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 통일 외교 안보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 통일 외교 안보 국정홍보처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 편찬위원회 편찬위원장 김병준 정책기획위원장 편찬위원 1권 총론 / 대통령 발언록 성경륭 정책실장(감수) 정동수 정책조정비서관(책임집필) 2권 민주주의 차성수 시민사회수석, 이호철 민정수석, 천호선 홍보수석(감수) 윤건영 정무기획비서관(책임집필) 3권 경 김대유 경정책수석(감수) 문일재 경정책비서관(책임집필) 4권 사회 김용익 사회정책수석(감수) 김동완 사회정책비서관(책임집필) 5권 통일 외교 안보 백종천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감수) 배기찬 동아비서관(책임집필) 6권 균형발전 이민원 국가균형발전위원장(감수) 남동균 국가균형발전위원회비서관(책임집필) 7권 정부혁신 차의환 혁신관리수석(감수) 권해상 혁신관리비서관(책임집필) 8권 일지 / 자료 김정호 기록관리비서관(책임집필) 편집 총괄 김종민 국정홍보비서관
발간사 참여정부는 핵과 신용불량자 위기 속에서 출발해 지난 5년 동안 이를 극복하고 민주주 의 개혁, 국민소득 2만 달러 달성, 동반성장, 동아 평화 정착, 균형발전, 정부혁신 등 각 분 야의 성과를 통해 대한민국을 선진국으로 발전시켰다. 권위주의, 특권과 유착을 청산하고 공정하고 투명한 민주주의를 뿌리내렸다. 대통령의 권 력은 그 어느 때보다 겸손해졌고 초과권력을 위해 이용됐던 권력기관들은 모두 자리로 돌 아갔다. 권력에 의해 굴절됐던 과거사의 상처도 치유하고 있다. 정경유착과 관치경를 청산하고 시장경를 정착시켰다. 국민소득 2만 달러와 수출 3천 억 달러 달성은 이렇게 공정하고 투명한 기업경영과 시장경쟁이 만들어낸 경성과다. 미래 의 성장을 위해 한 미 FTA 협상도 타결시켰다. 참여정부는 지난 시기 성장 일주의, 승자독식이 만들어낸 양극화 문를 국민적 의로 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한 최초의 정부다. 성장과 복지가 함께 가는 사회를 만들 기 위해 복지재정과 사회투자를 꾸준히 늘렸다. 핵 문로 전쟁 위기까지 치달았지만 평화적 해결이라는 원칙을 버리지 않고 한과 주 변국들을 끈질기게 설득해 한반도, 나아가 동아시아에 평화와 번영의 대세를 만들어냈다. 남정상회담으로 이 정전체 종식과 평화협정 체결까지 내다보게 되었다. 한 미간여 러 난들을 풀어내고 수평적 동맹 관계로 성숙시켰다. 행정복합도시, 혁신 기업도시 등 균형발전 사업을 통해 수도권 집중을 해결하고 국토의 고른 성장을 도모한 것과 정부 혁신을 통해 행정 및 대국민 서비스의 질을 높인 것도 참여정 부의 중요한 성과다. 이런 성과에도 불구하고 참여정부 실패론 잃어버린 10년 등의 이해할 수 없는 주장이 남발되는 것은 대한민국 발전을 위해서도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참여정부 국정운영 백 서 는 참여정부의 성과와 한계를 가감 없이 기록함으로써 향후 국정운영과 역사적 평가에 긴요한 사료가 될 것이다. 이 책이 참여정부에 대한 공정하고 성숙한 담론을 이끌어내는 데 쓰이길 기대해본다. 2008년 2월 참여정부 국정운영백서 편찬위원장 김병준 발 간 사 5
머리글 참여정부는 출범과 더불어 3대 국정목표의 하나로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를 설정하 였다.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는 참여정부의 핵심적인 국가안보목표로서 21세기 우리 나라와 동아시아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시하고 있으며, 참여정부의 국정철학과 국가안 보전략을 포괄하고 있다. 참여정부는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를 구현하기 위해 균형적 실용외교, 협력적 자주국방, 신뢰와 포용의 대정책이라는 3대 분야로 구성된 평화번영정 책을 시하고 이를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평화번영정책을 통해 참여정부는 이들 분야에서 많은 성과를 이루어 21세기 우리의 생존 과 번영을 위한 유리한 환경을 조성할 수 있었다. 균형적 실용외교 분야에서는 6자회담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함으로써 핵문 해결의 가시적 진전과 함께 앞으로 한반도 평화체 및 동아 다자안보협의체로 나아갈 수 있는 기틀을 마련하였다. 동아 협력과 통합의 질 서를 형성하기 위해 한 미, 한 일, 한 중, 한 러 관계를 발전시키고, 미래지향적 역내 관계를 구축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또한 APEC, ASEAN+3/EAS, ASEM 정상회의 등 다자 회의에 적극 참여하여 지역내 및 지역간 협력 강화를 위한 노력에 기여하였다. 나아가 글로 벌 협력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유엔사무총장을 배출하는 등 우리의 국적 위상을 강 화하였으며 전방위적 자유무역협정(FTA) 추진과 에너지 자원 외교를 통해 지속적인 성장 동력을 확보해 나갔다. 협력적 자주국방 분야에서는 국방개혁 2020 법화로 가능한 한 우리 힘으로 우리의 안보를 책임질 수 있는 선진 국방체계를 구축하였다. 이와 동시에 전시작전통권 전환 일 정 확정 등 성공적인 한미동맹 재조정을 통해 21세기형 한미동맹관계를 구축하였다. 나아 가 이라크, 아프간 및 레바논 파병 등 국평화유지와 재건 활동도 활발히 전개하여 우리의 머 리 글 6 국적 위상을 높이고 한국의 평화이미지를 국사회에 각인시켰다.
신뢰와 포용의 대정책 분야에서는 우선 역사적인 2007 남정상회담 개최를 들 수 있다. 이 회담에서 합의한 2007 남 정상선언 은 한반도 평화정착, 남한 공동번영, 화 해와 통일을 위한 실천적 틀을 시함으로써 한반도 웅비의 시대를 열어나갈 수 있는 토대 를 구축하였다. 또한 참여정부는 다방면의 남 대화를 정례화하고 이를 뒷받침하기 위한 법적, 도적 기반을 강화하여 남 화해협력을 도화하였다. 특히, 참여정부에서 남 교 류협력은 그 어느 때보다도 확대 심화되었고, 서로에 대한 이해와 신뢰의 폭이 넓어졌다. 이러한 내용을 담고 있는 통일 외교 안보 분야 국정운영백서는 이전 정부에서 발간한 것과는 형식과 내용에 있어서 많은 차이를 보이고 있다. 무엇보다도 형식에 있어서 과거의 단편적 기술형식에서 탈피, 통일 외교 안보 분야를 체계적 종합적으로 구성하였다. 내 용에 있어서도 정책 추진 배경 및 경과, 그리고 이에 대한 반응 등을 포함하였다. 아무쪼록 이번 통일 외교 안보 분야 국정운영백서가 참여정부 안보정책의 성과에 대한 국민 여러 분들의 이해의 폭을 넓히고 나아가 차기정부의 정책수립에도 참고자료로 활용되기를 바란 다. 대통령비서실 통일외교안보정책실장 백종천 머 리 글 7
차례 1편 총론 : 동아시대 구상과 평화번영정책 1장 노무현 대통령의 동아시대 구상 14 1절추진배경 14 2절 동아시대 구상의 구체화 16 3절 동아시대 구상의 의미 19 2장 동아시대 구현을 위한 평화번영정책 23 1절 평화번영정책의 의미 23 2절 평화번영정책의 추진전략 25 3절 평화번영정책의 전개 31 2편 균형적 실용외교 3장 핵문 해결 진전과 한반도 평화체 42 1절 참여정부의 핵 해결 원칙과 방향 44 2절 6자회담과 핵 해결과정 53 3절 한반도 평화체 77 4장 동아 협력과 통합의 질서 모색 82 차 례 8 1절 미래지향적 역내 관계 구축 82
2절 동아의 통합질서 모색 107 5장 외교역량 강화와 글로벌 협력외교 123 1절 국가외교역량 강화와 유엔 사무총장 배출 123 2절 다자외교를 통한 협력관계 증진 133 3절 경외교를 통한 국익창출 극대화 158 3편 협력적 자주국방 6장 자주국방과 선진 국방체계 구축 180 1절 자주국방 추진과 국방개혁 2020 법화 180 2절 선진 국방체계 구축 187 3절 군 구조 개편과 미래지향적 첨단전력 강화 197 4절. 병영문화 개선 205 5절 병역도 개선 213 7장 한 미동맹 재조정과 21세기형 동맹관계 구축 223 1절 한 미동맹 재조정 : 추진 배경과 경과 223 2절 전시작전통권 전환과 한국형 공동방위체 235 3절 용산기지 이전 및 주한미군 재배치 248 4절 주한미군의 안정적 주둔여건 보장 256 차 례 9
8장 국 평화유지활동과 이라크 파병 266 1절 한국군의 평화유지활동(PKO) 현황 266 2절 평화 재건 지원부대 이라크 파병 270 3절파병부대성격및규모 274 4절 파병 준비 및 주요 활동과 성과 278 4편 신뢰와 포용의 대정책 9장 2007 남정상회담과 남관계 신뢰구축 284 1절 2007 남정상회담 추진 배경과 진행 경과 284 2절 2007 남정상선언의 주요 내용과 의미 293 3절 2007 남정상회담 후속조치 추진 306 10장 남 화해협력의 도화 추진 331 1절 남대화의 정례화 331 2절 법 도적 기반조성 361 11장 남 교류협력의 확대 심화 370 1절 남 경협력 추진 현황 370 2절 개성공단 사업의 안정적 추진 378 차 례 10
3절 사회문화협력사업 386 4절 인도적 문 해결 노력 392 차 례 11
1 총 론 : 동아시대 구상과 평화번영정책
1 노무현 대통령의 동아시대 구상 1절 추진 배경 21세기에 들면서 세계는 이전과는 다른 두 가지의 큰 특징을 띠게 되었다. 하나는 냉 전종식 이후 미국 중심의 세계질서가 유지되는 가운데 테러와의 전쟁 이라는 전혀 새 로운 안보환경에 직면했다는 점이다. 또 하나는 20세기 후반 일본의 부상에 이어 21세 기에 들어 중국의 부상 이 본격화되었다는 점이다. 이를 통해 동아는 경문뿐만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14 아니라 안보문에서도 세계적 관심의 초점이 되었다. 우선, 2001년 9 11 테러를 계기로 세계 정세는 큰 변화를 겪었다. 미국을 비롯한 국 사회의 주요 국가들은 전통적 국가안보의 틀을 벗어나 변화된 안보환경에 적응할 수 있는 새로운 안보 패러다임을 준비했다. 특히 미국은 핵무기와 미사일 등을 포함한 대 량살상무기의 확산 방지를 최우선적인 국가안보 목표로 설정하고 적극적인 군사안보 전략을 채택했다. 이와 동시에 미국은 새로운 군사안보전략에 따라 전세계적인 동맹관 계 재조정을 추진했다. 이러한 미국의 정책변화는 기존의 한 미 동맹관계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또한 경 에너지 자원 환경 등 비군사적 영역의 안보문가 새롭게 부각되었다.
이러한 문는 국적인 규모로 발생하고 전세계적으로 급속히 확산되는 특징을 보이 고있어, 국적인 공동대처와 함께 국내적으로도 광범위한 영역에서 종합적인 대처가 요구되었다. 이를 위해 각 분야에서 안보역량을 강화하고, 국기구 및 지역별 다자안 보 대화를 통한 범세계적인 공동 노력이 절실히 필요하게 되었다. 한편 21세기의 동아는 세계의 중심지역으로 급부상하면서, 역내 국가 간에는 상호 협력과 대립의 양상이 나타나고 있었다. 동아는 세계인구의 23.6%, GDP의 19%, 세 계 외환보유고의 약 40%를 차지하면서 미, 유럽과 더불어 세계경의 3대 중심축의 하나가 되었다. 그리고 한 중 일 3국의 총수출에서 역내 수출이 차지하는 비중이 1995년의 14%에서 2005년 20.2%, 수입의 경우 22%에서 27.6%로 상승할 정도로 역내 경협력도 증대했다. 그러나 동아에는 이러한 경적 부상과 협력관계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대립과 불 안정이 상존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동아는 세계적 강국인 미국과 일본, 그리고 중국 과 러시아의 전략적 이해관계가 교차하는 공간일 뿐만 아니라 역사적 상처가 대로 아 물지 않았기 때문이다. 세계 초강대국 미국은 동아에서의 영향력을 계속 유지하려 했 고, 급부상하는 중국은 화평굴기(평화로운 부상) 를 슬로건으로 적극적인 대외정책을 펼쳤다. 세계 2의 경강국 일본은 미 일동맹 강화와 헌법개정 등을 통해 이른바 보통국가화 를 추구했으며, 냉전시기 세계 패권경쟁의 한 축이었던 러시아는 국력의 신장과 중국과의 전략적 동반자 관계를 통해 과거의 영광을 회복하려 했다. 동아의 이러한 대립구도를 더욱 악화시킬 수 있는 요인은 핵문였다. 특히 2002년 10월 한의 우라늄 농축프로그램(UEP)문로 2차 핵 위기가 발발한 이후 핵문를 둘러싼 미국과 한의 대결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조성되었다. 핵문는 한반도의 평화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있는지, 한반도의 위기에 따라 동아의 평화가 얼마나 흔들릴 수 있는지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결국 2003년 2월, 참여정부가 출범할 당시의 세계, 특히 동아와 한반도를 둘러싼 안보환경은 지각이 크게 변동하는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미국이 세계적 차원에서 전 개한 테러와의 전쟁이 한의 핵문와 결부되고, 중국의 강대화와 일본의 우경화에 따 른 동아의 세력관계 변동이 한국의 외교안보에 새로운 과를 던지고 있었다. 이러한 1 장 노 무 현 대 통 령 의 동 아 시 대 구 상 15
안보의 위협요인 속에서도 동아의 경적 급성장과 2000년 남정상회담 이후 전개 된 남간 교류협력의 심화는 새로운 기회요인이 되었다. 또한 핵문, 나아가 한 문로 인해 우리가 급변하는 동아의 정세에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힘이 위축되 었지만, 세계 12위권의 경력과 민주화의 진전, 그리고 한을 능가하는 강력한 군사 력은 새로운 외교 안보 대정책을 펼 수 있는 기반이 되었다. 2절 동아시대 구상의 구체화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동아시대 구상을 공식적으로 천명하 면서 한반도와 동아의 미래에 대한 새로운 비전과 실천전략을 밝혔다. 취임사에서 밝힌 노무현 대통령의 동아시대 구상은 2003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 사를 통해 보다 정교화 구체화되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취임사에서 동아 지역이 갖는 무한한 경적 잠재력과 동아 중 심에 위치한 한반도의 진취적 역할 가능성을 강조했고, 8 15 경축사에서는 한반도와 동아 평화의 중요성, EU 통합의 교훈, 동아 지역에서의 새로운 질서의 필요성 등을 강조하였다. 특히 8 15 경축사를 통해 노무현 대통령은 강한 군대와 융성한 경만으 로는 평화를 지켜낼 수 없으며, 한반도와 동아에 통합의 질서, 평화의 체가 도적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16 으로 정착되어야 한다는 점을 역설하였다. 취임사와 8 15 경축사를 통해 천명된 노무현 대통령의 동아시대 구상은 이미 후 보자 시절부터 구상되고 발전되어 왔다. 예비 후보 시절이었던 2001년 11월, 노무현 후 보는 안동시민회관에서 행한 21세기 시대정신과 리더십 이라는 특강에서 동아 시 대, 통합의 시대, 가치문화의 시대 를 강조하였다. 여기서 노무현 대통령은 남관계의 새로운 시대를 통해서 한국은 변방의 역사, 주변의 역사 를 청산할 수있고, 동아 에는 평화와 번영의 질서가 형성될 수 있다고 강조했다. 또한 노무현 후보는 2002년 9월 유럽연합의 기자단을 대상으로 행한 동아의 평화 와 번영을 위한 새로운 질서 라는 강연에서 우선 우리의 시각을 한반도에서 동아로
대통령 발언 이 우리의 미래는 한반도에 갇혀 있을 수 없습니다. 우리 앞에는 동아시대가 도래하고 있습니다. 근대 이후 세 계의 변방에 머물던 동아가 이 세계 경의 새로운 활력으로 떠올랐습니다. 21세기는 동아시대가 될 것이라는 세계 석학들의 예측이 착착 현실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동아의 경규모는 세계의 5분의 1을 차지합니다. 한 중 일 3국에만 유럽연합의 네 배가 넘는 인구가 살고 있습니다. 우리 한반도는 동아의 중심에 자리 잡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중국과 일본, 대륙과 해양을 연결하는 다리입니다. 이 런 지정학적 위치가 지난날에는 우리에게 고통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오히려 기회를 주고 있습니다. 21세기 동아시대의 중심적 역할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고급 두뇌와 창의력, 세계 일류의 정보화 기반을 갖고 있습니다. 인천공항, 부산항, 광양항과 고속철도 등 하 늘과 바다와 땅의 물류기반도 구비해 가고 있습니다. 21세기 동아시대를 주도적으로 열어 나갈 수 있는 기본적 조건 을 갖추어 가고 있습니다. 한반도는 동아의 물류와 금융의 중심지로 거듭날 수 있습니다. 동아시대는 경에서 출발합니다. 동아에 번영의 공동체 를 이룩하고 이를 통해 세계의 번영에 기여해야 합니 다. 그리고 언젠가는 ` 평화의 공동체 로 발전해야 합니다. 지금의 유럽연합과 같은 평화와 공생의 질서가 동아에도 구축되게 하는 것이 저의 오랜 꿈입니다. 그렇게 되어야 동아 시대는 완성됩니다. 그런 날이 가까워지도록 저는 혼신 의 노력을 다할 것임을 굳게 약속드립니다. - 2003년 2월 25일 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에서 확장할 것을 강조하였다. 그리고 대 화해협력정책 을 평화와 공동번영정책 으로 계승 발전시켜, 미 중 일 러 등 동아 4강 사이의 평화를 중재하고 주도하는 역 할까지 담당할 수 있는 동아의 평화중심국가 실현 을 목표로 삼고 있다는 것을 밝혔 다. 나아가 경적 번영이라는 차원을 추가해 남이 협력해 동아에 평화적이고 경 적인 프로젝트를 만들고, 이 프로젝트에 미 중 일 러 EU 등 관련국이 참가하는 매 력적인 구상을 내놓겠다고 밝힌 바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동아시대 구상은 후보 시절에 이어 대통령 당선자 시기에 더욱 발 전되었다.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2003년 2월 6일 인천국공항에서 열린 동아 경 중심국가 건설 국정과토론회 에서 동아시대 구상의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정리 했다. 즉 당선자는 당시에 1동아 물류비즈니스 중심국가 2동아 물류비즈니스 중 1 장 노 무 현 대 통 령 의 동 아 시 대 구 상 17
대통령 발언 불과 100여 년 전만 해도 우리는 나라를 지켜낼 군대도, 군대를 키울 경력도 없었습니다. 급변하는 세계질서를 읽 어내고 새로운 질서에 대처할 방도를 세울 만한 지혜도, 국민의 뜻과 힘을 하나로 모을 역량도 없었습니다. 강한 군대와 융성한 경만으로 나라와 국민의 안전을 완벽하게 보장할 수는 없습니다. 전쟁이 일어나지 않도록 해 야 합니다. 한반도와 동아시아에 평화체를 구축해야 합니다. 유럽은 50년 전부터 공동체 질서를 출범하여 평화와 공동번영의 질서를 구축하고, 이 국가간 통합의 길로 들어서 고 있습니다. 오랜 세월 계속된 전쟁으로 생긴 대립과 반목의 장벽을 거의 허물어 버리고, 그 위에 화해와 통합의 질서 를 세우고 있습니다. 저는 정치를 시작하기 전부터 유럽이 만들어 가는 새로운 역사를 부러운 눈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 과정을 지켜보 면서, 지역협력을 통한 평화와 공동번영의 질서가 세계적으로 확산되어 가는 것이 21세기 세계사의 조류가 될 것이라 는 믿음을 갖게 되었습니다. 동아시아에도 협력과 통합의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 가야 합니다. 그래서 다시는 강대국의 틈바구니에서 어디에 기댈 것인가를 놓고 편을 갈라 싸우다 치욕을 당하는 역사를 반복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이 저의 동아시대 구상 의 핵심입니다. - 2003년 8월 15일 노무현 대통령 58주년 광복절 경축사에서 심지 3동아 중심국가 또는 4동아시대 등 여러 개념이 동시에 사용되고 있는데, 이 개념들이 서로 대치되는 것이 아니라 실로 서로 융합 포괄하고 있다고 정리한 것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18 이다. 대통령직인수위원회는 인수위 활동을 마무리하면서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를 참여정부의 3대 국정목표의 하나로 설정하였다. 이때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라는 국정목표는 단지 동아시대라는 지역적 시대적 과를 다루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 의 평화와 번영을 동아의 차원에서 해결해야 한다는 시각을 담고 있었다.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라는 국정목표를 이루기 위해 인수위원회는 한반도 평 화체 구축 과 동아 경중심국가 건설 을 참여정부의 국정과로 시했다. 이렇 게 설정된 두 개의 국정과는 참여정부의 출범 이후 국가안전보장회의(NSC), 동아 경중심추진위원회(동아시대위원회), 안보실 등을 통해 대통령 과로서 지속적으
인수위원회 백서에 나타난 동아 구상 당선자는 적어도 경적 측면에서 세계 경의 중심이 동아로 옮겨온다는 예측에 대해서는 그 누 구도 이의를 기하지 않는다며, 이에 대한 한국의 대응전략이 물류 비즈니스 금융 중심지이고, 그 전 체를 포괄해서 경중심지라고 표현하고 있다고 부연하였다. 그러나 당선자는 장기적으로 우리가 동아 중심국가 또는 동아시대를 얘기할 때는 단순히 경 적 측면을 뛰어넘어 수천 년간 내려온 변방적 위치, 변방의 역사라는 한반도의 역사에 종지부를 찍자 는 상위의 개념이 들어있다고 강조하였다. 또한 당선자는 단지 중상주의적 경성장 경발전의 계기로서가 아니라 EU와 같이 소위 지역통 합의 질서 또는 지역공존의 질서로 발전해 간다면, 우리 한국의 정치적 위상도 변방의 역사를 극복하 고 적극적으로 지역의 질서를 주도해 나가는 자주적인 역사를 펼쳐갈 수 있는 정치적 조건이 형성되는 역사적 의미가 있다고 역설하였다. 로 추진되었다. 3절 동아시대 구상의 의미 참여정부는 3대 국정목표로 국민과 함께하는 민주주의, 골고루 잘사는 균형발전 사회,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를 내세웠다. 이 중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는 참여정부의 통일외교안보정책을 포괄하는 핵심적 정책목표이자 21세기 우리나라와 동 아시아가 나아가야 할 비전을 담고 있다. 노무현 대통령의 국정철학과 국가안보전략 을 담고 있는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구상은 변화하는 동아 정세에 대한 냉철한 분석, 우리의 역사에 대한 성찰과 우리나라의 위상 변화에 대한 재인식에 기초를 두고 있다. 우선, 동아의 정세변화와 관련해 특히 강조할 점은 한 중 일을 중심으로 하는 동 아의 부상과 함께 동아에 협력과 대립의 구도가 공존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동아 에서 미 일 중 러와 남한은 냉전시기에는 자유진영과 공산진영으로 나뉘어져 있 1 장 노 무 현 대 통 령 의 동 아 시 대 구 상 19
었고, 냉전종식 이후에도 기존의 대립구도가 완전히 사라진 것은 아니다. 특히 세계적 인 냉전종식에도 불구하고 한반도의 냉전상태는 완전히 극복되지 않았고, 21세기에 들 어미 일과 중 러의 각축구도도 다시 조성되고 있다. 또한 역사문로 비롯된 한 중 일 3국의 갈등은 서로에 대한 불신과 대립을 조장하고 있는 상황이다. 이러한 대립 과 갈등의 동아 상황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유럽통합과 같은 새로운 비전이 필요하고, 우리가 이에 주도적인 역할을 해야 할 필요성이 기된다. 둘째, 우리는 19세기 이래의 역사를 성찰함으로써 한반도의 운명이 동아의 운명과 밀접히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알수있다. 100여년 전 일본은 영 미를 중심으로 하는 서양세력과 연대하여 중국 및 러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우리나라는 그 전쟁터가 되었 다. 이후 우리는 일의 식민지가 되었고, 미국과 소련에 의해 해방이 되자마자 분단되 고, 곧이어 세계전쟁에 준하는 한국전쟁이 일어났다. 그리고 냉전시대에 남한은 자유세 계의, 한은 공산세계의 최전방기지가 되어 한반도는 세계 어느 곳보다도 위험한 지역 이 되었다. 지난 100여년간의 이러한 역사는 한반도의 전쟁과 분단 그리고 평화가 동 아의 구도와 정세에 긴밀히 연관된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이러한 역사적 성찰을 통해 한반도 문를 동아라는 큰 틀을 통해 조망하고 해결책을 모색해야 한다는 인식이 생 겨났다. 셋째, 한국의 위상과 국력에 대한 새로운 인식이다. 우리 민족에게는 오랫동안 중국 이라는 거대한 세계 중심국가 의 조그만한 변방 이라는 인식이 있었다. 이것이 근대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20 이후에는 식민화와 분단 그리고 전쟁을 겪으면서 약소국 의식으로 변화되었다. 이에 따 라 외교안보정책의 기저에는 항상 약소국 현실주의 가 자리잡게 되었다. 그러나 오늘 날의 대한민국은 세계적 기준으로 보았을 때 더 이상 약소국이 아니다. 대한민국은 세 계 12위권의 경력과 군사력 그리고 민주체와 문화전파력을 가진 중견국(middle power)이 되었다. 따라서 전통적인 변방의식, 약소국 현실주의에 입각한 강대국 편승 론등은21세기 우리의 외교안보철학이 될 수 없다. 21세기 우리의 외교안보통일정책은 중견국가로서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을 주도하고, 나아가 동아의 평화와 번영을 촉진 하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한반도 나아가 동아의 새로운 질서, 평화와 번영의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 수동적 객체가 아니라 능동적 주체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의 전환이 필
요했던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의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구상 은 이러한 세 가지 문의식에 입 각해 수립되었고, 수많은 비판과 장애에도 불구하고 일관되게 추진되었다. 노무현 대통 령의 동아시대 구상과 관련된 비판 중 가장 많이 기된 것은 왜 동아인가? 라는 점이다. 즉 왜 한반도가 아닌가?, 또 왜 동아시아가 아닌가? 라는 점이다. 이에 대해 노 무현 대통령은 한겨레신문 주최 부산 국심포지엄 (2007년 11월 13일) 기조연설을 통해 이 비판에 대답했다. 우선 왜 한반도가 아니고 동아인가 하는 점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의 항구적 인 평화와 번영이 동아의 평화와 번영에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다는 점을 강조했다. 한반도의 분단과 전쟁은 냉전체의 산물이었습니다. 그런데 세계적인 냉전체는 해체되었지만, 아직도 한반도는 분단의 굴레를 벗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동아의 냉전체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고 있기 때문입니다. 동아의 냉전체가 아직도 해소되지 않고 있는 것은 동아의 냉전구도가 보다 뿌리가 깊은 동아의 대결구도와 결합되어 있기 때문입니다. 동아의 대결구도는 냉전체보다 그 역사가 오래된 것입니다. 400년 전 임진왜란 이래 동아의 해양세력과 대륙세력은 지속적인 대립과 충돌을 반복해 왔습니다. 청 일전쟁, 러 일전쟁이 그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한반도의 분단은 그때부터 씨앗이 뿌려 졌습니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직도 아물지 않고 있습니다. 이처럼 한반도의 갈등과 대립은 한반도만의 문가 아닙니다. 오랜 역사를 가진 동 아 대결구도의 일부이고, 그것에 의해 규정받아 왔습니다. 한반도에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서는 동아에 남아 있는 역사적 이념적 갈등이 해소되고 새로운 협력의 질서가 만들어져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동아 평화를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으로 노무현 대통령은 왜 동아시아가 아니고 동아인가라는 점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현재 동남아시아는 아세안을 중심으로 새로운 협력질서를 형성해가고 있습니다. 잘 가고 있습니다. 그에 반해 동아는 앞서 말씀 드린 바와 같이 아직도 대결의 질서를 해 소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경적으로 군사적으로 압도적인 역량을 가진 동아 3국이 1 장 노 무 현 대 통 령 의 동 아 시 대 구 상 21
화해와 협력의 질서를 형성하는 데 성공하기 전에는 아세안에서 한 중 일간의각축 은 심화될 것이고, 이는 결국 동아시아 전체의 불안요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 점에 서, 동아공동체를 전하지 않고 동아시아공동체를 말하는 것은 좀 공허하다 싶습니 다. 따라서 동아시아공동체가 성공하려면 동아공동체가 먼저 성공하거나, 적어도 병 행하여 추진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동아시아 전체의 번영과 결속에 기여하는 길이 될 것입니다. 한편 노무현 대통령은 한반도 문와 동아시아 문가 동아 문를 해결함으로써 풀릴 수 있다고 보았지만, 거꾸로 한반도 문가 풀려야 동아시아 문도 풀릴 수 있 다고 역설했다. 한반도에서의 대립과 긴장은 동아 정세에 여러 가지 대립과 긴장의 요인을 공 하고 있습니다. 핵문, 미사일문, 주한미군, 미사일 방어체 등이 한반도의 대결 상태에서 비롯되었거나 관련을 가지고 있습니다. 따라서 한반도에 냉전체가 계속되 는 한 동아시아의 대립과 긴장은 해소되기 어렵습니다. 그런 점에서 한반도 문의 해결은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를 여는 첫걸음이 될 것입니다. 이렇듯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구상은 한반도의 평화와 번영뿐만 아니라 동아, 나아가 동아시아를 평화와 번영의 공동체로 만들기 위한 비전이자 전략이라고 할 수 있 다. 동아시대 구상은 우리 역사에 대한 성찰과 동아의 상황에 대한 냉철한 인식, 그 리고 우리의 주체적 역량에 대한 객관적 평가에 기초하고 있다.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22
2 동아시대 구현을 위한 평화번영정책 1절 평화번영정책의 의미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진정한 동아시대를 열자면 먼저 한 반도에 평화가 도적으로 정착되어야 한다 고 강조하면서, 한반도의 평화증진과 공동 번영을 목표로 한 평화번영정책 을 시하였다. 그리고 추진원칙으로서 첫째 대화를 통한 문 해결, 둘째 상호신뢰 우선과 호혜주의, 셋째 남당사자 원칙에 기초한 국협력, 넷째 정책의 투명성 고와 국민과 함께하는 정책 등 4가지를 시하였다. 노무현 대통령이 시한 평화번영정책은 기본적으로 김대중 정부의 햇볕정책을 계승 발전시킨 것이다. 노무현 대통령도 취임사에서 햇볕정책의 성과를 계승 발전시키면 서, 정책의 추진방식은 개선해 나가고자 한다는 의지를 밝힌 바 있다. 그렇다면 무엇을 계승하고 무엇을 발전시킨 것일까? 결론부터 말하면 화해협력이라는 남관계의 원칙 은 그대로 계승하면서 이를 평화번영의 단계로 끌어올리고, 여기에 동아시대라는 새 로운 비전을 부여했다고 할 수 있다. 그냥 평화정책이면 되는데, 굳이 번영까지 꼭 집어넣고 동아시아라는 비전을 내건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23
것은 남대화에 대해 긍정적인 사고를 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한 전략적 비전입니다. 동 아 번영에 대한 우리의 비전이 있을 때 남대화에 대해서 호의적으로 생각할 가능성 이 높다는 판단을 고려한 것입니다. (2003년 3월 24일 노무현 대통령, 통일부 업무보고 시) 김대중 전 대통령은 1998년 햇볕정책을 천명하면서 한의 무력도발 불용, 흡수통일 불추구, 대화와 협력이라는 3가지 원칙을 시했다. 이러한 3가지 원칙은 지난 반세기 간 적대적 관계였던 남관계를 화해협력 관계로 전환시키기 위한 것으로서 대포용 정책의 핵심을 구성한다. 평화번영정책은 이러한 햇볕정책의 남관계 재설정을 토대로 여기에 평화와 공동번 영이라는 목표를 부여했다. 즉 남간의 화해협력을 발전시켜 평화공존과 공동번영을 이루자는 것이다. 또한 남간의 교류협력이 더욱 확대되기 위해서는 경협력과 평화 정착이 함께 가야 한다는 전략적 측면을 강조하였다. 즉 평화와 경가 선순환하는 구 조가 정착될 때 남관계가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렇듯 햇볕정책의 대 화해협력 기조를 견지한다는 점에서 계승 이며 이를 평화번영이라는 목표지향적, 전 략적 정책으로 격상시켰다는 점에서 발전 인 것이다. 특히 평화번영정책은 여기서 한발자국 더 나아가 대정책의 지평을 동아로 확대 해 외교안보정책의 기조로 삼았다는 점에서 특징이 있다. 즉 한반도 평화체 구축을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24 통해 한반도가 동아 평화의 발원지가 되며, 남이 교류협력을 통해 대륙과 해양을 잇는 가교 역할을 함으로써 동아 공동번영의 시대를 열어가자는 안이다. 남이 동 아 공동번영의 시대를 주도해 나가자는 비전을 시함으로써 남관계도 더욱 안정 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는 판단인 것이다. 이렇듯 평화번영정책은 동아시대라는 비전 속에 남관계를 위치지음으로써 대 정책의 내포를 더욱 풍부하게 하고 그 외연을 넓혔다. 평화번영정책은 후일 그 완결판 이라고 할 수 있는 2007 남정상선언에서 철저하게 구현되었다. 2007 남정상선언은 남관계 발전과 평화번영을 위한 선언 이라는 공식 명칭부터 평화번영정책의 산물임 을 보여준다. 2007 남정상선언은 평화번영정책의 철학과 원칙, 그리고 전략을 고스란
히 담아냄으로써 참여정부의 통일외교안보정책의 핵심을 잘 보여주었다. 그러나 평화번영정책은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단지 대정책에 머무르지 않는다는 점 을 강조할 필요가 있다. 평화번영정책은 참여정부의 핵심비전인 동아시대 구상과 밀접 히 관련되어 있고, 이 비전을 실현하기 위한 정책이라는 점에서 통일외교안보 분야의 최 상위 정책이라고 할 수 있다. 즉 평화번영정책은 참여정부 초기 대정책에 초점을 둔 것 으로 명명되었으나 참여정부 5년의 전시기를 통해 볼 때 대 외교 국방 정책을 총괄 하는 정책으로 위치 지을 수 있다. 이러한 평화번영정책이라는 큰 틀에서 노무현 대통령 은 2005년 초 대통령 주재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국방에서는 자주국방, 외교에서는 균 형외교라면 남관계에서는 신뢰구축이 우리의 안보전략 기조 라는 점을 강조했다. 참여정부는 지난 5년간 평화번영정책을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그러나 시련과 도전 을 거치면서 내용이 더욱 풍부해지고 심화된 것도 사실이며 2007 남정상회담 과정에 서 더욱 완성도가 높아졌다. 큰 틀에서 보면 한반도 평화에 최우선 순위 부여, 평화 와 번영의 선순환, 핵문와 남관계의 선순환 이라는 전략을 추진해 온 것으로 정리할 수 있다. 2절 평화번영정책의 추진전략 1. 한반도 평화정착 우선 참여정부는 통일이라는 말을 아낀 편이다. 그것은 통일을 바라지 않거나 추구하지 않아 서가 아니라 평화가 우선이기 때문이다. 한반도에는 아직 평화도 정착되지 않았다. 따라서 통일에 대한 추상적 논의보다는 한반도에 평화를 정착시키는 데 모든 역량을 집중해야 할 때인 것이다. 통일은 대화하고 교류하고 협력하면 자연스럽게 따라오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일방안이 필요하다면 기존 정부들에서 시한 민족공동체 통일 방안이면 충분하다는 판단이다. 역설적으로 남이 첨예하게 적대적으로 대치하던 시 절에 통일 논의가 많았다. 일종의 통일 담론 과잉 상태였다. 그것은 역대 정부들이 남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25
간의 이념적 경쟁과 체의 정당성을 목적으로 통일 논의를 정치적으로 활용했기 때문 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평화 없는 통일은 없다. 그것이 참여정부의 판단이었다. 참여정부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서의 작업을 기초로 한반도 평화체 구축 을참 여정부 10대 국정과 중의 하나로 설정했다. 그만큼 한반도 평화정착에 대한 참여정부 의 의지가 강했다는 것이다. 한반도가 지구상의 마지막 냉전지대로 남아있는 것은 20세기의 불행한 유산입니다. 그런 한반도가 21세기에는 세계를 향해 평화를 발신하는 평화지대로 바뀌어야 합니다. (2003년 2월 25일16대 노무현 대통령 취임사) 대통령이 되고 난 후 통일 얘기 보다는 평화구조를 정착시키는 문에 집중해 왔습 니다. 대화하고 교류하고 협력하면 통일이 따라올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2005년 4월 28일 노무현 대통령, 통일부 업무보고 시) 이러한 정부의 의지와 노력이 첫번째 결실을 맺은 것이 2005년 9 19 공동성명에 포 함되어 있는 동아 평화 및 한반도 평화체 관련 조항이다. 주지하듯이 9 19 공동성 명 4항에는 동아에서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한 공동노력과 더불어 직접 관련 당 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에 관한 협상을 가질 것이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26 다 라고 되어 있다. 동 조항은 6자회담을 지휘하던 서울 본부에서 베이징의 우리 대표 단에 강력한 훈령을 내려 관철시킨 것이다. 한반도 평화체 구축을 위한 외교적 노력과 함께 참여정부에서 심혈인 기울인 것이 남간의 군사적 긴장완화이다. 당면해서는 핵문가 한반도에서 최대의 안보위협이 지만 설령 핵문가 해결되어도 남는 것이 남간 대규모 재래식 군사력의 일촉즉발 의 대치상태이다. 정부는 특히 서해 평화정착과 휴전선 일대에서의 우발적 충돌 방지가 시급하다고 보았다. 이 두 지역의 위험성은 이미 2차례의 서해교전과 휴전선 일대에서 자주 발생하는 총격 사건으로 입증된 바 있다. 따라서 참여정부는 우선 이 문를 해결 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였으며 참여정부 초기부터 대통령의 특별지시가 있기도 했다. 그
1차적 결실이 2차 장성급회담(2004년 6월 3~4일)에서의 합의이다. 동 합의에는 서해상 에서의 우발적 충돌방지를 위한 조치 및 군사분계선 지역에서의 선전활동 및 선전수단 거가 포함되어 있다. 이러한 초보적 군사적 신뢰구축 조치들은 한반도 평화정착을 위 한 귀중한 밑거름이다. 참여정부의 평화정착 의지가 가장 큰 결실을 거둔 것은 역시 2007 남정상회담에서 였다. 2007 남정상선언에서는 군사적 신뢰구축과 평화체 비핵화 등 한반도 평화 정착과 관련된 사안이 2개의 별도 조항에서 비중있고 실질적으로 다루어지고 있다. 이 점에서 주로 남관계의 선언적 원칙에 주력했으며 통일문에 관한 비중이 컸던 6 15 공동선언과 비교될 수 있다. 이는 한반도 평화정착에 정책의 최우선순위를 두었던 참여정부의 의지가 관철된 것으로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2. 평화와 경의 선순환 참여정부의 평화번영정책에서 핵심 전략 중의 하나가 평화와 경의 선순환구조 정 착이었다. 평화와 경의 선순환이란 남관계에서 경협력이 평화를 구축하고 평화 가 경협력을 뒷받침 하는 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역사적인 6 15 공동선언 이후 남관계의 비약적 발전에도 불구하고 하나의 한계로 지적된 것이 경 사회문화 분야와 정치 군사 분야의 불균형이었다. 이는 기본적으 로 남관계에서의 신뢰 부족과 정치 군사 분야의 협력에 대한 측의 소극적 태도 때 문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불균형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측의 적극적 호응 을 유인해 낼 수 있는 전략적 접근이 필요했다. 이를 위해 참여정부는 평화정착과 경협력을 전략적으로 연계하는 접근을 취했다. 즉 경나 사회문화 분야의 교류협력이 증진되면 자연스럽게 정치 군사 분야로 확산 (spill-over)된다는 기능주의적 접근에서 탈피하여, 경적 공동이익과 군사적 긴장완화 를 동시에 증진시킬 수 있는 사업들을 발굴하고 추진하였던 것이다. 지난 정부에서 착수했지만 참여정부에 들어서 실질적으로 진전된 3대 경협사업이 평 화와 경의 선순환 구조를 잘 보여준다.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은 남이 모두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27
이익을 보는 호혜적 경협사업이지만 이와 동시에 엄청난 군사적 긴장완화 효과를 가지 고있다. 개성은 한국전쟁 시 한의 주요 공격로였으며 금강산 지역의 장전항에는 한의 잠수함 기지가 설치되어 있었다. 그런데 개성공단과 금강산관광 사업으로 인해 두 지역에 주둔하고 있던 한군 부대가 쪽으로 이동하고 휴전선의 통문이 열리게 된 것 이다. 남 철도 도로 연결도 마찬가지이다. 철도 도로 연결과 운행은 남이 군사적 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군사분계선을 가로지르는 사업이기 때문에 군사적 안전 보장 조치가 이루어져야 하며 그 과정에서 군사적 긴장완화가 뒤따르게 된다. 그러나 평화와 경의 선순환 모델의 가장 대표적 사례는 노 대통령이 스스로 2007 남정상선언의 가장 핵심적인 합의 라고 평가한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이다. 남 간에 가장 충돌의 가능성이 높고 실로 1999년과 2002년 2차례의 교전이 일어났던 서 해 NLL 인근을 남의 공동이익을 창출하는 공간으로 탈바꿈시켰기 때문이다. 서해평화협력특별지대 구상에 포함되어 있는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해주 경특 구개발, 한강하구 공동이용 등이 모두 경적 이익과 군사적 긴장완화를 동시에 가져 다주는 사업들이다. 남간 군사충돌의 가능성이 가장 높은 서해 NLL 인근에 공동어로 구역과 평화수역을 설정하고 이를 위한 군사적 보장조치를 마련함으로써 남 공동의 경적 이익을 극대화하는 것은 물론 군사적 충돌의 가능성을 미연에 방지할 수 있다. 또한 경적으로 유리한 입지 조건을 갖추고 있는 해주 지역을 특구로 개발하는 것은 그 자체로도 유의미한 일이지만 해주 지역에 배치되어 있는 군사 시설의 후방 이동에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28 따른 군사적 긴장완화도 기대할 수 있다. 한강하구 공동이용도 마찬가지이다. 한강하구 골재 채취에 따른 막대한 경적 이득과 군사적 긴장완화 효과를 동시에 달성할 수 있 다. 그 동안 참여정부가 군사적으로 첨예하게 대치하고 있는 접경지역에서의 경협사업 들에 역점을 두어 온 것은 주로 이러한 전략적 고려 때문이었다. 2007 남정상선언의 군사적 신뢰구축을 다루는 3항과 경협력을 다루는 5항에서 공동어로구역과 평화수역 문가 반복적으로 거론되고 있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이는 평화와 경를 구조적으로 연계함으로써 평화정착과 공동번영을 동시에 달성하려는 우리 정부의 전략적 의지를 방증하는 것이다. 군사적 긴장완화를 다루는 3항에서 각종 협력 사업에 대한 군사적 보장조치 문가 거론되고 있는 것도 중요하다. 그간 남간
의 경협이 군사적 보장이라는 장벽에 가로막힌 적이 한두 번이 아니라는 점에서 평화가 경를 뒷받침하는 구체적 사례인 것이다. 이렇듯 평화와 경의 선순환구조 정착은 평화번영정책의 핵심전략으로서 참여정부 가 남관계를 기존의 화해협력에서 평화번영의 단계로 발전시켰다고 주장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근거이다. 3. 핵문 해결과 남관계 발전의 병행 참여정부는 핵문 해결에 있어서 적극적 역할을 수행하고자 했고, 대정책 추진 에서도 이를 핵심적 요소로 다루었다. 그러나 핵문는 우리만의 문가 아니다. 핵문는 1994년 네바 합의부터 2002년 10월2차 핵위기까지는 KEDO 경수로 건 설 문가 있기는 하지만 주로 미 양자 차원에서 다루어졌다. 또한 핵 6자회담이 출범한 이후로는 6자라는 다자 틀에서 다루어지고 있다. 이렇듯 핵문는 남관계 차원을 넘어서 미국을 비롯한 주변국들의 이해가 관련된 국문로서의 성격이 강하 다. 또한 남관계에는 핵문만 있는 것이 아니다. 무엇보다 남 간 대규모 재래식 군사력의 대치 문가 있다. 인도적 문로서는 이산가족과 탈자 국군포로, 인도적 지원의 문가 있다. 또한 각종 사회문화 교류와 경협력 문도 있다. 따라서 우리의 대정책은 단순히 핵정책으로 환원될 수 없는 복잡한 요소들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사정으로 인해 우리는 핵문 해결과 남관계 발전이라는 두가지 과를 동시에 수행해야 하는 어려운 상황에 있다. 이에 대한 참여정부의 기본적 입장은 이 두 가지 과가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이다. 핵문 해결이 남관계 발전에 유리한 조건 을 공하며, 남관계의 발전이 핵문 해결에 기여한다는 선순환 발전이 참여정 부가 추구해 온 또 다른 남관계 발전 전략이다. 핵문와 남관계의 선순환을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는 2005년 9 19 공동성명 채택을 전후한 시기에서 찾을 수 있다. 당시는 한의 핵보유 선언(2월 10일) 및 6자회 담 불참으로 핵문가 교착 상태에 있던 시기였다. 또한 남관계도 직전 해에 있었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29
던 조문파동과 탈자 대량입국의 여파로 인해 남 관계가 사실상 중단된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정부는 남관계 복원을 통해 핵문의 돌파구를 마련한다는 전략을 세우고 이를 치밀하게 추진해 나갔다. 그리하여 남 차관급회담(5월 16일~5월 19일) 을 통해 남관계를 복원시키고, 뒤이어 성사된 대특사의 김정일 위원장 면담(6월 17 일)을 통해 한의 6자회담 복귀 약속을 받아냄으로써 13개월간 중단되었던 6자회담을 재개시켰던 것이다. 특히 이 과정에서 대 중대안 을 통해 한의 핵폐기 협상에의 호응을 강력히 유인해 냄으로써 9 19 공동성명 채택의 동력을 공했다. 그러나 한반도를 둘러싼 복잡한 정세는 핵문 해결과 남관계 발전이라는 두가지 과의 동시 수행이 간단치 않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양자는 분명 구조적으로는 선순환의 관계에 있으나 단기적으로는 반드시 속도가 일치하는 것이 아니며 어느 일방의 상대적 지 체 현상이 노정되곤 하기 때문이다. 특히 한이 우리 정부의 거듭된 경고를 무시하고 핵 실험을 강행한 조건하에서는 핵문가 남관계에 일정하게 영향을 줄 수밖에 없다는 것이 엄연한 현실이기도 했다. 그러나 정부는 핵문와 남관계의 선순환에 대한 확신 을 가지고 핵실험 이후의 어려운 정세 속에서도 남관계의 기본 동력을 유지하였다. 2007 남정상회담은 핵문와 남관계의 선순환 전략이 가장 효과적으로 작동 한 전형적 사례이다. 2007 남정상회담은 9 19 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2단계 조치 가 합의되는 등 6자회담의 진전을 배경으로 개최되었으며 이러한 과정을 더욱 공고히 하 는데 기여하였다.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30 2007 남정상선언 4항은 9 19 공동성명과 2 13 합의가 순조롭게 이행되도록 노 력하기로 함으로써 6자회담과 남관계가 선순환 과정에 들어섰음을 분명히 보여주고 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이 직접 서명한 문서에서 6자회담 합의의 성실한 이행을 다짐 함에 따라 비핵화합의의 구속력이 더욱 높아졌다고 할 것이다. 측이 남정상회담을 앞두고 10 3 합의를 채택하기 위해 일부 민감한 문구에서 전향적 입장을 취했다는 점도 남정상회담이 핵문 해결에 기여했다는 것을 보여 준다. 또한 김정일 위원장이 정상회담에서 김계관 한 외무성 부상으로 하여금 10 3 합의에 대해 우리측에 상세하게 보고하게 했다는 것도 주목할 대목이다. 결론적으로 6자회담의 순항을 배경으로 남정상회담이 개최되고 여기서 6자회담
합의에 대한 정치적 은총 을 공함으로써 핵문와 남관계의 선순환은 안정적으 로 구조화되었다고 할 수 있다. 3절 평화번영정책의 전개 참여정부는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라는 국정목표를 구현하기 위해 평화번영정 책을 일관되게 추진했다. 참여정부의 안보정책은 1평화를 위한 안보 2우리 힘으로 지키는 안보 3미래를 내다보는 안보 4조용한 안보 5경를 생각하는 안보 라는 5가 지의 원칙과 균형적 실용외교, 협력적 자주국방, 신뢰와 포용의 대정책이라는 3대분 야로 구성된다. 1. 안보정책의 원칙 먼저, 평화를 위한 안보 원칙이다. 참여정부 안보정책은 안보는 평화를 위한 것 이 라는 확고한 신념을 바탕으로 추진되었다. 싸워서 이기는 안보가 아니라 전쟁이 없도록 하는 것이 최상의 안보인 것이다. 여기서 평화 를 위한 핵심전략은 공존의 지혜이다. 그리고 공존을 위해 가장 중요한 것은 상호 인정과 존중이고, 협력을 통해 신뢰를 축적 해야 한다. 끊임없이 상대를 자극하고 적대시해서는 화해와 협력을 이룰 수 없다. 따라 서 오해가 생기고 싸움이 벌어지지 않도록 세심하게 주의를 기울여 나가는 것이 신뢰를 쌓는 길이다. 참여정부는 이러한 신념하에서 대결보다는 화해를 추구해 왔다.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하는 바탕 위에서 대화로써 해결하는 안보, 즉 평화를 위한 안 보 를 일관되게 추진해 왔다. 둘째, 우리 힘으로 지키는 안보이다. 우리의 안보는 우리의 힘으로 하는 것이 원칙이 다. 내 나라는 내가 지킨다고 하는 의지와 자신감을 가지고 있어야 안보가 되고 국방이 되는 것이다. 우리의 안보를 다른 나라에 맡겨놓고 자존심을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이 치에 맞지 않다. 노무현 대통령은 남의 나라 군대를 최전방에 배치해 놓고 인계철선이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31
라고 부르는 것은 자주국가의 자세도 아니고 우방에 대한 도리도 아니다 고 강조했다. 여기서 가장 큰 문는 현실의 의존보다 심리적 의존이라고 할 수 있다. 노무현 대통령 은 5년 동안 이 심리적 의존을 탈피하기 위해 끊임없이 노력했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 지 마찰과 오해를 빚기도 했다. 셋째, 미래를 내다보는 안보이다. 이는 남관계와 한 미동맹이라는 좁은 틀을 넘어 미래의 동아 질서를 내다보면서 미래를 준비해 나가는 것이다. 우리는 지정학적으로 동아의 중심에 있으며, 주변에는 미 중 일 러 등 강대국들이 협력과 대립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따라서 동아의 평화를 위해서는 다자안보체를 만들고 나아가 이를 발전시켜야 한다. 참여정부는 지난 2005년 9 19 공동성명과 수차례에 걸친 한 미 정 상 회담에서도 이러한 원칙을 확인한 바 있다. 넷째, 안보를 정치수단으로 이용하는 것을 배격하는 조용한 안보이다. 우리는 과거 안보를 정략적으로 이용하던 때가 있었다. 정부가 안보상황을 부풀려 국민에게 불안감 을 주고 그것을 정권 지지로 유도하던 시절이 있었다. 이렇게 안보를 정쟁의 수단으로 삼는 것은 독재의 잔재이므로, 참여정부는 안보를 빙자하여 국민을 불안케 하거나 정략 적으로 이용하는 것을 단호히 배격해 왔다. 이를 위해 안보상황에 대해 사안의 경중을 신중히 판단해 냉정하게 대응토록 했다. 다섯째, 경를 생각하는 안보이다. 참여정부는 안보문가 우리 경에 직접적이고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데 주목하고, 모든 안보정책에 경를 고려했다. 특히 핵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32 문와 남관계를 잘 관리함으로써 우리 경가 이러한 안보 문들로 인해 크게 흔들 리는 일이 없도록 해야 한다는 확고한 원칙을 가지고 정책을 추진했다. 그결과한핵 실험 등 위기 국면에서도 우리 경는 안정된 상태를 유지할 수 있었다. 2. 균형적 실용외교 노무현 대통령이 주창한 균형적 실용외교 는 참여정부 5년 동안의 외교정책 기조였 다. 구체적으로 균형적 실용외교란 가치와 국익, 동맹과 다자협력, 세계화와 국가 정체성, 한국과 상대국가 간의 균형과 조화를 이루는 것이며, 외교 및 안보목표를 달
성하기 위하여 정책 결정 및 집행과정에서 전략적 유연성을 발휘하는 것을 의미한다. 가치와 국익의 균형 은 평화 인권 주권 등 보편적 가치와 함께 국가적 실리를 갖 추는 일이다. 동맹과 다자협력의 균형 이란 한 미 동맹을 안보의 근간으로 삼되 다자 안보대화 및 협력정책을 함께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세계화와 국가 정체성의 균 형 은 개방적인 세계화 추세에 능동적으로 대응하면서도 국가 고유의 특성과 위상을 유지하는 것이다. 국가 간의 균형 은 대외관계에서 협력적 수평적 호혜관계를 유지 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균형외교의 뿌리에는 우리가 외교정책과 외교적 사고의 중심이 되어야 한다 는 철학이 자리 잡고 있다. 우리가 정세나 주변 여건의 객체로 전락해서는 안 된다는 세 계관이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노무현 대통령은 정세를 가지고 아무리 계산을 해도 내가 그 정세의 변수가 되지 않으면 모든 것은 끌려만 다니는 것입니다. 우 리 자신이 변수가 되는 것, 주변국이 전략을 결정하는 데도 우리가 변수가 될 수 있으면 하는 데까지 밀고 가야 하는 것 이라고 강조했다. 나아가 우리 미래의 주관적 이해관 계와 가장 적합한 것을 찾아내고, 그 방향으로 모든 당사자들의 행동에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전략과 전술적 접점을 찾아내는 것이 이치 라며 작은 국가들이 어떤 선택을 하느 냐가 영향을 미친다 는 점을 지적했다. 균형외교의 원칙은 현실로 다시 태어나야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원칙을 현실로 번역 하는 과정에서 우리의 상황과 처지에 적합하다고 생각하는 구체적인 방안을 시했다. 즉 핵문의 평화적 해결과 한반도 평화체 구축을 기초로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 대를 구현하고, 이를 실현하는 데 적합한 대외환경을 조성해야 하며, 이를 위해 공고한 한 미 동맹을 바탕으로 주변국 및 전 세계적 차원에서 균형적 실용외교를 적극 추진해 나가야 함을 강조한 것이다. 특히 동아 차원에서는 일본 중국 러시아와의 관계를 격상시키면서, 동시에 한국이 중심을 잡고, 중 일 간의 경쟁은 한 미 협력으로 풀어 나가는 해법을 시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동아 균형자론 이 등장했다. 참여정부는 균형적 실용외교를 통해 다음과 같은 구체적인 성과를 달성했다. 우선 참 여정부는 출범 당시 핵문로 매우 불안했던 한반도 안보환경을 개선해 왔다. 핵문 해결을 위한 우리의 적극적 역할과 관계국의 협력으로 2005년 9 19 공동성명,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33
동아 균형자 관련 대통령 발언 우리 군대는 스스로 작전권을 가진 자주군대로서 동아시아의 균형자로서 동아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낼 것입니다. - 2005년 2월 25일 취임 2주년 기념 국회연설 우리 대한민국은 오랜 역사를 통해서 평화를 추구해 왔고, 또 앞으로도 그렇게 할 것입니다. 이 우리 군은 한반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평화와 번영을 지키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습니다. 동아시아의 세력 균형자로서 이 지역의 평화를 굳건히 지켜낼 것입니다. 이를 위해 동아시아의 안보협력구조를 만드는 데 앞장서고, 한 미동맹의 토대 위에 서 주변국들과의 더욱 긴밀히 협력을 강화해 나갈 것입니다. - 2005년 3월 8일 공군사관학교 졸업식 치사 우리 대한민국은 동아시아의 전통적인 평화세력입니다. 역사 이래로 주변국을 침략하거나 남에게 해를 끼친 일 이 없습니다. 우리야말로 떳떳하게 평화를 말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우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동아시아 의 평화와 번영을 위한 균형자 역할을 해나갈 것입니다. 따질 것은 따지고 협력할 것은 협력하면서 주권국가로서의 당 연한 권한과 책임을 다해나가고자 합니다. 앞으로 우리가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따라 동아의 세력판도는 달라질 것입 니다. - 2005년 3월 22일 육군3사관학교 졸업식 치사 2007년 2 13 합의와 10 3 합의 를 이끌어냈다. 이를 계기로 핵문는 동결을 넘 어 핵폐기를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핵문 해결을 위한 6자회담과 4자 회담을 통해 한반도 평화체 및 동아 평화안보체 구축의 길을 시했다. 이것은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34 반세기 이상 지속되고 있는 한반도의 전쟁상태와 동아의 냉전상태를 종식시키는 역 사적인 의미가 있다. 둘째, 균형적 실용외교를 통해 한 미동맹을 성숙시키고 주변국과의 관계를 발전시 켰다. 한 미동맹 재조정과 한 미 FTA 타결을 통해 한 미관계가 미래지향적으로 발 전할 수 있는 토대가 구축되었고, 중국과는 전면적 협력 동반자관계를 수립하였다. 또 한 러시아와는 포괄적 동반자관계를 구축했으며, 일본과는 보편적이고 올바른 역사인 식에 기초한 새로운 한 일관계를 수립하려고 했다. 아울러 ASEAN+3 정상회의를 계기 로 한 중 일 3국 정상회의와 APEC, ASEAN+3, 유엔총회 등 다자외교를 통해 동아 협력관계 증진 및 미래지향적인 세계질서구축을 도모해 왔다.
셋째, 글로벌 차원의 협력외교를 적극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위해 국가적 외교역량을 강화하고, 경외교 차원에서 동시다발적인 FTA를 추진해 선진 통상국가의 발판을 마 련하였다. 특히 우리의 지속적인 성장동력을 확보하기 위해 에너지 자원 확보를 위한 투자형 정상외교를 적극 전개하였다. 참여정부는 세계 12위의 경력과 민주주의 발전 및 높은 문화적 창의력 등을 바탕으 로 정력적으로 외교활동을 전개했고, 노무현 대통령은 활발하게 정상외교를 펼쳤다. 그 러나 노 대통령은 국협력을 강조하면서도 우리나라만 잘살면 그만이라는 식의 국가 이기주의에서 벗어나야 함을 지속적으로 강조했다. 해외 순방 기간 중에는 우리 상품 이 많이 팔려서 기분이 좋기는 한데, 우리만 팔아먹으면 장기적으로 결국 우리에게 손 해가 되는 것은 아닌가 라며 문를 기한 후, 결국 서로 윈-윈하는협력모델을찾 아야 한다 는 취지의 발언을 하곤 했다. 이러한 인식은 바로 국관계에 대한 노 대통령 의 기본 철학과 길게 보고 깊이 생각하는 사고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노 대통령은 유엔총회 기조연설에서 모든 나라가 공존하며 이익을 누리는 공동번영 의 국질서 를 만들어야 함을 강조하고, 가치와 대의 중심의 국질서 창출에 대한 의지를 천명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철학과 비전에 따라 노 대통령은 부산 APEC 정상회 의를 성공적으로 개최하고, ASEM 정상회의 아시아 조정국으로서의 역할을 훌륭히 수 행하여 우리의 위상을 드높였다. 뿐만 아니라 아프리카 국가들에 대한 원조 확대와 개 발 경험 전수를 골자로 하는 아프리카 개발 이니셔티브 를 주도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의 균형적 실용외교와 한국의 국사회에서의 응당한 기여, 번영된 국 공동체를 위한 정상 차원의 노력이 대한민국의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이 유엔 사무총장으로 선출되 는 데 기여했다고 할 수 있다. 3. 협력적 자주국방 참여정부는 시대변화에 부응하는 안보기조로 협력적 자주국방을 시했다. 이는 한 편으로는 한반도 전쟁 억에서 우리가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는 것이고, 다른 한편으로 는 변화된 안보환경에 부합하는 한 미동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35
여기서 핵심적인 것은 자주국방력의 강화인데, 참여정부는 출범 초부터 명실상부한 자 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해 노력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육사 59기 졸업 및 임관식(2003 년 3월 11일)에서 나는 국군의 통수권자로서 여러분과 함께 자주적 방위역량이 한층 강화된 선진 정예강군 을 이룩해 나갈 것 이라고 천명하였다. 협력적 자주국방은 크게 세가지 방면에서 이루어졌다. 첫째, 한 미동맹의 미래지향적 발전이다. 한 미동맹은 지난 반세기 동안 우리 안보 의 근간으로서 경성장과 국가발전의 밑바탕이 되었지만, 이를 둘러싼 주객관적 환경 은 변화되고 있었다. 먼저 미국은 9 11테러 이후 초국가적 비군사적 위협에 대비한 군사전략 개념으로 변화를 추구하면서 전 세계에 주둔하고 있는 미군기지의 재배치를 추진했다. 이와 연계하여 우리의 방위역량이 향상됨에 따른 역할 분담의 확대가 불가피 해졌다. 그리고 국내적으로도 우리의 국력신장에 따른 호혜적이고 협력적인 성숙한 한 미 동맹 관계를 모색해야 한다는 국민적 요구가 강하게 기되었다. 따라서 우리에 게는 향후 자체 군사력을 기반으로 국가 방위에서 주도적 역할을 수행하면서 한 미동 맹을 미래지향적으로 발전시켜 나갈 필요성이 대두된 것이다. 이러한 배경을 바탕으로 한 미 양국은 동맹 재조정을 통해 과거 정부들이 추진해 오다가 매듭을 짓지 못한 용 산기지 이전 및 주한미군 재배치 등 묵은 과들을 해결하였다. 특히 참여정부는 미국 과 전시작전통권 전환에 합의하여 자주국방 태세를 강화하는 한편, 한 미동맹 관계 를 역동적 호혜적 수평적인 동맹관계로 발전시켰다.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36 둘째, 자주적 정예군사력의 건설이다. 참여정부는 한 미동맹 발전과 병행하여 임기 내 자 주국방을 실현하기 위한 기반을 구축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여기에서 의미하는 자주국방은 국가 주권을 수호할 수 있는 방위능력을 구비하는 것이다. 즉 한국이 처한 지전략적 (geostrategic) 환경 속에서 안보의 주체가 되고자 하는 국가의지와 자위적 방위역량을 기반으로 한 미동맹 및 대주변국 안보협력을 보완적으로 병용하여 안보목표를 완성하는 것이다. 군사력 건설의 기본방향은 한반도에서의 전쟁억능력을 우선적으로 확충하고, 미래 의 불특정 위협에 대해서는 잠재적 대응능력을 배양하면서 필수 소요를 장기적으로 확 보해 나가는 것이다. 또한 군사력의 내실을 기하기 위하여 현존 전력을 지속적으로 보 완하고, 독자적인 감시 정찰 수단을 조기에 확보하는 방향으로 설정하였다.
셋째, 군 구조 개편과 국방개혁이다. 국가의 방위역량은 군사력과 효율적인 운영체계 에 의해 결정된다. 적정 국방비로 필요한 전력을 건설하기 위해서는 국방개혁이 병행 추진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군 구조 개편과 운영체계의 혁신이 요구된다. 역대 정부에 서도 끊임없이 국방개혁을 추진해 왔고 이것이 부분적으로 성과를 거두었으나, 안보환 경의 변화를 충분히 반영하고 미래 안보환경에 능동적으로 대응하기 위한 구조적인 개 혁을 달성하는 데에는 미흡한 부분이 있었다. 참여정부는 명실상부한 자주국방의 토대를 마련하기 위해 군 구조를 개편하고 국방 운영의 효율성을 고하는 등 국방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했다. 이를 통해 군사력 건 설, 조직및운영체계, 획득 및 군수지원 체계, 인사 및 교육훈련 체계 등 반 분야에 서 효율성을 고하기 위해 노력했다. 군 구조 개편의 기본방향은 단기적으로는 현 조직의 효율성 고에 중점을 두되 장기 적으로는 한국군 주도의 방위기획 및 작전수행이 가능한 구조와 체계를 만들어가는 것 이다. 정부는 국방조직의 전문화와 문민화를 추진하고, 합동참모본부의 위기관리 작 전기획 능력을 향상시켜 방위기획 및 작전수행 기구로서의 편성과 기능을 단계적으로 보강해 나갔다. 또한 병력 및 부대구조는 병력 중심에서 미래전에 적합한 정예 과학기 술군 구조를 지향하며 통합적 군사력 발휘가 보장될 수 있도록 발전시켜 나갔다. 그리 고 군의 정예화와 연계해 병력규모를 단계적으로 조정하며, 사회여건과 국가적 소요에 부응할 수 있도록 병역도를 발전시켜 나갔다. 나아가 예비전력의 강화방안을 모색하 고 정신전력 강화와 사기 복지향상을 통해 병사와 중견 이하 간부의 삶의 질을 우선적 으로 개선하고, 대군인의 취업을 보장하기 위해 그들의 전문성을 사회적 자원으로 활 용하는 방안을 추진했다. 3. 신뢰와 포용의 대정책 노무현 대통령은 집권 초기이던 2003년 4월 23일 외교안보관계장관 간담회에서 남 관계에 대해 외교적 전술과 기교를 가지고 한을 대하려 하지 말고, 원칙과 신뢰 그리 고 합리적인 관계를 기본으로 남관계를 가져갔으면 좋겠습니다 라고 말했다. 그리고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37
2004년 12월 13일의 민주평통 상임 운영위원회 합동회의에서도 신뢰하지 않으면 성 공할 수 없다 고 강조했다. 얼마만큼 해줘야 되나? 얼마만큼 양보해야 되나? 때때로 우리 국민들이 자존심 상해 할 것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공식이 있는 것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한이 우리를 신뢰하고 함께 문을 열고 개혁해서 뭔가 함께 협력해서 살아갈 수 있다는 믿음을 확실하 게 가지도록 할 수밖에 없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신뢰하지 않으면 성공할 수 없습니다. (2004년 12월 13일 민주평통 상임 운영위원회 합동회의) 또한 2005년 초 대통령 주재 국가안전보장회의에서 국방에서는 자주국방, 외교에서 는 균형외교라면 남관계에서는 신뢰구축이 우리의 안보전략 기조라는 점을 강조했 다. 이렇듯 신뢰는 처음부터 참여정부 대정책의 핵심요소였으며, 이후로도 일관된 대정책의 기조가 되었다. 그렇다면 남관계에서 신뢰를 중시한다는 것은 구체적, 정 책적으로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한이 예측하기 어렵고 이해하기 어려운 상대이며 때로는 일방적인 행동으로 우리 를 혼란스럽게 하는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렇게 상대가 불합리하게 나올 때도 인내 심을 가지고 대화의 끈을 놓지 않음으로써 남 간에 신뢰가 구축되고 남관계도 한 단계 발전할 수 있다는 것이다.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38 한의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감행 때, 우리 정부가 취했던 입장이 대표적 사례라고 할수있다. 당시 국내외 일부 세력은 우리 정부의 초강경 대응을 주문했다. 한의 핵 무기 개발을 지원한 정권이라며 참여정부에 대한 악의적 비난을 퍼붓는 한편 개성공단 과 금강산관광 사업의 즉각적 중단을 요구했다. 심지어 국지전을 감수해야 한다는 극단 적 주장도 있었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냉정하고 차분하게 대응했다. 이미 측에 수차례 예고했던 쌀차 관과 비료 추가공은 중단했지만 한이 6자회담에 복귀하면 언든지 재개될 수 있 다는 출구를 열어두었다. 유엔 결의안의 성실한 이행 등 국사회와 보조를 맞추면서도 유엔 결의안의 범위를 벗어나는 대재 요구에 대해서는 끌려다니지 않았다. 특히 개
성공단과 금강산관광 등 한번 중단하면 되돌리기 어려운 남경협 사업들은 변함없이 진행하였다. 또한 어떤 경우에도 남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의 미사일 발사 후 예정되었던 19차 남장관급 회담(9월 11~13일) 중단을 요구하는 국내외 목소리가 있었지만 당당히 회담에 응해 한의 잘못된 행동을 경고하고 지적하는 길을 선택했다. 측에 대화를 통한 문해결을 요구하면서 우리 스스로 대화의 문을 닫을 수는 없다 는 판단이었다. 이러한 참여정부의 원칙은 일각에서 주장하는 남관계에서의 상호주의 와 대비된 다. 상호주의는 기본적으로 되갚기전략(팃포탯 tit-for-tat) 즉 눈에는 눈, 이에는 이 식의 발상이다. 상대방이 하는 대로 우리도 똑같이 대응해야 한다는 상호주의 원칙에 따랐다면 남관계는 돌이킬 수 없는 큰 상처를 입었을 것이며,6자회담 재개와 2 13 합의 이행으로 미관계가 개선되는 상황에서도 남 관계는 적대와 반목에서 벗어 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관계에서 상호존중과 신뢰의 강조가 한이 무슨 행동을 해도 용인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우리가 신뢰를 가지고 대하는 만큼 측도 일방적 태 도를 배격하고 합리적으로 행동해야 한다는 요구를 담고 있다. 각종 남회담에서 정부 는 한의 부당한 언행에 대해서는 분명히 지적했으며 남이 합의한 약속의 이행을 요 구했다. 또한 우리가 이미 경고한 사안에 대해서는 단호한 태도를 견지했다. 신뢰에 대 한 강조의 이면은 합리성에 대한 요구인 셈이다. 노무현 대통령은 13기 민주평통자문회의 연설(2007년 7월 19일)에서 남관계를 회고하면서 상대를 포용하고 신뢰를 쌓아나간다는 원칙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것이 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남관계 전략 이라는 점을 재확인했다. 남관계에 있어서는 신뢰구축이야말로 최선의 원칙임과 동시에 전략이라는 것이다. 남관계는 핵문로 인해 참여정부 임기 내내 어려움을 겪었지만 마침내 2차 남정상회담의 성사에 이르게 되었다. 이는 상호존중과 신뢰라는 참여정부의 대정 책 원칙이 유효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2007 남정상선언 2항은 남관 계를 상호존중과 신뢰관계로 확고히 전환 시켜나가기로 하였다. 이는 기본적으로 1972 년에 발표한 7 4 공동성명 과 1992년에 발효된 남관계기본합의서 의 내용을 재확 2 장 동 아 시 대 구 현 을 위 한 평 화 번 영 정 책 39
대통령 발언 핵문가 풀리지 않는 동안에도 남 교류협력은 꾸준히 확대되어 왔습니다. 참여정부는 이 과정에서 관용과 신 뢰 구축이라는 일관된 원칙을 지켜왔습니다. 끊임없이 상대를 경계하고 적대해서 대결적 분위기를 조성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존재를 인정하고 포용하고 역지사지함으로써 신뢰를 쌓아왔습니다. 상대가 불합리하게 나올 때에도 인내심을 갖고 대화의 끈을 놓지 않았습니다. 상대방이 하는 대로 우리도 똑같이 대응해야 한다는 상호주의 로는 이처럼 어려운 대화를 이어나갈 수가 없습니다. 상호주의는 당장은 속시원할지 몰라도 국민의 안전과 평화에는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신뢰를 해치고 또 다 른 대립과 갈등을 불러올 뿐입니다. 상호주의로 얻을 수 있는 것은 수시로 발생하는 위기상황의 반복과 대결구도 밖에 없을 것입니다. 대강경책을 쓰지도 않았고, 비상을 걸어 국민을 불안하게 하지도 않았지만 한반도는 지금 그 어느 때 보다 안정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그동안 핵문의 해결 과정은 우리에게 매우 소중한 경험이었습니다. 상대를 포용하고 신뢰를 쌓아나간다는 원 칙을 일관되게 지켜나가는 것이야말로 가장 효과적인 남관계 전략임을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 2007년 7월19일 13기 민주평화통일자문회의 전체회의 연설 인한 것이지만 참여정부 대정책의 일관된 원칙이기도 하다. 또한 2007 정상선언의 30 여개 구체합의 대부분은 그 동안 남측에서 기되거나 요구한 사항들이다. 이는 측이 우리를 신뢰 하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실로 믿지 많으면 측이 수용하기 어 려운 안들이 다수 포함되어 있다. 특히 군사시설의 후방이동이 불가피한 해주 특구 1 편 총 론 : 동 아 시 대 구 상 과 평 화 번 영 정 책 40 건설이나 철도 화물 수송은 측 군부가 안보상의 이유로 꺼려했던 사업들이다. 이 측도 우리의 대정책이 한의 체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민족의 공동번영을 추 구하고 있음을 신뢰하고 있는 것이다. 참여정부의 대정책 추진 과정에서 가장 큰 장애요인은 퍼주기 대 저자세 한 눈치보기 친좌파 등과 같은 부당한 정치적 공세와 이에 따른 국론의 분열이었 다. 통일을 목표로 하는 대정책이 남과 의 통일은 차치하고 남과 남의 분열을 초래 하는 모순적 상황이 번번이 정부의 발목을 잡았다. 이에 대해서 참여정부는 대정책의 실체를 있는 그대로 국민에게 알리고 부당한 비난에 대해서는 당당하게 대응했으며, 신 뢰와 포용의 대정책이라는 기조를 놓치지 않았다.
2 균형적 실용외교
3 핵문 해결 진전과 한반도 평화체 1절 참여정부의 핵 해결 원칙과 방향 1. 한 핵문의 역사 핵문는 198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 및 동아 안보를 위협하는 최대의 안보 현안 이었다. 1989년 9월 프랑스 상업위성 SPOT(해상도 100m)의 영변 핵시설 사진 공개로 한의 핵개발에 대한 국적 우려가 증폭되었다. 동 위성사진은 한이 1987년 이후 가동 중인 자체 설계의 5MWe급 실험용원자로 외에 50MWe급, 200MWe급 원자로 및 핵재처리시설을 신규로 건설 중임을 보여주었다. 이에 따라 1990년 2월 국원자력기구(IAEA) 이사회에서 한에 대해 안전조치협정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42 체결 및 IAEA 사찰 수락을 촉구하는 결의가 있었다. 이에 대해 한은 1핵보유국의 비 핵국가에 대한 핵위협 금지, 2한반도 핵무기 철수, 3대한 핵무기 불사용(NSA) 보장 등을 핵 폐기의 조건으로 내세웠다. 그러나 IAEA 측은 상기 한의 요구가 IAEA 권 한 밖의 문라는 이유로 이를 거부하였다. 한 핵문가 국사회의 우려 대상이 되어가던 1991년 당시우리는남간협상
협상시 주요 쟁점 구분 남한 한 사찰 원칙 상호주의 원칙 의심 동시 해소원칙 사찰 방법 정기사찰과 특별사찰 병행 특별사찰 거부 사찰 대상 핵물질시설, 핵관련 군사기지 모든 주한미군 기지 성역(군사기지) 불허 측 군사기지 외 을 통해 핵 문를 해결하기 위해 노력했다. 1990년 9월 4일1차 남 고위급회담 개최 이후 남 대화가 본격 진행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편 1991년 후반에 들어서서 부시 대통령은 전술핵무기를 한반도에서 철수하겠다고 발표했고(9월 27일), 노태우 대 통령은 핵부재 선언을 발표했다.(12월 8일). 이러한 상황을 배경으로 남한은 12월 26 일~31일까지 3차에 걸쳐 판문점에서 개최된 핵협상을 통해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에 합의(12월 31일)하였다. 동 합의에 따라 한국은 1992년 1월 7일, 1992년도 팀스피리트 훈련 중단을 발표했다. 그리고 한은 1992년 1월 30일, IAEA와 핵안전조치협정에 서 명했다(1992년 4월 10일 발효). 한반도비핵화공동선언 합의에 따라 1992년 3월 19일 이래 남한은 수차례에 걸쳐 남핵통공동위원회(JNCC) 협상을 개최하여 남 상호 사찰의 범위 방법 절차 등을 논의하였다. 그러나 동 협상은 한 내 군사시설(의심시설)에 대한 임시사찰 거부 로 합의에 이르는 데 실패하였다. 한편 한은 IAEA와의 핵안전조치협정에 따라 1992년 5월 4일 보유 중인 핵시설에 관 한 최초보고서(Initial Report)를 IAEA에 출하였다. IAEA는 남 핵사찰 협상이 지지부진 한 가운데 1992년 5월 25일~6월 5일까지 1차 대 임시사찰을 실시하였다. IAEA는 1993 년 2월까지 총 6차에 걸친 임시핵사찰을 실시하였는데 그 과정에서 측이 신고한 플루 토늄 추출량과 IAEA 측 추정치 간에 중대한 불일치(discrepancy) 가 있음을 발견했다. 이러한 불일치 문를 규명하기 위한 IAEA의 특별사찰 문가 1992년 9월이후최대 현안으로 부각되었고, 특별사찰 문를 둘러싼 IAEA-한 간 대립이 고조되었다. 이런 가 운데 IAEA 이사회는 1993년 2월 한의 특별사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였다. 이에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43
흑연료를 경수로(LWR)로 대체하기 위한 협력 미 네바 합의 요지(1994년 10월 21일) 2003년을 목표로 2000MWe 용량의 LWR 공 주선 - 미국은 6개월 내 경수로 공급협정 체결을 위해 최선의 노력 경주 - 필요 시 쌍무 원자력협정 체결 최초의 LWR 완공 시까지 대체에너지 공 - 난방 및 발전용 중유 공 - 3개월 이내에 중유공 시작, 매년 50만톤까지 지원 미 측의 LWR 공급보장 1개월 내 흑연료 및 관련시설 동결, 궁극적으로 해체 - LWR 건설 완료 시 해체 완료 - LWR 건설 기간 중 5MWe 폐연료봉 안전 보관 및 처리를 위해 협력 미 간 정치 경 관계의 완전 정상화 지향 3개월 내 무역 투자 장벽 축소(통신 및 금융거래 포함) 영사 및 기술적 문 해결 후 연락사무소 교환 공동 관심사항 진전에 따라 대사급 쌍무관계로 격상 비핵화된 한반도의 평화 - 안보를 위한 노력 미국은 한에 공식 NSA(핵무기 불사용 약속) 공 한은 한반도비핵화 공동선언 이행을 위한 조치 실시/남대화에 호응 NPT 체 강화를 위한 협력 한은 NPT에 잔류하고 핵안전협정 이행 경수로 공급협정이 서명되는 즉시 한은 동결대상이 아닌 핵시설에 대한 IAEA 임시 및 정기 핵사찰 수용 한은 경수로 사업의 상당부분 완공 후 핵심부품 도착 이전에 IAEA 핵사찰 수용 대해 한은 IAEA 이사회의 불공정한 결의를 비난하면서 1993년 3월 12일 핵확산금지조 약(NPT) 탈퇴 성명을 발표하였다. 한의 NPT 탈퇴에 대해 유엔 안보리는 1993년 5월 11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44 일 1한의 NPT 탈퇴선언 재고 및 NPT 의무이행 재확인 요청 2한의 IAEA 안전조치 협정 이행 요청 3IAEA 사무총장의 대한 협의 및 결과 안보리 보고 요청 4당사자들 간의 대화를 포함, 관련국들에 대해 문해결 촉진 권유 5안보리는 필요 시 추가적인 조치를 검토하고 결정한다는 등을 담은 결의(825호)를 채택하였다. 안보리 결의를 토대로 미 간에 핵 문를 해결하기 위한 협상이 시작되었다.
1993년 6월 2일부터 뉴욕에서 갈루치 국무부 정치 군사 차관보와 강석주 외교부 1 부부장 간 1단계 미 고위급회담이 개최되었다. 미 고위급 회담은 1단계 회담 (1993년 6월 2일~7월 14일)과 2단계 회담(1993년 7월 16일~19일), 3단계 회담(1994년 7 월 8일~10월 17일) 등을 거치면서 우여곡절 끝에 기본합의문 (미 네바 합의)을탄 생시켰다. 이로써 핵 문가 해결되는 듯했다. 네바 합의는 한이 핵시설을 동결하고 궁극적으로 해체하며, 이를 대가로 미국이 1000MWe 경수로 2기와 연간 50만톤 중유공을 주선한다는 내용을 골자로 하고 있다. 경수로 핵심부품 도착 이전에 IAEA가 필요로 하는 모든 사찰(특별사찰 포함)의 수락을 명기하고 있으며, 아울러 미 관계 정상화 협의, 남대화 재개, 한반도 비핵화 공동 선언 이행 등도 규정하였다. 미 네바합의에 대한 공화당 계열의 비판에도 불구하고 미국의 클린턴 행정부는 네바 합의 이행을 위해 노력했다. 미국이 대 중유공급을 시작(1995년 1월 15일)하고 KEDO 한 간 경수로 공급협정이 체결(1995년12월15일)되어 공사에 들어가기도 하였다. 그러나 합의 이행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네바합의가 타결된 지 얼마 안돼 미 공화 당이 상하 양원을 장악하면서 네바합의 자체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가 지속적으로 기 되었다. 또한 1998년 8월 17일 미국 뉴욕타임스지는 한 핵시설 건설 중 이라는 목으 로 한이 평안도 금창리 지하에 거대한 핵시설을 신축하고 있다는 의혹을 기하였 다. 이런 상황에서 한은 1998년 8월 31일 대포동 1호의 다단계 미사일 발사 실험을 감행 하기도 하였다. 이는 핵무기 개발 자체보다도 군사적으로 의미를 갖는 운반체 기술이 한에서 개발되고 있다는 점에서 당시 국사회의 비상한 관심과 우려를 자아냈다. 그러나 이러한 긴장된 분위기 가운데에서도 한 미 일 공조를 바탕으로 한 핵 문 의 해결 노력은 지속되었다. 미 대표단의 2차례에 걸친 금창리 지하시설 방문(1999년 5월/2000년 5월)을 통해 의혹이 대부분 해소되었다. 또한 미국은 페리(W.Perry) 대 정책조정관이 방(99년 5월)한 결과를 토대로 보다 체계화된 대정책 보고서를 발표 (1999년 9월)하였다. 2000년 6월 남 간에는 역사적인 정상회담이 개최되었고, 한 조명록 차수의 방미(2000년 10월)와 올브라이트 미 국무장관의 방(2000년 10월) 등 미 관계 정상화를 위한 대화 분위기가 고조되었다.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45
그러나 2001년에 들어와 상황이 또다시 급변하기 시작하였다. 2001년 9 11 테러, 그리 고 2002년 1월 한을 이란 이라크와 함께 악의 축 으로 언급한 부시 대통령의 연두 국정연설은 미관계 변화의 신호탄이 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2년 10월 핵문 는 또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면서 한반도를 위기국면으로 몰고 갔다. 켈리 국무부 동아태 차관보 일행이 방했을 때(2002년 10월 3~5일), 한이 농축우라늄 개발계획을 시인했다 는것이미국언론(USA 투데이 및 뉴욕타임스)에 보도됨에 따라 2002년 10월 16일한 미 양국은 한에 대해 조속한 핵폐기를 촉구하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다. 2002년 11월 14일 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KEDO) 집행이사회는 한이 네바합의 의무를 위반한 데 대해 12월부터 대 중유지원을 중단하기로 결정했다. 이에 대해 12 월 12일 한은 외무성 대변인 담화를 통해 핵동결 해 및 핵시설 가동을 공표하고, 12 월 21일 핵동결 해조치 개시했고, 12월 31일에는 IAEA 사찰관을 추방하였다. 나아가 한은 2003년 1월 10일 NPT 조약 탈퇴를 선언하는 정부성명을 발표하고 2월 26일에 는 5MWe 원자로를 재가동하였다. 이에 맞서 국사회는 IAEA 특별이사회를 통해 대 재결의안을 채택(2003년 1월 6일)했으며, 특히 미국은 2003년 3월 4일 군사적 옵션도 테이블에 있다 고 경고하는 등 핵문를 둘러싼 미국과 한의 양보 없는 대결로 한반도에는 일촉즉발의 긴장이 조성되었다. 이에 따라 핵문는 네바합의 이전으로 회귀하는 2차 핵위기 국 면으로 빠져들었다. 참여정부 출범 전후에 전개되고 있던 이러한 상황은 한반도의 평화 가 얼마나 취약한 토대 위에 있는지를 보여주는 동시에, 언라도 외부요인에 크게 동 요될 수 있다는 것을 극명하게 드러내었다. 2. 핵문 해결 3원칙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46 핵문는 참여정부의 안보정책에 있어서 가장 우선적인 핵심 현안이 되었고, 나아 가 평화와 번영의 동아시대 구상 추진에 있어 최대의 장애요소가 되었다. 노무현 대 통령은 핵문 해결을 우리 안보의 핵심 현안으로 인식하고, 주요 고비마다 뚜렷한 원칙과 실질적인 문 해결을 중시하는 실용주의를 바탕으로 협상을 전개해나갔다.
2002년 12월 24일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외교통일안보분과 위원들을 주축으로 핵 T/F를 구성토록 하고 모든 노력을 다해 핵문를 해결하라 고 지시했다. 핵 T/F의 첫 작업 가운데 하나는 12월 27일 대통령 당선자가 발표한 핵문 관련 성명이었다. 이 성명을 통해 노무현 대통령 당선자는 명분이 무엇이든 한의 핵은 한반도와 동아의 안정과 평화에 결코 바람직하지 않으며, 한 자신의 안 정과 번영에도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입장을 천명하였다. 핵 3원칙과 주요 합의 내용 핵 3원칙 1 핵불용 2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3 우리의 적극적 역할 9 19 공동성명 2 13 합의 10 3 합의 목표 : 한반도 비핵화를 평화적 방법으로 달성 핵심 내용 한,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계획 포기 조속한 시일 내 NPT와 IAEA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임을 공약 미국, 대공격 침공 의사 없음을 확인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준수 이행 적절한 시기에 대 경수로 공 문에 대해 논의 미는 상호 주권 존중, 평화공존, 관계정상화 조치 약속 6자는 에너지, 교역 및 투자 분야에서 경협력 증진 동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 직접 당사국 등은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 평화체 협상 초기단계 조치 : 합의 후 60일 이내 영변 핵시설 폐쇄 봉인, 불능화 IAEA 사찰관 복귀 핵폐기 대상 모든 핵 프로그램의 신고 목록 협의 미/ 일 관계정상화 위한 양자 대화 개시 중유 100만톤 상당 에너지 지원 한반도 비핵화, 미/ 일 관계정상화, 경 에너지 협력, 동아 평화 안보체 등 5개 W/G 30일 내 회의 개최 - 초기조치가 이행 되는 대로 6자 장관급 회담 신속 개최 - 직접 당사국 간 별도포럼에서 한반도 평화체 협상 개시 다음단계 이행 조치 모든 핵프로그램에 대한 완전한 신고 및 모든 현존 핵시설의 불능화 추진 동 기간중 중유 100만톤 상당의 경 에너지 인도적 지원 공 금년내(2007.12.31까지) 영변 5MWe 원자로, 재처리 시설, 핵연료봉 조시설 불능화 완료, 모든 핵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2007.12.31까지 공), 핵물질 기술 또는 노하우를 이전하지 않는다는 공약 재확인 미, 한의 비핵화 조치 등과 병행하여 미 WG에서의 공약 (테러지정국 해 적성국 교역법 종료 등) 완수 중유 100만톤 상당의 경 에너지 인도적 지원 공 적절한 시기에 베이징에서 6자 외교장관회담 개최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47
노무현 대통령은 2003년 2월 25일16대 대통령 취임사에서 핵문와 관련 1 핵 불용 2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3우리의 적극적 역할이라는 핵 해결 3원칙을 대 내외에 천명하였다. 참여정부는 이러한 3원칙을 기초로 정책의 일관성을 유지하면서 핵문를 적극적으로 해결해 왔다. 그 과정에서 한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 등 무 모한 행위를 감행하고 이를 빌미로 대 강경대응을 주장하는 보수 강경파들의 비판과 주장이 거센 힘을 발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참여정부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핵해결 3원칙을 견지하였다. 또한 참여정부는 한반도에서 긴장이 고조돼서는 안되며, 외교 적 평화적으로 핵문가 해결되어야 한다는 확고한 입장을 유지하면서 냉정하게 상 황을 판단하고 치밀하게 협상전략을 수립하고 정책을 집행했다. 그 결과 참여정부는 핵문 해결의 청사진이라고 할 수 있는 9 19 공동성명 을 도출하는 데 주도적인 역 할을 했다. 또한 2007년 2 13 합의 와 10 3 합의 라는 성과도 이끌어내었다. 3. 핵문 해결을 위한 대통령 구상 노무현 대통령은 핵문 해결을 위해 2003년 5월한 미 정상회담, 6월한 일정 상회담, 7월 한 중 정상회담 등 매달 한차례씩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를 통해 참여정 부는 유관국들에게 현실성 있는 대안을 시하고, 핵 문의 평화적 해결을 위한 길 을 터 나갔다. 참여정부는 2004년 후반에 들어와 핵 해결 3원칙 이외에 보다 구체적이고 체계적 인 핵 해결 방향을 시했다. 2004년 11월 칠레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 공식 방문 길에 오른 노무현 대통령은 11월 13일 중간기착지인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하여 첫 일 정으로 국문협의회(WAC) 주최 오찬 연설(LA 연설)을 하였다. 이 연설에서 시작하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48 여 12월 18일 일본 실무방문까지 일련의 순방 기간 동안 노무현 대통령은 핵 문 해결방안에 관해 체계적인 대통령 구상 을 밝혔다. 참여정부는 이러한 대통령 구상에 입각해 핵문 해결노력과 함께 한반도의 평화 안정이라는 근본적 국익을 일관되 게 추구했다.
핵문만 집중해서 해결하면 쉬울 것입니다. 한체에 대한 어떤 가치판단과 불신이 결합되어서 그 문가 먼저 해결돼야 한다는 전를 갖고 있으면 (핵 문는) 안풀리고 복잡해 지는 것입니다. 그것이 핵심입니다. (12월 6일 프랑스 동포간담회)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핵문와 관련하여 유관국가들과의 협의 과정에서 우리의 의 사가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였다. 핵관련 정책판단의 결과는 여타국과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우리의 평화와 안전, 미래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친다는 점에 주목한 것이다. 핵 문를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데 초점을 맞추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었다. 정책판단 과정에서 우리가 가장 강한 발언권을 행사해야 합니다. 한과 한민족이 고가장인접해있고, 한의 조그만 일로부터도 생존 자체를 위협받을 수 있기 때문입 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한국정부의 자세와 의지, 그리고 국민들의 의지입니다. (11월 23일 하와이 동포간담회) 노무현 대통령의 대인식은 1한의 붕괴는 불가능하며 2변화와 핵포기가 불가피 하다는 입장이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한이 내핍과 위기관리에 익숙한 체로 한국과 중국이 불원하고 인접국도 심각한 사태로 간주하는 한 한의 붕괴는 불가능하며 또한 한 내부의 조직화된 저항세력도 존재하지 않는다는 인식을 갖고 있었다. 한 정권은 무력으로 침공하기 전에는 무너지지 않을 것입니다. 내부의 저항세력 이 조직화 되어 있지도 않습니다. (12월 2일 한 영 정상회담) 중국이 붕괴 안되도록 지원하고 한국도 붕괴를 불원하며 인접국에 큰 문가 될 수 있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 (12월 6일 한 프 정상회담)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49
또한 노무현 대통령은 한의 개혁 개방은 불가피하며, 그 변화는 이미 시작되었다 고 판단하였다. 아울러, 노무현 대통령은 한은 중국 베트남 러시아 EU 등을 다 니면서 시장경 메커니즘 학습에 열을 올리고 있고, 남경협에도 적극적인 입장을 보 이고 있다. 한 변화의 실질적 지표인 자본 과 시장 관념이 부분적으로 형성되고 있 다 는 인식을 보였다. 시장거래가 적은 규모지만 시작됐고, 이미 상당 수준으로 받아들여져 돌이킬 수 없는 단계로 보입니다. (11월 13일 국문협의회) 개성공단 건설을 위해 휴전선에서 불과 24km 떨어지고 한의 주공격로서 군사집 결지인 개성의 군사시설을 자진 철폐한 것은 한이 변하고 있는 증거입니다. (12월 2일한 영 정상회담) 이러한 관점에서 변화를 시작한 한으로서는 핵포기가 불가피할 것이라고 평가되 었다. 한의 경발전을 위해서는 국사회의 안전보장과 경지원이 긴요하며, 더군 다나 한국과 중국의 도움 없이는 최소한의 생계유지조차 곤란한 상황이기 때문에 핵무 기 보유와 안전보장 경지원은 양립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핵무기를 보유하면서 안전보장과 지원을 받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결국 핵무기를 포기하고 국사회의 보상, 정상적인 대우, 교류와 경지원 을 선택할 것입니다.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50 (12월 6일 프랑스 동포간담회) 이러한 상황인식에 바탕을 둔 노무현 대통령의 핵 해법은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원칙하에 전략적 결단으로 돌파구를 마련하는 것이었다. 먼저, 대화를 통한 평화적 외 교적 해결은 참여정부의 확고부동한 원칙으로 대화 이외의 다른 대안은 받아들일 수 없
음을 분명히 밝혔다. 이러한 노무현 대통령의 입장은 1무력행사는 우리민족의 생존이 걸린 문이며 또다시 전쟁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으로 절대 불가하고, 2봉쇄정책도 불안과 위협의 장기화를 초래할 것이며, 3붕괴시도는 한의 모험주의적 행동을 촉발 하여 우리에게 큰 재앙이 될 수 있다는 인식에 바탕을 두고 있다. 핵문는 반드시 평화적으로 해결되어야 하며, 화해와 포용을 통해 한변화를 유도하는 것 이외에는 대안이 없습니다. (12월 2일 한 영 정상회담) 노무현 대통령이 밝힌 핵 해법의 두 번째 방법은 핵 문를 최우선적 과로 삼 아 조기해결을 추진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직접 피해를 받는 당사자이기 때문에 핵 문의 장기화를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이다. 따라서 핵 방치론 이나 선의의 무시 론 등을 불식시키고 핵문의 시급성 중요성에 대한 유관국 간 공동인식 형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핵문를 부시 행정부 2기의 정책 우선순위 1번으로 삼아 6자회담의 틀 속에서 평화적 외교적 방법으로 조속히 해결함으로써 6자회담 참가국 및 전세계 국민들에게 평화와 희망을 주는 것이 필요합니다. (11월 20일 한 미 정상회담) 핵 해법의 세 번째 방법은 전략적 결단 이 한과 유관국 양방향에서 나와야 하고 이를 위해 상호 존중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한은 핵을 포기하는 대신 안전을 보장받 고 경발전을 이룩하겠다는 전략적 결단을 내려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한은 국사 회의 안전보장 약속을 신뢰해야 하며, 아울러 성의 있는 대화와 합리적 행동 자세를 가 져야 한다. 마찬가지로 유관국은 한에 이러한 기회를 줄 것인지에 대한 전략적 결단, 즉 한을 신뢰하고 대화 상대방으로 인정할 것인지 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중요하다. 한의 과거 행태로 볼 때 한을 불신하는 것은 당연할 수 있으나 희망을 보여주고 기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51
회를 주는 것이 우선되어야 하며, 대화를 위한 스처의 내용을 보다 합리적이고 균형 적으로 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6자회담을 성공시키기 위해서는 한이 핵을 포기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려야 합 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한이 이러한 결단을 내리도록 우리 또한 몇 가지 문를 해 소하고 조정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11월 13일 국문협의회 연설) 한을 자극하지 말고 유리한 분위기를 조성토록 노력해야 합니다. (11월 20일한 미 정상회담) 합리적 수용 범위에서 행동하고 필요한 결단을 내려야 합니다. 끝내 핵무기를 개 발하는 상황이 진행되면 누구도 장담할 수 없을 것입니다. (12월 6일 프랑스 동포 간담회) 이러한 접근방법을 토대로 참여정부는 2004년 12월 18일 국가안전보장회의 상임위 에서 1핵 문에 대한 정부의 기본입장, 2핵문의 평화적 해결의 중요성, 3대 화를 통한 핵 문 해결의 가능성, 4핵 문 해결을 위한 우리의 역할, 5한의 전략적 결단 촉구, 6유관국과의 유연한 대응 주문, 7한의 붕괴 가능성, 8한의 개 혁 개방 전망, 9대화상대로서의 한 인정 문, 10한 인권문 라는 10가지 항목 에 대한 입장을 최종적으로 정리 결정하였다.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52
2절 6자회담과 핵 해결과정 1. 6자회담의 출범과 전개 1) 6자회담의 구성과 협상 개시 2002년 10월 17일 한국 외교부와 미국 국무부는 한의 농축 우라늄 개발의혹을 공 식 기하였다. 이른바 2차 핵 위기가 시작된 것이었다. 2002년 후반과 2003년초 반에 이르기까지 핵 문를 둘러싼 미 간 긴장이 고조되면서 우리나라를 포함한 주변국의 중재 노력 또한 강화되었다. 참여정부는 핵 해결 3원칙을 바탕으로 관련국 들과의 긴밀한 협력을 통해 문를 평화적으로 해결한다는 기조에서 정책을 추진하였 다. 특히 우리 정부는 군사 안보 경 문 등이 복합된 핵 문 해결은 어느 한 나 라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는 인식하에 다자협력의 필요성에 공감하고 다양한 협의체 를 검토하였다. 초기에 한은 핵문는 미 간의 문이며, 미국의 대 적대시 정책의 산물인 만큼 미 양자협의를 통해 풀어야 할 문라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러나 우리를 비롯하여 미국과 중국 등의 적극적인 노력에 힘입어, 2003년 4월 12일 한은 대화형식 에 구애받지 않겠다는 입장을 표명하였다. 이를 계기로 4월 23일부터 이틀간 미 중 3자 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담에 한국이 배되면서 일부에서는 우리 의 주도적 역할 실종, 왕따 당한 주도적 외교 라는 비판도 기되었다. 그러나 노무현 대통령은 형식에 관계없이 무조건 대화부터 시작해야 한다 는 입장을 미 측에 확인해 주었다. 노무현 대통령은 실질적 문 해결을 위해서는 대화를 통해 상호 신뢰부터 회 복해야 한다는, 즉 형식보다는 내용을 중시하는 실용주의적 접근을 택한 것이었다. 미 중 3자회담 직후 미 측 수석대표였던 켈리(Kelly) 차관보는 서울을 방문하여 다음 회담부터는 한국과 일본의 참여가 필수적임을 강조하였다. 이어 개최된 5월 14일 한 미 정상공동성명에서 이를 재차 확인하면서 우리나라와 일본의 참여가 결정되었 다. 마지막 남은 러시아는 3개월 뒤인 2003년 8월 한의 요청을 수락함으로써 참여하 게 하였다. 이로써 6자회담의 형태가 완성되었다.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53
2003년 8월 27일부터 29일까지 2박 3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개최된 1차 6자회담은 핵문 해결을 위한 대화 과정을 시작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세차례개최된전 체회의와 회의장 곳곳에서 수시로 열린 양자협의를 통해 회담 참가국들은 서로간의 입장 을 보다 잘 이해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으며, 대화를 통해 문를 해결할 수 있다는 가능 성을 확인하였다. 회의 결과, 참가국들은 핵문의 평화적 포괄적 해결, 한반도 비핵 화, 한 안보 우려 해소, 6자회담 지속 등 기본 원칙에 대해 공감대를 형성하였다. 또한 차기회담을 개최한다는 원칙에 합의함으로써 대화의 모멘텀을 유지할 수 있게 되었다. 우리 대표단은 한 미 일 3자협의및남 간 접촉, 각종 양자협의 등을 통해 원활한 회담 분위기 조성에 기여하였다. 1차 회담부터 확인된 우리나라에 대한 각국의 신뢰는 향 후 6자회담 내 대화 촉진자 로서의 우리의 역할과 활동에 든든한 기반이 되어주었다. 약 6개월 뒤인 2004년 2월 25일 참가국들은 조어대에 다시 모여 나흘간 2차 6자회 담을 개최하였다. 참가국들은 지난 1차 회담 결과를 바탕으로 한 핵 폐기, 대 안전 보장, 핵동결 등 주요 안건에 대해 보다 심도있는 협의를 진행하였다. 또한 회담 정례화 및 차기 본 회담 준비를 위한 실무그룹 구성에도 합의함으로써 대화 과정을 안정화하고 회담을 지속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하였다. 2차 회담의 최대 성과는 바로 2차 핵위기 대두 이후 최초로 공동 합의 문건을 생산 하였다는 것이다. 의장성명(Chairman s Statement) 형식으로 채택된 합의문은 핵 문 해결 원칙을 서면으로 정리하여 대외적으로 공포함으로써, 향후 회담 진행의 방향 을 시하고 6자회담 진전의 모멘텀을 마련하였다. 불과 1년 6개월 전까지 평행선을 달 리던 미국, 한과 한반도에 대한 상이한 이해를 가졌던 한 중 일 러가 한자리에 모 여 서면합의를 도출하였다는 사실에 국사회는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다. 힘을 얻은 참 가국들은 보다 큰 성과를 거두기 위해 차기 회담 준비에 착수하였다.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54 두 차례의 실무그룹 회의를 거쳐 2004년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개최된 3차회담 은 준비 과정이 철저했던 만큼 실속있는 회담이었다. 참가국들은 한국, 미국, 한이 의한 구체적인 안을 중심으로 핵폐기 원칙, 핵동결 폐기 방안 및 이에 대한 상응조 치 그리고 농축우라늄 문 등에 대해 심도있는 협의를 가졌으며, 각국 간의 입장 차이 는 향후 대화를 통해 해결해 나가기로 하였다. 특히 한의 농축 우라늄 프로그램 문,
핵폐기의 구체적인 사항, 상응조치 등에 있어 참가국 모두는 추가 논의의 필요성에 공 감하고, 가능한 빠른 시일에 실무그룹 회의를 개최하여 앞으로 3개월 내 개최될 차기 회담을 위한 준비에 만전을 기하기로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합의에도 불구하고, 한은 미국의 대 적대시 정책 폐지 및 대 상 응조치 참여, 6자 회담에서의 남한 핵물질 실험 문 우선 논의 등을 조건으로 시하 면서 회담 개최를 지연시켰다. 2) 대 중대안과 6자회담의 재개 2005년초 미관계가 악화되면서 한 핵문도 어려운 국면으로 빠져들고 있었 다. 라이스 국무장관이 상원 인준 청문회(2005년 1월 18~19일)에서 한을 폭정의 전 초기지 로 규정하고, 이어 부시 대통령이 대통령 취임사(1월 20일)에서 전세계에 자유 를 확산할 것이며 항구적 폭정 을 용납하지 않겠다 고 천명하는 등 민감한 발언들이 미 최고 당국자들로부터 쏟아져 나왔다. 한은 이에 정면으로 대응하여 2월 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핵보유 를 선언하면 서 6자회담을 무기한 중단할 것 과 핵무기고를 지속 증강해 나갈 것 임을 강조하였 다. 양측 간의 대결이 악화일로를 치달으면서 핵문 해결을 위한 6자회담 재개는 기 약이 없었고, 핵문 해결의 실마리를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야 할지 막막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경색국면 타개를 위한 각국의 노력이 진행되었다. 왕자루이 중국 당 대외연락부장이 한을 방문(2월 19~22)하여 김정일 위원장을 면담, 6자회담 복귀 를 설득하였고, 라이스 국무장관이 일본(3월 18~19일), 한국(3월 19~20일), 중국(3월 20~21일)을 순방하면서 해결방안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한은 6자회담을 군축회담으로 전환할 것 을 요구(3월 31일, 외무성 담화) 하고, 폐연료봉 8,000여 개 인출 완료를 주장(5월 11일, 외무성 대변인)하는 등 상황은 나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핵 해결을 위한 우리의 노력도 적극적으로 진행되었다. 바로 대 중대안 이 그것이다. 한의 핵보유 선언과 6자회담 무기연기 선언(2005년 2월 10 일) 이후, 악화일로를 치닫는 핵 상황을 대화국면으로 전환, 한을 6자회담의 장으로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55
나오게 함으로써 핵문를 평화적으로 해결해 나가기 위한 중대안 이 마련되었다. 이러한 중대안은 남 차관급회담 (2005년 5월 16~19일)에서측에대해사전 설명을 하였으며, 정동영 특사(통일부 장관) 방시 김정일 국방위원장 면담(2005년 6 월 17일)에서 측에 전달되었다. 이후 우리 정부는 미국 등 유관국에 대해 설명하였으 며, 2005년 7월 12일 동 방안을 공식적으로 발표하였다. 대 중대안(2005.7.12) : 대 직접 송전계획 6자회담에서 한이 핵 폐기에 합의하면 신포 금호지구 경수로 건설공사를 종료하는 대신 우리가 200만 kw의 전력을 한에 직접 송전 방식으로 공함 대 중대안은 다음과 같은 점에서 의의를 갖고 있다. 먼저, 핵문의 직접 당사 자로서 핵문를 조기에 그리고 주도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안이다. 핵문로 인해 한반도 위기가 지속되면 우리의 경 사회적 안정은 크게 흔들릴 수밖에 없다. 한반도 평화와 안정을 위해서는 교착상태에 있는 핵상황을 대화국면으로 전환시키고 실질 적 해결과정으로 진입시킬 필요성이 절박했는데, 그 과정에서 우리가 적극적이고 주도 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판단에 따라 이루어진 결단이었다. 둘째, 중대안은 새로운 비용을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1994년 미 네바 합의 에 따른 경수로 건설에 들어가게 되는 비용으로 추진한다는 것이다. 중대안 당시에는 네바합의에 따라 추진되었던 경수로 건설공사가 2년째 중단된 상태였으며, 동 사업이 재개될 경우 우리 측은 잔여 공사비 35억달러 가운데 최소한 24억달러(70%)를 추가로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56 부담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중대안의 경우, 핵심요소인 대 송전로 건설과 변환설비 건설 등에 소요될 비용이 이 범위 내에서 충당 가능한 것으로 추정되었다. 즉 추가적 비 용 없이 핵관련 교착상황을 타개하고 신속한 비핵화 과정으로 나아갈 수 있는 방안으 로 중대안이 검토된 것이다. 셋째, 남과 이 함께 번영하고 민족경의 균형적 발전에 기여할 수 있는 안이었
다. 동 방안이 실행될 경우 핵문 해결을 촉진시킴으로써 한반도 평화정착에 결정적 으로 기여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남 경협력을 획기적으로 발전시킬수 있는 전기가 마련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우리의 대 중대안에 힘입어 한은 결국 7월 9일 4차 6자회담에 참석 할것 임을 발표하게 되고, 4차 6자회담 1단계 회의가 7월 26일~8월 7일까지 베이징 에서 개최되었다. 물론 한이 대화에 나오게 된 계기가 전적으로 우리의 대 중대 안에 의한 것이라고는 할 수 없다. 힐 차관보와 김계관 한 외무성 부상이 7월 9일베 이징에서 접촉하였고, 라이스 국무장관이 중국(7월 9~10일), 일본(7월 11일12일), 한국 (7월 12~13일)을 순방하였으며, 탕자쉬엔 중국 국무위원이 후진타오 주석의 구두친서 를 가지고 한을 방문하는 등 대화재개를 위한 관계국들의 노력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 중대안이라는 획기적이고 창의적인 안을 가지고 관계국들로 하여금 대화하고 협력할 수 있는 기초를 공함으로써, 경색국면을 타개하고 6자회담이 재개 될수 있도록 하는 데 참여정부가 중요한 기여를 한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3) 4차 6자회담의 개최 2005년 7월 26일 13개월여 만에 4차 6자회담이 재개되어 13일간(7월26일~8월7일, 1단계 회의) 협상을 계속했다. 참가국 모두가 폐막일을 정하지 않고 합의를 도출할 때 까지 협상을 계속한다는 각오로 진지하고 집중적인 협상을 진행하였다. 회의 결과, 참 가국들은 6자회담의 목표와 원칙을 담은 공동문건의 채택이 필요하다는 점에 합의하였 다. 아울러 한반도 비핵화, 대 안전보장, 관계정상화 등 동 문건 내용의 대부분에 대 해 참가국들의 의견이 일치하는 성과를 거두었다. 1단계 회의의 모멘텀이 계속 유지되는 가운데 4차 회담2단계 회의(9월 13~19일) 가 개최되었다. 2단계 회의에서 참가국들은 핵심쟁점에 대해 집중적이고 깊이있는 협 상을 진행하였다. 협상 과정에서 서로간의 현격한 입장 차이로 인해 협상이 결렬될 위 기도 몇 번이나 있었다. 그때마다 우리는 적절한 타협안을 시하고 문안 타결 시까지 휴회에 반대한다는 입장을 견지하면서 합의 도출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분위기를 조성 하였다. 우리는 창의적인 사고를 통해 구체 문안을 시해 가면서 관련국 설득에 총력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57
을 기울였다. 결국 경수로를 포함한 최종문안은 협상 타개를 위해 우리가 시한 구상 을 상당부분 반영하고 있다. 공동성명 채택을 위한 협상과정은 우리의 외교력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시너지 효 과를 발휘한 시기였다. 특히 4차 6자회담 2단계 회의 기간(9월 13일~19일)은 대통령 및 외교통상부 장관의 유엔 방문, 평양에서의 남 장관급 회담 등과 겹쳤다. 우리 정부는 이를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회담 진전을 위해 관련국들을 설득하는 데 주도적 역할을 발 휘했다. 반기문 외교통상부 장관은 뉴욕에서 유엔 총회 기간 중 라이스 미 국무부장관 과총7회의 긴급 통화 및 회담을 통해 공동성명의 최종 쟁점을 타결하기 위해 노력하 였다. 아울러 반 장관은 일본 중국 등 관련국 외교장관들과 협의하는 등 총 10여차례 이상의 협의를 개최하였다. 핵심 쟁점에 대한 집중적인 의견 조율과 우리를 포함한 관 련국들의 노력 결과, 마침내 6자회담이 처음 개시된 이후 2년여 만에 참가국 만장일치 로 회담의 목표와 원칙을 담은 9.19 공동성명 이 채택되었다. 2. 9 19 공동성명과 6자회담의 공전 1) 9 19 공동성명 의 주요내용과 의미 9 19 공동성명 은 2년 이상의 기간을 끌어온 6자회담 과정 중에서 도출된 최초의 실질적 합의로서 핵문의 평화적 외교적 해결을 위한 이정표를 시했다. 9 19 공동성명 의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우선 참가국들은 6자회담의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임을 다시 한번 확인 하였다. 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하는 핵프로그램 을 포기하고, 조속하게 NPT 및 IAEA 안전조치에 복귀할 것을 공약하였다. 미국은 한반도 내 핵무기가 존재하지 않는 2 편 균 형 적 실 용 외 교 58 다는 점과 한에 대해 공격 또는 침공의사가 없음을 확인하였다. 또한 한은 평화적 핵에너지 이용에 관한 권리를 보유하고 있음을 표명하고, 여타국은 이에 대해 존중을 표하고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공 문를 논의하기로 하였다. 둘째, 한과 미국 및 한과 일본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하였 다. 이는 일강점기와 분단, 그리고 한국전쟁 시기에 형성된 한과 일본, 한과 미국
9 19 공동성명 요지 1 6자회담 목표가 한반도의 검증가능한 비핵화임을 재확인 - 한은 모든 핵무기와 현존 핵프로그램 포기, 조속한 NPT 및 IAEA 안전조치 복귀 공약 - 미국은 한반도 내 핵무기 부재 및 한에 대한 공격 또는 침공의사 부재 확인 - 한반도 비핵화 공동선언 준수 및 이행 필요성 - 여타국은 한의 평화적 핵이용권 존중 및 적절한 시기 경수로 공문 논의에 동의 2 미와 일은 관계정상화를 위한 조치를 취할 것을 약속 3 6자는 에너지, 교역, 투자 분야에서의 경협력을 증진시킬 것을 약속 - 여타국은 대한 에너지 지원 공 용의 표명, 한국은 200만KW 전력공급 안 재확인 4 6자는 동아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 노력할 것을 공약 -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적절한 별도 포럼에서 한반도의 영구적 평화체 관해 협상 5 6자는 단계적 방식으로 상기 합의 이행을 위해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할 것을 합의 6 5차 6자회담을 11월 초 베이징에서 개최키로 합의 과의 적대관계가 종식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셋째, 6자는 에너지, 교역 및 투자 부문에서 양자적 혹은 다자적으로 경 협력을 증 진시키기로 합의하였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중국, 일본, 러시아, 미국은 한에 에너지 지원을 공할 용의를 표명하고, 우리나라는 2005년 6월 12일 발표한 200만KW 전력 공급 안을 재확인하였다. 넷째, 6자는 동아 지역의 항구적 평화와 안정을 위해 공동으로 노력할 것을 약속하 였다. 직접 관련 당사국들은 별도의 적절한 포럼에서 한반도의 항구적 평화체에 대해 협상하기로 하였다. 아울러 6자는 동아 안보 협력을 증진하기 위한 방안과 수단을 모 색하기로 합의하였다. 3 장 핵 문 해 결 진 전 과 한 반 도 평 화 체 5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