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경제원역사강좌 3 (2015 년 11 월 19 일 ) 19 세기의危機 이영훈 反轉하는역사상 19세기말西方의여러외교관, 선교사, 여행가들이목도한조선왕조의현실은 18 세기의한국인들이높은자부심과충족감으로노래했던그것과는전혀별개의것이었다. 그들의눈에비친조선의현실은극도의가난함과無氣力그자체였다. 그들이보기에조선의미래는없었다. 조선의國王은무능하였고, 兩班官僚들은부패하였다. 조선의백성들은관료들의虐政과수탈에지친나머지노동의욕을잃고있었다. 이방인들이보기에이나라의가장두드러진국민적특성은게으름이었다. 1) 이방인만도아니었다. 조선인스스로가그들의현실을그같이인식하였다. 그들은절망과분노에찬한숨을쉬면서그들의나라가전세계에서가장약하고가난한나라라고개탄하였다. 그들은경제가침체하고사회가문란하고도덕이타락한모든책임은부패하고탁상공론을일삼고당쟁으로분열한양반신분의지배자들에있다고간주하였다. 2) 그들로부터스스로를小中華로자처했던 18세기그들선조의威風堂堂한모습을찾아내기는어렵다. 그사이무슨일이있었기에그토록歷史像의극적인反轉이이루어졌는가. 뒤이어한반도를자신의부속영토로지배하기시작한일본의역사학자들은조선의지난천년의역사에있어서볼만한발전은없었다는결론을내렸다. 그들은고대삼국시대에는燦然한문화를자랑했던이민족이조선왕조에이르러심하게정체하게된원인을중국과의사대관계와半島라는지리적환경에기인한他律性이나오랜朋黨정치가빚어낸黨派性에서찾고자하였다. 3) 그들에게있어서조선왕조는인류사에있어서문명이퇴보한좋은본보기의하나였다. 오늘날의연구수준에볼때그같은한국사이해는帝國主義의오만과편견에지나지않았다. 그렇지만그들로하여금그런편견에젖어들게한조선측의계기로서그들이직접관찰하거나전해들은 19세기조선의경제가심한정체를특징으로했음은그리간단히부정될일은아니었다. 해방후, 한국의역사학자들은위와같이일본에의해심어진불쾌하기짝이없는 - 1 -
역사상을극복하고자많은노력을기울였다. 그들은 17-18세기에상업경제가발전했음을성공적으로입증하였다. 나아가그들은近代資本主義로향한맹아적경제형태가그시대의농업과공업에서自生했다고주장하였다. 19세기는그연장선에서근대를위한정치적변혁이추구된시대였다. 빈곤과혼란으로점철된 19세기의이미지는말끔히벗겨지고그를대신하여근대로향한분홍빛의낙관이덧칠해졌다. 조선왕조의진정한불행은시간이충분치않았다는점이다. 근대로의萌芽가결실을맺기도전에제국주의가침입해왔으며, 그모든것을파괴해버렸다는것이다. 이같이또한번의반전을본 19세기의역사상은현대한국의드높은민족주의정서에잘부응하면서국내에서는어렵지않게지배학설로군림하였지만, 해외의연구자들까지설득하기는그리쉽지않았다. 미국의어느역사학자는한국인들이그들의역사에서산업혁명의씨앗을찾고자노력하는것을두고오렌지나무에서사과를구하고있다고점잖게비꼬았다. 4) 그에의하면한국에있어서근대적요소는어디까지나開港후바깥세계에서유입된것에다름아니었다. 전장의서술대로 18세기는번영과안정의시대였다. 상업경제가발전하였으며, 신분제가해체되는가운데농민적토지소유가성립하고小農經濟가성숙하였다. 경제의전체적순환을책임진것은均安의政治經濟學으로잘기획된한국사고유의國家的再分配經濟였다. 필자는그러했던 18세기의조선왕조에서세계사상최초로産業革命을성취했던 18세기英國의모습을찾기는어렵다고생각하고있다. 조선과영국은상이한자연적인문적환경에서자기나름의발전경로를모색해온다른형태의문명이었다. 18세기조선왕조에서서유럽근대를찾아내고자했던한국역사학자들의노력은民族史의주체적이고내재적인발전에대한주관적인신뢰에도불구하고객관적으로는서유럽과는상이한환경에서독자적형태로전개되어온한국의역사를서유럽중심의單線的發展史觀으로왜소화하고그에종속시키는결과에다름아니었다. 19세기는다른무엇도아닌 19세기의史料로써설명되지않으면안된다. 1990년대이래한국의연구자들은 19세기가남긴적지않은사료로부터物價, 利子, 賃金, 土地生産性등, 동세기의장 단기경제변동을알리는여러指數를발굴하기시작하였다. 2002년필자는경상도慶州府의유서깊은玉山書院이소장하고있는 18-19세기자료를조사할기회를가졌다. 1개년에한책씩작성된동서원의지출부를연도순로죽배열하니까그자체로훌륭한경제변동의장기추세가검출되었다. 장부표지와속지의紙質이점점粗惡해지고있었다. 그장부로부터추출된여러경제적지수들도같은이야기를전해주었다. 이하그렇게또한번의反轉을보게된 19세기의역사상을소개한다. - 2 -
山林의황폐 17세기중반이래약 1세기반에걸친조선왕조의번영과안정은한반도의인간들이일찍이부딪혀본적이없는도전적상황을조성하였다. 그기간의급격한인구증가로인해산림이황폐해지기시작한것이다. 5) 인구증가는煖房과炊事를위한연료柴木에대한수요를증대시켰다. 하층민에게까지溫突이란난방시설이일반적으로보급되는것은 18세기라고알려져있다. 그이전까지노비를비롯한하층민의주거는반지하움집인경우가많았다. 노비제의해체와더불어온돌을구비한지상가옥이일반화하였으며, 이같은주거양식의변화는시목에대한사회적수요를증폭시켰다. 산림을황폐시킨또하나의요인은식량의증산을위한山地의개간이었다. 산지를개간하여이루어진경지를 18-19세기의사람들은火田이라불렀다. 그화전이얼마나성하게일구어졌는지에대해서는참고자료가적지않다. 18세기의鄭尙冀라는유학자는화전의크기가 5, 60만결아래가아니다. 라고하였다. 당시전국의결총은 140만결정도였다. 19세기의丁若鏞도비슷한언급을남겼다. 그는 우리나라는산지가국토의 3/4인데화전의면적이평지와비슷하다. 고했다. 6) 조선왕조는산림을황폐시키는화전에대해자주금지령을발포했지만실질적인행정력을결여한가운데명분에그치는경우가대부분이었다. 18-19세기의한국인들에게쌀은主食이기를넘어사회적문화적으로상징성이큰식료였다. 7) 쌀을먹어야사회적인격으로대접받을수있었다. 신분의고하를막론하고쌀을주식으로탐닉하는시대의풍조는다음의두그림에서도잘나타나있다 (< 그림2-1>). 하층신분의농군들이들에서점심을먹고있는장면이다. 앞은 18세기의유명한金弘道의그림이고뒤는그것을模作한 19세기의그림이다. 원작에서김홍도의초점이어디에맞추어있었는지는 19세기의모작에서쉽게확인할수있다. 그것은밥을가득담은소쿠리, 커다란밥그릇, 막걸리항아리였다. 19세기의모작에서는이것들이일층선명하게부각되어있다. 쌀을신분으로탐닉하는食文化는기존의밭을논으로바꾸는번답 [ 反畓 ] 현상을촉진하였다. 산에매달린계단식밭까지도모두논으로뒤집는다. 고하였듯이溪間에조성된화전에물을끌어들여논으로바꾸는것이번답이다. 智異山계곡의유명한계단식논이조성되기시작한것은 18세기부터이다. 8) 번답의개발이얼마나왕성하였는지, 그에대해 19세기의徐有榘는전국적으로논의 3할이번답이라고하였다. 9) 산림의황폐에대한우려와대책은正祖代 (1776-1800) 부터적지않게제기되었다. 예컨대 1798년 10월備邊司가국왕에啓하기를 근래松政이날이갈수록해이해지는탓으로公山이나私養山이나할것없이가는곳마다헐벗은곳뿐이니정말작은 - 3 -
< 그림 2-1> 점심 ( 김홍도 ), 새참 (19 세기 ) 걱정거리가아닙니다. 라고하였다. 10) 그런데산림이헐벗기시작하는것은그보다이른 18세기초부터였다. 산림이황폐하면그속에서놀던호랑이를비롯한각종짐승이소멸한다. 그초기에산짐승과인간과의충돌이잦아지는데, 그로부터산림이황폐하는조짐을찾을수있다. 17세기의왕조실록에서호랑이가人家에출몰하거나사람이나가축을해쳤다는기사는 13건에불과하다. 18세기의왕조실록에서관련기사는 74건이나된다. 호랑이피해가절정에달한것은 1750년대이다. 예컨대 1754년 4 월경기도에서만한달안에호랑이에게먹힌자가무려 120명이나되었다. 11) 호랑이피해는 1770년대를넘기면서부쩍줄어들었으며, 19세기가되면거의사라졌다. 19세기의왕조실록에서호랑이에관한기사는고작 4건에불과하다. 이로부터한반도의산림은 1770년대이후호랑이가살수없을정도로성글어졌음을알수있다. 이후開港期 (1876-1910) 에조선을찾은외국인들은조선의산림이극도로황폐해있음에대해적지않은기술을남겼다. 그들에게조선의황폐한산림은이전방문지인일본의푸른산림과너무나대조적인것이었다. 전국의林相에대한최초의조사는 1910년朝鮮總督府에의해이루어졌다. 그결과전국임야의 32% 가成林地, 42% 가稚林地, 26% 가無立木地로판명되었다 12) (< 그림2-2>). 성림지는인간의접근이불가능한蓋馬高原이나太白山脈과같은깊은산속에있는原始林이었다. 그를제외한한반도의거의전역이, 특히농업선진지대인중남부이하가무입목지나치림지로헐벗어있었다. 1917년에완료된土地調査事業에의하면한반도의경지는총 487만헥타르였다. 그에비해 1877년일본정부의토지조사사업 - 4 -
< 그림 2-2> 조선임적조사 (1910) 사진 1-3 조선임적조사사업 (1910) 산림면적 : 15.8백만 ha 성림지 ( 초록 ): 32.3% 치수발생지 ( 빨강 ): 41.8% 무립목지 ( 노랑 ): 25.9% 산림분포남부 : 20% 북부 : 80% ( 평북, 함경도 : 74.3%) 에서밝혀진北海島를제외한日本列島의경지는총 484만헥타르였다. 일본열도는산지의비중이한반도와비슷한가운데절대면적이 1.35배나된다. 이로부터 18-19세기한국인들이동시대일본에비해얼마나열심히산으로올라가농지를일구었는지를살필수있다. 조선왕조가산림의황폐라는환경위기를면하지못한것은산림자원을관리할주체를창출하고그들의권리를보호하는제도를만들지못했기때문이다. 조선왕조는정부와왕실이수용하는材木을확보하기위해전국의요처에公山을지정하고엄격히관리하였지만민간의偸斫을막을수는없었다. 민간에서는墓地를중심으로일정범위의연고권을정부로부터인정받은私養山이발달하였다. 그렇지만사양산에대한墓主의권리는주변농민의자유접근을완전히배제할만큼절대적인것은아니었다. 13) 산지의사적소유권이왕조에의해공인된적은없었다. 예컨대사양산은매매되기까지하였는데, 그때작성된계약문서를보면전답의매매문기에서와같은 후일에만약탈이생기면이문기를관에제출하여증거로삼으라. 와같은文句를찾을수없다. 14) 官이산지의소유권을증명해주는제도가마련되지않았던것이다. 조선왕조의산림제도는끝까지 山林과川澤은백성과함께共有한다. 는성리학적이념에의해지배되었다. 산림을사적재산으로관리하는주체가결여된가운데산림 - 5 -
자원에대한사회적수요가증가하자먼저베는사람이임자가되는이른바 共有地 의悲劇 이전형적으로연출되었다. 15) 農業生産의감소 산림이헐벗으면뒤이어어떠한재앙이따르는지에대해서는그리긴설명이필요하지않다. 한반도의토양은일반적으로表層이얕고그아래에風化作用에취약한花崗巖 片麻巖이깔려있다. 산림의황폐는조그만비에도흙과풍화작용을받은암반이沙石으로흘러내려堤堰을메우고洑를무너뜨리게했다. 19세기에걸쳐水利施設이파괴되고기능을상실해간추세에관해서는적지않은기록이남아있다. 1847년 備邊司謄錄 의한기사는 근세이래로관리가법을지키지않고백성은본분을중하게여기지않아제언과보가막히고무너져도준설하거나수리할생각은아니하고폐기하여경지로삼고있다. 고하였다. 16) 이기사는제언이막혀생겨난토지를경지로활용하는사회기강의문란을고발하고있지만, 보다근본적인원인은제언의준설이불가능할정도로매년대량의토사를흘러내려보낸산림의황폐에있었다. 그결과 1918년의조사에의하면전국에 6,300개제언과 20,700개보가존재하지만, 그태반은이용이불가능한실정이어서수리의편리를보는토지가총 154만정보의답가운데 23만정보에불과하였다. 17) 또한산림의황폐는잦은水害를유발하였다. 토사의퇴적으로河床이높아진하천은조그만비에도범람하여주변의농지를떠내려보내거나 [ 浦落 ] 모래로덮는 [ 覆沙 ] 피해를안겼다. 이와관련해서는전라도靈光郡西部面의예가잘알려져있다. 18세기서부면의경지는 775결이었는데, 19세기후반까지 578결로약 25% 나감소하였다. 경지가그렇게크게감소한것은서부면을흐르는세개의川이자주범람하여포락과복사의피해를안겼기때문이다. 18) 이같은현상은지방에따라정도가다르긴했지만전국적범위의일이었다. 조선왕조의과세지, 곧경지면적은 1784년의 102만결을정점으로하여 1883년의 94만결까지감소하였다. 19) 전국적으로농업생산이감소한것은이처럼경지면적이감소한탓도있지만, 보다큰원인은土地生産性의감소에있었다. 전라도영암군의문씨양반가와경상도경주부의옥산서원등, 남부지방의여러양반가와서원에서전해오는 18-19세기의秋收記는동기간단위토지로부터의生産量이나地代量의장기추세가어떠했는지를제시하고있다. < 그림2-3> 은지금까지확인된경기이남의 35개지역에서확인된 17세기말이래답 1두락당벼지대량의연도별평균치의장기추세이다. 20) - 6 -
< 그림 2-3> 두락당지대량의장기추세 ( 단위 : 租, 斗 ) 25 20 15 10 5 0 1685-9 1690-4 1695-9 1700-4 1705-9 1710-4 1715-9 1720-4 1725-9 1730-4 1735-9 1740-4 1745-9 1750-4 1755-9 1760-4 1765-9 1770-4 1775-9 1780-4 1785-9 1790-4 1795-9 1800-4 1805-9 1810-4 1815-9 1820-4 1825-9 1830-4 1835-9 1840-4 1845-9 1850-4 1855-9 1860-4 1865-9 1870-4 1875-9 1880-4 1885-9 1890-4 1895-9 1900-4 1905-9 1910-4 1915-9 1920-4 1925-9 1930-4 1935-9 1940-4 1945-7 출처 : 李榮薰, 17 세기후반 ~20 세기전반水稻作土地生産性의長期趨勢 두락당벼지대량은 1680년대이래 1750년대까지는 15-20두수준에머물다가이후부터 1880년대까지 6-7두수준으로크게감소하였으며, 1890년대부터상승의추세로반전하여 1940년대까지 15두수준을회복하고있다. 두락당지대량의감소는두락당생산량의감소가아니라地代率의하락에의해서도초래될수있다. 21) 특히民亂이자주발생하여사회기강이문란해진 1840년대이후는지대율의하락이보다중요한요인이었다고생각된다. 22) 그것은민란이종식된 1890년대이후지대량이상승의추세로돌아선것을보아서도짐작할수있다. 그렇지만 1750년대이래의큰폭의감소를모두지대율의하락으로설명할수는없다. 並作制하의지대율은통상 50% 이며, 채집된 35개사례가운데지대율의수준을보이는몇몇사례에관한한거의변화가없었던것으로확인되고있다. 또한그중의 3개사례는두락당지대량이아니라生産量자체의추세를보이고있는데, 거기서도감소의장기추세는마찬가지이다. 요컨대 18세기중엽이후조선의논농사에있어서토지생산성은 1880년대까지큰폭으로하락하였다. 수리시설의파괴에따른水利事情의악화가한편의원인이었을것이다. 뒤이어살필시장의위축과사회기강의해이는노동의욕을감퇴시킴으로써그에민감하게영향을받는논농사의생산성을떨어뜨리는다른한편의요인으로작용했을것이다. 논농사의위기가밭농사에서도마찬가지였다는확실한증거는없다. 밭농사는수리사정의변화에큰영향을받지않기때문이다. 그렇지만시장의위축과사회기강의해이는밭농사에도나쁜영향을미쳤을가능성이크다. - 7 -
채집된 35개사례는대부분전라도와경상도에속하고있다. 사례가수집되지않은평안도와함경도등의북부지방에서도농업이위기적상황이었는지는알수없다. 19 세기의함경도는남부지방과달리경제적으로확장추세에있었던것같다. 인구가증가하고있었으며, 그에따라논의면적과장시의수가증가하고있었다. 23) 이에위와같은논농사의위기적상황은 19세기함경도와는무관하였을가능성이크다. 또한경기이남의남부라고해서모든지역의상황이다같지는않았을것이다. 채집된사례에관한한논농사의위기는 19세기의전라도에서가장심각하였다. 추수기에서관찰된논농사의위기상황은다른자료에서발견되는相對價格의동향에서도마찬가지로확인되고있다. 경주부옥산서원의재정지출부에서발견되는다양한재화의가격을비교한연구에의하면, 19세기이래쌀의상대가격은상승추세였으며, 특히 19세기중엽이후가그러하였다. 24) 1792-1906년에걸쳐매년 1책씩남아전하는서울明禮宮의재정지출부에서확인되는찹쌀가격은그와補完財관계에있는팥 녹두 꿀가격보다더가파른상승세를보였다. 이현상은 19세기에걸쳐서울시장에공급되는찹쌀의양이점점감소하였음을그원인으로하고있다. 서울시장에서의이같은상대가격의동향은서울에쌀을공급한경기, 충청, 황해지역에서논농사의생산성도전라 경상지역과마찬가지로 19세기에걸쳐하락해갔음을시사하고있다. 25) 市場의위축 1660년대이후조선왕조의경제적번영과안정을가져다준일본과의무역은 18세기에들어일본이주요수입품인중국산絹織物과조선산人蔘을국산화함에따라급격히위축되어갔다. 일본으로부터의銀수입은 1714년의 1,956 貫을정점으로하여 1751년까지 110관으로줄었으며, 1752년 10관의은을실은배 1척이마지막으로입항한뒤로는사실상두절되었다. 26) 東萊의倭館에서 5일마다양국의상인이만나던私貿易시장은 1722-1726년에는 74% 의높은開市率을보였으나 1844-1849년에는 24% 의낮은수준에불과하였다. 27) 그사이양국의외교관계도점점소원해져 1636년이래 8회에걸쳐이루어져온조선왕조의通信使파송은 1811년이후중단되었다. 양국관계는일본대마번이해마다銅 胡椒 丹木등과같은조선의非土産品을공급하고조선이면포 665동과쌀 1만 3,333석을지급하는 28) 公貿易중심으로위축되었는데, 이관계는 1876년일본과새로운형태의국교가수립되기직전까지묵묵히이어졌다. 일본은의유입이감소하자중국과의무역에적지않은타격이가해졌다. 조선왕조 - 8 -
는은의유출을막기위해 1720년柵門後市를봉쇄하였다. 사행단을수행하는상인들이책문에서중국상인과벌인후시는조선의은이유출되는가장중요한경로였는데, 그유출량이연간 50-60만냥에달하기도하였다. 29) 이후대중무역은연간八包銀 7-8만냥의규모로축소되었다. 책문후시는 1754년변경주민의생계를돕는다는명분으로다시개설되었는데, 조선왕조는은대신종이, 면포, 해산물을수출을장려하였다. 1758년조선왕조는은이점점부족해져사행단이휴대하는 8 包銀의확보마저어렵게되자정부가보유한은을譯官들에게대여하여중국에서방한용帽子를수입하여민간에은을받고파는정책을시행하였다. 1774년에는상인들이직접자기자본으로모자를수입하고그로부터정부가은을관세로수취하는정책이취해졌는데, 그것도국내의은보유가점점고갈되어여의치않았다. 예컨대상인들에허가된모자의수입량은연간 1,000 隻이었는데, 1808년의수입량은 560척에불과하였다. 30) 이같은모자무역은결과적으로민간이보유한은을중국으로유출시키는역할을수행하였다. 은부족에따른對中무역의침체를구한것은재배인삼, 곧家蔘이었다. 가삼은 18세기초영남에서재배법이개발되었는데, 18세기말開城부근으로그재배중심지가바뀌었다. 자연산과달리가삼은장거리수송에부패할수있어紅蔘으로蒸溜, 가공되었다. 홍삼은정부의강력한규제에도불구하고일찍부터중국으로밀수출되었다. 그대책의일환으로, 또 8포은을확보하기가점점어려워진현실에대응하여, 1797년조선왕조는 17세기의포삼제를부활하여사행단이여행경비와무역자금을위해홍삼 120근을휴대하는것을허락하였다. 당시홍삼 1근의국내가격은은 100냥이었는데, 중국으로건너가면 350-750냥의고액으로팔렸다. 31) 홍삼의수출무역은처음에는司譯院의역관과서울상인이, 1810년대이후개성상인과의주상인이주도권을장악하였다. 공인된수출물량은 1797년의 120근에서, 1811년에 200근, 1823년에는 800근, 1834년에는 8,000근, 1847년에는 2만근으로까지늘었다. 32) 정부는수출홍삼에대해斤當정액의수출세를수취하여戶曹와義州府의재정에보태었는데, 1840년대의경우근당 5냥으로서도합 10만냥의적지않은규모였다. 은을대신한홍삼의출현으로대중무역은 19세기에들어와번성했다고보이지만, 그것이국내의경제발전과시장확대에얼마나도움이되었는지는의심스러운일이다. 인삼의재배와홍삼으로의가공에는많은자본이소요되었으며, 이에정부의허가를받은소수의상인들만그특권을누렸다. 반면중국으로부터대량의견직물수입은조선의오래된蠶業과絹織業에파괴적인영향을미쳤다. 그럼에도조선왕조의지배계층은자국의산업을보호하기위한産業政策이나貿易政策을강구하지않았다. 오히려그들은중국산고급비단을선호하였으며, 이에비단의수입은상인들에게커 - 9 -
다란이익을안겼다. 1834년조선왕조는비단을경쟁적으로수입하려는市廛상인들의청원을허락하여비단의수입권을널리개방하였다. 33) 1834년홍삼의수출량이종전의 800근에서 8,000근으로갑자기증가한것도그때문이었다고보인다. 그와더불어西洋木또는唐木이라하여이미중국에들어오기시작한영국산면제품도함께수입되기시작하였는데, 그에따라서울의면포전이입은타격을적지않았다. 중국사견직물이대량으로수입됨과더불어서유럽산면제품까지수입되자, 홍삼의수출에도불구하고조선의대중무역은적자를면치못하였다. 예컨대중앙정부가보유한은은 1782년 43만냥이었는데, 비단의수입자유화가있은 1830년대에격감하여 20만냥전후에머물렀다. 34) 일본에서더이상은이들어오지않자평안도등지에서은광이개발되었는데, 대부분의은은대중무역의적자를메우기위해중국으로유출되었다. 19세기에들어와황해도遂安등지에서는砂金이활발하게채취되기시작했는데, 그역시대부분중국으로빨려들어갔다. 그에대해丁若鏞은그의 經世遺表 에서 우리나라는해마다金銀수천만냥을중국에들여보내錦繡와絹布를바꿔오고있다. 이것은한정있는것으로써한정없는것과무역하는것이니어찌국력이쇠진하여피폐하지않겠는가. 35) 라고지적하였다. 對日貿易의쇠퇴와對中貿易의불균형은결과적으로국내시장의위축을초래하였다. 그좋은증거를 19세기에걸친農村場市의동향에서찾을수있다. 36) < 표2-1> 에서보듯이 1770년총 1,062기에달했던전국의장시수는 1830년까지큰변화가없었다. 다만전라도에서장시수가동기간 216기에서 188기로적지않게감소하였는데, 이로부터농촌시장의위축이전라도에서가장먼저시작되었음을알수있다. 37) 뒤이어 1872년까지는충청 전라 경상의동향만알려져있는데, 장시가도합 614기에서 511기로 17% 나감소하였다. 특히충청도에서의감소가가장심하여 158기가 105 기로까지감소하였다. 이후에도장시는정치 경제의혼란이심했던 1890년대까지더욱감소하거나정체했으며, 1900년이후에야증가추세로돌아섰다고보인다. 삼남지방의장시는 1911년까지 592기로증가하였는데, 그럼에도충청과경상에서는 1830 년의수준에미달이었다. < 표 2-1> 1770-1911 년전국과삼남장시수의추이 1770 년 1830 년 1872-76 년 1911 년 전국충청도전라도경상도 1,062 157 216 276 1,052 158 188 268-105 169 237 1,084 138 208 246-10 -
19세기에걸친장시의감소는내륙에서보다연안에서더심하였다. 내륙지방의장시수는안정적이었으며, 오히려증가하기도하였다. 연안지방에서장시가더많이감소한것은海上貿易이쇠퇴하였기때문이다. 38) 전술한대로동래의왜관에서벌어진일본과의사무역시장은 19세기전반까지점점위축되었으며, 그에따라왜관으로오가는상선의수와화물의양도줄어들었다. 전장에서소개한대로전라도와경상도의연안을연결한南海貿易은전라도의곡물이경상도로건너가고경상도의어물이回航화물로실려오는구조였다. 19세기에들어전라도논농사의생산성이크게떨어지자이같은구조의남해무역은점차시들어갈수밖에없었다. 1797년國王正祖가서울한강의상인들에게지방군현의稅穀을서울로漕運하는특권을부여한것은지방의해상무역에더없이큰타격이었다. 정조는한강이남의水原에있는부친의묘莊陵에자주행차하였으며그때마다한강에상인들의배를동원하여배다리 [ 舟橋 ] 를가설하였다. 정조는그에대한보상으로그때까지지방의상인들이보유했던세곡의조운권을한강의상인들에게넘겼다. 39) 세곡 100만석의조운비는대략 10만석에달하였다. 그거액의운임이서울상인의소득으로넘겨지자지방의상업과해상무역은위축될수밖에없었다. < 표 2-2> 전라도靈巖과경상도慶州의미가변동의상관계수 기간 상관계수 관측치 1738-1765 0.941 10 * 1779-1816 0.659 37 * 1820-1854 0.627 30 * 1855-1882 0.230 11 * 1883-1910 0.618 31 * 1911-1937 0.818 18 * 비고 : * 는 5% 유의수준. 국내시장이위축됨에따라광역적인市場統合도해체되어갔다. < 표2-2> 은전라도靈巖과경상도慶州의쌀값변동을비교하여그상관계수를시기별로추적한것이다. 40) 전장에서소개한대로 1735-1765년간두시장에서의쌀값변동은 0.941이라는높은수준의유의한상관계수를보였다. 번성한남해무역이멀리떨어진두시장을긴밀하게통합하였던것이다. 그기간이조선왕조경제의전성기였다. 뒤이어 1816년또는 1854년까지쌀값변동의상관계수는 0.6으로낮아져시장통합이적지않게해체되었음을알수있다. 그렇지만아직은통계적으로유의한관계여서미약하나마시장통합의상태가유지되었다고할수있다. 이후 1855-1882년이되면두시장은어 - 11 -
떠한수준의상관성도이야기하기힘들정도로완전히분열하고말았다. 두시장의 상관성이회복되기시작하는것은 1883 년이후, 정확히말해일본으로의쌀수출이 본격화하는 1890 년대부터인데, 그에대해서는후술하겠다. 國家的再分配經濟의해체 농업생산의감소와시장의위축이사람들의생활수준에나쁜영향을미치고있었음은여러방면에서종합적으로관찰되고있다. 농업임금에관한연구는농업생산성의하락을반영하여日雇노동자의實質賃金이 1853년이후약 50년간 1/3 수준으로하락하였음을보여주고있다. 41) 조선왕조가파악한인구수는 1814년 790만 3,167구를정점으로하여 1861년까지 674만 8,138구로 14.6% 나감소하였다. 이것이실제인구의감소를대변하는지는확실하지않지만, 그러했을가능성이적지않다. 전국적으로분포한 181개兩班家의族譜에서가족구성을복원한연구에의하면, 家族員은 19세기초 3.75명전후에서 1870년대까지 3.25명전후로감소하였다. 42) 인구가감소한주요원인은死亡率의증가에있었다. 생활수준이하락하여영양상태가악화되자사람들은질병과추위의위협에더많이노출되었다. 농촌사회의안정기조가해체되어갔음을보이는또하나의증거는農家의存續期間에서찾아지고있다. 전장에서소개한대로 1717년경상도丹城縣法勿也面의호적에서元戶 368호가同面에서가계를유지하고계승한기간은평균 41년이었다. 그에비해 1825년의원호 567호가동면에서존속한평균기간은 21년에불과하였다. 43) 그처럼 19세기의농가는대개당대에 1회이상다른면으로주거를옮김이보통이었다. 약간의흉작이나조금의충격에도사람들이철새처럼이리저리대량으로유동하였음이 18세기에비해일층불안해진 19세기농촌사회의실상이었다. 농업생산이감소하고시장이위축되는가운데서도 1830년대까지농촌사회의안정기조를떠받친것은還穀制를중심으로한國家的再分配經濟였다. 君王이백성의살림살이를직접보살핀다는性理學的王政의이념에입각한환곡제의운영이 18세기의농촌경제를안정시킨효과에대해선아무리강조해도지나치지않을것이다. 그환곡제가 19세기에들어와조금씩해체되어갔다. 18세기말총 1천만석에달했던환곡은 1862년까지 800만석으로줄었다. 그것도장부상의수치이지창고에실제로쌓인것은그것의 46% 에불과한실정이었다. 44) 장부상의수치가實在와크게다른것은농업생산이감소하여환곡을상환하지못한농가가많아졌기때문이다. 군현의수령이나향리들의기강이해이해져환곡을훔쳐먹거나상업자금으로활용하다가실패한것도다른한편의원인이었다. - 12 -
환곡의총량이감소하고있음에도 17-18세기처럼정부재정에의한元穀이원활하게보충되지못한것은농업생산의감소로정부재정의收支가악화되었기때문이다. < 그림2-4> 는 1779-1881년에걸쳐매연말에중앙정부의各司가時在로보유하고있는米, 豆, 布, 錢등을錢으로환산한총량의장기추세이다. 45) 풍흉에따라해마다진폭이크긴하지만 1800년대까지만해도중앙정부의시재총액은 500-600만냥에달하였다. 그러했던재정상태가급격히악화되기시작한것은 1809년부터이다. 이후 1830년대가되면중앙정부의시재총액은 200-300만냥으로줄어들었으며, 이후다소간의회복을보이다가 1850년대이후다시한번급격히악화되어 1870년대말이면 100만냥이하로떨어지고말았다. 이처럼 1810년대이후중앙정부의재정은장기적으로적자의신세를면치못하였다. 그가장중요한원인은앞서잠시소개한대로중앙정부의과세지結總이감소하고있었듯이농업생산의감소에따른結稅수입의감소에있었다. < 그림 2-4> 中央各司年末時在총액의추이 (1779-1881) 출처 : 박석윤 박석인, 朝鮮後期財政의變化時點에관한考察, 東方學志 60, 1988. 또한중앙정부는해마다각郡縣의作況을파악하고災害가발생한정도에따라결세를적절히감면하였다. 재해는그정도에따라다섯등급으로구분되었으며, 그에따라관례적으로일정규모의면세지가지급되었다. 이같이재정을통해구축된일종의自己調節的安定化機構는농촌경제에가해진생산충격을완화함에적지않게기여하였다. 그런데 1840년대이후중앙정부재정의악화로면세지의지급규모가줄어들기시작하였다. 그에따라위와같은안정화기구도작동하지않게되어농촌경제 - 13 -
가일층불안정해졌다. 46) 정부재정만이아니라王室財政도마찬가지의추세를걸었다. 조선왕조의왕실은정부재정으로부터의供上과왕실의사유지인宮房田등으로부터의수입을주요수입원으로하였다. 왕실은궁궐밖에宮房이라는分室을설치하여왕실의각종생활재료를조달하였다. 궁중의內燒廚房과外燒廚房에米 斗등食材料의공급을주요업무로하는明禮宮이란궁방의 1793년연말재고는총 46,230냥의거액에달하였다. 이같이풍족했던재고는 19세기에들어와조금씩소진되어갔으며, 1840년대에이르러선거의바닥을드러내일시차입이행해지기도하였다. 명례궁재정수입의거의절반을차지하는궁방전으로부터의수입이농업생산의부진으로정체하거나감소하였기때문이다. 47) 1840년대가되면조선왕조의경제적통합에龜裂이발생하고있음을알리는赤信號가여러군데서켜지고있었다. 환곡제등의국가적재분배경제가사실상機能不全에빠졌기때문이다. 전장의 < 그림1-3> 에서볼수있듯이농촌시장의米價는 1830년대까지는충격을받더라도대개일정의균형수준으로회귀하는定常性을보였다. 1840년대이후미가는정상성을상실하고불안정한움직임을보이다가 1850년대중반부터급속한인플레이션의추세에접어들었다. 48) 중앙정부가재정수입을보충하기위해銅錢을자주대량으로발생한것이그직접적인계기를제공하였다. 民亂의물결 조선왕조가수습하기힘든危機에빠졌음을알리는가장직접적인표현은왕조의지배체제에대한농민의물리적저항이었다. 가장심각한저항의대상은還穀制였다. 18세기조선왕조의안정을지탱한환곡제가이제는갈등과저항의대상으로바뀌었다. 19세기중반환곡의거의절반이상은회수되지못하거나逋欠된상태였다. 중앙정부는재정수입을보충하기위해환곡의 1/10 이자수입을중앙재정으로이속시켰다. 군현의관리들은농가에환곡을나누어주지도않은채이자곡의수납만을강요하였는데, 이를臥還이라하였다. 군현에따라서는이자곡을군현의結總에배분하여결세와함께수취하였는데이를都結이라하였다. 49) 대개 1840년대이후환곡제는그본연의권농과구제의기능을상실하고와환과도결등의형태로수탈적인토지세로바뀌어갔다. 50) 조선왕조는모든男丁의인신을개별적으로파악하여身役을수취하는지배체제를끝내포기하지않았다. 많은변용에도불구하고왕조의개별인신지배체제는 19세기말까지고수되었다. 1750년을전후하여전국적으로良人軍丁은그수가 50만정도 - 14 -
였는데, 18세기말까지증가추세였다. 이들은중앙과지방의각軍營에배속된帳簿상의군인들로서연간 1필의軍布를해당군영에상납하였다. 군정으로선발된것은주로소수의하층상민신분이었다. 그들보다훨씬많은수의양반, 향리, 노비신분과각양합법적면역자와불법적피역자들이있어군포부담에서제외되었다. 지방에따라서는동리의주민들이신분고하를막론하고군포를공동부담하는洞布制또는軍布契의관행이성립해있었지만그리일반적이지않았다. 군정을조사해내는일은 19세기전반농촌사회에있어서신분 계층간의가장심각한갈등의소지를이루었다. 힘이없는하층상민은 16세이하의어린아이도군포를부담했는데이를黃口簽丁이라하였다. 白骨徵布라하여사망한자에게까지군포가부과되기도하였다. 이를견디지못하고농가가도산하면族徵과隣徵이라하여그친족과이웃에게부담이전가되었다. 예컨대 1788년경상도榮川郡의경우戶總은 3,283호인데각종면역호와피역호를제하고난상민호는 500여호에불과하였다. 그런데군정의총수는 2,783 명이나되었다. 51) 상민호에중첩으로부과된군포부담이얼마나무거웠을지상상하기힘들정도이다. 19세기초전남의康津縣에유배중인丁若鏞은군포수취에따른갖가지폐단을그의 牧民心書 에서더없이리얼하게기록하였다. 52) 1803년그가지은 哀絶陽 이란시는어느남정이남자아이를낳은지사흘만에군정으로등록되자 내가이것때문에困厄을당한다 고하며서스스로자신의생식기를잘랐는데, 그아내가그생식기를들고관가에가서울며하소연하였다는내용이다. 읽은이의마음을더없이처연하게만드는그시의전반부를인용한다. 갈밭마을젊은여인울음도서러워라縣門향해울부짓다하늘보고호소하네군인남편못돌아옴은있을법도한일이나예부터男絶陽은들어보지못했노라시아버지죽어서이미喪服입었고갓난아인배냇물도안말랐는데三代의이름이軍籍에실리다니달려가서억울함을호소하려도범같은문지기버티어있고里正이호통하여단벌소만끌려갔네남편문득칼을갈아방안으로뛰어들자붉은피자리에낭자하구나 - 15 -
스스로한탄하네 아이낳은죄로구나 53) ( 하략 ) 드디어농민들은통합의능력을상실한가운데수탈성만노골화하는왕조의지배체제에물리적으로저항하기시작하였다. 1840년경상도慶州府의백성들이서울에올라와大闕앞에서환곡제의폐단에대해소청을제기하였다. 처음에는소수에의한합법적인청원의형태로시작된농민의저항은점차집단적이며폭력적인형태로바뀌어갔다. 이윽고 1862년에이르러선三南의 70여郡縣에서守令을고을밖으로축출하고탐학한鄕吏를처형하는民亂이발생하였다. 민란은실세하거나몰락한양반신분의지식인에의해주도되는경우가많지만, 그에호응하여민란에참여한중심세력은가난한小農들이었다. 54) 대개의민란은지방관아에난입하여탐악한수령을핍박하여印符를탈취하고고을밖으로축출하거나민원의대상인吏胥와土豪의집을파괴하고살해하는과정으로막을내렸다. 그들은중앙에서파견되어온관리들의회유로해산하였는데, 그것은농민들의일반적인식에있어서민란을야기한악정이대개수령과이서배의개인적인貪惡에있는것으로이해되었기때문이다. 민란의물결에직면하여조선왕조는환곡제와군역제를개혁하였다. 환곡제의경우장부상으로만존재하는虛留穀을조사하여그절반이상을蕩減하였다. 환곡제는남아있는곡식을중심으로 1894년의甲午更張까지존속하였다. 그렇지만제도의형식만남고사실상폐지된지방도적지않았으며, 존속하는경우에도중앙에상납해야할이자곡을結總에나누어결당少額을수취하는형태가일반적이었다. 이렇게원래의환곡제가크게위축된가운데조선왕조는농민救恤制度를복구하기위해 1867-1868년 180만냥의銅錢을주조하여米穀을매집한다음, 군현하의각面에이를분배하고面民이자율적으로그를관리하도록하였는데, 이를社倉制라하였다. 1862년의대규모민란을계기로환곡제는사창제로이행했다고말할수있다. 사창제는환곡제와달리면민이관리의주체였던만큼그운영이비교적건실하여농가의안정에도움이된것으로평가되었다. 55) 군역제에대해중앙정부는군현의군포부담을경감해주는한편, 그때까지지방에따라관행으로실시되어온洞布制를권장하였다. 이같은정책은 1870년戶布制의실시로공식화하였다. 당시의집권자大院君은양반신분의제반특권을억압함으로써왕권을강화코자하였다. 그는군포의부담에서면제되어온양반신분의반발을누르면서동리주민이군포를공동부담하는호포제의실시를강행하였다. 이를계기로 17세기에확립된班常신분제는크게동요하였다. 그렇다고양반과상민신분의사회적평등이곧바로실현된것은아니었다. 호포제의구체적시행은군현의자 - 16 -
치에맡겨졌다. 군현에따라서는戶布가두신분에공평하게부과되기도하였지만, 그런곳은그리많지않았다. 양반신분이강세한남부지방의대부분의군현에서는여전히반상을차별하는名分論이우세하여常民戶는兩班戶보다더많은양의호포를부담하였다. 56) 1862년의민란은극도로문란했던수취제도를바로잡고농민부담을경감시키는데성공하였다. 조선왕조의지배체제는거센도전에봉착하였으며, 양보가불가피한가운데크게동요하였다. 그렇다고농민들의경제생활이본질적으로개선된것은아니었다. < 그림2-3> 에서보듯이농업의생산성은 1880년대까지급하게하락하고있었다. 그위에정부가주조한대량의동전은물가를급하게끌어올리면서시장의혼란을가속하였다. 농민에대한정부의양보는재정위기를심화시켰으며이는농민에대한다른형태의수탈을강화하였다. 1862년에크게일은民亂의물결은이후에도잦아들지않았으며, 1894년의동학농민봉기에이르기까지면면히이어졌다. 조선왕조는 1876년의開港을맞기이전에이미심각한체제위기에봉착해있었다. 農村社會의분열 1862년에남부지방을크게휩쓸었던民亂의물결은이후에도끊이지않았다. 1876년개항이후 1894년의東學農民蜂起에이르기까지각종기록에서확인되는민란은근 100건에달하고있다. 57) 1862년의대규모민란을맞아조선왕조는民怨의주요대상이된還穀制와軍役制의폐단을개혁하였다. 그럼에도민란의물결이이어진것은군현守令의학정과수탈이더욱심해졌기때문이다. 그배경에는 1880년대이후본격화한고종의매관매직이있었다. 수령에임명된자들은그의짧은임기내에그가수령이되기위해투자한자금을재빨리회수하지않으면안되었다. 1892년右議政鄭範朝는민란이만연하는世態를개탄하면서수령들이관직을旅館처럼여기고행정은衙前들에게맡겨둔채백성의재산을勒奪하는데만주력한다고하였다. 58) 같은시기한반도를여행한영국의지리학자이자벨라비숍은이나라가오직약탈자와피약탈자의두계급으로구성되어있는데, 면허받은吸血鬼인兩班계급으로부터끊임없이보충되는관료계급, 그리고인구의 4/5인, 문자그대로의하층민인平民계급이그것이라고하였다. 59) 당오전의발행에따른급격한인플레이션은국가의수취제도를혼란시켰다. 고정가격에따라동전으로결세를수취하는군현에서는결세가미곡현물로바뀌어수취되거나시장가격에준하여수취되기도하였다. 통화권이분열하고지방에따라물가에큰차이가발생하자당일전으로결세를수취하여당오전으로대납하거나현물결세를 - 17 -
상업적으로활용하여차익을추구하는지방관들의행위가빈번해졌다. 그에따른거 래의실패와結稅의逋欠은농민들에게이중의부담을강요하였다. 1870 년戶布制의실시에도불구하고軍役制의모순은완전히해소되지않았다. 전 체인구가정확하게조사되지않았기때문에동리별호포의실질부담에는차이가있 었다. 有勢한양반동족의동리는여전히부담에서제외되거나아주가벼운부담밖 에지지않았다. 아전들이地方財政의수입원으로은폐하고비호하는동리도많았는 데, 이를契房村이라하였다. 동리내에서는兩班戶과常民戶사이에호포부담의차 별이있었다. 앞서지적하였듯이호포제가반상의신분차별을폐지한것은아니었다. 예컨대 1879 년경상도榮川郡의경우, 양반호에부과된호세는호당 1.2 냥이었음에 비해상민호의호세는 1.94 냥이었다. 60) 1880 년대의조선왕조는이같은온갖病痛을낳고있는체제모순에효율적으로 대처할능력을더이상갖추지못하였다. 전국도처에서몰락양반과하층상민을주 력으로하는민란의물결은끊이지않았다. 군현에따라민란은몇일이고邑底를장 악하고중앙에서내려온按覈使등의출입을저지하는조직적인양상으로발전해갔 다. 정치와사회의기강이전반적으로해체된가운데사회적義賊을자처하는明火賊 또는活貧黨의활동도 1880 년대후반에절정을이루었다. 전국도처에이들이출몰하 지않은고을이없었다. 이들은대개 30-40 명씩무리를지어兩班土豪나商人家를 약탈하였다. 이들은대담하게도지방관부를습격하거나노상에서중앙정부로올라가 는각종進上物을가로채기도했다. 61) 도적떼의발호로장시와장시를오고가는상인 의행렬이끊어졌다. 갈등과분열은농촌사회의내부에까지깊숙이파고들었다. 경제적곤궁은많은곳 에서동리주민의상호갈등을유발하고오래된洞契를해체시켰다. 그와더불어친 족과친족들이반목하였으며, 친족내부에도宗家와支家가갈등하였다. 水利, 營林, 敎育을둘러싼향촌의공동조직이기능을정지하였다. 심지어수리시설洑가무너져 도그대로방치되었다. 마을의하민들도통제되지않았으며, 노동의규율도해체되었 다. 머슴들은주인의지시를따르지않았으며, 同牌와어울려술과노름으로방종하 였다. 62) 극한의혼돈과절망속에서인간들을구원할복음은鄭鑑錄등각종秘記의형태로 전해졌다. 어디선가眞人이나위대한將帥가홀연히등장하여이세상을구원하리라 는南方眞人說또는海島起兵說이널리유포되었다. 63) 開闢의세상에선모두가평등 하리라. 1840 년대부터이어진민란의역사를총괄하는 1894 년의東學農民蜂起는이 러한정신세계의小貧農을주체로하였다. 1) 박지향, 일그러진근대, 푸른역사, 2003, 일그러진근대, 171-195 쪽. 2) 앙드레슈미드지음, 정여울옮김, 제국그사이의한국, 휴머니스트, 2007, 116-119, 295-301 쪽. - 18 -
3) 李基白, 韓國史新論 ( 新修版 ), 一潮閣, 1990, 1-3 쪽. 旗田巍著, 李基東譯, 日本人의韓國觀, 一潮閣, 1983, 134-136 쪽. 4) 카터 J. 에커트지음, 주익종옮김, 제국의후예 : 고창김씨가와한국자본주의의식민지기원 1876-1945, 푸른역사, 2008, 30 쪽. 5) 이에관한근년의대표적연구로서다음을참조할수있다. 이우연지음, 한국의산림소유제도와정책의역사, 1600 1987, 일조각, 2010. 6) 이상이우연, 한국의산림소유제도와정책의역사, 1600 1987, 160-162 쪽. 7) 정치영, 지리산지농업과촌락연구, 高麗大學校民族文化硏究院, 106-107 쪽. 8) 정치영, 지리산지농업과촌락연구, 181-191 쪽. 9) 徐有榘, 林園經濟志 本利志卷 1 田制諸田. 10) 正祖實錄 22 년 10 월癸卯. 11) 英祖實錄 30 년閏 4 월戊辰. 12) 이우연, 한국의산림소유제도와정책의역사, 1600 1987, 206-207 쪽. 13) 이우연, 한국의산림소유제도와정책의역사, 1600 1987, 88-97 쪽. 14) 이영훈 박기주 이명휘 최상오, 한국의유가증권 100 년사, 해남, 2005, 26 쪽. 15) 이우연, 한국의산림소유제도와정책의역사, 1600 1987,70 쪽. 16) 備邊司謄錄 憲宗 13 년 1 월 15 일. 17) 李光麟, 李朝水利史硏究, 財團法人韓國硏究圖書館, 1961, 146 쪽. 18) 鄭勝振, 韓國近世地域經濟史 - 全羅道靈光郡一帶의事例 -, 景仁文化社, 2003, 41-52 쪽. 19) 李榮薰, 장기경제통계. 20) 李榮薰, 17 세기후반 ~20 세기전반水稻作土地生産性의長期趨勢 ( 초고 ), 21) 김건태, 조선후기양반가의농업경영, 역사비평사, 2004, 382-383 쪽. 22) 전라도영광군의辛氏家추수기를분석한정승진에의하면 1840 년대이후두락당지대량이감소한한편의원인은지대율의하락에있었다. 鄭勝振, 韓國近世地域經濟史 - 全羅道靈光郡一帶의事例 -, 182-185 쪽. 23) 고승희, 조선후기함경도상업연구, 國學資料院, 2003, 40-51, 74-97 쪽. 24) 박기주, 재화가격의추이, 1701-1909 - 慶州지방을중심으로 -, 이영훈편, 수량경제사로다시본조선후기, 서울대학교출판부, 187-188, 204-205 쪽. 25) 이영훈, 19 세기서울재화시장의동향 - 안정에서위기로 -, 中村哲 박섭편저, 동아시아자본주의형성사 Ⅰ, 신서원, 2005, 102-108 쪽. 26) 田代和生, 近世日朝通交貿易史の硏究, 創文社, 1981, 325 쪽. 27) 鄭成一, 朝鮮後期對日貿易, 신서원, 2000, 98 쪽. 28) 糟谷憲一, 近代的外交體制の創出 - 朝鮮の場合を中心に -, アジアなかの日本史 Ⅱ, 1992, 231 쪽. 일본에지급된면포와쌀은 1660 년이래 1021 동과 1 만 6,000 석이었는데 1809 년위와같이조정되었다. 29) 全海宗, 韓中關係史硏究, 一潮閣, 1970, 103 쪽. 30) 萬機要覽 財用篇 5 公用公用艱難 ; 국역만기요람 Ⅰ( 財用篇 ), 재단법인민족문화추진회, 560 쪽. 31) 유승주 이철성, 조선후기중국과의무역사, 景仁文化社, 2002, 194 쪽 32) 유승주 이철성, 조선후기중국과의무역사, 207 쪽. 33) 고석규, 19 세기전반서울의시전상업, 이태진외, 서울상업사, 태학사, 2000, 335-342 쪽. 34) 李憲昶, 1678-1865 년간貨幣量과貨幣價値의推移, 經濟史學 27, 1999, 26-27 쪽. 35) 민족문화추진위, 국역경제유표 Ⅰ, 1977, 169 쪽 ( 丁若鏞, 經世遺表 卷 2, 冬官工曹典圜署 ). 36) 韓相權, 18 세기말 -19 세기초場市發達에대한基礎硏究 - 慶尙道地方을중심으로 -, 韓國史論 7, 1981. 196 쪽. 이재하 홍순기, 한국의場市 - 정기시장을중심으로 -, 民音社, 1992, 73-74 쪽. 37) 場市의수가감소한것을두고두가지상이한해석이있다. 韓相權의위의논문은분산적인장시가보다큰규모의장시로통합되어가는시장발전의현상으로해석한반면, 이재하 홍순기의위의책은 19 세기의사회적혼란과경제적침체로인해농촌시장이후퇴하는현상으로이해하였다. 필자는후자의해석이타당하다고생각한다. 전자의해석이성립하기위해서는 5 일마다의 5 日場이 3 일장또는常設市場으로나아가는추세가관찰되어야하는데, 실제로는그반대이다. 예컨대 1770 년의 東國文獻備考 에서는 2-3 일장이각도에서여럿존재하였지만, 1830 년의 임원경제지 에서전국의장시는거의예외없이 5 일장으로표준화해있음을확인할수있다. 38) 李榮薰, 19 세기朝鮮王朝經濟體制의危機, 朝鮮時代史學報 43, 2007, 280-281 쪽. 39) 崔完基, 朝鮮後期船運業史硏究, 一潮閣, 129-147 쪽. 40) 이영훈편, 수량경제사로다시본조선후기, 237 쪽 41) 李宇衍, 農業賃金의推移 : 1853-1900, 安秉直 李榮薰編著, 맛질의農民들 - 韓國近世村落生活史 -, 一潮閣, 2001, 196-202 쪽. 42) 박희진, 朝鮮後期家系當平均口數趨勢 - 族譜를이용한家族再構成을중심으로 -, 경제사학 33, 2002, 13 쪽. 43) 이영훈 조영준, 18-19 세기農家의家系繼承의추이 - 경상도단성현法勿也面戶籍에서 -, 경제사학 39, 2005, 17 쪽. 44) 오일주, 조선후기의재정구조의변용과환곡의부세화, 實學思想硏究 3, 1992, 82-84, 108 쪽. 45) 박석윤 박석인, 朝鮮後期財政의變化時點에관한考察, 東方學志 60, 1988. 146-147 쪽. 이논문에서는 1867 년當百錢의발행으로인해중앙재정의시재고가매우높은異常値가포함되어있으나이를소거하였다. 46) 박이택 이영훈, 18-19 세기미곡시장의통합과분열 - 靈巖지방의미가변동에대한생산충격의영 - 19 -
향분석 -, 이영훈편, 수량경제사로다시본조선후기, 322 쪽. 47) 李榮薰, 大韓帝國期皇室財政의기초와성격, 경제사학 51, 2011,??-?? 쪽 48) 미가가正常性을상실하는시기는 1846 년으로검정되고있다. 박이택 이영훈, 18-19 세기미곡시장의통합과분열 - 靈巖지방의미가변동에대한생산충격의영향분석 -, 316 쪽. 49) 송찬섭, 朝鮮後期還穀制度改革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32-33, 64-65 쪽 50) 文勇植, 朝鮮後期賑政과還穀運營, 景仁文化社, 285-287 쪽. 51) 金容燮, 朝鮮後期의賦稅制度釐正策, 增補版韓國近代農業史硏究 - 農業改革論 農業政策 - 上, 一潮閣, 1984, 281 쪽. 52) 丁若鏞, 牧民心書 兵典簽丁. 丁若鏞著, 茶山硏究會譯註, 譯註牧民心書 Ⅳ, 創作과批評社, 108-152 쪽. 53) 丁若鏞著, 宋載邵譯註, 茶山詩選, 創作과批評社, 1981, 哀絶陽, 238-241 쪽. 54) 양진석, 1862 년농민항쟁의배경과주도층의성격, 한국역사연구회지음, 1894 년농민전쟁연구 2-18 19 세기의농민항쟁 -, 역사비평사, 1992, 198-222 쪽. 55) 송찬섭, 朝鮮後期還穀制改革硏究, 서울대학교출판부, 2002, 191-247 쪽. 56) 金容燮, 朝鮮後期의賦稅制度釐正策, 278-290 쪽. 57) 백승철, 개항이후 (1876-1893) 농민항쟁의전개와지향, 한국역사연구회지음, 1894 년농민전쟁연구 2-18 19 세기의농민항쟁 -, 역사비평사, 1992, 316 쪽. 58) 백승철, 개항이후 (1876-1893) 농민항쟁의전개와지향, 308 쪽. 59) 이사벨라버드비숍지음, 이인화옮김, 한국과그이웃나라들, 살림, 1994, 511-512 쪽. 60) 金容燮, 朝鮮後期의賦稅制度釐正策, 292 쪽. 61) 백승철, 개항이후 (1876-1893) 농민항쟁의전개와지향, 328-331 쪽. 62) 李榮薰, 18 19 세기大渚里의身分構成과自治秩序, 맛질의農民들 - 韓國近世村落生活史 -, 一潮閣, 2001, 283-295 쪽. 63) 高成勳, 朝鮮後期 海島起兵說 관련變亂의추이와성격, 朝鮮時代史學報 3, 1997. - 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