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2 보훈문예물 공모전 당선작 모음 아버지의 비석
발 / 간 / 사 2012 년의 10 월, 가을의중턱에와있습니다. 보훈문예물공모전도어느새 16 회를맞이하여 후대에전달할수있는국가유공자와그가족들의이야기가축적되어, 훌륭한나라사랑 교육사료로활용되고있습니다. 대한민국은독립 - 호국 - 민주화 - 경제성장으로이어지는굴곡의역사속에서식민지 경험과 6 25 전쟁의폐허를딛고 60 년만에세계 10 대부국으로거듭났습니다. 며칠전우리나라가 UN 안보리이사국에 16 년만에재진출했다는소식과, 녹색기후기금 사무국을국내에유치하였다는낭보는, 이제는세계를이끌어가는대한민국의위상을 대내외에과시하는하나의사례로취급될정도가되었습니다. 우리가누리고있는경제성장과자유민주주의의발전은국가유공자의희생과헌신위에 이룩된것으로, 그분들의희생이헛되지않도록이나라를튼튼히지켜나가야할것입니다. 이를위해국가보훈처에서도자라나는세대가우리의역사를바로알고호국정신과 나라사랑정신을함양할수있도록최선을다하겠으며, 보훈문예물공모전사업도지속 적으로추진해가고자합니다. 올해의보훈문예물공모전에서는전국의초등학생부터고령의참전용사에이르기까지 많은분들이정성껏참여해주셨습니다.
젊은세대의작품을통해우리청소년들의가슴속에호국선열들에대한무한한존경과건전한국가관이자리잡고있음을볼수있었고, 참전용사의생생한수기에서는전쟁의참상을통해자유와평화가얼마나귀중한것인지를다시한번느낄수있었습니다. 전체적으로매우우수한작품이많았으며, 해를거듭할수록응모작품의수준이향상되고있어매우기쁘게생각합니다. 이뜻깊은작품을많은국민이읽고호국영령께감사하는마음을갖게 되기를바라는마음에서, 수상작들을모아한권의책으로엮었습니다. 지면이 한정되어응모작품을모두싣지못한점을매우아쉽게생각합니다. 아무쪼록보훈문예작품당선작모음집을통해, 대한민국을위해희생하고 헌신하신분들의나라사랑정신이독자들가슴속에깊이전달되기를바랍니다. 바쁘신가운데에도훌륭한작품을엄선해주신심사위원여러분께깊은 감사를드리며, 귀중한작품을보내주신응모자여러분께도감사와격려의 말씀을드립니다. 2012. 10. 26. 국가보훈처장박승춘
Contents 최우수상 160- 아직끝나지않은전쟁! 손대익 _ 경북포항시 우수상 183- 패전의그날 민경식 _ 인천남구 장려상 210- 나의 6.25 참전기 박명호 _ 서울동대문구
국가보훈은 대한민국의 과거-현재-미래입니다.
아직끝나지않은전쟁! 160 패전의그날 183 나의 6.25 참전기 210
최우수상 아직끝나지않은전쟁! 손대익 경북포항시 잊혀진전쟁 6 25전쟁이발발한지어느덧 62년이넘어섰지만, 6 25전쟁은정말우리에게 잊혀진전쟁 인듯하다. 중앙일보 (2012년 6월 25일자 ) 를보면 학생들 30%, 6 25 전쟁언제일어났는지몰라 라는기사는충격적이다.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 설문조사기관인두잇서베이가서울시내초등학교 6학년, 중3, 고2 등 989명과전국대학생 1~4학년 625명을대상으로 6 25 전쟁에관한인식조사를벌인결과에따르면 한국전쟁은누가일으켰다고알고있느냐 라는질문에학생 76.3% 가 북한 이라고답했다. 북한외남한 미국 중국 일본 러시아라고응답한학생들은 23.7% 였다. 북한이아닌다른나라라고응답한답변가운데중3 학생은러시아 (12.1%) 를, 고2 학생들은미국 (11.5%) 을가장많이언급했다. 통일을부정적으로바라보는인식도뚜렷했다. 한국과북한이통일이된다면언제쯤으로보나 라는질문에 당분간안될것이다 라는응답이 41.6% 로가장많았다. 10년이내 라고응답한학생들은 8.9% 에불과했다. 통일을할필요가없다 는응답도전체의 15.4% 에달했다. 할필요가없다 는응답은초6(11.7%), 중3(18.8%), 고2(20.0%) 로학년이올라갈수록비율이높았다. 한국전쟁발발연도를묻는질문에는 10명중 7명 (69.6%) 꼴로 160 아버지의비석
1950년 이라고응답했다. 16% 는 1945년 이라고답했다. 현재우리국민의 70% 이상은전쟁을경험하지않은세대들로서점차전쟁을잊어가고있다. 그러나그전쟁은아직끝나지않았다. 1953년남과북은휴전협정을맺고전쟁을쉬고있을뿐남과북은여전히대치상태에있다. 아직끝나지않은전쟁을기억시키기위해서나의 6 25 참전경험을기록으로남기려한다. 오로지 ' 구국의일념 으로참전 나라의위기앞에서과연어떤선택을해야하는지학생여러분들은깊이 생각해보기를바랍니다! 교장선생님은조회시간을이용해나라의위기앞에용기를낼것을우리들에게호소했다. 당시나는포항중학교 6학년에다니고있었는데, 교장선생님의감동어린호소로우리학교에서는 300명이상의지원자가나섰다. 1950년 7월초. 장마로인해후덥지근한날씨였다. 전쟁이터졌다는소식과함께, 일주일만에서울을빼앗겼는소식을들었다. 6 25동란이일어난후, 전세는인민군에게밀리고있었지만그때만해도곧전세가좋아지리라는낙관적인전망을하고있을때였다. 그러나 7월상순으로접어들고영덕, 울진까지적이남하하고있다는소식이전해졌다. 적이무서운기세로남하하고있다는소식이전해졌다. 포항에서자취를하며학교에다니던나와친구들은공산군으로부터나라를지켜야겠다는굳은결심을했다. 전세가호전되어돌아오면다시복교를해주겠다는전제하에우리는모두지원입대를결의했다. 아버지의비석 161
우리모두전선으로함께떠나자! 떠나자! 양양한앞길을바라볼때에혈관에파도치는애국의깃발넓고넓은사나이마음생사도다버리고공명도없다보아라, 휘날리는태극깃발은천지를진동하는승리의함성 무궁화제일강산대한의학도화랑도그의정신내몸에받아서충성과정열로손을깨물어우리들은신대한의학도지원병 전쟁이무엇인지도몰랐던우리는 학도지원병가 를부르며한껏기분이고무되어있었다. 그러나부모의동의도없이미성년자를자원입대시켜서는안된다는학부모들의거센항의가이어졌다. 결국학교에서는부모동의서를받은사람만자원입대할수있도록조치를했다. 학도병으로서의출전을하루앞두고나는커다란난관에봉착해있었다. 내가출전한다는소식을전해들은부모님은송라면집에서 60리길을찾아나를말리러오셨다. 꼭가야되겠나? 162 아버지의비석
예, 친구들하고다약속해놨습니다! 의리가있지어떻게안가겠습니까? 부모님은더이상만류하지않으셨다. 당시 19살이었던나는우리송라면에서한두명밖에없는중학교학생이었고, 6남매의장남이었다. 대를이어야할장남이살아돌아온다는보장도없는전쟁터에자원입대한다는데도부모님은차마반대하지못하셨다. 1950년 7월 10일, 나는뜻을모은친구들과함께학교측에자원입대하였다. 해방이되기까지, 오랫동안일제의탄압을경험했던당시사람들에게는, 나라가위급할때, 나서야한다는우국충정의마음은지금과는비교할수없을정도로강했다. 그리고우리학생들은배운대로우국충정의마음으로행동해야한다는각오도남달랐다. 그당시학교에서자원입대한친구들 11명과후배들 24명, 모두 35명이었다. 오로지나라를구해야한다는생각에서자원입대하였다. 5~60 명씩전투에배치 학교에서마련해준환송연을받고, 1차지원자 35명은대구로향하게되었다. 우리들의학적부에는 학도병자원입대 라는단어가새겨졌지만, 언제다시 학도병자원입대 라는글씨밑에 1900년 0월 0일, 전사 로다시고쳐질지알수없는운명이었다. 우리는배속장교의인솔하에대구에와서입대하였다. 우리가도착한곳은 대구농림중학교 25연대지원자훈련소였다. 그곳에서간단한신체검사를받고우리는다시 동부초등학교 로향하였다. 본격적인훈련을받기위해서 아버지의비석 163
였다. 그때지원자가모두 700명가까이되었는데, 대구에서모집한인원이꽤많았던것으로기억된다. 첫날우리가배식받은식사는김에싼주먹밥이전부였다. 지금까지아무반찬도없이밥을먹어본적이없었던나는, 그주먹밥을도저히먹을수가없어서굶기로했다. 우리중일부가그밥을잘먹지못하는바람에첫날은주먹밥이많이남게되었다. 그런데그이튿날이되면서부터우리는그것도없어서못먹을지경이되었다. 배가고파서어쩔수없이주먹밥을먹게되었지만, 밥을먹는순간부모님이나집생각이간절했다. 우리는그곳에서무기도없이제식훈련을받았다. 훈련을받은지 3일만에무기를받았다. 2차대전당시썼던무기들을부산에서싣고온것들이라고전해들은기억이있다. 무기들은 81mm 박격포, 중기관총, M1 소총등이었다. 우리는 M1 소총을분해결합하는훈련을받았다. 그리고로켓포쏘는훈련도받고, 제식훈련을받으면서군가도불렀다. 우리는실탄을지급받지못해사격연습은할수가없었다. 적을향해쏘아야할총알을사격연습을위해허공을향해쏠수는없었다. 우리부대에는대부분이학생출신의학도병들이었지만, 소학교만졸업하고온친구, 심지어무학의친구도있었다. 나이는우리랑비슷했지만, 가족과헤어져먹여주고재워준다는말에지원한학생들이었다. 그러나우리는어느학교를다니는지몇살인지물어볼여유는없었다. 더위와배고픔을견디며훈련을했고, 차츰차츰동료애를느껴가고있었다. 우리는제식훈련을하면서사기를높이기위해불렀던 학도호국단가 가생각난다. 학도호국단가 태평양큰물기슭대륙동녘에 164 아버지의비석
우뚝솟은백두산민족의정기 화려한금수강산이루었으니 하늘이주신나라지켜나가세 우리들은삼천만민족의태양 피끓는호국단학도호국단 우리가훈련을받던중, 이승만대통령이직접방문하여청년학도대인우리를격려하고가기도했다. 우리의사기는한껏올랐지만, 훈련을받는중에날마다선착순으로 5~60명씩모집되어전선을향해떠날때는한편두렵기도하고겁도났다. 각부대에서신병요청이있을때마다차출되어가는것이었다. 대구앞산사격장에서박격포사격훈련까지마치게된나는 300여명의학도병과함께의성북쪽에주둔해있던수도사단제17연대에배속되었다. 무기도없이제식훈련만받은나는다른 300여명과함께의성북쪽에주둔해있는제17연대에배속됐다. 그러고나서 8월중순군번도계급도없이포항시북쪽의기계면에투입됐다. 비록군번도계급도없고총도한번쏴보지못한채참전했지만, 정통학도병이라는자부심은대단하였다. 기계문성리전투참전 나는변변한훈련조차받지못한채백인엽장군이이끌던제3사단 17연대에첫배속되었다. 우리학도대는처음엔의성으로출발했는데, 며칠후군번을부여받고정식군인이되어다시보충된 17연대를따라기계로떠나게되었다. 아버지의비석 165
내가처음투입된곳은 기계-운주산전투지 이었다. 운주산전투지는포항시북구기계면, 영천시자양면, 임고면이렇게 2개군, 3개면에걸쳐있는산악지대였다. 인민군을이곳을지나대구로진격하기위해안간힘을썼다. 8월중순에접어들면서, 인민군제12사단과정예유격대제 766부대가포항을점령하고그여세를몰아기계면방면으로진격하고있어상황이다급해져서우리는급히의성에서이동하여기계-안강전투에투입되었던것이다. 우리부대가기계입구에이르니여기저기뒹굴고있는공산군의시체와탄피들이치열한격적지임을말해주고있었다. 아군은해군육전대를새로편성하여투입하고, 우리 17연대, 18연대, 그리고신설된 23연대등모두투입하여기계를지키기위해총력을기울이던중이었다. 우리에게는총도없고아무것도없엇다. 학도병이라배급된실탄도많지않았다. 다른장병들게는각자박격포세개씩도주어졌다. 총이없기때문에박격포포탄을터뜨리라는것이었다. 연대전방지휘소인기계경찰지서옆집에주둔하고있던우리는심심찮게들려오는총포소리를들으며밤을새웠다. 적과서로오가는예광탄이밤하늘을수놓는모습을뚜렷이볼수있었다. 서로의목숨을겨냥하는그예광탄불빛이아름답다고느꼈던것은열여덟소년의순수한감수성이었을지도모른다. 다음날아침, 가마니에담아온주먹밥하나를받아배를채우고있는데, 적의박격포탄이날아와터졌다. 한두발이아닌집중세례였다. 담을의지해엎드려있으니뜨거운파편들이등위로날아와떨어지기도했다. 766유격대까지흡수재편성하여더욱막강해진인민군제12사단이총공세를퍼부어왔고, 기계-안강도로가차단되었다. 기계-안강고지는부산으로남하하는인민군을막기위해서는반드시사수해야만하는지역이었다. 그러나이후적군의총공세로다시기계-안강간도로가차단되고결국우 166 아버지의비석
리군이기계면에서철수하면서전황이불리해졌다. 연대본부의지시로우리학도병소대가 1대대 1중대로보충되어갔으며, 나는 3소대에배속되었다. 연대본부에서는우리학도병에게남다른기대를걸고있었다. 소대에도착했을땐, 이미짙은어둠이내린뒤였다. 주먹밥한개를셋이나누어먹고문성리뒷산전초능선에배치가되었다. 우리가다시탈환해야할 기계 가저만치아래내려다보였다. 30분쯤지났을때적의집중포격이시작되었다. 얼마후, 포격이멎더니육탄공격이시작되었다. 필사적인방어를하였으나진지구축이안된상태의방어전이라우리의희생은늘어만갔다. 좌측어래산주능선이붕괴되고중대장의철수명령에따라철수를할수밖에없었다. 우리는차량을버리고, 밤시간을이용하여농로를따라다시기계지역에서철수하게되었다. 우리화력이애이렇게약하노? 국군전력이공산군만못하단말이가? 빨리전력을증강해야할낀데!! 입대후부터늘함께다니던학우재형, 재곤이와함께쫓기기만하는전황 에울화통을터트리고있을때였다. 손들고나왓!! 갑자기적의고함소리가들려왔다. 귓전을때릴정도로요란한소리를내며다발총세례도무차별적으로퍼부 어졌다. 바로옆에있던재형, 재곤이가총에맞고쓰러졌다. 무방비상태의기 아버지의비석 167
습으로많은전우들이무참하게쓰러져갔다. 나는죽기를각오하고, 총을안고굴러내렸다. 중학교수업시간 생물 과목을좋아했던나는생물시간에동물들의생존본능을유심히관찰하였다. 보호색을띤동물들이어떻게목숨을유지하는지, 그리고강한독을뿜어자신을보호하는동물, 그리고비단개구리처럼미리죽은척하는동물들, 나는비단개구리처럼미리총알을맞아죽은척하는게목숨을부지하는방법이라는걸깨닫고는총에맞아쓰러진척총을안고언덕아래로굴렀다. 운명은하늘에맡긴채 천만다행으로날이어두워지고나서총성이멎은후공산군지역을빠져나올수있었다. 아비규환의총성이섬뜩하게오가는소리가고스란히들렸다. 함께싸울아군을찾아보았으나아무도없었다. 그곳을빠져나와야했다. 가시덤불에얼굴을찢기면서달리는나의옆으로적의포탄이날아들기도했다. 한참을달려작은마을에도착하니 50대남자세분이피난도가지않고겁에질린표정으로나를맞아주었다. 옥산서원이있는마을이었다. 날이밝아대대본부로갔더니, 간밤의전투에서반이상이희생된상황이었다. 늘붙어다니던동료학우 2명바로옆에서쓰러졌는데날이밝아시체라도찾아야했지만, 그럴수가없었다. 살아남은우리는전우의원수를갚겠다는적개심으로불타올랐다. 우리는병력보충도없이빼앗긴고지를향해다시탈환전을전개하게되었다. 우리 17연대의반격으로기계를탈환할수있었고, 그여세를몰아비학산까지공격해갔다. 그러나급히재편성된인민군제12사단의반격이이어졌다. 비학산 8부능선에서많은학도병이희생되는아픔을겪어야만했다. 진두지휘하던백인엽사단장까지팔에관통상을입었을정도였다. 당시는인민군 12사단과정예유격대제766부대가포항을점령하고그여세를몰아기계면방면으로진격해상황이다급했다. 이에우리군은더는물러 168 아버지의비석
설수없어배수의진을치고반격에나서기계면을거쳐비룡산까지공격, 수많은학도병의희생속에기계면을탈환했다. 나는포항기계전투를시작으로인천상륙작전, 서울탈환, 강원금화전투등그야말로 '4대전투 ' 에소총수와수색대로참전했다. 화랑무공훈장을탄뛰어난전공을쌓은군인이었지만, 기계문성리 의첫전투경험은아직도잊혀지지않는다. 포항을비롯안강 기계에서시작된낙동강방어선전투는 1950년 8월 4일부터 9월 14일까지낙동강을중심으로벌어졌던전투를말한다. 국토의 95% 를빼앗긴절체절명의상황에서낙동강방어선은더이상물러설곳이없는최후의저지선이었다. 인민군은 해방 5주년이되는 1950년 8월 15일까지부산을점령하겠다 는목표와자신감으로임했기에낙동강방어선전투는쌍방이결코양보할수없는피의전장이었다. 기계는 8월 9일에서 8월 15일까지전투를벌였으나패하여이지역을뺐겼다가 8월 13일에서 8월 18일전투에서기계지구탈환전을벌여적의수중에들어간기계지구를탈환하는데성공하였다. 이에기계운주산일대를빼앗긴인민군들은신광비학산일대로총퇴각을하여진지를치고있었다. 이러한인민군을섬멸하기위해국군은총력을기울였으나비학산탈환에는실패하였지만, 인민군에게치명적인손실을입혔으며낙동강방어선총반격전의기반이되었다. 당시아군 9개사단은천혜의지형장애물인낙동강선 160Km와동해안산악지역을이은 80km를연결하는 낙동강방어선 을구축하여인민군 13개사단의파상공세를막아내고칠곡, 다부동, 기계 안강, 영천지구, 포항전투에서승기를잡았다. 8월이끝났을때는어느덧전력과사기는역전된상태였다. 국군과유엔군의승리로낙동강방어선전투는마침내막을내렸다. 낙동강방어선전투는 아버지의비석 169
치열했던공방전에서전쟁의판도를수세에서공세로바꾸는결정적인계기를마련하고, 6 25전쟁의전세를뒤엎은기념비적인전투였다. 동부전선에서벌어진가장치열했던기계전투는 낙동강방어선전투 에서자신감을준전투였다. 인민군이최초에기도했던경주방면으로의남하는여기서완전저지하고말았다는성과로보아아군측의개가로말하지않을수없다. 안강곤제봉전투참전 1950년 8월하순, 인민군은경주를목표로삼고 1개연대를투입해총공격을가해왔다. 6 25전쟁발발로부터 9월초순까지, 아군은낙동강이남까지후퇴하며사실상인민군과의지연전과방어전을치르기에바빴다. 인민군은경주의현곡면지역에출몰하면서침투를기도했다. 당시한신중령이주축이된수도사단제1연대대장제 1군단이안강을지켰지만, 미군제8군사령관은경주지역의전황이긴박한상태임을알고미군제24단을경주에급파했다. 안강이인민군의수중에넘어가면공산군이언제 경주 로밀어닥칠지모를위태로움을고스란히겪었던것이다. 곤제봉전투를비롯한안강전투에서는하룻밤사이에 5~600명의병력이손실되는위급함을겪기도했다. 곤제봉전투는무려 8일간에걸쳐 30회가넘는상호역습이거듭되었고, 곤제봉주인이 7번이나바뀌었다. 이에국군제 1군단은특수부대를투입해곤제봉을사수하고, 수도사단기갑연대와제3연대, 제17연대를증가배치했다. 적의 9월공세로빼앗긴 곤제봉 전투에도나는참전하고있었다. 김일성으로부터독전지시를받은공산군은끈질기게공세를가해왔고, 야간에는팔로군출신의공산군기습에우리는고전을면치못하였다. 우리는결국막대한희생자만내고철수를할수밖에없는상황을 170 아버지의비석
맞고말았다. 많은희생자를내고도사수를못하고진지를이탈하였다고군기확립의본보기로 3대대장을총살형에처한일도있었다. 내가공격해간능선에는조그만바위가많았다. 바위에숨어적과서로대치하다가머리만내밀고사격을가하면서수류탄으로맞서며올라갔다. 적은쓰러지면서도도망가지않고그자리를사수하고있을정도로치열하게맞서왔다. 하나둘눈앞의적을하나씩섬멸하면서 5부능선이상을점령해올라갔다. 중대장은권총을빼들고독전을펼치고있었다. 국가의운명이달리공격전이라해도과언이아닐정도로중대한공격이었기때문에사력을다하고있었다. 8부능선까지점령한뒤, 수류탄투척과함께일제히돌격전으로돌진해갔으나적의완강한저항으로 8부능선에서저지당하고말았다. 앞서가던동창 백운섭 군이관통상을입고내려왔다. 얼마후에는 편시도 군마저상반신파편상을입고만신창이가된채내려오고있었다. 1대대에있던마지막동창생들이고지를내려갔다. 나는외톨이가된것처럼서글픔이밀려왔다. 그때나는아군에게퇴로를안내하느라헌병한명과함께제일늦게철수하고있었다. 학야리계곡을지나기계로접근해가는도중, 적이버리고간실탄상자와소련제수류탄상자를노획하였다. 우리들은상자를열어수류탄을나누어가졌다. 그런데계곡의하천을건넜을때, 우리는적의집중포격을받았다. 포격이얼마나정확하고강한지포플러나무사이에은폐한나의몸은폭발과함께날려온모래와자갈에차츰묻혀가고있었다. 금방이라도몸이산산조각날듯흔들렸다. 그렇게포격은바로한치반경안으로맹렬하고불가항력적으로쏟아졌다. 그런와중에도나는잠이왔다. 나자신도모르는사이에 전투에투입되면서부터제대로잔날이하루도없었던것이다. 나는어차피죽을목숨이라면, 죽더라도고통이나잊고죽자는심정으로일부러잠을청하는지경이되었다. 아버지의비석 171
폭발음에도아랑곳없이일부러잠을청했더니마취제라도맞은것처럼금방잠에빠져버렸다. 지금생각해보면참거짓말같은일이다. 자는동안인민군은나를적군의시신으로여기고옆을스쳐지나갔을지도모를일이아닌가! 얼마후, 누군가발로차면서철수를재촉했다. 나는모래에덮힌무거운몸을겨우일으키고나왔다. 이튿날, 우리대대는본격적인안강공략전을감행하였다. 우리는콩밭의이랑사이를포복하여접근해갔다. 미군기의폭격으로기계는온통화염에휩싸였다. 시가지입구까지진격해갔을때는이미어둠이깔리기시작하고있었다. 지원폭격을하던미군비행기도가버렸다. 나뭇잎으로온몸을위장한적의증원부대가합세해오는것이눈앞에보였다. 증원부대와합세한적은미군폭격이없는어두움을이용해더욱힘을얻고있는상황이었다. 그곳으로화력을집중하였지만, 날이어둡기시작하여명중률이높지않았다. 소총으로공격하던나는적들처럼기관총이있었으면하는아쉬움만이가득하였다. 적과의거리 10m. 더이상소총으로맞서싸우는것이불가능했다. 중대장의철수신호에따라물러서기시작했다. 손들고서! 하는위협적인소리와함께다발총알이발뒤에꽂히기도하고몸을스쳐가기도했다. 내가사력을다해달리니적도사력을다해쫓아왔다. 숨이차고목이타올라곧쓰러질것같았지만죽음앞에솟아나는용기와힘은정말로신통하였다. 이름모를어느동네를통과할때는흙돌담을단숨에뛰어넘기도했으니말이다. 부산으로의길을뚫기위해낙동강지역을필사적으로차지하려는적의전력은막강하였고, 기계-안강전투는우리에게불리한전세로이어졌다. 당시의국군은공산군에비하여병력면에서나화력면에서나열세였다. 172 아버지의비석
적의공세로안강남방고지로밀려날수밖에없었다. 어느날은대낮에적의박격포탄이날아와먹고있던주먹밥에흙세례를퍼붓기도했다. 때마침미군폭격기가날아와전방을폭격하고있는데도인민군은이를조롱이라도하듯포사격을멈추지않았다. 적은과수원안에있는조그만집의처마밑에처마밑에은폐하여포를쏘아대고있으니미군폭격기가알리없었기때문이었다. 우리공군기가아니어서무전으로적의목표물이어디에있는지알려줄수도없었다. 우리는유효사거리가짧아효과도없는소총으로대응사격하는것이전부였다. 이런상황이고보니폭격을하고있는미군비행기는눈뜬장님이었다. 곧죽을지도모른다는슬픔속에유비무환의국력배양을이뤄놓지못한조국에대한한탄이밀려오기도했다. 삼면이논으로둘러싸인철길옆조그만산언덕에서였던것으로기억한다. 한밤중에전방에서 항복해나오라, 국방군 XX들아! 하는고함소리와함께총격전이시작되었다. 우리도얼른응사하여서로총격전이벌어졌다. 항복해나오라우, 국방군간나 XX 들아! 야이, 빨갱이 XX 들아! 살고싶으면니들이항복하라! 우리도인민군의선전선동에질세라거칠게소리를지르면서응대를했다. 한참을이렇게신경전을쓰고있는데난데없이적의수류탄이우리바로옆에서터지는것아닌가! 적의유인전술에말려든것이었다. 우리가적의선전선동에만신경쓰고있는사이적은우리들뒤로와서수류탄을던진것이다. 적은엄호사격에힘입어계속수류탄공격을가해왔다. 교통호안에서는부상한전우의신음소리가그치지않았고, 내좌우에서방아쇠를당기던전우도쓰러졌다. 화약냄새는코를찌르고숨도못쉴지경이 아버지의비석 173
었다. 소련제수류탄화약냄새가그렇게매운줄그날처음알았다. 드디어백병전이벌어졌다. 총격전은물론총검술이난무하는아수라장이되었다. 숨소리조차들리정도로적은가까이에있었다. 비교적나는사격을정확히하여내앞과위의적을없앨수있었다. 전방을향해정신없이총을쏘아대고있는데, 내뒤에서온적이내등을치더니철모를쓴머리를내리갈기고지나갔다. 나는정신을잃은듯그대로엎드려있을수밖에없었다. 다행히아군의지원사격으로얼마후, 총성은멎었다. 우리의필사적인사수에밀린적은희생자만남겨둔채물러났다. 우리는피아간, 수류탄만교환하다가재돌격전끝에마침내남쪽봉우리를점령했다. 적의희생은두말할것없었고, 우리군의희생도적지않았다. 오른쪽팔에통증이느껴져만져보니찰과상을입은상태였다. 다행히심각하지는않아압박붕대로묶어두었다가다음날 머큐로크롬 으로간단히치료를했다. 결국고지탈환에성공하며 곤제봉전투 는종지부를찍었다. 비록나는이마지막전투에는참가하지못했지만, 이전투는약 1만명이목숨을잃었던참혹한전투로역사는기록하고있다. 총검으로몸을부딪쳐싸우는백병전으로 15번이상의공방전을펼친끝에, 일주일이상계속되었던곤제봉전투가드디어끝을맞았다. 이고지점령과함께서로약속이나한듯이한목소리로외치는만세소리가해저무는하늘을메아리쳤다고한다. 이전투에서 17연대장을비롯해많은장병들이전사하였고, 연대장병들이두번이나대거교체되었다. 열여덟의내가목숨을걸고치르고있었던기계-안강전투였다. 안강전투는국군제1군단이계획하고단행한최초의공격작전이자성공작전이었다. 안강전투의성공과함께인민군남침이후계속되었던국군및유엔군의후퇴도끝나게되었다. 인민군은동해안과동부산악지대인영천보현산일대와기계면운주산등 174 아버지의비석
을거쳐대구와경주방면으로서진격을시도하였다. 아군은이러한인민군의의도를격퇴시켰다. 곤제봉전투에서실패한인민군은이날경주를포기하고후퇴를하게된다. 우리국군은안강에서전투력을재정비하였다. 기계-안강전투는중요한전투였다. 특히경주지역점령을목표로한인민군의진출을 20여일동안이나지연시키고, 나아가낙동강방어선의총반격전의기반이되었다. 이러한인민군과의기계 안강을둔전투는인천상륙작전으로인민군들이 9월 23일총퇴각할때까지뺐고빼앗기는양상이계속되었다. 하지만안강전투의승리로낙동강전선의전세를역전시키기까지적과의공방전은 6 25 전쟁사에서가장치열했다고해도과언이아닐것이다. 만약낙동강방어선의유지가없었다면인천상륙작전도없었다. 9월 15일전개된인천상륙작전의성공과함께안강, 경주일대지켰던 1사단은동부전선반격에앞장서게되었다. 행선지도모른채인천으로 기계 안강전투에서구사일생으로살아난나는그해 8월하순어느날부대원들과함께부산으로내려가수송선에몸을실었다. 인천상륙작전참전의첫걸음이었다. 배를타고가는데도행선지를모르고탔다. 다만, 수도권탈환작전에투입된다는말만들었지인천상륙작전에동원될줄은생각도못했다. 내가속한 17연대는미해병대의뒤를이어후위로월미도에상륙했다. 그리고인천을거쳐곧바로서울동작동방면으로진격해한강을건넜다. 나는인천에들어서자피난을못가고숨어있던시민이태극기를흔들며어찌나열렬히환영하던지지금도그때를생각하면너무감격스럽다. 그런데한강을건널때는한강다리폭파때희생된수많은시체가그때까지떠다니는참혹한 아버지의비석 175
광경도잊을수가없다. 지금도그모습을생각하면전쟁이주는참혹함에몸서리가쳐진다.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전재되었다. 그런데도김일성은유엔군이인천에상륙했다는사실을감추고낙동강전선에서공격을독려하고있었다. 하지만이미인민군은전력이약화되어낙동강전선을뚫기에는역부족이었다. 나는소총하나만달랑든일개사병으로비록큰전공은못세웠지만, 역사에남는전투현장에있었다는것만으로도너무자랑스럽다. 맥아더장군이인천상륙작전을계획한것은지금생각해보면탁월한선택이었다. 물론적의시선을분산하기위해 장사상륙작전 을감행하여 198명의학도병과군인의전사자를내고인천상륙작전에서는단 25명의전사자만희생시킨것은대단한작전이었다. 인천상륙작전 을인민군은예상도못하고불의에일격을당하고, 38선으로후퇴하기시작했다. 이인천상륙작전의성공에는 장사상륙작전 이있었다. 작전당시에는몰랐지만, 전쟁후고향에오니인근장사앞바다에서많은학생들이죽었다는소식을듣고무척가슴이아팠다. 장사상륙작전 은 1950년 8월대구에서긴급모집된 772명의학도병들로구성된육군본부직할독립제1유격대대로, 주요임무는영덕지역일대의인민군제2군단의후방지역을교란시키고적의진로를차단하는것이었다. 1950년 9월 14일새벽 5시경장사리해안으로상륙을감행하던중태풍 ( 케지아, Kezia) 으로배가좌초되는어려움속에서도상륙에성공한다. 유격대는 8 일간이나식량지원이없는극한의상황에서인근지역의적을섬멸하고인민군의보급로를차단하였으며, 인민군과치열한전투로 139명의대원들이전사하는등막대한희생을치렀다. 이들은희생속에서도작전을성공적으로이끌었다. 176 아버지의비석
나는퇴직후장사상륙작전참가자명단을대구에백운봉씨에게찾아가구했다. 장사상륙작전참가자는서로이름도학교도모르고있었다. 내가어렵게이들에게작전지시를내렸던사람을찾아가명단을구해장사의돌비석에이름을남기게되었다. 9월 21일, 유엔군이인천에상륙했다는소식이인민군전전선으로흘러들었다. 22일부터는인민군들은북으로도주하기시작했다. 9월 23일, 인민군들에겐총퇴각명령이떨어졌다. 그이후수세에몰리던 6 25전쟁은공세로전환해서서울을탈환하고압록강까지밀고올라갈수있었다. 나는그해 10월소총소대에서연대수색대로배치됐다. 그리고강원도일원에서인민군소탕전과자격능선, 백마고지전투등수많은전투에참가해최일선에서묵묵히임무를수행하다 12월일등병으로진급했다. 중공군생포. 무기노획 6.25전쟁에서나의뇌리를떠나지않는전투는단연강원도금화전투다. 금화지역은 6.25전쟁당시가장치열했던전투중하나가벌어졌던곳. 1951년에는밤낮으로주인이바뀌는아비규환의지옥으로변한지역이다. 그해 8월. 나는 5명으로구성된수색대조장이었다. 안개로 10m 앞도보이지않던어느날. 나는대원들과함께인근을수색하던중민가굴뚝에서연기가나는것을보고접근해낡은군화로보이는신발을발견하고집을덮쳐방안에있던중공군 5명을생포했다. 또인근을수색해위장한중공군트럭 5대와트럭에실려있던고사포 5문도노획하는전과를올렸다. 처음에워낙감쪽같이위장해처음에는그냥초가집인줄알았다. 자세히보니트럭앞부분이보여서중공군트럭을발견할수있었다. 그당시중공군의위장술은트럭을아예집으로만들어놓았다. 나는중공군생포와무기및트럭을노획하여그공로로그해 아버지의비석 177
12월화랑무공훈장을받았다. 1952년 2월금화오성산의무명고지. 나는이곳에서야간에적진을기습해전투를벌이던중오른쪽발에수류탄파편이박히는부상을당해후방으로후송됐으나치료후곧바로원대복귀했다. 참전이후그때처음으로다쳤는데지금생각하니다른전우들에비해그것도큰행운이었다. 후방으로후송되면대부분이나아도복귀하지않으려고하는데난낫자마자다시복귀했다. 그때는무조건복귀해야한다는의무감만있었다. 당시의내가얼마나의욕이넘치고적을한명이라도더죽이고생포해야겠다는의지가강했는지지금생각해도내가대단하다고여겨진다. 경기도포천 5군단정보처근무를마지막으로 1954년 7월하사로만기제대했다. 교육자의길 나는복교를하였다. 학교에서내가지원입대했던것을알고있던터라, 복교는어렵지는않았다. 이승만대통령은국가의앞날을짊어질청년학도들은시급히학교로돌아가학업을계속하라는담화를발표 (1951년 2월 28일, 종국학생복교령 ) 하였다. 문교부 ( 현재교육과학기술부 ) 는전국에흩어진학생들에게다음과같은내용의복교령을내렸다. 1) 모든학도는원래의본분인학업으로돌아갈것 2) 군복무로학업이중단된학도의군복무사실이인정되면학교당국은무조건복교를인정할것 3) 군및각급학교는군복무로부터복교하는학도들에게특별배려를해줄것 4) 군복무중학년진급이누락된학도는본인의희망에따라학년진급을인정할것 178 아버지의비석
1957년병역법이개정될때까지당시병역법에의하여다시징집되어군복무를이중으로해야하는시련을겪어야만했다. 대통령의복교령이내려진이후학도병입대는없었고, 병역법에의하여재학중에는징병적령자도입영하지않았기때문에학생참전자는더이상늘어나지않았다. 그러나복교령에따라고향으로학교로돌아왔던학도병들중상당수는학교로돌아갔다. 학교에복교한숫자는전쟁전의 10분의 1도안되는학생들이남아있었다. 전쟁의위협도사라지지않아졸업을하고서우리는입대영장을받게되었다. 학도병으로참전했던전과는하나도반영되지않은 징집영장 을받고친구들이나나는화가많이나기도했다. 1957년병역법이바뀌지않아나처럼재입대해야하는학도병들이많이있었다. 경기도포천 5군단정보처근무를마지막으로 1954년 7월하사로만기제대했다. 제대후나는포항수산대학에입학해다시학업을계속했다. 이후준교사를시작으로 24년간대구. 경북지역초등학교에서학생들을가르치고 12년간포항. 경주지역에서교장으로재직하는등 43년간교육자의길을걸어왔다. 나는틈만나면학생들에게나라사랑과안보의식을가르쳤는데요즘은학생들이진학에만신경써안보교육이제대로안되는것같아안타깝다. 제대로된교육이너무절실하다고생각한다. 추모비건립 6 25때희생한분들을위해내나름대로뜻깊은일을하려고노력중이다. 1996년에는전쟁으로산화한고향선후배, 동료를기리고자지역의뜻있는사람들과함께성금을모아기계면화대리에기계. 안강전투전몰장병위령탑을건립하기도했다. 용화사라는절이있는데, 기계-화대리전투에서전사한 아버지의비석 179
박충곤대위의미망인이세웠다. 그절은원래마을에서멀리떨어진곳에그전쟁미망인이남편의원혼을달래기위해혼자세웠다. 처음에마을주민들이미친여자라고여겼다가나중에그사연을알고는모두협심을해서용화사라는절로만든것이다. 나도그미망인의정성을생각하고전쟁중에돌아가신전몰장병위령탑건립에물심양면으로도왔다. 그리고내고향송라에서 20리떨어진곳에영덕군남정면장사리에서인천상륙작전의양동작전으로실행된 장사상륙작전 이있었다. 6 25전쟁판세를바꾼인천상륙작전의성공으로장사상륙작전은대부분의사람들이알지못하지만, 장사상륙작전에참전한 772명의사람들중 139명이전사하였다. 어린학생들이마침다가온케지아라는태풍과문산호의좌초로많은희생자를냈다. 나는그들을위해내가할수있는일이무엇일까고민하다가장사상륙작전에서희생한분들을위해장사상륙작전전몰위령탑건립및참전자명단작성을위해애를썼다. 학도병예우에대해서도불만이다. 학도병은일반징집자와달리나라를위해학업도포기하고목숨까지바친진정한애국자라는것이나의생각이다. 내가받는연금은월 15만원. 무공훈장수훈이명목이고그나마아직도흉터가남아있는발부상은시기를놓쳐연금대상에서제외됐다. 나는그래도교장퇴직으로연금을받아살고있다. 생활고에시달리지는않지만, 다른학도병출신의친구들은중병과생활고를겪고있다. 6 25참전유공자중현재생존자는약 17만명인데매년 1만 ~1만5000명이사망하고있는데, 정부에서는이분들에대한처우에관심을가졌으면한다. 180 아버지의비석
평화와번영 교직에서정년퇴직한나는현재초 중 고등학생들을대상으로안보강연을 하러다닌다. 나라가있어야내가존재한다는것이한국전쟁의교훈임을잊지말아야한 다. 모두가애국자지만특히학업과인생을포기하고오로지구국의일념으로 일어선모든무명의학도병들을절대잊지말아달라 " 고학생들에게당부했다.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가리지않고초청하는곳은내건강이허락하는한어디든달려간다. 학생들은나의전쟁무용담보다는전쟁으로인해꿈이꺾인나의이야기에더욱공감한다. 생물학도가되어대학교에진학하고했던내꿈이전쟁으로산산이깨어지고, 전쟁으로인해친한친구나가족을잃은나의이야기에눈물적신다. 6 25전쟁을생각하면아직도잊혀지지않는악몽이다. 끝으로나는바란다. 나의생사를위협할정도로커다란위기가나라에닥쳤을때나는과연무엇을할수있을것이가를이글을읽으면서한번생각해보았기를말이다. 그리고나와어린학도병들이무엇을위해전쟁터에뛰어들수밖에없었는지도한번쯤회자해주기를말이다. 나는당시에운이좋아살았지만, 조국을위해싸우다가먼저간학우들을생각하면지금도잠이오질않는다. 62년이지났지만, 아직도밤잠을설치게하는악몽의 6 25전쟁. 팔십이넘은나이에도공산군에대한나의분노는아직도풀리질않는다. 6 25전쟁은동 서간냉전이종식되고세계가공동의번영과안정을위해다 아버지의비석 181
양한협력을모색하고있는오늘날에도끝나지않은채로, 여전히우리의평화와안정을파괴하고이념의대립과갈등을조장하는등아직끝나지않고여전히진행중인전쟁이다. 벌써우리에게잊혀져가는 6 25전쟁이지만, 오히려미국을비롯한 6 25 참전국들은피흘려싸운전쟁을결코잊지않는다. 미국은양평지평리전투를지금도육군전투교재로쓰면서중공군인해전술에백병전으로맞섰던경험을되살리고있다고한다. 영국에서는 6 25 전쟁당시참전한영국군글로스터연대 750명이중공군 42,000명의대규모공세를저지한 임진강전투 에서생존한참전용사 50여명이선술집 임진퍼브 에서모이고, 일부는해마다 4 월이면파주시적성면감악산설마리계곡의 설마리전적기념비 를찾는다고한다. 엄청난희생을치르고얻어낸평화와번영. 이귀한교훈은어린이부터전쟁을모르는젊은세대에게확고한국가관과정체성을확립하는데커다란교훈이되어야한다. 전쟁은작으나크나모든것을앗아간다. 6 25전쟁은결코잊혀져서는안되는전쟁이다. 끝. 182 아버지의비석
최우수상 패전의그날 민경식 인천남구 1. 장진호전투의서막 (1950 년 11 월 27 일 ) 낮에도영하 20도로내려가기일쑤인개마고원의어느산정상아래, 나는새벽경계를서기위해 21시경경사진언덕한민가에서눈을붙이려누웠다. 동료들이먼저방바닥을차지하고누워있어할수없이나를포함한우리근무조 4명은부엌바닥에서자기로했다. 밀집을깔고 2명씩머리를반대방향으로돌리고서로간의몸을사이사이에포갠채, 언제적의기습이닥칠지몰라탄창과총을옆에끼고침낭속에들어가철모를베개삼아잠자리에들었다. 잠은설핏든것같지만신경은예민하다. 이따금씩산짐승의울음소리와마른풀을스치는바람소리가신경을건드리며눈꺼풀이떨렸지만무거워뜰수는없다. 어머니 의모습이꿈속에서아련하다. 1950년 8월 12일내가만 17세의나이로부산에서육군제 23연대에입대할당시어머니는 6째동생을뱃속에넣은만삭의몸으로눈물을지으셨다. 황해도해주고향땅을떠나힘들게삼팔선을넘어시집간누이와외삼촌들과더불어부산으로피난왔을때어머니는북한군에게총살당한지아비를잃은슬픔에잠겨있을사이도없이나를전장에보내야하는사실에몸을떠셨 아버지의비석 183
다. 비통함이눈물이되어그렁그렁해진눈으로나를똑바로보지못하시고뼈마디가앙상한손으로나의손을꼭잡아주실뿐이었다. 몸성히돌아오라우,,,,, 꼭살아오라우 어머니의간절함이손가락마디마디로전해졌다. 아버지의빈자리를대신하지못하고전장으로가야만하는장남인나로서는어머니의좁고가녀린어깨가너무애처로워외면하고말았다. 어린동생들은? 또세상빛을기다리는저생명은어찌될런지,,,, 나의운명과우리집안의앞날을걱정하는사이, 나는부산항제 2부두에서일본국적의허름한배 가이오마루 ( 海王丸 ) 호에실려미 7사단 31연대가주둔하고있던후지산훈련장에도착했다. 나는미 7사단 31연대 3대대중화기중대 75mm 무반동포소대에편입되어한달남짓훈련을받고인천상륙작전에투입되어본격적인한국전쟁의포화속으로빠르게빨려들어갔다. 적이다. 기상!! 기상!! 얼마나잤는지땅땅하는총소리와함께비상이걸렸다. 대대본부전부대원이각자의위치에서전투준비태세에돌입했다. 시간이경과했지만전방고지 FDC( 관측소 ) 로부터포사격요청이없다. 총성이멎으면서조용해진다. 우리는다시잠을자기위해집안으로들어가부엌바닥에누어잠을청했다. 얼마의시간이지났을까주위사방에서요란한총소리와함께내가잠자고있던곳에적의기습공격이가해졌다. 방바닥에누어서잠을자던동료병사들의신음소리와더불어순식간에기습공격을당했다. 아군후방에대한적군의침투식기습공격작전이다. 다행히나는낮은부엌바닥에있었기때문에무사했다. 워낙순식간에당한일이라침낭속에서나오려고발버둥을치다가서로간의발이부딪쳐잘빠져나오지못했다. 184 아버지의비석
밖에서는계속요란한총성과함께중공군의고함소리와미군의목소리가뒤엉켜일대가아수라장이되었다. 정신을차리고부엌바닥에서고개를들고밖을보니내눈을의심케할만큼엄청나게많은수의중공군이구름떼같이우리쪽을향해여러방면에서돌진해오고있다. 미군과국군이함께있는아군의자동화기가적군을향해일제히사격을가하지만, 적군은멈추지않았다. 중공군은마침내우리의저지선을뚫고아군진지를유린하기시작하면서, 적군의수적우세속에전후방이없는최단거리에서의사격과수류탄투척으로쌍방간육박전이사방에서벌어지기시작하였다 대대본부는물론, 대대전체가일순간에공격당한상태다. 미군병사들이 G1( 미군 ) 소리를지르며소대본부로달려간다. 내가있는곳에서소대본부는그리멀지않다. 약간높은곳이며, 경사도가있는곳을올라가야한다. 나도미군병사와함께뛰다멈추다하면서돌담집이있는경사진곳을올라가니미군병사가끌어올려준다. 이제는좀안심이되나싶었는데이내중공군의집중공격이이어진다. 미군병사들은돌담장을은신처로이용적군의공격에용감하게응사하며싸우고있었다. 나도순간적으로내앞으로돌진해오는적군들을향해정신없이사격을계속가했다. 엄청나게많은수의중공군이떼를지어다니며, 여기저기수류탄을투척한다. 우리쪽은자동화기로적군을향해사격을가하다보니많은수의적군이 사살된다. 수류탄의폭발음과피, 아의총소리때문에귀가따갑고멍해져옆 동료병사의소리가잘들리지않는다. 아버지의비석 185
미군병사중에는자동화기 (BAR) 를각기다른방향으로놓고교대로적군을향해사격을가하고있다. 아군이공중으로계속쏘아올리는조명탄으로장진호신흥리일대는대낮같이밝다. 피. 아구분없는격전속의공포속에서도나는살아야겠다는생각밖에들지않았다. 뒤에밀집더미가보였다. 일단그밑으로숨어들어갔다. 굵은통나무를깔고쌓았기때문에그사이로내몸하나는들어갈수있는공간이생겼다. 나는밀짚더미밑에잠시숨어있다가동태를살펴재빨리나와다른장소로이동했다. 그러면서돌진해오는적군을향해정신없이사격을가했다. 내가쏜총한발에적군 2.3명이쓰러지는같았다. 그래도적군의수적우세에압도당해겁이난다. 적군이물러설기미가보이지않아걱정이다. 이제는적군이도망갔으면하고빌어본다. 힘내라곧아군의전폭기가상공에나타날것이다. 미국인소대장은소대원들에게외쳤다. 병사들은날이밝기를기다리며전투에임하고, 소대장과분대장은계속뛰어다니며힘을내라고소리를지르며분대원들에게용기를북돋아주고있었다. 그때어디서날아온총알소리와함께그렇게빽빽소리지르던분대장심슨의소리가들리지않는다. 총알이심슨의하복부옆을관통하며그를쓰러뜨렸다. 세계 2차대전당시독일전선에참전한용사다. 그는미남이었고우리에게독일인아내가있다고자랑삼아이야기하곤했었다. 우리몇몇이그를민가의방안쪽에뉘어놓고응급처치를해주었다. 집주인가족들이이불을뒤집어쓰고부들부들떨고있는모습이목격되었다. 186 아버지의비석
중공군은엄청난사상자를내면서도계속해서아군진지를향해파상공격으로돌진해온다. 사방은총성과폭발음그리고고함지르는소리로생지옥을방불케했다. 나의전면으로수없이밀려오는적군에사격을가해돌진을저지한다. 내가태어나처음당하는상황이다. 정신이나간상태다. 피, 아를분별할수없는혼란상태의격렬한야간전투가무질서속에계속되고있었다. 날이밝아오면서드디어아군의전폭기편대가상공에나타나우리의주변일대를무차별로폭격해적군의침투지역을강타하면서지상의아군을돕기시작했다. 전투는드디어역전, 아군이유리한위치에서치열한전투가계속되었고, 나도정신없이적군을향해사격과수류탄을투척하며육박전을벌였다. 전폭기편대의엄청난공중공격에정신을잃고숨을곳을찾는적군은패전의기색이짙어지자많은수의희생자를내고주위산속으로퇴각하기시작했다. 전황이반전되자각자의소대장과분대장들은도망가는적군을추격사살하라며, 집주위돌담장안에서밖으로나가싸우라고나와분대원들을내쫓는다. 미처도망가지못한적군이이리저리숨으려고도망다닌다. 공포감속에도격전을치르고내가살아있다는사실에안도하면서다들제정신들이아니었다. 전투중인병사들의얼굴은공포에질린표정이고독기가서려있다. 적군을한명이라도더죽여야내가산다는전쟁터에서, 상대방을먼저죽이는인간성을상실한잔인한전투가지금여기장진호일대에서피. 아 ( 被, 我 ) 간에많은사상자를내면서치열 ( 激烈 ) 하게밤새도록벌어지고있는것이다. 시간이지나면서격렬했던전투는적군의퇴각으로서서히소강상태로들어갔다. 아버지의비석 187
어쩌다산골짜기에숨어있다산을넘어도망치는적군을발견하면각종 화력을동원하여경쟁적으로사격을가해사살하다보니달아나는산토끼를 사냥하는것같아통쾌한기분과묘한감정이든다. 날이밝았다. 아군과적군의많은전사자시체가사방에널려있었고, 산발적인전투속에뒷정리에들어갔다. 적군은밤사이나의위치약 200m 전방커브형지점교량에도로차단을목적으로통나무를쌓아놓았다. 공중에서는적군의잠복지역에계속폭격을감행하고있다. 우리는적군잔당을소탕하면서부상자를헬기로공수했다. 부상자에대한조치는신속하고헌신적이다. 미군, 한국군구별없이순서를정해계속적으로공수가진행된다. 적군들도미처도망가지못해여러명이포로가됐다. 전날밤격전에서흐트러졌던장비를정리하고전사자를일정한곳에옮기는작업중무차별사격으로침낭속에서나오지못하고까맣게타죽은미군동료병사의시체가보였다. 참으로끔찍했다. 그러나중공군의시체는더끔찍했다. 아군의중화기에맞아머리가날아간시체, 복부가파열된시체, 우리쪽을향해포복하다 M1 소총에맞아얼굴앞면만있고뒤통수가날아간시체, 참으로눈뜨고볼수없는장면이다. 이상야릇한표정을짓고죽은중공군의시체등그야말로엄청난수의죽음이다. 적군의부상자들은넋을잃고우리의도움을바라고있다. 시체와뒤엉켜아 직도생명이끊어지지않고꿈틀거리는모습의전쟁터, 바로여기가살아남 은자들의생지옥이었다. 중공군은솜누비옷에털모자와운동화, 천으로둘둘말아만든긴자루에 188 아버지의비석
건빵뿐인식량을넣고전투에임했다. 그들은영하 30`~~40도의강추위와눈보라속에서체력의한계와굶주림으로많은동사자가속출하는가운데인해전술로우리를공격했으나많은사상자만냈다. 그러나우리아군의희생도만만치않았다. 2. 실패한진격과지리한전투들. 장진호전투는 1950년 11월 27일부터 12월 11일까지함경남도장진호부근에서미군해병제1사단과보병제7사단 31연대가중공군 8개사단의포위망을뚫기위해감행한전투이다. 이전투는유엔군이북진할때미군해병제1사단이서부전선에서북상중인미 8군과의접촉을유지하려고장진호계곡을따라북한의임시수도강계방면으로진격하던중장진군서한면유담리와신흥리일대에서중공군 8개사단으로부터포위를당하게되면서시작되었다. 높이 2000m 이상의험준한산들과깊은협곡등의악조건속에서해병제 1사단과보병제31연대가 40Km의협곡지대를돌파하여성공리에함흥으로철수하였지만. 이작전으로미군은 6532명의병력손실을입었다. 그러나이전투로인해청천강일대에서수세에빠져있던미 8군의철수를가능케했으며중공군의함흥지역진출을 2주간지연시켜국군과미군그리고북한주민약10만명이흥남항을통해남으로철수할수있었다. 당시내가속한미보병제 7사단 31연대는장진호동쪽에서, 해병 5연대전투단은장진호서쪽기슭에서, 해병제 7연대전투단은유담리에서각각 11 월 24일까지차후공격준비를완료한후, 11월27일 5연대전투단이주공격부대로서유담리서쪽약 43Km에위치한요림동교차지점 ( 무풍리 ) 을점령하 아버지의비석 189
기위해제 7 연대전투단의초월공격을개시했으나, 중공군의강력한저항에 부딪쳐공격이저지되고많은전상자가발생하게된다. 이미입수한적군에관한정보를무시한채작전을개시함으로써비록장비는열세하나수적으로절대우세하고전술훈련이잘된중공군 12개사단에의해포위되어그유명한미제1해병사단과보병제7사단31연대가중공군의포위망돌파작전 ( 일명장진호전투 ) 을감행하게된다. 동이틀무렵산발적인전투가계속되는가운데공중에서는쌍발수송기로부터여러종류의보급물자가낙하산 ( 落下傘 ) 에의해. 물, 휴지등이계속투하되었다. 크리스마스가가까워서인지미국본토로부터보내오는크리스마스선물도투하된다. 그러다적진가까이떨어지는낙하물도있어난감한경우도종종있었다. 적군의사격권내에있기때문에회수작업은위험했다. 먼곳에떨어진낙하물은회수를아예못하고아군지역인근에낙하된물품만겨우회수한다. 우리 M중대가경계잠복하고있는지역전방에다수의낙하물이떨어졌다. 안갈수도없고갈수도없는상황이다. 지휘관도판단이난처한모양이다. 각분대장들을불러모아의논중이다. 우리들은회수하는것을원치않는데회수작업에나설것같다. 우선가까운곳에낙하한물품을회수하기로했다. 그물망에씌워져있기때문에옆에찬대검이나칼로절단해체해야운반할수있었다. 각분대장의인솔하에행동이개시되어 1차회수목표는무사히임무를완수했다. 투하되는물품의종류는주로 C. 레이숀 ( 전투용야전식량 ) 과의약품탄약. 음료수등이다. 190 아버지의비석
경계와긴장속에제1차 2차. 3차회수작업이이어졌다. 이번에는부상자를후송하기위한잠자리형소형헬기 ( 부상자 2인용바깥동체양측에부착 ) 3대가착륙했다. 투하된물자의회수는잠시중단하고부상자를헬기가착륙한장소까지운반하는일을거들었다. 나는헬기동체양쪽에부상자를들것과함께부착하는것을돕고있는데순간어딘가에서요란한총소리와함께총탄이우리쪽을향해날아와내발밑얼음땅에흙먼지를내며꽂힌다. 악하는소리와함께헬기로부터약간떨어져몸을뒹굴며납작엎드려총알이날아오는것을피했다. 적탄에명중된줄알았다. 그러나정신차려보니총알이빗나갔다. 우리의동작을결코적군이가만보고만있을리없었다. 우리를향해다양한화기로집중사격을가해후송작전은잠시중단되고다시쌍방간격렬한전투가시작됐다. 또다른곳에착륙해있던헬기가집중사격을받고파손되었다. 다른헬기는급히이륙해서남쪽을향해날아가고, 아군의대응사격이시작되면서치열한전투가또시작되었다. 헬기를엄호하고온전폭기편대도적군의잠복지점을공격하면서지상전을돕기시작했다. 분대장은분대원들에게엄폐할수있는곳에그대로엎드려있으라며손짓한다. 우리는원위치로되돌아갈수있는상황이아니었다. 이번에는다른전투기편대가나타나적진지를향해맹폭격을계속하다보니, 적군의기세도한풀꺾였다. 잠시치열했던전투는공중과지상에서의대응공격으로잦아들면서, 적군은공격력을잃고우리의시야에서멀리도망쳤다. 우리측도약간명의부상자를내고원위치로돌아갈수있었다. 우리의제 31 연대 3 대대는하루종일산발적인전투를하면서투하된물품 회수와진지구축, 엄청난많은수의중화기를집중배치하고적군의다음공 아버지의비석 191
격에대비하였다. 우리박격포소대원은임무를포기하고소총수의임무를대신했다. 공군의전폭기편대도하루종일우리의주변산에여러종류의폭탄을계속적으로투하해적군이우리쪽으로의접근을못하게막았다. 적은산정상과중턱에잠복하고우리들의행동을주시할수있는곳에위치해있다. 1950.11.29일새벽적군은우리의후방을기습공격했으나많은사상자를내고격퇴당했다. 아군은진격만계속하는상황에서방어태세는허술했기에희생도많았다. 이과정에서학생친구 1명이행방불명되고 2명이부상을당했다. 수시로적의포탄이우리쪽을향해날아온다. 특별한상황이아니면참호속에서나오지않는다. 다시해는지고어두워지면서일촉즉발의공포분위기다. 어제새벽에자다가기습당하며겪은전투장면이하나하나떠올랐다. 오늘밤나의잠복지점전면에서벌어질적군과의일진일퇴의공방전에서죽지않고많은수의적군을사살해야될터인데,,,, 걱정이앞선다. 지금까지하나님이나를지켜주지않았다면, 나는벌써죽었을텐데하나님께감사한마음도이루말할수없다. 오늘밤도무사하기를... 눈을감고하나님앞에간절한기도를드렸다. 꼭살려달라고, 살아서돌아가면예수님말씀에순종하고교회열심히잘다닐것이라고하나님께굳게맹세했다. 하나님은나의간절한기도를들어주시고꼭이곳에서살려내어머님품으로돌려보내주실것이라는확신이마음밑바닥에서차올랐다. 그러니마음이좀편해졌다. 긴장과적막속에적군의공격에대비해경계에임하고있으면어릴적지 192 아버지의비석
나온나의과거가선명하게다떠오른다. 동네에서친구들과재미있게뛰어놀던그때로거슬러올라가부모님의마음을상하게했던일, 동생을괴롭힌일등후회스런일이먼저떠오른다. 살짝눈을올려밤하늘을올려다본다. 개마고원의차가운밤공기속에별하나가외롭게떠있다. 밤이깊어가면서아군이계속적진의목표물에대해포격을가하자, 중공군도다양한포로우리를향해포탄을발사한다. 우리측의우세속에공방은계속되면서둘째날새벽이밝아온다. 나는전방약 200 미터거리에위치한완만한커브형의도로와연결된교량 전면방면과호수측면주변지역얼음벌판을가로질러돌격해오는적과철 로뚝을따라공격해오는적군을격퇴하는임무를맡았다. 나의전면에서대치하고있던많은수의적군이철길뚝을따라낮은자세로포복해와우리의진지를향해파상 ( 波狀 ) 공격을감행한다. 우리뒤에배치된수대의장갑차에장착된 4문의캐리버 50m/m 기관포가적군의접근을효과적으로제지하면서우리도계속적을향해사격을가한다. 내주변에서부상자가속출한다. 위생병부르는소리에응급처치를하기위해옆동료가달려간다. 오늘밤도쌍방간에격렬한전투가계속된다. 적군을향해사격을하면서도살아야되겠다는생각뿐이다. 셋째날중공군의공격은전날과동일한인해전술로, 우리진지에대한침투식파상공격을벌였다. 첫날전투의패전을만회하려는기세로아군의후방을공격섬멸하려는작전이다. 우리가실로엄청난화력으로대응하다보니적들은쉽게다가오지못했다. 이러한상황속에서도우리측의사상자는늘어만갔다. 아버지의비석 193
밤마다눈내리는낯설은땅혹한의개마고원장진호신흥리, 오늘밤도백설덮인산야에서승패를결정하려는, 피아간의격전이전개되고있다. 첫째둘째날전투에비해, 전부대원이죽기를각오하고적군을격퇴하고있다. 상호간에물러설수없는상상 ( 想像 ) 을초월한격렬한전투가사방에서벌어진다. 전투의양상은우리측이불리하다. 다급한상황에서 105m/m 곡사포가적을향해직사포로발사된다. 포병이할수있는마지막수단이다. 정신없이참호속에몸을숨겼다, 내밀었다하면서적과싸우는동안새벽먼동이터오고있다. 날이밝으면우리의전폭기가어김없이나타나지상과교신하면서목표물에대한공격을시작한다. 반갑다. 용기가생긴다. 우리측과근접거리에있던중공군이공중으로부터의기관포사격을받고도망치는것이우리의시야에들어온다. 일개편대가폭격을완료하면다음편대가연속적으로공중공격을가한다. 공중에서발사되는기관포의탄피가우리머리위로무수히떨어진다. 북한땅장진호신흥리에벼락과천둥, 지진이일어난상태다. 폭탄이떨어질때마다그폭풍이내가있는곳까지후끈거리고귀가멍해진다. 우리도퇴각하는적군을향해일제히사격을가했다. 오늘도중공군은많은희생자를내고물러갔다. 제일먼저나는하나님께감사기도를올렸다. 오늘의격전도하나님이나의생명을지켜주셨기때문에살았다고믿는다. 앞으로도계속해서내생명을지켜달라고기도를했다. 하루가지날때마다사상자가늘어나, 우리의전투병력이줄어든다. 오늘도잠시소강상태가유지되면서부상자를후송하기위해잠자리형헬기가수시로날아온다. 죽지않고부상당해헬기에실리는것을보면부럽다. 죽는것은일단면했기때문이다. 194 아버지의비석
넷째날아침이다. 부상자를헬기로후송하는일과공중에서투하되는전투장비수거와, 진지를재구축을하면서또하루가지나간다. 그러다우리가적군으로부터사방이완전포위당해옴짝달싹못하고있다는사실을처음알게되었다. 제3대대후방에있던부대가적군의포위공격을당해많은피해를보고남쪽으로철수했다는소식이들렸다. 하늘이무너지는청천벽력같은소식이었다. 우리부대는? 오늘밤은어떻게될것인가? 죽음이떠올랐다. 무서웠다. 그동안우리가싸웠던전투들은무엇이었단말인가? 엄습해오는절망속에오늘밤도한가닥희망을품고하나님을향해살려달라고애원하는기도를올렸다. 우리박격포소대에속해있던 6 명의친구중지금현재생존자는나와또다른한명뿐이다. 우리를포위한중공군은더욱강력하게공격 ( 攻擊 ) 해올텐데긴장속에오늘밤도깊어만간다. 한반도의최북녁땅한, 만 ( 韓, 滿.) 국경지대개마고원해발 2000mㅡ얼어붙은땅장진호에살인적인강추위와매서운찬바람이우리를덮치고있다. 영하 30~40도에중화기와포가얼어붙어작동이원활하지않다. 각종차량들은시동을계속걸어놓은상태다. 우리를포위하고대치하고있는적군은우리에게여러종류의포로계속사격만하지이렇다할공격은없다. 많은희생자를내면서계속우리를공격할필요성을느끼지않는모양이다. 중공군의주력부대는우리를포위한채퇴로차단을강화하면서남쪽방향으로계속진격하여포위당한우리와아군과의거리를더멀리떼어놓는작전이었다. 전날밤격렬했던전투에비하면약간은소강상태다. 우리의진지후방에서치열한전투가계속되고있다. 우리를에워싼포위망을뚫기위한아군의돌파작전으로생각되어한가닥희망을갖고밝아오는새아침을기다린다. 아버지의비석 195
3. 후퇴가탈출로,,,, 그러나그것은비겁한탈출이아니었다. 1950년12월01일. 날이밝으면서미군병사들의움직임이바빠졌다. 상부로부터철수명령이내려진모양이다. 자체적으로포위망을뚫고철수하란다. 각자가최소한의소지할수있는장비만을가지고나머지는소대별로모아불태워없애란다. 지휘관의판단과명령은아래와같았다. 훼이스중령은 오늘 (1950, 12. 1) 도탈출을위한연결부대의도착을기대할수없으며, 부하들의피로도는이미정상적인감내의한계를넘었다고판단한다. 이곳에서하룻밤을다시모험하여죽음을기다리느니차라리적의포위망을강행돌파하여단숨에하갈우리 ( 해병기지 ) 를향해서돌진해야한다. 그는먼저제56야포대대와중박격포중대에게 13:00 이전에남아있는전탄약을사격해버린후에화포를파괴하라 지시하고는 300명이넘는부상자후송을위해상태가양호한차량 22대를차출하고나머지차량은모두파괴시키라 고명령하였다. 어제밤내가품었던한가닥의희망이무너지는순간이었다. 길가에세워둔 20여대의차량에미처공수하지못한부상자를서둘러차에태우기시작했다. 공군의전폭기편대가우리의주위를적군이접근하지못하도록무차별적으로폭탄과네이팜탄을투하하는가운데우리는탈출을서둘렀다. 우리를포위하고있던중공군도철수하는장면을가만히보고만있지않았 다. 총공세로나오기시작했다. 불태우던보급물자와장비, 포탄을그대로놓 196 아버지의비석
고내가있던참호속에서나와도망치기시작했다. 부상자를실었던트럭도 일제히남쪽으로향했다 적군이우리를향해사격을가하는총탄을피하기위해우리는철길뚝반대면에일렬로길게줄을지어포복하면서후퇴했다. 우리의후미에서는적군의추격이시작되었다. 각자의상황판단에따라행동한다. 참으로어처구니없는상황이벌어졌다. 모두가도망가기에만혈안이다. 무질서는극에달해용감했던전투병의모습은보이지않고전투능력을완전히상실한상태다. 지금까지명령하에행동하던제3대대가한순간무너져제각기살기위해호숫가철뚝밑으로뛰어내려와몸을숨기고음폐물를이용해낮은자세로또는일렬로포복을하면서남쪽을향해필사의탈출을하고있다. 지나가는곳곳마다적군이우리를기다리고있었다. 달아나다목이타서도로옆흙섞인눈을집어먹었다. 길가에총에맞아방금죽은피난민의시체가보였다. 어린아이로부터아낙네에이르기까지그리고주인잃은보따리가사방에널려있다. 지금바로여기가굶주린야수들의싸움터였다. 또한전멸의순간에살기위해탈출하려는우리제3대대병사들의처절한모습이었다. 대항할의지와능력도없다. 퇴로가완전차단된상태에서독안에든쥐와같다. 탈출구가없다. 적군과도근접거리에있기때문에공중에서의폭격지원도잘이루어지지않고있다. 지휘관도없다. 스스로결정하고행동한다. 나는운이좋게도적군의추격과사격을받으면서도상당거리를죽지않고도망쳐나왔다. 지금내가있는이장소는그래도약간숨을돌릴수있는장소다. 적군의추 아버지의비석 197
격에남쪽을향해돌진하던차량들도여기서멈추어있다. 부상자를태운트럭에는적군을상대해싸워야할멀쩡한병사들이운전석과조수석양쪽에수명식이나매달려있다. 그런가하면앞바퀴양쪽본닛위에엎드려꼼짝안하고있는병사도있다. 남쪽다음장소를향해돌진할때마다양쪽언덕에서엄호사격으로돌진을돕는다. 누가그렇게지시하는것도아니다. 지금여기서머뭇거릴시간이없다. 상황이긴박하게변하고있다. 우리를추격공격하는적군은높은구릉지대를광범위하게장악하고우리가통과하는방향에맹렬히사격을가하고있다. 우리의일부병사들도선임자의지휘에따라적군의공격에또다른장소로이동해가면서대응사격으로치열한교전이시작되었다. 이곳을빨리탈출해야한다. 용기와각오가필요한순간이다. 기회를노리던병사들중에용감한한병사가먼저뛰어나가면그뒤를따라하나, 둘씩소그룹으로남쪽을향해빙판을달려나간다. 나도이번그룹에끼여얼음판위를돌진하리라결심했다. 그순간마음속으로하나님을불러외쳤다. 이번만딱한번살려달라고애원했다. 그리고최단거리를택해내가가야할남쪽구릉지대를향해총탄이날아오는얼음벌판한가운데로달려나갔다. 너무가까운직선코스로잘못선택한것같다. 적군이먼저통과한아군병사들을향해사격을많이했던그얼음판이었다. 나는수명의동료들과함께그얼음판의중간지점을돌진하는순간얼음판이깨져물속에빠지고말았다. 철렁하고가슴이내려않는순간당황스러웠다. 철모와소총그리고등에질머맸던배낭도함께물에빠지고말았다. 나는순간적으로하나님을원망했다. 다른병사들은물에안빠지고달아나는데나를죽게하시다니, 이제는죽었다생각하니앞이캄캄해졌다. 적탄 ( 敵彈 ) 은계속나의주변으로날아와얼 198 아버지의비석
음판위에꽂힌다. 그래도살아야하겠기에얼음판위에가슴을대고팔에다힘을주고나오려니얼음이계속깨져나올수가없었다. 몇번허우적거리는그사이순간적으로지혜가생겼다. 수영자세에서얼음위에팔을올려놓고수영을하듯하니몸이얼음판위로쓱올라왔다. 물속에서허우적거리는동안적진에서는나를향해집중사격이수없이계속이어졌으나신기하게도적군의총탄에맞지않고무사히통과해서몸을은신할수있는또다른목표지점인구릉지대제방에도착할수있었다. 악몽의순간이지나갔다. 뒤를돌아보니아직도한두명의동료병사가어름물속에서허우적거리는모습이보였고나머지병사들은적군의총탄에맞고얼음물속으로가라앉거나떠있는상태다. 그러나포위망을완전히벗어난것은아니다. 얼마를가야할지어떠한상황이나에게닥쳐올지나의운명은탈출로의지형에따라안전과절망이수시로교차한다. 나는물에빠져하반신이완전히물에젖어있는상태였다. 갈아입을내의와바지도없다. 희망없는탈출에한가지근심이또생겨났다. 적군의총탄도피해야하지만지금부터는물에빠져얼어붙는나의몸에도신경을써야한다. 앞서탈출하다적군에사살된전사자의배낭을뒤져보니양말이나왔다. 그것을장갑대신에양손에꼈다. 바지와내의는없다. 갈아입을시간적여유도없다. 철모와소총도전사자에것으로대신했다. 우리가탈출하는가운데바로전면에서아군공군기의오폭으로인해많은사상자가발생했다. 대혼란이왔다. 그야말로참혹한참상이다. 사기는저하되고수습할수없는상태다. 적군의계속적인추격과사격을피해남은생존자들은계속포위망을돌파하기위해남쪽으로의탈출을시도한다. 적군은 아버지의비석 199
우리가통과해야할길목을완전히차단하고우리를향해계속사격을가하 고있는상태다. 시간이지날수록물에빠졌던하반신에찬기가더해졌다. 이산을빨리통과해야할텐데,,,, 공중에서는우리가통과해야할산정상부근 1221고지일대에무차별폭격을가해중공군의공격을무력화하고하는동시에, 지상에서는부상자를실은차량대열도차량을세운채운전병도차에서내려와우리와같이길가에엎드려사방에서날아오는총탄을피하면서대응사격을하고있다. 시간이계속지나면서사상자가속출한다. 후미쪽에서는일부낙오자가적군에생포되는상황이다. 초조하고긴박한상황이전개되고있다. 중공군의추격과매복공격이계속이어지고있다. 산정상을전면공격해통과하는방법밖에는없다. 또한번의목숨을건산정상 1221 고지에대한돌격전이다. 끝이없다. 죽어야끝이날것같다. 지옥으로들어가는문턱에서있는느낌이다. 이산정상을넘지못하고죽을것만같은생각이든다. 살아서돌아간다는희망이거의없다. 그러나지금여기서더이상머뭇거릴시간이없다. 선임지휘자의명령으로정상공격을위한돌격이이루어지면서나는우측에서산정상을공격하게되었다. 간헐적으로기총사격과폭탄을투하하던전폭기편대도멀리날아가버렸다. 여기서산을넘지못하고죽느냐살아서계속남쪽으로가느냐기로의순간이었다. 모두가긴장된상태다. 드디어행동개시다. 정상을향해일제히살기위해죽기를각오한돌격이다. 산정상과어딘가알수없는곳에서우리를향해수없이총탄이계속날아온다. 미군지휘자는고함을지르며정상을향해 200 아버지의비석
돌진하란다. 최악의상황이전개되고있다. 정상을향해포복과사격을하면서한발씩올라간다. 죽을건만같고공포감에올라갈용기가없다. 그럼에도지금상황에서안올라갈수도없고. 제자리에있을수도없다. 산정상공격은계속되지만살아야되겠다는생각뿐이었다. 전사자가속출했다. 지금여기까지나는 6명의학생전우중유일한생존자인친구 < 고문국 > 과앞서거니뒤서거니하면서왔다. 나는 < 고문국 > 보다앞선상태에서산정상을향해적군에총격을가하면서음폐장소에서또다른장소로이동하면서올라가고있었다. 그런데갑자기악! 하는소리와함께총탄에맞았다며 < 고문국 > 이소리를질렀다. 내가뒤를돌아보니꼼짝하지않는다. 죽었다고판단하고계속산정상을향해올라가려는한순간또소리친다. 총에맞았다고,,, 다시뒤를돌아봤다. 나는고문국보다산정상가까이접근한상태다. 내가있는장소에서약 20m이내의거리를내려가는것은위험하다. 그쪽은음폐장소가없다. 총탄이계속날아오기때문에움직이면적군의표적이된다. 우리는산정상과자동차길과도로아래쪽사방에서협공을당하고있다. 정신이없다. 내려갔다다시올라온다는것은그야말로모험이다. 잠시생각끝에위험을각오하고친구를살펴보기로결심했다. 적군은계속우리가산정상으로돌진하는것을저지하기위해우리쪽을 향해맹렬하게사격을하는상황에서나는잠시망설이다기회를포착해재빠 른동작으로고문국이있는장소로이동해서살펴보았다. 총탄이우측귀위 아버지의비석 201
쪽헬멧을뚫다말았다. 나는친구에게괜찮다는말해주고, 산정상의적군을향해계속사격을하면서우리의제3대대병사들과함께일제히적진으로돌진하기시작했다. 우리가통과하는걸저지하고있던적군도무차별적인공중폭격과죽기를각오하고적진을향해돌진하는기세에눌려일부는도망가고많은사상자를내며포위망을끝내풀어주고말았다. 나의좌측동쪽으로연결된부근일대에서는계속적을공격하는전투가벌어지고있다. 나의위치바로발밑참호속에부상당한적군수명이엎드려약간씩움직이는것이목격되었다. 미군동료에게참호속을가리키며노데드, 노데드 (No Dead) 라고소리를질렀다. 알아서사살하란다. 그리곤빨리산을내려가자고손짓한다. 나도마음이약해졌다참호속을향해사격을하기가싫어졌다. 적군이지만순간적으로죽인다는것이마음에걸린다. 그러나망설일시간이없다. 적군의추격을피해급히현위치에서빨리달아나는것이우선이다. 지금내가살기위한필사의공격이이산정상 (1221고지) 공격으로마지막이되었으면하는마음간절하다. 그런데내뒤를따라올라오던 < 고문국 > 그친구가보이지않는다. 이상하다틀림없이내뒤를따라올라왔는데그친구가보이지않는다. 사방을둘러보았지만보이지않는다. 산정상일대는아직도적군과의교전으로요란한총성이계속되는상황이다. 큰소리로 < 고문국 > 을몇번씩이나반복해서불렀다.!! 고문국 ~ 고문국어디있냐 ~? 고문국들리면대답하라.~ 고문국!! 그는끝내대답이없다. 죽었나보다, 조금만더올라왔으면살았을텐데아 202 아버지의비석
쉬운마음이간절하다. 지금학생친구 6명중다죽고나만홀로남았다. 그러나슬퍼할겨를도없이내가가야할남쪽방향을보니고원지대속의野山과平野지대다. 철길과자동차길이남쪽을향해나있다. 함흥으로가는길이다. 우리의제31연대본부가위치한후동리가목표다. 여기서얼마의거리인지모르지만살기위해서는또가야한다. 해는지고날이어두워지면서기온도뚝떨어졌다. 눈보라의찬바람이매섭게불기시작했다. 얼음물속에빠졌던바지가얼기시작했다. 발을옮길때마다바지갈래에서뻐걱뻐걱소리가난다. 아직속내의는얼지않고찬기만느껴진다. 우리를향해또다른곳에서적군의추격이시작되었다. 밤이지만사방이잘보인다. 산정상에서신속하게내려와우리는선임자의지휘에따라소단위로나누어져행동한다. 나는선두그룹에속해전투대열을유지하면서철길과자동차길을번갈아가면서초긴장속에탈출을계속했다. 처음에는여러방면으로부터적군의추격과사격을받았으나, 우리는빠른걸음과낮은자세를취하면서남쪽을향해전진또전진했다. 드디어연대본부가위치한후동리마을부근까지어렵게접근할수있었다. 그러나우리를맞아줄우군은보이지않고격전을치른잔해만이남아있을 뿐연대본부는더남쪽으로철수한상태였다. 4. 진정죽어야끝나는전쟁인가? 매복사격을가하는적군을때로는정면으로돌파하면서잔인하고극악의 상황속에서살아남아여기연대본부가위치했던후동리까지탈출해왔건만 여기가내가살수있는마지막목표지가아니었다. 적군과의치열한전투로 아버지의비석 203
중공군의시체가여기저기흐트러져있으며아군의전사자시체도눈에띤다. 전진배치된우리전방대대의전투를지원할연대본부가우리제3대대와동시에적군의기습공격으로많은피해를입고후퇴했으니그동안우리의제 3대대가와해될수밖에없었던참으로난감한전황을이해할수있었다. 나에게는더이상의희망도없고체력도한계에왔다. 모든것이여기서최후를맞을것같은불길한예감이들었다. 얼어붙은長津湖의山野와시베리아에서불어오는눈보라의찬바람속에장진호의밤은깊어만간다. 살을에이는차디찬공기는내몸을더욱더얼어붙게하여기진맥진케한다. 그래도좌절과낙심은잠시뿐우리의선두대열은남쪽을향해계속탈출한다. 지금탈출인원은약20명내외어둠과침묵속에사방을주시하며외롭게탈출하고있다. 후속대열은보이지않았다. 대열에서낙오되면죽는다. 이목숨이끝날때까지동작을멈춰서는안된다. 걸어야산다. 부산항을떠난후누님집에다살아있다고무사하다고편지보냈는데받아보셨는지요.. 어머니! 꿈에서라도저를보셨는지요.? 저는지금어머니곁으로가기위해처절하게걸음을떼고있습니다... 긴장과공포와침묵속에남쪽을향해탈출은계속된다. 우리의후미지역에서는총성이계속들려오고있다. 우리를추격하면서후속부대의퇴로를차단키위한적군의작전인것같다. 우리들은이보다앞선상태의위치에서탈출하고있다. 우리제 31 연대제 3 대대의막강했던병사의모습은보이지않고비참하다. 극소수의병사만이살아남았다. 총없이빈손인병사, 동료전우의팔에의지 해걷는부상병, 패잔병의모습이란참으로비참하다. 여기서더처절하고잔 204 아버지의비석
인한비극이있으랴!! 세계최대의강국이고세계2차대전을승리로장식한미국으로서는그야말로치욕적 ( 恥辱的 ) 이다. 세계최강의군사력을자랑하는군대치고는너무나도허술하고무력하다. 적군에일방적으로타격 ( 打擊 ) 당하면서무질서하게도망쳐나오는지금의미군은전멸상태이다. 후일 ( 後日 ) 어떻게전사 ( 戰史 ) 에기록될까? 물에젖은내바지는시간이지나면서꽁꽁얼어고목나무같이굳어만간다. 발바닥이얼어붙는것같아더욱초조해진다. 내가가야할곳이아직멀었는지희망이보이지않는다. 긴박하고극한상황에서지금이순간나는내자신을서서히잃어가고있다. 다리를만져보니아직은신경이살아있다. 아군이있는곳까지걸을수있을지발가락사이로얼음이얼어오는것같아마음이더욱초조해진다. 맨발로얼음판위를걷는느낌이다. 입을악물고계속걷는다. 발의느낌이없어지는것같다. 밤은깊어만가고총성은희미하게사방에서들려온다. 의식도가물가물해지고더이상은걸을수없을것같았다. 5. 나의임무는끝나지않았다. 나는발에다온통신경을쓰다보니얼마의거리를걷거나달려왔는지모르 겠다. 최후의그순간까지계속중공군의매복사격과맹추격을받으면서긴 장과공포속에서뛰거나걸으며남쪽으로향했다. 아버지의비석 205
갑자기우리대열에서앞서걷던미군이발걸음을멈추고납작엎드렸다. 반사적으로뒤의병사들도몸을낮추고총을겨누었다. 어느쪽이든총이발사되면또다시격전을벌일각오를하고신경을곧추세웠다. 그러나잠시침묵이흐르는가운데총소리대신예상밖의사람소리가들려왔다. 스탑!! 스탑, 홀드업? 돈슛트, 지아이 (GI) 지아이??' 피아의신분을확인하는듯한말들이오가는것같았다. 드디어우리의신분을확인한초병이밝은목소리로우리를환영하는듯한외침이새벽공기를가르고눈속을퍼져나갔다. 1950년12월2일새벽장진호남단 ( 南端 ) 하갈우리외각 ( 外殼 ) 지대에서미해병제1사단본부전초부대 ( 前哨部隊 ) 가탱크를포함해중무장 ( 重武裝 ) 한병력을이끌고우리가돌아올것에대비해기다리고있었던것이었다. 후일장진호전투의작전경과기록은다음과같았다. 작전일시 : 1950년 11월 27일 - 12월 2일. 작전지역 : 함경남도장진군서한면신흥리장진호동안. 적군 : 중공군 2개사단 ( 80, 81.) 규모. 아군 : 미제7사단제31연대제3대대. 제32대제1대대 (2개대대) 12월 4일에확인된바로는하갈우리 ( 해병기지 ) 로철수한보병 2개대대의병력은불과 181명 (90% 는동상 ) 이었다. 이대대의개전초병력은 1,053명이었으므로약 900명이장진호동안일대에서전사또는동사했거나낙오되어적에게포로가되었을것으로판단된다. 이전투에서연대장을비롯하여대대장, 중대장등많은지휘관을잃었다. 그러나이특수임무부대의 7일간의혈투는 2개사단이상의중공군에게심대한손실을주고그들을고착견제함으로써미제1해병사단의동측방위협을감소시키고상급부대의작전에기여한 206 아버지의비석
공이지대했다. 해병대병사들이우리를껴안아준다. 우리의어깨와철모를두들겨주면서 장하다, 용감했다, 고생했다, 살아서돌아와반갑다 는뜻의영어를연발한다. 참으로내가살아서여기까지왔다는것이믿어지지않았다. 기적같고꿈만같다. 나도모르게뜨거운눈물이흘러내렸다. 땅바닥에주저앉고말았다. 나는들것으로운반되어앰블랜스를타고야전의천막속에옮겨졌다. 얼어붙었던신발, 바지를벗기고한미군위생병의정성어린맛사지와음식물을제공받기시작했다. 적진을향한포성은요란하지만천막속희미한불빛아래땅바닥들것에누워있어도나는지금이순간살았다는안도감에여기가지상낙원이다. 다음날중공군에포위당한해병사단본부하갈우리에급조된활주로에서쌍발수송기에실려함흥영포비행장에도착, 함흥시내에있는육군제15병원에입원하게되었다. 제15육군병원은폭격당한모습으로썰렁했다. 창문에는유리도없고, 가마니나담요로창을대신한곳도있다. 나는하반신이동상에걸려많은걱정을했다. 다리가근질근질하고가려움의감각만이있을뿐이다. 그러나특별한이상은없었다. 기적같은상황이또일어난것이다. 나는극심한탈수와피로감으로원인모를신열이나서며칠간을의식이몽롱한상태에서아무것도먹지도못하고위병소에머물렀다. 이후흥남부두로급히철수중인육군제1군단정보부대소속의매형을어렵게만나는과정을거쳐가까스로지옥같았던전장터를빠져나올수있었다. 장진호전투에서전멸의순간나는신의선택을받고끝내살아남는행운 아버지의비석 207
의병사가되었다. 그러나대전현충원에는고문국이라는나의전우가잠들고있다. 7일간의장진호혈투에서소대원중한국군은나와고문국만살아남았었다. 중공군으로겹겹이싸여진포위망을하나하나뚫고나오는과정에서, 드디어최후의일전인 1221고지돌격전에서나는적군을제압해탈출하는데는성공했으나나의뒤를따르던고문국은끝내총성속에스러져갔다. 산발적인전투가계속되는상황에서고문국을계속불렀지만고문국은끝내대답이없었다. 당시의처절했던전장 ( 戰場 ) 에서우정과전우애로꽃을피웠던이름잊은전우들과고문국. 60년이지난지금여기대전현충원에옛전우가찾아와석판에새겨진고문국. 그대의비석앞에머리를숙인채서있다. 길고도긴세월의강을휘돌아지금이곳에서서, 잠시그때를회상하며나와생사의시간을함께했던잊지못할우정의전우고문국을그리워하며다시한번그대이름을나즈막하게불러본다. 당시우리소대원중학생친구 6명은나이가엇비슷해곧잘어울렸었다. 전세가심각하다고느껴질즈음어느날우리는자연스럽게모여결의를했다. 모두살아집으로돌아가기엔어려울것같다. 그러나끝까지살아서돌아가는친구가집까지찾아가지금쓴주소와함께편지를전하자 며굳게다짐하고편지를서로교환하고소지했었다. 전우들은각자부모님들에게나를키워주시고공부시켜주신것고맙다고,,, 아버지, 어머니가보고싶다고,,,, 형제야사랑한다는그말과함께기타등등을썼었던같다. 그러나난살아남은자로서마지막임무를해내지못한자괴감에내내억눌 렀었다. 장진호를건너면서물에빠져배낭에넣었던편지들을모두소실하고 208 아버지의비석
말았다. 미안하다정말미안하다 이제저기서해의지는해와다를바없는내인생에서임무를마치지못한노병은이글로미안한마음을대신하려한다. 또한멀리한국땅까지건너와자유민주주의의이념아래값진목숨을내줬던미군동료병사들에게도마음깊이감사의뜻을전한다. 후기 미국은 2000 2005년장진호전투지역에서발굴한미군유해 226구를하와이의합동전쟁포로실종자사령부 (JPAC) 로옮겨와유전자감식을실시했다. 그결과 12구가아시아계인종으로확인되자 2011년 8월한국국방부유해발굴감식단에이를통보했다. 2012년 5월 25일, 북한지역에묻혀있던국군유해가봉환된것은휴전이후처음이다. 6 25전쟁당시미군에배속됐던카투사로신원이확인된 2구와 10인의무명용사의유해봉환을계기로북한지역내국군전사자실태에관심이쏠리고있다. 지금까지수습하지못한국군전사자 13만명중 3만9000여명이북한에묻혀있을것으로군은추정하고있다.(2012년 5월 26일자동아뉴스중 ) 아버지의비석 209
장려상 나의 6.25 참전기 박명호 서울동대문구 6.25 전쟁이일어난지 62년이지났고, 내나이는 80이넘었다. 그러나나는아직스무살의청년이고, 그당시의전투는지금도생생하다. 나는내가슴에전쟁을묻은채살아왔으며, 그때의기억은아무때나없애주세고되살아난다./ 아, 그때의전우들은다어디에있으며, 나는지금살아무엇을하고있는가. 나는그때의장면들은어떻게든남기고싶었으며, 그때보고들은것을후손들에게꼭전하고싶었다. 나는이수기를쓰며가슴이문득문득아파옴을느낀다. 내나이가많아쉽게감상에빠지기도하며, 지나간시간들이너무아쉬어마음이찢어지기도한다. 그러나, 그런것들은아무것도아니다. 내전우들은이미 60여년전에총알에박히고, 칼날에찢어지고, 대포알에부서진것을. 우연히보훈처에서참전수기를모집한다고하기에여기몇글자으모한다. 글쓰는재주는물론없고, 뚜렷한업적도없는나지만그래도나는내전우들을위해무엇인가하고싶었다. 그래서용기를내어이글을쓴다. 전우들이여, 나의이작은수기를그대들에게바치오니부디우습다탓하지말고하늘에서라도미소한번지으며읽어주기를바란다. 나는 1932 년생으로 6.25 가일어나던 1950 년에만 18 세였다. 내고향은경 기도남양주평내였고, 우리가족은할아버님박천홍, 할머님손악이, 아버님 210 아버지의비석
박완만, 어머님이일순, 형님박영호, 형수님엄순례, 누님, 동생박인호, 여동생박경희, 남녀조카등모두 16명이었다. 6.25 전쟁이일어나기전에나는서울서대문에있는적십자병원에근무하고있었다. 6월 25일새벽에전쟁이일어났다는소식을라디오방송을통해알게되었고, 뉴스에서는우리국군이진격을하고있다고하였다. 6월 26일오후에서울북쪽에서간간이폭음이들려왔다. 라디오방송을동료들과함께듣고있으니이승만대통령께서우리국군이북진을하고있다고한다는뉴스가계속나오고있었다. 우리는국군이북진하고있구나하고믿고있었다. 27일되자더욱가까이에서포성이자주들리자우리직원들은불안과공포에휩싸여가고있었다. 28일날이밝자포성은멈추고조용해졌다. 그날오후에작업모와작업복에붉은줄을친인민군이나타났다. 인민군은서울시민들에게해방이되었으니안심하고가정으로돌아가라고하였다. 나는급히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나와동대문을거쳐망우리고개넘어구리시, 남양주금곡을지나고향인평내까지걸어서무사히도착하여가족과다시상봉할수가있었다. 당시인민군을환영하는사람들이많았다. 서울에서는많은중학교고등학교학생들과시민들이김일성노래를부르고, 김일성사진이붙은피켓과남조선이해방되었다는현수막등을들고행진했다. 을지로와종로거리가꽉메일정도로인민군환영집회가이곳저곳에서열렸다. 시골에서는넉넉하게살지못하던사람들이자위대라는완장을차고다니며부락에서잘사는사람들을괴롭혔다. 부락에서회의가있다고하여참가하였다. 인민군이주민들을모아놓고누구는자위대대장, 누구는여맹위원장을하라하고, 나를지명하여민청위원장이라는칭호를주었다. 나이도어린내가할수없다고하니까자위대책임 아버지의비석 211
자가 여러분이사람박명호가적당하다고생각하면박수를쳐주세요. 라고하여사람들이박수를침으로그직책을맡게되었다. 그직책을맡고보니아침일을하러가기전에부락회의가있고, 저녁일을마치고돌아오면회의가있다고하였다. 아침회의에서는오늘은무슨일을하라는임무를주고, 저녁회의에서는결과보고를하라고하며날마다몹시괴롭혔다. 이렇게괴로움을당하고있을때서울서대문적십자병원에서복귀하라는통지를받아병원으로복귀하였다. 병원에복귀하고보니인민군부상병이하루에도수백명씩도착하여병원전체가인민군부상병원이되어병원이물샐틈도없이꽉찼다. 이렇게며칠근무하고있었다. 어느날귀한분이온다면정문쪽으로길게늘어서라하고인민군이양쪽으로삼엄하게경계를하고있었다. 이윽고사이렌소리가나더니까만세단차가 10여대도착하였다. 한세단차에서거구의소련사람이내리고, 또다른차에서거구의남자가내리는데그사람이김일성원수라고하였다. 참잘생긴미남이었다. 윗머리가약간벗겨진것같았으나위풍당당해보였고대단한사람으로보였다. 이렇게며칠근무하고있던어느날저녁이였다. 난데없이비행기소리가스쳐가더니용산쪽을폭격하였다. 폭격과동시에시커먼연기가치솟았다. 그순간여기적십자병원도폭격을당하는것이아닌가하고겁이더럭났다. 마침내병원을떠나기로하고서대문에서부터동대문, 청량리, 마우리고개를넘어서고향남양주평내까지걸어서갔다. 고향에도착해보니청량리에서원주를거쳐부산으로가는철도가운데북한강을건너는양수리철교가미군제트기의폭격으로끊어져있었다. 인민군이한참남진하고있는때였다. 인민군은전차포탄, 야포포탄이없으면전쟁을할수없으므로그곳주민들에게야포탄을짊어지고남한강을건너게하였다. 밤새도록이일을반복시켰다. 212 아버지의비석
우리고향평내에서양수리까지는 20킬로미터이상되었다. 그먼곳을밤에만걸어서왕복하며포탄을나르니몸이지칠대로지쳤다. 왜밤에만이런일을시키느냐고물으니낮에는미군폭격때문에못한다고하였다. 나날이이렇게괴로우니도저히그부락에서살수가없었다. 그부락뒤에는학당골이라는산이있었다. 그골짜기에방공호를파서천장에나뭇가지를걸쳐놓고그위에흙을덮고또그위에뗏장으로위장하여그속에 16명의가족이살수있는방공호를만들어지냈다. 어느날, 인민군이부근의청장년들을미금시금곡초등학교운동장으로다모이게하였다. 운동장에청장년들이꽉차자강사가등단하였다. 우리의인민군이낙동강을점령하고며칠후면부산까지해방시킬것인데우리청년들이이곳에이렇게있으면되겠느냐. 대구부산까지해방시키면세계에서가장잘사는지상낙원이될것이다. 라며온갖유화정책에선전을하는것을귀로듣고만있었다. 모두눈을감으라고하니까귀로듣기만했던것이다. 그강사가우리청장년이이렇게앉아만있지말고모두일어나서인민군을도우러가지고하면서나갈사람은손을들고앞으로나오라고하였다. 눈을감고있는가운데옆과앞뒤에서 네, 네. 하면서사람들이앞으로나갔다. 그렇게해서나간사람은자진해서의용군으로나간것이다. 그러나사실은인민군이운동장의청장년들옆과앞뒤사이사이에열성당원을앉게하여그열성당원들이손을들고나오도록한것이었다. 그사실을모르는청장년들이얼떨결에손을들고나온것이었다. 그사람들은결국의용군에가서대한민국을배반한사람으로몰리게되었다. 나도그사람들중의한사람이었다. 그러나곧탈출하여집으로돌아왔다. 내가두번째의용군으로가게된내막은이렇다. 한집에청장년이 2, 3인이상있는집에는한명씩할당이나왔다. 우리집에는형님박영호, 중간에나 아버지의비석 213
박명호, 동생박인호이렇게삼형제가있었는데형님에게가라고할수가없고, 동생에게가라고할수도없어둘째인내가의용군으로가게된것이었다. 그부락에서는나와부락개울건너편에살고있는한사람이차출되었다. 두사람은서울청계초등학교에서밤에만의용군훈련을받았다. 7일정도훈련을받으면낙동강전선으로가게되어있었다. 5일째되던날저녁무렵, 종로에서동대문쪽으로이동훈련을하고있었는데인도에훈련모습을보기위해많은인파가모여있었다. 사람들이많아탈출한기회가있을것같았다. 마침내같이차출되었던사람을옆으로잡아끌어민간인틈에섞여걸었다. 그렇게하여탈출한두사람이동대문방향으로가면잡힐것같아서종로 5 가에서종로-화신앞-을지로-동대문운동장으로가는전차를타고동대문운동장에서내려청계천, 청량리, 망우리고개를넘어고향으로돌아왔다. 고향평내에서세번째로다시의용군으로차출되었다. 청량리로터리까지왔을때그곳에도많은사람들이다니는틈을타서다시도망칠수있었다. 9월 15일유엔군이인천상륙작전에성공하여그후인민군이후퇴할때우리양민을많이괴롭혔다. 인민군패잔병 16명이패주하면서우리부락의청장년들을모아놓고회식을베풀라고하였다. 우리부락사랑채가있는어느집큰방에다닭을잡고여러가지음식을마련하여접대를하였다. 그때우리부락의청장년들이입을모아의논하기를이사람들을몽땅잡자고하였다. 우리청장년 15 ~ 16명이그사람들을접대하는척하다가그사람들이가지고있는장총, 다발총등을빼앗고 16명의손을묶어마당에다꿇어앉혔다. 곧바로나무짊어지는지게끈으로꽁꽁묶어 3킬로미터서울방향에있는금곡지서에인계했다. 그러나이사람들이반항을하며파출소를다때려부수고기물도다파괴하면서난동을부렸다. 결국그고장국회의원에게연락 214 아버지의비석
하여몽땅잡아간일도있었다. 인민군이후퇴하는과정에있었던일이다. 우리집방공호뒤쪽으로올라가면학당골산정상이있는데그곳에태극기를꽂고있던군인들이자신들은인천에상륙해서이곳까지진격해왔다며부락으로가서음식을해다달라고하였다. 내가친구한사람과우리부모님이계시는방공호에들렀다가내려간다고하고사시나무골방공호를내려오는데총소리가많이나서앞을바라보는순간, 수백명의군인들이나를향해총을쏘고있었다. 전속력으로방공호로뛰었는데수백발의총탄이나하나를보고날아오고있었다. 나는부모님이계시는방공호로급히뛰어들어갔다. 군인들이방공호쪽으로총을난사하였다. 우리식구들은방공호안에서밥을지어먹고있었는데총알이비오듯쏟아지니식기가박살이나고방공호속에서 16명의생명이몽땅다죽에되었다. 우리아버님께서손을들고나가시며모두다우리가족이라고하니까조금전에뛰어들어간인민군병사를내놓으라고하였다. 우리아버님께서그애는우리아들이라고하니까이영감거짓말하지말라고개머리판으로우리아버님을내려쳤다. 어쩔수없이내가끌려나갔다, 그당시는젊은사람들은머리를다깎았다. 인민군도머리를깎아인민군과민간인이구별이안되는것이였다. 더구나방공호로달리는과정에신발마저벗겨져우리가족이라고하여도믿지를않았다. 나는가족을떠나손을어깨위로올리고병사들에게끌려갔다. 병사들은나를포로나잡은것같이산에서내려가경춘국도인돌팍고개까지갔다. 거기에서천마산쪽을바라보던미국관측장교가나를보더니갓뎀하면서돌로내려쳐미군관측장교에게맞아죽을뻔하였다. 아버지의비석 215
나를호송하던병사들이끌고다닐필요없이여기서총살시켜버리자고하면서양쪽에서 M1총을겨누는것을내가 당신들양민학살하는것이얼마나큰죄인지아느냐. 며양쪽에있는소총을못쏘도록붙들고승강이를벌이고있었다. 그때마침지프차한대가올라오다가이게무슨짓이냐고하면서총을내려놓게하였다. 그장교가내머리를만져보고옷을벗으라고하면서어깨도만져보고발을올리라고하면서내발바닥을만져보더니이사람은인민군이아니다라는판정을내려주어간신히살아날수가있었다. 역시장교는판단력이있다는것을이때알았다. 그렇게풀려나집으로돌아왔다. 내가풀려나온것을온식구가기쁘게생각하며이야기를하고있는데군인들이우리집을찾아와우리삼형제를보더니너희들솔직히말하지않으면다죽여버린다고호통을치며집안을샅샅이뒤졌다. 군인들이신발벗어놓는댓돌을뒤지다가내가의용군갔을때신었던인민군신발을꺼내면서이래도의용군에안갔다왔다고부인하겠느냐며총부리를들이댔다. 그래서내가나서서내가의용군에갔다왔다고하니까이것들악질이라고하며밖으로끌고나가총살시키자며밖으로끌고나갔다. 그러나나와같이의용군에끌려갔던사람집으로데리고가서확인을하고, 그부락의유지들의증언을들은다음풀려나올수가있었다. 우리집에인명피해는없었으나재산목록 1호인마차소가없어졌다. 인민군이후퇴하면서큰마차소는다끌고가던때였다. 저녁노을이질무렵인민군두명이장총을메고올라오는것을보고빨리소를몰아산으로도망을쳤다. 산옆길로피해서소를방공호옆에매어놓았는데방공호로총을집중사격하는바람에소가총알 5발을맞고죽은것이었다. 황소한마리를우리식구가다먹을수가없어서부락민에게팔려고하였 216 아버지의비석
으나부락민들이총맞은소는독이들어있다고하며한사람도사지않아서우리가족이황소한마리를다먹어버리고말았다. 나는몇번이나의용군에끌려갔었고, 국군의오해도받았다. 구사일생으로모든위기를잘넘겼다. 어찌보면운이좋았던것같기도하다. 만일그때인민군에잡혀갔더라면오늘날이렇게살아있을수가없었을것이다. 참으로꿈같은세월이었다. 인민군은인민공화국이라위장하고민주주의를외치고있었다. 공산주의선동은감언이설이었다. 그들은공산당의인간세상이바로지상낙원이라고부르짖고, 범죄가없는세상이며, 돈한푼없어도김일성대학을다닐수있으며, 남조선에서는병에한번걸리면꼼짝없이죽지만북조선에서는김일성원수계서다고쳐주신다고허위선전을하였다. 농사를지을농토도무상으로나누어준다고하면서, 어느부락이라도토지를많이가지고있는지주들에게서논밭을압수하여어렵게사는농민들에게도나누어준다고하였다. 그렇게선동하니좋은세상이왔다하며없는사람들은한없이기뻐했다. 그러나이런감언이설은인민군이후퇴하면서모두허위라는것이폭로되었다. 나는국민방위군이되었다. 국민방위군이란인민군이자신들이점령하고있던지역의젊은이들을자기들마음대로인민군으로쓸수있기때문에우리젊은이들을적에게빼앗기지않기위하여, 그리고우리젊은이들을남하시켜후에우리군으로활용하기위하여모집한제도였다. 다시말해서적군에게청장년을빼앗기지않으려고젊은사람들을방위군으로모집하여남하하였던것이다. 우리국민방위군은서울에서부산까지행군하면서사격훈련한번받아본적이없었다. 국민방위군은고등학교와대학에다니던학생들을방위장교로임명하여군대조직과같이연대장, 대대장, 중대장, 소대장으로부임하여그 아버지의비석 217
들로하여금방위군을통제하게하였다. 국민방위군은집에서입던옷그대로입었고, 하루에한두끼도제대로먹기힘들었다. 1950년 12월 10일경, 서울에서양평, 여주, 문경새재를넘어경북상주를거쳐대구, 영천, 경남양산, 부산, 김해덕두초등학교까지 26일의도보행진을하였다. 1950년 12월은유난히추웠으며눈도많이왔다. 그시절에내복입은사람은 100명중 1명이있을까말까했다. 그추위에뜨거운물한모금못마시고옷한벌못입었다. 식사라는것은아침에주먹밥 1개, 저녁에주먹밥 1개였다. 국물있는국은한번도먹어보지못했고, 주먹밥을반으로쪼개서그주먹밥에소금국물을조금부어주는것이최고의식사였다. 이런대우를받으며남으로행군하면서영양실조로쓰러진사람, 감기에걸렸으나치료약이없어열병으로쓰러진사람등수천수만명의방위군이사망하였다는통계가나와있었다. 우리고향에서온두사람도쓰러졌으나현재까지유골은물론유품하나찾지못하고있다. 나는방위군에대해그내막을자세히는모른다. 그러나수많은젊은이들이허망하게목숨을잃은데대해서는분한마음을감출수가없다. 국민방위군은군번도없이, 군인으로대우받지도못하고오직나라를위해군인이되겠다고모인청년들이었다. 그러나그들은아무것도하지못했고, 아무것도받지못하였다. 수북후에정부차원에서방위군조사진상위원회가구성되어방위군총사령관등 6, 7명의간부가처형된것으로알고있다. 3월에김해덕두초등학교에서방위군은해체되었다. 많은청년들이갈길을잃었다. 당시부산영도에장정대기소가있었다. 우리는 4월에다시부산까지도보행진을했다. 부산에서바로미군 LST를타고제주도모슬포의제1훈련소에입소하여 28일간의모진훈련을받았다. 전쟁중이라제대로훈련을받을수가없었고, 소총몇발만쏘아보았다. 나는박격포훈련을받았다. 박격 218 아버지의비석
포는무게가많이나가는무기라훈련은상당히고통스러웠다. 훈련이끝나고군인이된우리는제주를출발하여부산에들렀다가전남목포를거쳐인천에서하선하였다. 인천항구에서기차를타고서울로왔다. 서울역에서다시군트럭을타고강원도김화에도착했다. 나는육군 9사단 28 연대 1대대 2중대 2소대소총수로배속을받았다. 1951년 6월, 현재의계룡산으로일명김일성고지라고도하는김화북방 603고지탈환전에참전했다. 603고지는유엔군이 60회공격을하였으나번번이실패하여포기상태에있던곳이다. 적들의대남방송은이곳 603고지를빼앗으려면군번한트럭을가지고오라고연일방송하고있었다. 우리 9사단 28연대 1대대가단일격으로 603고지를확보했다. 우리병사들은 M1소총에칼을꽂고중공군의가슴, 옆구리를닥치는대로찌르고발로차며, 인해전술로최후의발악을하는중공군을무찔렀다. 드디어현재도지적도에나오는계룡산을점령하였다. 이전투에서살아남은병사는많지않았다. 계룡산을점령하고보니정상은아주가파르고바위가많아적진방향으로토치카를파기가대단히힘들었다. 우리병사들의장비는야전삽과야전곡괭이가전부였다. 밤새도록겨우자기몸하나의은신처가될수있는토치카를파고적진오성산방향의저격능선을바라보며 M1소총을겨누고있었다. 아침이되었다. 전국각지에서온병역미필자인 30 ~ 40세의노무자들이아침식사를날라다주어분대원들은꿀맛같은아침식사를할수있었다. 아침식사를하고난다음에는밤새도록파놓은토치카를다시보수작업을하였다. 그당시의토치카는땅을수직으로파고그안에들어가자기몸을숨기고적을향해총을쏠수가있으면완성이었다. 1951년 5월경에중공군은곡사포를보유하지못했기때문에토치카를수직으로만파도우리병사들은생명을유지할수있었다. 밤이되었다. 중공군은인해전술로아군의최전방부대인우리의기를꺾기 아버지의비석 219
위해피리를불고꽹과리를치며밀려왔다. 중공군에공격은대단했다. 처음에는서로총격전이었으나중공군은숙자가많았다. 아무리중공군에게총을쏘고, 앞에있는중공군이죽고쓰러져도, 뒤에있는중공군이다시올라오고또다시올라왔다. 여러차례교전을반복하다보니우리병사들도지칠대로지쳐쓰러지기시작했다. 결국후퇴명령이떨어졌다. 603고지정상에서중부능선까지후퇴하고그곳에방어진지를구축하였다. 그러나밤새도록고지쟁탈전에시달린중공군도더이상우리 9사단 28연대 1대대를공격하지못하였다. 날이밝았다. 많은병사가전사하고부상당한우리소대, 중대에인원보충을하고, 다시 603고지를점령하는전투가시작되었다. 아군은박격포, 105밀리중박격포등모든화력을고지에집중사격하였고, 우리공군전투기의웅단폭격이시작되었다. 고지는화염에휩싸였다. 우리중대, 소대는그기회를놓치지않고일제히밀고올라갔다. 그러나고지에있는준공군은그리쉽게후퇴를하지않고버티고있었다. 마침내우리소대가총공격을하여 603고지를재탈환하였다. 두차례의 603고지탈환전에서우리소대원들은반수이상부상당하거나전사하였다. 결국다른중대에게고지를인계하고우리중대는고지아래에배치되었다. 603고지전투전의전우는애써찾아보아야할정도로눈에띄지않았다. 참으로전쟁의무서움을느꼈다. 제주훈련소에서훈련을받고이곳 603고지에와서두번의혈전을치르고나니, 훈련동기들은몇명밖에보이지않았다. 나도언제어디서어떻게전사하여이세상에서사라진다고생각하니참이세상이허망하였다. 문득부모형제생각이떠올랐다. 그날은유난히도날이맑아하늘에는무수히많은별이총총히떠있었고, 날씨는서늘하였다. 그날밤은아주조용했 220 아버지의비석
다. 603고지에서내려다보니김화읍후방에서포를쏘는소리가간간이들리고그포탄은 603고지너머적진에떨어졌다. 잠시후에는굉장한폭음이들렸다. 그날낮에는휴식을취해야했으나잠을잘숙소가없었다. 산기슭에조금넓은장소를찾아호를파야했다. 그러나그일대에는중공군시체가여기저기널려있었다. 시체의다리를끌어비탈아래로굴려떨어뜨려버리거나중공군이파놓은토치카에시체를몇개모아합장하였다. 중공군시체를다치우고그장소에서너명이잘수있는토치카를파고나뭇잎따다바닥에깔고군용모포를베고잠을자고휴식을취할수가있었다. 아침에는 603고지아래쪽에있는임시취사장에가서소대의식사를걸머지고돌아와분배해서식사를하였다. 낮에는토치카작업을하며피곤하게움직였다. 다음날밤에는토치카에서편하게잠을잘수있었다. 아침에기상하여담요를치우는데벌겋게보이는뱀이담요밑에쪼그리고있었다. 옆에있는동료들을밀어내고 M1소총을뱀을향해몇발을난사했는데그독사가꿈쩍도하지않았다. 소총끝으로건드려보아도아무반응이없었다. 그독사뱀이성질이급한뱀이라서담요밑에숨어있다가나에게깔려죽은것이었다. 얼마나피곤했으면그것도모르고잔것이었다. 그독사는총맞아죽은것이아니고질식사한것이었다. 그현장을목격한분대장과소대장에게크게꾸지람을들었다. 603고지중턱에있는것도잠시였다. 다시우리중대, 소대가 603고지중턱에최전방초소에배치된것이었다. 중공군이빼앗긴 603고지를되찾기위해다시인해전술로발악을하였다. 그러나우리가차지한 603고지는산이높은편이고, 우리를공격하는중공군은저격능선방향으로낮은산이많기때문에우리가작전상유리하였다. 아버지의비석 221
603고지쟁탈을위해계속혈전이벌어졌다. 603고지좌우로 29연대 30 연대가배치되어있었다. 이후 603고지좌측으로평강부근까지진경을하여우리 9사단에병력은한없이소모가많았다. 기필코우리 9사단은이지역을완전점령하여보병 2사단에게인계하였다. 9사단은현남양주진접면에있는광능내부근의밤나무골이라고도하는지역의예비사단이되어 20일간병력보충을하며휴식을취하였다, 7월초에 9사단은강원도철원군모장면신정리에있는 395고지라고하는야산에주둔을하게되었다. 395고지북쪽으로 281고지등비슷한고지가네개있었다. 9보병사단이 395고지일대에배치되자마자중공군과영토분쟁이시작되었다. 28연대 ( 일명도깨비부대 ) 는 395고지부근의네개고지를완전히점령하여우리영토로확보하였다. 그러나중공군이예상외로강력하게도전하여네개의고지에서의전투는밤낮없이계속되었다. 중공군은 395고지까지도강력하게공격해왔다. 395고지주변을정리한우리 28연대에도전하고있는중공군은 395고지전방에높은산 800고지를장악하고있었다. 김일성이백마고지를빼앗기고이산에서 3일간통곡하고그산정상에서눈물을흘렸다고한다. 그리하여 800 고지를김일성고지라고도한다. 중공군이주둔하고있는 800고지 ( 김일성고지 ) 를점령하고, 그전방백마고지북쪽의 500고지를점령하여야만철원평야가우리수중으로들어올수있었다. 그때문에 9사단사단장은우리도깨비부대부대장에게 500고지를점령해야만뒤쪽 800고지를탈환할수있으니 395고지전방 500고지를탈환하라고하였다. 28연대연대장은 1대대가가장전투를잘하는부대라며 1대대장에게작전명령을내렸다. 우리 1대대장병에게비상이떨어졌다. 각병사에게조금마한 222 아버지의비석
봉지 1개씩나누어주며그봉투에다손톱발톱머리타락을잘라넣으라고하였다. 이번전투에서살아남지못할것이라며전사하면이것을유품으로고향집에보낸다는것이었다. 이제는고향부모님도못뵈옵고이세상을하직하는구나하고생각하니한없이슬퍼졌다. 나만의슬픔이아니었다. 옆의전우들도마찬가지였다. 어는전우는눈물을뚝뚝떨어뜨리고있었다. 모두한잠도못잤다. 새벽 1시가넘어전원집합명령이떨어졌다. 대대장이적진의 500고지는무슨일이있어도점령해야한다는훈시가있었다. 우리가왜 500고지를점령하지않으면안되느냐하는훈시직전에 500고지를점령하지못하면다시는못돌아온다는훈시를하였다. 훈시가끝나자 1대대전장병이한밤중에행군을하였다. 500고지아래골짜기에서대대병력을모아놓고마지막담배를피우라며작전명령이떨어졌다. 헌병이 15명정도있었는데헌병들에게지시를하였다. 저언덕위에헌병들을배치하여그언덕을넘어오는병사는무조건사살하라는것이었다. 후퇴는없다는것이었다. 1대대전장병에게무조건 500고지를점령하라는명령이떨어졌다. 점령하지못하면대대장이명령한대로헌병에게총맞아죽을것이고, 오직 500고지를탈환하는목표밖에없었다. 1대대장병들은 500고지 4, 5, 6, 7부능선까지공격하였으나별반응이없었다. 이전투는승리하겠구나하고생각하는순간, 적진에서기관총세례가쏟아지고중공군이피리를불며북을치며일제히공격을개시했다. 우리도목표 500고지정상을향해기관총세례를퍼붓고, 후방에서는야포포격을퍼부었다. 500고지를향한우리병사들의총공격이시작되었다. 그러나중공군은우리의공격을기다리고있다가일제히공격을가하므로공격하던우리병사가많은희생되었다. 도저히 500고지를탈환할수가없었다. 공격에실패한것으로판단한대대장이철수명령을내렸다. 우리대대가중공군 아버지의비석 223
에게쫓기는과정은비참하였다. 중공군은우리가퇴각하는것을그대로두지않았다. 야포, 박격포, 기관총세례를집중적으로우리 1대대장병에게쏟아부었다. 중공군은피리를불며장구를치며우리후퇴하는장병에게무차별공격을감행하였다. 참으로처절한패배를당하였다. 500고지를공격하다가전사한전우, 부상당한전우들을몽땅적군중공군에게남겨놓고후퇴를하였다. 그여세를몰아중공군은백마고지주위 4개고지를많이괴롭혔다. 그러나중공군이가지고있는 500고지를그대로두지않았다. 얼마후같은방법으로 500고지를공격하였으나점령은또실패하였다. 우리병사도많이희생되었다. 백마고지전투가시작되기전에전사자 200여명, 부상자는수백명으로집계되었다. 참으로전쟁은비참하였다. 중공군과교전을하고있는사이에세월은 1952년 10월로접어들었다우리 28연대도깨비부대는몇달간의혈전에서많은병사를잃었고재편성하는기회가왔다. 인원을재편성하고전투준비를하고있을때에 395고지 ( 백마고지 ) 전투가터졌다. 사단비밀에의하면중공군의곡씨라는장교가백마고지를총공격한다는정보를가지고사단에귀순하였다는것이다. 그러나곡씨가백마고지를총공격한다는그날공격은없었다. 이틀뒤, 1952년 10월 6일저녁 7시15분, 중공군 38군제 114사단 340연대의선제공격으로전투가개시되었다. 중공군제 340연대는 2천여발을 395고지정상에퍼부었다. 제 1선에철조망을걷어내는갈고리부대, 그다음은고량주술을많이먹을술취한부대가마구잡이로올라왔다. 그뒤를이어수류탄만던지는부대가마구잡이로올라오고, 그다음이소총따발총부대가공격해왔다. 30연대는일단후퇴하였다가 30분후, 바로다시공격을재개해고지를되찾았다. 30연대의병력손실이너무커서예비연대로있던 28연대가투입되 224 아버지의비석
었다. 1대대 2중대 1소대곽효재일병이동료의죽음을보고적진의기관총진지를격파하고동료중대원들이일제히공격을하여 395고지를탈환하였다. 우리박격포소대는백마고지후면골짜기에주둔하여백마고지지원사격을하였다. 포 4문이맹렬한포격을하였다. 그러나박격포포열이불덩이가되어서포탄이머리나가지를않았다. 흙을담을마대를포열에칭칭감고물을아무리부어도포열이식지를않아참으로다급한상태였다. 중공군은백마고지에올라온다고하는데포탄은백마고지적진에떨어지지않으니소대장은펄펄뛰었다. 박격포분대장들을모아놓고별별소리를다하였다. 심지어총살이야기까지나왔다. 그러나소대장이직접확인해보니어찌할수가없다는것을알수있었다. 중대장, 대대장에게보고하고소대장은최대한포열을식혀서계속포사격을하라고하였다. 그동안최전방백마고지쟁탈전은계속되고있었다. 3차, 4차공격은 29연대와합동으로정상을탈환하는작전도이루어졌다. 우리박격포소대는고대도못하였다. 중공군이후퇴하면중공군후면을공격하고, 중공군이공격해오면시한포탄을쏘았다. 중공군공격부대몇미터머리위해시한포탄을투하하면폭탄이폭발하면서적에게파편이떨어져적의공격을멈추게할수있었다. 우리부대가철수를할때에는연막탄을쏘았다. 연막탄을발사하면연막탄연기를이용해서철수작전을감행할수가있었다. 백마고지쟁탈전은계속되고있었다. 백마고지 4차공방전은중공군 114사단제 340연대가참가했다. 340연대가실패를하자 112사단 334연대를투입하여백마고지를공격하였다. 3시간이상의혈투끝에우리가백마고지를빼앗겼다. 그러나 28연대와 30연대의합동작전으로 30분후백마고지를되찾았다. 우리박격포소대는주야로박격포를발사하다보니며칠잠을자지못하였 아버지의비석 225
다. 잠을못잔 4포수가마침내사고를냈다. 포탄을반대로포열에넣은것이었다. 포탄이폭발하여포열이산산조각이나면서파편이되어사수와부사수를덮쳤다. 사수와부사수는온데간데없이사라지고유혈만낭자하였다. 이곳저곳에시체의잔해만나뒹굴고있었다. 두사람의시신은구별도할수없는상태였다. 갑작스런사고였기에시신을수습할도구도없었다. 할수없이모래담는마대에이곳저곳널려있는일부분을주어담아대대본주에이송하였다. 군인도어는정도는잠을자야하는데며칠씩잠을못자다보니이런사고가난것이었다. 참으로안타까운일이었다. 다음날도역시전투는계속되고있었다. 또백마고지를중공군에게점령당한것이었다. 박격포진지를철수하라는명령이떨어졌다. 백마고지후방으로는평야지대이기때문에박격포진지를구축할장소가없었다. 81밀리박격포는유호사거리가 4,200미터밖에안되었다. 하는수없이현재에백마고지전승탑아래물을가두어놓은저수지에서물이내려오는수로에박격포를설치에놓고수로언덕위에올라가서잠시앉아있는데예감이좋지않아아래로내려가는순간내가앉아있던바로그자리에중공군이발사한박격포탄이떨어졌다. 흙먼지를흠뻑뒤집어썼다. 중공군은헛되이포탄을낭비하지않았다. 백마고지를점령한관측병이내가앉아있는것을확인하고박격포를발사해바로그자리에명중시킨것이었다. 적군일망정훌륭한박격포사수였고, 중공군관측병이훈련이잘되어있다는것을느꼈다. UN군과한국군의전차포사격, 야포사격, 전투기의백마고지정상에대한정확한포격을시작으로, 우리 9사단의 28연대 29연대병사들이최후발악하는중공군병사들과백병전하는모습은정말대단하였다. 우리박격포진지에서육안으로도확인이가능하였다. 우리박격포소대는아군이백마고지를점령하자백마고지후면박격포진지로이동하였다. 이동하자마자백마고지를 226 아버지의비석
점령하고있던중공군에무차별로박격포를발사하였다. 10월 12일, 백마고지를상실한상태에서백마고지정산에비행기폭격과전차포로포격을가했다. 그러나전차포는직사화기이기때문에백마고지정상의중공군기관총진지를정확하게포격할수가없었다. 중공군기관총부대는우리 30연대의공격에도끄떡하지않고기관총을발사하고있었다. 그때젊은혈기넘치는 30연대 1대대 1중대 3소대장강승우소위가오귀봉, 안영권병사를이끌고박격포포탄을가승에안고적진의기관총진지에포탄을폭발시켜적의기관총진지를폭파하고백마고지를점령하였다. 백마고지에있던기관총사수와부사수는쇠사슬에발목이꽁꽁묶여있었다. 참으로잔인한일이었고, 우리민주주의군대에서는상상도못할일이었다. 중공군의기관총진지를폭파한 3용사는오늘날백마고지전투에서영웅칭호를받는 3군신이되었다. 395고지는우리공군기의폭격과쌍방의포격이수도없이퍼부어져고지표고가 1미터정도낮아졌다고한다. 포격으로고지전체가하얗게벗겨져공중에서보면흰말한마리가누워있는것처럼보인다하여백마고지라는이름이붙었다. 10월 13일오후에는대한민국대통령이미 8군사령관과함께 9사단을방문하여눈물을흘리며장병들을격려하였다. 15일에는북방의 3개전초기지마저탈환함으로백마고지일대의열흘간의전투는종결되었다. 백마고지전투에서아군은 808명의전사자와부상자, 행방불명을합쳐모두 3,422명의희생자를냈다. 중공군의피해는전사자 8,234명등사상자가모두 14,275명으로집계가나왔다. 아군이소모한포탄은 22만발, 중공군도 55,000여발을쏘았다고한다. 이고지는철원북방남북을가로막고있는무명고지였다. 그러나얼마나중요한고지인지는북으로 500미터와 700미터김일성고지가있었다는사실로 아버지의비석 227
도알수있다. 북쪽에서는이능선을확보하면이북에서제일넓은곡창지대를확보할수있고전술적으로서울까지넘볼수있었다. 우리측에서도북한군이내려오면마땅한방어진지가없었다. 그래서백마고지확보는대단히중요한과제였다. 제 9보병사단은강원도사창리에서예비사단으로인원보충과휴식을취하였다. 30연대는보병 2사단에편입되어 1952년 11월저격능선에투입되었다. 저격능선전방에는 1,000미터가넘는오성산이북방을가로막고저격능선을지키고있었다. 아군보병 9사단이점령한 603고지 ( 계룡산 ) 를인수받은보병 2사단과보병 9사단 30연대가합동작전으로저격능선을점령하여야했다. 북한군이철의삼각지대오성산을지키기위해서는반드시저격능선을확보해야했다. 따라서북한측이중공군을적극토입하여저격능선을사수할목적으로전투가전개된것이다. 저격능선에서혈전이시작되었으나서로공방전만있고승부가잘나지않았다. 대통령께서고민끝에전육군참모총장을보병 2사단장에임명하여저격능선전투를지휘하게하였다. 세계역사에서육군참모총장을하던분이사단장을한예는없을것이다. 그만큼저격능선전투는중요했고, 우리육군의명예가걸려있었다. 1952년 12월무렵에유엔군은이전쟁을하루라도빨리끝내고싶어휴전회담을성립시키려고안간힘을다하는것같았다. 우리육군은서쪽으로백마고지, 중북부지역으로저격능선을사수하지못하면철원김화평야가북한쪽으로넘어가게되기때문에철의삼각지대전투에대한민국의운명이걸려있다고보았던것이다. 보병 2사단장은사단의명예와대한민국의명예를두어깨에짊어지고저격능선전투를지휘했다. 저격능선전투 40여일동안에중공군 1개군단과우리보병 2사단과 9사단 30연대와의혈전에서보병 2사단의승리로저격능선 228 아버지의비석
을확보한것이다. 사창리에서인원을정비한보병 9사단은강원도김화군에위치한오성산정면의저격능선에보병 2사단과사단교체를하게되었다. 낮에는병력이동이오성산에서내려다보이니까밤에저격능선에배치되었다. 1952년 12월 25일이었다. 우리 9사단이교체된것을알았는지굉장한포화가떨어지고교전이계속되었다. 그러나 603고지전투, 백마고지전투, 백마고지후면의 500고지전투에 1년 ~5개월의전투경험이있어서두렵다거나위협은느끼지않았다. 다음날저격능선에올라갈기회가생겼다. 저격능선에올라가보니나무한그루풀한포기없는민둥산이었다. 그능선에는 10분이상서있을수가없었다. 바로전면에 1,000미터가넘는오성산이버티고있기때문이었다. 적에게노출되면바로직사회기의공격을받을수있었던것이다. 저격능선은우리전초부대가고지에완전배치를할수없는위치였다. 저격능선 7~8부능선후미에우리 28연대가배치되어있었고, 직사화기는피할수있는위치였다. 전투가시작되면밤새도록포사격을반복하고어떤날은포탄이없어포사격을못하는날도있었다. 오성산에위치한중공군이내려다보고우리보급로를마구포격하는바람에포탄을보급하는데어려움이많았다. 밤새도록저격능선쟁탈전에전사하고부상당한병사를후송하는과정에서도고통이많았다. 전사한병사는 50 구, 100구를모아한꺼번에군트럭에시체를쌓고쌓아끈으로묶어후송하였다. 포장이잘되어있지않아시체들이이리끌리고저리쏠리고팔다리가흐느적거리며흔들흔들거리는것을바라보는우리장병들의심정은이루말할수가없었다. 한없는슬픔이밀려오고눈물이끝없이쏟아졌다. 이리도많은전우가쓰러지고또쓰러지는것을목격하면서중공군에게적 아버지의비석 229
개심도생겼다. 우리가중공군을격퇴하지못하면우리전우들의희생을누가갚겠는가. 더용감하게싸워야겠다는생각이들었다. 그와같이매일매일전투가반복되다보니최전방소총소대에는병사가없는것같았다. 신병보충도제대로안되고분대장급도전사하거나부상당하여고참병이없었다. 우리 3소대에서몇명의고참병을차출하여분대장으로저격능선쟁탈전에참전시켰다. 나도예외가될수없었다. 2중대 1소대분대장으로어느때는 2분대장으로저격능선전투에투입되었다. 오른쪽어깨에부상을당했고며칠후에는왼쪽다리에파편상을입는등수차례의위기도있었다. 그래도전투에참가하여끝까지싸웠다. 그사이에수없이많은전우들이죽어가는것을눈앞에서목격했다. 그러나어깨부상, 허벅지에부상으로계속전투에참가할수가없었다. 결국원대복귀하여박격포소대분대장으로계속포지원사격을하였다. 저격능선전투는끝이보이지않는전투였다. 매일아침이면우리전우의시체가트럭에실려후송되는것이반복되었다. 저격능선에올라갈기회가생겨봉우리에올라가걸어보니흙먼지가가루가되어발목까지빠졌다. 얼마나많은폭탄이떨어졌으면돌이부서지고흙이부서져먼지같이가루가되어서발목이빠질까. 참으로처참한전투였다. 1952년 12월 25일부터 1953년 7월 26일까지 7개월에걸친저격능선혈전에서얼마나많은귀중한목숨이전사했는지통계가나오지않고있다. 9사단전사보고역사에는백마고지전사자 1,000명, 월남전전사자수백명, 나머지 7천여명의전사자는철원지구, 금화지구로만나와있으면확실한통계가없다. 4~5천명은금화지구 603고지 ( 계룡산 ) 와저격능선에서전사한것으로추측된다. 오성산은 1,060미터가되는산으로평강을옆에두고남북을가로막고있는웅장한산이다. 6.25 당시인민군이서울을점령하고수원, 대전을거쳐전라 230 아버지의비석
도를완전점령하고, 동으로는포항영천까지점령하고대구, 부산만남아최후에왜관낙동강에서최후에결전이남아있었다. 다부동전투에서유엔군과한국군이반격에성공하고, 맥아더원수가인천상륙작전에성공하면서 1950 년 9월 28일에서울을수복하고그여세로 38선을돌파하고평양을점령하고압록강두만강까지진격을했을때금화북방에있는오성산은제외해놓고북진한것이작전이잘못된것같았다. 낙동강까지내려갔던인민군이평양까지퇴각할수가없어오성산에집결하였던것이다. 우리유엔군이압록강두만강까지진격할때금화지구오성산에주둔하고있던인민군이 2개사단이상이라고하였다. 인민군이서울을다시점령하려고김화지구사창리, 일동, 이동을거쳐남양주수동면에있는안마산평내, 호평으로내려옴으로북방에거주하던주민들이또피난보따리를싸가지고한강이남으로피난을하였다. 그러나인천서울을사수하던병력으로인민군을북쪽으로밀어낸것이다. 그와같이오성산은인민군에보급창이며병력수만명이주둔할수있는군사요충지로알려져있다. 북한의전투기가오성산지하로드나들수있다고한다. 우리 9사단은그와같은북한의요충지오성산과연결된저격능선을완전히방어하였던것이다. 마침내 1953년 7월 27일에휴전회담이성공하여전투는종료되고 6.25전쟁은휴전이되었다. 전투가끝나고죽음에대한공포도사라졌으나나는멍한상태에서아무런생각이나지않았다. 그러한충격에서벗어나는데몇달이걸렸다. 9사단은강원도양주군에있는대암산으로이동하였다. 대암산은표고가 1,300미터이상이었다. 1953년 9월대암산정산에진지를구축하고부대가주둔하였는데산전체가어름덩어리였다. 대암산정상은겨울평균기온이영하 30도이고 40도이하일때도있었다. 아버지의비석 23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