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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發 刊 辭 退溪學釜山硏究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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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차 <기획강좌> 례 동양사상과 이상사회 (우리가 꿈꾸는 세상) 性齋 許傳 散文 硏究 申承勳 3 東學의 水雲선생이 꿈꾸는 세상 鄭在權 20 退溪의 林居十五詠 孫五圭 31 南冥 曺植이 꿈꾸는 朝鮮社會 韓相奎 37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이상사회론 朴文鉉 48 동아시아의 이상세계관 張在辰 62 欲의 現實과 仁의 文藝運動 趙柄悟 78 實學派의 이상사회론 成昊俊 88 동양고전에서 古 와 今 의 문제 金喆凡 95 東洋思想과 우리의 삶 琴鏞斗 98 동아시아의 이상향(理想鄕) 이야기 張源哲 112 漢代 儒家가 꿈꾸었던 理想社會 金奉建 123 폭력 없는 학교를 위한 인성교육의 방향 金秉權 131 茶山 丁若鏞 선생의 삶을 고찰 李泰鍾 142 風俗의 社會的 機能 鄭尙圤 153 환경친화적인 삶 朴淸吉 160 학교 폭력사태의 원인 고찰과 그 치유책 李炳壽 168 中國의 이해 (과거와 현재) 李陽子 174 건강생활과 營養 卞在亨 183 자본주의 4.0시대 한국경제의 도전과 과제 李浩永 198 萬海의 愛國과 詩心 金泰詢 217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 洪普植 233 全循義(?~?)의 생애와 저술 李宗峰 241 李舜臣 將軍의 忠國爲民의 정신 崔海晋 254 임진왜란의 기억과 전승 金東哲 258 고려말 禑ㆍ昌王과 廢假立眞 兪英玉 278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현대 趙南旭 293 慶尙左水營에 대하여 李源鈞 308 <일반강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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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동양사상과 이상사회 (우리가 꿈꾸는 세상) 性齋 許傳 散文 硏究 東學의 水雲선생이 꿈꾸는 세상 退溪의 林居十五詠 南冥 曺植이 꿈꾸는 朝鮮社會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이상사회론 동아시아의 이상세계관 欲의 現實과 仁의 文藝運動 實學派의 이상사회론 동양고전에서 古 와 今 의 문제 東洋思想과 우리의 삶 동아시아의 이상향(理想鄕) 이야기 漢代 儒家가 꿈꾸었던 理想社會 폭력 없는 학교를 위한 인성 교육의 방향 - 1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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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性齋 許傳 散文 硏究 -記를 통해본 理想과 苦惱- 신 승 훈* I. 서론 性齋선생 許傳(1791:정조21년-1886:고종23년)은 조선후기에 큰 문호를 열어 후학들을 聖學의 길로 이끌었던 宗師이다. 분명한 그의 자취 때문에 학계의 연 구적 관심은 주로 학문적 업적에 집중되었다.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를 중심 으로 한 연구진이 그 동안 축적한 성과는 이를 잘 대변한다.1) 그런데 본고는 학문적 업적을 초점에 두지 않고 인간적 면모와 그의 내면세계에 집중해보려 한다. 이는 그간의 연구에 대한 비판적 시각 때문이 아니다. 성재에 관한 학문 적 연구는 지금처럼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하며, 그간의 성과는 성재학에 관해 서는 선하를 이루었다고 평가한다. 다만 성재의 인간적 면모와 그 내면세계에 대한 관심과 연구는 앞으로 진행 될 학문적 연구의 밑바탕이 될 것이고, 그것은 성재를 더 깊이 이해하는 방법의 하나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또 학문저술에 관련한 연구가 지속될수록 그의 학자 * 경성대 교수 1) 기왕의 연구성과를 일별함은 그 동안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에서 진행해온 성재 허전에 대한 연 구의 진정성과 지속성을 확인하는 의미가 있다. 따라서 그 연구성과를 정리해 본다. 金喆凡, 性齋 許傳의 生涯와 學問淵源, 문화전통논집 제5집(1997),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60쪽 ; 박준원, 性齋 許傳 文學 硏究, 문화전통논집 제5집(1997),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61~108쪽 ; 강대민, 性齋 許傳 門徒의 愛國運動, 문화전통논집 제5집(1997),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09~130쪽 ; 강대민, 性齋 許傳 門徒의 義兵運動, 문화전통논집 제6집 (1998),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19쪽 ; 김철범, 性齋 許傳의 制度改革論에 관하여, 문 화전통논집 제6집(1998),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1~33쪽 ; 鄭景柱, 性齋 許傳의 詩經講義 에 나타난 說詩 觀點, 문화전통논집 제6집(1998),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5~69쪽 ; 곽 정식, 性齋 許傳의 傳文學에 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7집(1999),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16쪽 ; 정경주, 宗堯錄 에 나타난 性齋 許傳의 經學 관점, 문화전통논집 제7집 (1999),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7~47쪽 ; 김강식, 性齋 許傳의 學風과 歷史的 位相, 문 화전통논집 제7집(1999),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49~63쪽 ; 鄭景柱, 許性齋 禮說의 收養 子 문제에 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8집(2000),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22쪽 ; 金康植, 性齋 許傳의 三政改革策과 성격, 문화전통논집 제8집(2000),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3~38쪽 ; 김철범, 許性齋 著述考略, 문화전통논집 제9집(2001),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 소, 1~19쪽 ; 김철범, 經筵講義를 통해 본 許傳의 政治思想, 문화전통논집 제10집(2003),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14쪽

10 적 면모가 뚜렷해지겠지만, 자칫 그 면모가 인간적 면모는 소거된 거룩한 초상 이 될 수도 있기에 본고가 인간적인 모습에 집중하는 것이 일정한 의미가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본고는 성재가 꿈꾸었던 理想과 그가 발을 붙이고 살 았던 당대의 현실 사이에서 발생하는 苦惱를 찾아보려고 한다. 본고가 주로 다루는 자료는 記이다. 문집과 저술 전반을 검토하여 이상과 고 뇌를 찾는 것이 더 완전한 결과를 도출하겠지만, 역량의 한계와 시간의 제약 등 은 차선을 선택하게 하였다. 그래서 記를 중심으로 논의하려 한다. 記란 문체는 다양한 내용을 담을 수 있는 비교적 자유로운 스타일이다. 원천적으로 문체적 속성이 備忘 을 목적으로 하기에 다양한 범주의 내용을 담을 수 있다. 건물의 조 성과 관련한 각종 造成記, 산수유람과 관련한 遊記, 유람의 풍류를 공감하며 臥遊의 감흥을 담은 山水記, 특정한 목적 때문에 그것을 기록하여 남기는 志事 로서의 錄記 등 다양하고 다채롭다. 또 다양하고 다채로운 내용을 담을 수 있기 에 제약이 적다. 따라서 자유로운 서술이 가능한 문체이다. 상대적으로 자유로 운 記의 서술 속에 성재의 이상과 고뇌가 잘 담겨있다고 본다. 이러한 이유로 본고는 우선 記를 검토했다. II. 性齋 許傳의 理想과 苦惱 1. 第一等人 과 삶의 현실 성재는 26세가 되던 1822년에 警省文 을 지어 이렇게 포부를 말하였다. 또 하물며 만물의 영장이라고 말하니 영장이 되는 所以의 실상을 하지 못한다 면 초목이나 곤충과 무엇이 다르겠는가? 이것이 진실로 제일등인 으로 스스로 기 약하지 않을 수 없는 이유이다. 堯舜孔顔도 인간에게는 또한 동류이다.2)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만물의 영장이라는 말의 실상에 부합해야겠다는 포부 와 이상이다. 그래서 요임금, 순임금, 공자, 안자 같은 제일등인 으로 스스로를 기약하겠다는 것이다. 젊은 날 성재가 꿈꾸었던 理想을 단적으로 드러내는 말이 다. 그리고 그가 생애를 모두 바쳐 이 이상을 실현하려고 했다는 것은 이미 주 지의 사실이다. 2) 許傳. 性齋集 권10. <警省文>.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且况旣云物 之0矣, 不能爲所以0之實, 則與草木昆蟲奚異哉! 是固不可不以第一等人自期也. 堯舜孔顔, 於人亦 類也

11 그런데 성재도 자신을 둘러싼 역사적 상황과 개인적 현실이 이 이상의 실현 을 쉽게 허락하지 않을 것임을 자각하고 있었다. 아! 이미 晩歲에 태어나 世衰道微하니 비록 仁義道德의 설을 듣고자 하나 누구 를 따라 그것을 구하겠는가? 다만 마땅히 문을 닫고 옛 성현의 글을 읽으며 本性 을 다해야할 따름이다. 가장 염려스러운 것은 어머니의 연세가 높고 가산이 궁핍 하여 궁함을 지키며 가난을 편히 여기면서 끝까지 이 초심을 지킬 수 없음이다. 이것을 두려워하고 이것을 경계하여 전전긍긍하노라.3) 성재가 살았던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은 儒者가 꿈꾸는 이상의 실현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내외의 정치적 상황과 서세동점의 압박, 성리학의 교조화와 민심의 이반 등을 성재 역시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 한 형편은 그가 학문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성재의 오랜 官歷은 家産을 책임져야하는 현실에서 그가 선택할 수 있었던 유일한 방법이 관직생활이었기에 생긴 것이다. 하지만 위에서 보듯 그의 본심은 성현과 같은 제일등인이 되는 것이었지 벼슬살이가 아니었다. 만약 당대가 兼善 天下할 수 있는 가능성이 있었던 시기라면 성재가 벼슬한 것 자체도 유자로서 당연히 선택할 수 있는 하나의 길이었겠으나, 당대는 그러한 가능성이 낮았고 성재 역시 그것을 알고 있었다. 고종조의 대원군집정기에 잠시 그 가능성을 점 치기도 하였으나 그것도 정치상황의 변화에 따라 여의치 않았었다. 여하튼 성재 는 이러한 상황과 현실 속에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진력하였고, 그 속에서 고 뇌하였다. 성재는 한 사람의 인간이었던 것이다. 2. 普遍的 人性에 대한 희망 성재는 긍정적 세계관을 가졌던 인물이다. 그 긍정의 근거는 늘 인간에 대한 희망이었다. 무릇 나라의 都邑과 宮室, 집안의 閭里와 屋宅이 그 크고 작음은 다르지만, 그 터를 열고 守成하는 所以는 같다. 터를 열고 지키는 도는 사람에게 달려있 을 뿐이다.4) 3) 4) 許傳. 性齋集 권10. <警省文>.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噫! 生已晩 矣, 世衰道微, 雖欲聞仁義道德之說, 孰從而求之? 惟當杜門讀古聖贒書, 以盡所性而已矣. 最所念者, 慈 母年高, 而家產空乏, 不能固竆安貧, 終保此初心. 是懼是戒, 戰戰慄慄. 許傳. 性齋集 권14. <揖淸亭重修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夫國 之都邑宮室, 家之閭里屋宅, 其大小殊, 其所以肇基守成均也. 肇之守之之道, 在乎人而已矣

12 인간에 대한 신뢰는 성재가 꿈꾸었던 理想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성재는 普遍 한 人性의 발현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그래서 자신의 호를 性齋로 삼으며, 보편 적 인성을 자신만의 호로 獨有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그 獨有가 싫어서 가장 보 편적인 것으로 이름 한다고 이유를 말한다. 가상으로 등장하는 객과의 문답을 본다. 주인이 자신이 머무는 室을 性齋라고 하였다. 객이 힐난한다. 호가 이름과 다 르니 호도 獨有한 바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반드시 자기만 獨有한 것을 취해 드러 내어 일컫고, 또 남들로 하여금 드러내어 일컫게 한다. 天命의 性은 무릇 사람이 라면 갖고 있는 것이다. 사람으로서 갖고 있다면 모든 사람들이 호를 삼아도 괜찮 을 것이데, 어찌하여 그대가 감히 獨有하는가? 나는 저 獨有라는 것이 싫다. 그래서 이것을 취하였을 뿐이다. 오늘날 천하의 근심거리에 독유보다 심한 것이 없다. 井田制가 폐지되고 阡陌이 이어지자 농부 는 혼자만 부자인 자에게 곤란을 겪고, 학교의 제도가 해이해지자 薦選의 제도가 뒤섞이니 선비는 혼자만 귀한 자들에게 곤란을 겪었으며, 專賣하는 상인이 이익 을 독점하자 상인은 물건을 내놓지 않고, 요망한 사람이 기교를 독점하자 장인은 통하지 못하며, 異端이 독점하자 儒道는 자취나 흔적이 아주 없어졌고, 소인이 독 점하자 군자는 막혔으며, 사사로움이 독점하자 공변됨은 사라지고, 이름이 독점하 자 실상이 망하였으며, 文이 독점하자 質이 어지러워졌으니, 심한 경우는 자식이 어버이를 버리고 혼자만 잘살고, 신하가 군주를 져버리고 혼자만 살아남는다. 작 거나 크거나 가볍거나 무거운 일들이 한결같이 독유를 꾸짖기에도 여력이 없는 것들이다. 독유의 근심은 이와 같은 것이다. 이 性이란 사람과 사람이 같고, 생명 과 생명이 갖추었으니, 내가 어질면 남도 어지니 남이 또한 나이고, 남이 의로우 면 나도 의로우니 나 또한 남이다. 예를 행하면 모두가 남이고, 지혜를 갖추면 모두가 내가 되니, 하필 독유한 뒤에야 나의 것이 되겠는가?5) 獨有란 偏在를 말한다. 그것이 무엇이든 편재는 문제를 야기한다. 여기서 성 재의 고민과 고뇌는 시작된다. 편재에 대한 혐오와 비판, 이것에 대한 냉철한 대결의식이 성재의 삶을 관통하며 그의 학문세계를 구축하였다고 본다. 그런데 性은 普遍이다. 누구나 갖고 있다. 그 보편성에 성재는 집중한다. 그래서 역설처 럼 들리지만 누구나 가진 것으로 자기의 호를 삼는다고 하였다. 이는 인간에 대 5) 許傳. 性齋集 권14. <性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主人號其所 居之室曰性齋. 客有難之曰: 號之與名殊, 號亦所獨也. 故人必取己所獨有者而表稱之, 亦使人表稱之. 天命之性, 夫人而有之, 夫人而有之則夫人而爲號可也. 何子之敢獨有也? 曰: 吾惡夫獨有者. 故是之取 爾. 今夫天下之患, 未有甚於獨有者, 井地廢而阡陌連則農困於獨, 學校弛而薦選雜則士困於獨貴, 榷 沽獨利而商不出器, 祅獨巧而工不通, 獨異端而儒道泯, 獨小人而君子沮, 獨私而滅公, 獨名而亡實, 獨文 而亂質, 甚者子遺親而獨, 臣倍君而獨. 小大輕重, 一不餘力而讓獨, 若是乎獨有之患也. 是性也, 人與人 同, 生與生俱, 我仁而人仁, 人亦我也, 人義而我義, 我亦人也. 5焉而均是人也, 智焉而均是我也, 何必 獨然後爲吾有哉! - 6 -

13 한 신뢰와 人性에 대한 희망적 전망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성재는 인간이라 면 누구나 하늘이 부여한 性을 구현시키며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낙관적 전망이다. 이 낙관이 신뢰와 희망의 근거였다. 이 낙관은 성재가 꿈꾸었던 삶에도 투영된다. 성재가 꿈꾸었던 삶은 儒者라면 너무도 당연하게 꿈꾸었던 이상이라서 오히려 평범하다. 대저 선비가 성인의 세상에 태어나 밝고 환하게 부합하여 이 군주를 요순같은 군주가 되게 하고 이 백성을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하여 몸은 부귀의 즐거움을 누 리고 이름은 우주의 사이에 드리워 光輝가 멀리 펴져 빛나게 드러남이 군자가 원 하여 하려는 바이다.6) 자신의 군주를 요순이 되게 하고, 백성을 요순의 백성이 되게 함은 유자의 꿈 이자 이상이다. 이는 孔孟 이후 모든 유자가 꿈꾸었던 이상이었다. 평범하고 일 반적이라서 오히려 공허하게 들리는 이 말을 성재는 신념화하였다. 그가 인간존 재에 보인 강렬한 신뢰와 낙관은 이 평범한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90년의 일생 을 학문의 길에 경주하게 하였다. 道在邇 란 말이 이 경우에도 적용되리라 생 각한다. 성재는 이토록 평범해보이고 당연한 것을 이루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다. 그래서 그는 특별하다. 그러나 성재가 현실을 외면하거나 도외시한 적은 없었다. 그도 이상과 현실의 괴리에 고뇌하였다. 특히 理想이 늘 현실의 장벽에 부딪히는 문제는 직시하였다. 무릇 孝悌는 지극한 행실이고 忠義는 큰 절개이며 學問은 넓은 사업이다. 이는 모두 性分의 본디 있는 바이며 職分의 마땅히 할 바이지만, 사람마다 모두 이 본 성을 따르고 이 직분을 다할 수는 없다.7) 지극히 당연한 도리지만 실제 현실에서 실현되는 경우보다는 그렇지 못한 경 우가 많다. 그것을 개인의 기질의 문제나 편차의 문제로 책임을 돌릴 수도 있으 나 성재는 교화의 문제로 인식하였다. 거기에 士로서의 사명이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정자를 짓는 일에서조차 선비가 마땅히 해야할 일이 있다고 했다. 매해 네 계절의 가운데 달에 이 정자에서 믿는 바를 익히며 친목을 닦고, 때가 돌아오면 이 정자에서 노닐며 휴식하고 외우고 읊으며 노래를 한다. 가까운 자로 6) 7) 許傳. 性齋集 권14. <晩晦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夫士生聖 人之世, 明良契合, 使是君爲堯舜之君, 使是民爲堯舜之民, 身享 貴之樂, 名垂宇宙之間, 光輝發越, 赫 赫顯顯, 君子之所願欲也. 許傳. 性齋集 권14. <道川祠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夫孝弟至 行也, 忠義大節也, 學問廣業也. 是皆性分之所固有, 職分之所當爲, 而有不能人人率此性盡此職

14 하여금 젖어들고 물들어 보고 느끼게 하며, 먼 자로 하여 소문을 듣고 흥기하게 한다. 이는 대학 에서 이른바 한 집안이 흥하면 한 나라가 흥한다는 것이며, 戴記 에서 이른바 풍속을 옮기고 바꾼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정자를 지음 이 어찌 심상한 臺榭와 樓觀이 騷人墨客이 왕래하며 음풍농월하는 도구가 될 뿐 인 것과 비교하여 같다고 할 수 있겠는가? 정자를 짓는 행위가 향촌의 세력가가 자신과 가문의 위세를 드러내기 위함이 거나, 풍광을 즐기며 음풍농월의 공간이 되는 데에 그쳐서는 안 되고, 강학의 공간이자 친목의 공간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는 선비가 세상에 나가 경륜 을 펴고 포부를 실천하지 못한다해도 자신의 향촌에서 주변을 교화하고 선도하 는 사명을 잊어서는 안 됨을 주지시키는 것이다. 성재는 선비의 언행이 곧 교화 의 수단이 됨을 잘 인식하고 있었다. 그래서 효열이나 충절의 인사에 대한 顯彰 에 있어서 그 인물의 삶이 갖는 가치를 반드시 교화의 관점에서 언급하였다. 낙동강 상류의 곡목리는 侍讀을 지낸 학사 趙景羲 군의 고향마을이다. 대저 나 무의 가지가 굽어서 아래로 드리운 것을 樛 라 한다. 國風의 <樛木>은 군자의 덕 이 아래에 미침을 찬미한 것이다. 학사가 그 뜻을 취하여 거처를 樛園 이라 하였 으니, 좋구나 아래에 미친다는 뜻이여!8) 비록 때를 만나 세상에 나가지는 못하더라도 향촌에서 자신의 덕성을 아래에 미치며 교화하는 선비를 성재는 바람직한 인간형이라고 본 것이다. 또한 遇不遇의 문제는 선비에게 출처의 문제와 관련한 일반적인 고민거리였 다. 성재는 이를 이상과 현실의 괴리이지만, 본성을 이루는 길임에는 같다고 보 았다.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를 본성에 따라 닦는다면 단지 본성을 이룰 뿐만 아니 라 또한 그 본성을 다함에 해당한다. 그러나 선비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조정에서 입신하지 못한다면 山林일 뿐인데, 이는 兼善天下와 獨善其身의 나뉨이지만 곧 그 본성을 이룸은 마찬가지이다.9) 遇不遇에 매이지 않고 각각의 상황에서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바를 다하는 것이 선비의 본분이라는 시각이다. 자신의 상황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바를 최 8) 9) 許傳. 性齋集 권15. <樛園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上洛之曲木 里, 侍讀學士趙君景羲桑梓之鄕也. 夫木之枝, 曲而下垂曰樛. 國風之樛木, 美君子之德逮下也. 學士取其 義名其居曰樛園, 善乎逮下之義也! 許傳. 性齋集 권15. <文山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天所以賦 予於我者, 率性而修之, 則非惟遂其性, 亦當盡其性. 然士生斯世, 不立身於朝則山林而已, 此兼吾獨善之 分, 卽其遂性均也

15 선을 다해서 할 뿐 때를 만나지 못했음이나 자신을 알아주지 않는 것에 대해서 는 연연해하지 않아야 함을 말했다. 오랜 관력에도 요로에 선 적은 없지만, 성 재는 지성으로 군주를 보필했다. 그의 경연강의를 일별하더라도 이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이는 성재가 우불우의 문제에 이미 그 본성을 이룸은 마찬가지 라 는 답을 가지고 살았음을 의미한다. 성재는 遇不遇를 그 속에서 있으면서 초월 하였던 것이다. 3. 學問的 이상과 방향 성재가 星湖의 학통을 계승하여 順菴과 下廬를 이었다는 것은 주지의 사실이 다. 또 성호가 寒岡과 眉叟를 통해 퇴계의 학맥에 닿아 있음도 잘 알려진 사실 이다. 그런데 그 尊信의 정도는 잘 알려져 있지 않다. 여기 그 정도를 알 수 있 는 말이 있다. 아! 한강선생은 가정 22년에 태어나셨으니 퇴계선생보다 연세가 약간 적으셨고, 미수선생은 만력 23년에 태어나셨으니 한강선생보다 연세가 약간 적으셔서 서로 이어서 직접 배우고 도통을 전하여 그 宗을 얻으셨다. 그러나 나는 이렇게 수백년 뒤에 태어나 항상 선생의 무리가 되지 못함을 한스러워한다.10) 성재가 한강과 미수를 존신한 것은 자신의 학문이 이분들에게 연원이 닿아 있음을 자부함이며, 또 그 연원이 퇴계에게 있음을 자부하는 것이었다. 앞서 성 재가 제일등인 을 목표로 했다고 말했는데, 여기 퇴계, 한강, 미수, 성호, 순암, 하려가 성재가 목표로 삼았던 제일등인 일 것이며, 또한 그 문도가 되지 못했음 은 만세에 태어난 후학으로서의 고뇌일 것이다. 성재가 우리나라에서 살만 한 곳으로 영남을 칭송하며, 산천과 풍속과 인물을 기준으로 언급하고 영남의 인물에 중후한 군자가 많음을 그 이유로 들었던 것11)도 사실 퇴계 이후 영남에 뿌리내린 士風을 높게 평가한 것이다. 이 역시 성재의 자부가 형성되게 한 요인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자부심의 실상을 채우기 위해 어떻게 학문을 해야할 것인가? 10) 11) 許傳. 性齋集 권14. <觀海亭重修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嗚呼! 寒岡先生生於嘉靖二十二年, 少退溪先生若干歲, 眉叟先生生於萬曆二十三年, 少寒岡先生若干歲, 相繼 親炙, 道統之傳, 得其宗矣. 而傳生乎此數百餘年之後, 常恨未得爲先生徒. 許傳. 性齋集 續集 권4. <左水堂記>. 한국문집총간309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凡言山 川風俗人物可居之地者, 莫不以嶺南爲最何也? 一曰嶽鎭川停土肥泉甘也. 二曰好稼穡尙勤儉, 地重難動 搖也. 三曰文學天性重厚多君子也. 兼此三者, 不惟我八道之最, 求之天下, 似無與較也. 如天嶺之介川, 月城之良佐, 善谷之溫惠, 晉陽之德山, 新安之沙月, 福州之河回, 嶺南之最, 皆大賢所毓0種德也. 遺風 餘俗, 歷累十世不改, 尊祖敬宗孝親悌長忠君信友, 愛人以及物, 是其敎也

16 성재는 우선 성현의 글을 읽고 체화함을 그 방법으로 인식하였다. 성현의 글이 아니면 읽지 않았고, 문학과 덕행은 후세를 가르치기에 충분하 였다.12) 이 글은 晩全堂 洪可臣의 영당을 중수할 때 쓴 것이다. 그런데 이 말은 성재 의 말이 아니라 미수가 만전당의 문집에 서문으로 써준 글에서 인용한 것이다. 성재는 이 말에 한 마디도 군더더기를 붙일 수 없다고 하였다. 전폭적인 공감을 표시한 것이다. 이 공감은 성재 자신의 목표나 이상과 부합되기에 가능한 것이 었다. 성재 역시 젊은 시절부터 이런 삶을 꿈꾸었음은 앞서 보았던 바와 같다. 그렇다면 성현의 글에서 무엇을 보고 무엇을 배워야 한다는 것일까? 성재는 도 가 멀리 있지 않다고 했다. 학자는 聖人을 배워 장차 聖人에 이르려 한다. 聖人은 나와 동류이니, 그 道는 단지 하늘이 부여한 性을 따름이니, 그 體는 仁義禮智이고 그 用은 부모를 孝로써 섬기고, 효를 옮겨 忠을 하며, 지아비는 뜻이 맞게 하고 지어미는 따르며, 어른은 어른답고 어린 사람은 어린 사람다움이다. 한유가 그 도는 쉽게 밝혀지고, 그 가 르침은 쉽게 행해지니, 그것으로써 자신을 다스리면 도리를 따르되 상서롭고, 남 을 다스리면 사랑하되 공변되며,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면 어느 곳에든 합당하지 않음이 없다. 고 하였는데, 이는 대학 의 나의 밝은 덕을 밝혀 修身齊家治國 平天下한다. 함이다. 聖人이 이미 가고 없으니 道는 聖人의 글에 있다.13) 성재는 학문의 요체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 본성을 體用으로 나누어 말하면 仁義禮智가 그 체이고 孝悌忠信이 그 용이 라고 하였다. 도가 멀리 고원한 곳에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에 있기에 그 도는 쉽게 밝힐 수 있고 그 가르침은 쉽게 행할 수 있다는 한 유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유가의 理想인 대학 의 修身齊家治國平 天下도 이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이상의 구체적 실천방안으로써 성재는 下學上達을 말한다. 모든 군자들이여! 먼저 일상의 늘 행하는 일에서 下學함으로부터 점차 天人性 命의 이치에 上達한다면, 물러나 머무름에 몸을 선하게 하여 안자 증자 정자 주자 12) 13) 許傳. 性齋集 권14. <晩全洪公影堂重修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非聖賢之書不讀, 文學德行, 足以敎後世. 許傳. 性齋集 권14. <芝泉精舍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學者學 聖人, 將以至於聖人也, 聖人與我同類者. 其道只是率循天賦之性, 而其軆則仁義5智, 其用則事父母孝, 移孝爲忠, 夫和 順, 長長幼幼. 韓子所云, 其道易明, 其敎易行, 以之爲己則順而祥, 爲人則愛而公, 爲 天下國家, 無所處而不當者也. 此大學明明德修身齊家治國平天下者也. 聖人旣沒, 道在聖人書

17 의 도를 배울 수 있을 것이고, 나아가 벼슬함에 임금을 섬겨 后稷 卨 伊尹 傅說 의 사업을 이룰 수 있을 것이니, 힘쓰지 않을 수 있겠는가! 힘쓰지 않을 수 있 겠는가!14) 육영당에 와서 강마할 선비들에게 독려하는 이 말은 성재 자신의 다짐이며, 필생의 노력을 경주한 학문방법이자 학문적 이상이다. 下學으로부터 점차 上達 로 나아감은 구분된 절차나 단계를 의미한다기보다 학문적 방법론으로써 日用 의 常行之事에서 구체적인 실천을 통하여 그 속에 내재한 天人性命의 이치에 도달함이다. 이 방법론은 근기실학의 종장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강조되어온 하 나의 公案이었다. 성재 역시 이를 체화하여 후학을 권면한 것이다. 또한 성재는 학문에 있어서 段階的 漸進이 중요함을 역설하였다.15) 즉 고원 한 목표를 향해 獵等을 불사하거나 자신의 한계를 구획하여 정하지 말고 가까 이에 있는 목표부터 이루어나가는 방식16)을 택하라고 하였다. 인을 어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중니의 문하에서 큰 법도를 받들어 入室한 자가 72인이지만, 일찍이 한 사람도 인으로 허여하지 않고 오직 안자만 석달을 인 에서 벗어나지 않았다고 칭찬하시고, 또 인의 조목으로 삼으라고 가르치시기를 예가 아니면 보지 말고, 예가 아니면 듣지 말며, 예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예가 아니면 행하지 말라. 하시고, 완전히 인으로써 허여하시지는 않으셨으니 인을 어 찌 쉽게 말할 수 있겠는가! 무릇 인이라는 것은 五常을 포괄하고 萬善을 관통하 는 혼연한 천지의 生物之心이다. 오직 그것을 본성으로 하는 자만이 편안하게 행 하니, 편안하게 행하는 자는 生而知之의 성인이다. 그러나 성인이나 범인이나 모 두 사람이다. 生而知之, 學而知之, 困而知之가 비록 나뉨이 있지만 그 앎에 이름은 하나다. 편안하게 행하고, 이롭게 여겨 행하고, 억지로 힘써서 행함은 비록 나뉨이 있지만 그 행함에 이름은 하나다. 진실로 제일등인을 미칠 수 없다고 여겨 스스로 한계를 긋는 자는 포기함을 편안하게 여기는 것이다. 그러므로 선비는 현인을 바 라고, 현인은 성인을 바라며, 성인은 하늘을 바란다. 하는 것이며, 下學上達 을 말함은 이것이 높은 데에 오름은 낮은 곳에서부터 하고 멀리 가려고 하면 가까운 데에서부터 시작하는 도를 말함이다. 권생 돈연은 그 대인의 명을 받들어 나에게 학업을 청하려 왔는데, 일찍이 덕을 이루는 방법을 물은 적이 있다. 내가 그 물음 에 답하였다. 맹자께서는 내가 원하는 바는 공자를 배우는 것이다. 하셨는데, 나 는 공자를 배우려면 먼저 안자를 배우고, 안자를 배우려면 마땅히 석달을 인에서 14) 15) 16) 許傳. 性齋集 권15. <育英堂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凡百君子, 先自下學乎日用常行之事, 漸次上達于天人性命之理, 則居可以善身而學顔曾程朱之道, 出可以事君而致 稷卨伊傅之業, 可不勉哉! 可不勉哉! 許傳. 性齋集 권15. <尺木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物之0而 能變化不測者龍也. 然其始之騰翥也, 必階尺木然后, 潛者見, 見者躍, 躍者飛而雲從之, 其亦異哉! 許傳. 性齋集 續集 권15. <居然亭記>. 한국문집총간309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君欲 學程朱, 則志葛庵之所志, 學退陶之所學, 庶乎爲行遠自邇之方云爾

18 벗어나지 않는 방법을 배워야 된다, 고 말한다. 석달을 인에서 벗어나지 않음에서 넘어선다면 인을 편안히 여길 수 있을 것이다. 비록 도달하지 못한다하더라도 인 에 의거하는 군자가 됨을 잃지는 않을 것이다. 바라건대 安仁 이 두 글자를 室에 써두고 항상 눈으로 보도록 하라. 17) 성재는 인간이 타고난 자질이 다름을 인정하지만, 그 자질에 안주하지 않고 노력한다면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궁극적 경지는 같다고 말한다. 그러나 자신 의 한계를 긋고 목표를 향해가지 않는 자는 포기한 자라고 하였다. 무한한 인간 의 가능성에 대한 신뢰를 읽을 수 있다. 그런데 그 가능성을 실현시키는 방법은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접근이라고 하였다. 공자를 배우려면 안자를 배우라는 것 이다. 그러면서 궁극적인 목표와 이상을 잊지 않는다면 그 목표와 이상에 혹 도 달하지 못할지라도 부끄러운 결과가 초래되지는 않을 것이라는 권면인 것이다. 이는 인간존재에 대한 고뇌를 바탕으로 기존의 학설들에 대한 재해석을 가한 것이다. 生而知之, 學而知之, 困而知之는 종래에 그 타고난 천분을 이유로 벗어 날 수 없는 제한조건으로 인식되었었다. 하지만 성재는 앎이라는 궁극에 도달할 수 있다면 모두 같다고 했다. 또 安而行之, 利而行之, 勉強而行之도 그 타고난 자질의 한계에 기인한 제약으로 인식되었었지만, 성재는 행함이라는 궁극적 목 표에 이를 수 있다면 그 역시 같은 것이라 하였다. 天賦의 성을 구현함에 타고 난 기질과 자질의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궁극의 목표와 이상을 이루려는 의지 가 있다면 그 궁극의 결과는 같다고 역설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뇌와 그 한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의지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4. 人格的 이상과 현실 앞서 성재는 학문의 요체는 인의예지와 효제충신에 있다고 하였다. 학문의 목 표는 그 실천에 있는바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바람직한 인간형이 되는 것이다. 성재는 바로 그 학문의 목표를 삶에서 실천한 인물들을 이상적 인간형으로 기 17) 許傳. 性齋集 권15. <安仁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仁豈可易 言哉! 仲尼之門, 奉弘規而入室者七十有二人, 未嘗一以仁許之, 獨於顔子稱三月不違仁. 又詔之以爲仁 之目曰非5勿視非5勿聽非5勿言非5勿動, 亦未嘗專以仁許之, 仁豈可易言哉! 夫仁者, 包五常而貫萬 善, 渾然天地生物之心也. 惟性之者安而行之, 安而行之者, 生知之聖也. 然聖凡均是人也, 生而知之, 學 而知之, 困而知之, 雖有分焉, 及其知之一也. 安而行之, 利而行之, 勉強而行之, 雖有分焉, 及其行之一 也. 苟以第一等人, 爲不可幾及而自畫者, 安於暴棄也. 故曰士希賢賢希聖聖希天, 謂下學而上達, 此升高 自卑陟遐自邇之道也. 權生敦淵承其大人之命, 請業於余, 嘗問成德之方, 余應之曰, 孟子曰所願則學孔 子, 余則曰欲學孔子, 先學顔子, 欲學顔子, 當學不違仁之術. 過於不違則可以安仁, 雖不及, 不失爲依仁 之君子矣. 其以安仁二字, 書諸室, 常目在之

19 리고 있다. 그러나 누구나 이러한 목표를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니다. 현실은 그렇지 않은 쪽이 더 많다는 것이다. 성재는 이 문제를 타성적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직시한 다. 그리고 그 어려움을 인정한다. 삶과 죽음은 사람에게 큰 일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하려는 바에 삶보다 심한 것 은 없고, 싫어하는 바에 죽음보다 심한 것은 없다. 무릇 삶을 구할 수 있고 죽음 을 피할 수 있는 것을 누가 하지 않겠는가? 그러나 하려는 바가 또한 삶보다 심 한 것이 있고, 싫어하는 바가 또한 죽음보다 심한 것이 있으니, 그 심한 것과 심 함의 경계와 구분을 알아 결단하기를 마치 못을 끊고 쇠를 자르듯이 한다. 그러나 삶을 버리고 죽음을 취함은 사람마다 할 수 있는 바가 아님이 있다. 오직 천지의 바른 기운을 품부받아 얻고 인의의 본성을 양성한 사람이라야 할 수 있다. 이와 같은 사람은 億兆의 사람 중에도 손가락으로 꼽을 사람이 없고, 천리의 땅에도 어 깨를 나란히 할 사람이 없으며, 백 세대를 보더라도 뒤를 이을 사람이 없다.18) 捨生取死의 어려움을 들어 至高의 가치를 지켜낸 인간을 기리려는 목적의 이 글에서 성재는 오직 천지의 정기를 얻고 인의의 본성을 이룬 사람만이 이러한 경지에 도달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한 가문에서 대를 이어 孝孫 과 忠烈과 忠僕이 함께 나온 것은 드물기는 하지만 가정의 훈도와 인격의 함양 이 만들어내는 아름다운 일이기에 가능하다고 하였다.19) 백행의 근본을 효라 한다. 누구나 알고 있지만 그 실천에 있어서는 누구나 할 수 없는 것 또한 효이다. 성재는 누구나 할 수 없는 효행을 기리며 그 일을 기 록한다. 18) 19) 許傳. 性齋集 권14. <趙氏兩世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死 生之於人, 大矣. 故人之所欲, 莫甚於生, 所惡莫甚於死. 凡可以求生而避死者, 孰不爲也? 而所欲亦有甚 於生者, 所惡亦有甚於死者, 知其甚與甚之界分, 而斷之若斬釘截鐵. 然捨生取死, 有非人人之所可能. 惟 禀得天地之正氣, 養成仁義之本性者爲之. 如斯人者, 兆人而不指屈也, 千里而不肩比也, 百世而不武 踵也. 許傳. 性齋集 권14. <趙氏兩世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如 咸安趙氏之一門十三忠, 竆天地亘古今而罕有者也. 嗚呼! 有爲端廟全節者, 諱曰旅, 號曰漁溪, 人謂孤竹 之風. 祭之西山院, 其後本支諸孫, 相繼立慬於南蠻北塞之亂. 漁溪五世有諱俊男, 始以孝行拜昭格署參 奉不仕, 丁酉倭再寇, 禍及公曾祖執義公墓, 公冒入賊中, 負土掩柩, 賊脅欲同歸, 公罵曰汝辱我國家, 掘 我墳塋, 不共戴天之讐, 豈從汝苟活耶? 乃北向四拜, 拔刀自刎而死. 賊亦義之, 以衣覆屍而去. 有子曰繼 先, 萬曆癸卯武科, 後値昏朝, 屛居田里, 仁祖改玉, 起爲宣傳官. 時朝廷患毛文龍[明將]之移鎭宣川, 自 椵島移. 以李莞爲義州尹, 莞素知公爲人, 辟爲幕賓, 與議軍事. 丁卯虜兵猝至, 公奮身先登, 射殺賊甚多, 矢竆力竭而死. 肅廟丙戌事聞, 父子俱命綽楔. 故別爲閣以旌之. 哲宗甲寅, 參奉贈司僕寺正, 宣傳贈兵 曹參議. 宣傳公之奴某甲, 自義州還, 未至家五里許, 訃于公族家, 流涕言戰亡事而曰主死之日, 豈欲獨 生, 恐主之名不顯而忌日不傳, 忍而至此. 然不能救夫子於危, 無面目到家, 遂投水而死. 忠奴又生於忠 臣之家

20 효자는 어린 아이일 때부터 정성으로써 어버이를 사랑할 줄 알았고, 자라서는 신을 삼아서 맛있는 음식을 봉양하였다. 母喪에는 죽을 먹으면서 피눈물을 흘리 며 상기를 마쳤고, 아버지가 피가 섞인 설사를 앓아 위태로울 때 매추라기 구이를 먹고 싶다고 하면 매추라기 구이를 구하여 드리고, 자라구이를 먹고 싶다고 하면 자라구이를 구하여 드렸는데, 모두 그 시기에 구하기 어려운 것이었다. 상이 나서 여묘살이 3년을 할 때에는 소금으로 간을 한 음식을 먹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자지 않았으며 부들자리 끝을 자르되 안으로 넣지는 않음을 끊지 않으니 사람들이 하 기 어려운 바였다.20) 남들이 하기 어려워하는 일을 했기에 그것을 특별하게 여긴 것이 아니라, 그 일을 그저 자신의 일로 알고 지극한 정성을 드림이 어려운 줄도 모르고 해낸 그 마음을 기린 것이다. 그것은 정성이 있으면 가릴 수 없고 가릴 수 없으면 드 러나기 때문이다.21) 성재는 자신의 손가락을 두 번 찧어 한번은 시어머니를 살 리고 한번은 남편을 살린 홍씨부인의 孝烈을 기린바 있다. 남양 홍씨는 시집오기 전부터 柔順하고 仁孝하였는데, 22세에 辛氏 가문에 시 집와서 婦德과 婦行으로 밖에 알려졌다. 시어머니 이씨를 매우 공손하고 부지런 히 섬기고, 남편을 공경하며 어김이 없어서 집안의 법도가 화목하였다. 갑오년에 이씨가 병을 앓아 거의 일어나지 못하게 되자, 홍씨는 근심스러운 안색으로 여러 달을 옷의 띠를 풀지도 않고 눈을 다른 곳으로 돌리지도 않으며 몸소 불을 지펴 밥을 해드렸고, 屬纊함에 숨이 끊어지려고 하자 곧 손가락을 깨물어 피를 내어 입 에 대어 드리니 마침내 소생하여 지금까지 80여세가 넘도록 여전히 병이 없다. 정 유년에는 그 남편이 염병에 걸렸는데 경서를 전수하다가 갑자기 기절하자 홍씨가 또 그 손가락을 찧어 피를 마시게 하니 남편이 과연 회생하여 지금까지 60여세가 넘도록 해로하고 있으니 어찌 기이한 일이 아니겠는가!22) 孝烈이 반드시 奇行으로 이루어진다면 누가 孝烈을 행할 수 있겠는가? 성재 가 이런 일을 기록한 이유는 시어머니와 남편이 있음만을 알고 자신의 몸이 있 음은 알지 못했던23) 지극한 정성 때문이었다. 이 지극한 정성은 자신의 몸을 20) 21) 22) 23) 許傳. 性齋集 권14. <贈童蒙敎官耐齋李公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孝子自孩識愛親以誠, 旣長捆屨以供甘旨. 母喪歠粥泣血以終制, 父患血痢危殆, 欲鶉炙則求進 鶉炙, 欲鱉炰則求進鱉炰, 皆非時難得者也. 及丁憂廬墓三年, 食不鹽寢不被, 芐翦不絶[納], 人所難也 許傳. 性齋集 권15. <鶴皐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余語之曰: 君之所居, 旣以鶴臯爲名, 鶴之聞于天者, 誠也. 君其至誠無息乎? 誠者天道也, 思誠者人道也. 許傳. 性齋集 권14. <洪氏 人孝烈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南 陽洪氏, 自在室柔順仁孝, 二十二歸于辛門, 德 行, 聞于外. 事姑李氏甚謹勤, 敬夫子無違, 家道雍睦. 甲午李氏疾病殆不起, 洪氏色憂, 屢月不解帶不交睫, 躳執炊爨, 及至纊息幾絶, 乃齧指出血以灌口, 竟得 甦, 至今八十餘尙無恙. 丁酉其夫遘癘, 傳經之際忽氣絶, 洪氏又斫其指, 夫果回生, 至今六十餘偕老, 豈 不異哉! 許傳. 性齋集 권14. <洪氏 人孝烈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非

21 희생하여 아버지를 화적의 칼날에서 구하기도 하고24), 때로는 호랑이가 감동하 기도 하였다는 전설을 만들기도 한다. 성재는 이러한 전설도 지극한 정성이면 가능하다고 말한다. 여묘살이 3년동안 호랑이가 지켜주었으니, 어찌 효성이 이루어낸 일이 아니겠 는가? 참으로 性分의 고유한 바를 다하고 職分의 마땅히 해야 할 바를 다했다고 이를 수 있으니, 이는 단지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기 때문만은 아닌 것이다.25) 성재는 효가 기행이기에 드러나거나 타고난 자질이 아름답기에 가치 있는 것 이 아니라 인간으로서의 본성과 직분을 다하는 것이기에 가치 있다고 기린 것 이다.26) 이것은 성재가 꿈꾸었던 인격적 이상이었다. 부귀영화를 싫어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것보다도 가치 있는 삶이 있다고 믿고 실천에 옮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가 믿는 바는 분명 부귀영화로는 이룰 수 없는 별개의 경계에 있을 것이다. 성재는 이러한 인간을 기렸다. 吾黨의 선비 중에 내사생 정군 창익이 있는데 백운산 북쪽에 산다. 군은 藥圃와 牛川을 조상으로 두었으니 참으로 법도 있는 가문의 자손이며, 회재와 퇴계를 종 사로 삼았으니 眞儒의 門人이다. 言動과 擧止가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영남사람 이다. 일찍이 太學에서 반년간 유학을 했는데 儒風이 쇠약하고 士氣가 시들해진 것을 보고 개연히 탄식하기를 돌아가 내가 처음 품었던 뜻을 이룸이 좋겠다. 산 은 밭으로 갈 만하고 나무를 할 만하며 물은 마실 만하고 씻을 만하다. 고인의 글 을 읽고 고인의 말을 말하고 고인의 행동을 행한다면 이 사람 또한 고인일 따름 이다. 라고 하고는 그대로 떠났다. 이것을 기로 쓴다.27) 24) 25) 26) 27) 只知有姑有夫, 而不知有其身者, 不能也. 許傳. 性齋集 권15. <永慕堂李公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嗚呼! 粤在肅宗之時, 有若孝子永慕堂李公, 天性純至, 愛父母多有異行. 年纔十八, 痘疫大熾, 隨其大 人避痘山村, 一夜火賊猝入, 㐫鋒及於大人, 公驚起以身蔽之, 遍軆受創, 手腕已斷, 因以氣絶, 賊去後村 人來救, 僅得回甦. 然病創八年, 遂以不起, 此乃不幸之尤者也, 報生之極者也, 古今能爲此者幾人哉? 許傳. 性齋集 권15. <丁孝子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廬 墓三年, 有虎守之, 豈不是孝感所致耶? 眞可謂盡其性分之所固有, 而職分之所當爲也, 此非但天質之 美而已. 許傳. 性齋集 권15. <永慕堂李公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人道莫大於孝, 孝者善事父母之謂也. 子之事親, 天之經地之義, 性分之所固有, 職分之所當爲. 故孝莫 如曾子之養志, 聖人不稱其孝, 但曰事親若曾子者可也. 其或有不幸而遭非常之變, 如舜閔而能盡其道, 然後特以孝稱之. 世降而人或有失其本心之正, 而不顧父母之恩者, 口軆之養, 溫淸之節, 猶不能盡誠, 甚 或有貽羞戮而陷危殆者, 則矧肻服勤竭力報生以死者乎? 許傳. 性齋集 권15. <雲北軒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吾黨之士, 有內舍生鄭君昌翼, 居白雲之北. 君以藥圃 牛川爲祖, 眞法家子也, 以晦齋 退溪爲宗, 眞儒門人也. 言動 擧止, 不問可知爲嶺南人也. 嘗遊太學半歲, 見儒風衰而士氣委靡, 慨然歎曰: 反而遂吾初服可矣. 山可 耕可樵, 水可飮可濯. 讀古人書, 言古人言, 行古人行, 是亦古人也已. 遂行. 是爲記

22 성균관에 적을 둔 적이 있다는 것으로 보아 정창익은 청운의 꿈을 안고 유학 을 온 사람이다. 그런데 그가 어느날 홀연히 떠나버린다. 처음 품었던 안빈낙도 의 꿈을 이루기 위함이라는 것이 그 이유이다. 성재는 그를 떠나보내며 이렇게 記를 써주었다. 개인적으로 보자면 성재도 이러한 삶을 꿈꾸었기 때문에 부러움 이 있었을 것이다. 시각을 조금 다르게 하면 정창익의 행동과 삶은 유자가 꿈꾸 는 이상의 하나이기도 하다. 성재는 그 꿈과 이상을 찾아 고향으로 돌아간 정창 익을 이상적 인간형의 하나로 기린 것이다. 안으로는 집안의 가훈을 잇고 밖으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며 일생을 사는 사람도 성재는 이상적인 삶을 사는 인간형으로 기렸다. 거사 금군 우열이 용마루 몇 개를 얽어 精舍를 산의 시냇물 사이에 짓고, 평소 에 모아둔 우리나라 명현들의 墨帖 수천 본을 보관해두고 그 室의 이름을 尙友라 하였다. 거사는 바로 퇴계의 문인인 매헌공의 후손인데 뜻이 돈독하고 옛 것을 좋 아하는데, 안으로는 가훈을 지키고 밖으로는 스승의 가르침을 받들며 세상을 마 치려 한다고 한다.28) 성재의 관점에서는 이러한 삶의 방식이 분명 난세를 살아가는 하나의 방법이 었던 듯하다. 출세하여 官祿에 매인 삶을 사느니보다는 욕심없이 家訓과 師敎를 지키고 받들며 사는 삶이 훨씬 현명하다고 본 것이다. 따라서 이런 尙友千古의 삶도 성재의 이상이었다 할 수 있다. 閒雅한 정신세계를 꿈꾸었던 수많은 유자 들처럼 성재도 세속의 名利는 소거된 맑고 깨끗한 세계를 추구하였다.29) 그런 데 그 세계는 혼자만 무욕적 삶을 유유자적 누리는 것이 아니라 敬宗收族의 이 상이 실현되거나30), 공동체의 화합과 공존을 추구하는 儒風이 진작된 사회의 이 상이 함께 추구된 공간이었다.31) 28) 29) 30) 31) 許傳. 性齋集 권15. <紫山精舍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居士琴 君佑烈, 搆數棟精舍於山溪之間, 以其平日所集我東名賢墨帖數千本藏之, 名其室曰尙友. 居士乃退溪門 人梅軒公後孫也. 篤志好古, 內守家訓, 外承師敎, 以永厥世云爾. 許傳. 性齋集 권15. <朝陽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以其無事 之時, 藏焉修焉遊焉息焉, 或書一卷, 或琴一張, 或酒一壺, 或山而樵, 或水而魚, 不知山外更有何樂可以 易此者乎? 許傳. 性齋集 권15. <修睦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人道親親 爲大, 仁率義率, 親親之道也. 厥初生民, 始祖一人, 生子衆多, 則各爲別子, 子之子, 孫之子, 曾孫之子, 至于雲仍, 本本支支, 源源派派, 世愈遠而族愈踈, 分異離析則殆行塗人不若也. 故程夫子曰: 管攝天下 人心, 收宗族厚風俗, 須是立宗子法, 宗法壞則人不知來處, 流轉四方, 不相識. 此周官奠系世辨昭穆之 義也. 許傳. 性齋集 권15. <南厓書室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我東之 嶺南, 古所稱鄒魯也. 國朝以來, 儒賢輩出, 倡明道學, 流風餘韻, 至屢百年而不衰, 家詩5戶絃誦, 眞天 下之樂國也. 余自十七八歲, 叨陪仁山之庭, 五年之間, 與其文學之士交遊, 習熟聞見, 莫非陶山南冥以來 諸先生之德行言議也. 三十後又一至, 甲子之歲知金海, 學徒日聚, 益覺嶺南之儒風, 可以增士氣而扶

23 그런데 아무리 성군이 치세하는 세상일지라도 숨어서 자신을 감추고 드러내 지 않는 현자가 있는 법이고, 세상이 어지럽고 도가 실현되지 못하는 경우라면 상황은 더욱 심할 것이다. 이는 성재가 고민했던 한 가지였다. 옛 唐堯의 성대한 세상에 들에 버려진 현자가 없었다고 일컬어지지만, 箕氵穎 의 사이에는 대개 巢父의 무리가 있었으니 의혹이 아니겠는가? 내게는 대림에 사 는 친구가 있는데 스스로 대림의 한 逸民이라고 하고 자신이 遊息하는 齋를 一林 이라고 하였다.32) 남겨진 현자가 한 명도 없는 세상은 理想일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어쩔 수 없는 현실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런 현자가 없는 세상이 오기를 바라고 만들려 고 애쓰는 자세는 儒者의 사명일 것이다. 성재의 고민과 고뇌는 늘 이러한 곳에 있었다. 지고의 가치를 실현한 삶을 살고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쓸쓸한 상황 이 없기를 바라는 마음이 그 남겨지고 묻혀버린 삶을 조명하고 宣揚하였던 것 이다. 그런데 主鎭이 몰래 도망쳐버리고 고립된 성은 포위되어 밖에서는 하루살이나 개미새끼의 구원도 없으니 적은 수로는 많은 적을 상대할 수 없고 약한 병사로는 강적을 상대할 수 없음을 어찌하겠는가? 그러나 오히려 기운을 돋워 한번 크게 소리를 지르자 병사들은 누구나 할 것 없이 죽음을 집으로 돌아가는 것으로 여겼 다. 하지만 끝내 힘이 다하고 형세가 곤궁해짐을 면할 수 없어서 몸이 화살과 돌 아래에 죽게 되었다. 이는 태사공이 이른바 떨쳐일어나 몸을 돌보지 않고 나라의 위급함에 따름이고, 맹자가 이른바 삶을 버리고 의로움을 취함이며, 공자가 이른 바 몸을 죽여 인을 이루는 것이니, 참으로 백세에 人臣을 권면하였다 말할 수 있 겠다. 그러나 忠節을 포상하고 장려하게 하는 恩典이 빠져서 미치지 못함은 단지 자손이 미약하기 때문일 뿐이다.33) 아무리 지고의 가치와 바람직한 이상을 실천하며 살아도 아무도 알아주지 않 는다면 그처럼 허무한 일이 없을 것이다. 성재가 늘 고민했던 것은 이 知遇의 문제였다. 나를 알아주지 않음을 근심했던 것이 아니라 내가 알아주지 못함을 32) 33) 國脈也. 於是甚欲居之, 時有外夷之亂, 因漂泊東西, 至今恨焉. 許傳. 性齋集 권14. <一林齋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昔唐堯盛 時稱野無遺賢, 然箕氵穎之間, 盖有巢父之倫, 豈不惑哉? 余有友人居大林, 自謂大林之一逸民, 而扁其 遊息之齋曰一林. 許傳. 性齋集 권14. <忠順堂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其奈 主鎭潛逃, 孤城被圍, 外無蚍蜉蟻子之援, 寡不敵衆, 弱不敵強. 然猶厲氣一呼, 士無不視死如歸, 而竟不 免力盡勢竆, 殞身於矢石之下, 此太史公所謂奮不顧身, 以循乎國家之急者也, 孟子所謂捨生取義者也, 孔子所謂殺身以成仁者也, 眞可謂百世人臣之勸, 而褒忠奬節之典, 闕然未及者, 只以子孫微弱耳

24 근심했던 것이다. 그래서 나로 인하여 누군가 드러나고 알려진다면 그 일을 기 록하여 드러낸다는 기록의 정신을 記 에 실현하고 있다. III. 결론 성재가 살았던 19세기의 역사적 상황은 儒 者 가 꿈꾸는 이상의 실현이 결코 용이하지 않았다. 내외의 정치적 상황과 서세동점의 압박, 성리학의 교조화와 민심의 이반 등을 성재 역시 목도하고 있었던 것이다. 또 경제적으로 넉넉지 못 한 형편은 그가 학문의 길을 가도록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러나 이렇게 암담한 상황에서도 성재는 普 遍 한 人 性 의 발현이 가능하다고 믿었다. 이는 인간에 대한 신뢰와 人 性 에 대한 희망적 전망이 없다면 가능하지 않다. 성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하늘이 부여한 性 을 구현시키며 살 수 있다고 믿었다. 이는 낙관적 전망이었다. 성재는 학문의 요체란 하늘이 나에게 부여한 본성을 따르는 것이라 하였다. 그 본성을 體 用 으로 나누어 말하면, 仁 義 禮 智 가 그 體 이고 孝 悌 忠 信 이 그 用 이 라고 하였다. 도가 멀리 고원한 곳에 따로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일상의 모든 것에 있기에 그 도는 쉽게 밝힐 수 있고 그 가르침은 쉽게 행할 수 있다는 한 유의 말을 인용하기도 하였다. 이는 유가의 理 想 인 대학 의 修 身 齊 家 治 國 平 天 下 도 이 밖에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고도 하였다. 이러한 학문적 이상의 구체 적 실천방안으로써 성재는 下 學 上 達 을 말했다. 生 而 知 之, 學 而 知 之, 困 而 知 之 는 종래에 그 타고난 천분을 이유로 벗어날 수 없는 제한조건으로 인식되었었다. 하지만 성재는 앎이라는 궁극에 도달할 수 있 다면 모두 같다고 했다. 또 安 而 行 之, 利 而 行 之, 勉 強 而 行 之 도 그 타고난 자질의 한계에 기인한 제약으로 인식되었었지만, 성재는 행함이라는 궁극적 목표에 이 를 수 있다면 그 역시 같은 것이라 하였다. 天 賦 의 성을 구현함에 타고난 기질 과 자질의 차이가 없을 수 없지만, 궁극의 목표와 이상을 이루려는 의지가 있다 면 그 궁극의 결과는 같다고 역설한 것이다. 인간의 한계에 대한 고뇌와 그 한 계를 벗어나려고 몸부림치는 의지의 가능성을 보았기 때문에 이렇게 말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성재는 학문의 요체는 인의예지와 효제충신에 있다고 하였다. 학문의 목표란 그것의 실천에 있는바 실천이 이루어진다면 바람직한 인간형이 되는 것이라 믿 었다. 성재는 바로 그 학문의 목표인 孝 悌 와 仁 義 를 삶에서 실천한 인물들을 이 상적 인간형으로 기리고 있었다. 여기서 한걸음 나아가 잠시 시대가 古 道 와 거스르는 상황이 있을지라도 그래

25 서 그 시대를 사는 사람이 고통스러울지라도 끝까지 古道를 법도로 삼는다는 尙古의 정신은 성재의 기에 나타난 이상과 고뇌의 변주라고 생각한다. 따라서 성재의 이 말로 마무리를 삼는다. 비록 古道를 따른다 하여 한 때에 거슬림을 받더라도 끝내 古道로써 百世의 法 으로 삼으니 그 消長盛衰의 이치가 또 어떠한가?34) 참고문헌 <원전> 許傳. 性齋集.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許傳. 性齋集 續集. 한국문집총간309집. 한국고전번역원 <논문> 강대민, 性齋 許傳 門徒의 愛國運動, 문화전통논집 제5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性齋 許傳 門徒의 義兵運動, 문화전통논집 제6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곽정식, 性齋 許傳의 傳文學에 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7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김강식, 性齋 許傳의 學風과 歷史的 位相, 문화전통논집 제7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9., 性齋 許傳의 三政改革策과 성격, 문화전통논집 제8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金喆凡, 性齋 許傳의 生涯와 學問淵源, 문화전통논집 제5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7., 性齋 許傳의 制度改革論에 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6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8., 許性齋 著述考略, 문화전통논집 제9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1., 經筵講義를 통해 본 許傳의 政治思想, 문화전통논집 제10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03 박준원, 性齋 許傳 文學 硏究, 문화전통논집 제5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鄭景柱, 性齋 許傳의 詩經講義에 나타난 說詩 觀點, 문화전통논집 제6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1998., 宗堯錄 에 나타난 性齋 許傳의 經學 관점, 문화전통논집 제7집, 경성대학교 한국학 연구소, 1999., 許性齋 禮說의 收養子 문제에 대하여, 문화전통논집 제8집, 경성대학교 한국학연구소, ) 許傳. 性齋集 권15. <忠順堂旌閭記>. 한국문집총간308집. 한국고전번역원 면. 雖以 古道見忤於一時, 終以古道爲法於百世, 其於消長盛衰之理, 又何如哉!

26 東學의 水雲선생이 꿈꾸는 세상 - 동학의 이상사회론 - 정 재 권* 제1장 서론 동학의 이상사회는 현실을 기반으로 이루어진 사회이다. 이 때 현실은 어떠한 철 학적 기반으로 이루어진 것인가를 판단해야 한다. 동학뿐만 아니라 모든 사상은 언 제나 시간과 공간적 시대의 특수성에 대해 판단을 내린다. 동학 이념 역시 스스로의 패러다임에 따라 각각의 시공간적 사회상황에 대한 판단을 내린다. 어떤 현실이 이러저러하다는 것은 그 현실에 대한 이해의 틀 중 하나를 적용한 것이다. 현실적 문제란 인식의 틀끼리 발생하는 불협화음에 대한 다른 표현으로 볼 수 있다. 모든 현실 인식의 틀은 각각 지향하는 목표를 가진다. 東學이 西學1)과 佛 學과 儒學과 仙道學과 사상적으로 다른 점이 있다면 그것은 현실에 대한 인식 패러 다임에 있어서도 분명 차이가 있을 것이다. 현실에는 개인적 현실과 사회적 현실, 국가적 현실과 세계적 현실 등 여러 가지 형식으로 구분될 수 있는 여지가 있다. 이러한 것은 객체적 분석이다. 지금까지의 여러 연구들에 있어서 동학의 현실인식 패러다임이 지나치게 객체 사회를 대상으로 사회구조에 대한 분석에 치우쳐 있다는 점이다. 여기서 동학의 현실인식 패러다임 의 핵심은 객체적 사회구조 분석에 있지 않다는 점이다. 그 이유는 기존의 동학적 현실인식 패러다임들은 객관적 현실을 主로 보고 인식 틀을 從으로 보기 때문이다. 동학의 이상사회란 내면의 하늘님 마음을 고찰하는 心學의 세계이다. 하늘님 마 음을 외부적 사회시스템에 종속시킨다는 것은 외부적 사회시스템이 하늘님이고, 마 음의 하늘님은 사회 시스템 하늘님의 반영물로 볼 수 있다는 공식을 인정하는 셈이 된다. 동학은 인간은 자연과 우주 및 靈的 세계 속의 한 존재라는 점을 전제로 한 다. 동학의 현실에 대한 개념은 아무리 좁게 설정해도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와 무생명체의 靈과 肉을 포함시키지 않을 수 없다. 靈에는 만물의 靈이 있고, 肉에는 만물의 肉이 있다. 인간 중심세계에서는 인간이 가치의 중심이며, 인간의 삶이 가치 * 동의대 교수 1) 여기서 말하는 西學이란 水雲이 말한 西學 개념 즉 天主敎를 의미한다

27 의 중심이며, 인간사회의 가 가치의 중심이 되겠지만 자연과 우주 및 만물의 영혼 적 삶에서는 제도적 물질적 인간중심세계의 가치가 더 이상 동학의 중심사상이 될 수 없다. 제2장 동학적 이상사회의 구성 1. 至氣一元 至氣는 陰陽의 작용으로 인해 인식되나 인식의 방법은 통찰과 믿음이다. 水雲은 陰陽이 서로 고르게 펴짐에 수백 수천가지 만물이 그 가운데에서 화해 나온다 2)고 하였다. 보이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 것을 드러내고, 들리는 것으로 들리지 않는 영 역을 추론해 내게 하며, 아는 것으로 모르는 영역을 추론하게 하며, 알려지는 것으 로 망각되는 것을 드러내며, 발전함으로서 쇠퇴함을 드러낸다. 좁은 것을 보면서 넓 음을 통찰하게 하는 것이 음양의 작용이다. 氣란 한 마디로 形象하여 表達하기 어려운 것이다. 대상이 아니기에 개념화할 수 없고, 나를 포함하면서도 나란 하나의 요소가 아니기에 玄妙한 것이다. 그것이 대상 화될 수 없는 것이다. 海月은 氣란 것은 天地, 鬼神, 造化, 玄妙를 모두 포괄한 하 나의 氣 3)라고 하였다. 天地와 鬼神과 造化와 玄妙는 보이는 듯 하나 보이지 않고, 들리는 듯하나 듣는 것을 초월하는 것이다. 인간의 객관 사물적 관찰과 언어적 한계 를 넘어서는 것이면서도 삶의 모든 요소를 이룬다는 뜻이다. 水雲은 氣의 遍在를 말하기를 氣는 허령창창하여 일에 간섭하지 않음이 없고 일 에 명령하지 않음이 없으며 모양이 있는 듯하나 모양을 말하기 어렵고 들리는 듯하 나 보기 어려우니 이는 또한 혼원한 一氣이다. 4)이라고 말하였다. 氣는 無所不在하 면서도 모든 일에 主宰者로서 존재한다. 主宰者는 每事에 無往不復之理로 자신을 드러내는데 무엇으로 되돌아오는지 감지할 수 없지만 그것을 믿고 그것에 따라야 한다. 어찌 눈에 보이지 않고, 귀에 들리지 않는 것을 믿어야 되는가? 또 水雲은 氣를 不然其然5)의 논리로서 설명하고 있다. 나면서부터 알았다 할지 라도 마음은 어두운 가운데 있고, 자연히 화했다 해도 이치는 아득한 사이에 있 다 6)고 하였다. 氣의 遍在性은 인식의 안에도 있고, 인식의 밖에도 있다. 그것은 내 2)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경전, 동경대전, 논학문,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사, 포덕142), p.24. 3)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천지이기. 4) 위의 책, 동경대전, 논학문. 5) 위의 책, 동경대전, 불연기연. 6) 위의 책, 동경대전, 불연기연

28 재한 지극한 하늘님에 대한 통찰에서 나온다. 내재한 지극한 하늘님을 영접하지 못 하면 그러한 이치를 설명할 수 없으며, 과학적 객관자료로는 설명할 수 없다. 동학의 至氣一元主義는 유학의 理氣二元論을 극복함으로써 우주의 존재론적 위계 질서를 현실사회까지 적용하려고 한 송대의 주자적 위계주의적 세계관을 완전히 제 거해 버렸다. 존재론적 위계질서 속에는 人과 物이 다르게 되며, 家와 家가 親親으 로 달라야 하며, 국가끼리도 위계가 있어야 하며, 인간사회 속에도 위계가 있어야 한다. 朱子的 세계관은 궁극적으로 인간의 本性을 압도하는 사회질서지상주의로 치 닫게 된다. 동학은 至氣 一元論을 주장하면서 理는 단순히 직능상의 차별로 볼 뿐 근원에서는 하나의 氣라고 보기 때문에 이러한 이념을 사회관계에 적용시키게 되면 모든 인간의 본원적 차별이 사라지는 평등사회가 구현된다. 직능상의 차이는 직능 일 뿐 직능에 의해서 인간의 존재가 차별을 받을 수 없다. 지기일원주의는 인간과 만물이 모두 하나의 氣 일체라는 입장이다. 이것은 인간 중심주의를 탈피하게 하는 새로운 각성의 일갈이다. 至氣에는 자연과 인간의 모든 생멸활동과 활동의 반복이 모두 포함된다. 여기서 인간중심적 공리주의 및 객관주 의의 경계는 사라지고, 초공리 초객관만 남는다. 종교적 믿음의 세계가 현실이 될 수 있는 근거가 바로 여기에 있다. 인간세계와 인간의 척도에 의한 우주만을 현실로 보는 과학주의 세계관에 대한 새로운 도전이며, 객체지상주의적 현실관에 대한 새 로운 패러다임의 제시이다. 인간과 만물 역시 하나의 一氣에서 생하였기 때문에 인간이 만물을 제어한다거나 지배하는 위치가 아닌 함께 조화하여 살아가야 하는 에코토피아를 실현하게 된다. 해월은 천지가 곧 부모이고, 부모가 곧 천지이다 7)라고 하였다. 天地가 곧 父母라 는 물활론적 사고는 至氣一元論의 정신세계가 아니면 설명될 길이 없다. 地上天國이란 至氣일원에 따른 세상이다. 인간과 만물이 함께 조화를 이루는 사 회를 의미하는 초사회적 의미를 함축하는 것이다. 인간끼리의 합의와 인간끼리의 단계적 발전 단계를 지상천국이라고 할 수 없는 이유는 이러한 존재론적 근거에 기 인한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至氣는 통찰과 믿음의 대상으로 認識의 영역과 超 認識의 영역을 함께 한다. 至氣는 개념화할 수 없는 대상화 불가능한 존재이면서도 無所不在하며, 主宰者로서 존재하기 때문에 종교성을 가지며, 人格的 絶對者이다. 至氣一元論은 理氣二元論的 사고를 극복함으로써 존재론적 일원론을 형성하고, 모 든 생명의 평등성을 주장하게 된다. 인간끼리의 평등뿐만 아니라 인간과 만물 간의 평등을 전제하기 때문에 참된 현실이란 인간과 만물의 영역, 인간의 인식가능영역 과 인식 불가능 영역이 모두 현실이된다. 地上天國이란 至氣一元의 무한평등의 세 7)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2, 천지부모

29 계에서 노니는 인간 간의 화해이며, 인간과 자연 간의 화해이며, 인식세계와 초인식 세계와의 화해의 세계라는 의미이다. 2. 侍天主 心學 우주의 모든 존재는 모두 하늘님이며, 사람 역시 하늘님이다. 하늘님이란 요소적 존재가 아니라 至氣의 顯現이다. 至氣는 우주에 가득차서 한 곳도 빈 곳이 없는 존 재이다. 하늘님이란 至氣의 현현이다. 要素가 아니기 때문에 시간과 공간적 한계를 가지지 않는다. 내 몸에 모신다는 것은 내 몸이 한계를 갖는 존재가 아니라는 의미 이다. 내 몸을 세포로 구성된 하나의 要素로 본다면 至氣의 無所不在한 존재가 세포 속에 갇힐 수 있겠는가? 그렇다면 나의 몸이란 무엇인가? 나는 무엇이며, 몸은 무엇 인가? 나란 것을 다른 타인과 구별시키고, 자연과 구별시키고, 신과 구별시킨 나로 본다면 그것은 하나의 서구적 개인 개념으로 떨어질 뿐이다. 天人合一과 物我一體 의 동양적 사고는 철저한 정신세계의 영역이지 요소적 內外觀念이나 主客觀念은 아 니다. 하늘님을 모신 사람이란 기하학적 이성과 감각적 조합으로 판단할 수 있는 대상 이 아니다. 오직 其然과 不然의 양단을 통해서 인지되는 존재이다. 사람이 至氣로 이루어진 존재지만 사람이 식물이나 바위라 부를 수는 없는 일이다. 사람이 다른 동 물과 차이가 나는 원인을 객관적 요소로 분석 설명할 수 없다. 그 이유를 수운은 不 然과 其然8)으로 설명하고 있다. 其然을 통한 인식은 언어에 의지해서 인간 간에 소 통될 수 있으나 항상 不然이 있어야 한다. 不然은 믿음에 의지해서 인간과 만물 간 소통될 수 있으나 其然을 통해서 가능하다. 오직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하늘님은 존 재하고, 그렇지 못하면 하늘님은 존재하지 못한다. 하늘님을 모시지 못한다고 해도 하늘님이 아예 사라지는 것이 아니라 不然其然을 통한 통찰할 때 가지 유보되어 내 면에 존재할 뿐이다. 유보되었다 하더라도 활동이 없는 것이 아니라 맹렬히 활동을 하고 있을 뿐이다. 내가 그 활동을 認知하지 못하고 나의 능력으로만 이루어지는 줄 알 뿐9)이다. 사람의 하늘님을 인지하고 그것에 대한 경외하고 받드는 행위를 일러 侍天主라 부른다. 동학의 시천주 신앙은 유학의 도덕적 차별성과 親親主義의 한계를 뛰어넘 는다. 동학의 시천주 신앙에서 나오는 평등성은 외부적 율법으로 경직된 유학의 틀 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시천주 신앙을 실현하는 하나의 도구라는 전제 아래에서 만 유학의 삼강오륜은 행위의 편리한 규칙 정도로 이해될 뿐이다. 즉 윤리란 유학에 8) 위의 책, 불연기연. 9) 동경대전, 포덕문, 수운은 하늘님의 뜻에 이해 이루어지는 것인 줄 모르고, 저절로 되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을 無爲而化 라 표현하였고, 그러한 사람을 愚夫愚民이라 하였다

30 있어서는 理氣의 차별성을 전제로 한 것이나, 동학에서는 至氣 일원론적 전제 아래 에서 요청되는 것이라는 차이이다. 유학에서는 유한한 신체와 세습되는 신분및 직 능을 유일 개인의 본성으로 보고 그 개인을 전제로 요청되는 윤리이나, 동학에서는 至氣的 身體와 초신분과 초직능의 개인을 전제로 요청된 윤리이다. 전자는 개인의 양심에 호소하는 윤리이고, 후자는 우주가 내 몸인 至氣身體에 호소하는 윤리이다. 전자는 살아있는 신체에 의탁하는 양심이지만 후자는 生死를 모두 초월하여 至氣에 의탁한 윤리이다. 이상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모든 존재는 하늘님인데 하늘님은 요소적 존재가 아니라 지기의 顯現이다. 하늘님을 인식한다는 것은 侍天主함을 통해서 가능하다. 시천주 함이란 不然과 其然 인식의 양단을 통해서 認知되고 實踐되는 영역이다. 시 천주 도덕윤리는 儒學의 경직된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오직 시천주 행위를 실현 시키는 부분적 과정으로서만 의미를 가진다. 侍天主는 心學이기 때문에 心學에 근 거를 두지 않는 여타 동학의 인식론은 종교적 의미의 특성을 상실한다. 3. 同歸一體主義 同歸一體는 存在의 근원이 같다는 의미이다. 자연과 인간의 근원이 하나이며, 班 常의 근원이 하나이며, 君 臣의 근원이 하나이다. 직능상 역할의 차이는 있을 지라 도 그 직능을 벗어나면 모두가 존중받아야 할 하늘님을 모시는 사람들이니, 직능상 차이를 가지고 하늘님을 모시는 사람의 格까지 차별로서 지배하거나 조롱할 수는 없다. 同歸一體의 반대말은 各自爲心이다. 各自爲心이란 인간이 품수하고 있는 수많 은 소질과 욕구와 지위들 중에 한 가지를 得하면 그 한 가지를 가지지 못한 사람들 을 지배하고, 차별할 수 있다는 것이다. 즉 개인의 욕구와 지위들을 종횡으로 구별 하고 차별하거나, 지배 또는 복종을 정당화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것이 동귀일체 이며, 그 반대가 各自爲心이다. 동귀일체는 개인 대 개인, 개인 대 집단, 집단 대 집단 간 발생하는 동학적 신념에 역행되는 문제에 대한 폭 넓은 소통 뿐 아니라 인간 대 자연, 인간 대 우주의 문제 역시 폭 넓은 소통에서 이루어진다. 소통이란 단순히 정보적 교환과 이성적 합의에 기반한 동귀일체뿐만 아니라 지극한 동학의 시천주 신앙의 동귀일체를 요청한다. 전자는 외형적 일체요, 후자는 내면적 일체이다. 여기서 외면적 동귀일체와 내면적 동귀일체란 무엇인가? 외면적 동귀일체로는 제 도적 문제적의 극복, 즉 남녀차별, 빈부격차, 장애인의 문제, 교육의 문제, 경제의 불균형, 환경의 문제, 실업의 문제 외 이루 말할 수 없는 문제에 대한 열린 소통의 장을 의미한다. 하나의 문제에 대한 합의가 아니라 지속적으로 열린 소통의 장을 의

31 미한다. 내면적 동귀일체로는 神0의 영역에서 나타나는 종교적 무차별적 평등정신 을 氣化시키는 에너지를 공동으로 받아들이는 수행과 직관의 일체주의이다. 일체의 사회적 직능에 따른 차별을 뛰어 넘고, 인간과 무생물의 차별을 뛰어넘는 至氣의 일 원적 통찰로서의 일체이다. 동귀일체는 시간과 공간의 화해이기도 하다. 시간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요소 로 나누어지는데, 과거에 의해서 현재와 미래가 만들어지는 인과법칙을 뛰어넘어야 한다. 미래지상주의는 미래를 위해서 현재를 수단화하는데 미래를 위한 수단적 방 법론도 뛰어넘어야 한다. 동양의 사고와 수학적 동일률에 의해 영감을 받은 화이트 헤드의 과정철학 역시 현재를 다양한 언변으로 객관화하려는 신실용주의적 아류로 서 그 아류의 한계를 뛰어넘어야 한다. 동귀일체는 과거결정주의도 아니요, 역사단 계설적 운명론도 아니오, 실용주의적 무원칙론도 아니다. 이들의 의도는 모든 인간 의 행위와 감정과 역사를 언어를 통해 실증하려는 시도가 깃들어 있다. 동귀일체는 현실을 초월하지도 않으면서 현실에 매몰되지도 않는다. 현실을 인정하면서 그것을 뛰어넘는다. 외면을 간과한 내면 일변도 역시 문제이지만 내면을 간과한 외면 일변 도의 동귀일체 역시 문제이다. 동학의 종교적 의미는 이 양자를 모두 포괄하면서 내 외를 雙全하는 동귀일체를 추구하는 것이다. 제3장 東學 理想社會의 현실진단 수운은 당시의 사회적 현실을 표현하기를 傷害之數10), 淆薄한 世上 人心11), 下元 甲12) 등의 표현을 통하여 各自爲心13)으로 현세적 물질주의에 매몰되고, 하늘님을 지극히 위하는 뜻은 없고, 사람마다 경쟁하고, 신분 마다 지배하고 지배당하며, 국 가 간 兵馬로 침공하고 지배하고, 지배당하는 相剋時代로 표현하였다. 수운은 이러한 사회를 各自爲心 不順天理 不顧天命 14)의 시대로 보며, 傷害之數 의 運數로 파악하였다. 傷害之數는 先天運數이기 때문에 東學을 통하여 後天開闢이 되어야 하는 상태를 의미한다. 즉 수운이 본 외부적 현실은 道의 부재이다. 야릇한 風說, 造化를 부림, 武器 15) 등의 이야기는 道와 器의 문제인데 그 중에서 道가 중 심 주제이다. 서양이 싸우면 이긴다는 武器에 대한 공포는 참된 공포가 아니고 그러 한 무기를 사용하여 함부로 남의 문화권을 유린하는 道가 문제라는 것이다. 그래서 10) 11) 12) 13) 14) 15)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위의 책, 책, 책, 책, 책, 책, 동경대전,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경대전, 용담유사, 동경대전, 포덕문. 논학문. 몽중노소문답가. 포덕문. 몽중노소문답가., 동경대전, 포덕문. 논학문

32 새로운 무기를 개발할 것이 아니라 無窮 無窮한 道를 깨치고 그 도를 펴는 德을 쌓 는 것으로 西學의 침공을 극복해야 된다고 보았다. 東學이 兵馬를 동원한 외세의 침공과 西學의 各自爲心 종교에 대적하기 위해서는 兵馬를 더 우세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西學을 배우는 것이 아닌 본래부터 있던 우 리의 道를 되살리는 일16)이다. 수운의 이러한 입장은 西學과 서양 문명은 그 자체 各自爲心과 至氣의 결여로 말미암아 東學의 至氣과 同歸一體의 정신에 의해 극복되 는 運數의 것으로 보고 있다. 至氣의 결여란 內外가 둘이 아니며, 존재와 존재자가 둘이 아닌 것을 부정하고 있다는 의미이다. 서학에서는 이 둘을 갈라 要素化시키고 있기 때문에 傷害之數의 相剋運數가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 세상과 이 우주가 모 두 그 자체 神이다. 내가 그 속에 속하는데 나를 또 어디로 분열시켜 나를 볼 수 있 는가. 모두가 우주에 속하는 것 17)으로 정신 영역의 내면에 존재하는 하늘님 內有 神0과 우주에 一氣로 外有氣化하는 통일적 至氣를 찾아야 된다. 수운이 본 현실은 至氣와 天主의 현실이다. 至氣로 보면 天主가 客이고, 天主로 보면 至氣가 客이나 至氣와 天主는 나 를 통해서 볼 때 둘 다 참 나의 근원이다. 내 가 天主를 모시자 말자 至氣가 함께 내 주위를 감싸 우주에 感通하게 되고, 내가 至 氣를 느끼자마자 천주 하늘님이 바로 살아서 나 를 衛護하여 天地 간 造化에 참여 하게 된다. 一動一靜이란 至氣와 天主의 왕래를 거듭함을 의미하는 것이지 至氣와 天主를 망각하고 다시 기억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참된 현실은 이렇게 한 생명체의 내면에서 至氣와 天主의 無爲而化를 실현하는 것을 의미할 뿐 至氣와 天主를 제거한 채 현실의 구조를 배타적으로 방어한다거나 종속되어 지배당하는 관계가 설정된다거나 내부적 제도의 개선 정도를 지칭하는 것 은 아니라는 의미이다. 수운의 현실인식 패러다임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운은 그 당대의 현실을 相 剋時代로 표현함으로써 不變의 대상이 아닌 陰陽 動靜의 太極으로 보았다. 태극은 곧 마음의 문제이지 현실의 문제가 아니다. 相剋時代의 본질은 各自爲心인데 각자 위심은 各知不移의 道를 통하여 극복해야 하는 것이지 또 다른 각자위심의 氣化를 가지고는 안된다는 의미이다. 一氣의 大降接氣를 통하여 天主는 現實이 되고 現實 의 본질이 된다. 참된 현실인식이란 至氣와 天主의 無爲而化를 인식한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至氣一元的 侍天主 정신에 입각해서 德을 펴는 일은 종교적 및 신앙적 문제이며, 동학의 현실인식의 중심 개념이다. 현실의 위기는 종교적 동학에 있어서 道의 위기이다. 동학의 현실인식 패러다임은 道의 위기를 읽고, 道를 萬世에 전할 16) 노태구, 동학의 지기와 천주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동양정치사상사, 제1권 2호, p ) Fritjof Capra 저, 이재희 역,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서울 :범양사, 1997), p. 35., 노태구, 동학의 지기와 천주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동양정치사상사 제1권 2호 (서울: 한국동양정치 사상학회, 2002), p.107에서 간접인용

33 길을 강구하는 방법의 존폐여부를 지칭할 뿐이다. 제4장 수운 동학 이상사회의 계승 - 해월 해월은 세계를 국내와 국외의 관계로 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치 군사적 관계 독립국가 모델로 보지도 않는다. 그는 세계동포주의적 입장에서 세계를 본다. 해월 은 우리나라의 영웅호걸은 人種의 種子니, 모두가 萬國 布德師로 나간 뒤에 제일 못난이가 본국에 남아 있으리니, 至劣者가 상재요 도통한 사람이라. 18)라고 하였다. 동학의 이상사회는 하늘님을 마음에 모시는 사람의 마음이며, 그 마음을 가지고 사 회를 구축하는 사람들의 사회이다. 그렇기 때문에 특정 지역과 특정 민족과 특정 역 사의 영역이 아니다. 이를 줄여서 세계라고 말할 수 있으니, 동학은 세계동포주의에 기반한 이상사회라는 인식의 기반을 가지고 있다. 세계의 변화는 동학의 運數에 따른 변화이다. 마르크스의 자본 논리나 노동의 질 과 형식에 따른 변화도 아니며, 억압자와 피억압자의 운명적 교차점도 아니다. 오직 동학의 운수에 따른 변화이며, 이 변화에 따라서 세계는 바뀔 뿐이다. 해월은 우리 도의 운수는 세상과 같이 돌아가는 것이니 나라의 정치가 변하는 것도 또한 우리 도의 운수로 인한 것이다 19)라고 하였다. 동학에서 道의 運數란 周易이나 正易的 외부적 卦를 빌려서 설명되는 것이 아니다. 외부에 설정한 인위적 상징물은 참된 道 의 運數를 설정하는 기준이 되지 못한다. 참된 기준은 동학의 侍天主이념이 실현되 는 시점과 영역일 뿐이다. 외부적 상징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역사는 我와 非我가 설 정되고 대립되는 갈등의 역사이고, 외부적 상징이 제거된 역사는 我와 非我의 대립 과 갈등이 사라진 조화의 세계이며, 地上天國의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는 어떤 시점을 예정하는 것도 아니고, 어떤 영역 속에서만 이루어지 는 것도 아니다. 현재 속에 同歸一體가 있으며, 현재 속에 各自爲心이 있을 뿐이다. 同歸一體와 各自爲心은 융합할 수 없는 것이지만 同歸一體 속에서도 各自爲心이 나 타날 수 있고, 各自爲心 속에서 同歸一體를 드러낼 수도 있다. 인간의 내면과 그 행 위는 복잡한 수 백가지의 욕구와 자아들로 구성되어 있다. 하나의 부분이 시천주에 맞고, 다른 부분이 맞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하나의 맞지 않은 부분을 가지고 모 든 내면의 잠재된 영역을 무시하거나 폐기할 수는 없는 일이다. 마찬가지로 신앙적 시천주라는 것이 단순히 믿음을 밖으로 표시하고 하나의 조직에 가입한다고 이루어 지는 것이 아니라 나를 이루는 수많은 자아와 욕구들을 잘 파악하고, 하나 하나의 사고와 믿음과 행위들이 확률적으로 더 적절한 분포를 보일 때를 의미한다. 따라서 18) 앞의 책, 해월신사법설, 개벽운수. 19)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오도지운, pp

34 동학의 역사철학은 역사의 장이 외부가 아니고, 내부 마음이다. 외부 세계는 동귀일 체와 各自爲心이 서로 엉켜 자아의 일부분을 연마하는 장소일 뿐이지 그것이 역사 발전의 기준이 되지는 않는다. 역사는 文化와 道의 역사이지 전쟁과 영토와 행정의 역사가 아니다. 海月은 말하 기를 사상은 동방에 있고, 기계는 서방에 있다. 20)고 하였다. 참된 현실은 侍天主 된 自我에 있다. 외부세계가 나를 지배하고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외부 세계를 지배하고 존재하게 하는 데 그 나 가 바로 道이다. 세계를 지배하는 것은 道이지 兵馬가 아니다. 전쟁의 무기는 단순히 기계일 뿐 기계가 세상을 지배하 지는 못한다. 해월은 무기는 사람 죽이는 기계를 말하는 것이요, 道德은 사람 살리 는 기틀을 말한다. 21)고 하였다. 사람을 죽여서 문화를 일으키는 일은 어렵고 설혹 성공하였다 하더라도 잠시일 뿐이요, 사람을 살리는 道를 가지고 세상을 경영하면 영원할 것이다. 道는 內聖外王이니 나를 닦고 밖으로 모범을 보일 뿐 외부적 힘과 강압으로 세상을 지도할 수는 없는 일이다. 해월은 수운의 道로써 西學과 서양의 兵馬를 대적해야 한다는 이념에 가장 충실 한 사람이었다. 동학혁명의 사회개혁적 입장에서 동학을 보려는 사람들은 때때로 해월의 동학혁명 초기에 행한 반대의견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으면서 동학의 無爲而 化思想과 天人合一思想 등은 동학을 정치적 사회적 실천과는 거리가 먼 종교로 만 들었다22)고 하지만 이것은 동학의 일부분에 치우친 견해이다. 해월은 道로써 亂을 지음은 불가한 일이다. 호남의 전봉준과 호서의 徐璋玉은 국가의 역적이요 사문의 난적이라, 우리는 빨리 모여 그것을 공격하자 23)고 하였다. 道는 內聖外王이며, 無 爲而化이다. 亂이란 兵馬로서 자신을 주장을 전달하고, 상대방을 굴복시키려는 것이 기 때문에 동학의 방법이 아닌 것이다. 해월은 교조신원운동을 하기 위해 군중의 동 원을 요청하는 동학도들에게 은인자중할 것을 요청 24)한 기록이 있다. 해월은 현 실이 동학의 교리와 모순 상태에 있다고 할지라도 그것을 兵馬와 群衆을 이용하여 물리력으로 극복하려는 모든 것들을 傷害之數의 방법으로 생각하고 철저한 비폭력 적 노선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해월의 현실에 대한 인식패러다임은 현실의 문제가 나의 행동을 요청하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문제를 극복하는 내적 성숙과 수행을 더 소중히 여겼다. 이러한 비폭력적 방법은 나중에 의암의 3 1운동 때 비폭력운동으로 촉발되는 계기를 마련한다. 20)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吾道之運. 21) 위의 책, 해월신사법설, 吾道之運. 22) 이러한 관점으로 동학혁명을 논하고 있는 서적으로 이현희, 동학사상과 동학혁명 (서울: 청아출 판사, 1984), p.343. 참고할 것. 23) 吳知泳, 東學史 제2장, (서울: 아세아문화사 影印本, 1979), p ) 위의 책, p

35 동학의 정통성은 道로써 세상을 구하는 것이며, 道를 펴는 일이야 말로 가장 강력 한 戰爭이다. 布德이란 말은 가장 힘들고 강력한 수단의 전쟁을 의미한다. 武器를 가지고 대적하는 전쟁은 下手의 전쟁이고, 武器에 의해 승리한 전쟁은 下手의 승리 이다. 道로써 이긴 전쟁은 가장 강력한 勝利이고 道로써 패한 전쟁은 가장 잔인하고 처참한 전쟁이다. 따라서 역사는 전쟁에 의해서 승자와 패자의 역사가 아니고 문화 와 道의 역사이다. 전쟁의 승자들이 인류에 남긴 전쟁의 기술 역사보다 道의 승자들 이 남긴 道의 기술 역사는 더 강력한 것이다. 제5장 결론 이상사회란 혈통도 아니요, 국적도 아니요, 언어도 아니요, 역사도 아니다. 유태인 을 보라. 그들의 혈통과 국적과 언어와 역사가 모두 달라도 유태인이 유태인일 수 있는 근거를 생각해야할 시기가 되었다. 수백년 수천년이 지난 뒤 우리에게 우리 라고 말할 수 있는 유일한 코드 가 있다면 그것은 동학 이다. 동학 속에는 유 불 선 삼학이 애초부터 존재한다. 불학의 정토요, 유학의 완성이며, 선도의 실현처이다. 동 학은 단순히 외세에 저항하는 역사적 사건의 유적만이 아니요, 왕조정치를 마감시 킨 농민군의 혁명만이 아니라, 우리의 정체성을 길이 보전해 줄 중요한 정신적 유전 자이다. 동시에 동학은 인류의 보배이다. 동학은 단순히 우리의 손을 이미 떠나 있 다는 점을 알아야 하며, 우리는 이러한 보배를 널리 세상에 알려 후손들에게 선조로 서 부끄럽지 않은 이 순간의 한 삽을 쌓는 작업을 해야 되겠다. [참고도서] <서적> 吳知泳, 東學史, 서울: 아세아문화사 影印本 Fritjof Capra 저, 이재희 역, 신과학과 영성의 시대, 서울 :범양사, 노태구, 동학의 지기와 천주의 변증법적 관계에 대해, 동양정치사상사 제1권 2호, 서울: 한국동양정치사상학회, 2002 천도교중앙총부, 천도교경전, 동경대전, 서울: 천도교중앙총부출판사, 포덕142. <논문> 김정의, 동학의 문명관, 동학학보, 제2호, 서울: 동학학회, 김한구, 동학의 비교사회 문화론, 한국학논집 제9호, 한양대학교 한국학연구소,

36 배영기, 동학이념과 21세기 새로운 통일 패러다임 정립, 신종교연구, 제2집, 한국신 종교학회, 최민자, 동학의 정치철학적 원형과 리더십론, 동학학보, 제9권 1호. 서울: 동학학회, 한자경, 동학의 이상사회론, 철학사상 제17호, 서울: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노태구, 한국인의 정체성과 천도교의 종교교육, 종교교육학연구, 제16권. 서울: 종교 교육학회, 이현희, 동학과 민족운동, 동학학보, 제9권 1호, 서울: 동학학회, 조휘각, 동학의 민주주의 사상에 관한 연구, 국민윤리연구, 제51호, 한국윤리학회, 임형진, 천도교 통일운동과 전위단체, 동학학보, 제8호, 서울: 동학학회, 오문환, 의암 손병희의 교정쌍전 의 국가건설 사상, 정치사상연구, 제10집 제2호, 한국정치사상학회, 정경환, 백범의 정치사상과 동학, 동학학보, 제9권 2호. 서울: 동학학회, 최무석, 동학의 민족교육운동, 교육철학 제4호, 한국교육철학회, 황묘희, 동학에 나타난 시대개혁론, 동학학보, 제6호. 서울: 동학학회, 2003 황묘희, 동학의 근대성에 대한 고찰, 민족사상, 창간호, 부산: 한국민족사상학회, 오문환, 동학사상이 보는 통치의 정당성 문제, 동양정치사상사, 제2권 1호, 한국동 양정치사상사학회, 고건호, 동학의 세계관에 나타난 전통과 근대의 변증법, 동학학보, 제9권 1호, 서울: 동학학회, 정영희, 동학의 인간평등사상 연구, 동학학보, 제7호, 서울: 동학학회, 손인수, 동학사상의 아동관, 교육사교육철학, 제3호, 교육철학회, 진창영, 동학사상의 교육내용과 생태교육, 종교교육학연구, 제24권, 한국종교교육학 회, 신기현, 동학의 평등인식, 호남정치학회보, 양병기, 동학의 정치사상으로서의 재조명, 동학학보, 제2집, 동학학회, 김정희, 동학의 정치사상, 호남정치학회보 vol 5, 호남정치학회, 김만규, 종교적 사회운동으로서의 동서사상의 교감, 동학학보, 제6호, 서울: 동학학 회,

37 退溪의 林居十五詠 손 오 규* Ⅰ. 서론 퇴계 이황( )의 林居十五詠 은 그 제목 아래에 <次李玉山韻>이라 되 어 있다. 玉山은 晦齋 李彦迪( )을 일컫는다. 그래서 <次李玉山韻>이라는 말은, 퇴계가 회재의 林居十五詠 에 사용된 韻字를 빌어다가 자신의 林居十五詠 을 지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필이면 왜 퇴계는 회재의 韻字와 題目을 그대로 사용 하였을까. 그 이유가 무엇이었을까. 매우 궁금하다. 次韻詩는 흔히 있는 일이며 또 조선조 선비들의 멋스러운 문학 활동이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기에는 회재와 퇴계 두 학자가 차지하는 조선조 士林에서의 位相과 학문세계가 너무나 비범하다. 正祖는 1792년 3월 閣臣 李晩秀를 영남으로 내려 보내어, 3월 19일에는 경주에 있는 晦齋 李彦迪의 玉山書院에 致祭하고 24일에는 안동에 있는 退溪 李滉의 陶山 書院에 致祭케 하였다. 그리고 25일에는 도산에서 과거를 실시하였다. 이 때 과거 에 응시한 인원이 무려 七千 二百 二十八이었으며 이 중에서 답안지(試紙)를 제출한 사람이 三千 六百 三十二名이었다1). 당시로서는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선비들이 참 여하였다. 이 때 정조는 敎書에서 말하기를, 바른 학문(正學)을 존숭하려면 마땅히 先賢을 존숭하여야 한다. 2)라고 하였다. 이것은 옥산서원과 도산서원 致祭의 목적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또 지난 번 邪學이 점차 번지려 할 때 오직 영남 사람들이 先正 之學을 삼가 지켜 흔들리지 않고 마음을 빼앗기지 않아 이로부터 나의 널리 사모하 는 마음이 더해졌다3) 라고 하였다. 이 두 구절을 종합하면, 정조는 회재와 퇴계가 邪學을 물리치고 바른 학문을 수호 * 제주대 교수 1) 嶠南賓興錄, 書啓(왕실도서관 장서각 디지털 아카이브, 慶尙道慶州 玉山書院 以同月十九日...陶山書院...二十四日...祭畢翌日二十五日設場...御題揭 示使之 應製入門七千二百二十八人 收券三千六百三十二張 2) 조선왕조실록, 정조34권, 16년, 3월2일.( 敎曰 欲尊正學 宜尊先賢 3) 위의 책, 정조34권, 16년, 3월2일. 向來邪學之漸染也 惟喬南人士 謹守先正之學 不撓不蒦 自是以往 增我曠慕

38 하여 영남 사림들로부터 尊賢의 대상으로 추앙받고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 것이다. 따라서 정조가 이만수로 하여금 옥산서원과 도산서원에 치제케 한 것은, 당시 晦齋 와 退溪의 士林과 學問에 미치는 영향과 位相에 대해 임금이 국가적 행사를 통하여 공식적으로 인정하였다는 사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퇴계의 회재 詩 次韻은 사 림과 성리학계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고 할 것이다. 회재는 林居十五詠 을 45세인 조선조 중종 30년(1537년)에 지었다. 이보다 앞 서 회재는 41세 때인 중종 26년(1531년)에 金安老의 기용을 반대하다가 성균관 사 예로 좌천되고 곧 벼슬에서 물러나 경주로 돌아왔다. 그 다음 해인 중종 27년(1532 년) 42세 때, 경주 紫玉山 아래에 獨樂堂과 溪亭을 지었다. 그리고 45세 때인 중종 30년(1535년)에 林居十五詠 을 지었다. 그러므로 회재의 林居十五詠 에는 자옥 산에 묻혀 살아가는 山林之樂과 학문의 이상과 포부가 형상화되어 있다. 또 회재는 같은 해 10월 11일, 자옥산장에 머물면서 꿈속에서 있었던 일을 소재로 하여 記夢 이란 시 2句를 지었다. 이 시의 서문에는, 꿈에 임금의 편전에 들어 고향으로 돌아 갈 것을 아뢰면서 임금에게 靡不有初 鮮克有終이란 구절을 인용하면서 殿下 愼終 如始 則福祚無窮矣4) 라고 아뢰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것은 기몽 이 회재가 자옥산 에 묻혀 살게 된 동기를 말하는 동시에 임금에 대한 충의정신이 함축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므로 記夢 과 林居十五詠 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져야 만 한다. 퇴계는 회재와 동시대인이면서도 10년의 차이가 있다. 회재보다는 약간 후배인 셈이다. 퇴계가 회재의 林居十五詠 을 차운한 것은 60세인 명종 15년(1560년)이 다5). 이 해 11월 기고봉에게 사단칠정을 논변하는 답신(答奇高峯書辨四端七情)을 보내었으며, 또 도산서당이 완성되어 학문탐구와 교육이 더욱 깊어졌다. 이 두 가지 사실은 퇴계 개인의 생애나 학문에 있어서만이 아니라 조선조 성리학계에 있어서도 매우 중요한 역사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나 이때는 회재가 配所에서 病死한(63세, 명종8년, 1553년) 지 7년이나 지난 후였다. 그리고 아직 회재의 復爵에 대한 명이 내려지지 않았다. 회재의 復爵은 명 종21년(1566년)에 비로소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퇴계가 회재의 시를 차운하고 제목까지 그대로 사용한 것은 회재에 대한 尊慕之心을 짐작하기에 충분하다고 할 것이다. 이것은 훗날 퇴계가 지은 회재의 行狀을 통하여서도 충분히 짐작해 볼 수 있다. 그래서 짐작컨대 혹시 퇴계는 도산서원 隱居의 전형을 회재를 통하여 모색하고자 한 것은 아닐까. 이언적, 晦齋集, 卷2, 律詩 絶句 乙未冬十月十一日 余在山莊 夢入特進俯伏 上前啓曰 臣有病母遠在 不得久留朝 行將辭去... 古人云 靡不有初 鮮克有終 願殿下愼終如始 則福祚無窮矣 5) 권오봉, 退溪詩大全, 포항공과대학, 1992, 636쪽. 4)

39 그렇다면 퇴계는 회재의 어떤 점을 흠모하였을까. 그리고 왜 퇴계는 회재를 흠모 하였을까. 그리고 퇴계가 도산서원에서 추구하고자 한 산림생활의 이상은 어디에 있었는가. 나아가 퇴계는 회재의 영남사림과 성리학계의 위상으로 보아, 學統授受에 의한 도학적 전통과 성리학적 세계관 확립을 목적으로 林居十五詠 을 차운한 것은 아니었을까. 여기에 대한 해답이 바로 퇴계의 林居十五詠 과 회재의 行狀 에 함 축되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Ⅱ. 林泉幽居와 東魯眞隱 회재의 林居十五詠 은 1. 早春 2. 暮春 3. 初夏 4. 秋聲 5. 冬初 6. 悶旱 7. 喜雨 8. 感物 9. 無爲 10. 觀物 11. 溪亭 12. 獨樂 13. 觀心 14. 存養 15. 秋葵 이다. 그런데 퇴계는 이 중에서 6. 悶旱 8. 感物 10. 秋葵 를 뺐다. 또 4. 秋聲 은 早秋 로, 5. 冬初 는 初冬 으로, 14. 存養 은 存心 으로 제목을 약간 수정하였다. 9. 無爲 는 樂時 로, 12. 獨樂 은 幽居 로 제목을 완전히 바꾸었다. 그리고 회재의 다른 시 樂天 을 存心 다음에 넣고, 記夢 2수는 맨 마지막에 배치하여 林居十五詠 을 완성하였다. 또 퇴계는 林居十五詠 의 순서를 조금 달리 하였다. 우선 회재의 시 2. 暮春 을 자신의 시에서는 7번째에 배치하였으며, 9. 無爲 는 樂時 로 제목을 바꾸어 5번째 에 배치하였다. 그리고 12. 獨樂 은 幽居 로 제목을 바꾼 다음 6번째에 배치하였 다. 이상을 정리하면, 퇴계의 林居十五詠 1. 早春, 2. 初夏, 3. 早秋, 4. 初冬, 5. 樂時, 6. 幽居, 7. 暮春, 8. 觀物, 9. 喜雨, 10. 溪亭, 11. 存心, 13. 樂 天], 記夢 의 순서가 된다. 이런 배치는 상당한 의미를 갖는다. 왜냐하면 林居十五詠 은 15수의 연작시로서 하나의 통일된 주제 아래에 이루어진 전체로서의 의미를 함축하고 있기 때문이다. 林居는 山林隱居를 의미한다. 이것은 회재가 林居十五詠 의 첫머리 5수에서 자옥 산의 春夏秋冬을 읊은 것에서 알 수 있다. 이런 회재의 생각과 의도를 퇴계는 단박 에 간파하였으니, 역시 퇴계의 林居十五詠 첫머리 4수도 도산산수의 4계절을 노 래하였던 것이다. 幽居 벗을 사귀는 마음, 월단에게 묻지 마오 쇄약해지는 얼굴 풍진에 견디기 어렵구려 가난에도 불구하고 요즘 거처를 옮겼더니 앞은 맑은 강이요 뒤에는 푸른 산이네

40 不用交情問越壇 風塵難與抗衰顔 撥貧近日移三徑 前對淸江後碧山 이 시는 회재의 林居十五詠 중 12. 獨樂 을 차운하여 제목을 바꾼 것이다. 이 해에는 도산서당이 완성되었다. 따라서 제 3구 삼경을 옮겼다(移三徑) 는 도산서당 이 완성되어 학문대성의 뜻을 이룰 수 있게 되었음을 말한다. 그리고 제 4구는 背 山臨水의 서당 주변 산수를 노래하였으니, 곧 퇴계와 도산을 말한다. 따라서 퇴계는 이 시에서 주자와 회재의 산수은거를 본받아, 日常 속에서 奇絶處를 발견한 기쁨의 생활, 즉 도산은거를 통한 道의 실천적 삶과 즐거움을 형상화하였다. Ⅲ. 觀物樂時와 欲識前賢 퇴계의 도학적 삶은 학문을 통하여 구체적으로 실행되는데, 그 학문적 태도와 성 격을 林居十五詠 5. 樂時 에서 잘 살펴볼 수 있다. 樂時 만물이 굽고 펴는 조화, 모두가 천지의 이법이며 음양이 옮겨가며 변하는 것도 각기 때가 있구나 나 홀로 태화탕 한잔을 기울이며 안빈락도 백 편을 길게 읊조리리 屈伸變化都因數 爻象推遷各有時 獨飮太和湯一盞 長吟安樂百篇詩 제1구의 都因數 의 數 는 천지자연이 계절에 따라 변해가는 근원이며 원인인 理 法 을 의미한다. 성리학적으로는 理 를 의미한다. 제2구의 爻象 은 그런 이법에 따 라 나타나는 사계절의 현상을 말한다. 제 3구에서 퇴계는 4계절의 현상적 변화를 감상하면서 內的省察을 실천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가 술을 마시는 행위는 이 런 내적 성찰의 명상적 자세를 상징적으로 형상화한 것이다. 그 결과 퇴계는 제4구 에서 길이 은거의 삶을 영위할 것이라 다짐하고 의지를 더욱 굳건히 한다. 그러니 長吟安樂百篇詩 는 은거의 이상과 즐거움을 유지하며 실천적 삶을 살고 싶다는 이 상을 노래한 것이다

41 Ⅳ. 靜中持敬과 聞道樂天 퇴계의 학문은 心性論 에서 독창적 체계를 완성하였다. 심성론은 인간의 마음을 깊이 성찰하고 탐구하여 善한 상태를 유지하는 수양론적 성격을 강하게 지니고 있 다. 이런 생각을 선비의 벼슬살이에 비추어 생각하면, 그것은 곧바로 進退辭受之義 를 말하는 것이다. 의리라는 것도 마음을 다스리는 데에 근원하니, 마땅히 선비는 마음에 근원하는 의리의 올바름으로 進退辭受의 근본을 삼아야만 한다. 觀心 고요 속에 경을 지키려 옷깃마저 단정히 하노니 만약 마음을 본다고 말하면 이것은 두 마음이리 연평에게 이 뜻 궁구한 것을 물으려 하였으나 얼음항아리 가을달처럼 아득하여 찾을 수 없음이여 靜中指敬只端襟 若道觀心是兩心 欲向延平窮此旨 氷壺秋月杳無心 마음이 利慾을 떠나 순수한 상태 즉 타고난 그대로의 性을 지킨다면 만사와 만물 이 그대로 비치니, 참된 모습을 잃을 염려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세속의 삶은 이기 심과 욕망이 넘치니 마음이 흐려지기 쉽다. 퇴계는 <天命圖說>에서 마음을 설명하 되 心體와 心用을 입체적으로 설명하려고 하였다. Ⅴ. 결론 退溪 李滉의 林居十五詠 은 晦齋 李彦迪의 임거십오영 을 次韻하여 제목도 그 대로 사용하였다. 단지 회재의 임거십오영 중에서 悶旱 과 秋葵 그리고 感物 을 빼고 회재의 다른 시 樂天 과 記夢 2수를 보태어 15수를 완성하였다. 회재는 42세 때(1532년) 벼슬에서 물러나 경주 紫玉山 아래에 獨樂堂을 지어 은 거하였다. 그리고 45세(1535년) 때에 林居十五詠 을 지어 隱居之志와 학문적 깨달 음 그리고 道의 실천을 통한 正學의 수호와 進退辭受之義를 노래하였다. 그리고 성 리학을 탐구하여 大學章句補遺, 續或問, 求仁錄 등의 저술을 남겨 性理學史에 빛난다. 또 忘齋 孫叔暾과 忘機堂 曺漢輔에게 書忘齋忘機堂無極太極說後 라는 글 을 통해 성리학에 대한 정밀하고도 뛰어난 식견과 학문적 함축을 보였다. 그리하여 嶺南學派의 창시로 일컫기도 한다. 이상의 논의를 요약하여 결론으로 삼는다

42 첫째, 퇴계가 회재의 林居十五詠 을 次韻한 것은 60세(1560년) 때이다. 이 해 11월 퇴계는 奇高峯에게 四端七情을 논변하는 답신을 보내었으며, 또 도산서당이 완성되었다. 퇴계는 도산서당이 완성되자 회재의 임거십오영 을 次韻하여 도산은 거의 전형을 탐색함과 동시에 회재의 정신과 학문을 찬양하며 景慕의 情을 기탁하 였다. 둘째, 퇴계는 회재의 삶과 학문을 통하여 도산은거의 전형을 모색하고자 한 것이 라 짐작된다. 나아가 學統授受에 의한 도학적 전통과 성리학적 세계관 확립을 목적 으로 임거십오영 을 次韻한 것이라고 생각된다. 셋째, 퇴계는 도산은거를 통하여 자연의 조화로움을 깨치는 희열과 함께 사색을 통한 靜觀의 靜謐함을 內的凝視를 통해 自覺하고 있다. 그리고 대자연의 哲理와 인 생의 順理에 대해 사색하며 그것을 궁리하는 도산은거의 즐거움을 山水樂으로 형상 화하였다. 넷째, 林居十五詠 은 퇴계가 그리는 이상적 삶이요 陶山隱居의 自樂을 노래하였 다. 퇴계는 도산은거를 통해 도학적 삶에 대한 淵源과 모범을 실천하고자 하였으니, 林居十五詠 은 林泉幽居를 통한 東魯眞隱의 意境을 노래하였다고 할 것이다. 다섯째, 林居十五詠 은 퇴계의 학문정신과 尊賢정신이 형상화되어 있다. 따라서 퇴계는 도산에 은거하여 敬을 실천하고 학문을 연구하여, 대자연의 조화와 順理에 동참하는 道의 경지를 노래하였으니, 林居十五詠 은 觀物樂時와 欲識前賢의 意境을 형상화 하였다. 여섯째, 林居十五詠 은 도산은거를 통해 利慾으로부터 벗어난 지혜의 삶과 승화 된 의식의 경계를 형상화하였으니, 內直外方의 敬을 실천하는 自省之心을 노래하였 다. 곧 靜中之敬과 聞道樂天의 意境이 그것이니, 修養論에 입각한 조선조 士大夫詩 歌의 典範이 되었다고 할 것이다

43 南冥曺植이 꿈꾸는 朝鮮社會 한 상 규* 1. 참선비의 길을 안내한 교육자 400 여년전 조선사회를 개혁 하고자 했던 處士. 南冥 曺植(1501 ~ 1572)의 정신은 오늘날에도 그리워지고 날이 갈수록 절실한 까닭이 무엇일까. 남명이 이룩한 많은 업적이 당대는 물론 지금에도 여전히 변함없이 추앙받고 있기에 지금도 우리는 지적인 그리움을 그리워하는 선비의 모습으로 남고 싶어한다. 한 시대를 살았던 지성인의 삶 은 앎 을 통하여 영원히 계승되고, 교육을 통하 여 그와 같은 됨 을 지향하게 되어 있으므로 잠시 동안의 고난과 모순된 삶속 에서도 잊혀 지지 않고 살아나는 것이다. 오늘 여기 모이신 많은 유림의 지도자 들은 바로 이러한 삶에 동참하면서 나의 모습을 先賢과 같이 그리워하고 되고 파 하는 마음의 움직임이 내재하고 있다고 본다. 남명이 살다간 400여년 전 士 林의 정신이 국가의 元氣가 되어 우리의 정신을 지탱하고 있다. 南冥集 編年 67세 조에 당시 선비의 성격과 관련하여 언급하였으니, 일반적 으로 사림은 ①성리학자나 사장학자의 구분없이 士類로 보는 경우 ② 성리학자 와 詞章學者를 통칭하는 경우 ③ 사림파라 하여 선비들의 집단개념으로 보았 다. 이렇게 볼때 선비의 인생로는 반드시 정해진 것은 아니다. 예컨대 과거를 거쳐 벼슬길을 나선 선비가 退官落鄕하여 敎學의 場을 열어 후학을 가르치고 지방문풍을 교화하는 지도자가 될 때 士林派라 부를 수 있다. 조선중기 金宗直의 문도가 일시 중앙정제에 진출하기 이전까지는 출사한 성 리학자 鄭道傳, 權近 등을 훈구파라 하여 앞서 말한 선비에 속하지만 순수한 사 림파와는 구별된다. 한번 출사한 선비도 그들의 在地的 기반이 鄕里이기 때문에 향촌의 교화에 힘썼다. 즉, 이들은 향촌에서 글을 가르치고 예법을 일으키는 禮敎主義者다. 이같은 현상은 유교문화의 공통성으로 본다. 당시의 향촌교화는 경전을 기초 로한 제분야의 지식을 가르치는 역할이 공자의 교학이나 程朱子의 교학에서 찾아볼 수 있다. 또 다른 측면에서는 선비 역할은 정치함의 명분을 正命으로 내세워 각자의 역할기대에 충실하는 경우도 있다. 남명은 言路를 통하여 郡王 * 동주대학 교수

44 之學을 헌책하였는데 이것은 선비의 正命論 이며 향촌의 교화와 民風의 순 화로 사림파의 역할에 충실하였다. 남명에게서 이러한 기절을 엿볼 수 있다. 儒者는 개인적으로나 집단적으로 나 권력, 실리와 같은 욕망에 무관심하 거나, 무력한 사람이 아닌, 현실에 바탕을 두면서 이상적 사회를 꿈꾸는 지성 인이다. 그러므로 유가에서 이해하는 유학은 현실참여를 전제하고서 자신의 학을 체득하였다. 여기서 사림의 현실 참여의식은 修己의 측면에서 學 이 되고 治人의 입장에서 敎 를 성취하려 한다. 이로써 사림파의 역할은 충족 된다. 조선중기 이후에 거듭되는 士禍를 계기로 남명같은 사림의 선비가 주목 을 받으면서 숭앙받는 인물이 되므로 자연히 교학에만 전념하는 선비의 기절 을 순유로 보게 되었다. 남명은 스스로 성찰하기를, 내 일찍이 才와 德이 없으니 어찌 일마다 할 수 있겠는가마는 만일 옛날 의 덕을 높이고, 후학을 권장하여 얼마간의 賢才를 설발하여 각기 그 재능을 높이고 앉아서 성공함을 보는 일이 좋다. 고 하였으니 이는 그가 꿈꾸는 조선사회의 중심이 선비라고 생각하기 때문 이다. 조선시대의 사림파의 선비는 관직보다는 향리와 산림에 은거함으로써 출사의 선비보다는 높은 기절로 숭앙받고 있었다. 동시에 교학과 국정에 대한 헌책으로 순수한 선비의 기절을 保持할 수 있었다. 남명의 이와 같은 사림정 신은 出處大節에서 나타난다. 조선시대 유학의 興起와 교학의 요람은 사회발전의 기본 바탕이라고 보고 나아가 유학은 학문적 성장과정서 교학의 역할이 至大하여 전통논리를 흡수 하는 가운데 민본정치의 이념으로 받아들였다. 유학이 政敎이념과는 별도로 인간본연의 본성을 회복하고 유지하기 위하여 훈구학자와는 대조되는 사림학 파에 의하여 새로운 私學의 발달을 가져왔다. 사림의 공적은 백성을 순화하고 군왕을 교화하면서 인재양성에 뜻을 두면서 차츰 특정의 학자를 중심으로 門徒를 이루어 학통을 형성하게 이르렀다. 이러 한 학통은 주로 영남지역의 선비들에 의해서 조선의 鄒魯之鄕 이라는 유 학의 고장이 형성되었다. 그 학파는 조선후기 실학자들에 까지 이어져서 남인 의 영수 許穆은 남명의 사상을 계승한 鄭逑의 사상을 계승하였다. 남명이 성 장한 다음 1519년 己卯士禍는 도학정치의 맥을 끊어 놓았으나 학문과 사색의 도장은 날로 흥기 하였다. 이로써 영남사림의 학풍은 조선 초 관학에 대칭되 는 사학의 태동으로 한국유학의 전통을 수립하였다. 즉 吉再이후 형성된 학통 은 이황 조식대에 와서 사림의 선비정신은 교학활동을 함으로써 두 학파의

45 사상은 더욱 생명력을 얻게된다. 영남우도의 조식은 金宏弼, 鄭汝昌의 학풍을 계승하여 南冥學派를 형성하여 退溪學派와 더불어 양 학파는 공자 이래 중국의 原始儒學과 주자의 성리학을 받아 들여서 각기 다른 학문사상과 특성을 지니게 되었다. 이러한 연유에서 유하연구의 대가 朴鍾鴻은 한국사상사논고 에서 유학이 한반도 문화형성에 정신적 일익을 담당함과 동시에 중앙집권적 체제형성에 있어서 지도이념의 구실을 하였다고 하였다. 중앙집권체제형성에서 지도이면의 역할은 정신적인 면에서 긍정적인 측면이 있었으나 후일 파당으로 사사를 앞세우는 일면도 있었기에 학파의 순수성이 훼상되기도 하였다. 여기서 학파의 형성에 긍정적인 요인이 된 배경은 成宗代 부터 新進士類를 우대하여 지방 문풍 진흥에 이바지를 하였다. 대개 학통의 연원은 문하에 나아가 수학하는 경우와, 科擧場에서 選擧取才한 知貢吏를 사 부로 존경하고 그 사상과 학문을 따르고 숭모하는 데서 비롯된다. 학통의 연원은 私淑한 문인의 계통과 어느 한 인물에 의해서 나타났다기 보다는 당시의 정치문화속이 잉태한 사림의 정신이 강직한 先行性과 각고의 탐구심이 강직한 把持力으로 나타나서 타 학파의 追隨를 불허하였다. 이러한 풍토가 조선중기의 교학을 난숙하게 하였다. 또한 교학이념의 多端한 방법으 로 발전할 수 있는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로 인하여 학교의 제도와 學規가 속 출하였고, 사학기관이 발달하여 신진사류가 다수 배출되었다. 일단 배출된 신 진사류는 향리에 생활근거를 두면서 농촌의 애환을 직접 체험하였으나 때로 는 上京從事하는데 의미를 두었다. 그러나 남명의 문도는 대개 侍從하였을 뿐 관직보다는 학문을 더 좋아하여 교학과 行身에 유념하였다. 이들이 주로 교학 하는 장소는 서원을 중심으로 存養省察 과 修身治己 를 宗旨로 삼았다. 이들은 일신의 안녕을 안목에 두지 않고 오직 存天理竭人欲 하려는 삶의 태도가 있었으므로 당시 서원을 중심으로 한 교학활동은 인륜을 목표로하고 있었다. 남명학파도 퇴계학파와 같이 정치적인 패퇴를 그들의 명분론으로 보 상받고자 정교이념과 맞설 수 있는 사상으로 윤리적 예교주의를 정도로 받아 들였다. 그런 까닭으로 節義만이 이러한 사상을 보존할 수 있었다. 구체적인 교학규범으로 義 를 내세웠던 남명은 의리를 내면적 근거와 우주적 근원 에서 해명하려는 철학적 삶을 성리학의 과제로 전면에 내세운 것이 예학의 실천적 行道다. 그 행도가 不就와 順自然의 道家的 삶의 자세와 가깝다고 보게 된다. 그러나 성리학적 원리에만 구속받지 않으려는 의도가 있었으므로 퇴계학파 로부터 배척을 받은 적도 있다. 퇴계학파에서는 陸九淵과 王守仁의 학문은

46 중국에서 성하지 않고 간혹 숭상하는 자가 있을 뿐이다 고 말하였다. 이황의 문도인 柳成龍이 이같은 견해를 표명한 바 있는데 明의 왕안석이 陽明을 종사하는 것은 覇道하는 유자 라고 하여 다소 선적인 태도를 비난하 였다. 이황은 양명은 학술이 매우 어긋나고 그 마음은 굳세고 사납다고 하면 서 왕양의 모든 변설은 장황하며 인의를 해치고 천하를 어지럽히고 있다면서 배척하였다. 남명의 학문경향은 퇴계학파와는 달리 양명학을 부정한 적이 없 고 오히려 폭넓게 이해하였기 때문에 문도들의 학문성향도 성리학에만 얽매 이지 않았다. 2. 제자교육에 성공하여 후일 남명학파를 형성하다. 남명에게서 배운 수많은 문인들은 대개가 경상우도에 밀집해 있다. 남명의 사우, 문인, 사숙인에 관한 기록은 덕천원생록 7권, 산해사우연원록, 덕천사우연원록 등이 있다. 이중 산해연원록 에는 문인과 종유인의 구 분없이 111명이고, 덕천산우연원록 에는 135명 종유인이 52명 사숙인이 162명으로 등재되어 있다. 남명이 30세부터 과업을 포기하고 독서와 교학에 만 전념하던 산해정(김해)시절에 정복현, 이제신, 권문임, 노흠, 권문현 등이 와서 배웠고, 48세부터 60세까지 약 12년간은 합천 雷龍亭 (三嘉)에서는 정인홍, 이광우, 이광곤, 문익성, 오건, 강익, 전치원, 하응도, 박제현, 진극원, 박제인, 하항, 하각, 박찬, 오운, 이정, 조종도, 이천경 등이 보인다. 남명 61 세부터 별세할 때까지 산천재(산청원리)에는 이조, 이창, 정탁, 조원, 김우옹, 이대기, 이노, 유종지, 최영중, 김효원, 정구, 최항, 유대수, 곽재우 등이 있으 며 강학장소가 밝혀지지 않는 문인으로 배신, 하청주, 이요, 이유인, 오간, 김 면, 도희령, 박제현, 이욱, 박순, 최원, 박인량, 하혼, 강숙, 최녁, 송당수, 노순, 이현우, 정인기 등이 있다. 이처럼 영남 우도에서 최대의 문도를 이루어 이후 남명학파 혹은 南冥別派(安鼎福의 말)를 형성한 것은 한국유학사에서 큰 비중 을 차지하고 있으며 특히 남명의 교육적 역량이 지대함을 말해 준만큼 문인 들의 처신과 행적도 조선조 선비들 중에서 가장 뛰어났기에 남명의 교육적 업적은 퇴계를 壓頭하고도 남음이 있다.(이만규, 조선교육사 1950)는 후세의 평가가 나온 것은 영남우도의 학이 남명의 출현에 이르러 一高峰을 이루었기 때문이다. 남명의 폭넓은 인간성과 高節한 志操는 남방의 大終山 같아서 智異 山下의 기상을 그대로 표출했다. 이는 영남좌도의 소백산하의 이황의 문도와 뜻을 같이 하면서도 학문의 次序 와 방법을 달리하여 남명학파로서의 특성을 지니고 있다. 조식의 사상은 도학 자적 삶의 자세를 중시하였다. 그는 老子의 우주본체에 따르는 理法을 당연시

47 하였으므로 어떻게 하면 실천할 수 있을는지 그 방도를 강구하는데 힘썼다. 더 욱이 홀로 우뚝 선 기절은 우도인의 풍토와 관련하여 崇文好武하며 力農好學하 는 생활자세가 어우러져서 남명학은 성립되었다. 남명학이 특별히 유학에서의 학통은 그들의 학문적 성격과 동양의 시대정신과 관련되어 있다. 이들이 한결같이 궤를 같이하는 학문의 공통연원은 다소의 차이는 있으나 도통의 시발은 伏羲에서 요 순 우 탕 주 문 무왕의 중국사상에 일정한 맥 을 이루었다. 이는 다시 춘추시대의 공 맹시대에 중절되다시피 하였으나 송 대에 주렴계, 장재, 정호, 정이, 주희에 와서 도학의 전수가 활발하게 전개되 었다. 여기서 주희의 도학은 조선시대 사상을 지배해왔다. 남명학파는 성리학 을 학문사상의 토대로 삼으면서 諸兵學과 老壯學의 정신을 어느 정도 수용하 였다. 이렇게 하여 형성된 남명학파는 대개 세가지 형태로 나타났다. 그것은 ① 학문에 힘쓰면서 출사한 문도로서 나중에 사림으로 돌아와 교학 으로 생을 마친 오건, 정구, 김우옹, 김효원 등이 있다. ② 남명과 같이 처음 부터 은일지사로 지낸 문도로서 최영경, 이재신, 하항 등이 있다. ③ 후일 잠 시 出仕한 적은 있으나 임진의 병으로 활동한 문도로서 곽재우, 조조도, 오운 등 세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여기서 대부분의 문도는 남명의 정신을 이어 받아 은일지사로 교학에 종사하였는데 기묘사화(1519)를 계기로 이러한 경향 은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것은 하나의 역사적 사실로 자연히 유자들은 산림 으로 돌아가거나 아예 출사를 단념하였다. 이 당시 유자들의 일반적인 성향은 ① 순수한 산림파로서 성운, 서경덕, 조 식, 하항, 이제신 등의 도학자와 ② 출처의 절충파로서 이황, 김인후, 기대승, 이이 등의 경세학자 ③ 본격적으로 중앙정계에 진출한 심의경, 류성룡, 이산 해, 정여립, 김효원 등으로 나눌 수 있다. 이와 같은 분류는 처세관에 따라 다 르게 나타나며 학문관고도 관련되어 하나의 도학연원을 따르게 되었다. 도통 의 연원을 분류한 안정복은 이황을 이언정의 영향에서 보았는데 남명은 남명 별파로 규정하여 학문과 정신세계의 독자성을 시사하고 있었다. 안정복 정구 의 문하에서 장현광, 허목이 배출되었으며 허목은 이익, 안정복으로 이어지는 조선후기 실학사상의 실질적인 영향을 준 인물이다. 이렇게 본다면 지금까지 사학계에서 알려진 실학의 태두 李瀷은 남명학파와 무관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이로써 남명학파의 적전인 정구는 남명의 장자격인 오건의 제자이기도 하다. 남명에 의하면 퇴계문하에서는 류성룡, 김성일이 가장 이름나 있으며 오건은 양문에 출입하여 행동이 가장 높다고 하였다. 정구와 김우옹은 이황의 가르침을 받았으나 남명의 고제로 정구와 김우옹을 들고 있다. 이상에서 살펴 본 남명의 학통을 계승한 남명학파는 같은 지역적 연고로 인해서 이황의 학

48 통과도 관계되면서 남명학파 라는 독특한 유학정신과 학문에서 오는 도통 을 형성하였다. 이들의 학문세계는 중국고대의 유학이 범위를 벗어나지 못하 였으나 정신세계, 특히 선비정신은 남명의 영향을 크게 받았고 실제로 그러한 모습이 은일지사의 교학자로서 임란 초에 남명학파의 창의 및 의병활동은 경 상좌도 내지 타도의 의병봉기에 촉매제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흩어진 민심을 수습하고 도망한 군민을 집결시키는 데에도 큰 역할을 수행하였다. 그 결과 남명학파는 그들의 의병 활동을 통하여 국난극복에 일익을 담당하 였다. 그 구체적이 전과는 (1) 전국에서 가장 먼저 창의함으로써 다른 지방의 창의를 촉발시키는 효과를 가져왔고, (2) 남해상에서 아군의 제해권 장악을 위한 배후기지를 제공해 주었으며, (3) 낙동강 방어선과 진주성을 잘 지킴으 로써 왜적의 호남 진입을 차단하는 동시에 군량을 비롯한 군수 민수물자의 공급을 원활히 할 수 있었고, (4) 초기 관 의병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상호 협조체제를 유지하는 데에서 전수 양면에 다대한 성과를 거둔 동시에 다른 지방에도 시범이 될 수 있었다.(남명학연구 2집 이수건, 1992 : 22) 3. 출처가 분명한 선비를 기대하다. 관직에 나아가고 물러나는 길은 쉽지 않은 것으로 자의로 할 수도 없고 타 의로 원치 않는 처지로 몰리기 쉬우므로 그 실천에 있어서 매우 어렵다. 小 學 에서도 進退의 절도를 언급하여 40세에 관직에 나아가서 사물에 대응하 여 計策을 내여, 임금과 도에 맞으면 복종하고 옳지 않으면 관직에서 떠난다 고 하였고, 70세가 되어 벼슬을 그만두고 물러난다고 하였다.(立敎) 또한 고대 아테네의 플라톤(Platon B.C 427~347)도 교육의 단계서 35세 부터 50세까지 군사 및 정치 실무에 참가하고 50세까지 배워야만 국가의 지 도자가 될 수 있다(哲人政治)를 들고 있다.(한상규, 교육사상사 형설출판, 2009) 오늘날 우리의 지도자들은 어떤 형태로 나아가는가. 학연과 지연 등 인맥의 친소와 개인의 충성도에 따른 인사는 없는지 인사의 기준이 의에 두고 있는지 이에 두고 있는지를 남명의 출처 정신에서 배우고 실천해야 한다. 조선시대처럼 출사를 가장 큰 명예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선비 실천해야 한다. 조선시대처럼 출사를 가장 큰 명예로 생각하는 풍토에서 선비 의 몸가짐은 한시대의 정신문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선비는 학과 사가 정기에 나타나야 한다고 볼 때 선비의 삶이 학문과 사환의 길에서 불가분의 관계가 있어 일반적으로 관직에 임할 때 廟堂儒 로 부른다. 그러나 남명은 仕宦의 길을 단념하고 사림의 선비로 自足하였다. 成運은 일찍이 남명의 출처

49 에 관하여 다음과 같이 말한 적이 있다. 남명은 그 居함에 노자, 장자의 생활 관과 같았고 평생을 도를 추구하였기에 1572년(72세)에 제자들에게 남긴 유 언에서 處士로 칭함이 옳다고 하였다. 또한 명종대의 여론에 의하면 조광조 이후조정에서는 새로 인재가 필요할 때마다 남명과 성수침을 가까이 하여 성 학성취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 고 하여 그들의 청절과 학문을 높이 숭앙하였 다. 이처럼 남명은 당대 모든 선비의 사표가 되었으며 사림의 종사로 존대받 는 인물이 되었다. 이러한 사실로 인하여 남명은 학유들에게 도학의 입지를 일으키게 하였고, 시정의 절실한 인물로 조정에서도 그의 정론을 따르는 여론 이 형성하기에 이르렀다. 예컨대 선생은 평생 세상의 도에 뜻을 두었고 백 성의 고통에 늘 근심하였으며 국위에 대하여 탄식을 억누를 길이 없었다. 고 정구는 제문에서 밝혔다. 또한 허목도 남명선생신도비문 에서 선생은 구 차스럽게 따르지도 않았고 가만있지도 않아서 출처의 대절이 분명하였다. 이 율곡도 石堂日記 에 遺逸을 천거하여 기용하는 일은 있으나 虛聞으로 실제 성이 없다고 지적하고 曺某 같은 분이 仕路를 포기하고 사직서를 올려 서 時政의 폐단을 말하였다 고 하였다. 이처럼 남명은 산림에 있으면서 시정 의 참여를 포기한 적이 없다. 그의 정신세계는 冶隱 吉再先生傳 을 쓴 적 이 있었으므로 처사로서의 생활에 크게 자족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조정은 사림의 인재를 전혀 무시하지 않았으므로 명종이 思政 殿 에서 남명을 만남으로써 사림의 실세로 세인의 관심을 집중시켰다. 그럴 수록 남명은 정치현장의 유인을 물리치면서 언론으로 정치참여를 하여 사림 파 선비에게 상소 의 신뢰성을 갖게 하였다. 學記 에 구산 양씨의 출처 관을 매우 흡족하게 생각한 남명은 이렇게 말했다. 道를 행하기 위한 벼슬과 祿을 받기 위한 벼슬은 같지 않다. 常夷甫는 집이 가난하였으므로 召命에 응하여 벼슬에 나아가서 神宗이 우대한바 있다. 때에 두어가지 정무를 맡아 일하면서 登聞鼓 梁院등의 낮은 직책에 만족했다. 그는 祿만으로도 집안을 넉넉히 할 수 있었지만 모두 받고 사양하지를 않았다. 그 후 正叔이란 자가 백의로 발탁되어 權請하는 직책을 받았다. 이때 조정의 다 른 직책도 겸임하게 했으나 사양하였다. 대개 전일에 벼슬하지 않던 것도 도 를 위함이므로 오늘의 벼슬은 그 관직만으로도 행도에 족하므로 받았다. 그렇 지 않다면 이것을 구차하게 받는 록이 된다. 그런데 후세에는 도학이 밝지 않 아서 군자가 사양하고 받음이, 취함과 사함의 곡절을 능히 아는 사람이 드물 다. 까닭에 常公의 사양함을 사람들이 옳지 않다

50 고 했다. 이 말은 취사와 불취의 행도는 관직정도나 녹봉에 의해서 행신할 수 없다는 취지를 말해 준 것이다. 군자도 이러한 견지에서 벼슬을 하는 것 과 그만두는 것 또한 벼슬을 오랫동안 하는 것과 잠시 하는 것 등의 모두가 적당한데에서 비롯되어야 하며 進 退에 분명한 도가 있어야 한다. 고 했다. 이런 정신을 수용하여 남명은 出仕를 반드시 옳지 않다고 한 적은 없다. 그 리하여 제자들 중에는 관직에 진출한 자도 많다. 그때 마다 관직에 나간 제자 에게 牧民官의 자질을 훈도한 바 있다. 그 중에서 1551년 문인 金希參이 경 상좌도의 敬差官으로 여러 고을을 순회할 때 남명은 그에게 목민의 바른 길 을 일깨워 주었다. 또한 수제자 吳健이 조정에서 학록으로 재직할 때 의로써 행신하도록 훈도한 바 있다. 그런 후 1565년 4월 文正王后가 죽고 尹元衡이 드디어 삭탈 관직되자 정국은 다소 평온하게 이르자, 수차의 제수에도 불취하 다가 드디어 소명에 응하여 사정전에 나아갔을 때 제자 박인은 남명에 대하 여 출처대절을 대개 짐작하였다고 한 바 있다. 김우옹에게는, 장부의 거동에 무게가 있어서 큰 산줄기를 깍은 만길 절벽 같아야 한다. 때 가 되면 자신의 역량을 발휘하여 사업을 이루어야 한다. 千釣의 쇠뇌는 한번 쏘아 만겹의 굳은 성을 능히 부수는데 쓰며 생쥐를 잡는데 쓰지 않는다. 하여 大學 과 性理大全 으로 학문적 입지를 강화하여 선현의 올바른 식견을 받아들이도록 충고 하였다. 뿐만 아니라 자신이 스스로 行道, 爲學,行 義하는 모습을 제자들에게 보여 주었는데 그의 詩文중에서 출처대절의 정신 이 강하게 표출된 시<題德山溪亭柱>에서 선비의 높은 기절이 어떻게 나타났 는지를 살펴보면, 천석드리 종을 보라 /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울리지 않아 / 만고의 천왕 봉은/ 하늘이 울려도 오히려 울리지 않는구나(請看千石鐘 非大扣無聲 爭似頭 流山 天鳴猶不鳴) 지리중턱 아래 전야에 은일하며 교학과 사색의 장을 열어 자족하는 선비에 게는 자연과 같은 청고한 모습 외의 다른 모습은 전혀 없는 듯이 보였다. 자 신을 천석종에 비유하면서 사림의 명분을 지켰기에 스스로 호를 南冥 이 라고 칭하면서 지우 成守琛과 같은 산림생활을 기쁘게 생각한 바 있다. 다음 의 시가에서 그의 이러한 도가풍의 정신세계를 엿 볼 수 있다

51 두류산 양단수를 내 듯고 이제 보니, 도화뜬 말근 물에 산영조차 잠기어 라. 아희야 무릉이 어디매오, 나는 옌가 하노라 成東洲에게 준 시에서도 앞서 기술한 싯구(詩句)처럼 자연적인 삶의 모습이 엿보였고, 金卓爾에서 준 시에서도 관직을 사양하고 鹿門下에 들어가 버린 寒 陽 龐氏의 고사를 인용하였는가 하면 俗浴 에서 塵世의 혼탁한 시류를 씻 어버리겠다는 의지로 탁한 무리와는 멀리하겠다는 선비의 정신을 보였다. 당 대는 물론 후대까지도 남명의 이러한 정신세계가 선비들이 선망하는 기준이 되고 있다. 4. 서민이 잘 사는 사회를 꿈꾸다. 백성들의 민생을 위한 정치, 경제 개혁을 표방하여 국민들의 마음을 읽고 아픈 상처를 치유하면서 빈자와 병자 등 사회에서 소외된 계층을 위로할 줄 아는 사람이 남명이다. 산골에서 쟁기질하며 보리밥에 된장 나물국으로 생계 를 유지한 남명은 누구보다도 민초들의 고통을 잘 알고 있었다. 한민족은 고 조선 시대부터 법보다는 도덕성과 개인의 덕성을 존중하는 풍토를 만들었다. 단군만 해도 弘益人間의 사상속에 하늘과 땅 사이에 존재하는 인간을 우주의 작은 실체로 겸손한 존재로 여겨왔다. 즉 백성의 뜻을 하늘에 전달하는 畏敬 이 天心을 불렀고 하늘은 인간의 마음을 헤아려 복을 내리는 人心과 연결하 였다. 세종은 오랜 가뭄에 토방에서 거친 멍석자리로 거처하고 소찬을 하여 농민과 함께 고통을 극복하였다고 한다. 남명은 國政과 爲民에 대한 현실을 두고만 보고 있을 수 없어서 布衣의 신분으로 간절한 소망을 상소장과 시 부 의 문장을 통해서 자신의 심정을 밝혔다. 여기서 그는 時局에 대한 애국충정 의 정신은 사림의 선비로서 느끼는 현실감각과 이상론에 대한 욕구성향이 벽 을 마주보는 듯이 날카롭고 엄숙하다. 백성을 위한 民政은 군왕의 성덕을 요 구하게 되고 그렇지 못한 현실은 비판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다. 이러한 현실 을 보는 사림정치문화는 개혁의지가 포함된 경세치용적 입장이 나타나게 마 련이다. 조선 후기의 실학적 차원의 단계는 아니었으나, 주자학적 사회질서 내에서 정치문화가 성숙된 조선중기에 남명과 같은 개혁론은 확실히 진보적 이다. 이같은 사고는 주자의 理가 자연과 사회를 일관하는 영원한 절대적 존 재로 보고 있다는 것에 근거한 것으로, 현실적 사회질서는 절대적 진리가 불 변의 자연질서로서 불변한다는 성향을 보여 주었다. 여기서 질서의 인식은 개 별 사물의 理 에서 시작하여 일원적 이의 인식에 도달할 때 개인의 주관

52 적 인식은 객관화하여 동일한 인식이 되며 그것은 때로는 개별사물을 제약한 다. 즉 치국평천하의 원리는 보편적 도덕률의 실현이 통치자 군왕에 의해서만 가능 해 질 수 밖에 없는 절대적 통치논리를 뒷받침해준다. 남명은 1555년 (명종10)단성현감을 제수받고는 그 직을 辭免하는 辭丹城縣監疏 를 군왕 에게 올렸다. 소장의 내용을 간추려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관직에 뜻을 두지 않고 있는 자신의 솔직한 심정을 고백하면서 호사 생활에 만족하고 있음을 示唆했다. 둘째, 지금 이 나라는 근본이 서지 않았고 인심도 이미 조정과 멀어지고 있 으므로 앞날을 예측하기도 어렵다고 했다. 더욱이 이런 시국에도 불구하고 조 정의 내외 관료들의 부패가 극도로 문란한데도 대책을 세우지 못함을 안타깝 게 호소하였다. 셋째, 변방의 방비는 소홀하고 조정은 재물로 인사를 처리하여 자격있는 장 수는 없으며 城內는 군졸도 없는 형편이다. 이런 때 왜군이 변방을 혼란시키 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조정에서는 아무런 조치도 내리지 못하고 있는 무능함 을 지적하였다. 넷째, 國事는 구구한 정법에 있지 않고 국왕의 올바른 마음에 있음을 명심 해야 하며 이를 위한 방도로 군왕은 학문을 좋아하고 백가지 덕으로 통제해 야 한다는 요지다. 사단성현감소 에서 찾아 볼 수 있는 위민사상은 군왕을 교화하려는 의 도와 인을 위하는 애국충정의 깊은 정신적 고뇌가 있었다. 비록 직설적인 표 현으로 군왕의 실정을 비판하기는 했지만 그 어느 누구도 흉내 낼 수 없는 언 론의 정도는 용기 있는 선비만이 지닐 수 있는 정신으로 그렇게 해서라도 살 기 좋은 조선사회를 바라는 소망을 표현한 것이다. 5. 남명을 평가한 史官의 기록 남명은 選民意識을 소유한 선비가 아닌 모든 사람과 함께 삶을 걱정하고 가난 하게 살았던 처사였다. 이러한 그의 정신세계를 史官은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조식은 방정하고 염결한 사람으로 형제와 같이 살면서 자가의 재물을 자축하지 않았으며 학문에만 뜻을 두고 과거는 일삼지 않았다.(명종실록 권13, 7년 3월 9일, 7년 7월 11일 조) 조식은 사도사 주부로 삼았다. 조식은 사람됨이 맑고 절개가 굳어 예 법으로 몸을 단속하고 영욕 이달로써 마음은 움직이지 않으며 조행이 뛰

53 어나서 세상에 이름이 났다. (명종실록 권14, 8년 윤 3월 18일조) 조식은 천성이 감개하고 정직하고 세상 따라 부앙하려 하지 않았고, 몸을 깨끗하게 가져 속된 사람과 말을 할 때는 더럽힐까 두려워하여 뒤도 돌아보지 않고 떠날 듯이 있었으며 국가에서 누차 초빙하였으나 응하지 아니하였다.(명종실록 권12, 8년 5월 6일조) 단성현감 사직 상소문을 올려 문제시 될 때 성균유생 5백명의 상소문 속에 조식은 강직하고도 절실한 의론으로 정녕 나라를 걱정한 성심에서 나온 것이며 시폐에 강복하지 않고 언로가 막히어 사림의 기대가 무너진 것입니다.(명종실록 권19, 10년 12월 13일조) 누차에 걸쳐 벼슬을 내렸으나 나아가지 않는데 대하여 심의겸은 차에 서 조식 같은 이는 유일의 선비로서 조수의 은혜를 입고도 소명에 달려와 봉직은 않고 있지만 임금에게 충성하고 나라를 사랑하는 말이 일찍이 위 에 전달되었습니다.(명종실록 권33, 21년 7월 19일조) 명종이 서늘한 때를 기다려 남명을 역마를 태워 보낼 것을 경상감사 에게 지시하였다.(명종실록 권 33, 21년 7월 19일조) 명종과 사정권에 나아가 만난 남명은 가언과 선정의 치도를 논하였 다.(명종실록 권 33, 21년 10월 7일조) 이때 남명은 마지못해 올라와서 사대한 뒤에 즉시 호연한 마음으로 고향으로 돌아갔다 이때 입대했을 때 에 식의 말은 대단히 예리했다고 사신은 기록하였다.(명종실록 권33, 21 년 10월 21일조) 고향으로 돌아가는 한강가에는 선비들이 남명의 고명을 흠모하여 전 송하는 사람이 많았다.(명종실록 권331 21년 10월 21일조) 이상에서 살펴본 남명이 꿈꾸는 조선사회는 이 땅에 선비문화를 만들어 낸 사림의 표상으로 정치 사회 전반에 걸쳐 도를 실천하여 경상우도의 선비 문화의 중추적 역할을 하였다. 남명의 삶의 세계는 그의 삶의 단계에서 學而 不厭 誨人不倦 한 가운데 군자의 길을 개척하였다. 제자 松岩 李魯는 龍蛇日記(임진 11월 17일)에 우리들이 평소 무엇을 배웠 으며 무엇을 읽고 논했는가. 신하는 충에 죽고, 자식은 효에 죽는데 있었던 것 이 아닌가. 평소에(우리가) 배우고 논한 것이 바로 이에 있도다. 고 하였다. 남 명의 선비정신은 이처럼 義의 실천력이 후세에 까지 영향을 주고 있음을 증명 하고 있다

54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이상사회론 박 문 현* 1. 머리말 安藤昌益( )은 일본에서도 최근에야 알려지고 연구되기 시작한 에도 중기의 반봉건적인 氣철학자이다. 일본근세철학사에 있어 보기 드문 독창적이고 진 보적인 사상가로 지적되고 있는 그는 농민 운동가로도 숭앙을 받았다. 確龍堂良中 柳枝軒 등의 호를 가진 昌益은 지금의 일본 秋田縣의 大館市에서 부농의 아들로 태 어나 한때 禪僧의 신분을 가지기도 했으나 교토에서 의학을 배워 의사의 길을 걸으 면서 여러 분야의 학문을 연마해 백과전서적인 지식인이 되었다. 농민운동으로 인 해 幕 로부터 탄압받은 昌益이 잠적한 이후 약 150년 동안 잊혀진 사상가 로 묻 혀 있다 1899년 교토대 철학교수 狩野亨吉이 고문서 중에서 自然眞營道 를 발견 함으로써 다시 세상에 빛을 보게 되었다. 그러나 그의 이름이 널리 알려지게 된 것 은 1949년 駐日本 캐나다 대표부의 대표로 와 있던 역사학자 E.H.노먼이 잊혀진 사상가 - 安藤昌益에 대하여 를 써서 昌益을 민주주의의 선구자로 소개하면서 부터 이다. 주로 일본의 민간학자들에 의해 연구되고 있던 昌益의 사상은 1992년 중국에 서 中 日安藤昌益심포지움 이 열린 이후 국제적으로 더욱 활발한 연구가 이루어지 고 있다. 昌益이 남긴 저작으로 현재 확인된 것은 세 가지이다. 이미 간행된 自然眞營道 와 稿本 統道眞傳, 稿本 自然眞營道 이다. 刊本 自然眞營道 는 초기의 저작으로 한방의학과 그것의 방법론적 기초가 되는 역경 에 대한 비판을 통해 昌益의 자연 철학과 의학의 기초이론을 설명하고 있다. 고본 統道眞傳 은 중기의 저작인데, 내 용은 유교 불교를 비롯한 전면적인 이데올로기를 비판함으로써 그의 사회사상을 선 명히 드러내고 있다. 또 인체 생물 만국을 대상으로 그의 자연관 의학을 논술한 부분 도 포함되어 있다. 고본 自然眞營道 는 昌益의 전 생애에 걸쳐 쓰여진 手稿를 집대 성한 것으로서 大序卷 과 100권으로 되어 있으나, 26권 이하는 불타 없어지고 16 책만 남아 있다. 내용은 언어학, 유학, 불교, 神道, 한방의학등에 대한 비판과 儒者, 군인, 의사, 종교인들에 대한 비판으로 되어있는데 특히 法世物語卷 은 짐승, 새, * 동의대 교수

55 물고기, 벌레들의 대화를 빌어 인간사회를 통렬히 비판하고 있어 그 묘사가 흥미롭다. 昌益은 인류의 역사를 太古에 존재했던 自然世 에서 聖人 이 출현한 이래의 현실 사회인 法世 를 거쳐 미래의 이상사회인 자연세 로 되돌아간다고 봤다. 다시 말하 면 역사를 자연세 - 법세 - 자연세로 보는 昌益의 역사관은 근대적인 진보사관이나 변증법적인 발전사관이 아니고 동양고대의 순환사관으로 볼 수 있다. 그런데 그는 단순히 桃園鄕으로서의 이상사회를 꿈꾸기만 하는 유토피안은 아니었다. 최고강령 으로서의 자연세 에 도달하기 위한 과도기를 모색하고 있다. 과도기는 邑政 자치를 기초로 하는 直耕者 가 결정권을 가진 제도로서 오늘날 인간의 얼굴을 가진 사회주 의 를 만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과 같은 차원의 고민에서 설정된 것이다. 2. 法世 昌益은 그가 살았던 계급사회를 법세 라고 부른다. 원래 인간의 사회는 사람이 사람을 지배하고 착취하는 일이 없는 자유 평등의 사회로서 모든 사람이 直耕 을 행하면서 즐겁고 평화롭게 살아가는 세상이다. 그런데 성인 이 나타나 국가를 만들 고 군주를 세운 것이 모든 악의 근원이며 인간의 욕망이 시작된 원인이라는 것이 昌益의 생각이다. 곧 自然世 가 무너지고 난 후의 법세 는 성인계급이 권력을 휘두 르고 法을 휘둘러 통치하면서 直耕 의 민중을 수탈하는 지극히 반자연적인 계급사 회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러면 왜 법세 라고 말하는가?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든 법 의 강제력에 의해서 모든 것을 통치하는 권력지배의 세상이기 때문이다. 昌益이 말하는 法 이란 上下의 차별을 만들어 이것을 법칙으로 하는 등 자신이 위에 서기 위한 작위적인 것이다.1) 성인이나 왕 등 지배자의 사욕을 보편적인 公理와 같이 보이려고 문장화하여 강제 하는 것이 법 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에게 있어서의 모든 법은 사법 이다. 昌益 에 있어서 인간, 혹은 인륜과 자연은 본래 대립개념은 아니다. 자연의 반대개념은 만들어진 것 이며 이것은 私 와 法 의 양면을 내포한다. 私 란 恣意的인 道, 다시 말하면 운동의 궤적을 벗어난 것을 의미하며, 인식이나 사유에 있어서는 私의 分別 知 이다. 또한 실천의 면에 있어서는 私作에 의한 不耕貪食 을 뜻한다. 그것은 인간 과 그 행위에 관계되는 개념이다. 이에 반하여 그는 公 의 개념을 다음과 같이 韓 非子 의 정의에 대하여 그 나름으로 해석함으로써 단호히 부정한다. 1) 安藤昌益硏究會 編, 安藤昌益全集 13,( 東京: 農産漁村文化協會, 年), 203쪽.(이하 安藤昌 益全集 은 전집 으로 표기함)

56 자기 자신의 것만을 생각하며 행동하는 것을 私라고 말하고, 私와 반대의 입장을 公이 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公이란 스스로는 노동에 종사하지 않고 道를 훔 치기만 하는 장본인이 아닐까. 그러므로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2) 公 도 또한 不耕貪食 과 같은 뜻이며 私 에 상대적인 개념은 公 이 아니고 道 인 것이다. 이러한 昌益의 해석은 법가나 유가의 전통적인 公 私 개념과 엄격히 구 별된다.3) 기존의 공적령역을 昌益은 法 이라고 이름 붙였다. 私 가 개개인의 사고 와 행동에 관계되는 개념이라면 法 은 인간의 私的 행위에 의해서 구축된 객체적 영역이다. 그러므로 그의 문장에는 私法 이라고 하듯이 法 의 앞에 종종 私 字가 붙는다. 따라서 私法 이란 昌益에 있어서는 私公 (私的인 公)과도 같은 말이다. 法 은 구체적으로는 公的인 제도와 그것을 지탱하는 규정이나 이데올로기를 의미한다.4) 私法 이 지배하는 반자연적인 사회가 법세 인데 법세 라는 말이 현존하는 자료 에서는 고본 自然眞營道 24권의 法世物語 에만 나타난다. 法世物語 는 새, 길짐 승, 벌레, 고기 네 가지 동물의 무리가 모여 사람의 잘못을 규탄하는 방식으로 전개 된다. 짐승의 삶과 견주어 보면 인간세상이 얼마나 잘못되었는가를 네 무리의 많은 동물들이 등장해 지적하고 비판한다. 새의 장에서 한 대목 들어보자. 까마귀가 나서 서 큰 것이 작은 것을 잡아먹는 점은 동물이나 사람이나 서로 마찬가지가 아닌가 하면서 솔개의 의견을 청했다. 이에 대해서 솔개가 사람이 하는 짓은 다음과 같다고 응답했다. 천지의 토지를 도둑질해서 자기 소유, 자기 나라, 자기 영지로 삼는다. 直耕 하는 天道 의 성과를 게걸스럽게 차지하는 상위자가 하위자를 잡아먹는다. 그러므로 우리 새의 세상 보다 사람의 법세 가 훨씬 탐욕스럽고 어리석다. 法世 의 실상을 새의 입을 빌어 잘 나타낸 대목이다. 統道眞傳 에서는 법세 의 실태를 五逆十失 로써 비판하고 있다.5) 逆 은 자연에 역행하는 인간의 행위를 말한 다. 이것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먼저 五逆 은 제1역 : 만인평등이라는 인간의 자 연상태를 거역하고 사욕을 앞세워 王이라는 특권자가 나오게 된 것. 제2역 : 直耕 의 대도를 거역하고 不耕貪食 하는 것. 제3역 : 上下의 차별이 없는 인간사회를 거 역하고 유학에서 말하는 오륜을 내세워 봉건적 신분 질서를 확립한 것. 제4역 : 일 부일처의 자연의 인도를 거역하고 일부다처를 만들어 스스로 금수에 떨어지게 한 것. 제5역 : 자연의 존재방식을 거역하고 산중의 금을 채굴하여 통용함으로써 인간 2) 3) 4) 5) 全集 2, 64쪽. 安永壽延, 安藤昌益, 쪽. 위의 책, 263쪽. 全集 8, 쪽

57 의 욕망을 유발하고 조장한 것. 위의 五逆 에서 파생된 열 가지의 잘못(十失)은 다음과 같다. 제1실 : 악기를 만 들어 민중을 방탕하게 하고 오락에 빠지게 함으로써 不耕하는 사람을 만들어 내는 것. 제2실 : 바둑을 만들어 直耕 하지 않고 놀게 하는 도구가 되게 함으로써 도박 의 시초가 되게 한 것. 제3실 : 희생의 제도를 만들어 소, 양의 동물을 기르고 그로 인해 육식을 하는 것. 제4실 : 천하를 여럿으로 나누어 제후를 배치하고 신하를 붙 여 나라를 다스리게 함으로써 비생산인구를 많게 한 것. 제5실 : 관리를 둠으로써 그 직무에 따라 계급제도가 만들어진 것. 이것으로 인해 뇌물을 주고받는 공직사회 의 부패가 생겼기 때문이다. 제6실 : 무사에 의해 민중의 저항을 방지하고 억압하는 것. 민중의 저항이란 통치자인 군주가 도를 지키지 않음으로써 일어나는 것인데 민 중을 억압하고 형벌을 가하는 것. 제7실 : 많은 기술자가 실용성 없는 사치품을 만 들게 됨으로써 농사에 종사하지 않는 인구가 늘어나게 된 것. 제8실 : 상업을 일으 켜 매매제도를 성하게 한 것. 제9실 : 베 짜고 옷 만드는 기술자들이 쓸데없이 화려 하고 사치스런 옷을 만드는 것. 제10실 : 지배자의 구미에 맞게 글을 잘 쓰는 사람 을 賢者로 추켜올려 높은 지위를 줌으로써 天子라고도 하는 근로 대중을 愚者, 賤者 로 낮추어 보는 것. 요컨대 五逆十失 은 지배자의 존재와 그 지배체제 그리고 신분적 질서, 이기적인 경제체제 및 문자와 이데올로기에 의한 인민 지배로 집약된다. 지배와 상행위와 이 데올로기 이 셋은 항상 인간의 사욕에 결부되어 있으며 사욕의 소산이다. 지배는 上 下로 二別하며, 상행위는 自他로 二別하고 성인의 사상은 이 두 二別의 기점에 있 다. 法 이란 互性 에 대한 二別이며 妙 에 대한 분리이고 자연에 대한 작위이다. 그것은 사회를 형성하는 것이 아니라 해체하는 논리이며, 따라서 자연과 인간을 위 기에 몰아넣는 허구 혹은 허위의 체계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다.6) 昌益은 이 법세 를 변혁하고 성인 을 타도하여 그 사법 을 폐지함으로써 자연세 를 부활 하고자 하는 것이다. 3. 自然世 昌益이 인류의 태고에 있었다고 생각한 이상적인 공동체 사회가 자연세 이다. 이 것은 성인 들과 붓다가 출현하기 이전의 인간사회로 남녀가 협력하여 일하는 자연 과 조화를 이룬 사회이다. 현존하는 昌益의 유고 중에서는 고본 自然眞營道 私制 字書卷1에 자연세 에 대하여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그 요지는 다음과 같다. 6) 安永壽延, 앞의 책, 277쪽

58 자연세 란 천지 자연의 운행과 함께 사람들이 생산노동에 힘쓰고, 생활의 리듬이 천 지 자연의 리듬에 맞추어 조금도 변함이 없는 세상이다. 直耕 은 언제 시작되는 것도 언제 끝나는 것도 없이 계속되어 천지자연의 생성활동과 인간의 생산활동이 함께 진행되 어 양자의 조화로운 세계가 무한히 계속되는 것이다. 천지의 생성활동도 스스로 그러하며 인간의 생산활동도 스스로 그러하다. 이렇게 양자의 활동이 조화로운 세계를 자연세 라 말한다. 원래 生死란 근원적 실재인 眞 의 진퇴의 자기 운동이다. 자연세 에서는 성인이 나 승려가 없으므로 사람들은 그들로부터 당하는 여러가지 피해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위에 不耕貪食 하여 놀기만 하는 사람이 없으므로 아래에서도 노는 사람이 없다. 부부는 일부일처제를 바탕으로 사랑으로 결합하여 자식을 낳는다. 천지에 상하의 구별은 없고 신분이나 계급의 차별도 없다. 남녀도 마찬가지이다. 화폐의 유통이 없으므로 돈을 쌓아두는 부자도 가난한 사람도 없을 뿐만 아니라 도둑도 없다. 평야나 바닷가, 산골에 사는 사람들은 그들의 생산물을 서로 물물교환하여 과부족이 없는 생활을 영위한다. 사치 품을 만들기 위한 기술자도 상인도 없다. 색욕에 빠질 일도 없고 술이 없으므로 알콜중독 에 걸릴 염려도 없다. 농사에 게으름을 피우지 않고 항상 부지런히 일하므로 병에도 걸리 지 않는다. 고대중국의 의서나 의술은 없어도 천수를 누릴 수 있다. 五常, 五倫도 四民 사 농공상의 차별도 없다. 민중을 탄압하는 무사도 없다. 효도나 불효를 특별히 거론할 필요 도 없다. 천지의 精氣가 응축하여 곡물이 되고 사람들은 이것을 생기와 혈액의 원천으로 생활하고 자식을 낳고 기른다. 인간의 도리는 조부모, 부모, 자신, 자식, 손자의 5단계를 계속 이어나가는 데 있으며 이것은 자연의 구성요소인 五行의 발현인 것이다. 인간 모두 가 자식을 기르고 그 자식이 크면 부모를 봉양하고 또 자식을 기른다. 빼앗는 자도 빼앗 기는 자도 없으며, 천지자연의 조화로운 상태에서 천지가 만물을 생산하듯이 사람들은 대 지를 경작함에 있어 한 점의 사사로움도 없다. 이것이 자연세 의 실태다.7) 자연세 에 대해서는 위와 같이 私制字書卷 에 포괄적으로 기술되어 있으나 그 밖 에도 自然世 라는 용어는 사용하지 않았지만 실질적으로는 이것을 나타내는 글이 여러 곳에 보인다. 즉 고본 自然眞營道 의 私法儒書卷 1의 농업 및 本草의 章에서 아이누 사회에 관한 언급이라든가 私法神書卷 上의 天神七代의 章, 通道眞傳 의 人倫卷 과 禽獸卷 에서도 볼 수 있다. 또 간본 自然眞營道 卷2에도 짧게나마 자연 세 에 관해 기술한 것을 볼 수 있다.8) 이제 위의 자료들을 분석하여 昌益의 자연세론이 어떠한 것인가를 구체적으로 살 펴보자. ① 天人合一의 세계 大天地인 자연과 小天地인 인간은 같은 법칙에 의해 운동을 하게 되는 것이다. 자 7) 8) 全集 2, 쪽. 全集 別卷 쪽

59 연의 운행과 인간 사회의 영위에는 조금도 어긋남이 없어 사계의 순환과 농경노동 이 조화를 이룬 사회가 자연세 이다. ② 不耕貪食 하는 사람이 없이 모든 사람이 생산노동에 종사한다. 昌益은 오늘날 노동의 의미로 그가 만들어낸 독특한 개념인 直耕 을 사용한다. 直耕 은 그의 사상의 근간을 이루는 범주로서 농경작업을 중심으로 한 노동일반과 생산활동 전체를 의미한다. 인간은 스스로 노동함으로써 자신의 생명을 유지할 수 있는 먹을 것과 입을 것을 얻게 되므로 直耕 은 인간을 인간답게 만들어주는 것이 다. 곧 昌益은 인간을 노동하는 존재로 보는 것이다. 그러므로 昌益이 그리는 자연 세 는 놀고먹는 사람이 없이 사회 구성원 모두가 자연과 더불어 생산 노동에 종사하 는 사회이다.9) ③ 정치적 지배도 경제적 착취도 없는 자율적 사회이다. 사람들은 천지자연과 더불어 스스로 그러한(自然) 自發, 自主, 自律의 생활방법 을 취하기에 윗분 이라는 강제력을 가진 국가권력도 없고 아랫 사람 도 없는 무권 력의 공동체사회이다. 곧 자연세 는 정치적인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없는 사회이 다.10) 국가권력이란 주민의 생산물을 횡령하기 위한 목적으로 성인 이란 약탈자가 만든 작위적 제도로서 전 주민이 자연과 더불어 直耕 하는 사회의 위에서 짓눌러 온 것이다. 국가란 결코 전 주민의 생활과 질서의 유지와 안정을 위하여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昌益의 견해이다.11) 昌益은 생산노동에 의해 王, 侯 등의 모든 기생자들을 먹여 살리는 사람은 天의 생성활동을 계승하고 있는 농민인데 이 농민이 곧 천자라는 것이다. 따라서 천하에 서 가장 존경받는 사람은 천자인 농민이다. 국가를 없앤 후에 아래에 있는 생산자가 계급에 의해 사회를 자치적 자율적으로 운영해가는 평화로운 사회가 자연세 이다. 또한 위에서 군림하며 권력을 휘두르는 국가권력이 없기에 상납해야하는 年貢이 나 세금이 일절 없는 자연세 는 경제적 착취, 피착취의 관계가 없는 사회이기도 하다.12) ④ 모든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이 없는 사회 먼저 자연세 에는 성차별이 없어 남녀는 평등하다. 昌益은 남자를 하늘에 여자를 바다에 비기고 하늘과 바다가 하나의 자연을 이루듯이 남자와 여자도 한 인간인 것 은 자연의 진퇴하는 一氣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나 생물학적인 기능면에서나 사회 적 분업에 있어서 남녀의 구별은 부정하지 않고 있다. 그는 성교의 예를 들어 말하 直耕 에 대해서는 박문현의 논문 安藤昌益의 인간관, 東義論集 제30집(동의대학교, )를 참조바람. 10) 全集 2, 100쪽. 11) 寺尾五郞, 安藤昌益の社會思想, 52쪽. 12) 全集 2, 103쪽. 9)

60 기를 보통 성교시의 체위가 여자는 눕고 그 위에 남자가 엎드리는 정상위를 취하게 되는 것은 하늘이 땅을 내려다보고 땅이 하늘을 받치고 있는 자연의 이치를 따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죽어서도 마찬가지이다. 남자의 시체는 물에 떠내려갈 때 눕혀 놓아도 반드시 엎어지게 되며 여자의 경우는 반대로 엎어 놓아도 반드시 누운 채 떠내려가게 된다는 것이다.13) 그는 또 대등한 남녀가 결합하는 일부일부제 를 인륜의 근본이라고 주장한다. 昌益은 천하가 아무리 넓다하더라도 인간인 한 萬 人은 평등하여 한 사람과 같다고 말한다.14) 그는 단지 일반론으로서 평등론을 내건 것이 아니라 구체적으로 군신의 상하 차별이나 남존여비의 차별에 반대하고 인종과 민족간의 차별을 비판하였으며 유교의 中華思想을 규탄하고 일본의 小中華思想과 대외침략을 비난하였다. 모든 사회적 차별과 불평등이 없을 뿐 아니라 빈부의 차이 도 없는15) 경제적 평등의 사회가 자연세 이다. ⑤ 화폐와 상인이 없는 사회 昌益은 화폐와 상업활동에 대하여 일관되게 부정적인 태도를 취한다. 화폐는 성 인 의 헛된 욕망에 의해 만들어졌고 사람들은 利慾에 눈이 어두워 악순환의 고리에 끼어들게 된다고 본다. 그는 말하기를 金銀貨가 통용되게 되므로 성인 은 갖고 싶 은 것을 무엇이라도 가지고 호화로운 생활에 빠지고 金銀을 쌓아두고 싶은 사치스 런 욕심을 부린다. 민중은 이것을 보고 화폐의 유통에 의해 처음으로 욕심을 내어 누구든지 金이면 무엇이라도 할 수 있다는 착각을 일으킨다. 화려한 생활을 하고 싶 다는 욕심이 늘어나 돈 모으기에 혼란된 세상이 되었다. 16)고 말한다. 昌益은 이러 한 역사적 관점에서의 화폐부정론에 덧붙여 상업도 이욕을 증폭시키는데 박차를 가 하는 것이라고 부정한다. 상인은 세상에 물건을 유통하기 위해 만들어진 직업인데 물건을 자유롭게 취급할 수 있기에 이것을 기화로 이익을 배로 남기려 하는가 하면 王侯에게는 아첨하고 士, 農, 工을 기만하는 사람들이다. 상인들 서로간에도 본래의 인간적인 마음을 잊고 이익을 다투는 욕망에 사로잡힌 사람들이라는 것이다.17) 昌 益이 화폐와 상업을 부정하는 것은 무사의 입장에서 돈과 상업을 멸시하는 것과는 전혀 성격이 다르다. 사람들이 直耕 의 인륜으로부터 이탈하여 비생산적인 기생자 로 살아가게 되고 도덕적인 퇴폐를 초래하기 때문에 부정하는 것이다. 그러나 昌益 의 상업부정론에는 이러한 일반적이고 윤리적인 관점만 있는 것이 아니고 정신문화 적 퇴폐성에 대한 반발 때문이라고 볼 수도 있다. 13) 14) 15) 16) 17) 18) 全集 9, 全集 1, 全集 2, 全集 8, 全集 3, 東條榮喜, 89쪽. 107쪽. 100쪽. 141쪽 쪽. 安藤昌益の自然正世論, 96쪽 ) 그런데 昌益의 반상업주의에

61 대해서는 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상품경제의 발전으로부터 근대화로 나아가는 과정 을 이해하지 못한 퇴행성, 반동성과 결부시켜 昌益사상이 시대의 진전에 발맞추지 못했기에 오랫동안 잊혀졌다고 지적한다.19) 그러나 昌益은 화폐를 매개로 한 상업 경제가 필연적으로 수반하는 배금주의와 물욕의 이상항진을 경계하고자 한 것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⑥ 국경과 토지사유가 없어 평화로운 사회 昌益은 인도적 관점에서뿐만 아니라 정치적 경제적 관점에서 평화사상을 전개한 다. 우선 그는 인도적 관점에서 군사학을 비판한다. 군사에 관한 일은 조그마한 것 이라도 活眞 의 大敵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남을 죽이고 자신을 망치는 것이며, 또 남을 망치고 자기를 죽이는 것으로 죽음을 다투어 천하와 국가를 도둑질 하는 기술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라는 것이다.20) 계급지배의 통치가 없는 자치 자률 의 사회, 자연과 조화를 이룬 협동사회가 인간 사회의 올바른 형태라는 것이다. 그 는 또 천하는 위에 있는 지배자의 천하가 아니라 천하 만민의 천하라고 말한다.21) 천하는 德川家의 것도 아니고 天皇家의 것도 아닌 민중의 천하라는 것이 그의 자연 세론의 근본이념이다. 그는 天으로부터 생산자 대중에게 주어진 토지를 권력에 의 해 사유화하는 것에 반대한다. 요컨대 평화의 상태가 깨지는 것은 자연법칙에 의해 서가 아니라 사유제와 계급지배라는 계기가 개입되기 때문이라는 것이 昌益의 생각 이다.22) ⑦ 기만적인 이데올로기 도덕 종교 학문이 없는 사회 자연세 에는 계급지배를 위한 이데올로기가 없다. 昌益은 유교, 불교, 神道, 도교, 의학 등을 비판하고 이것들은 폐기되어야 한다고 말한다.23) 그는 성인 의 대표라 할 수 있는 공자를 비롯하여 맹자를 비판하고 사서오경을 깎아 내리며 노자와 장자 를 질책하고 석가모니와 달마를 비웃으며 聖德太子를 탄핵하고 神道書를 쓸데없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 시대에 학문이라고 볼 수 있는 모든 것을 부정하고 그것들과의 단절을 선언한다. 성인 의 말에 修身 齊家 治國 平天下가 있어 학자들은 이것을 내세우지만 농사를 짓지 않는 학자들은 자기 몸 하나도 다스릴 수 없다. 오히려 다 른 사람들에게 해를 끼칠 뿐이다. 학문이란 것은 자연의 법칙을 사물화하기 위한 범 죄적인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학문은 세상의 적이라고 밖에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24) 이와 같이 전통적인 교학을 모두 부정한 것은 일본사상사에서는 19) 20) 21) 22) 23) 24) 東條榮喜, 村瀨裕也, 全集 3, 全集 3, 全集 1, 全集 1, 앞의 책, 96-97참조 安藤昌益の平和思想, 安藤昌益-日本 中國共同硏究, 216쪽. 73쪽 쪽. 155쪽 쪽 참조

62 전례가 없는 파격적인 것이다. 德川 중기의 대부분의 사람들은 유 불 신의 삼교 중 어느 하나에 얽매어 있었으며 학자들 역시 어느 한 유파에 속하여 안정된 봉건 체제의 유지에 기여하고 있었다. 德川 중기 뿐만 아니라 일반적으로 인간의 사고의 대부분은 先人의 사고의 범위에서 벗어나기가 어렵다. 어릴 때부터의 생활습관이나 교육, 사회적 규범들이 인간의 사고 형성에 영향을 미치기 때문이다. 그런데 昌益은 여기에서 벗어나려는 것이다. 昌益이 전통적인 교학과 종교와 도덕을 부정한 것은 그의 독선적인 면을 부정할 수 없으나 한편으로는 부정을 통해서 독창적인 사상을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볼 수도 있다. ⑧ 퇴폐적 문화가 없고 질병이 없는 사회 자연세 에는 노래나 춤과 같은 예능이나 창녀가 없고 도박 등 승부를 다투는 노 름이 없다. 不耕貪食 하는 사람 없이 直耕 에 열중하는 자연세 사람들의 건강 상태는 양호 하다는 것이다. ⑨ 농업을 기반으로 한 교역이 이루어지는 사회 自然世 를 지탱하는 산업은 농업이다. 인간의 기본 생활자료인 食과 衣를 조달하 는 농업을 주요산업으로 생각한 昌益이기에 남자는 밭갈고 여자는 베짠다 는 말을 입버릇처럼 하는 것이다. 천지는 直耕 하여 인간과 만물을 생산한다. 즉 천지가 운 행하여 식물을 길러내고 동물은 식물을 먹고 살아간다. 인간은 直耕 하여 곡물을 생산한다. 자연에 자생하는 곡식이나 과일을 채취하기만 하지 않고 자연에 노동을 가하여 식물의 생육을 증진하는 일을 하면서 살아간다. 이것이 자연과 인간이 하나 이기에 농업이 기반이 될 수밖에 없다는 昌益의 자연론적인 농업관이다. 만약 인간 이 자연의 혜택을 받기만 한다면 자연을 훔치는 기생자, 소비자에 불과하다는 것이 다. 昌益은 인간존재 그 자체가 농민일 수밖에 없으며 농업이 인간 본래의 자세라고 말한다. 그러나 단순한 폐쇄경제가 아니다. 평야에 사는 사람들은 곡식을 생산하고 산촌의 사람들은 나무를 베어 땔감을 장만하며 어촌의 사람들은 고기를 잡는다. 이 들이 각기 생산하여 소비하고 남는 것들은 서로 교환하여 사용하기에 농촌, 산촌, 어촌 모두가 생활용품의 과부족이 없는 것이다.25) 昌益은 화폐를 매개로 하는 상업 은 부정하지만 각 지역간의 교역의 필요성은 인정하기에 생산물의 즉물적인 등가교 환을 전제로 한 경제교류를 구상한 것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자연세 의 특징은 없는 으로 일관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昌益의 자연세 는 글자 그대로의 유토피아 사상에 지나지 않는다. 25) 全集 2, 99쪽. 물물교환에 의한 공동체간의 교역은 4권 123쪽과 8권 143쪽에도 보인다

63 4. 적응론 - 과도기의 이론 앞에서 본 자연세 는 昌益이 구상한 유토피아일 뿐 법세 의 모순이나 결함이 근 절되고 이상세계가 실현될 가능성은 없다. 계급사회인 법세 를 개혁하여 무계급사 회인 자연세 에 도달하기 위한 하나의 과도기가 필요하다고 昌益은 생각한 것이다. 그는 이것을 사욕에 의한 계급제도에 따라 착취 쟁란이 끊이지 않는 현실 사회에 있어서 자연의 법칙 그대로의 사회를 실현하기 위한 적응론 26)이라고 부른다. 이것 은 위에 권력지배가 아직 있는 법세 에 해당하지만 그 말기라 할 수 있는 과정으로 실질적으로는 자연세 에 접근하는 과도기의 사회에 대한 이론이다. 적응론 의 구체적 방법은 어떠한가? 첫째 국가권력의 개혁과 축소이다. 먼저 상 부 지배층의 철저한 개혁이다. 최고 권력자인 윗사람이 家臣과 그 일족을 많이 거느 리고 있는 것은 반란을 두려워해서이다. 과도기의 사회에서는 윗사람은 방대한 家 臣團을 폐지하여 오로지 반란의 근본 원인을 제거하는데 전념해야 한다. 또 최고 통 치자로서 위에 있어도 美衣 美食이나 도락에 빠진다든지 호화로운 생활을 하지 않아 야 한다. 특권과 사치를 포기하고, 쓸데없이 가신을 거느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스 스로 일정한 농토를 정해서 이것을 경작함으로써 일족의 의식을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27) 위에 있는 통치자 자신이 농민이 되어 直耕 하고 아랫사람에 대한 지배 와 착취를 하지 않으면 반항하는 범죄자도 없을 것이므로 통치자는 상벌을 내릴 필 요도 없다. 통치계급이 존재한다 하더라도 민중의 생활에 간섭하지 않는다면 자연 세 에 가깝게 된다는 것이다. 적응론 에서는 최고 통치자뿐만 아니라 각 藩의 藩主 는 물론 상급 무사의 권력까지 박탈하고 농민화 한다. 또 권력의 실체인 무장력을 해체한다는 것은 이전부터의 昌益의 주장이다. 최고통치자와 각 藩主에 딸린 영주 및 하급무사에 이르기까지 모든 武士가 귀농하게 되므로 그 때까지의 지배자의 군 사체계는 제도적인 기구로서는 와해되어 幕藩 봉건체제는 사실상 붕괴되는 것이다. 과도기에는 최고 통치자도 제후도 무사들도 모두 直耕 하여 自活하고 美食 美衣나 낭비가 없으므로 민중으로부터의 貢納이나 징세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또 전국의 농지를 국유화한다. 봉건적인 분봉 할거의 영주적 토지소유는 폐지된다. 최고통치자 가 전국의 토지를 일괄하여 명목상 소유하던 것을 농민이나 귀농한 무사들 모두가 실제로 경작하고 있는 농지의 경작권을 부여받는 것이다.28) 과도기에는 아직 上 이라고 昌益이 표기하는 최고통치자가 존재하므로 26) 27) 28) 全集 1, 267쪽. 全集 1, 276쪽. 寺尾五郞, 安藤昌益の社會思想, 쪽 참조 자연세

64 가 못되는 것이다. 그러면 上 의 존재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세상을 평화롭게 유 지하기 위해서이다. 다시 말하면 全民皆8 를 추진하기 위해서 上 이 존재할 필요 가 있는 것이다. 영주계급이 귀농을 거부하고 전민개로 의 새로운 체제에 반항하면 이를 제압하고 형벌을 주어 直耕 에 종사하도록 하기 위해서다. 昌益은 오랜 동안 不耕貪食 에 길들여진 지배층이 하루아침에 자각하여 萬民直耕 을 실현하리라고는 기대하지 않았기에 일종의 강제력을 필요로 했던 것이라 생각된다. 直耕 의 민중은 최고통치자나 성인 등 그 누구로부터도 지도나 간섭을 받지 않 고 자발적으로 천지자연의 법칙에 따라 전국 어디에서나 물대기가 좋고 개간이 가 능한 곳에서 촌락을 이루어 생활하게 되는데 이 촌락을 단위로 민중의 자치 자율의 생활을 의식적으로 확대해 감으로써 자연세 의 길은 확보된다고 昌益은 생각했다. 이 근로민중을 주체로 한 지방자치를 그는 邑政 이라고 부른다. 그런데 모든 촌락 자치단체의 구성원 모두 直耕 의 원칙에 따라 자연 그대로의 자유로운 생활을 해나 간다면 읍정 은 평화로울 것이다. 그러나 어느 촌락에 범죄자가 생기면 어떻게 하 겠는가? 권력을 허용하지 않는 읍정 조직에 있어서 이러한 사태는 심각한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邑政 자치의 조화와 평화를 교란하는 나쁜 사람들이 나타났을 때를 대비한 昌益의 방안은 지극히 명확하다. 범죄자가 생기면 일족이 그를 잡아서 먼저 음식을 주지 않고 굶겨서 배고픔의 고통을 맛보게 하고 잘 타일러서 한번만 죄를 용서한다. 그 사람이 배고픔의 고통에 질려서 다시 그러한 나쁜 일을 저지르지 않고 진실로 농사에 열중한다면 그것으로 좋은 것이다. 그런데 자신의 잘못을 자각하지 않고 다시 나쁜 짓을 저지른다면 일족이 이 사람을 굶겨 죽음에 이르게 한다.29) 촌락내의 범죄에 대해서는 중앙의 上 이 개입하지 않고 촌락 내에서 처리하며 이 때 초범은 금식의 형벌을 과하고 재범에 대해서는 사형을 내린다는 것이다. 일족이 나쁜 행위를 하는 사람을 죽이는 것은 자연의 道에 따른 것이라고 昌益은 말한다. 그에 의하면 일족이 모두 直耕 에 열중하며 바른 생활을 할 때 惡者가 나 타난다는 것은 예기치 않은 일이다. 우연히 나타난 것에 불과하다.30) 말하자면 그것 은 인체에 우연히 생기는 폴립과 같은 것으로 그것을 그대로 방치하면 악성의 암으 로 될 수도 있다. 그러므로 그 폴립을 조기에 제거해야 병에 걸리지 않고 건강을 유 지할 수 있는 것이다. 일족이 악자를 죽인다는 것은 그와 같은 것으로 결코 나쁜 것 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天의 덕에 합치되는 일이라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여기서 우리는 昌益의 사회관과 인간관을 엿볼 수 있다.31) 全人直耕 이 실시되는 과정에서 지방의 자치를 유지하기 위해서 국가권력의 개입 을 배제하고 소악에 대해서는 일족 내부에서 제재하고자 하는 것이 昌益의 읍정론 29) 30) 31) 全集 1, 292쪽. 全集 1, 293쪽. 伊達 功, 安藤昌益 -ユ-トピア思想史の視座から-, 쪽 참조

65 이다. 이것은 오늘날 지방의 시대 를 부르짖고 있지만 단지 중앙권력의 분산화에 지나지 않는 지방자치와는 다르다. 오히려 읍정론은 중앙으로부터의 독립에 역점을 두고 있다. 지방의 邑村에 있어서 아래로 부터 자생한 인민 협동체가 중앙권력을 주 변에서 부터 잠식하여 가는 경향을 가진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읍정 이라는 지방 자치에 그 이상의 강한 반중앙성을 가지고 사회의 전반적인 체제변혁의 단위로서 위치하려는 주장은 일본사상사에서는 처음 있는 것이다.32) 이상에서 과도기에 있어서 국가권력의 개혁과 축소에 대해서 살펴봤는데 다음에 는 사회생활의 개조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전 주민을 근로농민으로 개조하고 전원이 直耕 하는 全民皆8 를 실현하는 사회적 인간적 변혁의 과정에서 인간의 생 활은 소박하고 질박한 것만 추구될 뿐 일체의 사치, 허식, 퇴폐 등은 배격된다. 화 폐경제의 억제 및 도시의 해체와 함께 소농 자립을 근간으로 하는 昌益의 과도기 사회정책에는 의식과 여가 생활도 포함된다. 의생활에 있어서는 비단옷은 금지되고 상층부는 목면으로 일반민중은 麻에 한해서 옷을 해 입을 수 있다는 것이다.33) 여 기서 주목할 만한 것은 과도기에는 권력은 부정되지만 上下의 구별은 아직 존재한 다는 사실이다. 또 식생활에 있어서는 육식을 금하는데 이것은 동물은 그들의 먹이 사슬에 의해서 먹고 먹히는 관계를 이루지만 인간은 동물과 엄격히 구별되므로 그 먹이사슬에 포함될 수 없다는 것이다. 술과 담배는 인체에 해롭기 때문에 금지된다.34) 또 과도기 사회에서 엄격히 경계하고 있는 것은 遊藝人의 기생적 생활과 성적 문 란이다. 昌益은 노래, 춤, 기악, 도박 등의 일체의 오락과 가부키의 배우, 창녀, 남 창, 주정뱅이 등은 없어져야 한다고 말한다. 이들은 사회층으로서는 遊民들인데 걸 식근성을 가지고 지배자들의 교만함과 사치함에 도움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35) 그 밖에도 적응론 에는 염료를 만드는 사람은 남색 염료만 만들 것이지 여러 가지 화 려한 염료를 만들지 말 것이며, 통을 만드는 사람은 물통 외에 장식적인 통을 제작 하지 말 것과 밥그릇을 만드는 사람도 일용품 외에 실용성이 없는 사치품을 만드는 것을 금하고 있다. 심지어 정원을 만들어 정원수를 심는 것도 사치스러운 일로 간주 하여 금하고 있다.36) 32) 33) 34) 35) 36) 寺尾五郞, 安藤昌益の社會思想, 쪽. 全集 1, 289쪽. 비단의 사용을 전면적으로 금지하는 이유는 그것이 사치품이어서가 아니라 명주 라는 것이 본래 누에의 집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사람들의 옷감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 라는 것이다. 全集 1, 289쪽. 禁煙에 대해서는 全集 1, 285쪽. 全集 1, 쪽. 全集 1, 285쪽

66 5. 맺음말 이상사회는 현실에 대한 불만과 부정에서 잉태된다. 그런데 인간은 보다 나은 삶 에 대한 본능적인 욕구 때문에 결코 현실에 만족할 수 없으므로 인류가 문명단계에 진입한 이래 수많은 사람들이 이상사회를 꿈꾸고 추구해 온 것이다. 安藤昌益의 이 상사회론은 모든 사회악의 근원이 인간의 사사로운 욕망에 의해 만들어진 사회제도 에 있다고 보고 자연상태로 복귀하는 것만이 이상사회를 재현할 수 있는 길이라는 자연세론을 펼친다. 그가 그리는 자연세 는 천인합일의 세계관 위에 착취와 억압이 없는 평등한 사회이며 모든 사람이 생산노동에 종사하는 사회이다. 또 화폐와 상인 이 없고 국경과 토지사유가 없으며 퇴폐적 문화가 없는 사회이다. 농업을 기반으로 한 이 사회는 무익한 학문도 기만적인 종교도 없는 인간과 자연이 조화를 이룬 평 화로운 세상이다. 昌益의 이러한 자연세 는 법세 비판을 통해 확인한 바와 같이 현 실사회에 대한 철저한 부정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런데 자연세 가 태초의 자연세계 로 복귀하는 것을 이상으로 여기고 있다고 해서 단순한 현실도피적인 환상이나 과 장적인 현실비판에 그치지는 않는다. 昌益은 법세 이전에 자연세 가 존재했을 뿐 만 아니라 실제로 北海道나 네델란드에는 그런 사회가 존재한다고 믿었다. 그러나 昌益의 이상사회론에는 자연세 의 논리는 있어도 자연세 를 만들어내는 원리는 나 오지 않는다. 즉 법세 를 타도하고 자연세 로 가고자 하는 혁명적 무기는 찾아볼 수 없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昌益의 이상사회론이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은 法世 에 있으면서 자연세 에 있어서와 같은 효과를 얻을 수 있는 적응론 을 내놓았기 때 문이다. 法世 곧 계급사회의 정치체제 안에서 不耕貪食 의 지배세력의 힘을 약화 시켜 민중의 역량을 강화시키고자 하는 최선의 개량책이 적응론 인 것이다. 昌益의 법세 에 비해 경제적 사회적으로 발전된 오늘에 있어서도 그가 주장한 평등 의 추구와 평화의 희구, 봉건전제에 대한 비판의식 및 천인합일론의 제창 등이 의미 를 갖는 것은 이것이 우리의 현실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 될 뿐만 아니라 미래의 종 합적 비전과 청사진을 마련하는데 示唆가 될 수 있을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67 참고문헌 安藤昌益硏究會 編, 安藤昌益全集 21卷 22冊, 東京: 農産漁村文化協會, 年. 安永壽延, 安藤昌益, 東京: 平凡社, 1976年. 寺尾五郞, 論考安藤昌益, 東京: 農山漁村文化協會, 1993年 , 安藤昌益の社會思想, 東京: 農山漁村文化協會, 1990年. 農文協 編, 安藤昌益日本 中國共同硏究, 東京: 農文協, 1993年. E.H. ノ- マン, 忘れられた思想家 - 安藤昌益のこと- 上 下, 東京: 岩波書店, 1991年. 東條榮喜, 安藤昌益の自然正世論, 東京: 農文協, 1996年. 伊達 功, 安藤昌益 -ユ-トピア思想史の視座から-, 松山: 松山大學總合硏究所, 1995年. 丸山眞男, 日本政治思想史硏究, 東京: 未來社, 1952年

68 동아시아의 이상세계관 -근대기 동아시아의 사상가들이 꿈꾼 待望의 이상세계張 在 辰* 1. 서론 인류역사가 진행되는 동안 시대의 문제점을 자각하고 변혁하려는 의지, 그리고 이상사회를 지향하는 의식은 이상세계관 을 형성하여 면면히 전해져왔다. 오늘날에 도 이상세계관, 혹은 유토피아니즘 이라고 하면 대체로 환상과 공상에 머무는 것 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그러나 인간이란 현존(Sein)만이 아니라 현존해야함 (Sollen)을 지향한다는 점에서 볼 때 본래가 이상적 존재이다. 이에 대해 데이비스 는 이상세계를 구상하는 모든 사상가들은 한 사회 내에서 조화와 만족감을 극대화 하고 갈등과 빈곤을 최소화하는 데 관심을 갖고 있다. 이들은 사회통합과 공동선이 개인적 사욕에 의해 타락하지 않은 완전한 사회의 건설에 관심이 있다. 1)라는 말로 갈파한 바 있다. 동아시아에서도 어느 시대, 어느 국가에서나 이상향을 추구하는 염원은 끊임없이 나타났으며, 이는 근대기에 이르러서도 마찬가지였다. 특히 한국과 중국에서의 이상 세계에의 동경과 그 동경을 현실화하려는 노력은 종교 혹은 정치의 형태로 나타났 다. 그러한 예는 한국의 경우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 이하 수운)와 증산(甑山) 강일순(姜一淳, , 이하 증산), 중국은 수전(秀全) 홍인곤(洪 仁坤, , 이하 수전)과 장소(長素) 강유위(康有爲, , 이하 장 소)에게서 볼 수 있다. 수운의 사상은 훗날 동학운동의 바탕이 된 무극대운(無極大運) 을 현실화하려는 이상사회 건설론 으로 요약할 수 있다. 또, 증산의 사상은 이른바 후천개벽 을 도모 하고자 천지공사(天地公事) 에 의한 이상사회 실현, 곧 후천선경(後天仙境), 용화 선경(龍華仙境) 으로 요약할 수 있다. 그런가하면 수전은 기독교와 흡사한 상제교 (上帝敎) 를 앞세워 태평천국(太平天國) 이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에 비해 장소는 이른바 무술변법(戊戌變法) 이라는 현실정치에서의 개혁을 통해 이상 * 동명대 교수 1) Davis, J. C., Utopia and the Ideal Society: A Study of English Utopian Writing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 p

69 과 공상이 두루 혼합된 대동세계(大同世界) 라는 이상사회를 건설하고자 했다. 이들은 모두 기존의 종교적, 정치적 관념들을 습합하고 그 위에 자신들이 자각한 바를 제시하였다. 이러한 이념에는 공동체의 위기와 병행하여 나타난 이상주의가 저변에 깔려 있었다. 다시 말해서 이들의 이상향에 대한 동경은 현실에서의 문제점 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의지를 수반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즉, 역사의 진행과 정에서 현실적으로 발생한 문제를 극복하는 방법인 동시에 목표가 가상의 세계 로 서의 이상향이었다는 것이다. 그러한 이상사회론 은 어차피 더 나은 사회상에 대한 희구(希求)이므로 거기에 이미 현실에 대한 반대상(反對像)으로서의 비판과 부정이 내포되게 마련이었다. 이 상사회론은 현실사회의 부조리와 악을 고발하는 비판의식을 전제로 하여 사회개 혁을 고취하는 역할을 함으로써 어느 정도 역사적 진보와 창조의 바탕으로 기능 한다.2) 근대라는 시대적 상황을 배경으로 한 이들 네 사람의 이상세계관이 오늘날에도 고찰되고 전승될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그 이유는 우선 이들의 이상세계관이 훗 날 미친 영향은 실제 사회발전의 동인이 되었기 때문이며, 오늘날의 정치, 경제, 사 회, 문화 등 분야에서 산적한 과제 해결에 이를 참조해야 할 점이 적지 않다고 보기 때문이다. 위의 네 사상가들의 이상세계관이 비록 공상과 환상처럼 여겨진다 하더라도 그것 은 현실을 변혁하고 이상의 실현을 향해 나아가는 지향성을 지닌 관념이라 할 수 있다. 이미 알려졌듯 네 사상가는 각기 다른 체험과 인식을 통한 특유의 관념들을 제시했다. 수운은 각도(覺道) 의 과정을 통하여 하느님 에게서 받은 무극대도 를 세상에 펼치는 것이 자신의 역할이라고 자각했다. 증산은 자신이 세상에 현신한 상 제 이자 미륵 이므로 삼계(천계 지계 인계)의 대권 을 주관할 수 있는 권능으로 여 러 신명들과 더불어 천지공사 를 감행하여 후천선경을 이룰 수 있다고 확신했다. 이에 비해 수전은 천부상제 인 황상제 의 계시를 통하여 구체적인 교의와 정치적 경제적 변혁을 통해 지상에 태평천국 을 건설하려고 하였다. 여기서의 하느님, 상 제, 미륵, 천부상제 등은 각각 앞서 각 기성종교에서 사용돼온 호칭이면서도 이 들에 의해 약간씩 다르게 해석된 것들이다. 바로 그 점이 이들의 사상이 지닌 전승 에 의한 공통점이자 새로운 해석에 의한 변별점이기도 하다. 네 사람의 이상세계관은 거시적이고 공상적이면서도 당대 현실에서의 실천을 염 두에 둔 구체적이고 현실적인 것이었다. 논자는 그런 초월성과 현실성이야말로 사 실은 그들 각 사상의 특성이자 근대 동아시아의 특성일 수도 있다는 전제 아래 이 2) 김성윤, 姜甑山의 理想社會論과 天地公事, 지역과 역사 제7호, 부산경남역사연구소, 2000, p

70 를 구체적으로 구명해나가고자 한다. 수운, 증산, 수전, 그리고 장소는 현실세계의 인 식과 비판의 과정을 거치면서 대망의 이상세계를 향한 그들의 희망과 이에 따른 청사 진을 제시하였다. 세계 사상의 역사에서 가장 보편적인 현상은, 선행 사상과의 완전 한 단절에 의한 창조 는 없고 모두가 전통을 기반으로 하여 재해석, 재적용의 해석학 적 수행을 한다. 3) 이들 사상가들 역시 기성종교인 유교, 불교, 도교 및 민간신앙, 그 리고 기독교 사상에 대하여 자신들만의 종교 관념을 바탕으로 수용과 비판을 통하여 재구성의 결과물을 제시하였다. 기성종교의 여러 요소를 빌려와 자신의 종교 체계 속 에서 새로운 의미를 부여하고 새로운 종교를 창시하게 될 때 강한 혼합주의적인 경향 을 띠게 되는 것이다. 4) 그러므로 이들이 각자 기성종교의 수용과 비판을 통하여 혼 합주의적인 결과인 천도(天道), 신도(神道), 원도(原道), 그리고 대동(大同) 이라는 통합관념을 도출해 내었다고 본다. 이어하트에 의하면 모든 종교는 그 발달과정에 있어서 형식화되고 개혁되는 과정 (formalism and reform)을 번갈아 거치게 되지만 어느 일정한 종교가 사회의 변화기 를 맞이하여 스스로를 그에 맞게 탈바꿈하는데 실패하여 형식화되는 과정이 계속되면 그 종교는 화석화(fossilization) 된다고 주장한다. 이때의 화석화란 기성종교가 스스 로를 개혁할 수 있는 힘을 잃어버린 상태를 말하는데 이런 경우에 처하게 되면 사람들 은 기성종교가 아닌 새로운 통로를 통하여 종교적 활력(religious vitality)을 찾게 된 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사람들이 스스로 종교운동을 일으키는데 이것이 바로 신종 교운동이 되는 것이다.5) 사회가 극히 혼란된 상황에 접어들게 되어 모든 가치체계가 붕괴되고 제자리를 잃 게 되면 사람들은 삶의 의미를 더 이상 찾을 수 없게 된다. 이때 그들은 정체성 (identity)의 위기를 심각하게 느끼게 되고 새로운 질서나 새로운 가치체계를 스스로가 만든 새로운 종교를 통해 얻으려 한다는 것이다.6) 기성종교를 대할 때 신종교들은 새 로 태어난 종교운동답게 기성종교를 강하게 부정하지만 그에 못지않게 기성종교의 여 러 요소를 흡수하게 된다. 가공의 세계가 특정한 시기가 오면 현실 세상에 구현될 것이라 예견되고 믿어지는 것이 종교의 세계이다. 가장 원시적인 것에서부터 가장 고도로 발달된 것에 이르기까 지 종교의 역사란 다수의 성현으로서, 거룩한 현실의 드러남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말 할 수 있다. 7) 수운, 증산, 수전, 그리고 장소는 새로운 통로를 통하여 종교적 활력을 찾으려고 했으며 이를 자신들의 이상세계관에 그대로 반영하여 새로운 세계를 구현하 3) 4) 5) 6) 7) 동학학회 편저, 동학과 전통사상, 도서출판 모시는 사람들, 2004, p.11. 최준식, 증산의 가르침에 나타나는 혼합주의의 구조, 종교신학연구 2, 1989, p.33. 최준식, 증산이 보는 전통종교, 현상과 인식 44, 1988, p.76.(재인용) 최준식, 앞의 책, p.76.(재인용) 미르치아 엘리아데/이동하 옮김, 성과 속, 학민사, 1983, pp

71 고자 하였다. 2. 이상세계를 향한 기성종교의 수용과 비판을 통한 통합관념 1) 수운의 천도(天道) 수용 비판 성리학의 주기설, 공맹의 심학의 전 유교 통, 五帝와 공맹의 사상, 대학 중용 의 내용을 용담유사에 인용, 성경신, 도덕규범의 중요성 성리학적 주리론, 신분 차별적 계급주의, 허례허식, 종적 우주 관 불교 화엄사상 사회적 기능의 상실 도교 장생불사의 신선사상, 영부, 주문 언급 없음 時運이나 道는 같다고 봄, 유원속사의 사후 구원관, 외재 학문으로의 사학 적 초월신관, 조상제사 부정 기독교 2) 증산의 신도(神道) 수용 書傳 : 相授心法 의 정신을 계승 大學 : 新民 의 사상을 전승 유교 불교 도교 기독교 비판 공자: 삼대출처(三代出妻), 소정묘주살(少正卯誅殺) 孟子 : 一心 에 대한 강조 허례: 제례진설법, 상복제도 周易 : 개벽할 때 사용할 글로 중 적서의 구별 시함. 계승해야할 예법을 강조: 儒之範 반상의 구별 節, 浴帶. 공자의 仁, 맹자의 성선설 미륵신앙: 용화세상 남녀의 차별 미타신앙: 나무아미타불 석가모니: 존재의 영속성 특정 승려: 요망한 무리 약사여래신앙: 醫統, 혹세무민을 일삼는 종교 佛之養生, 佛之形體 神仙術: 여동빈의 비유 노자: 효 사상에 위배 仙之造化, 仙之胞胎 예수: 어리석은 사람을 교화하러 온 사 람. 이마두: 천국건설을 위한 선행적 행위 벽곡법: 밥 사상에 위배 신명박대 모든 의식과 교의를 부정

72 3) 수전의 원도(原道) 수용 비판 대동사상 공자: 경전을 잘못 전함 저술에서 孔孟의 격언이나 내용을 인용, 위패를 모시고 여러 神들을 숭배 출판물의 명칭에서 유교적 표현을 사용 하는 행위 불교 33천, 18중 지옥, 업 사상, 염라 邪魔外道로 규정 도교 옥황상제, 天門, 美女, 甘果, 大道君, 眞人 邪魔外道로 규정 유교 예수: 홍수전 자신의 天兄 기독교 勸世良言: 자신의 방식으로 이해 언급 없음 유일신 신앙, 만민평등사상 4) 장소의 대동(大同) 수용 비판 유교 공자의 仁 사상, 禮運의 대동사상 성리학적 학문주의, 훈고학 고증학 비판 불교 반야사상, 화엄사상 불교의 不殺生설 도교 신선사상, 포박자 사상, 섭생법 기독교 평등사상, 박애정신 미묘한 말 및 심오한 진리가 많지 않으므로 사람들로 하여금 심취시키는 데 한계가 있음 초보적인 교리

73 통합관념의 비교 이상세계 의 공간 이상세계 명칭 인간의 위상 수용한 주 종교 天道 神道 地上 天界, 地界, 人界 地上仙境 용화선경, 지상선경, 선세 神明을 부리는 神仙 君子 존재로 神明보다 높음 유교 유교 불교 도교 수용한 불교, 도교, 보조 종교 민간신앙 모티프 득도, 개벽 절대적 하느님과의 존재와의 교감을 통한 관계 대행자 민간신앙 득도, 해원, 공사 자신이 곧 上帝이자 彌勒의 化身 原道 大同 천상의 천국, 地上 지상의 천국 태평천국 大同合國 유일신인 상제 의 신선 보살과 같은 자녀로서 一家의 존재 위상 기독교 유교, 불교, 민간신앙 유교 불교, 도교, 서구 민주주의 사상 幻夢, 천국, 자각, 대동, 천하일가 천하위공 상제의 次子 언급 없음 최제우, 강증산, 홍수전, 강유위의 생애 비교 최제우(수운) 강일순(증산) 홍인곤(수전) 강유위(장소) 생몰연대 출생나라 조선 조선 청 청 출생지역 경북 慶州 전북 古阜 광둥성 花縣 광둥성 南海縣 출신 향반 향반 客家 농민 봉건관료집안 교육 유교 유교 유교 유교 과거 응시하지 않음 응시하지 않음 수차례 응시 연이은 낙방 과거급제 관료

74 직업 장사꾼, 법술 머슴, 선생 天主와 靈的 神과의 관계 交感을 한 본인 사람 선생 관료 天父上帝의 次子 역할과 사명 개벽사상 전파 廣求天下 지상천국건설 대동세계건설 추종자 하층 민중 하층 민중 하층 민중 지식인, 관료 得道, 開闢 得道, 解寃 幻夢, 天國 自覺, 大同 侍天主, 天道 公事, 神道 天國, 原道 大同 五帝 복희, 요순 三代 孔子 이상세계 구현을 향한 모티프 사상의 핵심개념 遠古의 모델 3. 待望의 이상세계 1) 수운의 무극대운(無極大運)-후천개벽(後天開闢)을 통한 동귀일체(同歸一體) 의 지상선경(地上仙境) 수운 최제우가 1860년 하늘로부터 계시를 받고 전파한 후천개벽 사상은 무극의 운 을 주도할 무극대도 로 이 무극대도가 곧 천도 이다. 그러므로 수운이 주장한 이 천 도 를 기성종교의 수용과 비판을 통해서 형성된 총체적 통합종교 관념으로 볼 수 있 다. 수운은 천도 가 세상에 실현될 때 인류가 꿈꾸던 이상세계가 실현될 것으로 확신 했다. 그러므로 천도 의 실현은 무왕불복 의 역사적 시운에 의한 후천개벽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후천개벽의 궁극적인 지향점은 지상에 이상세계를 건설하는 것이 다.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인식과 방법을 다시개벽 을 통한 새로운 질서의 재창조 에서 찾으려 했던 것이다. 개벽 후 5만년에 네가 또한 처음이로다. 나도 또한 개벽 후 노이무공(勞 而無功)하다가서 너를 만나 성공하니 나도 성공 너도 득의 너의 집안 운 수로다.8)

75 개벽의 시운(時運)과 이에 따른 필연성을 하느님과의 소통을 통하여 직접 알게 되었 으며 이것을 수운과 그의 집안의 영광으로 생각하고 있다. 이러한 개벽의 운수는 요순 시대로의 환원이지만 그 과정이 순탄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수운의 염려는 다음 구절 에서 드러난다. 십이제국 괴질운수 다시 개벽 아닐런가 요순성세 다시 와서 국태안민 되지마는 기험하다 기험하다 아국운수 기험하다.9) 선천의 운이 다하고 후천의 새로운 운을 맞이하는 차원의 변화가 바로 개벽이다. 운수야 좋지마는 닦아야 도덕이 되는 것 10)이므로 후천개벽 의 시운에 있어서 수운은 세상 사람들이 천리와 천명을 따르고, 본래의 마음을 회복하여 후천의 새로운 세상을 열어가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러한 후천의 새로운 세상에서 펼쳐질 도를 수운은 무극대도 즉 동학 이라고 말한다. 후천개벽을 통하여 천도 가 실현될 지상의 이상세계는 동귀일체 의 이상세계이다. 수운이 지상천국에 대한 구체적 개념 정의나 모델을 제시한 기록은 없다.11) 또한 반봉 건적이고 반외세적인 면을 보여주지만 정치체제라든지 생산력과 생산관계에 대한 구 체적인 묘사는 보이지 않는다. 이와 달리 모든 사람이 요순과 같은 성인군자로서 공동 체를 이루고 있던 상고시대를 이상사회로 보았다. 그리고 초현실적 내세가 아니라 신 분의 차등이 철폐된 동귀일체의 평등적 도덕사회 구현을 의도하였다. 그러므로 수운의 이상사회는 도성덕립 을 이룬 군자공동체가 사회의 주체가 될 수 있는 세상이다. 2) 증산의 후천선경(後天仙境)-천지공사(天地公事)를 통한 중통인의(中通人義) 의 용화선경(龍華仙境) 증산은 이상세계인 용화선경을 건설하기 위하여 기존의 방법으로는 도저히 해결할 길이 없다고 판단하였다. 증산은 자신의 천지공사를 행함으로써 기존의 세계질서를 재 8) 용담유사 용담가 9) 용담유사 안심가 10) 용담유사 교훈가 11) 이돈화는 수운이 동귀일체사상으로 미래의 사회상을 구상하였으며 그것이 바로 지상천국이라고 한 다. 그런데 수운의 경전에는 지상천국이란 문구는 보이지 않는다. 이돈화는 지상천국교리 근거로 수덕문 의 입으로 장생의 주문을 외우고 와 지상신선 그리고 동귀일체 를 예를 드는데 머물고 있 다. 따라서 지상천국이란 개념은 이돈화의 해석인 것이다.(신일철, 동학사상의 이해, 사회비평 사, 1995, p.98.)

76 편하여 새로운 세상이 도래한다고 확신하였다. 천지공사 는 기존의 세상에서 원 과 한 으로 쌓인 묵은 기운을 풀어줌으로써 새로운 세계를 열기 위한 해원공사(解寃公 事)12) 를 통해서 가능한 것이다. 증산에 있어서 이상세계는 후천선경(後天仙境) 으로 묘사되고 있으며 세계질서 재 편방안으로의 천지공사 이전의 세상을 선천(先天) 이라는 개념으로 규정하고, 해원 이후에 전개되는 새로운 세계질서를 후천(後天) 이라는 개념으로 설정하였다.13) 증산 이 언급한 이상세계는 시운(時運)에 의하여 다가오는 세상이나 변혁에 의하여 전개되 는 세상이 아니라, 자신이 직접 주관하는 천지공사(天地公事) 라고 하는 의례적 행위 에 의해서 도래한다고 인식하고 있다. 증산은 자신이 주도한 천지공사 가 순조롭게 진 행되어 이러한 이치에 부합되는 시기가 오고 이에 합당한 인물이 나와서 이들이 후천 선경을 주도하게 된다고 확신한다. 계획에 맞는 때가되고 그 때에 맞는 사람이 와서 일이 성사되는 상황을 증산은 시 유기시(時有其時) 인유기인(人有其人) 이라고 말한다. 이러한 상황을 통하여 완성된 후 천선경을 증산은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후천(後天)에는 천하(天下)가 한 집안이 되어 위무(威武)와 형벌(刑罰) 을 쓰지 아니하고 조화로써 중생(衆生)을 다스려 화(化)할지니 벼슬아치 는 직품(職品)을 따라 화권(化權)이 열리므로 분의(分義)에 넘는 폐단(弊 端)이 없고 백성은 원통(寃痛)과 한(恨)과 상극(相剋)과 사나움과 탐심 (貪心)과 음탕(淫蕩)과 노여움과 모든 번뇌가 그치므로 성음소모(聲音笑 貌)에 화기(和氣)가 무르녹고 동정어묵(動靜語黙)이 도덕에 합하며 쇠병 사장(衰病死葬)을 면하여 불로불사하며 빈부의 차별이 철폐되고 맛있는 음식과 좋은 옷이 요구하는 대로 서랍 칸에서 나타나며 모든 일은 자유 욕구(慾求)에 응하여 신명이 수종들며 운거(雲車)를 타고 공중을 날아 먼 데와 험한 데를 다니며 하늘이 나직하여 오르내림을 뜻대로 하며 지 혜가 밝아서 과거 미래 현재 시방(十方) 세계의 모든 일을 통달하며 수 화풍(水火風) 삼재(三災)가 없어지고 상서(祥瑞)가 무르녹아 청화명려(淸 12) 대순전경 5장 13) 4절 증산의 선천(先天) 과 후천(後天) 의 개념은 김일부(金一夫)가 그의 저서 正易 에서 복희역(伏羲 易) 과 문왕역(文王易) 을 선천역(先天易)이라고 하고, 일부(一夫) 자신이 지은 정역을 후천역이라고 한 개념을 받아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증산은 천지공사(天地公事) 이전의 세상을 선천세상이 라고 하였고, 천지공사 이후의 세상을 후천세상이라고 명명했다. 일부(一夫) 이전에는 문왕(文王) 이 지은 역을 후천역(後天易)이라고 하고, 복희씨(伏羲氏)가 지은 역을 선천역(先天易)이라고 한 북 송(北宋) 때의 성리학자인 소강절(邵康節) 의 설이 보편성을 지녔다. 그러나 일부(一夫)는 자신이 상제(上帝)로부터 정역팔괘(正易八卦) 를 제시받는 각도(覺道)의 과정을 통하여 선후천(先後天) 의 개념을 재설정했으며, 증산(甑山)은 일부(一夫)가 재설정한 선천과 후천의 개념을 받아들여 자신의 천지공사 를 진행하는 개념 중의 하나로 사용하였다

77 和明麗)한 낙원으로 화하리라.14)(밑줄필자) 나의 세상에는 조화의 선경세상이니 나라를 다스림에 조화로써 한다. 말로써 교화하지 않고, 가르침이 없이도 교화하게 되나니, 도(道)는 상생 하는 도요. 상극 없는 이치와 악이 없는 세상이니라. 그러므로 나의 세상 에는 남자는 대장부(大丈夫)가 되고, 여자는 대장부(大丈 )가 되느니 라.15) 3) 수전의 태평천국(太平天國) -상제교의(上帝敎義)를 통한 천하일가(天下一 家)의 지상천국(地上天國) 수전이 태평천국을 건설하기 위한 여러 가지 방법 가운데 그들의 종교 사상을 일반 인에게 전달하는 것을 강도리(講道理)라 불렀으며 강도리를 통하여 상제교의 교리를 전달하였다. 태평천국은 그 모체인 상제회(上帝會) 시기부터 상제교(上帝敎)라는 종교 적 이념이 내부의 정신적 요소로 자리하고 있었다.16) 그러므로 수전은 태평천국을 건설하고 이를 유지하기 위한 정신적 원리를 기독교를 중심으로 한 통합적 종교 관념인 원도(原道) 를 통해서 실천하고자 했다. 이는 포교를 위해 수전이 저술한 책의 제목이 원도구세가(原道救世歌), 원도성세훈(原道醒世 訓), 원도각세훈(原道覺世訓) 이라는 것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난다. 상제교의 교리에 따른 수전의 태평천국은 천하일가 사상을 바탕으로 한 지상천국 을 지향했다.17) 이와 같은 이상세계를 구현하기 위한 윤리강령과 이상세계의 구조는 원도구세가, 원도성세훈, 원도각세훈 에 잘 나타나 있다. 원도구세가 에서 공평 정직한 세상을 만들기 위한 기본 전제를 정치상의 평등사상을 통해 설명하고, 원도성세훈 을 통하여 경제상의 평등사상을 설명함으로써 이상세계의 구조를 보여 준다. 원도각세훈 을 통하여 우상파타, 만주황제타도, 관료와 지주에 대한 저항 등이 담긴 일종의 행동강령 지침서인 태평천국의 이론적 기초를 확립하였다. 절대적인 평등한 사회를 지향한 태평천국의 이론적 출발점은 원도구세가, 원도 14) 대순전경 5장 16절 15) 천지개벽경 辛丑篇 11章, 16) 17) 曰我世난 造化仙境이니 治則造化라, 有不言之敎와 無爲之化하고, 道則相生이라 無相克之理와 罪惡之世也니라. 是故로 我世난 大丈夫오, 大丈 니라. 최진규, 태평천국의 종교사상, 조선대학교 출판부, 2002, p.227. 모든 사람이 상제의 자녀로 형제자매라는 생각은 일찍이 홍수전이 권세양언 을 읽고 구세의 진 리를 추구하기 시작하면서 제시되었다. 최진규, 상제교의 사상적배경과 종교적구세관, 태평천 국의 종교사상, 조선대학교 출판부, 2002, p

78 성세훈, 원도각세훈 을 통하여 상제 앞에서 모든 인간이 평등하고 남녀 간의 차별 이 없는 형제자매의 관계를 유지하는 사회를 이상으로 하였다. 이를 원도성세훈 과 권세양언 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상제가 천하범간의 대공지부 이므로 사람들은 모두 그의 자녀이며 따 라서 모두 상제를 숭배해야 한다. 천하의 많은 남인은 모두 형제의 무리요, 천하의 많은 여자는 모두 자매의 무리 인데 세간에 차강피계(此 疆彼界)의 사사로움 이나 서로 병탄하는 마음 이 있어 강이 약을 범 하지 않고 중(衆)이 과(寡)를 힘으로 이기지 않으며 지(智)가 우(愚)를 속 이지 않고 용(勇)이 겁(怯)을 괴롭히지 않는 이상사회를 동경하였다.18) 신천상제는 만왕의 왕이며 만국의 주로 우주 안의 만국 사람들은 국왕 으로부터 서민에 이르기까지 모두 그의 장악 안에 있다. 무릇 그의 뜻에 감히 항거하는 자는 어찌 죄를 받지 않는 곳으로 달아날 수 있겠는가? 위 로는 신천상제의 뜻을 거역하지 않고 아래로는 왕장법도를 범하지 않으 며, 세상의 즐거움만을 탐하지 않고 광음(光陰)의 보배를 헛되이 낭비하지 않아 군(君)은 정(政, 正)하고 신(臣)은 충성스러우며 부(父)는 자애롭고 자(子)는 효도하며 관(官)은 맑고 백성이 즐거워하여, 태평의 복을 영원히 누릴 수 있을 것이며 장차 밤에도 대문을 닫지 않고 길에 물건이 떨어져 있어도 줍지 않는 청평호세계(淸平好世界)를 보게 될 것이다.19) 이 구절은 당시 수전이 동경하고 있던 이상세계를 적절하게 표현한 것으로 중국 전 통사상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것이다. 이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에 바탕을 둔 대동세 계의 사상과 기독교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보인다. 당우삼대에 대한 동경은 대동세계 에 대한 동경이었으며 수전은 사마(邪魔)의 문을 뛰쳐나와 상제의 진도(眞道)를 향하 여 천위(天威)를 두려워하고 천계(天誡)를 힘써 준수하여 몸과 세상을 깨끗이 하고 자 신과 남을 바르게 하여 천하일가(天下一家), 공형태평(共亨太平) 의 세상을 이룩할 것을 희망하였다. 20)라고 하였다. 18) 原道醒世訓, 上帝天下凡间大共之父也, 天下多男人 尽是兄弟之辈, 天下多女子, 尽是姊妹之 群 何得存此疆彼界之私 何可起尔吞我并之念 其不一旦变而为强不犯弱 众不暴寡 智不诈愚 勇不苦怯之世也. 19) 勸世良言 神天上帝, 系原造化天地人万物至大神. 宇宙内万国之人物, 皆在神天上帝掌握之中. 倘 若全国之人, 遵信而行者, 贫者守分而心常安, 者慕善义, 心亦常乐, 上不违逆神天上帝之旨, 下不干犯 王章法度, 不独贪慕世乐之欢, 不空费光阴之宝, 君政臣忠, 父慈子孝, 官清民乐, 永享太平之福, 将见夜 不闭户, 道不拾遗的清平好世界矣

79 수전이 지향한 태평천국은 원시공산사회를 모델로 한 중국 고대의 대동 세계에 대 한 동경과 기독교적 이상주의를 현실 속에서 실현하려고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이와 함께 서양열강의 침략을 통하여 자본주의가 유입되는 근대사회를 맞이하는 시기 에 이에 맞서 새로운 시대정신을 주장했다고 볼 수 있다. 4) 장소의 대동세계(大同世界)-천하위공(天下爲公)을 통한 거고구락(去苦求樂) 의 대동합국(大同合國) 장소가 지향하는 이상세계는 천하위공(天下爲公) 을 이상으로 하는 세계이다. 이는 역시 다른 사상가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기성종교의 통합적 관념인 대동 의 정신이 실 현되는 이상세계이다. 천하위공(天下爲公) 의 대동사회(大同社會) 는 천하위가(天下爲 家) 의 소강사회(小康社會) 와 대립적 관계에 놓인 사회이다. 그래서 장소는 대동서 를 통해서 예기 의 예운편 에 나와 있는 대동 에 대한 개념을 기성종교의 통합관 념으로의 대동 으로 확장하여 이를 바탕으로 이상세계를 구현할 정신적 원리로 삼고 자 했다. 그러므로 장소의 대동은 원고에 대한 단순한 복고적 지향이 아니라 종교적 통합관념을 토대로 한 사회 변혁적 이상세계로의 대망이라고 본다. 장소가 제시한 이상사회는 고통이 없고 즐거움을 누릴 수 있는 세상이다. 대동사회 에 대한 대망은 현실세계에 대한 부정적인 인식에서부터 시작하는데 가족제도, 사유재 산제도, 국가제도 등에서 볼 수 있는 모든 구습을 타파하고 여기서 발생한 문제점들을 해결할 수 있는 새로운 이상사회를 구상하였다. 예기 의 대동 개념이 여러 사상과 습합되어 형성된 대동서 에는 기존 세계질서에 대한 문제 제기와 비판의식이 드러 난다. 대동서 는 모두 10부로 구성되어 있으며 각부 마다 들어있는 사상의 핵심을 나열하면 다음과 같다. 1) 세계 속에 들어가 군중의 고통을 살핀다. 2) 국가의 경계(國界)를 없애고 대지를 합친다. 3) 계급의 경계(級界)를 제거하고 민족을 평등하 게 한다. 4) 종족간의 경계(種界)를 없애고 인류를 동등하게 한다. 5) 남 녀의 경계(形界)를 없애고 독립을 보존한다. 6) 가정의 경계(家界)를 없 애고 하늘의 백성(天民)으로 삼는다. 7) 산업의 경계(産界)를 없애고 생 업을 공유화 한다. 8) 어지러움의 경계(亂界)를 제거하고 태평하게 다스 린다. 9) 유계(類界)를 없애고 중생을 사랑한다. 10) 고통의 경계(苦界)를 없애고 극락에 이른다.21) 20) 原道醒世訓, 跳出邪魔之鬼門, 循行上帝之眞道, 時凜天威, 力遵天誡, 相與淑身淑世, 相與正己 正人

80 장소가 제시한 10부 중에 인간을 행복하게 하는 최고단계의 이상적인 상황을 계부 (癸部)에서 언급하고 있다. 이러한 세상이 거고구락(去苦求樂) 의 대동합국이라는 이 상세계로 이를 요약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1. 대동세(大同世)에는 사람들이 모두 완벽한 조건을 갖춘 공공(公共)의 집에 살므로 개인의 집을 따로 지을 필요가 없다. 2. 태평세(太平世)에는 나라를 돌아다니는 생활로 바뀌게 되어 주거환경 이 마치 순환하는 것처럼 된다. 3. 태평세(太平世)에는 사람들이 개인 집을 짓지 않아도 되며, 비록 큰 부자나 편안한 노인이라 할지라도 여관(공공의 집)에서 살아간다. 4. 대동세에는 저절로 가는 배와 저절로 가는 차가 있어 지금보다 몇 천, 몇 백배 빨리 갈 수 있다. 5. 대동세의 초기에는 산 위에서 살고, 그 다음에는 물에서, 맨 나중에는 공중에서 살게 된다. 6. 대동세에는 하인이 없고 모두 기계가 대신한다. 7. 대동세에는 식생활이 날로 개선되어 날로 장수하는 사람들이 늘어난다. 8. 대동세에는 매일 새로 발명되는 것이 많아 고기를 대신할 수 있는 우 수한 식품이 만들어지는데 거의 고기와 똑같은 것이 나오게 된다. 9. 대동세에 이르러 차차 평등이 이루어지고, 물건을 만드는 기술이 날로 새로워지며, 고기를 대신하는 식품이 생기면 어찌 다시 강한 자가 약자 를 능멸할 것이며 같은 기운을 타고난 동물의 고기를 먹는 일이 있겠는 가? 이때는 전 세계가 살생을 금하여서 마침내 완전한 평등이 이루어질 것이다. 10. 대동세에는 의복에 구별이 없다. 귀천(貴賤)이 없고 남녀를 구별 짓 지 않으며 단지 귀중한 사람이 있을 뿐이다. 11. 대동세에는 기구들이 정교하고 기이하며 비행기가 날아다녀 지금으 로는 상상할 수 없는 일이 많을 것이다. 12. 대동세에는 머리칼로부터 수염 눈썹에 이르기까지 모두 깎아버린다. 온몸의 모든 털을 다 깎되 오직 코털만은 먼지와 더러운 공기를 막기 위 해 약간 남겨둔다. 태평세의 사람들은 가장 문명화되었으므로, 모든 털을 없애버려 몸을 깨끗하게 한다. 13. 태평세의 욕조는 순전히 흰 돌을 사용해서 만든다. 물은 모두 묘약 으로 만들어 그 물로 한번 목욕을 하면 편안하고 즐거워 마치 향기로운 21) 리쩌허우/임춘성, 중국근대사상사론, 한길그레이트북스, 2005, p

81 술을 마신 것 같고 몸의 때도 깨끗이 없어진다. 14. 대동세에는 누구나 매일 의사에게 한 번쯤 진찰을 받는다. 의사의 수는 그곳에서 일하는 사람의 수에 따라 정비례한다. 생활이 향상되어 있으므로 질병은 찾아보기 힘들다. 만약 기운이 다하여 죽을 지경에 이 른 사람이 고통스러워하면 여러 의사들이 의논하여 전기로 생명을 끊어 고통을 면하게 해준다. 이 시기의 의술의 신통함은 헤아릴 수가 없다. 사 람의 수명도 날로 길어져 지금으로는 상상할 수 없는데, 대개 모두가 천 이백 세로부터 점차 수 천백 세까지 늘어날 것이다. 15. 대동세에는 사람들이 걱정하는 바가 없어서 편안함과 즐거움이 극에 달해 오직 오래 살기만을 생각한다. 신선술(神仙術)을 크게 융성시켜 모 든 사람이 이것을 공부하게 되는데 이런 일들은 대동세에서 일어날 보편 적인 현상이다. 신선학(神仙學)이 융성한 다음에는 불교(佛敎)가 흥하게 될 것이다. 마지막 단계에서는 빛과 전기를 타고 기(氣)를 조절해서 지구 를 벗어나 다른 별로 가게도 된다. 이것은 대동의 극치이며 인류의 지혜 가 또 한 번 새로워지는 때이다. 16. 기독교의 가르침은 대동세에 이르면 저절로 없어지게 된다. 회교(回 敎)도 대동세에 들어서면 쇠멸한다. 17. 대동 태평의 이상은 곧 공자의 뜻이다. 대동세에 이르면 공자의 삼세 설(三世說)도 모두 이루어진다. 18. 대동세는 오직 신선사상과 불교 두 가지만 크게 성행할 뿐이다. 대 동이란 이 세상의 도의 중의 극치이며, 신선사상의 장생불사(長生不死)는 더욱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사상의 극치인 것이다. 불교의 불생불멸(不生 不滅)이란 이 세상을 벗어나지 않지만 세간(世間)을 나와서 더욱 대동의 세계 밖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대동세가 되면 처음에는 신선술 이 성행하고 후에는 불교의 가르침이 흥할 것이다. 19. 신선술과 불교 이후에는 하늘에서 노니는 학문인 천유학(天遊學)이 있는데, 이에 관한 것은 내가 다시 책으로 쓸 것이다. 대동서 에서 언급된 대동의 이상세계는 물질적인 면과 정신적인 면에서 모두 완 벽한 조건을 갖춘 이상세계이다. 장소의 이러한 대동세계상은 인간과 경제관계의 사 회화 및 넓은 의미에서 민주적이라고 특징지을 수 있는 정치 조직화 의 원리를 그 성 립의 전제로 하고 있다. 22) 유토피아사상은 불만스러운 상황에 의해 배태되며 현실 22) Hsiao Kung-chuan, A Modern China and a New World Kang Yu-wei, Reformer and Utopian, ,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75, p

82 상황으로부터의 객관적 분리가 어느 정도 이루어진 후에야 비로소 그 성숙함에 이르 게 된다. 왜냐하면 현실에 대한 불만은 개혁에의 충동을 유발하기 쉬우나, 유토피아의 사상이 구상되려면 먼 장래에 대한 탁월한 안목이 요구되기 때문이다.23) 그러므로 장 소는 근대로 나아가는 시점에서 모든 상황을 변혁의 대상으로 여겼다. 완전한 이상사 회가 실현되기 위한 선행적인 과제로 기존세계의 모든 구습이 타파되어야 하며, 가족 제도 사유재산제도 국가제도를 비롯한 경계를 짓는 모든 제도를 타파하여야 한다고 했 다. 정치, 경제, 사회, 종족이라는 측면에서 개인과 사회의 변화가 이뤄져서 기존의 세 계질서에서 야기된 문제점을 초월할 수 있는 새로운 이상사회의 건설을 주장하였다. 4. 결론 이 네 인물의 이상세계관을 고찰해 보면, 한국의 수운이나 증산은 고등종교로 인정 받지 못하는 유사종교의 창시자로만 여겨지고, 수전이나 장소는 실패한 정치인으로만 여겨지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이들이 각자 기성종교의 섭렵과 각성을 통해 다원주의 적 종교관을 형성했다고 볼 때 분명 신종교의 교조(敎祖)다운 면모를 지니고 있다. 비 록 종단과 경전, 사제조직과 구원의 논리 등 종교로서 갖추어야 할 필요충분조건을 남김없이 구비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그렇다 하더라도 경서를 통해 당대의 민중에게 인식의 각성을 유도하여 종단이나 사제조직과 유사한 자발적 조직을 떠올리게 하고, 특히 나름의 이상세계관을 제시하여 구원의 논리를 설파한 것은 신종교의 특징으로 손색이 없다고 본다. 특히 이들의 다원주의적 혼합주의는 그들이 살던 시대로부터 100여 년이 지난 오늘 날 세계적으로 시대의 조류로 떠오르고 있는 종교다원주의 의 원류(原流)와 같다고 본 다. 세계가 이를 추구하는 이유는 하나의 공동체를 추구하는 현실 때문인데,24) 동아시 아의 근대기에 나타난 네 사상가의 종교적 견해도 공통의 고민을 해결하려다보니 유 사한 사고를 갖게 되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그것과 전혀 다르다고만 말하기는 어렵 다. 이처럼 논자는 이들 네 인물의 사상을 비교하여 제시하면서 다원주의적 혼합주의가 어떻게 형성되어 신종교 교리로서 위상을 굳혀갔는지를 제시해보이고자 했다. 그러나 논자는 이들의 사상을 신종교의 연구에 한정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흔히 종교적 사유는 교조 개인의 종교적 경험을 개념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깨닫지 못한 것까지를 공유하거나 집단의 위세에 순종하도록 강요하는 성향을 지닐 수 있다. 논자 가 보기에 네 사상가는 비단 종교적인 차원에만 머물지 않고 시야와 사고의 폭을 넓혀 역사와 사회의 변화내지 발전의 규칙을 찾아내려 노력했다고 본다.25) 즉, 이들이 제시 23) 24) Hsiao Kung-chuan, 앞의 책, p.434. H. 카워드/한국종교연구회, 앞의 책, pp

83 한 이상사회 건설과 지향의 구체적 실천윤리 및 모델은 현실을 비판하거나 극복하면서 미래를 지향하는 역사발전의 논리였다는 것이다. 물론 수운과 증산의 이상세계관은 고원(高遠)한 신선의 세계를 동경하면서 이를 현 실적으로 실현가능한 세계라 언급한 면이 있으며, 도교의 신선과 같은 존재를 궁극적으 로 지향해야 할 대상이라 여기면서 수행(修行)의 방안을 제시하기도 했다. 수전과 장소 도 기독교와 유교를 중심으로 사상을 체계화하면서 예기 의 예운편 에 나오는 대 동세계 를 이상세계의 모델로 삼아 현실과 다소의 거리를 지닌 이론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그들이 제시한 이상세계는 맹목적 자연과의 합일(合一)이나 비합리적인 청빈 낙도(淸貧樂道), 혹은 몽환적인 신선의 세계 따위가 아니었다. 당대 현실에서 부닥친 절박한 실존에의 물음에 적절하고 현실적인 대안을 제시하고자 애썼던 인물이기에 이 들이 제시한 이상세계 역시 영성(靈性)의 회복을 통해 도달할 수 있는 깨달음의 경지 였다. 따라서 원고(遠古)에 의탁하라고 이르더라도 그것은 막연히 원시사회를 동경하 거나 비인간의 세계를 추구하라는 가르침이 아니었다. 순서대로 보면 현실과의 접점에 서 반봉건과 근대 극복을 위해 온힘을 기울인 결과, 혹은 그 이상의 변증법적 지향의 결과로써 이상세계를 실현하도록 노력하라는 권유였던 것이다. 따라서 원고(遠古) 의 관념은 결코 전통이나 보수로의 회귀가 아니라 근대 사회변동에 필요한 영성(靈性) 회 복을 위한 변증법적 승화의 과정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의 사상은 동아시아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갖고 주도적으로 근대 사회 를 변동시켜가기를 권하는 사상이었다. 사회변동을 촉진시킬 수 있는 가치를 제공하면 서 인간적이고 개아적인 자아에 눈 뜨고 차차 자신의 영성에 의한 구원을 바라던 민중 들에게 봉건적인 가치와 제도를 거부하고 새로운 안목을 갖고 사회를 변혁하도록 유 도하고자 했다. 그렇게 이들의 사상을 되짚어보면 이들이 신종교는 주창하였으되 종교가 결코 사회 와 동떨어진 것이 아님을 역설했음을 이해할 수 있다. 이들이 내세운 신종교의 관념이 야말로 사회변동에 동기를 부여하기도 하고 사회변동을 설명하려 한 것이었다. 따라서 이제부터라도 이들의 행적이나 사상을 신종교의 그것으로만 이해할 게 아니라 당대현 실에 대한 이해, 당대사회의 개조에 필요한 실천윤리의 제시라는 개방적이고 적극적인 논리로서 소구(遡求)할 필요가 있다고 본다.26) 시대를 이끌어가고자 한 신종교로서의 사상, 시대성을 중시하면서 현실의 시공에서 구현하고자 한 이상세계관 - 이 두 가지 주제만으로도 앞으로 이들의 사상을 역사학이나 민속학, 종교학에서 더욱 폭 넓게 다 룰 가치가 충분하다고 본다. 25) 26) 강문호, 동학사상과 태평천국혁명의 민족의식, 동학연구 제13집, 한국동학학회, 2003, p.101. 김성윤, 姜甑山의 理想社會論과 天地公事, 지역과 역사 제7호, 부산경남역사연구소, 2000, p

84 欲의 現實과 仁의 文藝運動 趙 柄 悟* Ⅰ. 欲의 現實과 東西文明 Ⅰ-1. 韓末 衛正斥邪의 지식인 柳麟錫은 開化가 진행되던 당시의 상황을 다음과 같 이 읊고 있다. 전기는 하늘에서 노략질하고 철로로는 땅을 얽어, 배 수레 이리 저리 다녀 인간세계 요동치네. 常道에 어그러지는 悖理를 어찌 다 표현하랴, 하늘 땅 사람에게 화를 씌워 모두가 불안하네.1) 전기가 사용되고 철도가 놓아지는 등 서구의 기계문명을 처음 목도한 당시 지식 인의 이 거부적 반응을 우리는 그 동안 낡은 관념을 되뇌이는 푸념이나 위정척사파 의 그 지독한 保守主義의 城이 허물어져 가는데 대한 비탄의 소리쯤으로 알아 왔다. 그런데 그로부터 한 세기가 남짓 경과한 지금 날로 빨라져 가는 그 기계문명의 自 己增殖의 와중에서 마침내는 인류와 지구의 생명의 滅絶을 근심하게 될 줄을 누가 알았겠는가? 지금 인류의 생존을 위협하는 대재난은 한 두 가지가 아니나, 우리가 시급히 다루어 야 할 급선무는 환경과 생태의 문제,2) 그리고 자본주의와 양극화 현상이라 할 수 있다. * 부산대 외래교수 1) 柳麟錫의 毅菴集 : 電掇于天鐵絡地 舟車橫縱蕩人寰 乖常悖理何名狀 加禍三才摠不安 2) 환경이나 생태의 문제는 단일하지 않다. 농약 폐수 쓰레기에 의한 토질 수질 오염을 위시하여, 국 지적 폭우 폭설 혹한 혹서의 怪候, 생물종의 日益消滅, 그리고 최근 심각히 이슈화 되고 있는 지구 온난화에 이리기까지 한 두 가지가 아니다. 지구 온난화의 경우, 최근의 보도를 보면 영국 남극조 사위원회의 조사에 따르면 남극의 온도가 1970년대 보다 3.6도나 상승했다고 한다. 권위 있는 과 학 전문 저널 사이언스 誌도 최근 지구 온난화에 따라 해수면이 빠른 속도로 상승하고 있다고 했다. 특히 아시아의 두 巨國 중국과 인도가 경제개발에 박차를 가하고 있어 앞으로 지구 온난화 의 속도는 더욱 빨라질 전망이다. 현재 중국은 에너지 수요의 76%를 석탄에 의존하고 있는데, 이 는 한 해에 22억톤의 석탄을 태우는 것을 의미하며, 이 수치는 2010년에는 26억톤에 이를 것이 예측된다고 한다. 또 중국의 자동차 생산량은 폭발적으로 증가해 2000년에 64만 대에 불과했던 생산량이 2005년에는 310만대에 이르렀다는 것이다. 따라서 자급자족했던 석유를 외국에서 수입 해다 쓰는데 갈수록 수입량이 많아지고, 2025년에는 지금의 두 배의 에너지가 소비될 것이 예측된

85 Ⅰ-2. 그러면 환경과 생태의 문제와 자본주의와 양극화 현상이 초래된 근본원인은 무엇일까? 이는 다름 아닌 인간의 欲, 즉 물질욕 때문이라 할 수 있다. 16세기의 道學者 李彦迪의 묘사를 보자. 사치를 금지하지 않아서는 아니 될 것입니다. 심하기도 합니다. 사치의 해됨 은, 하늘이 온갖 물질을 낳고 그것을 취해 쓰니 사람은 온갖 물질의 주인인 셈입니 다. 그런데 사람에게는 耳目口鼻의 욕망이 있어 그 욕망은 한량이 없는데, 물질은 山川 川澤에서의 생산이 있지만 그 생산에는 한계가 있습니다. 욕망이 한량없는 지 라 천하의 물건을 가지고 한 사람의 욕망을 받들더라도 충분치 못한 것이며, 물질의 생산에는 한계가 있는지라 한 사람의 욕망으로 천하의 물질을 다 써도 충족되지 않 을 것입니다. 하늘의 물질을 마구 써 없애니 하늘이 노하고, 백성의 膏血을 착취하 여 백성들이 원망을 품습니다. 백성들의 원망을 쌓고 하늘의 노여움을 쌓으면서도 그칠 줄을 알지 못한다면 서로 쟁탈하는 사태가 일어나서 멸망이 뒤따르게 될 것 입니다.3) 천하의 물건을 가지고 한 사람의 욕망을 받들더라도 충분치 못한 그 욕망을 부추 겨 혼란과 멸망이 뒤따르게 될 상황에까지 이른 罪責은 거의 전적으로 西歐文明의 패턴에 있다고 하겠다. 서구문명은 동양문명에 비해 상대적으로 보다 많이 欲의 동 기를 잉태하고 欲을 부추기는 방향으로 발전해 왔다. 일찍이 西歐에 받아들여져 서구적 삶의 원리가 되어온 성경 에는 분명히 이렇게 적혀 있다. 하나님이 그들에게 복을 주시며 그들에게 이르시되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라. 땅을 정복하라. 바다의 고기와 공중의 새와 땅에 움직이는 모든 생물을 다. 그래서 중국의 통치자들은 석유 등 자원확보를 위해 세계를 누비고 있다. 이에 따라 이산화탄 소를 비롯한 온실가스의 배출량도 같은 비례로 높아지고, 지구 온난화도 그만큼 빨라지며, 해수면 상승도 그만큼 빨리 진행될 것이다. 지구 온난화의 부작용은 해수면 상승에 의한 육지 면적의 축 소에만 그치지 않는다. 怪候의 빈발은 물론이려니와 생물종의 일익 소멸 등 생태계의 왜곡도 필연 적으로 진행될 것이다. 거기다 위와 같은 에너지 소비에 동반하여 산업화가 진행됨에 따라 토질 수 질 오염 등 여타의 공해도 더욱 악화될 가능성이 클 것이다.(중국의 江川 70% 이상이 이미 오염되 었고, 黃海도 오염이 점차 심각해져 간다고 한다.) 13억 중국인의 물질욕의 팽배는 세계의 공해를 더욱 높은 단계로 재촉해 갈 것이다. 인도가 지금 중국과 비슷한 과정을 밟아 가고 있고, 아프리카 대륙까지 산업화되는 날엔 지구의 자원은 바닥날 터이고, 그 대신 공해는 하늘과 땅, 그리고 강과 바다에 가득 차고 말 것이다. 그 다음 상상조차 싫은 결과에 봉착하고 말 것이다. 이렇게 인구 문 제, 핵 문제가 아니더라도 공해 문제 한가지만으로도 인류 생존의 지속 가능의 입지는 점점 좁아 들고 있는 것이다. 여기에 대해서 과학 기술의 고도한 발전으로 인류 재난의 방지가 가능하다고 하는 낙관론이 있어 오지만 악화일로의 상황으로 보면 낙관론은 신빙할 수가 없다. 3) 李彦迪, 晦齋集 12, 弘文館上疏

86 다스리라 하시니라.4) 물질욕의 왕성한 행사를 부추겨 땅과 바다 그리고 공중의 모든 생물, 즉 자연 자 체 내지 자연물을 정복하고 장악하라고 가르치고 있다. 자연 내지 자연물을 인간의 물질욕을 충족시키는데 필요한 단순한 물질이나 객체 이상으로 자연을 보지 않는 태도이다. 성경 의 이러한 가르침을 이어 받아 마테오리치는 天主實義 에서, 오직 이 한 천주만이 천지만물을 化生하여 사람을 存養하니, 우주간에 우리 사람을 양육하 기 위한 것이 아닌 물건은 하나도 없다. 5)라고 하면서 위의 성경 의 구절의 뜻을 천명하고 있다. 요컨대 하나님 이 사람의 존양을 위해 천지 만물을 만들었으니, 사 람의 양육을 위해서라면 맘대로 자연 내지 자연물을 희생시켜도 좋다는 인간의 唯 我的 獨存欲을 造物者의 이름으로 보증하고 있다. 오늘날 인류를 存亡의 기로로 몰 아 넣는 환경 생태 문제의 죄책의 대부분이 원천적으로 성경 의 위와 같은 가르침 에 있다고 해도 과언은 아닐 것이다. 이에 반하여 동양에서의 자연물 내지 자연에 대한 자세는 어떠했는가? 이달(孟春)에 (중략) 山林 川澤에 제사지낼 때의 犧牲으로 암소 암양을 쓰지 못하도록 명령한다. 수목을 베는 것을 금한다. 새 둥우리를 뒤엎지 말며, 幼蟲과 어 미의 태 안에 있거나 어린 짐승과 겨우 날기 시작하는 새들을 죽이지 말도록 할 것 이다. 작은 짐승을 죽이지 말며, 새의 알을 취하지 말도록 하라. (중략) 이 달(孟夏) 에 수목이 한창 왕성할테니 虞人[수목 사냥터의 관리 감시원]에게 명하여 산에 들어 가 수목을 두루 조사하며, 盜伐하지 말도록 할 것이다. 토목공사를 일으키지 말며, 제후들과 회합하여 군대를 일으키고 대중을 동원하지 말 것, 즉 大事를 일으켜서 흙 의 기운[土氣]을 요동케하지 말도록 할 것이다. (중략) 大事를 일으키면 하늘의 재 앙이 있을 것이다.6) 禮記 의 기록이다. 이 동양의 기록에 나타난 자연 내지 자연물에 대한 자세는 사뭇 보호적이다. 자연 재지 자연물을 인간 생존의 절대 조건으로 보는 점에 있어서 는 동서양이 다를 바 없다. 그러나 그것들을 대하는 태도에 있어서는 서양은 절대 군림으로 복종을 요구하는 것임에 대하여, 동양은 생존을 위한 동반자의 관계로 인 4) 聖經, 創世記 마테오리치, 天主實義 上. 是月也 (중략) 命祀山林川澤犧牲毋用牝. 禁止伐木. 毋覆巢, 毋殺孩蟲胎夭飛鳥, 毋麛, 毋卵.(중략) 是月也, 樹木方盛, 乃命虞人入山行木, 毋有斬伐. 不可以興土功, 不可以合諸侯, 不 可以起兵動衆, 毋擧大事以搖養氣,(중략) 擧大事則有天殃. 5) 6) 禮記, 月令 :

87 식하는 것이다. 거의 대조적인 차이가 있다. 서양은 인간의 唯我的 獨存을 위해 자 연 내지 자연물을 맘대로 享用하도록 하나님 으로부터 보증을 받은 데 대하여, 동 양은 토목공사나 전쟁을 일으켜 흙의 기운을 요동케 하면 하늘로부터 벌을 받을 것이라고 했다. 禮記 는 대략 2세기경에 이루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 이전 孟子 에 서는 촘촘한 그물을 물웅덩이나 연못에 넣지 않으며, 도끼를 때에 맞추어 산림에 들어가게 하라. 7)고 하였고, 이 이전의 論語 에서는 孔子께서는 낚시질은 하셨으 나 그물질은 하지 않으셨으며, 주살로 쏘셨지만 잠자는 새를 쏘지 않으셨다. 8)고 하 여, 자연물에 대한 애호의 자세는 心性 자체로서 또는 체질 자체로서 전해지고 있었 다. 그리고 禮記 이후 서구문명이 침입하기 전까지 그러한 심성과 체질 자체에 변함이 없었다. 앞에 든 韓末 衛正斥邪의 지식인 柳麟錫의 언설은 이러 배경에서 나 온 것이다. 요컨대 동양인은 자연과 자연물에 대해서 욕망을 절제하는 패턴임에 대 하여, 서구인은 욕망을 맘껏 행사하는 패턴이다. Ⅰ-3. 이러한 패턴은 자연과 자연물에 대해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다. 자연과 자연 물은 욕망이 지향하는 대상의 일부분일 뿐이다. 十字軍 전쟁을 일으킨 것도9) 이 패 턴에 의해서이고, 5대양 6대주에 걸쳐 식민지를 경영한 것도 이 패턴에 의해서이 다. 獨存을 위해 생육하고 번성하여 땅에 충만하게 하기 위한 땅에 충만하게 하기 위한 땅의 정복 이다. 그들은 마침내 욕망을 제도화하여 자본주의 체제를 만들어 식 민지 경영을 통해 맘껏 발전시켰다. 자본주의는 그 발전단계에 따라 여러 가지 형태 로 변했지만 그것이 인간의 물질욕을 풀어놓은 상태에서의 자유경쟁과 개인주의를 표방한다는 점에서는 별로 변함이 없다. 근년에는 이 자유경쟁과 개인주의가 더욱 苛烈하여 기업이나 개인이 강자만 살아남고 약자는 도태되는, 가위 정글의 규율이 7) 孟子, 梁惠王上: 數罟 不入洿池 (중략) 斧斤 以時入山林 (중략) 述而篇: 子釣而不綱 弋不射宿 9) 11세기 말에서 13세기 말 사이에 서유럽의 그리스도교도들이 성지 팔레스티나와 성도 예루살렘 을 이슬람교도들로부터 탈환하기 위해 전후 8회에 걸쳐 감행한 원정에 참여한 군사를 십자군이라 고 부른다. 당시 전쟁에 참가한 기사들이 가슴과 어깨에 십자가 표시를 했기 때문에 이 원정을 십 자군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십자군에게서 종교적 요인을 강하게 느끼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교도와 이슬람교도와의 싸움이라는 점에서 당연하다. 그러나 이것을 간단히 종교운동이라고 성격지을 수 는 없다. 봉건영주, 특히 하급 기사들은 새로운 영토지배의 야망에서, 상인들은 경제적 이익에 대 한 욕망에서, 또한 농민들은 봉건사회의 중압으로부터 벗어나려는 희망에서 저마다 원정에 가담하 였다. 그 밖에 여기에는 호기심 모험심 약탈욕구 등 잡다한 동기가 신앙적 광분과 합쳐져 있었다. 대체로 십자군시대의 서유럽은 봉건사회의 기초가 다져지고 상업과 도시의 발달도 어느 정도 이루 어져 있어서 노르만인의 남(南)이탈리아 및 시칠리아 정복, 에스파냐의 국토회복운동, 동부 독일의 대식민활동 등에서 볼 수 있듯이 주변 세계와의 경계를 전진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이런 배경에서 십자군도 정치적 식민적 운동의 일환이 될 수밖에 없었고, 종교는 이 운동을 성화(聖化)시키는 역 할을 수행하게 된 것이다 8) 論語,

88 全地球的 규모에서 관철되는 상황을 보여주고 있다. 부자는 더욱 부자가 되고 가난 한 자는 더욱 가난해지는 이른바 양극화 현상이 全世界的으로 일어나서 확산되고 심화되는 추세의 일로에 놓여있다.10) 무한 경쟁으로 질주하는 자본주의의 체제를 용인하는 한 양극화는 필연적이다. 경제사회적으로 어떠한 정책을 쓴다 해도 긍극적으로 양극화의 일시 완화를 위한 미봉책이 되고 말 뿐이다. 이것을 이해하는 데는 복잡한 이론이 필요치 않다. 자원 은 한계가 있고, 그 자원을 노리는 자본주의 주체는 많다. 강자들이 선점하면 나머 지는 패배자로 전략하고 만다. 근래에 세계적으로 기업 합병이 성행하는 것도 경쟁 에서 강자의 입지를 확보하기 위한 것에 다름 아니다. 이런 논리는 개인 차원에서도 그대로 적용된다. 경제사회적 기회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기회를 노리는 개인들은 무수히 많다. 능력있는 강자들이 기회를 점유하고 나면 나머지 무수한 개인들은 양 극화의 底邊으로 존재하고 만다. 더구나 경제 사회적인 기회가 갈수록 점점 적어져 간다는데 문제는 한층 더 심각하다. 말할 것도 없이 이 과정에 중산층의 몰락은 급 속히 진행될 것이다. 그래서 사회구성은 비유하자면, 양극화의 저변으로 존재하는 무수한 개인들로 이루어진 들판에 돛대처럼 강자들이 이따금씩 우뚝 우뚝 솟아 있 는, 기형적인 형태, 비인간적인 형태로 왜곡되어 가고 있다. 인생의 행복은 돛대들 만의 차지가 되고, 무수한 저변의 인생들은 특별히 정신적인 福樂을 향유하지 않는 한 불행하게 살게 될 것이다. 지구 자원을 고갈시키는 대가로서의 財 는 더욱 소수 화되는 소수인의 손에 쥐어지게 되고, 절대 대중은 그로부터 배제되는 사회는 이미 文名된 인간사회라고 할 수 없다. 弱肉强食이 자행되는 정글에 다름 아니다. Ⅰ-4. 현대 자본주의 문명은 자연환경에 있어서나 경제사회적 환경에 있어서 언젠 가는 대붕괴의 臨界値를 향해, 인류 역사의 종말을 향해 급속히 접근해 가고 있는 형국이다. 지구 자원을 위시한 모든 자원 -경제사회적 기회까지를 포함하여- 의 한 최근 발표된 미국내 계층간 이동성 연구 (톰 허츠 교수)라는 논문에 의하면, 빈곤층 가정에 서 태어난 아동이 성장하여 미국내 상위 5%의 상류층으로 진입할 수 있는 가능성은 1%에 불과하 다고 한다. 그러니까 미국의 빈곤층 자녀 100명중 단 한 명만이 상류층으로 이동할 수 있다는 말 이다. 반면 부유한 가정에서 태어난 아동이 성장하여 상위 5%의 부자가 될 확률은 22%에 달했다. 양극화의 장벽으로 계층이동이 至難한 상태가 되었고, 이것이 교육 기회의 불균등에 의해 다음 세 대로 전승이 된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다. 일본의 경우도 최근 보도에 의하면, 일본 경제의 자신감과 자부심의 표현이었던 1억 중산층 사회 도 점차 옛말로 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한 푼 도 저축을 하지 못하는 세대가 1972년 3.2%에서 2005년에는 23.8%로 늘어났다는 것이다. 이런 현상은 1995년 전체 근로자의 77%였던 정규직이 2005년에는 68%로 준 반면 비정규직은 21%에 서 32%로 늘어난 상황과 맞물려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워 자식의 대학 교육이나 부모 봉양을 포 기하거나 자살하는 사람도 많이 늘어난다고 한다. 비정규지도 못되고 아르바이트로 생활하는 젊은 이가 201만명에 달한다고 한다. 일본 역시 양극화로 가는 추세가 점차 심화되고 있음을 뜻한다. 미국과 일본 같은 자본주의 선진국의 위와 같은 사회 경제적 변화는 남의 나라 이야기가 아님은 말 할 것도 없다. 우리의 현실도 이들 나라와 조금도 다름이 없어서 양극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다. 10)

89 계가 더 이상 인간 욕망의 無限한 伸張을 허용치 않는다. 이 전 인류적 거대한 모순 을 어떻게 해야 극복할 수 있을까? 이는 어느 한 나라의 문제만이 아닌 데에 해결 을 위한 도전의 첫 난관에 봉착된다. 각국의 통치자들은 각기 그 住民의 욕구를 해 결해야 할 정치적 위임을 떠맡고 있다. 그런데 그 주민의 욕구한 것이 거의 대부분 물질과 기회에 관한 욕구이다. 인류가 직면해 가고 있는 대모순의 본질에는 아예 관 심도 없는 욕구가 대부분이다. 이 욕구를 해결해야 할 것을 위임받은 각국의 통치자 들은 自國의 또는 자신의 정치적인 당장의 이해를 위해 대 모순을 직시하려하지 않 는다. 미국 중국 인도 같은 세계 최대의 또는 머지않아 최대가 될 온실가스 배출국들 이 교토의정서에 가입하지 않은 것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다. 전 인류의 운명이 걸린 일에 무참하게 눈을 감자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오늘날의 민주주의도 일종의 愚衆 政治인 것이다. 당연히 재검토 되어야 한다. Ⅱ. 仁의 文藝運動 앞에서 논의한 欲의 현실, 즉 환경과 생태의 문제와 자본주의와 양극화 현상과 같 은 대 모순을 방치하는 한 인류는 미래를 이야기할 수 없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를 타개할 수 있겠는가? 이는 坐而待死 없는 것으로, 이러한 대 모순을 타개하기 위해 서라면 전 인류적으로 일종의 비상상황으로 전환해야 한다. 모든 자연과학적, 사회 과학적, 그리고 인문학적 지혜가 대모순의 타개에 우선적으로 바쳐져야 한다. 그래 서 사회 정치 경제적인 실천이 대모순의 해결에 최대한 연관을 갖도록 해야 한다. 仁 의 문학으로의 문예운동은 그 중 극히 미약한 힘을 보태는 하나의 운동이 될 것이 다. Ⅱ-1. 仁의 개념 仁 字는 아는 바와 같이 두 사람이 마주 보고 안부 인사를 나누는 상황을 표상한 것이다. 안부 인사를 나눌 때 각 주체들의 내면에 일어나는 공통적인 心的 현상, 즉 두 사람사이의 親愛하고 恭敬하는 情感을 포착하여 두루 상대를 향한 愛敬의 정감 이 通流하는 현상을 뜻하도록 된 것이다. 孔子에 이르러 仁은 자각, 內在化되면서 그 개념도 또한 크게 확충을 이루었다. 論語 에 仁 이라는 말이 백여 차례나 출현하지만 그 含意를 검증할 만한 문맥에 서 그것들이 완전 일치하는 경우는 매우 드물 정도로 다각적이다. 이를테면, 論 語 顔淵篇의 (仁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이다.(樊遲問仁 子曰愛人), 論語 學而 篇의 효도와 공손이라는 것은 仁을 행하는 근본이로다.(孝弟也者 其爲仁之本與), 論語 顔淵篇의 자기의 사욕을 이기고 예로 돌아가는 것이 仁이다.(顔淵 問仁 子 曰 克己復5爲仁), 論語 衛0公篇의 뜻이 있는 선비와 어진 사람은 삶을 구하여

90 그것으로 仁을 해침이 없고, 자신을 죽여 그것으로 仁을 이룸이 있다.(子曰 志士仁人 無求生以害仁 有殺身以成仁), 論語 雍也篇의 仁者는 정적인 산과 같다.(子曰 仁者 靜) 14), 論語 雍也篇의 仁者는 장수한다.(子曰 仁者壽) 15), 論語 雍也篇의 대저 어진 자는 자신이 나서고 싶으면 남을 (먼저) 내세우고, 자기가 달성[도달]하 고 싶으면 남을 먼저 달성[도달]하게 해준다.(夫仁者 己欲立而立人 己欲達而達人) 등 비교적 친숙한 몇 대목만 한 자리에 놓고 보더라도 그 함의의 다양성을 쉽사리 간파할 수 있다. 그래서 孟子시대에 오면 仁을 특정한 덕목으로서가 아니라 아예 도덕적 心性 전 반을 두루 가리키는 것으로, 孟子 盡心下에서 仁이란 것은 사람이다.(孟子曰 仁 也者 仁也) 란 명제를 성립시킨다. 즉, 사람이 사람된 까닭으로서의 理 란 뜻이다. 그러나 含意가 다각적이었다 하더라도 論語 에서 仁을 아직 人性을 두루 포괄하 는 단계에 까지 나아간 것은 아니다. 특정 덕목으로서 다방면에 걸쳐 개념이 확충되 는, 후일 孟子 에서 보듯이 그 개념이 도덕적 인성 전반을 포괄할 가능성으로만 있는 그 前의 단계에 있었다. 인의 待對 덕목으로서 智를 인정하고 있는 점이 그 점 을 잘 말해 준다. 비록 다각성을 띄었다 하더라도 특정 덕목으로서의 仁에 관한 論語 의 여러 함의들의 그 개념적 귀결점은 분명하다. 그것은 欲의 절제가 요구되는 공동체 윤리, 그리고 그 이상으로서의 仁의 지위이다. 사람을 사랑함 이란 것의 구체적인 내용은 바른 사람을 들어서 바르지 못한 사람들 위에 둠으로써 바르지 못한 사람으로 하여 금 바르게 되도록 함 이란 근본적으로 大衆에 대한 배려를 말한 것이고, 孝悌란 仁 을 행하는 근본 이란 것은 효제가 가족공동체 윤리임에 대하여 그 연장으로서의 仁 은 사회공동체의 윤리임을 전제로 한 명제이다. 나의 이기심을 이기고 禮 로 돌아 감 의 구체적 조목은 禮가 아니면 보지 말고, 禮가 아니면 듣지 말며, 禮가 아니면 말하지 말고 禮가 아니면 움직이지 말라 는 것이다. 즉, 나의 이기심을 이겨냄으로 써 주체를 한층 높이 고양시켜 禮라는 공적 道德律에 합치되도록 하는 것이 仁이라 는 것이다. 志士와 仁人 仁을 성취하는 일은 있음 은 공동체를 위한 자기 죽음 이 요구될 때는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仁의 성취임을 말한 점에서 인간을 철저히 공동체적 존재로 파악했으며, 仁이 인간의 존재 조건의 하나임이 전제되어 있다. 그 리고 仁이 단순히 윤리적 덕목의 하나임을 넘어 종교적 신념의 성격을 띠고 있음을 이 말의 함의는 지시한다. 仁者는 정적이다., 仁者는 장수한다. 는 존재와 당위의 일치에서 오는 無葛藤의 심적 태도를 의미하는 것으로, 仁이 역시 윤리의 테두리를 넘어 하나의 종교적 경지, 또는 愉悅히 흐르는 심미적 경지임을 암시한다. 그리고 끝으로 仁者는 남도 통달하게 함 은 仁이 낮게는 공동체의 相扶 정신을 높게는 成己와 成物의 종교적 수행정신을 가리킨다고 하겠다

91 맹자시대에 이렇게 인간세계에 한정되는 윤리 내지 종교적 신념으로 되어 온 仁 은 宋代에 와서 道學으로 성립되면서 우주의 생명원리로 최고범주화한다. 天地는 만물을 생성하는 것으로 마음을 삼는 자이자, 사람과 만물은 태어남에 또 각기 그 천지의 마음을 얻어서 마음으로 삼는 자이다. 그러기 때문에 마음의 덕 으로 말하면 비록 모든 덕목 전체를 다스리고 그 속을 관통해서 갖추어지지 않는 것 이 없다. 그러나 한 마디로 말하면 仁이라고 할 따름이다. (중략) 대개 仁의 본 직은 천지 만물을 생성하는 마음[天地生物之心]으로, 만물에 卽해서 있다. 朱熹의 仁說 의 일부이다. 천지가 만물을 생성시키는 마음을 仁이라고 했다. 그리 고 천지간 만물은 태어나면서 각기 천지의 마음, 즉 仁을 얻어서 제 마음으로 삼는 다고 했다. 仁이 우주 만물을 관통하는 생명원리로 된 것이다. 仁이 이렇게 생명원 리로 발전한 것은 물론 갑작스럽게 이루어진 일이 아니다. 孟子 에서 仁이란 것 은 사람이다. 라고 하여 仁이 인간의 도덕적 심성 전반을 가리키도록 되어 있고, 그 마음을 보존하며 그 덕성을 함양함은 하늘을 섬기는 길이다. 라고 하여 사람과 하늘 사이의 내재적인 통로도 마련되어 있었다. 거기에다가 戰國時代 말기에 성립된 것 으로 알려진 易傳哲學과 그 문헌의 하나인 繫辭 下에 천지의 큰 은혜는 생성이 다. 라고 하여 만물의 생성이란 자연의 작용을 큰 은혜로 의식한 天地觀이 표출되어 나왔다. 이와 같은 사상적 얼개 위에 사람에서의 仁 과 천지의 큰 은혜 에서 仁 과 큰 은혜 는 개념적으로 같은 범주의 것이기에 쉽게 접합될 수 있었다. 아무튼 이렇 게 하여 기존의 仁의 개념에 천자가 만물을 생성하는 큰 은혜란 내용을 접수하여 仁은 마침내 우주만물을 관류하는 생명원리로 존재하게 되었다. 따라서 仁을 기축 으로 하는 有生命的, 生機論的 세계관이 성립되어 철학이나 사상적으로 적극적 사 유의 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그 과제를 사유하는 철학적, 사상적 체계가 바로 道 學인 것이다. Ⅱ-2. 仁의 文藝運動 仁의 文藝란 仁의 주제를 표현한 문학을 말한다. 仁이 우주공동체의 이념이나 자 연에 대한 윤리로 개념이 확충된 만큼 자연을 제재로 한 많은 작품도 仁의 문학일 수 있다. 따라서 본고에서 말하는 仁의 文藝運動은 동양 고전문학에서 仁의 사상에 연계된 작품들을 해설하여 현대의 다양한 문학 예술 장르들에 발상을 줌으로써, 영 화나 뮤지컬과 같은 다양한 현대문학 장르들이 仁의 사상과 접맥되도록 하는 것이 그 기본 취지이다

92 삼라만상 어지러워 종잡을 수 없더니, 深遠한 한 하늘[一天]이 모두를 주무르는 걸. 신령한 공덕 넓기도 해, 구름이 다니며 비 내리게 하네. 오묘한 작용 두루 사무쳤구나, 고기는 뛰고 솔개는 날게 했네. 형상으로 있고 자취도 있다 하나, 본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걸. 나직히 乾坤理와의 黙契를 읊조리며, 창망한 天地 가운데에 홀로 섰네.11) 이 시는 李彦迪12)의 도학시로, 우주 생명과 자아와의 卽自的인 合一을 읊었다. 첫 째 연에서는 현상계의 삼라만상이 종잡을 수 없도록 어지럽더니, 그 배후에 심원한 한 하늘[一天]이 현상계의 모두를 주무르며 엄밀하게 질서를 짓고 있다고 했다. 둘째 연에서는 雲行雨施(구름이 하늘을 다니며 비 내리게 한다) 13)와 魚躍鳶飛 (물고기는 뛰어놀고 솔개는 난다) 14)의 내용을 영감을 불어넣어 압축한 시구이다. 여 기서의 雲行雨施 는 周易 단전(彔傳) 에 나오는 구절로, 구름이 하늘을 다니 며 비 내리게 하여 온갖 물건의 형상이 유전하여 형성됨. 즉, 만물이 하늘의 큰 은 혜를 입어 갖가지 형체를 이루어 가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魚躍鳶飛 는 中庸 12 장에 나오는 구절로, 물고기에 나아가면 道의 작은 것을 알 수 있고, 솔개와 물고기를 유추하여 전개하면 道의 큰 것을 또한 알 수 있다.15) 즉, 만물 각자가 본성대로 살아가 는 화해로운 질서를 이루도록 근거 지워준 심원한 한 하늘[一天] 을 읊었다. 이 시에서 특히 주목되는 것은 셋째 연과 넷째 연에 있다. 셋째 연에서는 물고기나 솔 개와 같이 형상으로 있고 자취도 있는 것 이 본래 처음도 없고 끝도 없는 것 이라고 했다. 이것은 구체적인 개체로서의 현상계의 만물 각자는 고립적이고 유한하다. 따라서 李彦迪 晦齋集 1, 感興 : 萬象紛然不可窮 一天於穆總牢W 雲行雨施神功博 魚躍鳶飛妙用通 雖曰有形兼有跡 本來無始又無終 沈吟黙契乾坤理 獨立蒼茫俯仰中 12) 조선 중종 때의 성리학자( ). 자는 복고(復古), 호는 회재(晦齋), 자계옹(紫溪翁)이 다. 김안로의 등용을 반대하다가 쫓겨나 경주 자옥산(紫玉山)에 들어가 성리학의 理說을 정립하여 이황(李滉)의 사상에 커다란 영향을 주었다. 후에 다시 등용되어 좌찬성 겸 원상(院相)까지 지냈으 나 윤원형 일당의 모함으로 을사사화에 연루되어 함경도 강계(江界)에 유배되어 그곳에서 죽었다. 저서에 회재집 이 있다. 13) 周易 단전(彔傳) 의 雲行雨施 品物流形(구름이 하늘을 다니며 비 내리게 하여 온갖 물건 의 형상이 유전하여 형성된다) 에서 援用한 시구이다. 14) 中庸 12장의 鳶飛戾天 魚躍于淵(솔개는 날아 하늘에 오르는데 물고기는 연못에서 뛰논다) 에서 援用한 시구이다. 15) 中庸 12장의 鳶飛戾天 魚躍于淵 의 集註에 子思引此詩 以明化育流行 上下昭著 莫非此理之 用 所謂費也 然其所以然者 則非見聞所及 所謂隱也(자사가 이 시를 인용하여 천지 자연이 만물을 만들어 자라게 함이 흘러 행하여 상하에 밝게 드러나는 것이 이 이치의 작용이 아님이 없음을 밝혔으니, 이른 바 費[도의 쓰임이 넓음]라는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그렇게 되는 까닭은 보고 들어서 미칠 바가 아니 니, 이른바 隱[도의 본체가 은미함]이라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11)

93 허망한 존재가 아니라 그 자체로서 영원한 實在인 우주생명의 現前者임을 말한 것이다. 더구나 道學의 관점에서 인간은 만물 가운데 가장 빼어난 현전자이다. 이것이 넷째 연에서 우주의 주체로서의 자아로 함축되어 나타난다. 끝 행의 홀로 섰 네 에는 우주생명의 질서에 닿은 超人的 존재로서의 주체적 자아에의 조망이 강하게 함 축되어 있다. 陶淵明의 四時 의 시구인 冬嶺秀孤松(겨울 산마루에는 외로운 소나무 빼어났다) 를 연상케 한다. 우주 주체로서의 天人之際 의 오묘한 이치와 黙契가 주는 감 개로운 高揚을 노래하고 있는 것이다. 道學者들은 詩文의 창작이나 감상을 玩物喪志라 해서 "물건을 즐기다 보면 뜻을 잃게 된다."며 군자가 경계해야 할 대상으로 보는 부정적 견해가 팽배했음에도 불구 하고, 朱熹나 李滉 등과 같은 도학자들은 모두 수많은 작품을 남겼다. 여기에는 그 만한 이유가 있다. 이는 道學의 思惟와 道學的 人格境界에서 유발되는 審美情調 때 문이다. 본고에서 仁의 文藝運動을 주장하는 것은 다름 아니다. 이언적과 같은 이러 한 道學者들의 시를 재해석하여 영화나 뮤지컬과 같은 현대의 다양한 문학 예술 장 르들에 발상을 제공하거나 다양한 현대문학 장르들이 仁의 사상과 접맥되도록 한다 면 仁의 文藝復興이 절로 꾀해 질 것이며, 이로 인하여 欲의 현실, 즉 환경과 생태 의 문제와 자본주의와 양극화 현상과 같은 대모순이 일정 부분이나마 치유될 수 있 을 것으로 보인다는 점에서이다. 끝으로 환경론자들은 인간 중심의 사상을 버려야 한다는 말을 곧잘 한다. 이것은 서구 문명권에서는 타당한 말이다. 그러나 동양 문명권에서는 황당한 느낌을 주는 말이다. 앞에서 성경 이나 天主實義 에서 보았듯이 서구 문명권에서는 인간이 자연 앞에 군림했으니, 인간 중심의 사고를 버려야 자연이 편안할 수 있다. 이에 반 해 동양에서도 자연에 대해 인간이 주체임을 간조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겸손한 보호자로서의 주체이다. 동양의 사고에 따르면 인간이 주체일수록 바람직하다. 겸손 한 보호자로서의 주체이기 때문인 것이다

94 實學派의 이상사회론 성 호 준* 실학사상의 대두와 배경 (1) 현실에 대한 자각과 반성 - 왜란과 호란의 양대 전란을 겪은 뒤, 국토가 황폐, 경제적으로 파탄 - 인조 이후로 노론세력의 집권으로 도덕적 명분론과 정쟁에만 몰두 * 예송논쟁 * 1차 논쟁 : 효종이 죽은 뒤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慈懿大妃:趙大妃)가 효종의 상 (喪)에 어떤 복을 입을 것인가를 두고 일어난 논란. 송시열-1년상, 윤휴-3년상 2차 논쟁 : 효종의 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가 죽자 조대비(趙大妃:자의대비)가 어떤 상복을 입을 것인가 하는 문제. 효종을 장자로 인정한다면 인선대비는 장자부 이므로 대왕대비는 기년복(1년)을 입어야 하지만, 효종을 차자로 볼 경우 복제는 대 공복(大功服:9개월)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었다. (2) 청대 고증학의 영향과 서구 문물의 전래 - 17세기 중기 이후 객관적 현실 문제를 중시하는 학풍 - 중국 사행(使行)의 영향으로 서양선교사와의 접촉 및 서양문물의 전래 실학의 개념 및 성격 (1) 실학이라는 용어는 송대 유학, 신유학이 발흥한 이후 사용된 것 - 학문의 성격 목적 방법에 대한 자기반성의 기준을 제시하는 말로 사용 (2) 조선후기 실(實)과 성리학파의 실(實)의 같은 의미. 허(虛)와 공(空)을 부정 (3) 성리학과 실학은 모순 대립하는 것이 아닌 상보(相補)의 학문 * 영산대 교수

95 실학의 학파 (1) 경세치용(經世致用)학파-성호 이익(李瀷)을 중심으로 한 토지제도 및 생정기구, 기타 제도상의 개혁에 치중하는 유파, 농업에 관심 (18세기 전반) (2) 북학파(北學派)-연암(燕巖) 박지원(朴趾源)을 중심으로 하는 이용후생학파 상 공업의 진흥과 생산의 혁신을 지표로 하는 유파. 노론과 낙론계열에서 선도 (18세기 후반) (3) 실사구시(實事求是)학파-완당(阮堂) 김정희(金正喜)등에 의하여 경서(經書) 및 금석(金石) 전고 등의 고증을 위주로 하는 유파. 고증(考證)훈고(訓詁) (19세기 전반) 실학의 학문적 성격 (1) 비판정신-자유로운 학문 탐구의 기풍을 추구 (2) 실용에 대한 관심-정덕(正德)을 거부하지는 않음 (3) 실증적인 연구방법-실사구시의 학 (4) 주체적 태도-민족주의적 발로 <박지원-격정의 삶을 살아간 북학의 대부> 박지원(朴趾源)의 생애와 학문 - 박지원( ) 서울 출생 년(영조 41) 과거에 응시 낙방 - 노론 계열의 학자, 홍대용(洪大容) 이덕무(李德懋) 박제가(朴齊家) 등과 교유 - 학문경향은 실용(實用)의 학 - 법고창신(法故創新) 초정집楚亭集 서문에서 옛것을 본받는 사람은 자취에 얽매이는 것이 문제이다. 새것을 만드는 사람은 이치에 합당치 않는 것이 걱정이다. 진실로 능히 옛것을 본받으면서 변화할 줄 알고, 새것을 만들면서 법도에 맞을 수만 있다면 지금 글이 옛글과 같다 고 하여 법고창 신法故創新 의 뜻을 말한 바 있다. 법고와 창신은 새의 양 날개와 같은 것으로 상보적인 관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96 자연과 인간에 대한 이해 - 음양오행에 대한 견해- 그대로의 자연현상이나 물질로 이해 - 음양오행에 대한 관념화를 비판 - 오행이란 백성의 생활에 유용하게 사용되어야 할 다섯가지 물질 - 지구설과 지전설을 주장 - 인물의 균등론을 주장(소설 호질(虎叱) - 작자의 열하일기(熱河日記) 중 관내정사(關內程史) 에 실린 작품이다. 연 암의 소설 중에서도 양반계급의 위선을 비판한 작품으로 허생전(許生傳) 과 함께 쌍벽을 이룬다.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 산중에 밤이 되자 대호(大虎)가 부하들과 저녁거리를 의논하고 있었다. 결국 맛 좋은 선비의 고기를 먹기로 낙착되어 범들이 마을로 내려올 때, 정지읍(鄭之邑)에 사는 도학자 북곽(北郭) 선생은 열녀 표창까지 받은 이웃의 동리자(東里子)라는 청상과부 집에서 그녀와 밀회하고 있었다. 과부에게는 성이 각각 다른 아들이 다 섯이나 있었는데, 이들이 엿들으니 북곽 선생의 정담이라, 필시 이는 여우의 둔갑 이라 믿고 몽둥이를 휘둘러 뛰어드니, 북곽 선생은 황급히 도망치다 똥구렁에 빠 졌다. 겨우 기어나온, 즉 그 자리에 대호 한 마리가 입을 벌리고 있어 머리를 땅 에 붙이고 목숨을 비니 대호는 그의 위선을 크게 꾸짖고 가버렸다. 날이 새어 북 곽 선생을 발견한 농부들이 놀라서 연유를 물으니, 엎드려 있던 그는 그때야 범이 가버린 줄을 알고 줄행랑을 쳤다는 내용이다. - 이 세상에서 사람보다 더 큰 도둑은 없다. 호랑이도 자신과 종이 같은 표범도 잡 아먹지 않은데 비해 인간이 서로 죽이고, 죽이는 숫자는 호랑이가 사람을 잡아먹 는 숫자와 비교할 수 없다. 이상세계의 실현-이용후생론의 전개 - 열하일기 새로운 방법과 묘한 방법이 있다면, 아무리 그 법이 오랑캐에서 나 왔다 할지라도 사대부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배우기를 원해야 한 다 고 함 - 조선에서 수레와 배가 다니지 않기 때문에 물자의 유통이 되지 않음, 시장이 형성 되지 않음 - 상업의 중요성은 쓸모없는 물건을 유통하여 쓸모있는 물건으로 만드는 것 - 사농공상(士農工商)중 사를 제외한 논공상은 평등한 자격

97 연암 이상세계의 의미 - 주자학 일변도의 학문풍토를 비판 - 음양오행에 대한 형이상학적 인식을 벗어나 과학적으로 이해 - 자천소명이시지(自天所命而視之)라는 관점의 객관화를 통해 사람과 사물을 이해 - 인물균론은 인간의 우월성만을 강조하여 만물위에 군림하려던 관점에서 벗어난 것으로 생태학적 시사점 제공 - 실학사상의 전도사가 된 연암은 조선이 선진국 대열에 진입하기 위해서는 중국 어를 공용어로 사용해야 한다 는 주장을 펴기까지 했다. <정약용-실학의 집대성> 정약용(丁若鏞)의 생애 - 정약용(丁若鏞, ) 경기도 광주(廣州)출생 - 경세치용학의 이익(李瀷)을 사숙, 이가환(李家煥) 이승훈(李承薰)등과 교유 - 서학(西學)관련 서적도 접함 - 정조와의 만남으로 국가경영에 참여 - 저서의 부류 - ① 육경(六經)과 사서(四書)에 대한 주석 - ② 일표이서- 지방행정책임자가 지켜야할 지침서인 목민심서(牧民心書), 국가제 도의 근본적인 개혁을 주장한 경세유표(經世遺表), 형법제도 개혁안인 흠흠신서 (欽欽新書) 정약용(丁若鏞)의 철학사상 - 실천을 통해 구체화되는 인(仁) - 인(仁)의 구체적인 내용을 효(孝) 제(悌) 자(慈)등으로 명시. 성리학자들의 오륜이 란 천부적으로 구비된 인간의 도덕성인 반면에 정약용의 인이란 나와 타인과의 관계에서 구체적으로 드러나는 도덕일 뿐 - 리(理)에 대한 비판과 상제(上帝)를 섬김 - 태극(太極)-리(理)를 부정함 천은 상제개념으로 이해 - 상제는 인격적이며 형이상적이며 세계를 재하는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존재 - 자주지권과 인간의 자존성

98 - 성리학이 선의 구체적 실천을 담보하지 못하였다고 봄 - 상제가 인간에게는 동물과 달리 결단할 수 있는 능력을 줌 다산의 이상세계 - 새로운 군민(君民)관계 - 목(牧)은 갈등과 분쟁의 조정 능력으로 인해 민에 의해 추대되어야 함 - 통치자인 목이 그 조정 능력이 없을 경우, 당연히 민은 그 목의 지위를 바꿀 수 있다고 함 - 토지개혁 및 사회개혁론 - 여전제 주장(田論) - 30호 정도를 단위로 여(閭) 라는 말단 행정조직을 만들고 여 안의 토지는 여 에 속한 농민들이 공동경작 한다. 각 여에는 여장(閭長)을 두는데, 여장은 개인의 노동을 매일매일 장부에 기록한다. 농작물을 수확한 후, 우선 국가에 10 분의 1세를 내고 여장의 녹봉을 떼어준 후 나머지를 노동날짜에 따라 나누어준 다. 1개 여에 속한 농민의 수는 제한이 없다. 정약용은 그 이유를 자유로운 이동 을 허락하면 농민들은 더 많은 수확물을 분배받을 수 있는 곳으로 이동하기 때문 에 10년 후에는 전국의 토지이용이 균등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했다. - 경세유표(經世遺表)에서는 정전제(井田制) 주장 - 토지에 대한 사적인 주인은 존재하지 않음. 토지공유제 시행 - 만민개로(萬民皆8)사상을 주장 - 오행설과 풍수설을 비판 - 죽은 조상이 그 자손에게 혜택을 줄 수 없다고 단정함. - 서학의 수용과 동시에 원시유학의 계승이라 함

99 <최한기-통민운화의 이상> 최한기의 생애와 사상적 배경 - 혜강(惠岡) 최한기(崔漢綺, ) 70세까지 벼슬에 나가지 않고 서울에 거주 동서고금의 책을 구입하여 연구함 - 기철학의 전통 : 서경덕(徐敬德)-임성주(任聖周)로 이어지는 한국의 기철학 - 서구 자연과학의 수용 - 후기 실학의 전통에 서 있음 최한기의 사상 - 존재근원과 천인(天人)관 - 기는 운동 변화를 거듭하는 것으로 이해함 - 구체적인 형태를 가진 것에서부터 인간의 의식에 이르기까지 존재하는 모든 것의 근원은 기 - 기를 본질적으로 운화하는 존재 운화 : 생생한 기가 항상 움직이고 두루 움직여 서 크게 변화하는 것 이라고 함 - 주자(朱子)의 도덕적인 기(氣)를 비판함 - 음양오행의 부정과 리의 주재적 성격 부정 - 인식체계와 학문관 - 감각 경험의 중시 성리학에서는 도덕적 앎에 관심은 많으나 사실적이고 현실적인 문제에 대한 인식은 부족함 - 자연과학의 긍정 말기(末器)라고 일컬어졌던 자연학이나 과학기술에 의미 - 인간 심성과 도덕관 - 인과 천이 도덕적 가치로 매개되는 점을 부인함. 인성이 선험적으로 도덕적 품성 을 구비한 것이 아님 최한기의 이상세계 - 통치의 준적- 통민운화(統民運化) - 천인운화와 일통친안이 종횡으로 사물을 밝혀 만수(萬殊)를 총괄하므로 이를 준 적이라고 함 - 천인운화-인신운화-대기운화 - 일신운화가 통민운화에 통달해야 백성을 치안할 수 있다고 함

100 - 평등에 바탕 한 교육과 법의 시해 - 사민평등의식의 확대, 사민에 대한 직분적 기능적 인식은 사민 평등 의식의 확대 를 가능케 함, 사민은 분업 - 인간의 후천적 교육과 경험에 따라 성장과 변화 가능성을 지닌 존재로 파악 - 최한기는 교육기회가 평등하게 주어져야 함을 강조(有敎無類) - 보편적 교육을 위해 문자교육이 필수 - 과거제를 비판하고 공의(公義) 공론(公論)에 의한 정치 실현 - 공의(公義)에 의한 인재 선발과 덕망있는 선비의 천거 - 언로의 확대를 주장

101 동양고전에서 古 와 今 의 문제 김 철 범* 1. 옛 것에 대한 인식 - 옛 것에 대한 우리의 인식은 어떠한가? : 男女간, 老少간, 東西간의 차이와 변화 - 흔히 옛 이란 傳統의 문제와 결부되어, 전통에 대한 인식이 옛 것에 대한 인식에 많이 작용되어 왔다. - 그러나 우리에게 전통이 왜 필요한가? 古 를 왜 우리는 거론하며, 중시하는가? - 고 란 금 이 있음으로서 존재하는 시간이며 공간이다. : 상대적 가치 - 그러므로 고 와 금 이란 어느 하나 빠져서는 가치 없는 개념이다. 古今論 의 의 미는 여기에 기반한다. - 古今論 의 역사는 오래되었다. 과거의 전통에 대한 인식과 미래사회에 대한 이 상적 전망을 위해 우리는 古今論의 문제를 이야기해 볼 가치가 있다. 2. 동양고전 속의 古今論 孔子의 古今論 * 子曰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 憲問 ) * 子曰 述而不作 信而好古 竊比於我老彭 ( 述而 ) * 子曰 我非生而知之者 好古敏以求之者也 ( 述而 ) * 子曰 周監於二代 郁郁乎文哉 吾從周 ( 八佾 ) * 子曰 古者民有三疾 今也或是之亡也 古之狂也肆 今之狂也蕩 古之矜也廉 今之矜也 忿戾 古之愚也直 今之愚也詐而已矣 ( 陽貨 ) * 子貢曰 如有博施於民而能濟衆 何如 可謂仁乎 子曰 何事於仁 必也聖乎 堯舜其猶病 諸 ( 雍也 ) * 修己以安百姓 堯舜其猶病諸 ( 憲問 ) * 경성대 교수

102 - 공자에게서 古 는 夏 殷 周 三代이며, 今 은 春秋末期이다. - 공자에게서 고 의 의미를 전체적 시각에서 면밀하게 생각할 필요가 있다. - 공자가 금 을 타락한 시대로 보았는가, 고 를 회귀해야 할 대상으로 보았는가? 孟子의 古今論 * 且古之君子 過則改之 今之君子 過則順之 古之君子 其過也 如日月之食 民皆見之 及其更也 民皆仰之 今之君子 豈徒順之 又從而爲之辭 ( 公孫下 ) * 他日 見於王曰王 嘗語莊子以好樂 有諸 王變乎色曰寡人 非能好先王之樂也 直好世 俗之樂耳 曰王之好樂 甚則齊其庶幾乎 今之樂 由古之樂也 ( 梁惠下 ) * 孟子 對曰取之而燕民 悅則取之 古之人 有行之者 武王 是也 取之而燕民 不悅則勿 取 古之人 有行之者 文王 是也 ( 梁惠下 ) * 周霄 問曰古之君子 仕乎 孟子曰仕 傳曰孔子 三月無君 則皇皇如也 出疆 必載質 公 明儀曰古之人 三月無君則吊 ( 滕文下 ) - 맹자에게서 古 는 周代이다. - 고 와 금 의 동질성의 발견 : 今之樂 = 古之樂 ; 與民同樂 이상적 정신 荀子의 古今論 * 古之學者爲己 今之學者爲人 君子之學也 以美其身 小人之學也 以爲禽犢 * 王者之制 道不過三代 法不貳後王 道過三代謂之蕩 法貳後王謂之不雅 衣服有制 宮 室有度 人徒有數 喪祭械用 皆有等宜 聲則凡非雅聲者擧廢 色則凡非舊文者擧息 械用 則凡非舊器者擧毁 夫是之謂復古 是王者之制也 ( 王制 ) * 脩百王之法 若辨白黑 應當時之變 若數一二 行5要節而安之 若生四枝 要時立功之 巧 若詔四時 平正和民之善 億萬之衆而博若一人 如是則可謂賢人矣 ( 儒效 ) * 法後王 一制度 5義而殺詩書 其言行已有大法矣 然而明不能齊法敎之所不及 聞見 之所未至 則知不能類也 知之曰知之 不知曰不知 內不自以誣 外不自以欺 以是尊賢畏 法而不敢怠傲 是雅儒者也 / 法先王 統5義 一制度 以淺持博 以古持今 以一持萬 苟 仁義之類也 雖在鳥獸之中 若別白黑 倚物怪變 所未嘗聞也 所未嘗見也 卒然起一方 則 擧統類而應之 無所儗怎 張法而度之 則晻然若合符節 是大儒者也 ( 儒效 ) - 古 와 今 의 시대를 先王 과 侯王 으로 설정. 侯王 이란 곧 周代의 文 武王을 가 리킨다

103 - 古 의 절대적 이상을 중시했지만, 그에게 고 란 時變 을 전제한 것에 있었다. 韓非子의 古今論 * 不知治者 必曰: 無變古 毋易常 變與不變 聖人不聽 正治而已 然則古之無變 常之 毋易 在常古之可與不可 ( 南面 ) * 上古之世 人民少而禽獸衆 人民不勝禽獸蟲蛇 有聖人作 搆木爲巢以避群害 而民悅之 使王天下 號之曰有巢氏 民食果蓏蚌蛤 腥臊惡臭而傷害腹胃 民多疾病 有聖人作 鑽燧 取火以化腥臊 而民說之 使王天下 號之曰燧人氏 中古之世 天下大水 而鯀 禹決瀆 近 古之世 桀 紂暴亂 而湯 武征伐 今有搆木鑽燧於夏後氏之世者 必爲鯀 禹笑矣 有決瀆於 殷 周之世者 必爲湯 武笑矣 然則今有美堯 舜 湯 武 禹之道於當今之世者 必爲新聖笑 矣 是以聖人不期修古 不法常可 論世之事 因爲之備 宋人有耕田者 田中有株 免走觸株 折頸而死 因釋其耒而守株 冀復得免 免不可復得 而身爲宋國笑 今欲以先王之政 治當 世之民 皆守株之類也 ( 五蠹 ) 3. 古今 의 歷史觀 - 동양의 전통적 역사관에 대한 평가는 순환론적 역사관, 懷古論(尙古論)적 역사관, 진보론적 역사관 등으로 평가되어 왔다. - 흔히 고 와 금 이란 개념의 설정과 고 를 숭상하는 인식들로 인해, 유가의 고금 론 은 회고론적 역사관을 지닌 것으로 평가되었다. - 그러나 앞의 자료를 통해 볼 수 있듯이, 공자 이후 순자에 이르기까지 유가들의 역사관에는 자기 시대와 미래에 대한 전망을 기대하고 있어, 다분히 진보적인 역 사의식을 보여주고 있다. 조셉 니덤은 이들에게서 직선적인 역사관을 볼 수 있다 고도 했다. - 따라서 이들의 고금론에 대한 정밀한 해석을 통해 그들의 역사관과 가치관을 제 대로 평가할 필요가 있다. - 한비자의 경우는 진보적 역사관이 선명하게 드러나고 있는데, 한비자의 사상이 순자와 무관하지 않으며, 당시 역사관의 전통 속에서 형성되었다고 본다

104 東洋思想과 우리의 삶 -五倫思想을 중심으로琴 鏞 斗* 1. 들어가기 지금 우리들은 바쁜 일상생활 속에 늘 상대를 경쟁자로 여기면서 살아가고 있다. 상대를 위한 배려 심 또는 양보심이라고는 찾아보기 힘들 정도로 남의 일로 여긴다. 조금이라도 함께 살아가려는 마음과 상대를 이해하려는 마음은 왠지 내가 손해 보 는 것 같은 마음이 드는 것은 누구나 다 느낄 것이다. 그동안 우리사회는 西勢東漸의 물질문명에 길들여져 經濟的으로나 文明의 발달은 刮目할 만한 성과를 이루었으나, 그 이면에는 人間本性은 파괴되고 우리의 傳統思 想인 儒敎사상은 이제 책상서랍 속에 死藏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러나 이러한 서양문물의 무분별한 유입이 우리 전통사회에 많은 영향을 끼쳤다 하더라도 아직도 곳곳에는 우리문화와 전통이 자리 잡고 있는 것 또한 사실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문화와 전통이 사장되도록 袖手傍觀만 하고 있어야 할까? 그 렇지 않다. 각계 뜻있는 학자들과 유관단체들이 우리문화를 지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이것은 아직도 우리 전통문화와 사상이 우리 현대사회에 상관관계가 많다는 것이다. 이러한 우리사회의 제반문제에 대해 해결책으로 제시 되는 것이 오늘날 많은 사람 들이 관심을 가지는 東洋思想의 儒學과선비정신이다. 동양사상과 유교정신이야말로 倫理道德的으로 위기에 빠진 우리사회의 병든 부분을 치유 할 수 있는 것이다. 특히 반세기전 동족상잔의 비극을 이겨내고 전 세계가 놀라는 경제발전과 물질문명의 발 달로 經濟와 物質的으로는 豊饒해졌지만 精神的으로는 오히려 退步하고 疲弊해진 지금의 우리나라 현실에 있어서는 동야사상과 우리의 전통문화를 恢復 高揚시키는 것만이 더불어 함께 살아가는 大同建設의 一翼이 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든다. 동양사상과 우리의 전통문화가 우리들의 일상생활에 어떠한 영향을 끼쳤으며 앞으 로 우리가 나아가야 될 방향은 무엇인지 살펴보고, 현대사회의 많은 일들과 비교 생 * 퇴계학부산연구원 전임교수

105 각해보기로 한다. 여기서 논할 점은 동양사상이란 것이 너무 包括的이고 廣範圍하기 때문에 동양사 상의 핵심인儒學에서 주장하는 우리 인간들이 지켜야할 가장 기본적이며 기초적인 五倫思想을 통해 어떠한 것이 우리들에게 필요로 하는가를 살펴보기로 한다. 2. 東洋思想과 한국사상 東洋思想과 西洋思想은 어떻게 구분하는가? 터키 이스탄불을 가로지르는 보스포러 스해협의 교량 한 가운데 동서양의 분기점을 알리는 푯말이 있다. 지금 21세기 우 주를 왕복하는 시대에 동서양을 구분한다는 것이 시대착오적인 생각일지 모르지만, 환경과 자연이 인간에 미치는 영향을 전제로 한다면 무리한 접근은 아닐 것이다. 일 찍이 세계 4대 인류문명의 발상지는 오리엔트 즉 동양의 제국에서 발생했다. 나일 강의 이집트문화, 티그리스. 유프라테스 강가의 메소포티미아문명, 갠지스강 유역의 인도문화, 황하유역의 中國 黃河문명이 그것이다. 출애굽 하여 팔레스타인지방에 정착한 히브리민족의 유일신신앙은 그리스도교의 모태가 되었고 나아가 서양사상의 뿌리가 되었다. 한편 기원전 15세기경 황하유역 에서는 殷 이라는 최초의 통일국가가 형성되었다. 그리고 孔子가 이상향으로 여기 는 周 왕조가 전개되지만 諸侯國간의 각축으로 春秋戰國時代를 맞이한다. 정치사회 적으로는 혼란기이지만 中國思想史에서는 百家爭鳴의 무대가 펼쳐지게 된다. 동양사상은 東洋人의 생각을 體系와 條理를 갖추어 정리하는 것인데, 이것은 생 활의 내용이나 문화적 체험을 통해 형성되고 공감대가 확대되면서 時代精神으로 자 리 잡게 된다. 思想은 동일시간과시대를 살다간 사람들이 指向했던 理念과 制度의 시간적 유산이라 할 수 있다. 東洋에서 오랜 기간 동안 影響力을 가지고 성장한 사 상으로 儒敎, 佛敎, 道敎 등을 들 수 있다. 儒敎는 中國 春秋戰國時代에 형성된 孔子, 孟子의 根本儒敎에서 출발하여, 漢의 董 仲舒, 唐의 韓愈, 宋나라 北宋五子, 南宋의 朱子學, 明나라 陽明學, 淸나라 實學에 이르기 까지 統治이데올로기로 그 時代마다 일정한 역할을 해 왔다. 佛敎는 고대 印度에서 釋迦牟尼의 출현으로 구체화되고 中國을 거쳐 大乘. 小乘. 天台宗. 華嚴宗. 禪宗 등 다양한 宗派를 형성하며, 한때 中國, 韓國, 日本의 精神的 기둥으로 자리 잡았다. 道敎는 無爲自然의 旗幟를 든 中國 春秋戰國時代의 老子와 莊子가 싹을 틔우고 神 仙術, 氣功, 鍊金術과 같은 民間의 修練療法을 흡수 발전시키며 넓은 大衆層을 확보 해 왔다

106 이러한 중국의 사상은 우리나라에 전래되어 많은 발전을 가져와 정치와 사상에 많 은 영향을 끼쳤다. 三國과 高麗時代에는 佛敎가 國敎로, 朝鮮時代에는 儒敎가 政治 理念으로 굳건한 위치를 차지하며 思想的 深化과정을 거치게 된다. 이러한 사상의 발달로 많은 사상가를 배출하게 된다. 佛敎에서는 元曉, 義天, 知訥, 西山, 四溟같은 승려가, 儒敎에서는 崔沖, 安珦, 李滉, 李珥, 丁若鏞같은 대학자가 韓國思想을 심화 시켰다. 그래서 東洋은 중국의 東洋思想이 한국으로 돌아오기 위한 橋梁이며 거울 과 같다. 韓國思想史에서 중국의 영향을 看過할 수는 없지만, 東洋思想은 오히려 韓國에 와 서 더욱더 화려하게 꽃피우고 열매를 맺은 것이다. 특히 崇儒抑佛을 統治理念으로 삼은 朝鮮朝에 와서는 많은 學者들이 東洋思想哲學의 深奧한 境地를 論辨한 학자들 이 적지 않다. 退溪 高峯 兩先生간의 四端七情論辨, 李柬 韓元震간의 人間과 事物의 本質에대한 湖洛論爭 등 인간의 주체성과 본질을 규명하려 했던 지성인들의 고뇌는 한국사상사에 金字塔이 되기에 충분하다.1) 東洋思想을 接木한 韓國思想은 父權的[天陽]인 하나님 降臨信仰이 母權的[地陰]인 穀神信仰과 만나 聖俗의 조화, 神人融合의 문화를 형성하는 구조로 이루어져있다. 그래서 외래종교인 佛敎, 儒敎도 한국의 토양 속에서는 八關會, 燃燈會, 儺5 등과 같이 독특한 民族文化形態를 나타내게 된 것이다. 巫敎는 民衆文化의 저변을 흐르 다가 佛敎, 儒敎 등 외래사상의 퇴적층을 活火山처럼 박차고 올라와 東學, 新宗敎와 같은 한국적 종교의 원형과 합류하게 된다. 우리 한국사상은 토속종교인 巫俗을 바 탕으로 외래종교와 합해서 한국사사의 틀을 완성하게 된다. 巫敎의 歌舞的인 엑스 터시(無我境)를 통해 神0과 직접 교제하고, 禍福의 조절을 목적으로 하는 것은 동 북아시아의 보편적 종교 현상이었다. 한국무교의 역사적 전개는 세 가지 방향으로 이루어졌다. 첫째는 天神降臨이 상징하는 古代祭儀의 單純傳承이고, 둘째는 地母穀 神 신앙이 상징하는 자기 변용적 발전이다. 셋째는 天地融合에 대한 신앙이 의미하 는 외래 종교와의 混合的 양상이다. 우리 한국인은 예로부터 禮義와 義理를 소중히 여기는 정서를 지니고 있다. 세상 이 物質과 武力을 최고의 가치로 삼아 無限競爭하는 시대에, 아시아의 동쪽 고요한 아침의 나라 大韓民國은 檀君할아버지의 建國理念인 弘益人間精神으로 단장한 白衣 民族이 세상을 밝히는 등불을 높이 치켜든 民族이다. 우리 한민족은 東洋思想과 韓 國思想이 함께 꽃피운 위대한 나라, 세상에서 尊重받고 正義로운 사회가 한민족의 가슴속에 살아 숨 쉬는 가장 偉大한 나라가 될 것이다. 1) 上記 文 一部는 傳統文化硏究會가 發行한 東洋思想 에서 拔萃한 것임

107 3. 五倫은 무엇인가? 五倫이란 儒敎의 基本綱1 중 人間으로서 지켜야할 基本德目 다섯 가지를 말한다. 서경 舜典을 살펴보면 五典을 삼가 아름답게 하라 2)라고 있는데 그 註에 보면 五典은 五常이니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 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이 이것이다. 3) 라고 되어 있다. 그리고 제19장을 보면 신하인 契에게 명하기를 契아 百姓이 친목하지 않고 五品이 순하지 않으므로 너를 司徒로 삼으니 恭敬히 다섯 가지 가르 침을 펴되 너그러움에 있게 하라. 4)하고 그 註에 五品은 父子, 君臣, 夫, 長幼, 朋友 다섯 가지의 名位等級이다. 5)하고 五敎는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 有別, 長 幼有序, 朋友有信이니, 다섯 가지의 당연한 道理로서 敎令을 삼은 것이다. 6)라고 되 어있다. 이 舜典에 나오는 것이 五倫에 대한 文獻上의 가장 오래된 記錄이다. 그리 고 虞書 皐陶謨篇에 보면 하늘이 차례로 펴서 법을 두시니 우리 五典을 바로잡아 다섯 가지를 후하게 하시며 7)라고 되어 있는데 그 註를 살펴보면 敍는 君臣父子兄 弟夫 朋友의 倫敍이고 8)라고 되어있다. 孟子 滕文公을 살펴보면 后稷이 百姓 들에게 稼穡을 가르쳐서 五穀을 심고 가꾸게 하자 五穀이 成熟함에 人民이 잘 길러 졌으니, 사람에게는 道理가 있는데 배불리 먹고 따뜻하게 옷을 입어 편안히 居處하 기만하고 가르침이 없으면 禽獸와 가까워진다. 聖人이 이를 근심하시어 契로 하여 금 司徒를 삼아 人倫을 가르치게 하셨으니, 父子간에는 친함이 있으며, 君臣간에는 義理가 있으며, 夫 간에는 分別이 있으며, 長幼간에는 차례가 있으며, 朋友간에는 믿음이 있는 것이다 9)라고 하여 사람으로서 지켜야할 가장 基本 道理를 말하고 있 다. 그 외에도 小學 에도 孟子의 말씀을 引用하고 있고, 우리 先賢인 朴世茂先生 이 저술한 童蒙先習 에도 하늘과 땅 사이에 있는 萬物의 무리에 오직 사람이 가 장 貴하니,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이유는 다섯 가지 人倫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孟子께서 말씀하시기를 아버지와 자식 간에는 친함이 있으며, 임금과 臣下 간에 는 義理가 있으며, 남편과 아내 간에는 分別이 있으며, 어른과 어린이 간에는 차례 2) 書經 虞書 3) 書經 虞書 舜典篇 第2章 愼徽五典 舜典篇 第2章 註 五典 五常也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 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是 也 4) 書經 虞書 舜典篇 第19章 契 百姓 不親 五品 不遜 汝作司徒 敬敷五敎 在寬 舜典篇 第19章 註 五品 父子君臣夫 長幼朋友五者之名位等級也 6) 書經 虞書 舜典篇 第19章 註 五敎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 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以五者當然之 理 而委敎令也 7) 書經 虞書 皐陶謨篇 第6章 "天敍有典 勅我五典 五 惇哉 8) 書經 虞書 皐陶謨篇 第6章 註 敍者 君臣父子兄弟夫 朋友之倫敍也 9) 孟子集註 滕文公 上 傳統文化硏究會編 后稷 敎民稼穡 樹藝五穀 五穀熟而民人育 人之有道也 飽 食暖衣 逸居而無敎 則近於禽獸 聖人 有憂之 使契 爲司徒 敎以人倫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 有別 長 幼有序 朋友有信 5) 書經 虞書

108 가 있으며, 親舊 간에는 信義가 있어야한다. 사람으로서 이 다섯 가지 떳떳한 道理 가 있음을 알지 못하면 그것은 날짐승 길짐승과 거리가 멀지 않을 것이다. 10)라고 말하고 있다. 이상의 몇 가지 典據를 살펴보면 조금식의 차이는 있지만 기본적으로 五倫은 사람 이 지켜야할 普遍的인 倫理道德을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五倫을 西洋의 보편적 價値인 個人主義가 들어오면서 혹 主觀的 恣意的으로 받아들이거나, 혹 否 定的이거나 肯定的으로 받아들인 측면도 없지 않다. 그렇다면 盲目的으로 社會의 곳곳에 뿌리내려있는 倫理道德的 측면을 肯定할수도 否定할수도 없는 것 또한 사실 이다. 그렇다면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받아들여야 할 부분과 고쳐나가야 할 부분 의 現實適用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이 五倫에 대하여 긍정적, 부정적 要素라는 것을 개개인의 생각과 현실에 처해진 상황, 時代흐름에대한 變化된 環境등 여러 가 지 측면을 고려해 시대상황에 맞는 倫理道德的 價値를 받아 들여야 할 것이다. 1) 父子有親 父母와 자식 간에는 친함이 있어야 한다. 이 친함이란 부모와 자식은 피와 살을 물 려주고 받은 하늘이 賦與한 타고난 친함이어야 한다. 부모는 자식을 仁慈하게 사랑 하고, 자식은 부모에게 恭順이 孝道하는 것이 부모와 자식 간에 끊을 수 없는 친함 인 것이다. 童蒙先習 에는 父母와 자식은 타고난 天性이 親한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서 기르고 사랑하여 가르치며, 자식은 부모를 받들어 잇고 孝道하여 奉養한다. 그러 므로 아버지는 자식을 올바른 方法으로 가르쳐 奸邪함에 들어가지 않도록 해야 하 며, 자식은 부모가 잘못이 있을 때 부드러운 목소리로 諫하여 향당과 마을에서 罪를 얻지 않도록 해야 한다 11)라고 말하여 부모와 자식 간의 기본 倫理를 설명하고 있 다. 그리고 부모자식 간에 警戒해야할 부분에 대하여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만약에 혹시라도 부모로서 그 자식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고, 자식으로서 그 부모를 부모로 여기지 않는다면 그것이 어찌 世上에 머리를 하늘로 두고 서서 살 수 있겠는가? 비 록 그러나 天下에 옳지 않은 부모는 없다. 부모가 비록 자식을 사랑하지 않더라도 자식은 孝道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다. 12)라고 설명하여 부모와자식간에 지켜야 10) 童蒙先習 傳統文化硏究會編 天地之間萬物之衆 惟人 最貴 所貴乎人者 以其有五倫也 是故 孟子曰 父子有親 君臣有義 夫 有別 長幼有序 朋友有信 人而不知有五常則其違禽獸不遠矣 11) 童蒙先習 傳統文化硏究會編 父子 天性之親 生而育之 愛而敎之 奉而承之 孝而養之 是故 敎之以 義方 弗納於邪 柔聲以諫 不使得罪於鄕黨州閭 12) 童蒙先習 傳統文化硏究會編 苟或父而不子其子 子而不父其父 其何以立於世乎 雖然 天下 無不是 底父母 父雖不慈 子不可以不孝

109 할 기본 도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세상은 朝變夕改처럼 변해가고 있고 다원화시대의 潮流에 따라 가족 간의 分裂은 부모자식간의 疎外로 이어지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요즘 흔히 하는 말로 혼자 사는 것이 편하다 무자식이 상팔자다 요즈음 효자는 부모가 만들어야한다 는 등의 말을 우리는 심심찮게 듣고 있다. 그리고 너무 자식을 감싸고돌아 사회에 적응해 자립 할 수없는 지경에 까지 이른 것이 現實이다. 오죽하면 헬리곱터 맘 이 란 新造語 까지 생겨났겠는가? 헬리콥터 맘 이란 자녀의 주변을 맴돌아 干涉을 멈 추지 않고 過剩保護하는 엄마를 가리킨다. 이들 엄마들은 자녀의 등하교, 學院講義 까지도 시간에 맞추어 데려다주고 데려오는 것은 기본이고, 자녀가 해야 할 奉仕활 동도 대신해준다. 이러다보니 자녀는 엄마가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마마보이 로 자라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자녀가 자라서 사회에 나오면 스스로 자립 할 수 있 는 능력이 없어 사회의 落伍者가 되는 것이다. 이와 비슷한 예로 기러기아빠 라는 신조어도 생겨났다. 자식의 공부를 위해 외국으로 유학 보내면서 그 뒷바라지를 위 해 자녀와 아내가 함께 떠나가서, 홀로 남겨진 가장들은 홀로된 외로움과 가족 간의 그리움으로 인해 極端的인 삶을 마감하는가하면, 외로움을 이기지 못해 不倫에 빠 져 가정파탄으로 離婚 등의 社會問題가 되기도 한다. 이와는 반대로 다 자라서 사회 생활을 하면서도 부모 곁을 떠나 自立하지 않는 세대들도 점점 늘어나고 있다. 이것 이 옛 가족제도와 같은 환경이라면 환영할만한 일이나, 그러나 이러한 자녀들은 모 두 부모를 모시려는 것이 아니라 經濟的으로 부모에게 의지해 사는 세대들이다. 이 러한 젊은이들은 자녀의 양육도 부모들에게 맞기며 자기들의 삶을 영위하면서 부모 들의 수고는 생각하지 않는 자기 이익만 챙기는 젊은이들이다. 이들을 캥거루 족 이라 부른다. 이와 같이 몇 가지 사례를 살펴보면 모두가 지나침은 있어도 부모가 자식을 돌보 고 보살피는 편이고, 자식들은 부모를 奉養하거나 모시려고 하는 예는 극히 드물다 는 것이다. 이것은 五倫 중 첫 번째 德目인 父子有親 의 사상이 고대로부터 이어져 온 血緣關係를 중요시하는 우리민족의 사상이, 과열되고 잘못되어 가는 예에 불과 하지만 우리들에게 시사 하는바는 매우 큰 것이다. 童蒙先習 에 말하기를 아 슬프다! 그 사람의 行實이 착하고 착하지 못함을 보 고자 할진대 반드시 먼저 그 사람이 孝道하고 효도하지 않음을 볼 것이니, 삼가 하 지 않을 수 있으며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13) 라고 하여 그 사람의 됨됨이 가 그 부모에게 孝道하느냐 하지 않느냐에 달려있다고 警戒하고 있다. 또 小學 에 이르기를 身體와 毛髮과 살은 부모에게서 받았으니, 감히毁傷하지 않는 것이 효도의 始作이고, 몸을 세우고 道를 行하여 後世에 이름을 드날려 부모를 드러나게 13) 童蒙先習 傳統文化硏究會編 噫 欲觀其人 行之善不善 必先觀其人之孝不孝 可不愼哉 可不懼哉

110 하는 것이 효도의 마지막이다 14) 라고 하였으니 父子有親 의 진실 된 意味를 여기 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부모는 자식을 낳아 하나의 人格體를 세상에 태어나게 한 責任과 義務로서 자식을 사람으로서 행복하게 잘 살아갈 수 있도록 사랑하고, 기틀 을 마련하여 나아가 이 세상에 쓸모 있는 사람이 되게끔 해야 될 것이고, 자식은 부 모의 그런 무한한 사랑에 대한 조그만 報答이라도 해야 한다는 마음가짐을 가지고 부모에게 孝를 다하고 부모의 기대에 어긋나지 않게 부응하여 행복하고 보람된 삶 을 살아야 할 것이다, 그래서 옛 先賢들은 孝는 모든 행실의 으뜸이다 라고 말씀 하신 것을 늘 가슴에 새겨야 할 것이다. 2) 君臣有義 임금과 臣下 간에는 義理가 있어야한다. 임금과 신하는 하늘과 땅 같은 신분이다. 그래서 임금과 신하는 자연적으로 從屬관계가 형성된다. 임금과 신하는 각각 자기 의 道理를 다하여 義를 지켜 至極한 정치인 太平聖代에 이르게 하는 것이 당연한 義務이다. 論語 에 보면 魯나라 定公이 임금이 신하를 부리고 신하가 임금을 섬 기는 데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라고 물으니 孔子가 대답하시기를 임금은 신하를 禮節에 맞게 부려야하고, 신하는 임금에게 忠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라고 하였 다 15) 이 두 가지는 모두 道理의 當然함이니 각자 스스로 다하고자 할 뿐이다. 이와 같이 君臣有義의 義는 임금이 임금답고 신하가 신하다울 때는 문제가 발생되 지 않는다. 문제는 임금이 임금답지 못할 때 올바른 신하라면 마땅히 임금이 바른길 로 갈수 있도록 諫하는 것이 신하의 道理인 것이다. 일찍이 抱朴子가 말하기를 도 끼를 맞아 죽더라도 바르게 諫해야하며, 끓는 솥에 삶겨 죽더라도 옳은 말을 다하면 그를 忠臣이라 한다. 16)라 말하여 忠臣이 지켜야 할 道理를 말했다. 또 商나라 紂王 이 暴虐한 정치를 하고 酒池肉林에 빠지며 炮烙之刑을 일삼으니 王子 比干이 임금 이 잘못이 있는데도 죽음으로서 諫하지 않으면 우리 百姓들은 무슨 罪인가? 하고 直言으로 諫言하니 紂王은 怒해서 말하기를 내들으니 聖人의 心臟에는 일곱 개의 구멍이 있다고 했는데 진실로 있는가? 하고는 왕자 比干의 배를 갈라 그 심장을 보 았다.17)하니, 예나 지금이나 爲政者가 잘못하면 忠臣이나 百姓이나 다 같이 塗炭에 14) 小學集註 明倫第二 傳統文化硏究會編 身體髮膚 受之父母 不敢毁傷 孝之始也 入神行道 揚名於後 世 以顯父母 孝之終也 15) 論語集註 八佾篇 傳統文化硏究會編 定公 問 君使臣 臣事君 如之何 孔子對曰 君使臣以5 臣事君 以忠 16) 明心寶鑑 治家篇 傳統文化硏究會編 抱朴子曰 迎斧鉞而正諫 據鼎鑊而盡言 此謂忠臣也 17) 小學集註 稽古篇 傳統文化硏究會編 君有過而不以死爭 則百姓 何辜 乃直言諫紂 紂怒曰 吾聞聖人 之心 有七竅 信有諸乎 乃遂殺王子比干 刳視其心

111 빠지는 것은 明若觀火한 일이다. 그러나 지금은 다원화시대에 살고 있고 옛날의 君臣有義의 잣대로 지금 社會를 評 價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그 理致만은 옛날이나 지금이나 크게 틀리지 않는다. 지 금의 國家機關도 行政 는 행정부대로 大統1이하 전 國務委員들과 각부처의공무원 들, 그리고 지방자치의 首長들과 공무원들이 각각 맡은바 職責을 잘 수행해 주고, 일반백성들은 모두 다 자기 生業에 종사하며 열심히 맡은 일을 한다면, 잘사는 나 라, 貧 격차가 없는 나라, 백성들이 믿고 사는 나라가 될 것이니, 이것은 예나지금 이나 변하지 않는 法則인 것이다. 미루어 생각한다면 입법부나 사법부도 똑같은 理 致인 것이다. 童蒙先習 에 이르기를 만일 혹시라도 임금으로서 임금의 道理를 다하지 못하 며, 신하로서 신하의 職責을 닦지 못한다면, 더불어 함께 천하와 국가를 다스리지 못할 것이다. 18) 라고 하여 君臣 간에 지켜야할 道理를 강조하고 있다. 또한 孟子께 서는 百姓들이 떳떳하게 살아갈 수 있는 生業이 없으면 그 때문에 떳떳한 마음이 없어진다. 19)라고 말씀하였다. 이것은 윗자리에 앉아 政治하는 사람들이 아래 사람 을 어떻게 다스리느냐에 따라 백성들의 마음이 움직인다는 것이다. 요즈음으로 말하면 輿論이 어떻게 움직이느냐에 따라 정치 생명도 길어질 수도 짧 아질 수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을 미루어 사회 전반을 살펴 볼 때 대기업 오너들도 자기 밑의 社員들을 하나같이 내 처자식같이 생각 한다면 그 사원들은 회사 일을 내 집안일같이 誠心을 다해 할 것이니, 그렇게 된다면 그 회사는 發展할 것이고 더 불어함께 사는 社會가 될 것이다. 이것이 오늘날의 우리 사회가 추구하는 大同社會, 貧 격차가 없는 사회, 계층 간의 葛藤이 없는 사회, 黑白의 極端的인 논리가 없는 사회가 되어 세계일류 국가가 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현대사회가 갖추어야 할 새 로운 의미의 君臣有義가 아닐까? 3) 夫 有別 남편과 아내사이엔 분별이 있어야 한다. 부부란 남남이 만나 가정을 꾸려 세상을 살아간다. 童蒙先習 에 말하기를 남편과 아내는 두 姓이 합한 것이다. 百姓이 태어나는 시작이며 모든 福의 根源이니, 仲媒를 행하여 婚姻을 議論하며 幣帛을 드 리고 친히 맞이하는 것은 그 分別을 두텁게 하는 것이다. 20)라고 하여 부부간의 분 별을 엄격하게 구분하였다. 그러므로 아내에게 장가들되 같은 姓을 취하지 않으며, 18) 童蒙先習 傳統文化硏究會編 苟或君而不能盡君道 臣而不能修臣職 不可與共治天下國家也 上 民則無恒産 因無恒心 20) 童蒙先習 傳統文化硏究會編 夫 二姓之合 生民之始 萬福之原 行媒議婚 納幣親迎者 厚其別也 19) 孟子 梁惠王章句

112 집을 지을 적에 안과 밖을 分別하여 남편은 밖에 거처하면서 안의 일을 말하지 않 고, 人은 안에 거쳐하면서 밖의 일을 말하지 않는다. 21) 라고 말하여 부부간에는 특별한 집안일을 제외하고는 남편은 남편의 일을 하고 부인은 부인의 일을 하여 서 로간의 영역을 침범하지 않고, 또한 서로를 배려하고 尊重해주는 것이 부부간의 분 별인 것이다. 남편은 묵묵히 자기의 道理를 다하여 집안을 和睦하게하고, 아내는 아내의 도리를 다하여 집안을 부드럽게 順從하도록 이끈다면 그 집안은 반드시 화 목하고 자식의 敎育이 이루어져 집안의 道가 바르고 잘될 것이다. 반면에 남편은 남 편의 도리를 다하지 못하고 집안과 부인을 잘 다스리지 못하며, 아내도 아내의 도리 를 다하지 않고 남편을 남편으로 대하지 않고 남편의 잘못된 점만 틈타서 집안을 어지럽게 한다면 그 집안은 道가 바르지 못해 쓸쓸해질 것이다. 그래서 옛날 가부장 시대에는 그 집안을 바루고 자식들의 올바른 교육과 집안의 화목을 위해 부인의 잘못을 엄하게 다스렸다. 小學 에 이르기를 부인에게는 일 곱 가지 내쫓아 보내는 것이 있으니, 시부모에게 順從하지 않으면 내보내며, 자식이 없으면 내보내며, 淫亂하면 내보내며, 嫉妬하면 내보내며, 나쁜 疾病이 있으면 내보 내며, 말이 많으면 내보내며, 도둑질하면 내보내야한다. 22)라고 하여 부인의 잘못된 점을 엄하게 다스렸다. 요즈음 세상 基準으로 보면 말도 안 된다 할지모르지만 그 註를 살펴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그 註에 이르기를 不順父母는 德을 거스리 기 때문이요, 無子는 代가 끊기기 때문이요, 淫亂은 宗族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요, 嫉妬는 집안을 어지럽히기 때문이요, 惡疾은 함께 祭需를 마련할 수 없기 때문이요, 多言은 親族을 離間시키기 때문이요, 竊盜는 義理에 반대되기 때문이다. 23)라고 하 였다. 이것은 남녀 간의 교제를 신중히 하고, 혼인의 시초를 소중히 하기 위한 것 이다 24)라 하여 남녀 간의 사귐을 重要하게 여겼던 것이다. 그러나 그중에서도 세 가지 내보내지 못하는 것이 있으니 맞이해 온 곳은 있으나 돌아갈 곳이 없으면 내 보내지 않으며, 함께 父母 삼년상을 지냈으면 내 보내지 못하며, 전에는 가난하다 뒤에 貴하면 내 보내지 못한다. 25)라 해서 함부로 내보내지 않았던 것이다. 七去 之惡 중에惡疾이나 無子는 어쩌면 天命인데 내보내는 것은 온당치 못하나, 그 나머 지는 오늘날에 있어서도 시사 하는바가 매우 크다. 오늘날에 있어 부부간은 서로가 서로를 위해주고 아껴주며 사랑하고, 각자 맡은바 일을 誠實하게 하면서 집안일을 서로 相議하며, 자녀교육 또한 서로가 의논해서 올 21) 上同 娶妻 不娶同姓 爲宮室 辨內外 男子 居外而不言內 人 居內而不言外 傳統文化硏究會編 有七去 不順父母去 無子去 淫去 妬去 有惡疾去 多言去 竊 盜去 上同 不順父母 爲其逆德也 無子 爲其絶世也 淫 爲其亂族也 妬 爲其亂家也 有惡疾 爲其不可與供粢 盛也 多言 爲其離親也 竊盜 爲其反義也 上同 所以愼男女之際 重婚姻之始也 上同 有所取 無所歸 不去 與更三年喪 不去 前貧賤後 貴 不去 22) 小學集註 明倫篇 23) 24) 25)

113 바른 길로 갈수 있도록 하는 것이 夫 有別이 아닐까? 물론 지금 세상은 家族法의 개정으로 同姓婚姻도 하는 시대고, 男女平等시대라 해서 政策立案이 여성위주로 제 정되는 경우도 많으나, 그러나 우리의 傳統思想인 儒敎文化는 아직까지 우리생활 곳곳에 散在해 있는 것도 사실이다. 그렇다면 오늘날의 夫 有別은 어떻게 해야 할까? 부부간에 서로를 이해하면서 溫 故知新의 智慧를 발휘해서 무조건 옛날 것은 排斥만할 것이 아니라 좋은 것은 본받 고 나쁜 것은 요즈음 시대에 맞게 하나씩 고쳐나가면서 新舊造化를 잘 調和한다면 幸福한 家庭을 이루어 새로운 價値觀의 夫 有別이 나오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든 다. 그래서 子思曰 君子 같은 德 있는 사람도 그 始作은 夫 에서 시작된다. 26)라 하여 부부관계를 아주 중요시 하였다. 4) 長幼有序 어른과 어린아이 간에는 차례가 있어야한다. 明心寶鑑 에 이르기를 늙은이와 젊은이, 어른과 어린이는 하늘이 정한차례이니, 理致를 어기고 道理를 상하게 해서 는 안 된다. 27) 라고 하고, 또 童蒙先習 에는 어른과 어린이는 하늘이 정해놓은 떳떳한 차례이다. 28) 해서 어른과 어린이, 늙은이와 젊은이, 스승과 제자, 兄과 아 우의 차례를 嚴格히 정해 놓았다. 그래서 兄弟간이나 宗族 간, 고을과 무리, 마을에 서 어른과 어린이의 차례를 紊亂하게 해서는 안 된다. 어른은 어린이를 仁慈하게 사랑하고 어린이는 어른을 恭敬한 後에야 어른이 젊은이를 업신여기거나, 젊은이가 어른을 업신여기는 弊端이 없어서 사람의 道理가 바르게 될 것이다. 29) 라고 말하 고 있다. 요즈음 신문지상이나 TV등 매스컴을 통해 가끔씩 전해지는 어린학생이 어른을 계단에서 밀어 어른을 숨지게 했다. 또는 어른이 나무란다는 이유로 어른에게 달려 들어 멱살을 잡으며 때렸다. 는 등의 뉴스를 보면, 人倫의 道理를 말하기 전에 정말 末世에 사는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이것이 꼭 그 아이들만의 問題인가? 라는 물음 에 우리 旣成世代들이 떳떳하게 대답할 수 있는가? 과연 어른들의 잘못은 없는지 나 자신 부터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지금은 多子女 시대가 아니다보니 모든 부 모들이 내 아이 만큼은 남의 아이 보다 잘 키워야지 하는 부모의 마음에 아이들은 점점 멍들어 가고 있는 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라는 말이 점점 줄어들고 있다. 26) 童蒙先習 夫 有別篇 傳統文化硏究會編 君子之道 造端乎夫 傳統文化硏究會編 老少長幼 天分秩序 不可悖理而傷道也 28) 童蒙先習 長幼有序篇 傳統文化硏究會編 長幼 天倫之序 29) 上同 長慈幼 幼敬長然後 無侮少陵長之弊 而人道正矣 27) 明心寶鑑 遵5篇

114 오직 내 아이, 내 가족, 내직장이라는 나만의 利己心이 점점 澎湃해져 사회전반에 蔓延되어 있다. 이러한 환경 속에 자라는 아이들의 人性이 어찌 올바르기를 바라겠 는가? 燎原의 불길처럼 퍼져가는 學校暴力, 先生과 學生간의 葛藤, 극성학부모들의 삐뚤어진 자식사랑, 이 모든 것들이 지켜야할 秩序가 무너졌기 때문이다. 옛날에 어린아이들을 가르칠 때는 물 뿌리고 쓸며 응하고 대답하며 나아가고 물 러나는 禮節과, 어버이를 사랑하고 어른을 恭敬하며 스승을 높이고 벗을 친하게 하 는 方法으로 가르쳤다. 30) 고 하였다. 이것은 어린아이 때부터 禮節에 맞는 行動을 가르친 뒤에 工夫를 하게 했던 것이다. 이렇게 하므로 해서 人性이 길러지고 禮節을 익혀서 情緖가 馴化되고, 傲慢하고 放恣하고 驕慢한 氣運을 꺾어 人間의 本性을 기 르게 하기위해서다. 그렇다고 해서 長幼有序를 부정적으로 만 볼 것인가? 그것은 아니다. 그래도 우리 나라만큼 노인 恭敬文化가 잘 되어 있는 나라도 없을 것이다. 그래서 어른은 社會의 선배로서 후배들에게 부끄럽지 않는 삶을 살아가야하며, 젊은이들은 그러한 훌륭한 선배들이 이루어 놓은 아름다운 傳統을 잘 이어 가꾸어 다시 後孫에게 물러주는 模 範된 삶을 살아가야 할 것이다. 이것이야말로 長幼有序의 秩序가 잘 서있는 나라, 아름다운 傳統이 살아 숨 쉬는 나라가 될 것이다. 5) 朋友有信 친구 간에는 信義가 있어야 한다. 字典을 살펴보면 朋 은 同門受學 하는 사람, 友 는 뜻을 함께하는 사람이라고 定義되어있다. 朋이든 友든 간에, 벗 사이는 貧 貴 賤 高下를 떠나 그 德을 벗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벗이란 天子로부터 庶人에 이 르기까지 벗이 없을 수 없으니, 그러므로 벗을 取하기를 반드시 端正한 사람으로 하며, 벗을 가리기를 반드시 자기보다 나은 이로 하여야한다. 31) 라 하여 벗을 사귀 는 것을 매우 중요시하였다. 曾子曰 君子는 글로써 벗을 모으고, 벗으로써 仁을 돕는다. 32)라 하여 벗을 사귀 는 方法을 제시하였다. 孔子께서는 子貢이 벗에 대해 물으니 忠誠으로 말해주고, 善으로 引導하되 不可하면 그만두어서, 스스로 辱되게 하지 말아야 한다. 33) 라고 대답하였다. 朱子는 이에 대해 벗은 仁을 돕는 것이므로, 그 마음을 다하여 告해주 고 그 말을 善하게 하여 引導한다. 그러나 義로써 合한자 이므로 不可하면 그만두어 30) 小學 小學書題 傳統文化硏究會編 灑掃應對進退之節 愛親敬長隆師親友之道 傳統文化硏究會編 取友 必端人 擇友 必勝己 32) 論語 顔淵篇 傳統文化硏究會編 君子 以文會友 以友輔仁 33) 上同 忠告而善道之 不可則之 毋自辱焉 31) 童蒙先習 朋友有信篇

115 야 하니, 만일 자주하다가 疎遠함을 당한다면 스스로 辱되는 것이다. 34) 라 하여, 아무리 친구간이라도 지킬 것은 지켜야 한다는 것이다. 만약에 친구간이라 하더라 도 지나치게 해서 친구에게 干涉으로 비친다면 그것은 疎遠해 질 수 있는 것이다. 요즈음 세대에는 친구사귀기를 너무 가볍게 생각해서 信義로 사귀는 것이 아니라 자기이익에 따라 사귀는 경향이 많은 것이다. 물론 자기의 일에 따라 이사람 저사람 사귀기는 하나 정말로 자신이 어려울 때 내 일같이 도와주는 친구가 얼마나 될까? 그래서 옛말에 술과 밥을 함께 할 때에 兄弟간 같은 친구는 천 명이 있으나, 내가 危急하고 어려울 때에 도와주는 친구는 하나도 없느니라. 35)라고 하여 친구 사귀는 것을 警戒 했던 것이다. 그래서 친구사귀는 것을 세 가지 部類로 말했다. 有益한 벗이 세 가지가 있고 損害되는 벗이 세 가지가 있으니, 벗이 바르며, 벗이 誠實하 며, 벗이 見聞이 많으면 有益하고, 벗이 外貌를 꾸미기만 잘하며, 벗이 柔順하기를 잘하며, 벗이 말만 잘하면 損害되는 벗이다. 36)라 하여 벗을 사귈 때 愼重히 選擇해 서 사귈 것을 말하였다. 이것은 사귀는 친구라 하더라도 그 사람에 따라 變化되어진 다는 것이다. 사람은 環境의 지배를 받는다. 우리는 주변에서 평소 공부도 잘하고 부모님 말씀 도 잘 듣던 친구가 不良한 친구들과 어울리면서 자연스레 불량배가 되어가는 것을 볼 때도 있다. 어린아이의 가장 기초교재인 四字小學 에 쑥이 삼밭 가운데서 자 라면 붙들어주지 않아도 저절로 곧아지고, 흰 모래가 검은 진흙에 있으면 물들이지 않아도 저절로 더러워진다. 37)라 하여 자라는 환경을 중요시했다. 이와 같이 친구란 一生에 있어서 가장 가까우면서도 한편으로는 가장 멀다고 여길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친구에게는 誠實과 信義로 사귀어 서로 간에 믿음이 생 기게 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 믿음이라는 것이 자기를 버리지 않으면 하기 어려운 것이다. 언제나 易地思之의 마음으로 친구를 配慮하고 믿음으로 사귀는 것이 오래 도록 사귈 수 있는 친구일 것이다. 그래서 孔子께서 친구들에게 誠實하지 못하면 윗사람에게 信任을 얻지 못할 것이다. 벗에게 誠實하는 方法은 어버이에게 恭順하 지 못하면 벗에게도 성실하지 못할 것이다. 38)라 하였다. 上同 友 所以輔仁 故 塵其心以告之 善其說以道之 然 以義合者也 故 不可則止 若以數而見疏 則自 辱矣 35) 明心寶鑑 交友篇 酒食兄弟千個有 急難之朋一個無 36) 論語 季氏篇 傳統文化硏究會編 益者三友 損者三友 友直 友諒 友多聞 益矣 友便辟 友善柔 友便 佞 損矣 37) 四字小學 傳統文化硏究會編 蓬生麻中 不扶自直 白沙在泥 不染自汚 38) 童蒙先習 朋友有信篇 傳統文化硏究會編 不信乎朋友 不獲乎上矣 信乎朋友有道 不順乎親 不信乎 朋友矣 34)

116 4. 나가며 지금까지 五倫思想을 중심으로 해서 우리 東洋의 傳統思想이 우리 인간생활에 끼 친 영향에 대해 개괄적으로 알아보았다. 지금 우리는 競爭時代에 살아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러한 경쟁사회에 있어 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남과 경쟁하여 반드시 이겨야 한다고 말한다. 그래서 우리는 아주 어려서부터 모든 일에 있어서도 親舊와 경쟁해야 하고 同僚와 경쟁해서 반드 시 이겨야 하고, 또한 무슨 일을 하던 간에 남들과 경쟁해서 이겨야 한다고 배우고 그렇게 생활해 왔다. 그래서 學校나 學院, 職場에서, 공부할 때나 일할 때도 남과경 쟁해서 반드시 이겨 社會的으로 출세할 것을 目標로 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옛날 우리 先賢들은 공부하는 목적이 지금과 달랐다. 옛 분들의 목표는 자 기를 닦고 나서 남을 다스리는 爲己之學 또는 修己治人에 두고 心身修養을 해왔다. 공부의 목표를 자기 자신의 內面的인 人格修養에 두고, 늘 마음을 깨끗하게 닦고, 慾心을 없애고 남이 보지 않더라도 언제나 行動擧止를 삼가고 조심해서 姿勢가 늘 儼然했다. 그리고 敬虔하게 마음을 바로잡고, 義로운 행동으로 어디에서나 模範되게 행동했다. 누구와 경쟁해서 이기려고 하는 것도 아니고, 남에게 자랑하려고 하는 것 도 아니었다. 그래서 옛사람들은 공부를 해서 知識을 습득하게 되면 그것을 자기 혼자만의 것으 로 삼지 않았다. 배우기를 열심히 하고 아는 지식이 쌓이면 그 지식을 남에게 베풀 어 모든 사람들이 그 지식의 惠澤을 누릴 수 있게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그들은 나 라가 위태로울 때는 목숨을 바쳐 나라에 忠誠을 다하기도 하였다. 우리역사에 길이 빛나는 李舜臣장군이나, 退溪선생, 栗谷선생, 그리고 나라가 風前燈火의 위태로움이 있을 때 목숨을 바쳐 殺身成仁을 한 수많은 義兵들, 安重根義士, 尹奉吉義士 등 수 많은 사람들이 자기의 배운 바의 知識을 나라를 위해 아낌없이 바쳤던 것이다. 이러한 모든 일들은 우리사회의 가장 기초단위인 나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 내 자신이 內面의 수양을 잘 닦고 집안을 잘 다스리며, 내가 닦은 修養을 社會에 베푼 다면 그 사회는 禮義가 바른 사회, 五倫이 살아있는 사회가 될 것이며, 미루어 나아 가면 사회가 잘되면 國家도 잘될 것은 스스로 알 것이다. 그러므로 이 다섯 가지 五倫思想은 하늘 秩序의 法이요 사람의 道理에 본래부터 지니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行實이 이 다섯 가지를 벗어 날 수 가없다. 39) 라고 하 여 사람이 일상생활을 하면서 五倫을 벗어날 수 없음을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래서 孔子께서 君子가 부모를 섬김이 孝誠 하므로 임금에게 忠誠할 수 있고, 兄을 공경 하므로 어른이나 모시는 官長에게 恭敬할 수 있고, 집안을 잘 다스리므로 官廳이나 39) 童蒙先習 總論篇 傳統文化硏究會編 天敍之典而人理之所固有者 人之行 不外乎五者

117 國家社會를 잘 다스릴 수 있다. 40) 라고 말하여 모든 것은 인간개인의 修養과, 家庭 이 잘 다스려져야만 國家가 잘 다스려 진다고 하였다. 이로 미루어 볼 때 우리인간은 부모로부터 내 몸이 태어나 부모에게 올바른 교육 을 받고, 자라서는 스승에게 교육을 받고, 어른을 恭敬하고, 친구 간에 잘 사귀며, 知識이 쌓이면 그 지식을 사회에 돌려주어 많은 사람이 그 惠澤을 볼 수 있게 하는 것이 人格修養과 工夫의 목표가 되어야 될 것이다. 그래서 공자께서는 弟子가 집에 들어가서는 孝道하고 나와서는 어른을 恭敬하며, 行實을 삼가 조심하고 말을 미덥게 하며, 널리 여러 사람을 사랑하되 仁한 사람을 가 까이 해야 될 것이니, 이것을 行하고나서 남은 힘이 있거든 그 남은 힘을 써서 글(文) 을 배워야 한다. 41)라 하여 우선 사람이 된 뒤에 공부를 해야 한다고 警戒하였다. 이와 같이 先賢들은 철저하게 자기수양을 마친 뒤에 남을 다스렸든 것이다. 요즈 음 아무리 바쁜 시대이고 個人主義가 넘치는 세상이라지만 인간의 根本倫理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묵묵히 이어져 오고 있는 것이다. 우리들은 法古創新의 마음으 로 옛 先賢들이 修養하고 지켜온 傳統倫理를, 보다 새롭게 이 시대에 맞는 패러다임 으로 構築하는 것이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들의 使命이 아닐까? 40) 孝經 傳統文化硏究會編 41) 論語 學而篇 君子之事親孝故 忠可移於君 事兄悌故 順可移於長 居家理故 治可移於官 傳統文化硏究會編 弟子入則孝 出則悌 謹而信 汎愛衆 而親仁 行有餘力 則以學文

118 동아시아의 이상향(理想鄕) 이야기 무릉도원(武陵桃源)에서 청학동(靑鶴洞)까지張 源 哲* Ⅰ 일반적으로 이상향(理想鄕)이란 모순으로 가득 찬 불완전한 현실 사회에 대해 더욱 나아진, 곧 발전된 사회를 일컫는다고 할 수 있다. 이는 현재에는 존재하지 않지만 앞으로 다가 올, 실현 가능한 그 어떤 이상적인 사회를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이상향 내지 이상사회(理想社會)에 대한 동경(憧憬)이나 의식은 인 류적인 보편성을 띠면서 세계 각지에서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그 결과 이상향 은 문학이나 종교, 철학이나 사상 등의 다양한 문화적 양식을 통해 표현되어 왔다 고 할 수 있다. 이를 역사적으로 살펴보면 우선 서양에서는 기독교의 성서(聖書)에 등장하는 천국(天國:에덴동산)을 비롯해서 황금동산(희랍), 아틀란티스(플라톤), 유토피아 (모어) 등의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이에 반해 동아시아의 최초의 문명인 중국 등지에서는 소국과민(小國寡民), 지덕지세(至德之世), 태평세(太平世), 대동 사회(大同社會), 동천복지(洞天福地), 무릉도원(武陵桃源) 등이 대표적이라고 할 수 있다. 한국의 경우에도 잘 알다시피 삼신산(三神山), 청학동(靑鶴洞), 우복동 (牛腹洞), 율도국, 이어도 등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 종교적인 측 면에서는 극락정토(極樂淨土), 미륵정토(彌勒淨土), 태평천국(太平天國), 십승지 (十勝地), 후천개벽(後天開闢) 등의 개념을 들 수 있겠다. 동서양에 나타난 이상향이나 이상사회의 유형을 좀 더 자세히 나누어 보면 서 양의 그것은 코케인(Cockaygne), 아르카디아(Arcadia), 천년왕국(千年王國: Millenium), 유토피아(Utopia) 등으로 나누어진다. 여기서 코케인과 아르카디아는 신화의 세계에서 등장하는 이상향으로 코케인은 모든 것이 풍족한 환락과 쾌락의 세계이고, 아르카디아는 인간의 욕구가 절제되어 자연과 조화를 이루는 낙원의 상태이다. 한편으로 기독교 전통과 관련되는 천년왕국과 유토피아는 시간적으로 는 미래에 있고, 공간적으로는 이 지상에 언젠가 도래할 것으로 믿는 이상세계이 * 경상대 교수

119 다. 다만 차이가 나는 것은 천년왕국은 신의 섭리(攝理)에 의한 것이지만, 유토피 아는 인간의 노력과 의지로 사회제도의 개선을 통해 실현하려는 이상사회라고 하 겠다. 그런데 이러한 서양의 이상향 가운데 아르카디아는 노자(老子)가 강조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의 도가적(道家的) 이상사회와, 유토피아는 대동사회(大同社 會)와 같은 유가의 이상사회와 여러 면에서 유사한 특성을 지닌다는 점이 주목할 만하다고 하겠다. 한편으로 동아시아의 이상사회의 유형을 위의 방식에 따라 구분한다면 대체로 산해경(山海經)형 무릉도원(武陵桃源)형 삼신산(三神山)형 대동사회(大同社會)형으 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이 가운데 산해경형과 삼신산형 蓬萊山 方丈山 瀛洲山 은 신화적인 세계로 환상성이 짙은데 반하여 무릉도원형과 대동세계형은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많이 반영된 경우라고 할 수 있다. 우선 유가적인 이상사회로 현실에서 실현 가능한 세계로 묘사되는 대동사회형 은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 나타난다. 여기에서는 대동(大同) 사회 소 강(小康) 사회 난세(亂世)라는 사회 발전의 세 단계가 제시되고 있다. 대동사회는 유교적 인(仁)이 구현된 덕치(德治) 사회이고, 소강(小康) 사회는 예(禮)로써 다스 려지는 현실적인 법치(法治) 사회이다. 난세(亂世)는 법도 통하지 않는 병들고 어 지러운 사회이다. 예기(禮記) 예운(禮運) 편에는 대동사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하고 있다. 대도(大道)가 행해지면 천하가 공평(公平)해진다. 똑똑한 사람을 뽑고 능력 있 는 사람에게 일을 맡기며 신의(信義)를 논하고 화목(和睦)을 닦게 된다. 따라서 사람들은 제 부모만을 부모로 대접하지 않고 제 자식만을 자식으로 여기지 않아 늙은이는 여생(餘生)을 마칠 수 있고 장정(壯丁)은 일할 수 있고 아이는 잘 양육 (養育)되며 과부, 홀아비, 병든 자들이 부양(扶養) 받게 된다. 남자는 짝이, 여자는 시집 갈 곳이 모두 있게 된다. 재물(財物)이 땅에 버려지는 것을 그대로 두지는 않지만 꼭 자기 것으로 하지도 않는다. 놀고먹는 것을 싫어하지만 꼭 자기를 위해 서 일하는 것만은 아니다. 따라서 남을 해치려는 꾀가 날 리 없고 도적도 생기지 않는다. 그러니 바깥문을 닫을 필요도 없다. 이러한 세상을 대동(大同)이라고 한 다. (大道之行也 天下为公 选贤与能 讲信修睦 故人不独亲其亲 不独子其子 使老有所终 壮有所用 幼有所长 矜寡孤独废疾者 皆有所养 男有分 女有归 货恶其弃于地也 不必藏于己 力恶其不出于身也 不必为己 是故谋闭而不兴 盗 窃乱贼而不作 故外户而不闭 是谓大同 ) 대동사회(大同社會)는 문자 그대로 대도(大道)가 행해지는 사회로 천하위공(天

120 下爲公)의 공유제(公有制), 능력에 맞는 직분(職分)과 일, 경제적 평등, 복지 사회, 도절난적(盜竊亂賊)이 없는 편안한 사회의 개념을 포함하고 있다. 인(仁)과 인애 (仁愛)로 구현되는 덕치(德治) 사회 곧 태평세(太平世)인 것이다. 이와 같은 대동 사회에 대한 열망은 대도(大道)가 행해지지 않는 소강사회(小康社會)에 대한 극복 의 의지에서 비롯되는 것이라고 하겠다. 이러한 대동사회의 특징은 소강사회와 비교해 보면 더욱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소강사회는 천하위가(天下爲家)의 사유제(私有制), 법치(法治)에 의해 지배되는 사 회로 현실적인 사회 논리를 말한다. 이는 최종적으로 대동사회라는 이상사회를 지향해 가는 전(前) 단계인 승평세(升平世)로 곧 차선책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 사회는 인위적으로 달성된 이상공간이라는 점과 비교적 강한 현실 비판, 사회개 혁적 의지가 두드러진다고 하겠다. 그리고 인간이 창조한 세계질서를 긍정한다는 점에서 현세지향적이라고 할 수 있다. 대동사회의 이러한 여러 특징들은 도교의 여러 현실 비판 의식과도 결합하여 후대의 민란(民亂), 종교개혁 운동, 사회정치 운동 그리고 소설과 같은 문학과 사상 등에 지대한 영향을 끼치게 되었다. 중국 후한말(後漢末)에 나타나는 태평도(太平道)와 오두미교(五斗米敎), 수호전(水滸 傳) 에 묘사되는 양산박(梁山泊) 사회, 강유위(康有爲)의 대동사상의 표현인 대동서(大同書)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고 할 수 있다. Ⅱ 현실적이면서도 인간의 의지와 노력이 비교적 반영되는 이상사회의 또 다른 유 형인 무릉도원(武陵桃源)형은 본래 도교적(道敎的) 이상향에서 유래된다고 하겠 다. 그 최초의 원형은 주지하다시피 노자의 도덕경(道德經) 80장에 등장하는 소국과민(小國寡民)에서 다음과 같이 묘사되어 있다. 인구가 적은 작은 나라. 온갖 문명의 도구가 있어도 사용하지 않고 백성의 생 명을 소중히 여겨 멀리 이동하지 않게 한다. 비록 배와 수레가 있어도 타는 일이 없고 갑옷과 무기가 있어도 사용하는 일이 없다. 사람들은 다시 새끼를 꼬아서 약 속의 표시를 하고 제가 먹는 음식을 맛있게 여기며 제가 먹는 옷을 멋있게 여기 고 제가 사는 거처를 편안히 여기고 제 사는 마을의 풍속을 즐기게 된다. 이웃한 나라가 서로 바라보고서 닭과 개 짖는 소리가 서로 들려도 백성들은 늙어 죽도록 서로 왕래하는 일이 없다. (小国寡民 使有什伯之器而不用 使民重死而不遠徙 雖有舟輿 無所乗之 雖有甲兵 無所陳之 使民復結縄而用之 甘其食 美其服 安其居 楽其俗 隣国相望鶏狗之声相聞 民至老死 不相往来 )

121 노자가 주장하는 이러한 무위자연(無爲自然)에 입각한 정치사상은 자기가 살고 있는 당대 사회의 현실을 비판한 것으로 그 주된 정치사회관으로는 이른바 칠반 (七反) 을 들 수 있겠다. 곧 반전쟁(反戰爭) 반압박(反抑壓) 반간섭(反干涉) 반중세 (反重稅) 반빈부불균(反貧 不均) 반기교(反技巧) 반사유(反私有) 사상이 그것이 다. 그는 또한 사무(四無), 곧 무위(無爲) 무사(無事) 무욕(無慾) 무화폐(無貨幣) 및 교환 을 주장하였는데 이러한 무위자연 사상이 집약된 이상사회로서 소국과민 의 세계를 제시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 동진(東晋) 시대의 위대한 시인인 도연명(陶淵明: )의 도화원 기(桃花原記) 와 도화원시(桃花原詩) 에 등장하는 이상향의 모습 역시 이러한 노자에 묘사되는 이상향의 연장선에서 나타난다고 할 수 있다. 학자들의 연구에 따르면 그는 본래 이 이야기를 유유(劉裕)의 북벌에 종군했던 친구에게서 듣고서 그를 바탕으로 해서 창작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 유사한 이야기가 다 른 문헌에서도 나타나는 것으로 미루어 보아 이는 오래된 전설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도화원시(桃花原詩) 의 서문 격으로 쓰인 도화원기(桃花原記) 의 내용을 읽어 보면 다음과 같다. 晉太元中 武陵人 捕魚為業 緣溪行 忘路之遠近 忽逢桃花林 夾岸數百步 中無雜樹 芳草鮮美 落英繽紛 漁人甚異之 復前行 欲窮其林 林盡水源 便得 一山 山有小口 彷彿若有光 便舍船 從口入 初極狹 纔通人 復行數十步 豁然開朗 土地平曠 屋舍儼然 有良田 美池 桑 竹之屬 阡陌交通 雞犬相聞 其中往來種作 男女衣著 悉如外人 黃髮垂 髫 並佁然自樂 見漁人 乃大驚 問所從來 具答之 便要還家 設酒 殺雞 作 食 村中聞有此人 咸來問訊 自云 先世避秦時亂 率妻子邑人來此絕境 不復 出焉 遂與外人間隔 問 今是何世 乃不知有漢 無論魏 晉 此人一一為具 言所聞 皆歎惋 餘人各復延至其家 皆出酒食 停數日 辭去 此中人語云 不 足為外人道也 既出 得其船 便扶向路 處處誌之 及郡下 詣太守 說如此 太守即遣人隨其 往 尋向所誌 遂迷不復得路 南陽劉子驥 高尚士也 聞之 欣然規往 未果 尋 病終 後遂無問津者 진(晋)나라 태원(太元) 때, 한 무릉(武陵) 사람이 고기잡이로 생계를 이어갔다. 하루는 시내를 따라 너무 멀리 들어가 길을 잃었다. 홀연히 복숭아 숲을 만났는

122 데, 시내 가장자리 수 백 보가 모두 복숭아나무뿐이었다. 향기로운 풀 아름다운 데, 복숭아 꽃잎 어지럽게 흩날려, 어부가 매우 이상하게 여겼다. 다시 앞으로 나 가면서, 복숭아나무 숲 끝까지 가보려고 했다. 숲이 끝난 곳에 수원지(水源池)가 있고, 자그마한 산도 보였다. 산에 조그마한 굴이 있는데 밝은 빛이 있는 듯하였 다. 배에서 내려 동굴 안쪽으로 들어갔다. 굴 입구가 매우 좁아 사람이 간신히 지나갈 수 있었는데, 다시 수십 보 들어가 니 넓고 확 트였다. 땅은 넓고 평평했으며, 집들도 잘 정돈되어 있었다. 기름진 땅과 아름다운 연못이 있고 뽕나무와 대나무 등이 있었다. 밭 사이 길은 사방으로 통하고 닭 울고 개 짖는 소리가 도처에서 들렸다. 이곳에서 오가며 농사짓는 것과 남녀가 옷을 입는 것이 모두 바깥세상과 같았다. 노인과 어린아이가 함께 기뻐하 고 즐거워했다. 그들이 어부를 보고 몹시 놀라며 어디서 왔는가 물었다. 어부가 자세히 대답하자, 집으로 초청해 술상을 차리고 닭을 잡아먹기를 청했다. 마을에 이런 사람이 와있다는 소문을 듣고, 마을 사람들이 모두 찾아와서 자세히 물었다. 그들 스스로 "선조들이 진나라 때 난을 피해 처자와 동향 사람을 거느리고, 세상 과 단절된 이곳으로 왔다 다시 나가지 않았소. 그래서 바깥세상 사람과 왕래가 끊 겼소."라고 하면서 물었다. "지금이 어느 시대입니까?" 그들은 한나라가 있었다는 사실조차 몰랐고, 위와 진나라는 말할 것도 없었다. 이에 어부가 알고 있는 모든 것을 일일이 말해주자, 모두 놀라며 탄식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를 자청하여 술과 음식을 대접했다. 어부는 며칠 동안 묵은 후 작별 인사를 했다. 마을 사람 들이 그에게 부탁했다. "바깥사람들에게 이야기 할 것이 못됩니다." 어부가 그 곳에서 나와 배를 타고 전에 왔던 길을 따라 돌아오면서 곳곳에 표 시를 해놓았다. 마을에 돌아와 태수를 뵙고 이러한 사정을 이야기 했다. 이에 태 수가 곧 사람을 보내, 그가 온 곳을 따라 표시한 곳을 찾았으나 끝내 길을 잃고 찾지 못했다. 남양에 유자기는 인품이 높은 선비였다. 이 이야기를 듣고 기뻐 그곳을 가보고 자 했으나 끝내 찾지 못하고, 이로 인해 죽고 말았다. 그 후로는 이 나룻터를 찾

123 거나 묻는 이가 없었다. 도화원기(桃花原記) 의 내용을 요약해 보면 한 어부가 길을 잃고서 우연히 무릉도원을 발견하는데, 그곳은 아름다운 복숭아꽃이 핀 숲을 지나 동굴의 험로 를 거쳐야 이를 수 있는 곳이다. 그곳은 넓은 옥토(沃土)와 길들이 나있고, 닭과 개 울음소리가 도처에서 들린다. 그곳은 진(秦)나라의 난리를 피해서 들어온 사람 들이 건설한 곳으로 노인과 어린아이가 모두 편안하여 즐거워한다. 어부는 환대 를 받으며 발설하지 말라는 그들의 당부를 듣는다. 그러나 돌아오는 길에 표시를 해두고서 다시 태수와 함께 찾아 왔으나 찾지 못했고, 이후 남양 사람 유자기가 실패한 이래로 그 나루터를 묻는 사람이 없었다는 줄거리이다. 연구에 따르면 여기에 등장하는 무릉(武陵)은 중국의 호남성(湖南省) 서남쪽에 있는 무릉산(武陵山) 기슭의 원강(沅江)의 강변 일대를 가리키고, 도원(桃源)은 복 사꽃이 만발한 무릉의 한 소원지(小源池)를 일컫는다고 한다. 요컨대 무릉도원은 진나라의 난을 피해 달아난 백성들이 건설한 소국과민의 이상사회를 제시한 것으 로 이후로는 이 세상과는 동떨어진 이상향 내지 동천복지(洞天福地)로 널리 인식 되게 되었다. 특히 동천복지는 동굴 속의 별천지로서 이른바 도교적인 신선향(神 仙鄕)을 일컫는 것으로 중국의 육조(六朝) 시대 3 6세기 에 유행한 것으로 명 산대천에 신선이 사는 낙원이 숨겨져 있다는 사상이다. 이러한 무릉도원은 자급 자족의 농업생산 경제에 기초한 소규모의 이상사회로 빈부 격차나 계층 간의 모 순이 없는 평화롭고 안정된 사회이다. 아울러 풍족한 물질적 욕구의 충족보다는 욕망의 절제와 검약을 통하여 안정을 추구하는 세상의 모습을 보이는데 이것은 초기 도교와 유가가 추구했던 태평한 세상의 모습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도화 원시(桃花源詩) 에서 묘사되는 그러한 세상의 모습은 다음과 같다. 嬴氏亂天紀 賢者避其世 黃綺之商山 伊人亦雲逝 往跡浸復湮 來逕遂蕪廢 相命肆農耕 日入從所憩 桑竹垂餘蔭 菽稷隨時藝 春蠶收長絲 秋熟靡王稅 荒路曖交通 雞犬互鳴吠 俎豆猶古法 衣裳無新製 童孺縱行歌 斑白歡游詣 草榮識節和 木衰知風厲 雖無紀歷志 四時自成歲 怡然有餘樂 於何8智慧 奇蹤隱五百 一朝 神界 淳薄既異源 旋復還幽蔽 問遊方士 焉測塵囂外 願言躡輕風 高舉尋吾契 영씨(진시황)가 천도를 어지럽히자, 현자들이 세상을 피해 숨어버렸네

124 네 명의 은자들 상산으로 가버렸고, 백성들도 역시 떠났다네 은신해 갔던 발자국 묻혀 지워졌고, 이 곳 오던 길 황폐해 묻혀버렸네 서로가 격려하며 농사짓고, 해가 지면 편안하게 쉬었네 뽕나무 대나무 무성해 그늘이 짙고, 콩과 기장 때맞춰 심었네 봄누에 쳐서 비단실 수확하고, 가을 추수해도 세금 바치지 않네 황폐한 길이 희미하게 트였고, 닭과 개가 서로 우짖네 제사도 옛 진나라 법대로 지내고, 의복 모양 새롭게 만들지 않았네 어린애들 길에서 멋대로 노래하고, 백발노인들 즐겁게 왕래하네 풀이 자라니 따뜻한 봄철인줄 알고, 낙엽이 지자 바람찬 겨울임을 아네 비록 달력 같은 기록 없어도, 사계절 변화로 일 년을 아네 기쁨이 충만하여 즐겁게 살고, 애써서 꾀나 재간을 부리지 않네 흔적 없이 숨겨진지 오백년 만에, 하루아침에 신비의 세계 드러났네 순박한 도화원과 야박한 속세는 맞지 않아서, 다시 선경을 깊이 감췄네 묻노니 속세에 사는 이들이, 어찌 속세 밖의 무릉도원을 알겠는가 원컨대 사뿐히 바람을 타고, 높이 올라 내 마음에 맞는 곳 찾으리라 이러한 무릉도원형 이야기는 이후의 설화나 작품에서도 자주 나타나는데 그 동 기나 안내자의 요소 등에 변화가 나타나는 변이의 양상을 보이게 된다. 우리나라 의 유명한 오복동(五福洞) 설화 에서는 안내자의 요소가 동물이 사슴으로 변 하고 있는데 그 이야기를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옛날에 어떤 사람이 하루는 산에 가서 나무를 하는데 사슴 한 마리가 나타났 다. 나무꾼이 사슴을 잡으려고 작대기를 들고 사슴의 뒤를 쫓아갔다. 그러나 사슴 은 자꾸 달아나서 나무꾼은 해가 질 무렵까지 사슴을 쫓아다니다가 마침내는 사 슴이 어느 굴속으로 들어가는 것을 보았다. 나무꾼은 끝까지 쫓아가 사슴을 잡겠 다는 생각으로 사슴이 들어간 굴속으로 들어갔다. 그랬더니 그곳은 캄캄한 굴이 아니라 사람이 살고 있는 별천지였다. 나무꾼은 이상한 생각이 들어서 그곳에 사는 한 사람을 붙들고 이곳이 어디냐 고 물었더니, 그들은 옛날에 이 세상의 난을 피하여 이곳으로 들어와 살게 되었는 데 지금까지 죽지 않고 행복하게 산다고 하였다. 나무꾼은 그곳에서 푸짐하게 대 접을 받고 집으로 돌아왔다. 그 뒤 사람들이 오복동을 찾아가려고 하였으나 다시 그곳을 찾을 수는 없었다고 한다

125 Ⅲ 이상에서 살펴보았듯이 동아시아의 이상향 내지 이상사회의 모습은 대체로 유 가와 도교 사상을 바탕으로 생겨나고 있다. 특히 도가적 색채를 강하게 보이는 소 국과민 또는 무릉도원의 변이형이라는 공통점을 보여주고 있다. 그것은 어디에서 나 민중의 소박하고도 원초적인 정서를 바탕에 깔고 있으면서 자신들이 사는 당 대 사회의 모순에 대한 불만에서 이상사회에 대한 열망을 원형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한국적 이상형의 단초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는 고려시대 이인로(李 仁老)의 유명한 청학동기(靑鶴洞記) 를 읽어 보면 다음과 같다. 智異山或名頭留(지이산혹명두류) 始自北朝白頭山而起(시자북조백두산이기) 花 峯蕈谷緜緜聯聯(화봉심곡면면련련) 至帶方郡(지대방군) 磻結數千里(번결수천리) 環而居者十餘州(환이거자십여주) 歷旬月可窮其際畔(력순월가궁기제반) 古老相傳 云(고로상전운) 其間有靑鶴洞(기간유청학동) 路甚狹襝通人行(로심협첨통인행) 俯 伏經數里許(부복경수리허) 乃得虛曠之境(내득허광지경) 四隅皆良田沃壤宣播植(사 우개량전옥양선파식) 唯靑鶴樓息其中(유청학루식기중) 故以名焉(고이명언) 盍古之 遁世者所居(합고지둔세자소거) 頹垣壤蹔猶在荊棘之墟(퇴원양잠유재형극지허) 지리산은 두류산(頭留山)이라고도 한다. 북쪽 백두산으로부터 일어나서 꽃봉오 리처럼 그 봉우리와 골짜기가 이어져 대방군(帶方郡)에 이르러서야 수천 리를 서 리고 얽혀서 그 테두리는 무려 십여 고을에 뻗치었기에 달포를 돌아다녀야 대강 살필 수 있다. 옛 노인들의 전하는 바로는 "그 속에 청학동(靑鶴洞)이 있는데 길 이 매우 협착(狹 )하여 겨우 사람이 다닐 수 있고, 몸을 구부리고 수십 리를 가 서야 허광(虛曠)한 경지가 전개된다. 거기엔 모두 양전(良田) 옥토(沃土)가 널려 있어 곡식을 심기에 알맞으나, 거기엔 청학만이 살고 있기 때문에 이런 이름이 붙 여졌고, 대개 여기엔 옛날 세상을 피해 사는 사람들이 살았기에 무너진 담과 구덩 이가 가시덤불에 싸여 남아 있다."고 한다. (청학동의 지형과 유래) 昔僕與堂兄崔相國(석복여당형최상국) 有拂衣長往之意(유불의장왕지의) 乃相約 尋此洞(내상약심차동) 將以竹W盛牛犢兩三以入(장이죽롱성우독양삼이입) 則可以 與世俗不相聞矣(칙가이여세속불상문의) 遂自華嚴寺至花開縣(수자화엄사지화개현) 便宿神興寺(변숙신흥사) 所過無非仙境(소과무비선경)

126 연전에 나는 당형(堂兄) 최상국(崔相國)과 같이 옷깃을 떨치고 이 속된 세상과 는 등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우리는 서로 이 곳을 찾아가기로 했다. 대고리짝에 소지품을 넣어 소 두서너 마리에다 싣고 들어가 이 세속과는 담을 쌓기로 했다. 드디어 화엄사(華嚴寺)로부터 출발하여 화개현(花開懸)에 이르러 신흥사(新興寺) 에 투숙하였는데, 가는 곳마다 모두가 선경이었다.(청학동을 찾아 나섬) 千嚴競秀(천엄경수) 萬壑爭流(만학쟁류) 竹籬茅舍(죽리모사) 桃杏掩映(도행엄 영) 殆非人間世也(태비인간세야) 而所謂靑鶴洞者(이소위청학동자) 卒不得尋焉(졸 부득심언) 因留詩嚴石云(인유시엄석운) 頭留山迴暮雲低(두류산회모운저) 萬壑千巖似會稽(만학천암사회계) 策杖欲尋靑鶴洞(책장욕심청학동) 隔林空聽白猿啼(격림공청백원제) 樓臺標緲三山遠(루대표묘삼산원) 苔蘚微茫四字題(태선미망사자제) 試問仙源何處是(시문선원하처시) 落花流水使人迷(락화류수사인미) 천암(千巖)은 경수(競秀)하고 만학(萬壑)이 쟁류(爭流)하며 대울타리에 초가들이 복숭아꽃 살구꽃 핀 사이로 은은하게 비치니 거의 인간 세상이 아닌 듯하나 찾고 자 하는 청학동은 마침내 찾지 못하고 말았다. 하는 수 없이 시만 바윗돌에 남기 고 돌아왔다. 두류산은 드높이 구름 위에 솟고, 만학 천암(萬壑千巖) 둘러보니 회계(會稽)와 방불하네 지팡이에 의지하여 청학동 찾으려 했으나, 속절없는 원숭이 울음소리만 숲 속에서 들리네 누대(樓臺)는 표모(縹緲)한데 삼산(三山)은 안 보이고, 써있는 넉 자가 이끼 끼어 희미하네 묻노니 선원(仙源)은 어디인가, 낙화유수(落花流水)만이 가물가물 (선경에 대한 감상과 청학동을 찾지 못한 안타까움) 昨在書樓偶閱五柳先生集有桃源記(작재서루우열오류선생집유도원기) 反復視之 (반부시지) 盖秦人厭亂(개진인염란) 携妻子幽深險僻之境(휴처자유심험벽지경) 山 迴水複樵蘇不可得到者以居之(산회수복초소불가득도자이거지) 及晉太元中(급진태 원중) 漁者幸一至(어자행일지) 鮿忘其途不得復尋耳(첩망기도불득부심이) 後世丹靑

127 以圖之(후세단청이도지) 歌詠以傳之(가영이전지) 莫不以桃源爲仙界(막불이도원위 선계) 羽車飇輪長生久視者所都(우차표륜장생구시자소도) 盖讀其記未熟耳實與靑鶴 洞無異(개독기기미숙이실여청학동무이) 安得有高尙之士如劉子者(안득유고상지사 여유자자) 一往尋焉(일왕심언) 어제 서루(書樓)에서 우연히 오류 선생집 (五柳先生集)을 훑어보다가 도원기(桃 源記)가 있기에 이것을 반복해 보니, 대개 진(秦)나라 때 난리를 피해 처자를 거 느리고 그윽하고 깊어 궁벽한 곳을 찾아 산이 둘렸고 시내가 거듭 흘러 초동(樵 童)도 갈 수 없는 험한 곳을 찾아 여기에 살았던 것이다. 진(晋)의 태원(太元) 연 간에 어떤 어부가 다행히 한 번 그 곳을 찾았으나 그 다음엔 길을 잃어 그 곳을 다시 찾지 못했다는 것이다. 후세에 이것을 그림으로 그리고 노래와 시로 전하여 도원(桃源)으로써 선계(仙界)라고 하고 장생불사(長生不死)하는 신선이 모여 사는 곳이라고 하였으나 아마도 그 기록을 잘못 읽었기 때문일 것이니 사실은 저 청학 동과 다름이 없을 것이다. 어떻게 유자기(劉子驥)와 같은 고상한 선비를 만나서 나도 그 곳을 한 번 찾아가 볼 것인가. (도원기를 읽고 청학동을 그리워함) 이 세상 어딘가에 살기 좋은 이상향이 있다는 믿음은 중국에서 한국으로 장소 를 옮기면서 명칭도 무릉도원에서 청학동(靑鶴洞)으로 바뀌었다. 푸른 학 이라는 뜻의 청학(靑鶴)이 천년학(千年鶴)으로 한 번 울면 천하가 태평해진다고 믿는 선 도문화(仙道文化)와도 관계가 있는 이러한 청학동에 대한 믿음은 태평성대를 바 라는 민중의 바람이 반영되어 있고 이는 역설적으로 당대 현실의 모순과 혼란을 여실히 보여 주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다. 청학동기(靑鶴洞記) 에 묘사된 지리 산 청학동은 한국의 이상향을 전형적,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것으로 그 사상적 배 경으로는 청학 모티프 등에서 나타나는 신선(神仙) 사상과 도원설화로 대표되는 도가적 이상사회에 대한 사상과 유가의 은일(隱逸) 사상이 복합적으로 나타나는 경우라고 하겠다. 그러나 이상향으로서의 지리산 청학동은 그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는 가상적 이고 상상의 장소인만큼 그 장소 정체성과 관련된 수많은 논의가 있어 왔다. 따라 서 그 장소 역시 조선 중기까지는 청학동이란 불일폭포 골짜기를 지칭하다가 조 선 후기로 가면서 세석(細石)고원을 청학동이라 했고, 오늘날은 불일폭포 위쪽 청 학봉 넘어 경상남도 하동군(河東郡) 청암면(靑岩面) 묵계리(默溪里) 학동을 청학 동이라 일컫게 되었다. 현대인은 장소 정체성과 진정성이 소멸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근현대 지리적 지식의 확장은 이 세계의 모든 장소를 낱낱이 드러내 버렸고, 자본주의적 가치가

128 지배하는 현대적 삶의 방식으로 말미암아 인간 존재의 장소적 본연성과 장소가 지니는 진정성은 상실되어 가고 있다. 곧 현대는 진정성 있는 관계로 맺어질 수 있는 장소와 공간이 해체되어 가는 시대인 것이다. 이러한 장소의 해체는 장소와 긴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인간 심성의 해체로 직결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상황에 서 이상향 또는 마음의 고향으로 인간 존재의 진정한 장소와 장소성으로의 귀환 이라는 메시지는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고 하겠다. 이상향은 삶의 원천인 것이다. 사람들은 현실 세계가 고통스러울 때 이상 세계를 꿈꾼다. 이인로 역시 이 세상을 등지고 싶어 청학동을 찾아 떠났다고 했다. 그러나 그가 그랬던 것처 럼, 이상 세계는 찾아갈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계속 이상 세계를 꿈 꿀 수 있는 것이다. 우리의 선조는 희망의 공간이던 지리산 청학동을 이상향으로 꿈꾸며 현실의 고달픔을 달래고 미래에 대한 소망을 엮어 나갈 수 있었던 것이다

129 漢代 儒家가 꿈꾸었던 理想社會 ---董仲舒 思想을 中心으로--金 奉 建* 1. 들어가는 말 중국의 역사에 있어서 漢代는 중국 문화의 전형을 이루는 시기이다. 여러 나라로 나누어져 있었던 戰國時代를 종식시키고 최초로 통일 왕조를 이룬 것은 秦이었다. 秦은 法家의 사상적 지도를 받아 천하를 통일한 뒤 통일국가로서의 기초를 다졌다. 文字와 度量衡을 통일했으며, 郡縣制를 창안하여 專制王權을 공고히 했다. 정신적인 면에 있어서도 法家思想을 顯學으로 삼아 以吏爲師 를 강요하였고, 법가 이외의 일 체의 다른 사상을 억제하여 焚書坑儒 를 단행하기도 했다. 천하를 통일한 秦王 瀛 政은 자신을 始皇帝 라 칭하고 자신이 죽고 난 뒤에도 그의 아들을 二世, 손자를 三世 라고 부르게 하여 萬代에 이르기까지 영원히 秦王朝가 영속되기를 기대했다. 그러나 秦은 천하를 통일한지 불과 18년 만에 망하고 그 자리를 漢에게 내어주고 말았다. 漢은 秦으로부터 통일 국가의 면모를 이어받았을 뿐 아니라 진정한 중국 문화의 원형을 이룩했다. 정치적으로는 秦의 郡縣制를 이어받아 專制王權을 더욱 공고히 하는 한편 경제적으로는 鹽鐵의 專賣化를 통해 국고를 충실히 했으며 군사적으로는 주변의 다른 나라들을 침략하여 영토와 부를 확장했다. 문화적으로는 秦이 기획했 던 초보적인 文字의 統一을 완성시켰고 文學과 藝術을 진흥시켜 오늘날에도 중국인 들은 자신들의 문자를 漢字나 漢文이라 부르고 자신들의 문화를 전반적으로 漢文 化, 혹은 中華文化라고 부르고 있다. 또 중국인들은 자신들을 漢族, 혹은 中華民族 이라 불러 민족의 정체성을 이루고 있다. 漢은 이와 같이 초기 중국의 國體를 형성하는 동시에 中國文化의 典型을 이루었 다. 漢王朝가 이와 같이 중국 역사상 최초로 통일왕조의 經營을 성공적으로 이룬 데 에는 儒家의 사상적 지도에 힘입은 바 컸다. 그 중에서도 董仲舒는 先秦諸家의 사상 을 종합 절충하여 통일왕조의 이데올로기를 제시했고, 漢의 武帝는 이를 받아들여 漢王朝의 사상적 토대를 마련했다. * 동의대 연구교수

130 董仲舒는 漢王朝의 정치적 이념을 형성하는 데 중심적인 역할을 한 인물이다. 그 는 전통적인 儒家의 天命思想과 孟子의 王道政治 사상을 계승하여 현실적인 제도 속에서 民本主義의 토대를 이루어냈다. 그리고 儒家를 바탕으로 하고 그 위에 道家, 墨家, 法家, 陰陽家 등의 사상을 포용하여 先秦儒家와는 또 다른 형태의 儒家思想을 구축했다. 이로 인하여 董仲舒는 漢王朝의 정치사상적 대강을 마련한 인물로 추앙 되고 있으며, 그가 주장했던 大同思想은 동양인들이 꿈꾸어 온 理想社會論의 전형 이 되었다. 그리고 이후의 다른 왕조들에 있어서도 政治理念의 모범이 되었다. 2. 西漢 初의 思想的 雰圍氣 漢의 초기 정치 이념은 道家의 무위자연사상이었다. 이는 앞 왕조였던 진이 법가 의 부국강병책으로 천하를 통일하였으나 조기에 멸망한 데에서 그 원인을 찾았다. 즉 秦이 지나치게 객관적인 법과 제도에 의거하여 백성들의 生意를 억압한 것이 주 된 원인이라고 본 것이다. 秦은 軍國主義에 의거하여 國强兵을 이루고자 했으나 가혹한 형벌로 모든 人民이 손발 둘 곳이 없을 지경이 되어서야 백성들의 자발성을 기대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그리하여 平民에서 몸을 일으켜 帝王에 오른 漢高祖는 略法三章 을 제외하고 일체의 법을 파기했다. 그러자 백성들은 서서히 생산력을 회 복하여 漢朝가 창업한지 대략 60년가량이 지난 武帝 시에는 곡식이 곳간에 차고 넘 쳐 길가에 쌓아두었으나 훔쳐가는 사람이 없었다. 고 할 정도로 민생이 회복되었다. 漢初의 황제들은 道家思想을 채택하여 無爲以治 를 통치의 원리로 삼았다. 그 결 과 확실히 사회 모순이 완화되고 생산력은 제고되었으나, 無爲와 自然의 사상으로 국가의 제도를 정비하고 왕권의 공고화를 기하기에는 여전히 미흡하였다. 이는 高 祖 시에도 이미 경험된 일이었다. 劉邦이 한나라를 세우자 儒者들이 황제 앞에서 進言할 때 늘 詩經 과 尙書 를 인 용했다. 그러나 유방은 이 몸은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는데 어찌 詩書를 섬기겠는가! 라 며 크게 화를 냈다. 이에 陸賈가 말했다. 말 위에서 천하를 얻었다 한들 어찌 말 위에서 천하를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유방은 마음이 불편했지만 오히려 부끄러워하는 기색을 보이며 말했다. 나를 위하여 秦나라가 천하를 잃은 이유와 내가 천하를 얻은 까닭이 무엇인지, 또한 과 거에 성공한 나라와 망한 나라에 대해 시험 삼아 저술해 보도록 하시오. 이에 陸賈는 나라의 존망 징후에 대해 약술하여 모두 12편을 지었다. 육가가 매 편을 아뢸 때마다 유방은 칭찬일색이었고 옆에 있는 사람들도 모두 만세를 외치며 그 책을 新 語 라 했다.( 史記 陸賈列傳 )

131 漢나라가 세워진 초기에 아직 制度가 자리 잡히지 않고 禮節과 法度가 너무 간략하여 武將들이 걸핏하면 술에 취해 망언과 괴성을 질러대고 칼을 뽑아 휘둘려댔다. 그래서 劉邦 은 휘하에 있는 장군들을 어떻게 단속할지 골머리를 앓고 있었다. 劉邦을 섬기고 있던 숙 손통이 그의 고민을 알아차리고 기회를 잡아 아뢰었다. 선비라는 사람들은 진취적인 일을 함께하기는 어렵지만 성업을 함께 지키기에는 적당 합니다. 원컨대 魯나라의 선비들을 불러 조정의 儀5를 함께 만들게 해주십시오. 그리고 즉시 禮儀 制度를 만들어 부하들의 행위를 규제했다. 劉邦은 황제에 대한 예인 三拜九叩頭를 받자 나는 오늘에서야 비로소 皇帝의 고귀함을 알았다 고 했다.( 史記 劉敬 叔孫通列傳 ) 이상의 자료를 보면 高祖는 일찍이 禮儀典章制度의 필요성을 알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왕비인 竇太后는 道家思想에 더욱 깊이 심취해 있었으므로 高 祖의 사후에도 섭정을 통해 계속 道家의 사상을 펼치고자 하였고, 이를 본받아 惠帝 와 文帝, 景帝에 이르기까지 道家 사상으로 일관했다. 武帝 시에 董仲舒의 罷黜百家, 獨尊儒術 의 건의를 받고서야 儒敎는 국교의 지위 에 오를 수가 있었다. 그러나 董仲舒는 原始儒家의 사상만으로 漢朝의 통치이념을 세우지 않았다. 그러기에는 漢의 사회 정황이 先秦 시기와는 너무나 바뀌어져 있었 다. 통일왕조인 漢에서는 先秦의 諸侯國들과 같이 一家의 이론만을 고집하는 것은 시대 상황과 부합하지를 않았고 통용될 수도 없었다. 이점에서도 法家만을 고집한 秦은 漢에 이미 反面敎師의 역할을 한 바 있다. 漢朝의 사상가들은 대개 여러 학파 에 대한 절충적 경향을 띠게 마련이었다. 董仲舒는 그 가운데에서도 諸家의 사상을 가장 성공적으로 절충 종합한 인물로서 이를 통해 漢代의 정치이념을 정립하였고 理想社會의 실현 방안을 정형화시킨 인물이다. 3. 董仲舒의 理想社會論 1) 天人感應論 董仲舒가 꿈꾸었던 理想社會는 儒家의 王道政治에 의한 大同社會였다. 그러나 儒 家의 王道政治는 君主의 仁政과 德治가 전제되어야만 실현될 수 있다. 현대의 民主 主義가 실현되기 이전의 專制君主制度 아래에서는 항상 이 전제조건이 문제였다. 즉 아무리 理想社會를 이루고자 하나 君王이 자신의 專制權을 어느 정도 누그러뜨 리지 않고서는 人民의 基本權은 이루어질 수 없겠기 때문이다. 이 점은 정치 현실에 서 언제나 묘한 함수관계를 이루어 왔다. 즉 統治者가 권력을 한껏 휘두르면 자신의 권력은 극대화할 수 있으나 人民은 이에 반발하여 革命으로 정권을 전복시킬 것이

132 고, 人民의 基本權을 지나치게 보장해 주면 자신의 王權이 미미해 질 수 있기 때문 이다. 儒家는 이 정치적 함수관계에서 언제나 君王이 仁政과 德治를 하면 兩者가 모두 적절한 만족을 얻게 되어 정치가 안정될 것이라고 주장해 왔다. 그러나 역래로 君王 들은 儒家의 이 조언을 잘 따르지 않았다. 그러므로 先秦 시기의 孔子는 앉은 자리 가 따뜻할 틈이 없이 轍環天下를 했으나 끝내 諸侯國의 정치이념으로도 채택되지 못했고, 孟子 또한 무수한 諸家의 논적들을 설파했으나 상황은 마찬가지였다. 漢代에 와서 董仲舒는 先秦 시기의 諸侯들과는 비교할 수 없는 강력한 통일왕조 의 전제군주에 맞서서 그의 권력을 제어할 수 있는 묘안을 제출했다. 이것이 바로 天人感應論이다. 2) 天人感應 思想의 원천 董仲舒 天人感應 思想의 源泉은 몇 가지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上代의 天 命思想이다. 하늘은 우리 백성이 보는 곳으로부터 보고, 우리 백성이 듣는 곳으로 부터 듣는다(天視自我民視, 天聽自我民聽) 는 書經 의 사상이나 하늘의 명은 한 결같지 않다(天命不于常), 하늘은 누구도 특별히 사랑하지 않는다. 오직 덕 있는 자를 도운다(皇天無親, 惟德是輔) 는 상대의 천명사상은 전통적으로 유가가 계승하 였고, 董仲舒는 기본적으로 이 사상을 자신의 天人感應 사상의 근본으로 삼고 있다. 둘째는 墨家의 尙鬼說이다. 儒家의 天命思想에서도 天은 어느 정도 人格神으로서 의 성격을 지니지만 다소 관념적인 것도 사실이다. 儒家의 天 관념이 內面化되어 孔 子의 仁이나 孟子의 性善으로 옯겨간 뒤에는 더욱 그러하다. 이에 董仲舒는 만물을 주재하거나 君權을 수여하는 등의 강력한 天의 인격성을 드러내기 위해서 墨家의 尙鬼說을 빌어왔다. 셋째는 陰陽家의 氣化宇宙論과 災異說이다. 동중서는 이를 채용하여 天人 간의 感應이 機械的 必然性을 지니고 있다고 역설했다. 이를 통하여 董仲舒는 天意가 만 물을 주재하고 동시에 民意가 하늘에 어렵지 않게 도달하는 관계를 정립했다. 이 학 설을 가설한 목적은 말할 것도 없이 군심의 옳지 못함을 바루기(格君心之非) 위한 것이다. 동시에 董仲舒는 人間의 몸과 마음이 天地의 몸과 마음과 닮아 있다는 것을 역설함으로써 天人感應의 機械的 必然性이 더욱 용이하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다. 3) 人副天數 董仲舒는 人間의 身體가 天地의 度數와 닮아 있다는 설을 폈다

133 天數의 미묘함을 구함은 인간만한 곳이 없다. 人身에는 四肢가 있고 每肢에 三節이 있어 서 모두 12개의 형체를 이루고 있다. 天에는 사계절이 있고 매 계절마다 3개월씩 있어서 12개월로 한 해의 數를 마친다.( 春秋繁露 官制象天 ) 인간에게는 360개의 마디가 있는데 天의 수에 짝한 것이다. 형체에 뼈와 살이 있는 것 은 地의 두터움에 짝한 것이다. 위로 耳目이 총명한 것은 해와 달의 모양과 같고, 몸에 빈 구멍과 여러 가지 맥이 있는 것은 내(川)와 계곡의 모양과 같다.( 春秋繁露 人副 天數 ) 天은 한해의 數로 人身을 이루었기 때문에 몸에 있는 작은 마디 366개는 한해의 日數이 다. 열두 개의 큰 마디는 1년의 月數이다. 속에 五臟을 가지고 있는 것은 五行의 數이다. 바깥에 四肢를 가지고 있는 것은 四時의 수이다.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것은 晝夜가 있는 것과 같으며, 剛柔가 있는 것은 冬夏가 있는 것과 같다. 슬퍼함과 즐거워함이 있는 것은 陰陽과 같고, 마음에 사려분별이 있는 것은 天地에 度數가 있는 것과 같으며, 行爲에 倫理 가 있는 것은 天地를 본받은 것이다.( 春秋繁露 人副天數 ) 이와 같은 陰陽家의 氣化宇宙論은 道家에도 받아들여져 道敎의 형성에 지대한 영 향을 미쳤지만 董仲舒는 이를 儒家에도 받아들이는 데에 주저하지 않았다. 이는 말 할 것도 없이 天人感應說의 전제조건으로 삼으려 함에서였다. 儒家는 精神的 內面 으로 들어가 天命과 人性이 하나 됨을 논하였다면, 陰陽家는 天地와 人間의 外的 物 質的 同質性과 相關性을 중시하였다. 哲學的 省察을 통하여 강인한 內的 信念을 갖 는 데에는 유가적 방식이 효용성이 있을지 모르나, 哲學者가 아닌 軍人政治家인 武 帝를 설득하기 위해서는 오히려 눈에 보이는 물질적 대상을 사용함이 훨씬 효율성 이 있었을지 모른다. 더욱이 漢初부터 道家의 사상이 顯學으로 이어왔고, 개인적으 로 神仙思想을 신봉하였던 武帝에게 있어서는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4) 災異說 董仲舒는 하늘과 人間 간의 구체적인 感應關係는 災異로써 알 수 있다고 했다. 天地間의 萬物에는 無上의 變化가 있다. 이것을 異라고 부른다. 작은 것을 災라고 하는 데 災가 늘 먼저 발생한다. 그 이후에 異가 뒤따라온다. 災는 天의 譴責이요 異는 天의 위 력이다. 天의 견책을 깨닫지 못하면 위력으로 두렵게 한다. 詩經 에 이르기를 上天의 威力을 두려워하라고 했는데 바로 이를 두고 한 말이다. 대개 災異의 근원은 완전히 국가 의 실정으로 말미암아 발생한다. 국가의 실정이 막 발생하려하면 天은 災害로 견책함으로

134 써 이를 알리는데 만일 譴責으로 이를 알려도 고칠 줄을 모르면 곧 怪異를 나타내어 놀라 게 한다. 놀라게 해도 여전히 두려워할 줄 모르면 殃禍가 닥치게 된다. 이로써 天意는 仁 이며 인간을 함정에 빠뜨리고자 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다.( 春秋繁露 必仁且知 ) 董仲舒는 여기에서 災異를 극히 생동적으로 표현했는데 이 설명에 의하면 災異는 아직 인간에 대한 天의 구체적인 賞罰懲惡이 아니다. 天意의 본질은 仁이요 과실을 저지르는 인간을 구제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 바꾸어 말하면 天은 비록 최고의 주재자라 하지만 무고하게 인간에게 그 권위를 남용하지 않으며 인간에게 중대한 과실이 없으면 災害, 怪異나 殃禍를 내리지 않는다. 이 과정에서 간과해서는 안 될 것은 인간은 자신의 내부로 들어가서 스스로 반성해야 하며 반드시 마음속에 삼가 고 경계함이 있어야 한다(人內而自省, 宜有懲於心, 春秋繁露 必仁且知 )는 것 이다. 그러므로 董仲舒가 災異를 말한 것은 災異를 수단으로 인간을 도덕적인 목적 에 도달케 하려는 것이며, 이것은 말할 것도 없이 災異로 드러난 天意를 살펴서 왕 스스로가 반성할 것을 바라서인 것이다. 5) 君權天授說 董仲舒에 의하면 天子의 모든 권한은 天이 부여한 것이다. 그래서 그는 天命을 받은 君主는 天意를 부여받아 天子라 불려진다. ( 春秋繁露 深察名號 )고 말하 였다. 그러나 여기서 비록 君主가 生殺大權까지 가지고 天과 함께 變化의 勢를 주관 한다 할지라도 그것 역시 어디까지나 至高無上의 존재인 天에 의거할 때라야 가능 한 것이다. 人間은 天에서 命을 받았기 때문에 다른 생물들과는 완전히 다르다..( 漢書 卷56, 董仲舒 本傳 ) 天은 天子를 堯舜에게 주었고, 堯舜은 天命을 받아 天下를 다스렸다..( 春秋繁露 堯 舜湯武 ) 董仲舒의 이 말을 살펴보면 그는 여기서 天과 君의 관계를 父子關係로 나타내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君主는 하늘의 아들이며 君主가 天을 섬기는 것은 부 모를 섬기는 것처럼 마땅한 일이며, 아울러 자식된 자로서는 마땅히 孝로써 사람됨 의 도리를 다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董仲舒는 君主가 하늘을 섬기는 것은 父母 를 섬기는 것처럼 마땅하며 孝로써 하늘을 섬겨야 한다. ( 春秋繁露 深察名 號 )고 하였던 것이다. 만일 天을 父로 본다면 天子는 天意를 위배하고서는 국가를

135 다스릴 수 없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말해서 부모의 마음은 그 자식을 사랑하지 않는 법이 없다. 董 仲舒가 天은 人君을 仁愛하는 마음으로 충만해 있으며, 天子는 바로 그 자애로운 부 모의 사랑 아래에서 政事를 주관한다고 했을 때, 天子의 지위는 어느새 天父 아래 로 옮겨지게 된다. 따라서 天子는 天父에 대해 마땅히 孝를 다해야 한다. 天과 君의 관계가 이와 같이 되면 君主는 단지 天이 파견한 대리인에 불과하며, 天을 받들어 정치를 행하여야 할 의무를 지닌 존재의 지위에 머무르게 된다. 董仲舒에 의하면 君主의 권력은 天으로부터 나왔다. 그러므로 天權은 君權을 구 속한다. 동중서는 天權의 君權에 대한 구속에는 두 가지가 있다고 여긴다. 즉 國命 의 與奪과 政事에 대한 監督이다. 董仲舒의 君權天授說에서는 天은 의지가 있어서 君主의 帝位를 주거나 빼앗을 수 있다. 그 기준은 곧 君主가 安民, 혹은 害民의 여 부에 달려 있다. 동중서에 의하면 天은 君位의 與奪로써 君主를 제제할 뿐만 아니라, 일상의 政事 에 시시각각 감독도 한다. 무엇보다도 君主의 德行과 惡行을 상세히 살핀다. 역사상 秦과 漢은 연이어 무력으로 천하를 차지했다. 그러나 이와 같이 君權의 轉 移가 사람의 힘에 의해서 마음대로 이루어진다면 君主는 勸力을 얼마든지 자의대로 독재하게 될 것이다. 董仲舒의 君權天授說은 군주의 專制權力을 오히려 제한하는데 포커스를 맞추었다. 그리하여 군왕의 권력은 천이 부여한 것이라는 것을 인정함으 로써 군왕의 기대를 달성시킴과 동시에 군권을 천권의 아래에 종속시킴으로써 전제 왕권으로 하여금 일정한 제약에 따르게 장치했던 것이다. 4. 맺는 말 주로 法家에 의해서 주도된 君權의 專制化는 그 실제적인 효용으로 秦이 天下를 통일한 후 漢朝에 들어서도 더욱 공고해져 갔는데 武帝에 이르러 그 절정에 이르렀 다. 賢良對策 에서 武帝가 朕이 지극히 높은 아름다운 덕을 이어받아 七窮을 전하 고 罔極을 베푼다(朕獲承至尊休德, 傳之七窮而施罔極} 고 한 말은 朕이 곧 國家 라 는 극도의 專制 觀念을 드러낸다. 이와 같이 君權이 가장 높았던 시대에 어느 누구 도 감이 民貴君輕 의 사상을 武帝에게 간하기는 어려웠을 것이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시기에 董仲舒는 표면적으로서는 君權이 天權의 확고한 지지 를 받아 君主가 天權을 빌어 마음먹은 대로 행할 수 있다고 했는데 이것은 雄才大 略의 武帝에게 매우 적합한 것이었다. 이와 같이 하면 君權은 天權을 빌어 얼마든지 확장할 수 있지만, 그러나 실질상 董仲舒의 의도는 君權을 天權 아래 두어 君權을 마음대로 행할 수 없게 할 뿐만 아니라 나아가 天權의 지도와 감독을 받아야 하게

136 했던 것이다. 이러한 天權觀念은 上代의 上帝나 上天 숭배 관념과도 연결된 것이어 서 大帝國의 專制君主로 하여금 쉽게 받아들일 수 있게 했다. 董仲舒는 바로 이 天 權의 至高無上을 주장하였으므로 武帝도 이에는 항거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뿐만 아니라 儒家의 전통적인 天命思想에서는 天은 곧 人心에 下貫하여 人性을 이루어 있으므로 民心이 곧 天心 이라는 결론에 도달하면 民貴君輕의 儒家의 정치 이상은 漢代에 董仲舒의 이러한 기묘한 안배 하에 비로소 君心에 받아들여져 獨尊 儒術, 罷黜百家 로 표현되는 國敎의 지위에 오를 수 있었던 것이다. 孔子와 孟子는 先秦 시기에 儒家를 열어 政治와 倫理와 修身을 논했다. 그러나 이 들의 언론은 매우 강렬했지만 현실 정치에서 효과적으로 실현되지는 못했다. 百家 爭鳴의 學術思想들 속에서 儒家는 유력한 一派였지만 여전히 一派에 지나지 못했 다. 현실 속에서는 오히려 뒤에 일어난 法家에 의해서 제압당하였다. 역사적으로 漢의 武帝에 이르러 전제왕권이 가장 극심할 때 民貴君輕의 儒家 사 상이 國敎의 지위에 오른 것은 董仲舒의 공이다. 董仲舒의 政治學說은 人副天數說 과 災異說을 바탕으로 이루어진 天人感應을 전제로 하고 있으므로 다소 神秘主義의 색채를 띠고 있다. 그래서 후대의 학자들 가운데에는 董仲舒를 大儒이지만 醇儒가 아니다 고 하거나 그의 사상을 迷信的 宗敎思想이라고 비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 나 漢代라는 사회정치적 특수성을 고려했을 때 그의 天人感應說을 바탕으로 한 儒 家의 王道政治 思想으로 國泰民安의 理想社會를 건립하려 한 그의 공적은 그리 쉽 게 폄하하기는 어렵다

137 폭력 없는 학교를 위한 인성 교육의 방향 김 병 권* 1. 학교 폭력의 문제점 요즈음 우리 교육 현실은 입에 담기조차 부끄러울 정도이다. 학생이 학생을 때리 거나 금품을 탈취하고, 심한 경우에는 학생들에게 폭력을 당한 학생이 하나밖에 없 는 소중한 생명을 스스로 포기하기도 한다. 그리고 선생님이 학생을 때리며, 학생이 선생님을 때리고, 학부모가 선생님의 멱살을 잡으며 폭력을 행하기도 한다.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지난 1월 18일부터 2월 20일까지 약 한 달 동안 일차 학 교 폭력 실태를 설문 조사하였다. 조사 대상은 전국 초등학교 4학년부터 고등학교 3학년 학생이었다. 전체 조사 대상 학생 520만명 가운에 136만6799명이 설문에 참여했으며, 회수율은 참여자의 약 25%이었다. 조사 결과 전체 응답자 136만여 명 중 17만명(12.5%)의 학생이 "학교 폭력을 당한 적이 있다", 32만명(23.5%)의 학생 이 "우리 학교에 일진(폭력 서클)이 있다"고 했다. 그리고 이차 학교 폭력 실태를 설문 조사하였다. 한 달 동안 340여만명이 넘는 인원이 참여했고, 이 추세로 보면 전체 대상 학생 520만명 가운데 70%가 넘는 364만명 이상이 설문 조사에 응할 것으로 예상하며, 일차 실태 조사 결과를 바탕으 로 미루어 보면 이번에도 최소 46만명에 달하는 학생이 학교 폭력 피해를 당하였다 고 응답할 것으로 예상한다. 고 말했다. 이 정도이면 학생들의 폭력이 학교 교육과 사회의 질서를 해치는 심각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우리나라는 예로부터 동방예의지국(東方禮義之國)으로서 아름다운 금 수강산(錦繡江山)이었으며, 이웃나라 국민들이 부러워한 나라였다. 그러나 이 시대 에는 우리나라가 예절을 지키는 나라이며 금수강산(錦繡江山)이라고 말하는 사람은 흔하지 않을 것이다. 어쩌면 사람이 사람을 가장 무섭게 여기면서 살얼음 위를 걷듯 이 불안하게 살아야 하는 금수강산(禽獸江山)의 나라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학교 폭력이 일어나는 원인은 무엇일까? 학교 폭력의 발생은 무엇보다도 교육의 목적을 왜곡한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생각 * 부산대 교수

138 한다. 우리나라의 교육의 목적은 홍익인간의 이념 아래 인격 도야, 인간다운 삶 영 위, 그리고 인류 공영의 이상 실현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교육 현실에서 이런 목적 을 실현하기 위한 교육이 실현되고 있지만, 우수한 성적으로 대학 진학이라는 목적 을 간과할 수 없는 것도 현실이다. 다음으로, 대학 진학을 목적으로 한 교육은 공교육에서 사교육으로 이동한 경향 이 있으며, 이에 따라서 홍익인간을 이념으로 한 인격 도야 교육이 소홀해졌음을 지 적하지 않을 수 없다. 마지막으로 우리나라가 근대적 산업화 사회에 진입하면서 대가족제도가 해체되어 공동체 의식을 상실하고, 자녀에 대한 부모의 지나친 사랑도 한 몫을 차지할 것이 다. 가족 공동체 의식 상실과 부모의 지나친 자녀 사랑은 자녀가 개인주의에 몰입하 여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 또는 책임의식을 결여시킨 하나의 원인이 되었다고 진단 할 수 있다. 2. 학교 폭력 발생의 실상 [사례 1] 여교사 얼굴에 주먹 날린 남중생 지난달 경기도 성남의 한 중학교에서 수업 중에 남학생이 여교사의 얼굴을 주 먹으로 때린 사건이 발생한 것으로 22일 밝혀졌다. 학교 측에 따르면 중간고사를 앞둔 지난달 말 7교시 수업에서 여교사 A씨가 손으로 남학생 B군의 머리를 두세 차례 때렸다. 수업에 집중하지 않는다는 이유였던 것으로 알려졌다. 그러자 남학 생이 갑자기 의자에서 일어나 교사의 얼굴을 주먹으로 가격했다. 교사는 충격을 받아 병가를 내고 집에서 쉰 것으로 전해졌다. 이 사건이 발생하자 B군의 부모가 학교에 찾아와 "교사가 먼저 내 아이를 때린 게 잘못된 것이다. 이번 일로 우리 아이에게 작은 불이익이라도 생긴다면 가만있지 않겠다."고 항의했다고 학교 관 계자가 전했다.<조선닷컴, > [사례 2] 수업 중 학생의 교사 폭력 부산의 한 중학교에서 여교사가 수업 중에 남학생에게 폭행을 당한 사실이 뒤 늦게 알려졌다. 7일 부산시교육청 등에 따르면 지난 5일 오전 부산 해운대구 모 중학교 2학년 교실에서 여교사 A(46)씨가 수업 중에 떠드는 이모(14)군에게 "조 용히 하라"고 주의를 줬다. 그러자 이군은 교사 A씨에게 화를 내며 욕설을 퍼부 었다. 이어 이군은 A씨의 뺨을 때리려고 했고, A씨가 이군의 손을 잡으면서 이를

139 막았다. 두 사람은 서로 마주 보며 맞서는 상태가 됐다. 이 같은 상태에서 이군은 발로 A씨의 배를 세 차례 차서 쓰러뜨렸다. 이때 놀란 학급 반장이 즉시 달려 나 와 제지했다. 하지만 이후에도 화를 참지 못한 이군이 걸상을 교사를 향해 집어던 지는 등 행패를 부렸다는 것이다. 교실에는 30여 명의 학생들이 수업을 받고 있 었지만 학생들은 당시 상황이 순식간에 벌어져 놀라서 지켜보기만 한 것으로 알 려졌다. 이군은 사건 직전에 수업에 10분 정도 늦게 들어왔고, 교사 A씨로부터 " 담배 냄새가 난다"는 지적을 받고 수업을 마친 뒤 별도의 조치를 기다리던 상태 였다. 이군은 당시 담배를 피운 사실을 시인했다고 시교육청은 말했다. 학교 측은 선도위원회 회의를 거쳐 현재 이군에게 등교 정지를 통보한 상태라고 말했다. 폭 행을 당한 교사는 정신적 충격과 부상 때문에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다.<동아 닷컴 > 위의 두 사례는 학교 교육의 심각한 문제를 보여준다. 첫째는 교사가 학생에게 어떠한 주의도 주지 말아야 하는가? 교사는 과목의 지 식 교육과 함께 인격을 도야해야 하는 교육을 담당한 주체이다. 학생의 잘못된 행동 을 보고도 그냥 넘어 가야 한다면 오로지 지식만을 전달하는 교육을 강조한 것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둘째는 폭력 현장에 있던 학생들은 지켜보기만 하는 방관자이어야 하는가? 학생 이 교사의 배를 차고 쓰러뜨리며 교사를 향해 걸상을 집어 던지는 데도 반장 이외 의 학생들이 지켜보기만 했다. 이렇게 지켜보기만 학생들은 사례의 기사에서 언급 했듯이 순식간에 벌어진 일에 놀라움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옳고 그름을 따져서 그 릇된 행동을 저지할 수 있는 용기가 없었던 방관자의 행동임에는 틀림없다. 셋째는 학부모의 자녀 사랑이 올바른가? 부모가 머리를 먼저 때린 교사의 잘못 이 먼저이며, 이 일로 인해서 자식에게 작은 불이익이 생긴다면 가만히 있지 않겠 다. 고 한 말은 부모로서의 당연한 판단일 수 있다. 그러나 학생이 교사의 얼굴을 강타하고 학교에서 일어난 일에 대한 부모의 직접적인 개입은 교권을 심각하게 침 해한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두 사례에서 본 학교 폭력은 타자를 배려하는 마음, 자신의 행위를 부끄러워하는 마음,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 교사에 대한 학생과 학부모의 예의 등이 부족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에 해당한다. 그리고 경솔하게 행동한 교사, 폭력을 휘두른 학 생, 그리고 자녀 교육만을 생각한 학부모 모두는 자신의 행위가 어쩔 수 없었다거 나, 우발적이라고 할 것이다. 그렇지만 교사, 학생, 그리고 학부모는 자신의 행위에 대해 부끄러워할 줄 알아야 하며, 반드시 책임을 져야 한다. 그래서 학교 교육에서 인격 도야 교육이 절실하지 않을 수 없다

140 3. 학교 폭력 발생 대응과 문제점 1) 가해 학생에 대한 대응 [사례 1] 피해자 신고와 가해자 처벌 얼마 전 경찰청이 운영하는 학교 폭력 신고전화 117에 신고가 들어왔다. "초등 학교 6학년 아들이 중학생 형들과 어울려 다니면서 나쁜 짓을 하니 말려 달라"는 요청이었다. 수사 지시를 받은 전북 전주 덕진경찰서는 신고 학부모의 아들 A군 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려고 했지만 A군은 대화를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경 찰관이 수시로 아이를 찾아가자 A군은 마침내 속내를 털어놓았다. "나도 형들과 어울리기 싫은데 보복을 당할까 봐 억지로 다니는 거예요. 형들이 '돈 모아오라' 고 핸드폰 문자로 협박해서 1만2000원도 빼앗겼어요. 맞기도 했고요." 피해 학생 은 A군 말고 5명이나 더 있었다. 경찰은 가해자인 중학교 3학년 학생 4명을 불러 조사한 뒤 검찰에 송치했다.<조선닷컴, > [사례 2] 방관자 학생 줄이기 학교 폭력 문제를 해결하려면 '방관자' 학생을 줄이는 것이 급선무라는 지적이 나왔다. 22일 서울 여의도 국회 의원회관에서 열린 학교 폭력 토론회에서 참교육 을 위한 전국학부모회 고유경 학부모상담실장은 "학생들은 노는 아이, 평범한 아 이, 공부만 하는 아이, 찐따(뭔가 부족한 점이 있어서 왕따를 당하는 아이) 등으 로 구분해 서로를 이해하려 하지 않는다."며 "학생들이 친구의 아픔에 공감하지 못하기 때문에 잔인한 행동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일진들의 힘과 질서에 복종하 느라 친구들이 폭행을 당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막아내려고 애쓰지 않고 외면한다 는 것이다. 과거 1970~80년대 교실에서는 학교 폭력이 일어나도 피해 학생을 감싸는 다 수의 의리파 학생들이 있었지만, 지금의 교실은 친구가 폭행을 당하는데도 무관 심으로 일관하는 학생들이 늘어났다. 전문가들은 학교 폭력에 대해 침묵하거나 방관하는 행동도 폭력에 해당한다고 지적한다.<조선닷컴, > [사례 3] 학교 출입증 발급 교육과학기술부는 외부 인사의 학교 출입에 대한 엄격한 가이드라인을 담은 ' 학생 보호 및 학교 안전 개선 계획'을 4일 발표했다. 지난 9월 28일 서울 계성초 등학교에서 발생한 외부인 흉기 난동 사건 등을 계기로 학교 안전 대책을 마련한

141 것이다. 이에 따르면 등 하교 시간을 제외한 학교 일과 중에는 학교 정문을 포함해 건 물의 모든 출입문을 폐쇄하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 또 학부모 등 외부인이 일과 중 학교를 방문할 경우에는 먼저 경비실이나 행정실에 들러 신분증을 내고 출입 증을 받아야 한다. 교과부 윤소영 학교폭력근절과장은 "만약 학생들이 출입증을 달지 않은 외부인 을 발견하면 비상벨 등으로 학교에 신고하도록 하겠다."며 "학교 무단 출입자는 출입증 교부 장소로 넘겨져 절차에 따라 출입증을 받거나 학교 밖으로 쫓겨나게 된다."고 말했다.<조선일보, > 교육과학기술부에서는 관련 기관과 협력하여 학교 폭력을 예방하고 교권을 확보 하기 위하여 법적 또는 제도적 다양한 대책을 마련하고 폭력 학생에 대한 교육과 처벌을 강화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교 폭력과 교권 침해는 근절되지 않기 때문에 최근에는 일반인들의 학교 출입을 엄격히 통제하겠다는 대책도 발표했다. 학부모의 학교 출입 통제가 과연 학교 폭력을 근절시키고 교권을 확보하는 데 어떤 효과를 가져 올 수 있을지 궁급하다. 4. 화해와 교육의 학교 폭력 예방 효과 1) 학교 폭력 신고 센터 운영 [사례 1] 학교 폭력 117센터 운영 교과부가 지난 2월 6일 학교 폭력 대책을 발표한 이후 117 번호로 학교 폭력 을 신고한 건수는 매월 늘어나고 있다. 지난 1월 616건에 불과했던 신고 전화는 지난달 3592건으로 급증했다. 피해자가 직접 신고한 건수의 비율도 1월 27.8%에 서 4월에는 59%까지 올라갔다. 교과부 관계자는 "피해자나 목격자들이 '신고하면 학교 폭력이 해결될 수 있다' 고 믿기 때문에 신고하는 것"이라며 "신고 건수 증가는 매우 긍정적인 신호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하지만 우리나라 학생이 700만명이고 학교 폭력이 만연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신고 건수 3000건은 결코 많다고 할 수 없다. 여전히 학교 폭력 사건이 많이 은폐되고 있다는 것이다

142 [사례 2] 학교 폭력 원스톱 센터 운영, 4,205건 신고 받고 1,821건 해결 김상익(가명, 15)군은 초등학교 6학년 때부터 왕따를 당했다. 가해 학생들은 상 익에게 담배를 사오라 하고, 안 사오면 '죽인다'는 협박까지 했다. 10월 31일 김 군의 어머니 서모(43)씨는 원스톱 센터에 이를 신고했다. "상익이가 불안해 하는 데, 신고했다고 괜히 더 큰 피해를 보는 건 아니겠죠?" 원스톱 센터는 즉시 상익 이의 집에 찾아갔다. 상익이는 처음엔 "보복이 두렵다"며 진술을 꺼렸지만, 스쿨 폴리스의 지속적인 설득에 결국 자신이 괴롭힘을 당한 사실을 털어놓았다. 이날 오후 서울청 수사팀은 수사에 착수해 학교에 이를 통보했고, 가해 학생들과 상익 이를 분리 조사했다. 신고 다음날 가해 학생과 가해 학생의 어머니는 상익이의 집 에 찾아와 사과했다. 4년 동안 신고도 못한 채 고민해 온 학교 폭력을 원스톱 센 터가 2일 만에 해결한 것이다.<조선일보, > 2) 체육 교육의 효과 [사례 1] 부산 양동여중의 틈새 체육 운동이 활발해진 이후 학교 분위기가 확 바뀌었다. 우선 아이들끼리 관계가 좋 아지면서 학교 폭력이 줄었다. 음악 줄넘기 클럽에서 선수로 활동하는 3학년 A양 (16)양이 대표적이다. A양은 왕따를 심하게 당하고 정서가 불안해 여러 번 자살 까지 시도했다. 그런데 줄넘기 선수로 대회에 나가고 친구도 생기면서 자신감도 얻었다. 몸무게도 20Kg이나 빠졌다. 이제는 클럽에서도 다른 친구들을 이끌며 주 도적으로 활동하고 있다.<조선일보, > [사례 2] 서울 중량중학교의 인성을 함께 가르치는 체육 수업시간에 인성을 강조하는 것도 특정이다. 교사는 경기 규칙을 잘 지켜야 한 다는 점, 상대방 선수에게 욕을 하면 안 된다는 점, 상대방 선수나 심판에 대한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점을 지속적으로 가르친다. 중량중 3학년 학생들은 체육 수업이 바뀌자 인성도 바뀌었다. 장난이 심하던 학생은 점잖아졌다. 막말을 하거 나 친구들을 괴롭히던 애들도 자제하는 것이 눈에 띄고, 왕따 학생도 친구들과 가 까워지면서 학교 폭력 예방에도 큰 효과가 있다고 교사들은 전했다. <조선일보, > 두 시례는 학교 폭력의 예방에 법적 제도적 처벌보다 인성 교육이 더 효과적임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는 성적 향상에만 얽매인 교육, 부모의 지나친 사랑에서 벗어나 학생들의 정서를 함양하고 인격을 도야하는 교육의 내용을 체육에만 한정할 것이

143 아니라 모든 과목에서 다양하게 체계적으로 개발해야 할 필요성을 생각도록 한다. 5. 학교 폭력 예방을 위한 고전 읽기 1) 인간의 존엄성 인식 惻隱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羞惡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辭讓之心 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며, 是非之心이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惻隱之心은 仁의 단서요, 羞惡之心은 義의 단서요, 辭讓之心은 禮의 단서요, 是非之心은 智의 단 서이다.(無惻隱之心 非人也 無羞惡之心 非人也 無辭讓之心 非人也 無是非之心 非 人也 惻隱之心 仁之端也 羞惡之心 義之端也 辭讓之心 禮之端也 是非之心 知(智) 之端也)< 孟子, 公孫丑章句 上 > 오직 사람만이 음양오행 가운데 빼어난 기를 받아 가장 靈妙하다. 형체가 생겨 나면 정신이 지각을 일으키게 되니, 다섯 가지 본성이 외물에 감응되어 움직여 선 과 악이 나누어지며 만사가 생겨나게 된다. 성인이 中正仁義로써 마음을 안정시 키고, 또한 고요함을 주로 하여 사람의 표준을 세우셨다. 그러므로 성인은 천지와 그 덕이 합치되고, 일월과 그 밝음이 합치되며, 사계절과 그 차례가 합치되고, 귀 신과 그 길흉이 합치되는 것이다. 군자는 中正仁義를 실현하기 위해 수양하기 때 문에 길하고, 소인은 이것을 거스르기 때문에 흉하다.(惟人也得其秀而最0 形旣生 矣 神發知矣 五性感動 而善惡分 萬事出矣 聖人定之以中正仁義而主靜 立人極焉 故 聖人與天地合其德 日月合其明 四時合其序 鬼神合其吉凶 君子修之 吉 小人悖之 凶)< 聖學十圖, 태극도설 > 2) 고전문학 분석적 읽기 토끼가 크게 웃으면서 말하기를 이 우매한 자라야 오장육부에 속한 간을 어 찌 자유롭게 내었다 넣었다 하겠느냐? 이는 잠시 내가 기특한 꾀로 너의 바다 나라 왕과 신하를 속인 것이다. 또 너의 용왕의 병이 날과 무슨 관계가 있는가? 또 네가 무단히 산중에서 유유자재한 나를 유인하여 너의 공을 나타내려고 하 였으니 내가 수궁에 들어가 놀래던 일을 생각하면 모골이 송연한지라 너를 곧 죽여서 분을 풀 것이로되 네가 나를 업고 만리창파에 왕래하던 수고를 생각하 지 않을 수 없어서 남아 있는 목숨을 살려 보내니 빨리 돌아가서 저 늙은 용에 게 죽고 삶이 유명하니 다시는 부질없이 망령된 생각을 내지 말라고 말하여라. 고 하였다. 또 크게 웃으면서 너의 일국 임금과 신하가 모두 나의 묘한 계략에

144 속으니 나라 일이 허무하다고 하리라. 고 말하였다. 말을 마치고 좁은 길을 통 해서 깊은 소나무 숲으로 들어갔다.<토끼전> 용왕은 병을 고치기 위해 토끼의 간을 먹으려고 결정한다. 이 결정은 왕이 자신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토끼를 희생시키려는 생각이며, 토끼를 측은하게 여기지 인는 마음다. 그래서 용왕은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지 않을 뿐만 아니라 백성에게 덕을 베 풀지 않은 왕을 상징한다. 자라는 용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토끼에게 용궁에 가면 편하게 살 수 있다고 속인다. 자라가 용왕의 병을 치료하기 위해 토끼를 속이는 일은 신하가 백성을 속이 는 일이다. 신하가 백성을 속이는 일은 신하로서 부끄럽게 여기지 않고 미워하지 않 는 행위이다. 그래서 자라는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부끄러움을 모르는 신하를 상징 한다. 토끼는 용궁에 가면 부귀영화를 누릴 수 있다는 자라의 거짓말이 거짓말인 줄 알 지 못하고 속는다. 토끼가 자라에게 속은 일은 노력을 하지 않고 일확천금을 얻으려 하거나 부귀영화를 누리고 싶은 잘못된 욕망을 가졌기 때문이다. 그래서 토끼는 노 력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일확천금과 부귀영화를 사양할 줄 모르는 백성을 상 징한다. 한편 용왕은 토끼의 간을 먹고 병을 고치려는 생각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 고, 토끼의 말이 참이지 거짓인지 모르고 속는다. 자라는 용왕에 대한 충성을 위해 토끼를 속이는 일이 옳은지 그른지를 따지지 않으며, 토기의 말이 참인지 거짓인지 알지 못하고 토끼에게 속는다. 토끼는 노력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일확천금 또 는 부귀영화가 옳은 일인지 그른 일인지를 따지지 않는다. 이런 사실은 자신의 판단 과 행위에 대하여 옳고 그름을 합리적으로 따지지 않은 인물들임을 상징한다. 용왕은 백성을 측은하게 여기는 덕을 베풀지 못한 왕을 상징한다. 남을 측은하게 여기는 마음은 인(仁)의 단서이다. 자라는 자신의 거짓말에 대해 부끄럽게 여기고 미워함을 모르는 신하를 상징한다. 부끄럽게 여기고 미워하는 마음은 의(義)의 단서 이다. 토끼는 노력을 하지 않고 얻을 수 있는 일확천금과 부귀영화를 사양할 줄 모 르는 백성을 상징한다. 사양하는 마음은 예(禮)의 단서이다. 용왕, 자라, 그리고 토 끼는 옳고 그름을 따지지 않는 인물들이다. 옳고 그름을 따지는 마음은 지(智)의 단 서이다. 용왕은 왕의 위치에서 실천해야 할 인(仁)과 지(智)를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자 라는 신하의 위치에서 갖추어야 할 의(義)와 지(智)를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토끼 는 백성의 위치에서 예(禮)와 지(智)를 갖추지 못한 인물이다. 용왕, 자라, 그리고 토끼는 각자의 위치에서 스스로 실천해야 할 덕을 갖추지 못한 인물이기 때문에 신

145 (信)을 잃은 인물이 된다. 인의예지신(仁義禮智信)은 사람이 실천해야 할 도덕적 가 치의 중요한 기준이다. <토끼전>에서 용왕은 왕답지 못한 왕이고 자라는 신하답지 못한 신하이며, 그리 고 토끼는 백성답지 못한 백성이다. 왕답지 못한 왕, 신하답지 못한 신하, 그리고 백성답지 못한 백성은 왕은 왕답게, 신하는 신하답게, 그리고 백성은 백성답게 해 야 한다는 고전의 가르침과 어긋난다. <토끼전>은 왕이 왕답게 덕을 베풀고, 신하 가 신하답게 의리를 지킴으로써 백성이 백성답게 살 수 있기를 기대했던 서민 계층 의 간절한 염원을 표현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현대 물질주의적 사회, 개인주의 사회 에서도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성이 존중되는 사회에서 인간 다운 삶을 영위하기 위해서는 비록 고전이지만 오상(五常)의 내용을 현대사회에 맞 게끔 체계적으로 개발하여 교육할 필요가 있다. 6. 제언 사람이 사람답게 살 권리를 지키면서 학교의 폭력을 예방하기 위하여 각 기관에 서 교육적, 법적, 제도적 보완을 하고 있다. 그렇지만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개인적 인성의 성숙을 지향한 교육이다. 개인의 인성을 성숙하게 하는 교육은 시대를 초월 하여 누구에게나 필요하다. 이런 인성 교육이 절실한 시대에서 퇴계(退溪) 선생의 수양론(修養論)을 생각하게 된다. 퇴계 선생이 제시한 인성 교육의 내용은 성학십도(聖學十圖) 의 심통성정도(心 統性情圖) 에서 찾을 수 있다. 심통성정도 에서 측은지심(惻隱之心), 수오지심(羞 惡之心), 사양지심(辭讓之心), 시비지심(是非之心), 성실지심(誠實之心)을 제시한다. 측은지심(惻隱之心)은 인(仁)의 단서이고, 수오지심(羞惡之心)은 의(義)의 단서이며, 사양지심(辭讓之心)은 예(禮)의 단서이고, 시비지심(是非之心)은 지(智)의 단서이며, 성실지심(誠實之心)은 신(信)의 단서라고 했다. 이러한 인의예지신을 오상(五常)이라 고 하며, 오상은 오직 사람만이 음양오행 가운데 빼어난 기이다. 그리고 군자는 中 正仁義를 실현하기 위해 수양하기 때문에 길하고, 소인은 이것을 거스르기 때문에 흉하다고 하였다. 퇴계 선생의 수양론의 핵심인 경(敬)과 심성(心性)의 중요한 내용인 오상(五常)은 급속도로 변화하는 현대 물질적 사회에서 인간성 회복과 새로운 이상 사회 건설을 지향하는 데 필요한 인성 교육의 근간이 될 것이라고 기대한다

146 <일반강좌> 茶山 丁若鏞 선생의 삶을 고찰 風俗의 社會的 機能 환경친화적인 삶 학교 폭력사태의 원인 고찰과 그 치유책 中國의 이해 (과거와 현재) 건강생활과 營養 자본주의 4.0시대 한국경제의 도전과 과제 萬海의 愛國과 詩心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 全循義(?~?)의 생애와 저술 李舜臣 將軍의 忠國爲民의 정신 임진왜란의 기억과 전승 고려말 禑ㆍ昌王과 廢假立眞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현대 慶尙左水營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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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8 茶山 丁若鏞 선생의 삶을 고찰 李 泰 鍾* 1. 서 론 정약용의 생애는 일반적으로 3단계로 나누어 이야기 한다. 먼저 약용이 22살 때 벼슬길에 오른 후 정조의 총애를 받으며 지내다가 신유사옥(辛酉邪獄, 1801년 천주 교도 박해)으로 강진에 유배되기 전까지 18년(당시 나이 40세), 강진에서 유배생활 하며 외로움 속에서도 목민심서 같은 수많은 책을 저술하며 유배에서 풀려나기까지 18년(그의 나이 58세), 유배에서 벗어나 그의 고향에서 유유자적하며 마지막 생을 보냈던 18년의 생애까지 우연의 일치인지 모르지만 그의 삶에 18이라는 숫자가 자 리 잡고 있다. 2. 정약용 선생의 간이 연보 1752년, 영조 28년(59세)때 이선(사도세자, 장조)과 혜경궁 홍씨 사이에 이산출생 (훗날 정조) 1762년, 영조 38년(69세)때, 윤 5월15일, 사도세자(28세)를 뒤주에 가두어 횡사하 니 윤5월 23일이다. 영조비 정순왕후 김씨와 세자빈 혜경궁 홍씨가 슬퍼하였다, 나경언(형조판서 윤급의 청지기)은 사도세자의 비행을 쓴 종이를 영의정 홍봉한에 게 바쳤고 영조에게 까지 전해졌다. "세자 비행10조문"(궁녀살해, 여승과 풍기문란, 평양미행(微行), 내시들과 모반)고반사건으로 세자를 뒤주에 가두어 죽였다. 영조는 이를 후회하고, 사도(思悼)라 시호하였다. 곧 나경언을 사살하였다. 정조가 즉위하여 장헌세자(莊獻世子)로 추존하였고, 다시 1899년(고종36, 광무 3)에 장조(莊祖)로 추존하였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입궁한 뒤 왕비의 동생 김구주(金龜柱) 등 과 결탁하여 세자와 영조를 이간시켰다고 전한다. 세자빈은 훗날 閑中錄 을 저술. 부자지간의 20년간의 불화의 원인을 파헤쳤다. * 동의과학대 교수

149 1762년, 6월 16일 정약용 출생, 나주정씨 가문으로 팔대옥당(홍문관, 사헌부, 사간 원-높은 학자) 명문가였다. 아버지 정재원(丁載遠, 33세), 어머니 해남 윤씨(윤선도 의 5대 손녀이며 윤두서의 손녀)사이에 경기도 광주군 초부면 마현리(현, 남양주시 조안면 능내리)에서 출생. 형제가 총 5남 5녀이니 4남으로 태어남. 정재원은 생원급제, 훗날 음보로 진주 목사로 가서 별세함(63살) 1768년, 7살, 五言詩 산(山)을 지었다. 작은 산이 큰 산을 가리네 (소산폐대산"小山蔽大山") 가깝고 먼 곳이 같지 않네 (원근지부동"遠近地不同") 1770년, 9살, 어머니 별세(41세), 약용의 마마병 구완에 따른 후유증으로 별세. 1776년, 15살, 관례를 치르고 약용(若鏞)이란 이름을 받음. 2월 22일 무과출신으로 승지를 지낸 풍산 홍씨 홍화보의 딸과 결혼. 3월 5일 영조승하 (보령83살, 재위52년) 각 방면 부흥기 마련한 영주(英主)였음. 3월 10일 정조 등극 보령 25살임. 조선 제22대 임금이다. 어머니는 혜경궁 홍씨. 이때, 정약용의 부친은 호조좌랑(인구와 토지관리소), 가을에는 화순현감으로 임명. 1777년, 16살, 정조1년, 이가환(李家煥)과 자형 이승훈(李承薰)을 쫓아 성호 이익 (李瀷)의 유고를 접함. 아버지를 따라 화순으로 내려가 동거하였다. 1780년, 19세, 아버지가 예천군수로 임명되어 예천에서 지내다 여름에 진주 촉석루 를 유람하고 논개사당에서 시를 남김. 1783년. 22살, 성균관에 입학, 2월 세자책봉 경축 증광감시에서 약전과 함께 초시 에 합격함. 4월에 회시(會試)에 합격, 선정전(宣政殿)에 입각하여 정조와 첫 대면. 1789년, 28살, 1월 7일 대과 장원급제, 3월 규장각(국립도서관) 검열관에 임명, 겨울에 주교(舟橋, 배다리)를 설치하는 공사의 설계를 맡아 공(功)을 남김. 배다리로 정조와 혜경궁 홍씨가 수원능으로 참배, 이를 "정조반차도"를 김홍도가 남 김(참가인원 930명, 말 120필 동원) 1792년, 31살. 5월에 부친별세(진주목사)로 나주 하담 선영에 묻힘. 3년 시묘살이를 하면서 수원성의 규제 지음. 기중기 발명으로 4만냥 절약. 1793년, 32살에 아버지 2년상을 마치고 입궐, 형조참의(법무장관)임명. 1795년, 34살, 7월 26일, 주문모 입국사건 혐의로 충남 청양군의 금정찰방 좌천. 1797년, 36살, 황해도의 곡산부사(谷山 使)에 임명, 겨울에 홍역을 치료하는 마과 회통(麻科會通) 전 12권을 지음. 1800년, 6월 28일, 정조승하. 보령49세, 재위24년으로 정약용 선생의 울분이 컸다. 1801년(신유년), 40살, 순조1년, 1월 10일, 정순대비의 사학(邪學)금지 교서발표와 천주교인 탄핵,

150 3. 유배를 당하다 정조 승하(1800년 6월28일, 보령 49세, 재위 24년)로 정약전, 정약용 형제는 벼슬 을 버리고 고향인 경기도 광주 마재에 은거하였다. 이때 뒷마당에 재실을 지어 당호를 "여유당(與猶堂)"이라고 글을 써서 붙였다. 老子 의 망설이면서, 겨울에 냇물을 건너는 것같이 두려워한다."라는 구절이다. 순조1년(1801년) 1월 19일 책롱사건(冊W事件)이 발생하여 천주교인을 탄압. 2월 9일, 노론은 남인 탄압의 기회를 잡았다. 남인 3거두인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이 표적이었다." 탄핵명분은 천주교이라는 명 분이다. 이날, 의금부 금부도사가 들이닥쳐 형제가 체포 구금되었다. 형조판서 이가환(이승훈의 외삼촌)은 천주교 교주, 이승훈(정약용 친누님의 남편, 중국 천주교 교리답습으로 들어가 자진 영세를 받은 최초의 인물, 이베드로) 현감 벼슬을 지냈으며 천주실의 책을 중국에 가서 구입하고 성물을 들여와 신봉하였음. 정약용은 22살, 성균관 입학하였을 때 천주교리를 접하고 천주실의란 책을 소지한 것을 혐의로 삼았음. 이 세 사람을 조선 邪學의 뿌리라고 지명하여 탄핵하였다. 정약용 선생은 32살 때, 정조 15년 1791년, 전라도 진산에서 벌어진 윤지충, 권상 연이 부모상에서 神主를 태우고 喪5를 하지 않는 것을 보고 천주교를 배척하였다. 그러니 이미 천주교인이 아니었지만 모함은 더 세었다. 순조는 죄인 심문을 위한 국청(鞠聽)을 세우고 심문을 하였다. 순조는 나이 12세이니 분간을 못하였으나 심문을 하면 목숨을 빼앗을 것이라는 것 을 알아 심문을 회피하였다. 실권은 대왕대비 정순왕후(貞純王后) 김씨가 수렴청정 하니 정약용 선생 구명이 어려웠다. "邪學에 대한 일을 지난번 배척한다는 하교를 하였다. 지금 대간(臺諫)의 계사는 진 실로 나의 신념과 어긋난다. 이들을 다스리는 것은 늦출 수 없다. 이들을 금오(金吾, 의금부)에 잡아들이라." -순조실록 1년(1801년) 2월 9일에당일 이가환, 이승훈, 정약용이 체포되고 계사에는 이름없는 정약전도 옥에 갇혔다. 노론 영수들이 국청을 맡았다. 정약용은 죽을 각오를 하였다. 2월 11일 정약종이 체포되었다. 이때 정약종은 집을 출가하여 천주교 본당인 경기 도 광주시 퇴촌면 우산리에 위치한 천진암 성지(우리나라 천주교의 발상지이다.)에 서 천주교 신도회 회장을 맡아 천주교 포교에 헌신하였다. 이곳은 우리나라 천주교회의 창립 주역인 이벽(李檗)이 약 15년간 학업과 수도에 전념하던 독서처(讀書處)이다. 정약종이 "저는 목숨 걸고 천주교를 믿습니다. 비록 만 번 죽더라도 조금도 후회하

151 지 않습니다." 이어서 "둘째 형과 막내가 함께 천주교를 배우려 하지 않아 한스럽 다."고 밝혀 형제는 목숨을 유지하게 된 것이다. 결국 형제는 유배형으로 결정되고 정약종, 이승훈은 효수되었다. 18일만에 목숨을 살려준다는 판결로 2월 27일, 정약용은 형님 정약전과 의금부에 서 풀려나 유배명령이 떨어졌다. 정약용 선생은 40을 갓 넘어 경상도 장기현(長鬐縣, 포항)으로, 형님 정약전은 신지 도(新智島, 완도)로 유배되었다. 유배길에 오르면서 2월 26일에 정약종은 서소문형장에서 효수되었고 아들 철상도 목숨을 빼앗겼다. 세계 첫 천주교 선교사상 최초로 자칭해서 영세를 받은 매형 이승 훈도 함께 효수되었다. 정약용 선생과 정약전은 가족과 숭례문에서 남으로 3리 떨어진 석우촌(石隅村)에서 이별한다. 다산의 석우촌 이별 시 한 말은 남쪽으로 가고 또 한 말은 동쪽으로 가야 하네. 숙부님들 머리엔 백발이 성성하고 큰 형님 두 뺨엔 눈물이 줄을 잇네. 이날 선생의 3살짜리 농장(農莊)을 보니 발길이 떨어지지 않았다. 다음날 2일, 충주 하담(荷潭)에 도착하여 선영에 들러 부친 정재원(鄭載遠)의 무덤 에 절을 하고 통곡하였다. 그 자리에서 아들에게 편지글을 썼다. (두 아들에게 부치다 1801년 3월 2일) 정약용 선생이 장기현에 도착한 것은 3월 9일이다. 장기현은 일찍이 1675년 숙종1년 에 노론 영수 송시열이 유배된 곳인데 이제 남인의 관리가 유배되니 격세지감이다. 새재(鳥嶺)를 넘고 도착하였다. 형님 정약전도 험한 파도를 타고 신지도에 도착하 였다. 유배생활의 어려움을 처절하게 보내는데 그해 가을 황사영 帛書事件에 혐의를 덮어 씌워 다시 의금부로 압송되어 국문을 받았다. 전혀 황사영 사건과는 무관하지만 천주교 사건이라 이번에는 移配명령을 받았다. 그렇게 이배된 유배지가 정약용 선생은 강진땅(18년간)이고, 형님은 흑산도(16년 간)이다. 형님은 解配의 빛을 못보고 목숨을 다했다. 형님은 물고기, 해초, 소나무에서 彼岸의 세계를 보았다. 이복형님 정약현은 "선백씨진사공묘지명"에 쓴 대로 가문을 지키고 제사(祭祀)를 이 었다

152 4. 강진 유배생활 10월, 황사영의 백서사건(1만3천자를 비단에 적음)으로 약전과 함께 다시 투옥 (신 유박해) 정약용 선생은 강진으로 유배되었다. 불안한 나날의 연속이었다. 유배 온 후 강진 읍내 주막에 방 한 칸을 얻은 다산은 석 달 동안 옷도 갈아입지 않은 채 두문분출 하였다. 이를 보다 못한 주막집 할머니 는 기가 죽어 있는 젊은 사람의 모습이 안타까워 한 마디 했다 한다. "아직 젊고 많이 배운 사람이 머땀시 그리 있능교. 재주 썩히지 말고 여그 있는 젊 은 사람들이라도 가르리치면서 살으야지." 할머니의 도움으로 끼니를 해결하고 8년간 강진읍에서 보냈다. 정약용 선생의 형벌은 위리안치가 아니라 관내 이동은 자유로웠으나 감시가 심하 였다. 1808년, 47살, 봄, 만덕사 서쪽 만덕동 귤동리의 茶山草堂으로 옮김(10년 거주) 처사 윤단의 정자, 이곳에 암자를 짓고, 연못, 샘, 차나무 심고 유유자적하시며 서적 천 권을 마련하고 저서에 몰두하면서 제자를 길렀다. 18명의 제자와 거처를 함께하였다. 제자의 능력에 맞는 교육을 시켰으니 현대교육의 효시라고 본다. 논어는 한 마디로 "수기치인의 군자학이다." 즉 학문의 길은 실천에 있다고 가르쳤다. 군사부일체라고 선생을 섬긴 윤종심, 윤종진 형제, 15살의 가장 어린 제자 황상, 영 리한 이학래 등이 있었다. 1813년, 52살, 제자 이강회(李綱會)와 윤동의 도움으로 "논어고금주(論語古今註) 40권 완성. 1814년, 53살, 여름, 맹자요의(孟子要義), 가을 대학공의(大學公義) 3권, 중용자잠 (中庸自箴) 3권, 중용강의보를 완성, 겨울 제자 이학래의 집주(集注)로 대동수경(大 東水經) 2권 완성. 흑산도 유배중인 형 약전은 자산어보를 저술 완성. 1815년, 54살, 봄에 심경밀험(心經密驗)과 소학지언(小學枝言)을 지음. 1816년, 55살, 흑산도 유배중인 형 약전이 세상 떠남,흑산도에 묻힘 (나이 57살). 1818년(순조18년), 57살, 봄에 목민심서 48권 완성. 1818년 8월 그믐날, 解配칙서를 금부도사가 가져왔다. 정약용 선생의 거처를 찾지 못하였다. 너무 오래된 일이라 강진현감도 이름을 몰라 겨우 수소문으로 찾아내어 길을 안내

153 한 곳이 다산초당이다. "정약용 해배요." 동네사람과 제자들이 반산반의 하였다. 정든 다산초당을 떠날 심정 아쉬웠다. 어버이 같이 섬기고 배웠던 스승이 고향 경기도 광주 마재(한강 두물목)로 돌아간다 고 할 때, 제자의 기쁨과 서운함이 겹쳐 다음날 환송회를 하였다. 백련사 草衣 스님과 제자들이 9월 초하루 송별연을 펼치는데 냇가에서 물고기를 잡 아 탕을 만들고 약주를 대접하였다. 그 자리에서 계(契)를 만들기로 하고 계주는 정 약용 선생을 모시고 경사일에 모이게 하였다. 계이름은 "다신계(茶信契)라고 선생이 작명하였다. 소중한 사제인연, 다신계(茶信) 맺고 햇차 따면 천리 밖의 한양에 계신 스승에게 차 를 정성들여 보냈다. 5년 뒤 윤종심, 윤종진 형제 제자가 스승을 찾았다. 얼싸안고 해후 풀고 지난 밀어 나누었다. 그 후손들이 100년간 이어지는 계를 맺었다. 매년 다산기일 만나 스승의 업적을 되새겼다. 5. 解配後의 여생 고향 마현으로 돌아옴. 순조는 정약용을 정승으로 기용하려 하나 서용보가 극구 반대하여 무산되었다. 이때 내각에 들어갔다면 우리 역사는 달라졌다고 본다. 근대개화가 일본보다도 빨 랐을 것이다. 목민지도는 실학에 바탕을 두었기 때문이다. 전제개혁, 산업발달, 과학발달은 뻔하였을 것이다. 1819년, 58살, 여름에, 흠흠심서(欽欽新書, 형벌을 신중히 하라) 완성, 9월 노론 대표인 신작(申綽)과 학술논쟁 벌임. 겨울에 아언각비(雅言覺非) 3권 저술 1821년(순조21년), 60살, 목민심서 완성(백성 다스릴 마음은 많으나 몸이 따르지 못한다.) 목민심서는 총 12편이고 72조목이다. 부임, 율기(律己), 봉공(奉公), 애민 (愛民), 이전(吏典), 호전(戶典), 예전(禮典), 병전(兵典), 형전(刑典), 공전(工典), 진 황(賑荒), 해관(解官) 으로 사회경제에 관하여 기술하였다. "군자는 修身함이 반이고 나머지 반은 牧民이다." 청렴한 선비의 행장은 겨우 이부자리에 속옷, 그리고 고작해야 책 한 수레면 된다. 1822년, 61살, 자신의 묘지명을 2부 지음. 1834년, 73살, 봄에 상서고훈(尙書古訓)과 지원록(知遠錄)을 합본하여 21권 저술,

154 가을에 매씨 서평 저술. 1836년, 75살, 현종2년, 2월 22일 회혼일(결혼 60주년)에 생을 마침. 제자 황상이 운구를 하였다. 4월 1일, 여유당(與猶堂) 뒤편에 묻힘. 1910년, 정2품 정헌대부(正憲大夫) 규장각제학(奎章閣提學)에 추증, 문도공(文度公) 시호받음. 6. 다산 정약용의 가계도 정재원(1729년-1792년 3월)-첫부인 의령 남씨( ) 정약현(1751년생 )-첫 부인은 경주이씨( , 이벽의 누나) 첫딸 정명련(황사영에게 시집)-1795년에 사살 둘째딸은 홍영관에게 시집가고 셋째딸은 홍재영에게 시집갔다. 정약현은 1795년에 진사 병과 34등 급제함, 벼슬에 나가지 않음, 1821년 9월 4일, 역질로 세상 떠남 나이 71세였다. 약용이 묘지명을 지었다. 정재원의 둘째 부인은 해남윤씨. 정재원-해남윤씨소온(尹小溫, ) : 1녀3남, 모두 2살 터울 누나 정씨는 이승훈의 부인이 됨 큰아들 정약전-풍산 김씨 장남 정학초(정약용이 후계로 삼으려했으나 17세에 요절) 1790년, 정조 14년에 문과 장원 급제, 병조좌랑 제수 1801년 신유사옥으로 흑산도유배, 자산어보, 논어난, 자산역간, 송경사의 저술 1816년 6월 중순 우이도에서 별세 순조6년 정약전의 둘째부인 박을녀(흑산도 출신) -아들 학소를 낳음 둘째아들 정약종-유소사(柳召史, 세실리아, ) 큰아들 정철상( -1801) 둘째 아들 정하상( )

155 세째아들 정약용-홍씨 정학연(丁學淵, )은 시인, 종축회통 저술 정학유(丁學游, )은 시인, 농가월령가 지음. 정효정-약용의 수제자인 윤창모(과거급제)와 결혼 정재원-세째 부인 김씨(정약용 보다 10살 위임)는 1남(정약황) 손자는 정유역(丁維驛, ) 외손자 방산 윤정기( )로 서예가였다. '문인화십곡병' '문인화십이곡병' 등 그림들이 눈길을 끌었다. 정약용 선생의 수제자로 알려져 친필 유묵과 집안 고문서 등 50여점이 전남 강진군 청에 기증하였다. 7. 다산 정약용의 제자 다신계(茶信契)에 적힌 제자 명단(모두 18명이다) 윤종문(尹鍾文 1787-?), 종영(鍾英 1792-?) 윤종기(尹鍾箕 )), 종벽(鍾璧 ), 종삼(鍾參 ), 종진(鍾軫 ) 4형제 윤종심(尹鍾心 ), 종두(鍾斗 ) 형제 윤자동(尹慈東 1791-?), 아동(我東) 형제 이덕규(李德圭 1796-?) 이덕운(李德芸 1794-?) 이유회(李維會 ), 이강회(李綱會1789-?) 형제 이기록(李基祿 1780-?), 정수칠(丁修七 1768-?) 정학연(丁學淵, 1783~1859), 정학유(丁學游, 1786~1855) 형제는 다산 정약용의 아들이다. 제자 외 윤창모나 외손자 윤정기(尹廷奇 ), 황상 등이 있으며 스님은 혜장선사, 초의선사, 스님의 제자들이 약용의 학문을 배웠다. 제자일 수 있으나 종교차이인지 제자로 넣지 않았다. 동되었다. 유형원-이익-실학 계승하여 집대성 시킴 정약용과 악연-이기경, 홍낙안, 목만중, 심환지, 서용보 정약용의 친구-이가환, 이승훈, 이기양, 이주신, 윤지눌, 이분들에 의해 다산학이 태

156 다산 정약용의 교육철학 선생의 삶에 관심을 기울인 것이 10년이 되었으니 숱하게 정약용 생애를 풀어 놓 았다. 그래서 정약용 선생 이란 별명까지 얻었다. 언젠가 연구의 결실이 빛을 볼 것이라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꾸준히 답사하고 자료 를 모으고 있으니 기쁨이 넘쳐난다. 선생의 업적은 한자가 생긴 이래 가장 많은 책을 쓴 사람으로 평가하니 무려 500 권의 저서를 남겼다. 교육, 정치, 경제, 사회, 과학, 의학, 종교, 철학, 공학 특히, 시 서화와 논술에 뛰어났다. 그래서 선생을 가리켜 조선의 르네상스를 일으켰다고도 하며, 조선의 아리스토텔레스라고 부른다. 서양의 괴테와 동시대인으로 겨룸. 15세에 천주교리를 접하면서 평생을 박애정신으로 살아야겠다는 다짐이 고통과 모 함으로 얼룩졌지만 좌절하지 않고 절차탁마한 선생의 삶을 본받고 싶다. 정약용 선생의 교육철학은 무엇인지 고찰하려고 한다. 유배지에서 편지글로 자녀교육을 시켰으니 역사상 전무후무한 일로 전해 온다. 더 불어 제자교육, 저술로 통한 교육철학을 살펴보았다. 천주교인으로 몰려서 온 집안이 파산된 뒤에도, 앞길이 끊겨진 자식들에게 편지를 보냈다. 내가 벼슬하여 자식들에게 물려줄 밭뙈기조차 장만하지 못하고 오직 勤 과 儉 두 글자를 정신적 유산으로 남기니 너희들은 야박하다 생각지 말고 항상 생활 속에서 실천하라 는 내용이었다. 선비신분인 자식들에게 과거를 보지 못하지만 품위를 지켜야 되며 직접 몸을 움직 여 나무심고 과일과 채소를 재배하도록 당부하였다. 살면서 헛된 것 바라지 말고 부지런히 노력하여 얻은 결실을 소중히 하라는 뜻이다. 결실은 함부로 낭비하지 말고 아끼고 절약해야 가난도 벗어난다. 사회 곳곳 대박 열풍이 문화적 양상이다. 복권, 사행심 조장 유혹손길, 한탕주의가 부채질한다. 흥청망청, 패가망신의 후일담이 우리들에게 무서운 비수로 다가온다. 물질은 땀과 노력으로 얻을 때 떳떳하고 가치 있다는 것을 정약용 선생은 강조하셨다. 정약용 선생의 가르침을 배우자 글을 읽어야만 사람이 되고 아버지 억울함을 풀어 줄 수 있다 고 설득하는 편지글

157 은 읽을수록 눈물겹다. 과거 볼 기회까지 빼앗긴 자식들이 무슨 희망으로 글공부를 하고 싶겠는가. 그러나 그는 그럴수록 글공부를 해야만 남에게 손가락질을 받지 않으며, 아비가 남긴 글 들을 정리해서 뒷날에 전할 수 있고, 패망한 집안을 다시 일으킬 수 있다 고 격려하 였다. 1802년 2월의 편지글에는 폐족으로서 글을 배우지 않고 예의가 없다면 어찌하겠 느냐? 보통사람보다 백배의 공력을 더해야 겨우 사람 축에 들 것이다. 학문을 하지 않고 예의마저 없으면 새나 짐승과 다를 게 있겠느냐? 나는 아주 고생이 많으나 자 식들이 책을 읽고 몸가짐을 잘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근심이 없어진다. 학연이가 4월 에 올 때는 말을 사서 타고 오라 고 적었다. 1802년 12월의 편지글이다. 폐족의 처지를 잘 알고 대처한다 함은 오직 독서 한 가지뿐이다. 독서야말로 인간의 으뜸가는 깨끗한 일이다. 15살이 되어서야 서울에 올라와 유학하였지만 방황하느라고 터득한 것이 없었다. 20살부터야 비로소 과거 공부에 전념하였고 성균관에 들어간 뒤부터는 학문에 전념하였다. 뒤이어 규장각에 예속되었는데 하찮은 문장학에 10년 가까이 머리를 썩였다. 그 뒤에 교서관의 일 때문에 분주하였다. 곡산에 부임해서는 백성들 다스리는 일에 온 정력을 기울였다 가 37살에는 형조참의가 되어 서울로 돌아와서는 신현조와 민명혁에게서 천주교와 관련하여 탄핵을 받았다. 그리고 그 이듬해에는 조선 정조임금이 6월에 승하하여 시골로 내려왔고 분주히 시골과 서울로 오르고 내리다가 40세 되는 해의 봄에 화를 당했으니 하루도 독서에 전념할 수가 없었다. 독서의 바탕은 효도이다. 다산초당으로 옮겨서는 활약이 두드러졌다. 아침 일찍 일어나 독서로 하루를 시작 하였다. 선생은 18년의 유배생활 중 다산 초당에서 11년을 보내면서 자식을 그리는 마음으 로 강진 고을의 학동을 제자로 삼아 학문을 가르치고 저술로 지냈다. 초당에서는 아침나절의 강의가 끝나면 열심히 외우고 익히고 쓰기에 열중하면서 하 루에도 몇 차례의 토론이 벌어졌다. 정조의 은총이 컸지만 34세때 제수 받은 동부승지(정3품)로 왕명을 출납하는 자리 를 받은 것이 공식적으로 그가 정조 밑에서 지낸 최고의 벼슬이었다. 끝내 그 이상 올라가지 못하고 좌절하였으니 안타까움만 남는다. 선생이 해배되는 결정이 났다. 1818년 8월 30일이었다. 제자들은 스승을 둘러쌌다. 해배를 기뻐하며 인사를 올렸다. 그리고 계칙을 만들었 다. 다신계(茶信契)를 결성하였다. 약용 생전에는 장남인 학연에게 보냈고 사후에도

158 이어져 100년후인 1920년까지도 계속되었다. 10년 동안 입은 은공을 대를 내려가 면서 10배로 갚은 것이다. 사제지간, 사제지정의 돈독함을 느낄 수 있었다. 무릇 교 육이란 훗날에도 연이 이어져야 함을 교훈으로 남겼다. 드디어 환송식 날을 잡았다. 만덕산 정상에서 갖기로 하고 준비하였다. 이학래는 18년 동안이나 약용의 가르침을 받았고 30세가 되었다. 하루 종일 잔치를 열고 늦 게야 하산하였다. 소가 끄는 수레에 책을 가득 싣고 마현으로 길을 재촉하였다. 정약용의 대표작 목민심서 (1813년부터 1821년 완고)는 교육철학에 잘 나타나 있다. 선생은 74세인 헌종 2년(조선 23대)1836년 2월 22일에 파란만장한 긴 생애를 마 치고 눈을 감았다. 양주군 와부면 능내리 여유당 뒷동산에 묻혔다. 사후 50년이 지나 고종은 그의 저작집인 여유당전서를 베껴 보존하게 하였다. 순종 은 1910년 7월 18일 정2품 증헌대부 규장각 제학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도공이라 하였다

159 풍속의 사회적 기능 鄭 尙 圤* Ⅰ. 서언 동물은 본능만으로 살지만, 사람은 문화적 행위를 하면서 산다. 그 문화적 행위 중 중요한 것이 의식(儀式, 儀5)이다. 사람은 평생 두 가지 의식의 궤적을 밟으면 서 살아간다. 하나는 매년 반복적으로 행하는 세시풍속[年中行事]이요, 다른 하나는 일생에 대개 한 번씩 거치는 관혼상제[通過儀5,Rite of passage]다. 이런 것을 풍 속이라고 한다. 유리니사금조(儒理尼師今條) 5년, 이 해에 민속이 환강하여 처음으 로 도솔가를 지었으니 이것이 가악의 시초다. (是年 民俗歡康 始製 兜率歌 此歌樂之 始也, 三國史記, 券1, 新羅本紀 1)라고 하였다. 이 경우 민속은 백성들의 풍속, 즉 의례가 있는 사회적 관습을 중심으로 한 삶의 양상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는 세시풍속 중에서는 추석, 관혼상제 중에서는 혼례와 제례를 간략히 살 펴보고, 풍속의 사회적 기능과 어른신의 역할을 말씀드리겠다. Ⅱ. 이중의 생활력(生活曆) 세상이 하루가 다르게 변하고 있다. 따라서 세시풍습도 계속 변하고 있다. 세시풍 습이란 계절과 생산력(生産曆)과 그에 따르는 의례(儀5)가 중심인데, 생산력도 그 전과 달라졌다. 벼의 재배 방법을 비닐하우스 못자리로 하면서 그 경작 시기가 한 20일 앞당겨져서 음력을 기준으로 따져도 시기가 맞지 않는다. 우리는 오늘날 양력을 기준으로 생활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의 생활력(生活曆)은 양력이다. 그런데 이 양력이 식민지시대에 일본인의 강요에 의하여 시작된 것으로 잘 못 알고 있는 이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우리도 세계적인 추세에 따라 이미 1895년(고종 32년)에 스스로 태양력을 채택하였다. 한일합방만 없었더라면 우리도 음력의 세시풍습이 자연스럽게 양력으로 옮겨지면서 양력설을 지냈을 것이다. 그러 나 곧 이 땅이 일제의 식민지가 되어 일본인이 쇠는 양력설을 강요하고 우리의 고 유한 문화와 풍습을 말살하려고 하니, 일반 민중까지도 이에 대한 반감으로 양력설 은 왜설 이고, 우리 설날은 음력설이라 고집하게 되었던 것이다. 해방 이후에 우리 는 양력을 기준으로 생활하면서 여전히 가정의 설 명절은 음력 정월 초하루고, 양력 * 동아대 명예교수

160 1월 1일은 관청이나 학교에서 일년의 시작을 기념하는 날이라는 인식을 버리지 못 하였다. 그래서 이중과세를 하지 말고 양력설을 쇠라고 정부와 언론기관에서 아무 리 계몽을 하여도 85% 이상의 가정에서 음력설을 쇠었다. 정부에서 이런 현실을 인정하여 음력 설날을 공휴일로 지정하게 된 것이다. 지금 우리는 대부분 생활은 양력으로 하면서 아직 차례와 기제사 등 제의와 관련 된 것은 음력을 기준으로 하고 있다. 그리고 혼인의 택일이나 사주를 본다든지 굿을 하든지 하는 전통적인 종교 행사는 여전히 음력이 기준이 되고 있다. Ⅲ. 추석은 천신제(薦新祭) 조선조에는 설, 한식, 단오, 추석을 4대 명절이라 했다. 4대 명절이라고 한 것은 크게 쇠기 때문이 아니라 중히 여기는 풍속인 성묘를 지내기 때문이었다. 일제 식민 지 강점기에 우리 전통문화말살정책으로 음력 명절을 금하였다. 특히, 1940년부터 제2차 세계대전으로 모든 국민을 전시동원체제로 몰아 부칠 때에 우리의 모든 전통 적인 세시풍속을 행하지 못하게 하였다. 그리하는 와중에도 우리 민초들은 설과 추 석 전날 밤중에 부엌문을 잠그고 제물을 장만하고 다음날 아침 일찍 일본 관헌이 오기 전에 차례를 지내었다. 아쉽게도 우리 양대 명절의 하나인 추석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잘 못 알고 있는 경우가 많다. 그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추석은 추수감사절이다. 둘째, 추석은 삼국 사기에 기록된 것처럼 궁중의 길쌈내기에서 유래하였다. 셋째, 옛날 추석은 즐거운 민속놀이를 많이 행하였다. 이런 언급은 추석 전후에 대중매체를 통하여 정설인 양 확산되면서 추석의 본질을 왜곡시키고 있다. 가을이 되면 어떤 농경민족이든 수확기에 축제를 벌인다. 추석은 분명 가을 수확 기의 농경의례다. 그러나 추수감사절이 아니다. 추수감사절은 추수를 하고 사람이 배불리 먹은 후 신께 감사함을 표하는 제의다. 우리나라 풍속으로는, 상달고사[上月 告祀]를 음력 10월 말날[午日] 혹은 길일을 택하여 집안의 신들께 고사를 올리는 데, 이것이 추수감사절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경상도에서는 이것을 도신(禱神) 이라고 한다. 목축을 위주로 하면서 초여름 밀을 수확하는 서구에서는 추수감사제가 성대하지 않다. 독일에서는 포도, 감자, 밀, 맥주 호프 등 특산품이 생산되는 각 지역에서 여 름부터 가을까지 한 해 농사에 감사의 뜻을 표시하는 수확감사절을 동네축제 형식 으로 연다. 미국의 추수감사절(Thanksgiving Day)은 감격스러운 역사적 유래로 큰 명절로 친다. 메이플라워(May flower)호를 타고 신대륙으로 건너간 청교도들이 개 척지에서 갖은 고생을 극복하고 한 해 농사를 수확한 후 새 땅에서의 첫 결실을 하 느님께 감사하여 드린 기념 예배에서 유래되어 11월 마지막 목요일에 지낸다

161 과거 동양 삼국에는 추수기인 음력 8월에 풍요를 상징하는 보름달이 뜨는 15일 을 명절로 크게 쇠었다. 그러나 중국의 중추절(仲秋節)은 정식 공휴일이 아니어서 설날인 춘절(春節)만 못하다. 둥근 달처럼 원만하게 가족의 단결과 화목을 도모하는 명절이라고 하여 단원절(團圓節)이라 부르기도 하고, 월병(月餠) 같은 간단한 선물 을 주고받는 정도로 축소되었다. 일본의 오봉(お盆)은 음력 7월 15일에 지내던 것 이 양력 8월 15일로 정착되었다. 이날 조상의 영혼을 집으로 맞아들여 제를 지내고 선산에 성묘를 하는 것은 우리 추석 풍습과 비슷하다. 그러나 조상숭배를 하는 불 교적인 풍습이 주로 행해지고 추수기 농경의례로서의 성격이 약화되었다. 유독 우리 민족만이 아직 음력 8월 15일을 수확기 농경의례로 크게 지낸다. 농사 지은 사람들이 결실을 먹는 기쁨을 누리기에 앞서 풍요함을 상징하는 둥근 달이 뜨 는 음력 팔월 보름을 기하여 경건한 마음으로 그 해 생산한 첫물의 곡식과 과일을 신께 올리는 제를 먼저 지낸다. 이 제의는 추수 후 배불리 먹은 뒤에 올리는 추수감 사제가 아니고, 새로 수확한 것을 사람이 입에 대기 전에 신께 먼저 올리는 경건한 제의이므로 천신제(薦新祭)라고 해야 한다. 미국에서 추수감사절을 성대히 쇠는 것 을 보고 성급히 우리 추석도 같은 것이라고 하는 것은 신식 사대주의적 발상이다. 우리 민족은 여름에 오이가 나면 오이 천신제를 지내고, 겨울에 첫 대구국을 끓 이면 신께 천신을 하고 먹는 풍습을 지켰다. 그래서 너 OO을 먹어 봤냐? 라고 물 었을 때에 아직 맛보지 못했을 때에 천신도 못했다. 라고 대답하는 말이 생겼다. 삼국사기 권1 신라본기 1 유리이사금조 9년에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왕이 이미 육부를 정한 뒤에 이를 두 패로 나누고 왕녀 두 사람으로 하여금 각 각 부내의 여자들을 거느리고 붕당을 만들게 하여 칠월 16일부터 날마다 대부의 뜰 에 일찍 모여 길쌈을 하는데, 밤늦게야 일을 파하고 팔월 십오일에 이르러 그 공의 다소를 살피어 진편에서 술과 음식을 마련하고 이긴 편에 사례를 하고 이에 가무와 온갖 놀이를 하였는데, 가배(嘉俳)라 일컬었다. (王旣定六部, 中分爲二, 使王女二人 各率部內女子, 分朋造黨, 自秋七月旣望, 每日早集大部之庭, 績麻乙夜而罷, 至八月十 五日, 考其功之多小,負者置酒食, 以謝勝者, 於是, 歌舞百戱皆作, 謂之嘉俳.) 풍습은 지도자가 행하자 하여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민중들이 살아가면서 절로 형성하는 것이다. 그런데, 한국의 식자들은 유래설만 들먹이면 꼭 고문헌을 인용하 려고 한다. 추석도 이 문헌을 인용하여 정확히 유리왕 때에 시작하였다고 하는데, 실은 고대 농경사회부터 지내온 천신제(薦神祭)로 가배가 있어 왕이 두레 길쌈을 장려하기 위하여 궁중에서 시합을 시켰다가 이미 있었던 이 명절날에 승부를 가리 고 잔치를 벌였던 것이다. 이것은 농민의 풍속이 궁중의 의례로 상승된 것을 기록 한 것이라 보아야 한다. 세시풍습 책에 보면 20가지 이상의 추석놀이가 기록되어 있어 굉장히 많이 논 것

162 같다. 그러나 그것은 전국적인 것을 모은 것이고, 한 마을에서 놀던 것은 몇 가지 되지 않는다. 추석날은 7월 보름 백중쯤부터 추석 직전까지 벌초를 한 선산에 올라 가서 성묘를 하기 때문에 오후 늦게라야 동네 사람들이 모여 놀 수 있다. 풍물이야 어느 놀이나 반주를 하므로 울리고 나서지만 소놀이 혹은 거북놀이는 중부지방에서만 놀고, 씨름대회와 소싸움은 읍내에서 개최되는 것이다. 그리고 남해 안 일대에는 돌팔매로 과녁을 맞치는 석사대회도 읍내에서 열리기도 한다. 달이 뜨 면 부녀자들이 달맞이도 하고 호남도서지역에서는 강강술래를 논다. 안동지방에서 는 놋다리밟기를 논다. 봉사놀이, 닭잡기놀이, 수건돌리기 등을 하고 놀던 아이들이 달이 뜨면 고사리꺾기, 꼬리따기, 남생이놀이 따위를 하며 신나게 논다. 추석 사흘 쉬는 집의 나락에 싹이 난다. 고 하듯이 추석은 부지깽이도 덤벙인 다. 는 바쁜 추수 직전이라 농촌에서는 하루 혹은 이틀밖에 쉬지 않는다. 그래서 민 속놀이도 거창하게 많이 놀지를 아니 하였다. Ⅳ. 전통 혼례와 가정의례 준칙의 혼례 우리나라에서 지내는 관혼상제는 일반적으로 유교식이다. 주희(朱熹)의 가례(家 5) 가 고려 말에 들어와서 정몽주의 건의에 의하여 지배계층에 적극 권장하였으나 여전히 무속과 불교식 의식이 행해졌다. 조선조 초기에 지배계층은 이 가례를 행했 으나 백성들에게는 1632년 신식(申湜)의 가례언해(家5諺解) 가 발간되어 비로소 보급되기 시작하였다. 조선조 중엽에 예학(禮學)이 발달하여 200여권의 책이 발간 되었다. 이 중 18세기 이재(李縡 1680~1746)의 사례편람(四5便覽) 이 가장 널리 알려졌다. 오늘날까지 이것을 준거로 흔히 관혼상제를 행하고 있다. 그러나 이런 서책은 큰 틀만 제시하고, 구체적으로 어떤 물건을 어떻게 놓으라는 언급이 없다. 대개 주자가례에 어긋나지 않는 범위 안에서 각 문중마다 나름대로의 규정을 세워 지켜왔다. 그래서 집안마다 제상을 차리는 법도 조금씩 다르게 되었다. 그야말로 가가례(家家5)다. 혼례도 기본 절차는 사례편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중국과 다르게 신랑은 사모관 대, 신부는 활옷을 입히는 등 토착화되었다. 우리 전통 혼례는 의혼(議婚), 납채(納 采), 납폐(納幣), 친영(親迎)의 4 과정을 거친다. 의혼은 중매를 통하여 양가가 혼인 을 의논하는 과정이다. 납채는 신랑집에서 청혼서라는 편지와 신랑의 사주(四柱)를 적은 글을 신부집으로 보내는 과정이다. 납폐는 신랑집에서 예장지라는 편지와 비 단 옷감을 신부집으로 보내는 과정인데, 이것을 함에 지고 간다고 하여 함 보낸다. 고 한다. 친영은 중심 혼인의식과정이다. 신부집 마당에서 대례를 올리고 신랑집으 로 가는 우귀을 하는데, 3년 혹은 1년을 지나고 가는 해묵이가 보통이었다. 그러나 근대에 들어 3일만에 신행을 하는 삼일우귀(三日于歸) 혹은 바로 그날 돌아가는 당

163 일우귀로 변하였다. 신행하고 시부모에게 폐백이라는 헌구례를 올리고, 신부집에 재 행했을 때에 신랑다루기인 동상례를 한다. 신부집 마당에서 올리는 혼인 의식은 전안례(奠雁5), 상배례(相拜5), 합근례(合 巹5)의 절차에 따라 진행된다. 전안례는 신랑이 나무기러기를 두고 절을 하면서 평 생 동안 부인만 사랑하겠다는 맹세를 하는 절차다. 상배례는 혼례의 중심행사로 신 랑 신부가 서로 절을 하는 의식이다. 이때에 남자는 홀수, 여자는 짝수를 상징하므 로 신부는 한번, 신랑은 두 번 절을 한다. 합근례는 원래 하나였던 표주박을 나누어 만든 바가지로 신랑신부가 술을 마시며 사랑의 술잔을 나누며 맹세를 하는 절차다. 1973년 5월 17일 가정의례의 허례허식을 일소하고, 의식절차를 합리화함으로써 낭비를 억제할 목적으로 대통령령 제6680호로 가정의례준칙 이 처음 제정되었 다. 이후 몇 차례 개정되었으나, 1999년에 건전가정의례의 정착 및 지원에 관한 법률 이 제정됨에 따라 기존의 가정의례준칙 은 폐지되고, 건전가정의례준칙 이 새로 제정되었고, 2008년 전면 개정되어 시행되고 있다. 가정의례준칙 중에서 혼례는 가정에서 행하지 아니하고 결혼식장에서 행하므로 관의 규제를 받기 때문에 비교적 잘 지켜지고 있다. 1)개식 2)신랑입장 3) 신부입장 4) 신랑신부 맞절 5) 신랑신부서약 6) 성혼선언 8) 주례사 9) 신랑신부인사 10) 행 진 순으로 간략하게 진행된다. 전통혼례와 지금 일반적으로 행하는 신식혼례를 비교해 보면 의혼, 납채, 납폐는 어느 정도 전승되고 있다고 보인다. 납채에서 혼서나 사성 등이 생략되는 경우가 많 아지고, 납폐의 허례허식은 상업주의의 부추김에 따라 과도해지는 경향이 있다. 드 러난 공식 행사인 친영 부분이 변했음을 알 수 있다. 혼인의식의 장소가 신부집에서 예식장으로 변하고 함잽이를 그대로 보내고 헌구례가 당일 폐백으로 변하였다. 동 상례는 댕기풀이 혹은 넥타이풀이로 전승되었다. 전에 없던 약혼식과 신혼여행이 첨가되었다. 어느 민족이나 혼인은 신성한 것으로 여겨 그 의식도 축복하는 분위기 에서도 엄숙하게 지내기 위하여 전통적인 혼례를 치르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우리 신식혼례라는 것이 옛날에도 없었고, 세계 어디에도 없고, 어느 종교의식도 아닌 것 이 문제다. 정부에서 강제로 규제하는 틀에 따라 행하기 때문에 전통성이나 신성성 이 없다. Ⅴ. 제례와 제물은 상징체계 배우지 못한 집안에서는 기제(忌祭)때에 제수를 준비하여도 지방(紙榜)을 쓸 일이 난감하다. 과거에도 식자가 없는 집에서는 남의 손을 빌려서 지방을 썼다. 위대한 분의 사당에는 영정을 그려서 모신다. 옛날에 사진이 없어서 대신 신위를 쓴 것이 다. 오늘날은 가정의례준칙(家庭儀5準則)대로 돌아가신 분의 사진이 있으면 모시고

164 제사를 지내면 된다. 지방도 한글로 아버님 신위, 어머니 신위 라고 써도 무방하 다. 단, 지방은 위는 둥글게 오리고 밑은 직선으로 잘라내어야 할 것이다. 하늘은 둥글고, 땅은 평평하다(天圓地方)는 과거의 우주관을 뜻하기 때문이다. 제사는 살아 있을 때처럼 모시는 것이 원칙이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가 없다. 예 에 어긋나지 않고 정성껏 모시면 된다. 제상을 보자. 살아 계실 때처럼 신위 앞에 메(밥)와 탕(국), 그리고 시접(수저)이 놓이고, 떡을 조금 물러 오른쪽에 차린다. 다 음 줄은 맛이 있는, 쇠고기로 육적, 두부로 소적, 생선으로 어적을 만들어 올린다. 이것은 산적이라고 하여 소고기와 어패류를 간장에 졸여 만들고, 소적은 생략하기 도 한다. 생선을 약간 말려서 찐 것을 따로 차린다. 이 줄 왼쪽에 면을 놓기도 하고 안 놓기도 한다. 그 다음 전을 구워 육전, 소전, 어전을 놓는다. 이 두 줄을 하나로 합하여 간략화하기도 한다. 그 다음 육탕, 소탕, 어탕을 놓는데, 근년에는 하나씩 따 로 끓이기가 번거로우니 탕국이라고 하여 소고기, 두부, 마른 오징어 등을 네모 반 듯하게 썰어 함께 넣어 국을 끓이기도 한다. 여기에 새우, 곤약, 다시마 등을 넣기 도 한다. 이럴 때에도 육탕, 소탕 어탕을 놓는 전통을 이어 삼탕을 반듯이 놓는다. 돌아가신 조상이지만 고기 종류만 드시면 영양불균형이 초래할 것이니 다음 줄에는 채소나물 반찬을 놓는다. 이 줄에 간장과 침채(동치미)를 놓는다. 절대 붉은 고춧가 루가 들어간 김치는 쓰지 않는다. 붉은 색과 심한 냄새는 귀신을 쫓는 것이기 때문 에 다른 제사 음식에도 고춧가루, 마늘을 쓰지 않는다. 이 줄에 술안주도 하고 입가 심을 하시라고 좌포우혜(左脯右醯)라고 왼쪽에 어포를 오른쪽에 식혜를 놓는다. 이 원칙은 다른 줄에 소고기 종류가 왼쪽, 생선 종류가 오른쪽에 놓이는 것처럼 왼쪽을 우위로 생각하는 사고에서 나온 것이다. 식사를 마치고 나면 후식 차례다. 그래서 가장 마지막 줄에 과일과 한과를 차린 다. 왼쪽부터 조율이시(棗栗梨柿)의 순으로 놓는다. 대추는 씨가 하나로 임금을 상 징하고, 밤은 세 톨로 삼정승, 배는 씨가 여덟 개로 팔도관찰사, 감은 씨가 여섯으 로 육방관속을 뜻한다고 한다. 조율시이로 놓아야 한다고 주장하기도 하지만 홍동 백서(紅東白西)의 원칙에 어긋나서 따르지 않기도 한다. 그 줄 오른 쪽에 한과를 차 린다. 제사상을 차리는 것이나 제사를 지내는 것은 상징 행위다. 그래서 시대의 변화에 따라서 간소하게 지내더라도 상징체계를 허물지 않고 정성껏 모시면 되는 것이다. Ⅵ. 풍속의 사회적 기능과 어른신의 역할 풍속의 사회적 기능으로 다음과 같은 것을 들 수 있다. 첫째, 한 사회의 전통 생활문화를 전승한다. 특히 미풍양속을 전승하고, 많은 생 활문화를 온전히 전하는 역할을 한다

165 둘째, 풍속은 만남의 기능이 강하다. 차례와 기제사를 통하여 조상과 만나고, 따 라서 부모형제를 만다. 그리고 고향 친척, 친구들도 만난다. 제를 지내고 음복(飮福) 를 하는 범위가 진정한 가족이라고 한다. 셋째, 따라서 가족 구성원을 결속시키는 역할을 한다. 넷째, 사회구성원을 통합하는 기능을 한다. 다섯째, 밋밋하고 변화가 없는 일상에 변화를 주어 주기가 있는 생활을 하게 한 다. 엄숙한 의식도 일상의 삶과 다른 것이지만, 의식 이후에 행하는 축제의 즐거움 은 사람들에게 재충전의 기회를 준다. 여섯째, 근본 회귀에의 기능을 한다. 사람은 자기가 태어난 모태(母胎)에 가장 안정감을 느낀다. 그래서 고향이 그립고, 어머니의 품, 가족의 울타리 속에 안온 한 느낌을 받는다. 풍속은 이런 근본에로 돌아감의 기회로 정서적 안정을 얻게 되는 장치다. 이런 중요한 사회적 기능을 하는 전통사회의 풍속이 변화 혹은 인멸되어 가고 있 다. 세시풍속 명절 중에서 설날과 추석이 공휴일이 되어 겨우 지내고 있다. 정월 대보름의 풍속이 일부 유지되고 있다. 관혼상제 중에서는 제례를 제외하고는 거의 없어진 상태다. 아주 간혹 전통혼례가 행해지기도 한다. 풍속은 공동체에서 정신적으로 풍요롭고 건강한 삶을 살기 위하여 필요한 문화유산이다. 노년층이 청소년층보다 잘 알고 행 할 수 있는 것은 전통적 풍속이다. 개혁, 변혁, 새것만이 한 사회를 발전시킬 수 없 다. 질주하는 사회는 중심을 잃고 넘어지게 마련이다. 전통, 전승, 묵은 것과 조화를 이루면서 나아가야 제대로 발전할 수 있다. 여러분이 전통적 풍속을 지키고 후대에 잘 가르쳐야 존경을 받을 수 있고 우리 사회가 건전하게 발전하게 된다

166 환경친화적인 삶 박 청 길* 1. 환경과학의 개념 환경(Environment)이란 우리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모든 사물과 현상을 말한다. 이중 자연환경은 지구상의 대기, 물, 흙과 암석 그리고 그 속에 살고 있는 인간을 포함한 생물을 말한다. 환경과학(Environmental Science)이란 자연환경의 현상을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넓은 의미에서의 환경과학은 새로운 학문분야가 아니고 환 경을 구성하는 요소별로 대기과학, 하천학, 호소학, 해양학, 지질학, 토양학 그리고 생태학 등 각 분야별로 오래전부터 발전되어 온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좁은 의미에서의 환경과학은 모든 환경의 자연적인 현상을 연구하는 것이 아니고 인간활동에 의해 일어나는 환경오염현상(Environmental Pollution)을 중점 적으로 연구하는 학문분야이다. 그래서 1960년대 이후 환경오염현상이 세계 각처에서 심각하게 대두된 이후 발 전하게 된 새로운 학문분야라고 할 수 있다. 2. 환경오염 환경오염이란 인간활동에 의하여 환경내에 물질과 에너지가 들어와서 환경의 질 적 변화를 일으켜서 이러한 변화의 결과가 인간을 포함한 생물에게 유해한 영향을 주는 현상을 말한다. 이때 유해한 영향을 일으키는 물질을 환경오염물질(Environmental Pollutants)이 라고 한다. 단순히 환경에 어떤 물질과 에너지가 부가되어 환경의 질적변화가 일어난 것만 가지고 환경이 오염되었다고 하지 않고, 환경의 질적변화의 결과가 본래 그 환경을 이용하던 인간을 포함한 생물에게 유해한 영향을 주었을 때 비로소 환경이 오염되 었다고 한다. 그래서 환경오염은 인간을 포함한 생물에 미치는 영향이 기준이 되기 때문에 환 * 부경대 명예교수

167 경과학은 환경과 생물과의 관계를 연구하는 생태학의 한 분야라고 할 수 있다. 환경 오염을 세분하면 환경을 구성하는 분야별로 수질오염, 대기오염, 토양오염 등으로 나눌 수 있다. 3. 환경용량 환경용량(環境容量)이란 생태학자 Odum(1971)의 정의에 의하면 환경오염이 일 어나지 않은 상태에서 어떤 환경이 부양할 수 있는 어떤 생물종의 최대 개체수라고 하였다. 생물의 입장에서 보면 어떤 개체수의 생물을 부양하는 데는 오염되지 않은 환경 과 적당량의 먹이생산능력이 뒷받침되어야 한다. 환경의 입장에서 보면 일정한 환경내에 생물의 개체수가 증가하면 생물의 배설물 의 증가로 오염부하량이 증가해서 생물이 살기에 적당한 환경상태를 유지할 수가 없다. 그래서 환경의 입장에서 본 환경용량이란 어떤 환경이 생태계에 악영향을 주 지 않는 상태에서 수용할 수 있는 최대 오염부하량이라고 정의한다. 즉 환경이 감당 해 낼 수 있는 오염부하량의 한계이고 환경의 자정능력 한계라고 할 수 있다. 모든 환경은 환경오염물질을 받아들일 수 있는 한계가 있고 그 속에서 생물을 부 양할 수 있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우리나라 남해안 거제만은 물이 맑고 깨끗해서 굴 양식장으로 유명한 해역이다. 처음 이곳에 굴양식을 시작할 때 새끼굴을 부착시킨 굴 껍질을 줄에 매달아 양식하 는 수하식 양식시설 대수를 1000대 설치하여 1년간 양식한 결과 600톤의 굴을 생 산할 수 있었다. 시설대당 굴 생산량은 0.6톤/대 이었다. 다음해에는 어민들이 시설대수를 1500대로 늘려서 양식을 해보았더니 900톤의 굴을 생산할 수 있었다. 그래서 증산된 굴을 팔아서 재미를 본 어민들이 다음해에는 시설대수를 2000대로 늘려서 양식을 하게 되었다. 그런데 굴 양식장에는 이상한 일 이 일어나게 되었다. 수확철이 되어도 굴의 성장률이 저조해서 굴 속살이 차지 않은 채 껍질만 남았고 굴들이 배설한 배설물들이 조류소통이 좋지 않아 양식장 밑바닥 에 쌓여 수질오염현상까지 나타난 것이다. 그해 굴 생산량은 600톤도 채 되지 않았으며 그나마 알굴 크기가 너무 작아 상품 가치도 떨어져서 추가로 시설한 시설비도 건져내지 못하고 손해를 보게 되었다. 결국 거제만의 환경용량은 900톤이고 이를 굴의 개체수로 환산하면 5g/마리를 적용해서 마리가 된다. 거제만은 환경용량을 초과하는 굴을 먹여 살릴 먹 이가 되는 식물플랑크톤 생산능력도 없고 환경용량 이상의 굴이 배설하는 배설물을 자정시킬 수 있는 능력도 없다는 것이다

168 그래서 어장 환경용량을 평가하여 환경용량 범위 내에서의 적정 시설량을 설치해 서 굴양식을 하면 환경의 악화 없이 지속가능한 생산을 할 수가 있다. 환경용량의 개념을 주량(酒量)에 비유할 수 있다. 사람에 따라 주량이 다르지만 술을 마실 때 주량껏 마시게 되면 기분이 좋아지고 혈액순환도 잘되어 건강에도 별 로 해를 끼치지 않지만 잘못하여 주량을 초과해서 술을 마시게 되면 머리도 아프고 구토도 날 것 같아서 기분도 좋지 않고 건강에도 해를 끼치게 된다. 즉 주량은 술을 소화 분해할 수 있는 능력이 되는 것이다. 환경관리의 기본원리는 환경용량을 잘 평가해서 환경용량 범위 이내로 오염물질 부하량을 적절히 제어하는 것이다. 4. 지구의 환경용량 지구상에는 2000년 현재 60억 인구가 살고 있다. 인구증가는 기하급수적 증가를 하는 속성을 가지고 있다. 그림 1.1은 세계 인구증가 경향을 나타낸 것이다. 수천년 전부터 1650년경 까지 는 전세계 인구는 5억 이하로 추산되고 1830년 10억이 되었고 100년 후 1930년 에는 20억이 되었다. 1960년에 30억이 되어 10억 증가하는데 30년 걸렸다 년에는 40억이 되어 15년 만에 10억이 증가하고 1987년에 50억이 되어 10억 증 가하는데 12년이 걸렸고 1998년에 60억이 되고 2025년에는 83억이 될 것으로 추 정되며 2050년 경에는 100억을 초과할 것이라고 한다. 그림 1.1 세계 인구증가 추세

169 20세기 들면서 인구가 급격히 증가하게 된 것은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에 걸쳐 영국을 중심으로 유럽제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을 계기로 하여 대량생산과 대 량수송수단이 발달하고 현대적 농업기술이 보급되어 획기적인 식량생산의 증대를 가져왔다. 여기다 더해 19세기 중엽 파스테르에 의해 질병의 원인이 세균이라는 것 을 발견하게 되자 서양 의학기술의 진보로 사망률이 급격히 감소되어 폭발적인 인 구증가의 계기가 되었다. 20세기에는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이 가속화되자 물질적으로는 풍요로운 사회 가 되었지만 산업화과정에서 수반된 천연자원의 개발, 공장건설과 제품생산과정 그 리고 도시화에 의해서 막대한 양의 환경오염물질이 배출되어 환경오염이라는 심각 한 부작용을 초래하게 되었다. 지구의 환경용량이 어느정도 될 것인가에 대하여 여러 학자들이 여러 가지 방법 으로 추정하였는데 80억에서 300억 까지 추정하고 있으나 100억이라고 추정하는 학자가 가장 많다. 그러나 지구가 부양할 수 있는 인구는 한계가 있기 마련이다. 5. 성장의 한계 20세기를 지나는 동안 세계 인구는 폭발적인 증가를 하고 있고 세계 모든 나라들 이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을 계속 추구하고 이로 인해서 수반되는 천연자원의 고 갈과 환경오염의 심화 그리고 식량증산이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한데서 비롯되는 개인별 지역별 식량부족 현상이 세계 도처에서 일어나고 있다. 이런 상황이 계속된 다면 인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지를 예측한 로마클럽 보고서를 요약해서 소 개하고자 한다. 5.1 로마클럽 로마클럽은 1970년 스위스 법인체로 설립된 민간단체로서 전 세계 25개국의 과 학자, 경제학자, 교육자, 경영자들로 구성되어 있으며 세계적 문제인 인구증가, 환경 오염, 자원고갈, 식량문제 등 인류를 위기로 몰아갈 수 있는 문제에 대하여 연구하 고 토론하면서 위기로부터 인류를 구할 수 있는 길을 모색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다. 로마클럽에서는 미국 MIT 대학의 시스템공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에게 의뢰하여 인류의 장래를 예측하고 위기를 회피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도록 하였다. 이 연구결과는 1972년에 성장의 한계(The limits to growth)라는 이름의 로마클 럽 보고서를 출간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Donella H. Meadows, Dennis L. Meadows, Jorgen Randers,

170 William W. Behrens Ⅲ, 1972, The limits to growth, A Potomac Associates Book.) 5.2 지구시스템 변화예측 지구시스템에 영향을 주는 인자가 무수히 많이 있겠지만 가장 심각한 문제로 등 장한 5가지 인자 즉 인구증가,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 환경오염, 천연자원 고갈, 식량부족을 채택하여 이들 인자들의 변동양식과 상호작용을 수학적 방정식으로 표 현한 수학적 모델을 개발하였다. 이 모델을 이용하여 전 세계는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을 지금과 같이 계속 추구 하고, 그로 인하여 자원 소모량은 계속 증가하고 환경오염물질 배출량은 계속 증가 하고, 인구는 지금의 추세로 계속 증가하고 식량증산율은 인구증가율을 따르지 못 하는 상태가 계속된다고 했을 때 지구시스템의 장래는 어떻게 변할 것인가를 예측 한 결과는 그림 1.2와 같다. 그림 1.2 현재상태에서 모델 계산결과

171 모델 계산 결과는 급속한 공업성장에 따라 자원고갈 현상이 가속화되어 산업기반 이 무너져 공업성장에 저해되고 인구증가에 식량생산이 따르지 못한 결과 식량부족 과 환경오염 때문에 2100년이 되기 전에 인구감소와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의 한 계를 맞게 된다. 세계가 지금과 같은 추세로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을 계속 추구한다면 자원고갈 에 의해 인구와 경제성장의 한계가 온다고 예측되었기 때문에 이번에는 과학기술을 더욱 발전시켜 이용가능한 자원량을 지금의 2배로 증가시켰다고 했을 때 지구시스 템의 장래를 예측한 결과는 그림 1.3과 같다. 그림 1.3 자원량을 2배로 증가시겼을 경우 모델 계산결과 여기서 보면 공업화에 의한 경제 성장이 더욱 높은 수준에 도달하여 그것으로 인 한 환경오염이 급속히 증가하여 사망률이 증가하고 식량생산이 감소되어 급격한 인 구감소 현상이 나타나는 성장의 한계를 맞게 된다. 이상의 두 가지 경우 이외에도 과학기술을 이용하여 환경오염물질 배출량을 삭감 했을 경우와 식량생산을 더욱 증가했을 경우 등 여러 가지 경우를 가정해서 계산하

172 여 보았으나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과 인구증가 추세를 그대로 둔 채 자원과 식량 생산 증가와 환경오염 삭감 대책만으로는 성장의 한계를 극복할 수가 없다는 결론 을 얻었다 지구 환경용량은 유한한테 너무 짧은 시간 내에 공업화에 의한 경제성장 추구로 급속한 오염부하량의 증가가 지구환경용량을 초과해 버렸기 때문에 성장의 한계를 재촉하는 결과를 초래하게 되었다. 지구 시스템의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균형되고 지속가능한 발전을 위해서는 공 업화에 의한 경제성장 속도와 인구증가 속도를 자발적으로 계획적으로 환경용량 범 위 내로 제어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결론을 얻었다. 6. 환경친화적인 삶 20세기는 물질문명의 세기라면 21세기는 환경의 세기가 되어야 한다. 앞서 로마 클럽 보고서에서도 지적한 바와 같이 환경을 고려하지 않은 물질적인 성장은 지속 가능할 수가 없다고 했다. 그래서 환경적으로 건전하며 지속가능한 발전(Environmentally Sound and Sustainable Development) 개념을 환경친화적인 발전개념으로 도입하고 있다. 환경친화적인 발전의 개념에 관해서 우리나라에서도 1992년 6월 5일 세계 환경 의 날에 발표한 환경보전을 위한 국가선언문 의 제 10항과 제 12항에서 물자 와 에너지를 절약하고 물질적인 성장만을 추구하는 사고에서 벗어나 정신생활을 향 상시킴으로써 삶의 질을 높이는데 가치를 두는 환경친화적인 삶을 살아가도록 노력 해야한다 라고 했다. 우리나라에서도 환경친화적인 산업구조로 전환촉진에 관한 법률을 제정하고 환경 친화적인 기업경영체제 도입을 적극적으로 유도하고 있다. 국제적으로는 국제표준화기구(ISO)에서 전 생산공정과 제품이 환경친화적인지를 인증하는 국제환경표준규격 ISO 시리즈를 제정하여 인증을 받지 않은 제품 에 대하여서는 무역상에 각종 규제를 받도록 되어있다. 환경친화적 삶을 위해서는 지금까지 우리들은 물질적인 성장에만 가치를 두던 것 을 정신적인 성장에 가치를 두는 가치관의 전환을 교육과 종교를 통해서 유도하는 것이 중요하다. 환경친화적인 생활과 환경친화적인 기업경영체제 도입과 환경친화 적인 국가경영이 확산될 때 전 세계 인류는 성장의 한계를 극복하고 지속가능한 발 전을 이룩할 수 있다. 환경친화적인 삶의 표본이 되는 한 예를 들어본다. 수도하는 스님들이 식사하는 모습을 보면 나무로 만든 보시기에다 먹을 만큼의 밥과 나물을 덜어서 천천히 다

173 드시고 나면 그 그릇에 물을 부어 깨끗이 씻은 후 그릇 씻은 물까지 다 마시고 나 서 깨끗한 수건으로 말끔히 닦은 후 수근으로 그릇을 덮어서 선반에 보관한다. 식사 후 밥 한 톨 남기지 않고 그릇 씻은 구정물 한 방울도 흘리지 않는 환경친화적인 삶의 표본이라고 할 수 있다. 역사가 토인비는 세계종교의 창시자들은 우주의 실재와 본질에 관한 우주관은 서 로 의견이 달랐으나 물질주의를 배척하는 윤리관은 모두 일치한다고 했다. 즉 인간이 물질적인 부를 최고의 목표로 추구한다면 결국 파멸에 이를 것이라고 한 목소리로 외쳤다. 불교에서는 이세상사람 누구나 물욕을 버리면 마치 연꽃에서 이슬방울이 굴러 떨 어지듯이 그의 모든 고통은 그로부터 떨어져 나갈 것이다.(담마파다, 336) 기독교에서는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에 들어가는 것보다 더 어렵다.(마태복음 19: 23-24) 이슬람교에서는 가난은 나의 자랑이다.(마호메트) 오늘의 환경문제를 근원적으로 해결할 수 있는 방법을 퇴계의 인간과 자연에 대 한 철학에 근거하여 제시하였다. (박문현, 2009, 지구의 위기와 퇴계의 자연관, 퇴 계학부산연구원보 102호, 1-2 ) 첫째, 욕망을 절제해야 한다. 퇴계는 물욕을 비롯한 인욕을 막고 천리를 간직함으로 써 금수의 위치에 떨어지지 않고 만물의 영장의 지위를 지킬 수 있는 것으로 생각 했다. 인류가 욕망을 끊임없이 추구하려든다면 전체 자연계의 생태균형을 파괴하고 자연환경을 악화시킬 것이다. 그러므로 환경의 위기를 극복하기위한 일상적인 대책 은 검소하고 절약하는 퇴계의 생활습관을 길러야 하는 것이다. 둘째, 인간과 자연은 일체라는 전일적 자연관으로 자연을 사랑해야한다. 셋째, 우환의식을 가지고 자연의 위기에 대처해야한다

174 학교 폭력사태의 원인 고찰과 그 치유책 李 炳 壽* 1. 머리말 학교 폭력사태가 심각하다. 교육이 바로 서야 나라가 바로 서는 법인데, 부모가 자녀를 학교에 보내기가 무서울 정도로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으니 지난날 교직에 몸 담았던 한 사람으로서 안타깝기 그지없다. 서울시 교육감은 끝내 학생인 권조례를 공포했으며, 교육과학부는 이를 취소하라는 등으로 손발이 맞지 않고 있 으니 국민들은 더욱 불안한 상황이다. 이에 우리의 학교 폭력사태의 원인을 살펴보 고 이에 대한 치유책을 생각해 보고자 한다. 따라서, 우리의 학교 폭력사태는 언제 근절이 될지 희망이 보이지 않는다. 학교 폭력사태는 우리나라만의 문제는 아닌 듯도 하다. 최근 미국에도 아이오와 주(州) 인구 8만의 소도시 수시티에서 15일 왕따를 견디다 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은 14세 남자 고교학생 사건이 계기가 되어 신문 1면 사설에 일어나라, 귀 기울여라, 포기 하지 마라. 라는 제목으로 보도하였으며, 우리는 왕따가 지금 여기서 시작된다고 강 조하였다 한다. 2. 학교 폭력사태의 원인 고찰 학생 폭력사태를 불러오게 된 원인에는 먼 원인(遠因)과 가까운 원인(近因)이 있 다고 본다. 오늘날의 학교 폭력사태의 먼 원인을 살펴보려면 15년을 거슬러 올라가 야 한다. 국민의 정부 김대중 정권이 들어서면서 교원의 정년을 65세에서 60세로 단축하려는 법 개정을 시도했었다. 노령교사 1명을 퇴출시키면 신출교사 2명을 채 용할 수 있다는 경제논리에 입각한 발상이었다. 얼핏 생각하기에는 국가 예산 절약 면에서 굿아이디어라는 생각을 해봄직도 하다. 그러나 교육의 근본목적은 국민의 인격형성, 곧 인성교육에 있는 것인데, 이를 망각하고 입시교육만을 중시하여 원로 교사의 노하우 따위는 안중에도 없었다. 논란 끝에 결국 당초의 5년을 3년 단축으 로 수정해 통과 시켰다. 그런데 이 과정에서 3년 동안 연차적으로 시행했더라면 좋 * 전 개금고 교장

175 았을 터인데, 한 해에 한꺼번에 퇴출시켜버림으로써 그 부작용이 매우 컸다. 정년단 축 자체가 잘 못 됐다기보다 시행방법이 졸속하여 부작용이 많았다는 것이다. 퇴임 교사의 수가 엄청 많았으므로 퇴출교사는 마치, 쓰레기 버리듯 푸대접을 받고 퇴출 당하는 것 같은 분위기가 팽배하였다. 교원의 인권 면에서 모양새가 매우 좋지 않았 다. 뿐만 아니라, 그 후에 당장 교원 부족 사태가 발생함으로써 수업 결손 현상이 생기고 이의 해결책으로 결국 명예퇴직금을 받고 나간 그 교사들을 다시 임시교사 로 불러들이는 사태까지 빚어졌으니 정부 예산상으로도 이중지출의 손실을 입게 되 었다는 비판을 받았다. 졸속을 넘어 국가적인 망신이란 혹평까지 받게 되었다. 우리나라에는 옛부터 스승의 그림자도 밟지 않는다. 는 말이 있을 정도로 교원 존경풍토가 살아있었는데, 졸속적인 교원 정년단축 시행으로 당시의 학교나 사회의 분위기가 일시에 교원 푸대접 풍조로 돌변하게 되었다. 교원이 존경을 받아야 옳은 교육이 이루어진다. 특히 인격교육에 있어서는 그러하다. 그런데 섣부른 정년단축 시행으로 교권이 무너져버린 결과가 됐으니 마치 소중한 보물을 놓친 것처럼 아까 운 일이었다. 이와 같이 오늘의 학생 폭력사태는 신중하지 못한 교원 정년 단축을 강행하면서 교원존경 풍토가 사라질 때부터 싹트기 시작한 것이니 학교폭력의 먼 원인이라 아니 할 수 없다. 다음으로, 최근 우리 가정에서 형제간 수가 급격하게 줄었다는 것이 한 원인이 되 었다. 지난날에는 보통 한 가정에 3, 4명 이상의 형제들이 함께 자랐으므로, 성장과 정에서 형제 자매간에 예절, 규칙, 위계질서 등 사회성을 배울 수 있었는데 요즘은 자녀가 한둘이 밖에 없으므로 그런 생활 훈련이 전혀 안 된 채 학교에 입학을 하게 되며, 또 무엇이든 자기 위주이고 자신이 제일인 양 이기주의적 행동을 잘 하므로 친구와의 화합이 잘 안 됨으로써, 원만한 교우 생활이 이루어지기 어렵고 상호 충돌 이 잘 생기는 것이 학교폭력이 발생할 소지가 많아졌다 할 수 있다. 그리고 교원 정년 단축의 강행으로 교권이 추락되고 교원이 존경받지 못하면서 학교질서가 붕괴되고 학교폭력이 싹트고 있었던 터에 오늘처럼 학교폭력 사태를 급 격하게 불러오게 된 결정적 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2011년에 시행한 <학생 처벌금 지> 조치가 바로 그것이다. 또 여기에 한 술 더 떠서 서울시교육청 등이 학생 인권 조례를 들고 나왔으니 불난 데 선풍기를 갖다 댄 꼴이 됐다. 이는 피교육자인 학생의 기는 살리면서 교육을 담당하는 주체인 교사들의 교권은 위축시켜버렸던 것이다. 이만저만한 모순이 아니었다. 학생 체벌금지와 학생 인권조 례 선포 - 이 두가지 조치는 학교의 질서를 파괴하고 학교 폭력사태를 초래한 주범 으로 볼 수 있다. 따라서 체벌금지와 학생 인권조례는 학교 폭력사태의 가장 큰 근 인(近因)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학교와 가정에서 입시 위주 교육만 중시한 나머지 인간교육(인성교육)을

176 경시한 것이 학교 폭력사태를 초래하는 큰 원인이 되고 있다. 또 일반사회에서 성인들의 폭력이 심화되어 가고 있는 것 또한 학교 폭력사태를 확대시키는 데 크게 한 몫을 했다고도 할 수 있다. 아이는 부모의 뒤꼭지 보고 자 란다. 는 말이 있다. 우리나라는 국회에서까지 난장판이 벌어지고 난투극이 벌어짐 으로써, 국가 체면을 손상시켰는데 학생들은 이를 배워서 학교 폭력으로 실현시키 고 있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3. 학교 폭력사태의 현황 처벌 금지조치가 시작되고부터는 학생의 생활지도가 극도로 어렵게 되었다는 것 이 교사들의 입에서 이구동성으로 나오고 있다. 학생 잘못을 지적한 교사에게 예사 로 X팔 이라고 욕을 하거나, 때려봐, 때려봐 하고 달려들기가 예사란다. 이런 학생을 지도할 마땅한 방법이 무엇인지 고민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더욱이 여 교사의 경우엔 창피해서도 상대하기가 싫어 거의 학생 지도를 포기한 상태라니 이 런 가운데 교사의 사명감이 생기겠는가? 사명감 없는 교육으로는 인간성 교육은 불 가능하다. 학생 소지품 조사는 학생을 지도할 사항이 많이 생기는데, 그것을 인권 유린으로 몰아붙이니 이는 학생지도를 포기하라는 것과 마찬가지란다. 지난해 학교의 명예퇴임 신청자 수가 급격히 늘어났다 한다. 그 이유는 학생처벌 금지조치 로 교직 수행이 힘들어지고 또한 보람도 느끼지 못하기 때문이라 한다. 학 생인권은 존중하라면서 교사의 인권은 소중시 되지 않고 있으니 교사의 매력은 떨 어질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이는 국가의 장래를 위하여 우려스러운 일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신문에 보면, 경기도 E중학교 모 교사는 중학생들이라고 우습게 봐서는 안 된다. 흉기를 들고 학교 오는 학생도 있고, 아이들로부터 폭행 당할까봐 폭력을 보고도 못 본 척 하는 교사도 있다. 고 했다. 그래서 이들은 학생 지도권이 회복되지 않으면 학교 폭력은 실제로 막기 어렵다. 고 실토했다. 또 C교사는 학부모를 면담하거나 가정방문을 할 수 있는 권한을 교사에게 주고, 학교는 격리나 전학 등의 행정적 조 치를 강제로 할 수 있어야 한다. 고 말하고, 이런 권한이 없다면 앞으로 경찰이 매 일같이 학교 문턱을 넘을 수밖에 없다. 고 말하고 있다. 더욱이 지난번 대구 학생자살사건 후의 가해학생들의 인터뷰 기사가 보도된 것을 보니 기가 막힌다. 왕따 학생 김군은 지난 일을 반성하면서 처음엔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재미로 때렸다. 기분 안 좋고 뭔가 짜증나면 습관적으로 주먹을 휘둘렀다. 내가 겪은 선생님들은 아이들 간의 싸움이나 괴롭힘을 두고 모두 다 못 본척하려

177 한다. 나만 해도 2학년 때 B군을 한 달 동안 매일같이 때렸지만, 우리 반에서 그 일을 선생님만 모르는 것 같았다. 고 실토하고 있다. 실정이 이러한데도 서울시 교육청이 굳이 학생 인권조례를 들고 나온 이유가 납 득이 가지 않는다. 학생인권이 소중하다면 교사인권도 함께 존중돼야 할 것이 아닌 가? 이 또한 나라의 장래를 위하여 심사숙고 되어야 할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난번에 교육과학부가 조사한 초 중 고교생을 대상으로 실시한 학교폭력 실태조 사에서 학교폭력을 경험했다. 고 응답한 학생이 16만 7395명이었는데, 피해장소로 가장 많이 밝힌 것은 골목길도, 유흥가도 아닌 학교 교실 안이었다 고 한다. (여기 서 우리는 학교 폭력을 책임지고 지도할 수 있는 사람은 역시 교사이어야 함을 절 실히 느낄 수 있다.) 4. 정부의 학교폭력 종합대책 발표 주요 내용 지난 2월에 정부는 관련 부처 합동회의를 거쳐 학교폭력 종합대책을 내놓았는데 그 주요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학교장이 폭력 가해 학생에게 즉시 출석 정지 조치를 내릴 수 있게 하고, 둘째, 폭력으로 징계를 받은 학생은 그 사실을 학교 생활기록부에 남겨 진학자료 로 제공토록 한다. 셋째, 학급당 학생수 30명 이상 중학교에 부담임을 두는 복수담임제를 도입하고, 넷째, 담임은 매 학기 1회 이상 학생과 1대1 면담을 해서 결과를 학부모에게 통 보하게 한다. 다섯째, 폭력 상황에 대한 단기 대책과 함께 신체활동 욕구를 건전한 쪽으로 발산 하고, 단체활동을 통한 인성 함양을 위해 체육수업 시간을 50% 늘리는 방안을 강 구한다. 5. 학교 폭력사태의 치유책 (1) 학생 폭력을 치유하기 위하여서는 폭력이 발생하기에 앞서 사전에 이를 예방 하는 데 주력하여야 하며 근본적으로 교원 존경 풍토를 조성하고, 실추된 교권을 회 복시켜 학생이 교원을 존경하는 가운데 교육이 이루어지도록 하여야 한다. (2) 학교와 학부모가 함께 관심을 기울여 학교 폭력사태에 대처하여야 한다. (3) 학교 폭력사태를 은폐하는 일이 없도록 하고 은폐한 교사나 교장은 엄중 문책 하도록 한다. (지난번 학교폭력 실태를 설문조사한 결과 허위 보고한 학교가 많았다 한다)

178 (4) 학교 폭력 가해 학생에 대한 신고가 즉각적으로 이루어지고, 가해학생은 반드 시 상응한 처벌을 받도록 하는 체계가 사회 전체에 확실히 구축되도록 한다. (학생 들이 아예 폭력을 휘두를 엄두를 내지 못하도록) (5) 학교 상담 창구를 활성화하여, 자유로운 상담에 응하고 주기적으로 교육을 실 시한다. (6) 가정에서는 자녀교육의 1차적 책임이 가정에 있음을 인식하고, 자녀에게 입 시 위주 교육보다 인성지도와 예절교육에 힘을 기울이도록 한다. (7) 올바른 취미 활동과 특기 교육을 통해 관심을 좋은 방향으로 순화시켜 나가 도록 유도한다. (8) 학교 폭력은 학교만의 문제가 아니므로, 학교와 교육청, 경찰, 지자체, 시민사 회단체 등이 모두 관심을 갖고 힘을 합하여 치유에 나서도록 한다. 6. 맺는말 오늘날 학생 폭력사태는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이다. 그럼 에도 이러한 심각한 사태를 두고도 두 세력이 팽팽한 대립각을 보이고 있다. 특히 우리 교육을 주관하여야 할 교육과학부가 학생인권조례만을 강력히 주장하고 있는 일부 교원 노조계통 교육감들을 설득하지 못하고 있는 것은 매우 답답한 일이요, 꼴 불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따라서 학부모들이 나서서 우리 교육을 바로잡아 줄 것을 갈망하고 있음에도 이를 실현시키지 못하고 있으니 누구를 믿어야 하겠는가? 일부 전교조 세력들이 학생인권조례를 강력히 주장하고 있지만, 지금 우리나라의 실정이 당장 학생인권이 짓밟히고 있다고 할 만큼 심각한 상황은 아니다. 학생은 역 시 피교육자이고 교육하는 주체는 교사임을 명심해야 하겠다. 아이들의 욕구는 모 두 순수하고 선하다는 안일한 생각은 재고되어야 한다. 선한 욕구는 들어주되, 악한 욕구는 스스로 자제할 수 있는 능력을 키워주어야 한다. 심심하다고 옆 친구를 때리 고 괴롭히는 실태를 두고 보면서도 학생 전체를 보호한다는 빙자로 학생인권조례를 들고 나오는 것은 편파적 사고이다. 한국교총 안양옥 회장은 오늘날 학교폭력에 대한 정치권의 무관심에 대해 지적했 는데, 이번 총선 기간중 여 야 수뇌부들이 쏟아낸 교육정책 중, 무상급식 반값등록 금 등 온갖 포퓰리즘 교육 정책만 쏟아낸 것은 아쉬운 점이라고 하고, 앞으로 전 개될 학교폭력 근절 대책은 언어폭력 개선 캠페인 부터 시작 된다면서, 교총 18만 명 교사들이 발 벗고 뛰겠다. 고 하며, 학교폭력 내 탓이오 운동을 전개 하겠다고 하니, 기대를 걸만하다고 보아진다. 학생 폭력사태를 잠재우고 난마처럼 흐트러진 학교의 질서를 바로 잡으려면 무엇

179 보다도 실추된 교권을 회복시켜 주는 일이 더 시급하다. 교육의 주체는 교사임이 분 명한데, 마치 피교육자인 학생이 교육의 주체인 양 착각하고 있는 이들이 적지 않 다. 학교 교사가 주체가 되어 적극적으로 모든 책임을 지고 앞장서서 교권을 행세할 수 있어야 학교가 바로 설 수 있다. 교사에게 권한도 주면서 동시에 책임도 물을 수 있게 하는 것이 정도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학생을 일방적으로 과보호하려는 학생 인권조례는 일단 거두어들이는 방향으로 용단을 내려야 한다

180 중국의 이해 (과거와 현재) 李 陽 子* 中 國 王 朝 年 表 B.C 1100 B.C 770 西周 (은) (서주) 분 위 촉 오 (춘추시대) (전국시대) 시 (서진) 317 동진 前漢 新 後漢 三國時代 (진) (전한) (신) (후한) (삼국시대) 대 통 일 시 581 北朝 東晋 A.D 8 秦 439 5胡 16國 西晋 隋 (수) 南朝 대 589 唐 5代 (당) (오대) 618 東 魏 ( ) 北 濟 ( 북 제 )( ) 西 魏 ( ) 北 周 ( 북 주 )( ) 南 朝 宋 ( 송 )( ) 齊 ( 제 )( ) 梁 ( 양 )( ) 陳 ( 진 )( ) 北朝 唐 戰國時代 { 春秋時代 열 B.C 221 B.C 202 東周(동주) 殷 220 B.C 403 北 魏 ( 북 위 )( ) 960 5代 10國 1127 北宋 1279 南宋 (북송) (남송) 거란(遼) 여진(金) [ 元 明 淸 (원) (명) (청) 阿片戰爭 (1840) 西夏(서하) 辛亥革命 (1911) (1038~1227) 中共(中國本土차지)(1949) (916~1125) (1115~1234) 蒙古(몽고) (1206) 5代 --- 後粱(후량) 後唐(후당) 後晋(후진) 後漢(후한) 後周(후주) 宋 * 동의대 명예교수

181 [1] 중국 역사의 개괄적 이해 1. 중국민족 (1) 인종 : 몽고인종 (Mongoloid) 한족 + 55개 소수 민족 장족, 회족, 위구르족, 티베트족, 몽골족 ; 최대 소수 민족 (2) 어족 : 차이나 티벳어족 (China - Tibet 어족) 단음절. 漢子(간체자) (3) 인구 : 13억 5천만 명 (세계인구의 1/5 ) 2 (4) 면적 : 959만 Km (세계 2위, 남한의 100배). 4개 직할시 28개 省 (5) 기후 : 계절풍지대 (비 일광 온도 벼농사) 2期作 2. 중국의 자연과 역사 (1)중국지도 : 28개 행정 구역 ( 省 ) 하북성, 하남, 산서, 섬서, 산동, 강소, 안휘, 절강, 복건, 강서, 호북, 호남, 광동, 광서, 사천, 운남, 귀주, 감숙, 길림, 흑룡강, 요령, 청해, 신강, 서장, 영하, 내몽 고 자치구, 해남도성, 대만성 (28개 성). 4개 직할시 ; 북경, 상해, 천진, 중경 江: 황하, 양자강(장강), 회하(회수), 주강(서강), 흑룡강, 송화강. (남북으로 운하 : 북경~남경) 산맥: 알타이산맥, 천산산맥, 곤륜산맥, 오대산맥, 진령산맥 (사막, 분지, 고원) (2) 지리적 조건 고대의 4대 문명 발생지의 하나 지리적 특성 : 고립성 (동, 서, 남, 북이 막힘). 西高東低 고립성 독창력, 창조력 (종이, 인쇄술, 나침반, 화약, 비단, 도자기, 주판 발명) 장기적인 통일국가 형성 (3) 중화의식 (中華意識 = 華夷觀: 화이관) 중화 : 세계의 중앙 中心, 문화의 만발. 中國 ; 세계의 중심 국가 주변민족을 야만시 이족(夷族) : 東夷(동이), 西戎(서융), 北狄(북적), 南蠻(남만) 주변국가의 역사를 正史의 列傳 부분에 기록 예) 三國志 魏志 東夷伝 국가적, 개인적 자존이 강한 민족 국가적 자존 : 창조적 중국 문명과 정치에 절대적 자신감

182 개인적 자존 : 面子(顔)을 세우는 풍습, 자신의 체면과 상대방의 체면을 존중 민족성 : 현세적, 낙천적, 인내, 慢慢地, 돈 중시 (4) 중국의 역사 (3600년) 중국문화권 = 동아시아 문화권 중국왕조의 변천과 시대적 특성 (中國 王朝 年表 참조) ① 先史時代 : 三皇王帝 전설 (堯舜시대) ② 구석기시대, 신석기시대 (앙소 문화, 용산 문화) ③ 殷代(은대)의 神政정치,도시국가,은허의 발굴:청동기,갑골문자,궁전,묘 ④ 周代(주대) : 封建制度(봉건제도), 宗法制度(종법제도), 周公의 활약 { 嫡長子 (大宗 ) - 왕위계승 他子 (小宗 ) - 제후 - [ 長子 - 제후 他子 - 大夫 ⑤ 춘추시대 : 존왕양이 춘추 5패 (春秋五覇) ⑥ 전국시대 : 하극상, 약육강식 (戰國七雄) 諸子百家思想(제자백가사상)의 발달 ; 百家爭鳴, 百花濟放 孔子, 孟子, 荀子, 墨子, 老子, 莊子, 韓非子, 申不害 商鞅, 孫子 ⑦ 秦代(진대) : 최초의 통일국가 (공헌) 始皇帝 焚書坑儒(분서갱유), 문자, 화폐, 도량형, 법률통일, 大土木工事 陳勝(진승), 吳廣(오광)의 亂 內戰(楚 漢戰) 유방, 항우 ⑧ 漢代(한대) : 前漢 後漢 (왕망의 新) 유교사상, 유교적 관료국가, 흉노정벌과 실크로드, 고조선 정벌 불교수입, 외척과 환관의 발호, 황건적의 난 ⑨ 삼국시대 : 魏(曹操), 蜀(劉備), 吳(孫權) 명분의 대립 제갈공명, 관우, 장비, 조자룡, 사마중달, 방추, 방통, 화타 (桃園의 結義, 三顧草廬, 赤壁大戰, 出師表, 泣斬馬謖) ⑩ 晋의 통일(西晋): 8王의 난과 골육상쟁,五胡(흉노,선비,저,강,갈)의 침입 北 : 5胡 16國 時代 (130년간; 316~439) 南 : 晋의 남천(東晋) 中國文化의 南遷, 귀족사회

183 ⑪ 南北朝 시대 : 북조 효문제의 漢化정책(均田制) 南朝 귀족사회의 성립 ( 豪族의 대토지 소유 ) ⑫ 隋代 : 文帝, 煬帝 (중앙집권제, 대운하 개척, 外征 ), 호한(胡漢)체제 ⑬ 唐代 : 제도의 정비 (과거제, 균전제, 租庸調制, 부병제) 측천무후, 玄宗과 양귀비, 안록산의 난, 황소의 난, 외척, 환관의 발호 당의 문화 : 서방문화유입 (비단길) 불교융성, 문학 (시: 이백, 두보) ⑭ 宋代:사대부관료사회, 군주전제정치, 文治主義, 이민족 침입(以夷制夷策) 王安石의 新法, 당쟁, 서민문화의 발달, 중국요리의 미각 宋學 (朱子學 = 성리학) : 修身齊家 治國平天下(수신제가 치국평천하) 修己治人之道 : 格物, 致知. 誠意, 正心(격물, 치지. 성의, 정심) ⑮ 元代 (정복왕조) : 징기즈칸, 쿠빌라이(세조) 西征, 東征 세계제국 형성 ( Pax Tataria 13C ~ 14C ) 종족적 신분제(몽고족,색목인,한인,남인),동서교통의 발달(잠치, 사라이), 동서문화 교류(마르코 폴로, 이븐 바투타, 카르피니, 몬테코르비노) ⑮ 明代 : 황제권의 강화, 복고정책, 전통문화 부흥, 一世一年號制 향신층이 사회주도, 상업, 무역의 발달, 은본위제 화페(일조편법) 민중의 지위향상 (항조운동, 직용의 변), 서민문학, 실학의 발달(양명학) ⑮ 淸代 : 여진의 정복왕조, 康熙(강희), 雍正(옹정), 乾陸帝(건륭제) 강경책과 회유책, 영토 확장, 8기(旗)制, 대외무역의 발달 반만(反滿) 민족사상 대두 考證學의 발달 [중국의 近現代史 연표] 아편전쟁(1840~42) 태평천국농민운동(1850~64) 애로우호전쟁 (1856~60) 洋務운동(1861~94) 淸日전쟁(1894~1895) 변법자강운동 (1898) 의화단운동(1899~1901) 신해(辛亥)혁명(1911) 중화민국(1912:孫 文) 5 4운동 (1919) 중국국민당(1919)과 중국공산당(1921) 제1차 국공합 작(1924~27) 북벌완성(1928) 만주사변(1931) 공산당의 大長征(1934-5) 중일전쟁(1937) 제2차 국공합작( ) 중국의 참승(1945) 國共

184 內戰(1946~49) 중화인민공화국(1949) 인민공사(1960年代) 文化大革命 (1966~1976) 1978年의 대전환; 개혁.개방(등소평) 천안문 사태 (1989년 6 월 4일) 강택민(1994년) 호금도 (2003년) 시진핑 (2012년) (5) 중국민족의 장기간 정치 통일의 이유 ① 지리적 조건 ② 민족구성의 純一性(순일성) ③ 언어, 문자의 동일성 통일왕조: 진, 한, 수, 당, 송, 원, 명, 청 분열시대: 5호16국, 남북조시대 (6) 중국 발전의 원동력 ① 근면한 중국농민의 인내력 ② 왕조지배에 반항하는 농민운동 ③ 군주에 대한 혁명권(放伐) ④ 과거제도(세습적 신분제 부정) 중국문화의 흡수성과 이민족의 동화; 독사주(酒)의 원리. 해바라기 문화권 [2] 오늘의 중국은 어떠한가 미국 발 서브프라임 모기지로 인한 세계경제위기는 두바이 발 경제 위기와 유럽 발 경제위기까지 겹치며 우리의 가슴을 놀라게 하고 있다. 80년 전 1929년에 전 세계를 덮쳤던 세계경제공황을 다시 기억하게 하면서 지구 촌은 어려움 속에서도 전 지구적, 글로벌 시대임을 절감케 하고 있다. 지구상에 존재했던 강대국들의 역사적 흥망성쇠를 개관해 보며 오늘의 중국을 얘 기해 보자. 세계의 강대국들이 멸망한 이유는 무엇인가. 지구상에 존재했던 어느 나라도 그 흥함이 영원하지는 않았다. 로마제국도, 몽골제국도, 해가 지지 않는 나라 대영제국도 그 번영이 영원하지 않 았으며 미국도 그 번성함이 영원하지 않을 것임을 지금 우리는 느끼고 있다. 그럼 그 다음의 번영의 주자는 누구일 것인가! 바로 중국이다. 머지않은 장래에 중국 주 도하의 세계평화시대(和平崛起)가 올 것이라고 중국인은 예언, 장담하고 있으며 세 계인들도 동조하고 있다. 캐나다 요크대학의 가브리엘 콜코 교수는 그의 책 [제국의 멸망]에서 세계제국의 쇠망 이유를 첫째 해외 모험(대외 전쟁) 비용. 둘째, 국내 발전 소홀과 경제적 모순 이라고 들면서 미국의 힘은 필연적으로 쇠약해질 것이며 미국이 누리던 오만의 시 대는 끝날 것이라고 예언하고 있다

185 현재 미국은 국제수지 적자와 과도한 국고채 차입으로 허덕이고 있는데 이는 아 프카니스탄, 이라크 전쟁 비용의 과도한 지출과 잘못된 금융자산 관리 체제로 인해 금융위기를 맞고 있는 것이다. 55만명이 파견되었던 월남전에 비해 14만 명이 파견 된 이라크전에 든 비용을 비교하면 다섯 배를 더 초과하였다. 첨단 무기와 첨단 장 비는 엄청난 비용을 낭비하게 하였으며 여러 국내 사태에 대비할 수 있는 능력마저 도 저하시켜 마침내 경제위기 발단의 장본인이 되고 말았다. 지금 미국도 영국의 전 철을 밟고 있는 것이다. 조지 프리드먼, 다니엘 앨트먼 교수; 미국은 망하지 않는다. 중국은 일등 못된다! 니얼 퍼거슨, 가브리엘 콜코 교수 ; 미국이 누리던 오만의 시대는 끝날 것이다! 현재 뜨고 있는 나라는 브릭스( BRIC`s )다 브라질은 차차기 리우에서 올림픽을 개최하며 여러 국내 자원을 이용한 정치 활 력으로 남미에서 가장 주목받는 나라다. 또한 러시아도 최근 석유 생산으로 활기를 띄고 있으며 인도는 인구 10억에, 우수 두뇌로 IT, 영화분야 등 다방면에서 각광을 받고 있다. 최근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인도의 싱총리 부부를 미국국빈으로 초대해 서 정중히 맞이했다. 중국은 이제 미국과 함께 G2에 진입했다. 그러면 이제 중국에 대해 살펴보자. 중국의 현재 중국은 1949년 모택동(毛澤東 마오쩌뚱)주도하는 공산주의 국가로 통일되어 중 화인민공화국을 세운 이후 많은 사람들은 토지개혁 등의 인민 위주의 새로운 정책 에 기뻐하며 해방되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대약진운동, 인민공사, 문화대혁명 을 거치면서 결국 사회주의의 시행착오에 빠지게 되었고 이에 대한 반성과 반발로 나 타난 혁명 2세대 등소평(鄧小平 덩샤오핑; 1978)에 의한 개혁 개방정책으로 잘못 된 과거를 회복하고 발전할 수 있는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그 후 혁명 3세대 강택민(江澤民 장쯔민;1994)을 거쳐 오늘의 중국 지도자인 혁 명 4세대 호금도(胡錦濤 후진타오;2003)에 이르러 비약적인 발전을 거듭하고 있다. 현재 개혁 개방 30년을 지나고 건국 60년을 거치면서 철강, 조선, IT산업 분야 에서 선전하며 중국은 이미 세계의 공장이 된지 오래다. 미국 여기자의 중국 제품 안 쓰기 버팀운동은 1년을 넘길 수 없었다는 기사를 통해 이제 세계는 Made in China 제품으로 넘쳐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은 이미 GDP(국민총생산) 6조 9000억 달러를 넘어서면서 미국, 일본에 이어 3위 독일을 재치고 3위에 올라섰다. 외환 보유고는 3조 달러를 넘어섰으며 국민 1 인당 GNP는 5000달러로 이미 초과달성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자동차 시장도

186 년 3000만대 생산을 초과했으며, 480만대 판매 1위 미국을 재치고 610만대 판매 로 현재 1위를 굳히고 있으며 석탄, 석유, 천연가스, 태양열, 풍력 발전 등 에너지 생산에 있어서도 26억 톤으로 미국을 재치고 세계 1위를 등록했다. 2008년 북경 올림픽을 성공리에 마무리 했으며, 지금은 2010년 상해세계박람회 를 열어 세계에 중국의 저력을 보이며 열정을 쏟고 있다. 중국은 현재 20년 후, 50 년 후의 중국의 위상을 상정해 놓고 거기에 맞추기 위해 분투, 노력 중이다. * 중국 경제 성장의 동력 1) 질 좋고 풍부한 노동력(신노동법으로 임금 인상 중) 2) 이공계 인재의 축적 3) 철저한 경쟁 원리(외자기업, 사기업, 국유기업) 4) 중국 경제성장의 3대 견인차 1, 내국인의 저축(40%) 2, 성장세를 유지하는 대외 무역 3, 외국인 기업의 직접투자의 규모가 방대하고 지속적 임 5) 세계 최고의 정치 효율(개발독재라는 人治의 틀 속에서 고속 성장) 6) 전세계 최고 수준의 국가 지도자. 지금은 세계가 중국 러시(Rush)시대다 아메리칸 드림은 지고 차이니즈 드림이 뜬다. 요즘 세계의 유행어다. 이제 중국이나 인도 등의 미국 이민 가정 출신의 고급 두뇌들은 미국을 떠나 다 시 고국으로 돌아가는 역이민을 하고 있다. 되돌아가는 그 숫자가 한 해 10만 명이 나 된다. 그래서 미국은 38년 만에 처음으로 두뇌 유출을 두려워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미국 대학생들은 줄을 이어 중국 유학 등 중국행을 하고 있다. 미국에서의 중국어 배우기는 대유행이며 국, 중, 고생 5만 명 이상이 중국어 공부에 열공하고 있다. 닉 슨 대통령은 1972년 죽의 장막으로 가려진 중국의 문을 열었고 그 손자 데븐 닉슨 은 지금 중국 유학 중이며 미국인에게 중국은 선택이 아니라 필수다. 라고 말하고 있다. 중국은 G2(Group of 2), 수퍼 파워(Super Power), 팍스 시니카(Pax Sinica)의 시대를 위한 조건을 지금 갖춰 가고 있는 중이다. 즉 세계의 인재, 물자, 자금을 끌어들여야 세계의 헤게모니를 장악할 수 있는 바, 현대 중국은 강력한 흡인력으로 세계의 인재, 물자, 자금을 빨아들이고 있다. 전 세 계의 제품과 지혜와 자금이 블랙홀처럼 차이나로 빨려들어 가고 있다. 한 예로 지

187 난 해 [글로발 싱크 탱크 써밋(Global Think Tank Summit)]이란 매머드 세미나를 개최하여 중국에 전 세계 900여명의 세계 두뇌를 집합시켜 토론하고 그 이론을 흡 수하고 수용하였다. 국제 세미나의 공용어는 이미 영어와 중국어가 되었다. Pax Sinica의 꿈 (중국 주도의 세계평화시대) (Pax Romana Pax Tataria Pax Britania Pax Americana Pax Sinica) ①중국의 국가정책 우선순위 1.국가통합유지 2.군사력 증강(우주정복) 3. 세계시장에서의 역할증대 4.대만 재병합 ②미국대학 내 중국계 유학생 수가 1위 (중국내 대학졸업자 4600만명) 인도 74,600명, 중국계 10만 명(중국 64,700+대만 28,000+홍콩 8,000) ③미국내 중국문화의 침투, 중국계 미국인의 미국 주류사회로의 진출 : 뉴욕에만 중국요리점 2천여 곳, 중국어는 스페인어 다음으로 많이 사용 그러나 중국에도 앞으로의 문제점이 많다. 무지개 빛의 중국만은 아니다! 1) 빈부의 격차(도.농간 격차, 동.서간 격차, 계층간 격차) 2) 소수민족의 저항(국가 해체 위기) ; 티베트, 위구르, 내몽골 3) 농민공의 반란 우려 4) 금융위기(중국 경제 고성장의 한계) 5) 민주화 문제(인권문제) 6) 환경 파괴와 사막화 7) 한 자녀(소황제) 문제 8) 부패 문제 등이다. 정치는 사회주의 경제는 자본주의라는 두 바퀴 즉 2원체제가 과연 끝까지 가능 할 것인가. 자본주의의 맛을 보고, 먹고 살만해지면 반드시 민주화 요구가 발생 하게 되어있다. 영원히 공산주의체제로 사람의 입을 틀어막고 억누를 수는 없다 < 현재 미국과 중국의 총성 없는 전쟁 > 21세기식 전쟁인 총성 없는 전쟁, 무제한적 전쟁은 이미 시작 되었다. 중국은 이라크전 이후 미국의 해는 이미 기울고 있으며, 산하에 두 마리 호랑이가 살 수는 없다고 호언장담하고 있다. 그렇다면 수퍼 파워를 꿈꾸는 그들의 전략은 무엇인가? 수퍼파워를 꿈꾸는 중국의 전략 1) 인공위성을 추락 시키는 기술 보유 (레이저 발사, 이엠피탄 이용)

188 중국은 미국의 최첨단 전자 장비나 인공위성을 노린다. 2) 기술 발전 계획의 지속적인 추진 정보 수집에 총력, 유학생을 첩보 수집 요원으로 이용한다. 3) 미디어 수단을 통한 사이버 공격 (미국 사이버군대 5만 육성 중) 인터넷 상의 전쟁. 수출관리청, 국방대학, 해군대학 뿐 만 아니라 모든 미국 주요기관들은 해킹을 당하는 사이버 공격을 받았고 계속 중이다. 4) 경제, 미디어, 기술 분야 전담부서 맹활약 중. 중국은 3조 달러 이상의 외환보유고를 이용해 미국에서 번 돈은 미국 국채를 다 매수하고 있으므로써 미국에 위협을 가하고 있다. 5) 석유, 석탄, 가스, 태양광 패널 등도 전 세계적으로 싹쓸이 하고 있는 형편. 중국의 눈부신 아프리카 진출. 공든 탑 15년, 200억 $ 투입.(알제리, 니제르, 수단, 에디오피아, 케냐, 잠비아, 마다카스카르 등 53개국에 중국인 수 십만명 진출 중; 현지 아프리카인들은 중국인 혐오증) 또한 남미 진출, 이태리 명품 시장 진출도 활발하다.; 세계 갈등의 한 원인도 중국의 급성장 때문. 중국은 우리를, 세계를 지금 추월하고 있다. 수퍼 파워가 되기 위해. 중국은 경제전쟁, 미디어 전쟁, 기술전쟁에서 미국을 따라잡기 위해 지금 현재 맹공격을 하고 있는 중이다

189 건강생활과 營養 변 재 형* 1. 건강의 개념 인생의 행복(幸福)을 뒷받침하는 가장 중요한 조건은 건강(健康)이라고 하여 이 견을 제기할 사람은 없을 것이다. 이는 곧, 건강이 인생을 행복하게 살아 갈 수 있 게 하는 기본이 되기 때문이다. 건강을 영어로는 Health로 표기하며, 불어의 Healthe( 원기왕성한), 라틴어로 Sant'e( Sanitas; Sanity 건전하다)의 뜻에서 유래하는 단어이다. 우리말 뜻으로 는 '몸에 탈이 없이 튼튼하다'는 의미로, 또 병리학적인 해석으로는 '몸에 질병이 없고 허약하지 않은 상태'라고 옮길 수 있다. 건강과 관련하여 인간을 생태적 견지에서 보면, 신체는 변천해 오는 생활환경 이 신체에 미치는 제반 작용에 대하여 적응(Adaptation)하거나, 저항하여 생리적으 로 항상 일정한 상태(생리적으로는 항상성, 恒常性 'Homeostasis' 이라고도 한다) 로 유지하려 하기 때문에, 때로는 건강한 것으로 생각되었든 신체도 다른 어떤 환 경에서는 불건강한 것으로 판명되는 경우도 있다. 따라서 건강과 불건강, 질병과 사망 등 '생로병사(生老病死)'와 같은 신체적인 변 화는 생물체로서의 생애에 비추어 연속적으로 일어나는 변화의 한 과정이라고도 볼 수 있다. 우리의 심신은 건강을 보장받은 것이 아니고, 선천적(先天的, Congenital)으로 뿐만 아니라, 후천적(後天的, Posterior)으로 형성된 인과(因果)의 소산(所産)이라 고도 할 수 있다. 건강을 지키는 일은 자신의 잠재적인 능력을 지속적으로 유지 발전시키는 일 로 될 것이며, 이는 곧, 개체에 국한하지 않고, 그 가정과 사회, 나아가서 국가의 부강 복지와도 직결되는 일이라고 할 수 있다. 건강한 가족을 구성원으로 하여 이루는 가정은 단란하고 행복한 가정을 약속받 을 수 있을 것이며, 행복한 가정으로 이루는 사회는 명랑하고 생산적인 사회를 이 루는 기본이 될 것임은 더 이상 강조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 부경대 명예교수

190 세계보건기구(WHO) 헌장의 서문(Preamble to the Constitution of the World Health Organization, 1946)에는 건강을 "단지 질환이나 약체(弱體)에서 벗어난 상태만이 아니라, 신체적, 정신적 및 사회적으로도 완전한 상태"를 가리킨다고 하 였다. 그렇다면 이처럼 모두가 소원하는 건강은 누구에게나 자연스럽게 보장받는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다. 기본적으로는 자기의 체질을 스스로 잘 파악하여 섭생 을 알맞게 하고, 체력에 따라 알맞은 운동으로 뒷받침하여야 건강이라는 대가(代 價)를 보상받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성리학자이신 퇴계(退溪) 선생( ) 은 평생을 병약한 몸 으로 지내시면서 독자적으로 창안하신 양생법(養生法)으로 스스로의 심신을 단련하 시고, 후세의 병약자를 구하기 위하여 양생비방서 '활인심방(活人心方)'까지 저술하 셨다. 독일의 저명한 생리학자 Rene Sand도 건강은 대가(代價)를 지불하므로서 얻을 수 있는 보상(報償)이라고 하였다. 또, 일본의 석유재벌 이데미쓰(出光)는 어릴 때부터 약골로 시달렸지만 손수 창 안한 지압법(指壓法)을 시술하면서 당시의 명문교인 코오베고등상업학교(神戶高等 商業學校)를 이수하고, 후에 일본 유수의 석유재벌(1940年代)로 성장하였으며, 九 十 장수(長壽)하는 의욕적인 인생을 누렸다. 이 같은 선현(先賢)들이 남긴 족적(足跡)은 올바른 건강관리가 개인의 인간적 승리를 위하여 얼마나 중요한가를 교훈(敎訓)으로 남겨 주고 있다. 2. 영양과 건강 (1) 영양과 생명현상(生命現像) 영양(營養; Nutrition)이란 "생명체가 성장하고, 활동하며, 번식하기 위하여 필요로 하는 물질을 몸 밖으로부터 얻어서 그것을 소재(素材)로 하여 신체조직을 만들고, 에너지를 획득하며, 몸속에서 일어나는 여러 가지의 대사과정(代謝過程)을 유지할 뿐만 아니라, 몸속에서 불필요하게 된 배설물들을 몸 밖으로 배출하는 일련 의 과정"이라고 정의된다. 생명체 속에서 일어나는 영양현상을 위하여 공급되어야 하는 영양소는 몸속에 서 하는 기능에 따라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열량소(熱量素; 당질, 지질, 단백질), 몸속의 생리작용의 조절기능을 담당하는 조절소(調節素; 수분, 무기염류, 섬유질, 비타민 및 단백질), 그리고 신체의 새로운 조직을 만들고 그 소모된 것을 보충해 주는 역할을 하는 구성소(構成素; 단백질, 지질, 무기질 및 수분) 등으로 나누인다

191 식물(食物)이 함유하는 영양성분은 소화기관에 의하여 몸속에로 소화 흡수되며, 흡수된 영양성분은 대사과정을 거쳐 에너지의 생산과 체성분의 합성, 재생 및 분해 과정을 통하여 생명현상을 발현하게 되며, 이 과정을 통하여 신체 기능의 항상성 (恒常性, Homeostasis)과 협동작용(協同作用, Cooperative action)에 의하여 생명 현상은 지속적으로 이어가게 되는 것이다. (2) 영양성분의 체내 이용 영양성분의 체내 이용과정을 보면, 식품중의 영양소는 소화관(消化管 ; 口腔 食道 胃 小腸 大腸 直腸(腎臟) 肛門(尿道)을 통하여 소화 흡수되어 체내 각 기관과 조직에 공급되고, 에너지의 소비, 체조직의 보수(補修)와 신생(新 生), 각 기관의 활성화(活性化)를 위하여 소비하게 된다. 인체의 구성과 식품 중의 영양성분과의 관계를 보면<도표- 1>, 인체는 식물(食 物)을 섭취하여 체성분을 합성하고, 한편, 분해하여 에너지를 얻고 있는데, 그 성분 구성을 대비하여 보면, 식품 중의 성분은 당질이 월등히 많은 것을 알 수 있다. 식품 성분/日 수분 인체의 성분(남자) 2 l 단백질 70 g 지질 50 g 당질 400 g 소화기관 수분 61 % 단백질 17 % 지질 16 % 당질 무기성분 0.5% 무기성분 및 비타민 수십 g 및 비타민 5.5% <도표- 1> 식품의 영양성분과 인체성분의 구성 이것은 식품 중의 당질이 몸속의 당질을 만들기 보다는 오히려 에너지의 산생 (産生) 에 많은 양이 소비된다는 것을 암시해 주고 있다. 여기서 영양성분이 성분별로 몸속에서 하는 일을 정리하면, 당질- 에너지의 산출(産出)과 일부 몸 성분으로 이용, 지질- 조직의 구성분, 에너지의 산출과 저장 수단, 단백질- 체성분의 합성을 위한 재료, 에너지 산생을 위한 예비물질, 무기질- 인체 지지조직(支持組織)의 구성분, 근육 및 신경조직의 기능과 체내의 수분평형에 역할, 신체 구성분 중 특수한 기능을 하는 체성분(헤모글

192 로빈, 갑상선호루몬 등)의 소재, 비타민- 미량이지만 필요불가결의 체내에서는 합성되지 않는 영양소로서 신체 영양현상을 지배하고 조절하는 기능 등의 용도로 이용된다. 여기서 영양소를 기능에 따라 분류하면, ① 에너지를 공급해 주는 열량소(熱量素) - 당질, 지질, 단백질 영양성분 중 몸속에서 많은 양으로 소비되는 열량소의 이용과 관련하여 보면, 열량소의 공급과 소비에 영향하는 요인: 열량소의 공급에 영향하는 요인- 기아(饑餓), 식욕(食慾), 식품의 종류 등, 열량소의 소비에 영향하는 요인- 기초대사량, 운동량, 식물의 소화 흡수에 소요되는 에너지소비량(식이성 발열효과) 등. 열량소가 산출(産出)하는 에너지의 양: 열량소(糖質, 脂質, 蛋白質)가 연소(酸化)에 의하여 생성하는 에너지의 양을 측 정한 결과에 의하면<표- 1>, 당질이나 단백질에 비하여 지질은 약 2배 이상으로 높은 에너지를 산출하는 것을 알 수 있다. <표- 1> 열량소가 산출하는 에너지량 열량소 Bomb 열량계 Rubner 계수 Atwater의 보정계수 당질 4.2 kcal/g 4.1 kcal/g 4.0 kcal/g 지질 단백질 인체가 소비한 에너지의 총소비량을 구하려면, 에너지의 총소비량 = 기초대사량 + 활동대사량 + 식이성 발열효과 기초대사량(BMR, basal metabolic rate)- 체표면적에 따라 비례, 1,000Cal/체표면적 1m² (by Rubner) 실측치; BMR = (체중)⁰⁷⁵/24hr 체중 Kg 당; 남성; 1.0kcal/kg/hr, 활동대사량(metabolic rate of 여성; 0.9kcal/kg/hr physical activity)- 운동량에 따라 활동대사량을 합한 아주 가벼운 활동; BMR의 20 40% 추가 가벼운 활동; BMR의 55 65% 추가 중등활동; BMR의 70 75% 추가 심한활동; BMR의 % 추가 식이성 발열효과(thermogenesis)- 값에 대하여 10%의 량을 가산, 기초대사량과

193 <산출 예> 인체의 에너지 소비량; 남자 성인(70kg 체중) 중등활동의 경우; (1.0 X 70 x 24) = 3,141.6 kcal/day 1.0- 남성 1.0kcal/kg/hr, 70-70kg 체중, 24-24hr, (1.0x70x24)의 75%, (1.0x70x24)+1176의 10%. 단백질의 권장섭취량(勸獎攝取量); 성장과 체중에 따라 성인; 필요량 x 125%= 0.825g/kg/일, ( 필요량은 0.66g/kg/일) 영아기(0 5개월); 1.52g/kg/일, 청년기(14 25세); 남자 0.9g/kg/일, 여자 0.85g/kg/일 <산출 예> 70kg 체중 남자 성인의 단백질 권장량; 0.825g x 70 = g/일 열량소의 섭취 비율(성인의 경우) ; 탄수화물 : 단백질 : 지방 60.8 : 14.2 : 25.0 ② 조절소(調節素)의 역할을 하는 비타민 비타민이란 "몸속에 미량(微量)으로 필요하면서도 몸속에서 만들어지지 않기 때문에 몸 밖에서 공급되어야 하는 영양소"를 가리키며, 지용성(脂溶性)과 수용성 (水溶性)의 비타민으로 나누인다. 지용성 비타민- 유지(油脂)에 가용성인 비타민으로 지질과 함께 체내에 흡수 되어 식이지방(食餌脂肪)의 양, 형태, 흡수 경로, 대사 등에 따라 크게 영향을 받는 다. 따라서 지방의 흡수나 대사에 이상이 생기면 지용성비타민에도 비슷한 영향을 받는다. 지용성 비타민은 소변을 통해 배설되지 않기 때문에 체내에 상당량이 저장 될 수 있으며, 따라서 과잉으로 섭취했을 때는 '과잉증(過剩症)'을 일으킬 수도 있다. 지용성 비타민의 기능과 많은 양으로 함유하는 식품: 비타민 A- 피부, 두발, 점막의 생성, 유지 및 건강에 관여, 세포분화와 관련 하는 기능, 시각관련의 기능, 뼈의 성장, 치아의 발육과 재생에 필 요, carotenoid의 항암작용 등. 식품; 황, 적, 록색 과채류(단근, 브록콜리, 시금치, 고구마류, 옥수수, 토마토, 감). 비타민 D- 혈장 칼슘의 항상성 유지에 역할, 뼈의 석회화(石灰化)와 탈석회 화에 관여하고, 면역조절 세포와 악성 종양세포(惡性腫瘍細胞) 등 세포의 증식과 분화의 조절에 관여

194 식품; 우유(D 강화유), 마가린, 참치, 연어, 간유. 비타민 E- 체내에서 항산화작용의 효과, 지용성 영양소의 2중결합의 보호, 노화지연(老化遲延), 암의 예방 및 돌연변이원(突然變異源) 생성 억제, 심혈관 질환의 예방. 식품; 식물유, 견과류, 소맥 배아, 전입곡류(全粒穀類), 녹엽채소류(綠葉 菜蔬類). 비타민 K- 혈액 응고인자(Prothrombin)의 합성과 뼈의 정상적인 대사에 도 움, 칼슘의 흡수에 역할하고, 혈액의 항응고인자(抗凝固因子)로서 작용 역할. 식품; 녹엽채소류, 양배추, 귀리, 동물의 간. 수용성 비타민- 비타민 B군 Vitamin B₁(thiamin), Vitamin B₂(riboflavin), niacin, pantothenic acid, biotin, Vitamin B₆ (pyridoxine),folate, Vitamin B12(co-balamin) 과 비타민 C가 해당된다. 수용성비타민의 기능과 많은 양으로 함유하는 식품: 비타민 B군- 주로 조효소로서 특정의 이온이나 원자단을 옮겨 주는 역할을 하며, 대사 진행을 도와주는 기능을 한다. Vitamin B₁(thiamin)- 당질로부터 에너지 대사에 역할, 신경전달계의 조 효소 기능. 식품; 전입곡류, 우유, 건조두류, 해바라기 씨앗, 견과류, 참치, Vitamin B₂(riboflavin)- 열량소의 산화-환원 반응에서 조효소로 작용. 식품; 견과류, 전입곡류, 우유, 오렌지, 감자, 어류, 육류. Niacin- 에너지 대사과정에 필수요소인 NAD와 NADP를 제공(TCA회로 및 지방의 산화 과정에서 전자나 수소공여체로서 작용). 식품; 전입곡류, 우유, 두류, 버섯, 쇠고기, 어류, 대사산물(tryptophan). Pantothenic acid- 홀몬과 신경전달물질의 형성, 열량소의 대사에 도움. 식품; 견과류, 콩류, 녹엽채소류, 우유, 바나나, 과일류, 감자, 소(돼지)간. Biotin- 카르복실화 반응 촉매효소의 조효소 기능. 식품; 땅콩, 호도, 난황, 간, 치즈, 우유, 대두, 밀, 효모. 비타민 B₆(pyridoxine)- 피리독살인산 형태의 조효소로 이용되며, 아미노 산과 단백질의 대사, 곧, 아미노기 전이반응, 탈아미 노반응, 탈탄산반응에 주로 관여

195 식품; 해바라기 씨앗, 콩류, 바나나, 우유, 녹황색야채류, 현미, 육어 류의 간. Folic acid- 적혈구의 형성에 필요, 유전자의 형성에 도움(THF; tetrahydro-folic acid)로서 DNA 복제와 세포분열에 필요한 티미딜산 (thymidylate, dtmp)의 생성에 필요한 탄소분자를 전이), 메치 오닌의 대사와 퓨린 고리의 생합성 과정에 조효소로서 관여. 식품; 녹황색야채류, 견과류, 두류, 우유, 바나나, 밀배아, 육어류의 간, 닭간, 달걀. 비타민 B12(Cobalamin)-적혈구와 유전자의 형성을 도움, 메티오닌의 합성, 신경섬유의 수초(髓鞘) 유지 등의 과정에서 조효소의 기능. 식품; 굴, 계살, 우유, 육어류, 가금류, 난류. 비타민 C- 콜라겐, 연골, 혈관조직의 형성에 중요한 역할, 항산화 활성, 철분의 흡수, 면역기능, 세포 구성물질의 합성 등의 반응에 관여. 식품; 녹채류(양배추, 시금치) 및 과일류(딸기, 오렌지, 토마토,), 우유, 고구마, 감자. ③ 구성소(構成素)와 조절소(調節素), 두 가지의 기능을 하는 무기질 인체의 구성분으로서 뿐만 아니라, 생리기능을 조절 유지하는데도 중요한 역할을 하며, 필요량에 따라 다량무기질과 미량무기질로 나누인다. 다량무기질(多量無機質, major-minerals): 양적으로 하루에 대략 100mg 이상을 필요로 하는 무기질. 칼슘(Ca)- 골격의 구성, 대사 조절 기능, 질환의 예방. 식품; 참깨, 치즈, 두부, 달걀, 케일, 녹색야채류, 우유. 뼈째 먹는 생선, 호도. 인(P)- 골격의 구성, 체성분의 형성, 비타민 및 효소의 활성화, 에너지대사, 완충작용. 식품; 곡류, 육류, 두부, 버섯류, 우유. 마그네슘(Mg)- 골격과 치아의 구성분, 효소의 조인자와 활성화작용, 에너지 대사에 관여, 신경자극의 전달과 근육운동에 관여. 식품; 전곡, 호박씨, 해바라기씨앗, 녹황색채소, 견과류, 두류. 나트륨(Na)- 삼투압 유지, 산 알칼리 평형유지, 근육과 신경계에 전기화학 적 자극 전달, 영양소의 흡수에서 Na -펌프의 역할. 식품; 식탁염, 간장, 된장, 가공식품. 칼륨(K)- 몸속 전해질의 평형 유지, 산 알칼리 평형 유지, 근육의 수축

196 이완 작용에 관여, 세포내 영양성분의 수준 조절. 식품; 곡류, 고구마, 두부, 바나나, 채소, 어류, 과일류, 우유. 미량무기질(微量無機質, minor-minerals): 하루에 매우 적은 양(100mg 이 하)을 필요로 하며, 몸속에 있는 전체 무기질 중 1% 이하로 존재하는 무기질. 생명 유지에 필수적인 미량무기질에는 철분, 아연, 구리, 요오드, 불소, 셀레늄, 망간, 크 롬, 몰리브덴, 코발트가 있고, 몸속에서 기능이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은 미량무기 질로는 실리콘, 니켈, 바나듐, 주석, 알 미늄, 붕소 등이 있다. 철분(Fe)- 산소의 이동과 저장 수단, 효소의 보조인자, 정상적인 면역기능 의 유지. 식품; 당밀, 곡류, 참깨, 육류, 곡물배아, 사과, 어패류, 해조류, 우유, 호박씨, 산채. 아연(Zn)- 체내 효소(영양성분의 대사 관여)의 구성분, 생체막의 구성 기능에 관여. 면역기능에 관여, 핵산의 합성에 관여. 식품; 곡류, 참깨, 육어류, 패류, 땅콩, 토마토, 사과, 우유. 구리(Cu)- 철분의 흡수 및 이용에 작용, 혈관 결합조직의 형성에 역할, 금속효소의 구성분. 식품; 참깨, 곡류, 육어류, 패류, 두부, 토마토, 땅콩, 기타. 요오드(I)- 갑상선 홀몬의 구성분, 식품; 곡류, 어류, 해조류, 우유, 채소. 불소(F)- 충치의 예방과 억제, 골다공증의 억제. 식품; 차, 해조류, 어류, 고구마, 자연수. 셀레늄(Se)- 글루타치온-과산화효소의 구성분으로 항산화작용에 역할, 비타민 E의 절약작용. 식품; 곡류, 육어류, 우유. 그 밖의 미량무기질; 망간(Mn)- 금속효소의 구성요소, 효소작용의 활성화. 식품; 견과류, 귀리, 전곡류, 참깨. 크롬(Cr)- 당질 및 지질 대사에 관여, 핵산의 구조 안정화. 식품; 땅콩, 계란, 동물의 간, 전곡, 견과류, 식물성기름. 몰리브덴(Mo)- 효소의 조인자(助因子; Co-factor). 식품; 육류, 전곡, 견과류, 우유, 과채류. 1 인체 조직을 구성하는 중요 무기원소: 경조직(硬組織; 骨格, 齒牙)- Ca, P, Mg

197 연조직(軟組織; 細胞, 筋肉)- K, Cl, P, Fe, I. 액조직(液組織; 血液, 體液)- Na, Cl, Ca, Mg, Fe, P. 2 인체를 구성하는 원소의 조성¹: 명칭 기호 비율(%) 명칭 기호 비율(%) 산소(酸素) O 65.0 염소(鹽素) Cl 0.15 탄소(炭素) C 18.0 마그네슘 Mg 0.05 수소(水素) H 10.0 철(鐵) Fe 질소(窒素) N 3.0 동(銅) Cu Ca 2.0 망간 Mn 인(燐) P 1.1 요오드(沃素) I 칼륨(加里) K 0.35 코발트 Co 흔적량 유황(硫黃) S 0.25 아연(亞鉛) Zn 흔적량 나트륨 Na 0.15 몰리브덴 Mo 흔적량 칼슘 ¹White 등, (3) 건강한 식생활을 위한 기본 건강한 식생활의 기본은 여러 종류의 식품을 알맞은 양으로 섭취하여 영양의 균형을 맞추는데 있다. 곧, 다양성(多樣性)- 한가지의 식품만으로는 필요한 영양소를 충족시킬수 없다. 따라서 영양소를 종류별로 고루 섭취하기 위해서는 영양 소의 분포에 따라 여러 가지의 식품을 고루 섭취하므로 서 몸속에 필요한 영양소의 공급을 충족할 수 있는 것이 다. 편식은 특정 영양소는 과잉으로 섭취하는 대신 다른 영양소는 몸속의 요구량을 공급받을 수 없게 되는 것이 다. 예로서 완전식품으로 알려져 있는 달걀에는 비타민 C가 결핍되어 있고, 칼슘이 부족한 반면, 우유 속에는 철분과 비타민 D가 매우 부족한 양이 들어 있다. 알맞은 양(適定量)- 영양소의 섭취는 필요한 영양소를 필요한 양 만큼 알맞

198 게 섭취하는 것이 중요하다. 영양소를 종류별로 과부족 (過不足)하게 섭취하면, 체내의 영양 불균형을 초래하게 되며, 이는 곧, 신체 기능의 이상(異常)이나 나아가서 불 건강(不健康)의 원인으로 결과하게 되는 것이다. 균형식(均衡食)- 모든 영양소를 고루 함유하는 식사를 가리키며, 6 가지 식 품군(1군- 곡류군, 2군- 고기 생선 계란 콩류군, 3군- 채 소류군, 4군 - 과일류군, 5군- 우유 유제품류군, 6군- 유 지 당류군)을 고루 섭취하는 것은 곧, 우리의 몸속에 필요 로 하는 영양소를 균형있게 공급하는 효과를 갖어 오게 되는 것이다. 이상,, 에서 나타낸 식생활을 위한 기본을 잘 지키는 것은 곧, 건강을 성 취하는 가장 기본으로 되는 것이다. 국민건강을 위하여 우리나라 보건복지가족부에서 제안(2009)한 "성인을 위한 식생 활지침"을 아래에 옮겼다. 첫째, 각 식품군을 매일 고루 먹자. 둘째, 활동량을 늘리고 건강 체중을 유지하자(매일 30분 이상/일/주당 4일 이상, 6 7km/일). 셋째, 청결한 음식을 알맞게 먹자(위생적으로 청결한 음식을 규칙적으로). 넷째, 짠 음식을 피하고 싱겁게 먹자(한국인의 현재의 소금 섭취량 약 13g/일을 약 5g/일까지 줄여야 하는 수준). 다섯째, 지방이 많은 고기나 튀긴 음식을 주려 먹자. 여섯째, 술을 마실 때는 그 양을 제한하자(남자- 2잔, 여자- 1잔). 이는 곧, 건강한 신체를 뒷받침하는 생활지침이기도 하다. 3. 생애(生涯) 중 영양의 중요단계 신체의 성장과정 별로 본 영양소의 공급방법과 인간의 생애와의 관계를 <도표2>에 나타내었다. 곧, 사람은 부모로부터 태어나면 누구나 성장 단계를 거쳐 각 자의 생애를 갖게 되며, 생애 중에는 자신의 신체조건과 생리적 요구에 따라 몸 밖에서 영양소를 지 속적으로 공급받아야만 한다

199 영양소의 공급형태 從屬營養期 인간의 생애 姙娠 出生 신체 상태 乳幼期(1 3歲) 幼兒期(4 13歲) 獨立營養期 성장기 靑年期(14 25歲) 활동기 壯年期(25 55歲) 老年期(55歲 ) 쇠퇴기 <도표- 2> 인간의 생애에 따른 영양소의 공급형태와 신체상태 몸속에로 영양소가 공급되는 방법은 크게 나누어 종속영양기(從屬營養期)와 독 립영양기(獨立營養期)로 나누어 생각할 수 있다. 종속영양기는 자기 스스로 신체가 요구하는 영양물질(혹은 食物)을 공급받지 못 하고, 생모(生母)나 다른사람에 의탁하여 영양소를 공급받는 기간을 가리킨다. 종 속영양기는 임신과 출생, 유유기(乳幼期)를 거처 유아기(幼兒期)까지가 해당되며, 이 기간은 개체의 영양상태가 의탁하고 있는 타인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기간으로 된다. 이때는 필요로 하는 영양소를 스스로 자기 의사에 따라 공급 받지 못하고, 양육하 는 생모(生母)나 유모(乳母)의 도움으로 영양소를 공급받기 때문에 영양문제는 전 적으로 자기 이외의 타인에게 의존하는 기간으로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기 간은 건강한 신체에로의 발육을 가져올 수 있는 일생중에 중요한 성장단계이기도 하다. 그리고, 이 기간은 일생 중 가장 성장이 왕성하고 신체상태가 활발한 활동을 하는 청년기(靑年期)를 대비하는 기간이기도 하다. 유아기(幼兒期)를 지나 청년기(靑年期)부터는 독립영양기(獨立營養期)로서 스스로 영양문제를 해결해야 하는 시기로 된다. 이때부터는 자신이 필요로 하는 영양문제 를 스스로 선택(選擇)하고 해결해야 하는 시기로서 인생으로서는 가장 활동이 왕성 한 시기일 뿐만 아니라 자기의 일생을 스스로 책임져야 하는 시기이기도 하고, 청

200 장년기(靑壯年期)를 거쳐 인생을 정리해야 하는 시기도 이 기간에 포함된다. 근년에 이르러 건강관리가 인생으로서의 성공을 가늠하는 중요한 열쇠로 된다는 인식이 널리 파급되어 국가적으로도 관련 복지시책에 정책적으로 많은 배려를 하 게 된 것은 국민건강을 위해서도 당연히 필요한 시책인 것으로 이해된다. 특히 장년기(壯年期, 25 55歲)에 건강하고 원기왕성(元氣旺盛)한 활동을 위해 서는 개인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의 발전을 위한 원동력이 된다는 뜻에서도 건강 한 생활인으로 활동을 지속하기 위하여 우리 모두가 실천하는 생활철학(生活哲學) 으로 뒷받침하여야 할 것으로 생각된다. 옛날에는 노년기(老年期, 55歲 )에 이르면, 무기력하게 소일(消日)하는 것이 많은 사람들의 생활 단면이었지만, 근년에는 장년기(壯年期)가 노년까지 연장되어 노년에 이르러서도 생산 활동에 참여토록 하고, 청년층(靑年層)을 선도하는 역할을 담당케 하는 등 부분적으로 선진사회의 모습을 보여주고는 있지만, 우리 인생의 사 회적인 수명을 연장함으로써 국가발전에 더욱 기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는 노년 기에도 건강을 위한 심신의 관리에 다각적인 정책 뒷받침이 있어야 할 것으로 생 각된다. Well-Aging Well-Growing Well-Being Well-Doing Well-Dying Good-Nutrition Life-Span <도표- 3> 인간의 생애(Life-Span)와 영양관리 이는 곧, 인간의 일생을 효과적으로 가꾸어 복지사회를 뒷받침하는 중요한 모멘 툼(momentum)으로 만들어 줄 것이기 때문이다. 곧, Well-Aging은 Good-Nutrition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을 의미하고, 여기서 Well-Dying은 노년기(老年期)에 있는 인간의 절실한 바램이기도 하다<도표- 3>. 이는 자연스럽게 오는 것이 아니라, 과거에 스스로를 어떻게 관리해 왔는가에 따라

201 영향하는 결과이며, 선진된 사회에서 인간생활의 일대기(一代期)가 행복하게 매듭 지어져야 할 전형(典型)이기도 하다. 노년기에 쇠퇴(衰退)하는 것은 인간만이 아니다. 존재하는 생명체 모두의 숙명(宿命)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식습관을 올바르게 갖는 것은 좋은 영양을 위한 건강한 식생활의 기본임을 잊어 서는 안될 것이다. 좋은 영양(Good-Nutrition)은 일생의 행복을 뒷받침하는 기본이 된다는 것을 다 시 한번 강조하는 바이다. 4. 아름다운 삶을 위한 지혜 우리 인간은 부모로부터 건강한 육체를 부여받은 후에 성인이 되기까지 부모와 가정과 사회의 도움으로 심신을 양육(養育)해 온 내력(來歷)의 존재이다. 그렇다면, 우리가 인생을 보람되고 뜻있게 산다는 것은 삶을 어떻게 살아가는 것 을 가리킬까? 행복한 일생은 자기 개인만의 것이 아니다. 사회와 국가, 나아가서 전 인류의 행복을 위한 출발인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건 강과 행복으로부터 나아가 전 인류를 바라보며 선진 한국으로 발돋움 하고 있는 오늘임을 잊어서는 안될 것이다<도표- 4>. 그 해답을 나는 자신이 처한 인생을 '스스로 아름답게 살아가는 것'이라고 답하 고 싶다. 따라서 '아름다움'이란 인생을 살아가는 궁극적인 목표이기도 하다. 건강한 肉體 건전한 精神 삶의 根幹 강인한 집념의 挑戰精神 성취의 幸福 보람 찬 人生 <도표- 4> 건강한 육체와 보람찬 인생

202 그러나 많은 삶들이 서로 접촉하며 살아가야 하는 숙명은 인간 서로의 본능에서 일어나는 욕구의 충돌이 원인이 되어 개개의 목표하는 아름다움을 잃게 되는 경우 가 세상사 인간관계에서 흔히 보이는 모습이기도 하다. 아름다운 삶이란 단순하게 인간의 감성에서 비롯된 예술작품을 통하여 추구하는 삶도 있겠으나, 인간 스스로 삶을 통하여 형이상학적(形而上學的)으로 연출하는 아 름다움 이상으로 아름다운 삶은 없을 것이다. 사람으로서의 도리를 다하면서 자신의 개발된 능력으로 인류사회에 공헌하며 살 아가는 순수한 인간적인 아름다움(人間美)이 곧, '아름다움의 예술'이며, 인간으로 부터 느껴 지는 인격적인 아름다움의 반영이 곧, 인간이 연출하는 '아름다움의 종 합적인 예술(藝術)'이라고 풀이하고 싶다. 맹자의 진심장(盡心章)에서 옮겨 온 '군자삼락(君子三樂)'을 떠 올리며, '인간의 참 아름다움(眞美)'을 되뇌어 본다. 一. 父母俱存하며 兄弟無故가 一樂也요, 양친 부모 살아 계시고, 형제가 무고한 것이 첫 번째 즐거움이요, 二. 仰不愧於天하며 俯不怍於人이 二樂也라, 우러러 하늘에 부끄럽지 않으며, 아래로는 인간에 부끄럽지 않는 것이 두 번째 즐거움이요, 三. 得天下英才而敎育之가 三樂也니라. 천하의 영재를 얻어 가르키는 것이 세 번째의 즐거움이니라. 곧, 사람을 가리키는 일이야 말로 인류문명의 발전을 선도하는 창조적 종합예 술(創造的綜合藝術)이라고 풀이하여 이를 두고 누가 지나친 견강부회(牽强附會)라 고 탓하겠는가? 자식 잘 기르고, 부모에 효도하며, 사회의 건전한 발전에 제 몫을 다할 뿐만 아 니라, 하루 하루를 스스로 뜻있게 살아가는 것, 이것이 곧, 삶을 아름답게 가꾸는 예술(藝術)이라고 되뇌이며, 말미(末尾)를 거둔다

203 참 고 문 헌 최 혜미 외(2011): 21세기 영양학원리, (주)교문사, 출판문화산업단지. 한국영양학회(2010): 한국인 영양섭취기준. 보건복지가족부(2009): 성인의 식생활지침. Nieman, Butterworth and Nieman(1992): Nutrition, Wm. C. Brown Publishers, IA, USA. Brody T.(1994): Nutritional Biochemistry, Academic Press Inc. Wardlaw G.M.(1999): Perspective in Nutrition, 4th ed., McGraw-Hill. US Department of Health and Human Sciences(2010): guidelines for Americans 成 百曉(1991): 懸吐完譯 孟子集註, (社)傳統文化硏究會 Dietary

204 자본주의 4.0시대 한국경제의 도전과 과제 이 호 영* 1. 경제체제의 필요성과 기본적인 개념 (1) 경제체제란 왜 필요한가? 1) 개인적 경제행위의 원칙(자이심에 의한 자기만족의 극대화) = 사회전체의 최대이익 혹은 경제문제의 최적한 해결을 보장 못함 2) 경제문제 해결 혹은 사회전체의 최대이익을 위해 사회전체에 적용될 기본적인 원리(체제원리) 필요 체제원리가 개인의 자이심에 의한 경제행위 규제 (2) 경제체제의 구분 생산수단의 소유형태 개인소유(자본주의) 사회공유(사회주의) 구분 시장가격(시장경제)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주의 시장경제 중앙계획(계획경제) 자본주의 계획경제 사회주의 계획경제 자원배분방식 (3) 기본적인 경제체제의 장단점과 경제성과 자본주의 시장경제 사회주의 계획경제 * 의의 생산수단 사유, 분권적 경제결정, 시장 기구에 의한 자원배분 생산수단 공유, 집권적 경제결정, 계획기능에 의한 자원배분 장점 단점 자유와 창의력발휘 공평성 달성에 로 생산성 향상, 자 한계 원 배분의 효율성 자유침해, 노동 공평성 달성 의욕의 저하와 비효율성 동아대 교수

205 (4)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붕괴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세계적 확산 1)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붕괴와 그 원인 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붕괴 *. 1985년 소련은 Perestroica 단행 소련붕괴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 붕괴 시장경제가 전 세계로 확산 * 베를린 장벽붕괴 동독 공산정권 붕괴 * 몰타 미소정상회담 : 냉전체제 종식 *. 중국 : 1979년 이후 개혁개방정책 추진 1992년 1월 등소평 남순강화 이후 사회주의 시장경제 도입 *. 베트남 : 1986년부터 Doi Moi Policy로 시장경제원리 도입 나) 사회주의 계획경제는 왜 붕괴되었는가? *. 국가의 계획적인 관리에 의해 생산량과 분배 결정방식 = 유리하게 보이나 결국은 그렇지 않음( 유인의 부족) *. 사회주의 계획경제 : 지식과 이성의 완전성을 전제(비 현실성) 2) 세계는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주류를 이루나 순수한 시장경제는 아님 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장점: 경쟁을 통한 효율성 증대 높은 경제성장 나) 자본주의 시장경제도 완벽하지 않음( 시장실패) 정부의 시장개입 필요성 등장 혼합경제화 소득의 불평등 분배, 경기변동, 실업 등으로 경제안정 유지의 어려움, 외부효과, 공공재 등 시장기능으로 해결 못하는 것도 존재 다) 한국경제도 엄밀하게는 순수한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아님(혼합경제) 라) (자본주의 시장경제가 혼합경제화해도) 경제 운영 : 시장기능( 계획기능)에 의존 시장기능 작동부재 경쟁부재 (제약) 능률저하 자본주의 시장경제 생명력 상실 2.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과정과 미래전망 (1)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단계

206 <서구자본주의 시장경제의 발전 단계> 서구자본주의 발전단계 기간 경제패러다임 자본주의 1.0 자본주의 2.0 자본주의 세기후반 1930년대 1980년대 -1920년대 말 -1970년대 말 -2008년 고전적인 수정자본주의 자유주의 복지국가 경제운영을 핵심정책 시장에 위임 기본사상 주요성과 문제점 자본주의 년 이후 공유가치 창조, 신자유주의 혁신, 성장, 실용주의 규제완화, 재정정책을 통한 민영화, 정부의 적극개입 시장기능 존중 정부역할 재발견 규제완화 재검토 M. Porter의 M. Friedman의 공유가치론 자본주의와 자유 A. Kaletsky의 Capitalism 4.0 자본주의 보강 A.Smith의 국부론 J.M.Keynes의 일반이론 산업혁명과 불황극복과 IT혁명과 (경제실용주의, 세계화 복지국가 건설 금융시장 세계화 정치보수주의, 근로의욕 감퇴와 글로벌 금융위기 금융감독 강화) 미국과 중국의 국가경쟁력 약화 대립과 갈등(?) 도시빈곤문제 세계대공황 (2008년) *. 자본주의 시장경제 : 18세기 말 영국에서 시작 대내외 여건의 변화와 자체의 취약점으로 주기적인 위기 직면과 자체적인 변신노력을 통해 더 나은 형태로 진화 *. Anatole Kaletsky, Capitalism 4.0 : The Birth of a New Economy in the Aftermath of Crisis : 자본주의 진화과정을 컴퓨터 소프트웨어 version처럼 진화단계에 따라 숫자로 이름을 붙여 자본주의의 발전단계를 4단계로 분류 1) 자본주의 1.0 : 고전적인 자유주의 가) 미국ㆍ프랑스의 정치혁명, 영국의 산업혁명과 함께 발전 나) 이론적 기반 : Adam Smith의 국부론 다) 산업화와 도시화에 따른 각종 사회문제 야기, 1930년대 세계대공황으로 불가피한 수정

207 2) 자본주의 2.0 : 정부주도의 수정자본주의, 복지국가 가) 미국 루스벨트 행정부의 뉴딜정책으로 시작 나) 이론적 기반 : J. M. Keynes의 일반이론, 영국의 Beverage Report 다) 과다한 복지재정 지출(미국 등 과 서구국가, 1970년대)의 효율성에 대한 회의론 제기 기존 복지국가 모델은 미국과 유럽 각국에서 1980년을 전후해 대대적 수정의 필요성 등장 경제 활력 실종, stagflation(stagnation + inflation)발생 3) 자본주의 3.0 : 신자유주의 가) 대처와 레이건의 자유시장 혁명 탄생 : 시장개방의 가속화, 민영화, 규제완화 동력을 잃고 있던 자본주의 시장경제에 활력을 불어넣고 세계경제 부흥 나) 이론적 기반 : M. Friedman의 자본주의와 자유 다) 민영화, 규제완화, 시장개방의 가속화는 또 다른 문제도 발생 *. 미국 캘리포니아 전력위기, 영국의 철도문제 무리한 민영화 *. 미국의 회계 관련 스캔들 규제완화 *. 세계시장이 하나로 통합되는 글로벌 경제시대의 무한경쟁 승자독식, 빈익빈(貧益貧), 부익부( 益 ) 등 부작용을 낳고, 급기야 이대로는 더 이상 지속 가능하지 않다는 근본적 한계 봉착 금융시장의 팽창과 위험성 증가(규제완화의 결과)는 글로벌 금융위기 (2009년 이후) 초래 *. 1930년대 대공황 당시와는 달리, 세계경제가 주요 국가들 간의 긴밀한 정책협조로 상대적으로 빠르게 위기국면 극복, 서구 자본주의는 지금 새로운 진화과정에 돌입(칼레츠키의 주장) 4) 왜 자본주의 4.0인가? 가)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새로운 위기 *. 카지노 자본주의 - 통제 없는 파생상품 거래를 통한 자산 버벌 확산 - 책임 없는 CEO지배구조는 탐욕과 사기가 만연하는 폰지 게임 조장

208 *. 자본주의 종주국인 미국과 EU의 저성장과 고실업, 고용 없는 경제회복, 미국과 영국의 소득분배 악화 미국 여론조사 결과 : 자본주의에 대한 긍정적 인식 50%, 부정적 인식 40%, 자본주의에 대한 젊은 층과 저소득층의 실망 확대, 미국 경제의 악화 및 비관적인 전망 확대 Occupy Wall Street, Occupy London과 같은 사회문제로 표출 1%와 99%의 대결양상 등장 *. 국가와 기업의 살아남기 위한 치열한 생존게임 : 강자가 살아남는 것이 아니라 살아남는 자가 강자가 되는 시대 돌입(Citibank, AIG, GM도 파산위기 직면) *. 따 먹기 쉬운 과일(low-hanging fruit)이 거의 소진 - 미국 : 지난 40년간 따먹기 쉬운 과일을 따먹으면서 잘 지탱, 국민들도 아직 과거와 같은 기대존재, 정부도 국민의 높은 기대충족 불가를 설득 이 아니라 그 가능성을 방치 미국의 정부와 가계가 수입의 한계를 걱정 않고 쉽게 빌려 씀 재정적자, 경상수지 적자, 가계부채 문제 초래 - 금융기관 : 정부의 느슨한 규제 감독체제하에서 쉽게 돈을 벌기 위해 정부와 가계의 씀씀이를 부채질 - 그리스 등 유로존 재정위기와 세계적 파장 국민과 정부가 쉽게 따먹을 수 있는 과일을 탐닉한 결과 나) 결과 *. 케인스주의자 및 반시장주의자 : 현행 미국 발 세계적인 경제위기 원인 = 자본주의 또는 신자유주의 해결책 = 정부의 시장에 대한 강력한 간섭적인 정책처방( 시장 기능적 정책처방) 근본적인 처방이 못 됨으로써 또다른 문제 발생 *. FT : 최근 상황을 자본주의의 위기로 진단 벌어지는 소득격차, 금융버블, 단기실적 위주 주주시스템 년 사이에 외환거래 규모는 234배 증가, 늘어 난

209 금융거래로부터 사회가 얻은 것은 부재 *. 다보스 제42차 WEF 세계경제포럼(스위스, 2012년) - 주제 : 거대한 변혁, 새로운 모델의 모색 - WEF, 글로벌 리스크 (2012년 보고서). 사회적 분열과 보호주의, 민족주의와 표퓰리즘에 휘말려 글로벌경제가 악순환에 빠져 디스토피아(유토피아의 반대말)의 세상도래 경고. 1%가 다 가져가는 시스템으로 자본주의 장점 사라져 탐욕, 불평등, 노동자 권리 침해 - 결과. 대전환을 위한 새로운 모색, 결과는 말잔치로 끝남. 신자유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자본주의의 모델을 제시하지는 못함 *. 포르투 알레그레 제12차 WSF 세계사회포럼(브라질, 2012년) - 주제 : 자본주의의 위기와 사회적ㆍ경제적 正義 - 핵심내용. 경제위기ㆍ공공정책ㆍ빈곤퇴치ㆍ기후변화 등에 관해 논의. 사회운동가들 / WEF 비판 : 자본주의는 원래 잘못된 것이므로 그 재건은 무의미 / 리우 + 20 (유엔지속가능개발회의, 2012년 6월) : 세계 주요도시에서 자본주의 반대, 환경적ㆍ사회적 정의 촉구를 위한 Occupy시위 촉구 - 결과 : 사회주의의 한계에 대한 극복방안을 제시하지는 못함 *. WEF와 WSF의 공통점과 차이점 - 두 포럼은 모두 1%와 99% 사이의 대결과 유사 - WEF는 親자본주의, WSF는 反자본주의의 입장의 차이 - 자본주의 위기에 대한 의견일치, 자본주의의 위기를 넘어설 대안의 발전모델 마련에는 성공 못함 다) 각국의 대응책 모색

210 *. 금융 분야의 정부감시의 확대 A. Greenspan류의 금융시장의 자율규제능력에 대한 신뢰 실추 영미식 금융자본주의에 대한 회의적 시각 확산과 대응책 등장 - G20 : Basel Ⅲ1)와 체계적인 금융기관 규제(파생금융상품 등) - 미국 : Volcker Rule2) 도입 - 프랑스 등 유럽 : Tobin Tax3), financial transaction tax4) 도입추진 - IMF : 일부 자본통제를 조건부 허용 *. 사회복지분야의 합리화 노력과 성과 - 영국 보수당의 Cameron 정부 : 재정과 복지부문의 개혁 가속화 - 스웨덴의 Reinfeldt정부 : 금융 분야에서의 규제강화, 재정긴축, 복지 혜택 축소 등의 개혁을 지속적으로 추진, 경제실적 측면의 큰 성과 라) 자본주의 4.0을 위한 과제 *. 직접민주주의 경향(여론조사와 SNS) 확대 : 자본주의4.0 정부(상충되는 목표 간에 인기 없는 선택)를 어렵게 함 자본주의 4.0 건설을 위해서는 새로운 사회비전을 제시하는 정치 지도자 역할이 가장 중요 1) 2) 3) 4) 바젤 III (Basel III, 은행자본 건전화방안)은 바젤은행 감독위원회에서 금융위기 재발을 막기 위해 내놓은 개혁안이다. 기존의 국제결제은행(BIS) 기준 자본 규제를 세분화하고 항목별 기준치를 상향 조 정하는 한편 완충자본과 레버리지(차입 투자) 규제를 신설한 것이 골자로서, 2004년 발표된 '바젤 II' 에 이어 6년만의 새로운 기준이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발표한 은행자산운용 규제책을 말한다. 이 은행개혁안은 폴 볼커(Paul Volker) 미 백악관 경제회복자문위원회(ERAB) 의장의 생각이 그대로 반영됐기 때문에 볼커룰로 이름 붙여졌다. 볼커룰의 목적은 금융시스템의 부실이 반복되는 것을 막기 위해 미국 은행 시스템을 상업은 행과 투자은행으로 분리하는데 있다. 이번 볼커룰은 은행 대형화에 따른 시스템 리스크 확대를 방지하 자는 목적 외에도 국민 여론을 반영해 은행업계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는데 목적이 있다. 토빈세(영어: Tobin Tax)는 국제투기자본의 무분별한 자본시장 왜곡을 막기위해 단기(短期) 외환거래 에 부과하는 세금이다. 경제학자 제임스 토빈이 제안하였기에 이렇게 이름붙여졌다. 통화거래세 (Currency transaction tax, CTT)라고도 하며, 세계 금융위기로 인해 주목받고 있다. 이는 장 기 자본투자나 상품, 서비스 교역을 방해하지 않는 수준에서 모든 외환거래에 세금을 부과하는 것을 말한다. 토빈은 통화시장의 개혁을 주장하였는데, 그 배경은 CTT가 거래비용을 높여 변동이 심한 금융 시장을 안정화하고 국가의 통화정책에 대한 자율성을 향상시키는 효과가 있다는 것이다. 미국에서 금융위기의 진원지인 월가의 금융거래에 세금을 추가로 부과해야 한다는 논의가 힘을 얻고 있다. 세금을 거둬 의료보험 및 금융감독 개혁 비용이나 경기부양 자금으로 사용하자는 안들이 쏟아지 고 있다

211 *. 자본주의의 자체적인 진화를 통한 시스템발전의 부정과 시위를 통한 해결방식으로는 대안모색 자체 불가 실패한 시스템의 건설적인 치유 부재, 시위는 성공적인 정치적 전략이 되는 것은 매우 드문 일이고, 극단적으로 혁명적인 상황에서 만 성공 가능 *. 합리적인 접근방법 : 자유주의와 시장경제원리(보수적 가치관) + 사회 적 연대의식(진보성향) 모색 *. 자본주의 2.0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강조됐지만 자본주의 4.0에서는 기업의 역할이 부각 시장과 기업의 생태계를 개혁하고 다시 정립 기업이 이윤만 추구할 게 아니라 사회의 유기적인 발전 도모, 경제 생태계 곳곳이 고루 혜택을 보는 따뜻한 자본주의 지속 가능한 경제, 지속 가능한 복지를 가능케 함 *. Michael Porter, 기업의 사회적 책임(Harvard Business Review, 2011) : 기업의 가치와 사회의 가치가 만나는 분야에서 공유가치 창출 The Economist(2011, 6, 11)의 지난 100년 간 IBM과 카네기재단의 사회적 공헌 실적비교 : M. Friedman의 전략(기업의 유일한 사회적 책임 : 이윤창출)을 추구한 카네기재단보다 포터전략을 추구한 IBM이 더 큰 성과평가 마) 자본주의 시장경제의 종말은 부재 *. 자본주의 시장경제 = 역사상 가장 생산적이고 성공적인 경제시스템 사회주의 계획경제 붕괴, 1980년 이후 중국의 1인당 GDP는 10배 성장했고 인도는 4배 성장 *. 자본주의 시장경제 = 역사상 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체제

212 자본주의 = 경제ㆍ정치적으로 탈중앙화 된 시스템으로서 유연성 보유 년대 위기(현재보다 더 심각) : 케인스는 발전기 고장으로 인식 하고 자본주의 틀 내에서 해결 년대 소비에트 체제 : 서구 모델보다 월등히 우수한 모델로 인정받았으나 적응에 실패하여 붕괴 권력과 정보가 중앙 집중화된 극도로 경직화된 체제 *. 자본주의 시장경제는 도덕적 우월성 보유 자본주의는 재산의 사적 소유를 보호하는 제도 또는 기구, 재산은 인간 생존의 필수품 자신이 소유한 재산으로 생산 활동을 하고, 그 결과물을 소유 = 정당하고, 생존과 행복을 추구하는 인간 본능 또는 목적과 부합 - 반자본주의 체제(사회주의, 복지국가주의, 간섭주의, 조합주의, 공산 주의 등) = 재산과 그 결과물의 사적 소유를 부정 부당할 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측면에서 타인의 노력과 재산으로 유지 불가 *. 자본주의 체제에 대한 불만과 불신의 현실적인 원인 - 소득분배의 불균형 지식기반경제, 세계화. 지식기반경제시대 : 교육수준의 고하, 전문성 및 기술력 고하간의 임금 격차는 산업시대보다 훨씬 큼 소득분배 문제의 심각화. 세계화추세의 가속화(out-sourcing, global supply chain의 확산) 교육수준과 전문성이 낮은 근로계층의 실업문제 고질화, 일자리는 생산성이 낮은 저임금수준의 서비스업 + 비 교역 서비스산업의 저 생산성과 비효율성에 따른 가격상승 근로자들의 생활수준 개선을 어렵게 함 보건, 의료, 교육, 사회보장 등 분야의 경쟁도입과 효율화 시급 WEF : 소득분배 악화개선책 = 교육개혁, 근로자들의 평생교육과 훈련 및 재훈련제도 강화를 위한 정부역할 제고, 민관 협력 강조 ( 자율적인 동반성장은 기업차원에서 시작) - 높은 실업률. 글로벌 금융위기 이전 : 성장은 고용으로 연결된다는 인식이 보편화. 최근상황 : 성장이 되어도 Jobless recovery현상, 저학력 근로계층과

213 청년실업 구조화 자본주의 지속을 위한 고용이 강조되는 성장요구 교육개혁과 근로자훈련제도 강화, 취업유발효과 제고를 위한 중소 중견기업의 육성, 기업과 정부의 협력강화 요구 - 결론 : 자본주의 대안 보다는 자본주의 체제 지속을 위한 보완책과 정부와 시장의 역할 조정이 요구 3. 한국자본주의의 발전과정과 대응과제 (1) 한국자본주의도 전환기적 혼란을 겪으면서 진화 <한국자본주의의 발전단계> 발전단계 한국자본주의1.0 한국자본주의2.0 한국자본주의3.0 약한 정부 강한 정부 민주 정부 특징 약한 경제 강한 경제 경제 강국 시기 년 년 년 자유만주주의, 자유주의, 대내 국가주의, 대외 기본사상 신 자유주의적 지향적 경제정책 지향적 경제정책 경제정책 인적자본 축적, IT강국, UN 사무 한강의 기적, 주요성과 시장경제 및 국가 총장국 및 G20 대외신인도 향상 기반확립 의장국 문제점 빈곤의 악순환 정치민주화 지연 양극화 심화 한국자본주의4.0 지속 가능한 한국 자본주의모델 정립 2009년 이후 자유주의, 시장 경제원리, 사회적 책임의식 지속가능한 경제 지속가능한 경영 지속가능한 복지 통일 쓰나미(?) *. 한국자본주 : 1945년 해방을 계기로 시작 한국자본주의의 역사는 일천 하지만, 그 진화과정은 서구 자본주의에 못지않게 역동적으로 급속도로 발전(서구 자본주의는 2세기에 걸쳐 발전) 1) 한국자본주의 1.0 가) 해방과 더불어 시작, 정치적으로 자유민주주의를 지향 실현시키지 못함( 한국사회의 미성숙) 나) 경제적으로 시장경제를 표방, 각종 정부규제 남발, 수출보다 수입대체를 중시하는 대내 지향적 경제정책 추진 빈곤의 악순환 못 살겠다, 갈아 보자 라는 구호 등장 결국 한국자본주의1.0은 4 19 민주화혁명, 5 16 군사혁명 과정을 거치면서 새로운 진화의 길로 전환

214 2) 한국자본주의 2.0 가) 박정희 정권 *. 빈곤문제 해결을 위한 경제성장 역점 *. 수출산업의 적극적인 육성 대외 지향적 경제정책으로 전환 *. 경제발전5개년계획의 성공적인 수립 집행( 군사정부의 강한 행정력) 전두환 정권에서도 지속됐고, 그 결과는 매우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 연평균 수출신장률 40%, 경제성장률 9%의 경제성과(한강의 기적) 한국경제와 한국기업에 대한 국제적 신인도 향상 나) 성공적 경제발전은 국민들의 민주화 욕구 제고, 정치적 민주화는 시대적 대세로 등장 3) 한국자본주의 3.0 가) 한국자본주의 2.0은 1987년 6.29선언을 전후해 새로운 진화의 길 강한 정부(한국자본주의 2.0의 기본 축)가 민주화로 붕괴 극심한 노사분규의 진통 실질임금 상승과 국제경쟁력 약화 나) 1997년 말 외환위기 과정에서 금융과 대기업부문에서 대대적 구조조정에 성공 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의 기반구축의 계기 마련 IT강국, 2010년 G-20의장국이라는 대내외적인 큰 성과 다) 한국자본주의 3.0의 성과에도 불구하고, 양극화 문제가 새로운 사회적 과제로 부상 *. 기본적인 원인 : 수출부문과 내수부문의 불균형 *. 1960년대 이후 한국경제성장의 견인차는 언제나 수출부문 수출신장이 고용확대( 고도성장초기 : 노동집약적인 수출산업), 실질임금 상승, 소득분배 개선 *. 수출산업의 자본 및 기술집약도 제고 수출신장의 고용확대 효과 축소 *. 외환위기와 글로벌 국제금융위기 과정에서 한국 원화의 상대적인 평가 절하, 수출시장에서 주 경쟁상대인 일본 엔화의 평가절상 한국 수출기업들의 가격경쟁력 제고 수출부문의 획기적 신장, 내수시장의 불황( 경제위기인 인한 소비심리 위축, 최근에는 내수 의 주요 부분을 차지하는 건설경기까지 침체) 수출부문과 내수부문의 경기격차는 사상 최고 수준

215 (2) 한국경제의 시대적 과제 : 자본주의 4.0의 기반구축 *. 한국경제 : 양극화를 비롯한 많은 문제점 봉착 정치사회적 혼란으로 연결 한국자본주의도 또 다른 진화과정을 요구받고 있음( 복지수준에 대한 불만족, 사회의 공정성에 대한 회의, 대기업 독주에 대한 반발, 정치권의 복지포퓰리즘 경쟁 등) 한국자본주의 4.0의 실천전략은 지속가능한 경제, 지속가능한 경영, 지속가능한 복지를 동시에 추진할 필요 1) 지속가능한 경제기반 구축 양극화 현상의 해소를 위한 각종 경제정책추진 <글로벌 금융위기이후 한국경제의 도전과 과제> *. 내수시장의 확대 양극화의 원인 = 기본적으로 수출부문과 내수부문의 불균형적 성장 *. 각종 부동산규제 정책들을 제로-베이스에서 전면 재검토 고 물가시대에 부동산 투기를 막기 위해 만들어진 것

216 *. 수출과 내수 간 균형을 이루는 방향에서 환율정책 운용 *. 서비스산업에 대한 각종 규제의 과감한 철폐, 생산성 향상을 위한 종합적 대책 마련 - 보건의료, 복지서비스, 환경, 교육 등 4대 서비스분야의 과감한 활성화 대책 추진( 고용유발효과가 크고 성장잠재력이 높고, 한국 서비스산업 은 선진국 생산성의 절반수준) <한국경제 부문별 특징과 과거 10년, 미래 10년의 환경> 부문 거시 경제 산업 고용 금융 현재 시스템 과거의 대내외 여건 미래 환경 방치할 경우 미래상 선진국장기 부진, 주요 신흥국 선진국 대안정기 긴축 수출둔화 + 신흥국의 부상 수출주도형 불확실성 증대 성장잠재력 둔화 교역량 증가 인플레이션 압력 경기변동성 확대 자유무역주의 증대 보호무역주의 한국 산업의 위상 IT와 전통 선진시장 성장과 신흥국 부상 확대 하락 주력업종 편중 환경/에너지 신흥시장 부상 및 기업 산업간 높은 중국시장 기술 부상 교역량 증가 격차 확대 의존도 한중일 3국간의 한중일 3국간 생산 활동의 단품 위주 전면전 전개 협력적 분업구조 변동성 확대 수출제품 이중구조와 효율성, 단기 저고용 + 질보다는 양에 성과에 초점을 맞춘 일자리 양극화로 이중구조 맞춘 일자리 창출 인력운용과 유연화 고용불안 심화 고용 없는 성장 전략 글로벌 과잉 금융부문의 유동성 선진국의 유동성 높은 대외의존도 영미식 글로벌 미약한 공급 확대 스탠더드 확산 금융위기의 반복 급격한 자본 자금중개 기능 금융기관의 유출입 취약한 고수익성 추구경향 금융시장 구조 심화

217 2) 지속 가능한 경영여건 정착 가) 정부보다 기업 활동이 더 중요한 시대 정부부문의 경쟁력 못지않게 기업부문의 경쟁력이 국가경쟁력의 핵심, 사회문제 해결에도 기업이 핵심적 역할 담당 나) 지속 가능한 경영의 과제 *. 대기업들이 마이클 포터의 공유가치창출 전략을 적극적인 추진 기업의 사회적 공헌전략을 기업경영 전략의 중심으로 설정, 이의 구현 을 위한 방향으로 기업조직 및 운영방식의 전면적인 재정비 *. 기업부문의 경쟁력 향상 한국기업들의 경영투명성 제고, 이사회의 감시기능 강화 최근 스위스 국제경영개발원(IMD) 국가경쟁력보고서 에서도 취약점 으로 지적 *. 경영권 승계과정도 보다 자유 경쟁적 방향으로 개선, 기업 내 의사소통 구조가 보다 개방적인 방향으로 발전 *. 지속적 학습 분위기를 조성해 구성원들의 창의성과 열린 사고를 촉진, 노사 간은 물론 하청업체 등 이해관계자들과의 상생문화 형성 3) 지속 가능한 복지를 위한 청사진 마련 사회복지정책의 기본적 틀로 발전 가) 복지파퓰리즘 담론은 문제를 안고 있지만, 이를 전면 부정하거나 또는 일방적으로 무시할 수는 없는 상황 *. 과거의 경험(1987년 불법적 노사분규가 사회적 혼란을 야기하고 한국경제 의 경쟁력을 잠식한 안타까운 상황) 시대적 대세로 인식하고 인내심을 갖고 대응 자유민주주의와 시장 경제를 한국자본주의 3.0의 기본철학으로 정착시키는 데 성공 *. 현재 진행되고 있는 여야 정치권 복지담론의 문제점 - 국가백년대계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단기적 대중 인기경쟁 차원에서 진행

218 유권자의 대다수는 더 많은 복지는 원하지만, 이를 위한 증세는 외면 - 핵심내용은 보편주의복지(무상복지)정책이고 재원조달 방식은 수익자부담 원칙이 아니라 세금을 더 거두는 일반조세방식 일반조세에 의한 재원조달은 수익자부담원칙보다 큰 국민적 저항 - 복지정책효과의 한계 모든 사람에게 언제나 똑같은 복지혜택보다는 필요한 사람에게 필요한 서비스를 필요한 때 제공할 경우 복지효과의 극대화 - 복지투자 우선순위의 간과. 한국은 아직도 복지사각지대 문제가 매우 심각. 한국은 아직 복지선진국이 되지 못한 상황(65세 이상 노인인구의 40% 이상 절대빈곤층, 노령층 자살률 증가)에서 복지사각지대에 있는 사람들 에 대한 대책소홀과 국가적 관심과 우선순위를 중산층과 고소득층을 위한 무상복지에 집중하는 것은 사회정의실현 차원에서 문제 중산층을 겨냥한 무상복지 주장은 John Rawls 정의론의 차등수정원칙 (가장 어려운 사람들에게 최대의 혜택 제공)에 반하는 것 가장 어려운 계층에게 더 많이 가야 할 재원을 중산층과 고소득층에 게도 저소득층과 똑같은 혜택을 주기 위한 재원으로 전환이 되어야 무상복지의 구현 *. 남 유럽사태의 본질(아테네대학교 하치스교수) - 국가부도 위기직면, 극렬한 국민적 저항은 선심성 복지에서 비롯됨 한 번 집행되기 시작한 정책은 중단하기가 곤란, 복지혜택의 단맛에 길들여진 국민들의 저항이 거세질 것이고, 개혁하기가 더 어려워짐 - 정부가 적극적으로 시장에 개입하는 복지국가론 : 복지파퓰리즘으로 흐르기 쉽고, 퍼주기식 복지는 한정된 재원을 고갈 시켜 지속 가능한 복지의 한계 초래 나) 지속 가능한 복지를 위한 접근방향 *. 한국자본주의 4.0는 경제와 복지가 동전의 양면이라는 전제에서 출발

219 지속가능성이란 경제와 경영에서는 물론 사회복지, 교육, 고용 등 사회 분야에서도 핵심적 정책방향 *. 자본주의 2.0에서는 정부의 역할이 강조, 자본주의 4.0에서는 기업의 역할이 상대적으로 더 부각 정부사업의 비효율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 형성, 경제는 물론 사회 분야에서도 기업의 상대적 비중은 지속적으로 확대 *. 복지포퓰리즘에 대한 소모적 정쟁을 중단하고, 국가백년대계 차원에서 복지분야의 투자우선순위와 방법에 대한 국민적 합의 도출을 위한 정치권의 역할이 요구됨 *. 지속가능 복지는 일자리 복지에서 출발 - 복지와 고용관련 중앙행정부서의 통합이 선행 - 지방정부의 복지전달체계를 공급자 중심(현재)에서 수요자 중심으로 개편 - 복지사각지대 해소,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각종 연금제도에 대한 보완 대책의 마련 4) 한국학 진흥원, 유교와 경영 포럼 가) 목적 : 한국경제성장을 위한 한국적 가치의 발굴과 재조명 나) 한국자본주의 변천과정과 그 주도원리 : 습득-초기자본주의( 20세기초중반) 체화-정부주도 계획경제( 년대) 불만누적-시장주도경제( 년대 중반) 위기-시장탐욕 억제(2000년대 중반-2010년대) 나) 한국자본주의의 과제 : 한국적 자본주의 창조단계 이행 한국경제의 주도원리 = 근본으로 돌아가 仁義와 利의 조화 시장경제의 학문적, 문화적 주체성을 회복, 2010년대 이후 서구이식 자본주의는 양극화 등으로 한계 *. 한국적 자본주의의 근본 : 기존 경제성장 방식의 부작용과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한 것( 자본주의적 경제성장을 위한 도구적 가치로서 유교) *. 유교자본주의론(동아시아 경제발전의 원인 : 근면 교육 가족 충효중시 문화, 집단주의 문화, 정부주도 개발방식 등)과 차이

220 4. 결론 (1) 지구촌적인 자본주의경제체제의 고민과 장기침체의 고민을 우리도 외면할 수 없는 상황 1) 한국의 소득분배, 실업, 재정상황과 경상수지는 서구 선진국에 비해 상대 적으로는 양호한 상황이나 이는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것 2) 지구촌적인 문제들에 잘 대응하지 않으면 머지않아 우리에게도 심각한 문제로 대두될 것이고, 이미 일부 사회, 정치문제화 3) 정치권은 선거철을 맞아 일자리 창출과 양극화 해소, 국민복지 향상이라는 미명하에 중구난방식 인기영합적 정책과 공약을 남발 4) 가계부채 1000억시대 국민 모두는 따먹기 좋은 과일논리에서 탈피해야 함 세계경제여건의 큰 변화, 한국경제 자체의 내용과 세계적인 위상도 변화 따먹기 쉬운 과일의 상당부분 소진 5) GATT-Bretton Woods 체제 소멸, 세계 9대 교역국(7대 수출국) Catch-up 이점이나 개발도상국 내지 신흥경제국으로서의 일부 이점 소멸 *. 한국의 정치권 : 우리 능력이상의 높은 국민적 기대를 현실에 맞추도록 설득하기보다 정부는 무엇이든 할 수 있는 것처럼 선전( 각종 복지와 관련된 무분별한 공약 제시) (2) 중장기적 안목에서 올바른 대응책 마련 1) 낮은 성장잠재력의 제고 노동의 질적 향상 적절한 교육개혁을 통한 지식경제기반시대에 알맞은 인력 공급( 과거 자본과 노동의 양적 증대) 가) 후발개도국으로서 국내외적으로 향유할 수 있는 low-hanging fruit는 거의 소진상태 나) 한국 : 단군 이래 가장 유리한 고지에서 국제경쟁을 하는 위치 지식경제기반시대 한국의 교육열은 세계최고수준 교육개혁을 국정 우선순위, 근로자의 평생교육과 훈련 재교육 제도강화 2) 자본축적을 통한 성장잠재력 향상 현재 생산성은 낮으나 고용창출효과가 높은 서비스산업 투자 활성화

221 가) 세계화시대 : 기업투자 여건을 다른 나라와 지역에 대한 비교우위 확충 나) 과감한 규제개혁, 개방과 경쟁 도입 MICE산업5)(보건, 의료, 관광, 컨벤션 등)과 물류 서비스산업의 효율성 제고, 양질의 일자리 창출 3) 한국 자본주의경제체제의 전반적인 효율성 제고 많은 산업분야 = Technological catch-up단계를 지나 Technological leader로서 원천적인 innovation노력 한국 : OECD국가 중 GDP대비 R&D지출은 높으나 기초과학과 원천기술 개발 등 분야의 정부투자 미흡 4) 사회적 거래비용축소를 통한 성장잠재력 제고 각종 법과 제도의 투명화와 선진화, 철저한 집행, 법질서 준수문화 정착 5) 한국경제의 근본체질 강화와 경쟁력 제고, 일자리 창출을 위한 중소, 중견 기업 육성 가) 2011년 한국경제 : 무역 1조 달러 달성(G9 진입), 세계시장 점유율 3.1% 나) 수출주종품목(조선, 반도체, 디스플레이, 휴대폰 등)은 세계시장에서 30-50% 점유율, 10대 주종품목 수출이 전체 수출의 50% 이상 차지, 이들 수출의 80%이상이 대기업이 직접수출, 수출 취업유발효과가 지속적인 저하 대기업과 대기업이 생산하는 수출품목에만 의존해서는 수출확대 불가 수출품목의 다변화 다) 대기업만이 아니라 중소 중견기업 성장을 통해 더 많은 일자리 창출 6) 사회안전망 구축과 사회통합 지식경제화 시대, 세계화시대의 특성 가) 한국의 현실로 보아 복지문제는 필요하고, 여야불문하고 모두 복지확대를 5) 회의(Meeting) 포상관광(Incentives) 컨벤션(Convention) 전시회(Exhibition)의 머리글자를 딴 용어로, 국 가적 차원의 종합서비스산업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폭넓게 정의한 전시 컨벤션 산업을 말한다. 2012년 여수 세계엑스포 같은 초대형 박람회를 비롯, 국가 정상회의, 각종 국제회의, 상품 지식 정보 등의 교 류 모임, 각종 이벤트, 전시회, 포상여행 등을 일컫는다

222 아젠다로 제시 나) 그러나 민주주의의 한계와 복지의 함정을 염두에 둘 필요 양당구도 정치 환경(특히 미래세대가 투표에 참여하지 못하는 대중민주 주의 체제)에서는 Median voter(중산층이하)가 정책결정 투표나 여론으로 정책을 결정시 지나치게 진보적인 성향으로 기울 가능성 복지제도 : 정치와 여론매체, 나아가 국가지배구조가 지나치지 않고, 대중 영합적이지 않고, 적절한 폭과 속도 결정 경제정책이 지나친 쏠림현상이 아니라 적절한 균형유지 중요 7) 국가위상에 걸맞은 역할과 책무를 다하고 적극적 리더십 발휘 가) 개도국지위를 유지하려는 생각을 정부와 국민 모두 폐기, 농업구조조정은 한중 FTA와 무관하게 추진해야 할 사안, 기후 및 환경변화에도 개도국이 아니라 선진국의 입장에서 적극대응 나) 도산 안창호 선생의 3가지 꿈 : 조국독립 달성, 경제 강국 건설, 세계인 으로부터 존경 받는 한국인상 형성 *. 각종 정치활동을 통해 좌파와 우파를 아우르는 노력을 경주했으나 생전에 성공하지는 못했음 *. 조국독립, 경제 강국 건설의 꿈은 상당부분 달성 *. 시대적 당면과제 : 대내적으로는 보수와 진보를 아우르고, 대외적으로는 세계인으로부터 존경 받는 한국인이 되는 것 한국인들이 지금 시점에서 갖추어야 하는 리더십 덕목 : 愛己愛他(자기를 사랑하면서, 자기를 사랑하듯 남을 사랑하라)

223 萬海의 愛國과 詩心 金 泰 詢* Ⅰ. 들머리 국권(國權)의 회복과 민족의 自存을 위해 66年의 생애(生涯)를 불같이 얼음같이 살다 가신 萬海 先生은 平和와 平等, 生命의 존엄성을 지키려는 선사(禪師)로서의 면모와 佛敎에의 헌신(獻身), 民族의 良心과 知性으로서 온몸과 영혼을 불태우신 독 립구국(獨立救國)의 활동, 그리고 近代文學의 선도자(先導者)로서, 타고난 정열과 감 흥으로 님의 침묵 이란 거창한 시탑(詩塔)을 쌓아올린 大詩人으로서의 크고 빛나는 족적(足跡)을 남기셨습니다. 卍海先生의 一生은 오롯이 항일 민족운동의 최일선에서, 그 삶이 곧 일제에 대한 저항이요 독립운동이었다. 또한 悲運의 가정을 저버리고 출가한 이후 山中佛敎에 머물지 않고 民族佛敎, 生活佛敎, 大乘護國佛敎로의 指向으로 과감한 불교 유신(維 新)을 외치고 이끄셨습니다. 先生은 文學人으로서 위대한 詩人이었으니 님 을 向한 올곧은 心性과 뜨거운 情念으로 産出된 님의 沈黙 88편의 시편(詩扁)마다 두보 (杜甫)나 타골보다 더 큰 감동으로 울립니다. 先生의 文學은 自由詩에 국한되지 않 고 시조, 소설, 수필, 한시(漢詩), 선언서 등 다방면에 걸쳐있습니다. 萬海先生은 백절불굴(百折不屈)의 革命家였고 現實에 발을 둔 개혁적인 승려였으 며 不世出의 위대한 詩人이셨습니다. 공교롭게도 오늘 6월 29일, 66年의 벅차고 고 된 생애를 마친 萬海禪師의 입적(入寂) 68주년 되는 날에 그분의 족적을 다 살필 수 없지만 先生의 겨레사랑 곧 失國의 主權 되찾기 愛國과 詩心을 대충이나마 살펴 보고자 합니다. Ⅱ. 萬海의 主要年譜 前半 少靑年期는 기록의 不實 또는 不傳으로 명확하지 못함 나 이 1세 * 연도 월.일 내 용 충남 홍성군 결성면 성곡리에서 父 淸州 韓氏 應俊과 母 溫 전 내성고 교장

224 (음7.12) 陽 方氏 사이의 次男으로 태어남. 아명은 유천(裕天), 호적엔 정옥(貞玉), 계명은 봉완(奉玩), 법명은 龍雲, 법호는 萬海(卍海) 4세 1882 아버지에게서 글공부 시작. 千字文 童蒙先習을 배우다. 6세 1884 향리의 서당에서 통감 등 漢文을 수학하다. 신동, 才童이란 말을 듣다. 8세 1886 홍성 읍내로 이주함. 9세 1887 서상기(西廂記)를 읽고 통감, 서경 등을 통달하다. 14 세 17 세 18 세 19 세 20 세 26 세 27 세 향리에서 天安 全氏 정숙과 결혼. 처가에 거주하며 공부한 듯함. 동학군의 전봉준 처형. 뒤이어 父母님과 兄 內外도 곤장 맞고 절명했다는 설 향리의 서당에서 훈장 노릇하다가 심기일전 속리산 법주사를 거쳐 설악산 오세암에 들어 불목하니를 하며 공부하다 오대산 월정사 강원 수학 1898 설악산 백담사로 옮김. 사미계수계 월 세 30 세 월 맏아들 보국(輔國)이 태어남. (자라서 절간의 아버지를 찾았으 나 냉대 받고 보국 내외는 북한에서 살다가 1977년에 사 망했다고 함) 이 무렵 처가에 피신한 동한 아내 全氏도 매 맞아 후유증으 로 사망함. 고향을 떠나(19세. 25세 설도 있음) 강원도 오대산 월정사, 설악산 백담사 등지를 전전하다가 1월 26일 백담사에서 김연 곡(金蓮谷) 스님을 스승으로 득도(得度) 전영제(全泳濟) 스승 에게서 수계(受戒). 이학암(李鶴庵) 스승에게 기신론, 능엄경, 원각경을 배움. 강원도 건봉사에서 안거하며 선(禪) 수업을 함. 이때 서여연 화라는 보살의 求愛를 받음. 이즈음 세계견문을 위해 백담사에서 下山해 러시아 블라디보 스톡으로 건너갔으나 일진회 첩자로 오인당해 죽을 고비를 넘 기며 되돌아와 咸南 안변 석왕사 등 이곳저곳을 전전함. 강원도 유점사에서 서월화 스승에게 화엄경을 공부함. 일본 마관 경도 동경 등지를 주유하며 신문물을 시찰, 서양철 학을 공부함. 이때 유학중이던 최린과 사귀고 10월 귀국. 강 원도 건봉사에서 반야경, 화엄경을 공부함. 12월 서울에 측량 강습소를 개설, 국민 개인 및 사찰토지를 수호하도록 계도함

225 31 세 32 세 강원도 표훈사 불교강사에 취임 승려 및 비구니들의 결혼허가 청원서를 중추원에 제출함 이완용 등 매국역신에 의한 한일병합강제조약 체결됨 백담사에서 조선불교유신론 을 탈고함 박한영, 김종래, 진진응, 장금봉 등과 순천 송광사에서 승려 궐기대회를 개최. 종문난적(宗門亂賊) 이회광을 몰아내 일본 조동종(曹洞宗)과 체결한 일한불교동맹조약을 분쇄키로 하고 조선 임제종(臨濟 宗) 종무원을 설치하여 관장에 취임. 5월 5일 조선 임제종을 동래 범어사로 옮김. 中國 東北三省을 주유하여 독립군의 정세를 살피던 중 통화 현 굴라재에서 왜의 첩자로 오인돼 총격 받고 마취없이 총알 제거 수술 뒤 귀국함. (이후 체머리(요두증)를 앓음) 통도사 불교강사 취임. 조선불교유신론 을 불교서관에서 간행. 불경전의 대중화를 위해 불교대전 편찬을 계획. 통도사 의 대장경을 열람하다. 불교대전 을 범어사에서 간행. 출판비는 연인 서여연화 보살의 협찬으로 충당함. 조선불교회 회장으로 취임 영 호남의 사찰(범어사 쌍계사 통도사 내장사 화엄사 백양사 선암사 송광사 해인사 등)을 순례하며 강연회를 열어 열변함 으로써 청중들 감동케하다. 봄에 정선강의 채근담 을 신문관에서 간행. 밤 10시경. 오세암에서 좌선하던 중 바람에 물건 떨어지는 소리를 듣고 그동안의 의심스런 생각들의 진리를 깨치고(擬 情頓釋) 오도송 을 남김. 월간지 유심(惟心) 을 창간. 조선 청년들의 수양, 전도 개 척, 인고, 자주정신 등을 고양하는 글을 씀 오세창, 최린 등과 조선독립을 모의 三一운동을 주도. 최남선 이 쓴 독립선언서 의 자구수정 및 公約三章을 첨기함. 동 지 33人의 서명을 이끔. 태화관에서 민족대표로 독립선언을 낭독하고 일경에 체포됨. 투옥때 三不(변호사, 사식, 보석) 투쟁원칙을 결의 실천함. 서대문 감옥에서 일인 검사의 심문에 조선독립에 대한 감 상의 개요 를 기초해서 답하다. 독립신문에 조선독립이유서 로 (휴지에 적어 돌돌 말아 면회객에 전달) 발표되어 조선민중을 감동케 함 세 1911 가을 35 세 36 세 37 세 겨울 4월 월 세 40 세 ~2월 41 세

226 42 세 43 세 45 세 46 세 47 세 48 세 49 세 50 세 51 세 52 세 53 세 54 세 55 세 공판 4일째. 사실 심문에 조선독립은 민족의 자존심 으로 답변 경성복심법원 : 손병희 등 민족대표 48명에 대한 판결. 한용 운, 손병희, 최린, 권동진, 오세창, 이종일, 이승훈, 함태영 등 8인은 최고형 3년형을 처함. 옥중 참회서를 써내면 사면한다 는 회유에 단호히 거부 오세창, 이종일, 김창준, 함태영 등과 함께 가출옥 월 4.18 조선물산장려운동을 적극 지원. 민족교육을 위한 민립대학 설립 운동 강연에서 自助 라는 연제의 웅변으로 청중을 감동케 함. (종로청년회관) 대한불교청년회 초대총재에 추대됨 설악산 백담사에서 시집 님의 침묵 탈고 님의 침묵 을 회동서관에서 발행 6.10만세운동 예비 검속으로 선학원에서 구속되다 가갸날(뒤에 한글날)에 대하여 를 동아일보에 발표 조선인 자구단체인 신간회 발기인으로 單一民族으로 左 右 合同케 하고 5월에 신간회경성지회장에 당선. 조선불교청년회 를 개편 조선불교총동맹 으로 개칭하 고 제자들인 김법린 김상호 등과 일제의 불교탄압에 맞서고 불교 대중화에 노력하다. 전문지식을 갖추자 란 논설을 별건곤 지에 발표 아들 한보국이 신간회 홍성지회 간사로 활동 김병로 송진우 조병옥 이인 이관용 서정희 등과 함께 광주학 생의거를 전국적으로 확대시키고 민중대회를 열어 예비검속 으로 구금됨. 논설 소작농민의 각오 를 조선농민 지에 발표 김법린 김상호 이용조 최범술 등이 조직한 청년승려비밀결사 만당(卍黨)의 영수로 추대되다. 전주 안심사에 보관되어 있던 한글 경판 원본 (금강경 원각 경 부모은중경 유합 천자문)을 발견 조사 발표하다. 국보적 한글경판의 발견경로 를 불교 지에 발표. 전주 안심사에서 찾은 한글 경판을 인출(印出)하다. (총독부 에서 인출 비용 제공하겠다 했으나 단호 거절, 고재현 등의 출자로 간행) 이즈음 일제의 식산은행이 소위 文化정책으로 조선 명사들을 매수. 선생에게 성북동 일대의 국유지를 주겠 다 했으나 거절함 유(兪)숙원 씨와 재혼하다. 시베리아 거쳐 서울로 를 三千里 지에 발표 월 월 8월 월 월 5월 7월 월 월 월 9월

227 10월 56 세 ~13 57 세 58 세 59 세 60 세 61 세 62 세 64 세 65 세 딸 英淑 태어남 회고담 북대륙의 하룻밤 을 조선일보에 발표. 장편소설 흑풍 을 조선일보에 연재 ( 까지) 이즈음 민족종교 대종교(大倧敎) 교주 나철(羅喆)열사의 유고 집 간행을 추진 단재 신채호(申采浩)선생의 묘비를 세우다(글씨는 오세창). 건립비용은 조선일보에서 받은 원고료로 충당함. 안재홍 정인보 등과 서울 공평동 태서관에서 다산 정약용(丁 若鏞)의 서세(逝世)백년 기념회를 개최 재정난으로 휴간된 불교 지 속간 신불교 제1집을 냄 광복운동의 선구자 金東三 열사가 옥사하자 유해를 심우장에 모셔다 5일장으로 예장함. (유언따라 화장하다.) 2월 3월 11월 논설 불교청년운동을 부활하라 를 불교 신집에 발표. 공산주의적 반종교이상 을 불교신집에 발표. 만당(卍黨) 당원들이 일제에 피검되고 만해 선생도 더 강한 감시를 받다 回甲(음력 7월 12일)을 맞아 김관호, 박광, 이원혁, 장도환 등이 中 心되어 서울 동대문 밖 청량사에서 회갑연을 베풀다. 오세창, 권동 진, 홍명희, 이병우, 안종원 등 20여명이 참석함. 민족독립운동의 밀회장소인 경남 사천시 곤양면 다솔사에서 김법린 최범 술 등 몇 명의 동지와 후학들이 베푼 회갑연에 참석하고 기념식수를 함 자립력행의 정신을 보급시켜라 는 논설을 신흥조선 지 창간호에 발표. 이해 벽산 스님이 집터를 제공 방응모, 박광 등 몇분의 성금으로 성북동에 심우장(尋牛莊)을 짓다. 총독부 돌집을 보기 싫다고 굳이 東北向으로 지어 卍海先生의 강골 (强骨)함을 여실히 드러내다. 2월 5월 논설 불교의 과거와 미래 를 [불교] 신집에 발표. 수필 명사십리 를 [반도산하]지에 발표. 이즈음 신사참배, 호적등재, 일제의 창씨개명에 대항. 박광, 이동하 등과 격렬한 반대운동을 벌임 1942 박광, 신백우, 최범술 등과 신채호 선생 유고집을 간행키로 결정하고 원고수집에 몰두함 1943 조선인 학병의 제2차세계대전(일제의 대동아전쟁) 출정 반대 운동을 펼치다

228 66 세 (음 5.9) 오랜 세월 일신의 平安을 저버린, 즐풍목우(櫛風沐雨), 풍찬 노숙(風餐露宿)으로 극도의 쇠약과 영양실조로 심우장에서 入寂逝世하시다. 제자인 박광 김관호 등이 유해를 모시고 미아리 화장장에서 다비(茶毘)하고 망우리 공동묘지에 안장함. 세수 66년. 법랍 39년 Ⅲ. 愛族救國의 化身-萬海의 愛國歷程 1. 安重根烈士와 만해는 1879년 同甲으로 태어나셨다. 우리 民族을 대신한 安장 군의 영웅적 장거는 세계를 놀라게 한 永世不忘의 고귀한 희생이었다. 安義士와 만 해는 만난적 없으나 두 분은 東學운동 소용돌이에 젊은 피가 끓었던 靑年이었다. 安 義士와 萬海는 이때 서른 고개를 넘는 때였다. 安의사가 한일병합의 원흉 이토-히 로부미의 저격을 획책할 때에 만해는 세계 情勢와 신문명을 접하기 위해 일본의 경 도, 동경 등지를 주유했으나 이것은 유람이 아닌 견문 쌓기였고 救國의 탐색이었으 며 결의의 다짐이었다. 만해가 목숨을 걸고 총칼을 잡지 않았으나 그의 一生을 되짚 어보면 한결같이 愛族 愛國으로 일관한 志士의 길이요. 투쟁의 역정이었다. 2. 만해는 동학운동에 협찬한 연루로 父母와 兄 內外가 모두 장살되는 아픔을 안 고 책 읽으며 독학하던 처가에서 몸을 일으켜 동학군에 들어가 밤낮없이 뛰다가 질 서 없는 동학군에 회의를 품고 새로운 목표와 이념으로 나라를 되찾겠다는 각오를 다지고 고향을 등지고 山속 절간으로 들어간다. 설악산 오세암으로 들어가 불목하 니로 일하며 경전공부를 시작, 월정사 백담사로 전전하며 생각을 키우다가 처가에 들렀을 때 아내가 출산을 맞아 아들 보국(保國 또는 輔國)을 낳았으나 그는 妻子에 얽매이기엔 애족구국의 뜻이 크고 굳었기에 곧장 出家하기에 이른다. 설악산 백담 사에 들어가 金連谷和尙에게서 득도하고 龍雲이라는 法名으로 승려가 된다 년 乙巳늑약으로 조선사람 가슴에 들끓는 울분과 도처의 의병활동과 열 사들의 自決 등을 접하며 만해는 즐풍목우(櫛風沐雨) 풍찬노숙(風餐露宿)을 겪는 고 난의 길로 들어선다. 29세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로 들어가 독립군의 실정을 알 아보던 중 일진회 첩자로 오해 받아 죽을 고비를 넘기고 되돌아온다. 다음 해 다시 세계의견문과 신지식을 알고자 일본으로 건너가 대학 청강으로 서양철학을 공부했 다. 이때 유학 중이던 최린을 만나 나라의 앞날을 논하며 사귀고 귀국한다. 이때 만 해는 측량기구를 구입해서 들어와 서울에 측량강습소를 개설 일제에 토지(개인 또

229 는 사찰 소유의)를 빼앗기지 않도록 지도했다. 33세 되던 가을에는 독립군을 만나 러 中國 동북 삼성을 주유하다가 왜의 첩자로 오인돼 총격을 받고 金東三 장군 등 의 도움으로 총알제거 수술을 마취 없이 받고 구명된다. 귀국길에 안변 석왕사를 거 쳐 강원도 유점사 등에서 수학하다가 만해의 체머리는 이때의 총격으로 인한 것이 라고 한다. 4. 만해의 애국애족 사상과 결의가 확연히 나타난 것은 1919년 己未년 三一獨立 宣言의 준비와 선포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고 담력과 용기로 앞장서 실천한 일이 었다. 오세창, 최린 등과 독립선언을 모의하고 동지들을 규합, 당대의 靑年文章家 최남선으로 하여금 선언문 작성을 지도하고, 公約三章을 첨가하는 등, 天下의 名 宣 言文을 만들어 태화관에서 낭독하고 조선독립만세를 외치고는 일경에 체포 투옥된 다. 이즈음 만해는 불교계 대표로서 백용성을 함께 이끌었고 중앙학림(현 동국대) 후배 김법린 백성욱 등 많은 학생들이 선언서를 뿌리도록 지도한다. 감옥 안에서도 독립운동은 계속되어 일본 검사의 심문에, 아무 서적이나 자료도 없는 감옥에서 붓과 종이를 요구 三 一조선독립에 대한 감상의 개요(독립선언이유 서) 를 썼다. 만해는 독립선언 동참을 권유받은 이상재가 거절함에 절교를 선언한 다. 뒤에 부왜(附倭)로 돌아선 최린의 방문이나 돈 협조는 끝끝내 거절하는 등(최린 이 몰래 두고 간 거액의 돈을 기어코 최린의 집에 던져 넣었다.) 그 뜨겁고 굳은 지 조와 결의는 꺾기지 않는다. 뒤에 독립운동에 대해 소극적인 최남선을 조우해서 문 안을 받음에 육당은 죽었다 며 돌아섰다는 것이다. 先生은 歷史的 時代精神을 읽고 世界進運을 꿰뚫은 큰 思想家요 先覺者로서 항일독립의 길에서는 일보의 후퇴나 타 협을 용납치 않은 강골지사였다. 公約三章 一. 今日(금일) 吾人(오인)의 此擧(차거)는 正義人道(정의인도)生存尊榮(생존존영)을 爲(위)하는 民族的(민족적) 要求(요구)이니 오직 自由的(자유적) 精神(정신)을 發揮 (발휘)할 것이요. 결코 排他的(배타적) 感情(감정)으로 逸走(일주)하지 말라. 一. 最後(최후)의 一人(일인)까지 最後의 一刻(일각)까지 民族(민족)의 正當(정당)한 意思(의사)를 快(쾌)히 發表(발표)하라. 一. 一切(일체)의 行動(행동)은 가장 秩序(질서)를 尊重(존중)하여 吾人의 主張(주장) 과 態度(태도)로 하여금 어디까지든지 光明正大(광명정대)하게 하라

230 朝鮮獨立에 對한 感想의 槪要 一. 槪 論 二. 朝鮮 獨立宣言의 動機 (1) 朝鮮民族의 實力 (2) 世界大勢의 變遷 (3) 民族自決條件 三. 朝鮮獨立宣言의 理由 (1) 民族自存性 (2) 祖 國 思 想 (3) 自 由 主 義 (4) 對世界의 義務 四. 朝鮮 總督政策에 對하여 五. 朝鮮獨立의 自信 自由는 萬有의 生命이요 平和는 人生의 幸福이라, 故로 自由가 無한 人은 死骸와 同하고 平和가 無한 者는 最苦痛의 者라 壓迫을 被하는 者의 周圍의 空氣는 墳墓로 化하고 爭奪을 事하는 者의 境涯는 地獄이 되느니 宇宙의 理想的 最幸福의 實在는 自由와 平和라. 故로 自由를 得하기 爲하여는 生命을 鴻毛視하고 平和를 保하기 爲 하여는 犧牲을 甘飴嘗하느니 此는 人生의 權利인 同時에 또한 義務일지로다. 그러 나 自由의 公例는 人의 自由를 侵치 아니함으로 界限을 삼느니 侵掠的 自由는 沒平 和의 野蠻 自由가 되며 平和의 精神은 平等에 在하니 平等은 自由의 相敵을 謂함이 라. 故로 威壓的 平和는 屈辱이 될 뿐이니 眞自由는 반드시 平和를 保하고 眞平和는 반드시 自由를 伴할지라. 自由여 平和여 全人類의 要求일지로다. 5. 출옥 후에도 만해의 민족해방 조선국독립 을 향한 의지는 꺾김이 없었다. 조선물산장려운동, 민족교육을 위한 民立大學 설립운동을 펴고 대한불교청년회 초 대총재에 추대되어 일제의 조선불교 및 사찰의 일본화에 단호히 맞섰다. 인도의 타 골을 뛰어넘는 詩集 님의 침묵 을 발표하여 우리 민족의 자유와 독립을 가슴으 로부터 절감케 하고 나와 겨레, 나와 조국, 나와 부처, 나와 애인이 不二요 不異임 을 깨닫게 한다. 나의 애인은 내 겨레요, 내 조국이었다. 지금 갔지만 반드시 돌아 온다는 民族解放 朝鮮獨立의 光復을 확신케 한다. 또 민족의 자랑인 한글을 기리는 가갸날(한글날) 제정을 기뻐하며 광고하는 글을 발표한다

231 6. 山中에 갇힌 불교를 현실에 발 디딘 生活佛敎 護國佛敎, 새로운 朝鮮의 佛敎 로 바꾸기 위해 승려의 결혼 허용, 재가승려-子女 생산도 늘이고 노동력도 확보하 는 등 국력 배양을 도모하는 불교의 유신을 선도하고 한편으로 제자들인 김법린, 김 상호 등과 일제의 불교 탄압에 맞선다. 또한 조선인 左右合同 민족단일전선 단체인 신간회를 발기 참여하고 서울지회장으로 활동하면서 광주학생의거의 전국확산을 이 끈다. 또 전문지식을 갖추자 자립역행의 정신을 보급시켜라 등의 논설을 발표 하여 자주 협동 자립정신을 고취시킨다. 7. 一生을 빈곤과 역경 속에서 독립된 국가와 자유의 민족 지키기에 헌신하는 동 안 先生의 연세가 노경(老境)에 들어 주위 동지의 도움으로 성북동에 거처할 집 심우장 을 짓게 됨에 일제총독부가 보기 싫다고 東北向으로 세웠다는 얘기는 많 이 알려졌다. 또한 민족종교 大倧敎 교주 나철 열사의 유고집 간행, 옥사한 민족사 학자 신채호 선생의 묘비 건립 및 유고집 간행을 주도한다. 동지들과 함께 신사 참 배 반대 및 창씨개명 반대운동 등을 전개한다. 만해는 독립운동의 선구자 金東三 장군이 옥사하자 버려진 시신을 심우장에 모셔 다가 유언대로 화장해 5일장으로 예장하는 등 우국충정을 다했다. Ⅳ. 萬海의 詩 몇 篇 先生의 詩는 自由詩, 定型의 時調詩, 漢詩에 걸쳐 많은 작품을 남긴다. 모든 장르 에 詩的 才能과 感動이 그득하고 넘친다. 可히 천부적(天賦的)이다. 先生의 詩는 쉽 다. 읊으면 가슴이 뭉클하고, 진실하고 알뜰한 사랑을 만난다. 어느 詩篇을 읊어도 거기 님이 있고 님 向한 丹心이 있다. 卍海 詩 몇편씩을 읊고 느껴본다. 自由詩 < 님의 침묵 >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놓고, 뒷걸음 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232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 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그러나 이별을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 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 나룻배와 행인 >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당신은 흙발로 나를 짓밟습니다. 나는 당신을 안고 물을 건너갑니다. 나는 당신을 안으면 깊으나 얕으나 급한 여울이나 건너갑니다. 만일 당신이 아니 오시면 나는 바람을 쐬고 눈비를 맞으며 밤에서 낮까지 당신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당신은 물만 건너면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가십니다그려. 그러나 당신이 언제든지 오실 줄만은 알아요. 나는 당신을 기다리면서 날마다 날마다 낡아갑니다. 나는 나룻배 당신은 행인. < 복종 > 남들은 자유를 사랑한다지마는 나는 복종을 좋아하여요. 자유를 모르는 것은 아니지만 당신에게는 복종만 하고 싶어요. 복종하고 싶은 데 복종하는 것은 아름다운 자유보다도 달큼합니다. 그것이 나의 행복입니다

233 그러나 당신이 나더러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라면 그것은 복종할 수가 없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복종하려면 당신에게 복종할 수가 없는 까닭입니다. < 나의 꿈 > 당신이 맑은 새벽에 나무그늘 사이에서 산보할 때에 나의 꿈은 작은 별이 되어서 당신의 머리 위를 지키고 있겠습니다 당신이 여름날에 더위를 못 이기어 낮잠을 자거든 나의 꿈은 맑은 바람이 되어서 당신의 주위에 떠돌겠습니다. 당신이 고요한 가을밤에 그윽히 앉아서 글을 볼 때에 나의 꿈은 귀뚜라미가 되어서 당신의 책상 밑에서 '귀똘귀똘' 울겠습니다 < 당신을 보았습니다 > 당신이 가신 뒤로 나는 당신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까닭은 당신을 위하느니보다 나를 위함이 많습니다. 나는 갈고 심을 땅이 없으므로 추수(秋收)가 없습니다. 저녁거리가 없어서 조나 감자를 꾸러 이웃집에 갔더니 주인은 "거지는 인격이 없다. 인격이 없는 사람은 생명이 없다. 너를 도와 주는 것은 죄악이다."고 말하였습니다. 그 말을 듣고 돌아 나올 때에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당신을 보았습니다. 나는 집도 없고 다른 까닭을 겸하여 민적(民籍)이 없습니다. "민적이 없는 자는 인권(人權)이 없다. 인권이 없는 너에게 무슨 정조(貞操)냐"하고

234 능욕하려는 장군(將軍)이 있었습니다. 그를 항거한 뒤에 남에게 대한 격분(激憤)이 스스로의 슬픔으로 화(化)하는 찰나(刹 那)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아아 온갖 윤리, 도덕, 법률은 칼과 황금을 제사지내는 연기인 줄을 알았습니다. 영원의 사랑을 받을까 인간 역사의 첫 페이지에 잉크칠을 할까 술을 마실까 망설일 때에 당신을 보았습니다. 時調 < 春朝 > 간밤 가는 비가 그다지도 무겁더냐. 빗방울에 눌린 채 눕고 못 이는 어린 풀아 아침볕 가벼운 키스 네 받을 줄 왜 모르느냐. < 春晝 > 봄날이 고요키로 향을 치고 앉았더니 삽살개 꿈을 꾸고 거미는 줄을 친다. 어디서 꾸꾸기 소리 산을 넘어 오더라. < 秋夜夢 > 가을밤 빗소리에 놀라 깨니 꿈이로다. 오셨던 님 간 곳 없고 등잔불만 흐리구나. 그 꿈을 또 꾸라 한들 잠 못 이뤄 하노라. 야속다 그 빗소리 공연히 꿈을 깨노. 님의 손길 어디 가고 이불귀만 잡았는가. 베개 위 눈물 흔적 씻어 무삼하리요. 꿈이거든 깨지 말자 백번이나 별렀건만. 꿈 깨자 님 보내니 허망할손 맹세로다. 이후는 꿈은 깰지라도 잡은 손은 안 노리라

235 님의 발자취에 놀라 깨어 내다보니 달 그림자 기운 뜰에 오동잎이 떨어졌다. 바람아 어디 가 못 불어서 님 없는 집에 부느냐. 漢詩 < 秋懷 > 十年報國劍全空 십 년을 나라 위한 칼이 헛되어 只許一身在獄中 한 몸만이 옥중에 갇혀 있을 뿐 捷使不來筮語急 기쁜 소식 오지 않고 벌레소리 요란한데 數莖白髮又秋風 몇 가닥 흰 머리털 또 가을 바람이네. < 山中白日 > 群峰蝟集到窓中 뭇 봉우리 한데모여 창가로 다가서고 風雪凄然去歲同 눈바람 처연하기가 지난 세월 같구려 人境寥寥晝氣冷 인경이 요요롭고 낮기운은 차기만 한데 梅花落處三生空 매화꽃이 떨어지는 곳 삼생이 비었구나. < 新聞廢刊 > 筆絶墨散自日休 붓이 꺾기고 먹이 흩어져 이날로 일 없어져 銜枚人散古城秋 재갈 물린 사람들 흩어져 고성의 가을같네. 漢江之水亦嗚咽 한강 물도 또한 흐느끼면서 不入硯池向海流 벼루에 들지 않고 바다로 흘러가네. Ⅴ. 님의 沈黙 과 만해 詩의 詩心 님의 침묵 을 비롯한 만해의 詩들은 하나같이 自由, 平等, 平和, 自主 정신의 活火山이라 할 수 있다. 만해의 삶이 한결같이 알차고 뜨거웠던 만큼, 詩 또한 알차고 뜨겁다. 집도 없이 정처도 없이 一生을 가난하게 살으신 先生의 詩는 습작이 아니고 퇴고를 거친 것이

236 없이 하룻밤에 생각나는 그대로 쓰여진 작품이었지만 시편마다 사상이 깊고 정서가 아름답고 나타나는 뜻이 곡진(曲盡)하기 그지없다. 승려요, 혁명가요, 독립지사였던 선생의 詩的 대상은 하나같이 부처님이고 조국이고 사랑의 절대자였다. 만해의 위 상이 다층적이기는 하지만 詩는 한결같이 따스하고 겸손하고 절대자의 품 같다. 시 집 님의 침묵 에 실린 88편의 詩는 형식이 自由로운 自由詩로서 거의 모두가 겸 양 어법의 존대어로 쓰여졌음을 본다. 그만큼 선생의 詩는 절대자인 님을 대하듯 공 경과 사랑과 진정을 다 쏟아 부어 마치 다비후의 사리(舍利)처럼 빛난다. 그런만큼 卍海의 詩는 쉽고 읊기가 편하고 좋다. 이러한 만해 시의 특성은 一見 人口에 회자되는 素月 詩와 相通하지마는 素月 詩 의 님은 소멸했거나 이별로 떠나버린 絶望과 悲哀, 안타까움으로 咏嘆과 설움과 恨 의 대상임에 比해 만해는 결단코 님을 보내버리거나 포기하지 않는 去者必反의 再 會를 기약한다. 만해의 詩的 대상은 希望의 님 復活의 님 으로 집약된다.(님은 임이 아니고 님 이다.) 님은 내 마음의 지배자요 동시의 내 마음의 노예다. 卍海의 어느 詩篇을 만 나든 그 속에 님이 있고 님을 향한 시인은 온갖 정성과 영혼을 다 바치는 사랑과 경외의 대상인 절대자이다. 다시 말하면 만해의 님은 민족이요, 조국이요, 부처님이 요, 애인이요, 혹은 사랑하는 제자요, 내가 가꾸는 풀이요 꽃이요 나무다. 내 조국의 땅이요 흙이요 물이요 우주요 진리이다. 님은 갔습니다 나는 님을 보내지 아 니 하였습니다 존대어로 끝맺는 시인은 낮은 곳에 임해서 님을 向한 경건한 기도 의 자세가 된다. 만해 시는 난해하지 않다. 그만큼 포용 영역이 넓고 크다. 무슨 뜻인지 무엇을 읊 었는지 모를 요즈음의 시들과는 다르지 않은가? 시적 표현의 기교로 직유 은유 상 징의 비유법과 대화법 질문법을 동원한다. 더러 더러는 독특한 逆說的 표현임을 이 해한다면, 시적 긴장감(tension)이 풀리면서 독자는 환희(歡喜)와 환호(歡呼)의 경지 를 체험할 수 있으리라. 만해 시는 혹 正-反-合의 변증법적 구조로 풀거나 또는 해 체나 분석, 재구성을 즐기는 학자들의 칼질을 원치 않는 시편들이라고 본다. 나를 두고 가신 님 이나 멀어진 당신 은 결코 아주 간 것이 아니다. 타고 남은 재가 다시 기름이 됩니다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希望의 정수박이에 드러부었 습니다. 와 같은 트릭은 현혹이 아니고 시인의 진심이고 진솔한 고백이며 간절한 기도입니다. 卍海의 詩는 상실이나 이별로 나타나더라도 결코 希望을 포기하지 않 는다. 卍海 詩를 은유와 逆說의 시학이라 한다. 그러나 그 은유나 역설은 복잡하지 않고 어렵지 않다. 만해 시는 自由와 平等 生命사랑 민중사랑(낮은 계층으로 길 잃 은 羊떼처럼 가여운 生命을 기리고 사랑한다.) 卍海는 서시격인 군말에서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 羊이 기루어서 詩를 쓴다 고 했다

237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 衆生이 釋迦의 님이라면 哲學은 칸트의 님이다. 장미꽃의 님이 봄비라면 마찌니의 님은 이태리다. 님은 내가 사랑할 뿐 아 니라 나를 사랑하나니라. 군말에서 만해 시의 대상인 님의 정체는 너무나 명료하 다. 님은 조국이요 민족이며 혹은 부처님이나 절대자로만 국한되지 않는다. Ⅵ. 맺음말 卍海의 愛族救國의 一念과 목숨을 건 獻身은 잠시의 안락(安樂)도 허용하지 않은 생애(生涯)적인 것이었음은 앞서 밝힌 그대로입니다. 志士요 革命家로서의 卍海는 승려로서도 山中佛敎를 民衆佛敎 生活佛敎로 改革하고 維新하려 했습니다. 대처승 (帶妻僧)인 만해는 西山大師와 四溟堂을 이은 護國佛敎의 선도자이기도 합니다. 여 느 抒情詩들과는 格을 달리하는 님의 沈黙 을 비롯한 88首의 주옥(珠玉)같은 自 由詩를 남긴 詩人, 卍海를 알면 알수록, 詩를 읽으면 읽을수록 님의 침묵 이 英語로 쓰였다면, 좀 더 많이 세계인에게 알려졌다면 노벨賞이 卍海에게 오지 않았 을까? 생각해 봅니다. 卍海 詩는 슬픔을 곧바로 새希望의 정수리에 들어부어서 극복(克服)과 부활(復 活), 성취의 힘이 솟구치게 함으로써 失國時代의 우리 겨레에게는 詩聖으로서 자리 해도 손색없다고 하겠습니다. 解體와 分折을 위주로 연구하는 학자의 해설을 접하지 않고도 卍海의 詩는 쉽게 읽히고 詩心(詩的 情趣)은 따뜻하게 전해 오지 않습니까? 이제 몇분의 卍海에 대한 견해(見解)를 덧붙임으로써 맺음합니다. 총무원장 宋月珠 스님 암흑기에 겨레의 가슴에 심어준 卍海의 자유사상, 민족사상, 민중사상, 진보사상, 통일사상, 생명사상 및 사랑의 철학을 오늘에 되살리는 일이 우리의 일이다. 卍海새얼 신년호 趙芝薰 시인 萬海先生은 근대한국이 낳은 高士였다. 先生은 愛國志士요, 佛學의 碩德이며 文壇 의 巨擘이었으니, 先生의 眞面目은 이 세가지 면을 아울러 보지 않고는 얻을 수 없 는 것이다. 왜냐하면 志士로서 先生의 강직한 氣槪, 孤高한 節操는 佛敎의 온축(蘊 蓄)과 文學作品으로써 빛과 향기를 더했고, 禪政雙修의 宗團으로서의 先生의 證得은 민족운동과 抒情詩로써 표현되었으며 선생의 문학을 일관하는 정신이 또한 民族과 佛을 一體化한 님 에의 가없는 사모였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선생의 志操가 한

238 갓 소극적인 은둔(隱遁)에 멈추지 않고 항시 적극적인 抗爭의 성격을 띠었던 것 金宗吉 교수 만해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않고 치열한 삶을 살았다. 시인이자 승려였고 독립운 동가였으며 각 분야에서 뚜렷한 자취를 남겼다. 학자적 자질도 뛰어나 양산 통도사 에서 대장경 6800여권을 독파 佛敎大典을 저술했다. 서대문형무소에서 옥사한 김 동삼 선생이 나라 없는 사람이 무덤은 있어 무엇에 쓰나. 화장해달라. 라는 유언을 실행해준 분이 만해였다 조선일보 그대들이 싸우지 아니하면 어찌할 작정이뇨 1940년 조선일보 강제폐간 당시 만해는 본지에 삼국지 를 연재하고 있던 중이었 다. 폐간호에 실린 그의 마지막 삼국지 의 내용은 주유가 형주(荊州) 진출을 꾀하면 서 장수들에게 전투를 독려하는 대목이다. 그대들이 싸우지 아니하면 어찌할 작정 이뇨. (중략) 어찌하여 나 한 사람을 위하여 국가의 큰일을 폐하리오. 시인이며 불교사상가였던 만해가 소설가로 데뷔한 것도 조선일보를 통해서였다. 1935년 4월 9일부터 1936년 2월 1일까지 총 241회에 걸쳐 흑풍 을 연재한 것. 조 선일보는 1935년 4월 2일자에서 흑풍 연재를 예고하며 님의 침묵이란 시집으로 써 이미 시인으로서의 선생을 대하였거니와 금번 이 흑풍으로써 다시 소설가로서의 선생을 대하게 됩니다 라며 선생의 소설은 다른 소설과 유(類)가 다릅니다. 좀 더 다른 의미로 읽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적었다. 좀 더 다른 의미 란 한용운 소 설 속에서 독자들이 민족의식 을 찾아줄 것을 주문하는 표현이었다. 이 소설이 연 재되면서 조선일보 발행부수는 당시로는 놀라운 숫자인 6000부나 늘어나기도 했 다. 그의 또 다른 대표작인 박명 역시 본지 1938년 5월 18일부터 1939년 3월 12 일까지 총 223회에 걸쳐 연재됐다. 만해는 1935년 7월 현재의 코리아나호텔 자리에 조선일보 사옥이 지어졌을 때도 축사를 통해 조선 사람의 문화 정도가 진보된 상징 이라며 기뻐했다. 만해는 조선 일보에 심우장 산시 와 심우장 만필(漫筆) 을 연재하기도 했다. 1927년 신간회 경성지회장이었던 만해는 신간회 중앙위원이자 평양지회장인 고 당 조만식(曺晩植)의 소개로 훗날 조선일보를 중흥시킨 계초 방응모(方應謨)를 만난 것으로 전해진다. 계초는 특히 만해와 벽초 홍명희를 존경하고 좋아해서, 세 사람은 새해가 되면 온천여행을 다닐 정도로 교분이 두터웠다 조선일보

239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 홍 보 식* 1. 서언 오늘날의 행정구역은 생활하고 있는 지역의 인구에 의해 구분되지만, 개항 이전에 는 큰 하천이나 분지 등의 자연이 그 경계의 기준이 되었다. 시대가 올라가면 올라 갈수록 지역을 구분하는 경계는 자연지형에 좌우되었다. 그래서 오늘날, 특히 도시 에서의 지역구분은 현재 생활하고 있는 시대의 구분인데, 이 지역 구분을 전근대 사 회에 그대로 적용하여 당시의 지역과 사회의 모습을 살펴보거나 또는 복원하기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지금의 연제구는 시대를 거슬러 삼국시대로 올라가면, 온천천 북쪽의 동래와 동일 한 생활공간을 이루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 사적 제173호로 지정되어 있는 동 래패총이 형성된 일대에 살았던 사람들과 밀접한 관련을 지닌다. 그리고 연산동고분 군이 만들어지기 전의 온천천 일대의 지배집단이 만든 유적이 동래패총 북쪽의 구 릉 일대에 위치한 복천동고분군이다. 뿐만 아니라 온천천 남쪽의 연산동고분군과 함 께 삼국시대 부산의 지배집단이 남긴 유적이란 점에서 이 양 고분군을 만든 집단이 동일 집단인지 아니면 다른 집단인지에 따라 삼국시대 부산의 정치적 향방을 가늠 할 수 있다. 2. 복천동고분군과 연산동고분군 1) 복천동고분군(사적 제273호) 복천동고분군은 현재의 동래중심가 북쪽에 반달모양으로 에워싸고 있는 속칭 대 포산의 중앙부에서 서남쪽으로 길게 뻗어 나온 구릉에 위치하는 부산의 가장 대표 적인 고분군이다. 이 고분군이 조영되어 있는 구릉은 가장 높은 곳이 표고 62.5m이 고 동북쪽에서 서남쪽으로 가면서 점차 완만하게 낮아지고 있다. 현재는 이 구릉의 길이가 약 700m, 폭은 80~100m 가량이지만, 원래는 현재의 동래시장 부근까지 이 어진 꽤 긴 구릉이었다고 하며 현 구릉의 말단부 남쪽에는 일명 학소대 라고 불리 는 낮은 구릉이 연결되어 있다. *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240 고분군은 이 구릉위에 축조되어 있는데, 1969년 주택공사로 고분군의 일부가 파 괴되면서 세상에 알려진 이후, 1974년까지 사이에 간헐적으로 동아대학교박물관에 의해 10기의 고분이 긴급 발굴되었고 이어 1974년에 부산대학교 박물관에 의해 구 릉의 동쪽사면에 있는 고분 3기가 발굴되었다. 그 후 1980년도에 들어와서 부산대 학교 박물관에 의해 본격적으로 조사되기 시작하였다. 사적 제 273호인 복천동고분 군은 8차례 이상의 계획조사와 수차례에 걸친 수습조사에 의해 다종다양한 유구와 유물이 출토되어 부산지역의 고대문화 내용을 구명하는 것뿐만 아니라 가야와 신라 문화를 이해함에도 매우 중요한 학문적 기여를 하고 있다. 지금까지의 긴급 및 정식 발굴을 통해 복천동고분군에서 조사된 유구는 모두 160 여기에 달한다. 여기에는 부곽이 딸린 목곽묘가 19기, 단독 목곽묘가 70기, 부곽 딸 린 수혈식석곽묘가 6기, 단독의 수혈식석곽묘가 50기, 옹관묘 2기, 횡구식석실묘가 1기씩 포함되어 있다.1) 이들 고분에서 출토된 유물은 총 10,000여점 이상이다. 여기에는 토기류가 3,000 여점, 철기류를 포함한 금속기류가 3,200여점, 유리제 구슬을 포함한 장신구류가 4,010여점, 골각제 등의 기타 유물이 10여점, 그외 인골 5구, 말잇빨 등의 동물유존 체 7점 등이 포함되어 있다. 경주지역과 같은 화려한 금 은제 유물은 많지 않으나 대신 철제유물이 많은 것이 특징인데, 그 가운데서도 무구류와 갑주류가 특히 많아 주목되었다. 복천동고분군은 유구가 구릉의 정상부에서 사면에 걸쳐 비교적 조밀하게 분포되 어 있는 전형적인 분묘유적이다. 분묘의 분포상태를 보면, 구릉 정상부 주변에는 부 곽을 가진 대형급 묘가 입지하고 있고, 구릉의 주변지역과 경사면에는 중 소형급 무덤들이 주로 입지하고 있었으며, 대체로 중심부 고분은 남쪽에서 북쪽으로 가면서 순차적으로 축조되어 간 경향을 보이다가 8 9호분 이후가 되면 다시 구릉의 아래 부분으로 축조되고 구릉의 중복에 이르러 횡구식석실묘가 축조되면서 고분의 축조 가 종결되는 것으로 추정된다. 현재까지 복천동고분군에서 확인된 묘제는 목곽묘 수혈식석곽묘 옹관묘 횡구 식석실묘 등이다. 상기 묘제 중 목곽묘와 수혈식석곽묘는 그 규모에 의해 다시 각각 대형묘와 소형묘로 나누어진다. 대형묘는 주로 각기 독립된 주 부곽으로 이루어졌 고, 소형묘는 부곽이 없는 단독분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독립된 주 부곽으로 이루 어진 대형묘는 주 부곽 양자가 모두 목곽인 것과 주곽은 수혈식석곽이고 부곽은 1) 부산대학교박물관 1983 東萊福泉洞古墳群Ⅰ 1990 東萊福泉洞古墳群Ⅱ 1996 東萊福泉洞古 墳群Ⅲ 東萊鶴巢臺古墳 부산박물관 1990 東萊福泉洞萊城遺蹟 東萊福泉洞 53號墳 1995 東萊 福泉洞古墳群 第5次調査槪報 東萊 福泉洞古墳群-第5次調査 99~109號 墳 복천박물관 東萊 福泉洞古墳群-第6次調査 141~153 朝鮮時代遺蹟 東萊 福泉洞古墳群-52 54號

241 목곽인 것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부곽이 딸리지 않는 단독묘도 목곽묘와 수혈식석곽 묘로 구분된다. 복천동고분군은 경주의 대형 고총고분을 제외하고는 함안 말이산 도항리고분군, 고령 지산동고분군과 더불어 남부지역 최대의 고분군이다. 그리고 유물은 경주의 대 형 적석목곽묘 다음으로 많은 량이 출토되었고 그 종류도 다양하다. 또 묘제도 목곽 묘와 수혈식석곽묘, 옹관묘, 횡구식석실묘 등이 확인되었다. 그리고 복천동고분군의 묘제의 변화는 가 야지역의 어느 고 분군보다도 뚜렷 하기 때문에 낙동 강유역 묘제의 구 조와 변화를 연구 함에 있어 하나의 표지적인 유적이 다. 또 구릉의 정 선부를 따라 대형 묘가, 구릉사면에 는 중 소형묘가 사진 1. 동래 복천동고분군 전경 입지하는데 이러 한 고분군 편성의 특색은 당시의 사회구성 관계의 실체를 규명할 수 있는 좋은 자료가 되기도 한다. 사진 7. 복천동 54호묘 사진 3. 복천동 11호묘 사진 4. 복천동 11호 석곽

242 뿐만 아니라 이 유적에서 보여준 2세기 초부터 7세기 초에 이르기까지의 다종다양 한 유물의 변화와 편년은 가야 및 신라지역 고분의 유물 매납구성의 변화양상 뿐만 아니라 개개 유물의 변화상을 규명하는데도 큰 도움이 되고 있다. 2) 연산동고분군 (부산광역시지정 기념물 제2호 / 지정년월일 : 1972년 6월 26일) 연산동고분군은 배산(盃山)에서 북쪽으로 뻗어 나온 50m 전후의 능선 정상부를 따라 대형 봉분을 가진 고분 10여 기가 일렬로 배치되어 있고, 대형 봉분들 주변의 구릉 경사면에는 중 소형고분들이 배치되어 있으며, 연동시장 방면으로 도로가 개설 되면서 잘려나간 부분에도 몇 기의 대형 고분이 더 있었을 것으로 추정하였으나, 2011년~2012년의 발굴조사에서 총 18기의 대형 봉분이 조성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연산동고분군은 일제강점기에 철제 갑옷과 투구들이 출토되어 고대 한 일 관계 연 구에 중요한 유적으로서 국 내외 학계의 관심의 초점이 되었고, 연산동고분군의 정 확한 성격 파악을 위하여 1988년 경성대박물관에서 8호분을, 부산여자대학교(현 신 라대학교)박물관에서 4호분을 조사하였다. 1988년 발굴조사에서 출토된 유물들을 살펴보면, 토기류로는 고배 기대 대부 장경호 원저단경호 뚜껑 등이 출토되었는데 모두 신라토기이다. 철기류로는 4호 분에서 화살통 꾸미개 금동금구편 철도자 쇠화살촉 미늘쇠편 등이, 8호분에서 는 주곽에서 비늘갑옷 대도편 쇠화살촉 쇠도끼 등의 무구류와 꽃무늬장식 말띠 드리개 발걸이 등의 마구류 및 유리로 만든 목걸이 등이 주피장자의 목 부분인 남 쪽에서 출토되었고, 부곽에서는 다수의 판갑편이 출토되었다. 그리고 2011년~2012년에 실시한 연산동고분군 정비 복원을 위한 발굴조사 결과, M3호분의 주 부곽에서 금동관편 금동관모 편 비늘갑옷 판갑옷 투구 말 투구 말 갑옷, 철판 위에 도금한 용무늬 장식 마구, 목걸이 고배 항아리 큰항아리 그릇받침 등 토기 류, 유리구슬, 철촉, 철모, 순장 인골 등 200여점의 다양한 유물이 출토되었다. 특히 1980년 복천동고분군 1차 발굴조사에서 말 갑옷과 투구가 출토된 이래 부산 지역에서 2번째로 말 갑옷과 투구가 출토되었을 뿐만 아니라, 투구 어깨가리개 팔가 리개 등 신체 부위를 보호하는 다양한 갑옷이 출토되어 傳 연산동고분군 출토만으 로 전해오던 갑옷과 함께 삼국시대 부산 지역 지배층의 무장적(武將的) 성격을 구체 적으로 확인할 수 있었다. 또한 일본의 고분시대 무덤에서 20여점밖에 출토되지 않 은 깃이 있는 판갑이 우리나라에서 처음으로 출토되어 일본과의 교류관계 해명에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생각된다. 아울러 5세기 후반 부산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부산식 고배(高杯)가 다량 출토되어 삼국시대 부산의 정체성과 자치성을 나타내는 문화의 존재가 확인되었으며, 지하로

243 된 수혈식 석곽과 주곽과 부곽으로 구분한 구조 등 복천동고분군의 전통을 계승하 면서도 봉분이 확인되지 않은 복천동고분군과 달리 대규모의 봉분이 특히 M3호분은 조성되었다. 전체 길이가 약 19m, 너비는 6m에 달하는 우리나라 에서 가장 큰 규모의 주 부곽 수혈식석곽묘임 이 확인되어 대규모 노 동력의 동원과 장엄한 매장 의식 등 새로운 매장문화가 나타나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연산동고분군은 현재 부산 지역에서 둥글고 높은 봉분을 가진 고분 사진 5. 연산동고분군 전경 으로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유적으로 2011년~2012년 발굴조사를 통해 석곽 내 면을 점토 미장한 후 목곽을 설치한 점, 벽 상부에 각재를 놓아 높이를 맞춤과 동시 에 뚜껑돌의 조정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건축기술, 부엽공법((敷葉工法)을 응용한 석 곽 밀봉 등 고대의 다양한 첨단 토목기술 및 전통 토목기술의 원형 등이 확인되어 우리나라 전통 토목기술의 원형을 구명할 수 있는 풍부한 미래의 문화유산 보고임이 입증되었다. 3. 삼국시대 부산 지배층의 동향 연산동고분군은 현재 남아 있는 부산지역의 유일한 고총의 원형성토분구로 된 유 적이며, 석곽의 구조와 출토유물 등으로 볼 때,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조영되었다. 연산동 4 8호분의 조사에 의해서 연산동고분군에 대한 정보의 획득과 삼국시대 부산지역 지배세력에 대한 논쟁은 물론, 신라로의 편입과정과 양상, 수혈 식석곽묘의 변천 등에 대한 새로운 논쟁을 불러일으키는 촉매제가 되었다. 2기의 고분 구조와 출토 유물로 볼 때, 그 시기는 5세기 후반임이 밝혀졌는데, 이 시기가 되면 부산지역의 중심 고분군인 복천동고분군의 고분 조영규칙이 이완되는 시기와 연동되는데, 연산동고분군이 이 시기에 조영되기 시작하는 점과 상관관계를 지니고 있음은 분명한다. 그런데 연산동고분군과 복천동고분군의 조영세력의 관계 에 대한 견해는 둘로 나눠져 있다

244 첫째는 연산동고분군은 복천동고분군에 대형묘의 조영 원리에 변화가 오면서, 지금까지 분묘를 조영해 온 복천동구릉이 아닌 온천천 남쪽의 구릉을 지배집단의 새로운 매장공간으로 설정하였기 때문에 동일 집단에 의한 묘역의 이동으로 파악 하였다.2) 둘째는 부산지역이 완전히 신라로 편입되는 5세기 후반에 복천동고분군이 조영된 지역과는 다른 곳에 새로운 고분군이 조영되는 것은 기존의 지배집단인 복천동고분 군 조영 집단이 쇠퇴하고, 대신 새로이 등장한 지배집단이 조영한 고분군으로 인식 한 견해이다.3) 첫째의 견해에 의하면, 400년 고구려군 남정의 결과 부산지역이 신 라의 영향권 아래에 놓이고, 5세기 후반대에 들어오면서 완전히 신라에 귀속되는 정치 문화적인 변화가 나타나지만, 부산을 지배하는 세력은 정치적인 변화에도 불구 하고 신라로부터 지배권을 인정받고, 묘지만 온천천 남쪽으로 연산으로 이동하였다 는 것이다. 그러나 후자의 견해는 부산이 신라에 귀속되면서 신라는 새로운 세력을 부산의 지배집단으로 내세워 기존의 지배세력인 복천동고분군 조영 집단을 견제하 고 신라의 지배력을 관철시키고자 하였는데, 그 새로운 지배집단의 묘역이 복천동 고분군과 대응되는 지역에 조영한 것이 연산동고분군이란 것이다. 이 양 견해는 물 질자료를 어떻게 이해하느냐에 따라 삼국시대 부산의 동향에 대한 인식이 상당히 달라질 수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이러한 논쟁에 종지부를 찍게 된 것은 2010년도와 년도에 실시한 연 산동고분군의 발굴조사였다. 정밀발굴조사를 실시한 M3호분은 매장주체부의 길이 가 약 16m에 달하여 삼국시대 영남지역에서 가장 규모가 큰 수혈식석곽임이 확인 되었다. 주곽의 묘광 너비가 약 6m에 달하고 묘광과 석곽 벽 사이의 충전공간이 넓 으며 석곽의 최상단석이 지하에 위치하는 점은 앞 시기의 동래 복천동고분군 수혈 식석곽의 전통을 계승하고 있음이 명확하게 확인되었다. 이 시기의 창녕 함안 고령 대구 등지의 수혈식석곽이 반지상식인 점과 뚜렷한 차이를 가지는 부산지역만의 특 징을 보인다. 2) 3) 申敬澈, 1995, 三韓 三國 統一新羅時代의 釜山 釜山市史 1卷, 釜山市史編纂委員會. 1995, 三 韓 三國時代의 東萊 東萊區誌 東萊區誌編纂委員會. 崔鍾圭, 1991, 무덤에서 본 삼한사회의 구조 및 특징 韓國古代史論叢 2, 韓國古代社會硏究所 編

245 사진 11. 연산동 M3호분 뚜껑돌 전경 사진 12. 연산동 M3호분 주곽과 부곽 위의 사실 이외에도 M3호분은 주곽보 다 부곽의 길이가 좀 더 길며, 석곽 내의 벽면에 짚을 썰어 혼입한 점토로 벽석면의 대부분 미장하였다. 길이가 300 이상인 장대한 화강암을 개석으로 이용하였는데, 2~3톤 가량의 개석을 균형있게 놓기 위해 석곽의 벽면 위에 긴 각재를 놓는 건축 기술도 확인되었다. M3호분에서는 벽석을 밀봉하는 과정, 개석을 덮고 봉분을 쌓기 전, 봉분을 쌓는 중, 봉분을 쌓고 난 후와 같이 무덤을 축조하는 과정의 다양한 시점에서의 의례 행 위가 확인되어 고대 봉분 축조과정상에서의 의례 행위 복원을 위한 다양한 정보를 획득하였다. 주곽에서는 찰갑편이 출토되었고, 부곽에서는 삼각판혁철판갑 견갑편과 종장판 주편이 출토되었다. 더군다나 일본의 고분시대 무덤에서도 약 20여점이 출토된 바 있는 깃달린 판갑이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으로 확인되어 일본과의 교류관계 해명에 도 상당한 도움을 줄 것으로 기대된다. 일제시기의 傳 연산동 출토 갑옷 투구, 연산 동 8호분의 찰갑 판갑 등의 출토 예로 보아 연산동고분군 내 고총고분의 대부분에 는 갑옷과 투구가 부장되었을 가능성이 클 것으로 예상된다. 이러한 점으로 보아 연 산동고분군의 피장자는 무장적 성격이 강한 지배층으로 추정된다. 부곽에서는 많은 수량의 토기류가 출토되었는데, 발형기대와 대부장경호의 표면에 는 격자무늬 삼각집선무늬 찍은 둥근무늬 자무늬 등으로 화려하게 장식된 신 라토기가 출토되었다. 그리고 고배 대각에 장방형 투창이 뚫리고 다수의 돌대가 있 는 부산식 고배가 다수 확인되어 5세기 후반의 부산지역 토기의 특징을 구명할 수 있는 자료가 확보되었다

246 4. 연산동고분군의 쇠퇴와 통일신라로의 이행 연산동고분군은 6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큰 무덤은 더 이상 조영되지 않고, 소형 묘만 조영된다. 연산동고분군에 대형묘가 조영되지 않는 것은 곧 부산지역에 대형 묘가 조영되지 않음을 나타낸다. 부산에 대형묘가 조영되지 않는 것은 부산을 다스 리는 지배층이 부산에 존재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6세기 이후, 부산지역에 대형묘가 조영되지 않고, 각지에 소형묘로 이루어진 고분군이 만들어진다. 이 시기에 그동안 대형묘가 보이지 않던 양산 지역에 새로이 대형묘로 이루어진 고분군이 조영되는 데, 북정리고분군이 그것이다. 북정리고분군이 양산과 부산을 아우르는 대형 고분군 으로서 이 양 지역을 지배하는 집단으로 부상한 신흥 세력이었다. 이 북정리고분군 은 7세기까지 대형묘가 지속해서 조영되었다. 6세기 전반 이후, 연산동고분군은 소형묘가 조영되고, 7세기에 들어서면서 소형 의 횡구식석실묘가 조영되었다. 8세기에도 이곳이 분묘를 만드는 공간으로 사용되 었음이 이곳에서 조사된 화장묘에 의해서 확인되었다. 그러나 얼마나 많은 분묘가 조영되었는지는 이 일대에 대한 조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런데 연산동고분군의 반대편인 배산 정상부 일대에 배산성지가 존재하고, 남쪽의 평탄지 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우물과 건물지가 확인되어 이곳이 통일신라시대 부산의 중심 으로 부상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247 全循義(?~?)의 생애와 저술 李 宗 峰* 1. 머리말 조선 15세기는 많은 의서와 농서의 편찬이 이루어졌던 시기이다. 의서는 대표적으로 醫方 類聚 鄕藥集成方 등이 편찬되었고, 농서는 農事直說 衿陽雜錄 등이 편찬되었는데, 이러한 의 농서는 조선전기의 대표할 만한 의미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뿐만 아니라 앞의 서적과 그 의미가 비교되지 않지만 또 다른 서적의 편찬도 많이 이루어졌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食g纂要 山家要錄 鍼灸擇日編集 등이다. 이러한 서적은 全循義 한 개인과 많은 연관을 가지고 있다. 전순의는 의방유취 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식 료찬요 산가요록 침구택일편집 등을 단독 혹은 공동으로 편찬하였다. 따라서 전순의는 조서전기 의 농학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인물이었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의 저술에 대해서는 책명만 전해져 왔던 서적들이 최근 발굴되면서 활기를 띠었다. 산가요록 은 농산물 가공법을 덧붙인 종합 농서라는 견해,1) 조선시대 최 고의 조리서로 알려진 需雲雜方 보다 100여 년 앞선 음식조리서뿐만 아니라 과학 영농서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하였다.2) 전순의는 침구택일편집 을 저술하여 후 대의 침술에 크게 기여하였다고 파악하고 있고,3) 또 세조의 명을 받아 食治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식료찬요 를 편찬하였다고 이해하고 있다.4) 따 라서 전순의의 저술에 대한 연구는 15세기에 편찬된 서적으로 나름의 의미를 부여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의 생애와 저술에 대해서는 거의 언급되었는데,5) 이를 통해 전순의의 의 농 서의 편찬은 15세기의 서적편찬의 과정에서 어떤 목적 혹은 의미에서 이루어졌는가 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전순의의 생애에 대해 살펴보고, 이를 토대로 의 농서의 저 * 부산대 교수 1) 이호철, 산가요록 의 채소기술과 동절양채 조선시대 농업사 연구, 국학자료원, 2003 이호철, 앞의 논문, ) ; 한복려, 산가요록 의 분석 고찰을 통해서 본 편찬연대와 저자 농업사연구 2 1, 한국농업사학회, 2003 ; 한복려 엮음, 다시 보고 배우는 산가요록, 사단법인 궁중음식연구원, ) 윤김영목 윤종빈 전병훈(a), 全循義의 생애와 저술활동에 관한 연구 동의생리병리학회지 제21권 1호, 2007 ; 윤종빈 전병훈 김영목(b), 全循義의 의학사상과 저작내용에 관한 소고 동의생리병리학회지 제21권 2호, ) 辛承云, 朝鮮初期의 醫學書 食療纂要 에 對한 硏究 書誌學硏究 40, 한국서지학회, ) 이종봉, 전순의의 생애와 저술 지역과 역사 28, 부경역사연구소,

248 술이 어떤 연관 속에서 이루어졌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2. 생애 전순의는 조선전기 세종 문종 단종 세조대에 御醫로 활동한 인물이었다. 전순의의 본관은 천안전씨대동보(문효공파) 와 씨족원류(진안) 사마방목 (진안) 등에 서로 다르게 기록되어 있다. 전순의의 가계는 천안전씨대동보(문효 공파) 에 全仁奇(부: 41) 全循義(42) 全碩童(자: 43) 으로, 씨족원류 에 全 循義(시조) 全碩重(자)6) 全世豪(손) 로 기록하고 있다. 그리고 사마방목 에 全 石童은7) 본관 鎭安이고, 부는 전순의로 예종 1년(1469) 증광시 진사 2등 20위에 합격한 기록이 있다.8) 따라서 전순의는 연구자에 따라 천안전씨 혹은 鎭安全氏로 이해하였다. 전씨는 세종실록 의 천안군 토성조에 全 河 申 沈 張 등이 있고,9) 세종실 록 의 진안현 토성조에도 李 全 白 韓 庾 등이 기록되어 있다.10) 즉 전씨는 천안군 과 진안현의 토성으로 존재. 전씨는 천안과 진안을 모두 본관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의 본관은 천안전씨대동보(문효공파) 에 근거할 것인가 아니면 사마 방목 씨족원류 등을 따를 것인가가 문제이다. 전순의의 신분은 천민 혹은 양인 중인 양반이었을까? 단종 때 大司憲 權蹲이 탄핵 상소를 올린 내용 중에 今全循義 係本庸賤 遭遇聖明 屢蒙超擢 位至三品 을 근거로 신분을 중인계급 혹은 상민계급보다 낮은 계층인 천민출신으로 이해하였음,11) 먼저 전순의의 의원으로 활동은 세종 22년(1440) 금성대군의 병이 나았을 때, 세 종으로부터 의원 盧重5는 안구마 1필과 전 5결을 받았고, 전순의는 楊弘遂 全仁貴 金智 등과 함께 옷 한 벌을 받았음.12) 전순의는 앞에서도 언급한 것처럼 세종 22년 의관으로 활동하고 있었던 점을 고려할 때 의관은 이시기보다 일찍 되었다. 6) 씨족원류 에 기록된 全循義 아들 全碩重은 全碩童의 오류임. 世祖實錄 권37, 11年(1465) 2日(丙子) 司憲府啓 南部令全石童 錄事李鳳孫官備酒肉, 招娼妓, 與 田制別監柳順行 東活人院別坐金仁門 宗廟副丞鄭允功等會飮, 請依律科罪 命只收告身 성종 9년 연풍현감, 성종 16년 신계현령 등을 역임하였다. 8) 한국정신문학중앙연구원, CD롬 사마방목, ) 세종실록 권149, 청주목 천안군.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권15, 천안군 성씨조에는 申 張 全 河 沈 盧 敬 田 등이 기록되어 있다. 10) 세종실록 권151, 남원도호부 진안현.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권39, 진안현 성씨조에는 李 白 全 韓 金 崔 庾 등이 기록되어 있다. 11) 한복려, 앞의 논문, 25쪽 ; 辛承云, 앞의 논문, 125쪽. 반면 김영진은 <해제> 山家要錄 (고농서국 역총서8), 농촌진흥청, 2004, 6쪽에서는 논증 없이 중인으로 추측하고 있다. 12) 世宗實錄 卷89, 22年(1440) 6月 21日(辛卯) 上喜錦城大君疾愈 賜侍病宦官崔濕馬一匹田五結 金忠 金衍田畇各加一資 賜田五結 加李海職 又賜醫盧重禮鞍具馬一匹田五結 裵尙文加一資 賜馬一匹田五結 賜楊弘遂全仁貴全循義金智各衣一領 朴延生超一資 延生 大君乳媪夫也 重禮之姪高憲 亦加一資. 7)

249 전순의는 세종 22년 내의원 의관. 어떻게 내의원 의관이 되었을까? 국초 의원을 선발하는 방식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다음의 자료를 살펴보자. <가> A)전라도 按廉使 金希善이 도평의사사에 보고하였다. 外方에는 醫藥을 잘 아는 사람이 없으니, 원컨대, 각도에 醫學敎授 한 사람을 보내어 界首官마다 하나의 의院 을 설치하고, 兩班의 子弟들을 뽑아 모아 生徒로 삼고, 그 글을 알며 조심성 있고 온후한 사람을 뽑아 敎導로 정하여, 그들로 하여금 鄕藥惠民經驗方을 익히게 하고, 敎授官은 두루 다니면서 설명 권장하고, 採藥丁夫를 定屬시켜 때때로 藥材를 채취 하여 處方에 따라 제조하여, 병에 걸린 사람이 있으면 즉시 救g하게 하소서. ( 太 祖實錄 권3, 2年(1393) 1月 29日(乙亥)) B) 六學을 설치하고 良家의 子弟들로 하여금 익히게 했는데, 1은 兵學, 2는 律學, 3은 字學, 4는 譯學, 5는 醫學, 6은 算學이었다(. 太祖實錄 권4, 2년(1393) 10월 27일(기해)) 위의 자료에 의하면 조선초기 의학을 배우는 의원은 신분적으로 양반 혹은 양가 의 자제들을 대상으로 하였음을 알 수 있고,13) 선발은 일정한 교육을 거쳐 시험을 통해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는 세종 27년 의방유취 의 편찬에 참여하였다. 이때 참여한 인물들을 살펴보자. <다> 集賢殿 副校理 金5蒙 著作郞 柳誠源 司直 閔普和 등에게 명하여 여러 方書를 수 집해서 分門類聚하여 合해 한 책을 만들게 하였다. 후에 또 집현전 直提學 金汶 辛 碩祖, 부교리 李芮, 承文院 校理 金守溫에게 명하여 醫官 全循義 崔閏 金有智 등을 모아서 편집하게 하고, 安平大君 李瑢과 都承旨 李思哲 右副承旨 李師純 僉知中樞院 事 盧仲5로 하여금 監修하게 하여 3년을 거쳐 완성하였는데, 무릇 3백 65권이었 다. 이름을 醫方類聚 라고 하사하였다( 세종실록 권110, 27년(1445) 10월 27일(무진)) 위의 자료에 의하면 의방유취 는 먼저 김예몽 유성원 민보화 등에 의해 방서가 13) 上護軍宋欽等上疏曰 名分國家之大閑 小壞則尊卑倒植 貴賤無倫 小則家不家 大則國不國矣 臣等待罪 醫員 職在救人 安敢妄爲論列 自犯出位之誅乎 特以切近之災 迫在床下 不敢默焉 夫醫之爲術 萬民之 司命 肇自神農 咸置厥官 本朝尤重是術 內設內藥房 外設典醫 惠民等司 擇世系無痕咎者屬焉 故士夫 之有才學者 或屈於兩科 則卽投于此 爭自琢磨硏窮 爲世名醫 近年以來 士類恥不願屬有由焉( 燕山君 日記 권25, 3年(1497) 7月 3日(壬寅))

250 분류 유취되고, 이를 기반으로 김문 신석조 이예 김수혼 등의 책임 하에 전순의 최윤 김유지 등이 편집하였고, 다만 이용 이사철 이사순 노중례 등이 감수하는 역할을 하 였다. 의방유취 는 집현현 학자인 김예몽을 비롯한 관료와 의관인 전순의 최윤 김 유지 노중례 등 양대 그룹의 참여에 의해 편찬되었다. 김예몽은 세종 29년(1447) 전순의 김의손이 함께 편찬한 침구택일편집 의 서 문을 지었다.14) 김예몽은 세종 32년 문신관료이지만 유성원 박연 등과 內藥房에서 의학의 서적을 상고하는데 참여하기도 하였다.15) 따라서 김예몽은 문신관료로 의학 에 상당한 식견을 가졌을 뿐만 아니라 이로 인해 전순의와도 인연을 맺을 수 있었 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는 세종 22년 금성대군의 질병 치료에 참여한 이후, 앞에서 언급한 의방 유취 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세종 29년 침구택일편집, 세종 31년 무렵 산가 요록 의 편찬,16) 세조 6년(1460) 식료찬요 의 편찬하였다.17) 전순의는 세종 후 반과 세조 중반에 집중적으로 의서를 비롯한 몇몇 서적을 편찬하였다. 특히 세종대 의 후반은 전순의가 의원으로 활동한 시점으로부터 대략 10년 정도 지난 시기이다. 어떻게 서적의 편찬이 가능하였을까? 침구택일편집 은 의서이기 때문에 향 약집성방 의방유취 와 계열을 같이하지만, 산가요록 은 전혀 다른 계통의 서적이다. 만약 전순의가 천민 출신이라면 이 같은 짧은 시기에 가능할 수 있었을 까? 조선초기 개인 혹은 단체에 의해 편찬된 의 농서의 편찬자를 통해 全循義의 신 분을 유추할 수 있다. 다음의 <표 1>에 의하면 농서의 편찬은 문신관료가 중심이었음을 알 수 있고, 의 서는 문신관료와 의관들이 중심이었다. 전순의는 의서를 비롯한 식료찬요 산 가요록 등을 편찬하였다. 따라서 전순의는 상당한 정도의 학문적 혹은 학자적 자 질을 갖추고 있었을 것이므로, 이를 고려할 때 천민출신이 아닌 다른 신분출신이었 을 가능성이 많다. 전순의는 의관으로 활동하면서 당대의 여러 인물들과 교류를 하였는데, 김예몽은 그가 교류한 대표적 인물로 생각된다. 김예몽( )은 전순의와 비슷한 年 輩로 식년 문과에 급제한 이후 통신사 서장관을 역임하였을18) 뿐만 아니라 세조가 즉위하였을 때 집현전 부제학으로 선위와 즉위 교서를 작성하였을19) 만큼 학문적으 14) 15) 16) 17) 18) 19) 침구택일편집 서. 世宗實錄 권127, 32年(1450) 1月 22日(戊戌) 召府尹朴堧 應敎金禮蒙 修撰柳誠源 攷閱方書于內藥 房七日. 김영목 윤종빈 전병훈(a), 앞의 논문, 2007, 16쪽. 산가요록 의 편찬시기를 추정하고 있지만, 구체적인 근거는 밝히지 않고 있다. 辛承云, 앞의 논문, 쪽. 세종실록 권89, 22년(1440) 5월 19일(경신). 세조실록 권1, 1년(1455) 윤6월 11일(을묘)

251 로 뛰어난 인물이었다. 그런 그가 전순의가 편찬한 침구택일편집 에 서문을 쓴 것은 두 사람의 관계가 예사스런 것이 아닐 것으로 유추된다. 그리고 전순의는 노년에 임원준( ) 서거정( ) 등과도 교류 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원준은 全循義보다 年輩가 아래지만 단종 세조대 의학 의 정책에 관심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의술에도 밝았던 인물이었다. 다음의 자료가 주목된다. <2-라> A)行副司正 任元濬이 의학의 便宜를 조목조목 진달 하였다. 하나, 2 3명의 문신 으로 하여금 의학의 가르침을 나누어 맡게 하되 英敏한 무리들을 택하여 方書와 經 文을 읽게 하고, 또 內醫 등으로 하여금 읽게 하여 四孟月에 재주를 시험하여 黜陟 에 빙거하소서. 하나, 여러 도의 좌우 界首官이 의국을 설치하여 약을 제조하여 팔 게 하소서. 하나, 唐藥을 덜 쓰고 새로 鄕藥을 써서 혜택을 베푸소서. 하나, 다시 鍼 灸專門의 법을 세워서 항상 익히게 하여 침과 약을 아울러 쓰소서. ( 단종실록 권1, 즉위년(1452) 5월 25일(정사)) B)신숙주가 말하기를, 내가 만약 손으로 때리게 되면, 비록 名醫로 이름난 全順 義 任元濬 같은 사람이 좌우에서 서로 교대하며 구호한다 하더라도 끝내 효험이 없 을 것이다. 하였다( 세조실록 권2, 1년(1455) 8월 16일(기미)) 임원준은 전순의와 직접적으로 교류한 내용이 보이지 많지만, 의학에 관심이 많 았을 뿐만 아니라 세조대에 같은 名醫로 교류의 가능성을 짐작. 전순의는 세조의 대표적인 인물은 徐居正( )과도 교류. <마> 全中樞 循義가 와서 뜸질할 자리를 표시해놓고 간 다음, 女醫 接常을 보내서 뜸 질을 하게 하므로, 위하여 한 絶句를 지어서 그 사실을 기록하다. 백발의 홍추는 늙어갈수록 건강하기에, 남들은 의술이 가장 정상하다고 말하네 나의 병치레는 오래전부터의 일이지만, 인명 구해준 그대 은혜는 언제 잊을 쏜가 가슴속에 묘술이 많음은 자못 믿거니와, 주후 의 좋은 의방이 있음은 누가 알 리오 명당을 정해 놓고는 바로 돌아갔는데, 모락모락 향 연기에 뜸쑥은 빛이 나누나20) 위의 시는 서거정이 을유년(세조 11년, 1465) 전순의에게 진료를 받은 후에 작성 한 것이다. 두 사람은 세조대에 고위 관료를 역임하였던 인물이었고, 이런 요인으로 20) 全中樞循義 來點灸穴而去 遣女醫接常灸之 爲賦一絶誌之: 白髮鴻樞愈徤強 人言醫術最精詳 沈綿我病 長年事 救活君恩幾日忘 頗信胸中多妙術 誰知肘後有良方 明堂訣罷還歸去 䙚䙚香烟艾炷光( 사가시 집 제12권)

252 많은 인연을 가졌을 것이고, 이런 인연이 전순의의 왕진으로 이어졌고, 이에 시를 남긴 것이다. 반면 서거정은 宋處寬과 함께 예종 1년 진사시 시험관이었을 때 공교 롭게도 전순의의 아들 전석동을 뽑았다.21) 따라서 전순의는 세조대 서거정과도 교류. 전순의는 어떻게 의학적 자질을 키웠고 혹은 양성되어 나갔을까. 이에 대해서는 다음의 세 자료가 주목된다. <바> A)임금이 말하기를, 醫術은 인명을 치료하므로 관계되는 것이 가볍지 않다. 그러 나 그 深奧하고 정미한 것을 아는 자가 적다. 判事 盧重5의 뒤를 계승할 사람이 없 을까 염려되니, 나이 젊고 총명 민첩한 자를 뽑아서 醫方을 전하여 익히게 하라. 하 였다( 세종실록 권89, 22년(1440) 6월 25일(을미)) B)崇泰라는 중이 또한 宗貞盛의 서간을 받아 가지고 왔는데, 醫術에 정통하다 한 지라, 임금이 시험하고자 하여 興天寺에 객관을 정하고 후하게 접대하면서 醫員 全 循義 金智 邊漢山 등에게 명하여 그 기술을 배워 익히게 하고, 인하여 병 있는 자로 하여금 가 보고 치료하게 하여 三時 동안 치료받고 돌아왔는데, 그 기술이 자못 효 험이 있었다( 세종실록 권116, 29년(1447) 5월 6일(병신)) C)典醫監提調가 아뢰기를, 世宗께서 軫念하시어 三司 이외에 따로 醫書 습독 하는 법을 세워 方書를 읽게 하여 후하게 勸奬하였는데 李孝信 全循義 金智 등이 조 금 그 방술을 체득하였습니다( 단종실록 권13, 3년(1455) 1월 25일(신미)) 따라서 세종은 세종대의 후반 노중례의 의술을 대신할 수 있는 의사의 양성에 많 은 관심을 가졌고, 전순의 이효신 변한산 김지 등은 그러한 과정에서 양성된 인물임. 전순의는 당대의 名醫로 의술을 펼치기도 하였지만, 의술을 가르치는 역할도 하 였는데, 다음의 자료가 주목된다. <사> A)司憲 에서 아뢰기를, 壤寧大君 李禔가 溫井에 가서 목욕한 지가 오래 되어 도 돌아오지 않으니, 作弊가 없지 않습니다. 청컨대 빨리 돌아오도록 하소서. 또 任 元濬을 특별히 起復하도록 하신 것도 또한 옳지 못합니다. 하니, 傳敎하기를, 양녕 대군은 이미 下道에 갔으니, 지금은 불러 올 수가 없다. 全循義가 늙고 또한 병들어 서 醫生을 가르칠 사람이 없으므로, 任元濬을 起復시킨 것뿐이다. 하였다.( 세조실 록 권18, 5년(1459) 10월 24일(임신)) B)동지중추원사 全循義 호조참판 任元濬도 또한 醫學을 侍講하고, 이어서 醫書의 21) 예종실록 권7, 1년(1469) 9월 7일(정해)

253 隼 人員을 불러서 磨勘하게 하였다( 세조실록 권31, 9년(1463) 11월 15일(기 사)) 전순의는 세조 초부터 명의로 왕에게 의학을 강할 뿐만 아니라 의생을 가르쳤 던, 즉 의학적 능력을 갖추고 있었던 인물이었다고 생각된다. 전순의는 문종의 죽음으로 단핵을 받았지만, 세조 집권이후 화려하게 등장하였다. 전순의가 세조대에 복권된 것은 문종을 죽음으로 몰았다(?). 과연 전순의가 그럴 수 있었을까? 전순의의 의술을 살펴보자. <2-아> 思政殿에 나아가 蓬原 院君 鄭昌孫 右議政 權擥 兵曹判書 韓明澮 參判 金礩 承旨 都鎭撫, 여러 衛將兼司僕 등을 불러서 술자리를 베풀었다. 또 말하기를, 醫員들 은 매 藥을 쓸 때 方書에 의거하지 않고 스스로 臆測하여 망령되이 增減하여, 사람 들로 하여금 목숨을 잃게까지 한다. 姜政丞(강맹경)의 일이 한 3이다. 全循義는 일 찍이 平胃散에 茵蔯을 더해서 楊汀의 痼疾를 다스리었는데, 이것은 방서에 없다. 楊 汀의 元氣가 充實하여 지금 이미 병이 나았는데, 대개 약의 처방대로 아닌 사례이 다. 의약의 폐가 이에 이르니, 장차 어찌 할까? 하고, 인하여 정창손을 醫學都提調 로 삼아 의원들의 부지런하고 게으른 것을 상고해서 陞黜하게 하였다. 명하여 王世 子를 불러서 이르기를, 나의 今日에 행한 바는 모두 네가 後日에 해야 할 것이니, 너도 마땅히 이를 알아 두어야 한다. 하였다( 세조실록 권24, 7년(1461) 4월 25 일(을미)) 세조는 훈신들과의 자리에서 의원들의 의술에 대해 논하면서 두 사례를 들고 있 는데, 하나는 의원들이 방서에 의거하지 않고 치료하여 사람의 생명을 잃게 하는데, 강정승(강맹경)의 일이 한 예이고, 다른 하나는 전순의가 평위산에 인진을 가하여 양정의 종기를 치료하였는데, 이것도 방서에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양정은 세조 7 년 함길도의 변란을 제어하는 도중 질병으로 전순의의 진료를 받았다. 양정은 곧 질 병이 나아 세조에게 숙배하였다.22) 전순의는 다른 방식으로 양정의 질병을 다스렸 음을 알 수 있다. 실제 단종대 전순의의 치죄를 주청하였을 때 대신들은 전순의가 偏見을 믿고 여 러 醫書를 널리 찾아보지 아니하고, 마침내 해롭지 않다 고 아뢰어 문종이 사신을 문밖까지 전송하도록 하여, 腫氣의 증세를 더욱 심하게 하였다고 하거나, 수라상에 食g를 또한 꺼리지 아니하고 바쳐서 종기가 매우 심하여 문종이 晏駕에 이르렀다 고 말하고 있다.23) 이로 보면 전순의는 위의 楊汀의 진료와 문종의 진료에서 보듯, 22) 23) 세조실록 권24, 7년(1461)5월 8일(정미) 단종실록 권6, 1년(1453) 5월 1일(정사)

254 의서에서 말하는 보편적 진료의 방식보다 자기 나름의 의학적 방식과 食治 등을 고 집함. 전순의는 오늘날의 관점에서 보면 의료 사고의 관점에서 접근할 수도 있지만 실제 문종을 독살하지 않았음. 전순의는 침으로 종기를 다스렸다든지, 식료를 통한 방식 등 의원으로 자기가 가진 의술의 체계를 통해 문종을 치료함. 전순의는 단종 초 어려움을 거쳤지만, 세조대에 화려한 의술과 함께 정치적 행보 를 통한 권력을 행사하였다. 전순의는 세조 1년 좌익원종 1등공신,24) 2년 첨지중추 원사에25) 서용된 후 어느 시기에 대호군이 되었고, 이 때 막대한 전지도 하사받았 다.26) 6년 행첨지중추원사,27) 6년 양용위 상호군, 8년 同知中樞院使,28) 세조 10년 자헌대부 동지중추원사29) 등을 거치면서 세조의 지근거리에서 정치적 위치를 확보 하였다. 이 무렵 전순의는 老且病 無敎誨醫生者 故起復元濬爾 고30) 하여 의료계에 서 은퇴한 것으로 이해하였지만, 이러한 은퇴는 의관을 양성하는 교육자에서 은퇴 였지 의사로서 은퇴는 아니었다. 전순의는 楊汀을 진료하였거나, 臨瀛大君 李璆의 아들 定陽尹 李淳이 병들었을 때 內醫 金智와 함께 진료를 지시받는 사례,31) 세조 와 원손이 아팠을 때 임원준과 함께 진료를 의논하였던 점,32) 그리고 서거정을 시 침하는 사례 등을 고려할 때 당대의 명의로 여전히 의학적 능력을 뽐내고 있었음. 즉 전순의는 노년까지 의사로서 자기의 역할을 수행하고 있음.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전순의는 세종대 의관으로 시작하여 세종의 의관 양성을 토대로 성장하였다. 전순의는 문신관료인 김예몽과 여러 의관, 그리고 세조대의 훈 신들과도 교류하였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는 천민 출신이라기보다 조선초기 의관 에 선발될 수 있는 신분을 고려할 때 良家子弟 이상의 신분을 가졌고, 醫科를 통해 의관이 되었을 가능성이 많다. 전순의의 의술은 의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경험에 의 한 다양한 의술과 食治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가졌다. 특히 세조대에 전순 의는 정치적 능력과 함께 老年까지 화려한 의술을 펼쳤다. 이러한 점은 세종 세조대 의서 농서를 편찬할 수 있는 개인적 능력으로 나타났다. <표 1> 조선 초기에 편찬된 의 농서 24) 25) 26) 27) 28) 29) 30) 31) 32) 세조실록 권2, 1년(1455) 12월 27일(무진). 세조실록 권4, 2년(1456) 5월 18일(병술). 세조실록 권7, 3年(1457) 3月 23日(丙戌) 嚴自治楊州田 李保仁豐壤田 賜大護軍全循義 세조실록 권25, 7년(1461) 7월 19일(정사). 세조실록 권28, 8년(1462) 4월 11일(병자). 세조실록 권34, 10년(1464) 11월 4일(계축). 세조실록 권18, 5年(1459) 10月 24日(壬申). 세조실록 권29, 8년(1462) 11월 1일(신묘). 세조실록 권30, 9년(1463) 7월 25일(임자) ; 세조실록 권31, 9년(1463) 10월 23일(무신) ; 세 조실록 권34, 10년(1464) 10월 6일(병술)

255 편찬자 시기 서명 신분 權仲和 외 3인 태조 7년(1398) 향약제생집성방 문신 趙浚 외 2인 정종 1년(1399) 신편집성마의방 우의방 문신 朴興生 촬요신서 문신 李行 郭存中 태종 17년(1417) 농서집요 문신 양잠방 양잠경험촬요 문신 不明 태종 세종 본조경험방 불명 兪孝通 외 2인 세종 13년(1431) 향약채취월령 문신, 의관 鄭招 卞孝文 세종 11년(1429) 농사직설 문신 세종 15년(1433) 향약집성방 문신, 의관 不明 선초 産書 불명 불명 세종 16년(1434) 醫方 불명 盧重禮 세종 16년(1434) 태산요록 의원 세종 27년(1445) 의방유취 문신, 의관 姜希孟 금양잡록 문신 姜希孟 사시찬요초 문신 姜希顔 양화소록 문신 兪孝通 盧重禮 朴允德 任元濬 세조대33) 창진집 문신 世祖 세조 9년(1463) 의약론 왕 불명 세조 12년(1466) 구급방 불명 徐居正 세조 12년(1466) 마의서 문신 尹豪 외 다수 성종 20년(1489) 신찬구급간이방 의관 등 許羝 성종 24년(1493) 의방요록 내의원주부 3. 저술 33) 손홍렬, <여말 선초 의서의 편찬과 간행> 한국과학사학회지 11-1, 한국과학사학회, 1989, 46쪽

256 1)침구택일편집 전순의 침구택일편집 은 서문과 책명을 통해 편찬 의도를 이해할 수 있다. <3-가> 醫道에는 두 가지 길이 있는데, 그 하나는 藥餌요, 다른 하나는 鍼灸이다. 그런데 병을 치료하는데 침구보다 묘한 것이 없다. 요체는 마음을 정진하여 손에 미치게 하 는 것이다. 내의원 護軍 全循義와 司直 金義孫 이러한 시술의 병폐를 바로 잡고 자 한 것이다. 여러 의서를 모으고 뺄 것은 빼고 보충할 것은 보충하여 한 권으로 엮었다. 이 책을 널리 광포하는 것은 대개 사람들로 하여금 遏眼의 시기에 길흉 을 판별하고, 손을 쓸 수 없는 膏盲도 치료하기 위함이다. 모든 사람들이 요절의 근 심을 덜어내어 모두 仁壽를 누릴 수 있도록 한다. 무릇 성인의 감화를 입는 것은 聖 朝의 仁心仁政의 그러함을 알지 못하는 것이 아닌가? 正統十二年 正月初六日 奉訓 郞集賢殿副敎理 知製敎 兼春秋館記注官 世子左司經 臣金禮蒙謹序( 침구택일편 집, 서) 위의 자료에 의하면 침구택일편집 의 편찬의 목적은 질병의 치료에는 두 가지 있지만 침구가 제일이고, 이를 통해 요절의 근심으로부터 벗어나서 장수를 도모하 겠다 는 것이다. 서명에 택일 이란 것은 시침의 시기, 즉 일시의 길흉과 기일의 선 택 을 중요시 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침구택일편집 의 편찬은 침구학을 집대성하 고자 하는 목적을 가졌고, 이를 통해 사람을 仁壽하게 하고, 이는 성조의 인심인정 에 연결시키고자 하였음을 알 수 있다. 2)산가요록 전순의의 산가요록 은 의서가 아니라 230여 가지의 방대한 조리법(술 담그는 법 등)을 기록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나무 채소심기, 장 담그고 술 빚는 시기 등의 길일을 택하는 다양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술을 만드는 법 47개 항목을 기술함. 杜康酒 米七斗 五刀 白米二斗五刀 浸水三日 細末 湯水六斗 和作粥 待冷 好匊五升 眞末一升和入 七日後 亦如右法 一七日後 白米二斗五升 如前洗浸全烝 无水无匊 乘熱入瓮 經十日 開用之 장담그기, 초빚기, 김치담그기, 재료 저장하기(과일, 고기, 겨울철 채소재배법 등)

257 곡물음식 과자만들기 반찬만들기 전순의가 산가요록 의 편찬을 통해 기존 농서를 보완하려는 의도와 함께 조리 법과 나무 채소를 심는 길일을 택하는 등의 내용을 포함시킨 것은 食g(食治)의 문 제와 침구의 택일과 연관되어 있다. 전순의는 식료찬요 의 서문에서 사람이 살 아가는데 있어 음식이 첫째이고 라고 밝히고 있는 것처럼 음식이 사람에게 가장 중 요하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따라 자연히 조리법 등에 관심을 가졌을 것이고, 이것은 다양한 내용을 담은 산가요록 을 편찬하게 된 의도였을 것으로 유추된다. 3)식료찬요 전순의는 식료찬요 를 편찬하였는데, 편찬한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그가 직접 쓴 서문이 주목된다. <3-나> 사람이 살아가는데 있어 음식이 첫째이고, 약이가 그 다음이다. 옛 사람이 처 방을 정할 때에는 먼저 음식을 다스리고, 음식으로 낳지 않은 뒤에야 약으로 다스린 다. 또 말하기를 음식에서 얻는 힘이 약에서 얻는 절반이 된다. 또 말하기를 질병을 치료하는데 마땅히 五穀 五肉 五果 五菜로 하는 것이지, 어찌 枯草 枯木의 뿌리에 해 법이 있겠는가? 이것은 고인들이 병을 다스리는데, 반드시 食g를 우선한 까닭이다. 때문에 신은 食醫心鑑 食g本草 補闕食g 大全本草 등의 처방을 상고하여 일상에서 食治할 수 있는 簡易方을 뽑아 45문으로 정리하여 올렸는데, 세 조께서 식료찬요 라는 이름을 지어주고 나에게 서문을 쓰도록 지시하였다. 또 교시하기를 이 처방 중에서 穀 肉 果 菜 등이 평소 사용하는 것이라 할지라도 실제 서로 간 착오를 일으킬 수 있기 때문에 各門의 物類의 아래 혹 正音을 부기하여 사 람들로 하여금 쉽게 알아 볼 수 있게 하고, 사용하는데 의혹이 없게 하라 하였다. 聖上께서는 博施濟衆의 道가 지극하고 극진하시다( 食g纂要, 天順四年 庚辰年 冬十一月 嘉靖大夫行龍驤衛上護軍 臣全循義首稽首謹序) 식료찬요는 천순 4년, 즉 세조 6년(1460)에 편찬되었고, 서를 통해 전순의의 의 학관을 엿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식료찬요 를 저술하게 된 동기를 이해할 수 있다. 전순의의 의학관은 질병의 치료보다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한국과 중국, 동양의 의학관에 토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예방의학을 위해서는 식치의 중요성을 밝히고 있다. 식치를 위한 식료찬요 의 저술은 세조의 명령에

258 따라 이루어졌고, 일반 백성을 염두에 두었음을 알 수 있다. 식료찬요의 항목 諸風, 傷寒, 心腹痛附脇痛, 咳嗽附喘(폐병, 기침, 딸국질) 등을 비롯한 45개 항 목을 기술하고 있음. <중풍> 治卒風不得語 大豆煮汁如飴 或濃煮食之 <폐병치료> 治肺病 唾膿血 薏苡仁(의이인)34)十兩杵碎 水三升 煎取一升 入酒少許 服之 4. 맺음말 전순의의 의술은 의서에만 의존하지 않고 경험에 의해 다양한 의술과 食治를 통 한 치료의 방법론을 가졌고, 이를 통해 질병을 치료하는 능력을 발휘하였다. 그가 탄핵받은 문종의 치료도 자신의 경험론에 의해 치료를 고수하였기 때문이었다. 세 조대에 전순의는 정치적 능력과 함께 老年까지 화려한 의술로 질병을 치료하였고, 이를 통해 자신의 역량을 펼쳐 나갔다. 전순의는 의관으로 세종 27년 의방유취 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이를 기반으로 의학적 지식을 넓혀 침구택일편집 을 저술하였다. 침구택일편집 의 편찬은 세종 의 의학 장려책에 따라 침구학을 집대성하려 하였고, 이를 통해 백성들에게 和氣 를 얻게 하여 仁心仁政 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전순의는 산가요록 을 저술하였는 데, 이는 사람이 살아가는데, 음식이 가장 중요하다고 인식하였기 때문이었다. 그리 고 전순의는 세조 6년 식료찬요 를 저술하였다. 이를 통해 전순의의 의학관을 엿 볼 수 있는데, 그는 질병의 치료보다 예방의학의 중요성을 강조하였다. 이는 한국과 중국, 즉 동양의 의학관에 토대하고 있음을 엿볼 수 있다. 따라서 전순의 의학관은 인정론에 토대하여 치료에서 예방의학의 중요성으로 변화되었음을 알 수 있다. 전순의의 저술은 세종과 세조대의 의서와 농서 등의 실용적인 서적, 즉 민의 생활 과 생명에 관계되는 서적의 편찬과 연관되어 있고, 이는 민생의 안정을 통해 세종과 세조의 통치기반을 강화시키려는 의도에서 이루어졌다. 의서의 편찬은 의술과 의학 의 발달을 도모할 수 있고, 이를 통해 인생의 안정을 도모할 수 있었고, 농서의 편 찬은 농업기술의 발달을 통해 생산력의 증대를 통해 민생의 안정과 국가의 기반을 강화할 수 있었다. 이상에서 볼 때 전순의는 세종 세조대에 어의로 활동하였지만, 御醫의 역할만을 한 것이 아니고, 다양한 저술활동을 통해 15세기 사회의 안정에 기여를 하였다고 34) 율무의 열매의 껍질을 벗긴 알맹이

259 볼 수 있다. 즉 전순의는 醫 農學者라 할 수 있고, 오늘날의 관점에서 논한다면 통섭 적인 인물이었다

260 李舜臣 將軍의 忠國爲民의 정신 최 해 진* 1.이순신 장군의 성격 1) 어머니에 대한 것 고향에 계시는 어머니에 대한 애절한 그리움 2) 부하에 대한 것 불침번 서는 병사가 겨울에 추위에 떠는 것을 알고 자기의 옷을 벗어 부하에게 주는 따뜻함과 규정을 어긴 부하에게는 곤장을 치기도 하고 첫 출전에 임하지 않고 도망간 군관을 목치기도 함. 운주루(運籌樓)-부하들의 참여 유도 2. 이순신 장군의 철학 忠國爲民의 정신=눈물을 흘리면서 그 분함을 나타내는 충국의 정신을 백의종군의 명을 받고 난 이후에도 변함이 없었음 궤멸된 수군을 해체하고 육군으로 편입하라고 했을 때 전하 아직도 12척의 전선이 있습니다. 신이 살아있는 한 왜적을 서해로 가게 내버려 두지 않겠습니다 충성 서 약을 함. 첫째로 철저한 원칙주의의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 두 번이나 백의종군이라는 모욕을 당함 전쟁 6원칙(목표의 원칙, 선제공격 원칙, 집중의 원칙, 기동의 원칙, 사기앙양의 원 칙, 철저한 경계 원칙)을 지킴. 둘째로 완전한 참여주의를 실천 정탐선, 탐후인(探候人) 파견 운주루(運籌樓) 설치 셋째로 엄격한 책임주의 정신 * 동의대 교수

261 3. 이순신 장군의 전략적 리더십 4. 이순신 장군의 전략 1) 대적 전략 (1)사전 전략 (2)전투 전략 0 바람이 불 때 돛을 올려라. 장군은 왜병과 전투를 시작하면 대개의 경우 2시간을 넘기지 않았다. 철저하게 준비한 연후에 유사감연(有事敢然:사전에 준비를 해두었다가 일에 임했을 때에는 신속하게 일을 처리하는 것)의 자세로 때를 맞추어 신속하게 적을 격퇴하였다. 0 적은 뒤에서 접근한다. 세계의 많은 전투에서 성공한 장수들은 적을 뒤에서 소리 없이 기습하여 적의 약점을 이용하면서 승리로 이끌었다. 적의 약점을 안다는 것은 승리를 보장하는 것 이다. 트로이 전쟁의 승리는 적장의 아킬레스건의 약점을 알았던 패리스 장군에게 돌아갔다.(언제나 무서운 적은 내 등 뒤에 있고, 더 무서운 것은 내 안의 방심에 있 다. 탑은 높을수록 위태롭고 자만은 클수록 위험하다) 0 백성의 정보를 신뢰하라. 탐후인(探候人)과 탐후선 활용. 부산의 허내은만(許內隱萬)을 고정 요원으로 활 용하였고, 한산 해전에서는 김천손(金千孫)이라는 백성의 정보를 활용하였으며, 부 산포 해전에서는 정끝돌(丁末石)이라는 포로 출신의 어부의 정보를 이용. 일본군의 협조자였던 김억(金億)과 일본군 항복자들의 정보도 이용하였다. 0 봄바람에도 꽃은 진다. 눈앞의 승리에 도취하여 적을 너무 깊숙이 뒤쫓아 가면 자칫 적의 함정에 빠질 우려가 있다. 약한 적의 움직임도 가볍게 보지 말아야 함 0 전공을 내세우지 마라. 0 어려울 때 앞장서라. 조직이 어려움에 처해 있을 때, 리더가 조직 구성원들 앞에서 위험을 직접 맞아 싸우면 구성원들은 일단 의지할 곳이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수가 있다. 그 조직

262 이 군이면 장군이나 장교가 그 역할을 할 것이고, 기업조직이면 관리자나 경영자가 그 역할을 해야 할 것이다. 이 장군은 칠전량 해전의 패전 뒤에 궤멸된 조선 수군 을 재건해 가는 과정에서 언제나 전투에 임하면 앞장서서 부하들을 지휘했다. 실전 에서 장수가 앞서 싸운다는 것은 대단한 모험이다. 자칫 장수가 잘못하여 죽기라도 한다면 그 군의 대열은 걷잡을 수 없이 무너진다. 그러므로 함부로 지휘자인 장수 가 앞에 나설 수 없다. 그러나 이 장군은 죽기를 각오하고 앞에 나서 부하들의 사 기진작에 힘쓰면서 궤멸된 수군을 이끌고 어란진, 명량, 노량진 해전을 승리로 이 끌었다. 0 힘을 집중하라. 거의 모든 전투에서 (평균 2시간 정도)안에 모든 힘을 집중, 선별 집중(選別,集中 戰略) (3)사후전략 이 장군은 전투에 임하면 반드시 뒷정리에 심혈을 기울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첫째, 적 패잔병이 민가에 노략질하는 것을 우려하여 잔적 처리하거나 퇴로 제공 둘째, 전투후 장졸들의 공과 과에 대한 신상필벌(信賞必罰)내용을 적어 조정에 보 고함. 마지막으로 다음 전투 대비-병사들을 쉬게 하고, 무기를 점검하며 적에 대한 추가 정보를 파악하기 위해 탐후선(探候船:정보 탐색선)과 탐후인(探候人)을 내보냈다. 2) 교육훈련 전략 3) 전쟁 전략 조선군의 전략- 일본의 침략을 예상 해상 또는 해안에서 적의 상륙을 저지하겠다는 기본적인 계책조차 갖고 있지 않 았다. 당시 전라좌수사로 있던 이 장군도 지금 적세가 왕성한 까닭은 모두가 해전 에서 적을 막지 못하여 그들이 뜻대로 상륙할 수 있게 한 것 때문입니다 라고 하 였다. 경상좌수사 박홍(朴泓)은 일본군이 상륙하기 전에 상당한 병력과 군량을 가 지고 있었음에도 이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기회를 놓쳐 동래성과 부산진성이 두 시간만에 함락되는 수모를 겪음 자기의 관할 지역에서 전략에 관한한 가능한 최선, 최대의 전략을 구사하였다. 이

263 장군은 전쟁 발발 14개월전인 1591년 2월 13일에 전라좌도수군절도사(전라좌수 사)로 발령받았다. 임지에 부임하자마자 현황 파악에 나섰다. 군선이 제대로 정비 되어 있는지 군기가 확립되어 있는지를 알기 위해 관할구역인 5진5포를 순시하였 다. 평소의 군기강 확립과 준비를 바탕으로 전쟁발발 사흘 전에 거북선을 진수하고 그 거북선에서 지자(地字), 현자 총통 발사를 시험하였다. 그리고 사흘 뒤 왜군의 침략소식을 듣고 그에 대응하기 위해 수군을 집합시키고 신병 700명을 보충하면 서 정찰활동을 강화할 것을 지시하였다고 한다. 유능한 참모배치 광양현감 어영담=물길 녹도만호 정운 송희립 장군과 정걸 장군 나대용 장군

264 임진왜란의 기억과 전승 김 동 철* 1. 임진왜란은 어떤 전쟁인가? 임진왜란은 1592년 4월에 시작되어 1598년 11월에 끝난 약 7년간의 전쟁이었 다. 1592년은 간지로 임진년이다. 조선은 선조 25년, 일본은 문록(文祿) 1년, 명은 신종(神宗) 만력(萬曆) 20년이다. 전쟁이 시작된 해의 간지를 따서.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일본군이 다시 침략한 1597년이 간지로 정유년이므로, 이것을 정유재란이 라 부른다. 1597년은 조선은 선조 30년, 일본은 경장(慶長) 2년, 명은 신종(神宗) 만력(萬曆) 25년이다. 임진년과 정유년의 2차례의 침략을 분리하여 임진 정유왜란 이라고 부르지만, 보통은 임진왜란 이라 부른다. 1592년 전쟁이 일어나서 1597년 의 재침(再侵)까지를 포함하는 7년간의 전쟁을 의미한다. 1592년 임진년이 용(龍), 1593년 계사년이 뱀[蛇] 의 해이므로, 용사지변(龍蛇之 變) 이라고도 한다. 임진왜란과 관련된 사료로 용사일기(龍蛇日記) 라는 책이 있다. 임진왜란은 16세기말 동아시아에서 일어난 국제전쟁이다. 전쟁의 규모, 전쟁 후 의 영향 등으로 볼 때, 동아시아의 역사에서 유래를 찾기 힘든 대규모 전쟁이었다. 조선을 전장(戰場, 전쟁터)으로 하여 싸운 조선 일본 명 세 나라의 역사를 바꾼 일대 전쟁이었다. 한국에서는 흔히 임진왜란이라 부른다. 임진년에 왜가 난을 일으켰다는 뜻이다. 왜(倭) 라는 낮춤 명칭에는 주관적인 감정이 들어 있다. 국가 간의 대등한 전쟁이라 는 시각이 담겨있지 않다. 북한에서는 공식적으로 임진조국전쟁 이라고 쓰고 있다. 임진조국전쟁은 일본침략자들의 침략으로부터 조국의 안전을 지켜낸 정의의 조국 방위전쟁이었다. 고 본다. 중국에서는 임진왜화(倭禍), 만력지역(萬曆之役), 만력동정지역(東征之役), 조선지 역(朝鮮之役)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공식적으로는 항왜원조(抗倭援朝)라고 한 다. 1950년 한국전쟁 참여를 항미원조(抗美援朝)라 부르는 것과 관련이 있다. 일본 에서는 조선진(陣), 고려진, 조선정벌, 조선침략, 히데요시(秀吉)의 조선침략, 조선출 병, 정한(征韓), 조선역(役), 文祿慶長の役(분로쿠케이쵸노에키) 등 다양한 명칭으로 부른다. 서양에서는 Hideyosi's Invasion of Korea : 1592~1598(히데요시의 조선 * 부산대 사학과 교수

265 침략 : 1592~1598)이 가장 일반적이다. 최근 한국에서는 임진난, 조일전쟁, 7년전 쟁, 임진전쟁 등 새로운 명칭이 사용되고 있다. 2. 전쟁의 원인 전쟁이 일어난 원인에 대해서는 다음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① 영주계급의 이익이나 히데요시 정권의 구조적 측면을 강조하는 견해이 다.[영토 확장설] 전국(戰國) 다미묘(大名)들 사이의 갈등을 해소하고, 그들의 이익을 보장해야 한 다는 히데요시 정권의 구조적 측면을 강조하는 주장이다. 전국시대 이래로 영토 확 장을 바라는 여러 다이묘의 요구가 존재하였는데,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더 많 은 영토를 차지하기 위하여 침략했다는 주장이다. ② 무역,상업 등 경제적인 면을 중시하는 견해이다.[감합(勘合)무역 부활설] 1547년 이후 중단된 일본과 명과의 감합무역을 부활시키기 위해 조선을 통해 명 과 교섭하고자 하였지만, 조선이 이를 거부하여 실패로 돌아가자 침략했다는 주장 이다. 명과의 강화회담에서 히데요시가 제시한 7개조에 감합무역 부활 이 있음을 근거로 한 주장이다. 그러나 처음부터 감합무역을 의도한 것은 아니고, 나중에 외교 교섭을 하는 과정에서 필요에 따라 추가로 제기한 것에 불과하다는 반론도 있다. ③ 국제질서 변화설이다. 이 역사적 사건을 동아시아 대외관계의 변동 속에서 파악하려는 시각에서 제기된 주장이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중국 중심의 국제질서인 책봉체제와 조공무역 체제를 변통시킬 목적으로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④ 히데요시 개인의 입장을 강조하는 견해이다.[공명(功名)설] 히데요시가 태양의 아들이기 때문에 세상을 지배해야 한다는 히데요시의 개인적 인 공명심과 영웅심이 전쟁을 일으켰다는 주장이다. 히데요시는 조선을 대마도에 조공하는 나라로 알고 있을 정도로 국제정세와 외교체제에 대한 무지하였다. 현실 성이 약한 주장이다. 임진왜란은 여러 가지 원인이 복합적으로 이루어져 일어난 것이다. 일본의 국내 상황이라는 맥락과 동아시아 공간에서 그 원인이나 배경을 찾고 있다. 히데요시 정 권은 침략전쟁을 통해 다이묘들을 계속 군역에 동원함으로써 권력을 집중시키고, 승리할 경우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고, 무역을 장악하여 경제적 이득을 얻을 수 있었 다. 명 중심의 국제질서가 변동하는 기회를 틈타, 군사력을 배경으로 동아시아를 정 복하려는 구상을 갖고 있었다

266 3. 16세기 왜변, 왜란의 시대-책봉체제의 변질 15세기에 조선과 일본은 명의 책봉(冊封)체제에 편입되어 있었다. 양국은 교린(交 隣)관계를 유지하면서 표면적으로는 평화의 시대를 유지하였다. 그러나 16세기에 들어와 책봉-교린체제가 무너지는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1) 16세기 왜변/왜란의 시대 1466~1494년의 약 30년 동안 삼포에 거주하는 일본인의 수가 2배 정도 늘어났 다. 항거왜인 수가 늘어나면서 여러 가지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가 일어났다. 공무역 등으로 지급되는 면포가 크게 늘어나 국가재정의 궁핍을 초래하였다. 토지를 점유 하여 경작지가 늘어나자, 1494년에는 경작지에 대한 수세가 이루어졌다. 호구조사 를 실시하는 등 점점 통제를 강화하였다. 조선측 통제가 강화되자 일본측 저항도 강 해졌다. 1474년에서 1509년까지 왜구의 약탈이 12회나 있었다. 일본인의 불만이 고조되고 왜구의 침범이 잦아지면서 양국인의 충돌도 잦아졌다. 1508년(중종 3) 11월 제포(薺浦)에 인접한 가덕도에서 해적사건이 일어났다. 가 덕도왜변 조사가 진행중 1509년 3월 전라도 보길도에서 제주도 공마(貢馬)를 운송 하던 배가 습격당하였다. 부산첨사 이우증(李友曾)은 항거왜인의 접대, 도항선의 조 사, 상행위의 단속 등을 엄격하게 하였다. 삼포의 책임자는 조정의 방침에 따라 삼 포의 통제를 더욱 강화하였다. 가덕도왜변은 1510년 삼포왜란의 전주곡이었다. 1510년 4월 제포 부산포와 대마도의 일본인이 합세하여 4,000~5,000여 명이 제 포 부산포를 공격하는 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는 삼포왜란(三浦倭亂)이 일어났다. 삼 포왜란은 15일 만에 진압되었다. 조선인 272명이 죽고, 민가 800여 호가 불타고, 일본인 선박 5척이 부서지고 300여 명이 죽은 큰 사건이었다. 이 난을 계기로 대마 도와 조선과의 통교는 단절되었다. 삼포왜란은 조선과 일본과의 관계의 중요한 전 환점이 된 사건이다. 삼포왜란 이후 왜변은 계속되었다. 사량진왜변과 을묘왜변이 대표적이다. 1544년 (중종 39) 4월 왜선 20여 척이 경상도 사량진을 침략 약탈한 사량진왜변이 일어났 다. 사량진왜변 후 명종 말년까지 30여 차례 왜구의 침략이 있었다. 가장 규모가 큰 것은 1555년(명종 10)에 일어난 을묘왜변이었다. 일본 고토(五島)지방에 근거를 둔 왕직(王直)을 비롯한 대해적단이 1555년 5월 70여 척을 이끌고 전라도 달량포(達 梁浦, 전남 해남군)를 침략하여, 전라병사 장흥부사를 살해하고 영암까지 침입하였 다. 달량왜변에서 퇴각한 해적은 6월말 천여 명의 왜적을 이끌고 제주도 화북포(禾 北浦)를 침입하였다. 1555년에 발생한 두 차례의 왜변을 을묘왜변이라 부른다

267 가덕도왜변, 삼포왜란, 사량진왜변, 을묘왜변 등 16세기 이후 일어난 크고 작은 왜변은 조선과 일본과의 교린관계를 변질시키는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다. 2) 1523년 중국에서 일어난 영파(寧波)의 난 明에 조공무역을 하는 일본의 조공선박인 감합선(勘合船)은 1404년에서 1547년 까지 17차례 파견되었다. 감합은 명과 일본 사이의 무역에 사용된 통교 증명서이 다. 일본 두 글자를 나누어 일자(日字) 감합과 본자(本字) 감합을 사용하였다. 종이 에 본자일호(本字壹號) 라고 묵인을 찍고, 이것을 반으로 나누어 가지고 있었다. 일 본측 무역선은 본자 절반(감합)을 가지고 도항하여 중국 영파에 있는 나머지(감합대 장)과 맞추어 진위를 확인하였다. 명의 선박은 일자감합을 가지고 오지만, 실제는 도항하지 않았다. 감합무역은 조공무역으로, 많은 무역이익을 내어 일본 유력세력이 참여하였다. 그런데 1523년(중종 18) 명의 무역항인 영파에서 일본인들 사이에서 무역쟁탈전 이 발생했다. 일본 긴키(近畿)지역을 중심으로 한 사카이(堺)상인과 호소가와(細川) 씨, 규슈의 하카타상인과 오우치씨, 두 세력의 치열한 무역쟁탈전이 영파의 난으로 발전하였다. 이 난을 계기로 오우치씨가 감합(勘合)무역의 패권을 차지하였다. 명은 오우치씨에 대해 엄격한 처벌은 내리지 않고, 일본 무역선의 규제를 강화하였다. 1547년(명종 2) 감합무역선이 마지막으로 명에 파견되고, 1551년 오우치씨가 멸망 하였다. 감합무역이 중지되어 일본은 큰 경제적 타격을 받았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 는 대명무역의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려 하였다. 1589년(선조 22) 무렵 그는 왜구를 종식시키는 대가로 감합무역의 기회를 다시 얻는 방안을 검토하였다. 이처럼 16세기에 들어와 명과 일본의 조공관계, 조선과 일본의 교린관계는 변하 고 있었다. 1510년 삼포왜란과 1523년 영파의 난의 그 중요한 전화점이 되었다. 16세기까지 지속되어 오던 책봉-교린체제는 1592년의 임진왜란에 의해 무너지고 말았다. 4. 임진왜란의 발발 히데요시는 1591년 8월 다이묘들을 교토에 소집하여, 조선출병을 선포하고 병력 동원계획과 동원 준비명령을 하달하였다. 1591년 10월부터 1592년 2월까지 규슈 사가(佐賀)에 나고야죠(名護屋城)를 쌓아 조선침략의 전진기지로 삼았다. 나고야성 을 중심으로 반경 3km 내에 약 120명의 다이묘 진이 분포하였다. 나고야성 유적과

268 다이묘의 진적(陣跡)은 일본의 특별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이 자리에 나고야성박 물관 이 건립되었다. 침략군은 9개 부대로 편성되었다. 1군은 소 요시토시(宗義智) 고니시 유키나가(小 西行長) 등 1만 8,700명, 2군은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 茂) 등 2만 2,800명, 3군은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1만 1,000명, 4군은 모 리 요시나리(毛利吉成)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등 1만 4,000명, 5군은 후쿠시마 마사노리(福島正則) 등 2만 5,000명, 6군은 고바야가와 다카카게(小早川 景) 등 1 만 5,700명, 7군은 모리 데루모토(毛利輝元) 등 3만명, 8군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 多秀家) 등 1만명, 9군은 하시바 히데카쓰(羽柴秀勝) 등 1만 1,500명이었다. 15만 8,700명의 육군 정규병력 외에, 수군 9,000명, 후방 경비병 1만 2,000명 등 전체 20여 만명이나 되었다. 침입 당시의 총병력은 30여 만명으로, 출정병력을 제외한 군대는 나고야에 10만명을 머물게 하고, 3만명은 교토를 수비하게 하였다. 조선을 침입한 부대는 1군이었다. 소(宗) 고니시군이 4월 13일 부산진성을 공격하 면서 임진왜란은 시작되었다. 1군에 이어 후속부대가 계속 부산에 상륙하여 4~5월 사이에 약 20만 명이나 되었다. 일본군은 세 길로 나누어 서울로 쳐들어 갔다. 부산 을 침략한 지 20일 만인 5월 3일 서울이 함락되었다. 서울을 함락한 일본군은 조선 팔도의 경략에 나섰다. 경기도-히데이에, 충청도마사노리, 전라도-다카카게, 경상도-데루모토, 황해도-나가마사, 평안도-기요마사, 강원도-요시나리, 함경도-기요마사가 각각 분담하였다. 서울 함락 보고를 받은 히데요시는 5월 18일 교토의 관백 히데쓰구(秀次)에게 서 신을 보내, 대륙정복에 따른 25개조 국할(國割) 방침을 전하였다. 1593년에는 출진 을 명하고, 1594년에는 천황을 북경으로 옮겨 주변 10개국을 천황 영지로 삼고, 히 데쓰구는 명의 관백이 되어 북경 주변 100개국을 차지하고, 일본관백은 하시바 히 데야스(羽柴秀保)나 우키다 히데이에로 삼는다는 대제국 공상안을 구상하고 있었다. 히데요시 자신은 중국 무역항 영파에 거처를 정하고 인도까지도 정복한다는 꿈을 꾸고 있었다. 이러한 구상은 중국황제를 중심으로 한 중화세계질서에 대한 도전으 로, 일본천황을 중심으로 한 체제를 구축하려는 것이었다. 5. 임진왜란과 부산 1) 부산진성 전투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가 지휘하는 선봉군인 제1군 18,700여명이 700여척의 병선으로 4월 13일 오후 5시경 공격하였다. 황령산 봉화대에서는 즉시 이 사실을

269 서울에 보고하였다. 당시 부산진첨사는 정발(鄭撥)이다. 정발 장군의 행동에 대해서 는 3가지 설이 있다. 절영도에 사냥갔다가 적선이 오는 것을 알고 성내로 들어갔다. 소수의 병선으 로 바다에서 싸우다 후퇴하였다. 농성작전을 펼쳤다. 13일 일본군은 절영도 전방에서 임시로 정박하였다. 쓰시마주 소 요시토시(宗義 智)가 약간의 군사를 거느리고 상륙하여, 부산진성의 경비 상황을 정찰하였다. 길을 빌리는 가도(假道)를 요구하는 글을 목판에 쓴 것을 성 밖에 세웠다. 정발은 이 요 구를 거절하였다. 14일 새벽에 일본군은 부산포 우암(牛岩)에서 셋으로 나누어 진을 치고, 차례로 상륙하여 성을 공격하였다. 부산진성의 호수는 300여호 정도였다. 병력은 1000여명 정도였다. 첨사 정발을 비롯한 부산진 주민은 숫적 열세를 극복하지 못하고 전사하였다. 일본측 西征日記 에는 성중의 군대는 물론, 부녀자, 어린 아이, 심지어 개나 고 양이까지도 모두 죽였다., 吉野日記 에는 남녀 할 것 없이 모두 베어 죽였다. 라 고 묘사하고 있다.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점령함으로써, 조선군의 해안 방어 세력을 제거하고, 조선 침략을 위한 교두보를 마련하였다. 정발은 흑의(黑衣)장군으로 임진 왜란 당시 가장 용감한 장수로 칭송되었다. 부산진성 전투는 조선군이 일본군을 맞 아 싸운 첫 전투였다. 2) 동래성 전투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동래성을 공격하였다. 동래성 전투의 시 간에 대한 2가지 설이 있다.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14일, 여세를 몰라 침입하여 포위하고 15일에 공격을 개시하여 전투하였다. 15일에 침입하여 전투가 전개되 었다. 첫 번째 설이 일반적이다. 당시 동래부사는 문관 출신인 송상현(宋象賢)이다. 송상현은 지역의 병권을 가지 고 있는 경상좌병사와 인근 군현의 군사력을 이용하여 싸울 계획이었다. 그러나 경 상좌병사 이각(李珏)은 울산에서 지원왔다가 성문을 열고 도망갔다. 부산 해안 방어 를 책임지고 있는 경상좌수사 박홍(朴泓)도 성을 버리고 도망갔다. 경상도 군사권을 가지고 있던 순찰사 김수(金睟)는 진주에서 동래로 가다가 도중에 되돌아 갔다. 양산군수 조영규(趙英珪)는 노모에게 하직 인사를 하고 전쟁에 참전하였다. 이러 한 동래성의 상황은 송상현의 순절시에 잘 나타나 있다. 외로운 성에 적은 달무리처럼 둘러쌌는데/ 주변 여러 군대는 아무 기척도 없구나/

270 임금과 신하의 의리가 중하니/ 부모와 자식의 은정은 가볍구나. 일본군은 3부대로 나누었다. 1대는 동쪽으로, 1대는 서쪽으로 가고, 주력부대는 남문 앞에 집결하였다. 일본군은 무혈 입성을 노렸다. 이에 전즉전의(戰則戰矣) 부 전즉가도(不戰則假道); 싸우려면 싸우고, 싸우지 않으려면 길을 빌려 달라 라는 투 항을 유도하는 글귀를 쓴 목패를 동래성 남문 밖에 세워 놓고 항복을 촉구하였다. 이에 대해 송상현은 전사이(戰死易) 가도난(假道難); 싸우서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려주는 것은 어렵다. 라고 하여, 단호한 항전 의지를 보였다. 15일 일본군은 전면 공격을 하였다. 조선군 주요 병력은 남문을 중심으로 집결하 였다. 남문은 쉽게 무너지지 않았다. 일본군은 동북쪽 성벽을 파괴하면서 성을 함락 하였다. 이런 전투 모습을 유성룡(柳成龍)의 징비록 에서는 먼저 허수아비를 만들 었다. 붉은 옷을 입히고, 푸른 수건을 머리에 감싸고, 등에는 붉은 깃발을 매고, 긴 칼을 차고 있었다. 이를 긴 작대기에 묶어서 성 담 사이에 세웠다. 이를 본 성안의 민들은 그 군세(軍勢)에 감짝 놀라 소동을 벌였다. 무기를 갖지 못한 민들은 몽둥이나 농기구를 들고 싸웠다. 지붕의 기왓장을 던지 며 대적하기도 하였다. 치열한 전쟁으로 많을 사상자를 내었다. 종군한 포르투갈 신부 루이스 프로이스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그들은 손가 락 두 개 반 두께의 널빤지를 연결해 장방패를 만들었으나 소총의 위력을 견뎌낼 수 없었다... 조선군은 약 5,000명 전사했고, 일본군은 성 두 곳에서 벌어진 전 투에서 거의 100명이 전사하고, 400명 이상이 부상했다. 양산군수 조영규의 아들 조정로는 부친의 유해를 찾으러 동래읍성에 가보니, 시 체가 가득하여 부친의 유골을 찾을 수 없었다. 최근 지하철 4호선 건설공사를 하는 과정에서 동래읍성 남문 밖에 있는 해자를 발굴하였다 년에 걸쳐 발굴조사가 이루어졌다. 무기류 203점, 생활용구 153점, 기타(나무 말뚝 등) 76점 등이 발굴되었다. 무기는 큰 칼, 작은 칼, 손 칼, 칼집, 비늘갑옷, 투구, 나무활, 각궁, 화살촉, 일본창, 숫깍지[강궁(强弓)에 사용] 등 이다. 160명 정도의 인골이 발굴되었다. 이 가운데는 여성이 3구 이상, 5살 정도 어 린아이 인골도 있었다. 인골 가운데는 머리에 구멍이 뚫려 있거나, 예리한 도구에 의한 상처 흔적도 보인다. 현재 지하철 4호선 수안역사 안에 동래읍성 임진왜란 역 사관 이 있다. 동래성 전투로, 동래부사 송상현, 양산군수 조영규, 동래교수 노개방(盧蓋邦), 향 교학생 문덕겸(文德謙), 양조한(梁潮漢), 비장(裨將) 송봉수(宋鳳壽) 김희수(金希壽), 겸인(傔人) 신여로(申汝<), 향리 송백(宋伯), 송상현의 첩 김섬(金蟾), 촌민 김상(金 祥) 등이 순절하였다

271 3) 다대진성 전투 4월 14일 부산진성을 함락시킨 일본군은 주력은 동래성, 나머지 일부는 서평포와 다대진을 공격하였다. 전투는 15일 본격적으로 실시되었다. 다대진첨사 윤흥신 순 절, 다대진성 성민들도 전사하였다. 4) 부산포해전 경상좌수사 박홍이 도망가고. 경상우수사 원균(元均)도 패하여 도망갔다. 율포만 호 이영남과 옥포만호 이운룡은 원균에게 호남에 원병을 청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 순신이 이끄는 전라좌수군이 원병을 왔다. 9월 1일 조선 수군 연합군은 부산포해전에서 대승을 거두었다. 부산포해전은 작 은 함대를 이끌고 3배가 넘는 대규모 세력에 맞선 해전이며, 일본 수군의 근거지를 공격한 의미 있는 일전이었다. 일본군선 100여척을 격파하였다. 이순신의 핵심참모 인 정운(鄭運)이 전사하였다. 다대포 몰운대에 정운공 순의비(鄭運公殉義碑) 가 있 다. 1980년에 양력 10월 5일을 부산시민의 날 로 정하였다. 1592년 음력 9월 1일 을 양력으로 환산한 것이다. 6. 임진왜란의 기억과 전승 국가 차원에서 임진왜란 때 활동했던 인물들을 공신으로 책훈을 하였다. 전후 복 구 작업의 일환이면서, 전란 수습을 위한 일차적 마무리작업이었다. 선무공신은 임진왜란 때 무공을 세웠거나, 명에 병량주청(兵糧奏請)사신으로 가서 공을 세운 사람에게 준 칭호이다. 18인을 3등으로 구분, 1등 3명, 2등 5명, 3등 10 명이었다. 호성공신은 선조를 모시고 의주까지 호종하는 데 공이 있는 사람에게 준 칭호이다. 1등 2명, 2등 31명, 3등 53명이었다

272 <참고> 임진왜란 공신 일람표 종류 선무 명칭 孝忠杖義迪毅協力宣武功臣 孝忠杖義協力宣武功臣 등급 1등 2등 공신 孝忠杖義宣武功臣 3등 忠勤貞亮竭誠効節協力扈聖 1등 호성 功臣 공신 忠勤貞亮効節協力扈聖功臣 2등 忠勤貞亮扈聖功臣 3등 이름 李舜臣 權慄 元均 申點 權應銖 金時敏 李廷馣 李億祺 鄭期遠 權悏 柳思瑗 高彦伯 李光岳 趙儆 權俊 李純信 奇孝謹 李雲龍 李恒福 鄭崐壽 信誠君 定遠君 李元翼 尹斗壽 尹根壽 柳成龍 柳永慶 朴東亮 등 31명 鄭琢 李憲國 柳希霖 李有中 등 53명 1)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과 인식 ① 동래부사 이안눌(李安訥) 1608년 2월에 부임한 이안눌( 재임)은 전쟁 후 동래부의 처참한 상황을 그의 문집 동악집(同岳集) 에 시로 남겼다. 특히 四月十五日 이란 시는 노 인들이 전쟁의 참담함을 기억하는 것을 듣고 동래성 함락 당시의 비참함을 형상화 하였다. 새벽 집집마다 곡을 하니/ 천지가 온통 쓸쓸하게 변하고/스산한 바람, 숲을 뒤흔든다/ 놀라고 괴이하여 늙은 아전에게 물었다/ 통곡소리가 어찌 이리 참담한가/ 임진년에 왜적이 들어와서/ 오늘 성이 함락되었습니다. (중략) 그래서 이날이 되면/ 제삿상 차리고 죽음을 애도하네/ 아비가 그 아들을 위해 곡하고/ 아들이 그 아비를 곡하네/ 할아비가 손자를 위해 곡 하고/손자가 할아버지를 위해 곡하네/ (중략) 아전이 앞에 나와 다시 말하기를/ 곡함이 있는 것은 그래도 슬프지 않지요/ 얼마나 많은데요, 퍼란 칼날 아래/ 온 가족이 다 죽어 곡할 사람조차 없다오. ② 동래부사 권이진(權以鎭) 동래부사 권이진( 재임)은 일본에 대한 대응에서 가장 강경책을 보인 인물이다. 1709년 동래부사로 부임할 때에는 최석정(崔錫鼎)의 천거를 받았 다. 1710년 동래 금정산성의 개수에 관한 자신의 방안이 조정에서 받아들여지지 않 자 당시 영의정으로 있던 최석정에게 편지를 올려 자신의 안이 관철되도록 해줄 것 을 부탁하였다. 권이진을 동래부사로 적극 추천한 사람 중에 하나가 남구만(南九萬)

273 이다. 남구만은 국방강화책을 강력하게 추진하였는데, 그 방안들은 그에게 많은 영 향을 주었다. 1709년 5월 <태종대에서 기우제를 지낸 이후 지은 시> 유회당집 임진년의 일을 생각하니 슬픈 감회가 일어난다. 저 섬은 평소에 조선의 은혜를 두 텁게 받았는데, 豊臣秀吉이 세력을 떨치자 조선의 허실을 모두 고해바치고는 향도 가 되었으니, 당시의 죄로는 宗義智가 으뜸이다. 小西行長이 철환하고 강화를 맺기 이전에 명의 군대는 아직 부산에 머무르고 있었다. 만일 조선의 편장을 한 명이라도 파견하여 명의 군대와 힘을 합쳤더라면, 새벽에 출발하여 섬의 오랑캐들을 모두 죽 여 하늘에까지 통하는 분함을 조금이라도 씻을 수 있었을 것이다.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에 적개심을 가졌으며, 왜란의 말미에 그 앞잡이인 대마 도를 정벌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가 있었는데 이를 살리지 못했음을 몹시 아쉬워하 였다. <忠烈別祠의 사액에 관한 일과, 부산자성에 만경리의 사당을 세우는 일에 관한 장계> 변란을 일으킨 왜놈들은 진실로 우리나라가 만세토록 잊을 수 없는 원수이고... <金井山城, 忠烈別祠, 海防에 관한 세 가지를 아뢴 소> 변방의 신하는 城池를 지키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신이 부임한 초에 금정산성의 일로 2차례 장계를 올림. 만번 죽을 것을 각오하고 이 성에 관한 일을 다 아뢰어, 직분의 만분의 일이나마 보답하려고 합니다. 일본에 대한 경계를 해소할 수 있는 길은 국방의 강화라고 인식하였다. 2) 임진왜란에 대한 기억의 전승과 현창 작업; 忠烈祠 동래부사 송상현을 비롯한 전쟁 때 희생된 순절자를 기억하고 현창하는 작업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 그 가장 대표적인 것이 충렬사이다. ① 1605년 부임한 동래부사 윤훤(尹暄, 재임) 때 정식으로 시작되 었다. 1605년에 송상현의 사묘(祠廟), 즉 송공사(宋公祠)를 남문 밖에 세움. ② 부사 이안눌(李安訥, ), 동래부민 66명 중 전공이 뛰어난 24명을 택하여 감사에게 청하여 정려를 세우고, 후손에게 복호(復戶)를 지급하도록 함. 경상좌수영에서 항거한 25인의 사적을 모아 정방록(旌榜錄)을 지음. ③ 1622년(광해군 14) 선위사 이민구(李敏求)가 송상현 사당에 사액(賜額)하고, 정 발을 병향(並享)/추향(追享)하기를 청함. 이민구는 이순신 이억기의 충민사, 김천일 최경회의 충렬사 등과 같이, 송상현의

274 사우 송공사에 사액을 내리고, 부산진첨사 정발을 함께 배향하게 해달라는 건의를 하였다. ④ 1624년(인조 2) 송공사에 충렬사(忠烈祠)의 사액을 내리고 정발을 병향함. 송상현의 사우에 사액을 내리는 것은 임진왜란 때 순절한 인물에 대한 절의를 표창 한 것이다. 이러한 순국을 표창하는 것이 절실했던 것은 1624년에 일어났던 이괄의 난과 같은 변고를 예방하기 위해서였다. 1624년 忠烈이란 사액을 내리자, 송공사를 충렬사로 부르게 되었다. ⑤ 1652년(효종 3). 임진왜란 발발 1주갑(周甲)된 해이다. 동래부사 윤문거(尹文擧, )는 송공사가 좁고 저습하며, 성문 가까이 있어 시끄러워 위치가 적당하지 않으며, 송상현공의 학행과 충절은 후학의 사표가 되므로, 이를 선비에게 가르칠 필요가 있음을 강조. 안락리 현 충렬사 자리로 이전. 사당을 창건, 강당과 동/서재를 지어 안락서원(安樂書院)이라 함. ⑥ 송시열이 충렬사 이안문(移安文)을 지었는데, 동래부의 사족이 안락서원의 송상 현을 통해서 충의와 더불어 인의를 배울 것을 언급하였다. 송시열은 송상현의 이미 지를 충절에서 인의로 확대 해석한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1670년 송시열이 찬한 동래남문비를 통해서 전국적으로 확산되었다. ⑦ 1653년(효종 4) 송상현의 諡號에 대한 논의가 있었다. 시호를 내려달라는 동래 부 사족인 박우계(朴友桂)의 상소에 대해서 대신들이 논의하였다. 효종실록 효종 4년 3월 4일. 고(故) 동래부사 송상현에게 충렬(忠烈)이란 시호를 추증하였다. 동래의 사인(士人) 박우계(朴友桂) 등이 상소하기를, 고 충신 송상현은 외로운 성을 지키다가 나라일 을 위해 죽었으므로 그 의열(義烈)이 환히 드러났는데도 역명(易名)의 법전이 지금 까지 없었으니, 충신과 의사의 기대에 답할 수가 없습니다. 그리고 그때의 교양관 (敎養官)인 노개방도 의를 지켜 떠나지 않고 선성(先聖)의 위판(位板) 아래에서 죽 었으니, 아울러 송상현의 묘우에 종향(從享)하게 하여 주소서. 하였는데, 이 일을 예조에 내리니, 예조가 노개방의 일에 대해서는 본도에 하문하고 송상현에게 시호 를 내리는 일은 대신들에게 의논할 것을 청하였다. 영중추부사 이경여(李敬輿)가 아 뢰기를, <전략> 지금 이 송상현은 조헌(趙憲) 고경명(高敬命)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으니 의당 시호를 내리는 가운데 들어가야 합니다. 하고, 다른 대신들도 옳게 여 겼다. 영돈령부사 이경석(李景奭)이 이어 해조로 하여금 그의 자손들을 녹용(錄用) 하게 할 것을 청하니, 상이 모두 따랐다. 송상현이 임진왜란 때 전투에서 순절한 조헌 고경명과 다를 것이 없으므로 시호 를 내리는데 들어가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송상현은 이순신 조헌 고경명과 동격으로

275 인식되기 시작하였다. 이 시기에 시호의 하사와 더불어 충렬사의 이건과 서원으로 의 승격이 이루어졌다. 송상현 행적 기록으로는 宋東萊傳 (신흠, 1624), 宋公行狀 (송시열, 1655), 壬 辰東萊遺事 (민정중, 1658), 神道碑銘 (송시열, 1658), 忠烈碑記 (東萊南門碑記, 송시열, 1670), 동래부 殉節圖畵記 (권이진, 1709) 등을 들 수 있다. 주목할 것은 송시열의 기록이다. 효종대와 그 이후 정치세력들에게 큰 영향력을 가진 송시열에 의해 보증되어, 확대 재생산되었다. ⑧ 1709년(숙종 35) 부사 권이진, 송상현/정발과 함께 전사한 분(양산군수 조영규 등)도 향사하도록 충렬사 별사(別祠)를 남문 안에 세움. ⑨ 1742년(영조 18)에 동래부사 김석일(金錫一)이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충렬공 송 상현이 순절한 정원루(靖遠樓)의 옛터에 송공단(宋公壇)을 설치하여 송상현을 비롯 하여 순절한 여러 사람을 모셨다. 이에 임진왜란 시기에 동래성전투에서 순절한 인 물들에 대한 현창 작업이 정리되었다. ⑩ 서원 철폐령과 충렬사 서원철폐령(書院撤廢令)은 1871년(고종 8년) 음력 3월 20일 지방에 있어서 양반의 근거지로 남설(濫設)된 서원의 오랜 적폐(積弊)를 제거하기 위해 흥선대원군이 서원 에 대해 내린 일대 정리 명령이다. 전국에 서원을 47개소만 남기고 통폐합한 조치 이다. 비사액서원을 우선적으로 정리를 하였고, 사액서원이라도 첩설된 것과 불법을 횡행하는 서원은 모두 철폐되었다. 1871년(고종 8년) 철폐령에서 제외된 서원 및 사우(祠宇) 도 수 서원 및 사우 개성 숭양서원 김포 우저서원 용인 심곡서원 양성 덕봉서원 경기도 충청도 12 파주 파산서원 고양 기공사 여주 강한사 과천 사충서원, 노강 5 서원 강화 충렬사 광주 현절사 포천 용연서원 연산 돈암서원 홍산 창렬사 노성 노강서원 청주 표충사 충주 전라도 충렬사 3 태인 무성서원 장성 필암서원 광주 포충사 순흥 소수서원 선산 금오서원 현풍 도동서원 상주 옥동서원 경상도 14 강원도 황해도 함경도 평안도 함양 남계서원 안동 병산서원 예안 도산서원 동래 충렬사 상 주 흥암서원 진주 창렬사 경주 서악서원, 옥산서원 고성 충렬 사 3 김화 4 배천 1 북청 영유 5 절사 거창 포충사 충렬서원 영월 창절서원 철원 포충사 문회서원 장연 봉양서원 평산 태사사 해주 청성묘 노덕서원 삼충사 안주 충민사 영변 수충사 평양 무열사 정주 표

276 3) 임진왜란 기억의 전승; 임진왜란도 현존하는 부산지역 임진왜란 관련 그림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작품명 수량 부산진순절도 1 임진전란도 1 동래부순절도 1 동래부순절도 1 동래부순절도 임진왜란도 병풍 1 작가 변박 (卞璞) 이시눌 (李時訥) 변박 (卞璞) 제작시기 소장처 비고 1760년 육군박물관 보물 391호 1834년 서울대 규장각 6월 한국학연구원 1760년 육군박물관 보물 392호 송상현 종가본 충북 유형문 청주고인쇄박물관 화재 223호 조선후기 변곤 1834년 (卞崑) 4월 19세기 6폭 후반 울산박물관 일본 和歌山 현립 박물관 (1) 1760년 이전의 순절도 관련 기록 ① 동래부사 민정중 때( ); 자료: 임진 동래유사 충렬사지 다시 널리 캐어묻고 믿을만한 증거가 있는 것을 취하여 一通의 기록을 만들고 새 길 돌을 구하여 事蹟을 싣고, 또 수칸의 집을 官道의 옆에 세워 畵工을 시켜 그 자 취를 그리게 하여 보고 느끼는데 도움을 주고자 하며... 돌은 이미 채취하였으나 병으로 인하여 파직하고 돌아갔다. ( 민정중 씀) 그림을 그렸는지 여부 는 확인되지 않음. ② 동래부사 정석 때( ); 자료: 권이진, 畵記 충렬사지 부사 鄭晳(정석)은 비석을 세워 그 글을 오래가게 하며 또 장차 그 사적을 그림으 로 그리려 하였다. ( 권이진 씀) 그림을 그렸는지 확인되지 않음. ③ 동래부사 권이진 때( ) 동래부사 권이진의 화기(畵記)1709년 11월 하순에 씀. 충렬사지 권7,분향록 수록. 화기는 유회당집 에도 수록되어 있다. 대저 사람들이 사서를 읽다가 충신, 열사의 사적에 이르면 그 사람은 뼈가 썩었을 것이요, 그 사적은 그림자조차 침몰되었을 것이다

277 이제 나는 옛 성의 남문 안에 한 극지(隙地)를 사서. 사옥을 짓고 조공(양산군수 趙 英珪), 노공(교수 盧蓋邦), 문생(文德謙)을 향사하고 사당의 좌측에 익무를 지어 金 希壽 이하를 제사지내니, 부리 宋伯, 부민 金祥이 모두 참여하였다. 그 비석을 옮겨 뜰 가운데 두고는 집을 지어 비벽을 덮고 그 집의 좌우에는 畵工에게 명하여 여러 사람이 의를 위해 죽은 모습을 그리게 하고, 아울러 李珏이 달아나는 형상을 그 사 이에 그리게 하였다. 또 성이 함락된 후에 민이 적에게 붙지 아니하고 의병을 일으 켜 적을 친 24인의 성명을 그 옆에 써서 諸公이 선을 권장하고 악을 미워하는 뜻을 끝마쳤다. 사당을 세워도 부족하여 또 비석을 세우고, 비석을 세우고도 부족하여 또 그림을 그 려서 장차 이 이치를 함께 稟賦하여 마음을 둔 자를 감격케 하려 한다. 사람이 누가 이 마음이 없겠으며 이 마음이 있는 자 누가 이 이치를 감추지 않아서 어찌 이 그 림을 보고도 임금에게 충성하고, 윗사람을 위해 죽을 마음이 생겨나지 않겠는가. 읍 사람이 전하기를 성이 처음 함락될 때 적이 성의 東山으로부터 넘어왔다고 한다. 충렬사 별사 안의 좌우벽에 순절도를 걸어두었다. 화기는 나무 편액의 형태로 새 겨 걸어두었다. 池內宏, 文祿慶長の役 (別編第一), 동양문고, 1936(吉川弘文館, 1987 복간)에 사진 수록되어 있다. 실물의 행방은 현재 알 수가 없다. ④ 동래부사( ) 조엄 1758년 4월 15일이 쓴 제문 祭宋公祠 충렬 사지 에는 遺祠에 있는 도는 그 일이 역역하다(遺祠有圖 其事歷歷) 라고 하였다. ⑤ 동래부사 홍명한이 1760년에 쓴 本 殉節圖序(본부순절도서) 충렬사지 에 보면 동래부에는 옛날에 순절도가 있었다(萊 舊有殉節圖). 라고 하였다. ⑥ 여산송씨지신공파보 (1957년) 민정중이 순절도 3폭을 그려, 1폭은 조정, 1폭은 민정중, 1폭은 송상현 종가가 소 장했다. 그러나 민정중이 지은 임진동래유사 에는 이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여산송씨족 보 에서 언제부터 이 기록이 나오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⑦ 송상현 종손가 소장 동래부순절도 연대와 화가 미상이다. 충북 송상현 종손가 소장. 1978년 충렬사 기념관 소장. 2000년 종손가 반환. 현재 청주고인쇄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278 (2) 1760년 변박이 그린 순절도 ① 동래부순절도 동래부사 홍명한( )이 1760년에 쓴 서문( 本 殉節圖序 ) 충렬사지 동래부에 오래전부터 殉節圖가 있음은 뜻이 여기에 있는 것이라 하겠다. <중략> 동래부에 어찌 하루라도 이 그림이 없으리오. 애석하게도 해가 오래됨에 변하고 헤 어져 가니 나는 적이 아주 흐려져서 분별할 수 없게 될까 두려워하여, 드디어 읍에 사는 변박을 시켜 다시 모사하고 새로 장정하게 하니(使邑寓人卞璞 繼摹而新粧之), 만약에 뒷사람으로 하여금 지금 이 그림을 보는 것을 지금에 옛그림을 보는 것과 같이 할 수 있다면 이 그림은 장차 오래 오래 전해질 것이오...삼가 충렬사에 간직 하여 써 뒷사람을 기다릴 따름이다. 이 서문에 의해 1760년 변박이 그린 것으로 봄. 변박이 옛그림을 다시 그린 것이다. 원래 충렬사 소장. 1963년 1월 17일 육사기념관 이관. 현재 육군박물관 소장 ② 부산진순절도 동래부사 홍명한( )이 1760년에 쓴 서문( 釜山殉節圖序 ) 충렬사 지 다시 그려서 보관함은 후일의 충용한 사람을 힘쓰도록 함이리라. 변박이 그렸다는 표시는 없으나, 本 殉節圖序 서문에 따라 1760년 변박이 그린 것으로 본다. 원래 충렬사 소장. 1963년 1월 17일 육사기념관 이관. 현재 육군박물관 소장 ③ 남옥(南玉)의 일관기 내용. 1763년 통신사[정사 조엄]의 제술관 南玉의 사행일기 日觀記 8월 22일 내용을 보면 다음과 같다. 두 벗[원중거, 성대중]과 함께 동성(東城)을 나가서 충렬사에 참배했다. 마침 추향 재일이어서 5~6명의 유생들이 <宋忠烈鄭忠壯城陷殉身圖>를 보고, 우옹[송시열]의 李忠傳 을 읽고 있었다. 정당에 송, 정 두공을 아울러 제향하고, 양산군수 조영규 공, 동래교수 노개방공을 배향하고, 동무에는 유생 문덕겸공, 비장 송봉수, 김희수공 을, 서무에는 겸인 신여로, 향리 송백, 읍민 김상을, 문밖의 별사에는 송공의 기생 금섬과 정공의 기생 애향을 배향했다. 그림의 서문에 이르기를...라고 했다. 사당에 참배를 마치고 재생에게 이르기를 제군들이 장차 이 사당을 모실 것이니, 우리들 마음이 흡족하오, 이 일[이각이 도망간 일]은 단지 충성스러운 영령들 뵙기 가 부끄러울 뿐만 아니라 여러 유생들 보는 것도 부끄럽소. 라고 했다

279 (3) 1834년에 그린 이시눌, 변곤이 그린 임진전란도 ① 이시눌의 부산진 다대진순절도 그림에는 萬曆壬辰後二百四十三年甲午六月 日 畵師本 軍器監官李時訥(만력임진후 이백사십삼년갑오 유월일 화사 본부군기감관 이시눌) 이라 적혀 있다. 순조 34년(1834) 화사 동래부 군기감관 이시눌이 그린 것이다. 군기감관은 동래부 별군관청 군기감관을 가리킨다.(<표> 참조) 근경의 다대포진과 원경의 부산진 두 성에서 벌어진 전투 상황을 그린 것이다. 다대진성 전투 그림이 그려진 순절도란 점에 의미가 있다. 서울대 규장각 소장(古軸 4252,4 31). 도서대장 명칭 임진전란도 이다. 서울대 (규장각) 한국고지도전시회( )에서 처음 공개되었다. 허선도의 논문(1987)에 소개되고, 1987년 8월 15일 독립기념관 개관 때 모본이 작성되었으나, 부산 지역에 서는 관심 가지지 못하다가, 최근에 알려지게 되었다. ② 변곤(卞崑)의 동래부순절도. 2010년에 알려진 그림이다. 그림에는 萬曆壬辰二百四十三年甲午四月日畵師本 千 摠卞崑(만력임진 이백사십삼년갑오 사월일 화사 본부 천총 변곤 이라 적혀 있다. 1834년 4월에 동래부 천총 변곤이 그린 것이다. 천총은 장관청 천총이다.(<표> 참 조). 현재 울산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그림에 인물명을 부기하고 있다. 변박의 그 림보다는 종가소장본과의 관련성이 크다. 두 그림 다 동래부사 박대규(朴大圭, 재임) 때 그린 것이다

280 <참고> 변박, 이시눌, 변곤의 동래부 무임(武任)직 경력 武廳무청 무임직 변박 이시눌 변곤 中軍중군 將官廳 千摠천총 장관청 把摠파총 哨官초관 行首행수 別軍官廳 별군관청 兵房병방 軍器監官군기감관 別軍官별군관 帶率軍官대솔군관 別將별장 別騎衛廳 별기위청 百摠백총 正정 領영 領下영하 作隊廳 別將별장 작대청 百摠백총 守堞廳 別將별장 수첩청 百摠백총 敎鍊廳 旗知彀 旗手 哨官기지구 기수 초관 교련청 敎鍊官교련관 (4) 일본 和歌山 현립박물관 소장 임진왜란도병풍 1999년 시즈오카(靜岡)현 거주 개인이 박물관에 기증되었다. 이때 붙여진 이름이 다. 기존의 동래부순절도와는 차이가 있다. 동래부순절도에는 있으나, 병풍에는 없는 것 假我途 假途難 목패, 경상좌병사 이각의 도망, 조총을 쏘면서 일본군이 동래성을 난입, 송상현의 순절, 두 여자가 지붕에서 기와 던지는 장면 등. 동래부순절도에는 없으나, 병풍에는 있는 것 병풍 좌측에 말탄 무장이 인솔하는 세 부대. 그중 하나는 활을 쏘면서 일본군을 압 도. 마을에서는 여인과 아이가 구원군을 맞음 등

281 4) 최초의 동래부지 (1740년)의 기억과 전승 동래부사 박사창(朴師昌, 재임) 때 편찬되었다. 현존하는 최고(最 古)의 동래부지[동래부읍지]이다. 1740년 12월 15일 쓴 박사창의 서문 동래는 변방의 주군(州郡)이다...특히 충령공 송상현부사의 사적을 상세히 기록 한 것은 생각건대 송사군과 정절인 두 분은 임진란을 당하여 절의를 숭상하고 죽음 을 돌아가는 거처럼 보아, 충의심이 늠연하여 공적을 수립함이 특이하니, 족히 일월 보다 밝고, 태산보다 높다 할진대, 어찌 그 전말을 상세히 서술하여 충신의사의 기 상을 장려하지 않으리오...우리의 융비를 수리하고, 우리의 의열을 분기시켜, 성을 지키기를 월천(月川)과 같이 하고, 첩보를 아뢰기를 충무공과 같이 하여, 성이 함락 된 옛 치욕을 쾌히 설욕함으로써, 적을 섬멸하는 위훈을 세우기를 깊이 바라는 바이 다. 동래부지를 편찬하는 의도가 잘 반영되어 있다. 임진왜란의 치욕에 대한 반성 위 에서 국방을 강화하여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내용 가운데 임진왜란과 관련되는 부분은 대략 다음과 같다. <고적> 송공단 <사묘> 충렬사. 1605년 부사 윤훤이 남문 안에 세웠다. 1651년 부사 윤문거가 부 의 동쪽 4리에 있는 萊山 아래의 安樂原으로 이건하였다. 1709년 부사 권이진이 別 祠를 세웠다. 1670년에 부사 정석이 농주산에 충렬비와 비각을 세웠다. 1709년 권 이진이 남문 안으로 비각을 옮겼다. <별전공신(別典功臣)> 1.첨사 김정서, 2.절충 정승헌, 3.정(正) 문세휘, 4.정 정순, 5.전권관 김일개, 6.정 김일덕, 7.정 송창문, 8.정 김근우, 9.주부 강개련, 10.판관 김흘, 11.주부 이언홍, 12.겸사복 김대의, 13.참봉 오홍. 14.관노 인수, 15.절충 김 달, 16.정 송남생, 17.판관 문택룡, 18.판관 박천추, 19.주부 송용경, 20.판관 김기, 21.부장 황보상, 22.판관 이응필, 23.판관 김사위, 24.판관 문도. 이상 24명의 사적은 임상원의 별전청 서문에 상세히 보인다. <제영잡저(題詠雜著)> 송공단(宋公壇); 접위관 최수범 충렬사; ① 현헌 신흠(申欽) 송동래전(宋東萊傳), ② 시남 유계(兪棨) 사우개건기(祠 宇改建記), ③ 판중추부사 송시열(宋時烈) 동래남문비기(東萊南門碑記, 1670). ④ 부사 권이진(權以鎭) 화기(畵記, 1709), ⑤ 부사 권이진 장계(狀啓), ⑥ 제문(祭文)

282 송동래 정첨사 양위 봉안제문[산일] 치제문, 치제문 별묘봉안제문 제 양산군수조공문, 제교수노공문, 제학생문공문, 별사체제문 ⑦ 시(詩) 부사 윤훤, 부사 이춘원, 접위관 이정제, 접위관 이세근, 부사 권이진, 양산군수 김수, 접위관 이정제, 부사 이정신 별전청(別典廳); 염헌 임상원(任相元) 서(序) 부산자성비; ①부산자성비명 병서, ②부사 권이진 자성비각기, ③부사 권이진 장계 이후 읍지를 보면 인물조의 절의(節義) 항목에 임진왜란 관련 인물들이 수록되어 있다. 5) 임진왜란 기억과 전승 사업의 집대성; 충렬사지(忠烈祠志) 부산지방의 임진왜란 당시 항전기록과 충렬사의 연혁, 동래부사 송상현 등 배향 인 물의 약전에 관한 내용을 수록한 책이다. 1767년(영조 43) 동래부사 엄린(嚴璘)이 편찬하고 1808년(순조 8) 동래부사 오한원(吳 源)이 간행하였다. 부산지역 임진왜 란 관련 자료를 집대성한 책이다. 목차를 보면 다음과 같다. 권1 충렬공유사(忠烈公遺事); 송동래전/행장/신도비명/치제문 등 권2 충장공유사(忠壯公遺事); 묘표(墓表)/ 정려록후/시장(諡狀)/부산순절비 권3 윤공유사(尹公遺事); 전망사적서/ 윤공사절기/충렬사에 추향하는 예조 관문 등 권4 조공유사(趙公遺事); 조양산전/조처사전/조공유사기/ 권5 노공유사(盧公遺事); 제문/밀양 중봉서원에 모시는 제문/노공유사기/문덕겸(文 德謙)전 권6 시향록(始享錄); 송공사(宋公祠)/서원기/임진동래유사(1668, 閔鼎重)/충렬비기 등 권7 분향록(分享錄); <별사(別祠) 권이진 장계/화기(畵記)/별묘봉안제문> <사액충렬 별사 권이진 상소/정공 별사이안축문 등> 권8 합향록(合享錄); 본부순절도서/부산순절도서/충렬사 강당 중수기/제문/제영 등 권9 송공단(宋公壇) 시말(始末) 권10 정공단(鄭公壇) 권11 윤공단(尹公壇) 추록(追錄) 만호 정운(鄭運) 사적(事蹟); 몰운대 순의비기 부록(附錄)1 만공단(萬公壇) 사적; 부산자성비명 병서/자성비각기 등 부록(附錄)2 별전공신(別典功臣); 부사 이안눌 표충복호문/효유문/별전청서 등

283 6) 한국 현대사에서의 기억과 전승 1968년 용두산공원 이순신장군 동상 건립되었다. 조각가 김세중 1977년 부산진첨사 정발 장군 동상이 건립되었다. 충렬사관리사업소 설치, 충렬사 상량식 거행되었다 1978년 동래부사 충렬공 송상현 동상이 건립되었다. 충렬사 정화사업이 준공되었다. 충렬사 정화 기념비가 제작되었다. 1978년 8월 5일 이주홍 글, 배재식 글씨 1978년 6월 재단법인 충렬사안락서원에서 충렬사지 가 영인, 국역되었다. 정중환, 김석희 번역. 1980년 12월 충렬사 정화지 가 간행되었다. 정중환, 김석희, 강용권 등 집필. 1980년 9월 10일 부산시민의 날 확정 공포되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의 부산포해전 승전일(음 9월 1일, 양 10월 5일) 1981년 다대첨사 윤흥신 공 석상이 고관입구에 건립되었다. 충남 아산 현충사(顯忠祠)가 1966년부터 1974년까지 성역화 작업을 하였다. 충렬 사는 1976년 5월부터 1978년 7월까지의 대대적인 정화사업을 하였다. 박정희 정권 시절 호국의 요람지 로 확장 정화하면서, 안락서원 본래 모습은 사라지고, 현재의 충 렬사로 자리하게 되었다. <참고문헌> 부산교통공사, 부산박물관, 동래읍성 해자가 품은 400년 전의 기억, 부산박물관, 임진왜란 (임진왜란 7주갑 특별기획전), 부산박물관, 동북아시아 국제 전쟁, 임진왜란 (제28기 성인박물관강좌), 김강식, 조선후기의 임진왜란 기억과 의미 지역과 역사 31, 부경역사연구소,

284 고려말 禑ㆍ昌王과 廢假立眞 유 영 옥* Ⅰ. 머리말 조선 태조 李成桂는 1388년 5월 위화도 회군으로 우왕을 폐위한 뒤1) 왕족 중에 한 사람을 국왕으로 옹립하고자 했으나, 회군에 동참한 曺敏修의 반대로 우왕의 아 들 창왕(재위 )이 즉위하게 되었다. 이에 이성계는 약 1년 뒤 창왕 을 폐위하게 되었는데, 이때 이성계측이 昌王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옹립하면서 내 세운 핵심 명분은 廢假立眞 이다. 폐가입진은 고려의 禑王과 昌王이 辛旽의 핏줄이므로 僞王 辛昌을 폐위하고 王氏 의 참된 왕족을 국왕으로 옹립한다는 말이다. 이러한 폐가입진의 명분론은 紀傳體 고려사 에 그대로 적용되어, 우왕과 창왕의 사적은 世家 에 등재되지 못하고 列 傳 의 제일 끝머리 <반역전>에 辛禑[附 辛昌] 의 이름으로 수록되었다. 辛氏인 우 ㆍ창이 참람히 왕위를 차지했다는 폐가입진의 논리는 조선 500년간 거의 변함없이 이어져 온 확고한 공식이었다. 그러나 18c 호남 선비 黃胤錫(1729~1791)의 방대한 생활일기 頤齋亂藁 나 安 鼎福(1712~1791)의 私撰史書 東史綱目 을 비롯한 몇몇 사료를 참고하면, 官撰ㆍ 사찬사서를 불문하고 거의 진리로 받들어진 이 입론이 실은 조선후기로 갈수록 史家 의 표피적인 書法에 불과할 만큼 흔들리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특히 18c에는 우ㆍ 창왕을 신씨가 아닌 왕씨로 보는 견해가 사대부 대다수의 公論으로 자리잡았다. 이에 본고는 사대부 개개인의 言說과 17 18c 私撰史書를 분석함으로써 폐가입 진이 조선후기에 점차 형해화된다는 사실을 1차적으로 밝히고, 아울러 폐가입진을 비판하는 인식들의 근거를 살펴 조선후기 사대부의 의리 및 정통성에 대한 사유를 일견 고찰해보고자 한다. 지금까지 폐가입진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다룬 논고가 없 기 때문에, 본고는 미흡하나마 작은 試論으로서의 의미가 있으리라고 본다.2) * 부산대 강사 1) 2) 1388년 3월 崔瑩(1316~1388)의 庶女가 우왕의 부인[寧妃]으로 간택/ 1388년 3월 明나라가 철령 위 설치를 일방적으로 통보 / 4월 요동정벌 단행(팔도도통사: 최영, 좌군도통사: 조민수, 우군도통 사: 이성계)하여 18일 평양 출발 / 5월 7일 위화도 도착, 2번이나 평양에 사람 보내 회군 요청했 으나 不許. 5월 22일 위화도 회군 / 6월 우왕 폐위하여 강화도로 추방. 12월 최영 죽임 / 1389년 11월 김저 사건으로 우왕을 강릉으로 옮김, 창왕을 폐위해 강화로 유배, 공양왕 즉위. 12월 창왕 ㆍ우왕 살해 본고는 유영옥, 廢假立眞 에 대한 조선후기 사대부의 비판적 인식, 역사와 경계 83, 을 278

285 Ⅱ. 廢假立眞에 대한 公論의 변화 고려 32대 우왕과 33대 창왕을 辛禑ㆍ辛昌 으로 표기하거나 僞王ㆍ僞主로 치부하는 일 은, 문종 2년(1452)에 완성된 高麗史 로부터 성종조 東國通鑑 (1485), 16c 이후의 私撰 史書, 개화기 국사 교과서에3) 이르기까지 변함없이 지속된 조선시대 史家의 일반적인 史 法이었다. 廢假立眞의 명분론은 조선시대 내내 관철되어 온 조선 건국의 큰 명분이었다. 나는 禑를 신씨가 아니라고 여기는 것은 자못 大同之論입니다만, 혹 그를 실 제로 신씨라고 하는 사람도 많이 있습니다. 하였다.4) 내가 또한 우ㆍ창의 경우 세상의 大同之論은 반드시 王氏라 일컫는데, 崔 錫鼎의 明谷集 에만 홀로 반드시 신씨라고 했습니다 하였다.5) 그러나 18c 노론계 학자 황윤석의 이재난고 에 의하면, 당대에는 우ㆍ창왕을 공 민왕의 아들로 보는 인식이 오히려 대다수였음을 알 수 있다. 비록 우왕을 신씨로 보는 사람도 여전히 많지만, 황윤석은 특히 大同之論 이라는 말로 18c 대다수 사대 부들의 公論이 우왕을 신씨로 보지 않는 것임을 알려주었다. 元天錫의 詩史에 근거한 비판 폐가입진을 부정하는 논리는 고려말 당대부터 이미 제시되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로는 우왕을 공민왕의 親子로 단정한 여말의 절의자 원천석(1330~?)을 들 수 있다. 우ㆍ창왕을 신씨가 아니라고 주장하는 언설들은 사림정치가 구현되고 조선성 리학이 성립되는 16c 후반부터 본격적으로 등장되었는데, 폐가입진의 오류를 지적 하는 조선 사대부들은 바로 耘谷 원천석의 詩史를 그 중요한 증거로 늘 제시하였다. 원천석은 여말의 사적을 野史로 기록하여 비밀리에 遺稿로 남겼는데, 후손이 그것 을 열어본 뒤 멸족이 두려워서 불태워 없애 버렸다고 한다. 이에 오직 시편만 남았 는데, 그것 또한 당대의 時事를 많이 읊조린 것이어서 詩史 라고 일컬어졌다.6) 3) 4) 5) 6) 축약한 글입니다. 유영옥, 개화기 國史 교과서의 年紀法 역사와 경계 79, 2011: 갑오개혁 이후 한일합방까지 약 20종의 국사 교과서가 편찬되었다. 그 중 고려시대사를 수록한 약 10종의 교과서들은 여전히 모두 辛旽 婢出 이라 하면서, 僞主禑 라 하거나 前廢王禑ㆍ後廢王昌 내지 廢主禑 이라 하거나, 아니면 고려사는 무릇 32世에 僞主 2人 이라고 표현했다. 黃胤錫, 頤齋亂藁 권8, <赴直紀行> 1767년 4월 4일(丁酉). 黃胤錫, 頤齋亂藁 권13, <西行日曆> 1769년 9월 27일(丙午). 大東野乘, 海東樂 (沈光世): 원천석은 평생의 저서를 궤짝 하나에 넣어 단단히 잠가 두고 임종 때에 유언하기를 자손이 聖人이 아니거든 열어 보지 말라 하여, 그 집에서 사당 안에 간직 해 두었다. 아들과 손자 때는 열어 보지 않았는데, 증손에 이르러 드디어 궤를 열어 보니, 고려 말의 野史였는데 國史와 같지 않은 데가 많았다. 보고 나자 끝까지 덮어 두기는 어려운 일이라 죄 279

286 조선전기 서거정과 유희춘도 亡國遺事의 의혹을 결단하는 데 참고가 된다고 운위 되었지만,7) 그들은 딱히 우ㆍ창왕을 신씨가 아니라고 단정한 적은 없다. 필원잡기 는 前王의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고 말한 李穡에 대해 국초의 史臣 趙璞이 그 이유 를 나름대로 유추하여 일견 이색을 변호했는데, 요즘 史書에는 이런 기록이 삭제되 었으나 후세 선비들은 이에 대한 논의를 알아야 한다는 정도로 언급했고, 유희춘은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이라 기록한 여말의 秘史를 목격한 정도였다.8) 명종ㆍ선조조에 들어서면 폐가입진에 대한 회의의 기운이 조금씩 구체적으로 드 러난다. 명종조 임보신의 병진정사록 9)과 선조조 名臣이자 이색의 후손인 이기의 송와잡설 10)은 모두 원천석이 우ㆍ창왕을 先王 이라 하거나 우왕을 공민왕의 친아들이 라고 언급한 사실을 전했다. 또 심광세(1577~1624)의 해동악부 나 안정복의 동사강 목 에 의하면, 운곡은 공양왕 이후를 國家 라 하지 않고 國人 이라 칭했으며, 조선 에 대해서는 我國 이나 我朝 라 일컫지 않고 다만 新國 이라 운운할 뿐이었다.11) 그러나 임보신과 이기 및 심광세 등은 이를 제3자의 입장에서 전할 뿐이지만, 月 汀 尹根壽(1537~1616), 象村 申欽(1566~1628), 竹泉 李德泂( ), 昆侖 崔昌大( )는 대개 원천석의 사필을 근거로 우ㆍ창왕의 신씨설에 대한 비 판을 직접적으로 제기하고 나서서 주목된다. 근래에 相國 윤근수가 일찍이 禑는 왕씨인데 간신들이 다른 성을 뒤집어 씌웠 다 고 했다.12) 를 얻을까 두려워, 마침내 그것을 불살라 버렸다. 오직 그가 지은 시집 2권이 있는데, 時事를 많이 읊었다. 7)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經史篇 4; 史籍類 1 <史籍總說> 二十三代史及東國正史辨證說; 東國 正史; 高麗史 : 내 생각에 고려사 말미의 사실은 믿기 어렵다. 마땅히 원천석의 역사를 간직한 詩, 유희춘이 미암집 에서 말한 前朝의 史草가 地庫[고려 사초를 보관하던 곳d로 임란 때 불탐] 에 있었다 는 말, 서거정이 필원잡기 에서 말한 고려말의 사실, 상촌 신흠의 勝國遺事 에서 논한 것, 金鎭圭[李德泂의 오류]가 竹窓閒話 에서 말한 것, 昆侖 崔昌大가 고려사 이야기에 대해 쓴 鳳村詩史, 성호 이익의 새설 에서 고려사에 관해 논한 것 등을 가지고 천고 이래 의심스러웠던 일을 결단해야 한다. : 安鼎福, 東史綱目 제17下, 공양왕 4년 秋7월조에도 거의 동일한 내용이 적혀 있다. 8) 大東野乘, 筆苑雜記 (徐居正) 권2 / 大東野乘, 松都記異 (李德泂) 附錄. 9) 任輔臣, 丙辰丁巳錄 訥齋集 관련 조항: 내 일찍이 鄭仁吉의 말을 들으니 원주에 그 선조 원천 석의 遺稿를 간직한 元氏가 있는데 후세에 아직 알려지지 않은, 가령 辛禑가 공민왕의 진짜 아 들이라는 것까지 말했다 고 하였다. 南士華도 혁명 당시의 史筆은 진실로 다 믿을 수 없다 고 하 였다. 10) 李墍, 松窩雜說 제2항: 공[원천석]은 우가 폐위되어 강화로 귀양갔다는 말을 듣고, 大書特書하기 를 나라에서 先王의 아들을 신돈의 아들이라 하여 폐위해 庶人으로 만들어 강화에 내쳤다 하 고, 이어서 다음과 같은 시를 지었다. 공은 우ㆍ창 부자를 先王으로 여겨 시를 쓰고 곡하였다. 11) 大東野乘, 海東樂 (沈光世). 安鼎福, 東史綱目 제17下, 공양왕 4년 秋7월조. 12) 大東野乘, 松都記異 (李德泂) 附錄. 280

287 원천석의 遺稿 중에는 후세가 알지 못하는 당시의 事迹을 직설적으로 기재한 것들이 있는데, 辛禑를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한 것은 그의 直筆 가운데서도 대 표적인 것이라 하겠다. 그때 정도전과 윤소종 등의 무리가 임금이 王氏가 아니라고 하는 자는 충신이고 왕씨라고 하는 자는 역적이다 는 주장을 내놓은 뒤 조정을 선동하고 인심을 현혹시켜, 마침내 士類를 결딴내고 사람들의 입에 재갈을 물려, 겨우 5년 만에 나라가 망하고 말았다. 그러나 인심이 다 현혹 되지는 않고 사람의 입을 다 재갈 물릴 수는 없어 초야에서 이렇듯 董狐의 直 筆이 나왔으니, 이 어찌 눌린 바위 틈 사이로 죽순이 삐져나온 것이 아니겠는 가!13) 고려 禑ㆍ昌 부자를 王氏라고 결정지어 말한 것은 關東의 높은 선비 원천석이 지은 野史에 자세히 기록되었고 그 밖에도 傳記에 나온 것이 하나 둘이 아 니니, 禑는 실상 공민왕의 아들인 것이 의심 없다. 고려의 운수가 장차 다 되자 이때 저 조준ㆍ정도전 무리가 貴에 급급하여 왕을 바꾸어 놓을 음모를 세 우게 되었다. 그들은 생각하기에 5백 년 宗社가 統緖를 전한 지 이미 오래 되 었으니, 만일 非常한 惡을 君父에게 가해서 사람들의 듣고 보는 것을 현혹시키 지 않는다면 혁명을 일으킬 수 없다 고 여겼다. 그래서 비로소 애매한 말을 만 들어내 드디어 姓을 바꾸는 추한 일을 이루어, 마침내 20년 동안이나 신하로서 섬긴 임금 부자를 머리를 나란히 하고 죽게 했으니, 사람의 도리가 없어졌다. 통탄함을 이길 수 있겠는가?14) 운곡은 이상한 말을 전해 듣는 경우와는 달라서 情ㆍ僞와 虛ㆍ實을 의당 모르는 것이 없으니, 그가 事實을 기록한 말이 도리어 斷案이 되기에 부족하단 말인가? 퇴계의 편지에도 국가가 萬世 후에는 운곡의 의논을 따라야 한다 는 말이 있고, 상촌도 우ㆍ창의 일은 마땅히 원천석의 사필을 믿어야 한다 했으 니, 내 구구한 견해도 전수받은 바가 있다. 곤륜집.15) 신흠은 우왕에 관한 사적은 원천석의 기록을 믿어야 한다면서,16) 원천석이 우왕 을 공민왕의 아들이라고 말한 것은 그의 직필 가운데서도 가장 대표적인 직필로, 바 위틈을 뚫고 피어난 죽순처럼 강인하고 아름답다고 高評하였다. 인조조 松都留守를 역임한 李德炯(1566~1645)도 松都記異 에서 원천석의 野史부터 거론하며 우왕이 공민왕의 아들인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고 단정하였다. 게다가 그는 조준ㆍ정도 전 등이 부귀에 급급하여 20년 동안이나 신하로 섬긴 군주의 성씨를 바꾸는 추악한 13) 14) 15) 16) 申欽, 象村集 권60, 晴窓軟談 下. 大東野乘, 松都記異 (李德泂) 附錄. 燃藜室記述 권1, 太祖朝故事本末 <高麗政亂王業肇基>. 申欽, 象村集 권45, 外集5 / 燃藜室記述 권1, 太祖朝故事本末 <高麗政亂王業肇基> 281

288 일을 자행했다고 혹평하였다. 송도기이 는 폐가입진의 오류를 지적할 뿐더러 그것 이 개국공신들의 사욕에 의한 음모라고까지 몰아붙이고 있는 것이다. 이처럼 조선후기에 와서 폐가입진을 의심하거나 비판하는 의식이 본격적으로 대 두된 것은, 우선 개국의 정당성 여부가 국가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조선의 역사가 충분히 영위되어 왔기 때문이다. 또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을 객관적인 시각 으로 바라볼 수 있는 시간적 거리에 비례하여, 성리학의 핵심 사회이념인 의리명분 론과 정통론도 보편적 가치로 조선사회에 더욱 공고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우왕신씨설을 고수하는 사대부 역시 여전히 적지는 않았다. 폐가입진을 훼 손하는 것은 금지된 국가의 忌諱였기 때문에 설사 그에 대한 회의나 의문이 있더라 도 드러내기 어렵고,17) 또한 國史가 전하는 通論의 史實에 진위 여부를 올바로 가 리기도 요원한 일이었다. 그래서 父子간에도 持論이 같지 않거나 한 개인의 견해조 차 갈피를 못 잡는18) 등 辛ㆍ王의 분변을 둘러싼 견해는 다양하게 착종되었다. 그러나 폐가입진의 등장으로 양산된 시시비비의 역사가 아무리 분분해도, 대세는 이미 신씨설을 부정하는 쪽으로 기울어 갔다. 그 속에서 폐가입진을 비판하는 公論 이 형성되고, 사대부들은 원천석의 詩史를 그들의 입론 근거로 계속 제시하였다. 운 곡은 고려 멸망의 적나라한 사실을 직필로 기록했고, 詩史를 통해 폐가입진을 비판 하는 자신의 견해를 후세에 전했다. 그는 우ㆍ창왕을 공민왕의 親子로 단정했고, 그 들을 모두 先王 이라 지칭하여 僭君이 아닌 정통의 군주로 존대했다. 우왕 폐위 때 는 그를 주상전하 라 칭하며 그 失位에 통곡하는 시를 짓기도 했다. 이러한 그의 詩史는 18c에도 꾸준히 읽혀 사대부의 공감을 자아내었다. 그러므로 원천석의 사필 은 조선후기 폐가입진에 대한 비판에 가장 중요한 한 근거가 되었다고 할 만하다. 李穡의 昌王 옹립에 대한 해석 廢假立眞의 잘못을 지적하며 우왕을 공민왕의 아들로 인정해야 한다는 사대부들 은 운곡 원천석의 詩史 외에 또 대개 창왕 옹립을 주장했던 목은 이색의 답변[當立 前王之子]에 한결같이 주목하였다. 위화도 회군 이후 우왕을 폐위하고 창왕을 옹립하게 된 데는 요동정벌 때 左軍都 17) 18) 安鼎福, 順菴集 권13, 雜著 <橡軒隨筆下[戶牖雜錄 並附]> 東國歷代史 : 양촌이 지은 목은의 행장을 보면, 辛禑 때에 그의 지위가 崇品에 이르렀으나, 신우 라고 칭하지도 않고 왕 이라고 칭 하지도 않고서 모두 생략했다. 왕 이라 칭하자니 時諱를 범하게 되고 신우 라고 칭하자니 그럴 수 없는 점이 있어서가 아니겠는가? 호유잡록. 黃胤錫, 頤齋亂藁 권38, <典牲署主簿肅謝之行日曆> 1786년 4월 24일(丁酉): 또 고려말 辛ㆍ王 의 의심은 정도전 등 여러 사람에게서 나와 후세에 분분했으니, 최석정 부자[최석정: 우왕을 신 씨라 주장/ 최창대: 우왕 신씨설 비판]의 경우도 각각 持論이 같지 않았습니다. 내 이웃의 찰 방 최수옹은 지난번에는 왕씨라 하더니 근자에는 신씨라 하더군요. 한 사람의 논의도 스스로 같 지 않답니다 하였다. 282

289 統使였던 조민수의 역할이 컸다. 그대 조민수는 우왕의 아들 昌을 옹립하고자 하면 서, 당대의 중망을 얻고 있던 이색을 찾아가 그의 견해에 힘입고자 하였다. 조민수 가 창왕을 옹립한 것은 이인임을 염두에 둔 개인적인 私心 때문이라 운위되지만, 목 은은 그와 별개로 의당 前王의 아들을 옹립해야 한다고 답하였다. 태조가 왕씨의 후예를 세우고자 하는데, 조민수는 이인임이 (자신을) 천거하여 뽑아준 은혜를 생각해 昌을 세우고자 했으나, 여러 장수들이 반대할까 걱정하 여, 이색이 당시의 이름난 儒臣이므로 그의 말을 빙자코자 비밀히 그에게 물으 니, 이색이 마땅히 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고 했다.19) 조민수가 창왕 옹립을 도모코자 이색을 찾았을 때 의당 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고 말한 목은의 답변은 조선후기 사대부들에게 두 가지 의미로 해석되어 폐 가입진을 비판하는 근거로 활용되었다. 첫째, 우왕이 王氏가 틀림없기 때문에 名儒 이색이 그의 아들을 옹립하고자 했다 는 해석이다. 18c 노론계 閔百順은 태조의 기세가 두려운 조민수가 그 威德을 꺾기 위해 당대의 巨儒 이색의 말을 빌리고자 했을 때, 만약 창왕이 신씨의 핏줄이라면 이색 같은 名儒가 어떻게 창왕의 옹립을 추천했을 것이며, 또 왕씨가 아니었다면 기 세등등한 이성계 세력의 반대를 어떻게 누를 수 있었겠냐고 반문하였다.20) 즉 우ㆍ 창왕이 왕씨였기 때문에 得勢한 이성계측도 창왕 옹립을 어쩔 수 없이 수용할 수밖 에 없었다는 논리이다. 둘째, 공민왕과 우왕의 관계에 있어서는 핏줄보다 부자간에 한번 맺어진 의리가 더욱 중대하기 때문에, 공민왕이 우왕을 아들로 인정했으면 당연히 그의 아들이라 는 의리명분론에 입각한 논리이다. 성호 이익은 고려사 가 우ㆍ창의 사적을 반역열전에 포함시킨 것은 옳지 못하다 면서, 공민왕이 우왕을 아들로 인정했으니 우왕에게는 털끝만큼의 不善한 마음도 없었을 것이므로 반역 이라는 말은 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덧붙여 10여 년이나 우왕을 군주로 섬겼던 윤회종이 우왕의 참형을 상소한 일을 예시하여, 우왕에게 稱 臣하다가 그를 신씨로 몰아친 자들은 君臣간의 의리를 저버린 인물로 비판했다.21) 19) 20) 21) 高麗史 권137, 列傳 제50 <辛昌 總序>. 黃胤錫, 頤齋亂藁 권8, 1767년 4월 4일(丁酉): 또 禑가 왕씨가 아니라면 목은이 어찌하여 이런 말을 했을 것이며, 또 어떻게 한 마디 말로써 태조의 위덕을 꺾었겠습니까? 하였다. 李瀷, 星湖僿說 권25, 經史門 <辛禑>: 정인지의 고려사 가 辛禑 父子를 반역열전에 넣은 것 은 그 의리가 공평하지 못하다. 그[禑]는 先王이 자기 아들이라고 하여 아버지는 전하고 아들 은 이어받았으니, 그 심중에 어찌 一毫인들 不善한 생각이 싹텄겠는가? 반역 이란 말을 차마 할 수 있겠는가? 공양왕 때에 윤회종이 곧장 上書하여 禑를 참하자고 청했는데, 윤회종은 禑가 왕위 에 있을 때 급제한 자이니, 禑는 일찍이 16년 전에 윤회종이 北面하여 임금으로 섬겼던 자가 아 283

290 상촌의 승국유사 의 의논에 그가 王氏가 아니라는 말 또한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공민왕이 그의 아버지로서 자기 아들이라 일컫고 江寧부원군에 봉하기 까지 했는데, 그 신하된 자들이 어떻게 '우리 임금의 소생이 아니다'고 하는가? 침상에서의 일은 지극히 은미하고 부자간의 의리는 지극히 크고 중한데, 그 아 버지가 그를 아들이라고 했다면 그의 아들인 것이다. 그 아버지가 아닌 자들이 그를 아들이 아니라고 하니, 도대체 무슨 이치인가? 牧老[이색]가 의당 전 왕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 고 한 것이 어찌 아무런 견해가 없겠는가? 李嗣源은 養子로서 莊宗의 大統을 이었고, 柴世宗은 異姓으로서 高祖의 뒤를 계승했으나, 史家들은 이를 허여했고 先儒 역시 비판하여 배척하지 않은 것은 父子의 명분 이 있기 때문이다. 그 임금은 자기 아들로 여기는데 그 신하가 아니라고 하는 것은 천고에 다시없는 일이다. 10년 동안이나 오래 在位하여 조정 신하들이 臣 이라 칭하지 않음이 없었으니, 원천석이 '眞ㆍ假에 대한 분간을 왜 빨리하지 않 았는가?' 한 말은 참으로 사실이다. 하였다.22) 또한 상촌은 규방의 일은 지극히 은미해서 王ㆍ辛의 명확한 구별은 증명이 불가 능할 뿐더러, 무엇보다 부자간의 명분과 의리가 지극히 중대하기 때문에, 공민왕이 아들이라고 인정했는데 신하들이 아들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천고에 다시없는 패륜 이라고 생각하였다. 또 신씨설이 사실이라면 진작 眞僞를 구분할 일이지 왜 10여 년이나 稱臣하다가 새삼스레 그 진위를 판가름하느냐는 원천석의 타박을 인용해, 오랫동안 군주로 섬기다가 하루아침에 僞主로 몰아붙이는 개국공신들을 비판했다. 상촌이 父子의 명분 운운하면서 인용한 李嗣源(867~933)은 李克用의 양자로, 이극용의 親子인 莊宗이 살해되자 5대10국시대 後唐의 2대 황제로 추대되었다. 또 柴榮[柴世宗]은 5대10국시대 後周를 건국한 郭威의 양자로, 異姓이면서도 곽위를 이어 즉위하였다. 이런 경우 史家들도 그들의 왕위계승을 인정했고, 朱子 역시 배척 하지 않았다. 왜냐면 이들은 모두 親子가 아니지만 父子간의 의리를 맺어, 그 명분 으로 대통을 승계하여 정통성을 획득했기 때문이다. 주자의 자치통감강목 은 엄격한 春秋筆法으로 사실을 재단했지만, 진시황이나 晉元帝를 異姓의 아들이라고 쓰지는 않았으며,23) 그들의 위호도 삭제하지 않았 다.24) 그것은 父子 관계에서 혈연이 핵심 관건은 아니며,25) 君臣 관계에서는 더욱 22) 23) 24) 25) 니던가? 李圭景, 五洲衍文長箋散稿 經史篇 4; 史籍類 1 <史籍總說> 二十三代史及東國正史辨證說; 東國正史; 高麗史 大東野乘, 月汀漫筆 (尹根壽): 朱子의 綱目 이 秦始皇과 晉元帝를 모두 他姓의 아들이라고 쓰 지 않은 것은, 진실로 他姓이 秦을 계승하고 晋을 이었다고 꼭 지적하지는 않기 위함이었다. 李瀷, 星湖僿說 권25, 經史門 <辛禑> 조선후기 立後제도는 立後 이후 親子가 태어나도 입후로 맺은 부자간의 의리를 파기하지 않는 것 284

291 이 군주로 섬겨 稱臣한 의리가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이는 조선후기 사대부의 일 반적인 통념이라 할 만하다.26) 그러므로 폐가입진의 오류를 지적하는 것은 黨色을 불문한다. 남인의 성호 이익 뿐만 아니라 서인의 영수 우암 송시열도 이러한 비판의식을 일정정도 견지하였다. 그러다가 한번 尤翁이 지은 <神道碑陰記>가 나오고부터 선생께서 선생이 된 전 모가 청천백일 같이 환하게 드러났다. 그래서 무릇 앞서 선생을 헐뜯고 비방하 며 큰 절개를 은폐시켰던 모든 말들이 쓰이지 못하게 되었다. 元耘谷이 기 록한 것은 선배들이 모두 董史에 비유했는데, 우옹의 <陰記>는 그와 더불어 大 義가 부합하니, 후일에 선생을 尙論하는 자는 우옹의 말을 버리고 비방하는 자 의 말을 믿어서는 안 될 것이 명확하다.27) 구한말 위정척사파 면암 최익현은 이색의 절개가 은폐되고 비방받다가 우암의 <神道碑陰記>로 인해 절의자 이색의 전모가 백일하에 드러났다고 하면서, 우암의 <신도비음기>는 선배들이 모두 직필로 떠받드는 원천석의 詩史와 大義가 정확히 부합한다고 평가하였다. 이로 보면 송시열 역시 우ㆍ창왕과 관련된 원천석과 이색 의 사적을 부자간, 군신간의 의리로 재단하여 긍정했던 것으로 보인다. 국초에 趙璞(1356~1408) 같은 이는 창왕을 세우자는 이색의 논의를 당시의 상 황에서 국가 안정을 위해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었다고 평가하였다. 그러므로 이 색에 대해 왕씨를 세우지 않고 신창을 세운 不忠의 首魁 라는 성토는 너무 가혹한 평가라고 변호하였다.28) 조박의 史評은 폐가입진에 대한 비판이라고 보기 어렵지 만, 晉元帝처럼 異姓인데도 형세상 임금으로 섬겨야 함을 인정했다는 측면에서 이 색을 비방하는 여타의 평가와는 자못 다르다. 그러나 송시열은 조박과 같이 이색을 평가하는 것도 잘못이라고 비판하였다. 그 는 형세상 어쩔 수 없이 신씨를 세웠다는 평가는 폐가입진을 거듭 긍정하려는 수작 에 다름 아니며, 만일 목은이 정말 그 때문에 창왕을 옹립하려 했다면 정도전과 同 浴한 인간일 뿐이지 절대로 절의로 칭송받는 선생이 되지는 못한다고 단언하였다. 26) 27) 28) 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 속에서 공민왕이 우왕을 자신의 아들로 받아들인 이상 우왕 은 이미 공민왕의 아들이라는 논리가 쉽사리 대두되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우왕신씨설을 따르는 이가 적잖은 것은 官撰의 國史에 대한 믿음 내지 불변의 국가 공식 을 깨는 부담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崔益鉉, 勉菴集 권24, 跋 <牧隱事實編跋>. 大東野乘, 筆苑雜記 (徐居正) 권2: 史臣 조박은 논하기를 晉의 元帝는 小吏 牛金의 소생이 분 명한데도 王導의 무리는 실로 그를 도와 치적을 쌓았으니, 원제가 비록 이름을 빌린 것이나, 원 제가 아니면 능히 인심을 진압할 수 없고 중흥의 대업을 이룰 수 없기 때문이었다. 이색이 창을 세우자는 논의도 대개 이와 같으니, 이로써 이색을 완전히 죄줄 수는 없다 하였다. 285

292 또 사책을 상고하니 이고(李翺)가 선생을 장단(長湍)에서 국문했는데, 선생의 공초에 辛昌을 세운 것은 내가 아는 바가 아니다 고 했다 하였고, 또 선생이 사람들에게 이르기를 胡致堂[胡寅]은 말하기를, 元帝의 姓이 牛인데도 東晉의 신하들이 편안히 여겨 바꾸지 않은 것은 반드시 오랑캐들이 교대로 침략해올까 염려해서이니, 만약 舊業을 의지하지 않으면 어떻게 人心을 복속시킬 수 있겠 는가 하였다. 내가 辛氏에게 감히 異議를 두지 않은 것도 이 뜻이다 라고 했다 하였는데, 이 두 가지는 曲筆인 듯하다. 이는 아마도 당시 佐命의 諸公들이 선 생의 중망을 빙자하여 昌의 폐위를 正道로 만들려는 것이었으리라. 진실로 史 氏의 말과 같다면 (목은 선생도) 바로 정도전과 같은 위인일 것이니, 어떻게 선 생이 될 수 있겠는가?29) 이와 같은 우암의 논리는 곧 이색의 창왕 옹립을 신하가 지켜야 할 올바른 의리 로 해석한 것이라 하겠다. 또 그는 <목은비음기>에서 태조가 천명으로 즉위한 것은 은나라 탕왕이나 주나라 무왕에 비견되므로, 목은이 伯夷 叔齊처럼 採薇하다가 餓 死하더라도 태조의 즉위에 하등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보았다. 이 또한 뒤집어 보면 목은을 절의의 대명사인 백이숙제에 비할 만큼 높이 평가하는 것이다. 게다가 정도 전을 폄하하는 것으로 보아 개국공신들에 대해서도 비판적이리라 추측된다. 이로 보면 우암도 우ㆍ창왕의 문제를 의리로만 논할 뿐, 왕씨냐 신씨냐로 논증하는 것에 는 그다지 의미를 두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16c 후반부터 17c에 걸쳐 폐가입진을 부정하는 본격적인 언 설들이 사대부의 개인기록으로 나타나다가, 18c에는 大同之論이라 일컬어질 만큼 주류를 이루어 19c까지 이어졌다고 하겠다. 특히 송시열이나 이익 같은 巨儒들이 이에 동조함으로써, 사유의 전환이 보다 쉽고 빠르게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Ⅲ c 私撰史書와 廢假立眞 우ㆍ창왕을 신돈의 핏줄로 보는 폐가입진의 명분론은 고려사 로부터 개화기 국 사 교과서에 이르기까지 조선시대 史家의 일반적인 史法으로 고수되어 왔다. 하지 만 그렇다고 해서 조선의 史家들이 이를 모두 事實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강목 에는 呂政ㆍ李昱ㆍ柴榮에게 모두 異3가 없었으니, 고려 우왕과 창왕의 29) 宋時烈, 宋子大全 권171, 碑 <牧隱碑陰記>. 286

293 일도 같은 조목인 듯한데, 당시 史書를 쓴 자는 이 예를 따르지 않는 것으로 일종의 의리를 삼았다. 이는 후인이 논의할 바가 아니나 史書의 예가 이와 같 지 않으므로 감히 좇지 않는다. 註: 按 우ㆍ창의 일은 당시 재상 이색과 초야에 있던 원천석의 正論을 막기 어렵고, 본조의 高論之士 유희춘ㆍ윤근수ㆍ신흠ㆍ이덕형 같은 이도 모두 사필 을 거짓으로 여겼다. 더구나 聖祖[이성계]께서 왕씨에게서 受禪했으니, 우ㆍ창 이 왕씨인가 신씨인가 하는 분변은 애당초 논할 것이 없다. 그런데 정도전ㆍ조 준ㆍ윤소종의 무리가 왕씨가 아니라는 설을 倡出하여 舊臣들을 鉗制하는 계책 으로 삼자, 온 나라가 여기에 附和하여 따르느냐 어기느냐로써 忠逆의 구분으 로 삼아 하나의 의리로 만들고, 훗날 역사를 쓰는 자도 모두 마음으로는 그른 줄 알면서도 다시 상고하여 분별하지 않으니, 만일 위에서 判下하는 분부가 없 으면 사사로이 바꿀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異姓이라 할지라도 史3는 이와 같아서는 아니 된다.30) 안정복은 동사강목 (1778)에서 후세의 모든 史家들은 우ㆍ창을 왕씨로 보지 않 는 것이 그릇된 줄 알지만, 조정에서 그에 대한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아무리 사찬 사서라도 제멋대로 바꿀 수 없는 일이기에, 우ㆍ창을 그대로 신우ㆍ신창으로 기술 해왔다고 밝혔다. 즉 조선의 신하로서 폐가입진을 부정하는 것은 자칫 태조의 聖德 과 개국에 누를 끼치는 일이므로, 史法의 常3로는 표면적인 명분론에 입각해 역사 를 서술하지만, 실상 폐가입진의 그릇됨은 史家들 모두 알고 있다는 것이다.31) 폐가입진의 논리를 훼손할 수 없는 것이 史法이기에, 사찬사서에서 폐가입진의 상투성 뒤에 숨어있는 사가의 속내를 파악하기란 쉽지 않다. 그러나 사찬사서는 17c부터 이미 조선전기 고려사 나 동국통감 에 기록된 여말의 사적을 그대로 반 복하지는 않았다. 오운의 동사찬요 (1606)와 유계의 여사제강 (1637~1640)에서 제일 먼저 그러한 인식의 변화가 묻어난다. 소론계 林象德(1683~1719)은 년 사이에 동사회강 을 지으면서 태 조의 조선 건국은 天命이지만, 그 과정의 사적이 공변된 天理를 따르지 않고 私意에 의해 가필되어 모순이 종종 있음을 한탄하였다. 그는 과거사의 대표사서인 동국통 감 이 그 지위에 걸맞지 않게 이에 대해 하나도 바로잡은 것이 없다고 비판하면서, 다만 오운의 동사찬요 와 유계의 여사제강 이 미흡하나마 大義를 드러내었다고 30) 31) 安鼎福, 東史綱目 卷首, 凡3 <統系> 제8항. 안정복은 동사강목 범례 에서 우ㆍ창이 異姓일지라도 史3가 그렇게 서술되어서는 안되므로 자 신은 감히 이를 그대로 좇지 않는다고 밝혔다. 그래서 안정복은 비록 圖上 <高麗傳世之圖>에 서 恭愍은 僞姓을 빌려 자기 아들로 삼아 宗社의 멸망을 재촉했으니 그렇게 됨이 마땅하다. 마침내 禑ㆍ昌 父子가 15~16년이나 왕위를 盜竊하도록 했는데, 사람들은 恭讓에서 고려가 망한 줄만 알고 이미 공민 때에 망한 것은 모른다 했지만, 동사강목 의 紀年을 쓸 때는 前廢王 禑 와 後廢王 昌 이라고 하였다. 287

294 평가하였다. 임상덕의 이 말에 대해 안정복은 그가 王ㆍ辛의 분별을 의심하되 무어 라 말하기 어려워서 이렇게 논설한 것이라고 판단하였다.32) 그렇다면 남인계 오운 의 동사찬요 와 서인계 유계의 여사제강 이 한두 가지를 필삭하여 大義를 드러내 었다는 임상덕의 말은 바로 우ㆍ창왕에 대한 일임을 은연중 알 수 있다. 선조 39년(1606)에 간행된 동사찬요 는 권1上이 단군조선~삼국기, 권1中은 신 라기ㆍ고려기, 권1下는 고려기, 권2上은 고려기, 권2中은 지리지, 권2下는 열전[삼 국名臣], 권3~7은 열전[고려名臣], 권8은 別錄[叛賊ㆍ權兇]으로 편제되었다. 여기 서 주목되는 것은 우ㆍ창왕이 맨끝의 별록에 들어 있지 않고 고려기 안에 여타의 왕들과 나란히 기술되었다는 점이다. 비록 신우ㆍ신창 이라 명명하는 것은 조선전 기 사서와 다름없지만, 우ㆍ창왕의 사적을 열전 끝에 넣지 않고 연대기에 포함시켜 서술한 것은 폐가입진의 인식이 조금이나마 교정되고 있음을 나타내준다. 이러한 변화는 약 30년 뒤 유계의 여사제강 으로 이어졌다. 유계는 여사제강 에 신 우기ㆍ신창기를 두고, 그 범례 에서 우ㆍ창의 기년은 동사찬요 의 예를 그대로 따르고 감히 고치지 않았다 고 밝혔다. 편년체 통사 동국통감 도 신우ㆍ신창 이라 하여 공민왕기 다음에 신우기를 두어 우ㆍ창왕의 사적을 기술했으니, 여사제강 이 신우ㆍ신창 이라 하여 그 사적을 공민왕기 뒤에 기술한 것은 언뜻 보면 별반 달라 진 것이 없다. 하지만 유계가 굳이 동국통감 이 아닌 오운의 동사찬요 를 따른다 고 명시한 것은 우ㆍ창왕에 대한 유계의 입장이 오운의 그것과 대동소이하다는 의 미로 우선 해석된다. 또 동사찬요 는 열전[고려명신] 에 정도전ㆍ조준 등의 조선 개국공신들을 빼는 대신 여말 절의자들의 사적을 보강하였다. 동사찬요 열전 에는 애국명장과 충신 ㆍ열사ㆍ효자가 가장 많이 수록되었는데, 이는 오운이 열전 의 인물 선정 기준으 로 忠節을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권7의 여말 명신에는 崔瑩, 朴尙衷(附 鄭思道, 金 九容), 李穡, 鄭夢周(附 李崇仁, 金震陽, 李種學), 吉再, 徐甄, 李養中, 金澍, 元天錫을 수록했는데, 정사도ㆍ이종학 및 길재ㆍ서견ㆍ이양중ㆍ김주ㆍ원천석은 고려사 <諸 臣傳>에 수록되지 못한 인물들이다. 오운은 길재 이하 四君子의 사적을 여러 서적 에서 追得하여 補錄했다고 스스로 범례 에서 밝히기까지 하였다. 본격적인 綱目體 사서의 단초가 된 여사제강 은 오운의 동사찬요 에 비판적 입 장을 취했지만,33) 오운의 節義 중시 관점만큼은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여 사제강 (초간본) 공양왕기는 여말 절의자에 대한 내용이 상대적으로 많은 분량을 차지하고 있다. 유계는 혁명 즈음의 節義之人으로는 정몽주ㆍ길재 등 여러 사람 외에 또 서견ㆍ이양중ㆍ김주ㆍ원천석 등 몇몇 사람들이 있는데, 모두 뜻을 지켜 굽 32) 33) 安鼎福, 東史綱目 凡3 <採據書目; 東國書籍> 東史會綱 여사제강 은 紀年이 너무 간략하고 참고할 만한 사실이 모두 열전에 들어 있어 참고하기 어렵기 는 예전 사서와 마찬가지 라는 측면에서 동사찬요 를 비판한 것이다. 288

295 히지 않았으니 현저히 칭찬할 만하다 는 史論 성격의 논평과 함께, 동사찬요 를 인용하여 이색 등 절의자들의 행적을 이곳에 수록한 것이다. 이는 對明의리론이 강 화되면서 대내적으로도 군주에 대한 절의가 강조된 결과가 아닐까 한다. 또한 그런 점은 黨色을 넘어서 당시의 공통된 이념적 지향이었다고도 할 것이다. 특히 여사제강 은 정몽주의 죽음을 殺門下守侍中鄭夢周 로 기술하였다. 춘추필 법에서는 용어 誅ㆍ伏誅 와 殺 의 의미가 현격히 다르다. 誅ㆍ伏誅 는 죽은 자가 죽을 죄가 있어서 그를 죽였다는 뜻이고, 殺 은 죽은 자가 죄 없이 억울하게 죽었 다는 뜻으로 죽인 주체를 비난하는 용어이다.34) 즉 殺정몽주 는 조선 개국세력에게 부정적인 표현이다.35) 그래서 영조는 이와 함께 송시열의 別錄 을 문제 삼아 결국 여사제강 공양왕기를 삭제하도록 명했다.36) 우암 송시열은 여사제강 에 서문을 쓰는 한편 본문에 별록을 첨부했는데, 그가 작성한 별록은 주자의 언설을 인용하여 문종 32년(1078), 숙종 4년(1099), 예종 16년(1121), 공양왕기에 각각 작성되었다. 그 중 문제적인 조항은 바로 공양왕의 遜位 기사에 첨부된 권신에 의한 찬탈 구절이다. 태조대왕이 무함 받은 일은 유계가 찬술한 여사제강 의 말단에 기재되어 있었 는데, 故 相臣 송시열이 쓴 것으로 별록 이라 이름했습니다. 그 기록은 주자의 말을 빌려서 고려는 50여 임금을 거쳐 權臣에게 찬탈당하는 바 되어 姓을 바 꾸었다 고 했는데, 이를 공양왕이 遜位한 기사 아래에 실어 놓았습니다. 아! 공 양왕을 대신해서 易姓하여 일어난 분은 바로 우리 태조대왕인데, 그가 이 말을 공양왕의 뒤에 특별히 쓴 것은 도리어 무슨 마음입니까? 장차 聖祖께서 開創한 일을 權臣이 나라를 찬탈한 것으로 돌려 스스로 萬世에 전하여 믿게끔 하려는 것입니까? 아! 이는 진실로 무슨 마음입니까? 그가 반드시 주자가 다른 데 서 말한 바를 빙자하여 권신이 國했다는 흉악한 무함으로써 덮어 씌우는 것 은 또한 의리에 크게 어긋나는 것 아니겠습니까? 송시열을 위하여 해명하는 자 들은 반드시 주자의 말이 이와 같다 고 하지만, 주자가 易簀한 것이 聖祖가 개국하시기 192년 전에 있었으니, 주자가 어떻게 미리 헤아려 보고 이런 말을 했겠습니까?37) 사실 주자의 언급은 武臣亂에 대한 내용임에도 불구하고 이 구절은 여사제강 34) 35) 36) 37) 유영옥, 東國通鑑 硏究, 부산대 박사학위논문, , 89쪽 참조. 高麗史 권117, 列傳 제30 <諸臣: 鄭夢周>에 及夢周還 乃遣趙英珪等四五人 要於路 擊殺之 라 했고, 東國通鑑 권56, 공양왕 4년 夏4월조에서도 고려사 와 똑같이 擊殺之 라 하였다. 그러나 여사제강 은 강목형 사서이기 때문에 殺정몽주 가 史家의 褒貶이 들어가는 綱에 해당하므로, 앞 의 두 사서에서 쓴 擊殺之 와는 의미가 현격히 다르다. 英祖實錄 권69, 25년 5월 19일(丙寅). 25년 5월 13일(庚申). 正祖實錄 권2, 즉위년 8월 6일(乙巳). 289

296 공양왕기에 옮겨 붙어, 마치 조선 건국이 권신에 의한 찬탈인 양 비쳐 문제가 된 것 이다. 송시열이 정말 그런 의도로 공양왕기에 이 별록을 붙였는지, 아니면 그런 의 도가 전혀 없었는데 당시 정계의 세력 다툼이 그를 그렇게 몰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상반된 의견이 존재한다. 송시열의 의도든 정치적 함의에 따른 왜곡이든 유계의 殺정몽주 와 함께 이 별록 은, 태조와 개국공신들의 조선 건국을 당대에 부정적인 시각으로 인지하기도 했음 을 반증하는 데 그 의의가 있다. 성리학의 의리명분론 위에서 전개되는 개국 주체세 력 및 건국 과정에 대한 비판은, 곧 표면적으로 보이는 史法 뒤에서 폐가입진이 쇠 퇴하는 과정을 간접적으로 표현해주기 때문이다. 한편, 市南 유계는 前王의 아들을 세워야 한다는 이색의 답변에 대해서도 송시열 과 유사한 自見을 피력하였다. 16c 訥齋 朴祥의 東國史略 은 이색의 답변을 국초 의 趙璞처럼 부득이한 방책의 일환으로 보았지만, 유계의 여사제강 은 그런 해석 조차 이색의 본뜻을 제대로 파악한 것이 아니라는 입장을 취했다. 또한 원천석이 조 선 건국 이후를 국가 라 하지 않고 新國 이라 했다는 내용도 원천석의 사적 뒤에 첨부하였다. 이로 보면 여사제강 은 동사찬요 의 의리 정신을 더욱 적극적으로 수용하여 폐 가입진의 철옹성을 이전에 비해 현격히 내파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兩亂 이후 무 너진 성리학적 가치체계를 재건하기 위해 주자성리학의 정통론과 의리명분론을 강 화하려는 여사제강 의 저술 동기와도 부합된다. 그리하여 여사제강 이후의 사찬사서도 폐가입진의 입지가 흔들리는 모습들을 보여준다. 洪汝河( )의 彙 麗史 는 권1~6이 世家 인데, 여기에는 태 조~공민왕과 공양왕의 사적이 수록되었고, 우ㆍ창왕의 사적은 세가 가 아닌 열전 에 수록되었다. 그러나 휘찬여사 열전 에 수록된 우ㆍ창은 고려사 <반역열 전>에 수록된 그것과는 격이 사뭇 다르다. 휘찬여사 열전 은 권20 王后ㆍ諸院妃 ㆍ宗室, 권21 辛庶人傳[禑昌], 권22~37 名臣, 권38 義烈ㆍ儒學ㆍ卓行ㆍ行人ㆍ良 吏, 권39 文苑, 권40 方技ㆍ宦者ㆍ酷吏ㆍ嬖幸, 권41 嬖幸, 권42 姦臣, 권43~46 叛 逆傳으로 구성되어 있다. 즉 휘찬여사 에서 우ㆍ창왕은 열전 의 제일 끝머리 <반 역전>에 수록된 것이 아니라 <宗室傳>과 <名臣傳> 사이에 수록되어 있다. 비록 우 ㆍ창왕의 사적을 辛庶人傳[禑昌] 이라 명명하고, 우왕이 신돈과 반야에게서 태어났 다는 상투적 언급을 하고 있지만, 휘찬여사 는 우ㆍ창왕을 宗室과 유사한 위치로 다룬 것이다. 동사회강 과 동사강목 에 오면 이런 점이 더욱 부각되어, 임상덕은 고려말의 사적이 공평하게 기록되지 못했다고 비판하며 우왕신씨설에 의심을 두었고, 안정복 은 애당초 王ㆍ辛을 분변할 필요가 없다면서, 權臣에게 폐위된 왕을 동사회강 에 290

297 서 廢王 이라 한 예를 따라 우ㆍ창왕까지도 前廢王 禑 와 後廢王 昌 이라고 기록하 였다. 특히 안정복이 범례 에서 밝힌, 史法의 常3로서는 폐가입진이 존속하되 그 실상은 몰락하고 있다는 언급은 조선후기 폐가입진 의 실체를 극명하게 드러내는 대목으로 매우 주목된다. Ⅳ. 맺음말 고려말 우ㆍ창왕을 辛氏의 僞王으로 규정하는 廢假立眞의 논리는 조선 개국의 정 당성을 대변하는 하나의 상징으로서, 국초부터 구한말까지 변함없이 견지된 국가 전체의 핵심 명분이었다. 그러나 18c 시대상을 반영한 이재난고 나 사찬사서 동 사강목 에 의하면, 당대에 폐가입진은 이미 표피적인 공식으로 전락하고, 사대부들 은 대개 우왕신씨설을 잘못된 논리로 여기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재난고 는 이 를 大同之論 으로 표현하여, 조선 건국을 객관적인 거리에서 바라볼 수 있는 18c에 는 폐가입진을 오류로 보는 인식이 도리어 公論으로 자리 잡았음을 알려주었다. 폐가입진의 오류를 비판하는 사대부들은 원천석의 詩史와 창왕 옹립을 주장한 이 색의 답변에 준거하여 자신들의 주장을 전개하였다. 그들은 우ㆍ창왕을 군주로 존 대한 원천석의 史筆을 직필로 존숭하고, 당대의 대학자 이색의 마땅히 前王의 아 들을 세워야 한다. 는 답변을 의리로 맺어진 부자 관계의 측면에서 해석하였다. 성 리학의 의리 이념이 보편화된 조선후기에, 前王이 인정한 아들을 신하가 감히 혈연 을 문제 삼아 폐위하는 것도 의리상 잘못이고, 10여 년 稱臣하며 北面하여 섬기다 가 一朝에 異姓의 僞主로 낙인찍어 군신 관계를 깨는 것도 의리상 잘못이었다. 여말 선초의 폐가입진에는 본디 혈연으로 眞僞를 구분하는 전제가 깔려 있지만, 이처럼 16c 후반~18c에는 성리학적 의리명분론이 儒者의 공통된 가치로 보편화되면서 혈 연을 전제하여 논증하는 王ㆍ辛 논쟁 자체가 무의미해져 갔고 덩달아 폐가입진도 갈수록 형해화되었다. 폐가입진의 명분론은 조선시대 史家의 일반적인 史法이었지만, 그렇다고 조선의 史家들이 이를 모두 事實로 받아들인 것은 아니다. 18c 후반 안정복은 동사강목 에서 史家들은 우ㆍ창을 王氏로 보아야 함을 알지만, 조정에서 그에 대해 결단하지 않았기에 사사로이 그것을 부정하는 史筆을 쓸 수 없다고 하였다. 즉 폐가입진은 실 상 대개 빈 껍질만 남았지만, 아직은 국가가 공인하는 명분이기 때문에, 史筆 역시 표면적으로는 폐가입진을 따르는 것이 常3라는 말이다. 따라서 私撰史書에서는 폐가입진에 대한 비판의식이 적나라하게 드러나지는 않는 다. 하지만 남인계 오운의 동사찬요, 서인계 유계의 여사제강, 소론계 임상덕의 291

298 동사회강, 남인계 안정복의 동사강목 등17 18c의 사찬사서들은 이미 고려사 나 동국통감 에 기록된 여말의 사적을 그대로 반복하지는 않으므로, 폐가입진의 오류를 간접적으로 지적하고 있음을 유추할 수 있다. 특히 동사회강 과 동사강목 에 오면 이런 점이 더욱 부각된다. 임상덕은 王ㆍ 辛 분별을 의심하면서 고려 멸망과 조선 건국에 대한 서술이 私意에 의해 가필된 형국이라고 비판하였다. 안정복은 애당초 王ㆍ辛을 분변할 필요가 없다고 치부하면 서, 특히 폐가입진이 史3로 고수되기는 하되 그 실상은 이미 텅 비었다고 증언함으 로써 18c 폐가입진의 실체를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292

299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현대 조 남 욱* Ⅰ. 머리말 우리 역사상 최고의 정치인으로 칭송되는 世宗大王1)을 다시 찾아보는 것은 민족 문화 창달의 맥락에서 매우 뜻 깊은 일이다. 22세 때 조선조 제4대 군주로 즉위하 던 세종 32년간의 역사는 정치 사회 어문 과학 등 모든 면에 있어서 괄목할만한 발 전상을 이루었다. 그것은 부와 태종의 비호와 수많은 인재들의 참여로 이루어지는 것이었지만, 왕조시대의 성격으로 알 수 있듯이 그 모든 것은 최고의 통치자인 군 주, 즉 세종의 중추적 역할이 없었다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그러한 탁월함의 모습을 오늘에 이어가고자 우리들은 각종의 기념물에 세종 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또 화폐 속에 그의 초상화를 넣거나 그의 탄신일(5월 15일)을 스승의 날로 삼는 등의 방법 으로 항상 그를 기리고 있다. 그렇다면 그처럼 그를 기리는 우리들의 태도는 과연 어떠한 모습이 바람직할 것 일까? 단순히 과거의 偉人에 대한 추모의 마음으로 족할 것인가? 아니면 오늘의 발 전 요인을 그의 세계속에서 찾아 활용하는 데에까지 이를 것인가? 여기 이 후자는 전자에 비하여 소위 바람직한 태도로 간주될 것이지만, 그러나 이 일은 쉬운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여기에는 세종 그 자체의 실상을 올바로 파악하는 일은 물론 현실 에 대한 정확한 비판의식이 요구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 세종에서 말할 수 있는 측면은 학문연구에서 교육행정에 이르기까지, 그리 고 문화창조론에서 농업경제론에 이르기까지 실로 다양한 것이지만,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부터 평생동안 통치자로서 정치인의 입장은 떠나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 므로 그 모든 것들은 그 특수한 자신의 위치와 상관성을 가지며 추진되고 있었다. 이를테면 학자적 능력이 있다고 하여서 세종은 비현실적인 관념의 세계를 논하는 학자로 남을 수는 없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그에 있어서는 인륜 도덕의 정신문화에 서부터 이용후생의 물질문화에 이르기까지 有用性 과 實利性 의 원칙이 언제나 중 시되고 있었던 것이다. * 부산대 교수 1) 이름은 祹(일설은 衣변의 도 자), 군호는 忠寧, 字는 元正, 시호는 莊憲, 생존연대: 재 위기간:

300 세종은 수많은 당면과제를 지혜롭게 해결해가야 할 정치인 그 자체의 입장을 32 년간 부단히 견지하고 있었다. 그러면 그 많은 정치 사회적 과제들을 어떠한 리더십 으로 처리해가는 것이었을까? 그리고 그 모습은 오늘날 어떠한 의의를 가질 수 있 는 것일까? Ⅱ. 세종 통치이념의 형성 조선조 건국의 중추세력 태종 芳遠의 三男으로 태어난 忠寧大君 세종은 왕위에 오르기 2개월 전만 하더라도 군주의 지위에 오르리라고는 생각될 수 없는 처지이었 다. 왜냐하면 이미 14년간이나 그의 맏형 讓寧大君이 세자의 지위에 있었고 또한 그 다음엔 둘째 형 孝寧大君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부왕의 이 른바 擇賢論 의 명분으로 왕위에 올랐다. 즉, 그는 1418년 8월 부왕 태종의 비호로 정치권력의 안정성이 확보된 가운데 22세의 나이로 조선조의 제4대 임금으로 즉위 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당시 상왕 태종이 관장했던 軍政 분야를 제외한 모든 정무를 발전적으로 슬기롭게 처리하여 갔다. 그러면 그와 같은 정치전개의 원동력, 즉 통치이념은 어디에서부터 형성되는 것이었을까? 이러한 물음에 대하여 그의 천부적 재능, 또는 심성의 아름다움 등을 말할 수도 있겠지만, 그 구체적 사실로서는 그의 好學性을 들지 않을 수 없다. 세종은 16세 대 군시절 성균관에서 천거한 생원시험 1등 출신의 李隨(1374~1430)에게서 배우기 시작한 것을 비롯하여, 그는 남다른 학구열로 많은 지식을 축적해 왔던 것으로 보인 다. 세종 5년의 실록에는 그의 이른바 手不釋卷 의 모습이 다음과 같이 정리되어 있다. 임금이 즉위하기 이전부터 학문을 좋아하여 게을리 하지 않았다. 일찍이 작은 병이 있는 데도 책 읽기를 그치지 않으니 태종은 환관을 시켜 책들을 다 가져오게 하였다. 오직 歐陽修 와 蘇軾의 글만이 옆에 있었는데 그것도 다 보았다. 즉위하여서도 손에 책을 놓지 않았으니, 비록 식사중에도 반드시 좌우에 책을 열어 놓았고, 혹은 밤중이 되어도 힘써 보아 싫어함이 없었다. 일찍이 近臣에 이르기를 내가 궁중에 있으면서 손을 거두고 한가히 앉아있을 때는 없었다. 고 하였다. 또 근신에 말하기를 내가 서적들을 본 후에 는 잊어버림이 없었다. 고 하였다. 그 총명함과 호학함은 천성으로 그러했던 것이다. 2) 이상과 같은 학구열은 일찍이 그의 즉위와 함께 구체화되고 있었으니, 그것이 곧 經筵體制의 확대개편으로 나타났고, 세종 2년에는 그 유명한 集賢殿의 설치 운영으 2) 世宗實錄 5년 12월 庚午. * 이후의 각주에서 世宗實錄 은 실록 으로 표시함. 294

301 로 드러났다. 즉 세종은 부단한 정치발전을 위하여 온갖 학문적 역량을 극대화시켜 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우선 현실적인 문제해결에 응용되어야 할 것이었기 때 문에 그는 經學뿐만이 아니라 史學에 깊은 관심을 두었다. 이러한 모습은, 유교정치 의 이론과 실천의 양면을 겸비하고 있는 眞德秀의 大學衍義 를 보고는 반복하 여 읽고 싶다 3)라는 특별한 말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세종은 독서의 과정에서 정치의 방책이 찾아지고 있음을 직접 말하였다. 즉 그는 재위 20년이 되었을 때에 자신이 지금까지 經典과 史書를 보지 않은 것이 없었음을 회고하면서 이르기를 지금도 독서를 그만두지 않는 것은 다만 글을 보는 사이에 생각이 떠올라 政事에 시행케 되는 것이 많기 때문이다. 4)라고 하였다. 독서란 통 치자에게 결코 포기될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면 그와 같은 학구적 과정을 거치면서 형성된 세종의 통치이념은 과연 어떠한 모습이었겠는가? 그 통치론의 중심에는 항상 天 이 전제되고 있었다. 유교에서 天 을 유일의 절대자로 상정하고 있듯이 세종도 이 점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서 그는 그 하늘과 사람은 궁극적으로 하나의 이치로 상통되어 작용하고 있음을 말 하고 있다. 천지의 마음은 오로지 만물을 생육하는 데에 있고 제왕의 도리는 이 백성들을 편안히 양 육하는 데에 있다. 하늘과 사람이 비록 다르나 그 극치는 하나이다. 5) 통치자로서의 올바른 도리란 곧 天人一致의 차원에서 비롯하는 것이라는 점을 천 명하고 있는 것이다. 세종은 이러한 원론적인 확인에 머물지 않고 더욱 적극적인 모 습을 보인다. 그것이 그의 이른바 인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린다. 라고 하는 代天理物 의 발언이다. 인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이 백성들을 편안케 하고 양육하는 것 으로 마음먹어야 한다. 6) 인군은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마땅히 天道를 따라야 한다. 7) 여기 세종의 말에서, 그가 보는 통치에는 군주가 다스리는 것이기 이전에 하늘의 다스림[天治] 이라는 의미가 선행되어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현실적인 정치행위는 3) 4) 5) 6) 7) 실록, 실록, 실록, 실록, 실록, 원년 3월 庚戌 20년 3월 癸卯 6년 10월 丙辰 6년 6월 己未 12년 3월 壬寅 295

302 군주를 중심으로 전개되는 것이 분명하지만, 그 근원적 당위성은 하늘의 다스림 의 조건에서 확보된다는 점이다. 그런데 여기 代天理物 이라는 말에서 物 이 뜻하는 바에 人 이 포함되느냐 하는 의문이 있을 수 있다. 위의 예문으로 볼 때는 物 의 넓은 의미로서 人 이 포함되어 해석된다. 즉 代天理物 에는 代天理人 이라는 의미가 내포되어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다음의 경우에서는 그 物 과 人 양자를 구별하는 경향을 볼 수 있다. 인군의 직무는 하늘을 대신하여 만물을 다스리는 것이니, 만물이 각기의 처소를 얻지 못 함에도 마음 아픈데 하물며 사람이랴! 8) 이 말에서의 物 이란 인간 이외의 만물 또는 사물 만 뜻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 러나 끝부분의 하물며 사람이랴![況人乎] 라고 하는 구절만 없다면 그렇게 이해해 도 좋을 것이다. 그런데 그 반문적 구절로 인하여, 代天理物 의 본의는 만물뿐만 아 니라 오히려 인간에 있어서 더욱 중시되지 않을 수 없다는 취지를 갖게 된다. 따라 서 代天理物 에서의 物 이 문자 그대로 해석된다 하더라도 통치원리로서의 본질적 의미에는 변함이 없는 것임을 알 수 있겠다. 그러면 진실로 天을 대행할만한 능력함양은 어떻게 가능할까? 이는 세종에 있어 서 실로 중요하게 작용되는 부분이다. 이러한 사실은 다음의 발언에서 확인된다. 아아! 하늘은 친함이 없고 오직 德 있음에 돕는다. 어짐으로써 또 성장하여서 백성을 보 살펴 갈 권한을 받았으니 검소함과 관대함을 다하여 나라의 경사스러움을 더해갈 것이다. 9) 위의 기록은 세종이 세자를 책봉하면서 당부한 말이다. 하늘에 감응할 정도의 지 도능력 즉 德 을 갖추지 못하면 그 위치를 잃게 될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경각심에 서, 書經 에 있는 하늘은 친함이 없고 오직 덕 있음에 돕는다. 10)라는 말을 원 용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군주의 위상을 견지해 가려면 天人一致의 도리를 깊이 알아서 실천해가는 정치능력, 즉 君德 을 부단히 함양해야 될 과제가 있게 된다. 이 는 곧 세종이 부단히 추구하였던 진실로 천을 대행할 만한 능력함양 의 문제 즉 代天 정신의 현실적 과제를 해결하는 의의를 갖는 것이기도 하다. 나아가 세종에 있어서의 天은 하나의 감시자적 기능을 발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 다. 그는 말하기를 내가 듣기에 임금이 부덕하여 정치가 균형있게 되지 못하면, 하 늘이 재앙을 보임으로써 잘 다스리지 못함을 경계한다. 11)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실록 9년 8월 甲申 실록, 3년 10월 丙辰 10) 書經 蔡仲之命篇 : 皇天無親 惟德是輔. 8) 9) 296

303 하늘이 이미 나를 재변으로 꾸짖었는데 어떻게 백성들을 번거롭게 하며 반찬을 먹 겠는가?. 12)라고도 하였다. 어떠한 종교적 계시나 신앙의 방법이 아닌, 생존에 직결 된 자연현상의 順逆에 따라서 그 天意를 확인하고 또한 근신하는 모습을 보이고 있 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렇게 경계하는 하늘에는 어떻게 대응해야 할 것인가? 이 대응논리로 세종은 민심의 화락 을 강조하였다. 즉 그는 이르기를 힘써 민심을 기쁘게 하는 것으로써 하늘의 견책에 답한다. 13)고 하였고, 또 말하기를 민심이 화순하면 天意 또한 순조롭게 된다. 14)고 하여, 天人和應의 기조를 천명하였다. 여기 이 말에서의 정치적 과제는 민심을 화순하게 하는 방도인 것이니, 그것은 또한 爲民 의 성격을 갖는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상에서 알 수 있듯이 세종정치에서 天을 상정했던 것은 결국 군주의 통치이념 의 근거가 된다. 그리하여 그것은 정치능력, 즉 리더십을 포괄적으로 극대화시킴과 동시에 인민을 사랑하는 善政의 방향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Ⅲ. 정치 리더십의 실제 1. 세종 정치의 이상경 세종의 정치적 이상세계를 확인해 보는 일은 그의 통치이념을 거론하는 선행적 성격을 갖는다. 모든 통치행위는 그러한 정신적 지향점이 없이는 논리적으로 불가 능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그가 추구한 정치 사회적 이상사회는 무엇이었을까? 이에 먼저 말할 수 있는 것은 인륜사회의 구현이다. 인간존중의 인륜사회를 구현 하는 것이 유교정치의 이상이었던 것처럼 세종에서도 이 점은 높이 추구되고 있었 다. 그러므로 그는 그 인륜 도덕성을 고양하기 위하여 즉위년부터 전국에 걸쳐 덕행 이 뛰어난 자들, 즉 孝子 孝孫 義夫 節 들을 찾아 국가적인 표창사업을 전개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태도는 그의 이른바 정치하는 데에는 孝道를 세우는 것보다 더할 것이 없다. 15)라는 발언의 구체적 모습이기도 하다. 세종은 이와 같은 도덕사회로 서의 이상향을 적극 구현하기 위하여 스스로는 모범을 보이면서 백성에는 각종의 교화사업을 전개함과 동시에 선행자에겐 상을 내리고 악행자에겐 벌을 가하는 입체 11) 12) 13) 14) 15) 실록, 실록, 실록, 실록, 실록, 5년 4월 乙亥 7년 윤7월 丙午 26년 7월 己未 7년 12월 甲戌 6년 7월 乙酉 297

304 적 방법을 강구하였다. 이러한 것들은 어느 한 때의 일회성에 그치지 않고 그의 재 임기간에 부단히 지속되었다는 점에서 더욱 주목되는 것이다. 다음으로 말할 수 있는 세종정치의 이상향은 平天下 에서의 平 자가 뜻하는 바로 서의 화평한 경지에 있었다는 점이다. 왕조국가의 정치적 과제는 주로 祖宗의 永續化와 民生의 安寧, 그리고 事大交隣 의 외교문제 등에 있었다. 이와 같은 현실적 당면 과제들을 적극 해결해가고자 하는 것이 또한 세종 정치의 주된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면 그 모든 것들이 원만히 해결 되어지는 화평의 이상사회는 그에 있어서 어떻게 표현되는 것이었을까? 이에 다음 의 말이 주목된다. 내가 부덕한데도 신민의 위에 있으니 밤낮으로 다스림을 꾀하여 隆平에 이르기를 기약한 지 무릇 8년이 되었다. 16) 여기서 그의 정치이상이 隆平 이란 말로 함축되어 나타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정치의 당면과제가 무난히 해결되어 內憂外患이 없고 國泰民安이 영속되는 드높은 평화의 경지 를 隆平 의 사회로 보았다. 그러한 大和平의 현실을 세종은 절실히 희 구해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가 추구하는 정치 사회적 이상경은 오직 隆平 이라는 용어로 나타나는 것만은 아니었다. 그 다른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아아! 천심을 받들어 왕도를 행하고 두루 넓고 큰 어짐을 베풀고 제왕의 가르침을 펴 민 생을 애휼히 여김으로써 영구히 豊平의 정치 에 이르려 한다. 17) 여기에서는 그 정치의 이상경이 소위 豊平之治 로 표현되고 있음이 특이하다. 여 기 豊平 이란 절대 화평의 경지를 가리키는 측면에서는 隆平 과 성격을 같이 하는 것이지만, 그 첫 字의 다름에서 느껴지듯이 각기의 含意가 동일하다고 볼 수 없다. 즉 豊平 이란 말에서는 경제적 풍요로움까지 나타내고 있다는 점이다. 그러나 隆 平 도 궁극적으로는 경제적 번영의 기초를 소홀히 하고서는 불가능한 것임을 주목 해 볼 때, 그 두 표현이 근본적으로는 동질성을 갖는다 하겠다. 따라서 그 두 용어 에서는 각기의 글자 하나씩을 떼어서 보는 입장, 즉 隆平 이란 융성과 화평 으로, 그리고 豊平 이란 풍성과 화평 으로 해석하여도 좋을 것으로 보인다. 세종이 추구했던 이상사회는 다음과 같은 民生論에서 좀더 구체적으로 확인해 볼 16) 17) 실록, 7년 6월 辛酉 실록, 6년 10월 丙辰 298

305 수 있겠다. 전답에서 힘써 농사지으며 우러러 섬기고 굽어 양육케 하여서 우리 백성의 생명을 길게 하고 우리나라의 바탕을 견고히 하며, 가정과 사람마다 넉넉하며 禮讓의 풍속을 크게 일으켜 때로 화평하고 해마다 풍년되어 다함께 화락하는 즐거움[熙皥之樂] 을 누려갈 것이다. 18) 이는 과거 전통사회에서의 농본주의에 근거한 경제의식과 유교 전통의 민본주의 에 따르는 국가의식 그리고 인륜정신이 흥기되어, 삶의 풍요로움을 누릴 수 있는 안 정된 경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참된 모습을 세종은 모두가 다 함께 환히 즐거 워하는 상태, 즉 熙皥之樂 이라 하였다. 인민들이 그 어떠한 근심걱정이 없는 상황 에서 삶 그 자체를 즐거워하는 경지인 것이다. 세종에 있어서 그와 같은 이상경을 지향하는 정치형태는 당연히 처음부터 나타나 고 있었다. 그것이 곧 즉위 3개월 후에 있었던 인민에 대한 종합적 시정책이다.19) 이는 또한 卽位敎書에서 천명한 바의 仁을 펴서 정사를 전개하겠다.[施仁發政] 20) 는 성왕정치로서의 기본정신을 구현하는 의미를 갖는 것이기도 하였다. 2. 민본정신과 애민 덕치주의 왕조시대의 정치체제는 君主 의 형태이었기 때문에 현대사회에서의 民主 와는 거리가 멀다. 그러면 정치체제의 구조상 피치자로서의 人民 은 어떠한 위치로 간주 되는 것이었을까? 이에 대한 유교의 입장은 곧 民本 으로 천명되었다. 그것은 인민 의 국가적 해석 즉 서경 에서의 이른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근본이 견고하 여야 나라가 평안하다.[民惟邦本 本固邦寧] 21)라는 말에서 비롯한다. 이와 같은 유교정치에서의 對民觀은 세종에서도 그대로 수용된다. 그는 종종 이 점을 정치 행정의 기본정신으로 거듭 확인하고 있었으니, 기근 극복의 정책을 밝힐 때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요, 먹는 것은 백성의 하늘이다. 22)라고 하였고 또 탐관 실록, 26년 윤7월 壬寅 그 시정책의 조목별 요점은 다음과 같다. ① 농사와 누에치는 일은 衣食의 근본이니 흉년에 노역 을 삼가며 失農이 없도록 할 것, ② 학교는 풍속과 교화의 근원이니 儒學敎育을 높일 것, ③ 수령 은 近民之職으로 그 선임이 중하니 각 道와 기관에서는 30년간의 치적을 조사 보고할 것, ④ 늙어 홀로되거나 외로운 자 병든 자들에게 賑恤方策을 펼 것, ⑤ 탐관오리의 폐습을 일소하고 민생을 사 랑으로 보살필 것, ⑥ 각 수령은 欽恤精神으로 刑獄에 임하고 각 소임에 충실할 것, ⑦ 孝子 順孫 義夫 節 를 널리 찾아 표창할 것, ⑧ 전사자의 후손을 보호하고 서용할 것, ⑨ 초야에 은거한 사 람들 가운데 재주와 道가 높은 자를 찾아 보고할 것. 20) 세종 즉위년(1418) 11월 己酉日의 卽位敎書 에 있는 施仁發政 이란 어원은 孟子 에서의 王 發政施仁 (梁惠王上 7장, 梁惠王下 5장)에서 비롯한다. 21) 書經 夏書 五子之歌 : 其一曰 皇祖有訓 民可近不可下 民惟邦本 本固邦寧. 18) 19) 299

306 오리에 대한 감찰 정책을 다룸에 있어서는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백성이 견고하 여야 나라가 평안하다. 23)라는 말로 시작하였다. 이것은 인민에 대한 정치적 해석의 차원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정치적 중심 과제를 확인하는 논거로 쓰였다. 이러한 점은 세종이 전국에 내린 敎書의 서두 에서 잘 나타나 있다. 백성은 나라의 근본이니 정치는 백성을 보양하는 데에 있다. 민생을 돈독히 하여 나라의 근본을 견고히 하는 것이 국정에서 우선 힘 쓸 바이다. 24) 민본 이념의 실천적 관건은 바로 民生 의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있다고 보는 것 이다 그러면 또 그 민생문제의 구체적 해결책은 무엇인가? 이에 다음의 말을 주목 하지 않을 수 없다. 국가는 백성으로 근본을 삼고 백성은 먹는 것으로 하늘을 삼는다. 농사란 의식의 원천으 로 王政에서 먼저해야 할 일이다. 오로지 인민의 大命에 관계되는 것이기에 천하의 지극한 노고에 복무케 하는 것이다. 위에 있는 사람이 성심으로 이끌어가지 않는다면 어찌 백성으로 하여금 부지런히 힘써 그 근본에 종사하여 살아가는 즐거움 을 누릴 수 있게 하리오. 25) 마을에서 영원히 탄식하는 소리를 끊고 각각 살아가는 즐거움 을 누리도록 할 것이니 오 로지 너희 吏曹는 이러한 지극한 마음을 살펴 내외에 효유하라. 26) 민본정치란 결국 인민의 생활문제를 해결하여 그들로 하여금 살아가는 즐거움 [生生之樂] 을 누릴 수 있게 하는 것으로서 가능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따라서 위 정자는 그 안정된 삶을 위한 지도자적 노력을 다하여야 된다고 본다. 이것의 구체적 모습이 곧 농경문화의 향상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세종의 민본이념은 마침내 정책결정을 위한 여론조사를 실시하는 차원에 까지 이르렀다는 사실 또한 주목되는 부분이다. 당시의 정치형태로 보아 일반의 평 민을 대상로 의견을 묻는다는 것은 생각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세 종은 그 12년 개량농법의 시행에 앞서 그에 대한 民意의 확인을 위해 여론을 조사 하게 하였는데 당시 보고된 총인원은 17만 1천여명으로 나타났다.27) 22) 23) 24) 25) 26) 27) 실록, 원년 2월 丁亥 실록, 5년 7월 辛巳 실록, 12년 윤12월 乙巳 실록, 26년 윤7월 壬寅 : 下敎曰 國以民爲本 民以食爲天 農者 衣食之源 而王政之所先也 惟其關生 民之大命 是以服天下之至勞 不有上之人誠心迪率 安能使民勤力趨本 以遂其生生之樂耶. 실록, 5년 7월 辛巳 실록, 12년 8월 戊寅日의 기록에는 찬성 98,657명 반대 74,149명으로 되어있는데, 柳永博은 합산 300

307 이와 같은 民本 의 이념은 세종에 있어서 愛民精神 으로 심화되었다. 세종은 한 결같이 백성을 사랑의 대상으로 보았다. 그리하여 그는 그 적극적인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즉 그는 즉위 초부터 특히 백성을 가까이 접하는 소위 近民之官 을 면대하 기 시작하였다. 세종 7년 12월부터는 2품 이하의 모든 수령까지 친견하였는데, 그 이유는 바로 그 수령들에게 세종 자신을 대신하여 인민을 사랑으로 대한다는 마음을 일깨워주기 위함이었다. 그 면대의 실제에서 교유했던 한 예를 보면 다음과 같다. 당연히 백성을 사랑하는 것으로 마음을 먹어야 할 것이니, 백성의 부모가 되어서 백성을 사랑하지 않는다면 누가 감히 자네를 사랑하겠는가. 28) 이처럼 그는 백성에 대한 절대 사랑, 즉 자식에 대한 부모의 마음처럼 먼저 어여 삐 대함으로써 서로간의 인간적 화응성을 고양해 가도록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마 침내 소위 탐관오리의 악정을 극복할 수 있는 것임은 물론이요, 백성들의 육체적 고 통과 경제적 역경을 예방해갈 수 있는 적극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 한편 세종의 애민정신은 그 유명한 훈민정음의 창제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세종 은 그 위대한 일을 완성하면서 이르기를 어리석은 백성들이 말하고자 하는 바 있 어도 마침내 그 뜻을 펴지 못함이 많으니, 내가 이를 민망히 여겨서 새로 28자를 만들어 사람들마다 쉽게 익혀서 날로 씀에 편리하게 하고자 하였다. 29)고 말했다. 이는 군주로서 정책을 입안하고 시행하며 인사관리를 철저히 하는 것으로 그의 애 민정신이 끝나는 것이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부분이다. 그 스스로가, 문자생활을 제 대로 하지 못하는 백성들에 대하여 민망히 여겼다는 그 사랑의 애절한 심정은, 곧 세계적인 문자의 창제사업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이다. 여기에는 그저 권력만으로 통치하겠다는 지배적 차원을 넘어서는 교화적 문화정치의 발전의지가 내재된 것이 기도 하다. 또한 그와 같은 애민정신은 한결같이 德治主義의 모습으로 일관하였음을 간과할 수 없다. 세종에 있어서의 덕치란, 유교정치로서의 형식적인 구호에 그치는 것이 아 니었다는 점에 그 특성이 있다. 즉 그에 있어서 인륜 도덕성을 지향하는 정치행위는 자신으로부터 여러 백성들에 이르기까지 소위 입체적인 형식을 띠고 있는 것이었다. 이러한 사실은, 그 스스로가 솔선하여 왕실의 도덕행위에 모범을 보이며 종종 백 성에 대한 敬老行事를 거행하고 있었던 점과, 전국에서 도덕적 행실이 탁월한 자를 28) 29) 과정에서의 잘못을 발견하고 그 정확한 집계는 찬성 97,636명 반대 73,949명 총171,585명이라고 밝혔다. 柳永博 世宗朝의 財政政策 學術院論文集-인문사회과학편- 18집 pp 쪽. 실록, 8년 4월 己卯 : 上引見 謂自養曰 命汝之言 亦不外此 當以愛民爲念 爲民父母而不愛民 誰 敢愛爾哉. 실록, 28년 9월 甲午 : 是月 訓民正音成 御製曰 愚民有所欲言 而終不得伸其情者 多矣 予爲此 憫然 新制二十八字 欲使人人易習 便於日用耳. 301

308 엄선하여 국가적 표창사업을 부단히 추구했던 일, 그리고 왕실의 의례 정립을 위해 서는 國朝五5儀 를 찬수케 하고 인민의 도덕심을 감발케 하기 위해서는 三綱 行實圖 를 낳게 하였던 점 등이 그것을 증명한다. 3. 法治와 衡平 愼刑主義 정치 전개의 실제에 있어서 인륜 도덕성의 천명은 그 기본적 의미를 갖는다. 그러 나 오직 도덕적 교화의 방법으로 모든 일탈행위를 막을 수 없는 것이 또한 사회 일 반의 현실적 상황이다. 그러므로 德治 를 말하면서도 法治 를 말하지 않을 수가 없 게 된다. 이 점은 유교 전통의 정치 현실에서 잘 나타나 있는 바이다. 그러나 그 법 치의 궁극적 意義는 인륜 도덕성을 벗어나서 찾아질 수 없다고 보는 점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살핀 세종의 애민정신은 사회적 형평성의 추구와 병존되고 있었다. 인민 을 사랑함에는 편애나 차별을 둘 수가 없다는 점이었다. 이러한 정신은 절대적 의미 를 갖는 것이었기에 세종은 하늘의 원리를 전제하며 그것을 확인하고 있었다. 하늘이 만물을 화육함에는 크고 작음을 가리지 않고, 임금이 백성을 사랑함에는 이것과 저것의 간격이 없다. 30) 노비가 비록 천하나 天民 아님이 없다. 31) 그의 이른바 代天理物 의 통치이론에 따라, 그리고 백성은 곧 군주의 백성 이 아 닌 하늘의 백성[天民] 이라는 절대적 해석에 따라 그 평등성이 확인되고 있는 것이 다. 인간 사회에 있어서 하늘의 원리가 공평하게 작용하는 것으로 간주되듯이, 정치 사회에 있어서의 인간 역시 차별이 없도록 공평하게 대해져야 한다는 말이다. 그러 면 그 구체적인 보장은 어떻게 가능한 것이었을까? 여기 세종이 추구한 평등성의 문제 또한 실제적으로는 법치 의 측면으로 강조되 고 있었다. 따라서 이른바 법 앞의 평등 이라는 성격을 갖는 셈이다. 그가 추구한 형평정신은 법의 집행과정에서만 중시되는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① 입법의 필요 성을 제기하는 기본입장에서부터, ② 입법의 과정, 그리고 ③ 그 집행 등의 모든 경 우에 작용하고 있었다. ①을 대표하는 예로서는 京官과 外官의 승진기간이 같지 않 음을 문제시하여 법제화해 가는 점(24년 7월)이 주목되는 것이요, ②의 예로서는 앞서 확인한 공법의 개정 시행을 위한 전국적인 여론조사를 볼 수 있으며, ③의 경 우로서는 관리라 하여 예외를 두지 않았던 엄정성에서 그 실상을 엿볼 수 있다. 30) 31) 실록, 21년 5월 辛酉 실록, 26년 윤7월 辛丑 302

309 세종에 있어서는 법을 세우기가 어려운 것이 아니라 법을 행하기가 어려운 것 32) 이라는 명제하에 어떠한 특권의식도 일체 용납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그는 禁酒令 의 발동시엔 나는 술을 마시면서 다른 사람들에게는 술 쓰는 것을 금하는 것이 옳 겠는가? 33)라는 말로써 임금님은 제외 라는 신하들의 의식을 반성케 하면서 스스 로 법 준수에 모범을 보이기도 하였다. 또한 관리가 일반의 법을 어겼을 경우는 그 예외를 두지 않았으니, 成均直學 金叔滋에게는 처자 관계를 엄정하게 지속하지 못 했다는 이유로 杖刑이 가해지고, 집현전 응교 權採가 婢妾虐待問題로 논죄되는가 하면, 대신 黃喜도 사위 徐達과 監牧官 太石均 각기의 論罪를 비호하는 발언문제로 두 번이나 파면된 바 있다. 국법의 운용에 있어서 지위의 고하가 문제될 수 없다는 사실을 보인 경우이다. 이처럼 법제의 형평정신을 추구함에 있어서는 항상 위법자에 대한 처리문제가 야 기된다. 그렇다면 세종은 법치로서 오직 처벌만을 능사로 여겼던 것일까? 이에 대 한 그의 입장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그의 刑獄觀을 살필 필요가 있다. 세종은 刑獄을 쓰면서도 그 목적을 분명히 인식하고 있었다. 이에 그는 말하기를 刑이란 다스림을 돕기 위해 갖추어진 것 34)이라 하였고, 또 獄이란 죄 있음을 징 계하는 것이지 본래 사람을 죽이게 하는 것은 아니다. 35)라고 하였다. 형옥이란 오 직 輔治的 기능과 악행을 징벌하는 데에 그 의의가 있다는 것이다. 따라서 그는 모 든 범법행위를 처리함에 있어서 매우 신중한 모습을 보였다. 그 대표적인 것이 즉위 초기부터 시행한 사형수에 대한 三審制 즉 三覆法 이다. 그와 같은 판결의 신중성은 사형의 경우에서만 제기되었던 것은 물론 아니다. 그 는 언제나 형벌의 남용을 염려하면서 輕罰主義와 眞相第一主義를 강조하였다. 동시 에 그는 법관들의 선입견적 치죄행위를 심히 못마땅하게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마침내 3천 8백여자에 달하는 장문의 교서를 직접 작성하여 법관들을 효유한 일도 있었다. 그 글에서 세종은 관리들이 오판한 사례 4건의 진상을 밝히고 있는데, 그 말미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아아! 죽은 자는 다시 살아날 수 없고 형벌로 다친 자는 다시 이어놓을 수 없으니, 만약 한번이라도 실수하면 후회한들 어찌 미칠 수 있으랴. 이것이 내가 밤낮으로 긍휼히 여겨 잠 시도 마음속에서 잊지 못하는 바이다 죽을 자로 하여금 저승에서 원한을 품지 않도록 하고 살아있는 자로 하여금 마음에 恨을 품지 않도록 하고, 모두의 情이 서로 기뻐하여서 감옥이 하나같이 비어있도록 하며, 화락한 기운이 널리 퍼져 비오고 해뜸이 순조롭게 되는 데에까지 32) 33) 34) 35) 실록, 실록, 실록, 실록, 22년 8월 庚辰 8년 5월 甲辰 13년 6월 甲午 7년 5월 庚午 303

310 이르도록 하여야 할 것이다. 36) 위의 말만 보아도 刑獄에 대한 세종의 심경을 충분히 엿볼 수 있겠다. 이러한 내 용의 글은 물론 그에게 내재한 인간 존엄성의 발로인 것이다. 그 인간의 가치는 절 대적인 것이어서 오직 한번의 실수도 용인될 수 없다고 보았다. 그리하여 인간 사회 에서는 물론 저 자연현상까지도 작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군주 일인의 힘 만으로는 불가능한 것이기에 그러한 장문의 자작교서로써 모든 신료들을 교유하는 모습을 보였다. 세종은 그와 같은 愼刑主義로 말미암아, 함부로 가두고 심문하는 제도를 개선하 며 죄수의 환경을 개선시키는 등 필요한 여러 가지 조치를 취하기도 하였다. 때로는 獄舍를 수리함으로써 형옥 정치의 확대 라는 오해의 구설수를 낳기도 하였지만, 죄 수에까지 뻗쳐간 그의 인간애는 그로 인하여 위축될 수 없었다. 형옥에 대한 세종의 입장은 형벌이 중하지만 신중하지 않을 수 없다. 37)라는 말이 그에 있어서 하나의 좌우명과 같이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그처럼 통치의 방편으로써 형벌을 신중히 사용하는 가운데서 또 그는 죄에는 가 볍고 무거운 것이 있으나 사람에게는 스스로 새롭게 해가는 이치[自新之理] 가 있 다. 38)고 하면서 改過遷善의 여지를 강조하였다. 그리하여 종종 사면을 단행하고 있었는데, 그 기본정신은 그 自新之理 를 전제한 自新之路 를 열어주는 데에 있는 것이라 하였다. 이는 법치 속의 현실에서도 세종 정치의 기본으로서 저버릴 수 없는 덕치의 교화정신이 반영되는 경우라 하겠다. Ⅳ. 세종 리더십의 현대적 의의 세종은 父王 太宗의 정치 시대와는 다른 권력의 안정기에서 유교의 聖君과 같은 善政의 통치력을 발휘하였다. 왕조시대의 성격상 왕실이 곧 국가 라는 정치 행정의 태도를 취할 수도 있었지만 세종은 오히려 나라의 기본은 곧 民生에 달려있다는 民 本 의 사실성을 직시하면서 愛民主義의 통치이념을 구현하여 왔다. 이로 말미암아 세종은 항상 백성을 위한 임금으로써 무엇을 어떻게 하여야 할 것인가 하는 과제의 식을 가졌으며 그로 말미암아 정치문화의 발전된 모습을 보일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와 관련하여 그 현대적 의의를 도출하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겠다. 첫째는 세종 리더십에 전제된 天 의 논리는 정치의 순수성을 보장하고 인간의 존 36) 37) 38) 실록, 13년 6월 甲午 실록, 14년 1월 乙亥 실록, 4년 2월 壬子 304

311 엄성을 확보하는 적극적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점이다. 동서의 정치발전사에서 볼 수 있듯이 정치 이상이 인간다운 삶 을 지향하는 데에 있는 한, 인간 지존의 인 권문제는 부단히 강조되어 왔다. 이러한 태도는 英 佛의 혁명정신이나 미국의 독립 선언서 그리고 유엔의 세계인권선언문 등에서 뚜렷이 밝혀져 있다. 그리고 우리나 라의 헌법 10조에서도 모든 국민은 인간으로서의 존엄과 가치를 가지며 행복을 추 구할 권리를 가진다. 국가는 개인이 가지는 불가침의 기본적 인권을 확인하고 이를 보장할 의무를 진다. 라고 하여 그 기본정신을 천명하고 있다. 따라서 인간의 존엄 성이 얼마만큼 폭넓게 그리고 적극적으로 보장되어 지느냐 하는 정치적 과제는 계 속 남아 있는 것이다. 이러한 문제와 관련하여 볼 때 세종 통치이념에서 전제되는 天 의 논리는 높이 평가될 수 있다고 본다. 앞서 살펴보았듯이 그는 군주의 입장은 하늘을 대신하는 것[代天] 이라 하면서 하늘이 견책한다[天譴] 는 의식을 보이는가 하면, 노비들에 대해서도 하늘의 백성[天民] 이라 하여 모든 문제를 풀어가는 기본 원칙에 있어서 는 항상 天 을 말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는 군주 자신에게는 天道와 天意에 따라야 한다는 정치적 순수성에 대한 의무감을 더해주는 것이요, 인민들에게는 통치자의 자의적 태도로 침해받을 수 없다는 천부적 인권의 확보를 가능하게 하는 기초이다. 즉 세종에 있어서 자기 스스로가 항상 통치의 기본입장에서 天 을 상정하고 있었던 것은, 군주로서의 권세를 확장하려는 의지의 반영이었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천인 합일적 진리구현의 사명감을 진작시켜 권력의 악용을 극복하고 백성의 위상을 절대 시하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특히 형법의 적용에 있어서 항상 신중할 것을 강조하고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그 天民 的 對民觀에서 비롯하는 인권 보호의식의 결과로 해석된다. 물론 세종 당시에는 오늘날과 같이 세밀한 법적 장치가 마련된 상황은 아니었다. 하 지만 세종의 이른바 나는 항상 생각하기를 사람의 죄가 사형에 처해지는 것이 마 땅하다 하여도, 情에 따라 용서할 수 있다면 모두 그렇게 해주고 싶은 것이 나의 본 심이다. 39) 라는 말로 알 수 있듯이, 인간존재를 보는 그의 정신적 태도는 오늘날의 우리들에게도 간과되어질 수 없는 인간 존엄성에의 절대적 의미를 갖는 것이었다고 하겠다. 둘째는 국민에 대한 통치자로서의 도덕적 일체감을 고양하고 있었다는 점이다. 이는 정치인으로서의 자질 함양과 관련된 문제이기도 하다. 이 부분에 관해서는 앞 서 확인한 세종 자신의 호학성과 근면성으로 그 정도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지만, 그는 언제나 마음이 바르면 백성 다스림에 어려움이 없다. 40), 마음이 바르면 일 39) 40) 실록, 6년 6월 丁未 실록, 8년 1월 丁未 305

312 을 처리함에 어려움이 없다. 41)고 하면서 마음 바로하기[心正] 를 강조한 점, 그리 고 일대의 정치가 흥기함에는 반드시 일대의 英材가 있었기 때문이다. 42) 라고 하 여 정치능력 의 함양을 중시한 점 등이 더욱 주목된다. 이러한 말은 곧 中庸 에 서의 이른바 爲政在人 의 논리를 반영한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이러한 정치인의 자질 문제는 오늘날에도 간과될 수 없다는 점에 그 현대적 의의가 제고된다. 申命淳 교수는 40년 한국정치사에서 민주적인 정치제도를 여러 형태로 수용해 왔 음에도 불구하고 민주정치를 확립하지 못한 원인은 바로 정치엘리트들에 있다고 보 았다.43) 그런가 하면 최근 우리나라 대통령들은 임기를 마치고 법의 심판을 받기에 바쁠 뿐만 아니라 현직 대통령의 친인척들이 구속되는 민망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와 더불어 공직사회는 부패되어 국민들로부터 도덕성 부분 최하위권의 평 가를 받고 있는 실정이다. 심지어는 법조계의 判事不條理까지 거론되는 상황에 있 다. 1981년에 제정된 공직자윤리법 이나 1991년에 채택한 국회의원윤리강 령 이 있어도 진정한 변화는 기대하기 어려운 실정인 것이다. 이러한 모습은 善惡 是非보다 利害得失을 더 높은 가치로 인식하는 물질주의적 사고방식과 함께 더욱 심화되고 있는 셈이다. 자본주의 문화가 낳은 이기주의적 행태는 결국 각종의 대립 과 갈등상을 낳고 있어 우리 모두의 공존공영을 위협하는 부정적 요인으로 작용하 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어려운 상황에서 우리는 어떠한 정치적 변화로 이 난국을 극복해갈 수 있겠는가? 이에 우선 대통령을 비롯한 모든 정치인들이 인간 보편의 도덕성을 회복 하여 정치적 신뢰성을 정립할 수 있어야 하며, 정치인이란 정치인 자신만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니라 온 국민을 위해서 있는 것이라는 의식의 변화와 함께 행동의 변 화를 보일 줄 알아야 할 것이다. 이때에 비로소 국가발전의 가장 낙후된 부분이 정 치 라는 오명을 벗을 수 있을 것이요, 더 이상 윤리 도덕교육의 방해자로서 남지 않 게 될 것이다. 이러한 오늘의 과제를 생각해 볼 때에 세종이 보여준 人倫精神과 爲 民精神, 그리고 德治와 法治의 조화적 태도 등은 그 보편적 가치를 갖는 것임에 틀 림없다고 하겠다. 셋째는 세종의 정치에서는 언제나 교화적 태도를 견지함으로써 국민에 대한 일체 감을 증진시키고 있었다는 사실 또한 간과될 수 없는 부분이다. 즉 그는 어진 선생 님과 같이 최대한 가르치면서 이끌어 가고자 하였다. 그것은 도덕이나 어문의 영역 에서뿐만 아니라 법조의 경우에서도 같은 입장이었다. 세종은 법조문의 내용을 쉽 게 널리 가르치고 잘 알려주면서 지키도록 하려 하였다. 그러나 당시의 정계에서는 41) 42) 43) 실록, 8년 1월 壬子 : 上 引見謂曰 心正 則處事無難. 실록, 6년 7월 갑신 : 王若曰 興一代之治 必有一代之英材. 신명순, 한국의 민주주의와 정치문화 현대사회연구소 한국 정치발전의 현실과 과제 ~47쪽. 306

313 현실적으로 법치를 추구하면서도, 일반 백성들에게는 법을 농간하는 무리가 생길 염려가 있다고 하여 그것을 반대한 일이 있었다. 그 대표적 인물이 이조판서 許稠이 었는데 세종은 그에 대하여 말하기를 그렇다면 백성으로 하여금 알지 못하고 죄를 범하게 하는 것이 옳겠는가? 백성들이 법을 알지 못하는데 그 범하는 것을 벌로 다 스리는 것은 朝四暮三 의 술책에 가까운 것이 아니겠는가? 44)라고 하면서 매우 비 판하였다. 이 발언은 치자의 입장을 떠난 피치자의 입장을 대변하는 성격의 것이다. 우리는 이러한 하나의 사례에서도 통치에 대한 세종의 교화주의적 진면목을 엿볼 수가 있는 것이다. 특히 세종은 실효성을 극대화하는 정책 결정에 있어서는 반대론까지도 수렴하는 포괄적 리더십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러한 실례는 金宗瑞가 육진을 개척할 때에 세종대왕은 비난하는 글을 보이면서 위임하였으니, 이와 같이 한 연후에야 비로소 큰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45)라는 효종의 발언에서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그는 부단히 토론문화를 매우 중시하고 있었다. 이러한 사실은 세종실록 이 증명하는 바이다. 성공적인 정책을 향한 세종의 고민은 이러한 말로 표출되기도 하였다. 법 을 세우고 새로 만드는 일은 자고로 어려운 것이다. 임금이 하고 싶어 하면 신하가 간혹 반대하고, 신하가 하고 싶어 하면 임금이 간혹 들어주지 않으며, 비록 상하가 모두 하고자 하나 시운이 불리한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46) 그의 탁월한 정치 리더 십은 이러한 복잡한 현장 속에서 그 성공적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요컨 대, 세종은 약 400만 명의 백성을 다스리면서 그들로 하여금 그 어떠한 삶의 고통 으로부터도 해방된 경지, 즉 아주 평화로운 상태에서 살아가는 즐거움[生生之樂] 을 영위하도록 하는 데에 최선의 노력을 다하였다. 그리하여 그는 인민들로 하여금 마침내 海東堯舜 으로 칭송받기에 이른 것이다. 오늘날 우리 국민이 원하는 정치발전을 위해서는 집권자 중심의 편향적 Friendship 보다는 반대하는 자들도 포괄하는 참된 Leadership 이 더욱 절실하다. 이러한 과제는 오는 12월의 대통령 선거에서부터 점차 해소되어질 수 있기를 기대 한다. 44) 실록, 14년 11월 壬戌 7년 8월 庚辰 실록, 15년 1월 己卯 45) 효종실록 46) 307

314 慶尙左水營에 대하여 李 源 鈞* (1) 경상좌수영(慶尙左水營)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영(慶尙左道水軍節度使營)의 약칭 으로 영명(營名)을 동래수영(東萊水營) 영좌수영(嶺左水營) 유영(柳營)이라고도 하였다.1) 우리나라의 수군(水軍)은 고려 말 조선 초기에 왜구의 대책으로 조선술과 해상의 전술이 발달하고 수군의 시설과 제도가 정비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태조 2년 (1393) 4월에 처음으로 경상좌우도 수군도절제사(慶尙左右道水軍都節制使)라는 직 명이 기록에 보이며2), 이어 동년 10월에는 수군도절제사를 수군도안무처치사(水軍 都按撫處置使)로 개칭하고3), 또 세조 12년(1466)에는 수군도안무처치사를 수군절 도사(水軍節度使)라고 직명을 바꾸었는데4), 이로부터 수군절도사를 통칭 수사(水使) 라 하였다. 당시 경상도에는 수군절도사 3명을 두었는데, 1명은 경상도관찰사(慶尙 道觀察使)가 겸임하고, 2명은 경상좌도수군절도사와 경상우도수군절도사였다. 경상좌도수군절도사의 군영(軍營)인 경상좌수영은 처음에는 동평현(東平縣)의 부 산포( 山浦)에 있었다.5) 동평현 부산포는 뒷날 동래현(東萊縣)의 부산포(釜山浦)로 서 현재 부산 동구 좌천동에 있었던 포구(浦口)였다. 그러나 부산포는 세종 5년 (1423) 일본에 개항(開港)하자, 왜선의 초박처(初泊處)로서 좌수영의 대장(大將)이 왜인들과 뒤섞여 있는 곳이라, 대장이 여기에 머물면서 직무(職務)를 수행하기에는 부적절하다 하여 좌수영을 울산 개운포(開雲浦)로 이전하게 되었다.6) 하지만 그 이 * 부경대 명예교수 1) 2) 3) 4) 5) 東萊營誌 太祖實錄 太祖實錄 太祖實錄 太祖實錄 官職條 권 3, 태조2년 4월 갑자조 권 10, 세종2년 10월 임술조 권 38, 세조12년 정월 무오조 권 150, 地理志 경상도 동래현조 (慶尙)左道水軍都按撫處置使本營 在東平縣南 七里 山浦. 成宗實錄 권 283, 성종24년 10월 임오조 慶尙左道水營 本在東萊縣釜山浦 成宗實錄 권 77, 성종8년 윤2월 기유조 命曾經政丞 曾經慶尙道監司 節度使 曾闕 6) 庭議事, 一 臣等 今因問及南方之事 敢以平日所懷更陳之 國家以釜山浦倭船初泊之處 不宜大將所居 乃移水軍節度使營於開雲浦 因其時觀察使所啓也 新增東國輿地勝覽 권 22, 蔚山郡 關防條 左道水軍節度使營 在開雲浦 自東萊縣釜山浦 移 干址 308

315 전 연대는 기록이 없어 정확히 알 수가 없다. 그러나 세조 6년(1460)에 개운포에 옮긴 경상좌수영을 다시 이전하자는 논의가 있었던 것을 보면7) 경상좌수영이 개운 포로 옮긴 것은 세조 6년(1460) 이전이었음을 알 수 있다. 경상좌수영이 울산 개운포로 이전한 후에는 울산에 경상좌병영과 경상좌수영이 한 고을 안에 있어 군사(軍事)의 지휘체계(指揮體系)에 애매모호(曖昧模糊)한 점이 있고, 또 여기에 거주하는 민중의 부담이 가중되었기 때문에 경상좌수영을 다시 부 산포로 옮기는 문제가 논의되었다. 그러나 좌수영을 부산포로 다시 이전하는 것에 대해서는 이에 반대하는 의론도 만만찮게 나타났다. 우선 상당한 이유가 있어 이전 한 수영을 다시 그곳으로 옮긴다는 것은 사체(事體)에 맞지 않고8), 또 부산포는 그 성중(城中)이 매우 협애(狹隘)하여 수영의 많은 원군(元軍)을 모두 수영하기 어려울 뿐 아니라, 지금의 수영에는 소유한 노비가 많아 일시(一時)에 진영(鎭營)을 옮기게 되면 그곳에는 일무(一畝)의 전답(田畓)도 없으니 반드시 뿔뿔이 도망쳐 흩어지고 말 것이며9), 이곳 개운포에 있는 곡식 50여 섬을 파종(播種)하는 둔전(屯田)과 노비 60여 구를 모두 좌수영이 소유하고 있는데, 만약 수영이 부산포로 이전한다면 60여 구의 노비가 100리 길을 왕래하면서 농사를 지을 수는 없을 것이라고 하였다.10) 이와 같이 경상좌수영의 이전 문제가 장기간에 걸쳐 논의가 계속되어 오다가 마 침내 울산 개운포에서 동래부의 남촌(南村)으로 옮겼는데, 그 연대는 문헌에 기록된 것이 없어 알 수가 없다.11) 남촌은 옛날의 남촌면(南村面)으로 곧 지금의 수영구 수 영동을 지칭한 것이다. 그런데 오직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 에만 선조 25 년(1592)에 옮겨온 것으로 되어 있다.12) 그러나 선조 25년(1592) 4월에 임진란이 일어난 것을 감안(勘案)하면 그대로 믿기가 어렵다고 생각된다. 지방에 내려오는 전 설에 의하면 경상좌수영이 처음 울산 개운포에서 지난 날 서면(西面)의 양정동에 있 었던 신좌수영(新左水營) 전차정류소(電車停留所) 부근에 이진(移鎭)하였다가 현재 의 수영동으로 옮긴지 3년 만에 임진란이 일어났다고 하였다.13) 여기에 나오는 신 7) 世祖實錄 권 20, 세조6년 6월 신해조 兵曹據慶尙道都體察使單子啓 一 慶尙左水營 已 審定移置 且倭人不可雜處於邊將之營 勿移爲便從之 8) 註 7) 참조 9) 中宗實錄 권 18, 중종8년 8월 갑진조 釜山城中狹隘 水營元軍甚多容處爲難 水營奴婢 數多 一時移鎭 無一畝田地 必至逃散 不可輕擧 10) 中宗實錄 권 18, 중종8년 8월 정미조 領事全應箕曰 慶尙左水營 今在開雲浦矣 臣意釜山 浦不可移也 屯田五十餘石播種之地 奴婢六十餘口此營之所有也 奴婢六十餘口 何能往來百里 而事其農業乎 東萊營誌 建置沿革條 古營之設 未知在於何代 而始設於蔚山 舊開雲浦 移建干東萊 十里 11) 許南村地 不知幾年. 東萊 誌 關防條 左水營 初在蔚山開雲浦 不知何年 移設干此 增補文獻備考 권 32, 輿地考 20 關防 8 海防條 左水軍節度營 舊在於蔚山開雲浦 宣祖二 12) 十五年 移設干東萊南村 港都釜山 제7호에 게재(揭載)된 崔漢福의 <水營遺事> 참조 13) 309

316 좌수영은 정식으로 제정된 행정동명(行政洞名)은 아니지만, 지방주민들이 다른 곳에 서 옮겨온 새로운 좌수영이 있었던 곳이라 하여 예로부터 신좌수영이라 일컫는 것 을 전차가 개통되자, 정류소의 명칭으로 삼은 것이라 생각된다. 이렇게 볼 때 울산 개운포에서 서면의 신좌수영으로 옮겨 온 경상좌수영이 임진 란이 일어나기 3년 전인 선조 22년(1589)에 다시 동래 남촌(수영동)에 이전하였다 는 전설은 신빙성이 있다고 하겠다. 남촌(수영동)에 옮겨진 좌수영은 47년 후인 인조 14년(1636)에 다시 감만이포(戡 蠻夷浦, 남구 감만동)로 이전하게 되었다.14) 이것은 남촌에는 선박을 제대로 대어 둘 곳이 없어 광풍(狂風)을 만나게 되면 반드시 패몰(敗沒)하겠지만, 감만이포는 지 세가 훨씬 좋아서 적의 침범을 방어하는데 매우 유리하다는 경상감사 유백증(兪伯 曾)의 치계(馳啓)에 따른 것이었다.15) 그러나 감만이포는 왜관(倭館)과 수로(水路)로 10리도 안 되는 거리에 있어 왜인들이 좌수영의 군사 동정(動靜)을 쉽게 파악할 우 려가 있다하여 다대포(多大浦)로의 이선(移船) 또는 이진(移鎭)이 논의되어 오다 가16) 마침내 효종 3년(1652)에 이르러 남촌의 구영(舊營)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었 다.17) 이 후에도 여러 가지의 문제점을 들어 다대포를 비롯하여 울산의 장생포(長 生浦)와 기장의 무지포(武知浦)로 좌수영을 옮기자는 주장이 있었지만 이는 모두 채 택되지 않고, 고종 32년(1895) 7월에 군제개혁으로 좌수영이 혁파(革罷)될 때까지 243년간 경상좌수영은 계속 동래 남촌에 있었으므로 수영동이란 동명(洞名)을 남기 게 되었다. (2) 경상좌수영에는 경상좌도수군의 총사령관이라 할 수 있는 무관(武官) 정3품의 경 상좌도 수군절도사(경상좌수사)가 있고, 그 부관(副官)으로서 무관 정4품의 우후(虞 侯)가 있었으며, 또 대솔군관(帶率軍官) 6명, 화사(畵師) 1명, 사자(寫字) 1명, 영리 (營吏) 30명, 진무(鎭撫) 37명, 통인(通印) 25명, 관노비(官奴婢) 10구(노 6구, 비 4 구), 사령(使令) 26명, 군솔(軍率) 23명이 있어18) 좌수사의 공사생활에 사역(使役) 14) 남촌에서 감만이포로 이진한 연대를 東萊 誌 를 비롯하여 東萊營誌 輿地圖書 등 문헌에는 모두 崇禎乙亥 즉 인조13년(1635)이라 하였으나, 仁祖實錄 에는 인조14년(1636)이라 했으므로 신빙도가 높은 실록(實錄)에 명시(明示)된 연대를 따르기로 하였다. 仁祖實錄 권32, 인조14년 2월 경오조 移慶尙左水營干戡蠻(夷浦) 舊營無藏舡之所 遇狂風 15) 則必致敗沒 戡蠻地勢便好 防守待變 亦勝於舊營慶尙監司兪伯曾 以此馳啓 朝廷從之 仁祖實錄 권36, 인조16년 3월 계미조 巡察使任絖馳啓曰 多大浦移船事 與統制使相議 則 16) 本營與倭館相對 水路不滿十里 一動一靜 彼無不知 難便之狀不一(後略) 增補文獻備考 권 32, 輿地考 20 關防 8 海防條 左水軍節度營 以倭館相近 孝宗三 17) 年 還設於南村舊其 左水營誌 참조 18) 310

317 되었다. 그리고 좌수영의 사무는 좌수사의 지휘를 받아 동래부의 경우와 같이 중앙 정부 의 육조(六曹)를 모방한 이방(吏房) 호방(戶房) 예방(禮房) 병방(兵房) 형방(刑 房) 공방(工房)이 있어 각기 사무를 분담하여 집행했으며, 우후에게는 우후아문(虞 侯衙門)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고, 여기에 관제(官制)와 시설이 별도로 되어 있었다. 좌수사의 거성(居城)인 좌수영성은 석축(石築)으로서 둘레가 1,193보, 높이 13척, 첩(堞, 성가퀴) 375타(垜, 살받이터), 옹성(壅城, 큰 성문을 지키기 위해 성문 밖에 쌓은 작은 성) 3고(庫), 치성(雉城, 성 위에 쌓은 얕은 담) 6고였으며19), 동서남북 사방에 각각 성문이 있었는데, 동문을 영일문(迎日門), 서문을 호소문(虎嘯門), 남문 을 주작문(朱雀門), 북문을 공진문(拱辰門)이라 하였다. 이들 성문에는 각기 문루(門 樓)가 있었으며, 특히 남문 밖 양쪽에는 박견(狛犬)이20) 놓여 있어 이채(異彩)를 띠 었고, 성문은 일정한 시각에 폐문루(閉門樓, 즉 觀海樓)에 달아 둔 북을 울리는 것 을 신호로 하여 열고 닫았다. 이 성은 숙종 18년(1692)에 당시의 좌수사 문효성(文 肴聖)의 중수(重修)를 거쳐서21) 왕조의 말기에 이르렀는데, 지금도 수영동에는 커다 란 암석으로 쌓아 올린 성곽이 허물어진 채 간간이 남아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성안에는 수사영(水使營) 즉 상영(上營)과 우후영(虞侯營) 즉 중영(中營)이 별도로 설치되어 있었으며, 영파당(寧波堂, 客舍), 관운당(管雲堂, 즉 東軒), 세검헌 (洗劍軒, 우후의 집무처)을 비롯하여 백화당(百和堂, 즉 裨將廳), 수항루(受降樓, 轅 門 즉 營門), 척분정(滌氛亭, 즉 舟師待變所), 연무정(鍊武亭, 즉 舟師將臺)과 군기고 (軍器庫, 典卒 46명), 화약고(火藥庫), 호고(戶庫, 別餉米 3,231석 6斗), 보군고(補軍 庫, 船價米 233石 5斗), 영수고(營需庫, 官需米 400石), 공고(工庫), 관청고(官廳庫), 지창(紙倉), 수성청(守城廳) 등 많은 관아와 창고가 있었다.22) 그리고 성 밖에는 어구정(禦寇亭)과 장대(章臺)가 있었는데, 어구정은 무사(武士) 들에게 사격훈련을 시키던 곳이요, 장대는 매년 10월 1일에 수사가 무사들의 무예 (武藝)를 시험하던 곳으로, 여기에 합격하면 수사의 명의(名義)로 된 합격증을 받아 선달(先達)이 되었다.23) 이밖에도 평상시에 병선(兵船)을 정박시키기도 하고, 또 풍 랑이 심할 때 병선을 대피시키기도 하는 상영선소(上營船所, 수사의 직할선소)와 중 영선소(中營船所, 우후의 직할선소)가 있었으며, 그 주위에는 적을 탐망(探望)하는 점이대(覘夷臺)와 망경대(望景臺)가 있었다. 한편 좌수영성의 수비를 담당하는 수성군(守城軍)의 편대는 좌우 2사(二司)로 나 19) 20) 21) 22) 23) 註 18)과 같음 이 박견(狛犬)은 다른 성에서는 볼 수 없는 좌수영성 특유의 것으로 현재 수영공원에 놓여있다. 左水營誌 참조 註 21)과 같음 註 13) 참조 311

318 누고, 또 전후좌우의 초대(哨隊)에는 수첩군관(受牒軍官) 125명과 가왜군(假倭軍, 대마도의 受職倭人) 25명이 배속되어 있었다.24) 또 좌수영 직속의 병선(兵船)으로 는 동래부지(東萊 誌) 와 속대전(續大典) 등 여러 문헌에 전선(戰船) 1척, 사후선(伺候船) 12척 등이 있었다고 하는데, 여기에 소속된 군병(軍兵)의 수가 매우 많았던 것으로 되어 있다. 그리고 좌수영 관할구역 안에는 각지의 병고(兵庫)와 봉산(封山)을 두고 있었다. 병고는 병기고(兵器庫)로서 좌수영 관하의 7개 진(鎭)과 기장 울산 등지에 27개소 를 두었고, 봉산은 선재(船材)의 조달을 위해 산림의 벌채를 금지하는 산으로 동래 의 상산(上山, 일명 萇山), 동변산(東邊山), 서변산(西邊山), 운수산(雲水山)과 다대 포의 몰운산(沒雲山), 두송산(頭松山), 금치산(金峙山)으로 지정되어 있었으며, 기장 울산 경주 장기(長鬐) 영일(迎日) 흥해(興海) 밀양 양산 등지에도 봉산이 있었다.25) (3) 경상좌수영 관하(管下)에는 원래 하나의 첨사영(僉使營, 巨鎭) 즉 부산진영(釜山 鎭營)과 12개소의 만호영(萬戶營, 諸鎭) 즉 다대포영(多大浦營, 동래) 해운포영(海 運浦營, 동래) 서평포영(西平浦營, 동래) 두모포영(豆毛浦營, 기장) 개운포영(開 雲浦營, 울산) 서생포영(西生浦營, 울산) 염포영(鹽浦營, 울산) 포이포영(包伊浦 營, 장기) 감포영(甘浦營, 경주) 오포영(烏浦營, 영덕) 축산포영(丑山浦營, 영해) 칠포영(漆浦營, 흥해)이 있었다. 그러나 이미 임진란 이전에 다대포영이 첨사영으 로 승격하고 해운포영과 염포영 오포영 등이 없어졌기 때문에 임진란 후에는 2개 소의 첨사영과 8개소의 만호영이 있었다. 그 후 왜란에 실패한 전철을 밟지 않기 위해 바다를 방어하는 요충지인 오늘의 부산지방에 두모포영 개운포영 포이포영 감포영 축산포영 칠포영을 이전하여 제마다 상당한 군비를 갖추게 하였으므로, 경상좌수영 관하(管下)의 전 병력은 사실상 부산에 총집결되어 있었으며, 따라서 부 산은 국내 최대의 수군기지가 되었다. 이제 부산지방에 있었던 좌수영 관하의 여러 진영(鎭營)에 대하여 살펴보면 다음 과 같다. 1) 부산진영(釜山鎭營) 부산진영은 현재 자성대(子城臺)를 중심으로 하는 동구 범일동에 있었으며, 그 수 장(守將)은 무관의 종3품 수군 첨절제사(僉節制使, 僉使)였다. 첨사의 밑에는 군관 (軍官) 진리(鎭吏) 지인(知印) 사령(使令) 군뢰(軍[) 등 120명이 있어26) 첨사 24) 25) 小田省吾 閱 都甲玄卿 編 釜山 史原稿 제2책 P.443 李完永 東萊 및 倭館의 行政小考 港都釜山 제2호 312

319 를 도와 영내의 사무를 집행하고 기타의 잡무에 사역(使役)되었다. 부산진 첨사영은 둘레 1,689척, 높이 13척의 석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동서 남북 사방에 성문이 있어 동문을 진동문(鎭東門), 서문을 금루관(金n關), 남문을 종 남문(鐘南門), 북문을 귀장루(龜藏樓)라 하였다. 성내에는 공진관(拱辰館, 客舍) 검 소루(劒嘯樓, 東軒), 제남루(濟南樓, 閉門樓)를 비롯하여 군관청(軍官廳), 수성청(守 城廳) 등 19개의 관사(官舍)와 호고(戶庫), 화약고(火藥庫) 등 5개의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부산진 직속의 병선은 전선(戰船) 2척, 병선(兵船) 2척, 귀선(龜船) 1척, 사 후선(伺候船) 4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전선은 가장 주가 되는 것으로 여기에 딸 린 군사가 2,233명이나 되었다.27) 2) 다대진영(多大鎭營) 다대진영은 사하구 다대동에 있었다. 원래 무관 종4품의 만호(萬戶)가 그 수장으 로 되어 있는 만호영이 있었으나, 이미 임진란 이전에 소위 변지이력(邊地履歷)으로 알려진 첨사영으로28) 승격하여 무관 종 3품관인 수군첨절제사(첨사)가 임명되었다. 그 후 효종 5년(1654)에는 첨사가 목장(牧場)의 감목관(監牧官)을 겸임하게 되었으 나, 숙종 2년(1676)에 그 겸임이 해제되었지만 곧 이어 겸임하게 되었다. 첨사의 밑에는 군관 진리 지인 사령 군뢰 등 69명이 있었는데29), 이들은 첨 사를 도와 영내의 사무를 분담하여 집행하기도 하고, 혹은 잡무에 사역되기도 하였 다. 첨사영은 둘레 1,806척, 높이 13척의 석성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사방에 성문 이 있어 동문은 패인루(沛仁樓), 서문을 영상루(迎爽樓), 남문을 장관루(壯觀樓), 북 문을 숙위루(肅威樓)라 하였다. 성내에는 회원관(懷遠館, 객사), 수호각(睡虎閣, 동헌)을 비롯하여 청상루(淸霜樓, 軍器所) 관청(官廳) 등 많은 관사(官舍)와 대동고(大同庫) 유포고(留布庫) 등 여러 개의 창고가 있었다. 그리고 다대진 직속의 병선은 전선 2척, 병선 2척, 귀선 1척, 사후선 4척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가장 주가 되는 전선에 딸린 군사는 2,202명 이 었다.30) 3) 서평포영(西平浦營) 서평포영은 현재의 사하구 다대동 부근에 있었으며, 무관 종9품 권관(權管)을 수 장으로 하는 최소의 진보(鎭堡)였다. 임진란 이후 한 때 다대진영 성내로 옮겼다가 현종 9년(1668)에 다대진성이 비좁아서 다시 구진지(舊鎭址) 부근에 돌아왔다. 그 후 숙종 3년(1677)에 이르러 서평포영이 왜관과 가까운 거리에 있으면서도 수장의 26) 27) 28) 29) 30) 東萊 邑誌 鎭堡 釜山鎭條 東萊 誌 關防 釜山條 崔南善 朝鮮常識 制度篇 第 3 武官類 僉使條 참조 東萊 邑誌 鎭堡 多大鎭條 東萊 誌 關防 多大浦條 313

320 관질(官秩)이 낮아 체통이 서지 않는다 하여 무관 종 4품 만호를 수장으로 하는 만 호영으로 승격되었다. 수장인 만호 밑에는 군관 진리 지인 사령을 합하여 모두 19명의 직원이 있어 직무를 수행하였다.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1척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전선에 딸린 군사는 그 수가 1,101명 이었다.31) 4) 두모포영(豆毛浦營) 두모포영은 원래 기장(기장읍 죽성리)에 있었으나, 인조 7년(1629)에 부산포로 옮겼다가 다시 숙종 6년(1680)에는 구왜관(舊倭館, 두모포왜관) 자리인 지금의 동 구 수정동으로 옮겼다. 본영의 수장은 만호였으며, 그 밑에 군관 진리 지인 사령을 합하여 모두 34 명의 직원이 있어 직무를 수행하였다.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으며, 그 중에서 전선에 딸린 군사는 그 수가 모두 1,101명 이었다.32) 5) 개운포영(開雲浦營) 개운포영은 원래 울산에 있었으나 임진란 후 부산포로 옮겼는데, 그 위치는 현재 동구 좌천동에 있는 정공단(鄭公壇) 부근이었다.33) 본영의 수장은 만호였으며, 그 휘하에 군관 진리 지인 사령을 합하여 모두 44명의 직원이 있어 직무를 수행하 였다.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는데, 그 중에서 전선에 딸린 군사는 그 수가 모두 1,101명 이었다.34) 6) 포이포영(包伊浦營) 포이포영은 원래 장기(長鬐, 포항시 남구 장기면)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란을 겪 은 후 동래 남촌(南村, 수영구 수영동)으로 옮겼는데, 본영의 수장은 만호였으며, 그 휘하에 군관 진리 지인 사령을 합하여 모두 39명의 직원이 있어 직무를 수행하 였다. 전선 1척과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 있었는데, 이 중에서 전선에 딸린 군사는 1,101명 이었다.35) 7) 감포영(甘浦營) 감포영은 원래 경주(경주시 감포읍)에 있었다. 그러나 임진란 후에 부산포로 옮겼 다가 뒤에 다시 동래 남촌(수영, 수영동)으로 옮겼으며, 만호를 수장으로 하는 만호 영이었다. 본영이 소유한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척이었는데, 그 중에 서 전선에 딸린 군사는 그 수가 1,101명 이었다.36) 31) 32) 33) 34) 35) 36) 상계서 西平浦條 상계서 豆毛浦條 釜山 史原稿 제 1책 P.226 東萊 誌 關防 開雲浦條 戰船에 딸린 군사의 수는 기록에는 없으나 다른 鎭營의 것과 같다고 본다. 東萊 誌 關防 甘浦條 314

321 8) 축산포영(丑山浦營) 축산포영은 원래 영해(寧海, 영덕군 축산면 축산리)에 있었으나, 임진란 후에 부 산포로 이전하였다가 뒤에 다시 동래 감만이포(戡蠻夷浦, 남구 감만동)로 옮겼는데, 만호를 수장으로 하는 만호영이었다. 본영이 소유한 병선은 전선 1척, 병선 1척, 사 후선 2척이었는데, 이 중에서 전선에 딸린 군사는 그 수가 1,101명 이었다.37) 9) 칠포영(漆浦營) 칠포영은 원래 흥해(興海, 포항시 북구 흥해읍 칠포리)에 있었으나, 임진란을 치른 후 부산포로 옮겨 왔다가 후에 다시 동래 남촌(수영구 수영동)으로 진영(鎭營)을 옮기 게 되었다. 본영은 만호를 수장으로 하는 만호영으로서 전선 1척, 병선 1척, 사후선 2 척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전선에 딸린 군사는 모두 1,101명 이었다. 37) 38) 상계서 丑山浦條 상계서 漆浦條 )

322 2012년도 시민문화강좌 일정표 매주 금요일 오후 3시~5시(강의: 90분) 連番 月/日 主 (기)는 기획강좌임 題 講師 備考 1 3/23 茶山 丁若鏞 선생의 삶을 고찰 2 3/30 性齋 許傳 散文 硏究 3 4/6 風俗의 社會的 機能 4 4/13 東學의 水雲선생이 꿈꾸는 세상 5 4/20 환경친화적인 삶 朴淸吉 부경대 명예교수 6 4/27 학교 폭력사태의 원인 고찰과 그 치유책 李炳壽 전 개금고 교장 7 5/4 中國의 이해 (과거와 현재) 8 5/11 퇴계의 林居十五詠 9 5/18 건강생활과 營養 10 5/25 南冥 曺植이 꿈꾸는 朝鮮社會 11 6/1 안도 쇼에키(安藤昌益)의 이상사회론 (기) 朴文鉉 동의대 교수 12 6/8 동아시아의 이상세계관 (기) 張在辰 동명대 교수 13 6/15 欲의 現實과 仁의 文藝運動 14 6/22 자본주의 4.0시대 한국경제의 도전과 과제 李浩永 동아대 교수 15 6/29 萬海의 愛國과 詩心 金泰詢 전 내성고 교장 16 7/6 實學派의 이상사회론 17 7/13 복천동 고분군과 연산동 고분군 洪普植 18 7/20 全循義(?~?)의 생애와 저술 李宗峰 부산대 교수 李泰鍾 동의과학대 교수 (기) 申承勳 경성대 교수 鄭尙圤 동아대 명예교수 (기) 鄭在權 동의대 교수 李陽子 동의대 명예교수 (기) 孫五圭 제주대 교수 卞在亨 부경대 명예교수 (기) 韓相奎 동주대 교수 (기) 趙柄悟 부산대 외래교수 (기) 成昊俊 영산대 교수 316 부산박물관 문화재조사팀장

323 連番 月/日 主 題 講師 備考 19 9/7 동양고전에서 古 와 今 의 문제 20 9/14 李舜臣 將軍의 忠國爲民의 정신 21 9/21 東洋思想과 우리의 삶 (기) 琴鏞斗 본원 전임교수 22 9/28 동아시아의 이상향(理想鄕) 이야기 (기) 張源哲 경상대 교수 23 10/5 고문헌의 형태서지(形態書誌) 24 10/12 임진왜란의 기억과 전승 (기) 金喆凡 경성대 교수 崔海晋 동의대 교수 宋靜淑 부산대 교수 金東哲 부산대 교수 25 10/19 漢代 儒家가 꿈꾸었던 理想社會 26 10/26 고려말 禑ㆍ昌王과 廢假立眞 (기) 金奉建 동의대 연구교수 兪英玉 부산대 강사 27 11/2 寒暄堂 金宏弼 道學의 傳承 양상 (기) 鄭景柱 경성대 교수 28 11/9 폭력 없는 학교를 위한 인성 교육의 방향 (기) 金秉權 부산대 교수 29 11/16 세종대왕의 리더십과 현대 趙南旭 부산대 교수 30 11/23 慶尙左水營에 대하여 李源鈞 부경대 명예교수 3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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