠(Winston Leonard Spencer Churchill) 수상은 전시 중의 회담 중에 미국 이 제의한 내용을 기억할 수 없다고 주장하고 있다. 즉, 그에 따르면 미국이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과 일본의 점령 정책에 대해 언급한 내용을 기억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시점은 처칠이 수상에서 물러나고 1945년 총선거에서 승리한 애틀리(Clement Attlee) 내각이 들어선 상황이었기 때문에 영국의 새 정부는 처칠이 전중 회담에서 합의했던 내용에 대해 문의했던 것으로 보인다. 7) 하지만 이러한 이견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큰 틀에서 미국의 대한정책을 따랐다. 한국에 대해 직접적인 이해관계를 갖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영국은 모스크바 3상 회의에서 한반도 문제에 대한 미국의 견해에 크게 반대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런데 주목되는 점은 한국 문제뿐만 아니라 일본의 점령에 있어서도 영국 대신에 영연방 국가의 하나인 호주에게 참여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다. 영국은 본토뿐만 아니라 영국의 식민지 역시 제2차 세계대전으로 많은 피해를 입었기 때문에 한국과 일본의 점령에 참여할 여력이 없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캐나다, 호주, 뉴질랜드, 남아 6) 영국은 1950년 1월 6일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의 정식 정부로 인정하였다. 이로 인해 샌프란시스코 평화조약에 중화인민공 화국을 참여시키는 문제로 영국과 미국은 대립의 각을 세운다. 이로 인해 1951년 6월 19일에는 미국과 영국 사이에 외상회의가 개최되었다. 중화인민공화국을 승인한 국가는 영국 이외에도 1949년 12개국(동독, 루마니아, 몽골, 미얀마, 불가리아, 북한, 소련, 알바니아, 인도, 체코, 폴란드, 헝가리), 1950년에 13개 국가(노르웨이, 덴마크, 베트남 민주공화국, 스웨덴, 스위스, 시론, 영국, 인도네시아, 아프가니스탄, 이스라엘, 파키스탄, 폴란드, 핀란드) 등이었다. 최은봉, 오승희, 냉전 초기 일본의 정부 선택 문제와 대중 등거리 전략, 아시아연구 14권 2호, 2011, 195 196쪽. 7) 당시 1945년 8월과 9월의 문서를 보면 영국 내각은 처칠에게 몇 차례에 걸쳐 얄타나 포츠담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4개국 분할 점령에 대해 합의한 적이 있었느냐고 물었고, 처칠은 그런 기억이 없다고 대답하였다. 6

Ⅰ. 총설 프리카 등에 참여할 것을 제안하였는데, 호주만이 일정한 관심을 보였다. 이 문제는 영국 내각에서도 참여 의사를 밝힌 호주에 대해서만 논의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그러나 이후의 사정을 파악할 수 있는 관련 문서가 더이상 없어서 호주의 참여 문제가 어떻게 추진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8) 그 밖에 한국에서의 좌우합작과 관련된 문서, 그리고 제1차 미 소공동위원회가 결렬된 상황에서 미국이 남한에만 적합한 임시정 책을 입안, 실시하는 정책을 추진하려 한다는 문서 등이 포함되어 있다. 9) 1948년과 1950년 사이의 문서들 가운데 눈에 띄는 것은 북한과 중국의 관계에 대한 내용이다. 이 문서들은 1948년에서 1949년 사이 북한의 정규군과 조선의용군이 중국 내전을 돕기 위해 파견되어 있었던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이 문서에서는 북한군의 5개 사단이 독립적으로 활동하고 있는 것으로 보고되어 있다. 이는 한국전쟁 직전 중국이 북한으로 돌려보낸 2개 사단을 넘어서는 것으로 상당히 큰 규모라고 할 수 있다. 10) 이것은 한국전쟁 시기 북한 정부가 유엔군의 북진으로 인해 붕괴 위기에 몰렸을 때 중국이 북한을 돕기 위해 지원군을 파견하게 되는 중요한 하나의 동기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한편, 이 시기의 한국에 대한 영국 문서들은 대체로 한국전쟁 부분에 집중되어 있다. 이 시기에도 중국에 대한 미국의 정책에 대해 영국이 이견을 드러내는 문서들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다. 이는 미국이 중국의 지원군에 대하여 적대적인 정책을 취하면서 중국 지원군의 보급로에 대한 폭격을 고려하는 과정에서 나타난다. 미국은 한반도 내의 지원군뿐만 아니라 지원군 보급을 위한 만주에서의 보급 기지에 대한 폭격까지 고려했지만, 영국은 이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영국은 한반도에 대한 중국의 이해관계를 어느 정도는 보장해야 하며, 특히 1950년 11월 6일 개최된 영국 내각회의에서 만주에 전기를 공급하는 압록강 주변의 발전소들이 유엔군에 의하여 8) 호주는 캐나다와 함께 1948년 유엔조선임시위원회(UNTCOK)와 유엔한국위원회(UNCOK)에 참여하는데, 이 때에도 유엔을 통한 미국의 한반도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을 취하였다. 호주와 캐나다 대표는 1947년과 1948년 초에는 단독 선거의 실 시가 한반도 분단을 가져올 수 있다는 부정적인 입장이었고, 1948년 12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시에는 만약 이 정부를 한반도 에서 유일한 정부로 인정할 경우 한반도의 영구적 분단을 가져올 수 있다고 반대하였다. 그 결과 유엔에서의 대한민국 정부 승인안은 선거가 실시된 지역에서 유일한 합법정부 로 수정되었다(박태균, "Ugly Duckling", 비교한국학 13권 1호, 2005 ; 강성천, 1947~1948년 UN 조선임시위원단과 통일정부 논쟁, 한국사론 35권). 이 관련 문서들은 상당히 중요할 것 같 은데 국가기록원에서 수집한 TNA 문서에는 유엔조선임시위원단과 유엔한국위원단 관련 문서는 없다. 9) 남한에만 적합한 정책을 입안 실시한다는 고려가 1946년 5월에 있었다는 것은 한편으로 미국이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정책을 기존의 주장(1947년 제2차 미 소공동위원회가 열리던 시기에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정책이 입안되었다는 것)과 다른 것이 어서 주목되는 문서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격적인 단독정부 수립을 위한 것이 아니라 과도입법의원 과 '과도정부' 수립을 위한 정책으로도 볼 수 있기 때문에 이 문서만으로 기존의 주장을 완전히 반박할 수는 없다. 10) 문서에는 각 사단의 지도부에 대한 설명은 있지만, 정확한 군인의 수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1949년 중국 혁명 후 귀환한 조선인 2개 사단의 규모도 정확히 알려져 있는데, 1949년 이전 북한군의 중국 파견을 고려하면 일반적인 사단 규모보 다는 큰 규모의 조선인들이 중국 혁명 이후 북한으로 귀환한 것으로 추측된다. 전쟁 전 북한으로 입국한 조선의용대는 3개 사단의 약 5만여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여기에는 중국에 파견되었다가 귀환한 북한군의 수는 포함되어 있지 않다. 7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피해를 받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중국 정부에게 인지시켜서 중국으로 하여금 안심토록 해야 한다는 견해도 도출되었다. 연합국들이 중국과의 협상을 불가능하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영국 정부의 판단이었던 것이다. 11) 영국은 원래 유엔군이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 것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영국은 미국과 달리 중국의 경고 38선 이북으로 유엔군이 진격할 경우 중국이 지원군을 파견하겠다 를 허세가 아니라 실제로 일어날 수 있는 일로 보았다. 영국은 38선 이북으로 북진하는 대신 한국군만 북진하고 유엔군은 공군과 해군만 지원해야 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북한 지역의 39도선이나 40도선에서 전쟁을 멈추고 그 이북 지역을 완충지대로 남겨둔다면, 중국이 개입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입장이었다. 12) 이러한 영국의 반대 입장은 미국의 유엔을 통한 정책에 대한 불만에서도 드러났다. 영국은 한국전쟁 시 미국의 소련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이 소련보다도 영국을 더 위험 하게 할 수 있다고 보았다. 영국으로서는 소련이 핵무기를 개발한 시점에서 소련에 대한 적대적인 정책이 서유럽에 대한 소련과 동유럽의 강경한 정책을 불러올 가능성이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아울러 한국전쟁의 정전협상 과정에서도 협상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않는 주요 원인이 미국이 중국군과 북한군에게 부적절한 요구를 했기 때문이라는 입장을 드러내기도 하였다. 뿐만 아니라 미국이 중국에 대해서 침략자 로 규정하는 것에 대해서도 불편한 입장을 드러내고 있다. 13) 미국은 유엔을 통해 두 차례에 걸쳐서 영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중국에 대해 강경한 입장을 표명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그 가운데 하나는 1950년 10월 7일 유엔총회를 통해 38선 이북으로의 진격을 암묵적으로 허용하는 결의안이었다. 이 결의안은 찬성 47표, 반대 5표, 기권 7표로 통과되었다. 또 다른 하나는 1951년 2월 1일 중국에 대해서 침략자 로 규정하는 결의안이었다. 특히 후자의 경우 미국은 중국에 대한 경제 제재를 포함한 결의안을 추진하였는데, 영국은 이에 대해 강력하게 반대하였다. 영국 정부는 유엔 대표에게 중국을 침략자 로 규정 하는 결의안에 대해 찬성표를 던지지 말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결국 이 문제는 11) 김계동, 중국군의 한국전 참전 전후 국제사회의 대응,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5회 국제심포지엄 발표문. 12) 당시 베빈(Ernest Bevin) 영국 외상은 유엔군 사령부는 중국안보에 위협이 되는 것으로 해석되는 어떠한 군사활동을 할 의도를 가지고 있지 않다 라는 성명서를 중국 정부에 전달하기도 하였다. 이 성명에서 베빈 외상은 총선거를 실시하고 한 반도 전체에 새로운 민주정부를 수립하는데 필요한 기간 동안만 유엔군이 주둔 할 것이며, 유엔군 사령부는 중국 국경 근 처에는 한국군을 제외한 외국군을 주둔시키지 않을 것 이라는 입장을 전달하였다(김계동, 중국군의 한국전 참전 전후 국제 사회의 대응, 규장각한국학연구원 제5회 국제심포지엄 발표문). 13) 미국에 비해서 영국은 중국에 대해 덜 공세적인 입장을 갖고 있었는데, 이는 홍콩의 안보 문제와 관련이 있다는 점이 TNA 문서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Legal Staus of Armed Conflicts in which His Majestys Forces Are involved, PREM 8/1562). 8

Ⅰ. 총설 미국이 영국의 제안을 일부 수용해서 제재안 을 제외하고 중국을 침략자 로 규정하는 결의안을 내는 수준에서 마무리되었다. 14) 이러한 미국의 정책에 대한 비판에는 영연방 국가들의 입장이 함께 반영되었으며, 특히 인도의 네루(Jawaharlal Nehru) 수상은 미국의 전쟁 정책에 대해 비판적 입장을 갖고 있었다는 사실이 TNA 문서를 통해 나타나고 있다. 15) 영국을 비롯한 영연방 국 가들은 미국의 정책을 비판하기까지 하였다. 영국 사회에서는 중국과 미국이 전쟁을 한다면 참전을 거부해야 한다는 견해까지 나오고 있었다. 이러한 불만에도 불구하고 영국은 유엔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한국전쟁 정책에 적극 동참하였다. 이는 특히 초기 전쟁의 전개과정이 영국의 예측을 벗어났기 때문이었다. 영국은 영연방군과 함께 유엔 결의에 따라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지만, 인천 상륙작전과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 직후 조기 철수를 추진했다는 점이 TNA의 문서들을 통해 나타나고 있다. 16) 그러나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해 조기 철수가 어려워 졌을 뿐만 아니라 영국군이 북한군과 중국군의 포로가 되면서 전체적인 전쟁 전략에 서 미국의 정책에 보조를 맞출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었던 것이다. 특히 전쟁 포로에 대한 정책에서 영국은 미국의 보조를 맞추면서, 인도가 포로 교환 및 반공포로 심사 에 적극 참여하는 것을 지지하는 입장을 표명하는 문서들이 상당수 포함되어 있다. 또한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 가운데 전쟁 전략에 대한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어 주목 된다. 한국전쟁에 참전한 영국군은 주로 육군과 해군이었는데, 17) 육군의 경우 먼저 홍콩에 주둔 중인 2개 대대와 지원부대로 제27여단을 구성해 2개 대대는 낙동강 방어 작전에 참전하였으며, 제27여단은 압록강으로의 북진작전에 참여하였다. 이후 영국은 29여단을 추가로 편성하였는데, 이 시기에 많은 영국군이 포로가 되었다. 18) 한편, TNA에 있는 한국전쟁 관련 문서에는 특히 해군 관련 내용이 많이 있다. 영국 해군은 1950년 6월 29일에 항공모함 1척, 순양함 2척, 구축함 2척, 프리깃함 3척을 파견 14) 당시 여당이었던 영국 노동당의 의원 23명은 한국에서의 협상을 위하여 미국이 대만에서 철수하고 중국 정부를 유엔에 가입 시키자는 결의안 초안을 하원에 제출하기도 하였다(김계동 앞의 글). 15)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서 반드시 의견이 일치하는 것은 아니었다. 영국과 영연방 국가들이 한국전쟁에 군대를 파견한 이후에 도 영연방 국가들 사이에서의 갈등으로 인해 영연방 이라는 이름 아래에서 사단을 만드는데 1년의 시간이 걸렸다. 이로 인 해서 1951년에 가서야 영연방군 사단이 만들어지는 것이다. 또한 영국과 캐나다 사이에서도 이견이 있었는데, 캐나다는 영연방군 을 만드는데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16) 영국은 유엔군의 38선 이북으로의 북진을 결정한 미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반대하는 입장이었다(이상호, 맥아더와 한국전 쟁, 푸른역사, 2012 참조). 17) 영국군은 총 56,000여명의 군인이 참전하였는데 1,078명의 사망자와, 2,674명의 부상자, 179명의 실종자, 그리고 977명의 포로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8) 중국군의 참전 이후 큰 피해를 입은 영국군은 영연방 국가들과 통합하여 1951년 7월 28일 영연방 제1사단을 창설하였다. 제1사단은 영국을 비롯해 호주, 캐나다, 뉴질랜드, 벨리에, 룩셈부르크 등 모두 6개국 군대로 구성되었다. 9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하였다. 영국 해군은 미 극동해군사령부의 작전지휘 하에서 연인원 약 17,000여명이 작전에 참가하였다. 참전한 영국 해군은 정기적으로 보고서를 제출하였는데, 이 보고서 에는 각 지역에서 있었던 영국 해군의 활동상을 담고 있다. 이 보고서들에 따르면 영국 해군은 동해와 서해에서 모두 활동하였는데, 특히 주목되는 것은 아래와 같은 몇 가지 사실들이다. 영국 해군 함정들의 활동 범위가 압록강 인근에 미쳤다는 사실 : 전쟁 당시 유엔군 은 공중전뿐만 아니라 해전에서도 주도권을 장악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 것은 두 가지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니는데, 첫째로 육지의 군사분계선에 비해 북쪽에 위치한 서해 5도가 유엔군의 관할권 안에 들어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 다는 점이다. 이것은 결국 서해상의 군사분계선이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결 정되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둘째로 해상 주도권의 장악은 1953년에 확정된 북방한계선(NLL)에 대해 북한이 항의하지 못하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북한은 1973년까지 서해상의 북방한계선에 대해 아무런 항의를 하지 못했는데, 19) 이는 1973년까지 유엔군이 해상에서의 주도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소련 공군의 활동에 대한 보고 : 한국전쟁 당시 소련군이 공군에 한해서 제한적으 로 참여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소련 공군은 유엔군의 공군기들이 압록 강 이북으로 넘어오지 못하도록 막는 역할을 하였다. 당시 소련 공군은 유엔군 의 공군기들을 압도하였는데, 1951년 4월 12일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유엔군은 후방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압록강 철교와 주변 지역 폭격에 B-29 72대와 F-80 32대를 출격시켰다. 소련 공군은 이에 맞서 60대의 전투기를 출격시켰는데, 약 40분간 치러진 공중전에서 소련 공군은 한 대의 손실도 없이 B-29 16대와 F-80 전투기 10여대를 격추시키는 승리를 거두었다. 미국 공군사에서는 이날을 검은 목요일 로 기록하였다고 한다. 20) 영국 TNA의 문서들에는 유엔군의 비행기와 소 련의 MIG-15기를 비교하는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영국으로서는 북대서양 조 약기구(NATO)와 바르샤바 조약기구(WTO)가 서로 대립하고 있는 상황에서 소련 19) Park, Tae Gyun, "The Korean Armistice System and the Origins of the Cheonan and Yeonpyeong Incidents", Seoul Journal of Korean Studies, Vol. 24, no. 1, 2011. 20) 중 언론이 소개한 구 소련 공군 한국전 참전 비화( 중앙일보 2007년 6월 5일자) 10

Ⅰ. 총설 공군에 대한 정보는 매우 중요했기 때문이다. 21) 영국 공군기를 적군기로 오인 해서 격추당하는 사고와 북한군이 유엔군 항공기를 이용하고 있다는 보고서도 주목된다. 소련 해군의 활동에 대한 보고 : 소련 해군이 한국전쟁에 참전했다는 사실은 그다지 많이 알려져 있지 않다. 영국 TNA의 문서에는 소련 해군의 참전에 관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당시 소련의 참전이 본격적인 군사작전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정찰을 위한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최근 소련 잠수함 격침에 대한 증 언이 나오고 있는 바와 같이 일부 해군 참전에 대한 기록이 있지만, 22) 대부분 증 언에 의한 것일 뿐 문서 자료로는 확인된 것이 거의 없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소련 해군의 참전에 관한 영국 TNA의 문서는 중요한 자료가 될 수 있다. 아울러 영국 해군은 한국전쟁에서 전투 활동에 대한 기록뿐만 아니라 전쟁의 교훈에 대한 부분을 체계적으로 정리하였기 때문에 전체적인 전쟁 상황 분석의 자료로서 이용할 수 있을 것이다. 북한 지역의 전염병 확산에 대한 기록 : TNA의 문서에 의하면 영국 해군의 임무는 크게 몇 가지로 나뉘어질 수 있다. 하나는 전투 지역에 대한 함포 사격 및 항공 모함으로부터 항공지원을 통해서 육군의 지상전에 도움을 주는 것이다. 둘째는 게릴라들의 활동을 돕는 것이다. 당시 38선 이남에서 북한군의 일부가 빨치산 활동을 했다면, 북한 지역에서도 남한군의 일부가 게릴라 활동을 하였다. 해군 함정들은 게릴라들의 활동을 지원하는 업무를 수행하였다. 셋째로 북한 지역에 있는 주민들의 대피를 도와주었다. 전쟁 기간 중 많은 북한 사람들이 남하하였 는데, 해군 함정들은 이들을 수송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런데 이러한 자료들 중에서 전쟁 기간 동안 북한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한 사실을 기록한 보고서들이 있다. 대체로 평양 근교와 원산 근교 지역에서 전염병이 발생한 것으로 보고되고 있다. 영국 해군으로서는 전염병이 발생한 지역에 군대 를 투입할 수 없을 뿐만 아니라 그 지역 주민들을 해군 함정에 탑승시킬 수도 없기 때문에 특정 지역의 전염병에 대한 정보는 매우 중요했다. 이 문제는 또한 21) 당시 보고에는 소련의 MIG-15의 수직 상승과 하강 능력이 서방의 공군기에 비해 훨씬 자유로왔다는 보고가 포함되어 있다. 22) 6.25 때 서해 대청도 해상에서 미 구축함이 소련 잠수함 격침, 조선닷컴 2007년 5월 2일자(http://news.chosun.com/ site/data/html_dir/2008/05/20/2008052000581.html). 11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중국과 북한이 제기한 세균전과 연관될 가능성도 있다. 직접적으로 연관되었는 지는 알 수 없지만, 시기적으로 중국과 북한이 미국의 세균전을 비난했던 1951년 여름 이후의 시점과 일치하고 있다. 물론 이러한 내용은 우연일 가능성도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한 검토와 조사가 필요할 것이다. 북한군 및 중국군에 대한 평가 : 영국군의 보고서에는 북한군과 중국군에 대한 분석이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보고서들에서는 북한군과 중국군의 규모와 현황, 무기, 전략과 전술, 그리고 군의 사기 등을 자세하게 분석하고 있다. 이 보고서들은 한국전쟁 시기 북한군과 중국군의 분석과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될 것이다. 23) 포로 문제 : TNA 문서들을 보면 한국전쟁에 대한 전략은 중국군의 참전으로 인 해 일정한 변화를 거쳐야 했고, 이 과정에서 영국군 포로가 발생하면서 더 복잡 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영국의 가장 큰 관심은 북한, 중국과의 포로 협 상이 원만하게 해결되는 것이었기 때문에 정전협정과 포로 문제 해결을 지체시 켰던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포로 석방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보였다. 또한 일본과 좋은 외교관계를 갖고 있었던 영국으로서는 이승만 라인에 의한 일 본 어부들의 억류에 대해서도 부정적 입장을 보였다. 그런데 영국 정부를 가장 곤혹스럽게 했던 것은 영국군 억류 포로 중에서 송환 을 거부한 포로가 나왔다는 점이었다. TNA 문서에는 해병대 출신 포로 중에 콘 드론(Condron)이라는 포로가 있었는데, 이 포로가 공산주의 사상에 심취하여 자 발적으로 중국에 남겠다고 했고, 중국에서 공산주의 사상에 대해 더 공부하고자 한다는 내용이 있다. 이와 더불어 중국군이 운영하는 포로수용소에서 사상교육이 이루어졌다는 보고도 있는데, 이는 영화 Bamboo Prison 속에서 나오는 내용과 유사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24) 정전협정 이후 영국군의 주둔 문제 : 영국은 유엔군의 일원으로 참전하였지만, 23) 북한군에 대한 평가 문서 중에는 전쟁 초기 북한군의 규모가 약 92,200명 정도로 파악하고 있으며, 전쟁 초기 북한군에 의 해 남한 군대가 괴멸되면서 남한군의 수가 19,500명까지 줄어들었다는 분석이 주목된다. 이 문서가 얼마나 객관적인 분석에 바탕을 두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지만, 기존 연구에서 지적하고 있는 북한군의 수자와는 일정한 차이가 있다. 일반적으로 당시 북한군의 총 병력이 198,000여명, 남한군이 104,000여명으로 알려져 있는데, 이 자료에서처럼 92,200명 정도였다면, 북한군과 남한군은 전쟁 초기 병력 규모에서 큰 차이를 보이지 않았다. 24) "Bamboo Prison"은 루이스 세일러(Lewis Seiler) 감독이 1954년에 만든 영화이다. 당시 유명한 배유였던 로버트 프랜시스 (Robert Francis)가 주연을 맡았는데, 이 영화 속에는 포로들이 중국 공산주의자들에 의해 교육받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다. 12

Ⅰ. 총설 전쟁에 오랫동안 개입할 의사가 없었다. 영국으로서는 중국과의 관계도 고려해야 했고, 특히 홍콩 문제도 고려해야 했다. 따라서 정전협정이 맺어지자 영국 측은 유엔군으로부터 철수하거나 유엔군 내 영국군의 수를 줄이기 위한 방안을 마련하기 시작했다. 여기에는 영국군뿐만 아니라 영연방군의 축소 및 철수에 대한 논의가 함께 이루어졌다. 그러나 유엔군의 일원이었기 때문에 바로 철수할 수는 없었고, 1956년부터 영국을 포함한 영연방군이 축소되기 시작했다. 당시에 영국군은 1,542명, 뉴질랜드군 89명, 호주군 88명, 캐나다군 22명 등이 한국에 주둔하고 있었다. 결국 영국군은 1957년 10월까지 대부분 철수하였으며, 유엔군 사령관 렘니쩌(Lemnitzer)는 이에 대해 유감을 표시하기도 했다. 흥미로운 점은 이 시기 정전협정이 발효된 이후에 발생한 남북 간 교전에 대한 전투 기록이 수록되어 있다는 점이다. 이 자료들은 정전체제 하에서 정전협정 위반에 대한 내용들이 한국 신문에서 선별적으로 보도하고 있다는 한계를 극복 할 수 있는 자료로서 중요하게 이용될 것으로 보인다. 3. 1960 ~ 1970년대 관련 문서 박정희 정부 시기는 한국 정부가 직접적으로 영국과 외교관계를 맺었던 시기였다. 주한미군이 주둔하고 있고 미국의 원조가 계속되었지만, 한국 정부는 직접적으로 영국과 접촉할 수 있었다. 특히 수출주도형 경제성장 전략을 추진하는 한국으로서는 미국 외에도 유럽으로 시장을 확대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였다. 따라서 이 시기에 한국과 영국 사이에는 경제협조를 내용으로 하는 협력 관계가 조성되었다. 이에 더해 박정희 정부가 1970년대 중화학 공업과 군수공업을 발전시키는 과정에서 영국을 포함한 유럽국가에 시찰단을 파견하는 경우도 적지 않았다. 25) 아울러 유엔에 서의 남북대결이 중요한 상황에서 유럽국가의 한 축을 이루는 영국은 박정희 정부에 게 매우 중요한 외교적 대상이 되었다. 이 시기 제일 중요한 자료는 통화개혁과 관련된 내용이다. 통화개혁은 철저하게 비밀에 붙여져 있었는데, 1961년부터 시작된 통화개혁 작업에 대한 자료가 TNA 자료 중에 포함되어 있다. 이 자료에 의하면 1961년 11월 상공부 장관 정래혁이 산업시찰 25) 대통령기록관 소재 대통령비서실 문서들에는 군수산업 발전을 위한 기술 도입을 위해 해외에 시찰단 및 대표단을 파견 하는 문서들이 포함되어 있다. 이 문서들에 의하면 이스라엘, 타이완 등과 함께 영국은 박정희 정부가 주요하게 벤치마크한 나라이다. 13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의 명목으로 영국을 방문해서 신권 화폐를 인쇄하는 문제를 논의하였다. 26) 정래혁 상 공부 장관은 영국을 방문한 이후에도 독일과 이탈리아를 시찰하고 귀국한 것으로 되 어 있는데, 이는 영국 방문의 원래 목적을 숨기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한국과 영국 사이의 무역에 대한 자료들도 주목된다. 5.16 쿠데타 직후의 문서에서는 한국과 영국 사이의 교역 전망에 대해 상당히 부정적인 평가를 하고 있다. 이는 한국 정부가 보유하고 있는 외환이 대체로 미국의 ICA에서 나오고 있는데, 이로 인해서 대 부분의 무역이 미국에 집중될 수밖에 없다는 점이 지적되고 있다. 또한 다른 외환의 수급에 대한 요청이 독일과 일본에서도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을 지적하면서 외환의 공급이 이루어지는 국가와의 무역이 더 강화될 수밖에 없기 때문에 당분간 한국과의 무역은 더이상 증가할 가능성이 없다는 진단을 내리고 있다. 그러나 1970년대 후반에 가면 무역 분쟁에 대한 문서가 있을 정도로 한국과 영국 간의 무역 규모가 성장하였다. 주지하듯이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중반부터 수출입 국 을 내세우면서 해외 수출을 강조하였고, 1970년대 중반에는 재벌들이 종합상사 를 만들면서 해외 수출에 더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었다. TNA에 있는 1977년에 생산된 문서 중에는 영국에 대한 한국의 흑백 TV의 수입이 영국의 국내 산업을 위협하고 있 으며, 이를 막기 위해서는 쿼터제를 도입해서 연간 5만여대가 수입되던 것을 19,000 대로 한정해야 한다는 입장을 밝히고 있다. 이후 이와 관련된 무역 분쟁이 어떻게 진 행되었는가에 대해서는 다른 자료를 통해 전말을 밝힐 필요가 있을 것이다. 한편, 원자력 관련 문서도 중요한 내용을 담고 있다. 한국 정부는 1960년대 후반부터 원자력 발전에 대해 적극적으로 고려하기 시작했다. 원래 한국의 원자력은 학문적 관 심에서 시작되었고, 1959년에 원자력원의 설립으로 원자력 이용을 위한 연구가 더욱 발전하였다. 그러나 1967년 과학기술처가 설립되면서 원자력청으로 개편되었고, 1968년 이후에는 원자력에 대한 관심이 발전 사업에 집중되면서 한국전력에서 원자력 발전 사업을 주도하게 되었다. 이후 1970년대를 거치면서 원자력 발전소를 건설하는 사업 이 한국 정부의 에너지 확충 사업에서 가장 중요한 부분을 차지하게 되었다. 그런데 한국 정부가 핵발전소 건립을 추진하고, 핵 발전 이후의 폐기물을 재처리하 면서 문제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핵폐기물의 재처리는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갖춘다는 것을 의미했다. 그러나 미국은 한국이 핵무장 잠재력을 가진 국가가 되기를 26) 조갑제 닷컴 에서는 천병규 재무부장관이 방문한 것으로 되어 있는데, 영국 문서에는 정래혁 장관이 방문한 것으로 나 오고 있다(http://www.chogabje.com/board/view.asp?cpage=0&C_IDX=38100&C_CC=AZ). 천병규는 정래혁이 방문 한 이후에 영국을 방문했는데, 천병규 장관의 방문에 대한 문서는 현재 수집되어 있지 않다. 14

Ⅰ. 총설 원하지 않았고, 이로 인해 한국 정부는 미국 이외의 국가와 핵 원자로 도입을 위한 협 상에 나서게 되었다. 27) 1973년의 한 미 원자력 협정에서 핵폐기물의 재처리를 금지 한 것과 1970년대 중반 한국 정부가 프랑스로부터 원자로를 도입하려 하자 미국 정부 가 이를 막고자 했던 것이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TNA 문서에는 1960년대 말 한국 정부가 원자력 발전소 건설을 영국에 수주하려고 하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한국 정부는 1974년부터 500메가와트의 원자력 발전소를 가동할 계획을 갖고 있었는데, 여기에 영국이 참여할 수 있는가의 여부를 분석하고 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발전소를 수주할 경우 한국 정부에 대해 10~15년 거치의 자금을 제공해야 하는데, 당시 영국 정부 내에서 이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여기에는 영국 수출신용보증부(Export Credits Guarantee Department ; ECGD)가 적극적 으로 개입하였고, 1969년에는 영국 국영전기회사가 원자력 그룹과 함께 신용 보증문 제를 논의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영국의 움직임은 결국 실패하였는데, 그 이유는 한국 정부가 미국 정부의 지속적인 압력에 의해서 미국의 Westing House로 수주 방향을 바꾸었기 때문 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의 원자력연구소와 과학기술처는 영국의 원자력 관련 기관으로부터 지속적으로 자문을 받았다. 이 시기에 또 하나 주목되는 것은 한국 정부의 대외정책 및 유신선포와 관련된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는 점이다. 박정희 정부는 1960년대 북한과 경합하는 과정에서 유엔총회에서 더 많은 지지를 받기 위해 대외관계의 확대가 필요하였다. 이는 북한과의 이데올로기 경쟁에서 유리한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것이기도 했다. TNA 문서에 의하면 한국 정부는 외교관계를 확대하기 위해서 영연방 국가와의 관계 강화에 대해 영국에게 많은 요청을 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영국은 한국 내부의 상황에 대해 상당히 많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유신체제의 선포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졌다. 1971년의 긴급사태 선포 와 함께 1972년의 유신체제 선포는 영국의 주요 관심사였다. 이는 당시 한국에 있었 던 국제연합한국통일부흥위원단(United Nations Commission for the Unification and Rehabilitation of Korea : UNCURK)에 영국이 직접 참여하지는 않았지만, 전체 7개국 대표로 구성된 회원국 중 영연방 국가의 일원인 호주와 파키스탄이 참여하고 있었고, 영국과 가까운 외교관계를 맺고 있었던 태국 역시 UNCURK에 대표를 파견하고 있었기 27) 김성준, 한국 원자력 기술 체제 형성과 변화, 1953 1980, 서울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참조. 15

해외 수집기록물 해제 (영국 편) 때문이었다. 1950년 10월 국제연합총회에서 조직된 UNCURK는 한국에서의 통일정책 이나 경제정책뿐만 아니라 한국 내의 정치, 사회적 상황에 대해서도 유엔총회에 보고 하였으며, 보고 내용은 유엔총회에서 토론을 통해 한국 통일에 대한 중요한 자료로 채택되었다. 이 과정에서 UNCURK의 대표들은 한국 내의 대통령 선거와 총선거에 대해 보고하기도 하였는데, 이는 한국에서의 민주주의 제도가 운영되는 상황을 보여주기 위한 것이었다. 따라서 UNCURK는 한국의 민주주의 제도가 유지, 발전하는 과정에 대해 매우 민감 할 수밖에 없었다. 이미 1952년 부산 정치 파동 시 UNCURK가 이승만 정부의 계엄령 선포 및 국회의원 체포에 대해 한국 정부에게 강력하게 항의했던 경험이 있었고, 박 정희 정부 시기에도 민주주의 제도의 발전에 대해 민감하게 반응했다. 따라서 영국은 1973년 UNCURK가 유엔총회에서 해체되기 전까지 한국의 정치에 대해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고, 긴급사태와 유신체제 선포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갖고 있었다. TNA 소장 문서들은 이상과 같은 한 영 관계의 특수성을 반영하는 내용을 담고 있다. 따라서 이 문서들이 한국현대사를 복원하는데 있어서 절대적 으로 중요한 의미를 지니기는 어렵지만 보조자료로서 이용될 수 있으며, 대외관계 관련 주제의 논문을 쓸 때에는 직접적인 자료로 이용될 수 있다. 예컨대 19세기 말 20세기 초 조청( 朝 淸 )관계와 조일( 朝 日 )관계, 그리고 조러( 朝 露 )관계에 대한 논문을 쓰게 된다면, 영국의 문서들은 이 관계들을 보다 객관적으로 조명할 수 있는 중요한 근거를 제시할 수 있다. 물론 한국전쟁 관련 문서들은 군사전략에 대한 직접적인 자료들을 담고 있기 때문에 군사사와 관련된 연구에는 직접적으로 인용되어야 할 중요한 자료라고 할 수 있다. 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