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성 페미니스트 가 되는 것은 가능한가 천정환 _ 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교수 heutekom@naver.com 고지훈의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 엘피) 과 정희진의 페미니즘의 도전 ( 교 양인) 을 박수치면서 읽었다. 이 책들은 오래 문명文 名 을 날릴만한 내공을 갖춘 이들이 낸 첫 번째 저작이다. 30 대 후반인 이들 저자는 몇 가지 공통점이 있다. 첫째, 이제 첫 번째 단독 저작을 냈지만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 그리고 팬도 있는 선수 들이라는 것. 일종의 중고신인 이랄까. 이들은 신문과 웹에서 넘치는 끼 와 파워 있는 문체로 글을 써왔다. 물론 공저들도 있었고. 둘째, 이들은 전문적 학제 속에서 길러지고 그 최종적(?) 단계인 박사 학위 취득을 위해 공부하고 있는 전문 연구자이다. 책을 읽어보면 알겠지만, 이들의 책에는 각각 국사학과 여성학의 전문적인 지식과 자료들이 원용되어 있고, 그리고 그 영역에서 사용하는 논리가 구사되어 있다. 그러나 이 책들은 전문적이고 주류 학제 담당자들과 불화할 수 있다. 이 저자들은 한편 아직은 다 안 망한 한국 인문ㅎ사회과학계가 배출할 수 있는 최대치로 볼 수도 있지만, 이들 책 자체는 일종의 과외 활동으로 나아가 기성의 질서와 사고에 대한 도전 으로 여겨질 수도 있다. 문장의 무덤을 넘어 오늘날 전문연구자 들은 점점 더 글다운 글을 안 쓰거나 못 쓰고 있다. 이에 대한 문제제기는 이미 여러 군데에서, 여러 번 터져 나왔으나 상황은 나빠지고 있다. 논문 쓰기가 오히려 더 큰 권력을 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문 ㅎ사회과학에도 예외 없이 산술적으로 적용되는 업적 평가 제도는 점점 돌이킬 수 없는 규율이 되고 있고, 이 틀 안에서 좋은 위치를 얻기 위한 경쟁도 심해지고 있다. 이미 교수가 된 사람들도 승진이나 자리보전을 위해서 논문 편수를 채워야 하니, 아직 학위를 받지 않은 사람이나 교수가 되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은 이놈의 편수
앞에서 아주 초조해진다. 한편 이와 같은 평가제도 는 오늘날 학술서적과 논문 을 양산하고 있다. 결코 신문이나 잡지에 그리고 이런 기획회의 같은 지적인 잡지에도 가시화되지 않지만, 또 기획자나 편집자들은 필자가 없다고 늘 푸념이지만, 연구자들은 무엇인 가 잔뜩, 매우 열심히 쓰고 있다. 혼자 골방에 처박혀서, 학진 등재 또는 등재 후보 학술지에 제출할 글을 쓰고 있다. 문제는, 그처럼 알고 보면 양산되고 있는, 그야말로 전국적으로( 아니 세계에서) 거의 기십 명 정도밖에 안 될 독자들을 위한 그 전문적인 글과 책의 품질을 점점 믿을 수가 없게 된다는 점이다. 객관적으로 학술 저널의 평균 수준은 분명 점점 떨어지고 있다. 그러니 계량화와 제도화를 통해 기하려던 학문 발전 은 이루어지고 있을까? 한편으로 이 등재후보지 ( ) 학술 논문은 일반 교양인뿐 아니라 인접분야의 연구자도 이해할 수 없는 글일 뿐 아니라, 박사 학위 논문이 그러한 것처럼 그야말로 문장의 무덤이다. 문체나 개성, 상상력 같은 것은 완전히 소탕된 그런 문장 말이다. 인문사회과학의 독자가 줄고 있다고 아우성이지만, 생산자와 수용자 공간의 불균형이나 연구자와 독자의 소통 공간은 더 좁아지고 있는 것이다.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이나 페미니즘의 도전 이 사회적으로 꼭 필요한 책일 뿐 아니라, 심지어 한국사회의 진보에 기여하게 될지라도, 학계 에서는 쓸모없는 책으로 판정받을 수도 있다. 심사위원들의 입맛에 따라 또는 기계적인 평가 기준에 따라 정해지는 오로지 학술 전문 서적 인가 아닌가라는 판단에 이 책들이 부합 하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정황이기 때문에 더더욱 새로운 좋은 필자를 찾아내기가 어려워진다. 제도의 기준과 현명하게 타협하는 전략이 인문ㅎ 사회과학자에게, 그리고 편집자에게 요청 되는 것이다. 용기와 열정, 빛나는 개성과 힘, 거기다 부지런함까지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 젊은 저자들은 페미니즘의 도전 이나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같은 좋은 책을 내놓은 것이다. 그들이 끝까지 문장의 무덤과 제도의 지뢰밭을 잘 통과하기를 바란다. 현대사를 둘러싼 투쟁,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성
약간 껄끄럽게 읽히는 이 책의 제목은 범죄의 재구성 에서 착안한 것이라 한다. 만약 부피가 약간 더 가볍고 귀에 더 쏙 들어오는 제목이었다면 이 책은 아주 잘 나가고 있지 않을까? 사실 고지훈의 문체 자체가 논의할 만한, 그리고 벤치마킹해볼 만한 거리이다. 그것은 남다른 상상력에서 나온다. 기발함 내지는 엉뚱함이라 해도 좋을 상상력은 그가 겉으로 무척 예의바르고 얌전한 인물임에도 속에서는 끓는 분노와 정열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아래 예들은 각각 6공화국의 위정자와 해방 직후 환국한 임정 세력에 대해 말하고 있는 대목들로, 대상을 대하는 눈의 높이나 태도가 철저히 풍자정신 에 맞춰져 있지 않으면 결코 나올 수 없는 문장들이다. 5공 청문회와 잇단 비리사건으로 수세에 몰렸던 집권 세력 역시 손놓고 있지는 않았다. 올림픽이 끝난 직후인 1988 년12월 28 일, 민생치안 확립을 위한 특별지시라 는 엄포를 놓는다. 놀만큼 놀았지? 이제 형한테 좀 맞아야겠다! ( 강조는 인용자) 요즘 연예매니지먼트사의 주요 임무 가운데 하나가 빠부대 결성이듯, 임정의 빠부대 소위 국내 지방조직의 건설은 환국 임정 세력에게 가장 중대한 문제였다. 어떤 역사학자들이 신성한 역사 앞에서 저런 비유를 쓸 수 있겠는가. 몸에 와 닿는 비유를 구사하여 주관의 경험을 공감 가는 문자로 만들어낼 수 있는 저런 능력은, 문학교육학자들이 말하는 문학 능력literary competence 의 일종이다. 이런 능력은 불행하게도 아무나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웬만한 연습 으로 되는 것도 아니다. 그런 능력은 국립국어연구원이 정해놓고 방송국 아나운서들이 폭력적 으로 바른말 고운말 같은 데서 강요하는 올바른 표현 이라든가, 정치적- 중립성 혹은 정치적- 점잖음 같은 것에 존경심을 느끼는 스타일의 사람들에게는 잘 생기지 않는다. 오랫동안 길러온 끼 와 삶의 태도 문제가 크게 작용하는 것이다. 선수들이 그러하듯이, 또는 그러해야 하듯이 모든 종류의 문장( 즉 앞의 허두에서 말한 개성 0 을 지향하는 논문에서부터 가장 압축적으로 쉬운 단어들만 조합해서 써야하는 신문이나 잡지의 7매나 15 매짜리 칼럼, 그리고 서사를 구성하고 조합해서 만들어야 하는 두꺼운 책까지에 ) 능하기란 쉽지 않다. 고지훈은 그럴 능력을 충분히 가진 인물이다. 하지만 이전에 웹에서 썼던 글에 비해서 현대사 인물들의 재구
성 의 글이 더 우수한 것은 아니다. 그리고 가끔 눈에 거슬리는 문장들이 있다. 아무튼 을 남발한다든가, 거침없는 구어체로 쓰다 보니 나오는 약간 부정확한 단어들과 비문들이 그것이다. 아마 오소독스 역사학자 ( 고지훈이 오소독스 역사학자 라고 책의 뒷표지는 말하 고 있지만 고지훈은 오소독스 가 되기에는 너무 뛰어난 상상력과 유머감각을 갖고 있다. 오소독스 역사학자 가운데에는 정말, 만나본 분들은 알겠지만, 많이, 앞뒤가 막히신 분들이 많다. 나는 국사학계가 이 큰 고기가 놀기에는 너무 작은 물이 아닐까, 걱정이 많다) 들이 봤다면 분명 눈살을 찌푸렸을 이 핑크색(!) 표지 책의 독자가 누구인지는 약간 궁금해진다. 알라딘에 들어가 보니, 꽤나 마니아스런 독자들과 함께 고답적이고 역사교육에 진저리를 쳐왔던, 그리고 현대사 때문에 답답했던 젊은이들이 독자 리뷰 를 달아놓았다. 현대사는 오늘날 투쟁의 중요한 장이 되고 있다. 이 투쟁은 일종의 기억 투쟁이며 보수- 진보 간의 이데올로기 투쟁이기도 하다. 북쪽을 포함한 한국의 정치 지형 전체가 이 투쟁을 쉬지 않게, 그리고 늘 들끓게 만들고 있다. 아마 노무현 정권이 있는 한, 또는 박정희의 딸이 보수우익당의 대표로 있는 한, 아니 이들이 물러난 이후에도 그리고 김일성의 아들이 북한정권을 담당하는 한, 이 투쟁은 치열할 것이다. 이 투쟁의 지형은 불균질하다. 투쟁의 강도와 소란스러움은 현대사의 소재에 따라 다르다. 국가가 만들어 놓은 각종 진상 규명 위원회들의 발표와 MBC 드라마 < 제5 공화국>, 임상수 영화 < 그때 그 사람들> 그리고 강정구 교수 사건, 장기수 묘역 훼손 사건 등등을 생각해보면, 이 투쟁이 대한민국의 출발부터 6.25 까지의 역사 과정, 그리고 북한과 직접 결부되어 있는 사안일 경우 특히 심각해진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투쟁에 그야말로 적극적으로 나서는 ( 극우) 보수세력과, 전쟁ㅎ 빈곤을 겪은 세대가 점차 사라지고 있어도, 북한의 모순과 허약함은 새로운 종류의 우익이 데올로기를 생산해내는 배경이 된다. 고지훈의 전공 분야가 바로 대한민국의 출발부터 6.25 까지의 역사이다. 한홍구, 박태균 같은 그의 선배들처럼 그가 이 기억 투쟁의 전장에서 어떤 역할을 하게 될지 궁금해진다. 글을 쓰는 와중에 해방 전후사의 재인식 ( 책세상) 이 출간되었다는 소식이 들려 온다. 대단하다. 조중 동에 의해서 정말 크게 보도되고 있고, 책 내용이 그래픽
뉴스로까지 요약되어 실려 있다.( 고지훈의 책은 이들 신문에서는 전혀 다루어지지 않다시피 했다. 이런 차이가 왜 생길까?) 조중 동이 한결 같이 환호하는 이유는 해방전후사의 재인식 에 참여한 이영훈, 박지향, 김일영, 김철, 신형기, 카터 J. 에커트 등의 필자들을 한데 묶어 뉴라이트라고 말할 수 있다는 생각 때문이다. 기억 투쟁의 오른쪽 바리케이드에 이 필자들은 징용된 것이다. 기성 역사학계의 민족주의가 교정받아야 할 부분이 분명 있다. 그러나 ( 아직 이 책을 읽지는 못했지만 ) 오늘날 포스트주의자들은 어디에 있는가? 저들이 오른쪽 에 서게 됨은 학문적 양심과 진리를 추구하는 그들이 단지 조선일보 같은 세력에 의해 전유된 것인지, 아니면 아직 한국학계에서는 소수파인 그들의 인정욕망이 뉴라이트라는 냄새나는 라벨을 덮어쓰는 일까지 별로 안 부끄럽게 만드는 것인지? 새삼 포스트주의의 공과에 대해 묻고 싶어진다. 여성주의의 힘 페미니즘의 도전 ( 이하 도전 ) 을 읽은 바에 따르면 페미니즘도 진동하는 사상이다. 도전 을 통해 페미니즘은 보편적인 새로운(?) 인간론이자 정치사상이 라는 것을 확인했고, 그래서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 ( 이하 큰 따옴표 속의 말은 모두 도전 속의 말) 이라는 것을 느꼈다. 그러나 다른 한편, 페미니즘은 가부장제의 피해자인 여성의 사상 이며, 여성의 입장 에서 연역+ 귀납된 입장의 체계이며, 따라서 당파적인 사상이라는 것도 재삼 확인하게 되었다. 이와 같은 진동이 단지 페미니즘 내부의 노선 차이( 예컨대 책 후반부에서 성매매 문제와 관련하여 설명하고 있는 자유주의/ 마르크스주의 페미니즘 vs 급진주의 페미니즘) 인지, 아니면 여성 이라는 존재( 그리고 그 명명) 자체의 진동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인지? 하여간 페미니즘은 마치 마르크스주의처럼 ( 마르크스주의의 진동 E. 발리바르) 보편적이기도 하고 당파적이기도 한 사상인 것이다. 저자는 페미니즘의 보편성을 말하고, 뒤에서 스스로 그것을 뒤집어 여성주의는 객관적이 지도 보편적이지도 않다. 아니, 그것을 지향하지 않는다 고 말한다. 단정적으로. 이는 단지 가치중립적 외관 을 거부한다는 말 이상이다. 전자의 측면은 나를 가르쳤고 또 페미니즘에 대해 완전히 동의하게 만들었다. 후자의 측면은 나를 입 다물게 한다. 먼저 보편적 사상이면서 정체성의 정치 가
아니라, 횡단의 정치 를 실현한다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 보자. 여성주의는 차이나 차별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차이를 이해하는 방식이다. 차이가 차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권력이 차이를 만든다. 여성주의는 정치적 올바름, 통일성이나 단일성의 가치보다는 대화의 가치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럴 때, 여성뿐만 아니라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도 들리게 된다. 다른 타자들의 목소리를 배제하지 않는 것, 이것이 진정한 보편주의 정치학으로서 여성주의 언어가 지닌 힘이다. 마르크스- 레닌이 죽은 개가 되고 난 뒤, 세상의 어떤 주의자 가 저처럼 자신감 있게 자신의 주의 에 대해 저렇게 자신감 빵빵하게 마니페스토 할 수 있을까? ( 故 전인권의 말대로 여성주의는 들을 만한 이야기를 하는 유일한, 마지막 반체제사 상 일지 모른다.) 뿐 아니라, 여성주의는 보편적이고 즐겁기도 한 것이다. 여성주의는 남성과 여성 모두에게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의문을 갖게 하고, 스스로 자신을 정의할 수 있는 힘을 준다. 대안적 행복, 즐거움 같은 것이다.( 중략) 여성주의는 여성만을 위한 것이 아니다. 남성에게, 공동체에게, 전 인류에게 새로운 상상력과 창조적 지성을 제공한다. 남성이 자기를 알려면 여성문제젠더 ( ) 를 알아야 한다. 여성 문제는 곧 남성 문제다. 여성이라는 타자의 범주가 존재해야 남성 주체도 성립하기 때문이다. 저와 같은 선언에 걸맞게, 도전 전체를 통해 도저한 자신감과 포용성과 건강성 이 유지되는 것을 보고 싶었다. 저런 선언을 긍정해줄 수 있다. 여성주의는 가장 강력한 일종의 포스트모던 - 사회사상이자 인간 사상이며 가장 풍부한 비동일성의 사유인 듯하다.( 사실 들뢰즈주의 같은 예는 어떤가? 탈주나 유목민 같은 개념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수사적으로는 매우 뛰어나나 실천의 면에서는 공허하다. 성격이 급하거니와 인생이 아주 짧다고 생각하는 나 같은 사람은 그런 한갓진 사상에 동의할 여유가 없다.) 그럴 수 있었던 것은, 페미니즘은 제반의 근대사상 전체뿐 아니라 포스트- 모던 사상들과 맞대결해왔고, 포스트콜로니얼리즘 같은 타자의 사상 과 대화해왔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가 말한 대로 페미니즘은 타자의 사상이며, 타자의 사상 타자의 입장 ( 그런 점에서 서경식의 디아스포라 기행 도 흥미롭다) 만이 새로운 보편을 가능하게 한다. 동의한다. 타자의 목소리야말로 인간의 자기중심성을 교정하는 데 가장 강력하고 유용하다. 나는 약5-6년 전에 한 게이액티비스트와 꽤 긴 시간 인터뷰를 한 적이 있었는데, 암에 걸려 돌아가신 내 어머니의 죽음과 그 과정에 대해 관찰하고 사유함으로써 얻은 배움 이외에, 인간이란 무엇인가라는 명제를 다시 생각하게 해주는 데 이만한 큰 경험이 없었다. 그는 싸이코 나 변태 가 아닌, 싸나이 도 일반적인 남자도 아닌, 그냥 똑똑하고 고민 많은, 그냥 그대로 그 자신인 그런 사람이었다. ( 이런 면에서 주류로부터는 배울 게 없다. 특히 아저씨들. 재미없다.TV 토론프로 그램들이 잘 보여주는 것처럼 한국의 아저씨들은 남의 말을 안/ 못 듣는다. 아저씨 들의 강력한 자기동일적 정체성 때문이다. 아저씨들은 외롭고 불쌍한 인간들이다. ) 보편 사상으로서 페미니즘은 해체적이기도 하다.( 뒤에서 쓰겠지만, 그래서 약간 탈이다.) 페미니즘은 차이로부터 기존의 보편을 끊임없이 해체하고 재구성한다. 정희진이 말하는 페미니즘은 ( 다행스럽게도) 사회적 범주와 사회적 그룹들을 동질화 ㅎ자연화하는 정체성의 정치가 아니라 횡단의 정치를 지향한다. 또 저자 의 말을 옮기면,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과 그 개인이 지향하는 사회적 가치를 구별하며, 대화의 과정을 목표로 삼는다. 초월적 보편이 아니라 소통 가능한 보편을 지향하며, 기원이나 본질이 아니라 자신을 오염에 개방하면서, 움직이는 현실을 타고 넘나드는 것이다. 도전 의 서문이 우리 시대에 씌어진 명문 名 文 의 하나라는 생각도 든다. 대자화된 ( 이렇게 헤겔식으로 불러도 될까?) 페미니즘은 타자 의 위치로부터 솟아 나와서 보편적 인간 해방을 겨냥하는 사상이라는데 어찌 박수를 안 칠 수 있으리오. 진정 그런 것이라면 나는 오늘부터 친-여성주의자pro-feminist 다. 당파적 사상으로서 페미니즘 그러나 페미니즘이 피해자이며 억압된, 여성 이라는 동질적 정체성을 가진 존재의 입장에서 연역/ 귀납된 논리라는 것을 도전 의 글들이 보여준다.( 그런데
이 책은 유감스럽게도 전작 은 아니다.) 이런 페미니즘은 정체성 덩어리 이며 나는 이에 대해 많은 신중하고도 양심적인(?) 남자들이 그러하듯이 별로 할 말이 없다. 왜냐, 정체성의 시각에서 나라는 인물을 말하면, 나는 비- 장애인/ 명문대 / 이성애 자/ 경상도 출신의 젊은 남성, 즉 한마디로 주류 남성이다. 안 그런 거 같지만 사실 한국 사회에서는 나와 같은 정체성 을 가진 자들은 소수 이며 ( 만약 그런 게 있다면) 젠더- 계급- 연령 피라미드의 꼭대기에 놓이는, 거의 왕자님 같은 존재이 다. 그렇다면 나 같은 존재는 비록 인간이기는 하겠지만 사실상 인류의 적이다. 여성인 정희진( 비장애인/ 이성애자) 이 장애인이나 동성애자 같은 존재에게 가끔 가해자 의 위치에 서는 것이 아니라, 거의 존재 자체가 가해 이다. 하지만 비록 왕자 이기는 하나 나도 약간의 반성능력을 가진 존재이기 때문에, 그 사실을 알고 있다. 그래서 사실상 다수 인류이며 소수자인 그들의 말이 다 옳고도 아프게 들린다. 그래서 나는 달리 말할 게 없다. 그냥 닭치고 있는 것이 내 가해 가능성을 줄이는 방법인 것이다. 정치적으로 올바르려면 아무 말도 할 수 없습니다. (16 쪽) 이런 반성을 하는 데에는 여성주의도 크게 한몫했다. 마르크스주의만큼 강력하게. 각설, 도전 에 따르면( 특히 1부 후반부에서 2 부까지), 어디까지나 남성언어와 여성언어가 따로 있고 여성의 섹스 와 남성의 섹스 가 다르다. 이런 부분을 읽어갈 때 나는 서문을 읽을 때와 달리 이 책이 ( 보편이나 대안을 제시하는 책이라기 보다) 주로 폭로 하는 책이라 느꼈다. 물론 피해자의 사상이거나, 폭로 한다고 해서 페미니즘의 설득력이 별로 줄어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특히 한국에서) 일방적인 남성지배나 성폭력 그리고 범죄 수준의 성매매( 이성애- 성매매- 성폭력은 정도 차이일 뿐이라는 급진주의 페미니즘의 입장은 틀렸으며 위험하다고 생각한 다) 는 넘쳐나는, 치 떨리는 현실 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성은- 남성은- 이라는 차이보조사로 시작하는 많은 단정적 인 명제들은 문제가 있다. 우선 그것들은 남성을 어쩔 수 없이 타자화함으로써, 그 자체로 부정확하다. ( 예: 남성의 식욕은 성욕과 무관하지만, 여성의 식욕은 곧 성욕으로 유추된다. 군대뿐만 아니라 동성 사회, 남성들만 있는 공간에서 벌어지는 권력 투쟁은 언제나 성적인 의미를 동반한다. 남성의 섹스는 폭력, 분노, 스트레스와 동반 상승한다. 등등) 그리고 더 불행한 것은 이런 입장은 어쩔 수 없이 분리주의를
전제하게 됨으로써, 남성이 친- 여성주의자가 될 가능성을 줄이고, 페미니즘을 고립되게 할 것이라는 점이다. 가부장제의 수혜자이며 기득권자일 뿐 아니라, 주체 인 남성 은 결코 그러한 타자( 여성) 의 입장 이나 여성의 관점 에 다다를 수 없다. 피해자- 되기/ 가해자- 되기의 악순환에서도 벗어나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 다. 분리주의는 분명 남성의 여성주의에 대한 공포와 핑계( 노력하는 마초 ) 를 증폭시킨다. 한편 이와 같은 입장은 저자 스스로 말한 역사와 문화를 초월하여 분석 과정에 선행하는 동일한 집단으로서 여성 은 존재하지 않는다. 여성 억압의 동일성에 대한 강조는, 차이에 대한 강조만큼이나 소통을 어렵게 할 수 있다.(237-238) 같은 명제와 충돌을 일으킨다. 그렇다면 책에서 예를 든 성판매여성의 복잡다단한 정체성( 과 입장) 처럼, 모든 여성의 정체성이나 가부장제에 대한 이해관계( 입장) 가 다르다. 그래서 여성은- 남성은- 이라는 말이 성립하지 않는다( 않아야 한다). 남성 페미니스트 ( 톰 디그비, 또하나의문화 ) 에도 헨리 S. 루빈이라는 FTM( 성전 환자술로 남자가 된 전 여성) 페미니스트가 정체성 패러다임 페미니스트 에 대해 비판하는 글이 있다. 하버드대학 강사 일을 한다는 이 복잡한 정체성을 가진 FTM은 남성- 여성이라는 정체성은 허구라고 주장한다. 심지어 여성- 됨 을 최후 심급에서 보증하는 것처럼 여겨지는( 나는 그렇게 믿고 있었다.) 여성-몸의 경험( 예컨대 생리) 같은 것조차도 몸의( 기실 인식의) 지향성보다는 중요하지 않다. 그래서 이와 같은 진동은 정희진의 것만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은 넓고도 다양한 페미니즘 속의 차이이거나 논쟁거리인 것을 넘어서, 여성주 의자의 ( 젠더주의로서의? 옮긴이) 환원 욕망 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이 된다. 그렇다면 여성주의는 어떻게 되는가? 여성의 정체성 을 전혀 상정하지 않는 여성주의가 가능한가? 또는 정체성 을 해체하는 주의가 가능한가? 포스트주의로서 여성주의? 이에 대한 정희진의 답은 명확하다. 여성 내부의 타자들의 목소리는 끊임없이 기존 여성주의를 해체, 재구성할 것이다. 여성주의는 언어 속에만 있든지 혹은 구성되어 가는 것 인가? 환원 없는 이론이 가능하다는 생각은 기실 포스트주의의 고유한 태도이다. 페미니즘
은 확실히 포스트주의로부터 영향 받은 사상의 하나인 것이다. 주지하듯 마르크시 즘은 유감스럽게도 (!) 경제결정론이며 노동계급 중심성 의 사상이다.( 경제결정론 의 세련된 형태는 알튀세르의 오지 않는 최종심급론이며, 노동계급 중심성의 최후의 형태는 E.P 톰슨과 같은 태도일 것이다. 유동하는 흐름으로서의 계급론.) 이런 환원론적 공백을 보완하기 위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한 짓은 현실의 투쟁을 통해 핵심고리론( 레닌) 과 주요모순론( 마오) 을, 그리고 상당히 군사적인 냄새도 나는 전략ㅎ전술론( 레닌ㅎ스탈린) 같은 사고틀을 만들어 붙인 것일 테다. 이는 현실 역사에서 마르크스- 레닌주의를 무척 유능하고 최고로 이성적인, 그러나 상당 히 잔인한 사상으로 만들었다. 그 폐해는 지적되어 왔고, 그래서 포스트주의자들은 환원을 싫어하는가 보다. 포스트주의자로서 정희진은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무엇을 문제라고 보는 가 (!) 라는 소절에서 선후, 근본 문제를 따지는 방식의 사유는 다른 시간과 공간 속의 정치를 인식자의 상황으로 환원하는 것이며, 그것이 바로 복잡한 현실을 단순하게 만드는 실재 에 대한 욕망, 서구 근대적 사유의 폭력 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포스트주의적 언명은 말로는 아름답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실천 實 踐 으로부 터 도피하는 강단- 먹물의 근거( 그들에게는 무엇을 할 것인가가 아니라, 오로지 어떻게 볼 것인가가 문제다!) 로 사용되거나 포스트주의 일반의 무기력( 그것은 정말 무기력하여 현실 의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못한 채 뜬구름이나 세고 있거나 심지어 때로 적의 무기로 사용된다을 ) 보증하는 말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경계해야 된다고 생각한다. 성매매금지법에 대한 저자의 태도는 나의 이런 걱정 을 더 크게 한다. 쓸데없는 걱정이었으면 좋겠다. 여성주의는 여성주의라서 근대 를 온전히 넘어설 수 있는지, 포스트주의와 강단의 사유들과 진짜 다를 수 있는지 궁금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