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년 방산우수논문 현상공모 日 本 의 비군사화규범 해체과정에서 經 團 連 방위생산위원회의 영향력 연구 1) 오동룡 2) 제 1장 서 론 제 1절 연구목적 및 문제제기 세계 3위의 경제력으로 평화헌법의 베일 속에 군사력을 꾸준히 증강시켜온 일본은 아베 신조( 安 部 晋 三 ) 내각에 이르러 비로소 보통국가(전쟁을 할 수 있는 군대를 가 진 국가)의 면모를 갖추었다. 집단자위권 용인 결정 및 기타 안보 관련 법제 추진으 로 자위대는 앞으로 세계 어느 곳에서라도 다양한 분쟁과 위기상황에 대처할 수 있 게 된 것이다. 무기와 장비의 질 면에서 세계 정상급에 도달한 자위대는 미군과 함 께 전 세계로 나가 다양한 실전 경험도 쌓을 것으로 보인다. 보통국가로 달려가는 노정에서 과거 일본을 짓눌렀던 정책적 제약들도 하나 둘 풀 리고 있다. 2004년 7월, 일본의 경제단체연합회( 經 濟 團 體 連 合 會 이하 경단련)는 새 로운 방위계획대강을 위한 제언 을 발표하면서 방산업체들이 구미 국가들과 첨단 무기를 공동으로 개발할 수 있도록 종전의 엄격한 무기수출 3원칙 을 완화해 달 라 며 일본 방산업체들이 국제공동개발에 참가가 불가능한 것은 기술적 쇄국 상 태나 다름없다 고 주장했다. 3) 2000년대 들어 본격화된 재계의 끊임없는 무기수출 3원칙 폐지 요구는 정치권 차 1) 본 논문은 필자의 2015년 국방대학교 안전보장대학원 박사학위논문을 발췌, 재작성한 것임. 2) 조선뉴스프레스 월간조선부 차장, 국방대 군사전략학과 박사. 3) 日 本 經 濟 団 體 連 合 會, 新 たな 防 衛 計 劃 大 綱 の 向 けた 提 言, 2004. 7. 20. - 1 -
원에서 주요 이슈로 다루기 시작했다. 마침내 2011년 11월 노다 요시히코( 野 田 佳 彦 ) 내각이 관방장관 담화 형식으로 무기수출 3원칙의 완화 방침을 발표한 데 이어, 2014년 4월 4일 아베 내각은 각의 결정을 통해 무기수출 3원칙을 폐지하고, 방위 장비 이전 3원칙 을 새로이 공표했다. 4) 방산업계는 경단련 산하 방위생산위원회( 防 衛 生 産 委 員 會 )를 중심으로 끊임없이 정부를 압박한 결과, 1967년 선언된 무기수출 3 원칙의 제약을 반세기만에 푸는 데 성공한 것이다. 전후 일본의 방위산업 재건은 한국전쟁과 미소 간 냉전이라는 국제정치적 상황을 배경으로 가능했다. 그러나 무기 재생산을 위한 미 점령당국과의 협의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한 것은 일본 정부와 더불어 경단련, 그리고 그 산하조직인 방위생산위원회 였다. 이 시기는 대략적으로 1950년대 초에서 1960년대 후반까지에 해당한다. 특히 정치적으로 일본은 1951년 9월 대일강화조약(샌프란시스코강화조약) 이후 사실상 독립국가 로서 미국의 그늘에서 벗어나 독자적인 방위정책을 수립해 나가는 시기 였다. 이 무렵은 일본의 방위정책과 방위산업을 제약하는 무기수출 3원칙 등 비군사 화 규범(non-military norm) 5) 들이 본격적으로 나타나기 이전으로서, 일본의 방산업 계가 미국과 일본 정부에 적극적 요구를 통해 자력갱생( 自 力 更 生 )을 추구하는 시기 로 볼 수 있다. 즉 재계는 미국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배상완화, 단독강화라는 자신들의 입장을 관철시켰으며, 미일경제제휴간담회(방위생산위원회의 전신)를 발족시켜 미국의 원조 로 자립경제의 기반을 마련했던 것이다. 특히 한국전쟁의 발발과 그에 따른 특수( 特 需 )로 일본의 방위산업은 본격적인 재건의 시기를 맞이했다. 그러나 1960년대 말 특 4) 방위장비 이전 3원칙 은 무기 수출을 금지하는 경우를 보다 명확하게 규정하고(원칙 1), 엄격한 정보 공개 하에서 평화공헌 및 국제협력의 적극적인 추진에 도움이 되는 경우 무기 수출을 인정하며(원칙 2), 목적 외 사용 및 제3국으로의 재이전에 대한 관리방안이 확보될 경우로 한정하는(원칙 3) 등 세 가지 기본 원칙으로 구성됐다. 国 家 安 全 保 障 会 議 決 定 / 閣 議 決 定 (2014)을 참조. 5) 비군사화(Anti-Militaristic)라는 말은 일본 정치를 연구한 크리스토퍼 휴즈와 글렌 후크(Glenn D. Hook)가 그의 저서에서 사용한 용어로 군대( 軍 隊 )의 요소를 탈색시킨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 규범은 원칙(principle)보다는 훨씬 사회성과 공공성이 강한 특성을 지닌다. 두 말의 합성어인 비군사화규범은 전후 일본의 평화헌법 하에서 자위대의 활동을 제약하기 위한 장치로 작용했다. 일본은 1946년 제정 한 헌법 제9조 1항에서 국가정책으로 전쟁을 포기한 데 이어, 제2항에서 육해공군 전력의 보유를 금 지했다. 1952년 4월 28일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을 통해 주권을 회복한 일본은 1954년 육해공 자위 대를 창설했지만, 헌법상의 평화주의 정신에 따라 비핵 3원칙, 우주의 평화적 이용 원칙, 무기수출 금지 3원칙, 전수방위의 원칙, 기반적 방위력 개념, 방위비 GNP 1% 이내의 원칙, 공격용 무기 비보유의 원칙 등 비군사화 규범을 연이어 선언했다. 박영준, 일본 방위산업 성장과 비군사화규범들 의 변화, 한일군사문화연구 제18집(2014). - 2 -
수의 중단과 미국의 군사원조(MAP, Military Assistance Program)가 사라지면서, 일 본 재계는 민군겸용( 民 軍 兼 用 ) 기술을 개발하면서 국산화를 통해 위기 탈출구를 마 련한다. 이 시기 일본의 방산업계는 국산화 노력과 함께 수출시장 개척 등을 해나가며 1, 2차 방위력정비계획 수립에 적극적으로 간여한다. 미국의 점령기간 동안 재계 원로 로 구성된 경단련과 방위생산위원회 간부들은 정부기구, 특히 방위산업의 비대화를 우려한 대장성( 大 蔵 省 )의 반대를 설득해가며 미국과의 직접 접촉을 통해 대장성을 위시한 여타 국가기관의 견제에 대응했다. 그러나 방산업계는 일본 정부가 1967년 무기수출 3원칙 선포 이후 비핵 3원칙, 전 수방위의 원칙 등 비군사화규범을 본격적으로 선언하면서 커다란 어려움에 직면한다. 베트남전의 발발로 일본의 방위산업은 무기의 수출과 국산화를 병행하며 또 한 번의 활로를 찾는 듯했으나 1967년 사토 에이사쿠( 佐 藤 榮 作 ) 내각이 무기수출 3원칙을 발 표하면서 방산업계는 된서리를 맞고 말았다. 그러나 방산업계는 국산화를 통해 꾸준 하게 기술력을 높이는 한편, 경단련을 통해 통산성과 의회, 그리고 방위산업 재건에 관심을 가진 보수인사들을 통해 여론을 조성하는 방법으로 생존을 모색한다. 이러한 분위기에서 경단련은 방위생산위원회를 중심으로 정계와 관계 핵심 인사들을 한자리 에 모은 방위장비국산화간담회( 防 衛 裝 備 國 産 化 懇 談 會 )라는 조직을 발족시키는 등 무 기 국산화와 해외 수출시장 개척에 앞장섰다. 1970년 1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中 曾 根 康 弘 ) 방위청장관은 취임 직후 자주방위론 ( 自 主 防 衛 論 )을 내세웠고, 그의 정책은 일시적이나마 일본 재계를 방위산업 재건의 기대로 들뜨게 만들었다. 그러나 미키 다케오( 三 木 武 夫 ) 내각은 연차방위력정비계획 (연차방) 폐지, 방위계획대강( 防 衛 計 劃 大 綱 )의 결정, 방위비 GNP 1% 이내 범위 지출 결정, 전수방위 원칙 설정 등 군사대국화를 막기 위한 규범들을 추가하는 등 방산업 계의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1982년 11월 총리에 취임한 나카소네는 소위 나카소네 구상 이라는 자신의 자 주방위 계획을 과감하게 실천에 옮겼다. 역대 정부가 내세웠던 전수방위( 專 守 防 衛 ) 라는 개념도, 미국의 압력 하에서 10년간에 걸쳐 방위비의 상한선으로 지켜온 GNP 1% 이내의 범위도 모두 나카소네 내각은 간단히 돌파했다. 이와 함께 나카소네는 무 기수출 3원칙을 완화하는 조치로서 대미 기술공여 조치를 단행했다. - 3 -
방위생산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일본의 방산업계는 방위비의 GNP 1% 벽 통과를 시작으로 1980년대 후반부터 방위생산에 장애가 되는 비군사화규범의 철폐를 주장했 고, 나카소네 내각은 재계의 이러한 요구를 적극적으로 정책에 반영했다. 특히 비군사화규범 가운데 무기수출 3원칙은 일본 방산업체의 생존을 위협하는 가 혹한 규범이었다. 1980년대 일본 방산업체들의 기업 활동 환경은 엄혹했다. 탈냉전 에 접어들면서 세계의 방산업체들은 흡수 통합을 통해 재편의 과정을 거치고 있었고, 생존을 위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마당에 일본의 방산업체들만 뒤처질 수 없다는 위기의식이 팽배했다. 특히 일본의 무기수출 규제는 타국과의 공동연구와 개발을 저 해함으로써 일본 방위산업의 갈라파고스화(Galapagos Syndrome) 6) 를 가져올 것이라는 분석도 나왔던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차기지원전투기(FS-X, Fighter Support experimental) 개발계획은 일본 방위산업 발전에 한 획을 긋는 대사건임과 동시에 무기수출 3원칙이 허물어지 는 단초가 된 사건이다. FS-X 개발계획을 통해 미일 양국 정부와 의회, 그리고 양국 의 방산업계는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키기 위해 한 치의 양보 없는 치열한 협상을 벌였다. 그 과정에서 무기수출 3원칙은 사실상 형해화( 形 骸 化 ) 하는 과정을 맞이했 다. 2011년 12월 노다 요시히코 내각이 우방국과의 무기거래와 국제공동개발 및 생산 협력 등을 포괄적으로 허용하는 방산장비 등에 관한 수출 가이드라인(방산수출가 이드라인) 을 마련한 데 이어, 2014년 4월 아베 내각은 무기 수출을 포괄적으로 허 용하는 방위장비 이전 3원칙 을 결정했다. 경단련 방위생산위원회가 주축이 된 방산업계의 노력이 마침내 결실을 맺은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의 보통국가화가 일본의 방위산업을 견인했기 때문에 가능했다. 이러한 측면에서 경단련으로 대표되는 재계가 정책결정자 그룹의 주요한 행위자로 서 일본의 방위정책 결정 구조 속에서 수행하는 역할의 비중을 밝히는 연구는 향후 국제사회에서 일본의 방위정책의 행보를 가늠해 볼 수 있는 주요한 요소가 될 전망 6) 육지로부터 멀리 떨어져 있어 독자적으로 진화한 종들이 육지와의 빈번한 교류로 외부종이 유입되자 면역력이 약해 멸종의 위기를 맞게 된 갈라파고스제도의 상황을 말한다. 세계시장의 추세와 동떨어진 채 자신들만의 표준을 좇다가 고립을 자초했다는 뜻으로, 1990년대 이후 일본 제조업 특히 IT산업이 자국 시장에만 안주한 결과 경쟁력이 약화돼 세계시장에서 고립된 현상을 설명하며 등장한 용어다. 세 계시장의 흐름에 발맞추지 못함으로써 곤란에 처하게 되는 상황을 가리키는 일반적 용어로 자리 잡았 다. - 4 -
이다. 아울러 무기수출을 통해 방위산업의 활로를 찾으려는 우리의 방산업계에게도 큰 시사점을 던져줄 것임에 틀림없다. 이상의 문제의식에서 본 논문은 1945년 패전 이후 해체됐던 일본의 방위산업이 냉 전기를 거치면서 다시 부흥하고, 이를 바탕으로 방산업체들이 경단련 방위생산위원 회를 중심으로 관료집단과 정치인들에게 어떠한 요구들을 해나가면서 방위정책의 변 화를 추동( 推 動 )해 왔는가를 살펴보고자 한다. 일본의 방위산업을 다룬 기존의 국내 외 연구들은 방위정책의 변화 틀 속에서 방위산업이 변화하는 것에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이에 비해 본 논문은 일본의 방산업계가 일본 방위정책을 결정하게 하는 중 요한 행위자(actor)이자 독립변수라는 가설을 상정해 그 인과관계를 서술하려는 것 이다. 이를 위해 본 논문은 일본의 방위정책에 경단련으로 대표되는 재계의 영향력은 어떻게 반영되고 있는가, 방위정책 결정과정에서 일본 정부 부처 간의 대립이 발 생하면, 재계는 이들을 어떻게 설득해 요구를 관철시켜 나가는가 비군사화규범의 형성과 해체 과정에서 나타나는 미국의 대일 요구사항에 대해 일본의 국가기구와 재 계의 반응은 각각 어떠한 형태로 나타날까 등을 핵심 질문으로 삼아 가설을 검증할 것이다. 분석을 위해 필자는 경단련 방위생산위원회가 발행하는 특보( 特 報 ) 에 나타 난 구체적 사실들을 통해 방위정책의 결정과정에 재계가 어떤 방식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 확인해 보았다. 경단련이 정기적으로 발행한 간행물로는 경단련 월보( 經 団 連 月 報 ), 경단련주보( 經 団 連 週 報 ) 등이 있다. 1953년 4월 방위 생산위원회가 방위생산위원회 속보( 速 報 ) 를 방산업체 회원사들에게 처음 발 간된 이래, 특보 는 1955년 7월 방위생산위원회 특보 로 제호를 바꿔 방산 업계 현안을 신속하게 회원사에게 속보 형식으로 전파하던 매체였다. 예컨대 특보 에 등장하는 정계-관계-재계의 방위관련 협의단체인 방위장비국산화간담 회의 활동 과정을 특보를 통해 파악해 보면 일본 방위정책의 형성과정을 생생하 게 파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 2절 經 團 連 과 방위생산위원회의 位 相 산업체의 이익을 대표하는 공식 조직 가운데 경단련( 經 團 連 )은 가장 파워 있는 - 5 -
단체다. 경단련 회원으로는 일본은행연합회, 일본철강연합회, 일본자동차연합회 등의 업종별 전국 단체와 신일본제철 등과 같은 일반 기업들을 망라하고 있다. 경단련은 통일된 의사표시를 위해 구성원들 간의 다양한 견해를 취합 조정하는 역 할을 한다. 1945년부터 1971년 사이에 경단련이 요망 의견 의 형태로 정 부에 건의한 내용을 보면, 일반경제 60건, 조세 관계 53건, 방위생산 관계 46건, 금융관계 42건, 해외 무역 관계 42건, 에너지 자원 관계 38건의 순으로 나타나고 있다. 7) 나아가 경단련은 자민당의 최대 후원자로서 여러 정책에 간여했다. 재계는 정 당들과 정치 지도자들의 정치활동을 위한 정치자금을 대 왔고, 내각 위원회와 의 회, 정당들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관철시켜 왔다. 뿐만 아니라 매스컴의 효율적인 이용을 통해 일본 사회 전체에도 강력한 영향력을 발휘해 왔다. 일본 경단련은 기업 활동과 관련한 경제정책, 산업기술 및 정책, 노사정책 및 제도, 국제협력 등 4개 분야를 총괄하는 주무부서 아래 12개의 국을 두고 있으 며, 방위생산위원회는 산업기술국 산하에 있다. 일본 재계와 정부의 관계와 관 련, 이케다 하야토( 池 田 勇 人 ) 수상은 일본 경제인들과의 비공식 모임에서 재계 가 배의 나침반이라면, 정부는 선장이다 라고 언급했다. 8) 경단련 내에서 방위생산과 관련된 분야는 방위생산위원회가 맡고 있다. 출범 당시부터 방위생산위원회의 사업은 방위생산에 관한 기초자료의 조사 작성과 대 책의 연구입안, 방위생산에 종사하는 업종과 단체, 기업 상호간의 연락조정 및 협력공장 계열의 정비강화에 관한 연구, 그리고 방위생산에 관한 정보의 수집 등 이었다. 9) 방위산업위원회의 탄생은 한국전쟁 특수를 계기로 시작된다. 전쟁 특수를 계기 로 미일관계가 발전하자, 1952년 8월 일본 재계는 미국 측에 미일 경제제휴 간 담회 를 상설화하자는 취지의 제안을 해 발족했고, 이후 미국과 일본은 간담회 명칭을 미일 경제협력간담회 로 바꿨다. 미일 경제협력간담회의 산하에는 총 합정책위원회, 방위생산위원회, 아시아부흥개발위원회 등 세 개의 하부기관이 설 치됐다. 이어 방위생산위원회 산하에 심의실( 審 議 室 )을 두어 특수 발주 계획화에 관한 기초조사를 하도록 했다. 미일 경제협력간담회는 미국의 군수원조, 자위대 7) Gerald L. Curtis. Big Business and Political Influence. Ezra F. Vogel. ed. Modern Japanese Organization and Decision Making. California: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75. 미국 언론들 은 보통 경단련을 all-powerful body 라고 부르고 있고, 실제로 경단련은 재계의 총사령탑의 역할을 담당하고 있다. 8) 日 本 經 濟 新 聞, 1961년 12월 25일. 9) エコノミスト 編 輯 部 編, 戰 後 産 業 史 への 證 言 三 東 京 : 每 日 新 聞 社. 1978, p.219. - 6 -
의 방위력 정비, 미 일 경제협력 업무를 수행했고, 방위생산위원회는 일본과 미국 양 정부에 일본 방산업체들의 의견을 집약해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했다. <그림 1> 경단련과 방위생산위원회 조직도 자료: 일본 경단련 홈페이지. 당시 미일 경제협력간담회는 나가사키 에이조( 長 崎 英 造 ) 회장(경단련 고문), 고바야시 아타루( 小 林 中 ) 부회장(개발은행 총재), 우에무라 고고로( 植 村 甲 午 郎 ) 부회장(경단련 상담역), 시마다 카츠노스케( 島 田 勝 之 助 ) 총합정책위원회 위원장 (홋카이도탄광 회장), 사토 기이치로( 佐 藤 喜 一 郞 ) 상임위원(제국은행 사장), 와 타나베 기스케( 渡 辺 義 介 ) 상임위원(야하다제철 사장), 다마이 쿄스케( 玉 井 喬 介 ) 상임위원(미쓰비시중공업 회장), 모로이 간이치( 諸 井 貫 一 ) 상임위원(지치부 시멘 트 사장), 호리 분페이( 堀 文 平 ) 상임위원(후지방적 회장) 등 일본 재계 중량급 인사들을 대거 포함하고 있었다. 10) - 7 -
당시 일본 정부로서는 전후 혼란 상황의 수습에 급급한 상황이라 방위생산에 관한 것은 방위생산위원회가 도맡아 처리했다. 그 결과, 방위생산위원회는 거의 미국 측과의 직접적인 대화로 일을 처리했다. 11) 방위생산위원회가 심의회에서 여 러 가지 안을 다듬어 이를 총합정책위원회에 상정하면, 미일 경제협력간담회 의 견으로 발표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시에 방위생산위원회는 경단련과 달리 독립적인 활동을 하는 한편, 회원 제 도를 만들어 관계회사로부터 회비를 징수했다. 이처럼 운영자금을 자체 조달하기 때문에 방위생산위원회는 경단련에 속하지 않는 구성원들도 소속시킬 수 있었다. 게다가 공식적인 경단련 정책과 일치하지 않는 정책들을 자유로이 발표하거나 실 행할 수도 있었다. 12) 이런 점들 때문에 방위생산위원회는 일본의 민간 방위청 (Japan's private defense ministry) 이라고도 불렸다. 방위생산위원회의 의장 은 발족 이후 일본의 전 산업사에서 실질적으로 오야붕 격인 미쓰비시중공업 의 회장이 겸임했다. 방위생산위원회 초대 위원장은 당시 일본산업협의회 고문인 고코 쿄시( 鄕 古 潔 ) 미쓰비시중공업 사장이 역임했다. 심의실장은 우에무라 고고로 경단련 회장, 센 가테츠야( 千 賀 鉄 也 ) 방위생산위원회 사무국장이 심의실 위원으로 간사역할을 맡 고 있었다. 심의실에는 전직 해군 제독과 육군 장성들로 구성돼 있어 심의실을 가리켜 민간 군수성(civil-military bureau) 이라 불렀다. 13) 제 2장 비군사화규범 해체기 경단련의 활동 본 논문은 1985년부터 1997년까지의 시기를 비군사화규범 해체기로 규정해 다룬 다. 대외적으로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 후반까지 경제적 전성기를 구가하며 방위산업의 기술력 축적을 바탕으로 미국의 경계대상이 된 일본이 기술 수혜국( 受 惠 國 )에서 기술 공여국( 供 與 國 )으로 전환하는 시기이자, 대내적으로는 일본의 방위산 업을 제약하던 무기수출 3원칙 등 비군사화규범들이 서서히 이완되는 조짐이 나타나 기 시작한 때다. 1985년을 비군사화규범의 해체 시점으로 삼은 까닭은 나카소네 총 10) エコノミスト 編 輯 部 編, 戰 後 産 業 史 への 證 言 三 東 京 : 每 日 新 聞 社. 1978, p.219. 11) ibid, p.221. 12) Richard J. Samuels, Rich Nation, Strong Army: National Security and the Technological Transformation of Japan. Ithaca and London: Cornell University Press. 1994. p.145. 13) ibid, p.143. - 8 -
리가 집권하면서 1985년부터 시작된 59중기업무견적(이하 59중업)에 나카소네 구상 으로 알려진 나카소네의 자주국방 비전이 반영되면서 일본의 군사화를 제약하던 비 군사화규범이 느슨해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를 기점으로 미국이라는 강력한 독립변수는 나카소네를 대표로 하는 일본의 정 치인들에게 적극적 방위정책을 수립하라는 압력을 행사했고, 나카소네는 론-야스 (로널드 레이건-나카소네 야스히로) 관계 로 불릴 정도로 돈독한 미일 안보 결속을 다져나가면서, 한편으로는 방산업계와 협력해 방위장비의 국산화를 달성해 나간다. 나카소네 총리의 방위정책에 의해 일본이 오랜 동안 넘지 못한 방위비의 GNP 대비 1% 이내 지출 원칙도 무너지고, 무기수출 3원칙도 대미 기술공여라는 이름으로 완화 되기 시작했다. 특히 그 하이라이트에 해당하는 사례는 미국과 공동으로 착수한 차기지원전투기 개발 계획(FS-X)이었다. FS-X 개발계획 과정에서 미일이 표출한 요구사항들은 양국 관계의 현주소를 적나라하게 보여주었다. 본 장에서는 이 시기에 일본의 재계가 방 위정책 변화의 중요한 행위자로서 어떠한 노력을 통해 일본의 비군사화 규범들을 변 화시키면서 방위정책을 추동해 왔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제 1절 미일방산협력과 무기수출 3원칙의 예외화 1. 무기수출 3원칙의 완화 움직임 가. 미국의 무기수출 3원칙에 대한 불만 전후 일본은 1953년 태국으로 탄환을 수출한 것을 시초로 상당 기간 무기를 수출 하고 있었다. 14) 이러한 무기 수출에 대해 산발적으로 국회에서 논의를 했지만, 집중 적으로 다룬 것은 1967년이었다. 그 해 일본의 무기수출 정책은 일대 전환점을 맞는 다. 일본 정부가 무기수출 정책에 관한 견해를 체계적으로 정리해 제시한 것이었다. 14) 櫻 川 明 巧, 日 本 の 武 器 禁 輸 政 策 - 武 器 輸 出 三 原 則 の 國 會 論 議 をめぐて, 國 際 政 治 108 号 (1995)를 참조. - 9 -
4월 21일 사토 총리는 중의원 결산위원회에서 무기수출 3원칙을 밝혔다. 그러나 이 단계에서는 무기의 수출 자체를 금지한다는 입장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 후 사회당 등 야당에서 보다 엄격하게 수출을 삼가하라는 목소리가 강해져 1976년 2월 27일 미 키 다케오 총리는 더 강화된 정부 견해를 발표했다. 1981년 1월 오사카의 호리타 하가네( 屈 田 ハガネ) 상사가 포신( 砲 身 )으로 보이는 강관( 鋼 管 )을 한국의 무기회사에 통산성의 승인 없이 수출한 사실이 드러났다. 이를 계기로 국회는 무기수출 문제에 관한 결의 를 가결했다. 무기수출 3원칙에 의해 일본은 제3국에 무기 수출을 엄격히 통제하는 등 원칙을 잘 지켜나갔다. 미국은 이와 같은 일본의 무기수출 통제에 대해 미일안보조약을 근 거로 불만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레이건 정권은 일본에 무기와 무기기술을 공여하고 있음에도 불구, 미국은 일본에게 무기기술을 공여 받지 못하고 있다며 문제를 제기 했다. 더욱이 미국은 순수한 군사기술이나 장래의 무기 공동생산도 염두에 두고 이 같은 요구를 하고 있었던 것이다. 구체적으로 미국이 상호방위원조협정(MDA)에 의한 유상원조계약(FMS)과 기술교환 약정을 근거로 양국 간 무기기술의 상호교류를 요구한 것은 1981년 6월 오무라 조지 ( 大 村 襄 治 ) 방위청장관이 와인버거 미 국방장관을 만났을 때였다. 즉, 미일간의 협 정에 의해 일본이 미국의 무기를 생산하고 있을 뿐 아니라, 미국의 기술과 정보를 이용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일본의 무기수출 규제 때문에 일본에서 미국으로의 기 술 흐름은 전면적으로 금지되고 있다는 것에 대한 불만이었다. 일본 측은 미국이 분쟁 당사국이 되면 무기수출 3원칙을 위배하는 것이라서 무기 기술 공여를 두고 큰 고민에 빠졌다. 스즈키 총리는 평화국가로서 일본이 분쟁 당 사국에 무기와 군사기술을 제공하는 것은 설령 상대가 미국이라도 불가능하다 며 이러한 취지를 비공식으로 미국에 전달했다. 그러나 미국은 동맹관계를 충족시키 지 못하고 있다 며 거부했다. 15) 결국 일본 정부는 미국의 요구를 무시할 수 없었다. 이러한 미국의 요구는 특정분 야에서 일본 기술력의 수준이 매우 높은 수준인 것으로 드러남에 따라 더욱 거세졌 다. 나카소네가 총리의 자리에 오른 것은 무기 공여 문제가 미일 간 이슈로 떠올랐 을 때였다. 그는 동맹국 미국에 대해 무기수출 3원칙을 적용하지 않는다는 결단을 15) 讀 賣 新 聞, 1982. 9. 16. - 10 -
내렸다. 나카소네는 그의 이러한 결정을 1983년 1월 14일 관방장관 담화 형식으로 발표했다. 나카소네 총리는 방위비 증액과 대미 무기기술 공여결정을 배경으로 1월 18일과 19일, 워싱턴에서 레이건 대통령을 만나 정상회담을 했다. 미일 정상은 미 일 동맹관계는 세계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사활적( 死 活 的 ) 존재 라는 데 인식을 같 이 했다. 더욱이 워싱턴 체류 중 나카소네 총리는 워싱턴포스트 캐서린 그레이 엄(Katharine Graham) 사주( 社 主 )와의 조찬에서 일본은 불침항모 라든가 일미 는 운명공동체 라고 말한 사실이 보도돼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나카소네 내각의 무기수출 3원칙 예외화가 새롭게 관계 부처 간 협의를 통해 나타 난 것은 1983년 1월 고토타 마사하루( 後 藤 田 正 晴 ) 관방장관의 담화였다. 결국 1981 년 6월 미국에서 제기됐던 대미 무기기술 공여문제는 1년 반 후인 1983년 11월 나카 소네 내각에서 결정을 보았고, 일본은 무기수출 3원칙의 적용 대상 국가에서 미국을 제외했다. 이러한 대미기술공여를 결정한 일본은 교환공문을 체결하고 양국 간 무기 기술공동위원회(JMTC) 16) 를 1984년 11월 발족했고, 1985년 12월에 이르러 대미 무기 기술 공여를 실시하기 위한 세목을 결정했다. 이 결과로 1986년 9월 방위청기술연구 본부가 연구해 왔던 휴대형 SAM(지대공유도탄) 관련 기술 을 비롯해 대미 기술공 여를 시작했다. 당시 고토타 관방장관 담화의 주된 내용은, 미국으로 무기기술을 공여하며, 이 공 여는 무기수출 3원칙에 따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17) 그러나 미국에 대한 예외화 조 치에도 불구하고 미국과의 방산협력에는 몇 가지 걸림돌이 여전히 존재했다. 이 가 운데 미국이 가장 불만을 품었던 것은 무기생산에 관한 것이었다. 이에 따라 일본 미츠비시중공업은 미사일 핵심 부품 중 하나로 센서, 정밀장치 등의 보호장치인 노즈콘 을 개발해 미 일이 공동개발 및 생산한 SM-3(함정 발사형 요격 미사일)에 탑재했다. 이것은 부품의 형태로 미국에 실질적으로 수출한 방산제품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18) 16) 1983년 1월 일본 정부는 무기수출 3원칙 예외조치로서 이미 대미 무기기술 제공협정 을 체결했으 며, 레이건 대통령 방일 직전인 같은 해 11월 8일 맨스필드 주일 미 대사와 아베 신타로( 安 倍 晋 太 郞 ) 외무상이 미일 교환공문(November 1983 Exchange of Notes, Japan-U.S.)을 교환하고, 양국 간 무 무기술공동위원회(JMTC)를 1984년 11월 발족했다. 17) 朝 雲 新 聞 社 編 輯 局, 防 衛 ハンドブック ( 東 京 : 朝 雲 新 聞 社, 2002), p. 720. 18) 김창모 외, 일본의 우경화 경향과 방위산업의 발전 전망, 산업연구원 ISSUE PAPER 2014-35 4 (2014. 6), pp.65-66. - 11 -
미국에 대한 두 번의 무기수출 예외화 조치, 즉 1983년과 2004년의 관방장관 담화 로 일본의 무기수출정책은 미국과 그 이외의 국가로 나누어 적용하게 됐다. <표 1> 무기수출 3원칙의 예외화 조치 예외화 조치 대미무기기술공여의 예외화 (1983년 1월 나카 소네 내각 / 고토다 관방장관) BMD 관계 무기의 예외화 등 (2004년 12월 고이 즈미 내각 / 호소다 관방장관) 관방장관담화의 발 표에 의한 무기수출 3원칙의 개별적 예외화 내용 -무기수출 3원칙 등에 의해 미국에 대한 무기기술수출도 원칙적으로 금지 됐으나, 미국정부로부터 미일 간 방위분야에 있어서 기술의 상호교류요청이 있다는 점을 배경으로, 미국으로의 무기기술공여를 예외화 하는 내각관방장 관 담화를 발표. -공여를 실시하기 위한 틀로서, 미일 간에 대미무기기술 공여약속을 체결, 공여한 기술에 대해 일본의 사전 동의 없이 목적 외 사용이나 제3국 이전 금지 -3월의 내각관방장관 답변에서 무기의 공동생산을 할 의도가 없다는 뜻의 정부 통일견해를 발표. -BMD 시스템에 관한 안건에 대하여 공동개발 공동생산 할 경우에 엄격한 관리를 한다는 전제로 무기수출 3원칙 등에 의하지 않는 것으로 한다. -미국과의 (BMD 시스템 이외의) 공동개발 생산 안건이나, 테러 해적대책 지 원 등에 도움이 되는 안건에 대해 개별 안건마다 검토해 결론을 얻는 것으 로 한다. 1국제평화협력업무 등의 실시에 수반되는 필요한 장비품의 수출(1991). 2국제긴급원조대로 자위대 참가에 수반되는 무기의 수출(1991). 3미일 물품역무상호제공협정 하에서 행해지는 무기부품 등의 미군으로의 제공(1996, 1998, 2004). 4인도적인 대인지뢰 제거활동에 필요한 화물 등의 수출(1997). 5재외일본인 등의 수송시 필요한 장비품의 수출(1998). 6중국 유기( 遺 棄 ) 화학병기처리사업의 실시에 수반되는 필요한 장비품의 수출(2000). 7테러대책특별조치법에 근거한 무기 등의 수출(2001). 8이라크 人 道 부흥지원특별조치법에 근거한 무기 등의 수출(2003). 9ODA에 의한 인도네시아로의 순시선 한 정의 수출(2006). 10보급지원특조법에 근거한 무기 등의 수출(2007). 11해적대처법안 등에 근거한 무기 등의 수출(2009). * 자료: 김진기, 일본 무기수출정책의 정치 경제적 함의와 한국에의 시사점. 안보학술논 집 제25집(2014). - 12 -
즉 미국에 대한 예외조치를 도입했고, 그 외의 개별 안건에 대해서는 사안별로 예외 적인 조치를 취했던 것이다. 19) 이에 따라 사토 내각과 미키 내각이 확립했던 무기 수출에 대한 일본 정부의 방침은 초기의 무기수출 3원칙 정신을 현저히 벗어났던 것 이다. <표 1>에서 보는 바와 같이 미일 간 공동개발에 관한 무기수출 3원칙의 특례적용 으로 일본 방산기업들은 2000년부터 2006년까지 이후 7년 간 미국과 12건 이상의 공 동연구 및 공동개발을 수행했다. 일본 최대 방산기업인 미츠비시중공업이 가장 활발 하게 참여했고, IHI NEC 등 대기업을 중심으로 다수의 공동연구 및 개발을 추진했 다. 2006년에는 말라카해협 등지에서 빈발하던 테러 및 해적에 대응하기 위해 인도 네시아에 순시함을 무상공여의 형태로 수출한 적이 있다. 나. 무기수출 3원칙 수정요구의 확산 무기수출 3원칙은 1967년 공표 이후 시대의 변화와 더불어 서서히 완화의 길을 걸 어왔다. 이 원칙의 폐지 및 완화를 주장하는 여론들은 냉전기부터 존재해 온 것이 사실이다. 예컨대 1980년대 활약하며 일본판 골리스트(Gaulist, 드골주의자)로 불린 에토 준( 江 藤 淳 ), 가타오카 데츠야( 片 岡 哲 也 ), 시미즈 이쿠타로( 淸 水 幾 太 郞 ), 나카 가와 야츠히로( 中 川 八 洋 ) 등 일본 보수파 논객들은 중국에 대항할 수 있는 무기체계 의 개발을 주장하며, 그 일환으로 무기수출 3원칙의 폐지를 주장했다. 20) 즉, 법적 구속력을 갖지 못하는 비군사화규범이기 때문에 강제성을 띠고 있지 않 았고, 실제 운영에서는 다양한 예외조항들을 적용하기도 했다. 그것을 빌미로 방산 업체들은 적극적인 폐지를 건의했고, 정치권은 이에 호응해 지속적으로 노력을 기울 임으로써 무기수출 3원칙이 폐지되기 전까지 다양한 예외상황 및 특례규정들이 허용 됐다. 이러한 여론을 바탕으로 1981년 일본 정부는 내각회의에서 민군 양 측면에서 사용할 수 있는 일부 범용품(dual-use goods)은 무기수출 3원칙의 규제대상에서 제 19) 미국 이외의 국가에 대해 관방장관담화로 무기수출 3원칙의 예외를 인정한 경우로는 국제평화협력업 무 등에 수반되는 필요한 장비품의 수출(1991) 등이 있다. 防 衛 省 編, 平 成 21 年 度 版 日 本 の 防 衛 ( 東 京 : 防 衛 省, 2009), p.21. 20) Mike M. Mochizuki, Japan's Search for Strategy, International Security, vol.8, No.3(Winter, 1983-1984), p.167. - 13 -
외하기로 결정하면서 원칙의 완화를 시도하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 정부는 무기수출 3원칙의 완화 노력을 다양한 예외 조건(exemption measures)과 특례 규정들을 마련 하는 방식으로 진행했다. 이처럼 점진적인 접근방식을 택하게 된 까닭은 일본의 군국주의 부활에 대한 대내 외 반대견해들이 엄연히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일본 내 재계에는 무기 수출 3원칙의 완화가 평화주의를 지향하는 일본의 이미지를 훼손한다는 점에서 큰 우려를 표하는 세력들이 존재했다. 21) 한편, 1983년 보수 우파를 대변하는 나카소네 총리는 국무회의에서 미일동맹의 강 화를 위해 미국에 한해서는 무기수출 3원칙의 예외를 허용함으로써, 미국에 군사기 술을 제공하기로 결정했다. 이후 미국에 전략방위구상(SDI) 관련 기술 등 일부 방위 기술을 수출했고, F-2 지원전투기의 공동개발이나 미사일 방어체계의 공동개발 과정 에서 일본의 군사기술이나 무기용 부품들을 이전했다. 이는 일본 정부의 독단적인 결정이라기보다 당시 미국이 자국의 SDI 연구 등에 일본의 군사기술 제공 및 참여를 요청했기 때문이다. 1990년대 들어서도 일본 국내의 방산업체, 여야를 막론한 정당, 그리고 오피니언 리더들을 중심으로 무기수출 3원칙의 개정을 요구하는 의견을 지속적으로 제기했다. 특히 일본이 잃어버린 10년 으로 표현하는 장기 불황을 겪기 시작하고, 정부가 방위예산을 긴축적으로 운영하면서 일본 방위산업 업체들에 대한 압박이 가중되자, 방위산업을 대변하는 경제단체들이 무기수출 3원칙의 부분적 완화, 혹은 전면적 해 제를 요구하기 시작했다. 22) <표 2>에서 보는 바와 같이 1995년 일본 정부는 방위계획대강을 발표하면서 무기 수출 3원칙의 기본 이념을 유지한다는 담화를 발표했으나, 실제로는 무기수출 3원칙 의 예외 적용을 확대하는 방향으로 전개했다. 1996년에는 미일 양국이 미 일 물품 역 무 상호제공협정(ACSA Acquisition and Cross Servicing Agreement)에 합의하면서 이 협정에 포함돼 있는 무기 예비품, 구성품도 무기수출 3원칙의 예외 적용을 받을 수 있게 됐다. 21) IHS Jane's, Japan moves closer to export ban revision, Jane's Defense Industry, 2010.10. 22) Christopher W. Hughes, Japan's Remilitarization, London: The International Institute for Strategic Studies, 2009, p.73; 日 本 経 済 団 体 連 合 会, 新 時 代 に 對 應 した 防 衛 力 整 備 計 劃 の 策 定 を 望 む (1995)을 참조. - 14 -
2003년에는 이라크에 대한 인도적 지원활동, 안전보장 등에 필요한 무기 및 장비 들에 대한 수출을 인정하기도 했다. 이처럼 일본은 우방국인 미국과의 지속적인 상 호협정을 통해 군사기술 및 방산제품의 공동 연구개발을 위한 협력을 확대했으며, 이러한 노력은 양국 방산기업 간의 지속적인 협력성과들로 나타나고 있다. 23) 시기 <표 2> 주요 미 일 방위산업 관련 협정 주요 협정 1983 대미 무기기술 제공협정 1996. 4 미 일 물자 및 서비스의 상호제공 협정 1999. 8 BMD 관련 미 일 공동 기술개발 협정 2005 BMD 방어용 요격미사일의 미 일 공동개발 협정 2007 미 일 포괄적 군사정보보호협정(GSOMIA) * 자료: 김진기, 탈냉전기 미국과 일본의 방위산업 협력: 미 일기술포럼에서의 논의를 중심으 로 국방연구 제53권 제2호, 2010.8, p.199를 표로 구성. 2004년 7월 일본 경단련이 무기수출 3원칙의 완화를 요청한 것을 시작으로 경단련 은 지속적으로 원칙의 수정을 요구했다. 24) 방산업체들은 1990년대 후반 이후 방위예 산 감축에 따라 국내 수요 감소와 방산물자의 생산단가 상승문제에 직면하게 되자, 기업 간 사업통합을 통해 개발비 및 생산원가를 절감하고자 했다. 이는 탈냉전 이후 비슷한 위기에 직면했던 미국 등 선진국 방산업체들이 국제공동개발 및 생산 등을 통한 글로벌 협력을 강화했던 것에 반해, 일본 기업들은 무기수출 3원칙에 묶여 미 국을 제외한 나머지 국가들과의 방산협력을 원천적으로 차단당하고 있었기 때문이 다. 25) 경단련은 1995년 들어서면서 방위산업의 유지, 강화에 대해 적극적인 발언을 시작 했다. <표 3>은 1995년 이후 경단련의 정책제언과 조사보고를 정리한 것이다. 이 중 요망서 또는 제언의 형태로 나타난 것은 1995년, 2000년, 2004년, 2009년, 2013년 23) 김진기, 탈냉전기 미국과 일본의 방위산업 협력-미일기술포럼에서의 논의를 중심으로 국방연 구 제55권 제2호(2010), pp.1-15. 24) 日 本 経 済 団 体 連 合 会, 今 後 の 防 衛 力 整 備 の 在 り 方 について: 防 衛 生 産 技 術 基 盤 の 强 化 に 向 けて (2004.7) 및 日 本 経 済 団 体 連 合 会,, 新 たな 防 衛 計 劃 の 大 綱 に 向 けた 提 言 (2010.7.20)을 참조. 25) 박영준, 군사력 관련 규범의 변화와 일본 안보정책 전망, 한일군사문화연구 제14집(2012. 10), p.23. - 15 -
등 5회다. 이 가운데 무기수출 3원칙에 대한 관방장관 담화가 나온 2011년 이전에 나타난 제안서들을 살펴보면 이미 무기수출 3원칙 등 비군사화 규범들의 완화 내지 폐지를 공통적으로 주장하고 있다. <표 3> 1995년 이후 경단련의 방위정책 관련 제언 조사보고 일람 일시 정책제언/조사보고 비고 1995/5/11 신시대에 대응한 방위력정비계획의 책정을 바란다 <07대강>(11/28) 2000/9/19 차기방위력정비계획에 대한 제언 <03중기방위력정비계 획>(12/15) 2003/10/21 미일안전보장산업포럼(IFSEC) 공동성명에 대하여 2004/7/20 향후 방위력정비의 존재양태에 대하여-방위생산 기 술기반의 강화로- <16대강>(12/10) 2009/7/14 우리나라 방위산업정책의 확립에 대한 제언 <2010년도의 방위력 정비에 대해>(12/17) 2010/7/20 유럽방위산업정책에 관한 조사미션보고 2010/7/20 새로운 방위계획의 대강에 대한 제언 <22대강>(12/17) 2011/7/1 미국 방위산업정책에 관한 조사미션보고 2012/2/22 독일 및 스웨덴 방위산업정책에 관한 조사미션보고 2012/7/17 미일방위산업협력에 관한 공동성명 2013/5/14 이태리 및 영국의 방위산업정책에 관한 조사보고 2013/5/14 방위계획의 대강에 대한 제언 * 출처: 김진기, 탈냉전 이후 일본 방위산업의 발전전략에 관한 연구, 국방연구 제56권 4 호 가을 통권 제69호(2013). 1995년 방위생산위원회는 방위청장관과의 간담회에서 정부에 장비의 국산화 를 요구했다. 방위생산위원회는 탈냉전 시기 일본의 방위산업체가 추구해 나갈 방향성 으로 첫째, 수출관리 정책 운용의 재검토, 둘째, 민생기술에 관한 기업의 권리보호, 미국과의 공동연구 개발 생산의 추구 등을 들었다. 26) 이 중 민수의 군수전용과 미국과의 공동 연구개발 및 생산은 사실상 무기수출 3원 칙이 폐지되지 않고는 어려운 제안이어서 1995년 요망서의 핵심은 무기수출 3원칙의 완화 또는 폐지에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이다. 경단련이 1995년 요망서를 발표한 것 은 당시 냉전질서의 종식 이후 미국을 중심으로 군수산업의 세계적인 재편이 진전되 26) 김진기, 탈냉전 이후 일본 방위산업의 발전전략에 관한 연구, 국방연구 제56권 4호 가을 통권 제69호, 2013, p.57. - 16 -
면서 일본이 이러한 흐름에서 제외될지 모른다는 일종의 불안감 때문이었다. 즉, 탈 냉전에 접어들면서 세계의 방산기업들이 흡수 통합을 통해 재편되고 있었고, 생존을 위해 규모의 경제를 추구하는 마당에 일본의 방산기업들만 뒤처질 수 없다는 위기의 식 때문이었다. 27) 다. 미일기술포럼 창설 침체 기미를 보이고 있던 일본 방산업계는 1980년대를 전후해 다시 일본 정치권과 대외관계에 대한 영향력을 회복하기 시작했다. 일본 방위산업의 기술적 능력의 신장, 그리고 미국 레이건 정부 하에서 추진된 대소 신냉전 기조 하에 일본에 대한 전략적 중요성의 재인식 등이 그 요인이었다. 비록 자주국방론이 퇴조기미를 보이긴 했지만, 일본의 정책결정자들은 무기제조 기술과 방위산업에 대한 잠재적 능력을 지속적으로 축적하는 것이 국제질서에서 일본의 위상을 확보하기 위해 긴요하다는 판단을 갖고 있었다. 통산성 관리를 역임한 아마야 나오히로( 天 谷 直 弘 )는 1980년에 저술한 글에서 일 본이 통상국가( 町 人 國 家 )가 아니라 국제사회에서 군사력을 행사할 수 있는 무사국가 ( 武 士 國 家 )가 되려고 한다면, 군비를 증강하고 무기수출 3원칙과 같은 규범을 폐지 할 각오를 해야 한다 고 지적했다. 28) 국제정치학자 나가이 요노스케( 永 井 陽 之 助 ) 29) 도 일본이 경무장, 비핵국가의 길을 견지한다 하더라도, 군사적 기술의 잠재력을 유 지하는 것이 일본이 국제사회 변화에 적응하는 전략이 될 것이라고 보았다. 30) 27) 김진기, 위의 책, p.58. 28) 天 谷 直 弘, 町 人 國 日 本 手 代 のくりごと, 文 藝 春 秋, 1980.3; 北 岡 伸 一 編, 戰 後 日 本 外 交 論 集 ( 東 京 : 中 央 公 論 社, 1995)을 참조. 29) 나가이 요노스케( 永 井 陽 之 助, 1924~2008)는 정치학자로, 아오야마학원대학 명예교수를 지냈다. 1950년 동경대 법학부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동경대에서 호리 토요히코( 堀 豊 彦 )에게 사사했다. 당초 하버드대학에서 정치논리를 연구하던 중 쿠바사태를 맞아 미소 강대국의 파워폴리틱스를 목격하고 충 격을 받았다. 고사카 마사타카 교토대 교수와 함께 현실주의 입장에서 일본 외교를 논했다. 핵시대의 권력정치에 주목해 이른바 비무장중립파와 매파 모두에게 비판적 시각을 견지했다. 한편으로 경무장, 경제중시라는 전후 일본외교를 요시다 독트린 이라 명명하고 높이 평가했다. 나가이의 평론 활동은 미 시마 유키오( 三 島 由 紀 夫 ) 등으로부터 높은 평가를 받았다. 또, 간 나오토( 菅 直 人 )는 대학시절 나가이에 게 영향을 받아 스스로 제174회 국회 총리대신 소신표명 연설에서 스승에 대해 언급하기도 했다. 30) Kenneth B. Pyle, Japan Rising: The Resurgence of Japanese Power and Purpose(New York A Century Foundation Book, 2007), p.259. - 17 -
이 같은 기술민족주의 인식에 따라 일본 방산업체들은 비군사화 규범의 파고 속에 서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공업 분야의 기술력을 토대로 기술적 잠재력을 극대화했다. 1970년대 후반 도시바나 후지츠와 같은 세계 최고 수준의 전자업체들이 일본 방위산 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늘어난 점이 이를 보여준다. 이러한 자부심을 바탕으로 1979년 경단련 방위생산위원회는 일본의 산업기술과 생산성이 세계 최고 수준이며, 방위산업도 예외가 아니다 라며 이러한 기술을 바 탕으로 독자적인 연구와 개발을 해야 한다 고 주장했다. 31) 일본 방산업계가 이룩한 높은 기술적 수준에 대해 미국은 일찍부터 주목하고 있었다. 1978년 미일 간 최초의 가이드라인이 서명되었을 무렵, 미국 측은 일본이 미국에 비해 우위를 보이고 있는 군사기술 분야를 확인하고, 향후 일본으로부터 미국으로의 군사기술 이전방안을 촉 진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32) 이러한 인식을 바탕으로 1980년에 들어서자 미 국방성은 일본에 대해 방위기술 이 전과 교환을 논의하기 위한 협의 기구인 미일기술포럼(US-Japan System and Technology Forum) 창설을 제안했다. 일본도 이 같은 포럼을 통해 F-15 전투기, 사 이드와인더 미사일, 화력통제시스템 등의 생산기술을 이전받을 수 있을 것으로 기대 했다. 33) 미일 간 군사기술 상호 교류의 제도화는 1980년대 이후 등장한 레이건 행정 부가 소련을 악의 제국 으로 인식하며 대소 신냉전 기류를 조성하면서, 그리고 일본에서는 나카소네가 총리로 취임하면서 더욱 가속화했다. 1981년 3월 캐스퍼 와인버거(Caspar Weinberger) 미 국방장관은 일본 외상에게 북 서태평양 해역에서 소련에 대응하는 미국의 군사력을 보완하는 차원에서 일본 자위 대가 군사력을 보강하는 한편, 괌 이서( 以 西 ), 필리핀 이북( 以 北 )의 해역에 대해 방 위를 분담해줄 것을 요청했다. 같은 맥락에서 마이크 맨스필드(Mike Mansfield) 주 일대사도 일본의 대잠능력과 방공능력의 강화를 희망했다. 34) 같은 해 6월, 레이건 대통령과 스즈키 총리 간 정상회담에서도 와인버거 국방장관 은 일본이 방위 관련 특정 기술을 미국에 이전할 수 있는 매카니즘을 구축해야 한다 31) Michael J. Green, Arming Japan: defense production, alliance politics, and the post-war search for autonamy(new York: Columbia University Press, 1995), p.80. 32) ibid., p.80. 33) ibid., p.83 34) 田 中 明 彦, 安 全 保 障 : 戰 後 50 年 の 摸 索 ( 東 京 : 讀 賣 新 聞 社, 1997), pp.289-290. - 18 -
고 언급했다. 1982년 3월 와인버거 장관은 나카소네 총리를 방문한 자리에서 일본 군사기술의 대미 이전을 재차 요청했다. 방위생산위원회는 대미 기술이전문제 상황 파악을 위해 1982년 5월 12일 윌리엄 페리(William Perry) 전 국방차관을 초청, 미 국의 군사기술 현황과 장래동향에 대해 설명을 청취했다. 35) 이 같은 미국 측의 거듭된 일본 군사기술 이전 요청은 일본 측으로서는 1967년에 공표되고 이후 그 적용이 보다 엄격해진 무기수출 3원칙의 재검토를 요구하는 사안 이었다. 미국 측의 요청에 대해 나카소네 총리는 대미 무기기술 이전이 무기수출 3 원칙에 저촉되지 않으며, 미일 방위조약 제3조에 비춰 가능하다는 입장을 정리해 미 국 측의 요청에 긍정적으로 응하기 시작했다. 1983년 11월 8일 양국 정부가 공동 군 사기술 이전에 관한 양해각서를 교환한 것은 그 결과물이었다. 36) 나카소네 총리는 동맹국인 미국에 대해서는 무기수출 3원칙을 예외적으로 인정한 다는 정책으로 전환한 것이다. 이후 미일 양국은 상호 군사기술이나 무기용 부품의 거래를 활발하게 진행했다. 1983년 3월 스타워즈 계획으로 전략방위구상(SDI) 37) 을 제창한 레이건 미 대통령은 동맹국들에게 SDI 연구에 동참해줄 것을 요청했다. 1985년 3월, 와인버거 국방장관 은 일본에 대해 미국의 SDI에 참가해 줄 것을 공식으로 요청했다. 나카소네 내각은 1985년 초 미국을 방문해 레이건 대통령과 정상회담을 가진 자리에서 처음으로 SDI 에 대한 이해를 표명하는 등 호의적 반응을 보였다. 그 후 일본 정부는 일본 기업에 의한 연구개발, 즉 서태평양 지역 미사일 방어망 구축 프로젝트(WESTTPAC) 참가를 승인했다. 38) 이후 미 국방성 SDI국 간부의 방일, 서독 본에서의 서방 선진7개국 정상회담 당시 미일 정상회담에서의 5원칙 39), 레이건 대통령이 나카소네 총리에게 서한을 발송(SDI 35) 防 衛 生 産 委 員 會, 昭 和 58 年 度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總 會 並 びに 同 記 念 パーティを 開 催,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00 号 (1983.8), p.4. 36) 미국의 군사기술 이전 요청이 잇따르자 방위생산위원회는 특보 196호, 197호에서 소련의 기술정책과 미국이 수출관리 등에 대해 RAND연구소 보고서를 게재했고, 이어 198호에서는 미국 저하드 말리 (Gerhard Mally) 박사의 논문 기술이전정책(Technology Transfer Controls) 를 소개하고 있다.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米 國 技 術 輸 出 管 理 政 策,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198 号 (1983.3), pp.22-33. 37) 1983년 3월 발표한 레이건 대통령의 SDI 구상은 소련의 전략핵 미사일이 미국과 동맹국에 도달하는 30분간 요격해 파괴한다는 개념이다. 藤 原 彰, 日 本 軍 事 史 ( 下 卷 ) 戰 後 編 ( 東 京 : 社 會 批 評 社, 2007), pp.268-270. 38) Richard J. Samuels, Securing Japan: Tokyo's Grand Strategy and the Future of East Asia(Ithaca, NY: Cornell University Press, 2007), p.91. - 19 -
의의를 적극 평가하고, 금후 동맹국과 충분히 협의를 표명) 등의 과정을 거쳐 1985 년 9월, 1986년 1월 등 두 차례에 걸쳐 관계 부처 담당자로 SDI 조사단을 편성해 미 국에 파견했다. 40) 곧이어 1986년 3월 말부터 4월 초에 걸쳐 4개 정부 부처 담당자 9 명과 방산업체 21개사 전문가 46명 등 총 55명으로 구성된 관민합동조사단을 미국으 로 보냈다. 조사결과를 토대로 4월 이후 6회에 걸쳐 관계 각료회의를 개최했고, 9 월 9일 내각 관방장관의 담화 41) 로 SDI 참가를 정식으로 발표했던 것이다. 미국의 SDI 구상은 소련은 물론이고,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반대 목소리가 터져나 왔다. 일본에서도 물리학자, 수학자 등이 반대서명에 나서기도 했다. 일본은 본래 평화헌법과 우주 개발의 평화적 이용에 관한 국회결의, 비핵 3원칙과 무기수출 3원 칙이 존재하고 있어 SDI 참가가 이러한 비군사화규범에 크게 반하는 행위인 것만은 명백했다. 그러나 나카소네 내각은 총리 자신이 적극적 자세를 취하며 SDI 참가를 강행했다. 비핵 3원칙과 전수방위에 저촉된다는 신중론을 뒤로 미룬 채 평화목 적 기초연구 첨단기술의 수준향상 을 강조하며 연구 참가를 강행했다. 재 계도 처음에는 연구 참가를 주저했으나, 기술력 확보에 절호에 기회라는 인식으로 후에 정부의 참가결정을 지지하고 나섰다. 이후 1986년 10월말과 12월 중순에 걸쳐 두 차례 참가 협의를 위해 외무성 북미국 심의관을 단장으로 하는 정부 교섭단이 방미했다. 방위생산위원회는 SDI 문제에 관 해 상황파악에 주력해 왔고, 1986년 10월 말 미일 양국정부협의가 급작스레 개최되 면서 때마침 산업계의 요망사항을 정리해 외무성, 통산성, 방위청, 과학기술청 등 관계 4개 성청 담당국장에게 우선적으로 제출했다. 방위생산위원회는 1986년 10월 20일 경단련, 방위생산위원회 총회에서 SDI 연구 계획 참가에 관한 당면 요망 이 담긴 의견서를 내고, 정부의 SDI 연구계획에 정 식으로 참가한 것은 일미관계의 긴밀화, 서방진영의 결속강화라는 관점에서 평가할 만하다 면서 SDI 계획이 첨단기술 수준의 대폭 향상을 내포하고 있어 커다란 관 39) 5원칙은 미국의 일방적 대소우위 추구 금지, 서방 측 전체 억지력의 일부로서 그 유지 강화를 위해 투자, 공격 핵무기의 대폭 삭감을 목표, ABM 조약 준수, 대소 교섭 선행과 개발 배치는 동맹국과 협의 하는 것을 말한다. 40) 防 衛 生 産 委 員 會, SDI 硏 究 計 劃 に 關 する 內 閣 官 房 長 官 談 話 - 昭 和 61 年 9 月 9 日,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19 号 (1986.12), pp.44-45. 41) 防 衛 生 産 委 員 會, SDI 硏 究 計 劃 への 參 加 に 關 する 當 面 の 要 望 を 關 係 4 省 廳 擔 當 局 長 に 提 出 -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總 合 部 會,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19 号 (1986.12), pp.36-37. - 20 -
심을 갖고 있다 고 했다. 방위생산위원회는 우리의 기술개발은 지금까지 민생분야 비중이 압도적으로 높 아 영국과 서독 등과는 다른 환경에 처해 있다 며 산업계는 SDI 연구의 틀을 짜 는 과정에서 일미 정부 간 협의에서 연구개발 성과를 이용할 수 있어야 할 것 이라 고 했다. 42) SDI 참여에서 영국이나 서독보다 더 적극적이었던 것이다. 일본 재계는 민생기술, 범용기술이 대종을 이루는 일본의 과학기술력을 SDI 참가 를 통해 어떻게 업그레이드 시킬까에 관심을 집중했다. 이와 함께 일본 참가기업들 이 자율적으로 연구결과를 습득할 수 있을까, 참가기업들이 독자적으로 보유한 기술 노하우 정보 등에 어떤 영향을 미치지 않을까 등이었다. 국방조달규칙 등 미국 국내법 및 1986년 3월 서독 신문에 보도된 미-서독 간 SDI 협정에서는 연구개발 중에 발생하는 성과를 전경정보( 前 景 情 報, foreground information)라 하고, 연구개발 이전 혹은 당해 연구개발프로젝트와는 별개로 생긴 기술 등을 배경정보( 背 景 情 報, background information)라고 정의했다. 즉 일본 산 업계의 초미의 관심사는 SDI 연구계획 하에서 외국기업이 관여하는 전경정보와 배경 정보의 취급에 관한 것이었다. 43) 첫째, SDI 연구계획은 전적으로 미국 정부 예산에 의존하는 것이어서 일본 정부가 SDI 참가표명을 할 당시에 정부 예산조치에 관한 언급이 없었다. 연구 성과의 이용 에 대해 성과의 귀속문제에는 특별한 언급이 없었던 것이다. 또 적절한 형태로 그 성과를 이용한다 는 조항에 대해 재계는 일본 정부 내각관방장관 담화의 표현을 그 대로 답습하기로 했다. 둘째, 미국 국내법에는 배경정보에 대해서는 원래 원소유자의 소유권 사용권 등 은 변경을 받지 않고, 미 국방성이 사용 또는 이전한다거나 하는 경우에도 원소유권 의 사전 동의가 필요하기 때문에 일본 기업들은 미 국방성과 이것까지 직접 계약을 42) 방위생산위원회는 정부에 대해 1참가기업이 적절한 연구개발 성과를 이용할 수 있도록 할 것, 2참 가기업 보유의 독자 기술 노하우 정보 등이 충분히 보호될 수 있도록 할 것, 3우리나라에 적용되는 미 국의 정보보호에 관한 규정을 명확하게 하는 동시에 참가기업이 보유하는 독자의 기술 노하우 정보 등 에 관해서는 비밀지정의 범위 밖으로 할 것, 4참가기업의 취급이 미국기업에 비해 불리하지 않도록 충분한 배려가 있을 것, 5정부는 기업참가의 계약 전 단계에 대해 필요 충분한 지원 활동을 가능하도 록 체제를 정비할 것 등을 요망했다. 防 衛 生 産 委 員 會, 昭 和 62 年 度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總 會 ならびに 同 記 念 パーティを 開 催 -SDI 硏 究 計 劃 への 參 加 に 關 する 當 面 の 要 望 について,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21 号 (1987.7), pp.8-9. 43) 防 衛 生 産 委 員 會, 위의 책, pp.8-9. - 21 -
체결한 것은 아니었다. 또 장차 배경정보와 전경정보의 구별이 곤란한 것이 있을 수 있기 때문에 제3국이나 미국의 타기업으로의 유출이 발생하지 않도록 그 보호의 필 요성을 명기했다. 셋째, 방위생산위원회는 SDI연구 프로젝트의 개별 계약시 입찰조건, 성과의 귀속 등에 대해 미국 기업과 비교해 불리하지 않도록 신경을 썼다. 특히 성과 귀속에 대 해서 일본 기업은 할 말을 할 수 있도록 했다. 넷째, 방위생산위원회는 각 단계에서 일본 정부가 참가기업을 강력하게 백업해야 한다고 촉구했다. 계약 형태가 미 국방성과 직접계약 혹은 미국 기업과의 계약, 어 느 형태라도 양국의 역할관계를 놓고 보더라도 일본 정부의 지원이 반드시 필요하다 는 것이다. 특히 미 국내법 규정에는 예외도 많고, 또 운용 면에서 유연성이 커서 개별교섭에 의해 참가조건에 차이가 발생할 우려가 많다고 지적했다. 44) 1983년 1월 일본 정부는 무기수출 3원칙의 예외조치로서 대미 무기기술 제공협 정 을 체결했으며, 레이건 대통령의 방일 직전인 같은 해 11월 8일 맨스필드 주일 미 대사와 아베 신타로( 安 倍 晋 太 郞 ) 외무상이 미일 교환공문(November 1983 Exchange of Notes, Japan-U.S.) 45) 을 교환하고, 양국 간 무기기술공동위원회(JMTC) 를 1984년 11월 발족했다. 46) 그리고 양국 안보 문제 협의의 일환으로 미일장비기술 정기협회(S&TF, US/Japan Systems and Technology Forum)를 설치했으나 거의 성과가 없었다. 그 까닭은 미 국방성이 국립연구소를 운영하고 있는데 반해, 일본 방위청은 기술 연구본부를 제외하고는 방위산업에 대한 직접적인 기술 연구의 기반을 갖고 있지 않 다는 점이었다. 따라서 정부수준, 구체적으로 방위청 기술연구본부가 가진 방산 기 술 중 미국이 관심을 가질 만한 군수 기술은 거의 없었다. 게다가 미국이 관심을 가 44) 위의 책. 45) 교환공문 전문은 일본국의 국방능력을 향상시키려는 목적으로 미합중국이 공여해온 방위분야 기술 공여를 포함한 원조를 고려하고, 또 최근 일본의 기술수준이 향상돼온 새로운 상황을 인식해 미일안전 보장체제의 효과적 운용을 확보하기 위해 미합중국에 대해 무기기술을 공여하는 길을 활짝 여는 것으 로부터 방위분야 기술의 상호교류를 꾀할 것이다 라고 명시했다. 防 衛 生 産 委 員 會, 日 米 武 器 協 力 問 題 について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02 号 (1983.12), pp.1-8. 46) 1983년 1월 14일 일본 정부의 대미 무기기술 공여가 정식으로 결정되자 양국 정부 간 구체적 실시 방안에 대해 협의가 이뤄졌다. 미 국방성 방위기술심의회(Defense Science Board) 산업간 협력문제 태스크포스 의장으로 카터 정권의 국방차관을 지낸 말콤 카리(Malcolm R. Currie)가 그해 10월 29일 방일했다.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米 國 との 産 業 間 協 力 - 米 國 Defense Science Boardの 勸 告 から,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199 号 (1983.10), pp.34-39. - 22 -
진 기술의 상당수는 일본의 민간 기업들이 갖고 있었으므로, 양국의 방산협력은 진 전되지 않았다. 뿐만 아니라 다수의 일본 기업들이 갖고 있는 기술들이 군수( 軍 需 ) 에 특화된 기술이 아니라 민수에서 개발돼 군수로 이전된 범용기술들이기 때문에, 안보상의 이유로 민간 기술의 이전을 강제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47) 이 때문에 정 부 간 협의의 실무적 구체화를 위한 방안으로 방산업체가 중심이 된 미일기술포 럼 48) 이 등장했던 것이다. 미일기술포럼은 포럼 멤버에 양국 정부 관계자가 다수 포함돼 있다는 점에서 민간 주도라기보다는 반관반민( 半 官 半 民 )의 성격이 강했다. 49) <표 4>를 보면, 1992년 9월 도관로켓엔진을 미일이 공동 개발한 것을 시작으로 선 진 강재기술, 항공기 사출좌석, 심해역 음향기술, 탄도미사일 방어기술, 함재형 대 공레이더 등 육해공을 망라한 첨단 무기체계를 개발해 왔고, 탄도미사일 방어용 능 력향상형 요격미사일, 하이브리드 전기구동에 대해서는 현재 개발을 진행 중에 있다. 한편 1990년 제1회 포럼부터 2009년도 제20회 포럼까지 이 포럼에 참가한 인사들 의 면면을 보면, 미국과 일본의 주요 군수산업체, 업계 단체, 국방성, 방위성, 경제 산업성(구 통산성) 등의 관계자들이 망라돼 나타난다. 일본 측에서는 후지중공업, IHI, 가와사키중공업, 미츠비시중공업, 샤프, 일본 방위장비공업회 등이 있으며, 미 국 측에서는 보잉, BAE 시스템즈, 레이시온, 록히드 마틴 등 양국의 주요한 방산업 체를 모두 포함하고 있다. 50) 1988년 8월 방위청 기술연구본부, 방위청 내국 무기군수과, 병기공업협회 소속 화 기탄약 제조회사를 중심으로 약 2주간의 일정으로 화기탄약 기술연수팀을 구성해 대 대적으로 미국 연수를 떠났다. 당시 미국을 비롯한 NATO 회원국들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낙후된 재래식 무기의 성능향상을 꾀하고 있었다. 일본도 기회를 놓칠세라 뒤 처진 탄약과 화기류 보완에 나섰다. 51) 주목할 점은 양국 정부 간에 이뤄진 무기기술 교류 협의를 구체적으로 산업계 차원에서 어떻게 대응해 나갈 것인가에 초점을 맞춰 미일기술포럼이 출범했다는 점이다. 이러한 차원에서 초기 미일기술포럼은 양국의 방산협력을 위해 다소 추상적이고 당위론적 논의가 이뤄졌다. 47) 김진기, 일본의 방위산업: 전후의 발전궤적과 정책결정 (서울: 아연출판부, 2012), pp.367-369. 48) 朝 雲 新 聞 社 編 輯 局, 防 衛 ハンドブック ( 東 京 : 朝 雲 新 聞 社, 2009), p.475. 49) 日 本 經 濟 新 聞, 2007. 11. 23. 50) 김진기, 앞의 책, p.369. 51) 防 衛 生 産 委 員 會, 海 外 における 火 器 彈 藥 技 術 の 動 向,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27 号, 1989.1, p.1-19. - 23 -
<표 4> 미일 공동 연구개발 프로젝트 실시 현황 항목 개요 약정시기 종료시기 도관 로켓 엔진 선진강재기술 전투차량용 세라믹엔 진 아이세이프 레이저 레이더 사출좌석 선진 하이브리드 추 진기술 심해역 음향기술 탄도미사일 방어기술 야전포용 고안전성 발사약 P-3C 후계기 탑재 전자기기 소프트웨어 무선기 함재형 대공 레이더 함재형 전투지휘시스 템 탄도미사일 방어용 능력향상형 요격미사 일 항공연료 및 기타 엔 진배기가스에 노출되 는 영향 휴대용 화학작용제 자동 감지기 항공기기로 응용하기 위한 화상자이로 하이브리드 전기구동 고속 多 胴 船 최적화 외부공기를 유입해 로켓의 고체연료를 2차연소 하게 하는 기초 기술 연구 1992.9 1999.1 잠수함 수납용기 등에 사용하는 초고장력 강재의 용접기초기술 에 관한 연구 1995.10 2002.1 세라믹 재료를 적용한 디젤엔진의 기초기술에 관한 연구 1995.10 2002.10 눈에 안전성 높은 파장의 레이저를 사용한 레이더 장치의 기초 기술에 관한 연구 1996.9 2001.9 전투기 사출좌석에 승무원 구속장치 및 좌석안정화장치를 추가 하기 위한 연구 1998.3 2003.3 고체연료와 액체산화제에 의해 추진 제어가 가능한 추진장치의 기초기술에 관한 연구 1998.5 2005.5 심해역에 대해 음파의 전달, 해저에서의 반사 등의 특성 분석 해 석에 관한 연구 1999.6 2003.2 해상배치형 상층시스템(현재의 해상배치형 미드코스 방어시스템) 미사일의 4개의 주요 구성품(적외선 시커, 키네틱 탄두, 2단로켓 1999.8 2008.3 모터 및 노즈콘)에 관한 연구 피탄시 발사약으로의 의도하지 않는 연쇄폭발을 회피하는 발사 약 기수기술에 관한 연구 2000.3 2004.1 해상자위대의 차기고정익초계기(P-X)와 미 해군의 다용도 해상 항공기(MMA) 탑재 전자기기를 대상으로 하는 상호운용성 확보 등에 관한 연구 2002.3 2006.9 무선기의 주요기능을 소프트웨어에 의해 실현하는 소프트웨어 무선기의 기초기술에 관한 연구 2002.3 2007.3 고출력 반도체 소자를 적용한 함정용 페이즈드어레이 레이더 기 술에 관한 연구 2006.4 2009.11 함정 전투지휘시스템에 오픈아키텍처기술을 적용하는 것에 대해 정보처리능력을 향상시키는 연구 2006.4 2009.11 탄도미사일방어용 능력 향상형 요격 미사일의 개발 2007.3 개발중 항공연료(JP-4 및 JP-8) 및 기타 엔진 배기가스에 노출되는 것 에 대한 영향 연구 2007.3 개발중 화학작용제에 대해 신속정확하게 감지가능한 것으로, 조작 및 처 리방법을 간소화한 휴대용 화학작용제 자동감지장치 및 시험평 2008.3 2013.3 가기술에 관한 연구 관성항법장치나 GPS를 보완해 기능을 강화시키고 화상을 사용 한 새로운 위치측정과 처리기술에 관한 연구 2012.11 개발중 차량을 모터로 전기 구동화하고, 동시에 그 가동 전원을 엔진과 바테리의 2계통으로 공급하는 기술에 관한 연구 2012.11 개발중 고속 기동성능을 보유하고 진동이 없으며 배수량에 비해 넓은 갑판면적을 확보할 수 있는 함정용 고속 다동선(특히 三 胴 船 )의 2014.3 개발중 설계를 목적으로 한 연구 * 자료: 防 衛 省, 防 衛 白 書 2014 年 度, p.422. - 24 -
제1회 미일기술포럼은 1990년 5월 밴더빌트대학 공공정책연구소 미일연구센터의 주최로 열려, 미국과 일본 기업인 17명이 참석했다. 처음으로 열린 포럼에서 양국 관계자들은 미일 간 기술이전의 현황, 기술협력 활동, 미일 방위투자환경, 투자에 대한 제약 사항, 미일 교류의 활성화 등 원론적 문제들에 대해 토의했다. 52) 한편, 1988년 10월 미일 정상회담에서 미일 양국은 일본 측이 국산 지원전투기 F-1의 후계기를 개발하는 차세대 전투기 사업에 대해 F-16 전투기를 기본모델로 공 동개발 한다고 합의했다. 53) 이 같은 방식으로 무기수출 3원칙이 미국에 한해 예외적 으로 적용되기 시작하면서 1983년부터 2005년까지 일본 기업들은 미국에 14건에 달 하는 군사기술을 수출했다. 일본 방위산업이 축적한 높은 수준의 군사기술과 신냉전 시기의 안보상황, 그리고 방산업계의 끈질긴 노력이 일본의 방위산업으로 하여금 무 기수출 3원칙을 포함한 비군사화 규범들이 설정한 장벽들을 뛰어넘게 한 것이다. 제 2절 미일 무기 공동생산과 방위생산위원회의 활동 1. FS-X 개발 결정 과정 일본의 FS-X 미일 공동개발은 항공자위대가 가진 F-1 54) 전투기를 대체할 지원전투 기 55) 로 록히드 56) F-16C를 기반으로 한 새로운 항공기를 미국과 일본이 협력해 개발 52) 김진기, 일본의 방위산업: 전후의 발전궤적과 정책결정 (서울: 아연출판부, 2012), p.370. 53) 田 中 明 彦, 앞의 책, pp.306-307. 54) F-1은 4차방 말기에 나타났던 T-2 연습기를 전투기로 개량한 FST-2의 공식명칭이다. F-1은 복좌의 T-2를 단좌의 경전투기로 개조한다는 구상으로 1973년 T-2 생산라인에서 2대를 빼내 별도의 라인에서 개조했다. 따라서 일본은 F-1을 T-2와 거의 같은 시기에 생산했고, 1975년부터 1979년까지 약 70대를 제작했다. 55) 전후 일본 항공자위대 전투기는 요격전투기와 지원전투기로 나뉜다. 헌법 제9조로 인해 오로지 방어 에만 전념한다는 점 때문에 공격해 오는 적의 전투기를 대상으로 한 공대공 전투를 기본 임무로 하는 것이 요격전투기다. 반면, 일본에 상륙하는 적 함대를 대상으로 한 공대함 기능을 갖고 자국 지상부대 전투에 대한 지원을 수행한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인 것이 지원전투기다. 전후 일본에서는 폭격이나 공 격이라는 군사용어를 사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지상부대의 전투를 공중에서 지원하는 근접항공지원 이 라는 군사용어에서 지원 을 사용하고, 이 임무를 수행하는 기종을 지원전투기라고 부르는 방법으로 독 자적 용어를 만들어낸 것이다. - 25 -
한다는 것이었다. FS-X 미일 공동개발을 둘러싸고 미국의 부시 정부와 일본 정부는 1989년 4월말 일단 최종적으로 조정을 했다. 이 프로그램은 미국 역사상 국제협력에 의한 가장 큰 군용기 개발 프로젝트였고, 일본 정부가 전후 수행한 가장 큰 규모의 항공기 연구개발 프로젝트였다. 57) 당초 일본은 F-1의 후속기인 차기전투기를 엔진을 제외하고는 국산으로 개발하고 싶다는 의향이 강했다. 58) 제로센 전투기를 개발한 호리코시 지로( 堀 越 二 郎 ) 59) 등 전 전 항공기 개발을 주도했던 기술자들이 전후 항공기산업 재건에 따라 미츠비시, 가 와사키, 후지중공업 등에서 자리를 잡았다. 또한 구 해군의 기술사관이 항공자위대 와 기술연구본부에 들어가는 등 FS-X 국내생산을 위한 인재풀도 어느 정도 조성돼 있었던 것이다. 오무라 히토시( 大 村 平 ) 전 항공막료장은 20톤급의 전투기 가격은 약 100억 엔이 므로 1kg당 약 50만 엔 꼴 이라며 일본의 금시세가 1kg당 약200만 엔이므로 전투 기 가격은 금값의 4분의 1에 맞먹는 기술 집약형 제품 이라고 했다. 오무라 막료장 은 소화 50년(1975년) 전투기 개발이 종료된 이래 10년이 경과하면서 당시 설계와 생산에 간여한 인물들이 아직도 현역으로 있다 면서 고도의 기술력을 보유한 일 본이 국산개발을 한다면, 설사 외국과의 공동개발이나 항공기 도입 때도 협상카드로 서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을 것 이라고 했다. 60) 56) F-16의 원 개발자는 제너럴 다이내믹스사의 Fort Worth fighter division이었으나, 1993년 록히드 가 흡수통합하면서 명칭을 Lockheed Fort Worth Company(LFWC)로 바꿨다. 57) Mark Lorell, Troubled Partnership: An Assessment of U.S.-Japan Collaboration on the FS-X Fighter(RAND, 1995), pp.1-3. 58) 防 衛 生 産 委 員 會, 今 後 の 航 空 裝 備 品 の 硏 究 開 發 - 防 衛 廳 前 航 空 幕 僚 長 大 村 平,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28 号 (1989.2), p.42-53. 59) 호리코시 지로( 堀 越 二 郎, 1903~1982)는 군마 현 후지오카 시에서 태어나 동경제대 항공학과를 수석 으로 졸업한 다음, 미츠비시 내연기제조(현재의 미츠비시중공업)에 입사해 본격적인 항공기 설계사로 일했다. 그는 미츠비시 96식 함상전투기의 설계시 혁신적인 설계와 0식 함상전투기(제로센)의 주임설 계기사로 유명하다. 전쟁 전에는 7시제 함상전투기, 9시제함상전투기(후에 96식 함상전투기), 전쟁 중 에 0식 함상전투기를 포함해 라이덴, 렛푸 등 유명 기체의 설계도 담당했다. 9시제 단좌전투기는 혁신 적인 설계로 후에 96식 함상전투기의 개발로 이어진다. 전후엔 동기였던 기무라 히데마사( 木 村 秀 政 ) 등과 함께 일본 최초의 터보프로펠러 여객기인 YS-11의 설계에 참가했다. 미츠비시중공업은 전후 분 할되었기 때문에 이로 인해 발족한 중일본중공업(후에 신미츠비시중공업)에 재직했고, 신미츠비시 중 공업을 퇴사한 후엔 교육 및 연구기관에서 교편을 잡았다. 1963년부터 1965년에 걸쳐 도쿄대학의 우 주항공연구소에서 강사로 일한 호리코시는 1965년 공학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그 후 1965년부터 1969년까지 방위대학교 교수, 1972년부터 1973년까지 니혼대학 생산공학부 교수를 지내다가 1982년 에 78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최근 개봉된 미야자키 하야오 감독의 2013년판 애니메이션 바람이 분다 ( 風 立 ち) 는 그를 모델로 한 영화다. - 26 -
이들 기술자들은 전후 최초의 국산 초등 제트연습기 T-1을 개발함으로써 전투기 국내개발 가능성을 내외에 과시했다. T-1의 개발은 당시 방위청 내에서 국내개발파 의 입지를 강화시켜 줌으로써 1960년대 중반 C-1 수송기와 T-2 초음속 고등훈련기의 국내개발, 그리고 이후 T-2를 개조한 지원전투기 F-1의 개발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일본의 항공 관계자들은 이러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F-1의 후속기가 될 FS-X의 국내 개발을 강력히 주장했던 것이다. <표 5>에 나타난 것처럼 전후 일본이 생산한 전투 기는 4차방 말기에 T-2 훈련기를 전투기로 개조한 F-1(FST-2)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 두 미국 항공기를 라이선스 생산 방식으로 제작한 것이었다. 일본은 F-1을 1975년부 터 1979년까지 약 70기 정도 생산했다. 일본 정부가 FS-X의 국내개발을 고려하게 된 또 하나의 이유는 F-1의 수명 문제였 다. 1977년 도입한 F-1이 설계 수명 20년, 3,500시간 비행을 고려하면 방위청은 늦 어도 1990년 중반까지 F-1의 대체기를 도입해야 했다. 따라서 늦어도 1992년에는 새 로운 기체를 제작해야 할 것으로 예상했었다. 하지만 F-1의 기체강도를 재검토한 결 과 4,000시간 이상 비행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했다. 당초 방위청이 예상했던 사고 손실이 거의 없었고, 오일쇼크로 훈련비행 시간도 줄어들어드는 등 1997년까지 유지 가 가능했던 것이다. 따라서 일본은 독자개발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생각을 했다. <표 5> FS-X 개발 이전에 일본에서 라이선스 생산된 미국 군용기 전투기 헬리콥터 기타 Boeing KV-107 Sikorsky S-61A North American F-86F Bell UH-1B/H Lockheed T-33A Lockheed F-104J Sikorsky SH-60 Lockheed P-2J McDonnel-Douglas F-4EJ Boeing CH-47 Lockheed P-3C McDonnel-Douglas F-15J Bell AH-IS Hughes OH-6 * 자료: Lorell, Mark. A History of U.S.-Japan Collaboration on the FS-X Fighter. New Brunswick and London: Transaction Publisher, 1996, p.60. 60) 防 衛 生 産 委 員 會, 今 後 の 航 空 裝 備 品 の 硏 究 開 發 - 防 衛 廳 前 航 空 幕 僚 長 大 村 平,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28 号 (1989.2), p.42-43. - 27 -
<표 6> FS-X 개발 이전 일본의 자체개발 군용기 전투기 제트 훈련기 기타 미츠비시 F-1 지원전투기 후지 T-1A 미츠비시 T-2 가와사키 T-4 신메이와( 新 明 和 ) US-1 구난정 가와사키 C-1 수송기 * 자료: Lorell, Mark. A History of U.S.-Japan Collaboration on the FS-X Fighter. New Brunswick and London: Transaction Publisher, 1996, p.61. FS-X의 임무는 대공방어보다는 대함공격용이었다. 원거리 출격이 가능하려면 항속 력이 길어야 했고, 적 항공기나 대공미사일의 반격을 고려해 작전반경이나 기동성이 우수해야 했다. 적 레이더의 추적을 회피하려면 스텔스 성능도 필요했다. 이러한 작 전요구성능(ROC)이 충족된다고 해도 F-15보다 고가라면 비용 대 효과 면에서 의미가 없었다. 가능한 한 소형, 경량화한 전천후( 全 天 候 ) 기체여야 했기 때문이다. 방위청 은 이러한 설계 개념을 갖춘 독자개발의 FS-X 기체를 원했다. 이에 앞서 1978년 방위청은 미츠비시중공업에 의뢰해 CCV(Control Configured Vehicle, 형상제어비행체) 61) 연구기 국내개발에 착수해 1983년 8월 개발에 성공했 다. CCV 연구기는 미츠비시가 개발한 T-2 초음속 고등훈련기를 개조한 것이었으나, 고성능 소형 컴퓨터를 장착한 전기식 조정장치(Fly-by-wire)에 의해 주익과 보조익 을 움직여 공중전에 대비하는 첨단 항공 전자장비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T-2 개량 CCV 실험기, F-4 개량기, T-4 중등훈련기 등에 실제로 적용돼 그 성과를 입증하기도 했다. 따라서 FS-X 국내개발에 대해 방위청과 항공업체는 성공 가능성에 대해 낙관 했다. 방위청은 1983년 12월에 관계 참사관 회의를 열어 항공자위대의 FS-X를 국내 개 발하기 위한 기술적인 가능성을 약 1년 반에 걸쳐 검토한다 는 방침을 세웠다. 62) 1985년 1월 항공기 운용 책임자인 모리 시게히로( 森 繁 弘 ) 항공막료장은 연구 총책임 자인 오모리( 大 森 ) 기술연구본부장에게 운용 요구사항을 제시하며 이를 만족시키는 61) 형상제어비행체(CCV)는 기수방향과 실제 기체 진행방향을 달리할 수 있는 고기동 기술이다. CCV는 동체에 카나드와 조종면을 추가하고, FBW(Fly-by-wire) 또는 PBW(Power-by-wire) 방식의 조종면 을 제어기술을 사용해 기체의 기수( 機 首 )를 움직이지 않고 상하좌우 기동이 가능하도록 비행컴퓨터가 제어하는 기술이다. 임상민, 전투기의 이해(상) (서울: 이지북, 2005), p.257. 62) 久 野 正 夫, FS-Xと 日 米 の 思 惑 軍 事 硏 究 8 月 号 (1989b), p.77. - 28 -
FS-X를 개발하는 것이 가능한지 조사를 의뢰했다. 그해 9월 오모리 기술본부장의 뒤 를 이은 야마시타( 山 下 ) 기술연구본부장은 엔진을 제외하면 국내 개발은 가능하며, 개발기간은 10년 정도 걸릴 것 이라고 답했다. 이에 따라 일본 정부는 국내생산을 정당화하는 작업에 돌입했다. 특히 미국의 예 상되는 견제를 고려해야만 했다. 63) 더군다나 정부 내의 의견도 제각각이었다. 외무 성은 미국과의 무역 역조, 미일 안보협력을 고려해 미국 항공기 제작사와의 공동생 산을 지지했고, 방위청과 방산업계는 국내개발을 주장했다. 64) 그리고 대장성은 무기 수출 3원칙으로 인한 제한된 시장규모를 고려하면, 독자개발은 아무래도 높은 개발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재정위기를 초래할 수도 있다며 회의적 반응을 나타냈다. 일본의 독자개발 계획이 윤곽을 드러내자, 미국은 강한 우려를 제기했다. 65) 경제 대국을 일궈낸 일본의 기술력으로, 미국이 압도적 우위를 차지하고 있는 몇 안 되는 분야마저 일본이 위협하려 하는 것은 아닐까라는 우려가 미국 내에서 나타났다. 게 다가 미국은 거액의 대일적자를 안고 있었다. 미국은 일본이 전투기 개발 대신 미국 산 F-16이나 F-18을 구입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66) 사실상 미국은 1978년 일본이 F-15 전투기의 공동 생산 또는 라이선스 생산을 시 작할 때부터 일본의 항공기 기술력을 주목하기 시작했다. 미 의회소속 감사기구인 회계검사원(GAO)은 보고서( U.S. Military Coproduction Programs Assist Japan in Developing its Civil Aircraft Industry )를 통해 하원 세입위원회 무역분과위 는 민간산업에 적용 가능한 고도의 군사기술(F-15 라이선스 생산)을 이전하는 것에 대해 일본의 민간항공기산업의 발전이 가까운 장래에 미국의 유력한 경쟁상대로 떠 오를 가능성이 있어 우려하고 있다 며 이러한 점에서 고도기술의 대일이전의 실 태와 무기를 공동생산 하는 계획을 실시할 때 고려사항에 대해 GAO에 1981년 3월 30 63) Michael W. Chinworth, Inside Japan's Defense: Technology, Economics & Strategy(New York: Brassey's(U.S.), 1992), p.141. 64) ibid., pp.141-142. 65) 아사히신문은 1985년 미 국방성이 FS-X 개발에 대해 다음 3가지 면에서 상당히 불쾌한 감정을 표시했다고 보도했다. 첫째, 미국이 만드는 전투기는 1,000대 단위, 일본은 100대 단위라서 일본 이 제작하면 단가가 비싸져 투자효율 면에서 다른 곳에 투자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둘째, 일본은 무 기수출 3원칙 때문에 FS-X를 개발하는 것이 이 원칙을 파기하는 것일 것이다. 셋째, 일본이 FS-X를 독자적으로 개발하면, 미국과의 안보조약과 동맹국 상호 시설서비스 이용(interoperability)가 사라지고 만다는 것이었다. 防 衛 生 産 委 員 會, 今 後 の 航 空 裝 備 品 の 硏 究 開 發 - 防 衛 廳 前 航 空 幕 僚 長 大 村 平,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28 号 (1989.2), p.44-46. 66) 田 中 明 彦, 安 全 保 障 : 戰 後 50 年 の 摸 索 ( 東 京 : 讀 賣 新 聞 社, 1997), p.307. - 29 -
일자로 조사를 의뢰했고, 1년의 조사결과를 거쳐 이듬해 1982년 3월 18일 보고서를 제출했다 고 했다. 1983년 6월 방위생산위원회 특보 에도 비슷한 내용이 감지되 고 있었다. 현재 미국의 군사기술은 세계 최고 수준으로 미국이 일본으로부터 얻을 수 있는 군사기술은 전무한 상태다. 최근 일본은 전자, 레이저 기술 부문에서 혁신적 진보 를 이루고 있고, 일부 미국 관료들은 일본의 기술력에서 얻을 것이 있다는 언급도 나오고 있다. 종래에 군사기술의 이전은 오로지 미국에서 일본으로라는 일방통행 식이었으나, 미 국무성에 따르면, 일본 정부는 조만간 무기수출 금지정책의 예외 로서 미국으로의 군사기술 이전을 허용할 방침이라고 한다. 67) 이런 측면에서 FS-X 프로그램은 미일 양국 간 국방, 외교, 무역, 기술 등의 모든 측면이 압축적으로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일본과의 협의를 미 국방성이 주도하는 데 대해 상무성, 무역대표부(USTR, United States Trade Representative), 그리고 의회 관계자들이 불만을 제기했다는 점에서도 분명히 드러나고 있다. 68) 1987년 6월, 당시 리차드 아미티지(Richard Armitage) 국방차관보는 니시히로 마사테루( 西 廣 整 輝 ) 방위국장에게 일본이 새로운 전투기의 국내 개발에 착수한다면, 미국과의 관 계가 어색해질 뿐 아니라 아시아 이웃나라들이 거부반응을 나타낼 것이 틀림없다 면서 신예기의 비행거리는 치시마( 千 島 )와 한반도에도 미쳐 전수방위의 틀을 넘게 되는 것 아닌가 라고 말했다. 또 아미티지는 같은 달 미일 수뇌회담 직전의 비공식 회합에서도 만약 일본이 국산기를 고집한다면, 전후 힘겹게 쌓아올린 양국의 안전 보장 관계에 흠집이 날지도 모른다 고 했다. 69) 미국산 전투기에 익숙해 있던 항공자위대의 전투기 조종사들도 국내개발에는 부정 적이었다. 조종사들은 F-1 지원전투기의 성공적 제작 사례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차기 지원전투기를 국내 개발하는 것보다 해외에서 도입 또는 개조하는 쪽을 선호했 67) 防 衛 生 産 委 員 會, わが 國 の 航 空 機 産 業 の 關 する 米 國 會 計 檢 査 院 の 報 告 - 米 國 の 軍 事 公 同 生 産 計 劃 が 日 本 の 民 間 航 空 機 産 業 の 發 展 に 寄 與,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199 号 (1983.6), pp.20-28. 68) Clyde V. Prestowitz, Trading Places: How We Allowed Japan to Take the Lead(New York: Basic Books. Inc, 1988), pp.38-40. 69) 田 中 明 彦, 安 全 保 障 : 戰 後 50 年 の 摸 索 ( 東 京 : 讀 賣 新 聞 社, 1997), p.307; 手 嶋 龍 一, ニッポンFSX を 擊 て ( 東 京 : 新 湖 社, 1991)를 참조. - 30 -
다. FS-X를 국내개발하기로 의견을 모은 방위청과 항공자위대 관계자들은 조달비만 1조400억 엔(170대 기준)이 들어가는 사업에 객관적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외국기 종과 국내개발 예정기를 비교검토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방위청의 이 같은 노력은 미국의 간섭을 부르는 자충수였다. 항공자위대는 장차 개발할 차기 지원전투기와 대등하다고 생각되는 15개 기종 중 에서 최종적으로 F-16C(GD사), MF/A-18(맥도넬 더글라스), 토네이도(파나비아) 등 3 개 기종을 선정했다. 방위청은 1985년 10월 1차 질문서를 내고 그 회답을 얻자 1986 년 5월 상세한 자료 수집을 위해 서독(토네이도)과 미국(F-16 및 F/A-18)에 조사단 을 파견했다. 3개사는 활발한 홍보활동을 벌였고, 자국 정부로 하여금 일본 정부에 압력을 가하도록 했다. 당시 기술이전 등을 고려했을 때 맥도넬 더글러스의 F/A-18 이 가장 유력한 후보였다. 70) <표 7> 방위청 기술연구본부의 주요 연구개발 프로그램 연구분야 비용(10억 엔) 기간(회계연도) 전투기 디자인 0.3 1973~1987 복합 재료 1.7 1974~1987 T-2 CCV 프로그램 6.1 1978~1985 화기 관제 레이더 4.4 1981~1987 임무 컴퓨터 2.4 1983~1988 기상용 전자전 시스템 1.7 1985~1989 관성항법장치 1.0 1985~1988 스텔스 성능 0.3 1986~1989 * 자료: Mark Lorell, Troubled Partnership: An Assessment of U.S.-Japan Collaboration on the FS-X Fighter(RAND, 1995), p.85. 상황이 이렇게 전개되자 일본 정부는 FS-X 계획을 국내개발 또는 공동 개발 가운 데 한 가지를 선택해야 할 처지에 놓이게 됐다. 71) 미국이 국내개발을 극력 반대할 70) F/A-18은 기술협력 부문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으나, 해군 항모용을 항공자위대 기종으로 채택 하기 어렵다는 지적을 받았고, F-15전투기는 당시 최강의 전투기였으나, 차기전투기로 선정했을 경우 이미 보유하고 있는 F-15와 중복돼 전술적인 면에서 다양성이 떨어진다는 지적을 받았다. F-16이 선 정된 이유는 성능 대비 효율 면에서 가장 높은 점수를 받았다. 防 衛 生 産 委 員 會, 今 後 の 航 空 裝 備 品 の 硏 究 開 發 - 防 衛 廳 前 航 空 幕 僚 長 大 村 平,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28 号 (1989.2), p.47-48. 71) Michael W. Chinworth, Inside Japan's Defense: Technology, Economics & Strategy(New York: Brassey's(U.S.), 1992), pp.146-147. 김진기, 일본의 방위산업: 전후의 발전궤적과 정책결 - 31 -
경우, 일본은 고성능 엔진을 제작할 기술은 없었기 때문에 국내개발은 사실상 불가 능했다. 그렇다고 유럽 등지에서 엔진을 구매해 국내개발을 할 수도 있었으나, 미일 안보협력 관계에서 미국을 자극하는 행동은 불가했다. 1987년 9월경 일본 정부는 나카소네 총리의 임기가 얼마 남지 않은 상황에서 이 문제의 해결책을 모색했다. 구리하라 유코( 栗 原 祐 幸 ) 방위청 장관은 미국의 전투기 를 모델로 한, 미일 공동개발이라는 타협책을 고안했다. 공동개발이 된다면 일본의 기술이 미국으로도 이전되는 효과도 있어, 1983년 나카소네 총리가 결단한 대미 무 기기술 공여의 첫 사례가 될 수도 있는 아이디어였다. 특히 미국은 미일 간 현안이 었던 쇠고기, 오렌지의 대일수출, 일본산 반도체의 수입통제, 칸사이 신공항 건설 참여, 도시바기계의 코콤(COCOM) 위반사건 72) 등 FS-X와 직접 관련이 없는 문제들을 끌어들여 FS-X 사업 참여를 위해 일본을 흔들기 시작했다. 결국 6월 30일 와인버거 장관은 구리하라 방위청장관과 도쿄에서 만나 일본의 국 내 개발안을 누르고 미일공동개발이라는 절충안을 성사시켰다. 73) 양국 국방장관은 절충안에서 공동개발 사업관리는 일본 방위청이 한다, 주계약사는 일본 기업으 로 한다, 개발비는 전액 일본이 부담한다, 개발 결과 얻어지는 기술정보는 전부 방위청에 귀속된다, 작업분담은 일본 측 55~65%, 미국 측 35~45%로 한다, 기술 운영위원회를 설치한다 등의 합의를 도출했다. 보름 뒤인 7월 15일 미 상원은 댄 포스(Dan Foorth) 의원과 로버트 버드(Robert Byrd) 의원 주도로 일본이 FS-X를 미국으로부터 구입하도록 요구한다 는 결의안 을 만장일치로 가결했다. 74) 결의안은 상원의 의견표명 수준이었으나, 때마침 발생한 도시바 코콤 위반사건과 관련해 미 의회가 일본에 대해 경고성 메시지를 전달한 것 으로 해석됐다. 75) 정 (서울: 아연출판부, 2012), p.334에서 재인용. 72) 1987년 도시바( 東 芝 )기계 임원 2명이 1982~1984년에 걸쳐 잠수함의 고성능 스크류를 제작하는 공 작 기계를 구소련에 수출한 일로 체포된 사건이다. 미 소가 첨예하게 대립하던 냉전시대에 서방국가들 은 공산권의 위협에 대처하기 위해, 대공산권수출통제위원회(COCOM)를 만들어 군수물자가 적( 敵 )의 수중에 들어가지 않도록 했다. 400여개의 통제품목에 해당하는 물품을 공산권에 수출하려면 코콤의 사전승인을 받아야 했다. 도시바기계는 이를 무시하고 소련이 원자력 잠수함의 소음을 줄이는 데 결정 적으로 기여하는 기계를 판매했다. 73) ibid., pp.145-147. 74) Mark Lorell, A History of U.S.-Japan Collaboration on the FS-X Fighter(New Brunswick and London: Transaction Publisher, 1996), p.153-154. 75) 김진기, 앞의 책, p.341. - 32 -
결국 일본은 미국의 압력에 굴복해 1987년 10월 23일 안전보장회의에서 FS-X사업 을 미일공동개발에 의한 F-16C 모델의 개조로 결정했다. 1987년 10월 미일 방위수뇌 회담에서 그 같은 취지의 합의가 나오고, 1988년 11월말에는 F-16을 플랫폼으로 한 공동개발에 양국이 합의했다. 양국의 공동개발 합의는 양해각서까지 정식으로 채택됐으나 합의가 성사된 것은 아니었다. 76) 미일 정부 간 합의에 대해 미 의회와 상무성 등이 클레임을 걸었기 때 문이었다. 미국 측이 이제까지와는 달리 안보문제에 통상 문제를 결부시켜 합의를 백지화하고 재조정을 시도하고 나선 것이다. 미국의 이러한 막무가내식 태도에 대해 일본 측에서는 공동개발에 대한 회의와 함께 민족주의적 움직임도 나타났다. 77) 미국 과의 무역마찰을 피하기 위해 울며 겨자 먹기로 공동개발로 양보한 일본은 기술유출 을 문제 삼는 미국의 태도에 아연실색하지 않을 수 없었다. 리쿠르트사건으로 인해 곤욕을 치르고 있던 일본 정부와 여당은 이러한 미국의 돌연한 태도변화로 더욱 궁 지에 몰렸다. 78) 미국이 이처럼 초강경 수단을 쓰면서까지 FS-X 사업에 참여한 까닭은 첫째, 일본 이라는 가장 큰 항공기 시장을 잃을까 우려했기 때문이다. 유럽지역에서는 토네이도 개발 이래 사실상 미국이 독점하고 있었던 군용기 시장이 유럽전투기(EFA)의 공동개 발로 인해 흔들리고 있었다. 유럽지역에서 독점적 지위를 상실하고 일본시장마저 잃 게 된다면 미국의 항공산업은 일대 위기를 맞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79) 둘째로 는 일본이 기술력을 바탕으로 항공기를 생산해 미국의 라이벌로 떠오르기 전에 공동 개발 등의 수단으로 일본의 항공기 산업을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고자 했던 것으로 보인다. 셋째로는 미국의 기술전략이다. 거대한 재정적자에 시달렸던 미국은 국방비 삭감 으로 인해 연구개발비 삭감이라는 악순환에 빠져 있었다. 미국은 이러한 연구개발비 의 삭감분을 공동개발로 보충하려 했다. 네 번째는 미 공군과 제너럴다이내믹스(GD) 76) 田 中 明 彦, 앞의 책, p.208. 77) FS-X가 진행되는 동안 이시하라 신타로( 石 原 愼 太 郞 ) 도쿄도지사와 당시 소니 회장인 모리타 아키오 ( 盛 田 昭 夫 )는 함께 저술한 No と 言 える 日 本 ( 光 文 社, 1989)을 출판했다. 민족주의적 성향의 이 책 은 미국에서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고, 일본에서도 베스트셀러가 됐다. 이후 石 原 愼 太 郞 渡 部 昇 一 小 川 和 久 가 지은 それでも'No'と 言 える 日 本 ( 光 文 社, 1990)과 石 原 愼 太 郞 江 藤 淳 이 지은 斷 固 'No'と 言 え る 日 本 ( 光 文 社, 1991)도 잇달아 출판됐다. 78) 김기석, FS-X, 미일공동개발사업의 문제점, 국방과 기술 Vol.128, 10월호(1989), p.7. 79) 김기석, 위의 책, pp.11-12. - 33 -
사가 안고 있는 내부적 동기였다. GD사는 당시 유럽 4개국을 겨냥해 F-16의 개량형 인 애질 팰콘(Agile Falcon)을, 미 공군의 차기공격기 후보로 A-16을 제안 중이었 다. 그러나 두 기체 모두 일체성형주익( 一 體 成 型 主 翼, co-cured composite wings)이 필수 불가결했다. 따라서 GD는 이미 완성단계에 있는 일본의 복합재 일체성형기술을 입수해야 하는 입장이었다. 개조의 하이라이트라고 할 주익은 기체 중량을 줄이기 위해 카본섬유복합체(CFRP) 로 만들 예정이었다. 주익은 날개 아래 세 곳에 1,800L급의 낙하탱크(drop tank )와 610kg의 ASM-1 공대함 미사일을 2발씩 장착해야 했기 때문에 하중이나 공기저항 면 에서 강한 소재를 사용해야만 했다. 주익은 일본 항공기술의 실력을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었다. 미국 측은 작업량 배분이 잘 이뤄져 날개 부분을 만들 기회를 얻는 다면, 제너럴 다이내믹사가 그 기술을 완전히 습득할 수 있을 것으로 확신했다. 80) 주익 개조에 대해 미일 양국은 첨예하게 대립했다. 1년간에 걸친 협상 이후에도 양국 정부의 양해 각서에는 날개 부분에 대한 타협이 이뤄지지 않았다. 81) 일본 측은 쟁점인 일체성형에 의한 복합재 주익은 10년 전부터 일본이 연구해 왔으며, 이미 시 제품이 완성돼 방위청 기술연구본부에서 시험 중에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복합재 주익은 차기지원전투기의 개발에 대비해 기업체의 선행투자로 연구개발해 왔기 때문 에 개발우선권은 당연히 일본 기업에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FS-X는 F-1기의 후속 기로 항공자위대의 사업이며, 개발비도 전액 일본 측이 부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또 MOU에 명기한 것처럼 사업관리는 방위청이 수행하며, 주계약업체도 일본의 미츠 비시중공업이라 작업에 대한 결정권이 원칙적으로 일본 측에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대해 미국 측은 미국은 일본 기업이 일체성형의 복합재 주익개발에 앞서 있 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F-16에 알맞은 복합주익은 새로이 개발해야 하기 때문에 출발점은 같다고 주장했다. 주익전체를 한 쪽이 전부 담당할 것이 아니라 미일 분담 방법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즉 개발관리권은 일본에 있더라도 개발의 시스템 은 경험이 많은 미국식을 따라야 한다고 주장했다. 미국 측은 또 F-16의 제공기술 자체도 수백 억 엔의 가치가 있다며 일본도 그에 상응하는 기술을 제공하라고 요구 했다. 80) Gregory W. Noble, FLYING APART?: Japanese-American Negotiations over the FSX Fighter Plane( Berkeley: University of California, 1992), pp.17-18. 81) Mark Lorell, op. cit., pp.195-196. - 34 -
미국 측은 FS-X 개발을 역할분담의 일종이라며, 일본은 미국과 공동의 목적을 가 진 동맹국으로 미국에 부족한 기술을 제공해야만 한다는 것이었다. 이와 함께 개발 사업에서 미국 측의 작업분담률을 35~45%로 합의했으나, 미국은 여기에 엔진은 포함 하지 않는 것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엔진 관계를 뺀 나머지 작업량의 35~45%에는 당 연히 주익개발도 포함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방위청은 1988년 예산 집행 상 2년차인 1989년에는 설계의 일부 및 지상시험용 장 치, 화기관제 레이더 등의 시험제작이 예정돼 있어 미국이 35~45%를 분담하는 선에 서 합의를 서두를 필요가 있었다. 82) 이와 같은 미일 간 실무논쟁은 최초에는 GD와 미츠비시중공업 사이에 일어났으나, 진전이 전혀 없었다. 1988년 11월 29일 양국이 공동개발에 정식으로 조인하면서부터 양국 정부가 나서기 시작했다. 결국 비행훈련용 시제기 4대 중 1대분의 주익과 강도시험기, 피로시험기의 주익 중 각각 한쪽 부분을 GD사가 담당하는 선에서 낙착을 보았다. 그 외에 후부 동체, 조정시스템의 일부, 전자기기 및 시스템 조정의 일부 등도 미국 측이 분담하되, F-16 기술 중 일본이 필요한 부분은 미국이 제공하는 것으로 결정돼 1989년 1월 12 일 양국은 기술원조협정을 체결했다. 기술원조협정에는 미국의 기술이 일본으로 유출되는 항목이 있기 때문에 미국 정 부가 무기수출통제법(제36조 D항)에 의해 이를 의회에 통보하고 30일 이내에 3분의 2 이상의 찬성으로 상하 양원이 합의해야 협정이 유효했다. 미국 정부가 1989년 2월 초 의회에 제출하면 미 정부의 승인을 근거로 해 일본은 1989년 3월 말 이전에 계약 을 체결할 수 있을 것으로 낙관하고 있었다. 1989년 1월 부시 정권 출범 직후, 미국 의회를 중심으로 공동개발이 미국의 기술 을 일본에게 공짜로 주게 될 것이라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미 의회를 중심으로 FS-X 사업에 제동을 거는 분위기가 감지되기 시작한 것이다. 1988년부터 1989년 사 이의 미국에서는 엔고로 대미 직접투자가 활발해지자 미국인들 사이에는 일본에 대 한 공포감이 요원의 불길처럼 급속히 퍼지고 있었다. 83) 1989년 1월 25일 제임스 베이커(James Baker) 미 국무장관의 공청회를 시작으로 부시 정권에 대한 공청회가 계속해서 열렸다. 2월 24일에는 공화당 베이커 의원 등 82) 防 衛 生 産 委 員 會, 昭 和 64 年 度 防 衛 關 係 槪 算 要 求 說 明 會 を 開 催, 防 衛 生 産 委 員 會 特 報, 第 226 号 (1988.10), p.7. 83) 田 中 明 彦, 安 全 保 障 : 戰 後 50 年 の 摸 索 ( 東 京 : 讀 賣 新 聞 社, 1997), p.308. - 35 -
24명의 의원들이 F-16 전투기 기술을 일본에 제공한다면 반대의결안을 제출할 것 이라는 요지의 서한을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2월 23일 하원 에너지 상업위원회 에서 열린 공청회에서는 대다수의 의원이 반대의견을 개진함으로써 의회의 반대공세 는 절정에 달했다. 미국 정부는 의회의 반대공세에 견디다 못해 2월 14일부터 양일 간 대통령 주재로 회의를 열어 FS-X 사업을 재검토하면서 기술이전에 대한 일본의 양보를 구하기로 결 정했다. 3월 30일 미국 정부는 대통령의 견해로 F-16의 비행제어 등 기본 소프트 웨어의 제공 제한, 생산단계에서 미국 측 담당 분야의 확대, 일본으로부터의 기 술제공 보증 등의 요청을 주미 일본대사에게 전달했다. 이로써 미일 간 절충이 다시 시작되는 사태가 발생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방위청 차관이 급히 방미해 베이커 국무장관, 모스 베커 상무장관 등과 회담했으나 이렇다 할 성과를 내지 못했다. 결국 일본 정부는 1989년 3월 말로 기한이 끝나는 1988년도 예산의 이월을 방지하 기 위해 미국 측과 합의가 없는 가운데 1989년 3월 30일 미츠비시중공업과 개발계약 을 체결했다. 그 후 4월 10일에는 미일 간 협의가 재개돼 4월 28일 합의에 도달했 다. 합의내용은 체계개발 완료단계에서 생산단계로 전환할 때 양해각서를 다시 작 성한다(미국 측 생산 담당 40% 확보), 미국 측은 레이더, 전자전 장비, 관성항법 장치, 미션, 컴퓨터의 하드웨어 이외의 기술에 대한 소유권을 갖는다, 라이선스 생산이 FS-X 엔진의 실행 가능한 생산방식임을 확인한다, 미국의 기술정보 공개제 약에 위배되지 않는 범위 내에서 일본은 필요한 소프트웨어를 최대한 입수할 수 있 도록 한다 등이었다. 1989년 5월 1일 부시 대통령은 FS-X 공동개발 사업에 수반되는 대일 기술제공을 의회에 통고했다. 이 날 부로 의회와 대통령 사이의 90일간의 밀고 당기는 싸움이 시작됐다. 이 무렵 미 언론도 FS-X에 대한 반대의견을 거세게 표출했다. 워싱턴포 스트 는 1989년 1월 29일자 칼럼에서 프랭크 칼루치(Frank Carlucci) 국방장관의 FS-X는 주는 것만이 아니다 라는 반론의 기회를 제공하기는 했으나, 역으로 우 리가 왜 70억 달러의 항공기술을 일본에 주어야 하는가 라고 보도해 논쟁의 불씨를 제공했다. 의회와 매스컴의 반대의견은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FS-X 협정에 의해 F-16에 관한 기술을 일본에 제공하게 되면, 일본은 민간기업에서 이를 항공기 개발 - 36 -
에 활용해 결국 미국 항공기산업에 큰 타격을 줄 것이다. 이 의견은 고품질 TV, 반 도체, 수퍼컴퓨터 등의 하이테크 산업에서 뼈아픈 역전극을 경험한 미국으로서는 항 공기 산업까지 당할 수는 없다는 피해의식의 산물이었다. 둘째, FS-X 사업은 미국이 일본에 주는 것에 비해 일본으로부터 받는 것이 너무 적다는 것이다. 즉 GD가 설계, 생산, 개조에 투자한 70억 달러에 해당하는 기술을 일본에 주는 대신, 얻는 것이라고는 4대의 개발용 시제기에 대한 4억4,000만 달러의 하청작업과 그 후 130대의 양산과정에서 얻게 되는 구성품 제조의 분담분, 일본의 레이더 및 복합재 기술, 그리고 생산 시 들어올 7,500만 달러 내지 1억5,000만 달러 어치의 로얄티뿐 이라고 주장했다. 84) 미국의 이러한 반대의견에 대해 일본의 반론도 만만치 않았다. 우선, 항공기산업 에 대한 일본 위협론은 현실적이지 않다는 것이다. 전투기 기술은 바로 민간항공기 에 적용시킬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일본은 세계 항공산업계에서 미국, 영국, 프랑 스, 서독, 캐나다, 이탈리아에 이어 일곱 번째 정도의 수준에 불과하기 때문에 가까 운 장래에 미국의 강한 라이벌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F-16에 의해 일본이 주는 것보다 받는 것이 많다는 지적에 대해서 일본 측은 당초 일본이 FS-X를 독자개발하려 했다가 미국의 개입으로 공동개발로 전환됐다는 사실이 망각됐다는 반론을 폈다. 또한 F-16은 이미 기술 대부분이 공개된 상태로 일본 외의 여러 나라에서 면허생산 되고 있기 때문에 F-16 기술 전부가 일본에 제공된다는 논 리는 맞지 않는다고 했다. 한편, 미국 의회와 매스컴들이 일본의 기술력이 보잘 것 없다 고 하자 일본 국 민들은 격분했다. 일본 측은 그렇다면 왜 미 국방성은 일본이 새로 개발하는 레이 더, 통합전자전장비, 관성항법장치, 미션, 컴퓨터 등의 기술이전을 주장하며, GD는 왜 복합재 주익의 개발 분담을 강력히 주장했느냐 는 것이었다. 게다가 F-16의 완 제품을 구입하라는 것은 억지주장이라는 것이다. 일본은 FS-X를 위해 10년 전부터 연구에 착수해 왔고, 만일 완제품을 도입하려 했다면 연구는 불필요했을 것이기 때 문이다. 85) 미국인들의 일본 경계심 내지는 반감이 FS-X 사업을 반대하는 의견으로 강력하게 표출된 것으로 보인다. 86) 이런 논란의 와중에서 부시 대통령은 1989년 7월 84) 김진기, 일본의 방위산업: 전후의 발전궤적과 정책결정 (서울: 아연출판부, 2012), pp.344-345. 85) Mark Lorell, Troubled Partnership: An Assessment of U.S.-Japan Collaboration on the FS-X Fighter(RAND, 1995), pp.84-96. - 3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