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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47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 손영훈 ( 한국외국어대학교 ) I. 서론 오늘날한국가의국력이나역량을평가하는척도가운데해외에거주하는동포의규모와그사회적지위및역할이주요한평가기준으로부각되고있다. 특히소위선진국들은해외거주동포를민족자산화하면서해당국과의교류와협력증진에적극활용하여왔다는것은널리알려진사실이다. 그러나한국의에너지자원외교가집중되고있는중앙아시아지역의고려인사회를활용하기위한우리의관심과지원은미국과일본등지의동포들에비해상당히미흡했던것으로보인다. 사실 1937년이후중앙아시아지역에집단적으로거주하고있는고려인들은 21세기한국의글로벌전략의실현과유라시아개척을위한매우소중한민족자산이다. 중앙아시아고려인들이과거한민족의고난의역사를상징하는집단에불과하였다면현재에는한국의중앙아시아진출과협력증진을위한중요한매개체로기능하고있기때문이다. 실제로중앙아시아지역에한민족공동체로서고려인들이대거거주하고있었기에한국이서구의선진국및일본등에앞서지난 18년간중앙아시아에대한투자가가능했었고더욱이민간차원의긴밀한유대관계가활성화되었던것이다. 따라서현지문화와사정에정통한고려인들의실력과사회적성취를어떻게활용하는가는장기적으로한국의중앙아시아진출의성공여부가달려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즉중앙아시아에진출한경쟁국사이에서한국이다시금활력을되찾고미래의동반자로서협력을도모하기위해서는고려인들을국가발전과민족공동체형성의대열에적극포용하고이들의역량을십분활용하는방안이적극적으로모색되어야하는것이다. 특히중앙아시아지역에서고려인들이계속해서뿌리내리고민족정체성을복원하는한편현지의주류사회로당당히진입할수있도록지원하는일은고려인사회뿐만아니라한국의발전을위해서도상당히중요한과제로부각되어왔다. 권위주의적통치체제를고수하고있는중앙아시아국가들과긴밀한정치및경제적협력체제를구축하기위해서는고위권력층과소통가능한고려인엘리트에대한심층적이해와네트워크확대가효율적접근방법이기때문이다. 그러나문제는한국과중앙아시아국가들간의관계발전에대한고려인사회와그엘리트들의기여도와앞으로기대되는역할에대해우리가너무무관심하거나무지하다는사실이라하겠다. 따라서 1991년이후중앙아시아지역에거주하고있는고려인의강제이주배경과과정, 소련사회에서고려인들의문화적접변및정체성변화에관한상당한연구성과에비해고려인사회를대표하는엘리트를대상으로하는연구는거의이루어지지않고있다. 본연구는고려인최대거주국가이자독립이후토착민족주의와언어정책으로급속한지위

48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하락을경험하면서소위 제2의정착 과정에직면해있는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를중심으로엘리트의형성과성장과정및그사회적성취를총체적으로파악하고한국정부및기업의체계적인지원및그활용방안모색을목적으로한다. 특히이논문은우즈베키스탄의소수민족으로서고려인엘리트에관한제한적자료와현지조사인터뷰에근거하여이루어졌으며소련시기와독립이후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에관한구체적인자료축척과정책지원등실용적차원에서접근하고자하였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에관한본연구는 30 만여명에가까운중앙아시아고려인동포들의전문적역량을파악하는동시에한국사회의지속적인성장동력으로활용하기위한기초적토대를구축한다는측면에서의의를두고자한다. II. 우즈베키스탄고려인의정착과엘리트의형성 1. 우즈베키스탄고려인의정착과정 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사회는사실상비극적인한민족역사의소산이자 1937년스탈린의소수민족재배치정책의직접적인산물이다. 당시소련의극동지역에거주하던고려인들이중앙아시아지역으로강제이주되면서우즈베키스탄에 7만 6천여명이정착하게되었던것이다. 물론강제이주이전에도중앙아시아지역에이미소수의고려인들이이주하여삶을영위하고있었지만다수의고려인들이집단적으로공동체를형성한것은 1937년가을-겨울의일이었다. 폭압적인강제이주의공포속에서상당수의고려인들이굶주림과질병으로희생되었고우즈베키스탄에도착한고려인들은 ' 사실상 ' 적성민족으로서거주이전의자유가제한되어엄청난억압과고통을감내해야만했다. 특히 1937년강제이주를전후하여 2천 5백여명에이르는고려인지도자들이정치적탄압으로처형되면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의사회적활동은극도로위축되었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이라는낯설고척박한환경에서대부분의고려인들은우선적으로생존하기위한물적기반을구축하는데전념할수밖에없었다. 우즈베키스탄의농업부문에투입된대부분의고려인들은소비에트당국의열악한정책적지원에도불구하고각고의노력으로황무지를개간하고관개시설을확충해나갔다. 특히고려인중심의콜호즈 ( 집단농장 ) 들이조직되고기후와토양에신속히적응하면서끈질긴생명력과특유의근면성, 나아가벼농사에관한풍부한경험을바탕으로우즈베키스탄의농업발전에기여하기시작하였다. 사실상우즈베키스탄의벼농사는고려인들의민족적특성을표출하는동시에공동체적결속을강화시켜주었던거의독점적농업생산양식의하나였다. 따라서전통적으로가축사육과밀농사가중시되던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들은벼농사의보급과그수확량의증대를통해서성공적으로정착할수있었던것이다. 1) 특히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은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49 벼, 채소, 과일등과같이당시거의경작되지않았던작물의재배에집중하는전략을통 해우즈베크인들을비롯한토착민들과의경쟁을피하면서착실히고려인사회를건설해나갔다. 결과적으로우즈베키스탄정착과정에서힘겹고값비싼대가를치러야했지만 1937년강제이주는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사회가굳건히뿌리내리는계기가되었다. 1941년소련이독일과의세계대전에참여하게되면서대부분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후방에서노동군으로동원되었다. 거의대다수의고려인들에게는소위조국수호전쟁에참전할기회마저주지않았고심지어군대에복무하던극소수의고려인군인들까지방출되었다. 그럼에도수백명의고려인청년들은자신의이름과출신을속이고소비에트군대에입대하여최전방에나가싸울기회를얻으면서소비에트국민으로서충성심과소비에트조국에대한헌신을증명해보였다. 물론그렇게해서라도우즈베키스탄을비롯한중앙아시아지역을탈피하고자했지만그이면에는소비에트조국에봉사함으로써그공훈으로정상적인시민으로생활하고자했던기대가있었던것이다. 2) 또한우즈베키스탄콜호즈의고려인들도전시와관련된각종중과세에시달리며힘든생활을영위하였지만거액의자금과상당한식량을국방강화의명목으로기부하고할당된전시물자를공급하기위해열성을다하였다. 3) 즉우즈베키스탄소수민족으로서고려인들은제2차세계대전을기회로활용하여소비에트체제에대한충성을통해전후질서에서사회적지위를회복하고정치적차별을극복하려하였던것이다. 제2차세계대전을전후하여우즈베키스탄고려인콜호즈들은농업부문에서괄목할만한성과를이룩하였다. 상당수고려인남성들의전쟁노역동원으로당시고려인콜호즈의생산여건이악화되었음에도불구하고농업생산량과경작지확대를위해고려인들은천부적인재능을발휘하였다. 그결과 1941-1945년사이에고려인콜호즈들은경지면적을평균 3배나늘렸으며특히북극성 (Полярная звезда) 콜호즈에서는 5배로늘려 4년동안 1,080 헥타르의토지가새로이개간되었고벼와면화재배를위한파종면적이 10배가까이증가되었다. 4) 더욱이제2차세계대전이후우즈베키스탄을비롯한소련체제의모든역량이집단농장의재건과발전에집결되면서고려인콜호즈들은기록적인농업생산량을달성하게되었다. 북극성콜호즈에서는헥타르당평균 4-5톤의벼를생산하였고일부작업조가 8톤이상을생산하는혁명적업적을달성하면서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의위상이점차높아지기시작하였다. 한편제2차세계대전이후우즈베키스탄에서대부분의고려인콜호즈들은전통적벼농사와더불어면화재배를중점사업으로채택하기시작하였다. 소비에트당국이공산주의국가건설을위한농업의중요성을역설하면서우즈베키스탄의경제회복과개발에대한구체적인방안으로면화산업의발전을강조하였기때문이었다. 5) 사실우즈베키스탄은소 1) 이희수 (1996), 구소련의한인사회, 민족과문화, Vol. 4, p. 81. 2) 최태강, 심헌용 (2000), 중앙아시아한인사회의통합문제 - 사회단체활동을중심으로 -, 총서, Vol. 2, p. 295. 3) 대표적으로북쪽봉화 (Северный маяк) 콜호즈의최세르게이 (Цой Серегй) 는항공대대창설을위해백만루블을국방기금에기부하였으며다수의고려인콜호즈구성원들도상당량의식량과물자들을기탁하였다. 4) 백태현 (2008), 중앙아시아경제의산업화와고려인의역할, 러시아중앙아시아한인의역사 ( 상 ), 재외동포사총서 07, pp. 248-249. 5) 황영삼 (2007), 우즈베키스탄고려인경제공동체의형성과발전과정의재조명, 역사문화연구, 제 26 집, p. 57.

50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련의주요면화생산지역으로서그역할을수행하면서러시아, 우크라이나, 벨라루시및발트국가의섬유공장에서필요로하는면화의 90% 를공급하였던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특화작물로높은상업적가치를지닌면화재배는정교한기술과많은인력이요구되고기후및토양이수확량에절대적영향을미쳤기때문에자칫실패할수도있는위험성을지니고있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대부분의고려인콜호즈들은벼농사의성공경험을바탕으로수차례의시도끝에면화재배지와수확량을급속히확대하면서우즈베키스탄의농업발전에서중추적역할을담당하게되었다. 따라서강제이주이후격변과혼란속에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소련체제에대한점진적인적응과농업부문에서의탁월한성과를바탕으로타민족의부러움을받는소수민족으로서자리를굳혀나가게되었다. 2. 소비에트농업엘리트로서의고려인 실제로제2차세계대전이종결되면서과거에사실상의적성민족으로취급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사회적위상은급속히향상되기시작하였다. 1948년부터 1954년까지 130명이상의고려인들이벼및면화수확량의증산에헌신적으로기여한공로로 사회주의노동영웅 (Герой Социалистического Труда) 칭호를수여받았던것이다. 특히그중일부고려인들은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선출되어소련과우즈베키스탄의권력기관으로당당히진입하게되었다. 즉소련체제의폭압적강제이주의희생자들로정치사회적지위의몰락에직면했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이소련체제의농업영웅으로거듭나면서그일부가국가엘리트로편입되기시작하였던것이다. 우선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의위상상승에기여한대표적인고려인으로북극성콜호즈의김병화 (Ким Пён Хва) 회장을언급하지않을수없다. 김병화회장은 1947 년과 1951년에면화의증산과곡물의다수확에관한업적으로두차례에걸쳐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를받은유일한소수민족출신의고려인이었다. 6) 김병화회장은우즈베키스탄의제2-7기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도선출되어농업위원회위원으로활동하면서고려인사회를대표하는국가엘리트로성장하였다. 김병화회장은 1974년에지병으로사망할때까지개인적인인품과뛰어난경영방법으로 1940년부터 34년간북극성콜호즈를지도하면서우즈베키스탄공훈면화재배인을비롯한다수의훈장과포상을받았다. 7) 우즈베키스탄거주역사가일천했던고려인으로유일하게두차례나영웅칭호를받은김병화회장의업적을기념하기위하여 1961년북극성콜호즈입구에그의흉상이건립되었고사후에는북극성콜호즈가김병화콜호즈로개명되었다. 더욱이김병화회장 6) 우즈베키스탄에서 2 차례이상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를받은사람은총 4 명으로면화수확의업적으로페르가나주의투르순쿨로프 (Х. Турсункулов) 가 3 차례에걸쳐영웅칭호를받았고우즈베키스탄공산당중앙위원회제 1 서기였던라쉬도프 (Ш.Р. Рашидов) 와타슈켄트주의목화재배인이었던아후노바 (Т. Ахунова) 그리고김병화회장이 2 차례에걸쳐영웅칭호를받았다. 7)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6), Краткие Очерки о Выдающихся Корейцах Узбекистана, Ташкент: Истикло л, pp. 76-85.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51 이운영하였던북극성콜호즈는 1948년부터 1957년까지 10여년동안 25명에이르는고려인사회주의노동영웅을배출하면서우즈베키스탄뿐만아니라소련전체를대표하는콜호즈로변모하게되었다. 특히벼수확의획기적증산으로 1949년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를받은전영섭 (Тен Ен Себ), 리니콜라이 (Ли Николай), 허세르게이 (Хе Серге й), 1949년면화수확의업적으로사회주의노동영웅이된김창세 (Ким Чан Се), 1950년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를받은김니콜라이 (Ким Николай), 가축사육으로 1951년사회주의노동영웅으로선정된최재임 (Цой Дя Им) 등의고려인들이북극성콜호즈에서활동하였다. 8) 그밖에우즈베키스탄의콜호즈에서농업생산에종사하던수십명의고려인들이레닌훈장과 10월혁명훈장등최고의영예를안으면서고려인사회의지위향상에크게기여하였다. 한편 1940-1962년에디미트로프 (Димитров) 콜호즈대표를역임하였던신재직 (Шин Д ен Дик) 또한 1951년에사회주의노동영웅훈장을받았으며농촌에서의학교교육발전에기여한공로로소련인민교사 (Народный учитель СССР) 라는영예와함께우즈베키스탄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활동하였다. 9) 이외에도사회주의노동영웅훈장의수상을통해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사회의지위향상에기여한대표적인고려인지도자들로는스베르들로프 (Свердлов) 콜호즈회장김드미트리 (Ким Дмитрий), 기간트 (Гиг ант) 콜호즈회장림명극 (Лим Мен Гык), 엥겔스 (Энгельс) 콜호즈와굴리스탄 (Гулист ан) 콜호즈의회장을역임한한발레틴 (Хан Валентин) 등을꼽을수있다. 한편소비에트당국은한반도해방이후이지역의사회주의건설을지원하기위해한국어를구사하는중등교육이상의우즈베키스탄고려인다수가포함된소련거주고려인들을북한에파견하였다. 당시북한에대한영향력을구축하기위해소련이대규모군사- 기술및경제적지원은물론상당수의친소비에트적고려인지식인등인적자원을제공하였던것이다. 실제로한국전쟁을전후하여우즈베키스탄출신고려인들은북한의노동당, 정부기구, 군대및교육기관등에서핵심적역할을담당하며북한정부수립에크게기여하였다. 그러나 1950년대중반중소분쟁이격화되고있던상황에서북한이친중국적입장을견지하고김일성체제에대한충성이강요되면서대다수우즈베키스탄출신고려인들은북한에서숙청되거나출신지역으로귀환하게되었다. 10) 1937년강제이후를전후한대대적인숙청으로소규모에불과하였던친소비에트적고려인지식인들의북한파견은고려인들의정착기에광범위한사회적진출을저해하는요인으로작용하였다. 북한의사회주의건설과정에서일부우즈베키스탄출신고려인들이고위직을역임하면서행정경험을축적하였지만상당수가한국전쟁에서희생되었기때문이었다. 조선노동당정치국위원을역임한허가이알렉세이 (Хегай Алексей) 와북한영웅창호를받은안동수 (Ан Дон Су) 등우즈베키스탄출신고려인들은한국전쟁에서사 8) 황영삼 (2007), pp. 67-71. 9)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6), pp. 214-221. 10) 서대숙편, 이서구역 (1989), 소비에트한인백년사, 서울 : 태암, pp. 133-134.

52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망하였다. 특히북한파견고려인들은우즈베키스탄의소비에트체제발전과정에서장기간소외되어있었기때문에귀환이후에도대부분이공산당과정부기구의중하위직위에제한될수밖에없었다. 북한인민군중장으로활약하였고 1973년우즈베키스탄공훈문화인으로선출된기석복 (Ги Сек Пок), 북한에서정치교육을담당한이후 1962-1987년까지타슈켄트스포츠용품공장의소장을역임한장학봉 (Тян Хак Пон), 북한인민군중장으로한국전에참전하고 1956년에우즈베키스탄으로귀환하여타슈켄트시주택위원회에서근무한황발렌틴 (Хван Валентин), 북한인민군중장을역임한유성철 (Ю Сен Чер), 북한인민군소장이었으며우즈베키스탄내무부에서활동한유가이니콜라이 (Югай Никола й) 등은북한에서활동하고우즈베키스탄으로귀환한대표적고려인들이었다. 11) 스탈린의통치시기폭압적강제이주로인한공포, 대규모숙청에따른지도자의부재, 적성민족이라는신분적제약및친소비에트지식인들의북한유출등으로인해우즈베키스탄의고려인들은극도로위축될수밖에없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고려인들은천부적인근면성과우수한영농기술이라는전통적생산문화를동력으로우즈베키스탄에서새로운삶을개척해나갔다. 우즈베키스탄의소수민족으로서고려인들은우선적으로안정적인정착에주력하면서도농업분야에모든역량을집중하고소련체제에대한충성과전쟁등의기회를최대한활용하여사회적지위의회복을추구하였던것이다. III. 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의성장과발전 1. 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의성장배경 1953년스탈린의사망이후사실상거주이전의제한이라는조치가철폐되고법적및정치적지위를회복한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는실로획기적인변화를맞이하게되었다. 우즈베키스탄의소수민족으로서사회적성취욕구가남달랐던상당수의고려인들이자녀들의상급학교진학과경제적성취등의이유로농촌을떠나도시로이주하기시작하였던것이다. 흔히소련시기에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교육에대한열의는천성적인근면성과더불어활발한사회적진출과성취의근본적인동인으로알려져왔다. 실제로강제이주직후의열악한환경에도불구하고 1938-1939학년도에만우즈베키스탄고려인전체인구의 20.9% 에해당하는 22,995명이학교에다니고있었다. 이는당시우즈베키스탄전체인구의학생비율인 17.6% 또는소련전체인구의학생비율인 18.7% 와비교해서월등히높은수치로서교육에대한고려인들의강한의지가단적으로표현되어있는부분이다. 12) 11) 우즈베키스탄고려인지식인들의북한및유즈노사할린파견에관해서는 Ким Г.Н.(1999), "Стереотипы советс кой историографии и актуальные проблемы исследования Корейской войны 1950-1953 гг.", Серия Востоковедения, Вестник КазГУ, 9, pp. 186-193; Ким Г.Н. и Мен Д.В.(1995), История и культура к орейцев Казахстана, Алматы: Гылым, pp. 153-185 참조 12) 방일권 (2007), 중앙아시아한인사회와교육 : 1930~1940 년대를중심으로, 역사문화연구 제 26 집, pp.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53 농촌지역의콜호즈를중심으로정착했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탁월한생산업적과안정적생활을바탕으로자녀들의사회적진출과신분상승을위하여교육에집중하기시작하였다. 특히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거주이전의제약과제2차세계대전에따른전시체제에도불구하고자녀들이가능한최고수준까지교육을받도록아낌없이투자하였다. 그결과 1950년대를전후하여상당수의고려인들이우즈베키스탄의전문학교와대학을졸업하고새로운소비에트고려인으로서사회적진출을모색할수있었다. 특히 1950 년대중반이후거주이전의자유가부여되면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모스크바및레닌그라드등지의대학으로진학하여선진지식을습득하면서학문, 기술, 산업, 의학등의전문분야로진출을모색하였다. 13)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당시소련최상의교육과전문직으로의진출을통하여소수민족이라는한계를극복하면서사회적지위향상과신분상승을추구하였던것이다. < 표 4-1> 1989 년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교육현황 > 출처 : Ким Брутт(1999), Корейцы Узбекистана: Кто есть Кто, p. 142. 1989년인구조사자료를통하여스탈린사후우즈베키스탄의소수민족으로서고려인들의뛰어난교육적성취를간접적으로파악할수있다. 1989년소비에트중등및전문교육이상을이수한우즈베키스탄고려인은 89,886명으로취학연령이상고려인전체인구인 160,086명의 56.2% 로과반이넘는것으로나타났다. 특히 1989년우즈베키스탄전체인구의평균 4% 가대학졸업자였던데비해고등교육중퇴이상의고려인은 25,142명으로취학연령이상고려인전체인구의 15.7% 로극명한차이를보였다. 더욱이당시우즈베키스탄고려인중에서기성세대에해당하는 30세에서 59세까지연령대의고등교육이수자는고려인전체인구의 25% 에이르렀다. 14) 따라서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들은타민족에비해월등히높은교육수준을바탕으로활발한사회적진출을통하여각계각층의지도적지위를차지하면서고려인사회의대표로서국가엘리트로성장할수있었던것이다. 한편고등교육을통한안정적인사회적지위확보와더불어물질적부의축적을위한 98-101. 13) 대표적인사례에속하는우즈베키스탄출신고려인으로는박보리스 (Пак Борис) 교수가있다. 황영삼 (2008), 시베리아고려인학자박보리스드미트리예비치의구술생애사 - 중앙아시아및시베리아생활시기를중심으로 -, 역사문화연구 제 30 집, pp. 3-50 참조. 14) Ким Брутт(1999), Корейцы Узбекистана: Кто есть Кто, pp. 142-143.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우즈베키스탄을비롯한소련전역에거주하고있던국민들의평균교육수준보다 1.6-1.8 배정도우월하였다.

54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경제적성취에대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강렬한욕구는급속한도시화를초래하게되었다. 고려인들은농촌에비해비교적교육기회가다양하고교육환경이우수한도시로대거이주하기시작하였던것이다. 특히소비에트고등교육을이수한고려인들의사회적진출이전문직에집중되면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이도시를중심으로거주하게되었다. 또한 1937년강제이주이후집단농장인콜호즈를중심으로생활하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산업화의진전과더나은삶을위한거주지이전을위해다른지역으로이주하면서도시화는더욱가속화되었다. 사실 1950년대후반부터우즈베키스탄에서추진된콜호즈들간의통합화와대형화조치로인해순수고려인콜호즈의수익성과생산성이극도로악화되기시작하였다. 따라서상당수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이고본질농업에나서면서주거조건이비교적양호한도시로삶의근거지를대거이동하게되었던것이다. 고본질은토지의임대와생산물분배에관한계약을통해이루어지는일종의계절적이동농업형태로서사회주의계획경제체제에서사적이익을취할수있었던영농방식이었다. 소련체제의근간이었던집단적농업생산체제와양립할수없었음에도불구하고당시그어떤농업생산방식보다높은생산성과수익성을담보할수있었기때문에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고본질은독자적영역을확보하며광범위하게전개될수있었다. 15)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사회주의농업분야에서생산성증대를위해활용되었던고본질에높은재능을발휘하였고농사철을이용해개인별, 집단별로콜호즈와계약을맺어수박, 양파, 참외등을생산하며많은소득을올리게되었다. 사실고본질농업방식을통해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도시에서의안정적인생활과교육지원을뒷받침하여신분상승을위한사회적진출의기반을단기간에마련할수있었던것이다. < 표 4-2> 우즈베키스탄고려인의도시와농촌거주변화 ( 도시화 ) 출처 : Ким Г.Н.(2006), История Иммиграции Корейцев: кн. 2, 1945-2000 годы, Алматы, с. 119. 따라서 1956년거주이전의제한이철폐된직후인 1959년에우즈베키스탄고려인중에서도시인구는 44,000 여명으로 1939년에비해무려 4배가까이빠르게증가하였던것이 15) Back Tae Hyeon(2001), "The Social Reality faced by Ethnic Koreans in Central Asia", German Nikolaevich Kim and Ross King (Eds.), The Koryo Saram: Koreans in the Former USSR, Korean and Korean American Studies Bulletin, Vol. 2&3, pp. 45-89.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55 다. 특히 1970년을기점으로고려인의도시인구가 85,000 여명으로고려인전체인구의 58% 였던반면에농촌인구는 42% 로 1939년의 85% 에비해절반수준으로하락하게되었다. 1989년당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도시화비율은무려 80% 에이르게되었고타슈켄트시의고려인인구도우즈베크인, 러시아인, 타타르인, 우크라이나인에이어 5위를기록하며도시집중현상이두드러지게나타났다. 따라서 1960년대이후고려인들의급속한도시화는우즈베키스탄의소수민족으로서고려인들의사회적성취욕구를극명하게반영하는독특한현상이었던것이다.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높은교육수준과급속한도시화는자연스럽게러시아어와러시아문화의전면적인습득으로이어지게되었다. 소비에트고등교육을통한사회적진출에서러시아어의효용가치가중요해지면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자발적으로러시아화정책에동화되어갔다. 더욱이러시아어습득에소극적이었던우즈베크인과는달리고려인이압도적인학교에서조차모국어보다러시아어학습이강조되었고심지어가정생활에서도러시아어사용이확대되었다. 사회적성취욕구가남달랐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이소련이라는러시아인중심사회에서사회적지위확보와신분상승을위해자녀들의러시아어습득을독려하였던것이다. 또한우즈베키스탄을비롯한소련전역의도시로대거이주하였던다수의고려인들은지배적러시아문화에자연스럽게노출되었으며농촌에서도고려인콜호즈들의다민족화로러시아어의사용이급속히확대되기시작하였다. < 표 4-3> 우즈베키스탄도시거주고려인들의러시아화정도

56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출처 : 소련의인구조사자료 (1970, 1979, 1989 년 ) 에근거하여재구성하였음. 실제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소련민족정책에순응하여러시아어중심의학교교육을열성적이고자발적으로수용하고다민족의융합을통한소비에트인형성을추구하였던가장모범적인소수민족이었다.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철저한러시아화와체제지향적태도는결과적으로고려인들의사회경제적지위향상에기여하면서각계각층에서지도적엘리트를배출하는데결정적요인이되었다. 특히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민족융합을통한소비에트인형성에부응하기위해우즈베키스탄에국한하지않고소련전역으로사회적진출을적극모색하였다. 결국 1982년타슈켄트를방문한브레즈네프는농업생산의성취에국한하지않고러시아어습득에근거한고등교육을통해소련전역의다양한분야로진출을시도하는모범적소비에트인으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을극찬하기에이르렀다. < 표 4-4> 1989 년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직업분포 출처 : Ким Брутт(1999), Корейцы Узбекистана: Кто есть Кто, p. 144. 1937년강제이주이후 50여년동안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우수한교육수준과전면적러시아화를통한역동적인사회적진출의결과는실로눈부신것이었다. 1989년자료에따르면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강제이주초기의전통적농업일변도에서탈피하여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57 산업, 건설, 교육, 보건체육, 교통통신등의분야로진출이두드러졌으며특히행정기관과사회단체등공직사회로의진입도활발히이루어졌다. 특히우즈베키스탄타슈켄트주에거주하는 86,400명의고려인중에서 42.7% 에해당하는 36,900명이교수, 교사, 의사, 공무원, 사무직등의전문직에종사하고있었다. 16) 특히우즈베키스탄고려인은소수민족으로서정치분야로의진출이제한되기도하였으나 1990년기준으로공산당전체당원의 3.7% 를차지하며당기구에서적극적으로활동하고있었다. 17) 1989년고려인들의직업분포는당시우즈베키스탄전체인구에서고작 1% 정도를차지하고있던소수민족으로서, 그리고 1937년강제이주민족으로서지난 60여년간고려인들의높은사회적약진을단적으로보여주는것이다. 따라서스탈린시대의억압과민족적차별을극복하면서농업부문을중심으로최고의지위까지도달했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 1956년이후높은교육수준과러시아어를무기로다양한분야에서발군의역량을발휘하며다수의국가엘리트를배출하면서주류사회로까지진입하게되었던것이다. 한편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들의활발한사회적진출에는어느정도의희생이불가피하였는데그들이치른대가는바로모국어의상실이었다. 2. 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의구성 1) 공산당및정부관료엘리트 소비에트시기높은교육적성취와개인적역량을바탕으로성장한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로서소련의최고권력기관인소비에트최고회의까지진입하였던인물로는강아나톨리 (Кан Анатолий) 와조바실리 (Цо Василий) 가대표적이다. 강아나톨리는타슈켄트농업대학을졸업하고타슈켄트주프라브다 (Правда) 콜호즈의부회장을역임하였으며두차례에걸쳐소련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선출되었다. 조바실리는 1950년우즈베키스탄의안디잔 (Андижан) 주에서태어나잠불 (Джамбул) 기술대학을졸업한이후엔지니어를거쳐잘랄쿠두크 (Джалалкудук) 지역섬유협회의대표이사를역임하였다. 조바실리는소련의마지막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을지냈는데현재그는모스크바에거주하며 전 ( 全 ) 러시아고려인연합회 회장으로활동하고있다. 18) 특히조바실리회장은 2006년민족간유대와친선교류에기여한공로를인정받아당시러시아푸틴대통령으로부터평화훈장을받기도하였다. 19) 한편우즈베키스탄농업부문에서고려인여성의활동도적극적이었다. 폴리토젤콜호즈의작업반장이었던리류보비 (Ли Любовь) 여성은옥수수수확량을획기적으로증대시킨공로를인정받아 1962년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를받았다. 특히이류보비는 1962년 16) 신연자 (1990), 소련속의한인들 : 소련의고려사람들과페레스트로이카, 계간사상 ( 여름 ), p. 288. 17) 한세르게이미하일로비치외, 김태항역 (1999), 고려사람우리는누구인가, 서울 : 고담사, p. 323. 18) Ким Брутт(1999), p. 28, p. 118. 19) 연합뉴스 2006 년 3 월 6 일자 < 러시아고려인연합회장, ` 국가평화훈장 ' 수상 > 기사참조.

58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에서 1970년까지소련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을지낸최초의고려인여성이기도하였다. 1976년사회주의노동영웅훈장을받은강오남 (Кан О Нам) 도소련소비에트최고회의에진출한대표적인우즈베키스탄고려인농업엘리트로기억되고있다. 1950년대이후다양한전문직종으로진출한고려인엘리트중일부는우즈베키스탄과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의발전에기여한공로로해당공화국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선출되었다. 소련시기우즈베키스탄고려인을대표하는엘리트인정해균 (Тен Хайг юн) 은 1948년타슈켄트법률대학을졸업한이후나망간 (наманган) 주투라쿠르간 (Тура курган) 군의검사로활동하면서공산당지구위원회제2 서기및지구집행위원회의장을역임하였다. 또한정해균은나망간주최대규모의굴바흐 (Гульбах) 솝호즈를운영하며지도자로서의역량을발휘하였고, 1968년부터 1975년까지는나망간주집행위원회제1 부위원장으로활동하였다. 정해균은우즈베키스탄원예부제1 차관으로박탈되어중앙정부에서활약하기시작하였고 1983년부터 1989년까지우즈베키스탄각료회의산하국가어업위원회위원장을역임하면서 4차례에걸쳐우즈베키스탄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선출되었다. 20) 강파벨 (Кан Павел) 은우크라이나의오데사수리공학대학을졸업한이후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과시르다리야주건설회사에서엔지니어로사회활동을시작하였다. 강파벨은국영토지관리회사의책임자로서우즈베키스탄의황무지였던 기아의초원 ( 골로드나야스텝 : Голодая степь) 지역을개척하는데기여한공로로 1982년에소련국가포상을받았으며두차례에걸쳐우즈베키스탄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활동하였다. 21) 1945년사마르칸트주에서태어나레닌그라드와타슈켄트에서수학한김아르카디 (Ки м Аркадий) 는부하라주와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에서건설엔지니어및책임자로근무하였으며, 특히 «타히아타쉬수력에너지건설» 회사의건설조립관리책임자를역임하였고카라칼파크공훈건축사로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선출되었다. 1945년타슈켄트주에서태어난류겐나디 (Лю Геннадий) 는 1970년에타슈켄트국립대학교를졸업하고 1970-1972년에걸쳐소비에트군대장교로복무하였다. 1972년부터신문기자로활동한류겐나디는 < 농촌의진실 > 신문부편집장과 < 소비에트카라칼파키야 > 신문의편집장을역임하였고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활동하였다. 한편 1950년대이후에도전통적인농업분야에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의출중한역량이지속적으로발휘되면서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와더불어정치적으로도성장하며고위직으로진출하게되었다. 1953년부터폴리토젤 (Политотдел) 콜호즈를운영하였던황만금 (Хван Ман Гым) 도새로운기술과농법의도입으로소련에서최고의면화생산량을기록하여 1957년사회주의노동영웅칭호를받았다. 황만금회장은우즈베키스탄공 20) Ким Брутт(1999), pp. 102-103. 21)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6), pp. 86-93.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59 산당중앙위원회위원과우즈베키스탄제6기소비에트최고회의간부회의위원으로활동하면서고려인사회의위상제고에크게기여하였다. 22) 김니콜라이 (Ким Николай) 는벼농사재배에대한공로로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의지위향상에일조한대표적고려인엘리트로서 1973년사회주의노동영웅훈장을받고호레즘 (Хорезм) 주소비에트의원및우즈베키스탄제11기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활동하였다. 강알렉세이 (Кан Алексей) 는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의수도인누쿠스지역러시아솝호즈에서근무하며 1973년사회주의노동영웅훈장을받았고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선출되었다. 이밖에도우즈베키스탄페르가나주마르길란금속제품공장의소장김모이세이 (Ким Моисей) 를비롯하여시당제2서기와주당부위원장을역임한양레브미르 (Лян Ревми р) 등과같이상당수의고려인들이 1950년이후기술, 건설, 교통, 농업, 언론, 스포츠등을비롯한다양한분야에서의전문적업적또는공산주의청년동맹과공산당이적극적활동을바탕으로우즈베키스탄지방행정단위 ( 시, 주 ) 의소비에트의원으로대거진출하여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를대표하면서고려인의사회적지위향상에기여하였다.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우즈베키스탄의중앙및지방행정기관, 공공기관, 검찰및경찰등권력기관의고위직에도진출하면서고려인뿐만아니라국가를대표하는엘리트로거듭나게되었다. 우선전빅토르 (Чжен Виктор) 는 1945년사마르칸트주에서출생하여사마르칸트국립대학교를졸업하고흘로프코마쉬 (Хлопкомаш) 공장의선임엔지니어와소장을활동하였으며사마르칸트산업협회인엘렉트로브트마쉬 (Электробытмаш) 의대표를역임한이후 1990년에우즈베키스탄지역산업부장관으로임명되었다. 23) 정니키포르 (Тен Никифор) 는 1941년타슈켄트주중치르치크지역에서출생하여 1963년타슈켄트종합기술대학을졸업하고사마르칸트그라도스트로이 (Самарканлградстрой) 건설기업을운영하였으며우즈베키스탄건설부차관을역임하였고 1988년에는곡물부차관으로임명되었다. 최레미르 (Цой Ремир) 는러시아공화국의페트로자보드스크국립대학을졸업하고지질학자로활동하였으며 1969-1990년사마르칸트산업지질협회선임지질학자와부대표를역임하면서새로운광물매립지를발굴하는데기여하였다. 1986년소련연방국가포상을수여받았고 1990년에우즈베키스탄지질학및광물자원국가위원회부위원장에임명되었다. 박콘스탄틴 (Пак Константин) 는 1958년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의누쿠스시에서태어나부하라기술대학과레닌그라드종합기술대학을졸업한후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소비에트최고회의에서근무하였으며누쿠스시부시장으로재직하였다. 유가이콘스탄틴 (Югай Константин) 은 1959년타슈켄트국립대학교를졸업하고검찰청에서근무하였으며 1978-1987년에시르다르야주부법원장으로근무하였고이후대검찰청감찰국검사로활동하였다. 22)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6), pp. 178-185. 23) Ким Брутт(1999), p. 124.

60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2) 교육및문화분야엘리트 1950년대이후우즈베키스탄교육부문에서고려인들은가장괄목할만한성장을이룩하면서대학총장 2명, 부총장 8명을비롯해우즈베키스탄과학아카데미연구위원, 학술연구기관의소장및수십명에이르는학장, 학과장및중등학교의교장등을배출하였다. 24) 한세르게이미하일로비치 (Хан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는사마르칸트국립대학을졸업하고철학박사로서 1985년에서 1988년에걸쳐타슈켄트문화대학부총장과총장을역임하였으며우즈베키스탄내무경찰학교교수로도재직하였다. 엠빅토르 (Эм Виктор) 는경제학박사이며 1985-1992년동안타슈켄트농업기술대학학과장, 부총장및총장을역임하였다. 김블라디미르 (Ким Владимир) 는타슈켄트경제대학을졸업하였으며경제학박사이자우즈베키스탄과학아카데미준회원으로 1980년대타슈켄트경제대학부총장을역임하였고 1981년우즈베키스탄공훈학자로추대되었다. 박니콜라이 (Пак Николай) 는 1947 년타슈켄트경제대학을졸업하고모스코바경제대학에서수학하였으며경제학박사로서 1964-1982년에사마르칸트협동대학부총장으로활동하였다. 손블라디미르 (Сон Владим ир) 는 1958년타슈켄트전기기술대학졸업한기술학박사로 1980년대타슈켄트전기기술대학부총장으로재직하였다. 한니콜라이알렉세이비치 (Хан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는 1949년타슈켄트국립대학교를졸업하였고경제학박사이며타슈켄트농업대학부총장으로재직하였고 1980년우즈베키스탄공훈경제학자로추대되었다. 석안드레이 (Шек Ан дрей) 는사마르칸트국립대학교학장을거쳐부총장을역임하였고박니콜라이 (Пак Ни колай) 도 1960년대와 1970년대에걸쳐부하라사범대학부학장으로재직한교육학문분야의고려인엘리트였다. 특히 1932년블라디보스톡에서태어나타슈켄트국립대학교를졸업한김올가 (Ким Ольга) 는소련에거주하는고려인여성최초로 1978년언어학박사 (доктор) 라는학문적업적을달성하였다. 한편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문화예술분야에도두각을나타내면서공훈예술인과공훈문화인으로선정되었으며역도, 유도, 복싱등의스포츠분야에서도소련연방챔피언과우즈베키스탄챔피언등을배출하였다. 특히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스포츠분야의고위행정직에도진입하였는데우즈베키스탄국가올림픽위원회위원장으로리가이볼미르 (Лигай Вольмир), 우즈베키스탄국가체육위원회위원장으로페르가나부주지사를역임한편비탈리 (Фен Виталий) 가활동하면서고려인을대표하여우즈베키스탄스포츠분야의발전에기여하였다. 25) 따라서 1953년에스탈린의철권통치가끝난이후약 40년동안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높은교육수준과전면적러시아화를통해주어진여건을최대로활용하면서사회각계각층에서그역량을유감없이발휘하면서지도적위치에까지도달할수있었다. 특히 24) 우즈베키스탄과학아카데미역사연구소한발레리부소장과의인터뷰 (2010 년 7 월 21 일 ) 25) Ким Брутт(1999), p. 106.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61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소수민족이라는신분적차별에따라정치, 군사, 공직으로의진출보다는상대적으로차별의소지가적고개인의능력과노력여하에따라신분상승을이룰수있는경제, 기술, 교육등의전문직에집중하게되었다. 그러나우즈베키스탄에서경쟁적우위를지녔던전통적인농업과일부전문분야에서고려인들은탁월한업적으로주류사회에진출했어도상층계층으로는진입하지못하고중상계층에머물면서러시아인이지배하는사회체제의유지와운영에기여하면서상대적으로높은사회경제적위치를누려왔다. 소련시기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이이룩한사회적성취에유달리 제 2- 또는부- 라는수식어가많은것도바로이러한요인에서비롯된것이었다. IV. 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의위축과엘리트지도층의변화 1. 독립이후우즈베크민족주의의부상과고려인사회의위기 소련시기에높은교육수준과활발한사회진출을통해러시아인과우즈베크인을비롯한주류민족사이에서중개적역할을수행하며중간자적위치를바탕으로비교적사회적명망이높았던고려인들에게우즈베키스탄독립은새로운시련으로다가왔다. 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들의방패막이역할을하였던러시아인의힘이약화되고대신그동안경멸하고거리감을두어왔던우즈베크인들이실권을잡게되었던것이다. 특히우즈베키스탄은독립이후소위 민족국가 (nation state) 형성을위해탈소비에트와민족전통의부활로대표되는우즈베크인중심의민족주의정책을강력히추진하여왔다. 그러나한편으로다민족국가로서우즈베키스탄은고려인을비롯한 120여소수민족에대한차별을금지하는다민족포용정책을견지하면서문화적다원주의를강조하는이중적행보를취해왔다. 26) 사실소련해체이후나타난우즈베크민족주의의부활은전체인구의 1% 에도미치지못하는고려인들의생존에대한직접적인위협으로간주되지는않았다. 우즈베키스탄정부가자치공화국을구성하고있는카라칼파크민족에대해서는매우통제적태도를일관하면서도고려인이나유태인등의소수민족에대해서는상당히관대한입장을취하고있기때문이었다. 특히우즈베키스탄헌법 5조 18항과 1996년 11월에공포된정부령 399호를통해공식적으로소수민족들의기본적권리를보장하고사회생활의모든영역에서차별을받지않으며다민족사회에서정체성을보존하는동시에전통문화를발전시킬수있는환경을보장하였다. 이에따라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고려문화협회와한국어교육기관등을조직하면서정체성회복과문화부흥의토대를마련할수있었던것이다. 27) 26) 우즈베키스탄민족주의정책에관해서는성동기 (2001), 우즈벡다민족정책과민족주의 - 현재의시대적상황에따른고려인의위상재조명 -, 재외한인연구, 제 11 호, pp.99-129; 성동기 (2006), 우즈베키스탄의민족문제, 민족연구, Vol.27, pp. 69-82 참조. 27) 전형권, Yu Lia Yim(2006), 우즈베키스탄의민족정책과고려인디아스포라정체성 - 고려인설문조사분석을중심으로 -, 슬라브학보 Vol.21, No.2, pp. 354-355.

62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그러나소수민족의포용이라는법률적보장에도불구하고우즈베크어의공식어선포로인해고려인을비롯한소수민족들이언어적제약에직면하면서사실상의차별과배척이심화되어왔다. 특히우즈베키스탄정부는모든정부문서를우즈베크어로대체하고사회적혼란에도불구하고 1993년문자개혁에대한법령을공포하여 2005년부터라틴문자의사용을의무화하였다. 따라서소비에트시기에러시아언어와문화의전면적수용을통해활발한사회적진출을도모했던대부분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하루아침에문맹적위치로전락할수밖에없었다. 특히우즈베크어구사능력이공직사회의취업과승진에서주요기준으로부각되면서고려인들의공직진출이극도로제약되었고심지어가지고있던직위에서퇴출되기도하였다. 따라서지난 40여년동안우즈베키스탄에서전면적러시아화를바탕으로주류사회로의진출을추구하며다수의엘리트를배출하여왔던고려인사회가위기에직면하게되었던것이다. 28) 한편우즈베키스탄에서자본주의시장경제의제한적도입과외국기업들의진출에따라공직사회와공공기관에서활동하던고려인들의이탈도가속화되었다. 실제로우즈베키스탄의체제전환기에서고려인들을비롯한소수민족들이직면한최대의문제는미래의언어문제라기보다는계획경제체제의붕괴에따른당면한생활수준의급격한하락이었다. 특히우즈베키스탄에서상대적으로높은지위와고본질을통한고수익을통해우즈베크인보다비교적풍족한생활을영위할수있었던고려인들은우즈베크민족주의로인한실업과경제활동의제약으로대부분극심한생활고에봉착하게되었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의체제전환기에서우즈베크민족주의부활과생활여건의악화에직면한고려인들은노동이주와직종변화를통해새로운활로를모색하기시작하였다. 현재우즈베키스탄에거주하는고려인은 17만 5천여명으로중앙아시아에서최다고려인공동체를형성하고있다고알려지고있지만실제로는 15만여명으로추산되고있다. 사실소련해체를전후하여비교적농업생산환경이우수한우즈베키스탄에고려인들의유입이한때증가하였으나강력한우즈베크민족주의와장기적인경제침체로인해서상당수의고려인들의생계형노동이주가급증하였기때문으로보인다.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노동이주는크게시기에따라두가지방향으로전개되어왔다. 29) 첫째, 소련해체를전후하여상당수의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이생활고를극복하고사업자금을확보하기위해우크라이나또는러시아등지로고본질을통하여이주노동을시도하였다. 그러나체제변혁과정에서의대두되는위험성과수확과판매등의유동성으로인해소기의목적을달성하지못하고귀환하지못하는경우가발생하면서고본질은고려인사회에가족의해체와무국적자문제를양산하게되었다. 둘째, 1990년대말부터세계적고유가로인해고도의경제성장을달성한러시아와카자흐스탄에서일자리가확대되고임금이상승하면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노동이주가대거발생하게되었다. 특히우즈베키스탄의강력한언어정책에따라사회적진출에서차별을느낀상당수의고학력고려인들이 28) 소련시기인 1989 년의인구조사에의하면우즈베크고려인 183,100 명중우즈베크어를모국어로하는고려인은고작 486 명으로전체의 0.25% 에불과하였다. 29) 우즈베키스탄고려문화협회신블라디미르회장과의인터뷰 (2010 년 07 월 21 일 )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63 러시아어가통용되고임금이월등히높은러시아나카자흐스탄으로이주하면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의인적자원유출이심각한문제로제기되고있다. 또한상당수가러시아어만을구사하는고려인들이우즈베크어습득문제로미래에대한불안과자녀교육문제로상당수가러시아나우크라이나로이주한것으로판단된다. 한편우즈베키스탄의체제전환과자본주의도입으로공직, 학교, 병원등에근무하던상당수의고려인들이저임금으로인한생활여건의악화로상대적으로높은수익을보장하는직종으로이직하면서전문직종사자가급격히감소하게되었다. 특히사회의전영역에서패권을차지하려는우즈베크우선주의에따라공직과직장에서고려인들의자리가대부분우즈베크인들에의해대체되고있다. 따라서우즈베크어구사능력으로공직사회에진출이제한되고특히승진에서배제되면서상당수의고학력고려인들이실업상태에직면하면서생활고를타개하기위해택시영업을비롯한단순노동이나서비스업에종사하게되었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직업선택이극히제한되고상대적으로언어적불이익이덜하며교육수준과관계없는사업이나서비스업으로진출하면서고려인을상징하였던교육수준은급속히하락하여왔다. 특히우즈베크인중심으로재편되는우즈베키스탄에서소수민족으로서차세대고려인들의심각한학력저하는장기적으로사회적진출에부정적영향을미치면서고려인들의위상하락을초래한다는점에서심각한문제로지적되고있다. 우즈베키스탄차세대고려인들이고등교육을이수하고우즈베크어를학습하여장기적으로공직사회진출을대비하기보다는영어나한국어를단기적으로습득하여외국기업에취직하여고소득을올리기를기대한다. 고려인들의상당수가우즈베크민족의국가로우즈베키스탄에서우즈베크의공용화는긍정적으로생각하지만실제로우즈베크어를아주소극적으로배우거나배울노력을거의하지않는데이는우즈베크어습득이현지의정책으로수용하지만고소득의직업을얻을수있는기회와직접적으로연관이없기때문에굳이학습의필요성을느끼지못하고있다는데문제가있는것이다. 특히한국기업의진출로모국어학습이경제적고소득과직접연계되면서우즈베크어보다는한국어학습에열중하게되었다. 그러나우즈베크민족의학생들도한국어를학습하기시작하면서우즈베크어지식을갖춘한국어구사자로서우즈베크학생을한국기업이선호하게되면서고려인들의입지는더욱위축될수밖에없었던것이다. 2. 독립이후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의변화와발전 1) 고려인운동과고려인엘리트 소련해체를전후하여중앙아시아국가들의독립이가시화되면서소비에트고려인이라 는공통의동질성과민족적연대감이급속히붕괴되기시작하였다. 그결과통합적소비 에트고려인사회는개별국가중심의우즈베키스탄고려인또는카자흐스탄고려인으로

64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분열될수밖에없었다. 따라서페레스트로이카이후소비에트정부가소수민족들의민족문화단체의설립을허용하자민족문화의부활및권리회복을위한소위고려인운동도개별국가를중심으로전개되었던것이다. 특히고려인운동은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문화단체의창립으로구체화되면서새로운고려인지도자들의등장을촉발시켰다. 실제로페레스트로이카이후소련에서민족적각성을기초로한고려인운동이최초로출현한지역은고려인최대거주국가인우즈베키스탄이었다. 그러나우즈베키스탄의고려인조직은시작부터대표직을둘러싼고려인지도자들간의갈등과반목으로심각한내분에직면하였다. 일찍이 1988년서울올림픽을전후로우즈베키스탄에서는고려인지식인들이민족문화단체의설립을목표로활발히움직이기시작하였다. 1988년 12월타슈켄트에서 100여명에이르는고려인엘리트들이 고려문화협회조직위원회 를결성하고타슈켄트문화대학총장을역임한한세르게이미하일로비치 (Хан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를위원장으로추대하였다. 그러나박보리스 (Пак Борис) 시인이우즈베키스탄고려인국제문화교육센터를중심으로세력을결집하고고려문화협회조직위원회와대립하면서고려인단체지도자들간의갈등이심화되기시작하였다. 30) 더욱이박보리스가우즈베키스탄공산당에한세르게이위원장을횡령혐의로고발하면서우즈베키스탄정부와고려인사회에상당한파문을야기하면서분란이확대되었다. 우즈베키스탄공산당중앙위원회는고려인단체창설과정에서대표직을둘러싼내분이확산되자한세르게이미하일로비치와박보리스를배제하고제3의인물을모색하게되었다. 결국이렇게하여 1991년 11월에타슈켄트고려인협회회장이자정치학교수였던한세르게이알렉산드로비치 (Хан Сергей Алексан дрович) 를초대회장으로하는 우즈베키스탄고려문화협회 가창립될수있었다. 따라서페레스트로이카이후최초로우즈베키스탄에서시작된고려인협회창립의가시적성과인고려문화협회는심각한내적갈등으로인한상처속에러시아나카자흐스탄보다늦게공식적으로출범할수있었던것이다. 특히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문화협회대표직을둘러싸고발생한우즈베키스탄고려인지도자들의심각한분열양상은 1937년강제이주이주최초의민족조직결성이라는역사적의미마저퇴색시키기에충분하였다. 더욱이초대회장으로선출된한세르게이알렉산드로비치도민족문화의부활을통한고려인의민족적단합에주력하기보다는개인적사업에몰두하면서고려문화협회의활동은침체될수밖에없었다. 결국한세르게이알렉산드로비치는한국과미국동포들의지원금을횡령한혐의로공산당의문책을받고사임하게되었다. 다시한번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지도자들의위상과대중적신뢰가추락하고고려문화협회대표직의권위가몰락하는순간이었다. 마침내우즈베키스탄공산당중앙위원회중간간부로서고려문화협회창립에실권을행사하였으며고려문화협회부회장으로활동하던역사학박사김표트르 (Ким Петр) 가회장으로추대되면서고려인사회의갈등을봉합해나가기시작하였다. 30) 이에대해서는김문옥 (1999),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현황과과제, 정신문화연구, 제 22 권, 제 1 호, pp. 170-173.; 한세르게이미하일로비치외, 김태항역 (1999), pp. 342-381 참조.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65 한편소련해체를전후하여고려문화협회를비롯해우즈베키스탄에설립된다양한고려인단체들간의적대적반목도고려인사회의단합을저해하고갈등을조장하는주요요인으로지적되어왔다. 실제로 1990년대이후우즈베키스탄에는고려문화협회와재생회 (Возрождение), 그리고친북성향의조국통일촉진위원회 (АСОК) 와범민련 (Бомминрен), 타슈켄트고려인사회연합회등의고려인단체들이활동해왔다. 31) 그중에서우즈베키스탄공산당의지도하에발족된고려문화협회는 1991년총리실산하소수민족문화부흥지원센터에고려인을대표하는단체로공식등록되었다. 고려문화협회는 1997년 9월에창간한 < 고려신문 >, 고려인과학기술협회인협회인진보, 1985년에창단한고려가무단을비롯하여노인협회, 화가협회등의산하기관과더불어우즈베키스탄전역에협회로통합된 30여지부를지닌고려인문화중앙을거느린전국적조직으로성장하여왔다. 한편재생회는타슈켄트시의인가단체로소련시기부터고려인노인들을후원하며관혼상제를공동으로주관하면서한민족의상부상조전통을기반으로고려인들의이권보호에적극적으로관여하였던자생적단체로알려져왔다. 1989년북한의전폭적인지원으로설립된조선통일촉진위원회 (АСОК) 는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에북한체제를선전하는정치단체였기때문에우즈베키스탄정부로의인가를받지못하였다. 우즈베키스탄독립초기조국통일촉진위원회는고려인사회에서처음으로 < 통일 > 이라는월간지를발행하고호텔과식당을운영하기도하였다. 그러나 1990년대후반북한의경제적침체와국제무대에서의고립으로조직의위상이하락하면서국제고려인통일연합이란조직으로변모하였으나그활동은미미한것으로알려지고있다. 32) 한편 타슈켄트고려인사회연합회 ( 회장 : 안조야 ) 는고려문화협회의활동노선에이의를제기한일단의고려인들이이탈하여 2002년 7월에조직한단체로서우즈베키스탄법무부에타슈켄트주사회단체로등록되어있으며산하단체로민족극장아리랑이활동하고있다. 우즈베키스탄의독립이후고려인사회에서고려인민족문화단체의설립과주도권을둘러싸고특징적으로나타나는분열적양상은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의형성배경에서그원인을찾아볼수있다. 우즈베키스탄의고려인들은소련체제의수립이전에유입된농민의후예로부터 1950년대에북한에서이동한유학생과노동자및 1990년대사할린에서이주한고려인에이르기까지그계층과출신배경이매우다양하였기때문이었다. 그중에서도 1937년스탈린의강제이주에의해희생되어극동지역에서우즈베키스탄에도착한사람과그후손들이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의주류를형성하여왔다. 또한소련시기급속한도시화에따른분산적거주로인한민족적유대감의상실과더불어고려인특유의사회적성취욕구도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의통합에부정적요소로작용한것으로보인다. 한편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모국인한반도의분단과남북한대립도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통합을저해하고민족문화단체들의적대적반목을야기하고있는요인이다. 특히한국과의접촉이빈번해지고고려인에대한지원이확대되면서우 31) 주우즈베키스탄한국대사관자료 32) Ким Брутт(1999), p.21.

66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즈베키스탄의고려인민족문화단체들이서로갈등관계에있는단체와대표를친북인사로매도하고고려인들의당면문제를해결하기보다는한국정부와기관에대한영향력을확대하는데집중하여왔다. 궁극적으로우즈베키스탄고려문화협회의창설과정에서고려인지도자들의갈등과고려인단체들간의반목은소련시기고려인사회의모범적이미지를실추시키면서고려인의민족적단합과문화적부활을추구한고려인운동의순수성을훼손하고말았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대부분이고려인단체들의내부적권력다툼이나외부적반목에대해염증을느끼고거리를두기시작하면서극소수에의한고려인단체들의활동은당연히위축될수밖에없었던것이다. 그러나 2000년대에들어우즈베키스탄고려문화협회의지도부가대거교체되면서변화의바람이일기시작하였다. 1990년대우즈베키스탄의대표적인고려인단체인고려문화협회의회장단은결국모두학자-교수출신의한세르게이알렉산드로비치와김표트르가차지하게되었고부회장도타슈켄트시당산하마르크스-레닌주의대학교지부책임자였던서가이미하일 (Шегай Михаил) 철학박사로마찬가지였다. 당시고려문화협회회장단의특성은철학, 역사, 정치학등공산당의이념교육을담당하던교수들이었으며실제로고려인들의대표라기보다우즈베키스탄정부가선호하는인사에가까웠다. 따라서고려문화협회회장단의대부분은보수적입장을견지하면서독립이후급속한정치경제적변화에대해신속히대응하지못하였으며따라서협회사업의자립적인재정적토대도구축할수가없었다. 결국 2001년에김표트르회장이사망하면서우즈베키스탄고려문화협회는새로운세대이자직업군출신의신블라디미르 (Шин Владимир) 를회장으로선출하면서변화를꾀하기시작하였다. 이런변화는카자흐스탄의고려인협회가 1995년부터경영마인드를갖춘상공인들로회장단을조직하여고려인들의경제활동을적극지원하고특히지방행정기관에고려인을진출시키면서자체역량을강화하고고려인의사회경제적위상을제고시켜나가고있었던상황과무관하지않았다. 33) 신블라디미르회장은소련군중령출신으로우즈베키스탄의권투영웅으로세계챔피언을차지한적도있고국가대표권투감독으로활동하며상당한사회적영향력을지닌스포츠계인사였다. 34) 신블라디미르회장을중심으로새로운회장단은고려인네트워크를적극활용하여한국과의관계를강화하고재정적기반을구축해나가면서고려인의단합과연대를바탕으로우즈베키스탄사회에서고려인의지위신장에주력해오고있다. 한편우즈베키스탄고려문화협회산하의일부지회장들도세대교체를통하여재정적기반을갖춘상공인이나전문직종사자들이선출되기시작하였고이를바탕으로해당지방의회로진출을시도하면서독립이후고려인사회의지위회복에기여하고있다. 특히 33) 대표적으로현재카자흐스탄상원의원인채유리를들수있다. 채유리의원은오랫동안사업가로서카자흐스탄고려인협회회장으로활동한바있다. 34)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9), Краткие Очерки о Выдающихся Корейцах Узбекистана(вторая книга), Таш кент: Истиклол, pp. 17-23.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67 나망간주고려문화협회의회장인니라리사 (Ни Лариса) 는여성사업가로서주의회의원후보이며반발레틴 (Пан Валентин) 은타슈켄트주베카바드 (Бекабад) 시고려문화협회회장이자지역신문의편집장으로활동하고있다. 또한안디잔주고려문화협회김뱌체슬라브 (Ким Вячеслав) 회장, 페르가나주고려문화협회허가이폴리나 (Хегай Пол ина) 회장, 부하라주고려문화협회전비탈리 (Чжен Витали) 회장은지역사업가로알려져있다. 특히타슈켄트고려인사회연합회를이끌고있는안조야 (Ан Зоя) 는타슈켄트가정종합병원을운영하는전문직여성으로타슈켄트주의회의원이자우즈베키스탄상원의원후보로활동하고있는대표적고려인이다. 35) 사실우즈베크인이절대다수를차지하고있는우즈베키스탄에서는다민족국가인카자흐스탄과달리민족문화협회가주류사회로진입할수있는소위 신분상승엘리베이터 로기능하지못하고있다. 그러나고려문화협회의회장단은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의대표자이자한국정부와고려인사회를연결하는통로로서신분상승을위한유리한지위를확보하고있는것은분명해보인다. 우즈베키스탄정부가한국과의밀접한경제협력을추진하는과정에서고려인사회에대한배려로고려인단체대표자들의주류사회진입을용인할가능성이잔존해있기때문이다. 더욱이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이밀집되어거주하고있는타슈켄트지역에서고려인단체의대표자들과전문직종사자들은시및주를비롯한지역의회로의진출에도상대적으로유리한입장에있는것으로보인다. 그러나고려인단체들을기반으로사회적성취를달성하기위해서는우선다양한고려인단체들의발전적통합을통해고려인사회에만연해있는갈등을봉합하고대중적신뢰를회복하면서고려인들의역량을결집하는작업이선행되어야할것이다. 특히고려인단체의지도자들이우즈베키스탄의주류사회로진입하기위한선결과제는우즈베크어습득으로우즈베키스탄국가가요구하는지도자로서면모를갖추는것이필요하다. 우즈베크어의습득문제는우즈베키스탄에서고려인사회의미래와엘리트들의주류사회로의진입을결정하는가장핵심적문제로부상하고있기때문이다. 2) 고려인중소기업인의활동 소련해체이후계획경제체제의붕괴에따라우즈베키스탄에서의혼돈과생활고는어느민족에게나있었던공통적상황이었지만특히고려인의경제적몰락은매우심각하였다. 우즈베키스탄에서우즈베크민족주의의부상으로국가권력에서완전히배제된소수민족인고려인에게불리한사회경제적여건이조성되었기때문이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 1937년의강제이주와같은고통속에서체제전환에따른새로운경제적토대를구축해나가야만했던것이다. 특히기업과공장이폐쇄되어일자리를상실한일부고려인들은생존을위협받는심각한상황에까지직면하게되었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자구책으로노점상에서부터시장구석의점포에이르기까지소규모의상 35) 우즈베키스탄고려신문김브루트편집장과의인터뷰 ((2010 년 07 월 20 일 ).

68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업활동에대거진출하며생계를유지할수밖에없었다. 36) 고려인들은외국과의소규모무역을통해당시우즈베키스탄에서절대적부족상태를 겪고있던소비재를공급하며상당한소득을올리기도하였다. 따라서소규모무역을통 하여어느정도자금을확보한고려인들은시장에서점포를얻어식료품또는의류등의판매를통해상대적으로안정적인생활기반을확보하기시작하였다. 즉우즈베키스탄독립이후새로이출현한상업활동의한형태인소규모무역을기반으로대부분의고려인들은체제전환기의어려움을극복하며삶을지탱해나갈수있었던것이다. 특히소규모무역을통해비즈니스에대한안목을기른일부고려인들은단기간에상당한자금을확보하면서타슈켄트시내에카페와레스토랑을운영하며사업규모를확대해나갔다. 소련시기의고본질과독립직후의소규모무역의경험을통하여사업가적기질을유감없이발휘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이제자본주의적경영방식에적응하기시작하였다. 특히우즈베키스탄에한국의자본유입과기업진출이본격화되자고려인들이대거파트너로참여하게되었고타민족에비해비교적빨리비즈니스분야에진출하게되었다. 사실소련해체이후한국은풍부한천연자원과양질의노동인력을보유하고있는우즈베키스탄의성장잠재력을높이평가하고경제적진출을본격적으로추진하면서한민족공동체의일원으로고려인들과의유대강화를적극모색하기시작하였다. 따라서당시주식회사대우나갑을방적과같은대기업뿐만아니라소규모사업가들이우즈베키스탄에대거진출하여침체되어있던고려인사회의부흥에단초를제공하였던것이다. 특히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한국기업의파트너로서혹은고용주로서자연스럽게자본주의사업방식을습득하면서독자적인기업활동으로전환할수있게되었다. 대표적으로 1980년대 레닌의길 콜호즈부회장을역임하였던황티모페이 (Хван Тимофей) 가타슈켄트에 대동강 이라는우즈베크-한국합작회사를설립하기도하였다. 37) 그러나우즈베키스탄정부가궁극적으로안정적인사회주의적시장경제를지향하기위해단계적인개방을추진하고경제체제가폐쇄적구조로변질되어나가면서독립이후고려인들이의욕적으로추진하였던다양한분야의사업들은난관에봉착하게되었다. 우즈베키스탄경제의고질적인숨화의불태환성과이중환율이사실상한국을비롯한외국투자를가로막는장애로작용하면서그영향이경제활동의전반적침체를야기했기때문이다. 38) 우즈베키스탄정부는원유및가스등의에너지를비롯한자원의개발을통한급속한경제발전보다는 2차산업중심의경제개발을추진하고있으나다양한규제로인해그성장이상당히지연되고있다. 즉천연가스, 면화등우즈베키스탄의주요원자재들을직접 36) 권희영 (2008), 소련붕괴이후한인사회의재편, 러시아중앙아시아한인의역사 ( 상 ), 재외동포사총서 07, pp. 384-385. 37) Ким Брутт(1999), p. 113. 38) 이문제는사실상우즈베키스탄에대한외국기업들의투자와사업확장에큰걸림돌이되고있다. 우즈베키스탄에서벌어들인숨화를달러화로바꾸어본국으로송금하는제도가제한되어있기때문이다. 2010 년 8 월당시숨화의공식환율은 1 달러달 1,620 숨정도였으나보통거래될수있는비공식환율은 1 달러당 2,200 숨으로서이중적환율구조가형성되어있었다.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69 수출하기보다가공하여부가가치를높인상품의생산과수출정책을추구하고있는것이다. 그리고우즈베키스탄정부는소위경제적주권확보를위해수입대체산업의육성에전력하면서석유화학, 자동차, 건자재, 정보기술및전자, 섬유및농산물가공분야의발전을적극독려하고있다. 더욱이 2008년우즈베키스탄은첨단산업육성과물류기지구축을위한나보이경제산업특구조성을의욕적으로추진하고있으며한국정부와기업들이우즈베키스탄과의중장기적인협력을바탕으로적극적으로참여하고있다. 그러나우즈베키스탄에서자원개발및건설분야등의대규모사업은소수의우즈베크권력층에의해독점되고있기때문에고려인을비롯한소수민족들의접근이거의봉쇄되어있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은제조업육성이라는정부정책에부응하면서상대적으로국가권력의통제에서자유로운 2-3차산업특히서비스업종의틈새시장을공략하여왔던것이다. 39) 상당수의고려인들이 1990년대공직을비롯한전문직을그만두고우즈베키스탄전역에서중소규모의다양한기업을설립하고비즈니스를시작하면서우즈베키스탄의고려인사업가로성장하여왔는데대표적인사례를들면다음과같다. 즉독립이후우즈베키스탄의경제분야에종사했던대표적고려인엘리트는우즈베크중앙은행부행장을역임한박안드레이 (Пак Андрей) 와아사카 (Асака) 은행의제1부행장으로활동하였던김아르카디 (Ким Аркадий) 로파악된다. 40) 또한 < 우즈트란즈가스 (Узтрансгаз)> 의회장을역임하고 < 우즈가스프롬 (Узбекгазпром)> 의부회장으로활동한테블라디미르 (Те Владими р), 대통령산하경제개혁및외국투자자문위원으로타슈켄트시에서 < 테크네지스-인포 (Технезис-инфо)> 회사의대표였던박비탈리 (Пак Виталий), 우즈베키스탄상원의원후보이면서 <Inter Milk> 회사의부사장이었던김로만 (Ким Роман) 등도우즈베키스탄고려인의대표적기업인이다. 또한사업과지방의회활동을겸임하고있는고려인들로는우즈베크-미국합작회사인 Building Technology의대표이사이자타슈켄트시의원인김세르게이 (Ким Сергей), 황만금농업회사대표로타슈켄트주의원에선출된황스타니슬라브 (Хван Станислав), 기차수리회사를운영하면서카르쉬시의시의원으로활동하고있는최보리스 (Цой Борис) 등이있다. 컴퓨터사업을하는 누론 기업의김아나톨리 (Ким Анатолий) 회장, 프로체스 (PA) 가구공장을운영하는김게오르기 (Ким Георги й), 카라칼파크스탄건축회사사장으로재직하고있는리발렌틴 (Ли Валентин), 리바우칼라르 무역회사회장인리올렉 (Ли Олег), 자동차시장과도매업에주력하고있는 카라반보조리 의림드미트리 (Лим Дмитрий) 대표, 옵티카 레스토랑체인사업설립자인양발레리 (Лян Валерий), 테겐 소시지가공공장과 테겐 상점체인사업을운영하는텐겐나디 (Тен Геннадий), 타슈켄트의대형레스토랑 청송 사장인유가이베라 (Югай Вера) 등도고려인들을대표하는사업가들로알려져있다. 또한 사마르칸드 39) 성동기 (2009), 한국의중앙아시아진출확대와고려인의역할 : 카자흐스탄과우즈베키스탄을중심으로, 중앙아시아 : 정치, 사회, 역사, 문화 전략지역심층연구논문집 I, pp. 238-241. 40)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9), pp. 50-55.

70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게올테흐서비스 회사대표김비탈리 (Ким Виталий), 페르가나시의 «콤베르톤» 회사부회장김레오니드 (Ким Леонид), 우르겐치지역의 호레즘샤카르 회사부사장텐그리고리 (Тен Григорий), 카쉬카다린스크지역대형농업업체대표최로만 (Цой Рома н), 지작시의 멜리오라토르 회사사장윤아나톨리 (Юн Анатолий) 등과같이다수의고려인들이우즈베키스탄전역에서중소규모의사업활동에적극참여하고있다. 41) 사실우즈베키스탄의민족정책에따른언어적제약을극복하고자본주의체제에적응하는생존양식으로상당수의고려인들은공직사회또는전문직으로의진출보다는비즈니스를통한부의축척에집중하였던것으로보인다. 특히우즈베크민족중심의권위주의적정치체제하에서대형사업의우즈베크민족독점과소수민족으로서고려인들의사업이정치권력에의한억압의대상이될수있다는점에서사실상고려인사업가들은틈새시장을중심으로중소규모의사업에머물러있을가능성이다분한것으로보인다. 3) 전문직고려인엘리트의부상 우즈베키스탄독립이후 1990년대중반까지만해도고려인들은정관계에서고위직을유지하며중앙및지방행정기관으로광범위하게진출해있었다. 그배경은사실상소비에트체제를계승한카리모프대통령을비롯한권력층이급격한정치구조의변화를원하지않았고우즈베크인들의교육수준이상대적으로낮고전문가집단이풍부하지않았기때문이었던것으로판단된다. 특히 1990년에지역산업부장관을역임한전빅토르가독립직후에는우즈베키스탄공화국부총리겸국유재산관리및사유화국가위원회위원장에임명되면서 1939년강제이주이후고려인사회에서가장높은직위에오른관료로기록되었다. 그리고우즈베키스탄제12기소비에트최고회의의원으로가금육제조기업의회장이었던정일리야 (Тен Илиья) 가선출되었다. 42) 더불어우즈베키스탄의자치공화국인카라칼팍스탄에서도노동부제1차관에리림마 (Ли Римма) 와교육부차관으로박알렉산드르 (Пак Александр) 가임명되었다. 또한우즈베키스탄지방행정기관에는박콘스탄틴 (Пак Константин) 페르가나부주지사, 함발레리 (Хам Валерий) 시르다린스크부주지사, 오가이콘스탄틴 (Огай Константин) 얀기에르부시장, 유가이바딤 (Югай Вадим) 알라륵부시장등이신생공화국의국가관료로서등장하였다. 우즈베키스탄의독립초기우즈베크민족주의의점진적대두에도불구하고고려인엘리트가비교적활발했던공직사회진출은일정부분우즈베키스탄정부의전략적배려에서비롯된것으로보인다. 독립직후심각한경제적위기에직면하고있던우즈베키스탄에다른국가들에앞서한국이자동차에서부터전자, 통신, 면방에이르기까지다양한기간산업에과감하게투자하였기때문이었다. 우즈베키스탄도경제개혁초기부터한국형경제성장모델에의해경제발전을추구할정도로한국의진출에우호적인입장을취하였 41) 우즈베키스탄고려신문김브루트편집장과의인터뷰 ((2010 년 07 월 20 일 ). 42) Ким Брутт(1999), p. 100.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71 던것이다. 우즈베키스탄정부의정책적배려는 1995년최대투자국의하나인한국에소련시기체육행정가로활약했던고려인편비탈리를주한대사로파견한데서도확인할수있다. 한국어를능숙하게구사하는편비탈리대사는 1988 서울올림픽과 1989년세계한민족체전당시소련선수단의부단장과단장의자격으로한국을방문한인연을가지고있었다. 편비탈리대사는 1995년부터한국에서우즈베키스탄을대표하며외교업무에종사하기시작하였고결국 1999년특명전권대사로공식부임하게되었다. 43) 편비탈리대사는최초의한민족해외동포출신대사로서한국과우즈베키스탄의전략적협력관계를무난히유지하면서이례적으로 10여년이상대사로근무하고있다. 44) 그러나 1990년대중반이후부터는우즈베키스탄에서철저한지역파벌중심의권력배분으로우즈베크인들이정관계에대거등용되면서고려인엘리트들은점차로배제되기시작하였다. 특히우즈베크민족우선주의가노골적으로대두되고우즈베크어구사능력이강제되면서고려인엘리트들의정관계진출은극도로위축될수밖에없었다. 더욱이소수민족의독자적인정치세력화를엄격히금지하고있는우즈베키스탄의권위주의체제하에서고려인들의독자적정치활동은민족적박해에직면할위험을안고있었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권력기관에진입이극도로봉쇄된상황에서특수한전문분야에서개인적능력을갖추거나우즈베크어를구사할수있는극소수의고려인들만이낮은처우에도불구하고중하위공무원으로지위를유지하여왔던것이다. 한편우즈베키스탄정부는단기간에걸쳐국가기구의전면적인우즈베크화를성공적으로완수하고상징적배려차원에서소수민족들이의회로진입할수있는여지를마련하게되었다. 2004년우즈베키스탄의회가단원제에서상원과하원의양원제로전환되면서대통령이 16명의상원의원을임명하도록규정하였던것이다. 즉우즈베키스탄최고의사결정기구로서상원은 12개주, 카라칼파크공화국, 타슈켄트시둥의지방의회에서선출된 84명과각계각층의전문가들중에서대통령이임명하는 16명으로구성되었다. 2010년부터 120명에서 150명으로의석수가증가한하원역시 135명은지역구에서직선으로선출하고환경분야의과학자및전문가를 14개의행정단위에서 1명씩선발하고대통령이 1명을지명하게되어있다. 따라서우즈베키스탄인구의 80% 를차지하는우즈베크인들이자연스럽게다수의석을확보하는상원에서대통령이임명하는전문가 16명중일부는소위민족할당제란혜택으로소수민족들에게부여될가능성이다분하였다. 45) 따라서우즈베키스탄대통령은한국과의관계를고려하고고려인에대한배려차원에서전문분야에서탁월한업적을보인박베라여성을상원의원으로임명하였다. 중앙아시아강제이주직후인 1938년카라칼파크자치공화국에서출생한박베라의원은누쿠스사범대학을졸업하고히바에서 45여년동안교사로근무하였다. 특히 1985년 43)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9), pp. 12-16. 44) 그결과편비탈리대사는현재주한외국대사사절중최고선임자역할을하고있다. 이러한장기근무배경에는아무래도대통령이슬람카리모프와의친분이크게작용하고있는것으로보인다. 45) 성동기 (2009), p. 234.

72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부터호레즘주의제20번고아원을운영하며최고의보육시설로만든공로를인정받아 2001년우즈베키스탄최고훈장인 영웅훈장 을받았으며결국대통령의지명에의해상원의원으로진출하게되었던것이다. 46) 2010년 1월에박베라의원의임기가만료되면서우즈베키스탄카리모프대통령은장발레리 (Тян Валерий) 우즈베키스탄국영항공사사장을상원의원으로지명하였다. 장발레리의원은 1946년타슈켄트에서태어나 1975년당시레닌그라드항공학교를졸업하고항공기조종사로활약하였으며 1992년부터항공행정분야에서탁월한능력을발휘하여항공청장과우즈베키스탄국영항공사의수장에오른입지전적고려인이다. 장발레리사장의상원의원지명은한국과의경제협력에대한우즈베키스탄정부의강한의지가내포되어있는것으로보인다. 특히우즈베키스탄의야심찬 나보이산업경제특구 (FIEZ) 사업에한국기업의적극적인참여에대한감사의뜻이반영된것으로보인다. 실제로장발레리의원은우즈베키스탄국영항공사사장으로재직하면서 2009년한국의대한항공과나보이국제공항공동개발프로젝트협약을이끌어내는데결정적인역할을한것으로알려져있다. 47) 사실상 1990년대중반이후우즈베크민족주의로상당히위축되었던고려인사회가최근들어두번이나연달아상원의원을배출하면서우수한소수민족으로서사회적위상이전반적으로회복되는계기가되고있는것으로보인다. 한편우즈베키스탄대통령의박베라의원과장발레리의원의지명은고려인들이우즈베키스탄의주류사회진입을위해서는전문직종사가중요하다는사실을다시금일깨워주는사례라할수있다. 편비탈리, 박베라, 장발레리 3인에관한이력은아래표와같다. < 표 4-5> 우즈베키스탄의대표적고려인엘리트 성명출생년도, 출생지주요학력주요경력 편비탈리 1947 년페르가나사범대학 88서울올림픽소련선수단부단장, 주한우즈베키스탄대사 (1999~ 현재 ) 박베라 1938년, 카라칼파크공화국 카라칼파크공화국누쿠스사범대학 교사 (45년) 고아원경영 ( 호레즘주 ) 상원의원 (2005-2010) 항공기조종사, 우즈베키 장발레리 1946 년, 타슈켄트 러시아레닌그라드항공대학교 스탄항공청장, 우즈베키스탄국영항공사사장, 상원의원 (2010~ 현재 ) 46) Ассоциация Корейских Культурных Центров Республики Узбекистан и Научно-техническое Общество Узбекистана <Тинбо>(2009), pp. 31-38. 47) 경향신문 2009 년 5 월 13 일자 < 대한항공 - 우즈벡항공국제물류센터건설 MOU> 기사참조.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73 V. 우즈베키스탄고려인엘리트에대한한국의지원방안 소련해체이후한국정부와기업들은다양한에너지및천연자원을보유하고신흥시장으로성장하는우즈베키스탄의전략적가치를높이평가하고다각적인협력과진출을모색해왔다. 그결과지난 2006년전략적동반자관계및각종자원개발과플랜트사업의진출등외교적성과와경제협력을확대해왔으며한류라는문화적조류도확산되어왔다. 그러나이런정치, 경제적성과에도불구하고한국진출의교두보로서우즈베키스탄에거주하고있는고려인에대한관심은상대적으로낮은편이었다. 사실상우즈베크민족주의의부상과극심한내분등으로고려인사회가극도로위축되면서한국의우즈베키스탄진출과정에서고려인의역할이점차로축소되었기때문이다. 특히소련해체이후한민족네트워크구축을위해정부와기업이의욕적으로추진한고려인사회에대한지원과활용도소기의목적을달성하지못하고침체가거듭되고있다. 그러나한국이우즈베키스탄과에너지자원외교를넘어미래의동반자로서협력을도모하기위해서는현지에서고려인들의사회적성장을위한한국의지원과그활용이절실한실정이다. 무엇보다도우즈베키스탄의고려인들이누구보다도현지사정에정통한전문가들로한국정부와기업의효율적인현지진출에기여할수있는소중한민족자산의육성이란실용적차원에서한국의지원이집중될필요가있다. 한국과경쟁관계에있는러시아, 터키등도우리의고려인에상응하는디아스포라집단과그대표자들을적극활용하면서정부와기업의진출문제를발전적으로해결하고있기때문이다. 따라서한국의우즈베키스탄진출이고려인들의위상에영향을미치고그고려인들의사회적성공이한국의우즈베키스탄진출에주요토대를제공하는동반상승적효과를창출할수있는구체적인지원과활용방안이모색되어야할시점인것이다. 특히우즈베키스탄과같이국가권력을대통령의친인척과특정파벌출신의우즈베크인들이독점하고있는폐쇄적구조에서고려인의주류사회진출을위한한국의지원방향이장기적으로모색되어야할것이다. 우즈베키스탄의정치권등주류사회로진입하여권력층과직접소통할수있는고려인의존재는궁극적으로한국의우즈베키스탄진출에핵심적조력자가될수있기때문이다. 우즈베키스탄고려인들에대한구체적인지원과활용방안을논의하기위해서는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가당면하고있는문제점에대한심층적이해가선행되어야한다. 본문에서지적한바와같이독립이후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는우즈베크민족주의의대두와경제적침체라는전환기적변화에소극적으로대처하면서전반적인사회적지위의하락을경험하였다. 특히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는내분에따른리더의부재속에서기성세대들이대부분공직과전문직에서배제되고생활고에직면하면서개별적으로노동이주를떠나거나소규모무역에종사하게되었다. 당시한국기업의진출은고려인들의고용창출로생활의안정에기여하고한국어학습과한류문화를확산시키면서고려인사회의위상제고에긍정적인역할을하였다. 그러나우즈베크민족중심사회에서

74 중앙아시아국가정체성과세계화 한국기업들도권력기관과밀접히연계된우즈베크인들을선호하게되면서여전히러시아어에의존하고있는고려인들의사회적진출은제한될수밖에없었다. 특히고려인차세대들이우즈베크어를필요로하는공직사회로진출을일찍이포기하고단기적돈벌이를위해상업과서비스업으로대거진출하면서심각한학력저하가발생하고있다. 이는다시금고려인차세대들의전문직으로의진출을저해하는걸림돌로작용하여고려인사회의위상하락을가속화시키고있다는데문제의심각성이있다. 따라서한국의우즈베키스탄고려인에대한지원은우선적으로중장기적인관점에서인적개발및교육역량강화에초점을맞춰차세대고려인엘리트양성에주력해야한다. 현재우즈베키스탄의국가발전에서필요로하는다양한분야의유능한인재를육성하여전문직진출을통해주류사회로진입할수있도록지원할필요가있다는것이다. 이를위해첫째, 우즈베키스탄차세대고려인들에게정부의국비초청장학사업과산업연수생사업의문호를대폭적으로개방하여선진학문과기술의습득을통해전문인력으로양성해야한다. 우즈베키스탄국가발전에필요한정보기술및산업기술, 건설, 금융, 경영, 행정등상대적으로한국이강점을가지고있는분야의지식과경험을집중적으로전수하여우수한경쟁력을지닐수있도록지원해야한다. 뿐만아니라우즈베키스탄차세대고려인들의한국방문과취업기회를확대하여시장경제체제에대한적응력을키워우즈베키스탄에서경제적성취를달성할수있도록그역량을배가시키는것도필요하다. 아울러우즈베키스탄에차세대고려인들의소질과전문능력을발휘하고주류사회에진입할수있는교육환경을조성하기위해한-우즈베키스탄대학교나전문기술훈련센터와같은교육기관의설립방안이모색될필요가있다. 즉현재까지의단기적이고물질적인지원에서벗어나차세대고려인들을우즈베키스탄사회의엘리트로키우는백년대계에한국정부가주목해야한다는것이다. 다만한국정부의고려인만을대상으로하는지원정책이민족차별적정책으로비쳐질수있기때문에우즈베키스탄발전에직접적으로기여하는형태로교육기관이구상되어야할것이다. 특히우즈베키스탄에교육기관의운영을통해한국에호의적인우즈베키스탄엘리트양성에주력하면서전문적소양을갖춘고려인차세대들에게우즈베크어의습득을장려하여장기적으로주류사회에진입할수있는인재양성에집중해야한다. 둘째, 현재우즈베키스탄고려인사회에서주도적인활동을펼치고있거나전문직에종사하고있는고려인들의정보를데이터베이스로구축하는작업이절실하다. 즉우즈베키스탄의각계각층에서활약하고있는고려인인적자원을발굴하고한국정부와기업이상시적으로네트워크킹할수있는환경을구축하고주류사회진출을후원하면서친한 ( 親韓 ) 엘리트로지속적으로관리해야한다. 사실소련해체이후지난 20여년동안의고려인연구는주로이주사, 전통문화의변화, 정체성분석등주로역사-문화적접근이대세를이루어오면서정작정부나기업에서활용할수있는실용적정보들의축적은도외시되어왔다. 물론기존연구들이독특한고려인사회를이해하는데상당히기여하였지만이제미래지향적인연구를통해한국진출의실제적인동반자로서고려인엘리트에대한구체적인인적자원시스템구축이필요한것이다.

중앙아시아고려인엘리트와지원방안 75 셋째, 우즈베키스탄을비롯한 CIS-중앙아시아고려인지도자들의정기적포럼을개최할필요가있다. 현재세계한인대회, 한인지도자대회등의행사가주로재미및재일동포위주로진행되면서 CIS-중앙아시아고려인지도자들에게차별의식을불러일으키는역효과를야기하고있다. 특히한국의에너지자원외교의중점국가에서방문한고려인지도자들이극단적으로소외되면서한국정부에대한불만을토로하며지속적회의참석에대해의문을제기하고있다. 이를해결하기위해한국정부는가칭 CIS-중앙아시아고려인포럼을별도로조직하여한국의 CIS 국가진출을실제로뒷받침할수있도록유대를강화해야한다. 따라서매년외교통상부주최로개최되는한-중앙아시아협력포럼과같은시기에전경련이나국회차원에서주최하는한-중앙아시아고려인포럼을서브네트워크를조직할필요가있다. 이를통해한국이 CIS-중앙아시아고려인들에게특별한관심을가지고있다는의사를한-중앙아시아포럼에참석한고위급인사와해당국가에보여주면서그위상을높여나가도록해야한다. 즉한국과해당국가를직접적으로연결하는매개체로서고려인지도자들의지위를각인시켜한국과의관계발전정도와활용정도에따라해당국가의주류사회진입이용인될수있도록기반을마련해야한다. 또한한-CIS 중앙아시아고려인포럼을통해한국정부는독립이후분열되었던 CIS 고려인사회의통합을주도할수있는부수적효과도거둘수있을것으로전망된다. 우즈베키스탄에고려인들이제대로뿌리내리고주류사회로진입할수있도록지원하는일은고려인사회뿐만아니라한국의발전에매우중요한과제이다. 특히차세대고려인엘리트의양성은새로이한국과고려인사회가협력해서집중적으로육성해야하는시대적과제이다. 한국의우즈베키스탄진출의성공여부가바로여기에달려있기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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