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970 ~ 1980 년대 많은 일본인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행방불명이 됨 1991년 ~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측에 납치문제를 제기. 북한 측은 완강히 부인. 2002년 9 월 제1차 일북정상회담(장소:평양), 일조평양선언에 서명 김정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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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문제 2015 일본국 외무성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970 ~ 1980 년대 많은 일본인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행방불명이 됨 1991년 ~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측에 납치문제를 제기. 북한 측은 완강히 부인. 2002년 9 월 제1차 일북정상회담(장소:평양), 일조평양선언에 서명 김정일 국방위원장 스스로 납치문제를 시인하고 사죄 10 월 납치피해자 5명이 귀국 2003년 8 월 6자회담 제1차 회담 2004년 5 월 제2차 일북정상회담(장소:평양) 11 월 일북실무자협의(장소:평양) 북한이 제공한 요코타 메구미씨의 유골 이라고 한 뼈의 일부에서 메구미씨와는 다른 DNA를 검출. 북한 측에 강력히 항의. 2005년 9 월 6자회담 공동성명 발표 2002 년 10 월에 귀국한 납치 피해자의 가족 중 북한에 남아 있던 5 명이 귀국. 안부가 밝혀지지 않은 납치 피해자에 대해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즉시 백지 상태로 돌려 본격적인 조사를 재개하겠다고 약속. 소가 히토미씨 가족은 자카르타에서 재회, 일본으로 귀국 (7 월) 2006년 2 월 일북포괄병행협의 (장소:베이징) 7 월 북한 미사일 발사 10 월 북한 핵실험 실시 발표 2007년 3 월 제1차 일북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부회(장소:하노이) 9 월 제2차 일북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부회(장소:울란바토르) 2008년 6 월 일북실무자협의(장소:베이징) 납치문제 재조사 실시에 합의 8 월 일북실무자협의(장소:심양) 전면적인 납치문제 재조사에 관련된 구체적인 사항 등에 대해 합의. 9 월 북한으로부터 조사개시 보류 연락 2009년 4 월 북한 미사일 발사 5 월 북한 핵실험 실시(2번째) 2010년 3 월 북한이 한국 해군 초계함 천안 에 어뢰 공격 11 월 북한의 한국 연평도 포격 2012년 4 월 북한 미사일 발사 11 월 일북정부간 협의(장소:울란바토르) 12 월 북한 미사일 발사 2013년 2 월 북한 핵실험 실시(3번째) 2014년 3월 북한 미사일 발사 일북 정부간 협의(장소:베이징) 5월 일북 정부간 협의(장소:스톡홀름) 북한측은 납치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 관한 포괄적이면서도 전면적인 조사실시를 약속 6월 북한 미사일 발사 7월 일북 정부간 협의(장소:베이징) 북한의 특별조사위원 설치 및 조사 시작과 일본의 대북조치 일부 해제 북한 미사일 발사 9월 일북 외교 당국간 회담(장소:심양) 10월 특별조사위원회와 협의(장소:평양) 2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970년대에서 1980년대에 걸쳐 많은 일본인들이 부자연스러운 형태로 행방불명이 되었다. 일본 당국에 의한 수사 및 망명한 북한 공작원의 증언에 의해 이들 사건의 대부분이 북한에 의한 납치 가능성이 짙은 것으로 밝혀졌다. 1991년 이래 일본정부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북한 측에 납치문제를 제기했으나, 북한 측은 완고하게 부인해 왔다. 그러다가 북한은 2002년 9월의 제1차 일북정상회담에서 처음으로 납치를 시인하고 사죄하며 재발 방지를 약속했다. 같은 해 10월에는 5명의 납치 피해자가 24년만에 귀국했다. 그러나 나머지 안부가 불분명한 일본인에 대해서는 2004년 5월의 제2차 일북정상회담에서 북한 측은 진상규명을 위한 즉각적이고도 철저한 조사의 재개를 천명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북한 당국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이 없다. 북한에 남겨진 피해자들은 지금도 모든 자유를 빼앗긴 채, 오랜 세월에 걸쳐 북한에 잡혀있는 상태로 현재도 구출되기를 기다리고 있다. 일본 국내에서는 1997년에 납치피해자의 가족들에 의해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 연락회 (가족회) 가 결성되는 등, 피해자 구출을 촉구하는 운동이 활발히 전개되어 2013년 4월에는 1,000만명을 넘는 서명을 총리대신에게 제출했다. 북한에 의한 납치문제는, 일본의 주권 및 국민의 생명과 안전에 관한 중대한 문제로 국가의 책임으로 해결해야 할 긴급한 중요 과제다. 일본 정부는 지금까지 귀국한 5명을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 가족연락회 ( 가족회 ) 결성 포함한 17명을 북한 당국에 의한 납치피해자로 인정했으나, 이 밖에도 일본 국내에서의 일본인 이외(조선적)의 납치용의사안 및 소위 특정 실종자 (주)를 포함하여,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이 있다. 일본 정부는 북한 측으로부터 납득할 만한 설명이나 증거 제시가 없는 이상, 안부가 불분명한 납치피해자는 모두 생존해 있다는 전제 아래, 계속해서 납치피해자 인정 유무와 관계 없이, 모든 납치피해자의 안전 확보 및 즉각적인 귀국을 위해서 최선을 다한다. 또, 납치에 관한 진상규명, 납치범의 인도를 계속해서 요구한다. 일본 정부는 계속해서 일조평양선언에 따라 모든 납치피해자의 한시라도 빠른 귀국을 실현하고, 불행한 과거 를 청산하여 국교정상화를 실현할 수 있도록 전력을 기울일 방침이다. (주) 특정 실종자란 민간단체인 특정실종자문제조사회 가 독자적으로 북한에 의한 납치 가능성이 있는 조사 대상으로 삼고 있는 실종자를 의미한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3

일본 정부 인정 납치피해자 일본 정부가 납치피해자로 인정하고 있는 17명에 관한 사안의 개요는 다음과 같다 (괄호 안은 당시 나이와 실종 장소). 일본 정부는 이 밖에도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이 있다는 인식 하에 납치피해자의 인정 유무에 관계 없이 모든 납치피해자의 안전확보 및 즉각적인 귀국을 위해서 전력을 다할 것이다. 1 1977년 9월 19일 우시쓰사건 6 1978년 7월 7일 아베크 납치용의사안 구메 유타카씨 치무라 야스시씨 (52 이시카와현) (23 후쿠이현) 이시카와현 우시쓰해안 부근에서 실종. 안부 미확인(북한은 입경을 부인). 치무라 후키에씨 (결혼전의 성:하마모토) (23 후쿠이현) 2 1977년 10월 21일 여성 납치용의사안 둘이서 데이트하러 간다 며 외출한 후 실종. 2002년 10월 귀국. 마쓰모토 교코씨 (29 돗토리현) 자택 부근의 손뜨개교실에 간다고나간 후 실종. 안부 미확인(북한은 입경을 부인). 7 1978년 7월 31일 아베크 납치용의사안 3 1977년 11월 15일 소녀 납치용의사안 요코타 메구미씨 (13 니가타현) 니이가타시에서 하교 도중 실종. 안부 미확인(북한은 자살 로 사망했다고 주장). 하스이케 가오루씨 (20 니가타현) 하스이케 유키코씨 (결혼전의 성:오쿠도)(22 니가타현) 하스이케씨는 잠깐 나갔다 금방 돌아오겠다 며 외출한 채 실종. 마찬가지로 오쿠도씨도 외출한 채 실종. 2002년 10월 귀국. 4 1978년 6월경 전 음식점 종업원 납치용의사안 다나카 미노루씨 (28 효고현) 8 1978년 8월 12일 아베크 납치용의사안 유럽으로 출국한 뒤 실종. 안부 미확인 (북한은 입경을 부인). 이치카와 슈이치씨 (23 가고시마현) 마스모토 루미코씨 5 1978년 6월경 리은혜 납치용의사안 다구치 야에코씨 (22 불명) 안부 미확인(북한은 교통사고로 사망 했다고 주장). (24 가고시마현) 바닷가에 석양을 보러 간다 며 나간 채 실종. 안부 미확인. (북한은 심장마비로 사망 (이치카와씨는 해수욕 중) 했다고 주장). 4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9 1978년 8월 12일 모녀 납치용의사안 11 1980년 6월 중순 신광수 사건 소가 히토미씨 하라 다다아키씨 (19 니가타현) (43 미야자키현) 소가 미요시씨 (46 니가타현) 둘이서 쇼핑하러 간다 며 나간 후 실종. 히토미씨는 2002년 10월 귀국. 미요시씨는 안부 미확인. (북한은 입경을 부인). 12 미야자키현 내에서 발생. 안부 미확인(북한은 간경변 으로 사망했다고 주장). 1983년 7월경 유럽에서의 일본인 여성 납치용의사안 아리모토 게이코씨 (23 유럽) 10 1980년 5월경 유럽에서의 일본인 남성 납치용의사안 유럽에서 실종. 안부 미확인(북한은 가스사고로 사망 했다고 주장). 이시오카 도오루씨 (22 유럽) 마쓰키 가오루씨 (26 유럽) 북한은 사망했다고 주장 북한은 입경 사실을 부인 귀국 유럽 체재중 실종. 안부 미확인 (북한은 이시오카씨는 가스사고로 사망, 마쓰키씨는 교통사고로 사망 했다고 주장). 납치피해자의 실종 장소 일본해 발생 현장 불명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5

납치문제를 둘러싼 일북 간의 교섭 1. 제 1 차 일북정상회담 (2002 년 9 월) 2002년 9월 17일의 제1차 일북정상회담에서 북한의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오랜 세월 부인해 온 일본인 납치를 처음으로 시인하고 사죄하며, 당시 일본 정부가 인정한 납치피해자 13명 가운데 4명은 생존, 8명은 사망, 1명은 입경 사실 확인이 불가능하다고 전했다. 또한, 일본 측이 조사를 의뢰하지 않았던 소가 히토미씨에 대해서 납치를 시인하고 생존을 확인했다 (한편 북한 측은 그 제1차 일북정상회담 후 조사에서 동시에 행방불명이 된 그의 모친인 소가 미요시씨에 대해서는 입북 사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관계자의 처벌과 재발 방지를 다짐하는 동시에 가족 면담 및 귀국 편의 제공을 보장하겠다고 약속했다. 이에 대해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당시)는 김정일 국방위원장에게 강력히 항의하고 지속적인 조사와 생존자의 귀국, 재발 방지를 요구했다. 2. 사실조사팀 파견 (2002 년 9 월 ~ 10 월) 2002년 9월 28일부터 10월 1일에 걸쳐 일본 정부가 파견한 사실조사팀이 생존자와 면담하고, 안부 미확인자에 대한 정보수집을 위해 힘썼다. 그러나, 북한이 제공한 정보가 처음부터 제한적인 데다 내용면에서도 일관성이 결여되어 의심스러운 점이 다수 포함되어 있었다. 마쓰키 가오루씨라고 하며 제출된 유골 은 법의학적인 감정 결과 다른 사람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같은 해 10월 29일~30일에 쿠알라룸푸르에서 열린 제12차 일북국교정상화교섭에서도 일본 정부는 150개 항목에 걸친 의문점을 지적하고 더 많은 정보제공을 요구했으나 북한 측으로부터 충분한 회답은 없었다. 3. 납치피해자 5 명 귀국 (2002 년 10 월) 2002년 10월 15일 납치피해자 5명 (치무라 야스시씨 치무라 후키에씨, 하스이케 가오루씨 하스이케 유키코씨, 소가 히토미씨)이 귀국하여 가족과 상봉했다. 일본 정부는 귀국한 5명의 납치피해자가 북한에 남겨두고 온 가족을 포함해서 자유로운 의사 결정을 할 24년만에 귀국한 일본인 납치피해자들 6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수 있는 환경을 설정할 필요가 있다고 판단하여, 같은 해 10월 24일 5명의 납치피해자가 계속 일본에 남도록 하는 한편, 북한에 남아있는 가족들의 안전 확보 및 조속한 귀국 일정 확정을 북한 측에 강력히 요구할 방침이라고 발표했다. 4. 제 2 차 일북정상회담 (2004 년 5 월) 2004년 5월 22일 고이즈미 총리(당시)가 다시 북한을 방문하여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납치문제를 비롯한 일북간의 문제와 핵, 미사일과 같은 안전보장상의 문제에 대해 논의했다. 납치문제와 관련해서는 이 회담을 통해 다음과 같은 사항들이 두 정상 간에 합의되었다. 북한 측은 치무라 야스시씨의 가족과 하스이케 가오루씨의 가족 총 5명이 이 날 일본에 귀국하는 데 동의한다. 안부 불명의 피해자에 대해서는 북한 측이 즉시 진상규명 조사를 백지 상태에서 재개한다. 본 합의에 따라 치무라 야스시씨 가족과 하스이케 가오루씨 가족 총 5명이 고이즈미 총리와 함께 귀국했다. 또한, 소가 히토미씨의 가족 3명은 그 후 7월 18일에 귀국 방일이 실현되었다. 5. 일북실무자협의 (2004 년 8 월 및 9 월 : 베이징, 같은 해 11 월 평양) 제 2 차 일북정상회담 (가) 2004년 8월 (제1차) 및 9월(제2차)에 걸쳐서 일북실무자협의가 열렸으며 북한 측은 안부불명자에 관한 재조사의 중간결과에 대해서 설명했으나 정보를 뒷받침할 만한 구체적인 증거 및 자료는 제공되지 않았다. (나) 2004년 11월의 제3차 협의는 50여 시간에 걸쳐 이루어졌는데, 북한 측의 조사위원회 와의 질의응답 이외에 총 16명의 증인 들로부터의 직접 청취와 납치 관련시설 등에 대한 현지시찰, 요코타 메구미씨의 유골 이라고 하는 것등의 물적 증거 수집이 이루어졌다. 또한, 이 협의에서는 일본 정부가 납치피해자로 인정하지는 않았으나 북한의 납치 의혹을 배제할 수 없는 실종자 (특정 실종자 등) 문제에 대해서 북한 측에 5명의 이름을 제시하며 관련 정보 제공을 요구했으나, 북한 측에서는 해당 5명에 대해 입경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고 회답했다. (일본 정부는 그 후의 협의에서도, 북한에 의한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에 관련된 정보를 제공할 것을 거듭 요구해 왔다.) (다) 일본 정부는 제3차 협의에서 북한 측이 제시한 정보 및 물적 증거에 대한 정밀조사를 즉시 실시했으나 8명은 사망, 2명은 입경 확인 불가능 이라는 북한 측의 설명을 뒷받침할 만한 것을 찾지 못했다. 또한, 지금까지 제공된 정보 및 물적 증거에는 많은 의문점이 있고, 요코타 메구미씨의 유골 이라고 한 뼈의 일부에서 메구미씨와 다른 DNA가 검출되었다는 감정 결과가 나왔다. 일본 정부는 이 점을 북한 측에 제의하고 강력히 항의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7

6. 일북포괄병행협의 (2006 년 2 월 : 베이징) 2006년 2월의 일북포괄병행협의에서 총 11시간에 걸쳐 납치문제에 관한 협의가 이루어졌으며, 일본 측은 거듭 생존자의 귀국, 진상규명을 위한 재조사, 피의자의 인도를 강력히 요구했다. 이에 대해 북한 측은 생존자는 이미 모두 귀국했다 는 종래와 같은 설명을 되풀이했다. 또한, 진상규명에 있어서는 안부불명자의 재조사를 계속할 것조차도 약속하지 않고, 피의자의 인도도 거부했다. 7. 일북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부회 (2007 년 3 월 : 하노이, 같은 해 9 월 : 울란바토르) 2007년 2월의 6자회담에서 설치하기로 한 일북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부회 제1차 회담이 같은 해 3월에 개최되었다. 일본은 모든 납치피해자 및 그 가족들의 안전 확보와 신속한 귀국, 진상규명, 피의자의 인도를 거듭 요구했으나, 북한측은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되었다 는 종래의 입장을 되풀이하는 등 납치문제의 해결을 위한 성의있는 대응은 보이지 않았다. 9월의 제2차 회담에서도 납치문제에 대한 구체적인 진전은 없었다. 8. 일북실무자협의 (2008 년 6 월 : 베이징, 같은 해 8 월 : 심양) (가) 2008년 6월의 일북실무자협의에서는 납치문제와 관련하여 일본 측은 모든 납치피해자의 귀국, 진상규명, 피의자의 인도를 거듭 요구하고, 북한 측이 납치문제를 포함한 제반 현안 해결을 위해 구체적인 행동을 취할 경우, 일본도 현재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 중 일부를 해제할 의사가 있다는 것을 거듭 설명하며 북한 측의 구체적인 행동을 촉구했다. 그 결과, 북한 측은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된 일 이라는 종래의 입장과는 달리,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앞으로 구체적 행동을 취하기 위한 재조사를 실시하겠다고 약속했다. (나) 같은 해 8월에는, 6월 협의에서 양측이 표명한 조치, 특히 북한의 납치문제 재조사에 대한 구체적인 방법에 대해서 심도있게 논의했다. 그 결과, 북한 측이 권한이 부여된 조사위원회를 설치하고, 모든 납치피해자를 대상으로 하여 생존자 발견과 귀국을 위한 전면적인 조사를 개시하기로 하고, 일본 측도 인적 왕래의 규제를 해제하고 항공기 전세편에 대한 규제를 해제하기로 합의했다. (다) 그러나 2008년 9월 4일 북한측으로부터 지난 일북협의에서 합의된 사항을 이행한다는 입장에는 변함이 없으나, 갑작스러운 일본 정권 교체(주:당시 후쿠다 총리의 사임)로 신정권의 합의사항 이행을 확인할 때까지 조사 개시를 보류한다는 취지의 연락이 있었다. 8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9. 일북정부간협의 (2012 년 11 월 : 울란바토르) 2012년 11월, 4년만에 북한과의 협의인 일북 정부간 협의가 개최되었다. 이 협의에서는 납치문제에 대한 심도있는 의견교환이 이루어져, 지금까지의 경위와 서로의 생각에 대해 논의를 바탕으로, 구체적으로 검토하기 위해 계속해서 협의를 하기로 했다. 또한, 일본 측은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서도 북한측에 제기하고 논의를 했다. 제2차 협의는 12월 5일과 6일에 개최하기로 결정되어 있었으나, 동월 1일 북한의 미사일 발사 예고로 인해 연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10. 일북 정부간 협의 (2014 년 3 월 : 베이징 ) 2014년 3월 3일과 같은 달 19일 및 20일에 심양에서 개최된 일북적십자회담의 기회를 이용하여 1년 4개월만에 일북 정부간(과장급)에 비공식의 의견교환을 실시하였으며 정부간 협의재개를 조정하기로 합의했다. 그러한 내용을 반영하여 3월 30일 및 31일에 베이징에서 개최된 일북 정부간 협의에서는 쌍방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폭넓은 여러 현안에 대해 진지하면서도 솔직한 논의를 하였고 향후에도 협의를 계속하기로 합의했다. 납치문제에 대해서는 지금까지의 협의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하면서 일본측의 기본적 생각에 관해 제기했다. 11. 일북 정부간 협의 (2014 년 5 월 : 스톡홀름 ) 2014년 5월에 스톡홀름에서 개최된 일북 정부간 협의에서 북한측은 납치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 관한 포괄적이면서도 전면적인 조사실시를 약속했다. 일본측도 북한측의 이러한 움직임을 바탕으로 하여 북한측이 조사를 위한 특별조사위원회를 구성하고 조사를 시작하는 시점에서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조치의 일부를 해제하기로 했다. 12. 일북 정부간 협의 (2014 년 7 월 : 베이징 ) 2014년 7월 1일 베이징에서 개최된 일북 정부간 협의에서는 북한측으로부터 특별조사위원회의 조직, 구성, 책임자 등에 관한 설명이 있었으며, 일본측으로부터는 이 위원회가 모든 기관을 대상으로 조사할 수 있는 권한이 적절하게 부여되어 있는가라는 관점에서 집중적으로 질문을 했다. 7월 4일, 북한측은 국영 언론을 통해 특별조사위원회의 권한, 구성, 조사방법 등에 관하여 일본측의 이해와 같은 취지의 내용을 국내외에 공표하였고, 납치피해자를 포함한 모든 일본인에 관해 조사를 시작할 것을 발표했다. 한편 일본측은 인적왕래의 규제조치와 지불보고 및 지불수단 등 휴대수출신고의 하한금액 인하조치를 해제함과 동시에 인도주의적 내용을 목적으로 하는 북한 선박의 입항을 허가하기로 했다. 일북정부간협의(2014년 7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9

13. 일북 외교 당국간 회담 (2014 년 9 월 : 심양 ) 2014년 9월 29일, 북한으로부터 조사 현황에 관한 설명을 보고받기 위해 일북 외교 당국간 회담을 개최했다. 본 회담에서 북한측은 현 단계에서는 일본인 한 사람 한 사람에 관한 구체적인 조사결과를 통보할 수는 없지만, 일본측이 평양을 방문하여 특별조사위원회의 구성원과 면담하면 조사의 현황에 관해 보다 명확하게 들을 수 있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14. 특별조사위원회와 협의 (2014 년 10 월 : 평양 ) 2014년 10월에 평양에서 열린 특별조사위원회와의 협의에서 일본측은 납치문제가 최우선과제라는 것, 모든 납치피해자의 안전확보 및 즉각적 귀국, 납치에 관한 진상규명과 납치실행범의 인도가 필요하다는 것, 정부 인정의 유무에 상관없이 모든 납치피해자를 발견하고, 조속히 안전하게 귀국시키는 것을 요구하고 있음을 거듭 전달했다. 또, 신속하게 조사하여 그 결과를 하루빨리 통보하도록 북한측에 강력히 요구했다. 북한측으로부터는 위원회 및 지부의 구성과 같은 체제에 대해, 그리고 증인이나 물증을 중시한 객관적 과학적인 조사를 실시하여 과거의 조사결과에 구애받는 일 없이 새로운 각도에서 철저히 조사해 간다는 방침에 대한 설명이 있었다. 또, 조사위원회는 북한의 최고지도기관인 국방위원회로부터 특별한 권한을 부여받고 있으며, 특수기관에 대해서도 철저하게 조사한다는 설명이 있었다. 납치문제에 대해서는 개별적으로 입국의 유무, 경위, 생활환경 등을 조사하고 있으며, 피해자가 체재했던 초대소의 흔적 등 관련 장소를 재차 조사함과 동시에 새로운 물증 증인 등을 찾는 작업을 병행하여 진행하고 있다는 설명이 있었다. 10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국제사회의 동향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서는, 일본이 단독으로 북한 측에 강력하게 제기하는 것은 물론, 다른 국가들로부터 납치문제 해결의 중요성에 대한 지지와 협력을 얻는 것이 불가결하다. 일본 정부는 모든 외교상의 기회를 이용해 납치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는 한국에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지만, 귀국한 일본인 납치피해자의 증언 등으로 태국, 루마니아, 레바논에도 북한에 의해 납치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존재하는 것으로 밝혀졌다. 그 밖에 북한에서 귀환한 한국인 납치피해자 등의 증언에 의하면 중국인 납치피해자 등도 있다고 한다. 이와 같이, 납치문제는 기본적 인권 침해라는 국제사회의 보편적 문제이다. 1. 유엔 (가) 유엔에서 일본은 유럽연합(EU)과 공동으로 북한 인권상황결의를 인권이사회와 유엔 총회 양쪽에 제출해 왔으며, 인권이사회에서는 7년 연속 7회, 유엔총회에서는 10년 연속 10회 채택되었다 (2014년 12월 현재). (나) 2013년 3월의 인권이사회에서 북한의 인권상황에 관한 유엔조사위원회(COI)를 새로 설치하는 내용을 포함한 결의가 컨센서스(무투표)로 채택되었다. 유엔조사위원회(COI)는 일본, 한국, 미국, 영국, 태국을 방문하는 등 납치문제를 포함한 북한의 인권상황 조사를 실시하여 2014년 2월에 최종보고서(COI보고서)를 공표했다. 유엔총회에서 연설을 하는 아베 총리 (2014년 9월) 유엔 북한인권조사위원회의 방일 (2013년 8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1

(다) 2014년 3월의 인권이사회에서 COI보고서 내용을 반영하며 지금까지 이상으로 강한 내용의 결의가 찬성다수로 채택되었다. 이 결의는 북한의 광범위하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최대한의 표현으로 비난하였고, 북한에 대해 납치문제를 포함한 모든 인권침해를 종식시키는 수단을 조속히 취하도록 촉구하고 있다. 또, COI보고서의 권고를 토대로 안보리가 인권침해의 책임자가 설명책임을 다하도록 적절한 국제형사사법 메커니즘에 위탁할 것을 검토하는 것과 COI보고서의 후속조치를 잘 실시하기 위한 체제를 구축하는 것 등이 요구되고 있다. (라) 2014년 12월, 유엔총회에서 과거 최다수의 국가가 공동제안국이 되었고 COI 보고서 및 같은 해 3월의 인권이사회 결의를 토대로 하며 지금까지 유엔총회에서 채택된 북한인권상황결의보다도 강한 내용의 결의가 찬성다수로 채택되었다. 구체적으로는 북한의 조직적이면서도 광범위하고 심각한 인권침해를 비난함과 동시에 인도( 人 道 )에 대한 죄 를 기시다 외무대신을 예방한 마르주끼 유엔 북한인권특별보고관(2014년 4월) 언급하였고, 나아가 안보리에게 북한의 인권 상황을 국제형사재판소(ICC)에 위탁할 것에 대한 검토를 포함하여 적절한 행동을 취하도록 촉구하였다. 일련의 결의채택을 바탕으로 2014년 12월에는 유엔 안보리에서도 인권상황을 포함한 북한의 상황이 포괄적으로 논의되었다. 북 한 에 의 한 핵 미 사 일 개 발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북한의 계속되는 핵 미사일 개발은 일본을 포함한 국제사회 전체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이다. 국제사회는 여러 차례에 걸친 유엔 안보리 결의에 따라 북한의 핵계획, 기타 대량살상무기계획 및 미사일개발계획 포기를 의무화하고, 각종 제재를 부과하고 있다. 그 중 유엔 안보리 결의 제1718호 (2006년 10월 채택), 제1874호 (2009년 6월 채택) 및 제2094호 (2013년 3월 채택)에서는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고 제재조치를 결정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문( 前 文 )에서는 북한은 (납치문제를 포함) 국제사회의 인도상의 우려에 대해 대처해야 한다는 것을 강조했다. 12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2. 6 자회담 일본은 6자회담에서도 납치문제를 제기해 왔으며, 2005년 9월에 채택된 공동성명에서는 납치문제를 포함한 각종 현안사항을 해결하는 것을 기초로 하여 국교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추진하는 것이 6자회담 목표의 하나가 되었다. 이에 대해 2007년 2월 성과문서에서는, 일북국교정상화를 위한 작업부회 설치가 결정되고, 10월 성과문서에서는 일북 양측이 일조평양선언에 따라 불행한 과거 를 청산하고 6자회담(2007년 9월 27일) 현안사항을 해결하여 빠른 시기에 국교정상화가 실현되도록 성실하게 노력할 것, 또한, 이를 위해 일북 양측이 정력적인 협의를 통해 구체적인 행동을 이행할 것을 확인했다. 여기서 언급한 현안사항 에 납치문제가 포함되어 있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3. 다자간 협의 일본 정부는 G7정상회담, ASEAN 관련 정상회담 등 다자간 협의에 있어서도 납치문제를 제기해 왔으며, 납치문제 해결의 중요성 및 이를 위한 일본 정부의 노력은 여러 국가로부터 명확한 이해와 지지를 얻고 있다. 예를 들어 2014년 6월의 브뤼셀 G7 정상회의에서는 납치문제 해결의 중요성에 대해 다시금 각국의 이해와 지지를 얻었고, 북한측에게 납치문제를 포함한 인권침해에 대처하도록 조속한 조치를 취할 것 등을 요구하는 정상선언이 발표되었다. G7 브뤼셀 정상회담(2014년 6월) 4. 양자 회담 일본은 미국, 한국, 중국, 러시아를 비롯한 각국과의 정상회담, 외무장관회담 등에서도 납치문제를 거론하고 각국은 일본의 입장에 대해 이해와 지지를 표명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13년 2월 일미정상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납치문제를 자신의 재임기간에 완전히 해결하겠다는 결의를 표명하고, 지금까지 미국이 보여준 이해와 지지에 일미정상회담(2014년 4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3

대해 사의를 표했다. 또, 2014년 4월의 일미정상회담 후에는 오바마 대통령이 납치피해자의 가족을 만나 이야기를 나누었다. 일미 정상은 그 외의 회담이나 전화회담에서도 납치문제에 대해 논의했고 오바마 대통령은 납치문제에 관한 일본의 입장에 대한 지지를 거듭 표명해 왔다. 한국과는 2013년 3월 일한정상 전화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박근혜 대통령에게 납치문제에 대한 협력을 요청했고 박 대통령은 이에 대해 일본과 협력해 나가겠다고 했다. 2014년 8월의 일한외교장관회담에서도 기시다 외무대신으로부터 납치문제의 해결을 위한 협력을 요청했고, 이에 대해 윤 병세 장관은 이해와 협력을 표명했다. 또한, 2014년 3월 일미한 정삼회담에서 아베 총리는 납치문제에 관한 미국 및 한국의 일관된 이해와 협력에 사의를 표하면서 양국과 협조해서 대응해 갈 것을 표명하였고 미국과 한국 양국의 이해를 얻었다. 그리고, 같은 해 8월의 일미한외교장관회담에서도 기시다 외무대신이 납치문제에 관한 미국과 한국 양국의 일관된 이해와 협력에 사의를 표명했다. 중국과는 지금까지의 정상회담에서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북한에 대한 압력을 포함하여, 중국 측의 가일층의 이해와 협력을 요청했고, 중국은 일북관계의 개선을 지지한다고 언급했다. 또한, 2012년 12월 일러정상전화회담에서 아베 총리가 납치문제에 대한 이해를 요청한 것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일본의 우려를 이해한다고 했고, 그 후의 정상회담에서도 푸틴 대통령은 이해와 조속한 해결에 대한 기대를 표명했다. 오바마 대통령과 납치피해자 가족의 면담(2014년 4월) 일미한 정상회담(2014년 3월) 일미한 외교장관회담(2014년 8월) 14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일본 국내에서의 대처 1. 납치문제대책본부 설치 등 2013년 1월, 일본 정부는 납치문제 대책을 협의하고, 문제 해결을 위한 전략적인 노력과 종합적인 대책을 추진하기 위해 모든 장관들이 참가하는 납치문제대책본부 를 새로 설치했다. 본 대책본부는 총리가 본부장을 맡고 납치문제담당대신과 내각관방장관 그리고 외무대신이 부본부장을 맡고 있으며, 각 장관들은 납치문제 해결을 위해 본부장, 부본부장을 중심으로 긴밀히 공조하며 각자의 책임 납치문제대책본부 제1차 회담 (2013년 1월) 분야에서 전력을 다하고 있다. 또한, 납치문제 해결을 위한 초당적인 조치를 강화하기 위해 정부 및 여야당 납치문제대책기관 연락협의회 를 개최하고 있다. 납 치 문 제 해 결 을 위 한 방 침 북한에 의한 납치문제는 일본의 주권과 국민의 생명 및 안전과 관련된 중대한 문제로, 국가의 책임 하에 해결해야 할 긴급하고 중요한 과제다. 일본 정부는 납치문제 해결 없이 북한과의 국교정상화는 있을 수 없다는 방침을 견지하고, 납치피해자로서의 인정 유무와 관계 없이 모든 납치피해자의 안전확보 및 즉시 귀국을 위해서 전력을 다한다. 또한, 납치에 관한 진상규명과 납치범 인도를 계속 추구한다. ( 납치문제 해결을 위한 방침과 구체적인 시책 2013년 1월 25일 납치문제대책본부 결정) 2. 일본 정부에 의한 수사 조사 일본 정부는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 사안 및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에 대해 귀국한 납치피해자들로부터 여러 차례에 걸쳐 협력을 얻으면서 철저한 수사 조사를 하고 있다. 이러한 수사 조사 결과, 지금까지 12건 17명을 일본인 납치피해자로 인정했다. 또한, 경찰은 조선적을 가진 남매가 일본 국내에서 납치된 사안 1건 (피해자 2명)에 대해서도 북한에 의한 납치용의사안으로 판단했으며, 북한 공작원 등 납치에 관여한 11명에 대해 체포장을 발부하여 국제 수배를 했다. 또한, 북한에 의한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의 수사 조사에 대해서는 2013년 3월 경찰청 외사과에 설치된 특별지도반 이 도도부현 경찰을 대상으로 지도 조정하고, 피해자 가족 등으로부터 DNA 감정자료 채취, 경찰청과 도도부현 경찰 인터넷 사이트에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과 관련된 사람들의 명단을 게재하는 등 대처를 강화하여 진상 해명을 위해 힘쓰고 있다. 또한, 해난 사안으로 처리된 것에 대해서도 경찰과 해상보안청이 협력을 강화하여, 수사 조사를 하고 있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5

사안 (사건)명 유럽에서의 일본인 여성 납치용의사안⓬ 우오모토 기미히로 (이전의 성:아베) 우시쓰사건❶ 아베크 납치용의사안 (후쿠이)❻ /신광수사건⓫ 신광수사건⓫ 모녀 납치용의사안 아베크 납치용의사안 (니가타)❼ 김세호 신광수 김길욱 통칭 김명숙 통칭 최순철 피의자 사안 (사건)명 아베크 납치용의사안(니가타)❼ 오누이 납치용의사안 유럽에서의 일본인 남성 납치용의사안❿ 통칭 한금녕 통칭 김남진 홍수혜 (일본명 기노시타 요코) 모리 준코 와카바야시 사키코 (결혼전의 성:구로다) 피의자 3. 납치문제 및 기타 북한 당국에 의한 인권침해 대처에 관한 법률 시행 (2006 년 6 월) 이 법은 납치문제를 비롯한 북한 당국에 의한 인권침해 문제 (여기서는 납치문제 등 으로 함)에 관한 국민의 인식을 심화시키면서 국제사회와 협력하여 납치문제 등의 실태를 해명하고, 이를 억제하는 것을 목적으로 2006년 6월 23일에 공포 시행되었다. 이 법은 납치문제 등의 해결을 위한 국가의 책무과, 계몽을 위한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책무, 북한인권침해문제계몽주간 (12월 10일~16일) 창설, 과 국가 및 지방자치단체의 계몽사업 실시 등을 규정하한다. 특히 북한인권침해문제계몽주간에는 일본 정부와 NGO가 다양한 회의, 심포지엄, 콘서트 등을 개최하여 일본 국내외에 납치문제 등의 해결을 호소한다. 납치문제 계몽포스터를 전국에 배부 16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4. 대북 조치 2006년 7월 5일 북한은 탄도 미사일 7발을 발사했다. 그 후 북한은 국제사회가 여러차례 경고했음에도 불구하고 2009년 4월, 2012년 4월, 같은 해 12월에 미사일을 발사하였고, 2006년 10월, 2009년 5월, 2013년 2월에 핵실험을 실시했다. 또한, 2010년 3월에 북한은 한국 해군 초계함에 어뢰공격을 했다. 이러한 사실에 대해 일본 정부는 엄중한 항의 및 단호한 비난의 뜻을 표명함과 동시에 유엔안보리결의에 의거한 대북제재조치와 함께 일본에서 북한으로의 도항 자제 요청, 북한 국적자에 대한 입국의 원칙금지, 북한 선적의 선박 입항금지, 북한과의 수출입금지 등의 대북조치를 취해 왔다. 2014년 5월의 일북합의에 근거하여 같은 해 7월에 일본측은 인적왕래의 규제조치와 지불보고 및 지불수단 등 휴대수출신고의 하한금액 인하조치를 해제함과 동시에 인도주의적 내용을 목적으로 하는 북한 선박의 입항을 허가하기로 했으나 유엔안보리결의에 근거한 대북제재조치와 북한과의 수출입 금지 등 일본의 독자적인 대북조치에 관해서는 그 후에도 계속 실시하고 있는 바이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7

납치된 13 세 소녀 요코타 메구미씨 지금으부터 35년 전인 1977년 11월 15일 일본해에 면한 니가타의 어떤 동네에서 한 소녀가 홀연히 사라졌습니다. 그 날 아침 요코타 메구미씨는 평소와 같이 아버지, 어머니, 쌍둥이 남동생들과 시끌벅적하게 아침밥을 먹은 후, 중학교를 향해 집을 나섰습니다. 이것이 가족들이 메구미 씨를 본 마지막 모습이 되었습니다. 메구미씨가 돌아오지 않는다!! 그 날 저녁, 특별활동인 배드민턴 연습을 마치고 돌아와야 할 메구미씨는 평소 집에 올 시간이 되어도 돌아오지 않았습니다. 가족들은 걱정되어 혼신을 다해 메구미씨를 찾았습니다. 경찰도 유괴, 사고, 가출, 자살 등 모든 상황을 상정하여 수사를 진행했습니다. 그러나, 목격자는 물론 유품조차도 찾지 못했습니다. 그 날 밤, 메구미씨는 많은 시간이 지난 후에 나온 증언에 의하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혼신을 다해 메구미씨를 찾고 있었을 때, 메구미씨는 북한 공작원에게 납치되어 40시간 동안이나 북한으로 가는 배 안의 컴컴하고 추운 선창에 갇혀 있었다고 합니다. 메구미 씨는 엄마, 엄마 하고 울부짖으며 출입구와 벽 등을 긁었고, 북한에 도착했을 때는 손톱이 빠질 정도로 피투성이가 되었다고 합니다. 밝고 건강한 메구미씨 메구미씨는 밝고 명랑한 소녀였습니다. 가족들에게는 마치 태양과 같은 존재였습니다. 노래 부르는 것도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주 좋아했고, 서예와 클래식발레도 배우고 있었습니다. 메구미씨가 사라지기 전날인 11월 14일은 아버지의 생신이었습니다. 메구미씨는 아버지에게 머리빗을 선물해 드렸습니다. 이제부터는 멋 좀 부리세요 라는 말과 함께. 가족들의 슬픈 나날 메구미씨가 없어진 날부터 가족들의 생활은 일변했습니다. 시끌벅적했던 식탁은 불이 꺼진 듯이 쓸쓸했습니다. 아버지는 매일 아침 조금 일찍 집을 나서서 해안을 돌아보았습니다. 어머니도 집안일을 마치면 거리 여기 저기를 돌아보았고, 메구미씨의 이름을 부르면서 해안을 몇 킬로씩 걸었습니다. 밤이 되면 아버지는 욕실에서 울었습니다. 어머니도 가족들이 모르게 혼자 울었습니다. 왜 이렇게 힘든 처지가 되어야 했는지, 죽고 싶다는 생각도 했습니다. 그런 슬픔과 괴로움 속에서 아무런 단서도 없이 시간이 흘렀습니다. 그리고 20년 후, 1997년 1월 21일 메구미씨가 살아 있다! 메구미씨가 평양에 살아 있다는 정보가 들어왔습니다. 아버지 시게루씨와 어머니 사키에씨는 요코타 메구미 라는 이름을 공개했습니다. 신문이나 잡지가 일제히 보도하고, 국회에서도 거론되었습니다. 일북정상회담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당시)는 북한을 방문하고, 김정일 국방위원장과 첫 정상회담을 가졌습니다. 시게루씨도 사키에씨도 이제 드디어 메구미 씨를 만날 수 있다는 큰 기대를 가졌습니다. 그 날, 김정일 국방위원장은 납치를 시인하고, 사죄했습니다. 그러나, 북한이 제공한 정보는 요코타 메구미 사망 (5명 생존, 8명 사망, 2명 미입경)이라는 충격적인 것이었습니다. 납득이 가지 않는 북한의 설명 그러나, 이것은 북한이 일방적으로 주장해 온 사실에 지나지 않습니다. 북한 측은 납득 가능한 설명이나 증거를 아직도 제시하지 않고 있습니다. 2004년 11월, 북한은 메구미씨의 유골 을 제출했으나, 감정 결과 그 일부는 메구미씨와는 다른 DNA가 검출되었습니다. 결코 포기하지 않는다! 너를 되찾을 때까지! 메구미씨를 비롯한 납치 피해자들은 소중한 인생을 빼앗겼습니다. 그 가족들도 깊은 슬픔 속에서 지금도 소중한 사람이 돌아오기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납치는 중대한 인권침해이며 국가주권의 침해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납치 피해자를 구해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사키에씨는 이렇게 말합니다. 돌아오면 큰 자연 속으로 데리고 가고 싶다. 북한에서는 도청기나 몰래카메라 등에 신경쓰면서 조심하며 생활을 했을 것이므로 홋카이도의 목장 같은 곳에서 대자로 누워 자유다! 하고 외치게 해 줄 것입니다. 그로부터 30년이 더 지난 지금도 메구미씨는 북한에 납치된 채입니다. 18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Q&A Q1 북한은 납치문제는 이미 해결된 문제 라고 주장해 왔는데 정말입니까? A1 안부가 확인되지 않은 일본 정부가 인정한 납치피해자 12명에 대해 북한은 8명은 사망, 4명은 입경하지 않았다고 설명해 왔습니다. 그러나 북한 측이 사망했다고 하는 8명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 북한이 유골 이라며 제출한 것의 일부에서 본인과는 다른 DNA가 검출되었다는 감정 결과가 나오는 등, 사망을 증명할 수 있는 객관적인 증거는 전혀 제시되지 않았습니다. 또한, 북한 측이 입경을 부인 또는 입경사실을 확인할 수 없다고 한 4명에 대해서는 수사 결과, 모두 북한이 관여되었다는 사실이 명확히 밝혀졌습니다. Q2 Q3 Q4 Q5 납치피해자는 몇 명 있습니까? A2 북한은 왜 일본사람을 납치했습니까? A3 일본 정부가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로 인정한 것은 17명입니다. 이 중 5명은 2002년에 귀국했지만, 12명은 북한에 남겨진 채입니다. 또한, 조선적을 가진 유아 2명이 일본 국내에서 납치된 사실도 밝혀졌습니다. 이 밖에 소위 특정 실종자를 포함하여, 납치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사안이 있다는 인식 하에, 북한 측에 대해 일본 정부의 납치인정 유무와 관계 없이, 모든 납치피해자의 즉각 귀국을 촉구하고 있습니다. 북한이 납치라고 하는 미증유의 국가적인 범죄행위를 일으킨 배경에는 공작원에 의한 신분위장, 공작원의 일본인화를 위한 교육담당으로의 이용, 북한의 보호 하에 있던 요도호 조직원 (주)들의 테러에 의한 인재 획득 등의 이유가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1970년 3월 31일 일본항공 351편 (통칭 요도호 )의 납치범과 그 가족 등의 총칭. 납치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닙니까? A4 북한에 의한 납치피해자는 한국에도 다수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더불어 귀국한 일본인 납치피해자 등의 증언으로부터 태국, 루마니아, 레바논에도 북한에 납치되었을 가능성이 있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습니다. 그 밖에 북한에서 귀환한 한국인 납치피해자 등의 증언에는 중국인 납치 피해자 등도 있다고 합니다. 납치문제는 일본만의 문제가 아닌 국제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입니다. 어떻게 하면 납치문제가 해결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까? A5 납치문제를 해결하려면 아래의 3가지 사항을 실현할 필요가 있습니다. 먼저, 모든 납치피해자가 귀국한다. 그리고, 북한이 납치의 진상을 밝힌다. 끝으로, 북한이 납치범을 일본에 인도한다. 북한에 의한 일본인 납치문제 19

파란색은 납치 피해자의 조국인 일본과 북한 사이에 가로놓인 일본해의 푸른 빛 을 상징합니다. 또한, 피해자와 가족을 유일하게 이어주고 있는 푸른 하늘 을 상징합니다. http://www.rachi.go.jp/kr/ 외무성 우편번호100-8919 도쿄도 지요다구 가스미가세키 2-2-1 TEL:+81-3-3580-3311 http://www.mofa.go.jp/mofaj/ 사진제공 내각홍보실 주식회사 시사통신사 AFP=시사 북한에 납치된 일본인을 구출하기 위한 전국협의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