ÀϺ»Æí-ÃÖÁ¾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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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古事記 古 事 13 記 신화 전설 가요 계보 등을 소재로 하여 일본 건국의 유래와 제1대 神武천황부터 제33대 推 古천황까지의 事蹟을 기록한 일본 현존 最古의 典籍이며, 전체 3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天武천황 대에 천황이 중심이 되어 이루어졌던 역사 저술사업을 元明천황이 계승하여, 太安萬侶에게 稗田 阿禮가 암송하고 있던 천무천황대의 역사 저술 내용을 필록하도록 명하였다. 712년 太安萬侶가 和漢混用體의 문장으로 기록하여 이를 원명천황에게 奏上하였다. 일본 최초의 사서로 일본고대 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일본고전문학대계 등에 수록되었다. 仲哀天皇(츄우아이텐노)1) 그 大后(오오키사키)2) 息長帶日賣命(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코토)3)은 당시 神이 지피 셨다. 天皇4)이 축자의 訶志比宮(카시히노미야)5)에 납시셔서 熊曾國(쿠마소노쿠니)6)을 치 려 하였을 때에 천황이 琴을 치시고,7) 제사지내는 정원에서 建內宿 8) (타케시우치노스쿠 1) 仲哀天皇 : 古事記 日本書紀 의 제14대 천황. 和風諡號는 足仲彦尊(타라시나카츠미코노미코 토). 景行천황의 황자 日本武尊과 垂仁천황의 딸 兩道入姬皇女 사이에서 태어났다. 숙부 成務天皇 에게 후사가 없어서 성무천황의 사후 1년 뒤에 즉위하였다. 九州 남부의 熊襲을 치려고 하던 중 神 功皇后에게 서쪽의 신라국을 치라는 신탁이 내렸는데, 이를 믿지 않았으므로 筑紫에서 사망하였다 고 한다. 仲哀천황은 日本武尊과 神功皇后의 설화를 황실계보 속에 넣기 위해 뒤에 추가된 존재라 는 주장이 있다(井上光貞, 1960, 日本國家の起源, 岩波書店, 178쪽). 2) 大后 : 일본 상고시대에 천황의 처를 키사키라고 부르고 그 중에서 최상위자를 오오키사키라고 불 렀다. 오오키사키를 日本書紀 에서는 皇后로 표기하였는데, 古事記 에서는 大后로 표기하였다. 3) 息長帶日賣命 : 日本書紀 에서는 神功皇后로 표기하고 있다. 神功皇后에 대해서는 21쪽의 주 1) 참조. 4) 天皇 : 仲哀天皇. 주 1) 참조. 5) 訶志比宮 : 日本書紀 에서는 日宮(카시이구)이라고 적고 있다. 仲哀천황의 궁이 있었던 곳인데, 이곳은 奈良, 平安시대 전기에는 香椎廟, 香椎宮으로 표기되었다. 현재 福岡市 東區 大字 香椎에 香椎宮이 있다(1982, 國史大辭典 3, 吉川弘文館, 264쪽). 6) 熊曾國 : 古事記 日本書紀 의 전승기사에서 남구주지방의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 日本書紀 에서 는 熊襲이라고 표기하였다). 7) 천황이 치시고 : 신의 신탁을 받을 때에는 신이 강림하도록 和琴을 연주하였다. 8) 建內宿 : 日本書紀 에서는 武內宿 로 표기하고 있다. 景行 成務 仲哀 神功 應神 仁德代 에 걸쳐 천황을 보필하였다고 하는 忠臣.

8 14 古事記 15 네)가 神의 명령을 여쭤보았다. 그러자 大后가 神이 지펴서 서쪽에 나라9)가 있다. 金銀 大 (오오하라에)19)하여 이를 깨끗하게 하고 또 建內宿 가 祭場에서 신이 명령하시길 청 을 비롯해 눈이 부신 많은 보물이 그 나라에 많이 있다. 내가 지금 그 나라를 복속시켜 주 하였습니다. 그러자 신이 가르쳐 주신 것은 모두 먼저와 마찬가지로 모든 이 나라는 그대 겠다. 고 말씀하셨다. 그러나 천황이 대답하시기를 높은 곳에 올라가 서쪽을 보아도 나 의 뱃속에 계시는 자식께서 다스릴 나라다.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자 建內宿 가 神이시 라가 보이지 않고 단지 큰 바다 뿐이다. 고 말씀하시고 거짓말하는 신이라고 하시면서 琴 여 황송하지만 그 神의 뱃속에 계시는 자식께서는 어떤 자식이십니까? 라고 여쭙자, 아 을 밀어놓고 연주하지 않고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계셨다. 그러자 그 神께서 매우 화가 나 드님이시다. 라고 말씀하셨다. 답하시기를 이것은 天照大神(아마테라스오오미카미)20)의 서 무릇 천하는 당신이 다스릴 나라는 아니다. 당신은 저승길로 가시오. 라고 말씀하셨 마음이시다. 또 底筒男(소코츠츠노오) 中筒男(나카츠츠노오) 上筒男(카미츠츠노오) 세 다. 그러자 建內宿 가 말하기를 황송한 일입니다. 폐하, 그 琴을 계속 연주하십시오. 신21)이다. 지금 진실로 그 나라를 갖고자 한다면 천지신들, 또 산의 신, 바다와 강의 신들에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조금 그 琴을 끌어당겨 마지못해 치시게 되었는데, 곧 琴 소리가 게 모두 폐백을 바치고 내 靈22)을 배 위에서 제사 지내고, 나무의 재를 표주박에 넣고 또 젓 들리지 않게 되었다. 그래서 불을 키고 보았더니 이미 돌아가셨다.10) 고 말씀하셨다. 가락과 접시를 많이 만들어 모두 바다에 띄우고23) 건너는 것이 좋다. 그러자 놀라고 두려워서 殯宮(아라키노미야)11)에 옮기고 나아가 국내에서 폐백을 모으 12) 13) 14) 15) 16) 17) 18) 고, 生剝 逆剝 阿離 溝埋 屎戶 上通下通婚 馬婚 牛婚 鷄婚 의 죄 등을 그래서 모두 신의 가르침대로 하고 군대를 정비하고 많은 배를 나란히 하여 바다를 건 너가실 때에 바다 속의 물고기들도 크고 작은 놈 할 것 없이 나와서 배를 지고 건너갔다. 순풍이 잘 불어 배는 파도를 따라 갔다. 그 배의 파도가 新羅國에 몰려들어 나라의 반 정 9) 나라 : 日本書紀 仲哀 8년 추9월 을해삭 기묘조에서는 衾新羅國이라고 나와 있다. 10) 그래서 조금 이미 돌아가셨다 : 日本書紀 仲哀 8년 추9월 기묘조와 9년 춘2월 계묘삭 정 미조에서는 중애천황의 사망에 대해 다르게 적고 있다. 즉 중애 8년 9월 5일에 중애천황이 신의 말을 믿지 않자 신이 다시 신공황후에게 지펴 중애왕을 비난하면서 중애천황이 자신을 못 믿는다 면 끝내 그 나라를 얻지 못하고 황후가 임신한 아들이 그 나라를 얻을 것이라고 신탁하였다. 그런 데도 천황은 믿지 않고 무리하게 熊襲을 쳐서 이기지 못하고 돌아와 仲哀 9년 2월 5일에 천황이 갑자기 몸이 아프더니 다음날 사망하였다고 한다. 日本書紀 편찬자는 사망 기사 뒤에 신의 말을 듣지 않아서 일찍 사망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고 적는 한편 分註의 형태로 천황이 친히 熊襲을 쳤는데 화살에 맞아 사망하였다는 설도 제시하고 있다. 11) 殯宮 : 시신을 매장하기 전에 안치한 곳. 日本書紀 仲哀 9년 春2月 계묘삭 정미조에서는 중애의 사망 사실을 숨기고 武內宿 가 해로로 穴門으로 가서 豊浦宮에 중애의 시신을 안치하고 불을 밝 히지는 않았다고 하면서 이해에 新羅役 때문에 중애를 장사지낼 수 없었다고 적고 있다. 현재 山 口縣 下關市 豊浦村의 忌宮神社에 豊浦宮趾였다는 곳이 있다(1967, 日本古典文學大系日本書紀 上, 岩波書店, 324쪽). 12) 生剝 : 산 짐승의 가죽을 벗기는 것. 13) 逆剝 : 살아있는 짐승의 가죽을 꼬리쪽부터 벗기는 것. 14) 阿離 : 밭의 두둑을 무너뜨리는 것. 15) 溝埋 : 관개를 위한 도랑을 막는 것. 16) 屎戶 : 오줌을 누어 신성한 장소를 더럽히는 것. 17) 上通下通婚 : 부모 자식간에 결혼하는 것. 18) 馬婚 牛婚 鷄婚 : 말 소 닭 등의 가축과 수간하는 것. 도까지 덥쳤다. 그래서 그 국왕이 두려워서 지금부터 천황의 명령대로 御馬甘(미마카 이)24)으로서 매년 한결같이 배 안이 마르지 않고 노가 마르지 않도록 천지가 있는 한 그치 지 않고 받들어 모시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그래서 [신공황후는] 신라국을 御馬甘으로 19) 大 : 사람들이 범한 죄와 부정한 것을 깨끗하게 하는 일본 神道의 종교의식. 20) 天照大神 : 하늘에 있으면서 비추는 신이라는 뜻으로 日神을 가리킴. 21) 底筒男 中筒男 上筒男 세신 : 古事記 日本書紀 에 의하면 伊 諾尊이 黃泉國에서 돌아와 筑 紫 日向 橘小戶 檍原에서 목욕재계하여 不淨한 것을 씻을 때에 바다의 밑 가운데 표면에서 童 子神과 함께 나타난 세 신이다. 日本書紀 에서는 住吉大神이라고 하였는데, 항해의 신이다 (1967,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上, 岩波書店, 96쪽). 住吉三神(스미요시노산진)이라고 한 다. 延喜式 神名帳에는 攝津國 住吉郡의 住吉坐神社(현재 大阪市 住吉區 住吉의 住吉大社)와 長 門國 豊浦郡의 住吉坐荒御魂神社(현재 山口縣 下關市 一の宮 東町의 住吉神社), 筑前國 那珂郡 住 吉神社(현재 福岡市 博多區 住吉의 住吉神社), 壹岐嶋 壹岐郡(현재 長崎縣 壹岐郡 芦邊町 住吉의 住吉神社), 對馬嶋 下縣郡 住吉神社, 播磨國 賀茂郡 住吉神社, 陸奧國 磐城郡 住吉神社가 보인다. 그러나 이후 住吉神社는 일본열도 전국에 퍼져 현재 이들 세 신을 모시거나 이들 신 중에서 한 두 신을 모시는 신사는 모두 2천 수백사가 된다. 22) 내 靈 : 住吉神社의 세 신의 신령. 23) 나무의 재를 바다에 띄우고 : 어떤 주술적인 의식인지 확실하지 않지만 海神에게 음식을 바 치는 의식일 가능성이 있다(1958, 日本古典文學大系古事記祝詞, 岩波書店, 324쪽). 24) 御馬甘 : 왕실의 말을 사육하는 部曲.

9 16 古事記 17 삼고 백제국을 바다 건너의 屯家25)로 삼으시고, 지팡이를 新羅國主의 문에 꽂고 墨江大神 이다.> 또 橫刀(타치)34)와 大鏡을 바쳤다. 또 백제에 현인이 있으면 바치도록 명령하셨으 (스미노에노오오카미)26)의 荒御魂(아라미타마)27)을 그 나라를 지키는 신28)으로 모셔놓고 므로 명을 받고 바친 사람은 和邇吉師(와니키시)35)라고 하여 論語 10권과 千字文 1권 합 돌아오셨다. 쳐서 11권을 이 사람 편에 바쳤다. <*이 和邇吉師는 文首 등의 조상이다.36)> 또 수공업자 로 韓鍛(카라카누치)37) 卓素(타쿠소)38)와 또 吳服(쿠레하토리)39) 西素(사이소)40) 두 사람을 應神天皇 이 천황의 치세에 海部 山部 山守部 伊勢部를 정하셨다. 劍池(츠루기노이케)29)를 만 들었다. 또 신라인이 도래했으므로 建內宿 가 이들을 이끌고 저수지를 만들어 百濟池 (쿠다라노이케)를 만들었다.30) 또 백제국주 照古王31)이 암말 한 마리와 수말 한 마리를 阿 바쳤다. 또 秦造(하타노이야츠코)의 조상,41) 漢直(아야노아타이)의 조상42) 및 술을 양조하 는 사람으로 이름이 仁番(니호), 또는 須須許理(스스코리)43)라고 하는 사람들도 건너왔다. 이 須須許理는 술을 만들어 바쳤다. 천황이 이 바친 술에 기분이 좋아 부른 노래는 須須 許理가 빚은 술에 나는 취했어요. 평화로운 술 웃게 만드는 술에 나는 취했어요. 이렇게 知吉師(아치키시)32) 편에 바쳤다. <*이 阿知吉師는 阿直史(아치키노후비토)33) 등의 조상 25) 屯家 : 日本書紀 에서는 官家로 나와 있다. 한반도 남부의 백제 임나 제국을 일본조정에 공납 하는 나라로 보아 官家라는 표기를 하였다. 26) 墨江大神 : 住吉大神. 주 21)의 底筒男 中筒男 上筒男 세신를 가리킨다. 27) 荒御魂 : 용맹한 신령(1983, 古語大辭典, 小學館, 81쪽), 神靈의 작용을 크게 둘로 나누어, 거칠 게 動的으로 작용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 荒御魂, 온화하고 靜的으로 작용하는 것을 표현한 것이 和御魂(니키미타마)이다(尾畑喜一郞편, 1978, 古事記辭典 櫻楓社, 58쪽). 여기에서는 住吉三神 이 작용하는 두 측면을 표현한 것이다. 日本書紀 神功攝政前紀 춘3월 경오삭 기묘조에서는 荒 魂은 앞장서서 軍船을 이끄는 신으로 나오는데, 同 12월 무술삭신해조에서는 神功皇后가 개선한 후에 荒魂은 穴門의 山田邑(현재 下關市 住吉神社)에 모셨다. 神功攝政 원년 춘2월에 和魂을 大 津 渟中倉 長峽 (攝津國 住吉郡, 현재 大阪市의 住吉區 住吉大社)에 모셨다. 28) 그 나라를 지키는 신 : 日本書紀 神功攝政前紀 12월 무술삭 신해조에서는 신공황후의 원정군을 따라 갔던 住吉의 세신이 神功皇后에게 나의 荒魂을 穴門의 山田邑에 제사지내라. 고 명하여 신 공황후는 신사를 山田邑에 세웠다고 한다. 29) 劍池 : 日本書紀 應神 11년조에서는 劍池 輕池 鹿垣池 廐坂池를 세웠다고 한다. 30) 신라인이 百濟池를 만들었다 : 일본서기 應神 7년조에서는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 羅人이 함께 내조하였으므로 武內宿 에게 명하여 여러 韓人들을 이끌고 저수지를 만들도록 하 였다. 따라서 저수지 이름을 韓人池라고 불렀다. 고 적혀 있다. 31) 照古王 : 백제 제13대 근초고왕(재위 346~375년). 32) 阿知吉師 : 日本書紀 應神 15년 추8월 임술삭 정묘조에서는 阿直伎 阿直岐로 나온다. 33) 阿直史 : 日本書紀 應神 15년 추8월 임술삭 정묘조에서는 阿直岐史로 나온다. 史는 大和政權에 서 글을 담당한 씨족에게 준 姓(카바네)인데, 阿直史는 阿直岐(阿知吉師)의 후손들이 大和政權에 서 글을 담당하였음을 말해준다. 34) 橫刀 : 大刀. 35) 和邇吉師 : 日本書紀 應神 15년조에서는 이 때에 천황이 阿直岐에게 너보다 더 뛰어난 박사가 있는지 묻자 (아직기가) 王仁이라는 사람이 뛰어나다고 대답하였으므로 상모야군의 조상 황전별 과 무별을 백제에 파견하여 王仁을 불러들였다. 고 적고 있다. 36) 和邇吉師는 조상이다 : 日本書紀 應神 16년 춘2월조에서는 王仁이 書首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37) 韓鍛 : 倭鍛에 대한 말로 한반도식의 冶匠을 가리킴. 38) 卓素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9) 吳服 : 吳의 직공. 日本書紀 應神 14년 춘2월조에서는 백제왕이 의복을 바느질하는 여자를 바 쳤는데 眞毛津이라고 하며 지금 來木衣縫의 시조다. 라고 적고 있다. 40) 西素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1) 秦造의 조상 : 新撰姓氏錄 左京 諸蕃 漢조에 의하면 秦造의 조상은 融通王이다. 融通王은 일명 弓月君이라고 하는데, 日本書紀 應神 14년 시세조에 의하면 弓月君은 백제에서 來歸하였다고 한다. 그는 왜국의 應神천황에게 자신의 나라의 120縣의 사람들을 이끌고 歸化 하고자 하였으나 신라인이 이를 방해하여 모두 加羅國에 머물고 있다고 하였다. 그러자 應神천황은 葛城襲津彦을 파견하여 가라에서 데려오도록 하였으나, 3년이 지나도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고 한다. 日本 書紀 應神 16년 8월조에서는 신라가 방해하여 襲津彦이 돌아오지 못 하고 있다고 생각한 應神천 황이 平群木 宿 와 的戶田宿 에게 정예병사를 주어 加羅에 파견하였더니 신라왕이 두려워서 그 죄를 자복하였으므로 平群木 宿 와 的戶田宿 가 弓月君의 백성들을 이끌고 葛城襲津彦과 함께 왜국으로 돌아왔다고 하였다. 42) 漢直의 조상 : 日本書紀 應神 20년 秋9월조에 倭漢直의 조상 阿知使主와 그 아들 都加使主가 자신의 무리 17縣의 사람을 이끌고 來歸하였다. 고 적혀있어 漢直의 조상은 阿知使主임을 알 수 있다. 43) 須須許理 : 新撰姓氏錄 右京 皇別 下 酒部公조에 大 천황대에 韓國에서 온 兄曾曾保利와

10 18 노래하시고 외출하셨을 때에 지팡이로 大坂(오오사카)44)의 길의 큰 돌을 치시자, 그 돌이 도망쳤다. 그래서 속담에 단단한 돌이라도 술 취한 사람을 만나면 도망간다. 라고 한다. 김은숙(한국교원대학교) 日本書紀 弟曾曾保利 두 사람이 있었는데, 천황이 어떤 재주가 있는지 묻자 술을 만드는 재주가 있다고 말 하였으므로 술을 만들도록 하였다. 고 적혀있다. 大 천황은 仁德천황이다. 44) 大坂 : 大和에서 河內쪽으로 넘어가는 고개.

11 日本書紀 21 日 本 書 紀 神代부터 持統天皇 11년(697)까지를 서술한 편년체 사서이다. 天武천황대부터 역사서 편찬사 업이 시작되어 持統 文武 元明천황을 거치며 계속 추진되어 元正천황대인 720년에 최종적으 로 완성되었다. 720년의 책임자는 舍人親王으로 역사서가 완성된 후 元正천황에게 奏上하였다. 전체 30권, 系圖 1권이지만, 系圖는 전해지지 않는다. 권1 2는 神代卷이며, 권3~권30은 神武 천황부터 持統천황까지의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일본고대사 연구에 매우 중요한 사서이 며, 한국에 관한 많은 기사가 수록되어 있어 한국 고대사 연구에도 중요한 자료이다. (新訂增補) 國史大系에 수록되었다. 권9 氣長足姬尊 神功皇后1) 攝政前紀 仲哀天皇2) 9년(200) 동10월 己亥朔 辛丑 겨울 10월 己亥朔 辛丑(3일). 和珥津(와니노츠)3)에서 출발하였다. 이 때 風神이 바람을 1) 神功皇后 : 日本書紀 에 의하면 仲哀天皇의 황후로서 이름은 氣長足姬尊(오키나가타라시히메노미 코토)라고 한다. 아버지는 開化天皇의 증손 氣長宿 王(오키나가노스쿠네노오오키미), 어머니는 葛 城高 姬(카즈라기노타카누카히메)이라고 전한다( 古事記 에는 아버지가 開化天皇의 현손이며, 어 머니는 신라의 왕자 天之日矛의 5세손이라고 한다). 仲哀天皇과 함께 큐슈 남부의 熊襲(쿠마소) 원 정을 나갔지만, 仲哀는 원정 도중에 갑자기 죽는다. 신공황후는 神託에 따라 新羅征討軍를 일으켜 만삭의 몸으로 몸소 바다를 건너 신라를 복속시키고 돌아오는 도중에 筑紫(츠쿠시)에서 應神天皇을 낳았다고 한다. 이후 신공황후는 69년간 재위하지 않으면서 섭정하는데, 그의 일대기인 神功紀에 는 설화적인 요소가 매우 많다. 그러나 日本書紀 神功紀의 한반도 관계 기사의 경우 백제왕력을 기준으로 120년을 하향 조정해서(那珂通世, 1958,`上世年紀考a, 外交繹史, 岩波書店) 보면 역사 적 사실로 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는 견해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그리고 神功紀에는 년조 세 곳에 걸쳐 분주의 형태로 三國志 卷30 魏書東夷傳 倭人條의 卑彌呼 기사와 66년조에 `晉起居注a의 기년기사 등 중국측 사서를 인용하고 있다. 3세기에 비미호가 魏에 사신을 보내어 조 공했다는 倭人條의 기사를 神功紀에 분주로서 인용하였다는 것은 日本書紀 편찬자가 신공황후라 는 전설적 인물을 卑彌呼로 간주하였다는 증거이다. 2) 仲哀天皇 : 古事記 日本書紀 의 계보상 14대 천황. 日本書紀 에 의하면 전설상의 영웅인 日 本武尊(야마토타케루노미코토)의 둘째 아들로서 이름은 足仲彦(타라시나카츠히코)이고, 어머니는 兩道入姬命(후타치노이리노미코토)이다. 熊襲을 정토하기 위해 神功皇后와 筑紫까지 갔지만, 神託 을 무시했기 때문에 급사했다고 한다. 3) 和珥津 : 對馬島의 북단에 있는 上縣(카미아가타)郡 上對馬(카미츠시마)町의 鰐浦(우니우라)를 가리킨다.

12 22 日本書紀 23 일으키고, 海神은 파도를 일으켰다. 바다 속의 큰 물고기가 모두 떠올라 배를 떠받쳤다.4) 하였다. 즉시 백기를 들어 스스로 항복하고 흰 줄로 손을 뒤로 하여 묶었다. 圖籍7)을 봉 큰 바람이 순풍이 되어 불고 범선이 파도를 타니 노를 젓는 수고로움도 없이 곧 신라에 하고 王船 앞에서 항복하였다. 그리고 머리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 길이 天地와 더불 이르렀다. 그 때 배를 따르던 파도가 멀리 나라 안에까지 밀려들어갔다. 이 일로 인해서 어 飼部(미마카이)8)가 되겠습니다. 배의 키가 마를 사이 없이 해마다 말빗과 채찍을 바치 天神地祇가 모두 도와준 것을 알았다. 이에 신라왕은 전전긍긍하며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겠습니다. 또 바다를 사이에 두고 멀리 떨어져 있다는 것을 꺼리지 않고 해마다 남녀의 여러 사람을 불러 모아서 신라의 건국 이래 일찍이 바닷물이 나라를 침범했다는 것은 듣 라고 말하였다. 거듭 맹세하여 동쪽에서 떠오른 해가 다시 서쪽에 調9)를 바치겠습니다. 지 못했다. 혹시 천운이 다하여 나라가 바다로 되는 것은 아닌가? 라고 말하였다. 그 말 서 떠오르는 일이 없는 한, 또 阿利那禮河(아리나레가와)10)가 역류하고 강의 돌이 하늘로 이 끝나기도 전에 軍船이 바다에 가득하여 깃발이 햇빛에 빛나고 북과 피리의 소리가 산 올라가 별이 되는 일이 없는 한, 春秋의 調를 거르거나 게을리 하여 빗과 채찍의 공물을 천에 울렸다. 이 광경을 멀리서 바라보던 신라왕은 뜻밖의 군사들이 나타나 장차 신라를 바치지 않는다면 天神地祇와 함께 벌을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신 멸망시키려 하고 있는 것이라 여기고 두려워 전의를 상실하였다. 마침내 정신을 차리고 라왕을 죽이십시오. 라고 말했다. 이에 황후는 처음에 신의 가르침대로 장차 金銀의 나 내가 듣자하니 동쪽에 神國이 있는데 日本5)이라고 한다. 또한 聖王인 天皇6)이 있다고 한 라를 얻을 것이다. 또한 전군에 호령하여 스스로 항복하여 오는 자는 죽이지 말라. 라고 다. 틀림없이 그 나라의 神兵일 것이다. 어찌 군사를 일으켜 막을 수 있겠는가? 라고 말 말한 바 있다. 지금 이미 財國을 얻었다. 또 사람들이 스스로 항복하였다. 죽이는 것은 좋 지 않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신라왕의 결박을 풀고 飼部로 삼았다. 마침내 그 나라 안 4) 이 때 도왔다 : 古事記 仲哀段에도 비슷한 내용이 있다. 5) 日本 : 倭 또는 倭國에서 바뀐 국호. 日本書紀 에는 倭와 日本이 혼용되어 나온다. 일본 국내 사료 에서 대외적으로 日本이라는 국호을 정식으로 사용한 것이 확실한 기사는 續日本紀 卷2 大寶 2 年(702) 乙酉條이다. 이 기사에 의하면 당에 파견된 粟田朝臣眞人이 자신이 일본국의 사신이라고 주장하자, 당 황제는 일본이 어떤 나라인지 질문하였다고 한다. 중국측 사료의 경우는 舊唐書 의 卷6 本紀 則天皇后 大足 2年(702)條, 同 卷199 上 列傳 倭國條에서부터 나오고, 三國史記 에는 卷6 新羅本紀 文武王 10年(670) 12月條에 日本이란 국호가 처음 보인다. 이러한 日本이란 국호의 성립시기에 대해서는 일찍이 推古天皇이 隋의 황제에게 보낸 國書에 日出處天子 隋書 卷81 ( 列 傳 倭國條)라는 기사를 근거로 日本이라는 것은 중국의 동방에 있다는 의미로 推古朝에 성립되었 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이에 대해 최근에는 天武末에서 持統初에 걸쳐(7세기 말에서 8세기 초) 성립하여 持統 3年(689) 淨御原令에 제도화된 후, 신라나 당나라에도 전해졌다고 하는 견해(岩橋 小彌太, 1970, 日本の國號, 吉川弘文館 ; 大和岩雄, 1996, `日本a國はいつできたか, 大和書 房)가 설득력을 얻고 있다. 6) 天皇 : 倭王 倭國王, 또는 大王(熊本縣 江田船山古墳出土 大刀銘에 보인다)에서 바뀐 고대 일본 군주의 칭호. 그 성립 시기에 대해서는 일찌기 推古朝의 法隆寺 樂師象光背銘과 孝德朝의`元興 寺塔露盤銘a에 天皇 이 새겨진 것을 근거로 推古朝 즈음에 성립되었다는 견해(津田左右吉, 1963,`天皇考a, 津田左右吉全集 3, 岩波書店)가 제기되었다. 그러나 최근 연구 동향에 의하면 天武紀 이전의 日本書紀 의 기록은 물론 금석문 등에 보이는 천황호는 천무 지통 이전으로 보 기는 어렵다는 것이 대세이다. 현재는 1983년 飛鳥京유적에서 출토된 皇子 大津皇 목간과 1997년 天皇聚 弘寅 이라고 적힌 飛鳥池출토 목간을 근거로 日本 국호와 함께 7세기말 천무 조부터 사용되기 시작하였다는 설이 유력하다(東野治之, 1980,` 大王 號の成立と 天皇 號a, 으로 들어가 귀중한 보물 창고를 봉인하고 圖籍과 문서를 거두었다. 그리고 황후가 가지 ゼミナ一ル日本古代史 下, 光文社 ; 森公章, 1983,`天皇號の成立と意義a, 古代史硏究の最前 線 1, 雄山閣出版 ; 增尾伸一郞, 2001,`日本書紀の編纂と天皇號の成立a, 東アジアの古代文 化 106, 大和書房). 7) 圖籍 : 지도와 호적. 신라왕이 이것을 봉하였다는 것은 토지와 인민을 자유롭게 부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결국 자국의 토지와 인민에 대한 지배권을 포기하겠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8) 飼部 : 율령제하에서 말의 사육을 담당하는 곳을 말한다. 令集解 職員令 左馬寮條에 頭一人. 掌 左閑馬調習. 養飼. 供御乘具. 配給穀草. 及飼部戶口名籍事 라고 나온다. 신라가 왜국의 飼部가 되 겠다는 것은 古事記 仲哀段에 신라왕이 御馬甘 이 되겠다는 표현 및 日本書紀 雄略 8年 2月 條에 신라인을 典馬 로 삼았다는 표현과 함께 앞으로 일본에 복종하겠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 러한 내용은 한반도제국에서 말과 마구, 그리고 말의 사육법 등이 왜국에 전래된 사실과 신공황후 의 신라정벌이라는 전설이 혼합되어 만들어진 허구로 볼 수 있다. 9) 男女의 調 : 日本書紀 崇神 12年 9월조에 보이는 此謂男之 調. 女子手末調也 를 가리킨다. 남 자가 수렵을 통해서 얻는 고기와 피혁, 그리고 여자가 손수 짜내는 명주와 무명 등의 조세를 일컫 는다. 여기서 調라는 용어는 고구려 백제 신라 등이 외교 교섭시에 보낸 선물을 나타내는 일본 서기 의 일본 중심적인 독특한 표현이다. 주변의 국가들을 蕃國 으로 놓고 그 번국의 공물의 의미 로서 율령시대 일본국내의 세제용어인 調로 표기한 것이다. 10) 阿利那禮河 : 신라 경주의 북부를 흐르는 北川(閼川:ar-nari) (三品彰英, 1962, 日本書紀朝鮮關 係記事考證 上, 吉川弘文館, 63쪽).

13 24 日本書紀 25 고 있던 矛를 신라의 王門 앞에 세우고 후세의 표시로 삼았다.11) 그 창은 지금도 신라의 고 했다. 이로써 內官家17)로 정하였다. 이것이 이른바 三韓18)이다. 황후는 신라에서 돌아 王門 앞에 세워져 있다. 신라왕 婆沙寐錦12)은 즉시 微叱己知波珍干岐13)를 인질로 삼아 金 왔다. 銀彩色 및 綾羅 絹을 가지고 80척의 배에 실어 官軍을 따라가게 하였다. 이로써 신라왕 은 항상 80척의 調를 日本國에 바치게 되었는데14) 이것이 그 연유이다. 이에 高麗15)와 百 濟 두 나라의 왕은 신라가 圖籍을 거두어 日本國에 항복하였다는 말을 듣고 몰래 그 군세 를 엿보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도저히 이길 수 없음을 알고 스스로 營外로 나와서 머리를 神功皇后 46년(246)19) 춘3월 乙亥朔 봄 3월 乙亥朔(1일). 斯摩宿 (시마노스쿠네)20)를 卓淳國21)에 파견하였다. <*斯摩宿 는 라 조아리며 지금 이후부터는 오래도록 西蕃16)이라 칭하고 조공을 그치지 않겠습니다. 11) 그리고 삼았다 : 杖을 세운다는 것은 토지 점거를 나타내는 것이다. 따라서 신공황후가 신라 의 왕문 앞에 자신의 杖을 세웠다는 것은 신라를 정복했다는 의미이다. 12) 婆沙寐錦 : 三國史記 卷1 신라본기에 의하면 婆沙는 제5대 婆娑尼師今으로서 A.D.80년에서 122년까지 재위한 왕이다. 그런데 寐錦이란 용어는 한국측 사료에서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 등 에는 보이지 않으며`廣開土王陵碑a `中原高句麗碑a `蔚珍鳳坪碑a `智證大師寂照塔碑a등의 금석문에만 보인다. 이에 대해서 寐錦은 尼師今과 동의어라는 설(鮎貝房之進, 1931,`日本書紀朝 鮮地名攷a, 雜攷 7)과 麻立干의 異表記란 설(이병도, 1979, 한국고대사연구, 박영사)이 제기 되었는데,`中原高句麗碑a `蔚珍鳳坪碑a가 신라 마립간 시기에 세워진 것임이 판명됨으로써 현 재 寐錦을 麻立干으로 보는 데는 거의 이견이 없다. 이렇게 볼 때 婆沙寐錦이란 표현은 日本書 紀 의 오기로 보아야 한다. 13) 微叱己知波珍干岐 : 日本書紀 神功 5年 春3月條에는 微叱許智伐旱으로 나온다. 三國史記 에 의하면 微叱己知波珍干岐는 신라 15대 奈勿王의 아들 未斯欣을 가리킨다. 三國遺事 에는 美海 未叱喜라고도 한다. 波珍干岐는 신라 17관등 중 제4위에 해당하는 波珍飡이고, 知 혹은 智는 신 라의 인명어미에 붙는 존칭적 의미이다. 微叱己는 未斯欣과 음이 통하는 동일인물이다. 이 未斯欣 은 三國史記 에는 402년, 三國遺事 에는 391년에 왜국에 파견되었다고 나온다. 본조에서는 波 沙尼師今과 동시대의 인물로 기술되어 있는데 양자의 생존 시기가 무려 300여 년 정도가 차이가 난다. 동시대인이 될 수 없는 이 인물들이 어떠한 경로를 통해서 日本書紀 에 채록되었는지는 명 확히 알 수 없지만, 日本書紀 편찬자의 손에는 이들에 관한 기록, 즉 신라측 전승기록이 있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이 두개의 다른 전승 중에서 婆沙寐錦에 관한 전승은 실제 왜국에 체재를 경험 했던 微叱己知波珍干岐 기록으로 흡수된 다음, 신공황후의 신라정벌의 이야기에 부회되어 나타난 것으로 추측된다(연민수, 1996,`일본서기 신공기(神功紀)의 사료비판a, 日本學 15). 14) 이로써 되었는데 : 日本書紀 仁德 17年 9월조에 於是新羅人懼之乃貢獻. 調絹一千四百六 十疋及種種雜物. 幷八十 과 允恭 42年 正月條에 於是新羅王聞天皇旣崩. 驚愁之. 貢上調船八 十 及種種樂人八十 라는 비슷한 기사가 보인다. 15) 高麗 : 日本書紀 에 보이는 高麗는 모두 고구려를 일컫는다. 雄略 20年條에는 으로 나오기 도 한다. 16) 西蕃 : 서쪽의 蕃國 이라는 의미. 日本書紀 에는 新羅를 高句麗 百濟 任那와 함께 일본에 조 공해 오는 蕃國 이며, 천황의 內官家 로 취급하고 있다. 이는 기본적으로 唐의 율령을 모방한 결과로 日本書紀 편찬시의 율령국가 지배층의 대외인식에 의해 규정된 표현이다. 令集解 公 式令 詔書式條에 인용된 古記의 御宇日本天皇詔旨. 對隣國及諸蕃國而詔之辭. 問隣國與蕃國何其 別. 答隣國者大唐. 蕃國者新羅也 라는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듯이 일본은 율령제하에서 唐을 隣 國, 신라를 蕃國으로 규정하고 있다. 17) 內官家 : 古事記 와 日本書紀 에서 백제 신라 임나 등의 한반도 제국을 일본의 朝貢國이라는 의미로 사용한 표현이다. 古事記 仲哀段에는 백제를 渡屯家, 日本書紀 欽明紀에는 신라를 內 官家屯倉, 繼體 欽明紀에는 任那를 任那官家로 표현하기도 한다. 官家는 미야케(みやけ) 로 읽 으며 屯倉(또는 屯家御宅 三宅) 이라는 다른 표현을 사용하기도 한다. 屯倉 이란 원래 大王 또 는 야마토정권이 왜국내의 諸國을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지배하기 위해 설치한 건물(官舍)을 의미한다. 18) 三韓 : 원래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馬韓 辰韓 弁韓의 호칭이다. 그러나 日本 書紀 에서는 고구려 백제 신라를 가리킬 때 사용되었다. 위의 三韓과 관련된 기사는 신공황 후가 신라를 정벌하자 고구려와 백제도 스스로 일본에 복속하게 되었다는 이른바 신공황후의 삼한정벌 기사이다. 이 기사에 대해서는 津田左右吉에 의해 사건의 허구성 및 문제점이 지적된 이래(1924, 古事記及び日本書紀の硏究, 岩波書店), 신화학적으로 해석하거나(黃浿江, 1996, 日本神話의 硏究, 지식산업사), 推古 齊明(皇極) 持統 3명의 女帝를 모델로 하여 꾸민 이야 기로 보기도 한다(直木孝次郞, 1988,`神功皇后傳說の成立a, 古代日本と朝鮮 中國, 講談社 學術文庫). 19) 神功 46년 : 日本書紀 기년으로 246년에 해당되지만, 백제 왕력 기사에 기초해 2干支로 내려 연대를 수정하면 366년으로 근초고왕 21년에 해당된다. 20) 斯摩宿 : 같은 기사 중에 志摩宿 라고도 나오는데 어떤 인물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宿 는 舊姓이 連(무라지)으로 天武 13년(684) 10월에 제정된 8色의 姓 가운데 하나이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이 해에 大伴(오오토모) 佐伯(사에키) 등 50氏에게 사여되었는데 대부분이 神別出自 씨 족들이다. 8세기 말 이후에는 도래인에게도 사여되었다. 종래 일본학계에서는 斯摩를 일본 和歌 山(와카야마)縣 橋本(하시모토)市 隅田八幡(스다하치만)宮에 소장되어 있는 人物畵像鏡의 명문에

14 26 어떤 姓22)을 가진 사람인지 알 수 없다.> 이때 卓淳王 末錦旱岐23)가 斯摩宿 에게 甲子 日本書紀 27 年24) 7月中25)에 백제인 久 彌州流26) 莫古27) 세 사람이 우리나라에 와서 백제왕은 東 方에 일본이라는 貴國28)이 있다는 말을 듣고 臣들을 보내 그 貴國에 조공하도록 하였습니 보이는 斯麻 에 비정하기도 했으나, 同 鏡名의 冒頭에 나와 있는 癸未年은 443년 혹은 503년으 로 추정되어 神功紀의 366년( )과는 커다란 연대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에 斯摩를 출신 지명으로 이해하고 宿 를 姓名이 아닌 氏名일 것으로 추정한 연구(李基東, 1990,`百濟의 勃興 과 對倭國關係의 成立a, 古代韓日文化交流硏究 )가 있다. 日本書紀 에는 斯摩가 志摩 로도 표 기되고 있는데 이것을 三國志 倭人傳에 보이는 伊都國의 한 영역(현 큐슈 福岡市 서쪽 지역)으 로 비정하고 斯摩宿 를 이 伊都國 출신인물로 추정하였다. 북큐슈의 伊都國은 366년 가야 지방 에 斯摩宿 를 파견하여 백제와의 통교를 시도하였다고 한다. 21) 卓淳國 : 가야제국의 하나. 日本書紀 에는 卓淳國에 대한 전반적인 기록은 보이지 않고 대외관계 나 멸망 등에 대한 단편적인 기록만 보인다. 神功 46年 春3月條에 백제와 왜의 통교를 중개한 것 으로 기술되면서 처음 등장한다. 이어 신공 49년 춘3월조에는 왜의 소위 加羅 7國 평정 의 거점 이 되고 있다. 이후 탁순국은 290여 년간 일본서기 에 등장하지 않다가 繼體 欽明紀의 남부가 야 3국 멸망 기사에서 다시 보인다. 三國史記 나 三國遺事 에는 그 국명조차 확인할 수 없다. 卓淳國의 위치에 대해서는 漆原(津田左右吉, 1913,`任那疆域考a, 朝鮮史地理硏究 1), 昌原(今 西龍, 1919,`加羅疆域考a, 史林 4~34 ; 김정학, 1983,`加耶史의 연구a, 史學硏究 37 ; 김 태식, 1988,`6세기 전반 加耶南部諸國의 소멸 과정 고찰a, 韓國古代史硏究 1), 大邱(鮎貝房之 進, 1931, 앞의 글 ; 千寬宇, 1977,`復元加耶史a上, 文學과 知性 28 ; 주보돈, 1982,`加耶滅 亡問題에 대한 일고찰-新羅의 膨脹과 관련하여a, 慶北史學 4 ; 白承玉, 1995,` 卓淳 의 位置 와 性格- 日本書紀 관계기사 검토를 중심으로-a, 釜大史學 19 ; 盧重國, 2006,`4세기 加耶 諸國과 百濟의 관계a, 釜大史學 30) 등으로 비정되고 있다. 22) 姓(카바네) : 고대 일본에서 氏族의 직업과 등급을 표시한 칭호. 신공 46년 춘3월조에서는 姓이 氏(우지)의 의미로 사용되었다. 고대 일본의 氏는 정치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대왕 천황이 하 사하는 혈연 또는 擬制的 혈연집단으로서의 동족집단에 대한 칭호이다. 각각의 씨에는 氏上이 있 어서 씨집단의 재산 및 구성원을 관리하고 氏神에 대한 재산을 담당한다. 각 씨족이 어느 계통에 속하는가를 결정하는 근거는 각 씨족의 선조전승을 기록한 家記類이었다. 한편, 姓에는 臣(오 미) 君(키미) 連(무라지) 直(아타이) 造(미야츠코) 史(후히토) 首(오비토) 등이 있었는데 각각의 씨에 따라 다르게 사여되었다. 황실 계통의 皇別씨족에게는 臣 君, 天神 계통인 神別씨 족에게는 連, 도래계 씨족의 경우에는 吉士(키시) 史(후히토)의 姓이 사여되었다. 天武 13년 (684)에는 8色姓의 제정에 의해 眞人(마히토) 朝臣(아손) 宿 (스쿠네) 忌寸(이미키) 道師 (미치노시) 臣 連 稻置(이나기) 8종류의 姓으로 정리 통합하고자 하였으나 실제로 사여된 것 은 忌寸까지의 상위 4성에 그쳤고 그 이외에는 舊姓이 그대로 존속되었다. 이러한 고대일본의 氏 姓제도는 6세기 전반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23) 末錦旱岐 : 末錦은 탁순왕의 이름인지, 아니면 신라왕에 대한 호칭 중의 하나인 寐錦과 같은 어원 을 갖는 것인지 단정하기 어렵다. 旱岐는 日本書紀 신공 62년조의 加羅國王己本旱岐 라는 표 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加耶諸國 수장의 호칭이다. 末錦이 신라왕에 대한 호칭이라면 末錦 다. 그래서 길을 찾다가 이 땅에 이르렀습니다. 만약 臣들에게 길을 가르쳐 통할 수 있게 해 준다면 우리 왕은 반드시 군왕에게 깊이 감사할 것입니다. 라고 고하였다. 그 때 久 등에게 본디 동쪽에 貴國이 있다는 것을 들은 바 있지만, 아직 왕래한 적이 없기 때문에 그 길을 알지 못한다. 다만 바닷길이 멀고 파도가 거칠어서 큰 배를 타고서야 겨우 왕래 할 수 있을 것이다 비록 路津이 있다고 해도 어찌 능히 도달할 수 있겠는가? 라고 말하였 다. 이에 久 등이 그러면 지금 당장은 건너갈 수 없겠습니다. 다시 돌아가 선박을 준 비한 다음에 왕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고 말하였다. 또한 만약 貴國의 사신이 오면 반 旱岐는 호칭만 두개 나열한 것이 되어 부자연스럽지만, 신라의 경우에도 寐錦王의 용례(牟卽智寐 錦王`蔚珍鳳坪碑a)가 있으므로 일단 末錦은 寐錦과 같은 뜻을 가진 호칭으로 볼 수도 있다. 24) 甲子年 : 神功 46年이 丙寅年이므로 甲子年은 神功 44年이 된다. 日本書紀 기년으로는 244년 이지만, 백제 왕력 기사와 비교를 통해 2간지를 내리면 364년이 된다. 25) 7月中 : 中 은 중순의 의미가 아니라 시간을 나타내는 조사로서 7월에 라는 의미. 이는 蔚州川 前里書石이나`中原高句麗碑a `丹陽赤城碑a등 한국 금석문에도 자주 사용된 표현이다. 26) 久 彌州流 : 두 인물의 생몰연대 등 구체적인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久 는 日本書紀 神功 46年부터 52年까지 일관된 활동을 보여주는 인물로서 당시 백제와 왜의 통교과정에서 왜측의 千 熊長彦과 함께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그리고 久 의 久 는 日本書紀 에서 久爾辛 久禮波 久禮志 久遲布禮 久禮斯己母 久禮牟羅城 久麻那利 久嵯旱岐 久貴 등과 같이 모 두 한반도의 인명 지명을 표기하는 데 사용되었다. 彌州流의 彌도 日本書紀 에서 枕彌多禮 布 彌支 彌麻沙 印支彌 彌至己知奈末 등과 같이 그 용례가 모두 한반도계 인명 지명에서 주로 나타난다(木下禮仁, 1993, 日本書紀と古代朝鮮, 書房, 34~50쪽). 27) 莫古 : 莫古解.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에 의하면 莫古解는 근초고왕 24년(369)에 태자 近仇 首가 고구려와 싸울 당시 헌책한 인물로 나온다. 28) 貴國 : 日本을 가리킨다. 津田左右吉은 貴國을 日本書紀 편찬자가 윤색한 말로 보았으나(1921, `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a, 滿鮮地理歷史硏究 8), 이후`百濟記a에서 왜를 貴國이라고 적 은 것에 주목한 三品彰英은 귀국을 2인칭적 호칭으로 보고 이런 호칭이 사용된 것은`百濟記a가 왜를 의식하여 편찬된 사서이기 때문일 것이라고 추측하였다(1962, 앞의 책, 121쪽). 한편 이러 한 주장에 대해 貴國은 상대국을 부르는 존칭이 아니라 비천한 나라에 대한 존귀한 나라라는 의 미, 즉 蕃國에 대한 貴國의 의미가 있기 때문에 貴國은 蕃國관념이 나타나는 7세기 말 이후 일본 에서 쓰인 말이라는 주장도 제기되었다(栗原朋信, 1978,` 書紀 神功 應神紀の貴國の分析から みた日本と百濟の關係a, 古代東アジア史論集 下 ; 山尾幸久, 1978, 日本古代王權形成史論, 岩波書店, 189~191쪽).

15 28 日本書紀 29 드시 우리나라에 알려주십시오. 라고 당부하고 이내 돌아갔다. 고 하였다. 斯摩宿 은 다. 그러나 이제 사자에게 부탁하고 공물을 계속해서 바치겠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爾 人인 爾波移(니하야)29와 卓淳人 過古 두 명을 백제국에 파견하여 그 왕을 위로 波移는 그 일을 받들고 돌아가서 志摩宿 에 보고하였다. 그리고 志摩宿 은 卓淳으로부 곧바로 30) 하였다. 그 때 백제의 肖古王 은 매우 기뻐하며 후하게 대접하였다. 이에 五色綵絹 각 31) 터 돌아왔다. 32) 한 필과 角弓箭, 그리고 鐵鋌 40매를 爾波移에게 선물하였다. 게다가 다시 보물 창고 를 열어서 각종 진귀한 보물들을 보여주며,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진귀한 보물들이 많 다. 貴國에 조공하고자 하여도 길을 알지 못하여 뜻은 있는데 생각대로 되지 않고 있었 神功皇后 47년(247) 춘4월 봄 4월. 백제왕은 久 彌州流 莫古를 보내어 조공하도록 하였다. 그 때 신라국의 調 29) 爾波移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30) 肖古王 : 백제의 제13대왕 近肖古王(재위 346~375). 三國史記 卷23 百濟本紀에는 제5대 肖古 王(166~214)도 보이나 日本書紀 의 초고왕은 제13대왕인 근초고왕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에 는 肖古王 이외에 速古王으로, 古事記 應神段에는 照古王으로 나오기도 한다. 續日本紀 卷40 延曆 9年(790) 百濟王仁貞의 상표문에는 近肖古王으로 나타나고, 新撰姓氏錄 에는 肖古王 速 古王 速古大王 近速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31) 角弓箭 : 쇠뿔 혹은 양뿔 따위로 꾸민 활과 화살. 32) 鐵鋌 : 무기나 주술구의 원료로 사용한 철판 또는 철편.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弁辰條에 의 하면 3세기에서 4세기에 걸쳐 왜는 가야제국의 철을 수입하였다(國出鐵. 韓濊倭皆從取之)고 한 다. 이와 관련하여 4~5세기대에 이르면 한반도 남부에서 鐵鋌의 생산이 크게 늘어나면서 철 소 재 보급이 본격화한다. 鐵鋌의 용도에 대해서는 철 소재 이외에 화폐로서의 기능이 강조되기도 하지만(林孝澤, 1985,`副葬鐵鋌考a, 東義史學 2 ; 宋桂鉉, 1995,`洛東江 下流流域의 古代 鐵 生産a, 加耶諸國의 鐵, 인제대 가야문화연구소), 이 시기 新羅 加耶 지역 고분에서 널리 출토 되는 다량의 철정과 망치 집게 등의 철 鍛冶具는 바로 철정의 보급이 철소재 보급의 보편적인 형태로 정착되었음을 말해준다. 특히 백제 근초고왕이 鐵鋌 40매를 왜의 사신에게 주었다는 위의 기록은 4세기 즈음에는 백제지역에서도 철 자원개발과 철 생산이 독자적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을 뜻한다(李賢惠, 1995,`鐵器普及과 政治勢力의 성장a, 加耶諸國의 鐵, 인제대 가야문화연구 소). 충북 진천 石帳里 철 생산유적의 발굴 조사에 의해 늦어도 4세기 초에는 백제지역에서도 대 량의 철(小形鐵鋌)이 생산되었음이 밝혀졌다(國立淸州博物館, 1994, 鎭川石帳里 鐵生産遺跡發 掘調査 ). 5세기 이후가 되면 한반도에서 출토되는 철정의 크기와 무게가 일정한 범위 내에서 규 격화하는 경향을 보인다고 한다(安在晧, 1990,`鐵鋌에 대하여a, 東萊福泉洞古墳群 Ⅱ). 한편 일본열도 내에서 철정은 4세기 말에서 5세기 초에 걸쳐 큐슈에서 關東지방까지 넓은 지역에서 출 토되고 있다. 특히 近畿지방에 집중되고 있는데 大和(야마토) 河內(카우치)를 중심으로 5세기대 의 고분에서 길이 15~40cm의 鐵鋌이 다수 출토되었다는 보고가 있다(東潮, 1999, 古代東アジ アの鐵と倭, 溪水社, 207~212쪽). 일본열도에서 철의 생산과 제철이 시작되는 시기는 6세기 이 후의 일로서 그 이전까지는 한반도의 철정과 같은 수입 원료에 의존하고 있었다(大澤正己, 1984, `冶金學的見地からみた古代製鐵a, 古代を考える 36). 使도 久 와 함께 왔다. 이에 皇太后(神功皇后)와 태자 譽田別尊(호무타와케노미코토)33) 는 크게 기뻐하며, 先王(仲哀天皇)이 바라고 계셨던 나라 사람이 지금 來朝하였다. 천황 을 만나지 못한 것이 참으로 슬픈 일이다. 라고 말하자 군신은 모두 슬퍼서 눈물을 흘리 지 않는 자가 없었다. 그리고는 두 나라의 공물을 檢校34)하였다. 이에 신라의 공물은 진 귀한 것이 실로 많았지만 백제의 공물은 적고 값싼 것으로 좋지 않았다. 그래서 久 등 에게 묻기를, 백제의 공물이 신라에 미치지 못하는 것은 무슨 까닭이냐? 라고 물었다. 대답하기를 신들은 길을 잃어 沙比新羅35)에 이르렀는데, 신라인이 저희들을 붙잡아 囹 圄36)에 감금하였습니다. 석 달이 지나자 죽이려고 하였습니다. 그때 久 등은 하늘을 향 해 저주를 하였습니다. 신라인은 그 저주를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우리의 공물을 빼앗아 자기 나라의 공물로 대신하고 신라의 천한 물건으로 신의 나라의 공물과 바꾸었습니다. 그리고 신들에게 만약 이 사건을 누설하면 돌아오는 날에 너희들 을 죽이겠다. 고 하였습니다. 久 등은 두려워서 이를 따랐을 뿐입니다. 그래서 가까스 37) 로 天朝 에 올 수 있었습니다. 그 때 皇太后 譽田別尊는 신라의 사자를 꾸짖고, 이에 33) 譽田別尊 : 應神天皇. 日本書紀 神功 3年 正月條에는 譽田別皇子로 나온다. 여기서 別(와케)은 獲居 和氣라고도 하며, 5세기 중반 이전에 왜국의 大王 및 유력수장의 이름에 붙는 존칭으로 사 용되었다. 5세기 후반 이후는 君(키미) 臣(오미) 등의 姓으로 바뀌었다. 34) 檢校 : 공물의 목록과 실물의 수가 맞는지 점검하는 일. 35) 沙比新羅 : 沙比(사히)를 거점으로 하는 신라라는 의미. 沙比는 일본서기 신공 5년 춘3월조에 海 의 와 같은 음으로 良(현재 경남 梁山) 지역을 가리킨다(三品彰英, 1962, 앞의 책, 111~112 쪽). 良 즉 양산은 신라의 가야진출의 거점이었고, 고대 일본과 신라가 자주 접촉하던 지역이었다. 36) 囹圄 : 감옥. 禮記 月令 仲春의 令有司省囹圄 의 疏에 囹牢也. 圄止也, 出入止所以. 皆罪人舍 所也 라고 나온다. 37) 天朝 : 倭國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편찬단계에서 윤색된 표현이다.

16 30 日本書紀 31 天神에게 누구를 백제에 파견하여 장차 사건의 진위를 검사하도록 할 것이며, 또한 누구 那那加比 (치쿠마나나카히쿠)43)라고 하였는데 무릇 이 사람인가?> 이에 千熊長彦을 신 를 신라에 보내어 그 죄를 물으면 좋겠습니까? 라고 빌었다. 이에 천신이 武內宿 (타케 라에 파견하여 백제의 헌상물을 함부로 바꾸어간 것을 꾸짖었다. 38) 우치노스쿠네) 로 하여금 그 일을 의논하도록 하여라. 그리고 千熊長彦(치쿠마나가히 라고 말하였다. <*千熊長彦은 코)39)을 사자로 삼으면 마땅히 원하는 바대로 될 것이다. 명확히 그 성을 모르는 사람이다. 一云에 武藏國(무사시노쿠니)40)의 사람이며 지금은 額 42) 에는 職麻 田部槻本首(누카타베노츠키노모토노오비토)41) 등의 시조라고 한다.`百濟記a 38) 武內宿 : 建內宿 라고도 하며 전승상의 인물. 古事記 에서는 제8대 孝元天皇의 孫, 日本書 紀 에서는 孝元天皇의 증손으로 나온다. 孝元天皇은 缺史八代에 해당되는 천황으로 7세기 후반 에 일본의 역사를 늘이기 위해 조작하여 삽입된 8명의 천황 가운데 한 사람으로 실존하지 않았다 (直木孝次郞, 1964,`應神王朝論序說a, 日本古代の氏族と天皇 ). 이러한 孝元天皇의 자손이라고 하는 武內宿 는 古事記 에서는 제13대 成務부터 제16대 仁德까지, 日本書紀 에서는 제13대 景行부터 仁德까지 장기간에 걸쳐 大臣으로서 천황을 보좌하면서 한반도제국과 밀접한 관계를 가졌던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新撰姓氏錄 에 의하면 武內宿 의 후예씨족으로 葛城(카즈라 기) 平群(헤구리) 巨勢(코세) 蘇我(소가)氏 등이 나오는데 모두 皇別씨족이다. 이 가운데 蘇我 氏가 推古朝에 武內宿 전승을 작성하는데 깊이 관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塚口義信, 1980,`武內宿 傳說の形成a, 神功皇后傳說の硏究 ; 金恩淑, 1988-a,`倭漢氏의 歸化 傳承 의 基礎的 考察a, 歷史敎育 40). 39) 千熊長彦 : 日本書紀 에 의하면 神功 47年에서 51年에 걸쳐 백제와 왜국의 교섭활동에서 주요 인물로 활약하고 同 49年에는 백제의 支山 古沙山 맹서에 입회하는 왜측의 사자로 나온다. 일본서기 편찬자는 분주에서 千熊長彦의 姓을 알 수 없는 사람이라 하였으나, 一云 을 인용하 여 千熊長彦이 武藏國 사람으로 額田部 槻本首 등의 시조라고 전하고 있다. 그리고`百濟記a에서 말하는 職麻那那加比 라는 인물과 같은 인물로 추정되기도 하지만, 명확히 알 수 없는 인물이 다. 釋日本紀 권17 秘訓에서 職麻那那加比 의 職의 上古音이 치쿠(千) 이며 比 는 히코 (彦)로 읽고 있는 점을 감안하면`百濟記a의 職麻那那加比 와 일본서기 의 千熊長彦은 동일인 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 의 편찬자가`百濟記a의 職麻那那加比 라는 인명 을 일본식으로 고쳐 千熊長彦이라는 이름을 지은 것이라는 견해(池內宏, 1970, 日本上代史の一 硏究, 中央公論美術出版, 87~93쪽)와 일본서기 편찬자에게는`百濟記a와는 별로도 千熊長彦 이라는 인명 자료가 있었으며,`百濟記a에는 職麻那那加比, 일본에는 千熊長彦으로 각각 전해 지고 있던 것이 일본서기 편찬자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견해(三品彰英, 1962, 앞의 책, 112~114쪽)가 있다. 40) 武藏國 : 현재의 東京都와 埼玉(사이타마)縣 및 神奈川(가나카와)縣의 동부 지역의 옛 국명이다. 41) 額田部槻本首 : 額田部氏의 複姓의 하나. 額田部氏는 額田部(왕궁 운영 담당)를 관장한 伴造(토모 노미야츠코)씨족이다. 新撰姓氏錄 左京神別 下에 額田部湯坐連, 大和國神別에 額田部河田 運 이라는 額田部氏 관련 씨족이 보이는데 모두 天津彦根命의 자손을 칭하고 있다. 允恭天皇에게 이마에 田자형의 털이 나있는 말을 바친 것을 계기로 額田部氏를 사성받았다고 전한다. 槻本氏에 관해서는 日本書紀 天武 朱鳥 원년(686) 6월조에 槻本村主인 勝麻呂에게 連姓을 주었다는 기사 가 보인다. 續日本後紀 에는 近江國에 거주하던 槻本連良棟 등이 後漢 獻帝의 자손임을 칭하는 데 이를 근거로 渡來系 씨족으로 보기도 한다. 42) 百濟記 : 日本書紀 가 한반도 관계 기사를 기술하는데 기본사료로 이용했던 이른바 百濟三書 가 운데 하나. 日本書紀 에는`百濟記a(神功 應神 雄略紀에 5곳) 이외에`百濟新撰a(雄略 武 烈紀에 3곳) `百濟本記a(繼 欽明紀에 18곳)도 인용되어 있다. 그러나 이는 일본서기 의 분 주에 그 서명을 명기한 경우만 든 것이고,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은 기사에서 백제삼서가 인용 되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들 문헌으로부터 인용된 기사는 일본의 율령제적인 관념에 의하여 윤색되어 있기는 하지만(일본을 貴國, 조정을 天朝 라고 표현한 것이 단적인 예이다), 4세기에서 6세기 사이의 삼국 및 가야 관계 사실 등을 밝히는데 중요한 내용을 전하고 있다.`百 濟記a에 나오는 백제왕으로는 肖古王 阿花王 直支王 蓋鹵王이 있다. 지금까지 연구 성과를 정리하며 보면, 크게 百濟三書가 백제에서 편찬되어 일본에 전해진 사서라는 견해와 백제 사료를 기초로 일본에서 만들어진 사서라는 견해로 나뉘어져 있다. 좀더 구체적으로 백제에서 편찬되었 다는 설은 다시 일본 반입설(津田左右吉, 1921,`百濟に關する日本書紀の記載a, 滿鮮地理歷史硏 究報告 8 ; 池內宏, 1947, 앞의 글 ; 千寬宇, 1977, 앞의 글)과 백제 헌상설(今西龍, 1936,`百濟 史講話a, 百濟史硏究, 近澤書店 ; 三品彰英, 1962,`百濟記 百濟新撰 百濟本紀についてa, 朝鮮學報 24)로 나눌 수 있다. 일본에서 만들어졌다는 설에는 백제망명인 편찬설(坂本太郞, 1964,`繼體紀の史料批判a, 日本古代史の基礎的硏究 上, 東京大學出版會 ; 丁仲煥, 1973,` 日 本書紀 에 인용된`百濟三書a에 대하여a, 아세아학보 10 ; 山尾幸久, 1978,`百濟三書と日本書 紀a,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5)과 수사국 편찬설(高寬敏, 1993,` 日本書紀 所引`百濟本記aに 關する硏究a, 高句麗 渤海と古代日本, 雄山閣)이 있다. 현재 백제삼서에 대한 일반적인 시각 은 편찬시기나 편찬주체에 대해서는 여러 견해가 있지만, 그 사료적 가치를 인정하면서 일본서 기 편찬단계에서 윤색 또는 개변되었다고 보고 있다. 따라서 최근 연구경향은 일본서기 편찬 단계에서 백제삼서를 편집한 주체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백제기a는 木羅氏 관 련씨족(山尾幸久, 1978, 앞의 글 ; 李根雨, 1990,`百濟記の主役a, 古代日本と東アジア, 小學 館),`백제신찬a은 琨支관련 씨족 (山尾幸久, 1978, 앞의 글 ; 李根雨, 1994,` 日本書紀 에 인용 된 百濟三書에 관한 연구a, 한국정신문화연구원 박사학위논문), 백제본기는 百濟王氏(山尾幸久, 1983, 日本古代王權形成史論, 岩波書店, 199~200쪽)가 편찬한 것으로 보기도 한다. 43) 職麻那那加比 : 주 39) 참조.

17 32 神功皇后 49년(249) 춘3월44) 봄 3월. 荒田別(아라타와케) 鹿我別(카가와케)45)을 장군으로 임명했다. 그리하여 久 등과 함께 군사를 정돈하여 바다를 건너가 卓淳國에 이르러 신라를 공격하고자 하였다. 그때 누군가가 군사의 수가 적어서 신라를 깨뜨릴 수 없습니다. 그러니 다시 沙白蓋盧 44) 神功 49年 春3月 : 이 기사는 神功皇后의 한반도 제국에 대한 정토 기사가 실려 있는 만큼 任那 日本府 논의의 출발점이 되는 사료라고 할 수 있다. 근래에는 이 기사의 내용대로 신공황후가 한 반도 제국을 정토하고 그 일부를 백제에게 하사했다는 내용을 사실로 인정하는 연구자는 거의 없 다. 그러나 이 기사를 4세기 후반에 진행된 백제의 활동으로 볼 것인지에 대해서는 다양한 견해 가 제시되고 있다. 神功 49年 春3月條의 소위 가야 7국 평정 기사 에 대한 연구 동향을 살펴보 면 다음과 같다. 먼저 백제 近肖古王대의 백제를 정토의 주체로 보는 입장이다. 이 입장은 다시 크게 두 가지로 나눌 수 있다. 백제가 근초고왕대 가야제국을 군사적으로 지배했다는 견해(이병 도, 1970,`近肖古王拓境考a, 百濟硏究 1,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 千寬宇, 1977,`復元加耶 史a中, 文學과 知性 29 ; 金鉉球, 1991,` 神功紀 加羅七國 平定記事에 관한 一考察a, 高大 史學會 )와 백제가 남부가야에 대한 교역권을 장악했거나 혹은 공납관계를 형성했다고 보는 견해 (盧重國, 1988, 百濟政治史硏究, 一潮閣 ; 이현혜, 1988,`4세기 가야사회의 교역체계의 변 천a, 한국고대사연구 1 ; 이도학, 1995, 百濟古代國家硏究, 一志社 ; 김태식, 1996,`백제의 가야지역 관계사 시고a, 백제의 중앙과 지방, 충남대 백제연구소)이다. 둘째 근초고왕의 일시적 인 군사활동은 인정하지만 영역화한 것은 아니며, 실제로는 5세기 중엽 이후(山尾幸久, 1983, 앞 의 책 ; 이영식, 1995,`百濟의 加耶進出過程a, 韓國古代史論叢 7) 또는 6세기 이후의 사실이 소급 반영되었다는 입장(이근우, 2005,` 日本書紀 神功紀 加羅 7국 정벌 기사에 대한 기초적 검토a, 한국고대사연구 39)이 있다. 이상의 신공 49년조 춘3월조에 대한 다양한 논의는 이기동 `4세기 ( 한일관계사연구의 문제점a, 韓國上古史, 民音社)과 주보돈(1995,`서설-가야사의 새 로운 정립을 위하여a, 가야사연구, 경상북도) 등의 논고에 자세히 소개되어 있다. 45) 荒田別 鹿我別 : 두 사람은 應神 15年 秋8月條에 王仁을 데리러 백제로 갔다는 上毛野君의 선조 인 荒田別 巫別과 동일한 인물로서 新撰姓氏錄 河內國止美連條에 豊城入彦命之後也. 四世孫 荒田別命男. 田道公被遣百濟國. 娶止美邑吳女. 生男之君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또한 續日本 紀 卷50 延曆 9년(790) 秋7月 辛巳條의 百濟王仁貞의 상표문에는 上毛野氏遠祖荒田別 이 백제 에 파견되어 有識者를 구하였다는 기사가 나온다. 이들은 河內(카와치) 지방을 중심으로 백제와 교섭에 관여한 上毛野氏의 조상으로서 日本書紀 편찬자가 그들의 계보 또는 家記에서 인용한 인명으로 여겨진다( 史朗, 1983,`上毛野氏關係氏族の基礎的考察-朝鮮とかかわる上毛野氏關 係氏族-a(下), 東アジアの古代文化 37). 上毛野氏는 持統 5年(691)의`墓記a제출 18씨족 중에 포함되어 있다. 日本書紀 33 (사하쿠카후로)46)를 보내 군사를 증원해달라고 요청하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곧 木羅斤 資(모쿠라콘시)47) 沙沙奴 (사사나쿠)48) <*이 두 사람의 姓은 알 수 없다. 다만 本羅斤資 는 백제의 장군이다.>에게 명령하여 정병을 이끌고 沙白蓋盧와 함께 가도록 하였다. 모 두 卓淳에 집결하여 신라를 공격하여 깨뜨리고 比自본49) 南加羅50) 國51) 安羅52) 多 羅53) 卓淳 加羅54) 7國을 평정하였다. 그리고 군사를 옮겨 서쪽으로 돌아서 古奚津55)에 이르러 南蠻56) 彌多禮57)를 무찌르고 백제에게 주었다. 이에 백제왕 肖古와 왕자 貴須58) 46) 沙白蓋盧 : 자세히 알 수 없지만, 문맥상 卓淳人으로 추정된다. 47) 木羅斤資 : 일본서기 에 의하면 韓地를 경략한 인물로 나오는데 신공 49년조 출전미상의 분주에 의하면 百濟將軍이라고 한다. 또 神功 62年條에 인용된`百濟記a에는 壬午年에 신라를 치기 위해 보낸 沙至比 가 신라의 미인계에 빠져 도리어 加羅를 친 데 노한 천황이 가라에 파견하여 그 사 직을 구하게 한 인물로 기록되어 있다. 應神 25年條에는 木羅斤資의 아들로 木滿致가 나온다. 木 羅氏는 백제 대성 8족 가운데 하나인 木氏의 복성이다. 48) 沙沙奴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주 162) 참조). 49) 比自본 : 현 경남 昌寧.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火王郡. 本比自火郡[一云比斯伐]. 今昌寧 郡 이라고 나온다. 또한 三國史記 卷1 新羅本紀 婆娑尼師今 29年(108)條에 比只國이 나오는데 같은 지명일 것이다. 50) 南加羅 : 현 경남 金海.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金海小京. 古金官國 <*一云伽落國. 一云伽 耶> 라고 나온다.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에 보이는 狗邪韓國이 김해지역으로 비정된다. 日 本書紀 欽明紀에는 下加羅로 나온다. 51) 國 : 현 경북 慶山. 日本書紀 繼體 21年(537) 6월조에 신라에 의해 멸망한 가야제국 己呑國 이 보인다. 현재 경북 경산지역(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 千寬宇, 1977, 앞의 글) 또는 영산 밀양 지역(金泰植, 1993, 加耶聯盟史, 一潮閣, 188쪽)으로 비정되고 있다. 52) 安羅 : 현 경남 咸安.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咸安郡. 法興王以大兵滅阿尸良國. <*一云阿 那加耶> 라고 나오며,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弁辰條에 安邪國을 가리킨다.`광개토왕비a에 도 安羅人 기록이 보인다. 일본서기 계체 흠명기에 자주 보인다. 53) 多羅 : 현 경남 陝川.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江陽郡. 本大良州郡, 景德王改名. 今陝州 라 고 나온다. 54) 加羅 : 현 경북 高靈.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高靈郡. 本大伽倻國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55) 古奚津 : 현 전남 강진.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狗奚國. 56) 南蠻 : 백제를 중심으로 볼 때 남쪽의 오랑캐란 의미. 57) 彌多禮 : 日本書紀 繼 2年(508) 12月條에 보이는 南海의 耽羅 와 彌多禮 가 음이 비슷 하고, 南海 라는 방위도 백제에서 彌多禮를 볼 때의 南蠻 이라는 표현과 유사하다는 것을 근 거로 彌多禮를 제주도로 비정한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가 있다. 이에 彌多禮를 古

18 34 또한 군대를 이끌고 와서 만났다. 그 때 比利 中 布彌支 半古 四邑59)이 스스로 항복 日本書紀 35 하였다. 이에 백제왕 부자와 荒田別 鹿我別 등은 함께 意流村60)에 모였다.<*지금은 州 流須祇(츠르스키)라고 한다.> 서로 보며 기뻐하며, 예를 두텁게 하여 보냈다. 다만 千熊 奚津의 요충지인 강진으로 보거나(李丙燾, 1959, 韓國史-古代編-, 震檀學會, 360쪽), 三國 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新彌國으로 보고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한 견해(盧重國, 1988, 앞의 책, 119~120쪽)도 있다. 그런데 왜가 백제에게 토지를 주었다는 기사는 日本書紀 에 종종 언급되고 있다. 神功 49年 春3月條를 비롯해서 神功 50年 5月條의 多沙城 사여, 應神 8 年 春3月條의 枕彌多禮 峴南 支侵 谷那 등 東韓之地의 奪取, 雄略 21年 春3月條의 久麻那利 사여, 繼體 6年 12月條의 任那4縣 사여, 繼體 7~10年 己汶 帶沙 사여, 繼體 23年條 多沙津 사 여 등의 예가 그렇다. 日本書紀 의 영토 하사와 같은 표현은 율령제하의 일본의 국가관에 기초 한 역사 서술로 백제왕은 천황의 外臣으로 백제왕의 통치지역과 백성은 모두 천황에 의해 하사된 것으로 규정한 관념에 근거한 것이다 58) 貴須 : 백제 제14대왕 近仇首王(재위 375~383).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 近仇首王 즉위조에 一 云諱須 라고 나온다. 日本書紀 에는 貴首王으로 나오기도 하며, 續日本紀 延曆 10年(791) 夏四月 戊戌條에는 久素王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下에는 近貴須王으로 나온다. 59) 四邑 : 比利 中 布彌支 半古 등에 대해서는 일찍부터 여러 곳으로 비정되어 왔는데 크게 현 재 전라남도 일원으로 보는 견해(李丙燾, 1979,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512~514쪽)와 충남 및 전북 일원으로 보는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 末松保和, 1949, 任那興亡史, 吉川弘 文館)로 나눌 수 있다. 한편 이 4邑을 比利 中 布彌 支半 古四의 5읍으로 끊어 읽어 이를 각각 保安 金堤 井邑 扶安 古阜로 비정하는 견해(千寬宇, 1979,`馬韓諸國의 位置試論a, 東洋學 9 ; 全榮來, 1985,`百濟南方境域의 變遷a, 千寬宇先生還曆記念 韓國史學論叢, 正音 文化史)도 있다. 각 지명의 구체적인 위치에 대해서 정리해 보면 다음과 같다. 比利 : 三國史記 卷37 地理志 4의 完山<*一云比斯伐, 一云比自火> 라는 기사를 근거로 완산 (현 전북 전주)으로 보거나 三國史記 卷36 地理志 3에 發羅郡 (현 전남 나주)으로 비정하기도 한다.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에 보이는 卑離國을 비롯하여 卑離라는 명칭이 붙은 여 러 마한소국과도 관계가 있는 것으로 여겨진다. 또한`광개토왕비a에는 永樂 6年(396)條와 守墓 人條에 고구려군이 공파한 58城의 하나이며 광개토왕릉의 수묘를 담당케 하였던 新來韓濊의 출 신지로 比利城이 보인다. 中 : 三國史記 卷36 地理志 3에 金堤郡 本百濟碧骨縣 이라는 기사를 참고하면 현 전북 김제 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 의 骨 城縣 碧骨郡 碧骨縣 등은 모두 中과 관련된 지명으로 추정된다. 후문에서 백제와 왜가 맹약하였다는 支山이 中과 관련이 있는 곳으로 이해되고 있 다. 이 밖에 일본서기 天智 元年(662) 12월조에는 避城이란 지명이 보인다. 布彌支 : 현 전남 나주 일대. 그런데 三國史記 卷37 地理志 4에는 淸音縣, 本百濟伐音支縣, 今 新豊縣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이 伐音支가 布彌支를 가리키는 것으로 현 공주시 維鳩(新豊) 지역 으로 비정되기도 한다(末松保和, 1949, 앞의 글).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의 不彌國이 이에 해당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半古 : 三國史記 卷36 地理志 3의 潘南郡 本百濟 半奈夫里縣 이라는 기사를 근거로 현 전남 長彦과 백제왕은 백제국에 가서 支山61)에 올라 맹약하였다. 다시 古沙山62)에 올라서 함 께 磐石 위에 앉았다. 그때 백제왕이 맹세하기를 만일 풀을 깔아서 자리를 만들면 불에 탈까 두렵고, 또한 나무를 가지고 자리를 만들면 물에 떠내려 갈 것 같아 두렵다. 따라서 磐石에 앉아서 맹약하는 것은 영원히 썩지 않을 것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로써 지금부 터는 千秋萬歲에 끊임없이 항상 西蕃이라 칭하며 해마다 조공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 다.63) 그리고는 千熊長彦를 데리고 백제의 도읍에 이르러 더욱 두터이 예우하고 久 등 을 딸려서 보냈다. 나주군 반남면으로 비정되고 있다. 여기서 半奈와 潘南은 서로 音이 통한다. 한편 千寬宇는 布彌 支와 半古를 布彌와 支半으로 끊어 읽고 支半은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에 나오는 支半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 전북의 부안 태인 방면으로 비정하였다(1979). 이상의 지명 비정을 기초로 신공 49년 춘3월조의 4읍 항복 기사를 백제의 근초고왕이 전라도 남 해안까지 영토를 확장한 것으로 이해하는 견해(이병도, 1985, 앞의 글 ; 전영래, 1985, 앞의 글 ; 이기동, 1987,`馬韓領域에서의 百濟의 成長a, 馬韓百濟文化 10 ; 노중국, 1988, 앞의 글 ; 김 현구, 1993, 任那日本府硏究, 일조각, 39~40쪽)와 신공 49년 춘3월조의 기사는 근초고왕대의 사실을 바탕으로 한 것이 아니라 5세기 중엽 즉 웅진시대 이후의 사실을 각색한 것에 불과하다는 견해(김기섭, 1995,`近肖古王代 南海岸進出說에 대한 재검토a, 백제문화 24 ; 이영식, 1995, 앞의 글)가 제기되었다. 60) 意流村 : 백제의 초기 왕성인 尉禮城. 日本書紀 雄略 20年(476)조에 분주로 인용된`百濟記a에 도 尉禮로 나온다. 意流村을 전라북도 茂朱 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도 있다. 본조의 분주에 意流村을 달리 州流須祇이라 하였는데 이 州流須祇의 古音이 日本書紀 天智紀의 疏留城 州桑城이나 三國史記 의 周留城 豆率城과 비슷한 점을 그 근거로 들고 있다. 61) 支山 : 현 전북 金堤(주 59) 참조). 62) 古沙山 : 현 전북 古阜. 三國史記 卷23 백제본기 溫祚王 36年條에 築古沙夫里 라는 기사와 同 卷36 地理志 3에 古阜郡, 本百濟古 夫里郡 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63) 그때 말하였다 : 신공 49년 춘3월조의 磐石 위에서의 맹약기사는 일반적으로 7세기 후반 나 당군에 의해 백제가 패망한 뒤 백제에서 행해진 就利山 會盟을 모방하여 지어낸 이야기로 간주되 고 있다(池內宏, 1970, 앞의 글, 59~61쪽 ; 연민수, 1996, 앞의 글). 한편 磐石 위에서 이루어지 는 맹약 의식을 백제의 전통 의식으로 이해하여 신공 49년조의 맹약 기사는 원래 근초고왕 부자 가 맹주로서 맹약한 기사였는데 야마토 정권을 맹주로 한 기사로 바뀌었다는 설(徐甫京, 2002, ` 日本書紀 神功 49年條에 대한 검토a, 百濟硏究 35 및 2004,` 日本書紀 한반도 관계 기사 검토a, 고려대 박사학위논문)도 있다.

19 36 日本書紀 神功皇后 50년(250) 이 은혜를 베풀도록 하라. 고 하였다. 그 해에 千熊長彦을 久 하5월 여름 5월. 千熊長彦 久 등이 백제로부터 도착했다. 이에 황태후는 기쁘게 맞이하며 久 에게 바다 서쪽에 여러 韓을 이미 너희 나라에게 주었다. 지금은 무슨 일로 빈번히 또 오느냐? 라고 물었다. 久 37 64) 등이 天朝의 큰 은택은 멀리 弊邑 까지 미치니 우리 왕 (근초고왕)이 매우 기뻐하여 춤을 추면서 마음에만 담아둘 수가 없어서 돌아가는 사신 편 에 다시 정성을 다하도록 하였습니다. 비록 萬世에 이를지라도 어느 해인들 조공하지 않 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황태후는 勅을 내려 너의 말이 훌륭하도다.65) 이것은 짐도 생 각하고 있던 바이다. 라고 말하였다. 多沙城66)을 더해주고 왕래하는 길의 驛으로 삼도록 하였다. 神功皇后 51년(251) 춘3월 봄 3월. 백제왕은 다시 久 를 보내어 조공하였다. 이에 황태후는 太子67)와 武內宿 에 게 짐이 친히 교류하는 백제국은 하늘이 내려주신 것이지 인간에 의한 것이 아니다. 玩 好68)珍物은 우리나라에 일찍이 없었던 것인데 해를 거르지 않고 항상 와서 공물로 바치고 있다. 짐은 그 정성을 생각할 때마다 항상 기쁘다. 짐이 살아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두터 64) 弊邑 : 자국을 낮춰 일컫는 말. 65) 너의 말이 훌륭하도다 : 원문은 善哉汝言. 法華經 등에 자주 보이는 표현이다.`譬喩品a에 善 哉. 善哉. 如汝所言 라는 표현이 그 한 예이다. 66) 多沙城 : 현 경남과 전남의 경계인 섬진강 하구 부근(河東 지방). 三國史記 卷34 地理志 1에 河東郡. 本韓多沙郡 岳陽縣. 本小多沙縣 라고 나온다. 日本書紀 繼 紀에 보이는 帶沙 江 多沙津은 모두 같은 지역이다. 신공 50년 하5월조는 왜가 백제에 多沙城을 준 것으로 서술하 고 있는데, 계체 23년(529) 3월조에도 백제가 왜에 加羅의 多沙津을 요구하자 왜가 이를 허락하 였다고 하는 내용과 비슷하다. 백제가 多沙津을 확보한 것은 6세기경의 사실로 보는 것에는 이론 이 없다. 따라서 왜가 백제에게 多沙城을 하사하였다는 신공 50년 하5월조의 기사는 6세기 백제 가 多沙津을 확보한 역사적 사실이 4세기 중엽의 사실처럼 윤색 및 소급되어 삽입되어진 것으로 볼 수 있다(김현구, 1993, 앞의 글, 43~44쪽). 67) 太子 : 譽田別尊(주 33) 참조). 68) 玩好 : 진귀한 노리갯감(玩具). 등에게 딸려서 백제국에 보냈다. 그리하여 큰 은혜를 내리며 짐은 신의 가르침에 따라 처음으로 길을 열고 바다의 서쪽을 평정하여 백제국에게 하사 하였다. 이제 다시 두텁게 우호를 맺고 영원히 총애하여 상을 내린다. 고 말하였다. 이 때 백제왕 父子69)는 함께 이마를 땅에 대고 貴國의 큰 은혜는 天地보다 무겁습니다. 언 제 어디서건 어찌 잊을 수 있으리오. 聖王이 위에 있어서 해와 달처럼 밝고, 지금 臣이 그 아래에서 산악과 같이 견고합니다. 영원히 西蕃으로서 결코 두 마음을 품는 일은 없을 것 입니다. 라고 아뢰었다. 神功皇后 52년(252) 추9월 丁卯朔 丙子 가을 9월 丁卯朔 丙子(10일). 久 등이 千熊長彦을 따라왔다. 이 때에 七支刀70) 한 자 루와 七子鏡71) 한 면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의 귀중한 보물을 바쳤다. 그리고 臣國의 서 69) 백제왕 父子 : 近肖古王과 近仇首王. 70) 七支刀 : 일본 奈良(나라)縣 天理(텐리)市에 있는 石上(이소노카미)神宮에 봉안되어 있는 七支刀 와 같은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지만 확실한 증거는 없다. 길이는 74.9 로서 鍛鐵로 만 든 양날 칼이다. 칼의 몸 좌우로 각각 가지 칼이 3개씩 뻗어 모두 7개의 칼날을 이루고 있기 때문 에 七支刀라는 이름이 붙었다. 칼몸의 앞과 뒤에는 61자(앞 34, 뒤 27)가 金象嵌되어 있고 그 외 곽을 가는 금선으로 둘렀다. 앞면은 紀年, 日付干支, 刀名, 사여의 대상, 제작자의 순이고, 뒷면은 칠지도의 제작 연유가 새겨져 있다. 이 칠지도의 명문은 石上神宮의 大宮司로 있었던 菅政友가 1870년대에 처음으로 확인한 이래 지금까지 그 명문해석을 둘러싸고 여러 가지 의견이 나오고 있다. 칠지도 연구의 커다란 제약의 하나는 현재 명확히 판독하기 어려운 자가 많다는 것이다. 칠 지도의 제작 연대를 해명하는 데에 중요한 열쇠를 쥐고 있는 첫머리 연호 문제도 미해결 상태이 고, 백제와 왜국의 정치사적 관계를 구명할 수 있는 개개의 문구나 문서의 형식을 둘러싸고 아직 도 논의가 계속되고 있다. 특히 칼의 제작연대를 비롯해 백제왕이 왜왕에게 헌상한 것인가 하사 한 것인가를 둘러싸고 많은 논쟁이 제기되어 왔다. 譯註 韓國古代金石文 1 에 실린 명문은 다음 과 같다. (앞)-泰和四年五月十六日丙午正陽造百練鐵七支刀生 百兵宜供供侯王 作 (뒤)-先世以來未有此刀百濟王世子奇生聖音故爲倭王旨造傳示後世. 71) 七子鏡 : 둘레에 7개의 小鏡을 붙인 거울. 芸文類聚 天部에 梁나라 簡文帝가 지은 望月의 詩에 서 形同七子鏡. 影類九秋霜 라는 표현에 의하면, 七子鏡은 滿月처럼 둥근 거울이다. 무령왕릉과 일본에서 출토된 圓形鏡 등인 七獸鏡이 七子鏡이다( 口隆康, 1972,`武寧王陵出土鏡と七子鏡a, 史林 54~2).

20 38 日本書紀 39 쪽에 강이 있는데, 그 水源은 谷那鐵山72)입니다. 너무 멀어서 7일 동안 가도 이를 수가 없 다. <* `百濟記a 에서 말하기를, 壬午年77)에 신라가 貴國을 받들지 않으므로 귀국이 沙至 습니다. 그 물을 마시다가 문득 그 산의 철을 얻으니 영원토록 聖朝에 바치고자 합니다. 比 (사치히코)78)를 보내어 이를 치도록 하였다. 신라인은 미녀 두 명을 단장시켜서 津에 고 아뢰었다. 이에 손자인 枕流王73)에게 지금 내가 교류하고 있는 바다 동쪽의 貴國은 서 沙至比 를 맞이하여 유혹하였다. 沙至比 는 그 미녀를 받고는 도리어 加羅國79)을 쳤 하늘이 이끄는 나라이다. 그러므로 天恩을 베풀어 바다 서쪽을 나누어 나에게 주니, 나라 다. 가라국의 왕 己本旱岐80)와 아들 百久 阿首至 國沙利 伊羅麻酒 爾汶至81) 등은 의 기틀이 영원히 견고해졌다. 너도 마땅히 우호를 잘 닦아 土物을 모아 공물을 끊임없이 그 인민을 데리고 백제로 도망해 왔다. 백제는 이들을 두터이 대우하였다. 가라국 왕의 바친다면 죽어도 무슨 한이 남겠느냐? 라고 일러두었다. 이 이후로 매년 끊임없이 조공 누이인 旣殿至가 大倭82)에 天皇83)은 沙至比 을 보내어 신라를 치도록 하셨습니다. 그런 하였다. 데 沙至比 를 신라의 미녀를 받아들이고 신라를 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우리나라를 멸 神功皇后 55년(255) 백제 肖古王이 薨하였다.74) 神功皇后 56년(256) 망시키어 형제 인민 모두가 떠도는 신세가 되니 걱정스러운 마음에 견딜 수가 없어 이렇 게 와서 아룁니다. 라고 하였다. 천황은 매우 노하여 木羅斤資를 보내 병사를 이끌고 가 서 加羅에 모여 그 나라의 社稷을 복구시키도록 하였다. 고 하였다. 一云84)에 沙至比 는 천황이 노하였음을 알고 감히 공공연히 귀국할 수 없어 몰래 잠입하였다. 그 누이동생85)은 皇宮에서 일하고 있었다. 比 는 은밀히 사람을 보내어 천황의 노여움이 풀렸는지 어떤 백제 왕자 貴須가 왕위에 올랐다.75) 神功皇后 62년(262) 신라가 조공하지 않았다. 그 해에 襲津彦(소츠비코)76)을 파견하여 신라를 치도록 하였 72) 谷那鐵山 : 谷那는 현 黃海道 谷山郡(臨津江이나 禮成江의 상류지역)으로 비정하는 견해(鮎貝房 之進, 1931, 앞의 글)와 전남 谷城으로 보는 견해(김현구, 1993, 앞의 글)가 있다. 73) 枕流王 : 백제 제15대왕 枕流王(재위 384~385). 近仇首王의 맏아들로, 어머니는 阿爾夫人이다. 384년 7월에 사신을 東晉에 보내 조공하였다. 그해 백제에 공식적으로 불교가 수용되었다. 74) 肖古王의 사망 : 肖古王은 近肖古王이며 肖古王이 사망한 신공 55년은 2간지 내리면 375년이 된 다.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의 近肖古王 30年 冬11月條의 薨年기사와 그 시기가 일치한다. 75) 貴須의 즉위 : 貴須는 近仇首王이다(주 58). 三國史記 卷24 백제본기 近仇首王 즉위년(375)조 에는 近仇首王<*諱須云>. 近肖古王子 近肖古在位三十年薨, 位卽 이라고 나오듯이 근구수 왕의 즉위년은 日本書紀 와 1년의 차이가 난다. 이것은 일본서기 의 경우는 越年 元法, 삼국 사기 는 當年 元法에 의해 즉위년을 기록한 데서 비롯된 차이다. 76) 襲津彦 : 氏는 葛城(카츠라기)이다. 葛城襲津彦은 武內宿 (타케우치노스쿠네)의 자손으로 葛城 氏의 祖이다. 여기서 彦(히코 : 日子라고도 한다)은 別(와케)과 함께 단순한 존칭이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襲津彦은 신공 5년부터 웅략 7년에 이르는 긴 기간동안 활약한 인물로 나오며 고사 기 에 의하면 그의 계보가 缺史八代에 속하는 孝元天皇에서 시작되기 때문에 실존한 인물로 보기 에는 의문점이 많다. 그런데 신공 62년조에 인용된`百濟記a에는 襲津彦이 沙至比 로 나온다. 이에 대해서 일본서기 의 편찬자가`百濟記a의 沙至比 라는 인명을 일본식으로 고쳐 襲津彦이 라는 문자를 끌어 온 것이라는 견해(池內宏, 1970, 앞의 글)와 일본서기 편찬자에게는`百濟記a 와는 별로도 襲津彦이라는 인명 자료가 있었으며,`百濟記a에는 沙至比, 일본에는 襲津彦으로 각각 전해지고 있던 것이 편자에 의해 서로 연결되었다는 견해(三品彰英, 1962, 앞의 글)가 있다. 葛城氏는 4세기에서 5세기 전반에 大和國 葛城지방(현 奈良縣 御所市 서남부)을 중심으로 강한 군사력을 배경으로 대두한 씨족으로 大王家의 외척씨족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5세기 말 웅략즉위 전기에 葛城円이 安康천황을 살해한 眉輪王(마요와노미코)과 함께 제거되는 것을 계기로 葛城氏 는 급격히 쇠퇴하게 된다. 葛城氏의 몰락 후에는 蘇我氏가 그 기반을 계승한다. 77) 壬午年 : 382년. 신공 62년의 수정기년. 78) 沙至比 : 주 76) 참조. 79) 加羅國 : 현 경북 고령. 大加耶라고도 한다. 80) 己本旱岐 : 己本은 왕의 이름이다. 旱岐는 加羅諸國의 왕호이다. 81) 百久 爾汶至 : 자세히 알 수 없는 인물들이다. 82) 大倭 :`百濟記a의 大倭는 왜국을 가리키며, 보통 일본서기 본문에 보이는 大倭는 大和國(현 奈 良縣 지역)을 가리킨다.`百濟新撰a에도 大倭라는 표현이 보이는데`百濟記a와 함께`百濟新撰a 에 원래부터 大倭라고 표기되어 있었는지에 대해서는 의문이다. 83) 天皇 :`百濟記a가 편찬되는 과정이나 日本書紀 에 인용되는 과정에서 윤색된 표현. 주 6) 참조. 84) 一云 :`百濟記a의 내용으로 볼 것인지, 아니면 다른 인용문구인지는 분명하지 않다. 85) 누이동생(妹) : 일본서기 에 의하면 襲津彦의 딸인 磐之媛(이와노히메)은 仁德天皇의 황후가 되 어 履中 反正 允恭 세 천황을 낳았다. 여기서 妹 라고 하였기 때문에 磐之媛은 아니다.

21 40 지를 알아보게 하였다. 누이동생은 꿈을 핑계 삼아 어젯밤86) 꿈에서 沙至比 를 보았습 니다. 라고 아뢰자 천황은 몹시 분노하여 어떻게 감히 比 가 돌아올 수 있는가? 하였 다. 누이동생이 이 말을 전하자 比 는 용서받지 못할 것을 알고 石窟에 들어가 죽었다. 日本書紀 41 是歲92) 이 해에 백제 辰斯王이 즉위하여 貴國 천황에게 無禮하였다.93) 그래서 紀角宿 (키노츠 노노스쿠네)94) 羽田矢代宿 (하타노야시로노스쿠네)95) 石川宿 (이시카와노스쿠네)96) 고 한다.> 神功皇后 64년(264) 백제국 貴須王이 薨하였다.87) 왕자 枕流王이 왕위에 올랐다. 神功皇后 65년(265) 백제 枕流王이 薨하였다.88) 왕자 阿花89)는 나이가 어렸다. 숙부 辰斯가 찬탈하여 왕이 되었다.90) 권10 譽田天皇 應神天皇 應神天皇91) 3년(272) 86) 어젯밤(今夜) : 하루가 밤부터 시작된다는 의미에서 今夜라는 표현을 쓴 듯하다. 여기서는 오늘날 의 昨夜라는 의미로 번역하였다. 87) 백제국 貴須王이 薨하였다 : 神功 64年은 日本書紀 紀年으로는 264년이다. 백제왕력을 참고로 2간지 내리면 384년이 된다. 近仇首王의 사망 시기는 三國史記 卷24 백제본기와 일치한다(近 仇首王 10년 하4월조). 88) 백제 枕流王이 薨하였다 : 神功 65년의 수정기년은 385년이다. 枕流王의 사망 시기는 三國史 記 卷24 百濟本紀와 일치한다(침류왕 2년 동12월조). 89) 阿花 : 침류왕의 아들로 백제의 제17대 왕인 阿莘王(재위 392~405). 三國史記 와 三國遺事 에 서는 阿莘王의 異稱으로 阿芳王이라고 하는데 莘은 원래 芳 또는 花이었던 것이 와전되었을 가능 성이 크다. 90) 숙부 되었다 : 숙부 辰斯는 백제 제16대 왕인 辰斯王(재위 385~392)을 가리킨다. 辰斯王의 즉 위 시기는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와 일치한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서는 태자가 어렸기 때문에 진사가 즉위하였다고 기록하였으나, 일본서기 에서는 진사가 왕위를 찬탈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91) 應神天皇 : 古事記 日本書紀 의 계보상 15대 천황. 이름은 譽田別尊(호무타와케노미코토)라 고 하고 아버지는 仲哀天皇이다. 어머니인 神功皇后가 신라원정 후 돌아오는 길에 筑紫에서 낳았 다. 宋書 卷97 列傳 倭國條의 倭王讚으로 비정되기도 한다(前田直典, 1948,`應神天皇朝という 時代a, オリエンタカ 創刊號). 日本書紀 應神紀에는 王仁을 비롯한 많은 한반도인의 도래기사 와 기술의 도입, 경지개간 등의 기록이 자주 보인다. 한편 응신 이후에 궁(輕島明宮)이나 왕릉(羽 曳市의 譽田御廟山으로 추정)이 大和(야마토)에서 河內(카와치)로 옮겨가는 특징이 나타난다. 이 에 大和의 三輪(미와)지방에 거점을 두고 있었던 이전의 崇神系인 三輪王朝 와는 다른 河內王 朝 라는 새로운 왕조를 상정하고 應神이 그 시조가 되었다는 견해(直木孝次郞, 1964,`應神王朝 論序說a, 日本古代の氏族と天皇, 書房)가 제기되어 많은 주목을 받고 있다. 92) 是歲 : 日本書紀 紀年은 272년이다. 2간지 내리면 392년이 된다.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에 의하면 이 해는 辰斯王이 죽고 阿莘王이 즉위한 해이다. 93) 이 해에 無禮하였다 : 백제왕이 천황에게 無禮를 범하였다는 식의 표현은 應神 3년 시세조 이외에도 일본서기 의 여러 곳에 보인다. 94) 紀角宿 : 紀角宿 (木角宿 ) 이하 네 명 모두 武內宿 (建內宿 )의 자식이다. 古事記 孝元段 에 此建內宿 之子. 幷九[男七女二]. 波多八代宿 者[波多臣 長谷部之君之朝也]. 次蘇 賀石河宿 者[蘇我臣 岸田臣等之朝也]. 次平群都久宿 者[平群臣 馬御 連等祖也]. 次木 角宿 者[木臣 坂本臣之朝]. 라고 나온다. 이 紀角宿 는 紀氏의 조상으로 전승상의 인물이 다(岸俊男, 1966,`紀氏に關する一試考a, 日本古代政治史硏究, 書房). 紀氏의 姓은 臣으로 천 무천황 13년(684)에 朝臣을 받았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에는 紀朝臣石川朝臣同祖. 建內宿 男紀角宿 之後也 라고 되어 있다. 본거지는 和歌山(와카야마)縣 紀ノ川(키노카와)일대이고, 야 마토의 平郡(헤구리) 지방까지 그 세력이 미쳤다. 紀氏는 紀ノ川 북부일대에서 나는 질 좋은 목재 덕택으로 일찍부터 수군을 보유한 군사씨족으로 성장할 수 있었고, 본거지를 중심으로 한반도계 유적 유물의 분포는 紀氏와 한반도 제세력의 교류가 활발했음을 말해준다(森浩一, 1989,`紀伊 の國と韓の國a, 韓國の古代遺跡 ; 金井塚良一, 2002,`海を渡った馬一紀伊の古代豪族, 紀氏と 加耶一a, 三國時代硏究 2, 學硏文化社). 일본서기 에는 5~6세기 紀小弓宿 紀生磐宿 등 기씨의 주요 인물들의 활동이 자주 보이는데 모두 대외교류(특히 가야)에서 활약하고 있다. 95) 羽田矢代宿 : 古事記 孝元段에 나오는 波多八代宿 를 말하며 波多臣 등의 조상이다. 古事 記 에서 波多八代宿 는 建內宿 (武內宿 )의 장자이고 波多臣 林臣 波美臣 등의 조상이라고 나온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에는 八多朝臣. 石川朝臣同祖. 武內宿 命之後也 라는 기록을 통 해서 蘇我氏와 관련이 있음을 알 수 있다(주 38) 참조). 96) 石川宿 : 古事記 孝元段의 蘇賀石河宿 를 말하며 蘇我臣 등의 조상이다. 古事記 에서 蘇 我石河宿 는 建內宿 의 자식이고 蘇我臣 川 臣 田中臣 등의 조상으로 나온다. 蘇我(소가) 氏는 6세기에서 7세기 중엽에 걸쳐 왜왕권 최대의 정치 세력을 형성한 씨족이다. 그 계보 전승 은 蘇賀石河宿 를 시조로 滿智 韓子 高麗로 계승되었다. 稻目(이나메)대에 이르러 稻目이

22 42 日本書紀 43 木 宿 (츠쿠노스쿠네)97)를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꾸짖었다. 이에 백제국은 辰斯王을 죽 명하여 여러 韓人101)을 거느리고 연못을 만들도록 하였다. 그리하여 그 연못을 韓人池102) 여 사죄하였다.98) 紀角宿 라고 불렀다.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99) 應神天皇 7년(276) 應神天皇 8년(277) 추9월 춘3월 가을 9월. 高麗人 百濟人 任那人 新羅人이 함께 來朝하였다.100) 이 때 武內宿 에게 봄 3월. 百濟人이 來朝하였다. <* `百濟記a 에서 말하기를, 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無禮하였다.103) 그래서 우리의 枕彌多禮 및 峴南 支侵 谷那 의 東韓의 땅104)을 빼앗았 大臣이 되고 자신의 딸을 欽明의 왕비로 삼은 것을 계기로 정치의 중심세력을 형성할 수 있었 다. 이후 稻目의 아들 馬子(우마코)는 物部守屋과의 싸움에서 승리하여 더욱 그 권력기반을 다 져 나갔다. 馬子의 아들인 蝦夷(에미시)와 손자인 入鹿(이루카)을 거치면서 소아씨의 권력은 더 욱 절대화되어갔지만, 中大兄皇子(天智天皇)와 中臣(藤原)鎌足 등에 의해 蝦夷 入鹿 부자가 살 해됨으로써 소아씨는 몰락하게 된다. 소아씨의 본거지는 大和(야마토)와 河內(카와치)지역이었 을 것으로 여겨지며, 그 출자가 백제계 이주민이었을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주 38)과 주 138) 참조). 97) 木 宿 : 古事記 에 平群都久宿 로 나오며 平群(헤구리)臣 등의 조상이다. 日本書紀 仁德 元年 春正月條에 의하면 木 宿 가 태어날 때 집에 (굴뚝새)가 날아들었다고 한다. 같은 날 仁德天皇도 태어났는데 황궁에 木 (부엉이)가 날아들었다. 이것을 길조로 여긴 應神天皇과 武內 宿 가 새의 이름을 따서 자식의 이름을 짓되, 날아든 새의 이름을 교환하여 각자 자식의 이름을 지었다고 한다. 이렇게 해서 인덕천황은 大 皇子(오오사자키노미코)라 하였으며 武內宿 의 자식은 木 宿 라고 부르게 되었다는 전승이 있다. 木 宿 의 실존 여부는 확인할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전승이 남게 되는 시기는 일반적으로 武內宿 계보에 平群氏가 포함되는 시기 즉 推 古朝로 보고 있다(塚口義信, 1980, 앞의 글). 98) 百濟國은 사죄하였다 :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 辰斯 8년(392) 10월 11월조의 王狗原 田旬經返. 十一月. 狗原行宮薨 라는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진사왕의 죽음이 정상적이 아 님을 알 수 있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支王 원년(405)조에 國人이 왕위에 있던 禮를 죽인 예 에서도 왕위 계승의 정통성에 문제가 있는 경우에 國人의 반발이 강했음을 알 수 있다. 無禮와 관 련하여 百濟國 운운하는 부분은 정상적이지 않은 진사왕의 죽음을 바탕으로 일본서기 편찬자가 만들어낸 표현일 것이다. 99) 紀角宿 돌아왔다 : 阿花 즉 阿莘王의 즉위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卷25 백제본기 아신왕 원년(392)조에 阿莘王<*或云阿芳>. 枕流王元子 王薨詩年少. 故叔父辰斯繼位. 八年薨. 位 卽 라고 기록되어 있듯이 三國史記 에는 왜국이 阿莘王의 즉위에 간여한 사실을 전하고 있지 않 다. 이 또한 진사왕의 사망기사와 함께 일본서기 편찬자가 조작한 것으로 여겨진다. 100) 고려인 내조하였다 : 古事記 應神段에는 亦新羅人參渡來 라고 하여 신라인만 건너온 것 으로 기록하고 있다. 고 한다> 다. 이에 왕자 直支105)를 天朝에 보내 先王의 우호를 닦도록 하였다. 101) 韓人 : 日本書紀 에서는 넓은 의미로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에서 도래한 사람들을 말하고, 좁은 의미로는 가야에서 도래한 사람들을 가리킨다. 이는 본래 韓이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이후 한반도 남부에 있던 부족집단을 총칭하여 불렀던 것에서 유래한다. 고사기 에서도 막연히 한반도를 가리킬 때 韓 이란 표현을 사용하고 있다. 102) 韓人池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古事記 應神段에는 建內宿 命이 도래한 신라인을 이끌고 百濟池 를 만들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古事記 에서 신라인이 만든 연못을 왜 百濟池라고 부르 게 되었는지 알 수 없다. 103)`百濟記a 無禮하였다 : 어떤 이유로 무례했다고 하는지 알 수 없다. 응신 3년 시세조에 진 사왕의 무례와 이어서 백제국이 진사왕을 죽여 사죄하였다는 표현과 마찬가지로 일본서기 편 찬자의 조작으로 여겨진다. 104) 東韓의 땅 : 峴南 支侵 谷那 東韓의 땅이라고 해석하는 경우도 있지만, 일반적으로 東韓之 地 는 峴南 支侵 谷那 지역을 총칭하는 의미로 해석되고 있다(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峴 南은 三國史記 卷37 地理志 4의 甘勿阿를 가리키며 현 전북 咸悅지역에 해당된다. 谷那는 현 전남 谷城을 가리킬 가능성이 크다(주 72) 참조). 그런데 支侵의 비정에 대해서는 두 가지 견해 가 있다. 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馬韓條의 兒林과 같다고 보아 현 충남 大興의 옛 이름인 任 城에 비정하는 견해(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와 支侵國을 가리키는 것으로 현 충남 洪城지역 으로 보는 견해(末松保和, 1949, 앞의 글, 70~76쪽)가 있다. 105) 直支 : 阿莘王의 아들로 백제 제18대왕 支王(재위 405~420). 三國史記 에는 支, 宋書 와 梁書 에는 映으로 기록되어 있다.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支 元年條에 支王<*或云直支>. 梁書名映. 阿莘之元子. 阿莘在位第三年立爲太子. 六年出質倭國 이라고 나온다. 支가 왜국에 質로 파견되었다는 내용은 三國史記 阿莘王 6년(397)조(王與倭國結好. 以太子 支質爲)에도 보인다.`廣開土王碑a의 永樂 9년(399) 己亥條에는 百殘이 맹세를 어기고 왜와 화통해 군사를 끌어들였다(百殘違誓與倭和通)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를 통해서 397년에 백제가 왜국에 支를 質로 파견한 이유가 고구려의 남하를 견제하려는 목적에서 이루어진 것이라는 데는 이론이 없다 (李基白, 1975, 韓國古代史論, 探求堂, 74쪽 ; 山尾幸久, 1977, 日本國家の形成, 岩波書店,

23 44 應神天皇 14年 (283) 춘2월 봄 2월. 百濟王106)이 縫衣工女107)를 바쳤는데 이름은 眞毛津108)이라고 한다. 지금 來目衣 日本書紀 이끌고 歸化하고자 하였습니다. 그런데 신라인이 방해하여 모두 加羅國112)에 머물러 있습 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葛城襲津彦(카즈라키노소츠비코)113)을 보내어 弓月의 人夫를 加羅에서 불러들이도록 하였다. 그런데 3년이 지나도록 襲津彦은 돌아오지 않았다. 縫(쿠메노키누누이)109)의 시조이다. 應神天皇 15年 (284) 是歲 추8월 壬戌朔 丁卯 이 해에 弓月君110)이 백제로부터 來歸하였다. 그리고 臣은 저희나라의 人夫 120縣111)을 45 가을 8월 壬戌朔 丁卯(6일). 百濟王114)은 阿直岐115)를 파견하여 良馬 2마리를 바쳤다. 이 에 輕(카루)116)의 언덕 위의 마굿간에서 기르도록 하였다. 그리고 阿直岐에게 사육하는 일 137쪽 ; 羅幸柱, 1993,`古代韓日關係에 있어서의 質 의 意味a, 建大史學 8). 한편 이러한 支의 왜국 파견은 백제의 고구려 견제정책의 일환임과 동시에 국내적으로 볼 때 왕위계승을 둘 러싸고 추방된 것이거나(梁起錫, 1982,`百濟 支王代의 政治的 變革a, 湖西史學 ), 반대로 후 계자의 신변을 보호하기 위해서 취해진 조치(연민수, 1997,`백제의 대왜외교와 왕족a, 백제연 구 27)로 이해되기도 한다. 106) 百濟王 : 阿莘王. 107) 縫衣工女 : 옷을 꿰매는 여자 기술자. 108) 眞毛津 :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백제의 대성8족의 하나인 眞氏인 점을 감안하면 상층신분의 여성일 가능성이 있다. 109) 來目衣縫 : 來目은 현 奈良縣 原(카시하라)市 久米(쿠메)町 지역이다. 和名類聚抄 에 大和國 高市郡久米 라고 나온다. 衣縫에 대해서는 新撰姓氏錄 和泉國 諸蕃條에 衣縫. 出自百濟國神 露命也 라는 기록이 보이지만, 和泉(이즈미)國의 衣縫과 大和(야마토)國의 來目지역이 어떤 연 관성이 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110) 弓月君 : 秦(하타)氏의 선조. 應神 16년 8월조에도 秦氏의 도래전승이 보인다. 古事記 應神段 에는 秦造之祖 韓直之祖 參渡來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秦氏는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上 에 의하면 太秦恭宿. 秦始皇帝三世孫. 孝武王之後也. 男功滿王. 帶仲彦天皇<*諡仲哀>. 八年 來朝. 男融通王<*一曰弓月王>. 譽田天皇<*諡應神>. 十四年來朝. 率百二十七縣百姓歸化. 獻金銀 玉帛等物 이라고 하여 秦始皇帝의 후예를 칭하고 있지만 실제는 신라나 가야 방면에서 건너간 도래인 집단이다. 秦氏는 山背(야마시로)國의 葛野(카즈노) 紀伊(키이)郡을 중심으로 近江(오우 미)國 愛智(아이치)와 太上郡에서 美濃(미노) 越前(에츠젠) 攝津(셋츠) 播磨(하리마)國 등 전 국각지에 퍼져 있는 대규모 문화전파 집단이다. 특히 농지개발과 양잠, 광산개발, 그리고 鑄造 및 木工 기술이 뛰어났다고 한다. 따라서 관련 자료도 전국적으로 분포하고 있지만 특히 京都府 남부의 山城(야마시로)지역과 큐슈 북부지역의 宇佐(우사)지역에 많은 관련 자료가 남아있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秦氏는 일본열도에 정착한 후 재지의 호족이나 야마토정권의 창고 등의 실 무를 담당하는 하급관인으로도 활동한 흔적을 남기고 있다. 姓은 초기에 造였다가 天武 12년 (683)에는 連, 이어서 同 15년에는 忌村姓을 하사받는다. 을 관장하도록 하였다. 이러한 이유로 말을 사육하는 곳을 일러 廐坂(우마야사카)117)라고 불렀다. 阿直岐는 또한 經典118)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 道稚郞子(우지노와키이라츠코)119) 111) 120縣 :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上에는 127縣으로 기록되어 있다. 112) 加羅國 : 日本書紀 에는 加羅라는 용어가 加耶諸國을 가리키는 경우와 고령의 加耶(大加耶)를 가리키는 경우가 있다. 여기서는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정확히 알 수 없다. 113) 葛城襲津彦 : 주 76) 참조. 114) 백제왕 : 阿莘王 14년(404) 115) 阿直岐 : 古事記 應神段에는 阿知吉師(아치키시)로 나온다. 그런데 古事記 에서는 아지길사를 왜국에 보낸 백제왕을 照古王, 즉 近肖古王(재위 346~374)이라고 기록하고 있다(百濟國主照古 王. 以牡馬壹疋牝馬壹疋. 付阿知吉師以貢上<*此阿知吉師者. 阿直史等之祖>). 또한 일본서기 에 서는 阿直岐의 천거에 의해 王仁을 초빙하였다고 기술하고 있는데 고사기 에는 아직기와 왕인 의 관계를 언급하고 있지 않다. 116) 輕 : 현 奈良縣 原(카시하라)市 大輕(오오가루)町 부근이다. 117) 廐坂 : 輕(카루)의 坂 위에 있는 마굿간. 廐坂의 위치에 대해서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왜국에 승마 풍습이 전해진 것은 대체로 4세기 중후반으로 추정되지만, 馬胄 등으로 말을 무장하는 것은 5세 기 후반까지 내려간다(一瀨和夫, 2002,`倭國の古墳と王權a, 倭國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이 점을 고려하면 牧馬 및 騎馬 관련한 기술도 백제로부터 영향을 많이 받았을 것으로 짐작된다. 118) 經典 : 여기서는 經書와 典籍이라는 의미로 유교 관련 서적을 말한다. 119) 道稚郞子 : 應神의 태자. 日本書紀 仁德卽位前紀에 의하면 應神이 사망한 후, 당시 太子였던 道稚郞子가 大 皇子(오오사자키노미코 : 후에 仁德天皇)와 서로 황위를 사양하였기 때문에 한동안 空位 상태가 계속되었다. 그 때 大山守皇子(오오야마모리노미코)가 황위를 찬탈하고자 했지만 道稚郞子가 이를 알아차리고 大山守皇子를 제거한 후 자신은 大 皇子가 천황에 즉 위할 수 있도록 자살한다. 120) 博士 : 고대 일본의 博士는 율령제하에서 陰陽寮나 大學寮 등의 부서에 소속되어 학문과 교육에

24 46 의 스승이 되었다. 이에 천황은 阿直岐에게 너보다 훌륭한 博士120)가 있느냐? 고 물었다. 라고 하였다. 이에 上毛 대답하길, 王仁121)이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 사람이 우수합니다. 野君(카미츠케노노키미)122)의 조상인 荒田別(아라타와케) 巫別(카무나기와케)123)를 백제에 日本書紀 47 보내어 왕인을 불러오도록 하였다. 阿直岐는 阿直岐史(아치키노후비토)124)의 시조이다. 應神天皇 16년(285) 춘2월 종사하는 官人을 말한다. 이외에도 대학이나 교육과는 무관한 전문기술자(瓦博士 등)를 박사로 호 칭하기도 하였다. 본조에서는 막연히 學者라는 의미가 강하다. 日本書紀 에는 繼體 欽明紀 등 에 백제가 五經博士 曆博士 易博士 등을 파견하였다고 전하고 있다. 이것은 6세기 대에 백제에 박사제도가 성립되어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梁書 卷54 列傳 百濟條에서 백제가 中大 通 6年(534)과 大同 7年(541) 두 차례에 걸쳐 梁나라에 毛詩博士를 청하는 기사가 참고 된다. 121) 王仁 : 古事記 應神段에는 和邇吉師(와니키시)로 나온다. 왜에 건너가 論語와 千字文을 전파하 였고, 文首氏(西文氏)의 시조가 되었다(故受命以貢上人名. 和邇吉師. 卽論語十卷千字文一卷. 幷 十一卷. 付是人卽貢進. <*此和爾吉師者文首等祖>). 王仁의 도래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에 의하 면 王仁은 阿直岐의 추천을 받아 왜에 건너 간 것으로 나온다(주 115) 참조). 그러나 두 사람의 전승은 원래 별도로 되어 있던 것이 후대에 같은 백제계라는 동족적 의식에 의해 결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 도래 시기는 古事記 의 경우 照古王(近肖古王)의 시대로 적고 있다. 이에 비해 日 本書紀 에는 응신 15년에 기록되어 있는데 120년 내리면 백제 전지왕 원년(405)에 해당된다. 日本書紀 에는 바로 이 해에 아화(아신)왕이 사망하고 직지(전지)왕의 즉위사실을 전하고 있고, 삼국사기 의 왕력과 일치한다. 따라서 王仁의 도래 시기는 日本書紀 에 전하는 전지왕대일 가 능성이 크다(연민수, 2005,`古代日本의 한반도계 氏族의 역할-西文氏와 東漢氏를 중심으로-a, 한일관계사연구논집 3 임나문제와 한일관계, 경인문화사). 한편, 일본 나라시대의 최고의 고 승이었던 行基의 墓誌에는 本出於百濟王子王爾之後 라 하여 행기를 王爾 즉 王仁의 후예라고 기록하고 있다(齊藤忠 編著, 1983, 古代朝鮮 日本金石文資料集成, 吉川弘文館). 행기의 묘지 명에 의하면 왕인의 후예씨족들은 적어도 8세기 중엽까지는 그들의 선조의 본관을 백제로 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22) 上毛野君 : 上毛野氏는 下毛野(시모츠케노)氏와 함께 崇神의 황자인 豊城入彦命(토요키이리히코 노미코토)의 후예를 칭하는 皇別氏族이다. 天武 13年(684)에는 朝臣姓을 사성받는 당대 유력씨 족이었다. 新撰姓氏錄 左京皇別條에 의하면 上毛野朝臣은 日本書紀 웅략 9년 7월조에 보이 는 田邊史伯孫(타나베노후히토하쿠손)의 후손이라고 하는데 이는 원래 河內(카와치)지방에 있던 田邊史가 東國의 上毛野지방(현 群馬縣 지역)으로 이동하여 上毛野氏가 된 것으로 추측되고 있 다(三品彰英, 1964,`荒田別 田道の傳承-歸化人と上毛野氏-a, 朝鮮學報 31). 田邊史는 河內 지방의 도래인 집단으로 일본서기 웅략 9년 7월조에 의하면 王仁의 후예씨족인 書首(西文)氏 와 혼인관계를 맺었다. 이 書首(西文)氏와 田邊史의 밀접한 관계가 그대로 田邊史의 후신인 上毛 野氏와의 관계에 반영되어 王仁의 초빙에 활약하는 荒田別 巫別의 기사가 첨가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기도 한다(김은숙, 1988-b,`西文氏의 歸化 傳承a, 歷史學報 118). 123) 荒田別 巫別 : 주 45) 참조. 봄 2월. 王仁이 왔다.125) 이에 태자 道稚郞子는 王仁을 스승으로 삼았다. 여러 典籍을 배우니 통달하지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이른바 王仁은 書首(후미노오비토)126)의 시조이다. 124) 阿直岐史 : 古事記 應神段에는 阿直史로 나온다. 天武 12年(683) 10月에 連姓을 받고, 承和 元 年(834) 9월에는 阿直史福吉 등 3인이 淸根宿 로 改姓되었다. 新撰姓氏錄 石京諸番 下에 安勅連. 百濟國魯王後也 라고 되어 있다. 安勅은 阿直과 음이 통한다. 魯王에 대해서는 毗有王 의 誤記로 보는 견해도 있지만 정확히 알 수 없다. 史(후히토)는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기록을 담 당했던 씨족에게 주는 姓으로 주로 도래계 씨족이 사성받았다. 대체로 6세기 중반에서 후반에 걸쳐 성립된 것으로 여겨지며(加藤謙吉, 1995, 史姓の成立とフミヒト制 日本古代の社會と 政治, 吉川弘文館), 史姓을 가진 도래계 씨족으로는 王辰爾의 후예씨족인 船史 白猪史 津史 가 유명하다. 125) 王仁이 왔다 : 주 121) 참조. 古事記 應神段에 의하면 和邇吉師(王仁) 論語 10권과 千字文 1권을 가지고 왜에 건너갔다고 전한다. 그런데 천자문은 중국남조의 梁武帝(502~549)가 周興 嗣에게 명하여 편찬한 것으로 연대적으로 맞지 않다. 126) 書首 : 文首 또는 일반적으로 西文(카후치노후미)氏라고 하며 王仁의 후예씨족(주 121) 참조). 비 교적 이른 시기의 도래전승을 갖고 있는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으로 馬史 櫻野首 高志史 등은 동족이다. 西文氏는 河內國 古市郡(현 大阪府 羽曳野市)을 중심으로 야마토 정권에서 문서행정을 담당하는 문필씨족이었다. 西文氏는 姓이 首(오비토)이면서도 문필 담당의 史(후히토) 집단 위에 있었던 존재였다. 天武 12년(683) 9월에는 連을, 同 14년 6월에 忌寸姓을 받았다. 延曆 10년(791) 4월에는 그 일부가 宿 로 改姓되었다. 한편, 5세기 후반 이후 西文氏와 함께 기록 등의 전문직에 종사했던 도래씨족으로 阿知使主(아치노오미)의 후예를 칭하는 東漢(야마토노아야)氏 혹은 倭漢 氏가 있었다. 日本書紀 敏達 元年(572) 5月條에서는 西文氏와 東漢氏를 가리켜 東西諸史 라는 표현을 쓰기도 한다. 그런데 續日本紀 卷40 延曆 10年(791) 夏四月條에는 西文氏의 후예인 文 忌寸最弟가 자신의 조상인 王仁의 출자를 중국 漢高祖의 후예라고 칭하면서 천황에게 宿 의 姓 을 받기를 청하는 기사가 있다. 이 기사에 의하면 西文氏는 8세기 후반부터 중국 황제 후예씨족임 을 칭하고 있는데 新撰姓氏錄 左京諸番 上에도 文宿. 出自漢高皇帝之後鸞王也 라고 같은 기 록이 보인다. 이렇게 서문씨가 漢高祖의 후예씨족임을 칭하게 된 것은 前漢시대 王氏의 낙랑지역 에의 이주에 관한 역사적 지식이 반영된 것으로 倭漢氏가 延曆 4年(785)에 後漢靈帝 증손인 阿智 王을 조상으로 주장한 것이나 百濟 왕족에 대한 賜姓정책 등에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보기도 한다(金恩淑, 1988-b, 앞의 글). 한편 井上滿郞에 의하면 씨족들의 출자개변은 고대 일본이 중국

25 48 日本書紀 是歲 49 加羅에 보냈다. 이에 정병을 주며 襲津彦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고 있다. 분명히 신라 이 해에 백제 阿花王이 薨하였다.127) 천황이 直支王128)을 불러 그대는 나라로 돌아가서 왕 129) 위를 이으라. 라고 하였다. 이에 다시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131) 130) <*東韓이란 甘羅城 132) 高難城 爾林城 이 이것이다.> 가 방해하여 체류하고 있을 것이다. 너희들은 빨리 가서 신라를 치고, 그 길을 열도록 하 라. 라고 詔를 내렸다. 이에 木 宿 등은 정병을 이끌고 나아가 신라의 국경에 이르렀 다. 신라왕은 놀라 服罪하였다. 이에 弓月의 人夫를 거느리고 襲津彦과 함께 돌아왔다. 8월 應神天皇 25년(294) 133) 134) 8월. 平群木 宿 (헤구리노츠쿠노스쿠네) 的戶田宿 (이쿠하노토다노스쿠네) 를 문화에의 동경이 강했고 견당사가 빈번히 행해질 무렵에 자신의 씨족을 중국황제에 결부시키는 일에 의해 이익을 얻으려고 했던 것이 동기라고 한다(1987, 渡來人, リブロポ一ト, 173쪽). 127) 이 해에 薨하였다 : 阿花王은 阿莘王을 말한다. 阿莘王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三國史記 권25 백제본기 阿莘王 14년(405) 9월조와 일치한다. 128) 直支王 : 支王(주 105) 참조). 전지왕의 귀국과 왕위 계승에 대해서는 삼국사기 권25 백제본 기 전지왕 원년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29) 이에 보냈다 :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百濟記a에는 阿花王이 즉위하여 귀국에게 無禮 하자 枕彌多禮와 峴南 支侵 谷那의 東韓 땅을 빼앗았다는 기사가 나온다(주 104) 참조). 130) 甘羅城 : 현 전북 咸悅.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백제기a에는 峴南으로 나온다. 131) 高難城 : 현 전남 谷城.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백제기a에는 谷那로 나온다. 132) 爾林城 : 應神 8년 춘3월조에 인용된`백제기a의 支侵과 같은 것으로 보아 현 전북 任實로 비정 하거나(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전북 金堤郡 利城으로 보기도 한다(末松保和, 1949, 앞의 글, 70~77쪽). 日本書紀 에서 爾林이라는 지명은 현종 3년(487) 시세조와 흠명 11년(550) 4월 조에도 보인다. 133) 平群木 宿 : 古事記 에 武內宿 의 아들인 平群都久宿 로 나오며 平群(헤구리)氏 등의 조 상이다(주 94)와 주 97) 참조). 古事記 履中段에 의하면 住吉仲皇子(스미노에노나카츠미코)의 모반사건 때 履中을 구출하는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平群(헤구리)氏는 姓이 臣이며 천무 13년 (684)에 朝臣姓을 받는다. 5세기 중후반 雄略朝부터 仁賢朝에 걸쳐 大臣을 배출했다고 하는 전 승을 가진 씨족으로 6세기 초 武烈朝에 몰락한다. 平群都久宿 가 武內宿 계보에 포함되는 것 은 推古朝 전후의 시기이다(塚口義信, 1980, 앞의 글). 推古朝 전후시기에 平群氏 일족은 蘇我氏 와 함께 物部討伐軍에 참가하거나 征新羅軍의 장군으로 등장하는 등 蘇我氏 밑에서 군사적으로 활약하고 있다. 특히 崇峻卽位前紀(587)에 物部大連守屋의 모반을 토벌하여 崇峻 즉위에 공을 세운 장군으로 등장하는 平群神手는 平群木 宿 와 유사한 성격을 가진 인물이다. 이에 平群木 宿 는 平群神手를 과거에 투영한 가상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김은숙, 1988-a, 앞의 글). 이와 관련하여 平群氏의 고분으로 추정되는 平群谷 고분군의 축조연대를 6세기 중엽 이후로 보고 平群氏가 중앙호족으로 등장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중엽이후로 보아야 한다는 연 구(辰巳和弘, 1972,`平群氏に關する基礎的考察a(上), 古代學硏究 64)도 참고 된다. 백제의 直支王이 薨하였다.135) 이에 아들 久爾辛136)이 왕위에 올랐다. 왕이 어렸다.137) 大 134) 的戶田宿 : 的戶田宿 의 加羅 파견 기사는 日本書紀 에 보이는 的(이쿠하)氏에 관한 최초의 기사인 동시에 的氏의 시조전승에 해당된다. 日本書紀 仁德 12년 8월조에는 的臣의 조상인 盾 人宿 가 고구려에서 헌상한 철과녁을 관통시켜서 的戶田宿 라는 이름을 하사받았다는 전승이 있다. 的氏는 古事記 孝元段에는 葛城長江會都毘古의 후손으로, 新撰姓氏錄 山城國皇別條 에 의하면 武內宿 의 자식인 葛城襲津彦의 후손으로 나온다(주 76) 참조). 동족으로 葛城氏 平群氏 蘇我氏 許勢氏 등이 있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的氏는 任那日本府와 관련하여 河內 直과 함께 가야에서 활동하는 등 河內지역에 본거지를 두고(直木孝次郞, 1964,`的氏の地位と 系譜a, 日本古代の氏族と天皇, 書房) 왜국과 한반도 제국과의 외교 교섭에서 활약하였다. 135) 百濟의 薨하였다 : 백제 直支王( 支王)의 사망 시기는 三國史記 권24 백제본기에 의하 면 支王 16년(420)이다. 應神 25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294년이므로 수정연대로 계산하 면 414년이 된다. 삼국사기 와는 6년의 차이가 난다. 한편,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 의하 면 景平 2年(424)에 餘映이 사신을 파견한 것으로 되어 있어 424년에도 전지왕이 생존한 것으 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일본서기 응신 39년(수정연대 428) 춘2월조에도 直支王이 新齊都媛 을 왜에 파견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처럼 支王의 사망시기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차제 에서도 모순을 일으키고 있다. 응신 39년은 日本書紀 기년으로 308년으로서 수정연대를 적용 하면 428년이 된다. 428년은 삼국사기 에 의하면 毗有王 2년에 해당되고 前王은 久爾辛王이 다. 따라서 응신 39년의 직지왕은 일반적으로 久爾辛王의 誤記로 보고 있다. 136) 久爾辛 : 支王의 아들로 백제 제19대 왕인 久爾辛王(420~427). 三國史記 에는 구이신왕의 즉위가 전지왕의 사후 바로 420년에 이루어지는데(久爾辛王. 支王長子. 支王薨. 卽位), 일 본서기 에서는 전지왕의 사망 시기와 마찬가지로 414년에 즉위하는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한 편,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는 구이신왕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支王이 416년(義 熙 12)에 동진으로부터 백제왕으로 책봉받고 있고, 또 424년(景平 2)에 동진에 사신을 파견하였 다는 기록이 있다. 이에 중국측 사서에서 전지왕이 424년까지 조공하였다는 기록에 주목하여 구이신왕의 재위 기간을 424년에서 427년까지로 보는 견해(盧重國, 1988, 앞의 글, 138쪽)와 중국측의 오해에서 비롯된 것으로 간주하여 삼국사기 의 기록대로 420~427년으로 보는 견해 (李基東, 1974,`中國史書에 보이는 百濟王 牟都에 대하여a, 歷史學報 62)가 있다.

26 50 日本書紀 51 倭의 木滿致138)가 국정을 잡았다. 아울러 王母와 밀통하여 무례한 행위를 많이 저질렀다. 을 하다가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貴國140)과 왕래하였다. 天朝141)의 명령을 받아서 우리나라 천황은 이를 듣고 소환하였다. <* `百濟記a 에서 말하기를, 木滿致는 木羅斤資가 신라를 의 정사를 장악하고 권세를 세상에 떨쳤다. 그러나 天朝가 그 포악함을 듣고서 소환하였 139) 정벌할 때에 그 나라 婦人을 얻어서 낳은 자식이다. 아버지의 공적으로 任那 에서 전횡 다. 고 한다.> 應神天皇 39년(308) 137) 왕이 어렸다 : 구이신왕이 즉위할 당시의 나이는 대략 16세 정도로 추정되고 있다(李道學, 1984,`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系의 檢討a, 韓國史硏究 45). 138) 木滿致 : 三國史記 卷25 百濟本紀의 蓋鹵王 21年(475)條에 漢城이 멸망할 때 文周王과 함께 熊津으로 남하한 인물인 木리滿致와 동일인물일 가능성이 크다. 이 木滿致와 三國史記 의 木리 滿致를 동일인물로 본다면 木滿致는 문주왕대까지 생존한 셈이 된다. 그런데 日本書紀 에 의하 면 木滿致의 출생은 木羅斤資가 신라를 공격할 때 신라의 여성을 취하여 木滿致를 낳았다고 하 는`百濟記a의 기록으로부터 神功 49年(369) 3월 이후의 어느 시기로 볼수 있다(주 47) 참조). 양쪽 기록을 결합하여 목만치의 생존연대를 헤아려보면 木滿致는 100세 이상이 되어 버린다. 木 滿致가 三國史記 에서 木리滿致라는 인물로 5세기 후반에도 왕성하게 활동하였다는 사실에 주 목하면 일본서기 神功紀의 木羅斤資와 應神紀의 木滿致의 활동 연대가 부자연스럽게 된다. 이 에 일본서기 신공기 및 응신기의 목씨부자 관련 기사를 일반적인 간지 조정법인 2간지가 아닌 3간지를 내려 이해해야 한다는 견해(山尾幸久, 1983, 日本古代王權形成史論, 岩波書店, 200~213쪽)가 제기되었다. 일본서기 의 목씨부자 관련기사를 3간지 내리면 우선 久爾辛王과 木滿致는 동시대인으로 될 수 없고, 日本書紀 의 목만치 기사와 삼국사기 의 목협만치 관련 기사 사이에 생기는 모순을 해결할 수 있다. 그리고 분주로 인용된`백제기a의 내용 중에 來入 我國 執我國政 이라는 표현이나 삼국사기 의 木리滿致 관련 기록을 통해서 목만치는 왜측 大倭 ( )의 인물이 아니라는 것이 증명된다. 따라서 응신 25년조의 본문 내용은 분주로 인용된 `백제기a를 참고로 일본서기 편찬자의 윤색이 가해졌음을 명확히 알 수 있다. 일본서기 본 문과`백제기a의 공통적인 부분은 목만치를 왜에 불러들였다는 내용인데 천황이 한반도인을 불 러들였다는 것은 그 한반도인이 일본에 도래한 것을 표현하는 日本書紀 의 독특한 필법이다. 이와 관련하여 木滿致가 日本書紀 의 蘇我滿智와 동일인으로 왜국으로 건너가 蘇我씨의 조상 이었다는 연구가 주목된다. 木滿致(木리滿致)는 문주왕의 사후 일본으로 망명하였는데 그의 후 예가 大和(야마토)의 曾我(소가)지역에 정착한 후 蘇我씨를 칭하게 되었다는 것이다(文定昌, 1970, 日本上古史-韓國史의 延長-, 294쪽 ; 門脇禎仁, 1971,`蘇我氏の出自について-日本 の木 滿致と蘇我滿智-a, 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 12 ; 鈴木靖民, 1971,`木滿致と蘇我氏-蘇 我氏百濟人說によせて-a, 日本のなかの朝鮮文化 12). 木滿致가 실재로 蘇我氏의 조상이 되었 다고 본다면`百濟記a에 木氏父子 관련 기록이 자주 보이는 것은`百濟記a의 원사료에 蘇我氏의 家記같은 자료가 포함되어 있었음을 말해준다. 한편 木滿致와 木리滿致는 동명이인으로서 활동 한 시기가 다르다고 보는 견해도 있다. 비류왕대의 병관좌평인 解仇와 문주왕대의 병관좌평 解 仇 등 백제사에서 동명이인의 경우가 종종 나온다는 것을 근거로 들고 있다(盧重國, 1994,`百 濟의 貴族家門 硏究-木 (木)氏 세력을 중심으로-a, 大丘史學 48). 춘2월 봄 2월. 백제 直支王은 그 누이동생 新齊都媛142)을 보내어 조정을 섬기도록 하였다. 이 에 新齊都媛은 7인의 부녀를 데리고 來歸하였다. 권11 大 天皇 仁德天皇 仁德天皇143) 41년(353) 춘3월 봄 3월. 紀角宿 144) 를 백제로 보내어 처음으로 國郡145)의 경계를 나누고 토산물을 자세 139) 任那 : 日本書紀 에 나오는 任那 는 첫째 金官國을 가리키는 것, 둘째 가야지역 전체를 가리키 는 지리적 명칭, 셋째 멸망시의 백제왕의 통치지역 등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에 처음 任那 가 보이는 곳은 崇神 65年 秋7월조이다. 한국 사료에서는 任那加羅 任那加良 金官國 伽倻로 나 오며 任那 로 약칭하는 경우는 없다. 140) 貴國 : 倭國. 주 28) 참조. 141) 天朝 : 大和(야마토)政權. 142) 新齊都媛 : 直支王의 누이라는 기록만 보이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日本書紀 雄略 2年 7 월조에도 천황이 백제에 女郞을 요구하여 蓋鹵王이 適稽女郞을 보냈다는 유사한 기록이 보인다. 143) 仁德天皇 : 古事記 日本書紀 의 계보상 16대 천황. 이름은 大 尊(오오사자키노미코토)이 며 아버지는 應神이다. 宋書 卷97 列傳 倭國傳에 나오는 倭王讚 또는 珍으로 보기도 한다. 仁 德의 陵은 현재 5세기 중엽의 前方後圓墳인 오사카의 大山(다이센)古墳으로 비정되고 있다. 그 러나 記紀의 仁德 전승은 應神의 전승과 비슷한 부분이 많고, 그 구체성도 떨어지기 때문에 仁德 의 실재를 부정하는 견해도 있다. 144) 紀角宿 : 주 94) 참조. 145) 國郡 : 고대 율령제하의 지방 지배 조직. 國은 國造(쿠니노미야츠코)의 지배영역을 의미하며, 전 국적으로 國이 확정된 것은 대체로 7세기 후반 천무조로 보고 있다. 그 國 아래의 지방 조직으로 7세기 단계까지 評이 있었다. 이후 701년 大寶律令 시행과 함께 評이 郡으로 바뀌면서 비로소

27 52 日本書紀 53 히 기록하도록 하였다. 이 때 백제왕의 친족인 酒君146)이 무례하게 굴었으므로 紀角宿 잡아서 천황에게 헌상하면서 臣은 언제나 그물을 쳐서 새를 포획해왔지만, 아직 이러한 는 백제왕147)을 꾸짖었다. 백제왕은 이것을 두려워하여 酒君을 쇠사슬로 묶어서 襲津彦에 종류의 새를 잡아 본적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기이하게 여겨서 헌상합니다. 라고 말하였 게 딸려 보내어 진상하였다. 이리하여 酒君은 오자 바로 石川錦織首許呂斯(이시카와노니 다. 천황은 酒君을 불러 새를 보여주며 이것은 무슨 새인가? 라고 물었다. 酒君은 이런 148) 시코리노오비토코로시) 의 집에 도망가 숨었다. 그리고 거짓으로 천황은 이미 臣의 죄 새는 백제에 많이 있습니다. 길들이면 사람을 잘 따르며, 또한 빠르게 날아서 여러 새들을 를 용서하셨다. 따라서 너에게 의탁하여 살고자 한다. 고 말하였다. 오랜 세월이 지나서 라고 잡습니다. 백제 사람은 이 새를 俱知151)<*이것은 지금의 매(鷹)이다.>라고 부릅니다. 천황은 마침내 그 죄를 용서하였다. 대답하였다. 이에 酒君에게 주어서 길들이도록 명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길들일 수 있 仁德天皇 43년(355) 추9월 庚子朔 었다. 酒君은 무두질한 가죽 끈을 그 발에 묶고 작은 방울152)을 그 꼬리에 달아서 팔뚝 위에 올려 천황에게 헌상하였다. 이 날 百舌鳥野(모즈노)153)에 행차하여 사냥하였다. 이 때 꿩이 많이 날았다. 이에 매를 놓아서 잡도록 하였는데 잠깐 동안에 수십 마리의 꿩을 잡았다. 가을 9월 庚子朔(1일). 依網屯倉(요사미노미야케)149)의 阿 古(아비코)150)가 기이한 새를 권14 大泊瀨幼武天皇 雄略天皇154) 2년(458) 國郡制가 확립되었다. 따라서 仁德紀의 國郡 이라는 표현은 8세기 일본서기 가 편찬될 당시 의 윤색으로 볼 수 있다. 146) 酒君 : 왜국에 건너온 이유가 일본서기 에는 紀角宿 에게 무례를 범하여 끌려온 것처럼 기술 되어 있는데 이는 윤색된 내용이다. 후문에 그의 행적을 보면 매사육과 관련이 깊은데 매를 전문 적으로 사육하던 백제계 도래집단의 조상전승에 酒君이 있었던 듯 하다. 新撰姓氏錄 右京諸番 下 刑部條와 和泉諸番 百濟公 및 六人部連條에 出自百濟國酒王也 라는 기록에 의하면 百濟公 과 六人部가 酒王(酒君)의 후예씨족임을 밝히고 있다. 147) 百濟王 : 이 때의 백제왕의 이름은 명확히 알 수 없다. 148) 石川錦織首許呂斯 : 石川錦織首는 石川氏의 일족이고, 許呂斯는 이름이다. 씨족 이름에서 볼 때 河內國 石川郡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거주하고 있던 인물로 여겨진다. 河內國 石川郡은 현재 大 阪(오사카)府 南河內(미나미카와치)郡과 羽曳野(하비키노)市 富田林(톤다바야시)市의 일부 지 역이다. 河內 지역에 한반도계 이주민 집단이 많이 거주하고 있던 정황과 특히 酒君과 관련되어 등장하고 있는 점을 볼 때 許呂斯는 백제계 도래인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住吉神代記 에는 石川錦織許呂志 로 나온다. 149) 依網屯倉 : 和名類聚抄 에 의하면 攝津國 住吉(스미요시)郡 大羅(오오라)鄕-현 大阪市 住吉區 남동부-에서 河內國 丹比(탄피)郡 依羅(요사미)鄕 및 三宅(미야케)鄕-현 松原市 북서부-일대에 있었다고 전한다. 屯倉(미야케)는 屯家宮家 혹은 御宅 三宅이라고도 하며 大王家의 직영지이 다. 원래 屯倉은 수확한 稻를 보관하던 창고를 말하는 것이었는데 이후 大和政權이 諸國에 설치 하면서 그 곳의 토지(屯田)와 경작민(曲部) 모두 포함하여 大王家의 직영지란 의미로 부르게 되 었다. 일본서기 에서 屯倉 관계 기사는 垂仁 127年 시세조에 처음 보이지만 그대로 신뢰할 수 없고, 일반적으로 5세기 이후 仁德朝부터 설치되기 시작한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 150) 阿 古 : 山(야마)部를 통솔하던 수장. 阿比古 阿毘古 我孫 이라고도 한다. 日本書紀 景行 추7월 가을 7월. 백제의 池津媛(이케츠히메)155)은 천황이 장차 행차하려는데 이를 거역하고 18年 夏4月條에 山部阿 古 로 나온다. 山部는 산림의 管理나 생산에 종사하던 部民을 말한다. 151) 俱知 : 매(鷹). 和名類聚抄 에. 和名太加. 今案. 古言云俱知 라는 기록이 보인다. 152) 小鈴 : 사냥용 매의 꼬리에 다는 방울. 153) 百舌鳥野 : 현 大阪府 堺(사카이)市의 中百舌鳥(나카모즈)町에서 浜寺石津(하마데라이시즈)町에 걸친 지역. 154) 雄略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21대 천황. 이름은 大泊瀨幼武(오오하츠세와카타케루)이다. 아버지는 允恭天皇이고, 어머니는 忍坂大中姬命(오시사카노오오나카츠히메)이다. 埼玉(사이타 마)縣 稻荷山(이나리야마)古墳 鐵劍銘과 熊本縣 江田船山(에다후나야마)古墳 出土 大刀銘에 보 이는 獲加多支鹵大王(와카타케루오오키미) 로 추정되고 있다. 또한 宋書 卷97 列傳 倭國條에 478년 安東大將軍 칭호를 받은 倭武王으로 보는 것이 통설이다. 雄略은 5세기 후반 吉備(키비) 나 伊勢(이세)의 씨족들의 반란을 제압하는 등 왜왕권의 발전에 일대 획기를 그은 왕으로 이해되 고 있다. 그런데 日本書紀 에 의하면 雄略의 재위기간이 丁酉年(457)에 즉위해서 己未年(479) 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으나 그대로 신뢰할 수 없다. 먼저 457년 즉위라면 당장 그의 형인 興 의 462년 대송견사 사실( 宋書 의 孝武帝 大明 6年 3月條 및 倭國條)과 모순을 일으키게 되며 송서 의 기록을 신뢰하면 그의 즉위는 적어도 462년 이후에 이루어진 것으로 보아야 한다. 稻 荷山古墳 鐵劍銘의 辛亥年 이 471년이므로 아마도 그의 즉위년도는 462~471년 사이의 어느 해로 추정해 볼 수 있다. 한편 웅략의 사망연대에 대해서는 고사기 에 124세의 나이로 己巳年 (489)에 죽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일본서기 와 10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28 54 日本書紀 石川楯(이시카와노타테)156)과 음란한 짓을 저질렀다.<*舊本에는 石河股合首(이시카와 노마타아이노오비토)의 선조 楯(타테)이라고 한다.> 천황은 크게 노하여 大伴室屋大連 (오오토모노무로야노오오무라지)157)에게 조서를 내려서 來目部(쿠메베)158)에게 부부(두 남녀)의 수족을 나무에 묶어서 임시로 만든 단 위에서 불태워 죽이도록 하였다.<* `百 159) 에서 말하기를, 己巳年160)에 蓋鹵王161)이 즉위하였다. 천황은 阿禮奴 濟新撰a 162) 를 55 雄略天皇 5년(461) 하4월 여름 4월. 백제의 加須利君(카스리노키시)165)<*蓋鹵王이다.>은 池津媛(이케츠히메)이 화 형당해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適稽女郞이다.> 논의하여 말하기를 예전에 여인을 바쳐 보내어 女郞163)을 청하였다. 백제는 慕尼夫人164)의 딸인 適稽女郞을 단장시켜 천황에게 바쳤다. 고 하였다.> 155) 池津媛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분주로 인용된`百濟新撰a및 雄略 5年 夏4月條에 의하면 池 津媛은 백제 蓋鹵王이 천황에게 바친 慕尼夫人의 딸인 適稽女郞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156) 石川楯 : 日本書紀 仁德紀 41年 3月條에 백제왕족 酒君이 石川錦織首許呂斯의 집에 도망갔다 는 이야기가 있다. 石川楯은 石川錦織首許呂斯와 같은 씨족으로 舊本 에 石河股合首祖楯 으 로 기록되어 있듯이 姓은 首이다. 石川氏는 蘇我氏의 일족으로 河內의 石川郡에 본거지를 두고 있는 백제계 씨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주 148) 참조). 157) 大伴室屋大連 : 古事記 와 新撰姓氏錄 에 의하면 天忍日命(아메노오시히노미코토)의 자손으 로, 日本書紀 에는 雄略卽位前紀부터 武烈紀까지 5대에 걸쳐 大連(오오무라지)으로 나온다. 大 伴氏는 物部氏와 함께 군사를 담당했던 유력 씨족으로 5세기 후반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氏上 이 大連을 역임하면서 권력을 장악했다. 천무 13년(684) 12월에 동족인 佐伯(사에키)連과 함께 宿 姓을 하사받는다. 158) 來目部 : 久米部라고도 한다. 中國과 四國 지방을 중심으로 분포하고 있었던 大和政權의 군사적 部民으로 大伴氏의 통솔 하에 있었다. 記紀의 神武東征說話에는 久米部의 용감함을 노래한 久 米歌 도 있다. 159) 百濟新撰 : 일본서기 가 한반도 관계 기사를 기술하는데 기본사료로 이용했던 이른바 百濟三書 의 하나이다.`百濟新撰a은 日本書紀 雄略紀(2년 7월조와 5년 7월조)와 武烈紀(4년 시세조)의 3곳에 인용되었다. 蓋鹵王에서 武寧王까지 5대(455~523)의 시기에 걸쳐 인용되었지만, 실제로 는 蓋鹵王 末多王(東城王) 武寧王의 세 명의 왕명만 보인다. 그 내용은 武寧王의 출생담을 중 심으로 구성된 백제왕의 계보적인 성격이 강하다.`百濟新撰a은`百濟記a나`百濟本記a에 비해 일본서기 에 인용된 기사수가 매우 적을 뿐만 아니라, 내용 자체도 편찬의도를 파악하기에는 부족하다. 현재`백제신찬a이 일본서기 에 이용된 이유에 대해서는 神功紀부터 雄略紀까지를 간지 2운 올린 것을 조정하기 위해 이용되었을 것으로 보는 견해(三品彰英, 1962, 앞의 글)가 많 은 지지를 받고 있다. 그리고`백제신찬a의 편찬자는 琨支의 후예씨족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 다(山尾幸久, 1978, 앞의 글 ; 이근우, 1994, 앞의 글). 160) 己巳年 : 蓋鹵王 전후의 기사년으로는 429년과 489년이 있다. 그런데 三國史記 卷25 百濟本 紀에 의하면 429년은 毗有王 3년, 489년은 東城王 11년에 해당되고 개로왕의 재위기간은 455 년에서 475년까지이다. 따라서 개로왕 즉위 간지년은 乙未年(455)이 된다. 일본서기 와 삼국 사기 의 백제왕력이 일치하지 않는 부분이다. 이에 己巳年에 즉위한 백제왕은 蓋鹵王이 아니라 毗有王으로 보기도 한다(三品彰英, 1962, 앞의 글 ; 이근우, 1994, 앞의 글). 그러나 三國史記 에는 비유왕의 즉위를 427년(丁卯年)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 또한 문제가 있다. 이 밖에`百 濟新撰a에 2세기의 蓋婁王(재위 128~166)의 즉위기사가 5세기의 개로왕의 즉위 기사로 잘못 수록되었다는 견해(이재석, 2001,` 日本書紀 속의 百濟 王曆 小考-`百濟新撰a의`己巳年蓋鹵 王立a기사에 대한 一解釋-a, 일본학 -特輯 韓 日歷史交流의 어제와 오늘- 20)도 있다. 161) 蓋鹵王 : 백제 제21대 왕(재위 455~475). 毗有王의 長子로 이름은 慶司이다. 중국 사료에는 度 宋書 百濟傳)로 ( 나온다(주 160) 참조). 162) 阿禮奴 :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奴 라는 인명표기는 神功紀 49년조의 沙沙奴 와 欽 明紀 5년조`百濟本記a의 津守連己麻奴 등에도 보이듯이 奴 와 자는 백제계 사료에 주 로 보인다(木下禮仁, 1961,`日本書紀にみえる百濟史料の史料的價値についてa, 朝鮮學報 21 22合). 이 奴 를 왜국의 원시적 姓으로 보는 견해(平野邦雄, 1962,`古代氏姓 人名に現 れた階級關係-特に歸化系氏族を通じて-a, 日本古代史論集 上, 吉川弘文館)도 있다. 163) 女郞 : 신분이 높은 여성을 가리키는 호칭. 일본서기 에서 女郞 이라는 용어는 웅략 2년조에 인용된`百濟新撰a에만 보이기 때문에 원래 백제 혹은 한반도에서 사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일본의 경우는 일본서기 에서 姬 또는 媛 이라는 용어가 주로 사용되고 있다. 164) 慕尼夫人 : 三國史記 卷24 百濟本紀에서 枕流王의 어머니를 阿爾夫人, 責稽王이 帶方王女 寶 果를 夫人으로 삼았다는 기록 등으로 미루어 백제는 왕비를 지칭하여 夫人 이란 용어를 사용하 였음을 알 수 있다(또한 일본서기 제명 6년(660) 7월조에 인용된 고구려 승려 도현의`日本世 記a에도 의자왕의 妃를 大夫人 이라고 지칭하였다). 흠명 7년 시세조에 인용된 백제계 사료인 `百濟本記a에 의하면 고구려의 왕비가 正夫人 中夫人 小夫人 등 세 명이 있었다고 기술하 고 있다. 따라서 慕尼夫人은 蓋鹵王의 妃이었을 가능성이 크고, 慕尼夫人의 딸로 나온 適稽女郞 은 개로왕의 딸로 볼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는 慕尼夫人과 適稽女郞에 관한 기록 이 보이지 않기 때문에 정확히 알 수 없다. 165) 加須利君 : 蓋鹵王. 加須利 는 蓋鹵 의 일본식 표기이다. 日本書紀 황극 원년(642) 2월조에 는 淵蓋蘇文을 伊梨柯須彌 로 적고 있는데 여기서 柯須 는 加須 와 같고 蓋 를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29 56 日本書紀 57 서 采女(우네메)166)로 하였다. 그런데 무례를 범하여 우리나라의 이름을 실추시켰다. 이제 였다. 加須利君은 즉시 임신한 부인을 軍君에게 보내며 나의 임신한 부인은 이미 산달을 부터 여자를 바치지 말라. 고 하였다. 이에 아우 軍君(코니키시)167)<*昆支이다.>에게 너 맞이하였다. 만약 도중에 출산하게 되면, 부디 한 배에 태워서 어디에 있더라도 속히 나라 168) 는 일본에 가서 천황을 모셔라. 라고 하니, 軍君은 上君 의 명령에 어긋나지 않도록 하 겠습니다. 바라건대 君의 부인을 저에게 주시고 그러한 후에 보내주십시오. 라고 대답하 로 돌려보내도록 하라. 고 말하였다. 마침내 서로 이별의 말을 나누고 조정으로 향했다. 6월 丙戌朔 6월 丙戌朔(1일). 임신한 부인은 과연 加須利君의 말대로 筑紫(츠쿠시)의 各羅島(카카라 166) 采女 : 고대 일본의 下級女官. 5세기 후반부터 國造 등의 유력한 지방호족이 大王에게 복속의 표 시로 자신들의 딸을 바친 것이 그 유래이다. 왕궁에서 여러 가지 일을 담당했는데 大王의 妃가 된 인물로 伊賀采女宅子가 있다. 167) 軍君(昆支) : 釋日本紀 秘訓에는 코니키시 또는 코무키시 로 읽는다. 여기서 코니 는 오늘 날 大 의 의미이고, 키시 는 君 의 의미이다. 따라서 軍君 은 大君, 즉 왕을 일컫는다. 이 와 관련하여 周書 卷49 列傳 百濟條의 王姓夫余氏. 號於羅瑕. 民呼爲 吉支. 夏言竝王也 라 는 기사에서 吉支 가 大君 에 해당한다. 그리고 宋書 卷97 列傳 百濟條에 의하면 大明 2 년(458) 백제왕 余慶(개로왕)의 表文 중에 征虜將軍 左賢王 余昆 란 인물이 나온다. 이 余昆이 바로 昆支이다. 한편 昆支는 三國史記 에는 개로왕의 아들로 나오지만(百濟本紀 文周王 3年 夏 4月條에 拜王弟昆支爲內臣佐平 이란 기사가 있다. 여기서 王弟라는 것은 문주왕의 아우로 개 로왕의 아들이 된다), 日本書紀 에서는 개로왕의 동생으로 기록하고 있다. 또한 新撰姓氏錄 河內國諸蕃의 飛鳥戶造. 百濟國此有王男琨伎王也 라는 기록에 의하면 곤지는 비유왕의 자식으 로 나오므로 비유왕의 장자인 개로왕의 동생이 된다. 軍君 이라는 호칭은 곤지의 아들인 斯麻 (武寧王)가 왕위에 올랐기 때문에 大君 즉 軍君 으로 追號되어 이것이 이후 고유명사화 되었 을 가능성이 크다. 新撰姓氏錄 에는 곤지의 후예씨족으로 飛鳥戶造가 보이는데 지통천황이 어 렸을 때 이 집안에서 양육되었다고 한다. 또한 延喜式 神名帳에는 飛鳥戶神社가 나오는데 현재 이 신사는 곤지를 祭神으로 모시고 있다. 이 곤지의 渡倭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 학설이 있으나 일 반적으로 請兵使였다는 관점이 가장 지지를 받고 있다(양기석, 1981,`三國時代 人質의 性格에 대하여a, 史學志 15 ; 鈴木靖民, 1984,`東アジア諸民族の國家形成と大和王權a, 講座日本歷 史 1, 岩波書店 ; 이도학, 1985,`漢城末 熊津時代 百濟王位繼承과 王權의 性格a, 韓國史硏究 50 51). 한편 왜국에 있는 백제 계통의 이주민 집단을 조직하여 倭國 정권에 협력하고 또 이들 을 이용하여 백제를 구원하려 한 것이라고 보는 견해(정재윤, 1999,`熊津時代 百濟 政治史의 전 개와 그 성격a, 서강대 박사학위논문)도 있다. 또한 곤지의 파견 자체는 곤지를 왜국으로 추방한 것이었다는 연구(연민수, 1998,`5세기 후반 백제와 왜국-곤지의 행적과 동성왕의 즉위사정을 중심으로-a, 일본학 13 ; 주보돈, 2003,`熊津都邑期 백제와 신라의 관계a, 古代 東亞細亞와 百濟, 충남대 백제연구소)도 있다. 최근에는 곤지의 도왜가 즉각적인 군사동원을 전제한 파병 요청이 아니라 주변국과의 여러 관계를 고려하면서 백제중심의 국제관계를 유지하기 위해 이루 어진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재석, 2004,`5세기 백제와 倭國의 관계a, 백제연구 39). 168) 上君 : 蓋鹵王. 주 161)과 주 162) 참조. 노시마)169)에서 아이를 낳았다. 이에 그 아이 이름을 嶋君(세마키시)170)라고 지었다. 이 때 軍君은 즉시 배 한척을 마련하여 嶋君을 나라로 돌려보냈다. 이가 武寧王171)이다. 백제인 은 그 섬을 主嶋라고 불렀다. 추7월 가을 7월. 軍君은 京으로 들어왔다. 이미 다섯 명의 자식이 있었다. <* `百濟新撰a 에서 말하기를, 辛丑年172)에 蓋鹵王은 아우 琨支君을 보내어 大倭173에 가서 天皇을 섬기면서 169) 各羅島 : 현 佐賀(사가)縣 東松浦(히가시마츠우라)郡 鎭西(친제이)町의 加唐島(카카라시마)로 보 기도 한다. 日本書紀 武烈 4年 是歲條에 各羅海中有主島 라고 나온다. 170) 嶋君 : 武烈 4年 是歲條에 島王이 보인다.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上(1967, 岩波書店, 470쪽)에서는 嶋君과 嶋王 모두 古訓을 세마키시(セマキシ) 로 기재하고 있다. 세마 는 嶋, 키시 는 君(혹은 王)이라는 의미이다. 모두 武寧王을 지칭한다. 171) 武寧王 : 백제의 제25대 왕(재위 501~523). 三國史記 卷26 百濟本紀에 의하면 牟大王(東城 王 末多王)의 둘째 아들로 이름은 斯摩(혹은 隆)이다. 501년에 즉위하여 523년(武寧王 23) 3월 에 사망하였다.`武寧王墓誌a에도 무령왕이 癸卯年(523) 6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寧東大將軍百濟斯麻王年六十二歲, 癸卯年五月丙戌朔七日壬辰崩). 삼국사기 에는 무령왕 이 태어난 해를 기록하고 있지 않으므로`武寧王墓誌a의 기록을 통해 계산해 보면 무령왕이 태 어난 해는 462년이 된다. 그런데 日本書紀 에는 雄略 5년(461) 6월에 무령왕이 태어났다고 기 록되어 있으므로`武寧王墓誌a와 1년의 차이가 난다. 또한 일본서기 에는 무령왕의 즉위를 武 烈 4년(502)으로 전하고 있다. 무령왕이 사망한 시기에 대해서는 일본서기 가 繼 17년(523) 으로 전하고 있으므로 삼국사기 및`武寧王墓誌a모두 일치한다. 한편 무령왕의 계보에 대해서 도 三國史記 와 日本書紀 는 달리 전하고 있다. 三國史記 에는 末多王(東城王)의 아들로 기록 되어 있는데 日本書紀 武烈 4年 是歲條의 분주인`百濟新撰a에는 武寧王은 琨支의 아들로서 末多王(東城王)과 모계를 달리하는 異母兄이라고 되어 있다. 이처럼 무령왕의 출생과 계보에 관 해서는 양 사서가 달리 전하고 있기 때문에 이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주 252) 참조). 172) 辛丑年 : 461년. 三國史記 에 의하면 蓋鹵王 7년, 日本書紀 에서는 웅략 5년에 해당된다. 그

30 58 先王의 우호를 다지도록 하였다. 고 한다.> 雄略天皇 7년(463) 是歲 日本書紀 59 은 멀리서 조용히 듣고는 마음속으로 기뻐하였다. 곧 稚媛을 女御176)로 삼고자 田狹을 任 那國司177)로 임명하였다. 얼마 후 천황은 稚媛을 불러들였다. 田狹臣은 稚媛에게 장가들어 兄君(에키미)178) 弟君(오토키미)179)을 낳았다.<*別本에는 田狹臣의 부인의 이름은 毛媛(케 히메)라 한다. 葛城襲津彦의 아들 玉田宿 (타마타노스쿠네)의 딸이다. 천황은 그녀의 용 이 해에 吉備上道臣田狹(키비노카미츠미치노오미타사)174)는 천황을 가까이 모시고 있으 모가 아름답다는 말을 듣고 남편을 죽이고 그녀를 얻었다고 한다.> 田狹은 이미 임지에 면서 친구에게 줄곧 稚媛(와카히메)175)을 자랑하며 천하의 미인이라도 나의 부인과 같은 가서 천황이 자신의 부인을 빼앗은 소식을 듣고는 도움을 요청하기 위해서 신라로 들어 이는 없다. 아름답고 너그러우며 온갖 좋은 점을 갖추고 있다. 발랄하고 온화하여 여러 가려고 하였다. 당시 신라는 中國180)을 섬기지 않고 있었다. 천황은 田狹臣의 아들 弟君과 좋은 점을 갖추고 있다. 화장할 필요도 없고, 향수를 뿌릴 필요도 없다. 넓은 세상에 이와 라고 吉備海部直赤尾(키비노아마베노아타히아카오)181)에게 너희들은 가서 신라를 쳐라. 비할 바가 없다. 요즘 세상에 좀처럼 볼 수 없는 빼어난 미인이다. 라고 말하였다. 천황 詔를 내렸다. 그 때 측근에 있던 西漢才伎歡因知利(가후치노아야노테히토쿠칸인치리)182) 런데 宋書 에서는 大明 6年(462)에 倭國世子인 興(安康)이 安東將軍倭國王으로 책봉되었다고 적고 있듯이 辛丑年의 倭王은 興(安康)과 武(雄略)의 아버지인 濟, 즉 允恭이다. 173) 大倭 :`百濟新撰a이 일본서기 에 인용될 때 윤색된 표현일 것으로 여겨진다. 日本書紀 武烈 4年(502) 시세조에 인용된`百濟新撰a에는 倭 로 표기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 82) 참조. 174) 吉備上道臣田狹 : 氏는 吉備氏, 姓은 臣, 이름은 田狹이다. 古事記 孝元段과 日本書紀 應神 22年 9月條 등에 下道臣(시모츠미치노오미)과 함께 吉備氏의 조상으로 나온다. 따라서 일본서 기 의 吉備上道臣田狹 任那 파견 기사는 吉備氏의 任那 관련 최초의 기사로 吉備氏와 加耶 지역과의 관계를 기원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 것으로 볼 수 있다. 吉備氏는 5세기 대에 현 재 岡山(오카야마)縣과 廣島(히로시마)縣 동부지역을 중심으로 철과 소금 교역 등 瀨戶內海(세토 나이카이)의 해상교통을 장악하여 세력을 넓혔고, 大王家와 혼인관계를 맺고 국내 군사행동에도 깊이 관여함으로써 번영을 누린 씨족이다(志田諄一, 1971, 古代氏族の性格と傳承, 雄山閣, 145~154쪽). 吉備 지역에 있는 造山古墳(岡山市新庄下)과 作山古墳(總社市三須) 등 大王의 古 墳에 필적할 만한 巨大古墳(前方後圓墳)은 4~5세기에 이 지역 수장의 세력이 강했음을 말해준 다. 그러나 5세기 중엽 이후가 되면 몇 번의 반란을 일으킨 후 모두 진압되고, 이로 인해 吉備지 역에 白猪 兒島屯倉 등 많은 屯倉이 설치되면서 대왕에게 대부분 복속된다. 7세기에 이르러 吉 備氏는 上道 下道 三野 香屋 등의 씨족으로 분화된다. 따라서 5세기 단계에 吉備上道臣 운 운하는 것은 7세기 이후 혹은 日本書紀 가 편찬될 당시에 윤색된 내용으로 보아야 한다. 다만 5세기 중엽 이후 길비씨의 반란전승 및 둔창 설치는 이전에 길비씨가 장악하고 있었던 가야를 비롯한 한반도 남부와의 외교 교섭권을 大和政權이 확보하게 된 사실을 반영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平野邦雄, 1970,`吉備氏と和氣氏a, 古代の日本 4, 角川書店). 175) 稚媛 : 雄略 7年 是歲條에 인용된 別本 에는 이름이 毛媛 으로 葛城襲津彦의 아들 玉田宿 (다마타노스쿠네)의 딸이라고 적고 있다. 淸寧卽位前紀에는 웅략이 죽은 후 星川(호시카와)皇子 을 부추겨서 난을 일으켰지만 실패하여 모두 불에 타 죽었다고 한다. 176) 女御 : 왕의 침실에서 수발드는 여자. 周禮 天官에 女御, 掌敍御于王之燕寢 이라고 나온다. 177) 任那國司 : 미마나노쿠니노미코토모치 라고 훈독하며, 日本書紀 에 의하면 大和政權에서 任 那 지역에 파견한 지방관을 말한다. 그 임무는 임나 모든 지역의 군사적 지배나 신라 또는 백 제와의 교섭 등에 관여하였다고 한다. 그러나 國司 는 율령제하에서 중앙에서 각 國에 파견한 지방관이다. 7세기 후반 천무조에 國이 확정된 후 701년 대보율령이 시행되면서 國司制가 확립 되었다. 따라서 雄略朝 단계에는 國司 란 지방관은 존재하지 않았으며, 大化이전 단계에서 보 이는 國司 는 國宰(쿠니노미코토모치) 라는 임시 사자의 성격을 가진 존재로 이해된다. 즉 任 那國司 라는 용어는 일본서기 편찬자에 의해 조작 윤색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178) 兄君 : 日本書紀 淸寧卽位前紀에 의하면 星川皇子의 모반에 동참했다가 불에 타죽는다. 179) 弟君 : 본문에서는 부인인 樟媛에게 살해당한 것으로 나오지만, 분주로 인용된 或本에는 백제로 부터 돌아와 漢手人部 등을 바쳤다고 한다. 이것을 근거로 흠명 5년 3월조의 분주에 보이는 吉 備弟君臣과 동일인으로 보기도 한다(三品彰英, 1964,`上代における吉備氏の朝鮮經營a, 朝鮮 學報 36). 180) 中國 : 日本. 日本書紀 편찬자의 中華思想에 입각한 표현이다. 181) 吉備海部直赤尾 : 吉備海部直氏은 吉備씨의 일족으로 吉備氏 휘하의 海部의 통솔자였다. 赤尾는 일본서기 에서 처음 등장하는 吉備海部直氏 사람이다. 日本書紀 雄略紀와 敏達紀에는 해외파 견 사신으로 활약한 吉備海部直氏의 사람들이 많이 보인다. 여기서 海部(아마베)는 海人部라고 도 하며 大王에게 해산물의 공납 및 선박 제조, 해양 운송 등을 담당한 집단이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應神朝에 처음 설치되어 한반도제국과 교류하는데 많은 활약을 하였다. 각지에 海部直 首 公을 두고 이들을 통솔하였다. 182) 西漢才伎歡因知利 : 西漢氏(河內漢)는 5세기 말에서 6세기 전반에 걸쳐 백제 또는 가야에서 왜 국으로 건너가 河內지방을 중심으로 기술 직능 집단으로 활약하였다. 이 씨족은 河內의 漢人들 을 통솔하면서 세력을 쌓은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이다. 姓은 처음에는 直, 이후에 連, 천무조에

31 60 日本書紀 61 가 저보다 재주 있는 자가 韓國183)에는 많이 있습니다. 불러들여 부리도록 하십시오. 라 묻고 海部直赤尾와 함께 백제가 바친 手末才伎189)를 데리고 큰 섬에 머물렀다. 천황은 弟 고 나아가 아뢰었다. 천황은 群臣에게 조서를 내려서 그렇다면 마땅히 歡因知利를 弟君 君이 없어진 것을 듣고 日鷹吉士堅磐(히타카노키시카타시와)190) 固安錢(코안센)을 파견 등에게 딸려 보내 백제로 가도록 하고, 아울러 勅書를 내리니 재주가 있는 자를 바치도록 하여<*堅磐, 이것은 柯陀之波(카타시하)라고 한다.> 모두 復命하도록 하였다. 그리고 倭 184) 하여라. 라고 하였다. 이에 弟君은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거느리고 백제로 갔다. 國神 國의 吾礪(아토)의 廣津邑(히로키츠노무라)에 職人들이 살도록 하였지만,191) 병에 걸려 죽 이 老女로 변신하여 홀연히 길에 나타났다. 弟君은 나아가 나라(신라)까지의 거리를 물었 는 자가 많았다.<*廣津, 이것은 比慮岐頭(히로키츠)라고 한다.> 이 때문에 천황은 大伴大 다. 老女는 하루만 더 가면 도착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弟君은 스스로 길 連室屋에게 조서를 내려 東漢直 (야마토노아야노아타이츠카)192)에게 명하여 新漢陶部 이 멀다고 생각하여 토벌하지 않고 돌아왔다. 백제가 바친 今來才伎185)를 大島186)에 모아 놓고 바람을 기다린다는 것을 핑계 삼아 체류한지 한 달이 지났다. 任那國司 田狹臣은 弟 君이 치지 않고 돌아간 것을 기뻐하며 몰래 백제에 사람을 보내 弟君에게 너의 목이 얼 마나 질기길래 사람을 치려고 하는가. 듣자니 천황은 나의 부인을 취하여 이내 兒息187)<* 아들은 이미 위의 문장에 보인다.>까지 있다고 한다. 지금 걱정스러운 것은 禍가 순식간 에 닥치리라는 것이다. 나의 아들인 너는 백제에 머물며 일본과 교류하지 않도록 하라. 나도 任那에 머물면서 일본과는 교류하지 않을 것이다. 라고 경계하여 말하였다. 弟君의 부인 樟媛(쿠스히메)188)은 국가에 애정이 깊고 君臣의 의리를 존중하였다. 충성이 태양보 다 밝았으며 절개는 靑松보다 굳었다. 이 모반을 미워하여 그 남편을 죽여서 방안에 몰래 는 忌寸을 사성을 받았다. 동족으로는 河內氏 山背氏 台氏 등이 있다. 才伎는 技術者를 말하 며 歡因知利는 인명이다. 183) 韓國 : 日本書紀 에서는 넓은 의미로 고구려를 포함한 韓半島諸國을 가리킬 때와 좁은 의미로 고구려를 제외한 한반도 남부의 諸國을 가리킬 때가 있다. 여기서는 후자를 의미한다. 184) 國神 : 新羅의 國神. 185) 今來才伎 : 今來란 倭에 새로 왔다. 는 의미이다. 才伎는 日本書紀 에 의하면 陶器制造 鞍 作 畵家 錦織 通釋 등의 재능과 기술을 가진 집단을 지칭한다. 따라서 今來才伎는 5세기 중 엽(雄略朝)에서 6세기 초에 걸쳐 倭에 이주해 온 도래계 기술자 집단을 일컫는다. 즉 앞 시대에 건너온 이주민에 대해 상대적인 말로서 새로 왔다는 의미의 新來才伎 또는 新來漢人 이라고 도 한다. 雄略 7年 是歲條의 후반부 기록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이들은 漢氏(西漢 東漢氏)에 게 통솔되었다. 한편 今來는 日本書紀 에서 지명으로도 나온다(大化 5年 3月條에 今來大槻라는 지명이 보인다). 186) 大島 : 현 경남의 南海. 繼 23年 3月 是月條에도 보인다. 187) 兒息 : 磐城皇子와 星川稚官皇子를 일컫는다. 188) 樟媛 : 자세히 알 수 없다. 다만 일본서기 편찬자가 樟媛에 대해서 국가에 굳었다 라고 평가한 내용은 文選 冊魏公九錫文에 나오는 표현(君執大節. 精貫白日)과 비슷하다. 189) 手末才伎 : 주 182)와 주 185) 참조. 190) 日鷹吉士堅磐 : 日鷹吉士는 日鷹(紀伊國 日高郡) 지역을 기반으로 삼고 외교 혹은 항해에서 활약 한 도래계 씨족으로 紀氏(주 94) 참조)의 휘하에 있었다. 堅磐와 固安錢은 이름이다. 吉士는 주 로 외교 사무 및 항해 등의 일에 종사하는 집단에게 주어진 姓이다. 吉士라는 명칭은 일반적으로 6세기 중엽에 성립한 신라의 관위인 吉士(吉之 吉之智 稽知)의 영향을 받아 성립한 것으로 보 고 있다(三浦圭一, 1957,`吉士についてa, 日本史硏究 34). 대표적인 길사계 씨족으로 日鷹吉 士 이외에 難波吉士 三宅吉士 草香部吉士 등 모두 19씨족이 있었다. 이들 씨족들 중에는 신라 뿐만 아니라 백제와 가야에서 건너간 집단도 있으며(加藤謙吉, 2001, 吉士と西漢氏-渡來氏族 の實像, 白水社, 17~18쪽), 대부분 천무 12년(683)에 連姓을 사성받았다. 일본서기 에는 웅략 7년 시세조의 日鷹吉士의 백제파견 기사를 시작으로 천무조까지 한반도 제국과 吉士系 씨족과 의 빈번한 외교관계 기사가 보이고 있다. 그런데 吉士系 씨족은 7세기 말 이후부터는 그 모습을 거의 드러내지 않고 있다. 같은 도래계 집단인 史姓系 씨족이 8세기 이후에도 외교나 학문 분야 에서 활발한 활동을 하는데 비해 吉士系 諸氏는 중앙이나 외교의 일선에서도 전혀 활동하고 있 지 않다. 191) 倭國 하였지만 : 여기서 倭國은 日本이 아니라 大和(야마토)國을 가리킨다. 吾礪에 대해서 는 和名類聚抄 에 보이는 大和國 城下郡 阿刀村(현재 奈良縣 磯城郡 田原本町 부근)으로 비정 된다. 推古 18년(610) 10월에 新羅使가 숙박했던 阿斗河邊館(阿斗 지역의 강 근처에 있는 館이 라는 의미)의 阿斗(아토)가 吾礪와 같은 지역일 것이다. 廣津邑도 그 부근에 있던 大和川 또는 寺 川의 한 나루터였을 것이다. 192) 東漢直 : 日本書紀 應神 20年 秋9月條에 東漢氏(倭漢氏)의 조상인 阿知使主의 자식 都加使 主로 나온다. 이에 의하면 後漢 靈帝의 자손인 阿知使主와 그 자식 都加使主가 17縣의 무리를 이끌고 왜국에 건너가 東漢氏의 선조가 되었다고 한다. 日本書紀 에 東漢氏에 관한 기사는 모 두 28군데 걸쳐 보이는데 雄略 7年 是歲條 기사부터 사실로 인정되고 있다(關晃, 1953,`倭漢氏 の硏究a, 史學雜誌 62~9). 東漢氏는 5세기 말에서 6세기에 걸쳐 河內(카와치)에 본거를 둔 西 漢氏와 비교하여 주로 大和國 高市郡 檜前鄕(현재 奈良縣 明日香村)을 중심으로 활동하였기 때 문에 東漢氏 혹은 倭漢氏라고 불리게 되었다. 西文氏와 함께 大和政權 내에서 정치 군사 재 정 각종 기술 등 다방면에 걸쳐 활약한 대표적인 도래계 씨족이다. 日本書紀 에는 20여씨에

32 62 日本書紀 63 (이마키노아야노스에츠쿠리베)193)高貴(코우키) 鞍部(쿠라츠쿠리베)194)堅貴(켄키) 畵部 (마카미노하라)198) 세 곳으로 옮겨 살도록 하였다.<*或本에는 吉備臣弟君가 백제에서 돌 (에카키베)195)因斯羅我(인시라가) 錦部(니시코리베)196)定安那錦(죠우안나코무) 譯語卯 아와 漢手人部(아야노테히토베)199) 衣縫部(키누누이베)200) 육人部(시시히토베)201)를 바 安那(오사보우안나) 등을 上桃原(카미츠모모하라)197) 下桃原(시모츠모모하라) 眞神原 쳤다고 한다.> 雄略天皇 9년(465) 이르는 東漢氏 枝氏가 보이고 있다. 東漢氏의 원래 성은 直이었으며, 天武 11年(682)에 連姓을 사성받았다. 천무 14년에는 천무 8성의 제4위성인 忌寸성을 사성받았다. 그런데 이 東漢氏의 출 자에 대해서 크게 두 가지로 다르게 이해되고 있다. 續日本紀 卷40 延曆 4年(785) 6月條의 동 한씨의 有力枝旅인 坂上氏출신 예田麻呂의 상표문에 의하면 東漢氏는 중국 後漢 皇帝의 후예라 고 한다. 현재 東漢氏의 출자를 중국의 후한 황제로 보는 연구자는 없다. 그러나 續日本紀 의 기사를 근거로 동한씨를 帶方지역 출신으로 보기도 한다(坂上義種, 1987,`渡來系の氏族a, 日 本の古代 1, 中央公論社 ; 김은숙, 1988-b, 앞의 글). 김은숙의 견해에 따르면 속일본기 이외 에 일본서기 신찬성씨록 및 삼국사기 에 보이는 漢 의 용법으로부터 漢 은 낙랑 대방 지역에 이주해서 생활하던 남북조 시대 이전의 중국인을 가리킨다는 것이다. 한편 원래 가야제 국 가운데 安羅國 사람들이 이주해 갔기 때문에 아야(アヤ) 라고 부르다가(鮎貝房之進, 1972, `漢をアヤ又アナ訓じたる就いてa, 雜攷, 國書刊行會 ; 加藤謙吉, 1991,`東漢氏の氏族組織の 成立a, 大和政權と古代氏族 ), 아야 라는 씨명의 음훈에 맞는 漢 자가 대표성을 갖는 문자로 정착했다고 보기도 한다. 즉 동한씨는 가야제국의 유력국이었던 안라국이 바로 동한씨 선조의 본거지였으며, 다른 가야지역의 이주자나 일부 백제계와도 의제적 동족관계를 맺었다고 이해되 기도 한다(연민수, 2005, 앞의 글). 193) 新漢陶部 : 新漢은 今來才伎 또는 今來漢人과 같다. 이전에 도래한 漢人에 대해서 이 때 새롭게 건너온 漢人이라는 의미이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東漢氏는 5세기 초에서 중엽(應神 仁德朝) 무렵에 이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데, 5세기 중엽에서 6세기 초에 걸쳐 비교적 늦게 이주한 今 來漢人을 東漢氏가 동족화하여 세력을 확대하였다. 陶部는 陶器를 만들어 공납하는 집단으로 奈 良시대에는 그 일부가 雜戶 品部로서 관영공방 등에 배속되었다. 이 시기 陶部의 존재는 고대 일본에서 재래의 土師器를 대신해서 須惠器가 제작되기 시작한 것과 관계가 깊다. 즉 수에키의 제작은 한반도의 도질토기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아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는데(西谷正, 1992,`九 州北部初期須惠器とその系譜a, 異國と九州-歷史における國際交流と地域形成-, 雄山閣), 이 에 일본서기 기사는 시사하는 바가 크다. 194) 鞍部 : 마구류를 제작하는 집단으로 馬文化의 보급과 기마풍습의 전래와 관련이 있다. 鞍作 혹은 案作이라고도 한다. 195) 畵部 : 圖工 집단. 일본서기 崇峻 元年(588) 시세조에 백제에서 화공 白加라는 인물을 보냈다 는 기록이 보인다. 196) 錦部 : 錦織部라고도 하며 고급 직물을 짜는 집단이다. 197) 上桃原 : 日本書紀 推古 30年(622) 5月條에 蘇我馬子(소가노우마코)를 桃原에 墓를 쓰고 장사 지냈다는 기록이 있다. 통설에는 蘇我馬子의 묘를 高市郡 明日香村(현 奈良縣 明日香村)에 있는 3월 고 하니 천 3월.202) 천황이 직접 신라를 정벌하고자 하였다. 神이 천황에게 가지 말라. 황이 가지 않았다. 紀小弓宿 (키노오유미노스쿠네)203) 蘇我韓子宿 (소가노카라코노스 쿠네)204) 大伴談連(오오토모노카타리노무라지)205)<*談, 이는 箇陀利(카타리)라고 한 다.> 小鹿火宿 (오카히노스쿠네)206) 등에게 조칙을 내려서 신라는 서쪽 땅에 있으면서 누대에 걸쳐 신하를 칭하며 朝聘을 어기지 않고 貢職207)도 성실하게 바쳤다. 짐이 천하를 石舞臺(이시부타이)古墳으로 보고 있다. 이에 따르면 桃原은 明日香(아스카)村 일대로 추정된다. 198) 眞神原 : 日本書紀 崇峻 元年(588) 是歲條에 始法興寺作, 此地飛鳥眞神原名 라는 기록이 보 인다. 여기서 法興寺는 飛島寺를 가리키므로 眞神原은 현 奈良縣 明日香(아스카)村의 飛鳥 지역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199) 漢手人部 : 漢은 新漢, 手人部는 뛰어난 工人집단을 의미한다. 앞서 나온 여러 品部의 총칭으로 사용되었다. 200) 衣縫部 : 의복의 제작 및 재봉에 종사한 工人 집단으로 錦部와 함께 각종 의류를 조정에 납품한 것으로 여겨진다. 201) 육人部 : 宮廷의 음식물 조리를 담당한 집단. 膳夫(카시하데)가 주로 어류 조리를 담당한 것에 비해 육人部는 육류 조리를 담당한 것으로 추정된다. 202) 雄略 9年 3月 : 雄略 9年(465)은 신라 慈悲王 8年에 해당된다. 이 시기는 신라와 백제가 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하정책에 대항하고 있던 시기이다. 이러한 시기에 고구려가 倭에 조공했다거 나 신라가 백제의 성을 탈취했다는 것은 삼국사기 의 내용에 비추어 볼 때 맞지 않는다. 203) 紀小弓宿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본조의 後文에 의하면 신라정벌군 의 대장군으로 활약 하다가 신라에서 病死했다고 전한다. 204) 蘇我韓子宿 : 公卿補任 에는 蘇我滿智宿 의 아들이며 蘇我高麗의 아버지로 기록되어 있다. 신라에서 紀大磐宿 와 갈등을 빚고 결국 大磐宿 에게 살해당하였다. 205) 大伴談連 : 大伴室屋大連의 아들이자 大伴金村大連의 아버지. 신라에서 전사하였다. 206) 小鹿火宿 : 小弓宿 의 아들이라고도 전하나 자세히 알 수 없다. 日本書紀 雄略 9年 5月條 에 角臣의 조상으로 나온다. 207) 貢職 : 貢賦라고도 하며 공물이란 뜻.

33 64 日本書紀 다스리게 된 후에는 몸을 對馬의 밖에 두고, 흔적을 羅208)의 밖에 숨긴 채 고구려의 조 공을 막고 백제의 城을 병탄하였다. 하물며 이제 다시 朝聘을 그치고 貢職도 바치지 않고 吳나라 사람이라고도 한다. 磐余(이와레)212)의 吳琴을 타는 65 手屋形麻呂(사카테노야카타 마로)213) 등이 그 후예이다. 있다. 이리의 새끼 같은 본성을 가지고 있어 배부르면 가버리고, 배고프면 와서 붙는다. 너희들 4명의 卿을 大將으로 임명한다. 마땅히 왕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정벌하고 천벌 을 내리도록 하라. 고 명령하였다. 雄略天皇 20년(476) 동214) 겨울. 高麗王이 크게 군사를 일으켜 백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215) 그때 소수의 잔병 하5월 여름 5월. 紀大磐宿 (키노오이와노스쿠네)209)는 아버지의 죽음 소식을 듣고 이내 신라 들이 倉下216)에 모여 있었다. 무기와 양식은 이미 바닥난 상태여서 근심과 울음소리가 심 로 가서 小鹿火宿 가 이끌던 兵馬 船官과 여러 小官을 장악하여 명령을 마음대로 하 하였다. 그 때 고구려의 여러 장수들이 왕에게 백제의 심성은 보통이 아닙니다. 신이 볼 였다. 이에 小鹿火宿 는 大磐宿 를 깊이 원망하여 韓子宿 에게 거짓으로 大磐宿 때마다 저도 모르게 망설여집니다. 다시 퍼져나갈까 두려우니 이를 쫓아 없애버리기를 가 저에게 말하기를 내가 다시 韓子宿 가 관장하고 있는 官을 장악할 날은 그리 멀지 청합니다. 라고 말하였다. 왕이 그럴 수 없다. 과인이 듣건대 백제국은 일본국의 官家217) 않았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바라건대 굳게 지키십시오. 라고 고하였다. 이로 인해 韓子 로서 그 유래가 오래 되었다고 한다. 또한 그 왕이 천황을 섬기고 있는 것도 사방의 주변 宿 와 大磐宿 는 틈이 벌어졌다. 이에 백제왕210)은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작은 일로 말 나라가 모두 아는 바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이에 그만두었다. <* `百濟記a 에서 말하기 미암아 사이가 벌어졌다는 말을 듣고 韓子宿 등에게 사람을 보내 국경을 살펴보고 싶 으시면 청컨대 왕림해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그리하여 韓子宿 등은 말고삐를 나란 히 하고 갔다. 강가에 도착하여 大磐宿 는 말에게 물을 먹였다. 그때 韓子宿 가 뒤에 서 활을 쏘았는데 大磐宿 의 말안장 뒤편의 橫木에 꽂혔다. 大磐宿 는 놀라 뒤돌아서 서 韓子宿 를 쏘아서 떨어뜨리자 韓子宿 는 강 가운데서 죽었다. 이 세 명의 신하는 예전부터 서로 다투었는데 지금도 가던 길에서 어지러이 다투어 백제의 왕궁에 이르지 못하고 돌아왔다. 雄略天皇 11년(467) 추7월 가을 7월. 백제국에서 도망해 온 자가 있었다. 스스로 貴信211)이라 하였다. 貴信은 또한 208) 羅 : 神功 5年 春3月條에는 草羅로 나오며 良, 즉 현 경남 梁山으로 추정된다. 209) 紀大磐宿 : 신라정벌군 의 대장군이었던 紀小弓宿 의 아들이다. 顯宗 13年 是歲條에는 紀 生磐宿 로 나오기도 한다(주 203)과 주 238) 참조). 210) 百濟王 : 雄略 9年을 서기로 추정하면 465년이 되므로, 이 시점에서 백제왕은 蓋鹵王이다. 211) 貴信 : 백제를 경유하여 왜국에 건너 간 중국인이다. 212) 磐余 : 大和(야마토)國의 한 지명으로 추정되는데,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213) 手屋形麻呂 : 手는 지명으로 현 奈良縣 磯城(시키)郡 田原本(타와라모토)町의 阪手(사카테) 를 가리킨다. 屋形麻呂란 인물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214) 冬 高麗王大發軍兵 伐盡百濟. 爰有小許遺衆. 聚居倉下. 兵粮旣盡. 憂泣玆深. 於是高麗諸將言於 王曰. 百濟心許非常. 臣每見之. 不覺自失. 恐更蔓生. 請遂除之. 王曰. 不可矣. 寡人聞. 百濟國者 爲日本國之官家. 所由來遠久矣. 又其王入仕天皇. 四隣之所共識也. 遂止之. <*百濟記云. 蓋鹵王 乙卯年冬. 大軍來攻大城七日七夜. 王城降陷. 遂失尉禮. 國王及大后王子等. 皆沒敵手>. 215) 고구려왕이 멸망시켰다 : 三國史記 卷18 高句麗本紀 長壽王 63年(475)에 백제의 왕도인 漢城을 공격하여 개로왕을 살해했다는 기사와 대응하지만, 시기는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본조는 이하 雄略 21年 春3月條 및 同 23年 夏4月條와 일련의 기사로 모두`百濟記a를 참고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216) 倉下 :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上, 1967, 岩波書店, 496쪽)와 日本古典文學全集 日本書 紀 (2, 1996, 小學館, 204쪽) 모두 헤스오토 라고 읽으며 백제어일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 러나 倉 은 日本書紀 에서 백제 신라 가야 등의 한반도 제국이 왜국의 朝貢國임을 나타낼 때 사용한 官家 혹은 屯倉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진다. 따라서 倉下라는 말은 백제어가 아닌 원 래 쿠라지(クラジ) 라는 일본어로 倉庫의 床下 를 의미하며 일본서기 편찬자가 윤색한 표현 으로 볼 수 있다. 217) 官家 : 주 17) 참조. 218) 乙卯年 : 蓋鹵王 21년인 475년. 한성함락과 개로왕의 사망 시기는`百濟記a와 三國史記 가 서

34 66 를, 蓋鹵王 乙卯年218) 겨울에 日本書紀 219) 의 대군이 공격해 와서 大城220)을 7일 낮, 7일 밤을 치 67 麻那利는 任那國의 下 呼唎縣228)의 別邑이다.> 자 王城이 함락되어 드디어 尉禮221)를 잃었다. 국왕 및 大后222) 王子 등이 모두 적의 손에 죽었다. 고 한다.> 雄略天皇 21년(477) 춘3월223) 봄 3월. 천황은 백제가 고구려에 의하며 멸망당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久麻那利(코무나 雄略天皇 23년(479) 하4월229) 여름 4월. 백제 文斤王230)이 薨하였다. 天王231)은 昆支王232)의 다섯 아들 중 둘째인 末多 王이 어리면서도 총명하여 칙을 내려 內裏233)로 불렀다. 친히 머리를 어루만지며 은근히 타이르면서 그 나라의 왕이 되도록 하였다. 이에 병기를 주고 아울러 筑紫國의 군사 500 리)224)를 汶洲王에게 주어, 그 나라를 구해 일으켰다. 그 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기를 백 제국은 비록 이미 망하여 倉下에 [잔병이] 모여 걱정하고 있다고 하였지만, 실은 천황에 게 의지하여 다시 그 나라를 일으켰다. 고 하였다.<*汶洲王은 蓋鹵王의 母弟이다.225)`日 226) 에 久麻那利를 末多王227)에게 하사하였다고 한다. 무릇 이는 잘못일 것이다. 久 本舊記a 로 일치한다. 219) : 백제의 입장에서 부르는 고구려에 대한 멸칭이다. 220) 大城 : 漢城. 漢은 크다는 의미로 大와 뜻이 통한다. 221) 尉禮 : 漢城. 日本書紀 神功 49年 春3月條의 意流와 음이 통한다(주 60) 참조). 222) 大后 : 개로왕의 왕비. 223) 天皇聞百濟爲高麗所破. 以久麻那利賜汶洲王. 救興其國. 時人皆云. 百濟國. 雖屬旣亡. 聚憂倉下. 實賴於天皇. 更造其國. <*汶洲王蓋鹵王母弟也. 日本舊記云. 以久麻那利. 賜末多王. 蓋是誤也. 久麻那利者. 任那國下 呼利縣之別邑也>. 224) 久麻那利 : 熊津. 久麻(코무)는 熊, 那利(나리)는 津 혹은 川의 의미이다. 倭가 백제에게 久麻那 利를 하사하였다는 내용은 일본서기 편찬자의 조작이다. 225) 汶洲王 蓋鹵王의 母弟이다 : 汶洲王은 백제의 제22대 왕인 文周王(재위 475~477). 文周王과 蓋鹵王의 관계에 대해서는 사료에 따라 다르게 전하고 있다. 먼저 三國史記 卷25 百濟本紀 蓋 鹵王 21年 9月條와 文周王 卽位年(475)條에는 文周王이 개로왕의 아들로 기록되었지만, 일본 서기 에는 文周王이 개로왕의 동생임을 추측할 수 있는 기록이 있다. 즉 일본서기 웅략 5년 하4월조와 7월조 인용의`백제신찬a에 의하면 琨支가 蓋鹵王의 동생이라고 하는데(주 167) 참 조), 그 琨支(昆支)는 三國史記 문주왕 3년(477) 4월조에서 문주왕의 동생이라고 하므로 문주 왕과 개로왕은 형제사이가 된다. 따라서 본조에서 문주왕을 개로왕의 母弟라고 한 기록은 異母 弟 혹은 同母弟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226) 日本舊記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227) 末多王 : 백제의 제24대 왕인 東城王(재위 479~501).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에 의하면 휘 가 牟大이고 문주왕의 아우인 곤지의 아들로 나온다. 501년 11월에 東城王이 加에게 암살당하 자 뒤를 이어 무령왕이 즉위하였다. 日本書紀 武烈 4年(502) 是歲條에는 末多王이 暴虐無道 하였기 때문에 國人들이 그를 제거하고 무령왕을 세웠다고 적고 있다. 228) 下 呼唎縣 : 日本書紀 계체 6년(512) 冬12月條에는 任那 4縣 중의 하나인 下 唎 로 나온 다. 일찍이 下 呼唎縣의 위치에 대해서는 충남 동남부에서 전북 북동부에 걸친 지역으로 보거 나(鮎貝房之進, 1931, 앞의 글), 전남 남서부 또는 영산강 지역(末松保和, 1949, 앞의 글), 낙동 강 중하류 지역(千寬宇, 1977, 앞의 글)으로 추정되었다. 또는 于勒 12곡명 가운데 達已 가 보 이는데, 唎 와 동일 지역으로 추정하여 하동군 하동읍으로 보기도 한다(田中俊明, 1990,`于 勒十二曲と大加耶聯盟a, 東洋史學硏究 48~4). 그런데 任那國下 呼唎縣別邑 이라는 표현에 서 國의 하위조직으로 縣을 두는 제도 자체가 당시 한반도 제국에는 없었다. 왜국의 경우도 일 본서기 에는 國-縣 표기가 여러 곳에 나타나지만 당시 國-縣制의 존재 자체가 부정되기도 한다 (윤석효, 2004,` 日本書紀 와 伽耶a, 漢城史學 18). 따라서 倭가 백제에게 久麻那利를 사여 하였다는 내용 자체가 조작된 것인 만큼 이 논의의 연장선상에서 久麻那利를 任那國下 呼唎縣 의 別邑이라고 서술한 분주 내용 역시 조작된 것으로 이해된다. 229) 百濟文斤王薨. 天王以昆支王五子中. 第二末多王. 幼年聰明. 喚內裏. 親撫頭面. 誡 慇懃. 使 王其國. 仍賜兵器. 幷遣筑紫國軍士五百人. 衛送於國. 是爲東城王. 230) 文斤王 : 백제의 제23대 왕인 三斤王(재위 477~479). 三國史記 권26 백제본기 삼근왕 즉위 년조에 의하면 문주왕의 장자로서 문주왕이 477년 9월 解仇에게 암살당한 후, 어린나이에 즉위 하였다. 그리고 삼근왕의 사망 시기는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479年 冬11月로 기록하고 있 는데 비해 일본서기 에는 479年 夏4月로 약간의 차이를 보이고 있다. 231) 天王 : 이 시기의 왜왕의 칭호는 大王이었으므로 원사료에는 大王이었을 것이다. 다만 중국 위진 남북조시대에 북조계의 여러 황제 중에 王에서 天王을 거쳐 이후 천황으로 칭호가 격상된 경우 가 있듯이 본조도 이러한 예와 비슷하게 倭王에 대한 존칭으로 天王이 사용되었을 가능성도 있 다. 한편 法王帝說 에 四天王寺를 四天皇寺 로 기록하였듯이 고대 일본에서는 王과 皇을 혼동 하는 경우도 있었던 듯 하다. 232) 昆支王 : 雄略 5年 夏4月條 軍君(주 167) 참조). 233) 內裏 : 후대의 용어로 천황이 거주하던 곳을 일컫는다.

35 68 日本書紀 69 魯239) 那奇他甲背240) 등의 계책을 써서 백제의 適莫爾解241)를 爾林242)에서 살해하였다. <* 명을 보내어 본국까지 호위하도록 하였다. 이가 東城王이다. 爾林은 고구려의 영토이다.> 帶山城243)을 쌓아서 東道를 막아 지켰다. 군량을 운반하는 是歲234) 235) 이 해에 백제가 바치는 공물이 여느 때보다 많았다. 筑紫의 安致臣(아치노오미) 과 馬 236) 飼臣(우마카이노오미) 등이 船師를 이끌고 고구려를 공격하였다. 권15 弘計天皇 顯宗天皇237) 3년(487) 是歲 이 해에 紀生磐宿 (키노오이와노스쿠네)238)는 任那를 점거하고 고구려와 통교하였다. 장차 서쪽 三韓의 왕이 되고자 官府를 정비하고 스스로 神聖이라 칭하였다. 任那의 左 234) 是歲. 百濟調賦. 益於常例. 筑紫安致臣馬飼臣等. 率船師以擊高麗. 235) 安致臣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236) 馬飼臣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으나 말 사육과 관련된 씨족으로 추측된다. 237) 顯宗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23대 천황. 아버지는 履中天皇의 황자인 市邊押磐(이치노에 노오시하)皇子, 어머니는 荑媛(하에히메)이다. 仁賢天皇의 同母弟이다. 이름은 弘計(오케) 혹은 來目稚子(쿠메노와쿠고)라고도 한다. 재위 기간은 일본서기 에 의하면 485~487년 3년간이지 만 고사기 에는 8년간 재위하였다고 한다. 市邊押磐皇子가 웅략천황에게 암살당한 후 두 아들 億計(弘計의 형으로 후에 제24대 천황인 仁賢天皇으로 즉위)와 弘計는 숨어 살다가 淸寧天皇(제 22대 천황)에 의해 동생 弘計가 먼저 즉위하여 顯宗天皇이 되었다. 238) 紀生磐宿 : 日本書紀 에 의하면 신라정벌군 의 대장군이었던 紀小弓宿 의 아들이다(주 203)과 주 209) 참조). 雄略 9年 夏5月條에는 紀大磐宿, 欽明 5年 3月條에는 爲哥可君(有非 岐)로 나오기도 한다. 紀生磐宿 의 실체에 대해서는 倭臣이 아니라 원래 임나 에서 활동하던 木氏인 백제장군으로 보고, 백제에서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어 5세기 후반 가야를 거쳐 왜로 건 너간 인물로 추정되기도 한다. 나아가 이 紀生磐宿 관계 기사는 紀氏 씨족전승 단계에서 조작 되기는 하였지만 실제 내용은 당시 백제와 가야의 관계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하였다(李弘稙, 1936,`任那問題を中心とする欽明紀の整理-主要關係人物の硏究-a, 靑丘學叢 25 ; 千寬宇, 1975,`任那日本府의 虛構a, 韓國史의 재조명, 독서신문출판사). 한편 紀生磐宿 의 행적을 日本書紀 편자의 조작으로 보거나(연민수, 1990,`6세기 전반 가야제국을 둘러싼 백제 신라 의 동향-소위 임나일본부설의 구명을 위한 서장-a, 신라문화 7), 이와는 달리 가야와 고구려 의 관계를 시사하는 것으로 본 견해(白承忠, 1996,`安羅의 移那斯 麻都에 대한 검토a, 지역 과 역사 2, 부산경남역사연구소 ; 李鎔賢, 1997,`五世紀における加耶の高句麗接近と挫折-顯 나루터를 차단하여 군대를 굶주리게 하였다. 백제왕은 매우 화가 나서 領軍 古爾解244) 內頭 莫古解245) 등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帶山으로 나아가 공격하게 하였다. 이에 生 磐宿 는 군사를 모아 역습하였다. 용기를 내며 더욱 기세가 강해지니 향하는 곳마다 모 두 깨뜨렸다. 일당백이었다. 그러나 얼마 후 무기가 떨어지고 힘이 다하니 일을 그르칠 宗紀是歲條の檢討a, 東アジアの古代文化 90)도 있다. 239) 左魯 : 일본서기 欽明 2年(541) 7月條에 인용된`百濟本記a에 左魯麻都 란 인물이 보인다. 佐魯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으나 칭호의 일종으로 추측된다. 240) 那奇他甲背 : 일본서기 欽明 5年(544) 2月條에 인용된`百濟本記a에 那干陀甲背 와 那哥陀 甲背 란 인물로도 나온다. 백제 聖明王이 大和政權에 소환을 요구한 任那日本府 관련 인물들인 河內直 移那斯 左魯 등의 조상이기도 하다. 甲背는 존칭으로 여겨지는데 일본서기 에서는 木리不麻甲背(繼體 10年 夏5月條), 麻那甲背(繼體 23年 春3月 是月條) 등의 백제인에게도 사용 되었다. 241) 適莫爾解 : 適은 姓이며 莫爾는 이름이다. 解는 존칭이다. 자세히 알 수 없는 인물이다. 適을 백 제의 大姓八族 중의 하나인 燕씨로 보기도 한다. 같은 適씨의 인물로 일본서기 安閑 원년 (534) 5월조에 嫡德孫이란 인물이 보인다. 242) 爾林 : 應神 16年 是歲條에 東韓之地 의 한 곳인 爾林城과 같은 곳으로 보고 이 爾林을 전북 任實로 비정하거나 전북 金堤郡 의 利城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주 132) 참조). 그런데 이들 두 지역 가운데 하나라고 해도 후문의 분주에서 당시 爾林이 고구려의 영토라는 설명은 이해 하기 힘들다. 이에 東韓 이라는 말에 주목하여 충북 음성 혹은 괴산으로 보기도 한다(李鎔賢, 1997, 앞의 글). 243) 帶山城 : 현 전북 井邑郡 泰仁面으로 비정하는 견해가 있다(末松保和, 1949, 앞의 글, 106~107 쪽). 帶山城을 쌓아 東道를 지켰다는 구절에서 東道 는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上(1962, 岩波書店, 526쪽)에서 야마토지 즉 야마토미치(大和道) 로 읽고 있는 점을 참고하면 백제의 대왜 교통로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고, 식량을 운반하는 항구를 차단하였다는 것은 하천을 이용 한 백제군의 군량 운송을 任那 가 차단하였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244) 領軍古爾解 : 領軍은 백제의 五方 중 각 방의 方領에 해당되며 관위는 達率이었다. 661년 백제 부흥군이었던 百濟僧道琛이 領軍將軍을 자칭한 바 있다. 古爾는 백제의 複姓이며 解는 이름이 다.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245) 內頭莫古解 : 內頭는 6좌평의 하나인 內官佐平으로 재정업무를 주로 담당하였다. 삼국사기 권 24 백제본기 근초고왕 24년(369)조에 태자 근구수와 함께 고구려군을 물리친 백제 장군으로 莫 古解라는 인물이 나오지만 120년 가까운 연대차이가 있어서 같은 인물로 보기 어렵다.

36 70 日本書紀 71 것을 알고 任那로부터 돌아왔다. 이로 말미암아 백제국은 左魯 那奇他甲背 등 300여 京에 도착하기 전에 섬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그렇게 이름 지었다. 지금도 各羅의 바다에 명을 죽였다. 는 主嶋가 있다. 왕이 태어난 섬이다. 이에 백제인은 主嶋라고 이름 지었다. 고 하였다. 지금 생각해보니 嶋王은 蓋鹵王의 아들이다. 末多王은 琨支王의 아들이다. 이것을 異母 권16 小泊瀨稚 246) 天皇 武烈天皇 3년(501) 11월 是月 11월. 이 달에 백제의 意多郞247)이 卒하였다. 高田(타카타)248) 언덕 위에 장사지냈다. 武烈天皇 4년(502) 是歲 이 해에 백제의 末多王이 無道하여 백성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國人249)은 마침내 [末多 `百濟新撰a 에서 말하기를, 末多 王을] 제거하고 嶋王250)을 세웠다. 이가 武寧王이다. <* 兄이라하는 것은 未詳이다.> 武烈天皇 6년(504) 동10월 겨울 10월. 백제국이 麻那君253)을 보내 調를 바쳤다. 천황은 백제가 여러 해에 걸쳐 공 물을 바치지 않았다254)고 하여 [麻那君을] 억류시키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武烈天皇 7년(505) 하4월 王이 무도하여 백성에게 포학하게 굴었다. 國人이 함께 [末多王을] 제거하였다. 武寧王이 여름 4월. 백제왕(武寧王)은 斯我君255)을 보내 調를 바쳤다. 별도로 表文을 올려 이전 즉위하였다. 諱는 斯麻王이다. 이는 琨支251)王子의 아들이다. 즉 末多王의 異母兄이다.252) 에 調를 진상했던 사자 麻那는 百濟國主의 骨族이 아니었습니다. 그러한 이유로 삼가 斯 琨支가 倭로 향할 때에 筑紫嶋에 이르러 斯麻王을 낳았고, 섬에서 [백제로] 돌려보냈다. 我를 보내어 조정을 섬기도록 합니다. 라고 하였다. 나중에 [斯我는] 자식이 생기니 法師 君이라 한다. 이가 倭君(야마토노키미)256)의 선조이다. 246) 武烈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25대 천황. 아버지는 仁賢天皇(億計天皇), 어머니는 雄略天 皇의 딸인 春日大郞(카스카노오오이라츠메)皇后이다. 일본서기 에는 인덕천황이 聖帝로 비유 되고 있고, 무열천황은 폭군으로 묘사되어 있다. 이것은 인덕천황의 계통이 이 武烈朝에 와서 단절된 것과 관계가 깊은 것으로 성제의 마지막 후예는 폭군이라는 중국사상에 영향을 받았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한편 이 武烈天皇이 실존하지 않았다고 보기도 한다. 247) 意多郞 : 백제에서 건너온 왕족 혹은 귀족 남성으로 추측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왜국에 건너간 시기에 대해서는 전하는 바가 없다. 248) 高田 : 현재 나라분지 남서부에 있는 高田(타카타)市 지역이다. 249) 國人 : 國人이 어떤 사람들을 가리킨 것이지 분명하지 않지만, 일반적으로 三國史記 에서 國人 은 지배층 사람들을 가리키는 경우가 많다. 250) 嶋王 : 武寧王(주 170) 참조). 251) 琨支 : 주 167) 참조. 252) 末多王의 異母兄이다 : 日本書紀 雄略 5年 夏4月條와 6月條에는 武寧王이 蓋鹵王의 아들로 나온다. 그런데 본조에 분주로 인용된`百濟新撰a에서는 武寧王을 蓋鹵王의 아우인 琨支의 아들 로서 末多王(東城王)의 異母兄으로 적고 있다. 이에 日本書紀 편찬자는 武寧王을 蓋鹵王의 아 들로 末多王을 琨支의 아들로 서술하면서`百濟新撰a이 武寧王이 末多王의 異母兄이라고 한데 대해서는 未詳으로 처리하고 있다( 지금 생각해보니 부터). 주 171) 참조. 253) 麻那君 : 繼 23年(529) 3月條의 麻那甲背, 欽明 4年 12月條의 中佐平木리麻那와 동일인이다, 254) 백제가 않았다 : 日本書紀 에 의하면 백제 朝貢은 雄略 23년(479) 이후 보이지 않다가 25 년 만에 다시 시작된 셈이다. 255) 斯我君 : 본조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히 알 수 없지만 後文에 의하면 백제 王族임을 알 수 있다 (주 256) 참조). 이 斯我君을 무령왕 4년에 칠지도를 지참하고 대왜외교의 일선에 활동한 인물 로 추정하는 견해(연민수, 1998,`七支刀銘文의 재검토-연호의 문제와 제작 연대를 중심으로a, 고대한일관계사, 혜안)도 있다. 256) 倭君 :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下 百濟條에는 武寧王의 자손으로 和朝臣이 나오는데(和朝臣. 出 自百濟國都慕王十八世孫武寧王也) 倭君과 관련이 깊다. 和朝臣과 倭君은 같은 야마토 씨로서 동족이다. 和朝臣은 武寧王의 아들인 純陀太子의 자손으로 원래의 姓은 史(히)였다.

37 72 권17 男大迹天皇 繼體天皇257) 2년(508) 日本書紀 73 하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 任那日本縣邑261)에 있는 백제의 백성들 가운데 도망 와서 貫(호 적)에 누락된 채 3~4대 지난 자들을 찾아내어 모두 백제로 돌려보내 호적에 올리게 하였다. 12월 12월. 남쪽 바다 가운데의 耽羅人이 처음으로 百濟國과 통교하였다.258) 繼體天皇 3년(509) 춘2월 259) 에는 久羅麻致支彌260)가 일본에서 왔다고 봄 2월. 사신을 백제에 보냈다. <* `百濟本記a 繼體天皇 6년(512) 하4월 辛酉朔 丙寅 여름 4월. 신유삭 병인(6일). 穗積臣押山(호즈미노오미오시야마)262)을 백제에 파견하였 다. 그리고 筑紫國(츠쿠시노쿠니)의 말 40匹을 하사하였다. 동12월 겨울 12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 별도로 上表文을 올려 임나국의 上 唎 下 257) 繼體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26대 천황(재위 507~531). 아버지는 彦主人王(히코우시노오오 키미), 어머니는 振媛(후리히메)이다. 이름은 男大迹(오오도)이다. 武烈天皇의 사후에 후계자가 없 었기 때문에 大伴金村大連(오오토모노가나무라노오오무라지)이 應神의 5세손이었던 男大迹을 越 前(에츠젠)에서 맞이해 와서 즉위시켰다고 한다. 그러나 계체천황의 출자와 사망에 관해서는 많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 먼저 계체와 응신과의 계보관계에 의문을 제기하며 越前 지방의 호족이 무 열천황의 사후 혼란을 틈타 대화정권을 장악하였고, 계체의 등장으로 이전의 왕통은 단절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가 있다. 그리고 5세기대 출자가 다른 두 왕가가 존재했는데 계체천황을 시작으로 새로운 왕가가 천황을 배출하게 되었다는 등의 이른바 王朝交替說 이 주목을 받고 있다(鈴木靖 民, 1985, 古代國家史硏究の步み-邪馬臺國から大和政權まで-, 新人物往來社 참조). 한편, 일 본서기 계체 25년(531) 冬12月條에 인용된`百濟本記a 에는 계체의 사망시기를 辛亥年(531)으로 적고 있지만 계체 다음의 安閑天皇은 533년에 즉위하기 때문에 2년이라는 공위기간이 생기게 되 어 문제가 된다. 그리고`백제본기a 에 531년 계체천황의 사망과 함께 태자 및 황자가 모두 죽었다 (이른바 辛亥의 變 )고 한 기록은 계체의 사망 후 2년 사이에 황위를 둘러싸고 내란이 있었을 것 으로 이해되고 있다(喜田貞吉, 1928,`繼體天皇以下三天皇繼承の關する疑問a, 歷史地理 52~1 ; 林屋辰三郞, 1995,`繼體 欽明朝內亂の史的分析a, 古代國家の解體, 東京大學出版會). 258) 耽羅人이 통교하였다 : 耽羅는 제주도를 말한다. 南海는 백제에서 보았을 경우의 방위 개념 이기 때문에`百濟本記a등의 백제측 기록을 참고하여 작성된 것으로 추측된다. 그런데 三國史 記 百濟本紀에는 文周王 2年(476) 4월과 東城王 20年(498) 8월에 이미 탐라와 백제가 통교한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이에 삼국사기 의 탐라와 일본서기 의 탐라는 다른 지명을 가리키는 것으로 일본서기 의 탐라가 실재 현재의 제주도라는 견해가 제기되었다. 즉 삼국사기 탐라는 耽牟羅 즉 康津으로 백제와 제주도가 처음으로 통교한 것은 일본서기 의 기사대로 508년에 이 르러서 이루어졌다는 것이다(이근우, 1994, 앞의 글). 259) 百濟本記 : 소위 百濟三書의 하나. 일본서기 계체기에 4곳, 흠명기에 14곳 인용되었다. 인용 연대는 계체 3년(509)에서 흠명 17년(558)까지다.`百濟記a나`百濟新撰a과 달리 일본을 倭라 唎263) 娑陀264) 牟婁265) 4縣을 청하였다. 唎國守266) 穗積臣押山이 이 4현은 백제와 기록하지 않고, 日本이라고 기록하였다. 그 내용은 백제와 가야제국과의 관계, 신라 및 왜의 동 향 등이 자세히 기술되어 있다. 일본서기 편찬자는 계체천황의 사망 시기를`百濟本記a에 근 거해 기술할 정도로`백제본기a에 대한 신뢰가 높았다(주 42)와 주 159) 참조). 260) 久羅麻致支彌 : 자세히 알 수 없다. 261) 任那日本縣邑 : 日本이나 縣邑은 모두 후대에 윤색된 표현. 다만 백제의 부랑 도망자의 本貫 이 적에 대해서는 백제가 고구려에 빼앗긴 한강 유역을 대신하여 남부지역에서의 노동력 확보와 관 련을 짓기도 하고(盧重國, 1981,`泗 時代 百濟支配體制의 變遷a, 韓 劤博士停年紀念私學論 叢 ) 유식백성의 귀농과 호적정비를 인구추쇄책과 관련지어 지방관인 道師 파견의 필요성이 생 기게 된 것으로 이해하기도 한다(金壽泰, 1997,`百濟의 地方統治와 道師a, 百濟의 中央과 地 方, 충남대 백제연구소). 262) 穗積臣押山 : 穗積氏는 饒速日命(니기하야히노미코토)의 자손으로 나오며 臣姓을 칭하는 씨족으 로 物部(모노노베)氏 采女(우네메)氏와 동족관계를 이루고 있다. 穗積氏의 본거지는 大和國 山 邊郡 穗積鄕(현재 나라현 天理市 前栽 부근)이다. 天武 13年(684) 11월에 朝臣姓을 사성받았다. 押山은 繼體 7年(513) 夏6月條에는 意斯移麻岐彌라고도 하며, 계체 6년 12월조와 23년 3월조 에 唎國守 下 唎國守 등으로 나오고 있다. 國守制는 701년 大寶律令 이후 실시된 지방 지 배 제도로서 國守는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이다(國司의 4등관 가운데 가장 높은 등급). 직책은 지방의 행정 사법 치안 등 국정일반의 총책임자였다(주 177) 참조). 263) 上 唎 下 唎 : 주 228) 참조. 264) 婆陀 : 현 전남 구례 일대 또는 낙동강 중류의 漆谷郡 仁同으로 추정되기도 한다(주 228) 참조). 265) 牟婁 : 현 전남 영산강 서쪽 일대 또는 낙동강 상류의 醴泉으로 보기도 한다. 최근 梁直貢圖 百濟國使圖經에 보이는 麻連 과 동일지역으로 간주하여 영산강 유역으로 비정하는 견해(李鎔 賢, 1999,` 梁直貢圖 百濟國條の 旁小國 a,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7)도 있다.

38 74 日本書紀 75 가깝고 일본과는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아침 저녁으로 돌아다니기 쉽고, 닭과 개의 소 려고 하였다. 그 때 物部大連의 아내가 단호하게 무릇 住吉神270)이 처음으로 이 海表271)의 리도 구별하기 어렵습니다. 지금 백제에게 주어 같은 나라로 만든다면 굳게 지키는 대책 金銀의 나라인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을 胎中의 譽田天皇에 주었습니다. 이에 大 으로 이보다 나은 것이 없습니다. 가령 나라를 합쳐도 후세에는 다시 위험할 수 있는데, 后氣長足진尊(神功皇后)과 大臣 武內宿 가 나라마다 官家를 두어 오랫동안 해외의 방벽 하물며 다른 나라로 둔다면 몇 년이나 지킬 수 있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大伴大連金 으로 삼은 것은 이유가 있습니다. 만약 땅을 나누어 남에게 준다면, 원래의 영역과 달라 村267)은 자세하게 의견을 듣고 이 계획에 동의하여 주상하였다. 이로써 物部大連 鹿火268) 집니다. 후세까지 비난이 끊이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말했다. 이치에 맞는 말이나 天勅 가 宣勅使로 임명되었다. 物部大連은 바로 難波館269)으로 출발하여, 百濟客에게 칙을 전하 에 위배될까 두렵소. 라고 말했다. 그 아내는 절실하게 병을 사칭해서 칙을 전하지 마십 시오. 라 간언하였다. 大連은 간언에 따랐다. 이로 인해서 사자를 새롭게 임명하여 칙서 266) 唎國守 : 주 262) 참조. 267) 大伴大連金村 : 大伴室屋의 손자이며 大伴談의 아들이다. 武烈~欽明朝의 大連으로(武烈卽位 前紀 12월에 大連이 됨) 무열과 계체천황을 즉위시킨 인물이다. 連姓을 가진 씨족 중 가장 유 력한 자로서 大連(오오무라지)이 되어 欽明 元年(540)에 실각할 때까지 大臣과 함께 대왕의 정 치를 보좌하였다. 268) 物部大連 鹿火 : 武烈卽位前紀(498) 11月條에 처음 보인다. 大伴大連金村과 함께 大連이 되어 대왕의 정치를 보좌하였다. 계체 22년(528) 11월에는 大將軍으로서 筑紫에 파견되어 磐井(이 와이)의 난을 진압하였다. 이것을 계기로 物部氏는 북큐슈까지 그 세력을 확장하여 한반도제국 과 교류를 활발히 가질 수 있었다(直木幸次郞, 1966,`物部連に關する二, 三考察a, 日本書紀 硏究 2). 物部(모노노베)氏는 饒速日命의 후손으로 대화정권의 大氏族으로서 씨족의 본거지는 河內國 川郡(현재 八尾 東大阪市의 일부 지역) 일대에 걸쳐 있었다. 대화정권에서는 주로 군사와 형벌, 제사 등과 관련한 직무를 담당하였다. 대략 5세기 중엽 이후 大伴氏와 함께 大連 의 지위에 올랐지만, 물부씨가 본격적으로 대화정권에서 실세로 군림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이후 大伴金村大連의 정치적 실각 이후의 일이었다고 할 수 있다. 欽明朝 이후부터 大臣이었던 蘇我氏와 더불어 정국을 주도해 나갔으며 한반도와 물부씨의 교류도 6세기에 집중되어 나타난 다. 일본서기 에는 繼體紀의 物部至至의 출병, 그리고 欽明紀의 물부씨 백제관료의 활동 등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일본서기 에 의하면 552년 백제로부터 불교가 수입된 이후에 는 그 수용여부와 관련된 문제로 소아씨와 정치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이 대립에 서 물부씨는 패배하여 몰락하였으며 이후 대련의 지위는 폐지되고 소아씨 중심의 정치가 전개 된다. 천무 13년(684)에 물부씨의 본종가는 朝臣姓을 받고 物部氏에서 石上(이소노카미)氏로 개칭하였다. 269) 難波館 : 難波는 현재 大阪(오사카)市의 남부의 大阪灣과 河內(카와치)低地 사이에 남북으로 길 게 펼쳐진 上町(우에마치)臺地 일대 지역이다. 難波지역은 동쪽으로는 大和(야마토)川수계를 통 해 飛鳥(아스카), 大和지역과 이어지고, 서쪽으로는 瀨戶內海(세토나이카이)를 통해 西日本 각 지와 한반도 및 중국과도 통하였다. 남으로는 紀伊(키이)지방으로 이어지고, 북으로는 淀川(요 도가와)수계를 통해 山背(야마시로)지방을 거쳐 北陸(호쿠리쿠)지방으로 이어졌다. 이와 같은 지리적 조건 덕분에 일찍부터 개발되어 5세기 후반 이후 難波津에는 大和政權의 離宮을 비롯해 서 외국사절을 접대하기 위한 難波館 등 외교와 교역을 위한 시설이 계속 만들어졌다. 를 전달하도록 하였다. 선물과 칙서를 주고 상표문에 따라 임나 4현을 주었다. 大兄皇子 (勾大兄皇子. 후에 安閑天皇)는 다른 일이 있어서 나라를 나누어 주는 것을 듣지 못하였 다. 뒤늦게 선칙에 대해 알고는 놀라고 후회하며 고치고자 令을 내리며 胎中之帝(應神天 皇) 이래 관가를 설치한 나라를 가볍게 蕃國이 요구대로 쉽게 줄 수 있는가. 라고 하였 다. 이에 日鷹吉士272)를 보내어 백제의 사자에게 새롭게 선언하였다. 사자가 답하여 어 버지인 천황(계체천황)이 便宜를 도모하여 칙을 내렸으니 끝난 것이다. 아들(勾大兄皇子) 인 황자가 어찌 천황의 칙에 위배되고 버릇없이 다시 명령을 내리겠는가. 틀림없이 이것 은 거짓이다. 만일 그것이 사실이라고 하면 몽둥이의 두꺼운 쪽으로 때리는 것과 가는 쪽 으로 때리는 것 중에 어느 쪽이 아프겠는가? 라고 말하고 돌아갔다. 이에 어떤 사람이 大伴大連과 唎國守 穗積臣押山이 백제의 뇌물을 받았다. 라고 하였다. 繼體天皇 7년(513) 하6월 `百濟 여름 6월. 백제가 姐彌文貴273)장군과 州利卽爾274)장군을 파견해서 穗積臣押山 <* 270) 住吉神 : 底筒男命 中筒男命 表筒男命 三神을 가리킨다( 日本書紀 神代 上). 일본서기 에 의하면 神功皇后가 熊襲(쿠마소)을 征討할 때 神託을 내린 신으로 신라정벌 때에 皇后를 수호하 던 항해의 신이기도 하다. 271) 海表 : 海外 즉 나라 밖에 멀리 있는 미개의 나라를 의미한다. 272) 日鷹吉士 : 日鷹吉士에 대해서는 주 190) 참조. 이름은 알 수 없다. 273) 姐彌文貴 : 姐彌는 三國史記 권25 百濟本紀 蓋鹵王 21年條에 보이는 祖彌桀取의 祖彌와 같은 백제의 複姓이다. 이 姐彌를 백제의 大姓 중에 하나인 眞氏로 보는 견해도 있다(今西龍, 1934, 百濟史硏究, 297~298쪽). 文貴는 이름이다. 본조는 백제가 왜에 장군을 파견한 기사로서 姐

39 76 本記a 에는 委275)의 意斯移麻岐彌276)라 한다.>에게 딸려 보내어 五經博士277) 段楊爾278)를 바 쳤다. 별도로 伴跛國279)이 臣의 나라의 己汶280)의 땅을 빼앗았습니다. 바라건대 天恩을 내려 원래 속한 곳에 되돌려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추8월 癸未朔 戊申 가을 8월. 계미삭 무신(26일). 백제 태자 淳陀281)가 죽었다. 日本書紀 동11월 辛亥朔 乙卯 겨울 11월. 신해삭 을묘(5일). 조정에서 百濟의 姐彌文貴장군, 斯羅의 汶得至282), 安羅283) 의 辛已奚284)와 賁巴委佐, 伴跛의 旣殿奚285)와 竹汶至 등을 불러놓고 恩勅을 내려 己汶 帶沙286)를 백제에 주었다. 是月 이 달에 伴跛國이 彌文貴의 귀국기사는 계체 9년(515) 2월조에 보인다. 274) 州利卽爾 : 州利는 백제의 복성이며 卽爾는 이름이다. 계체 10년(516) 9월조에는 州利卽次로 나 온다. 姐彌文貴와 함께 계체 9년 2월에 귀국한 후 계체 10년 9월에 다시 왜국에 건너간다. 275) 委 : 倭國을 지칭한다. 志賀(시가)島에서 발견된 金印에 漢委奴國王 이라고 새겨진 예가 있다. 276) 意斯移麻岐彌 : 押山君. 意斯移麻는 오시야마(オシヤマ) 로 읽으며 押山과 같고, 岐彌는 키미(キ ミ) 로 읽으며 君을 의미한다. 移는 일본의 推古시대의 遺文에도 보이는 古韻이다(주 262) 참조). 277) 五經博士 : 漢의 武帝 때에 처음 두었다. 五經이라는 것은 易經 書經 詩經 禮記 春秋를 말 한다. 오경박사는 유교의 교관임과 동시에 황제의 자문이기도 하였다. 이후 관리의 교육 및 과 거 기관으로서 大學制度가 발달함에 따라 오경박사는 주로 시험 및 교육을 담당하게 되었다. 백 제에도 오경박사제도가 있었다는 것은 본조와 이후 일련의 기사를 통해서 알 수 있는데 삼국사 기 권26 백제본기 성왕 19년(541)조에는 왕이 南朝의 梁에 조공해서 毛詩博士, 涅槃 등의 經 義, 그리고 工匠과 畵師 등을 청했다는 기록도 보인다. 278) 段楊爾 : 자세히 알 수 없다. 계체 10년(516) 9월에 漢高安茂와 교대하였다. 279) 伴跛國 : 伴跛는 三國史記 地理地에 보이는 星州의 옛 이름인 本破 와 음이 유사하다. 梁直 貢圖 百濟國使圖經에는 백제의 부용국의 하나인 叛波 로 나온다. 종래 伴跛는 현 경북 星州 일대의 지역으로 비정되어 왔다. 그러나 日本書紀 계체기 7~9년조에 기록된 반파의 행동범 위, 계체 23년조에서는 加羅 로 표기되는 등 이에 대한 합리적인 해석이 어렵다. 이에 今西龍 은`己汶伴破考a에서 그의 구설을 수정하여 반파는 성주를 제2의 중심지로 하고 고령지역을 제1 의 중심지로 삼은 大加耶國의 이름으로 추정하였다(1970, 앞의 글, 391~407쪽). 한편 김태식 은 고령과 성주를 별개의 정치세력으로 상정한 후 반파가 5세기 이후에 대가야를 표방하던 고령 지방의 이전 주체세력의 하나였을 것으로 추측하였다(1985,`5세기 후반 大加耶의 발전에 관한 연구a, 韓國史論 13). 이 경우 성주를 고령의 세력권으로 보는가 혹은 독립된 정치체로 보는가 에 차이는 있지만 반파가 고령의 정치체를 가리키는 점에서는 양자가 일치하고 있다. 280) 己汶 : 현재 섬진강 유역(전남 곡성, 남원 등)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翰苑 所引`括地志a에 基汶河 라는 하천이 보이는데 己汶은 이 하천 유역을 가리킨다. 281) 淳陀 : 삼국사기 에는 보이지 않으나 일본서기 를 통해서 武寧王의 태자임을 알 수 있다. 續 日本紀 卷40 延曆 8年(789) 12月條에 의하면 皇太后 高野新笠에 대해서 后先出自百濟武寧王 之子純陀太子 라고 기록하고 있듯이 淳陀(純陀)는 高野氏(원래 和氏)의 선조이다. 77 支를 보내서 보물을 헌상하고 기문의 땅을 구하였으나 끝내 주지 않았다. 繼體天皇 8년(514) 3월 3월. 伴跛國이 子呑287) 帶沙에 성을 쌓아 滿奚에 연결하고, 烽候288)와 邸閣289)을 만들어 日本에 대비하였다. 또한 爾列比 麻須比290)에 성을 쌓아 麻且奚 推封291)과 연결하였다. 병사와 무기를 모아 신라를 협박하였다. 부녀자를 약취하고, 마을을 약탈하였다. 흉포한 적이 습격한 곳은 남는 것이 거의 없었다. 포악하고 사치하며 괴롭히고 능멸하며 많은 살 상을 자행하니 이루 다 기록할 수 없다. 282) 汶得至 : 자세히 알 수 없다. 至는 경칭어미. 283) 安羅 : 현 경남 咸安 지역에 있던 加耶國(주 52) 참조). 284) 辛已奚 : 賁巴委佐와 함께 안라의 사신으로 본조에만 보인다. 모두 자세히 알 수 없다. 285) 旣殿奚 : 일본서기 흠명 2년(541) 4월조에는 古殿奚로 나온다. 그런데 소속이 본조와 달리 加 羅로 기재되어 있다. 竹汶至는 자세히 알 수 없다. 286) 帶沙 : 多沙를 가리킨다(주 66) 참조). 287) 子呑 : 滿奚와 함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경남 진주의 서쪽 또는 섬진강 방면이었을 것 으로 추정된다. 288) 烽候 : 적 상황을 살필 수 있고, 봉화를 올릴 수 있는 곳. 289) 邸閣 : 식량이나 무기를 저장하는 군용 창고. 290) 爾列比 麻須比 : 爾列比는 현 경북 慈仁 일대 지역으로 보거가 경남 宜寧으로 보기도 한다. 麻 須比는 현 경남 陜川郡 三嘉의 옛 이름이 麻杖이었다는 것에 주목하여 합천군 일대 지역으로 비 정하기도 한다. 두 지역명에 공통적으로 보이는 比는 村과 같은 뜻이다. 291) 麻且奚 推封 : 신라와 접하고 있던 성. 麻且奚는 자세히 알 수 없다. 推封은 현 경남 밀양의 옛 이름이 推火이었으므로 밀양 일대의 지역으로 추정된다.

40 78 繼體天皇 9년(515) 춘2월 甲戌朔 丁丑 봄 2월 갑술삭 정축(4일). 백제사자 文貴장군 등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에 칙을 내려 物部連<*이름은 알 수 없다.>과 함께 보냈다. <* `百濟本記a 에는 物部至至連292)이라 한다.> 是月 이달에 沙都島293)에 이르러 소문에 伴跛人이 원한을 품고 독을 머금어 강한 것을 믿고 포악한 짓을 일삼는다는 말을 들었다. 이에 物部連은 수군 5백을 인솔하여 바로 帶沙江 으로 나아갔다. 文貴장군은 신라를 거쳐 돌아갔다. 하4월 日本書紀 79 추9월 가을 9월. 백제가 州利卽次장군을 보내서 物部連과 같이 와서 기문의 땅을 준 것에 대 해 감사했다. 따로 오경박사 漢高安茂297)를 바치면서 박사 段楊爾와 교체해 줄 것을 청하 였다. 청하는 바에 따랐다. 戊寅(14일). 백제가 灼莫古298)장군과 日本의 斯那奴阿比多299)를 高麗 사신 安定300) 등에 딸 려 보내어 來朝하고 우호를 맺었다. 繼體天皇 17년(523) 하5월 여름 5월. 백제왕 武寧王이 薨하였다.301) 여름 4월. 物部連이 帶沙江에서 머문 지 6일이 지났을 때, 반파가 군사를 일으켜 쳐들 어왔다. 옷을 벗기고 가진 것을 빼앗았으며, 장막을 모두 태웠다. 物部連 등은 무서워 도 망가서 겨우 목숨만 건져 汶慕羅294)에 머물렀다. <*汶慕羅는 섬의 이름이다.> 繼體天皇 10년(516) 하5월 여름 5월. 백제가 前部295) 木리不麻甲背296)를 보내서 物部連 등을 己汶에서 맞아 노고를 치하하고 함께 데리고 입국하였다. 군신이 각각 의상 斧鐵 면포를 내었다. 토산물을 더하여 조정에 쌓아 놓고 따뜻하게 위로하며 賞祿을 후하게 주었다. 292) 物部至至連 : 일본서기 繼體 23年(562) 3월조에는 物部伊勢連父根으로 나온다. 이름 중에 至 至라는 것은 父의 일본식 字音表記일 것이다. 293) 沙都島 : 거제도. 294) 汶慕羅 : 帶沙江, 즉 섬진강 하구 가까이에 있던 섬으로 南海島로 추정된다. 295) 前部 :백제의 5部 가운데 하나. 周書 卷49 列傳 百濟條에 의하면 백제는 왕도를 上部 前部 中部 下部 後部의 5部로 나누어 각 부에 병사 5백 명씩 배치하였다고 한다. 296) 木리不麻甲背 : 木리은 백제의 대성 8족 가운데 하나인 木씨의 복성으로 보거나(盧重國, 1988, 앞의 글, 183~187쪽), 리氏의 복성표기로 추정하기도 한다(平野邦雄, 1972,`日本書紀にあらわ れた古代朝鮮人名a, 續日本古代史論集 上, 吉川弘文館). 후자와 관련하여 日本書紀 흠명 4 년(543) 12월조에는 백제의 중신들의 이름들(中佐平木리麻那와 下佐平木尹貴) 가운데 木리와 木씨가 함께 등장하고 있다. 이것을 木리씨에서 木씨로 분리되어 가는 과정으로 이해하는 견해 도 있다(김은숙, 1994,`6세기 후반 신라와 왜국의 국교성립과정a, 신라문화 15). 不麻는 이 름이고 甲背는 백제 사람에게 자주 보이는데 백제의 관위로 추정된다. 297) 漢高安茂 : 姓은 高氏이고 이름은 安茂이다. 漢은 新撰姓氏錄 의 諸蕃에 보이는 漢과 마찬가지 로 조상이 중국계임을 나타낸 것으로 볼 수 있다. 298) 灼莫古 : 姓은 灼氏이고 이름은 莫古이다. 일본서기 흠명 11년(550) 4월조에 같은 성씨의 백 제인으로 灼干那가 보인다. 한편 灼은 適 혹은 嫡과 음과 통함으로 현종 3년 是歲條의 適莫爾 解, 그리고 安閑元年 5월조의 嫡德孫 등도 같은 성씨 사람들로 추정된다. 이 灼氏가 燕氏라는 견해도 있다. 299) 斯那奴阿比多 : 성은 斯那奴(科野)이고 이름이 阿比多이다. 斯那奴(科野)氏는 欽明紀에 자주 보 이는데 백제와 왜국의 외교상에서 활약하였다. 이른바 倭系百濟官僚를 배출하던 씨족으로 흠명 5년(544) 2월조에 斯那奴次酒, 同 10年 8월조에는 科野新羅란 인물들이 보인다. 斯那奴(科野) 氏의 원래 본거지는 信濃(시나노)으로 현 長野(나가노) 지역이다. 이 지역에는 한반도 계통의 적 석총이 千曲川 하류 지역을 중심으로 850기 이상 분포하고 있다고 하며(金鉉球, 1985, 大和政 權の對外關係硏究, 吉川弘文館, 97~99쪽), 후대의 사료이기는 하지만 日本後紀 卷8 延曆 18年(799) 12월조에는 고구려인의 존재가 이들 지역에서 확인되기도 한다. 300) 安定 : 성은 安氏이고 이름은 定이다.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제를 경유해서 왜국에 건너왔을 것 으로 추정된다. 301) 武寧王이 薨하였다 : 삼국사기 권26 백제본기 및`武寧王墓誌a에 기록된 무령왕의 사망 시기 와 일치한다.

41 80 繼體天皇 18년(524) 춘정월 춘정월. 백제 태자 明이 즉위하였다.302) 繼體天皇 21년(527) 하6월 壬辰朔 甲午 여름 6월 임진삭 갑오(3일). 近江毛野臣(오우미노케나노오미)303)은 군사 6만을 이끌고 任那에 가서 신라에 패한 南加羅304) 己呑305)을 부흥시켜서 임나에 합하고자 하였다. 이 때 筑紫國造(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 磐井(이와이)306)이 몰래 반역을 꾀하였지만, 실 행하지 못하고 몇 해가 지났는데, 일이 성공하기 어려울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항상 기회 日本書紀 를 살피고 있었다. 신라가 이를 알고 몰래 磐井에게 뇌물을 주어 毛野臣의 軍勢를 막으 려고 하였다. 이 때 磐井은 火國307) 豊國308) 2국에 세력을 확장하여 조정의 직무를 집행 하지 못하게 하였다. 밖으로는 해로를 막아서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 등이 해마다 보내는 朝貢船을 가로막고, 안으로는 임나에 보냈던 毛野臣의 軍을 막고 무례하게 지금 은 使者가 되었지만, 옛날에는 나의 친구로서 어깨를 나란하고 팔꿈치를 스치며 같은 그 릇으로 밥을 먹었다. 졸지에 사자가 되어 어찌 너를 따르라고 할 수 있는가? 라고 말하 였다. 마침내 싸우게 되었는데 교만하고 스스로 자랑스러워했다. 이리하여 毛野臣은 방 해를 받아 도중에 체류하고 말았다. 천황은 大伴大連金村(오오토모노무라지가나무라) 物部大連 鹿火(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아라카히) 許勢大臣男人(고세노오오미노오히토) 등에게 조를 내려 筑紫의 磐井이 모반하여 西戎의 영지를 점유하고 있다. 이제 누가 장 군이 될 수 있겠는가? 라고 물었다. 大伴大連 등이 병사들을 정직하고 인자하며 용기있 게 이끄는 데는 302) 백제 태자 明이 즉위하였다 : 明은 백제의 제 26대 왕인 聖王(재위 523~554). 繼體 7年(513) 8 月條에 의하면 武寧王에게는 淳陀라는 태자가 있었다. 그 기록을 신뢰할 수 있다면 明은 淳陀가 사망한 후에 태자로 옹립된 것으로 여겨진다. 日本書紀 에는 주로 聖明王으로 나오는데 이 밖 에 明王 聖王 聖明 등의 호칭도 보인다. 聖王의 즉위연대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가 繼體 18 年 즉 524년으로 기록하고 있는데 비해 삼국사기 는 무령왕이 죽은 후 곧 523년에 즉위하였다 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은 日本書紀 의 踰年稱元法에 따라 기록된 것으로 실재 삼국사기 의 기록과는 차이가 없다. 303) 近江毛野臣 : 任那 에 파견되었다가 왜국으로 소환되어 가는 도중에 병으로 죽었다고 한다. 이 近江毛野臣의 실체에 대해서 크게 세 가지로 파악되고 있다. 먼저 왜국이 파견한 官人으로 보거 나(三品彰英, 1966,` 繼體紀 の諸問題-特に近江毛野臣の所傳を中心として-a, 日本書紀硏究 2 ; 大山誠一, 1980,`所謂 任那日本府の成立についてa 下, 古代文化 32~12), 왜국의 使臣(請 田正幸, 1974,`六世紀前期の日朝關係-任那 日本府 を中心として-a,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1 ; 연민수, 1990, 앞의 글), 또는 백제의 파견관으로 보기도 한다(千寬宇, 1977, 앞의 글 ; 김현구, 1993, 앞의 글). 304) 南加羅 : 주 50) 참조. 305) 己呑 : 國. 주 51) 참조. 306) 筑紫國造磐井 : 북부 큐슈 筑紫 지역의 지방호족. 日本書紀 에는 筑紫國造라고 기록되어 있지 만, 古事記 風土記 에는 筑紫君으로 적고 있다. 國造는 율령제가 도입되기 이전에 있었던 지방지배기구의 하나로 각 지역 유력수장이 임명되어 臣 連 君 公 直 등의 성을 하사받았 다. 筑紫에 國造制가 시행된 것은 대체로 磐井의 난 후에 그 자식인 葛子가 속죄를 위해 糟屋屯 倉을 헌상한 것을 계기로 성립되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 또한 日本書紀 에는 磐井의 난에 대해서 磐井이 신라의 뇌물을 받고 近江毛野臣의 신라원정을 방해했다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 81 鹿火보다 뛰어난 자가 없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천황이 좋다고 하 였다. 繼體天皇 23년(529) 춘3월 봄 3월. 백제왕이 下 唎國守 穗積臣押山臣에게 무릇 조공하는 사자들이 항상 섬 돌출 부를 피할 때마다<*해중에 있는 島曲의 崎岸을 말한다. 세간에서는 美佐祁(みさき)라고 한다.> 매번 풍파에 시달리게 됩니다. 이 때문에 공물을 적시거나 망가지게 됩니다. 바라 건대 加羅의 多沙津을 신이 조공하러 가는 길의 津으로 삼게 해주십시오. 라고 말하였 다. 이에 押山臣이 이 請願을 주상하였다. 반적으로 일본서기 의 近江毛野臣의 신라원정 기사와 磐井의 난 관련 기사는 원래 무관계로서 일본서기 편찬자의 작문에 불과하다고 보고 있다(坂本太郞, 1964,`繼體紀の史料批判a, 日 本古代史の基礎的硏究 上). 현재 일본학계에서는 이 磐井의 난을 고대국가형성기에 있었던 국 토통일 전쟁으로 평가하면서 당시 국제정세 속에서 이해하려는 공통된 인식을 가지고 있다(小田 富士雄, 1991,`磐井の亂の歷史的位置a, 古代を考える磐井の亂, 吉川弘文館). 307) 火國 : 肥國이라고도 한다. 현 熊本 長崎 佐賀縣 일대를 포함한 옛 지명. 율령제하에서 肥 前 肥後의 두 나라로 분할된다. 308) 豊國 : 율령제하에서 豊前 豊後의 두 나라로 분할된다.

42 82 日本書紀 83 斯等315)은 그들이 의관을 바꿔 입은 것에 격노해서 사자를 보내어 그 사람들을 모두 모아 是月 이 달에 物部伊勢連父根(모노노베이세노무라지치치네)309)과 吉士老(키시노오키나라)310) 311) 신라로 돌려보냈다. 신라는 크게 수치스러움을 느끼고 왕녀를 돌아오게 하고자 전에 그 등을 보내서 津을 백제왕에 주고자 하였다. 그 때 加羅王 이 칙사에게 이 津은 官家를 대의 청혼을 받아들여 내가 결혼을 허락하였으나 지금 일이 이와 같이 되어버렸다. 부디 둔 이래 신이 조공하러 가는 길의 津이었습니다. 어째서 그리 쉽게 그것을 이웃나라에게 왕녀를 돌려 보내줄 것을 요청한다. 라고 말하였다. 加羅의 己富利知伽(코호리치카)316)<* 줄 수 있습니까? 원래 지정하여 주신 영토와 다릅니다. 라고 말하였다. 칙사 父根 등은 알 수 없다.>가 대답하기를 부부가 되었는데 어찌 다시 헤어질 수 있으며, 또한 자식까 312) 이 때문에 가라왕의 면전에서 多沙津을 주는 것은 어렵다고 생각하고 큰 섬 으로 돌아 313) 가서 특별히 錄史 를 보내어 扶余(백제)에게 주었다. 이로 말미암아 가라는 신라와 우호 를 맺고 일본에 원한을 품게 되었다. 가라왕은 신라의 왕녀를 아내로 맞아들여 드디어 자 식을 낳았다.314) 신라는 처음 여자를 보낼 때 함께 백 명을 보내서 왕녀를 시중들게 했다. 이들을 받아들여 여러 縣에 분산하여 거주시켰는데 신라의 의관을 착용하게 했다. 阿利 지 있거늘 어찌 이를 버리고 갈 수 있겠는가. 하였다. 결국 [신라는] 지나는 곳에 있는 刀 伽317) 古跛 布那牟羅318)의 3성을 빼앗고, 또한 북쪽의 5성319)을 함락시켰다. 是月 이 달에 近江毛野臣을 安羅에 사자로 보내어 칙을 내려 신라에게 南加羅 己呑을 재 건하도록 권하였다. 백제는 將軍君尹貴320) 麻那甲背321) 麻鹵322)등을 안라에 파견하여 조 309) 物部伊勢連父根 : 주 292) 참조. 310) 吉士老 : 吉士에 대해서는 주 190) 참조. 老는 이름으로 자세히 알 수 없다. 311) 加羅王 : 현 경북 고령에 있었던 대가야의 왕을 일컫는다. 312) 큰 섬 : 繼體 9年(515) 夏4月에 物部連 등이 도망갔던 汶慕羅 즉 현 경남의 南海島로 추정된다. 313) 錄史 : 문서 및 기록을 담당하는 관인. 314) 가라왕은 낳았다 : 三國史記 卷4 新羅本紀 법흥왕 9年(522)條에 가라국왕이 신라에 통혼 을 청하자 신라는 伊 比助夫의 누이를 보냈다는 기록이 있다. 315) 阿利斯等 : 加耶 수장층의 칭호로 추정된다. 日本書紀 垂仁 2年 是歲條의 분주에 意富加羅國王 (大加耶國王)의 아들 이름이 都怒我阿羅斯等 혹은 于斯岐阿利叱智干岐 이라고 기록한 예가 있다. 이 기사는 그대로 믿기 어렵고 이를 제외하면 繼體 23年(529) 夏4月조의 분주, 同 24年 秋 9月條, 그리고 敏達 12年(583) 7月條에는 阿利斯登 이라는 명칭으로 나오고 있다. 일본학계에 서는 대체로 이 阿利斯等을 민달 12년 7월조의 達率日羅의 아버지 火葦北國造阿利斯登 과 동일 인물로 간주한다. 그런데 이러한 시각에는 아리사등을 왜의 가야지배와 관련하여 현지에 파견된 倭系官人으로 보는 인식(池內宏, 1970, 앞의 글, 254쪽)이 저변에 깔려있다. 이와는 반대로 백제 또는 한반도계 阿利斯等(阿利斯登) 일족이 葦北 지역으로 이주해 가서 國造가 된 것으로 이해하 기도 한다(김현구, 1993, 앞의 글, 138~140쪽). 그런데 아리사등을 인명으로 보는가 아니면 칭 호로 보는가에 따라 해석은 완전히 달라진다. 아리사등은 계체 23년 4월조에 任那王인 己能末多 干岐 기사의 분주에 己能末多干岐라 함은 아리사등일 것이다. 라는 기록이 있듯이 실제로 그의 행적을 보면 가야의 수장층격인 인물로 묘사되고 있다. 따라서 아리사등을 인명으로 보고 출자를 火葦北國에서 구할 경우 葦北 지방의 국조로서 이 지역에 뿌리를 내린 재지세력이 어느 틈엔가 도해하여 가야일국의 수장이 되었다는 말이 되는데 납득할 수 없는 일이다. 반대로 한반도에서 阿利斯登 일족이 葦北 지역으로 건너가 그 지역의 國造가 되었다고 추정하는 것도 근거가 부족하 다. 여기서 아리사등을 인명이 아닌 칭호로 볼 경우 이리사등은 1인에 한정되지 않고 복수의 인 물이 될 수 있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阿利斯等을 이름이 아닌 加羅王 또는 執權大臣의 位號 또는 존칭으로 볼 수 있다면(今西龍, 1979, 朝鮮古史の硏究, 國書刊行會, 324쪽), 가야의 아리 사등과 위북지방의 아리사등은 같은 계통의 칭호를 쓰는 별개의 인물일 것으로 추정된다. 316) 己富利知伽 : 가야 수장층의 칭호. 阿利斯等과 동일인으로 보고 둘 다 이름이 아닌 칭호로 보는 견 해도 있지만(今西龍, 1979, 앞의 책, 324쪽), 일본서기 편찬자가 己富利知伽에 대해서 알 수 없 다고 주석을 단 것으로 보아 동일인으로 보기는 어렵다. 또한 己富利知伽에 대해서는 加羅 출신임 을 명확히 하고 있지만 阿利斯等에게는 그러한 출신지 구분이 없다. 己富利는 코호리 로 훈독되 는데 評(郡 이전의 명칭)의 훈과 같다. 그리고 知伽를 君長의 뜻으로 읽을 수 있다면(三品彰英, 1966, 앞의 글), 己富利知伽란 郡 정도 크기의 지역의 수장 이라는 의미로 이해해 볼 수도 있다. 317) 刀伽 : 古跛와 함께 본조에 나타나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다만 모두 가야의 읍락으로 신라와 의 경계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318) 布那牟羅 : 일본서기 계체 24년(530) 9월조에도 보인다. 布那는 昌寧의 옛 지명인 布羅와 음 이 통하기 때문에 火王山城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牟羅에 대해서는 梁書 卷54 열전 百濟傳에 그 풍속에 城을 健牟羅라고 부른다. 는 기록이 보인다. 牟羅(모라)는 村(ムラ)의 의미이다. 319) 북쪽의 5성 : 일본서기 계체 24년(530) 9월조에 騰利枳牟羅 등의 5성 탈취 기사와 유사하다. 320) 君尹貴 : 일본서기 欽明 4年 12월조에는 3佐平의 한명인 下佐平木尹貴로 나온다. 본조의 君 尹貴 이하 麻那甲背, 麻鹵 인명은 欽明紀에 인용된`百濟本記a에 나오는 인물들을 모아놓은 것 으로 추정되기도 한다(高寬敏, 1993,` 日本書紀 繼體紀 近江毛野臣朝鮮派遣記事の檢討a, 大阪經濟法科大學アジア硏究所年報 4). 321) 麻那甲背 : 일본서기 흠명 2년(541) 4월조의 城方甲背昧奴, 흠명 4년 12월조의 中佐平木 麻 那, 武烈 6年(504) 10월조에 사신으로 온 麻那君은 모두 동일인 일 것으로 여겨진다. 322) 麻鹵 : 일본서기 흠명 2년 4월조에는 下部中佐平麻鹵로 나온다.

43 84 日本書紀 85 칙을 듣도록 하였다. 신라는 蕃國323)의 官家를 깨뜨린 것을 두려워하여 大人324)을 보내지 近江毛野臣에게 詔를 내려 任那王이 上奏한 바를 잘 물어서 양국간의 의심을 풀고 화해 않고, 夫智奈麻禮 奚奈麻禮325) 등을 안라로 보내서 조칙을 듣도록 하였다. 이에 안라는 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毛野臣은 熊川329)에 머물며 <*一本에는 임나의 久斯牟羅330) 새로이 高堂을 세워서 칙사(近江毛野臣)를 인도하여 오르도록 하였다.326) 國主327)가 그 뒤 에 머물렀다고 한다.> 신라 백제 두 나라의 왕을 소집했다. 新羅王 佐利遲331)는 久遲布 를 따라 계단을 올랐다. 國內의 大人 중에 堂上에 오르는 자는 한둘이었다. 백제의 사자 禮332)<*一本에 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333)라 부른다.>를 보내고, 백제는 恩率 彌騰利334)를 와 장군들은 堂의 아래에 있었다. 무릇 수개월 동안 여러 번 堂 위에서 논의가 있었다. 장 보내서 毛野臣이 있는 곳에 모이도록 하였을 뿐 두 왕 자신은 오지 않았다. 毛野臣이 크 군 君 등이 그 뜰에 있었던 것을 분하게 여겼다. 게 노하여 두 나라의 사신에게 책문하여 말하기를 小가 大를 섬기는 것은 하늘의 도리이 하4월 是月 여름 4월. 이 달에 사신을 파견하여 己能末多干岐328)를 돌려보냈다. 아울러 任那에 있는 다.<*一本에는 대목의 끝에는 대목을 잇고, 소목의 끝에는 소목을 잇는 것이다라고 한 다.> 어찌하여 두 나라의 왕은 직접 와서 천황의 칙을 받으려고 하지 않고 가벼이 사신을 보냈는가? 설령 지금 너희들의 왕이 스스로 와서 칙을 들으려고 해도 나는 칙을 전하지 않겠다. 반드시 물리치겠다. 라고 하였다. 久遲布 恩率 彌騰利는 두려운 마음을 품고 323) 蕃國 : 주 16) 참조. 여기서 蕃國은 구체적으로 南加羅와 己呑을 가리킨다. 324) 大人 : 일본서기 에서 대인에 대한 용례는 神代(下) 등에 于志(우시) 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현대 일본어에서 남자 어른에 대한 높임말이 여기서 유래했음을 알 수 있다. 즉 지체 높은 사람, 존귀한 사람 등의 의미이다. 기존 연구에서는 가야남부제국 가운데서 안라의 뜻에 동조하는 소국들로부터 온 대표자들로 이해하거나(김태식, 1993, 앞의 글, 201~202쪽), 안라국 주변에 있었던 지역 세력 의 수장 또는 최상위층 귀족이 안라국에 편입된 후 중앙 귀족화 된 사람으로 보기도 한다(백승옥, 2006,`4~6세기 安羅國의 領域과 國內大人 -칠원지역 고대사 복원의 一段-a, 釜大史學 30). 325) 夫智奈麻禮 奚奈麻禮 : 奈麻禮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1위에 해당되는 奈麻 奈末을 말한 다. 夫智와 奚는 사신의 이름이다. 이곳에만 보이므로 자세히 알 수 없다. 326) 이에 하였다 : 이른바 高堂會議 혹은 安羅會議 라고 한다. 530년대 백제와 신라가 동서 양방에서 안라의 영역 가까운 지점까지 군사적 거점을 설정하고 육박해 오는 위기적인 상황에서 안라는 자구책을 모색하기 위해 국제회의를 개최하게 된다. 기존연구에서는 이 회의의 중심이 인물로 나오는 近江毛野臣의 성격 규정에 따라 회의를 주도한 나라도 또한 왜국 백제 안라로 각각 다르게 보고 있다(주 303) 참조). 327) 國主 : 安羅國王. 여기서 國王이라고 기록하지 않은 것은 안라에 대한 차별적 표기로 볼 수 있 다.`광개토왕비a에서 백제왕을 殘主(百殘=百濟)로 표기한 비슷한 예가 있고, 일본서기 흠명 5년(544) 4월조에는 卓洵國主 라는 용례가 보인다. 이에 대해 國主란 百濟 의 입장에서 小 國 관념에 입각하여 상대적으로 낮추어 불렀을 가능성이 있다고 주장하거나(白承忠, 1995,`加 耶의 地域聯盟史 硏究a, 부산대학교 박사학위논문), 國主가 안라국의 지배자를 가리키는 것이지 만 안라국의 지배자가 왕으로 칭하였던 것은 540년대가 되어서였다고 이해하기도 한다(趙仁成, 1996,`6世紀 阿羅加耶(安羅國)의 지배세력의 동향과 정치형태a, 加羅文化 13). 328) 己能末多干岐 : 己能末多는 가야 수장의 이름이다. 干岐는 가야의 수장 칭호로서 百濟本記에는 旱岐라고 표기되기도 한다. 329) 熊川 : 현 경남 창원군 웅천면. 각각 돌아가서 왕에게 소집에 응하라고 전했다. 이에 신라는 다시 上臣335) 伊叱夫禮智干 岐336)를 파견하여<*신라는 大臣을 上臣으로 한다. 一本에는 伊叱夫禮知奈末이라고 말한 다.> 무리 3천을 거느리고 와서 칙명을 듣고자 하였다. 毛野臣은 멀리서 무장한 군사 수 천인이 둘러싸고 있는 것을 보고, 熊川으로부터 임나의 己叱己利城으로 들어갔다. 伊叱 330) 久斯牟羅 : 久斯는 현 경남 창원의 옛 이름으로 屈自 혹은 仇史라고도 한다. 牟羅는 村의 의미이 다. 마산 지역으로 비정되기도 한다. 일본서기 계체 24년(530) 9월조에도 보인다. 331) 佐利遲 : 신라 法興王(재위 514~540). 이름 앞에 신라왕이라고 하였음으로 이 시기 신라의 왕 은 법흥왕이다. 계체 23년인 529년은 三國史記 에 의하면 법흥왕 16년에 해당된다. 법흥왕의 諱는 原宗이다. 佐利遲의 遲 는 신라의 인명에 종종 등장하는데 智와 같이 주로 남성에게 붙는 美稱으로 볼 수 있다. 佐利 는 일본어로 사리(サリ)라고 읽는데 정확히 무슨 의미인지 알 수 없 다. 단 법흥왕 18년에 上大等이었던 이찬 哲夫의 哲 과 佐利 가 음이 통한다고 보고 佐利遲를 哲夫로 이해하기도 한다. 332) 久遲布禮 : 신라 居柒夫. 三國史記 卷44 列傳에 의하면 居柒夫는 荒宗이라고도 부른다. 333) 久禮爾師知于奈師磨里 : 居柒夫의 異表記. 磨里는 남성의 美稱으로서 荒宗의 宗과 통한다. 334) 彌騰利 : 자세히 알 수 없다. 335) 上臣 : 上大等. 三國史記 卷38 職官志(上) 上大等條에 上大等(혹은 上臣이라고 한다)을 법흥 왕 18년(531) 처음으로 두었다. 는 기록이 있다. 336) 伊叱夫禮智干岐 : 異斯夫. 三國史記 권44 列傳에 의하면 진흥왕 2년(541)에 兵部令이 되었고, 6년에는 國史 편찬을 장려했다고 한다.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23년(562) 9월조에 의 하면 왕이 異斯夫에게 가야를 정벌하도록 명령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44 86 日本書紀 87 夫禮智干岐는 多多羅337)의 들에 머물면서 돌아가지 않고 석 달이나 기다렸다. 그러면서 략하여<*金官340) 背伐341) 安多 委陀를 4촌으로 한다. 一本에는 多多羅 須那羅 和 여러 번 칙명을 듣고자 청하였지만, 끝내 칙명을 들을 수가 없었다. 伊叱夫禮智가 거닐던 多 費智를 4촌이라고 한다.> 사람이나 물건을 남기지 않고 약탈하여 본국(신라)으로 돌 士卒들이 촌락에서 식량을 구걸하다가 毛野臣의 아갔다. 어떤 이는 多多羅의 4촌이 약탈당한 것은 毛野臣의 잘못이었다. 고 한다. 人인 河內馬飼首御狩(코우치노우마카 338) 이노오비토미카리) 의 집을 지나치게 되었다. 御狩는 다른 문에 들어가 숨어서 구걸하 는 자들이 지나가는 것을 기다려 주먹을 쥐고 멀리서 때리는 시늉을 하였다. 구걸하는 자 들이 이것을 보고서 석 달을 기다려 勅命를 듣고자 하였으나, 宣勅은 없고, 칙명을 듣기 위해 온 사자를 괴롭히고 있다. 上臣을 기만하여 죽이려고 하고 있는 것임을 이제 알았 339) 다. 라고 하였다. 이에 보았던 것을 상세하게 上臣에게 보고하였다. 上臣은 4村 을 공 繼體天皇 24년(530) 추9월 가을 9월. 任那가 사신을 보내 奏上하기를 毛野臣이 마침내 久斯牟羅에 舍宅을 짓고 머무린 지 2년이 되었는데<*一本에 3년이라고 한 것은 오고 간 해를 합한 것이다.> 政事 를 게을리 하고 있습니다. 요즘에 日本人과 任那人 사이에 자주 자식이 태어나 그 귀속문 337) 多多羅 : 현 경남 多大浦 부근이다. 338) 河內馬飼首御狩 : 河內馬飼首氏는 河內에서 말의 조련과 사육을 맡은 馬飼首를 관리하던 伴造 씨족으로 일본서기 에 의하면 대화정권의 馬飼部를 관리하면서 任那復興 을 위해 대외관계에 서도 활약하였다. 일본서기 에는 같은 씨족 인물로 繼體의 즉위에 공헌을 한 河內馬飼首荒籠과 欽明 22년(561) 시세조의 河內馬飼首押勝이 나온다. 河內馬飼首氏는 河內直氏나 河內漢直氏와 는 계통이 다르고 천무 12년(683) 9월에 山內馬飼造와 함께 連姓을 사성받았다. 御狩는 이름인 데 繼體 24年(530) 9월조에는 河內母樹馬飼首御狩로 나온다. 여기서 母가 오모(オモ)로 발음되 는 점에서 한반도 남부의 도래인일 가능성이 지적되기도 한다(李永植, 1993, 加耶諸國と任那 日本府, 吉川弘文館, 264~265쪽). 339) 4村 : 후문의 주와 다른 주인 一本 은 그 村名을 다르게 전하고 있다. 그런데 敏達 4年(575) 6 월조의 4邑과 推古 8年(600) 是歲條에 신라의 6城割讓 기사에 보이는 城名은 一本 의 村名과 일치한다. 이것을 표로 나타내면 다음과 같다. 繼體 23年 4月 주 安多 金官 背伐 委陀 同上 一本 多多羅 須奈羅 費智 和多 敏達 4年 6月條 多多羅 須奈羅 發鬼 和陀 推古 8年 是歲條 多多羅 素那羅 弗知鬼 委陀 위치 현 경남 多大浦 현 경남 金海 현 경남 熊川 미상 제를 둘러싸고 소송으로 해결하는 것은 어렵습니다. 처음부터 판단할 수가 없는 것입니 4村 기사에 대해서는 금관가야의 멸망 연대와 관련하여 적지 않게 논의되어 왔는데 4촌 공격을 곧 신라에 의한 금관국의 병합으로 보는 견해(三品彰英, 1966, 앞의 글 ; 大山誠一, 1980, 앞의 글 ; 金 泰植, 1988,`6세기 전반 가야남부 제국의 소멸과정 고찰a, 한국고대사연구 1 ; 연민수, 1990, 앞 의 글)가 많은 지지를 받고 있다. 한편 일본서기 에 의하면 繼體紀의 신라의 4촌 공격 즉 금관국의 병합은 敏達紀에 이르러 이른바 任那의 調 의 사적 기원으로 연결된다. 물론 일본서기 의 임나 의 조 의 허구성에 대해서는 새삼 논할 바가 못 되지만 임나의 조 의 해당지역으로 되어 있는 多多 羅 등 4촌이 신라의 이사부가 경략했다는 금관국 등 그 주변의 4촌과 일치한다는 점이 주목된다. 340) 金官 : 南加羅. 주 50) 참조. 須 혹은 素는 金과 뜻이 통하고, 奈羅(nara)는 國을 의미한다. 341) 背伐 : 현 경남 웅천. 일본서기 계체 24년(529) 9월조에는 背評으로 나온다. 342) 誓湯 : 죄인의 손을 열탕에 넣어 봄으로써 데이거나 그렇지 않는 것을 기준으로 옳고 그름을 판 단하는 고대 재판의 한 종류. 探湯이라고도 한다. 343) 吉備韓子那多利 斯布利 : 韓子란 일본 남성과 한반도의 여성 사이에 태어났던 자식을 일컫는 다. 여기서 那多利와 斯布利는 이름으로 吉備 출신의 병사와 가야 여성 사이에 태어난 자들이다. 344) 調吉士 : 백제계 도래씨족. 新撰姓氏錄 에는 同族으로 調曰佐나 調連이 나오는데 모두 백제국 努理使主의 후예라고 한다. 흠명 23년 7월 是月條에 調吉士伊企儺라는 인물이 보인다. 調吉 士 란 氏姓名은 조정에 바치는 공납물인 調(미츠기) 의 관리를 담당한 도래계 집단이라는 것에 다. 毛野臣은 誓湯342)을 두기를 즐겨하며 진실을 말하는 자는 데지 않고, 거짓을 말하는 자는 데이고 말 것이다. 라고 하니, 이에 湯에 들어가 데어 죽은 자가 많습니다. 또한 吉 備韓子那多利(키비노카라코나타리) 斯布利(시후리)343)를 죽이고<*大日本의 사람이 蕃國 의 여자와 결혼해 태어난 자를 韓子라 한다.> 항상 인민을 괴롭히고, 끝내 和解하는 법이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천황은 그 行狀을 듣고 사람을 보내서 소환했으나 오지 않았다. 몰래 河內母樹馬飼首御狩를 京에 보내 아뢰기를 신이 勅旨를 이루지 못하고 京으로 돌 아간다면, 고생하며 가서 공도 없이 헛되이 되돌아가는 꼴이 됩니다. 부끄럽고 면목이 없 어 견딜 수 없을 것입니다. 엎드려 바라건대 폐하시여, 國令을 완수하고 조정에 돌아가 사죄할 때까지 기다려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사자를 보낸 후에 다시 스스로 생각하여 말하기를 그 調吉士344)도 역시 皇華之使(조정의 사신)이다. 만약 나보다 먼저 귀국하여 實情을 아뢰면 나의 罪科는 더욱 무거워질 것이다. 라고 하였다. 곧 調吉士를 보내서 군

45 88 日本書紀 89 사를 거느리고 伊斯枳牟羅城345)을 방어하도록 하였다. 이에 阿利斯等346)은 모야신이 사소 이 28년 歲次 甲寅에 崩하였다고 한다.357) 그러나 이것을 25년 歲次 辛亥에 崩했다고 한 한 것에만 신경 쓰고 소임에 힘쓰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여러 차례 귀국할 것을 권했지만 것은`百濟本記a 의 내용을 인용하였기 때문이다.358) 그 내용에 太歲 辛亥의 3月에 군사 돌아가지 않았다. 이로 말미암아 모야신의 모든 行迹을 알고 배반할 마음을 품기 시작했 가 안라로 진군해서 乞 城359)에 주둔하였다. 이 달에 고구려는 그 왕 安을 죽였다.360) 또 다. 그래서 久禮斯己母347)를 신라에 보내어 군사를 요청하고, 奴須久利348)를 백제에 보내어 들으니 일본의 천황과 太子 皇子가 모두 죽었다. 고 하였다.361) 이에 의하면 辛亥는 25 군사를 청하였다. 毛野臣은 백제의 군사가 온다는 것을 듣고, 背評349)에서 맞아 싸웠는데 년에 해당된다. 후에 勘校하는 사람은 그것을 알 것이다.> <*背評은 지명이다. 다른 이름은 熊備己富里이다.> 다치고 죽은 자가 반이었다. 백제는 奴須久利를 사로잡아서 수갑과 족쇄를 채우고, 목에는 칼을 채워 자물쇠로 잠근 다음 신 권18 廣國押武今日天皇 安閑天皇362) 원년(531) 라와 함께 성을 포위하였다. 阿利斯等을 꾸짖어 毛野臣을 내놓으라! 라고 하였다. 毛野 臣은 성 주위의 수비를 견고히 하여 생포할 수 없었다. 이에 양국은 적당한 곳에서 한 달 동안 체류하며 성을 쌓고 돌아가니 久禮牟羅城350)이라고 불렀다. 돌아가는 길에 騰利枳牟 羅351) 布那牟羅352) 牟雌枳牟羅353) 阿夫羅354) 久知波多枳355) 등의 5성을 빼앗았다. 5월 5월. 백제가 下部 脩德嫡德孫363) 上部 都德己州己婁364)등을 보내서 평상시의 調物을 공 상하고, 따로 표를 올렸다. 繼體天皇 25년(531) 동12월 丙申朔 庚子 겨울 12월 병신삭 경자(5일). [계체천황을] 藍野陵356)에서 장사지냈다. <*或本에는 천황 서 비롯되었다. 345) 伊斯枳牟羅城 : 현 경북 淸道郡에 위치. 346) 阿利斯等 : 주 315) 참조. 347) 久禮斯己母 : 阿利斯等이 신라에 파견했던 사자. 348) 奴須久利 : 阿利斯等이 백제에 파견했던 사자. 이후 백제의 의심을 받아 구금된다. 349) 背評 : 背伐. 주 339) 참조. 350) 久禮牟羅城 : 현 경북 달성군의 苞山(琵瑟山)에 위치. 351) 騰利枳牟羅 : 현 경남 창녕군의 靈山에 위치. 352) 布那牟羅 : 현 경남 창녕 일대. 布那는 布羅라고도 한다. 布那牟羅가 일본서기 계체 23년 (529) 4월 是月條에 인용된 분주인 一本의 費智, 민달 4년 6월조의 發鬼, 추고 8년 시세조의 弗 知鬼가 모두 같은 지역을 가리킨다고 보기도 한다. 353) 牟雌枳牟羅 : 현 경남 창녕의 無愁에 위치. 354) 阿夫羅 : 현 경북의 현풍에 위치. 355) 久知波多枳 : 현 경북 달성군 求智面에 위치. 356) 藍野陵 : 延喜式 諸陵式에는 攝津(셋츠)國 島下(시마시타)郡 安威(아이)鄕의 땅에 있다고 기록 되어 있다. 하지만 현재 高槻(타카츠키)市 郡家新(군케신)町에 있는 今城塚(이마시로츠카)古墳을 계체릉으로 보고 있다. 今城塚古墳은 전체 길이 190m, 後圓部의 높이가 10m, 前方部의 폭이 140m에 달하는 전형적인 前方後圓墳이다. 357) 천황이 한다 : 日本書紀 安閑 元年(534)條에도 이해 太歲甲寅이다. 는 기록이 보인다. 여기서 甲寅年은 534년이다. 358) 그러나 때문이다 : 일본서기 에서는 계체천황의 사망시기를`百濟本記a 를 근거로 재위 25년 즉 辛亥年(531)으로 하였기 때문에 安閑의 즉위 때까지 2년이라는 空位가 생긴다(주 257) 참조). 359) 乞 城 : 위치를 정확히 알 수 없다. 백제가 안라까지 세력을 뻗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360) 이 달에 죽였다 : 고구려의 왕 安은 제22대 왕인 安臧王(재위 519~531). 삼국사기 에 의 하면 安臧王은 재위 13년, 즉`百濟本記a 에서 전하는 辛亥年과 같은 해인 531년에 사망했다고 전한다. 다만`百濟本記a 와 다른 점은 사망한 달을 夏5月로 전하고 있고, 안장왕의 사망 원인에 대해서는 언급하고 있지 않다. 361) 또 들으니 하였다 : 이른바 辛亥의 變 (주 257) 참조). 362) 安閑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27대 천황. 아버지는 繼體天皇이고(첫째 아들), 어머니는 尾張 連草香의 딸 目子媛(메노코히메)이다. 이름은 勾大兄(마가리노오오에)이며, 제28대 천황인 宣化天 皇의 同母兄이다. 계체천황이 사망하고 난 뒤 2년 후에 즉위하였다. 安閑 宣化 두 천황과 異母弟 인 欽明天皇(제29대 천황) 사이에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兩朝가 대립하였다고 한다(주 257) 참조). 363) 下部脩德嫡德孫 : 下部는 백제 5부 가운데 하나. 脩德은 周書 에 기록된 백제 16계에는 보이지 않는다. 이 脩德을 施德 혹은 將德으로 추정하는 견해도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嫡德孫에 대해서 는 성이 嫡이고 이름이 德孫으로 볼 수 있다. 현종 3년 시세조의 適莫爾解, 계체 10년 9월조의 灼莫古, 흠명 11년 4월조의 灼干那 등과 같은 성씨의 인물로 추정된다(주 241)과 주 298) 참조). 364) 上部都德己州己婁 : 上部는 백제 5부 가운데 하나. 都德은 위의 脩德과 마찬가지로 周書 에는

46 90 日本書紀 武小廣國押盾天皇 宣化天皇365) 2년(537) 무라)372)에 거주시켰다. 지금의 山村己知部(야마무라노코치후)의 조상이다. 동10월 壬辰朔 8월 91 겨울 10월 임진삭(1일). 천황은 신라가 임나를 침공한 것366)에 대해 大伴金村大連(오오 8월. 고구려 백제 신라 임나가 모두 사신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秦人(하타히 토모노가나무라노오오무라지)에게 명하여 그 아들 磐(이와)과 狹手彦(사데히코)367)을 보 토)373) 漢人(아야히토)374) 등 諸蕃의 投化者를 불러 모아 國郡에 안치하고 戶籍을 작성하 내 임나를 돕도록 하였다. 이 때 磐은 筑紫에 머무르며 그 國(쿠니)368)를 다스리며 三韓에 였다. 秦人의 戶數는 모두 7,053호로 大藏椽(오오쿠라노후비토)375)을 秦伴造(하다노도모 대비하고 있었다. 狹手彦은 임나로 나아가 백제를 구원하였다. 노이먀쓰코)376)로 임명하였다. 권19 天國排開廣庭天皇 欽明天皇369) 원년(540) 2월 9월 乙亥朔 己卯 9월 을해삭 기묘(5일). 難波 祝津宮(하후리츠노미야)377)에 행차하였다. 大伴大連金村 許勢臣稻持(코세노오미이나모치)378) 物部大連尾輿(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379) 등 2월. 백제인 己知部370)가 귀화하였다. 倭(야마토)國371) 添上(소우노카미)郡의 山村(야마 보이지 않는다. 己州己婁는 흠명 4년 9월에 왜국에 왔을 때 관등이 護德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는 데 護德도 백제 16계에 보이지 않는다. 다만 都德은 護德보다 낮은 관등이었을 것으로 固德 혹 은 對德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365) 宣化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28대 천황. 아버지는 繼體天皇이고(둘째 아들), 어머니는 尾 張連草香의 딸 目子媛(메노코히메)이다. 이름은 檜 高田(히노쿠마노타카다)이며, 제27대 천황 인 安閑天皇의 同母弟이다. 安閑天皇이 자식없이 죽었기 때문에 군신의 추대를 받아 즉위했다고 전한다(주 257) 참조). 366) 신라가 임나를 침입한 것 : 三國史記 권4 新羅本紀 法興王 19年(532)條에 金冠國主 金仇亥가 妃와 세 아들, 그리고 國寶를 가지고 신라에 투항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367) 狹手彦 : 日本書紀 흠명 23년(529) 8월조에는 한반도에 파견되어 고구려를 격파했다고 적고 있다. 日本三代實錄 卷5 貞觀 3年(861) 8월조에서 狹手彦은 大伴大連金村의 셋째 아들로서 宣化 欽明朝에 해외에 파견되어 공을 세웠다고 전한다. 扶桑略記 흠명 13년조에도 대동소이 한 내용이 보이는데 협수언을 佐호彦으로 표기하고, 백제의 요청에 의해 고구려를 쳤던 것을 흠 명 13년의 일로 기록되어 있다. 368) 國 : 주 145) 참조. 369) 欽明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29대 천황(재위 540~571). 아버지는 繼體, 어머니는 仁賢의 딸인 手白香(타시라카)이다. 敏達 用明 崇峻 推古 4대 천황의 아버지이다. 계체 말년에 異母 兄인 安閑 宣化와 황위계승을 둘러쌓고 병립하였지만, 선화가 사망한 후에는 흠명조로 통합되 었다(주 257)과 주 362) 참조). 치세 중에 불교가 공식적으로 전해졌으며, 고구려와 교류가 시 작되었다. 日本書紀 欽明紀는 대외관계기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점이 큰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370) 己知部 : 己知는 己智 혹은 稽知(吉士) 라고도 한다. 神功紀의 微叱己知波珍干岐의 己知와 같 은 의미로 수장을 뜻한다. 新撰姓氏錄 大和國諸蕃條에 의하면 己智 는 중국 秦始皇의 태자 胡亥의 후손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371) 倭國 : 여기서는 大和(야마토)國을 가리킨다. 현재 나라지방. 372) 山村 : 현재 나라의 남부지역으로 山町(야마마치)에서 帶解町(오비토케마치) 등에 걸친 지역. 373) 秦人 : 秦氏에 속하여 견직물의 생산을 담당한 도래인 집단 혹은 그 후예. 주 110) 참조. 374) 漢人 : 漢氏에 속하여 수공업 기술 등을 담당한 도래인 집단 혹은 그 후예. 주 185)와 주 192) 참조. 375) 大藏椽 : 椽은 원래 율령제에서 國司의 제3등관을 말하며, 大藏省의 3등관에는 椽職이 없다. 일본서기 편찬단계에서 삽입된 표현이다. 376) 秦伴造 : 秦部를 관장한 자로서 확실하지는 않지만, 일본서기 欽明卽位前紀에 보이는 秦大津 父를 가리키는 듯 하다. 377) 祝津宮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378) 許勢臣稻持 : 巨勢男人大臣의 아들이다. 許勢氏는 巨勢氏로도 나오고, 姓은 臣이다. 天武 13年 11月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新撰姓氏錄 右京皇別條에 의하면 武內宿 의 후예로 기록되어 있다(주 38) 참조). 본거지는 大和國 高市(타케치)郡 巨勢(코세)鄕으로 오늘날의 나라현 南葛城 (미나미카츠라기)郡 지역을 중심으로 한 大和지방의 남부 일대에 해당한다. 이 지역에는 약 400 여 기의 후기 횡혈식 고분으로 이루어진 大和남부 지역의 최대 군집분인 巨勢山고분군이 있다. 이 고분군의 조사 보고와 문헌사료에 대한 검토를 통하여 許勢氏는 6세기 이후 세력을 얻어 등 장한 신흥씨족이었으며 그 실존이 확인되는 최초의 인물이 許勢奈率哥麻이었다는 견해(直木孝 次郞, 1964,`巨勢氏祖先傳承成立過程a, 日本古代の氏族と天皇, 書房)가 제시되었다. 許勢 氏가 6세기 신흥씨족이라는 것은 오늘날 일본 학계의 통설이라고 할 수 있다.

47 92 日本書紀 93 이 따랐다. 천황이 여러 신하에게 어느 정도의 군졸이면 신라를 칠 수 있겠는가? 라고 와 任那日本府(미마나야마토노미코토모치)389)의 吉備臣(키비노오미)390)<*이름은 알 수 없 물었다. 物部大連尾輿 등이 적은 군졸로는 쉽게 정벌할 수 없습니다. 옛날 男大迹天皇 다.>과 백제에 가서 모두 詔를 들었다. 백제의 聖明王이 임나의 旱岐들에게 日本天皇이 380) (繼體天皇) 6년에 백제가 사신을 보내 任那의 上 唎 下 唎 娑陀 牟婁 4縣 을 청 하였습니다. 大伴大連金村은 백제의 요청대로 그 구하는 바를 하사하도록 하였습니다. 그 때문에 신라는 오랫동안 [왜국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가볍게 여기어 쳐서는 안 됩니 다. 라고 奏上하였다. 이에 大伴大連金村은 住吉(스미요시)381)에 있는 집에서 병을 칭하며 나오지 않았다. 천황이 靑海夫人 勾子(마가리코)382)를 보내 정중하게 위문하도록 하였다. 大伴은 황송해하며 臣의 병은 다름이 아닙니다. 지금 여러 다른 신하들이 신이 任那를 멸망시켰다고 하기에 두려워서 조정의 부름에 따르지 못한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 에 鞍馬383)를 사자에게 주며 후하게 경의를 표하였다. 靑海夫人은 사실 그대로 아뢰었다. [천황이] 詔를 내리며 오래도록 충성을 다했다. 여러 사람의 말에 두려워하지 마라. 고 하였다. 결국 죄를 묻지 않았고, 총애가 더욱 깊어졌다. 欽明天皇 2년(541) 하4월 여름 4월. 安羅의 次旱岐384) 夷呑奚 大不孫 久取柔利 등과 加羅의 上首位古殿奚385) 卒麻旱岐386) 散半奚旱岐387)의 자식, 多羅의 下旱岐夷他 斯二岐旱岐388)의 자식, 子他旱岐 379) 物部大連尾輿 : 物部大連守屋의 아버지 불교 도입문제를 둘러싸고 蘇我氏와 대립한다. 380) 4縣 : 繼體 6年 冬12월조 참조. 381) 住吉 : 현 大阪市 住吉區 지역. 物部守屋과 蘇我蝦夷가 각각 難波의 宅(用明 2年 4월조)과 難波 大津의 宅(皇極 3年 3월조)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大伴金村도 당시 大津이라고 불리 는 住吉津에 宅을 가지고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382) 靑海夫人勾子 : 자세히 알 수 없다. 383) 鞍馬 : 화려하게 장식한 말. 384) 次旱岐 : 旱岐 다음가는 지위에 있었던 자에 대한 칭호로서 下旱岐와 같다. 大不孫와 久取柔利 는 欽明 5年 11月條에 下旱岐로 나타난다. 385) 上首位古殿奚 : 上首位는 旱岐의 가신집단의 우두머리에 대한 칭호로 보는 견해가 있다. 일본 서기 흠명 5년(544) 11월조에는 上首位 다음의 지위에 있었던 자의 칭호로 여겨지는 二首位란 칭호가 보인다. 古殿奚는 일본서기 繼體 7年(513) 冬11月條에 伴破의 旣殿奚로 나온다. 386) 卒麻旱岐 : 卒麻는 현 경남 陜川郡 草溪 일대 지역이다. 일본서기 欽明 5年 11月條에는 卒麻君 으로 나온다. 387) 散半奚旱岐 : 散半奚는 현 경남 陜川의 옛 이름이다. 일본서기 欽明 5年 11月條에는 散半奚君 으로 나온다. 388) 多羅의 下旱岐夷他 斯二岐旱岐 : 多羅는 현 경남 陜川 지역을 가리킨다(주 53) 참조). 下旱岐는 次旱岐와 같다. 夷他는 이름이다. 斯二岐는 三國史記 地理志의 辛爾縣으로 현 경남 富林面 新 反里를 가리킨다. 일본서기 欽明 5年 11月條에는 斯二岐君으로 나온다. 389) 任那日本府 : 任那日本府의 초출이다. 日本書紀 에는 安羅에 설치되었다고 해서 安羅日本府로 도 나온다. 任那日本府 기사는 일본서기 에서 흠명 2년(541)부터 15년에 걸쳐 기록되어 있다. 任那日本府가 언제 설치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흠명 2년 4월조에서 성명왕이 계체천황대의 일 을 회고하면서 근강모야신을 任那日本府라 부르고 있다. 백제측은 근강모야신을 임나일본부로 인식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任那日本府는 흠명 14년 일본부경 적신이 사망한 후 다시 일본 부경은 임명되지 않았으며, 흠명 15년의 在安羅諸倭臣 을 최후로 임나일본부 기사는 보이지 않아 任那日本府의 하한은 554년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日本府 라는 명칭은 6세기 중엽에 실재한 명칭은 아니다. 日本 府 는 7세기 말 이후의 것으로 후대 왜에서 일본으로 국호가 바뀐 후에 가필 수정된 것이다. 日本府 의 府 자 때문에 종래 이를 관아로 생각해 왔다. 그런 데 현존 최고의 일본서기 주석서인 釋日本紀 에서는 임나일본부를 일본음으로 미마나노야 마토노미코토모치 로 읽고, 任那之倭宰 라는 주석을 달고 있다. 야마토 는 왜를 의미하여, 미코토모치 는 천황의 의지를 전달하는 사람 즉 사신을 의미한다. 따라서 임나일본부 는 임나 에 파견된 왜의 사신 을 의미하는 것이 된다. 그렇다면 흠명 15년 12월조 보이는 在安羅諸倭 臣(안라에 주재한 왜신들) 이 임나일본부의 실태에 가장 가까운 당시의 표현이었을 것이다. 과 거 일본학계의 통설은 4세기 중엽부터 6세기 중엽까지 임나일본부가 존속했다는 것이었으나 최 근에는 이를 6세기 전반으로 제한해 보려는 경향이 강하다. 또한 日本府의 위치도 종래 한일 양 국학계에서 금관가야(김해)와 안라(함안)이었을 것으로 이해해 왔지만, 최근 안라에만 존재한 것으로 고정시켜 보는 견해가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任那日本府의 실체 및 성 격규정에 관한 연구는 다양하다. 일찍이 일본에서 4세기에서 6세기에 걸쳐 왜가 남한지역을 지 배하였다는 이른바 임나일본부설을 만들어 내었는데 이를 체계적으로 정리한 것이 末松保和 (1949)이다. 이 임나일본부설은 해방 이후 여러 각도에서 검토되고 비판되면서 이제는 어느 정 도 극복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극복의 전기를 만들어 준 것은 김석형이 조선에는 任那도 日本府도 없었고 임나일본부 관련기사의 모두는 九州의 百濟系 分國과 大和政權 사이에 吉備의 加羅系 分國의 지배를 둘러싸고 충돌한 것이었다고 하는 分國論이었다(1966, 초기조일관계연 구, 사회과학원출판사). 이후 井上秀雄은 임나일본부를 한반도 남부 해안지대에 거주한 왜인집 단으로 파악하였고(1973, 任那日本府と倭, 寧樂社), 천관우( )는 임나일본부는 369년에 가야 제국을 평정한 백제가 설치한 派遣軍司令部로 파악하였다. 천관우의 백제군사령 부설은 倭人傭兵說을 주장한 김현구(1985)에 의해 보다 구체화되었다. 한편 이병선은 일본서

48 94 日本書紀 95 조서를 내린 바는 오로지 임나를 재건하라는 것이다. 이제 어떤 정책을 써서 임나를 재건 聖明王은 옛날 우리 선조 速古王 貴首王393)의 치세 때에 安羅 加羅394) 卓淳旱岐 등이 할 수 있겠는가. 모두 각자 충성을 다하여 천황의 뜻이 펼쳐지도록 도와야 할 것이다. 라 처음 사신을 파견하고 상통하여 두텁고 친밀하게 우호를 맺었다. 子弟가 되어 항상 극진 고 말하였다. 임나 한기들이 대답하기를 이전에 두세 차례 신라와 의논하였으나 회답이 하기를 바랐다. 그러나 지금 신라에 속아 천황의 분노를 사고 任那의 원한을 산 것은 과 없었습니다. 의도하는 바를 다시 신라에 알린다고 해도 여전히 대답은 없을 것입니다. 지 인의 잘못이다.395) 나는 깊이 후회하면서 下部中佐平麻鹵396) 城方甲背昧奴397) 등을 보내 금 함께 사신을 천황에게 보내 보고해야 할 것입니다. 무릇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대왕의 加羅398)에 가서 任那日本府에서 만나 서로 맹세를 하게 하였다. 이후 이 일을 계속 염두에 뜻에 달려있습니다. 삼가 교지를 받들면서 누가 감히 이의를 제기하겠습니까? 하지만 임 두면서 임나를 재건하는 것은 조석으로 잊지 않았다. 지금 천황이 조서를 내려 속히 임 나의 국경이 신라와 접해있기 때문에 卓淳 등이 화를 입을까 두렵습니다. 고 하였다. <*등 나를 재건하라. 고 하였다. 이에 너희들과 함께 모의하여 임나 등의 나라를 세우고자 한 이라는 것은 391) 392) 己呑 加羅 를 말한다. 탁순 등의 나라는 망할 위험이 있다고 말한다.> 다. 마땅히 좋은 계획을 세워야 한다. 또한 임나의 국경에서 신라를 불러 들은 것인가 아 닌가를 묻겠다. 동시에 사자를 보내어 천황에게 주상하여 삼가 교시를 받고자 한다. 만약 사자가 돌아오기 전에 신라가 틈을 엿보아 임나를 침공하면 나는 가서 마땅히 구할 것이 기 에 나오는 국명 지명의 분석을 통해 任那를 대마도에 비정하였다(1987, 任那國과 對馬 島, 아세아문화사).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임나일본부를 왜인 使者나 외교교섭단체로 본 견해 로는 鈴木靖民(1974,`いわゆる任那日本府及び倭問題a, 歷史學硏究 405), 鬼頭淸明(1976, `任那日本府の檢討a, 日本古代國家の形成と東アジア ), 奧田尙(1976,`任那日本府と新羅の倭 典a, 古代國家の形成と展開, 吉川弘文館), 大山誠一(1980,`所謂任那日本府の成立についてa, 古代朝鮮と日本 ) 등의 견해를 들 수 있다. 이외에 가야와 왜 사이의 외교나 교역의 측면을 중 시하여 교역기관으로 보는 견해로는 吉田晶(1975,`古代國家の形成a, 岩波講座 日本歷史-古 代- 2) 이근우(1985,`日本書紀 任那關係 기사에 관하여a, 청계사학 2) 등의 견해를 들 수 있고, 安羅에 설치된 倭臣館으로 본 견해로는 김태식(1991,`530년대 安羅의 日本府 경영에 대 하여a, 울산사학 4) 연민수(1990)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그리고 왜가 가야 제국과의 외교 교섭을 위해 임시 파견한 사신단으로 본 견해로는 請田正幸(1974) 이영식(1993) 등의 연구를 들 수 있다. 이외에 고고하적으로 임나일본부 문제를 다룬 논고로는 안춘배(1991,`고고학상에 서 본 任那日本府說a, 가라문화 8)의 연구가 있다. 390) 吉備臣 : 日本府의 중심인물로 나온다. 일본서기 欽明 5年 3月條에 吉備弟君臣이란 인물이 보 이는데 吉備臣이 이 吉備弟君臣을 가리키는 것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日本書紀 에는 吉備氏의 활약상이 여러 곳에 걸쳐 기록되어 있는데 5세기 대에는 주로 한반도에서 활약하고 있다. 任那 國司였던 吉備上道臣田狹이나 신라정토에 파견된 田狹의 아들 弟君(雄略 7年 是歲條), 日本府行 軍元帥의 한 사람인 吉備臣小梨(雄略 8年條), 신라정토의 장군이었던 吉備臣尾代(雄略 23年條) 등이 보인다. 吉備氏에 대해서는 주 174) 참조. 391) 己呑 : 國. 현 경북 慶山 지역(주 51) 참조). 392) 加羅 : 南加羅. 日本書紀 에서 加羅는 보통 좁은 의미로 高靈의 大加耶를 가리키지만, 넓은 의 미의 加羅 즉 任那 를 가리키기도 한다. 그런데 欽明 2년 4월조에서는 加羅가 고령의 大加耶 또는 安羅를 가리키거나, 南加羅를 가리키기도 한다. 여기서는 남가라를 가리킨다(주 394)와 주 398) 참조). 다. 걱정할 바가 못 된다. 그러나 방비를 잘하고 경계하기를 잊어서는 안 된다. 특히 너희 들이 탁순 등이 당한 바와 같은 화를 입는 것을 두려워한다고 말하였으나, 신라가 스스로 강하기 때문이 아니다. 己呑은 加羅와 신라 사이의 경계선에 있어서 해마다 공격을 받 아 패망한 것이다. 任那도 구원할 수가 없었기 때문에 멸망한 것이다. 南加羅는 땅이 협 소하여 갑작스러운 공격에 대비할 수 없고, 의지할 곳도 없었기 때문에 망한 것이다. 또 한 卓淳은 군신이 이반하여 군주는 스스로 따르리라는 생각에 신라에 내응하였다. 이 때 393) 速古王 貴首王 : 速古王은 백제 제23대 近肖古王(주 30) 참조). 貴首王은 백제 제14대 近仇首 王(주 58) 참조). 394) 加羅 : 여기서는 고령 대가야를 가리킨다(주 54)와 주 392) 참조). 395) 그러나 잘못이다 : 繼體 23年 3月 是月條 참조. 396) 下部中佐平麻鹵 : 下部는 백제의 5部 가운데 하나. 中佐平은 日本書紀 欽明紀에 보이는 3佐平 가운데 하나. 일본서기 欽明 4年(543) 11月條에 三佐平이란 말이 보이고, 同 12月條에는 上佐 平 中佐平 下佐平이 함께 등장한다. 이렇게 좌평이 세분화되는 것은 단지 행정업무의 세분화 현상에 의한 것이 아니라 6세기 백제 성왕대 지배귀족의 신분서열을 나타내기 위한 것으로 이해 되기도 한다(梁起錫, 1990,`百濟聖王代의 政治改革과 그 性格a, 한국고대사연구 4). 麻鹵는 일본서기 繼體 23年(529) 3月 是月條에도 나온다. 397) 城方甲背昧奴 : 城方은 관직으로 方의 장군인 方領 혹은 부장 放佐일 것으로 추측된다. 甲背는 칭호이고, 昧奴란 인물은 일본서기 繼體 23年 3月 是月條에 麻鹵와 함께 麻那로 나온다. 欽明 4년 12월조에는 중좌평 木리麻那란 인물로 등장한다. 398) 加羅 : 安羅. 주 52)와 주 392) 참조. 일본서기 繼體 23年 春3月 是月條에 회의 장소가 安羅로 기록되어 있다.

49 96 日本書紀 97 문에 멸망 한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삼국이 패망한 것은 모두 이유가 있었다. 옛날에 신라 알 수 없다. 다른 경우도 모두 이와 같다.> 등을 安羅에 보내 신라에 간 任那執事404)를 소 는 고구려에 구원을 요청하여 임나와 백제를 공격했지만, 전혀 이길 수 없었다. 그러니 환하여 임나의 재건에 대해서 도모하도록 하였다. 따로 安羅日本府의 河內直405)이 신라와 신라가 어찌 홀로 임나를 멸망시키겠는가? 지금 과인은 너희들과 힘과 마음을 합쳐 천황 통모하고 있는 것을 심하게 꾸짖었다.<* `百濟本記a 에 말하길 加不至費直406) 阿賢移那 의 힘을 빌리면 임나는 반드시 부흥할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물건을 각각 차등있 라고 하지만 알 수 없다.> 이에 [성명왕은] 任那에 옛날 우리 斯407) 佐魯麻都408) 등이다. 게 하사하였다. 모두 기뻐하며 돌아갔다. 선조인 速古王 貴首王은 당시 旱岐 등과 처음으로 화친을 맺으면서 형제처럼 되었다. 추7월 가을 7월. 백제는 安羅日本府399)와 신라가 통모한다는 말을 듣고, 前部奈率鼻利莫古400) 奈率宣文401) 中部奈率木리 淳402) 紀臣奈率彌麻沙403)<*紀臣奈率은 무릇 紀臣이 韓의 婦 이에 나는 그대들을 子弟로 여기고, 그대들은 나를 父兄처럼 여기며, 천황을 섬기며 힘을 합쳐 함께 강적을 막아내어 나라를 평안하게 하고 집을 지켜온 것이 오늘에 이르렀다. 우 리 선조와 당시 한기와 화친할 때 한 말을 생각하면 밝은 해와 같이 분명해진다. 이후로 人을 얻어 낳은 자식으로 백제에 머물렀기 때문에 奈率이 된 자일 것이다. 그 아버지는 399) 安羅日本府 : 주 389) 참조. 400) 前部奈率鼻利莫古 : 前部는 백제의 5部 가운데 하나. 奈率은 관위 16계 가운데 제6위에 해당한 다. 鼻利는 백제의 복성이고, 莫古는 이름이다. 欽明 4年(543) 12月條에는 德率로 나온다. 401) 奈率宣文 : 日本書紀 欽明 8年(547) 4月條에는 前部德率眞慕宣文으로 나온다. 402) 中部奈率木리 淳 : 日本書紀 欽明 8年 4月條에는 德率木리 淳으로 나온다. 木리은 木씨 혹 은 리씨의 복성표기이다. 403) 紀臣奈率彌麻沙 : 일본서기 欽明 5年 2月 3月 11月條에도 보인다. 분주에도 기록되어 있듯 이 欽明紀에는 倭人과 韓人婦人 사이에 태어나 백제의 관료가 되어 외교활동에 종사한 자가 많 이 보인다. 이른바 倭係百濟官僚 이다. 기존연구에서 공통적으로 인정하고 있는 倭係百濟官僚 로는 紀臣奈率 麻沙 物部奈率用歌多 許勢奈率哥麻 物部奈率哥非 上部奈率科野新羅 上 部奈率科野次酒 上部奈率物部烏 物部施德麻 牟 등이 있다. 이들이 백제관료와 가장 크게 다 른 점은 백제관등과 함께 고대 일본의 氏와 姓을 동시에 칭하고 있다는 점이다. 왜계백제관료의 출신씨족으로는 紀 許勢 物部 科野氏가 있다. 이들은 백제관료이면서 왜국과도 깊은 친연관 계를 맺고 6세기에 백제와 왜국뿐만 아니라 가야와의 정치 외교 분야에서 활약한 사람들로 이 해된다. 다시 말해 백제가 對倭외교의 실리와 그 원활함을 추구하기 위한 방편에서 만든 독특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왜계백제관료에 대해서는 李弘稙(1936,`任那問題を中心とする欽明紀の 整理a, 靑丘學叢 25)의 연구를 시작으로 많은 연구에서 조금씩 언급되어 왔다. 그러나 왜계백 제관료 자체에 대한 연구는 笠井倭人(1974,`欽明朝における百濟の對倭外交a, 古代の日本と 朝鮮, 學生社)에서 본격적으로 이루어지기 시작하였다. 이후 김현구(1985)와 이재석(2000, `소위 倭系百濟官僚와 야마토 王權a, 韓國古代史硏究 20)의 연구성과가 발표되었다. 그리고 최근 영산강 유역의 전방후원분의 피장자 집단의 성격문제와 관련하여 왜계백제관료를 상정하 는 견해가 제시되고 있다. 대표적인 연구로서 주보돈(2000,`백제의 영산강유역 지배방식과 전 방후원분 피장자의 성격a, 한국의 전방후원분, 충남대출판부)과 박천수(2002,`榮山江流域に おける前方後圓墳の被葬者の出自とその性格a, 考古學硏究 39~2) 등의 논고가 있다. 404) 任那執事 : 日本書紀 에 의하면 임나의 여러 문제에 대해서 일본부의 관인과 협의하던 任那諸 國의 대표자들로 이해된다. 즉 欽明 2年 4월과 同 5年 11月條 등에 보이는 任那諸國의 旱岐 등 이 이에 해당된다. 405) 河內直 : 河內直氏의 인물로 이름은 알 수 없다. 천무 10년(681) 4월에 川內直縣(카와치노아타 히노아가타)는 連姓을 받아 河內連氏로 되었다. 따라서 河內連은 河內直氏의 후손이 된다. 河 內直氏는 新撰姓氏錄 河內諸蕃條에 의하면 백제계 도래집단(河內連. 出自百濟國都慕王男陰 太貴首王也)으로 河內國 河內郡(현재 東大阪市와 八尾市 일부 지역)를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그런데 河內直氏의 출자에 대해서는 선조전승의 혼란과 일본서기 에서 반백제적인 행동 등에 주목하여 가야로부터 이주한 씨족으로 보기도 한다(笠井倭人, 1971,`加不至費直の系譜につい てa, 日本書紀硏究 5, 書房). 이와 관련하여 日本書紀 顯宗紀에 보이는 바와 같이 백제와 인접해 있던 서부가야의 소국이 백제에 패한 뒤에 일본열도(특히 河內지방)로 이주한 뒤 河內 直으로 되고, 大和政權에 의하여 하내지역이 통합된 이후에 다시 安羅에 파견되었다고 보기도 한다(이영식, 1993,` 任那日本府 關聯氏族의 硏究a, 先史와 古代 4). 日本書紀 欽明紀에 는 日本府 관련 인물들에 대해서 백제가 대화정권에게 원래의 본거지로 송환해 줄 것을 몇 차 례에 걸쳐 요구하는데 그 중에도 河內直은 移那斯 麻都과 함께 송환이 거론되고 있는 핵심인 물이다. 406) 加不至費直 : 河內直. 加不至(카우치)는 河內(카와치)와 음이 통하고, 費直(아타이)는 直姓의 옛 표기이다. 407) 阿賢移那斯 : 佐魯麻都와 함께 일본부의 실권을 잡고 있었던 인물이다. 阿賢은 칭호로 추측되며 移那斯가 이름이다. 日本書紀 欽明 5年(544) 3月條에서는 聖明王이 그를 佐魯麻都와 함께 친 신라파로 보고 천황에게 日本府에서 추방하기를 요청한 바 있다. 欽明 10年 夏6月條에는 延那 斯로 나온다. 408) 佐魯麻都 : 日本書紀 흠명 5년 3월조에 麻都는 韓婦의 소생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신라 의 의관을 착용한 것에 대해서 성명왕의 비난을 샀다고 한다.

50 98 日本書紀 99 이웃나라와 우호를 닦는데 부지런히 하여 여러 나라와 돈독해지고 골육 이상으로 은혜 또한 日本卿409) 등은 오랫동안 임나의 나라에 머물면서 신라와 경계를 가까이 접하고 있 를 베풀었다. 처음의 좋은 관계를 끝까지 가지고 간다는 것은 과인이 항상 바라는 바이 었다. 신라의 실상은 잘 알 것이다. 임나를 해하고 일본의 힘을 막으려고 한 것은 이미 다. 어찌 가벼이 떠도는 말에 이끌려 몇 해 사이에 유감스럽게 뜻을 잃어버렸는지 자세 오래된 일이다. 단지 올해의 일이 아니다. 그런데도 감히 움직이지 않는 것은 가깝게는 히 알 수 없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후회막급이라는 말이 이를 두고 말한 것인가. 천지의 백제를 경계하고 멀게는 천황을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조정을 섬기는 척하며 임나와 거 신에게 맹세하여 과오를 고치고자 한다. 하나도 숨김없이 할 바를 밝혀서 정성이 신령에 짓으로 화친했다. 이렇게 任那日本府를 기쁘게 한 것은 임나를 공략하기 전에 거짓으로 게 통하게 하여 스스로 깊이 반성하는 것이 또한 마땅히 우리가 취해야 할 바이다. 무릇 복종하는 모습을 보이기 위해서이다. 바라건대 그(신라의) 틈을 엿보아 갖추어지지 않았 뒤를 잇는 자는 선조의 규칙을 귀하게 이어 받아 父祖의 업을 성대하게 하여 성공시키는 을 때를 노려 한번에 군사를 일으켜 공략할 것이다. 천황이 조칙을 내려 南加羅 己呑 것을 귀하게 여긴다고 들었다. 따라서 지금 선대의 화친의 우호를 존중하고 천황의 조칙 을 일으키라고 권유한 것은 비단 수십 년 동안의 일만은 아니다. 그런데 신라는 하나같 의 말에 따라 신라에게 빼앗긴 南加羅 己呑 등을 빼앗아 본관에 되돌려 임나로 옮기 이 명령을 듣지 않았다는 것 또한 卿들도 아는 바이다. 천황을 믿고 받들어 임나를 세우 어 영원토록 부형의 나라가 되어 항상 일본을 섬길 것이다. 이것이 과인이 먹어도 맛을 려고 하는데 어찌 이와 같은가? 卿 등이 쉽게 감언을 믿고, 가볍게 거짓말을 믿어 임나 모르고, 자도 편안하지 않은 바이다. 지난 일을 후회하고 지금을 경계하며 언제나 마음 국을 멸망케하고 천황을 욕되게 할까 나는 두렵다. 경은 경계하여 타인에게 속지 말라. 을 두루 쓸 것이다. 무릇 신라가 감언으로 주위를 속이는 것은 다 아는 바이다. 너희들은 고 하였다. 신라를 맹신하여 이미 계략에 빠져버렸다. 지금 임나의 경계는 신라와 접하고 있다. 마 땅히 항상 방비를 해야 할 것이다. 어찌 경계를 게을리 하는가. 두려운 것은 간계에 빠져 나라를 잃고 집이 망하여 포로로 되는 것이다. 과인이 이를 생각하면 걱정되어 편안할 수가 없다. 들리는 소문에 임나와 신라가 함께 계략을 꾸밀 때에 벌과 뱀의 괴이한 징조 가 나타났다고 한다. 또한 여러 사람들이 아는 바이다. 무릇 흉조는 행동을 경계하기 위 해 나타나고, 災異현상은 사람들을 깨달도록 하기 위해 나타난다. 이는 바로 하늘의 경 계이고 先靈의 징표이다. 화를 맞은 후 후회하거나 멸망한 후에 재건하고자 해도 어림없 는 일이다. 지금 너희들은 나를 따라 천황의 칙명을 받아 임나를 재흥시켜야 한다. 어찌 성공하지 못할 것을 걱정하는가. 만약 오래토록 본토를 보존하고 국민을 통일시키고자 欽明天皇 3년(542) 추7월 가을 7월. 백제가 紀臣奈率彌麻沙 中部奈率己連410)을 보내서 下韓411)의 任那의 정책412) 을 아뢰고 아울러 표를 올렸다. 欽明天皇 4년(543) 하4월 여름 4월. 백제 紀臣奈率彌麻沙 등이 돌아갔다. 한다면 그 계략이 여기에 있다. 신중히 생각하지 않을 수 있는가. 라고 말하였다. 聖明 王이 다시 任那日本府에 천황이 조칙에 말하길 임나가 만약 멸망하면 그대들은 의지 할 곳이 없어질 것이다. 임나가 만약 재건된다면 너희들은 도움을 얻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 任那를 옛날과 같이 일으켜 너희들은 도움 받아 백성을 잘 보살펴야 한다. 고 하였 다. 삼가 조칙을 받드니 송구스러운 마음이 가득하다. 충성을 다할 것을 맹세하고 임나 의 융성을 바랄 뿐이다. 옛날과 같이 천황을 영원히 섬기고 싶다. 우선 앞으로의 일을 생 각하는 것이 이후를 안락하게 지낼 수 있을 것이다. 지금 일본부가 조칙에 따라 임나를 구원할 수 있다면 반드시 천황이 칭찬할 것이고 너희들 자신에게도 恩賞이 있을 것이다. 409) 日本卿 : 日本府의 卿 이라는 의미이다. 卿 은 후대에 윤색된 표현이다. 여기서는 일본부의 상급관인 즉 的臣 등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측된다. 的臣에 대해서는 주 134) 참조. 410) 中部奈率己連 : 日本書紀 欽明 5年(544) 月條, 同 7年 正月條에도 나온다. 欽明 6年 5月條의 奈率其릉과는 동일인이다. 411) 下韓 : 日本書紀 欽明 5年 11月條의 南韓 과 같다. 여기서 韓은 가야의 지역을 가리키기 때문 에 下韓이란 백제의 아래쪽 즉 남쪽 방면에 위치한 가야지역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구체적으로 남가라를 가리키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51 100 日本書紀 추9월 101 지 10여년이 지났다. 그렇게 奏上은 하지만 아직도 이루지 못하고 있다. 무릇 임나는 그 가을 9월. 백제 聖明王이 前部奈率眞牟貴文413) 護德己州己婁414)와 物部施德麻 牟415) 416) 등을 파견하여 扶南 의 재물과 奴 2口를 바쳤다. 동11월 丁亥朔 甲午 겨울 11월 정해삭 갑오(8일). 津守連(츠모리노무라지)417)을 보내어 백제에 詔하여 임나 고 하였다. 아울러 詔書 의 下韓에 있는 백제의 郡令 城主418)를 日本府에 속하게 하라. 를 가지고 가게 하여 宣勅하기를 그대는 여러 차례 상표문을 올려 임나의 재건을 주장한 대 나라의 棟梁이니, 만약 棟梁이 부러지면 어찌 집을 지을 수 있겠는가. 짐이 걱정하는 것이 이것이다. 그대는 모름지기 하루빨리 [임나를] 재건하도록 하라. 만약 속히 임나를 재건한다면 河內直<*河內直은 이미 上文에 보인다.> 등은 자연히 물러날 것이다. 어찌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 날 성명왕은 宣勅을 다 듣고 3명의 內頭佐平과 여러 신하에게 조칙은 이와 같다. 어떻게 하면 좋은가? 라고 물었다. 3명의 佐平은 下韓에 있는 우리 郡令 城主를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임나국을 재건하는 일은 빨리 聖勅을 들어야 합니 다. 라고 답하였다. 12월 412) 任那의 정책 : 이른바 任那復興會議 혹은 任那再建會議 을 말한다. 그러나 임나부흥회의 등의 용어는 일본서기 에는 없다. 敏達 12년 7월조에 유일하게 任那復興 이란 표현이 보이고 이를 학술적 용어로 사용한 것은 末松保和의 任那興亡史 (1949)부터이다. 구체적으로 신라에 게 멸망당한 南加羅 己呑 卓淳 등의 부흥을 말한다. 그러나 임나부흥회의 라는 것은 실질 적인 의미에서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의견이 있다. 임나부흥 의 당사자인 임나 의 의지는 찾아 볼 수 없고 오로지 백제와 왜의 의지만이 강조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서술태도는 일 본서기 찬자 혹은 백제본기의 역사관념에서 나왔다고 보는 것이 지배적이다(백승충, 1993, 앞 의 글 ; 松波宏隆, 1993,`任那復興會議關係記事と百濟本記a, 國史學硏究 19, 龍谷大學 ; 연 민수, 1997,`금관국의 멸망과 동아시아a, 가야문화 10). 413) 前部奈率眞牟貴文 : 眞牟는 백제 대성8족의 하나인 眞씨의 복성표기로 眞慕 혹은 姐彌라고도 한 다. 文貴는 이름이다. 일본서기 계체 7년(513) 6월조에 姐彌文貴란 인물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414) 護德己州己婁 : 護德은 백제 관위 가운데 제9위인 固德일 것으로 추측된다. 己州己婁는 일본서 기 안한 원년(534) 5월조에 上部都德己州己婁로 나온다(주 364) 참조). 415) 物部施德麻 牟 : 倭係百濟官僚(欽明 2년 추7월조 紀臣奈率彌麻沙 주 참조)의 한 사람이다. 일 본서기 흠명 15년(554) 12월조에 東方令 物部莫哥武連으로 나온다. 物部氏에 대해서는 주 268) 참조. 416) 扶南 : 오늘날 캄보디아를 가리킨다. 417) 津守連 : 일본서기 흠명 5년 2월조에 인용된 百濟本記에는 津守連己麻奴 로 나온다. 백제본 기를 통해서 己麻奴 이 이름임을 알 수 있는데, 奴 와 자는 백제계 사료에 주로 보인다(주 162) 참조). 津守連氏는 攝津(세츠)지역의 씨족으로 천무 13년(684) 12월에 宿 姓으로 개성되 었다. 418) 郡令 城主 : 翰苑 卷30 蕃夷部 百濟條에 보이는 方領 아래의 軍將과 道使를 가리킨다. 여기 서 郡令은 일본 율령제하에서 사용된 직명으로 추정되기도 한다(金英心, 1990,`5~6세기 百濟 의 地方統治體制a, 韓國史論 22). 12월. 백제 성명왕이 이전의 詔書를 군신들에게 두루 보이며 천황의 조칙이 이와 같다. 어찌하면 좋은가? 라고 물었다. 上佐平沙宅己婁419) 中佐平木리麻那420) 下佐平木尹貴421) 德率鼻利莫古 德率東城道天422) 德率木 昧淳 德率國雖多423) 奈率燕比善那424) 등이 함께 논의하여 신들은 품성이 우매하고 어리석어 모두 지략이 없습니다. 임나를 재건하 라는 조칙은 속히 받들어야 합니다. 지금 任那執事와 각국의 旱岐들을 소집하여 같이 모 의하여 표를 올려 뜻을 전하십시오. 또한 河內直 移那斯 麻都 등이 아직 安羅에 머물 고 있으면 임나는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그러므로 아울러 표를 올려 본거로 옮기도록 425) 라고 대답하였다. 성명왕이 군신들이 의논한 바가 매우 과인의 마음 부탁하십시오. 에 든다. 라고 하였다. 419) 上佐平沙宅己婁 : 沙宅은 대성8족 중의 하나인 沙씨의 복성표기이다. 己婁는 이름이다. 上佐平 에 대해서는 주 396) 참조. 420) 中佐平木리麻那 : 日本書紀 武烈 6年(504) 冬10月條의 麻那君, 繼體 23年(529) 3月 是月條의 麻那甲背와 동일인이다(주 253)과 주 320) 참조). 421) 下佐平木尹貴 : 일본서기 계체 23년 3월 시월조에는 將軍君尹貴로 나온다. 422) 德率東城道天 : 東城은 백제의 복성으로 추정된다. 道天는 이름이다. 423) 德率國雖多 : 國은 백제의 대성8족 중의 하나이다. 雖多는 이름이다. 424) 奈率燕比善那 : 燕比를 燕씨의 복성이다. 善那는 이름이다. 425) 그러므로 부탁하십시오 : 日本書紀 欽明 5年(544) 2月條에는 河內直 移那斯 麻都의 공동 선조로서 那干陀甲背 加臘直岐甲背가 나온다. 그리고 同 3月條에는 麻都가 韓腹에서 태어났다는 기록이 있는데 이러한 기록들을 통해서 보면 3인의 본거지는 모두 왜국이 아닌 한반도로 볼 수 있 다. 구체적으로 安羅 이외의 가야 또는 백제일 가능성이 크지만 이에 대해서는 명확히 알 수 없다.

52 102 是月 이달에 施德高分426)을 보내 任那執事와 日本府執事427)를 소집하였다. 모두 정월 1일에 지나 가서 듣겠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欽明天皇 5년(544) 춘정월 봄 정월. 백제국이 사신을 보내어 任那執事와 日本府執事를 소집하였다. 모두 제사 지 낼 시기입니다. 제사가 끝나면 가겠습니다. 라고 답하였다. 是月 이 달에 백제가 다시 사신을 보내어 任那執事와 日本府執事를 불렀다. 日本府 任那가 執事를 보내지 않고 미천한 자를 보냈다. 이로 인해 백제는 임나국의 재건에 대해서 협의 하지 못하였다. 2월 日本書紀 103 심하여 다른 사람에게 속지 말라. 는 말을 전하였다. 또 津守連<* `百濟本記a 에는 津守連 己麻奴 431) 라 한다. 그러나 말이 변하여 바르지 않다. 미상이다.>이 일본에서 와서 조칙 을 전하고 임나의 재건 문제를 물었다. 이에 日本府와 任那執事와 같이 임나의 재건 문제 를 논의하고 계획하여 천황에게 보고하고자 세 번이나 불렀으나 계속 오지 않았다. 그래 서 임나의 문제를 함께 협의하여 천황에게 보고할 수 없었다. 지금 津守連을 머무르게 하 고, 따로 빠른 사자를 보내어 천황에게 사정을 상세하게 보고하고자 한다. 그래서 3월 10 일에 日本에 사자를 보내겠다. 이 사자가 도달하면 천황은 반드시 그대들에게 물을 것이 다. 그대 日本府卿과 任那의 旱岐들은 각자 사자를 보내어 내가 보내는 사자와 같이 [일 본으로] 가서 천황이 내린 조칙을 들어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河內直<*百濟本記에는 河內直 移那斯 麻都로 되어 있다. 그러나 말이 변하여 올바를 것은 자세히 알 수 없다.>에게 옛날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오직 너의 악평만 들 어 왔다. 너의 선조들도 <* `百濟本記a 에는 그대의 선조 那干陀甲背432) 加臘直岐甲背433) 라고 하고, 또 那奇陀甲背 鷹哥岐彌라고도 한다. 말이 변하여 자세히 알 수 없다.> 다같 `百濟本記a 에 爲哥岐彌, 이름은 有非岐 이 간계를 품고 거짓을 말하였다. 爲哥可君434)<* 백제가 施德馬武428) 施德高分屋 施德斯那奴次酒429) 등을 보내 임나에 가서 日本府와 (우히키)라 하였다.> 이 그 말을 믿고 국난을 걱정하지 않고 우리 뜻에 배반하여 방자하 임나 旱岐 등에게 내가 紀臣奈率彌麻沙 奈率己連 物部連奈率用歌多430) 등을 보내 천 게 포악한 짓을 저질렀다. 이 때문에 생겨 났으니 전적으로 그대들의 책임이다. 그대들은 황에게 朝謁하도록 하였다. 彌麻沙 등이 일본에서 조서를 가지고 돌아와 너희들은 그곳 임나에 가서 머물면서 항상 나쁜 짓을 하였다. 임나가 나날이 쇠퇴하는 것은 오로지 그대 에 있는 일본부와 함께 조속히 좋은 방책을 세워 짐이 바라는 바를 이루게 하라. 삼가 조 들 때문이다. 그대들에게는 비록 하찮은 것일지 모르나 작은 불이 산야를 태우고 마을로 번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너희의 악행에 의해 임나가 패망한 것이다. 그리고 결국에는 426) 施德高分 : 일본서기 흠명 5년(544) 2월조에는 施德高分屋으로 나온다. 高는 姓, 分(分屋)은 이름이다. 427) 日本府執事 : 日本府卿(혹은 日本卿. 欽明 2年 秋7月條) 또는 日本府臣과 같이 일본부내에서 일 정한 상하관계를 나타낸 지위 내지는 직명으로 볼 수 있다. 428) 施德馬武 : 일본서기 흠명 11년(550) 2월조에는 奈率馬武로 나온다. 馬가 姓, 武는 이름으로 추측된다. 429) 施德斯那奴次酒 : 斯那奴氏는 科野氏라고도 하며 信濃(시나노) 즉 현 長野(나가노) 지방이 본거 지이다(주 299) 참조). 次酒가 이름이며 왜계백제관료의 한사람이다. 日本書紀 欽明 14年 (553) 正月乙亥條에는 上部德率科野次酒로 나온다. 백제 멸망 후에 일본에 망명한 백제인 가운 데에도 科野氏가 보인다. 430) 物部連奈率用歌多 : 왜계백제관료 중의 한사람으로 이름은 用歌多이다. 欽明 3年(542) 7月에 왜국에 건너온 百濟使臣 중에는 보이지 않는다. 해외의 서쪽에 있는 여러 나라의 官家는 오랫동안 천황을 섬기지 못하게 되었다. 지금 천 황에게 奏上하여 그대들을 본거지로 돌려보내고자 요청할 것이다. 그대들도 또한 와서 431) 津守連己麻奴 : 주 417) 참조. 432) 那干陀甲背 : 日本書紀 顯宗 3年(487) 是歲條에 任那左魯 那奇他甲背의 那奇他甲背와 같다. 혹은 那奇陀甲背라고도 한다(주 240) 참조). 433) 加臘直岐甲背 : 加臘는 加羅를 말하며 直岐는 이름으로 추정된다. 甲背는 존칭이다. 鷹哥岐彌라 고도 하는데, 岐彌는 존칭인 君(키미)과 음이 통한다. 鷹哥는 이름으로 추정된다. 434) 爲哥可君 : 분주로 인용된`百濟本記a에 의하면 爲哥岐彌라고도 하며 이름은 有非岐이다. 顯宗 3年 是歲條의 紀生磐宿 (주 238) 참조). 生磐(오히하)과 有非岐(우히키), 北野本의 有非破(우히 하)는 음이 서로 통한다.

53 104 들어라. 고 말하였다. 日本書紀 105 려 奈率彌麻沙 奈率己連 등이 신의 나라에 와서 조서를 보이며 그대들은 거기에 있는 또한 日本府卿과 任那旱岐 등에게 무릇 임나의 나라를 세우는 일은 천황의 위엄을 빌 일본부와 함께 좋은 계책을 내어 하루빨리 임나를 재건하라. 신중하고 타인에게 속지 말 리지 않고서 누가 능히 세울 수 있을 것인가. 따라서 나는 천황을 좇아 군사를 청하여 임 라. 고 하였습니다. 또한 津守連 등이 신의 나라에 와서 칙서를 건네며 임나를 세우는 일 나의 나라를 도와주고자 한다. 군량은 내가 운반한다. 군사의 수는 아직까지 정확히 모르 을 물었습니다. 삼가 칙서를 받들어 시기를 놓치지 않고 협의하려고 하였습니다. 이에 사 고, 군량을 운반할 곳도 역시 결정하기 힘들다. 한 곳에 모아 함께 의논하여 좋은 것을 택 신을 보내 日本府<* `百濟本記a 에는 烏胡跛臣439)을 불렀다고 한다. 아마 이는 的臣일 것이 해서 천황에게 주상하고자 한다. 이에 자주 소집했는데 너희가 오지 않아 협의할 수 없었 다.>와 임나(의 한기)를 소집했습니다. 모두 대답하기를 새해가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다. 고 말하였다. 지내고 가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다시 사 日本府가 임나의 執事가 소집에 응하지 않은 것은 우리가 보내지 않았기 때문에 갈 수 신을 보내서 오라고 하였습니다. 함께 대답하기를 제사 때가 되었습니다. 바라건대 지 없었던 것입니다. 우리가 천황에게 보낸 사신이 돌아와서 짐이 印哥臣435)<*말이 변하여 내고 가겠습니다. 고 하였습니다. 오랜 시간이 지났으나 오지 않았습니다. 또 다시 사신 자세히 알 수 없다.>을 신라에 보내고 津守連을 백제에 보낼 것이다. 그대들은 조칙을 받 을 보내서 불렀습니다. 그런데 지위가 낮은 자를 보냈기 때문에 같이 계책을 논의할 수가 을 때까지 기다려라. 스스로 신라와 백제에 가지 말라. 고 하셨다고 합니다. 조칙이 이와 없었습니다. 무릇 임나가 불러도 오지 않은 것은 본의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阿賢移那 같았습니다. 때마침 印哥臣이 신라에 사신으로 간다는 소식을 듣고, 이에 사신을 보내어 斯 佐魯麻都<*두 사람의 이름이다. 이미 上文에서 언급했다.>의 奸計에 의한 것입니다. 천황이 말씀하신 바를 물었습니다. 조칙에서는 日本府臣과 任那執事는 신라로 가서 천 무릇 任那는 安羅를 형으로 알고 있습니다. 오로지 그 뜻을 따릅니다. 安羅人은 日本府를 황의 칙명을 들으라. 는 내용이었습니다. 백제에 가서 명령을 들으라는 말씀은 없었습니 하늘처럼 여기고 오직 그 뜻을 따릅니다. <* `百濟本記a 에는 安羅를 父로, 日本府를 本으 다. 나중에 津守連이 여기를 지나가면서 지금 내가 백제에 파견되는 것은 下韓에 있는 로 여긴다고 한다.> 지금 的臣 吉備臣 河內直 등은 모두 移那斯 麻都가 시키는 대로 백제의 郡令 城主를 물러나도록 하기 위함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오직 이 말만 들었 할 뿐입니다. 移那斯 麻都는 비록 집안과 신분이 미천한 자이지만 日本府의 정사를 마 고 임나와 일본부가 백제에 모여서 천황의 칙명을 들으라는 말씀은 듣지 못했습니다. 따 음대로 하고 있습니다. 또한 임나를 통제하여 사신을 보내지 못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 라서 나아가지 않은 것은 임나의 본의가 아닙니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任那旱岐들은 때문에 같이 협의할 수도 없었고, 천황에게 답신도 보내지 못하고 있습니다. 고로 己麻奴 사신이 와서 소집하기에 바로 가서 참가하고자 해도, 日本府卿이 가는 것을 허락하지 않 440) <*아마 이는 津守連일 것이다.>를 머무르게 하고, 별도로 빨리 나는 새 같은 사람을 았기 때문에 가지 못했습니다. 大王은 임나를 재건시키려는 진심을 보여주셨습니다. 이 보내 천황에 주상합니다. 만약 둘<*둘이라는 것은 移那斯와 麻都를 말한다.>이 안라에 를 보고 기뻐하는 마음은 이루 다 말할 수 없습니다. 라고 하였다. 머물면서 많은 간계를 부리면 임나의 재건은 어렵고, 海西의 諸國441)도 반드시 섬기지 않 3월 3월. 백제가 奈率阿 得文436) 許勢奈率哥麻437) 物部奈率哥非438) 등을 보내서 표를 올 435) 印哥臣 : 日本書紀 宣化 4年(539) 5月條에는 伊賀臣으로 나온다. 伊賀臣은 日本書紀 孝元 7年 2月條에 의하면 阿倍(아베)臣 등 7씨족과 함께 大彦命(오오비코)의 후손으로 나온다. 주 538) 참조. 436) 奈率阿 得文 : 阿 을 지명에서 유래한 백제의 복성으로 보는 견해도 있다. 得文은 이름. 흠명 5년(544) 10월에 귀국한다. 437) 許勢奈率哥麻 : 哥麻가 이름이며 왜계백제관료이다. 흠명 5년 10월에 귀국한 후 欽明 8年(547) 4月 을 것입니다. 엎드려 원하건대 이 두 사람을 본국으로 보내 주십시오. 그리고 칙명을 내 려 일본부와 임나를 타일러 임나를 세울 것을 도모하십시오. 이에 臣은 奈率彌麻沙와 奈 에 다시 왜국에 원군을 요청하기 위해 건너간다. 許勢氏와 韓婦 사이에 태어난 韓子로 여겨진다. 438) 物部奈率哥非 : 哥非가 이름이며 왜계백제관료이다. 흠명 5년 10월조에 귀국한다. 439) 烏胡跛臣 : 的臣을 가리킨다. 烏胡跛(우코하)와 的(이쿠하)은 음이 통한다. 的臣에 대해서는 주 134) 참조. 440) 己麻奴 : 津守連己麻奴 (주 417) 참조). 441) 海西의 諸國 : 여기서는 백제와 임나 를 가리킨다.

54 106 日本書紀 107 率己連 등에게 己麻奴 를 딸려 보내 표를 올려 아룁니다. 이에 조서에 的臣 등 <*등이 함을 구원할 수 없고, 이로 인해 的臣 등이 신라에 왕래하면서 경작할 수 있게 되었다. 고 라 함은 吉備弟君臣 河內直 등을 말한다.>이 신라에 왕래한 것은 짐의 본의가 아니다. 주상한 것은 天朝를 속이고 더욱 奸計를 부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명백한 사실에 대해서 442) 443) 이전에 印支彌 <*자세히 알 수 없다.>와 阿鹵旱岐 가 있을 때 신라에 핍박당하여 백성 조차 천조를 속이려 하고 있습니다. 이 외에도 허위가 반드시 많을 것입니다. 的臣 등이 들은 농사를 지을 수가 없었다. 백제는 멀리 있어 위급함을 구원할 수 없었다. 이러한 이 安羅에 있으면 任那는 세우기 어려울 것입니다. 마땅히 속히 물러나게 하십시오. 신이 몹 유로 的臣 등이 신라와 왕래하면서 경작하고 있다는 것을 짐이 일찍이 들은 바 있다. 만약 시 걱정하고 있는 것은 佐魯麻都가 본디 韓婦의 소생이지만, 지위가 大連448)에 있다는 것 任那를 세우면 移那斯와 麻都는 말할 것도 없이 저절로 물러갈 것이다. 고 말씀하셨습니 입니다. 日本府執事들과 교제하여 번영하고 귀한 반열에 올랐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도리 다. 엎드려 이 詔書를 받고나서 기쁨과 황송함이 교차했습니다. 그래서 신라가 조정을 속 어 신라의 奈麻의 禮冠을 쓰고 있습니다. 즉 身心이 어디에 귀부하고 있는지는 누구라도 444) 淳 을침 쉽게 알 수 있습니다. 행위를 조용히 살피건대, 전혀 두려워하는 것이 없습니다. 전에 그 공해서 久禮山445)의 우리 수비병을 몰아내고 마침내 점거해버렸습니다. 安羅에 가까운 곳 의 악행을 주상할 때 자세히 기록하여 알려드렸습니다. 지금도 다른 나라의 옷을 입고, 매 은 안라가 경작을 하고, 久禮山에 가까운 곳은 신라가 경작을 하고 있습니다. 각각 자신들 일같이 신라의 영지에 이르러 공사 구분 없이 전혀 꺼리는 바 없이 왕래하고 있습니다. 무 의 곳을 경작하여 서로 침략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移那斯 麻都가 남의 경계를 넘어 릇 경작을 하고 6월에 도망가 버렸습니다. 印支彌 다음의 許勢臣의 때 <* `百濟本記a 에는 우 마음을 먹고, 신라에 내응하니 가라는 바깥으로부터 싸움을 하는 입장이 되었습니다. 이 리가 印支彌를 머무르게 한 후에 온 旣酒臣446)의 때에 이르러라고 한다. 모두 자세히 알 수 때문에 [탁국은] 멸망한 것입니다. 만약 函跛旱岐가 내통하지 못하도록 하였다면 없다.>에는 신라가 다시 남의 경계를 침략한 일이 없었습니다. 安羅도 신라가 핍박하여 비록 소국이지만 망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卓淳의 경우도 또한 그렇습니다. 만약 卓淳國 경작을 못한다고 말한 적이 없었습니다. 신이 일찍이 신라는 해마다 많은 병사와 무기를 의 왕이 신라와 내통하여 적을 불러들이지 않았더라면, 어찌 멸망에 이르렀겠습니까. 여 이는 것이지 천황의 칙명에 의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았습니다. 신라가 봄에 447) 國이 망한 것도 다른 까닭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國의 函跛旱岐449)가 加羅國에 딴 國은 모아서 安羅와 荷山 을 습격하려 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혹은 加羅를 습격한다고 들었 러 나라가 패망한 화근을 두루 살펴보면 모두 내응하거나 딴 마음을 품은 자 때문에 비롯 습니다. 최근 사신이 왔었습니다. 그래서 군사를 보내 임나를 지키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 된 것입니다. 이제 麻都 등이 신라와 마음이 통하여 그 옷을 입고 밤낮으로 왕복하면서 은 았습니다. 여러 번 날쌘 군사를 보내어 때맞춰 구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임나는 계절 밀히 나쁜 마음을 품고 있습니다. 이에 임나가 영원히 망해 버리는 것이 아닌가 하고 두려 에 따라 경작하고, 신라는 감히 침략을 못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멀리 있어 위급 워하고 있습니다. 임나가 만일 망하면 신의 나라도 고립되어 위태롭게 됩니다. 조공하고 자 마음을 먹어도 어찌 가능하겠습니까. 엎드려 원하옵건대 천황은 깊이 생각하시고 널리 442) 印支彌 : 許勢臣의 전임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443) 阿鹵旱岐 : 阿鹵가 인명 혹은 지명인지, 旱岐의 지위를 나타내는 것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日 本古典文學大系本 日本書紀 下 (1962, 岩波書店, 84쪽)에서는 阿鹵를 아로(アロ) 로 읽고 있 다. 444) 淳 : 현 경북 대구 지역(주 21) 참조). 445) 久禮山 : 현 경북 達城의 苞山(琵瑟山)으로 비정되고 있다(주 350) 참조). 그런데 이곳은 安羅에 서 멀고 加羅(고령)와 가까운 지역이다. 따라서 위치비정 혹은 安羅의 영역 범위에 문제가 있다. 후문의 荷山의 위치를 고려하면 이 때의 安羅는 加羅의 오기일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446) 旣酒臣 : 許勢臣. 주 378) 참조. 447) 荷山 : 현 경북 고령군 斗谷面 荷山. 斗谷面은 낙동강 본류와 지류인 會川이 만나는 지점에 위치 한다. 살펴서 속히 그들을 본국으로 보내 임나를 평안하게 해 주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동10월 겨울 10월. 백제의 사인 奈率得文과 奈率奇麻 등이 돌아갔다. <* `百濟本記a 에는 겨울 10월 奈率得文과 奈率奇麻 등이 일본에서 돌아와서 河內直 移那斯 麻都 등의 일을 주 상했지만 이에 관해서는 아무런 말도 없었다고 말했다고 한다.> 448) 大連 : 日本書紀 欽明 5年 11月條에 的臣이 日本府의 大臣으로 기술되어 있는 것과 관계가 있 다. 的臣과 麻都은 실재 大臣 大連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비유적인 호칭에 불과하다. 449) 函跛旱岐 : 函跛는 國旱岐의 이름으로 여겨지는데 확실하지는 않다.

55 108 日本書紀 11월 109 일으키게 될 것이다. 요청한 병사에게는 내가 의복과 식량을 제공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 11월. 백제가 사신을 보내 日本府臣과 任那執事를 불러 천황에게 보낸 奈率得文과 許 에게 아뢰고자 하는 첫 번째 계책이다. 또한 南韓에 郡令과 城主를 두는 것이 어찌 천황 勢奈率奇麻 物部奈率哥非 등이 일본에서 돌아왔다. 지금 일본부신과 임나국의 집사는 의 뜻을 거스르고 조공하는 길을 막는 것이 되겠는가. 오로지 바라는 것은 여러 가지 문 마땅히 와서 칙명을 듣고 함께 임나의 일을 협의하라. 고 말하였다. 日本의 吉備臣, 安羅 제를 해결하고 강적을 물리치려는 것이다. 무릇 저 흉악한 무리는 누구와도 손잡으려 할 의 下旱岐大不孫 久取柔利, 加羅의 上首位古殿奚 卒麻君 斯二岐君 散半奚君의 아 것이다. 북적은 강하고 우리나라는 미약하다. 만일 남한에 郡令과 城主를 두어 수리하고 들, 多羅의 二首位訖乾智, 子他旱岐, 久嵯旱岐450)가 백제에 이르렀다. 이에 백제의 聖明王 방어하지 않으면 이 강적을 막을 수가 없다. 또한 신라도 막을 수 없다. 그러므로 이들을 이 조서를 대략 보이고 나는 奈率彌麻佐 奈率己連 奈率用哥多 등을 일본에 보냈다. 두어 신라를 핍박하고 임나를 보존하려는 것이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게 되어 다시는 이에 詔하여 빨리 임나를 세우라. 고 말씀하셨다. 또 津守連이 칙명을 받들고 임나를 세 조공을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고자 하는 두 번째 계책이다. 또 吉備 웠는가에 대해서 물었다. 따라서 모두를 부른 것이다. 어찌하면 다시 임나를 세울 수가 臣 河內直 移那斯 麻都가 아직 임나에 머물고 있다면 비록 천황이 임나를 세우라는 있을 것인가. 각자의 계책을 말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吉備臣 任那旱岐 등이 무릇 任 조를 내리더라도 불가능하게 될 것이다. 바라건대 이 네 명을 이주시켜 각각 本邑으로 돌 那國을 세우는 것은 오로지 大王에게 달려 있습니다. 대왕을 따라 다같이 주상하여 칙을 아가게 해야 한다. 이것이 천황에 주상하려고 한 세 번째 계책이다. 마땅히 일본의 신과 듣겠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聖明王이 임나국은 우리 백제와 예부터 지금까지 子弟와 임나의 한기 등은 모두 사자를 보내어 똑같이 천황에 주상하여 恩詔를 들을 것을 청하 같이 되겠다고 약속하였다. 지금 日本府의 印岐彌<*任那에 있는 日本의 臣을 말한다.>가 라. 고 하였다. 이에 吉備臣과 旱岐 등이 大王이 말하는 세 가지 계책이 우리의 마음에 이미 신라를 치고 다시 우리를 치려고 한다. 또 신라의 거짓말에 속아 즐거워하고 있다. 도 맞는 것입니다. 지금 돌아가서 日本의 大臣<*任那에 있는 日本府大臣453)을 말한다.>과 무릇 印岐彌를 임나에 보낸 것은 본디 그 나라를 침해하려는 것은 아닐 것이다 <*자세히 安羅王 加羅王에게 말하고 함께 사신을 보내어 천황에게 주상하겠습니다. 이것은 참으 알 수 없다>. 예부터 신라는 무도하였다. 말로 속이고 신의를 깨고 卓淳을 멸망시켰다. 로 천재일우의 기회이니 심사숙고하여 계책을 세워야만 합니다. 고 하였다. 수족과 같이 사이좋게 지내려고 하면 오히려 후회하게 되고 말 것이다. 그러므로 모두를 오게 하여 다같이 恩詔를 받들어 임나국을 일으키고 계승시켜, 옛날과 같이 영원히 형제 가 되기를 바란다. 듣건대 신라와 안라와의 양국의 국경지역에 큰 강(낙동강)이 있으니 451) 要害의 땅이라고 한다. 나는 여기를 거점으로 삼아 6城 을 쌓으려 한다. 삼가 천황에게 3천 명의 병사를 요청하여 城마다 500명씩 두고, 아울러 우리 병사로 충당하여 신라가 경작하는 것을 막으면 九禮山의 5城452)은 자연히 무기를 버리고 항복할 것이다. 卓淳國도 450) 久嵯旱岐 : 현 경남 固城. 日本書紀 欽明 23年(562) 正月條에 인용된 一本 에는 古嵯로 나온 다. 삼국사기 권34 지리지 1에 固城郡. 本古自郡 라는 기록이 보이는데 여기서 古自 와 古 嵯 는 음이 통한다. 451) 6城 : 낙동강 서쪽에 신라와 대치하기 위해서 만들고자 한 백제의 군사적 거점. 日本書紀 繼體 24年(530) 秋9月條에 보이는 久禮牟羅城과 騰利枳牟羅 布那牟羅 牟雌枳牟羅 阿夫羅 久知 波多枳 5성으로 추측된다. 欽明天皇 6년(545) 춘3월 봄 3월. 膳臣巴提便(카시와데노오미하스히)454)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하5월 여름 5월. 백제가 奈率其릉455) 奈率用哥多 施德次酒 등을 보내어 표를 올렸다. 452) 九禮山의 5城 : 주 451) 참조. 騰利枳牟羅 이하 5성을 가리키는 것으로 여겨지지만 확실하지 않다. 453) 日本府大臣 : 주 389) 427) 참조. 454) 膳臣巴提便 : 膳臣은 膳夫(가시하데)를 거느리고 宮廷의 음식물 조리를 담당한 씨족이다(주 201) 참조). 巴提便는 이름이다. 455) 奈率其릉 : 中部奈率己連. 주 410) 참조.

56 110 日本書紀 추9월 111 是年 가을 9월. 백제는 中部護德菩提456) 등을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어 吳財457)를 日本府臣과 여러 旱岐에게 차등있게 주었다. `百濟本記a 에는 12 이 해에 고구려에 大亂이 있었다.460) 많은 사람이 살해당하였다. <* 월 甲午(20일) 高麗國의 細群과 群이 궁문에서 싸웠다.461) 북을 치면서 전투를 벌였다. 細群이 패하였으나 군사를 해산하지 않은 지 사흘이 되었다. 細群의 자손을 모두 사로잡 是月 458) 이 달에 백제가 丈六佛像 을 만들었다. 願文을 지어 무릇 듣건대 丈六佛을 만들면 功 德이 매우 크다고 하니 이에 삼가 만듭니다. 이 공덕으로 천황이 매우 높은 덕을 얻으셔 서 천황이 다스리는 彌移居(미야케)國459)이 모두 행복하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늘 아래 모 든 중생들이 모두 해탈하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이것을 만듭니다. 라고 하였다. 동11월 겨울 11월. 膳臣巴提便(카시와데노오미하스히)이 백제에서 돌아와 신이 사신으로 파견 될 때 처자도 같이 뒤따라 왔습니다. 백제의 濱<*濱은 바닷가이다.>에 도착했을 때, 해가 저물어 거기에 머물러 숙박하였습니다. 아이가 갑자기 사라져 어디로 갔는지 알 수가 없 었습니다. 그날 밤 大雪이 내렸습니다. 새벽녘에야 비로소 찾아 나섰는데 호랑이 발자국 아 죽였다. 戊戌(24일) 462) 고 한다.> 國의 香岡上王이 薨했다. 欽明天皇 7년(546) 춘정월 甲辰朔 丙午. 춘정월 갑진삭 병오(3일). 백제의 사신 中部奈率己連 등이 돌아갔다. 이에 양마 70필과 배 10척을 하사하였다. 하6월 壬申朔 癸未 여름 6월 임신삭 계미(12일). 백제가 中部奈率掠葉禮463) 등을 보내어 調를 바쳤다. 是歲 이 연이어 있었습니다. 신이 이에 칼을 차고 갑옷을 입고 발자국을 따라 바위 동굴에 이 이 해에 고구려에 大亂이 있었다. 무릇 싸우다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 `百濟本 르렀습니다. 칼을 빼어들고 삼가 天勅을 받들어 육지와 바다를 비바람을 맞으며 고생하 記a 에 말하기를 高麗에서 正月 丙午에 中夫人의 아들464)을 왕으로 세웠다. 나이가 8살이 며 나아가, 풀을 베개 삼고 가시를 깔고 잤던 것은 자식을 사랑하여 아비의 업을 잇게 하 고자 한 것이었다. 생각건대 네가 靈威있는 신일지라도 자식을 사랑하는 것은 매한가지 일 것이다. 어젯밤에 아이가 없어져서 추적하여 이곳에 이르렀다. 목숨을 잃은 것은 두렵 지 않다. 원수를 갚으러 왔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얼마 후 그 호랑이가 앞으로 다가와서 입을 벌려 물려고 하였습니다. 巴提便이 갑자기 왼손을 뻗어 그 호랑이의 혀를 잡고 오른 손으로 찔러 죽이고 가죽을 벗겨 가지고 돌아왔습니다. 라고 하였다. 456) 中部護德菩提 : 菩提는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457) 吳財 : 吳는 중국 남조를 가리키는 것으로 당시는 梁武帝의 말년에 해당된다. 즉 중국 梁나라의 재물을 의미한다. 458) 丈六佛像 : 1丈 6尺 높이의 석가불좌상. 459) 彌移居國 : 彌移居는 官家의 字音表記이다. 官家에 대해서는 주 17) 참조. 여기서 彌移居國은 백 제와 임나를 지칭한다. 460) 이 해에 있었다 : 일본서기 는 고구려의 대란에 대해서`百濟本記a를 참고로 欽明 6年 (545) 是年條와 同 7年 是歲條로 나누어 기술하고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는 고구려 대란에 대한 기록이 보이지 않는다. 461) 12월 싸웠다 : 欽明 7年 시세조에 의하면 細群은 小夫人 舅氏, 群은 中夫人 舅氏를 가리 킨다. 細群과 群은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462) 國 薨했다 : 國은 백제계 사료에 나타난 고구려에 대한 멸칭(雄略 20年條에 인용된 `百濟記a에 처음 보인다)이다. 香岡上王은 고구려 제23대 왕인 安原王(재위 531~545)의 시호 로 볼 수 있다. 三國史記 권19 高句麗本紀에는 安原王의 시호가 보이지 않지만 제24대 陽原王 에게 陽岡上好王, 제25대 平原王에게는 平岡上好王 등의 시호가 붙은 예를 통해서 추측해 볼 수 있다.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도 安原王의 사망시기를 545년(안원왕 15)으로 전하고 있다. 新撰姓氏錄 左京諸蕃條에는 安原王의 후예씨족으로 首가 나온다. 463) 中部奈率掠葉禮 : 掠은 성이고 葉禮은 이름이다. 이후 귀국 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欽明 9年 (548) 4월에 中部杆率로서 다시 왜국에 파견되어 그 해 閏7月 귀국했다는 것을 보면 이번 사행 의 귀국은 欽明 9年 4월 이전에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464) 中夫人의 아들 : 후문에는 世子로 나오며 고구려 제24대 陽原王(재위 545~559)을 가리킨다.

57 112 었다. 日本書紀 王에게는 3명의 부인이 있었다. 正夫人에게는 아들이 없었다. 中夫人이 世子를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가 群이었다. 群이었다. 小夫人도 아들을 낳았다. 그의 외할아버지는 細 王의 병에 걸려 위독해지자 細群과 群이 각각 자기 집안의 부인이 낳은 아 들을 즉위시키고자 하였다. 그래서 細群측에서 죽은 자가 2천여 명이었다. 고 한다.> 113 일입니다. 그러나 그 말의 진위를 확인하고자 세 번이나 사신을 보내 불렀으나 모두 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더욱 걱정됩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황송하신 천황께서 <*西蕃들은 일본 천황을 모두 황송하신 천황이라 칭한다.> 먼저 헤아려 주십시오. 요청한 원군을 잠 시 멈추시고 신의 보고를 기다려 주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이에 천황은 조서를 내려 上 奏한 내용을 듣고 우려하는 바를 살펴보니 日本府와 安羅가 이웃의 어려움을 구하지 않은 欽明天皇 8년(547) 것은 또한 짐도 괴로워하는 바이다. 또 高麗에 몰래 사신을 보냈다는 것은 믿을 수 없다. 짐이 명하였다면 보냈을 것이다. 명하지 아니하였는데 어찌 맘대로 보낼 수 있겠는가. 원 하4월 여름 4월. 백제가 前部德率眞慕宣文과 奈率哥麻 등을 보내어 구원병을 청하였다. 거듭 해서 下部東城子言465)을 보내어 德率汶休麻那466)와 교대하게 하였다. 하건대 왕은 흉금을 터놓고 평온하게 있으면서 너무 의심하거나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임나와 함께 전에 명한 대로 힘을 합쳐서 北賊을 막고 각각 封土를 지켜라. 짐이 마땅히 약간의 사람을 보낼 것이니 안라가 도망한 空地를 채우도록 하라. 고 하였다. 欽明天皇 9년(548) 6월 辛酉朔 壬戌. 춘정월 癸巳朔 乙未 봄 정월 계사삭 을미(3일). 백제의 사신 前部德率眞慕宣文 등이 돌아갈 것을 청하였다. 이에 조서를 내려 요청한 구원병은 반드시 보내서 구원할 것이다. 마땅히 속히 왕에게 가서 보고하라. 고 하였다. 6월 신유삭 임술(2일). 백제에 사신을 보내 조서를 내려 德率宣文이 돌아간 이후에 형 편이 어떠한가. 소식은 어떠한가. 짐이 듣건대 그대 나라는 賊의 침해를 받았다고 하니 마땅히 任那와 함께 힘써 도모하여 전과 같이 방어하도록 하라. 고 하였다. 윤7월 甲申朔 辛未 하4월 壬戌朔 甲子 여름 4월 임술삭 갑자(3일). 백제는 中部杆率掠葉禮467) 등을 보내 德率宣文 등이 칙을 받들어 신의 나라에 이르러 구원병은 때에 맞춰 파견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恩 468) 詔를 받으니 기쁘기 그지없습니다. 그러나 馬津城 전투<*正月 辛丑에 高麗가 군사를 이끌고 馬津城을 포위하였다.>에서 사로잡은 포로가 安羅國과 日本府가 [고려를] 불러 들여 징벌하기를 부추겼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상황을 미루어 볼 때 참으로 그럴 법한 윤7월 갑신삭 신미(12일). 백제 사신 掠葉禮가 돌아갔다. 동10월 겨울 10월. 백제에 370명을 보내어 得爾辛469)에 성을 쌓는 데 돕도록 하였다. 欽明天皇 10년(549) 하6월 乙酉朔 辛卯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의하면 平成(陽原王의 諱)은 안원왕 3년(533) 정월에 태자로 책봉되었 기 때문에 이 때 1세이라고 하더라도 즉위할 때는 적어도 13세 이상이 된다. 그런데 본조의`백제 본기a 에는 8세에 즉위하였다고 기술되어있으므로 삼국사기 의 내용과 차이를 보이고 있다. 465) 下部東城子言 : 東城은 백제의 복성이다. 欽明 15年(554) 2월에 德率東城子莫古와 교대한다. 466) 德率汶休麻那 : 汶休는 백제 대성8족 가운데의 하나인 木氏의 복성표기이다. 麻那는 이름이다. 467) 中部杆率掠葉禮 : 주 463) 참조. 468) 馬津城 : 현 충남 예산의 獨山城.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聖王 26年(548) 正月條에는 이 시 기 고구려가 백제의 獨山城을 공략하였다는 기사가 있다. 여름 6월 을유삭 신묘(7일). 將德久貴470)와 固德馬次文471) 등이 돌아가기를 청하였다. 이 469) 得爾辛 : 현 충남 恩津. 三國史記 地理志에 의하면 德殷郡은 원래 백제의 德近郡으로 경덕왕 대에 개명되어 지금의 德恩郡으로 되었다고 한다. 그리고 동국여지승람 에 의하면 恩津은 德恩 과 같다고 한다. 여기서 德爾는 德恩과 음이 통한다. 470) 將德久貴 : 久貴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다만 후문에는 관등이 將德(제7위)이 아닌 施德(제8위) 으로 나오기도 한다.

58 114 日本書紀 에 조서를 내려 延那斯와 麻都가 몰래 사사로이 高麗에 사신을 보낸 것은 짐이 마땅히 乙未(16일). 백제가 中部奈率皮久斤475)과 下部施德灼干那476) 등을 보내어 사람을 보내어 허실을 물을 것이다. 요청한 군사는 바라는 바에 따라 중지시키겠다. 라 를 바쳤다. 고 하였다. 欽明天皇 11년(550) 춘2월 辛巳朔 庚寅 봄 2월 신사삭 경인(10일). 백제에 사신을 보내어 <* `百濟本記a 에 말하길 3월 12일 辛 고 하였 酉에 일본의 사신 阿比多(아히타)472)가 배 3척을 이끌고 도성 아래에 이르렀다. 다.> 짐이 將德久貴와 固德馬進文 등이 올린 표의 뜻에 따라 손바닥 들여다보듯이 하나 하나 교시한다. 그 생각하고 있는 바를 자세하고 분명하게 밝히고자 한다. 大市頭(다이시 473) 즈) 가 돌아온 뒤로도 평상시와 다름이 없었다. 이제 보고한 말을 좀더 자세히 파악하고 사신을 보낸다. 또한 짐이 듣건대 奈率馬武는 왕이 신뢰하는 신하이다. 위에 아뢰고 아래 에 전하는 것이 왕의 마음에 심히 맞아서 왕을 보필하게 되었다고 들었다. 만일 국가가 무사하고 오랫동안 관가가 되어 길이 천황을 받들고자 한다면 마땅히 馬武를 대사로 삼 아 조정에 보내라. 라고 하였다. 거듭해서 조서를 내려 짐이 듣건대 북적은 강하고 포악 하다고 한다. 화살 30具를 내리니 한 곳을 방어할 수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하4월 庚辰朔 여름 4월 庚辰朔(1일). 백제에 있는 日本王의 사람이 바야흐로 돌아가고자 하였다. <* `百濟本記a 에는 4월 1일 庚辰에 日本阿比多가 돌아갔다. 고 한다.> 百濟王 聖明이 왕 의 사람에게 임나의 일은 칙명을 듣고 굳게 지키겠다. 延那斯와 麻都의 일은 문책할 것 인지 아닌지는 오로지 칙에 따를 것이다. 라고 말하고, 高麗奴 6口를 바치고, 별도로 왕 의 사람에게 奴 1口를 주었다.<*모두 爾林474)을 공격하여 사로잡은 奴이다.> 471) 固德馬次文 : 馬가 성이고 次文이 이름이다. 固德은 백제 관위 16계 가운데 제9위. 472) 阿比多 : 일본서기 계체 10년(516) 9월조에 백제사신의 일원으로 같은 이름이 보이는데 만약 동일인이라면 꽤 고령이었을 것이다(주 299) 참조). 日本書紀 繼體紀에는 백제의 사신으로 欽 明紀에는 왜국의 사신으로 활약하고 있다. 473) 大市頭 : 자세히 알 수 없다. 474) 爾林 : 주 242) 참조. 115 의 포로 10口 欽明天皇 12년(551) 춘3월 봄 3월. 보리 씨앗 1000斛을 백제왕에게 주었다. 是歲 이 해에 백제 聖明王이 친히 군사와 두 나라<*두 나라는 新羅와 任那를 말한다.>의 병 사를 거느리고 高麗를 쳐서 漢城477)의 땅을 차지하였다. 또한 진군하여 平壤478)을 쳤다. 모두 6郡479)의 땅이다. 마침내 故地를 회복하였다. 欽明天皇 13년(552) 5월 戊辰朔 乙亥 5월 戊辰朔 乙亥(8일). 백제 가야 안라가 中部德率木리今敦480)과 河內部阿斯比多481) 등을 보내어 고구려와 신라가 화친하고 세력을 합쳐 신의 나라와 任那를 멸하려고 듭니 475) 中部奈率皮久斤 : 皮가 성이고 久斤은 이름이다. 귀국 시기는 알 수 없다. 476) 下部施德灼干那 : 灼이 성이고 干那은 이름이다. 中部奈率皮久斤와 마찬가지로 귀국 시기는 알 수 없다. 477) 漢城 : 神功 49年 春3月條에 意流村으로 나오고, 雄略 20年條에 인용된`百濟記a에는 尉禮로 나온다(주 60) 참조). 478) 平壤 : 北漢山 근처의 南平壤을 가리킨다. 지금의 서울 지역. 479) 6郡 : 漢城과 平壤(남평양)을 중심으로 한 옛 백제의 영역. 欽明 13年 是歲條에 의하면 백제는 다시 이곳을 신라에 빼앗긴다. 480) 中部德率木리今敦 : 木리은 木씨 또는 리氏의 복성표기이다. 今敦은 이름으로 흠명 14년(585) 정월에 귀국한다(주 296) 참조). 481) 河內部阿斯比多 : 왜계백제관료 혹은 가야를 대표하는 사신. 日本書紀 欽明 14年 正月條에서 中部德率木리今敦과 함께 백제사신으로 기술되어 있다. 河內部(카와치베)씨는 씨족 이름에서 볼 때 河內 지역에 본거지를 두고 거주하고 있던 씨족으로 여겨진다. 河內氏가 백제계 이주민 집단 이었던 점과 河內지역에 한반도계 이주민 집단이 많이 거주하고 있었던 정황으로 볼 때 이 河內 部氏도 한반도에서 건너 간 도래인들로 추정된다. 阿斯比多가 이름이다.

59 116 日本書紀 117 다.482) 따라서 삼가 원병을 요청하여 먼저 불시에 공격하고자 합니다. 군사의 많고 적음은 을] 유포시키고 예배하는 공덕을 찬양하여 이 법485)은 여러 법 가운데 가장 뛰어나지만, 천황의 칙명에 따르겠습니다. 고 아뢰었다. [천황이] 조서를 내려 지금 백제왕 안라 이해하기도 어렵고 입교하기도 어렵습니다. 周公486)과 孔子도 이해할 수 없을 것입니다. 왕 가라왕과 일본부의 신 등이 함께 사신을 보내 아뢴 상황은 잘 들었다. 또한 마땅히 이 법은 無限한 福德과 果報를 일으키고, 無上의 菩提487)로 이끕니다. 예를 들면 사람이 임나와 함께 마음과 힘을 하나로 하여라. 그렇게 하면 반드시 하늘이 지켜주는 복을 받을 隨意寶(如意寶珠)를 품고 사용하면 뜻하는 바대로 되는 것과 같이 이 오묘한 法寶도 그와 것이며 또한 황송하신 천황의 靈威에 의한 加護가 있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같은 것입니다. 기원한 것이 뜻대로 되어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습니다. 또 멀리 天竺 으로부터 삼한에 전해지기까지 가르침에 따르고 받들어 존경하지 않음이 없었습니다. 이 동10월 483) 겨울 10월. 백제 聖明王<*다른 이름은 聖王이다.>이 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 484) 보내어 釋迦佛金銅像 1軀, 약간의 幡蓋와 약간의 經論을 바쳤다. 등을 따로 표를 올려 [불법 에 백제왕 臣 明은 삼가 部臣488)怒唎斯致契를 보내 帝國에 받들어 전하니 畿內(日本)에 유 489) 라고 적고 있는 바 포시키십시오. 과연 불교에서 나의 법이 동쪽으로 전해질 것이다. 대로 이루어질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이날 천황은 듣고 나서 뛸 듯이 기뻐하며 사신에 게 조서를 내려 짐이 예부터 지금까지 이와 같이 미묘한 법은 들은 적이 없다. 그러나 482) 고구려와 신라가 멸하려고 듭니다 : 백제의 성왕은 원병 요청의 중요한 이유로 신라와 고 구려가 화통한다는 것을 전하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와 신라의 우호관계는 대개 464년 경에 결 렬되는 것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성왕이 왜의 원병을 끌어들이기 위해 고구려를 들먹였던 것에 불과한 것인지, 실제로 이 기간에 고구려와 신라의 내통이 있었는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이에 고구려와 신라의 밀약이 552년이나 553년 초에 성립되었던 것으로 추정한 견해(노태돈, 1976,`고구려의 한강유역 상실의 원인에 대하여a, 한국사연구 13), 일본서기 의 기사를 신 빙하여 552년 5월 이전에 백제가 양국의 내통을 알고 있었다는 견해(김주성, 1998,`성왕의 한 강유역 점령과 상실a, 백제사상의 전쟁, 충남대 백제연구소), 551년 고구려 혜량법사와 거칠 부의 관계, 그리고 혜량법사의 신라투항을 밀약의 계기로 보는 견해(주보돈, 2006,`5~6세기 의 고구려와 신라의 관계a, 북방사논총 11) 등이 있다. 483) 西部姬氏達率怒唎斯致契 : 西部는 백제 5部 가운데 하나인 下部로 추정된다. 姬는 姓, 怒唎斯致 契는 이름이다. 그런데 姓에 氏 가 붙은 것이나 관등이 성과 이름 사이에 기술되는 것은 이례 적이다. 노리사치계는 승려가 아닌 백제관인일 것으로 여겨지는데 新撰姓氏錄 에 이름이 비슷 한 인물이 나온다. 右京諸蕃 下와 山城諸蕃에 調達과 民首가 선조로 칭하는 努理使主 가 바로 그이다. 여기서 使主는 백제의 인명어미에 자주 등장하는 경칭의 의미이다. 불교를 전한 노리사 치계가 왜국에 영주하였다면 노리사주로서 그 후손을 형성하였을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 484) (백제 聖明王이) 釋迦佛金銅像 1軀 바쳤다 : 日本書紀 에서 처음으로 백제에서 왜국에 불 교가 정식으로 전래되었다고 전하는 기사이다. 그런데 백제가 왜국에 불교를 전해 준(일본학계 에서는 이른바 佛敎公傳 이라는 표현을 사용함) 시기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불교 전 래시기에 대해서 日本書紀 의 흠명 13년(552)인 壬申年 이외에 扶桑略記 의 繼體 12年(522) 인 壬寅年, 그리고 元興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이하 元興寺緣起 로 약칭함)와 上宮聖德法 王帝說 에는 538년인 戊午年으로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扶桑略記 의 불교관련 기사는 설화적 요소가 강하고, 538년인 戊午年은 欽明紀에는 없었다. 538년인 무오년은 선화 3년인데 이른바 繼體 欽明朝內亂 에 해당되는 시기이다. 한편 日本書紀 흠명 13년 동10월조 기사는 짐은 스스로 결정할 수 없다. 라고 말하였다. 이에 여러 신하들에게 두루 서쪽 蕃國이 바친 불상의 용모는 장엄하고 눈부시다. 지금까지 전혀 본 적이 없던 것이다. 이것을 숭 배해야 하는가 말아야 하는가? 라고 물었다. 蘇我大臣稻目宿 (소가노오오오미이나메노 스쿠네)490)가 서쪽 蕃國 여러 나라가 하나같이 모두 예배합니다. 豊秋日本만 어찌 홀로 8세기 초에 漢譯된 金光明最勝王經 이나 大般若經 등의 불전과 梁高僧傳 康僧會傳 등 의 중국 고승전이 인용되어 있기 때문에 일본서기 의 편찬자의 조작으로 보기도 한다. 금광명 최승왕경 은 중국에서 703년에 義定이 한역한 것을 702년 견당사와 함께 중국으로 갔던 승려 道慈가 養老 2年(718) 12월 귀국할 때 일본으로 가져간 것이며, 도자는 이 경전의 문구를 이용 하여 백제로부터 불교가 전래된 기사를 윤색한 것이라고 한다(井上薰, 1961,`日本書紀佛敎傳 來記載考a, 日本古代政治宗敎, 吉川弘文館). 이밖에 불교공전 이란 불상 불전 승려 삼자 가 모두 갖추어져 전래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가운데 가장 중요한 승려의 도래가 민달 13년 이 후에나 이루어지기 때문에 그 이전에는 불교가 정식으로 전래되었다고 볼 수 없다는 견해(中村 修也, 2007,` 日本書紀 佛敎傳來記事의 편찬에 대하여a, 백제연구 46)도 있다. 단, 민간차 원에서는 이보다 이른 시기에 불교가 전래되었음을 시사하는 전승이 있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 다(中井眞孝, 1994, 朝鮮と日本の古代佛敎, 東方出版, 3~8쪽). 485) 法 : 이하의 내용은 주로 金光明最勝王經 의 如來壽量品과 四天王護國品 등의 표현과 같다. 486) 周公 : 孔子가 理想으로 삼은 聖人. 487) 菩提 : 道 覺 知를 일컫는다. 번뇌에서 벗어나 바른 지혜를 얻어 깨달음에 이른다는 의미이다. 488) 部臣 : 원래 고대 중국에서 諸侯의 신하라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489) 나의 것이다 : 大般若經 難聞功德品에 나오는 표현과 같다. 490) 蘇我大臣稻目宿 : 宣化 欽明朝의 大臣으로 馬子의 아버지. 日本書紀 宣化 元年(536) 2月

60 118 日本書紀 119 등지겠습니까. 라고 아뢰었다. 物部大連尾輿(모노노베노오오무라지오코시)491)와 中臣連 伽藍에 불을 놓았다. 전부 타버려 남은 것이 없었다. 이때 하늘에는 바람과 구름도 없었 鎌子(나카토미노무라지가마코)492)가 함께 우리나라의 왕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 항상 天 는데 갑자기 大殿에 불이 났다. 地社稷의 180神을 춘하추동으로 제사지내고 섬겼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蕃神으로 바꾸 어 받든다면 國神의 노여움을 살까 두렵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마땅히 원하고 있는 稻目宿 에게 [불상을] 맡겨 시험 삼아 예배하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大臣이 무릎 꿇고 받으며 기뻐하고, 小墾田(오하리다)家493)에 안치하였다. 부지런히 出家의 業(佛道)을 닦고 이를 위해 向原(무쿠하라)家494)의 집을 사념없이 희사하여 절로 삼았다. 그 후 나라 에 돌림병이 돌아 백성들이 고통스럽게 죽어갔다.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심해져서 치료 할 수가 없었다. 物部大連尾輿와 中臣連鎌子가 함께 지난날 신의 계책을 따르지 않아서 이렇게 병들어 죽게 되었습니다. 이제 머지않아 원래대로 되돌린다면 반드시 경사스러운 일이 있을 것입니다. 마땅히 속히 던져 버려 후일의 복을 구해야 합니다. 라고 아뢰었다. 천황이 말한 대로 하라. 고 하였다. 이에 有司가 불상을 難波의 掘江495)에 던져 버리고, 是歲 이 해에 백제가 漢城과 平壤을 포기하였다. 신라가 이를 틈타 漢城으로 들어갔다. 현재 신라의 牛頭方 尼彌方<*지명이지만 자세히 알 수 없다.>이다. 欽明天皇 14년(553) 춘정월 甲子朔 乙亥 봄 정월 갑자삭 을해(12일). 백제가 上部德率科野次酒496)와 杆率禮塞敦497) 등을 보내 군 병을 청하였다. 戊寅(15일). 백제의 사신 中部杆率木리今敦과 河內部阿斯比多 등이 돌아갔다. 6월 條에 처음 나오며 흠명 31년(570) 3월에 사망한다. 여기서 宿 는 姓이 아닌 존칭이다. 蘇我氏 에서 처음으로 大臣에 취임하여 大王가와 인척관계를 맺고 급속히 세력을 확장한 인물이다. 蘇 我氏는 武內宿 의 자식인 石川宿 의 후손으로 大和(야마토)國 高市(타케치)郡의 蘇我(현 原 市曾我町)지역을 본거지로 세력을 형성했던 씨족이다. 주 38), 96) 참조. 491) 物部大連尾輿 : 日本書紀 安閑 元年(534) 12月 是月條에 처음 보일 때부터 大連으로 나온다. 守屋의 아버지이다. 492) 中臣連鎌子 : 中臣氏은 天兒屋命(아메노코야네)의 후손으로 대화정권의 제사를 담당한 씨족이 다. 中臣氏系圖 에는 흠명조에 常磐(토키와)가 처음으로 中臣連을 사성받았다고 나오고, 中臣 이라는 씨명은 신과 인간을 중개한다는 의미에서 유래하였다고 한다. 鎌子라는 이름은 中臣氏 系圖 에도 보이지 않아 자세히 알 수 없다. 中臣氏의 유명한 인물로는 大化改新 때에 활약한 中 臣鎌足이 있다. 中臣鎌足은 천지 8년(669)에 大織冠 內大臣 이라는 직위와 藤原氏 라는 씨명 을 받았다. 이에 일족도 藤原氏를 칭했지만 문무 2년(698) 겸족의 아들인 不比等(후히토)만 藤 原氏名을 계승하고 그 외에는 다시 中臣氏를 칭하게 되었다. 中臣連은 천무 13년(684)에 朝臣姓 을 사성받는다. 493) 小墾田家 : 奈良縣 高市(타케치)郡 明日鄕(아스카)村 북부의 大字豊浦(다이지토요라) 일대에 위치. 494) 向原家 : 元興寺緣起 에 牟久原(무쿠하라)에 櫻井(사쿠라이)道場을 만들었다고 하며, 法王帝 說 에 의하면 櫻井寺가 지금의 豊浦(토요라)寺라는 기록을 통해서 볼 때 小墾田家 가까운 지역 에 위치. 495) 難波의 掘江 : 大阪灣에서 가까운 大川(天滿川). 大和의 向原에 있었던 불상을 難波에 버린다는 것은 부자연스럽기 때문에 본조의 기사를 부정하기도 한다. 한편 廢佛의 방침을 선언하기 위해 6월. 內臣(우치노오미)498)<*이름이 빠져 있다.>을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그리고 양마 2필, 同船499) 2척, 활 50張, 화살 50具를 하사하였다. 칙명을 내려 요청한 군대는 왕이 사용함에 따를 것이다. 라고 하였다. 따로 칙서를 내려 醫博士 易博士 曆博士 등은 마땅히 순번에 따라 교대시켜야 한다. 지금 위에 열거한 職種의 사람들은 바야흐로 교대 할 시기가 되었다. 돌아오는 사신에 딸려 보내 교대시키도록 하라. 또한 卜書 曆本과 여 러 가지 藥物도 함께 보내라. 고 하였다. 일부러 도래인이 많이 거주하던 難波에 버렸다는 견해도 있다. 496) 上部德率科野次酒 : 주 429) 참조. 497) 杆率禮塞敦 : 杆率은 德率로 추정된다. 禮는 성이고 塞敦은 이름이다. 498) 內臣 : 일본서기 에서 內臣은 주로 왕의 측근으로서 집정관적인 성격을 가진 자에게 붙는 직위 로 사용되는 경우가 많다. 孝德卽位前紀에 中臣鎌子連이 취임한 바 있고, 이후에 藤原房前이 內 臣직에 올랐다. 흠명 6년 7월조에 인용된`日本世記a 에는 蓋金(개소문)을 內臣으로 기록하고 있 다. 그러나 여기서는 직위가 아닌 씨명으로 흠명 15년(554) 동12월조에 有至臣 을 가리킨다. 有至臣 은 大和國 宇智(우치)郡의 씨족이다(주 520) 참조). 內臣의 파견은 흠명 14년(553) 정월 에 백제가 上部德率科野次酒와 杆率禮塞敦을 파견에 군사을 요청한 것에 대한 답사로 여겨진다. 499) 同船 : 많은 목재를 조립하여 만든 큰 배. 皇極 元年(642) 8月條에 同船. 母慮紀舟 라고 나온다.

61 120 日本書紀 8월 辛卯朔 丁酉 121 동10월 庚寅朔 己酉 8월 신묘삭 정유(7일). 백제가 上部奈率科野新羅500)와 下部固德汶休帶山501) 등을 보내 겨울 10월 경인삭 기유(20일). 백제 왕자 餘昌504)<*明王의 아들 威德王이다.>이 나라 안 표를 올려 지난해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內臣德率次酒502)와 任那大夫503) 등을 보내 바다 의 군대를 모두 징발하여 고구려로 향하였다. 百合의 들판에 요새를 쌓고 군사들과 함께 밖 여러 彌爾居(官家)의 일을 아뢰었습니다. 엎드려 恩詔를 기다리기를 봄에 돋은 풀이 먹고 잤다. 이날 저녁 바라보니 넓은 들은 비옥하고 평원은 끝없이 넓은데, 사람의 자취 단비를 기다리듯 하였습니다. 올해 문득 듣자니 新羅와 國(고구려)이 통모하여 백제와 는 거의 없고 개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이 때 갑자기 북과 피리 소리가 들렸다. 餘昌이 크 임나가 빈번하게 일본에 찾아가고 있다. 생각건대 이것은 군사를 청하여 우리나라를 치 게 놀라 북을 쳐서 맞대응하면서 밤새 굳게 지켰다. 새벽녘에 일어나 넓은 들판을 보니 려는 것이다. 이 일이 만약 사실이라면 나라의 패망을 발꿈치를 들고 기다리는 꼴이 된 마치 푸른 산과 같이 軍旗가 가득하게 덮여 있었다. 날이 밝자 목에 頸鎧를 입은 자 1騎, 다. 일본의 군사가 출발하기 전에 안라를 공격해 빼앗고 일본에서 오는 길을 막자. 라고 징<* 자는 자세히 알 수 없다.>을 꼽은 자 2騎, 표범 꼬리로 장식한 자 2騎, 모두 합해 하였다고 합니다. 그 계략이 이와 같습니다. 臣 등이 이를 듣고 두려운 마음이 깊이 들었 5騎가 말고삐를 나란히 하고 와서 묻기를 어린아이들이 우리 들판에 손님이 와 있다. 습니다. 바로 빠른 배로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아룁니다. 바라건대 천황은 속히 전군과 라고 하였다. 어찌 맞이하는 예를 갖춰 맞이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지금 속히 우리와 더 후군을 이어서 보내 구원해 주기를 원합니다. 가을까지는 바다 건너 彌爾居를 굳게 지키 불어 예로써 문답할 만한 사람의 이름과 나이, 관위를 알고 싶다. 라고 하였다. 餘昌이 겠습니다. 만약 지체하여 늦는다면 후회해도 소용없을 것입니다. 파견군이 신의 나라에 성은 同姓이고 관위는 杆率이며 나이가 29세이다. 라고 대답하였다. 백제에서 반문하니 도착하면 옷과 식량은 신이 충당할 것입니다. 임나에 도착하여도 역시 그렇게 할 것입니 또한 앞과 같은 방식으로 대답하였다. 드디어 標를 세우고 싸우기 시작하였다. 이에 백제 다. 만일 [임나가] 지급할 수 없다면 신이 반드시 충당하여 부족함이 없도록 하겠습니다. 는 高麗의 용사를 창으로 찔러 말에서 떨어뜨려 머리를 베었다. 그리고 머리를 창 끝에 한편, 的臣이 삼가 天勅을 받고 와서 臣蕃을 위무하고 있습니다. 주야로 태만하지 아니하 고 정사에 힘쓰고 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海表(바다 밖)의 蕃들은 모두 그의 善政을 칭 송하여 영원히 海表의 여러 나라에 선정을 베풀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불행하게도 죽었 꽂아 들고 돌아와서 군사들에게 보였다. 高麗軍 장수들의 분노가 더욱 심하였다. 이 때 백제의 환호하는 소리가 天地를 가르는 듯 하였다. 또 副將이 북을 치며 나아가 高麗王을 東聖山505) 위에까지 쫓아가 물리쳤다. 다 하니 깊이 추도하는 바입니다. 이제 임나의 일을 누가 다스릴 수 있겠습니까. 엎드려 바라옵건대 천황은 속히 그를 대신할 사람을 보내 임나를 다스리기 바랍니다. 또한 바다 밖의 여러 나라들은 활과 말이 매우 부족합니다. 옛날부터 지금까지 천황에게 받아 강한 적을 막았습니다. 천황은 자애롭게 활과 말을 많이 내려주시기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500) 上部奈率科野新羅 : 科野는 斯那奴(시나노)라고도 하며 新羅는 이름이다. 501) 下部固德汶休帶山 : 汶休는 백제의 복성이고 帶山은 이름이다. 502) 內臣德率次酒 :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下) (1965, 岩波書店, 110쪽)에서는 欽明 14年 春 正月條의 上部德率科野次酒와 동일인으로 추정하였다. 한편 內臣을 欽明 15年 冬12월조의 有至 臣으로 보고(주 520) 참조), 內臣과 德率次酒 두 사람으로 이해하기도 한다(이재석, 2000). 503) 任那大夫 : 欽明 14年 春正月에 上部德率科野次酒와 함께 왜국에 파견된 日本府執事로 추측된 다. 일본에서 大夫란 용어는 大臣 大連 다음의 고급관인을 가리키며, 이러한 고급관인이 나타 나기 시작한 것은 6세기 후반 이후이다. 율령제가 시행된 이후에는 5위 이상의 관인에 대한 경 칭으로 사용되었다. 欽明天皇 15년(554) 춘정월 丙申 봄 정월 병신(9일). 백제가 中部木리施德文次506)와 前部施德曰佐分屋507) 등을 筑紫에 보 504) 餘昌 : 백제 제27대 威德王(재위 554~598). 삼국사기 백제본기에는 그의 즉위를 성왕 32년 (554)에 즉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흠명 15년(554) 동12월에 聖明王이 전 사한 후 威德王이 흠명 18년(557) 춘3월에 즉위할 때까지 3년간 공위가 생긴다. 505) 東聖山 : 평양 동북쪽의 大聖山. 506) 中部木리施德文次 : 木리은 백제의 복성이고 文次가 이름이다. 흠명 15년(543) 3월에 귀국한다. 507) 前部施德曰佐分屋 : 曰佐를 백제의 성으로 보고 前部施德曰佐分屋를 백제인으로 간주하는 견해 도 있으나(佐伯有淸, 1982, 新撰姓氏錄硏究 考證編 第二, 吉川弘文館, 316쪽), 曰佐(오사)氏 는 도래계 씨족으로서 왜국에도 있었으므로 그는 왜계백제관료였을 가능성이 높다(이재석,

62 122 日本書紀 내 內臣과 佐伯連508) 등에게 묻기를 德率次酒와 杆率塞敦 등이 지난해 윤달 4일에 와서 臣등 <*臣 등은 內臣을 일컫는다.>은 내년 정월에 도착할 것입니다. 라고 하였다. 그렇 123 率王有悛陀516) 採藥師施德潘量豊 固德丁有陀517) 樂人施德三斤 季德己麻次 季德進 奴 對德進陀518)를 바쳤다. 모두 요청에 따라 교대하였다. 게 말은 하였지만 자세한 것은 알지 못한다. 오는 것인가, 아닌가. 또한 군대의 수는 얼마 인가. 약간이나마 미리 듣고 軍營을 쌓고자 한다. 라고 말하였다. 별도로 바야흐로 듣자 니 황공하신 천황의 조서를 받들어 筑紫에 가서 보내 줄 군대를 환송하라고 하였습니다. 그 말을 들고 이루 비교할 수 없이 기뻤습니다. 올해의 싸움은 전에 없이 매우 위태로우니 보내주실 군사를 정월까지 도착할 수 있도록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內臣이 명 3월 丁亥朔 3월 丁亥朔(1일). 백제 사신 中部木 施德文次 등이 돌아갔다. 하5월 丙戌朔 戊子 여름 5월 병술삭 무자(3일). 內臣이 수군을 거느리고 백제에 도착하였다. 령을 받들어 바로 구원군 1천, 말 1백 필, 배 40척을 보내도록 하겠다. 라고 대답하였다. 동12월 2월 겨울 12월. 백제가 下部杆率汶斯干奴519)를 보내 표를 올려 백제왕인 신 明과 安羅의 여 509) 510) 2월. 백제가 下部杆率將軍三貴 와 上部奈率物部烏 등을 보내 구원병을 구하였다. 그리고 德率東城子莫古511)를 바치고 이전의 番인 奈率東城子言과 교대시키고, 五經博士 王柳貴512)를 固德馬丁安513)과 교대하도록 하였다. 승려 曇慧 등 9인은 승려 道深 등 7인과 514) 러 倭臣들, 任那의 여러 나라의 旱岐들이 아룁니다. 斯羅(신라)가 무도하여 천황을 두려 워하지 않고 과 마음을 같이하여 바다 북쪽의 彌移居를 멸망시키려고 합니다. 신들이 함께 의논하여 有至臣(우치노오미)520) 등을 보내 군사를 요청하여 斯羅를 정벌하려고 하 515) 교대하였다. 따로 칙명을 받들어 易博士施德王道良 曆博士固德王保孫 醫博士奈 였습니다. 이에 천황이 有至臣을 다시 보내니 군사를 거느리고 6월에 도착하였습니다. 신들이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12월 9일에 斯羅를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신이 먼저 東 2000, 앞의 글). 曰佐는 야마토 조정에서 통역을 전문적으로 담당하는 씨족이었기 때문에 譯 語 라고도 한다. 신찬성씨록 에 의하면 紀氏와 동족관계로서 建內宿 의 후예라고 되어 있으 나, 曰佐라는 이름이 고대 韓語에 유래를 두고 있는 점 등에서 실제로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이 주민 집단으로 인식되고 있다. 曰佐氏의 거주지는 近江國(현재의 志賀縣)과 山城國(현재의 교토 相樂郡), 그리고 大和國(현재의 나라현) 등 여러 곳에 걸쳐 확인된다. 508) 佐伯連 : 大和政權 내에서 군사를 담당한 유력씨족으로 천무 13년(684) 12월에 宿 를 사성받 는다. 新撰姓氏錄 左京神別中 大伴宿 條에 大伴室屋의 아들 談에서 갈라져 나왔고, 大伴氏 와 함께 靭部(유케이)를 이끌고 궁문을 호위했다고 한다. 509) 下部杆率將軍三貴 : 杆率의 관위를 가진 將軍으로 이름이 三貴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10) 上部奈率物部烏 : 물부씨계 왜계백제관료. 이름은 烏이다. 511) 德率東城子莫古 : 東城을 백제의 복성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莫古는 이름이다. 흠명 8년(547) 4 월에 왜국에 건너왔다. 512) 王柳貴 : 王은 성이고 柳貴는 이름이다. 513) 固德馬丁安 : 馬는 성이고 丁安은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14) 易博士施德王道良 : 宋書 卷97 列傳 百濟國條에 의하면 백제의 역학은 중국에서 도입되었다 고 한다. 王은 성이고 道良은 이름이다. 515) 曆博士固德王保孫 : 周書 卷49 列傳 百濟條에는 백제는 宋의 元嘉曆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기 록되어 있다. 王은 성이고 保孫은 이름이다. 516) 醫博士奈率王有悛陀 : 周書 卷49 列傳 百濟條에 백제는 醫藥을 알고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王有는 복성이고 悛陀은 이름이다. 517) 採藥師施德潘量豊 固德丁有陀 : 採藥師는 2인으로 施德 潘量豊과 固德 丁有陀이다. 潘과 丁은 각자의 성. 518) 樂人施德三斤 季德己麻次 季德進奴 對德進陀 : 隋書 권81 列傳 百濟條에 의하면 백제악기 로 鼓角 箏 등의 악기가 있었다고 한다. 이하 三斤 己麻次 進奴 進陀은 모두 이름이 다. 본조에만 나와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19) 下部杆率汶斯干奴 : 汶斯는 백제의 복성이고, 干奴는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20) 有至臣 : 內臣이라고도 한다. 新撰姓氏錄 大和皇別條에 의하면 孝元天皇의 아들 彦太忍信命 (히토후츠오시노미코토)의 후손으로 나오며, 또 建內宿 의 동생으로 나오는 甘美內宿 (우마시 우치노스쿠네)가 山代內臣의 조상이라는 전승도 있다. 大和國 宇智郡(현재 나라현 五條市 부근) 이 본거지이며, 山城國 綴喜郡 有智鄕(현재의 교토 八幡市 內里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특히 大 和분지에서 紀ノ川(키노가와) 유역으로 향하는 길목에 있는 宇智郡에는 한반도의 영향을 강하게 남기고 있는 北宇智고분군이 있는데 有至臣의 활동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和田 萃, 1979,`紀路と曾我氏a, 古代の地方史-畿內編- 3, 朝倉書店).

63 124 日本書紀 125 方領 物部莫哥武連(모모노베노마카루노무라지야)521)을 보내 그 方의 군사를 거느리고 函 를 모두 징발하여 길을 차단하고 격파하였다. 이 때 신라에서 佐知村527)의 飼馬奴苦都528) 山城522)을 공격하도록 하였습니다. 有至臣이 거느리고 온 竹斯物部莫奇委沙奇(츠쿠시노 <*다른 이름은 谷智이다.>에게 苦都는 천한 奴이다. 明王은 유명한 군주이다. 이제 비천 523) 모노노베노마카와사카) 가 불화살을 잘 쏘았습니다. 천황의 위령에 의해 이 달 9일 酉 한 奴에게 유명한 군주를 죽이도록 하고자 한다. 후세에 전해져서 사람들의 입에서 잊혀 時에 성을 빼앗아 불질러 태워버렸습니다. 단출한 사신을 배로 급히 파견하여 아룁니 지지 않기를 바란다. 고 하였다. 얼마 후 苦都가 明王을 사로잡아 두 번 절하고 왕의 머 다. 라고 하였다. 별도로 만약 신라뿐이라면 有至臣이 데리고 온 군사로 충분할 것입니 리를 베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明王이 왕의 머리를 奴의 손에 건네줄 수 없다. 라 다. 그러나 이제 고 하였다. 苦都가 우리나라의 법에는 맹약을 어기면 비록 국왕이라 할지라도 奴의 손에 과 新羅가 함께 힘을 합하였기 때문에 성공하기 어렵습니다. 엎드려 524) 근처에 있는 여러 군사들을 보내서 신의 나라를 돕기 죽습니다. 라고 하였다. <*一本에는 明王이 胡床에 허리를 기대고 앉아 谷智에게 차고 를 청합니다. 또한 임나를 도울 수 있다면 일은 성공을 거둘 수 있을 것입니다. 라고 하 있던 칼을 풀어 주며 베도록 하였다. 고 한다.> 明王이 하늘을 우러러 크게 탄식하고 눈물 였다. 또한 신이 따로 군사 만 명을 임나에 보내 돕겠습니다. 아울러 아뢰니 이번 일은 을 흘리며 허락하기를 과인이 생각할 때마다 늘 고통이 골수에까지 사무쳤다. 돌이켜 헤 바라건대 竹斯島(츠쿠시노시마) 525) 1령, 도끼 300구, 사로잡 아려 보아도 구차하게 살 수는 없다. 고 이에 머리를 내밀어 베도록 하였다. 苦都는 머리 은 城의 백성 남자 2명과 여자 5명을 바칩니다. 적어서 죄송할 따름입니다. 라고 아뢰었 를 베어 죽이고 구덩이를 파서 묻었다. <*一本에는 신라는 명왕의 頭骨은 남겨 매장하고 다. 餘昌이 신라를 정벌할 것을 모의하니 耆老가 말하기를 하늘이 아직 우리와 함께하고 나머지 뼈는 예를 갖춰 백제에 보냈다. 지금 신라왕이 명왕의 뼈를 北廳 계단 아래에 묻었 있지 않습니다. 화가 미칠까 두렵습니다. 라고 간하였다. 餘昌이 늙었구려, 무엇을 겁내 다. 이름하여 그 관청을 都堂이라 한다. 고 한다.> 餘昌은 마침내 포위당하여 빠져나오지 는가. 우리는 大國(일본)을 섬기고 있는데 어찌 두려울 것이 있는가. 라고 하였다. 드디 못하고 있었다. 사졸들은 놀라 어찌할 바를 몰랐다. 筑紫國造(츠쿠시노쿠니노미야츠코)529) 어 신라국에 들어가 久陀牟羅(쿠다무라)526)에 성책을 쌓았다. 그 아버지 明王은 여창이 계 라는 활을 잘 쏘는 사람이 있었다. 앞으로 나아가 활시위를 당겨 신라의 騎兵 중 가장 용 속된 전쟁에 오랫동안 잠자지도 먹지도 못하면서 고생하는 것을 걱정하였다. 어버이의 감한 자를 쏘아 떨어뜨렸다. 쏜 화살이 말안장 앞뒤의 橫木을 예리하게 관통하여 갑옷의 자애로움에 부족함이 많으면 아들이 효도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이에 스스로 가서 그 옷깃까지 다다랐다. 계속해서 화살을 쏘니 비 오듯 하였고 게을리하지 않고 더욱 힘써 포 노고를 위로하고자 하였다. 신라는 明王이 친히 왔다는 소식을 듣고 나라 안의 모든 군사 위한 군대를 활로 후퇴시켰다. 이로 인해 여창과 여러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하여 돌아왔 급합니다. 한 척의 배를 보내 아뢰지만, 좋은 비단 2필, 다. 여창은 國造가 활로써 포위한 군대를 물리친 것을 칭찬하며 鞍橋君(쿠라지노키미) 521) 東方領 物部莫哥武連 : 東方領은 백제의 지방행정구획의 하나인 東方의 장관으로 관등은 達率이 다. 周書 卷49 列傳 百濟條에 의하면 東方은 得安城에 해당된다고 한다. 이 得安城은 오늘날 의 충남 恩津으로 비정된다(今西龍, 1934,`百濟五方五部考a, 百濟史硏究 ; 千寬宇, 1979,`마 한제국의 위치시론a, 東洋學 9). 物部莫哥武連은 왜계백제관료의 한 사람으로 일본서기 흠 명 4년(543) 추9월조에는 物部施德麻 牟로 나온다. 522) 函山城 : 현 충북 옥천의 管山城.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 백제성왕이 가라와 함께 공격한 곳이다. 523) 竹斯物部莫奇委沙奇 : 竹斯는 筑紫이다. 이름은 莫奇委沙奇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24) 竹斯島 : 현재 일본 九州를 가리킨다. 隋書 권81 列傳 倭國條에 大業 3年(608) 隋使裴世淸이 竹斯國에 이르렀다는 기사가 있다. 525) : 床 등의 위에 덮은 모직물의 한 종류. 526) 久陀牟羅 : 久陀는 현 경남 거창의 옛 이름인 居 과 같다. 牟羅(무라)는 村의 의미이다. 이라 불렀다. <*鞍橋는 여기서는 矩羅 (쿠라지)530)라고 한다.> 이때 신라 장수들은 백제 527) 佐知村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 보이는 三年山郡(현 충북 보은군)의 한 村일 것으로 추측된다. 528) 飼馬奴苦都 : 삼국사기 권4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조에 의하면 신라군 裨將인 삼년산군 의 高干都刀의 습격으로 백제성왕이 살해되었다고 한다. 苦都는 都刀와 동일인으로 여겨지는데 飼馬奴와 高干의 사이에는 신분상 큰 차이가 보인다. 飼馬奴는 말의 사육 및 훈련을 담당한 집 단에 소속된 천민으로 볼 수 있는데 이에 비해 高干은 신라 외위 11등 가운데 제3등에 해당된다. 529) 筑紫國造 : 日本書紀 欽明 15年 5月條에 內臣이 이끌고 온 수군 가운데 한 사람으로 여겨진다 (주 306) 참조). 530) 矩羅 : 矩羅 (쿠라지)는 鞍橋을 활로 관통시켜서 붙여진 이름이다.

64 126 日本書紀 127 가 피로하여 지쳤음을 알고 드디어 전멸시키고자 하였다. 한 장수가 안 된다. 일본 천황 데 어찌 하물며 禍福의 원인과 국가의 存亡에 대해서 알겠습니까? 라고 하였다. 蘇我卿535) 이 임나의 일 때문에 여러 번 우리나라를 책망하였다. 하물며 다시 百濟 官家를 멸망시킨 이 옛날 天皇 大泊瀨(오오하쓰네: 雄略天皇) 때에 당신 나라가 고구려에게 핍박을 받아 다면 반드시 후환이 따를 것이다.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그만 두게 되었다. 위험하기가 계란을 쌓아 놓은 것보다 더했습니다. 이에 천황이 神祇伯536)에게 神祇로부터 欽明天皇 16년(555) 춘2월 계책을 받도록 명하였습니다. 祝者가 이에 神의 말에 託宣하여 建國의 신을 모셔서 장차 망하려는 군주를 구하면 반드시 국가는 안정되고 백성들은 편안해질 것이다. 라고 아뢰 었습니다. 이로 말미암아 신에 의탁하여 구원을 받은 후 사직이 평안해졌습니다. 무릇 나 봄 2월. 백제 왕자 餘昌이 왕자 惠531)<*왕자 惠는 威德王의 동생이다.>를 보내어 聖明 라를 세운 신은 하늘과 땅이 나뉘어지고 풀과 나무가 말을 할 때 하늘에서 내려와 나라를 王이 적에게 살해당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15년에 신라에게 살해당했는데 지금 그 세운 신입니다. 최근에 당신 나라에서는 제사를 지내지 않는다고 들었습니다. 지금이라 것을 아뢴 것이다.> 천황이 듣고서 상심하고 슬퍼하였다. 이에 사자를 보내어 나루(難波 도 전의 잘못을 뉘우치고 神宮을 수리하여 神靈을 만들어 제사지내면 나라가 크게 번영 津532))에서 맞이하여 위문하였다. 이에 許勢臣533)이 왕자 惠에게 이곳에 머물고자 합니 할 것입니다. 저의 말을 절대로 잊지 마십시오. 라고 말하였다. 까? 아니면 본국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라고 물었다. 惠가 천황의 덕에 의지하여 돌 아가신 부왕의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만약 불쌍히 여겨 병기를 많이 주신다면 치욕을 씻 고 원수를 갚고자 합니다. 臣이 돌아가거나 머무르는 것은 오직 명에 따를 뿐입니다. 라 고 대답하였다. 얼마 후에 蘇我臣534)이 방문하여 聖王은 天地의 道理에 통달하였고 명성 은 널리 두루 퍼졌습니다. 길이 정국을 안정시키고 바다 서쪽 蕃國을 통솔하여 천년만년 천황을 받들 것이라고 생각하였습니다. 어찌 하루아침에 갑자기 승천하시어 흐르는 물처 럼 되돌아오지 못하고 묘실에 안치되리라고는 생각이나 했겠습니까. 어찌 이보다 비통하 고 슬픈 것이 있겠습니까. 무릇 성정이 있는 자라면 누가 애도하지 않겠습니까. 도대체 어떤 잘못으로 이러한 화를 불렀는가. 지금 어떤 술책을 가지고 나라를 안정시키겠습니 까. 라고 말하였다. 惠가 대답하기를 臣은 원래 성품이 어리석어 큰 계책을 알지 못하는 8월 8월. 백제 餘昌은 여러 신하들에게 少子는 이제 돌아가신 부왕을 받들기 위해 출가하 여 불도를 닦고자 한다. 라고 말하였다. 여러 신하와 백성들이 지금 군왕께서 출가하여 불도를 닦고자 하신다면 일단 명령을 받들겠습니다. 아! 전의 생각이 바르지 못하여 후에 큰 우환이 있었으니 누구의 잘못입니까? 무릇 백제국은 고려와 신라가 다투어 멸망시키 고자 하였습니다. 開國한 이래 지금까지도 계속되고 있습니다. 지금 이 나라의 종묘사직 을 장차 어느 나라에게 주려고 하십니까? 모름지기 도리를 명확하게 보여주십시오. 만약 耆老537)의 말을 들었다면 어찌 이런 상황에까지 이르렀겠습니까? 앞의 잘못을 뉘우치고 속세를 떠나는 수고로움은 하지 마십시오. 만약 원하는 바를 이루고자 한다면 모름지기 國民을 출가시키면 됩니다. 라고 하였다. 여창이 좋다 라고 승낙하고, 곧 신하들에게 모 의하도록 하였다. 신하들은 마침내 상의하여 100명을 득도시키고 幡盖를 많이 만들어 여 531) 惠 : 백제의 제28대 왕인 惠王(재위 598~599). 聖王의 아들이며 餘昌威德王의 동생이다. 諱는 季이다. 532) 難波津 : 日本書紀 仁德 62年 夏5月條에 처음 보인다. 원래 難波津이란 1곳이 아니라 堀江입 구와 河內湖 근처 등 여러 곳에 있었던 津을 모두 가리키는 명칭이었다.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곳은 御津으로 이후 難波津이라고 할 경우 御津만을 가리키게 되었다. 御津의 위치는 현재 大阪 市 中央(츄오우)區 心齋橋(신사이바시) 혹은 高麗橋(코우라이바이) 부근으로 추정된다. 533) 許勢臣 : 이름을 알 수 없다. 이전에 許勢臣을 칭하는 인물로는 欽明 元年 9월조에 許勢臣稻持 가 있다. 534) 蘇我臣 : 蘇我大臣稻目으로 추측된다(주 490) 참조). 러 가지 공덕을 쌓았다고 한다. 535) 蘇我卿 : 여기서 卿은 율령제하에서 8省의 장관 혹은 納言 參議 등 3위 이상의 자를 말한다. 蘇我卿이라는 표기는 후대의 윤색. 536) 神祇伯 : 神祇의 제사를 담당한 책임자로 율령제하의 직책이다. 537) 耆老 : 禮記 王制에 의하면 老而賢者 를 말하는데 당시 백제에서 유력귀족을 대변하는 존재 로 이해된다.

65 128 欽明天皇 17년(556) 춘정월 봄 정월. 백제의 왕자 惠가 귀국을 청하였다. 그래서 무기와 좋은 말을 매우 많이 주었 다. 또한 여러 차례 賞品도 많이 주니 여러 사람들이 감탄하였다. 이에 阿倍臣(아베노오 미)538) 佐伯連(사에키노무라지) 播磨直(하리마노아타이)539)를 보내어 筑紫國의 수군을 이끌고 백제에 도착할 때까지 호위하도록 하였다. 별도로 筑紫火君540)(츠쿠시노히노키미) <* `百濟本記a 에는 筑紫君(츠쿠시노히노키미)의 아들 火中君(히노나카노키미)의 동생이 라고 한다.>을 보내어 용감한 군사 천 명을 거느리고 彌호(미테)541)<*彌호는 나루터의 이 름이다.>까지 호송하도록 하였다. 나아가 뱃길의 요충지를 지키게 하였다. 日本書紀 129 欽明天皇 22년(561) 신라가 久禮叱及伐干547)을 보내어 調賦를 바쳤다. 司賓548)이 베푼 饗應의 횟수가 평상시 보다 적었다. 及伐干이 분하게 여기며 돌아갔다. 是歲 이 해에 다시 奴 大舍549)를 보내 지난번의 調賦를 바쳤다. 難波(나니와)의 大郡550)에서 여러 蕃國들의 서열을 매겼는데 掌客額田部連(쇼우카쿠누카타베노무라지)551) 葛城直(카 즈라키노아타이)552) 등이 백제의 아래에 신라 사신을 배열하여 인도하였다. 大舍는 화가 나서 관사에도 들어가지도 않고 배를 타고 돌아가 穴門553)에 이르렀다. 이때 穴門館은 수 리 중이었다. 大舍가 어떤 손님을 위해 짓는가? 라고 하자, 工匠 河內馬飼首押勝(가와 동10월 치노우마카이노오비토오시카츠)554)이 거짓으로 西方의 무례를 문책하러 보낼 사자가 머 겨울 10월. 蘇我大臣稻目宿 (소가노오오오미이나메노스쿠네) 등을 倭國의 高市郡(다 케치노코오리)에 파견하여 韓人大身狹屯倉(카라히토노오오무사노미야케)542)<*韓人이라 는 것은 百濟를 말한다.> 高麗人小身狹屯倉(코마히토노오무사노미야케)543)을 두었다. 紀 國(키노쿠니)에 海部屯倉(아마노미야케)을 두었다.544)<*一本에는 각지의 韓人을 大身狹屯 倉의 田部545)로 삼고, 高麗人을 小身狹屯倉의 田部로 삼았다고 한다. 韓人 高麗人을 田 部로 삼았기 때문에 이것을 屯倉이라고 하였다.> 欽明天皇 18년(557) 춘3월 庚子朔 봄 3월 경자삭(1일). 백제 왕자 餘昌이 왕위에 올랐다. 이가 威德王546)이다. 538) 阿倍臣 : 6~8세기 大和國 十市郡 阿倍 지역(현 櫻井市 아베) 을 중심으로 활약한 중앙 씨족이 다. 日本書紀 孝元 7年 2月條에 의하면 阿倍臣은 伊賀臣(印哥臣) 등 7씨족과 함께 大彦命의 후손이다(주 435) 참조). 539) 播磨直 : 播磨(현 兵庫縣 서남부 지역) 지방의 호족. 540) 筑紫火君 : 火(肥)國의 호족(주 306)과 주 307) 참조). 541) 彌호 : 현 경남 남해도의 彌助里. 542) 韓人大身狹屯倉 : 韓人(여기서는 百濟)이 경영하는 身狹(高市郡)의 屯倉이라는 의미이다. 543) 高麗人小身狹屯倉 : 高麗人이 경영하는 身狹의 屯倉이라는 의미이다. 544) 海部屯倉 : 紀伊國 북서부의 海部郡(현재 和歌山市 서부와 海草郡 下津町 지역)에 있던 屯倉. 545) 田部 : 大化改新 이전 屯倉의 경작에 종사한 부민을 말한다. 546) 威德王: 백제 제27대 왕(在位 554~598)(주 504) 참조). 547) 久禮叱及伐干 : 久禮는 이름, 급벌찬은 신라 17관등 중 제9위인 급찬에 해당된다. 三國史記 卷44 列傳 斯多含傳에 보이는 사다함의 아버지 仇梨知 급찬과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황초령 비 마운령비의 未知 대나마를 일본서기 에서는 未叱로 표기하고 있는데 이는 久禮叱의 경우 도 마찬가지 일 것이다. 신라에서 知로 표기하는 음을 일본서기 에서는 叱로 표기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久禮叱의 귀국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흠명 22년(561) 시세조의 내용을 통해 그 해에 귀국하였을 것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548) 司賓 : 사신을 접대하는 관리를 말한다. 549) 奴 大舍 : 奴 는 이름, 大舍는 신라 17관등 중 제12위에 해당된다.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 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50) 難波大郡 : 大郡은 행정구역이 아니라 외국 사신을 담당하는 기관으로 추정된다. 日本書紀 에는 推古 16년(608) 9월조에 隋使를 難波大郡에서 향응했다는 기록과 舒明 11年(639) 是歲條에 難波 大郡과 三韓館을 수리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天武 2年(673) 11月條에는 筑紫大郡 으로 나온다. 551) 掌客額田部連 : 掌客은 외국 사신을 접대하는 관리의 職을 말한다. 額田部에 대해서는 주 41) 참조. 552) 葛城直 : 일본서기 흠명 31년(570) 4월조에 葛城直難破가 보인다. 葛城直에 대해서는 주 76) 참조. 553) 穴門 : 日本書紀 垂仁 2年 是歲條에 처음 보인다. 關門(칸몬)해협 연안에 위치(長門國 서남 부). 穴門館은 외국 사신접대 시설인데 延喜式 兵部省 驛馬條에 의하면 長門(나가토)國 臨門 (린몬)驛 부근에 설치되었다고 한다. 후에 臨海館으로 이름이 바뀐다. 554) 河內馬飼首押勝 : 河內馬飼首에 대해서는 주 338) 참조. 押勝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66 130 日本書紀 131 무를 숙소다. 라고 말하였다. 대사가 나라로 돌아가 그 말을 보고했다. 이것을 듣고 신라 는 것을 잊지 말고 편안할 때도 반드시 위험할 때를 생각해야 하는 것은 옛날의 훌륭한 는 阿羅 波斯山555)에 성을 쌓고 日本에 대비하였다. 교훈이다. 지금 있는 곳은 승냥이와 이리 같은 적과 접해 있으니, 경솔히 변란이 일어날 것을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물며 평안한 시대에도 칼을 몸에서 떼어 놓아서는 안 欽明天皇 23년(562) 된다. 무릇 군자가 무기를 갖추는 것은 그만둘 수 없는 것이다. 마땅히 잘 경계하고 이 명 령을 힘써 받들도록 하라. 라고 하였다. 군사들은 모두 신뢰하고 복종하여 섬겼다. 河邊 추7월 己巳朔 가을 7월 기사삭(1일). 신라가 사신을 보내어 調賦를 바쳤다. 그 사인은 신라가 任那를 멸 臣瓊罐은 홀로 나아가 싸워 가는 곳마다 모두 함락시켰다. 신라가 다시 白旗를 들고 무기 망시켰다는 것을 알고 國恩을 저버린 것을 부끄럽게 여겨 감히 돌아가기를 청하지 못하고 를 버리고 항복했는데, 河邊臣瓊罐는 원래 병법을 알지 못하여 신라에 대하여 백기를 들 마침내 머물러 본토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를 국가의 백성과 같이 대우하였다. 지금 河內國 고 헛되이 홀로 나아갔다. 신라 장군이 장군 河邊臣이 지금 항복하려고 한다. 고 하고는 (카와치노쿠니)556) 更荒郡(사라라노코오리)557) 이에 진군하여 역공하였다. 매우 날래고 빠르게 공격하여 깨뜨렸는데 선봉대의 피해가 野邑(우노노사토)의 신라인의 선조이다. 매우 심했다. 倭國造手彦(야마토노쿠니노미야츠쿠테히코)562)이 구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 是月 이 달에 大將軍 紀男麻呂宿 (키노오마로노스쿠네)558)을 보내어 군사를 거느리고 唎 에서 출발하고, 副將軍 河邊臣瓊罐(카와베노오미니헤)559)은 居曾山560)에서 출발하도록 해 서 신라가 임나를 공격한 것에 대해 문책하고자 하였다. 드디어 임나에 도착하여 薦集部 561) 首登 (코모츠메베노오비토토미) 를 백제에 보내 戰略을 약속하게 하였다. 이에 登 는 처가에 묵었는데 봉인한 서신과 활과 화살을 길에 떨어뜨렸다. 신라가 군사 계책을 모두 알고 갑자기 대병을 일으켰지만, 차츰 패하여 투항하기를 빌었다. 紀男麻呂宿德이 승리 를 거두고 군사를 돌려 백제의 군영으로 돌아갔다. 軍中에 명을 내려 무릇 이겨도 패하 고 군사를 버리고 달아났다. 신라 장군이 손에 갈고리창을 쥐고 성 주위의 못까지 뒤쫓아 와서 창을 휘두르며 공격하였다. 手彦은 날랜 말을 타고 있었기 때문에 성 주위의 못을 뛰어 넘어가 간신히 죽음을 면하였다. 신라 장군이 성 주위의 못에서 탄식하여 久須尼自 라고 하였다. 이에 河邊臣이 군사를 이 利563)<*이 말은 신라말이다. 자세히 알 수 없다.> 끌고 퇴각해서 급히 들에 군영을 만들었다. 이 때 사졸들은 모두 서로 속이고 업신여기며 명령을 따르려 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은 군영에 나아가 河邊臣瓊罐 등과 그를 따라 왔던 부인을 모두 사로잡았다. 이 때는 아버지와 아들, 부부사이에서도 서로 도울 수가 없었 다. 신라 장군이 河邊臣에게 너의 목숨과 부인 가운데 어느 쪽이 중요한가. 하니 대답하 기를 어찌 한 여자를 사랑하여 화를 얻겠는가. 어느 것도 목숨보다 중요한 것은 없다. 555) 阿羅 波斯山 : 阿羅는 안라, 波斯山은 巴山을 가리킨다. 556) 河內國 : 河內國(현재 東大阪市와 八尾市 일부 지역)은 大和(야마토)에서 瀨戶內海(세토나이카 이) 및 한반도 남부지역과 통하는 교통의 요지로서 河內氏를 비롯하여 여러 도래계 씨족의 활동 무대이기도 하였다(주 45) 126) 182) 481) 참조). 557) 更荒郡 : 更荒郡은 현재 大阪 북쪽의 四條 (욘죠우나와테)市와 寢屋川(네야가와)市의 동남쪽과 大東(다이토)市 대부분에 걸친 지역이다. 558) 紀男麻呂宿 : 用明 2년(587) 7월에 物部氏 토벌군으로 참가하였고, 崇峻 4년(591) 11월에 대 장군으로서 축자에 출전하였다가 추고 3년(595) 7월에 돌아왔다. 紀氏에 대해서는 주 94) 참조. 559) 河邊臣瓊罐 : 河邊臣은 蘇我氏와 동족으로 天武 13년(684) 11월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瓊罐은 이름이다. 560) 居曾山 : 현재 경남 거창, 또는 전북 남원(居斯勿縣) 지역으로 추정된다. 561) 薦集部首登 : 薦集部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일본서기 에는 천무 12년(683) 9월에 薦集造가 連을 사성받았다는 기록이 있다. 登 는 이름이다. 고 하고, 첩으로 삼는 것을 허락하였다. 신라 장군이 마침내 그 부인을 벌판에서 간음하 였다. 부인이 후에 돌아오자 河邊臣이 이야기를 하고자 하였다. 부인이 매우 부끄럽고 한 스럽게 여겨 따르지 않고 이전에 당신이 나의 몸을 쉽게 팔았는데, 지금 무슨 낯으로 서 로 만나겠습니까. 라고 말하고는 마침내 승낙하지 않았다. 이 부인은 坂本臣(사카모토노 오미)564) 의 딸로서 甘美媛(우마시히메)565)이라고 하였다. 동시에 포로가 되었던 調吉士(츠 562) 倭國造手彦 : 倭國造는 大和國 城下(죠우카)郡 大和(야마토)鄕의 씨족. 姓은 直이다. 倭國直은 천무 12년(683) 9월에 連, 천무 14년 6월에 忌寸성을 사성받는다. 手彦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563) 久須尼自利 : 자세히 알 수 없다. 564) 坂本臣 : 日本書紀 崇峻卽位前紀(587) 7월조에 나오는 坂本臣糠手 란 인물로 추정된다. 坂本

67 132 日本書紀 133 키노키시) 伊企儺(이키나)566)는 용맹한 사람으로 끝까지 항복하지 않았다. 신라 장군이 칼 은 이름이다.>과 그의 시녀 吾田子를 蘇我稻目宿德大臣에게 보냈다. 이에 대신은 두 여 을 빼서 목을 베고자 하였다. 잠방이를 벗기고 엉덩이를 일본으로 향하게 하고, 일본 장 자를 처로 삼고 輕570)의 曲殿에 살도록 하였다.<*鐵屋은 長安寺571)에 있다. 이 절이 어느 군은 내 엉덩이를 깨물어라. 고 큰소리를 지르도록<*叫는 부르짖다는 뜻이다.> 협박하였 國에 있는지는 알지 못한다. 一本에는 11년에 大伴狹手彦連이 백제국과 함께 고구려와 다. 곧 [伊企儺는] 큰소리로 신라왕은 나의 엉덩이를 먹어라. 고 소리 질렀다. 비록 고통 陽香572)을 比津留都573)에서 쫓아냈다고 한다.> 과 협박을 받았으나 여전히 이전과 같이 소리쳤다. 이로 인해 죽음을 당하였다. 그의 아 들 舅子(오지코) 또한 그 아버지를 안고서 죽었다. 伊企儺의 말은 이와 같이 빼앗기 어려 웠다. 이로 말미암아 여러 장수들이 애석해 하였다. 그의 아내 大葉子(오오바코) 또한 함 께 사로잡혔는데, 슬프게 노래하기를 柯羅(카라쿠니)567)의 城 위에 서서 大葉子는 머리 에 쓰는 천을 흔들며 일본으로 향하네. 라고 하자, 어떤 이가 화답하여 말하기를 柯羅의 城 위에 서서 大葉子는 머리에 쓰는 천을 흔들며 難波로 향하네. 라고 하였다. 8월 8월. 천황이 대장군 大伴連狹手彦(오오토모노무라지사데히코)568)을 파견하여 군사 수만 을 이끌고 高麗를 치도록 하였다. 狹手彦은 이에 백제의 계책을 써서 고려를 격파하였다. 그 왕569)이 담을 넘어 도망하자 狹手彦은 드디어 승세를 타고 왕궁으로 들어가 珍寶財 권20 渟中倉太珠敷天皇 敏達天皇574) 4년(575) 2월 乙丑 2월 을축575). 백제가 사신을 보내어 조를 바쳤다. 여느 해보다 더욱 많았다. 천황은 아직 신라가 任那를 세우지 않자 황자와 대신에게 임나의 일을 게을리 하지 말라. 고 조를 내 렸다. 하4월 乙丑朔 庚寅. 여름 4월 을축삭 경인(6일). 吉士金子(키시노가네)를 신라에, 吉士木蓮子(키시노이타 비)는 임나에 파견하였다.576) 吉士譯語彦(키시노오사히코)577)는 백제에 사신으로 보냈다. 貨 七織帳 鐵屋을 모두 빼앗아 돌아왔다. <*舊本에는 鐵屋은 고구려 서쪽의 높은 누각 위에 있었으며, 織帳은 고구려왕의 내전 침실에 걸려 있었다고 한다.> 七織帳은 천황에 게 바치고 갑옷 두 벌, 금으로 장식한 칼 두 자루, 구리종 3개, 五色幡 2竿, 미녀 媛<*媛 臣은 천무 13년(684) 11월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新撰姓氏錄 攝津皇別條 和泉皇別條 左 京皇別條에 의하면 坂本臣은 建內宿 의 아들 紀角宿 의 후예로서 紀朝臣과 동족이 된다. 坂本 臣의 坂本은 지명으로 和名類聚抄 에 和泉國 和泉郡 坂本鄕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현재 오사카 和泉(이즈미)市 坂本(사카모토)町 부근으로 추정된다. 565) 甘美媛 : 자세히 알 수 없다. 566) 調吉士伊企儺 : 伊企儺가 이름이다. 日本書紀 繼體 24年(530) 9월조에 毛野臣을 소환하기 위 해 任那에 파견된 調吉士라는 이름을 명확히 알 수 없는 인물이 보인다(주 344) 참조). 567) 柯羅 : 韓國. 568) 大伴連狹手彦 : 大伴大連金村(주 267) 참조)의 아들. 日本書紀 宣化 2年(537) 冬10月條에 大 伴磐과 함께 任那에 쳐들어 온 신라를 격퇴시키는 인물로 처음 나온다. 569) 그 왕 : 日本書紀 欽明 23年은 562년에 해당되므로 이 때의 고구려왕은 제25대 平原王(재위 559~590)이다.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는 平原王<或云平崗上好王>. 諱陽成. 陽原王長子. 有 膽力. 善騎射 라고 기록되어 있다. 570) 輕 : 현재의 奈良縣 原(카시하라)市 大輕(다이케이)町 부근이다. 曲殿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571) 長安寺 : 일본서기 에는 그 위치에 대해서 모른다고 적고 있지만, 扶桑略記 欽明 13年(552) 條에 以鐵屋置長安寺 라는 기록에 이어서 그 분주에 長安寺者. 在近江國栗太郡多侈郞寺是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近江國 栗太(쿠리타)郡은 현 滋賀(시가)현 남서부에 있었던 郡. 572) 陽香 : 陽原王의 陽崗 혹은 平原王의 휘인 陽成 어느 쪽을 가리키는지 명확히 알 수 없다. 그런데 흠명 11년은 550년에 해당되므로 이 시기의 고구려왕은 제24대 陽原王(재위 545~559)이다. 삼 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陽原王<或云陽崗上好王>. 諱平成. 安原王長子 라고 기록되어 있다. 삼 국사기 와 일본서기 에서는 이 시기 백제와 고구려가 자주 전투를 치룬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573) 比津留都 : 자세히 알 수 없다. 574) 敏達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0대 천황(재위 572~585). 이름은 渟中倉太珠敷(누나쿠라 노후토타마시키)이다. 아버지는 欽明天皇, 어머니는 宣化의 딸인 石姬(이시히메)이다. 일본서 기 에 의하면 재위기간 동안 任那復興 을 꾀하는 등 한반도제국과 활발한 교섭을 전개하였다. 한편 국내적으로는 불교도입을 둘러싸고 物部氏와 蘇我氏가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황후인 額田 部(누카타베)皇女는 후에 推古天皇에 즉위한다. 575) 2월 을축 : 2월에는 을축 간지일이 없기 때문에 3月 乙丑朔(1일) 일 것으로 추정된다. 576) 吉士金子 파견하였다 : 日本書紀 崇峻 4年(591) 11월조에도 같은 문장이 보인다. 그때 吉

68 134 敏達天皇 6년(577) 하5월 癸酉朔 丁丑 여름 5월 계유삭 정축(5일). 大別王(오오와케노오오키미)과 小黑吉士(오구로노키시)를 보내어 백제국의 宰(미코토모치)로 삼았다578). <*王人으로 명을 받들어 삼한에 사신으로 갈 때 宰라 자칭한다. 韓의 宰로 삼았다는 것은 무릇 古典에 따름이라. 지금은 使라고 한 다. 나머지도 모두 이와 같다. 大別王은 어디 출신인지 자세히 알 수 없다.> 동11월 庚午朔 겨울 11월 경오삭(1일). 백제국왕이 귀국하는 사신 大別王 등에게 의탁해서 經論 약간 권579)과 律師 禪師 比丘尼 呪禁師 造佛工 造寺工 6인을 바쳤다. 이들을 難波(나니 와)의 大別王寺580)에 안치하였다. 敏達天皇 12년(583) 추7월 丁酉朔 日本書紀 135 하고자 하였으나 실행한 채 돌아가 그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에 짐은 神의 계책을 이 어받아 임나를 부흥시키고자 한다. 지금 백제에 있는 火葦北國造 阿利斯登(히노아시키타 노쿠니노미야츠코아리시토)581)의 아들 達率日羅582)가 현명하고 용기가 있다고 한다. 그래 서 짐은 그와 함께 계획을 세우고자 한다. 고 하였다. 이에 紀國造押勝(키노쿠니노미야츠 코오시카츠)583)과 吉備海部直羽嶋(키비노아마노아타히하시마)584)를 보내어 백제로부터 불 러들이도록 하였다. 동10월 겨울 10월. 紀國造押勝 등이 백제에서 돌아왔다. 조정에 복명하기를 百濟國主585)가 日 羅를 아깝게 여기며 명에 따르려하지 않고 있습니다. 라고 하였다. 是歲 이 해에 다시 吉備海部直羽嶋를 보내어 日羅를 백제에서 소환하였다. 羽嶋는 백제에 가 서 먼저 개인적으로 日羅를 보고자 혼자 집 문 앞에까지 갔다. 얼마 후 집안에서 韓婦가 나와 韓語로 당신의 根을 나의 根 안으로 넣으세요. 라 하고 바로 집안으로 들어가 버렸 가을 7월 정유삭(1일). 조서를 내려 나의 돌아가신 아버지 천황 때에 신라가 내관가의 다. 羽嶋가 곧 그 뜻을 알아차리고 뒤따라 들어갔다. 이에 日羅가 나와서 손을 잡고 의자 나라를 멸망시켰다. <*天國排開廣庭天皇(흠명천황) 23년에 임나가 신라에게 멸망당하였 에 앉게 하고 비밀스럽게 말하기를 제가 몰래 듣자하니 百濟國主는 일단 臣을 보내면 천 다. 이에 신라가 우리 내관가를 멸망시켰다고 하는 것이다.> 아버지 천황이 임나를 복구 조가 억류하여 되돌려 보내지 않을까 의심하여 아끼는 마음에 바치지 않으려 합니다. 宣 勅할 때 마땅히 엄하고 무서운 표정으로 속히 보내라고 재촉하십시오. 라고 하였다. 羽 士金子는 吉士金으로 나온다. 吉士木蓮子는 민달 13년(584) 춘2월조에 難波吉士木蓮子으로 나 오기도 한다. 難波吉士는 新撰姓氏錄 右京諸蕃 下에 難波連, 出自高麗國好太王也 라고 하여 고구려 광개토왕의 후손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敏達朝 이후부터 본격적으로 활동하기 시작하다가 推古朝에 가장 많은 활동을 보이고 있다. 천무 13년(684)에 連姓을 사성받 았다(주 190) 참조). 577) 吉士譯語彦 : 자세히 알 수 없다. 578) 大別王 삼았다 : 宰 의 일본어 훈은 미코토모치 이며, 분주에서 使의 의미라고 설명하고 있다. 따라서 大別王과 小黑吉士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백제국의 宰 로 임명되었다 는 것은 백제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서 분주에 나오는 王人은 左傳 莊 公 7年條에 보이는 王人子突救衛 의 왕인과 같은 뜻으로 왕의 사인이다. 日本書紀 神功攝政 前紀에 인용되어 있는 분주에 新羅宰 라는 표현도 보인다(주 389) 참조). 579) 經論 약간 권 : 扶桑略記 藥恒法華驗記에는 經論 200권으로 기록되어 있다. 580) 大別王寺 : 難波에 있던 대별왕의 집에 절이 있었다고 볼 수 있으나 그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581) 火葦北國造 阿利斯登 : 火는 큐슈의 肥(히) 지역이고, 葦北은 현재 熊本(쿠마모토)縣 葦北(아시키 다)郡의 지역을 말한다(주 315) 참조). 582) 日羅 : 阿利斯登의 자식으로 백제에서 태어나 달솔의 직위까지 올라간 인물이다. 그러나 야마토 정권에 소환된 후 백제가 筑紫에 新國을 건설하고자 한다고 폭로하는 등 백제를 적대시하는 발 언을 함에 따라 동행하였던 백제인에게 살해당한다. 583) 紀國造押勝 : 日本書紀 에서 처음 보이는 紀國造. 古事記 孝元段에 木國造之祖宇豆比古 라 는 전설상의 인물이 보이지만, 본조가 紀國造에 관한 최초의 기사라고 할 수 있다. 고대 일본에 서 國造制는 6세기 전반으로 실시된 것으로 추정됨으로 紀伊國의 國造도 이 시기에 이르러 성립 되었음을 볼 수 있다. 押勝은 이름으로 紀伊國造系圖 에는 忍勝으로 나온다. 584) 吉備海部直羽嶋 : 吉備海部直씨는 5~6세기 길비 지역의 海部집단을 관리하던 씨족으로 외교에 서도 활약하였다. 웅략 7년 시세조에 吉備海部直赤尾라는 인물이 보인다(주 181) 참조). 585) 百濟國主 : 이 때는 威德王(재위 554~598)을 일컫는다. 國主에 대해서는 주 327) 참조.

69 136 日本書紀 137 嶋가 그 계책에 따라 日羅를 불렀다. 이에 백제국주는 천조를 두려워하여 감히 칙을 거스 어 日羅를 머물게 하고 원하는 대로 물품을 주었다. 그리고 阿倍目臣(아헤노메노오 르지 못하고 日羅 恩率586) 德爾587) 余怒 奇奴知588) 參官589) 師德率次干德590) 水 미)596) 物部贄子連(모노노베노니에코노무라지)597) 大伴糠手子連을 日羅에게 보내어 국 手591) 등 몇몇 사람을 보냈다. 日羅 등이 吉備兒嶋屯倉(키비노코지마노미야케)592)에 도착 정에 대해 물었다. 日羅가 답하기를 천황이 천하를 다스리는 데에는 모름지기 백성을 보 593) 하자 조정은 大伴糠手子連(오오토모노아라테코노무라지) 을 보내어 노고를 치하하고 호하고 기르는 것이 중요합니다. 어찌 갑자기 군사를 일으켜 도리어 장차 [백성을] 멸망 다시 大夫 등을 難波館에 보내어 日羅을 방문하도록 하였다. 이때 日羅는 갑옷을 입은 채 에 빠뜨리려 합니까. 따라서 지금 논의하는 것은 조정의 臣(오미) 連(무라지)과 두 造<* 말을 타고 문 앞에 이르러 곧 廳舍 앞으로 나아가서 무릎을 꿇고 절하며 탄식하기를 檜 二造라는 것은 國造(쿠니노미야츠코)598)와 伴造(토모노미야츠코)599)를 말한다.>부터 아래 宮御 天皇(宣化天皇) 때에 나의 君(我君) 大伴金村大連(오오토모노카나무라노오오무 로 백성에 이르기까지 모두 풍요로워 부족함이 없도록 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3년 594) 라지)이 국가를 위해 해외에 사신으로 보냈던 火葦北國造 刑部靭部(오사카베노유케이) 동안 양식과 병사가 풍족하여 백성들이 기뻐하고 물불을 꺼리지 않을 때 함께 국난을 극 阿利斯登(이라사토)의 아들 臣 達率日羅는 천황의 부름을 받고 삼가 내조하였습니다. 라 복할 수 있습니다. 그런 다음에 선박을 많이 만들어 津마다 정박해 두고 客人들이 보도록 고 하였다. 이에 갑옷을 벗어 천황에게 바쳤다. 阿斗桑市(아토노쿠와노이치)595)에 館을 지 하여 두려운 마음을 가지도록 하십시오. 그리고 유능한 사신을 백제에 보내어 그 국왕을 부르십시오. 만약 오지 않으면 太佐平600) 王子 등을 부르십시오. 그러면 저절로 복종하 586) 恩率 : 백제 관위 16계 가운데 제3위. 여기에는 인명이 빠져 있다. 恩率 이하 인명기재 방식은 혼란스럽다. 587) 德爾 : 은솔이 귀국한 후에도 일본에 머물고 있음을 볼 때 은솔과는 다른 인물이다. 日羅를 암살 한 죄로 日羅의 일족에게 처형당한다. 588) 余怒 奇奴知 : 인명으로 여겨지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89) 參官 : 후문의 恩率參官 에 대한 분주에서 은솔과 참관이 각각 1명씩이다. 라고 설명한 내용 을 통해서 볼 때 참관은 관명으로 恩率 다음의 副使 정도로 추정해 볼 수 있다. 그리고 일본서 기 황극 원년(642) 8월조에는 百濟使參官 이라는 표현이 있는데 이 또한 백제사 와 參官 으로 나누어 이해해야 할 것이다. 590) 師德率次干德 : 師는 배의 조타수이다. 德率은 백제 16관위 중 제4위, 次干德은 이름이다. 591) 水手 : 水夫라고도 하며 선원을 말한다. 592) 吉備兒嶋屯倉 : 白猪屯倉 혹은 이와 별개의 屯倉으로 볼 수 있다. 고대에는 吉備의 兒嶋가 현재 와 같이 반도가 아니라 瀨戶內海(세토나이카이)를 오가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섬이었다. 子洲라 고도 부른다( 日本書紀 神代 上 第4段). 593) 大伴糠手子連 : 上宮太子拾遺記 에는 奴加之古連 으로 나온다. 日本書紀 崇峻 元年(588) 춘 3월조에 의하면 大伴糠手連의 딸 小手子는 崇峻天皇의 妃가 되었다고 한다. 594) 刑部 靭部 : 刑部(오사카베)는 允恭의 황후 忍坂大中姬(오시사카노오오나카츠히메)를 위해 설 치한 名代(나시로)의 部民 집단이다. 전국에 분포하며 중앙은 刑部造, 지방에서는 國造가 관리 하였다. 靭部(유케이)는 주로 西國의 지방호족 자제로 편성되며 궁정의 守衛를 담당하는 조직이 다. 이들은 중앙에서 군사를 담당하는 大伴連의 지휘에 따른다. 여기서 火葦北國造 阿利斯登를 刑部靭部라는 것은 원래 火葦北國造가 관리 담당하던 刑部에서 靭部가 징집되었는데 阿利斯登 이 바로 징집된 靭部의 우두머리였다는 것을 의미한다. 는 마음이 생길 것이니, 그런 뒤에 죄를 물으십시오. 라고 하였다. 또한 백제인이 모의 하여 말하기를 배 3백 척이 있는데 筑紫에 가기를 원합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만약 축 자를 실제로 청하면 내려주는 척 하십시오. 그러면 백제는 새로 나라를 세우고자 반드시 595) 阿斗桑市 : 和名類聚抄 에 大和國 城下郡 阿刀村(현재 奈良縣 磯城郡 田原本町 부근)이란 지명 이 보인다. 이에 의하면 阿斗는 大和川의 본류 혹은 지류 가까이에 있었던 지역이다. 桑市는 후 문에 桑市村으로 나오지만,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다. 596) 阿倍目臣 : 阿倍臣은 大王에게 食物 공헌을 담당한 중앙의 伴造씨족으로 6~8세기에 번영을 누 렸다. 본거지는 大和國 十市郡 阿倍(현 櫻井市 阿倍)지역이고 大彦命의 후예씨족이다. 天武 13 年(684) 11月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目은 이름이다. 597) 物部贄子連 : 先代舊事本紀 天孫本紀에 物部守屋의 동생으로 나온다. 598) 國造 : 國造는 율령제가 도입되기 이전에 있었던 지방지배기구의 하나로 각 지역 유력수장이 임 명되어 臣 連 君 公 直 등의 성을 하사받았다(주 583) 참조). 599) 伴造 : 大王의 휘하에서 伴(토모)이나 部(베)을 통솔하던 집단. 넓은 의미로는 大伴 物部 등과 같이 連姓을 가진 유력씨족들도 포함되지만, 일본서기 에서는 일반적으로 중간계층의 집단을 가리킨다. 그 종류로는 大王을 근위하는 內廷系伴造(掃守連 鴨縣主 車持君 등), 名代 子代를 관리하는 伴造(刑部造 檜 舍人造 등), 도래계 유력씨족(漢直 津造 등), 도래계 기술반조(錦 部造 鍛冶造 馬飼造) 등이 있다. 대부분은 율령제가 시행되면서 하급실무관인으로서 재편되 어 각 관사에 伴部(토모베)로 배속되었다. 600) 太佐平 : 백제 최고의 집정관. 일본서기 흠명 4년(543) 11월조와 12월조에서는 上佐平 中佐 平 下佐平를 일컬어 三佐平이라는 것이 나온다.

70 138 日本書紀 139 먼저 여자들과 아이들을 배에 싣고 올 것입니다. 이 때를 대비하여 壹岐 對馬에 복병을 명하였다. 葦北에 사신을 보내어 日羅의 眷屬을 다 불러들여 덕이 등을 주면서 뜻에 따라 많이 잠복시켜 놓았다가 도착하기를 기다려 죽이십시오. 반대로 속아서는 안됩니다. 중 죄를 판결하게 하였다. 이 때 葦北君606) 등이 모두 죽여서 彌賣嶋(히메시마)607)<*彌賣嶋는 요한 곳마다 견고한 요새를 쌓으십시오. 라고 아뢰었다. 이에 恩率 參官이 귀국할 때 아마 姬嶋일 것이다.>에 던져 버리고, 日羅는 葦北에 이장시켰다. 그 후 바닷가 사람들이 <*舊本에는 恩率이 한 사람, 參官이 한 사람이라 하였다.> 몰래 德爾 등에게 내가 축자 恩率의 배는 폭풍을 만나 바다에 침몰하였고, 參官의 배는 津嶋(츠시마)608)에 표착했다 를 지나갈 즈음을 기다려 너희들이 몰래 日羅를 죽인다면 내가 왕에게 자세히 아뢰어 놓 은 벼슬을 내리도록 하겠다. 본인과 妻子는 그 영예로움을 후세에 계속 전하게 될 것이 다. 고 하였다. 德爾 余奴가 모두 따르기로 하였다. 參官 등은 마침내 血鹿(치카)601)에서 출발하였다. 이때 日羅는 桑市村(쿠와노이치노무라)에서 難波館으로 옮겼다. 德爾 등은 밤낮으로 모의하여 日羅를 죽이고자 하였다. 그 때에 日羅의 몸에서 불꽃과 같은 빛이 나 서 德爾 등은 두려워하여 죽이지 못하였다. 마침내 12일 그믐에 빛을 사라지는 것을 보고 죽였다. 日羅가 다시 살아나서 이는 내가 부리던 奴 등이 한 짓입니다. 신라가 한 짓이 아닙니다. 라는 말을 마치고 죽었다. <*마침 이때 신라 사신이 와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말한 것이다.> 천황이 贄子大連 糠手子連에게 조를 내려 小郡(오고호리)602)의 서쪽 부근 언덕에서 거두어 장사지내게 하고, 그 처자식과 水手 등은 石川603)에 살도록 하였다. 이에 大伴糠手子連이 논의하여 한곳에 모여서 살면 변고가 일어날까 두렵습니다. 라고 하였 다. 이에 처자식들은 石川百濟村(아시카와노쿠다라노무라)604)에 살게 하고 水手 등은 石 가 겨우 돌아갈 수 있었다. 고 하였다. 敏達天皇 13년(584) 춘2월 癸巳朔 庚子 봄 2월 계사삭 경자(8일). 難波吉士木蓮子609)를 신라에 사신으로 파견하였다. 마침내 任 那에 갔다. 추9월 가을 9월. 백제에서 온 鹿深臣(카후카노오미)610)<*이름이 빠졌다.>이 彌勒石像 1軀를 소유하고 있었고, 佐伯連(사헤키노무라지)<*이름이 빠졌다.>이 佛像 1軀를 소유하고 있 었다. 是歲 川大伴村(이시카와노오호토모노무라)에 살게 했다. 德爾 등을 붙잡아 下百濟 河田村(시 이 해에 蘇我馬子宿 (소가노우마코노스쿠네)611)가 불상 2구를 받기를 청하고 鞍部村主 모츠쿠다라노 카와타노무라)605)에 가두고 몇 명의 大夫를 보내어 그 일을 추문하였다. 德 司馬達等(쿠라츠쿠리노스쿠리 시메다토),612) 池邊直氷田(이케베노아타히히타)613)을 사방 爾 등이 죄를 자백하여 진실로 이는 恩率 參官이 시켜서 한 짓입니다. 저희들은 그 부 하들이라서 감히 거역할 수 없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이로 인해 옥에 가두고 조정에 복 601) 血鹿 : 肥前國風土記 와 和名類聚抄 에 肥前(히젠)國 松浦(마츠우라)郡 値嘉(카치)鄕으로 나온 다. 현재 長崎(나가사키)縣 五島(고토우)列島의 小値嘉嶋(코카치지마)이다. 602) 小郡 : 행정구역이 아니라 難波에 있었던 외교청사를 말한다. 西國을 지배하기 위해 세운 관청 이라는 견해도 있다. 603) 石川 : 현재 大阪府 南河內(미나미카와치)郡 남쪽에서 富田林(톤다바야시)市와 河內長野(카와치 나가노)市 북부에 걸친 지역이다. 604) 百濟村 : 和名類聚抄 에 河內國 錦部(니시고리)郡 百濟(쿠다라)鄕으로 나온다. 石川(이시카와) 상류지역으로 현재 富田林市 錦織 彼方 板持 伏見堂 일대로 추정된다. 605) 下百濟 河田村 : 현 大阪府 富田林(톤다바야시)市 甲田(코우다) 지역. 606) 葦北君 : 葦北國造의 일족. 君은 西國의 國造에게 많은 성이다. 607) 彌賣嶋 : 현 大阪市 西淀川(니시요도가와)區의 姬島(히메지마)를 가리킨다. 608) 津嶋 : 對馬島(츠시마). 609) 難波吉士木蓮子 : 주 576) 참조. 610) 鹿深臣 : 元興寺緣起 에는 甲賀臣으로 나온다. 현 滋賀(시가)縣 甲賀(코우가)郡의 씨족이다. 611) 蘇我馬子宿 : 蘇我稻目의 아들. 蘇我稻目의 뒤를 이어 大臣이 되었다. 物部氏를 타도하여 대화 정권의 패권을 장악하였으며, 崇峻을 암살한 후 추고천황을 추대하여 蘇我氏의 전성시대를 열었 던 인물이다. 백제의 도움으로 최초의 가람인 飛鳥寺를 창건하였으며 불교의 보급, 관위제의 시 행 등 많은 활약을 하였다. 612) 鞍部村主 司馬達等 : 鞍部는 鞍作이라고도 하며 도래계 씨족이다. 村主(스구리)는 姓이다. 본거지 는 大和의 飛鳥부근이고, 안장을 제작하던 鞍作部를 관리하였다. 雄略朝에는 백제로부터 건너 와 서 東漢(야마토노아야)氏의 휘하에 들어간 今來才伎 중의 한 사람인 鞍部堅貴란 인물이 보인다.

71 140 日本書紀 141 에 보내 수행자를 찾도록 하였다. 이에 播磨國(하리마노쿠니)614)에서 승려였다가 환속한 집 동쪽에 불전을 만들어 미륵석상을 안치하고622) 세 비구니를 청하여 齋會를 크게 열었 단 한 사람을 찾았는데 이름이 高麗惠便615)이었다. 이에 大臣은 스승으로 삼았다. 司馬達 다. 이 때 達等이 齋食 때에 불사리를 얻어 馬子宿 에게 바쳤다. 馬子宿 는 시험 삼아 616) 等의 딸 嶋(시마)를 득도시켰는데 善信尼 (젠신니)<*나이 11세였다.>라 한다. 또한 善信 617) 사리를 모루 위에 놓고 철퇴로 후려쳤다. 모루와 철퇴는 모두 부서졌지만 사리는 파손되 尼의 제자 두 사람을 득도시켰는데, 한 사람은 漢人夜菩(아야히토야보) 의 딸 豊女(토요 지 않았다. 또 사리를 물에 던졌더니 사리는 맘대로 뜨기도 하고 가라앉기도 했다. 이로 메)로 禪藏尼(젠조우니)618)이고, 또 한사람은 錦織壺(니시코리노츠부)619)의 딸 石女(이시 말미암아 馬子宿 와 池邊直氷田, 司馬達等은 불법을 깊이 믿고 수행을 게을리 하지 않 메)로 惠善尼(에젠니)620)<*壺는 여기서 都符라고 한다.>이다. 馬子는 홀로 불법에 귀의하 았다. 馬子宿 는 또한 石川宅623)에 불전을 지었다. 불법은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여 세 비구니를 공경하여 이들을 氷田直621)과 達等에게 의탁하여 衣食을 공급하게 했다. 권21 泊瀨部天皇 崇峻天皇624) 卽位前期(用明天皇 2년: 587) 司馬達等은 이름으로 추정되며 天平 19年(747)에 제출된 元興寺緣起 에는 鞍師首達等으로 나온 다. 그런데 扶桑略記 흠명 13년(552)조에 의하면 司馬達等이 大唐漢人이라하여 중국계 인물로 묘사되어 있다. 그러나 같은 기록에서 그의 아들인 多須奈는 백제불공으로 기록하고 손자에 해당 하는 조는 太子傳古今目錄抄 에 모두 백제출신임을 밝히고 있다(中井眞孝, 1994, 93쪽). 扶桑 略記 에 사마달등을 중국계로 표기한 것은 대당관계가 활발한 시기의 계보조작일 것으로 추정하 기도 한다(연민수, 2007,`왜로 이주한 백제인과 그 활동a, 백제유민들의 활동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7, 충남역사문화연구원). 한편, 기존 연구에 의하면 6세기 후반 불교 수용 세력은 蘇我 氏-倭漢氏-4部氏(鞍部 金作部 韓鍛冶 鎧作)가 중심이 되어 飛鳥寺를 기반으로 활동하고 있 었다고 한다(日野昭, 1971,`鞍作氏と佛敎a, 日本古代氏族傳承の硏究, 永田文昌堂 ; 佐佐木一 紀, 1983,` 日本書紀 の編纂過程に關する一試論-推古 舒明紀の檢討を通じてa, 日本歷史 419). 613) 池邊直氷田 : 池邊直은 東漢氏와 동족이다. 日本書紀 欽明 14年 夏5月條에는 溝邊直으로 靈 異記 에는 氷田直으로 나오기도 한다. 614) 播磨國 : 현 兵庫(효고)縣 지역. 615) 高麗惠便 : 생몰연대 및 渡倭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다. 위의 惠便 관련 내용은 元興寺緣起 에 도 나온다. 616) 善信尼 : 일본에서 최초로 출가한 비구니. 元興寺緣起 에는 斯末賣(시마메)로 나온다. 617) 漢人夜菩 : 漢人은 漢氏의 휘하에 있으면서 錦綾 무기 가죽 등의 수공업생산에 종사하였다(주 185) 192) 374) 참조). 夜菩는 이름이고 본조에만 보인다. 618) 禪藏尼 : 元興寺緣起 에는 等已賣(토요메)로 나온다. 619) 錦織壺 : 錦織部氏는 錦部氏라고도 하며 백제계 도래씨족이다. 錦織部氏의 성은 首로 흠명 31년 (570) 5월조에 錦部首大石이라는 인물이 보인다. 錦織部氏은 天平神護 元年에 連姓을 사성받고, 그 중 일부가 三善宿 로 개성된다. 新撰姓氏錄 右京諸蕃 下에 三善宿. 出自百濟國速古大 王也 라는 기록이 보인다. 620) 惠善尼 : 元興寺緣起 에는 伊志賣(이시메)로 나온다. 621) 氷田直 : 주 613) 참조. 6월 甲子 즉위전기(用明天皇 2년) 여름 6월 갑자(21일). 善信阿尼 등이 대신에게 출가의 길은 戒 를 근본으로 합니다. 백제에 가서 戒法을 배우고자 합니다. 라고 하였다. 이 달에 백제의 調使가 왔다. 大臣은 사신에게 이 비구니들을 그대들 나라에 데리고 가서 戒法을 배우게 하고, 다 마치면 다시 보내주시오. 라고 말했다. 사신이 臣 등이 蕃國으로 돌아가 먼저 국왕에게 아뢰겠습니다. 그 후에 보내도 늦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崇峻天皇 원년(588) 是歲 이 해에 백제국이 사신과 더불어 승려 惠總625) 令斤626) 惠寔627) 등을 보내어 佛舍利를 622) 집 동쪽에 안치하고 : 日本書紀 에 의하면 蘇我馬子의 저택은 모두 세 곳에 있었다고 전 한다. 먼저 石川 부근 저택은 현 原市 石川町에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槻曲(用明 2年 4月條)의 저택은 그 위치를 알 수 없다. 그리고 飛鳥天 부근의 저택은 현 高市郡 明日鄕村 大字 島庄에 있었다고 한다. 한편 聖德太子傳曆 과 七大寺巡禮私記 에는 미륵석상을 元興寺(飛鳥 寺)의 東金堂에 안치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623) 石川宅 : 주 622) 참조. 石川宅에 만들어진 불전을 훗날 石川精舍라고 부른다. 大和志 에는 本 明寺로 나온다. 624) 崇峻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2대 천황(재위 587~592). 이름은 泊瀨部(하츠세베노)이다. 아버지는 欽明, 어머니는 蘇我稻目宿 의 딸 小姉君(오아네노키미)이다. 제31대 用明天皇의 사 망 후 物部氏의 지지를 받던 穴穗部皇子와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대립했지만 蘇我氏의 지지를 얻 어 천황으로 즉위하였다. 大伴糠手連의 딸 小手子(고테코)를 妃로 삼았다. 이후 蘇我馬子大臣이

72 142 日本書紀 143 바쳤다. 백제국이 恩率首信628) 德率蓋文629) 那率福富味身630) 등을 보내어 調를 진상하고 의 법을 묻고 善信尼 등을 백제국 사신 恩率首信 등에게 붙여 보내어 학문을 배우게 했 아울러 불사리와 승려 聆照律師631) 令威632) 惠衆633) 惠宿 道嚴634) 令開635) 등과 寺工 다. 飛鳥衣縫造(아스카노키누누이노미야츠코)644)의 선조인 樹葉(코노하)645)의 집을 허물어 太良未太636) 文賈古子637) 盤博士將德白味淳638) 瓦博士麻奈文奴639) 陽貴文640) 陵貴 처음으로 法興寺646)를 지었다. 이 땅을 飛鳥 眞神原(마카미노하라)647)이라 이름하고, 또한 文641) 昔麻帝彌642) 畵工白加643)를 바쳤다. 蘇我馬子宿 가 백제 승려들을 초청하여 受戒 飛鳥 田(토마타)이라고 일컬었다. 崇峻天皇 3년(590) 보낸 東漢直駒에게 암살당하였다. 625) 惠總 : 元亨釋書 卷16 願雜 11 古德 1에 의하면 崇峻 元年(588) 3월에 백제에서 일본으로 건너 왔다고 한다. 생몰연대는 미상. 元興寺緣起 에는 惠勳으로 나온다. 이 밖에 慧聰 惠 등의 이름으로 나오기도 한다. 聖德太子의 스승인 고구려의 惠慈와 함께 三寶의 棟梁으로 추앙받는 다. 596년 惠慈와 함께 法興寺에 머물렀다. 626) 令斤 : 후문에 나오는 令開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다. 聖德太子傳曆 에는 令欣, 元興寺緣起 에는 令契로 나온다. 627) 惠寔 : 후문의 惠宿과 동일인. 628) 恩率首信 : 元興寺緣起 에는 恩率首眞로 나온다. 首信은 이름이다. 629) 德率蓋文 : 元興寺緣起 에는 보이지 않는다. 蓋文은 이름이다. 630) 那率福富味身 : 那率은 백제 16계 관위 중 제6위인 奈率. 福富는 복성, 味身는 이름이다. 福富는 백제의 대성8족 중의 하나인 氏의 복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631) 聆照律師 : 元興寺緣起 에 인용된`塔露盤銘a에는 令照法師로 나온다. 632) 令威 : 元興寺緣起 에는 令威法師로 나온다. 633) 惠衆 : 惠總과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된다(주 625) 참조). 634) 道嚴 : 元興寺緣起 에는 道嚴法師로 나온다. 635) 令開 : 주 626) 참조. 636) 寺工太良未太 : 寺工은 사원건축의 기술자를 뜻한다. 太良은 성이고 未太는 이름으로 추정된다. `塔露盤銘a에는 寺師丈羅未大로 나온다. 637) 文賈古子 : 文賈은 성이고 古子이다.`塔露盤銘a에 같은 이름이 보인다. 638) 盤博士將德白味淳 : 盤博士는 탑의 露盤 등 금속주조의 전문 기술자를 말한다. 將德은 백제 16계 관위 중 제7위. 白은 성이고 味淳이 이름이다. 白氏는 대성8족 중 氏를 가리킨다. 元興 寺緣起 에는 自昧淳으로 나온다. 639) 瓦博士麻奈文奴 : 瓦博士는 瓦 제작의 전문 기술자를 말한다.`塔露盤銘a에는 瓦師로 표기되어 있다. 麻奈는 관위, 文은 성, 奴는 이름으로 추정되지만 확실하지 않다.`塔露盤銘a에는 麻那文 奴라고 나온다. 640) 陽貴文 : 陽은 성, 貴文이 이름인 듯 하다.`塔露盤銘a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641) 陵貴文 : 陵은 성, 貴文이 이름인 듯 하다.`塔露盤銘a에는 布릉貴로 나온다. 642) 昔麻帝彌 :`塔露盤銘a에도 같은 이름이 보인다. 춘3월 봄 3월. 學問尼인 善信 등이 백제에서 돌아와 櫻井寺648)에 머물렀다. 是歲 이 해에 출가한 비구니는 大伴狹手彦連의 딸 善德649) 大伴 夫人650) 新羅媛 善妙651) 百濟媛 妙光, 또한 漢人 善聰 善通 妙德 法定照 善智聰 善智惠 善光 등이다. 鞍 部司馬達等의 아들 多須奈(타스나)도 동시에 출가했다. 이름은 德齊法師라고 한다. 643) 畵工白加 : 畵工은 佛畵 및 佛具 장식을 제작하는 전문 기술자를 말한다.`塔露盤銘a에는 書人 으로 표기되어 있다. 白은 성이고 加는 이름이다.`塔露盤銘a에는 百加로 나온다. 644) 飛鳥衣縫造 : 飛鳥衣縫部를 통솔하는 伴造. 飛鳥衣縫部는 大和國 高市(타케치)郡 飛鳥(아스카) 에 살던 衣縫(의복 제작)의 品部를 말한다. 645) 樹葉 : 인명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646) 法興寺 : 飛鳥寺라고도 한다. 蘇我氏의 氏寺로서 일본 最古의 본격적인 사원이다. 崇峻 元年 (588)에서 推古 4年(596)에 걸쳐 백제의 기술로 건립되었다. 平城京 천도(710) 이후에는 법흥사 도 平城京(奈良)으로 이전되면서 그 이름이 元興寺로 바뀌었다. 그때 飛鳥의 法興寺도 존속하여 本元興寺로 불리기도 하였다. 647) 眞神原 : 日本書紀 雄略 7年(463) 是歲條에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을 이곳에 머물도록 하였 다는 기사가 있다. 현재 明日香(아스카)村 飛鳥川(아스카가와) 동쪽 지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 된다. 648) 櫻井寺 : 元興寺緣起 에 의하면 蘇我稻目이 佛을 안치한 牟久原(向原)의 저택을 敏達 11년에 楷 井으로 옮긴 후 이듬해 그곳에 櫻井道場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櫻井道場이 櫻井寺로 되었을 것 이다. 이 櫻井寺는 豊浦寺라고도 한다. 649) 善德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50) 大伴 夫人 : 大伴氏의 고구려인 부인으로 여겨진다. 大伴氏에 대해서는 주 157) 참조. 651) 新羅媛 善妙 : 이하 9명은 이곳에만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3 144 日本書紀 권22 豊御食炊屋姬天皇 推古天皇652) 3년(595) 推古天皇 7년(599) 5월 戊午朔 丁卯 추9월 癸亥朔 5월 무오삭 정묘(10일). 高麗僧 慧慈653)가 귀화하니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았다. 是歲 이 해에 백제 승려 慧聰654)이 왔다. 이 두 승려는 불교를 널리 펴서 모두 三寶의 棟梁이 되었다. 推古天皇 4년(596) 동11월 겨울 11월. 法興寺가 완성되었다. 이에 大臣의 아들 善德臣655)을 寺司656)로 삼았다. 이 날, 慧慈 慧聰 두 승려가 처음으로 法興寺에 거주하였다. 推古天皇 5년(597) 하4월 丁丑朔 여름 4월 정축삭(1일). 백제왕657)이 왕자 阿佐658)를 보내 조공했다. 145 가을 9월 계해삭(1일). 백제가 낙타 1마리 나귀 1마리 양 2마리 흰 꿩 한 쌍을 바쳤다. 推古天皇 9년(601) 3월 甲申朔 戊子 3월 갑신삭 무자(5일). 大伴連 (오오토모노무라지쿠이)659)를 고구려에 보내고, 坂本臣 고 糠手(사카모토노오미누카데)660)를 백제에 보내 조서를 내려 조속히 任那를 구원하라. 하였다. 推古天皇 10년(602) 6월 丁未朔 己酉 6월 정미삭 기유(3일). 大伴連 坂本臣糠手가 함께 백제에서 돌아왔다. 이때 來目皇子661) 는 병으로 누워 결국 정벌을 수행하지 못하였다. 동10월 겨울 10월. 백제 승려 觀勒662)이 왔다. 曆本과 天文 地理書 그리고 遁甲 方術書를 바 652) 推古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3대 천황(재위 592~628). 일본 최초의 여성 천황. 이름은 額田部(누카타베)이다. 아버지는 欽明, 어머니는 蘇我稻目의 딸 堅鹽媛(키타시히메)이다. 천황 이 되기 이전 敏達天皇의 황후이었다. 崇峻天皇이 소아마자에게 암살당한 후 군신들의 요청에 의해 천황으로 옹립되어 즉위하였다. 推古天皇 치세에는 蘇我馬子와 廐戶皇子(聖德太子)가 권력 의 중추에 있으면서 官位12階, 헌법17條 등 내정을 정비하고 5세기 말 이래 단절되어 있던 隋에 사신을 파견함으로써 중국과 외교를 재개하였다. 653) 慧慈 : 고구려 승려. 推古 3年(595)부터 推古 23年(615)까지 왜국에 체재하였다. 法興寺에 머물 면서 三寶의 棟梁으로서 성덕태자의 스승이 되었다. 일본 아스카 불교뿐만 아니라 推古朝의 외 교에도 많은 영향을 미쳤다. 654) 慧聰 : 주 625) 참조. 655) 善德臣 : 蘇我馬子大臣의 아들로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56) 寺司 : 사원의 俗人 관리. 657) 百濟王 : 威德王. 推古 5년은 威德王 44年(597)에 해당된다. 658) 阿佐 : 백제의 제27대 왕인 威德王(재위 554~598)의 왕자로 추정된다. 일본서기 에는 더 이 상의 아좌관련 기록이 보이지 않지만 聖德太子傳曆 추고 5년(597)조에 의하면 성덕태자와 만 남을 가졌고,`斑鳩古事便覽a 日本佛敎全書 卷117) ( 太子唐形御影條에는 阿佐가 그림을 잘 그 려 성덕태자의 초상화를 그렸다는 전승을 남기고 있다. 唐形御影이라고 하는 성덕태자의 화상 은 현재 나라의 법륭사에 보관되어 있다. 거기에 唐形御影은 아좌의 筆이다. 라는 기록이 남아 있다. 659) 大伴連 : 日本書紀 崇峻 4년(591) 11월조에 의하면 任那復興 을 위해 대장군으로서 筑紫까 지 갔다가 推古 3年(595)에 귀환한다. 推古 9年 3월에는 고구려에 파견되어 推古 10年 6월 백 제를 통해 귀국한다. 推古 16年 8월에는 隋使 裴世淸의 영접하는 임무를 맡기도 한다. 聖德太 子傳曆 에는 大伴連색으로 나오기도 한다. 660) 坂本臣糠手 : 推古 9年(601) 3월에 백제에 파견되었다가 同 10年 6월에 귀국한다. 坂本臣에 대 해서는 주 564) 참조. 661) 來目皇子 : 聖德太子의 同母弟. 古事記 上宮太子拾遺記 上宮聖德法王帝說 에는 久米王 으로 나온다. 662) 觀勒 : 백제계 도래승으로 생몰연대는 미상. 元亨釋書 卷16 願雜 11 古德 1에 의하면 원흥사 (법흥사)에 머물면서 고구려승 혜자 및 백제승 혜총과 함께 三論學의 대가로서 成實宗에도 해박

74 146 日本書紀 147 쳤다. 이때 書生 3 4인을 뽑아 觀勒에게 배우게 하였다. 陽胡史(야코노후비토)663)의 선 후비토오우헤이)669)을 掌客으로 삼았다. 이 때 妹子臣(이모코노오미)670)이 신이 돌아올 조인 玉陳(타마후루)은 曆法을 익히고, 大友村主高聰(오오토모노스구리코우소우)664)은 天 때 당나라 황제가 신에게 서신을 주었습니다. 그러나 백제를 거쳐서 올 때 백제인이 심문 665) 文 遁甲을 배웠으며, 山背臣日立(야마시로노오미히타치) 은 方述을 배웠다. 모두 학업 하여 빼앗았기 때문에 바칠 수 없게 되었습니다. 라고 아뢰었다. 이에 군신들이 의논하 을 성취하였다. 여 무릇 사신이란 비록 죽어서라도 임무를 다해야 하거늘 어찌 그렇게 태만하여 大國의 서신을 잃어버렸는가? 라고 하고 유형에 처했다. 그때 천황이 칙을 내려 妹子는 비록 推古天皇 16년(608) 서신을 잃어버리는 죄를 저질렀으나 가벼이 이를 처벌할 수 없다. 고 하였다. 그 대국의 사신들도 이를 듣고 또한 좋지 않다고 하여 용서하고 죄를 더 이상 묻지 않았다. 6월 壬寅朔 丙辰 666) 6월 임인삭 병진(15일). 사신들이 難波津 에 정박했다. 이날 飾船 30척으로 사신들을 강 입구에서 맞이하여 신관에 안치하였다. 이에 中臣宮地連鳥摩呂(나카토미노미야도코 로노무라지오마로)667) 大河內直糠手(오오시코우치노아타이누카데)668) 船史王平(후네노 推古天皇 17년(609) 하4월 丁酉朔 庚子 여름 4월 정유삭 경자(4일). 筑紫大宰가 백제의 승려 道欣 惠彌671)를 수장으로 한 10 하여 성덕태자에게 불법을 가르친 승려 중의 한명이었다. 推古 32年(624)에는 불교계의 최고 僧官인 僧正으로 임명되었다. 663) 陽胡史 : 陽胡史는 新撰姓氏錄 和泉國諸蕃條에 楊侯忌寸과 동족으로 나온다. 楊侯忌寸은 同左 京諸蕃條에 隋煬帝의 후손인 達率 楊侯阿了王의 후예라고 나오므로 陽胡史도 隋煬帝의 후손을 칭하였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楊胡史는 達率이라는 백제관등을 칭하고 있는 점을 볼 때 원래 백제에서 이주해 온 집단이었지만 후대에 중국 왕족 후예씨족임을 자칭하였을 것으로 추측된다. 玉陣는 인명으로 이곳에만 나오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64) 大友村主高聰 : 續日本紀 卷40 延曆 6年(787) 7月條에 大友村主廣道 등이 志賀忌寸을 사성받 았다는 기사가 보인다. 志賀忌寸은 新撰姓氏錄 攝津諸蕃條에 의하면 後漢孝獻帝의 후손으로 나온다. 高聰은 인명으로 이곳에만 나오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65) 山背臣日立 : 山背臣은 천무 13년(684) 11월에 朝臣姓을 사성받는다. 씨족의 유래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지만 山背(현재 쿄토시의 남쪽) 지역에 있었던 씨족으로 추측된다. 日立은 인명 으로 이곳에만 나오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66) 難波津 : 주 269)와 주 532) 참조. 667) 中臣宮地連鳥摩呂 : 推古 20年(612) 2월에 堅鹽媛의 무덤을 欽明天皇의 무덤으로 옮길 때 大臣 의 를 올린 인물이다. 668) 大河內直糠手 : 大河內直은 河內國 출신 國造家 씨족으로 凡川內直이라고도 한다. 糠手는 인명 으로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69) 船史王平 : 船史氏는 도래계 씨족이다. 天武 12年(683) 10월 連姓, 延曆 10年(791) 정월에 宿 姓 을 사성받았다. 흠명 14년(553)에 王辰爾가 船賦를 기록하는 일을 담당한 것을 계기로 船氏라는 씨명을 받았다고 한다. 新撰姓氏錄 右京諸蕃 下에는 宮原宿. 菅野朝臣同祖. 鹽君男智仁君之 後也 로 나온다. 王平은 인명으로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주 124) 참조). 라고 아뢰었 인과 俗人 75인이 肥後國의 韋北津(아시키타노츠)672)에 정박하고 있습니다. 다. 이때 難波吉士德摩呂(나니와노키시토코마로)673) 船史龍(후네노후비토타츠)674)을 보 내어 어떻게 왔습니까? 라고 물으니, 백제왕의 명령으로 吳國675)에 파견되었는데 그 나 라에 난리가 일어나는 바람에 들어갈 수 없었습니다. 이에 다시 본국으로 돌아가는데 갑 자기 폭풍을 만나 바다에서 표류하다가 다행히도 聖帝의 변경에 표착하게 되어 기뻐하고 있습니다. 라고 대답했다. 5월 丁卯朔 壬午 5월 정묘삭 임오(16일). 德摩呂 등이 복명하였다. 바로 德摩呂 龍 두 사람을 백제인이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도록 송사로 보냈다. 對馬에 이르러 道人 등 11인이 모두 머물고자 670) 妹子臣 : 정식 명칭은 小野臣妹子(오노노오미 이모코)로 小野臣은 和珥臣과 동족이다. 小野臣은 新撰姓氏錄 右京皇別條에 의하면 近江國 滋賀(시가)郡 小野(코우노)村이 본거지라고 하며, 妹 子는 일본 최초의 견당사로서 唐에서 蘇因高라고 불리었다고 한다. 671) 道欣 惠彌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72) 韋北津 : 韋北은 현 熊本縣 韋北郡 水 市 八代市 남부 지역을 가리킨다. 673) 難波吉士德摩呂 : 難波吉士에 대해서는 주 190)와 주 576) 참조. 德摩呂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여 자세히 알 수 없다. 674) 船史龍 : 龍은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여 자세히 알 수 없다. 675) 吳國 : 日本書紀 에서 吳國은 중국의 강남지역을 가리킨다. 應神 39年 春2月條에 처음 보인다.

75 148 日本書紀 하니 표를 올려 머물게 했다. 이에 元興寺676)에 머물도록 하였다. 가 大唐에서 돌아왔다. 백제의 사신이 犬上君을 따라 내조하였다. 推古天皇 20년(612) 11월 己丑朔 庚寅 是歲 이해. 백제에서 귀화해 온 사람이 있었다. 그 얼굴과 몸에 흰 반점이 있어서 마치 白癩 病者같았다. 사람들은 그가 다르게 생긴 것을 싫어하여 바다 가운데의 섬에 버리려고 하 였다. 그런데 그 사람이 만일 臣의 얼룩진 피부가 보기 싫으면 얼룩소나 말을 나라 안에 서 기를 수 없을 것이다. 또한 臣은 작은 재주가 있는데 산악의 모형을 잘 만들 수 있습 니다. 그러므로 신을 머물게 하고 부리면 나라에 이익이 될 것입니다. 어찌 헛되게 섬에 버리려고 하십니까? 라고 하였다. 이에 그 말을 듣고 버리지 않았다. 남쪽 정원에 須彌 월 기축삭 경인(2일). 백제 사신에게 향응을 베풀었다. 推古天皇 31년(623) 是歲 이 해에 新羅가 任那를 공격하니 임나는 신라에 복속되었다.686) 이에 천황은 장차 신라 를 치고자 대신들과 모의하고 여러 경들에게 자문을 구하였다. 田中臣(타나카노오미)687) 은 급하게 쳐서는 안됩니다. 먼저 상황을 살펴서 반역을 확인한 뒤에 공격하여도 늦지 山의 모형과 吳橋677)를 만들 것을 명했다. 그때 사람들은 그 사람을 路子工(미치코노타쿠 않을 것입니다. 바라옵건대 시험 삼아 사자를 보내어 그 사정을 엿보게 하십시오. 라고 미)678)이라 불렀다. 또한 이름은 芝耆摩呂(시키마로)라 한다. 또, 백제인 味摩之679)가 귀화 대답하였다. 中臣連國(나카토미노무라지쿠니)688)은 任那는 원래 우리나라의 內官家입니 하였다. 吳國에서 伎樂舞을 배워 출 수 있다. 고 말하였다. 이에 櫻井에 거주시키고 소 다. 지금 신라인이 그것을 쳐서 복속시켰습니다. 청컨대 군대를 정비하여 신라를 정벌하 년을 모아 伎樂舞를 배우도록 하였다. 眞野首弟子680) 新漢濟文681) 두 사람이 그 춤을 배 고 임나를 탈환하여 百濟에 부속시키십시오. 어찌 신라에 소속되어 있는 것보다 이익이 워 전하였는데, 이들이 지금의 大市首(오오치노오비토)682) 田首(사키타노오비토)683) 되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하였다. 田中臣은 그렇지 않습니다. 백제는 잘 배반하는 나라 등의 선조이다. 推古天皇 23년(615) 추9월 가을 9월. 犬上君御田 (이누카미노키미미타스키)684) 失田部造(야타베노미야츠코)685) 676) 元興寺 : 法興寺(주 646) 참조). 677) 吳橋 : 중국의 太鼓橋 같은 형태의 다리를 말한다. 678) 路子工 : 도로 혹은 다리 건설 기술자를 말한다. 이름은 분주에 의하면 芝耆摩呂로 나오는데 자 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79) 味摩之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80) 眞野首弟子 : 眞野首는 新撰姓氏錄 右京諸蕃下條에 의하면 백제 近肖古王의 후예씨족이라고 한다. 弟子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81) 新漢濟文 : 新漢은 今來漢人 과 같다(주 185) 참조). 濟文은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682) 大市首 : 新撰姓氏錄 左京諸蕃條에 出自任那國人都怒賀阿羅斯止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683) 田首 : 新撰姓氏錄 大和國諸蕃條에 出自任那國主都奴加阿羅志等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684) 犬上君御田 : 失田部造와 함께 推古 22년(614) 6월에 隋에 파견된 바 있다. 舒明 2年(630) 8 월에 제1차 견당사가 되어 서명 4년 8월에 귀국한다. 犬上君은 近江國 犬上郡 지역에 있던 씨족 으로 추측된다. 685) 失田部造 : 이름은 알 수 없다. 失田氏는 物部氏와 동족으로 天武 12年 9월에 連姓을 사성받는다. 686) 이 해에 복속되었다 : 이 시기 任那 는 멸망한 뒤였기 때문에 신라가 임나 를 병합했기 때문에 신라를 공격하게 되었다는 추고 31년(623) 시세조의 일련의 기사는 사실로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리고 그 내용자체는 日本書紀 추고 8년(600) 춘2월조 및 同 시세조의 신라정토 기 사와 매우 유사한 점이 많이 보인다(주 694) 참조). 687) 田中臣 : 이름은 알 수 없다. 田中臣氏은 古事記 孝元段에 의하면 蘇我石河宿 (주 96) 참조) 의 후예씨족으로 나오며, 新撰姓氏錄 右京皇別條에는 田中朝臣. 武內宿 五世孫都目宿 之 後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소아씨와 관계가 깊은 씨족이다. 688) 中臣連國 : 中臣連氏은 대화조정의 제사담당 씨족으로 中臣連勝海는 敏達 用明朝대에 物部氏 와 함께 反佛論者로서 활동한 바 있다. 國은 中臣氏系圖 에 인용된 延喜本系에 의하면 中臣可 多能祜의 둘째 아들로 나온다.

76 150 日本書紀 151 로 길가는 도중에도 거짓을 합니다. 무릇 그가 요구하는 바는 다 그릇된 것이므로 백제에 바쳤다. 그런데 磐金 등이 아직 돌아가지도 않았는데, 이 해에 大德695) 境部臣雄摩侶(사카 게 부속시켜서는 안 됩니다. 라고 하여 결국 정벌하지 않았다. 그리고 吉士磐金(키시노이 이베노오미오마로)696) 小德697) 中臣連國(나카토미노무라지쿠니)을 大將軍으로 삼고, 小 와카네)689)을 신라에 보내고, 吉士倉下(키시노쿠라지)690)를 임나에 보내어 임나의 일을 묻 德 河邊臣 受(카와베노오미네즈)698) 小德 物部依綱連乙等(모노노베노요사미노무라지 도록 하였다. 이때 신라의 국왕은 8명의 大夫691)를 파견하여 신라의 일을 磐金에게 보고 오토)699) 小德 波多臣廣庭(타노오미히로니와)700 小德 近江脚身臣飯蓋(오우미노아나무 하고 또한 임나국의 사정을 倉下에게 아뢰었다. 그리고는 임나는 작은 나라이지만 천황 노오미이이후타)701) 小德 平群臣宇志(헤구리노오미우시)702) 小德 大伴連(오오토모노무 의 附庸國이다. 어찌 신라가 함부로 그것을 소유할 수 있겠는가. 항상 그러하였듯이 내관 가로 정할 것이니 걱정하지 말라. 고 약속하였다. 그리고 奈末智洗遲692)를 吉士磐金에게 693) 694) 딸려 보내고, 또한 임나인 達率奈末遲 를 吉士倉下에게 딸려 보내어 두 나라의 調 를 689) 吉士磐金 : 難波吉士磐金. 日本書紀 推古 5년 11월에도 신라에 파견된 바 있다. 690) 吉士倉下 : 日本書紀 推古 31년 11월조에 吉士磐金과 함께 신라를 통해 귀국하는 기사가 보 인다. 691) 8명의 大夫 : 推古朝의 왜국 고급관인에 대한 칭호를 신라의 관인에게 적용시켜 기록한 예이다. 692) 奈末智洗遲 : 奈末은 신라 17관등 중 제11위이다. 智洗遲는 이름으로 日本書紀 推古 31년 (623) 추7월조에는 智洗爾로 나온다. 693) 達率奈末遲 : 奈末遲가 이름으로 日本書紀 推古 31년 추7월조에는 奈末智로 나온다. 694) 두 나라의 調 : 이른바 任那의 調 6세기 중반에서 大化改新 이전 시기의 일본서기 한반도관 계기사의 특징은 임나 문제를 중심으로 기술되어 있다. 즉 532년 이후의 금관가야의 멸망 이 후부터 562년의 대가야 멸망 때가지는 이른바 任那復興 문제를 중심으로 서술되어 있으며, 한편 562년 이후부터 645년 까지는 이른바 任那의 調 문제를 중심으로 기사가 전개되고 있 다. 任那의 調 에 관한 일본서기 관련 사료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민달 4년(575) 6월조의 4邑의 調, ②추고 8년(600) 시세조의 6城 할양 기사, ③추고 18년(610) 추7월조의 신라 임 나사인의 축자 도착 기사, ④추고 19년(611) 추8월조의 신라 임나의 조공 기사, ⑤추고 31(623)년 시세조의 신라 임나의 조 기사, ⑥서명 10년(638) 시세조의 백제 신라 임나의 동시 조공 기사, ⑦대화 원년(645) 추7월조의 백제사에 의한 임나의 조 貢進기사, ⑧대화 2 년 2월조의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의 동시 조공기사, ⑨대화 2년 9월조의 임나의 조 폐 지 기사이다. 임나의 조 에 대한 지금까지의 견해들은 연구자마다 세부적인 부분에서 차이를 보이고 있지만, 크게 두 가지 견해로 나눌 수 있다. 첫 번째로 임나의 조 를 사실로 인정하려 는 일본학계의 시각이다. 이것은 다시 5~6세기 전반 이전의 역사를 전제로 이해하는 견해(末 松保和, 1949 ; 鬼頭淸明, 1976)와 왜왕권의 임나지배라는 역사적 사실을 전제로 하지 않으면 서 6~7세기의 사실로 이해하는 견해(鈴木英夫, 1983,`<任那の調>の起源と性格a, 國史學 119 ; 山尾幸久, 1989,`<任那の調>の實態と性質a, 古代の日朝關係, 書房 ; 西本昌弘, 1990,`倭王權と任那の調a, 129)로 구분할 수 있다. 5~6세기 전반 이전의 역사를 전제로 이해 하는 견해는 현재 대부분의 연구에서 부정되고 있다. 6~7세기 사실로 이해하는 견해의 경우는 당시 한반도 정세를 고찰하여 신라의 입장에서 임나의 조 문제를 검토하려 한 점이 주목되지 만 임나일본부 문제와 관련하여 이해하는데 여러 문제점이 남아 있다. 두 번째로 임나의 조 기사 자체를 부정하는 한국학계의 견해(金鉉球, 1985 ; 延敏洙, 1992,`日本書紀<任那詔>關係 記事檢討a, 九州史學 105 ; 鄭孝雲, 1994,` 日本書紀 批判序說Ⅰ-推古 8, 30년조의 임나 의 조 기사를 중심으로-a, 韓日關係史硏究 2)이다. 일본서기 의 임나의 조 에 관한 기사 는 왜왕권의 이른바 임나지배 를 전제로 한 것으로 그 전제가 문제인 이상 사료적 가치를 인 정할 수 없다고 한다. 당연히 임나의 조 관련기사는 역사적 사실을 전혀 반영하고 있지 않았 다고 하며, 일본서기 편찬단계에서 조작된 것으로 이해한다. 이 밖에 대화정권의 임나의 조 확보는 대가야의 멸망 이후 蘇我氏 중심의 대화정권이 친신라외교를 추진하면서 내건 명분이었 다고 이해하는 견해(김은숙, 1992,`日本書紀 任那 기사의 기초적 검토a, 한국사시민강좌 11, 일조각)도 있다. 이상 임나의 조 에 대한 구체적인 연구사 검토 및 금후 연구방향에 대해 서는 나행주의 논고(2005,`6세기 한일관계의 연구사적 검토a, 한일관계사연구논집 3, 경인 문화사)가 참고 된다. 695) 大德 : 推古 11年(604)의 12위계 가운데 제1위. 696) 境部臣雄摩侶 : 境部臣은 蘇我氏의 일족이다. 雄摩侶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나오기 때문에 자세 한 것은 알 수 없다. 이하 8명 모두 이곳에만 보이는 인물들이다. 697) 小德 : 推古 11年의 12위계 가운데 제2위. 698) 河邊臣 受 : 日本書紀 推古 26年(619) 是歲條 및 舒明卽位前紀에는 河邊臣으로 나온다. 河邊 臣은 주 559) 참조. 699) 物部依綱連乙等 : 物部依綱連은 新撰姓氏錄 河內神別條에 의하면 饒速日命의 후예씨족이다 (주 268) 참조). 700) 波多臣廣庭 : 波多臣은 蘇我氏와 동족으로 古事記 孝元段에 의하면 建內宿 의 아들 波多八代 宿 의 후손으로 나온다. 天武 13年 11월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주 95)와 주 303) 참조). 701) 近江脚身臣飯蓋 : 近江脚身臣은 淡海臣과 동족이다. 淡海臣은 古事記 孝元段에 의하면 波多八 代宿 의 후예씨족이다(주 95)와 주 303) 참조). 702) 平群臣宇志 : 平群臣은 武內宿 의 자식인 平群都久宿 의 후손이다. 姓은 臣으로 후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大和國 平群郡 平郡鄕이 본거지이다. 日本書紀 에는 雄略紀부터 仁賢紀까지 眞島가 大臣의 지위에 있었다고 전하지만, 그대로 믿기에는 어려운 부분이 많다. 用明 2년 物部守屋토벌 군의 장군이었던 神手의 등장과 함께 부상한 신흥씨족으로 볼 수 있다(주 97) 참조).

77 152 日本書紀 153 라지)703)<*이름이 빠졌다.> 小德 大宅臣軍(오오야케노오미이쿠사)704)을 副將軍으로 삼아 壬戌(17일). 승려 觀勒을 僧正706)으로 삼고, 鞍部德積(쿠라츠쿠리노토쿠시야쿠)707)을 僧 수만의 군대를 거느리고 신라를 정벌하도록 하였다. 그때 磐金 등은 모두 항구에 모여서 都708)로 삼았다. 이날에 阿曇連(아즈미노무라지)709)<*이름이 빠졌다.>을 法頭710)로 삼았 출항하고자 바람과 파도를 살피고 있는데, 軍船이 바다를 가득 메워 수없이 들어왔다. 두 다. 705) 나라의 사신은 멀리서 그것을 바라보고 깜짝 놀라 돌아가 머무르며 대신에 堪遲大舍 를 임나의 사신으로 삼아 貢上하도록 하였다. 이에 磐金 등은 이렇게 군사를 일으키는 것은 이전의 약속과 어긋나는 것이다. 이로 인해 임나의 일은 이번에도 성공할 수 없게 되었 다. 고 서로 말하고 배를 타고 건너갔다. 비록 장군들은 처음에 임나에 도착해 의논하여 신라를 습격하고자 하였으나, 新羅國主는 많은 군대가 몰려왔다는 소식을 듣고 미리 두려 워하여 항복을 청했으므로 장군들이 함께 의논하여 표를 올리니 천황이 허락하였다. 推古天皇 32년(624) 권23 息長足日廣額天皇 舒明天皇711) 2년(630) 3월 丙寅朔 3월 병인삭(1일). 高麗의 大使宴子拔 小使若德,712) 백제의 大使恩率素子 小使德率武德713) 이 함께 조공하였다. 추8월 庚子 가을 8월 경자(8일).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에게 朝堂에서 향응하였다. 하4월 丙午朔 戊申 여름 4월 병오삭 무신(3일). 어떤 승려가 도끼로 할아버지를 쳤다. 이때 천황은 그 말을 듣고 대신을 불러 조를 내려 무릇 출가한 자는 머리 숙여 삼보에 귀의하고 계율에 따라 야 한다. 어찌 거리낌 없이 경솔하게 惡逆을 범하는가. 지금 짐이 듣자하니 어떤 승려가 할아버지를 쳤다고 한다. 그러므로 모든 절의 僧尼들을 모아서 심문하라. 만약 사실이라 면 중죄로 다스리도록 하라. 고 명하였다. 이에 모든 僧尼들을 모아 심문하고 惡逆을 행 한 승려 및 여러 僧尼들까지 처벌하려 하였다. 그때 백제의 승려 觀勒이 표를 올려 무릇 불법은 西國에서부터 漢에 이르러 3백 년을 지나고 백제국에 전해져 겨우 100년이 되었 습니다. 그런데 우리 왕은 일본 천황이 賢哲하다는 것을 듣고 불상과 경전을 바쳤는데 백 년이 채 못 되었습니다. 이에 지금 僧尼가 아직 계율을 잘 익히지 못하여 문득 악역을 범 하였습니다. 이에 여러 승니들은 당황하고 두려워하여 어찌 할 바를 모르고 있습니다. 바 라건대 악역을 범한 자를 제외한 나머지 승니들을 다 사하고 죄를 묻지 말아주십시오. 이 것이야말로 큰 공덕일 것입니다. 라고 말하였다. 천황이 그 말을 따랐다. 703) 大伴連 : 大伴連 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704) 大宅臣軍 : 大宅臣은 和珥氏와 동족이다. 古事記 孝昭段에 의하면 天押帶日子命의 후손으로 나온다. 천무 13년(684) 11월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705) 堪遲大舍 : 堪遲는 인명이고 大舍는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12위. 706) 僧正 : 고대 일본의 불교 통제 정책인 僧鋼制의 僧官 가운데 하나. 707) 鞍部德積 : 鞍部는 鞍作이라고도 하며 도래계 씨족이다(주 194)와 주 612) 참조). 日本靈異記 上 五話에서는 德積 이외에도 大伴屋栖古連이 僧都에 임명되었다고 적고 있다. 708) 僧都 : 고대 일본의 불교 통제 정책인 僧鋼制의 僧官 가운데 하나이다. 709) 阿曇連 : 阿曇氏는 북큐슈 博多(하카타)灣 연안에 본거지를 두고 해상교통을 장악하면서 海部를 통솔하던 伴造씨족이다(後藤四郞, 1967,`大化前後における阿曇氏の活動a, 日本歷史 226). 천무 13년(684) 12월에 宿 姓을 사성받는다. 여기에는 이름이 보이지 않으나 皇極 元年(643) 正月條에 大仁阿曇連比羅夫라는 인물과 동일인으로 추정된다. 710) 法頭 : 僧正과 僧都를 도와 불교를 통제하는 기관의 관인으로서 승니를 감독하는 僧正 僧都와 는 별도로 주로 사원의 재정을 관리하는 임무를 수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日本書紀 大化 元年 (645) 8月條에 俗人 3인을 法頭로 임명한 기사가 보인다. 711) 舒明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4대 천황(재위 629~641). 이름은 田村(타무라). 아버지는 敏達의 아들 押坂彦人大兄(히코히토오오에)皇子이고, 어머니는 그 異母妹인 糠手姬(누카에히메) 皇女이다. 推古 사후 蘇我大臣蝦夷의 지지를 받고 山背大兄王을 누르고 629年 飛鳥岡本宮에서 즉위하였다. 황후는 후에 제35대 皇極天皇으로 즉위하는 寶(다카라)皇女이다. 그 사이에 中大兄 皇子(후에 天智天皇) 大海人皇子(후에 天武天皇)를 낳았다. 재위 2년(630)에 처음으로 견당사 를 파견하였다. 712) 大使宴子拔 小使若德 : 이곳에만 보이는 인물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9월에 귀국 한다. 713) 大使恩率素子 小使德率武德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9월에 귀국한다.

78 154 9월 癸亥朔 丙寅 9월 계해삭 병인(4일). 고구려와 백제의 사신이 본국으로 돌아갔다. 是歲 이 해에 難波大郡714)과 三韓館715)을 고치고 수리했다. 舒明天皇 3년(631) 3월 庚申朔 3월 경신삭(1일). 백제왕 義慈가 왕자 豊章을 質로 삼아 보냈다.716) 714) 難波大郡 : 주 550) 참조. 715) 三韓館 : 처음 나온다. 한반도에서 오는 사신이 묵는 곳으로 추정된다. 이와 관련하여 일본서 기 추고 16년(608) 4월조에는 高麗館이 보인다. 716) 백제왕 義慈가 보냈다 : 義慈는 제31대 백제왕(재위 641~660). 豊章은 日本書紀 에는 豊 璋 餘豊璋 百濟君豊璋 百濟太子餘豊, 중국측 사료에는 夫餘豊 餘豊 등으로 나온다. 그런데 舒明 3年이라면 백제에서는 義慈王代가 아니고 그 前王인 武王(재위 600~641)의 재위 32년이 되 는 해이다. 三國史記 에 의하면 의자왕은 武王의 장자로서 武王 33년(632)에 太子에 책봉되고 641년에 즉위하였다. 義慈王의 즉위와 비슷한 시기에 日本書紀 에는 皇極 元年(642)과 2年에 백 제왕자 翹岐가 왜국으로 왔다는 기사가 있다. 따라서 일찍이 舒明紀의 기록은 舒明 3년이 아니라 翹岐가 도일한 시기로 수정해야 한다는 견해가 제기되었다(池內宏, 1960,`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 唐 羅 日三國の關係a, 滿鮮史硏究 上世 第二, 吉川弘文館 ; 西本昌弘, 1985,`豊璋と翹岐 大化改新前夜の倭國と百濟 a, ヒストリア 107, 大阪歷史學會 ; 山尾幸久, 1992,`640年代の 東アジアとヤマト國家a, 靑丘學術論集 2 ; 연민수, 1997, 앞의 글). 이에 대해서 豊璋은 武王의 아들로서 舒明紀의 기록은 百濟王璋을 百濟王義慈로 잘못 기록했다는 견해도 있다(井上光貞, 1975,`大化改新と東アジアa, 岩波講座 日本歷史 2, 岩波書店 ; 金壽泰, 1992,`百濟 義慈王代 의 太子冊封a, 百濟硏究 23 ; 鄭孝雲, 1995, 古代韓日政治交涉史硏究, 학연문화사, 86~89쪽 ; 金善民, 2000,` 일본서기 에 보이는 풍장과 교기a, 일본역사연구 11, 일본사학회 ; 宋浣範, 2005,`七世紀の倭國と百濟 百濟王子豊璋の動向を中心に a, 日本歷史 686). 전자가 豊璋과 翹岐를 같은 사람으로 이해하고 있는 반면, 후자는 豊璋과 翹岐를 다른 사람으로 보고 있다. 한편 盧重國은 日本書紀 의 舒明紀와 齊明紀에 보이는 豊璋을 同名異人으로 간주하여 舒明 3年(631) 의 豊璋은 武王의 아들로, 齊明 6年(660)의 豊璋은 義慈王의 아들로 보았다. 그 주요 근거로써 日本書紀 卷25 白雉 元年(650) 2月 甲申條의 百濟君豊璋其弟塞城忠勝 과 齊明 6年 10月條의 送王子豊璋及妻子與其叔父忠勝等 에 보이는 忠勝 을 전자에서는 풍장의 동생, 후자에서는 풍장 日本書紀 155 의 숙부로 기록한 것을 들고 있다. 즉 白雉 元年의 忠勝은 무왕의 아들인 풍장과 형제관계가 되고, 齊明 6年의 忠勝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장과 숙질관계가 된다는 것이다(1994-b,`7세기 百濟와 倭와의 關係a, 國史館論叢 52, 국사편찬위원회). 豊璋과 翹岐를 같은 사람으로 보는 견해에서 내세우는 근거 중에 하나가 바로 解와 翹岐의 발음이 유사하다는 점이다. 西本昌弘은 釋日本 紀 의 秘訓을 검토하여 解(キウケ)의 발음과 皇極紀에 보이는 翹岐(ケウキ)의 발음이 유사하다 는 점에서 解와 翹岐를 동일인물로 보았다. 삼국사기 의 백제 지명 표기를 분석한 연구(都守 熙, 1980,`百濟地名硏究a, 百濟硏究 11, 충남대 백제연구소)를 보더라도 解 와 岐 의 上古音 이 비슷한 것으로 보아 解와 翹岐는 같은 사람일 가능성이 크다. 따라서 舒明紀의 기록은 舒明 3년이 아니라 翹岐가 도일한 시기 즉 황극 원년 혹은 2년으로 수정해야 한다. 그렇다면 왜 풍장에 관한 기사는 이렇게 여러 가지 표기법과 여러 가지 설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인명 표기법에 주목 한다면 일본서기 의 豊璋 관련 기사의 원사료로는 翹岐에 관한 기사, 豊璋에 관한 기사, 그리고 제명 천기지에 인용된`日本世記a 의 解 관련 기사 등 적어도 세 가지 이상의 원사료가 있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것은 日本書紀 의 豊璋에 관한 기사에 풍장이 왜국에 가게 되는 기사뿐만 아 니라 풍장의 귀국 기사도 다양한 자료를 바탕으로 작성되었음을 짐작하게 한다. 일본서기 에의 하면 풍장의 귀국에 대해서는 齊明 6년(660) 冬10月條 분주와 天智卽位前紀(661) 9月條, 그리고 天智 元年(662) 5月條에 기재되어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에서는 풍장의 귀환에 대해 661년 9월 과 662년 5월, 두 종류의 설을 병기하고 있는 셈이다. 鬼頭淸明은 日本書紀 天智 元年(662) 12 月條부터 2年 9月條까지의 백제에서의 豊璋 등의 활동과 백촌강 전투에 관한 기사는 주로 朴市田 來津의 무용담을 기록한 朴市氏의 家記를 참고로 작성하였다고 추측하였다(鬼頭淸明, 1981, 白 村江, 敎育社, 147쪽). 朴市田來津은 천지즉위전기(661) 8월조에 秦造田來津으로 나오고, 그해 9 월에 풍장의 호송군으로 백제에 건너간다. 이후 천지 원년 12월에는 백제에서 부흥군의 근거지를 州柔에서 避城으로 옮기는 것에 대해서 避城이 적지와 가깝다는 이유로 반대한다. 그러나 풍장과 복신은 朴市田來津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근거지를 避城으로 옮겼는데, 이듬해 신라군이 피성 가 까이 공격해 오자 다시 州柔로 돌아간다. 천지 2년(663) 8월 己酉條에는 秦造田來津이 당군과 싸 우다 장렬히 전사하는 모습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이러한 일련의 기사는 秦造田來津의 활약상 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는 점을 감안할 때 朴市氏의 家記를 참고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따라서 풍 장의 귀국시기를 천지즉위전기(661) 9월로 적고 있는 기사는 朴市氏의 家記의 내용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한편 천지 원년(662) 5월에 풍장 호송군의 책임자였던 大將軍 大錦中 阿曇比邏夫連은 皇極 元年(642) 2月條에 의하면 舒明의 사망을 알리기 위해 백제에 파견된 바 있다. 阿曇連氏는 海人部를 통솔하던 伴造씨족으로 일본서기 에는 해상활동에 활약하는 阿曇氏 관련기사가 여러 군데에 보이고 있다. 일본서기 에서 阿曇連氏는 天武 元年(672) 春3月條에 阿曇連稻敷가 筑紫에 파견되어 天智의 사망 소식을 당의사신 郭務悰에게 전한 기사가 보이는 등 외교활동에서도 활약 한다. 또한 阿曇連稻敷의 경우는 天武 10年(681) 帝紀와 上古諸事의 記定事業에도 참여하고 있다. 천무 10년(681)의 기정사업은 일본서기 편찬의 시작으로 볼 수 있으므로 이 때 阿曇連稻敷가 阿 曇比邏夫連의 활약상을 일본서기 참고자료로 정리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이와 같이 豊 璋이라는 같은 표기를 사용하는 기사들이라도 그 원자료가 다른 경우 귀국 시기를 다르게 전하고

79 156 舒明天皇 7년(635) 하6월 乙丑朔 甲戌 여름 6월 을축삭 갑술(10일). 백제가 達率柔717) 등을 보내 조공했다. 추7월 乙未朔 辛丑 가을 7월 을미삭 신축(7일). 백제 사신을 위해 조정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舒明天皇 10년(638) 是歲 이해에 百濟 新羅 任那가 함께 조공하였다.718) 舒明天皇 11년(639) 추7월 가을 7월. 조서를 내려 올해에 大宮719)과 大寺720)를 만들어라. 百濟川721) 옆을 궁궐터로 삼아라. 이에 서쪽의 백성은 궁궐을 짓고 동쪽의 백성은 절을 지었다. 그리고 書直縣(후 日本書紀 월 12월. 百濟川 옆에 9층탑을 세웠다. 舒明天皇 12년(640) 동10월 乙丑朔 乙亥 겨울 10월 을축삭 을해(11일). 大唐 학문승 淸安724)과 學生 高向漢人玄理725)가 신라를 거 쳐 도착하였다. 백제 신라의 조공사가 함께 왔다. 각각 관작 1급을 주었다. 是月 이 달에 [천황은] 百濟宮726)으로 옮겼다. 舒明天皇 13년(641) 동10월 己丑朔 丁酉 겨울 10월 기축삭 정유(9일). 천황이 百濟宮에서 崩하였다. 丙午(18일). 궁의 북쪽에 빈소를 마련하였다. 이것을 百濟大殯727)이라 한다. 미노아타이아가타)722)을 大匠(오오타쿠미)723)으로 삼았다. 권24 天豊財重日足姬天皇 皇極天皇728) 원년 (642) 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일본서기 에서 풍장의 귀국시기를 두 가지로 전하고 있는 것은 편찬 자의 착오라기보다는 편찬자가 참고한 자료가 달랐기 때문에 나타난 결과로 보아야 한다. 편찬자 는 일본서기 본문을 구성하는데 내용의 통일보다는 원자료의 원문을 더욱 존중하였다고 볼 수 있다(박재용, 2007,` 日本書紀 에 인용된 道顯의`日本書紀a a, 한국고대사연구 47). 717) 達率柔 : 柔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이는 인물이다. 718) 이해에 조공하였다 : 주 694) 참조. 719) 大宮 : 서명 12년(630) 10월에 廐坂宮에서 새롭게 옮긴 百濟宮을 일컫는다. 백제궁의 위치는 그 동안 北葛城郡 廣陵町 大字百濟로 보는 것이 통설이었지만, 최근 발굴조사에 따라 櫻町市 吉備 부근으로 보기도 한다. 720) 大寺 : 일본서기 황극 원년(642) 9월조의 분주에 보이는 百濟大寺를 일컫는다. 721) 百濟川 : 현재 御所市의 동남부지역에서 시작하여 三宅町 부근에서 葛城川과 합류하는 蘇我川에 해당된다. 722) 書直縣 : 倭漢書直縣(皇極 元年 2月) 혹은 倭漢直縣(白雉 元年 是歲條)이라고도 나오는 것과 같 이 書直은 東漢氏의 일족임을 알 수 있다. 縣은 이름이다. 東漢氏에 대해서는 주 192) 참조. 723) 大匠 : 중국에서는 종묘 궁실 등 토목 건축을 담당하는 관리의 장을 將作大匠 이라고 하였다. 춘정월 乙酉 봄 정월 을유(29일). 백제에 사신으로 갔던 大仁729) 阿曇連比羅夫(다아즈미노무라지히라 724) 淸安 : 추고 16년(608) 9월 隋使 裴世淸이 귀국할 때 따라간 南淵漢人請安과 동일인이다. 귀국 후 대화개신에도 참여하였다. 725) 高向漢人玄理 : 608년 隋使 裴世淸을 따라 중국에 유학을 떠났다. 귀국 후 大化改新에도 참여하 였고, 國博士로 임명되었다. 726) 百濟宮 : 주 719) 참조. 727) 百濟大殯 : 大殯은 성대한 殯이라는 의미이다. 서명천황의 殯은 서명 13년(641) 10월 丙午(18 일)에 시작하여 이듬해 황극 원년 12월 壬寅(21일) 滑谷岡에 장사지낼 때까지 1년 2개월간 계속 되었다. 728) 皇極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5대 천황(재위 642~645). 이름은 寶(다카라). 아버지는 敏 達天皇의 손자 孫茅渟(치누)王, 어머니는 吉備嬉(키비히메)王이다. 제34대 舒明天皇의 황후로서 中大兄皇子(후에 天智天皇) 大海人皇子(후에 天武天皇)의 어머니이다. 제36대 孝德天皇의 同

80 158 日本書紀 159 부)730)가 筑紫國에서 역마를 타고 와서 백제국이 천황이 崩했다는 소식을 듣고 조문사를 積이 죽었습니다.737) 또, 백제 사신이 崑崙738) 사신을 바다에 던져 버렸습니다. 금년 정월에 파견했는데, 臣은 그 조문사를 따라 함께 筑紫國에 도착하였습니다.731) 臣은 장례식에 참석 는 國主의 어머니739)가 죽었고, 또 弟王子와 자식 翹岐,740) 누이동생 4명,741) 內佐平岐味742) 732) 라고 하였다. 하고자 먼저 혼자 왔습니다. 그런데 그 나라는 지금 大亂이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름 높은 사람 40여 명이 섬으로 추방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 戊申(22일). 고구려 백제 사신에게 難波郡에서 잔치를 베풀었다. 大臣에게 조서를 내 2월 丁亥朔 戊子 2월 정해삭 무자(2일). 阿曇山背連比羅夫 草壁吉士磐金(쿠사카베노키시이와카 네)733) 倭漢書直縣(야마토노아야노후미노아타이아가타)734)을 백제 조문사가 있는 곳에 735) 736) 보내어 그쪽 소식을 물었다. 조문사는 百濟國主 가 臣들에게 塞上 은 항상 나쁜 짓 을 한다. 귀국하는 사신에게 딸려 보내 주기를 청하더라도 天朝에서는 허락하지 마십시 오. 라고 말했습니다. 라고 대답하였다. 백제 조문사의 從子 등이 지난해 11월 大佐平智 려 津守連大海(츠모리노무라지오오아마)743)는 고구려에 사신으로 보내고, 國勝吉士水鷄 (쿠니카츠노키시쿠이나)744)<*水鷄는 우리말로 俱毗那(쿠히나)라 한다.>는 백제에 사신으 로 보내라. 草壁吉士眞跡(쿠사카베노키시마토)745)은 신라에 보내고, 坂本吉士長兄(사카모 고 하였다. 토노키시나가에)746)은 임나에 사신으로 보내라. 庚戌(24일). 翹岐를 불러 阿曇山背連의 집에 머무르게 하였다. 辛亥(25일). 고구려 백제 사신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癸丑(27일). 고구려 백제 사신이 모두 돌아갔다. 母妹이기도 하다. 645년 大化改新을 계기로 孝德에게 양위하고 皇祖母尊이라고 스스로 칭하였 다. 655년에 제37대 齊明天皇(재위 655~661)으로 重祚하였다. 729) 大仁 : 推古 11년(604) 12관위 가운데 제3위. 730) 阿曇連比羅夫 : 주 709) 참조. 731) 백제국이 도착하였습니다 : 백제의 弔問使 파견 기사는 황극 2년 4월 경신삭조에도 보인 다. 두 기사는 출처가 다른 동일기사일 가능성이 크다. 위의 皇極 元年 春正月條기사는 阿曇連氏 의 家記를 참고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732) 그런데 일어났습니다 : 三國史記 에는 武王 사후에 백제에서 大亂이 일어났다는 기사가 없다. 733) 草壁吉士磐金 : 推古 5年(597)과 31年에 신라에 파견된 바 있다. 吉士에 대해서는 주 190) 참조. 734) 倭漢書直縣 : 주 722) 참조. 735) 百濟國主 : 義慈王. 736) 塞上 : 塞城이라고도 한다. 白雉 元年(650) 2月條에 豊璋의 동생으로 나온다. 737) 지난해(去年) 죽었습니다 : 본조에서는 大佐平智積이 죽었다고 하였으나 皇極 元年 7月 乙 亥條에는 그 智積이 백제사신으로서 왜국의 연회에 참석하고 있다. 大佐平은 백제조정이 최고관 료로서 일본서기 에 의하면 백제귀족 가운데 大佐平에 취임하고 있는 인물은 백제말기 沙宅千 福(齊明 6年 7月條에 인용된`伊吉連博德書a)과 일본으로 망명한 沙宅昭明(天武 2年 閏6月 庚寅 條) 등 모두 백제의 대성8족 가운데 하나인 沙(沙宅)氏 사람들이다. 이와 관련하여 백제의 沙宅 氏 중에는 智積이라는 같은 이름을 가진 자로 砂(沙)宅智積이 있다. 이 砂宅智積이 본조의 大佐 平智積과 동일인일 것으로 여겨진다. 그렇다면 현존하는`百濟砂宅智積碑a에는 甲寅年(645)에 砂宅智積의 활동이 보이므로 日本書紀 皇極 元年 2月 丁亥條의 기사는 기년상의 오류가 있음 을 알 수 있다. 738) 崑崙 : 현 인도차이나반도와 말레이반도 지역을 일컫는다. 739) 國主의 어머니(國主母) : 義慈王의 어머니. 三國史記 에는 의자왕의 어머니에 대한 기록이 없다. 740) 동생 왕자와 자식 翹岐 (弟王子兒翹岐) : 이 弟王子兒翹岐 는 크게 두 가지로 해석할 수가 있 다. ① 弟王子의 자식인 翹岐, 즉 翹岐는 義慈王의 조카가 된다. ② 弟王子와 자식인 翹岐 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런데 황극 2년 4월 庚子條에 百濟國主兒翹岐弟王子 라고 되어 있고, 풍장과 교기가 동일인일 가능성이 크기 때문에 ②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여겨진다. 다만 의자왕의 아들 인 翹岐가 황극 원년 2월에는 섬으로 추방되었다고 하지만, 同年 4월에는 百濟大使로서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나온다. 다시 황극 2년 4월 庚子條에도 교기가 일본에 건너간 것으로 되어 있어 서 황극 원년 4월조와 황극 2년 4월조는 백제의 弔問使 파견 기사와 마찬가지로 출처가 다른 동 일한 기사로 추정해 볼 수 있다(주 716) 참조). 741) 누이동생 4명(母妹女子四人)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42) 內佐平岐味 : 內佐平은 內臣 內頭 內法佐平 3佐平 가운데 하나로 추정된다. 岐味는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43) 津守連大海 : 이하 백제 신라 임나에 보내는 國勝吉士水鷄 草壁吉士眞跡 坂本吉士長에 대 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744) 國勝吉士水鷄 : 難波吉士國勝. 일본서기 제명 2년(656) 시세조에 난파길사국승이 백제로부터 돌아왔다는 기사가 보인다. 745) 草壁吉士眞跡 : 眞跡이 이름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46) 坂本吉士長兄 : 長兄가 이름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坂本吉士는 이곳에 처음 보인다.

81 160 日本書紀 161 本에는 백제 사신 大佐平智積과 그의 아들 達率753) 이름은 빠졌다. 恩率軍善754)이 참석했 하4월 丙戌朔 癸巳 여름 4월 병술삭 계사(8일). 大使翹岐가 그의 종자를 데리고 조정에 알현하였다.747) 748) 乙未(10일). 蘇我大臣이 畝傍家 에서 백제의 翹岐 등을 불러 직접 대화를 나누었다. 이에 좋은 말 1필과 鐵鋌 20鋌을 주었다. 오직 塞上만 부르지 않았다. 다고 한다.> 이에 건강한 아이에게 명해서 翹岐 앞에서 씨름을 하도록 하였다. 智積 등은 연회가 끝난 후 물러나와 翹岐의 문전에서 절하였다. 8월 己丑 8월 기축(6일). 백제의 사신과 參官 등이 돌아갔다. 큰 배와 同船755)<*同船은 母慮紀舟 5월 乙卯朔 己未 5월 을묘삭 기미(5일). 河內國 依綱屯倉749) 앞에 翹岐 등을 불러 활로 사냥하는 것을 관 람하게 했다. 라 한다.> 3척을 주었다. 이날 한밤중에 서남쪽에서 천둥소리가 울렸으며 바람이 불고 비 가 왔다. 參官 등이 탄 배가 해안에 부딪쳐 부서졌다. 庚午(16일). 백제국 調使의 배와 吉士의 배가 함께 難波津<*대개 吉士는 이전에 백제에 사신으로 갔었을 것이다.>에 정박했다. 750) 丙申(13일). 백제의 質 達率長福756)에게 小德757)의 관위를 주고, 中客758) 이하에게는 관위 1급씩을 주었다. 물품을 각기 차등있게 주었다. 壬申(18일). 백제사신 이 調를 바치고 吉士가 복명하였다. 戊戌(15일). 백제 參官 등에게 배를 주어 떠나보냈다. 乙亥(21일). 翹岐의 종자 한 사람이 죽었다. 己酉(26일). 백제 신라 사신이 돌아갔다. 丙子(22일). 翹岐의 아들이 죽었다. 이때 翹岐와 그의 처가 아들이 죽은 것을 꺼려 喪葬 에는 나아가지 않았다. 무릇 백제와 신라의 풍속에 죽은 사람이 있으면 비록 부모 형 제 부부 자매라 하더라도 결코 자신은 보지 않는다. 이로 보건대 자애롭지 못한 정도 가 어찌 금수와 다르다고 하겠는가? 戊寅(24일). 翹岐가 그의 처자를 데리고 百濟 大井家751)에 옮겨갔다. 이에 사람을 보내 9월 癸丑朔 乙卯 9월 계축삭 을묘(3일). 천황이 大臣에게 조서를 내려 짐은 큰 절을 짓고자 한다. 마땅 히 近江과 越國의 장정을 징발하라. 고 하였다.<*百濟大寺759)이다.> 또한 여러 나라에 부 과하여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어 그의 아들을 石川에 장사지냈다. 추7월 乙亥 가을 7월 을해(22일). 백제 사신 大佐平智積 등에게 조정에서 연회를 베풀었다.752)<*或 747) 大使翹岐가 알현하였다 : 주 740) 참조. 748) 畝傍家 : 畝傍山(현 原市 畝傍町) 근처의 저택. 일본서기 황극 3년(644) 11월조에 大臣(蘇我 蝦夷)가 畝傍山의 동쪽에 집을 세웠다고 나온다. 749) 依綱屯倉 : 依綱은 河內國 丹比郡에서 攝津國 住吉郡에 걸친 지역. 日本書紀 仁德 43년 9월조 에 依綱屯倉阿 古가 보인다. 750) 백제사신 : 翹岐로 추정된다. 751) 百濟 大井家 : 和名後文 에 자식을 石川(주 603) 참조)에 장사 지냈다고 한 기록을 참고하면 大 井家는 현 大阪府 河內長野(카와치나가노)市 太井(오오이) 또는 南河內(미나미카와치)郡 太子(타 이시)町 大井(오오이)을 가리키는 것으로 추정된다. 752) 백제 사신 大佐平智積 등에게 베풀었다 : 주 737) 참조. 753) 達率 : 성과 이름은 정확히 알 수 없으나 황극 원년 8월 丙申條에 보이는 達率長福일 가능성이 크다. 754) 恩率軍善 : 軍善의 귀국기사는 보이지 않지만 황극 2년 7월조에 백제부사로서 다시 일본에 건너 갔다. 755) 同船 : 많은 목재로 조립해서 만든 배. 756) 達率長福 : 일본서기 황극 원년(642) 추7월 乙亥條의 達率이 長福이라면 長福의 성은 沙(砂) 宅氏가 된다. 왜국에 파견된 백제의 인질 가운데 왕족 이외의 인물로는 達率長福이 처음이다. 757) 小德 : 추고조 12관위 가운데 제2위. 758) 中客 : 일본서기 大化 5年(649) 시세조의 분주 및 天武 2年(673) 8月 戊申條에도 신라 사신 일행에게 中客이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모두 사신단의 간부 등을 지칭하는 것으로 여겨진다. 759) 百濟大寺 : 8세기 전반 국가가 조영 및 경영의 비용을 부담했던 大安寺의 최초이름이 百濟大寺 이었다. 일본서기 서명 11년(639) 추7월조와 747년에 작성된 大安寺伽藍緣起幷流記資財帳 에 의하면 百濟川 부근에 大寺를 조영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단 大安寺緣起 에는 2월로 기

82 162 日本書紀 皇極天皇 2년(643) 번식시키지 못했다. 3월 辛亥朔 癸亥 皇極天皇 4년(645) 3월 신해삭 계해(13일). 백제의 사신이 머물던 難波館과 민가에 불이 났다. 하4월 庚子 여름 4월 경자(21일). 筑紫大宰가 急使를 보내 百濟國主의 자식 翹岐와 아우 왕자가 760) 라고 아뢰었다. 弔使와 함께 왔습니다. 6월 辛丑 6월 신축(23일). 백제의 조공선이 難波津에 정박했다. 추7월 己酉朔 辛亥 가을 7월 기유삭 신해(3일). 몇 명의 大夫를 難波郡에 보내어 백제국이 바친 調와 물품 163 6월 丁酉朔 甲辰 6월 정유삭 갑진(8일). 中大兄(나카노오오에)766)이 몰래 倉山田麻呂臣(쿠라노야마다노 마로노오미)767)에게 三韓이 調를 바치는 날에 반드시 경에게 그 표문을 낭독하게 하겠 다. 고 하면서 入鹿의 목을 베고자 하는 말을 건네었다. 麻呂臣이 허락하였다. 권25 天萬豊日天皇 孝德天皇768) 大化원년(645) 추7월 丙子 가을 7월 병자(10일).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조를 바쳤다.769) 백제의 을 점검하게 했다. 이에 대부가 백제 사신에게 백제국에서 바치는 조는 예전에 비해 부 족하다. 大臣(蘇我蝦夷)에게 보내는 물건은 지난해에 돌려보낸 품목과 같다. 여러 경들에 게 보내는 물건은 전혀 가져오지 않았다. 모두 예전의 사례에 어긋나니 어찌된 일인가? 라 라고 물었다. 大使 達率自斯761) 副使 恩率軍善762)이 모두 지금 곧바로 갖추겠습니다. 고 대답하였다. 自斯는 質인 達率武子763)의 아들이다. 是歲 이 해에 백제 太子餘豊764)이 벌통 4개를 가져와 三輪山765)에 방사하여 길렀으나 끝내 록). 1997년 백제대사로 추정되는 吉備池廢寺를 발굴 조사한 결과 금당의 기단은 동서 37m, 남 북 28m, 높이 2m 이상의 규모로 확인되었고, 탑의 기반은 한 변이 약 30m에 달하는 정방형이 며, 기단의 높이는 약 2.8m으로 밝혔다(奈良文化財硏究所, 1999, 幻のおおでら百濟大寺 ). 百 濟大寺는 이후 天武 2年(673) 12월에 高市郡으로 이전되면서 高市大寺(이후 천무 6년에 大官大 寺로 개칭)로 명칭이 바뀌었다. 平城京 천도 이후 716년에 高市大寺도 平城京으로 이전되면서 그 이름이 大安寺로 바뀌었다. 760) 百濟國主의 왔습니다 : 주 731) 참조. 761) 達率自斯 : 自斯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62) 恩率軍善 : 주 754) 참조. 763) 達率武子 : 이름 앞에 質 이라는 표현을 썼기 때문에 왜국에 건너갔음을 알 수 있는데 그 시기 가 언제인가는 명확히 알 수 없다. 764) 太子餘豊 : 豊璋을 가리킨다. 단 여기서 太子라는 호칭은 풍장이 백제멸망 후 백제로 돌아가 왕 이 된 것을 주목한 일본서기 편찬자의 윤색으로 볼 수 있다(주 716) 참조). 765) 三輪山 : 현 奈良縣 櫻井(사쿠라이)市의 三輪山. 766) 中大兄 : 中大兄皇子. 후에 天智天皇으로 즉위한다. 767) 倉山田麻呂臣 : 일본서기 황극 3년(644) 춘정월조의 蘇我倉山田麻呂로 蘇我入鹿의 從兄弟. 公卿補任 에는 右大臣蘇我山田石河麻呂. 馬子大臣之孫. 雄正之子也 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蘇我山田石河麻呂가 蘇我倉山田麻呂이다. 또한 雄正은 그의 아버지 蘇我倉摩呂臣(舒明卽位前 紀)이다. 768) 孝德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6대 천황(재위 645~654). 이름은 輕(카루). 皇極의 同母 弟. 아버지는 敏達天皇의 손자 孫茅渟(치누)王, 어머니는 吉備嬉(키비히메)王이다. 645년 大化 改新이 일어나자 皇極天皇의 양위를 받아 즉위한 후, 皇極의 장자인 中大兄皇子(후에 天智天皇) 를 황태자로 삼고 연호를 大化(다이카)라고 하였다. 황후는 황극천황의 딸이자 中大兄皇子의 同 母妹인 間人皇女이다. 難波宮으로 천도한 후 개신정치를 추진해 나갔지만, 후에 中大兄皇子와 대립한다. 白雉 5年 10월에 難波宮에서 병사한다. 769) 고구려 백제 신라가 바쳤다 : 일본서기 에서 비교적 신뢰성이 높은 대외관계기사의 경 우는 사신의 이름이 명확히 기재되어 있다. 그런데 한반도의 3국 또는 2국이 동시에 조공한 기 사의 경우는 대부분 이름이 빠져있다. 대화 원년(645) 추7월조의 경우도 백제사신 이름만 거론 되고 있고, 천황의 詔書도 고구려와 백제에게 전달될 뿐 신라에 대해서는 전혀 언급이 없다. 고 구려 사신에게 건네는 조서의 내용도 형식적인 것에 그치고 있다. 이렇듯 신뢰할 수 없는 삼국

83 164 日本書紀 165 조사가 임나의 사신을 겸하여 임나의 조를 바쳤다.770) 단지 백제의 大使인 佐平綠福771)은 馬飼造777)<*이름이 빠졌다>를 재차 보낸다. 또한 명하여 鬼部達率意斯778)의 妻子 등을 보 병에 걸려 津館에 머물고 京에 들어오지 않았다. 巨勢德太臣(코세노토고다노오미)772)이 내겠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773) 고구려 사신에게 조를 내려 明神御宇日本天皇 의 詔旨에 천황이 보낸 사신과 高麗神 의 아들이 보낸 사신은 걸어 온 길은 짧으나 앞으로의 길은 길다. 이에 온화한 마음을 가 지고 서로 계속 왕래할 만하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백제 사신에게도 조서를 내려 明神御宇日本天皇의 詔旨에 먼 옛날 우리 皇祖의 시대774)에 처음으로 백제 국은 內官家가 되었을 때는 예를 들면 세 줄로 꼰 그물775)과 같았다. 중간에 任那國을 백 제에 속하도록 해주었다. 후에 三輪栗 君東人(미와노크루쿠마노키미아즈마히토)776)을 보내 임나국의 경계를 살피도록 하였다. 이 까닭으로 백제왕은 칙명에 따라 그 경계를 모 두 보여 주었으나 調에 빠진 것이 있다. 따라서 그 조를 돌려보낸다. 임나에서 나는 물건 은 천황이 훤히 알고 있다. 무릇 이후부터는 상세하게 나라와 調를 기록하도록 하라. 너 희 佐平 등은 같은 얼굴로 다시 와서 조속히 명확하게 보고하도록 하라. 지금 三輪君東人 8월 癸卯 8월 계묘(8일). 사신을 大寺(百濟大寺)에 보내어 僧尼들을 불러 모아서 조를 내려 磯城 嶋宮御宇天皇(欽明天皇) 13년에 백제 明王이 우리 大倭에 佛法을 전하였다. 이때 여러 신 하들은 받아들이기를 원하지 않았으나, 蘇我稻目宿 가 홀로 그 법을 믿었다. 천황이 이 에 蘇我宿 에게 조를 내려 그 법을 받들도록 하였다. 이에 譯語田宮御宇天皇(敏達天皇) 의 치세에 蘇我馬子宿 는 亡父의 태도를 존경하고 따라서 能仁779)의 가르침을 존중하였 다. 하지만 다른 신하들이 믿지 않아 이 法典이 없어질 위기에 처했었지만, 천황은 馬子 宿 에게 명하여 불법을 신봉하도록 하였다. 이 후 小墾田宮御宇天皇(推古天皇)의 시대 에 馬子宿 가 천황을 받들어 丈六繡像 丈六銅像을 만들고 불교를 顯揚하고 僧尼를 공 경하였다. 짐은 다시 바른 가르침을 숭상하고 大道을 널리 열고자 한다. 그러므로 沙門 大法師780) 福亮781) 惠雲782) 常安783) 靈雲784) 惠至785) 寺主僧旻786) 道登787) 惠隣788) 동시 조공기사는 일본서기 에서 孝德紀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다만 舒明紀의 경우에도 3곳(2 년 3월조의 고구려 백제, 10년 시세조의 백제 신라 임나, 12년 10월조의 백제 신라)에 걸 쳐 보이지만 이 또한 신뢰하기 어렵다는 점이 지적된 바 있다(岡田精司, 1969,`孝德紀批判の一 試論a, 日本史籍論集(上), 吉川弘文館). 770) 백제의 조사가 바쳤다 : 주 694) 참조. 771) 佐平綠福 : 綠福이 이름으로 다른 곳에 보이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72) 巨勢德太臣 : 황극 2년(643) 11월에 蘇我入鹿의 명령을 받고 斑鳩宮에 있던 山背王을 공격한 바 있고, 대화 원년(645) 7월에는 고구려 사신에게 천황의 詔를 전하였다. 대화 5년(649) 4월에 左 大臣으로 승진한 후 제명 4년(658) 정월에 사망하였다. 巨勢臣은 許勢臣이라고도 한다. 773) 明神御宇日本天皇 : 일본서기 황극 2년 2월조에 明神御宇日本倭根子天皇, 同年 3월 壬午條 에 現爲明神御八島國天皇 과 비슷한 표현으로 神으로서 세계를 통치하는 일본의 천황 이라는 의미이다. 律令 公式令 詔書式條에 明神御大八洲天皇 이라는 표현과 續日本紀 卷1 文武 元 年 8月條의 天皇卽位 宣命에도 現御神止大八島國所知天皇 이라는 비슷한 표현이 보인다. 皇極 朝 단계의 이러한 표현은 日本 등 후대의 용어가 보이는 점을 미루어 日本書紀 편찬자의 윤 색으로 볼 수 있다. 774) 皇祖의 시대 : 神功皇后의 攝政時期를 일컫는다. 775) 세 줄로 꼰 그물 : 日本과 百濟 그리고 任那 삼국의 결합을 비유한 표현이다. 776) 三輪栗 君東人 : 三輪栗 君은 복성으로 栗 에 있었던 三輪君의 일족을 가리킨다. 三輪君은 현 奈良縣 大和盆地 동남부의 三輪지방에서 기반을 잡고 있었던 씨족이다. 束人은 이름이다. 후 문의 三輪君東人과 동일인이다. 777) 馬飼造 : 대화조정의 말을 관리하던 伴造씨족이다. 馬飼首도 같은 임무를 띠고 있었지만 倭馬飼 首 河內馬飼首 등과 같이 지방의 伴造씨족이었다. 이들을 중앙에서 총괄한 것이 馬飼造이다. 778) 鬼部達率意斯 : 鬼部는 백제왕도 5부 가운데 하나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것은 알 수 없다. 意斯 는 이름이다.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79) 能仁 : 석가모니. 780) 大法師 : 聖德太子補闕記 에는 大 法師로 나온다. 781) 福亮 : 聖德太子傳私記 에 인용된`法起寺塔露盤銘a에는 戊戌年(638) 福亮僧正이 彌勒像을 제 조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782) 惠雲 : 舒明 11年(639) 秋9月에 惠隱(推古 16년 9월에 隋使 裴世淸이 귀국할 때 함께 따라감)과 함께 신라를 거쳐 귀국했다고 전하지만 당에 건너간 시기에 대해서는 관련 기록이 없어 알 수 없다. 783) 常安 : 南淵請安. 주 724) 참조. 784) 靈雲 : 일본서기 서명 4년(632) 추8월조에 唐使 高表仁을 따라 僧旻 및 신라의 送使와 함께 귀국한 기사가 보인다. 하지만 渡唐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785) 惠至 : 白雉 3年 4月條의 惠資와 동일인일 것으로 추정된다. 786) 寺主僧旻 : 寺主는 飛鳥寺의 대표자를 말한다. 僧旻(?~653)은 도래계 학문승으로 추고 16년 (608) 小野妹子를 따라 隋로 건너가 유학하다가 舒明 4年(632) 추8월에 唐使 高表仁을 따라 귀 국한다. 645년 대화개신 후 高向玄理와 함께 國博士로 임명되고 이듬해 十師의 일원이 되어 개

84 166 惠妙789)를 十師790)로 삼는다. 특별히 惠妙法師를 百濟寺의 寺主로 삼는다. 이 十師들은 마 땅히 여러 승려들을 가르치고 이끌어 반드시 불법에 따라 불교를 수행하도록 하라. 무릇 천황으로부터 伴造에 이르기까지 세우고자 하는 절 가운데 조영할 수 없는 경우 짐이 모 두 도와서 짓도록 하겠다. 지금 寺司들과 寺主를 임명한다. 여러 절을 순행하여 僧尼 奴 婢 田畝의 실정을 조사하여 모두 빠짐없이 아뢰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來目臣791)<* 이름이 빠져 있다.> 三輪色夫君792) 額田部連甥793)을 法頭로 삼았다. 大化 2년(646) 2월 甲午朔 戊申 2월 갑오삭 무신(15일). (중략) 고구려 백제 임나 신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調賦를 바쳤다. 日本書紀 167 大化 4년(648) 2월 壬子朔 2월 壬子朔(1일). 三韓에 學問僧을 보냈다. 白雉 원년(650) 2월 庚午朔 戊寅 2월 경오삭 무인(9일). 穴戶國司 草壁連醜經(쿠사카베노무라지시코후)794)이 白雉(흰 꿩)795)를 바치며 國造首의 同族 贄(니에)796)가 정월 9일에 麻山(오노야마)797)에서 잡았습 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이 일을 百濟君798)에게 물어보니 百濟君이 後漢 明帝 永平 11년 에 흰 꿩이 어떤 곳에 나타났다고 합니다. 라고 하였다. 또한 沙門 등에게 물으니 사문 등은 들어보지도 본적도 없는 일입니다. 마땅히 천하에 사면을 내리시어 민심을 기쁘게 하십시오. 라고 대답하였다. 道登法師799)는 옛날 고구려가 절을 짓고자 여러 지역을 살 신정치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787) 道登 : 日本靈異記 上 12話에 고구려에 유학하고 元興寺에 거주하였다고 한다. 788) 惠隣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89) 惠妙 :?~680. 후문에 의하면 百濟寺의 寺主가 되었다고 한다. 白雉 5年(654) 2月條의 學問僧 惠妙와는 다른 사람. 百濟寺는 백제멸망 이전에 백제계 도래인들에 의해 난파에 건립된 절이다. 百濟寺는 10세기초까지 존속하였는데 그 관리와 운영주체는 백제왕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市 古晃, 2003,`百濟王氏と百濟郡a, 古代日本と百濟, 大巧社). 日本靈異記 에는 제명조에 백 제에서 건너 온 釋義覺이라는 승려가 難波百濟寺 에 거주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주 949)과 주 960) 참조). 790) 十師 : 唐은 武德 2年(619: 추고 27)에 十大德을 두어 승니를 통제하도록 하였다. 당시 당에 유 학하고 있었던 僧旻 등이 이 제도를 도입하여 추고조의 僧正 僧都를 대신해서 十師制를 만들었 다. 十師는 白雉 2年 3月條 이후에는 더 이상 보이지 않고, 天武 2年 12月條에 僧正 僧都가 다 시 나타난다. 791) 來目臣 : 新撰姓氏錄 右京皇別條에 蘇我稻目宿 의 후손으로 나오고, 大和皇別條에는 久米臣 으로 나온다. 天武 13年 11월 朝臣姓을 사성받는다. 792) 三輪色夫君 : 三輪君에 대해서는 주 776) 참조. 大化 5年 5月에 신라에 파견된다. 793) 額田部連甥 : 額田部連에 대해서는 주 41)과 주 551) 참조. 甥은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 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94) 穴戶國司 草壁連醜經 : 穴戶는 본래 下關海峽을 가리킨다. 穴戶國은 후에 長門國으로 이름이 바뀐 다. 草壁連은 천무 13년 12월에 宿 姓을 사성받는다. 醜經는 이름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펴보고 있을 때 어느 곳에서 白鹿(흰 사슴)800)이 천천히 지나갔습니다. 이에 그 곳에 절을 세우고 白鹿園寺801)라고 명명하고 불법을 심었습니다. 또, 白雀(흰 참새)802)이 어떤 절의 田莊803)에 나타났습니다. 國人들이 모두 祥瑞라고 하였습니다. 또, 大唐에 보냈던 사신이 죽은 三足烏804)를 가지고 오니 國人들이 祥瑞라고 하였습니다. 이것들은 비록 대수롭지 않지만 상서로운 동물이라고 하는데, 하물며 白雉(휜 꿩)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795) 白雉 : 延喜式 治部省 祥瑞條에 의하면 中瑞에 해당된다. 796) 國造首 의 同族 贄 : 首와 贄 모두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797) 麻山 : 山口縣 美 (미네)郡 美東(미토우)町 赤(아카)村에 있는 산. 798) 百濟君 : 豊璋을 일컫는다(주 716) 참조). 799) 道登法師 : 대화 원년(645) 8월에 설치된 十師 가운데 한명(주 787) 참조). 800) 白鹿 : 延喜式 治部省 祥瑞條에 의하면 上瑞에 해당된다. 801) 白鹿園寺 : 석가모니가 처음으로 설법한 땅이 鹿野苑(사슴이 있는 庭園이라는 뜻)인데 이것을 鹿 園이라고도 한다. 본조에서는 白鹿이 나타났기 때문에 白鹿園寺라고 부르게 된 듯하다. 802) 白雀 : 延喜式 治部省 祥瑞條에 의하면 中瑞에 해당된다. 803) 田莊 : 절이나 호족의 사유지를 말한다. 804) 三足烏 : 延喜式 治部省 祥瑞條에 의하면 上瑞에 해당된다.

85 168 甲申(15일). 조정의 隊仗805)을 元旦의 의식과 같이 정렬시켰다. 左右大臣806)과 百官들이 紫門807) 밖에서 네 줄로 병렬하였다. 要田臣飯蟲(아와타노오미이이무시)808) 등 4명이 꿩을 실은 수레를 끌고 앞서서 갔다. 左右大臣과 百官 및 백제군 豊璋, 그 아우 塞城과 忠勝,809) 高麗의 侍醫毛治,810) 新羅의 侍學士811) 등을 거느리고 中庭812)에 이르렀다. 하4월 여름 4월. 신라가 사신을 보내 調를 바쳤다. <*或本에는 이 천황 때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이 해마다 사신을 보내 공헌하였다고 하였다.> 日本書紀 白雉 3년(652) 하4월 여름 4월. (중략) 신라 백제가 사신을 보내 調와 물건을 바쳤다. 白雉 4년(653) 6월 6월. 백제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와 물건을 바쳤다. 白雉 2년(651) 白雉 5년(654) 하6월 추7월 甲戌朔 丁酉 여름 6월. 백제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와 물건을 바쳤다. 169 가을 7월 갑술삭 정유(24일). 西海使 吉士長丹813) 등이 백제 신라가 보낸 사신과 함께 筑紫에 이르렀다. 805) 隊仗 : 令義解 有非違條에 의하면 衛士의 陣을 隊라고 하고, 兵衛 內舍人의 陣을 仗이라고 한다. 806) 左右大臣 : 이 시기 左大臣은 巨勢德陀古臣, 右大臣은 大伴長德連이다. 807) 紫門 : 천황이 거처하는 內裏를 紫宮이라고 하기 때문에 紫門은 紫宮의 정문을 가리킨다. 808) 粟田臣飯蟲 : 粟田臣은 新撰姓氏錄 右京皇別條에 의하면 天足彦國人命의 후예씨족으로 나온 다. 飯蟲은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여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809) 忠勝 : 日本書紀 齊明 6年(660) 10月條에는 풍장의 叔父로 나온다(送王子豊璋及妻子與其叔父 忠勝等). 이에 白雉 元年 2월조의 忠勝은 武王의 아들인 풍장과 형제관계가 되고, 齊明 6年의 忠勝은 의자왕의 아들인 풍장과 숙질관계가 된다고 이해하기도 한다. 이 견해는 日本書紀 의 舒明紀와 齊明紀에 보이는 豊璋을 同名異人으로 간주하여 舒明 3年(631)條의 豊璋은 武王의 아 들로, 齊明 6年(660)의 豊璋은 義慈王의 아들로 비정한데서 비롯된 것이다(노중국, 1994-b, 앞 의 글). 한편 백치 원년 2월조의 其弟 는 풍장의 동생이 아니라 백제왕(의자왕)의 동생으로 해 석해야 한다는 견해도 있다(山尾幸久, 1973, 앞의 글). 810) 侍醫毛治 :`職員令a內藥司條에 의하면 4인이 侍醫에 임명되었다. 고구려에서 侍醫를 파견하였 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외교사신단 가운데 毛治라는 의사가 있었고 그가 왜국에 남아 侍醫 가 되었을 가능성이 크다. 811) 侍學士 :`東宮職員令a에 東宮學士 란 侍學士가 보인다. 본조의 侍學士는 신라 출신이다. 신라 에서 학사를 파견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지만 신라의 인질 金多逢과 함께 온 인물 중에 효덕 조의 侍學士가 된 자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12) 中庭 : 內裏의 庭 是歲 이 해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조문하였다. 권26 天豊財重日足姬天皇 齊明天皇814) 원년(655) 추7월 己巳朔 己卯 가을 7월 기사삭 기묘(11일). 難波의 조정에서 북쪽<*北越815)>의 蝦夷(에미시)816) 99인, 813) 西海使 吉士長丹 : 제2차 遣唐大使. 백치 4년(653) 5월 파견된 견당사 2船 가운데 大使 吉士長 丹이 타고 있던 제1서가 한반도를 경유하는 北路를 이용했기 때문에 西海使라고 한 듯하다. 이 때 제2선에는 副使 吉士驅가 타고 있었으며 모두 121명이 파견되었다. 白雉 5년 7월에 귀국하 였다. 814) 齊明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7대 천황(재위 655~661). 제35대 皇極天皇이 중조하여 제 명천황에 즉위하였다(주 728) 참조). 660년에 백제 부흥을 위한 원군을 파견하고자 북큐슈에 갔 으나 이듬해 병으로 사망한다. 815) 北越 : 北陸道의 동북 지역. 현 新潟縣 지역으로 옛 국명은 越國(코시노쿠니)이다. 816) 蝦夷 : 일본 고대 동북지방에서 北海道에 걸친 지역의 주민을 대화조정측에서 부른 호칭이다. 보 통 에미시 라고 부르지만, 平安시대 이후 문헌에서는 모두 에비스 라고 나온다. 宋書 卷97

86 170 日本書紀 171 동쪽의 <*東陵奧817> 蝦夷 95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아울러 백제의 조사 150인에게도 상에 담을 둘러쌓았다. <*田身은 산 이름이다. 이것을 太務(타무)라고 한다.> 또한 嶺上 베풀었다. 의 두 槻樹 근처에 觀(樓臺)을 세웠다. 兩槻宮824)이라 하였다. 또는 天宮이라고도 불렀다. 是歲 이 해에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조를 바쳤다. <*百濟의 大使는 西部達 率余宜受818), 副使는 東部恩率調信仁819)으로 모두 100여인이었다.> 蝦夷 人(하야토)820) 이 무리를 이끌고 내속하여 조정에 알현하고 물품을 바쳤다. 신라는 따로 及飡彌武821)를 質로 삼아 才伎者 12명을 바쳤다. 彌武는 병들어 죽었다. 齊明天皇 2년(656) 是歲 이 해에 飛鳥의 岡本에 다시 궁터를 정했다. 이때 고구려 백제 신라가 함께 사신을 보내 조를 바쳤다. 이에 이 궁터에 감색 장막을 치고 연회를 베풀었다. 마침내 궁전이 세 워졌다. 천황이 거처를 옮기고, 後飛鳥岡本宮822)이라 명했다. 田身嶺(타무노미네)823)의 정 이때 [천황은] 사업을 일으키는 것을 좋아했다. 水工에게 香山의 서쪽에서 石上山825)에 이 르기까지 도랑을 파도록 하였다. 배 200척으로 石上山의 돌을 싣고, 강의 흐름을 타고 궁의 동쪽 산까지 와서 돌을 쌓아 담을 만들었다. 그때 사람들이 미친 생각으로 만든 도 랑이다. 이 도랑을 만드는데 인부 삼만 여 명을 동원했고, 담장을 쌓는 데 칠만여 인부가 낭비되었다. 궁궐 재목은 썩고, 산 정상은 무너졌다. 라고 비방하였다. 또한 돌로 산의 언덕을 만들지만, 만드는 대로 저절로 무너질 것이다.<*생각건대 아직 완성되기 전에 이 와 같이 비방하였던 듯하다.> 라고 비방하였다. 또 吉野宮826)을 만들었다. 西海使佐伯連 繩(사에키노무라지타쿠나와)827)<*관위와 계급이 빠져 있다.>와 小山下難波吉士國勝(나 니와노키시쿠니카츠)828) 등이 백제에서 돌아와 앵무 한 쌍을 헌상하였다. 齊明天皇 3년(657) 是歲 이 해에 사신을 신라에 보내 장차 沙門智達829) 間人連御 列傳 倭國條의 倭王武의 상표문에 보이는 毛人이 에미시를 가리킨다. 에미시 라고 불린 사람들 은 율령국가의 華夷思想의 영향아래 일반 倭人과 문화적으로 다른 부분이 의도적으로 강조되고, 이들은 수렵을 생업으로 하며 농경을 하지 않는 야만적인 사람들이기 때문에 정복 동화되어야 한다는 것이 정당화되기도 하였다. 日本書紀 에는 神武卽位前紀 10월에 처음 나오지만 이는 일 반적으로 7세기 후반 東北經營 이후의 사실이 소급되어 기록되었다고 보고 있다(坂本太郞, 1964,`日本書紀と蝦夷a, 日本古代史の基礎的硏究 上, 東京大學出版會). 817) 東陵奧 : 현재 동북지방의 거의 전 지역에 해당된다. 화동 5년(712)에 出羽國이 分置되었다. 818) 西部達率余宜受 : 西部는 백제왕도 5부 가운데 下部에 해당된다. 余宜受의 余는 백제왕성인 夫 餘의 약자이고, 宜受는 이름이다. 다른 곳에 보이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819) 東部恩率調信仁 : 東部는 백제왕도 5부 가운데 上部에 해당된다. 調는 성이고 信仁은 이름이다. 820) 人 : 큐슈남부 大隅 薩摩지방에 거주하였던 주민을 가리키며 하야토 라고 부른다. 일본서 기 에서는 夜句人(推古 24), 혹은 多 人(천무 11) 등으로 나오기도 한다. 6세기에 이르러 대화 정권과 교류를 가지기 시작하였다. 683년(천무 12) 이후 대화조정에 완전히 복속되어 정기적으 로 조공하며 군사와 가무연주 등을 담당하게 되었다. 8세기 초에는 반란을 일으키기도 한다. 821) 及飡彌武 : 及飡은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9위에 해당되는 級 이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彌武 는 大化 5년(649) 是歲條에 보이는 金多逢 다음의 인질이다. 822) 後飛鳥岡本宮 : 舒明天皇의 飛鳥岡本宮과 같은 지역에 조영 혹은 개축되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30) 依綱連稚子831) 등을 너 後飛鳥岡本宮이란 舒明天皇의 飛鳥岡本宮에 대한 제명천황의 飛鳥岡本宮이라는 의미일 것이다. 823) 田身嶺 : 多武峯. 현 櫻井(사쿠라이)市 남부에 위치한 明日香(아스카)村과 경계를 이루는 산. 824) 兩槻宮 : 續日本紀 大寶 2年 3月條에 令大和國. 繕治二槻離宮 이라는 기록이 보인다. 大和 志 에는 多武峯의 서북방면에 根槻라는 지명이 남아있는데 이 곳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825) 石上山 : 현 奈良縣 天理(텐리)市 石上(이소카미)町 부근의 산. 826) 吉野宮 : 최근 발굴조사에서 吉野郡 吉野町 宮龍의 吉野川 부근에 7세기 후반의 건물 및 정원 유적이 발견되어 이 지역이 吉野宮地일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일본서기 응신 19년 10월조, 웅략 2년 10월조에는 吉野宮 行幸기사가 보이고, 천지 10년 10월조에는 大海人皇子가 吉野宮에 은거하였다는 기록이 있다. 827) 西海使佐伯連 繩 : 白雉 5년 7월조에도 遣唐西海使의 귀국기사가 보이는데 본조의 西海使는 遣百濟使이다. 佐伯連은 주 508) 참조. 繩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828) 小山下難波吉士國勝 : 小山下는 대화 5년(649) 2월에 제정된 19관위제 가운데 제14위. 難波吉 士는 敏達 4年(575) 夏4月條 주 참조. 國勝은 이름으로 황극 원년(642) 2월조의 國勝吉士水鷄 와 다른 인물이다. 829) 沙問智達 : 제명 4년 7월조에 신라선을 타고 당에 건너간다.

87 172 日本書紀 173 희 나라 사신에 딸려서 大唐에 보내려고 한다. 라고 하였는데, 신라는 받아들이지 않았 포로로 잡아 갔다. 고 아뢰었다. 이로 말미암아 국가(왜국)는 병사들을 서북 경계에 진영 다. 이로 말미암아 沙門智達 등이 돌아왔다. 西海使小花下阿曇連頰垂,832) 小山下津臣 을 세우도록 하고, 성책을 수리하고 산천의 길을 가로막을 징조이다라고 하였다.> 또한 833) <* 는 俱豆磨(쿠츠마)라고 한다.>가 백제에서 돌아와 낙타 한 마리, 당나귀 두 834) 835) 라고 하였다. 마리를 바쳤다. 石見國 이 白狐(흰 여우) 가 나타났습니다. 齊明天皇 4년(658) 是歲 이 해 (중략) 出雲國(이즈모노쿠니)836)이 북쪽 바닷가에 물고기가 죽어 쌓여 있는데, 두 께가 석 자 정도 됩니다. 그 크기는 복어만 하고, 참새 같은 부리와 바늘 같은 비늘이 있습 西海使 小花下 阿曇連頰垂가 백제에서 돌아와 백제가 신라를 정벌하고 돌아오는데 이때 말이 스스로 절의 금당 주위를 밤낮으로 쉬지 않고 돌았습니다. 오직 풀을 먹을 때만 멈 추었습니다. 라고 하였다.<*或本에는 庚申年에 이르러 적에게 멸망할 징조였다. 고한 다.> 齊明天皇 5년(659) 추7월 丙子朔 戊寅 니다. 비늘의 길이는 여러 치였습니다. 俗人들은 참새가 바다에 들어가 물고기가 되었기 가을 7월 병자삭 무인(3일). 小錦下840) 坂合部連石布(사카이베노무라지이와시키),841) 大 때문에 이를 雀魚라 부릅니다. 라고 하였다. <*或本에는 庚申年(660) 7월,837) 백제가 사자 仙下842) 津守連吉祥(츠모리노무라지키사)843)이 唐國에 사신으로 파견되었다. 이에 道奧蝦 를 보내 大唐과 신라가 힘을 합해 우리를 공격하였다. 이미 義慈王과 王后838) 太子839)를 844) 에는 同天皇(齊明) 치세에 小 夷 남녀 2인을 당의 천자에게 보였다. <* `伊吉連博德書a 830) 間人連御廐 : 間人連은 천무 13년 12월에 宿 姓을 사성받는다. 같은 間人連 인물로 일본서기 추고 17년(609) 동10월조에 鹽蓋란 인물이 나온다. 御廐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831) 依綱連稚子 : 物部依綱連은 新撰姓氏錄 河內神別條에 의하면 神饒速日命의 후예씨족으로 나 온다. 稚子은 이곳에만 보인다. 832) 小花下阿曇連頰垂 : 小花下는 대화 5년(649) 2월에 제정된 19관위 가운데 제10이다. 阿曇連은 주 709) 참조. 頰垂은 이름이다. 제명 4년(658) 시세조에도 백제로부터 귀국했다는 기록이 보 이고, 천무 9년(680) 9월조에는 견신라사로 나온다. 833) 小山下津臣 : 津臣은 備中國都宇郡(현 岡山縣 都窪郡)의 호족으로 吉備臣과 동족이다. 는 이름이다. 834) 石見國 : 현 島根(시마네)縣 서부지역에 있었던 國. 835) 白狐 : 延喜式 治部祥瑞에 上瑞로 기록되어 있다. 836) 出雲國 : 현 島根(시마네)縣 동부지역에 있었던 國. 율령제하에서도 國司와는 별도로 出雲國臣 이 出雲國造로 임명되었다. 837) 7월 : 제명 5년(659) 7월은 나당군이 백제를 공격한 시기로 원래 백제의 사신파견은 7월이 아닌 9월로 보아야 한다(齊明 6年 9月 己亥朔條 참조). 838) 王后 : 의자왕의 왕비를 일컫는다. 제명 6년(660) 추7월조에 인용되어 있는`日本世記a에는 君 大夫人으로 나온다. 웅략 20년조에는 개로왕의 왕비를 大后라고 지칭하기도 하였다. 839) 太子 : 태자 隆을 일컫는다. 제명 6년(660) 추7월조에 인용되어 있는`伊吉連博德書a 에도 보인다. 840) 小錦下 : 대화 5년(649) 2월에 제정된 19관위제에는 보이지 않고, 천지 3년(664) 2월에 제정된 26관위제 가운데 제12위에 해당된다. 이 小錦下는 천무 14년(685) 춘정월에 淨御原令制에서 直 大廣肆로 바뀌었으며 대보령제의 종5위하에 상당한다. 제명 5년(659) 추7월조 본문기사는 분주 인`이길련박덕서a를 참고로 작성되었으며 본문과 분주 모두 坂合部連石布의 관위가 小錦下로 나오는 것을 통해서 천지 3년 2월 이후에 작성되었음을 알 수 있다. 841) 坂合部連石布 : 坂合部連은 境部連이라고도 하며 천무 13년(684) 12월에 宿 姓을 사성받는 다. 新撰姓氏錄 左京神別條에 의하면 坂合部宿 를 火命明의 8대손 邇倍足尼의 후예라고 한 다. 백치 4년(653) 하5월조에는 坂合部連氏의 인물로서 견당사를 따라 당의 유학길에 오른 坂 合部連磐積(石積)이 보이는데, 천지 4년(665)에 견당사로 파견된 바 있고, 천무 11년(682) 3월 에는 新字 44권 작업에도 참여하였다. 石布는 磐 또는 石敷로 나오기도 한다. 제명 2년 (656) 9월에 副使로서 고구려에 파견된 경험이 있고, 續日本紀 天平寶字 元年(757) 12월에 는 小錦下坂合部石敷로 나오는데 그가 생전에 쌓은 공으로 인해 자식이 功田 6町을 받았다고 한다. 842) 大仙下 : 大山下로 나오기도 하며 대화 5년(649)의 19관위 가운데 제12위, 천지 3년(664) 2월의 26관위 가운데는 제15위에 해당된다. 이 大山下는 天武 14年 春正月에 勤大廣肆로 바뀌었다. 843) 津守連吉祥 : 津守連은 천무 13년(684) 12월에 宿 姓을 사성받는다. 吉祥은 제명 7년(661) 5월 에 귀국한 후, 善隣國寶記 에 의하면 천지 3년(664) 9월에 伊吉史博德과 僧智辨 등과 함께 大 宰府에 머물고 있던 당사 郭務悰에게 축자대재의 명의로 된 칙지를 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844)`伊吉連博德書a: 제4차 견당사의 일원이었던 伊吉連博德이 당을 오가며 겪은 일 및 여정을 작

88 174 日本書紀 175 錦下坂合部連石布와 大山下津守吉祥連 등이 2척의 배로 吳唐의 길845)을 이용하여 사신으 고 도망하여 括州851)에 이르렀다. 州縣의 관리가 洛陽京852)으로 보내주었다. 16일 한 밤중 로 갔다. 己未年 7월 3일에 難波의 三津浦846)에서 출발하였다. 8월 11일에 筑紫의 大津浦847) 에 吉祥連의 배가 越州 會稽縣 須岸山853)에 도착하였다. 북동풍이 불었는데 바람이 갑자 를 출발하였다. 9월 13일에 백제의 南端에 있는 섬에 이르렀는데 섬의 이름은 명확히 알 기 매우 심해졌다. 22일에 행렬이 餘姚縣854)에 도착하였다. 타고 온 큰 배와 여러 調度物 수 없다. 14일 寅時(오전 3시부터 5시)에 두 배가 연이어 대해로 접어들었다. 15일 해가 은 그곳에 남겨 두었다. 윤 10월 1일에 越州 관아에 이르렀다. 10월 15일 역마를 타고 입 질 무렵에 石布連의 배가 역풍을 만나 남해의 섬에 표류했는데 섬의 이름은 爾加委848)이 경하였다. 29일 달려가 東京에 이르렀다. 천자는 동경에 있었다. (중략) 일을 마치자 칙 었다. 그때 섬사람들에게 살해당하였다. 東漢長直阿利麻(야마토노아야노나가노아타이아 지가 있었는데 국가는 내년에 반드시 海東을 정벌하는 일855)이 있을 것이다. 너희들 왜 리마)849)와 坂合部連稻積(사카이베노무라지이나츠미)850) 등 5인은 섬사람의 배를 훔쳐 타 의 사신들은 동쪽으로 돌아갈 수 없다. 고 하였다. 마침내 西京856)에 머물러 특별한 곳에 유폐되었다. (중략) 이로 인해 해를 거쳐 고생하였다. (후략) 고 하였다.> 성한 개인기록물이다. 日本書紀 齊明紀에만 分註의 형태로 3군데(제명 5년 7월조, 同 6년 7 월조, 同 7년 5월조)에 걸쳐 인용되고 있다. 그 내용은 왜국의 제4차 견당사가 제명 5년(659) 7 월에 筑紫에서 출발하여 제명 7년(661) 5월에 귀국하기까지의 왕복과정 및 당에서 있었던 일들 에 대한 것이다. 내용 중에는 한반도 원정을 앞둔 당이 왜국의 사신단을 長安에 가둔 사실이나 耽羅가 왜국에 처음으로 사신을 파견하게 된 경위 등 중국이나 한반도 자료에는 볼 수 없는 내용 도 전하고 있어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伊吉連博德書a 를 작성한 伊吉連博德은 일본서 기 에는 주로 왜국의 외교를 담당했던 인물로 나온다. 처음 제4차 견당사로서 파견되었다가 귀 국한 후 천지 3년(664) 9월에는 津守連吉祥 등과 함께 대재부에 머물고 있던 당사 곽무종에게 축자대재의 명의로 된 칙지를 전하는 임무를 수행하였다. 천지 6년 11월에는 유인원의 사자인 司 馬法聰의 송사로서 백제까지 건너갔다가 이듬해 정월에 귀국하였다. 지통 9년(695) 9월에는 小 野朝臣毛野와 함께 견신라사로 임명되기도 하였다. 이처럼 외교가로서 활동할 수 있었던 것은 博德 집안의 내력과도 관계가 깊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舒明 4년(632) 10월에 難波津에서 머 물고 있던 唐使高表仁을 접견한 사람으로 伊吉史乙等이 보인다. 伊吉連博德의 원래 씨성이었던 伊吉史(壹伎史)는 天武 12년(683) 10월에 連姓으로 사성받는다( 新撰姓氏錄 左京諸蕃 上에 의 하면, 伊吉連은 長安人 劉家楊雍의 후예로 전하고 있다). 이 때 같이 史姓에서 連姓을 받은 씨족 으로 船史 阿直史 등이 있었는데 모두 도래계씨족으로 국가의 기록을 담당하였다. 伊吉史도 도 래계씨족으로 외교 분야뿐만 아니라 문필에도 많은 인물을 배출한 씨족이었다. 續日本紀 에의 하면 文武 4年(700) 伊吉連博德은 刑部親王 藤原朝臣不比等 薩弘恪 등과 함께 율령찬정에 종 사하였는데, 이들 중에서 薩弘恪은 역사편찬에 참여하였을 것으로 추측되는 사람이다. 845) 吳唐의 길 : 왜국의 견당사가 북큐슈를 출발하여 한반도 남서부를 경유하지 않고 중국의 강남지 역으로 직행하는 南路를 말한다. 846) 三津浦 : 日本書紀 仁賢 6年 是歲條에 보이는 難波御津 또는 難波大津. 欽明 16年 春2月條 難 波津 주 참조. 847) 大津浦 : 현 福岡(후코오카)市의 博多(하카타)港의 옛 이름으로 那津(나노츠)이라고도 한다. 848) 爾加委 : 자세히 알 수 없다. 849) 東漢長直阿利麻 : 東漢長直은 東漢氏의 일족으로 황극 3년 동12월조에 蘇我氏의 명령에 따라 齊明天皇 6년(660) 하5월 是月 이 달 (중략) 또한 나라 백성들이 까닭 없이 무기를 들고 길을 오갔다.<*國老가 백제국 이 땅을 잃을 징조인가라고 하였다.> 추7월 庚子朔 乙卯 가을 7월 경자삭 을묘(16일). 고구려 사신 乙相賀取文857) 등이 돌아갔다. (중략) <*고구 858) 에 7월에 운운. 春秋智859)가 大將軍 蘇定方의 손을 빌려 백 려 沙門道顯의`日本世記a 모削寺(法器山寺)를 지었다. 阿利麻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東漢氏는 주 192) 참조. 850) 坂合部連稻積 : 坂合部連는 주 841) 참조. 稻積는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 다. 851) 括州 : 현 중국 浙江省의 麗水. 852) 洛陽京 : 후문의 東京. 853) 越州 會稽縣 須岸山 : 越州는 현 杭州灣 남쪽 일대로 括州의 북쪽에 위치한다. 會稽縣은 현 浙江 省의 興紹, 須岸山은 舟山열도의 한 섬으로 須岸島를 가리킨다. 854) 餘姚縣 : 현 浙江省의 餘姚 855) 海東을 정벌하는 일 : 海東은 한반도를 가리킨다. 856) 西京 : 당의 수도 長安. 857) 乙相賀取文 : 乙相은 고구려의 관위로 추측된다. 고구려의 관위 중 相계열로는 大相 從大相 小相 狄相 4종류가 있지만 乙相이 이 가운데 어떤 것을 가리키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賀取 文은 고구려 외교사절의 대사로서 齊明 6年 春正月에 왜국에 파견되었다. 858) 沙門道顯의`日本世記a: 道顯은 원래 고구려 승려로서 생몰연대와 渡倭시기는 명확히 알 수 없

89 176 日本書紀 177 제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혹은 백제가 스스로 망하였다고 한다. 妖女인 君大夫人860)이 을 만나 볼 수 있었다. 11월 1일에 將軍 蘇定方 등이 사로잡은 백제왕 이하 태자 隆862) 등 무도하게 권력을 장악하고 현량한 사람을 죽였기 때문에 화를 자초한 것이다. 신중하지 여러 왕자 13명, 太佐平863) 沙宅千福,864) 國辨成865) 이하 37명, 모두 50여 명을 조정에 진 않을 수 있겠는가. 라고 하였다. 그 注에 신라의 春秋智는 內臣 蓋金861)에게 원하는 바를 상하였다. 바로 천자에게 데리고 가니 천자는 恩勅을 내려 앞에서 바로 풀어주었다. 19일 얻지 못하자 당에 사신으로 가서 신라의 의관을 버리고 천자에게 아첨을 떨며 도움을 청 에 위로를 받고, 24일에 東京에서 출발하였다. 고 하였다.> 하여 이웃나라에 화를 입히고 그 뜻하는 바를 이루었다. 라고 하였다.`伊吉連博德書a 에 庚申年 8월 백제가 이미 평정된 후, 9월 12일 사신들은 본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다. 19 일에 西京(長安)에서 출발하였다. 10월 16일 東京(洛陽)에 돌아와 비로소 阿利麻 등 5명 9월 己亥朔 癸卯 9월 기해삭 계묘(5일). 백제가 達率<*이름이 빠졌다>과 沙彌覺從866) 등을 보내서 말하 기를<*或本에는 도망해 와서 國難을 고했다고 한다.> 올해 7월에 신라가 힘을 믿고 이 웃나라와 가까이 지내지 않으면서 唐人을 끌어들여 백제를 멸망시켰습니다. 임금과 신하 다. 다만 왜국에 건너와 당시 국제사정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바탕으로 왜국 내에서 藤原鎌足과 깊은 관계를 유지하며 정치 군사 고문의 역할을 수행했던 것으로 여겨진다. 도현이 작성한`日 本世記a는 日本書紀 齊明紀와 天智紀에 분주의 형태로 4군데에 걸려 인용되었다. 齊明紀의 `日本世記a기사로는 백제의 멸망을 전하는 기사(齊明 6年 秋7月條)를 비롯하여 鬼室福信이 왜 국에 解의 송환을 요청하는 기사(齊明 7年 夏4月條)와 福信이 唐포로를 헌상하는 기사(齊明 7 年 11月條)가 있다. 그리고 天智紀에는 藤原鎌足의 사망과 관련하여 도현이 애도를 표한 기사(天 智 8年 冬10月條)가 있다. 이상의 기사는 일본서기 에 인용될 때 분주로 인용되었을 뿐만 아니 라 본문작성에도 참고 되었다(박재용, 2007,` 日本書紀 에 인용된 道顯의`日本世記aa, 한국 고대사연구 47). 이러한`日本世記a는 중국이나 한반도 자료에는 볼 수 없는 내용도 전하고 있 어서 그 사료적 가치가 매우 크다. 859) 春秋智 : 신라의 金春秋. 日本書紀 에서 春秋智라는 인명은 본조의`日本世記a와 제명 6년 9월 조의 或本에만 보인다. 860) 君大夫人 : 의자왕의 왕비. 무령왕릉 출토 유물 가운데 왕비를 大夫人으로 언급한 명문이 있는 점으로 보아 의자왕의 왕비임을 알 수 있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제명 6년 10월에 백제가 멸망 한 후 당에 끌려간 백제의 왕족 중에는 의자왕의 처인 恩古가 있었다. 이 恩古가 의자왕의 왕비 인 君大夫人일 것이다. 日本書紀 흠명 7년(546) 是歲條에 인용된`百濟本記a의 夫人의 표기 등도 함께 고려하면 君大夫人이라는 호칭은 일본식 호칭법에 따른 것이 아니라 원래 백제계 사 료에 의거하였을 가능성이 크다. 이 恩古를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을 대성팔족에 대비되는 비대 성팔족 혹은 신진귀족으로 보고 계백 흑치상지 등의 세력이 바로 그러한 집단일 것으로 추정 하는 견해도 있다(김주성, 1989,`의자왕대 정치세력의 동향과 백제멸망a, 백제연구 19). 861) 蓋金 : 고구려의 蓋蘇文을 일컫는다. 三國史記 蓋蘇文傳에 蓋蘇文에 대해서 혹은 蓋金이라 한다 는 분주가 보인다. 삼국사기 뿐만 아니라 중국측 사서에서도 蓋蘇文과 蓋金이라는 인명표 기가 모두 나온다. 그런데 日本書紀 에는 蓋蘇文 대신 伊梨柯須彌 와 蓋金 이라는 인명표기 로 나온다. 伊梨柯須彌 는 皇極 元年(642) 2月條에 보이는데 伊梨 는 姓인 淵, 柯須彌 는 蓋蘇文을 일본식으로 표기한 것이다. 일본서기 에서 蓋金 이라는 인명표기는 본조의`日本世 記a와 天智 3年 冬10月條 두 곳에만 보인다. 가 모두 포로가 되어 남아 있는 백성도 거의 없습니다.<*或本에는 올해 7월 10일에 당 의 蘇定方이 수군을 거느리고 尾資津867)에 진을 쳤다. 신라왕 春秋智가 병마를 거느리고 怒受利山(누주리노무레)868)에 진을 쳤다. 백제를 협공하여 서로 싸운 지 3일 만에 우리 王 城869)이 함락되었다. 같은 달 13일에 왕성이 파괴되기 시작하였다. 怒受利山은 백제의 동 쪽 경계에 있다. 고 한다.> 이에 西部870) 恩率鬼室福信871)은 매우 분개하여 任射利山(니자 862) 태자 隆 : 三國史記 에 의하면 義慈王 4年(644)에 태자로 봉해졌다. 백제 멸망 후 665년 熊津 都督으로 임명되었다. 그의 묘비명이 낙양에서 출토되었다. 863) 太佐平 : 주 600) 참조. 864) 沙宅千福 : 沙宅은 백제 대성8족 중의 하나인 沙氏의 복성표기이다. 千福은 이름으로`唐平百濟 碑a에는 大首領大佐平沙 千福 으로 기록되어 있다. 865) 國辨成 : 國氏는 백제 대성8족 중의 하나이다. 辨成은`唐平百濟碑a에 沙 千福 과 함께 蘇定 方에 의해 당에 연행된 사람으로 기록되어 있다. 866) 沙彌覺從 : 沙彌는 具足戒를 받지 않은 정식 승려가 되기 이전의 수행승을 일컫는다. 覺從은 이 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867) 尾資津 : 현 충남 보령군의 彌造浦설과 현 경기도 인천의 彌鄒津설이 있다. 문맥상 彌造浦일 가 능성이 크다. 868) 怒受利山 : 三國史記 階伯傳에 보이는 黃山(連山의 옛이름)을 가리킨다. 현 대전광역시의 儒 城에 비정하는 설도 있다. 869) 우리 王城 : 원문은 我王城 으로 사비성을 일컫는다. 여기서 我 라는 표현을 통해서 或本이 백 제인이 작성한 자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870) 西部 : 百濟王都 5部制 가운데 하나인 下部에 해당된다. 欽明 13年 冬10月條의 西部姬氏達率怒 唎斯致契 주 참조. 871) 恩率鬼室福信 : 鬼室福信(?~663)은 백제 무왕의 조카. 627년에 武王의 사신으로 당에 건너간

90 178 日本書紀 179 키노무레)872)<*或本에는 北任敍利山이라고 한다.>에 웅거하고, 達率餘自進873)은 中部874) 또한 원군을 요청하고 아울러 왕자 余豊璋의 보내줄 것을 요청하면서 <*或本에는 佐平貴 久麻怒利城(쿠마누리노사시)875)<*或本에는 都都岐留山(츠츠키루노무레)876)이라고 한다.> 智 達率正珍이라고 하였다> 唐人들이 해충 같은 적을 거느리고 와서 우리 영토를 뒤흔 에 웅거하여, 각각 한 곳에 군영을 만든 뒤 흩어진 군졸을 불러 모았습니다. 이전의 싸움 들어 놓고, 우리의 사직을 전복시켜 우리의 왕과 신하를 포로로 잡아갔습니다. <*백제왕 에서 무기를 다 잃었기 때문에 몽둥이를 들고 싸워 신라군을 깨뜨리고 백제는 그 무기를 義慈, 그의 처 恩古,880) 그의 아들 隆 등과 그 신하 佐平千福 國辨成 孫登881) 등 모두 50 빼앗았습니다. 얼마 후 백제 군사들이 다시 날래고 용맹해져서 당이 감히 공격해 오지 못 여 명이 가을 7월 13일에 蘇定方에게 사로잡혀 唐國에 이송되었다. 무릇 이것의 징조는 하였습니다. 福信 등은 이에 나라 사람들을 모아 왕성을 함께 지켰습니다. 國人들은 佐 이유 없이 무기를 들고 다닌 일일 것이다.> 그러나 백제국은 멀리 천황의 보호에 의지하 平福信 佐平自進 이라고 높여 불렀습니다. 오직 福信만이 영묘하고 용맹한 위세를 발휘 며 다시 사람들을 모아서 나라를 이루었습니다. 바야흐로 이제 원하오니 백제국이 天朝 하여 이미 망한 나라를 부흥시켰습니다. 고 아뢰었다. 에 보내 시위하도록 했던 왕자 豊璋을 맞이하여 國主로 삼으려고 합니다. 고 운운하였 동10월 겨울 10월. 백제 佐平 鬼室福信이 佐平貴智 등을 보내어 당나라 포로 100여 명을 바쳤 다.877) 지금 美濃國(미노노쿠니)878)의 不破(후와) 片縣(가타아가타)879) 2郡의 唐人들이다. 다. 조서를 내려 원군을 요청하는 것은 옛날에도 있었다고 들었다. 위기에 빠진 것을 도 와주고 끊어진 것을 이어주는 것은 恒典에 나타나 있다. 백제국이 곤궁하여 우리나라에 와서 본국이 망하여 어지러운데 의지할 곳도 알릴 곳도 없어 창을 베고 쓸개를 핥는 것과 같이 고생하고 있으니 반드시 구원해 달라고 멀리서 와서 표를 올렸다. 그 뜻을 저버리기 어렵다. 장군들에게 각각 명하여 여러 길로 일제히 나아가라. 구름이 모이고 번개 치는 일이 있고, 백제멸망 후에는 任存城에서 승려 道琛과 함께 부흥운동을 전개하였다(`唐劉仁願紀 功碑a). 이후 왜국에 구원병을 요청하고, 왜국에 있던 풍장을 맞이하여 왕으로 추대하면서 부흥 운동에 더욱 힘썼다. 그러나 부흥운동 과정에서 도침과 불화로 인해 도침을 죽이고, 그 후 풍장 과도 갈등을 빚고 끝내 풍장에게 살해당한다. 본조에서 鬼室福信의 관등인 恩率은 백제 16관등 가운데 제3위이다. 그런데 제명 7년 11월조에 인용된 或本에는 佐平으로 나오며,`唐劉仁願紀功 碑a에는 率(제5위)로 나온다. 872) 任射利山 : 任存城. 현 충남 대흥면의 봉수산성일 것으로 추정된다(심정보, 2002,`백제부흥운 동과 임존성a, 백제부흥운동의 재조명, 공주대 백제문화연구소). 873) 達率餘自進 : 余自信(天智 2年 9月條)이라고도 하며 餘씨로서 왕족출신이다. 日本書紀 에 의하 면 천지 8년(669)에는 관등이 좌평으로 나오고 佐平鬼室集斯 등 남녀 7백 여명과 함께 近江國 蒲 生郡으로 옮겨 살았다. 671년 정월에는 大錦下(天智 3년 2월에 제정된 26관위제 가운데 제9위)를 제수받았다. 新撰姓氏錄 右京諸蕃 下에 의하면 餘自進(餘自信)은 왜국으로 건너간 후 高野造의 시조가 되었다. 餘自進과 余自信을 다른 인물로 보는 견해(노중국, 1994-b, 앞의 글)도 있다. 874) 中部 : 百濟王都 5部制 가운데 하나. 875) 久麻怒利城 : 熊津城. 현 충남 공주. 876) 都都岐留山 : 백제부흥군의 거점이었던 州柔 혹은 留城. 三國史記 에는 周留城으로 나온다. 877) 백제 바쳤다 : 제명 7년 11월조에 인용된`日本世記a에도 福信이 唐人을 바친 기사가 있다. 일본서기 제명기와 천지기에는 같은 사건을 반복해서 기록하고 있는 곳이 몇 군데 있다. 이것 은 일본서기 편찬자가 하나의 사건을 기록할 때 그와 관련된 여러 자료들을 그대로 인용한 데 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것과 같이 함께 沙 882) 에 모여 惡人들을 베고 쓰러져가는 백제를 구하라. 마땅히 有司들 은 모두 도와 예를 다하여 떠나보내도록 하라. 고 운운하였다. <*왕자 豊璋 및 처자와 그 숙부 忠勝883) 등을 보냈다. 그들이 떠난 정확한 시기는 7년조884)에 보인다. 或本에는 천황 878) 美濃國 : 현 岐阜(기후)縣 남부지역의 옛 국명이다. 879) 不破 片縣 : 不破는 현 大垣市의 서부에서 不破郡 垂井町에 이르는 지역이며, 片縣는 濃尾평야 부근이다. 880) 恩古 : 의자왕의 왕비(주 860) 참조). 881) 孫登 : 天智 10年 11月條에 唐使人 郭務悰의 송사였던 沙宅孫登과 동일인이다. 882) 沙 : 원래는 신라 6부 가운데 하나이지만, 여기서는 신라를 지칭한 표현으로 볼 수 있다. 883) 忠勝 : 白雉 元年 2월조에는 풍장의 아들로 나온다(주 809) 참조). 884) 7년조 : 天智卽位前紀(齊明 7年) 9月條에 백제왕자 풍장이 귀국하였다는 것과 귀실복신이 풍장 을 맞이한 내용의 기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풍장의 귀국 기사는 天智 元年(662) 5月條에도 기재 되어 있다. 이것은 天智卽位前紀 9月條와 天智 元年 5月條 두 기사는 같은 사건을 전하고 있지 만 원자료가 달랐기 때문에 빚어진 결과로 여겨진다. 풍장의 귀국시기를 661년 9월로 보는 견 해로는 山尾幸久(1989, 앞의 글, 411~412쪽) 정효운(1991,`7세기대의 한일관계의 연구(下)백강구전에의 왜군파견 동기를 중심으로-a, 고고역사학지 7) 노중국(1994-b, 앞의 글) 등 의 견해가 있다.

91 180 日本書紀 이 豊璋을 왕으로 세우고, 塞上885)을 輔로 삼아 禮를 갖추어 떠나보냈다고 하였다.> 181 략) <* `日本世記a 에는 11월에 福信이 사로잡은 당인 續守言892) 등이 筑紫에 도착했다고 하였다. 或本에는 辛酉年(661)에 백제 佐平 福信이 바친 당 포로 106명을 近江國에서 墾 동12월 丁卯朔 庚寅 12월 정묘삭 경인(24일). 천황이 難波宮에 행차했다. 천황은 바야흐로 福信이 요청한 뜻 에 따라 筑紫에 행차하여 장차 원군을 보내고자 처음 이곳에 와서 여러 軍器를 갖추었다. 田을 하면서 살도록 하였다고 했다. 庚申年(660)에 이미 福信이 당의 포로를 바쳤다고 했으므로 지금의 注로 두니 결정하라.893)> 권27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894) 稱制前紀 (齊明天皇 7년: 660년) 是歲 이 해에 백제를 위해 장차 신라를 정벌하고자 駿河國(스루가노쿠니)886)에 명령해서 배를 만들도록 하였다. 배가 다 만들어지자 이를 끌고 續麻郊(오미노)887)에 이르렀을 때 밤중에 이유도 없이 그 뱃머리와 고물(방향키)이 서로 반대로 되었다. 사람들은 결국 패한다는 是月 이 달에 蘇將軍이 突厥 왕자 契苾加力895) 등과 水陸 두 길로 고구려의 성 아래에 도착하 것을 알았다. 科野國(시나노노쿠니)888)에서 파리 떼가 서쪽을 향해 날아가면서 巨坂을 넘어갔는데 크기가 열 아름쯤이고 높이는 하늘까지 닿았다. 고 말하였다. 또한 원군이 패배할 불길한 징조임을 알았다. 齊明天皇 7년(661) 하4월 여름 4월. 백제 복신이 사신을 보내 표를 올려 그 왕자 解889)를 맞이하기를 요청했다. <*釋道顯`日本世紀a 에는 백제 福信이 글을 올려 그 君 解의 송환을 東朝에 요청했다 890) 고 하였다. 或本에는 4월에 천황이 朝倉宮 으로 옮겼다고 했다.> 11월 壬辰朔 戊戌 11월 임진삭 무술(7일). 천황의 관을 飛鳥의 川原891)에 안치하고 빈소를 마련하였다. (중 885) 塞上 : 塞城이라고도 한다(주 809) 참조). 886) 駿河國 : 현 靜岡(시즈오카)縣의 大井(오오이)川 동부 지역의 옛 국명이다. 887) 續麻郊 : 현 伊勢(이세)市의 북서쪽에 위치한 多氣郡 明和(메이와)町의 川(하라이가와) 하구 지역이다. 888) 科野國 : 信濃國. 주 299) 참조. 889) 解 : 豊璋. 주 716) 참조. 890) 朝倉宮 : 현 福岡縣 朝倉郡 朝倉町의 山田과 須川, 그리고 杷木(하키)町의 志波가 그 소재지로 추정되었지만 최근 발굴조사 결과 志波가 가장 유력시 되고 있다. 891) 飛鳥의 川原 : 飛鳥川 서쪽의 明日香(아스카)村 大字(오오지)川 지역을 가리킨다. 892) 續守言 : 지통 3년(689) 6월에 같은 唐人 薩弘恪과 함께 稻를 하사받고, 지통 5년(691) 9월에는 음박사로서 은 20량씩을 사여받았다. 또한 692년 12월에는 水田 4町씩을 사여받고 있는데 이 러한 사실들은 續守言이 薩弘恪과 함께 일본서기 편찬사업에 참여하였음을 말해준다(森博達, 1999, 日本書紀の謎を解く, 中公新書 ; 김은숙, 2002,` 古事記 日本書紀 의 편찬과정a, 강좌한국고대사 5,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893) 庚申年에 결정하라 : 이 부분은 日本書紀 편찬자의 注로서 庚申年(660)에 福信이 唐포로를 바 쳤다는 기록은 제명 6년 10월조에서 백제 鬼室福信이 佐平貴智 등을 파견하여 당 포로 100여인을 바 쳤다는 기사를 가리킨다. 그런데 앞의`日本世記a내용은 복신이 보낸 唐人 續守言 등이 제명 7년 (661) 11월에 筑紫에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이 경우`일본세기a 의 내용은 제명 6년 10월조와 모순 되므로 일본서기 편찬자는`日本世記a 에서 661년에 복신이 보낸 唐人 續守言 등이 축자에 도착하 였다고 하는 기사에 의문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즉 일본서기 편찬자는`일본세기a 에 언급된 續 守言을 경신년에 복신이 헌상한 당 포로 중의 한 사람으로 판단하였던 것이다. 이에 편찬자는 庚申年 (660)의 당 포로 헌상 기사를 상기시키면서 후세 사람이 참고하여 판단하도록 주를 넣었던 것이다. 894) 天智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8대 천황(재위 668~671). 이름은 中大兄(나카노오오에). 아버지는 舒明, 어머니는 皇極(齊明). 大海人皇子(후에 天武天皇)의 兄이며, 野讚良皇女(후에 持統天皇)의 父이다. 645년 中臣鎌足과 함께 蘇我本宗家를 멸망시키고 孝德 齊明天皇의 皇太 子로서 大化改新의 여러 정책을 진행시켰다. 齊明천황의 사후에 稱帝하면서 663년 白江전투의 패전 후에는 내부 정비에 충실하였다. 667년 수도를 近江으로 천도하여 大津宮을 조영하고 이 듬해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에는 庚午年籍을 작성하고 官位를 개정하였다. 이 시기 近江 令이 제정되었다고 보기도 한다. 895) 契苾加力 : 契苾은 부족명으로 중국측 사료에서는 鐵勒으로 기록되기도 한다. 加力은 이름인데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보장왕 20년 정월조에는 何力으로 나온다. 896) 長津宮 : 제명 7년(661) 3월조에 娜大津(那津)에 둔 磐瀨行宮(현 福岡市 南區 三宅)을 長津으로 개명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92 182 였다. 황태자가 長津宮896)으로 거처를 옮겼다. 점차 해외의 軍政을 들었다. 8월 8월. 前將軍897) 大華下898) 阿曇比邏夫連, 小華下899) 河邊百枝臣(카와베노모모에노오 미)900) 등과 後將軍 大華下 阿倍引田比邏夫臣(아베노히케타노히라부노오미),901) 大山上902) 物部連態(모노노베노무라지쿠마),903) 大山上 守君大石(모리노키미오오이와)904) 등을 백제 日本書紀 183 오미코모시키)911)의 누이를 아내로 삼도록 하였다. 그리고 大山下 狹井連賓 小山下 秦 造田來津을 파견하여 군사 5천여 명을 거느리고 본국까지 호위해 보내게 하였다. 이에 豊璋이 입국할 때 福信이 맞이하러 와서 머리를 조아리고 나라의 정사를 [풍장에게] 모두 맡겼다. 12월 에 보내어 구원하도록 하였다. 이에 무기와 오곡을 보냈다. <*或本에는 이 뒤를 이어서 12월. 고구려가 말하기를912) 이 12월에 고구려는 극심한 추위에 浿江(대동강)이 얼어붙 별도로 大山下905) 狹井連檳 (사이노무라지아지마사),906) 小山下907) 秦造田來津(하다노미 었다. 그러므로 당군이 雲車 衝 으로 북과 징을 시끄럽게 울리며 공격하여 왔다. 고구 고 한다.> 야츠코타쿠츠)908)를 百濟909)에 보내 지키도록 하였다. 9월 9월. 황태자가 長津宮에 가서 백제 왕자 豊璋에게 織冠910)을 주고, 또 多臣蔣敷(오오노 려의 사졸들은 용감하고 씩씩하였기 때문에 다시 당군의 堡壘 2개를 빼앗았다. 단지 2개 의 요새만 남았다. 이 또한 다시 밤을 틈타 빼앗을 계책을 마련하였다. 당의 군사들은 무 릎을 끌어안고 울고 있었기 때문에 날카로움이 무디어지고 힘이 다하여 빼앗을 수 없었 다. 고 하였다. 배꼽을 씹는 후회를 해도 어쩔 수 없다는 것이 이것이 아니면 무엇이겠는 가. <*釋道顯은 春秋의 뜻913)으로 말하면 먼저 고구려를 치고자 한 것이지만, 백제를 먼 897) 前將軍 : 前將軍이었던 阿曇比邏夫連은 천지 원년 5월조에서는 大將軍을 칭한다. 898) 大華下 : 大化 5年(649)의 19관위 가운데 제8위. 899) 小華下 : 大化 5年의 19관위 가운데 제10위. 900) 河邊百枝臣 : 天武 6년(677) 10월에 民部卿이 된다. 河邊臣은 주 559) 참조. 901) 阿倍引田比邏夫臣 : 日本書紀 齊明 4년(658) 是歲條에 肅愼을 토벌한 越國守로 나오며, 續日本紀 養老 4년(720) 정월조에는 제명조에 筑紫大宰帥를 지냈던 大錦上 比邏夫의 자식인 大納言 正三位 阿 倍朝臣宿 奈麻呂가 사망했다는 기록이 보인다. 阿倍引田氏은 阿倍臣氏(주 435)와 주 538) 참조)의 일족으로 田鄕(현 奈良縣 櫻井市 白河)이 본거지이었다. 천무 13년 11월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902) 大山上 : 大化 5年(649)의 19관위 가운데 제11위. 903) 物部連態 : 여기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904) 守君大石 : 제명 4년 11월 有間皇子 모반 사건에 가담한 죄로 체포되어 上毛野國에 유배당한 적 이 있다. 천지 4년에는 견당대사로 당에 파견된다. 守君은 新撰姓氏錄 左京皇別條와 河內皇別 條에 守公으로 나오는데 大 命의 후예로 나온다. 905) 大山下 : 大化 5年(649)의 19관위 가운데 제12위. 906) 狹井連檳 : 狹井連은 物部連과 동족이다. 新撰姓氏錄 左京 山城 大和神別條에 饒速日命 의 6대손으로 伊香色乎命의 후예로 나온다. 천무 13년(684) 12월에 宿 姓을 사성받는다. 907) 小山下 : 大化 5年(649)의 19관위 가운데 제14위. 908) 秦造田來津 : 近江國 朴市(愛知郡)에 있었던 秦造로서 천지 원년 11월조에는 朴市田來津으로 나 온다. 來津의 활약상에 대해서는 주 716) 참조. 909) 百濟 : 여기서는 豊璋을 가리킨다. 910) 織冠 : 대화 5년(649) 2월에 제정된 19관위 가운데 최상위인 大織 小織을 일컫는다. 저 공격한 것은 백제가 신라와 가깝고 침략해 오는 바가 심해서 괴롭고 급했기 때문에 이 와 같이 된 것이다. 라고 하였다.> 911) 多臣蔣敷 : 多臣은 新撰姓氏錄 左京皇別條에 神武天皇의 皇子인 神八井耳命의 후예로 나온다. 천무 13년(684) 11월에 朝臣姓을 하사받는다. 蔣敷는 和州五郡神社神名帳大略註解 에 의하면 太安麻呂(太安万侶, 古事記 의 찬자)의 祖父라고 한다. 912) 고구려가 말하기를(高麗言) : 이하의 내용은 新唐書 卷220 列傳 高麗條과 蘇定方傳, 그리고 三國史記 권22 寶藏王 21年(662) 春正月條에도 관련 기록이 있다. 新唐書 에 의하면 龍朔 元 年(661) 8月에 唐將 蘇定方이 浿江에서 고구려군을 격파하고 이후 평양까지 포위했지만 이듬해 개소문의 군대에게 패하고 때마침 대설을 만나 포위를 풀고 당으로 돌아갔다고 한다. 삼국사기 에도 보장왕 21年 정월조에도 신당서 와 비슷한 내용으로 기록되어 있다. 天智卽位前紀(661) 12 月條 기사는 내용 중에 고구려 군사의 膽勇雄壯 과 唐兵의 抱膝而哭 이라는 표현을 통해서 볼 때 고구려인의 기록을 참고로 작성되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日本書紀 에는 이 시기 고구려 사신 이 일본에 건너왔다는 사실이 보이지 않지만, 冒頭의 高麗言 이라는 표현으로 보아 고구려 사신 이 전한 이야기를 참고로 작성되었을 것이다. 즉 新唐書 및 三國史記 의 661년 8월과 662년 정월에 일어난 이야기를 日本書紀 에서는 고구려인의 기록을 통해 661년 12월조에서 총괄해 서 술한 것으로 여겨진다. 분주에 도현의 설명이 인용되고 있기 때문에 도현이 고구려인의 기록 혹 은 고구려 사신이 전한 이야기를 듣고`日本世記a 에 정리한 내용일 가능성이 크다. 913) 春秋의 뜻 : 春秋 는 春秋智를 가리킨다. 道顯은 당의 고구려 공격과 백제의 멸망에 김춘추가 관여한 사실을 강조한 것이다.

93 184 日本書紀 是歲 185 하4월 (전략) 또 일본의 고구려 구원군914) 장수들이 백제 加巴利915)의 해안에 정박하여 불을 피 여름 4월. 쥐가 말꼬리에 새끼를 낳았다. 釋道顯이 점을 쳐 北國의 사람들이 장차 南 웠다. 재에 구멍이 생겨 가는 소리가 났는데 화살이 날며 우는 소리와 같았다. 어떤 사람 라고 하 國에 의지하게 될 것이다.919) 아마도 고구려가 망하여 일본에 속하게 될 것인가. 이 고구려 백제가 끝내 망할 징조인가. 라고 하였다. 였다. 天智天皇 원년(662) 하5월 춘정월 辛卯朔 丁巳 봄 정월 신묘삭 정사(27일). 백제 佐平 鬼室福信에게 화살 10만개, 絲 500근, 錦 1000 근, 布 1000端, 韋916) 1000張, 볍씨 3000斛을 주었다. 3월 庚寅朔 癸巳 3월 경인삭 계사(4일). 백제왕에게 布 300端을 주었다. 是月 이 달에 唐人과 新羅人이 고구려를 쳤다. 고구려가 우리나라에 구원을 요청하여 軍將917) 을 보내 918) 留城 에 진을 치도록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唐人들이 그 남쪽 경계를 침략할 수 없었다. 신라는 서쪽 보루를 빼앗을 수 없었다. 여름 5월. 大將軍 大錦中920) 阿曇比邏夫連 등이 수군 170척을 거느리고 豊璋 등을 호위 하여 백제국에 호송한 후 칙서를 내려 豊璋이 그 왕위를 잇도록 하였다. 또한 福信에게 金策을 주어 그 등을 어루만지면서 爵祿을 포상으로 주었다. 이때에 豊璋 등은 福信과 더 불어 머리를 조아리고 칙서를 받으니 사람들은 눈물을 흘렸다. 6월 己未朔 丙戌 6월 기미삭 병술(28일). 백제가 達率萬智921) 등을 보내 조와 물건을 바쳤다. 동12월 丙戌朔 겨울 12월 병술삭(1일). 백제왕 豊璋과 그 신하 佐平福信 등은 狹井運922)<*이름이 빠졌다.> 朴市田來津923)과 의논하여 이 州柔924)라는 곳은 농지와 멀리 떨어져 있고 토지도 척박 하여 농사에 적합한 땅이 아니고 방어하고 싸울 장소이다. 여기에서 오래 머문다면 백성 들이 굶주릴 것이니 이제 避城925)으로 옮겨야 한다. 避城은 서북으로 띠를 두르듯 古連旦 914) 고구려 구원군 : 일본서기 에는 왜가 군대를 파견하면서 3곳에 걸쳐 백제구원군이 아니라 고구 려와 관련이 있다는 식의 표현이 나타나고 있다(천지즉위전기, 천지 원년 3월, 천지 2년 5월). 고구려를 구하러 갔다거나 고구려가 병사를 요청해서 군장을 보냈다거나, 군사에 관한 일을 고 구려에 알리고 돌아왔다는 등의 기사를 신뢰할 수 있다면 고구려와 왜의 군사적 연합까지도 생 각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915) 加巴利 : 현 전북 扶安. 916) 韋 : 무두질한 가죽. 917) 軍將 : 이 시기 이전에 왜국에 파견한 군대는 풍장 호송군뿐이다. 따라서 여기에 보이는 왜국이 파견한 고구려 구원 군장은 풍장 호송군을 의미한다. 918) 留城 : 백제부흥 말기의 본거지. 일본서기 에서는 州柔城으로 표기되기도 한다. 중국측 사료 와 삼국사기 에는 周留城으로 나온다( 삼국사기 권43 金庾信傳 下에는 豆率城으로 나오기도 한다). 일반적으로 현재 충남 서천군의 한산 건지산성이나 전남 부안의 위금암산성으로 비정되 고 있지만, 이설이 분분하다(노중국, 2003, 백제부흥사, 일조각, 191~196쪽 참조). 919) 北國의 것이다 : 道顯은 鼠(子)는 北, 馬(午)는 南을 나타내는 五行說을 바탕으로 北國의 고 구려가 南國인 일본에 속하게 될 것이라고 점쳤다. 도현의 예언대로 고구려는 6년 후(668)에 멸 망한다. 920) 大錦中 : 大化 5年(649)의 19관위제에는 보이지 않는다. 天智 3년(664) 2월에 제정된 26관위제 가운데 제8위이다. 천지즉위전기 8월조서는 阿曇比邏夫連의 관위는 大華下(大化 5年의 19관위 가운데 제8위)이었다. 921) 達率萬智 : 다른 곳에 보이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922) 狹井運 : 주 906) 참조. 923) 朴市田來津 : 주 716)과 주 908) 참조. 924) 州柔 : 周留城. 주 918) 참조. 925) 避城 : 현 전북 金堤. 일본서기 신공 49년 3월조에는 中 또는 支山 으로 나온다. 신증 동국여지승람 김제군 산천조에는 廻淵에 옛 병영의 터가 있다고 기록되어 있다. 이 병영이 언 제 만들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풍왕이 피성으로 천도한 후 군영을 설치한 것을 시사해주는

94 186 日本書紀 187 涇이 흐르고 동남으로는 깊은 늪과 커다란 제방이 막고 있다. 주위가 밭으로 둘러져 있고 라지오오후타),931) 中將軍 巨勢神前臣譯語(코세노칸사키노오미오사)932) 三輪君根麻呂 도랑을 파서 빗물을 모을 수 있다. 꽃과 열매가 무성하니 삼한 가운데 가장 기름진 곳이 (미와노키미미네마로),933) 後將軍 阿倍引田臣比邏夫(아헤노히케타노오미히라부) 大宅 다. 옷과 음식의 근원이 되니 天地 사이에 깊이 굽어 들어간 곳이다. 비록 低地이지만 어 臣鎌柄(오오야케노오미카마츠카)934)을 보내 2만 7천 명을 거느리고 신라를 공격하도록 찌 옮기지 않겠는가. 라고 하였다. 이에 朴市田來津이 홀로 나아가 避城과 적이 있는 곳 하였다. 과의 거리는 하룻밤이면 갈 수 있습니다. 서로 이렇게 매우 가까우니 만약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나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입니다. 무릇 굶주림은 나중의 일이고 존망이 먼 저입니다. 지금 적이 함부로 공격해 오지 못하는 것은 州柔가 산이 험한 곳에 있어 모두 방어시설이 되며, 산이 높고 계곡이 좁아 지키기 쉽고 공격하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만약 低地에 있었다면 어찌 견고히 지킬 수 있으며 동요 없이 지금까지 이르렀겠습니까. 라고 간하였다. 끝내 간언을 듣지 않고 避城으로 도읍을 옮겼다. 是歲 이 해에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 무기를 수리하고 선박을 갖추고 군량을 비축하였다. 天智天皇 2년(663) 춘2월 乙酉朔 丙戌 봄 2월 을유삭 병술(2일). 백제가 達率金受926)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신라인이 백제의 남쪽 4곳의 州를 불태우고,927) 아울러 安德928) 등의 요지를 공략하였다. 이에 避城은 적이 있는 곳과 가까워졌다. 그 때문에 이곳에 군세가 머물 수가 없는 형세가 되어 다시 州柔 에 돌아왔다. 田來津이 간언한 바와 같았다. 3월 3월.929) 前將軍 上毛野君稚子(카미츠케노노키미와쿠코)930) 間人連大蓋(하시히토노무 것으로 여겨진다. 926) 達率金受 : 金受는 성인지 이름인지 명확히 알 수 없다. 927) 신라인이 불태우고 : 三國史記 권6 新羅本紀 문무왕 3년 2월조에 비슷한 내용을 전하는 기사가 있다. 928) 安德 : 德安의 오기. 德安은 백제 5방 가운데 東方의 得安城을 가리킨다. 현 충남 恩津에 비정되 고 있다.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 3년 2월조에는 신라가 德安城을 공격한 기사가 있다. 929) 3月 : 왜국이 백제부흥전쟁에 본대를 파견하는 시기. 왜국이 참전한 이유에 대해서는 크게 네 夏5月 癸丑朔 여름 5월 계축삭(1일). 犬上君935)<*이름이 빠졌다.>이 급히 고구려에서 군사의 일을 논 의하고 돌아왔다. 石城936)에서 解를 만났는데 이 때 解가 福信의 죄를 말하였다. 가지 견해가 있다. 첫 번째는 백제에서 건너온 사람들이 대화정권의 지배층을 이루고 있었다는 전제하에서 당시 그들이 자신들의 출신 조국을 해방시키기 위해 출병했다는 설(林宗相, 1974, `7世紀中葉における百濟 倭の關係a, 古代日本と朝鮮の基本問題, 學生社 ; 변인석, 1994, 白 江口戰爭과 百濟 倭 關係, 한울아카데미)이다. 두 번째는 왜국이 자신의 속국 내지 조공국인 백제를 구원하기 위해서 출병했다는 조공국 구원설(石母田正, 1971, 日本の古代國家, 岩派書 店 ; 鬼頭淸明, 1976, 白村江, 敎育社)이다. 세 번째는 왜국이 대외적 상황을 정권의 내부 모순 과 위기를 타개하기 위해서 참전하였다는 설(山尾幸久, 1989, 앞의 글 ; 연민수, 1997,`改新政 權의 성립과 동아시아 외교a, 일본역사연구 6)이 있다. 네 번째는 일본열도에 대한 당의 위협 을 사전에 저지하고자 파견하였다는 설(김현구, 2001,`동아시아 세계와 백촌강싸움-야마토정 권의 출병 준비 과정을 중심으로-a, 일본학 20 ; 이재석, 2003,`백제 부흥 운동과 야마토 정 권a, 사총 57)이다. 한편 당시 전쟁의 성격이 제국주의 전쟁이었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왜국의 참전도 결국 신라를 정복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주장(정효운, 1995, 앞의 글)도 제기되었다. 930) 上毛野君稚子 : 일본서기 천지 2년(663) 6월조에도 이름이 보인다. 上毛野君氏는 주 122) 참조. 931) 間人連大蓋 : 일본서기 천지 4년 4월조에도 보인다. 間人連은 천무 13년 12월에 宿 城을 사 성받는다. 932) 巨勢神前臣譯語 : 巨勢神前臣은 近江國 神前郡을 근거지로 삼은 巨勢氏의 일족으로 추정된다. 譯語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933) 三輪君根麻呂 : 三輪君은 현 奈良縣 大和盆地 동남부의 三輪지방에 있었던 씨족이다. 根麻呂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934) 大宅臣鎌柄 : 大宅臣은 和珥氏의 일족이다. 천무 13년(684) 11월에 朝臣姓을 사성받는다. 鎌柄 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935) 犬上君 : 현 滋賀縣(近江國) 犬上郡의 씨족이다. 천무 13년 11월에 朝臣姓을 사성받는다. 新撰 姓氏錄 左京皇別조에 의하면 日本武尊의 후예라고 한다. 고구려에 파견된 목적이 백제부흥군 에 왜국의 군대를 파견한 사실을 알리기 위한 것으로 여겨진다. 936) 石城 : 현 충남 부여의 석성면에 소재한 石城山城으로 비정하거나 홍성군 장곡면 대현리의 鶴城 山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5 188 日本書紀 6月 189 먼저 공격하면 저들은 스스로 물러날 것이다. 라 하였다. 다시 일본의 어지럽게 대오를 6월. 前將軍 上毛野君稚子 등이 신라의 沙鼻937) 岐奴江938) 2개의 성을 공략했다. 백제왕 편성한 중군의 군졸들을 이끌고 진격하여 굳게 진치고 있는 당의 군대를 쳤다. 大唐은 곧 豊璋은 福信이 모반하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고 의심하여 손바닥을 뚫고 가죽으로 묶었으 좌우에서 배를 협공하여 에워싸고 싸웠다. 잠시 동안에 일본군은 계속 패하여 물에 빠져 나, 이때 스스로 결정하기 어려워 어찌할 바를 알지 몰랐다. 이에 여러 신하에게 福信의 죽는 자가 많고 배의 앞뒤를 돌릴 수 없었다. 朴市田來津은 하늘을 우러러 맹세하고 이를 죄가 이미 이와 같으니 목을 베야 하는가, 아닌가? 하고 물었다. 이에 達率 德執得939)이 갈며 분해하면서 수십 명을 죽이고 전사했다.942) 이때, 백제왕 豊璋이 여러 사람과 배를 이 사람은 나쁜 반역 죄인입니다. 풀어 주어서는 안됩니다. 고 말하였다. 福信이 곧 德 執得에게 침을 뱉으며 썩은 개와 같은 어리석은 놈이구나. 라고 하였다. 왕이 건장한 병 사들을 시켜 복신의 목을 베게 한 후 소금에 절이도록 하였다. 추8월 壬午朔 甲午 타고 고구려로 도망갔다. 9월 辛亥朔 丁巳 9월 신해삭 정사(7일). 백제의 州柔城이 이로서 당에게 항복하였다. 이때 國人들이 서 로 州柔가 항복했으니, 일이 어찌할 수 없게 되었다. 백제의 이름이 오늘로써 끊어지게 가을 8월 임오삭 갑오(13일). 신라는 백제왕이 자국의 良將의 목을 베었다는 소식을 듣 되었다. 조상의 무덤이 있는 곳을 어찌 다시 갈 수 있겠는가. 다만 호禮城943)에 가서 일본 고 곧장 백제에 들어가 州柔를 공략할 것을 논의하였다. 이에 백제는 적의 계략을 알고 군의 장수들을 만나 해야 할 일을 서로 모의할 수 있을 뿐이다. 라고 하였다. 마침내 원 여러 장수들에게 지금 듣건대 大日本國의 구원군 장수인 盧原君臣940)이 용맹한 군사 만 래부터 枕服岐城944)에 있던 처자들에게 나라를 떠나려는 마음이 있음을 알렸다. 여 명을 거느리고 바로 바다를 건너왔다고 한다. 여러 장군들은 이에 미리 계획을 세워두 941) 고 하였다. 기 바란다. 나는 직접 白村 에 가 맞이하여 향응할 것이다. 戊戌(17일). 적장이 州柔에 이르러 그 왕성을 포위하였다. 大唐의 군장이 전선 170척을 辛酉(11일). 牟호을 출발했다. 癸亥(13일). 호禮에 이르렀다. 甲戌(24일). 일본의 수군 및 佐平余自信945) 達率木素貴子946) 谷那晋首947) 億禮福留948) 이끌고 白村江에서 진을 쳤다. 戊申(27일). 일본의 수군 중 처음 도착한 배들이 대당의 수군과 교전하였지만 일본이 불리하여 후퇴하였다. 대당은 진을 굳게 지켰다. 己酉(28일). 일본의 여러 장수들이 백제왕과 더불어 상황을 살피지 않고 서로 우리가 937) 沙鼻 : 현 경남 梁山으로 추정된다. 938) 岐奴江 : 현 경남 宜寧으로 추정된다. 939) 德執得 : 德은 姓, 執得은 이름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천지 10년(681) 정월조 에 망명백제인 가운데 德頂上이 있고, 지통 5년 12월조에는 醫博士 德自珍이란 인물이 보인다. 940) 盧原君臣 : 盧原君은 駿河의 國造系 씨족이다. 제명 6년 是歲條에 駿河國에 명해 배를 만들게 한 기사가 보인다. 941) 白村 : 일본서기 에는 白村 혹은 白村江 으로 기록되었고, 舊唐書 卷84 列傳 劉仁軌傳 및 三國史記 백제본기에는 白江 으로 나온다. 단 삼국사기 에는 白沙 로 기록하는 경우도 있 다. 그 위치는 일반적으로 현재 금강 하구 부근으로 추정하고 있지만, 東津江 하류 혹은 당진군 石門面과 高大面 연해로 추정하기도 한다. 942) 일본의 전사했다 : 왜군이 백강전투에서 패배한 원인에 대해서는 풍장과 복신의 불화로 인 하여 왜군이 제 때에 주류성에 입성하지 못하여 나당군과의 전투를 효과적으로 수행하지 못해 패배했다는 설(김현구, 2003,`백강전쟁과 그 역사적 의의a, 백제 부흥운동과 백강전쟁, 공주 대 백제문화연구소)이 있다. 이에 대해 왜군의 전투능력의 한계를 지적하기도 한다. 즉 백강 전 투에 참전한 왜군의 구성을 보면 각각의 지방호족이 동원한 國造軍의 집합체였는데, 국조군은 국조들의 일족과 그 지배하에 있는 민중과 노비를 동원한 것으로 정예병들이 아니었기 때문에 패할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八木充, 1970,`百濟の役と民衆a, 小葉田淳退官記念國史論集 ; 卞 麟錫, 1994,`7세기 중엽 백강구전에 참가한 일본군의 성격에 대하여a, 국사관논총 52 ; 佐藤 信, 2003,`白村江の戰いと倭a, 百濟文化 32 ; 김영관, 2004,`백제부흥운동의 실패 원인a, 선사와 고대 19). 943) 호禮城 : 현 경남 南海島로 보는 견해와 전남 보성군의 烏城으로 보는 견해가 있다. 944) 枕服岐城 : 현 전남 康津 지역에 있던 것으로 추정된다. 945) 佐平余自信 : 일본서기 제명 6년(660) 9월조에 복신과 함께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한 達率余自 進과 동일인물(주 873) 참조). 946) 木素貴子 : 일본서기 에 의하면 천지 10년(671) 正月에 兵法에 능한 인물이었기에 大山下로 敍位된

96 190 日本書紀 와 國民들이 호禮城에 도착하였다. 이튿날 배로 비로소 일본으로 향했다. 191 하5월 戊申朔 甲子 여름 5월950) 무신삭 갑자(17일). 百濟鎭將951) 劉仁願이 朝散大夫952) 郭務悰953) 등을 보내 天智天皇 3년(664) 表函을 올리고 헌상품을 바쳤다. 3월 동10월 乙亥朔 949) 3월. 百濟王善光王 등을 難波에 살도록 했다. (후략) 겨울 10월 을해삭(1일). 郭務悰 등을 보내는 칙명이 있었다. 이날 中臣內臣(中臣鎌足)954) 이 沙門智祥955)을 郭務悰에게 보내 물건을 하사하였다. 다. 懷風藻 에 학사로서 大友皇子의 빈객이 되었다고 한다. 대우황자는 천지의 아들로서 671년에 태정대신의 지위에 올라 유력한 왕위 후보자였지만 任申의 亂(672) 에서 패해 자살한 인물이다. 947) 谷那晋首 : 천지 10년 正月에 兵法에 능한 인물이었기에 大山下로 敍位된다. 948) 億禮福留 : 천지 4년(665) 8월에 四比福夫와 함께 筑紫國에 가서 大野城과 椽城을 쌓았다. 천지 10년 正月에는 兵法에 능한 인물이었기에 大山下로 敍位된다. 億禮은 복성이고, 福留는 이름이다. 949) 百濟王善光王 : 善光은 禪廣이라고도 하며 의자왕의 아들. 續日本紀 卷27 天平神護 2년(766) 6월조에 의하면 舒明朝에 풍장과 함께 왜국에 건너갔다고 한다. 이후 백제멸망으로 인해 왜국에 계속 체류한 것으로 여겨진다. 그의 아들로 昌成과 遠寶 南典이 있고, 良虞는 손자이다. 693년 사망 후에는 正廣參을 추증받았다. 선광 일족이 거주한 難波는 百濟郡(당시는 百濟評)이 설치된 곳이다. 현재 백제군에 관한 최고의 기록으로는 平城京長屋王木簡 가운데 靈龜 元年(715)에 작성된 百濟郡南里車長百濟部若末呂車三轉米十二角斗 라는 기록이 있다(1991, 平城京長屋王 邸宅と木簡 奈良國立文化財硏究所編, 吉川弘文館). 백제군이라는 지명은 백제왕족을 비롯한 백제인의 거주지라는 의미로 만들어진 것으로 여겨진다(井今啓一, 1965,`攝津國百濟郡考a, 百濟王敬福, 綜藝社). 주 788) 참조. 한편 속일본기 의 기록에는 持統朝에 百濟王 을 사성 받았다고 적고 있다. 백제왕의 王 은 8色 姓보다 상위에 있는 것으로 왜국의 왕족에게만 주어 지는 칭호다. 지통천황은 선광과 그 자손에게 백제왕의 칭호를 내려줌으로써 이들을 왜국의 準 황족으로 대우하고자 하였다(김은숙, 2007,`일본 율령국가의 백제왕씨a, 백제유민들의 활동 백제문화사대계 연구총서 7, 충남역사문화연구원). 이에 일본서기 천지 3년 3월조에서 善光 을 百濟王氏라고 기록한 것은 日本書紀 편찬자의 윤색으로 보지만(1998, 新編日本古典文學全 集 日本書紀 3, 小學館, 264쪽), 天智紀에서 사용된 백제왕 이란 씨성가 아니라 일반명사로 백제의 왕 을 뜻하는 것으로 이해되기도 한다(田中史生, 1997, 日本古代の民族支配と渡來 人, 校倉書房 ; 이근우, 2001,`일본열도의 백제 유민에 대하여a, 한국고대사연구 23). 즉 일본서기 지통 5년(691) 춘정월조에 의하면 을묘조와 을유조에 각각 百濟王 余禪廣 백제 왕선광 이라고 적고 있어 지통 5년 정월단계까지 아직 백제왕이라는 것이 명확히 백제왕씨를 가리킨다고 볼 수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만약 이 단계에 백제왕 이 씨성이었다면 余 라는 원래의 성을 쓸 필요가 없고, 속일본기 의 기록에서도 선광이 백제왕씨를 받은 것이 藤原朝廷 (持統朝)이라고 막연하게 적고 있으므로 일본서기 천지 천무기에 보이는 백제왕은 백제의 왕 이라는 의미로 사용되었을 가능성이 크다는 것이다. 戊寅(4일). 郭務悰 등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950) 여름 5월 : 善隣國寶記 천지 3년(664)조에 인용된`海外國記a에는 당이 4월에 파견한 당의 大 使 곽무종 등 30인과 백제좌평 軍 등 100명이 일본 對馬島에 도착하였다고 적고 있다. 軍 은 다음해에는 정5품상의 右戎衛郞將으로 당의 劉德高와 함께 다시 일본에 파견되는데, 삼국 사기 에 보이는 百濟司馬 軍, 司馬稱軍과 동일인일 것으로 추측된다. 951) 百濟鎭將 : 鎭將은 隋唐代 地方軍의 장을 말한다. 일본서기 에는 百濟鎭將으로 劉仁願이라고 기록되어 있으나 資治通鑑 卷201 高宗麟德 元年 冬10月條의 기록에 의하면 유인원이 劉仁軌 와 교체된 것은 664년 10월 이후이므로 664년 4월의 백제진장은 유인궤이다. 한편 善隣國寶 記 에 실린`海外國記a에는 백제진장의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이에 유인원이 백제진장으로 등 장하는 일본서기 의 기록은 잘못된 것으로 보는 견해(정운용, 1993,`天智朝의 대외정책에 대 한 일고찰a, 한국상고사학보 14)도 있다. 한편, 삼국사기 에서 664년 2월의 웅령의 서맹과 665년 8월 취리산의 서맹을 주선한 것은 당의 칙사 유인원이라 하는 점에서 664년 2월 당고종 의 특사로서 웅진도독부에 파견된 유인원이 곽무종의 파견에 관여하였을 수도 있다고 보기도 한 다(김은숙, 1996,`백제부흥운동이후 천지조의 국제관계a, 일본학 15). 952) 朝散大夫 : 大唐六典 에 의하면 從5品下에 해당된다. 953) 郭務悰 : 백제에 파견되어 있던 당의 관인. 일본서기 천지 4년(665) 9월조, 同 8년 시세조, 同 10년 11월조에는 唐使人으로 나온다. 백제부흥전쟁 이후 당이 처음으로 왜국에 파견한 사신이다. 954) 中臣鎌足 : 645년 중대형황자와 함께 蘇我氏를 멸하고 大化改新을 주도한 인물이다. 천지 8년 (669)에 大織冠 內大臣이라는 직위와 藤原氏 라는 씨명을 받았다. 이에 일족도 藤原氏를 칭했 지만 문무 2년(698) 겸족의 아들인 不比等(후히토)만 藤原氏名을 계승하고 그 외에는 다시 中臣 氏를 칭하게 되었다. 不比等은 율령체제를 확립하고 역사서를 편찬하는 데 힘써 주도했으며 딸 宮子를 文武天皇의 황후로 들여 나라시대에는 조정에서 가장 유력한 집안이 되었다. 한편 中臣 鎌足을 신라계 내지 신라와 깊은 관계를 가지고 있었던 인물로 보는 연구(김현구, 1985, 앞의 글, 385~388쪽)도 있다. 955) 沙門智祥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善隣國寶記 에 실린`海外國記a에 의하면 곽무종과의 교섭 에 직접 종산 것은 智辨과 津守連吉祥이었다. 진수련길상은 659년 견당사로 파견되었다가 661

97 192 日本書紀 12월 甲戌朔 乙酉 12월 갑술삭 을유(12일). 郭務悰 등이 돌아갔다.956) 天智天皇 4년(665) 춘2월 是月 백제국의 관위의 계급을 검토하였다.957) 그리고 佐平福信의 功을 인정하여 鬼室集斯958) 959) 에게 小錦下 를 수여했다. <*그 본래 관위는 達率이다.> 또한 백제의 백성 남녀 400여 인을 近江國(오우미노쿠니) 神前郡(칸사키노코오리)에 거주하도록 하였다.960) 3월 是月 이 달에 神前郡의 百濟人에게 토지를 지급했다. 년에 귀국한 사람이며, 지변은 652년 5월 견당사 길사장단과 함께 당으로 갔던 승려다. 지변이 언제 귀국하였는지 확실히 알 수 없다. 956) 곽무종 등이 돌아갔다 : 善隣國寶記 에 실린`海外國記a에 의하면 이길사박덕이 곽무종에게 파 견되어 百濟鎭西筑紫大將軍 이 在百濟國大唐行軍總管 에게 보내는 첩을 전하였다고 한다. 그 첩의 내용은 곽무종이 가져온 첩을 보니 당의 천자가 보낸 국서가 아니고 사신도 천자가 보낸 사신이 아니라고 하면서 앞으로도 公使 가 아니면 入京할 수 없다고 하고 있다. 곽무종은 9개 월간이나 대마도에 머물면서 입경하지 못하고 귀국한 셈이 된다. 957) 백제국의 검토하였다 : 천지 10년 정월조에도 백제망명인에게 관위를 수여한 기사가 보인 다. 958) 鬼室集斯 : 鬼室福信의 아들, 혹은 그의 친족으로 추정된다. 鬼室集斯가 언제 일본에 건너갔는 지 확실하지 않지만 백제에서 망명해 간 귀족 중에서 최초로 관위를 사여받았다. 그런데 鬼室集 斯가 小錦下(천지 3년 2월에 제정된 26계제 가운데 제12위)를 제수받은 것은 천지 10년 정월조 에도 보인다. 또한 천지 4년 춘2월조에서는 鬼室集斯의 원래 백제관위를 達率이라고 하였는데 천지 8년 是歲條에는 佐平으로 나온다. 한편 일본 滋賀(시가)縣 蒲生郡 日野町에는 鬼室集斯의 墓碑가 있으며 鬼室集斯가 鬼室神社에 신으로 모셔져 있다. 묘비 자체 및 비문에 대해서는 에도 시대부터 진위논쟁이 계속되어 왔지만, 최근에 묘비는 鬼室集斯의 후손들에 의해 平安시대 후기 에서 겸창시대 후기에 걸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한 연구(胡口靖夫, 1997,`鬼室集斯의 墓碑와 祭祀에 대해a, 한국민속학 29)가 주목된다. 959) 小錦下 : 주 840) 참조. 960) 또한 하였다 : 망명백제인들을 이용하여 새로운 도읍지인 近江國을 개발하기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이후 천지 6년(667) 3월에 大和 귀족들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天智는 飛鳥에서 近江 國의 大津京으로 천도하였다. 또한 천지 8년에도 佐平餘自信과 佐平鬼室集斯 등 남녀 700여 인 193 추8월 가을 8월. 達率 答본春初961)를 보내 長門國(나가토노쿠니)962)에 성을 쌓게 했다. 達率 億 禮福留,963) 達率 四比福夫964)를 筑紫國에 보내 大野(오오노)965)와 椽(키)966) 2성을 쌓았다. 耽羅가 사신을 보내 조공했다.967) 9월 庚午朔 壬辰 9월 경오삭 임진(23일). 당국이 朝散大夫 沂州司馬,968) 上柱國969) 劉德高970) 등을 보냈다. <*등은 右戎衛郞將 上柱國 百濟 軍 朝散大夫 上柱國 郭務悰을 말한다. 모두 254명이다. 을 近江國 蒲生郡에 거주시킨 기사가 있다. 이밖에 일본서기 천지 5년조에는 망명백제인들을 東國지방에 이주시켰는데 이것은 東國지방의 토지 개척을 위한 조치로 여겨진다. 특히 近江國 의 神前郡과 蒲生郡은 백제 유민들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현재도 蒲生郡에 는 石塔寺나 百濟寺 등이 남아있어 이 지역이 고대에 백제인과 관계가 깊은 지역이었음을 말해 준다(주 789)과 주 949) 참조). 961) 答본春初 : 答본는 복성, 春初는 이름이다. 천지 2년(663) 9월에 건너갔을 것으로 추정된다. 천 지 10년 정월조에 의하면 병법에 능하다고 하여 大山下에 서위된다. 962) 長門國 : 주 553) 참조. 963) 億禮福留 : 億禮는 複姓, 福留는 이름이다. 천지 2년 9월에 왜국에 건너갔다. 천지 10년 정월조 에 병법에 능하다고 한다. 964) 四比福夫 : 四比는 복성, 福夫는 이름이다. 億禮福留와 함께 천지 2년 9월에 왜국에 건너간 것 으로 추정된다. 965) 大野城 : 현 福岡(후쿠오카)縣 大宰府(다이자이후)市의 북쪽에 있는 大野山(四天王山)에 축조된 조선식 산성. 전체 길이 15km로 내부에는 50여 곳의 건물터가 발견되었다. 966) 椽城 : 續日本紀 권1 문무 2년(698) 5월조에 보이는 基肄城과 같다. 현 佐賀縣 三養基郡 基山 町에서 福岡縣 筑紫野市에 걸쳐있는 基山에 축조된 조선식 산성. 현재 내부에는 30여곳의 건물 터가 남아있다. 大野城과 椽城 이외에도 천지 6년(667) 11월에 對馬島에 金田城이 축조되었는 데 이 또한 백제식 산성으로 망명백제인의 기술로 쌓아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西谷正, 1994, `朝鮮式山城a, 岩波講座 日本通史 3, 岩波書店). 967) 耽羅가 조공했다 : 일본서기 에 의하면 백제 멸망 이후 탐라는 661년부터 688년까지 9회 에 걸쳐 왜국에 사신을 파견하고 있다. 968) 沂州司馬 : 沂州는 중국 山東省 臨沂縣 州를 가리키며, 司馬는 刺史 휘하에 있던 武官의 長을 지칭한다. 969) 上柱國 : 軍功者에게 사여하던 勳官 가운데 가장 높다. 970) 劉德高 : 白雉 5년(654) 2월조에 인용된 伊吉連博得言 에 의하면 乙丑年(天智 4, 665)에 왜국 에 건너갔다고 한다. 懷風藻 大友皇子傳에 劉德高와 皇子에 대해서 언급한 글이 남아있다.

98 194 7월 28일에 對馬에 이르렀다. 9월 20일에 筑紫에 이르렀고, 22일 票函을 진상하였다.> 11월 己巳朔 辛巳 11월 기사삭 신사(13일). 劉德高 등에게 연회를 베풀어 주었다. 12월 戊戌朔 辛亥 12월 무술삭 신해(14일). 劉德高 등에게 물건을 하사했다. 是月. 劉德高 등이 돌아갔다. 天智天皇 5년(666) 是冬 이해 겨울에 東都의 쥐들이 近江을 향해 옮겨갔다.971) 백제의 남녀 2천여 인을 東國에 거주시켰다.972) 무릇 승려와 속인을 가리지 않고 癸亥年(663)부터 3년 동안 모두 官食을 주었다. 倭漢沙門智由973)가 指南車를 바쳤다. 天智天皇 6년(667) 춘2월 壬辰朔 戊午 봄 2월 임진삭 무오(27일). (중략) 이날 皇孫 大田皇女(오오타노히메미코)974)를 능 앞의 묘에 장사지냈다. 고구려 백제 신라가 모두 葬列이 통과하는 길에서 애도의 표하였다. 추7월 己未朔 己巳 가을 7월 기미삭 기사(11일). 耽羅가 佐平 椽磨975) 등을 보내 공물을 바쳤다. 971) 東都의 옮겨갔다 : 유사한 내용의 기사가 白雉 5年 정월조와 12월조에도 기록되어 있다. 본 기사는 天智 6年(667) 3月條의 近江 천도에 대한 복선의 기사로 여겨진다. 972) 백제의 남녀 2천여 인을 거주시켰다 : 동북 지방의 토지 개척을 위해 거주시킨 것으로 여 겨진다(주 959) 참조). 973) 倭漢沙門智由 : 齊明 4년 是歲條에도 沙門智踰가 指南車를 만들었다는 기록이 보인다. 倭漢氏는 주 192) 참조. 974) 大田皇女 : 天智天皇의 皇女로 大海人皇子(후에 天武天皇)의 妃이다. 975) 椽磨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지만, 좌평이라는 백제관직명을 보유하고 있는 점에서 웅진도독부 에 부속된 탐라인일 것으로 추정되기도 한다(김은숙, 1996, 앞의 글). 日本書紀 월 丁巳朔 乙丑 11월 정사삭 을축(9일). 백제 鎭將 劉仁願이 熊津都督府 熊山縣令976) 上柱國 司馬法聰977) 등을 파견하여 大山下978) 境部連石積979) 등을 筑紫都督府980)에 보냈다. 己巳(13일). 司馬法聰 등이 돌아갔다. 小山下 伊吉連博德과 大乙下981) 笠臣諸石(사카노 오미모로이와)982)을 송사로 삼았다. 天智天皇 7년(668) 하4월 乙卯朔 庚申 여름 4월 을묘삭 경신(6일). 百濟983)가 未都師父984)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庚午(16일). 未都師父 등이 돌아갔다. 天智天皇 8년(669) 是歲 이 해에 小錦中 河內直鯨(코우치노아타이쿠지라)985) 등을 大唐에 사신으로 보냈다. 또한 976) 熊山縣令 : 熊山縣은 熊津縣으로 추정되고, 令은 縣의 장관을 의미한다. 977) 司馬法聰 : 삼국사기 신라본기에 의하면 백제가 멸망한 후 신라에 억류되어 672년에 문무왕 이 당에 사신을 파견할 때 석방되었다고 한다. 일본서기 천지 4년(665) 9월조에 신라에 저항 하였다는 기록 등을 통해서 본다면 法聰은 예전에 백제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이도학, 1987, `熊津都督府의 支配組織과 對日本政策a, 白山學報 34). 978) 大山下 : 大仙下로 표기되기도 한다(주 842) 참조). 979) 境部連石積 : 주 841) 참조. 천지 4년(665)에 견당사로 파견되었다가 천지 6년 11월에 당의 도 움으로 귀국한다. 이 시기에 당이 왜국 견당사의 귀국을 도와 준 이유는 왜국이 고구려를 원조 하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한 계책이었을 것으로 여겨진다(鈴木靖民, 1972,`百濟救援の役後と 日唐交涉a, 續日本古代史論集 上, 吉川弘文館). 980) 筑紫都督府 : 筑紫大宰府. 일본서기 편찬자가 唐의 관제를 모방하여 윤색한 표현이거나 실제 당시 당측에서 일본의 筑紫大宰府를 부른 명칭이었을 것이다. 981) 大乙下 : 천지 3년(664) 2월에 제정된 26관위 가운데 제21위. 982) 笠臣諸石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笠臣氏는 吉備笠臣氏라고도 하며 천무 12년 11월에 朝臣姓을 사성받았다. 新撰姓氏錄 右京皇別條에 의하면 孝靈天皇의 皇子인 稚武彦命의 후예라고 한다. 983) 百濟 : 당이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한 熊津都督府를 가리킨다.

99 196 日本書紀 197 佐平餘自信과 佐平鬼室集斯 등 남녀 700여 인을 近江國 蒲生郡(가모우노코오리)986)에 옮 貴子995)<*兵法을 능하다.> 億禮福留996)<*兵法을 능하다> 答본春初997)<*兵法에 능하 겨 살도록 하였다. 또한 당이 郭務悰 등 2천여 인을 보냈다. 다.> 본日比子贊波羅金羅金須998)<*약에 해박하다.> 鬼室集信999)<*약에 해박하다.>에게 天智天皇 10년(671) 춘정월 辛亥 봄 정월 신해. 百濟鎭將 劉仁願이 李守眞987) 등을 보내 표를 올렸다. 是月 이 달에 大錦下988)를 佐平 餘自信 沙宅紹明989)<*法官大輔990)>에게 내렸다. 小錦下991)를 鬼室集斯<*學職頭992).에게 내렸다. 大山下993)를 達率 谷那晋首994)<*兵法에 능하다.> 木素 984) 未都師父 : 10일 후에 귀국한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985) 河內直鯨 : 河內直氏는 백제계 씨족이다(주 405) 참조). 일본서기 에는 河內直鯨을 비롯한 사신 들의 파견목적이 보이지 않는데 新唐書 卷220 日本傳 咸亨元年(670) 3월조의 倭國王. 遣使賀 平高麗 라는 기사를 통해서 河內直鯨은 당이 고구려를 멸망시킨 것을 축하하기 위해 파견되었음 을 추정해 볼 수 있다(森克己, 1966, 遣唐使, 至文堂, 23쪽). 그런데 冊府元龜 卷970 外臣部 朝貢 3에는 總章 2年(669) 12월과 咸亨 元年(670) 두 차례에 걸쳐 왜국사신이 입조한 것으로 되어 있다. 咸亨元年條의 내용은 신당서 의 내용과 같다. 河內直鯨의 귀국시기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986) 蒲生郡 : 滋賀(시가)縣 神崎(카미자키)郡의 동남부에 위치. 987) 李守眞 : 唐人으로 7월에 熊津都督府 사신과 함께 귀국한다. 988) 大錦下 : 天智 3년 2월에 제정된 26관위제 가운데 제9위. 989) 沙宅紹明 : 懷風藻 大友皇子傳에 學士로서 황자의 빈객으로 활동한 모습이 보인다. 藤氏家 傳 大織冠傳(鎌足傳)에 의하면 뛰어난 문장가로서 당시의 최고 유력자였던 藤原鎌足의 비문을 작성하였다고 한다. 日本書紀 天武 2年(673) 閏6月條에 沙宅昭明의 사망 후에 그의 학식이 높 이 평가되어 外小紫位에 추증되었다. 한편 沙宅紹明은 671년 近江令의 제정에도 백제계 도래인 許率母와 함께 참가하였을 것으로 추측되기도 한다(瀧川政次郞, 1931,`本邦律令の沿革a, 律令 の硏究, 刀江書院). 990) 法官大輔 : 大寶律令制의 式部大輔에 해당된다(法官이라는 용어는 天智 및 天武朝에도 사용되 었지만 大輔는 대보율령 이후의 용어이다). 式部大輔은 정5위하 혹은 종4위하에 상당한다. 식부 는 관인의 서위와 임관에 관련된 명부, 考課 選敍 課試 등 문관의 인사를 관장한다. 991) 小錦下 : 天智 3년 2월에 제정된 26관위제 가운데 제12위이다. 992) 學職頭 : 大寶令制에서 式部省 大學寮의 장관인 大學頭에 해당된다. 종5위상 혹은 종5위하에 상 당한다. 회풍조 서문에 의하면 일본의 학교제도는 천지조에 처음 만들어졌다고 하였으므로 귀 실집사가 초대장관에 임명된 것으로 여겨진다(關晃, 1956, 歸化人, 至文堂, 140쪽). 내렸다. 小山上1000)을 達率 德頂上1001)<*약에 해박하다.> 吉大尙1002)<*약에 해박하다.> 許率母1003)<*오경에 밝다.> 角福牟1004)<*陰陽에 능하다.>에게 내렸다. 小山下1005)를 나머 지 達率 등 50여 인에게 내렸다. 2월 戊申朔 庚寅 2월 무신삭 경인(23일). 백제가 臺久用善1006)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6월 丙寅朔 己巳 6월 병인삭 기사(4일). 백제 三部1007)의 使人이 요청한 군사에 대해 칙명을 내렸다. 993) 大山下 : 대화 5년의 19관위 가운데 제12위, 천지 3년 2월의 26관위 가운데는 제15위에 상당한다. 994) 谷那晋首 : 주 947) 참조. 995) 木素貴子 : 주 946) 참조. 996) 億禮福留 : 주 948) 참조. 997) 答본春初 : 주 961) 참조. 998) 본日比子贊波羅金羅金須 : 日本書紀集解 에서는 본日比子 贊波羅 金羅 金須 4인으로 보았 지만, 정확히 몇 명인지 단언할 수 없다. 999) 鬼室集信 : 이곳에만 보인다. 鬼室福信 및 集斯와 어떤 관계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 1000) 小山上 : 대화 5년(649)의 19관위 가운데 제13위, 천지3년 2월의 26관위 가운데는 제16위에 상당한다. 1001) 德頂上 : 주 939) 참조. 1002) 吉大尙 : 吉은 성이고, 大尙은 이름이다. 懷風藻 大友皇子傳에 學士로서 황자의 빈객으로 활 동한 인물로 나오며, 아들 宜와 智首가 神龜 元年(724) 5월에 吉田連을 사성받는다. 1003) 許率母 : 許는 성이고, 率母는 이름이다. 천무 6년(677) 5월에 大博士로 임명되고 大山下(종6 위)와 함께 30호의 봉호를 받는다. 懷風藻 大友皇子傳에 學士로서 황자의 빈객으로 활동한 인물로 나온다. 1004) 角福牟 : 角은 성으로 록으로도 표기하며 福牟는 이름이다. 자손 중에 陰陽博士인 角兄麻呂(록 兄麻呂)가 있다. 神龜 元年 5월에 羽林連을 사성받는다. 1005) 小山下 : 대화 5년(649)의 19관위 가운데 제14위, 천지3년 2월의 26관위 가운데는 제18위에 상당한다. 1006) 臺久用善 :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07) 三部 : 백제의 5방 가운데 3개의 方

100 198 庚辰. 백제가 日本書紀 眞子1008) 등을 파견해 조를 바쳤다. 是月 이 달에 (중략) 신라가 사신을 보내 조를 바쳤다. 별도로 물소 한 마리, 산 닭 한 마리를 바쳤다. 추7월 丙申朔 丙午 가을 7월 병신삭 병오(11일). 唐人 李守眞 등이 백제의 사신 등과 함께 돌아갔다. 11월 甲午朔 癸卯 199 두 정박하고 있다. 서로 논의하기를 지금 사람과 배의 수가 많아 갑자기 그곳에 도착하면 그곳의 防人들이 놀라 활을 쏘며 싸움이 일어날 것이다. 이에 道文 등을 보내 미리 조공 하려는 뜻을 아뢰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라고 말하였다. 권28 天渟中原瀛眞人天皇 天武天皇(上)1016) 원년(673) 춘3월 壬辰朔 己酉 봄 3월 임진삭 기유(18일). 內小七位1017) 阿曇連稻敷(아즈미노무라지이나시키)1018)를 筑紫 에 파견해서 천황의 喪을 郭務悰 등에게 알렸다. 이에 郭務悰 등은 모두 喪服을 입고 세 11월 갑오삭 계묘(10일). 對馬國司1009)가 筑紫의 大宰府에 사신을 보내어 이달 2일에 沙 門道文1010) 筑紫君薩野馬(츠쿠시노키미사츠야마)1011) 韓嶋勝娑婆(카라시마노스구리사 바)1012) 布師首磐(누노시노오비토이하)1013) 4인이 당에서 와서 당의 사신 郭務悰 등 600 인, 送使 沙宅孫登1014) 등 1,400인, 모두 2,000인은 배 47척에 타고 함께 比知嶋1015)에 모 1008) 眞子 : 熊津都督府의 관인으로 추정되는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09) 對馬國司 : 對馬國司란 율령제하의 용어로서 이전에는 對馬宰 혹은 對馬國宰로 불렸을 것으로 추정된다. 1010) 沙門道文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11) 筑紫君薩野馬 : 지통 4년(690) 10월조에 의하면 제명 7년 백제에 파견되었다가 당군의 포로가 된 인물이다. 筑紫君은 주 306) 참조. 1012) 韓嶋勝娑婆 : 韓嶋는 지명으로 辛島이라고도 한다. 和名類聚抄 에 기록된 豊前國 宇佐郡 辛嶋 鄕에 해당되며, 현재 大分縣 宇佐市의 辛島로 비정된다. 勝은 도래계씨족의 姓이다. 娑婆는 이 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1013) 布師首磐 : 布師首는 新撰姓氏錄 左京皇別條에 의하면 武內宿 의 후예로 나온다. 和名類聚 抄 에 기록된 土佐國 安藝郡의 布師鄕(현 高知縣 安藝市 西鄕)을 근거지로 활약한 씨족이다. 磐 은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1014) 沙宅孫登 :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당할 때 의자왕과 함께 당으로 연행된 佐平孫登과 동일인물이 다. 이후 백제로 돌아와 熊津都督府의 관인으로서 활동한다. 그런데 당이 2,000명이나 되는 사 람들을 왜 왜국에 보냈는지 이들이 어떤 사람들이었는지에 대해 확실한 것은 알 수 없다. 이들에 대해 군사물자요청설 백제난민수송설 위압회유설 모략부대설 포로송환설 등이 있다. 먼저 군사물자요청설은 웅진도독부가 신라와의 전투에서 필요한 군수물자를 요청하기 위해 사신을 파견했다는 설(井上光貞, 1974,`飛鳥の朝廷a, 日本の歷史 3, 小學館)이다. 백제난민수송설은 곽무종 등 600명이 웅진도독부의 당인으로 사택손등 등 1,400명의 백제피난민을 수송하였다는 것이다(池內宏, 1960,`百濟滅亡後の動亂及び唐羅日三國の關係a, 滿鮮史硏究 上世 第2冊, 吉 川弘文館 ; 鈴木靖民, 1972, 앞의 글 ; 이도학, 1987, 앞의 글. 단 이도학은 2,000명 모두 백제망 명인이라고 하였다). 위압회유설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이 곽무종에게 2,000여인의 병력을 보 내 고구려 정복의 위력을 과시하여 일본에 위압을 가하기 위해서 파견하였다는 것이다(森克己, 1965, 앞의 글, 22~23쪽). 모략부대설은 당이 2,000명의 정치공작원들을 파견하여 천지천황을 암살하고 大海人皇子(후에 天武天皇)를 즉위시켜 괴뢰정권을 만들려 하였다는 설(鈴木治, 1972, 白村江, 學生社, 78쪽)과 당이 대해인황자에 압력을 가하고 大友皇子의 近江朝政을 지원하기 위한 부대를 파견하였다는 설(대화암웅, 1979,`壬申の亂の謎a, 古事記と天武天皇の謎, 六興 出版)이 있다. 마지막으로 포로송환설은 600명은 감시와 호송을 위한 당인들이고 사택손등이 인 솔해 간 1,400인은 백제부흥전쟁 이후 당과 백제령에 억류되었던 병사 유학생 유학승 견당 사 수행원 등 倭國人이었다고 한다(松田好弘, 1980,`天智朝の外交についてa, 立命館文學 ; 直木孝次郞, 1993,`百濟滅亡後の國際關係a, 朝鮮學報 147). 1015) 比知嶋 : 현 거제도 서쪽방면에 있는 比珍島로 추정된다. 1016) 天武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39대 천황(재위 672~686). 이름은 大海人(오오시아마). 아 버지는 舒明天皇, 어머니는 皇極(齊明), 天智天皇의 동생. 황후는 野讚良皇女(持統天皇). 자 식으로 高市 草壁 大津皇子가 있다. 天智天皇이 사망한 후 천지의 아들인 大友(오오토모)皇 子와 황위계승을 둘러싸고 대립하여 壬申亂(672)을 일으켰다. 그해 7월에 大友가 자살하자 전 쟁에서 승리한 天武는 飛鳥淨御原宮을 짓고 이듬해 즉위하였다. 치세기간 동안 유력씨족들을 관료제하에 조직 통제하여 천황 중심의 중앙집권체제를 확립하였다. 동시에 법전 및 史書의 편찬, 神祇祭祀의 정비, 불교통제의 강화 등에도 노력하였다. 日本書紀 天武紀는 2권으로 나 누어져 편찬되었는데 상권은 주로 天武의 즉위 전인 이른바 壬申亂에 대해서 정리하였다. 하권 에서는 치세 내용을 기록하였다. 1017) 內小七位 : 小七位는 천지 3년(664) 2월에 제정된 26관위제에는 없다. 이에 小七位를 대보율 령제의 小山位로 보던가, 小七位의 七 字를 乙 字의 오기로 보고 小乙位로 추정하기도 한다.

101 200 日本書紀 번 애도의 禮를 올리고, 동쪽을 향해 머리를 조아렸다. 壬子(21일). 郭務悰 등이 再拜를 하고, 書函과 信物을 바쳤다. 비로소 즉위하였다. 이에 오직 축하 사신 이외에는 부르지 않았다. 너희들이 직접 본 대 로이다. 또한 날씨가 춥고 파도가 험해졌다. 오래도록 머물러 있으면 도리어 너희들에게 는 근심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마땅히 빨리 돌아가도록 하라. 고 하였다. 이에 국왕과 하5월 辛卯朔 壬寅 여름 5월 신묘삭 임인(12일). 甲 弓矢를 郭務悰 등에게 하사하였다. 이날 곽무종 등에 게 하사한 물건은 모두 匹, 布 2852端, 綿 666斤이었다. 戊午(28일). 高麗1019)가 前部1020) 富加 1021) 등을 보내 조를 바쳤다. 庚申(30일). 郭務悰 등이 돌아갔다. 권29 天渟中原瀛眞人天皇 天武天皇(下) 2년(674) 윤6월 乙酉朔 庚寅 윤6월 을유삭 경인(6일). 大錦下 百濟 沙宅昭明이 卒하였다. 사람됨이 총명하고 지혜로 와 사람들이 수재라고 칭하였다. 이에 천황이 그것을 놀라워하니 恩情을 베풀어 外小紫 사신 久麻藝1025) 등에게 처음으로 爵位를 주었다. 그 爵位는 大乙上1026)인데, 錦繡으로 冠 을 장식하였다. 그 나라의 佐平 관위에 해당한다. 곧 筑紫로부터 돌아갔다. 天武天皇 3년(675) 춘정월 辛亥朔 庚申 봄 정월 신해삭 경신(10일). 百濟王昌成1027)이 薨했다. 小紫位로 추증하였다. 天武天皇 4년(676) 춘정월 丙午朔 봄 정월 병오삭(1일). 大學寮1028)의 여러 學生, 陰陽寮1029) 外藥寮1030) 및 舍衛1031)의 딸과 位1022)로 추증하였다. 거듭해서 본국의 大佐平의 위계도 하사하였다. 추8월 戊申 가을 8월 무신(25일). 즉위 축하 사신 金承元1023) 등 中客1024) 이상 27인을 京에 불렀다. 그리고 大宰에게 명하여 耽羅의 사신에게 조서를 내려 천황이 새로이 천하를 평정하고 內位에 대해서는 천지 10년 정월조의 施行官位法度之事 라는 기사에 주목하여 이 시기부터 外位와 구별하여 敍位하기 시작했다는 견해가 있다. 1018) 阿曇連稻敷 : 주 716) 참조. 1019) 高麗 : 신라가 문무왕 10년(670) 백제의 옛 영역이었던 金馬渚(현 전북 익산)에 安勝을 왕으로 삼아 세운 정권. 1020) 前部 : 고구려의 王都 5部 가운데 하나. 1021) 富加 : 귀국기사도 보이지 않고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22) 外小紫位 : 外位의 初出이다. 日本書紀 天武紀에는 모두 4곳에 걸쳐 外位가 보이는데 壬申亂 에서 활약한 지방출신자들을 우대하기 위해 하사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小紫位는 천지 3년 2월에 제정된 26관위 가운데 제6위이다. 1023) 金承元 : 천무 2년(673) 윤6월에 신라의 賀騰極使로서 왜국에 건너왔다. 당시의 관위는 韓阿 (大阿 )으로 신라 17관등 가운데 제5위이다. 같은 해 11월에 귀국한다. 1024) 中客 : 使臣의 지위 혹은 職掌일 것으로 여겨진다. 참고로 大化 5年 是歲條에 新羅使의 구성을 보면 僧 1인, 侍郞 2인, 丞 1인, 達官郞 1인, 中客 5인, 才伎 10인으로 구성되어 있다. 1025) 久麻藝 : 탐라의 왕자. 천무 2년 윤6월에 왜국에 사신( 일본서기 에서 최초로 왜국의 작위를 받은 탐라사신)으로 왔다가 그해 8월에 귀국한다. 이미 천지 8년(669) 3월조에 久麻伎라고 하 여 조공한 기사가 있고, 이후 천무 4년 8월에도 도왜한 기사가 있다. 1026) 大乙上 : 천지 3년 2월에 제정된 26관위 가운데 제19위. 1027) 百濟王昌成 : 백제왕 善光(禪廣)의 아들이자 敬福의 伯父( 續日本紀 天平神護 2年 6월조 참 조). 어려서 아버지를 따라 왜국에 왔으나 674년에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여 小紫(종3위)를 추증받았다. 본조의 백제왕 칭호는 持統朝에 善光이 사성받은 것을 참고로 追記한 것으로 여겨 진다. 1028) 大學寮 : 大寶令制의 式部省의 被官에 해당되는 관사. 四等官 이외에 大學博士 音博士 書博 士 등이 있고, 학생 400명이 배속되었다. 천무조의 官名은 學職이었을 것이다(주 992) 참조). 1029) 陰陽寮 : 大寶令制의 中部省의 被官에 해당되는 관사. 天文 曆 氣象 관측의 일을 맡는다. 四 等官 이외에 陰陽師나 陰陽博士 曆博士 天文博士, 그리고 陰陽生 曆生 天文生 등이 배속 된다. 1030) 外藥寮 : 大寶令制의 宮內省의 被官인 典藥寮에 해당되는 관사. 四等官 이외에 醫師 醫博士 醫生 針師 針博士 針生 등이 배속된다. 1031) 舍衛 : 인도의 불교 성지인 곤다州 세트마해트 지역.

102 202 日本書紀 墮羅1032)의 딸, 百濟王 善光, 新羅 仕丁1033) 등이 藥과 진기한 것을 바쳤다. 12월 癸未 12월 계미(6일). 大唐에 유학생 土師宿 甥(하지노스쿠네오이)1036) 白猪史寶然(시라이노 天武天皇 6년(678) 후비토호우넨)1037) 및 백제 원군으로 참전했다가 大唐의 포로가 된 사람인 猪使連子首(이츠 카이노무라지코비토)1038) 筑紫三宅連得許(츠쿠시노미야케노무라지토쿠코)1039)가 신라를 5월 壬戌朔 甲子 5월 임술삭 갑자(3일). 大博士 百濟人 率母(許率母)에게 칙명을 내려 大山下의 관위를 주었다. 그리고 30戶를 봉하였다. (후략) 경유해서 귀국하였다. 신라는 大奈末 金物儒1040)를 보내 甥 등을 筑紫까지 호송하였다. 天武天皇 14년(686) 天武天皇 10년(682) 2월 丁丑朔 庚辰 2월 정축삭 경진(4일). 당인 백제인 고구려인 모두 147인에게 작위를 주었다. 8월 丙子 8월 병자(10일). 三韓의 사람들에게 조서를 내려 이전에 10년 간의 조세를 이미 정한 바 있다. 또 더하여 귀화의 첫해에 같이 온 자손은 모두 과역을 면제한다. 고 했다. 동10월 癸酉朔 丙子 겨울 10월 계유삭 병자(4일). 백제승 常輝1041)에게 30戶를 봉했다. 이 중의 나이는 100 天武天皇 12년(684) 세였다. 춘정월 丙午 11월 丙寅 봄 정월 병오(18일). (중략) 이날 小墾田 ) 및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음악을 궁 전의 정원에서 연주했다. 天武天皇 13년(685) 5월 辛亥朔 甲子 5월 신해삭 갑자(14일). 귀화한 백제의 승니 및 속인, 남녀 합해 23인을 모두 武藏國(무 사시노쿠니)1035)에 안치했다. 1032) 墮羅 : 覩貨邏라고도 한다(齊明 3年 7월조, 천무 4년 정월조). 현재 타이. 1033) 仕丁 : 율령제 용어로 국가의 각종 노역에 징발된 자들을 가리킨다. 여기에서는 신라의 仕丁임 을 밝히고 있는데 천무 9년(680) 2월조에 신라의 仕丁 8인을 본토로 돌려보냈다는 기사가 있 다. 신라 仕丁의 도왜기사는 보이지 않는다. 1034) 小墾田 : 倭舞의 일종일 것으로 추정된다. 1035) 武藏國 : 현 埼玉(사이타마)縣과 東京都 및 神奈川(카나가와)縣 동부의 옛 국명. 일본서기 에 서 백제계 도래인을 武藏(무사시)國에 정주시켰다는 기사는 본조가 유일하다. 11월 병인(24일). 法藏法師1042)와 金鍾1043)이 白述1044)을 달인 약을 바쳤다. 이날 천황을 위해 招魂祭를 지냈다. 1036) 土師宿 甥 : 文武 4年(700) 6월 勤廣參으로 大寶律令 찬정사업에 참가하였고, 和銅 2年(709) 정월에 정6위하에서 종5위하로 승진되었다. 당에 파견된 시기는 알 수 없다. 1037) 白猪史寶然 : 白猪史骨이라고도 한다. 문무 4년 6월 務大壹로서 대보율령 찬정사업에 참가한 공에 의해 사록받았다. 당에 파견된 시기는 알 수 없다. 1038) 猪使連子首 : 猪使連은 猪飼部(이카이베)를 관장한 반조씨족으로 천무 13년(684) 12월에 宿 姓을 사성받는다. 新撰姓氏錄 右京皇別條에 의하면 安寧天皇의 황자 志紀都比古命의 후예라 고 한다. 子首는 이름으로 이곳에만 보인다. 1039) 筑紫三宅連得許 : 筑紫三宅連은 古事記 神武段에 의하면 神八井耳命의 후예로 나온다. 得許 는 이름으로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40) 金物儒 : 筑紫에서 향응을 받고 천무 14년(685) 3월 귀국한다. 1041) 常輝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42) 法藏法師 : 持統 6年(692) 2월에 음양박사로서 銀20兩을 받았다. 1043) 金鍾 : 천무 14년 동10월 庚辰條에는 優婆塞益田直金鍾으로 나온다. 優婆塞은 속세에 있으면 서 불교를 신봉하고 수행하는 남자를 일컫는다. 益田直金鍾은 이곳에만 보이기 때문에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3 204 日本書紀 天武天皇 朱鳥 원년(686) 持統天皇 2년(688) 춘정월 壬寅朔 癸卯 하5월 戊午朔 乙丑 봄 정월 임인삭 계묘(2일). (중략) 이날 攝津國(츠노쿠니) 사람 百濟新興1045)이 白馬瑙1046) 를 바쳤다. 5월 무오삭 을축(8일). 백제 敬須德那利1050)를 甲斐國(카이노쿠니)1051)으로 옮겼다. 추7월 丁巳朔 丙子 가을 7월 정사삭 병자(20일). 백제 沙門道藏1052)에게 명하여 祈雨禮佛을 드리도록 했다. 5월 庚子朔 戊申 5월 경자삭 무신(9일). (중략) 이날 侍醫인 百濟人 億仁1047)이 병이 들어 죽게 되었다. 勤 大壹位를 내리고, 100戶를 봉했다 오전이 지나지 않아 천하에 비가 두루 내렸다. 8월 辛亥 8월 신해(25일). 탐라왕이 佐平加羅1053)를 보내어 방물을 바쳤다. 9월 戊戌朔 丁卯 9월 무술삭 정묘(30일). (중략) 이날 百濟王良虞1048)가 백제왕 善光을 대신하여 205 를지 었다. (후략) 권30 高天原廣野姬天皇 持統天皇1049) 원년(687) 윤12월 윤12월. 筑紫大宰가 고구려 백제 신라 3국 남녀 백성과 僧尼 62명을 바쳤다. 9월 丙辰朔 戊寅 9월 병진삭 무인(23일). 탐라 사신 佐平加羅 등에게 筑紫館에서 연회를 베풀고 물건을 각각 차등 있게 주었다. 持統天皇 4년(690) 5월 乙酉 5월 을유(10일). 백제의 남녀 21명이 귀화했다. 1044) 白述 : 국화과의 다년생 초목. 1045) 百濟新興 :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46) 白馬瑙 : 석영의 일종. 1047) 億仁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48) 百濟王良虞 : 良虞(郞虞)는 善光의 손자이자 昌成의 아들. 大寶 3년(703) 8월에 伊豫守로 임명 되고, 그 후 藤氏家傳 下 武智麻呂傳에 의하면 慶雲 元年(704)에 大學頭가 되어 武智麻呂와 함께 대학의 부흥에 진력하였다고 한다. 天平 9年(737) 7月에 사망하는데 그 때의 관위는 散位 從4位이었다. 한편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下(1967, 岩波書店, 483쪽)에는 良虞를 선광 의 아들이자 昌成의 동생이며, 敬福의 아버지라고 한다. 1049) 持統天皇 : 日本書紀 의 계보상 제40대 천황(재위 690~697). 日本書紀 에 기록된 마지막 천황. 이름은 野讚良(우노노사라라). 아버지는 天智, 어머니는 蘇我倉山田石川麻呂의 딸인 遠智娘. 天武天皇의 황후. 686년 천무가 사망한 후에도 臨朝稱制하면서 689년 飛鳥淨御原令 을 시행하는 등 고대율령국가의 확립에 노력하였다. 689년 황태자이었던 草壁황자가 사망함에 따라 이듬해인 690년에 정식으로 즉위하였다. 즉위 후 694년에는 藤原京으로 천도하고, 697 년에 손자인 文武天皇에게 양위하고 자신을 太上天皇으로서 정치를 보좌하였다. 702년 사망한 후에는 천무의 大內陵에 합장되었다. 1050) 敬須德那利 : 망명백제인으로 추정되지만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51) 甲斐國 : 현 山梨(야마나시)縣의 옛 국명이다. 후대의 사료에서도 이 지역에 거주한 백제인의 후예들을 확인할 수 있다. 續日本紀 연역 8년(789) 6월조에 보이는 古爾는 三國史記 에도 보이는 古爾萬年과 같은 성이며, 鞠部와 要部도 22부를 연상시킨다(關晃, 1996,`甲斐の歸化 人a, 古代の歸化人 ). 1052) 沙門道藏 : 天武 12年(683) 秋7月條에도 비를 내리게 한 기사가 있다. 養老 5年(721) 6월에 나 이 80세를 넘겨 祿을 받았다. 1053) 佐平加羅 : 佐平은 백제의 관등으로 탐라가 오랫동안 백제의 영향 아래에 있었음을 보여주는 사례이다. 加羅는 이곳에만 보인다.

104 206 日本書紀 人朝臣(후세노미아루지노아소미)1067)과 大伴御行宿 (오오토모노미유키노스쿠네)1068)에게 9월 丁酉 9월 정유(22일). 大唐 학문승 智宗1054) 義德1055) 淨願1056)과 軍丁1057)인 筑紫國 上陽 郡 1058) (카미츠야메노코오리) 1060) 訓 1059) 大伴部博麻(오오토모베노하카마) 가 신라의 送使 大奈末金高 등을 따라 축자로 돌아왔다. 봄 정월 기묘(7일). 公卿에게 음식과 의상을 주었다. 正廣肆1061) 百濟王余禪廣1062) 直大 1064) 遠寶 있었다. 하4월 辛丑朔 권장하였다. 춘정월 己卯 肆 는 80호로 전과 합하면 300호이다. 그 나머지에게도 봉을 더해 주었는데 각각 차등이 여름 4월 신축삭(1일). (중략) 大學博士 上村主百濟1069)에게 大稅 1,000束을 주어 학업을 持統天皇 5년(691) 1063) ) 良虞와 南典 에게도 후하게 내렸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乙酉(13일). 封을 더해 주었다. 황자 高市는 2,000戶로 이전의 것과 합하면 3,000戶, (중략) 正廣肆 百濟王禪廣에게 100호로 이전의 것과 합하면 200호, 直大壹1066) 布勢御主 5월 辛未朔 辛卯 5월 신미삭 신묘(21일). 百濟 淳武徵子1070)에게 壬申年의 공을 포상하여 直大參1071)을 주 었다. 이에 와 布를 하사하였다. 9월 己巳朔 壬申 9월 기사삭 임신(4일). 音博士1072) 당인 續守言과 薩弘恪,1073) 書博士 백제인 末士善信1074) 1054) 智宗 : 白雉 5年(654) 2월에 견당사를 따라 당에 건너갔다. 1055) 義德 : 白雉 4年 夏5월에 학문승으로서 견당사를 따라 당에 건너갔다. 1056) 淨願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57) 軍丁 : 丁은 성년남자 혹은 사역할 수 있는 남자를 의미한다. 軍丁은 軍士를 일컫는다. 1058) 上陽 郡 : 筑紫國의 동남부. 현 福岡縣 八女(야메)市와 八女郡 및 筑後(츠쿠고)市의 북쪽 지역 에 비정된다. 1059) 大伴部博麻 : 大伴部는 大伴氏의 部曲으로 전국에 분포하고 있었다. 博麻는 大伴部 출신의 인 물로 제명 7년 백제부흥전쟁에서 포로가 되어 당에 끌려간 筑前國上陽郡의 병사였다. 그 후 664년에 土師連富 등의 귀국을 위해 자신을 팔아 옷과 식량에 충당하였다고 한다. 이에 持 統 4年(690) 9月에 그가 귀국하자 한달 후 조정은 博麻의 희생을 높이 사서 務大肆(令制에서는 종7위하에 상당)의 관위와 여러 상을 하사하였다 1060) 大奈末金高訓 : 大奈末은 大奈麻로 신라의 17관등 가운데 제10위. 金高訓은 持統 4년(690) 12 월에 귀국한다. 1061) 正廣肆 : 令制에서는 正3位 또는 從3位에 상당. 1062) 百濟王余禪廣 : 百濟王善光王. 주 949) 참조. 1063) 直大肆 : 令制에서는 종5위상 또는 종5위하에 상당. 1064) 遠寶 : 善光의 아들. 문무 4년(700) 10월에 직광삼(정5위하)으로 常陸守에 임명되었고, 708년 3월에는 정5위상으로 左衛士督에 임명되었다. 이후 화동 6년(713) 4월에는 散位從4位下로 승 진하였고, 天平 6年(734)에 사망한다. 1065) 南典 : 善光의 아들. 持統 10年(697) 正月에 直大肆을 서위받고, 화동 1년(708) 3월에 종4위하 로 備前守로 임명되었다. 이후 播磨按察使를 거쳐 天平 9年(737)에는 從3位가 되었다. 에게 銀 20냥을 각각 하사하였다. 1066) 直大壹 : 令制에서는 정4위상 또는 정4위하에 상당. 1067) 布勢御主人朝臣 : 廣庭의 아버지이다. 持統 元年(687) 정월 納言으로서 천무천황의 빈궁에서 를 하였고, 同 4년 정월 천황의 즉위 때에는 丹比島와 함께 주하하였다. 同 8년 정월 氏上이 되었고, 이후 阿倍朝臣을 칭하였다. 同 10년 大納言, 大寶 元年(701) 右大臣으로 승진하였다. 同 13년에 사망할 때는 左大臣 從2位이었다. 1068) 大伴御行宿 : 持統 2年 11월 천무천황의 장송 때에 布勢御主人과 함께 를 하였다. 同 8년 에 氏上이 되었고, 大寶 元年 정월 사망할 때는 大納言正廣參이었다. 이후 正廣貳右大臣에 추 증되었다. 1069) 大學博士 上村主百濟 : 율령제하에서는 式部省의 大學寮에 박사(정6위하) 1인과 조교(정7위하) 2인을 둔다. 百濟는 지통 7년 3월에는 勤廣貳, 慶雲 元年 2월에 종5위상이 된다. 망명백제인인 지 아닌지 확실히 알 수 없다. 1070) 淳武徵子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71) 直大參 : 율령제하에서는 정5위상 혹은 정5위하에 상당한다. 1072) 音博士 : 율령제하에서는 式部省 被官인 大學寮에 音博士가 2인 있고, 종7위하에 상당하였다. 일반학생들에게 소위 기초교양과목으로 중국어의 표현을 가르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1073) 薩弘恪 : 續守言과 함께 제명 7년(661) 11월에 왜국에 건너온 것으로 추정된다(주 892) 참조). 1074) 書博士 백제인 末士善信 : 書博士는 율령제하에서 大學寮에 書博士가 2인 있고, 종7위상에 상 당하였다. 일반적으로 한자를 쓰는 법을 가르쳤다. 末士는 末氏의 복성표기, 善信은 이름이다.

105 208 12월 戊戌朔 己亥 12월 무술삭 기해(2일). 醫博士 務大參 德自珍,1075) 呪禁博士 木素丁武1076)와 沙宅萬首1077) 에게 각각 은 20냥을 하사하였다. 持統天皇 6년(692) 2월 丁酉朔 丁未 2월 정유삭 정미(11일). 여러 관인에게 조서를 내려 3월 3일을 맞아 장차 伊勢에 가려 고 한다. 마땅히 그 뜻을 잘 알아 옷과 물건들을 갖추도록 하라. 고 하였다. 陰陽博士1078) 日本書紀 持統天皇 8년(694) 3월 己亥 3월 기해(16일). 조서를 내려 7년 癸巳年에 醴泉1080)이 近江國 益首郡(야스노코오리)1081) 都賀山(츠가야마)1082)에서 솟았다. 여러 병에 걸린 사람들이 益須寺1083)에 머물면서 치료하 였는데 차도가 있는 사람이 많았다. (중략) 처음 醴泉을 경험한 사람인 葛野羽衝(가즈노 노하츠키)1084)과 百濟士羅羅女(쿠다라노츠라라메)1085)에게 각각 2匹 布 10端 10口 를 내리도록 하라. 고 하였다. 沙門法藏과 道基1079)에게 은 20냥을 각각 하사하였다. 持統天皇 10년(696) 持統天皇 7년(693) 춘정월 甲寅 춘정월 乙巳 209 봄 정월 갑인(11일). 百濟王 南典1086)에게 直大肆를 주었다. 봄 정월 을사(15일). 백제왕 善光에게 正廣參을 추증하였다. 아울러 賻物을 하사하였다. 11월 壬辰 11월 임진(7일). 탐라의 왕자와 佐平 등에게 하사품을 각각 차등이 있게 내렸다. 末士善信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 수 없다. 1075) 醫博士 務大參 德自珍 : 醫博士는 율령제하에서 宮內省의 被官인 典藥寮에 의박사가 1인이 있 고, 정7위하에 상당한다. 醫生 40인을 교육한다. 務大參은 令制에서는 종7위상에 상당한다. 德 自珍의 德은 성이고, 自珍은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76) 呪禁博士 木素丁武 : 呪禁博士란 주술에 의한 질병의 치료를 목적으로 설치하여 주금생을 가르 치는 관리이다. 율령제하에서는 典藥寮에 呪禁博士 1인이 있고, 종7위상에 상당한다. 呪禁 70 인을 교육한다. 木素丁武의 木素는 木氏의 복성, 丁武는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77) 沙宅萬首 : 沙宅은 沙氏의 복성, 萬首는 이름이다.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78) 陰陽博士 : 율령제하에서는 中務省의 陰陽寮에 陰陽博士가 1인이 있고, 정7위하에 상당한다. 음양생 10인을 가르쳤다. 1079) 道基 : 다른 곳에 보이지 않아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80) 醴泉 : 감주와 같은 맛이 나는 온천수. 1081) 益首郡 : 현 滋賀縣 八幡(야와타)市의 남단과 守山(모리야마)市의 대부분에 걸친 지역 1082) 都賀山 : 현 滋賀縣 守山市 三宅町에 있는 작은 산. 1083) 益須寺 :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守山市 吉堅町 남동부에 7~8세기 와편이 발견되고 있어 그 일대일 것으로 추정된다. 1084) 葛野羽衝 :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1085) 百濟士羅羅女 : 近江國에 있던 망명백제인 또는 그 자손으로 추정된다. 1086) 南典 : 주 1065)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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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9 續日本紀 217 續日本紀 六國史의 하나로 日本書紀 의 뒤를 잇는 편년체 사서이며, 전체 40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光 仁천황 때에 石川名足 등이 편집한 것을 桓武천황 때에 藤原繼繩 菅野眞道 등이 개정하여 전반 부를 완성하였고, 다시 후반부를 편찬 수정하여 797년 완성하였다. 697년(文武천황 원년)부터 791년(桓武천황 延曆 10)까지 95년 동안의 일본 역사를 편년체로 서술하였다. 奈良시대의 기본 사료이다. (新訂增補)國史大系에 수록되었다. 권1 天之眞宗豊祖父天皇 文武天皇 4년(700) 동10월 己未(15) 直大壹 石上朝臣麻呂(이소노가미노아손 마로)를 筑紫總領1)으로 삼았다. 直廣參 小野朝 臣毛野(오노노아손 케누)를 大貳로 하였다. 直廣參 波多朝臣牟後閉(하타노아손 무고헤) 를 周防總領2)으로 삼았다. 直廣參 上毛野朝臣小足(가미츠케노아손 오타리)을 吉備總領3) 으로 삼았다. 直廣參4) 百濟王遠寶(구다라노고니키시 온보우)를5) 常陸6)守7)로 하였다. 1) 總領 : 총령은 7세기 후반 일본열도의 군사적 외교적 중요 지역에 설치된 관직으로서 大宰라고도 표기되었다. 대보령의 시행 이후 축자대재(총령)만 남고 나머지는 모두 폐지된 것으로 보인다. 사 료상으로 확인되는 7세기 후반의 총령은 筑紫 周防 吉備 伊予 東國 다섯 군데이다. 2) 주방국(스오우노쿠니) : 지금의 야마구치(山口)현 동남부 지역. 3) 길비국(키비노쿠니) : 지금의 오카야마(岡山)현 지역 4) 直廣參 : 천무천황 14년에 제정된 작위의 하나이며 701년 대보령 시행에 따른 율령 관위와 비교하 면 正五位下에 상당한다. 5) 백제왕 원보 : 日本書紀 지통천황 5년 정월조에 百濟王 禪廣 등과 함께 등장하며 이때 直大肆(율 령 관위제로 따지면 從五位上에 해당)의 관위를 가지고 있었다. 원보의 혈통 관계는 분명하지는 않 지만, 백제 의자왕의 아들 禪廣의 자식으로 추정하는 견해가 가장 일반적이다. 뒤에 左衛士督을 거 쳐 성무천황 천평 6년(734) 3월에 사망하였다. 6) 常陸 지방 : 오늘날의 關東 지역의 茨城縣 일대이다. 7) 守 : 당시 일본의 지방에 파견된 최고 행정 책임자(지방관)를 말한다. 일본의 고대 지방 통치 체제 는 國(쿠니)-郡(고호리 또는 군)-里(사토 또는 리) 체제로 편제되어 있었으며 國을 다스리는 최고 장관을 國司(고쿠시)라고 하였다. 일본의 율령 官制는 기본적으로 각 관청의 관원이 長官(가미)-次 官(스케)-判官(죠)-主典(사칸)이라는 四等官制로 구성되어 있으며 四等官의 구체적 표기는 각 관 청마다 달랐다. 지방의 國司의 경우는 통상 守(가미)-介(스케)- (죠)-目(사칸)으로 구성되어 있었

110 218 권3 天之眞宗豊祖父天皇 文武天皇 大寶 3년(703) 8월 辛酉(2) 從五位上 百濟王良虞(구다라노고니키시료우구)를8) 伊豫守로9) 삼았다. 권3 天之眞宗豊祖父天皇 文武天皇 慶雲 원년(704) 2월 乙亥(20) 從五位10) 上村主百濟(가미노스쿠리 구다라)11)에게 阿刀連(아토노무라지)의 姓을 하사하 였다. 권3 天之眞宗豊祖父天皇 文武天皇 慶雲 4년(707) 5월 癸亥(26) 續日本紀 219 러 우리 사신 粟田朝臣眞人(아와타노아손 마히토) 등을 만나, [그를] 따라서 歸朝하였다. 그 고생하였음을 가련히 여겨 이러한 하사를 한 것이다. 권4 日本根子天津御代豊國成姬天皇 元明天皇 和銅 원년(708) 3월 丙午(13) 從四位上 中臣朝臣意美麻呂(나카도미노아손 오미마로)를 神祇伯에 임명하였다. (중략) 正五位上 猪名眞人石前(이나노마히토 이와사키)을 右京大夫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大 伴宿 男人(오호도모노스쿠네 오히토)을 衛門督에 임명하였다. 正五位上 百濟王遠寶를 左衛士督13)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巨勢朝臣久須比(고세노아손 쿠스히)를 右衛士督에 임명하였다. (중략) 正五位上 巨勢朝臣邑治(고세노아손 오호지)를 播磨守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下 百濟王南典(구다라노고니키시 나무텐)을14) 備前守에15)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多 治比眞人吉備(다지히노마히토 키비)를 備中守에 임명하였다. (후략) 讚岐國 那賀郡의 錦部刀良(니시고리노도라), 陸奧國 信太郡의 生王五百足(이호다리), 筑後國 山門郡의 許勢部形見(고세베노가타미) 등에게 각각 衣 1襲 및 鹽 穀을 지급하였 다. 처음 百濟를 구원하였을 때12) 관군이 불리하였다. 刀良 등이 唐兵의 포로가 되어 [신 분이] 몰락하여 官戶가 되었다. 40 여년이 지나서 이에 해방되었다. 刀良은 이때에 이르 권6 日本根子天津御代豊國成姬天皇 元明天皇 和銅 6년(713) 하4월 乙卯(23) 從四位下 安八萬王(아하치마 오우)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大石王(오호 이시 오우)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益氣王(야케 오우)에게 正五位下를 수 다. 따라서 常陸守라고 하면 常陸國의 國司 4명 중에서도 가장 지위가 놓은 守의 지위를 말한다. 8) 백제왕 양우 : 천평 9년 7월에 죽었으며 당시 지위는 散位 從四位下였다. 백제왕 경복의 薨傳에, 백제왕 경복의 부친인 백제왕 양우는 백제왕 선광의 손자이며 백제왕 창성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 다. 또한 백제왕 양우는 日本書紀 천무천황 朱鳥 원년(686) 9월에 할아버지인 백제왕 선광에 대 신하여 천무천황의 빈소에 조문을 아뢰었다고 나온다. 9) 伊豫 지방 : 오늘날의 四國 지역의 愛媛縣 일대이다. 10) 從五位 上村主百濟 : 從五位上인지 從五位下인지 불분명하며 從五位 다음에 上 또는 下 글자가 탈락되어 있다. 11) 上村主百濟 : 백제 국명을 자신의 개인 이름으로 사용한 경우이다. 상촌주백제는 日本書紀 지통 천황 5년 3월에 大學博士로서 大稅 1000束을 하사받았다는 기록이 보이며 동 7년 3월에는 儒道 에 뛰어나다고 하여 食封 30호를 하사받았다고 한다. 이때 그의 관위는 勤廣貳(율령제 관위로는 正六位下에 해당)였다. 12) 처음 百濟를 구원하였을 때 : 673년 백제 구원의 명분으로 백제 부흥운동 세력과 연합하여 나당 연합군과 격돌하여 당의 수군에게 패배한 소위 백촌강 전투 를 말한다. 여하였다. 從四位上 多治比眞人池守(다지히노마히토 이케모리)에게 正四位下를 수여하 였다. 正五位上 百濟王遠寶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大伴宿 男人(오호도 모노스쿠네 오히토)에게 正五位上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賀茂朝臣吉備麻呂(가모노아 손 키비마로)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笠朝臣長目(가사노아손 나가메) 穗 積朝臣老(호즈미노오미 오유) 小野朝臣馬養(오노노아손 우마카이) 調連淡海(츠키노무 라지 아후미) 倉垣忌寸子首(구라가키노이미키 고오비토)에게 나란히 從五位上을 수여 하였다. 讚岐國에 기근이 들어 구휼하였다. 처음으로 制하기를 五位 이상으로서 같은 13) 左衛士督 : 左衛士府의 장관 직책이다. 14) 백제왕 남전 : 백제왕 선광의 손자로 생각된다. 15) 備前 지방 : 오늘날 中部 지역의 岡山縣 일대이다.

111 220 位階者는 나이의 長幼에 따라 列次로 하라. 고 하였다. 續日本紀 221 오우), 智努王(치누 오우), 御原王(미하라 오우)에게 나란히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 位下 高安王(다카야스 오우), 門部王(카도베 오우), 葛木王(가스라기 오우)에게 나란히 從 권6 日本根子天津御代豊國成姬天皇 元明天皇 靈龜 원년(715) 춘정월 癸巳(10) 詔에 이르기를, 올해 元日에 皇太子가 처음으로 拜朝하였고 瑞雲이 나타나 보였다. 모 름지기 大赦를 천하에 행한다. 단 八虐을 범한 자와 私鑄錢과 盜人, 常赦에서 허락되지 않는 자는 나란히 사면에서 제외한다. 고 하였다. 內外의 文 武官 六位 이하에게 位 1 階를 올려 주었다. 또 二品 穗積親王(호즈미 신노)에게 一品을 수여하였다. 三品 志紀親 王(시키 신노)에게는 二品을, 從四位下 路眞人大人(미치노마히토 우시) 巨勢朝臣邑治 (고세노아손 오호지) 大伴宿 旅人(오호토모노스쿠네 다비토) 石上朝臣豊庭(이소노가 미노아손 도요니와) 多治比眞人三宅麻呂(다지히노마히토 미야케마로) 百濟王南典 藤原朝臣武智麻呂(후지와라노아손 무치마로)에게 나란히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正五 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石川朝臣難波麻呂(이시가와노아손 나니와마로)에게 從 四位上을, 正五位上 百濟王良虞에게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中臣朝臣人足(나카토미노아 손 히토다리)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大伴宿 宿奈麻呂(오호토모노스쿠네 스쿠나마 로), 穗積朝臣老(호즈미노오미 오유), 多治比眞人廣成(다지히노마히토 히로나리), 小野朝 臣馬養(오노노아손 우마카이), 紀朝臣男人(기노아손 오히토)에게 나란히 正五位下를 수 여하였다. 從五位下 賀茂朝臣堅麻呂(가모노아손 가타마로)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佐 伯宿 蟲麻呂(사에키노스쿠네 무시마로), 大藏忌寸伎國足(오오쿠라노이미키 구니다리), 餘眞人(요노마히토)16), 從六位上 朝來直賀須夜(아사코노아타이 카스야)에게 나란히 從五 位下를 수여하였다. 동10월 戊寅(12) 位上 大伴宿 男人(오호토모노스쿠네 오히토) 太朝臣安麻呂(오오노아손 야스마로) 正 正三位 阿倍朝臣宿奈麻呂(아베노아손 스쿠나마로), 正四位下 安八萬王(아하치마 오우), 五位下 當麻眞人櫻井(타이마노마히토 사쿠라이) 從五位上 多治比眞人縣守(다지히노마 從四位下 酒部王(사카베 오우), 坂合部王(사카이베 오우), 智努王(치누 오우), 御原王(미 히토 아가타모리) 藤原朝臣房前(후지와라노아손 후사사키)에게 나란히 從四位下를 수 하라 오우), 百濟王良虞, 中臣朝臣人足(나카토미노아손 히토다리) 등에게 封戶를 더해 주 여하였다. 正五位下 曾 連足人(소네노무라지 다루히토) 佐伯宿 百足(사에키노스쿠네 었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모모다리) 百濟王良虞에게 나란히 正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笠朝臣吉麻呂(가 사노아손 요시마로) 中臣朝臣人足(나카도미노아손 히토다리)에게 나란히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臺忌寸少麻呂(우테나노이미키 스쿠나마로) 道君首名(미치노키미 오비토나)에게 나란히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六位上 下毛野朝臣石代(시모츠케노노 아손 이와시로) 當麻眞人大名(타이마노마히토 오오나) 紀朝臣淸人(키노아손 키요히 11월 甲辰(8) 高麗와 百濟 두 國의 士卒이 本國의 亂17)을 만나 천황의 덕에 投化해 왔다. 朝庭은 그 絶 域에서 온 것을 가련히 여겨 終身토록 復(세금 면제)을 지급하였다. 또 遣唐使의 水手 이 상에게 房戶18)의 役을 전부 면제해주었다. 또 九等戶(의 선정)에는 賤의 多少와 幼長19) 토) 從六位下 土師宿 豊麻呂(하지노스쿠네 도요마로)에게 나란히 從五位下를 수여하 였다. 또 二品 氷高內親王(히다카 나이신노)에게 一品을 수여하였다. 권7 日本根子高瑞淨足姬天皇 元正天皇 養老 원년(717) 춘정월 乙巳(4) 從三位 阿倍朝臣宿奈麻呂(아베노아손 스쿠나마로)에게 正三位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上 安八萬王(아하치마 오우)에게 正四位下를, 无位 酒部王(사카베 오우), 坂合部王(사카이베 16) 餘眞人(요노마히토) : 餘氏는 백제계 이주민 출신 가문이며 餘氏 출신 사람 중에는 뒤에 百濟朝臣 (구다라노아손) 姓을 받는 경우도 있었다. 百濟朝臣씨는 新撰姓氏錄 左京諸蕃에 백제 都慕王의 30世孫 惠王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한 여씨 출신 인물의 특징으로서는 陰陽術에 뛰어난 지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위의 본문의 餘眞人도 藤氏家傳(下)에 음양에 뛰어난 5 인 중 한 사람으로 기재되어 있다. 17) 本國의 亂 :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사건을 말한다. 18) 房戶 : 靈龜 원년의 式에 의거하여 鄕의 하부 조직으로서 한 鄕에 2~3개의 里를 만들면서 동시에 鄕을 구성하는 50戶 각각의 鄕戶도 2~3개의 房戶로 나뉘었다.

112 222 續日本紀 223 요즘 이후 다수가 법대로 하지 않고 있다. 이로 인하여 本源을 끊으려고22) 하면 廢業하는 을 고려하여 財에 준하여 정하도록 하였다. 家가 나오게 되고, 방치하여 금하지 않으면 姦非한 무리들이 있게 된다. 다시금 錢貨 사 권8 日本根子高瑞淨足姬天皇 元正天皇 養老 5년(721) 용의 편의를 헤아려 百姓들이 이윤을 얻게 하고자 한다. 200錢을 사용하여 1兩의 銀에 해당하게 한다. 이로서 買物의 貴賤과 價錢의 多少는 때에 따라 平章23)하게 하되 영구히 6월 戊戌(23) 詔를 내려 말하기를, 沙門 行善은 책상자( )를 짊어지고 遊學하기를 벌써 7년이 지났 다. 어려운 수행(難行)을 모조리 맛보고 三五術을 터득하여 바야흐로 本鄕에 돌아왔다. 불쌍히 여기고 상 줄만 한 것이 진실로 깊다. 만약 天下의 諸寺를 [방문하여] 수행하는 일 이 있다면 [그를] 恭敬하여 供養하는 것은 오로지 僧綱에 대한 경우와 같게 하라. 또 百濟 沙門 道藏은 실로 法門의 영수(領袖)이자 釋道의 棟梁이다. 나이가 80세를 넘어 기력이 쇠잔해졌다. 束帛으로 시혜를 내리는 것이 아니라면 어찌 養老의 情이라고 칭하겠는가. 모름지기 所司에 명하여 항상(四時20)로) 물건을 베풀어야 할 것이다. 5疋, 綿 10屯, 布 20端(을 하사한다.). 또 老師가 태어났던 同籍의 親族에게도 스님의 육신이 죽을 때가지 復(과역 면제)을 지급하였다. 6월 辛丑(26) (전략) 阿倍朝臣若足(아베노아손 와카다리)을 木工頭에, 從四位上 藤原朝臣麻呂(후지와 라노아손 마로)를 左右京大夫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上 百濟王南典을 播磨按察使로 삼고 從四位上 石川朝臣石足(이시가와노아손 이와다리)을 大宰大貳로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縣犬養宿 石次(아가타이누카이노스쿠네 이와스키)를 右衛士佐로 삼았다. 信濃國을 분 할하여 처음으로 諏方國을 설치하였다. 恒式으로 삼는다.24) 만약 어기는 자가 있으면 職事官 主典 이상은 當年의 考勞를 삭제하 고 나머지는 蔭贖을 불문하고 杖 60대를 치도록 한다. 고 하였다. 正六位上 矢集宿 蟲麻呂에게 田 5町을, 從六位下 陽胡史眞身에게는 4町을, 從七位上 大倭忌寸小東人(야마토노이미키 오아즈마히토)에게 4町을, 從七位下 鹽屋連吉麻呂(시오 야노무라지 키치마로)에게 5町을, 正八位下 百濟人成(구다라노히토나리)에게 4町을 각 각 하사하였다. 모두 律令을 편찬하는데 세운 功 때문이다. 또 여러 學術이 있는 사람 23 인에게 田을 하사하였는데 각각 [정해진] 수량이 있었다. 권9 日本根子高瑞淨足姬天皇 元正天皇 養老 7년(723) 춘정월 丙子(10) 天皇이 中宮에 납시었다. 從三位 多治比眞人池守(다지히노마히토 이케모리)에게 正三 位를 수여하였다. (중략) 從四位上 阿倍朝臣首名(아베노아손 오비토나), 石川朝臣石足(이 시가와노아손 이와다리), 百濟王南典에게 나란히 正四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上 大伴 宿 道足(오호토모노스쿠네 미치다리), 紀朝臣男人(키노아손 오히토)에게 나란히 從四位 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阿倍朝臣船守(아베노아손 후나모리), 從五位上 調連淡海(츠 키노무라지 오우미)에게 나란히 正五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권9 日本根子高瑞淨足姬天皇 元正天皇 養老 6년(722) 2월 戊戌(27) 詔를 내려 말하기를, 시장 언저리에서 교역함에 있어서 원래 가치(격)를 정해두었다.21) 19) 幼長 : 원문에는 勿長으로 되어 있으나 이를 幼長의 誤記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여기서도 이에 따른다. 20) 四時 : 춘하추동을 말한다. 21) 교역함에 있어서 원래 가치(격)를 정해두었다. : 關市令 12조와 13조에 물가에 대한 관련 규정이 정해져 있다. 22) 本源을 끊으려고 : 발본색원하여 단속함을 말한다. 23) 平章 : 서로 상담하여 가격을 합의한다는 의미이다. 24) 영구히 恒式으로 삼는다 : 시세에 대한 일정한 변동은 허용하나 반드시 200錢=銀 1兩이란 원칙 하에서의 변동만을 허용한다는 의미이다. 25) 雜樂生 : 고대 일본의 雜樂은 통상 궁중의 의식에 사용되는 古來의 久米舞나 五節舞 등의 가무를 제외한 樂舞를 말한다. 율령의 職員令 규정에 의하면 잡악은 文武雅曲正舞 에 대치되는 것으로 설명되어 있다. 아래의 본문에 나오는 唐樂 百濟樂 등의 外來 樂舞와 기타 지방의 樂舞가 여기 에 해당된다.

113 224 續日本紀 권11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3년(731) 권11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6년(734) 7월 乙亥(29) 3월 壬申(11) 雅樂寮 雜樂生25)의 정원을 정했다.26) 大唐樂 39인,27) 百濟樂28) 26인,29) 高麗樂30) 8인,31) 225 散位39) 從四位下 百濟王遠寶가 죽었다. 新羅樂32) 4인,33) 度羅樂34) 62인, 諸縣舞35) 8인, 筑紫舞36) 20인이다. 大唐樂의 樂生은 일본 인인가 외국인인가를37) 묻지 않고 교습 능력이 있는 자를 취하고, 百濟 高麗 新羅 등의 [樂]의 樂生은 각각 그 國의 사람 중에서 배울 능력이 있는 자를 취한다. 단 度羅樂 諸 縣 筑紫舞의 樂生 舞生은 각각 樂戶38)에서 취한다. 권12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7년(735) 하4월 戊申(23) 위계가 없던 長田王(나가타 오우)40)과 池田王(이케다 오우)41)에게 모두 從四位下를 내렸 다. 正四位下 百濟王南典과 從四位上 多治比眞人廣成(다지히노마히토 히로나리)에게 正 26) 정원을 정했다. : 대보령 시행 단계에서는 악생의 정원에 대한 규정이 없었으며 성무천황 천평 3 년 7월에 이르러 비로소 정원에 대한 규정을 마련한 것이다. 27) 大唐樂 39인 : 양로령에는 정원이 60인으로 규정되어 있다. 28) 百濟樂 : 백제에서 樂人이 일본에 온 것은 이미 日本書紀 흠명천황 15년 2월조에 기록이 보인 다. 공후( )와 횡적(橫笛)을 사용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성무천황 천평 16년 2월 병진조 등의 사료에는 百濟王氏가 이것을 연주하였다는 기록이 보인다. 29) 百濟樂 26인 : 양로령에는 정원이 20인으로 규정되어 있다. 30) 高麗樂 : 고구려 전래의 樂으로서 日本書紀 천무천황 12년 정월조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의 악을 연주하였다고 나온다. 9세기 이후 헤이안(平安) 시대가 되면 삼국의 악은 모두 고려악으 로 흡수 통일되어 唐樂에 대칭되는 악으로 정립되었다. 31) 高麗樂 8인 : 양로령에는 정원이 20인으로 규정되어 있다. 32) 新羅樂 : 日本書紀 천무천황 12년 정월조에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의 악을 연주하였다고 하 는 기사가 일본에서는 처음 보이는 사료이다. 현존하는 나라(奈良) 東大寺의 정창원 소장 新羅琴 이 신라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33) 新羅樂 4인 : 양로령에는 정원이 20인으로 규정되어 있다. 34) 度羅樂 : 耽羅, 즉 제주도의 樂으로 보는 견해 혹은 중앙아시아의 토화라(吐火羅)의 악으로 보는 견해 등 여러 가지 설이 있다. 35) 諸縣 : 九州 남부의 지명으로서 日向國 諸縣郡을 가리킨다. 따라서 諸縣樂은 이 지역의 歌舞를 말한다. 36) 筑紫舞 : 筑紫舞의 筑紫(츠쿠시)는 九州 북부 지역 일대를 말한다. 37) 大唐樂의 樂生 : 원문은 夏蕃으로 되어 있는데 여기서 夏는 일본인을 말하고 蕃은 신라 발해 등 을 가리키는 용례로 사용되나 여기서는 외국인으로 번역하였다. 38) 樂戶 : 악생을 배출하기 위해 설정된 戶로서 令制 品部의 일종으로 治部省 雅樂寮에 속한다. 職員 令의 규정에는 伎樂生을 樂戶에서 배출한다고 하였지만, 기타 樂生도 樂戶에서 배출되었을 것으 로 생각된다. 令集解 別記에 의해 伎樂戶 49호, 木登 8호, 奈良笛吹 9호가 大化國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四位上, 正五位上 粟田朝臣人上(아와타노아손 히토가미)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下 阿倍 朝臣粳蟲(아베노아손 누카무시)에게 從五位上을 내렸다. 正六位上 石河朝臣年足(이시가 와노아손 도시다리) 多治比眞人伯(다지히노마히토 오호지) 百濟王慈敬(구다라노고니 키시 지교우)42) 阿倍朝臣繼麻呂(아베노아손 츠기마로)에게 從五位下를, 外從五位下 秦 忌寸朝元(하타노이미키 쵸겐)에게 外從五位上을, 外正六位上 上毛野朝臣今具麻呂(가미 츠케노노아손 고구마로)와 正六位上 土師宿 五百村(하지노스쿠네 이호무라) 城上連眞 立(키노에노무라지 마다치) 陽侯史眞身(야코노후비토 마미)에게 外從五位下를 내렸다. 권12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8년(736) 춘정월 辛丑(21) 天皇이 朝堂에 임어하였다. 從四位上 紀朝臣男人에게 正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39) 散位 : 位階는 있으나 그에 상당한 관직을 가지고 있지 않은 경우를 말한다. 40) 長田王 : 長親王의 아들. 이후 天平 12년 11월에 從四位上, 13년 8월에 刑部卿에 제수되고, 天平 寶字 3년에 사망하였다. 41) 池田王 : 舍人親王의 아들. 天平 寶 6년 정월에 從四位上에 서임되고, 畿內巡察使 彈正尹 등을 역임하였다. 天平寶字 원년 4월 道祖王 廢太子의 뒤를 이어 皇嗣의 후보가 되었지만, 孝行有闕 이라 하여 제외되었다. 同 3년 6월 淳仁天皇이 즉위하고 그 형제라는 이유로 三品에 서임되었다. 惠美押 의 亂으로 인해 同 8년 10월 親王에서 諸王으로 강등되고 土佐國으로 유배되었다. 42) 百濟王 慈敬 : 성무천황 천평 12년 2월에 從五位上이 되고 동 16년 2월에 正五位下로 되었다.

114 226 石川朝臣夫子(이시가와노아손 후시), 正五位下 石上朝臣勝雄(이소노가미노아손 가츠오) 에게 각각 正五位上을, 從五位下 巨勢朝臣奈 麻呂(고세노아손 나테마로), 從五位上 石上 朝臣乙麻呂(이소노가미노아손 오토마로)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賀 茂朝臣助(가모노아손 스케)에게 從五位上을, 外從五位下 三國眞人廣庭(미쿠니노마히토 히로니와) 當麻眞人鏡麻呂(타이마노마히토 카가미마로) 下毛野朝臣帶足(시모츠케노노 아손 오비다리), 正六位上 石川朝臣東人(이시가와노아손 아즈마히토) 多治比眞人國人 (다지히노마히토 구니히토) 百濟王孝忠(구다라노고니키시 고우츄)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波多朝臣古麻呂(하타노아손 고마로) 田口朝臣三田次(다구치노아 손 미타스기) 紀朝臣必登(키노아손 히토) 田中朝臣三上(다나카노아손 미가미) 巨勢朝 臣首名(고세노아손 오비토나) 阿倍朝臣車借(아베노아손 구루마가시) 佐伯宿 淨麻呂 (사에키노스쿠네 기요마로) 土師宿 祖麻呂(하지노스쿠네 오야마로) 丹比宿 人足(다 지히노스쿠네 히토다리), 正六位下 下道朝臣眞備(시모츠미치노아손 마키비), 正六位上 大 藏忌寸廣足(오오쿠라노이미키 히로다리)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續日本紀 227 권13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0년(738) 하4월 庚申(22) 從五位下 佐伯宿 淨麻呂(사에키노스쿠네 기요마로)를 左衛士督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廣嗣(후지와라노아손 히로츠구)를 大養德守에 임명하고 式部少輔는 그대로 보 유하게 하며, 從五位下 百濟王孝忠을 遠江守44)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佐伯宿 常人(사 에키노스쿠네 츠네히토)을 丹波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伴宿 兄麻呂(오오토모노스 쿠네 에마로)를 美作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本朝臣濱名(가키노모토노아손 하마나) 을 備前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大宅朝臣君子(오오야케노아손 기미코)를 筑前守에 임 명하고, 外從五位下 田中朝臣三上(다나카노아손 미가미)을 肥後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 下 陽侯史眞身(야코노후비토 마미)을 豊後守에 임명했다. 권13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1년(739) 하4월 戊寅(17) 권12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9년(737) 7월 己丑(17) 散位 從四位下 百濟王郞虞가 卒하였다. 9월 己亥(28) 從三位 鈴鹿王(스즈카 오우)을 知太政官事43)에 임명했다. 從三位 橘宿 諸兄(다치바나 노스쿠네 모로에)을 大納言에, 正四位上 多治比眞人廣成(다지히노마히토 히로나리)을 中 正六位上 百濟王敬福(구다라노고니키시 교후쿠)45)에게 從五位下를, 正六位上 田邊史難 波(다나베노후비토 나니와)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했다. 권13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2년(740) 2월 丙子(19) 百濟王(氏)46)들이 風俗樂47)을 연주하였다. 從五位下 百濟王慈敬에게 從五位上을, 正六 納言에 임명했다. 廣成과 百濟王南典에게 각각 從三位를 수여했다. 從四位下 高安王(다 카야스 오우)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43) 지태정관사 : 8세기 초에 설치된 百官을 총괄하는 직책. 703년에서 745년 동안에 刑部親王(오사 카베 신노우)을 비롯하여 모두 4명밖에 임명된 적이 없다. 대보령의 태정대신에 대한 규정에는 태정대신이 될 수 있는 사람은 모든 면에서 완벽한 능력과 조건을 갖추고 있어야 하며 적임자가 없을 때에는 임명하지 않고 공석으로 비워놓아도 된다고 할 정도로 현실적으로는 추상적인 면이 많았다. 지태정관사는 실질적으로는 태정대신의 역할을 하면서 이러한 현실적 모순을 보완하기 위하여 설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44) 遠江守 : 遠江(도오츠오미) 지역은 현재 靜岡(시즈오카)縣 지역이다. 45) 百濟王敬福 : 천평 9년 7월에 작고한 百濟王 郞虞의 아들이다. 46) 百濟王(氏) : 日本書紀 천지천황 3년(664) 3월조에 百濟王 善光王을 難波에 거주하게 했다고 하였다. 이 무렵부터 百濟王氏가 難波에 거주했다고 생각된다. 續日本紀 성무천황 天平 16년 2 월 22일에 성무천황이 難波의 安曇江에 유람했을 때, 百濟王들이 百濟樂을 연주하였다고 한다. 奈良時代 후기에는 大阪府 枚方(히라가타)市 지역으로 이주했던 듯하다. 枚方市 中宮에 奈良時代 후기에 건립된 百濟寺跡이 있다. 47) 風俗樂 : 백제의 樂을 말한다. 천황이 오늘날의 오사카 일대인 나니와(難波)와 가와치(河內) 일대 를 순행할 때 백제왕씨 일족이 樂舞를 연주하는 것은 續日本紀 천평 16년 2월, 천평신호 원년

115 228 續日本紀 229 位上 百濟王全福(구다라노고니키시 젠후쿠)48)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이날 車駕가 하고, 從五位下 小治田朝臣廣千(오하리다노아손 히로치)을 尾張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환궁하였다. 百濟王孝忠을 遠江守에 임명하고,50) 外從五位下 陽侯史眞身(야코노후비토 마미)을 但馬 守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阿倍朝臣蟲麻呂(아베노아손 무시마로)를 播磨守에 임명하고, 11월 甲辰(21) 詔를 내려 陪從한 文武官과 騎兵 및 子弟들에게 위계를 각각 1級씩 내렸다. (중략) 從五 位下 多治比眞人家主(다지히노마히토 야카누시) 阿倍朝臣吾人(아베노아손 아히토) 多 治比眞人牛養(다지히노마히토 우시가히) 大伴宿 祜信備(오오토모노스쿠네 고시비) 百濟王全福 阿倍朝臣佐美麻呂(아베노아손 사미마로) 阿倍朝臣蟲麻呂(아베노아손 무 시마로) 藤原朝臣八束(후지와라노아손 야츠카) 橘宿 奈良麻呂(다치바나노스쿠네 나 外從五位下 大伴宿 百世(오오토모노스쿠네 모모요)를 美作守에 임명하였다. 권15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5년(743) 5월 癸卯(5) 群臣에게 內裏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중략) 從五位上 紀朝臣淸人(키노아손 키요히 토) 石川朝臣年足(이시가와노아손 도시다리) 背奈王福信(세나 오우 후쿠신)에게 각각 라마로)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大伴宿 稻君(오오토모노스쿠네 이나키미) 百濟王孝忠 佐味朝 권14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3년(741) 臣蟲麻呂(사미노아손 무시마로) 巨勢朝臣堺麻呂(고세노아손 사카이마로) 佐伯宿 稻 麻呂(사에키노스쿠네 이나마로)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8월 丁亥(9) 從五位下 多治比眞人木人(다지히노마히토 키히토)을 兵部少輔에 임명하고, 從四位上 長田王(나가타 오우)을 刑部卿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大伴宿 御中(오오토모노스쿠네 49) 6월 丁酉(30) (전략) 正五位下 背奈王福信(세나 오우 후쿠신)을 亮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藤原朝臣淸 미나카)을 少輔兼大判事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百濟王慈敬을 宮內大輔 에 임명하고, 正 河(후지와라노아손 키요가와)를 大養德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佐伯宿 毛人(사에키노 四位下 智努王(치누 오우)을 木工頭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上 紀朝臣鹿人(키노아손 카히 스쿠네 에미시)을 尾張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秦井手乙麻呂(하다노이데노오토마로) 토)을 大炊頭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車持朝臣國人(구루마모치노아손 구니히토)을 主殿 를 相摸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百濟王敬福(구다라노고니키시 게이후쿠)을 陸奧51)守에 頭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多治比眞人家主(다지히노마히토 야카누시)를 鑄錢長官에 임명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葛井連廣成(후지이노무라지 히로나리)을 備後守에 임명하고, 從五 位下 小治田朝臣廣千(오하리다노아손 히로치)을 讚岐52)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上 引田 朝臣蟲麻呂(히케다노아손 무시마로)를 土左守에 임명했다. 10월, 연력 10년 10월조 등에도 보인다. 48) 百濟王 全福 : 백제왕 경복과 作名上 유사성이 보이므로 경복과 형제 관계일 가능성이 있으며, 이 경우 전복보다 경복이 먼저 從五位下를 수여받았다는 점에서 전복은 경복의 동생일 가능성이 크 다. 백제왕 전복은 천평 16년의 나니와 순행 때에도 백제악을 연주하여 위계를 수여받았으며, 그 해 9월에 山陰道巡察使 직에 제수되었다. 그리고 이듬해인 천평 17년 9월에는 正五位下로서 오 와리(尾張)國의 행정장관(國司)에 임명되었다. 참고로 오와리국은 지금의 나고야(名古屋) 일대를 중심으로 한 지역이다. 49) 宮內大輔 : 宮內省의 次官(스케) 직책을 말한다. 궁내성은 太政官 휘하의 율령 중앙관제(8省)의 하나로서 궁정의 서무 일체를 담당하는 관청이었으며, 太政官의 右弁官局 소속이었다. 참고로 궁 내성의 四等官制는 卿-大輔 小補-大丞 小丞-大錄 小錄으로 표기하였다. 50) 百濟王孝忠의 遠江守 임명 : 續日本紀 천평 10년 4월조에도 보이므로 위의 임명기사는 遠江守 유임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51) 陸奧(무츠) 지역 : 오늘날 일본 東北(도오후쿠) 지역 일대를 가리킨다. 지금의 후쿠시마(福島) 미 야기(宮城) 이와테(岩手) 아오모리(靑森)현 제 지역을 영역으로 하고 있었으며 8세기 말 9세기 초 桓武天皇의 시대에 완전히 영토적으로 일본 조정에 편입되기 전까지는 에미시(蝦夷) 종족의 집 단 거주 지역이었다. 52) 讚岐國(사누키노쿠니) : 지금의 시코쿠(四國)의 카가와(香川)현 지역

116 230 續日本紀 권15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6년(744) 권16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7년(745) 2월 丙辰(22) 9월 戊午(4) 231 安曇(아즈미)江53)에 행차하여 松林을 유람하고, 百濟王들이 百濟樂(구다라가쿠)을 연주 知太政官事兼式部卿 從二位 鈴鹿王(스즈카 오우)이 죽었다. 高市皇子(다케치노미코)의 했다. 詔를 내려 无位의 百濟王女天(구다라노고니키시 뇨텐)54)에게 從四位下를,55) 從五位 아들이다. 正五位上 橘宿 奈良麻呂(다치바나노스쿠네 나라마로)를 攝津大夫에 임명하 上 百濟王慈敬, 從五位下 孝忠,56) 全福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고, 正五位下 百濟王全福을 尾張守59)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田邊史高額(다나베노후히 9월 甲戌(15) 巡察使57)를 畿內 七道에 파견했다. 從四位下 紀朝臣飯麻呂(기노아손 니이마로)를 畿內 使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石川朝臣年足(이시가와노아손 도시다리)을 東海道使에 임명하 고, 正五位上 平群朝臣廣成(헤구리노아손 히로나리)을 東山道使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石川朝臣東人(이시가와노아손 아즈마히토)을 北陸道使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百濟王全 福을 山陰道使58)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大伴宿 三中(오오토모노스쿠네 미나카)을 山 陽道使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巨勢朝臣嶋村(고세노아손 시마무라)을 南海道使에 임명 하고, 從四位上 石上朝臣乙麻呂(이소노가미노아손 오토마로)를 西海道使에 임명하고, 外 從五位下 大養德宿 小東人(야마토노스쿠네 오아즈마히토)을 次官에 임명하였다. 道별 로 判官(죠) 1인, 主典(사칸) 1인(을 임명했다). 토 타카누카)을 參河守에 임명하고, 民部卿 正四位上 藤原朝臣仲麻呂(후지와라노아손 나 카마로)를 兼近江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縣犬養宿 須奈保(아가타이누카이노스쿠네 스나호)를 丹後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原眞人麻呂(오오하라노마히토 마로)를 美作守 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井上忌寸麻呂(이노우에노이미키 마로)를 紀伊守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紀朝臣宇美(키노아손 우미)를 讚岐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車持朝臣國人(구 루마모치노아손 구니히토)을 伊豫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上 文忌寸馬養(후미노이미키 우마카이)을 筑後守에 임명하였다. 권16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8년(746) 하4월 己酉(4) 從五位下 甘南備眞人神前(카무나비노마히토 카미사키)을 刑部大輔에 임명하고, 外從五 位下 犬養德宿 小東人(야마토노스쿠네 오아즈마히토)을 攝津亮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百濟王敬福을 上總60)守에 임명하고, 從四位上 石上朝臣乙麻呂(이소노카미노아손 오토마 53) 安曇 : 현재의 오오사카(大阪)시 北區 野崎町 일대이다. 54) 百濟王女天 : 여기에만 보이는 사람이며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55) 從四位下 : 無位에서 단숨에 從四位下를 수여받는 것은 대단히 파격적인 대우이며 親王의 아들에 준하는 대우라고 말할 수 있다. 56) 從五位下 孝忠 : 원문에는 孝忠 위에 從五位下 라고 되어 있지만, 孝忠은 天平 15년 5월 3일에 從五位下에서 從五位上으로 서임되었기 때문에 잘못이다. 孝忠 다음의 全福도 天平 12년 11월 14 일에 從五位上으로 승진하였다. 57) 巡察使 : 태정관에 소속된 임시 지방 시찰관이다. 持統天皇 8년인 694년에 처음 등장하였으며 712년에는 매년 파견이 이루어졌다. 천평보자 2년(758)에 3년에 1회 파견 방식으로 바뀌었다가 뒤에 일시 정지되는 때도 있었다. 최종 폐지되는 것은 830년 천장 7년 이후이다. 58) 山陰道 : 현재 일본의 中國 지역 중에서 우리나라 동해 쪽에 면해 있는 지역들을 말한다. 丹波 丹後 但馬 因幡 伯耆 出雲 石見 岐 등의 지역이 여기에 해당한다. 로)를 常陸守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石川朝臣年足(이시카와노아손 도시다리)을 陸奧守에 임명하였다. 59) 尾張 : 尾張(오와리)國은 지금의 나고야(名古屋)시가 있는 愛知(아이치)縣 일대이다. 60) 上總 : 上總(카즈사)國은 지금의 千葉(치바)縣 일대이다. 61) 左中辯 : 최고의 행정기관인 태정관의 사무국인 弁官局의 소속 관인이다. 변관국은 左弁官局과 右弁官局 그리고 少納言局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태정관의 서무를 담당하면서 宣旨와 官符 등의 發布와 관청과의 연락 업무 등을 수행하였다. 좌변관국과 우변관국에는 각각 大弁 中弁 少弁이 각각 1명씩 배치되어 있었는데 위의 左中弁은 좌변관국의 中弁임을 말한다. 변관국의 관인 자리 는 매우 명예로운 중요 관직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가문의 격과 능력이 있는 자가 취임하였다.

117 232 續日本紀 4월 壬辰(11) 233 四位上을, 從四位下 多治比眞人廣足(다지히노마히토 히로나리)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 正五位下 百濟王孝忠을 左中辯61)에 임명하고, 從四位下 大市王을 內匠頭에 임명하고, 上 石川朝臣年足(이시가와노아손 도시다리) 平群朝臣廣成, 正五位下 大伴宿 古慈備 從五位下 紀朝臣廣名(기노아손 히로나)을 大學頭에 임명하고, 從四位上 安宿王(아스카 (오오토모노스쿠네 고시비), 正五位上 橘宿 奈良麻呂(다치바나노스쿠네 나라마로)에게 오우)을 治部卿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多治比眞人土作(다지히노마히토 하니츠쿠리)을 民 각각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石川朝臣麻呂(이시카와노아손 마로) 百濟王孝忠 紀朝臣 部少輔에 임명하고, 從四位下 多治比眞人廣足(다지히노마히토 히로나리)을 刑部卿에 임 宇美(키노아손 우미)에게 각각 正五位上을, 從五位下 大伴宿 百世(오오토모노스쿠네 명하고, 從四位上 船王(후나 오우)을 彈正尹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大伴宿 三中(오오 모모요), 從五位上 巨勢朝臣堺麻呂(고세노아손 사카히마로)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내렸 토모노스쿠네 미나카)을 長門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紀朝臣男楫(키노아손 오카지)을 다. (후략) 大宰少貳에 임명했다. 권17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20년(748) 9월 癸亥(14) 從五位下 藤原朝臣宿奈麻呂(후지와라노아손 스쿠나마로)를 上總守에 임명하고, 從五位 下 百濟王敬福을 陸奧守에62)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伴宿 駿河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스 루가마로)를 越前守에 임명했다. 2월 己未(19) 從三位 巨勢朝臣奈호麻呂(고세노아손 나데마로)에게 正三位를, 正四位上 三原王(미하라 노오오키미), 正四位下 石上朝臣乙麻呂(이소노카미노아손 오토마로)에게 각각 從三位를, 從四位上 紀朝臣麻路(키노아손 마로)에게 正四位上을, 從四位上 多治比眞人廣足(다지히노 윤9월 乙酉(7) 无位의 鹽燒王(시오야키 오우)에게 本位의 正四位下를 수여하고, 從五位下 百濟王敬福 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했다. 마히토 히로나리), 從四位下 大伴宿 兄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에마로)에게 각각 正四位 下를, 從四位下 佐伯宿 淨麻呂(사에키노스쿠네 기요마로) 佐伯宿 常人(사에키노스쿠 네 츠네히토)에게 각각 從四位上을, 正五位上 石川朝臣麻呂(이시카와노아손 마로) 百濟 王 孝忠 紀朝臣宇美(키노아손 우미)에게 각각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巨勢朝臣堺麻呂(고 동10월 癸酉(25) 63) 正五位下 百濟王孝忠을 大宰大貳에 임명했다. 세노아손 사카히마로) 背奈王 福信에게 각각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多治比眞人屋主(다지 히노마히토 야누시) 藤原朝臣巨勢麻呂(후지하라노아손 고세마로)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권17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 19년(747) 춘정월 丙申(20) 南苑에 출어하여 五位 이상에게 연회를 베풀고, 諸司의 主典 이상에게 술과 안주를 내 렸다. 正四位上 智努王(치누 오우)에게 從三位를, 正四位下 三原王(미하라 오우)에게 正 62) 陸奧守 : 百濟王 敬福는 천평 15년 6월에도 陸奧守에 임명된 바 있다. 63) 大宰大貳 : 九州 하카다에 설치된 大宰府의 소속 관인이다. 大宰府의 최고 장관은 帥이며 그 아래 차관이 大貳와 少貳이다. 大宰帥는 중앙의 관직과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으며 따라서 大宰帥로 임 명되어도 실제 九州까지 와서 근무하는 경우는 드물었다. 그러므로 大宰府의 실질적 최고 장관은 大宰大貳와 少貳인 경우가 많았다. 從五位下 石川朝臣名人(이시카와노아손 나히토) 鴨朝臣角足(가모노아손 츠노다리) 民 忌寸眞楫(다미마카지)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外從五位下 若犬養宿 東人(와카이누카히노 스쿠네 아즈마히토) 國君麻呂(구니오키미마로), 正六位上 百濟王元忠 藤原朝臣魚名(후 지하라노아손 우오나) 多治比眞人石足(다지히노마히토 이와다리) 佐伯宿 乙首名(사에 키노스쿠네 오토오비토나) 久米朝臣湯守(구메노아손 유모리) 本朝臣市守(가키노모토 노아손 이치모리) 粟田朝臣奈勢麻呂(아와타노아손 나세마로) 石川朝臣豊人(이시카와노 아손 토요히토) 平群朝臣人足(헤구리노아손 히토다리) 田中朝臣少麻呂(다나카노아손 수쿠나마로) 大伴宿 御依(오오토모노스쿠네 미요리) 阿倍朝臣鷹養(아베노아손 다카카 히) 津嶋朝臣家蟲(츠시마노아손 이에무시) 佐味朝臣廣麻呂(사미노아손 히로마로) 建

118 234 續日本紀 235 部公豊足(다케루베노키미 도요타리) 日下部宿 大麻呂(구사카베노스쿠네 오오마로)에게 노스쿠네 기요하로) 佐伯宿 常人(사에키노스쿠네 츠네히토)에게 각각 正四位下를 수 각각 從五位下를, 外從五位下 陽侯史眞身(야코노후비토 마미)에게 外從五位上을, 正六位 여하였다. (후략) 上 高市連大國(다케치노무라지 오오쿠니)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했다. 권17 天璽國押開豊櫻彦天皇 聖武天皇 天平勝寶 원년(749) 하4월 甲午朔 天皇이 東大寺에 行幸했다. 盧舍那佛像의 前殿에 出御하여, 北面하여 像을 마주했다. 皇后와 太子가 함께 近侍했다. 群臣百寮 및 士庶는 나누어 [前殿의] 뒤에 줄지어 섰다. 勅 을 내려 左大臣 橘宿 諸兄(다치바나노스쿠네 모로에)을 파견하여 부처님께 [다음과 같 이] 아뢰었다. 三寶의 奴로서 섬기고 있는 天皇의 命으로 盧舍那佛像의 御前에 아뢰라고 말씀하시기 를, 이 大倭國에서는 天地가 개벽한 이래, 황금은 人國64)에서 헌상하는 것이 있었다 해 도, 이 國에는 없는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만, 통치하고 있는 국내의 동방에 있는 陸奧國守 從五位上 百濟王敬福이 관내의 少田郡65)에서 黃金이66) 나왔다고 상주하고 헌상 하였습니다. 이것을 [천황은] 듣게 되시자, 놀라고 기뻐하며 귀하게 생각하시고, [그것은] 盧舍那佛이 자비와 축복으로 내려주신 物이라고 생각하고 받으시고 두려워하고 계시며, 하4월 乙卯(22) 陸奧守 從三位 百濟王敬福이 黃金 900兩을 貢進했다. 8월 辛未(10) 從五位下 大原眞人麻呂(오오하라노마히토 마로) 石川朝臣豊人(이시카와노아손 토요 히토)을 각각 少納言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伴宿 古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고마로)를 左少辯에 임명하고, 大納言68) 正三位 藤原朝臣仲麻呂(후지하라노아손 다카마로)에게 紫 微令69)을 겸하게 하였다. 參議 正四位下 大伴宿 兄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에마로), 式部 卿 從四位上 石川朝臣年足(이시가와노아손 도시다리)에게 각각 大弼을 겸하게 하고, 從 四位下 百濟王孝忠, 式部大輔 從四位下 巨勢朝臣堺麻呂(고세노아손 사카이마로), 中衛少 將 從四位下 背奈王福信에게 각각 少弼70)을 겸하게 하였다. (후략) 권18 寶字稱德孝謙皇帝 孝謙天皇 天平勝寶 2년(750) 3월 庚子(12) 백관들을 불러 예배하고 섬기려 하는 일을 입에 올리기도 너무나 두려운 三寶의 御前에 正四位下 多治比眞人占部(다지히노마히토 우라베)를 攝津大夫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진실로 두렵고 두렵게 아룁니다. 라고 말씀하십니다. (중략) 正三位 巨勢朝臣奈호麻呂 紀朝臣小楫(기노아손 오카지)을 山背守에 임명하고, 從四位下 百濟王孝忠을 出雲守71)에 (고세노아손 나테마로)에게 從二位를, 從三位 大伴宿 牛養(오오토모노스쿠네 우시카히) 임명하고, 從五位下 內藏忌寸黑人(쿠라노이미키 쿠로히토)을 長門守에 임명하고, 從五位 에게 正三位를, 從五位上 百濟王敬福에게 從三位를67), 從四位上 佐伯宿 淨麻呂(사에키 上 大伴宿 犬養(오오토모노스쿠네 이누카이)을 播磨守에 임명하고, 正五位上 多治比眞 64) 人國 : 여기서의 人國의 의미는 他國으로 보인다. 65) 少田郡 : 현재 宮城縣 遠田郡 湧谷町에 黃金山神社가 있고, 神社에 인접한 黃金迫에서는 근년까 지 砂金이 생산되었다. 고대의 小田郡은 지금의 遠田郡에 포함된다. 66) 黃金 : 당시 日本에서는 아직 황금이 자체 발견된 적은 없었다. 여기에 보이는 百濟王 敬福의 황 금 발견이 일본열도의 황금 채굴의 시작이었다. 그리고 동대사를 건립하고 있던 조정에서는 百濟 王 敬福의 황금 발견으로 인하여 비로소 동대사의 조영을 완성할 수 있었다. 百濟王 敬福의 황금 발견의 의의가 얼마나 큰 것이었는가는 위의 동대사 大佛 開眼式에서 天皇이 특별히 황금 이야기 부터 언급하고 있는 데서도 잘 나타난다. 67) 從三位 : 從五位上의 위계에서 從三位로의 승진은 대단히 파격적이며 이례적인 승진이다. 68) 대납언 : 太政官의 차관에 해당하는 관사이다. 천황을 보좌하며 천황에게 奏上을 올리기도 하고 宣下(천황의 명령을 아래로 전달하는 것)를 태정관의 장관인 大臣(태정대신 좌대신 우대신)이 부재하였을 때에는 대납언이 정무를 수행하였다. 대보령의 규정에는 대납언의 정원은 4명이나 후대에 증가하여 8~10명으로 되었다. 69) 紫微令 : 紫微中臺의 최고 장관을 말한다. 紫微中臺는 성무천황의 왕비인 光明皇后의 皇后宮職을 개칭한 것으로서 藤原朝臣仲麻呂가 그 최고 장관에 취임하여 권세를 휘둘렀다. 천평보자 8년 (764)에 폐지되었다. 70) 少弼 : 紫微中臺의 소속 관인에 대한 배치로서 최고 장관인 紫微令 휘하에 大弼과 少弼을 두었다. 71) 出雲 : 出雲(이즈모) 지역은 지금의 島根(시마네)縣 일대이다.

119 236 續日本紀 237 人國人(다지히노마히토 구니히토)과 藤原朝臣乙麻呂(후지와라노아손 오토마로)를 각각 位上 平群朝臣廣成(헤구리노아손 히로나리)을 武藏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佐伯宿 全 大宰少貳에 임명했다. 成(사에키노스쿠네 마타나리)을 陸奧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粟田朝臣奈勢麻呂(아와타 5월 辛丑(14) 從三位 百濟王敬福을 宮內卿72)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藤原朝臣千尋(후지와라노아손 치 히로)을 美濃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壬生使主宇太麻呂(미부노오미 우다마로)를 但馬 守에 임명했다. 노아손 나세마로)를 越前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阿倍朝臣嶋麻呂(아베노아손 시마마로) 를 伊豫守에 임명했다. 동10월 戊寅(5) 常陸守 從三位 百濟王敬福을 檢習西海道兵使에 임명하였다. 判官 2인, 錄事 2인[을 임 명하였다]. 권18 寶字稱德孝謙皇帝 孝謙天皇 天平勝寶 3년(751) 춘정월 己酉(25) 正四位上 大伴宿 兄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에마로)에게 從三位를, 從四位上 安宿王 (아스카 오우)에게 正四位下를, 從四位下 大市王(오오치 오우)에게 從四位上을, 无位의 道守王(치모리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正五位上 阿倍朝臣蟲麻呂(아베노아손 무시마로) 多治比眞人國人(다지히노마히토 구니히토)에게 각각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佐伯宿 毛 人(사에키노스쿠네 에미시)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多治比眞人家主(다지히노마히토 야카누시) 大倭宿 小東人(야마토노스쿠네 오아즈마히토)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從五 位下 高丘連河內(다카오카노무라지 가와치) 百濟王元忠 大伴宿 古麻呂(오오토모노 스쿠네 고마로) 縣犬養宿 古麻呂(아가타이누카이노스쿠네 고마로 ) 中臣朝臣淸麻呂 (나카토미노아손 키요마로)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권18 寶字稱德孝謙皇帝 孝謙天皇 天平勝寶 4년(752) 5월 辛未(26) 권19 寶字稱德孝謙皇帝 孝謙天皇 天平勝寶 6년(754) 2월 己卯(13) 正六位上 百濟王理伯(구다라노고니키시 리하쿠)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했다. 하4월 庚午(5) 從五位上 中臣朝淸麻呂(후지와라노아손 키요마로)를 神祇大副에 임명하고74), 從五位下 秋篠王(아키시노 오우) 粟田朝臣人成(아와다노아손 히토나리)을 각각 少納言에 임명하 고, 從四位上 大伴宿 古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고마로)75) 를 左大辯에 임명하고, 從五位 下 石川朝臣豊成(이시가와노아손 토요나리)을 右少辯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日置造眞 를 紫微中臺少忠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當麻眞人子老를 雅樂頭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石川朝臣名人을 民部大輔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石川朝臣豊人을 主稅頭에 임명하고, 從 五位上 大伴宿 家持를 兵部少輔에 임명하고76), 從四位上 紀朝臣飯麻呂를 大藏卿에 임명 하고, 正五位下 朝臣中臣益人을 造宮少輔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武良志를 左京 亮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文忌寸上麻呂를 右京亮에 임명하고, 從三位 文室眞人珍努(후 從五位下 多治比眞人犢養(다지히노마히토 고우시카이)을 遠江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巨勢朝臣淨成(고세노아손 키요나리)을 下總守에 임명하고, 從三位 百濟王敬福을 常陸守73) 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笠朝臣蓑麻呂(가사노아손 미노마로)를 上野守에 임명하고, 從四 72) 宮內卿 : 宮內省의 최고 장관이다. 宮內省은 궁정의 서무 일체를 담당하는 관청이며 그 관인에 대 한 명칭은 卿-大輔, 少補-大丞, 少丞-大錄, 少錄으로서 四等官制가 구성되어 있다. 73) 常陸(히다치) 지역 : 오늘날의 茨城(이바라기)縣 일대이다. 74) 神祇大副에 임명 : 天平 15년 6월에 神祇大副에 임명되고, 同 19년 5월에 尾張守, 다시 神祇大副로 임명된다. 再任되는 사정은 中臣氏界 所引本系帳에 기술되어 있으나 그 내용에는 의문이 있다. 75) 從四位上 大伴宿 古麻呂 : 遣唐副使의 임무를 마치고 임관되었다. 76) 兵部少輔에 임명 : 그의 재임기간 중에 萬葉의 防人歌가 수집 기록되었다. 77) 攝津大夫 : 攝津職의 장관(카미)이다. 78) 攝津亮 : 攝津職의 차관(스케) 직책이다.

120 238 續日本紀 무야노마히토 치누)를 攝津大夫77)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百濟王理伯(구다라노고니키시 리하쿠)을 亮78)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多治比眞人土作을 尾張守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大 伴宿 稻君을 上總守에 임명하고, 從四位上 吉備朝臣眞備79)를 大宰大貳에 임명하고, 從 五位下 小野朝臣田守를 少貳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黃文連水分을 肥前守에 임명했다. 239 권20 寶字稱德孝謙皇帝 孝謙天皇 天平寶字 원년(757) 5월 丁卯(20) 大納言 從二位 藤原朝臣仲麻呂(후지와라노아손 나카마로)를 紫微內相85)에 임명하고, 從 三位 藤原朝臣永手(후지와라노아손 나가테)를 中納言86)에 임명하였다. [천황은 다음과 같 이] 詔를 내렸다. 권19 寶字稱德孝謙皇帝 孝謙天皇 天平勝寶 8세(756) 짐이 周禮 를 읽어보니, 장군과 재상은 道를 달리 하고, 정치에는 文武의 구별이 있 5월 丙辰(3) 다고 하였다. 이치상 당연히 그러해야 한다. 그러므로 新令87)의 규정과는 별도로 紫微內 사자를 파견하여 三關80)을 굳게 지키게 했다. 從二位 藤原朝臣豊成, 從三位 文室眞人珍 努 藤原朝臣永手, 正四位下 安宿王(아스카 오우), 從四位上 黃文王, 正四位下 橘朝臣奈 相 1인을 두고 內外의 모든 兵事를 관장하도록 한다. 그 官位 祿賜 職分의 雜物88)은 모 두 大臣에 준한다. 良麻呂, 從四位下 多治比眞人國人(다지히노마히토 쿠니히토), 從五位下 石川朝臣豊成을 또 勅을 내렸다. 요즈음 관인을 選考하여 格89)에 의거해서 [진급시킬] 階數를 정하는 御裝束司81)에 임명하고, 六位 이하 10인[을 임명했다]. 從三位 多治比眞人廣足(다지히노 데, [그 결과] 사람마다 위계가 높아져 적당한 관직에 임용하기가 어렵게 되었다. 금후로 마히토 히로다리) 百濟王敬福, 正四位下 鹽燒王(시오야키 오우), 從四位下 山背王(야마 는 新令에 의거하도록 하라.90) [이것은] 저번 養老 연간에 짐의 外祖父인 故太政大臣(藤原 시로 오우), 正四位下 大伴宿 古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고마로), 從四位上 高麗朝臣福 不比等)이 칙명을 받들어 編修한 律令이다. 所司에 포고하여 일찍 시행하게 하라. 信(고마노아손 후쿠신), 正五位上 佐伯宿 今毛人(사에키노스쿠네 이마에미시), 從五位 從二位 藤原朝臣豊成(후지와라노아손 토요나리)에게 正二位를, 正四位下 鹽燒王 從四 下 小野朝臣田守(오노노아손 타모리) 大伴宿 伯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하쿠마로)를 位上 池田王(이케다 오우)에게 각각 正四位上을, 從四位上 諱[白壁王이라는 본명을 쓰는 山作司82)에 임명하고, 六位 이하 20인[을 임명했다]. 外從五位下 大藏忌寸麻呂(오오쿠라 걸 꺼려 諱라고 하였다] 從四位上 船王(후나 오우)에게 각각 正四位下를, 從四位下 山背 83) 노이미키 마로)를 造方相司에 임명하고, 六位 이하 2인[을 임명했다]. 從五位下 佐味朝 王(야마시로 오우)에게 從四位上을, 從五位上 久勢王(구제 오우)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 84) 臣廣麻呂(사미노아손 히로마로) 佐佐貴山君親人을 養役夫司에 임명하고, 六位 이하 6 인[을 임명했다]. 79) 從四位上 吉備朝臣眞備 : 遣唐副使의 임무를 마치고 임관되었는데 더불어 遣新羅使였다가 귀국 한 小野田守를 少貳에 임명한 것은 국제 정세의 긴장에 대처하기 위해 大宰府를 강화할 의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80) 三關 : 鈴鹿(스즈카) 不破(후하) 愛發(아라치)關을 말한다. 81) 御裝束司 : 장례에 필요한 제반 의례 물품을 관장하는 임시 관사이다. 82) 山作司 : 山陵을 만드는 일을 맡은 임시 관사이다. 83) 造方相司 : 二品 이상의 親王, 二位 및 大納言 이상의 고급관인의 葬儀를 맡고, 棺을 실은 車를 선도하는 자를 方相이라 하고, 方相의 衣裳 持物을 갖추는 관청을 造方相司라고 한다. 84) 養役夫司 : 산릉을 만드는데 동원되는 인부들을 부양하는 일을 맡은 임시 관사이다. 85) 紫微內相 : 紫微中臺의 장관이다. 원래는 紫微令이 장관이었는데, 군사권까지 아울러 장악하려고 개정하면서 명칭도 紫微內相으로 개칭하였다. 86) 중납언 : 令外官(율령에 규정되어 있지 않은 관직)의 하나이다. 705년에 설치되었는데 대납언의 정원을 2명 감원하고 중납언의 정원을 3명으로 하였다. 맡은 일은 대납언과 거의 동일하며 천황 을 최측근에서 보좌하는 일을 하였으나, 다만 大臣의 부재 시에 大納言처럼 정무를 대신하여 관 장할 수는 없었다. 87) 新令 : 大寶令에 대해 養老令을 新令이라 한 것이다. 88) 雜物 : 職分田 職封 職分資人 등. 89) 格 : 慶雲 3년 2월 16일 格. 90) 新令에 의거 : 養老令은 大寶令의 考選 연한 규정을 그대로 계승하여 內長上 6考, 內分番 8考, 外 長上 10考, 外散位 12考로 했기 때문에, 景雲 3년 2월 16일 格에 비교하면 각각 2考씩 늘어난 것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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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2 242 續日本紀 243 츠게노아손 다구히)를 右馬頭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宅朝臣人成(오오야케노아손 히토 는 7월 2일 저녁때 병사를 동원하여 內相의 저택을 포위하여 그를 살해하고, 곧 大殿(御 나리)을 左兵庫頭에 임명하고, 左大辯 正四位下 大伴宿 古麻呂에게 陸奧鎭守將軍을 겸 在所)을 포위하여 황태자(大炊王)를 퇴위시키며, 다음으로 황태후(光明子)의 궁을 점거하 임하게 하고, 陸奧守 從五位上 佐伯宿 全成(사에키노스쿠네 마타나리)에게 副將軍을 겸 여 驛鈴과 天皇御璽92)를 취하도록 하자. 그리고 우선 右大臣(藤原豊成)을 소환하여 지휘 임하게 하고, 從四位下 多治比眞人國人을 攝津大夫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上 文忌寸馬養 하게 하고, 그런 다음 帝(孝謙)를 폐위하고 四王93) 중에서 [황태자를] 뽑아 즉위시켜 천황 (후미노이미키 우마카이)을 鑄錢長官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伴宿 御依(오오토모노스 으로 하자 라고 합의하였습니다. 쿠네 미요리)를 參河守에 임명하고, 正五位上 賀茂朝臣角足을 遠江守에 임명하고, 從五 이리하여 뒤쫓아 자백하게 된 사람들을 소환하여 오는 순서대로 즉각 구금하고 각각 다 位上 石上朝臣宅嗣(이소노가미노아손 야카츠구)를 相摸守에 임명하고, 紫微少弼 從四位 른 장소에 유치해서 한 사람 한 사람을 심문하였다. 최초로 안숙왕을 심문하였다. [왕은 上 巨勢朝臣堺麻呂(고세노아손 사카이마로)에게 下總守를 겸임하게 하고, 正四位下 大伴 다음과 같이] 자백하였다. 宿 古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고마로)를 陸奧按察使에 임명하고, 從四位上 山背王을 但 지난 6월 29일 해질녘에 黃文王이 와서 말하길 奈良麻呂가 [安宿王에게] 상담하고 싶 馬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武良志(후지와라노아손 무라시)를 伯耆守에 임명하 은 일이 있다고 한다 고 하였습니다. 내(안숙왕)가 [황문왕을] 따라 가, 太政官 院內에 도 고, 從三位 百濟王敬福을 出雲守91)에 임명하고, 從三位 藤原朝臣乙麻呂(후지와라노아손 착하였습니다. 벌써 20인 정도의 사람이 있었습니다. 한 사람이 맞이하러 와서 예의바르 오토마로)를 美作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調連馬養(츠키노무라지 우마카이)을 備前守에 게 인사하였습니다. 가까이서 얼굴을 보니 奈良麻呂였습니다. 또 素服을 한 사람이 한 명 임명하고, 從五位下 있었습니다. 꼼꼼히 보니 小野東人이었습니다. 그때 사람들이 모두 말하길 시간이 이미 本朝臣市守(가키노모토노아손 이치모리)를 安藝守에 임명하고, 正 五位下 阿倍朝臣嶋麻呂(아베노아손 시마마로)를 伊豫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井朝臣 子祖父(에노이노아손 고오오지)를 豊後守에 임명하였다. 지나려 하고 있다. 모두 일어서서 예배하자 고 하였습니다. 내(安宿王)가 묻길 나는 아 직 모르겠다. 무엇을 예배하자는 것인가 라고 하였습니다. [누군가가] 답하길 天地에 예 배하는 것일 뿐이다 라고 했습니다. 나(安宿王)는 비록 사정을 알지 못하였지만 다른 사 추7월 庚戌(4) 천황은 다시 中納言 藤原朝臣永手(후지와라노아손 나가테) 등을 보내 東人(아즈마히토) 등을 엄하게 심문하게 하였던 바, [다음과 같이] 자술하였다. 람들을 따라 일어서서 예배했습니다. 속아서 [음모의 장소에] 갔을 뿐입니다. 또 黃文王 奈良麻呂 古麻呂 多治比犢養 등을 심문하였는데, 말은 비록 매우 달랐지 만 내용은 거의 모두 같았다. 일은 모두 사실입니다. 斐太都(히다츠)의 말에 틀림이 없습니다. 지난 6월 중에 시간을 勅使는 또 奈良麻呂에게 심문하길 逆謀가 어떻게 해서 일어났는가? 라고 하였다. [奈 약속하여 회합하여 일을 기도했던 적이 세 번 있었습니다. 첫 번째는 奈良麻呂(나라마로) 良麻呂가] 답하길 內相의 정치에 無道한 것이 매우 많았다. 그래서 우선 병사를 동원하 의 집에서 모였고, 두 번째는 圖書(寮)의 창고 근처의 정원에서, 세 번째는 太政官院의 정 여 [천황의 허락을] 청하여 그를 체포하고, 그 후 사정을 아뢰려고 하였다. 라고 하였다. 원에서였습니다. 모였던 사람들은 安宿王(아스카 오우) 黃文王(키부미 오우) 橘奈良麻 [칙사가] 또 묻길 정치에 無道한 것이 많았다고 한 것은 어떠한 일을 가리키는가. 라하 呂(다치바나노스쿠나마로) 大伴古麻呂 多治比犢養(다지히노우시카이) 多治比禮麻呂 였다. [奈良麻呂가] 답하길 東大寺를 조영한 일로, 인민이 고통을 당하고 [조정에서 근 (다지히노이야마로) 大伴池主(오오토모노이케누시) 多治比鷹主(다지히노다카누시) 大伴兄人(오오토모노에비토)입니다. 나머지 사람들은 어두운 밤이어서 얼굴이 보이지 않 았습니다. [일동은] 庭中에서 天地와 四方에 예배하고, 함께 鹽汁을 마시고 맹서하길 오 91) 出雲守(이즈모노카미) : 出雲國의 國司 중에서 장관직이다. 92) 驛鈴과 天皇御璽 : 驛鈴과 天皇御璽를 아울러 鈴印 이라고 한다. 본래 천황의 御在所에 있어야 하는 것이지만, 本條에 의하면 光明皇太后가 있는 곳에 있다. 황태후의 권력이 천황을 압도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93) 四王 : 鹽燒 安宿 黃文 道祖王을 말한다.

123 244 무하는] 여러 氏人(우지비토)들도 이것을 우려하였다. 또 奈羅에 續日本紀 94) 245 을 설치한 것도 이미 지난 天平 17년(745) 先帝 陛下(聖武)가 難波에 行幸하였을 때 신체가 좋지 않았습니 커다란 괴로움의 원인이 되고 있다. 라고 하였다. [칙사가] 묻길 이른바 氏人들이란 어 다. 이때 奈良麻呂가 全成에게 말하였습니다. 陛下의 신체 상태가 좋지 않아 거의 위독 느 氏들을 가리키는가. 또 東大寺의 조영은 너의 부친(橘諸兄) 때부터 시작되었다. 지금 한 상태에 이르렀다. 그런데 아직 皇嗣를 세우지 않았다.96) [만약 천황이 붕어하면] 사변 [너는] 인민이 고통을 당하고 있다고 하지만 [아들인 너의] 말로서는 부적절하지 않은가. 이 일어날 것이다. [나는] 多治比國人 多治比犢養 小野東人을 거느리고 黃文王을 세워 라 하였다. 이리하여 奈良麻呂는 말이 궁하여 굴복하였다. 천황으로 하여 백성의 바램에 부응하길 원한다. 大伴과 佐伯의 일족이 이 거사에 동조하 또 佐伯古比奈(사에키노고히나)를 심문하였다. [그는] 답하길 賀茂角足(가모노츠노다 면 장차 無敵일 것이다. 바야흐로 지금 천하 사람이 근심하고 고통스러워하고 있다. [都 리)은 高麗福信(고마노후쿠신) 奈貴王(나키 오우) 坂上예田麻呂(사카노우에노가리타 가 전전하고 있기 때문에 인민의] 주거가 일정하지 않고 도로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끊이 마로) 巨勢苗麻呂(고세노나에마로) 牡鹿嶋足(오시카노시마다리)을 초빙하여 [大和國 지 않으며 원망하고 한탄하는 소리가 정말로 많다. 이러한 사정이므로 상의하여 도모하 平群郡] 額田部(누카다베)95)의 집에서 술을 마셨습니다. 그 의도는 반란을 일으킬 때 이들 면 일은 반드시 성사될 것이다. 함께 하겠는가. [용맹한] 사람을 [仲麻呂 측에서] 활동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또 角足과 반란 全成이 답하였습니다. 全成의 先祖는 淸明한 마음으로 당시의 천황을 보좌하였다. 전 자는 상의하여 田村宮의 그림을 그리고, 이것을 가리켜 보이고 [자신을 한패에] 넣으려고 성은 비록 어리석지만 어찌 선조의 행적과 다른 길을 취하겠는가. 실제로 일이 성사된다 하였습니다. 라고 하였다. 하더라도 따르고 싶지 않다. 심문을 마치고, 하나같이 모두 옥에 가두었다. 또 衛府의 관인을 나누어 파견하여 반역 奈良麻呂가 말하였습니다. 天下의 근심을 보고 생각한 바를 말했을 뿐이다. 다른 사람 의 패거리를 체포하게 하였다. 그리고 出雲守 從三位 百濟王敬福, 大宰帥 正四位下 船王 에게 누설하지 말라. 말이 끝나자 작별하고 돌아왔습니다. 그 후 [孝謙天皇 즉위의] 大嘗 등 5인을 파견하여 衛府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옥사의 수인을 [탈취당하지 않도록] 굳게 祭가 있었던 해(天平勝寶 원년)에 奈良麻呂가 말했습니다. 전해에 말했던 일을 지금 실행 방비하고, 수인들을 고문하여 엄히 심문하게 하였다. [그 결과] 黃文王 *多夫禮( 者)로 하려고 한다. 어떻게 하겠는가. 全成이 답했습니다. 朝廷에서 全成에게 높은 작위와 두 개명 道祖王 *麻度比(惑者)로 개명 大伴古麻呂 多治比犢養 小野東人 賀茂角足 터운 봉록을 내렸다. 어찌 감히 하늘을 어기고 악역의 일을 하겠는가. 이 말은 전해에 이 *乃呂志(愚鈍)로 개명 등은 각각 [고문하는] 杖에 맞아 사망하였다. 安宿王과 그의 妻子는 佐度(사도 섬)로 유배되었다. 信濃國 守 佐伯大成과 土左國 守 大伴 미 잊었다. 어찌 다시 일을 일으키려 하는가. 奈良麻呂가 말했습니다. 너는 나와 마음을 같이하는 친구이다. 이 때문에 말한 것이다. 다른 사람에게 누설하지 말길 바란다. 古慈斐 두 사람은 각각 그대로 任國에 유배되었다. 반역에 가담했던 패거리들 중 어떤 자는 또 지난해 4월 全成97)이 [陸奧의] 금을 가지고 入京했는데, 이때 奈良麻呂가 전성에게 옥중에서 사망하고 나머지 자들은 모두 법률에 따라 유배되었다. 또 사자를 파견하여 遠江 말했습니다. 大伴古麻呂를 만나본 적이 있는가. 전성이 답했습니다. 만나본 적이 없 守 多治比國人을 소환하여 심문하였다. 답이 [다른 자와] 같았으므로 伊豆國에 유배하였다. 다. 이때 奈良麻呂가 말했습니다. 너와 함께 古麻呂를 만나보고 싶다. 함께 辨官의 曹 또 陸奧國에 칙을 내려 國守 佐伯全成을 심문케 하였다. 그가 [다음과 같이] 답하였다. 94) : 續日本記 에는 本條 외에 天平寶字 3년 10월 15일조에 尾垂 이 보인다. 職員令 70 大國 條의 本注에 關 이 있고, 義解에 關은 檢判處, 은 斬柵所 라고 하였다. 奈良의 의 위치는 山背國 久世郡 奈良鄕이라고 하는 설이 있지만, 出雲國風土記 에는 國堺에 이 설치되어 있으 므로, 大和와 山背의 경계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95) 大和國 平群郡 : 平群郡에 額田鄕이 있다. 지금의 大和郡山市額田部 北町 南町에 해당한다. 96) 아직 皇嗣를 세우지 않았다. : 阿倍內親王(후의 孝謙天皇)은 天平 10년 1월 13일에 立太子로서 건 재하였다. 여기에서 皇嗣(황태자)가 세워져 있지 않다고 한 것은 奈良麻呂가 阿倍內親王을 태자 로 인정하지 않았음을 말해준다. 여성 황태자가 違禮였기 때문일 것이다. 97) 全成 : 天平勝寶 원년(749) 윤5월 11일에 陸奧介의 지위에 있었는데 황금의 산출에 의해 從五位 上에 敍位되었고, 이후 계속 陸奧國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去年 은 앞에 나온 大嘗祭가 있던 해 (天平勝寶 원년) 이후의 해이겠지만, 後文의 聖武天皇의 병세에서 보면 天平勝寶 8년일 듯하 다.

124 246 續日本紀 247 司98)에 가서 만나보고 이야기하였습니다. 한참 있다 奈良麻呂가 말했습니다. [聖武]천황 속케 하고, 贈小紫 村國連小依(무라쿠니노무라지 오요리)의 壬申年 功田 10町, 贈正四位 의 건강이 악화된 채 오랜 세월을 경유하였다. 모습을 엿보니, 남은 목숨이 얼마 안 된다. 上 文忌寸 麻呂(후미노이미키 네마로)와 贈直大壹 丸部臣君手(와니베노오미 기미테)의 지금 천하가 어지러워 인심이 안정되지 않고 있다. 만약 다른 씨족이 천황을 세운다면 우 同年[의 공적에 의한] 功田 각 8町, 贈直大壹 文忌寸智德(후미이미키 치토코)의 同年 功 리 일족은 단지 멸망할 것이다. 나의 바램은 大伴 佐伯 양 宿 (의 사람들)을 거느리고 田 4町, 贈小錦上 置始連 (오키소메무라지 우사기)의 同年 功田 5町, 이 다섯 사람은 각 黃文王을 세워 천황으로 하는 것이다. 다른 씨족에 앞장서서 행동한다면 만세를 지배할 각 中功으로써 2代 동안 상속하게 합니다. 正四位下 下毛野朝臣古麻呂(시모츠케노아손 기틀을 다지는 것이다. 古麻呂가 말했습니다. 右大臣과 大納言은 단지 두 사람일 뿐이 고마로), 贈正五位上 調忌寸老人(츠키이미키 오키나), 從五位上 伊吉連博德(이키무라지 지만, 세력을 타고 권력을 장악하고 있다. 네가 비록 새로 천황을 세운다 하더라도 사람 하카토코), 從五位下 伊餘部連馬養(이요베무라지 우마카히)은 각각 大寶 2年(702) 律令 들이 어찌 따르겠는가. 원컨대 그러한 말은 다시 하지 말라. 을 편찬한 [공적에 의한] 功田이 각기 10町인데, 4인은 각각 下功으로써 그 아들 1代 동 全成이 말했습니다. 이 일은 도에 어긋나는 것이다. 실제로 일이 성사된다 하더라도 어찌 좋은 평판을 얻겠는가. 말이 끝나자 나는 작별하고 돌아왔습니다. 奈良麻呂와 古麻呂는 그대로 그 청사에 머물 안 상속하게 합니다. *이상 10조는 先朝 때에 정한 것이다. 贈大錦上 佐伯連古麻呂(사에키무라지 고마로)103)의 乙巳年(의 공적에 의한) 功田 40町6 段은 타인의 지휘를 받고 싸워 힘을 다해 姦賊을 주살했던 것으로, 공적은 있지만 대공이 렀습니다. 그 후의 이야기는 듣지 못했습니다. 라고 할 수는 없습니다. 令條의 上功으로써 3대 동안 상속하게 합니다. 從五位上 尾治宿 심문이 끝난 후 全成은 목을 매어 자살하였다. 大隅(오하리노스쿠네 오호스미)의 壬申年[의 공적에 의한] 功田 40町은 近江朝廷(天智 12월 壬子(9) 太政官이 상주하기를, 공적을 표창하여 勅語를 내리는 것은 聖典에도 기록된 大事입니 다. 선행을 기려 封地를 주는 것은 현명한 왕의 의무입니다. 우리나라에서는 乙巳年(645, 大化 원년) 이래로 많은 사람이 공을 세워 각각 봉지를 상으로 받았습니다. 다만 田令의 조문(功田條)에는 大功 上功 中功 下功의 등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功田99) 문서에 는 그 등급이 기재되어 있지 않은 것도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예전부터 현재까지의 예를 天皇)의 崩御에 의해 服喪하고 있을 때, [天武天皇이] 大義에 따라 行幸하여 [거병할 것 을] 결심하고, 은밀히 關東으로 탈출하였을 때, 大隅는 [천황을] 맞이하여 인도하고 私第 를 청소하여 마침내 行宮으로 삼고 거병을 위한 資材를 제공하여 도왔습니다. 그 공적이 실로 큽니다. 그러나 大功에 준할 정도는 아니고 中功에 비하면 그것보다는 큽니다. 令條 에 의해 上功으로 하여 3대 후까지 상속하게 합니다. 贈大紫 星川臣麻呂(호시카와오미 마로)의 壬申年 [공적에 의한] 功田 4町, 贈大錦下 坂 비교하여 등급을 정하려고 생각합니다. 大織冠100) 藤原內大臣101)의 乙巳年(의 공적에 의한) 功田 1백 町102)은 大功으로 영구히 상 98) 辨官의 曹司 : 平安宮에는 太政官院의 東北隅에 있는 朝所 북쪽에 있었다. 朝所는 관인이 식사를 하는 곳이다. 99) 功田 : 율령제의 토지제도 하에서 勳功을 세운 사람에게 주는 토지. 각각 大 上 中 下의 구별 이 있으며 大功田은 영구히 세습이 허용되며 上功田은 3세(증손)까지, 中功田은 2세(손), 下功田 은 子에게까지 세습시킬 수가 있었다. 100) 大織冠(다이쇼쿠칸) : 일본 고대 冠位의 하나. 647년 冠位 13階 제도를 제정하였을 때 최고 높은 관위였다. 이후 律令官位制의 시행 전까지 冠位 19階 제도와 冠位 23階 제도로 개정되었을 때에 도 최고의 冠位 자리를 유지하였다. 그렇지만 실제 임명된 사람은 中臣鎌足(나카토미노 가마타 리)이 유일하였다. 101) 大織冠 藤原內大臣 : 645년 소아씨를 타도하는데 앞장 선 中臣鎌足(나카토미모가마타리)을 말 한다. 102) 町 : 율령제 토지제도 단위의 하나로서 대보령 시행 이후 1町은 10段이었다. 1段은 360步였으므 로 1정은 3600步였다. 이것은 가로와 세로를 사람의 발걸음 3600보로 계산하였을 때 그 영역 안에서 수확할 수 있는 생산량을 의미한다. 율령제의 토지 면적은 단순한 크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다. 103) 贈大錦上 佐伯連古麻呂 : 皇極 4년 6월 乙巳의 變에 즈음하여, 三韓上表日에 殿中에 숨어 中大 兄皇子 등과 함께 蘇我入鹿을 토벌하였다. 그러나 日本書紀 에 의하면 처음에는 入鹿의 위세에 두려워 나아가지 못했는데, 中大兄의 부추김을 받아 간신히 斬하였다고 한다.

125 248 續日本紀 249 上直熊毛(사카노우에아타이 구마케)의 同年 [공적에 의한] 功田 6町, 贈正四位下 黃文連 것은 아닙니다. 비교하면 [大寶律令을 찬수했던] 下毛野朝臣古麻呂(시모츠케노노아손 大伴(기후미무라지 오오토모)의 同年 [공적에 의한] 功田 8町, 贈小錦下 文直成覺(후미아 고마로)107)등의 功과 같습니다. 令의 조문에 의하면 下功으로, 그 아들에게 상속하게 합니 타이 쟈우카쿠)의 同年 [공적에 의한] 功田 4町, 이 4인은 각각 전쟁터를 돌아다니며 충 다. *이상 14조는 今上天皇 때 정한 것이다. 라고 하였다. 성을 다하여 천황을 받들었습니다. 공적(의 내용)은 다르지만 공로의 성과는 같다고 하겠 습니다. 비교해보면 村國連小依(무라쿠니무라지 오요리) 등의 예와 같습니다. 令條에 의 하면 中功이므로 2대 동안 상속하게 합니다. 大錦下 笠臣志太留(카사오미 시다루)는 吉野大兄(요시노노오오에)의 모반 계획을 통보 한 [공적에 의한] 功田이 20町인데, 통보한 것이 하잘 것 없는 말이고 탐색하여 [밀모를] 드러내게 한 것은 아닙니다. 비록 大事라고는 하지만 이치상 그 정도로 커다란 것은 아닙 니다. 令條에 의해 中功으로 하여 2代 동안 상속하게 합니다. 從四位下 上道朝臣斐太都(가미츠미치노아손 히다츠)의 天平寶字 元年(757) [공적에 의 한] 功田 20町은 [惡]人이 모반을 도모하고 있음을 알고 통보하여 [재액의 근원을] 제거 하게 했습니다. 이것을 논하면 실로 커다란 공적이지만 혼자서 처리했던 것은 아닙니다. 令條에 의하면 上功으로 3대 동안 상속하게 합니다. 小錦下 坂合部宿 石敷(사카히베노스쿠네 이와시키)의 功田 6町은 사절로서 唐國으로 가는 도중에 賊地104)에 표착하여 횡사했던 데 의한 것인데, 가련한 일이지만 공적이라고 칭하는 것은 적절치 않습니다. 令條에 의하면 下功으로, 그 아들에게 상속하게 합니다. 正五位上 大和宿 長岡(야마토노스쿠네 나가오카)과 從五位下 陽胡史眞身(야코후비 토 마미)은 각각 養老 二年(718)에 律令을 찬수한 [공적에 의한] 功田이 각 4町이고, 外 권20 寶字稱德孝謙皇帝 孝謙天皇 天平寶字 2년(758) 하4월 己巳(28) 內藥司의 佑(스케)로 出雲國의 員外 을 겸임한 正六位上 難波藥師奈良(나니와노쿠스 시나라) 등 11인이 진언하였다. 奈良 등의 遠祖인 德來는 본래 高麗人이었지만 百濟國으로 이주하였습니다. 예전에 泊 瀨朝倉 朝廷(雄略天皇)이 百濟國에 조를 내려 才藝가 있는 사람을 찾아 구하였습니다. 그 래서 [백제국은] 德來를 일본 조정에 바쳤습니다. 德來의 5대 손인 惠日은 小治田(推古天 皇 朝廷)의 御世에 大唐國에 파견되어 醫術을 습득하였습니다. 그래서 藥師라 자칭하고 마침내 姓으로 되었습니다. 지금 어리석은 자손들이 남녀를 불문하고 [의사도 아니면서] 모두 藥師라는 성을 자칭하고 있습니다. 이러면 이름과 실체가 뒤섞여 어지럽게 될까 염 려됩니다. 엎드려 원하옵건대, 藥師라는 성을 바꾸어 難波連이라는 씨성을 하사해주시길 바랍니다. 이를 허락하였다. 6월 甲辰(4) 從五位下 矢集宿 蟲麻呂(야즈메노스쿠네 무시마로)와 外從五位下 鹽屋連古麻呂(시오 大宰(府)의 陰陽師 從六位下 餘益人(요노마스히토)과 造法華寺의 判官 從六位下 餘東人 야무라지 키치마로)는 각각 同年의 [공적에 의한] 功田이 각 5町이며, 正六位上 百濟人 (요노아즈마히토) 등 4인에게 百濟朝臣이라는 씨성을 하사하였다. 越後國의 目 正七位上 成(구다라노히토나리)은 同年의 [공적에 의한] 功田이 4町인데, 이 5인은 각각 刀筆105) 高麗使主馬養(고마노오미 우마카히)과 內侍典侍 從五位下 高麗使主淨日(고마노오미 기 106) 을 가지고 율령의 조문을 刪定하였습니다. 공적은 많지만 그 일이 매우 곤란하였던 요히) 등 5인에게 多可連(이라는 氏姓)을, 散位의 大屬 正六位上 로타리)과 散位 正八位下 淨成(고마노키요나리) 등 4인에게 長背連(이라는 氏姓)을 하 사하였다. 104) 賊地 : 日本書紀 齊明 5년 7월 3일조에 인용된`伊吉連博德書a에 의하면, 坂合部連石數(石布) 의 船은 南海로 표류하여 爾加倭라고 하는 섬에 도착, 섬사람에게 살해되었다고 한다. 105) 刀筆 : 붓과 작은 칼로 율령의 條文을 改正하였다. 칼은 대나무나 나무에 기록한 문자의 誤記를 지우기 위해 사용한 小刀이다. 106) 공적은 많지만 : 功이 크기는 하지만 국난을 구한 것은 아니다. 連廣足(고마무라지 히 107) 下毛野朝臣古麻呂 : 大寶律令 선정자이다.

126 250 續日本紀 코 마우)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外從五位下 食朝臣三田次(하미노아손 미타스키) 正六位 권22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 3년(759) 上 田口朝臣大戶(다구치노아손 오오토) 正六位下 大原眞人繼麻呂(오오하라노마히토 츠 추7월 丁卯(3) 勅을 내리기를 官位令에 준하면, 彈正尹은 從四位上의 官으로 官位가 매우 가볍다. 그 러니 사람들이 어찌 두려워하겠는가. 금후로는 고쳐 從三位의 官으로 하라. 고 하였다. 從四位下 阿倍朝臣嶋麻呂(아베노아손 시마마로)를 左大辯에, 從四位下 大伴宿 犬養(오 오토모노스쿠네 이누카히)을 右大辯에, 從五位上 石川朝臣豊成(이시카와노아손 토요나 리)을 左中辯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下 佐味朝臣蟲麻呂(사미노아손 무시마로)를 中宮大夫 에 임명하고 備前守는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佐佐貴山君親人(사사키야마키미 오 야히토)을 [中宮]亮에, 從五位下 橘宿 綿裳(다치바나노스쿠네 와타모)을 左大舍人助에, 從四位下 岡眞人和氣(오카노마히토 와케)를 內匠頭108)에, 從四位下 御方王(마카타노오오 키미)을 木工頭에 三品 池田親王(이케다노미코)을 251 政尹에, 外從五位下 食朝臣三田次 (하미노아손 미타스키)를 西市正에, 從五位下 阿倍朝臣許智(아베노아손 고치)를 山背介 에, 外從五位下 陽侯史玲 (야코후비토 랴우친)를 伊賀守에 임명하고, 鎭國衛次將 從五 位下 田中朝臣多太麻呂(다나카노아손 타다마로)에게는 上總員外介를 겸임하게 하고, 從 五位下 三嶋眞人廬原(미시마노마히토 이호하라)을 武藏介에, 從三位 百濟王敬福(구다라 노고니키시 쿄우후쿠)을 伊豫守에 임명하였다. 권22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 4년(760) 춘정월 丙寅(4) 高野天皇(孝謙上皇)과 帝(淳仁)가 內安殿에 납시어 大保 從二位 藤原惠美朝臣押勝(후지 기마로)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正六位上 下道朝臣黑麻呂(시모츠미치노아손 구로마로)에 게 外從五位下를, 從五位上 粟田朝臣深見(아와타노아손 후카미)에게 正五位下를, 女孺 正六位上 大伴宿 眞身(오오토모노스쿠네 마미) 雀部朝臣東女(사자키베노아손 아즈마 메), 從六位下 布勢朝臣小野(후세노아손 오노), 正七位上 大神朝臣妹(오오미와노아손 이 모), 无位의 藤原朝臣藥子(후지와라노아손 쿠스코)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위계의 수여가 끝나자 高野天皇은 다음과 같은 口頭의 勅을 내렸다. 乾政官의 大臣(太政大臣)은 특별히 근무할 만한 사람이 없을 때는 공석으로 두는 관직 이다. 그렇지만 현재의 大保(惠美押勝)는 반드시 그 임무를 완수할 것으로 생각하여 몇 번이나 거듭 [大師에 취임하도록] 勅하였지만 임무를 감당할 수 없다고 사퇴하고, 만약 그것을 받을 만한 사람이라면 조부(不比等)가 [취임하여] 근무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런 데 지식도 없고 마음도 나약하고 열등한 押勝이 근무할 수 있는 관직이 아닙니다. 너무도 두렵다고 말하였다. 이처럼 말했다고 하여 모든 사람들에게 사퇴한다고 하기 때문에 이 관(大師)을 수여하지 않는다고 알릴 수도 없다. 또 조부인 大臣(不比等)은 밝고 깨끗한 마 음을 가지고 몇 대나 되는 천황의 御世에 천하의 [정치에 대해] 상주하고 조정을 돕고 섬 겼던 일을 기쁘고 고마운 일이라고 생각하여, 입에 올리기에도 두려운 성스러운 천황(元 正天皇)의 조정에서 太政大臣으로 근무하라고 勅하셨지만, 몇 번이나 사퇴를 아뢰었기 때문에 [太政大臣의] 지위를 받지 않고 마쳐버렸던 것도 유감스러운 일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므로, 지금 이 藤原惠美朝臣 大保를 大師의 관으로 올려주려 한다는 천황의 어명을 두루두루 들어라 하고 분부(宣)하노라. 와라노에미노아손 오시카츠)에게 從一位를, 正四位上 藤原朝臣眞楯(후지와라오아손 마타 그래서 大師 押勝을 불러 몸에 휴대하는 부절(隨身契)을 수여하였다.109) 또 中納言 正三 테) 正四位下 藤原朝臣巨勢麻呂(후지와라노아손 고세마로)에게 각각 從三位를, 從五位 位 石川朝臣年足(이시가와노아손 도시다리)을 御史大夫에, 從三位 文室眞人智努(훈야노 上 下毛野朝臣稻麻呂(시모츠케노노아손 이나마로)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日下部宿 마히토 치누)를 中納言에, 三品 船親王을 信部卿에, 從三位 藤原朝臣眞楯(후지와라노아 古麻呂(쿠사카베노스쿠네 고마로) 石川朝臣豊成(이시카와노아손 토요나리)에게 각각 正 五位下를, 從五位下 田中朝臣多太麻呂(다나카노아손 타다마로) 日置造眞 (에키미야츠 108) 내장두 : 내장두는 內藏寮의 장관이다. 內藏寮는 中務省 소속 관청으로서 궁중의 관물을 보관하 는 창고 기능을 관장하였다. 109) 隨身契 : 통설로는 公式令 45, 給隨身符조에 보이는 궁문 통행증인 隨身符와 같다고 본다. 그러 나 다음 규정에서 親王 및 大納言 이상과 中務少輔 五衛佐 이상에게는 모두 隨身符를 지급한 다. 고 하고 있어, 일부러 특기할 필요는 없다. 본조의 隨身符는 發兵이나 固關 등 보다 강력한 권능을 가진 것이었을 것이다.

127 252 續日本紀 253 손 수마다테)을 大宰師에 임명하였다. 하였다. 韓遠智113) 등 4인에게는 中山連(나카야마노무라지), 王國嶋114)(오우 쿠니시마) 등 천황은 다음과 같이 勅을 내렸다. 5인에게는 楊津連115)(야나이즈노무라지), 甘良東人116)(가라노아즈마히토) 등 3인에게는 淸 목숨을 다 바쳐 군주를 섬기는 것은 충신의 지극한 절조이고, 공로에 따라 상을 주어 篠連(키요시노노무라지), 刀利甲斐麻呂(도리노카이마로) 등 7인에게는 丘上連117)(오카노 보답하는 것은 聖君의 근본이 되는 말이다. 예전에 先帝(聖武天皇)께서는 자주 밝은 詔를 에노무라지), 戶淨道 등 4인에게는 松井連(마츠이노무라지), 憶賴子老118)(오쿠라이노코오 내려 雄勝城을 조성하셨다. 그런데 그 공사는 완성하기가 어려워 전임 장군은 곤란을 받 유) 등 41인에게는 石野連119)(이시노노무라지), 竹志麻呂120)(츠쿠시마로) 등 4인에게는 坂 았다. 그러나 지금 陸奧國의 按察使兼鎭守將軍 正五位下 藤原惠美朝臣朝獵(후지와라노 原連(사카하라노무라지), 生河內(이키노가와치) 등 2인에게는 淸湍連(키요세노무라지), 에미노아손 카리) 등은 荒夷를 가르치고 인도하여 皇化에 순종하게 하고 一戰도 치르지 面得敬(멘노도쿠케이) 등 4인에게는 春野連121)(하루노노무라지), 高牛養122)(고우노 우시카 않고 조성을 완수하였다. 또 陸奧國의 牡鹿郡에서는 大河(北上川)를 가로지르고 높은 峻 이) 등 8인에게는 淨野造(키요노노미야츠코), 卓 智123)(타쿠고우치) 등 2인에게는 御池 嶺을 넘어 桃生柵을 만들어 적의 요해처를 빼앗았다. 돌아보고 그 공적을 생각하면, 이치 造(오이케노미야츠코), 延爾豊成(에니노토요나리) 등 4인에게는 長沼造(나가누마노미야 상 당연히 찬미하고 위계를 올려주어야 한다. 朝獵을 발탁하여 특별히 從四位下를 수여 츠코), 伊志麻呂(이시마로)에게는 福地造(후쿠치노미야츠코), 陽麻呂(히마로)에게는 高代 한다. 陸奧介兼鎭守副將軍 從五位上 百濟朝臣足人(구다라노아손 다루히토) 出羽守 從 造(다카시로노미야츠코), 烏那龍神(우나노타츠가미)에게는 水雄造(미노오노미야츠코) 五位下 小野朝臣竹良(오노노아손 츠쿠라) 出羽介 正六位上 百濟王三忠(구다라노고니키 科野友麻呂124)(시나노노도모마로) 등 2인에게는 淸田造(키요다노미야츠코), 斯臘國足(시 시 산츄우)에게는 각각 一階를 승진시킨다. 鎭守軍監 正六位上 葛井連立足(후지이노무라 지 다치타리) 出羽 正六位上 玉作金弓(다마츠쿠리노카나유미)에게는 각각 外從五位 下를 수여한다. 鎭守軍監 從六位上 大伴宿 益立(오오토모노스쿠네 마시타테)은 艱苦를 사양치 않고 스스로 두 차례나 정벌하는 수고를 하였고, 鎭守軍曹 從八位上 韓袁哲(칸온 테츠)은 자신이 살해되는 위험을 두려워하지 않고 솔선하여 돌입하는 용기를 보였으므 로, 각각 三階를 승진시킨다. 나머지 從軍한 國司 郡司 軍毅에게는 각각 二階를 승진 시킨다. 단 正六位上인 자에게는 별도로 正稅 2천 束을 지급한다. 또 軍士나 蝦夷의 囚 로 군공이 있는 자는 按察使가 簡定하여 奏聞하라. 권23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 5년(761) 3월 庚子(15)110) 百濟人 餘民善女111)(요노미요시메) 등 4인에게 百濟公112)(구다라노키미)이라는 성을 하사 110) 三月 庚子 : 천평보자 5년 3월 庚子조의 도래인에 대한 賜姓은 천평보자 원년 4월 辛巳조에 일 본풍의 성을 받기를 원하는 사람은 모두 허락한다는 효겸천황의 칙에 의거하여 실제 시행된 것 이다. 백제계 도래인 131인, 고구려계 도래인 29인, 신라계 도래인 20인, 중국계 도래인 8인 등 모두 188인이 사성의 대상이 되었다. 111) 餘民善女 : 여기에만 보이는 인물이다. 112) 百濟公 : 新撰姓氏錄 左京諸蕃에 百濟國 都慕王 二十四 世孫 汶淵王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13) 韓遠智 : 여기에만 보인다. 114) 王國嶋 : 백제계통의 王氏에 대하여 신일본고전문학대계 續日本紀 (제3권, 1992, 岩波書店)의 보주(560쪽)에서는 백제 멸망 후 웅진도독으로 부임하다 죽은 당의 장군 王文度의 후예씨족이라 고 설명하고 있다. 115) 楊津連 : 新撰姓氏錄 右京諸蕃에 八淸水連과 同祖 관계에 있으며 八淸水連은 당의 장군 王文 度에서부터 나왔다고 한다. 116) 甘良東人 : 甘良氏는 백제계 도래 씨족이며 甘良東人은 여기에만 등장한다. 117) 丘上連 : 岡上連이라고도 표기한다. 118) 憶賴子老 : 憶賴라는 씨족의 이름은 백제의 聖地를 가리키는 호칭 혹은 백제의 雅稱인 意流 尉 禮 意呂와 통하는 지명에 유래한다는 설이 있다. 119) 石野連 : 新撰姓氏錄 左京諸蕃에 百濟國人 近速王의 孫 憶賴福留에서 나왔다고 기재되어 있다. 120) 竹志麻呂 : 대일본고문서 (13권, 220쪽)에 의하면 攝津國百濟郡南部鄕의 戶主로 나온다. 천평 보자 2년 2월의 문서( 대일본고문서 4권, 259쪽)에는 畵工佑로 나온다. 121) 春野連 : 新撰姓氏錄 右京諸蕃에 百濟速古王의 손자, 비류왕에서부터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122) 高牛養 : 뒤에 淸野連(키요노노무라지)으로 성이 바뀌었다. 123) 卓 智 : 卓씨는 백제 부여 일대의 지명에서 유래한 것으로 보인다. 御池造는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에 백제국 부여의 卓斤國主 施比王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124) 科野友麻呂 : 여기에만 보이는 인물이다. 科野氏의 科野는 信濃 이라고도 표기하며 지금의 長

128 254 續日本紀 라노쿠니타미) 등 2인에게는 淸海造(키요미노미야츠코), 佐魯牛養125)(사로노우시카이) 등 3인에게는 小川造(오가와노미야츠코), 王寶受 등 4인에게는 楊津造, 월 丁酉(17) 他伊奈麻呂(토우 從四位下 藤原惠美朝臣朝狩(후지와라노에미노아손 아사카리)를 東海道節度使에 임명 타노이나마로) 등 5인에게는 中野造 (나카노노미야츠코), 調阿氣麻呂(츠키노아케마로) 하고, 正五位下 百濟朝臣足人(구다라노아손 다루히토) 從五位上 田中朝臣多太麻呂(다 126) 127) 高麗人 達沙仁德 등 2인에게는 朝日連(아사 나카노아손 타다마로)를 副使에 임명하였다. 判官은 4인, 錄事는 4인이었다. 그 所管은 히노무라지), 上部 王蟲麻呂(오우무시마로)에게는 豊原連(도요하라노무라지), 前部 高文 遠江 駿河 伊豆 甲斐 相摸 安房 上總 下總 常陸 上野 武藏 下野 등 12國 信에게는 福當連128)(후타기노무라지), 前部 白公 등 6인에게는 御坂連, 後部 王安成 등 2 이고, 배 152척, 병사 1만5천7백 인, 子弟 78인, 水手 7천5백2십 인을 [징발하여] 검열하 인에게는 高里連(다카사토노무라지), 後部 高吳野에게는 大井連(오오이노무라지), 上部 고 준비한다. 그 인원수 중 2천4백 인은 肥前國에서, 2백 인은 對馬嶋에서 취한다. 등 20인에게는 豊田造(도요타노미야츠코), 王彌夜大理(오우 야야다이리) 등 10인에게는 豊原造(도요하라노미야츠코), 前部 選理 등 從三位 百濟王敬福(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후쿠)을 南海道使130)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井造(카키이노미야츠코), 上部 君足(기미다리) 등 2인에게는 雄坂造(오사카 藤原朝臣田麻呂(후지와라노아손 다마로) 從五位下 小野朝臣石根(오노노아손 이와네)을 노미야츠코), 前部 安人에게는 御坂造(미사카노미야츠코), 新羅人 新良木舍姓縣麻呂(시 副使에 임명하였다. 判官은 4인이고, 錄事는 4인이었다. 所管은 紀伊 阿波 讚岐 伊 라기노도네리 아가타마로) 등 7인에게는 淸住造(키요스미노미야츠코), 須布呂比滿麻呂 豫 土左 播磨 美作 備前 備中 備後 安藝 周防 등 12국이고, 배 1백21척, 병사 (스부로노히마마로) 등 13인에게는 狩高造(카리다카노미야츠코), 漢人 伯德廣足 등 6인 1만2천5백 인, 子弟 62인, 水手 4천9백2십 인을 검열하여 준비한다. 3인에게는 에게는 雲梯連(우나데노무라지), 伯德諸足 등 2인에게는 雲梯造129)(우나데노미야츠코)라 는 성을 하사하였다. 癸未(3) 藤原河淸(후지와라노가와키요)을 맞이하는 使인 外從五位下 高元度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그 錄事 羽栗翔(하쿠료노가케루)은 河淸이 있는 곳에 머무르고 귀국하지 않 았다. 野縣 일대의 古지명이다. 科野氏는 日本書紀 흠명천황의 代에 소위 왜계백제관료로서 활약한 인물들이 많이 보이며 한반도에서 도래한 씨족 집단으로 보는 것이 일반적 견해이다. 125) 佐魯牛養 : 佐魯氏는 日本書紀 현종천황 3년 시세조에 임나에서 활동하고 있었던 佐魯(麻都) 가 보인다. 佐魯牛養는 여기에만 등장하는 인물이다. 126) 中野造 : 新撰姓氏錄 右京諸蕃에 百濟國人 杵率答他斯智의 후예라고 나온다. 127) 百濟人 餘民善女 20인에게는 豊田造 : 여기까지가 백제계 도래인에 대한 사성이다. 128) 福當連 : 新撰姓氏錄 左京諸蕃에 高麗國人 前部能婁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대일본고 문서 (16권, 522쪽)에 보이는 福當倉主도 가바네는 다르지만 아마도 福當連氏와 동족관계에 있 었다고 보인다. 129) 雲梯造 : 新撰姓氏錄 右京諸蕃에 高向村主와 同祖 관계이며 宗 德公의 후예라고 나오는데 高 向村主는 휘나라 무제의 태자인 文帝에서 나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正四位下 吉備朝臣眞備(기비노아손 마키비)를 西海道使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多治比 眞人土作(다지히노마히토 하니츠쿠리) 佐伯宿 美濃麻呂(사에키노스쿠네 미노마로)를 副使에 임명하였다. 判官은 4인이고, 錄事는 4인이었다. 所管은 筑前 筑後 肥後 豊 前 豊後 日向 大隅 薩摩 등 8國이고, 배 121척, 병사 1만2천5백 인, 子弟 62인, 水 手 4천9백2십 인을 검열하여 준비한다. 이 병사들은 모두 3년 간 田租를 면제하고, 전부 弓馬 훈련을 시키며 五行의 진법을 조 련하여 익히게 한다. 남은 병사는 병기 제조에 종사하게 한다. 권24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 6년(762) 춘정월 戊子(9) 信部少輔 從五位下 紀朝臣牛養(키노아손 우시카히)에게 少納言을 겸임하게 하고, 從五 位上 阿倍朝臣毛人(아베노아손 에미시)을 左中辯에, 從四位下 石川朝臣豊成(이시카와노 아손 토요나리)을 右大辯에, 從五位上 大伴宿 家持(오오토모노스쿠네 야카모치)를 信部 大輔에, 外從五位下 忌部連黑麻呂(이무베무라지 구로마로)를 內史局助에, 從四位下 宗形 130) 南海道使 : 南海道 절도사의 의미. 남해도는 지금의 四國(시고쿠) 지역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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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0 258 續日本紀 259 出雲介에, 外從五位下 上毛野公眞人(가미츠케노키미 마히토)을 美作介에, 從五位上 甘南 伴宿 潔足(오오도모노스쿠네 기요다리) 佐伯宿 木節(사에키노스쿠네 기부시), 正六 備眞人伊香(가무나비노마히토 이카고)을 備前守에, 從五位上 道守王(치모리노오오키미) 位下 大神朝臣奧守(오오미와노아손 오쿠모리)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正六位上 六人部連 을 備中守에, 從五位下 小野朝臣石根(오노노아손 이와네)을 長門守에, 從三位 百濟王敬 鯖麻呂(무토베노무라지 사베마로) 麻田連金生(아사다노무라지 가나후) 息長丹生眞人 福(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후쿠)을 讚岐守에, 外從五位下 池原公禾守(이케하라키미 아와 大國(오기나가니우노마히토 오오쿠니) 粟田朝臣道麻呂(아와다노아손 미치마로) 高麗 모리)를 讚岐介에, 從四位下 和氣王을 伊與守에, 從五位上 中臣丸連張弓(나카토미노와니 朝臣廣山(고마노아손 히로야마)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女孺로 无位의 橘宿 御笠(다치 무라지 유미하리)을 伊興介에, 從五位下 紀朝臣廣純(키노아손 히로스미)을 大宰員外少貳 바나노스쿠네 미가사), 從六位下 阿倍朝臣豆餘理(아베노아손 츠요리)에게 각각 從五位下 에, 從五位下 中臣朝臣鷹主(나카토미노아손 다카누시)를 肥前守에, 從五位下 笠朝臣不破 를 수여하였다. 麻呂(가사노아손 후와마로)를 日向守에 임명하였다. 권25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 8년(764) 권25 廢帝 淳仁天皇 天平寶字 8년(764) 춘정월 己未(21) 춘정월 乙巳(7) 正五位下 山村王을 少納言에, 從五位下 阿倍朝臣子路를 左少辯에 임명하고, 內藏助 外 正三位 文室眞人淨三(훈야노마히토 쟈우사무)에게 從二位를, 在唐大使 正四位下 藤原 從五位下 高丘連比良麻呂에게 大外記를 겸임하게 하고, 外從五位下 麻田連金生를 左大 朝臣淸河(후지와라노아손 기요카와)에게 從三位를, 從四位下 和氣王(와케 오우)에게 從 史에, 從五位下 大伴宿 潔足을 禮部少輔에, 正五位下 紀朝臣伊保를 仁部大輔에, 從五位 四位上을, 无位의 猿福貴王(엔부쿠기 오우)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下 奈貴王(나키 오우) 上 多治比眞人木人을 主計頭에, 外從五位下 葛井連立足을 主計助에, 從五位下 甘南備眞 에게 從五位上을, 從四位下 中臣朝臣淸麻呂(나카토미노아손 기요마로) 石川朝臣豊成 人伊香을 主稅頭에, 外從五位下 船連男楫을 主稅助에, 從五位下 路眞人鷹甘을 兵馬正에, (이시카와노아손 토요나리)에게 각각 從四位上을, 正五位下 阿倍朝臣子嶋(아베노아손 고 從五位下 小治田朝臣水內를 大炊頭에, 正五位下 久世王을 木工頭에, 從五位下 穗積朝臣 시마) 百濟王元忠(구다라노고니키시 겐치우)에게 각각 從四位下를, 從五位上 紀朝臣伊 小東人을 木工助에, 從五位下 掃守王을 典藥頭에, 從五位下 粟田朝臣黑麻呂(아와타노아 保(키노아손 이호) 藤原朝臣田麻呂(후지와라노아손 다마로) 藤原朝臣繩麻呂(후지와라 손 구로마로)를 左京亮에, 外從五位下 蜜奚野(미츠노케이야)를 西市正에, 正四位下 吉備 노아손 다마로)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本朝臣市守(가키노모토노아손 이치모 朝臣眞備(기비노아손 마키비)131)를 造東大寺長官에, 正五位下 百濟朝臣足人(구다라노아 리) 多治比眞人木人(다지히노마히토 기히토) 忌部宿 鳥麻呂(인베노스쿠네 도리마 손 다루히토)을 授刀佐에, 從四位下 仲眞人石伴(나카노마히토 이와토모)을 左勇士率에, 로) 中臣朝臣毛人(나카토미노아손 에미시) 下毛野朝臣多具比(시모츠케노노아손 타구 從五位下 大原眞人宿奈麻呂(오오하라노마히토 수쿠나마로)를 左虎賁翼에, 從五位下 藤 히) 大原眞人今城(오오하라노마히토 이마키) 石川朝臣豊人(이시카와노아손 토요히 原惠美朝臣薩雄(후지와라노에미노아손 사츠오)을 右虎賁率에, 正五位上 日下部宿 子麻 토) 高圓朝臣廣世(다카마도노아손 히로요) 藤原惠美朝臣小湯麻呂(후지와라오에미노 呂를 山背守에, 從五位下 大伴宿 伯麻呂를 伊豆守에, 從五位上 粟田朝臣人成을 相摸守 아손 오유마로)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小治田朝臣水內(오와리타노아손 미누 에, 從五位上 上毛野公廣濱을 近江介에, 從五位下 藤原惠美朝臣執棹를 美濃守에, 外從五 치) 巨勢朝臣古麻呂(고세노아손 고마로) 高橋朝臣廣人(다카하시노아손 히로히토) 菅 生朝臣忍人(스가오노아손 오시히토) 石川朝臣氏人(이시가와노아손 우지히토) 粟田朝 臣黑麻呂(아와다노아손 쿠로마로) 坂本朝臣男足(사카모토노아손 오다리) 大原眞人宿 奈麻呂(오오하라노마히토 스쿠나마로) 上毛野朝臣馬長(카미츠케노노아손 마나가) 大 131) 四位下 吉備朝臣眞備 : 天平勝寶 2년 정월에 右京大夫에서 筑前守로 좌천되고(薨傳에 의하면 다 시 肥前守로 遷任됨), 4년 入唐副使로서 入唐하고 6년에 歸朝한 후 그 해 4월 大宰大貳가 되었 다. 지금까지 14년이나 都의 重職에 있었다. 反藤原仲麻呂 측의 인사라고 생각된다.

131 260 續日本紀 261 位下 池原公禾守를 美濃介에, 從五位下 藤原朝臣繼繩을 信濃守에, 從五位下 田口朝臣大 從七位下 佐伯宿 家繼, 大初位下 石村村主石楯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正六位上 張祿 萬戶를 上野介에, 從五位下 上毛野朝臣馬長을 出羽介에, 從五位下 藤原惠美朝臣辛加知 滿 漆部宿 道麻呂 道守臣多祁留 土師宿 樽 弓削連耳高 田部宿 男足 秦忌寸 를 越前守에, 外從五位下 村國連蟲麻呂를 越前介에, 從五位上 高圓朝臣廣世를 播磨守에, 智麻呂 靭負宿 嶋麻呂 內藏忌寸若人 美努連奧麻呂 中臣片岡連五百千麻呂 矢集 從五位下 藤原朝臣藏下麻呂를 備前守에, 外從五位下 葛井連根主를 備中介에, 從四位下 宿 大唐 秦忌寸伊波太氣, 從六位下 掃部宿 廣足 正六位上大原連家主 津連眞麻 上道朝臣正道를 備後守에, 從五位下 石川朝臣氏人을 周防守에, 從五位下 小野朝臣小贄 呂 尾張宿 東人 雀部直兄子 丈部直不破麻呂 高志毘登若子麻呂 建部公人上 桑 을 紀伊守에, 從四位上 佐伯宿 毛人을 大宰大貳에, 從五位上 石上朝臣宅嗣를 大宰少貳 原連足床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正四位上 廣瀨女王 圓方女王 神社女王에게 각각 從 132) 에, 從四位下 佐伯宿 今毛人을 營城監에, 從五位下 佐味朝臣伊與麻呂를 豊前守에, 從 五位上 大伴宿 家持를 薩摩守에 임명하였다. 동10월 庚午(7) 詔를 내려 親王 大臣의 후손 및 逆徒의 토벌에 참여한 諸氏의 사람들에게 다음과 같이 위계를 승진시켜주었다. 三位를 수여하였다. 동10월 辛未(8) 從五位下 高橋朝臣廣人(다카하시노아손 히로히토)에게 從五位上을, 從六位上 百濟王武 鏡(구다라노고니키시 무쿄우)에게 從五位下를, 外從五位下 日置造蓑麻呂(에키미야츠코 미노마로)에게 外正五位下를, 无位의 弓削宿 美努久女(유게노스쿠네 미노쿠메) 乙美 无位의 諱 *今上(桓武天皇) 矢口王 三關王 大宅王 若江王 當麻王 坂上王에게 努久女(오토미노쿠메) 刀自女(도지메)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中務少丞 正六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藤原朝臣濱足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上 縣犬養 位上 大原眞人都良麻呂(오오하라노마히토 츠라마로)에게 淨原眞人(키요하라노마히토)이 宿 古麻呂 小野朝臣竹良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佐伯宿 伊太智에게 從五位 라는 성과 淨貞이라는 이름을 하사하였다. 上을, 外從五位下 葛井連立足 漆部直伊波, 正六位上 守山眞人綿麻呂 海上眞人淨水 岸田朝臣繼手 大伴宿 形見 八多朝臣百嶋 宇治眞人宇治麻呂 忌部宿 比良夫 三 野眞人馬甘(미노노마히토 우마카히) 安曇宿 三國(아즈미노스쿠네 미쿠니) 紀朝臣鯖 麻呂(키노아손 사바마로) 久米朝臣子蟲(구메노아손 고무시) 百濟朝臣益人(구다라노아 손 마스히토) 山田三井宿 廣人(야마다노미이노스쿠네 히로히토) 笠朝臣道引 佐伯 宿 久良麻呂(사에키노스쿠네 구라마로) 巨勢朝臣津麻呂(고세노아손 츠마로) 多治比 眞人小耳 高向朝臣家主 中臣朝臣常 佐伯宿 眞守 阿倍朝臣淨成 賀茂朝臣大川 石上朝臣家成 紀朝臣廣庭 豊野眞人奄智 文室眞人水通 國見眞人阿曇 藤原朝臣乙 繩 藤原朝臣小黑麻呂 石川朝臣永年 若櫻部朝臣上麻呂 弓削宿 薩摩 當麻眞人得 足 阿倍朝臣東人, 從六位上 雀部朝巨道奧 大伴宿 淨麻呂, 從六位下 賀茂朝臣田守, 동10월 壬申(9) 高野天皇이 兵部卿 和氣王(와케노오오키미) 左兵衛督 山村王(야마무라노오오키미) 外衛大將 百濟王敬福(구다라노고니키시 교우후쿠) 등을 파견하여 병사 수백 명을 거느리 고 中宮院을 포위하게 하였다. 그때 帝(淳仁天皇)는 갑작스러운 일이라서 의복을 입거나 신발도 신지 못했는데 使者가 재촉하였다. 몇 명의 侍衛는 뿔뿔이 흩어져 따르는 자가 하 나도 없었다. 겨우 母家의 두 세 사람과 함께 도보로 圖書寮의 서북쪽에 도착하였다. 山 村王이 다음과 같이 詔를 선포하였다. 입에 올리기에도 두려운 짐의 先帝인 天帝(聖武天皇)의 어명으로 짐에게 勅하시길, 천하는 짐(聖武)의 아들인 너(孝謙)에게 수여한다는 그 일은 말해보자면, 王을 奴로 하 려고 하더라도, 奴를 왕이라고 말하더라도, 네가 하고 싶은 것처럼 하여 가령 [너의] 후 에 帝로서 [位에] 오른 사람이라도, [位에] 오른 후 너에 대해 禮가 없고 따르지 않아 예 132) 營城監 : 大宰府 관하의 성곽 축성을 감독하는 관일 것이다. 佐伯今毛人은 天平寶字 8년 8월 4 일에 營城監兼肥前守로 되고, 天平神護 원년 3월 10일에 築怡土姓專知官(본관은 大宰大貳)으로 되었다. 寶龜 3년(772) 11월 25일조에 築紫營大津城監을 폐지한 일이 보인다. 營城監은 위의 두 예뿐이다. 법에 어긋나는 사람을 帝의 位에 오르게 해서는 안 된다. 또 君臣의 도리에 따라 곧고 깨 끗한 마음을 가지고 너를 도와 섬기는 [사람이야말로] 帝로서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라고 勅하셨다. 이러한 御命을 짐은 또 한 두 竪子들과 [성무천황의 어전에서] 모시고 받

132 262 續日本紀 들었던 적이 있다. 263 隱岐守에, 從五位下 藤原朝臣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구로마로)를 播磨守에, 從五位下 葛 그런데 지금 帝가 되어 있는 사람(淳仁天皇)을 이 수년 간 보고 있자니, 그 位에 있을 능 력도 없다. 이것뿐만이 아니라 지금 들은 바에 의하면, 仲麻呂와 마음을 같이 하여 몰래 짐을 제거하려고 모의하였다. 또 몰래 6천의 병사를 징발하여 거느리고, 또 일곱 사람만 으로 關으로 들어가려고 모의하였다.133) 精兵으로 [高野天皇측을] 눌러 무너뜨려 혼란케 해서 짐을 討滅하자고 말하였다. 그래서 이러한 이유로 [淳仁天皇을] 帝位에서 물러나게 하고 親王의 位를 주어 淡路國의 公으로서 물러나게 하라고 勅하신 천황의 어명을 두루 두루 들어라 하고 분부(宣)하신다. 위의 詔를 선포하는 일이 끝나자, 淡路公과 그 어머니를 따라서 小子門(小子部門)으로 갔는데, 도로에서 안장을 얹은 말을 붙잡아 [淡路公 등을] 태웠다. 右兵衛督 藤原朝臣藏 下麻呂(후지와라노아손 구라지마로)가 淡路公 등을 配所로 호송하고 하나의 院에 유폐하 井連立足(후지이무라지 다치타리)을 播磨介에, 從五位下 佐伯宿 助(사에키노스쿠네 다 스쿠)를 淡路守에 임명하였다. 동10월 壬辰(29)135) 正五位下 百濟朝臣足人(구다라노아손 다루히토)에게 從四位下를, 正六位上 文室眞人眞 老(훈야노마히토 마오유)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縣犬養宿 古麻呂(아가 타이누카히노스쿠네 고마로)를 中務大輔에, 從五位下 石川朝臣永年(이시카와노아손 나 가토시)을 式部少輔에 임명하였다. 11월 己酉(16) 從五位下 百濟朝臣益人(구다라노아손 마스히토)을 周防守에 임명하였다. 였다. 高野天皇은 勅을 내렸다. 淡路國을 大炊親王(淳仁)에게 준다. 國內에 있는 官物 調 庸 등 따위는 임의로 사용 해도 좋다. 단 出擧한 官稻는 한결같이 常例에 따르라. 권26 高野天皇 稱德天皇 天平神護 원년(765) 춘정월 己亥(7) 또 [高野天皇은] 詔를 내렸다. 船親王은 9월 5일에 仲麻呂와 둘이서 모의하길, 書狀을 만들어 조정의 허물을 열거해 서 [천황에게] 올리자. 라고 모의하였다. 또 仲麻呂의 家(田村第)의 물품을 집계하였더 니, 서류 중에 [船親王이] 仲麻呂와 주고받았던 음모의 편지가 있었다. 이 때문에 親王의 134) 명의는 격하시켜 諸王으로 하고 隱岐國으로 유배시키도록 한다. 또 池田親王 은 이번 여름에 말을 많이 모아 모반의 일을 모의했다고 들었다. 이러한 말은 몇 번이나 상주가 있었다. 이 때문에 親王의 명의를 격하시켜 諸王으로 하고 土左國으로 유배시키도록 한 다고 詔하신 [천황의] 大命을 두루두루 들어라 하고 분부(宣)하노라. 正五位上 阿倍朝臣息道(아베노아손 오키미치)를 攝津大夫에, 從五位下 美和眞人土生 (미와노마히토 하니후)을 攝津亮에, 從五位下 坂本朝臣男足(사카모토노아손 오타리)을 연호를 바꾸어 天平神護라고 하였다. 勅을 내렸다. 짐은 미소한 몸으로 외람되이 황위 를 계승하였지만 덕으로 백성을 교화시켰다는 평판도 듣지 못하고 누차 간사하고 교묘한 기교가 나타나고 있다. 또 역병이 거듭 발생하고 여러 해 곡물이 익지 않아, 백성들이 재물 을 손해보고 거주할 곳을 잃어 마치 깊은 수렁에 빠진 것 같다. 저 賊臣 仲麻呂는 外戚136)의 近臣으로 先朝 때 기용되어 그 임무를 잘 수행하고 있었으므로 새삼스럽게 의심하지 않 았다. 어찌 사악한 반역의 마음을 품고 毒과 같은 재앙을 천하에 흠씬 퍼뜨려 사람의 마음과 신의 마음을 노하게 하여 원망하는 기운이 하늘까지 놀라게 할 줄 예상하였겠는 가. 다행히 神靈이 나라를 보호하고 風雨가 군대를 도와 10일도 안 되어 모두 굴복하고 誅戮되었다. 지금 악의 원흉이 이미 제거되었으니 함께 善으로 돌아가고 舊惡을 씻어내 만물과 함께 새로워지고자 한다. 그래서 마땅히 연호를 바꾸어 天平寶字 9년을 天平神護 元年으로 한다. 諸國의 神職에게는 각각 位를 一階씩 승진시켜준다. 지난 9월 11일부터 133) 일곱 사람만으로 關으로 들어가려고 모의하였다. : 7인이 누구인지 불분명하고 7인으로 關을 돌 파할 수 있는 것도 아니므로, 閤 의 잘못으로 보고 高野天皇의 宮으로 쳐들어갈 것을 모의했다 고 보는 주장도 있다. 134) 池田親王 : 船親王과 마찬가지로 舍人親王의 아들. 135) 冬十月 壬辰 : 날짜 기재에 혼란이 있다. 136) 外戚 : 仲麻呂는 稱德天皇의 어머니인 光明皇后의 종형제이다.

133 264 續日本紀 월 18일까지137) 일정한 관직을 가진 관인(職事)과 諸司의 교대근무 관인(番上)으로 六位 多, 從六位下 大伴宿 이상의 자가 征討에 봉사했을 경우 역시 一階씩 승진시켜준다. 단 正六位上인 자에게는 를, 外從五位下 大原連家主外에게 正五位下를, 无位의 調連牛養(츠키무라지 우시카히)에 상례에 따라 물품을 하사한다. 또 京中의 70세 이상인 자에게는 位를 一階씩 올려준다. 게 外從五位上(本位는 外從五位下이다)을, 外正六位上 鳥取部與曾布(도토리베노요소후) 이를 원근에 포고하여 짐의 뜻을 알게 하라. 에게 外正五位下를, 无位의 上村主五十公(가미노수쿠리이소키미)(律師 善榮의 아버지로, 麻呂 弓削御淸朝臣秋麻呂 弓削宿 牛養에게 각각 從五位下 또 詔를 내렸다. 天皇의 大御命으로써 勅하신 大御命을 두루두루 들어라 하고 勅하노 이때 나이 84세였다)에게 外從五位上을, 正六位上 若湯坐宿 子人(와카유에노스쿠네 고 라. 섬기고 있는 사람들 중에는, 섬기고 있는 상태에 따라 지위를 올려주는 자도 있고, 또 히토) 高尾連賀比(다카야무라지 카히) 千代連玉足(치요무라지 다마타리) 佐佐貴山公 종군했던 공적에 의해 지위를 올려주는 자도 있다. 그러나 이번에 내린 위계는 보통 때와 人足(다다키야마키미 히토타리) 長谷部木麻呂(하츠세베노키마로) 田部宿 足嶋(다베 는 다른 의미를 가지고 있다. 이처럼 특별히 하사하는 이유는 평온할 때 섬기는 것은 누 노스쿠네 다루시마) 佐太忌寸味村(사타이미키 아지무라) 民忌寸古麻呂(다미이미키 고 구라도 그렇게 하겠지만 이번처럼 위급할 때 身命을 아끼지 않고 곧고 밝고 깨끗한 마음 마로) 鳥取連大分(도토리무라지 오오키다) 國覓連高足(구니미무라지 다카타리) 文忌 을 가지고 조정을 보호하고 섬기는 사람이야말로 지위를 올려주고 동정을 베풀어야 한다 寸光庭(후미이미키 데루니와) 美奴連智麻呂(미노무라지 치마로) 土師宿 冠(하지노스 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금후로도 느슨해지고 게을러지는 일 없이 온갖 어리석 쿠네 카가후리) 秦忌寸公足(하다이미키 기미타리) 長瀨連廣足(나가세무라지 히로타 은 사람들을 가르치고 인도하여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게 하고 늘 더욱더 확고하게 섬기 리) 維成澗(이세이칸) 香山連賀是麻呂(가구야마무라지 가세마로) 百濟安宿公奈登麻 길 기대하여 위계를 올려주어 다스리는 것이다, 라고 분부(宣)하신 어명을 두루두루 들어 呂(구다라노아스카베키미 나토마로) 金刺舍人八麻呂(가나사시 노도네리 야츠마로), 正 라 하고 분부(宣)하노라. 七位上 葛井連河守(후지이무라지 가와모리), 正六位上 檜前舍人直建麻呂(히노쿠마노도 正四位上 文室眞人大市(훈야노마히토 오오이치) 正四位下 高麗朝臣福信(고마노아손 후쿠신)에게 각각 從三位를 수여하고, 正五位下 久世王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下 船井 네리노아타이 다케마로) 葛井連道依(후지이무라지 미치요리)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王에게 從五位上을, 從四位下 藤原朝臣魚名(후지와라노아손 우오나)에게 正四位下를, 正 正三位 諱(후의 光仁天皇), 從三位 和氣王 山村王, 正三位 藤原朝臣永手 藤原朝臣眞 五位上 石上朝臣宅嗣(이소노가미노아손 이에츠구)에게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藤原朝臣 楯, 從三位 吉備朝臣眞備 藤原朝臣藏下麻呂, 從四位上 日下部宿 子麻呂, 從四位下 佐 田麻呂(후지와라노아손 타마로) 安倍朝臣毛人(아베노아손 에미시), 從五位上 大伴宿 伯宿 伊多智 坂上大忌寸예田麻呂 牡鹿宿 嶋足에게 각각 勳 二等을 수여하였다. 從 御依(오오도모노스쿠네 미요리)에게 각각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當麻眞人廣名(타이마노 四位下 藤原朝臣繩麻呂 粟田朝臣道麻呂 弓削御淸朝臣淨人에게 각각 勳 三等을, 正四 마히토 히로나) 中臣丸連張弓(나카도미노마루무라지 하리유미)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位下 中臣朝臣淸麻呂, 從四位下 藤原朝臣濱足 藤原朝臣楓麻呂 高丘連比良麻呂, 正五 從五位下 藤原朝臣繼繩 藤原朝臣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쿠로마로) 大伴宿 伯麻呂 位下 小野朝臣竹良, 從五位下 石村村主石楯에게 각각 勳 四等을, 從四位下 安倍朝臣彌夫 (오오도모노스쿠네 하쿠마로) 佐伯宿 三方 穗積朝臣小東人(호즈미노아손 오아즈마 人에게 勳 五等을, 從五位下 坂上王, 正五位上 阿倍朝臣息道, 正五位下 津連秋主, 從五位 히토) 井朝臣小祖(에노이노아손 오오야) 小野朝臣小贄(오노노아손 오니에), 无位의 上 石川朝臣垣守, 從五位下 漆部直伊波, 外從五位下 金刺舍人八麻呂, 從六位上 藤野別眞 調連馬養(本位는 從五位下이다)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外正五位下 日置造蓑麻呂(헤키노 人淸麻呂에게 각각 勳 六等을 수여하였다. 미야츠코 미노마로), 正六位上 佐伯宿 高岳 多治比眞人長野(다지히노마히토 나가 无位의 櫻井女王 淨原女王 高向女王 小垂水女王 高岡女王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노) 多治比眞人乙麻呂(다지히노마히토 오토마로) 中臣習宜朝臣山守 下道朝臣色夫 수여하고, 正五位下 藤原朝臣乙刀自 竹宿 乙女에게 각각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當麻 眞人比禮 大野朝臣仲智 安倍朝臣都與利 多可連淨日 熊野直廣濱, 從五位下 古仁蟲 137) 9월 11일부터 10월 18일까지 : 仲麻呂의 난의 기간. 名에게 각각 正五位上을, 從五位下 石川朝臣奈保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錦部連河

134 266 內 大神朝臣伊毛 忌部毘登隅 橘宿 眞束 縣犬養大宿 姉女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續日本紀 267 윤10월 甲午(6) 外從五位上 葦屋村主刀自女 長谷部公眞子 壬生連子家主女, 從七位下 藤野別眞人蟲 正六位上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 百濟王信上(구다라노고니키시 신죠우) 女, 无位의 藤原朝臣伊久治, 正六位下 息長眞人廣庭 巨勢朝臣魚女, 從六位下 大宅朝臣 百濟王文鏡(구다라노고니키시 몬쿄우)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六位上 百濟王 宅女, 正七位上 三始朝臣奴可女, 正六位上 李小娘, 无位의 巨勢朝臣宮人, 无位의 私朝臣 文貞(구다라노고니키시 몬쵸우) 등 3인에게는 각각에게 상응하는 위계를 수여하였다. 長女, 從六位下 若櫻部朝臣伊毛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正七位上 丈部細目, 從六位下 久 須原部連淨日, 從七位下 山田御井宿 公足, 從六位下 私家原 草鹿酒人宿 水女 桑原 毘登宅持 水海連淨成, 從七位上 許平等 賀陽臣小玉女 桑原連嶋主, 從七位下 田邊公 吉女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三位 池上女王에게 勳 二等을 수여하고, 從五位上 紀朝臣益女에게 勳 三等을, 從四位 下 竹宿 乙女, 正五位上 吉備朝臣由利 稻蜂間宿 仲村女 大野朝臣仲智 安倍朝臣都 與利, 從五位下 藤原朝臣玄信에게 각각 勳 四等을, 從五位下 壬生直小家主女에게 勳 五 等을, 從五位下 藤野別眞人廣蟲女 巨勢朝臣魚女, 外從五位下 賀陽臣小玉女 桑原連嶋 主 草鹿酒人宿 水女 田邊公吉女에게 勳 六等을 수여하였다. 이날 五位 이상에게 연회를 베풀고 지위에 따라 차등을 두어 祿을 내렸다. 동10월 辛未(13) 천황이 紀伊國에 행행하였다. [행행에 즈음하여] 正三位 諱(白壁王, 후의 光仁天皇)를 御前의 次第司 長官에, 從五位下 多治比眞人乙麻呂(다지히노마히토 오토마로)를 次官에 임명하고, 正四位下 中臣朝臣淸麻呂(나카토미노아손 기요마로)를 御後의 次第司 長官에, 從五位下 藤原朝臣小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오구로마로)를 次官에 임명하였다. 각각 判 官 2인, 主典 2인을 임명하였다. 正四位下 藤原朝臣繩麻呂(후지와라노아손 나와마로)를 御前의 騎兵將軍에, 正五位上 阿陪朝臣毛人을 副將軍에 임명하고, 從三位 百濟王敬福(구 다라노고니키시 쿄우후쿠)을 御後의 騎兵將軍에, 從五位下 大藏忌寸麻呂(오오쿠라이미 키 마로)를 副將軍에 임명하였다. 각각 軍監 3인, 軍曹 3인을 임명하였다. 이 날 大和國 高市郡의 小治田宮에 도착하였다. 동10월 戊子(30) 권27 高野天皇 稱德天皇 天平神護 2년(766) 3월 辛巳(26) 從五位下 佐伯宿 助를 山背介에 임명하고, 近衛將監 從五位下 賀茂朝臣諸雄에게 伊勢 員外介를 겸임하게 하고, 左衛士佐 外從五位下 民忌寸總麻呂에게 參河 을 겸임하게 하 였다. 外從五位下 高屋連竝木을 遠江大 에, 從五位下 巨勢朝臣公成을 武藏守에, 從五位 下 大野朝臣眞本을 下總介에 임명하고, 參議 民部卿 正四位下 勅旨大輔 侍從 藤原朝臣繩 麻呂에게 近江守를 겸임하게 하고, 從五位下 太朝臣犬養(오오노아손 이누카히)를 近江介 에 임명하고, 勅旨少丞 從五位下 葛井連道依(후지이무라지 미치요리)에게 近江員外介를 겸임하게 하고, 從五位下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을 飛 守에, 外正五位下 大原連家主(오오하라무라지 야카누시)를 但馬員外介에, 從五位上 海上眞人淸水(우나카 미노마히토 기요미)를 豊前守에 임명하였다. 5월 甲子(10) 從五位下 百濟王三忠(구다라노고니키시 산츄우)을 民部少輔에, 從五位下 百濟王文鏡 (구다라노고니키시 몬쿄우)을 近江守에, 從五位下 坂上忌寸石楯(사카노우에이미키 이와 타테)을 近江介에, 從五位上 佐伯宿 美濃麻呂(사에키노스쿠네 미노마로)를 能登員外介 에 임명하였다. 6월 壬子(28) 刑部卿138) 從三位 百濟王敬福(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후쿠)이 사망(薨)하였다. 그 선조는 百濟國 義慈王에서 나왔다. 高市岡本宮에서 천하를 다스렸던 天皇의139) 御世에 義慈王은 弓削寺에 행차하여 예불하고, 唐樂과 高麗樂을 寺의 뜰에서 연주하였다. 刑部卿 從三位 百濟王敬福(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후쿠) 등이 本國의 舞를 연주하였다. 138) 刑部卿 : 형부성의 장관. 139) 天皇 : 舒明천황을 말한다.

135 268 續日本紀 269 그 아들 豊璋王과 禪廣王을140) 파견하여 천황을 모시게 하였다. 後岡本朝廷에141) 이르러 데 주조는 끝났지만 도금할 황금이 부족하였다. 그런데 陸奧國에서 역마를 달려 小田郡 義慈王142)은 전쟁에 패하여 唐에 항복하였다. 그 신하 佐平 福信은 사직을 회복하고 멀리 에서 출토된 黃金 900兩을 貢上하였다. 우리나라에서 黃金이 나온 것은 이로부터 시작 일본에서 豊璋을 맞이하여 끊어진 왕통을 재흥하였다. 豊璋은 왕위를 찬탈한 후 참언에 되었다. 聖武皇帝는 매우 가상히 여겨 從三位를 수여하고 宮內卿152)으로 전임시켰으며 얼 의거하여 함부로 福信을 죽였다. 唐兵은 이것을 듣고 다시 州柔을 공격하였다. 豊璋은 우 마 지나지 않아 河內守153)를 더해주었다. 天平勝寶 4년 常陸守에 임명되고 左大辯으로 전 리(일본)의 구원병과 함께 항전하였지만, 구원병은 전쟁에 패하고 豊璋은 배를 타고 高麗 임되었다. 자주 出雲(이즈모) 讚岐(사누키) 伊豫(이요) 등 國의 國守154)를 역임하였고, 로 도망하였다. 禪廣은 이 때문에 백제로 돌아가지 않았다. 藤原朝廷143)은 그에게 百濟王 天平神護 초에 刑部卿에 임명되었다. 향년 69세였다 이라는 144) 145) 를 하사하고, 사망한 후 正廣參 에 추증되었다. 禪廣의 아들 百濟王昌成은 유년 시절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 입조하였는데 아버지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飛鳥淨御 原의 御世에146) 小紫147)에 추증되었다. 昌成의 아들 郞虞는 奈良朝廷에서148) 從四位下 攝 津亮149)에 임명되었다. 敬福은 바로 그의 셋째아들이다. 敬福은 성품이 방종하고 규칙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주색을 매우 좋아하였다. 感神聖武皇帝150)는 특별히 총애하고 대우하 여 은상과 하사물이 매우 많았다. 당시 그에게 관인과 백성이 와서 청빈을 고하면, 매번 다른 사람의 물품을 빌려 예상 밖의 물품을 주었다. 이 때문에 자주 지방관을 역임했지만 집에 남은 재산이 없었다. 그러나 천성적으로 분별력이 있어 정치적 역량이 있었다. 天平 年中에 從五位上 陸奧守에 임명되었다. 당시 聖武皇帝는 盧舍那佛의 銅像151)을 만들었는 11월 丁巳(5) 正四位上 藤原朝臣宿奈麻呂(후지와라노아손 스쿠나마로), 正四位下 藤原朝臣魚名(후지 와라노아손 우오나)에게 각각 從三位를 수여하고, 從五位下 諱(山部親王(야마베 신노우), 후의 桓武天皇)에게 從五位上을, 无位의 山邊王 石城王 若江王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正五位上 安倍朝臣息道(아베노아손 오키미치), 正五位下 多治比眞人土作(다지히노마히 토 하니츠쿠리)에게 각각 從四位下를, 從五位上 大伴宿 伯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오지 마로)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大原眞人嗣麻呂(오오하라노마히토 츠기마로) 百濟王 理伯(구다라노고니키시 리하쿠)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田口朝臣安麻呂 淸原 眞人淸貞 息長眞人道足 粟田朝臣鷹守 輔治能眞人淸麻呂, 從六位上 藤原朝臣種繼(후 지와라노아손 타네츠구)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正六位上 中臣伊勢朝臣子老에게 外從五 140) 豊璋王과 禪廣王 : 원문에 豊璋王 禪廣王 으로 나온다. 141) 後岡本朝廷 : 齊明천황의 조정을 말한다. 142) 義慈王 : 백제 31대 최후의 왕이다. 왕자 豊璋을 인질로 일본에 보냈다고 한다. 당과 신라 연합 군의 공격을 받고 당에 포로가 되어, 당에서 병사하였다. 143) 藤原朝廷 : 持統天皇을 말한다. 144) 百濟王이라는 : 의미상으로는 백제왕 이라는 氏姓(우지-가바네)을 하사한 것으로 생각되지 만 원문에는 姓 이라고 하지 않고 어디까지나 라고 되어 있어 엄밀하게 말해 칭호 를 하 사한 것으로 해석된다. 이 경우 백제왕 이 氏姓인가 아니면 칭호인가 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 으며 음미할 점이 많은 중요한 사료라고 할 수 있다. 145) 正廣參 : 冠位 48階의 제6위. 正三位에 상당한다. 146) 飛鳥淨御原의 御世 : 天武朝를 말한다. 147) 小紫 : 天智朝의 冠位 26階의 제6위. 從三位에 상당한다. 148) 奈良朝廷 : 持統天皇의 조정을 말한다. 149) 攝津亮 : 攝津國을 다스리는 攝津職의 國司 중 차관이다. 150) 感神聖武皇帝 : 聖武天皇을 말한다. 151) 盧舍那佛의 銅像 : 유명한 東大寺의 大佛을 말한다. 位下를, 无位의 小治田女王, 正六位上 伴田朝臣仲刀自, 從六位下 平群朝臣眞繼 大神朝 臣東方, 无位의 巨勢朝臣巨勢野 小野朝臣田刀自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從六位下 平野 阿佐美, 從七位上 八坂造吉日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권28 高野天皇 稱德天皇 神護景雲 원년(767) 춘정월 己巳(18) 천황이 東院에 납시어 詔를 내렸다. 지금 諸王을 보면 연로한 자가 많다. 그 중에 공로 를 기려야 할 자도 있고, 짐이 마음속으로 가엽게 생각하는 자도 있다. 그래서 그 상태에 152) 宮內卿 : 宮內省의 장관이다. 153) 河內守 : 河內國의 國司 중에서 장관이다. 154) 國守 : 지방 최고 행정장관으로서 國司 중에서도 장관(카미)임.

136 270 續日本紀 따라 각각 위계를 수여한다. 마땅히 여러 사람들에게 포고하여 짐의 뜻을 알게 하라. 无位의 依智王(에치 오우) 篠嶋王(시노시마 오우) 廣河王(히로가와 오우) 淨水王(기 271 原朝臣雄依(후지와라노아손 오요리)를 右衛士督에, 從五位下 田口朝臣安麻呂(타구치노 아손 야스마로)를 右衛士佐에 임명하였다. 요미즈 오우) 名方王(나가타 오우) 調使王(츠키 오우) 飯野王 鴨王 壹志濃王 田 처음으로 法王宮職155)을 설치하였다. 造宮卿 但馬守 從三位 高麗朝臣福信에게 大夫를 中王 八上王 津守王 名草王 春階王 中村王 池原王 積殖王 高倉王 部王 겸임하게 하고, 大外記 遠江守 從四位下 高丘富連比良麻呂에게 亮을 겸임하게 하고, 勅 長尾王(나가 오우) 淨名王(기요나 오우)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百 旨大丞 從五位上 葛井連道依(후지이노무라지 미치요리)에게 大進을 겸임하게 하였다. 少 濟王理伯(구다라노고니키시 리하쿠)에게 正五位上을, 外正五位下 大原連家主(오오하라 進 1인, 大屬 1인, 少屬 2인을 배속하였다. 무라지 야카누시), 外從五位下 池原公禾守(이케하라키미 아와모리), 正六位上 弓削御淨 朝臣廣方 大野朝臣石本 文屋眞人忍坂麻呂 三嶋眞人嶋麻呂 藤原朝臣雄依 藤原朝 臣長道 石川朝臣眞人 石川朝臣名繼 石上朝臣眞足 大原眞人年繼 石川朝臣人麻 呂 巨勢朝臣苗麻呂 當麻眞人永嗣, 從六位上 安倍朝臣草麻呂, 正六位上 佐伯宿 家 主 川邊朝臣東人 吉備朝臣眞事 笠朝臣乙麻呂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正六位上 林連 雜物 船連庭足 堅部使主人主, 從六位上 昆解沙彌麻呂, 正六位上 高屋連赤麻呂 秦忌 寸蓑守 品治部公嶋麻呂 難破連足人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고, 從四位下 藤原 朝臣家子에게 正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外從五位下 利波臣志留志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墾田 1백 町을 東大寺에 헌상했 기 때문이다. 3월 癸巳(16) 神護景雲으로 改元하였다. 천황은 詔를 내렸다. 日本國에 계시고 大八洲國을 다스리시는 倭根子天皇(稱德天皇)의 어명으로써 勅하시 는 어명을 두루두루 들어라 하고 분부(宣)하노라. 今年 6월 16일 申時에 동남 방향에서 매우 기이하고 화려한, 七色이 교차하는 구름이 일어났다. 이것을 짐 스스로도 보았고 近侍하고 있던 사람들도 함께 보고서 불가사의하 게 생각하고 기뻐하고 있었던 참에 伊勢國守 從五位下 阿倍朝臣東人 등이 상주하길, 6 3월 己巳(20) 從五位下 巨勢朝臣苗麻呂를 少納言에 임명하고, 從四位下 阿倍朝臣息道를 中務大輔에 월 17일 度會郡의 等由氣宮156) 위에 오색 瑞雲이 일어나 宮 위를 덮었습니다. 그래서 그 임명하고 侍從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石川朝臣淸麻呂를 中務少輔에, 從五位下 구름의 모습을 書寫하여 올립니다. 라고 상주하였다. 또 陰陽寮도 7월 15일에 서북 방 賀茂朝臣大川을 大監物에, 從五位下 文屋眞人忍坂麻呂를 右大舍人頭에, 從五位下 石上 향에서 아름답고 기이한 구름이 일어났습니다. 同月 23일에 동남 방향에 나타났던 구름 朝臣眞足을 內匠助에, 從五位下 粟田朝臣公足을 內匠員外助에, 從五位下 淨原王을 內禮 은, 本은 붉은 색이고 末은 황색으로 거의 오색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라고 상주하였다. 正에, 從五位下 紀朝臣廣名을 式部大輔에, 從五位下 藤原朝臣小黑麻呂를 式部少輔에, 從 이처럼 기이한 구름이 나타난 이유를 검토하게 하였던 바, 式部省 등이 상주하길 祥瑞의 五位下 皇甫東朝(구와우오토우테우)를 雅樂員外助兼花苑司正에, 正五位上 淡海眞人三船 書를 자세히 검토하여 보니, 이 구름은 景雲으로 참으로 大瑞에 해당합니다. 라고 상주 (아후미노마히토 미후네)을 兵部大輔에, 從五位下 百濟王三忠(구다라노고니키시 사무치 하였다. 그런데 짐이 생각해보니, 이처럼 매우 귀하고 기이한 大瑞는 성스러운 황제의 御 우)을 兵部少輔에, 從五位下 井朝臣祖足(에노이노아손 오야타리)을 木工助에, 外從五 世에 至德에 감응하여 天地가 보여주는 것이라고 늘 들었다. 이것이 결코 짐의 덕이 천지 位下 津連眞麻呂(츠무라지 마마로)를 攝津大進에, 從五位上 佐伯宿 三野(사에키노스쿠 의 마음을 감동시켜드렸던 것은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런데 이 大瑞는 伊勢大神宮 네 미노)를 下野守에, 從五位下 縣犬養大宿 內麻呂(아가타이누카히오오스쿠네 우치마 의 위에 나타났다. 그러므로 역시 이것은 天照大神이 자비롭게 보여주신 것이다. 또 입에 로)를 下野介에, 外從五位下 利波臣志留志를 越中員外介에, 從五位下 阿部朝臣許智를 丹 波介에, 從五位下 紀朝臣古佐美를 丹後守에 임명하고, 從三位 藤原朝臣藏下麻呂를 伊 豫 土左 二國按察使에 임명하고 近衛大將 左京大夫는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藤 155) 法王宮職 : 天平神護 2년 10월 20일에 法王이 되었던 道鏡을 위한 관직. 156) 等由氣宮 : 현재의 豊受大神宮, 즉 伊勢外宮이다.

137 272 續日本紀 올리기에도 두려운 御世 御世에 선조인 천황의 御靈이 도와서 내려주시고 자애롭게 내려 주셨던 것이다. 간 여러 大寺의 大法師들을 초청하여 最勝王經을 講讀하게 하 있는 자, 이들 모두를 사면한다. 단 八虐을 범한 자, 고의살인자, 私鑄錢者, 강도 절도, 또 吉祥天悔過를 받들어 행하게 했을 때, 여러 大法師들이 法대로 勤行하고, 또 諸 통상의 恩赦로 사면되지 않는 자는 이 사면의 범위에 넣지 않는다. 널리 천하에 포고하여 또 지난 정월에 14일 고, 또 천하에 죄를 범한 자 가운데 死罪 이하는 죄의 경중에 관계없이 죄가 이미 발각된 자, 아직 발각되지 않은 자, 죄가 이미 확정된 자, 아직 확정되지 않은 자, 옥에 수감되어 157) 158) 273 臣들도 천하의 政事를 이치에 맞게 행하고 있는 것에 의해, 三寶도 諸天159)도 天地의 神들 짐의 뜻을 알게 하라. 도 함께 보여주신 기이하고 귀한 大瑞의 雲인 듯하다고 생각한다. 이 기이하고 기쁜 大瑞 陰陽員外助 從五位下 紀朝臣益麻呂(키노아손 마스마로)에게 正五位下를, 陰陽允 正六 를 머리 위에 받고서 참고 묵묵히 있을 수가 없어, 諸王 諸臣들을 불러 함께 기뻐하고 位上 山上朝臣船主(야마노우에노아손 후나누시)를 從五位下에 임명한다.(지금 조사해보 존중하며 천지의 御恩에 보답해야 한다고 생각하고 詔하신 천황의 어명을 두루두루 들어 니, 景雲 2년 처음으로 朝臣이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여기서는 位記에 의거하여 이것을 라 하고 분부(宣)하노라. 썼다.) 員外允 正六位上 日下部連蟲麻呂(쿠사카베무라지 무시마로), 大屬 百濟公秋麻呂 그런데 대저 天은 만물을 능히 덮어주고 길러주며 자비와 연민을 베풀어주는 것이다. 또 伊勢大神宮의 宜 및 大物忌 內人160) 등에게는 位 二級을 수여한다. 단 御巫161) 이하 162) (구다라노키미 아키마로), 天文博士 國見連今蟲(구니미무라지 이마무시), 禁師164) 末使 主望足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伊勢守 從五位下 阿倍朝臣東人에게 從五位上을, 伊勢介 의 사람들에게는 一級을 수여한다. 또 伊勢國의 神郡으로 되어 있는 二郡 의 郡司 및 諸 正六位下 日置造通形에게 外從五位下를, 大神宮의 國의 有位 无位의 祝部들에게 位 一級을 하사한다. 또 六位 이하 및 左右京의 男女로 나 五位下를, 等由氣宮의 이 60세 이상인 자에게 位 一級을 하사한다. 단 正六位上으로 3년 이상 근무평정을 거듭 勢朝臣老人에게 從四位上, 參河目 正六位上 紀朝臣門守에게 從五位下를, 參河介 外從五 163) 한 자에게는 上正六位上 을 하사한다. 또 孝子 順孫 義夫 孝婦 節婦 力田에게는 位 二級을 하사한다. 그 家의 門에 그 취지를 표창하여 내걸고 종신 그 田租를 면제한다. 또 五位 이상의 사람들에게는 천황의 소유물을 하사한다. 또 천하 諸國의 금년의 田租 절 반을 면제한다. 또 80세 이상의 노령자 및 鰥 寡 孤 獨으로 자활할 수 없는 자에게는 을 하사한다. 또 天이 현시해주신 瑞祥 그대로 연호를 고친다. 그래서 天平神護 3년을 고쳐 神護景雲 元年으로 한다, 라고 詔하신 천황의 어명을 두루두루 들어라 하고 분부 (宣)하노라. 157) 14일(二七日) : 7일(一七日)의 잘못으로 생각된다. 158) 最勝王經을 講讀하게 하고 : 玄蕃式에는 매년 정월에 8일부터 14일까지 7일 간 大極殿에서 僧 32인, 沙彌 34인을 불러 金光明最勝王經 을 講說하도록 규정되어 있다. 平安時代에는 궁중의 중요한 의식으로 되었고 御齋會라 칭했다. 159) 諸天 : 四天王 帝釋天 등의 護法神. 160) 大物忌 內人 : 모두 伊勢神宮의 神社에 종사하는 神職이다. 161) 御巫 : 巫女. 대부분 童女이다. 162) 二郡 : 多氣郡과 度會郡. 163) 上正六位上 : 從五位下와 正六位上 사이에 설정된 位階. 宜 外從五位下 神主首名에게 外正 宜 外正六位下 神主忍人에게 外從五位下를, 參河守 從四位下 伊 位下 秦忌寸智麻呂 參河 民忌寸總麻呂에게 각각 外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左右大臣에게 綿을 사람마다 750屯, 二位에게 450屯, 三位에게 300屯, 四位에게 150 屯, 五位에게 60둔, 外位에게 40屯을 하사하였다. 女에게도 이에 준하여 하사하였다. 3월 丙午(29) 從四位下 佐伯宿 今毛人을 左大辯에 임명하고 造西大寺長官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紀朝臣廣庭 阿倍朝臣小東人을 각각 勅旨少輔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葛井連道 依를 員外少輔에 임명하고 法王宮 大進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外從五位下 健部朝臣人上 (다케루베노아손 히토카미)을 勅旨大丞에, 正六位下 紀朝臣益麻呂(키노아손 마스마로)를 陰陽頭에, 從五位下 弓削宿 薩摩(유게노스쿠네 사츠마)를 陰陽助에, 外從五位下 松井連 淨山(마츠이무라지 쟈우센)을 內匠助에, 從五位上 布勢朝臣人主(후제노아손 히토누시)를 式部大輔에, 正五位上 百濟王理伯(구다라노고니키시 리하쿠)을 攝津大夫에 임명하고, 從 四位下 阿倍朝臣毛人(아베노아손 에미시)을 造東大寺次官에 임명하고 宮內卿은 그대로 164) 禁師 : 축술로써 질병과 재액을 막는 도교 계통의 방술가.

138 274 續日本紀 275 맡게 하였다. 從四位上 伊勢朝臣老人을 造西隆寺長官165)에 임명하고 中衛中將 參河守는 人淸貞(기요미하라노마히토 기요사다)을 宮內少輔에, 從五位下 石川朝臣垣守(이시카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若江王과 外從五位上 秦忌寸智麻呂를 각각 寫一切經次官 노아손)를 木工頭에, 從五位下 布勢王(후세노오오키미)을 內膳正에 임명하고, 從四位下 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丈部直不破麻呂를 下總員外介에 임명하고 近衛員外少將은 그 多治比眞人土作(다지히노마히토 하니츠쿠리)을 左京大夫에 임명하고 讚岐守는 그대로 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弓削御淨朝臣廣方(유게노미키요노아손 히로카타)을 武藏員 맡게 하였다. 從四位下 百濟朝臣足人(구다라노아손 다루히토)을 右京大夫167)에, 外從五位 外介에 임명하고 中衛將監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百濟王武鏡(구다라노고니키 下上 毛野公眞人(가미츠케노키미 마히토)을 造東大寺大判官에, 外從五位下 飛 國造高 시 무쿄우)을 但馬介에, 從五位下 賀茂朝臣大川(가모노아손 오오카와)을 長門守에, 外從 市麻呂(히다노쿠니노미야츠코 다케치마로) 橘部越麻呂(다치바나메노고시마로)를 각각 五位上 上村主五十公(오오토모노스쿠네 야카모치)을 讚岐員外介에, 正五位上 淡海眞人 造西大寺大判官에, 從五位下 安倍朝臣小東人을 衛門佐에, 外正五位下 葛井連根主를 衛 三船(아후미노마히토 미후네)과 從五位上 大伴宿 家持(오오토모노스쿠네 야카모치)를 門大尉에 임명하고, 從四位下 佐伯宿 伊多智를 左衛士督에 임명하고 上野員外介는 그 각각 大宰少貳에 임명하였다. 散位 從四位下 粟田朝臣奈勢麻呂(아와타노아손 나세마로) 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長道를 左衛士佐에, 從五位下 弓削御淨朝臣鹽麻呂 가 사망(卒)하였다. 를 左兵衛督에, 從五位下 巨勢朝臣池長을 右馬助에 임명하고, 陸奧介 從五位下 田口朝臣 安麻呂에게 鎭守副將軍을 겸임하게 하고, 大 권29 高野天皇 稱德天皇 神護景雲 2년(768) 겸임하게 하고, 正五位上 石川朝臣名足을 大和守에, 外正五位下 敢 部忍國을 志摩守에, 從五位下 石上朝臣眞足을 遠江介에, 從五位下 粟田朝臣鷹守를 安房守에 임명하고, 從三 2월 癸巳(18) 正三位 弓削御淨朝臣淸人을 大納言에 임명하고 內竪卿 衛門督 上總守는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三位 中臣朝臣淸麻呂를 中納言에 임명하고 神祇伯166)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大藏卿 從三位 藤原朝臣魚名을 參議에, 從五位上 賀茂朝臣鹽管을 神祇大副에, 從五位下 中臣朝臣子老를 中務少輔에, 從五位上 藤原朝臣家依를 侍從에, 從五位下 坂上王을 大監 物에, 從五位下 巨勢朝臣公成을 左大舍人頭에, 從五位上 豊野眞人奄智를 圖書頭에 임명 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家依를 式部少輔에 임명하고 侍從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 位下 高橋朝臣廣人을 散位助에, 外從五位下 土師宿 位를 諸陵助에, 從五位上 石川朝臣 人成을 民部大輔에, 從五位下 石川朝臣己人을 主計頭에, 從五位下 田部宿 男足을 主計 助에, 正五位上 大伴宿 益立을 兵部大輔에, 外從五位下 伊吉連眞次를 鼓吹正에, 從五位 上 巨勢朝臣淸成을 大藏大輔에, 從五位上 從五位上 道嶋宿 三山에게 鎭守軍監을 井朝臣子祖를 宮內大輔에, 從五位下 淸原眞 165) 造西隆寺 : 東大寺에 상대되는 尼寺로, 奈良市 西大寺町에 세워졌다. 166) 신기백 : 신기관의 장관을 말한다. 신기관은 神道와 관련한 제반 업무를 관장하는 관청으로서 조 직기구상으로는 태정관과 더불어 소위 2官 8省체제의 쌍벽을 이루고 있다. 그러나 최고 장관에 임명되는 사람의 관위가 태정관의 경우 태정대신이 正(從)1位급이었는데 비해 신기관의 신기백 은 從4位下였기 때문에 지위상에서 서로 대등한 구조였다고는 할 수 없다. 位 藤原朝臣繩麻呂를 近江按察使에 임명하고 民部卿 勅旨大輔 侍從은 그대로 맡게 하였 다. 從五位下 吉備朝臣眞事를 美濃介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藤原朝臣雄田麻呂를 武藏守 에 임명하고 左中辯 內匠頭 右兵衛督 등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葛井連立足을 若狹守에, 外從五位下 下道朝臣黑麻呂를 越前介에, 外從五位下 丹比宿 眞繼를 伯耆守 에, 從五位下 藤原朝臣種繼를 美作守에, 從五位下 藤原朝臣雄依를 備前守에, 從五位下 石川朝臣眞人을 備中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阿倍朝臣草麻呂를 備中介에 임명하고 園 池正은 그대로 맡게 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小黑麻呂를 安藝守에, 從五位上 高圓朝臣 廣世를 周防守에, 從五位下 中臣朝臣常을 阿波守에, 外從五位下 板茂連眞釣을 伊豫介에 임명하였다. 이 날 勅을 내렸다. 職員令에 준하여168) 高橋 安曇 二氏169)로 內膳司에 임명된 자는 奉 167) 右京大夫 : 당시 京을 행정적으로 관리 담당하는 곳은 京職이었는데 경직은 左右로 나뉘어져 있 었다. 右京大夫는 우경직의 장관(카미) 직이다. 168) 職員令에 준하여 : 職員令 46 內膳司에 의하면 內膳司의 장관은 奉膳二人 이다. 169) 高橋 安曇 二氏 : 高橋氏에 대해서는 延曆 11년에 성립된 高橋氏文 이 있는데, 원래 膳氏로 천 황의 식사에 종사했음을 알 수 있다. 安曇氏는 日本書紀 應神 3년 11일조에 海人의 宰 로 되 었다는 것이 보이는데, 海人을 거느리고 해산물을 궁정에 공납했다고 생각된다.

139 276 續日本紀 膳이라 하고, 他氏로 內膳司에 임명된 자는 명칭을 正이라고 하라. 277 다. 병사는 적과 상대하여 어려움에 직면해도 생명을 아끼지 않고, 전투를 익히고 용기를 떨쳐 반드시 선봉을 다투어야 합니다 그런데 근년에 諸國에서 징발되어 陸奧國에 들어온 하4월 戊寅(5) 女孺170) 正六位下 百濟王淸仁(구다라노고니키시 쇼우닌)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鎭兵은 도중에 도망해버리고 있습니다. 또 當國에서는 1년 간의 食料로 稻 36만여 束을 米로 찧어 운반하고 있는데, 수송비로 헛되이 官物을 소비하여 점점 백성을 괴롭히기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舊例를 조사해보니, 前守172) 從三位 百濟王敬福(구다라노고니키시 쿄 6월 庚子(28) 內藏頭兼大外記 遠江守 從四位下 高丘宿 比良麻呂(다카오카노스쿠네 히라마로)가 사 우후쿠) 때에 他國의 鎭兵을 정지하고 當國의 병사를 징발하여 鎭兵으로 넣었던 일이 있 망(卒)하였다. 그 조부 沙門詠(샤몬에이)은 近江朝(天智朝) 癸亥(天智 2) 해에 百濟에서 습니다. 바라건대 이 舊例에 따라 當國의 병사 4천 인을 징발하여 鎭兵으로 넣고 他國의 歸化하였다. 父 樂浪河內(사사나미노가후라)는 正五位下 大學頭 가 되고 神龜 元年에는 鎭兵 2,500인을 정지하길 청하옵니다. 또 이 지역은 매우 추워 쌓인 눈을 치우기가 어렵 [씨성을 고쳐] 高丘連(다카오카노무라지)으로 하였다. 比良麻呂는 어려서 大學에서 배우 습니다. 겨우 초여름이 되어서야 調를 운반하게 되어 調使들이 출발합니다만, 산에는 사 고 널리 서적을 섭렵하여 大外記를 역임하고 外從五位下를 수여받았다. 天平寶字 8년에 다리를 설치하고 바다에는 범선을 띄우는 바, 갖가지 어려움이 겹치고 있습니다. 그들은 藤原仲麻呂(후지와라 나카마로)의 모반을 고발하여 景雲 元年에 宿 (스쿠네)라는 성을 또 늦가을에야 本鄕으로 돌아오므로 [농번기에 늦게 됩니다] 이 調物의 운반보다 더 백성 하사받았다. 의 산업을 방해하는 것은 없습니다. 바라건대 백성이 낸 調 庸은 國에 거두어 두고 10년 171) 9월 壬辰(22) 陸奧國에서 上言하기를 兵士를 준비해두는 것은 긴급한 사태에 대응하기 위해서입니 에 한 번 京의 창고에 進納하길 청하옵니다. 라고 하였다. 이것을 허락하였다. 권30 高野天皇 稱德天皇 神護景雲 3년(769) 8월 甲寅(19) 170) 女孺 : 후궁에서 근무하는 女官(궁인)을 말한다. 171) 大學頭 : 대학두는 大學寮의 장관이다. 大學寮는 式部省의 소속 관청으로서 중앙에 설치된 관리 양성 기관(지방에 설치된 것이 國學이었음)이었으며 제도적으로 확립된 것은 대보율령의 제정 때였다. 대학료의 교과는 본과(뒤에 明經道로 됨)와 算道 書道가 있었으며 본과의 정원은 學生 (가쿠쇼우) 400명으로 구성되었으며 算生은 30인, 書生은 약간 명이었다. 8세기 중엽인 나라시 대 중기에는 본과에서 文章道와 明法道 2도가 분리되었으며 9세기 이후인 헤이안시대가 되면 明 經道 明法道 文章道 算道 4도가 성립하였다. 학생은 주로 5위 이상의 귀족관인의 자제들이 었지만 지원자에 한하여 8위까지의 하위직 관인의 자제들도 입학이 허락되었다. 학생들은 10일 마다 旬試를 치르고 1년마다 年終試를 보아야 하였으며 在學 9년 안에 졸업할 가능성이 없는 자 는 퇴학조치를 당하였다. 대학의 최종시험(寮試)에 급제한 사람을 得業生이라 불렀다. 관직으로 나가고자 하는 사람은 다시 秀才 明經 進士 明法 4과목의 국가시험에 응시해야 하였으며 과 목과 성적에 따라 위계가 수여되었다. 그렇지만 5위 이상의 귀족 관인의 자제는 대학을 통하지 않고도 음위제를 통하여 만 21세가 되면 자동적으로 위계를 수여받을 수 있었으며 실제 음위제 를 통해 수여받는 것이 대학 졸업 후 수여받는 위계보다도 높았기 때문에 대학 제도는 그렇게 인 기가 높지 않았다. 그렇지만 나라시대 말기 이후 취학이 장려되고 재정적으로도 확충되면서 많 은 학자와 문인을 배출하였다. 從五位下 當麻眞人永繼(다기마노마히토 나가츠구)를 左少辯에 임명하고, 從四位下 大 伴宿 伯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오지마로)를 員外右中辯에 임명하고 造西大寺次官은 그 대로 맡게 하며, 從五位下 太朝臣犬養(오오노아손 이누카히)을 右少辯에, 正五位下 小野 朝臣小贄(오노노아손 오니에)를 中務大輔에 임명하고, 勅旨大丞 從五位下 健部朝臣人上 (다케루베노아손 히토카미)에게 圖書助를 겸임하게 하고, 從五位下 山上朝臣船主(야마노 우에노아손 후나누시)를 陰陽助에 임명하고 筑後 은 그대로 맡게 하며, 外從五位下 百 濟公秋麻呂(구다라노키미 아키마로)를 筑後允에, 外從五位下 雀部兄子(사자키베노에코) 를 內藥正에, 外從五位下 淸湍連雷(기요세무라지 이카즈치)를 雅樂大允에, 從五位下 阿 倍朝臣意宇麻呂(아베노아손 오우마로)를 主船正에, 正四位下 田中朝臣多太麻呂(다나카 노아손 타다마로)를 宮內大輔에, 從五位下 大伴宿 不破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후하마 172) 前守 : 이전의 장관(카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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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 282 續日本紀 283 廣川王을 備後守로 하였다. 陰陽頭 從四位上 大津連大浦에게 安藝守를 겸하도록 하고 外 守(다케치무라지 야모리),175) 越智直入立(오치아타이 이리타치)에게 나란히 外從五位下를 從五位下 安都宿 眞足을 그 介로 하였다. 外從五位下 上毛野公息麻呂를 周防守로, 從五 주었다. 일이 끝나고 五位 已上에게 잔치를 베풀었다. 祿을 하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 位下 大伴宿 田麻呂를 土左守로, 從五位下 多治比眞人公子를 肥前守로, 從五位下 多治 었다. 比眞人豊濱을 豊前守로, 外從五位下 秦忌寸蓑守을 日向守로 임명하였다. 동10월 己巳(3) 散位 從四位下 國中連公麻呂(구니나카무라지 키미마로)가 사망(卒)하였다. 본래 百濟國 사람이다. 그의 祖父인 德率173) 國骨富는 近江朝庭 때인 癸亥年(663)에 本蕃174)의 喪亂을 만나 歸化하였다. 天平 연간에 聖武皇帝가 널리 發願하여 盧舍那佛 銅像을 만들었는데 그 길이가 五丈이나 되었다. 당시 鑄工들 중에는 감히 손(재주)을 가할 수 있는 자가 없었 는데 公麻呂는 사뭇 교묘한 생각이 있어 마침내 그 功을 이루었다. 그 공로로 마침내 四 位를 수여 받았다. 관직이 造東大寺次官 겸 但馬員外介에 이르렀다. [天平]寶字 二年에 大和國 葛下郡 國中村에 사는 것에 말미암아 땅으로 인해 氏名을 命 받았다. 권33 天宗高紹天皇 光仁天皇 寶龜 6년(775) 춘정월 庚戌(16) 8월 辛未(10) 正五位下 百濟王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묘우신)에게 正五位上을 수여하였다. 11월 乙巳(15) 사신을 陸奧國에 보내어 詔를 내려 말하기를, 夷 등이 홀연 逆心이 발동하여 桃生城 을 침범하였는데 鎭守將軍 大伴宿 駿河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수루가마로) 등은 조정 으로부터 위임받은 바를 잘 받들어 身命을 돌아보지 않고 叛賊들을 쳐부수며 懷柔하여 歸服케 하였다. 애쓴 수고로움(勤勞之重)은 실로 가히 칭찬할 만하다. 駿河麻呂 이하 1790 여명에게 그 공훈에 따라 위계를 더하여 하사하노라. 고 하였다. 正四位下 大伴宿 駿河麻呂에게 正四位上과 勳 三等을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紀朝臣廣純(키노아손 히로 스미)에게는 正五位下 위계와 勳 五等을, 從六位上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슈테 츠)에게는 勳 六等을 수여하였으며 나머지에게도 각각 차등이 있었다. 그 功이 낮아 敍勳 감에 못 미치는 자에게는 물건을 하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從五位下 參河王 伊刀王 田上王에게 나란히 從五位上을 주었다. 從四位上 藤原朝臣 家依(후지와라노아손 이에요리), 大伴宿 伯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오지마로)에게 나란 히 正四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多治比眞人木人(다지히노마히토 기히토)에게 正五 位上을, 從五位下 高向朝臣家主(다카무쿠노아손 야카누시), 藤原朝臣鷲取(후지와라노아 손 와시토리), 中臣習宜朝臣山守(나카토미노스게노아손 야마모리), 佐伯宿 國守(사에키 노스쿠네 구니모리)에게 나란히 從五位上을 주었다. 外從五位上 坂上忌寸老人(사카노우 에이미키 오키나), 外從五位下 淨岡連廣嶋(키요오카무라지 히로시마), 正六位上 百濟王 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구엔쿄우), 坂本朝臣繩麻呂(사카모토노아손 나와마로), 小治田朝 臣諸成(오하리다노아손 모로나리), 田中朝臣難波麻呂(다나카노아손 나니하마로), 大伴宿 上足(오오토모노스쿠네 가미타리)에게 나란히 從五位下를 주었다. 正六位上 高市連屋 173) 德率 : 백제 16관등제의 제 4등. 174) 本蕃 : 여기서는 백제를 말한다. 권34 天宗高紹天皇 光仁天皇 寶龜 7년(776) 춘정월 丙申(7) 正五位下 掃守王(카니모리 오우)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下 部王에게 從五位上을, 正 六位上 楊胡王에게 從五位下를, 正四位下 藤原朝臣家依에게 正四位上을, 正五位上 石川 朝臣垣守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多治比眞人長野, 石川朝臣豊人, 大中臣 朝臣子老에게 나란히 正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石上朝臣家成, 石川朝臣眞永에 게 나란히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文室眞人水通(훈야노마히토 미나미치), 藤 原朝臣宅美(후지와라노아손 야카미), 巨勢朝臣苗麻呂(고세노아손 나에마로), 巨勢朝臣池 長(고세노아손 이케나가), 石川朝臣淸麻呂(이시카와노아손 기요마로), 百濟王利善(구다 175) 高市連屋守 : 西市正 園池正을 역임. 大和國高市郡의 郡領家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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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 286 從五位下 賀茂朝臣大川(가모노아손 오오카와)을 內藏助로 하였다. 參議 從三位 藤原朝臣 百川(후지와라노아손 시로가와)에게 式部卿을 겸하게 하고 右兵衛督은 그대로 두었다. 神祇伯 從四位下 大中臣朝臣子老에게 大輔를 겸하게 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眞葛을 散位頭로 삼고 從五位下 安倍朝臣謂奈麻呂를 治部少輔로 삼았다. 正五位上 多治比眞人 長野를 民部大輔로 삼고 從五位下 多朝臣犬養을 少輔로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當麻眞人 永嗣를 大判事로 하고 從四位下 神王을 大藏卿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安倍朝臣草麻呂 를 齋宮 長官에 삼았고 從四位下 石川朝臣名足을 造東大寺 長官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續日本紀 287 권35 天宗高紹天皇 光仁天皇 寶龜 9년(778) 6월 庚子(25) 陸奧, 出羽의 國司 이하인 者로서 征戰177)에서 軍功이 있던 2,267인에게 직위를 주었다. 按察使 正五位下 勳五等의 紀朝臣廣純에게 從四位下 勳四等을, 鎭守權副將軍, 從五位上 勳七等의 佐伯宿 久良麻呂(사에키노스쿠네 구라마로)에게 正五位下 勳五等을, 外正六 位上 吉彌侯伊佐西古(기미코노이사세코)와 第二等178) 伊治公 麻呂(고레하리노키미 아자 紀朝臣門守(키노아손 카도모리)를 鑄錢 次官으로 삼고 從五位下 藤原朝臣長河(후지와라 마로)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勳六等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슈테츠)에게 勳五等 노아손 나가카와)를 中衛少將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大中臣朝臣諸魚(오오나카토미노 을 수여하였다. 그 밖의 사람들에 대한 敍位는 각각 차등이 있었다. 이 작을 수여함에 있 아손 모로우오)를 衛門佐로 하였으며 從五位下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에 어 제외되었던 사람들의 祿도 각각 차등이 있었다. 戰死한 자에게는 父나 자식에게 前例 게 그 員外의 佐로 삼고 從五位下 紀朝臣弟麻呂(키노아손 오토마로)를 左衛士의 員外의 에 따라 위계를 수여하여 주었다. 佐로 하였다. 外從五位下 大荒木臣押國(오오아라키오미 오시쿠니)을 遠江介로 삼고 參議 右衛士督 從四位下 藤原朝臣小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오구로마로)에게 常陸守를 겸하게 하였다. 正五位下 粟田朝臣鷹守를 介로 하였다. 從五位上 紀朝臣家守를 美濃守로 삼고 從五位下 安倍朝臣笠成을 越中守로 하였다. 從五位下 廣川王을 因幡守로 삼고 右大辯 正 四位下 田中朝臣多太麻呂에게 出雲守를 겸하게 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仲繼를 播磨 介로 삼고 從五位上 田中王을 伊豫守로 삼았다. 大納言 近衛大將 從二位 藤原朝臣魚名에 게 大宰帥를 겸하도록 하게 하고 從四位上 石上朝臣息嗣을 大貳로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笠朝臣名麻呂를 그 少貳로 삼았다. 12월 辛卯(14) 처음 陸奧鎭守將軍 紀朝臣廣純이 말하기를 志波村의 賊들이 개미들처럼 모여들어 마 권35 天宗高紹天皇 光仁天皇 寶龜 10년(779) 춘정월 甲子(23) 正四位上 藤原朝臣是公(후지와라노아손 고레키미)에게 從三位를, 正五位下 三方王(미 카타노오오키미)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飯野王(이히노오오키미)에게 從 五位上을, 正六位上 鹽屋王(시오야오오키미)에게 從五位下를, 正五位下 豊野眞人奄智(토 요노노마히토 에무치)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安倍朝臣東人(아베노아손 오즈마히토),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 巨勢朝臣苗麻呂(고세노아손 나에마로)에게 각각 正 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安倍朝臣常嶋(아베노아손 츠네시마), 大中臣朝臣繼麻呂 (오오나카토미노아손 츠구마로), 安倍朝臣家麻呂(아베노아손 이에마로), 紀朝臣眞乙(키 음대로 나쁜 짓을 하였습니다. 出羽國의 군졸과 서로 싸웠는데 [우리가] 져서 물러났습니 다. 라고 하였다. 이에 近江介 從五位上 佐伯宿 久良麻呂를 鎭守權副將軍으로 삼아 出 羽國을 鎭守하게 하였다. 지금에 이르러 正五位下 勳五等 紀朝臣廣純(키노아손 히로수 미)에게 從四位下 勳四等을 수여하고, 從五位上 勳七等 佐伯宿 久良麻呂(사에키노스쿠 네 구라마로)에게 正五位下 勳五等을, 外正六位上 吉彌侯伊佐西古(기미코노이사세코) 第二等176) 伊治公 麻呂(고레하리키미 아자마로)에게 나란히 外從五位下를 수여한다. 勳 六等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슈테츠)에게 勳五等을 수여하였다. 그 나머지들에게 도 각각 차등이 있었다. 176) 第二等 : 이것은 소위 蝦夷爵이다. 蝦夷爵은 일반 조정의 위계와는 달리 蝦夷 집단에게만 수여하 는 것이었는데 언제 제정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式部省式이나 大臧省式 등에 蝦夷爵에 관한 내 용이 기술되어 있는데 이에 따르면 일본 조정은 蝦夷에게는 모두 6등급의 爵을, 그리고 조정에 복속한 蝦夷(= 囚)에게는 일반의 위계를 주는 방식으로 구별하고 있었다. 177) 征戰 : 寶龜 7년 4월부터 전개된 蝦夷 정토 작전을 말한다. 178) 第二等 : 이것은 조정에 귀부해 오는 蝦夷들에게 지급하는, 第一等에서 第六等으로 여섯 등급으 로 구성된 소위 蝦夷爵이라고 불리는 것의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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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6 290 續日本紀 291 를 參河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石川朝臣美奈伎麻呂(이시카와노아손 미나키마로)를 原朝臣是公에게 각각 正三位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壹志濃王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 下野介에 임명하였다. 였다. 從五位下 石城王에게 從五位上을, 无位 淺井王에게 從五位下를, 正四位下 大伴宿 하4월 癸卯(15) 天皇이 大極殿에 出御하여, 詔를 내려 말하기를, 明神으로서 大八洲를 통치하시는 天 皇의 詔旨로서 말하는 勅을 親王 諸王 百官人 등 天下 公民은 모두 들어라 하고 말한 다. 입에 올리기도 두려운 現神인 倭根子天皇의 皇, 이 황위(天日嗣高座之業)를 입에 올 리기도 두려운 近江 大津宮에서 통치하신 天皇179)이 처음으로 정하신 法에 따라 하사받아 봉사하도록 수여받았는데, [황위 선양을] 받자옵자니 걱정스럽고 받기 두려워 나아갈 지 도 물러설 지도 모른 채 두려워하고 있다고 말하는 천황의 勅을 모두 들어라 하고 말한 다. 그런데 천황으로서 天下를 다스리는 임금은 賢人 能臣180)을 얻어 천하를 평안하게 다 스리는 사람이라고 듣고 있다. 故로 大命으로서 말하건대 朕이 비록 졸렬하지만 親王을 비롯하여 諸王 諸臣들의 조력에 의해 이 수여받은 천황으로서의 통치(食國天下之政)를 평안하게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아첨하거나 속이는 마음 없이 忠明 之誠으로 天皇의 朝廷이 세우는 食國天下之政을 모두 도와 섬겨야 할 것이다, 라고 말하 伯麻呂 大伴宿 家持 佐伯宿 今毛人 坂上大忌寸예田麻呂에게 각각 正四位上를, 從四位下 石川朝臣名足 藤原朝臣雄依 大中臣朝臣子老 藤原朝臣鷹取 紀朝臣船守 藤原朝臣種繼에게 각각 從四位上을, 正五位上 豊野眞人奄智(토요노노마히토 에무치) 安倍朝臣東人(아베노아손 아즈마히토) 佐伯宿 久良麻呂(사에키노스쿠네 구라마로)에 게 각각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에게 正五位上을, 從五 位上 榮井宿 蓑麻呂(사카이노스쿠네 미노마로) 紀朝臣犬養(키노아손 이누카히) 山上 朝臣船主(야마노우에노아손 후나누시)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多治比眞人人足에 게 從五位上을, 外正五位下 吉田連古麻呂 正六位上 石川朝臣公足 紀朝臣千世 大中臣 朝臣安遊麻呂 安倍朝臣木屋麻呂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外從五位下 河內連三立麻呂에게 外從五位上을, 正六位上 船連田口 和史國守 伊勢朝臣水通 武生連鳥守 上毛野公薩 摩 土師宿 道長 正七位上 物部多藝宿 國足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5월 癸未(25) 는 天皇의 勅을 모두 들어라 하고 말한다. 고 하였다. 별도로 말하기를, 朕 한 사람만이 從五位下 賀茂朝臣大川를 神祇大副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石川朝臣淨麻呂를 少納言 이 경사스럽고 귀한 御命을 받아야 할 것인가. 무릇 사람의 아들이 복을 받고자 하는 것 에 임명하였으며, 正五位下 大神朝臣末足을 左中辯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多治比眞人 은 부모를 위한 것이라고 듣고 있다. 故로 朕의 親母인 高野夫人을 皇太夫人으로 칭하고 豊濱(다지히노마히토 토요하마)을 左少辯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紀朝臣家守(키노아 冠位을 올려 [그에 합당한] 또 대우를 하기로 한다. 섬기고 있는 사람들 중에 스스로 봉사 손 야카모리)를 右中辯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阿倍朝臣石行(아베노아손 이와츠라)을 한 사정(狀)에 따라 한 두 사람들에게 冠位를 올려주고 대우해준다. 또 大神宮을 비롯하 右少辯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紀朝臣眞人(키노아손 마히토)을 大學頭에 임명하였으며, 宜 祝 등에게 位 一階를 수여한다. 또 僧綱을 비롯하여 諸寺의 智行人181) 및 正五位上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을 散位頭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三嶋眞 나이 80세 이상의 僧尼들에게 물품을 布施한다. 또 나이가 많거나 궁핍한 사람, 孝 義 人大湯坐(미시마노마히토 오오유에)를 治部少輔에 임명하였으며, 正五位下 石上朝臣家 人 등에게 대접을 하고 자양해준다. 또 天下의 올해 田租를 면제한다고 하는 天皇의 勅을 成(이소노카미노아손 이에나리)을 民部大輔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菅嗣(후지 모두 들어라 하고 말한다. 와라노아손 수가츠구)를 民部少輔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藤原朝臣繼彦을 兵部少輔 여 諸社의 四品 비田親王에게 三品을 수여하였다. 從三位 石上大朝臣宅嗣 藤原朝臣田麻呂 藤 에 임명하였고, 從四位下 石川朝臣垣守를 刑部卿에 임명하였고 伊豫守는 그대로 두었으 며, 從五位上 當麻眞人永嗣를 刑部大輔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文室眞人子老를 刑部 少輔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中臣朝臣鷹主 高倉朝臣殿繼를 각각 大判事에 임명하였으 179) 近江 大津宮에서 통치하신 天皇 : 天智天皇를 이르는 말. 180) 賢人 能臣 : 현명하고 유능한 신하. 賢臣能人 이라고 표현하기도 하였다. 181) 智行人 : 智德이 뛰어난 사람을 말한다. 며, 正五位下 大伴宿 不破麻呂를 大藏大輔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紀朝臣犬養을 宮內 大輔에 임명하였고 丹後守는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陽侯王을 大膳大夫에 임명하였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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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9 296 臣豊庭을 民部少輔에 임명하였으며, 從四位下 多治比眞人長野를 刑部卿에 임명하였고, 續日本紀 297 3월 乙酉(14) 從五位下 賀茂朝臣大川을 大藏少輔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藤原朝臣繩主를 中衛少將 外從五位下 筑紫史廣嶋(츠쿠시노후비토 히로시마)를 近衛將監에 임명하고 播磨大 (하 에 임명하였고, 彈正尹 從三位 高倉朝臣福信에게 武藏守를 겸하게 하였으며, 從五位下 리마노다이죠우)는 그대로 두었다. 外從五位下 下道朝臣長人(시모츠미치노아손 나가히 伊賀香王(이카가노오오키미)을 若狹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大中臣朝臣安遊麻呂(오 토)을 大和介에 임명하였고, 從四位上 多治比眞人長野(다지히노마히토 나가노)를 伊勢守 오나카토미노아손 아유마로)를 播磨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百濟王仁貞(구다라노 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繩主(후지와라노아손 나와누시)를 伊勢介에 임명하였 고니키시 닌쵸우)을 備前介에 임명하였다. 外從五位下 尾張連豊人(오하리무라지 토요히 고, 正五位上 紀朝臣鯖麻呂(키노아손 사바마로)를 尾張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藤原 토)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朝臣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구로마로)를 遠江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文室眞人與企 동10월 庚申(16) 詔를 내려, 當郡182)의 올해 田租를 면제하고, 國司 郡司 및 行宮의 側近에 사는 高齡 者, 아울러 諸司의 從者들에게 그 연령과 지위에 따라 물품을 하사하였다. 또한 行宮에 供奉한 百濟王의 부하 한 두 사람의 位階를 승진시켜 주었다. 百濟寺에 近江 播磨 二 國의 正稅 각 5,000束을 시주하였다. 正五位上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百濟王武鏡(구다라노고니키시 무쿄우)에게 正五位下 를, 從五位下 百濟王元德(구다라노고니키시 겐토쿠) 百濟王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겐 쿄우)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四位上 百濟王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묘우 신)에게 正四位下를, 正六位上 百濟王眞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에게 從五位下를 수 여하였다. 11월 丁酉(24) 正四位下 百濟王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묘우신)에게 正四位上을 수여하였다. 권38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3년(784) 2월 辛巳(?)183) 女孺 无位 百濟王眞德(구다라노고니키시 신토쿠)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후무야노마히토 요키)를 相模守에 임명하였다. 近衛將監 從五位下 佐伯宿 老(사에키노 스쿠네 오유)에게 相模介를 겸하게 하였다. 從五位下 三國眞人廣見(미쿠니노마히토 히로 미)을 能登守에 임명하였고, 大外記 外從五位下 朝原忌寸道永(아사하라노이미키 미치나 가)에게 越後介를 겸하게 하였다. 外從五位下 上毛野公薩摩(가미츠케노키미 사츠마)를 但馬介에 임명하였고, 中宮大夫 內藏頭 從四位上 紀朝臣家守(키노아손 야카모리)에게 備 前守를 겸하게 하였다. 從五位下 文室眞人於保(훈야노마히토 오호)를 備後守에 임명하였 고, 正五位下 百濟王武鏡(구다라노고니키시 무쿄우)을 周防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石川朝臣淨繼(이시카와노아손 기요츠구)를 讚岐介에 임명하였고, 右衛士督 正四位上 坂 上大忌寸예田麻呂(사카노우에오오이미키 가리타마로)에게 伊豫守를 겸하게 하였으며, 從五位下 多治比眞人乙安(다지히노마히토 오토야스)을 肥後守에 임명하였다. 5월 甲午(24) 攝津職 史生 正八位下 武生連佐比乎가 흰 제비184) 한 마리를 헌상하였다. 이에 位階 二 級과 그 國의 正稅 500束을 하사하였다. 散位頭 從四位下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이 卒하였다. 권38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4년(785) 춘정월 乙巳(9) 從五位上 川邊女王(가와베노오오키미)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고, 從五位下 三嶋女王 182) 當郡 : 천황이 사냥을 즐긴 河內國 交野郡을 말한다. 183) 2月 辛巳 : 2월 달은 壬寅朔으로 시작하기 때문에 辛巳 간지의 날은 원래 없다. 뭔가 편집 과정 에서 잘못이 있었던 것 같다. (미시마노오오키미)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으며, 无位 八千代女王(야치요노오오키미) 184) 흰 제비 : 흰 제비 헌상의 경우 治部省式에는 祥瑞로 기재되어 있지는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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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1 300 續日本紀 301 토 도시누시)를 出雲守에 임명하였고, 近衛將監 外從五位下 筑紫史廣嶋(츠쿠시노후비토 카리)를 大宰少貳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百濟王英孫(구다라노고니키시 에이손)을 陸 히로시마)에게 播磨大 을 겸하게 하였으며, 從五位下 笠朝臣雄宗(카사노아손 오무네)을 奧鎭守權副將軍에 임명하였다. 美作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을 備前守에 임명 하였으며, 東宮學士 外從五位下 林忌寸稻麻呂(하야시노이미키 이나마로)에게 備前介를 겸하게 하였고 造東大寺次官은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上 葛井連根主(후지이노무라지 네 누시)를 伊豫守에 임명하였고, 外從五位下 秦忌寸長足(하다노이미키 나가타리)을 豊前介 에 임명하였다. 춘정월 癸亥(27) 攝津國 能勢郡 大領 外正六位上 神人爲奈麻呂(미화히토노이나마로) 近江國 蒲生郡 大 領 外從六位上 佐佐貴山公由氣比(사사키야마노키미 유케히) 丹波國 天田郡 大領 外從 六位下 丹波直廣麻呂(타니와노아타히 히로마로) 豊後國 海部郡 大領 外正六位上 海部 公常山(아마노키미 도코야마) 등이 職을 게을리 하지 않고 백성을 어루만지는데 적절한 방법이 있었다. 이에 詔를 내려,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또한 正六位下 海上國造 他田日奉直德刀自(오사다노히마츠리노아타히 도코토지)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小倉王(오구라노오오키미) 百濟王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쿄우)을 각각 少 納言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乙叡(후지와라노아손 오토에)를 權少納言에 임명 하였으며, 正五位下 大中臣朝臣諸魚(오오나카토미노아손 모로우오)를 左中辯에 임명하 였고 山背守는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藤原朝臣園人(후지와라노아손 소노히토)을 右少 辯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紀朝臣作良(키노아손 츠쿠라)을 大藏大輔에 임명하였으며, 外從五位下 佐伯直諸成(사에키노아타히 모로나리)을 園池正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弓 削宿 大成(유게노스쿠네 오오나리)을 西市正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中臣朝臣鷹主 (나카토미노아손 다카누시)를 信濃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日下部宿 雄道(쿠사카 5월 壬戌(28) 正六位上 百濟王元基(구다라노고니키시 겐키)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6월 癸酉(10) 勅을 내려 이르길, 지난 5월 19일 皇后宮에 赤雀가 나타난 상서로운 일이 있었던 까닭 에, 널리 天下의 有位者들에게 爵位 一級을 하사하였다. 다만 [皇后宮의] 宮司는 이 상서 로운 새가 나타난 곳이어서, 당연히 포상을 하여 이 불가사의한 선물에 보답을 해야 할 것이다. 이에 宮司의 主典 이상에게 六位이든185) 五位이든 논하지 말고 爵位 一級을 승진 시키도록 하라. 고 하였다. 右衛士督 從三位 겸 下總守 坂上大忌寸예田麻(사카노우에노오오이미키 카리다마로)呂 등이 上表하여 아뢰기를, 臣 등은 본디 後漢 靈帝의 曾孫 阿智王(아치 오우)의 後孫입니 다. 後漢의 帝位가 魏로 옮겨갔을 때, 阿智王은 神牛의 가르침에 따라 그곳을 떠나 帶方 으로 갔습니다. 그리고 홀연히 寶帶의 祥瑞를 얻었습니다. 그 모양은 宮城을 닮아 있어 그곳에 國邑을 세우고 그곳의 백성들을 키웠습니다. 그 후 父兄을 불러 고백하기를, 나 는 東國186)에 聖主가 있다고 들었다. 어찌 가서 복종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만약 이 곳에 오랫동안 있으면, 아마 覆滅하게 될 것이다. 고 하고, 즉시 母弟인 迂興德 및 七姓을 가 진 백성들을 데리고, 來朝하여 歸化하였습니다. 이는 즉 譽田天皇187)이 天下를 다스리던 御世의 일입니다. 이에 阿智王은 奏請하여 아뢰기를, 臣의 舊居는 帶方에 있습니다. 백 성들은 男女 모두 才藝를 가지고 있는데, 근자에는 百濟와 高(句)麗 사이에 붙어살면서, 그곳을 떠날지 계속 살지 아직 마음을 모른 채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天恩으로 베노스쿠네 오미치)를 豊前守에 임명하였다. 5월 甲寅(20) 從五位上 淨原王(기요미하라노오오키미)을 右大舍人頭에 임명하였고, 從四位上 藤原朝 臣雄依(후지와라노아손 오요리)를 大藏卿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上 大中臣朝臣子老(오오 나카토미노아손 고오유)를 宮內卿에 임명하였고 神祇伯은 그대로 두었다. 正四位下 神王 (기와노오오키미)을 禪正尹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海上眞人三狩(우나카미노마히토 미 185) 六位이든 : 특별히 六位가 언급이 된 것은 보통의 전례와 달리 六位의 五位 진입을 허가해주겠다 는 것을 나타내고 있다. 예를 들어 正六位上의 경우 여기서 위계 一級을 하사받으면 자동적으로 五位의 반열에 오르게 되는데 보통의 경우 조정은 이렇게 되는 것을 인정하지 않고 敍位의 혜택 을 당사자의 아들에게 대신 수여하는 방식을 채택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의 경우에는 당사 자가 서위의 결과 자동적으로 五位 반열에 오르는 경우가 있어도 인정해 주겠다는 것이다. 186) 東國 : 일본을 말한다. 187) 譽田天皇 : 응신천황을 말한다.

152 302 續日本紀 303 使者를 보내시어 그들을 불러들일 수 있도록 해주십시오. 라고 하였습니다. 이에 勅을 리) 外正五位下 丹比宿 眞淨(다지히노스쿠네 마키요) 外從五位上 上毛野公大川(가미 내려 臣下 八腹의 씨족188)을 보내어 나누어 출발하게 하였습니다. 그 남녀 백성들은 촌락 츠케노키미 오오카와) 正六位上 佐伯宿 志賀麻呂(사에키노스쿠네 시카마로) 阿倍朝 전체가 使者를 따라 모두 來朝하여 영원히 公民이 되어 累代에 걸쳐 해를 거듭하여 지금 臣名繼(아베노아손 나츠구) 從七位上 和朝臣家麻呂(야마토노아손 이에마로) 正六位上 에 이르렀습니다. 지금 諸國에 있는 漢人 또한 그 후예입니다. 臣 예田麻呂 등은 先祖의 多治比眞人賀智(다지히노마히토 카치) 紀朝臣楫人(키노아손 카지히토) 藤原朝臣淸主 王族의 姓을 잃고 下人의 卑姓을 받았습니다. 바라옵건대 忌寸의 姓을 고쳐 宿 의 姓을 (후지와라노아손 기요누시) 百濟王孝德(구다라노고니키시 케우토쿠)에게 각각 從五位 하사해 주십시오. 엎드려 바라옵건대 天恩으로 矜察하여 주시옵소서. 혹여 聖聽을 내려 下를 수여하였다. 연회가 끝나고 祿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주신다면, 所謂 寒灰가 更煖하고 枯樹가 復榮할 것입니다. 臣 예田麻呂 등은 지극한 바람 左京大夫 從三位 겸 右衛士督 下總守 坂上大宿 예田麻呂(사카노우에노스쿠네 가리타 을 주체할 수 없어 이에 上表文을 바치는 바이옵니다. 라고 하였다. 詔를 내려 이를 허 마로)가 薨하였다. 예田麻呂는 正四位上 犬養의 아들이다. [천평]寶字 年間에 授刀少尉에 락하였다. 坂上 內藏 平田 大藏 文 調 文部 谷 民 佐太 山口 등 忌寸(이미 임명되었다. 동 八年에 惠美仲麻呂가 역모를 꾀하면서 먼저 그 아들 訓儒麻呂를 平城宮 키) 11姓을 가진 16인에게 宿 (스쿠네)의 姓을 하사하였다. 에 보내어 鈴印을 빼앗게 하였다. 예田麻呂는 將曹 牡鹿嶋足과 함께 詔를 받들어 즉시 말 9월 辛酉(29) 從五位下 佐伯宿 葛城(사에키노스쿠네 카즈라키)을 左少辨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百濟王英孫(구다라노고니키시 에이손)을 出羽守에 임명하였으며, 近衛少將 從五位下 紀 朝臣兄原(키노아손 에하라)을 檢備前介에 임명하였다. 권39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5년(786) 춘정월 戊戌(7) 五位 이상의 관인들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正四位下 神王에게 正四位上을 수여하였고, 從四位上 壹志濃王에게 正四位下를 수여하였으며, 從五位下 篠嶋王에게 從五位上을 수 여하였고, 從四位上 大中臣朝臣子老(오오나카토미노아손 고오유)에게 正四位下를 수여 하였다. 正五位上 紀朝臣犬養(키노아손 이누카히)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고, 正五位下 文室眞人高嶋(후무야노마히토 다카시마) 從五位上 藤原朝臣雄友(후지와라노아손 오토 모) 藤原朝臣內麻呂(후지와라노아손 우치마로)에게 각각 正五位上을 수여하였으며, 從 五位上 藤原朝臣菅繼(후지와라노아손 스가츠구)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고, 從五位上 藤原朝臣乙叡(후지와라노아손 오토에)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外從五位下 長尾忌 寸金村(나가오이미키 가나무라) 物部多藝宿 國足(모노노베노타기노스쿠네 구니타 188) 八腹의 씨족 : 많은 씨족이란 의미이다. 을 달려 訓儒麻呂를 射殺하였다. 그 공로로 從四位下 勳二等을 수여받았고 大忌寸의 氏 姓을 하사받았다. 中衛少將에 임명되었고, 甲斐守를 겸하게 되었다. 이는 廢帝紀189)에 실 려 있다. 寶龜 初에, 正四位下를 수여받았고, 임지로 나가 陸奧鎭守將軍에 임명되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곧 돌아와 近衛員外中將, 丹波 伊豫 등의 國守를 역임하였다. 天應 元年에 正四位上을 수여받았고, 右衛士督으로 옮겨 앉았다. 예田麻呂의 家門은 대대로 弓馬를 다루는 일을 職으로 하였고 달리는 말에서의 활쏘기에 능하였다. 宮中을 宿衛하 는 일을 하여 대대로 朝廷에 봉사하였다. 天皇은 그를 총애하여 優厚하였다. 별도로 封戶 50戶를 하사받았다. 延曆 四年 從三位를 수여받고 左京大夫에 임명되었다. 右衛士督 下 總守는 그대로였다. 薨하였을 때 나이가 59세였다. 춘정월 己未(28) 地震이 있었다. 從五位下 安倍朝臣枚麻呂(아베노아손 히라마로)를 大監物에 임명하였 고, 從五位下 藤原朝臣 麻呂(후지와라노아손 가즈라마로)를 皇后宮大進에 임명하였으 며, 正五位上 安倍朝臣家麻呂(아베노아손 이에마로)를 左大舍人頭에 임명하였고, 從五位 下 安倍朝臣名繼(아베노아손 나츠구)를 右大舍人助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紀朝臣作良 (키노아손 츠쿠라)을 大學頭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縣犬養宿 繼麻呂(아가타이누카히 노스쿠네 츠구마로)를 散位助에 임명하였으며, 外從五位下 林連浦海(하야시무라지 우라 189) 廢帝紀 : 廢帝는 순인천황을 말한다.

153 304 우미)를 主計助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乙友(후지와라노아손 오토토모)를 宮內 續日本紀 305 하였다. 少輔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文室眞人久賀麻呂를 木工頭에 임명하였고, 外從五位下 國 從五位下 高倉朝臣石麻呂(다카쿠라노아손 이와마로)를 中務少輔에 임명하였고, 從五位 中連三成을 木工助에 임명하였으며, 外從五位下 上村主蟲麻呂를 官奴正에 임명하였고, 下 中臣朝臣比登(나카토미노아손 히토)을 和泉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甘南備眞人 從四位上 佐伯宿 久良麻呂를 左京大夫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繩主(후지와라 繼成(가무나비노마히토 츠구나리)을 伊賀守에 임명하였고, 外從五位下 御使朝臣淨足(미 노아손 나와누시)를 中衛少將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仲成(후지와라노아손 나 츠카히노아손 기요타리)을 參河介에 임명하였다. 近衛少將 從五位上 佐伯宿 老(사에키 카나리)을 衛門佐에 임명하였으며, 皇后宮亮 正五位上 笠朝臣名末呂(카사노아손 나마로) 노스쿠네 오유)에게 相模守를 겸하게 하였고 少納言은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紀朝臣 에게 右衛士督을 겸하게 하였고, 從五位上 百濟王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쿄우)를 右兵 眞人(키노아손 마히토)을 相模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百濟王玄風(구다라노고니키시 衛督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文室眞人大原(훈야노마히토 오오하라)을 右兵衛佐에 임명 겐후우)을 美濃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佐伯宿 葛城(사에키노스쿠네 카즈라키)을 하였다. 從五位下 大宅朝臣廣江(오오야케노아손 히로에)을 美濃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 陸奧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石淵王(이와후치노오오키미)을 若狹守에 임명하였다. 從 下 安倍朝臣眞黑麻呂(아베노아손 마쿠로마로)를 出雲介에 임명하였다. 五位下 紀朝臣馬守(기노아손 우마모리)를 越中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丹比宿 眞淨 를 丹波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大宅朝臣廣江을 丹後守에 임명하였고, 外從五位下 권39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6년(787) 춘정월 壬辰(7) 正四位下 多治比眞人長野(다지히노마히토 나가노)에게 從三位를 수여하였다. 无位 矢庭 王 大庭王 正六位上 岡田王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大伴宿 潔足 (오오토모노스쿠네 기요타리)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文室眞人波多麻呂 (후무야노마히토 하타마로) 安倍朝臣常嶋(아베노아손 츠네시마) 藤原朝臣眞友(후지와 라노아손 마토모)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文室眞人久賀麻呂(후무야 노마히토 구카마로) 阿倍朝臣弟當(아베노아손 오토마사) 藤原朝臣宗嗣(후지와라노아 손 무네트구) 紀朝臣眞子(키노아손 마코)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고, 正六位上 大 原眞人長濱(오오하라노마히토 나가하마) 橘朝臣安麻呂(다치바나노아손 야스마로) 藤 原朝臣今川(후지와라노아손 이마카와) 百濟王玄風(구다라노고니키시 겐후우) 正六位 下 紀朝臣全繼(키노아손 마타츠구) 從六位上 巨勢朝臣人公(고세노아손 히토키미) 正六 丹比宿 稻長을 伯耆介에 임명하였다. 中納言 正三位 藤原朝臣小黑麻呂에게 美作守를 겸하게 하였고 中務卿은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紀朝臣安提를 備中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雄倉王을 阿波守에 임명하였으며, 正五位上 內藏宿 全成을 讚岐守에 임명하 였고, 陸奧介 從五位下 佐伯宿 葛城에게 鎭守副將軍을 겸하게 하였다. 윤5월 丁巳(5) 陸奧鎭守將軍 正五位上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쥰테츠)이 어떤 일에 연루되어192) 日向權介193)로 좌천되었다. 8월 甲辰(24) 高椅津에 行幸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大納言 從二位 藤原朝臣繼繩(후지와라노아손 츠 구타다)의 저택에 들러, 그의 正室 正四位上 百濟王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묘우신)에게 從三位를 수여하였다. 位上 石川朝臣永成(이시카와노아손 나가나리)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2월 庚申(5). 勅을 내려, 諸勝190)에게 廣根朝臣이라는 氏姓을, 岡成191)에게 長岡朝臣이라는 姓을 하사 190) 諸勝 : 광인천황의 아들로서 모친은 縣犬養勇耳이다. 191) 岡成 : 환무천황의 아들이다. 192) 어떤 일에 연루되어 : 어떠한 일이었는지는 미상이다. 193) 日向權介 : 日向國(휴가노쿠니 : 지금의 규슈 宮崎縣)을 다스리는 지방 장관(國司) 중에서 차관 직이다. 權官은 통상 율령제에 의해 정해진 正官 이외의 관직의 하나로서 일종의 임시직이었다. 하지만 781년 이후에는 權官이 正官과 별 차이 없는 직책이 되었다.

154 306 동10월 己亥(20) 別宅의 主人이194) 百濟王 등을 이끌고 다양한 음악을 연주하게 하였다. 從五位上 百濟王 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쿄우) 藤原朝臣乙叡(후지와라노아손 오토에)에게 각각 正五 位下를 수여하였고, 正六位上 百濟王元眞(구다라노고니키시 겐신) 善貞(젠쵸우) 忠信 (츄신)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으며, 正五位下 藤原朝臣明子(후지와라노아손 아키 코)에게 正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家野(후지와라노아손 야카노)에게 從 五位上을 수여하였고, 无位 百濟王明本(구다라노고니키시 묘우혼)에게 從五位下를 수여 하였다. 이날 還宮하였다. 권39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7년(788) 2월 甲申(6) 續日本紀 307 였고, 從五位上 紀朝臣伯麻呂를 大宰少貳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石川朝臣多 를 肥 前守에 임명하였다. 2월 丙午(28) 從五位下 多治比眞人繼兄을 右少辯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藤原朝臣眞友를 中務大輔 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山口王을 大監物에 임명하였고, 從四位上 和氣朝臣淸麻呂를 中宮大夫에 임명하였으며 民部大輔 攝津大夫는 그대로 두었다. 左中辯 從五位上 大伴宿 弟麻呂에게 皇后宮亮을 겸하게 하였고, 外從五位下 阿閉間人臣人足을 皇后宮大進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川村王을 右大舍人頭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廣田王을 縫殿頭 에 임명하였다. 主稅助 外從五位下 麻田連眞淨에게 大學博士를 겸하게 하였고, 從五位下 大原眞人長濱을 散位助에 임명하였으며, 外從五位下 中臣栗原連子公을 大炊助에 임명하 였고, 從五位下 大宅朝臣廣江을 主殿頭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和朝臣家麻呂(야마토노 中納言 兵部卿 從三位 石川朝臣名足(이시카와노아손 나타리)에게 大和守를 겸하게 하 아손 이에마로)를 造酒正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長津王(나가츠노오오키미)을 鍛冶正에 였고, 從五位下 高倉朝臣殿嗣(다카쿠라노아손 도노츠구)를 大和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百濟王敎德(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토쿠)을 右兵庫頭에 임명하 位下 大伴宿 蓑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미노마로)를 河內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百 였고, 外從五位下 林連浦海(하야시무라지 우라우미)를 安藝介에 임명하였다. 陸奧按察使 濟王善貞(구다라노고니키시 젠쵸우)을 河內介에 임명하였다. 正四位下 伊勢朝臣老人(이 守 正五位下 多治比眞人宇美(다지히노마히토 우미)에게 鎭守將軍을 겸하게 하였고, 外從 세노아손 오키나)을 遠江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縣犬養宿 繼麻呂(아가타이누카히) 五位下 安倍猿嶋臣墨繩(아베노사시마오미 수에나와)를 鎭守副將軍에 임명하였다. 를 伊豆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紀朝臣眞人을 相模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 朝臣 麻呂를 相模介에 임명하였다. 中宮大夫 從四位上 石川朝臣豊人에게 武藏守를 겸 하게 하였고, 中衛少將 正五位下 藤原朝臣乙叡에게 下總守를 겸하게 하였으며, 從五位下 中臣丸朝臣馬主를 上野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淺井王을 丹波守에 임명하였다. 從五 位上 大中臣朝臣繼麻呂를 但馬守에 임명하였고, 式部大輔 左兵衛督 從四位下 大中臣朝 臣諸魚에게 播磨守를 겸하게 하였으며, 從五位下 笠朝臣江人을 播磨介에 임명하였고, 外 권40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8년(789) 춘정월 甲辰朔(1) 日蝕이 있었다. 춘정월 己酉(6) 從五位下 忍海原連魚養을 播磨大 에 임명하였다. 正五位上 當麻王을 備前守에 임명하 五位 이상의 관료들과 南院195)에서 연회를 즐겼다. 였고, 少納言 從五位下 藤原朝臣繩主에게 備前介를 겸하게 하였으며 右衛士佐는 그대로 從五位上 笠王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고, 從五位下 廣田王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 두었다. 從五位下 下毛野朝臣年繼를 備中介에 임명하였고, 外從五位下 忌部宿 人上을 安藝介에 임명하였으며, 東宮學士 左兵衛佐 從五位下 津連眞道에게 伊豫介를 겸하게 하 194) 別宅의 主人이 : 藤原朝臣繼繩을 말한다. 195) 南院 : 長岡宮에서는 內裏의 남쪽에 朝堂院이 설치되어 있었는데 위의 이 南院도 조당원을 가리 키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평성궁의 시대에서는 주로 정월 7일 및 16일 등의 연회는 內裏나 朝堂 (大極殿 南院)에서 개최되는 것이 보통이었으며, 이것이 長岡宮 시대에도 계승되고 있었다고 추 정한다면 역시 이 남원은 朝堂일 가능성이 부각되는 것이다.

155 308 續日本紀 309 으며, 无位 葛井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고, 從四位下 佐伯宿 眞守(사에키노스쿠네 臣石麻呂(다카쿠라노아손 이와마로)를 美作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藤原朝臣園人(후 마모리)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藤原朝臣菅繼(후지와라노아손 수가츠구) 지와라노아손 소노히토)을 備後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百濟王敎德(구다라노고니 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고, 正五位下 百濟王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쿄우)에게 正五 키시 케우토쿠)을 讚岐介에 임명하였다. 位上을 수여하였으며, 從五位上 文室眞人與企(훈야노마히토 요키) 紀朝臣作良(키노아 손 츠쿠라)에게 각각 正五位下를 수여하였고, 從五位下 賀茂朝臣人麻呂(가모노아손 히토 마로) 藤原朝臣園人(후지와라노아손 소노히토) 伊勢朝臣水通(이제노아손 미나미치) 津連眞道(츠노무라지 마미치)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平群朝臣國人 (헤구리노아손 구니히토) 紀朝臣伯(키노아손 오지) 紀朝臣登萬理(키노아손 도마리) 井朝臣靺鞨(에노이노아손 마츠카츠) 田中朝臣大魚(다나카노아손 오우오) 安倍朝臣 人成(아베노아손 히토나리) 巨勢朝臣道成(고세노아손 미치나리) 石川朝臣淸濱(이시카 와노아손 기요하마) 石川朝臣淸成(이시카와노아손 기요나리) 大春日朝臣淸足(오오카 스가노아손 기요타리) 藤原朝臣岡繼(후지와라노아손 오카츠구) 石上朝臣乙名(이시카 와노아손 오토나) 大野朝臣仲男(오오노노아손 나카츠오) 角朝臣筑紫麻呂(츠노노아손 츠쿠시마로)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大網公廣道(오오요사미노키미 히로미치) 韓國連源(가라쿠니노무라지 미나모토) 秋篠宿 安人(아키시노스쿠네 야스 히토)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兵部卿 從三位 겸 近江守 多治比眞人長野(다 지히노마히토 나가노)를 參議에 임명하였다. 2월 丁丑(4) 3월 戊午(16) 從四位下 大中臣朝臣諸魚(오오나카토미노아손 모로우오)를 神祇伯에 임명하였고 式部 大輔 左兵衛督 近江守는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大中臣朝臣弟成(오오나카토미노아손 오토나리)을 少納言에 임명하였고, 從四位下 紀朝臣犬養(키노아손 이누카히)을 左大舍人 頭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을 中宮亮에 임명하 였고, 從五位上 津連眞道(츠무라지 마미치)를 圖書頭에 임명하였으며 東宮學士 左兵衛佐 伊豫介는 그대로 두었다. 外從五位下 大網公廣道(오오요사미노키미 히로미치)를 主計助 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安倍朝臣枚麻呂(아베노아손 히라마로)를 兵部少輔에 임명하였 으며, 從五位上 藤原朝臣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구로마로)를 刑部大輔에 임명하였고, 從 五位下 藤原朝臣大繼(후지와라노아손 오오츠구)를 大判事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下 石上 朝臣家成(이시노카기노아손 이에나리)을 宮內卿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矢庭王(야니와 노오오키미)을 正親正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文室眞人八嶋(후무야노마히토 야시마) 를 彈正弼에 임명하였고, 從四位下 藤原朝臣菅繼(후지와라노아손 수가츠구)를 左京大夫 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角朝臣筑紫麻呂(츠노아손 츠쿠시마로)를 衛門大尉에 임명하였 고, 從四位下 藤原朝臣內麻呂(후지와라노아손 우치마로)를 右衛士督에 임명하였으며 越 從五位下 大原眞人美氣(오오하라노마히토 미케)를 尾張守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高 前守는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大秦公忌寸宅守(우즈마사키미노이미키 야카모리)를 左 賀茂朝臣諸雄(다카카모노아손 모로오)을 參河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文室眞人子 兵庫助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爲奈眞人豊人(이나노마히토 토요히토)을 右兵庫頭에 임 老(후무야노마히토 고오유)를 安房守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上 百濟王玄鏡(구다라노고니 명하였으며, 從五位下 小野朝臣澤守(오노노아손 사와모리)를 攝津亮에 임명하였고, 外從 키시 겐쿄우)을 上總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石川朝臣淸濱(이시카와노아손 기요하 五位下 麻田連 賦(아자다노무라지 가리후)를 山背介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大伴王을 마)을 上總介에 임명하였다. 近衛將監 外從五位上 池原公綱主(이케하라노키미 츠나누시) 甲斐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文室眞人久賀麻呂(후무야노마히토 구카마로)를 但馬介 에게 下總大 을 겸하게 하였고, 式部大輔 從四位下 大中臣朝臣諸魚(오오나카토미노아 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石川朝臣公足(이시카와노아손 기미타리)을 安藝守에 임명하 손 모로우오)에게 近江守를 겸하게 하였으며 左兵衛督은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紀朝 였고, 正五位下 粟田朝臣鷹守(아와타노아손 다카모리)를 長門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 臣長名(키노아손 나가나)을 越前介에 임명하였고, 大判事 從五位上 橘朝臣綿裳(다치바나 上 藤原朝臣園人(후지와라노아손 소노히토)을 大宰少貳에 임명하였다. 노아손 오타모)에게 越中介를 겸하게 하였으며, 正五位上 安倍朝臣家麻呂(아베노아손 이 造東大寺司를 폐지하였다.196) 에마로)를 石見守에 임명하였고, 兵部大輔 左京大夫 從四位下 藤原朝臣雄友(후지와라노 아손 오토모)에게 播磨守를 겸하게 하였고 左衛士督을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高倉朝 196) 造東大寺司의 폐지 : 사원의 교토 이전을 불허하였던 환무천황의 엄격한 불교 사원에 대한 정책

156 310 續日本紀 12월 [明年 정월] 壬午(15) 311 였으며, 无位 謂奈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고, 正四位下 紀朝臣古佐美(키노아손 고사 大枝山陵에 장사지냈다. 皇太后의 姓은 和氏, 諱는 新笠으로, 贈正一位 乙繼의 딸이다. 197) 미)에게 正四位上을 수여하였다. 從四位上 和氣朝臣淸麻呂(와케노아손 기요마로)에게 正 母親은 贈正一位 大枝朝臣眞妹이다. 后의 先祖는 百濟 武寧王의 아들 純陀太子 에서 나 四位下를 수여하였고, 正五位上 文室眞人高嶋(훈야노마히토 다카시마) 百濟王玄鏡(구 왔다. 皇后는 용모가 정숙하고 덕이 뛰어나 일찍이 영예로운 평판을 들었다. 天宗高紹天 다라노고니키시 겐쿄우)에게 각각 從四位下를 수여하였으며, 從五位上 百濟王仁貞(구다 皇이 즉위하기 전, 혼인하여 宮으로 들어왔다. 今上을 낳고 早良親王 能登內親王을 낳 라노고니키시 닌쵸우)에게 正五位上을 수여하였고, 從五位上 羽栗臣翼(하쿠리오미 츠바 았다. 寶龜 年間에 姓을 고쳐 高野朝臣(다카노노아손)이라 하였고, 今上이 卽位하자 皇太 사)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末茂(후지와라노아손 수에시게)에게 夫人으로 推尊되었다. 延曆 九年에 尊號를 追上하여 皇太后가 되었다. 百濟의 遠祖인 都 從五位上을 수여하였고, 正六位上 百濟王鏡仁(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닌)에게 從五位下 198) 慕王(츠모우 오우) 은 河伯의 딸이 태양에 정성껏 빌어 낳았다. 皇太后는 즉 그 후손이 다. 이에 謚號를 바치는 바이다. 를 수여하였다. 이 날 詔에 말하기를, 百濟王(씨) 등은 朕의 外戚199)이다. 지금 그런 까닭에 그들 중 한 두 사람을 발탁하여 爵位를 내리려한다.200) 고 하였다. 권40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9년(790) 춘정월 癸亥(26) 從二位 藤原朝臣繼繩 正三位 藤原朝臣小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오쿠로마로) 正四位 上 神王 正四位下 紀朝臣古佐美(기노아손 고사미) 從四位上 和氣朝臣淸麻呂(와케노아 손 키요마로) 正五位下 文室眞人與企 從五位上 藤原朝臣黑麻呂(후지와라노아손 구 로마로)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 三嶋眞人名繼(미시마노마히토 나츠 구) 從五位下 文室眞人八嶋(훈야노마히토 야시마) 및 六位 이하의 官人 9인을 一周忌의 御齋曾司에 임명하였다. 2월 甲午(27) 3월 庚子(3) 節宴201)을 중지하였다. 비록 喪服은 벗었으나 아직 상중인 까닭이다. 日向權介 正五位上 勳四等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슈테츠)이 그 罪를 용서받고 入京을 명받았다. 3월 丙午(9) 從五位下 巨勢朝臣嶋人(고세노아손 시마히토)을 山背守에 임명하였고 左衛士佐는 그대 로 두었다. 從五位下 藤原朝臣今川(후지와라노아손 이마가와)을 伊勢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大原眞人美氣를 尾張守에 임명하였으며, 雅樂頭 正五位下 文室眞人波多麻呂 (훈야노마히토 하타마로)에게 參河介를 겸하게 하였고, 鼓吹正 外從五位下 奈良忌寸長野 (나라노이미키 나가노)에게 遠江介를 겸하게 하였다. 從五位上 藤原朝臣黑麻呂(후지와라 詔를 내려, 大納言 從二位 藤原朝臣繼繩를 右大臣에 임명하였고, 中納言 正三位 藤原朝 노아손 쿠로마로)를 駿河守에 임명하였고, 木工助 外從五位下 高篠連廣浪(다카시노노무 臣小黑麻呂를 大納言에 임명하였으며, 從四位上 大伴宿 潔足 從四位下 石川朝臣眞 라지 히로나미)에게 駿介河를 겸하게 하였다. 從五位下 都努朝臣筑紫麻呂(츠누노아손 츠 守 大中臣朝臣諸魚 藤原朝臣雄友를 각각 參議에 임명하였다. 쿠시마로)를 武藏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大野朝臣仲男를 安房守에 임명하였으며, 參 從三位 紀朝臣船守에게 正三位를 수여하였고, 正五位上 當麻王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 과 관련이 있다. 197) 純陀太子 : 日本書紀 계체천황 7년 8월조에 그의 사망 기사가 실려 있다. 武寧王보다도 일찍 사망한 것 같고 武寧王의 뒤를 이어 즉위하는 성왕의 형일 가능성이 크다. 198) 都慕王 : 고구려의 시조인 주몽을 가리킨다. 東明( 후한서 부여전) 朱蒙(위지 고구려전) 鄒牟 삼국사기 백제본기)라고도 ( 표기된다. 199) 外戚 : 환무천황의 모친 高野新笠은 和乙繼의 딸이며, 그 선조의 계보가 백제 武寧王의 아들 純 陀太子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200) 爵位를 내리려한다. : 百濟王玄鏡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上 百濟王仁貞에게 正五位上을 수여 하였고, 正六位上 百濟王鏡仁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한 것을 말한 것이다. 201) 節宴 : 3월 3일 曲水의 宴을 말한다.

157 312 續日本紀 313 議 彈正尹 正四位上 神王에게 下總守를 겸하게 하였고, 從五位下 入間宿 廣成를 常陸介 시코리노무라지 야카모리)를 織部正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紀朝臣難波麻呂(키노아손 에 임명하였다. 大藏大輔 正五位下 藤原朝臣乙叡에게 信濃守를 겸하게 하였고 侍從는 그 나니와마로)를 宮內大輔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藤原朝臣弟友(후지와라노아손 오토 대로 두었으며, 從五位下 平群朝臣淸麻呂를 信濃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多治比眞人 토모)를 宮內少輔에 임명하였고 侍從은 그대로 두었다. 左中辯 正五位上 百濟王仁貞(구 濱成을 陸奧按察使 겸 陸奧守에 임명하였다. 近衛少將 從五位下 坂上大宿 田村麻呂에 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에게 木工頭를 겸하게 하였고, 從五位下 大神朝臣人成(오오미와 게 越後守를 겸하게 하였고 內匠助는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大宅朝臣廣江을 丹後守에 노아손 히토나리)을 大膳亮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紀朝臣登麻理(키노아손 도마리)를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仲成을 出雲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藤原朝臣末茂 彈正弼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巨勢朝臣人公(고세노아손 히토키미)을 左京亮에 임명하 를 美作守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中臣朝臣常을 紀伊守에 임명하였다. 圖書頭 從五位上 였다. 從五位下 安倍朝臣人成(아베노아손 히토나리)을 春宮大進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津連眞道에게 伊豫守를 겸하게 하였고 東宮學士 左兵衛佐는 그대로 두었으며, 從五位下 百濟王忠信(구다라노고니키시 치우신)을 中衛少將에 임명하였으며, 正五位下 紀朝臣木 高橋朝臣祖麻呂(다카하시노아손 오야마로)를 伊豫介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文室眞人 津魚(키노아손 고츠오)를 衛門督에 임명하였고 內匠頭는 그대로 두었으며, 從五位下 佐 那保企(훈야노마히토 나호키)[本名은 與企]를 大宰大貳202)에 임명하였으며, 正五位下 粟 伯宿 繼成(사에키노스쿠네 츠구나리)을 衛門佐에 임명하였다. 外從五位下 大田首豊繼 田朝臣鷹守(아와타노아손 다카모리)를 肥後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百濟王鏡仁(구다 를 左衛士大尉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伊勢朝臣水通을 右衛士佐에 임명하였으며, 兵部 라노고니키시 쿄우닌)을 豊後介에 임명하였다. 大輔 正五位下 藤原朝臣乙叡에게 右兵衛督을 겸하게 하였고, 大外記 從五位下 秋篠宿 安人에게 右兵衛佐를 겸하게 하였으며, 皇后宮亮 正五位下 大伴宿 弟麻呂에게 河內守 3월 壬戌(25) 正五位上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을 左中辯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多 治比眞人宇美(다지히노마히토 우미)를 右中辯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藤原朝臣眞鷲 (후지와라노아손 마와시)를 右少辯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弟友(후지와라노아 손 오토토모)를 侍從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物部多藝宿 國足을 圖書助에 임명하였고 를 겸하게 하였다. 外從五位下 麻田連眞淨을 伊勢介에 임명하였고, 外從五位下 息長眞人 淨繼(오기나가노마히토 키요츠구)를 尾張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田中朝臣淸人(다 나카노아손 키요히토)을 下總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文室眞人八嶋(훈야노마히토 야 시마)를 伯耆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多治比眞人繼兄(다지히노마히토 츠구에)을 大 宰少貳에 임명하였다. 常陸大 은 그대로 두었으며, 從四位下 藤原朝臣內麻呂(후지와라노아손 우치마로)를 內 藏頭에 임명하였고 右衛士督 越前守는 그대로 두었다. 左京大夫 從四位下 藤原朝臣菅嗣 추7월 辛巳(17) (후지와라노아손 스가츠구)에게 陰陽頭를 겸하게 하였고, 正五位下 紀朝臣木津魚(키노아 左中辯 正五位上 겸 木工頭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 治部少輔 從五位下 손 고츠오)를 內匠頭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百濟王元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신)을 百濟王元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신) 中衛少將 從五位下 百濟王忠信(구다라노고니키시 治部少輔에 임명하였고, 外從五位下 上毛野公薩摩(가미츠케노노키미 사츠마)를 主稅助 치우신) 圖書頭 從五位上 겸 東宮學士 左兵衛佐 伊豫守 津連眞道(츠노무라지 마미치) 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上 大伴宿 潔足을 兵部卿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藤原朝臣乙叡 등이 上表하여 아뢰기를, 眞道 등의 본디 系統은 百濟國 貴須王(기스 오우)에서 나왔습 을 兵部大輔에 임명하였으며 侍從 信濃守는 그대로 두었고, 從五位下 甘南備眞人淨野를 니다. 貴須王은 百濟가 발흥하여 시작하여 第十六代의 王입니다. 무릇 百濟의 太祖인 都 兵部少輔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岡繼를 大判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和朝 慕(츠모우)大王은 太陽神이 靈을 내려주시어 扶餘 지역을 지배하여 開國하게 되었고, 天 臣國守(야마토노아손 구니모리)를 大藏少輔에 임명하였으며, 外從五位下 錦部連家守(니 帝의 202) 大宰大貳 : 大宰大貳는 大宰府의 차관급 관직이다. 大宰府의 장관은 大宰帥이며 차관이 大宰大 貳(정원 1명)와 大宰少貳(정원 2명)였다. 203) 天帝의 203) 을 받아서, 諸韓을 총괄하여 王을 칭하게 되었습니다. 시간이 흘러 近肖古王 때 : 일종의 未來記로서 천제가 천자가 될 만한 사람에게 내리는 표식이라고 한다.

158 314 續日本紀 315 에 이르러, 멀리 聖化를 사모하여 처음으로 貴國204)을 방문하였습니다. 이는 神功皇后의 습니다. 까닭에, 능히 퇴색한 것을 수리하고 단절된 것을 계승해 갈 수 있어, 만 백성이 攝政 시대입니다. 그 후 輕嶋豊明朝에서 천하를 다스린 應神天皇은 上毛野氏의 遠祖인 우러러보며 기쁘게 의지하고, 正名을 변별할 수 있어, 천하가 歸屬하며 宜를 얻게 되는 荒田別에게 명하여, 百濟에 使者로 가서 有識者를 초빙해 오게 하였습니다. 國主인 貴須 것입니다. 무릇 懷生하고자 있으면, 손뼉을 치며 뛰어오르며 기뻐하지 않는 자가 없을 것 205) 王은 삼가 使者의 旨를 받아들여, 宗族에서 인재를 골라, 그 孫子인 辰孫王 *一名 智宗 입니다. 眞道 등의 先祖가 聖朝에 봉사한 것은 그 시기가 아주 먼 옛날입니다. 이후 家門 王 을 파견하여, 使者를 따라 入朝하게 하였습니다. 天皇은 이를 기뻐하며, 특히 寵命을 은 文雅를 業으로 전해오고 있으며, 一族은 西庠209)의 職을 관장하고 있습니다. 眞道 등은 내려 皇太子206)의 스승으로 삼았습니다. 이에 처음으로 書籍이 전하여졌으며, 크게 儒學 昌運한 때에 태어나 天恩을 입고 있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連의 姓을 고쳐서 바꾸어 의 氣風을 밝히게 되었습니다. 文敎의 發興은 실로 여기에서 출발합니다. 難波의 高津朝 朝臣의 姓을 하사해 주시옵소서. 라 하였다. 이에 勅을 내려 居住地名에 근거하여 菅野 207) 에서 천하를 다스린 仁德天皇은 辰孫王의 長子인 太阿郞王 을 近侍로 삼았습니다. 太阿 郞王의 아들이 亥陽君, 亥陽君의 아들이 午定君, 午定君은 3명의 아들을 낳았습니다. 長 子는 味沙, 둘째는 辰爾, 막내는 麻呂입니다. 이에 따라 비로소 자손이 나뉘어 三姓으로 되며, 각기 所職에 따라 氏의 이름을 갖게 되었습니다. 葛井連 船連 津連 등이 그것입 니다. 他田朝에서 천하를 다스린 敏達天皇의 치세에 이르러,208) 高麗國이 使者를 보내어 烏羽의 上表文을 올렸습니다. 群臣 諸史들이 이를 능히 읽어낼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 데 辰爾가 나아가 그 上表文을 보고 능히 읽어내며 솜씨 좋게 옮겨 적어 상세하게 그 내 용을 奏上하였습니다. 天皇은 그의 심오한 학문을 기뻐하여 후히 상을 내려 치하하며 詔 를 내려 이르길, 부지런하구나, 크기도 하구나. 그대가 만약 학문을 좋아하지 않았다면 누가 이를 능히 읽고 풀어내었겠는가. 지금부터 殿中에 近侍하도록 하라. 고 하셨습니 朝臣(스가노노아손)의 氏姓을 하사하였다. 추7월 戊子(24) 從五位下 紀朝臣 麻呂(기노아손 이와마로)를 少納言에 임명하였고, 從四位下 石川朝 臣眞守(이시가와노아손 마모리)를 右大辯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調使王(츠키노오미) 을 左大舍人頭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藤原朝臣刷雄을 右大舍人頭에 임명하였다. 近衛 少將 從五位下 藤原朝臣繩主에게 式部少輔를 겸하게 하였고 備前介를 그대로 두었다. 從 五位上 阿保朝臣人上을 大學頭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藤原朝臣是人을 治部大輔에 임 명하였으며, 從五位下 文室眞人大原을 治部少輔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上 藤原朝臣眞作 을 大藏大輔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下 紀朝臣犬養(기노아손 이누카이)을 大膳大夫에 임명 하였고, 從五位上 葛井連根主(후지이노무라지 네누시)를 大膳亮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 다. 그리고 또 東 西의 諸史에게 詔를 내려 이르길, 너희들은 비록 여럿이 있으나 辰爾 下 大春日朝臣淸足(오오가스카노아손 키요다리)을 官奴正에 임명하였고, 正五位下 葛井 에는 미치지 못하는구나. 이를 각각 國史와 家牒에 상세히 기재하도록 하라. 고 하셨습 連道依(후지이노무라지 미치요리)를 春宮亮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大伴宿 蓑麻呂(오 니다. 삼가 생각해 봄에, 皇朝는 天에 의해 布化를 행하고, 옛 것을 헤아려 풍습을 널리 오토모노스쿠네 미노마로)를 中衛少將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今川(후지와라 알리고 있습니다. 넓은 恩澤은 群方으로 널리 퍼져가고, 훌륭한 政治는 만물에 미치고 있 노아손 이마카와)을 伊勢守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上 宗形王(무나카타 오우)을 讚岐守 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百濟王元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신)을 肥後介에 임명하였다. 204) 貴國 : 일본에 대한 경칭으로 사용된 말이다. 日本書紀 신공황후 섭정 46년조 등에도 일본을 가리켜 귀국으로 칭하는 동일한 표현이 나온다. 205) 辰孫王 : 일본서기 에는 이 이름은 보이지 않고 해당 인물로서 王仁이 나온다. 이 辰孫王 전승 은 왕인 전승을 모방하여 만든 작문이 아닐까 하는 견해도 있다. 206) 皇太子 : 일본서기 응신천황 16년 2월조에 태자 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는 기술이 나온다. 207) 太阿郞王 : 일본서기 에는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新撰姓氏錄 右京諸蕃(船連)에 大阿郞王, 攝津諸蕃(船連)에 大阿良王 으로 나온다. 208) 敏達天皇의 치세 : 以下의 민달조의 이야기는 일본서기 敏達天皇 원년 5월조에 나온다. 권40 今皇帝 桓武天皇 延曆 10년(791) 춘정월 戊辰(7) 五位 이상의 관료들과 연회를 즐겼다. 正五位下 笠王에게 正五位上을 수여하였고, 无位 209) 西庠 : 시경에 나오는 舜 임금이 학교를 서쪽에 세웠다는 고사에서 나왔다. 여기서는 大學寮를 가리키는 것으로 보인다.

159 316 續日本紀 317 乙枚王 正六位上 守山王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으며, 從四位下 石上朝臣家成 上 賀茂朝臣人麻呂(가모노아손 히토마로)에게 伊勢守를 겸하게 하였으며, 從五位下 藤原 (이소노카미노아손 이에나리) 石川朝臣眞守(이시카와노아손 마모리)에게 각각 從四位 朝臣 麻呂(후지와라노아손 카즈라마로)를 相模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吉備朝臣與 上을 수여하였고, 正五位上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 正五位下 大伴宿 智麻呂(기비노아손 요치마로)를 相模介에 임명하였다. 近衛將監 從五位下 池原公綱主(이 弟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오토마로) 藤原朝臣眞友(후지와라노아손 마토모)에게 각각 케하라노키미 츠나누시)에게 常陸大 을 겸하게 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今川(후지와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葛井連根主(후지이노무라지 네누시)에게 正五位下를 라노아손 이마카와)을 美濃守에 임명하였으며, 正五位上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수여하였고, 從五位下 賀茂朝臣大川(가모노아손 오오카와) 多治比眞人乙安(다지히노마 슈테츠)을 下野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文室眞人大原(훈야노마히토 오오하라)을 陸奧 히토 오토야스) 大原眞人美氣(오오하라노마히토 미케) 巨勢朝臣總成(고세노아손 후사 介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安倍朝臣人成(아베노아손 히토나리)을 能登守에 임명하였고, 나리) 百濟王英孫(구다라노고니키시 에이손) 藤原朝臣繩主(후지와라노아손 나와누 從五位下 藤原朝臣淸主(후지와라노아손 키요누시)를 丹波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시) 和朝臣三具足(야마토노아손 미쿠타리) 和朝臣國守(야마토노아손 구니모리) 紀朝 布勢朝臣田上(후세노아손 타카미)을 因幡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岡繼(후지 臣楫長(키노아손 가지오사) 物部多藝宿 國足(모노노베노타기노스쿠네 구니타리)에게 와라노아손 오카츠구)를 伯耆介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岡田王을 備中守에 임명하였고,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外從五位下 菅原朝臣道長(스가하라노아손 미치나가) 秋 從五位下 大中臣朝臣弟成(오오나카토미노아손 오토나리)을 豊前守에 임명하였으며, 從 篠朝臣安人(아키시노노아손 야스히토) 正六位上 佐伯宿 岡上 紀朝臣乙佐美 路眞人 五位上 藤原朝臣園人(후지와라노아손 소노히토)을 豊後守에 임명하였다. 豊長 藤原朝臣最乙麻呂 藤原朝臣道繼 大神朝臣仲江麻呂 布勢朝臣田上 平群朝臣 嗣人 大伴宿 是成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畝火宿 淸永 安都宿 長人 佐婆部首牛養 伊與部連家守 淸道造岡麻呂에게 각각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 다. 연회가 끝나고 지위에 따라 祿을 하사하였다. 춘정월 庚午(9) 하4월 戊戌(8) 左大史 正六位上 文忌寸最弟(후미노이미키 모오토) 播磨少目 正八位上 武生連眞象(다 케후노무라지 마카타) 등이 아뢰기를, 文忌寸 등에게는 원래 두 개 家統이 있습니다. 東 文氏210)는 直이라 稱하고, 西文氏211)는 首라 稱하여, 서로 나란히 일을 하였고 그렇게 해온 지 오래되었습니다. 지금 東文氏는 一家를 들어 이미 宿 의 姓으로 되었으나, 西文氏는 无位 川原女王(가와라노오오키미) 吳岡女王(구레오카노오오키미) 正六位上 百濟王 그 恩擇에서 빠져 여전히 忌寸의 姓에 머물러 있습니다. 最弟 등은 다행히 좋은 때를 만 難波姬(구다라노고니키시 나니와히메) 无位 縣犬養宿 額子(아가타이누카히노스쿠네 났습니다. 지금 자세히 살펴보지 않는다면, 여러 代가 지난 후에, 이치를 말할 때 그 말미 누카코)에게 각각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암을 바가 없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東文氏와] 마찬가지의 영예로운 姓을 하사해 춘정월 己卯(18) 正五位上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슈테츠) 從五位下 坂上大宿 田村麻呂(사카 노우에노오오스쿠네 타무라마로)를 東海道에, 從五位下 藤原朝臣眞鷲(후지하라노아손 마와시)를 東山道에 보내어 軍士를 뽑아 검열(열병)하고 무기를 검사하게 하였다. 蝦夷 주시어, 영원히 子孫을 위해 도모할 수 있도록 해주시옵소서. 라 하였다. 勅을 내려, 그 本系를 책망하였다. 最弟 등이 아뢰길, 漢高帝의 後孫을 鸞이라고 하고, 鸞의 後孫인 王狗 때 百濟로 옮겨 갔습니다. 百濟 久素王212) 때, 聖朝가 使者를 보내어 文人을 초빙하고자 하자, 久素王은 (에미시)를 정벌하기 위해서이다. 춘정월 癸未(22) 從五位上 賀茂朝臣大川(가모노아손 오오카와)을 伊賀守에 임명하였고, 齋宮頭 從五位 210) 東文氏 : 大和(야마토 지방)에 기반을 두고 있는 東漢氏 계통의 문필 담당 씨족이다. 211) 西文氏 : 河內國 古市郡(현재 오사카 府 羽曳野市)에 기반을 두고 있는 문필 담당 씨족이다. 212) 百濟 久素王 : 귀수왕 근구수왕이라고도 한다.

160 318 王狗의 子孫인 王仁을 보내었습니다. 이는 文氏 武生氏 등의 先祖입니다. 라 하였다. 이에 最弟 및 眞象 등 8인에게 宿 의 姓을 하사하였다. 추7월 壬申(13) 從四位下 大伴宿 弟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오토마로)를 征夷大使에 임명하였고, 正五 續日本紀 319 9월 庚辰(22) 下野守 正五位上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슈테츠)에게 陸奧鎭守將軍을 겸하게 하 였다. 동10월 己亥(12) 位上 百濟王俊哲(구다라노고니키시 슈테츠) 從五位上 多治比眞人濱成(다지히노마히토 右大臣이 百濟王 등을 이끌고 百濟의 樂을 연주하게 하였다. 正五位下 藤原朝臣乙叡(후 하마나리) 從五位下 坂上大宿 田村麻呂(사카노우에노오오스쿠네 타무라마로) 從五 지와라노아손 오토에)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고, 從五位下 百濟王玄風(구다라노고니 位下 巨勢朝臣野足(고세노아손 노타리)을 각각 征夷副使에 임명하였다. 키시 겐후우) 百濟王善貞(구다라노고니키시 젠쵸우)에게 각각 從五位上을 수여하였으 추7월 丁亥(28) 從五位上 藤原朝臣是人(후지와라노아손 고레히토)을 右少辯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多治比眞人賀智(다지히노마히토 카치)를 宮內少輔에 임명하였으며, 右中辯 正五位下 多 治比眞人宇美(다지히노마히토 우미)에게 武藏守를 겸하게 하였다. 從五位下 三方宿 廣 名(미카타노스쿠네 히로나)을 上野守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佐伯宿 岡上(사에키노스 쿠네 오카노에)을 上野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百濟王忠信(구다라노고니키시 치우 신)을 越後介에 임명하였고, 從五位下 藤原朝臣大繼(후지와라노아손 오오츠구)를 備前 介에 임명하였으며, 從五位下 藤原朝臣眞鷲(후지와라노아손 마와시)를 大宰少貳에 임명 하였다. 추7월 戊子(29) 外從五位下 安都宿 長人(아토노스쿠네 나가토)을 右京亮에 임명하였다. 左中辯 從四 位下 百濟王仁貞(구다라노고니키시 닌쵸우)이 卒하였다. 8월 壬子(24) 攝津國 百濟郡213) 사람 正六位上 廣井造眞成(히로이노미야츠코 마나리)에게 連의 氏姓 을 내렸다. 213) 攝津國 百濟郡 : 和名抄에 동부 서부 남부 3鄕으로 이루어져 있는 것으로 확인이 되며, 백제 인의 집단 이주로 인하여 생긴 郡名으로 보인다. 며, 從五位下 藤原朝臣淨子(후지와라노아손 기요코)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고, 正六位 上 百濟王貞孫(구다라노고니키시 쵸우손)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이재석(동북아역사재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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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2 日本後紀 323 日 本 後 紀 六國史의 하나로 續日本紀 의 뒤를 잇는 편년체 사서이다. 전체 40권으로 840년 간행된 관찬 사서이다. 藤原緖嗣 등이 嵯峨천황의 명으로 편찬을 시작하여, 淳和천황대와 仁明천황대 등 모두 3차에 걸쳐 편찬이 이루어졌다. 平安시대 초기의 근본 史料로서 792(延曆 11)~833년(天長 10)의 시기를 다루고 있으며, 현재는 그 중 10권(桓武紀 4권, 平城紀 2권, 嵯峨紀 4권)이 전해지고 있 다. 결실된 부분은 類聚國史 日本紀略 등에 의해 어느 정도 보완할 수 있다. (新訂增補)國史 大系에 수록되었다. 권5 桓武天皇 延曆 15년(796) 11월 丁酉 11월 丁酉(10일) 無位 嶋野女王(시마노 죠오우), 百濟王孝法1)(구다라노고니키시 코오호), 百濟王惠信2)(구다라노고니키시 케이신), 和氣朝臣廣子(와케노아손 히로코), 橘朝臣常子 (다치바나노아손 츠네코), 紀朝臣內子(키노아손 우치코), 紀朝臣殿子(도노코), 藤原朝臣川 子(후지와라노아손 가와코), 錦部連眞奴(니시고리노무라지 마누) 등에게 從五位上을 수여 하였다. 無位 弓削宿 美濃人(유게노스쿠네 미노히토)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권5 桓武天皇 延曆 16년(797) 춘정월 甲午 춘정월 甲午(7일) 五位 이상의 관인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束帛을 하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從五位上 篠嶋王(시노시마 오우)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坂本王(사카모토 우오), 安曇王(아즈미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百濟 王玄鏡3)(구다라노고니키시 겐쿄), 藤原朝臣乙叡(후지와라노아손 다카도시), 多治比眞人 1) 百濟王孝法 : 百濟王孝法은 이 기사 및 연력 16년 2월조에 보이는 것 외에는 달리 등장하지 않는 다. 연력 24년(805) 11월 庚辰條에 보이는 百濟王敎法과 발음이 비슷한 점에서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도 있으나 확실하지는 않다. 2) 百濟王惠信 : 연력 23년(805) 7월에 正五位上을 수여받았으며 승화 6년 3월에 從三位에 제수되었 다. 仁明天皇 승화 9년(842) 9월에 사망하였으며 이때 지위는 散事 從三位였다. 3) 百濟王玄鏡 : 光仁天皇 보귀 6년(775) 정월에 正六位上에서 從五位下로 승진하였으며 石見守 小

163 324 海(다지히노마히토 우미)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중략) 百濟王聰哲4)(구다라노고니 키시 소테츠), 佐伯宿 鷹成(사에키노스쿠네 다카나리), 石川朝臣道益(이시가와노아손 日本後紀 325 2월 癸亥 2월 癸亥(7) 勅을 내리기를, 從五位上 嶋野女王, 百濟王孝法, 百濟王惠信, 和氣朝臣廣 미치마스), 和朝臣建男(야마토노아손 다케오), 安倍小殿朝臣野守(아베노오도노노아손 노 子, 橘朝臣常子, 紀朝臣內子, 紀朝臣殿子, 藤原朝臣川子, 錦部連眞奴, 從五位下 弓削宿 모리), 中臣丸朝臣豊國(나카도미노와니노아손 도요쿠니)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 美濃人 등의 位田은 모름지기 남자에 준하여 지급하라. 고 하였다.10) 六位上 錦部連春人, 民忌寸廣成(타미노이미키 히로나리), 山口忌寸諸上(야마구치노이미 키 모로가미), 林宿 沙婆(하야시노스쿠네 사바), 中科宿 巨都雄(나카시노노스쿠네 고 츠오)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춘정월] 庚子(13) (전략) 從五位上 高橋朝臣祖麻呂(다카하시노아손 오야마로)를 駿河守 로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百濟王元勝5)(구다라노고니키시 겐쇼우)을 安房守6)에, 從五位下 大野朝臣犬養을 上總介에 임명하였다. 大外記 外從五位下 中科宿 巨都雄을 兼常陸少 으로 삼고 從五位下 大神朝臣仲江麻呂(오오미와노아손 나카에마로)를 美濃介로 임명하 였다. 從五位下 百濟王聰哲을 出羽守로 삼고 從五位下 大枝朝臣眞仲(오오에다노아손 마 나카)을 能登守로 임명하였다. (후략) [춘정월] 辛丑(14) 傳燈大法師位 善珠(젠쥬)를 僧正으로 삼고 傳燈大法師位 等定(토죠 3월 癸丑 3월 癸丑(27) 甲斐, 下總 兩國이 굶주렸다. 사신을 보내어 賑給하였다. 從四位下 多治 比眞人繼兄(다지히노마히토 츠구에)을 中務大輔로 삼았다. 從五位下 坂本王을 雅樂頭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笠朝臣江人(가사노아손 에히토)을 民部大輔에 임명하고 信濃守는 이전과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藤原朝臣貞嗣(후지와라노아손 사다츠구)를 그 少輔로 삼고 外從五位下 葛井宿 松足(후지이노스쿠네 마츠다리)을 主計助에 임명하였다. 從五 位下 紀朝臣千世(키노아손 치요)를 刑部少輔로 삼고 外從五位下 竝槻忌寸荻麻呂를 園池 正에 임명하였다. 從四位下 紀朝臣勝長(키노아손 카츠나가)을 右京大夫로 삼고 左衛士督 造東大寺長官 美作守는 이전과 그대로 두었다. 從四位下 百濟王英孫11)(구다라노고니키시 에이손)을 右兵衛督12)에 임명하였다. 우)을 大僧都로, 傳燈大法師位 施曉(세교우)를 少僧都로 임명하였다. [춘정월] 辛亥(24) 能登國7)의 羽색(하쿠이)郡8)과 能登(노토)郡 두 郡의 沒官田 및 野 77 町을 尙侍9) 從三位 百濟王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메이신)에게 하사하였다. 권8 桓武天皇 延曆 18년(799) 2월 辛巳 2월 辛巳(7) 諱<*嵯峨太上天皇>가 殿上에서 [어른이 되는] 冠禮를 하였다.13) 五位 이상 納言 上總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연력 2년(783) 10월에 환무천황의 交野 행차 시에 수행하 였다가 從五位上을 수여받았으며, 동 6년(787) 10월 천황의 交野 행차 시에는 백제왕씨 일족을 인 솔하여 백제악을 연주하여 正五位下에 제수되었다. 4) 百濟王聰哲 : 百濟王聰哲은 이 기사 이후 出羽守 主計頭 越後守 刑部大輔 등의 관직을 역임하 였다. 5) 百濟王元勝 : 百濟王元勝은 이후 內兵庫正 鍛冶正 大判事 등의 벼슬을 역임하였다. 6) 安房守 : 安房國(아와노쿠니)의 國司들 중에서 카미(守: 최고 장관) 직책을 말한다. 참고로 당시 중 앙 조정에서 지방의 國(쿠니)에 파견되는 최고 지방 행정장관인 國司(고쿠시)는 통상 四等官(長官< 카미>-次官<스케>-判官<죠>-主典<사칸>)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카미는 守, 스케는 介, 죠는, 사칸은 目으로 대개 표기되었다. 7) 能登國 : 현재의 石川(이시카와)縣 노토 반도. 8) 羽색(하쿠이)郡 : 이시가와현 羽색郡으로 계승되었다. 의 관인에게 옷과 이불을 하사하였다. 從五位下 淸野宿 最弟(키요노노스쿠네 이야오토) 9) 尙侍 : 나이시노카미 로서 內侍 직의 우두머리를 말한다. 10) 2월 계해조의 칙 : 이 칙의 내용은 연력 15년(796) 11월에 嶋野女王 百濟王孝法 百濟王惠信 和氣朝臣廣子 橘朝臣常子 紀朝臣內子 紀朝臣殿子 藤原朝臣川子 錦部連眞奴 등이 從五位 上에, 그리고 弓削宿 美濃人이 從五位下에 각각 임명되었는 바, 그 후속 조치로서 이들에게 지 급해야 할 位田(위계에 대하여 지급하는 田)을 모두 남자들에 준하여 지급하라는 것이다. 11) 百濟王英孫 : 百濟王英孫은 이후 연력 18년(799) 2월에 右衛士督(우에지노카미)에 임명되었다. 右衛士督은 右衛門府의 장관이다. 12) 右兵衛督 : 右兵衛府의 장관(督: 카미). 13) 冠禮를 하였다 : 嵯峨太上天皇은 당시 14세였다.

164 326 日本後紀 327 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고 從三位 百濟王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메이신)에게 正三位를 從五位下 淡路眞人福良麻呂(아와지노마히토 후쿠라마로)를 少輔에 임명하였다. 侍從 從 수여하였으며 正五位上 三嶋宿 廣宅(미시마노스쿠네 히로야케)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 四位下 中臣王(나카도미 오우)을 兼左大舍人頭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粟田朝臣入鹿(아와 였다. 從五位下 高倉朝臣殿嗣(다카쿠라노아손 도노츠구)를 主計頭로 삼았다. 타노아손 이루카)을 治部少輔로 삼았다. 中納言 從三位 藤原朝臣雄友(후지와라노아손 오 [2월] 甲午(20). 正六位上 石川朝臣乙名(이시가와노아손 오토나)에게 본래의 위계 從五 位下를 되돌려 주었다. 從四位下 多治比眞人繼兄(다지히노마히토 츠구에)을 神祇伯으로 삼고 山城守 지위는 이전 그대로 두었다. 中納言 從三位 藤原朝臣雄友(후지와라노아손 오토모)를 兼中務卿으로 삼았다. 從五位下 登美眞人藤津(토미노마히토 후지츠)을 左大舍 人助로 삼았다. 從五位下 藤原朝臣岡繼(후지와라노아손 오카츠구)를 圖書頭로 임명하고 從五位上 橘朝臣安麻呂(다치바나노아손 야스마로)를 內藏頭로 삼았다. 中納言 從三位 和 14) 朝臣家麻呂(야마토노아손 이에마로)를 兼治部卿으로 삼고 從五位下 百濟王鏡仁 (구다라 노고니키시 쿄징)을 그 少輔15)로 임명하였다. 正五位下 文室眞人波多麻呂(훈야노마히토 하타마로)를 雅樂頭로 삼았으며 從四位下 粟田朝臣鷹守(아와타노아손 다카모리)를 大藏 卿으로 임명하였다. 外從五位下 嵩山忌寸道光(스세노이미키 도우코)을 大炊權助로 삼았 으며 從五位上 小倉王(오구라 오우)을 典藥頭에 임명하였다. 正五位上 秋篠朝臣安人(아 키시노노아손 야스히토)을 中衛少將으로 삼았으며 左中辨 丹波守의 지위는 이전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菅原朝臣門守(스가와라노아손 카도모리)를 人正에 삼았으며 從四位 16) 下 百濟王英孫(구다라노고니키시 에이손)을 右衛士督에 임명하되 攝津守 지위는 이전 그대로 두었다. 從四位下 紀朝臣勝長(키노아손 카츠나가)을 左兵衛督에 삼고 近江守 지 위는 이전 그대로 두었다. 從四位下 紀朝臣兄原을 右兵衛督으로 임명하고 肥後守 지위는 이전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安倍朝臣小笠(아베노아손 오가사)을 그 佐로 임명하였다. 6월 己丑 토모)를 兼民部卿으로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甘南備眞人眞野(간난비노마히토 마노)<*太 上天皇의 諱에 저촉된 때문에 神 을 고쳐 眞 으로 하였다>를 主稅頭로 임명하였다. 正 五位下 藤原朝臣大繼(후지와라노아손 오호츠구)를 大藏大輔로 임명하고 下總守의 지위 는 그대로 두었다. 從四位下 大原眞人美氣(오호하라노마히토 미케)를 大膳大夫로 임명하 고 外從五位下 村國連息繼(무라쿠니노무라지 오키츠구)를 阿波權介로 삼았다. 9월 癸卯 9월 癸卯(2) 從五位下 百濟王貞孫17)(구다라노고니키시 테이손)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 였다. [9월] 辛亥(10) 從四位下 藤原朝臣園人을 右大辨에 임명하고 大和守 지위는 그대로 하 였다. 東宮傅 從三位 大伴宿 弟麻呂(오호도모노스쿠네 오토마로)를 兼治部卿으로 임명 하였다. 正五位下 藤原朝臣仲成을 大輔兼山城守에 임명하였다. 正五位下 阿倍朝臣弟當 (아베노아손 오토아테)을 兵部大輔로 삼고 正四位下 百濟王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쿄 우)을 刑部卿18)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菅原朝臣門守를 主殿助로 삼고 從五位下 石川朝 臣道成(이시가와노아손 미치나리)을 左京亮에 임명하였다. 神祇伯 從四位下 多治比眞人 繼兄을 兼右京大夫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百濟王敎德19)(구다라노고니키시 쿄도쿠)을 上總守20)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都努朝臣筑紫麻呂(츠노노아손 츠쿠시마로)를 그 介로 삼 았다. 近衛少將 從五位上 大伴宿 是成(오호도모노스쿠네 고레나리)을 兼下野守에 임명 하고 從五位下 百濟王敎俊21)(구다라노고니키시 쿄슈)을 그 介22)로 삼았다. 式部少輔 從五 6월 己丑(16) 從五位下 石川朝臣魚麻呂(이시가와노아손 우오마로)를 左少辨에 임명하 였다. 從五位下 百濟王鏡仁을 右少辨에 임명하였다. 中納言 從三位 和朝臣家麻呂를 兼中 務卿에 임명하고 相摸守의 지위는 이전 그대로 두었다. 正五位下 大庭王을 大輔로 삼고 14) 百濟王鏡仁 : 百濟王鏡仁은 이후 右少弁 左中弁 河內守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15) 小補 : 여기서의 小補는 治部省의 장관(卿) 휘하의 차관 벼슬임. 16) 攝津守 : 攝津國의 國司 직 중에서 장관에 해당한다. 17) 百濟王貞孫 : 百濟王貞孫은 연력 10년(791) 10월에 正六位上에서 從五位下로 진급한 바 있다. 18) 刑部卿 : 刑部省의 장관직이다. 19) 百濟王敎德 : 百濟王敎德은 이후 宮內大輔 治部大輔 등을 역임하였으며 嵯峨天皇 홍인 13년 (822) 10월에 사망하였다. 이때 그는 刑部卿 從四位上의 벼슬에 있었다. 20) 上總守(카즈사노카미) : 上總國(카즈사노쿠니)의 國司 직 중 장관이다. 上總國은 지금의 치바현이다. 21) 百濟王敎俊 : 百濟王敎俊은 이후 左衛士佐 美濃守 鎭守將軍 陸奧守 下野守 出羽守 등의 관 직을 역임하였다.

165 328 日本後紀 329 位下 和氣朝臣廣世(와케노아손 히로요)를 兼阿波守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村國連息繼 지난 天平勝寶 9년 4월 4일의 勅에 의거하여 大姓30)을 고쳤으면 합니다. 라고 하였다. 眞 를 그 介로 삼았다. 老 등에게 姓 須須岐(스스키)를 하사하고, 黑足 등에게는 豊岡(도요오카)이라는 성을, 黑 麻呂에게는 姓 村上(무라카미)을, 秋足 등에게는 姓 篠井(시노노이)을, 豊人 등에게는 姓 12월 甲戌 甲戌(5) 甲斐國 사람 止彌若蟲23)(토미노와카무시), 久信耳鷹長24)(구시지노다카나가) 등 190인이 말하기를 우리들의 선조는 원래 百濟人입니다. 우러러 聖朝를 흠모하여 바다를 건너 投化하였습니다. 天朝25)의 綸旨26)가 내려 攝津職에 안치되었습니다. 후에 병인년27) 정월 27일의 格에 의거하여 다시금 甲斐國28)으로 옮겨졌습니다. 그로부터 세월이 오래 지났습니다. 엎드려 지난 天平勝寶 9년 4월 4일의 勅을 받들건대 이르기를 高麗 百濟 玉川(다마가와)을, 文代 등에게는 姓 淸岡(키요오카)을, 家繼 등에게는 姓 御井(미이)을, 貞麻呂에게는 姓 朝治(아사하리)를, 色布知에게는 姓 玉井(타마이)을 하사하였다. 권12 桓武天皇 延曆 23년(804) 춘정월 庚子 新羅人 등이 멀리서 聖化를 흠모하여 우리의 풍속으로 來附하였다. 진실로 改姓을 원한 庚子(24) 從五位下 笠朝臣庭麻呂(가사노아손 니와마로)를 大和介로 임명하고, 外從五 다면 모두 허락한다. 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저희들의 선조는 아직 蕃姓을 바꾸지 않았 位下 津宿 源(츠노스쿠네 미나모토)을 山城介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中臣朝臣弟枚(오 습니다. 엎드려 改姓할 수 있게 되기를 청합니다. 라고 하였다. 若蟲에 姓 石川(이시가 오나카토미노아손 오토히라)를 伊賀守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荒城臣忍國(오오아라키 와)을, 鷹長 등에게 廣石野(히로이시노)라는 성을 하사하였다. 노오미 오시쿠니)을 遠江介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高倉朝臣殿繼(다카쿠라노아손 도노 또 信濃國 사람 外從六位下 卦婁眞老(케이로노마오유), 後部黑足(고우호우노구로타리), 츠구)를 駿河守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眞雄(후지와라노아손 마카츠)을 近江權介 前部黑麻呂(젠호우노쿠로마로), 前部佐根人(젠호우노사네히토), 下部奈호麻呂(가호우노 로 임명하고, 大內記 從五位下 平群朝臣眞常(헤구리노아손 마츠네)을 兼大 에 임명하 나데마로), 前部秋足(젠호우노아키다리), 小縣郡 사람 无位 上部豊人(죠호우노도요히토), 고, 從五位下 和朝臣弟長(야마토노아손 오토나가)을 信濃介로 임명하였다. 中衛少將 從 下部文代(가호우노후미시로), 高麗家繼(고마노이에츠구), 高麗繼楯(고마노츠구다테), 前 四位下 巨勢朝臣野足(고세노아손 노다리)을 兼下野守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中臣朝臣 部貞麻呂(젠호우노사다마로), 上部色布知(죠호우노시코후치) 등이 말하기를 저희들의 常麻呂(오오나카토미노아손 츠네마로)를 介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佐伯宿 社屋(아에키 29) 선조는 高麗人입니다. 小治田 飛鳥 두 朝庭의 시절에 歸化하여 來朝하였습니다. 그때 노스쿠네 모리야)을 出羽守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山人(후지와라노아손 야마히 부터 이래로 대대로 平民으로서 아직 本號를 고치지 못하였습니다. 엎드려 바라옵건대 토)을 越中權介로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和朝臣氏繼(야마토노아손 우지츠구)를 越後介로 임명하고, 從四位下 安倍朝臣弟當(아베노아손 오토아테)을 丹波守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22) 介(스케) : 國司 중에서 차관을 말한다. 여기서는 下野守 휘하의 차관에 임명되었다는 내용이다. 23) 止彌若蟲 : 다른 곳에는 보이지 않는다. 토미 계열의 씨족으로는 신찬성씨록 에 登美眞人(左京 皇別) 登美連 (左京神別 上) 止美連(河內國皇別) 鳥見連(河內國神別) 登美首(和泉國皇別) 등 의 씨족이 보인다. 大和國의 登美鄕이란 지명은 止美邑에서 유래한다고 한다. 24) 久信耳鷹長 : 쿠시지 라는 성은 다른 곳에 보이지 않는다. 25) 天朝 : 여기서는 일본을 가리킨다. 26) 綸旨 : 천황의 명령을 말한다. 27) 병인년 : 天智天皇 5년(666)일 가능성이 크다. 28) 甲斐國 : 지금의 靜岡(시즈오카)縣 일대. 29) 小治田 飛鳥 두 朝庭 : 각각 推古天皇과 舒明天皇의 시대를 말한다. 淡海眞人有成(오우미노마히토 아리나리)을 介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秦公宿 宅守(오 오우즈마사노스쿠네 야카모리)를 因幡介로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石川朝臣宗成(이시카 와노아손 무네나리)을 備後守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百濟王忠宗31)(구다라노고니키시 츄 우소우)을 伊豫介32)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藤繼(우지와라노아손 후지츠구)를 大 宰少貳로 임명하였다. 正五位上 藤原朝臣 麻呂(후지와라노아손 카즈라마로)를 豊前守 30) 大姓 : 本姓을 말한다. 31) 百濟王忠宗 : 百濟王忠宗은 이후 少納言兼左兵衛佐에 임명되었다. 32) 伊豫介(이요노스케) : 伊豫國(이요노쿠니, 지금의 에히메현)의 國司 직 중 차관을 말한다.

166 330 日本後紀 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藤原朝臣眞書(후지와라노아손 마후미)를 豊後守로 임명하였다. 甲辰(28) 刑部卿 陸奧出羽按察使 從三位 坂上大宿 田村麻呂(사카노우에노오오스쿠네 타무라마로)를 征夷大將軍33)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百濟王敎雲34)(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 운) 從五位下 佐伯宿 社屋(사에키노스쿠네 모리야) 從五位下 道嶋宿 御楯(미치시마 35) 노스쿠네 미다테)을 副將軍에 임명하고, 軍監 8인, 軍曹 24인을 두었다. 331 과분한 出世를 했지만, 하늘이 내린 才質은 不足했다고 할 수 있다. 귀한 자리(직)에 있다 고 해도 故人40)을 만나면 신분이 낮음에도 싫어하지 않고 握手하며 말하였다. 이 광경을 본 者는 감격하였다. 享年 71세였다. 추7월 己卯 추7월 己卯(7) 相撲(스모)를 관람하였다.41) (전략) 從五位上 紀朝臣內子(기노아손 우치 코) 川上朝臣眞奴(가와카미노아손 마누) 百濟王惠信(구다라노고니키시 케이신) 藤原 하4월 壬子 하4월 壬子(8) (전략) 侍從 從四位下 葛野王(카도노 오우)을 兼主馬頭로 임명하고, 從五 位下 紀朝臣田上(키노아손 타가미)을 內廐助로 임명하고, 從五位下 百濟王元勝을 內兵庫 正36)에 임명하였다. 朝臣川子(후지와라노아손 가와코) 紀朝臣殿子(기노아손 도노코)에게 正五位上을, 无位 藤原朝臣上子(후지와라노아손 가미코) 橘朝臣御井子(다치바나노아손 미이코) 紀朝臣 乙魚(기노아손 오토우오) 坂上大宿 春子(사카우에노오오스쿠네 하루코)에게 從五位上 을 수여하였다. 辛未(27) 制 하기를, 침식되어 하천이 된 土地는 많은 田籍에서 제외됨에도 불구하고 새로 田이 된 토지에 대한 言上은 듣지 못하였다. 西岸이 유실되어 公田이 없어지면 東岸 에 새로 토지가 出現하도록 되어 있으나, 私地로 점거당해 버렸다. 이대로 수년이 경과하 면 公田의 損失은 얼마나 될 것인가. 모름지기 天平 14년 이후 새로 출현한 田數를 상세 히 조사하여 言上하라. 빠트리거나 허술해서는 안 된다. 中納言 從三位 和朝臣家麻呂(야마토노아손 이에마로)가 薨하였다. 從二位 大納言을 追 37) 贈하였다. 家麻呂는 贈正一位 高野朝臣弟嗣 (다카노노아손 오토츠구)의 孫으로 先祖는 百濟國 사람이다. 성격은 과묵(木訥)하고 才學은 부족하지만, 天皇의 外戚인 관계로 특히 발탁되어 승진하였다. 蕃人38)이 相府에 들어간 것이39) 이로부터 시작되었다. 人臣으로서 권12 桓武天皇 延曆 24년(805) 춘정월 丙戌 춘정월 丙戌(16) 參議 從四位下 秋篠朝臣安人을 右大辨에 임명하고, 近衛少將 勘解由長 官 阿波守는 원래대로 두었다. 從四位下 橘朝臣安麻呂(다치바나노아손 야스마로)를 左中 辨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百濟王鏡仁(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진)을 右中辨42)에 임명하였 다. 從四位上 藤原朝臣葛野麻呂를 刑部卿에 임명하고, 越前守는 그대로 두었다. 천황이 五位 이상인 자에게 연회를 베풀고 物을 하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권13 桓武天皇 延曆 24년(805) 33) 征夷大將軍(세이이다이쇼군) : 후대 막부시대 사무라이들의 최고의 지위인 將軍(쇼군)의 유래가 되는 관직이다. 征夷의 夷 는 단순히 東夷 혹은 오랑캐를 나타내는 추상적인 말이 아니라 일본 열도의 동북부에 거주하고 있던 蝦夷(에미시) 집단을 가리킨다. 즉 蝦夷의 夷 인 것이다. 34) 百濟王敎雲 : 여기에만 보이는 인물이다. 35) 軍曹 : 정토군의 四等官으로서 令(軍防令)의 규정에 의하면 1만 명 이상에 대하여 軍曹 4인을 둔 다고 되어 있다. 36) 內兵庫正 : 內兵庫司의 장관이다. 37) 高野朝臣弟嗣 : 환무천황의 생모인 高野新笠(다카노노니이가사)의 부친이며 환무천황에게는 외 할아버지가 된다. 연력 9년(790) 11월에 正一位를 추증받았다. 38) 蕃人 : 和朝臣家麻呂가 백제계 도래인 출신이기 때문에 이렇게 표현한 것이다. 9월 己丑 9월 己丑(24) 傳燈大法師位常騰을 少僧都로, 從五位上 百濟王聰哲(구다라노고니키시 39) 相府에 들어감 : 公卿이 되는 것을 말한다. 40) 故人 : 여기서의 故人은 옛 知人을 말한다. 41) 相撲(스모) 관람 : 스모를 관람하는 것은 매년 7월 7일 거행되는 연중행사의 하나이다. 42) 右中辨 : 正五位 상당의 관인이 취임할 수 있는 태정관 휘하의 弁官 조직의 일부

167 332 소우데츠)을 主計頭43)로, 從四位下 橘朝臣安麻呂를 常陸守로, 從五以下 大伴宿 眞城麻 呂(오오토모노스쿠네 마키마로)를 能登守로 임명하였다. 11월 庚辰 11월 庚辰(15) 曲宴이 열렸다. 次侍從 以上인 자에게 의복을 하사하였다. 相模國44) 大住 郡 田 2町을 從四位下 百濟王敎法45)(구다라노고니키시 교우호우)에게 하사하였다. 권13 桓武天皇 大同 원년(806) 춘정월 癸巳 日本後紀 333 3월 壬午 3월 壬午(18) 中納言 從三位 藤原朝臣內麻呂가 參議 正四位下 藤原朝臣繩主 從四位下 藤原朝臣緖嗣 從四位下 秋篠朝臣安人 散位 從四位上 五百枝王을 引率하여 天皇의 死 體를 入棺하였다. 正三位 藤原朝臣雄友 從三位 藤原朝臣內麻呂 藤原朝臣葛野麻呂 從四位上 五百枝王 正四位下 藤原朝臣繩主 從四位上 藤原朝臣園人 正五位下 御長眞 人廣岳 從五位上 藤原朝臣繼彦 石川朝臣河主 從五位下 池田朝臣春野 藤原朝臣永 貞 紀朝臣색麻呂 息長眞人家成 및 六位 이하 7인을 御裝束司48)에 임명하고, 從三位 藤 原朝臣乙叡 紀朝臣勝長 從四位上 吉備朝臣泉 從四位下 藤原朝臣仲成 文室眞人八 太麻呂 正五位下 藤原朝臣黑麻呂 布勢朝臣尾張麻呂 從五位上 淡海眞人福良麻呂 춘정월 癸巳(28) 從四位下 藤原朝臣仲成(후지와라노아손 나카나리)을 大和守로 임명하 從五位下 路眞人年繼 및 六位 이하 8인을 山作司49)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田口朝臣息 고, 從五位上 百濟王鏡仁을 河內守46)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紀朝臣南麻呂(기노아손 미나 繼 田中朝臣八月麻呂 및 六位 이하 6인을 養役夫司50)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安倍朝臣益 미마로)를 介로 임명하였다. (중략) 大內記 從五位下 平群朝臣眞常(헤구리노아손 마츠네) 成 外從五位下 秦宿 都伎麻呂 및 六位 이하 3인을 作方相司51)에 임명하고, 正五位上 을 兼近江權介에 임명하고, 左衛士佐 從五位下 百濟王敎俊(구다라노고니키시 교우슈)을 大野朝臣直雄(오오노노아손 마오) 從五位下 百濟王敎俊 및 六位 이하 3인을 作路司52)에 兼美濃守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坂本朝臣佐太氣麻呂(사카모토노아손 사타케마로)를 임명하였다. 左右京 五畿內 近江 丹波의 人夫 5천인을 동원하기로 하였다. 從三位 信濃介에 임명하였다. (후략) 藤原朝臣葛野麻呂 從四位上 藤原朝臣園人을 權參議에 임명하였다. 2월 庚戌 4월 戊申 2월 庚戌(16) (전략) 外從五位下 出雲連廣貞(이즈모노무라지 히로사다)은 典藥助에 임 4월 戊申(15) 四七齋를 佐比(사이) 鳥戶(도리베) 崇福寺에서 행하였다. 이날 右兵庫 명하고, 美作權 은 원래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百濟王元勝(구다라노고니키시 겐쇼우)은 頭 從五位下 佐伯王(사에키 오우) 左衛士佐 從五位下 百濟王敎俊 등을 伊勢國53)(이세노 鍛冶正47)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下毛野朝臣年繼(시모츠케누노아손 도시츠구)는 官奴正에 쿠니)에 파견하여 齋內親王54)을 맞이하도록 하였다. 임명하였다. (후략) 하5월 甲子朔 하5월 甲子朔(1) (중략) 이날 正五位下 和氣朝臣廣世(와케노아손 히로요)를 左中辨에 임 43) 主計頭 : 民部省 산하의 主計寮의 우두머리이다. 44) 相模國(사가미노쿠니) : 지금의 가나가와현이다. 45) 百濟王敎法 : 환무천황의 女御로서 홍인 2년(811) 정월에도 山城國 乙訓郡 白田 1町을 하사받았 다. 승화 7년 11월에 사망하였다. 46) 河內守 : 河內國(가와치노쿠니)의 國司 중 장관 직책이다. 47) 鍛冶正 : 鍛冶司(카네치노츠카사)은 궁내성에 소속된 관사로서 鍛冶正(가네치노카미)은 그 최고 우두머리. 48) 御裝束司 : 환무천황의 장례식 절차에 수반되는 제반 도구와 물품을 관장하는 임시 관사이다. 49) 山作司 : 무덤을 만드는 일을 맡은 임시 관사. 50) 養役夫司 : 무덤을 만드는데 동원되는 인부들을 관리하는 일을 맡은 임시 관사. 51) 作方相司 : 方相氏(음양도의 수호신)를 만드는 일을 맡은 임시 관사. 52) 作路司 : 장례 행렬이 무덤이 만들어져 있는 곳까지 가기 위해 길을 만드는 일을 맡은 임시 관사. 53) 伊勢國 : 지금의 미에(三重)縣 伊勢 地方. 54) 齋內親王 : 이세신궁에서 각종 의식을 주관하였다.

168 334 日本後紀 명하고, 大學頭 美作守는 그대로 두었다. 從四位下 吉備朝臣泉(키비노아손 이즈미)을 式 部大輔에 임명하고, 正五位上 三諸朝臣綿麻呂를 侍從에 임명하고, 播磨守는 그대로 두었 335 石津麻呂(사카노우에노오오스쿠네 이시즈마로)를 右馬頭에 임명하고, 外從五位下 道 嶋宿 御楯(미치시마노스쿠네 미다테)을 陸奧鎭守 副將軍에 임명하였다. 55) 다. 正五位上 藤原朝臣繼業은 兵部大輔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百濟王聰哲은 越後守 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安倍朝臣小笠(아베노아손 오가사)은 介에 임명하였다. 추7월 甲申 추7월 甲申(4) 勅을 내리기를 鎭守府59)의 將官의 任務는 변경을 수비하는 것이며, 비상 시에 대비하여 조금이라도 부족함이 있어서는 안 된다. 지금 듣자하니, 鎭守將軍 從五位 권17 平城天皇 大同 3년(808) 下 兼陸奧介 百濟王敎俊은 遠方의 鎭守府를 떠나 항상 陸奧國府60)에 있다고 한다.61) 혹시 6월 甲寅 非常 사태가 생기면 적절히 대처할 수 있겠는가? 邊境의 將軍의 태도가 이러해서는 안 6월 甲寅(3) 山城國 久世郡의 땅 6町을 高丘親王(다카오카 신노우)에게 하사하였다. 散 位 從三位 藤原朝臣乙叡(후지와라노아손 다카도시)이 薨하였다. 右大臣 從一位 豊成(도 요나리)의 孫이며, 右大臣 贈從一位 繼繩(츠구사다)의 子이다. 母는 尙侍(나이시노카미) 百濟王明信으로 桓武天皇의 寵愛를 받았다. 乙叡는 父母 때문에 두루 높은 요직을 역임 하였으며 中納言에 이르렀다. 완고한 성격에 妾을 좋아하였다. 山水 좋은 곳에 많은 別莊 56) 을 짓고 여성과 함께 그 곳에서 며칠씩 머무르기도 하였다. 推國天皇 (오스쿠니노스메라 미고토)이 太子일 적에 乙叡는 宴席에서 가까이 앉아 술을 쏟는 不敬을 저지른 적이 있 다. 天皇은 이것을 가슴속에 응어리로 두었다가 後에 伊豫親王(이요 신노우)의 사건에 連 坐하였다. 乙叡가 사면되어 돌아온 후 자신이 無罪임을 알고 울분을 품은 채 죽었다. 享 年 48세였다. 庚申(9) 從五位下 多治比眞人全成(다지히노마히토 마타나리)을 雅樂助에 임명하고, 從 五位下 笠朝臣庭麻呂(가사노아손 니와마로)를 玄蕃助에 임명하였다. 正五位下 百濟王聰 哲을 刑部 大輔57)에 임명하고 越後守는 그대로 두었다. 從五位下 紀朝臣良門(기노아손 요 된다. 앞으로는 이러한 일이 없도록 하라. 고 하였다. 攝津國 河邊郡 畝野牧을 폐지하였 다. 목장의 말이 달아나 백성의 生業에 피해를 주고 있기 때문이다. 9월 甲申 9월 甲申(5) (전략) 從五位上 多治比眞人八千足을 大藏大輔에 임명하고, 正五位下 百濟 王敎德(구다라노고니키시 교토쿠)을 宮內大輔62)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上 高橋朝臣祖麻呂 (다카하시노아손 오야마로)를 大膳大夫에 임명하고, 安藝守는 그대로 두고, 從五位下 大 原眞人眞福(오오하라노마히토 마후쿠)을 備後守에 임명하였다. 11월 甲午 11월 甲午(17) 雜舞와 大歌 및 五節舞를 奏하였다. 由貴(유키) 主基(스키) 兩國의 國郡 司와 人夫에게 물품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이날 從五位下 葛井王(후지이 오우) 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고, 正六位上 新城王(니이키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고, 從 四位下 三諸朝臣眞屋麻呂(미모로노아손 마야마로) 藤原朝臣大繼(후지와라노아손 오오 시카도)을 大和介에 임명하고, 鎭守將軍 從五位下 百濟王敎俊을 兼陸奧介58)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坂上大宿 大野(사카노우에노오오스쿠네 오오노)를 權介에 임명하였다. 從五 位上 藤原朝臣淸主(후지와라노아손 키요누시)를 左馬頭에 임명하고, 從五位上 坂上大宿 55) 越後守 : 越後國(에치고노쿠니, 지금의 니이가타 현)의 國司 중의 장관 직책 56) 推國天皇 : 여기서는 平城天皇을 말한다. 57) 刑部 大輔(교부노다이후) : 刑部省의 차관급 벼슬이다. 형부성은 刑部卿(장관)-刑部大輔, 刑部少 輔(차관)-刑部大丞, 刑部少丞(判官)-刑部大錄, 刑部少錄(主典) 등의 四等官制로 구성되어 있다. 58) 兼陸奧介 : 陸奧國(무츠노쿠니, 지금의 미야기현 이와테현 아오모리현 일대)의 國司 중에서 차 관급의 직책을 겸직한다는 의미. 59) 鎭守府 : 진수장군의 주둔지가 있는 곳으로 陸奧國 택城에 있었다. 60) 陸奧國府 : 陸奧國의 國司가 근무하는 관청을 말하는 것으로서 陸奧國 多賀城(다가죠, 현재 미야 기현 多賀城市에 소재)에 있었다. 61) 百濟王敎俊 : 陸奧國의 國司로서 國府에 나가 근무해야 하는 입장이기도 하였지만 本官이 어디까 지나 진수장군이었기에 진수부에 상주할 의무도 있었다. 62) 宮內大輔 : 宮內省의 차관이다.

169 336 日本後紀 337 츠구)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고, 正五位上 藤原朝臣繼業(후지와라노아손 츠구나리) 正 唐樂師 12인이며 橫笛師는 2인이다. 高麗樂師(고마가쿠시)는 4인이며 橫笛 莫 五位下 安倍朝臣鷹野(아베노아손 다카노)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高橋朝 目 舞 등의 師이다. 百濟樂師(구다라가쿠시) 4인은 橫笛 臣祖麻呂(다카하시노아손 오야마로) 藤原朝臣繼彦(후지와라노아손 츠구히코) 藤原朝 다. 新羅樂師(시라기가쿠시) 2인은 琴과 舞의 師이다. 度羅樂師66)(토라가쿠시) 2인은 鼓 臣道雄(후지와라노아손 미치오) 紀朝臣田上(기노아손 다카미) 藤原朝臣眞雄(후지와라 와 舞의 師이다. 伎樂師67)는 2인, 林邑樂師68)(린유우가쿠시)는 2인이다. 64) 莫目65) 舞 등의 師이 노아손 마오)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고, 從五位下 永原朝臣最弟麻呂 大伴宿 人益(오 오토모노스쿠네 히토마스) 石川朝臣繼人(이시가와노아손 츠구히토) 三嶋眞人年嗣(미 시마노마히토 도시츠구) 百濟王元勝(구다라노고니키시 겐쇼우) 多治比眞人今麻呂(다 지히노마히토 이마마로) 紀朝臣繩麻呂(기노아손 다다마로) 讚岐公千繼(사누키노키미 치츠구) 藤原朝臣山人(후지와라노아손 야마히토) 安倍朝臣眞勝(아베노아손 마카츠) 大中臣朝臣智治麻呂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권17 平城天皇 大同 4년(809) 춘정월 癸巳 춘정월 癸巳(16) 春宮亮 從五位下 藤原朝臣冬嗣(후지와라노아손 후유츠구)를 兼侍從에 임명하고, 齋宮頭 從五位下 文室眞人正嗣(훈야노마히토 마사츠구)를 兼上總守에 임명하 고, 從五位下 息長丹生眞人文繼를 介에 임명하고, 左近衛少將 從五位下 大伴宿 和武多 麻呂(오오토모노스쿠네 와무타마로)를 兼常陸權介에 임명하였다. 從五位下 百濟王敎俊 을 下野守63)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谷忌寸野主(타니노이미키 노누시)를 豊後介에 임명하 고, 從五位下 佐伯宿 耳麻呂(사에키노스쿠네 미미마로)를 陸奧鎭守將軍에 임명하였다. 2월 己未 2월 己未(13) (전략) 從五位上 安倍朝臣眞勝을 大學頭에 임명하고, 備中守는 그대로 두 었다. 從五位上 百濟王元勝을 大判事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伊勢朝臣繼麻呂(이세노아손 츠구마로)를 主殿助에 임명하였다. (후략) 3월 丙寅 3월 丙寅(21) 雅樂寮의 여러 종류의 樂師의 인원수를 정하였다. 歌舞師 4인, 笛師 2인, 63) 下野守 : 下野國(시모츠케노쿠니, 현재 도치기현)의 國司 중 장관 직책. 권20 嵯峨天皇 弘仁 원년(810) 9월 甲寅 9월 甲寅(17) 越前介 從五位下 阿倍朝臣淸繼(아베노아손 키요츠구)와 權69) 少 70) 百濟 71) 王愛筌 (구다라노고니키시 아이센) 등은 太上天皇이 伊勢國에 행차한다는 소식을 듣고 병사를 동원하여 이에 응하고, 新任의 越前介 從五位下 登美眞人藤津(토미노마히토 후지 츠)을 체포하고 사무 인계를 하지 않았다.72) 民部少輔 從五位下 紀朝臣南麻呂(기노아손 64) : 공후는 백제에서 전래된 것이며 백제에서 왔기 때문에 당시 일본에서는 구다라고토 라고 부르고 있었다. 흔히 百濟琴이라고도 하였다. 65) 莫目 : 대나무로 만든 縱笛 66) 度羅 : 중앙아시아로 보는 견해와 남방의 타이 일대로 보는 견해가 있다. 67) 伎樂師 : 기악(즉 吳樂)을 가르치는 교관. 기악은 推古天皇의 시대에 가장 먼저 일본에 전래되었다. 68) 林邑 : 지금의 베트남 69) 權 : 權官(곤칸)은 율령제에 규정된 正官 이외의 官의 하나이다. 正官으로서는 자격이 부족하지만 사무에 숙달된 자를 편의적으로 관에 임명하여 급료를 주었던 임시의 관에서 비롯되었다. 781년 員外官의 폐지 이후 권관은 정관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었다. 처음에는 지방관에만 한 정하여 실시하였지만 점차 중앙의 관에도 시행하게 되었다. 특히 지방관의 경우는 급료만을 받기 위해 임명되는 경우가 늘어나면서 실제 현지에 부임하지 않는 경향을 조장하고 이것이 결국은 지 방관제의 문란을 가져오는 결과를 낳았다. 70) 少 : 당시 일본의 지방 편제 단위인 國은 그 규모에 따라서 大國-上國-中國-下國으로 분류되 고 있었는데 少 (쇼우죠우)는 大國에 한해 설치되어 있었다. 國司 중에서도 判官 급의 직책 71) 百濟王愛筌 : 仁明天皇 천장 10년(833) 6월의 처분으로 인해, 과거 쿠스코(藥子)의 변에 연좌되어 귀양살이를 하던 사람들이 近國으로 귀양지를 옮기는 것이 허락되어 百濟王愛筌도 安房國(아와노 쿠니, 지금의 치바현)에서 三河國(미카와노쿠니, 지금의 아이치현)으로 옮기게 되었다. 72) 國司의 사무 인계 : 國司의 임기 만료 혹은 해임 등의 사유로 國司의 교대가 이루어질 때에는 전 임자는 分付, 후임자는 受領 이라는 소위 업무 인수 인계 절차를 거치게 되어 있었다. 즉 전임 자는 재임 중의 문서(발행 공문서와 수령 공문서), 관아와 여러 가지 器物 官物의 출납을 기록한

170 338 미나미마로) 등을 파견하여 勘問하자 죄를 자복하였다. 淸繼 以下는 원래 죽을 죄에 해당 하나 輕減하여 먼 곳으로 유배보냈다. (후략) 권21 嵯峨天皇 弘仁 2년(811) 춘정월 甲子 日本後紀 339 권22 嵯峨天皇 弘仁 3년(812) 춘정월 丙寅 춘정월 丙寅(7) 无品 佐味親王(사미 신노우)에게 四品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多賀王 (다가 오우)에게 正五位上을 수여하고, 无位 石野王(이시노 오우) 正六位上 原王(하라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고, 從四位上 文室朝臣眞屋麻呂(훈야노아손 마야마로)에게 춘정월 甲子(29) 從四位上 藤原朝臣冬嗣(후지와라노아손 후유츠구)를 參議에 임명하 正四位下를 수여하고, 從四位下 藤原朝臣今川(후지와라노아손 이마가와)에게 從四位上 고, 나머지 [보유]관직은 그대로 두었다. 從七位下 菅原朝臣淸人(스가하라노아손 키요히 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百濟王敎德 小野朝臣野主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고, 從五位 토) 正六位上 朝野宿 鹿取(아사노노스쿠네 카토리)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고, 從六位 上 紀朝臣百繼(기노아손 모모츠구)에게 正五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下 勇山連文繼(이사야마노무라지 후미츠구)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小 野朝臣野主(오노노아손 노누시)를 左中辨에 임명하고 (중략) 從五位上 藤原朝臣藤成(후 지와라노아손 후지나리)을 播磨介에 임명하였다. 山城國73) 乙訓(오토쿠니)郡 白田74) 1町 을 從四位下 百濟王敎法에게 하사하였다. 이날 勅을 내려 말하기를 (하략) 하4월 己丑 하4월 己丑(26) 阿波國75) 사람 百濟部76)廣濱77)(구다라베노 히로하마) 등 1백인에게 百濟 78) 公 (구다라노키미)을 賜姓하였다. 장부와 正倉에 수납되어 있는 現物을 후임자에게 인도해야 하며(이것을 分付 라고 함) 이것을 수령한 후임자는 전임자의 임기 중에 과실 혹은 태만, 나아가 결손이 없었음을 증명하는 解由狀 을 전임자에게 발급해 주게 하였던 것이다. 그렇지만 현실에서는 전임자가 관물의 손실 혹은 납 입하여 보충해 넣어야 할 부분을 제대로 이행하지 않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에 법제를 정비하기 위해 연력 22년에는`延曆交替式a이 제정되었다. 또한 不與解由狀 제도가 시행되어, 교대 시에 후임자가 전임자에게 解由狀을 발급해 줄 수 없는 경우에는 그 내용을 적은 不與解由狀을 작성하 여 國司의 교대가 이루어지게 하였다. 73) 山城國(야마시로노쿠니) : 지금의 교토府 지역이다. 74) 白田 : 로 되어 있는 판본도 있다. 75) 阿波國(아와노쿠니) : 지금의 도쿠시마현이다. 76) 百濟部 : 통상 백제인 출신으로 구성된 雜戶 집단에서 유래한 말로 생각된다. 百濟戶와 마찬가지 로 內藏寮와 大藏省에 소속되어 있었다. 77) 百濟部廣濱 : 여기에서만 보이는 인물이다. 78) 百濟公 : 百濟君이라고도 한다. 속일본기 천평보자 5년 3월조에 백제인 余民善女 등 4인에게 百濟公을 사성하는 기사가 보인다. 신찬성씨록 左京諸蕃 下에 出自百濟國都慕王二十四世孫汶 辛未(12) 右京 사람 正六位上 飛鳥戶造79)善宗80)(아스카베노미야츠코 요시무네) 河內國 사람 正六位上 飛鳥戶造名繼(아스카베노미야츠코 나츠구)에게 百濟宿 81) (구다라노스쿠 네)를 賜姓하였다. 式部卿 三品 葛原親王(가즈하라 신노우)을 兼大宰帥에 임명하였다. (후략) 3월 丁丑 3월 丁丑(19) 從五位下 百濟王敎勝(구다라노고니키시 쿄쇼우)을 刑部少輔82)에 임명하 고, 外從五位下 林忌寸眞永(하야시노이미키 마나가)을 大炊助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多 治比眞人船主(다지히노마히토 후나누시)를 右京亮에 임명하였다. 11월 乙亥 11월 乙亥(20) 從五位下 百濟王敎俊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고 出羽守83)에 임명하였다. 淵王也 라고 나오며, 동 右京諸蕃 下에 因鬼神感和之義, 命氏謂鬼室, 廢帝天平寶字三年, 改賜, 百濟公姓 으로, 또 동 和泉國諸蕃에 出自百濟國酒王也 라고 나온다. 79) 飛鳥戶造 : 이 씨족은 신찬성씨록 右京諸蕃 下에 出自百濟國比有王也, 동 河內國諸蕃에 出 自百濟國比有王男琨伎王也, 百濟國末多王之後也 라고 나온다. 아스카베는 河內國 安宿(아스 카)郡에서 유래한 것으로서 현재 오사카府 하비키노시와 南河內郡 일대이다. 80) 飛鳥戶造善宗 : 여기에서만 보이는 인물이다. 81) 百濟宿 : 신찬성씨록 右京皇別 上에 良岑朝臣 항에 환무천황의 女孺였던 百濟宿 永繼가 良 岑朝臣安世를 낳았다고 하는 관련 기사가 보인다. 82) 刑部少輔 : 刑部省의 차관 급 관직.

171 340 日本後紀 권22 嵯峨天皇 弘仁 4년(813) 권24 嵯峨天皇 弘仁 6년(815) 춘정월 辛酉 춘정월 庚辰 341 춘정월 辛酉(7) 五位 이상에게 豊樂院에서 연회를 베풀었다.84) 음악을 연주하고 祿을 하 춘정월 庚辰(8) 正六位上 石田王(이시다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고, 正五位下 大 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正四位下 吉備朝臣泉(키비노아손 이즈미)에게 正四位上 原眞人淨子(옹하라노마히토 키요코)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고, 外從五位下 凡直古刀自 을 수여하고, 從四位上 秋篠朝臣安人(아키시노노아손 야스히토)에게 正四位下를 수여하 (오오시노아타이 고토지)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고, 從八位下 百濟宿 四千子86)(구다라 고, 正五位下 石川朝臣河主(이시가와노아손 가와누시) 藤原朝臣道繼(후지와라노아손 노스쿠네 요치코) 无位 大網公嶋刀自(오오요사미노키미 시마토지)에게 外從五位下를 미치츠구) 從五位上 安倍朝臣男笠(아베노아손 오가사)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 수여하였다. 五位上 藤原朝臣三守(후지와라노아손 미모리) 大枝朝臣繼吉 坂上大宿 鷹養(사카노 우에노오오스쿠네 다카카이)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고, 從五位下 百濟王忠宗(구다라노 고니키시 츄소우) 安倍朝臣犬養(아베노아손 이누카이) 安倍朝臣益成(아베노아손 마스 나리) 佐伯宿 長繼(사에키노스쿠네 나가츠구) 小野朝臣岑守(오노노아손 미네모리)에 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후략) 甲子(10) 從五位下 藤原朝臣弟川(후지와라노아손 오토가와)을 伊勢介에 임명하고 (중 략) 右衛門佐 從五位下 安倍朝臣雄能麻呂(아베노아손 오노마로)를 兼介에 임명하고, 少 納言 從五位上 百濟王忠宗을 兼左兵衛佐에 임명하였다. 2월 庚申 2월 庚申(18) 百濟王 등이 奉獻하였다.87) 五位 이상과 六位 이하 및 百濟王 등에게 祿을 하사하였는데 차등이 있었다. 동10월 壬子 동10월 壬子(15) 散事88) 從二位 百濟王明信이 薨하였다. 이재석(동북아역사재단) 권24 嵯峨天皇 弘仁 5년(814) 9월 庚辰 9월 庚辰(7) 從四位下 百濟王敎德을 治部大輔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紀朝臣長田麻呂(기 노아손 나가타마로)를 宮內大輔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大伴宿 乎智人(오오토모노스쿠네 오치히토)을 左京亮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中科宿 善雄(나카시나노스쿠네 요시오)을 東宮 學士에 임명하고, 從五位下 紀朝臣貞成(기노아손 사다나리)을 造西寺次官에 임명하였다. 壬午(9) 神泉苑에 행차하였다.85) 文人에게 명하여 詩를 짓게 하였다. 83) 出羽守(데와노카미) : 出羽國(데와노쿠니, 현재 야마가타현과 아키다현 일대) 國司 중에서 장관 급 관직. 84) 豊樂院에서 연회 : 정월 7일날 마다 거행하는 정례 연회이다. 85) 神泉苑에 행차 : 매년 9월 9일이 되면 개최하는 절기 행사이다. 86) 百濟宿 四千子 : 여기에서만 보이는 사람이다. 87) 백제왕의 봉헌 : 2월 17일 기미조에 천황의 交野 행차 기사가 있으므로 이와 관련된 일로 보인다. 88) 散事 : 여기서는 관직이 없는 지위가 높은 여성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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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 續日本後紀 345 續 日 本 後 紀 六國史 중 네 번째 勅撰史書. 전체 20권. 855년 文德천황의 명으로 右大臣 藤原良房 등이 편 찬을 시작하여 869년 완성하였다. 833(天長 10)~850년(嘉祥 3)까지 仁明천황 1代의 사적을 기 록한 실록체 사서로, 내용은 유교적인 의례, 천황의 동정, 궁중행사 기사가 자세하게 수록되었 다. 율령이나 국가의 동향을 전하는 기사는 비교적 적다. 외교 怪異 등의 기사가 많고 4위 이상 귀족 관인의 薨卒전기에는 성품과 관련된 사적을 기록하고 있다. (新訂增補)國史大系에 수록되 었다. 권1 仁明天皇 天長 10년(833) 하4월 戊午朔 천황1)이 紫宸殿(시신덴)2)에 납시었다. 侍臣들에게 술을 내렸고 음악이 이어졌다. 右京 大夫,3) 종4위하 百濟王勝義(쿠다라노코니키시쇼우기)4)가 백제국 풍속무(음악과 춤)를 연 주하였다. 1) 천황 : 淳和(쥰나)天皇(786~840). 재위 823~833, 제53대 천황. 桓武(칸무)천황의 제3황자. 어머 니는 藤原旅子. 2) 紫宸殿 : 平安宮 內裏의 正殿(1985, 國史大辭典 6, 吉川 弘文館, 792~793쪽). 3) 右京大夫 : 일본 율령제에서 京師의 사법 행정 경찰을 담당한 관청을 京職이라고 하였는데, 주 작대로의 동쪽을 左京職이 서쪽을 右京職이 담당하였다. 右京職의 장관을 右京大夫라고 하였다. 弘仁년간(810~823)에 檢非違使를 새로 두어 京都의 치안유지를 담당하게 하면서 京職은 유명무 실화하였다. 4) 百濟王勝義 : 780~855. 百濟王善光의 6대손. 할아버지는 百濟王元忠이며 아버지는 玄風이다(김 은숙, 2007,`일본율령국가의 백제왕씨a, 백제사대계 연구총서 7 百濟遺民들의 活動,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93쪽). 延曆 25년(806) 大學少允이 되고 이후 大同 4년(809) 右京少進, 大同 5년 에 藏人 左衛門大尉가 되었다. 弘仁 7년(816) 종5위하로 승진하고 弘仁 10년(819)에 左衛門佐가 되었고, 弘仁 11년(820)에 相摸介를 겸임하였다. 弘仁 12년(821)에 종5위상으로 승진하고 弘仁 13 년(821)에 但馬守가 되었다. 天長 4년(827)년에는 美作守를 겸임하고 정5위하로 승진하였다. 天長 6년(829) 종4위하로 右京大夫가 되었다. 그리고 天長 10년(833) 4월에 紫寢殿에서 백제국의 風俗 舞를 연주하고 그해 11월 左衛門督으로 임명되었다. 承和 2년(835)에 종4위상으로 승진하고 承和 4년(837) 1월 相摸守로 임명되었으나 그해 6월 宮內卿으로 임명되었다. 承和 6년(839) 종3위로 승진하고 承和 9년(842) 相摸守를 겸임하였다. 齊衡 2년(855) 76세로 사망하였다.

174 346 天長 10년(833) 하4월 己卯 천황이 內裏5)로 옮겨가셨다. 攝津國 百濟郡6)의 황폐해진 밭 27정을 源朝臣勝7)에게 주었다. 續日本後紀 347 의 아들11) 등은 모두 近國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하였다. 종5위하 藤原朝臣貞本(후지와라 노아손사다모토)12)은 특별히 방면하여 입경할 수 있도록 하였다. 天長 10년(833) 6월 己巳 권2 仁明天皇 天長 10년(833) 6월 甲子 그리고 지난 弘仁 원년 사건8)에 연좌되어 유배된 사람은 비록 스스로 국가의 법을 어겼 지만 오래동안 숨어 지내고 있었던 것을 가엽게 여겨 安倍朝臣淸繼(아베노아손키요츠 구),9) 百濟王愛筌(쿠다라노코니키시아이센),10) 故 藤原朝臣仲成(후지와라노아손나카나리) 죄인 安倍朝臣淸繼13)는 원래 伯耆國(호우키노쿠니)14)에 유배되었으나 이제 美作國(마마 사카노쿠니)15)으로 옮겼다.16) 百濟王愛岑17)은 원래 安房國(아와노쿠니)18)이었으나 이제 參 河國(미카와노쿠니)19)으로 옮겼다. 天長 10년(833) 8월 戊戌 備前國(비젠노쿠니)20) 사람 直講博士( 코우하카세),21) 정6위상 韓部廣公(카라베노히로 5) 內裏 : 平安宮의 內裏. 6) 攝津國 百濟郡 : 현재 大阪市 生野區의 서쪽 부분과 東住吉區의 대부분 지역, 天王寺區에 堂ケ之町 을 포함하는 지역이다. 7) 源朝臣勝 : 日本三代實錄 仁和 2년(886) 7월 4일 신사조에 서술된 그의 卒傳에 의하면 그는 嵯峨 (사가)천황의 아들로 어머니는 惟良씨였다. 뒤에 출가하여 由蓮이라는 법명을 가지게 되었으며, 총 명하고 內典을 두루 섭렵하였고 老莊사상을 좋아하였고 생각이 깊고 행동거지도 훌륭하였다고 한 다. 위의 졸전에서 源朝臣勝의 어머니는 惟良씨 출신이라고 하였는데,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貞 觀 9년(867) 4월에 백제계 錦部連三宗麻呂와 安宗이 惟良宿 라는 새로운 씨성을 받고 있는 점에 서 惟良씨는 원래 錦部連씨였음을 알 수 있다. 즉 源朝臣勝의 어머니는 백제계였음을 알 수 있다. 8) 弘仁 원년 사건 : 日本後紀 弘仁 원년(810) 9월 갑인조에 의하면 越前介 종5위하 阿倍朝臣淸繼 와 權少 百濟王愛筌 등이 平城태상천황이 伊勢國에 行幸한다는 것을 듣고 병사를 모아 이에 호 응하면서 신임 越前介 종5위하 登美眞人藤津을 붙잡아 업무 인수인계를 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에 嵯峨천황은 종5위하 紀朝臣南麻呂 등을 파견하여 이들의 죄를 묻고 淸繼 등의 死罪를 감하여 遠流 에 처하였다고 한다. 이는 阿倍朝臣淸繼와 百濟王愛筌 등이 平城태상천황 편에 서서 藥子의 난에 연좌하여 유배된 것이다. 9) 安倍朝臣淸繼 : 阿倍朝臣淸繼로도 표기되었다. 平城천황의 신하. 日本後紀 에 의하면 大同 3년 (808) 11월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고, 下野介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服喪 때문인 듯 휴직 하였다가 大同 4년(809) 1월에 다시 관직에 복귀하였다. 809년 12월 평성천황이 병으로 양위하고 嵯峨천황이 즉위한 후 越前國의 介로 임명되었으나 弘仁 원년(810) 9월 藥子의 난 때는 부임하고 있던 越前國에서 平城태상천황에게 호응하여 越前國 權少 百濟王愛筌과 함께 군대를 일으켰다. 이 때문에 安藝權守로 좌천되었다가 遠流에 처해졌다. 10) 百濟王愛筌 : 주 9)에서 언급한 日本後紀 弘仁 원년(810) 9월 갑인조에서 越前國 權少 으로서 越前介 安倍朝臣淸繼와 함께 嵯峨천황에게 대항하는 난을 일으켜 遠流에 처해졌다. 天長 10년 (833)에 遠流를 경감하여 近流에 처한 것이다. 11) 藤原朝臣仲成의 아들 : 이름을 알 수 없다. 仲成(764~810)은 式家 種繼의 아들이며 藤原朝臣藥子 의 오빠로 藥子와 공모하여 平城(헤이죠우)상황의 變 을 일으켰다. 平城태상천황이 平城으로 천 도하기를 원하여 嵯峨천황과 대립하였을 때 仲成은 平城태상천황의 측근 藥子와 함께 平城태상천 황 편에 섰다. 嵯峨천황은 藥子의 관직을 박탈하고 仲成도 佐渡權守로 좌천하고 右兵衛府에 감금 한 후 죽였다. 12) 藤原朝臣貞本 : 平城천황대인 大同 3년(808) 11월 종5위하로 左兵衛佐 겸 但馬介로 임명되었다. 弘仁 원년(810) 9월 藥子의 난 때 平城太上天皇측에 가담하여 飛 權守로 좌천되고 遠流에 처해 졌다가 仁明천황대인 天長 10년(833)에 23년만에 入京을 허가받은 것이다. 이후 承和 13년(846) 1월에는 종5위하에서 종5위상, 承和 14년(847) 2월에는 大藏大輔로 임명되고, 嘉祥 3년(850) 3 월 仁明천황이 사망하였을 때는 裝束司로 임명되어 장례에 참가하였다. 文德천황대인 仁壽 3년 (853) 1월에는 정5위하로 승진하였다. 13) 安倍朝臣淸繼 : 주 9) 참조. 14) 伯耆國 : 현재 鳥取縣 東伯郡 西伯郡 日野郡. 15) 美作國 : 현재 岡山縣 북부. 16) 安倍朝臣淸繼 :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7) 百濟王愛岑 : 百濟王愛筌과 동일인물(주 10) 참조).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8) 安房國 : 현재 千葉縣 安房郡. 19) 參河國 : 현재 愛知縣 동부. 20) 備前國 : 현재 岡山縣 동부. 21) 直講博士 : 보통은 直講이라고 한다. 大學寮 儒學科(뒤에 明經道로 바뀜)의 교관. 당의 제도를 모

175 348 續日本後紀 키미)22)에게 直道宿 (나오미치노스쿠네)를 사성하였다. 廣公의 조상은 百濟國人이다. 349 承和 원년(834) 2월 乙未 忠良親王(타카요시신노우)28)이 冠禮를 치렀다. 4품을 서위하였다. 先代 태상천황29)의 4째 天長 10년(833) 동10월 武臣 정6위상 大川王(오오카와오우)23)에게 종5위하를 주었고, 정5위하 百濟王安義(쿠다라노코 니키시안기)24)에게 종4위하를 주었다. 정6위상 百濟王文操(쿠다라노코니키시분소)25)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아들이다. 어머니는 백제씨30)로 종4위하 勳3등 俊哲(슈테츠)31)의 딸인 종4위하 貴命32)이다. 承和 원년(834) 5월 丙子 左京(사쿄우)33) 사람 정7위하 文忌寸歲主(후미노이미키토시누시)34)와 無位 同姓 三雄(미 츠오)35) 등에게 淨野宿 (키요노노스쿠네)36)를 사성하였다. 河內國(카와치노쿠니)37) 사람. 권3 仁明天皇 承和 원년(834) 춘정월 癸亥 26) 27) (전략) 종5위하 百濟公繩繼(쿠다라노키미나와츠구) 를 參河介 로 삼았다.(후략) 방하여 神龜 5년(728)에 세 명을 두었으나 大同 3년(808)에 두 명으로 바뀐다. 상당관위는 정7위 하이며 職田으로 3町을 받았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釋奠에 참가하며 정부에 감신등 명경도 교관 들이 하는 직무를 담당하였다. 9세기에는 存問渤海客使로서 외교에도 관여하였다(1988, 國史大 辭典 9, 吉川弘文館, 672쪽). 22) 韓部廣公 : 續日本後紀 承和 5년(838) 6월 임자조에서는 仁明천황이 청량전에 납시셨을 때에 助敎 정6위상 直道宿 廣公에게 群書治要 제1권을 읽도록 하였다고 하며, 다음해 춘정월 경신조 에서는 정6위상 直道宿 廣公에게 외종5위하를 주었다고 한다. 廣公에 대해서는 이후 더 이상 보 이지 않는다. 23) 大川王 : 續日本後紀 承和 8년(841) 11월 병진조에서는 종5위하에서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다.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4) 百濟王安義 : 이 기사는 百濟王安義에 대해 사서에서 처음 언급하고 있는 것이다. 이후 百濟王安 義는 承和 원년(834) 7월 종4위하의 관위를 가지고 丹波守와 右兵衛督을 겸임하게 되었으나, 承 和 4년(837) 12월 사망하였다. 25) 百濟王文操 :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6) 百濟公繩繼 : 新撰姓氏錄 에 의하면 百濟公씨는 여러 종류가 있다. 左京 諸蕃 下 백제조의 百濟 公씨는 都慕王의 24세손 汶淵王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며, 右京 諸蕃 下 백제조의 百濟公씨는 鬼 室씨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和泉國 諸蕃 백제조의 百濟公씨는 백제국의 酒王의 후손이라고 하였 다. 百濟公繩繼에 대해서는 이 밖에 다른 사료가 보이지 않아 어떤 계보의 百濟公씨인지 알 수 없다. 27) 參河介 : 參河國의 차관. 28) 忠良親王 : 819~876. 嵯峨천황의 제4황자. 834년 2월 26일에는 紫宸殿에서 仁明천황에게 인사 하고 춤을 추어 이불과 요를 선물받았다( 續日本後紀 承年 원년 2월 정미조). 上總守 上野守 兵部卿 式部卿 大宰守를 역임하였다. 사냥을 매우 잘 하였다. 29) 先代 태상천황 : 제52대 嵯峨천황(786~842, 재위 809~823). 30) 百濟氏 : 百濟王氏를 가리킴. 31) 百濟王俊哲 :?~795. 百濟王敬福의 손자, 百濟王理伯의 아들. 續日本紀 에 의하면 寶龜 6년 (775) 11월 大伴宿 駿河麻呂의 蝦夷 정토에 참가하여 勳 6등을 수여받았다. 寶龜 9년(778) 6월 에도 정토에 공이 있어 勳5등을 받았다. 寶龜 11년(780) 3월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고, 4 월에 다시 종5위상으로 승진한 후 6월에 陸奧鎭守府將軍으로 임명되었다. 그해 12월 적에게 포위 되었을 때 桃生 白河 등의 郡의 神 11社에 기도하여 포위에서 벗어날 수 있었으므로 이들 신에게 국가에서 폐백을 보내도록 신청하여 허가받았다. 天應 원년(781) 9월에는 蝦夷를 정벌한 공으로 정5위상 훈4등을 수여받았다. 延曆 6년(787) 윤5월 무슨 일인가에 연좌하여 日向權介로 좌천되 었으나 延曆 9년(790) 3월 사면되어 평안경으로 돌아갔다. 延曆 10년(791) 1월에는 東海道에 파 견되어 征夷를 위한 병사와 무기를 점검하고 下野守로 임명되었고 그해 9월에는 陸奧鎭守將軍을 겸임하고 延曆 14년(795) 8월 사망하였다(김은숙, 2007, 앞의 책, 113~120쪽). 32) 百濟王貴命 :?~851. 진수부장군 百濟王俊哲의 딸로 嵯峨천황의 女御가 되어 基良親王 忠良親 王 基子內親王을 낳았다. 弘仁 10년(819) 1월에 종5위상의 관위를 받고 같은 해 10월에 종4위 하로 승진하였는데, 아마도 819년 1월에 嵯峨천황의 女御가 되어 그해 10월에 基良親王을 낳았 을 것으로 여겨진다. 仁壽 원년(851) 9월 사망하였다. 33) 左京 : 平安京의 주작대로의 동쪽 지역. 34) 文忌寸歲主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5) 同姓 三雄 : 文忌寸三雄.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6) 淨野宿 : 文忌寸씨 중에 이미 淨野宿 를 사성받은 사람이 있었다. 즉 日本後紀 延曆 16년 (797) 2월 을축조에 종5위하 淨野宿 最弟라는 이름이 보인다. 37) 河內國 : 畿內에 속하는 大國. 현재 大阪府의 서북 서남부를 제외한 대부분의 지역.

176 350 정6위상 文忌寸繼立(후미노이미키츠구타테)의 忌寸을 고쳐 宿 를 주었다. 歲主 三 雄 繼立 등의 조상은 백제국인이다. 承和 원년(834) 6월 辛丑 和泉國(이즈미노쿠니)38) 사람. 정6위상 蜂田藥師文主(하치다노쿠스시후미누시),39) 종8 續日本後紀 351 키미)47) 등 3인에게 淸根宿 (키요네노스쿠네)48)를 주었다. 核公의 조상은 백제국인이었다. 承和 원년(834) 11월 丁未朔 辛亥 정6위상 百濟王奉義(쿠다라노코니키시호우기)49)와 정6위상 百濟王慶仁(쿠다라노코니 키시쿄우진)50)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위하 同姓 安遊(안유우) 등에게 深根宿 (후카네노스쿠네)40)를 주었다. 그 조상은 백제국 인이다. 권4 仁明天皇 承和 원년(834) 추7월 庚戌朔 承和 2년(835) 춘정월 癸丑 종4위하 百濟王安義41)를 右兵衛督42)으로 삼았다. 丹波守43)는 그대로 가지게 하였다. 承和 원년(834) 9월 壬申 勘解由使(카게유시)44) 主典45) 阿直史福吉(아치키노후비토후쿠키치),46) 散位 同姓 核公(카쿠 천황51)이 豊樂殿(호우라쿠덴)52)에 납시었다. 朝堂(쵸우도우)53)에서 백관에게 연회를 베 풀었다. (중략) 종4위하 藤原朝臣廣敏(후지와라노아손히로토시),54) 紀朝臣善岑(기노아소미요시미네), 百濟王勝義(쿠다라노코니키시쇼우기)55)에게 종4위상을 주었다. 承和 2년(835) 춘정월 己巳 38) 和泉國 : 5畿內 중의 一國 下國. 현재의 大阪府 남부. 39) 蜂田藥師文主 : 深根宿 로 改姓한 이후 續日本後紀 承和 6년(839) 8월 갑술조에 遣唐使의 知 乘船事로 深根文主라는 이름이 보인다. 蜂田藥師는 新撰姓氏錄 和泉國 諸蕃 漢條에서는 吳主 孫權王에서 나왔다는 씨족과 吳國人 都久爾理久爾에서 나왔다는 씨족이 보여 9세기 초에 중국계 를 칭하는 씨족도 있었음을 알 수 있다. 40) 深根宿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1) 百濟王安義 : 주 24) 참조. 42) 右兵衛督 : 右兵衛府의 장관. 兵衛府는 일본 令制의 官司로 左右兵衛府가 있다. 중앙의 상비군인 左右衛士府 衛門府와 함께 5衛府를 구성하였다. 宮門의 경비, 巡檢, 行幸씨의 수호 등을 담당하 였다. 직원은 督 佐 大尉 少尉 大志 少志 醫師 1명씩과 番長 4명, 兵衛 400명, 使部 30 명, 直丁 2명이 있었다. 兵衛는 주로 지방호족의 자제를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43) 丹波守 : 丹波國의 장관, 丹波國은 山陰道의 上國. 현재의 京都府와 兵庫縣에 걸친 지역에 있었다. 44) 勘解由使 : 평안 초기에 시작된 令外官. 奈良시대 말기에 지방관을 비롯한 관리를 교체할 때에 신 임자가 전임자로부터 사무 인수인계를 무사히 마쳤음을 증명하는 解由狀을 제출하는 제도가 만 들어졌다. 그러나 이 문서를 발행할 때에 신임자와 전임자 사이에 분쟁이나 부정이 생겼으므로 지방관의 교체를 원활하게 하기 위해 勘解由使를 설치하였다(1982, 國史大辭典 3, 吉川弘文館, 223쪽). 45) 主典 : 4등관, 상당 관위는 종7위하였다. 左近衛(사킨에이) 戶嶋守(헤노시마모리) 右兵衛(우효우에이) 同姓 眞魚(마우오) 등 에게 安岑連(야스미네노무라지)을 사성하였다. 嶋守의 조상은 백제국인이다. 46) 阿直史福吉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7) 同姓 核公 : 阿直史核公.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8) 淸根宿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9) 百濟王奉義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50) 百濟王慶仁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51) 천황 : 제54대 仁明(닌묘우)天皇(810~850, 재위 833~850). 嵯峨천황의 황자. 어머니는 橘嘉智 子이다. 52) 豊樂殿 : 平安宮의 內裏의 연회장. 朝堂院의 서쪽에 있었다. 53) 朝堂 : 평안궁의 朝堂院의 일부. 朝堂院은 大極殿 朝堂 朝集堂으로 구성되었다. 大極殿은 천황 이 행차하는 곳이고 朝堂은 朝廷의 정무를 보는 장소였으며, 朝集堂은 신하들이 대기하는 장소였 다. 平安宮의 朝堂院에서는 儀式과 政務를, 豊樂殿에서는 饗宴을 하였다. 54) 藤原朝臣廣敏 : 承和 4년(837) 5월 大宰大貳로 재임 중 사망한다. 55) 百濟王勝義 : 주 4) 참조.

177 352 承和 2년(835) 5월 癸酉 右京人 丹波 權大目(탄바노곤노다이사칸),56) 昆解宮繼(콘케미야츠구), 內 (나이쥬),57) 同姓 河繼(카와츠구) 등에게 廣野宿 (히로노노스쿠네)58)를 사성하였다. 백제국인 夫子의 후손이다. 承和 2년(835) 11월 辛酉 遣唐使(켄토우시),59) 知乘船事(치죠우센지), 종8위상 香山連淸貞(카구야마노무라지기요 사다)60)과 兄 두 사람에게 連을 고쳐 宿 를 주었다. 그 조상은 백제국인이다. 권5 仁明天皇 承和 3년(836) 2월 己丑 續日本後紀 353 承和 3년(836) 2월 癸巳 정6위상 百濟王慶苑(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엔)63)과 百濟王元仁(쿠다라노코니키시겐 진)64)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元仁은 婦人이다.] 承和 3년(836) 3월 辛酉 能登國(노토노쿠니)65)의 史生(시쇼우),66) 馬史眞主(우마노후히토마사누시),67) 右近衛 同 姓 貞主(사다누시)68) 등에게 春澤史(하루사와노후히토)69)를 사성하였다. 그 조상은 백제 국인이다. 承和 3년(836) 윤5월 戊寅 右京人 內藏(우치노쿠라노츠카사), 大屬(다이사칸),70) 百濟連淸繼(쿠다라노무라지키요 츠구)71)에게 多朝臣(오오노아손)72)을 사성하였다. 淸繼는 착오로 繼父의 성을 가지게 되었 천황이 神泉苑(신센엔)61)에 가셔서 송골매를 날려보냈다. (중략) 이날 무위 百濟王永琳 (쿠다라노코니키시예이린)62)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56) 丹波權大目 : 丹波國의 4등관. 權大目은 權官으로, 부임하지 않고 大目에 해당하는 봉록을 지급 받았다. 丹波國은 山陰道의 上國으로, 현재의 京都府와 兵庫縣에 걸친 지역이다. 57) 內 : 內裏에서 천황을 가까이에서 일상적인 잡무를 보던 하급관인. 奈良시대 중기에는 子所에 속하여 子라고 불리웠으나, 天平寶字 7년(763) 子所가 內 所로 바뀌면서 內 로 개칭하였다 (1989, 國史大辭典 10, 吉川弘文館, 508쪽). 58) 廣野宿 : 廣野宿 씨로는 日本三代實錄 貞觀 11년(869) 12월 8일조에 弘野宿 河繼(히로노 노스쿠네카와츠구)가 보인다. 59) 遣唐使 : 7세기부터 9세기에 걸쳐 일본이 당에 파견한 공식적인 사신. 遣唐使는 大使 副使 判 官 錄事 등으로 구성되며, 그 밖에 知乘船事 造舶都匠 譯語 醫師 陰陽師 畵師 史生 射 手 船師 新羅譯語 奄美譯語 卜部 雜使 音聲生 玉生 鍛生 鑄生 細工生 船匠 畵師, 人 挾抄 水手 등이 함께 파견되었다. 60) 香山連淸貞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1) 神泉苑 : 남북 4町, 동서 2町의 광대한 면적을 가진 平安京 내의 禁苑. 大內裏의 남동쪽에 인접하 여 북쪽은 二條, 남쪽은 三條, 동쪽은 大宮, 서쪽은 壬生대로에 접하였다(1986, 國史大辭典 7, 吉川弘文館, 867쪽). 62) 百濟王永琳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황족 이외의 여자가 無位에서 일약 종5위하를 받는 경우는 천황의 키사키가 되는 경우가 많았다. 永琳은 淳和(쥰나)천황의 은총을 입어 종5위하의 관위를 받게 되었을 것이다. 63) 百濟王慶苑 : 이후 承和 7년(840) 1월에 河內介(하내국의 차관)로 임명되지만, 그후로 더 이상 보 이지 않는다. 64) 百濟王元仁 :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5) 能登國 : 北陸道의 中國. 현재의 石川縣 북부. 66) 史生 : 令制에서 각 관청에 소속되어 있던 하급관인, 공문을 필사하거나 文案에 상관의 서명을 받 는 일을 하였다. 67) 馬史眞主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8) 同姓 貞主 : 馬史貞主,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9) 春澤史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70) 內藏大屬 : 內藏寮의 4등관. 內藏寮는 천황의 보물이나 일상에 쓰는 물품을 조달하고 보관하고 바치는 업무를 담당한 관청. 71) 百濟連淸繼 : 淸繼는 淨繼로도 표기되었다. 多朝臣이라는 새로운 씨성을 받은 후 承和 8년(841) 11월에 외종5위하로 승진하였고, 承和 10년(843) 1월에는 山城介로 임명되었다( 續日本後紀 承 和 8年 11月 丙辰條, 同 10年 春正月 辛丑條). 72) 多朝臣 : 大和國十市郡 富(오오) 鄕(현재 奈良縣 磯城郡 田原本町 多) 출신의 씨족. 天武 13년 (684) 朝臣姓을 받았다. 古事記 日本書紀 新撰姓氏錄 에서 神武天皇의 황자 神八井耳命 의 후손으로 나오고 있다.

178 354 으나 이제 本姓을 찾고자 청한 것이다. 右京人 左衛門 權少志 大原史河麻呂(오오하라노 續日本後紀 355 다무네노무라지)81)을 사성하였다. 그 조상은 백제국인이다. 후히토카와마로)의 史姓을 고쳐 宿 姓을 주었다. 河麻呂의 조상은 백제국인이다. 承和 3년(836) 윤5월 乙酉 美濃國(미노노쿠니)73) 사람. 主殿寮(토노모료우),74) 少屬(쇼우사칸)75) 美見造貞繼(미미노 미야츠코사다츠구)76)가 본거지를 左京의 6條2坊으로 옮겼다. 그 조상은 백제국인이다. 承和 3년(836) 8월 癸丑 정3위 百濟王慶命(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묘우)77)이 尙侍(쇼우지)78)가 되었다. 承和 3년(836) 9월 丁丑 右京人 造兵司(조우헤이시), 大令史(다이사칸),79) 朴弟春(보쿠오토하루)80)에게 貞宗連(사 권6 仁明天皇 承和 4년(837) 6월 甲寅 左衛門督82) 종4위상 百濟王勝義를 宮內卿83)을 겸하도록 하였다. 相摸守84)도 그대로 겸 직하도록 하였다. 承和 4년(837) 6월 己未 右京人 左京亮(사쿄우노스케)85) 종5위상 吉田宿 書主(요시다노스쿠네후미누시)86)와 越 中介,87) 종5위하 同姓 高世(타카요)등에게 興世朝臣(오코스요노아손)88)을 사성하였다. 始 祖 鹽乘津(시오노리츠)89)은 大倭人이다. 뒤에 國命에 따라 三己汶90) 땅에 옮겨가 살았다. 그 땅은 결국 백제에 속하게 되었는데 鹽乘津의 8세손 達率 吉大尙(키치다이죠우)91)과 그 73) 美濃國 : 東山道의 上國. 현재 岐阜縣의 남부지방. 74) 主殿寮 : 令制의 宮內省 소속 관사. 천황이 행행할 때의 가마나 日傘 등의 관리와 供奉, 전상의 휘 장 관리와 설치, 천황의 입욕 공봉, 內裏 정원의 청소, 궁내의 등촉 관리, 땔감의 조달 등을 담당 하였다(1989, 國史大辭典 10, 吉川弘文館, 402쪽). 75) 少屬 : 令制의 각 관청의 하급관인. 76) 美見造貞繼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77) 百濟王慶命 : 嵯峨천황(786~842, 재위 809~823)의 후궁 중의 한명으로 정3위 大納言 兼 行右 近衛大將 源朝臣定의 어머니이다. 이후 承和 8년(841) 11월에는 종2위로 승진하고 嘉祥 2년 (849) 2월 사망하였다. 그녀가 사망하였을 때에 仁明천황은 종1위를 추증하고 사신을 파견하여 장례를 돕도록 하였다. 78) 尙侍 : 內侍司의 장관. 정원은 2명이었다. 천황 옆에서 모시면서 奏請 宣傳을 담당하고 女孺를 檢校하며, 내외명부의 朝參 禁內禮式을 담당하는 등 內廷의 일상생활에 밀착한 중요하고 광범 위한 일을 담당하였다. 內侍司는 大同 2년(807) 이후에는 後宮女司의 최고 官司가 되어 위세가 높았다. 平安시대에는 연중행사가 정착하고 궁정의례가 정비되어 후궁 內廷의 여러 일은 방대하 고 다양화하여 禁內 예식을 담당하는 內侍司의 일은 매우 복잡하고 많았다(1989, 國史大辭典 10, 吉川弘文館, 507쪽). 仁明천황은 아버지 嵯峨태상천황이 총애하는 후궁 百濟王慶命을 尙侍 로 임명한 것이다. 79) 造兵司 大令史 : 造兵司의 3등관. 造兵司는 令制의 兵部省 소속 관청으로 병기 제조를 감독하였다. 80) 朴弟春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81) 貞宗連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82) 左衛門督 : 左衛門府의 장관. 일본의 令制에 衛士를 지휘하여 궁성의 문을 경비하고 개폐하는 일 을 담당한 衛門府를 설치하였다. 大同 3년(808)에 衛門府를 폐지하고 左右衛士府에 합쳤다가 弘 仁 2년(811)에 左右衛士府를 左右衛門府로 고쳤다. 83) 宮內卿 : 宮內省의 장관. 宮內省은 일본 令制의 8省 중의 하나. 태정관의 右辯官局에 소속하여 궁 정 일을 담당하였다. 84) 相摸守 : 相摸國의 장관. 相摸國은 東海道의 上國. 현재 神奈川縣. 85) 左京亮 : 左京職의 차관. 86) 吉田宿 書主 : 日本文德天皇實錄 嘉祥 3년(850) 11월 기묘조에 그(興世朝臣書主)의 卒傳이 보인다. 87) 越中介 : 越中國의 차관. 越中國은 北陸道의 上國. 현재의 富山縣. 88) 興世朝臣 : 일족으로 興世朝臣有法 興世朝臣貞町 興世有年 등이 日本三代實錄 에 보인다. 89) 鹽乘津 : 鹽垂津의 誤記. 新撰姓氏錄 左京 皇別 下 吉田連조에서는 鹽垂津彦命(시오타리츠히코 노미코토)로 표기되어 있다. 90) 三己汶 : 新撰姓氏錄 左京 皇別 下 吉田連조에서는 任那國主가 자신의 나라 동북에 세 己汶 땅 이 있는데 즉 上己汶 中己汶 下己汶이며, 사방 300리라고 하였다. 91) 吉大尙 : 7세기 후반의 의술가. 日本書紀 天智 10년(671) 춘정월조에서 藥學에 뛰어나 天智천황 에게 관위를 받고 있으며 懷風藻 에 의하면 천지천황의 아들 大友황태자의 賓客으로 대접받으며 고문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 있다.

179 356 동생 少尙(쇼우죠우)92) 등이 고향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있어 찾아서 내조하였다. 대 대로 의술을 전하였고 문예에도 통달하였다. 자손의 집이 奈良京(平城京)의 田村里에 있 었으므로 吉田連(키치타노무라지)93)을 사성하였다. 承和 4년(837) 동10월 戊午 종5위상 百濟王慶仲(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츄우)94)에게 정5위하를 주었다. 종6위상 百 續日本後紀 357 주었다. 承和 5년(838) 11월 丁卯 정6위상 百濟王敎凝(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교우)100)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또 외종6위 하 宇漢米公毛志(우카메노키미에미시)101)에게 외종5위하를 주었다. 일찌기 정복전에서 훈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 濟王忠誠(쿠다라노코니키시츄우세이)95)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선대 太上天皇이 交野(카 타노)의 遊獵地96)에서 하신 말씀이 있어서 서위하게 된 것이다. 권8 仁明天皇 承和 4년(837) 12월 辛卯 承和 6년(839) 춘정월 庚申 밤에 春興殿(슈코우덴)97)에 도둑이 들어 비단 50여필을 훔쳐갔다. 숙위하는 사람 중에 본 사람이 없었다. 右兵衛督 종4위하 百濟王安義98)가 사망하였다. 권7 仁明天皇 承和 5년(838) 춘정월 丙寅 [종5위하] 百濟王永豊(쿠다라노코니키시예이푸우)99)과 大藏宿 橫佩에게 종5위상을 정5위하 百濟王慶仲(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츄우)102)에게 종4위하를 주었다. 承和 6년(839) 춘정월 甲子 종4위하 百濟王慶仲을 民部大輔(민부다이후)103)로 삼았다. 承和 6년(839) 2월 丁丑 종4위상 百濟王勝義104)에게 종3위를 주었다. 정6위상 百濟王永仁(쿠다라노코니키시예 이진)105)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92) 少尙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93) 吉田連 : 新撰姓氏錄 左京 皇別 下에서는 吉田連이 제5대 孝昭천황의 황자인 天帶彦國押人의 4 세손 彦國葺命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94) 百濟王慶仲 : 日本後紀 天長 2년(825) 춘정월 신해조에서는 百濟王慶忠이 종5위하에서 종5위 상으로 승진하고 있는데 동일인이다. 續日本後紀 에 의하면 慶仲은 承和 6년(839) 1월에 종4위 하로 승진하고 民部大輔가 되었으며, 承和 8년(841) 4월에 사망하였다. 95) 百濟王忠誠 : 續日本後紀 承和 10년(843) 2월 기사조에서 종5위하 百濟王忠誠이 大監物(中務 省의 品官으로 조정의 창고에 물자가 들어가고 나가는 것을 감찰하는 관직으로 5위상당관)로 임 명되었다고 한다.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96) 交野의 遊獵地 : 고대 河內國 交野郡(현재 大阪府 枚方市와 交野市)의 구릉지대는 交野 라고 불 리웠는데, 遊獵地로 유명하였다(1982, 國史大辭典 3, 吉川弘文館, 361쪽). 97) 春興殿 : 평안궁 內裏의 부속전사. 紫寢殿의 남정의 동쪽 끝에 있었다. 무기 등을 보관하였다. 98) 百濟王安義 : 주 24) 주 41) 참조. 99) 百濟王永豊 :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00) 百濟王敎凝 : 日本文德天皇實錄 에 의하면 齊衡 원년(854) 2월에는 종5위하로 侍從이 되었으 나, 그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01) 宇漢米公毛志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宇漢米公씨는 蝦夷의 族長 일족이다. 102) 百濟王慶仲 : 주 94) 참조. 103) 民部大輔 : 民部省의 차관. 民部省은 일본 令制의 8성 중의 하나로 태정관의 左辯官에 속하여 諸 國의 戶籍 賦役 田 山川 道路 등을 관할하였다. 104) 百濟王勝義 : 주 4) 참조. 105) 百濟王永仁 : 이후 承和 10년(843) 2월에는 右兵庫頭로 임명되고, 仁壽 원년(851) 4월 次侍從 이 되었으며, 天安 2년(858) 11월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고, 貞觀 원년(859) 2월 攝津權介가 되 었다.

180 358 續日本後紀 承和 6년(839) 3월 己亥 359 承和 7년(840) 6월 병인 종4위하 百濟王惠信(쿠다라노코니키시에신)106)에게 종3위를 주었다. 備中介(비츄우노스케),116) 외종5위하 余河成(아구리노카와나리)117)과 右京大屬(우쿄우사 칸),118) 정6위하 余福成(아구리노후쿠나리)119) 등 3인에게 百濟朝臣(쿠다라노아손)120)을 사 承和 6년(839) 8월 戊寅 성하였다. 그 조상은 百濟國人이다. 加賀國(카가노쿠니) 사람. 정6위상 百濟公豊貞(쿠다라노키미토요사다)107)의 본거지를 左 京의 4조3방으로 옮겼다. 豊貞의 조상은 백제국인이다. 경오년108)에 河內國 大鳥郡109)에 거주하도록 하였다가 을미년110)에 加賀國 江沼郡(에누마군)111)에 거주하도록 하였다. 承和 7년(840) 추7월 庚辰 參議(산기)121) 종4위상 春宮大夫(슈구우다이부),122) 右衛門督(우에몬노카미),123) 文屋朝臣 秋津(훈야노아손아키츠)124)과 民部大輔,125) 종4위하 百濟王慶仲126) 등을 저택에 보내 종1위 承和 6년(839) 11월 癸未 右京人 정6위상 御春宿 春長(미하루노스쿠네하루나가)112) 등 11인의 宿 성을 고쳐 朝 113) 臣성을 주었다. 이들은 百濟王族으로 飛鳥戶造(아스카베노미얏코) 의 후손이다. 권9 仁明天皇 承和 7년(840) 춘정월 丁未 종5위하 百濟王慶苑(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엔)114)을 河內介(가와치노스케)115)로 삼았다. 106) 百濟王惠信 : 百濟王敬福의 아들 百濟王理伯의 딸. 延曆 15년(796) 11월 무위에서 일약 종5위상 의 관위를 받은 점에서 환무천황의 후궁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延曆 23년(804) 7월에는 정 5위상으로 승진하였다. 承和 6년(839) 3월 종3위로 승진한 후, 承和 9년(842) 9월에 사망하였 다( 續日本後紀 承和 9년 9월 기해조에 散事從三位百濟王惠信薨 이라고 적혀있다). 107) 百濟公豊貞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百濟公씨에 대해서는 주 26) 참조. 108) 경오년 : 日本書紀 에 의하면 天智 9년(670) 2월에 호적을 만들었다고 하므로 庚午年은 670년 일 가능성이 크다. 109) 河內國 大鳥郡 : 河內國에는 大鳥郡이 없고 和泉國에 大鳥郡이 있었으므로 和泉國을 잘못 표기 한 것일 것이다. 현재의 大阪府 泉北郡. 110) 을미년 : 695년 755년 815년 중의 하나일 것이다. 111) 加賀國 江沼郡 : 현재 石川縣 江沼郡. 112) 御春宿 春長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13) 飛鳥戶造 : 飛鳥戶造씨는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百濟조에서 백제국 比有王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고, 河內國 諸蕃 百濟조에서는 比有王의 아들 琨伎王에서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114) 百濟王慶苑 : 주 63) 참조. 115) 河內介 : 河內國의 차관 116) 備中介 : 備中國의 차관. 備中國은 山陽道의 上國으로, 현재 岡山縣 서남부지역이 있었다. 117) 餘河成 : 天長 10년(833) 11월에 정6위상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續日本後紀 天長 10년 11 월 庚午條). 承和 7년(840) 百濟朝臣이라는 새로운 씨성을 사여받은 후 承和 12년(845) 1월에는 종 5위하로 승진하였으며, 承和 13년(846) 2월 安藝守로 임명되었고, 仁壽 3년(853) 8월 사망하였다. 118) 右京大屬 : 平安京 右京職의 4등관. 119) 余福成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20) 百濟朝臣 : 新撰姓氏錄 左京 諸蕃 下 百濟條에서 百濟朝臣은 백제국 都慕王 30세손 惠王의 후 손이라고 하였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天平寶字 2년(758) 6월에 孝謙天皇이 餘益人 餘東人 등에게 百濟朝臣이라는 씨성을 사여하였다. 121) 參議 : 大寶令이 시행된 지 얼마되지 않아 새로 설치한 令外官 朝政을 參議한다는 뜻에서 이런 명칭이 부쳐졌다. 大臣 納言 다음의 重職으로, 藏人頭 左右大辯 近衛中將 左中辯 式部大 輔 5개국 이상의 國司를 역임한 사람, 官位가 3위인 사람 중에서 엄선하여 임명하였다. 122) 春宮大夫 : 황태자 家政기관인 春宮坊의 장관. 123) 右衛門督 : 右衛門府의 장관(주 103) 참조). 124) 文屋朝臣秋津 : 787~843. 9세기 전반의 관인 무관. 文室眞人大原의 아들이며 무관으로 유명 한 文室朝臣綿麻呂의 동생. 弘仁 원년(810) 右衛門督에 임명된 후 右近衛將監 藏人 甲斐守 武藏介 因幡守 木工頭 左中將 藏人頭 등의 관직을 역임하였다. 天長 7년(830) 종4위하로 參議에 임명되어 右大辯 左近衛中將을 겸직하였다. 그후 武藏守 左大辯 春宮大夫 檢非違 使別當 右衛門督 丹波守 등을 역임하였다. 그러나 承和 9년(843) 嵯峨태상천황이 사망한 직 후 藤原朝臣良房이 황태자 恒貞親王을 폐하고 道康親王을 황태자로 세우기 위해 날조한 역모사 건에 연좌되어 다음해 配所에서 사망하였다. 125) 民部大輔 : 주 103) 참조.

181 360 續日本後紀 를 추증한다는 조서를 읽도록 하였다.127) 권10 仁明天皇 承和 7년(840) 11월 辛丑 承和 8년(843) 하4월 庚申 종4위하 百濟王敎法(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호우)128)이 사망하였다. 桓武천황(칸무텐노 우)129)의 女御(뇨우고)130)였다. 361 종4위하 百濟王慶仲131)이 사망하였다. 慶仲은 百濟氏 중에서 잘 선발해서 등용한 사람 이다. 비록 큰 그릇은 아니었지만, 관리로서 유능하였다. 武藏守(무사시노카미)132)로 나갔 다가 民部大輔로 돌아왔는데, 세상 사람들이 낚시를 잘 한다고 하였다. 여러 사람이 낚시 를 하러 慶仲과 함께 강에서 낚시줄을 드리웠으나 물고기들은 慶仲의 낚시 만을 물어 순 126) 百濟王慶仲 : 주 94) 참조. 127) 저택에 보내 읽도록 하였다 : 이 기사의 앞부분에 우대신 종2위 皇太子傅 藤原朝臣三守가 사망하였다. 는 기사가 있으므로 仁明천황이 사망한 藤原朝臣三守의 저택에 사람을 보내 三守에 게 종1위를 추증한 것이다. 128) 百濟王敎法 : 百濟王孝法으로 표기되기도 하였다. 百濟王理伯의 아들 百濟王俊哲의 딸로 延曆 15년(796) 11월 무위에서 일약 종5위상의 관위를 받고 있는 점에서 桓武天皇의 후궁이 되었을 것으로 여겨진다. 延曆 24년(805) 11월에는 종4위하로서 桓武천황에게 相模國 大住郡의 田 2 町을 하사받았으며, 弘仁 2년(811)1월에는 山城國 乙訓郡의 白田 1정을 嵯峨천황으로부터 하사 받았다. 129) 桓武天皇 : 제50대 천황(737~806). 재위 781~806. 제49대 光仁(코우닌)天皇의 제1황자. 어머 니는 백제계 도래씨족인 和史씨 출신의 高野新笠이다. 130) 女御 : 平安시대에 생긴 後宮 女官제도의 하나. 율령제도에서는 后 한 사람 이외에 後宮에는 妃 2명, 夫人 3명, 嬪 4명의 정원이 있었으나 평안시대가 되자 妃 夫人 嬪 대신에 정원 제한 이 없는 女御 更衣를 두었다. 女御는 皇后 中宮의 밑이지만, 更衣보다는 높은 지위였다. 桓 武천황대에 紀乙魚와 百濟敎法을 女御로 임명한 것이 처음이다. 玉井力은 사료상 女御로 명기 되어 있는 紀乙魚와 百濟敎法 이외에도 무위에서 일약 종5위하를 받은 여성은 모두 女御로 판 단된다고 하면서 女御는 嬪 이하의 키사키의 통칭 이라고 하였다(玉井力, 1972,`女御 更衣 制の成立a, 名古屋大學文學部 硏究論集 史學 19). 女御가 출현하게 된 이유로 津田京子는 令 制의 後宮이 妃 이하 모두 9명의 정원이었지만, 환무천황은 황후 이외에도 31명의 妃가 있었으 므로, 정원을 초과한 天皇妃의 명칭이 필요하였을 것으로 보았다(津田京子, 1991,` 女御 更 衣 の成立について, 奈良古代史論集 2, 117쪽). 女御는 後宮職員令 에 기재된 嬪을 대신하 는 지위로서 4위 5위의 관위를 받았으나, 親王이나 內親王을 낳은 女御는 先帝가 사망한 후 종3위를 받은 경우도 있었다. 仁明천황부터 宇多천황대에 걸쳐 後宮에 皇后 夫人을 두지 않 아 황태자의 생모인 女御가 后妃 중의 우두머리가 되는 경향이 생겼다. 아버지가 大臣인 경우, 또는 본인이 덕망이 높거나 특별히 천황의 총애를 받은 女御는 3위의 관위를 받게 되었으며, 황태자가 천황으로 즉위하면 생모인 女御는 皇太夫人-皇太后-太皇太后가 되는 관례가 만들어 졌다. 식간에 100여 마리를 잡았다. 그리고 여러 대부들 중에서 강건하다는 소리를 들었다. 일 찍이 東國에서 도읍으로 올 때 나루터에 이르렀는데, 교활한 사람이 무리를 이끌고 와서 다른 사람들을 쫓아내어 모두 건너갈 수가 없었다. 모든 사람들이 두려워하여 감히 말을 하지 못 하고 있었는데 慶仲이 채찍으로 그를 쳤다. 이마의 살이 벗겨져 얼굴을 가리자 당황하여 엎드렸고 그 무리도 물러갔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기뻐하였고 배를 저어 건너 갔다. 承和 8년(843) 11월 丁巳 이날 정3위 百濟王慶命133)을 종2위로 삼았다. 권11 仁明天皇 承和 9년(842) 춘정월 戊申 종 3위 百濟王勝義134)를 相模守135)로 삼았다. 宮內卿136)도 그대로 겸직하였다. 131) 百濟王慶仲 : 주 94) 참조. 132) 武藏守 : 武藏國의 장관. 武藏國은 東海道의 大國. 현재 東京都와 埼玉縣 神奈川縣 동부지역. 133) 百濟王慶命 : 주 77) 참조. 134) 百濟王勝義 : 주 4) 참조. 135) 相模守 : 주 84) 참조. 136) 宮內卿 : 주 83) 참조.

182 362 권13 仁明天皇 承和 10년(843) 춘정월 甲午 續日本後紀 363 이 두 번 울었다. 그 소리가 우레와 같았다. 붉은 기운이 회오리바람처럼 남쪽으로 날아 갔다. 申時145)에 다시 울었는데 그 기운이 처음과 같아 서쪽으로 날아갔다.146) 參議,147) 正 躬王(마사미오우)148)을 파견하여 능의 벌목한 나무 77주를 조사하도록 하였다. 이루 셀 [散位] 종4위상 作宿 友足(토모노스쿠네토모타리)이 사망하였다. (중략) 天長 10년(833) 수 없었다. 勘當陵守長 百濟春繼(쿠다라노하루츠구)149)가 상주하였다. 梅宮(우메노미 에 종4위하를 받았다. 友足137)은 사람이 단순하고 고지식하고 세상 물정을 잘 몰랐다. 무예 야)150)에 모셔진 정5위하 酒解神(사카토케노카미), 종5위하 大若子神(오오와카고노카미), 를 잘 하였고 매사냥을 가장 좋아하였다. 百濟王勝義138)와 함께 같이 수렵하였다. 그러나 종5위하 小若子神(오와카고노카미)의 세 신에게 모두 종4위하를 바쳤다. 종5위하 自玉手 마음 씀씀이는 달랐다. 勝義王은 사슴을 잡으면 반드시 그 고기를 나누지는 않았지만 友足 祭來酒解神(타마테요리마츠리키타루사카토케노카미)에게는 정5위하를 바쳐 모두 名神 139) 은 贄 로 바친 것을 제외한 나머지는 여러 大夫들에게 모두 주어 한 조각도 남기지 않았 (묘우진)151)으로 삼았다. 다. 따라서 여러 大夫들이 농담삼아 말하기를 염라왕에게 갔을 때 염라왕이 멋대로 友足 을 나쁜 곳으로 가게 한다면 우리들이 구하여 반드시 탈출하게 할 것이다. 잘못해서 勝義 가 극락으로 가게 된다면 우리들은 역시 호소하러 가서 지옥에 떨어지도록 할 것이다. 友 足은 나이 66세로 사망하였다. 스스로 죽을 날을 알아 목욕하고 의복을 갖추고 병 없이 죽 었다. 사람들이 괴이하게 여겼다. 사는 곳을 잘 아는 사람이었다고 모두들 말하였다. 承和 10년(843) 2월 己巳 종5위하 百濟王永仁140)을 右兵庫頭141)로 삼았다. 承和 10년(843) 하4월 己未朔 楯列陵守(타타나미노미사사기노카미)142) 등이 말하였다. 지난 달 18일 食時143)에 山陵144) 137) 友足 : 作宿 友足 延曆 22년(803) 內舍人으로 출사하여 左衛門大尉 左兵衛佐 加賀守 遠江 守 常陸介 左衛門佐守 등을 역임하였다. 138) 百濟王勝義 : 주 4) 참조. 139) 贄 : 신이나 천황에게 바치는 山野河海에서 나오는 식료품. 140) 百濟王永仁 : 주 105) 참조. 141) 右兵庫頭 : 令制의 右兵庫의 장관, 左 右兵庫는 의장용이나 실용의 무기를 보관하는 업무를 맡 았다. 142) 楯列陵守 : 神功皇后陵, 정식 명칭은 狹城盾列池上陵. 大和國 添上郡(현재의 奈良市 山陵町)에 있다. 143) 食時 : 아침먹을 시간. 144) 山陵 : 楯烈陵. 145) 申時 : 오후 3시부터 5시. 146) 지난달 서쪽으로 날아갔다 : 이 때 기이한 현상이 일어난 이유에 대해서는 續日本後紀 承 和 10년(843) 하4월 기묘조에 보인다. 즉 사람들이 전하는 이야기에 따라 楯列山陵의 북쪽을 聖 武天皇陵으로 알고, 남쪽을 神功皇后陵으로 알아 제사지내고 있었는데, 이 때문에 기이한 현상 이 일어났다.`圖錄a을 통해 두 릉이 바뀐 것을 확인하고 4월 21일 북쪽을 神功皇后陵으로 정하 고 다시 칙사가 파견되어 神功皇后陵에 활과 검 등을 바쳤다. 147) 參議 : 주 121) 참조. 148) 正躬王 : 799~863. 桓武천황의 황자 萬多(만타)親王의 아들. 어렸을 때부터 총명하여 大學에 입학하여 史記 漢書 등을 읽어 弘仁 7년(816) 文章生試에 급제하였다. 天長 6년(829)에 종 4위하를 받고 天長 8년(831)에 侍從이 된 후 彈正大弼 刑部大輔 右京大夫 丹波守 등을 역임 하고 承和 6년(839) 參議가 되었다. 貞觀 4년(862) 상표하여 자손에게 平朝臣이라는 씨성을 사 여받고 貞觀 5년(863) 參議 彈正大弼 刑部卿 越前權守의 직을 가진 상태에서 사망하였다(坡 本太郞 平野邦雄, 1990, 日本古代氏於人名辭典, 吉川弘文館, 585~586쪽). 149) 百濟春繼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新撰姓氏錄 未定 雜姓 左京條에서 百濟氏 는 백 제국 牟利加佐王의 후손 이라고 하였는데, 牟利加佐王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다. 150) 梅宮 : 梅宮大社 山城國 葛野郡(현재의 京都市 右京區 梅津)에 있던 神社. 祭神은 酒解神 大若 子神 子若子神 등이다(1980, 國史大辭典 2, 吉川弘文館, 167쪽). 151) 名神 : 神社 祭神의 등급의 하나. 일본 고대에 諸國의 神社 중에서 특별히 영험이 뛰어난 高名한 신을 가리킨다. 續日本紀 天平 2년(730) 10월 경술조에서 渤海에서 보낸 信物을 諸國名神社에 바쳤다는 것이 名神에 관한 최초의 기록이다. 延喜式 의 神名帳에는 224社의 306座가 적혀 있 는데, 延喜式 臨時祭에는 名神祭 때 조정의 폐물을 봉납받는 203社의 285座의 名神이 적혀 있다(1992, 國史大辭典 13, 吉川弘文館, 523쪽).

183 364 續日本後紀 365 사요시), 百濟宿 河成(쿠다라노스쿠네카와나리),157) 無位 源朝臣興(미나모토노아손오코 承和 10년(843) 12월 乙卯朔 (전략) 出羽國(데와노쿠니), 河邊郡(카와베군)152)의 百姓 외종5위하 勳8등 奈良己智豊繼 (나라코치노토요츠구)153) 등 5인에게 大瀧宿 (오오타키노스쿠네)154)를 사성하였다. 이들 의 조상은 백제인이다. 스), (중략)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承和 12년(845) 2월 壬寅 河陽宮(카야노미야)158)에 行幸하여 遊獵하였다. 兵部卿(효우부쿄우)159) 4품 忠良親王160) 과 百濟王들161)이 贄(니에)162)를 바쳤다. 扈從하는 侍從(지쥬우)163) 이상에게 祿을 주었다. 권14 仁明天皇 저녁 때 가마가 宮164)으로 돌아왔다. 承和 11년(844) 춘정월 庚寅 종5위하 藤原朝臣安永(쿠다라노아손야스나가), 藤原朝臣大津(쿠다라노아손오오츠), 紀 朝臣野長(키노아손노나가), 路眞人永名(미치노마히토나가나), 坂上大宿 正野(사카노우 155) 에노오우스쿠네마사노), 百濟王善義(쿠다라노코니키시젠기), 淸瀧朝臣河根(키요타키 노아손카와네)에게 종5위상을 주었다. 권16 仁明天皇 承和 13년(846) 2월 庚子 (전략) 종5위하 百濟宿 河成165)을 安藝守166)로 삼았다. 承和 13년(846) 3월 丙辰 권15 仁明天皇 播磨國(하리마노쿠니), 揖保郡(이히호군)167)사람. 散位,168) 정8위상 百濟公淸永(쿠다라노 承和 12년(845) 춘정월 甲寅 종5위하 笠朝臣數道(카사노아손카즈미치), 百濟王慶世(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세),156) 橘 朝臣千枝(타치바나노아손치에), 久賀朝臣三夏(구가노아손미나츠), 惟良宿 貞道(코레요 시노스쿠네사다미치)에게 종5위상을 주었다. 외종5위하 菅原朝臣楣吉(스가하라노아손히 152) 出羽國 河邊郡 : 현재의 秋田縣 河邊郡. 153) 奈良己智豊繼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54) 大瀧宿 : 大瀧(오오타키)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살던 곳의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 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宿 는 天武 8姓 중에서 제3위 姓이다. 155) 百濟王善義 : 이후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56) 百濟王慶世 : 承和 14년(847) 12월에는 齋院長官으로 임명되었고, 嘉祥 3년(850) 5월에는 散位 종5위상으로 藥師寺使로 임명되었다. 貞觀 원년(859) 2월 刑部大輔로 임명되었고, 그해 4월에 는 次侍從이 되었다. 157) 百濟宿 河成 : 餘河成 百濟朝臣河成을 가리킨다. 承和 7년(840) 6월에 餘河成은 百濟朝臣이 라는 새로운 씨성을 사여받았다. 그리고 이 기사에서도 승진하고 있으므로 朝臣보다 낮은 宿 姓으로 강등될 이유도 없으므로 百濟宿 는 百濟朝臣을 잘못 표기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158) 河陽宮 : 桓武天皇대에 山城國 山崎(현재 京都府 乙訓郡 大山崎町)에 조영한 離宮. 현재는 離宮 八幡宮이 있다. 159) 兵部卿 : 兵部省의 장관. 兵部省은 令制의 8省 중의 하나. 養老職員令에 의하면 兵部省에는 兵 馬 造兵 鼓吹 主船 主鷹의 5司가 있어 내외 武官의 人事와 軍事를 담당하였다. 160) 忠良親王 : 주 28) 참조. 161) 百濟王들 : 백제왕씨 일족. 162) 贄 : 주 139) 참조. 163) 侍從 : 일본 令制의 천황측근 관직. 中務省에 소속되었다. 상당관위는 종5위하이며 정원은 8명 인데 3명은 少納言이 겸직하였다. 藏人이 설치되면서 원래 직무와 관련성이 적어져 公卿이 겸임 하는 예도 생겼으며 인원도 늘어나 平安시대 말기에는 20인으로까지 늘어나 명예직적인 색채가 강해졌다. 164) 宮 : 平安宮. 165) 百濟宿 河成 : 百濟朝臣河成을 가리킨다(주 157) 참조). 166) 安藝守 : 安藝國의 장관 167) 播磨國 揖保郡 : 현재의 兵庫縣 揖保郡.

184 366 키미키요나가)169)과 남녀 1명씩의 본거지를 左京 3條2坊에 옮기도록 하였다. (후략) 續日本後紀 367 스),174) 大秦公是雄(우즈마사노키미코레오)175)에게 외종5위하를 주었다. 연회가 끝나고 祿 을 각각 주었다. 권17 仁明天皇 承和 14년(847) 춘정월 甲辰 정6위상 (중략) 百濟王安宗(쿠다라노코니키시안소우)170) (중략)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嘉祥 2년(849) 춘정월 丁丑 尙侍 종2위 百濟王慶命176)이 사망하였다. 종1위를 추증한다는 칙이 있었다. 종4위상 豊 江王(토요에오우),177) 종5위하 美志眞王(미시신오우),178) 종5위하 藤原朝臣緖數(후지와라 노아손오카즈),179) 종5위하 飯高朝臣永雄(이이다카노아손나가오)180)을 파견하여 장례를 承和 14년(847) 12월 乙巳 감독하게 하였다. 종5위하 紀朝臣全吉(키노아손젠키치)을 主殿頭171)로 삼았다. 종5위상 百濟王慶世(쿠다 라노코니키시쿄우세)172)를 齋院長官173)으로 삼았다. 권19 仁明天皇 嘉祥 2년(849) 춘정월 壬戌 [정6위상] 蕃良朝臣豊持(하라노아손토요모치), 高岳宿 宗雄(타카오카노스쿠네무네 오), 上毛野朝臣綱主(카미츠케누노아손츠나누시), 百濟宿 康保(쿠다라노스쿠네미치야 168) 散位 : 令制에서 위계는 있으나 직무가 없는 사람. 式部省 관할 하의 散位寮에서 관할하였다. 도 읍에서는 6위 이하의 散位는 교대로 散位寮에 출근하였고, 지방에서는 國衙에 출근하였다. 169) 百濟公淸永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百濟公씨에 대해서는 446쪽의 주 26) 참조. 170) 百濟王安宗 : 仁壽 3년(853) 1월 安藝介로 임명되고 齊衡 3년(856) 1월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 다. 天安 2년(858) 1월에 安藝守로 임명되고, 그해 4월에 사망하였다. 171) 主殿頭 : 主殿寮의 장관. 主殿寮에 대해서는 주 74) 참조. 172) 百濟王慶世 : 주 156) 참조. 173) 齋院長官 : 齋院司의 장관. 齋院은 京都의 賀茂神社에서 근무하는 미혼 황녀를 가리킨다. 伊勢의 齋王과 마찬가지로 卜占으로 정해졌다. 사무를 담당하는 齋院司에는 長官 이하 관인들과 內侍 女藏人들과 같은 女官이 근무하였다. 174) 百濟宿 康保 : 이후 伊豆國守가 되었으나 齊衡 원년(854) 10월에 부하 백성 수명을 때려 죽여 遠流에 처해졌다. 百濟宿 씨는 新撰姓氏錄 에는 실려 있지 않지만 日本後紀 弘仁 3년(812) 춘정월 신미조에서 右京人 정6위상 飛鳥戶造善宗과 河內國人 정6위상 飛鳥戶造名繼가 百濟宿 라는 새로운 씨성을 사여받고 있는 점에서 원래는 飛鳥戶造씨였음을 알 수 있다. 飛鳥戶造에 대 해서는 461쪽의 주 127) 참조. 175) 大秦公是雄 : 이후 仁壽 2년(852) 1월에는 攝津介로 임명되었다. 大秦이라는 씨명은 山城國公 葛野郡 太秦邑(현재 京都市 右京區 太秦)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太秦씨 중에서는 宿 를 사 성받은 太秦公宿 씨가 있는데, 新撰姓氏錄 左京 諸蕃 上 漢條에서 진시황제의 3세손 孝武王 에게서 나왔다고 하였다. 176) 百濟王慶命 : 주 77) 참조. 177) 豊江王 : 796~863. 光仁천황의 아들 비田친왕의 손자. 日本三代實錄 貞觀 5년(863) 秋7월 16일 병오조의 豊江王 卒傳에 의하면 그는 弘仁 13년(822) 종5위하를 받은 이후 貞觀 4년(862) 퇴관할 때까지 종4위하까지 승진하였고, 관직으로는 少納言 侍從 中務大輔 兵部大輔 右京 大夫 下總權守 宮內卿 등을 역임하였다. 178) 美志眞王 : 承和 7년(840)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였고, 承和 8년 正親正이 되었고, 그해 高津內親王이 사망하였을 때에는 장례를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嘉祥 3년(850)에는 종5위 상으로 승진하였고, 仁壽 원년(851)에는 諸陵頭로 임명되었다. 179) 藤原朝臣緖數 : 日本文德天皇實錄 에 의하면 嘉祥 3년(850) 3월 仁明천황이 사망하였을 때에 는 諸衛를 이끌고 左右兵庫를 지키는 일을 담당하였고 仁壽 2년(852)에는 越前介로 임명되었다. 180) 飯高朝臣永雄 : 承和 11년(844)에 종5위하로 승진하였고, 承和 12년에 左京亮으로 임명되었다. 承和 14년에 仁明천황의 황여 時子內親王이 사망하였을 때와 嘉祥 3년(850) 嵯峨천황의 황녀 秀子內親王이 사망하였을 때도 장례를 감독하는 일을 담당하였다. 貞觀 5년(863) 종5위하에서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고, 貞觀 6년에는 丹波守로 임명되었다. 181) 百濟王敎福 : 百濟王安義의 아들. 日本文德天皇實錄 에 의하면 嘉祥 3년(850) 5월에 元興寺使 로 임명되고, 齊衡 원년(854) 4월 48세로 사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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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 日本文德天皇實錄 371 日本文德天皇實錄 六國史 중 다섯 번째 正史. 문덕천황의 일대를 대상으로 한 編年體史書로 전체 10권이다. 871 년 淸和천황이 右大臣 藤原基經 등에게 명하여 제1차 편찬이 이루어졌다. 陽成천황 때에 제2차 편찬을 하여 879년 완성되었다. 嘉祥 3년(850) 3월부터 天安 2년(858) 8월에 이르는 8년 6개월 간의 일이 수록되었다. 六國史 중에서 처음으로 實錄이라는 명칭을 채용하여, 日本三代實錄 에 답습되었다. 다른 국사에 비해 格을 매우 적게 인용하고 있지만, 인물의 전기가 풍부하다. (新訂 增補)國史大系에 수록되었다. 권1 文德天皇 嘉祥 3년(850) 5월 己卯 태풍이 불어 나무를 부러뜨리고 풀을 죽게 하였다. 災異로 기록하였다. 侍從1) 종5위상 嶋江王(시마에오우),2) 左少弁(사쇼우벤),3) 종5위하 文室朝臣助雄(훈야노아손스케오),4) 中 務少丞(나카츠카사노쇼우죠우),5) 정6위상 百濟王忠岑(쿠다라노쿠코키시츄우센),6) 內舍人 1) 侍從 : 365쪽의 주 163) 참조. 2) 嶋江王 : 續日本後紀 에 의하면 承和 2년(835) 無位에서 종5위하로 출사한 이후, 承和 8년(841) 에 大監物로 임명되었고, 嘉祥 3년(850) 3월에 侍從으로 임명되었다. 위의 사건 이후 같은해 9월 에도 伊勢大神宮에 파견되어 祥瑞가 나타났음을 보고하였다. 仁壽 3년(853)에도 伊勢大神宮에 파 견되어 災疫을 없애주기를 기원하였다. 齊衡 원년(854) 諸陵頭로 임명되었고 그 다음해에 大膳大 夫로 임명되었다. 天安 2년(858)에는 大舍人頭로서 仁明천황릉에 가서 淸和천황의 즉위를 고하고 있으며( 日本文德天皇實錄 ), 貞觀 2년(860) 伊勢大神宮에 가서 폐물을 바치고 정5위하로 승진하 였다( 日本三代實錄 ). 3) 左少弁 : 左弁官을 구성하는 관직. 左弁官은 左大弁 左中弁 左少弁(각각 정원 1명)과 史(大史 少史 각각 정원 2명)으로 구성되어 中務省 式部省 治部省 民部省을 관할하였다. 左弁官은 右 弁官과 함께 太政官에 소속하였다. 4) 文室朝臣助雄 : 807~858. 天武천황의 황자 長親王의 후손으로 中納言 종3위 直世王의 둘째 아들. 大學에서 經史를 배우고 承和 원년(834) 종5위하를 받고 齋宮頭로 임명되었다. 그후 大藏少輔 左 少弁 遠江守 左中弁 丹波守를 역임하였다. 天安 2년(858) 종5위하로 사망하였다(坡本太郞 平野邦雄, 1990, 日本古代氏族人名辭典, 吉川弘文館, 568쪽). 5) 中務少丞 : 中務省의 4등관. 정원 2명. 中務省(나카츠카사쇼우)은 令制의 8성 중의 하나. 太政官의 左弁官에 소속되어 천황에 侍從하면서 조칙의 문안을 심사하여 서명하고, 上表를 천황에게 전달하

187 372 日本文德天皇實錄 373 (우도네리),7) 정6위상 八多朝臣湊(하타노아손미나토),8) 종8위상 淸瀧朝臣岑成(키요타키 散位 종5위하 百濟王敎福(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후쿠),15) 源朝臣潁(미나모토노아손히이 노아손미네나리)9)등을 伊勢大神宮(이세다이진구우)10)에 보내 齋王(사이오우)11) 內親王 즈) 등을 元興寺使로 삼았다. 刑部少輔16) 종5위하 藤原朝臣關雄(후지와라노아손세키오), (나인신노우)12)을 맞아들이고 建禮門(켄레이몬)13) 앞에서 散位 源朝臣同(미나모토노아손히토시) 등을 興福寺使로 삼았다. 散位 종5위하 丹 眞人 除하도록 하였다. 庚辰 繩主(타지히노마히토나와누시), 文室朝臣墾田麻呂(훈야노아손하리다마로) 등을 大安寺 使로 삼았다. 前 越後守 종5위하 丹 眞人氏永(타지히노마히토우지나가), 散位 大宅朝臣 六七日 齋會(사이에)14)를 하였다. 종5위상 坂上大宿 正野(사카노우에노오오스쿠네마 年雄(오오야케노아손토시오) 등을 西大寺使로 삼았다. 散位 종5위하 高階眞人信澄(타카 사노), 左京亮 종5위하 飯高朝臣永雄(이이타카노아손나가오) 등을 東大寺使로 삼았다. 시나노마히토노부스미), 在原朝臣善淵(아리하라노아손요시부치) 등을 法隆寺使로 삼았 다. 散位 종5위상 百濟王慶世(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세),17) 종5위하 橘朝臣三夏(타치바나 는 일, 圖書寮에서 편수하는 國史를 감수하며, 後宮 관계 사무 등을 담당하였다. 6) 百濟王忠岑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7) 內舍人 : 令制에서 中務省에 소속하였던 관인. 정원 90명. 무장하고 궁 안에서 숙직하면서 궁을 지 키고 천황이 행행할 때 호위하는 일과 그 밖에 천황 옆에서 잡무를 담당하였다. 令制에서는 5위이 상의 사람의 자제 중에서 인재를 선발하여 임명하도록 하였다. 8) 八多朝臣湊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9) 淸瀧朝臣岑成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0) 伊勢大神宮 : 현재 三重縣 伊勢市에 있는 皇大神宮(內宮). 天照大神을 모시는 곳으로 율령시대에 는 최고 국가제사의 대상으로 천황 이외의 사람이 사적으로 기원하는 것을 금하였다. 황녀를 齋 王으로 파견하였다. 11) 齋王 : 伊勢大神宮의 齋王. 齋宮 延喜式 齋宮寮式에 의하면 천황 즉위 초에 미혼의 내친왕 중에 서 점쳐서 정하여 우선 궁궐안의 雅樂寮 大膳職 등의 初齋院에서 약 1년간, 그리고 궁성 밖의 淨 野(嵯峨野)에 지은 野宮에서 약 1년간 潔齋를 지내고 3년째의 9월에 천황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監送使 이하 수백인을 이끌고 伊勢로 갔다. 齋王은 伊勢의 多氣御所에서 潔齋생활을 하였다. 齋王 은 천황을 대신하여 일본 천황가의 皇祖 天照大神을 모시는 至高의 巫女였다. 원칙적으로 당대 천 황이 양위하거나 사망하면 齋王을 퇴임하게 되었지만, 부모가 사망하거나 본인에게 과실이 있어 도 퇴임해야 하였다(1985, 國史大辭典 6, 吉川弘文館, 144~146쪽). 12) 內親王 : 仁明천황의 딸 久子內親王을 가리킨다. 仁明천황이 즉위한 후 天長 10년(833) 3월 26일 伊勢의 齋王으로 임명되어 潔齋생활을 하다가 嘉祥 3년(850) 3월 인명천황이 사망하자 齋王을 퇴 임하게 되었다. 13) 建禮門 : 平安宮의 內裏外郭의 남쪽 중앙문. 白馬節會가 이 문 앞에서 행해졌다. 14) 六七日 齋會 : 齋會는 승니를 초빙하여 佛事를 거행하고 잿밥을 내놓은 법회를 가리킨다. 양친 형 제나 스승이 사망하였을 때 삼칠일과 칠칠일에 경전을 읽거나 강설하였다. 齋會는 日本書紀 天 武 4년(675) 4월조에 승니 2400여명을 초빙하여 크게 齎를 하였다고 하는 기사를 통해 天武대부 터 국가적인 행사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에서는 850년 3월 21일 사망한 仁明천황을 위해 육칠일 齋會, 즉 42齋를 850년 5월 3일 거행한 것이다. 노아손미나츠) 등을 藥師寺使로 삼았다. 권2 文德天皇 嘉祥 3년(850) 11월 己卯 종4위하 治部大輔(지부다이부),18) 興世朝臣書主(오코스요노아손후미누시)19)가 사망하였 다. 書主는 右京人이다. 본성은 吉田連이다. 그 조상은 백제출신으로 조부 정5위상 圖書 頭(즈쇼노카미)20) 겸 內藥正(나이야쿠노카미),21) 相摸介(사가미노스케), 吉田連宜(기치타 노무라지요로시)22)와 부 內藥正 정5위하 古麻呂(후루마로)23)는 모두 侍醫가 되어 여러 대 15) 百濟王敎福 : 367쪽의 주 181) 참조. 16) 刑部少輔 : 刑部省의 3등관. 17) 百濟王慶世 : 364쪽의 주 156) 참조. 18) 治部大輔 : 治部省의 차관. 治部省은 令制의 8성 중의 하나로 태정관의 左弁官에 속하여 5위이상 관인의 姓氏 繼嗣 婚姻 祥瑞 喪葬 僧尼 國忌 蕃客과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였다. 19) 興世朝臣書主 : 355쪽의 주 88) 참조. 20) 圖書頭 : 圖書寮의 장관. 令制에서 圖書寮는 궁중의 도서를 보관하고 국사를 편찬하는 일을 담당 하였다. 21) 內藥正 : 內藥司의 장관, 令制에서 內藥司는 천황 中宮 東宮의 진료를 담당하였다. 22) 吉田連宜 : 원래는 승려로 이름이 惠俊이었으나 文武 4년(700) 8월 환속을 명령받아 吉이라는 氏 와 宜라는 이름을 사여받았고 관위를 받았다. 724년에 吉田連을 씨성으로 받았다. 730년 3월에 는 제자를 길러 그 의술을 전습시키도록 하였다. 733년 圖書頭가 되었고 738년에는 典藥頭로 임 명되었다. 萬葉集 에 和歌 4수가 실려있고, 懷風藻 에는 한시 2수가 실려있다.

188 374 日本文德天皇實錄 375 에 걸쳐 받들었다. 宜 등은 유교에도 밝아 제자들이 그 가르침을 기록하였다. 書主는 공 정5위상 藤原朝臣良仁(후지와라노아손요시히토), 정5위하 藤原朝臣高房(후지와라노아손 손하고 근면하였으며 몸가짐이 훌륭하였다. 옛날에 嵯峨太上天皇(사가다이죠우텐노우) 타카후사), 종5위상 平朝臣春香(타이라노아손하루카), 藤原朝臣 藤(후지와라노아손나 이 皇子였던 시기에 특별히 그 행동거지를 어여삐 여겼다. 延曆 25년(806) 尾張少目(오 미후지), 豊階公安人(토요시나노키미야스히토), 종5위하 小野朝臣千株(오노노아손치카 24) 25) 와리노쇼우사칸) 이 되었고, 大同 4년(809) 4월 縫殿少允(누이도노노쇼우인) 이 되었 부), 百濟王永仁(쿠다라노코니키시예이진),31) 文室眞人有眞(훈야노마히토아리마), 善友朝 다. 弘仁 원년(810) 정월 內藏少允(쿠라노쇼우인)26)으로 전근하였다가 弘仁 4년(813) 5월 臣豊宗(요시토모노아손토요무네), 高橋朝臣安雄(타카하시노아손야스오), 坂上大宿 貞 左兵衛權大尉(사효우에노곤노다이이)가 되었다. 弘仁 7년(816) 2월 左衛門大尉(사에몬노 守(사카노우에누오오스쿠네사다모리), 藤原朝臣冬緖(후지와라노아손후유오), 橘朝臣常 다이이)가 되었고 行檢非違使를 겸하였다. 잠시 후 右近衛將監으로 전근하였다. 書主는 蔭(타치바나노아손츠네카게), 橘朝臣茂房(타치바나노아손시게후사), 藤原朝臣三藤(후지 비록 유교에 능통하였으나 몸이 민첩하여 높은 언덕을 뛰어오를 수 있고 깊은 물도 건널 와라노아손미후지), 淸原眞人淸海(키요하라노마히토키요미), 南淵朝臣年名(미나부치노 수 있어서 무예에 능한 무사와 같았다. 和琴27)을 잘 연주하여 大歌所別當(오오우타도코로 아손토시나) 등을 次侍從(지지쥬우)32)으로 삼았다. 노벳토우)28)도 역임하면서 節會29)에서 늘 연주하였다. 권3 文德天皇 9월 甲戌 散事 종4위하 百濟王貴命(쿠다라노코니키시키묘우)33)이 사망하였다. 貴命은 종4위하 陸奧鎭守將軍 겸 下野守 俊哲의 딸로, 아름답고 솜씨가 좋아 嵯峨太上天皇(사가다이죠우 仁壽 원년(851) 하4월 癸卯朔 텐노우)때에 女御34)가 되었다. 2品 式部卿 大宰帥(다자이노카미)35) 忠良親王의 어머니이 종4위하 道野王(미치노오우), 房世王(후사요오우), 正躬王(마사미오우), 貞內王(사다우 다. 弘仁 10년(819) 정월 종5위상을 받고 10월 11일 종4위하로 승진하였다. 30) 치오우), 雄風王(오토요오우), 高叡王(타카에오우), 伴宿 成益(토모노스쿠네나리마스), 권4 文德天皇 23) 古麻呂 : 吉宜의 아들. 778년 內藥佑 겸 豊前介, 781년에는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784년에는 侍醫 겸 內藥正, 786년에는 常陸大 도 겸하였다. 24) 尾張少目 : 尾張國의 4등관. 尾張國은 東海道의 上國. 현재의 愛知縣의 서반부 지역. 25) 縫殿少允 : 縫殿寮의 3등관. 令制에서 縫殿寮는 中務省에 소속되어 女王 이하 女官의 名帳 考課 및 의복에 관한 일을 담당하였다. 26) 內藏少允 : 內藏寮의 3등관. 令制에서 內藏寮는 中務省에 소속되어 궁중용의 재보 금은, 그 밖 에 제국의 공헌물과 천황 황후의 의복과 신발을 보관하는 창고를 관할하고 궁중에서 천황이 사 용하는 물건을 조달하여 바치는 일을 담당하였다. 27) 和琴 : 일본고유의 6현금. 28) 大歌所別當 : 大歌所의 장관. 大歌所는 令外官으로 大歌, 즉 催馬樂 神樂歌 등을 담당하는 관청. 29) 節會 : 節日(元旦 白馬 踏歌 端午 豊明)이나 그 밖에 공적인 행사가 있는 날에 궁중에서 거 행되는 연회(1987, 國史大辭典 8, 吉川弘文館, 333쪽). 30) 雄風王 : 雄豊王(오토요오우). 續日本後紀 에서는 雄豊王으로 표기되었다(承和 9년 9월 임인조, 承和 10년 12월 신유조). 仁壽 2년(852) 2월 乙巳 參議 정4위하 宮內卿 겸 相摸守 滋野朝臣貞主(시게노노아손사다누시)가 사망하였다. 貞主는 右京人이다. 貞主가 상표하여 말하기를 무릇 大宰府(다자이후)36)는 서쪽 끝의 큰 31) 百濟王永仁 : 357쪽의 주 105) 참조. 32) 次侍從 : 令制의 侍從에 준하는 것으로 節會나 그 밖의 祭儀 法會 등에서 侍從(정원 8명)을 보조 하기 위해 임시로 임명하였던 직책. 續日本紀 寶龜 원년(770) 정월8일조에 처음 보인다. 4위 5위 중에서 임명하였다. 延喜式 중무성식 時服조에 의하면 차시종의 정원은 92명이었다. 33) 百濟王貴命 : 349쪽의 주 32) 참조. 34) 女御 : 360쪽의 주 130) 참조. 35) 大宰帥 : 大宰府의 장관. 9세기 이후 親王이 임명되는 관례가 생기면서 權帥나 大貳가 실질적인 장관이 되었다.

189 376 日本文德天皇實錄 땅이며 中國(일본)의 우두머리입니다. 동쪽으로는 長門(나가토)37)을 關門으로 하고 서쪽 으로는 신라를 마주하고 있습니다. 나아가 九州二嶋는 郡縣이 넓고 멀어, 옛부터 지금까 지 중요한 지역이었습니다. 무릇 일을 도모할 때에는 반드시 옛일이 있어 옛날 이야기를 듣고 옛 기록을 참고하여야 합니다. 大唐 高麗 新羅 百濟 任那 등은 모두 우리나라 에 위탁하여 입조할 수 있었습니다. 혹은 공헌하는 일을 핑계삼거나 귀화하려는 마음을 가지고 몰려드는, 외부에서 들어오는 關門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仁壽 3년(853) 8월 壬午 지진이 있었다. 散位 종5위하 百濟朝臣河成(쿠다라노아손카와나리)42)이 사망하였다. 河 成은 本姓은 餘였는데 뒤에 百濟로 고쳤다. 武勇이 있었고 强弓을 잘 쏘았다. 大同 3년 (808) 左近衛로 삼았다. 그림을 잘 그려 여러 차례 천황에게 불려갔다. 그가 그린 고인의 초상화나 산수초목이 마치 살아있는 것 같았다. 옛날에 궁중에 있었을 때 어떤 사람에게 從者를 불러오도록 하였으나 그 사람이 從者의 얼굴을 모른다고 하자 河成이 종이 한 장 을 꺼내 그 모습을 그려주었으므로 그 사람은 從者를 찾아올 수가 있었다. 그 솜씨가 이 권5 文德天皇 와 같아 오늘날 그림에 대해 말하는 사람은 모두 그를 본받고 있다. 弘仁 14년(823) 美作 仁壽 3년(853) 춘정월 戊戌 천황이 377 權少目으로 임명되었고 天長 10년(833) 외종5위하를 받았다. 여러 관직을 맡았다가 承和 樂院(부라쿠인)38)에 가셔서 靑馬節會(아오우마노세치에)39)를 열었다. 군신에 게 연회를 베풀었는데 옛 의식대로 행하였다. (중략) 종5위하 藤原朝臣本雄(후지와라노 아손모토오), 百濟王永善(쿠다라노코니키시예이젠),40) (중략) 源朝臣 (미나모톤아손카노 우) 등에게 종5위상을 주었다. 년중(834~847)에 備中介가 되었다. 다음에 播磨介가 되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그를 우러 러 보았다. 사망하였을 때 나이는 72세였다. 권6 文德天皇 齊衡 원년(854) 2월 辛未 仁壽 3년(853) 춘정월 丁未 41) 종5위하 百濟王安宗(쿠다라노코니키시안소우)을 安藝介(아기노스케) 로 삼았다. 36) 大宰府 : 令制에서 西海道(九州)를 총괄하였던 관청으로, 현재 福岡縣 太宰府町에 있다. 백강구전 투(백촌강사움)에서 패배한 일본이 天智 3년(664) 筑紫에 水城을 쌓고 방위기지로서 大宰府를 처 음 설치한 후 令制에서는 九州諸國의 행정관리 외국사절과 도래인의 접대, 해변 방위 등을 임무 로 하는 기관으로 정비되었다. 37) 長門 : 長門國 고대 山陽道의 中國. 현재 山口縣의 일부. 38) 樂院 : 351쪽의 주 52) 참조. 39) 靑馬節會 : 궁정의 연중행사의 하나로 정월 7일 천황이 紫宸殿에서 군신들에게 연회를 베풀고 左 右馬寮에서 기르던 말을 보여주는 행사. 중국의 행사가 전해진 것으로 持統朝부터는 항례화하여 令(雜令 節日條)에도 규정이 들어갔다. 처음에는 풍락원에서 거행하였으나 문덕천황 때부터 점차 紫宸殿에서 거행되게 되었다. 정월 7일 이 행사를 거행하면 그해의 邪氣를 막는다고 생각하였다. 村上천황대부터 靑馬를 白馬로 고쳐쓰게 되었지만, 일본음은 모두 あおうま 로 읽었다(1979, 國史大辭典 1, 吉川弘文館, 37쪽). 40) 百濟王永善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1) 安藝介 : 安藝國의 차관. 승려 52인을 內裏로 불러 大般若經을 독경하도록 하였다.43) 3일만에 끝났다. 종5위하 百濟王敎凝44)(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교우)을 侍從(지쥬우)45)으로 삼고, 安倍朝臣有道(아베 노아손아리미치)를 大主鈴(다이슈레이)으로 삼았다. 42) 百濟朝臣河成 : 782~853. 탁월한 회화기술에 의해 이름을 남긴 일본 최초의 화가. 飛 의 匠과 솜씨를 경쟁하였을 때 河成이 썩는 냄새가 날 정도로 생생하게 시체를 묘사하여 놀라게 하였다는 일화도 있다. 차아천황의 離宮 嵯峨院(현재 京都市 右京區 大覺寺의 전신)의 정원도 만들었다고 전해진다(364쪽의 주 157) 참조). 43) 승려 52인 독경하도록 하였다 : 大般若經 1部 600권을 독경하는 법회(大般若會)를 연 것 이다. 일본에서 大盤若會가 열린 것은 大寶 3년(703) 大官 藥師 元興 弘福의 네 절에서 大般 若經 을 전독하고 100명의 得度를 실시한 것이 처음이다. 大般若經 은 讀誦하면 사악한 것을 물 리치고, 읽으면 福과 영예를 얻는다고 하여, 일본에서 8세기부터 근세까지 書寫와 독송이 이루어 졌다. 讀經에는 轉讀(부분 독경) 또는 眞讀(全卷 독경)이 있었는데, 위의 독경이 어떤 독경이었는 지 알 수 없다. 44) 百濟王敎凝 : 357쪽의 주 100) 참조. 45) 侍從 : 일본 율령관직제에서 中務省에 소속된 관인으로 천황의 측근에서 신변의 여러 가지 일을

190 378 日本文德天皇實錄 379 츄우)의 손자이며, 종5위하 玄風(겐푸우)52)의 아들이다. 어려서 大學에서 공부하여 문장 齊衡 원년(854) 하4월 丙辰 散位 百濟王敎福(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후쿠)46)이 사망하였다. 敎福은 종4위하 安義47)의 아들이다. 嘉祥 3년(850) 정월에 종5위하를 받았다. 사망하였을 때 나이는 48세였다. 을 잘 썼다. 大同 원년(806) 2월 大學少允이 되었고, 4년(809) 2월 右京 少進(쇼우신)53) 이 되었다. 弘仁 7년(816) 2월에 종5위하를 받았다. 弘仁 10년(819) 2월에 左衛門佐(사 에몬노스케)54)가 되었고, 弘仁 11년(820) 정월에는 相摸介(사가미노스케)를 겸직하였다. 弘仁 12년(821) 10월에는 종5위상을 받았고 弘仁 13년(822) 3월에는 但馬守(타지마노카 齊衡 원년(854) 동10월 甲戌 미)로 전근하였다. 天長 4년(827) 1월에 美作守(미마사카노카미)로 임명되었고 정5위하 公卿(쿠교우)48)이 평의한 내용을 상주하였다. 전직 伊豆國의 守 외종5위하 百濟宿 康 를 받았다. 天長 6년(829) 2월에 종4위하를 받았고 右京大夫가 되었다. 天長 10년(833) 保(쿠다라노스쿠네미치야스) 가 부하 백성 數人을 때려 죽였다. 康保의 죄는 당연히 死 11월 左衛門督으로 전근하였고, 承和 4년(837) 1월 相摸守를 겸직하였다. 그해 6월에 宮 罪에 해당하나 조서를 내려 1등을 감하여 遠流(온루)50)에 처하였다. 內卿이 되었고 承和 6년(839) 2월에는 종3위를 받았다. 늙어서 벼슬을 그만두고 河內國 49) 讚良郡(사라라군)55) 산기슭에서 살면서 매와 개를 기르면서 요양하였다. 사망하였을 때 권7 文德天皇 齊衡 2년(855) 추7월 戊寅 종3위 百濟王勝義(쿠다라노코니키시쇼우기)가 사망하였다. 勝義는 종4위하 元忠51)(겐 하였다. 관위는 종5위하에 상당하였다. 정원은 8명인데 이 중에서 3인은 少納言이 겸임하였다. 諸王이나 공경의 자제가 자주 임명되었으나, 藏人所가 설치되면서 점차 원래 맡았던 직무를 장인 소의 장인이 맡게 되었다. 평안중기 이후 시종은 명문자제의 서작 후 초임관직이 되었고 공경의 명예직적인 兼官도 많아졌다(1985, 國史大辭典 6, 吉川弘文館, 769쪽). 46) 百濟王敎福 : 367쪽의 주 181) 참조. 47) 安義 : 百濟王安義. 348쪽의 주 24) 참조. 48) 公卿 : 太政大臣 左大臣 右大臣을 公 大納言 中納言 參議. 3위이상의 朝官을 卿이라고 하 여 양자를 함께 公卿이라고 부른다. 49) 百濟宿 康保 : 366쪽의 주 174) 참조. 50) 遠流 : 流刑(루케이) 중의 하나. 大寶律과 養老律에서는 流刑으로 遠流 中流(츄우루) 近流(콘 루)의 三流를 두었다. 流刑에 처해진 사람은 거주지에서 추방되어 1년간 徒役한 후 유배된 곳의 호적에 편입되어 良民으로 班田을 지급받고 조세를 납입해야 되었다. 神龜 원년(724)의 式에서 遠流는 伊豆國 安房國 常陸國 佐渡國 隱岐國 土佐國 中流는 수方國 伊豫國 近流는 越 前國 安藝國로 규정하였으나, 延喜式 에서는 中流에 信濃國이 추가되었다. 51) 元忠 : ~773. 百濟王善光의 4대손이며 百濟王孝忠의 아들. 天平 20년(748) 정6위상에서 종5위 하로 승진한 후 治部少輔 大藏少輔 등을 역임하였으며, 天平寶字 8년(764)에 종4위하까지 승진 하였다. 나이는 76세였다. 권8 文德天皇 齊衡 3년(856) 춘정월 辛亥 帝(文德천황)가 南殿(나덴)56)에 납시어서 靑馬節會57)를 열었다. 慣例대로 군신에게 연회 를 베풀었다. (중략) 종5위하 藤原朝臣近主(후지와라노아손치카누시), 紀朝臣道茂(키노 아손미치시게), 百濟王安宗58)(쿠다라노코니키시안소우), 橘朝臣常陰(타치바나노아손츠네 카게), 在原朝臣善淵(아리하라노아손요시부치), 安倍朝臣貞行(아베노아손사다유키) 등에 게 종5위상을 주었다. 52) 玄風 : 百濟王元忠의 아들. 延曆 6년(787)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고 美濃介로 임명되었 으며, 延曆 10년(791)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다. 53) 右京 少進 : 右京職의 3등관. 우경직에 대해서는 345쪽의 주 3) 참조. 54) 左衛門佐 : 左衛門府의 차관. 左衛門府에 대해서는 355쪽의 주 82) 참조. 55) 河內國 讚良郡 : 현재의 大阪府 北河內郡. 56) 南殿 : 紫寢殿. 345쪽의 주 2) 참조. 57) 靑馬節會 : 주 39) 참조. 58) 百濟王安宗 : 366쪽의 주 170) 참조.

191 380 권9 文德天皇 天安 원년(857) 춘정월 丁未 無位 藤原朝臣潁子(후지와라노아손카이코), 종6위상 百濟王貞琳(쿠다라노코니키시테 이린),59) 紀朝臣仲岑(키노아손나카미네), 종6위하 和朝臣安子(야마토노아손야스코), 종7 위상 平群朝臣眞宗(헤구리노아손마무네), 종6위하 秋篠朝臣春子(아키시노아손하루코), 無位 林朝臣氏子(하야시노아손우지코) 등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권10 文德天皇 天安 2년(858) 춘정월 庚子 (전략) 종5위하 百濟王淳仁(쿠다라노코니키시쥰진),60) 橘朝臣貞雄(타치바나노아손사다 오), 藤原朝臣有貞(후지와라노아손아리사다), 大和眞人吉直(야마토노마히토요시나오), 藤原朝臣基經(후지와라노아손모토츠네) 등에게 종5위상을 주었다. 天安 2년(858) 춘정월 己酉 (전략) 종5위상 百濟王安宗61)을 安藝守로 임명하였다. (후략) 天安 2년(858) 하4월 壬寅 종일 비가 왔다. 하늘에서 소리가 났는데 우레와 같았다. 安藝國에서 國守 종5위상 百 濟王安宗이 사망하였다고 보고하였다. 김은숙(한국교원대학교) 59) 百濟王貞琳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女官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60) 百濟王淳仁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1) 百濟王安宗 : 366쪽의 주 170) 참조. 日本三代實錄

192 日本三代實錄 383 日本三代實錄 六國史 중 최후의 正史. 宇多천황의 명으로 源能有 藤原時平 菅原道眞 大藏善行 三統理平 이 편찬하기 시작하여 醍 천황 때인 901년에 완성하였다. 전체 50권. 淸和天皇 陽成天皇 光孝 天皇 3代의 역사를 정리한 것으로 858(天安 2)~887년(仁和 3)의 기사를 수록하고 있다. 연중행사 에 관한 기사와 詔勅 上表 願文 등을 자세하게 싣고 있다. (新訂增補)國史大系에 수록되었다. 권1 淸和天皇 天安 2년(858) 11월 7일 甲子 종5위하 守(슈)1) 左少弁 丹 眞人貞岑(타지히노마히토사다미네), 右兵庫頭2) 百濟王永仁 (쿠다라노코니키시예이진).3) 散位 橘朝臣伴雄(타치바나노아손토모오), 雅樂頭 源朝臣舒 (미나모토노아손노부루), 병부소보 源朝臣直(미나모토노아손나오루), 右近衛 權少將 겸 周房權守 藤原朝臣常行(후지와라노아손츠네유키), 右少弁 藤原朝臣家宗(후지와라노아손 이에무네)에게 모두 종5위상을 주었다. 天安 2년(858) 11월 26일 계미 左京職이 매년 鍛冶戶(카누치코)4) 百濟品部戶5) 등의 計帳을 바치는 것은 公家(쿠게)6) 1) 守 : 일본 令制에서는 관위상당제가 시행되었으나, 관위와 관직이 일치하지 않는 경우가 있었다. 관위보다 관직이 높은 경우를 守 라고 하여, 서명할 때에는 관위와 관직 사이에 守 라는 글자를 적어넣었다. 2) 右兵庫頭 : 362쪽의 주 141) 참조. 3) 百濟王永仁 : 357쪽의 주 105) 참조. 4) 鍛冶戶 : 銅製나 鐵製의 雜器를 가공 생산하는 工人으로 雜戶에 속하였다. 令集解 職員令에 인용된 別記에 의하면 兵部省 造兵司에 270호, 宮內省 鍛冶司에 238호가 배치되어 10월부터 3월의 농한기 에 호별 한명씩의 丁이 雜工部 20명과 鍛部 20명의 지휘를 받으면서 병기나 금속기의 생산에 종사하 였다. 일부 鍛冶戶는 고구려 백제 신라에서 도래한 잡공인과 함께 大藏省 典鑄司에 소속하여 雜工 部 10명의 지휘를 받으면서 금은동철의 주조를 담당하였다. 延喜式 에 의하면 鍛冶司를 大同 3년 (808)에 흡수한 木工寮에 鍛冶戶가 372호 소속되었고, 兵庫寮에 雜工戶가 374호 소속되었다. 5) 百濟品部戶 : 百濟戶(쿠다라코). 令制에서 內藏寮와 大藏省에 소속하여 신발과 안장 등 피혁 제품

193 384 日本三代實錄 385 에 무익하고 담당 관리들을 번잡하게만 하니 이를 폐지하여 바치지 말도록 해달라고 말 尉 藤原朝臣國經(후지와라노아손쿠니츠네), 橘朝臣子善(타치바나노아손코요시), 藤原朝 하였다. 이에 따랐다. 臣貞庭(후지와라노아손사다니와), 式部大丞 藤原朝臣安棟(후지와라노아손야스무네), 右 衛門 少尉 文室朝臣卷雄(훈야노아손마키오), 右兵衛權大尉 文室朝臣能雄(훈야노아손요 권2 淸和天皇 시오), 散位 藤原朝臣岑人(후지와라노아손미네히토), 橘朝臣忠宗(타치바나노아손타다무 네), 木工權助 笠朝臣弘興(카사노아손히로오키), 大內記 高階眞人菅棟(타카시나노마히토 貞觀 원년(859) 2월 13일 己亥 스가무네), 右近衛將監 兼 美作權 散位 종5위상 百濟王慶世(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세)7)를 刑部 大輔8)로 삼았다. (중략) 右 9) 10) 兵庫頭 종5위상 百濟王永仁 을 攝津國의 權介 로 삼았다. 貞觀 원년(859) 하4월 2일 丁亥 이날 조서를 내려 종4위하 時佐王(토키스케오우)11)과 종5위상 百濟王慶世12)를 次侍從13) 으로 삼았다. 紀朝臣正守(키노아손마사모리), 丹波權 百濟王俊 14) 聰(쿠다라노코니키시슈초우), 散位 笠朝臣高人(카사노아손타카히토), 內藏少允 丹 眞 人石臣(타지히노마히토이와오미), 主殿允 車持朝臣廣眞(쿠루마모치노아손히로마사)에게 모두 종5위하를 주었다. 貞觀 원년(859) 11월21일 辛未 외종5위하 賀陽朝臣姑子(카야노아손하하코), 無位 源朝臣高子(미나모토노아손타카코), 橘朝臣常子(타치바나노아손츠네코), 藤原朝臣繼子(후지와라노아손츠구코), 藤原朝臣高 권3 淸和天皇 貞觀 원년(859) 11월 19일 庚午 子(후지와라노아손타카코), 藤原朝臣榮善子(후지와라노아손사요코), 百濟王香春(쿠다라 노코니키니코우슈),15) 笠朝臣遠子(카사노아손토오코)에게 모두 종5위하를 주었다. 종6위 상 江沼臣河子(에누마노오미카와코)에게는 외종5위하를 주었다. 정6위상 源朝臣撰(미나모토노아손에라부), 源朝臣治(미나모토노아손오사무), 左衛門大 권4 淸和天皇 의 생산에 종사하였던 백제계 工人, 令制전의 部(베) 신분의 계보를 이었다. 內藏寮에 10호, 大藏 省에 11호가 배속되어 각각 長上官인 典履 2인의 지휘를 받았다. 百濟戶는 임시로 근무하면서 계 속 上番하여 근무하는 百濟手部를 보조하는 역할을 하는 예비군적 존재였다. 6) 公家 : 본래 公家라는 말은 朝廷 국가 천황 등 오오야케를 가리켰는데, 平安시대 후기에 武士와 寺社의 세력이 강해지자 조정의 정치를 담당하는 朝臣이 公家로 불리우게 되었다. 7) 百濟王慶世 : 364쪽의 주 156) 참조. 8) 刑部 大輔 : 刑部省의 차관. 刑部省에 대해서는 334쪽의 주 57) 참조. 9) 百濟王永仁 : 357쪽의 주 105) 참조. 10) 攝津國의 權介 : 攝津國의 員外 차관. 11) 時佐王 : 日本文德天皇實錄 天安 원년(857), 日本三代實錄 貞觀 16년(874) 5월 7일 갑오조에 의하면 散位 종4위하로 사망하고 있으므로, 859년 이후 874년 5월 이전의 어느 때인가 次侍從을 그만두었을 것이다. 12) 百濟王慶世 : 364쪽의 주 156) 참조. 貞觀 2년(860) 11월 16일 壬辰 (전략) 散位 百濟王貞惠(쿠다라노코니키시테이에),16) 藤原朝臣眞宗(후지와라노아손마무 네), 藤原朝臣雄良(후지와라노아손오요시), 當麻眞人安方(타이마노마히토아스카다), 備 前介 永原朝臣永岑(나가하라노아손나가미네), 河內介 石川朝臣弟庭(이시카와노아손오토 니와), 宮內大丞 大原眞人安雄(오오하라노마히토야스오) 모두 종5위하를 주었다. 13) 次侍從 : 375쪽의 주 32) 참조. 14) 百濟王俊聰 : 貞觀 6(864)년 10월에는 伯耆守로 임명되었고 元慶 3(879)년 1월에는 和泉守로서 종5위하에서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다. 15) 百濟王香春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6) 百濟王貞惠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94 386 日本三代實錄 권5 淸和天皇 曆(기호우레키)25)을 사용하였습니다.26) (후략) 貞觀 3년(861) 6월 16일 己未 貞觀 3년(861) 8월19일 庚申 처음으로 長慶宣明曆經(쵸우케에센묘우레키쿄우)17)을 반포하여 시행하였다. 전에 陰陽 387 左京 사람 散位 외종5위하 伴大田宿 常雄(토모노오오타노스쿠네츠네오)27)에게 伴宿 頭(온묘우노카미)18) 종5위하 겸 行曆博士 大春日朝臣眞野麻呂(오오카스가노아손마노마 (토모노스쿠네)성을 사성하였다. 전에 정3위 行中納言 겸 民部卿 황태후궁대부 伴宿 善 로)19)가 상주하여 삼가 살펴 보건대 豊御食炊屋姬天皇(토요미케카시키야히메노스메라미 男(토모노스쿠네요시오)28) 등이 상주하기를 常雄이 간곡하게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 코토)20) 10년 10월에 백제국의 승려 觀勒21)이 처음 역법을 바쳤습니다만22) 세상에서 사용 다. 삼가 家諜을 살펴보니 伴大田宿 와 같은 조상으로, 金村大連公(카나무라오오무라지 되지 않았습니다. 高天原廣野姬천황(타카마노하라노히로노히메노스메라미코토)23) 4년 노키미)29)의 셋째 아들 狹手彦(사테히코)의 후손입니다. 狹手彦은 宣化천황대에 사신으로 12월에 처음으로 元嘉曆(겐카레키)24)을 사용하라는 칙이 있어서 사용하였고, 그 후 儀鳳 17) 長慶宣明曆經 : 宣明曆. 당의 徐昻이 만들었다고 한다. 당에서 長慶 2년(822)부터 71년간 사용된 역법으로, 거의 大衍曆의 曆數에 의하고 있지만 時差 氣差 刻差의 3差를 더하여 일식의 추산법 을 개량하였다. 貞觀 원년(859) 5월 발해사가 長慶宣明曆을 바치자 이를 陰陽頭 겸 行曆博士 大 春日朝臣眞野麻呂가 검토하여, 貞觀 3년(861) 6월에 채용하였다. 이후 貞享 원년(1684)까지 823 년간 사용되었다(1988, 國史大辭典 9, 吉川弘文館, 574~575쪽). 18) 陰陽頭 : 陰陽寮의 장관. 陰陽寮는 令制에서 中務省에 소속된 관청으로 卜筮 天文 曆 時刻에 관한 업무를 담당하였다. 19) 大春日朝臣眞野麻呂 : 日本文德天皇實錄 에 의하면 眞野麻呂는 가업을 계승하여 天安 원년(857) 까지 5대에 걸쳐 曆道를 전하여 왔다고 한다. 嘉祥 2년(849) 1월 종5위하로 승진하고 齊衡 3년 (856) 1월부터 貞觀 4년(862) 1월까지 曆博士를 역임하고 있다. 貞觀 2년(860) 11월에는 음양두 로 임명되었고 貞觀 4년(862) 1월에는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다. 天安 원년(857)에 大衍曆에서 五 紀曆으로 개력하기를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고, 위의 貞觀 3년(861)에는 다시 五紀曆에서 宣明曆 으로 개력하기를 건의하여 허가받았다. 20) 豊御食炊屋姬天皇 : 推古天皇(스이코텐노우), 554~628, 제33대천황. 재위 592~628. 欽明天皇 의 제3황녀로 어머니는 蘇我稻目의 딸 堅鹽媛. 敏達天皇의 황후로 숭준천황이 蘇我馬子에게 살 해당한 후에 추대받아 즉위하였다. 聖德太子를 섭정으로 삼아 관위 12계제의 시행, 국사 편찬, 견 수사의 파견 등 여러 가지 개혁적인 정책을 실시하였다. 21) 觀勒 : 145쪽의 주 662) 참조. 22) 豊御食炊屋姬天皇 처음 역법을 바쳤습니다만 : 日本書紀 推古 10년(602) 동10월조에 백 제의 승 관륵이 와서 역법책 천문지리책과 遁甲方術의 책을 바쳤다는 기사가 보인다. 23) 高天原廣野姬天皇 : 持統天皇(지토우텐노우). 24) 元嘉曆 : 중국 남송의 何承天이 만들어 元嘉 22년(445)부터 65년간 사용한 달력. 송 제 양에 사신을 파견한 백제에 이 달력이 전해져 실제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周書 백제전과 隋書 백제 전을 통해 알 수 있다. 日本書紀 에서는 欽明 16년(555)에 백제에서 曆博士 王保孫과 推古 10년 (602)에 백제승 觀勒이 曆法을 전하여 陽胡史의 조상인 玉陳이 관륵에게 역법을 배웠다고 하는 데, 이것은 모두 元嘉曆이었다(1984, 國史大辭典 5, 吉川弘文館, 131쪽). 25) 儀鳳曆 : 당의 천문학자 李淳風이 만들어 麟德 2년(665)에 반포되어 728년까지 64년간 사용된 달력. 중국에서는 麟德曆으로 불리웠다. 이 달력은 신라에 전해지고 다시 일본에도 전해져 儀鳳 曆이라는 명칭으로 불리웠다. 의봉력으로 불린 이유는 儀鳳 년간(676~679)에 신라에 전해졌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일본에서는 698년부터 大衍曆을 사용하게 되는 天平寶字 7년(763)까지 66 년간 儀鳳曆을 사용하였다(1983, 國史大辭典 4, 吉川弘文館, 207쪽). 26) 高天原廣野姬천황 4년 12월에 사용하였습니다. : 日本書紀 持統 4년(690)11월 갑신조에 서는 칙을 받들어 元嘉曆과 儀鳳曆을 사용하였다고 하였는데, 실제로 두 가지 달력이 함께 사용 된 것은 692년부터 697년까지다. 27) 伴大田宿 常雄 : 日本三代實錄 貞觀 3년(861) 2월 19일 계해조에서는 主殿允으로서 정8위하 에서 외종5위하로 승진하고 있다. 이때 常雄은 太政大臣 藤原良房의 家人으로 일하고 있었다. 28) 伴宿 善男 : 811~868. 大伴宿 國道의 아들이며 伴宿 中庸의 아버지이다. 天長 7년(830) 校 書殿에서 근무하면서 仁明천황의 총애를 받게 되었다. 承和 8년(841) 大內記로 임명되었고, 承和 9년(842)에는 藏人 式部大丞으로 임명되었다. 그후 讚岐權介 右少弁 藏人頭 右中弁 參 議 班河內和泉田使長官 右大弁 下野守 右衛門督 檢非違使別堂 式部大輔 中宮大夫 美 作守 讚岐守 등을 역임하였다. 齊衡 3년(855)에는 정3위로 승진하고 藤原朝臣良房과 續日本後 紀 의 편찬에 종사하였으며, 貞觀 원년(859)에 정3위로 승진하고 民部卿에 임명되었다. 貞觀 2년 (860)에는 中納言, 貞觀 6년(864)에는 大納言이 되었다. 그러나 貞觀 8년(866) 應天門의 變으로 斷罪되어 伊豆國으로 유배되었다. 유배 후 몰수당한 그의 재산이 막대했다고 한다( 日本古代氏族 人名辭典, 453~454쪽). 29) 金村大連公 : 大伴大連金村(오오토모노오오무라지카나무라) 武烈 繼體 安閑 宣化朝의 大連. 30) 宣化천황대에 백제를 도왔습니다 : 日本書紀 宣化 2년(537) 동10월 임진삭조에 같은 내용

195 388 日本三代實錄 任那에 가서 신라를 정복하고 임나를 회복하였으며 백제를 도왔습니다.30) 欽明천황대에 백제가 高麗의 침입으로 사신을 파견하여 구원해주기를 요청하였습니다. 狹手彦은 다시 대장군이 되어 고려를 쳤습니다. 그 왕이 성을 뛰어넘어 도망하였습니다. 그 틈을 타서 389 권6 淸和天皇 貞觀 4년(862) 7월 28일 己未 궁에 들어가 갖은 보화를 모두 찾아내 바쳤습니다.31) 磯城嶋천황32)대에 다시 와서 고려포 左京 사람 전임 越後介 외종5위하 坂上伊美吉能文(사카노우에노이미키요시부미),36) 大 人(고구려인)입니다.33) 狹手彦은 다시 해외에 파견되어 學少允 종6위상 坂上伊美吉斯文(사카노우에노이미키코레부미)37) 등 9인에게 坂上宿 를 두 나라를 정벌하고 絶域에서 힘을 다해 다시 두 나라를 세워 몸은 당시에 높았고 공은 사성하였다. 후한 孝靈황제38)의 4대손 阿智使主(아치노오미)39)의 후손으로 坂上大宿 (사 후대에까지 전해졌습니다. 옛 사람(狹手彦)은 질박하여 두 나라를 제거하는 데 힘을 다하 카노우에노오오스쿠네)40)와 같은 조상을 가졌다. 左京 사람 종5위하 行(코우)41) 參河介 壹 여 사사로움이 없었으므로 특별한 姓을 따로 내렸습니다. 그러나 자손들은 大部(오오토 志宿 吉野(이치시노스쿠네요시노)에게 大春日朝臣(오오카스가노아손)42)을 사성하였다. 모)34)라는 성을 가질 수 없어서 따로 大田宿 (오오타노스쿠네)라는 성을 내렸습니다. 그 天足彦國押人命43)(아메타라시히코쿠니오시히토노미코토)의 후손이다. 우경인 中宮少屬 리고 狹手彦의 동생 阿彼布古는 아버지의 뒤를 이어35) 이후 자손이 퍼지지 않을까 걱정하 정8위상 道祖史豊富(후나도노후히토토요토미)44)에게 惟道宿 (코레미치노스쿠네)45)를 사 여 다시 더 이상 새로운 성을 사여받지 않았습니다. 이제 阿彼布古의 후손들은 대대로 높 성하였다. 阿智使主의 黨類로 백제국에서 來歸하였다. 左京 사람 造兵司 少令史 정6위상 은 자리에 올랐습니다. 그러나 狹手彦의 후손은 높은 자리에 올랐다고 하는 사람을 오래 飛鳥戶造彌道(아스카베노미야츠코 미치)46)에게 百濟宿 (쿠다라노스쿠네)47)를 사성하였 동안 들은 적이 없습니다. 한 조상의 후예로서 번영과 쇠락이 크게 달라서 한탄하고 호소 다. 百濟國 混伎48)의 후손이다. (중략) 河內國 安宿郡49)(아스카헤군)人 외종5위하 行主計 로를 바쳤는데, 지금 山城국의 하는 일이 그치지 않았습니다. 常雄은 다행히도 태평성대를 만나 새로 천황 조정에도 참 여하여 문음이 중흥하고 실로 영예롭고 기쁩니다. 大田이라고 하는 두 글자를 삭제하여 한 宗으로 돌아가게 된다면 밖으로는 功臣의 계보를 욕되게 하지 않게 될 것이며, 안으로 는 형제간의 우애를 두텁게 할 수 있게 될 것입니다. 善男 등은 삼가 家記를 살펴보니 말 하는 바가 헛되지 않습니다. 청컨대 저 두 글자를 삭제하고 바로 宿 를 내리시어 支派를 本源에 넣어주시기를 바랍니다. 라고 하였다. 이에 따랐다. 의 기사가 보인다. 31) 欽明천황대에 모두 찾아내 바쳤습니다 : 日本書紀 欽明 23년(562) 8월조에 비슷한 내용의 기사가 보인다. 32) 磯城嶋천황 : 敏達천황. 33) 磯城嶋천황 人입니다 : 일본서기 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이지 않는다. 34) 大部 : 大伴으로도 표기된다. 大伴(大部)은 조정이 소유한 伴을 의미한다. 35) 옛 사람은 大部連公을 이었습니다 : 일본서기 를 비롯한 다른 사료에는 이러한 내용이 보 이지 않는다. 36) 坂上伊美吉能文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貞觀 5년(863) 1월에는 越前權介로 임명되었다. 37) 坂上伊美吉斯文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元慶 원년(877) 4월에 左京亮 종5위하로 大極殿 건 축에 관여하였으며, 그 다음해 左京介로 임명되었다. 38) 孝靈황제 : 靈帝. 후한 제12대 황제. 재위 168~ ) 阿智使主 : 東(倭)漢(야마토노아야)氏의 조상(482쪽의 주 306) 참조). 40) 坂上大宿 :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上에서 坂上大宿 씨는 후한 靈帝의 아들 延王에서 시작되 었다고 하였다. 41) 行 : 일본 令制의 용어. 令制에서는 官位相當制가 시행되었으나, 관위가 높은 사람이 상당하는 관 직보다 낮은 관직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 관직을 行한다고 하고, 서명할 때에 관위와 관직 사이에 行 이라는 글자를 적었다. 이와 반대로 관위보다 높은 관직을 가지게 되었을 때에는 守(슈) 라 는 글자를 적어 넣었다. 42) 大春日朝臣 : 新撰姓氏錄 左京 皇別 下에서 孝昭천황의 황자 天帶彦國押人命(아타라시히코쿠 니오시히토노미코토)의 후손으로 나오고 있다. 43) 天足彦國押人命 : 日本書紀 孝昭天皇조에 효소천황의 아들이며 和珥臣 등의 시조로 나오고 있다. 44) 道祖史豊富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5) 惟道宿 : 이후 貞觀 7년(865) 5월 20일 경자조에도 보인다. 46) 飛鳥戶造彌道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47) 百濟宿 : 442쪽의 주 7) 참조. 48) 混伎 : 昆支. 56쪽의 주 167) 참조.

196 390 日本三代實錄 391 助 飛鳥戶造豊宗(아스카베노마야츠코토요무네)50)을 본거를 고쳐 左京職에 속하도록 하였 였다. 嘉祥 2년(849) 정월 中納言으로 임명되었다. 이달 어머니인 尙侍 백제왕씨가 사망 다. (중략) 河內國 安宿郡人 皇太后宮少屬 정8위상 百濟宿 有世(쿠다라노스쿠네아리 하자, 定은 벼슬을 그만두었다. 51) 요) 를 左京職에 등록시켰다. (후략) 貞觀 5년(863) 춘정월 3일 丙寅 大納言 정3위 겸 右近衛大將 源朝臣定(미나모토노아손사다무)52)이 사망하였다. 종2위 를 추증하였다. 종4위하 행이예수 풍전왕과 산위 종5위하 전구조신통범등을 보내 관 앞 에서 이를 선포하도록 하였다. 定은 嵯峨太上天皇의 아들이다. 어머니는 백제왕씨로 그 이름은 慶命이다. 천황이 맞아들여 특히 총애하였는데, 예의 범절이 뛰어나서 매우 존경 貞觀 5년(863) 추7월 26일 丙辰 囚獄司(슈우고쿠시)53)의 囚人이 防援(보우엔)54) 右兵衛 百濟豊國(쿠다라노토요쿠니)55)에 게 상해를 입혔다. 이때에 左兵衛 2명과 右兵衛 2명을 左右囚人防援으로 삼았는데,56) 囚 人 등이 불만을 터뜨려서 이 난을 일으킨 것이다. 貞觀 5년(863) 8월 9일 己巳 받았으며 궁궐에서 권세가 비할 데가 없었다. 官은 尙侍에 이르렀고 爵은 2위에 이르렀 우경인 종5위하 行 皇太后宮 大進 御船宿 彦主(미후네노스쿠네히코누시),57) 종5위하 다. 사망하자 종1위를 추증하였다. 처음 태상천황이 嵯峨院으로 옮겨갔을 때 별궁을 지 行助敎 겸 備後介 御船宿 佐世(미후네노스쿠네스케요),58) 內藏少屬 정7위상 御船宿 氏 어 살게 하였으므로 小院으로도 불리웠다. 태상천황이 사는 곳을 大院이라 하였으므로 柄(미후네노스쿠네우지카라),59) 散位 종7위상 船連助道(후나노무라지스케미치)60) 등 남녀 상시가 사는 곳은 그 다음이므로 이렇게 불렀던 것이다. 권세가 대단하였음이 이와 같았 다. 定은 태어날 때부터 뛰어나게 영리하여 태상천황이 더욱 총애하였다. (중략) 承和 14 년(847) 정월 參議로 임명되었고, 15년 봄에 尾張守가 되었는데 中務卿은 그대로 겸직하 49) 河內國 安宿郡 : 현재 大阪府 南河內郡. 50) 飛鳥戶造豊宗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貞觀 원년(859) 11월에 主計助로서 외종5위하로 승진 하였다. 이후 貞觀 5년(864) 8월에는 御春朝臣을 사성받는다. 貞觀 7년(866) 3월에는 美濃權介 로 임명되고 그 다음해 1월에는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51) 百濟宿 有世 : 이후 日本三代實錄 貞觀 6년(864) 8월 17일 신미조와 元慶 4년(880) 8월 29일 경술조에 보인다(442쪽의 주 7) 참조). 仁和 2년(886) 1월에는 主殿權允으로서 종5위하로 승진하 였다. 52) 源朝臣定 : 815~863. 嵯峨천황의 황자. 어머니는 百濟王慶命이다. 嵯峨천황은 弘仁 5년(814) 조 서를 내려 百濟王慶命의 소생을 源朝臣의 씨성을 사여한다는 조서를 내려 탄생과 함께 臣籍에 들 어가게 하였다. 천장 8년(831)에 元服하고 그 다음해 종3위가 美作守로 임명되었다. 그 다음해 參議로 임명되었고 治部卿 中務卿 播磨守를 겸임하였다. 承和 7년(840) 淳和上皇이 사망하였 을 때에 사직을 청하여 參議를 그만 두고, 承和 14년(847)에 다시 참의로 임명되어, 中務卿 尾 張守를 겸임하였고 嘉祥 2년(849)에는 中納言으로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해 정3위로 승진하였 다. 仁壽 3년(853)에는 左兵衛督을 겸임하였다. 天安 2년(858)에는 右近衛大將으로 임명되고 貞 觀 원년(859)에는 大納言이 되었다(坂本太郞 平野邦雄, 1990, 日本古代氏族人名辭典, 吉川弘 文官, 606쪽). 53) 囚獄司 : 令制의 刑部省에 소속되어 죄인의 看守와 형의 집행을 담당한 관청. 正 佑 大令史 少令史 각 1명씩과 物部 40명, 物部丁正 20인을 두었다. 54) 防援 : 죄수를 호송하고 감시하는 사람. 養老令 獄令 斷罪條에 의하면 大 罪囚(사형수)에게 형을 집행할 때는 죄수 1명에 20인의 防援을 두었고, 죄수 1명이 증가할 때마다 防援 5명씩을 추가하 였다고 한다. 55) 百濟豊國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56) 이 때에 삼았는데 : 養老令 獄令徒流囚조에서는 복역하고 있는 죄수 1명당 2명의 防援이 감시 하도록 하면서, 防援은 도읍에서는 物部와 衛士 중에서 충당하고 그 밖의 지역은 현지의 병사 중에 서 뽑아서 쓰도록 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兵衛 중에서 防援을 충당하였다고 하므로, 防援은 五 衛府의 병사 중에서 충당하였음을 알 수 있다(1976, 日本思想大系 律令, 岩波書店, 689쪽). 57) 御船宿 彦主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天安 2년(858) 9월 외종5위하 行中宮少進에서 中宮大 進으로 승진하고, 貞觀 원년(859) 4월에 종5위하로 승진하였으며, 貞觀 5년(863) 2월에는 因幡 介로 임명되었다. 貞觀 9년(867) 2월에는 加賀權介로 임명되었다. 58) 御船宿 佐世 : 802~880. 9세기의 관인 학자. 齊衡 3년(856) 이래, 助敎 大學助 備後權介 越前權介 次侍從 大學博士 刑部大輔 安藝權守 攝津權守 등을 역임하였다. 日本三代實錄 의 卒傳에 의하면 禮經에 통달하여 천황이 孝經 을 공부할 때 侍講을 하였다고 한다(坂本太郞 平野邦雄, 1990, 앞의 책, 367쪽). 59) 御船宿 氏柄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0) 船連助道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97 392 日本三代實錄 6인에게 菅野朝臣(스가노노아손)61)을 사성하였다. 河內國 丹比郡(타치히군)62)사람 左兵衛 權大志 정7위상 船連貞直(후나노무라지사다나오)에게 御船宿 (미후네노스쿠네)를 사성 하였다. 彦主 등의 조상은 백제국의 貴須王63)에서 나왔다. 貞觀 6년(864) 8월 8일 壬戌 정7위하 大丘造塵繼(오오오카노미야츠코치리츠구),73) 散位 종 7위상 大丘連田刈(오오오카노무라지타카리)74)등 4명에게 宿 를 사성하였다. 그 조상은 우경인 외종5위하 行主計助 飛鳥戶造豊宗(아스카베노미야츠코토요무네)64)등 남녀 8명 에게 御春朝臣(미하루노아손)을 사성하였다. 그 조상은 백제국사람 琨伎65)다. 無姓 百姓 安岑(야스미네), 春岑(하루미네) 등 2명에게 有良朝臣(아리요시노아손)을 사성하고 右京 에 살도록 하였다. 백제인이다. 貞觀 6년(864) 8월 17일 辛未 (전략) 右京人 河內守 종5위하 蕃良朝臣豊村(하라노아손토요무라),75) 右大史 종6위하 葛井連宗之(후지이노무라지무네유키),76) 兵部 少錄 정6위상 葛井居都成(후지이노이츠 貞觀 5년(863) 10월 11일 庚午 우경인 陰陽 少屬 종6위상 飛鳥戶造淸貞(아스카베노미야츠코키요사다),66) 內 권9 淸和天皇 左京人 武藏國의 權大 貞觀 5년(863) 8월 17일 丁丑 393 나리)77) 등에게 菅野朝臣(스가노노아손)78)을 사성하였다. 本系가 백제국사람 貴須79)에서 정6위 나왔다. (중략) 좌경인 皇太后宮 少屬 정7위상 百濟宿 有世(쿠다라노스쿠네아리요)80) 상 飛鳥戶造淸生(아스카베노미야츠코키요오),67) 太政官 史生 정8위하 飛鳥戶造河主(아스 에게 御春朝臣(미후루노아손)을 사성하였다. 有世는 그 조상이 백제국인 比有81)에서 나 카베노미야츠코카와누시),68) 河內國 高安郡(타카야스군)69)사람 主稅 大屬 정7위상 飛鳥戶 왔다. 造有雄(아스카베노미야츠코아리오)70) 등에게 百濟宿 (쿠다라노스쿠네)71)를 사성하였다. 그 조상은 백제국인 比有72)의 후손이다. 貞觀 6년(864) 冬10월 14일 丁卯 (전략) 散位 종5위하 百濟王俊聰82)을 伯耆守(호우키노카미)83)로 삼았다. (후략) 61) 菅野朝臣 : 450쪽의 주 58) 참조. 62) 河內國 丹比郡 : 현재 大阪府 中河內郡. 63) 貴須王 : 近仇首王, 450쪽의 주 59) 참조. 64) 飛鳥戶造豊宗 : 390쪽의 주 50) 참조. 65) 琨伎 : 昆支. 66) 飛鳥戶淸貞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7) 飛鳥戶造淸生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8) 飛鳥戶造河主 : 이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69) 河內國 高安郡 : 현재 大阪府 中河內郡. 70) 飛鳥戶造有雄 : 이후 元慶 원년(877) 12월 25일 신묘조와 元慶 4년(880) 8월 29일 경술조에 보 인다. 71) 百濟宿 : 442쪽의 주 7) 참조. 72) 比有 : 백제의 제19대왕 毗有王. 457쪽의 주 98) 참조. 73) 大丘造塵繼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74) 大丘連田刈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75) 蕃良朝臣豊村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76) 葛井連宗之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貞觀 4년(862) 釋奠이 거행되었을 때 直講 종7위상으로서 左傳을 강의하였으며. 그 다음해에는 左少史 종6위하로서 河內國 丹比郡에서 右京職으로 본거지를 옮기고 있다. 貞觀 8년(866) 1월에는 右大史로서 외종5위하로 승진하였으며, 越中介로 임명되었다. 77) 葛井居都成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貞觀 5년(863) 9월 兵部少錄 정7위하로서 河內國丹比郡 에서 右京職으로 본거지를 옮겼다. 78) 菅野朝臣 : 450쪽의 주 58) 참조. 79) 貴須 : 백제 제14대왕 近仇首王. 392쪽의 주 63) 참조. 80) 百濟宿 有世 : 390쪽의 주 51) 참조. 81) 比有 : 毗有王. 457쪽의 주 98) 참조. 82) 百濟王俊聰 : 385쪽의 주 14) 참조. 83) 伯耆守 : 伯耆國의 장관. 伯耆國守은 고대 山陽道의 上國, 현재 鳥取縣의 東伯郡 西伯郡 日野

198 394 권10 淸和天皇 貞觀 7년(865) 5월 20일 庚子 日本三代實錄 395 당으로 갔는데, 귀국하던 중 배가 역풍을 만나 南海의 賊地에 표착하여 피살되었다.92) [淸 上의]本姓은 大戶首(오오헤노오비토)93)로 河內國人이다. 大田 는 피리 연주하는 방법을 잘 알고 부지런히 연마하였다. 天長 초년에 雅樂寮의 左京 사람 造酒令史 정6위상 道祖史永主(후나도노후히토나가누시),84) 散位 대초위하 道 百濟笛師(쿠다라후에노시)94)로 임명되었고, 이어서 唐橫笛師(토우후에노시)95)가 되었다. 祖史高直(후나도노후히토타카나오)85) 등 두명에게 惟道宿 (코레미치노스쿠네)를 사성하 수년간 아악료의 少屬으로 있다가 일약 大屬으로 승진하였고, 齊衡 3년(856) 權大允으로 였다. 그 조상은 백제국인 王孫許里86)에서 나왔다. 임명되었다. 貞觀 3년(861) 1월 21일 외종5위하를 수여받고 이날 궁궐에서 연회가 있었 는데 大田 의 연주가 뛰어났으므로 특별히 상을 더 주었다.96) 大田 는 본성은 和邇部 권11 淸和天皇 (와니베)였으나 뒤에 宿 를 사성받았다.97) 사망하였을 때 나이는 68세였다. 貞觀 7년(865) 冬10월 26일 甲戌 貞觀 7년(865) 12월 9일 丙辰 雅樂寮(가가쿠료우)87) 權大允 외종5위하 和邇部宿 大田 (와니베노스쿠네오오타마 로)88)가 사망하였다. 大田 는 우경인이다. 吹笛89) 출신으로 伶官90)에 소속되었다. 처음 阿波國(아와노쿠니) 板野郡(이타노군)98) 사람 百濟岑子女(쿠다라노미네코노무스메)99)가 한 번에 세 남자아이를 낳았다. 稻 300속과 유모 1명을 하사하였다. (후략) 雅樂 權少屬 외종5위하 良枝宿 淸上(요시에다노스쿠네키요카미)91)에게 사사하여 피리 부는 것을 배웠다. 淸上은 특히 피리를 잘 불어 그 소리가 극히 아름다웠는데, 大田 가 배우고자 하는 기개가 있다고 생각하여 가르쳤다. 承和 초년에 淸上은 견당사를 따라 대 郡 지역. 84) 道祖史永主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道祖史는 459쪽의 주 116) 참조. 85) 道祖史高直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86) 王孫許里 : 主孫許里의 誤記(栗田寬, 新撰姓氏錄硏究 下, 1248쪽).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백제조에서 道祖史는 백제국의 主孫許里公의 후손이라고 주장하였다(459쪽의 주 117) 참조). 87) 雅樂寮 : 令制에서 治部省에 소속되어 일본재래의 가무나 외래의 가무, 음악의 演奏, 演舞와 후계 자 육성을 위한 교습을 담당한 관청. 頭 助 大允 少允 大屬 少屬 각각 1명씩과 使部 20인 의 관인이 있었다. 그 밖에 실기를 교습하는 師와 生이 있었다. 88) 和邇部宿 大田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貞觀 6년(864)에 雅樂權大允으로 임명되었다. 89) 吹笛 : 笛工. 雅樂寮에는 일본 재래음악을 교습하는 歌師 4명, 歌人 40명, 歌女 100명, 師 4명 生 100명, 笛師 2명 笛生 6명 笛工 8명이 있었다. 90) 伶官 : 음악을 담당한 관청. 雅樂寮를 가리킨다. 91) 良枝宿 淸上 : 續日本後紀 承和 3년(836) 윤5월 병자조에서 河內國人 遣唐音聲長 외종5위하 良枝宿 淸上 등을 右京7조2방에 본거를 옮기도록 하였다고 한다. 92) 承和 초년 피살되었다 : 續日本後紀 에 의하면 承和 5년(838) 8월에 일본 최후의 견당사가 당 으로 건너갔다가 839년에 귀국하였다. 그러나 839년 7월 16일 산동반도의 赤山浦를 출발한 견당사 선 제2박은 南海 지역의 裸人國에 표착하여 그 지역 사람들과 교전하여 백수십명의 사람 중에 30명 정도만이 살아남아 840년 4월에 일본에 도착하였다(김은숙, 2006,`일본 최후의 遣唐使 파견과 張 保皐勢力a, 韓國古代史硏究 42, 303~306쪽). 良枝宿 淸上도 나인국에서 피살된 것이다. 93) 大戶首 : 新撰姓氏錄 河內國 皇別조에서 大戶首씨가 大彦命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大彦命은 효 원천황의 아들로 阿倍朝臣등의 조상이다. 94) 百濟笛師 : 令制에서는 雅樂寮에 百濟樂師(쿠다라가쿠노시)가 4명 있었으나 百濟笛師는 보이지 않지만, 百濟樂師 중에 百濟笛師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5) 唐橫笛師 : 令制에서는 雅樂寮에 唐樂師(토우가쿠노시)가 12명이 있었지만 唐橫笛師는 보이지 않 는다. 그러나 唐樂師 중에 唐橫笛師가 포함되었을 가능성이 있다. 96) 貞觀 3년 1월 21일 상을 더 주었다 : 日本三代實錄 貞觀 3년(861) 1월 21일 병신조에서 大 田麻呂를 외종5위하로 승진시켰다고 하면서 그가 피리를 잘 불었다고 적고 있다. 97) 大田 는 사성받았다 : 日本三代實錄 貞觀 5년(863) 8월 8일 무진조에서 좌경인 외종5위 하 行雅樂少允 和邇部宿 大田麻呂에게 宿 성을 사성하였다고 적고 있다. 98) 阿波國 板野郡 : 현재의 德島縣 板野郡. 阿波國은 南海道의 上國이었다. 99) 百濟岑子女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00) 安峯連小嶋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99 396 日本三代實錄 권12 淸和天皇 권14 淸和天皇 貞觀 8년(866) 춘정월 26일 癸卯 貞觀 9년(867) 夏4월 25일 甲午 우경인 정6위상 安峯連小嶋(야스미네노무라지코시마)100)와 종6위하 安峯連眞魚(야스무네 노무라지마우오)101) 등 5명의 連姓을 宿 姓으로 바꾸도록 하였다. 그 조상은 백제인이다. 397 主稅少允 종6위상 錦部連三宗麻呂(니시고리노무라지미무네마로),107) 木工少允 정6위상 錦部連安宗(니시고리노무라지야스무네)108)에게 惟良宿 (코레요시노스쿠네)를 사성하였 다.109) 그 조상은 百濟國 사람이다. 伊賀國(이가노쿠니)110)의 權目 정6위하 韓人眞貞(카라 권13 淸和天皇 貞觀 8년(866) 6월 16일 己丑 지진이 있었다. 無品 高子內親王(타카코나이신노우)102)이 사망하였다. 상가에서 굳이 사 양하여 장례를 담당하는 관리를 임명하지 않았다. 3일동안 조정을 쉬었다. 內親王은 仁 明天皇103)의 황녀인데 어머니는 백제왕씨로 종5위상 敎俊104)의 딸이다. 承和 초년에 賀茂 (카모)의 齋王으로 임명되었으나,105) 仁明천황이 사망한 후 齋王을 그만두고 사저로 돌아 히토마사다)111)에게 豊瀧宿 (토요타키노스쿠네)112)를 사성하였다. 그 조상은 任那國 사람 이다. 권32 陽成天皇 元慶 원년(877) 12월 16일 壬午 우경인 종5위하 行 山城權介 船連副使 (후나노무라지후쿠시마로),113) 內藏 權少允 정7 갔다.106) 위상 津宿 輔主(츠노스쿠네스케누시),114) 主殿允 大初位下 葛井連直臣(후지이노무라지나 101) 安峯連眞魚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02) 高子內親王 : ~866. 仁明천황의 딸로 賀茂齋院을 지냈다. 103) 仁明天皇 : 351쪽의 주 51) 참조. 104) 敎俊 : 百濟王敎俊, 延曆 18년(799) 종5위하로 下野介로 임명된 후 大同 원년(806) 1월에는 左 衛士佐로 美濃守를 겸임하였으며, 그해 3월에는 作路司로 임명되었으며, 그래 4월에는 伊勢의 齋王을 영접하는 일을 맡았다. 大同 3년(808)에는 鎭守將軍으로서 陸奧介를 겸임하도록 하였으 나 임지로 가는 것을 지체하여 질책을 받았다. 大同 4년(809)에는 下野守로 임명되었으며 弘仁 3년(812)에는 종5위상으로 승진하고 出羽守로 임명되었다. 105) 承和 초년에 임명되었으나 : 續日本後紀 에 의하면 天長 10년(833) 3월에 賀茂齋院으로 임명되었고, 承和 2년(835) 3월에 賀茂川에서 淨化의식을 거행하고 齋院으로 들어갔다( 續日本 後紀 天長 10년 3월 계축조, 동 承和 2년 춘3월 갑오조). 106) 仁明천황이 돌아갔다 : 이에 대해서는 다른 사료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嘉祥 3년(850) 3월 21일 仁明천황이 사망한 후 伊勢의 齋王을 불러들였다는 기사가 日本文德天皇實錄 嘉祥 3년 5월 기묘조에 보이므로, 賀茂의 齋王이었던 高子內親王도 齋王을 그만두고 사저로 돌아갔을 것 이다. 107) 錦部連三宗麻呂 : 이후 元慶 원년(877)에 主稅大允으로 외종5위하로 승진하고, 그 다음해에는 大和權介로 임명되었다. 108) 錦部連安宗 : 이후 貞觀 18년(876) 4월에는 木工權大允 외종5위하로서 大極殿의 건축에 사용할 재목이 있는 산을 찾기 위해 紀伊國에 파견되었으며, 元慶 3년(879)에는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109) 主稅少允 사성하였다 : 이 사성기사 이전에 日本三代實錄 貞觀 5년(863)년 9월 5일 갑오 조에 河內國 錦部郡人 木工 權少屬 종7위상, 錦部連安宗과 式部位子 종7위상 錦部連三宗麻呂 등의 본거지를 左京職에 옮기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110) 伊賀國 : 東海道의 下國. 현재의 三重縣 서북부. 111) 韓人眞貞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12) 豊瀧宿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13) 船連副使 : 船連副使麻呂,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直講 종7위하로서 貞觀 5년(863) 8월의 釋奠에서 禮記를 강의하였고, 貞觀 8년(866) 8월의 釋奠에서는 左氏傳을 강의하였다. 貞觀 9 년(867) 1월에는 외종5위하로 승진하였고, 같은 해 11월에는 河內國 丹比郡에서 右京職으로 본 거를 옮겼다. 貞觀 18년(876) 4월부터 元慶 원년(877) 2월까지 종5위하 行助敎로 이름이 보인 다. 114) 津宿 輔主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元慶 3년(879) 11월에는 외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200 398 日本三代實錄 오오미)115) 등 3명에게 菅野朝臣(스가노아손)116)을 사성하였다. 그 조상은 백제국 사람이다. 河內國 安宿郡(아스카군) 네), 左兵衛少尉 良岑朝臣唯實(요시미네노아손타다자네), 圖書助 藤原朝臣有世(후지와라 노아손아리요), 中宮少進 藤原朝臣近野(후지와라노아손치카요), 式部大丞 藤原朝臣貞幹 元慶 원년(877) 12월 25일 辛卯 117) 399 (후지와라노아손사다모토), 兵部大丞 橘朝臣貞樹(타치바나노아손사다키), 阿波 사람 외종5위하 行主稅助 百濟宿 有雄(쿠다라노스쿠네아 리오)118)의 거주지를 右京3조에 속하도록 하였다. (후략) 藤原朝 臣道前(후지와라노아손미치사키), 壹岐守 賀茂朝臣直岑(카모노아손나오미네), 散位 藤原 朝臣直房(후지와라노아손나오후사), 民部大丞 藤原朝臣春庭(후지와라노아손하루니와), 大內記 紀朝臣利貞(기노아손토시사다), 木工權大允 藤原朝臣在公(후지와라노아소아리키 미), 中監物 吉備朝臣民淵(기비노아손타미부치), 左兵衛權大尉 巨勢朝臣愛業(코세노아손 권35 陽成天皇 치카나리) 등에게 종5위하를 주었다. 元慶 3년(879) 춘정월 7일 丁酉 종5위하 守 大判事 平朝臣住世(타이라노아손스미요), 散位 大野朝臣鷹取(오오노노아손 타카토리), 安藝權守 藤原朝臣岑人(후지와라노아손미네히토), 和泉守119) 百濟王俊聰,120) 信濃介 橘朝臣茂蔭(타치바나노아손시게카게), 備後守 藤原朝臣諸方(후지와라노아손모로 권38 陽成天皇 元慶 4년(880) 8월 29일 庚戌 카타), 雅樂頭 源朝臣精(미나모토노아손쿠와시), 少納言 겸 侍從 藤原朝臣淸生(후지와라 下野國(시모츠케노쿠니)122)의 종5위하 三和神(미와노카미)123)에게 정5위상을 주고 河內 노아손키요오), 木工頭 藤原朝臣維邦(후지와라노아손코레쿠니), 式部少輔 겸 文章博士 國 飛鳥戶神社(아스카베진쟈)124)에 田 1町을 사여하여 춘추 제사의 비용으로 삼도록 하였 菅原朝臣道眞(스가하라노아손미치자네), 筑後守 紀朝臣令影(기노아손요시카게) 등에게 다. 氏人 主稅助 외종5위하 百濟宿 有雄(쿠다라노스쿠네아리오)125)와 主殿 權允 정6위상 종5위상을 주었다. 御春朝臣有世(미하루노아손아리요)126) 등의 청에 따른 것이다. 元慶 3년(879) 11월 25일 庚辰 元慶 4년(880) 10월 20일 庚子 [散位] 정6위상 常人王, 源朝臣蔭(미나모토노아손카게), 大藏大丞 藤原朝臣高尙(후지와 大和國(야마토노쿠니) 十市郡(토오치군)127) 百濟川(쿠다라가와) 부근의 田 1정 7단 160 라노아손타카히사), 左近衛將監 在原朝臣載春(아리하라노아손토시하루), 右馬大允 百濟 王敎隆(쿠다라노코니키시쿄우류우),121) 前 越前大 藤原朝臣長常(후지와라노아손나가츠 115) 葛井連直臣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元慶 3년(879) 1월에는 종8위하 守 中宮少進으로서 외종 5위하로 승진하였으며, 그해 11월에는 中宮大進으로서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元慶 6년(882) 3 월에는 종5위상으로 승진하였으며, 仁和 2년(886)년에는 황태후궁의 亮으로 임명되었다. 116) 菅野朝臣 : 450쪽의 주 58) 참조. 117) 河內國 安宿郡 : 현재의 大阪府 柏原市 남부와 羽曳野市 동남부지역. 118) 百濟宿 有雄 : 392쪽의 주 70) 참조 119) 和泉守 : 和泉國의 장관. 和泉國은 5畿內의 下國. 현재의 大阪府남부. 120) 百濟王俊聰 : 385쪽의 주 14) 참조. 121) 百濟王敎隆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22) 下野國 : 東山道의 下國. 현재의 토치키縣. 123) 三和神 : 三和神社. 下野國 那須郡의 신사. 현재 토치키현 那須郡 小川町 大字三輪에 있다. 祭神 은 현재 大物主神을 主神으로 한다. 承和 5년(838) 官社가 되었다. 仁和 원년(885)에는 종4위하 로 승진하였다. 124) 飛鳥戶神社 : 현재 大阪府 羽曳野市 飛鳥에 위치한 神社. 飛鳥戶造씨의 조상 昆支王을 제사지내 고 있다. 貞觀 2년(860) 官社가 되었다( 日本に殘る古代朝鮮 (近畿編), 100쪽 ; 百濟遺民들의 活動, 247~253쪽). 125) 百濟宿 有雄 : 392쪽의 주 70) 참조. 126) 御春朝臣有世 : 日本三代實錄 에 의하면 仁和 2년(886) 1월에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127) 大和國 十市郡 : 현재 奈良縣 磯城郡.

201 400 日本三代實錄 401 보와 高市郡(타케치군)128) 夜部村(야베무라)의 田 10정 7단 250보를 大安寺(다이안지)129) 고 平城에 절을 옮겨 짓도록 하시고139) 大安寺(다이안지)로 칭하셨습니다. 지금 두 군데 에 주도록 칙을 내렸다. 그전에 그 절의 三綱이 牒을 올려 예전에 聖德太子가 平群郡(헤 옛 땅을 살펴보니, 습지는 公田으로 하고, 높고 건조한 땅에서는 백성들이 살고 있습니 구리군)에 熊凝道場(쿠마고리도우죠우)을 창건하였을 때 飛鳥岡本天皇(아스카오카모토 다. 청컨대 잘 확인하여 절의 땅으로 해 주십시오. 라고 하였다. 이에 따랐다. 130) 노텐노우) 이 十市郡(토오치군), 百濟川(쿠다라카와) 근처에 옮겨 세우도록 하고 300호 를 封戶로 내려주시고 百濟大寺(쿠다라다이지)라고 칭하셨습니다.131) 子部大神(코베노오 김은숙(한국교원대학교) 오카미)이 이 절의 가까이에서 원한을 품고 여러 번 堂塔을 불태웠습니다. 天武天皇(텐무 텐노우)132)께서 高市郡 夜部村에 옮겨 지으시고 高市大官寺(타케치다이칸지)133)라고 칭하 시고 封戶 700호를 내리셨습니다.134) 和銅 원년(708)에 平城으로 천도하여135) 聖武천황 (쇼우무텐노우)136)께서 조서를 내려 律師(릿시)137) 道慈(도우지)138)를 이 절에 있도록 하시 128) 高市郡 : 현재 奈良縣 高市郡. 129) 大安寺 : 平城京에 있었던 南都7大寺 중의 하나. 현재 奈良市 大安寺町에 眞言宗의 사찰로 존재 한다. 130) 飛鳥岡本天皇 : 舒明(죠메이)天皇 131) 飛鳥岡本天皇 칭하셨습니다 : 日本書紀 舒明 11년(639) 추7월조에 의하면 이해에 百濟川 邊에 百濟宮과 百濟寺를 만들었다고 한다. 132) 天武天皇 :?~686. 제40대천황. 재위 672~686. 舒明천황의 제3황자. 어머니는 皇極천황(齊明 천황). 天智천황의 동생으로 천지천황 사후 조카 大友황자와 왕위쟁탈전(임신의 난)에서 승리하 여 즉위하였다. 飛鳥淨御原令의 제정, 국사의 편수, 8색성의 제정, 작위 60계제 제정 등 율령국 가체제의 정비에 노력하였고, 황자들을 중심으로 하는 황친정치를 강화하였다. 133) 高市大官寺 : 大和 高市郡에 있었던 大官大寺. 大安寺의 전신. 大官은 오오츠카사 라고도 하는 데, 천황을 가리킨다. 大寺는 국가로부터 최고의 경제적 대우를 받는 지위가 높은 사원이라는 뜻 이다. 즉 大官大寺는 천황이 願主가 되어 불교흥륭과 통제를 장악하기 위한 大寺라는 뜻이다. 134) 天武天皇 내리셨습니다 : 日本書紀 天武 2년(673) 12월 무술조에 의하면 小紫 美濃王과 小錦下 紀臣訶多麻呂를 高市大寺를 짓는 관리에 임명하였다고 한다. 135) 和銅 원년에 천도하여 : 和銅 원년에는 元明천황이 平城에 도읍을 세우겠다는 조서를 내렸 고, 평성경으로 천도한 것은 和銅 3년(710)이다( 續日本紀 和銅 원년 2월 무인조, 同 和銅 3년 3월 신유조). 136) 聖武천황 : 701~756. 제45대 천황, 재위 724~749. 文武천황의 제1황자. 어머니는 藤原宮子. 藤原不比等의 딸 光明子를 황후로 삼아 황족에서 황후를 맞는 전통을 깼다. 적극적으로 당의 문 물제도를 채용하고 불교를 신앙하여 國分寺문, 東大寺를 창건하고 東大寺 大佛을 주조할 것을 發願하여 소위 天平문화를 만들어내었다. 137) 律師 : 일본고대의 僧官. 日本書紀 天武 12년(683)에 僧正 僧都와 함께 승니를 統領하도록 명령받았다. 養老僧尼令에 의하면 律師 이상을 僧綱이라고 하였는데, 僧綱으로는 덕행이 무리를 감복시키고 道俗 모두에게 존경을 받고 불법을 잘 운용할 수 있는 사람을 임명하도록 하였다 (1993, 國史大辭典 14, 吉川弘文館, 564쪽). 138) 道慈 : ~744. 8세기 전반의 고승. 奈良시대 大安寺의 승려. 三論宗 第3傳이라고 한다. 俗姓은 額田씨. 大和國 添下郡人. 大寶 2년(702)에 당에 가서 長安의 西明寺에서 학문 수행하고 당의 궁중에서 仁王般若經 을 강의하는 고승 100명 속에 선발되었다고 한다. 養老 2년(718)에 귀국 하였다. 天平 원년(729) 10월 律師로 임명되어 불교 정책의 추진에 큰 역할을 하였다. 僧尼의 질을 높이기 위해 戒師 초청계획을 세우고 大安寺를 移建하였으며 日本書紀 의 편찬사업에도 참가하였다. 일본 불교계를 비판한 愚志 1권을 저술하였다. 天平 16년(744) 70여세로 입적하 였다(1989, 國史大辭典 10, 吉川弘文館, 91~92쪽). 139) 平城에 절을 옮겨 짓도록 하시고 : 大安寺가 平城京에 移建된 시기에 대해서는 續日本紀 靈龜 2년(716) 5월 辛卯조에 始徙建元興寺于左京六條四坊 이라는 기사의 元興寺가 大安寺의 誤記로 여겨지고 있어(1990, 新日本文學大系 續日本紀 二, 岩波書店, 15쪽 460쪽 注 17 18) 716년 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東大寺가 건립되기 이전에는 大安寺가 가장 큰 사원이었다고 한다 (1987, 國史大辭典 8, 吉川弘文館, 68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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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3 類聚國史 405 類 聚 國 史 六國史( 日本書紀 續日本紀 日本後紀 續日本後紀 日本文德天皇實錄 日本三 代實錄 )의 기사를 神祇 帝王 後宮 政理 등의 사항별로 분류하여 연대순으로 수록한 책. 編 者는 菅原道眞으로 892년에 성립하였지만 뒤에 增補가 있었다. 원래 本編 200권, 目錄 2권, 帝 王系 3권 등이나, 현존하는 것은 61권이며, 抄出本 1권이 있다. 六國史의 기사를 뽑아 보는 데 편리할 뿐 아니라 六國史의 내용을 보완하는 것도 많아서 일본 고대사연구에 중요한 사료이다. (新訂增補)國史大系에 수록되었다. 권31 天皇行幸 弘仁 6년(815) 2월 18일 6년 2월 己未<*17일> 交野(가타노)1)에 行幸하였다. 庚申<*18일> 百濟王 등이 물건을 바쳤다. 五位 이상 및 六位 이하 및 百濟王 등에게 祿 을 하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弘仁 8년(817) 2월 20일 8년 2월 丁未<*17일> 交野에 행차하였다. 庚戌<*20일> 五位 이상 및 山城 河內 攝津 등의 國의 2) 이상의 관인에게 옷과 침 구류를 하사하였다. 佐爲(사이) 百濟(구다라)3) 粟倉(아와쿠라)4) 三寺에 각각 綿 100斤 1) 交野 : 河內國 大阪府에 있었던 郡이다. 현재의 交野市 全域과 枚方市 대부분(茨田郡이었던 枚 方町 蹉 村을 제외) 寢屋川市의 일부(, 水本村)에 해당한다. 文武天皇 大 2年(702)경에 茨田 郡으로부터 分割 設置되었다. 交野郡衙는 現在의 交野市 郡津에 있었다는 설이 있지만, 명확한 증거는 없다. 交野郡의 대부분은`가타노가하라(交野ヶ原)a라고 불리는 台地 丘陵地로, 경작에는 적합하지 않지만, 새와 짐승이 많이 서식하고, 교토에서 가깝기 때문에 귀족들의 사냥터 역할을 했 다. 천황의 사냥터(天皇 이외에는 수렵이 금지)가 있었던 것과 관련한 禁野(히라가타(枚方)市)의 지 명이 남아있다. 또, 가타노가하라는 벚꽃의 명소로 알려져 있다. 2) (죠) : 지방 행정 최고 책임자인 國司의 일원으로서 判官(四等官 중에서 세 번째)이다. 3) 百濟寺 : 滋賀縣 東近江市에 있는 天台宗 사원이다. 그 절이 있는 산을 釋迦山 이라고 한다. 본존 은 11면 관음이다. 金剛輪寺 西明寺와 함께`湖東3山a의 하나로 유명하다. 琵琶湖의 동쪽, 鈴鹿 山脈의 서쪽 山腹에 위치한 백제사는 推古天皇 14年(606)에 聖德太子에 의해 설립되었다고 한다. 聖德太子는 당시 일본조정에 온 高句麗 승려 惠慈와 함께 그곳에 이르렀을 때, 산 속에서 이상한

204 406 類聚國史 두 國의 正稅 각 5천束을 시주하였다. 正五位上 百濟王利善(구다라노고니키시 리젠)8)에 을 시주하였다. 이날 가마가 交野에서 돌아왔다. 4월 壬辰<*3일> 冷然院에 납시어 文人으로 하여금 詩를 짓게 하였다. 侍臣 및 文人에 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百濟王武鏡(구다라노고니키시 무교우)9)에게 正五位 下를, 從五位下 百濟王元德(구다라노고니키시 겐토쿠),10) 百濟王玄鏡(구다라노고니키시 게 옷과 침구류를 하사하였다. 겐쿄우)11)에게 나란히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四位上 百濟王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承和 3년(836) 2월 20일 3년 정월 壬戌<*22일> 天皇이 神泉苑에 행차하여 즐기며 상을 주었다. 동행한 5위 이 상에게 祿을 하사하였다. 无位 飯高宿 永刀自(메시다카노스쿠네 나가토지)에게 外從五 메이신)12)에게 正四位下를, 正六位上 百濟王貞善(구다라노고니키시 테이젠)13)에게 從五位 下를 수여하였다. 延曆 6년(787) 10월 20일 位下를 수여하였다. 戊辰<*28일> 天皇이 神泉苑에 행차하였다. 매를 풀어 물에 사는 날짐승들을 떨게 하였다. 2월 壬午<*13일> 天皇이 神泉苑에 행차하였다. 새매( 407 )를 풀었다. <*20일> 己丑. 天皇이 神泉苑에 납시어 매를 풀었다. (중략) 이날 无位 百濟王永琳(구 6년 10월 丙申<*17일> 天皇이 交野에 행차하였다. 매와 큰 이리를 풀었다. 大納言 從二 位 藤原朝臣繼繩(후지와라노아손 츠구타다)의 別業을 行宮으로 삼았다. 己亥<*20일> 主人이 百濟王 등을 인솔하여 여러 가지 樂을 연주하였다. 從五位上 百濟 다라노고니키시 에이링)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5) 권32 天皇遊獵 延曆 2년(783) 10월 16일 桓武天皇 延曆 2년 10월 戊午<*14일> 交野에 행차하였다. 매와 큰 이리( )를 풀었다. 庚申<*16일> 詔를 내려 當郡의 금년도 田租를 면제하였다. 國司와 郡司 및 行宮의 나이 많은 側近들과 諸司의 수행원들에게 물건을 하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또 百濟 王 등 行在所를 供奉한 사람 한 둘에게 위계와 爵을 올려 주었다. 百濟寺에 近江,6) 播磨7) 불빛이 나는 것을 보았다. 불빛이 나는 곳을 찾아가보았더니, 그것은 신령한 삼나무였다. 태자는 그 삼나무를 뿌리가 붙은 그 상태에서 조각하여 11면관음상을 만들고, 상을 감싸는 형태로 불당을 세웠다고 한다. 이것이 百濟寺의 시작이라고 하며, 백제의 龍雲寺를 모방하여 절을 세웠기 때문에 百濟寺라고 불렀다고 한다. 百濟寺의 史料上 初見은 11세기인 寬治 3年(1089)이기 때문에, 聖德太 子가 창건하였다는 전승이 어디까지 사실을 반영하고 있는지는 불명확하지만, 百濟寺라는 절 이름 을 보면, 이 절은 한반도계 氏族의 氏寺로써 창건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平安時代에는 近江國의 많 은 사원과 같이 比叡山 延曆寺의 세력 하에 들어가 天台宗 사원이 되었다. 4) 粟倉寺 : 지금의 西粟倉村이라는 곳에 위치하였던 사원이다. 西粟倉村은 岡山縣 英田郡에 있는 마 을로 현의 북동부 끝자락에 위치하고, 지금의 兵庫縣 鳥取縣과 경계를 두고 있다. 5) 從五位下 수여 기사 : 續日本後紀 仁明天皇 承和 3年(836) 2月 己丑(20日)條에도 동일한 내용이 보 인다. 6) 近江 : 近江國(오우미노쿠니)은 일찍이 일본의 지방행정 구분이었던 율령제 하의 국(國) 가운데 하 나로, 東山道에 위치하였다. 현재 滋賀縣을 범위로 한다. 江州라고 불리기도 한다. 延喜式 에서의 쿠니의 格은 大國 近國이다. 7) 播磨 : 播磨國(하리마노쿠니)은 고대 일본의 지방행정 단위였던 國 가운데 하나이다. 山陽道에 위 치하였으며, 현재의 兵庫縣 縣南西部에 해당한다. 延喜式 에서의 쿠니의 格은 大國 近國이다. 播州라고도 부른다. 木簡에서는 針間國 幡麻國이라고 표기하고 있는 경우도 있다. 8) 百濟王利善 : 천평보자 2년(758) 10월, 散位寮牒에 正6位上, 同寮助로서 自署하고, 天平神護 원년 (765) 윤10월, 從五位下에 보임되었다. 同 2년(766) 三飛 守, 寶龜 2년(771) 7월 讚岐員外介에 임명되었다. 同 7년(776) 5월, 從五位上, 同 10년(779) 정월, 正五位下, 天 원년(781) 4월 正五 位上에 올랐고, 이어서 5월에는 散位頭에 보임되었다. 延曆 2년(783) 10월 交野行幸에 함께 하였 고, 從四位下에 오른 후 이듬해 5월 사망하였다. 그 때 散位頭 從四位下였다. 9) 百濟王武鏡 : 奈良時代 말기부터 平安時代 초기의 인물로서 出羽守를 지냈다. 10) 百濟王元德 : 寶龜 10년(779) 5월 正六位上에서 從五位下에 보임되었다. 당시에는 散位. 延曆 2 년(783) 10월 交野行幸에 함께 하였고, 從五位上에 보임되었다. 11) 百濟王玄鏡 : 출생 사망연대 미상. 나라 헤이안시대 전기의 관인. 龜 6년(775) 從五位下가 됨. 桓武天皇의 河內 交野에서의 수렵에 함께 하고 승진을 거듭함. 右兵衛督, 上總守을 거쳐, 延曆 18년(799) 刑部卿. 正四位下. 12) 百濟王明信 : 출생연도는 미상이나 815년에 사망. 奈良時代 말기부터 平安時代 초기에 걸쳐 활동 했던 인물이다. 藤原 南家의 유력자인 藤原豊成의 차남 藤原 의 부인(室)이었다. 百濟王敬福의 손녀이기도 하다. 13) 百濟王貞善 : 續日本紀 국사대계본에는 眞善 으로 나오나 類聚國史 에는 貞善 으로 되어 있다.

205 408 類聚國史 409 王玄鏡, 藤原朝臣乙叡(후지와라노아손 다카도시)에게 모두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六 키시 겐후우),19) 百濟王善貞20)에게 나란히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淨 位上 百濟王元信(구다라노고니키시 겐신),14) 善貞(구다라노고니키시 젠테이),15) 忠信(구다 子에게 正五位下를, 正六位上 百濟王貞孫(구다라노고니키시 테이손)21)에게 從五位下를 라노고니키시 츄우신)16)에게 모두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藤原朝臣明子(후지 수여하였다. 와라노아손 아키코)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下 藤原朝臣家野(후지와라노아손 야카노)에 게 從五位上를, 无位 百濟王明本(구다라노고니키시 묘우혼)17)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 다. 이날 환궁하였다. 延曆 13년(794) 10월 13일 13년 정월 己亥 <*25일> 栗前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庚子<*26일> 瑞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이날 큰 눈이 내렸다. 延曆 10년(791) 10월 12일 2월 丙辰<*13일> 葛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10년 冬10월 丁酉 <*10일> 交野에 행차하였다. 매와 큰 이리를 풀었다. 右大臣 <*[繼 繩]>의 別業을 行宮으로 삼았다. 庚午<*27일> 水生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3월 丁丑<*4일> 大原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18) 己亥<*12일> 右大臣이 百濟王 등을 인솔하여 百濟樂(구다라가쿠) 을 연주하였다. 正 五位下 藤原朝臣乙叡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百濟王玄風(구다라노고니 8월 庚戌<*10일> 大原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丙辰<*16일> 大原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9월 壬辰<*22일> 交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10월 壬子<*13일> 交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百濟王 등에게 물건을 하사하였다. 14) 百濟王元信 : 續日本紀 延曆 9年(790) 3月 壬戌(26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元信爲治部少 輔, 同 7月 辛巳(乙丑朔 17日)條에서 治部少輔從五位下百濟王元信, 同 7月 戊子(24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元信爲肥後介 라고 보인다. 15) 百濟王善貞 : 續日本紀 延曆 6年(787) 10月 己亥(20日)條에서 正六位上百濟王元眞 善貞 忠信 從五位下, 續日本紀 延曆 7年(788) 2月 甲申(6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善貞爲介, 續日 本紀 延曆 10年(791) 10月 己亥(12日)條百에서 百濟王善貞 從五位上 이라고 보인다. 16) 百濟王忠信 : 續日本紀 延曆 6年(787) 10月 己亥(20日)條에서 正六位上百濟王元眞 善貞 忠信 從五位下, 續日本紀 延曆 9年(790) 3月 壬戌(26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忠信爲中衛少 將, 續日本紀 延曆 9年(790) 7月 辛巳(乙丑朔 17日)條에서 中衛少將從五位下百濟王忠信, 續日本紀 延曆 10年(791) 7月 丁亥(28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忠信爲越後介 라고 보인다. 17) 百濟王明本 : 續日本紀 延曆 6年(787) 10月 己亥(20日)條에서 无位百濟王明本從五位下 라고 보인다. 18) 百濟樂 관련 설명: 고대 일본 律令官制에 있어서 治部省에 속한 機關으로 雅樂寮가 있었다. 이 기 관은 여러 공식 행사에서 雅樂을 연주하는 것과 연주자를 양성하는 것을 주요 업무로 하고 있었 다. 연주자로는 歌師 舞師 笛師 樂師가 설치되었는데, 앞의 세 부류는 倭樂(재래음악)을, 후자 는 雅樂(해외음악)을 담당했다. 樂師는 율령에서 唐 新羅 高麗(高句麗) 百濟 및 吳樂인 伎樂 腰鼓로 나누어져서 각각의 음악을 담당했다. 百濟樂은 百濟樂師(종8위상, 歌 舞 등 6개 분과가 있음)가 담당하는 음악이다. 이외에도 高麗樂師(종8위상, 橫笛 鼓 등 6개 분과가 있음) 新羅樂 師(從8位上, 琴 舞의 두 개 분과가 있음) 등이 각각 高麗樂 新羅樂의 연주와 교육을 담당했다. 권32 天皇遊獵 大同 5년 2월 17일 5년 2월 丙戌<*8일> 栗前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山城國 및 彈正尹 明日香親王(아스카 신노우)이 물건을 바쳤다. 侍臣에게 옷과 침구류를 하사하였다. 甲午<*16일> 交野에 행차하였다. 乙未<*17일> 交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날이 저물어 山埼離宮에 납시었다. 河內國 및 掌 19) 百濟王玄風 : 출생 사망연대 미상, 나라시대 관인. 百濟王元忠의 아들. 百濟王勝義의 아버지. 延 曆 6년(787) 2월 從五位下, 美濃介가 되었고, 延曆 10년(791) 10월에 從五位上에 올랐지만, 이후 소식에 대해서는 不明이다. 20) 百濟王善貞 : 續日本紀 延曆 6年(787) 10月 己亥(20日)條에서 正六位上百濟王元眞 善貞 忠信 從五位下, 續日本紀 延曆 7年(788) 2月 甲申(6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善貞爲介, 續日 本紀 延曆 10年(791) 10月 己亥(12日)條에서 百濟王善貞 從五位上 이라고 보인다. 21) 百濟王貞孫 : 續日本紀 延曆 10年(791) 10月 己亥(12日)條에서 正六位上百濟王貞孫從五位下 라고 하는 같은 기사가 보인다.

206 410 類聚國史 411 侍 從五位下 安都宿 吉子(아토노스쿠네 요시코)가 물건을 바쳤다. 四位 이상에게 침구 (죠) 이상에게 옷과 침구류를 하사하였다. 佐爲 百濟 粟倉僧尼 三寺에 각 綿 100屯을 류를 하사하고 五位 및 百濟王 등에게는 옷을 하사하였다. 시주하였다. 이날 천황의 가마가 交野에서 돌아왔다. 丙申<*18일> 水生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攝津國이 물건을 바쳤다. 承和 12년(845) 2월 25일 大同 5년 2월 27일 12년 2월 壬寅<*25일> 河陽宮에 행차하여 사냥을 즐겼다. 兵部卿 四品 忠良親王(다다 己亥<*27일> 山城守 從四位下 藤原朝臣繼彦(후지와라노아손 츠구히코)에게 從四位上 22) 을 수여하였다. 介 (스케) 外從五位下 高丘宿 弟越(다카오카노스쿠네 오토고시)에게 外 라 신노우) 및 百濟王 등이 진상품(御贄)을 바쳤다. 옆에서 시중들고 있는 侍從 이상에게 祿을 하사하였다. 날이 저물어 가마에 타고 궁으로 돌아왔다.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攝津守 從四位下 小野朝臣野主(오노노아손 노누시)에게 從四位 上을, 介인 從五位下 廣根朝臣諸勝(히로네노아손 모로가츠)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河內守 從五位上 紀朝臣南麻呂(기노아손 미나미마로)에게 正五位下를, 介 從五位下 大伴 宿 雄堅魚(오오토모노스쿠네 오가타우오)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四位 이상에게 침구류를 하사하고, 侍從 및 세 國의 (죠) 이상에게 옷을, 目 이하 및 郡司에게 綿을 하 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 佐爲寺 및 百濟寺에 綿 각 100屯을 시주하였다. 이날 천 황의 가마가 交野로부터 돌아왔다. 권32 太上天皇遊獵 承和 4년(837) 10월 28일 4년 10월 戊午<*28일> 從五位上 百濟王慶仲(구다라노고니키시 게이츄우)25)에게 正五 位下를, 正六位上 百濟王忠誠(구다라노고니키시 츄우세이)26)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 다. 앞서 交野의 遊獵處로부터 太上<*[嵯峨]>天皇의 풍지(諷旨)가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수여한 것이다. 大同 7년 2월 20일 7년 정월 壬辰 <*26일> 栗前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侍臣 및 山城國의 이상에게 옷과 침구류를 하사하였다. 天長 10년(833) 6월 9일 2월 壬子<*16일> 交野에 행차하였다. 丙辰<*20일> 水生野에서 사냥을 즐겼다. 從四位下 百濟王敎德(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 23) 권34 天皇不予 24) 도쿠) 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從七位下 百濟王勝義(구다라노고니키시 쇼우기) 에 甲子<*9일> 詔를 내려 운운하되 (중략) 천하에 大赦를 내린다. (중략) 또 지난 弘仁 원 년 사건27)에 연좌되어 귀양 간 사람들은 비록 스스로 조정의 법도를 거스렸다고는 하나 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陪從한 五位 이상 의 관인 및 山城 河內 攝津 세 國의 22) 介 : 國司 중에서도 次官. 여기서는 山城國의 차관직 國司임을 말한다. 23) 百濟王敎德 : 출생연도 미상.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의 관인. 환무천황의 후궁으로 보이는 百濟 王貞香의 아버지. 延曆 7년(788) 2월, 右兵庫頭에 補任, 관위는 從五位下. 延曆 8년(789) 2월, 讚 岐介가 되었다. 延曆 18년(799) 9월에는 上總守에 補任, 從五位上. 大同 3년(808) 9월, 宮內大輔 에 補任, 正五位下. 弘仁3년(812) 정월에 從四位下에 올랐다. 弘仁 5년(814) 9월에는, 治部大輔 가 되었고, 弘仁 7년(816) 2월에는 嵯峨天皇의 水生野의 사냥에 동행했으며 從四位上에 올랐다. 弘仁 13년(822) 10월 17일에 사망. 사망 시의 지위는 從四位上, 刑部卿이었다. 24) 百濟王勝義 : 생몰연대는 780~855년. 헤이안시대 전기의 公卿. 百濟王玄風의 아들. 但馬守, 右京 大夫, 左衛門督 등을 거쳐 承和 4년(837) 宮內卿이 되었다. 延曆 20년(801) 駿河 內親王을 낳았다. 25) 百濟王慶仲 : 출생연도는 알 수 없으며 헤이안 시대 초기의 관인이다. 아버지는 正五位上 陸奧守 鎭守將軍 敎俊. 嵯峨天皇의 寵姬尙侍 慶命의 형. 承和 6년(839) 정월 7일 從四位下에 올랐고, 11 일 民部大輔에 補任되었다. 그 때 武藏守를 겸임했다. 841년 4월 20일에 사망하였다.. 26) 百濟王忠誠 : 續日本後紀 承和 4年(837) 10月 戊午(28日)條에서 正六位上百濟王忠誠從五位 下, 續日本後紀 承和 10年(834) 2月 己巳(10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忠誠爲大監物 라고 보 인다. 27) 弘仁 원년 사건 : 弘仁은 일본의 元 가운데 하나로, 810년부터 823년까지의 기간을 가리킨다. 이 시대의 천황으로는 嵯峨天皇 淳和天皇이 있다. 弘仁 원년은 810년으로 弘仁 원년 사건 이

207 412 類聚國史 오래 동안 은둔하였음을 가련하게 여기노라. 安倍朝臣淸繼(아메노아손 키요츠구),28) 百濟 王愛筌(구다라노고니키시 아이신),29) 故藤原朝臣仲成(후지와라노아손 나카나리)30)의 아들 31) 등은 모두 귀양살이를 헤아려 近國 으로 들어오게 한다. 從五位下 藤原朝臣貞本(후지와 라노아손 사다모토)32)은 특별히 방면하여 京으로 돌아오게 한다. (후략) 413 承和 8년(841) 4월 20일 8년 3월 壬辰<*21일> 散位 從四位上 藤原朝臣文山(후지와라노아손 후미야마)이 卒하였다. 4월 庚申 <*20일> 從四位下 百濟王慶仲35)이 卒하였다. 慶仲은 百濟氏 중에서 適用之人 이다. 비록 큰 그릇은 아니었으나 관리로서의 幹聲을 지니고 있었다. 출사하여 武藏守36) 가 되었다. 들어와 民部大輔37)에 임명되었다. 세인(世人)들이 첨공(詹公)의 術38)이 있어 권66 薨卒四位 되었다. 고 말하였는데, 여러 낚시하는 사람들과 慶仲이 하천에 가서 낚시를 하였는데 물고기들이 오로지 慶仲의 낚시 바늘만 물어 순식간에 백여 마리를 낚아 올렸다. 또 여러 承和 4년(837) 12월 2일 33) 34) 12월 辛卯<*2일> 右兵衛督 從四位下 百濟王安義(구다라노고니키시 안기) 가 卒하였다. 란 810년에 일어난 정치사건인 쿠스코의 변(藥子의 變)을 말한다. 쿠스코의 변은 平城太上天皇의 변이라고도 한다. 平城上皇과 嵯峨天皇이 대립하지만, 嵯峨天皇 측이 신속하게 군사를 움직임으 로써 平城上皇이 出家하는 것으로 마무리된다. 이 사건으로 平城上皇의 애첩(愛妾)인 藤原藥子와 그의 오빠 藤原仲成 등이 처벌되었다. 28) 安倍朝臣淸繼 : 출생 사망연대 미상, 부모 미상. 從五位下 越前介를 역임하였다. 平城天皇의 측 근으로 弘仁 원년(810) 9월 同 上皇이 伊勢國에 遷幸했을 때, 上皇을 따랐고 신임 伊勢介 登美藤 津를 보임하여 집무를 시키지 않았다. 후에 民部少輔 紀南麻呂 등의 힐문을 받고, 死罪를 선고받 았지만 刑 1等을 면하여, 伯耆國에 유배되었다. 天長 10년(833) 6년에는 유배지가 美作國으로 바 뀌었다. 29) 百濟王愛筌 : 續日本後紀 天長 10年(833) 6月 甲子(9日)條에도 동일한 내용이 나온다. 30) 藤原仲成 : 藤原仲成(774~810)는 平安時代 초기의 公卿이다. 아버지는 藤原種 이고, 어머니는 粟田道麻呂의 딸이다. 785년 아버지인 種 가 암살되었기 때문에 소년이었지만 從5位에 보임되 었다. 여동생인 藥子가 平城天皇의 총애를 받았기 때문에 중용되어 권세를 누렸다. 809년 平城天 皇이 嵯峨天皇에게 양위하자 권세를 잃을까 두려워한 仲成 藥子 남매는 上皇과 함께 平城京로 옮겨 가서 상황의 重祚를 획책하여 二所朝廷 의 대립을 야기시켰다. 810년 參議가 되어 公卿의 반열에 올랐다. 그러나 같은 해 9월 嵯峨天皇 세력에게 잡혀 사살되었다. 31) 近國 : 고대 일본의 지방행정 구분이었던 令制國 가운데 지리적으로 首都에서 가까운 國을 가리킨 다. 이른바 近畿地方 이 이에 해당한다. 32) 藤原朝臣貞本 : 續日本後紀 天長 10年(833) 6月 甲子(9日)條와 동일한 기사이다. 續日本後紀 承和 13年(846) 正月 己酉(7日)條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續日本後紀 承和 14年(847) 2月 丁丑 (11日)條에서는 從五位上藤原朝臣貞本爲大藏大輔 라고 되어 있어 후에 大藏大輔에 올랐다는 사 실을 알 수 있다. 33) 右兵衛督 : 兵衛府 산하의 관인이다. 兵衛府는 律令制의 官司의 하나로서 左兵衛府와 右兵衛府의 두 가지가 존재하였다. 그 기관의 長을 兵衛督이라고 했는데, 이 역시 左兵衛督와 右兵衛督이 있 大夫 중에는 [그의] 壯健함을 일컫기도 하였는데, 일찍이 東國39)으로부터 都에 들어올 때 길이 나루터의 배를 다투는 곳에 이르렀는데 매우 약은 사람(傑 人)이 있어 무리를 이끌 었다. 督은 四等官 가운데 長官인 카미 에 해당되는 것이다. 令制에서는 從五位上에 상응하는 관직이었지만, 延曆 18年(799) 4월 27일에 從四位下로 改訂되었다. 34) 百濟王安義 : 續日本後紀 天長 10年(833) 10月 戊申(28日)條에서 正五位下百濟王安義從四位 下, 續日本後紀 承和 元年(834) 7月 庚戌朔條에서는 從四位下百濟王安義爲右兵衛督, 續日 本後紀 承和 4年(837) 12月 辛卯(2日)條에서 右兵衛督從四位下百濟王安義卒 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그는 右兵衛督 從四位下까지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837년 에 사망하였다는 것을 파악할 수 있다. 35) 百濟王慶仲 : 출생연도 미상. 헤이안 초기의 관인. 아버지는 正五位上 陸奧守 鎭守將軍 敎俊. 嵯 峨天皇의 寵姬尙侍 慶命의 형. 承和 6년(839) 정월 7일 從四位下에 올랐고, 11일 民部大輔에 補 任되었다. 그 때 武藏守를 겸임했다. 841년 4월 20일에 사망하였다. 36) 武藏守 : 武藏國의 장관을 가리킨다. 武藏國은 고대 일본의 지방행정 단위 가운데 하나이다. 현재 埼玉縣과 東京都의 隅田川에서 동쪽 지역과 도서를 제외한 부분 및 神奈川縣의 북동부(현재 川崎 市 전역과 橫浜市 東部 沿岸部)을 포함한 지역에 해당한다. 武州라고 부르는 경우도 있다. 延喜 式 에서의 格은 大國 遠國이다. 國의 행정관은 4등관인데 守 介 目이 그것이다. 37) 民部省 : 律令制 하의 八省 가운데 하나이다. 財政 租稅 일반을 관할하고 여러 國의 戶口 田 畑 山川 道路 租稅를 관장한다. 재정관청으로서 별도로 大藏省이 있었지만 租稅와 租稅관계 의 戶籍은 이쪽에서 다루었기 때문에 大藏省보다도 중시되었다. 장관(長官)인 民部卿은 正四位下 에 해당하지만, 地券關係 및 租稅關係를 다루는 重職이기 때문에 中納言 이상의 公卿이 겸직하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民部省의 실무자에 해당하는 判官에는 大丞 少丞 가운데서 연령에 따라 從五位下에 보임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들을 民部大夫라고 불렀다. 民部大輔는 正五位下에 상당 하는 1인이었다. 38) 첨공(詹公) : 중국 전국시대 사람으로서 본명은 詹何이다. 낚시에 능하여 一說에는 낚시에 아주 뛰어난 사람이란 의미로도 통용되었다. 39) 東國 : 근대 이전 일본의 지리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고대에는 아즈마 라고 불리어졌다. 현재에

208 414 고 와서는 여러 사람들을 내쫓으며 함께 건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이 두려워 하여 감히 항의하지도 못하고 있었는데 慶仲이 한번 채찍을 들어 때렸다. 이마 가죽이 벗 겨져내려 얼굴을 덮자 당혹해하며 엎드렸고 그 무리들 또한 물러갔다. 사람들이 크게 기 뻐하며 배의 노를 저으며 다투어 건너갔다. 類聚國史 415 권77 奏樂 延曆 10년(791) 10월 11일 桓武天皇 延曆 10년 10월 己亥 <*11일> 右大臣 <*[繼繩]>이 百濟王 등을 인솔하여 百濟 樂을 연주하며 운운하였다. <*이 일은 모두 位部에 기록되어 있다.> 承和 10년(843) 정월 5일 10년 정월 甲午<*5일> 散位 從四位上 伴宿 友足(토모노스쿠네 도모타리)이 卒하였다. 友足은 延曆 22년에 內舍人에 임명되었다. 弘仁 초기에 左衛門大尉에 제수되었다. 弘仁 5년에 從五位下를 수여받고 右兵衛佐에 제수되었다. 天長 6년에 加賀守에 제수되었다가 遠江守 常陸介로 옮겼다. 10월에 左衛門佐에 임명되었으며 10년에 從四位下를 수여받 았다. 友足은 사람됨이 平直하고 物情을 거스르지 않았다. 武藝에 뛰어났으며 매와 개를 가장 좋아하였다. 百濟王勝義(구다라노고니키시 쇼기)40)와 같은 때에 獵將이 되었는데 다 만 그 마음씀씀이는 각각 달랐다. 勝義王은 사슴을 잡으면 반드시 그 고기를 나누지는 않 았는데 友足은 진상품(御贄)으로 바친 나머지는 여러 대부들에게 두루 보내되 한 점의 저 민 고기도 남기지 않았다. 이 때문에 여러 大夫들이 농담(戱言)으로 말하기를 염라대왕 (閻樂王) 앞에 이르러 友足이 나쁜 곳(惡趣)에 배치된다면 우리들이 구하여 반드시 벗어 나게 만들 것이다. 잘못하여 勝義가 맑은 곳(淨刹)으로 간다면 우리들이 소송을 제기하여 奈黎로 밀어 떨어뜨릴 것이다. 라고 하였다. 友足은 나이 66세에 卒하였다. 스스로 솜옷 을 엮는 시기41)를 알아(屬 之期) 목욕하고 束帶하여 병 없이 임종하였다. 有識들이 기이 하게 여기며 모두 말하기를 태어날 곳도 알 수 있는 사람 이라고 하였다. 는 關東 坂東(=足柄坂以東의 의미)과 동일하게 취급되는 경우가 많지만, 이것은 비교적 후대에 발생한 것이다. 東國에 해당하는 令制國 중 二關의 동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는 伊勢國 志摩 國 美濃國 飛 國 尾張國 三河國이 있고, 大山의 바깥쪽에 해당하는 지역으로 信濃國 甲斐 國 遠江國 駿河國 伊豆國 諏方國이 있다. 坂東 諸國을 山東 (上野國 下野國 武藏國)과 坂東 (相模國 安房國 上總國 下總國 常陸國)으로 나누기도 한다. 諏方國은 나중에 信濃國 에 편입 통합에 의해 폐지되고, 武藏國은 東海道로 편입됨에 따라 山東 에서 坂東 으로 옮겨 진다. 40) 百濟王勝義 : 생몰연대는 780~855. 헤이안 시대 전기의 公卿. 百濟王玄風의 아들. 但馬守 右京大 夫 左衛門督 등을 거쳐, 承和 4년(837) 宮內卿이 되었다. 延曆 20년(801) 駿河 內親王을 낳았다. 41) 솜옷을 엮는 시기 : 임종할 시기를 말한다. 권78 賞賜 朱鳥 4년 10월 22일 10월 乙丑<*22일> 詔를 내려, 軍丁 筑後國 上陽 郡(카미츠야메노고호리) 사람 大伴 部博麻呂(오오토모베노하카마로)는 天豊財重日足姬 <*[齊明]>天皇 7년 百濟를 구원하는 役에서 그대는 唐軍의 포로가 되었다. 무라지 호도), 天命開別 <*[天智]>天皇 3년 土師連富 (하지노 連老(히노무라지 오유), 筑紫君薩夜麻(츠쿠시노키미 사츠야마), 弓削連 元寶(유게노무라지 겐호우)의 자식아이 4인은 唐人이 꾀하는 바를 주상하고자 하였으나 衣粮도 없는 연고로 전할 수가 없을 것을 우려하였다. 이때 博麻呂가 土師富 등에게 일 러 말하기를, 나는 너희들과 함께 本朝로 돌아가고 싶지만 옷과 식량이 없는 탓으로 모 두 떠날 수는 없다. 원컨대 내 몸을 팔아 衣食에 충당하기 바란다. 고 하였다. 富 등은 博麻呂의 計에 따라 天朝로 올 수 있었다. 그대 홀로 他堺에 머문 것이 지금 30년이나 되 었다. 朕은 조정을 받들고 國을 사랑하고 자기 몸을 팔아 忠을 드러내었던 것을 칭찬하노 라. 그런 까닭에 務大肆42) 및 5疋,43) 綿 10屯,44) 布 30端,45) 稻 1천束, 水田 4町46)을 하 사하며, 그 水田은 曾孫에게까지 미칠 것이다. 그리고 三族의 課役의 면제하여 그 功을 42) 務大肆 : 일본 令制의 從七位下에 해당한다. 43) 필(疋) : 비단 혹은 布에 대한 단위. 일반 포(布)의 경우 1필은 길이 5丈 2尺, 폭 2尺 2寸이며 고급 품인 미노 지역의 비단(일본에서는 이것을 美濃 라고 함)은 길이 5丈 1尺, 폭 2尺 2寸이었다. 44) 綿 1屯은 2斤이다. 45) 端 : 길이 5丈2尺, 폭 2尺4寸의 크기를 말한다. 46) 町 : 율령제 토지제도 단위의 하나로서 대보령 시행 이후 1町은 10段이었다. 1段은 360步였으므 로 1정은 3600步였다. 이것은 가로와 세로를 사람의 발걸음 3600보로 계산하였을 때 그 영역 안 에서 수확할 수 있는 생산량을 의미한다. 율령제의 토지 면적은 단순한 크기를 기준으로 하는 것 이 아니라 토지에서 생산할 수 있는 수확량을 기준으로 하는 것이었다.

209 416 類聚國史 드러내고자 하노라. 고 하였다.47) 417 朱鳥 5년 5월 21일 5월 辛卯 <*21일> 百濟淳武微子(구다라노쥰무미시)53)의 壬申年의 功54)을 칭찬하여 直大 朱鳥 5년 정월 7일 48) 5년 정월 己卯<*7일> 公卿에게 음식과 의상(衣裳)을 하사하였다. 正廣肆 百濟王余禪廣, 直大肆 遠寶,49) 良虞50)와 南典51)에게 특히 우대하여 하사하였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52) 參55)을 하사하였다. 인하여 布를 하사하였다. 朱鳥 5년 9월 4일 9월 己巳朔 壬申 4일 音博士(고에노하카세)56) 大唐 續守言,57) 薩弘恪, 書博士58)(데가키 노하카세) 百濟末士善信(구다라노밧시젠신)59)에게 銀人 20냥(兩)을 하사하였다. 47) 주조 4년 10월 22일조의 기사 : 日本書紀 持統 4年(690) 冬10月 甲辰朔 乙丑條에 보이는 내용 이다. 日本書紀 持統 4年(690) 9月 乙亥朔 丁酉條에서는 筑後國 을 筑紫國 이라 하였다. 日 本書紀 持統 4年(690) 冬10月 甲辰朔 乙丑條에서는 天命開別天皇 (天智天皇)을 天明開別天 皇 이라 하였다. 또한 筑紫君薩夜麻의 귀국은 天智天皇 10년(672) 11월의 일이다. 48) 百濟王余禪廣 : 百濟王善光의 다른 표기. 백제 의자왕의 왕자라고도 나온다. 舒明天皇 3년(631) 형 余豊璋과 함께 質로 일본에 건너왔다. 백제의 멸망 후에도 일본의 難波에 定住하였다. 만년에 正廣肆의 관위와 百濟王의 氏姓을 받았으며, 食封 100戶를 받기도 하였다. 持統天皇 7년(693) 1 월 正廣參에 오르기로 되어 있었으나 그 직전에 사망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本姓은 余. 이름은 禪 廣으로 쓰기도 한다. 49) 直大肆 遠寶 : 출생연도 미상. 7세기 후반부터 8세기 전반까지의 관인. 善光의 아들 혹은 손자로 慈敬의 아버지. 持統 5년(691) 정월 善光 良虞 南典과 함께 보물을 하사받았다. 그 당시는 直 大肆. 文武 4년(700) 10월 直廣參으로 常陸守에, 和銅 원년(708) 3월 正五位上으로 左衛士督에 보임되었고, 713년 4월 從四位下에 올랐다. 天平 6년(734) 3월, 散位로 사망하였다. 50) 百濟王良虞 : 아스카-나라시대의 관인. 661년 출생. 百濟王昌成의 아들(일설에는 동생이라고도 함). 朱鳥 원년(686) 天武天皇의 喪禮에서 사망한 백제의 왕족으로서 할아버지 善光을 대신하여 弔辭를 말하였다. 伊予守, 攝津亮을 담당했다. 從四位下. 天平 9년(737) 7월 17일 사망. 이름은 郞虞으로도 쓴다. 51) 百濟王南典 : 나라시대의 公卿. 天智天皇 5년(666)에 출생. 백제왕 선광의 아들이라고도 하고, 손 자라고도 한다. 和銅 원년 備前守가 되었고, 6년 備前國의 북부 6郡을 분할하여 처음으로 美作國 을 설치했다. 후에 播磨按察使를 맡았고, 天平 9년(737) 從三位에 올랐다. 天平寶字 2년(758) 93 세로 사망하였다. 52) 주조 5년 정월의 관위 수여 : 天武天皇 14년(685)에는 冠位 26階가 冠位 48階로 改訂되었다. 이 것은 八色의 姓과 관련이 있으며, 이후 大 令 新位階制가 만들어질 때까지 계속되었다. 親王 諸王을 諸臣으로 분리하고, 별도로 冠을 주어 諸臣의 上位에 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다. 明位 2階에는 明大와 明廣이 있으며, 4개의 관위가 있다. 淨位 4階에는 淨大와 淨廣이 있으며, 8개의 관위가 있다. 諸臣 正位 4階는 正 直 勤 務 追 進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正廣肆는 그 가 운데 8번째 관위이고, 從三位에 해당한다. 直大肆는 15번째 관위이고, 從五位上에 해당한다. 53) 淳武微子 : 출생 사망연도 모두 미상. 淳武止라고도 쓴다. 백제 사람인 不破氏를 조상으로 한다. 672년 壬申의 亂 에서 大海人皇子(天武天皇) 쪽에 섰다. 直大參(正五位上). 日本書紀 持統天 皇 5年(691) 5月 21日條에서, 壬申年의 功 에 대한 포상으로써 直大參의 位와 布를 받은 것 이라고만 보인다. 별도로 新撰姓氏錄 에는 不破勝의 선조가 淳武止이라고 보이며, 淳武止는 淳 武微子와 같다고 생각된다. 美濃國 不破郡은 大海人皇子의 軍勢가 集結한 곳이었기 때문에 淳武 微子는 百濟滅亡을 계기로 不破에 정착하여 大海人皇子의 군대에 가담한 것이라고 추측된다. 54) 壬申年의 功 : 672년에 일어난 고대 일본의 최대 내란인 壬申의 亂 에서 세운 공적을 의미한다. 天智天皇의 太子인 大友皇子에 대해서 皇弟 大海人皇子가 지방호족 세력을 지지 기반으로 하여 반기를 든 것이다. 반란자인 大海人皇子는 승리하여 天武天皇으로 즉위하였다. 天武天皇 元年은 干支로 壬申에 해당되기 때문에 壬申의 亂 이라고 부르고 있다. 55) 直大參 : 天武天皇 14년(685)에는 冠位 26階가 冠位 48階로 改訂되었는데, 그 가운데 하나이다. 親王 諸王을 諸臣으로 分離하고, 별도로 冠을 주어 諸臣의 上位에 둔 점도 주목해야 할 부분이 다. 明位 2階에는 明大와 明廣이 있으며, 4개의 관위가 있다. 淨位 4階에는 淨大와 淨廣이 있으 며, 8개의 관위가 있다. 諸臣 正位 4階는 正 直 勤 務 追 進의 단계로 나누어진다. 直大參 은 正五位上에 해당한다. 56) 音博士 : 式部省의 직할 하에 있던 관료육성기관인 大學寮에서 中國語 發音을 가르치던 사람(從 七位上에 해당)을 말한다. 57) 大唐 續守言 : 삼국사기 百濟本紀, 唐書 百濟 에서 豊璋은 이듬 해인 662년 5월에 입국했 다고 되어있다. 이 때 福信은 왕을 맞이하러 나가 국정을 모두 위임했다. 倭國은 이후에도 福信에 게 군수물자를 보내었고, 福信도 포로를 倭國으로 보냈는데, 이 때 보낸 인물 중 한사람이 바로 唐人續守言이다. 58) 書博士 : 式部省의 직할 하에 있던 관료육성기관인 大學寮에서 書道를 가르치던 從七位上에 해당 하는 직을 말한다. 59) 百濟末士善信 : 일본서기 에 의하면 書博士 百濟末士善信이 持統 5년(649) 9월 은 20兩을 받은 것으로 되어 있다.

210 418 類聚國史 권78 賞賜 권83 免租稅 慶雲 4년(707) 5월 26일 天平 字 5년(761) 11월 17일 419 慶雲 4년 5월 癸亥<*26일> 讚岐國 那賀郡 錦部刀良, 陸奧國 信太郡 壬生五百足, 筑後 11월 丁酉<*17일> 從四位下 藤原惠美朝臣朝狩(후지와라노에미노아손 아사카리)를 東 國 山門郡 許勢部形見 등에게 각각 의복 1襲과 鹽穀을 하사하였다. 처음에 百濟를 구할 海道63) 節度使64)로 삼았다. 正五位下 百濟朝臣足人(구다라노아손 다루히토),65) 從五位上 때60) 官軍이 불리하였는데 刀良 등은 唐兵의 포로가 되어 [신분이]몰락하여 官戶가 되었 田中朝臣多太麻呂(다나카노아손 타다마로)를 副使로 삼고. 判官은 4인, 錄事도 4인으로 다. 40여 년을 지나서 해방되어 良民이 되었다. 지금에 이르러 우리 사신 粟田朝臣眞人 하였다. 그 관할하는 곳은 遠江 駿河 伊豆 甲斐 相摸 安房 上總 下總 常陸 (아와타노아손 마히토) 등을 만나 [그들을] 따라서 조정으로 돌아왔다. 그 애쓰고 고생한 上野 武藏 下野 등 12國이다. 선박 151척, 兵士 1만5천7백인, 子弟 78인, 水手 7천5백 것을 가련하게 여겨 이러한 하사가 있는 것이다.61) 20인을 檢定하였다. 수 중에서 2천4백인은 肥前國에서, 200인은 對馬嶋에서 선발하였 延曆 13년(794) 7월 9일 13년 7월 己卯<*9일> 山背, 河內, 攝津, 播磨 등의 國의 稻 1만1천束을 從三位 百濟王 明信(구다라노고니키시 메이신), 從四位上 五百井女王(이오이 죠오우), 從五位上 置始女 王(오키소메지 죠오우), 從四位上 和氣朝臣廣 (와케노아손 히로무시), 因幡國造(이나바 노미야츠코) 淨成(키요나리)의 딸 등 5인에게 하사하였다. 새로운 京과 家를 만들었기 때 문이다.62) 권78 獻物 天武天皇 4년(676) 정월 1일 天武天皇 4년 春정월 丙午朔. 大學寮의 諸學生 陰陽寮 外藥寮 및 舍衛女 墮羅女 百濟王善光, 新羅 출신 仕丁 등이 약과 진기한 물건들을 받들어 바쳤다. 60) 처음에 백제를 구할 때 : 여기서 처음에 구할 때 란, 백제 멸망 시의 일본 구원병 파견을 말하 는데 구체적으로 제명천황 7년(661)과 천지천황 2년(663)의 白村江에서의 敗戰을 가리키는 듯하다. 61) 경운 4년 5월 26일조의 기사 : 續日本紀 慶雲 4年(707) 5月 癸亥條와 동일한 기사. 62) 평안경 천도 : 平城京에서 78년에 조영한 長岡京으로 천도한 桓武天皇이, 794년에 다시 천도한 곳은 바로 平安京이다. 불과 10년만의 재천도에는 長岡京에서 흥한 藤原種 暗殺에서부터 早良 親王 廢太子에 이르기까지 일련의 소동이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天武系의 都에서 벗어나 天智系의 都를 만들 의도도 있었다고 이야기된다. 63) 東海道 : 五畿七道 가운데 하나로서 혼슈(本州)의 太平洋 방면의 지역을 가리키는 행정단위이다. 다. 從三位 百濟王敬福66)을 南海道使67)로 삼았다. 권99 敍位4 大同 3년(808) 11월 17일 11월 甲午<*17일> 從五位下 葛井王(후지이 오우)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正六位 上 新城王(니이키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從四位下 三諸朝臣眞屋 (미모로노아손 마야마 64) 節度使 : 節度使는 天平 3年(732)에 각 道의 軍 을 강화하기 위해서 설치한 令外官의 직이다. 일 단 폐지 후 天平 字 5年(761)에 다시 節度使를 두었으나 후에 또 폐지되었다. 65) 百濟朝臣足人 : 나라시대 무인, 백제계의 씨족출신으로 본성은 여(余). 후에 백제조신의 씨성을 하사받았다. 天平 10년에는 鎭守判官, 후에 陸奧大, 陸奧介兼鎭守副將軍 등을 거쳐 종사위하, 우경대부에 올랐다. 出羽 雄勝柵(秋田縣)의 축성, 藤原仲麻呂의 난 평정 등에서 공적이 있었다. 770(神護景雲 4)년 5월 12일 사망. 66) 百濟王敬福 : 일본에 망명한 백제왕족의 자손이다. 697년 출생. 749년 陸奧守 在任 시에 陸奧國 의 小田郡에서 黃金을 발견한 것으로 잘 알려져 있다. 또 橘奈良麻呂의 난과 藤原仲麻呂의 난 진 압에도 공적이 있었다. 官位는 從三位 刑部卿이었다. 百濟王敬福은 738년 41세 때 陸奧介로서 사료 상에 나타난다. 당시 陸奧守는 大野東人이었다. 739년에는 正六位上에서 從五位下에 올랐 으며, 743년 46세에 陸奧守으로 승진하였다. 766년 사망. 향년 69세. 67) 南海道使 : 본문의 南海道使 는 南海道節度使 를 의미하는데, 759년 伊予守에 취임하여 761년 에 新羅征伐의 논의가 일어났을 때 百濟王敬福은 南海道節度使에 임명되었다. 그것은 紀伊 阿 波 讚岐 伊予 土佐 播磨 美作 備前 備中 備後 安芸 周防 등 12개 國의 군사권을 장 악하는 위치였다. 실제로는 신라에의 진공이 시현되지 않았지만, 만일 한반도 공격이 성공하였다 면 敬福이 百濟國王에 다시 복귀하였을 가능성도 있었다는 설도 있다.

211 420 類聚國史 421 로), 藤原朝臣大繼(후지와라노아손 오오츠구)에게 從四位上를, 正五位上 藤原朝臣繼業 게 從五位下를, 從四位上 文室朝臣眞室 (훈야노아손 마야마로)에게 正四位下를, 從四 (후지와라노아손 츠구나리), 正五位下 安倍朝臣鷹野(아베노아손 다카노)에게 從四位下를 位下 藤原朝臣今川(후지와라노아손 이마가와)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下 百濟王敎德(구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高橋朝臣祖 (다카하시노아손 오야마로), 藤原朝臣繼彦(후지와라 다라노고니키시 쿄우도쿠),69) 小野朝臣野主(오노노아손 노누시)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 노아손 츠구히코), 藤原朝臣道雄(후지와라노아손 미치오), 紀朝臣田上(기노아손 타가미), 였다. 藤原朝臣眞雄(후지와라노아손 마오)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永原朝臣 弟 (나가하라노아손 이야오토마로), 大伴宿 人益(오오토모노스쿠네 히토마스), 石川朝 臣繼人(이시가와노아손 츠구히토), 三嶋眞人年嗣(미시마노마히토 도시츠구), 百濟王元勝 (구다라노고니키시 겐쇼우),68) 多治比眞人今 (다지히노마히토 이마마로) 紀朝臣繩 (기 노아손 타다마로), 讚岐公千繼(사누키노키미 치츠구), 藤原朝臣山人(후지와라노아손 야 弘仁 3년(812) 11월 20일 11월 乙亥<*20일> 從五位下 百濟王敎俊(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슈)에게 從五位上을 수 여하고 出羽守(데와노카미)70)로 삼았다. 弘仁 4년(813) 정월 7일 마히토), 安倍朝臣眞勝(아베노아손 마가츠), 大中臣朝臣智治 (오오나카도미노아손 치지 4년 정월 辛酉<*7일> 正四位下 吉備朝臣泉(키비노아손 이즈미)에게 正四位上을 수여하 마로)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大中臣朝臣弟守(오오나카도미노아손 오토모리), 紀朝臣 였다. 從四位上 秋篠朝臣安人(아키시노노아손 야스히토)에게 正四位下를, 正五位下 石川 越永(기노아손 고시나가), 安倍朝臣寬 (아베노아손 히로마로), 藤原朝臣弟葛(후지와라 朝臣河主(이시가와노아손 가와누시), 藤原朝臣道繼, 從五位上 安倍朝臣男笠(아베노아손 노아손 오토후지), 多朝臣人長(타노아손 히토나가), 安倍朝臣淸繼(아베노아손 키요츠구), 오가사)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藤原朝臣三守(후지와라노아손 미모리), 齋部宿 廣成(인베노스쿠네 히로나리)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外從五位下 秦宿 大枝朝臣繼吉, 坂上大宿 鷹養(사카우에노오오스쿠네 다카가이)에게 正五位下를, 從五 都伎 (하타노스쿠네 츠기마로)에게 外從五位上를, 正六位上 名草直道主(나쿠사노아타 位下 百濟王忠宗(구다라노고니키시 츄우소우),71) 安倍朝臣犬養(아베노아손 이누카이), 安 이 미치누시)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倍朝臣益成(아베노아손 마스나리), 佐伯宿 長繼(사에키노스쿠네 나가츠구), 小野朝臣岑 弘仁 3년(812) 정월 7일 守(오노노아손 미네모리)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3년 정월 丙寅<*7일> 无品 佐味親王(사미 신노우)에게 四品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多 賀王(다가 오우)에게 正五位上을, 无位 石野王(이시노 오우), 正六位上 原王(하라 오우)에 68) 百濟王元勝 : 日本後紀 延曆 16年(797) 正月 庚子(13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元勝爲安房守, 日本後紀 延曆 23年(804) 甲申 4月 壬子(8日)條에서 從五位下百濟王元勝爲內兵庫正, 日本 後紀 大同 元年(806) 2月 庚戌(16日) 從五位下百濟王元勝爲鍛冶正, 日本後紀 大同 3年 (808) 11月 甲午(17日)에서 從五位下永原朝臣最弟麻呂, 大伴宿 人益 石川朝臣 人 三島眞人年 嗣 百濟王元勝, 日本後紀 卷17 大同 4年(809) 2月 己未(13日) 從五位上百濟王元勝爲大判事, 日本後紀 卷30(逸文) 弘仁 13年(822) 10月 丁巳朔條에서 從五位上中臣朝臣道成 百濟王元勝 大伴宿 國道正五位下, 日本後紀 卷34(逸文) 天長 3年(826) 正月 甲戌(7日)條에서 正五位下 百濟王元勝正五位上 라고 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지속적으로 승진하였으며, 점차 비중 있는 위치 에 있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69) 百濟王敎德 : 출생연도는 미상이나 822년에 사망하였다. 8세기 후반~9세기 전반의 관인. 환무천 황의 후궁으로 보이는 百濟王貞香의 아버지. 延曆 7년(788) 2월 右兵庫頭에 補任, 관위는 從五位 下. 延曆 8년(789) 2월 讚岐介가 되었다. 延曆 18년(799) 9월에는 上總守에 補任, 從五位上. 大 同 3년(808) 9월 宮內大輔에 補任, 正五位下. 弘仁 3년(812) 정월에 從四位下에 올랐다. 弘仁 5 년(814) 9월에는 治部大輔가 되었고, 弘仁 7년(816) 2월에는 嵯峨天皇의 水生野의 사냥에 동행했 으며, 從四位上에 올랐다. 弘仁 13년(822) 10월 17일에 사망. 당시의 관위는 從四位上이며, 관직 은 刑部卿이었다. 70) 出羽守 : 出羽國의 장관을 말한다. 出羽國은 고대 일본의 행정 단위 가운데 하나이다. 범위는 오 늘날의 山形縣과 秋田縣에 해당하지만, 秋田縣 북동부의 鹿角市와 小坂町(鹿角郡)은 포함되지 않 는다. 羽州라고도 불리었다. 延喜式 에서의 格은 上國 遠國이다. 明治元年에 羽前國과 羽後國 으로 分割되었기 때문에 이후 兩羽라고도 불리었다. 71) 百濟王忠宗 : 후에 左兵衛佐를 겸하게 되었고, 814년 3월 1일에는 正五位下를 받았다( 日本後 紀 ).

212 422 類聚國史 弘仁 5년(814) 3월 1일 3월 戊申朔. 從五位上 百濟王忠宗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423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百濟王安義,72) 布勢朝臣海(후세노아손 우미)에게 從五 位下를 수여하였다. 弘仁 11년(820) 정월 7일 권99 敍位4 11년 정월 庚辰<*7일> 豊樂殿에서 五位 이상 및 蕃客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從四位上 弘仁 7년(816) 정월 7일 藤原朝臣繼彦(후지와라노아손 츠구히코)에게 正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多治比 7년 정월 癸酉<*7일>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三品 葛原親王에게 二品을 수여하였 眞人今 (다지히노마히토 이마마로), 良岑朝臣安世(요시미네노아손 야스요), 藤原朝臣三 다. 從五位上 直世王(나오요 오우)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高瀨王(다카세 오우)에게 守, 平野王(히라노 오우)에게 從四位上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上 葛井王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巨倉王(고쿠라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正五位下 坂上大宿 鷹養 從五位下 御井王(미이 오우)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大縣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 (사카노우에노스쿠네 다카카이), 高階眞人遠成, 高村宿 田使(다카무라노스쿠네 다츠카 다. 正五位下 安倍朝臣眞勝(아베노아손 마가츠), 橘朝臣永繼(다치바나노아손 나가츠구), 이)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大伴宿 人益(오오도모노스쿠네 히토마스), 上毛野朝臣穎人(가미츠케누노아손 히데히토)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藤 佐伯宿 長繼, 安倍朝臣雄能 (아베노아손 오노마로)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 原朝臣伊勢人(후지와라노아손 이세히토)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藤原朝臣眞川(후지 位下 大伴宿 彌繼, 藤原朝臣眞書, 藤原朝臣友人(후지와라노아손 도모히토), 路眞人年繼 와라노아손 마가와), 出雲宿 廣貞(이즈모노스쿠네 히로사다), 藤原朝臣濱主(후지와라노 (미치노마히토 도시츠구), 海眞人有成(우미노마히토 아리나리), 安倍朝臣寬 (아베노아 아손 하마누시), 高階眞人淸階(다카시나노마히토 키요시나), 橘朝臣長谷 (다치바나노마 손 히로마로), 三嶋眞人助成(미시마노마히토 스케나리), 安倍朝臣豊柄(아베노아손 도요 히토 하세마로)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三原朝臣春上(미하라노아손 하루 가라), 物部 連足繼(모노노베노소우사노무라지 아시츠구)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 가미), 春岡眞人廣海(하루오카노마히토 히로우미), 大伴宿 勝雄(오오도모노스쿠네 가츠 다. 正六位上 文屋眞人秋津(훈야노마히토 아키츠), 淸原眞人長谷(키요하라노마히토 하 오), 百濟王永哲(구다라노고니키시 나가데츠), 多治比眞人淸貞(다지히노마히토 키요사 세), 多治比眞人淸門(다지히노마히토 키요가도), 紀朝臣虎主(기노아손 도라누시), 橘朝臣 다), 安倍朝臣永野(아베노아손 나가노), 笠朝臣仲守(가사노아손 나카모리), 紀朝臣御依 繼成(다치바나노아손 츠구나리), 藤原朝臣村田(후지와라노아손 무라타), 安倍朝臣眞度良 (기노아손 미요리), 藤原朝臣三成(후지와라노아손 미나리), 安倍朝臣高繼(아베노아손 다 (아베노아손 마도라), 坂田朝臣弘貞(사카다노아손 히로사다), 正六位下 百濟王敎貞(구다 카츠구)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라노고니키시 쿄우테이), 從六位上 佐伯宿 弓繼(사에키노스쿠네 유미츠구), 和朝臣家主 (야마토노아손 이에누시), 小野朝臣繼手 (오노노아손 츠기테마로), 正七位上 布勢朝臣 淨繼(후세노아손 키요츠구)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弘仁 13년(822) 11월 1일 11월 丁巳. 正四位下 藤原朝臣繼彦, 紀朝臣百繼(기노아손 모모츠구)에게 從三位를 수여 하였다. 正四位下 平野王에게 正四位上을, 從四位下 直世王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下 弘仁 7년(816) 2월 15일 2월 丙辰<*15일> 水生野에서 사냥하며 즐겼다. 從四位下 百濟王敎德에게 從四位上을, 從七位下 百濟王勝義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弘仁 9년(818) 정월 4일 9년 정월 戊子<*4일> 正五位下 直世王, 佐伯宿 長繼(스에키노스쿠네 나가츠구)에게 72) 百濟王安義 : 續日本後紀 天長 10年(833) 10月 戊申(28日)條에서 正五位下百濟王安義從四位 下, 續日本後紀 承和 元年(834) 7月 庚戌朔條에서는 從四位下百濟王安義爲右兵衛督, 續日 本後紀 承和 4年(837) 12月 辛卯(2日)條에서 右兵衛督從四位下百濟王安義卒 라고 되어 있다. 이로써 그는 右兵衛督 從四位下까지 올랐다는 것을 알 수 있고, 출생연도는 알 수 없지만 837년 에 사망하였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213 424 類聚國史 425 高瀨王(다카세 오우)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上 弟野王(오토노 오우)에게 正五位下를, 從 天長 2년(825) 정월 7일 五位下 野倍王(노베 오우)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氷上王(히가미 오우)에게 從五位下 2년 정월 辛亥 <*7일.> (중략) 從五位下 藤原朝臣淸綱(후지와라노아손 키요츠나), 巨勢朝 를, 從四位下 安倍朝臣男笠(아베노아손 오가사), 安倍朝臣雄能 (아베노아손 오노마로) 臣淸野(고세노아손 키요노), 石川朝臣廣主(이시가와노아손 히로누시), 橘朝臣弟氏(다치 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下 藤原朝臣濱主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中臣朝 바나노아손 오토우지), 藤原朝臣三成(후지와라노아손 미나리), 百濟王慶忠(구다라노고니 臣道成(나카도미노아손 미치나리), 百濟王元勝(구다라노고니키시 겐쇼우),73) 大伴宿 國 키시 게이츄우),74) 大野朝臣眞鷹(오오노노아손 마마로), 伴宿 氏上(도모노스쿠네 우지가 道(오오도모노스쿠네 구니미치)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미), 藤原朝臣輔嗣(후지와라노아손 스케츠구)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권99 敍位4 弘仁 14년(823) 정월 7일 14년 정월 癸亥<*7일> 豊樂殿에 납시어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无位 高棟王(다카무 네 오우)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繼野王(츠구노 오우)에게 從五位上을, 正 六位上 津嶋王(츠시마 오우), 山名王(야마나 오우), 岡野王(오카노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上 佐伯宿 長繼에게 正四位下를, 從四位下 藤原朝臣道雄, 紀朝臣長 田 (기노아손 나가타마로)에게 從四位上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坂上大宿 廣野, 橘朝 臣長谷 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下 藤原朝臣河主, 藤原朝臣淨本(후지와라노아손 키요모 토), 粟田朝臣飽田 (아와다노아손 아키다마로), 安野宿 文繼, 吉田宿 文主(키치다노스 쿠네 후미누시)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藤原朝臣常嗣(후지와라노아손 츠 네츠구), 春原朝臣永世, 藤原朝臣豊主, 高階眞人石川(다카시나노마히토 이시가와), 多治 比眞人興宗(다지히노마히토 오키무네), 橘朝臣氏守, 紀朝臣諸繼, 雀部朝臣家繼(사사키베 노아손 이에츠구), 永世朝臣公足(나가요노아손 기미다리), 縣犬養宿 淨人(아가타이누카 天長 2년(825) 10월 15일 10월 甲寅<*15일> 正六位上 百濟王敎養(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요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藤原朝臣三成(후지와라노아손 미나리)에게 正五位下를, 正六位上 藤原朝臣豊繼(후지와라노아손 도요츠구)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天長 3년(826) 정월 7일 3년 정월 甲戌<*7일> 豊樂殿에서 연회를 베풀었다. 正四位下 藤原朝臣繼業(후지와라노 아손 츠구나리)에게 從三位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小野朝臣岑守(오노노아손 미네모리) 에게 從四位上을, 無位 高枝王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下 雄豊王에게 從五位上을, 正六 位上 粟生王에게 從五位下를, 正五位下 藤原朝臣世嗣(후지와라노아손 요츠구)에게 從四 位下를, 正五位下 百濟王元勝에게 正五位上을 수여하였다. 권99 敍位 4 天長 4년(827) 정월 21일 이노스쿠네 키요히토)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安野宿 眞繼(야스노노스쿠 4년 정월 癸未<*21일> 制曰. (중략) 從四位上 直世王에게 正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 네 마츠구), 百濟公繼嶋(구다라노키미 츠구시마), 岐史眞鷹, 栗前連名正(쿠리쿠마노무 位下 南淵朝臣弘貞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上 佐伯王에게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弟野王 라지 나마사), 河內忌寸淨濱(가와치노이미키 키요하마), 廣宗連 繼(히로무네노무라지 이 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下 貞園王과 占野王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山階王과 長川王 토츠구), 阿閉臣氏成(아베노오미 우지나리)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朝野宿 鹿取(아사노노스쿠네 카토리), 菅原朝臣 淸公, 藤原朝臣濱主, 藤原朝臣淨本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藤原朝臣吉野 73) 百濟王元勝 : 자세한 것은 주 68) 참조. 74) 百濟王慶忠 : 日本後紀 卷33(逸文) 天長 2年(825) 正月 辛亥(4日)條에도 같은 승진 기사가 보 인다.

214 426 類聚國史 (후지와라노아손 요시노)에게 從四位下를, 正五位下 池田朝臣春野(이케다노아손 하루노) 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藤原朝臣山人(후지와라노아손 야마히토), 紀朝臣興道(기노아 손 오키미치), 百濟王勝義(구다라노고니키시 쇼우기), 安倍朝臣吉人, 興原宿 敏久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427 位下를, 從四位下 百濟王忠宗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天長 10년(833) 10월 28일 10월 戊申<*28일> 正六位上 大川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百濟王安義 (구다라노고니키시 안기)77)에게 從四位下를, 正六位上 百濟王文操(구다라노고니키시 분 소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78) 天長 5년(828) 정월 7일 5년 정월 甲子<*7일> 豊樂殿에 납시었다. 從三位 春原朝臣五百枝에게 正三位를 수여하 였다. 從四位上 藤原朝臣綱繼에게 正四位下를, 正五位上 弟野王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 下 豊江王에게 從五位上를, 正六位上 近棟王과 御仲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 位下 和氣朝臣眞綱, 紀朝臣善岑, 安倍朝臣吉人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大 中臣朝臣淵魚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笠朝臣仲守, 巨勢朝臣淸野, 藤原朝臣雄敏, 藤原 朝臣常嗣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石川朝臣弟道, 和朝臣家主, 藤原朝臣長 岡, 文室朝臣大田, 紀朝臣深江, 大春日朝臣雄, 貞江連繼人, 橘朝臣氏人, 伴宿 眞臣, 羽 권99 敍位 4 承和 원년(834) 11월 5일 11월 丁未朔 辛亥<*5일> 正六位上 百濟王奉義(구다라노고니키시 호우기), 正六位上 百 濟王慶仁(구다라노고니키시 게이진)에게 모두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79) 承和 2년(835) 정월 7일 색公吉足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藤原朝臣良房, 坂上大宿 正野, 安倍朝 2년 정월 癸丑<*7일> 天皇이 豊樂院에 납시었다. 朝堂에서 百官들에게 주연을 베풀었 臣安仁, 伴宿 黑成, 藤原朝臣貞守, 多治比眞人遠永, 田口朝臣佐波主, 當麻眞人廣道, 高 다. 詔를 내려, 從三位 源朝臣信(하라노아손 신)에게 正三位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藤 75) 橋朝臣廣野, 外從五位下 安野宿 眞繼, 百濟公綱繼(구다라노키미 츠나츠구), 忠宗宿 原朝臣良房(후지와라노아손 요시후사)에게 從四位上을, 從五位上 永野王(나가노 오우)에 末繼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三繼王과 津守王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无位 嶋江王, 正 天長 5년(828) 10월 17일 10월 己巳<*17일> 右馬大允76) 正六位上 百濟王善義(구다라노고니키시 젠기)에게 從五 位下를 수여하였다. 天長 7년(829) 정월 7일 6년 정월 戊子<*7일> 從四位下 藤原朝臣愛發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无位 正躬王 六位上 廣坂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藤原朝臣廣敏(후지와라노아손 히 로도시), 紀朝臣善岑(기노아손 요시미네), 百濟王勝義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承和 3년(836) 2월 20일 2월 己丑<*20일> 天皇이 神泉苑에 행차하였다. 无位 百濟王永琳(구다라노고니키시 에 이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80) 에게 從四位下을, 從五位上 磐田王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楠野王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雄貞王과 美能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上 紀朝臣색 에게 正四 75) 천장 5년 정월 7일조의 기사 : 日本後紀 卷36(逸文) 天長 5年(828) 正月 甲子(7日)條에도 같은 내용이 보인다. 76) 右馬大允 : 馬寮라는 율령제 官司의 하나에 속해 있는 직장이다. 馬寮에는 正七位下에 상당하는 大允을 左右 각 1명씩 두었다. 77) 百濟王安義 : 주 72) 참조. 78) 천장 10년 10월 28일조의 기사 : 續日本後紀 天長 10年(833) 10月 戊申(28日)條에 같은 내용 이 보인다. 79) 승화 원년 11월 5일조의 기사 : 續日本後紀 承和 元年(834) 11月 辛亥(5日)條의 기사와 같은 내 용이다. 80) 승화 3년 2월 20일조의 기사 : 續日本後紀 卷5 承和 3年(836) 2月 己丑(20日)條의 기사와 같 은 내용이다.

215 428 承和 4년(837) 10월 28일 戊午<*28일> 從五位上 百濟王慶仲에게 正五位下를, 正六位上 百濟王忠誠(구다라노고 니키시 츄우세이)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앞서 交野의 遊獵處로부터 太上<*[嵯峨]> 天皇의 풍지(諷旨)가 있었는데, 이로 인하여 수여한 것이다. 承和 5년(838) 정월 7일 5년 정월 丙寅<*7일> 天皇이 豊樂殿에 납시어 百官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詔를 내려, 從五位上 豊江王(도요에 오우)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豊村王(도요무라 오우)에게 從 五位上을, 正六位上 高原王(다카하라 오우)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和氣 朝臣眞綱, 笠朝臣梁, 藤原朝臣雄敏(후지와라노아손 오토시), 大枝朝臣總成에게 從四位 類聚國史 429 권99 敍位4 承和 6년(839) 2월 25일 2월 丁丑<*25일> 從四位上 百濟王勝義에게 從三位를, 正六位上 百濟王永仁(구다라노 고니키시 에이진)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81) 承和 6년(839) 3월 18일 3월 己亥<*18일> 從四位下 百濟王惠信(구다라노고니키시 게이신)에게 從三位를 수여 하였다. 承和 11년(844) 정월 7일 上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藤原朝臣豊主(후지와라노아손 도요누시), 紀朝臣名虎(기노아 11년 정월 庚寅<*7일> 天皇이 紫宸殿에 납시어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詔를 내려, 손 나토라), 丹 眞人淸貞, 從五位上 笠朝臣廣庭(가사노아손 히로니와)에게 從四位下를 无品 基貞親王에게 三品을, 无品 宗康親王에게 四品을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安倍朝臣安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善道朝臣眞貞에게 正五位上을, 從五位上 坂上大宿 鷹主(사카노 仁에게 從四位上를, 无位 基枝王에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上 長田王에게 正五位下를, 正 우에노오오스쿠네 다카누시), 藤原朝臣嗣宗(후지와라노아손 츠구무네)에게 正五位下를, 六位上 從五位下 紀朝臣椿守, 百濟王永豊(구다라노고니키시 에이호우), 大藏宿 橫佩에게 從五 를, 從四位下 田口朝臣佐波主, 藤原朝臣長良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藤原 位上을 수여하였다. 朝臣輔嗣, 良岑朝臣木連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安永, 藤原朝臣 承和 5년(838) 11월 13일 11월 丁卯<*13일> 正六位上 百濟王敎凝(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옹)에게 從五位下를 수 여하였다. 承和 6년(839) 정월 7일 6년 정월 庚申<*7일> 天皇이 紫宸殿에 납시었다. 詔를 내려, 正四位下 菅原朝臣淸公(스 가하라노아손 키요기미)에게 從三位를, 正五位下 基棟王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 五位下 有雄王, 岡於王에게 從五位上를 수여하였다. 正六位上 弟河王, 野長王에게 從五 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橘朝臣氏人(다치바나노아손 우지비토), 滋野朝臣貞主, 藤 原朝臣助(후지와라노아손 스케)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正五位下 善道宿 眞貞(요 시미치노스쿠네 마사다), 百濟王慶仲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山王, 鎌倉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下 橘朝臣氏人에게 正四位下 大津, 紀朝臣野長, 路眞人永名, 坂上大宿 正野, 百濟王善義(구다라노고니키시 젠기), 淸 瀧朝臣河根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承和 12년(845) 정월 7일 12년 정월 甲寅<*7일> 天皇이 豊樂院에 납시어 群臣에게 주연을 베풀었다. 詔를 내려, 正三位 橘朝臣氏公에게 從二位를, 從五位上 石作王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安宗王에 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豊井王, 仲嗣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四位上 南淵朝 臣永河에게 正四位下를, 從四位下 坂上大宿 淸野, 无位 源朝臣安에게 從四位上을 수여 하였다. 正五位下 小野朝臣篁, 伴宿 成益, 藤原朝臣富士 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淸岑宿 門繼, 藤原朝臣岳守, 佐伯宿 利世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 位下 笠朝臣數道, 百濟王慶世(구다라노고니키시 게이세),82) 橘朝臣千枝, 久賀朝臣三夏, 81) 승화 6년 2월 25일조의 기사 : 續日本後紀 承和 6年(839) 2月 丁丑(25日)條과 같은 기사이다. 82) 百濟王慶世 : 續日本後紀 承和 12年(845) 正月 甲寅(7日)條의 같은 기사에서도 보인다. 續日

216 430 類聚國史 431 惟良宿 貞道에게 從五位上를 수여하였다. 外從五位下 菅原朝臣梶吉, 百濟宿 河成(구 려, 无品 恒貞親王에게 三品을, 无品 本康親王에게 四品을 수여하였다. 正三位 藤原朝臣 다라노스쿠네 가와나리),83) 无位 源朝臣興, 正六位上 橘朝臣淸蔭, 藤原朝臣直世, 良岑朝 良房에게 從二位를, 從四位上 橘朝臣岑繼에게 從三位를, 從四位下 小野朝臣篁에게 從四 臣宗貞, 紀朝臣 弟, 菅野朝臣高年, 藤原朝臣雄瀧, 橘朝臣友雄, 紀朝臣眞主, 和氣朝臣齊 位上을, 從四位上 高枝王에게 正四位下를, 无位 貞內王에게 從四位下를, 從四位下 豊江 之, 紀朝臣道茂, 橘朝臣岑範, 吉備朝臣全繼, 中臣丸朝臣氏成, 石川朝臣宗我繼, 高橋朝臣 王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下 有雄王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淸野, 伴宿 益雄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을, 无位 安原王, 正六位上 利見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无位 源朝臣勝, 山王에게 源朝臣多에게 從四位上을, 從五位上 藤原朝臣行道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 承和 14년(847) 정월 7일 14년 정월 甲辰<*7일> 天皇이 紫宸殿이 납시어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詔를 내려, 三品 仲野親王에게 二品을, 正四位下 源朝臣弘에게 從三位를, 從四位下 橘朝臣岑繼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下 長田王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有雄王에게 正五位 下를, 從五位下 豊前王에게 從五位上을, 无位 江王, 正六位上 高叡王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无位 源朝臣勤에게 從四位上을, 正五位下 興世朝臣書主에게 從四位下를, 從 五位下 藤原朝臣氏雄, 永原朝臣末繼, 藤原朝臣仲統, 伴宿 善男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 였다. 外從五位下 物部首廣泉, 正六位上 南淵朝臣穎守, 橘朝臣安吉雄, 伴宿 直統, 紀朝 臣眞丘, 坂上大宿 貞守, 橘朝臣直繼, 紀朝臣全吉, 藤原朝臣冬緖, 紀朝臣好雄, 高橋朝臣 祖繼, 藤原朝臣安雄, 笠朝臣出羽, 安倍朝臣忠雄, 百濟王安宗(구다라노고니키시 안소 우), 藤原朝臣潔雄, 大中臣朝臣眞主, 淡海朝臣豊庭, 丹 眞人善雄, 石川朝臣貞成, 佐伯宿 84) 屋代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下 藤原朝臣常永, 伴宿 諸野, 橘朝臣眞直, 高階眞人岑緖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外從五位下 秦忌寸福代, 井朝臣嶋公, 无位 在原朝臣業平, 正六位上 良岑朝臣淸風, 藤 原朝臣吉備雄, 藤原朝臣長基, 藤原朝臣虎主, 田口朝臣岑永, 紀朝臣全法, 笠朝臣岑雄, 藤 原朝臣直道, 橘朝臣數岑, 橘朝臣岑緖, 丹 眞人弟梶, 賀茂朝臣弟岑, 文室朝臣墾田, 大 春日朝臣眞野, 縣犬養宿 氏河, 當麻眞人鴨繼, 御春朝臣眞濱에게 從五位下를 수여하 였다. 正六位上 蕃良朝臣豊持, 高岳宿 宗雄, 上毛野朝臣繩主, 百濟宿 康保(구다라노스 쿠네 코우호), 太秦公是雄에게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연회가 끝나고 祿을 하사하였 는데 각각 차등이 있었다.85) 嘉祥 3년(850) 정월 7일 3년 정월 丙戌<*7일> 紫宸殿에 행차하지 않았다. 을 내려 左右大臣이 일을 맡아 행하 도록 하고 女樂은 연주하지 않았다. 詔를 내려, 四品 忠良親王(타다라 신노우)에게 三品 을, 正四位下 源朝臣融(하라노아손 유우)에게 從三位를, 從四位下 藤原朝臣良相에게 從 권99 敍位 4 嘉祥 2년(849) 정월 7일 嘉祥 2년 정월 壬戌<*7일> 天皇이 紫宸殿에 납시어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詔를 내 四位上을, 從五位下 美志眞王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上 野王, 嗣岑王에게 從五位下 를, 正五位下 滋野朝臣貞雄, 藤原朝臣氏宗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藤原朝 臣貞守(후지와라노아손 사다모리), 橘朝臣眞直(다치바나노아손 마나오)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藤原朝臣 藤(후지와라노아손 나미후지), 文室朝臣眞室, 橘朝臣海雄(다치바나 노아손 우미오), 良岑朝臣宗貞(요시미네노아손 무네사다)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本後紀 承和 14年(847) 12月 乙巳(14日)條를 보면 후에 齋院長官에 오른 것을 알 수 있다( 從五 位下紀朝臣全吉爲主殿頭 從五位上百濟王慶世爲齋院長官 ). 83) 百濟河成 : 百濟河成은 延曆 元年(782)에 출생하여 仁壽 3年(853) 8月 24日에 사망한 平安時代 初期의 畵家이다. 본래의 姓은 余이고, 百濟人의 子孫이다. 個人의 이름이 남아있는 최초의 화가 이자 名人으로서의 전설은 많지만 作品은 남아있지 않다. 84) 승화 14년 정월 甲辰. 7일조의 기사 : 續日本後紀 承和 14年(847) 正月 甲辰(7日)條와 동일기 사이다. 外從五位下 山代宿 氏益(야마시로노스쿠네 우지마스), 伴宿 宗, 春日臣雄繼(카스가노 오미 오츠구), 讚岐朝臣高作(사누키노아손 다카사쿠), 正六位上 源朝臣穎, 橘朝臣信蔭(다 85) 嘉祥 2년 정월 壬戌. 7일조의 기사 : 續日本後紀 嘉祥 2年(849) 正月 壬戌(7日)條와 동일기사 이다.

217 432 類聚國史 433 치바나노아손 노부카게), 橘朝臣三夏(다치바나노아손 미나츠), 藤原朝臣北雄(후지와라노 와라노아손 치카누시), 紀朝臣道茂(기노아손 미치시게), 百濟王安宗(구다라노고니키시 아손 기타오), 橘朝臣末茂(다치바나노아손 스에시게), 橘朝臣門雄(다치바나노아손 가도 안소우),86) 橘朝臣常蔭(다치바나노아손 츠네카게), 在原朝臣善淵, 安倍朝臣貞行(아베노아 오), 百濟王敎福(구다라노고니키시 쿄우후쿠), 春原朝臣末繼(하루하라노아손 스에츠구), 손 사다유키) 등에게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紀朝臣貞守,(기노아손 사다모리) 丹 眞人棟臣, 田口朝臣統範, 南淵朝臣彌繼, 文室朝臣 雄道(훈야노아손 오미치), 藤原朝臣穎基, 伴宿 主雄(도모노스쿠네 누시오), 桑田眞人虎 吉(쿠와다노마히토 도라기치), 粟田朝臣 雄, 山口朝臣春方(야마구치노아손 하루가타)에 게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권99 敍位 4 天安 2년(858) 정월 10일 2년 정월 庚子<*10일> 天皇이 南殿에 납시어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无位 忠貞王 에게 從四位下를 수여하였다. 无位 住世王에게 從五位下를, 從四位下 春澄朝臣善繩에게 仁壽 3년(853) 정월 7일 3년 정월 戊戌<*7일> 豊樂院에 납시어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었다. 從四位上 伴宿 善 從四位上를, 正五位下 源朝臣興, 南淵朝臣年名(미나미부치노아손 도시나)에게 모두 從四 男(도모노스쿠네 요시오)에게 正四位下를, 從四位下 道野王(미치노 오우), 藤原朝臣氏宗 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上 藤原朝臣氏雄(후지와라노아손 우지오), 橘朝臣淸蔭(다치바 (후지와라노아손 우지무네) 등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无位 當世王에게 從四位下 나노아손 키요카게)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百濟王淳仁(구다라노고니키시 쥰닌), 橘 를, 從五位上 豊前王에게 正五位下를, 從五位下 善永王, 益善王 등에게 從五位上을 수여 朝臣貞雄(다치바나노아손 사다오), 藤原朝臣有貞(후지와라노아손 아리사다), 大和眞人吉 하였다. 正六位上 正岑王(마사미네 오우), 仲井王(나카이 오우), 眞貞王(마사다 오우) 등 直, 藤原朝臣基經(후지와라노아손 모토츠네) 등에게 모두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87) 에게 從五位下를, 從四位下 藤原朝臣輔嗣, 諸成 등에게 從四位上을 수여하였다. 從五位 上 田口朝臣房富(타구치노아손 후사토미), 笠朝臣年嗣(가사노아손 도시츠구), 丹 眞人 門成, 藤原朝臣貞本(후지와라노아손 사다모토), 在原朝臣行平(아리하라노아손 유키히 라), 藤原朝臣仲統 등에게 正五位下를 수여하였다. 從五位下 藤原朝臣本雄(후지와라노아 손 모토오), 百濟王永善(구다라노고니키시 에이젠), 淸原眞人秋雄(키요하라노마히토 아 키오), 廣宗宿 繼(히로무네노스쿠네 이토츠구), 文室朝臣笠科(훈야노아손 가사시나), 藤原朝臣良方(후지와라노아손 미요시가타), 山田宿 古嗣(야마다노스쿠네 후루츠구), 橘 朝臣永範, 南淵朝臣年名, 紀朝臣今守, 坂上大宿 貞守, 源朝臣 등에게 從五位上을 수 여하였다. 齊衡 3년(856) 정월 7일 3년 정월 辛亥<*7일> 帝(천황)가 南殿에 납시어 靑馬를 보셨다. 群臣에게 연회를 베풀 었는데 보통 때의 의식(常儀)과 같았다. 從四位下 基兄王에게 從四位上을, 无位 棟貞王에 게 從四位下를, 從五位下 利見王에게 從五位上을, 正六位下 末良王, 淸田王(키요다 오우) 등에게 從五位下를, 正四位下 源朝臣寬(하라노아손 히로시)에게 正四位上을, 從四位下 淸原眞人長田(키요하라노마히토 나가타)에게 從四位上을, 從五位下 藤原朝臣近主(후지 권101 敍位 6 元慶 3년(879) 정월 7일 元慶 3년 정월 七日 丁酉 (전략) 從五位下 守大判事 平朝臣住世(타이라노아손 스미요), 散位 大野朝臣鷹取(오오노노아손 다카토리), 安藝權守 藤原朝臣岑人(후지와라노아손 미 네히토), 和泉守88) 百濟王俊聰(구다라노고니키시 슈소우), 信濃介 橘朝臣茂蔭(다치바나노 아손 시게카게), 備後守 藤原朝臣諸房(후지와라노아손 모로후사), 雅樂頭 源朝臣精, 少納 言兼侍從 藤原朝臣淸生, 木工頭 藤原朝臣維邦, 式部少輔兼文章博士 菅原朝臣道 (스가 86) 百濟王安宗 : 續日本後紀 承和 14年(847) 正月 甲辰(7日)條에도 그 이름이 보인다. 文德實錄 仁壽 3年(853) 正月 丁未(16日)條에서는 安芸介가 되었다는 내용이 있으며, 文德實錄 齊衡 3年 (858) 正月 辛亥(7日)條에는 본문 기사와 동일한 내용이 확인된다. 858년 정월 16일에는 從五位 上 安芸守에 올랐다는 내용이 있으며, 같은 해 4월 11일에 사망한 것으로 되어 있다. 87) 천안 2년 정월 10일조의 관위 수여 기사 : 文德實錄 天安 2年(858) 正月 庚子(7日)條와 동일. 88) 和泉守 : 和泉 지역의 장관이다. 和泉는 일본 令制國 가운데 하나로 현재의 大阪府 南西部에 해당 하며, 일반적으로는 泉州 또는 泉州地域이라고도 부른다.

218 434 類聚國史 하라노아손 미치가즈), 筑後守 紀朝臣令影 등에게 모두 從五位上을 수여하였다. 435 를 뽑는다. 百濟 高麗 新羅樂 등의 樂生은 모두 蕃에 해당하면서 배움을 감당할 수 있는 자를 뽑는다. 다만 度羅樂 諸縣 筑紫 生은 모두 樂戶에서 뽑는다.91) 元慶 3년(879) 11월 25일 11월 25일 庚辰. (중략) 外從五位下 行遠江介 櫻井田部連豊直(사쿠라이타베노무라지 도 요나오), 勘解由次官兼行산博士 但馬介 阿保朝臣今雄(아호노아손 이마오), 木工權助 惟 良宿 安宗(고레요시노스쿠네 야스무네), 參河權介 佐伯直是繼(사에키노아타이 고레츠 구), 中宮大進 菅野朝臣直臣(스가하라노아손 나오오미), 散位 正六位上 常人王, 源朝臣 권147 律令格式 養老 6년(722) 2월 27일 養老 6년 2월 戊戌<*27일> 正六位上 矢集宿 麻呂에게 田 5町을 하사하였다. 從六 蔭, 大藏大 藤原朝臣高尙, 左近衛將監 在原朝臣載春, 右馬大允89) 百濟王敎隆(구다라노 位下 陽胡史眞身(야코노후비토 마미)에게 4町을, 從七位上 大倭忌寸小東人(야마토노이 고니키시 쿄우류우) 등에게 모두 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미키 고아즈마히토)에게는 4町을, 從七位下 屋連古麻呂(시오야노무라지 고마로)에게 는 5町을, 正八位下 百濟人成(구다라노히토나리)에게는 4町을 하사하였다. 모두 律令을 권107 內藏寮 選定하는데 공이 있었기 때문이다.92) 大同 원년(806) 10월 12일 平城天皇 大同 원년 10월 辛未<*12일> 典履 2인, 百濟手部 10인, 典革 1인, 百濟戶(구다라베), 部 6인, 戶(고마베)가 內藏寮90)에 예속하는 것을 허가하였다. 권107 雅樂寮 天平 3년(731) 7월 29일 聖武皇帝 天平 3년 7월 乙亥<*29일> 雅樂寮의 雜樂生의 정원을 정하였다. 大唐樂(토우 권165 祥瑞 上 天平神護 3년(767) 8월 8일 陰陽員外助 從五位下 紀朝臣益 (기노아손 마스마로에게 正五位下를 제수하였다. 允 正六位上 山上朝臣船主(야마노가미노아손 후나누시)에게 從五位下를 제수하였다. <*지 금 살펴보건대, 景雲 2년에 처음 朝臣을 하사하였다. 이것은 位記에 의거하여 쓴 것이 다.> 員外允 正六位上 日下部連蟲 (쿠사카베노무라지 무시마로). 大屬 百濟公秋 呂(구 가쿠)은 39인, 百濟樂(구다라가쿠)은 26인, 高麗樂(고마가쿠)은 8인, 新羅樂(시라기가쿠) 다라노키미 아키마로),93) 天文博士 國見連今 (쿠니미노무라지 이마무시). 은 4인, 度羅樂(토라가쿠)은 62인, 諸縣 (모로모로노아가타마이)는 8인, 筑紫 (츠쿠시 望足에게 모두 外從五位下를 수여하였다. 마이)는 20인으로 하였다. 大唐樂의 樂生은 夏蕃을 불문하고 敎習을 감당할 수 있는 자 禁師 末使主 白雉 원년(650) 2월 15일 甲申<*15일> 朝廷의 隊仗94)이 元會의 儀와 같았다. 左右大臣 <*[巨勢德陀古] [大伴長 89) 右馬大允 : 馬寮라는 율령제 官司의 하나에 속해 있는 직장이다. 馬寮에는 正七位下에 상당하는 大允을 左右 각 1명씩 두었다. 90) 內藏寮 : 율령제에서 中務省에 속한 기관이다. 內藏寮의 起源은 律令制 이전의 三藏 大藏 內 藏 齋藏 가운데 하나인 內藏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內藏은 履中天皇 時代까지 소급된다고 말하여 지며, 天皇家의 財 를 관리하는 창고로 율령제 시행 후에도 中務省의 기관으로 존속되었다. 內藏 寮의 職員을 보면, 가죽제품 제조를 감독하는 典履(正八位上)가 있고, 그 아래에 가죽제품을 제조 하는 伴部로 百濟手部, 가죽제품을 제조하는 品部로 百濟戶가 있다. 또한 가죽의 염색을 감독하는 典革(正八位上)이 있고, 그 아래에 가죽염색의 伴部인 部와 가죽염색의 品部인 戶가 있다. 91) 고대 일본의 아악료 : 주 18)의 설명을 참조. 92) 功田 : 日本 律令制에서 특별한 훈공이 있는 자에게 급여된 田地를 말한다. 百濟人成은 養老律令 撰修의 功績으로 功田 4町을 받았다. 이 때 大倭長岡 陽胡眞身이 각 4町, 矢集 麻呂 屋吉麻 呂가 각 5町을 받았다. 93) 百濟公秋麻呂 : 奈良時代에 율령에서 정하는 本來業務를 수행한 陰陽師로, 백제 망명왕족의 자손 이다. 767년에 陰陽大屬, 769년에 陰陽允을 지냈다고 되어 있다.

219 436 類聚國史 437 德]>百官人들은 紫門 밖에서 4개의 열을 이루었다. 粟田臣飯 (아와다노오미 이이무시) 나타나고 있다. 한편으로는 두렵고 한편으로는 기쁘다. 그래서 親王 諸王 및 群卿百寮와 등 4인은 雉輿를 잡고 앞에서 나아가게 하였다. 左右大臣은 이에 百官 및 百濟君(구다라 천하의 만백성(黎民)은 서로 기뻐하고 있다. 이에 小建 이상에게 각각 차등 있게 祿을 지 95) 노키미) 豊璋(호우쇼우), 그 아우 塞城과 忠勝, 96) 97) 高麗 侍醫 (미모토쿠스시) 毛治 (모우 98) 지), 新羅 侍學士 (지가쿠지) 등을 이끌고 中庭에 이르렀다. 天武天皇 12년(684) 춘정월 18일 丙午<*18일> 詔를 내려 말하기를, 明神御大八洲日本根子天皇99)의 勅命은 여러 國司 國 造 郡司 및 百姓이 모두 들어야 한다. 朕이 처음 등극한 이래로 하늘의 상서로운 조짐(天 瑞)은 한 두 개가 아니라 많이 이르렀다. 전하여 듣건대 그 天瑞란 行政의 도리가 天道에 급한다. 因하여 大 이하는 모두 사면한다. 또한 百姓의 課役도 또한 면제한다, 고 하 였다. 이날 小墾田 및 高麗 百濟 新羅 삼국의 음악을 庭中에서 연주하였다.100) 권173 火 皇極天皇 2년(643) 3월 13일 皇極天皇 2년 3월 辛亥朔 癸亥<*13일> 難波101)의 百濟客 堂과 民家의 집에 불이 났다. 화합할 때 이에 부응하여 나타나는 것이라고 한다. 지금 짐의 치세에 임하여 매년 거듭 권180 諸寺 94) 朝廷의 隊仗 : 궁중 호위대를 말한다. 후대 令의 규정(宮衛令)에는 衛士의 陣을 隊 라고 하며, 內 舍人과 兵衛의 陣을 仗 이라고 한다고 규정되어 있다. 95) 百濟君 豊璋 일족 : 百濟君 豊璋은 扶余豊璋을 가리킨다. 출생 사망연도는 미상이며, 百濟 마지 막 왕인 의자왕(재위: 641~660)의 왕자이다. 여기에 대해서는 백제 무왕의 아들이라는 설도 있 다. 扶余豊璋은 日本書紀 에서의 표기이고, 三國史記 에서는 余豊璋, 唐書 에서는 余豊이 다. 倭國 체재 중 백제 본국이 唐과 新羅에 멸망당하였기 때문에 백제를 부흥하기 위해 귀국하였 다. 豊璋의 도래시기는 日本書紀 에 의하면 舒明天皇 3年(631) 3月이지만, 三國史記 百濟本紀 에서는 義慈王 13年(653) 倭國과 통호하는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에 이 무렵이 아닐까 하는 설이 있다. 日本書紀 에서는 이미 孝德天皇 650年 2月 15日 조영 중인 難波宮에서 白雉改元이 契機 가 된 白雉獻上 儀式에 豊璋이 출석하고 있다. 豊璋은 日本과 百濟의 동맹을 담보하는 人質이었 지만 日本측은 太安万侶(오오야스마로)의 일족 多蔣敷의 여동생을 豊璋에게 시집보내는 등 대우 는 賓客 취급으로 결코 나쁘지 않았던 것으로 보인다. 豊璋의 남동생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에 의하면 善光( 續日本紀 에서는 禪廣)이라고 하고 日本에서 渡來人으로서 체재하였다. 이 자손이 持統天皇 때부터 百濟王의 칭호를 받아 百濟의 王統을 이어나갔다고 한다. 96) 高麗 侍醫 : 고구려인 출신으로 구성된 궁정의 侍醫 집단을 말한다. 97) 毛治 : 여기에만 보여 자세한 것은 알 수 없다. 98) 新羅 侍學士 : 신라인 출신으로 구성된 궁정의 가정교사와 같은 역할을 맡은 사람들을 말한다. 99) 明神御大八洲日本根子天皇 : 明神御宇日本天皇의 다른 표기로 보인다. 일본이라는 국호가 성립 된 시기는 7세기 후반에서 8세기 초 무렵이라고 생각된다. 天武天皇 치세에 성립되었다는 설과 701年(大 元年)의 大 律令 成立 전후로 성립되었다는 설이 유력시되고 있다. 日本書紀 大化 元年 7月條에 高句麗 百濟에서 온 使者에의 詔에 明神御宇日本天皇 이라고 되어 있지만, 이것 은 후에 정해진 大 律令 公式令을 토대로 하여 日本書紀 편자가 윤색(潤色)을 가하였던 것으 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舒明天皇 11년(639) 7월 舒明天皇 11년 추7월. 詔에 말하기를, 올해 大宮102) 및 大寺103)를 조영할 것이라고 하였 다. 즉 百濟川(구다라가와) 옆을 宮이 들어설 장소로 하였으며 이리하여 서쪽의 백성(西 民)은 궁을 만들고 동쪽의 백성(東民)은 절을 만들었다. 또한 書直縣을 大匠104)으로 삼았 다.105) 권182 施入物 延曆 17년(798) 정월 11일 17년 정월 壬辰<*11일> 河內國의 稻 2천속(束106))을 百濟寺에 시주하여 넣었다. 100) 고대 일본의 음악 : 주 18)을 참조. 101) 難波 : 난파(나니와)는 지금의 오사카이다. 102) 大宮 : 百濟宮을 말한다. 103) 大寺 : 百濟大寺를 말한다. 104) 大匠 : 건축 토목 기술자의 우두머리로 중국에서는 이러한 직책을 將作大匠이라 하였다. 105) 書直縣의 大匠 임명 기사 : 日本書紀 舒明天皇 11년 가을 7월조에 같은 내용이 보인다. 106) 束 : 1속은 율령제 시행 이전의 단계에서는 1代(5步)에서 수확되는 수확량을 가리켰으나 율령제 로 이행한 단계에서는 1속은 10把(약 10斤)였다.

220 438 권185 高僧 推古天皇 3년(595) 5월 10일 推古天皇 3년 5월 丁卯. 高麗僧 慧慈가 귀화(歸化)하였다. 皇太子의 스승으로 삼았다. 이해에 百濟僧 慧聰107)이 왔다. 이 두 스님은 불교에 두루 통하였다. 모두 三寶의 동량(棟 梁)으로 삼았다. 新撰姓氏錄 권185 僧封 天武天皇 14년(686) 10월 4일 天武天皇 14년 冬10월 癸酉朔 丙子<*4일> 百濟僧 常耀에게 30戶를 봉하여 주었다. 이 스님은 나이가 백세였다. 이재석(동북아역사재단) 107) 慧聰 : 나라시대에 백제에서 도래한 승려이다. 출생 사망연대 미상. 595年(推古天皇 3)에 일본 에서 불교를 널리 보급하고, 이듬해 596年(推古天皇 4)에 法興寺(蘇我善德가 寺司, 現在 飛鳥寺 安居院)가 완성되자 高句麗에서 도래한 惠慈와 거주하면서 함께 三 의 棟梁이라 칭해졌다. 三 國 法 緣起 에 의하면, 三論宗(南都六宗 가운데 하나)의 學僧이자 聖德太子의 法 스승이었 다고 한다.

221 新撰姓氏錄 441 新 撰 姓 氏 錄 平安京과 5畿內에 거주하던 고대 씨족의 계보를 모아놓은 책. 姓氏錄 이라고도 한다. 萬多親 王, 藤原園人 등이 弘仁 6년(815) 7월에 편찬하였다. 30권과 목록 1권으로 구성되었다. 그러나 完本은 전하지 않고 현존하는 것은 抄錄本 뿐이다. 이 책 이전에도 天平寶字 5년(761)에 淳仁천 황이 氏族志 를 편찬하도록 명하였으나 도중에 藤原仲麻呂의 난이 일어나 완성되지 못하였다. 桓武天皇도 延曆 18년(799) 12월 환무천황이 제 씨족에게 本系帳을 제출하도록 명하였으나 완 성되지 못하였다. 嵯峨천황이 즉위한 弘仁 원년(810) 9월 이후 다시 추진되어 弘仁 6년(815)에 완성된 것이다. 平安京과 山城 大和 攝津 河內 和泉의 순서로 1182씨를 皇別 神別 諸蕃 의 三體 로 구별하여 제1권부터 제10권까지에 황별 335씨, 제11권부터 제20권까지에 神別 405씨, 제21권부터 제 29권까지에 諸蕃 326씨, 그리고 제30권에 未定 雜姓 117씨를 배치하여 각 씨족들의 계보를 적었다. 현존하는 抄錄本은 크게 建武 2년본(1335)과 延文 5년본(1360)의 두 계통이 있는데 제21권 이하는 두 책이 많은 차이가 있다. 여기에서는 佐伯有淸이 여러 抄錄 本들을 참고하여 만든`校訂新撰姓氏錄a (佐伯有淸, 1962, 新撰姓氏錄の硏究 本文篇, 吉川弘 文館)을 底本으로 하였다. 左京皇別 大原眞人(오오하라노마히토) (쇼쿠니혼기)의 諡號 敏達(비타츠)의 손자 百濟王(쿠다라오우)1)에서 나왔다. 續日本紀 내용과 부합된다.2) 1) 敏達의 손자 百濟王 : 新撰姓氏錄 未定 雜姓 左京조의 池上 人도 敏達천황의 손자 百濟王의 후 손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고사기 일본서기 에는 민달천황의 손자 이름 중에 百濟王이 보이지 않는다. 佐伯有淸은 古事記 민달천황단에 보이는 多良王(쿠다라노오우)의 多 자 앞에 久가 있었 던 것이 轉寫하는 과정에 탈락하였을 가능성을 말하였다(佐伯有淸, 1981, 新撰姓氏錄の硏究 考 證篇 第1, 吉川弘文館, 204쪽). 민달천황의 아들이라면 百濟王은 舒明천황의 동생이 된다. 舒明천 황은 百濟川邊에 百濟宮을 짓고 살았으므로 百濟大王으로 불리웠을 가능성이 있으며, 그의 동생도 백제왕으로 불리웠을 가능성이 있다. 2) 續日本紀 부합된다 : 續日本紀 天平 11년(739) 4월 갑자조에 종4위상 高安王 등의 청을 받아들여 大原眞人 성을 하사하였다고 한다. 百濟王이 大原眞人이라는 씨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기 사는 없지만, 佐伯有淸은 이 때에 百濟王도 함께 大原眞人성을 사성받았을 것이라고 보았다(佐伯 有淸, 1981, 앞의 책, 201쪽).

222 442 新撰姓氏錄 443 셔서 태어났다. 延曆 21년(802) 12월 27일 특별히 良岑朝臣을 사성받아 右京에 살았다.9) 島根眞人(시마네노마히토) 大原眞人과 같은 조상이다. 百濟親王(쿠다라신노우)3)의 후손이다. 淸原眞人(키요하라노마히토) 4) 桑田眞人(쿠와다노마히토) 과 같은 조상이다. 百濟親王의 후손이다. 止美連(토미노무라지)10) 尋來津公(히로키츠노키미)11)과 같은 조상이다. 豊城入彦命(토요키이리히코노미코토)12) 의 후손이다. 4세손 荒田別命(아라타와케노미코토)13)의 아들 田道公(타지노키미)14)이 백 左京皇別 上 良岑朝臣(요시미네노아손)5) 종4위하 良岑朝臣安世(요시미네노아손야스요)6)는 皇統 河內國 皇別 照天皇(시호 桓武) 치세에 종 7위하 百濟宿 之繼(쿠다라노스쿠네나가츠구)7)가 女 (메노와라하)8)가 되어 [천황을] 모 3) 百濟親王 : 주 2)의 百濟王과 동일인물. 4) 桑田眞人 : 新撰姓氏錄 左京 皇別 桑田眞人조에서 桑田眞人은 大原眞人과 같은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5) 良岑朝臣 : 桓武天皇의 후예씨족. 良峯朝臣으로도 표기한다. 桓武天皇의 아들 安世가 씨성을 사여 받고 우경에 編籍된 것에서 시작되었다. 良岑이라는 씨명은 山城國 乙訓郡 良峯(현재 京都市 西京 區 大原野 小鹽町의 善峯寺 善峯川 일대)과 관련이 있다. 良岑朝臣씨로는 良岑朝臣安世의 아들로 宗貞(僧正 遍昭) 晨直 木連 淸風 長松 등이 보이고, 遍昭의 아들 由性과 素性(이상 法師), 晨 直의 아들 衆樹(參議)과 衆樹의 아들 義方(左近衛中將) 등이 활약하였다(坂本太郞 平野邦雄, 1990, 日本古代氏族人名辭典, 吉川弘文館, 683쪽). 6) 良岑朝臣安世 : 785~830. 桓武天皇의 황자. 어머니는 百濟宿 永繼. 藤原朝臣冬嗣의 同母弟. 延 曆 21년(802) 12월에 良岑朝臣을 사성받고 右京에 살게 되었다. 大同 2년(807) 11월 右衛士大尉로 임명되었고 大同 4년(809) 6월 정6위상에서 종5위하로 승진하였다. 左近衛少將, 雅樂頭 등으로 임명되었고 大同 5년(810) 9월 左少弁이 되었고 左近衛少將, 丹波介를 겸임하였다. 弘仁 2년(811) 2월 藏人頭로 임명되었고 弘仁 3년(812) 12월 左衛門佐를 겸임하였다. 弘仁 5년(814) 1월 종4위하 로 승진하고 같은해 8월에는 左衛門督 5로 임명되었다. 弘仁 6년(815) 左京으로 거주지를 옮기고 左京大夫가 되었다. 그 다음해 1월 右大弁이 되고 같은 해 10월 參議로 임명되었다. 弘仁 11년 (820) 1월 左大弁으로 임명되고 그 다음해 1월에 中納言이 되어 陸奧出羽按察使, 春宮大夫를 겸임 하였다. 弘仁 14년(823) 右近衛大將이 되고 정3위로 승진하였다. 天長 5년(828) 2월 大納言으로 임명되었으나 天長 7년(830) 7월 46세로 사망하여 종2위를 추증받았다. 그가 사망하자 嵯峨上皇 이 挽歌 2편을 지었다. 安世는 文武에 뛰어나 日本後紀 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內裏式 經國 集 의 찬정을 담당하였다. 安世가 지은 漢詩가 凌雲集 文華秀麗集 經國集 에 보인다(坂本 太郞 平野邦雄, 1990, 앞의 책, 684쪽). 7) 百濟宿 之繼 : 公卿補任 과 本朝皇胤紹運錄 에는 百濟宿 永繼로 표기되었다. 公卿補任 에 의 하면 永繼의 아버지는 정5위상 飛鳥戶奈止丸(飛鳥部奈止麻呂)이다. 飛鳥部奈止麻呂는 續日本紀 天平神護 원년(765) 춘정월 기해조에서 정6위상을 받은 百濟安宿公奈, 登麻呂와 동일인이다. 飛鳥 部(飛鳥戶)가 百濟宿 로 개성한 것은 日本後紀 弘仁 3년(812) 춘정월 신미조에서 飛鳥部戶造 등이 百濟宿 라는 氏姓을 받은 이후다. 百濟宿 永繼는 藤原朝臣內麻呂와 결혼하여 寶龜 5년 (774) 藤原朝臣眞夏를 낳고 寶龜 6년(775)에 藤原朝臣冬嗣를 낳았다. 그 후 女孺가 되어 桓武天皇 을 모시다가 良岑朝臣安世를 낳았다(林陸朗, 1994,`桓武朝後宮の構成とその特徵a, 桓武朝論, 雄山閣, 83쪽). 8) 女 : 女孺 女 로도 표기한다. 後宮에서 근무하는 下級女官. 養老令 後宮職員令에 의하면 畿內 씨 족이 後宮 宮人으로 바친 13살 이상 30살 이하의 여자들을 女孺라고 하였다. 女孺는 後宮의 內侍司 에 100명, 藏司에 10명, 書司에 4명, 藥司에 4명, 兵司에 6명, 司에 10명, 殿司에 5명, 掃司에 10명 배속되어 잡일을 하였다. 女孺는 後宮 이외에 東宮이나 嬪 이상의 키사키의 宮에도 배속되었다. 9) 延曆 21년 살았다 : 현존하는 日本後紀 에는 延曆 19년부터 延曆 22년까지의 부분이 缺落되 었다. 公卿補任 弘仁 7년(816)조의 良峯安世의 補書에 延曆 년 특별히 良峯朝臣을 사성하고 右京에 편적하였다고 적혀있다. 10) 止美連 : 佐伯有淸은 止美라는 씨명은 日本書紀 神功攝政 49년 춘3월조와 應神 8년 3월조에 인용된 百濟記에 보이는 백제의 沈(枕)彌多禮(토무타레)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 沈 (枕)彌多禮는 三國史記 地理志 武州條의 道武郡 冬音縣(현재 전남 강진군 강진읍)으로 추정하였 다(佐伯有淸, 1982, 新撰姓氏錄の硏究 考證篇 第2, 吉川弘文館, 461~462쪽). 11) 尋來津公 : 廣來津公이라고도 적는다. 日本書紀 雄略 7년 시세조에 倭國吾礪廣津<廣津, 此云比 慮岐頭>邑 이 보인다. 廣津은 河內國 涉川郡 跡部鄕(현재 大阪府 八尾市 植松町 부근)의 難波津 남 부의 옛 명칭이다. 尋來津公씨 일족으로는 續日本紀 와 類聚國史 에 尋來津公關麻呂가 보인다. 12) 豊城入彦命 : 崇神천황이 木國(紀伊國)의 國造 荒河刀弁(荒河戶畔)의 딸 遠津年魚目目微比賣(遠津 年魚眼眼妙媛)와의 사이에서 낳은 아들. 日本書紀 崇神 48년 4월 병진조에 의하면 숭신천황에 게 동국을 다스리라는 명령을 받아 上毛野君 下毛野君의 시조가 되었다고 한다. 古事記 에서도 上毛野君 下毛野君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13) 荒田別命 : 日本書紀 神功攝政 49년 3월조에 荒田別과 鹿我別을 장군으로 삼아 久 등에게 주어 함께 군대를 일으켜 건너가 탁순국에 이르러 신라를 치도록 하였다는 기사가 보인다. 그 후 應神 15년 8월 정묘조에서는 이 때에 상모야군의 조상 荒田別과 巫別을 백제에 파견하여 王仁을 불러

223 444 제국에 파견되어15) 止美邑(토미노무라)의 吳女(쿠레노오미나)16)와 결혼하여 아들 持君(모 치노키미)17)을 낳았다. 3세손 熊(쿠마), 新羅(시라기) 등은 欽明天皇(킨메이텐노우) 때에 新撰姓氏錄 445 百濟朝臣(쿠다라노아손)24) 백제국 都慕王 30세손 惠王(쿠예이와우)25)에서 나왔다. 參來하였다. 新羅의 아들 吉雄(요시오)는 거처하는 곳에 따라 止美連(토미노무라지)를 사 성받았다.18) 日本紀에는 보이지 않는다.19) 左京諸蕃 下 百濟20) 和朝臣(야마토노아손)21) 百濟國(쿠다라노쿠니) 都慕王(츠보오우)22) 18세손 武寧王(무네이와우)23)에서 나왔다. 들였다. 고 하였다.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의 百濟王仁貞 등의 상표에도 應神천황 대의 上毛野臣의 먼 조상 荒田別 등에게 명하여 백제에 가서 유식자를 초빙하도록 하였는데 국주 귀수왕이 이 뜻을 받들어 宗族 중에서 귀수왕의 손자 진손왕을 파견하였다고 하였다. 14) 田道公 : 日本書紀 仁德 53년 5월조에 上毛野君의 조상 竹葉瀨를 파견하여 신라가 조공을 바치 지 않은 것을 문책하도록 하였는데, 가던 도중에 흰 사슴을 잡아 천황에게 바쳤으므로 사신으로 가는 것을 중지하였다. 그후 다시 竹葉瀨의 동생 田道를 신라에 파견하였는데 신라가 항전하였으 므로 싸우고 4읍의 인민을 포로로 잡아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仁德 55년에는 반란을 일으킨 蝦 夷를 진압하다가 죽었으나, 죽은 후 그의 무덤에서 큰 뱀이 나와 하이가 그 독으로 죽은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15) 4세손 파견되어 : 주 14)를 통해 알 수 있듯이 荒田別은 백제에 파견되었다. 그러나 田道가 백제에 파견되었다는 기록은 이 밖에는 없다. 16) 吳女 : 佐伯有淸은 吳女는 韓女를 가리킨다고 보았다(佐伯有淸, 1982, 앞의 책, 463쪽). 17) 持君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8) 3세손 사성받았다 : 古事記 日本書紀 에는 보이지 않는다. 19) 日本紀에는 보이지 않는다 : 佐伯有淸은 이를 吉雄이 止美連을 사성받은 일이 日本書紀 에 보이 지 않는다는 뜻으로 파악하였으나(佐伯有淸, 1982, 앞의 책, 464쪽), 止美連조에서 말하고 있는 내용 모두가 日本書紀 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20) 이 역주 작업에서는 佐伯有淸의 新撰姓氏錄の硏究 考證篇 第5(1983, 吉川弘文館)와 同 考證篇 第6(1983, 吉川弘文館)을 많이 참고하였다. 앞으로 앞의 책은 佐伯有淸, 1983, 뒤의 책은 佐伯有 淸, 1983(b)로 표기하기로 하겠다. 21) 和朝臣 : 和朝臣의 옛 성은 史로, 延曆 2년(783) 4월에 和史國守 등 35명이 朝臣 성을 받았다. 和 史國守는 桓武天皇의 어머니 和新笠과 남매간일 것으로 추측된다. 續日本紀 延曆 9년(790) 정 월 임자조에서 高野新笠 황태후의 姓이 和氏였다고 하면서 그녀가 百濟武寧王의 아들 純 태자에 서 나왔다고 하였다. 그러나 이는 和氣淸麻呂가 편찬한 和氏譜 등에서 주장한 것으로 사실이 아 니다(加藤謙吉, 1995,`史姓の成立とフミヒト制a, 日本古代の社會と政治, 吉川弘文館, 10쪽). 純 태자에 대해서는 日本書紀 繼體 7년(513) 추8월조에서 백제태자 淳陀가 죽었다고 적고 있 다. 日本書紀 武烈 7년(505) 하4월에 무령왕이 斯我君을 일본조정에 보냈는데, 그의 자식이 法 師君으로 그가 倭君(야마토노키미)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倭君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 데, 위의 續日本紀 延曆 9년(790) 정월 임자조에서 和씨가 백제 무령왕의 아들 純 태자에서 나왔다고 하는 계보는 일본서기 의 무열 7년조의 倭君기사와 繼體 7년조의 백제태자 淳陀의 기 사를 참고하여 만들어낸 것일 가능성이 크다. 22) 都慕王 : 佐伯有淸은 이를 토보오우로 읽었으나, 都는 츠로 읽어야 한다. 예를 들어 日本書紀 應神 20년 추9월조에 나오는 都加使主는 츠카노오미로 읽히고 있다(1967, 日本古典文學大系 日 本書紀 上, 岩波書店, 374쪽). 都慕王에 대해 일본 측 사료에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은 續日本紀 延曆 9년(790) 정월 임자조로 여기에서 백제의 먼 조상을 都慕王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續日本 紀 延曆 9년(790) 추7월 신사조의 百濟王仁貞 등의 상표문에서는`百濟大祖都慕大王者 日神降 靈奄扶餘而開國 天帝授 憁諸韓而稱王a이라고 하여, 백제의 큰 조상 都慕大王이 부여를 건국 하고, 天帝 을 받아 여러 韓을 합치고 왕을 칭하였다고 하였다. 삼국사기 백제본기 始祖溫祚 王조에서는 溫祚王의 아버지를 鄒牟, 또는 朱蒙이라고 하였다. 神崎勝은 642년 백제가 고구려와 관계를 강화하면서 고구려와 같이 東明王(朱蒙)을 백제의 시 조신으로 모시게 되었을 것이라고 하였다(1995,`夫餘 高句麗の建國傳承と百濟王家の始祖傳 承a, 日本古代の傳承と東アジア, 吉川弘文館, 312쪽). 그러나 백제와 고구려가 동맹을 강화하 던 시기는 수가 중국을 통일한 6세기말 경부터이며(김은숙, 2007,`7세기 동아시아의 국제관 계a, 한일관계사연구 26, 50쪽), 隋書 列傳 東夷 百濟조의 백제의 시조에 관한 내용도 백제 가 수에 파견한 사신에 의해 전해진 것으로 생각할 수 있으므로, 東明王(朱蒙 都慕王 鄒牟)를 시조신으로 놓게 된 것은 6세기말 경부터로 볼 수 있다. 23) 武寧王 : 백제 제25대왕(재위 501~523).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諱가 斯摩 또는 隆이며, 牟 大王의 둘째아들로 모대가 재위 23년에 사망하자 즉위하였다고 하였다. 일본서기 에서는 雄略 5년(461) 6월 병술삭조에서 武寧王의 탄생에 관해 적고 있으며, 武烈 4년(502) 시세조에서 武寧 王의 즉위에 대해 적으면서 무령왕을 琨支왕자의 아들이며 末多王의 異母兄이라고 적고 있다. 24) 百濟朝臣 : 百濟朝臣의 원래 氏名은 餘였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天平寶字 2년(758) 6월에 餘益 人 餘東人 등이 百濟朝臣姓을 사성받았다고 한다. 25) 惠王 : 日本書紀 에 의하면 欽明 16년(555) 2월에 백제왕자 餘昌이 왕자 惠를 파견하였다고 한 다. 혜는 다음해 정월에 귀국하는데 이 때에 일본은 무기와 좋은 말을 많이 보냈으며, 阿倍臣 佐

224 446 新撰姓氏錄 百濟公(쿠다라노키미)26) 林連(하야시노무라지)34) 백제국 都慕王 24세손 汶淵王(몬엔와우)27)에서 나왔다. 調連(츠키노무라지)28) 百濟國人 木貴公(모쿠쿠위코우)35)에서 나왔다. 香山連(카야마노무라지)36) 水海連(미즈우미노무라지)29)과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 努理使主(누리노오미)30)의 후손 이다. 譽田천황(호무다노스메라미코토) <*諡號는 應神(오우진)> 치세 때 歸化하였다.31) 努理使主의 손자 阿久太(아쿠타)의 아들로 彌和(미와) 賀夜(카야) 麻利(마리)가 있었 다. 彌和가 弘計天皇(시호 顯宗)32)치세에 누에를 짜서 447 絹 등을 바쳤으므로 調首(츠키노 오비토)를 賜姓하였다.33) 백제국인 達率(다치소치) 荊員常(케이윈쟈우)37)에서 나왔다. 高槻連(타카츠키노무라지)38) 백제국인 達率 名進(에이신)39)에서 나왔다. 廣田連(히로타노무라지)40) 백제국인 辛臣君(신신쿤)41)에서 나왔다. 伯臣 播磨直을 파견하여 筑紫國의 해군을 이끌고 백제까지 호송하였으며, 따로 筑紫의 火君에 게 용사 1000명을 이끌고 백제까지 보내주도록 하였다고 적고 있다. 혜왕은 삼국사기 에 의하 면 明王의 둘째아들로 昌王이 죽은 후 598년부터 599년까지 즉위하였다고 한다. 26) 百濟公 : 百濟公의 옛 성은 餘였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天平寶字 5년(761) 3월에 백제인 餘民善 女 등 4명에게 百濟公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27) 汶淵王 : 那珂通世는 汶淵王을 日本書紀 雄略 21년(477) 3월조에 보이는 汶洲王이었을 것으로 보았다.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文周王을 汶洲王으로 쓰기도 한다고 적고 있으므로 汶洲王은 백제의 제22대 문주왕(재위 475~478)을 가리킨다. 28) 調連 : 調調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絹 등의 調를 관리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調連의 옛 氏 姓은 調首였다. 連姓을 집중적으로 사성하였던 天武 12년(683)경에 調首에서 調連으로 姓이 바뀌 었을 것이다. 調連씨로 調連淡海 調連馬養(이상 續日本紀 ) 調連牛養( 大日本古文書 ) 調連 安宗(平安遺文 ) 등이 보인다. 29) 水海連 : 뒤의 河內國 諸蕃 百濟조에 水海連이 보인다(주 214) 참조). 30) 努理使主 : 古事記 에서는 奴理能美라고 적고 있다. 仁德천황의 황후 石之日賣命이 질투가 심하 여 仁德천황이 八田若郞女와 결혼하자 화를 내고 궁을 떠났는데 그녀는 山代로 가서 筒木(山城國 綴喜郡 綴喜鄕, 현재 京都府韓 綴喜郡 田邊町 普賢寺 부근)의 奴理能美의 집에 가서 누에 치는 것 을 보았다고 한다. 31) 譽田천황 歸化하였다 : 古事記 와 日本書紀 에서는 응신천황대에 吳服, 縫衣工女를 바쳤 다고 하는데, 奴理能美가 바로 이들의 후손일 가능성이 있다. 32) 顯宗 : 顯宗天皇(켄조우텐노우) 450~487. 제23대천황, 재위 485~487년. 33) 努理使主의 손자 바쳤다 : 이는 고사기 나 일본서기 에 보이지 않는다. 34) 林連 : 林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志紀郡 志鄕(현재 大阪府 藤井寺市 道明寺町 林)의 志라는 鄕 名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 林連 일족은 續日本紀 大日本古文書 등에 이름이 보인다. 35) 木貴公 : 木씨는 백제의 大姓八族 중의 하나다. 日本書紀 天智 2년(663)조에 백제가 멸망하였 을 때 일본에 망명한 사람 중에 木素貴子가 보이는데, 그가 木貴公일 가능성이 크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木素貴子는 兵法에 뛰어나 天智 10년(671) 1월에 大山下(令制의 종6위)의 관위를 사여 받았다고 한다. 懷風藻 에서는 天智천황의 아들 大友황태자의 賓客으로 대접받았다고 한다. 36) 香山連 : 香山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十市郡 天香山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라는 설과 美 稱이라는 설이 있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神龜 원년(724) 5월에 荊軌武가 성무천황으로부터 香 山連이라는 씨성을 사여받았다고 한다. 續日本後紀 承和 2년(835) 11월 신유조에 의하면 遣唐 使 知乘船事 종8위상 香山連淸貞과 형 두 사람은 宿 성을 사성받아 香山宿 가 되었다. 香山連 씨 일족은 續日本紀 類聚國史 續日本後紀 大日本古文書 등에 이름이 보인다. 37) 荊員常 : 이 이름은 다른 곳에서는 보이지 않는다. 아마도 백제가 멸망하고 좌평 여자신, 달솔 목 소귀자 등이 일본의 배를 타고 일본으로 망명할 때에 함께 일본으로 간 사람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佐伯有淸, 1983, 33쪽). 38) 高槻連 : 高槻라는 씨명은 攝津國 西成郡과 島上郡의 高槻村, 또는 山城國 相樂郡 高槻里와 관련 이 있을 것이다(栗田寬, 1900, 1148쪽). 高槻連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9) 名進 : 이 밖에 더 이상 이 이름이 보이지 않는다. 40) 廣田連 : 廣田이라는 씨명은 攝津國 武庫郡 廣田鄕(현재 兵庫縣 西宮市라 大社町 일대)이라는 지 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廣田連의 옛 성은 辛으로 續日本紀 에 의하면 天平寶字 2년(758) 9월 에 淳仁천황이 辛男床 등 16명에게 廣田連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廣田連씨 일족은 續日本紀 와 大日本古文書 에 그 이름이 보이고 있다. 41) 辛臣君 :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百濟조에서 廣田連씨의 조상으로도 나오고 있다. 日本書紀 繼 體 7년(513) 11월 을묘조에는 왜국이 백제에게 己汶과 滯沙를 주었을 때 安羅의 辛巳奚와 賁巴委佐가 칙을 받들었다고 나와 있다. 이 辛巳奚가 辛臣君의 일족일 가능성이 있다(佐伯有淸, 1983, 40쪽).

225 448 石野連(이시노노무라지)42) 백제국 近速王(킨소쿠와우)43)의 손자 憶賴福留(오쿠라이후쿠루)44)에서 나왔다. 神前連(카미사키노무라지)45) 백제국인 정6위상 賈受君(카쥬쿤)46)에서 나왔다. 沙田史(사타노후히토)47) 백제국인 意保尼王(오호네와우)48)에서 나왔다. 42) 石野連 : 石野라는 씨명은 伊豫國 宇和郡 石野鄕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栗田寬, 1900, 1149쪽). 續日本紀 天平寶字 5년(761) 3월 경자조에서 百濟人 憶賴子老 등 41명에게 石 野連씨를 사성하였다고 하므로 원래는 憶賴씨였음을 알 수 있다. 石野連씨 일족으로는 續日本 紀 에 石野連子老가 보인다. 43) 近速王 : 音으로 보아서는 백제 제13대 近肖古王일 가능성이 있으나, 憶賴福留는 7세기 후반 사 람이므로 근초고왕의 손자라고 보기는 어려우므로 近速王은 근초고왕과 다른 사람이다(佐伯有 淸, 1983, 41쪽). 44) 憶賴福留 : 憶賴福留는 日本書紀 의 憶禮福留와 동일인으로 天智 2년(663) 佐平 餘自信, 達率 木素貴子 등과 함께 일본으로 망명하였다. 憶賴는 日本書紀 神功 49년조에 보이는 意流村이나 또는 백제의 옛 도성 慰禮城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鮎貝房之進, 1937, 雜攷 제8 집(姓氏攷及族制攷), 朝鮮印刷株式會社, 117쪽). 45) 神前連 : 近江國 神埼郡 神埼鄕(현재 滋賀縣 彦根市 稻枝町 甲崎 일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神龜 원년(724) 5월에 정6위하 賈受君이 神前連을 사성받았다고 한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天智 4년(665) 2월에 백제의 백성 남녀 4백여인을 近江國 神前郡에 살게 하였다고 하였는데 이 때 이주한 사람의 후손일 것이다. 神前連씨 일족은 續日本紀 寧 樂遺文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46) 賈受君 : 賈受君은 續日本紀 養老 5년(721) 춘정월 갑술조에서 정6위하로서 解工, 즉 기술에 능하여 10疋, 10, 布 20段, 20口를 사여받았다. 47) 沙田史 : 佐伯有淸은 沙田을 마스타 로 읽었으나(佐伯有淸, 1983, 44쪽) 加藤謙吉의 주장대로 人名이나 씨명에서 沙는 보통 사 로 읽히고 있으므로(加藤謙吉, 1995, 7쪽) 여기에서는 사타노 후히토로 읽었다. 沙田이라는 씨명은 安藝國 沙田郡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栗田寬, 1900, 新撰姓氏錄考證 下, 吉川半七, 1150쪽). 沙田史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아 언제 沙田史라 는 씨성을 받았는지 옛 씨성이 무엇이었는지는 알 수 없다. 48) 意保尼王 : 音意으로 보아 保尼王(오호네와우)는 大根使主(오호네노오우미)와 동일인일 가능성이 있다. 新撰姓氏錄 449 大丘造(오오오카노미야츠코)49) 백제국 速古王50) 12세손 恩率 高難延子(카우탄엔시)51)에서 나왔다. 小高使主(오타카노오미)52) 백제국인 毛甲(모카후)이라는 姓의 加須流氣(가수루케)53)라는 사람에서 나왔다. 飛鳥部(아스카베)54) 백제국인 國本木吉志(코쿠혼모쿠키시)55)의 후손이다. 49) 大丘造 : 山城國 葛野郡 大岡鄕의 大岡(오호오카)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 언제 大丘造를 사성받았 는지는 알 수 없다. 大丘造씨 일족은 續日本後紀 日本三代實錄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50) 速古王 : 佐伯有淸은 速古王을 백제의 제5대왕 肖古王으로 보았다(佐伯有淸, 1983, 45쪽). 그러 나 日本書紀 欽明 2년 4월조와 7월조에서 聖明王이 昔我速古王貴首王之世 昔我先祖速古 王貴首王 이라고 하면서 近肖古王대와 近仇首王代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여기의 速古王도 近 肖古王일 가능성이 있다. 近肖古王은 백제 13대왕으로 346~375년 재위하였다. 삼국사기 백제 본기 근초고왕 즉위전기에 의하면 비류왕의 둘째 아들로 신체가 장대하고 멀리 내다보는 식견을 가지고 있었으며, 계왕이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고 하였다. 肖古王은 재위 166~214년. 三國史 記 백제본기 肖古王 즉위전기에 의하면 肖古王은 素古라고도 하는데 蓋婁王의 아들로 개루왕이 재위 39년만에 사망하자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고 한다. 51) 高難延子 : 高難延子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高難은 日本書紀 應神 16년 시세조에 보이는 東韓의 땅 중에 高難城이 보이는데, 이 곳과 관련이 있는 씨로 여겨진다(佐伯有淸, 1983, 46쪽). 52) 小高使主 : 小高라는 씨명은 和名抄 에 常陸國 行方郡 小高鄕, 陸奧國 磐城郡 小高鄕과 上野國 綠野郡 小高鄕 등이 보이는데 小高使主씨가 어느 곳과 관련이 있는지 알 수 없다(栗田寬, 1900, 1151쪽). 53) 加須流氣 : 毛甲이라는 姓이나 加須流氣라는 사람은 이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54) 飛鳥部 : 飛鳥部(아스카베)씨는 飛部씨라고도 하는데, 河內國 安宿(아스카)郡(현재 大阪府 南河內 郡)과 관련이 있다. 飛鳥部씨 일족으로는 大日本古文書 에 飛鳥部智萬呂와 飛部屋戶萬呂가 보이 고 續日本後紀 에 飛鳥部稻子가 보인다. 大日本古文書 에는 武藏國의 飛鳥部 麻呂가 보인다. 55) 國本木吉志 : 國本은 잘못 들어간 글자일 가능성이 있다(佐伯有淸, 1983, 48쪽). 木吉志에 대해 서는 木貴公과 동일인으로 보는 견해(栗田寬, 1900, 1147쪽)와 다른 사람으로 보는 견해(佐伯有 淸, 1983, 48쪽)가 있다.

226 450 右京 諸蕃 下 百濟 百濟王(쿠다라노코니키시)56) 백제국 義慈王57)에서 나왔다. 菅野朝臣(스가노노아손)58) 백제국 都慕王 10세손 貴首王(키수와우)59)에서 나왔다. 葛井宿 (후지이노스쿠네)60) 菅野朝臣과 같은 조상이다. 鹽君(시오노키미)의 아들 味散君(미사노키미)61)의 후손이다. 56) 百濟王 : 百濟라는 씨명은 百濟國과 관련이 있다. 백제왕의 옛 씨명은 餘씨로 禪廣(善光이라고도 씀)이 지통천황에게 백제왕의 칭호를 사여받았다. 續日本紀 의 百濟王敬福의 薨傳에 의하면 의 자왕이 서명천황에게 아들 豊璋과 禪廣을 보냈다고 한다. 善光은 그후 백제가 멸망한 후에도 계 속 일본에 남아 持統천황대에 백제왕의 칭호를 받은 후 이를 씨성으로 사용하였다. 백제왕씨는 이후 9세기 후반까지 중앙정계에서 귀족으로 활약하였다. 그후 백제왕씨는 쇠퇴하였으나 일본조 정은 氏爵을 사여하여 우대하였다(김은숙, 2007,`일본 율령국가의 백제왕씨a, 百濟遺民들의 활 동, 충청남도 역사문화연구원, 78~125쪽). 57) 義慈王 : 백제 제30대 국왕. 재위 641~660년. 661년 사망하였다. 58) 菅野朝臣 : 菅野라는 씨명은 大和志 에 보이는 大和國 宇陀郡 菅野村(현재 奈良縣 宇陀郡 御杖 村 大字 菅野일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다(栗田寬, 1900, 1218쪽). 菅野朝臣의 옛 씨 성은 津連이었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延曆 9년(790) 7월에 津連眞道 등에게 菅野朝臣을 사성 하였다고 한다. 津連의 옛 성은 津史로, 續日本紀 에 의하면 天平寶字 2년(758) 8월에 津史秋主 등 44명에게 津連을 사성하였다고 한다. 그런데 日本書紀 에 의하면 敏達 3년(574)에 船史 王 辰爾의 동생 牛에게 津史를 사성하였다고 하므로 津史의 원래 성은 王씨였음을 알 수 있다. 菅野 朝臣씨 일족은 續日本紀 日本後紀 續日本後紀 類聚國史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59) 貴首王 : 백제 제14대 국왕 近仇首王. 재위 375~384년. 日本書紀 의 欽明 2년(541) 하4월조에 貴首王이 보인다. 日本書紀 神功攝政 49년 3월조에서는 貴須王이라고 표기하였다.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에서는 津連眞道 등이 眞道 등의 本系는 백제국 貴須王에서 나왔습니 다. 귀수왕은 백제의 제16세왕입니다. 라고 하였다. 續日本紀 延曆 10년(791) 4월 무술조에서 는 文忌寸最弟가 백제 久素王 때에 聖朝에서 사신을 파견하여 문인을 초빙하셨으므로 久素王이 狗의 손자 王仁을 바쳤습니다. 라고 말하고 있다. 60) 葛井宿 : 葛井(후지이)은 藤井(후지이)로도 표기된다. 栗田寬은 藤原宮이 藤井原에 있었다고 하 新撰姓氏錄 451 宮原宿 (마야하라노스쿠네)62) 菅野朝臣과 같은 조상이다. 鹽君63)의 아들 智仁君(치니노키미)64)의 후손이다. 는 萬葉集 의 노래에 근거하여 葛井을 大和國 高市郡의 藤原宮이 있었던 곳일 것으로 보았다(栗 田寬, 1900, 1221쪽). 佐伯有淸은 河內國 志紀郡 長野鄕 藤井寺(현재 大阪府 藤井寺市)와 관련이 있다고 보았다(佐伯有淸, 1983, 195쪽). 葛井宿 의 옛 氏姓은 葛井連이었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延曆 10년(791) 1월 葛井連道依 등 이 葛井宿 를 사성받았다고 한다. 葛井連의 옛 성은 白猪史로, 養老 4년(720) 5월에 葛井連라 는 새로운 씨성을 사여받았다. 白猪史의 원래 성은 王씨로 日本書紀 에 의하면 欽明 30년(569) 4월 王辰爾의 조카 津이 白猪史의 씨성을 받았다고 한다. 葛井宿 씨로는 續日本紀 에 葛井 宿 道依, 日本後紀 에 葛井宿 松足 葛井宿 豊繼, 日本紀略 에 葛井宿 廣致, 平安遺文 에 葛井宿 弟上, 續日本後紀 에 葛井宿 藤子 葛井宿 石雄 葛井宿 鮎川이 보인다. 61) 味散君 :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에 의하면 仁德천황 때에 辰孫王의 장자 太阿郞 王을 보내 仁德천황 옆에서 뫼시도록 하였는데, 太阿郞王의 아들 亥陽君 亥陽君의 아들 午定君 이 있었고, 午定君이 세 아들을 낳았는데 장자가 味沙, 둘째 아들이 辰爾, 막내 아들이 麻呂였다. 이에 따라 각각 세 姓의 시조가 되었다. 각각 직분에 따라 씨명을 삼았는데 葛井 船 津連 등이 그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이 사료의 앞 부분에서 辰孫王은 貴須王, 즉 近仇首王의 손자로 나오 고 있으므로 味散君은 백제왕족이 된다. 續日本紀 에 보이는 味沙를 新撰姓氏錄 에서는 味散君으로 표기한 것이므로 味散君의 아버지 라고 하는 鹽君은 續日本紀 의 午定君을 가리킨다. 즉 味散君은 午定君의 장자로 葛井宿 의 조 상이 된다. 葛井宿 이외에도 宮原宿 津宿 의 계보에서도 鹽君과 午定君이 동일인임을 알 수 있다. 62) 宮原宿 : 河內國 南河內郡 高鷲村 大字 北宮 南宮(현재 大阪府 羽曳野市 高鷲町) 주변의 옛 지 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佐伯有淸, 1983, 200~201쪽). 宮原宿 일족은 續日本 紀 類聚國史 平安遺文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63) 鹽君 : 午定君. 주 61) 참조. 64) 智仁君 : 王智仁(오우치니) 王辰爾(오우치니) 辰爾(치니) 등으로도 표기되었다. 7세기 말 또는 8세기 초에 王智仁의 손자 王後를 매장할 때 함께 넣은`船首王後墓誌(후네노오우고보시)a 에서는 王智仁首 라고 표기되었다(東野治之, 1977, 日本古代の墓誌, 72~75쪽). 日本書紀 의 欽明 14년(553) 7월 갑자조에서는 欽明천황이 王辰爾에게 船賦를 징수하는 일을 맡기고 그에게 船史 를 사성하여, 王辰爾가 船連의 조상이 되었다는 내용을 적고 있으며, 日本書紀 敏達 원년(572) 5월 병진조에서는 敏達천황이 船史의 조상 王辰爾가 아무도 읽지 못한 고구려의 국서를 읽은 것 을 辰爾(치니) 만한 사람이 없다면서 극찬한 내용을 적고 있다. 주 62)의 續日本紀 延曆 9년 (790) 7월 신사조에서는 仁德천황 때에 근구수왕의 손자 辰孫王(一名 智宗王)이 장자 太阿郞王에 게 仁德천황 옆에서 뫼시도록 하였는데, 太阿郞王의 아들 중에서 午定君의 둘째 아들이 辰爾(치

227 452 津宿 (츠노스쿠네)65) 菅野朝臣과 같은 조상이다. 鹽君의 아들 麻侶君(마로노키미)66)의 후손이다. 中科宿 (나카시나노스쿠네)67) 菅野朝臣과 같은 조상이다 鹽君의 손자 宇志(우시)68)의 후손이다. 船連(후나노무라지)69) 菅野朝臣과 같은 조상이다. 大阿郞王(타아라오우)70)의 3세손 智仁君(치니노키미)의 新撰姓氏錄 453 후손이다. 三善宿 (미요시노스쿠네)71) 백제국 速古大王(소쿠코타이와우)72)에서 나왔다. 雁高宿 (카리타카노스쿠네)73) 백제국 貴首王(크스와우)74)에서 나왔다. 安勅連(아치키노무라지)75) 백제국 魯王(로와우)76)에서 나왔다. 니)였고 그가 船連의 조상이라고 하였다. 그러나 辰孫王은 王辰爾와 辰斯王의 辰 자에서 智宗王 은 王智仁의 智 자를 바탕으로 王辰爾 후예씨족이 만들어낸 架空의 인물이다. 이들은 백제왕족 의 후손임을 주장하기 위해 王辰爾(王智仁)도 王 자를 빼고 辰爾 智仁君 으로 칭하게 되었 다(김은숙, 1988,`西文氏의 歸化 傳承a, 歷史學報 118, 76~78쪽). 65) 津宿 : 津은 선착장인 津을 관장하는 職名과 관련된 씨이다. 日本書紀 敏達 3년(574) 10월 무 신조에 의하면 船史 王辰爾의 동생 牛에게 조서를 내려 津史를 賜姓하였다고 한다. 續日本紀 天 平寶字 2년(758) 8월 병인조에 외종5위하 辰砂秋主 등 34인이 청하여 津連으로 개성하게 되었다 고 한다.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에서 津連眞道 등이 菅野朝臣을 사성받았는데, 續 日本紀 延曆 10년(791) 정월 계유조에서는 對馬守 정6위상 津連吉道 등 10인에게는 宿 성을 주 었다고 한다. 그 후 元慶 원년(877) 12월 임오조에서 津宿 輔主가 菅野朝臣을 사성받았다. 津宿 일족은 續日本紀 類聚國史 續日本後紀 日本三代實錄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66) 麻侶君 : 麻侶君은 주 61)의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의 麻呂로, 午定君(鹽君)의 막 내아들이 된다. 67) 中科宿 : 續日本紀 延曆 10년(791) 정월 계유조에 의하면 津連都雄 등 형제 자매 7명이 거주 지에 따라 中科宿 라는 씨성을 받았다고 하는데, 中科라는 곳은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津連氏 에 대해서는 주 65) 주 68) 참조. 中科宿 씨 중에는 834년에 菅野朝臣을 씨성으로 받은 사람들 이 있다. 中科宿 일족은 續日本紀 日本後紀 續日本後紀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68) 宇志 : 宇志(우시)는 日本書紀 敏達 3년(574) 10월 무술조에 船史 王辰爾의 동생 牛(우시)로, 津史를 사성받았다. 그런데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에서는 辰爾의 동생 麻呂가 津 連이 되었다고 한다. 津史씨가 津連씨로 改姓한 것이므로, 麻呂는 牛(宇志)와 동일인으로 여겨진 다. 따라서 宇志는 鹽君의 아들이 된다. 그런데 여기에서는 宇志가 鹽君의 손자로 나와 있다. 栗 田寬은 中科宿 계보에서 宇志가 鹽君의 孫으로 나와 있는 것은 男 의 오자일 것으로 보고 있다 (栗田寬, 1900, 1226쪽). 그러나 牛(우시)와 宇志(우시)를 할아버지와 손자로 볼 수도 있다. 69) 船連 : 日本書紀 欽明 14년(553) 7월 갑자조에 의하면 蘇我大臣 稻目宿 가 欽明천황의 명을 받들어 王辰爾에게 가서 船賦(배의 세금)을 거두어 기록하도록 하고 王辰爾를 船長으로 삼았다고 하였다. 王辰爾는 이 때문에 船史라는 씨성을 받게 되었다. 그후 船史는 天武 12년(683)에는 船 連으로 개성되었다. 船連씨 중에서는 貞觀 5년(863)과 元慶 원년(877)에 菅野朝臣을 씨성으로 받 은 사람도 있고, 貞觀 5년(863)에 御船宿 를 씨성으로 새로 받은 사람들도 있다. 船連씨 일족은 日本後紀 類聚國史 日本三代實錄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70) 大阿郞王 :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에서는 太阿郞王으로 나오고 있다. 近仇首王의 손자라고 하는 辰孫王의 아들(주 61)와 주 64) 참조). 71) 三善宿 : 三善(미요시)이라는 씨명은 備後國 三次(미요시)郡이나 阿波國 三好(미요시)郡과 관련 이 있다(栗田寬, 1900, 1229쪽). 三善宿 의 옛 氏姓은 錦部連으로, 續日本紀 延曆 7년(788) 2 월 신사조에서 錦部連首姉繼가 類聚國史 권187 度者 大同 2년(807) 6월 을해조에서는 三善宿 로 나오고 있으므로, 그 사이에 三善宿 라는 새로운 씨성을 사여받았음을 알 수 있다. 三善宿 씨 일족은 日本後紀 平安遺文 續日本後紀 日本三代實錄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72) 速古大王 : 佐伯有淸은 백제 제5대 肖古王(佐伯有淸, 1983, 213쪽)으로 보고 있지만, 速古大王도 近肖古王일 가능성이 있다(주 50) 참조). 73) 雁高宿 : 雁高(카리타카)라는 씨명은 大和國 添上郡 獵高野(카리타카노, 현재 奈良縣 鹿野苑 町)와 관련이 있다. 續日本紀 延曆 4년(785) 5월 무술조에 의하면 右京人 종5위하 昆解宿 沙 彌麻呂 등에게 雁高宿 를 새로 씨성으로 주었다고 하므로 그전의 씨성은 昆解宿 였음을 알 수 있다. 續日本紀 寶龜 6년(775) 8월조에 정5위하 昆解沙彌麻呂에게 宿 를 사성하였다고 하므 로 원래는 昆解씨였다. 雁高宿 씨 일족은 日本後紀 類聚國史 日本三代實錄 등에 그 이 름이 보인다. 74) 貴首王 : 주 59) 참조. 75) 安勅連 : 安勅(아치키)는 阿直岐(아치키) 阿直(아치키)라고도 쓴다. 백제의 阿直岐를 가리킨다. 古事記 응신천황단에 백제국의 照古王이 阿知吉師를 보내 암수 말 1필씩을 應神천황에게 바쳤 다고 하면서 注로 阿知吉師는 阿直史 등의 조상이라고 적고 있다. 日本書紀 應神 15년 8월 정 묘조에서도 백제왕이 阿直伎를 파견하여 좋은 말 2필을 바쳤으므로 阿直伎에게 이를 관리하도록 하였으며 阿直岐가 경전을 잘 읽었으므로 태자 道稚郞子의 스승으로 삼았다고 적고 있다. 그리

228 454 新撰姓氏錄 城篠連(키시노무라지)77) 455 百濟公(쿠다라노키미)84) 백제국인 達率 支母末惠遠(키모마츠에엔)78)에서 나왔다. 79) 市往公(이치유키노키미) 귀신에게 감화되었다는 뜻으로 鬼室씨라고 하였는데,85) 廢帝86) 天平寶字 3년(759)에 百 濟公姓을 사성받았다.87) 백제국 明王(메에와우)80)에서 나왔다. 岡連(오카노무라지)81) 市往公과 같은 조상이다. 目圖王(모쿠토와우)82)의 아들 安貴(안키)83)의 후손이다. 고 應神천황이 阿直岐에게 더 뛰어난 博士가 있는지 물었더니 阿直岐가 王仁을 추천하였으므로 荒田別과 巫別을 백제에 보내 王仁을 불러왔다고 하였다. 日本書紀 天武 12년(683) 10월 기미조에서는 阿直史에게 連을 새로운 성으로 주었다고 하는 데, 8세기 사료에 보이는 사람들은 모두 阿直 安勅 阿直史 등으로 連姓을 가진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佐伯有淸은 阿直이나 安勅으로만 나와있는 사람들 중에 阿直連이나 安勅連이 있었을 수 도 있을 것으로 보았다(佐伯有淸, 1983, 215쪽). 安勅連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76) 魯王 : 백제의 왕명 중에 보이지 않는 이름이다. 77) 城篠連 : 城條라는 씨명은 지명과 관련이 있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떤 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 다. 續日本紀 天平神護 2년(766) 3월 임신조에 대초위상 支母末吉足 등 5명에게 城條連을 사성 하였다고 하므로 원래 씨는 支母末이었음을 알 수 있다. 城篠連씨에 대해서는 아 밖에 더 이상 보 이지 않는다. 78) 支母末惠遠 : 續日本紀 天平神護 2년(766) 3월 임신조에 보이는 대초위상 支母末吉足의 조상 일 것이다. 아마도 日本書紀 天智 2년(663) 9월 갑술조에 백촌강의 패전 이후 좌평 餘自信을 비롯해 많은 사람들이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 기록되어 있는데, 이 때 일본으로 건너간 사람일 것 이다. 關晃은 正倉院文書에 자주 보이는 旣母長万呂 旣母辛建万呂 同向万呂 등은 支母末吉足 의 동족일 것이라고 하였다(關晃, 1996,`改編新撰姓氏錄諸蕃之部a, 關晃著作集 第3卷 古代の 歸化人, 吉川弘文館, 358쪽). 旣母(키모)와 支母(키모)는 같은 음을 다른 한자로 표기한 것이므 로 이들은 동족일 가능성이 크다. 79) 市往公 : 市往(이와유키)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高市郡 市往岡(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岡)이 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市往公씨에 관해서는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80) 明王 : 백제 제26대왕 聖王. 삼국사기 백제본기에 의하면 성왕의 諱는 明 인데 국인들이 聖王 으로 칭하였다고 한다. 日本書紀 에서는 明王 明 聖明王 聖王 등으로 적고 있다. 81) 岡連 : 岡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高市郡 岡村(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岡)과 관련이 있다. 續 日本紀 神龜 4년(727) 12월 정축조에 僧正 義淵法師에게 市往씨를 고쳐 岡連을 새로 사성하고 그 형제들도 岡連을 씨성으로 전하도록 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岡連씨는 원래 市往씨였음을 알 수 있다. 그후에도 天平 19년(747) 10월에 市往泉麻呂가 岡連을 사성받았다. 岡連씨 일족은 續 日本記 大日本古文書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82) 目圖王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83) 安貴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84) 百濟公 : 百濟라는 씨명은 백제국과 관련이 있다. 百濟君으로도 표기한다, 百濟公씨 일족으로는 百濟君水通( 大日本古文書 ) 百濟公和麻呂( 懷風藻 寧樂遺文 ) 百濟公秋麻呂( 續日本紀 ) 등이 보인다. 85) 귀신에게 鬼室씨라고 하였는데 : 鬼室씨로 가장 이른 시기에 사료에 보이는 사람은 鬼室福 信이 있다.`劉仁願紀功碑a에 僞 率鬼室福信 이라고 적혀 있고, 日本書紀 齊明 6년(660) 9월 계묘조에도 귀실복신이 보인다. 따라서 鬼室씨는 福信에서 시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귀실복 신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의자왕 20년(660)조에 의하면 武王의 從子라고 하므로 원래는 부여씨 였으나 귀실씨로 불리우게 되었음을 알 수 있다. 胡口靖夫는 귀신에게 감응하였다는 것은 福信의 탁월한 軍政 통솔력을 표현한 것이라고 보고,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부흥운동 중인 662년경 豊璋 王이 福信의 군사적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그에게 鬼室씨를 사성하였을 것이라고 하였다(1996, `鬼室福信と劉仁願紀功碑a, 近江朝と渡來人, 雄山閣, 39쪽). 그러나 귀신에게 감화되었다는 이야기는 다음에 제시하는 隋書 列傳 東夷 백제조에도 보이듯 이 백제왕족들이 자신들의 조상 전승으로 전해오던 이야기였다. 백제의 조상은 高麗國(고구려) 에서 나왔다. 그 고구려 국왕에게 侍婢가 있었는데 그녀가 갑자기 잉태하게 되자 그녀를 왕이 죽 이려고 하였다. 그녀는 달걀 같은 것이 와서 감응하여 임신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왕이 이를 버렸 으나 뒤에 한 남자아이가 태어나 이를 다시 돈사에 버렸으나 죽지 않아서 神으로 모셔 기르도록 하였는데 그 이름이 東明이라고 하였다. 장성하자 고려왕이 그를 꺼렸으므로 東明은 두려워서 淹 水로 도망하였는데 夫餘사람들이 그를 받들어 모셨다. 東明의 후손 중에 仇台라는 사람이 어질고 신의가 돈독하였는데 처음 그 나라를 帶方故地에 세웠다. 漢의 遼東太守 公孫度가 딸을 그에게 부 인으로 주었는데 점차 창성하여 東夷의 강국이 되었다. 처음에 百家가 바다를 건너갔다고 하여 百 濟라고 칭하였다. 백제가 멸망한 후 고구려 왜국과 협력하여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담당하였던 왕족 福信이 백제의 조상이며 고구려의 조상인 東明이 귀신에 감화하여 태어났다는 위와 같은 전설을 바탕으로하여 스스로 鬼室씨를 칭하였을 가능성이 있다. 鬼室福信 이외에 鬼室氏로는 日本書紀 에 鬼室集斯와 鬼室集信이 보인다. 鬼室集斯는 鬼室福 信의 아들로 백촌강의 전투에서 일본이 패전하였을 때 백제유민들과 함께 일본으로 건너갔다고 여겨지는데 天智 4년(665)에 福信의 공에 의해 小錦下(令制의 종5위)의 관위를 받고 天智 10년 (671)에는 學識頭가 되었다. 鬼室集信도 귀실복신의 아들일 가능성이 큰데 天智 10년(671) 藥에

229 456 百濟伎(쿠다라노테히토)88) 백제국 都慕王의 손자 德佐王89)에서 나왔다. 廣津連(히로츠노무라지)90) 백제국 近貴首王(킨키스와우)91)에서 나왔다. 淸道連(키요미치노무라지)92) 백제국인 은솔 納比旦止(나후히탄토)93)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457 廣海連(히로우미노무라지)94) 韓王信(칸와우신)95)의 후손 須敬(스쿄우)96)에서 나왔다. 不破連(후하노무라지)97) 백제국 都慕王의 후손 毗有王(히이와우)98)에서 나왔다. 麻田連(아사타노무라지)99) 백제국의 조선왕 准100)에서 나왔다. 廣田連(히로타노무라지)101) 통달한 사람으로 大山下(令制의 종6위)를 사여받았다. 그밖에 大日本古文書 를 통해 8세기에 鬼 室石次 鬼室小東人 鬼室乎人 鬼室 萬呂 등의 이름을 확인할 수 있다. 86) 廢帝 : 淳仁天皇(쥰닌텐노). 733~765년. 제47대 천황. 재위 758~764년. 天武천황의 아들 舍人 親王의 제7황자이며 어머니는 當麻山背. 諱는 大炊. 藤原仲麻呂의 아들 眞從의 미망인 粟田諸姉 와 결혼하여 仲麻呂의 田村第에 살다가 天平勝寶 8歲(756)에 성무천황이 사망한 후 天平寶字 원 년(757) 태자로 책립되었다. 다음해 孝謙천황의 양위로 즉위하였으나, 仲麻呂가 專權을 휘둘렀 다. 天平寶字 5년(761)경부터 孝謙上皇이 道鏡을 총애하면서 淳仁천황은 효겸상황과 대립하게 되 어, 그 다음해 孝謙上皇이 국가의 大事와 상벌에 관한 권한을 빼앗자, 仲麻呂가 반란을 일으켰으 나 上皇측에 의해 진압되었다. 天平寶字 8년(764) 10월 폐위되어 淡路로 유배되었다. 이후 淡路 公 淡路廢帝로 불리웠다. 天平神護 원년(765) 10월 유배지를 탈출하였으나 붙잡혀 죽었다. 87) 廢帝 사성받았다 : 續日本紀 天平寶字 5년(761) 3월 경자조에 백제인 餘民善女 등 4인에 게 百濟公을 사성한다는 기사가 있으나, 이는 鬼室씨와 별도로 餘씨성을 가진 사람들에게 百濟公 을 사성한 것이다. 鬼室씨가 언제 百濟公을 사성받았는지 확실하지 않지만, 續日本紀 天平寶字 3년(759) 동10월 신축조에서 君字姓을 가진 사람들에게 公字姓을 사여하였다고 하므로 鬼室씨는 759년 이전에 百濟君으로 바뀌었다가 다시 天平寶字 3년에 百濟公으로 바뀐 것으로 여겨진다. 88) 百濟伎 : 백제에서 도래한 工人이었기 때문에 百濟伎라는 씨명을 가지게 되었을 것이다. 日本書 紀 雄略 7년 시세조에 백제가 바친 今來才伎 라는 말이 있다. 百濟伎씨에 관해서는 다른 사료 에는 보이지 않는다. 89) 德佐王 : 다른 사료에는 보이지 않는다. 90) 廣津連 : 日本書紀 雄略 7년 시세조의 倭國吾礪廣津邑 이라고 나와 있는 廣津과 관련이 있다. 이곳은 河內國涉川郡跡部鄕의 難波津의 남부이다. 廣津連씨는 이 밖에는 보이지 않는다. 91) 近貴首王 : 近仇首王(주 59) 참조). 92) 淸道連 : 이 씨명은 지명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생각되지만, 어느 지명인지는 알 수 없다. 續日 本紀 延曆 10년(791) 12월 병신조에 의하면 외종5위하 淸道造岡麻呂 등에게 淸道連성을 주었다 고 한다. 당시 岡麻呂는 內藥侍醫였다. 淸道連씨 일족으로는 淸道連岡 平安遺文 ( )가 보인다. 93) 納比旦止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백제국인 辛臣君(신신쿤)102)의 후손이다. 94) 廣海連 : 廣海는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는데, 어느 곳인지는 알 수 없다. 廣海連씨 일 족으로는 廣海連男成( 平安遺文 )이 보인다. 95) 韓王信 : 史記 韓王信傳에 의하면 韓襄王의 孫이라고 한다. 96) 須敬 :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97) 不破連 : 不破라는 씨명은 美濃國 不破郡(현재 岐阜縣 不破郡)과 관련이 있다. 不破連씨는 더 이 상 보이지 않는다. 98) 毗有王 : 백제 제19대왕. 재위 427~455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毗有王 즉위전기에서는 비유왕 이 구이신왕의 장자라고 하면서 혹은 전지왕의 서자라고도 하는데 알 수 없다고 적고 있다. 또 毗 有王 2년(428) 2월조에 왜국사신이 왔는데 從者가 50인이었다고 적고 있다. 宋書 백제전에서는 백제왕 毗로 나오고 있다.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飛鳥戶造에서는 比有王으로 표기하고 있다. 99) 麻田連 : 麻田이라는 씨명은 攝津國 豊島郡 麻田村(大阪府 豊中市 麻田)과 관련이 있다. 續日本 紀 에 의하면 神龜 원년(724) 5월 신미조에 정8위상 答本陽春에게 麻田連이라는 씨성을 주었다 고 한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天智 4년(665) 8월에는 달솔 答본春初가 長門國에 파견되어 성을 쌓았으며, 天智 10년(671) 1월에는 兵法에 뛰어나 대산하를 받았다고 한다. 麻田連은 원래 答본 씨로 백제가 멸망한 후 다른 백제유민들과 함께 일본에 건너가 攝津國에 거주하였을 것으로 여겨 진다. 麻田連씨 일족으로는 麻田連陽春( 萬葉集 懷風藻 ) 麻田連眞淨( 續日本紀 ) 麻田連 狎賦( 續日本紀 ) 등이 있다. 100) 조선왕 准 : 三國志 魏志 韓傳과 後漢書 韓傳에 보이는 조선왕 準을 가리킨다. 조선왕 준이 위만에게 패하여 무리 수천인을 이끌고 바다로 가서 馬韓을 깨뜨리고 스스로 韓王이 되었으나 準의 후손은 끊어졌다고 하였다. 答본씨가 三國志 後漢書 등에 보이는 韓王 準의 후손이라 고 주장한 것은 자신들의 조상이 백제왕보다 먼저 마한 땅에 살던 사람임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 라고 할 수 있다. 101) 廣田連 : 廣田이라는 씨명은 攝津國 武庫郡 廣田鄕과 관련이 있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天平寶

230 458 春野連(하루노노무라지)103) 백제 速古王104)의 손자 比流王105)에서 나왔다. 面氏(멘시)106) 春野連과 같은 조상이다. 比流王107)의 후손이다. 己汶氏(코몬시)108) 春野連과 같은 조상이다. 速古王109)의 손자 汶休奚(몬키우케이)110)의 후손이다. 字 2년(758) 9월에 辛男床 등 16명에게 廣田連을 사성하였다고 하였으므로 廣田連은 辛씨였음 을 알 수 있다. 廣田連씨 일족은 續日本紀 大日本古文書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102) 辛臣君 : 주 41) 참조. 103) 春野連 : 春野라는 씨명은`兵部式a에 보이는 但馬國 春野驛과 관련이 있다(栗田寬, 1900, 1246 쪽). 續日本紀 에 의하면 天平寶字 5년(761) 3월에 백제인 面得敬 등 4명에게 春野連이라는 씨 성을 주었다고 하므로 원래는 面씨였음을 알 수 있다. 이 春野連을 사성받은 面得敬 등 4명 이외 에 春野連씨는 보이지 않는다. 104) 速古王 : 新撰姓氏錄 에 나오는 速古王은 백제 13대왕 近肖古王인 경우가 있다(주 51)과 주 73) 참조). 그러나 여기에서는 比流王의 조부이므로 백제 제 5대왕 肖古王이다. 재위 166~214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초고왕 즉위전기에 의하면 초고왕은 素古라고도 하였는데 蓋婁王의 아들 로 개루왕이 재위 39년만에 사망하자 뒤를 이었다고 한다. 105) 比流王 : 백제 제11대왕. 재위 304~344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比流王 즉위전기에 의하면 仇 首王의 둘째 아들로 본성이 관대하고 사람들을 사랑하였으며 힘이 세고 활을 잘쏘았다고 한다. 민간에 오래동안 있다가 제 10대왕 汾西王이 사망하였을 때 汾西王의 아들이 어렸으므로 臣民이 비류왕을 추대하여 즉위하게 되었다고 하였다. 近肖古王은 그의 둘째 아들이었다. 106) 面氏 : 面이라는 씨명은 백제의 州(현 전라남도 무안)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鮎貝房之進, 1937, 115~116쪽). 面氏 일족으로는 面忠宗( 小右記 )가 있다. 107) 比流王 : 주 105) 참조. 108) 己汶氏 : 己汶이라는 씨명은 섬진강 중류의 己汶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日本書紀 繼體 7 년(513) 6월조와 11월조에 보인다. 백제가 姐彌文貴 장군과 州利卽爾 장군, 穗積臣押山 편에 五 經博士 段楊爾를 보내어 伴跛國이 백제의 己汶 땅을 빼앗았다고 하면서 왜국이 이를 백제에 돌 려달라고 부탁하였다고 한다. 己汶씨는 이 밖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09) 速古王 : 春野連과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으므로 여기의 速古王은 백제 제5대 肖古王이 된다(주 104) 참조). 110) 汶休奚 : 己汶씨의 조상이라고 하는 汶休씨는 日本書紀 欽明紀에 德率 汶休麻那, 下部 固德 汶 休帶山이 보인다. 新撰姓氏錄 459 汶斯氏(몬시시)111) 春野連과 같은 조상이다. 速古王112)의 손자 比流王113)의 후손이다. 大縣史(오오아가타노후히토)114) 백제국인 和德(와토코)115)의 후손이다. 道祖史(후나도노후히토)116) 백제국주 主孫許里公(스소코리노키미)117)에서 나왔다. 111) 汶斯氏 : 汶斯라는 씨명은 백제의 州라는 지명과 관련된 것이다. 汶斯氏로는 日本書紀 欽明 15년(554) 12월조에 백제의 下部 杆率 汶斯干奴가 있을 뿐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12) 速古王 : 백제 제5대 肖古王, 주 104) 주 109) 참조. 113) 比流王 : 주 105) 참조. 114) 大縣史 :大縣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大縣郡(현재 大阪府 中河內郡)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大 縣史의 옛 성은 和德史였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神龜 2년(725) 6월 和德史龍麻呂 등 38명이 大縣史의 씨성을 새로 받았다고 한다. 大縣史씨 일족으로는 大縣史龍麻呂( 續日本紀 ) 大縣史 末呂( 大日本古文書 )가 있다. 115) 和德 : 和德史씨가 7세기 중엽에 일본에서 관인으로 활약하고 있었음은 日本書紀 大化 2년 (646) 3월 신사조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佐伯有淸은 和德史씨는 和德이라는 조상의 이름을 그 대로 자신들의 씨족의 명칭으로 삼았을 것으로 보았다(佐伯有淸, 1983, 239쪽). 116) 道祖史 : 道祖(후나도)라는 씨명은 攝津國 島上郡 道祖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栗田寬, 1248 쪽). 日本書紀 白雉 4년(653) 6월조에 旻法師가 사망하였을 때 孝德천황이 旻法師를 위해 佛 菩薩像을 만들라는 명령을 하였는데, 이 때 명령을 받은 畵工 중에 魚戶(후나도)直이 보인다. 魚戶(후나도)는 道祖로도 표기되므로 같은 씨라고 할 수 있다. 日本三代實錄 貞觀 4년(862) 7월 28일 을미조에서는 정8위상 道祖史豊富가 惟道宿 라는 새로운 씨성을 받았다고 적고, 그 가 阿智使主의 黨類로 백제국에서 來歸 하였다고 적었다. 道祖史씨 일족은 日本三代實錄 에 그 이름이 보인다. 117) 主孫許里公 : 日本三代實錄 貞觀 7년(865) 5월 20일 경자조에서 좌경인 造酒令史 정6위상 道 祖史永主와 散位 대초위하 道祖史高直 등 2인이 惟道宿 를 새로 사성받았는데, 그 조상이 백제 국인 主孫許里公이라고 하였다. 主孫許里는 古事記 應神段에 보이는 須須許理와 동일인이다 (栗田寬, 1900, 1248~1249쪽). 古事記 應神段에서는 須須許理가 백제의 照古王(근초고왕)대 에 백제에서 왜국으로 건너온 사람으로 술을 잘 빚었다고 적고 있다. 118) 大原史 : 大原이라는 씨명은 續日本紀 和銅 4년(711) 정월 정미조에 보이는 攝津國 嶋上郡 大 原驛(현재 大阪府 三島郡 島本町 부근)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佐伯有淸, 1983, 242쪽). 新

231 460 大原史(오오하라노후히토)118) 漢人 木姓 阿留素西姓令貴(아루소사이세이레이키)119)에서 나왔다. 苑部首(소노베노오비토)120) 백제국인 知豆神(치즈신)121)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461 高野造(타카노노미야츠코)125) 백제국인 좌평 餘自信126)의 후손이다. 飛鳥戶造(아스카베노미야츠코)127) 백제국 比有王128)에서 나왔다. 民首(타미노오비토)122) 水海連123)과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인 努利使主(누리노오미)124)의 후손이다. 撰姓氏錄 左京 諸蕃 上에도 漢人 西姓令貴의 후손이라고 하는 大原史씨가 보인다. 大日本古文 書 平安遺文 등에도 大原史씨의 이름이 많이 보인다. 續日本後紀 承和 3년(836) 윤5월 무 인조에서는 우경인 左衛門權少志 大原史河麻呂가 大原宿 라는 새로운 씨성을 받았다고 하면서 河麻呂의 조상이 백제인이었다고 적고 있다. 그러나 日本三代實錄 貞觀 5년(863) 9월 8일 정 유조에는 右京인 主計權少屬 종8위상 大原史弘原과 內膳令史 종7위상 大原史廣永 등이 宿 를 사성받았다고 하면서 그 조상이 후한의 孝靈황제의 후손 麗王이라고 하여, 大原史씨에는 백제계 를 주장하는 씨족과 후한계를 주장하는 씨족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大原史씨 일족은 續日本後 紀 日本三代實錄 에 그 이름이 보인다. 119) 漢人 木姓 阿留素西姓令貴 : 木姓은 백제의 大姓八族 중의 하나. 阿留素西姓令貴 중에서 阿留素 는 무슨 뜻인지 알 수 없으나, 西姓令貴 는 新撰姓氏錄 左京 諸蕃 上 漢條의 大原史씨의 조상 이며, 攝津國 諸蕃 漢條의 大原史씨도 漢人 西姓令貴에서 나왔다. 고 하므로, 漢人 출신의 西씨 姓을 가진 令貴라는 사람을 조상으로 주장하는 씨족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씨족들 중에서 백제계를 주장하는 사람들은 자신들이 백제에 살면서 木씨 성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을 위와 같 은 조상 이름으로 표현한 것으로 추측된다. 120) 苑部首 : 苑部는 園部라고도 쓴다. 苑部라는 씨명은 苑池를 관리하고 채소나 과수를 재배하던 일 을 관할하였던 苑部의 伴造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佐伯有淸, 1983, 243쪽). 苑部首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21) 知豆神 : 新撰姓氏錄 大和國 제번 백제조의 園人首의 조상이기도 하다. 佐伯有淸은 그가 어떤 인물인지 언급하고 있지 않다(佐伯有淸, 1983, 243쪽 355쪽) 그러나 音으로 볼 때 백제 부흥 운동 때의 장군 遲受信과 동일인물임을 알 수 있다. 遲受信은 660년 백제가 나당연합군에게 멸 망한 후 장군으로 백제부흥군에 참가하여 나당의 군대에 저항하였다. 그는 663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주류성 등이 함락되고 부흥군의 주력이 괴멸된 후에도 임존성에 거점을 두고 항복을 거부 하였으나 앞서 신라에 항복한 黑齒常之와 沙 相如 등의 공격을 받아 성이 함락되자 고구려로 도망하였고, 이로써 백제부흥운동은 끝났다. 122) 民首 : 民(타미)라는 씨명은 조정 직할지의 인민을 관할한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延喜式 神名帳 和泉國 大島郡조에 보이는 美多彌 신사가 있던 곳이 民首씨의 본거지였다(栗田 寬, 1900, 1250쪽). 民首씨 일족은 日本三代實錄 大日本古文書 나 平安遺文 등에 그 이 름이 보인다. 그런데 續日本後紀 承和 2년(835) 10월 경자조에는 左京人 종6위하 民首氏主가 長岑宿 를 사성받았는데 氏主는 魯公伯禽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魯公伯禽은 周公의 아들이므 로, 民首씨 중에 중국계를 주장하는 사람이 등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 日本三代實錄 貞觀 5 년(863) 9월 15일 갑진조에서는 大和國 山邊郡人 上野權少 정6위상 民首廣門과 右京人 大宰 醫師 정7위상 民首方宗, 木工醫師 정6위상 民首廣宅 등이 眞野臣을 사성받았다고 하면서 이들 이 天足彦國押人命의 후손이라고 하여, 民首씨 중에서 皇別 씨족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나타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民首씨 일족은 大日本古文書 續日本後紀 日本三代實錄 平安遺 文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123) 水海連 : 河內國 諸蕃 백제조에 水海連씨가 보인다(주 214) 참조). 124) 努利使主 : 주 30) 참조. 125) 高野造 : 高野라는 씨명은 大和國 添下郡 高野(현재 奈良市 山陵町 부근)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 다(佐伯有淸, 1983, 245쪽). 高野造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26) 餘自信 : 餘自進으로도 표기된다. 日本書紀 齊明 6년(660) 9월 계묘조에서 백제가 멸망한 후 백제 부흥운동이 일어났을 때 달솔 餘自進이 中部久麻怒利城에 거점을 두고 싸워 백제 사람 들에게 존경받았다는 이야기가 적혀있다. 그 후 餘自信은 日本書紀 天智 2년(663) 9월 갑술 조에서 일본의 수군과 함께 일본으로 가고 있다. 그는 백강구 전투에 참가하였다가 패배한 일 본의 수군의 배에 타고 일본으로 건너간 것이다. 그 후 日本書紀 天智 8년(669) 시세조에서 는 좌평 餘自信이 좌평 鬼室集斯, 남녀 700여인과 함께 近江國 蒲生郡으로 거처를 옮겼다고 적고 있다. 127) 飛鳥戶造 : 飛鳥戶라는 씨명은 安宿戶 安宿이라고도 적는데, 河內國 飛鳥戶(安宿)郡(현재 大阪 府南河內郡 일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飛鳥戶造씨는 續日本紀 日本後紀 類聚國 史 日本三代實錄 大日本古文書 등에 여러 사람의 이름이 보인다. 그런데 飛鳥戶造씨 중 에서 百濟宿 를 사성받는 사람들이 생긴다. 弘仁 3년(812) 1월에 右京人 정6위상 飛鳥戶造善宗 과 河內國人 정6위상 飛鳥戶造名繼가 百濟宿 를 사성받은 후, 貞觀 4년(862) 7월에 飛鳥戶造 彌道가 百濟宿 를 사성받았고, 貞觀 5년(863) 10월에도 右京人 陰陽少屬 종6위상 飛鳥戶造淸 貞 등 4명이 百濟宿 를 사성받았다. 128) 比有王 : 주 98) 참조.

232 462 御池造(오이케노미야츠코)129) 백제국 扶餘(후요)130) 땅의 卓斤(타쿠킨)의 國主인 施比王(시히오우)131)에서 나왔다. 中野造(나카노노미야츠코)132) 백제국인 杵率133) 答他斯智(타후타시치)134)의 후손이다. 眞野造(마노노미야츠코)135) 백제국 肖古王136)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463 谷造(스키타니노미야츠코)137) 백제국인 堅祖州耳(켄소시우지)138)에서 나왔다. 坂田村主(사카타노스구리)139) 백제국인 頭貴村主(토우키노스구리)140)에서 나왔다. 上勝(카미노스구리)141) 백제국인 多利須須(타리스스)142)에서 나왔다. 不破勝(후하노스구리)143) 129) 御池造 : 御池라는 씨명이 職員令의 園池司에서 담당한 苑池나 채소 과일 등을 관리하는 직책 과 관련된 것으로 보는 栗田寬의 견해(栗田寬, 1900, 1255쪽)와 美稱으로 보는 佐伯有淸의 견해 (佐伯有淸, 1983, 248쪽)가 있다. 續日本紀 天平寶字 5년(761) 3월 경자조에 백제인 卓 智 등 2명에게 御池造라는 성을 내렸다고 하므로 御池造의 옛 성은 卓씨임을 알 수 있다. 御池造에 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30) 扶餘 땅의 卓斤 : 三國史記 백제본기 성왕 16년 춘조에서 泗 로 도읍을 옮기고 국호를 南扶 餘로 하였다. 고 적고 있는데 扶餘는 南扶餘를 가리킨다. 卓斤은 삼국사기 지리지에 德殷 郡 本百濟德近郡 이라고 나오고, 都督府 13縣조에 得安縣 本德近支 라고 나오는 德近(현재 충남 은진)을 가리킨다. 131) 施比王 : 施比(시히)는 백제의 성왕이 천도하였던 泗 (충남 부여)를 가리킨다. 施比王은 백제 후 기의 수도 이름 泗 를 바탕으로 만들어낸 이름으로 여겨진다. 132) 中野造 : 中野라는 씨명은 越前國 足羽郡 中野鄕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栗田寬, 1900, 1268쪽). 續日本紀 天平寶字 5년(761) 3월 경자조에 의하면 백제인 答他伊奈麻呂 등 5명에게 中 野造를 사성하였다. 고 하였듯이 원래는 答他씨였다. 答他는 託 續日本紀 養老 ( 5년 정월 갑 술조)로도 표기되었다. 133) 杵率 : 백제관위 16계 중 제5위인 率. 134) 答他斯智 : 答他斯智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35) 眞野造 : 眞野라는 씨명은 近江國 滋賀郡 眞野村(현재 滋賀縣과 大津市 眞野町 일대)과 관련이 있다. 眞野造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日本書紀 推古 20년(612) 시세조에 眞野 首弟子가 보이는데, 佐伯有淸은 眞野首弟子가 眞野造씨의 조상이 아닐까하는 의견을 제시하였 다(佐伯有淸, 1983, 250쪽). 한편 眞野臣씨는 皇別 씨족임을 주장하고 있다. 新撰姓氏錄 右京 皇別 下에서 眞野臣은 孝昭천황의 아들 天足彦國押人命의 3세손 彦國 命의 후손이라고 하면서, 彦國 命의 3대손 大矢田宿 가 神功皇后를 따라 신라를 치고 개선하는 날 그는 신라에 남아서 鎭守장군이 되어 신라의 국왕 猶榻의 딸과 결혼하여 두 아들을 낳았는데 큰 아들의 9세손 和珥 部臣鳥 등이 近江國이 志賀郡 眞野村에 거주하다가 庚寅年(690)에 眞野臣이라는 姓을 가지게 되었다고 한다. 백제국인 淳武止等(쥰무토토우)144)의 후손이다. 136) 肖古王 : 佐伯有淸은 이를 백제 제5대왕 肖古王으로 보고 있으나(佐伯有淸, 1983, 250쪽), 주 50)에서 언급하였듯이 백제 제13대왕 近肖古王일 가능성도 크다. 137) 谷造 : 谷이라는 씨명은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이지만 어느 곳에 있었는지 알 수 없다. 谷 造씨에 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38) 堅祖州耳 : 堅祖州耳라는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堅祖씨는 新撰姓氏錄 未定雜姓 右京 조에서 堅祖氏가 백제국인 堅祖爲智의 후손으로 나와있다. 139) 坂田村主 : 坂田이라는 씨명은 近江國 坂田郡(현재 滋賀縣 坂田郡)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坂田村主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40) 頭貴村主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41) 上勝 : 上(카미)라는 씨명은 河內國 安宿郡 賀美鄕(현재 大阪府 羽曳野市 駒ケ谷一帶)이라는 지 명과 관련이 있다. 上勝씨 일족은 平安遺文 에 그 이름이 보인다. 142) 多利須須 : 多利須須(타리수수)는 太利須須(타리수수) 田利須須(타리수수)와 같은 사람이다.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漢조의 工造씨는 吳國人 太利須須(타리수수)의 후손이라고 하였으며, 祝部씨도 吳國人 田利須須(타리수수)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이를 통해 타리수수의 후손 중에 중 국계를 주장하는 사람과 백제계를 주장하는 사람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143) 不破勝 : 不破라는 씨명은 美濃國 不破郡(현재 岐阜縣 不破郡)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不破 勝씨 일족은 續日本紀 와 日本後紀 에 그 이름이 보인다. 144) 淳武止等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淳武씨는 日本書紀 持統 5년(691) 5월 신묘조에 百濟淳武微子가 壬申의 난 때의 공으로 直大參의 관위와 布를 사여받았다. 고 적혀 있다. 淳 武微子는 淳武止等의 아들로 672년의 壬申의 난 때 美濃國 不破郡에 살고 있었을 것이다(佐伯 有淸, 1983, 252~253쪽).

233 464 刑部(오사카베)145) 백제국 酒王(사케노키미)146)에서 나왔다. 漢人(아야히토)147) 백제국인 多夜加(타야카)148)의 후손이다. 賈氏(카시)149) 백제국인 賈義持(카기지)150)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465 半毗氏(한피시)151) 백제국 沙半王152)의 후손이다. 大石椅立(오오이시노하시타테)153) 백제국인 庭姓蚊爾(테에세이분니)154)에서 나왔다. 林(하야시)155) 林連156)과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인 木貴(모쿠쿠이)157)의 후손이다. 大石林(오오이시노하야시)158) 145) 刑部 : 刑部라는 씨명은 允恭의 大后의 名代部(황후의 이름을 부친 황실사유민)였던 刑部를 관할 하였던 직책과 관련이 있다. 古事記 允恭단과 日本書紀 允恭 2년 2월 기유조에서 允恭이 大 后(황후)를 위해 刑部를 설치하였다고 적고 있다. 刑部씨 일족은 續日本紀 萬葉集 大日 本古文書 에 많은 이름이 보인다. 146) 酒王 : 백제의 왕족. 日本書紀 仁德 41년 3월조에 보인다. 仁德천황이 紀角宿 를 백제에 파 견하여 國郡을 나누고 생산물을 전부 기록하도록 하였을 때 백제왕족 酒君이 무례한 행동을 하 여 紀角宿 가 백제왕을 질책하자 백제왕이 송구스러워하면서 酒君을 쇠사슬로 묶어 襲津彦 편 에 왜국으로 보냈다고 한다. 왜국에 가서 酒君은 石川의 錦織首許呂斯의 집에 숨어들어가 인덕 천황이 이미 자신의 죄를 사하여 許呂斯 집에 살도록 하였다고 거짓말하였다. 한참 뒤 인덕천황 은 결국 그 죄를 사하였다고 한다. 日本書紀 仁德 43년 9월 경자조에서는 依網屯倉에서 기이 한 새를 잡아 천황에게 바쳤는데, 천황이 酒君을 불러 새를 보여주면서 어떤 새인지 물었다고 한 다. 酒君은 그 새는 백제에 많다고 하면서 잘 훈련시키면 사람을 따른다고 대답하였다. 매우 민 첩해서 다른 새를 잡는데, 백제에서는 이 새를 구지라고 한다고 적고 있다. 그리고 구지가 지금 의 매라고 注에서 적고 있다. 仁德천황은 酒君에게 이 새를 기르도록 하였는데 얼마 되지 않아 순치되었다. 酒君은 그 새의 발에 가죽 끈을 달고 그 꼬리에 작은 방울을 달고 팔위에 올려놓고 천황에게 바쳤다고 한다. 한편 新撰姓氏錄 和泉國 諸蕃 百濟公條와 六人部連조에서도 酒王이 보인다. 147) 漢人 : 漢人이라는 씨명은 한반도에서 도래한 기술자 집단인 漢部 漢人部를 관장하는 사람이나 漢人 집단의 구성원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漢人씨 일족은 日本書紀 續日本紀 大日本 古文書 日本三代實錄 등에 많은 이름이 보인다. 148) 多夜加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49) 賈氏 : 賈씨라는 씨명은 중국의 성 賈와 관련이 있다. 續日本紀 養老 5년(721) 정월 갑술조에 賈受君이 보이는데, 그는 神龜 원년(724) 5월에 神前連이라는 새로운 씨성을 받았다(주 45) 주 48) 참조). 150) 賈義持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林連159)과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인 木貴160)의 후손이다. 151) 半毗氏 : 半毗라는 씨명은 백제의 半奈夫里(현재 전남 潘南)와 관련이 있다. 半毗氏 일족으로 半 奈比角이 平城宮 출토목간에 보인다(佐伯有淸, 1983, 257쪽). 152) 沙半王 : 백제 제6대왕 仇首王의 맏아들, 삼국사기 백제본기 古爾王 즉위조에 의하면 234년 仇首王이 재위 21년에 사망하였을 때 맏아들 沙伴이 있었으나 나이가 어려 정치를 해 나갈 수 없어, 肖古王의 동생 고이왕이 즉위하였다고 한다. 153) 大石椅立 : 大石椅立이라는 씨명 중에서 大石은 近江國 栗太郡 大石(현재 滋賀縣 大津市 大石中 일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椅立도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大石椅立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54) 庭姓蚊爾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55) 林 : 林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志紀郡 排志鄕(현재 大阪府 藤井寺市 道明寺町 林)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林씨 일족은 大日本古文書 와 平城宮 出土 木簡 등에 이름이 보인다. 156) 林連 : 주 34) 참조. 157) 木貴 : 木貴公. 주 35) 참조. 158) 大石林 : 大石林이라는 씨명 중에서 大石은 近江國 栗太郡 大石(현재 滋賀縣 大津市 大石中 일 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林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志紀郡 排志鄕(현재 大阪府 藤井寺市 道 明寺町 林)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大石林씨 일족으로 大石林繼成( 日本三代實錄 )이 있다. 159) 林連 : 주 34) 참조. 160) 木貴 : 木貴公. 주 35) 참조.

234 466 新撰姓氏錄 467 勝(스구리)171) 山城國 諸蕃 上勝(카미노스구리)172)과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인 多利須須(타리스스)173)의 후손이다. 百濟 161) 民首(타미노오비토) 水海連162)과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인 怒理使主(누리노오미)163)의 후손이다. 伊部造(이베노미야츠코)164) 백제국인 乃里使主(노리노오미)165)에서 나왔다. 末使主(스에노오미)166) 백제국인 津留牙使主(츠루가노오미)167)에서 나왔다. 木曰佐(키노오사)168) 末使主169)와 같은 조상이다. 津留牙使主170)의 후손이다. 161) 民首 : 주 122) 참조. 162) 水海連 : 주 214) 참조. 163) 怒理使主 : 努利使主 努理使主라고도 표기한다(주 30) 참조). 164) 伊部造 : 伊部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古事記 垂仁段에 보이는 垂仁천황의 황자 伊登志和氣王 을 기념하기 위한 子代部의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伊部造씨 일족은 大日本古文 書 寧樂遺文 日本三代實錄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165) 乃里使主 : 努利使主 努理使主 怒理使主와 같은 인물(주 30) 참조). 166) 末使主 : 末(스에)이라는 씨명은 日本書紀 崇神 7년 8월 기유조에 보이는 茅渟縣陶邑 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陶邑은 和泉國 大島郡 陶器莊(大阪府 堺市 陶器 上之 일대)지역이다. 末使 主씨 중에는 和泉國 神別에서 天津彦根命의 아들 彦稻勝命의 후손이라고 하는 씨족도 있다. 末 使主씨 일족은 大日本古文書 平安遺文 에 그 이름이 보인다. 167) 津留牙使主 : 津留牙使主는 新撰姓氏錄 未定雜姓 山城國의 木勝씨의 조상이라고 하는 津留木 과 동일인으로 여겨진다(栗田寬, 1900, 1367쪽). 木勝은 紀伊郡 紀伊鄕과 관련이 있다. 168) 木曰佐 : 木이라는 씨명은 山城國 紀伊郡 紀伊鄕과 관련이 있다. 曰佐는 백제인의 姓이 카바네로 변화한 것이다(佐伯有淸, 1981, 316쪽). 木曰佐씨 일족은 大日本古文書 平安遺文 에 그 이 름이 보인다. 169) 末使主 : 주 166) 참조. 170) 津留牙使主 : 주 167) 참조. 岡屋公(오카노야노키미)174) 백제국 比流王175)의 후손이다. 大和國 諸蕃 百濟 連(카츠라노무라지)176) 백제인 (코마)177)에서 나왔다. 和連(야마토노무라지)178) 백제국주 雄蘇利紀王179)에서 나왔다. 171) 勝 : 勝이라는 씨명은 고대한국어에서 촌락의 수장을 의미하던 스구리 라는 칭호와 관련이 있다. 勝씨 일족은 日本書紀 大日本古文書 日本後紀 續日本後紀 등에 많은 이름이 보인다. 172) 上勝 : 右京 諸蕃 下 百濟조에 上勝씨가 보인다(주 141) 참조). 173) 多利須須 : 주 142) 참조. 174) 岡屋公 : 岡屋이라는 씨명은 山城國 宇治郡 岡屋鄕(현재 京都府과 宇治市 木幡町 岡屋 일대)과 관련이 있다. 新撰姓氏錄 右京 皇別에서 八多朝臣이 武內宿 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일본 삼대실록 貞觀 11년 12월 8일 신묘조에서는 우경인 무위 岡屋公貞介와 岡屋公貞幹이 八多朝臣 이라는 씨성을 받았다고 한다. 따라서 佐伯有淸은 岡屋公씨는 원래는 도래계 씨족이었는데 皇別 계통이라고 주장하였을지도 모른다고 하였다(佐伯有淸, 1983, 326쪽). 岡屋公씨 일족은 大日 本古文書 日本三代實錄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175) 比流王 : 주 105) 참조. 176) 連 : 이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머리를 장식하는 가발을 제작하는 部를 관할하는 伴造씨족 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日本書紀 天武 12년(683) 9월 정미조에 의하면 造에게 連姓을 주 었다고 하므로 連의 옛 씨성은 造였음을 알 수 있다. 連씨 일족은 日本書紀 續日本 紀 平安遺文 大日本古文書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177)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일본서기 에 의하면 百濟本記 에서 백제가 고구려를 으로 표현하고 있는 점에서 백제에 들어온 고구려계 사람일 가능성이 있다. 178) 和連 : 和라는 씨명은 大和國 城下郡 大和鄕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和連씨 일족으로는 和連

235 468 宇奴首(우노노오비토)180) 百濟國君181)의 아들 彌奈曾富意彌(미나소호노오미)182)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469 攝津國 諸蕃 百濟 波多造(하타노미야츠코)183) 백제국인 佐布利智使主(사후리치오미)184)에서 나왔다. 薦口造(코무쿠노미야츠코)185) 백제국인 拔田白城君(누키타시로키노키미)186)에서 나왔다. 園人首(소노히토노오비토)187) 백제국인 知豆神(치즈신)188)의 후손이다. 船連(후나노무라지)189) 菅野朝臣(스가노노아손)190)과 같은 조상이다. 大阿良王(타아라오우)191)의 후손이다. 廣井連(히로이노무라지)192) 백제국 避流王(히루와우)193)에서 나왔다. 林史(하야시노후히토)194) 林連195)과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인 木貴(모쿠쿠위)196)의 후손이다. 爲奈部首(이나베노오비토)197) 백제국인 中津波手(나카츠하테)198)에서 나왔다. 諸乙( 續日本紀 )이 있다. 179) 雄蘇利紀王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80) 宇奴首 : 宇奴(우노)라는 씨명은 宇努(우노) 野(우노)로도 표기되는데, 河內國 更荒郡 野 邑(大阪府 大東市과 生駒山 西麓 일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宇奴首씨 일족으로는 宇奴首 男人( 政事要略 ), 野(우노)首宇麻後賣( 大日本古文書 )가 있다. 181) 百濟國君 : 佐伯有淸은 國君 밑에 인명이 탈락된 것으로 보았다(佐伯有淸, 1983, 353쪽). 182) 彌奈曾富意彌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河內國 諸蕃의 宇努造조에 보이는 彌那子富意 彌와 같은 사람일 것으로 여겨지고 있다(佐伯有淸, 1983, 353쪽 470쪽). 183) 波多造 : 波多라는 씨명은 大和國 高市郡 波多鄕(현재 奈良縣 高市郡 高取町 일대)과 관련이 있 다. 波多造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84) 佐布利智使主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85) 薦口造 : 薦口라는 씨명은 河內國 石川郡 紺口鄕(현재 大阪府 河內郡 河南町)과 관련이 있다. 薦 口造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86) 拔田白城君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87) 園人首 : 園人이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園池司의 전신인 관사에 소속하고 있던 園人을 관할하는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古事記 安康段에 葛城의 5村에 苑人이 있었다고 하는데, 이곳은 뒤에 大和國 忍海郡 園人鄕(현재 奈良縣 北葛城郡 新庄町 忍海 일대)이 되었다. 園人首씨 일족으로는 園人首(闕名, 平安遺文 )이 있다. 188) 知豆神 :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하 백제조의 苑部首씨도 知豆神의 후예라고 하였다(주 121) 참조). 189) 船連 :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하 백제조에도 船連씨가 보인다(주 69) 참조). 190) 菅野朝臣 :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하 백제조에 菅野朝臣씨가 보인다(주 59) 참조). 191) 大阿良王 : 大阿郞王이라고도 표기함(주 70) 참조). 192) 廣井連 : 廣井이라는 씨명은 美作國 英多郡 廣井鄕(현재 岡山縣 勝田郡 勝田町 栗廣)과 관련이 있다. 續日本紀 延曆 10년(791) 8월 임자조에 攝津國 百濟郡人 정6위상 廣井造眞成이 連姓을 받았다고 하므로 廣井連의 옛 씨성은 廣井造였음을 알 수 있다. 廣井連眞成은 弘仁 2년(811)에 는 廣井宿 라는 새로운 씨성을 받았다. 그런데 新撰姓氏錄 에 廣井連으로 나오고 있는 것은 廣井連이었을 때 씨족의 계보를 제출하였기 때문이다(佐伯有淸, 1981, 278쪽). 廣井連씨 일족으 로는 위의 廣井連眞成 이외에 廣井連嶋人( 大日本古文書 )이 보인다. 193) 避流王 : 比流王. 주 105) 참조. 194) 林史 : 林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志紀郡 志鄕의 志(현재 大阪府 藤井寺市 道明寺町 林)라는 향 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추정된다(佐伯有淸, 1983, 397쪽). 林史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95) 林連 : 주 34) 참조. 196) 木貴 : 木貴公. 주 35) 참조. 197) 爲奈部首 : 爲奈部라는 시명은 猪名部라고도 표기되는데, 이 씨족이 목공기술자인 爲奈部(猪名 部)를 관할하던 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日本書紀 應神 31년 8월조에서는 신라인이 왜 국의 선박에 화재가 일어나게 한 책임이 있었으므로 신라왕이 목공기술자를 바쳤는데 그가 곧 猪名部의 조상이라고 적혀 있다. 爲奈部 의 본거지는 日本書紀 仁德 38년 7월조에 보이는 猪

236 470 新撰姓氏錄 牟古首(무코노오비토)199) 吉志(우시키시)200)에서 나왔다. 백제국인 原首(하라노오비토)201) 眞神宿 (마카미노스쿠네)202)과 같은 조상이다. 福德王의 후손이다. 三野造(미노노미야츠코)203) 백제국인 布須麻乃古意彌(후스마노코오미)204)에서 나왔다. 205) 村主(스구리) 葦屋村主(아시야노스구리)206)와 같은 조상이다. 意寶荷羅支王(오오카라키오우)207)의 후 손이다. 名縣, 율령국가시대의 攝津國 河邊郡 爲奈鄕(현재 兵庫縣 尼崎市 동북부 일대)이었다. 爲奈部首 씨 일족으로는 猪名部首老( 寧樂遺文 )가 있다. 198) 中津波手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199) 牟古首 : 牟古라는 씨명은 攝津國 武庫郡 武庫鄕(현재 兵庫縣 尼崎市 武庫庄 일대)과 관련이 있 다. 牟古首씨에 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00) 吉志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01) 原首 : 原이라는 씨명은 攝津國 島上郡 原村(현재 大阪府 高槻市 松が丘, 黃金の里, 東城山町 일 대)과 관련이 있다. 原首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02) 眞神宿 : 大和國 諸蕃 漢조에 漢의 福德王의 후손이라는 眞神宿 가 있다. 眞神이라는 씨명은 日本書紀 雄略 7년조 시세조와 崇峻 원년 시세조에 보이는 眞神原(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 村 飛鳥)과 관련이 있다(佐伯有淸, 1983, 341쪽). 漢의 福德王은 누구인지 알 수 없다. 그러나 漢의 福德王의 후손이라고 주장하는 原首와 眞神宿 가 각각 新撰姓氏錄 에서 백제계와 중국 계로 나오고 있는 것은 백제 사람 중에 중국인들이 포함되었기 때문으로 여겨진다. 原首는 왜국 으로 건너가기 전의 백제를 자신의 출신지로 주장하였고, 眞神宿 는 조상 계보를 더 거슬러 올 라가 백제에 살기 이전의 계보를 주장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203) 三野造 : 三野라는 씨명은 攝津國 西成郡 三野鄕(현재 大阪府 西淀川區 野里町 부근)과 관련이 있다. 三野造씨에 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04) 布須麻乃古意彌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05) 村主 : 村主라는 씨명은 主寸 主村이라고도 표기되는데 고대 한국에서 족장을 의미한 촌추라 는 명칭과 관련이 있다. 村主씨 일족은 大日本古文書 類聚國史 日本文德天皇實錄 平 安遺文 등에 많은 이름이 보인다. 206) 葦屋村主 : 和泉國 諸蕃 百濟 葦屋村主 참조. 471 勝(스구리)208) 上勝(카미노스구리)209)과 같은 조상이다. 多利須須(타리스스)210)의 후손이다. 河內國 諸蕃 漢 高丘宿 (타카오카노스쿠네)211) 百濟國 公族 大夫 高侯212)의 후손 廣陵高穆213)에서 나왔다. 百濟 水海連(미즈우미노무라지)214) 백제국인 努理使主(누리노오미)215)에서 나왔다. 207) 意寶荷羅支王 : 意寶荷羅支王의 意寶荷羅는 日本書紀 垂仁 2년 시세조의 一云 에 보이는 意 富加羅 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意富加羅는 대가라로 김해에 비정되고 있다(佐伯有淸, 1983, 402쪽). 대가라 출신이 백제계라고 주장하는 것은 대가라 출신 중에서 백제로 들어가 백 제인이 된 사람이 있었음을 말해준다. 208) 勝 : 山城國 諸蕃 百濟조에도 勝씨가 보인다(주 171) 참조). 209) 上勝 : 주 141) 참조. 210) 多利須須 : 주 142) 참조. 211) 高丘宿 : 栗田寬은 高丘라는 씨명은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일본열도의 지명 이나 한반도의 지명 모두 가능성이 있다고 하였다. 일본 열도의 지명으로는 和名抄 에 보이는 讚岐國 三木郡 高崗鄕이나 土佐國 高岡郡 高岡鄕 등의 지명이 高丘와 관련이 있다. 高丘宿 씨 일족은 續日本紀 日本後紀 日本逸史 續日本後紀 日本三代實錄 大日本古文書 등이 그 이름이 보인다. 212) 百濟國 公族 大夫 高侯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栗田寬은 백제의 시조 온조가 고구 려의 시조 고주몽의 둘째 아들이므로 백제의 公族 중에 高씨가 있을 수 있다고 하였다(栗田寬, 1900, 1314쪽). 213) 廣陵高穆 : 廣陵高穆은 좌경 제번 한조의 大石씨 우경 제번 한조의 大山忌寸의 조상으로도 나와 있다. 廣陵은 秦대에 九江郡 에 속해 있던 縣名이다. 후한시대에 廣陵郡이 되었다. 지금의 江蘇 省 江都縣이다. 214) 水海連 : 佐伯有淸은 水海라는 씨명은 美稱일 것으로 보았다(佐伯有淸, 1983, 460쪽). 水海連씨 일족으로는 水海連淨(淸)成( 續日本紀 )이 있다.

237 472 調曰佐(츠키노오사)216) 水海連217)과 같은 조상이다. 河內連(카와치노무라지)218) 백제국 都慕王219)의 아들 陰太貴首王220)에서 나왔다. 佐良良連(사라라노무라지)221) 백제국인 久米都彦(쿠메츠히코)222)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473 錦部連(니시고리노무라지)223) 三善宿 (미요시노스쿠네)224)와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 速古大王225)의 후손이다. 依羅連(요사미노무라지)226) 백제국인 素 志夜麻美乃君(소네시야마미)227)에서 나왔다. 山河連(야마카와노무라지)228) 依羅連229)과 같은 조상이다. 素 夜麻美乃君(소네야마미노키미)230)의 후손이다. 岡原連(오카하라노무라지)231) 백제국 辰斯王232)의 아들 知宗233)에서 나왔다. 215) 努理使主 : 주 30) 참조. 216) 調曰佐 : 調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絹 등의 調를 관리하던 것과 관련이 있다. 曰佐는 譯語, 즉 통역이라는 직책과 관련이 있다. 調씨 중에서 譯語을 하였던 사람이었을 것이다. 調曰佐씨 일 족으로는 調曰佐 万呂, 調曰佐足麻呂(이상 大日本古文書 )가 보인다. 217) 水海連 : 주 214) 참조. 218) 河內連 : 河內라는 씨명은 河內國 河內郡(현재 大阪府 中河內郡 일부 지역)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日本書紀 天武 10년(681) 4월에 川內直縣이 連姓을 받았다고 하므로 河內連의 옛 씨성은 河內直이었음을 알 수 있다. 河內連씨 일족은 大日本古文書 平安遺文 에 그 이름이 보인다. 219) 都慕王 : 주 22) 참조. 220) 陰太貴首王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佐伯有淸은 고구려 시조 鄒牟의 아들이므로 백 제 시조 온조왕을 가리킨 것이 아닐까 하는 견해를 제시하였다(佐伯有淸, 1983, 462쪽). 221) 佐良良連 : 佐良良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讚良郡(현재 大阪府 河內郡의 일부 지역)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佐良良連씨에 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22) 久米都彦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23) 錦部連 : 錦部라는 씨명은 錦織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이 씨족이 錦을 직조하는 品部인 錦部(錦 織部)를 관할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錦部連씨의 본거지는 河內國 錦部郡 (현재 大阪府 南河內郡의 일부 지역과 河內長野市와 富田林市 남부)와 若江郡 錦部鄕(大阪府 八 尾市 西郡과 河內長野市 若江일대)였다. 日本書紀 仁德 41년 3월조나 欽明 31년 7월 是月조, 推古 18년 10월 을사조, 舒明 즉위전기 등에 錦織首씨가 보인다. 그 후 錦織首씨 중에서 錦織造 씨가 된 사람이 있어, 天武 10년(681) 4월에 錦織造小分이 連姓을 받아 錦部連이 되었다. 錦織 首(니시코리노오비토)는 錦部毗登(니시코리노히토)라고도 표기하는데, 이들 중에서 續日本紀 天平神護 원년(765) 12월 을사조에서 河內國 錦部郡人 종8위상 錦部毗登(니시코리노히토)石次 등 26명이 錦部連을 사성받았다. 그후 錦部連씨 중에서 다시 三善宿 를 사성받은 씨도 있다(주 72) 참조). 錦部連씨 일족은 續日本紀 大日本古文書 日本後紀 平安遺文 日本三 代實錄 등에 많은 이름이 보인다. 224) 三善宿 : 주 71) 참조. 225) 速古大王 : 佐伯有淸은 백제 제5대 肖古王(佐伯有淸, 1983, 465쪽)으로 보았으나, 주 72)에서 언급하였듯이 제13대 근초고왕일 가능성도 있다. 226) 依羅連 : 依羅라는 씨명은 河內國 丹比郡 依羅鄕(현재 大阪府 松原市 天善町), 攝津國 住吉郡 大 羅(大阪市 東住吉區 我孫子町 庭井町 일대). 續日本紀 에 의하면 神護景雲 원년(767) 7월에 河內國 志紀郡人 종6위상 依羅造五百世麻呂와 丹比郡人 依羅造里上 등이 連姓을 받았다고 한 다. 依羅連씨 일족은 앞에서 依羅連을 사성받은 依羅造五百世麻呂와 依羅造里上 이외에는 더 이 상 보이지 않는다. 227) 素 志夜麻美乃君 : 누구인지 알 수 없다. 228) 山河連 : 山河라는 씨명은 山川이라고도 표기되는데 지명과 관련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어느 지명인지 알 수 없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神護景雲 원년(767) 7월에 河內國 志紀郡人 정6위상 山川造魚足 등 9명이 連姓을 받았다고 한다. 山河連씨 일족은 앞의 山川造魚足 이외에는 더 이 상 보이지 않는다. 229) 依羅連 : 주 226) 참조. 230) 素 夜麻美乃君 : 주 227)의 素 志夜麻美乃君의 志가 빠졌지만 같은 인물이다. 231) 岡原連 : 岡原이라는 씨명은 지명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지지만 어느 지명인지 알 수 없다. 岡原連씨에 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32) 辰斯王 : 백제 제16대왕(재위 385~392). 삼국사기 백제본기 진사왕조에서는 진사왕이 근구수 왕의 둘째 아들이며 침류왕의 동생으로 침류왕이 사망하자 태자가 어렸으므로 대신 즉위하였다 고 적고 있다. 그러나 일본서기 神功 65년조에서는 침류왕이 사망하고 왕자 아화가 연소하였 으므로 숙부 진사가 왕위를 빼앗았다고 하였다. 그리고 침류왕의 사망에 대해서도 삼국사기 백 제본기 진사왕 8년 추7월조에서는 고구려왕 담덕이 병사 4만을 이끌고 북쪽을 공격하여 石峴 등 10여성을 함락하자 침류왕이 담덕이 군대를 잘 지휘한다는 것을 듣고 나아가서 싸우지 못 하여

238 474 林連(하야시노무라지)234) 백제국 直支王235)[古記에서는 周王(스와우)236)이라고 한다]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475 吳服造(쿠래하토리노미야츠코)237) 백제국인 阿漏史(아루노후히토)238)에서 나왔다. 宇努造(우노노미야츠코)239) 宇奴首(우노노오비토)240)와 같은 조상이다. 백제국인 彌那子富意彌(미나소호노오미)241) 漢水 북부의 여러 부락을 많이 고구려에 빼앗겼으며, 10월에는 고구려가 關彌城을 함락하였는데 침류왕은 狗原에서 사냥을 하였으나 열흘이 넘어도 돌아오지 않다가 그해 11월에 狗原行宮에서 사망하였다고 한다. 이를 일본서기 에서는 응신 3년 시세조에서 백제의 진사왕이 즉위하여 귀 국의 천황에게 실례하였으므로 응신이 紀角宿 등을 파견하여 그 무례함을 책하자 백제국이 진 사왕을 살해하여 사과하였으며, 紀角宿 등은 阿花를 왕으로 세우고 돌아왔다고 적고 있다. 233) 知宗 : 智宗王, 續日本紀 延曆 9년(790) 7월 신사조에서 百濟王仁貞 百濟王元信 百濟王忠 信 津連眞道 등이 상표한 내용 중에 知宗에 대해 보인다. 즉 응신천황이 사신을 파견하여 백제 에서 유식한 사람을 구하였을 때 백제의 왕 귀수왕이 宗族 중에서 손자 진손왕, 일명 智宗王을 사신과 함께 왜국으로 보냈으며, 응신이 그를 황태자의 스승으로 삼아, 이때부터 서적이 전해져 儒風이 전해졌고 문교가 흥하게 되었다고 한다. 그러나 智宗王은 王辰爾 후예 씨족이 만들어낸 가공의 인물일 가능성이 크다(주 64) 참조). 234) 林連 : 주 34) 참조. 235) 直支王 : 백제 제 18대왕(재위 405~420년), 삼국사기 백제본기 支王 즉위전기에서는 支王의 즉위과정이 자세히 적혀 있다. 支王은 直支라고도 불리웠다. 支王은 아신왕의 원 자로 아신왕 3년에 태자가 되었다가 아신왕 6년에 왜국과 결호하고 태자 전지를 질로 보냈는 데 아신왕 14년에 왕이 사망하자 왕의 동생 訓解가 섭정하면서 태자가 돌아오기를 기다렸으나 막내동생 섭례가 훈해를 살해하고 스스로 왕이 되었다. 전지는 왜국에서 훈해 사망 소식을 듣 고 울면서 귀국하기를 청하자 왜왕이 병사 100명을 보내 호위해 보내주었다. 백제의 국경에 다다르자 한성인 해충이 와서 대왕이 세상을 떠나신 후 왕의 동생 례가 해를 죽이고 스스로 왕이 되었으니 원컨대 태자께서는 함부로 들어오시지 마십시오. 라고 고하였다. 支는 倭人 에게 남아서 자신을 지키도록 하고 섬에서 때를 기다렸다. 國人이 례를 죽이고 맞아들여 전지 는 즉위하였다. 日本書紀 應神 8년 3월조에 인용된 百濟記에서는 阿花王이 즉위한 후 貴國에 무례하여 우리의 枕彌多禮 峴南 支侵 谷那 東韓의 땅을 빼앗았으므로 왕자 直支를 天朝에 파견하 여 先王대와 같은 우호관계를 맺었다. 고 하였으며, 應神 16년 시세조에서는 백제에서 阿花 王이 사망하자 천황이 直支를 불러 귀국하여 왕위를 잇도록 하라고 말하고 東韓의 땅을 주어 보냈다. 고 적고 있다. 그리고 應神 39년 2월조에서는 백제 直支王이 그 여동생 新齊都媛으 로 하여금 모시도록 하였으므로 新齊都媛은 일곱 부녀를 이끌고 일본에 왔다. 고 적고 있다. 236) 周王 : 梁書 백제전에서 辰斯王의 이름으로 須(스)가 보이는데 周王은 이를 가리키는 듯하다. 須(스)를 周(스)로 표기한 것인데 이를 林連씨가 가지고 있었을 古記에서 直支王의 다른 이름으 로 적고 있는 것은 林連씨가 진지왕의 이름을 잘못 알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의 후손이다. 飛鳥戶造(아스카베노미야츠코)242) 백제국주 比有王243)의 아들 琨伎王244)에서 나왔다. 237) 吳服造 : 吳服이라는 씨명은 백제의 초고왕이 파견한 옷을 직조하는 수공업자를 일컫는 吳服과 관련이 있다. 고사기 응신단에 의하면 백제국 초고왕이 이름이 탁소인 韓鍛과 이름이 西素인 吳服 두 사람의 수공업자를 바쳤다고 한다. 吳服造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38) 阿漏史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39) 宇努造 : 宇奴(우노)라는 씨명은 宇努(우노) 野(우노)로도 표기되는데, 河內國 更荒郡 野 邑과 관련이 있다(佐伯有淸, 1983, 469~470쪽). 宇努造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40) 宇奴首 : 주 180) 참조. 241) 彌那子富意彌 : 주 182) 참조. 242) 飛鳥戶造 : 飛鳥戶라는 씨명은 安宿戶, 安宿이라고도 적는데, 河內國 飛鳥戶(安宿)郡이라는 지 명과 관련이 있다(佐伯有淸, 1983, 470쪽). 주 127) 참조. 243) 比有王 : 주 98) 참조. 244) 琨伎王 : 삼국사기 백제본기 文周王 3년(477) 하4월에 王弟 昆支를 內臣佐平으로 삼았는데, 그해 7월에 昆支가 사망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東城王 즉위전기에서는 동성왕의 諱는 牟大, 혹 은 摩牟인데 文周王의 동생 昆支의 아들이라고 하였다. 일본서기 에서는 昆支를 軍君으로도 표 기하고 있는데 雄略 5년(463) 하4월조에는 그가 일본에 가게 된 이야기가 적혀 있다. 즉 백제의 加須利君(蓋鹵王)이 자신이 일본조정에 파견한 池津媛이 음행을 저질러 불에 타 죽은 것을 듣고 더 이상 여자를 바치지 않기로 하고 그의 동생 軍君(昆支)에게 일본으로 가서 천황을 모시게 하 였다. 軍君은 개로왕의 부인과 동행해 일본으로 가는 것을 조건으로 하여 이에 응하였다. 개로 왕은 임신한 부인을 軍君에게 주면서 도중에 부인이 해산하면 돌려 보내주도록 요구하였다고 한다. 이어서 雄略 5년 6월조에서는 개로왕의 부인이 筑紫의 各羅嶋에서 아이를 낳았으므로, 그 아이 이름을 嶋君이라하고 嶋君을 배로 돌려보냈는데 이가 곧 武寧王이라고 하였다. 그리고 7월 조에서는 軍君이 입경하였는데 이미 다섯 아들이 있었다고 하였다. 昆支는 463년경 일본으로 갔다가 477년 이전에 백제로 돌아갔을 것이다.

239 476 飛鳥戶造(아스카베노미야츠코)245) 백제국 末多王246)의 후손이다. 古市村主(후루치노스구리)247) 백제국 虎王248)에서 나왔다. 上曰佐(카미노오사)249) 백제국인 久爾能古使主(쿠니노코오미)250)에서 나왔다. 和泉國 諸蕃 百濟 新撰姓氏錄 477 六人部連(무토베노무라지)253) 百濟公과 같은 조상이다. 酒王의 후손이다. 錦部連(니시고리노무라지)254) 三善宿 (미요시노스쿠네)255)와 같은 조상이다. 信太首(시노타노오비토)256) 백제국인 百千(하쿠치)257)의 후손이다. 取石造(토로시노미야츠코)258) 백제국인 阿麻意彌(아마키미)259)에서 나왔다. 百濟公(쿠다라노키미)251) 百濟國 酒王(사케노키미)252)에서 나왔다. 245) 飛鳥戶造 : 주 127) 참조. 246) 末多王 : 백제 제24대왕(재위 479~501년). 日本書紀 雄略 21년(477) 3월조에서는 日本舊記 에서 久麻那利를 末多王에게 주었다고 하였는데 이는 틀렸다는 구절이 보인다. 그리고 雄略 23 년(479) 4월조에서는 동성왕의 즉위 과정을 적고 있다. 백제 文斤王이 사망하자 雄略천황이 昆 支王의 다섯 아들 중에서 어려서부터 총명한 末多王을 內裏로 불러 친히 머리를 쓰다듬으며 은 근히 가르침을 주어 그 나라의 왕으로 삼고, 무기를 주고 筑紫國의 군사 500인을 파견하여 호송 하게 하였는데 이가 곧 동성왕이다. 한편 삼국사기 백제본기 東城王 즉위전기에서는 東城王 의 諱는 牟大, 혹은 摩牟라고도 하는데 文周王의 동생 昆支의 아들로 담력이 뛰어나고 활을 잘 쏘아 백방백중이었는데 삼근왕이 사망하자 즉위하였다. 고 적고 있다. 247) 古市村主 : 古市라는 씨명은 河內國 古市郡(현재 大阪府羽曳野市 古市町)과 관련이 있다. 古市 村主씨 일족으로는 古市村主寸食( 大日本古文書 )이 있다. 248) 虎王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49) 上曰佐 : 上(카미)라는 씨명은 河內國 安宿郡 賀美鄕(현재 大阪府 羽曳野市 駒ケ谷 飛鳥)이라 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佐伯有淸, 1983, 478쪽). 上曰佐씨 일족은 山城國 愛宕郡 計帳에 그 이 름들이 보인다( 大日本古文書 ). 250) 久爾能古使主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51) 百濟公 : 백제라는 씨명은 백제국과 관련이 있다. 백제공씨는 여러 종류의 백제공씨가 있다. 左 京 諸蕃 下 百濟조의 百濟公씨는 백제의 都慕王의 24세손 汶淵王의 후손이라고 하며(주 27) 참 조), 右京 諸蕃 下 百濟조의 百濟公씨는 鬼室씨의 후손이다(주 84) 참조). 百濟公씨 일족으로는 百濟君(公)刀自古와 百濟公豊貞(이상 續日本紀 )이 보인다. 252) 酒王 : 주 146) 참조. 253) 六人部連 : 六人部라는 씨명은 身人部(미토베)라고도 표기하는데, 이 씨족이 육인부의 반조씨족 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육인부가 어떤 성격의 품부였는지는 확실하지 않다(佐伯有淸, 1983(b), 16쪽). 六人部씨 일족은 續日本紀 類聚國史 續日本後紀 등에 그 이름이 보인다. 254) 錦部連 : 錦部라는 씨명은 錦織이라고도 표기하는데, 이 씨족이 錦을 직조하는 品部인 錦部(錦 織部)를 관할하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주 224) 참조). 255) 三善宿 : 주 71) 참조. 256) 信太首 : 信太라는 씨명은 和泉國 和泉郡 信太鄕(현재 大阪府 和泉市 王子町 信太일대)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이 씨족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57) 百千 : 백천(하쿠치)에 대해 佐伯有淸은 日本書紀 神功攝政 62년조에 인용된 百濟記의 加羅國 王 己本旱岐의 아들 百久至(하쿠쿠치)와 동일인일 가능성을 제시하였다(佐伯有淸, 1983(2), 18 쪽). 258) 取石造 : 取石(토로시)이라는 씨명은 續日本紀 神龜 원년(724) 10월 정미조에 行還至和泉國 所石頓宮 에 보이는 所石(和泉國 和泉郡 信太鄕, 현재 大阪府 和泉市 王子町 부근)과 관련이 있 다(佐伯有淸, 1983(2), 18쪽). 萬葉集 권10의 2166번가에는 取石池라는 말이 나오는데 이것 도 和泉市 王子町 부근의 저수지이다. 取石造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日本書紀 景行 27 년 12월조에는 熊襲魁帥로 取石鹿文이 보인다. 259) 阿麻意彌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60) 葦屋村主 : 葦屋이라는 씨명은 攝津國 原郡 葦屋鄕(현대 兵庫縣 芦屋市)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촌주는 이 지역에 배치된 葦屋漢人을 관장하는 임무를 맡았던 사람임을 가리키는 칭호가 姓으로 변한 것이다(佐伯有淸, 1983(b), 19쪽). 葦屋村主 일족으로는 葦屋主寸淨賣( 大日本古文

240 478 葦屋村主(아시야노스구리)260) 백제 意寶荷羅支王(오오카라시오우)261)에서 나왔다. 村主(스구리)262) 葦屋村主와 같은 조상이다. 大根使主(오오네오미)263)의 후손이다. 衣縫(키누누이)264) 백제국 神露命(카무로노미코토)265)에서 나왔다. 新撰姓氏錄 百濟氏(쿠다라시)268) 백제국 牟利加佐王(무리카사오우)269)의 후손이다. 朝戶(아사헤)270) 백제국인 胸廣使主 朝戶(무네히로노오미아사헤)271)의 후손이다. 足奈(스쿠나)272) 백제국인 종7위하 足奈眞己(스쿠나노마코)273)의 후손이다. 未定雜姓 右京 左京 호良公(테라노키미)274) 池上 人(이케노헤노쿠라히토)266) 渟中倉太珠敷天皇(시호 敏達)의 손자 百濟王267)의 후손이다. 479 백제국주 意里都解275)의 4세손 秦羅君276)의 후손이다. 堅祖氏(케무소시)277) 백제국인 堅祖爲智(케무소이치)278)의 후손이다. 書 ) 葦屋村主刀自賣( 續日本紀 )가 보인다. 261) 意寶荷羅支王 : 주 207) 참조. 262) 村主 : 주 205) 참조. 村主씨 일족으로는 和泉國人 陵戶 村主黑人( 日本後紀 )가 보인다. 263) 大根使主 : 左京 諸蕃 下 百濟조의 沙田史의 조상 意保尼王과 동일인으로 여겨지고 있다(주 49) 참조). 264) 衣縫 : 衣縫이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의복을 만드는 일을 담당한 衣縫(部)의 반조씨족, 또는 그 부민의 후예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日本書紀 應神 14년 2월조에 백제왕이 縫衣工女 眞毛津을 바쳤는데, 그가 今來目衣縫의 시조라고 하였다. 衣縫씨 일족으로는 衣縫牛甘( 大日本 古文書 ) 衣縫大市( 正倉院寶物銘文集成 )이 있다. 265) 神露命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神露(카무로)는 백제인명일 가능성이 크다(佐伯有 淸, 1983(b), 21쪽). 266) 池上 人 : 池上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十市郡 池上鄕(현재 奈良縣 櫻井市 安倍, 香久山 일대)이 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池上 人씨 일족으로는 池上 人大成, 池上 人淨浜古(이상 寧樂遺 文 )가 있다. 267) 渟中倉太珠敷天皇(시호 敏達)의 손자 百濟王 : 주 1) 참조. 268) 百濟氏 : 姓을 가지지 않은 百濟씨로는 朱鳥 원년(686) 1월 초 궁정에서 연회를 베풀었을 때 천 무천황에게 白瑪瑙를 바친 攝津國人 百濟新興이 있다( 日本書紀 朱鳥 원년 춘정월 임인삭 계 묘조). 269) 牟利加佐王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70) 朝戶 : 朝戶라는 씨명은 朝(肥後國 益城郡 麻部)라는 곳에 편호된 도래족 집단의 일원에게 주어 진 것으로 여겨진다(佐伯有淸, 1983(b), 33쪽). 朝戶씨 일족으로는 朝戶諸公, 朝戶小津(이상 大日本古文書 ), 慈寶(俗姓 朝戶씨, 日本後紀 元亨釋書 ) 등이 있다. 271) 胸廣使主 朝戶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72) 足奈 : 백제에서 가지고 있던 씨명으로 여겨지고 있다(栗田寬, 1900, 1352쪽). 足奈씨 일족으로 는 足奈眞己 이외에 足奈太須, 足奈公万足(이상 大日本古文書 )이 보인다. 273) 足奈眞己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74) 良公 : 良(테라)라는 씨명은 寺라고도 쓴다. 이러한 씨명을 가지게 된 것은 佛寺를 관할하는 治 部省 玄蕃寮의 전신인 寺人의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良公씨는 더 이상 보 이지 않는다. 275) 意里都解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76) 秦羅君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77) 堅祖氏 : 堅祖라는 씨명은 백제에서 가지고 있던 씨명일 것으로 여겨진다. 藤原宮 출토 목간( 藤 原宮木簡, 2~68쪽)에 보이는 堅口 는 堅祖씨일 가능성이 크다. 우경 제번 백제의 谷造의 조상으로 백제국인 堅祖州耳가 보인다. 이들 이외의 堅祖氏는 보이지 않는다. 278) 堅祖爲智 :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41 480 新撰姓氏錄 古氏(코시)279) 백제국인 481 河內國 率280) 古都助(코츠죠)281)의 후손이다. 加羅氏(가라시)282) 백제국인 都玖君(츠쿠노키미)283)의 후손이다. 吳氏(고시)284) 백제국인 德率285) 吳伎側(고키소쿠)286)의 후손이다. 山城國 廣幡公(히로하타노키미)287) 백제국 津王288)의 후손이다. 279) 古氏 : 古라는 씨명은 백제에서 가지고 있던 씨명으로 여겨진다(佐伯有淸, 1983(2), 52쪽). 古氏 는 未定雜姓 和泉國조에도 보인다. 古氏 일족으로는 古都助 이외에 古牛甘 大日本古文書 ( )이 있다. 280) 率 : 백제 16관위 중에서 제5위. 281) 古都助 :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82) 加羅氏 : 加羅라는 시명은 加羅國이라는 국명과 관련이 있다. 加羅는 甘良 賀良으로도 표기되었 다. 續日本紀 天平寶字 5년(761) 3월 경자조에 백제인 甘良東人 등 3명에게 淸篠連이라는 씨 성을 사성하고 한다. 그런데 新撰姓氏錄 未定 雜姓 河內國조에 보이는 賀良姓씨는 신라국 郞 子王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이는 加羅國이 멸망한 후 신라에 편입된 사람과 백제로 망명한 사람 이 있었기 때문이다. 加羅氏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83) 都玖君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84) 吳氏 : 吳라는 씨명은 백제에서 가지고 있던 씨명이다. 吳氏는 일본에서 吉士로 불리우다가 白 雉 5년(654)에는 吉士 長丹이 당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많은 문서와 보물을 받아 돌아온 공로로 200호의 봉호를 받고 吳氏를 새로 받게 되었다. 吉士 長丹 이외에 吳氏는 보이지 않는다. 285) 德率 : 백제 16관위 중에서 제4위. 286) 吳伎側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87) 廣幡公 : 廣幡이라는 씨명은 美稱이라고 하는 佐伯有淸(佐伯有淸, 1983(2), 70쪽)의 견해가 있 다. 日本三代實錄 貞觀 5년(863) 5월 22일 갑신조에서 더러운 곳에서 가까워 山城國의 廣幡 神과 田中神을 愛宕郡 伊佐彌里로 옮기도록 하였다. 山城國 愛宕郡 計帳에 호주 秦人 廣幡石足 이 보여 廣幡公은 원래 秦人 廣幡씨였을 것으로 여겨진다(佐伯有淸, 1983(b), 71~72쪽). 廣幡 公씨 일족으로는 廣幡君大名, 廣幡君息嶋, 廣幡君家主女(이상 大日本古文書 )가 있다. 大友史(오오토모노후히토)289) 백제국인 白猪奈世(시라이노나세)290)의 후손이다. 船子首(후나코노오비토)291) 백제국인 久爾君(쿠니노키미)292)의 후손이다. 新木首(니이키노오비토)293) 백제국인 伊居留君(이케루노키미)294)의 후손이다. 豊村造(토요무라노미야츠코)295) 백제국인 德率296) 古曾父佐(코소후사)297)의 후손이다. 288) 津王 : 梁書 백제전에 의하면 문주왕의 이름이 都라고 하였는데, 고대 일본에서 都(츠)와 津 (츠)는 모두 같은 음을 나타내므로 津王은 문주왕을 가리킨다. 左京 諸蕃 下 百濟조의 百濟公은 汶淵王의 후손이라고 하였는데 이 문연왕은 문주왕을 가리킨다(주 27) 참조). 289) 大友史 : 大友라는 씨명은 近江國 滋賀縣 大友鄕(滋賀縣 大津市 坂本 부근)이라는 지명과 관련 이 있다. 大友史씨는 續日本紀 天平 15년(743) 9월 기유조에 官奴 斐太를 良人으로 만들어 大 友史라는 씨성을 주었다는 기사에 보인다. 大友史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90) 白猪奈世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白猪는 日本書紀 欽明 16년(556) 7월 임오조에 보이는 白猪屯倉(岡山縣 眞庭郡 동부)과 관련이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291) 船子首 : 船子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배의 노를 젓는 일을 하던 舟子의 伴造씨족이었던 것과 관 련이 있다. 船子首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92) 久爾君 : 久爾君은 河內國 諸蕃 백제 上曰佐씨의 조상 久爾能古使主와 동일인으로 여겨진다. 293) 新木首 : 新木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添下郡 新木村(현재 奈良縣 大和郡山市 新木町)이라는 지명 과 관련이 있다. 新木首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94) 伊居留君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95) 豊村造 : 豊村이라는 씨명은 지명으로 여겨지지만 어느 곳인지 알 수 없다. 豊村造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96) 德率 : 덕솔은 백제 16관위 중에 제4위다. 297) 古曾父佐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42 482 新撰姓氏錄 八??部(야마타베)298) 483 쿠), 7姓의 漢人(아야히토) 등을 이끌고 귀화하였다.306) 백제국인 多地多祁卿(타치타케쿄우)299)의 후손이다. 300) 長田使主(오사타노오미) 7姓 중에 첫 번째는 段(단)<*古記에서는 段光公(단구와코우), 字는 富等(후토)라고 하는 데, 員姓이라고도 한다>307)은 高向村主(타카무쿠노스구리),308) 高向史(타카무쿠노후히 백제국인 爲君王(이쿤오우)301)의 후손이다. 舍人(토네리)302) 백제국인 利加志貴王(이카시키오우)303)의 후손이다. 新撰姓氏錄 逸文304) 姓氏錄 제23권에서 말하기를305) 阿智王(아치노오우)은 譽田天皇(호무다노스메라미코 토)<*시호는 應神>치세에 본국의 난을 피하여 어머니와 처자 및 동생 遷興德(센코우토 298) 八??部 : 八??部(야마타베)라는 씨명은 山田史(야마타노후히토)의 部曲이었던 것과 관련있다는 설이 있다(太田亮, 姓氏家系大辭典 제3권 八 部항, 6319쪽). 팔 부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99) 多地多祁卿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00) 長田使主 : 長田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若江郡 楠根村 大字長田(현재 大阪府 東大阪市 楠根町 長 田)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長田使主씨 일족으로는 長田使主淨浜( 大日本古文書 )이 있다. 301) 爲君王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02) 舍人 : 舍人(토네리)이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궁정에서 천황이나 황족에게 近侍하면서 호위하던 舍人이라는 직책을 가지고 있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舍人씨 일족으로는 舍人眞万呂, 舍人 (이 상 大日本古文書 ) 등이 있다. 303) 利加志貴王 : 이 이름은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04) 新撰姓氏錄 逸文 : 현존하는 新撰姓氏錄 은 원형 그대로가 아니라 14세기 이후의 抄錄本이다. 그러나 다른 책에`姓氏錄云a `姓氏錄曰a 이라는 형태로 인용되어 있거나 씨족들이 가지고 있는 新撰姓氏錄 의 殘簡이 남아 있다. 이 逸文은 新撰姓氏錄 이 편찬된 시기의 원문의 형태를 짐작 하게 할 수 있는 것으로 의미가 크다. 佐伯有淸은 栗田寬, 新撰姓氏錄考證 ; 和田英松, 國書逸 文 ; 田中卓, 新撰姓氏錄の基礎硏究 ; 古典保存會, 新撰姓氏錄抄錄 등을 참조하여`新撰姓 氏錄逸文a 을 작성하고 이에 대한 고증을 하였다(佐伯有淸, 1962, 新撰姓氏錄の硏究 本文篇 ; 1983(b), 195~328쪽). 본 주석 작업도 佐伯有淸의 연구(佐伯有淸, 1983(b))를 기초로 하였다. 305) 姓氏錄 말하기를 : 이 逸文은 新撰姓氏錄 제23권 右京 諸蕃 上 坂上大宿 조의 坂上系 圖 阿智王조에 인용된 일문이다. 현행 抄本에는 出自後漢靈帝男延王 이라고 나와 있다. 306) 阿智王은 귀화하였다 : 日本書紀 應神 20년 9월조에서 倭漢直祖阿知使主 其子都加使主 竝率其之黨類十七縣而來歸焉 이라고 하였다. 그후 續日本紀 寶龜 3년(772) 하4월 경오조에 서 정4위하 近衛員外中將 겸 安藝守 勳 2등 坂上大忌寸 田麻呂 등이 檜前忌寸을 高市郡司로 임명하는 이유는 先祖 阿智使主가 輕嶋豊明宮宇馭宇天皇(應神)대에 17縣의 사람을 이끌고 歸化 하자 조서를 내려 高市郡 檜前村에 살게 하였기 때문입니다. 高市郡에는 檜前忌寸과 17縣의 사 람으로 가득차게 되어 다른 姓의 사람은 열 중에서 한 두명이 되었습니다. 라고 하였다고 한다. 이를 통해 阿知使主(阿智使主)와 함께 일본에 간 사람들이 高市郡 檜前村에 거주하였음을 알 수 있다. 나아가 續日本紀 延曆 4년(785) 6월 계유조에서는 右衛士督 종3위 겸 下總守이 된 坂上 大忌寸 田麻呂 등이 상표하여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고 한다. 신등은 원래는 후한 靈帝의 증손 阿智王의 후손입니다. 漢이 魏로 바뀌던 때 阿智王은 신령한 소의 가르침에 따라 帶方으로 가서 곧 상서로운 寶帶를 얻었는데 그 모습이 궁성과 닮았으므로 국읍을 세워 사람들을 길렀습니다. 뒤에 [아지왕이] 父兄을 불러서 東國에 聖主가 있다고 들었 는데, 어찌 귀의하지 않겠는가? 만약 이곳에 오래 있으면 멸망할까 두렵다고 이야기하고, 어머 니와 동생 遷興德과 7姓의 백성을 데리고 歸化하여 來朝하였는데 이것이 譽田천황대였습니다. 阿智王은 자신이 살던 곳은 帶方인데, 인민은 남녀가 모두 才藝가 있지만, 최근에는 백제와 고 구려 사이에서 살면서 마음 속에 망설임이 있어 어찌 할지 모르고 있다고 하면서 은혜를 베풀어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와 달라고 [천황에게] 상주하였습니다. 그 인민 남녀는 마을 사람 모두 사 신을 따라 와서 公民이 되어 대대로 지금까지 이어졌습니다. 지금 諸國에 있는 漢人들이 그 후 손입니다. 臣 田麻呂 등은 조상이 왕족이었지만 下人과 같은 卑姓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라옵건 대 忌寸을 고쳐 宿 姓을 내려주십시오. 천자께서 은혜로써 잘 살피셔서 은혜를 베푸시기를 엎 드려 바라옵니다. 만약 천자께서 허락해 주신다면 꺼진 재도 다시 불붙고 마른 나뭇가지도 다시 푸르게 되는 것과 같을 것입니다. 신 麻呂 등은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진심을 감출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상표문을 받들어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여기에서는 阿知使主가 후한 靈帝의 증손이라며 왕족 출신임을 강조하면서 帶方지역에서 일본 으로 건너왔다고 주장하고 있다. 307) 段 :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漢의 郡首조에 의하면 郡首씨의 조상은 段姓夫公, 일명 富等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段光公은 段夫公을 잘못 베낀 것일 가능성이 크다. 富等은 右京 諸蕃 下 漢 조의 雲梯連의 조상 宗寶德公, 山城國 諸蕃 漢조의 民使首씨의 조상 寶德公, 未定雜姓 山城國의 穴太村主의 조상 曹氏寶德公과 같은 인물이다. 員姓은 曹姓을 잘못 베낀 것일 가능성이 크다(佐 伯有淸, 1983(b), 245쪽). 308) 高向村主 :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漢조에서는 高向村主가 魏武帝의 태자 文帝에게서 나왔 다고 하였다. 高向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錦織郡 錦部鄕 高向村(현재 大阪府 河內長野市 高向)이 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243 484 新撰姓氏錄 485 토),309) 高向調使(타카무쿠노츠키츠카이),310) 評首(코호리노오비토),311) 民使主首(미타미츠 츠카히)322) 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카이노이비토)312) 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李姓(리세이)313)으로 刑部史(오사카베노후히 (우다노코호리),324) 佐波多村主(사하타노스구리),325) 長幡部(나가하타베)326) 등의 조상이 토)314)의 조상이다. 다음은 다. 다음은 高姓(카우세이)327)으로 檜前村主(히노쿠마노스구리)328)의 조상이다. 郭姓(사우구와쿠세이)315)으로 坂合部首(사카이베노오비 姓(사우세이)323)으로 大和國(야마토노쿠니), 宇太郡 토),316) 佐大首(사타노오비토)317) 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朱姓(슈세이)318)으로 小市(오치),319) 천황이 그 온 뜻을 긍휼히 여겨 阿智王을 使主(오미)로 칭하였고 大和國 檜 (히노쿠마) 佐奈宜(사나게)320) 등의 조상이다. 다음은 多姓(타세이)321)으로 檜前調使(히노쿠마노츠키 의 郡鄕을 주어 살게 하였다.329) 그 때에 阿智使主가 상주하기를 신이 입조할 때에 本鄕의 人民이 이산하였는데, 지금 듣기를 高麗 百濟 新羅 등의 나라에 흩어져 있다고 합니 다.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 오도록 하시기를 바랍니다. 천황이 곧 사신을 파견하여 불러들 309) 高向史 : 高向史의 옛 성은 漢人이다. 日本書紀 에 의하면 推古 16년(608) 당의 사신 裵世淸이 당으로 돌아갈 때에 小野妹子臣을 大使로 당에 파견하였는데, 이 때 함께 파견된 유학생 8명 중 에 한명으로 高向漢人玄理가 있다. 玄理는 귀국한 후 皇極 4년(645)에는 國博士 高向史玄理로 등장하므로 그 사이 史를 姓으로 받았음을 알 수 있다. 310) 高向調使 : 高向調使라는 이름에서 高向은 이들의 근거지 지명과 관련이 있고 調使는 이 씨족이 징세를 담당한 것과 관련이 있다. 311) 評首 : 郡首와 같다.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下 漢條에서 郡首씨는 高向村主와 같은 조상을 가 지고 있는데 寶德公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312) 民使主首 : 民使首와 같다. 新撰姓氏錄 山城國 諸蕃 漢條에서 民使首씨는 高向村主와 같은 조 상을 가지고 있는데 寶德公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313) 李姓 : 舊唐書 宰相世系表에서 이씨는 姓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314) 刑部史 : 刑部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允恭 皇后의 名代部였던 刑部의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 이 있다. 新撰姓氏錄 攝津國 諸蕃 漢條의 刑部造는 吳國人 李牟意彌에게서 나왔다고 하는데, 刑部史씨와 동족으로 여겨진다. 315) 郭姓 : 이 姓에 대해서는 알 수 없다. 316) 坂合部首 : 坂合部라는 씨명은 境部 堺部라고도 표기하는데, 이 씨족이 경계를 정하는 일을 담 당하였던 坂合部의 반조씨족이었던 것과 관련이 있다. 攝津國 皇別 坂合部條에서는 坂合部씨가 윤공천황대에 나라의 경계 표지를 세우는 일을 담당하였으므로 坂合部連이라는 씨성을 사여받 았다고 적고 있다. 大和國 皇別에도 坂合部首가 보이는데, 여기에서는 阿倍朝臣과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는데 大彦命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317) 佐大首 : 佐大라는 씨명은 佐太라고도 표기되는데, 河內國 茨田郡 佐太鄕(大阪府 守口市 佐太 일 대)과 관련이 있다. 佐大首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18) 朱姓 : 朱姓에 대해서는 5帝의 한 사람 頊의 후예가 周대에 國(山東省 鄒縣 동남부)에 봉해 졌다는 전설이 있다. 319) 小市 : 小市(오치)라는 씨명은 越智(오치)라고도 표기하는데, 大和國 高市郡 越智邑(현재 奈良縣 高市郡 高取町 越智)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320) 佐奈宜 : 佐奈宜라는 씨명은 河內國 若江郡 佐奈宜里(현재 大阪府 八尾市 涉川 부근)와 관련이 있다. 佐奈宜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였다.330) 大 (오호사자키) 천황(시호 仁德) 치세에 무리를 이루어 왔다. 지금의 高向村主 (타카무카노스구리),331) 西波多村主(가후치노하타노스구리),332) 平方村主(히라카타노스구 321) 多姓 : 이 姓에 대해서는 자세한 것을 알 수 없다. 322) 檜前調使 : 씨명 중에서 檜前은 大和國 高市郡 檜前鄕(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檜前 일대) 과 관련이 있다. 調使는 이 씨족이 징세를 담당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323) 姓 : 중국의 24史에서 姓을 가진 사람은 明史 권142에 보이는 旗張이 유일하다고 한다. 324) 大和國 宇太郡 : 현재 奈良縣 宇陀郡. 325) 佐波多村主 : 佐波多라는 씨명은 大和國 宇 郡 篠幡庄(현재 奈良縣 宇陀郡 榛原町 幡)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佐波多村主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26) 長幡部 : 長幡部라는 씨명은 常陸國風土記 久慈郡조에 보이는 長幡部의 먼 조상 多호이 긴 옷 감을 짰다는 전승과 관련이 있다. 長幡部는 常陸國을 비롯해 여러 지역에 있었다. 327) 高姓 : 周代에 齊의 呂尙의 자손이 高(현재 山東省 禹城縣 서남부)에 봉해져 高姓을 가지게 되었 다는 전설이 있다. 328) 檜前村主 : 檜前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高市郡 檜前鄕(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 檜前 일대) 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上의 檜前村主條존에서는 漢高祖의 아들 齊王肥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329) 천황이 살게 하였다 : 이와 같은 내용은 古事記 나 日本書紀 에는 보이지 않는다. 續日 本紀 寶龜 3년(772) 하4월 경오조에서 阿智使主가 十七縣의 사람들을 이끌고 歸化해오자 응신 천황이 高市郡 檜前村에 살게 하였다고 하였다. 330) 그 때에 불러들였다 : 위에서 인용한 續日本紀 延曆 4년(785) 6월 계유조에서는 阿智王 의 인민을 불러들인 것이 응신천황대로 되어 있다(주 293) 참조). 331) 高向村主 : 주 308) 참조. 332) 西波多村主 : 西波多라는 씨명은 河內國 茨田郡 幡多鄕(현재 大阪府 寢屋川市 秦 大秦)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西波多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44 486 新撰姓氏錄 487 리),333) 石村村主(이하래노스구리),334) 飽波村主(아쿠나미노스구리),335) 危寸村主(토노키노 스구리),344) 錦部村主(니시고리노스구리),345) 田村村主(타무라노스구리),346) 忍海村主(오시 스구리),336) 長野村主(나가노노스구리),337) 加村主(히카노스구리),338) 茅沼山村主(치누노 누미노스구리),347) 佐味村主(사비노스구리),348) 桑原村主(구하하라노스구리),349) 白鳥村主 야마노스구리),339) 高宮村主(타카미야노스구리),340) 大石村主(오호이시노스구리),341) 飛鳥 (시라토리노스구리),350) 額田村主(누카타노스구리),351) 牟佐村主(무사노스구리),352) 甲賀村 村主(아스카노스구리),342) 西大友村主(가후치노오호토모노스구리),343) 長田村主(나가타노 主(카후카노스구리),353) 鞍作村主(쿠라츠쿠리노스구리),354) 播磨村主(하리마노스구리),355) 333) 平方村主 : 平方이라는 지명은 河內國 茨田郡 枚方邑(현재 大阪府 枚方市 枚方)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平方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34) 石村村主 : 石村이라는 씨명은 磐餘라고도 표기하는데 大和國 十市郡 磐餘村(현재 奈良縣 櫻井 市 중부, 原市 동남부 일대)과 관련이 있다. 續日本紀 에 의하면 石村村主씨 중에서 石楯과 押繩 등은 天平神護 元年(765) 4월에 坂上忌寸이라는 씨성을 새로 받았다. 335) 飽波村主 : 飽波라는 씨명은 大和國 平群郡 飽波鄕(현재 奈良縣 生駒郡 安堵村)과 관련이 있다. 飽波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36) 危寸村主 : 危村이라는 씨명은 兎村의 誤寫일 가능성이 크다. 兎村이라는 씨명은 和泉國은 大鳥 郡 等乃伎(현재 大阪府 高石市 富木)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危寸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37) 長野村主 : 長野라는 씨명은 河內國 志紀郡 長野鄕(현재 大阪府 藤井寺市 長野)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長野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38) 加村主 : 加라는 씨명은 大和國 葛上郡 避箇(현재 奈良縣 御所市 大字朝妻)라는 지명과 관 련이 있다. 加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39) 茅沼山村主 : 茅沼山라는 씨명은 日本書紀 安閑 원년(531) 10월 갑자조의 茅渟山屯倉이 있었 던 茅渟山(현재 大阪府 泉佐野市 上之鄕 부근)이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茅沼山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40) 高宮村主 : 高宮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葛上郡 高宮鄕(현재 奈良縣 御所市 大字 西佐味 부근)이 라는 지명과 관련이 있다. 高宮村主씨 중에서 高宮村主田使, 高宮村主眞木山은 延曆 3년(784) 에 春原連이라는 씨성을 새로 사여받은 후 다시 延曆 4년(785)에는 高村忌寸이라는 씨성을 사 여받았으며, 弘仁 2년(811)에는 宿 姓을 새로 받아 高村宿 가 되었다. 341) 大石村主 : 大石이라는 씨명은 近江國 栗太郡 大石(현재 滋賀縣 大津市 大石中)이라는 지명과 관 련이 있다. 大石村主씨 일족으로 百嶋 養賣 廣椅賣 大國 豊國 廣道 廣嶋 大鯖 眞人 諸甘 男足 折 且山 등이 續日本紀 大日本古文書 寧樂遺文 平安遺文 등에 보 인다. 이들 중에서 大石村主男足은 延曆 2년(783) 大山忌寸이라는 씨성을 새로 사여받았다. 342) 飛鳥村主 : 飛鳥라는 씨명은 大和國 高市郡 飛鳥(현재 奈良縣 高市郡 明日香村)와 관련이 있다. 飛鳥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43) 西大友村主 : 西大友라는 씨명은 河內國 石川郡 大伴村(현재 大阪府 富田林市 北大伴과 南大伴) 과 관련이 있다. 西大友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44) 長田村主 : 長田이라는 씨명은 攝津國 八部郡 長田鄕(현재 兵庫縣 神戶市 長田區)과 관련이 있 다. 長田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45) 錦部村主 : 錦部라는 씨명은 河內國의 錦部郡 錦部鄕(현재 大阪府 富田林市 二十山 부근) 若江 郡 錦部鄕( 현재 大阪府 八尾市 西郡, 河內市 若江) 등과 관련이 있다. 錦部村主씨는 錦綾을 직 조하는 공인집단인 錦部를 관장하는 업무를 담당한 씨족이었다. 錦部村主씨 일족으로 石勝 稻 手丸 藥麻呂 人勝麻呂 人勝 三田 特萬呂 등이 大日本古文書 平安遺文 類聚國 史 續日本後紀 日本三代實錄 에 보인다. 新撰姓氏錄 山城國 諸蕃에서는 錦部村主씨가 波能志(하노시)의 후손이라고 하였다. 346) 田村村主 : 田村이라는 씨명은 河內國 丹比郡 田邑鄕主(현재 大阪府 南河內郡 美原町 菅生 부 근)와 관련이 있다. 田村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47) 忍海村主 : 忍海라는 씨명은 大和國村 忍海郡(현재 奈良縣 南葛城郡의 일부)과 관련이 있다. 忍 海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48) 佐味村主 : 佐味라는 씨명은 日本書紀 神功攝政 5년 3월 기유조에 보이는 佐 邑, 大和國 葛 上郡 佐味邑村(현재 奈良縣 御所市主 葛城 佐味)과 관련이 있다. 佐味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49) 桑原村主 : 桑原라는 씨명은 日本書紀 神功攝政 5년 3월 기유조의 桑原邑, 大和國 葛上郡 桑 原鄕(현재 奈良縣 御所市村 掖上)과 관련이 있다. 桑原村主는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上에서는 漢 高祖의 7세손 萬德使主에게서 나왔다고 하였다. 350) 白鳥村主 : 白鳥라는 씨명은 河內國 高市郡 白鳥(大阪府 羽曳野市 古市町 부근)와 관련이 있다. 白鳥村主씨 일족으로는 頭麻呂 馬人 牛養 元麻呂 茂智 등이 續日本紀 日本紀略 類聚國史 등에 보인다. 이들 중에서 馬人은 神護景雲 3년(769)에 白原連이라는 새로운 씨성 을 사여받았고, 茂智 는 天長 원년(824)이후 天長 10년(833) 이전의 어느 시기엔가 長岑宿 라는 새로운 씨성을 사여받았다. 351) 額田村主 : 額田이라는 씨명은 大和國 平群郡 額田鄕村(현재 奈良縣 大和群山市 額田部村 北 町 寺町 南町 일대)과 관련이 있다. 新撰姓氏錄 大和國 諸蕃 漢條에서는 額田村主가 吳國 사람 天國古(아마쿠니노코)에서 나왔다고 하였다. 352) 牟佐村主 : 牟佐라는 씨명은 身狹으로도 표기되는데 大和國 高市郡 牟佐(현재 奈良縣 原市 見 瀨)와 관련이 있다. 牟佐村主씨 일족으로는 靑, 相摸 등이 日本書紀 와 續日本紀 에 보인다. 新撰姓氏錄 左京 諸蕃 下 漢條에서는 牟佐村主가 吳 孫權의 아들 高에게서 나왔다고 하였다. 353) 甲賀村主 : 甲賀라는 씨명은 河內國 讚良郡 甲可鄕(현재 大阪府 四條 市 甲可)과 관련이 있다. 甲賀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245 488 新撰姓氏錄 489 漢人村主(아야히토노스구리),356) 今來村主(이마키노스구리),357) 石寸村主(이하키노스구 姓氏錄에 말하기를366) 阿智使主(아치노오미)의 아들 都賀使主(츠카노오미)367)가 大泊瀨 리),358) 金作村主(카나추쿠리노스구리),359) 尾張吹角村主(오하리노후에노스구리)360) 등이 稚武天皇(오오하츠세와카타케노스메라미코토)<*시호 雄略>치세에 使主를 고쳐 直姓을 361) 그 후손이다. 그때 阿智王이 상주하여 今來郡(이마키노코호리)362)을 세웠는데 뒤에 高市郡(타케치노 고호리)으로 고쳤다.363) 그리고 사람이 많아져 사는 곳이 좁아져 다시 諸國에 분치하였는 데 攝津 參河(미카와) 近江(오우미) 播磨 阿波(아하)364) 등의 漢人村主(아야히토노스 구리)가 이것이다.365) 354) 鞍作村主 : 鞍作라는 씨명은 河內國 涉川郡村 鞍作(현재 大阪市村 東住吉區 加美 鞍作町主)과 관련이 있다. 鞍作村主씨 일족으로는 司馬達等 益人 玉 賣 등이 日本書紀 萬葉集 大 日本古文書 등에 보인다. 355) 播磨村主 : 播磨라는 씨명은 播磨國(현재 兵庫縣主 일부)과 관련이 있다. 播磨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56) 漢人村主 : 漢人이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한반도에서 도래한 기술자 집단인 漢人을 통솔하는 업 무를 담당하였던 것과 관련이 있다. 漢人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57) 今來村主 : 今來라는 씨명은 大和國 今來郡(뒤에 高市郡으로 바뀜, 현재 奈良縣 高市郡)과 관련 이 있다. 今來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58) 石寸村主 : 石寸이라는 씨명은 石城 磐城으로도 표기되는데, 近江國 栗太郡에 磐城이 있었을 것으로 추측되고 있다(1965, 日本古典文學大系 日本書紀 下, 岩波書店, 362쪽). 359) 金作村主 : 金作이라는 씨명은 이 씨족이 金工기술자 집단인 漢人의 통솔자였던 것과 관련이 있 다. 金作村主씨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360) 尾張吹角村主 : 尾張吹角이라는 씨명은 尾張國(현재 愛知縣)이나, 河內國 安宿郡村 尾張鄕(현재 大阪府 柏原市 國分 부근)과 관련이 있다. 이 지역에 거주하고 있던 吹角工 집단 漢人의 통솔자 였을 가능성이 있다(佐伯有淸, 1983(2), 263쪽). 361) 지금의 후손이다 : 여기에 나열된 30씨는 모두 村主라는 姓을 가지고 있는데 關晃은 이들을 여러 종류의 漢部 집단을 이끌던 長이었을 것으로 보았다(關晃, 1953,`倭漢氏の硏究a, 史學雜 誌 62~9, 19쪽). 362) 今來郡 : 日本書紀 欽明 7년 7월조에 倭國 今來郡 이 보임. 뒤에 大和國 高市郡(현재 奈良縣 高市郡)으로 바귐. 363) 뒤에 고쳤다 : 日本書紀 欽明 17년 冬10월조에 倭國 高市郡 이 보이지만, 이것이 이 시 기에 今來郡에서 高市郡으로 개칭된 것이라고 볼 수 있는지 확실하지 않다. 364) 阿波 : 阿波國(현재 德島縣). 365) 攝津 이것이다 : 이들 지역의 漢人村主씨에 대해서는 더 이상 보이지 않는다. 받았다.368) 자손은 따라서 이를 姓으로 하였는데, 아들 山木直(야마키노아타이)369)은 장남 핏줄의 조상이고<*본명은 山猪>, 志努直(시누노아타이) <*일명 成努>370)은 중간아들 핏 줄의 조상이고, 다음으로 爾波伎直(니하키노아타이)371)은 동생핏줄의 조상이다. 김은숙(한국교원대학교) 366) 姓氏錄에 말하기를 : 이 逸文은 新撰姓氏錄 右京 諸蕃 上 坂上大宿 조의 坂上系圖 都賀使 主조에 인용된 逸文이다. 367) 都賀使主 : 日本書紀 에서는 都加使主, 東漢直 (야마토노아야노츠카히츠카) 등으로 표기되었 다. 日本書紀 應神 20년 추9월조에서 阿知使主와 그의 아들 都加使主가 자신들의 무리 17현 의 사람들을 이끌고 來歸하였다고 적고 있다. 그후 應神 37년 2월 무오삭조에서는 阿知使主와 都加使主를 吳에 파견하여 縫工女酒를 데려오도록 하였다고 한다. 그리고 雄略 7년(463) 시세 조에서는 천황이 大伴大連室屋에게 조서를 내려 東漢直 에게 新漢陶部高貴 등의 새로 한반도 에서 도래한 기술자들을 大和國에 정착시키는 역할을 맡겼다고 한다. 雄略 23년(479) 8월 경오 삭 병자조에서는 병환이 위중하였던 雄略천황이 大伴大連室屋과 東漢直 에게 遺詔를 내리고 있는 점에서 雄略이 매우 신임하던 신하였음을 알 수 있다. 368) 都賀使主 받았다 : 日本書紀 雄略 16년(472) 동10월조에 조서를 내리기를 漢部를 모으 고 伴造를 정하라 고 하였다. 直을 姓으로 賜하였다<一에 말하기를 賜는 漢使主 등에게 直을 사 성하였다는 것이다>. 라고 적고 있다. 369) 山木直 : 위 逸文 다음에 이어지는 新撰姓氏錄 逸文에서 民忌寸를 비롯한 25씨의 조상으로 나 와 있다. 370) 志努直 : 坂上系圖 別本에서 처음으로 坂上姓을 사여받았다고 적고 있다(佐伯有淸, 1983, 105쪽 참조). 371) 爾波伎直 : 위 逸文 다음에 이어지는 新撰姓氏錄 逸文에서 山口宿 를 비롯한 8씨의 조상으로 나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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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사진 24 _ 종루지 전경(서북에서) 사진 25 _ 종루지 남측기단(동에서) 사진 26 _ 종루지 북측기단(서에서) 사진 27 _ 종루지 1차 건물지 초석 적심석 사진 28 _ 종루지 중심 방형적심 유 사진 29 _ 종루지 동측 계단석 <경루지> 위 치 탑지의 남북중심 하 출 입 시 설 형태 및 특징 제2차 시기 : 건물 4면 중앙에 각각 1개소씩 존재 - 남, 서, 북면의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지의 흔적이 뚜렷이 나타났으며 전면과 측면의 중앙칸에 위치 - 동서 기단 중앙에서는 계단 유인 계단우석( 階 段 隅 石 ) 받침지대석이 발견 - 계단너비는 동측면에서 발견된 계단우석 지대석의 크기와 위치를 근거로 약 2.06m - 면석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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