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교회사 100대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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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랑 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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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세계교회사 100 대사건 세포
2 소개글 과거는오늘이있게한원인이다. 또한내일은오늘에의해결정되어진다. 가톨릭교회의 2000 년역사는어떤의미를담고있을까. 2천년역사속을면면히흐르며과거와오늘을이어주는정신은무엇일까? 과거의역사적사실들은단지역사속의사건에불과할뿐인가? 세계교회사 100대사건-역사의현장을찾아서역사를다시시작하며그의미찾기에나선다 년교회역사가지닌빛나는문화유산은물론 교회사의전체맥락을짚어봄으로써미래교회의모습을정립하는데밑거름으로삼고자한다. 세계교회사 100 대사건은가톨릭신문사가선정했으며 광주가톨릭대학교김희중신부 ( 그레고리안대학교교회사박사 ) 등전문가들이감수했다. < > 가톨릭신문에연재했던내용을시작할무렵부터스크렙해서 모아놓은자료입니다.
3 목차 1 [1] 예수의역사적실재 8 2 [2] 교회의창립 11 3 [3] 초기그리스도교근본정신 14 4 [4] 첫박해와스테파노의순교 17 5 [5] 사울의개종 20 6 [6] 예루살렘사도회의 22 7 [7] 바오로사도의전도여행 24 8 [8] 로마교회의기원 26 9 [9] 베드로, 바오로의순교 [10] 교계제도의기원 [11] 사도시대의교부들 [12] 초기그리스도교호교가 [13] 교부들의황금기 [14] 알렉산드리아교리학교 [15] 초세기교회의이단과분열 [16] 로마제국의박해 [17] 콘스탄티누스의개종 [18] 밀라노관용령과제국교회 [19] 아리우스이단과제1차니체아공의회 [20] 제1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21] 네스토리우스이단과에페소공의회 [22] 강도회의와칼체돈공의회 [23] 삼장서논쟁과제2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24] 예로니모와불가따성서 [25] 아우구스티노신학 62
4 26 [26] 그레고리오대교황의선교와개혁 [27] 수도생활의시작 [28] 서방교회수도원의시작과성베네딕도 [29] 로마와동방교회의수위권문제 [30] 비잔틴교회 [31] 게르만민족의대이동 [32] 프랑크족의개종 [33] 아일랜드, 영국의포교 [34] 이슬람의출현 [35] 교황청과프랑크왕국의제휴 [36] 카알대제와그리스도교적황제권의완성 [37] 교황령의성립과기원 [38] 성화상논쟁과제2차니체아공의회 [39] 카롤링거왕조의멸망과교회의혼란 [40] 오토 1세와신성로마제국 [41] 클뤼니수도원의개혁운동 [42] 그레고리오개혁과서임권논쟁 [43] 보름스정교조약 [44] 동방대이교 [45] 십자군운동 [46] 12세기의청빈운동 [47] 대탁발수도회의탄생 [48] 대학의시작과스콜라학의전성 [49] 성토마스아퀴나스 [50] 인노첸시오 3세와교황의세계지배 116
5 51 [51] 제4차라테란공의회 [52] 종교재판 - 이단심문제도 [53] 교황권의쇠퇴와교서 우남상탐 [54] 아비뇽의교황들 [55] 서구대이교 [56] 콘스탄츠공의회 [57] 위클리프와요한후스 [58] 바젤공의회 [59] 르네상스시대의교황 [60] 인문주의와에라스무스 [61] 루터의 탑실경험 [62] 대사논쟁과루터 [63] 라이프치히토론회 [64] 보름스제국의회 [65] 아우크스부르크제국의회 [66] 츠빈글리와스위스의종교개혁 [67] 칼빈의개혁운동 [68] 헨리 8세와영국의교회분열 [69] 트리엔트공의회 [70] 공의회이후성인시대 [71] 반종교개혁 [72] 지리적발견과식민지포교 [73] 중국선교와적응논쟁 [74] 갈릴레오갈릴레이 [75 ] 아시아선교, 인도와일본 172
6 76 [76] 한국교회창립 [77] 갈리아주의 (Gallicanism) 태동 [78] 에피스코팔리즘 [79] 얀센주의 (Jansenism) [80] 계몽주의와교회 [81] 프랑스혁명과교회 [82] 나폴레옹과교회 [83] 교황령의소멸과바티칸시국 [84] 제1차바티칸공의회 [85] 노동헌장 (Rerum Novarum) 반포 [86] 루르드성모발현 [87] 제1차세계대전과교회 [88] 파티마의성모발현 [89] 한국순교자 79위시복 [90] 교황비오 11세와라테란조약 [91] 전례운동 [92] 제2차세계대전과교회 [93] 제2차바티칸공의회 [94] 한국교회 103위성인시성 [95] 메데인문헌 (Medellin Documets) [96] 남미해방신학의태동 [97] 교황요한바오로 2세 [98] 새교회법반포 [99] 2000년대희년개막 [100] 복자마더데레사수녀 223
7 [1] 예수의역사적실재 :14 - 예수의역사적실재 - 만삭의아내를부축하며달려온것이벌써수백리길. 나자렛사람요셉은머리누일곳이라도찾았으나베들레헴에서방을얻기란하늘의 별따기였다. 임박한출산의다급함때문일까. 요셉과마리아의심신은극도로지쳐있었다. 요행히마굿간에거처를마련한요셉과마리아. 안쓰럽게도그들의출산을어린양치기목동들과하늘의수많은별들만이지켜보고있었다. 그러나누추하고불편하기이를데없는이출산의순간이온인류를구원하실그리스도예수, 수천년동안인류가기다려온메시아가탄생하 는순간이었다. 구세주이신예수그리스도가그렇게한아기의모습으로이세상에모습을드러낸것이다. 한처음천지가창조되기전부터말씀이계셨다. 말씀은하느님과함께계셨고하느님과똑같은분이셨다. 말씀이사람이되셔서우리와 함께계셨는데우리는그분의영광을보았다 ( 요한 1, 1?4). 그것은또 동정녀가잉태하여아들을낳으리니그이름을임마누엘이라하리라 ( 이사 7, 14) 고하신구약의예언이이루어지는순간이었 다. 이몸은주님의종입니다. 주님뜻대로이루어지기를바랍니다 (fiat voluntas tua) 라는성모마리아의고백이결실을맺으며믿는이들 의신앙고백이되는순간이기도했다. 구세주의탄생은역설적이게도이렇게가장소박하고가난하게이루어졌다. 예루살렘에서남쪽으로 8km 쯤떨어진언덕에위치한인구 3 만명의도시베들레헴은이스라엘의두번째임금인다윗이태어나고자란곳이 다. 성서에서예수그리스도의탄생지로묘사된베들레헴은그동안주인과주민이뒤바뀌는역사적소용돌이를겪고지금은아랍인거주지인 상태. 구세주의탄생지로인류역사에일대전환점을이룬역사의현장베들레헴. 이곳에예수성탄성당이있다. 예수성탄성당의입구는말을타고들어와약탈하는것을막기위해길은좁고출입구는두번이나낮추어졌다. 예수성탄성당은현재그리스정교회에서관리하고, 십자군이북쪽에세운가타리나성당은가톨릭이보존하는데, 성탄때 TV 에나오는베들레 헴에서의미사장면은성가타리나성당에서의미사봉헌모습이다. 허리를굽혀좁은입구를따라들어가면아기예수가탄생한바로그자리에 이곳에서예수그리스도동정마리아에게서탄생하셨다 (Hic de Maria Virgine Jesus Christus Natus est) 고라틴어로새겨놓았다. 이곳은예수의탄생이라는역사적실재를확인하고그의미를되새기려는순례자들로연일발디딜틈없이북적댄다. 별자리를보려면보통 몇시간씩줄을서서기다려야한다는데운이좋았다. 순례객사이를비집고들어가무릎을꿇은채예수께서나신곳이라는별자리에친구했 다. 그때의감격이란. [1] 예수의역사적실재 7
8 비천한인간의모습을취하시기까지우리를사랑하시는예수님, 당신을사랑하게하소서 예수의삶의흔적은나자렛에서부터가나 - 갈릴래아호수 - 사마리아 - 예리고 - 예루살렘등지곳곳에베어있다. 이즈르엘평야북쪽에위치한나자렛은예수가유년시절을보냈고공생활전까지요셉과마리아와함께 30 여년을보낸곳이다. 이곳에가브 리엘천사가마리아에게예수잉태를예고해준자리, 곧마리아의집터였다는곳에성모영보성당이아름다운모습으로순례자들을맞고있 다. 나자렛에서 4 마일정도떨어진곳에위치한가나촌. 혼인잔치에서첫번째기적을행하셨다는곳에기적의성당이있다. 지하에보관된돌항아 리들을보는순간 2000 년전혼인잔치에와있는듯감격이밀려든다. 갈릴래아호수는예수의발자취가가장많이묻어있는곳. 예수께서물위를걸어다니는기적을보여주신곳도, 거센풍랑을한마디말씀으 로잠재운곳도바로이곳이다. 갈릴래아호수북서쪽에인접한도시타브가에는예수께서빵다섯개와물고기두마리로 5000 명을먹이셨다는곳에빵의기적성당이서있 고, 산상설교를하셨다는진복팔단산언덕엔진복팔단성당이호수를배경으로아름답게자리잡고있다. 또베드로가부활하신그리스도로부터 내양들을잘돌보라 는명령과함께수위권을받았다는곳에베드로수위권성당이세워져있다. 그리스도교최대의성지예루살렘. 예수의수난죽음과함께그의인간적면모를확연히실감할수있는곳이기도하다. 올리브산정상의주 의기도성당과게세마니동산의고뇌의성당을거쳐예수께서입성하셨다는그길을따라예루살렘으로들어갔다. 예수가사형선고를받고가시관을쓰신빌라도의관저가그대로보존돼있고병사들이예수를매질하고가시관을씌운곳에세운채찍성당은 다시한번순례객들의옷깃을여미게한다. 십자가의길 (Via dolorosa) 기도는골고타언덕까지이어진다. 골고타언덕은원래예루살렘성밖사형집행장이었으나예수의십자가사 건후그리스도교성지가되었다. 이곳에콘스탄티누스황제의어머니헬레나의요청으로주의무덤성당이세워졌다. 성당구내에 10~14 처까지의유적을수용하고있는데예수가십자가에못박혀돌아가신곳 (12 처 ), 예수의시신이내려진곳 (13 처 ), 예수의빈 무덤 (14 처 ) 등을눈으로확인하는순간 2000 년을이어져오는신앙의실재와연속성에전율을느끼지않을수없다. 구약에서예언된메시아가 2000 년전한인간의모습으로탄생하셨다. 그이름은예수였다. 그는 30 여년을살았고당시의가치기준과관행을 깨부수는파격적인언행으로물의 (?) 를일으켰다. 그에게돌아온것은모욕과수난, 그리고십자가형벌이었다. 인간적으로더할수없는패배와좌절, 결국엔죽음까지자초한예수를그리스 도요구원자로고백하는무리가있다. 바로그리스도교신앙인들이다. 예수그리스도의역사적실재는허구도아니요, 그리스도교신앙을정당화하고강화하기위한방편은더더욱아니다. 그의실재는그리스도 교신앙의핵심이며, 우리가나약한이세상삶을이겨내고영원한생명을고대하게하는바탕이자뿌리이다. 그러한예수그리스도가일생을걸고던진가르침은바로사랑과기쁨이다. [1] 예수의역사적실재 8
9 [1] 예수의역사적실재 9
10 [2] 교회의창립 :15 세상끝날까지너희와함께하리라 지난번에서예수의역사적실재에관해성서적전승 ( 傳承 ) 을기초로살펴보았다. 성서학과역사비평학등의발전으로최근까지밝혀진역사의예수는성서와다소차이가있다. 연구결과에따르면예수는최소한기원전 4년이전에나자렛에서탄생했다는의견이지배적이다. 예수는헤로데대왕생존시에탄생했다 ( 마태 2, 루가 1, 5). 그런데헤로데는로마건국 750년, 즉기원전 4년에예리고길트하천변별궁에서병사했다고기록돼있다. 따라서예수의탄생은그보다앞서기원전 6~7 년경인것으로추측하고있다. 루가에의하면예수는티베리오황제치세제 15 년에요한세자 에게침례를받고출가했다 ( 루가 3, 1). 시리아지방역산법에따르면제 15 년은 27 년 10 월 1 일부터 28 년 9 월 30 일까지이다. 그리고예수는 30 년 4 월 7 일금요일에처형됐다는것이 거의확실하다. 그렇다면예수는두해반정도공적으로활동했다는결론이나온다. 이같은차이는복음사가들이객관적으로역사를쓴것이아니라그리스도 인의입장에서예수에대한믿음을적었기때문이다. 이과정에서성서는당시전래되어오던어록 ( 語錄 ) 과사화 ( 史話 ) 등각종사료들의영향을받았을것이다. 사도들의부활체험십자가상죽 음. 예수의일생은그렇게끝이났다. 평소그를스승이요메시아로믿고따랐던제자들의심정은어떠했을까. 한바탕꿈이라도꾼듯허탈해하지않았을까. 생전에스승께서하신 말씀들을떠올리며일말의기대 (?) 를가지면서말이다. 물론성서에이부분에대한자세한이야기는나오지않지만예수의무덤이비었다는소식을전해들은제자들의반응에서우리는당시제자 들의심정을추측해볼수있을것이다. 이말을듣고여자들은예수의말씀이생각나서무덤에서발길을돌려열한제자와그밖의여러사람들에게와서이모든일을알려주었다 그러나사도들은여자들의이야기가부질없는헛소리려니하고믿지않았다 ( 루가 24, 8~911). 지극히인간적인제자들은예수의무덤이 비었고낯선두사람이나타나사람의아들이다시살아나셨다고말했다는여인들의말이도무지믿기지않았을것이다. 신앙이란이런것이다. 사람의오감 ( 五感 ) 에의해모든것이이해되고설명될수있다면 2000 년을이어온가톨릭신앙의위대함이오히려의 문스러울것이다. 그러나하느님은사랑때문에, 기묘한당신의방법으로인간을구원에로이끄신다. 그것은바로죽음에서부활하신예수를당신제자들과사람들에게나타나게하시고, 당신성령을보내셔서교회를세우시는일이었다. 제자 들이부활하신예수를목격한사실은그들에겐일대사건이었다. 그것은곧스승예수의말이이루어졌다는확신이었고이는또예수가그들이고대해왔던메시아임을조금도의심없이확신하게되는순간 이었다. 제자들의놀라움과기쁨은성서에도잘표현되고있다. [2] 교회의창립 10
11 예수께서함께식탁에앉아빵을들어감사의기도를드리신다음그것을떼어나누어주셨다. 그제서야그들은눈이열려예수를알아보았는 데예수의모습은이미사라져보이지않았다. 그들은길에서그분이우리에게말씀하실때나성서를설명해주실때에우리가얼마나뜨거운감동을느꼈던가하고서로말하였다 ( 루가 24, 30~32). 성령강림과교회창립스승예수의부활을체험한사도들의삶은근본적으로뒤바뀌었다. 죽음도물리치신예수그리스도의힘을실제목격한그들에게죽음은이제더이상두려워할것도아니요, 이세상살이의가치는앞으로다 가올영원한생명에비길것이못되었다. 하느님은그렇게사도들을준비시키셨고단련시키셨다. 오순절날. 일단의무리들이한방에모였다. 지난날스승예수와최후의만찬을나누었던바로그곳. 며칠전사도들은예수를배신한유다를 대신해마티아를 12 사도가운데한사람으로뽑았었다. 오순절은유다인들에게가장중요한축일의하나인과월절후열다섯째날을의미한다. 이축제때엔외국에흩어져있던많은유다인들이 예루살렘으로모여든다. 바로그오순절날, 12 사도들과신도들이모여있던방에성령이내리셨다. 성령이내리던순간은예수의부활처럼특이하고드라마틱하다. 갑자기하늘에서세찬바람이부는듯한소리가들려오더니그들이앉아있 던온집안을가득채웠다. 그러자혀같은것들이나타나불길처럼갈라지며각사람위에내렸다 ( 사도 2, 1~3). 놀라운기적도일어났다. 그때예루살렘에는세계각 국에서온경건한유다인들이살고있었다. 그소리가나자많은사람들이몰려들었다. 그리고사도들이말하는것이사람들에게는저마다 자기네지방말로들리므로모두어리둥절해졌다. 이렇게어안이벙벙하여도대체어찌된영문인가하며웅성거렸다 ( 사도 2, 5~12 참조 ). 예수께서부활하신후두번이나나타나신곳, 잡히 시기전날밤제자들과최후의만찬을나누셨고, 오순절에성령이내리셨던바로그방은시온산에있다. 시온 (Zion) 산은유다인과회교도에 겐그들이존경하는다윗왕의무덤이있는곳이며그리스도교인에겐최후만찬의장소이다. 여기에 1 세기경교회를세웠고, 70 년과 135 년예루살렘파괴시에도다행히피해를면했으나 614 년페르시아군침략때파괴되었다가십자군 에의해 12 세기에재건된것이오늘날볼수있는최후의만찬성당이다. 시온산에는또성모마리아가예수의제자들과함께여생을보내다가잠드신곳에세워진성모영면성당도있다. 고대유럽건축양식인아치 식으로지어져, 가운데기둥이벽기둥과연결되어곡선천장을이룬최후의만찬성당. 당신성령을보내시어교회의시작을알리게하신그 장소에두발을딛고섰다. 그때의예수님은성찬례를통해오늘도다시살아나시며, 온갖인간적허점과불완전함을지닌교회도 2 천년간성령의인도를받으며긴순 례의여정을살고있다. 약간은어두컴컴한성당내부를휙둘러보고나오는데당신살과피를내어주시며최후의만찬을거행하신예수님의 사랑과안타까움이느껴져와가슴이뭉클해진다. 초대교회의발전 성령을받은베드로의오순절설교 ( 사도 2, 14~36 참조 ) 는확신에차있었다. 그는말한다바로이예수를하느님께서다시살리셨으며, 우리 는다그증인이다고. 또외친다. [2] 교회의창립 11
12 그러므로이스라엘의온백성은분명히알아두시오. 여러분이십자가에못박아죽인이예수를하느님께서는우리의주님이되게하셨고그 리스도가되게하셨다고. 창조때야훼의입김이들어가생명이탄생한것처럼이제당신성령을보내심으로써제자들의공동체에생명을불어넣었다. 이새로운공동 체는놀라운생명력과능력을받았고, 이로써제자들의작은공동체가새로운하느님의백성으로세상에알려지기시작했다. 베드로의설교 를듣고그날신도가된사람이 3000 명이나되었다고성서는증언하고있다 ( 사도 2, 41). 사도들과초대교회신도들의노력으로교회는날로발전했다. 그것은또코이노니아 ( 친교 ), 기도, 빵의나눔, 사도들의가르침으로요약되는 초대교회공동체의매력때문이기도했다 [2] 교회의창립 12
13 [3] 초기그리스도교근본정신 :16 친교와나눔, 기도생활에전념 예수그리스도께서마지막까지모든것, 살과피까지내어주신골고타언덕에서십자가의길기도를바치면서대희년을사는그리스도인으로 서그리스도께서실천하셨던그삶을얼마만큼실천하면서살수있을지를생각했다. 십자가에못박히신그리스도께서이제다이루었다라고말씀하신것은정말모든것이다끝난것이아니라이제새로운시작임을암시해 주고있었다. 그래서돌아가시기전에우리들에게서로사랑하라는가르침과우리들이서로하나가되기를진심으로기도하셨던예수님의간절한소망을 생활속에서얼마만큼약속을지키며살고있는지반성했다. 때는 1967 년전, 서기 33 년. 그리스도의수난과죽음으로의기소침해있던제자들은그리스도의부활로다시금활기를되찾았다. 이제그들이원하고추구하던하느님의 왕국, 새세상이이루어질것같은희망적인분위기가감돌았다. 그러나곧이어그리스도의승천으로제자들은또다시실망하게된다. 죽었다가살아난그리스도만옆에계시면만사형통인데또다시자기들 을떠난다는사실에실망이이만저만이아니었다. 더군다나내가떠나더라도또다른협조자가올것이라는말씀은더욱더이해하기어 려웠다. 결국그리스도께서는제자들의인간적인간청을물리치고하늘로올라가셨다. 못내섭섭했던제자들은하늘만쳐다보고있을뿐이었다. 하지만마냥이렇게있을수만은없었다. 곧바로정신을차린제자들은그리스도를팔았던유다대신마티아를새사도로뽑고예루살렘을 떠나지않고모두마음을모아기도에힘썼다. 그러던중그리스도께서약속하신성령이내려와제자들에게새로운힘을주었다. 새힘, 성령으로가득찬제자들은두려움도없이그리스도께서행하셨던일, 하느님나라선포와병든자들을고쳐주는등새로운예언자 가되어죽음을각오하고열심히선교활동을했다. 예수그리스도께서이땅에오신목적이하느님나라선포이므로제자들도그들의삶을통해하느님의모습을보여주고그리스도의모범을 따라실천하며예수그리스도께서가르치신것을그대로가르쳤다. 그리스도께서그랬던것처럼이들도악과싸워야했다. 부활을부인하는사두가이파사람들의모진박해도참아내고멈추지않고말씀을선포했다. 그것은제자들이그리스도로부터받은첫째 사명이느님나라선포이기때문이다. 이러한성령의힘으로행하는사도들의설교와기적으로많은사람들이회개하고교회라는공동체안에모여새로운백성이되었다. 그들은 사도들의가르침을듣고서로도와주며빵을나누어먹고기도하는일에전념하였다 ( 사도 2, 42) 이처럼교회공동체는획기적인사건, 예수그리스도의부활과승천, 성령강림으로시작됐다. 시간이지나고날이갈수록많은사람들이회개 하고공동체에들어왔다. [3] 초기그리스도교근본정신 13
14 그러나이들은유다교의품안에서태어나고자랐다. 그래서정통신앙인유다교를버리고새로운삶을시작한다는것은참으로큰고통이뒤 따를수밖에없었다. 200 여년전우리신앙선조들이그랬던것처럼이들도많은박해를받았고이웃으로부터멸시와손가락질을받았을 것이다. 그러나오히려그리스도를따르는믿는사람들은더욱더늘어갔다. 믿는사람은모두함께지내며그들의모든것을공동소유로내어놓고 재산과물건을팔아서모든사람에게필요한만큼나누어주었다. 그리고한마음이되어날마다열심히성전에모였으며집집마다돌아가며같이빵을나누고순수한마음으로기쁘게음식을함께먹으며하 느님을찬양하였다 ( 사도행전 2, 44 46). 사도들의말씀을믿고세례를받아새로운하느님의백성이된이들은세속을떠난이상적인생활을한것이아니라한마음한뜻으로함 께지냈다. 성령의힘으로. 더욱신비로운것은함께지내면서분열보다는서로가진것을모두내어놓고공동으로사용하며우정과형제애로넘치는생 활을했다는것이다. 당시로서는상상도할수없었던획기적인사건이다. 가진것모든것을내어놓음으로써인간은재산의주인이아니라공동선을위해맡은재산을관리해야하는봉사자일뿐이라는사실을깨우 쳐준다. 즉재물과하느님두주인을동시에섬기지못하며따라서재물보다하느님을택한이들이그리스도와함께더욱풍요롭게산다 는것을실감나게체험하며살았다. 그리스도를믿는신앙으로모여든신자들은서로를형제라고부르며하나의공동체가되어재산을공동관리했다. 재산헌납을강요하지 않았는데도가진것을서로나누어쓰고서로도와주며무엇보다도형제애를실천에옮기며함께차별없는생활을했다. 없는자들의고통을덜어주면서예수께서가난한사람은행복하다 ( 루가 6, 20) 고말씀하신그뜻을가슴깊이느끼게됐다. 이렇게함으로써 함께모인사람들이재물로인해분열되는것을막고일치속에조화를이루며살았다. 새로모인백성들의생활방식중하나가공동기도이 다. 공동기도야말로예루살렘공동체의특징이다. 날마다성전에모여같이빵을나누고하느님을찬양하였다. 교회를위해교회와함께기도하 는가운데이들의일치감은더욱굳게다져졌다. 또한기도하는도중빵나누기예식을통해부활하신그리스도와일치했다. 이들은기쁨속 에서서로가진것을나누며성찬예식을거행한것이다. 그러나지금의우리는어떤가? 함께모여기도하는것이특정신심운동단체나소수에불과하고매주일주님의날조차외면해버리는약한 신앙인들이너무많다. 그래서가진것을함께나눔이라는성찬의기쁨을모르고있다. 해마다신자증가에비례해냉담자와행불자가증가한다는사실은초기그리 스도교공동체를되돌아보는우리에게큰교훈을안겨다주고있다. 하느님의백성이라는새로운삶을통해하느님을모실수있다는것그자체가엄청난사실이다. 주님을알게되고구세주로모실수있다는 것에감사드릴때대희년의의미가드러날것이다. 이와함께서로용서하고서로나누며함께찬양할때은총의대희년을사는우리에게그기쁨이배로늘어날것이다. [3] 초기그리스도교근본정신 14
15 [3] 초기그리스도교근본정신 15
16 [4] 첫박해와스테파노의순교 :16 사람에게복종하는것보다하느님께복종해야하지않겠습니까 성령강림과교회의창립. 성서에사실적으로묘사되고있는이사건들은앞으로전개될그리스도교회의장미빛미래와박해라는두가지상 반된역사를예견하고있었다. 사도행전은예루살렘초대교회의생활상과발전상을비교적소상하게전해준다. 성령의강림으로새로운하느님의백성, 새로운교회로세상 에알려지기시작한초대교회공동체는공산 ( 共産 ) 과공유 ( 共有 ) 의정신으로번창해나갔다. 믿는사람은모두함께지내며그들의모든것을공동소유로내어놓고재산과물건을팔아서모든사람에게필요한만큼나누어주었다. 그 리고한마음이되어날마다열심히성전에모였으며, 집집마다돌아가며같이빵을나누고순수한마음으로기쁘게음식을함께먹으며하느 님을찬양하였다 ( 사도 2, 44~47). 누구의강요에의해서가아닌, 헌신과순수한열정에서비롯된이러한종교적윤리적공산주의는이교인들을자극했고, 그들의관심을교회 에쏠리게만들었다. 앞서교회창립편 (2 회 ) 에서지적한것처럼우정과친교 ( 코이노니아 ), 기도, 빵의나눔, 사도들의가르침으로대변되는초대교회공동체의특 징들도교회의발전과무관하지않았다. 또한가지초대교회발전을뒷받침한것이있다. 사도들의설교에뒤따르는치유기적이그것이다. 사도행전 2 장 43 절은사도들이놀라운일들과기적들을행했다고전한다. 이를토대로 3 장 1~10 절에서는베드로와요한이성전에서행한치유치에관한진술이이어진다. 나는돈이없습니다. 그러나내가줄수있 는것은이것입니다. 나자렛예수그리스도의이름으로걸어가시오 ( 사도 3, 6). 계속되는설교와치유. 그것은우리가줄수있는것은세상것과는다른것이라는불멸의그리스도교정신을강력하게대변하고있었다. 나자렛예수그리스도의이름으로행해지는치유는곧예수가메시아, 주님, 하느님의아들임을고백하도록이끌었다. 신자의수는나날이증가하고 ( 사도 2, 47) 베드로가앉은뱅이를고친후에는남자만도 5000 명이나믿게되었다 ( 사도 4, 4). 박해의그림자 그러나이즈음교회엔박해의그림자가서서히드리워지고있었다. 첫번째박해는예수의이름으로가르치고기적을행하던베드로와요한, 그리고날로늘어가는신도들의무리를걱정스럽게지켜보던유다교 지도자들과의갈등양상으로나타났다. 이상황은묘하게도예수가사두가이파의반대를샀던당시와절묘하게연결되고있다. 부활을가르친예수는부활이없다고주장하는사두가이파의반대를샀다 ( 루가 20, 27~ 38 참조 ). 그러나이제그들은수가부활했다고 주장하고예수안에서죽은이들의부활을가르치는베드로와요한을그냥내버려두지않았다. [4] 첫박해와스테파노의순교 16
17 원로, 대사제, 율법학자들이예수를거슬러회의를소집한것 ( 루가 22, 66) 과마찬가지로베드로와요한의주장에대처하기위해유다의회 가소집됐다 ( 사도 4, 5~6). 법정 (Synedrium) 에선베드로와요한. 그들에게사두가이파인유다원로들과율법학자들이말한다. 당신들은누구의이름으로이런일을했소? 기적에초점을두고다그치는이물음에베드로의답변은확신에차있다. 불구자였던저사람이성한몸으로여러분앞에서게된것은바로나자렛예수그리스도의이름을힘입어된것입니다. 그분은여러분이십자가에못박아죽였지만하느님께서죽은자들가운데서다시살리신분입니다 ( 사도 4, 10). 베드로의언변에놀란유다 지도자들은다시는예수의이름으로말하지도말고가르치지도말라고권고하는선에서물러난다. 그들역시치유사실을목격한데다온예루살렘사람들이그사실을알고주시하고있었기때문이다. 그러나예수부활을증언하고그가주님이라고가르치는사도들의행동을누가막을것인가. 계속되는사도들의설교와치유기적은사두가 이파사람들의심사를건드렸고결국사도들을감옥에가두기에이른다. 대사제의심문에베드로의대답이걸작이다. 사람에게복종하는것보다오히려하느님께복종해야하지않겠습니까 ( 사도 5, 29). 격분한사두가이들로부터죽을고비를넘긴사도들은매질을당하고다시한번예수의이름으로아무것도말하자말라는다그침을받았다. 그러나이것은미구에닥칠박해의시작에불과했다. 신도들의무리가급증하자사도들의말씀의봉사가방해를받기시작했다. 식량을배 급하고가난한이를돌보기위해 7 명의보조자를선발한것도사도들이기도와전교에온힘을쏟기위해서였다. 스테파노는이렇게뽑힌 7 명의보조자가운데한사람이었다. 스테파노의순교 초대교회공동체가조직과체제를갖추면서하느님의말씀은널리퍼져나갔고신도들의무리도날로늘어갔다. 이러한때격노한유다원로들과율법학자들에의해처참한사건이발생하고만다. 바로일곱보조자중한명인스테파노의순교가그것이다. 성령의힘으로놀라운일들을행하던스테파노가자유인의회당사람들과논쟁을벌인것이화근이었다. 회당사람들은키레네, 알렉산드리 아, 길리기아와아시아에서온디아스포라유다인들, 즉본토를떠나사방에흩어져살던유다인들이었다. 거짓증인들과모함에의해유다의회에끌려나온스테파노는성령의인도를받아예언된구세주를배척하고죽인유다인들의배반행위를 고발했다. 그의말을들은의회의원들은스테파노를성밖으로끌어내돌로쳐죽였다. 스테파노가순교한자리엔현재그리스정교회의기념성당이세워 져있다. 이슬람대사원아래쪽에위치해있는이성당엔순교지점에다윗의별이새겨져있고스테파노의순교모습을담은이콘등으로장식되어 있다. [4] 첫박해와스테파노의순교 17
18 하느님은이렇게박해라는또다른모습으로당신교회를단련시키려하셨다. 그러나주예수님, 제영혼을받아주십시오주님, 이죄를저사람들에게지우지말아주십시오라는스테파노의마지막외침은숱한고난과 박해를견디어낼교회의생명력을또한예견하고있었다 [4] 첫박해와스테파노의순교 18
19 [5] 사울의개종 :17 " 나는네가박해하는예수다 " 하느님의계획은인간적인생각과판단을뛰어넘는다. 때론너무극적이어서두려움마저느끼게한다. 스테파노가디아스포라유다인들과의논쟁끝에유다의회의원들에의해돌에맞아죽던그현장에서, 사울은스테파노를돌로내려치는거짓증인들의옷을받아들고스테파노의순교를목도하며그의죽음을당연시하고있었다. 그뿐인가, 사울은집집마다다니며남녀를가리지않고신도들을가려내모두감옥에쳐넣는일에앞장서고있었다 ( 사도 8,3). 하느님은그러한사울을택하시어열렬한당신의도구로삼는다. 사람이평생지녀온가치관이나신념을바꾸기란쉬운일이아니다. 특히종교적신념일경우더욱그러하다. 소위 ' 개종 ' 을경험한사람이라면인생을뒤바꿀만한내적체험을하지않고서는쉽지가않은일이다. 세계교회사를추적하면서 ' 사울의개종 ' 을별도로언급하는것은사울의개종체험이갖는드라마틱한상황때문이기도하지만, 사도가된바오로가가톨릭교회에남긴가르침과영성, 활동의결과들이너무나엄청나기때문이다. 사울의회심체험 때는기원후 30년대초. 유다인사울은위세당당히다마스커스를향해가고있었다. 그에겐예루살렘대사제로부터그곳에숨어있는그리스도교인들을체포해압송하라는임무가주어져있었다. 당시예루살렘의그리스도교인들은박해를피해사방으로흩어졌고, 이가운에많은이들이다마스커스로피신했다. ' 교회를쓸어버리는데 '( 사도, 8,3) 앞장섰던사울은그들을잡기위해발걸음을재촉하고있었다. 다마스커스에가까이이르렀을때사울은갑자기하늘에서번쩍이는섬광에놀라엎어지고말았다. 이때하늘에서음성이울려왔다. ' 사울아, 사울아네가왜나를박해하느냐 '. 사울이황급히물었다. ' 당신은누구십니까 ' 하늘에서음성이다시들려왔다. ' 나는네가박해하는예수다 ' 2000년가톨릭교회사에서큰전환점이된사울의회심장면은이처럼극적으로이루어졌다. 강한빛에의해시력을잃은사울은사람들의손에이끌려다마스커스로들어가그곳교회지도자아나니아에게인도된다. 주님의예시를받은아나니아는사울에게안수하며말한다. ' 사울형제, 나는주님의심부름으로왔습니다. 그분은당신이여기오는길에나타나셨던예수님이십니다. 그분이나를보내시며당신의눈을뜨게하고성령을가득히받게하라고분부하셨습니다 ' 아나니아의안수로사울은다시앞을보게되고세례를받아완전히새로운사람으로다시태어났다. 말로만듣던다마스커스. 낯선방문객을힐끔바라보는그들의모습이웬지낯설게느껴지지않는다. 사울의회심체험을연상하며친근함을느꼈기때문이리라. 이곳사람들은아랍계열이지만피부색이나생김새가유럽민족에가깝다. 시리아의수도인마다스커스는교회가시작되기훨씬전부터번성한도시로, 현존하는대도시가운데역사가가장오래된고도 ( 故都 ) 이다. 사울이그곳을찾았을때다마스커스는이미 2000년이상의오랜역사를갖고있었다. 그리스도인들의관심은아무래도성서에 ' 곧은거리 ' 로표현된곳에모아진다 ( 사도 9,11). 회심체험을한사울은이도시의 ' 곧은거리 ' 에있는유다의집에머물렀고그곳에서아나니아에게세례를받았다. 사울의신앙적탄생지 사도바오로가걸었던 ' 곧은거리 ' 를찾기위해서는다마스커스의구도시로발길을옮겨야한다. 오늘날다마스커스는두지역으로나뉘어진 [5] 사울의개종 19
20 다. 하나는고대부터내려오는구도시이고, 다른하나는 19-20세기에확장된신도시이다. 역사의때가겹겹이묻어있는구도시는타원형의성벽으로둘러싸여있다. 이구도시를가로지르는 1300미터에이르는길게뻗은대로가바로 ' 곧은거리 ( 直街 )' 다. 사도바오로가이곳에왔을때는너비가 15미터에이르고길양편에석주들이늘어선로마식대로 ( 大路 ) 였다. 그러나오늘날이름은그대로이나과거의모습을찾을길이없다. 길이좁아졌고곧은도로의서쪽절반은천장이있는전형적인아랍인시장 ' 수크 ' 로변했다. 다만몇개의석주와로마시대의건축물일부가과거의모습을짐작케할뿐이다. 그러나 ' 곧은거리 ' 가끝나는동편은지금도크리스찬구역이어서교회가밀집해있다. 그중가장널리알려진곳이사울이세례를받고새사람이되었다는곳에세운 ' 아나니아교회 ' 다. 돌계단을따라내려가만나는아주작은지하교회지만역사의체취를느낄수있다. 희랍정교회의대주교가있는아름다운 ' 마리아기념교회 ' 를지나 ' 곧은거리 ' 의끝동문을나와남쪽으로 300미터정도성벽을따라걸으면큰성문과만난다. 성문뒤쪽으로돌아가면돌로지은작은경당 (chapel) 이있다. ' 사도바오로경당 ' 을쫓기던바오로가신도들의도움으로광주리에실려성벽을내렸다는곳에세워졌다 ( 사도 9,20-25 참조 ). 사도바오로의발길이닿았던곳, 또한그의신앙적탄생지이기도한다마스커스는새롱누감동을선사하기에충분하다. 사진말 = ( 위 ) 다마스커스크리스찬구역에위치한아나니아교회. 오랜역사를간직한작은지하교회로바오로사도의체취를느낄수있다. ( 아래 ) 다마스커스 ' 곧은거리 ' 의현재모습. 성서는사울이회심체험후이거리에있는유다의집에서아나니아로부터안수와세례를받았다고전해진다 [5] 사울의개종 20
21 [6] 예루살렘사도회의 :59 " 율법보다믿은이우선 " 확인사도바오로를비롯한제자들의열심한전교로시간이흐를수록많은이들이새로운하느님의백성이되었다. 새로운하느님의백성들중에는유다인신자들뿐만아니라외교인 ( 이방인 ) 들도많았다. 문제는여기에서비롯됐다. 율법을강조하는유다인신자들과그렇지않은외교인들사이에서뜻하지않은심각한갈등이생겨자칫교회가분열될지경에까지이르게할지도모를중요한문제가불거지게된다. 바로 ' 할례 ' 문제였다. 첫선교여행을마치고안티오키아교회로돌아온바울로에게는선교여행을무사히그리고좋은성과를얻었다는기쁨을만끽하고추가하기보다골치아픈문제에당면했다. 여기에서우리는교회의내부적인갈등을최초로목격하게된다. 사건의전말은이렇다 ( 사도행전 15,1-35 참조 ). 바울로가선교여행을떠난후예루살렘에서온신자라고자칭하는사람들이안티오키아교회에와서 ' 외교인들도할례를받아야한다 ' 고강요하고나섰다. ( 나중에밝혀진일이지만베드로를비롯한예루살렘의사도들과원로들은이들을보낸사실이없다고했다 ). 즉구원이이스라엘사람들에게만약속되었으므로할례예식을통해외교인들을이스라엘백성에입적시켜야한다고주장했다. 다시말해서이들은예수그리스도의역할보다율법을우선시하고있는셈이었다. 격렬한의견충돌과치열한논쟁은시간이흘러도그칠줄을몰랐다. 아니시간이흐를수록열심했던신자들이하나둘교회를떠나는악순환이계속됐다. 바오로는고민에빠졌다. 발이부르트도록다니면서애써전교한결과가겨우이것인가하는실망만이앞서기시작했다. 그래서바오로는결단을내렸다. 예루살렘으로가기로했다. 예루살렘에가서확실한결론을얻어더이상힘들게전교한신자들이교회를떠나는것을막고급기야교회가분열되는불미스런사태를막고자했다. 바르나바와몇몇신자들과함께예루살렘에도착한바오로는베드로와사도, 원로들에게그간의이야기들을보고했다. 그런데 ' 불난데부채질한다 ' 고바리사이파에속했다가신자가된사람들이 ' 외교인들에게도할례를주고모세의율법을지키도록해야한다 '( 사도 15,5) 고강력하게주장하고나섰다. 급기야사도들과원로들은회의를열었다 ( 사도 15,6). 때는기원후 49년경. 베드로를비롯한사도들과예루살렘모교회의원로들, 유다인신자와외교인신자들이참석한가운데예루살렘에서가톨릭교회첫공의회인사도회의가열렸다. 오래고열띤토론이계속됐다. 그럴수밖에없는것이외교인들이예수를믿고세례를받는것만으로구언을받을수있는지, 아니면할례를기본으로삼는유다인들의종교율법과관습을따라야하느냐를판별해야하는매우중대한사안이었기때문이다. 그러나계속토론만하다가는결론이날분위기가아니었다. 그래서베드로가구원의원칙을세웠다 ( 사도 15,7-11). 첫째, 유다인들도잘지키지못하는법, 즉 ' 할례 ' 라는멍에를외교인들에게강제로부과할수없다. 둘째, 무엇보다도예수께서죽으시고부활하심으로써완전한구원을마련하셨으므로불필요한규칙은폐지할수밖에없다는것이다. 즉베드로의해답은외교인들도사도들과똑같이성령을받아모시고있고주님도아무런차별을두지않았는데과연할례를받지않았다고해서구언을받을수없다는것은말도안된다는것이다. 한마디로우리가구원받는것은주님의은총에의한것이라고강조했다. 그러자열띤토론장은한순간찬물을끼얹은듯적막감이흘렀다. 이어주님의형제인야고보가예루살렘지방교회의책임자로서지방교회의일치와화목을위해외교인출신신자들에게부과한규칙을상기하면서안티오키아신자들에게도이같은내용이담긴편지를띄울것을요청한다 ( 사도 15,19-21 참조 ). 결론은내려졌다. 예루살렘사도회의에참석한사도들과원로들은안티오키아신자들에게전해줄편지도쓰고이내용을설명해줄바르사바라는유다와실라를대표로뽑아안티오키아로보내기로했다 ( 사도 15,22). 이간은결정은대표로파견된이들이예언자로서편지내용을설명해주고여러가지말로안티오키아신자들을기쁘게하고힘을얻도록하 [6] 예루살렘사도회의 21
22 기위함이었고실제로안티오키아신자들은편지를읽고격려를받았으며기뻐하면서 ( 사도 15,31) 예루살렘사도외희에서권고한규칙을지킴으로써율법자체보다윤리도덕적인입장에서거룩한생활을하게된것이다. 예루살렘사도회의에서결정된사항은다음과같다 ( 사도 15,23-29). - 엉뚱한말로괴롭히는이들은예루살렘교회에서시킨것이아니며 - 외교인신자들은 ' 할례를받을의무가없고 - 구원은율법을통해서가아니라그리스도의은총으로되는것이며 - 우상에게바쳤던제물을먹지말고 - 피나목졸라죽인짐승도먹지말고 - 음란한행동을하지말것을당부했다. 사도행전 15장 1-35절에나오는예루살렘사도회의소식은우리에게시사하는바가크다. 사도회의에서결정된내용도중요하지만 ' 사도들과원로들과온교회 ' 또는 ' 성령과우리 ' 라는표현을사용함으로써공동체가사도들과함께내리는결정에는성령의도움이따름을강조하고있다. 지금도국 내외교회에서수많은대의원회의 ( 시노두스 ) 가열리고있다. 여기서우리가잊지말아야할것은공동체가함께내린그어떤결정도인간의능력으로가아니라성령께서함께하심이라는사실이다. 그래서공동체에서내릴결정에신자인우리는그것을믿고따라야할의무가있는것이다. 하느님과그리스도를믿고성령을믿는, 다시말해삼위일체의신비를받아들이는하느님의백성이기때문이다 [6] 예루살렘사도회의 22
23 [7] 바오로사도의전도여행 :00 스테파노의순교이후예루살렘공동체의신자들은박해를피해예루살렘을떠나기시작했고흩어진신자들은이교도지역에서용감하게복음을전파하기시작했다. 그리하여시리아의수도안티오키아에는유대인과이방인의혼성교회가창립돼 ' 그리스도의사람들 ' 즉 ' 그리스도인 ' 이라불릴만큼독립된종교단체로주목을끌었다. 이에사도들은바르나바를안티오키아에파견해교회를돌보게했고바르나바는다르소에머물던바오로를초빙하고이때부터사도바오로의위대한전도여정이시작된다. 사도바오로의위대성은그의전도여행에있고그전도여행의위대함은구원의복음이유태교나팔레스티나지역의좁은곳을벗어나전세상을위한보편적복음이되게하는원동력이되었다는데있다. 바오로는안티오키아를거점으로세번에걸쳐지중해동부지역에광범위한전도여행을떠나게되는데안티오키아는사회적으로나교회사적으로대단히중요한대도시였다. 안티오키아는시리아의수도로서로마제국안에서로마알렉산드리아다음으로셋째가는큰도시였고동방과의무역로인실크로드의출발지이자종착지이기도했으며무엇보다소아시아지역에서그리스문화의중심지였다. 안티오키아의이러한지리적조건은바오로사도가왜이곳을전교의거점으로삼았는지충분히대변해주고있다. 안티오키아의이러한지리적중요성은이지역을차지하기위한전화에휩싸이는계기가되고이로인해그리스인이나로마인이남긴유적은물론그리스도교공동체의흔적을찾아보기어렵게만들었고지금은이름마저도안타키아로바뀐도시뒷언덕에있는베드로석굴성당만이남아그나마멀리서달려온순례자들허탈한마음을달래준다. 바오로사도는바르나바와함께이곳안티키아를떠나키프로스섬으로가면서첫번째전도여행 (45~49년경) 을떠나베르게비시디의안티오키아이고니온데르베등지에서전교활동을펼쳤는데이결과많은이방인들이입교했다. 이방인들의입교자들이늘어나면서이들에게예수의신앙만을요구할것인가유대교율법까지지키도록할것인가하는문제가대두돼결국예루살렘에서사도공의회 (49년경) 가열리게된다. 교회역사상첫공식적인회의인이사도회의에서이방인계그리스도인들은유대교의율법을지킬의무가없음을확인하는동시에사도들은유대인들에게전도하고바르나바와바오로는이방인들에게전도하기로결의함으로써바오로는명실공히이방인의사도가되어앞으로의그의전도여행에더욱박차를가하게된다. 첫번째전도여행의성공에고무된바오로는곧이어두번째전도여행 ((50~52경) 을떠나는데특히고린토에서 18개월간머물면서신약성서중가장먼저쓰여진데살로니카전서를집필했다. 두번째여행에서의가장큰특징은바오로가유럽에첫발을디뎠다는것이다. 필립비교회가바로이두번째여행중에바오로가유럽 ( 지금의그리스 ) 에세운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고린토의네교회중처음으로세운교회로이후필립비교회는바오로사도의전도와생계를위해물심양면으로돕는유일한교회가된다. 두번째전도여행에서가장오래머물렀던고린토에는 52년경바오로사도가갈리오총독에게심문을받은법정축대가보존돼있어그위대한여행의향기를맡을수있다. 세번째전도여행 (53~58년경) 의중심지는 3년가까이머물면서큰교회를세웠던에페소였다. 바오로사도는이곳에서많은위험과시련속에서고통을당했고얼마동안옥고까지치른것으로보여진다. 복음전파를위해스스로감내한사도의그러한수난은신앙의씨앗이돼에페소교회는당시교회들중가장큰교회가됐고이곳을중심으로신앙이급속히확산되기시작한다. 지금도에페소의성요한대성당유적을보면당시교회가얼마나활발했던지짐작할수있다. 사도바오로의전도여행지를찾아다니면서확인하고싶었던것은무엇보다그전도여행의성공이유는무엇일까하는것이었고이를오늘날에는어떻게받아들일것인가하는것이었다. [7] 바오로사도의전도여행 23
24 그리스도교의빠르고넓은전파는사도바오로의열정이전에그리스도교가지니고있는진리의힘이가장큰매력이었다. 거대한로마제국의사상의근간을이루고있었던희랍사상아래서고대인들이가장고민했던신의문제, 영혼의불멸, 지상생활의목적, 정의등의문제에대해그리스도교사상이주는명쾌한해답은이교적세계관의체험속에서진리를찾던이들에게구원의빛줄기가됐음이분명하다. 또한그리스도교가가지고있는이교들과의차이점, 즉그리스도교의윤리성, 초월적인선험적종교관, 역사속에생동하는역사성, 이를증거하는고대그리스도인들의삶과기적등은입교자들에게참된새로움을주기충분했다. 이러한역사적배경속에바오로의남다른배경도그의전도여행을성공적으로마치게한요인이됐다. 바오로는첫째율법을가르치던바리사이로서개종했다. 그래서예수의복음이유다교와어떤차이를가지고있는지누구보다도정확히알고있었다. 둘째바오로는디아스포라유다인으로넓은세상에대한많은경험과더불어희랍어를잘구사했을뿐아니라희랍사상들을잘이해하고있었다. 이러한바오로의두가지장점은그의전도여행을성공으로이끄는훌륭한바탕이되는데첫째가없이는그리스도교신앙의위대한예언자가되지못했것이고둘째가없이는이교인을위한성공적인선교사가되지못했을것이다. 우리도바오로사도가가졌던첫번째의성공요인인그리스도교가가진진리의힘은이미가지고있다. 따라서신자로서의사명인복음선포를위해서는내가믿는신앙에대한이해와복음대상에대한이해그리고복음을위한헌신이우리에게남은과제로보인다. " 나의기대와희망은내가조금도부끄러움을당하지않고, 살든지죽든지내몸을통해서그리스도께서항상그렇듯이지금도온세상에서찬양받는것입니다 "( 필립 1, 20) [7] 바오로사도의전도여행 24
25 [8] 로마교회의기원 :03 로마를처음방문한순례자들이받는감흥은크게 2가지로나눌수있다, 하나는도시전체가웅장한박물관이라해도과언이아닐정도로엄청난유물과유적, 빼어난예술작품으로가득하다는사실에기인한다. 그것은가톨릭신앙에대한자부심과자긍심이요, 전세계가톨릭신앙의심장부에서있다는느낌을주기에충분하다. 다른또하나의반응은신앙이소박해야한다는어렴풋한신념에서나오는 " 조금과하지않은가?" 하는푸념이다. 하늘을찌르는웅장한성당과조각품들은신앙을공고히하기위한것이라기보다는다분히정치적이고제국주의적이며, 가난한이들의교회와는거리가먼듯해보인다는것이다. 이에대해로마에서오래거주한한한국인교포는 " 건물의웅장함이나화려함에매혹될필요도불평할필요도없다 " 며 " 중요한것은이곳에 교회가있었고그리스도교역사의짙은흔적이담겨있다는것 " 이라고말했다. 바로그렇다. 로마는그리스도교역사의가장큰신비가담겨있는교회이며그야말로보편교회를일컫는대명사요상징이다. 더욱이이곳의 주교는바로교황으로예수그리스도와거룩한사도들로부터내려오는사도적계승을이어받아전세계보편교회를하느님나라로이끄는특 별한사명을부여받았다. 보편교회의대명사. 상징로마는테베레강을중심으로기원전 8세기에이강을끼고형성된도시에기원을두고있다. 고고학적으로로마는기원전 9세기말부터 7세기초까지팔라티노언덕에서살았던목동과농부들에게서시작됐다고한다. 왕정과공화정시대를거쳐로마제국시대가기원전 31년경시작됐다. 이후 200여년동안을 ' 로마의평화 (Pax Romana)' 라고부른다. 바로이때예수그리스도의구원역사가펼쳐진다. 이스라엘역사에서로마가처음으로언급된것은마카베오상 8장이다. 기원전 63년에폼페이우스가팔레스티나를정복하고이스라엘은로마의지배를받게된다. 예수는로마의통치하에서탄생했고 ( 루가 2장 ) 로마총독인본시오빌라도치하에서십자가에못박혀죽었다 ( 루가 23 장 ). 로마가직접복음에언급되지는않았지만로마황제들의지배는분명하게언급되고암시돼있다 ( 마르 12,13-17; 마태 22,15-22; 루가 20-26; 요한 11,48). 로마서집필이전공동체존재 로마교회가언제생겼는지, 즉로마에첫그리스도인이언제정착했고어떻게그리스도인공동체가형성됐는지는확실히알수없다. 다만 바오로의로마서간을근거로적어도그집필연대인 58 년이전에이미그리스도인공동체가로마에존재했었다는것은분명하다. 바오로는 59 년에서 61 년사이에로마에도착한것으로추정된다. 사도행전에따르면그는로마시외의아피오광장과트레스타베르네까지 마중을나온로마의신자들과만나기도했다. 바오로는약 2 년동안로마에머물면서비록감시상태였지만방문객들을만날수있었고예수 와복음에대해그들과논쟁을벌이기도했다. 바오로가체포되는경위는사도행전 21 장 17 절부터 36 절에적혀있다. 베드로사도의경우에는로마도착사실이명확하게나타나있지않다. 다만글레멘스의고린토서간과외경인베드로복음, 베드로행전이베드 로의로마체류사실과함께그의순교사실을전해주고있다. 글레멘스 1 세교황이 95 년경고린토교회로써보낸편지를보면바오로가스페인에가서전도한후에다시로마로와서순교했다고한다. [8] 로마교회의기원 25
26 64 년 7 월 19 일네로황제가로마에불을지르고나서여론이좋지않자그리스도인들을방화범으로몰아 4 년동안모질게박해했는데이박해 때바오로와베드로가순교했을것으로추정된다. 테르툴리아노에따르면베드로는예수처럼십자가형을받았고바오로는세례자요한처럼참수형을당했다고한다. 타치우스는두사도의순 교의해를 64 년으로, 에우세비오는 67 년으로기술하고있다. 두사도의순교사실로인해로마교회는굳건한터전을마련한다. 두사도는그리스도교공동체의주역이었고이들이로마에서순교에이름 으로써로마교회는베드로사도의수위권에연관되게되고로마의주교는교황으로서전세계보편교회를이끌고지도하는확고한자리를 갖게된다. 예루살렘성전파괴 로마로집중 사실로마는제국의수도로서정치적으로나모든면에서중심을차지하고있었다. 비록예루살렘이그리스도교의발상지이지만오히려로마 가중심이되었다는사실은당시의정치상황등복합적인이유에기인한다. 그리스도인공동체는유대인거주지역에서시작됐다. 유대교의입장에서그리스도교는새로운분파로이해됐고그리스도교는예수의죽음에 대한책임문제로유다교와늘갈등과마찰을일으키고있었다. 로마제국이예루살렘성전을파괴한다음에예루살렘은더이상그리스도교의중심지역할을할수없게됐다. 이에따라그리스도인들이 제국의수도인로마로자연스럽게집중되게됐다. ' 로마교회 ' 라고할때이는제국의수도로서 ' 로마 ' 와구원사적신비로서의 ' 교회 ' 라는두가지의미를갖는다. 따라서이는로마라는일개 지역교회의의미를넘어서보편교회의대명사이다. 로마는이미제국의수도로서정치적으로중심지였고역사적으로중요한위치를차지하고 있다. 로마는뿐만아니라베드로와바오로두사도의순교지라는특수한의미와배경으로인해지역교회를넘어선새롭고확고한위치를차지한 다. 따라서로마교회는초기교회의다양한문화적배경속에서일치의기준이었고가시적인정점이었다. 이후로마주교는스승처럼다른지역교회와공동체의문제에가르침을내린다. 글레멘스는고린토교회의내부분쟁에직접개입함으로써 로마주교가중요한역할을담당했음을알려준다. 당시지역공동체지도자들은로마를방문해로마공동체와의일치를확인하고보장받곤 했다 [8] 로마교회의기원 26
27 [9] 베드로, 바오로의순교 :03 로마의 4대성당이라고하면성베드로대성전, 성요한라떼라노대성전, 성모마리아대성전, 그리고성바오로대성전을일컫는다. 그중성베드로와성바오로대성전은사도베드로와바오로의무덤위에세워진성전들이다. 인류가이룩한가장위대한창조물의하나를건축물에서꼽는다면단연바티칸의성베드로대성전이라할수있다. 최대길이 221m, 최고높이 141m로세계최대의성당가운데하나이며독창적인구상과미켈란젤로가예수그리스도의가시관을상징해제작한돔은베드로대성전을상징하는가장대표적인모습이다. 교황은모든중요한바티칸의행사들을이위대한성전에서거행하며순례자들이많을때에는성전앞의타원형광장에서옥외행사를집전한다. 얼마전막을내린대희년도바로베드로대성전의성문을열어시작했고바로그성문을닫는예식을광장에서거행함으로써폐막됐다. 무덤위에성전건립베드로대성전이자리잡은바로이곳이사도베드로의무덤이있는곳이다. 최초의베드로성당은 90년경교황아나글레토가베드로의무덤위에세운작은경당이었다. 그뒤콘스탄틴대제가그리스도교를공인하면서베드로의무덤이있다고믿은바티칸언덕에바실리카식성당을건축했다. 그후 1200년동안존속하던베드로성당을새롭게만들기위해구상한것은교황니콜라오 5세, 이후우여곡절을겪으며베드로성전은 176년이라는오랜공사끝에완공, 1626년 11월18일교황우르바노 8세에의해축성됐다. 베드로대성전내부에들어서면두줄의거대한기둥에의해 3개의통로가나뉘며중앙신랑과양쪽익랑이교차하는곳에교황제대가있다. 바로이제대밑에성베드로의무덤과많은교황들의무덤이있다. 로마의 4대대성전중하나인바오로대성전역시사도바오로의무덤위에세워졌다. 전승에따르면사도바오로는로마남서쪽에조금떨어진 앗아쿠아스살비아스 라는곳에서참수되어그곳에서가까운오스티엔가에묻혔다고한다. 그후무덤위에작은성당이세워졌고 324년에콘스탄틴대제에의해헐리고그자리에기념성당이세워졌다고한다. 로마의박해그리스도교는복음전파초기부터로마제국내의여러요소와긍정적으로일치하는부분이많아서빠른속도로전파됐다. 국경을없애고대제국을형성해행정질서나언어, 문화가통일돼있었던점, 상업교통수단의발달, 그리고제국어디에나퍼져있는유대인공동체등과이미평화시대로접어들어있었던시대상황등이긍정적인요소였다. 하지만그리스도교가빠른속도로전파되자결국이는로마제국과마찰을빚게된다. 로마제국은 62년네로황제의태도변화가있기까지는대체로그리스도교에호의적이었다. 일부과격한유다인들이유다해방을부르짖으며독립전쟁을일으키는등소요를유발했으나그리스도인들은로마제국에아무런적의를보이지않아로마행정관리들은그리스도인들을단순히영적이고종교적인사람들로여겼다. 하지만 62년경부터그리스도교에대한무관심이나무지의상태를벗어나면서호의적이던관계가무너지고박해가발생했다. 그리스도교와로마제국은부딪힐수밖에없는요인을이미갖고있었다. 로마제국은다신교적인경향으로국가를절대시한제국이었다. 반면그리스도교는이러한국가의절대성을함께할수없었다. 또그리스도교의신앙생활에대한무지역시충돌의원인을제공했다. 이로써박해의빌미가제공됐고드디어첫박해인네로의박해때베드로와바오로사도가모두순교했고이후그리스도교는로마에서불법종교가됐고줄곧박해가이어졌다. 사도들의순교베드로사도의순교와관련해전승에따르면자신의생애후반기에로마로가서활동하다가순교했고그곳에묻혔다고전해진다. 95년경로마의글레멘스주교는 고린토인들에게보낸편지 베드로가박해중에서도거룩하고위대한모범을보여주었다고기록했다. 안티오키아의이냐시오주교도로마인들에게보낸편지에서같은설명을했고 1세기후반이레네오는로마에서의그의활약상을설명해준다. 한편이레네오는베드로와바오로사도가로마교회의창립자라고보았지만바오로의로마서에의하면이런견해는맞지않는다. 왜냐하면바 [9] 베드로, 바오로의순교 27
28 오로는그때까지로마에도착하지않았기때문이다 ( 로마 1,13). 따라서비교적더타당한것으로보이는견해는바오로가로마에갇혀있을때두사도가협력해서일했다는것이다. 사도행전의끝맺음에서이사실을추측할수있다 ( 사도 28,31). 베드로가로마에서순교했다는교회의전승은정확하게나타나지는않는다. 이는 2세기말과 3세기초에베드로가로마를여행하고순교했다는전승이정립되면서확정됐다. 바오로는 58년봄고린토에서로마서를쓸때부터예루살렘과로마를거쳐스페인에가서전도하고싶다는이야기를여러차례해왔다. 글레멘스 1세교황이 95년경고린토교회로써보낸편지를보면바오로가스페인에가서전도한후에다시로마로와서순교했다고한다. 네로황제는 64년 7월19일로마시에불을지르고나서여론이좋지않자그리스도인들을방화범으로몰아 4년동안모질게박해했다. 이박해때베드로와바오로사도가순교했다. 두사도가 65년네로황제의대박해동안에순교했으며베드로는십자가에거꾸로매달려죽었으며바오로는세례자요한처럼참수형을받았다는전승은테르툴리아노에의해전해졌다. 이러한기록은네로의대박해때바오로와베드로가죽었다는타치우스의보도와도일치한다. 3세기초제피리노교황재임시로마사제의글을인용한에우세비오는베드로의기념비가바티칸에있었다는전승을기록했다. 4세기초콘스탄틴대제는바티칸언덕에대성전을건축했는데대성전을평지위에세울수있었음에도불구하고힘들게언덕위에세운것은베드로의유해가그곳에묻혀있다는확신에서이뤄진것으로보인다. 전설에의하면바오로는로마남문밖교외에있는지하수가세줄기솟아나는티레폰타네에서순교했고그근처현재의바오로대성전자리에묻혔다고한다 [9] 베드로, 바오로의순교 28
29 [10] 교계제도의기원 :04 교회의초창기역사를따라순례하다보면유명한도시마다사람들의입에오르내리는그도시와연관한인물들이있다. 예를들어안티오키아의이냐시오, 스미르나의뽈리까르푸스, 가이사리아의바실리우스등. 이들은모두그도시의주교들이었으며도시의유명인물들은대개교회의정통성과선교를위해헌신한주교들이었다. 생각이여기쯤미치면자연히주교, 신부, 부제로이루어지는교계제도가언제부터형성됐는지의문을가지게된다. 교계제도란교회초창기에는성령의은총이많은사람들의특수한활동을통하여드러났는데교회안에서이러한직무를수행한사람들중에는사도, 예언자, 전도사, 목자, 교사, 기적을행하는사람, 병을고치는사람, 이상한언어를말하는사람, 희사하는사람등이있었다. 이여러직무중에는은사에의한직무도있었고사도의권위로설정된책임자로있었지만세월이흐르면서은사에의한직무는직제화되지않고자취를감추지만교회의초석인사도직에관련된직무들은차츰제도화하여감독, 장로, 집사등의명칭으로후대에계승된다. 사도들의포교활동으로예루살렘의교세가신장하고교무가복잡해지자사도들은그에따른새로운직무들을 ' 기도와안수 ' 라는절차를통해맡기기시작했다. 기도와안수는단순한축복의의미만을뜻하는것이아니라실제로성령의은총을주는것으로교계제도의절차안에그리스도께서직접작용하시고살아계심을확신하는초대공동체의성령의현존에대한믿음의표현이었다. 따라서교직자들에게부여되는직무의은사는살람이아니라하느님께로부터나오는것임을강조하는것으로보이지않는하느님의은사를보여주는성사적성격을지니고있다. 이처럼성서에서모든믿는이들에게선사된생동감넘치는성령의현존으로증언되는교회직무의보편성과역동성이중세를거치면서경직되고제도화된직무의우월성과절대성만이전면에부각돼는우를낳기도해지금까지성직권위주의등의폐해를낳고있다. 성서상에서교회공동체안에주어진여러직무들은언제나공동체의성장과복음선포에관련된것으로교회공동체를위한봉사직분이었다. 제도의성립과정사도들의생전에는사도들의포교활동으로중요도시마다교회가설립되면서이들교회에서사도들을보필하고직접지도할신앙깊고덕망있는유지들을뽑아장로단을결성했다. 그리고박해가심해지고사도들의죽음이가까워오면서사도들은복음선포의계속을위해장로들중학식과덕망이뛰어난사람들에게그곳교회를통치하는감독직을맡겼다. 사도들의생존시에는아직이런협력자들을후계자인주교로생각한것같지않지만 1세기말경요한이소아시아지방의일곱교회에보낸서간에서교회전체를수신인으로하지않고책임자를수신인으로하고있는데서알수있듯이사도들과그직제자들이선종하기시작하면서그들의사목적직권은각지방의교회감독들에게위임될수밖에없었다. 따라서사도들의사목적권한이각지방의감독들에게축소제한돼전수됐고또한편으로는각지방교회를감독하던사도들과직제자들이사라지면서장로단의단장인감독의권위가커지면서감독들의사목권한이상향확대되기도했다. 이러한두경향이합쳐지면서지역에주교가상주하는 1교회 1주교제도가성립되기에이른다. 주교가교회본연의우두머리로서교회의중심점으로나타나자장로들은주교의신부단을구성했고교도직과사제직에있어서주교의협력자가돼본시주교가주례하던미사도지방에서는신부가주례하게됐고주교공석시주교를대리하기도했다. 사도들에게첫임명을받은교직자 ( 사도행전 6, 1~6) 들인부제들은원래사도들의보조자로서사도훅시대에는주교들의보조자로빈민구제, 재산관리등교회공동체의물질적사무를관장하고경신례때시중을드는것이주요한임무였으며때로는전도사로활약하기도했다. 특이한것은이미사도시대 ( 로마 16,1) 부터여집사즉여부제들이활동했으며 6세기까지존속했었다는것인데이들은일반적으로부녀자들의자선사업과전도및세례를돌보아주는임무를맡았다. 이처럼부제는사제가되기위한하나의과정이아니라독립된직책이며초세기교회에서는신부들보다직분은낮았을지라도사제들보다더큰영향을발휘하기도했다. [10] 교계제도의기원 29
30 주교관할구역과교구초기그리스도교단체는선교의특성상도시에세워졌고이단체의지도자는주교들이었다. 그러나교회규모가커지면서여러교회로나누어지게되는데기부와유산증여등으로교회의소유가된개인집들이신부들의거처이자직무활동의중심지가돼오늘날의본당과같은형태를띄게된다. 300년경로마에는이러한교회에원래집주인의이름을붙이다후에유명한순교자혹은성인들의이름을붙였다. 이러한일군의본당들이교회의관할구역을구성했는데그경계는일반적으로로마제국의지방경계선과동일했고그지역의수도가교구로불리웠다. 이는지방교회가그지역의수도에서부터먼저세워졌기때문이다. 이러한지방교구의주교들이중요한임무를위해시노드 ( 종교회의 ) 에몰려들었고시노드는교회일치를유지하고강화하는주요한방편이됐다. 그리고이러한본당과교구제도의일치는로마교황직에서전교회의통일이라는정점을이룬다. 교계제도에대한명확한지침은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제시하고있는데공의회는교계제도가신자들을지배하기위한권력체계가아니고교회에봉사하는제도임을분명히하고주교직은독재권력이아닌횡적인협력과조정을통한단체적 (Collgialis) 인것이며신부는개인적인주교대리역이아닌주교를중심으로한단위를이루는단체 (Presbyterium) 이며부제는그자체로독립된직책임을분명히하고있다 [10] 교계제도의기원 30
31 [11] 사도시대의교부들 :46 100여명밖에들어갈수없는작은성당에서미사를봉헌했다. 그리고미사를봉헌하는내내언어의장벽을뚫고전해져오는같은신앙고백에 ' 하나의신앙안에한형제 ' 임을체험하며몸서리쳤다. 이처럼우리교회의신앙은전세계어느곳에서나동일하다. 그곳이비록아프리카어떤오지라할지라도. 시간적으로도그리스도께서교회를세우신지도어느듯 2000년. 그긴오랜세월동안무엇이 ' 하나의신앙 ' 으로이어내려오게하는지. 그힘은무엇인지돌이켜보지않을수없었다. ' 사도들의가르침에따라 ' 초기그리스도교지도자들의권위를나타내는표현은언제나 ' 사도들의가르침에따라 ' 또는 ' 우리가전해들은바에따라 ' 였다. 주후 100년경의교회는사도들의수가순교로적어지자그제자들이나아니면사도들의말을들은사람들이교회를지도하게됐다. 그러나당시교회는사도들의공백뿐아니라외부적으로박해의위협까지함께받고있어서지도부의권위가어려움에처해있었다. 따라서사도들이후교회를맡은지도자들은자신들의생각이나사상이아니라항상사도들의가르침을따라혹은전해들은바에따라자신들이감독하던지역에발생하는문제에대처해나갔다. 이러한가르침의계승을전승이라하고이것을신앙의규칙 (regula fidei) 이라고불렀다. 사도교부란오늘날이처럼사도들로부터전해받은신앙의올바른가르침즉사도적전승을이어받아후대에물려준초세기저술가들을사도시대의교부혹은사도교부라고한다. 교부란 ' 교회의아버지 ' 란뜻으로교회의지도자급인물즉주교들을말하는데쉽게는공의회문헌들을결정하고반포한주교들을가르킨다. 그러나일반적으로는고대교회의저술가들을일컫는데해당교부가저술시사용한언어에따라그리스교부와라틴교부로나뉜다. 사도교부란교부들중에서도신약성서의후기경전들과동시대인 1세기말부터 2세기중엽까지의저술가들을지칭한다. 사도들로부터세워진교회들이뿌리를내리는이시기의교부들은사도들과그후세대사이에올바른그리스도의가르침을전달해주는교량구실을하며성전 ( 聖傳 ) 의기초를놓았다. 만약이당시의지도자들이예수님을직접뵙고가르침을받은사도들의가르침을자기생각대로신자들에게가르쳤다면아마오늘날전세계교회는그민족과언어의다양성만큼이나다양한신앙의형태를띄고있을지모를일이다. 사목적이고교훈적이었던가르침로마의글레멘스, 안티오키아의이냐시오, 스미르나의뽈리카르푸스, 히에라폴리스의파피아스가사도교부들에속하고저자에대해논란이있긴하지만 ' 바르나바의서간 ', ' 헤르마스의목자 ', ' 디오그에토에게보낸서간 ', ' 디다케 ' 등의문헌도사도교부시대의것으로간주한다. 사도교부들은사도들의감소와박해라는이중고를겪고있던시기에활동했다. 따라서복음의순수성과가르침의정통성을보존하면서이단을바로잡고신자들에게그리스도교윤리에맞는생활을강조하며교회의지도체계를확립하기위해장상에순명할것을권고할필요가있었다. 이런필요에의해사도교부들의저서들은사목적이고교훈적인내용으로되어있고아직체계적인신학을펼치지는못했다. 사도교부시대최초의문헌인제4대교황글레멘스가 95년경에쓴 ' 제1고린토서간 ' 은사도바울로가이미꾸짖은바있는고린토교회의내분이재발해일부평신도들이성직자를추방하고또다른신자들은성직자들을옹호해공동체가파당싸움으로붕괴될지경에처해있는상황에서쓴충고편지이다. 사도시대부터각지역책임자는주교에의해관리돼온것이관례였음에도불구하고고린토교회의분란에멀리떨어져있는로마의주교가간섭하고있다는것은당시교회에서갖는로마주교의우위성을보여주고있다. 이런점에서로마의주교즉교황의수위권이교회안에서어떻게형성되기시작했으며어떻게인정받았는지알수있다. 또한이같은증언은이냐시오가순교하기위해로마로끌려가면서로마교회에보낸감사편지에서도잘드러난다. [11] 사도시대의교부들 31
32 이냐시오는또한미르나교회에쓴편지에서 " 예수께서계신곳에가톨릭교회가있듯이주교가나타나는곳에교회공동체가있어야한다 " 면서최초로그리스도교공동체를가톨릭교회로표현했고주교주교를중심으로한교계제도의발달과정을엿보게해준다. 이처럼사도교부들의저서는우리가원시그리스도교의생활과사상, 체계를아는데중요한가치를지닌것으로원시공동체의규칙, 전례생활, 신약성서의발전과정, 교회사등과관련한소중한자료들이다. 목숨으로지킨신앙의원칙이처럼사도교부들은정통가르침에충실했을뿐아니라생활또한거룩했으며이가르침을지키기위해목숨을바쳤다. 뽈리카르푸스는 155년경화형으로순교하는데그이순교록에따르면 " 총독이그리스도를저주하면놓아보내주겠다고하자뽈리카르푸스는 ' 그분을섬긴지가 86년이나됐는데하느님이제게잘못한점이한가지도없는데어찌저주할수있겠소 '" 하며당당히죽음을맞이했다고전한다. 86세백발의나이에도불구하고이처럼용감하게신앙을증거했던성인처럼사도시대교부들은예수께서가르쳐주시고사도들로부터이어받은복음의순수성을지키기위해목숨을다해헌신했다. 그리고그공로로오늘날전세계가톨릭신자들은모여그리스도께서알려주신계시진리를왜곡없이알수있게됐고하나의신앙을고백하게된것이다. 이대목에이르러한국교회도교리지식이부족하던초기성직자가없음을한탄하여임의로성직을만들어운용하다잘못된것임을알고는즉시중지하고이승훈이북경의선교사들에게눈물로범벅이된통회의편지를보내는장면이오르는것은지킬것은지켜가야한다는생각이깊어서였을까. 지금우리의모습에서는너무자주, 다양한이유로신앙의원칙이무시되는것을보면서우리는후손들에게왜곡되지않은신앙을물려줄수있을까, 과연그신앙의원칙을위해목숨을걸수있을까곱씹어본다. 스테파노의순교이후예루살렘공동체의신자들은박해를피해예루살렘을떠나기시작했고흩어진신자들은이교도지역에서용감하게복음을전파하기시작했다. 그리하여시리아의수도안티오키아에는유대인과이방인의혼성교회가창립돼 ' 그리스도의사람들 ' 즉 ' 그리스도인 ' 이라불릴만큼독립된종교단체로주목을끌었다. 이에사도들은바르나바를안티오키아에파견해교회를돌보게했고바르나바는다르소에머물던바오로를초빙하고이때부터사도바오로의위대한전도여정이시작된다. 사도바오로의위대성은그의전도여행에있고그전도여행의위대함은구원의복음이유태교나팔레스티나지역의좁은곳을벗어나전세상을위한보편적복음이되게하는원동력이되었다는데있다. 바오로는안티오키아를거점으로세번에걸쳐지중해동부지역에광범위한전도여행을떠나게되는데안티오키아는사회적으로나교회사적으로대단히중요한대도시였다. 안티오키아는시리아의수도로서로마제국안에서로마알렉산드리아다음으로셋째가는큰도시였고동방과의무역로인실크로드의출발지이자종착지이기도했으며무엇보다소아시아지역에서그리스문화의중심지였다. 안티오키아의이러한지리적조건은바오로사도가왜이곳을전교의거점으로삼았는지충분히대변해주고있다. 안티오키아의이러한지리적중요성은이지역을차지하기위한전화에휩싸이는계기가되고이로인해그리스인이나로마인이남긴유적은물론그리스도교공동체의흔적을찾아보기어렵게만들었고지금은이름마저도안타키아로바뀐도시뒷언덕에있는베드로석굴성당만이남아그나마멀리서달려온순례자들허탈한마음을달래준다. 바오로사도는바르나바와함께이곳안티키아를떠나키프로스섬으로가면서첫번째전도여행 (45~49년경) 을떠나베르게비시디의안티오키아이고니온데르베등지에서전교활동을펼쳤는데이결과많은이방인들이입교했다. 이방인들의입교자들이늘어나면서이들에게예수의신앙만을요구할것인가유대교율법까지지키도록할것인가하는문제가대두돼결국예루살렘에서사도공의회 (49년경) 가열리게된다. 교회역사상첫공식적인회의인이사도회의에서이방인계그리스도인들은유대교의율법을지킬의무가없음을확인하는동시에사도들은유대인들에게전도하고바르나바와바오로는이방인들에게전도하기로결의함으로써바오로는명실공히이방인의사도가되어앞으로의그의 [11] 사도시대의교부들 32
33 전도여행에더욱박차를가하게된다. 첫번째전도여행의성공에고무된바오로는곧이어두번째전도여행 ((50~52경) 을떠나는데특히고린토에서 18개월간머물면서신약성서중가장먼저쓰여진데살로니카전서를집필했다. 두번째여행에서의가장큰특징은바오로가유럽에첫발을디뎠다는것이다. 필립비교회가바로이두번째여행중에바오로가유럽 ( 지금의그리스 ) 에세운필립비, 데살로니카, 베레아, 고린토의네교회중처음으로세운교회로이후필립비교회는바오로사도의전도와생계를위해물심양면으로돕는유일한교회가된다. 두번째전도여행에서가장오래머물렀던고린토에는 52년경바오로사도가갈리오총독에게심문을받은법정축대가보존돼있어그위대한여행의향기를맡을수있다. 세번째전도여행 (53~58년경) 의중심지는 3년가까이머물면서큰교회를세웠던에페소였다. 바오로사도는이곳에서많은위험과시련속에서고통을당했고얼마동안옥고까지치른것으로보여진다. 복음전파를위해스스로감내한사도의그로한수난은신앙의씨앗이돼에페소교회는당시교회들중가장큰교회가됐고이곳을중심으로신앙이급속히확산되기시작한다. 지금도에페소의성요한대성당유적을보면당시교회가얼마나활발했던지짐작할수있다. 사도바오로의전도여행지를찾아다니면서확인하고싶었던것은무엇보다그전도여행의성공이유는무엇일까하는것이었고이를오늘날에는어떻게받아들일것인가하는것이었다. 그리스도교의빠르고넓은전파는사도바오로의열정이전에그리스도교가지니고있는진리의힘이가장큰매력이었다. 거대한로마제국의사상의근간을이루고있었던희랍사상아래서고대인들이가장고민했던신의문제, 영혼의불멸, 지상생활의목적, 정의등의문제에대해그리스도교사상이주는명쾌한해답은이교적세계관의체험속에서진리를찾던이들에게구원의빛줄기가됐음이분명하다. 또한그리스도교가가지고있는이교들과의차이점, 즉그리스도교의윤리성, 초월적인선험적종교관, 역사속에생동하는역사성, 이를증거하는고대그리스도인들의삶과기적등은입교자들에게참된새로움을주기충분했다. 이러한역사적배경속에바오로의남다른배경도그의전도여행을성공적으로마치게한요인이됐다. 바오로는첫째율법을가르치던바리사이로서개종했다. 그래서예수의복음이유다교와어떤차이를가지고있는지누구보다도정확히알고있었다. 둘째바오로는디아스포라유다인으로넓은세상에대한많은경험과더불어희랍어를잘구사했을뿐아니라희랍사상들을잘이해하고있었다. 이러한바오로의두가지장점은그의전도여행을성공으로이끄는훌륭한바탕이되는데첫째가없이는그리스도교신앙의위대한예언자가되지못했것이고둘째가없이는이교인을위한성공적인선교사가되지못했을것이다. 우리도바오로사도가가졌던첫번째의성공요인인그리스도교가가진진리의힘은이미가지고있다. 따라서신자로서의사명인복음선포를위해서는내가믿는신앙에대한이해와복음대상에대한이해그리고복음을위한헌신이우리에게남은과제로보인다. " 나의기대와희망은내가조금도부끄러움을당하지않고, 살든지죽든지내몸을통해서그리스도께서항상그렇듯이지금도온세상에서찬양받는것입니다 "( 필립 1, 20) [11] 사도시대의교부들 33
34 [12] 초기그리스도교호교가 :47 호교교부시대의상황교회사의시계추가 2세기중반에이르면성공적인선교활동으로교회공동체가날로성장한다. 그러나교회의성장은새로운문화권, 이질적세상과접하게되는계기가되고로마제국의박해도갈수록심화된다. 다신교국가인로마제국에서하느님만이유일신으로다른신들은우상에불과하다는그리스도교의사상은이교도들로부터미움을사게됐을뿐만아니라신자들이황제신격화를거부해반정부집단으로취급됐다. 또한급격한교세의확장에놀란로마제국은체제에대한불안과위협을느낀나머지마르쿠그아우렐리우스황제같은권력자나첼수스및루치아누스같은지식층이그리스도교를반박하고지속적으로박해하게된다. 이러한정치적인이유외에도교회구성원대부분이하층계급으로구성돼있어저질신흥종교라는비웃음을샀을뿐아니라박해를피해비밀리에모여성찬전례를거행하는것을두고근친상간혹은사람의살과피를먹는식인종이라는유언비어까지나돌았다. 설상가상으로그리스도교는유대인들로부터도비난과공격을받는삼중고를겪고있는상황이었다. 호교교부란이러한반교회적이교도적상황에맞서그리스도교지도자들은교회를옹호하고변론하는데교회의역량을집중시킬필요가있었다. 교회초기사도교부들은신자들을가르치고지도교육하는데주안점을두었지만이시기에와서는교회의자기방어및옹호자기변론의호교적요소가 2세기교회의특징으로자리잡게된는것이다. 따라서이때의교회지도자들및저술가들을호교교부라고부르는것이다. 그리스도교가광신과미신으로매도당하는입장에서호교교부들은로마제국과그리스도교를비난하는이들에게조목조목반박한다. 호교교부들은교회를변론하는입장에서일반적으로 3가지중요논점을펼쳤다. 첫째, 교회를국가의위험요소로보는이들에게교회에대한올바른이해를가질것을촉구하면서그리스도교가로마제국에위험요소가아니며신앙은모든시민들의복지를생각하므로세상을위한유익한종교요올바른기존질서를수호하는원동력이므로합법적인근거없이충실한시민을박해하지말라는것. 둘째, 이교사상과그들의우상, 미신, 신화에대한모순과부도덕성을지적하면서그리스도교의올바른신관즉하느님의유일신사상의우월성을설파하면서하느님의초월성과그리스도의강생의신비, 육신의부활등에대한교리를강조한다. 세째로는철학의이론적방법즉인간의이성만으로는진리에도달할수없음을일깨우며인간의한계성을지적하며그리스도교는인간의철학과사상을뛰어넘는신적요소를지니고있으므로그리스도교야말로참다운학문 ( 신적철학 ) 이라고강조한다. 이처럼호교교부들은신약성서의가르침을소개하는데그친사도교부들과달리비록투박하지만이론적으로신앙을설명하면서신학의기틀을마련해최초의신학자들이라고할수있다. 호교교부들호교교부들은희랍문화권에서개종한사람들로서그리스도교를소개하는데있어변증법, 대화론, 수사학등희랍철학방식을도입, 응용하여그리스도교화시키고있다. 때문에어떤이들은그리스도교를희랍화시킴으로서복음의순수성을잃어버리는결과를초래했다고혹평하기도한다. 그러나교부들은이교도들과대항해그들의말과표현양식을사용해그리스도교를설명했지만교리자체를변질시키진않았다. 오히려당시로마제국의대중언어였던희랍어와그표현양식을사용함으로써신앙을모든계층에전파할수있는길을터놓은셈이다. 열정적이었던호교교부들의신앙과해박했던그들의학문적업적은그리스도의복음이일련의토착화과정을거쳐그리스 로마문화에정착되는데있어초석을세웠다. 이토착화과정에따르게돼있는이단과분열에맞서교리의순수성을지키는데지대한공을세웠을뿐아니라 [12] 초기그리스도교호교가 34
35 다음세기본격적인신학을펼치는교부들의황금기를여는단초를제공한것이다. 호교교부들에는과드라뚜스, 아리스티데스, 아리스톤, 아테나고라스, 타시아누스, 유스티누스, 테오필루스, 헤르미아스등이있다. 이중에서도 2세기대표적호교가는현재대구신학교의주보성인인유스티누스다. 이교가정에서태어난유스티누스는희랍식교육을받아깊은철학지식을습득했고이러한학문적자세로진리를탐구했다. 유스티누스는스토아철학, 아리스토텔레스학파, 플라톤사상에연이어몰두했지만끝내하느님존재에대한이해의한계를느끼던중체사리아의바닷가에서한노인을만나인간의모든사상은한계와부족함이있다는것을깨닫고그리스도교로귀의하게됐다. 이때가 130년경으로추정되는데이때부터유스티누스는평신도이지만진리의설파자, 신앙의설교가로나서위대한교회의스승이됐다. 유스티누스는자신의회개와관련하여 " 플라톤학파의제자였을때나자신이그리스도인들을비난했었는데사람들이가장두려워하는죽음에직면해서도용감한그들을보면서나는그들이악이나탐욕가운데살수없는사람들이라고생각하게됐다 " 면서순교자들의행동에감동을받았음을고백하고있다. 순교자들에받은감동을가슴에품고회개한유스티누스는 165년경자신이순교할때까지생앵의절반을로마에머무르면서자기집에교리를가르치는학교를세워복음을전하는한편박해자들에항의하는 2편의호교론을남겼다. 평신도의신분으로교회를위해온몸을열정적으로불사른유스티누스의귀감은정초가되면심심풀이를핑계로토정비결을보고오늘의운세에한탄하며때마다궁합이니택일이니가리지않는타협적인신앙을살고있는우리들에게시사하는바가크다. 내가얼마나좋은보물을가졌는지알지못하면그보물은남의것이되고만다 [12] 초기그리스도교호교가 35
36 [13] 교부들의황금기 :48 터키의수도앙카라에서남동쪽으로약 280km, 차로 4시간을달리면가빠도기아라고하는고원지대가나타난다. 이곳은주후 17년로마의티베리우스황제에의해로마의속주가된가빠도기아왕국이있던곳이다. 가빠도기아곳곳에는 3천개가넘는동굴성당이있어이지역을찾는순례객들의감탄을자아내게하는데그가운데서도수도원집성촌인괴레메지역이가장유명하다. 너희가찾지못하는곳 이란뜻의괴레메의바위산들에는수많은동굴성당과수도원이조성돼있는데안내자의말에따르면매일한성당에서 1번씩돌아가며 1년간미사를봉헌할수있도록 365개의성당이조성돼있다고한다. 이동굴성당의내부벽에는세월의무상함을보여주듯마모되고이교들에의해훼손되기도했지만수도자들이불타는신심으로그린프레스코화가남아있다. 그중대표적인것이바실리우스성당이다. 가빠도기아왕국의수도였던가이사리아 ( 현지명 = 카이세리 ) 의주교였던바실리우스는동생인니싸의주교그레고리우스와나지안조주교였던그레고리우스와더불어가빠도기아의삼총사교부로불린다. 이가빠도기아의삼총사교부들은이전시대의호교교부들이이교도적상황에맞서교회를옹호하던것에서나아가신앙의유산들 ( 信仰財 ) 를보다깊게신학적으로이끌었던교부들의전성기시대의대표적인물들이다. 정통교리의확정 2세기말부터여러지역교회에서중요한교부들과저술가들이거의동시에나타나신학의기초를놓게되는데이시기는그리스도교복음이그리스, 로마문화에정착되는시기다. 따라서복음이이들문화권안에서일종의토착화과정을거치는데희랍철학과의만남은그리스도교를하느님의계시로보지않고단순히이성적지식 ( 그노시스 ) 만으로오해되는징후가농후했다. 그노시스이단들은이미우주창조와구원등에대한성서내용을자의적으로해석해즐겨사용했다. 그래서당시교회지도자들즉, 교부들은그리스도교신앙및계시의원천들을정확히규정하고정전성서를확정하는한편그해석을사도들의계승을통하여보증된주교에게유보하는것이필요하게됐다. 이단자들의자의적해석에대해사도성전의정신에서신앙을이해하는것만이그리스도교적그노시스가될수있음을강조하게된것이다. 이러한그노시스및기타이단과의대결에서학술적인그리스도교신학이발전하게되고공의회들을통해정통교리가확정공포되기에이르렀다. 교부학에서중요하게거론되는교부들대부분이이시대에속하는사람들로서희랍어를사용하는동방교회에서는아타나시오, 가빠도기아삼총사교부, 알렉산드리아의치릴루스, 요한크리소스토모등이있고라틴아를사용하는서방교회에서는힐라리우스, 암브로시우스, 레오1세대교황, 아우구스티누스등이속한다. 동방교회와서방교회는지리적문화적차이로인해신학적경향도차이를보이는데서방교회에서는교회론과성사론이발전됐고동방교회에서는성삼론과그리스도론이크게발전했다. 교부가되는조건원래주교들에게만붙여졌던교부란명칭은 4세기후반여러이단논쟁이있을때교회의정통교리를증언하는주교는물론신부학자들도포함해교부라고부르기시작했다. 하나의교회의신앙과일치 안에서각종문제들을판단하고바른길을제시해주는사람은누구나교회의스승인교부라고부른것이다. 이렇게사도들의설교내용을가르치고증언한다는의미에서교부들은교회신앙의증거자로여겨지게됐고따라서새로운교리가등장했을때그것이교부들의가르침인지비교해보아위배되는사항이있으면배척되는이유가됐다. 이렇게이단앞에서사도들로부터물려받은신앙의유산을정확한표현으로그르침없이보존하기위해노력한교부들에있어신학과영성생활은구별되지않았다. [13] 교부들의황금기 36
37 교부들의신학적성취는학술적흥미에의해서가아니라서목자의입장에서신자들에게그리스도교의영성생활을심어주기위한것이었으므로교부스스로도빼어난수덕생활을실천했던것이다. 이런의미에서아우구스티누스성인은신학을 하느님을사랑하게하는학문 이라고했다. 교부에대한이러한역사적개념에따라교회는 4가지기준을구비한사람들을교부라한다. 첫째그가르침이사도들의설교에부합하는정통성이있어야하고 ( 정통교리 ) 둘째사도들의시기에가까운분들이다.( 고대성 : 95년경고린토인들에게보낸편지를저술한로마의글레멘스에서부터동방교회는요한마미쉐노, 서방교회는그레고리오대교황까지 ) 셋째는생활이모범적인분들로가르침과실제생활사이의조화와신앙과윤리적생활사이에조화를이루면서교회생활에충실했던분들 ( 거룩한생활 ) 이며넷째는교회가전통적으로인정해온분 ( 교회의인정 ) 이어야한다. 가르침과생활의일치를이루어낸교부들의모범은우리에게시사하는바가크다. 과연우리는자신이알고있는신앙에대해얼마나확신을가지고실천하고있는지되돌아보지않을수없었던것이가빠도기아바실리우스동굴성당의조악한프레스코화가준이미지였다. 교부들은죽어서도가르치고있다 [13] 교부들의황금기 37
38 [14] 알렉산드리아교리학교 :48 초대교회당시에는로마와더불어시리아의안티오키아, 이집트의알렉산드리아가가장큰국제적인도시였다. 이중에서알렉산드리아 ( 현지명 = 알리스칸드리아 ) 는기원전 331년에알렉산더대왕이자기이름을따서나일강하구와지중해가만나는곳에세운도시로지금도수도카이로다음가는제2의도시다. 알렉산더대왕이후이집트프톨레마이이오스왕가의수도가됐으며아프리카아시아유럽세대륙이만나는지리적중요성때문에헬레니즘시대의문화 경제의중심도시였다. 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마지막왕클레오파트라의고향이기도한알렉산드리아에는지난 96년부터이집트정부와유네스코가복원을추진중인 70만개의파피루스뭉치를소장한고대세계최대의도서관을가지고있었다. 또한일찍부터문화와학문이꽃피웠던알렉산드리아에는많은유대인들이거주했는데기원전 2세기에히브리어를모르는유대인들을위해구약성서가희랍어로번역돼 70인역 (septuaginta) 이출판돼기도했다. 이러한히브리사상과희랍사상의교류가일찍부터이루어져그리스도교를받아들일토양이충분했다. 알렉산드리아의이러한사상적토양은알렉산드리아를초기그리스도교신학의가장중요한거점으로만들게된다. 교리학교의시작알렉산드리아는교회초기부터복음이전해져교회공동체가활발히활동하고있었다. 교회전승에의하면마르꼬복음사가가이곳에복음을전했다고전해지며영지주의적이단집단들도흥행했다. 대도시인알렉산드리아는 2세기경왕성한선교활동으로매일같이사람들이입교해옴으로써특별한세례지원제도같은것이필요하게됐다. 또한세례지원자들뿐아니라이들을가르칠교리교사들을위한수준높은신학교육과교리를가르칠양성소즉교리학교가필요하게된것인데사가들에의하면알렉산드리아에는이미 2세기에이런교리학교가있었다. 알렉산드리아교리학교는판테누스가설립자로알려져있는데희랍철학의방법에따라철학과그리스도교사상을가르쳤다. 알렉산드리아는그리스계인프톨레마이오스왕조의수도로희랍철학을꽃피웠던도시였으므로신학과의만남도자연스레희랍사상안에서이뤄졌던것이다. 판테누스는철학강의의일환으로복음을강의했고이후알렉산드리아학교의뛰어난제자들도철학의언어와형식을빌어복음을전달했다. 또한성서를문자적의미에국한되지않고그속에숨겨진영적이고신비적의미를밝혀내는은유적방법으로해석해이교문화를수용하기도했다. 이러한이교학문을거쳐그리스도교의진리에이르고자하는알렉산드리아의학풍은후대특히개신교도들에게는이단으로몰릴만큼 ' 지난친적응으로인한순수한복음의변질이라는문제를낳기도했다. 끌레멘스와오리제네스오리제네스와함께알렉산드리아교리학교가배출한대표적인물인끌레멘스는이러한의혹에대해 " 가능한쉽게이교인들의고유한사고를통해올바른방법으로진리에대한신앙에도달하도록이교인들에게익숙한것을제공하지않을수없다 " 고저서양탄자 (stromata) 에서밝히고있다. 아테네의이교가정에서태어난끌레멘스는시칠리아와팔레스티나등지를돌며공부를하다 180년경알렉산드리아에서판테누스를만나그리스도교에입교하게된다. 이런끌레멘스에게있어신앙과이교철학은서로모순되는것이아니었고오히려모든학문은신학에도움을주고그리스도교는모든이교학문의꽃 ( 영광이며화환 ) 이라는확신을가졌다. 끌레멘스에게있어이교철학과그리스도교와의이런조화는스승이신그리스도께서모든인간이성안에역사하신다는로고스신학에기초를두고있다. 끌레멘스신학의출발점인로고스는세상의창조주이며계시자로마지막에친히인간육신을취하여강림하신분으로모든이성적활동의주 [14] 알렉산드리아교리학교 38
39 재자이시기때문에이교철학과신앙사이의조화가가능하다는것이었다. 한편끌레멘의제자인오리제네스는초대교회에서가장뛰어난학자중한명으로천재적자질을가지고있었다. 아버지가순교할만큼독실한알렉산드리아의신자가정에서태어난오리제네스는가르친바를실천했고실천한바를가르쳐많은사람들이그의삶을모방하려고했을만큼검소하고절제된생활을했다. 오리제네스는로고스에기반을둔스승끌레멘스의사상에서한발더나아가모든것의중심을하느님에게두면서자신의신학을펼치고있다. 오리제네스에게있어하느님은영이며. 낳음을받지않은분이며물질계를초월한위격적존재로서인간과관계를맺고돌보고계신다는것이그의사상적중심이다. 따라서오리제네스에게있어하느님은인간에게도저히파악될수없는분이시지만그리스도를통하여인간에게알려짐으로써그리스도는하느님의본체및존재의완전한표상인것이다. 네치우스황제박해때투옥돼고문을당했으며그후유증으로 253년선종한오리제네스는생전에엄청난수의저서들을남겼지만시기와질투로고통을겪었고사후에도몇가지학설때문에수세기를두고소위 ' 오리제네스논쟁 ' 의대상이되기도했다. 물론이러한신학논쟁은동방교회의신학을엄청나게발전시키는원동력이됐다. 로마가패배자마저도로마화시키는방식으로세계를제패한것처럼알렉산드리아는이교학문마저도하느님을위한도구로사용해초대교회최고의중요거점도시가됐으나이제는또다시교회유적이라곤까타콤바정도만이남아있는이교인의도시가됐다 [14] 알렉산드리아교리학교 39
40 [15] 초세기교회의이단과분열 :49 역사적사건에는언제나양면성이존재한다. 어떤좋은것이라도나쁜점을가지고있고반대로나쁜것이라해도긍정적인면을가지고있는법이다. 복음선포는어차피복음의고유한문화와는다른이질적문화를대상으로삼아이루어지는것이므로복음선교는일종의토착화단계를거치게된다. 이과정에서종교혼합내지는문화갈등현상을빚게되고따라서복음선포는정통신앙과는다른분열과이단이라는자연발생적인부정적요소를안게된다. 따라서복음선포와함께다양한문화들속에서복음의고유한성격을유지토록하면서그문화들을쇄신시키는한편그문화들이가진장점들을흡수동화하여교회스스로도쇄신되는것이초세기교회의과제이기도했다. 이러한신앙교의를구체화하는과정속에서도출되는오류, 즉이단들은비록그내용이신앙의일치에서벗어난것이지만상대적으로교의를발전시키는진보를이끌어내게된다. 사실지금의교회가가지고있는대부분의신앙교의들은 3~4세기경에확정된것들인데이는이단들로부터복음의순수성을지키고자하는교회의노력에서비롯된것들이다. 역사적으로교회는선교가지중해연안전체에걸쳐이루어진 2세기중엽부터외적박해의위협과함께이단과분열이라는대내적위협이라는이중의어려움을겪게된다. 따라서복음의순수성을지키려는교회의노력은괴상한의견과이단의출현에대해각별한주의를기울여왔다. 다양한이단들 당시의대표적이단들로는영지주의, 마르치온이단, 몬타니즘등을들수있다. 영지주의 (gnosticism) 란특수계층의사람들에게만비밀리에전해오는구원에관한지식즉 ' 영지 ' 와관련된이단사상을일컫는말이다. 동방의이원론사상을흡수하여여러가지종교와다양한철학을끌어들인종교혼합적인사상으로시작된영지주의는 2세기부터그리스도교의요소들을받아들여교회안에서조직화되면서신자들에게큰혼란을초래했다. 교부들은일반적으로사도행전 8장에나오는마술사시몬을그리스도교적영지주의의기원으로보고있다. 영지주의의대표적주장은이원론으로서선과악, 영의세계와물질세계, 영과육등이존재론적으로대립의관계에놓여있다는것이다. 영지주의자들에게있어신은영의세계만관할하고이영의세계는완전한광명 (pleroma) 의세계인데우주는하느님으로부터유출에의해생겨났고수많은영적존재들이나왔는데그것들은신적근원으로부터점점멀어지고있다. 하느님으로부터거리가멀면멀수록그존재들은본질에서작아지고최하층에이르면물질과융합되는데물질은암흑과악의세계로이최하층에서세상이생겨났고세상을만든이는데미우르구스로서구약의야훼와동일한존재라고주장한다. 그러므로구원이란암흑의물질로부터하느님의완전한광명으로의복귀를말한다. 여기서영지주의와그리스도교의혼합이생겨나게되는데인간이어떻게암흑을극복하고광명의세계로복귀할수있는가를가르치면서천상영적세계에속하는그리스도가가짜로육체를취하고물질세계에내려와광명의세계로복귀할수있는비밀을몇몇사람들에게깨우쳐줌으로써구원이이루어진다는것인데이비밀이바로영지라는것이다. 영지주의는물질세계를무시함으로써극단적인두형태로나타나는데육식과결혼을금하는금욕주의와육신은전혀쓸모없는것이므로어떠한것을해도상관없다는윤리적방탕주의가그것이며순교나금욕도구원에아무런소용이없다고한다. 영지주의의한분파인마르치온의이단설은 2세기에한때그리스도교회의가장위험한상대였다. 지노페주교의아들로태어나영지주의적주장으로인해아버지로부터파문당한후 140년경로마에서자신의교회를세워전파해 5세기까지그영향을미쳤다. [15] 초세기교회의이단과분열 40
41 마르치온은구약을배척하고엄격한이원론을가르쳐구약의야훼는분노하는악신, 신약의그리스도는최고의선신이라가르쳤다. 마르치온사상은이러한이원론에따라윤리적으로엄격한생활을강조해많은이들이추종했다. 특히마르치온은구약성서를거부하고신약성서도루가복음서와바오로의 10개서간만을인정함으로써교회는이에대항해성서의정전목록을확정하는데박차를가하게된다. 초세기교회의또다른대표적이단중하나인몬타니즘이단은몬타누스에의해주장된것으로몬타누스는교회가너무세족화되었다면서보편교회를배척하고엄격한윤리개혁과금욕을설교하면서박해중에피신하는것을배교와같은것이며신자들은순교를향해나아가야한다고주장했다. 몬타누스를따르는사람들은초대교회의순수성을회복하기위해뽑히운영적인사람, 비추임을받은사람들이라자처하면서성령으로부터받은은사를강조했다. 또한그리스도의천년왕국이다가왔다고말하며종말론을고조시켜결혼을경시하고부부라도별거할것을권장했다. 초세기교회의대학자였던떼르뚤리아누스가이이단에빠지기도했다. 분열과이단의의미 복음선포는복음의고유한문화와는다른문화에서살아온개인이나집단을만나게되는구체적상황에서발생한다. 복음선포는복음의새로운문화적적응이라는과제속에서이루어진다는것인데이는당연히자신과맞지않는관점을제시하고다른생활방식을주장하는새로운도전을맞이하게된다. 이과정에서신앙의일치에서벗어나는주장들을이단이라부르는것이다. 대부분이단을주장한이들은열심한이들, 즉유달리구원진리를열심히찾는사람들에서부터비롯됐다. 복음의전파과정에서파생되는이러한이단들은교회사안에서신앙생활의폐해도가져왔지만이단들로부터복음의순수성을지키려는교회의노력을가져와신학이발전하고교의가정리되는긍정적인측면을이끌어낸것도사실이다. 이런점에서칼라너는 " 교회는자신에대한반대를듣고... 거부함으로써비로소자기자신의진리를더욱명백히인식하게된다 " 고말했다. 역사적으로교회는이단의활동이활발해지는 2세기부터사도전승원칙의정확한해석과성서정전의확정을통해또나아가공의회를통해이단을방어하면서교회의정신적재산을풍부히했다. 몬타누스이단에대항하고자지역주교들이모여회의를하기시작해 3세기중엽에는관구회의로발전하게됐고결국 325년제1차공의회인니체아공의회가개최돼아리우스이단등에대한결정을내리게된다 [15] 초세기교회의이단과분열 41
42 [16] 로마제국의박해 :24 300년박해순교신심으로극복처음로마를순례하는사람들이가장먼저느끼는것은정도의차이는있겠지만놀라움과반감이아닐까싶다. 4대성당을비롯해곳곳에산재해있는교회유적들의엄청난규모와화려함은이를건축한신앙인들의놀라운신앙열정을체험케하면서도왠지이질감내지는노예문화의산물이아닐까하는의구심이함께들기에충분하다. 그러나이러한의구심은카타콤바를순례하면서사그라지게될것이다. 지상의화려하고웅장한교회는참혹한환경속에서살다스러져간지하교회순교자들의신앙이라는튼튼한기초가없었다면불가능했으리라는느낌, 아니이들의순교가있었기에지상교회의영광이가능했으리라는것을깨닫는데는그리많은시간과설명이필요하지않다. 떼르뚤리아누스의 순교자의피는그리스도교인의씨앗 이라는말을실감할수있는순간이다. 카타콤바에묻힌이들은주로네로황제부터종교자유가허용되는 313년까지근 300여년간의혹독한박해속에목숨을잃은순교자들이다. -원인과근거- 박해가일어나기전까지그리스도교와로마제국은비록호의적인관계를유지하고있었지만서로부딪힐수밖에없는요인들을안고있었다. 먼저로마인들은병역을노예나무산자들에게는부과시키지않을만큼시민의권리요의무라고생각할정도로개인보다국가를절대시하는성향이어서하느님을유일신으로믿는그리스도교와상충될수밖에없다. 아울러황제들은로마제국의정치 사회적혼란기를맞으면종교적기반에서제국의쇄신과내적강화를꾀했는데황제숭배같은국가종교예배가국가에대한충성의시금석으로강조될수록이를거부하는그리스도인은국가의적으로나타날수밖에없었다. 또한로마인들은영적세력이인간삶에영향을미친다고믿고있었는데타치우스나아우렐리우스같은황제들의재위기간에전염병, 기근, 홍수, 야만족침입등의재난이발생하자그리스도교반대파들은그리스도교때문에신들의분노를사서이러한일들이일어난다며군중들을부추키기도했다. 뿐만아니라그리스도교에대한무지도박해의한몫을담당했는데그리스도의살과피를먹고마신다는것에대해신자들을식인종으로, 형제자매로서의친교생활에대해근친상간하는야만인이라는유언비어가나돌았다. 이러한이유속에서박해가가해지지만법치국가인로마제국에서박해에대한법적근거는전무하다시피하다. 112년경비타니아지방의총독플리니우스가트리야누스황제에게그리스도교인에대한처벌을묻는질의서를보낸적이있는데이에대한황제의답변이후임황제들의박해의사례가됐다. 트라야누스황제는답변을통해 그리스도인들을수색하지는말고고발된자들만처벌하며그중에서도배교자는용서하라 고했다. 이에대해떼르뚤리아누스는 만일그리스도교인들이죄인이라면왜그들을처벌하지않는가? 그들이죄인이아니고따라서수색할필요가 없다면왜그들을단죄하고처벌하는가 라면서하등의법적근거없이그리스도교인들을박해한다고비난했다. -박해의과정- 로마제국의박해는대체로 10번에걸쳐일어났다고하는데그성격은 3기에걸쳐뚜렷이구분된다. 100년경까지의제1기는그리스도교에호의적이다가로마시대화재사건으로일어난우발적이고산발적인박해기이며 250년까지의제2기는그리스도교를반인류적반국가적금지된종교로규정하고신자라는이름만으로도처벌의대상이되던시기다. 가장조직적이고잔인하게시 [16] 로마제국의박해 42
43 행된 250 년에서 313 년까지의제 3 기는로마제국의정치 사회적혼란을무마시키기위해일어난박해시기였다. 교회초창기로마제국은속주통치의일환으로종교관용정책을시행해왔고특히유다교에는 허용된종교 라는이름으로허용했고유다교의한종파로이해한그리스도교도같이허용해왔으나 64년 7월로마에대화재가일어나자네로황제는그리스도인들을방화범으로몰아책임을전가시키면서박해를시작했다. 네로는교회를박해하면서자신의궁전을밝히기위해순교자를기둥에묶어산채로불태워소위 인간횃불 을만드는악행을서슴치않았다. 이 4년여에걸친박해때베드로와바울로사도가순교했다. 스토아철학자이기도한마르쿠스아우렐리우스황제는자신의재위기간동안일어난기근과페스트등의재난에대한원인을신자들에게돌리고혹독한박해를가하기도했다. 무엇보다가장오랫동안가장참혹했던마지막박해의주인공은디오클레시아누스황제였다. 당시로마는삭슨족의반란과게르만족의침입으로국경은불안하고국내적으로는군부의반란행위가속출하는등시민전쟁과경제파탄으로무정부상태의혼란기를맞고있었다. 따라서황제의최우선급선무는제국내권력의안정이었다. 디오클레시아누스는이러한사정으로인하여처음에는비교적관용정책을베풀었으나권력이안정된후황제권한의신성화를위해국가종교 를강조하기시작했다. 이에황제는황제숭배를거부하는그리스도교인들을상대로 4 번의칙령을발표하는등무자비한박해를시도했으나 실패했고결국콘스탄티누스대제에의해 313 년종교자유가허용되기에이른다. - 승리의원인 여년에걸친모진박해에도불구하고그리스도교는마침내로마제국의새로운사회 통치질서로자리잡게되는승리를거둔다. 박해를이겨낸원인은여러가지가있지만먼저그리스도교의보편적인교리에서찾을수있다. 교회가제시하는인생문제에대한확실한대답과절대적가치는혼란기에의구와회의에빠진이들에게그야말로구원의빛이었다. 아울러 교의보다신의능력을더중요시했던고대의종교적관념에서그리스도교표시아래거둔콘스탄티누스대제의승리는박해를종식시키는결 정적인사건이었다. 그러나무엇보다신자들의거룩한생활과교회의자선활동, 형제적친교나아가순교자들이보여준용기와죽음을앞둔불굴의자세는가해 자들마저감동을받기에충분했고박해를이기는원동력이됐다. 베드로대성당의화려함은카타콤바의실루엣이겹칠때만영광으로빛날수 있다는이유가여기에있다 [16] 로마제국의박해 43
44 [17] 콘스탄티누스의개종 :26 <== - 개선문과콜로세움순교지의대명사꼴로세움과순교의승리를보여주는듯한콘 스탄티누스개선문. 전승이끈그리스도를수호신으로 성주간이되면교황은순교자들의고귀한희생을기념하기위해순교자들이맹수의먹이가되어쓰러져간콜로세움에서십자가를손수메고십자가의길기도를봉헌한다. 이콜로세움에서서쪽으로 1.5km정도를가면콘스탄티누스대제의개선문이나타난다. 후에파리개선문의모델이되기도한이개선문은콘스탄티누스가 312년막센시우스를물리치고서로마를제패한기념으로원로원이건조해콘스탄티누스에게헌정한것이다. 콘스탄티누스는이전쟁의승리후 313년밀라노에서동로마의황제리치누스와협정을맺고그리스도교의종교자유를허용했다. 순교지의대명사콜로세움과순교의승리를보여주는듯한콘스탄티누스개선문을함께바라보고있노라면남다른신앙의감동이전해져오는듯하다. 지하교회또는카타콤바의교회로특징지워지던그리스도교는콘스탄티누스에의해비로소지상교회가될뿐아니라 4~5세기황금기를맞이하게된다. 이처럼콘스탄티누스의개종은교회사적으로뿐만아니라세계사적으로도일대전환점을이루는중요한사건이다. 정치적상황 로마황제중가장지독한박해를일으킨디오클레시아누스는노예가문출신으로황제에오른인물이다. 그는쟁취한황제권력을유지하기위해 4두정치라고도불리는 4분령통치정책을실시한다. 4분령통치는로마제국이한사람에의해통치하기는너무넓은영토였고정적들에의해권좌가언제찬탈될지모르는상황에서능력있는정적들을자기휘하에두고넓은제국을효과적으로통치하기위해제국을 4등분한정책이다. 디오클레시아누스는이정책을위해먼저자신의명령에복종하고자신의정책을잘추진할인물로비천한농민출신막시미아누스를공동통치자로삼아자신과같은황제 ( 아우구스투스 ) 칭호를주어제국의서쪽을맡게하고자신은동쪽을맡았다. 그리고다시이들정제 ( 正帝 ) 밑에한사람씩의부제 ( 副帝, caesarea) 를두어제국을 4등분하여통치하게했다. 즉디오클레시아누스 ( 소아시아와북아프리카 )-갈레리우스( 발칸반도 ), 막시미아누스 ( 이탈리아 )-콘스탄시우스( 프랑스와스페인 ) 의 4분령통치가이뤄진것이다. 결과적으로서기 293년 4명의황제가제국을분할통치하는형태가됐다. 이사분령통치를통해제국이안정되자디오클레시아누스는자신을신격화하는작업을시작하는데모든군인들에게황제숭배등종교적의무를강요하자유일신을믿는그리스도교인군인들과충돌할수밖에없었다. 신자군인들은황제숭배를거부하거나아예병영을이탈하기도했다. 결국로마제국은반역죄인이라는국사범으로그리스도인들을처형하기시작한다. 4명의황제중에서도갈레리우스가다스리고있는지역에서박해가가장심했는데갈레리우스는신자군인들의병역에대한이러한태도를위협적으로느껴군부내에서그리스도교신자들을색출하도록종용하고마침내 303년디오클레시아누스를설복해제국전체에서신자들에대한색출을시작한다. 이러한일련의사건을통해최고의권력을장악한갈레리우스는 305년디오클레시아누스와막시미아누스를퇴위시키고자신과콘스탄시우스에게아우구스투스칭호를부여한다. 그리고이들밑에자신의꼭둑각시인세베리우스와막시미아누스다이아를부제로삼았다. 이때볼모의형태로로마에머물던콘스탄티누스는자신이아버지의부제가될것으로믿었다가기대에어긋나자몰래황궁을빠져나와아버지와합류했다가 306년아버지사망후군대에의해황제 ( 아우구스투스 ) 로추대됐다. [17] 콘스탄티누스의개종 44
45 개종 311 년제 1 정제인갈레리우스사망후서로마는콘스탄티누스와세베리우스를무너뜨린막시미아누스의아들막센시우스, 동로마는리치니우스 와막시미아누스다이아가다스리는형태가된다. 이들네황제들은지리적환경과그리스도교에대한정책에의해동맹관계를맺었다. 콘스탄티누스는서로마에서막센시우스를물리치기위해리치니우스와동맹을맺었는데두황제는콘스탄시우스의그리스도교에대한관용정책을그대로시행했다. 콘스탄시우스는일신교적인태양신 ( 미트라 ) 의신도여서역시유일신교인그리스도교에대해혹독한박해중에서도비교적관용정책을써왔다. 콘스탄티누스는이후 312년이탈리아로출정해막센시우스와서로마제국의패권을두고다투게된다. 군사적으로열세에있던콘스탄티누스는로마의티베르강밀비오다리에서결정적인전투를치르게되는데전투전콘스탄티누스가그리스도교신자의신에게기도하면서도움을청했을때공중에서빛나는십자가와 이것을가지고승리하라 는문구를보았다. 이에자신감을얻은콘스탄티누스는그리스어로그리스도를의미하는키 (X) 와로 (P) 로된군기를만들어가지고싸워승리했다고한다. 이밀비오전투의승리로콘스탄티누스는서로마의주인이됐고그리스도를수호신으로공경하게된다. 고대로마인의신개념에서는종교의 교의보다신의능력이우선시했으므로그리스도의상징으로승리한그가그리스도를수호신으로삼은것은당연했다. 콘스탄티누스의이러 한개종은박해의종식과함께그리스도교가로마제국의국교가되는길을열어놓는대전환점이된다. 콘스탄티누스가죽기직전에야세례를받았다는것과 312년이후에도로마제국의최고제사장 (pontifex Maximus) 으로서이교의식을계속했다는점에서그의개종이단순히정치적술수였다고폄하하는의견도있다. 그러나당시로마제국은집집마다수호신을모실만큼다신교국가였고제국내의속주민들의종교도그대로허용되는상황이었던만큼황제자신이비록그리스도교로귀의했다고해도한순간에자신의종교를강요하는것은어려운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는이러한제국의풍습과문화를고려하여이교를금지시키지도않고자신이이교행사에참석하기도했지만밀비오전투이후온갖방법으로그리스도교를촉진했다. 그리스도교성직자들에게면세 (312), 십자가형금지 (315), 교회상속권한인정 (321), 주일의공인 (321) 등이교문화와의공존속에시행한수많은그의그리스도교촉진정책은어쩌면당시의상황을고려할때마찰을피하면서그리스도교세를극대화할수있는현명한조치인지도몰랐다. 그리고그의이러한조치는후에테오도시우스황제에의해그리스도교가국가종교가되는기틀을다졌다 [17] 콘스탄티누스의개종 45
46 [18] 밀라노관용령과제국교회 :27 <== 밀라노주교좌두오모성당. 타종교포함종교자유허용 이탈리아의경제는북부지역에의해주도되고있고그중에서도밀라노는이탈리아경제를이끌고있는경제수도이다. 또한이탈리아북서부의롬바르디아주의주도인밀라노는경제중심지일뿐아니라역사적건축물과박물관, 대학등으로둘러싸인전통의도시다. 그중에서도밀라노의두오모 ( 주교좌 ) 대성당은이탈리아최대의고딕양식건축물이다. 고딕건축양식의특징중하나는뾰족탑이라부르는첨탑과천정을높게하는것인데이는하늘을향한인간의소망을표현하면서하느님께사람들을들어올린다는표현의의미라고한다. 두오모광장에서바라보는대성당의위용은정말하늘을향한인간의마음이이런것이구나할만큼감탄을자아내게한다. 밀라노에서도모든중심지는이두오모성당과광장을중심으로펼쳐져있다. 밀라노관용령 312년밀비오전투에서승리한콘스탄티누스는 313년이밀라노를방문한다. 정략결혼으로이뤄진누이동생콘스탄시아와동부지역의황제리치니우스와의결혼식참석차였다. 내전을막치른콘스탄티누스는자연히제국의안정을위해리치니우스와여러가지문제에대해논의하게되고그중에서도십자가발현체험을한콘스탄티누스는종교문제특히그리스도인들에대한문제를다루면서로마제국내에서그리스도교의신앙의자유를허용한다는포고형식의영을내리게된다. 이를밀라노칙령혹은관용령이라부른다. 밀라노관용령은내용상크게두부분으로나뉘는데첫째는그리스도인들을지칭하면서그리스도인이나비그리스도인을막론하고제국내모든시민들에게적용되는종교자유의원칙을선포한것이다. 둘째는그리스도인들이박해시대에몰수당한재산이나팔린재산까지도교회에반납하도록명시한것이다. 이밀라노관용령자체가그리스도교를국교화하거나특권을베푼것이아니라타종교와같이신앙의자유를허용한것뿐이지만그리스도교가제국의새로운질서를만들어내는기초가됐다. 밀라노관용령이후콘스탄티누스대제가취한여러조치들은대중의대량입교와함께정치, 경제, 사회, 문화등다방면에그리스도교정신을확산시키게된다. 324년콘스탄티누스는반교회적정책을시행한리치니우스를물리치고전로마의유일한통치자가됨으로써그리스도교정책은더욱강화된다. 뿐만아니라콘스탄티누스대제를이은아들들은콘스탄티누스의친교회정책을더욱강화했다. 비록율리아누스황제때반교회정책이시행되긴했으나성공하지못했고결국테오도시우스 1세때인 380년 2월에 ' 가톨릭신앙에대한칙령 '(De fide catholica) 의반포와함께그리스도교가제국의공인종교가됐다. 이로써 300년간의혹독한박해를이겨낸그리스도교는제국교회, 국가교회가됐다. 제국교회의영향 콘스탄티누스의개종을단초로제국의공인교회가된그리스도교는박해받는교회에서특권의교회로, 순교자의교회에서국가교회로전환 하면서새로운국면을맞이하게된다. 먼저로마세계의그리스도교화는광범위한복음전파와함께대중의대량입교로인해양적으로성장했 [18] 밀라노관용령과제국교회 46
47 다. 그러나이러한집단개종은부족한세례준비와완화된입교절차등으로신앙의개념조차모르는이름뿐인신자들을양산해교회가속화될위험을함께안고있었다. 어떤이들은이러한집단개종은축복이아니라배교라고할만큼극단적으로반대의태도를취하기도했고교회의대중화를우려한인물들중몇몇은교회복음화와내적쇄신그리고신앙생활의심화를위해사막으로은거하기도해초기수도원운동의시초가되기도했다. 많은이들의집단개종으로속화의위험뿐아니라이교적이고미신적요소가교회안에침투하여그리스도교교리와는다른이론이나신조들을주장하는이들도생겨나게되는데이러한이단과이교는교회안에심한분열을일으켜교회일치를위협했기때문에교회의대중화보다더큰교회의위협요소였다. 그러나이러한이단들에대한논쟁을통해신학이발전되었으며공의회들을통해정통교리가확정공포되기도해질적인교회의성장을가져오기도했다. 교부학에서중요하게거론되는교부들은대부분이시기에속하는분들로교부들은이교사상과반그리스도교적사상을거슬러교회의교리를정립해나갔다. 신학의발전과더불어신자들의신앙생활을좌우할전례도비약적으로발전하기시작해거의모든곳에서매일거행되기도했다. 당시신자들의신심은수도생활의영향을받아기도, 극기, 자선을경건한신앙인의생활모델로자리잡아성무일도가널리행해지기도했다. 대중신심가운데가장두드러진것은순교자에대한공경이었는데순교자의유해를찾아내성당에모시는운동이일반화됐고신자들은자신들의무덤을순교자들의유물이나무덤가까운곳에마련하기위해애를태우기도했다. 그러나교회가국가교회가됨으로써국가권력과너무밀착되어부와권력을누리면서세속화되는경우도있었다. 따라서어떤이들은콘스탄티누스전환기를평가하면서쇠퇴기로보기도한다. 어떤전환기에도갈등과부정적요소가발생하듯이콘스탄티누스의개종에서시작된제국교회로의전환기역시긍정적인면과부정적인면을동시에안고있다. 수많은세월이흐른지금, 당시의교회사건에대한판단은어려운일이다. 다만중요한것은교회의존재이유를교회구성원스스로망각할때교회는위험에빠진다는것을역사가가르쳐주고있다는것이다. 사진말 - 로마제국내에서그리스도교신앙의자유를허용한다는포고형식의영을밀라노칙령혹은관용령이라부른다 [18] 밀라노관용령과제국교회 47
48 [19] 아리우스이단과제 1 차니체아공의회 :29 <== 325 년에소집된제 1 차니체아공의회는모든공의회중최초의공의회이다. 사진은 니체아의소피아성당. 니체아신경채택한최초의공의회 재작년수천여명의사상자를발생시킨터키대지진의진앙지 ' 이즈니크 ' 호수변에자리잡은이즈니크는주민 2만여명의소읍에불과하지만로마 비잔틴시대에는꽤이름난도시니체아였다. 로마시대에는비타니아속주의주도였고십자군전쟁시에는 4차십자군에점령당한비잔틴제국의임시수도이기도했다. 그러나무엇보다교회사안에서니체아는맨첫번째공의회가열렸던곳으로유명하다. 325년에소집된제1차니체아공의회는모든공의회중최초의공의회이면서모든교의논쟁이발생할때마다니체아신경이정통성의기준이될정도로가장중요한공의회였다. 니체아공의회는부활대축일의날짜를춘분이후만월다음주일로확정하고성직자생활, 교회구조, 공적참회, 전례문제등에대하여처음으로세계모든교회에적용되는교회법적규정을공포했다. 뿐만아니라니체아공의회개최의빌미가됐던아리우스사상을단죄하고예수그리스도는성부와동일한본성을지닌하느님의아들이라는교의를정립했다. 2세기이후그리스도교의주무대는팔레스티나에서그리스로옮겨지게됐다. 이때부터그리스도교복음이헬레니즘과혼합되면서체험적이고성서적이었던신앙표현방법이그리스철학의영향을받아점점존재론적이고형이상학적개념으로바뀌게된다. 아리우스역시플라톤주의의원리를자기신학의논거로삼았다. 아리우스사상의핵심은첫째신성을지닌하느님이되려면창조되지않는분이어야하는데하느님의아들이되신로고스는성부로부터낳음을받았기때문에진정한의미의하느님이될수없다는것으로따라서로고스는성부의첫번째피조물이며다른피조물처럼무에서창조되었다는것이다. 둘째는성자가창조되기전에는존재하지않았기때문에 ' 존재하지않았었던때가있었다 ' 는것이다. 셋째는그리스도를하느님의아들이라부르는것은신적본성을지니고있기때문이아니라하느님께서그의공적을보시고입양시켰기때문으로신성과어떤유사성도없다는것이다. 그리고넷째는성부는성자를창조의도구로사용하였으며성자를통해창조된첫번째피조물이성령이라는것이다. 알렉산드리아의바우칼리스본당주임신부로사목활동을하던아리우스가 318년부터이러한사상을설교하기시작하자많은사람들이그의사상에동조하기시작했다. 전통가르침에위배되는이러한설교를철회하도록한교도권의권고에아리우스가응하지않자알렉산드리아의주교알렉산데르는 318년에이집트지역주교회의를열어 100여명의주교들과함께아리우스와그추종자들을단죄했다. 아리우스는이결정에굴하지않고니코메디아의주교에우세비오등에게지지를호소하며팔레스티나와아시아등지의안티오키아학파에속하는교회들에게자신의주장을계속전했다. 그결과아리우스논쟁은점차알렉산드리아학파와안티오키아학파사이의대립으로발전해동방으로확산됐다. 안티오키아학파를중심으로한아리우스지지자들이알렉산드리아교회회의의결정을무시하고독자적으로교회회의를개최해아리우스의명예를회복시키자 323년부터안티오키아학파와알렉산드리아학파는서로집회를개최하여상대방을이단으로비방하면서그리스도교를분열로내몰았고사회적으로도큰혼란이야기됐다. [19] 아리우스이단과제 1 차니체아공의회 48
49 공의회소집과그이후 324년리치니우스를물리치고로마제국을통일한콘스탄티누스는이제막통일된제국이종교적문제로인한지역적대립으로분열될위협을느낀나머지하나의교리로통일시킬마음을먹는다. 그러나황제는교리내용보다는제국의안녕만을바랐으므로이논쟁의신학적의미를몰랐다. 콘스탄티누스는아리우스논쟁의문제를해결하기위해주교들을비티니아지방의니체아에소집해 325년 5월 20일에공의회를개최했다. 다행히세계최초의공의회에참석한 300여명의주교들은아리우스의주장이사도들로부터전해내려오는그리스도교의핵심교리인성자의신성, 육화와구원의신비를근본적으로부인하고있다는사실을인식하고니체아신경을채택했다. 교부들은니체아신경에서성자께서성부와 ' 동일한본성 '(homousios), 동일한천주성을지니고있다고선포했다. 니체아공의회의결정으로교회의일치를기대했으나논쟁이수그러지지않자공의회의결정보다제국의평화유지에목표를둔콘스탄티누스는정책을수시로변경한다. 화해를염두에둔황제는 328년에아리우스와추종자들의추방명령을취소시키고알렉산드리아교회에다시복직시켜줄것을요구하는한편아리우스사상을반대하고철저한니체아신경신봉자로신앙과관련해황제를수시로거부해온아타나시오를알렉산데르주교의후임자로임명했다. 그러나황제의기대와는달리아타나시오는아리우스의복직을거부해귀양을가게된다. 아타나시오는이때부터무려다섯차례에걸쳐주교직에서쫓겨나고 17년동안유배생활을하면서도정통신앙을고수했다. 콘스탄티누스황제이후에도아리우스사상은황제의교회정책에따라부침을거듭하다가테오도시우스황제취임후제국내모든사람들이니체아신경을받아들이도록함으로써종식되고 381년제1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의교의결정으로써공식마감됐다. 신앙문제에있어국가와교회는이단을극복하려는동일한관심사를가졌지만그동기는서로달랐다. 교회는신앙의교의적명확성이, 황제에게는사회안정과국가의일치가더중요했다. 따라서신학적대립은동시에빈번하게정치적세력투쟁이되기도했다. 이러한투쟁은교회의정신적힘을길러주었고교의의확정과유능한인재를길러내기도했지만사도들과순교자중심의교회가영주급주교들중심의봉건주의적교회로가는계기가되기도해비판의대상이되기도했다 [19] 아리우스이단과제 1 차니체아공의회 49
50 [20] 제 1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32 <== 성이레네성당 381 년제 1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개최된성이레네성당. 십자가형태의이레네성당은 4 세기 초까지아프로디테의신전이었다가성당으로개조됐다. 터키의이스탄불은아시아와유럽양대륙에걸친도시이면서로마시대에는콘스탄티노플, 비잔틴시대에는비잔티움으로불렸던역사적도시로 1923년까지 1600여년간이나라의수도였으며동방그리스도교의중심지였다. 콘스탄티누스황제는동로마제국을지배하던리치니우스를물리치고제국을통일하자제국의새로운수도, 신로마를건설해야할필요성을느꼈다. 이는정치적으로는귀족과기득권층의끊임없는음모와술수로부터벗어나기위해서였고지리적으로는방대한영토의제국을통치하기에는서쪽으로치우친로마를대신하기위해서였다. 종교적으로도제국일치의이념으로삼은그리스도교의장려를위해우상숭배에찌든로마와는다른, 순수한신앙도시의건립을필요로했다. 따라서콘스탄티누스는마르마라바다와보스포르스해, 수심깊은골드혼이 3면을둘러싸고있고천연적요새지역인이곳에 6년간의대공사끝에도시를완성하고자신의이름을따서콘스탄티노플로명명했다. 뿐만아니라성이레네성당과소피아성당등을건축해도시전체를신앙도시화하여성모마리아께봉헌했다. 교회사적으로수많은사연을간직하고있는콘스탄티노플은초세기교회를뒤흔들어놓은아리우스이단논쟁을종식시키고삼위일체교리를확립한제1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개최된곳이기도하다. 삼위일체논쟁교회는처음부터성령께대한신앙을고백해왔다. 성부와성자와성령삼위의이름으로세례를주는관습이초창기부터정착되어왔었고박해시대교회나교부들도삼위일체신앙을고백해왔다. 이어제국교회시대에접어들면서외적인위험이사라지고그리스철학과의만남은수많은교리논쟁을불러왔고이단까지등장하게된다. 그중에서도아리우스사상이대표적이었는데니체아공의회에서는화급한문제였던성자의신성에관한교리를선포하고성령에대해서는간단하게 ' 성령을믿는다 ' 고하였다. 니체아공의회이후에도아리우스파의소동은계속되었고세미 ( 半 ) 아리우스주의자들인마케도니우스파는성령의신성마저거부했다. 이는황제들의종교적성향과도밀접한연관이있는데 361년아리우스파의옹호자였던콘스탄시우스가사망한후아타나시오는 362년알렉산드리아에서교회회의를개최해니체아공의회결정을재확인하고아리우스사상을배격했다. 그러나이교를신봉해배교자라불리는율리아누스황제는제국의안정을위해아타나시오를다시귀양보냈다. 이어율리아누스황제사망후로마제국은요비아누스의짧은통치를거쳐동로마제국은아리우스파를지지하는발렌스, 서로마제국은니체아정통교리를지지하는발렌시아누스가통치하는형세가된다. 동로마제국의교회는 373년아타나시오가선종하자정통교리의옹호세력은가파도키아의삼총사교부즉체사레아의바실리오, 나지안즈의그레고리오, 니싸의그레고리오에의해계승됐다. 특히바실리오는발렌스황제의종교정책에저항했을뿐아니라동생그레고리오를니싸, 막내동생베드로는세바스티아노, 친구그레고리오를나지안즈의주교로임명하는등형제와친구들을주교로임명하여정통신앙을지키기위해자신의관할교구를강화했다. [20] 제 1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50
51 반면서로마제국의교회는니체아신앙을줄곧지지해왔고발렌스황제사망후발렌시우스황제의아들그라시아누스가전로마제국을통치하게된다. 그라시아누스는다시로마의동부지역을테오도시우스에게맡겼다. 스페인에서태어나자연스럽게니체아의가르침을받고자란테오도시우스는종교적일치를이루기위해니체아정통신앙을고집했다. 381년하나의신앙안에서제국을일치시킨다는칙령을통해니체아신앙의정통성을공표했고다른어떤이단도금지시켰다. 제2차보편공의회테오도시우스의종교정책이수도콘스탄티노플을중심으로동방에서다시논쟁을불러일으키자테오도시우스는 380년 11월나지안즈의그레고리오를콘스탄티노플대주교로발탁했고이어 381년 5월그레고리오를의장으로제1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개최했다. 이공의회는 150여명의동방교회주교들만이참석한공의회로서신아리우스주의, 성령배격론자, 마케도니아파등여러이단들을배격하고성령의신성에관하여니체아신앙고백을재확인하여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을확정했다.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은니체아신경에 " 또한주님이시요생명을주시며성부에게서좇아나시며성부와성자와더불어같은흠숭을받으시고같은영광을받으시며예언자를통하여말씀하신성령을믿나이다 " 란구절이첨가됐다. 이결의는로마에보고됐고교황다마소 1세는서로마의그라시아누스황제에의해소집된로마교회회의에서동방주교들의결정을재확인하고삼위일체에대한교리법령을선포했다. 이로써니체아이후로시작된삼위일체의논쟁이일단락됐다. 그러나제1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의성령에관한결의는아리우스주의와성령종속론등을단죄하는것이주목적이었기때문에동 서방교회의신학을선택해지지한것은아니었다. 따라서동방교회는성령이 ' 성자를통하여성부에게서 ' 좇아난다고이해하였고서방교회에서는성령이 ' 성부와성자에게서 ' 좇아난다고해석했다. 이는결국서방교회에서 589년톨레도교회회의에서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에자신들의표현인 ' 성자에게서 (Filioque)' 를삽입함으로써큰문제를야기하게된다. 서방에서는신앙의해석이라고생각한반면동방에서는신앙의변조라고여겼던것이다. ' 성자에게서 ' 가삽입된이신경은서방교회에서는점차보편화되어마침내 1014년베네딕도 8세교황때로마에서도채택돼 1054년동 서방교회대분열의원인중하나가되고만다. 지금은음악공연장으로사용되고있는콘스탄티노플공의회의개최지이레네성당이보여주는세월의무상함을느끼면서실천적이고체험적이었던신앙이사변적논쟁거리가되어버렸다는씁쓸함을지울길이없었다면너무비관적인것이었던걸까 [20] 제 1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51
52 [21] 네스토리우스이단과에페소공의회 :43 에페소는바울로사도가 3차전도여행시 27개월간이나머물며대대적으로선교했고사도시대교회들중가장규모가컸었던공동체였다. 이를뒷받침이라도하듯에페소에는사도요한과루가의무덤, 성모님께서말년을보내셨다는성모마리아의집, 성요한성당, 성모성당등많은유적들이산재해있다. 교회역사상처음으로성모께봉헌된첫번째성당인에페소의성모성당은성모님께서요한사도와함께예루살렘에서옮겨와살던곳으로 431년제3차보편공의회인에페소공의회가열린곳이다. 그리스도론논쟁 " 예수그리스도안에서어떻게인성과신성이결합되어있는가?" 이질문은 325년의니체아공의회와 381년의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통하여삼위일체론이정리되고난후교회의최대관심사를표명한것이다. 성자가성부와어떤관계가있는지가신학적으로규명된후에는성자가지닌신성과인성에관한새로운교리문제가발생한것이다. 이신학적논쟁은오래전부터대립해왔던알렉산드리아학파와안티오키아학파사이의불목과투쟁으로더욱치열해진다. 그리스도론논쟁은니체아신경의지지파인알렉산드리아학파계열신학자들로부터비롯됐다. 이들은아리우스이단을염려하여주로그리스도의신성을강조하면서그리스도안에신성과인성이서로구분되지만분리될수없다면서하나의본성을강조했다. 반면안티오키아학파는인성을강조하면서그리스도안의인성과신성의구분에중점을두었다. 알렉산드리아학파에따르면예수께서세상에서행하신모든행적은하느님의행적이되지만안티오키아학파에따르면그행적도신성과인성에따라철저히구분되는데예를들면그리스도께서수난을받으실때하느님으로서의예수는고통도수난도받지않고다만인간예수가받은것이라는것이다. 이러한완전분리는그리스도의한위격안에불가분의합일을인정치않는이원론에빠지게된다. 이러한논쟁에불을지핀것이 ' 하느님의어머니 '(Theotokos) 명칭문제로불거진네스토리우스사건이었다. 네스토리우스이단네스토리우스는 381년안티오키아근처에서페르시아인부모사이에서태어나안티오키아학파사상에깊이물든인물이었다. 수도회사제로서뛰어난설교로이름이높았던그는테오도시우스 2세황제의총애를받아 428년콘스탄티노플의총대주교가된다. 네스토리우스는주교가되자각종이단들을물리치기위해많은노력을기울였으며신학논쟁을중재하기도했다. 당시에는성모신심이고조되던때여서 ' 하느님의어머니 ' 란용어가널리사용됐는데일부안티오키아학파출신신학자들이성모는인간예수만을낳았기때문에 ' 하느님의어머니 ' 라부를수없고단지 ' 인간의어머니 ' 라고불러야한다고주장했다. 네스토리우스는논쟁의해결책으로 ' 그리스도의어머니 ' 라는명칭을사용할것을주장했다. 성모님은인간예수만을낳으신분이지결코신예수의어머니는될수없다는것이었다. 이는그리스도의신성을부정한것이아니라완전한인성을강조하기위해강조된것이었다. 네스토리우스의이러한주장은즉시심한반발을불러일으켰고특히알렉산드리아의반대가심했으며이반대세력의중심은알렉산드리아의총대주교인치릴로였다. 치릴로는첼레스티노 1세교황에게네스토리우스와관련된자료를보내지지를얻어낸다음 430년알렉산드리아주교회의에서네스토리우스가르침을단죄하고 12개조항의파문조문을네스토리우스에게보내그의주장을철회할것을요구했다. 이에네스토리우스는치릴로의주장을반박하는 12개조항의파문조항을발표하고테오도시우스 2세에게문제해결을위한공의회의소집을요구했다. [21] 네스토리우스이단과에페소공의회 52
53 테오도시우스 2 세는네스토리우스의요구를받아들여서로마제국의황제인발렌시아누스 3 세와함께공의회를개최하기로결정함으로써 431 년 6 월 22 일성령강림대축일에에페소에서공의회가개최됐다. 에페소공의회공의회는소란스럽게진행됐다. 네스토리우스가관구소속주교 26명과함께먼저도착했고이어치릴로가 50명의관구소속주교들과함께도착했다. 반면안티오키아의요한총대주교일행과로마교황사절단은미처도착하지못했다. 그러나치릴로는교황의대리인임을자처하며많은주교들의반대에도불구하고공의회개막을서둘렀고이때문에숫적열세를감안한네스토리우스는에페소에머물러있으면서도또세번이나참석요구를받고도공의회참석을거부했다. 치릴로는첫회기에서이미작성해놓은그리스도안에서의신성과인성의위격적결합에대한신앙선언문을작성하고 198명의참석주교들의인준을받아내믿을교리로선포했다. 이로써 ' 하느님의어머니 ' 칭호가채택되었다. 그러나 5일후안티오키아의요한총대주교가 44명의관구소속주교들과함께도착하자네스토리우스는회의에들어가지않고별도의회의를개최해에페소공의회결정을반대하고치릴로와에페소의주교멤논을파문했다. 이로써공의회는 2개의회의로갈려서로비난과공격을퍼붓게됐다. 쌍방의비방이계속되자난처해진테오도시우스 2세는두지도자인네스토리우스와치릴로를체포했다. 후에치릴로는자신의임지로되돌아갈수있었지만네스토리우스는북부이집트로추방되었고 451년경에사망했다. 이로써공의회는일단락되었지만동방교회주교단의분열은계속됐다. 새교황식스토 3세에이르러네스토리우스사건으로분열된교회의질서와평화를회복하기위해일치의길을모색하다 433년 4월에안티오키아측에서는네스토리우스사상의단죄를승인하고알렉산드리아는치릴로가안티오키아측에서작성한신조를받아들임으로써합의가이루어졌다. 네스토리우스의이단사상에대해서는오늘날까지의견이분분하다. 에페소공의회이후네스토리우스지지자들은페르시아로피신하여교회를세웠고성실한수도생활과열성적인포교활동으로인도, 티벳, 중국까지전파됐다. 중국에서는위대한종교, 빛나는종교라는뜻으로경교 ( 景敎 ) 라는이름으로한동안융성했었다. 사진말 = 431 년에페소공의회가열렸던에페소의성모성당유적. 그리스도안에서의신성과인성의위격적결합에대한신앙선언문이작성 되고믿을교리로선포했다. 이로써 ' 하느님의어머니 ' 칭호가채택됐다 [21] 네스토리우스이단과에페소공의회 53
54 [22] 강도회의와칼체돈공의회 :44 독일의벨테신부는 " 교의의역할은복음의자리를차지하는것이아니라복음을알아듣도록도움을주는것이다. 따라서교의는예수를바라보며예수를근거로삼아서이해해야한다 " 고했다. 말인즉교리라는것은성서에나타난예수님의가르침을설명해주는것이지그자체가강조돼주객이전도돼서는안된다는것이다. 신앙교의를정립한초대교회의공의회들을둘러보면서지리적언어적문화적차이로인한신앙해석으로시작된교의논쟁들이심심찮게올바른예수이해를위한대화의장이되기보다자신들의정당성을관철하기위한대결의장이되고있음을되새겨보지않을수없다. 인간의아전인수식다툼에도하느님의섭리가작용하고계시겠지만사랑이라는신앙을이야기하면서서로의정당성을추구하기위해여론을조장하고권력의힘을빌리고그로인해분열해서로다른길을가는모습들을보면서갈비에콜라같이어울리지않는다는여운이저녁땅거미처럼길게남는다. 우호적인세력들을등에업고서로를비난하고분열하던또하나의사건이 449년에페소와 451년칼체돈에서있었다. 단성설과강도회의네스토리우스를단죄한에페소공의회세대이자치릴로의열렬한지지자였던콘스탄티노플의욥수도원장에우티케스는네스토리우스의이단을격렬히반대하면서치릴로의단일본성이론을극대화했다. 에우티케스는그리스도안에서의신성과인성의일치를강조하면서강생하신그리스도안에처음에는두본성이있다가인성은 ' 마치바다에떨어지는물방울이바다에녹아버리듯 ' 신성에흡수되어신성만남는다고주장했다. 그리스도의신성과인성의지나친혼합성에서새로운이단이발생한것이다. 이단성설은오늘날까지도동방교회안에서잔존할정도로지역교회를동요시키면서동서방교회분열의한원인을제공했고정치적으로도동서로마제국간의긴장을초래했다. 에우티케스의단성설주장후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플라비아누스는주교회의를열어에우티케스에게그의주장을철회할것을요청했으나불응하자그를파문하고수도원장직에서해임했다. 그러나치릴로의후계자인알렉산드리아의총대주교인디오스코루스가에우티케스를지지하고테오도시우스 2세에게교리논쟁해결을위한공의회를요구해 449년 3월 30일치릴로가승리한에페소에서공의회가소집됐다. 그러나이공의회는에우티케스지지자들에의해주도돼치릴로가사용한방법대로반대파들에게발언의기회도주지않고일사천리로진행됐다. 교황레오 1세가플라비아노총대주교에게보내그리스도의한위격안에서신성과인성의일치를천명한교의교서 (Tomus ad flavianum) 도낭독하지않았다. 뿐만아니라플라비아누스주교를파문하는동시에에우티케스를복직시킴으로써서로마제국과교황의거센반발을불러일으켰다. 칼체돈공의회레오교황은 449년의에페소공의회를강도공의회라고규정하고플라비아누스총대주교의복직과에우티케스의단죄를요구하며새로운공의회개최를요구했다. 때마침테오도시우스 2세가사망하고정통파를지지하는풀케리아와결혼한마르치아누스가집권하자마르치아누스는에페소공의회를무효화하고새로운공의회의개최를선언했다. [22] 강도회의와칼체돈공의회 54
55 이리하여 451년 10월 8일에칼체돈에서제4차보편공의회가개최됐다. 칼체돈공의회는그때까지개최된교회회의중가장규모가큰것으로레오교황이훈족 ( 흉노족 ) 의침입으로참석치못했으나 600명이상의주교들이참석해단성론을단죄하고양성교리를선포했다. " 그리스도안에서두개의본성은혼합되거나분리되지않으며한위격안에일치되어있다 " 는이신조는오늘날까지그리스도론의기초가되고있다. 이리하여위격적일치의그리스도론이확정됐다. 그러나분리, 일치, 위격같은형이상학적개념들은서방교회에서는확실한개념이었으나동방교회에서는생소한것이었다. 따라서회기중에이미심각한분열현상이일어났고칼체돈공의회이후로도동방교회는신성과인성의일치를계속단성설로이해했다. 나아가이러한갈등은로마와동방총대주교간의대립으로이어졌다. 동방교회의이러한단성설지지경향은신앙적인면뿐만아니라정치적으로도이어져종교와일치교회와국가를흡수융합시키는동방교회의제국신학을발달케했고신자들의신앙생활에까지확대돼신적인것이인간적인것을흡수하는신앙사고가만연했다. 또한공의회결정사항중 ' 동로마제국의수도인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는로마의주교와동등한품위를갖는다 ' 는조항을레오교황이인정하지않자동서방교회의분열이가속화됐다. 신앙의해석을둘러싼이러한논쟁은교회에큰상처를안겨주기도했으나주창자들의신앙생활과는별개의상황이었다. 비록그들이가진신학적소양에따라단죄받고파문되기도했으나대부분열심한신앙인들이었다. 칼체돈은오늘날콘스탄티노플 ( 이스탄불 ) 에합쳐져한도시가되었으며공의회가열렸던성녀에우페미나성당에는하이다르파사기차역이세워져수천수만명의이슬람교도들이메카와메디나로순례를떠나는시발역이됐다. 사진말 = 칼체돈공의회가열렸던성녀에우페미나성당에는하이다르파사기차역이세워져수천수만명의이슬람교도들이메카와메디나로 순례를떠나는시발역이됐다. < 김상재 > [22] 강도회의와칼체돈공의회 55
56 [23] 삼장서논쟁과제 2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46 <== 이스탄불의성소피아성당 제 2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가개최됐던이스탄불의성소피아대성당 년부터 500 년간 이슬람의모스크로사용되다 1935 년박물관으로바뀌었다. 황제단성론옹호 교황과관계단절 죽은세주교 저술단죄 큰반발불러성좌권위떨어지고동 서방대립심화콘스탄티노플 ( 이스탄불 ) 에서가장유명한것을꼽으라면역시성소피아대성당이다. 현존하는성소피아대성당은유스티아누스황제때지은것으로유스티아누스황제가 532년폭도들에의해불타버린성당을신축하기시작, 5년 10개월의공사끝에완공했다. 유스티아누스가 537년축성식을거행하기위해입장하다감격해 " 솔로몬대왕이여내가당신을이겼소 " 라고외쳤다는일화는유명하다. 완공후 1000여년동안은세계에서가장큰성당이었고지금도 5번째로큰성당이자제2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 보편공의회로는 5차 ) 개최지인성소피아대성당의건축은황제의신앙이념과무관하지않았다. 유스티아누스황제는뛰어난군주로서 5세기게르만족의대이동으로잃은로마의옛영토를회복시키는한편모든법의필수불가결한원천이되는로마법대전을만들어국가행정을정비했다. 뿐만아니라 ' 통일된그리스도교의기초위에로마제국의재기 ' 를목적으로수많은교회건축과더불어교회내정에도깊숙이관여했다. 유스티아누스황제의이러한일련의행동들은단성론의영향으로교회와국가를흡수융합하는비잔틴제국신학이그바탕이됐다. 실제로유스티아누스는지상에군림하는신의대리자인신정주의적군주로행동하면서정통적신앙의보호자로자처하며교의와교회규율의세목에이르기까지관여했을뿐아니라칙령을통해신학논쟁에도관계했다. 그러나종교적일치를희망하여황제의권력으로교의문제를해결하려한황제의간섭은제국을새로운분규로몰아넣었다. 삼장서논쟁유스티아누스황제의정책에는황후테오도라의입김도많이작용했는데테오도라는원래콘스탄티노플의원형극장히포드롬의무희였다. 무희시절테오도라는한고위관리의정부였는데그가북아프리카로발령을받자그를찾아갔다가문전박대당하고오갈데없는처지에서알렉산드리아에서단성론자인한성직자를만나신실한신앙인이됐다. 콘스탄티노플에돌아와신앙생활에전념하던테오도라는유스티아누스황제를만나일약황후가되는행운을누린다. 이후테오도라는황제의총애를바탕으로단성론자들을비호했고황제는이를받아들였다. 이틈을단성론자들이파고들었다. 그리스도론에대한논쟁으로인한제국의분열을염려한황제에게궁정에서영향력을지녔던가빠도키아지방가이사리아의주교아스키다의테오도로주교가안티오키아학파지도자들과그들의신학을네스토리우스이단으로단죄한다면단성론자들이제국교회에일치할것이라고감언하자황제는이제안에동의했다. 이리하여유스티아누스황제는 544년에이미죽은몹수에스티아의주교테오도로와치로의주교테오도레토, 에데사의주교이바스등을네스토리우스주의자들이라고단죄하는한편그리스도론에관한그들의저서내용도단죄하는칙령을반포했다. 이러한황제조치에대한찬반을이른바삼장서논쟁이라한다. 삼장서란이들 3명의저자들과그들이저술한저서의내용과관련된문서전체를가리키는말이다. 삼장서의단죄는죽은주교들에대한단죄로서교회사상초유의일이었고칼체돈공의회에서사면된이들에대한것으로공의회의권위를손상시키고단성설을묵인한결과라큰반발을불러일으켰다. [23] 삼장서논쟁과제 2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56
57 제2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제국전체에서격렬한반발이일어남에도불구하고유스티아누스황제는자신의칙령을받아들이게하려는시도를계속했다. 동방교회에서는아무도이결정을합당한것이라받아들이지않았지만총대주교들과주교들은끊임없이강요를받았고해임을면하기위해서는받아들일수밖에없었다. 이에궁정주재교황대리인스테파노는단죄서명자들과의관계를단절하기도했다. 한편교황비질리오는황제의강요로콘스탄티노플로연행돼와 1년가까이억류당하다마침내 548년 4월 11일칼체돈공의회의권위를보호한다는조건으로삼장서에대해파문을선언했다. 교황의이러한행위는서방교회에큰충격을주었는데아프리카교회에서는교황을파문하기까지했다. 이러한교회형편을감안해교황과황제는분규를조정하기위해전체교회회의를개최하기로하고그때까지는이문제에대해더이상논의하지않기로협정을맺었다. 그러나유스티아누스가 551년에새로이삼장서를단죄하기위한칙령을발표했다. 이번에는비질리오교황도동의를거부하자성당에서군인들에게폭행을당하기도했다. 이로써교황과황제의관계가단절됐으며교황은황제가소집한공의회에참여하기를거부했다. 유스티아누스는교황이참석하지않은가운데 553년 5월과 6월에제2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를개최해삼장서에대해파문을선언했고이에반발하는평신도와성직자들을파문이나파면으로위협했다. 비질리오교황은처음에는교황령 (Constitum) 을통해삼장서의유죄판결을단호히금지했으나황제가추방과강제노동의협박을가하자병중에시달리던교황은 553년 12월공의회의결의를추인하고말았다. 그러나교황의동의는교의적결정과는전혀상관이없는것이었다. 이처럼신학적으로미숙한황제의태도와본연의임무를지켜내지못하고변덕스러웠던교황으로인해교회일치가크게손상되고교황직의권위가땅에떨어졌을뿐아니라동방과서방의대립이심화됐다. 종교적분열로인한제국의동요를막으려는정치적인동기외에종교적인문제도황제가해결할수있는권한이있다고생각한데서비롯된일련의사건들은결국혼란만가중시킨꼴이되고만것이다. 사랑의행위도인간적인동기에의해서가아니라하느님때문에이뤄질때그리스도교의애덕이되는것처럼인간의권력에만의지한종교적일치나개혁은성공할수없다는것을이논쟁은잘보여주고있다 [23] 삼장서논쟁과제 2 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 57
58 [24] 예로니모와불가따성서 :49 <== 베들레헴의가타리나성당. 해마다여기서전세계로방영되는성탄자정미사가봉헌되는데성당에서지하계단으로내 려가면예로니모성인의서재가있다. 대중이읽기쉽게라틴어로성서번역, 원문에충실하고정확 교회공식성서 고전강의로선풍적인기를끌던도올김용옥은예수님의탄생지에대한의문을제기해물 의를빚은적이있다. 해산일이임박한임산부가나자렛에서 300여리떨어진베들레헴으로이동해아이를낳은것이의심된다는것이었다. 그러나이같은주장은신약학계에서는이미친숙한추론이다. 예수부활이후유다계그리스도인들은예수님을메시아로신봉했는데베들레헴이아닌다른곳에서태어났다고하면예수님은약속된메시아가아니란반론이제기될것이분명하기에복음사가들은역사적신빙성이없는호구조사까지만들어내면서마리아와요셉을베들레헴으로이동시켰다는것이다. 결국베들레헴은예수님이실제로탄생한곳이라기보다는예수님을메시아로섬긴믿음에서나온신앙적탄생지라는것이역사비평학적성 서학자들의견해다. 물론예수님의역사적탄생지로베들레헴을보는설도있지만중요한것은예수님의탄생지가베들레헴이냐나자렛이냐 하는것은그리스도교의신앙내용은아니라는것이다. 어쨌든베들레헴이예수님의탄생지라는것이교회내에서오래된전승인것만은틀림이없는데오늘날에도성탄성당이자리하고있어수많은순례자들에게사랑을받고있다. 베들레헴의성탄성당은콘스탄티누스황제의어머니헬레나성녀가 324년베들레헴에순례와서예수님탄생지로전해오는동굴을참배하고그동굴위에다성당을지었다고한다. 그러나이성당은언젠가불타버리고지금은유스티아누스황제때완공된것이다. 이유스티아누스성당왼편에 1881년프란치스코회수도자들이세운가타리나성당이있다. 전세계에방영되는성탄자정미사는여기서이뤄지는것이다. 가타리나성당에서지하계단으로내려가면예수탄생동굴과비슷한동굴들이많이있는데그중하나가예로니모성인의서재이다. 예로니모성인은이곳에서 34년간집필하면서수도생활을했다. 예로니모는 420년에선종했는데생시에서재근처동굴에묻어달라고유언하여서재옆동굴에묻혔으나 13세기에이르러성인의시신은로마성모대성당으로이장됐고지금은빈석관만이남아있다. 예로니모 뛰어난성서학자이며수덕가로서서방교회의 4 대교부중한명인예로니모성인은 347 년현재의유고슬라비아인달마시아의스티리도니아의 부유한가정에서태어났다. 12 살때로마에가서수사학과치체로등의라틴고전문학을배웠고 19 세때리베리오교황에게서세례를받았다. 이후프랑스의트리어지방에서관리로일하다아리우스이단논쟁으로트리어에서귀양살이 (335~337) 하던아타나시우스성인에의해소개된 [24] 예로니모와불가따성서 58
59 동방교회의수도생활에매료되어일생을하느님을위해봉헌하기로결심했다. 373 년친구와예루살렘성지순례를떠났다가열병에걸려친구는죽고자신은회복되어안티오키아에머물며성서주석방법과그리스어를배 운예로니모는이때의체험으로성서연구를자신의소명으로받아들이게된다. 과거에예로니모는성서를로마제일의변호사로서뛰어난문체를자랑하던치체로의작품과비교하여조잡한문장에의한보잘것없는저서로여기고있었다. 그후그는안티오키아동편에있는칼치스사막에서 3년동안은수자생활을하면서그리스어와히브리어를완벽하게습득한후성서주해연구에나섰다. 그러나은수자들사이에서아리우스이단으로대립하는상황이오자 379년안티오키아로가서사제품을받고이듬해콘스탄티노플로가당시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였던나지안즈의그레고리오의강의를듣고오리제네스성서주석에심취해이때부터오리제네스저서들을그리스어에서라틴어로번역하기시작했다. 예로니모는 382년교황다마소 1세의초청으로로마로와 3년간교황비서로봉직하면서교황으로부터라틴어성서번역을의뢰받았다. 이에수년간의노력끝에유명한불가따성서번역본을완성했다. 고령이던교황의뒤를이어후계자로예정되었던예로니모는엄격한수덕가로서해이한생활을하던성직자들을비난하여동료성직자들로부 터신임을얻지못하고교황서거후적대자들의비난이심해지자로마를떠나 386 년여름부터 420 년선종할때까지베들레헴에서수도생활을 하며저술과번역활동에몰두했다. 예로니모는라틴교부들가운데가장박학한학자로엄청난분량의저서를남겼으며동시대사람들가운데라틴어와그리스어히브리어를자 유자재로구사할수있었던유일한사람이었다. 불가따성서 그러나무엇보다예로니모는 " 성서를모르는것은그리스도를모르는것과같다 "( 이사야주해서서문 ) 는자신의말에서보듯성서학자였고 그의불가따본성서번역본은교회에공헌한자신의가장큰업적이다. 2세기중엽부터라틴어로번역되기시작한성서는 4세기말경에이르러라틴어필사본들이양산되자그순수성의훼손이심각할정도였다. 그러자라틴교회안에서사용되고있던성서의개정필요성이대두됐고이를맡은것이고대교회에서가장뛰어난성서학자예로니모성인이었다. 구약성서의경우처음에는그리스어로된 70인역에서번역하던예로니모는성서의순수성을되찾기위해서는원천으로돌아가는것이중요하다고보고구약성서는히브리어원문에서, 신약성서는그리스어에서직접번역하게된다. 예로니모는 382년교황다마소 1세의명을받은이후복음서는 384년에, 신약전체는 386년에, 구약은 404년에완성했다. 예로니모가번역한라틴어성서에불가따 (Vulgata) 라는이름이붙여진것은 13 세기경이었는데원문에충실하고정확할뿐아니라대중이 쉽게읽을수있는라틴어로되었기때문이다. 교회는트리엔트공의회에서인수페르 (Insuper) 라는칙령을통해교회공식성서로선언했다. 신앙의순수성을위해원천으로돌아가야한다는예로니모의원칙은오늘날우리의일상생활에도요구되는덕목일것이다. 죄가되는지안되 는지만을따지기보다그리스도의삶에얼마나합당한것인지를먼저찾는일이더중하고그잣대의기준은성서에있다고할것이다. 예로니모가 ' 신학교의주보 ' 또는 ' 수덕생활의주보 ' 로모셔진것은교회가르침과교회생활의기본은성서라는것을표현해주고있는것이 다. [24] 예로니모와불가따성서 59
60 [24] 예로니모와불가따성서 60
61 [25] 아우구스티노신학 :50 신학자요사목자였던 은총의박사 동방교회가희랍의철학적논리에근거해삼위일체론과그리스도론의교리논쟁 에몰두해있던것과달리서방교회는구원론에깊은관심을나타냈다. 3세기의치프리아누스와떼르뚤리아누스이후 100여년간뛰어난학자를배출하지못한탓도있지만그리스인들의관심의대상이었던형이상학적사색보다는실천적이고신자생활에직접관계되는인간각자의구원에대한윤리실천문제, 자유의지와죄, 원죄, 은총과의화등이더욱관심의초점이된것이다. 그리고이러한신앙적경향은후에서구의신학을특징짓는요소들이된다. 서방의구원론적논쟁은 4세기에이르러엄격한윤리주의적이단인도나투스이단과펠라지우스이단을불러일으켰다. 도나투스이단은성사의인효성을강조해 " 그리스도교회는성인들의집합체로서거룩한교회여야하고따라서배교자들이거행한성사는무효이며성사적효과를낼수없다 " 고주장했다. 따라서깨끗한순교자들의교회를자처한도나투스주의자들은그들에게개종하는모든이들에게다시세례를베풀었다. 100여년간북아프리카교회를분열시킨도나투스이단은영국출신의수도자펠라지우스에게영향을미쳐 ' 인간구원은신의은총에의해서가아니라인간의공로를통해서성취되고은총은다만좀더쉽게착한행위를할수있기위해필요할뿐 ' 이라는사상이등장해교회를위협하기에이르렀다. 그러나위기가크면뛰어난영웅이나타나는법. 이러한교회의위기앞에홀연히나타나정통신앙을수호한성인이바로히포의주교아우구스티노다. 사목자요철학자이며신비가이자수도자인아우구스티노는서방신학의아버지로서토마스아퀴나스와함께서방신학의상징적인물이며중세문화의형성자중한사람으로오늘날까지도지대한영향을미치고있다. 생애 아우구스티노는 354 년 11 월 13 일아프리카의누미디아지방의타가스테 ( 현재알제리북쪽의수쿠아라스 ) 에서성녀모니카와이교도인아버지 파트리치우스사이에서태어났다. " 어머니의젖과더불어그리스도의이름에취해있었던사람 "( 고백록 ) 이라는자신의말처럼아우구스티노는 열심하고거룩한어머니모니카로인해그리스도교적분위기속에서자라났다. 아우구스티노는고향인타가스테와카르타고에서공부를하고, 타가스테, 카르타고, 로마, 밀라노등지에서교사생활을하면서지혜의이상에 매료되고진리를찾으려는그의노력이시작됐다. 그러나이시기에단순한이성을통해하느님께도달할수있다는마니교의선전에빠져 9 년간마니교에심취했다가잘못을깨닫고회의주의에빠지고말았다. [25] 아우구스티노신학 61
62 성인은이시기에대해 " 여러분들에게말하고있는나는한때스스로속고있었습니다. 젊은나이에처음으로성서를접했을때신심을추 구하기보다는지적인문제들을논하기를더좋아했습니다. 불행히도나는날수있다고생각해서보금자리를떠났던것입니다. 그런데내가 날수있기도전에나는떨어져버렸습니다 "( 설교 ) 라고고백하고있다. 이러한위기에서성인을구한것은아들의회개를바라는어머니의눈물과자신을이단으로빠트렸던진리에대한사랑이었다. ' 차라리더열심히추구하지절망을하지는말자 '( 고백록 ) 는다짐을한성인은암브로시오성인을만나성서에대한사랑을가지게됐고암브 로시오의후임심플리치아노의도움으로신플라톤철학을접해하느님에대한믿음을갖게됐으며심플리치아노가권한바울로서간들을통해 인간이하느님의은총으로구원에이를수있음을깨달았다. " 집어서읽어라 "(Tolle lege) 의체험이후확신의광명을얻은그는 386 년밀라노인근의카시치아쿰에서기도와명상의생활을시작했다. 그리고이듬해부활때방탕했던젊은시절얻은아들과함께암브로시오성인으로부터세례를받았다. 영세후로마의수도원들을순례하고고향으로돌아온성인은친구들과수도생활을시작했으며 391년히포로가서새로운수도공동체를설립했다. 그러던중사제의부족을호소하던히포의주교발레리우스에의해사제로서품되었다가 395년보좌주교가되고발레리우스주교선종후히포의교구장이돼 35년간때때로식사할시간도없을만큼열정적으로사목활동을하다 430년 76세의나이로선종했다. 축일은 8월 28 일. 사상 이성과신앙, 하느님과인간, 그리스도와교회, 자유와은총등에관한신학적해결을시도한아우구스티노성인의사상은진리를발견하기 위해몸부림치던그의파란만장한생애와회개이후교회의위협이던네가지이단, 즉마니교도나투스펠라지우스아리우스이단에대한논 박을통해이루어졌다고할수있다. 젊은시절의방황과방탕했던시절의경험은성인으로하여금하느님은총에대해확신으로이르게해교회는그를 ' 은총의박사 ' 로부르게했다. 마니교의선악이원론사상을반박하여악의문제를해결했으며도나투스이단을거슬러교회의단일성과성사와은총을강조했고펠라지우스와의논쟁에서원죄와예정설등의교리를발전시켰다. 또한생애의마지막 10 년간을아리우스이단과싸운성인은최고의역작이라고할수있는삼위일체론을남겼다. " 이해할수있는것을믿으라 " 고하는동시에 " 믿을수있는것을이해하라 " 고되풀이해말한아우구스티노는이성과신앙은진리를알도록 도와주는두개의힘으로이성과신앙이함께작용해야진리에이를수있다고주장하면서믿음이확실해야한다면권위를필요로하고그권 위는최고스승이신그리스도의권위이며이는성서에나타나있고성서는가톨릭교회의권위에의해보증된다고했다. 따라서아우구스티노는무엇보다성서를사랑했고그의수많은성서주석서들이이를대변하고있다. 성인은신심의첫째양식인성서에바탕을두면서완덕의길을보여주고자했고그기도의삶안에서탁월한신학적철학적가르침이탄생하 게된것이다. " 여러분의소망은바로여러분의기도입니다. 여러분의소망이계속되면여러분의기도또한계속됩니다 "( 시편주해 ). [25] 아우구스티노신학 62
63 [25] 아우구스티노신학 63
64 [26] 그레고리오대교황의선교와개혁 :37 고대의위기위에미래교회건립주후 410년믿을수없는일이일어났다. 영원한도시로마가게르만부족인서 ( 西 ) 고트인들에의해약탈되고파괴된것이다. 콘스탄티누스의천도이래제국의정치적수도는콘스탄티노플이었지만로마는아직도제국의상징적도시였고서방교회의중심이었다. 로마의이러한재난은제국을혼란에빠트렸고많은이교도들은로마의재앙이로마의신들을버리고그리스도교로개종했기때문이라고비난했다. 아우구스티노는이러한주장을거슬러 ' 하느님의도시 ( 신국론 )' 를저술해로마의재앙을그리스도교적으로이해시키려하기도했다. 410년로마의함락이래서로마제국은몰락의길을걷기시작했다. 439년반달족에의해북아프리카가점령당했고 452년훈족의침입, 455년반달족의로마약탈, 476년고트족에의한서방의마지막황제아우구스툴루스의폐위등혼돈의시간이계속이어졌다. 그리고이러한혼돈은꺼져가는한시대를의미하면서동시에새로운시대를예고하는것이기도했다. 이암울한시대의삭풍을맞으면서도과거를부정시키지않고다음시대의영광을여는등대가되어준것은바로교회였다. 교회는침입자들과의담판을통해파괴를막았고약탈과전염병으로피폐해진사람들에게구호금을지급하는한편야만족들에의해파괴된학교들을대신해교육도담당했으며거룩한전례를통해황폐해진백성들의마음을어루만져주었다. 교회는더이상기대할수없는로마제국의지원을대신해서방세계에서사람들을보호하고지탱해주는유일한기관이된것이다. 그리고무너져가는서방사회에서높은교육을받은성직자들은정치적으로나사회적으로중요한위치를갖게됐다. 특히이시기에뛰어난교황들의활약은새로운시대를여는원동력이됐고동시에교황권의강화라는시대적부산물을낳았다. 그활약의와중에서도고대에서중세로넘어가는과도기에있었던그레고리오 1세교황의업적은지대했다. 그래서로마교회는서방교회의 4 대교부중한명이기도한그레고리오교황을대교황으로부르고있다. 수도자출신첫교황그레고리오는 540년로마의명문귀족이었으며이미펠릭스 3세와아가삐또 1세두교황을배출한아니키아가문에서태어났다. 귀족계층의고등교육을받은그레고리오는이미 33세가되던 573년최고위층인로마집정관에선출됐다. 그러나 575년부친의사망후그레고리오는장래가보장된화려한세속생활을청산하고로마첼리오언덕에있던집을베네딕도규율을따르는성안드레아수도원으로만들어수도생활을시작했고시칠리아의상속토지에도 6개의수도원을설립했다. 578년에는베네딕도 1세로부터부제로서품되었고이듬해에는펠라지오 2세에의해콘스탄티노플의교황사절로파견되기도했다. 이후 586년에야로마로돌아온그는다시수도원으로돌아갔으나 590년펠라지오 2세가선종하자자신의사양에도불구하고수도자로서는최초로교황에선출됐다. 선교와개혁 [26] 그레고리오대교황의선교와개혁 64
65 당시로마는야만족의침입과 5~6세기에창궐한전염병과페스트로폐허가되다시피했다. 따라서교황에착좌한그레고리오는먼저굶주리는시민들을위해식량과필수품을장만하는데주력했고이를위한재원마련을위해이탈리아와프랑스북아프리카등지에산재해있던교황청의재산을정비했다. 그의이러한교황청의부동산재정비는나중에교황령의기초가되고중세시기교황의영향력을강화하는계기가된다. 교황은자선사업뿐만아니라서구사회의지도자로서농부들에대한대지주들의착취를막았고랑고바르드족이 592년로마를포위했을때담판으로그들을물리치는등제국의정치적군사적수호에도나섰다. 이러한과정속에서동로마제국황제들로부터아무런도움을기대할수없다는것을깨달은교황은교회를끊임없이위협하는야만족들을받아들이는한편그들을그리스도교로개종시키고문명화시켜야한다는결론에이르렀다. 프랑크왕국과우호관계를설립하고대대적인선교정책을실시해안드레아수도원장아우구스티노를영국으로파견했다. 또한아리우스교도들인랑고바르드족들의개종등게르만민족들의개종과게르만교회와의유대를강화해나갔다. 이러한정책들은앞으로게르만민족들이지니게될서구사회에서의영향력을꿰뚫어본선견지명으로 ' 그리스도교적중세서양 ' 을탄생시키는토양이됐다. 그레고리오교황의이러한혜안은고대의폐허위에미래의교회를건립한중세교황권의창시자로불리게했다. 그레고리오교황은교회의공적지위향상을위한노력만큼이나교회쇄신을위해서도열과성을다했다. 성직자들의생활을개혁하기위해사목지침서 (Liber regular pastoralis) 를저술했다. 사목직무를받는동기, 사목자들이지녀야할덕목, 교리교수법등을다루고있는이책은중세기동안사제양성의기초가됐다. 이와함께수덕적인그리스도교생활을강조해욥의윤리를저술하기도했다. 욥기를신학적비유적으로설명하고있는이책은중세기의윤리신학과수덕신학의기초를놓은보고가됐다. 또한수도생활을촉진시켜많은수도원을건축하는한편선교와개혁에수도사들을첨병으로삼았다. 또한성직이지배하는특권이아니라봉사하는특전으로생각한그레고리오교황은콘스탄티노플의총대주교가 ' 세계교회의총대주교 ' 라는칭호를사용하자이에반대하면서자신은오히려 ' 하느님종들중의종 ' 이란표현을사용했다. 이후이표현은로마주교들이가장즐겨사용하는표현이됐다. 그레고리오는전례분야에서도당시미사를개혁하고미사전문을오늘의형식으로만들었다. 각지방에서제각기불려지던성가들을재정리해전례와전례력에알맞게맞추었다. 그레고리오성가라는이름은여기서비롯된것이다. 허약한건강을강인한정신력으로극복한신심깊은수도자요탁월한정치가였던그레고리오교황의 14년간의재위는역사적전환기에새로운미래를개척한위대한시간으로세계사적으로나교회사적으로중요한의미를지닌다. 사진말 - 로마의유적 로마의멸망을보고사람들은절망했으나로마를멸망시킨이민족들을개종시킨그레고리오대교황의활약으로오히려그리스도교적중세사 회를만드는토양을만들었다 [26] 그레고리오대교황의선교와개혁 65
66 [27] 수도생활의시작 :39 <== 가타리나수도원 시나이산의심장가타리나수도원전경. 유스티아누스황제때지어진것으로여러 나라에점령당했으면서도점령자들의보호로지금까지잘보존될수있었다. 교회사 100대사건의줄기를따라방랑도순례도아닌길에서이집트시나이산에이르렀다. 수도생활의요람인이집트에서도보존이가장잘되어있다는가타리나수도원을찾아온길이었다. 시나이산초입의가타리나수도원. 342년경헬레나성녀가시나이산을순례하고나서기념경당을세운것이모체가돼유스티아누스황제때건립된것이다. 그러나수도원을바라보면서느낀첫인상은수도원의역사나외형적모습이아니라무엇이수도자들을이황량한사막으로이끌어냈느냐하는내면적인것이었다. 수도원은고행수덕생활에그기원을두고있다. 복음선포시기고신극기를통해덕을쌓는생활은비그리스도교세계에도널리행해지고있었고이러한수덕생활이교회안에도입돼하느님을위해재산과자신을단념하는금욕생활은사도시대부터있어왔다. 고대그리스도인들이금욕적수덕생활을한것은여러이유가있지만그중에서도첫째는그리스도를온전하게따르기위함이었고둘째는세 상종말이가까이왔다는초대교회의믿음때문이었다. 그러나이러한금욕적고행수덕생활이교회안에서고유한신분을이루고제도화되기 시작한것은 3 세기말부터이다. 박해시기동안그리스도인들은자기나라에살면서도인정받지못하는신앙때문에이방인처럼살아야했다. 그리스도에게충실하기위해세 상의것들을스스로포기한초세기교회의신앙인들은세상과의분리속에서모두가정결과가난, 기도, 고행과같은요소들을실천한수덕 자들이었다. 이처럼순교정신으로가득찼던초기교회에서는수도승생활이나조직적인수도생활이별도로필요하지않았다. 수도승생활의기원은순교정신이생기를잃어갈때, 즉콘스탄티누스에의해평화의시기가도래한후일어난다. 말하자면완전한사랑의형태로서추구했던순교신심이새로운역사적상황을맞아새로운형태로발전하게된것이다. 이는당시신앙인들이순교를영적으로고행하는것으로생각한것처럼고행수덕생활은평생을통해서순교하는것이라여긴때문이었다. 특히 4세기부터는고행수덕생활을평화시의 ' 영광스러운순교 ' 라고했다. 고행수덕생활이수도생활로넘어가는데대한또다른동기는세속화된교회에대한반동으로서다. 초세기의박해는교회의커다란외적위협 이었지만영적으로는복음의충만함과함께그리스도를뒤따르려는열의가충만한시기였다. 그러나 4 세기교회상황이로마제국과동화되어 [27] 수도생활의시작 66
67 본래의예언적사명을잃어버리게되고안주하게되자순교자들이맡았던교회의예언직을다시수행하기위해이미익숙해진세속으로부터 의이탈, 곧사막의고독속으로떠난것이다. 초기그리스도공동체에대한그리움을반영하듯카타콤바는동굴과은둔소로, 박해시의고문은 금육과단식으로, 감옥은사막으로대치해낸것이다. 이런맥락에서첫수도생활의형태라할수있는사막의수도생활은로마제국과일치하여정착된제도교회에대한비판적인예언이되어주 었다. 그리고이러한수덕자들의빼어난모범은 3 세기부터이집트와아프리카에서는공동체를통솔해야하는성직의임무를수덕자들에게맡기게 하는원인이됐고이는서방교회에서결혼한성직자에서절제를지키는성직자로다음엔독신성직제도로옮아가는결정적인계기가됐다. 결 국성직자들에게원천적으로수도자적삶을요구하고있는것이역사적가르침이다. 수도생활은처음에혼자서하는은수생활로시작되어공동체수도생활로발전했다. 은수생활을시작한대표적인물로는성안토니오를, 공동 체수도생활을시작한이로는성빠꼬미오를꼽는다. 안토니오는고대이집트의수도였던멤피스근처인코만의유복한가정에서출생해일찍부모를여읜후복음서에서부자청년이야기 ( 마태 19, 21) 에감동된나머지상속받은모든재산을다른이들에게나누어주고사막으로들어가 80여년간의은수자생활을시작했다. 땅바닥에자면서빵과소금물뿐인하루한끼의식사로극기생활을하던안토니오의선종이후수도원이그리스도교에급속히전파됐고새로운형태의성소가나타났다. 사막에서의초기고행수덕생활은물론하느님께봉헌된삶에우선성을부여하기위해공동생활없이혼자시작됐으나젊은은수자들은안토니오와같은경험많은은수자를필요로했고최소한의생계를위해또사랑의실천을위해자신들이만든것을팔아생필품을단체로구입하기도했으므로자연스럽게은수자마을이형성됐다. 이를공동은수생활수도회라고부르기도한다. 은수자들이증가하면서철처히혼자수도하는생활이극단적이거나개인주의적으로빠질위험이있자새로운형태의수도회곧공동생활수도회가등장하는데이러한수도원으로는빠꼬미오가이집트북부지방의타벤니시에세운공동체가처음이다. 은수자생활은성숙한사람만이해낼수있었고높은수준을요구했으므로모두가성공하지못했다. 은수생활을결심한이들이라해도많은사람들의도움을받아가며살아야하는그런사람들이었고이러한은수자들이단일체를이루려는경향을파악한빠꼬미오는한형제같이공동체를이루고사는수도생활을만들고이수도공동체를위해수도규칙서를만들었다. 빠꼬미오는사도행전 4장 32~35절에서표현된초대교회의이상적인형태를새로운수도공동체의표본으로삼았다. 빠꼬미오의이수도회에서여러수도원들이만들어졌고많은수도자들이몰려들었다. 이러한수도원의발전은 4 세기후반에와서유명한주 교들이교회와수도원의관계를정립하기시작했고 451 년칼체돈공의회에서공식적으로다뤄수도원을교구에종식시키고주교가수도원창 립을허가하고수도원을돌보도록했다. 그러나초대교회의이상을실현하고온전히봉헌된삶을살고자하는열의로시작된수도원은경제적으로엄청난부를차지하게되면서 ( 많은 지원자들과함께수도자들은노동의의무를지니고있었으므로 ) 그이상이반감하게되고 3~4 대를거치면서창설자의정신은식어가면서자 주개혁의도마위에오르곤했다. 처음시작의마음을간직할수있도록항상깨어있을때에만존재할수있다는교회사의교훈을수도원의역사에서도똑같이보여주고있는 것이다 [27] 수도생활의시작 67
68 [27] 수도생활의시작 68
69 [28] 서방교회수도원의시작과성베네딕도 :20 <== 몬테카시노수도원 베네딕도성인이 529 년에창건한몬테카시노수도원. 베네딕도회의모원 인이곳에성인과그의누이스콜라스티카성녀가잠들어있다. 서방교회수도원규칙서집대성, 동방교회와는달리도시속에서시작발 전 한곳에머물며기도 - 독서 - 노동조화이뤄 예로니모는 " 나에게도시는감옥이고고독은낙원이다 " 라고했다. 이처럼수도승들에게사막은고독의표시이자하느님만을생각할수있는최적의장소였다. 절대적인고독은절대적인자유를낳는법이다. 세상과의격리를의미하는사막은거주하는곳을떠나는지리적사막과다른생활방식, 즉금욕, 절제, 결혼의포기와같은사회적사막이있다. 동방교회에서의수도생활이이두가지사막의특징안에서철저히이뤄졌다면지리적여건이나사회적여건이달랐던서방교회는인위적고독을만들어가며수덕생활을영위해갔다. 서방에서의수도원은주로가정에서의고행수덕생활을통해발전했다. 그리고먼저발달한동방의수도생활에큰영향을받았다. 그러나동방의수도생활은너무엄격한것이어서가정고행수덕생활을하고있던사람들이주로부녀자들이었던서방에서는순화해야할필요가있었다. 이필요성에의해서방의고행수덕생활이수도원의형태로변해갔다. 교외에별장을짓고전원생활을즐긴로마인들의생활풍습속에수덕생활이받아들여지면서별장생활이수도원형태로변해간것이다. 즉개인집이수도원으로변하게됐다. 이렇게해서서방교회에서는도시한가운데서 ' 인공적인사막 ' 을발견했고도시속에서수도원의역사가시작됐다. 서방의수도원은동방의수도원과다른몇가지특징이있었는데이는서방교회의수도원이빨리받아들여지고발전한이유가되기도했다. 첫째는수도원생활을후원한사람들이로마의귀족들이라는점이다. 이미제국전체가그리스도교화된상태에서귀족들은정계은퇴후에별장에서지내던생활을수도생활과연결시켰다. 또실제로수도원의창설자들은대부분돈많은평신도들이었다. 둘째는유명한주교들이수도원의주도권을행사했다는것이다. 이렇게해서서방교회의특징중하나인교회와수도원사이의확고한관계가맺어졌고수도원은지역사회를위해많은일을했다. 셋째는초기수도원의자의식이었다. 비록로마제국이공적으로는그리스도교화됐지만대부분의개종자들은아직도미신과옛관습에젖어있던상태에서참으로그리스도를따르는사람들은수도자들이라는의식이팽배했다. 그래서 4세기부터는 ' 회개한다 ' 란말이개종만을의미하지않고수도원입회를의미하기도했다. 이런의식들은수도자들에게는자긍심을, 일반인들에게는수도자들에대한존경심을불러일으켜수도원의입지를강화시키는데큰도움이됐다. 4세기부터 6세기까지비약적인발전을보인수도원제도는그양적성장과맞물려개인주의나극단적고행생활과같은폐해를극복해야할과제를낳기도했다. 이러한시대적요청에의해 5세기부터생겨나기시작한것이수도원규칙서들이며그중에서도베네딕도가쓴규칙서는서방교회전체의규칙서가됐다. 우리가너무잘알고있다고생각하는베네딕도에대해사실은역사적으로고증된것이별로없다. 480년경누르시아에서출생해로마서공부를하다수비아코의한동굴에서은수생활을시작한후그의명성을듣고제자들이모여들자이것이수도공동체가됐고이후몬테카시노로 [28] 서방교회수도원의시작과성베네딕도 69
70 옮겨후대베네딕도회의모원이되는수도원을설립했다는사실정도와그에따르는전설에가까운일화들뿐이다. 베네딕도회라는조직도 19세기말에생겨난것이다. 베네딕도의역사적중요성은수비아코나몬테카시노수도원을세운것이아니라그가남긴 ' 수도승들의규칙 '(Regula Monachorum) 에있는것이다. 베네딕도의규칙서는고대에생긴수많은규칙서들중의하나로독창적인것이라기보다는그당시까지의수도원규칙양식들을한데모아새롭게구성한것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베네딕도규칙서의탁월함은시대를넘어사회제도와문명의연계를가능하게해준중용의정신에있었다. 베네딕도는이론과이상을내세우기보다현실을감안하여지극히실제적인법규를정했다. 지나친엄격성을피하고평범한신자로서할수있는수도생활제도를실시했다. 베네딕도는세상과의격리를위해광야나사막의고독이없던유럽에봉쇄구역을설정했고사막의수도자들이육체적요구를최소화한것에대해넉넉한수면과음식, 의복을제공하면서철저한공동소유를규정함으로써청빈의삶을구현했다. 이처럼동방의수도전통을손상되지않게서방의조건에맞게적응시킨것이성인의위대한업적이다. 뿐만아니라베네딕도는여기서그치지않고같은수도원안에머물것을요구하는정주의의무를요구했다. 당시유럽은아직게르만족의이동이끝나지않은시기였고수도자들도방랑생활을많이하였기때문에사회적으로불안한시기였다. 이러한시기에수도원의정주생활은사회적으로나종교적으로그유용성이대단히컸고후에중세기의첫문명화라는전원정착생활에큰영향을미쳤다. 이정주의약속으로베네딕도공동체는가정처럼친밀한공동생활을하게되는데베네딕도는이공동체의일과를공동기도와거룩한독서그리고노동이라는세가지요소로조화시켰다. 이러한규정으로인해베네딕도회의정신인 " 기도하며일하라 "(Ora et Labora) 라는모토가생기게된것이다. 이러한베네딕도규칙서는영국을필두로전유럽에전파되는데특히칼대제시대에는서방세계수도원의유일한규칙이되기도했다. 그리고지방에세워진수도원은그지역의선교활동과문화활동의중심지가돼교회의중심이자나라를발전시키는전초기지역할을하기도했다. 칼대제는미개발지역이나변방에수도원을설립하고수도자들에게그지역을개발하도록하기도했다. 이처럼베네딕도의규칙은중세의사회와교회에지대한영향을미쳤다. 그래서서양의 9세기부터 12세기까지를베네딕도적세기라고부르기도한다. 이탈리아중부를떠난적이없고두세개의수도원을설립하고작은책한권을쓴것외에는다른것이없는소박한사람이폭력과미신으로얼룩진암울한중세초기의새지평을연등불이됐다. 하느님에대한사랑과많은사람들이하느님을사랑하게만들고픈신앙하나로. [28] 서방교회수도원의시작과성베네딕도 70
71 [29] 로마와동방교회의수위권문제 :22 <== 오늘의콘스탄티노플 콘스탄티노플은새로운로마를자처하며로마교회와동등한품위를 주장했다. 사도전승에기인로마교회의우위성지속훗날 명예대표 재치권은불인정마찰지금은유럽의주도권이서방에있지만고대에는서방과는비교도안될경제력을바탕으로동방이정치경제문화모든면을주도했다. 특히콘스탄티노플천도이후에는더욱그비중이높아졌다. 교회의발전도이런역사적사회적상황과맞물려있었다. 서방교회의상징이랄수있는베드로대성당이 1626년에야축성된데반해동방의소피아대성당은 537년에축성된것을보아도동방지역의풍요로움과문화적수준을짐작할수있다. 이런와중에서도서방교회가동방교회에우위권을가질수있었던것은오직로마교회의특수성때문이었다. 로마교회의우위성은사도베드로와바울로에의해설립된교회라는사도전승에기인한다. 이는그리스도로부터사도들에게전달된계시가로마주교에게가장확실하고순수하게보존됐음을의미했다. 그리고순수한신앙에대한최대의보증인이사실은로마교회가처음부터타교회들로부터대표성을인정받게해주는근거가됐다. 총대주교구의기원그러나로마교회의수위권이완전하게드러나기까지는오랜역사적과정을거쳐야했다. 사도들은첫포교시기에제국내의중심도시와속주의수도같은대도시들에교회를세웠다. 그리고정치문화교역의중심지인이런주요도시들은동시에선교의출발점이자교회의중심이됐다. 그래서속주의여러도시들은수도인대도시교회와모교회의관계를맺고있었다. 자연히수도대교구의주교들은지방교회의주교선출이나교회규율을감독했고지역교회회의를소집하기도했다. 로마는이탈리아에서카르타고는북아프리카, 알렉산드리아는이집트, 안티오키아는시리아에서이러한권리를행사하고있었다. 이리하여교회안에총대주교가관할하는관구가생기게됐다. 325년니체아공의회는알렉산드리아와안티오키아교회의위상을고려하여로마교회처럼자신의구역안에서자치권을행사하는전통을인정하고동시에신앙의발상지인예루살렘의특수한위치를고려해서열상 4번째교구로지정함으로써총대주교구제도를공의회법률로확인했다. 이후 330년콘스탄티누스가제국의수도를로마에서콘스탄티노플로옮기자이도시주교의영향력이확대됐고새로운제국수도의주교위상이문제로대두됐다. 그래서 381년의콘스탄티노플공의회는콘스탄티노플이새로운로마라는이유로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보다는높고로마에다음가는명예적지위를허용했다. 이리하여교구서열이로마, 콘스탄티노플, 알렉산드리아,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의순서가됐고공의회는로마를제외한 4개의교구를총대주교구, 교구장을총대주교라고칭했다. 이후총대주교구들은각각그주변교회들을지휘하여거의독립적인교구를형성하였고각교구별로고유한전례와관습들을발전시켰다. 그러면서도신앙교리의일치로그리스도교를통일시키고있었다. ( 모스크바총대주교구는 1453년콘스탄티노플붕괴이후러시아가자신을그 [29] 로마와동방교회의수위권문제 71
72 후계자제 3 의로마로자처하며총대주교구를창설하고 1593 년동방교회총대주교 4 명이이지위를인정함으로써이뤄진것이다 ) 이리하여동방교회는총대주교구체제에의해운영됐지만신앙과관련한로마의우위성은그대로인정됐다. 로마교회의수위권 3세기까지의교회는공동체에서생기는많은문제와갈등에대하여로마의주교에게문의하여확답을바랐고교부들이나이단자들도로마의지지를얻기위해로마를방문했다. 그리고콘스탄티노플천도이후에도로마교회의대표성은계속유지됐다. 신앙교의를확정한고대의 4대공의회가비록황제의주도하에개최됐지만교황사절의참여와지위가보장됐고교황의동의가있어야공의회의결정이유효했던점등은로마교회의대표성을분명하게보여주는구체적인증거이다. 그러나제국의수도로서콘스탄티노플의위상과영향이강화되면서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구는독자적자치권과그리스도교세계안에서로마교회와동등한권위를요구하게된다. 451년칼체돈공의회는신로마이자제국의수도인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는로마의주교와동등한품위를갖는다고결의했다. 또한 599년에는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가이러한이전공의회결정들을근거로 ' 전세계총대주교 ' 라는직함을사용하기시작했다. 콘스탄티노플의이러한주장은자신의정치적지위에의존한것이었다. 그러나세속권력에의존한이러한인위적권위는점차정치와종교가밀착될수록황제의세력권안으로휩쓸려들어가자주성을잃는결과를낳았다. 이와는반대로천도이후정치적으로약화된로마의주교는교회영역안에서오히려자주적발전을가져다주었다. 콘스탄티노플의정치적요구가강할수록베드로까지소급되는신앙적기초가강조돼로마스스로수위권방어에나서게됨으로써수위권논쟁이표면화된것이다. 특히민족대이동의강풍속에서레오대교황등로마의주교들이이민족들의침입을몸으로막아내고폐허가된도시를복구하며시민들의유일한피난처가되자로마교회의지위는서방교회안에서더욱공고해졌다. 동방교회는로마의명예적대표성은인정하면서도재치권은인정하지않는제한적인관점에서로마의대표성을인정했고때로는마찰과갈등을불러일으켰다. 결국이슬람의침입, 교황령의건립등뒤바뀐사회적상황과수위권에대한해석의차이로동서교회가분열하고만다. 교황의수위권에대한자각은속권도함께주도하는교황의정치권력장악이라는폐해를낳기도했지만이를통해그리스도교적인서구라는중세를형성하는기반이되기도했다. [29] 로마와동방교회의수위권문제 72
73 [30] 비잔틴교회 :23 <== 아르카디우스의황후인에우독시아가자신에게직언을일삼은콘스탄티노 플총대주교요한크리소스토모성인에게귀양을통고하고있는장면. 국가에종속된교회모습보여황제는신이뽑은지상의대리자로인식 ' 하느님은 ~ 이아니다 는부정신학발전교회가걸어온지난흔적들을찾아다니면서가장인상깊었던곳은소아시아라불리는아나톨리아지방이었다. 로마제국의주무대였으며이전에이집트의가장위대했던파라오람세스 2세와자웅을겨룬히타이트의땅. 뿐만아니라바울로사도전도여행지의주무대로그리스도교신앙전파의관문역할을해냈던곳. 콘스탄티노플천도이후 1차부터 8차까지의공의회가열려그리스도교교리가체계화되고다듬어진곳이다. 이처럼 1000년동안동로마제국의중심지로찬란한그리스도교문명을꽃피웠던신앙의땅이면서도터어키하면신앙과의연관성이빨리떠오르지않는것은아마도터어키의역사적상황과맞물려있기때문이다. 동로마곧비잔틴제국은 1453년이슬람을기치로내건오스만투르크에의해멸망했다. 그후오늘까지터어키는국민의대다수가이슬람을믿는투르크족의나라이다. 따라서자신들과혈연상으로나문화적으로직접적인관련이없을뿐만아니라제국건설과정에서타도해야할대상, 이슬람화해야할대상이었던그리스문명과비잔틴교회를축소기록해야했다. 이런이유로터어키역사책에는사실상기원전의히타이트시대이후 1000년비잔틴제국사를훌쩍뛰어넘어아나톨리아지방역사를기술하고있다. 이러한역사기술의공백으로인해터어키가생소하게느껴지는것이다. 비잔틴제국로마제국은 5세기중반이후이탈리아본토를비롯한서쪽부분은게르만민족의대이동과함께사라졌고콘스탄티노플을중심으로한동쪽은이후에도계속돼독특한문명권으로발전한다. 이동로마제국의역사는비잔티움의운명과함께하여 ' 비잔틴제국 ' 으로불리기도한다. 기원전 7세기에메가라인들은보스포르스해협에식민지를건설했는데원정군대장비자스 (Byzas) 의이름을따서비잔티움이라부르게됐다. 이후콘스탄티누스가이곳으로로마제국의수도를옮기고새로운로마를외치며자신의이름을따콘스탄티노플로불렀다. [30] 비잔틴교회 73
74 그후테오도시우스황제가죽을때 (395) 제국을양분하여자신의두아들에게통치하게함으로써로마제국이사실상동서로분리됐다. 동로마제국의형성기는그리스도교가국교가된이래이교문화와의조화라는전환기에있었고발칸반도에서북아프리카까지이르는지리적특성상비잔틴제국은그리스도교와이교문화의교차지점으로서의특성을지니고있었다. 이후그리스도교와이교적헬레니즘이점차상호융합하여마침내그리스도교적이고그리스적이며동방적인문화를형성하게된다. 제도상으로는로마적이면서국민과언어문화면에서는그리스적이됐고그리스도교를제국의기반으로하는문명이이뤄진것인데이문화권이이른바비잔틴문화이며그중심이콘스탄티노플곧비잔티움이다. 방대한영토를지닌비잔틴제국은처음부터주변의슬라브, 아랍, 셈, 투르크등의문화와접촉했고이는국교인그리스도교의선교와도연결돼슬라브민족이개종하는업적을낳기도했다. 또한그리스도교의위협이된이슬람권의진출을막는방패역할을함으로써결과적으로서유럽이중세를주도할수있는계기를마련해주기도했다. 특성과신학비잔틴제국황제의대관식은성소피아성당에서거행됐다. 여기서총대주교는새권력자에게왕관을씌워준다. 이는비잔틴교회의특성을상징적으로보여주는것으로이렇게황제는신이뽑은지상의대리자가되는것이다. 비잔틴황제에게지상왕국이란하느님나라의이미지로서황제는천상왕국에서신이차지한위치를지상교회에서대리하는것이다. 바로이것이비잔틴교회의대표적특성중하나인황제교황주의 (caesaro papism) 이다. 곧교회에관여하는것이바로황권의본질이라는사상이다. 황제는자신들이하느님으로부터권력을받았으며모든국민들이하느님을숭배하도록해야할책임을지니고있다고생각했다. 그래서교회의정책과교의결정과정에적극적으로관여했고공의회와교회의결정사항을법으로집행하기도했다. 심지어황제들은그리스도를모방하여고관들을식사에초대할때 12명이라는상징적인숫자만부르기도했다. 국가와교회를동일체로본비잔틴제국의방침에따라비잔틴교회는줄곧국가에종속된국가교회적변모를보였다. 이에대해요한크리스도모성인등은교회에대한황제권의우위를부인하기도했다. 이는서방교회의속권과교권은각기고유한권능을가지고있다는양권설, 더나아가속권도하느님에게서나오는것이므로속권에대하여교권이우위에있다는견해와충돌하기도했다. 이러한서방교회와의갈등은 726년레오 3세의성화상공경금지, 800년카알대제의황제등극, 847년포시우스분규등일련의사건들을통하여심화되다결국 1054년결정적으로갈라서고말았다. 비잔틴교회의신학은특별히수도원에서많이발전하였으며부정신학, 신화, 정적주의를그내용으로하고있다. 인간의인식은유한하고불완전하므로하느님을인식한다는것은불가능하므로하느님속성에대해서하는님은어떤분이시다라는긍정보다하느님은어떤분은아니시다라는부정의서술을통해접근해야한다는것이며이를위해인간은자신을부단히정화시킬필요가있으므로사막이나황야에서정적가운데하느님을관상하고직관하는높은단계에까지이르는영적실천을추구한것이다. [30] 비잔틴교회 74
75 [31] 게르만민족의대이동 :51 교회사무대북유럽으로확장독일여행의백미라고하는라인강여행이시작되는쾰른은식민지라는뜻을가진라틴어콜로니아가독일어화한말로로마제국의최북단방어도시였다. 로마제국의국경은국가체제를공화정에서황제정으로만든카이사르와아우구스투스이후라인강과다뉴브강을기점으로하고있었고제국의주력부대를이곳에수비군단으로남겨놓았다. 용맹한게르만민족의남진을제지하는것이로마제국의가장주된국경수비였던것이다. 라인강과다뉴브강을경계로로마와마주한게르만족은마을공동체로살았으며그들의가장큰정치적사회적단위는부족이었다. 또한사회체제에서의기본적관계는전사와부족장과의관계였는데이는이후유럽전체를게르만족이지배하게되면서봉건제도를이루는바탕이된다. 로마가비록제국을게르만족으로부터보호하는데국방의최우선순위를두었지만국경과가장근접한게르만족은로마문명과친숙해졌다. 뿐만아니라 4세기초에이르러서는로마의큰주에서게르만인들이노동자나보충병으로편입되기도했고심지어정부에의해장려되기까지해 5세기의게르만침략에대한방어의많은부분이다른게르만인들에의해수행되기도했다. 게르만족은사냥을생업으로하는전투적민족이었으며일부일처제의건전한가족제도를가졌던까닭에인구는늘어만갔고식량은모자라먹을것과비옥한땅을찾아로마제국안으로몰려들수밖에없는사회적요인과군사적으로약체화되고내부적혼란과모순을겪고있었던로마제국내부의정치적요인을안고있었다. 경과 200년간진행된게르만민족의대이동은훈족의서진으로시작됐다. 그림에서보듯이 2세기중엽동게르만계의서고트족은다뉴브강북안에, 동고트족은동쪽흑해북안에자리잡고있었다. 한편중앙아시아스텝지역의유목기마민족이었던훈족은 2세기경부터서진을시작, 375년동고트족을압박하여이지역대부분을차지하게된다. 이에놀란서고트족은 376년일부는서쪽으로도망하고일부는동로마황제발렌스의허가를얻어다뉴브강건너트라키아지방으로이주하게되는데이것이민족대이동의시작이었다. 그러나서고트인들에게주어진땅은척박한곳으로살기어려운곳이었을뿐만아니라로마관헌들의횡포가심해서고트족은반란을일으켜 378년아드리아노플싸움에서로마군을격파하고발렌스황제를전사시켰다. 이반란은발렌스의제위를계승한테오도시우스황제의친게르만정책에의해잠정적으로수습되었으나그의사망후서고트인들은약탈과정복을재개해그리스와이탈리아를잇달아침입, 마침내 410년영원한도시로마를함락시켰다. 성아우구스티노는이정복에자극되어신국론을저술하고이재앙을그리스도교적으로이해시키려했다는것을볼때로마함락의심리적충격이얼마나컸었는지를짐작할수있다. 서고트족이이탈리아로접근하자서로마제국은본토방위를위해라인강국경의수비군단을소환하게된다. 이때부터라인강유역의여러게 [31] 게르만민족의대이동 75
76 르만부족들이제국안으로밀고들어와 30년만에고올, 스페인, 북아프리카등지의로마제국영토를점령했다. 서로마제국의멸망은이미막을수없게되었다. 425년이래반달족이스페인을황폐화시켰고 429년에이탈리아의곡창이었던북아프리카를정복했다. 이때히포에서성아우구스티누스가사망했다 (430년). 훈족은동고트족정복후에도서진을계속하여 452년에는로마를침입, 레오대교황의담판으로물러나기도했으며훈족의쇠퇴이후동고트족이 476년서로마황제로물루스아우구스툴루스를폐위시킴으로써서로마제국이멸망했다. 이때부터로마제국의서부는모두게르만민족의지배하에들어갔다. 서고트족은스페인에, 반달족은북아프리카에, 프랑크족은지금의프랑스인북쪽갈리아에, 부르군드족은남부갈리아에, 앵글로색슨족은영국에, 동고트족과랑고바르드족은이탈리아에각각왕국을세우고정착했다. 결과와의의게르만족의대이동은교회사의주요무대를지중해에서북유럽으로옮겨가게했다. 게르만족의침입으로제국의서부에서는제국의권위가실추됐고반면교회는무너진행정조직과파괴된공공시설, 황폐해진학교등의혼란속에서유일한희망으로남아고대의문화정수를보전하면서새로운역사창조의원동력으로떠올랐다. 뿐만아니라게르만족의대이동은신앙을심화시켰다. 비록당시교회가로마제국안으로들어와제국의제도를변화시키고교회의지위를확고히하고있었지만사람들이내면적으로는아직도신앙심이깊지못한상태였다. 고대의종교와사상을함께가지고있었던상태에서장기간에걸친침략으로세속생활에불안을느낀이들이신앙에매달리게된것이다. 이때부터신앙과노동의결합을보장해주는수도원생활이서유럽에뿌리를내리게되는것도이와같은사회적요인을안고있는것이다. 또하나짚고넘어가야할것은서로마제국멸망을계기로한교회의포교의식의전환이다. 로마제국으로침입해온게르만족의대부분은아리우스파였다. 이미몰락해가는서로마제국과동로마제국황제들로부터아무런도움을기대할수없다는것을깨달은그레고리오교황을비롯한후계자들은교회를끊임없이위협하는게르만족들을받아들이는한편그들을정통신앙으로교화시키고문명화시켜야한다는결론에이른것이다. 가톨릭교회와게르만족의동맹이이뤄짐으로써중세의특징인 ' 그리스도교적으로통일된서구사회 ' 라는기틀을놓게된것이다. [31] 게르만민족의대이동 76
77 [32] 프랑크족의개종 :51 <== 그리스도교적서구 기반마련 서유럽의주인이게르만족으로바뀌면서로마인과게르만인사이의대립이심화됐다. 이는종교적대립으로더욱확대됐는데게르만족은아직이교도였던프랑크족을제외하곤대부분아리우스신앙을신봉하고있었다. 게르만족의아리우스화는아리우스파의주교인울필라스 (Ulfilas 311~383 ) 의선교활동에의해이뤄졌다. 그리스도교신자이자로마인인어머니와이교도인고오트족의아버지사이에서태어난울필라스는콘스탄티노플에체류하면서신앙을아리우스형식으로받아들였고아리우스파의열렬한옹호자였던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에우세비오에의해주교로서품돼고오트지방의선교를위해보내졌다. 이리하여아리우스신앙은고오트인들에게서시작하여모든게르만민족들에게전파돼국교화되다시피했다. 게르만족들의국가형성후점령지역주민의정통신앙과아리우스신앙의종교적충돌은자연잔혹한박해와파괴를불러왔다. 동고오트의테오데리히왕은가톨릭적인로마인과희랍인들에대항해모든아리안계게르만부족들을연합, 구로마영토에아리우스신앙을신봉하는거대한게르만제국을건설하려는계획을세우기까지했다. 그러나이계획은신흥강국인프랑크의왕클로비스가개종함으로써무위에그치고만다. 클로비스의개종클로비스는가톨릭정통신앙을간직하고있었던왕비클로틸데로부터끊임없이입교를권유받았으나자식들의세례는동의하면서도자신은거부해왔다. 그러나알레만니족과의전쟁중에라인강한골짜기에서전멸의위기에처하자클로비스는아내의신을부르면서여기서승리하면신자가되겠다고약속한다. 결국클로비스는전투에서승리하고약속대로 496년프랑스랭스에서성탄축일에자신의군대와함께레미지오주교로부터세례를받았다. 가톨릭신앙에귀의한클로비스는동고오트테오데리히왕의아리안계게르만국가건설의도를저지하며교회의새로운보호자역할을담당했다. 클로비스는새로운콘스탄티누스였다. 그러나클로비스의개종에는정치적인면도많이작용했다. 클로비스가콘스탄티누스와마찬가지로그리스도교에호의적이면서도입교를주저한것은아직이교도였던프랑크족의군지도자들과국민들로부터신임을받기위함이었다. 당시클로비스는동쪽으로는알레만니족, 남쪽으로는아리안계게르만족들로부터위협을받고있었다. 그러나알레만니족과의전쟁에서승리하고남쪽의게르만족들의힘을약화시킨클로비스는이제수월한국가통치와자신의메로빙거왕조의기틀을다지기위해지역주민과의동맹필요성을느끼게된것이다. 사실정통신앙을간직하고있던점령지역의주민들과유대를이루지못한아리안계게르만국가들은빨리멸망했다. 다른게르만족과달리아리우스신앙을신봉하지않고있던프랑크족은클로비스의개종과함께급속히그리스도교로개종했다. 이러한프랑크족의개종은게르만민족과로마제국국민들과의유대를강화시켜프랑크왕국의확장과게르만족의개종에큰영향을미쳤다. 프랑크왕국의가톨릭신앙이안으로는체제의견고함을밖으로는지역민과교회에신망을얻게해준까닭이다. [32] 프랑크족의개종 77
78 이후모든게르만왕국중에가장강력하고통일된국가를이룬프랑크족은자신들의세력의근원으로서슴없이가톨릭신앙을꼽았고로마의멸망이후그리스도교의사명을위해새롭게부름받은민족으로행세했다. 개종의결과프랑크족의개종은그리스도교화한고대문명과게르만족의융합을가능하게함으로써그리스도교적서구가탄생될기틀을마련했다. 그리스도교는침략자요야만적습성에젖어있던게르만족을무시하지않고그들을받아들여고대의문화사상을전해줌으로써문명의단절없이고대와중세를연결시키는고리역할을했고프랑크족의개종으로촉발된게르만족의개종은아리우스이단의확산을막고그리스도교를발전시키는방패막이됐다. 그러나이러한세계사적종교사적의미에도불구하고프랑크족의개종에는또다른문제들이도사리고있었다. 그들의개종은신앙의체험에의한것이아니라왕의모범과그리스도교전례의외적화려함등에대한동경으로인한것이었다. 뿐만아니라민족의집단개종으로그리스도교적교리교육도받지않았고고대그리스도교의엄격한세례지원기도거치지않았으며세례후재교육도없었다. 자연게르만족의신앙은오랫동안피상적인수준에머물렀으며그리스도교에서요구하는윤리적이고영적인생활을따라갈수없었다. 신앙이보편화되면서세속화하는현상이그대로재연된것이다. 또한교회와국가의밀착관계는왕과귀족들의교회내정간섭을가져와왕이교회회의를소집하고주교들마저선출하거나임명하는예속화현상을가져왔다. 또한신학적토론이활발하던동방과는달리신학적사색이사라져갔다. 새로운선교관시대의발달과정에서새로운사상이나충격이가해질때기층세력의반응은주로세가지이다. 첫째는미리예단하는것이고둘째는무시하는것이며셋째는귀를기울이는것이다. 1500여년전의교회는월등한문화수준을가지고있으면서도야만적인게르만요소들을무시하거나미리단죄하지않고귀기울여받아들이고수용하여개화시킴으로써한층고양된문화질서체제를이뤄냈다. 그러나교회는그이후강성해진자신의힘을바탕으로새로운사상과조류를자신의신앙적준거에만맞춰단죄하고파문하는오류를많이범해왔다. 오늘날의세계도세기의전환과더불어전생, 환생, 역술, 뉴에이지, 텔레파시, 악마숭배등현대인의영혼의허기를채우려는새로운시도들이수없이일어나고있다. 이는더이상이성적이고교조적인세계관으로는현대인을만족시키지못한다는반증이며새로운신학적패러다임을요구하고있다는것이다. 시대의표징을해석하고수용하며새로운비전을제시하는생동감있는선교관만이교회의미래를보장해준다는것이다. 18세기의신관으로 21세기의복음선포를이끌어갈수없는것이다. [32] 프랑크족의개종 78
79 [33] 아일랜드, 영국의포교 :53 <== 선교요람골롬바노가세운이오나수도원유적. 563년경아일랜드의수도자인골롬바노는스코틀랜드서쪽해안의이오나수도원을설립했는데이수도원은 7세기까지스코틀랜드와잉글랜드의선교전진기지역할을담당했다 유럽복음화에큰영향미쳐영국교회의중심은런던이아니라대륙과인접한남쪽끝인켄터베리대교구다. 이는그레고리오 1세교황에의해선교사로파견된로마성안드레아수도원장아우구스티노가자신의대주교좌를런던이아닌이곳에세움으로써비롯됐다. 지금도켄터베리대성당에는아우구스티노자리가있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 브리타니아 ) 지방으로구분되는영국제도의선교가교회사에서중요한의미를지니는것은이지역의복음화가유럽의그리스도교화에큰영향을미치기때문이다. 아일랜드- 스코틀랜드교회아일랜드지방의복음화는오늘날아일랜드의주보성인으로추앙받는파트리시오성인에의해이뤄졌다. 385년경브리타니아에서태어난성인은 16세때해적들에의해납치돼아일랜드에노예로팔려가 6년간의노예생활을했다. 이후아일랜드를탈출하여수도생활을시작한성인은팔라디오스의후임으로아일랜드주교에임명돼포교주교로활동했다. 수도생활에애착을가진파트리시오에의해복음화된아일랜드교회는자연수도원중심의교회로신앙생활전반에걸쳐수도생활적분위기를띄고있었다. 6세기부터수많은수도원이설립되면서번영하였고수도원이교회행정의중심이돼수도원총장이관할하는수도원중심의교구가창설되기시작했다. 이러한제도는후에수도회면속구로발전하게된다. 아일랜드의수도원은행정중심일뿐만아니라고등교육기관의역할까지담당하여많은성인과학자들을배출함으로써후에아일랜드를성인들의섬, 박사들의섬으로불리게했다. 이러한아일랜드에서의수도생활적신앙관습은유럽대륙에까지널리퍼지게된다. 그중에서도속죄규정과관련해수도원에서발달한사적고해가일반평신도들에게까지전달돼유럽교회의신앙생활에엄청난영향을미쳤다. 그때까지교회는대죄가있을경우공개적인속죄 ( 그것도일생에한번 ) 밖에없었고속죄가끝난다음에교회공동체에다시받아들였기때문이다. 즉시사죄될수있었고은밀한마음의죄에대해서까지영성지도를받을수있었던이러한사적고해가평신도들사이에널리보급되자사람들은영성체전에고해성사를받기에이르렀고이를위해아일랜드에서는유명한 ' 속죄규정서 '(Penitentiales) 가나왔다. 이규정서는 7세기이후서구의모든성직자들이직무상지니고다녀야했다. 각종죄에대한속죄규정을정한이속죄규정서에따르면물건을훔친경우보상후평신도는 40일, 성직자는 1년, 수도자는 1년6개월간빵과물만먹고생활해야했다. 이러한아일랜드의열성적인영성생활은대륙의교회, 특히집단개종한프랑크왕국등과비교하면엄청난차이를보였고영국수도자들의대륙선교와함께유럽교회에크게영향을미쳤다. [33] 아일랜드, 영국의포교 79
80 브리타니아, 앵글로색슨교회요오크, 런던의주교들이 314년에있었던아를스교회회의에참석했던것으로보아브리타니아에는이미로마제국시대에교회조직이있었다. 그러나 407년로마가철수하자픽트, 앵글로, 색슨등게르만족들이침입해서그리스도교인들을웨일스지방이나대륙으로쫓아내고 7왕국을건설했다. 이곳에대한선교는무엇보다그레고리오 1세교황에의해이뤄졌는데교황은 596년아우구스티노와함께 40명의수도사들을이곳에파견했다. 그리고첫선교의결과는대단한것이어서 597년성탄축일날아우구스티노는켄트의에델베르트왕과 1만명에게세례를줄수있었다. 이처럼선교가큰성공을거두자교황은계속선교단을증원해보냈으며 601년에 12개교구로구성된두개의관구를설정하고켄터베리를수좌교구로정했다. 그레고리오교황의수도사파견은수도회역사와선교사에있어일대전환점을이룬계기가됐다. 교황은수도자들에게선교의사명을부여함으로써수도생활과사목생활의융합이라는예전의수도생활과다른새로운방향을제시했다. 또한선교방법에있어서도그레고리오대교황은일방통행식복음의강요보다뛰어난적응성을가지고기존관습들을복음적으로완성하도록이끌었다. 신앙은하나이지만신앙실천을위한전례등의방식에서교황은 " 높은산을오르려는사람은뛰어오르는것이아니라한발짝한발짝서서히오르는것 " 이라며신앙의토착화를강조했다. 대륙포교아일랜드와앵글로색슨교회의수도자들은고행실천의하나로하느님을위한순례여행을했다. 속죄행위이자특별한희생으로실시된순례여행은영국교회의높은영성생활을유럽대륙으로확대시켰고결국수도자들이순례를하면서복음을전하는선교활동에나서게했다. 골롬바노등아일랜드수도사들의선교활동은유럽, 특히독일과골지방에많은영향을미쳤다. 그러나이들의선교사업은조직적이거나계획적으로이뤄진것이아니고수행의차원에서평민들을대상으로이뤄졌고무엇보다로마교회와항구적인관계를맺지못해만족할만한성과를거두지는못했다. 반면앵글로색슨수도자들은선교방법이완전히달랐다. 조직적이고계획적이었으며교황과결속된상태에서프랑크왕국의지도층을상대로적응력있게선교활동을펼쳤다. 이와같은선교사들의유럽대륙에서의포교활동은동로마에서상실된교황의권위와영향력을서구에서회복시켜주는발판이됐다. 뿐만아니라독일의사도보니파시오를위시한앵글로색슨계수도사들의선교활동은영방교회로전락한프랑크교회를보편사상으로귀의시키고개혁시킴으로써교황직과프랑크왕국과의동맹을이뤄내는초석이됐다. 대륙으로부터복음을전래받아충실한신앙생활로대륙교회를감화시키고포교한앵글로색슨교회의모범은중국으로부터신앙을전래받아아시아선교의핵으로기대를모으고있는한국교회의역사와닮은꼴이다. 그리고이런위치에선제3천년기한국교회의나갈방향은당시영국교회의열성적인신앙생활에서찾아볼수있을것이다. [33] 아일랜드, 영국의포교 80
81 [34] 이슬람의출현 :54 <== 메카의카바신전을경배중인이슬람신자들 " 오마리아! 하느님께서말씀을통하여아들의기쁜소식을네게주시노라. 아기의이름은마리아의아들예수이리니이세상과다음에오는세상그리고하느님께가까이있는자들로부터영광되리라 " 성서의한구절을연상시키는듯한이말은꾸란 ( 코란 ) 3, 46의내용이다. 이처럼이슬람은우리의생각보다그리스도교와가깝다. 마리아의이름도복음서에는 19번밖에나오지않는데반해꾸란에는 34번이나언급된다. 철저히일신교를주장하는이슬람은유다교를하느님의노여움을산자들의길, 그리스도교를길을잃고헤매는자들의길이라고표현하고있다. 아브라함이세운순수한유일신신앙을유다교는계시내용을수정했고그리스도교는예수와그제자들은진정한모슬렘이었으나후대에변질된것이라고믿고있으며, 순수유일신신앙이이슬람속에서되살아나야한다는것이그들의주장이다. 이슬람이전의아라비아는고대다신교를신봉하고있었고그의례의중심지는인도양에서지중해에이르는대상로의요지인메카의카바성전이었다. 교역의중심지인메카는교역대상국인비잔틴과페르시아에접해있었으므로자연그리스도인들과접촉이있었다. 또한인근의메디나에는유다인정착촌이있었고 500년경쉬바국의왕들은유다교로개종한상태였다. 따라서 570년경무함마드 ( 마호메트 ) 가태어날당시아라비아각지에는유다교와그리스도교의영향을받아 ' 신은유일하다 ' 고믿는사람들이늘어났고이런사람들을하니프라고불렀다. 무함마드는메카의유수한부족인쿠라이시족하심가출신으로부모를일찍여의고할아버지와큰아버지에의해양육됐다. 상업에종사한큰아버지와함께장사를시작한그는 24~25세경돈많은과부하디자의장사대리인이돼성공을거둔뒤그녀와결혼했다. 하디자와결혼후무함마드는종교와인생의근본문제를고민하기시작했고 40세때꿈에서계시를받았다. 그리스도교인이었던부인의사촌와라카로부터그꿈이예언자로서부르심을받은것이란해몽을들은그는이후자신의계시를설파해나가며일신교를주장하기시작했다. 이에메카의검은바위순례를통해엄청난수입을거두던메카의부족들은무함마드를박해했고견딜수없게된무함마드는 622년야트립으로이주했다. 이슬람에서는이를히즈라 ( 헤지라 ) 라고부르며이슬람의원년으로삼았고이때부터야트립을 ' 예언자의도시 ' 란뜻으로메디나라고불렀다. 그동안무함마드는자신의활동을계시종교인유다교와그리스도교의진리를설파하는것이라고생각했었다. 그러나유다인의부정적인태도를보고아브라함이세운최초의유일신신앙이유다교와그리스도교에의해훼손된것이라믿고자신에게계시된내용이진실이라는결론을내린다. 그래서아브라함과의관계에서예루살렘을향했던예배방향이자신이계시를받은메카쪽으로바뀌게되고후에메카를정복한후카바의신전을알라의성전으로바꾸었다. 무함마드가아라비아반도를통일한후 632년사망하자이슬람은그의후계자인칼리프를선출해아라비아반도밖으로진출을시도했다. 644년까지시리아, 이라크, 아르메니아, 이란, 이집트등을정복했고나아가북아프리카대서양연안, 711년부터는스페인을침입했으며동쪽으로는중앙아시아와인도북서부까지지배하에두었다. 이슬람이이처럼짧은시간에영토를크게확장시킨것은피정복민에대한관용정책에기인한바가크다. 당시이슬람은상업과목축업이쇠퇴해새로운이주지와무역로의확보등경제적인요인들도정복정책의한요인이 [34] 이슬람의출현 81
82 됐다. 따라서정복지주민이나포로들에게일단개종을권하지만일정한공납을바치면신앙의자유를허용했다. 그러나무엇보다이슬람의팽창에는격렬한그리스도론분쟁에따른그리스도교의분열이중요한요인으로작용했다. 이슬람의정복지는주로아리아니즘과네스토리우스파에의해단성론을주장하던그리스도교분파들이자리하고있었고이들은비잔틴제국으로부터강압적인교회정책에시달려비잔틴에적의를느끼던중철저한유일신을신봉하는이슬람의지배를오히려환영했다. 뿐만아니라 8세기당시의이슬람은신흥종교로서별관심을두지않았을뿐아니라그리스도의신성을부인하는아리우스의일파쯤으로생각한그리스도교인들은이슬람의귀찮은간섭과제한때문에아예개종하고말았다. 또한비잔틴과페르시아제국간의계속된대립과전쟁으로양측의힘이쇠잔해진것도신흥종교인이슬람이그세력을넓혀가는데도움이됐다. 이러한이슬람의급속한성장은그리스도교에막대한영향을미칠수밖에없었다. 무엇보다그리스도교의옛중심지들인안티오키아알렉산드리아카르타고가이슬람의지배하에들어갔고이슬람정복직후 40명의주교가있던북아프리카지방이 11세기후반에는 2명의주교만이있을만큼쇠퇴해졌으며그나마 12세기이후그리스도교는이지역에서자취를감추었다. 또한이슬람세력에의해지중해가가로막혀동서교회간의소통이더욱어려워지고상호간의화해도무망하게됐다. 정복정책초기이슬람은사막지방에서일어난만큼문화적수준이낮아자신들의문화를향상시키기위해그리스도교의도움을절실히필요로했다. 따라서몇가지제한만을제외하고그리스도교에관용적으로대해왔으나 9세기에접어들면서이슬람문화가독립할수있을만큼성장하자오히려그리스도교문화가그들의성장에방해가됐다. 뿐만아니라그리스도교신자들의관료진출이많아져체제유지에불안을느끼고있는데다수도원장과주교직에대한부정과투쟁, 타락한신앙생활등그리스도교회의세속화는칼리프의개입을불러왔다. 이슬람의그리스도교에대한박해는 1009년알하킴이칼리프가됨으로써표면화됐는데이때예루살렘성지의교회가파괴됐으며이집트와시리아지방의교회재산이모두몰수됐고 1012년부터 1014년까지의대박해동안에는무려 3만을헤아리는교회가불태워지고그자리에이슬람사원이들어서는등암울한상황이계속됐다. 이에대한반동으로서구교회는십자군전쟁을일으키게된다. [34] 이슬람의출현 82
83 [35] 교황청과프랑크왕국의제휴 :56 <== 중세가톨릭교회의출발점 753년 11월교황스테파노 2세가일단의무리를이끌고로마를나서고있었다. 랑고바르드족의로마침략위협에맞서알프스를넘어프랑크왕국으로피핀 3세와협상하러떠난길이었다. 후대역사가들은이여행을 ' 비잔틴제국으로부터의교황직이탈, 교황사에있어서동로마제국시대로부터프랑크민족시대로의이행 ( 移行 ) 을상징한것이다 ' 라고평했다. 제휴의배경과과정 5세기이후서유럽이게르만족들의영향력아래놓이게됐지만로마제국의합법적정부이자교회의수호자는여전히비잔틴, 동로마제국이었다. 그러나동로마제국역시유스티아누스황제시절반달족과동고트족을몰아내는등옛영광을어느정도회복하는듯했으나곧이어페르시아, 아바르족, 슬라브족등많은이민족들의위협에시달리게되었다. 무엇보다아랍의이슬람세력이지중해권세계를침략했고제국의모든역량은이슬람의팽창을막기에도급급한실정이었다. 따라서동로마제국의서로마에대한기득권은이미유명무실해졌다. 한편 8 세기의서로마는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직접적인위협을받고있었다. 그레고리오 1 세교황에의해개종되긴했지만랑고바르드족은 이탈리아정복에대한야심은버리지않고있었다. 결국리웃프란드가 739 년로마를재침공한데이어아이스툴프가왕위에오른후이야심 을노골화했다. 이새로운위협은당시교황스테파노 2 세가다시프랑크왕국에원조를청하는계기가됐다. 이미 739 년당시에도프랑크왕국의카알마르 텔에게원조를요청했다거절당한바있었으나이번에는프랑크왕국의정치적상황도상당한변화의소용돌이속에있었다. 6 세기이후클로 비스의메로빙거왕조의권한은상당히약화됐고궁정장관 (Mayor of the palace) 들이실질적통치자로군림하고있었다. 7세기에들어서는피핀가문이정권을잡았으며아랍인들을스페인에서물리쳐서유럽에서무관의제왕이된카알마르텔사망후에그의두아들카를로망과피핀 3세가프랑크왕국을양분해통치했다. 이후정권다툼이일어나형인카를로망은수도원에입회했고사촌동생그리포와테우도알트도정쟁의희생물로사라졌다. 프랑크왕국의유일한실권자가된피핀 3세는궁정장관에머물지않고명실상부한지배자가되고싶었다. 그런데게르만족에게는왕은신으로부터선택된다는왕권신수설이있어물리적인힘으로왕을폐한다면신의징벌을받는다는전통이내려왔 다. 따라서정권투쟁과정에서이미많은적들이생겨났고정당성마저확보하지못했으며종교성이강한게르만족의왕권신수설에도부담을 [35] 교황청과프랑크왕국의제휴 83
84 느낀피핀은이를극복할방안을모색했다. 자신의왕위찬탈에대한비난의무마와정통성을더높은권위의인정을통해해소하려는것이었는데모두가납득할만한권위는당시서유럽에서최고의권위를갖고있던교황밖에없었으며교황의권위를통해도유로축성되는것외에는전통적왕권신수설을누를길이없었다. 이에피핀은궁정사제인풀라트를자카리아교황에게보내 ' 왕의칭호를가지고있지만실질적권한은없는왕 ' 의문제에대해질문했다. 이에교황은 " 실질적으로권력을지닌사람이왕으로불리는것이더좋겠다 " 는대답을했다. 이대답은결국피핀의왕위찬탈을승인하는것이었을뿐만아니라자신에대한대답이기도했다. 교황은눈앞에닥친랑고바르드족으로부터의위협을막아내야한다는위기감과황제교황주의로끊임없이교회내정을간섭해오던비잔틴황제의영향력으로부터교권독립을수립해야할필요를느끼고강력한세력으로부상한프랑크왕국과의동맹을돌파구로삼은것이다. 피핀 3세는 751년힐데리히 3세를축출하고교황이지명한프랑크대주교에의해도유축성돼왕위에올랐다. 이로써그리스도교왕권이성립됐고프랑크왕국에카롤링거왕조가들어서게됐다. 이러한교황의처신은 752년랑고바르드족이로마를위협할때그위력을나타냈다. 랑고바르드족이드디어로마를직접위협하자교황스테파노 2세는피핀에게자신을초대할것과교섭을위해방문할프랑크왕국까지호위할사절파견을요청했다. 사실상의구원요청이었다. 교황의요청에대해피핀은흔쾌히승낙했는데교황에게진정치적빚을갚을기회이자자신의그리스도교적왕권을보여줄수있는기회였기때문이었다. 로마를떠나온교황은드디어 754년 1월 7일폰티온의피핀궁전에서교황청과프랑크왕국과의동맹을맺었다. 피핀은로마를방어하고랑고바르드족이정복한지역을교회에돌려주기로약속했으며교황은그해 7월생드니수도원에서피핀을왕으로도유하고그의두아들카알과카를로망을후계자로축성해 ' 로마의보호자 ' 라는명예칭호를부여했다. ' 피핀의증여 ' 라고불리는이피핀의맹세는 754년프랑크의회가결의했는데그의사후카알대제에의해탄생될교황령의기초가됐다. 동맹의결과 지금은프랑스샹파뉴지방의소도시폰티온의사라진궁전에서이뤄진이동맹은수많은갈등에도불구하고줄곧비잔틴을지향해온교황권이비잔틴을떠나서구로전향하는일대사건이었다. 그리고무엇보다그리스도교적서구사회라는중세의출발을알리는것이었다. 이동맹으로가깝게는프랑크의힘을빌어랑고바르드족의위협으로부터로마와교회를구해냈고비잔틴황제로부터교권의독립을가져왔다. 또한교황령의확보로독립된경제기반을구축함으로써이후강력한군주형교황권의기틀을마련했다. 그러나정치적이해에서시작된이러한동맹은이후카롤링거왕조의몰락과함께교황의암흑시기를초래하는등정교유착의폐해를남기기 도했다. 또한동방에서는이러한프랑크왕과의동맹을고대로마제국을계승했다는자신들의권리를배신한것으로간주해인정하지않았 다. 이런정치적갈등과이해차이는동서방교회의분열과오늘날까지도잔존해있는갈등의뒷그림자로남아있다. [35] 교황청과프랑크왕국의제휴 84
85 [36] 카알대제와그리스도교적황제권의완성 :23 <== 서구황제권의상징아헨대성당 유럽사회발전의기초다져수백마디설명보다하나의상징이더욱명확하게다가올때가있다. 그것이 1000년의세월을뛰어넘는것이라면더욱그러하다. 유네스코가지정한세계문화유산인독일의아헨대성당. 피핀의아들이자그리스도교적황제권을완성한카알대제가 786년부터짓기시작해 800년에축성된성당이다. 생애의대부분을말위에서보내며대제국을이룩했던카알대제의왕궁성당인아헨대성당의첫인상은그야말로자신의통치이념을고스란히보여주는듯했다. 부활을상징하는 8각형구조에콘스탄티노플의성소피아성당을따른황제식원형천장. 여기에제대맞은편서쪽정면에위치한자신의옥좌는맞은편예수님의이콘과마주보고있다. 세상구원을위해동쪽에서는예수님이서쪽에서는황제가온다는의미라고한다. 또한규모는크지않지만성당안팎의화려한장식은게르만족의대이동이시작된이후 400년간의문화공백기를메우는카알대제시절의문예부흥을상징해준다. 생애와활동카알의면모는그의친구이자비서였던아인하르트가쓴전기 ' 카알의생애 '(Vita Caroli) 덕분에비교적자세히알려져있다. 이전기에따르면카알은신앙심깊은황제로하루에서너번씩왕궁성당에서의기도에참여했으며다른사람들과함께나지막히성가부르는것을좋아했다. 뿐만아니라완전한그리스도국가의실현을자신의임무로생각한그는식사때마다아우구스티노의 ' 하느님의도시 '( 신국론 ) 를읽게했다. 또한가난한이들을보살피는데도열정적이어서자신의왕국내에서만이아니라멀리바다건너시리아, 이집트, 예루살렘등에이르기까지그리스도교인들이곤궁한처지에있다는소식을들으면돈을보내곤했다. 또한이교도의통치아래있는그리스도교인들을돕기위해그들과친선을맺기도했다. 그리고무엇보다로마교회를위해모든노력을아끼지않았다. 고대에서중세로의과도기를종식시키고중세초기문명으로의전환을완성한카알은 771년왕위에올라 814년까지통치했다. 카알은왕위에오르면서두가지정책을실시한다. 첫째는모든게르만민족을하나의왕국으로결합하는확장정책이고둘째는자신이정복한모든영토내의사람들을그리스도교로개종시키는것이었다. 그의이러한정책은로마를침입한랑고바르드족을정복하면서공인돼더욱적극적으로추진된다. 랑고바르드족은카알에반대하기위해하드리아누스교황에게동맹을제의했으나교황이이를거절하자 773년즉각로마를침입했다. 이에카알은이탈리아로원정해랑고바르드족을정복하고스스로랑고바르드의왕위에올랐다. 이전쟁중카알은 774년부활절을보내기위해로마를방문했는데이때교황과같이성베드로사도의무덤앞에서서로에게충실할것을맹세했다. 여기서카알은로마최고의귀족으로서로마를군사적으로보호할책임을받았다. 이때부터 ' 로마교회의수호직무 ' 는곧서구황제들의직무가됐다. 이로써자신의교회적종교적지위가확보되자카알은더욱강력하게자신의정복을교회의이름으로추진해나갔다. 그의전쟁은철두철미하게왕국의국경주변을압박하던미신자와이교도들을향했고그리스도교화가정복과결합돼이민족들의그리스도교화는그들에게프랑크 [36] 카알대제와그리스도교적황제권의완성 85
86 왕국의통치권에굴복함을의미하게됐다. 800년무렵이되자프랑크왕국은오늘날의프랑스, 벨기에, 스위스와독일대부분, 이탈리아와스페인을차지했다. 일견해체된서로마제국의부활이었다. 제국이념과교회정책카알의통치적특징은로마의문화, 게르만적생활방식, 그리스도교이세가지에기반을둔것이다. 자신의전통치기간동안이세가지요소를결합해하나의왕국을만들었고유럽사회가발전할수있는기초를다졌다. 그래서이후지식인들은그를 ' 유럽의아버지 '(Patria Europae) 라고칭송했다. 아우구스티노의신국사상의실현을꿈꾼카알은완전한하나의강력한그리스도교적제국을만들기위해백성들의종교적교회적문화적향상에전념해학문과예술을번성시켜 ' 카롤링거르네상스 ' 를이끌었다. 카알의이러한제국이념은비잔틴황제의이념을알게된후부터더욱세속적인것과영적인것의구별이사라져신정정치화했다. 측근들이자신을다윗왕으로부르는것을즐겨한카알은자신의직무를하느님으로부터부름받고파견된그리스도교계의지도자요보호자로이해한것이다. 따라서교회의재산을마음대로처리하고교구와수도회를자신이선택한사람들로채웠으며수도원장과성직자들에게국가임무를맡기기도했다. 이러한지나친정교유착은경건하고강력했던군주였던자신이모든것을장악하고있을때는큰문제가없었지만그의사후후계자들에의해다시교회가세속화하는빌미가되기도했다. 카알의신정정치이념은 800년성탄대축일에교황레오3세가자신을기습적으로황제로대관한것에대한불쾌감에서도잘나타난다. 799년교황레오 3세는로마귀족들과의불화로로마에서쫓겨나카알의도움을청했고카알은이듬해직접로마로가서교황권을복위시켰다. 그리고자신의희망에따라아들을성탄대축일에도유하기로되어있었다. 그러나성탄축일밤기도중에레오 3세가카알에게황제관을씌우고황제로선언하자깜짝놀랐다. 교황레오 3세는황제를대관할수있는권리를상징적으로보여줌으로써통일된그리스도교세계에대한교황권을주장하고싶었던것이다. 이에대해이미동로마황제와대등한위치에있던카알은황제가교황과로마인에의해대관된다는사실이마음에들지않았다. 그래서 1년반이나지나서야비로소로마황제의칭호를사용했다. 동방은레오교황의행동에대해분노하고무시했으나이레네의실각이후그의황제권을마지못해승낙했다. 이로써서구의황제권이재건됐고제국의이념은카롤링거왕조와해이후에도수세기동안서구역사의내용과방향을제시했다. 위대한황제카알도마지막순간까지가져간것은성경책한권뿐이었다. 그의사후 200년뒤에무덤이발굴되었을때뼈만남은황제의손은무릎위에펼쳐진성경중 " 사람이온천하를얻고도제목숨을잃으면무슨소용이있는가 "( 마태 16, 26) 를가리키고있었다. [36] 카알대제와그리스도교적황제권의완성 86
87 [37] 교황령의성립과기원 :23 교황령은교황의세속주권이인정되는교황국가의영토를말한다. 자연교황령은교황의권위에따라시대마다달랐지만언제부터시작됐다고단정지어말할수없다. 교황국가의성립은베드로세습령 (patrimonia petri) 이라고부르는교회소유의토지와더불어황제들의교회내정간섭에서벗어나려는교황들의노력. 여기에비잔틴제국의쇠퇴와랑고바르드족의침입이라는국제정세, 로마전통적귀족세력의몰락과무관계층의지위향상및이탈리아내의반비잔틴경향등의사회적요인이중요요소로작용했다. 이중에서도가장기본적토대는역시교회가일찍부터소유해온많은토지재산인베드로세습지였다. 161년에고린토의디오니시우스주교가로마인들에게보낸편지를보면로마교회의신자들이다른지역의교회들을경제적으로도와주는것이관례화되어있는것으로나타난다. 로마의이러한원조는상황에따른일시적기부에의한것이었지만교회가안정되면서일시적기부금외에도빈민구호를위한항구적기금이마련되기시작한다. 이러한교회재산은몰수되기일쑤였던박해시기동안에는토지로소유하기어려웠지만콘스탄티누스의밀라노관용령으로교회재산의합법화가이뤄짐으로써토지의형태로보유하게됐고각계에서의기증도이어져세습지의규모가크게늘어났다. 이러한세습지에서나오는수입은주로교황에게지급되는것과, 성직자를위한성직록, 교회건물유지, 빈민구제와자선을위해사용됐다. 그중에서도빈민구제와자선이가장중요한사안이었으며토지관리관의임무중에서도빈민들을돌보고보호하는것이가장중요한임무였다. 이러한자선활동을체계화한최초의교황은그레고리오 1세였는데그는티베르강옆에곡물저장창고를짓고정부와는별도로식량을분배했다. 연이은침략과전쟁등으로로마의식량난이극심했던 7세기와 8세기에는오늘날의무료급식소와비슷한디아코니아 (diaconia) 를만들어수도자들을직원으로두었다. 하드리아누스 1세교황시절에는특정지역의빈민들이금요일에디아코니아에모여서가까운목욕탕까지노래하며인도됐으며목욕후식량을배급받기도했다. 이처럼다양한의도에의해유지되어온베드로세습지는 6세기후반랑고바르드족의침입으로상당히상실되기도했으나 8세기에들어와비잔틴제국의쇠퇴와함께더욱확장됐다. 이과정에서프랑크왕국의역할은지대했다. 754년스테파노 2세교황과동맹을맺은피핀은랑고바르드족이점거한지역의반환을약속함으로써교황령이형성될기초를놓았고그의아들카알대제는 774년 4월기존랑고바르드족의영토는물론베네치아, 이스트리아까지양도를약속했으며 781년과 788년두차례에걸쳐광대한토지를양도했다. 교황령의확대와함께교황의세속적권한은증가됐는데이는단순히비잔틴제국의쇠퇴에의한것이아니라오래전부터국가의간섭에서교회를독립시키려는교황들의노력에의한것이었다. 교권과속권의갈등은 313년그리스도교의공인이후계속됐으며게르만족의대이동과비잔틴제국의쇠퇴가맞물린반면교황의지위가확대된 5세기이후표면화됐다. 이후 800년까지악화된동서제국간의갈등속에서교황들은중부이탈리아에대한비잔틴제국의영향력을배제시켜나갔다. 국가권력으로부터자유로워지려는교황의노력과교회에대한영향력을잃지않으려는황제들간의이러한갈등은마침내비잔틴의레오 3세황제에의한이탈리아에대한중과세 (725년) 와성화상파괴정책 (726년) 의실시와함께결정적전환점을맞는다. 교황그레고리오 2세는세금지불과성화상파괴를거부했고황제는이런교황을응징하기위해군대를파견했으나이미유명무실해진비잔틴의영향에서벗어나려는지방민들의방해로실패했다. 이러한긴장의연속에서생활하던교황들은더이상국가의간섭을받지않기위해교황이세속적권력까지영유하는 ' 성베드로공화국 ' 사상곧성베드로가교황을통하여지배하는로마교황국을제창한것이다. [37] 교황령의성립과기원 87
88 선임교황들의사상을이어받은스테파누스 2세는교황령을 ' 하느님의거룩한교회, 로마인들의공화국 '(Sancta Dei ecclesia, res publica romanum) 으로불렀다. 이로써교황은황제의피보호자가아닌동등하거나우월한권리를가진권력을갖게됐다. 8세기에이르러교황들이이렇게강력하게비잔틴제국으로부터의이탈을시도할수있었던것은새롭게편성되는국제정세와여기서파생된사회적요인에힘입은바가크다. 비잔틴제국은고대로마제국의후계자로서이탈리아에대한지배권을주장했지만 5세기이후그영향력은현저히감소했다. 더욱이이민족의침입앞에서제국정부는아무런도움도주지못한반면교회와교황은유일한피난처로서이민족들을개종시키고백성들을구제했다. 뿐만아니라랑고바르드족의위협과정에서맺어진강력한프랑크왕국과의동맹은가장든든한후원자였다. 국제정세의변화는사회적변동또한가져왔는데 6세기로마인들이도처에서살해됐던고트족과의전쟁과이후정치세력과제국의행정력이쇠퇴하고관리들의억압과부패, 성화상파괴와같은종교적탄압, 이탈리아에대한비잔틴의속주화에대한로마인들의불만등으로반비잔틴사상이커져갔다. 이같은사회상속에서원로원과같은전통적인로마의귀족세력이약화되고무관계급의정치 사회 경제적지위향상이이어졌다. 이들은교황을응징하려는비잔틴세력에강력히대처하여교황을보호함으로써교황국가성립의한축을담당했다. 이처럼교황국가는 730년경부터 800년까지교권수호라는일관된노력의연장선상에서형성된것으로, 서로마제국의몰락과함께찾아온전쟁과사회경제적불안정등에기인한공백을교회가메움으로써세속적지배권을확대한데따른것이다. 그러나후대에이르러교황들의세속주권에대한지나친집착은교황의위신을실추시켰고속권을유지하기위한교회징벌의남발과재정난에따른과도한조세, 지방행정당국과의분쟁등을불러일으키기도했다. [37] 교황령의성립과기원 88
89 [38] 성화상논쟁과제 2 차니체아공의회 :25 <== 제 2 차니체아공의회가개최된니체아 ( 현지명이즈 니크 ) 의소피아성당. 흠숭과공경구별로논쟁해결초기그리스도교인들은유대계그리스도인들이었으므로우상숭배를초래하는신상을만들지않는유대율법의영향을받았다. 자연초기그리스도인들은성상을만들어세우는것에부정적이었고물고기나배와같이신자여부를확인하는암호나간단한상징물혹은신앙교육을위해착한목자, 어린양과같은소박한그림들을통해그리스도의신비를표현했다. 그러나신앙의자유를얻은 4세기이후영세자들이늘어나자모든이들에게상징적인표현만으로신앙신비를설명하기가어려워졌다. 보다구체적이고시각적인표현이필요했다. 대부분의사람들이문맹이었던시절이었으므로이런표현들은예술적시각에서보다교육의도구로이해됐고교부들은설교를진리를얻어듣는도구로, 성화상은보는도구로강조했다. 이러한성화상은특히동방지역을중심으로대중화되기시작했고 6~7세기경에는교회, 수도원, 카타콤바, 개인집등에그려졌다. 그러나성화상이대중화되면서병든사람을고쳐준다는등의미신적관념이도입되면서성물공경현상이나타났다. 이런성숙치못한성화상공경의풍습과교의적인충돌등으로성화상논쟁이일어났다. 논쟁은주로그리스도의신성만을강조하고참된인성을부정하는단성론자들에의해시작됐다. 사람의모습으로표현된그리스도의형상은신성을온전히드러내지못하므로성화상공경이그리스도의신성을부정하는이단에빠질수있다는논거였다. 이에대해 692년콘스탄티노플제2차트룰라눔교회회의는하느님께서사람의모습을갖추게되셨으므로그리스도의성화상이가능하다고선언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동로마제국에서이성화상문제는수그러지지않고오히려파괴운동으로발전했다. 717년즉위한동로마의레오3세황제는성화상공경에대한이러한찬반논의를잘알고있었지만불안한국내외정치상황때문에개입하지않았다. 그러나자신의정치적입지가강화된이후성화상공경옹호자들이자기와적대관계에있던선대황제들의옹호자였고자신의권위에완전히복종하지않는다는것을알고 726년구약의우상숭배금지와이슬람과유대인들의개종을이유로성화상파괴를명령했다. 이는단순히교의상의문제만이아니라교회를포함한전제국을자신의영향력아래두려는절대군주로서의야심에서비롯된것이었다. 뿐만아니라경제적인요소도크게작용했다. 당시동로마는이슬람의진출과슬라브민족의남하를막기위해많은전쟁을치르고있었으므로막대한부를필요로했다. 그러므로광대한토지와면세권을지니고있으면서황제의권위에예속되지않는수도원을속박시켜국가정책에대한수도원의개입을방어하는동시에수도원의수많은재산을차지하고자한것이다. [38] 성화상논쟁과제 2 차니체아공의회 89
90 이런관점에서볼때성화상논쟁은이제교의적인문제를떠나황제의전제정치로부터벗어나려는교회의자유와독립을위한투쟁적성격으로양상이변하게된다. 전통신앙에의해배척된단성론을주창하던소아시아의주교들은레오의조치를받아들였지만대다수성직자와신자들은레오를반대했고그레고리오 2세교황도황제의요구를거부함으로써제국전체에황제를반대하는운동이크게일어났다. 이에레오 3세는 730년 1월 17일성화상공경을금지하는칙서를발표하고성화상철거를무력으로강행했다. 그레고리오 2세교황은성화상파괴중지를요구하며주교들이결정해야할교의적문제에간섭치말것을명령했으며후임자그레고리오 3세교황도로마교회회의를통해성화상파괴, 비방, 제거행위를파문했다. 여기에대한반동으로레오 3세는교황을체포하기위해함대를보내기도했고남부이탈리아와시칠리아등지의교회재산을몰수하기도했다. 이제상황은동서제국의극렬한대립으로치닫게됐다. 성화상논쟁은레오의아들콘스탄티누스 5세에이르러절정에이르렀다. 성화상공경을인정한매부아르타바도스의반란을경험한데이어교황청과프랑크족의동맹을지켜본콘스탄티누스는정치적안정을위해 754년히에레이아에서회의를개최해성화상파괴를재가했다. 이러한전제정치에반대한것은거의수도자들이었는데수도자들의봉기는박해와처형으로이어져많은지방에서수도자들이전멸하다시피했다. 성화상논쟁이해결의실마리를찾은것은열살의어린나이로황제가된콘스탄티누스 6세를대신하여섭정한이레네황후에이르러서다. 자신이성화상공경으로추방당하기도했던이레네황후는이문제의해결을위해콘스탄티노플에서공의회를개최했으나반대파군인들에의해해산됐고 787년가을에서야니체아에서공의회가시작됐다. 제2차니체아공의회는동서교회가함께한마지막공의회로성화상논쟁을흠숭과공경으로구별함으로써해결했다. 흠숭은하느님께만해당되고공경은피조물에게도해당된다는사상을통해성화상공경의교의적기반을다진한편이의남용을경계했다. 이외에도공의회는한수도원에남녀수도자를함께두는것을금지했으며수도자나성직자가단독으로여인과식사하는것을금하는등의 22 개법규를정했다. 성화상논쟁이공경쪽으로가닥을잡음으로써수도원의부흥시대를가져왔고황제에게예속됐던동방교회의자율권이커졌으며성화상공경을끝까지지킨로마교회와교황의권위가제국전역과교회안에서높아지는결과를가져왔다. 그러나 100여년에걸친논쟁은지역간의첨예한대립을가져와이후동서교회의골을깊게했고결국동서교회가분열하는한원인이됐다. [38] 성화상논쟁과제 2 차니체아공의회 90
91 [39] 카롤링거왕조의멸망과교회의혼란 :26 <== 사체재판 J. P 로렌스작교황포르모소와스테파노 6세. 무덤에서파낸포르모소교황의이사체재판은 9세기극심했던교회혼란상을보여주고있다. 교황권, 권력의노리개로전락 896년가을, 정말어처구니없는일이일어났다. 스테파노 6세교황이땅에묻힌지 9개월이나지난포르모소교황의시신을파내교황복을입힌후단죄하는사체재판을거행한것이다. 나아가스테파노 6세교황은교황반지를낀포르모소의손가락을잘라버리고사체를절단해티베르강에버리는만행을저질렀다. 이러한만행에격분한로마시민들은스테파노 6세교황을체포해옥에가둔뒤교살시켜버렸다. 이같이참담했던교회의혼란상은카롤링거왕조의몰락에서부터그레고리오 7세교황의개혁초기까지계속됐는데사가들은이시기를서구의암흑시기혹은철의시기라부른다. 이시기교회의혼란상은로마교회의든든한후원자였으며외적기반이었던카롤링거왕조의몰락에서기인했다. 서구의그리스도교적황제권을완성시킨카알대제가죽자카롤링거왕조는바로쇠퇴하기시작했다. 제국을계승한경건왕루드비히 1세는신실하고교회정신에투철한황제였으나방금이룩된제국의통일을지켜낼정치력과결단력이없었다. 그는교회생활과관련한각종개혁입법들을추진해영적생활의발전을이끌었으나정치적무능으로왕위다툼을야기시켜 9세기정치질서의붕괴를초래했다. 루드비히 1세는아내인이르민가르트로부터세명의아들을얻었는데 817년에그들에게제국을분할해주었다. 장남인로타르 1세를공동황제로세우고이탈리아에서대서양에이르는제국의중앙부분을분할해주었으며이를중심으로동프랑크는셋째아들인루드비히 2세에게, 서프랑크지역은피핀에게물려주었다. 그러나이후루드비히 1세는후처에게서넷째아들대머리왕카알을얻자막내에게알라마니아를상속하려고제국의분할을변경하려했다. 이결정에전처의아들들이반항해골육상잔이시작됐고결국제국전체의붕괴를가져왔다. 840년루드비히 1세가죽자장남인로타르 1세가제국전체를다스리려는의도에루드비히 2세와카알이함께대항해싸웠다. 결국이들은 843년베르뒹 (Verdun) 조약을통해카알은서프랑크, 로타르 1세는중부, 루드비히 2세는동프랑크지역을다스리기로함으로써제국을삼분했다. 이로써서구민족공동체의통일이다시무너졌다. 또한 869년에로타르 2세가사망하자루드비히 2세등은메르센에서협정을통해사망한조카의영토인로타링기엔주를나누어가졌다. 이로서프랑크왕국은오늘날의독일, 프랑스, 이탈리아와비슷한형태로양분됐다. 이러한정치적혼란은황제의지도적위치상실을초래해지방군주들이서로가권력을잡으려는암투가심해졌다. 설상가상으로 8세기말부터북쪽에서는노르만족, 남쪽에서는사라센족, 제국의동쪽에서는헝가리족들이침입해이런혼란을가중시켰다. 이들은민가를노략질하고성당과수도원을점령해사제와수도자들을학살하는한편성물을빼앗는등말로표현할수없는만행을거듭했 [39] 카롤링거왕조의멸망과교회의혼란 91
92 다. 흉폭한노르만족등의침략속에서국가로부터보호를받을수없게된백성들은스스로자위책을강구하지않을수없었다. 결국지주와농민들은유력한제후의밑으로모여들었고제후들은이들의세력을모아이민족들로부터백성들을보호했다. 이리하여봉건제도가크게성장했으며사회생활상도크게변했다. 교회도처음에는이러한봉건제도를약자를위한조처로환영했으나차츰교회가사유화되는경향을보이더니수습하기어려운폐단들이생겨나기시작했다. 교회와수도원의재산은개인재산처럼귀족들의손아귀에서놀아났고성당들은사유교회로서매매되고상속되기까지했다. 평신도주교와평신도수도원장이흔했으며정식교육을받지않은자들이귀족들에의해성직에임명됨으로써성직자의의무에대한무관심, 무지, 탐욕, 향락심, 직위매매와방종이판을쳤다. 이와같이여러민족들이교차되는혼란과제도화된봉건제후, 난립한왕국의세력다툼속에싸움이그칠날이없었다. 이런와중에황제권의뒷받침을받지못한교황권은타락한로마귀족계급의이해관계속에빠져들어권력의노리개가됐고권력투쟁에뛰어든군주들은교황의권위를이용하기위해자기에게유리한교황을세우는데혈안이됐다. 마침내귀족들은교황좌의선거와관리에까지개입하기시작해온갖부정을저질렀다. 자기네가족이나아들을앉히기도했으며자기편에불리한교황들은암살하는사례도빈번히일어났다. 9세기와 10세기의 200년사이에 50명이넘는교황이나온것이나 884년에서 904년사이의교황이 11명이나되었던것은이러한사정을잘보여주는것이다. 그나마다행스러운것은이같은극심한혼란의틈바구니속에서도덕적으로결여되고패륜적행위를저지른교황들이적지않았음에도불구하고교황으로서그릇된교리나도덕을가르친일은없었다는것이다. 정치적으로나교회적으로암울했던이런혼란상은동프랑크에서오토대제가출현하여제국의안정을이루어내고언제나그러했던것처럼교회내의자정능력곧각종개혁운동들이일어남으로써진정되기시작했다. 게르만족의대이동과서로마제국의몰락속에서도자신의역할을훌륭히수행해냈던교회가카롤링거왕조의몰락과함께겪은이시대의혼란상에서는자신의정체성을잃어버리고갈피를잡지못한것은교회본연의자세를견지하지못한탓이다. 지나친권력과의밀착으로인한복음정신의왜소, 순교정신이아직면면히살아있던 5세기와달리세속화해버린대중들의신심, 잃어버린복음선포등당시의모습은이스라엘백성들이하느님으로부터벌받기직전과비슷한상황속에있었다. 이는이후교회의혼란상을극복한것이가난과극기로세속에저항한수도원개혁운동에서부터비롯되었다는데서도알수있다. [39] 카롤링거왕조의멸망과교회의혼란 92
93 [40] 오토 1 세와신성로마제국 :28 <== 오토 3 세의무덤 아헨대성당내에있는오토 3세의무덤. 신성로마제국의상징인독수리상앞에잠들어있는오토 3세는오토 1세의손자로 3살에왕위에올라고대로마제국의부흥을꿈꾸었다. 황제가국가와교회모두통치 프로테스탄트개혁의출발지였던비텐베르그를거쳐온탓인지신성로마제국의심장부인아헨을들렀을때 8월의무더위에도불구하고주체할수없는오한에떨었다. 제국의통일과안정을위해교회를이용하고강력한세속권력을바탕으로성직까지마음대로임명하고파면했던제국의역사가이미 600년뒤비텐베르그의성난함성을예고하고있었던것은아니었던가하는역사의회한이밀려온탓인지모른다. 동프랑크왕국의발전프랑크왕국은루드비히 1세이후삼분되어독일, 프랑스, 이탈리아로발전했다. 오늘날프랑스로발전한서프랑크는카롤링거왕조이후위그카페왕조가들어서수백년간치세했으나독일지역의동프랑크는카롤링거정부가바이킹과헝가리의마자르족침입을막아내지못하자작센을위시한여러지역에서독자적인지도자를추대해연합부족국가형태를이루었다. 이결과작센, 프랑켄, 로렌느, 쉬바벤, 바이에른등다섯곳에서독립적인지도자가등장했다. 그러나마자르족의위협이강했기에동맹관계가절대적으로필요한상황이었고이를위해한명의왕을선출하도록권유한교회지도자들의설득을받아들여프랑켄부족의콘라트 1세에이어작센의하인리히 1세를왕으로추대했다. 하인리히는부족간의화합을꾀하고마자르족의외침을효과적으로막아내제국의안정적기틀을마련하고자신의아들오토 1세에게왕위를물려주었다. 오토 1세는즉위와함께대내적으로는부족들의반란을물리치고대외적으로는마자르와슬라브족의침입을막아내는어려운문제들을해결했다. 수차례의전쟁을거쳐각부족들의반란을진압한오토 1세는왕권의확립을위해바이에른은동생에게, 슈바벤은장남에게, 로트링겐은사위에게맡기는등가족들에게각지역을맡겼으나이들이연합해자신에게반기를드는아픈경험을겪었다. 가까스로사태를진압한오토 1세는이때의경험으로국왕의지배력을강화하기위해교회를이용하기에이른다. 귀족들로부터교회재산을침탈당해경제적으로피폐해있던교회의지도자들이귀족들의발호를막기위한권력의중앙집권화에목말라하던차에이들을왕권에대한지지자로만들어왕권을강화하려한것이다. 이에오토 1세는교회에의식적으로토지를늘려주고주교들에게제후로서의온갖특권을부여함과동시에완전한충성과지지를요구했다. 이로써성직자에의한중세봉건교회의기원을만들었다. 오토의머리속에는주교와신부들은독신이므로왕권에반기를들수있는족벌세력형성의위험이없고상속또한이루어지지않으므로이들의사후에영토를회수할수있다는계산이깔려있었다. 이렇게교회를왕권유지의한축으로생각한오토는주교와수도원장등교회의고위성직자를직접임명했다. 이로서수도자나사제는왕의 [40] 오토 1 세와신성로마제국 93
94 관리가되었고교구나수도원은왕실소유의기관으로전락했다. 독일제국의최고관직으로는대재상이있었는데독일대재상에는마인츠의대주교가, 이탈리아의대재상에는쾰른대주교가, 부르쿤트의대재상에는트리에르의대주교가취임하는것이관례일정도였다. 오토는여기서그치지않고로마황제가될야심을드러냈다. 이미 936년아헨에서의즉위식에서의식적으로자신을카알대제의카롤링거왕조의전통과결부시킨오토는이탈리아지방을다스리던카롤링거왕조의로타르 2세가죽고난후일어난내분을이용해 951년이탈리아로원정해파비아에서스스로랑고바르드의왕에올랐다. 더넓은영토를가지게된오토는아가피토 2세교황에게로마황제로서의대관을요구했으나거절당했고황제의세력이로마에까지미치는것을반대하는귀족들도반대했다. 그리고때마침독일에서부족들의반란이일어나고헝가리도침입해오자독일로돌아갔다. 그러나교황역사상가장형편없었던요한 12세가로마귀족베렌가르의위협에도움을요청하자오토 1세는다시이탈리아원정을감행해베렌가르를패퇴시키고 962년드디어요한 12세로부터황제로대관됐다. 이로써신성로마제국이탄생한것이다. 신성로마제국의정식명칭은 ' 독일민족의신성로마제국 ' 이지만오토 1세시절에는단순히제국으로만불렸다. 아들오토 2세에이르러로마제국의부활이라는개념을명확하게하기위해로마가추가됐으며이후교회의독립을위한교황들과의다툼이끊이지않자 12세기프리드리히 1세에이르러독일제국이고대로마전통의보전자인그리스도교와일체라는뜻에서 ' 신성 ' 이라는이름이덧붙여졌다. 15세기에이르러서는제국이이탈리아에대한지배권을잃자신성로마제국의영역이독일에국한되므로 ' 독일민족의 ' 라는한정사가붙게된것이다. 오토의교회정책오토는황제로대관되자마자로마의통치자는자신이라는것과교황도황제에게충성서약을하지않고는교황이될수없다고천명하고교황도직접임명하고파면하기도했다. 이처럼오토 1세의교회정책은대주교, 주교, 수도원장등고위성직자에게영토를봉토로주고여러가지특권과보호를부여함과동시에이들을국내통치상의중요한지위에둠으로써교회와제국을하나로묶는한편최고통수권자를황제로하는신성정치체제였다. 황제는교황을통해주어지는것이아니라직접신의은총과제후의선거를통해서결정된다고주장했고 ' 거룩한교회 ' 의개념에 ' 신성한제국 ' 의개념을대치시킨것이다. 이정책은후임황제들이계승하여혼란스럽던교황청의개혁을도와교황권의권위확립에공헌하기도했으나황제를비롯한속인들의성직자서임권을전제로하고있다는점에서불가피하게교회와의투쟁을안고있었다. 카알이교회정신에투철한이들을주교로선택하고정치적도구로이용하지않은반면오토와그후계자들은이해관계에맞는이들을성직에세움으로서성직과성사까지돈으로사고파는등초대교회의박해보다더한폐해를교회에끼치게된것이다. [40] 오토 1 세와신성로마제국 94
95 [41] 클뤼니수도원의개혁운동 :15 <== 파괴된클뤼니수도원프랑스동부에있었던클뤼니수도원은 18세기말부터 19세기에걸쳐위그노및프랑스혁명폭도들에의해거의파괴되고현재는일부벽과기둥, 주춧돌만남아있다. 폐단에맞서엄격한수덕생활 영주제로재편되는중세사회의복잡한발전과정은그리스도교에중요한영향을미쳤다. 9세기후반에서 10세기에걸쳐왕이나세력가들은자신의세력유지수단으로성직자들에게충성을요구하며그대가로봉토를사여했다. 또한당시교육과학문은성직자들의전유물이다시피했으며귀족출신들이성직에대거참여했다. 이처럼높은출신성분과교육수준, 막대한부를지닌고위성직자들은일찍부터국가로부터정치적특권을얻었다. 세금이면제됐고, 치외법권이허용됐으며재판권까지행사하게됐다. 뿐만아니라시장, 화폐제조권, 관세의권리같은경제권마저갖게돼주교들과수도원장들은완전히제후화됐다. 이렇게교회가봉건화되어가는과정속에서중세의종교생활은그질이떨어졌다. 주교나수도원장이제후를겸직하는상황이교회의종 교적, 선교적, 문화적사업을쉽게이행하게하는잇점도있었지만교회의세속화를가속화시키는어두운면이더많았다. 과도한궁정과국가직무로인해서사목적직무를멀리하게되고제후로서싸움터에도나가야했다. 교회직위가정치적으로영향력이클수록왕과영주들은주교와수도원장임명에결정적인영향을미치고자했으며교회법적선출대신사사로운임명을공공연히했다. 몇몇영주들은평신도를주교나수도원장에임명했고무자격자, 심지어소년을임명하기도했다. 수도원장으로임명된평신도가처자식을거느리고수도원안으로들어올정도였으니그폐해는말로이루다할수없었다. 봉건제도아래에서성직자의규율과도덕은해이해지고신앙생활수준은크게떨어졌으며사회에는미신이팽배해졌다. 이런가운데교회개혁운동이일어났다. 10 세기부터 13 세기에이르기까지가톨릭교회는내부적으로자기쇄신을위한노력을기울였으며유능하고개혁적인교황들이나와교회의 위신과권위를높였다. 이와같은쇄신운동은교회의자주성회복으로이어졌지만그과정이순탄한것만은아니었다. 교황은성직서임권을둘러싸고신성로마황제와분쟁을겪어야했고이단과이교와의싸움을해야했다. 2세기동안의십자군운동이그대표적인예이다. 10세기말과 11세기초의교회쇄신운동은산만하고비조직적이었으나 11세기초부터는교회개혁이틀을갖추고 13세기에이르러마침내교황권은우위를확보하게됐고교회는스콜라신학, 고딕건축등중세문화의중심이됐다. 교회의개혁에가장앞장선것은수도원이었다. 수도원은세상과격리된채기도와명상에전념하던수도사들의공동체였으므로정치적세력관계에연루돼있던주교나교구성직자들과달리비교적교회본연의역할에충실할수있었다. 수도자와수도원의자각에서기인한이교회쇄신운동은종교적윤리적생활의모든영역으로파급되었는데그중에서가장중요한것이클뤼니수도원의개혁운동이다. [41] 클뤼니수도원의개혁운동 95
96 클뤼니수도원의개혁의성공비결은수도원이세속군주나제후의세력으로부터독립할수있었던데있었다. 클뤼니수도원은아퀴타니아의빌헬름공작이 910년부르군드클뤼니에세운것이다. 9세기교회의쇠퇴가수도원이유력인사들에예속된탓이라는자각을가진빌헬름은자신이설립한수도원에대한일체의권리를포기함으로써세속이나성직권력으로부터의자유를보장했다. 클뤼니수도원의설립승인장에는첫째, 봉건적토지를소유하지않고토지를포함한모든재산을신자들의자유로운희사로하고봉건적의무를지지않을것이며둘째, 수도원장의선거권은수도사가가지며셋째, 교황에직속하고고위성직자의간섭을받지않을것이며넷째, 태만과나태를추방하고필사와노동과공동예배에보다많은시간을할당할것등이명시돼있어강렬한개혁의지를엿볼수있다. 이로써클뤼니수도원의책임자는회원들이선출했으며교황이외의어떤세력자들로부터간섭을받지않았다. 비록왕이라해도수도원을해산시킬수없었으며수도원의토지는봉토가아니었으므로몰수할수없었다. 바깥세상의방해를받지않게된클뤼니의수도사들은베네딕도규칙서를엄수하며침묵가운데엄격한수덕생활을영위했다. 기도를통한다른수도원들과의형제적단결, 전례를통한그리스도교회와의강한공동체적유대는중세유럽그리스도교생활의심화를이끌어냈다. 교회의본질적인힘인영적생명력을통해교회의쇄신을내부로부터촉진시킨클뤼니수도원은훌륭한수도원장들로인해더욱강력한개혁의힘을발휘했다. 10세기에서 11세기에걸쳐성베르노, 성오도, 성아이마르, 성마졸로, 성오딜로, 가경자베드로등탁월한성인원장들은클뤼니수도원의발전을이끌었다. 그결과성오딜로원장시절 (994~1048년) 에는클뤼니수도원에속한수도원이 2000개가넘었다고한다. 클뤼니수도원의경건함은프랑스, 부르고뉴,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으로보급됐고교회생활뿐아니라중세사회전분야에깊은영향을미쳤다. 클뤼니수도원은당시서구의종교적심장이었다. 클뤼니수도원의중요성은이후교황직과결합하여성직매매와사제의결혼등교회의폐단과투쟁하는데있어촉매가되었다는점에서더욱그빛을발한다. 뛰어난기도생활과수행생활로간단히요약할수있는클뤼니수도원의개혁운동이성공할수있었던것은클뤼니수도회가쇄신을염두에두면서교회의본질적인것을성찰한후그것에로돌아가려했기때문이다. 그것은하느님의거룩하심을사람들에게전하는것이었다. 덧붙여클뤼니의개혁이짧은시간에성공할수있었던것은봉건제도속에서고단한삶을영위하고있던모든이들이교회로부터진정으로원하는것, 기도와경건한삶에대한목마름이그만큼컸다는반증이기도하다. 현대의생활이복잡해진만큼교회가해야할일도엄청나게많아졌지만진정으로필요한것, 신자들이목말라하는것이무엇인가하는질문에대한대답을옛날의지혜에서찾아볼수있다. [41] 클뤼니수도원의개혁운동 96
97 [42] 그레고리오개혁과서임권논쟁 :18 <== 카놋사의성 이성문앞에서하인리히 4 세황제는그레고리오 7 세교황에게자신의주교서임에대해 용서를구했다. 평신도의성직임명금지선포 1077년 1월 28일, 이탈리아북부카놋사의성문앞. 놀라운광경이펼쳐지고있었다. 독일의하인리히 4세황제가화려한황제복대신참회복을입고 3일째맨발로눈밭에서있었다. 성직자서임과관련해자신을파문한교황그레고리오 7세에게용서를구하며파문을철회해줄것을요청하고있었던것이다. ' 카놋사의굴욕 ' 으로기억되고있는이사건은 11~12세기성직서임권을둘러싼교황권과세속권력의투쟁을상징적으로보여주는일대사건이었다. 황제들과제후들이자신의영향력확보를위해주교와수도원장들을임명하는이른바 ' 평신도에의한성직서임 ' 은 2중의큰폐단을가져왔다. 첫째는성직의매매였고둘째는독신생활에대한규율의문란이다. 교회는이런폐단에맞서개혁교황들을중심으로세속권력에서교회를구출하기위해악전고투를거듭했다. 따라서이싸움은표면적으로는성직서임권리가누구에게있느냐하는것이었지만문제의본질은그리스도교의독립에관한것이었고나아가중세그리스도교문명의주도권을둘러싼투쟁이었다. 이러한교회개혁의불을당긴것은카롤링거왕조의멸망이후 180여년에이르는교황권의쇠퇴기에종지부를찍는레오 9세교황이었다. 레오 9세는즉위한 1049년 4월로마에서교회회의를소집하여성직매매를한주교를파문하고성직매매로신부가된이들에게도 40일간의참회를요구해 12세기교황권의전성시대를여는단초를제공했다. 이어 1056년하인리히 3세가죽고후임으로네살의어린하인리히 4세가등극하자성직서임권문제가본격적으로가시화되기시작했다. 니콜라오 2세는교황권의독립을위해 1059년라테란교회회의에서교황선거권을추기경만으로제한하는교령을반포하고교황선거의안전한실시를위해이탈리아남부지방을점령하고있던노르만족과동맹을맺었다. 이로써교황선거에대한속권의개입을막고교황청은교회개혁의전제조건인독립권을회복했다. 1073년알렉산데르 2세교황이선종하자그레고리오 6세부터 7대에걸쳐교황을보좌하며교회개혁파의거두로떠오른힐데브란트가만장일치로교황에추대되어그레고리오 7세란이름으로교황이됐다. 이때독일의하인리히 4세는성인으로성장해있었다. 교황권과황제권의투쟁에서대표주자격인두사람의격돌은밀라노주교좌를둘러싼일련의사태에서비롯됐다. 알렉산데르 2세때부터밀라노지역에서주교문제로자주폭동이일어나자하인리히 4세가주교를일방적으로파면시키고교황에의해성직매매죄로이미고소당한고드프리를임명했다. 알렉산데르 2세교황은이를인정하지않고밀라노시민단체가선출한오토를합법적인주교로인정했지만자신의선종으로사태를마무리짓지못한상태였다. 그레고리오 7세는교황이되면서성직매매와성직자의결혼을금지시키는등교회정화를시도했으나교황을따르는주교들이사제들로부터돌팔매질을당하는등반대에봉착했다. 여기서그레고리오 7세는폐단자체보다는폐단의근원이되는평신도의서임권자체를뿌리채뽑아내고자했다. [42] 그레고리오개혁과서임권논쟁 97
98 교황은하인리히 4세에게밀라노주교임명권에대해간여치말것을당부하는한편 1075년 2월로마에서종교회의를개최해평신도에의한성직서임을금지하는법령을선포하며 27개항목의 ' 교황훈령 ' 을선포했다. 그레고리오개혁의기본지침서가된이훈령은 ' 교회는하느님에의해설립되었고, 교황은전체교회의수장으로서주교를임명하거나해임하고전임시킬수있으며, 교황은자기가원하는사람을성직자로서품할수있다. 교황의결정은어느누구에의해서도취소될수없으며, 교회는어떠한오류도범할수없다 ' 로요약된다. 교황의수위권과무류성을강조하면서황제권에대한교황권의우위성을주장한교황의개혁조치는오토 1세이래지탱해온국왕의권력자체를근본적으로뒤흔드는것과같았다. 하인리히 4세는때마침독일북부의작센지방에서일어난반란으로수긍하는듯한태도를보였으나그해여름반란을진압한후자기가임명한밀라노주교가합법적이라고주장하며 1076년 1월보름스에서제국회의를개최하여그레고리오 7세를파면했다. 이에그레고리오 7세는그해 2월하인리히 4세를파문하고황제권의행사를금지시켰다. 아울러제국의신하들에게황제에대한충성선언과복종의무를해제하고황제를지지하던주교들을파문또는성직수행금지로처벌했다. 황제에대한전대미문의이조처는미사와성찬례에참석하지못하면구원받을수없다고생각하던독일제국에큰충격을주었다. 한편으로황제에게시달리던제후들은황제제거의명분을얻었다. 제후들은 1076년 10월마인즈의트리부르에서회의를열고황제가교황으로부터사면을받지못하면황제를퇴위시키고새로운왕을선출할것을결의해 1077년 2월아욱스부르그에서교황의참석하에회의를열기로했다. 황제파가급속히붕괴되자하인리히 4세는교황과제후들의동맹을막기위해눈덮힌알프스를넘어아욱스부르그회의에참석하려고로마를떠나카놋사에머무르고있던교황을찾아갔다. 3일간의참회끝에교황은황제를사면해줌으로써서구그리스도교세계의주도권이황제에게서교황으로넘어갔다. 한편하인리히를반대해그를제거하려했던제후들은교황의사면에반대해대립황제를세워황제와제후들간의전쟁이발발했다. 여기서다시실질적패권을회복한하인리히는카놋사의치욕을잊지않고교황에게복수를결행해 1080년교황을다시폐위시키는동시에 1081년로마로쳐들어가 1084년함락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는로마를탈출하여 1085년사망할때까지남부이탈리아에서자신의연합세력이던노르만족의보호를받으며살다 " 나는정의를사랑하고불의를미워하였기에유배지에서죽는다 " 는말을남기고선종했다. 그레고리오의개혁은실패한듯보였으나그의용감하고도고귀한희생정신은후세의모범이되어교황의수위권을강화시키고수도회의개혁을이끌어냈으며성직자의생활을쇄신시키는동시에세속권력으로부터교회의자유를확립해 12세기교황권의절정기를맞이하게했다. [42] 그레고리오개혁과서임권논쟁 98
99 [43] 보름스정교조약 :05 <== 보름스대성당. 11 세기에서 12 세기사이에건립된이성당은마인츠, 슈파 이어대성당과함께오토왕조의 3 대왕실성당중하나이다. 교회, 주교선출서임권확보 독일라인강을끼고있는포도주거래의중심지보름스는독일내가장오래된도시중하나이다. 부르군트제국의수도였으나 5세기훈족에의해파괴되었다가클로비스 1세에의해재건된유서깊은곳으로하인리히 4세와적발왕프리드리히, 프리드리히 2세등이결혼한독일제국의중심도시였다. 이곳에서 1122년성직서임권논쟁의결말을짓는보름스정교조약이이루어졌다. 그레고리오 7세이후교황권과황제권의대립은정치적으로나교회내부적으로상당한어려움을가중시켰다. 그레고리오 7세교황의선종이후독일은깊은당파싸움에빠져들어수많은내전에휩싸였고마침내하인리히 4세는 1105년자신의친아들이일으킨반란으로축출된후아들과의전쟁을준비하다 1106년에사망했다. 교회또한개혁파인그레고리우스파가한층강화되었으나로마의대부분이황제의보호를받는대립교황클레멘스 3세를지지하는등어려운상황이계속됐다. 그레고리우스선종 11개월후에야정통교황인빅토르 3세가선출될정도였다. 이러한악화된상황속에서일찍선종한빅토르 3세의뒤를이어클뤼니수도원장인오스티아의오도추기경이 1088년교황으로선출돼우르바노 2세가됐다. 우르바노는그레고리오개혁에철저한인물이었으나대립교황클레멘스 3세의추종자들이지배세력을형성하고있어로마에상주하지도못했다. 이런재위초기의정치적종교적상황때문에우르바노는신중한온건정책으로개혁을시도했다. 우르바노는 1089년멜피에서교회회의를소집하여성직매매와평신도의성직서임권에대한금지령을확인하면서도교회의승인없이황제에의해서임되었더라도성직매매의경우가아니라면교황관면으로서품을인정했다. 그러나하인리히 4세의세력이약화되고 1093년로마에상주하게되면서교황의위치가견고해지자우르바노 2세는보다강경한개혁정책을실시하기시작해 1095년피아첸차에서교회회의를열어클레멘스 3세와그의추종주교및그들이집전한모든서품을무효로선언했다. 또한그해 11월에는클레르몽교회회의에서평신도의성직서임은물론성직자의세속군주에대한충성서약도금지시켰다. 이리하여교황청의개혁방향은대립교황으로인한교황청분규와서임권투쟁으로집중되었으나우르바노 2세가 1099년 8월에선종한데이어 9월에클레멘스 3세가사망함으로써평신도의서임권문제만이남게됐다. 이즈음영국에서는 1100년에헨리 1세가등극했다. 헨리 1세는자신의왕위를교황청으로부터승인받기위해전왕월리엄 2세와의서임권논쟁으로로마에피신해있던캔터베리의안셀모대주교를불러들였으나안셀모대주교가교회의결정을지적하며봉신으로서국왕에대한충성서약을거부했다. 헨리 1세는안셀모대주교를파스칼 2세교황에게보내관면을요청했으나거절당하자안셀모대주교의재입국을불허했다. 이에교황은국왕이서임한영국성직자들을파문하는사태가일어났다. 이파문은국왕과대주교의화해를불러와결국 1107년런던에서영주와주교들이모인회의에서국왕은주교와수도원장의선거에간섭하지않는대신교황청은주교가축성되기전에국왕에게충성서약을수행하는것을양보했다. 이때이루어진합의가보름스정교조약의기초가되었으나충성서약양보는후에영국교회가국교회의특성을지니게하는계기가됐다. [43] 보름스정교조약 99
100 보름스정교조약과영향독일의하인리히 5세는그레고리우스개혁파들의적지않은협력을얻어아버지하인리히 4세를몰아내고황제가됐다. 하인리히 5세는재위초기자신의지위가불안할때는교황청의개혁조치들에순응하는듯했으나지위유지에대한확신을느끼는순간부터황제로서의서임권을주장했다. 따라서교회와의싸움이계속됐다. 이소모적인논쟁은 1119년에갈리스도 2세교황이선출된후해결의실마리를보이기시작했다. 오랫동안계속된논쟁에지쳐있는이들에의해조정의목소리가피할수없을만큼높아지자교황이스트라스부르그로특사를보내황제와잠정적합의를보았으나합의문작성에실패했고이후 1121년황제가제후들에게교황청과의평화협정을시작하도록하고교황도 3명의추기경을독일로보내해결을시도하였다. 이에 1122년 9월 23일드디어보름스에서평신도의서임권에관한오랜논쟁의종지부를찍는정교조약이체결됐다. ' 갈리스도조약 ' 이라고도불리는보름스정교조약은황제는성직서임권을포기하고교회법에의한주교와수도원장의선출과자유로운축성을보장하는대신교황은황제가주교선출장소에입회하여의견이통일되지못할때에주교를지명할수있도록했으며황제로부터세속재산과속권을부여받은주교는황제에대한봉사임무를갖게했다. 이로써교회는주교선출의자유와교회의서임을보장받는대신황제는주교에게세속적인직책을수여할권리를인정받았다. 결국보름스정교조약은주교에게주교로서의영적인지위와영주로서의세속적인지위등 2개의지위를동시에부여하는것을인정하였다. 이정교조약은독일에서는밤베르그제국의회에서인준을받았고, 교회에서는라테라노공의회에서추인됨으로써평신도성직서임권논쟁이종식됐다. 논쟁이종식됐지만주교나대수도원장은원칙상교회와세속군주모두에게인정을받아야하는결과를초래해국가와교회사이의문제에대한보이지않는대립이프랑스혁명에이르기까지계속됐다. 또한교회는이러한서임권투쟁을거치면서교황권이계속강화돼교황의주도하에십자군원정이조직되기도하고교황청은문서행정재무행정교회법의정비를통해정교한정부조직의형태로발전했다. 아울러 12세기이후로마법과교회법을이수한율사출신의교황들이계속선출됨으로써교황청을행정통치의중심으로하고교황령을영토로하는교황군주국이건설되어나갔다. 그러나인노센트 3세교황이후정치적사안에너무깊이너무광범위하게관여함으로써교회는본연의자세를견지하지못하고억압적기구로변모하기도했다. [43] 보름스정교조약 100
101 [44] 동방대이교 :06 <== 성소피아대성당 훔베르토추기경이파문교서를놓은성소피아대성당내부. 사진뒤편가운데가파문교서를놓았던중앙제대자리다 년동 서교회완전결별 하느님께서보시고판단하실지어다 (Videat Deus et judicet) 성직서임권논쟁으로교회개혁이시작될즈음교회는또하나의아픈상처를입었다. 그리스계중심으로발전해온동방교회와라틴계중심으로발전해온서방교회가 1054년완전히결별하게된것이다. 위의말은양교회의화해를위해레오 9세교황의특사로파견된훔베르트추기경이 1054년 7월 16일콘스탄티노플소피아대성당제대위에콘스탄티노플의첼룰라리우스총대주교등의파문교서를올려놓고난후외친말이다. 나흘후첼룰라리우스총대주교도교황사절을파문함으로써동서방교회의대분열이시작됐다. 갈등의시작 395년테오도시우스황제의선종이후동로마 ( 비잔틴 ) 와서로마 ( 라틴 ) 제국으로갈라져성장해온두교회의골은 5세기부터깊어졌다. 이는정치적인동시에문화적이고교의적인문제로인한것이었다. 정치적으로동방에서는황제교황주의사상에입각해황제가콘스탄티노플의총대주교를직접임명하고파면시키기도할만큼교회정책에관여하는것을황권의본질이라고생각했다. 반면서방에서는 476년게르만민족으로서로마제국이멸망하고제국복구과정에서교황권이황제권에비견될만큼성장해비잔틴황제와맞섰다. 교황권의성장과정에서로마와프랑크왕국의동맹, 800년카알대제의황제대관은로마제국의합법적계승자를자처하는동로마인들의격분을샀고교황령의성립으로인한동로마제국영토의상실은두교회간의갈등을감정적으로몰고갔다. 문화적차이는더욱더심각했다. 우선두교회는서로를이해하지못했다. 그리스의찬란한문화를계승한동방교회에있어서방인들은거칠고감정적인야만인들이었고라틴세계에있어동방은타락하고나약한분열주의자였다. 서방에서는 비잔틴 이란말이경멸의대명사가될정도였다. 전례와교의에서도두교회는서로갈등을빚고있었다. 동방에서는전례자체가강조된반면서방에서는교의가중시됐다. 또한동방에서는서방교회가성찬례때누룩이들지않은빵을사용하는것과토요일에금식하는것, 성직자가수염을기르지않는것, 니체아콘스탄티노플신경에 와성자에게서 (filioque) 를추가한것등을비난했다. 서방에서는동방교회성직자들이독신을지키지않는것등을문제삼았다. 또한 726년레오 3세황제의성화상공경금지조치로일어난논쟁은두교회의골을더욱깊게만들었다. 이어 포시우스분규 가일어났다. 856년쿠데타로섭정을하던테오도라황후가물러가고미카엘 3세가친정을시작했으나황제의큰아버지인바르다스가전권을행사했다. 858년주님공현축일에콘스탄티노플의이냐시오총대주교가바르다스가부도덕한생활을한다는이유로영성체를거부하자미카엘 3세는이냐시오를추방하고평신도였던포시우스를총대주교로임명했다. 이로인해 863년로마교회회의는포시우 [44] 동방대이교 101
102 스를파면하고이냐시오의복귀를명령했으나황제는이를거부하고 867년콘스탄티노플교회회의에서니콜라오교황을파문했다. 이로써동서방교회의분열이사실화되는듯보였다. 그러나그해 9월미카엘 3세가살해되고바실리오 1세가즉위해로마와의관계를회복함으로써일단락됐다. 그러나교회의제도와법률, 전례와신학, 언어와국민성의차이로인한격차는너무커완전한일치를이루지는못했다. 동서방교회에있어또하나의갈등요소는로마교회의수위권에관한것이었다. 그리스도교가로마제국의국교가되면서알렉산드리아나안티오키아교회는로마교회의으뜸으로인정하면서각지역에서재치권을행사하고있었다. 그러나콘스탄티누스가수도를콘스탄티노플로옮기고난후수도교구의위상이문제가됐고 381년제1차콘스탄티노플공의회에서콘스탄티노플의주교는예우상로마주교다음가는권리를갖는다고결정해로마, 콘스탄티노플, 안티오키아, 예루살렘순으로총대주교좌를공인했다. 이로써동방교회는교황을으뜸으로하는총대주교구체제로운영되었으나 7세기에이르러이슬람세력이비잔틴제국의다른총대주교의관할지역을정복하자콘스탄티노플총대주교구만남아로마교회와대등한위치에놓인것처럼보여졌다. 1054년사건이처럼양교회의오해와반목이깊어진상황에서일어난 1054년의대이교도사실은신앙의일치를이루려는화해의손짓에서시작됐다. 당시콘스탄티노플의총대주교였던첼룰라리우스는콘스탄티노플을로마교회와같은대접을받기위해교황의수위권을인정하지않고각종전례와교의상의차이를들어서방교회를비판했고레오 9세는이에강력히항의하며로마교회의절대적우위를강조했다. 이리하여동서교회가다시한번분규에휩싸일즈음노르만인들이비잔틴제국의영토였던남부이탈리아를침략했다. 노르만족들의침입에위협을느낀교황과황제는서로동맹을맺고공동대처하려했다. 그러기위해서는신앙상의화해가먼저이루어져야가능한일이었다. 콘스탄티누스 9세황제는총대주교에게화해를종용하고교황도원만한해결을위해훔베르트추기경과스테파노 9세교황이된프리드리히아말피의베드로대주교를특사로파견했다. 그러나불행히도양교회의두사람은이임무에적합한인물들이아니었다. 훔베르트추기경은성직매매타파와같은교회개혁의열렬한지지자로서완고했고무엇보다그리스문화를잘알지못했다. 미카엘첼룰라리우스총대주교또한완고한사람으로자신의동방교회에대한영향력을염려하여로마교회와의관계를경원시하던인물이었다. 사절이파견된사이노르만인들이비잔틴군대에의해패퇴하고정치적안정을되찾자황제는이제이문제에별관심을가지지않았다. 그러자첼룰라리우스는다시강경한태도로회귀하여교리와전례문제등을비판했고교황사절은이러한태도에격분했다. 이에교황사절들은 1054년 7월 16일파문교서를성소피아대성당제대위에놓고 하느님께서보고판단하실지어다 라고외친후로마로가버렸고 7월 20일총대주교는교황과사절들을파문했다. 이이후양교회는아직도일치를이루지못하고있다. [44] 동방대이교 102
103 [45] 십자군운동 :08 <== 십자군전쟁의원인이된예루살렘의거룩한무덤성전안에있는그리스도의무덤. 성지예루살렘을탈환하라 성도예루살렘. 그리스도교최고의성지인이곳은일년내내순례객들이끊이지않는다. 그중에서도순례객들이가장많이찾는곳은그리스도의거룩한무덤성전. 그러나순례의시각을떠나여행자의눈으로보면이곳은생각만큼그리엄숙하고평화스럽지못한곳이다. 성지의소유권과관할권을둘러싸고수많은분쟁이오고갔으며지금도가톨릭, 그리스정교회, 아르메니아정교회, 시리아정교회, 콥트교회, 에디오피아정교회등 6개종파가하나의성전을갈기갈기찢어소유하고있다. 신앙을둘러싼모든문제들을상징해주는듯하여기분이여간씁쓸한것이아니다. 이무덤성전을중심으로한성지탈환의대의명분속에교회역사상가장큰종교간의충돌이일어났으니그것이바로십자군전쟁이다. 배경과동기 11세기당시서유럽은클뤼니와그레고리오 7세개혁등에의해수도원문화가확산되었고종교적열성이고양된상태였으며새로운공동체의식이생겨났다. 그리스도교정신은사회전반에걸친기본토대였다. 따라서그리스도교신앙을위협하는요소는전체사회구조를위협하는위험이었다. 경제적으로는상업의발달등으로봉건지배체제가해체되고자치도시의독립이진행되는시기로무역세계의확대가당면과제였다. 그럼에도불구하고하층민과농민들의생활수준은열악하여생활수준이나사회신분의향상을바라는욕구나새로운세계에대한동경심이날로점증되어갔다. 십자군전쟁의또다른중요한배경은기사계급의동요였다. 끊이지않던제후들간의세력다툼이 11세기이후사회의안정과함께소멸되었으며교회도게르만족의이동으로교회안에유입된호전성을순화시키기위해 하느님의평화 (Pax Dei) 와 하느님의휴전 (Tregua Dei) 이란제도를만들어많은전투행위를금지시켰다. 하느님의평화는교회수도원성직자수도자농민상인들의주택과가축을해쳐서는안된다는것으로전쟁시비전투원의생명을보호해야한다는사상이여기서생겼다. 또한하느님의휴전은그리스도의수난에서부활까지를상징하는수요일부터월요일아침까지, 대축일과그전날등에전투행위를금지시킨것이다. 이두제도를어기면주교들은그나라의모든성사집행을금하였다. 이렇게되자기사들은전투정신을발휘할기회가없었고신분마저위태로워졌다. 서유럽과동로마제국, 이슬람으로삼분되어있던국제정세또한셀주크투르크족 ( 터어키 ) 의발흥으로균형이깨지고동로마제국이교황을비롯한서유럽사회에구원을요청하게됐다. 이러한시대적상황속에서예루살렘의거룩한무덤성당이 1009년카이로출신의칼리프엘하킴에의해산산조각나버렸고터어키가비잔틴을공격해 1071년지금의터어키남부만지케르트에서비잔틴황제를패퇴시킨후예루살렘을포함한소아시아지역을완전히정복했다. 637 [45] 십자군운동 103
104 년부터팔레스티나지역은이슬람의세력아래들어가있었지만성지순례와그지역그리스도인들에게큰어려움은없었다. 하지만셀주크투르크족이점령한이후부터는성지순례가어려워졌고심한박해를받았다. 성지참배순례는속죄행위로받아들여졌고그리스도께서죽으시고부활하신예루살렘이최고의순례지였던당시신자들에게예루살렘순례를하지못한다는것은엄청난충격이었다. 특히예수님의거룩한무덤을참배하는것은신자들의평생소원이기도했다. 이러한상황에서동로마제국의원정을요청받은서유럽이군사를일으키게된것이다. 십자군이라는말은전쟁참가자들이갈때에는가슴이나어깨, 돌아올때에는등에십자표시를한것에서비롯됐지만 13세기이후에야십자군이라불렸고그이전에는 예루살렘여행 혹은 거룩한무덤참배 라고불렸다. 십자군은비록이후에정치적경제적문제로변질되기는했지만순수한종교적열정에서시작된무장순례였던셈이다. 경과와결과 1095년동로마의알렉시우스 1세가도움을요청했을때서유럽프랑스의필립 1세와독일의하인리히 4세는파문상태였다. 따라서십자군전쟁은교황의주도로이뤄질수밖에없었다. 당시우르바노 2세교황은새롭게고양된그리스도교공동체의식으로동로마제국을도움으로써동서방교회의재결합을이루고이교도들의손에서성지를되찾음으로써그리스도교정신으로여러민족들을일치시킬기회로여겼다. 뿐만아니라점령지가정복자의영토가되듯교황통치권의영역을확대해가려고했다. 우르바노 2세는 1095년 11월프랑스의클레르몽교회회의를개최해성지탈환운동을전개할것을선언했다. 교황의열변으로촉발된성지탈환의신념은종교사회경제적요인들과맞물려하나의열병처럼유럽전역에퍼져나갔다. 교회는원정기간동안참가자의가족과재산을보호해주는대사를허락했다. 이리하여 11세기말부터 13세기까지근 200여년동안 8차례에걸쳐원정이이루어졌다. 농민십자군에이어기사들과귀족들로이뤄진제1차십자군이 1099년예루살렘을탈환하고예루살렘왕국을세우기도했으나대부분실패로끝났다. 영국의사자왕리차드와프랑스의필립 2세가주도한 3차십자군도그리스도인들의예루살렘순례를보장받는정도로그치고말았다. 십자군원정이거듭될수록그순수성도잃어버리게되는데 4차원정에서는베네치아상인들에게놀아나성지회복이아니라오히려콘스탄티노플을점령해라틴제국을세움으로써동서교회의분열을더욱심화시키고회복할수없게만들기도했다. 이처럼십자군운동은원정이거듭될수록신앙의순수한열정이퇴색되고변질된채엄청난희생에도불구하고군사적으로는실패로끝나고말았다. 교황의주도로이뤄진십자군은초기에는교황권의신장을가져왔지만궁극적으로십자군이실패함으로써교황권이쇠퇴의길로들어서는동시에유럽의종교적열정도식었다. 또한영주들이십자군원정에나선후영지관리를소홀히하게되고경제적으로쇠퇴하자봉건제도가무너지고왕권이절대화하는한편공동체의식이강화돼민족의식내지는국민의식이싹트기시작함으로써서유럽사회가근대로넘어가는계기가마련됐다. 또한동방과이슬람문화와의접촉은학문을증진시켜스콜라학의발전을가져왔다. 중세의특성을가장뚜렷하게드러낸역사적인대사건인십자군운동은복음선포는그수단도복음적이어야한다는것을단적으로보여준다. [45] 십자군운동 104
105 [46] 12 세기의청빈운동 :04 <== 프랑스알비시 카타리파활동의중심지였던프랑스랑그도크지방알비시전경. 가 운데주교좌성당이위압적인모습으로서있다. 영적목마름자구책에서시작 프랑스남부알비시를찾은것은어스름한저녁무렵이었다. 십자군운동이후열병처럼일어난청빈운동들의대명사격인카타리파의중심지를찾아온길이었다. 시내초입부터시야를사로잡은것은언덕위에자리한주교좌대성당이었다. 종탑높이 78m 건물높이 40m로 800년의세월을넘어지금도알비에서가장높은건물인성체칠리아주교좌성당의첫인상은길게늘어진그림자와함께어우러져위압적인풍모를뿜어내고있었다. 마치도시의군주처럼보였다. 주변의지세와도전혀어울리지않고창문마저지상에서 20m 높이에좁고길게나있어철옹성같은인상을풍기는성당. 뛰어난예술적감각을지닌프랑스에서어떻게이런건축물이만들어질수있었을까. 의구심이들지않을수없었다. 문화의가치는역사를곱했을때제대로평가된다고했던가. 해답은역시역사속에있었다. 알비주교좌성당의주춧돌이놓인것은 1289년 8월 15일. 카타리이단에맞서알비십자군이조직되어피비린내나는 20년간의살육전쟁이끝난지 60년뒤였지만여전히이단의위험이남아있었던시절이었다. 그리고건축을시작한사람은알비의주교요영주였으며프랑스종교재판소의부의장이었던카스타넷의베르나르도였다. 그는성당의위용을통해카타리이단에직면한정통신앙을수호하고그리스도교신앙의장엄함과하느님의위용을보여주고싶었던것이다. 문닫을시간이었지만멀리동양에서온순례자를위해특별히시간을허락해준성당측의배려로내부에들어가보니이러한생각은더욱일 치했다. 무뚝뚝한겉모습과달리장엄하면서도화려한내부의조각과그림들은한마디로정통교리서자체였다. 12 세기신자들에게무슨일 이일어났던걸까. 발단과특징 그레고리오개혁은여러면에서소기의성과를거두었다. 종교적열정은넘쳐났고교회내에서평신도의자각이일어나세속화된성직자의지도에순순히따르지않았다. 여기에더욱불을붙인것은십자군운동이었다. 예루살렘성지에서의가난한삶에대한체험은사람들에게복음서에나타난가난한그리스도를본받자는정신이넘쳐났다. 이리하여평신도들은직접그리스도와사도들의생활을알기위해성서를읽기시작했다. 또한십자군을통한동방문화와의접촉은사상적자유와발전을불러왔다. 오랜시간지속된개혁의과도한긴장상태와평신도사이에고조된복음적삶에대한열정에비해이에관심을가지지않은제도교회에대한불만은또다른개혁의목소리, 새로운신심운동을가져오게했다. 12세기에일종의붐을이룬이러한새로운요구는도미니코회나프란치스코회처럼대탁발수도회의탄생을가져오는긍정적인면으로발전하기도했지만이단적이고반교회적사상과결부되어이단화하기도했 [46] 12 세기의청빈운동 105
106 다. 결국 12세기민중적이단의출현은교회제도의개혁과번성에도불구하고교회내부에뚜렷한결핍과결함이있었음을입증해주고있다. 이전까지의이단이신학과교리에관련된새로운주장이었던데반해주로성직자들의실천내용을비판대상으로반성직자주의의공통점을보인다는것이이를말해준다. 세속화된성직자와수도자들은그들의직분을도외시했고더이상주민들이필요한영적지적목마름을해소시켜주지못했다. 한마디로 12세기의청빈운동은성직자수도자에게서영적목마름을채우지못한신자들이직접복음서에기록된그리스도의생활에로돌아가려는운동이었다. 발두스와카타리가난과적극적설교, 참회의실천, 자선적행동으로성격지워지는 12세기청빈운동의대표적인것이발두스파와카타리파이다. 발두스이단은부유한상인이었던발두스가 1173년경자신의모든재산을나눠주고청빈과속죄에대해설교하며자국어로된성서를읽기시작함으로써시작됐다. 그들은스스로를 리옹의가난한사람들 이라고불렀다. 그러나리옹의주교가그들이평신도이며라틴어성서를이용하지않는다고그들의설교를금지하자발두스는 1179년제3차라테란공의회에참석하여교회인준을받고자했다. 그러나교황알렉산델 3세가청빈서원만인정하고성직자를초청하지않는한설교를할수없다고하자이에불복해계속설교를하자 1184년이단으로규정돼파문에처해졌다. 이에발두스파는보편적사제직만을인정하면서스스로모든것을포기하고완전한청빈생활을하는자만이그리스도를전할권리가있다며점차교회로부터분리이탈했다. 그들은랑그도크와프로방스지방및북이탈리아지방으로흩어져또다른개혁세력들과만나연합해오늘날까지잔존하고있다. 12세기의청빈운동들이대부분그리스도교적기초위에서파생된데반해카타리파는비그리스도교적이고마니교적이원론적뿌리에서발생했다. 이들은프랑스알비를중심으로활동했으므로알비파 (Albigenses) 라고도불린다. 상인들과귀향하는십자군에의해전해진마니교적사상이기초를이루고있다. 이들에따르면세상은악한신에의해창조돼지배받고있는데신약의선한신은사람들을물질세계로부터해방시키고자천사중의하나인그리스도를 순수한사람 ( 카타리 ) 으로파견해천국에들어가기위한방법을가르친다는것이다. 따라서구원받기위해서는철저한금욕이필요하다는것이다. 그들에게있어물질세계는악한것이었으므로그리스도의강생을부정했고결혼을거부하는등극단적인이단사상을주장했다. 그들은철저한금욕생활을하는자신들을완전한그리스도인이라부르며부유하고세속적권력을탐하는가톨릭교회를사탄의회당, 가난한백성을돌보지않는성직자들을위선자로몰아붙이며성사를거부했다. 이러한사상은카타리파교역자들의철저한금욕청빈생활의모범과함께고단한삶을영위하며부유한교회에대한반감을가지고있던많은이들로부터폭발적인호응을받아급속히퍼져나갔다. 이에교회는 10여년간꾸준히재개종운동을펼쳤으나실패하고결국 1208년이들을무력으로진압하기위한알비십자군이결성되어 20년간피비린내나는전쟁을치렀다. 민중이단의이러한위험은결국종교재판이라불리는이단심문제도를출현시키게된다. [46] 12 세기의청빈운동 106
107 [47] 대탁발수도회의탄생 :07 <== 무덤위대성당아씨시의성프란치스코수도원대성당. 이수도원은성인의무덤위에건립된것으로성당과부속건물이아씨시의절반을차지하고있다. 철저한청빈순명으로헌신 세속권력의부당한간섭에맞서싸워온교회는이투쟁의과정에서우위를점하게되면서보다부유해지고더강력해졌다. 그러나교권의독립을이룩한교회는과거권력에휘둘린아픈경험을되풀이하지않기위해기존체제와재산관리에몰두함으로써스스로권력화세속화하는자기모순에빠지기도했다. 이에대한반동으로생겨난것이청빈운동으로일컬어지는 12세기의새로운종교운동이었다. 이러한새로운종교운동들은고유단체로결성돼그리스도교를반대하는종파나새로운수도회로발전하기도했다. 교회의책임자들은새로생겨나는수도회의수가너무많아서정통신앙의유지에골머리를싸매야했다. 그래서 1215 년제 4 차라테란공의 회는새로운수도회를더이상설립할수없도록결정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 13 세기초프란치스코회와도미니코회라는대탁발수도회가 창립된다. 이는엄격한두수도회의수덕적경향을반증하는것이며이들의삶이시대적요구에일치하고있음에대한보증이었다. 종교재판이라고불리는이단심문제도도입이정통신앙유지를위한부정적반응이었다면, 복음적청빈에의한탁발수도회의인정은긍정적 인대답이었다. 특징과영향 탁발수도회는종래의수도회와는몇가지점에서확연히구분된다. 첫째는수도자개인뿐아니라수도원자체도엄격한가난으로의무지워졌다. 둘째는설교등을위해서순회했으므로수도자가일정한수도원에속했던정주의의무가사라지고수도원을자유롭게왕래했다. 셋째는이단자들의개종과신자들에게복음정신을가르치기위해돌아다녔으므로지난날의수도회와는달리도시속에서, 세속안에서활동했다. 넷째이들은자신들의목표를위해형제들의단결을중요시했으므로총장을우두머리로한강력한중앙집권제형태를취했다. 탁발수도회는당시화두처럼대두된 복음적가난 의생활이부와세속적권력의정점에서있던당시교회안에서도실현할수있음을보여주는것이었다. 교회에대한철저한순명정신이탁발수도회의정신이었다. 탁발수도회는교회안에서사목에헌신했고이단과투쟁했으며이를위해교회학문영역에서도훌륭한공헌을했다. 그러나이후성장을거듭한탁발수도회는교황으로부터받은수많은특전과주교재치권에서의면제 (Exemtio), 강력해진수도회의사목적관여등은본당성직자와자주충돌을빚기도했다. 프란치스코와도미니코 [47] 대탁발수도회의탄생 107
108 중세에생긴탁발수도회는프란치스코회와도미니코회를위시해가르멜회와아우구스티노은수사회등이있고이중앞의두수도회를 2 대 탁발수도회라고한다. 프란치스코의초기삶은이단으로빠진발두스의그것과닮아있다. 부유한상인의아들로태어나귀족이될수있는기사가되기위해전쟁터에나섰고시련을통한회개의과정을거쳐나환우들의불쌍한삶속에계신그리스도를만남으로써철저히그리스도를따르고자했다. 성직자없이평화의복음을선포했고성직자와교회의판단에자신의삶을맡기지도않았다. 그러나그는교회의내적삶에봉사하는것이자신의과업이란것을알아들었다. 유언에 내가해야할일은복음을따라살아가는일이었고그것을알려주신분은주님이셨습니다. 나는이것을단순하게기록했고기록한것을교황님께서인준해주셨습니다 라고밝힘으로써교도권의권위를존중했고분열이일어나는것을피했다. 프란치스코는어떤목표를설정하고추구한것이아니라단순히그리스도의삶을따르고자했을뿐이었고이과정에서같은길을가고자하는형제들이생겨났다. 구체적인계획이나회칙이없었다. 성인의인격자체가공동체를형성하는힘이었다. 형제들이불어나자프란치스코는 1209년경자신들이하는일을인준받고자했다. 교황인노첸시오 3세는프란치스코가내민초기회칙을인간의힘으로지킬수없다고하여승인을주저하다그들의청빈생활과설교를허락했다. 복음적청빈으로프란치스코가추구하고자한것은평화였다. 십자군전쟁때에도직접이집트술탄을찾아가평화를심으려했다. 이러한성인의노력은적대세력인이슬람에도인정되어현지예루살렘성지의가톨릭측소유를대부분프란치스코회에서관리하고있다. 평화를추구하는성인의정신은이단과의싸움에서도논쟁보다는삶을통해보여주고자했다. 그리스도의강생을부정하는카타리파의이단에대해그리스도께서참으로강생하셨음을보여주기위해 1223 년성탄절에구유를만들어전시 했다. 물질세계거부에대해서는찬미의노래인태양의찬가를지었다. 이렇게복음적청빈생활로평화를추구한프란치스코의삶에대한 보증으로하느님은 1224 년성인에게그리스도의오상을새겨주셨다. 도미니코는스페인칼렐루에가에서신심깊은귀족가문에서태어났다. 어머니가 1828년복자로시복됐고성인의두형제도사제였으며삼촌은주교좌성당의주임신부였다. 또한성인이태어난카스틸리엔지역은이슬람의침입이있었던곳으로 100년전부터이들을몰아내는작업을성공적으로수행해나가는신앙의활력이넘치던곳이었다. 이러한분위기속에서자란성인은교회의내적쇄신과외적재건에큰관심을가지게됐다. 그는교계제도에충실한사람이었다. 24세에서품된도미니코는 33살에오스마주교좌성당의참사회원으로주교인디에고와함께외교사절로프랑스에갔다가랑그도크지방에서알비파와싸우고있는시토회원들을만나게된다. 그는여기서수도자들이항상알비파에지는이유를발견했다. 알비파의교역자들은엄격한금욕생활을하며청빈한삶을사는데비해시토회원들은그들의공식책무에따르는온갖혜택을누리고있었던것이다. 청빈의삶이가장효과적인도구임을깨달았다. 청빈한삶을영위하며해박한신학지식을바탕으로이단자들에게설교했다. 성인은이단자들 과토론을하면서신앙상의여러폐단들이교리지식의결핍에서온것임을깨닫고설교와종교교육을절감했다. 이에툴루즈주교의후원을 받아새로운설교수도회를설립했다. [47] 대탁발수도회의탄생 108
109 [48] 대학의시작과스콜라학의전성 :45 <== 소르본대학 소르본대학전경. 소르봉신부가수업료와서적구입, 숙식등에어 려움을겪는학생들을위해세운기숙사가토대가됐다. 자주적학문활동의욕구로탄생 세계에서가장오래된대학중하나인파리의소르본대학에이르면소르본광장주변의노천카페에서많은학생들이차한잔을시켜놓고레포트등을작성하기위해고민하고있는모습들을흔히대하게된다. 소르본대학은 1257년프랑스왕루이 9세의궁정신부였던로베르드소르봉 (Robert de Sorbon) 이형편이어려운대학생들을위해세운일종의기숙사 (collegium) 이다. 이것이후에파리대학의신학부문학부이학부를지칭하는대학이름이된것이다. 대학의시작 12세기이전유럽의모든교육은수도원학교와주교들이성직자의소양교육을위해주교좌성당인근에설립한교회학교에서이루어졌다. 여기서이뤄지는학문활동은주로성서와고대문헌을읽고주석하는것으로종교적인목적에국한되어있었다. 교과과정도그리스이래의 7 학과인문법, 수사, 변증의 3학과 (trivium) 와수학, 기하, 천문, 음악의 4학과 (quadrivium) 로이뤄져있었다. 이교과과정을로마시대에는시민의실생활에맞게, 중세에는교회의목적에맞게재편성해가르쳤다. 음악은교회음악, 수학은부활절계산을위해가르치는식이었다. 또한주교들은자신의권위를유지시키고신앙을보호하기위해교육내용을제한하며교육면허를가진교사 (magister) 에게만허락했다. 그러나 12세기에들어급속히성장한그리스도교국가의위용과십자군전쟁이후의사회적변화는새로운학문적요구를불러일으켰다. 상업과화폐경제의발달로인한시민계급의부상과십자군전쟁으로동방문화와의접촉은사람들의향학열을불러일으켰다. 또한 600여년간잊혀졌던유스티아누스법전의발견과아리스토텔레스저서의유입, 유클리데스의기하학과아라비아에서도입된아라비아숫자에기초를둔새수학의도입으로크게확장된정신세계를기존의교육제도로는수용할수없었다. 교사들도주교나수도회총장들의편협한감독에서벗어나고자했다. 여기서자주적학문활동을위한교수와학생들의조합 (Universitas magisti orum et scholarium) 이생겨났는데이것이대학의시작이다. 이들이국가의승인을얻고교황으로부터특전을받음으로써독립되어대학으로성장했는데노트르담성당의부속학교가파리대학으로성장한것처럼주로유명한교회학교들이대학으로변모했다. 대학의자치권중가장두드러진것은소정의과정을마친학생에게학위를수여한것이었다. 이로서학위를가진사람은신귀족으로대우를받게됐고학문은교권과제권에이은제3세력으로간주될정도였다. [48] 대학의시작과스콜라학의전성 109
110 중세의대학이새로운학문적활동을요구하는시대적요청에의해시작되었지만여전히교회적인성격이강했다. 교육의최고파수병인교 황의동의가있어야대학이생길수있었고어디서나가르칠수있는 (Facultas ubique docendi) 권한을줄수있었으며신학이모든교 과목중가장우위에있었으며교수들의대부분은여전히성직자였다. 이러한대학의성장에큰도움이된것이설교를위해종교교육을절감한양대탁발수도회였다. 프란치스코회와도미니코회는이미 1218~1220 년에파리대학에기숙사를건립했으며도미니코회원은 1229 년에프란치스코회는 1231 년에대학에서신학강좌를개설했다. 12~13 세기대학의형성은스콜라학의전성기를열어주었다. 스콜라학 (Scholastica) 이란말은중세여러학교 (scolae) 들에서형성된신학 적철학적학설을말한다. 스콜라학의가치는신앙과이성의조화로신학의과학성을강조하는데있다. 즉하느님의계시와같은신학의소 재들을이성적능력인철학적원리에근거하여체계화시킴으로써객관적인진리에도달하고자한것이다. 스콜라학의발전스콜라학의번창에는여러요인들이있지만대학의설립과프란치스코회나도미니코회같은수도회의학문적활동과더불어특히아리스토텔레스저서들의재발견이스콜라학의전성기를이끈원인이다. 이전까지교부철학중심의중세학문에서아리스토텔레스는보에시우스의번역과주해에의해논리학자로만알려져있었으나그의작품전체가번역돼소개됨으로써새로운학풍이휘몰아쳤다. 아리스토텔레스철학은이성과경험과자연의원리에만근거하고있어범신론적이고반교회적인사상을안고있었지만알베르투스마뉴스와 토마스아퀴나스같은대학자들을거쳐순화된사상은이전플라톤 - 아우구스티노주의중심의학문에서명확하지못하던신앙과이성의종합 을찾아낼수있었다. 아리스토텔레스적실재론은 13 세기의지배적세계관이됐다. 이러한 12 세기이성의강조는규정화된세상에대한해석을거부하는경향이강했다. 따라서직접적으로성서를가르치는것보다신앙생활 을하면서일어나는인간의문제와각종모순같은신학의명제들을가지고설명하는방식이도입됨으로써교의신학을등장시킨것이다. 이해를추구하는신앙 이라는아우구스티노의주장에따라 이성의인증 이란방식을도입한캔터베리의대주교안셀모가교부철학과스콜라학을매개하는위치에있으므로스콜라학의아버지로불리고이방법을체계화한사람으로는엘로이즈와의비극적사랑으로유명한아벨라르도와베드로롬바르두스가꼽힌다. 그리고 은총은자연을파괴하지않고완성한다 (Gratia non tollit naturam, sed perficit) 란명제를내세운불세출의보편적박사인토마스아퀴나스에이르러스콜라학이완성된다. 스콜라학전성기에진보적주장을한사람들은대부분프란치스코회와도미니코회의탁발수도회원들이었고주요활동은파리대학을중심으 로이루어졌다. [48] 대학의시작과스콜라학의전성 110
111 [49] 성토마스아퀴나스 :50 <== 성토마스아퀴나스 성토마스아퀴나스. 귀옆의비둘기는성령의속삭임을표현하고있다. 근대를열어가는사상전개 중세하면우리에게가장떠오르는단어가무엇일까? 아마도 암흑기 란말일것이다. 이런오해는중세시기의모든문화와학문이신중심적, 교회중심적이었던것에대한인 문주의자들의반동에서나온것이다. 그러나과거와단절된새로운사상이란없다. 신중심적세계관에서인간중심적세계관으 로넘어가는근대서구적사상도 200~300 년에걸친총체적인사회변화였다. 이는근대의 뿌리가찬란한중세문명에서기인한다는것을보여주는것이다. 조선이개국후고려의지배적사상이었던불교를버리고유교를새로운지배사상으로 선택한것은자신들의왕조찬탈을위한당연한명분이지만그렇다고고려불상의미려함 과청자의우아함을부인할정당성은어디에도없는것이다. 볼수있으니그가바로보편적이고천사적인교회박사성토마스아퀴나스다. 중세의절정기라할수있는 13 세기는서양다운서양을형성하는시기로이미근대를준 비하고있었다. 그리고이시기의한인물을통해중세를관통하고근대를여는사상을 생애토마스는 1225년경로마와나폴리사이에있는아퀴노마을인근의로카세카성에서태어났다. 형제들가운데막내였던토마스는 5살이되었을때몬테카시노수도원의봉헌자로보내졌다. 열네살이되던 1239년교황영토와황제영토의경계선에위치한몬테카시노수도원이황제의군대에의해점령당하자집으로돌아와나폴리대학에입학하게된다. 여기서토마스는자신의전생애를결정할운명적인두가지, 아리스토텔레스와탁발수도회를만나게된다. 나폴리는시칠리아에속하는지역으로동서방의경계지역이자전투지였다. 따라서국경지역의특성상그리스나아랍등의외래문화가상존해있었다. 여기에나폴리대학은프레드리히 2세에의해세워진순수국립대학으로교황청의영향력에서어느정도비켜나있었으므로교황청의공식적인아리스토텔레스강의금지령을글자그대로따르지않았다. 이런환경아래토마스는아리스토텔레스의자연철학을배우게된다. 또나폴리에는 1231년부터도미니코회가설립되어있었다. 토마스는 19살이되던해도미니코회에입회했다. [49] 성토마스아퀴나스 111
112 토마스가도미니코회를선택한것은진리선포에대한열정때문이었다. 그는신학대전에서 가르친다든가설교하는일은관상이차고넘쳐 서나오는것이다. 그러므로이와같은일은단순한관상보다더우월하다. 따라서갖가지수도회가운데최고의단계를점하는것은가 르치는것과설교하는것을목적으로하는수도회다 (188 문 6 항 ) 라고밝히고있다. 그러나귀족이었던그의가문은토마스가구걸승이된다는것을용납하지못했다. 토마스는가족을피해파리로가는도중형제들에게납치돼아버지의성에감금된다. 1년후풀려난토마스는파리대학으로가알베르토마뉴스의지도아래 1250년까지 5년간공부하고알베르토가쾰른에수도원대학을세우기위해갈때동행해학생들을가르치며한편으로알베르토에게강의를들었다. 1252년아리스토텔레스철학의중요성을간파한알베르토는토마스를파리대학에보내연구할수있도록했다. 토마스는스물일곱의나이로프란치스코회의보나벤투라와함께파리대학교교수가됐다. 이때성서학과롬바르두스의명제집을강의하며명제집을간결히정리하고논증하기위해아리스토텔레스의개념과원리를도입한신학을전개했다 년이탈리아로파견된토마스는같은수도회소속으로희랍문헌들을라틴어로번역하는작업을하던뫼르베케빌헬름을알게된다. 그가 번역해준아리스토텔레스의저서들은그리스어를잘모르던토마스의철학에결정적역할을하게됐다. 이시기에토마스는자신의대표작인 신학대전 을집필하기시작했다. 마흔넷이되던 1269년토마스는다시수도회에의해프란치스코회와의학문적대립이첨예해진파리대학교로가게됐다. 신앙을강조하는극단적인아우구스티노주의와이성을강조하는극단적인아리스토텔레스주의사이에서자신만의노선을추구하던토마스는이시기믿을수없을만큼많은저술을하게되고방대한신학대전 2부도이때씌여진다. 1272년로마로되돌아온토마스는나폴리에수도원대학을설립하라는명을받고나폴리로갔다가 1274년리옹공의회에참석하라는교황의명을받고리옹으로가던중 1274년 3월 7일선종했다. 사상토마스는아리스토텔레스적사고를받아들여구체적인사물에서사고를시작했다. 결국토마스의사상은인간이파악할수있는사물에대한설명이다. 그는눈에보이는경험적사물들에서출발해그존재가무엇인지, 어떻게존재하는지, 그존재의조건이무엇인지를탐구함으로써모든존재사물의근거로서의최고존재곧하느님을탐구하는데온힘을기울였다. 토마스에의하면모든사물곧존재하는모든것은 스스로존재하는존재자체 에참여 (participatio) 하고있기때문에없어지지않고있 는것이다. 철학적인이설명을교회용어로풀면창조가된다. 그리고이창조는신에의해자유로이이뤄지는사건이라는것이다. 이렇게철 학의원리인존재자체에대한탐구를창조론과연결시킴으로써토마스는자신이출발점으로삼은아리스토텔레스의철학을넘어섰다. 또한토마스에의하면창조된모든사물은자신의근원인창조주에게로되돌아가려는근본적인성향을갖고있는데이것이구원이다. 창조가 신에의해자유로이이뤄지는것처럼구원도사물들의마지막선택에따라이뤄질수도있고아닐수도있다. 토마스가쓴명제집주해서에따르면 피조물이그들의제일원천에서생성되어나오는과정은 일종의윤회 와같은것이며여기서모든 사물은태초에그들이출발점으로삼았던바로그곳을목적으로삼아되돌아간다 고했다. 이처럼토마스는사물의세계에서출발해신에게로나아가고자했다. 그래서토마스는인간의행복을 신을직관하는것 이라표현했다. 토마스의이러한사상은자신의삶을통해보여주고있는데그는선종하기얼마전인 1273년 12월 6일미사중신비체험을한이후더이상저술을하지않는다. 토마스는자신의친구요비서였던레지날드에게 내가바라본그것과비교한다면이제껏내가저술한모든것이지푸라기와같다 고대답했다. [49] 성토마스아퀴나스 112
113 [49] 성토마스아퀴나스 113
114 [50] 인노첸시오 3 세와교황의세계지배 :57 <== 인노첸시오 3 세. 13 세기프레스코화. 인노첸시오는교황직을신앙으로통일된서구 세계의지도자로서이해했다 교회가세상의중심에선절정기 유럽의역사도시들을돌아다니다보면도시의상징은항상주교좌대성당이다. 그리고대부분의대성당들이 1100년대에서 1500년대사이에지어진것들이다. 이무렵에무려 500 개가넘는대성당과무수한수도원들이건축되었다. 또한대성당들은문맹자들을가르치기위한눈으로보는교리서역할을성당자체가했기때문에하나같이화려한조각과스테인드글라스등으로꾸며져있으며크고웅장하다. 지금의경제력이나기술로도지어지기힘든대성당들이이처럼건축될수있었던것은당시의문화와사회의중심이교회였다는것을보여주는것이다. 즉서구세계에대한그리스도교의지배적상황을말없이보여주고있는셈인데그절정의시기가중세의가장위대한교황중의한명이었던인노첸시오 3세재위시절이었다. 그리스도의대리자교황그레고리오 7세개혁은표면상으로는교회독립을위한것이었지만그내면에는중세그리스도교문명의주도권을둘러싼투쟁이었다. 그레고리오 7세이후교황들은황제들과주도권다툼을벌이면서자신들의주장을뒷받침해줄통치기구를발달시켜법률과행정제도가크게발달했다. 이러한법률적발전과세속정부를앞지른관료적교회행정기구의발전은교황의지도력을대외적으로크게신장시켰다. 12 세기중반이후로는교황청업무를처리하는데에법률적지식의중요성이커지다보니교황들은대부분교회법전문가출신이었다. 이는그레고리오개혁기의교황들이대부분수도원출신들이었던것과대조를이룬다. 교회의일사불란함과달리서구주도권을놓고교황과다투던독일의하인리히 6세가 1197년에 2살짜리아들을남겨놓고사망하자황위계승을둘러싼싸움이일어났다. 그리고몇달후 1198년 2월 22일 90대의노쇠한첼레스티노 3세교황의뒤를이어 37세의젊고활동적인로타르 (Lothar von Segni) 추기경이인노첸시오 3세의이름으로교황이됐다. 독일의장기간에걸친왕위투쟁은그만큼교황권의신장을가져다주었는데여기에는인노첸시오 3세의뛰어난개인역량도한몫했다. 인노첸시오는볼로냐와파리대학에서수학한뛰어난신학자요법률가였다. 이미추기경시절부터세속권력에대한교황권의우위를주장해온인노첸시오는착좌연설에서 그리스도의대리자 (Vicarius Christi) 를자처하며교황에의한이상적인세계지배를꿈꾼다. 인노첸시오에있어서구는그리스도교백성들로이뤄진초자연적공동체였으며초국가적공동체였으므로교회의우두머리인교황이자연같은신앙안에서일치된서구국제사회의지도자가되어야한다는것이었다. 그리고세계지도자로서의원동력을 그리스도의대리자 개념에서찾았다. 그리스도께서는사제이자왕이시며교황은지상에서그대리직을맡고있기때문에속권보다우위에있다는것이다. 인노첸시오는황제우위권을주장한콘스탄티노플의알렉시오황제에게답서를보내면서 하느님께서는하늘의창공, 즉보편적교회안에두개의 [50] 인노첸시오 3 세와교황의세계지배 114
115 거대한광채를마련해두셨습니다. 그두광채란교황권과왕권이라는거대한두개의직권입니다. 그러나낮을지배하는태양이밤을관장 하는달보다더위대하고달이태양으로부터그빛을얻듯이교황이왕보다더위대하고왕권은그권위를교황권으로부터얻습니다 라고 밝혔다. 그러나인노첸시오는교황이세속에서무한한권력을갖는다든지속권을교권에포함시키려는시도따위는하지않았다. 그러나그들이 죄 를범할 (ratione peccati) 경우에는언제든지자신이나서서왕들을견책할수있다고확신했다. 교황의세계지배 인노첸시오는자신의이러한이념을실현시키기위해최선을다했다. 먼저그동안독일의호헨슈타우펜왕가의황제들에의해몹시제한되었던로마와교황령에대한교황의통치를위해전력을다했다. 합병이가능한지역은교황령으로합병시켰고교황령전체에대해효율적이고치밀한행정제도를도입했다. 그래서진정한교황령의건설자로불리기도한다. 인노첸시오는같은입장에서독일에서왕위다툼이일어났을때교황은후보자의자격을조사한다음이를승인할권리가있다고주장했고양측이이를받아들임으로써교황수위권의인정을받아냈다. 교황은처음에확장된교황령과시칠리아에대한교황의봉토주권의승인, 성직서임권포기등을약속으로오토 4세를인정하였으나오토가교황으로부터황제의제관을받은후약속을어기고시칠리아에대한지배권을주장하고나서자그를파문했다. 이어인노첸시오 3세는하인리히 6세의아들프레드리히 2세를등용시켰다. 교황의이러한시칠리아정책은교황권을독일제국에속한주교로국한시키지않고보편적지배권을행사하려는일련의노력이었다. 또한영국존왕의반대에도불구하고스테파노랭턴을캔터버리의대주교로임명하고이를거부한왕에게파문과영국내의성무집행정지를통해왕의순명을이끌어내고영국을교황봉토로삼았다. 이밖에도부당하게재혼한프랑스왕에대한파문, 근친결혼한스페인왕에대한파문, 왕위다툼이일어난나라들에대한중재등으로아라곤, 포르투갈, 덴마크, 폴란드, 보헤미아, 헝가리등이교황의주권을시인함으로써국가의왕이그들의국토를교황으로부터봉토로받은셈이됐다. 이처럼교황의영향력이전유럽에미치게됨으로써마치교황이 왕관의분배자 처럼여겨졌다. 인노첸시오는이러한그리스도의대리자로서의사명감은정통신앙을유지하려는노력으로이어졌다. 교황은이교도들의손에서성지를회복 하기위해제 4 차십자군을조직했으며카타리이단으로부터신앙을지키기위해알비십자군을조직하고탁발수도회를승인했다. 또한가장 큰업적중하나인제 4 차라테란공의회를소집해교회를내적으로개혁하고쇄신시켰다. 인노첸시오 3 세에있어세상은하나의위계제도, 곧거룩한질서로이해됐다. 따라서이질서가죄에얽매인사람과죄의이유로교란될때 언제나간섭할권리와의무가있다고생각하고이를실천했다. 그러나이러한권력은남용되고오용될위험이컸고실제로교회가권력의유 혹에서벗어나지못해아픔을겪기도했다. [50] 인노첸시오 3 세와교황의세계지배 115
116 [51] 제 4 차라테란공의회 :59 <== 라테란대성당라테란공의회가개최된로마의라테란대성당. 예수님께서최후의만찬시사용했다고하는식탁이보존되어있어교황의성목요일만찬미사는이곳에서봉헌된다 교회개혁위한 70 조항반포 영원의도시로마순례의백미는역시 4대성당이다. 중세건축예술의극치를보여주고있는이들 4대성당들은로마를순례하는개신교신자들이나가이드들에의해그웅장함과화려함으로인해가톨릭공격의좋은대상이되기도하지만당시신앙의열정과예술로승화된신앙심을볼수있는걸작들이다. 그중에서도콘스탄티누스황제가기증한라테란대성당은 1309년교황이아비뇽으로옮겨갈때까지 1000년간모든교황들의대관식과착좌식이거행된곳이며선종후이곳에묻힘으로써 교황의성당 으로도불린다. 라테란대성당은 324년실베스텔 1세교황에의해구세주그리스도께봉헌되었다가 898년지진으로붕괴된후이를재건한셀지오 3세교황이세례자요한에게봉헌했고 12세기에와서루치오 2세교황이다시사도요한에게봉헌해지금은 성요한대성당 으로불린다. 세계공의회는모두 21차례개최됐는데교리의정립기라할 1회부터 8회까지는동방교회지역에서개최됐고이라테란대성당에서 9회공의회가개최된이후에는모두서방지역에서개최됐다. 라테란공의회는모두다섯차례개최됐는데그중에서도인노첸시오 3세교황이소집한제4차공의회가가장중요하다. 배경과경과제4차라테란공의회는 12차세계공의회로트리엔트공의회이전의중세공의회중가장중요한공의회로 대라테란공의회 혹은 대공의회 로불렸다. 당시교회는성지탈환과교회재일치라는큰포부를안고떠난 4차십자군이만족할만한성과를거두지못한채돌아온상태였고알비파와피오레의요아킴수도원장의이단들이성행한시기였다. 뿐만아니라독일의프레드리히 2세에대한서방의황제로의승인문제, 교황이임명한캔터베리대주교를거부한영국의존왕문제등의정치적문제를안고있었다. 또한교회내부적으로는아직도성직매매가완전히근절되지않았고성직자들의문란한생활도계속된상태였다. 따라서교황은여러그리스도국가에서발생한분쟁들을해결한뒤에일치를도모한후이스라엘성지회복을위한십자군운동을더욱효과적으로추진하여교회전체의개혁을추진하고자하였다. 신앙으로일치된서구사회의지도자로자처한인노첸시오 3세교황은자신의이러한소임을공의회를통해해결하고자한것이다. 교황은스스로공의회소집이유를 교회내의모든결점을제거하고성덕을심으며, 잘못된것을바로잡고윤리를쇄신하며, 이단을제거하고신앙을굳건히하며, 불화를없애고평화를정착시키고압제를없애고자유를신장하며, 모든제후들과신자들이성지를돕게하기위해서공의회를소집한다 고밝혔다. [51] 제 4 차라테란공의회 116
117 인노첸시오 3세교황은 1213년 4월 19일공의회개최를선언하고보다보편적인공의회가되게하기위해동서방의모든주교들과성직자및그리스도교국가의제왕들에게초대장을보냈다. 2년간의준비끝에 1215년 11월 11일 400명이상의주교들을비롯하여각국의사절등 800 여명이참석한가운데라테란대성당에서공의회가개최됐다. 교황의개회사에이어예루살렘총대주교는이스라엘성지의불행한상황을설명하는동시에프랑스남부지방에서일어난알비파이단에대해연설했다. 이두가지문제는공의회의중점논의사항이됐다. 11 월 30 일까지 3 번의회기로나뉘어개최된공의회는처음에공의회를정치적인목적으로이용하려는군주들의갈등으로힘들게진행됐으나 결국 70 조항에이르는공식문헌과 1217 년 6 월 1 일십자군을출발시킨다는십자군에관한교령이발표됐다. 공의회에서결정된개혁규정들은 교회를내적으로쇄신시키는데크게기여했고오랫동안후대관구교회회의에많은영향을주었다. 결의내용 70개조항으로이뤄진공의회공식문헌은교회의개혁과정비라는당시교회의과제에대한범교회적의견의일치를이끌어낸결론이었다. 공의회는그개최배경에서보듯개인의영성보다는교회조직에대한지침의필요성에서개최됐으므로먼저교회조직의생활지침을다루고있다. 해당지역의사목적유익을위해개최되는지역공의회에대한지침을정하는한편수도회는 3년마다정기총회를개최하여수도회내의문제들을점검하고개혁조치들을하도록명했다. 또한지나치게많은수도회의설립으로인한혼란을우려해새로운수도회설립을금하기도했다. 교회조직에대한지침에뒤이어지는것은성직자와수도자들의생활에관한지침이다. 정결에위배되는성직자의교회록을박탈하며술집을 출입하거나향연장에서밤을새는행위나평신도권력자에게한충성서약을금지시켰다. 또한주교의가장중요한직무는설교임을강조하 면서성직자들을지혜롭고열성적으로돌보면서성직자들의잘못을교정하는데열성을다할것을권고했다. 성직자들에의한규범에이어지는것이교회구성원들에대한규정이었다. 모든신자는최소한 1년에한번, 즉매년부활대축일에는반드시고해성사와영성체를해야할의무가규정됐다. 또한혈통을보존하고가문의부와권력을유지하기위해근친결혼이빈번하던시기였으므로혈족간의혼인을금하고혼인에있어서서약의중요성을강조했다. 뿐만아니라재판을공평무사하게처리하도록하기위해 15개조항에걸쳐약자들을보호하고정당한재판을위한규정들을만들었다. 제 4 차라테란공의회는이전의파리교회회의나루앙교회회의등지역교회회의에서논의되었던내용을많이다루었지만이들을성문화하여 반포했다는점에서큰의의를가지고있으며특히혼인법과소송법등교회의법적인측면에서큰공헌을했다. [51] 제 4 차라테란공의회 117
118 [52] 종교재판 - 이단심문제도 :02 <== 이단법정 스페인이단법정에서화형판결을받고형장으로끌려가는이단자들. 지옥불이 삼키는그림이있는고깔모자와죄수이름이적힌삼베가운을걸치고있다 사회질서유지위한시대적산물 2000년 3월 12일교황요한바오로 2세는교회구성원들의지나간역사적과오에대해서공개적으로용서를구하는화해의예식을거행했다. 교황은이러한과오반성을위해 97년부터대희년준비위원회안에역사신학위원회를두고소위종교재판등의문제와관련해연구하도록했고 97년 10월에는종교재판과관련한국제회의가열리기도했다. 종교재판이라는말은라틴어인퀴지시오 (Inquisitio) 의오역이다. 인퀴지시오는찾다, 조사하다, 물어보다라는뜻을지닌인퀴레레 (inquirere) 라는동사의명사형으로조사, 탐문, 심문을뜻한다. 따라서이단에대한조사가원래목적인 이단심문 이제대로된말이지만세속권력과의관계등다양한상황속에서파생된여러부정적측면을부각시키기위해한자권안에서종교재판으로오용된것이다. 시대적배경과원인중세교회는클뤼니개혁과그레고리오 7세의개혁등으로교황의권위와세력이계속성장해마침내세속왕권에우위적이며지배적인세력이됐다. 가톨릭교회는유럽사회의보편적질서의원리가된것이다. 이는당시교회내에서뿐만아니라사회적으로도그리스도교진리를벗어난다른진리란용납될수없었다는사실을말해주는것이다. 사회안정의근간을이루고있는교회의통일을해치는것은곧사회불안을야기하는 공공의적 이었다. 따라서교회의적은국가의적이었다는이해가필요하다. 이런연유로이단색출에는교회가이단자에대한박해를금지시킬정도로국가가더적극적이었다. 그러나 11세기부터 13세기까지교회권력이정점에이르기시작하면서심한동요와혼란이일어난다. 교회의부와권위적자세, 성직수도자들의타락, 십자군전쟁, 자의식이강한시민계급의성장, 새로운사상의대두등은기존제도교회에대한반감과함께새로운신심운동으로나타났다. 이러한청빈운동사상은클뤼니와그레고리오의개혁에영향을받은것으로사도적청빈사상을강조하고직접성서를읽으며실천하려는신심운동이었다. 그러나성서를읽고해석하려는열의는대단했지만체계적으로갖추어진교육제도와지도자없는잘못된탐구로이단적이고반교회적으로빠질위험이농후했다. 이런부작용때문에제3차라테란공의회는개인의성서소유와번역을금지하기도했다. 새로운신심운동이이교적으로흐르면서오랫동안이어져온미신적종교들과민간신앙요소가얽히면서반교회적사상이빈번히속출했다. 11세기부터발생된이러한이단들은점차자신들의세력확장에걸림돌이되는교회에대해반대입장을보이면서거칠어지고반성직, 반제도적으로세력화하면서정치적투쟁을일삼아사회적혼란을조성했다. 이는기존의그리스도교위에성립된국가질서를위협하는, 교회와국 [52] 종교재판 - 이단심문제도 118
119 가의불안요인이됐다. 교회는진리와정통성의수호를위해, 국가는사회질서안정을위해이들을색출하고처벌하지않을수없었다. 그러나당시의범죄자처벌법은 고소에의한처벌제도 로피해자가고소를해야만할수있었으므로이단색출에있어서는어려움이더컸다. 심문제도에의한이단색출은 12~13세기에로마법을연구한결과였다. 로마의기본적인재판제도는고소에의한재판이었으나황제를시해하려는경우는중대한범죄로간주해심문에의한재판절차를사용했다. 이는고소가없어도사법관들이범죄자를찾아내고처벌할수있는정보를수집해혐의자를심문하는제도였다. 국가와교회는황제에대한시해가중대한범죄이듯사회질서를교란하고하느님에대한범죄인이단도반역죄로간주한것이다. 이단심문제도는유죄입증에필요한증거를얻기위한제도였지만객관적인증거가없는한심문관이자의적이고임의적인판결을내리기쉬웠다. 증인이없을경우자백외에는더욱입증하기어려웠다. 따라서이단을조사하되박해를반대하던교회는 1254년인노첸시오 4세때에이르러비극적인고문이도입됐는데고문사용은처음에는엄격했으나이단색출에대한강박관념등으로갈수록무자비해졌으며이윽고이단탄압의결정판이랄수있는마녀사냥이라는씻을수없는과오을불러왔다. 처벌과성립과정이단심문법정은처음부터가혹한처벌이나체형은인정하지않았고보통파문과수도원감금등정신적형벌이주를이루었으나이단운동이만연되자점차강화돼투옥, 재산몰수, 화인 ( 火印 ), 국외추방에이어사형까지시행됐다. 사형이본격화된것은 12세기들면서카타리파의강력한대두때문이었다. 이는교회통일을저해하는수준을넘어유럽사회의정치적사회적기반을뒤흔드는무정부주의적반란의위험요소로작용했기때문이다. 이단심문제도는이단근절을위한노력의여러단계를거쳐성립돼왔는데 1183년루치오 3세교황과적발왕프리드리히황제는이단자에관한협약을맺어이단자들과보호자는파문직후국외추방을선고해야하고세속당국은주교들의지시에따라처벌해야한다고규정했다. 이어인노첸시오 3세교황은교회소송법에이단심문절차를만들어당국은직무상이단자들이고소될때까지기다리지말고먼저찾아야한다고했다. 이때까지도사형은언급되지않았다. 프레드리히 2세는 1220년황제대관식에즈음해이단억압을위해세속군대를사용했고 1224년그레고리오 9세와공동으로이단에관한법령을반포했는데, 여기서세속당국은주교가인도한이단자들을감금하고이들의재산을몰수했으며사형에처함으로써처음으로사형이명문화됐다. 이어 1232년프리드리히 2세황제는이단자색출명령을국가에일임한다는칙령을반포하고색출된사람들을무자비하게화형에처했다. 프레드리히는이단색출을명목으로정적들을제거하는동시에교황을견제하면서유럽사회에대한지배력을확장하려는의도를가지고있었다. 프레드리히의이러한정치적야심과무자비한이단자박해를파악한그레고리오 9세교황은 1233년이단색출과심문을교황청이맡을것을주장하면서이단심문관임무를주로도미니코수도회에일임하면서소위종교재판소라불리는 이단심문을위한특별상설법정 을설치했다. 이이단법정은 1542년바오로 3세에의해이단심문최고기구인 이단심문성성 으로이어졌고 1588년교리성성으로바뀌어졌다가현재는신앙교리성으로변모했다. 이처럼이단심문제도는그시대의역사적정황으로이해할수있는부분도없지않지만역사진행과정안에서집행의지나침으로무고한사람들이상처받고특히고문도입이후로잔인함과비인간적행위로인한교회역사의어두운한단면임은틀림없고변명할수없는과오이다. [52] 종교재판 - 이단심문제도 119
120 [53] 교황권의쇠퇴와교서 우남상탐 :44 <== 노틀담대성당 파리의노틀담대성당. 필립 4 세가보니파시오 8 세교황의공의회소 집에맞서프랑스최초의삼부회의를개최한곳이다. 그리스도교적서구사회해체 성직자투옥. 십일조부과로교황과갈등 왕권강화로교황권의우위성쇠퇴기미 유럽의오래된도시이름을보면하나의공통점을보인다. 독일에서는 000부르그 (-burg) 영국에서는 000버러 (-bourg) 프랑스에서는 000부르 (-bourough) 라는도시이름뒤에붙는접미사다. 이는중세도시들을부르는말로성읍을일컫는말이다. 그리고그도시민들을부르주아라고불렀는데시민이라는뜻으로통용됐다. 상공업을통한도시의부활과발전은엄청난사회적변혁을가져왔다. 도시의발달과함께화폐경제가급성장했는데이는토지를기반으로 한전통적인부의형태를바꾸어놓았다. 따라서귀족은여전히사회적지배력을행사했지만토지를바탕으로한부와사회적지위가불안해 졌다. 귀족들은농업을상업적으로운영하기도했으며기업가로변신하는이들도생겨났다. 또한부의격차가벌어짐으로써전통적인귀족의기반이무너져귀족들의계층화가이뤄지기시작했다. 여기에당시강력한중앙집권화로세 력을확장하고있던군주들은도시의발달로강력한사회세력으로떠오른시민계급을옹호함으로써귀족들의사회적기능을약화시켰다. 이리하여강력한교황권아래단순한영주권으로격하됐던종래의국가들이상대적으로왕권이강화된중앙집권적군주국가로탈바꿈하게된 다. 이는그리스도교로통일된서구공동체의해체를뜻하는것이었다. 그리고이해체과정은자연교황권과왕권의갈등으로나타났는데그 대표적인것이보니파시오 8 세교황과프랑스의필립 4 세와의다툼이었다. 교황권과독일황제의다툼속에서황제권은크게약화됐다. 특히슈타우펜왕가의콘라드 4세사망후합스브르크왕가가들어서기까지황제가선출되지못하던시기 (1254~1273 Great Interregnum) 동안큰영향력을발휘하지못했다. 그러나교황권도이시기를유용하게보내지못했다. 교황에의한세계지배이념에심취한나머지시대적징표를읽지못하고세속적목적을위해파문과같은영적인무기들을남용했다. 반면황제권의약화는서방군주국가들에게는크게유리하게작용했다. 왕들은당시일어나고있던인문주의적사상과맞물려교회에대한거부감을가지고있던지식세력과함께점차중앙집권적통치기구들을설치하면서군주국가로의입지를굳혔다. 시대적상황이이러했으므로어느때보다교회는보다종교적인교황을필요로했지만유감스럽게도완고하고매우정치적인보니파시오 8 세 가 1294 년교황이됐다. [53] 교황권의쇠퇴와교서 우남상탐 120
121 교황과필립 4세의갈등은두시기로나눠지는데첫갈등은성직자들에대한과세문제였다. 영국과의백년전쟁으로많은전비가필요했던필립은제4차라테란공의회가교황의동의없이성직자에게과세를할수없도록규정하고있는데도불구하고십일조를부과했다. 이에교황은 1296년교서 재속사제에고함 을발표하고이에응하는군주들을파문한다고위협했다. 이에필립은로마와의모든교역을중단시켰고법학자들을동원해왕권의절대권을지지하게만들었다. 여기에새로성장한시민계급들도왕권을지지했다. 프랑스와의무역에많은수입을의존하던교황청은곤궁에빠졌을뿐아니라내부적으로도반대자들에게어려움을당하고있었다. 교황은결국한발물러서 1297년왕의필요시과세를인정했으며화해의표시로필립의할아버지인루이 9세를시성했다. 그리고교황은 1300년교회역사상처음으로성년을반포하여수많은사람들이로마를순례하게함으로써실추된권위를어느정도회복하는듯했다. 그러나 1301년필립이교황권의절대적지지자였던파미어 (parmiers) 의주교베르나르도를반역으로고발해감옥에가둠으로써새로운갈등이야기된다. 이같은필립의왕권강화와교회내정간섭에교황은왕을파문으로위협하면서로마에서프랑스교회를위한공의회를소집했다. 이를방관하면권좌가흔들릴것으로생각한필립은주교들에게공의회참석을금지시키고 1302년 4월파리의노틀담대성당에서프랑스역사상최초의삼부회의를소집했다. 귀족, 성직자, 시민계급으로이뤄진회의에서필립은프랑스왕의독립과세속사에있어서의왕의종주권을선언했다. 공의회를통해목적을이루지못한교황은 1302년 11월교서 거룩한하나의교회 ( 우남상탐 Unam sanctam) 을발표한다. 보니파시오 8세는이교서를통해교회의단일성을강조하며세속적권력은영적인것에종속되므로그리스도교국가의단일체안에서최고의판결권은교황에게있다고주장했다. 또한교회와국가가동시에우월하고독립적이라는관념은마니교적이단이라면서거부했다. 세속적인권력까지포함하는절대권을주장하면서신정정치를꿈꾸었던것이다. 이교서를접한필립은교황도부도덕할경우공의회에서심판받아야한다면서교황에게전임교황권찬탈, 성직매매, 이단, 독성죄등의죄목을부과해 1303년아나니의교황궁에서왕을파문할준비를하고있던교황을체포했다. 갖은수모끝에교황은시민들에의해구출되었지만큰충격을이기지못하고한달뒤선종하고말았다. 그의죽음은곧교황권의끝없는추락을의미했다. 이어진교황의아비뇽유폐, 대립교황으로인한서구대이교, 공의회우위설, 세속화된교 황의연이은출현등은교황직의보편적이고중세적인우위성의종말을말해준다. 교황권의쇠퇴는당시인문주의사상과결합해새로운정치원리를이끌어낸다. 1313년파리대학의총장이었던파두아의마르실리우스는 평화의수호자 (Defensor Pacis) 라는저서를통해권력의기초를민중에둔민중사상 (Lay spirit) 을주장했다. 그는국가는모든시민들의전체집합이고교회는모든신자들의전체집합으로보았다. 따라서국가안에존재하는교회는국가구조에의해서다스림을받아야한다고주장했다. 교황도사제이며사회의한시민인사제도모든사회법규에구속되어야한다는것이다. 나아가프란치스코와도미니코의청빈사상을그대로받아들인마르실리우스는교회는가난해야하고그러기위해서는국가가교회의모든재산을빼앗아야하며교회가가난해지면권력이없어지고자연국가의지배를받게된다고주장했다. 전체주의사상의시작이었다. [53] 교황권의쇠퇴와교서 우남상탐 121
122 [54] 아비뇽의교황들 :49 <== 아비뇽교황청아비뇽교황들의지나친친프랑스적정책들은영국과독일의불만을샀고마침내영국국교회와독일에서의종교개혁의결과로나타나게된다. 사진은아비뇽의교황청전경. 교황, 70 년간로마를떠나있었다 교황권은약화되고프랑스왕권은강화 교황직의보편성타격 불안위기조성 아비뇽에들어서면가장먼저눈에띄는것은끊어진채남아있는 ' 성베네제다리 ' 다. 성베네제가하느님의계시를받아 1185 년에세웠다고하는이다리는이후론강이범람하여끊어진이후복구되지않 고그대로보존되고있다. 아비뇽의끊어진다리가주는상징성은묘한역사적여운을남겨주었다. 교황청이로마가아닌아비뇽으로옮겨지게된것은이탈리아내교황령의사회정세불안과강력해진프랑스왕권의강요에따른것이었다. 교황령안에서는교황파와반교황파가갈려극심한내분에휩싸여있었다. 특히글레멘스 5 세가선출된이후에는로마의오르시니가문과콜 로나가문의대립투쟁으로내분이더욱심화돼무정부상태에빠져도저히로마에머물처지가못되었다. 프랑스의필립 4세는교황령내의이런상황을이용해교황청내에영향력을더욱높히고자했다. 베네딕도 11세선종이후 1년여의공백끝에 1305년 6월보르도의대주교인고트의베르트랑 (Bertrand de Got) 이글레멘스 5세교황이됐다. 그는로마의불안한정세와함께교황좌와필립 4세와의화해를위해프랑스를떠나려하지않았다. 그해 11월리용에서착좌식을거행한글레멘스 5세는결국 1309년아비뇽에정착했다. 이때부터 1376년까지약 70년간교황들은아비뇽에머물게된다. 교황이로마를떠난것은이때가처음이아니지만이처럼오랫동안이탈리아를떠나있은적은없었다. 사람들은이를유다인들이바빌로니아에 70년간유배되었던것에비유해 교황청의바빌론유배 (Captivititas Babylonica) 라고불렀다. 교황청의아비뇽정착은교황직에대한프랑스의영향력이높아진것을의미했고결과적으로아비뇽의교황들모두프랑스인이선출되고추 기경들도대부분프랑스인들이선임됐다. 이러한일련의사태들은교황직이프랑스왕권에봉사하는기관과같은인상을줌으로써프랑스외 의다른나라와갈등을빚기도했고결과적으로교황직의보편성에큰타격을주었다. 이런것의단적인예가성전기사수도회처리문제였다. 성전기사수도회는예루살렘순례자들을보호하고순례에동행할것을목적으로설립된수도회로서급속한성장을이뤘고왕과귀족들의적극적인후원으로명성과부를쌓았다. 십자군전쟁이끝난후수도회는거점을파리로옮겼는데수도회의자주성과막대한경제적부는왕권강화에큰방해가됐다. 이에필립 4세는이를이단으로몰아재산을몰수하고수도자들을사형에처했다. 글레멘스 5세는왕의강요에의해이들의잔혹한박해를묵인했을뿐아니라비엔공의회를개최해성전기사수도회를정 [54] 아비뇽의교황들 122
123 식으로폐지하고해산시켰다. 이러한왕권에대한굴복은정치적으로국왕의절대독립을가져왔고사회법규적으로는교회도국왕에종속한다는사상을대두시켰다. 이는교황들과독일의루드비히황제와의다툼에서극명하게드러난다. 하인리히 7세사후독일은바이에른의루드비히와오스트리아의프레드리히가황제위를놓고다투었으나투쟁과정에서루드비히가황제가됐다. 그러나교황은프랑스의정치적이해를고려해이를인정하지않고교황의승인이없었으므로무효라며루드비히를인정하지않았다. 이에루드비히는반격을가해교황권자체를공격했다. 독일교회도왕을지지했을뿐아니라월리엄오캄과마르실리우스같은학자들도교황권자체를공격했다. 이어카알 4세때인 1356년황제선출권을가진일곱제후 ( 마인츠, 쾰른, 트리어의 3대주교와라인궁중백, 작센공, 브란덴부르크변경백, 보히미아왕 ) 들에의해황제가선출되던선제후제도를계승하면서교황의승인을받을필요가없다는 ' 금인칙서 '(Golden Bull) 를발표했다. 이금인칙서는교황의보편적우위성의상실을상징하는사건이었다. 아비뇽교황들의지나친친프랑스적정책들은결국프랑스와경쟁관계에있던영국과독일의불만을샀고이들나라에서의반교황적태도는마침내영국국교회와독일에서의종교개혁의결과로나타나게된다. 교황청의아비뇽정착은교회내부적으로도또다른문제를야기시켰다. 우선화려한교황청을건립하고유지하는데엄청난재원을필요로했고이러한재원들을마련하기위해교황들은점차교회내정을중앙집권화했다. 교황들의이러한간섭은주교임명과관련해갈등이증대됐는데각지역에서선출되던주교들을교황이직접임명함으로써주교선출의관습은점차사라지고모든주교들을교황이임명하는법이설립되기시작해오늘날까지이어졌다. 교황에의해임명된모든주교들은교황청의재정을위해첫일년간의수입을내놓아야했다. 주교임명과관련해프랑스의영향력아래있던교황들은자주왕과상의해야했으므로문제가더심각했다. 이외에도빨리움수여에대하여대주교로부터받던지불금, 성직자유산계승의납세, 봉토세등은마치성직매매의인상을주기도했다. 이러한것들은결국교황좌의명예를크게실추시키는것이었다. 따라서스웨덴의성녀비르짓다와시에나의성녀가타리나등은로마귀환을촉구했고몇몇교황들도로마귀환을추진했다. 200대교황복자우르바노 5세는프랑스궁정과일부추기경들의반대를무릅쓰고 1367년 10 월로마에입성했으나안정감을보이던교황령이다시불안해져체류 3년만에다시아비뇽으로돌아왔다. 후임교황인그레고리오 11세는가타리나성녀의권고등에힘입어 1376년아비뇽을떠나이듬해 1월 17일로마로돌아왔다. 이로써로마귀환은실현됐고아비뇽의교황시대는막을내렸다. 그레고리오 11세는마지막프랑스인교황이었다. 아비뇽의교황들중에는교회의내적쇄신과대외선교등에힘을쏟은교황들도있었지만결과적으로이른바 교황의아비뇽유배 는교황 좌의보편적우위성을상실하는결정타가됐고세수확보를위한각종방안들은교회내의불안과위기를조성했다. 이러한결과로교황권의 위신은크게떨어졌고중대한위기를야기시켜결국다음사건인서구대이교의직접적인원인이됐다. [54] 아비뇽의교황들 123
124 [55] 서구대이교 :08 <== 피사의대성당대립교황의문제를해결하기위해피사에서새로운교황을선출했으나오히려교황이세명이되는초유의사태를발생시켰다. 사진은피사의대성당. 종탑으로세워진유명한피사의사탑이보인다. 교회분열로교황이 3 명존재 현교황은몇대일까? 현교황청연감에는현교황을 264대로표기하고있지만비오 12세때까지는비오 12세를 262대로표기했다. 그러면현재는 266대가되어야한다. 이같은혼란은대립교황으로인한것이었다. 역사적인제2차바티칸공의회를소집한요한 23세교황은비오 12세에이어교황에선출되자자신의이름을요한 23세라고명명했다. 이는과거 1410년부터 1415년까지재위한대립교황요한 23세를역사적오류에의한합법적교황이아님을분명히하고자한것이었다. 이처럼대립교황의문제는아주오래도록교회에상처를남겼다. 그중에서도서구대이교시대의교황들은큰문제가됐다. 이중선거와서방교회분열 아비뇽시절을마감하고돌아온그레고리오 11세가귀환 1년만인 1378년선종하자교황선출을위한추기경회의인콘클라베가 73년만에로마에서개최됐다. 그러나회의에참석한추기경 16명중 11명이프랑스인 ( 스페인 1명이탈리아인 4명 ) 이어서로마사람들은또다시프랑스출신의교황이선출돼아비뇽으로돌아가지않을까두려워했다. 당시까지도로마의정치사회적상황이안정적이지않아서그레고리오 11세도선종직전아비뇽으로돌아가려고했을정도였다. 이에로마인들은이탈리아출신의교황선출을요구하며시위를벌였다. 이러한분위기속에서추기경단은서둘러바리 (Bari) 의대주교인프 리냐노 (Batholomeo Prignano) 를교황으로선출했다 년 4 월 18 일착좌하며우르바노 6 세로명명한프리냐노는추기경이아니면서교 황이된마지막사람이었다. 아비뇽교황청시절부터강력한교회개혁의지를지녔던우르바노 6 세는추기경단쇄신을추진하는과정에서독선적이며타협할줄모르는 군주적성향을나타내며과도한수단을사용했다. 그는추기경들에게공개적으로또는개인적으로폭언을퍼부으며추기경들의부도덕과성 직매매사치를비난했고추기경들의아비뇽귀환요구를단호히거절했다. 당시권력지향적이었던추기경들은자신들의기득권상실과교황의과격한언행에대해불만을가졌고급기야 1378년 8월추기경들은교황선거가군중들의위협으로이뤄졌으므로무효라고선언하고교황좌가공석임을밝혔다. 우르바노 6세는추기경들이로마로돌아오지않자 9월 17일 29명의추기경들을새롭게임명하여교황청을재구성했다. 추기경들은결국 1378년 9월나폴리의폰디에서제네바의추기경로베르 (Robert) 를대립교황으로선출했고 10월 31일글레멘스 7세로즉위한그는로마에자리를잡지못하자 1379년 6월아비뇽에교황청을설립했다. 교황의이중선거로교회는두명의교황을갖게됐다. 40년에이르는서구대이교의시작이었다. [55] 서구대이교 124
125 그리스도교는지리적정치적으로완전히둘로갈라졌다. 영국과독일, 헝가리, 네덜란드, 중부이탈리아는로마계교황을프랑스와스페인, 스코틀랜드, 남부이탈리아는아비뇽계교황을지지했다. 성인들마저갈라져시에나의가타리나는로마교황을성꼴레테와빈첸시오페리에는아비뇽교황을지지했다. 이러한분열은교구와본당수도원과가정에까지확대됐다. 각지역교회는두명의주교, 두명의장상과두명의주임신부를갖게됐고신자들은양측추종자로분열됐다. 교황들과그들로부터임명받은성직자들은서로합법성을주장하며상대방을파문하고지지자들을파문했다. 이론적으로는서유럽의모든신자들이파문상태에놓이게됐다. 이러한교회분열은각각의교황들이그들의후계자를내면서더욱골이깊어졌다. 정통교황으로인정되는로마계는우르바노 6 세선종이후 보니파시오 9 세 (1389~1404) 인노첸시오 7 세 (1404~1406) 그레고리오 12 세 (1406~1417) 로이어졌고아비뇽계는글레멘스 7 세에이어베네딕도 13 세 (1394~1417) 가후임교황이됐다. 화해노력과종식 이러한분열의양상속에서교회일치를위한노력은계속되었지만큰성과를거두지못하고있었다. 파리대학교는 1394년이교극복을위해사임, 중재합의, 공의회등의세가지방안을제시했다. 그러나교황들은항상상대방의사임을주장했으므로동반사임과중재를통한방법으로는일치를이룰수없었다. 결국파리대학교는분규해결의방법으로공의회를제시했는데 1409년 3월 25일양측추기경들은피사에서교회회의를열어 6월 5일제15회기에서두교황은하니인성교회를믿는다고하면서도행동은그선언을배반한까닭에이교및이단의으뜸이라고단죄하여해임하고 26일양측합동선거에서만장일치로밀라노의대주교인필라르기 (Pietro Philarghi) 를알렉산델 5세로교황에선출했다. 교회일치를위해공의회교황이선출됐지만두교황이사임을거부하고공의회교황을인정하지않음으로써오히려한교회안에세명의교황이존재하는초유의사태가발생했다. 분규는더욱심해만갔고교회는속수무책이었다. 이때서유럽에서가장강력해졌고그리스도교재일치에관심이높았던독일의시지스문트황제가알렉산델 5세의후계자요한 23세에게압력을가해콘스탄츠에서공의회를개최했다. 이로써교황청의문제가세속군주와공의회로넘어갔다. 공의회는교황이 3 명이있던상황에서정통교황이누구냐하는고민에빠지게됐고결국 3 명의교황을모두퇴진시키고새교황을선출하기 로했다. 이에따라피사계의요한 23 세를 1415 년 5 월 29 일해임시켰고로마계의그레고리오 12 세는 1415 년 7 월자진사임했다. 끝까지사임 을거부한아비뇽계의베네딕도 13 세는 7 월 28 일폐위시키면서 11 월에마르티노 5 세를선출함으로써이교가종식됐다. 이교는종식됐지만교황청분규가공의회와세속군주의개입에의해해결됨으로써교황의권위가크게상처받은것은물론이고이후대두된 공의회우위설과반교황운동은결국 16 세기종교개혁으로까지이어지게된다. [55] 서구대이교 125
126 [56] 콘스탄츠공의회 :41 <== 교황선출한공의회건물 마르티노 5 세교황을선출한공의회건물 ( 왼쪽 ). 그러나콘스탄츠공의회는성마리아대 성당에서개최됐다 교황권에실망공의회우위설대두 단일교황선출로 40 년분열종식 성직자쇄신등개혁조치도내놓아 40년간교회의여정이분열과반목으로점철되어한계에다달았다. 그해결책으로마련된공의회개최지콘스탄츠를찾아갈때는독일지역을취재하며하루에도수백km를달려야하는일정과더위속에서, 그것도혼자라는노독이참을수없을지경에이르렀을때였다. 지친몸과마음을이끌고전날보덴호수 (Bodensee) 에이르러멀리반대편불빛으로만보이는콘스탄츠를바라보며맥주한잔으로노독을달래는동안, 부침을거듭해온교회역사에오랫동안생활의주기를맞춰온탓인지교회가콘스탄츠에서새로운힘을얻었음을생각하자그때까지의노독도사라지는듯했다. 온밤을기대에휩싸여하얗게지새운뒤이른아침배로콘스탄츠에도착했다. 콘스탄츠선착장에이르면가장먼저눈에들어오는것은한손에는교황마르티노 5 세 를, 다른한손에는독일황제지그문트를들고콘스탄츠공의회를상징하고있는임페리아동상과그뒤편의공의회건물이다. 콘스탄츠는 독일지역에서유일하게보편공의회가개최된곳이며독일지역에서유일하게교황이선출된곳이다. 대립교황으로인한교회분열상황을극복하기위해독일황제지그문트가요한 23 세에게공의회개최압력을넣었을때요한 23 세는자기가 합법적인단일교황이될것을기대하며이요구를수용해 1414 년 11 월 5 일콘스탄츠에서공의회를개최했다. 4 년간 45 회기열려 1418년까지 4년간 45회기에걸쳐열린공의회는교회일치문제와함께대립교황등으로교회에실망한개혁가들의이단문제를해결해야하는두가지난제를안고있었다. 그리고이런문제들을다루다보니자연교회내적생활에관한쇄신문제가다루어졌다. 그러나콘스탄츠공의회의가장시급한문제는역시교회의대분열상황을서둘러종식하는것이었다. 그래서 1414년 11월 16일부터시작된제1회기부터 1415년 5월 2일까지의제7회기까지는대립교황문제해결에주력했다. [56] 콘스탄츠공의회 126
127 3명의교황이대립하고있던상황에서주교들이지지하는교황이달랐고주교들은자신이속한국가가지원하는교황에순명하고지지를보내고있었던상황이었다. 결국공의회는파리대학교의명예총장인요한제르송등의영향을받아 3명의교황이모두퇴위해야만교회일치가회복될것으로판단했다. 그리고이탈리아인주교들이월등히많았으므로한쪽으로지지가몰리는것을방지하기위해투표권을주교개인이아니라각나라별로한표씩을주는전무후무한방식을도입했다. 상황이이렇게되자유일한교황이되는것이어려워진요한 23세는자신의악행으로재판받을까두려워공의회도중몰래도망쳤다. 공의회소집자인자신이사라짐으로써공의회가해산되기를바랐던것이다. 그러나지그문트황제는교황없이공의회계속을선언했고요한제르송도교황이공의회를해산시킬권한이없음을논증하는유명한연설을했다. 결국공의회는교회일치를이루고요한후스같은개혁가들의신앙의문제를해결할때까지공의회계속을결의했다. 뿐만아니라이를법적으로뒷받침할법령으로제4회기중인 1415년 4월 6일교령헥상따 (Haec sancta) 를발표했다. 이교령은공의회를성령에의해모인합법적인보편공의회로간주하고권한을그리스도로부터직접받았으므로교황을포함한모든그리스도인들은교회일치와개혁에관한공의회결정에복종해야한다고선언했다. 이교령은결국공의회가교황개인보다진리에가깝고하느님으로부터직접권한을부여받는기구로교황도순종해야한다는당시에대두된 신학의표현이었다. 대립교황으로인한교회분열을해결하기위한유일한수단으로선택된공의회가교황권에대한교회구성원들의회의와 함께공의회우위설을등장시킨것이다. 이결정에의해공의회는계속돼결국요한 23세는체포된뒤재판에회부돼 1415년 5월 29일폐위됐고 7월 4일로마계교황그레고리오 12 세의자진사임과 1417년 7월 28일아비뇽계베네딕토 13세의폐위, 마르티노 5세교황의선출로교회일치를이루어냈다. 교황권에회의를느낀공의회참석자들은새교황을선출한뒤에도교황을공의회에항구적으로예속시키기위해논의를계속했고제39회기에서교령프레구엔스 (Frequens) 를발표했다. 프레구엔스교령은주님의밭을잘경작하기위해서는공의회가자주소집되어야하므로콘스탄츠공의회폐막후 5년뒤와 7년뒤에공의회를개최하도록명시하고그이후엔정기적으로 10년마다공의회를소집하도록교황에게의무를지웠다. 공의회는또한몇사람들의지지에의해교황이옹립되고이로인해교회가상처받는것을염려하며선출권을가진사람들에게올바른교회정 신을갖도록요구하면서이러한분열을막기위한몇가지조치들을취했다. 그중가장중요한것은추기경들에의해선출된교황은반드시 공의회에서추인을받아야한다는것이었다. 또한교황선출에실패했을때에는공의회의규정을따르도록했다. 결국콘스탄츠공의회는교황권위에공의회를두고모든것을주교단의의견으로처리하려는경향을강력하게표현했다. 지금은공의회도 교황의사목권행사의하나로보고있지만당시공의회는이런사실을공문서화해발표했고교회분열에실망한교회구성원들이많은지지를 보였다. 이는분열과반목을일삼고부패한교황권이만들어놓은교회역사의한단면이었다. 공의회는이외에도교회대분열시기가가져온폐해들을극복하기위해각종개혁조치들을내놓는다. 그중에서도교회에내는여러봉헌금문제와성직자쇄신에관한규정을다루어성직자들은자신의사목구외의지역으로옮겨다니지말고복장이나전례에신중을기하며성직자의신분을이용해경제적인부를탐하지말것을강조했다. 또한대립교황으로인해야기된각종폐해에실망해교회의개혁을바라는사람들의주장중문제가된이단들도다루었는데그중에서도회기중단죄돼화형에처해진요한후스가대표적이다. [56] 콘스탄츠공의회 127
128 [57] 위클리프와요한후스 :44 <== 후스하우스 콘스탄츠의후스하우스. 콘스탄츠공의회에참석한기간동안후스가머물렀다는집에그 의기념관이세워져후스의행적과주장을기리고있다. 교회부패하자교계제도거부 성직자특권향유. 백성착취로원성자자 국가교회주의부추겨훗날종교개혁준비 국민들은굶주리고있는데지배계급은엄청난부와특권을누리면서도더큰이권을위해갈라져싸우고그러면서도국민들에게는인내와순종을요구한다면국민들은당연히지배층의지배논리와전통을거부하고항거할것이다. 15세기의교회가그랬다. 교회기강은해이할대로해이했으며서구대이교로지도층은서로반목했으며위로받아야할양떼들을돌보지않았다. 이러한상황은반교회적사상이발생하고퍼져갈온상이됐다. 더욱이근대국가에대한자각이일어나는시기로써주체적의식이높아갔던시기에부패하고분열된교회의모습은각민족들에게더이상보편적인지배논리로받아들여지지못했다. 오히려극복돼야할과거의전통이었다. 그중에서도오스트리아합스부르크왕가의통치아래있으면서로마교황청으로부터광할한땅과세금을거출당하던보헤미아지역이대표 적이었다. 정치사회적배경오늘날의체코지방인보헤미아의왕카렐 1세는 1388년신성로마제국의황제인카알 4세가됐다. 카알 4세는자신의등극을도운아비뇽계교황글레멘스 4세와밀월관계를유지했으므로당연히로마교황청과는대립관계에들어서게됐다. 그러나보헤미아전지역은아직도로마교황청세력내에있었고고위성직자들과지배관료는독일인들이맡고있었다. 따라서로마교황청중심의독일인과보헤미아사이에정치적긴장관계가조성됐다. 그리고수도권과교구사제들은보헤미아토지의절반을소유할정도로엄청난부를가지고있었다. 성직자들은시민의세금을거두어들이고분배하는일에거의모든시간을보내야했고그과정에서오는세속화를피할수없었다. 뿐만아니라당시 4만에불과했던프라하인구중성직수도자는 1200여명에이를정도로많았으며이들은온갖특권을향유하면서착취를거듭해백성들의원성을사고있었다. 이러한상황은보헤미아인들의가슴속에반게르만적반교회적감정을불러일으켰다. 이와중에 1382 년카알 4 세의딸이영국리처드 2 세와결혼해옥스퍼드와프라하의교류가밀접해졌고그결과위클리프의사상이도입되기 시작했다. 이시기에후스의친구인제롬이옥스퍼드에서공부하고돌아오면서위클리프의저작들을들여와후스에게소개했다. 옥스퍼드에서강의를한요한위클리프는 은총에기초한주권 을강조하며교황청을비롯한교계제도를배척하며성서만을신앙의최고 [57] 위클리프와요한후스 128
129 권위로삼았다. 또한속권과재산은교회에유해하며그리스도와사도들의가르침에배치된다고주장했다. 교회는가난하게살아야하며국가는교회의재산을몰수하여빈곤구제에나서야한다고주장하면서특히수도원의재산소유를맹렬히비난했다. 그리고실체변화와성사, 사제독신제등을거부했다. 이러한위클리프사상은당시대두되던국가교회주의를부추켜이후헨리 8세의국가교회 ( 성공회 ) 개척의선도적역할을하게된다. 위클리프사상은성직자들의속된생활과교회의부패에불평이높던보헤미아에서꽃을피우게되는데그중심에요한후스가서있었다. 민족운동과의결합 1372 년지금의체코인보헤미아의후시넥에서태어난요한후스는 1400 년사제품을받고프라하의베들레헴경당에서설교가로활동했다. 또 한 1402 년프라하대학의학장이된그는성서와위클리프저작들을체코어로번역했고성서강독과설교도라틴어가아닌체코어로가르쳤다. 생동감있고위력있는그의설교는대중을매료시켰고정치적민족적이해관계와맞물려보헤미아인들을고무시켰다. 후스의주장은대부분 위클리프의이론을따르고있으며특히교회의권위와교황권에대해부정적인논리를펼쳤다. 후스는교회의부와사치스러움은사악함과 불신앙의표징이라고보고성직매매와부에대한집착을청지기로서의본분을망각하고하느님의것을가로채는신성모독행위로간주했다. 이러한후스의교회에대한비판은주로독일인으로구성된지도급고위성직자를향한것이었으므로프라하대주교등으로부터원성을사게된반면독일의영향력에서벗어나고자하는보헤미아인들에게는열렬한환영을받았다. 교회개혁을바라며주장한그의주장은이제더나아가교회의가시적인권위를부정하기에이른다. 그는구원을위해보편된교회의필요성을거부하면서개인의은총상태가구원을결정한다고보았다. 또한교황권의권위는그리스도가아니라세속적인정치권력에서나온것이기에수위권은없고베드로의후계자도아니다. 따라서교회권력에순명할필요가없고교회는파문하거나단죄할권한이없으며인간의구원은예정되어있다고주장했다. 결국 1410년후스는피사계교황알렉산델 5세에의해설교금지령을받았으나왕과귀족및대학의지지를업고위클리프사상을계속옹호하며설교를했다. 더욱이 1412년피사계교황요한 23세가로마계교황그레고리오 12세를보호하고있던나폴리의왕라디슬라우스 (Ladislaus) 와의전쟁을위해십자군을조직하고여기에자금을기부하는이에게대사를반포하자더욱강력히이를비판하고그부당성을설교하자그를추종하는세력들에의해보헤미아에서큰소동이일어났다. 이런일련의사태로 1413년후스는파문됐다. 파문으로도보헤미아지역에서소요가가라앉지않자자기영토내에서혼란이일어날것을두려워한지그문트황제는이문제를콘스탄츠 공의회에서심의하도록하였고후스에게는신변보장을약속하며공의회참석을종용했다 년 11 월 3 일콘스탄츠에도착한후스는공의회 에서자신의입장을변호할기회를찾았으나황제의항변에도불구하고 1414 년 11 월 28 일체포되어도미니코수도회에감금되었다. 후스에대한심리는요한 23 세가공의회에서도망치는불의의사태발생으로더욱불리하게전개돼 1415 년 7 월 6 일위클리프의사상을신조 화하고변호하고설교했다는이유로사형을선고받고화형에처해졌다. 그러자그의추종자들이자주폭동을일으켜 15 년간처참한후스파 전쟁 (1419~1436) 이일어나기도했다. 교회개혁의목소리에국민적정서가결합된위클리프와후스의주장은당시자각되고있던국가주의와국가교회주의의를더부추킨결과를 가져왔으며결과적으로교황권을더욱약화시켰다. 뿐만아니라마르틴루터가자신을후스파라고할정도로 100 년뒤의종교개혁을준비한 사건이었다. [57] 위클리프와요한후스 129
130 [58] 바젤공의회 :47 <== 바젤성당스위스바젤대성당. 바젤에서강력히주장된공의회우위설은교황들로하여금공의회를기피하게만들어 16세기종교개혁시적시에공의회를개최하지못하게만들었다. 작은사진은마지막대립교황을선출한뮈켈하우스. 공의회우위설맞서교황권회복 공의회개최기피 개혁시기놓치기도 교회일치원칙 의식은자유롭게 제시 스위스북부의바젤. 프랑스와독일국경이접하는곳이다. 스위스제2의도시이기도한바젤의주교좌성당을찾았을때성당앞광장에서축제가한창이었다. 주교좌대성당완공 500주년기념축제였다. 그러나이축제에참가한대부분의사람들은개신교신자들이었다. 1529년종교개혁이후개신교측에성당을빼앗겨지금은예배당으로사용되고있기때문이다. 대성당맞은편광장오른쪽에지금은미술관으로사용되고있는작은건물이서있는데이건물이바로마지막대립교황펠릭스 5세가선출된곳이다. 마지막이교의현장이다. 콘스탄츠공의회는교회분열을가져온교황권을제한할목적으로교령프레구엔스 (Freqeens) 를통해콘스탄츠공의회폐막후 5년뒤와 7년뒤그이후엔 10년마다정기적으로공의회를소집하도록의무화했다. 마르티노 5세교황은이교령에따라 1423년파비아에서공의회를개최했으나페스트등의이유로다음공의회를 7년후바젤에서개최하기로만합의하고끝이났다. 그러나마르티노 5세는콘스탄츠공의회에서대두된공의회우위설에대한거부반응때문에소집을주저했다. 또한바젤시는오스트리아와부르군드와의전쟁으로위험했으며시민들도성직자들에게우호적이지않았다. 교황이공의회소집을주저하자독일, 영국, 프랑스등에서압력이가해졌고교황에게순종을거부하겠다고위협했다. 결국마르티노 5세는 1431년공의회를개최하기로했지만곧선종하고말았다. 뒤이어교황이된에우제니오 4세는곧바로공의회개최를선언했지만역시공의회에부정적인사람이었다. 따라서교황과공의회우위설을주장하는이들사이에긴장이고조된가운데 1431년 7월 23일공의회가개최됐다. 바젤공의회에는소수의주교들만참석했으나교회개혁을바라는성직자와평신도, 대학교수, 신학자등이대거참석했다. 개혁은당대의요 구였던셈이다. 공의회는콘스탄츠공의회의개혁완수, 이단의근절, 제국들간의평화, 동방교회와의재일치등의문제를안고있었다. 그러 나공의회는기대와는달리교회의행정부혹은상급법원을자처하며 공의회우위 를주장하는데에만관심을보였다. [58] 바젤공의회 130
131 사실 18 회기까지공의회는 공의회결정에의하지않으면누구도공의회를폐막할수없다, 공의회중에사도좌가공석이될경우공의 회밖에서교황을선출할수없다, 콘스탄츠공의회에서언급한공의회의권위와권력을재천명한다 등공의회우위설을주지시키기 위한결정을내렸을뿐이다. 또한교황청에바치던여러세금의납부를전면중지시켰다. 당연히교황은교황의권력을축소하고공의회의행정권을확대하려는이러한의도로부터벗어나고자했다. 마침오스만투르크의침입으로 함락직전에있던동로마제국이서유럽에군사적도움을요청해왔다. 그러나이는이전에신앙의재일치가이뤄져야가능한일이었다. 에우제니오 4세는이기회를이용하여바젤을벗어나고자동방교회와의재일치를협의할장소로피렌체를제안했고공의회론자들은바젤을고수했다. 동방의대표들이교황의제안대로이탈리아내의도시에서개최할것을받아들이자개최지문제를둘러싸고두파로갈라졌다. 1437년교황은공의회를페라라로이전할것을선언했고교황지지자들은바젤을떠나이듬해 1월 8일페라라에서공의회를속개했다. 이때부터바젤과페라라에서두개의공의회가열렸다. 이런상황에서중립을취하던영국과프랑스는교황지지로돌아섰고독일마저지그문트황제의사망이후제후들이중립적자세를취하거나교황을지지했다. 상황의불리를느낀바젤의공의회론자들은점점격렬하게공의회의우위를주장하다마침내 교황이공의회에예속되어야한다 는것을신앙으로선포했다. 여기에따라바젤공의회측은에우제니오 4세를폐위시키고 1439년 11월 5일평신도이던사보이의공작아마데우스를대립교황으로선출했다. 그는펠릭스 5세로명명했다. 이교를막기위해대두됐던공의회우위설이새로운이교를부른결과를가져왔다. 교회역사상마지막이교다. 서구대이교의폐해를경험한 후새로운교회분열을원치않는모든그리스도교국가들이교황을지지하자공의회우위설은큰타격을입었다. 반면페라라공의회는바젤측의공세에페라라공의회가적법한보편공의회임을천명하는내용을반복하다또다시페스트로인해장소를피렌체 ( 플로렌스 ) 로옮겼다. 피렌체공의회는적어도외형적으로는빛나는성과를거두었다. 무엇보다 신앙이동일하면의식은자유롭게할수있다 는교회일치를위한원칙을제시했다는점에서큰평가를받고있다. 동방교회는오스만투르크의위협에대해서방의원조를얻어내야할필요성에서, 서방교회는공의회우위설등에위협받는교황권과정통성확보를위해서로양보했다. 그결과주요신학상의문제들에있어합의를이루었다. 그리고양교회는 1439년 7월 6일레텐투르첼리 (Laetentur Coeli) 일치교령에서명함으로써일치를회복했다. 그러나이일치는오래가지못했다. 동방에서는성직자들이나백성들이지도자들의뜻을따르지않았고기대했던군사적원조도없었기때문에일치는유지될수없었다. 또한서방국가들은콘스탄티노플의운명에별로관심을기울이지않았고자국의이익만을추구해십자군이결성되지못했다. 결국콘스탄티노플은 1453년함락되어동서방교회의모든관계가완전히단절됐고차이점은더커져갔다. 1472년피렌체에서의일치교령은정식으로철회됐다. 콘스탄츠공의회에서대두돼바젤에서신조화하려했던공의회우위설은지지자들을얻지못한펠릭스 5세가 1449년사임함으로써교황권의승리로끝이났다. 그러나교황청의권위와힘에심각한타격을준것도사실이었다. 또한공의회우위설이언제다시등장할지도모른다는교황들의불안감은공의회개최를기피하게만들어한계점에달했던교회개혁을늦추었고결국 16세기종교개혁이일어났을때적시에공의회를개최하지못하게한원인이됐다. [58] 바젤공의회 131
132 [59] 르네상스시대의교황 :52 <== 르네상스교황들의문화적업적은놀랄만한것이다. 하지만그들에게맡 겨진보편교회의사명을외면했다는비판은벗어날수없다. 사진은식스투스 4 세시절건립된바티칸의시스틴성당. 세속권위에몰두교권추락 사생아를추기경이나영주로임명 공명심탓에문예진흥에는이바지 중세예술의대표적양식을고딕 (Gothic) 이라부른다. 이는르네상스인문주의자들이중세문화를비하하기위해붙인말로야만적인고트족의작품이란뜻을품고있다. 르네상스인문주의자들은중세를 5세기로마제국의몰락과함께시작된르네상스이전까지의야만시대로규정하고근대의시초를고대의연장선상에서찾고자한다. 이같은사고는개인보다는교회와신중심적인문화였던것에대한반동으로 14~15세기부패한교회상에서기인하는바크다. 르네상스의시작르네상스 (Renaissance) 는재생, 부활등의뜻을지닌프랑스어로고대그리스로마문화의부흥을통한새로운문화창출운동으로사상문학미술건축등다방면에걸쳐일어났다. 근대유럽문화태동의기반이된르네상스는 14세기후반에서 15세기초반이탈리아에서시작됐다. 르네상스가이탈리아내에서시작된것은여러가지요인을안고있었다. 먼저문화적으로이탈리아는고대로마의역사유산들이잔존해있었고로마문화에대한향수가높았다. 또한지리적으로이탈리아는동서교류의중심지로서이슬람과비잔틴의문화를서유럽에소개하는연결고리역할을해왔다. 정치경제적요인으로는 11~12세기상업의부활로상당한부의축적을이루었으며자치도시의발달과봉건사회의몰락으로시민계급이성장했다. 뿐만아니라역사적으로콘스탄티노플의함락으로동로마제국이멸망하자그리스문화를지닌비잔틴계열의학자들이대거유입됐고교황과황제들간의오랜갈등으로양편모두기진맥진한상태로새로운상황이요구되는시점이었다. 세속화된교회가시민들의영적갈증을해소해주지못하는사이이러한시대적배경속에서논리학과형이상학등신앙중심의학문은언어 문학역사윤리학등으로대치되면서도덕적인간형의완성을위한수단으로고전을탐독하기시작했던것이르네상스의시작이었다. 여기에 15 세기들어교황중심의그리스도교적보편국가가무너지고각나라마다근대군주국가가성립되면서중세의지배이념이었던그리스도 교와집단주의가해체되고세속주의와개인주의가등장한다. 또한인쇄술의등장으로프랑스영국독일등지로르네상스가급속히전파되면서신앙에있어서도초대교회의순수함으로돌아가고자하는 열풍으로성서연구등이활발해졌다. 결국르네상스는중세의정신생활을지배해오던그리스도교가반목과부패로제기능을다하지못하자그리스도교의이상과이념에대한회 [59] 르네상스시대의교황 132
133 의가일어나면서시작된새로운정신운동이었다. 그리고그영향은신중심의중세문화에서인간성을강조했던고대문화에대한관심으로나 타났고이를인문주의 (Humanism) 라고한다. 이시기의교황들르네상스교황이란 1440년에서 1520년까지르네상스시기에활동한교황을일컫는다. 이시기교회는교황청의아비뇽유배와서구대이교등을거치면서쇄신의목소리가높았던시기이며콘스탄티노플을함락시킨오스만투르크의침공위협이높았다. 또한이탈리아내의도시국가들간의분쟁이극에달했고동시에민족국가들의등장으로군주들이성직서임권을마음대로처리하려는국교회사상이드높았던시기였다. 따라서어느때보다영적임무에충실하고교회개혁의과업을성실히수행할교황들이필요했다. 그러나불행히도오히려교회를속화시키고교황직을부패시킨교황들이줄을이었다. 마치 10세기카롤링거왕조의몰락이후닥친교황들의암흑시기가다시도래한듯했다. 이시기의교황들은 베드로세습지 를하나의사유영지처럼생각하며스스로한국가의군주처럼행동함으로써교황직의보편적사명을잃어버렸다. 또한교황들의이러한영주적인공명심은로마를예술품으로장식하는데에더관심을쏟게했고문란한생활을통해얻은사생아들에게영지를주는데혈안이되기도했다. 가능한자신의조카나아들등일가친척에게성직과영주의자리를주려는이러한족벌주의는이시기교황들의특징처럼돼버렸는데이는결국종교개혁의한원인이되기도했다. 그들은교황령지역들을아들이나조카에게봉토로주었을뿐아니라아예교황령에서빼내어독립공국으로만들려고까지했다. 사실족벌주의는강력해진세속군주들의도전에중앙집권체제를구축해강력한교황권을갖기위한방편으로사용된것이었으나그폐해가너무컸다. 그리고이러한목적에의해임명된추기경단은그능력이나신앙적인면에서너무세속화되어있었으므로결국또다시부자격한교황을선출하는악순환을되풀이했던것이다. 르네상스시기교황들중특히식스투스 4세부터레오 10세까지의 50년간은교황권이최악으로퇴폐한시기였다. 시스틴성당을설립한식스투스 4세는후에율리오 2세교황이된조카를비롯해 2명의조카를추기경으로만들었고또다른조카에게는이몰라를공국으로주는등족벌주의를제도화해교황청과추기경단을속화시켰다. 뒤를이은인노첸시오 8세교황은추기경매수를통해교황이된인물로신부가되기전에두명의사생아가있었는데이들의결혼식을바티칸에서성대히거행하기도했다. 또한그는자신의사돈인메디치가문의 13살짜리소년을추기경으로임명하기도했는데이사람이후에레오 10세교황이다. 인노첸시오 8 세의뒤를이은알렉산데르 6 세는교황역사상가장최악의교황이다. 삼촌인갈리스도 3 세교황에의해추기경이된뒤성직매 매를통하여교황에선출되었다. 알렉산데르 6 세는 4 남 1 녀의사생아가있었는데그중한명은추기경으로임명했고나머지는모두교황령의 영주로만드는등족벌주의를일삼았다. 예수회 3 대총장은그의손자다. 비오 3세와같이청렴하고신앙심깊은교황들도있었지만르네상스시기의교황들은대부분영적지도자라는교황상을갖추지못했으며세속적인권위를지키는데에만몰두하여교황권의위신을추락시켰다. 목자로서보다는군주혹은장군의입장에서통치한교황들은비록르네상스시대의문예진흥에크게이바지했으나세속적인것에너무심취한나머지긴급한교회개혁을등한시했고족벌주의로교회폐해를더욱심각하게했다. 심지어루터의개혁을단순히수도자들의논쟁으로치부해버리고개인적관심사에심취해버리기도함으로써교회는돌이킬수없는처참한타격을받게됐다. [59] 르네상스시대의교황 133
134 [60] 인문주의와에라스무스 :55 <== 에라스무스는 폐해는제거되어야하지만신앙의실체가침해되어서는 안된다 고믿었다. 사진은한스홀바인작에라스무스초상, 루브르박물관, 나 무캔버스위에오일. 순수한복음정신회복주창 위선과미신. 교계제도폐해. 형식주의배격 분열통한개혁보다용서. 쇄신으로정화를 그리스도교적인문주의중세기의유럽은지금의유럽연합 (EU) 보다더욱강력하게통합된하나의사회였다. 지금의유럽연합이경제, 즉돈을매개로한경제공동체에불과한반면당시유럽은신앙을매개로정치경제문화등모든부분에서통합을이루고있던단일체였다. 우위론자들을지원한것도이런이유에서였다. 그러나중세말기에이르러교황권의추락등과함께민족국가들의군락으로변모돼있었고이러한민족국가의형성은자연교회로부터의독립을추구하며이른바민족적이고영토적인개념의국교회사상을등장시켰다. 어느곳의통치자들도교황의간섭을용납하지않았다. 그것이자국내교회에관한일일지라도. 콘스탄츠공의회이후영국, 독일, 프랑스등각국정치세력들이공의회 그러나그리스도교적세계의해체보다더욱큰문제는교회의세속화로인한 영적취약성 에있었다. 당시교회는많은사람들이갖고있 던신앙적고뇌와갈증을해소해줄능력이없었다. 오히려교회가고뇌의원천으로비춰졌다. 이처럼중세말의교회가사람들의신앙심을 충족시켜주고단련시켜주는영성과신학을제공하는데실패했다는것이종교개혁의성공적요인이됐다. 성인공경과성지순례, 죽은이를위한기도, 연옥교리등은대중적으로크게인기를누리고있었는데이런대중신심들이올바른지도를받지못해미신적이고주술적인형태로흘렀다. 그런데도불구하고교회는영적인일에몰두하기보다는교회의영향력확대를위해제후들과투쟁을일삼는등세속적인일에더몰두해있었다. 또한교회내치도법치주의에젖어복음정신의삶보다는각종준수사항과금지조항만이남은죽은교회로전락했고단순한관습의종교가됐다. 더욱고약했던것은성직자들사이에만연한권위주의와배금주의로성사를비롯한사목행위들을계량화해세금을거두어들인것이다. 밤베르크신부들의경우성혼선언대가로 9페니, 혼인미사시 48페니, 장례식 240페니, 부활판공성사 1페니, 세례성사 12페니등을받을정도였다. 당시노동자들의하루품삯이 10페니정도였다. 그러나이시기는비록전쟁과전염병등으로어려운시절이었지만교육의확장기였다. 군주들과제후들은비록보편교회이념에대항해자 신들에게유리한이론을전개하기위한목적에서였지만각종대학들을설립했다 년과 1500 년사이에유럽의종합대학은 20 개에서 70 개 [60] 인문주의와에라스무스 134
135 로늘어나있었고각나라마다각종단과대학들이무수히생겨나기시작했다. 이미 1500 년에이르러독일전체인구의약 3~4% 인 40 만명 정도가읽고쓸수있었다고한다. 교육의확장은사람들에게비판적기질을길러주었고동시에급속히발달하기시작한인쇄술은이를더욱 증폭시켰다. 신자들은출판으로대중화되기시작한모국어성경을직접읽음으로써교회의폐해를지적하기시작했고이탈리아에서시작된인문주의가알프스를넘어북유럽으로전파되면서신앙에서도성서나교부들의가르침으로돌아가자는그리스도교적인문주의가형성됐다. 그대표적인물이프랑스의르페브르 (Lefevre), 잉글랜드의토마스모어 (Thomas More), 네덜란드의에라스무스 (Desiderius Erasmus) 등이다. 그중에서도인문주의자들의왕자로불리는에라스무스는후대개혁가들의사상에큰영향을미쳤다는점에서아주중요한인물이다. 인문주의자들의왕자 1466년네덜란드로테르담에서성직자의사생아로태어난에라스무스는 9살때인문주의자헤지우스 (Hegius) 가만든데벤테르의학교에서공부했고 1486년아우구스티노참사수도회에입회했다. 1492년사제품을받은후파리대학으로유학을갔지만스콜라학풍에젖어시시콜콜한추론에만매달려있는신학에별흥미를느끼지못한채프랑스와네덜란드영국이탈리아등지를다니며인문주의자와주교와제후들과친분을쌓으며신앙의고전들연구에헌신했다. 에라스무스는많은작품들을남겼는데 그리스도군인의소교본 (Enchiridion militis christiani, 1504) 에서성직자들의무지와탐욕, 부패, 미신적인신심등을꼬집은데이어우신예찬으로잘알려진 미련함의찬미 (Laus Stultitae, 1511) 에서는모든계층의부도덕과모순특히고위성직자들의교만함과신앙생활의폐해등교회를날카롭게풍자해비판했다. 또한성서원전연구에도박차를가하여 1516년예로니모의불가타라틴어역본의오역을지적한그리스어신약성서를출판했다. 에라스무스는이러한작품들을통하여위선과미신, 교계제도의폐해, 교회의형식주의를배격하고순수하고원천적인복음의정신에로돌아갈것을주장했으며이를위한방법으로성서와교부들을비롯한초대교회의저서들에게서그원정신을찾고자했다. 그래서에라스무스는신약성서서문에서교회전통들가운데서본질적인요소가아닌것들은과감히폐지해야한다고강조하면서산상수훈에입각한생활즉복음의정신대로살면그리스도를발견할수있다고강조했다. 그러나 폐해는제거되어야하지만신앙의실체가침해되어서는안된다 는그의말처럼그는교회분열을통한개혁이아니라용서와쇄신의정화를강조했다. 이부분이루터와비교되는면이기도하다. 부패한교회를고치는데회초리가필요하지만권위를파괴함이없이순화시킬수있는방법을택한것이다. 그에게있어그리스도인들이서로싸운다는것은대단히수치스러운일로종교를위한소란과혁명, 전쟁은자기모순에빠지는것으로확신했다. 에라스무스는당시의신앙상태를어리석음과광신의만연으로보고참된지식을통하여대중의비판력을회복하여복음의원정신을회복해참된경건으로나아가고자했다. 타성화된교회관습을철폐해야한다고주장하면서도물리적인힘으로자신들의주장을관철하려는개혁파들도거부한에라스무스의이런중 용적자세는결국양측모두로부터비난받았다. 성서의정신에입각한개혁정신은평화로운개혁을원하는많은이들에게영향을미쳤고열 렬한지지를받았지만양측비평가들의혹평에의해역사의뒤안에머물게됐다. [60] 인문주의와에라스무스 135
136 [61] 루터의 탑실경험 :41 신앙을통해서만구원 확신 독일작센안할트주에위치한공업도시인비텐베르크. 비텐베르크수도원의탑실에서독일의신학자이며종교개혁자인마르틴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는이른바 탑실경험 (Turmerlebnis) 이라고불리는신앙체험을한다. 그는이체험속에서인간은결국죄와욕망을피할수없기때문에지상에서선행을쌓고공로를세움으로써구원이되는것이아니라, 오직예수그리스도에대한신앙을통해서만구원을받게된다고확신을하게된다. 바오로사도의 의인은신앙으로살게된다 는로마서 4장 17절의말씀에서루터는자신을끊임없이괴롭히던불안과죄의식에서벗어나게됐고스스로양심의평화를누리게됐다고할수있다. 루터가수도원안에살고있을때그에게신은죄인을단죄하는공포의신으로제시됐고그때문에그는항상신을향한두려움과원망을품고있었다. 그런데이제인간은오로지신의은총으로만구원되고신앙안에서만의롭게된다고믿음으로써그는새롭게태어난것같았고여기서부터성경말씀이그에게새로운모습으로다가오게된다. 영웅혹은이단의괴수루터는어떤이들에게는 신앙의영웅 이었지만다른이들에게는 이단의괴수 였다. 이처럼서로상반되게나타나는루터의모습은기본적으로가톨릭과프로테스탄트의교파적신앙의관점에서해석하려는경향의결과인것은물론이다. 하지만다른한편에서는루터자신에게서부터이러한상반된견해의요인이있다고볼수도있다. 즉루터의말이나저서들을통해서루터라는인물과사상을객관적이고정확하게파악하는것은대단히어려운일이라는것이다. 예를들어같은종교개혁자라고할수있는칼빈 (Jean Calvin, 1509~ 1564) 은자신의신학사상을완벽한체계로서술해 4권의신학총서를남겼지만루터는이러한저서를남기지않았다. 그는그때그때필요에따라저술, 강의와토론, 설교, 편지등을남겼을뿐이며그의개인적성격과체험및논쟁적어휘들때문에그의저서안에는역설적인표현들도많이발견된다. 루터교신학자뵈머 (H. Bohmer) 는 1906년 루터의저서들보다더많은루터가있다 고고백한일도있다. 이는루터를해석하는데있어서존재하는다양성뿐만아니라루터자신이이런해석들로이끌수있는위험과가능성을포함하고있음을말해준다. 가톨릭에서는세기를거쳐오며루터에대해비판적이고보수적인입장을취해왔으나 19세기초묄러 (J. A. Mohler) 나현대의로르츠 (Josef Lortz) 같은사가들의노력으로변화가일기시작했다. 이들의편견을배제한객관적연구결과로가톨릭교회는루터의종교개혁동기와사상의일부정당성을인정하기시작했다. 그후제2차바티칸공의회는 일치교령 을통해서증오와불신의장벽을넘어루터에대한부정적견해에대해재고를요구했다. 이에따라오늘날교회사가들은반가톨릭적프로테스탄트종교개혁에근거해비난하던자세에서벗어나루터를 가톨릭루터 (1483~1520) 와 프로테스탄트루터 (1521~1546) 로나눠평가하고있다. 가정학교서엄격한교육 [61] 루터의 탑실경험 136
137 루터는 1483년 11월 10일신성로마제국의튀링겐지방의작센공작령에위치한아이스레벤에서한광부의아들로태어났다. 8남매중맏아들로태어나이듬해성베드로성당에서 투르의마르티노 라는이름으로세례를받은그는유년시절부터엄격한교육을받았다. 훗날스스로친구들에게이야기하듯엄한가정교육과학교에서의철저한윤리교육등은그로하여금예수그리스도를무서운심판자로인식하게한것으로보인다. 어릴적부터그리스도란이름만들어도깜짝놀라얼굴이창백해지곤했다. 왜냐하면나는그를오직엄격한분노의심판자로만생각하게되도록교육받았기때문이다 루터의이러한심리상태는그의성품과함께훗날그의신학사상이형성되는데에도큰영향을미치게된다. 1501년에르푸르트대학교에입학해 1505년석사학위를받은그는아버지의뜻에따라변호사가되기위해 5월법학부에등록을한다. 바로그때일어난한가지사건은그의삶을송두리째뒤바꿔놓게된다. 당시 22세의법률학도는고향에서방학을지내고다시에르푸르트의대학으로가던도중시골길에서갑자기벼락을만난다. 바로옆에벼락이떨어진순간놀라말에서떨어진그는공포에질려 성녀안나여, 나를구해주시면일생을수도원에서바치겠습니다 하고애원한다. 이서원은그가오래전부터마음속에품고있었던구원의열망이구현되는순간이었다. 그는평소부터수도생활이구원에이르는지름길이라고생각해왔고그것이죽음에직면한순간, 하느님의심판및지옥벌에대한두려움이결정적으로이러한생각을폭발하도록유발했던것이다. 루터는부모와친지들의반대를무릅쓰고 7월 17일에르푸르트에있는아우구스티노은수자회에입회한다. 수도회에입회한그는규칙에따라엄청나다할정도로성경을읽었다. 하지만그는성경과자신과의내적관계를더중요시했고성경을주관적, 체험적으로해석하는경향을띠게된다. 이러한특징과함께그는신을항상무서운심판자로받아들였다. 루터의이러한신관은그후유명론신학에대한관심으로더욱굳어지게된다. 유명론에따르면신은절대적자유의지이며인간이구원되거나단죄되는것은인간에게그책임이있는것이아니라신이원해서이뤄지는것이다. 루터는 내가어떻게하면자비로운신을얻을수있는가, 즉자신의구원의불확실성에서나오는거듭되는질문을바탕으로열심하고엄격한수도생활을통해서구원의보장을얻으려고노력했다. 하지만그는아무리노력해도그구원의보장은확실해지지않았고자기자신안에서나타나는이기심과욕망, 육욕이그대로남아있음을보면서신의분노앞에공포만을느꼈던것이다. 그러한좌절과공포와두려움의순간에그는스스로 탑실경험 이라고부른순간적인영감을통해서새롭게신앙과구원을인식하게됐다. 루터는그후아우구스티노은수자회의설교가로또비텐베르크수도원부원장과신학연수원장으로임명됐다. 비텐베르크대학에서도신학대학교수로서스콜라사상을성서와초대교부로돌아가자는성서인문주의로대치시키는교육개혁을착수하는데중심인물이된다. 그리고 1517 년 5월, 97개항신학명제 를발표해이를독일의대학들에발송한다. [61] 루터의 탑실경험 137
138 [62] 대사논쟁과루터 :48 <== 군주와교회장상들에게연설하고있는루터. 그는세속군주의 보호아래자신의신념을실현하게됐다. 대사용고해성사표판매 가톨릭교회에대해가장자주비난의대상이되는것중의하나가이른바 면죄부 이다. 이용어는사실은 대사(indulgence) 를지칭한다. 16세기초독일에서촉발된대사논쟁은소위종교개혁을부른가장큰원인중의하나이기도하다. 루터를중심으로한대사논쟁을통해역사가주는성찰과반성의권유를다시한번짚어볼필요가있을것이다. 논쟁의발단루터종교개혁의직접적동기는로마성베드로대성전건축을위한대사설교에있었다. 극도로과장된대사설교를통해특히당시독일교회는부의축적에몰두한듯한느낌을주고있었다. 1513년제후요아킴 1세의동생알브레히트는 23세나이에마그데부르크의대주교가됐고할베르슈타트의관리권도얻게됐다. 마인츠교구까지도소유하려한그는교황청에일정액을그조건으로지불하기로계약했으며동시에자기교구안에서 8년동안베드로대성전건축을위한대사설교를하도록협약이이뤄졌고그수익금의반은자신이소유했다. 알브레히트대주교는전통에따라대사설교가들과고해신부들을임명하고이들에게설교에대한전체적지침서를주었다. 이지침서는돈을 많이걷는것을목적으로했기때문에웅변적과장이많았다고한다. 하지만당시대사와관련해교리상의잘못은없었던것으로보인다. 루터가 1541년에주장한대로대사를통해신자들의미래의죄까지사해진다고한일은없지만고해성사표를판매했고이표를가지면일생중언제라도고해성사를보면교황이보류한죄까지사해진다고한일은있었다고한다. 또설교가들은고해성사표를사는순간교회의영적은혜를얻기때문에통회가필요없다는식으로설교를했고죽은사람을위해대사를얻을때에도고해성사를보거나통회할필요없이돈만주면되도록되어있었다. 대사설교가들은이미 1482 년프랑스소르본느에서광고로붙여진일이있는표어 동전이통으로떨어지는순간연옥영혼이구원된다 는 말을과장되게인용한것이다. 이런식의설교는신자들로하여금교회가영혼구원보다돈에더관심이있다는인상을주게했다 년마그데부르크교구에서는라이프치히에있던도미니코회수사텟첼 (Johannes Tetzel, 1465~1519) 을대사설교가로임명했다. 당시 비텐베르크에서는대사설교가금지돼있었기때문에그곳의주민들은인근지방으로가서고해성사표를사야했다. 비텐베르크에서신자들의고해성사를듣던루터는이대사설교가신자들에게아주위험한인식을심어주고있음을발견한다. 즉성실한신 앙생활을위한노력보다는돈으로자기영혼을구하려고고심하고순례와같은외적행사에만신경을쓰고있었던것이다. 그래서기회가있 [62] 대사논쟁과루터 138
139 을때마다이러한설교를비판하던루터는급기야대사설교의초안이공식적성격을띤, 대주교의지도아래나온것임을알게됐고그의 교구장인히에로니무스슐츠와브란덴부르크의후작인동시에마인츠의대주교이며선제후인알브레히트에게항의편지를보낸다. 이편지에서루터는대주교에게새훈령을통해대사설교의폐단을없앨것을요구하고신학자들이대사교리를명확히밝힐것을촉구하면 서작금의대사시행을반박하는신학명제로서대사명제와대사논문을첨부했다. 루터는후에자신이 95 개조문을발표하게된동기는바로이편지에대해주교들이아무런회답을주지않은데있었다고말했다. 이 95 개 명제는루터자신의의지와는달리출판업자들의손에들어가 1518 년 95 개항목으로정리돼 95 개조명제 로인쇄됐다. 쇄신에서개혁으로논쟁이이어지면서루터는자신의신학체계를전분야에걸쳐발전시키게되고쇄신의주장은분열의빌미가되어가고있었다. 1518년 1월대사설교가로활동하던도미니코회수사텟첼이 95개조명제를논박하자루터는대사명제에대한해설서와대사와은총에관한글로대응했고저명한신학자인엑크 (Johann Eck, 1486~1543) 와도논쟁을벌였다. 알브레히트대주교는교황청에루터가이단적새교리를전파시키고있다고보고했고도미니코회는 3 월에작센관구총회에서루터를이단의 용의자로교황청에고발하기로합의했다. 교황레오 10 세는독일에서발생한대사사건을아우구스티누스은수자회와도미니코회의사이에서발생한교리논쟁으로간주해직접개입 을피하려고했다. 그에따라교황은아우구스티노은수자회의총장요한본스타우피츠에게문제해결을지시했고그해 4 월하이델베르크에 서열린총회를통해 십자가의신학 을담고있는 40 개항의명제를발표한루터에게침묵을권유했다. 루터는 5 월에교황에게보내는편지를통해대사명제의출판에대해해명하고교황에대한충성을표시했다. 하지만이러한충성선언과는 달리루터가동봉한 대사효력에관한해설서 는교황의권위보다는공의회의결정이우선적이라는내용을담고있었으며따라서교황에 게복종을표시하면서도자신의주장은결코취소할수없음을고집했다 년 6 월교황은루터에게 60 일이내로마출두를명령하면서교황청검열관프리에라스에게 95 개명제를반박하는논문을작성할것을지 시했다. 레오 10 세교황은 8 월 23 일아우구스부르크제국의회에교황특사로파견한가예타노추기경에게훈령을보내루터를체포하고그가 자신의주장을고집하면이단으로파문하고로마로송환하도록지시했다. 하지만작센의선제후프리드리히는교황청의요청에대해독일내에서루터에대한재판이이뤄지도록힘썼다. 그에따라가예타노추기경은 아우구스부르크에서 10 월 12 일부터 14 일까지청문회를열었지만루터는자기주장을굽히지않았다. 로마송환을피하기위해아우구스부르크를탈출한루터는자신의문제가교황청이아닌독일법정에서취급되도록요청함으로써사건을정 치쟁점화하려시도했고교황권을문제삼으면서세계공의회소집을청원했다. 루터는이후세속군주의보호아래에서자신의확신을실현 하게됐다. [62] 대사논쟁과루터 139
140 [63] 라이프치히토론회 :51 <== 마침내파문 1520 년 12 월 10 일루터는수많은학생들이지켜보는가운데교회법책과교황교서를불태 워버렸다. 이듬해 1 월 3 일마침내가톨릭교회는그를파문했다. 사진은루터홀안뜰. 루터, 근본교리까지거부 거듭된교황청의파문경고에도불구하고자신의뜻을굽히지않았던루터는 1520년 12월 10일가톨릭교회와결정적으로결별을선언하게된다. 이날루터는수많은학생들이지켜보는가운데교회법책과교황교서를불태워버림으로써이듬해 1월 3일마침내가톨릭교회는그를파문했다. 이에앞서 1520 년 6 월루터는라이프치히에서당시저명한신학자였던에크와토론회를 갖게된다. 이토론회에서는주로교황의수위권문제와공의회의권위문제가주된쟁점 으로다뤄졌다. 에크 (Johann Eck, 1486~1543) 신부는종교개혁에맞서당대의개혁신학자들과의논쟁에 서가톨릭의입장을대변한신학자이다. 그는독일에서태어나 1517 년까지루터와는편지 를주고받으면서우호적인관계에있었다. 하지만이듬해루터의 95개조명제 에대해비판적인논평을가함으로써루터와의틈이벌어지기시작했고여기에루터의비텐베르크대학동료인카를슈타트 (A. R. B. von Karlstadt, 1480~1541) 가이문제에개입하면서본격적인논쟁이시작됐다. 카를슈타트는루터에대한에크의논평에반대하는공격적인문건을발표했고이는그대로이른바 라이프치히토론회 로이어진다. 1519년 6월 27일부터 7월 16일까지이어지면서수없이많은논쟁적문건들이오고갔다. 신수설과무류성거부 루터는이논쟁에서교황권의신수설 ( 神授說 ) 과공의회의무류성 ( 無謬性 ) 을거부했다. 루터는교황이나세계공의회역시오류를범할수있 다고주장하면서오직성서만이신앙의원천이요기준이라고선언했다. 성서만 (Sola Scriptura) 을개혁의원칙으로내세우면서루터는 성서가읽는사람들에게스스로해석해주며성서자체가명확하므로교회의교도권은필요없다고주장했다. 루터는심지어자신의친구인슈팔라틴 (Spalatin) 에게이토론회를준비하면서교황교서들을연구한결과교황이반그리스도이거나적어도 반그리스도의사자 ( 使者 ) 라는생각을갖게됐다고까지말한적도있다. [63] 라이프치히토론회 140
141 에크는논쟁에서우선카를슈타트에이어루터와논쟁을벌였는데카를슈타트에반대해서는하느님이인간의동의를전제해의화 ( 義化 ) 를일 으킨다는것, 그리고루터에반대해서는교황의수위권이하느님으로부터제정됐다고주장했다. 라이프치히토론회는루터에대한단죄의과정에서결정적인영향을주었다. 토론회를통해더욱명확해진루터의입장과주장을바탕으로 쾰른대학교와루뱅대학교의신학자들은루터를단죄했다. 국가의영웅으로등장 하지만다른한편에서는라이프치히토론회이후루터가국가의영웅이요대변인으로등장하기도한다. 스스로교회의반그리스도를몰아내기위해하느님으로부터특별한소명을받았다고생각한루터는이제자신의모든언사에서더욱예언자적억양이가미됐다. 또한당시시민과농부들은루터에대해비록잘알지는못했어도그가교회와국가의혁신을이뤄줄사람이라는믿음을갖기시작했다. 그에따라사방에서학생들이비텐베르크대학으로몰려왔고그의사상과주장들은새로발명된인쇄술의도움으로쉽게전파될수있었다. 루터는대중들이알아듣기쉬운말로교회의부패상을비판하고자기입장을옹호했다 년과 1520 년사이루터의주된주장들은교회, 교황과주교의전권 ( 專權 ), 성사, 신앙과선행문제들과관련된것들이었다 년 로마 의교황직에관해, 독일국가의귀족들에게고함 이라는저서를시작으로 교회의바빌론유배, 그리스도인의자유 등일련의 저서들을통해자신의주장들을펴던루터는마침내교회쇄신을넘어교회의근본교리까지거부하는지경에이르게된다. 그는독일인의교황청에대한민족적반감에호소하면서교회의전통교리와관습을공격했다. 로마의교황직에관해 에서그는자신의새교회관을내세웠다. 그는그리스도교는모든신자들의단체인데이는볼수있는지상적단체가아니라신앙을향한마음안의영적교회라고주장했다. 교회안의계급제도는인간이만들어낸것이며외적교회안에만있고, 예수는베드로혼자에게만천국열쇠를준것이아니라교회전체에준것이라는등의주장을통해결국루터는영적인교회만이참교회라고주장했다. 독일국가의귀족들에게고함 을통해자신의교회관을더욱발전시킨루터는 교회권력이국가권력보다높다 교황만이성경을해석 할권리가있다 교황만이공의회를정당하게소집할수있다는, 이른바로마교황청의세가지장벽을먼저제거해야한다고주장하면서 귀족들의협력을구했다. 계급은인간이만든것 같은해 10월에쓴 교회의바빌론유배 에서는성사론을전개한다. 성사는오직세례, 고해, 성체성사뿐이라며칠성사를거부하고다른성사들은교황청이임의로첨가한것이라며성사란인간의화의수단인신앙을일으키는외적표현이라는새로운개념을도입했다. 특히루터는가톨릭교회가성체성사를남용하고있다며평신도에게성혈을영해주지않는것은로마의폭정이라고비난하고실체변화와성체 ( 聖體 ) 로서의미사를거부했다. 1520년 2월에로마에서심사위원회가구성됐고 6월 15일에는레오 10세교황의교황교서 주여, 일어나소서 가반포돼루터가제시한 41개항의명제를단죄함과동시에 60일안에취소할것을요구했다. 만일루터가계속고집하면그의저서들을불태우고파문의벌을내릴것이라고경고했다. 하지만루터는이러한경고를완전히무시한채그해 12 월 10 일비텐베르크의엘스터성문에서학생들과함께교회법책들과교황교서를공개 적으로불태웠고이로써가톨릭교회와의결별의수순을밟았다. 그는이튿날에는대학강의시간에 400 여명의청중앞에서자신은 순교할 [63] 라이프치히토론회 141
142 각오로이반그리스도 ( 교황 ) 와싸울것 이라고선언하기에이르렀다. 결국교황청은 1521 년 1 월 3 일루터를파문하는교서를공포했다. 여기서부터 가톨릭루터 는끝나고 프로테스탄트루터 가시작된다. [63] 라이프치히토론회 142
143 [64] 보름스제국의회 :55 <== 보름스제국의회 1521년 4월루터는황제앞에소환되어자신의신앙과행동을변호해야만했다. 생각할시간을달라고요청해하루의말미를얻은루터는 4월 19일의회에서여전히자신의주장을취소할수없다고주장했다. 루터, 끝까지 취소불가 주장 1521년 1월 3일파문된루터는이후다시한번자신의주장을취소할수있는기회를부여받는다. 신성로마제국의황제카알 5세 (1519~1556) 는 1월 27일부터보름스 (Worms) 에서열린제국의회에서, 루터의국외추방령을선포하려했으나프리드리히선제후가루터문제를의회에서심사하도록요청했고이것이받아들여졌다. 의회로부터출두령을받은루터는 4 월 16 일보름스에도착해다음날황제앞에서자신의주장을철회하라는압력을받았다. 생각할시간을 달라고요청해하루의말미를얻은루터는 4 월 19 일의회에서여전히자신의주장을변론하고성서에의거해서그것이오류라는명확한증명 이이뤄지지않는다면결코취소할수없다고주장했다. 의회결정에따라황제카알 5세는 5월 8일칙서 ( 보름스칙령 ) 에서명하고 25일공포했다. 칙서는루터의법익 ( 法益 ) 을박탈하고재산을몰수하며그의저서를전파하는자들도처벌하는내용이었으며그와그를따르는무리들을추방한다는내용이었다. 다만제후들이이미모두귀향한뒤여서칙령의시행은결정되지못했다. 어쨌든이처럼루터와그주장을따르는이들에대한단죄가결정됨에따라루터는신변의위협을받게됐다. 이사실을알게된제후프리드리히는 4월 26일보름스를떠나비텐베르크로향하던루터를보호하기위해납치를가장해바르트부르크 (Wartburg) 성에은밀하게숨겨두게했다. 프리드리히의배려로몸을피하게된루터는바르트부르크에서 1522 년 3 월 6 일까지머물게되는데이곳에서도그는바깥세상에큰영향을 미치는개혁저서들을수없이저술했다. 그는성모찬미가 (Magnificat) 의주해서를쓰고구약시편주석도시작했다. 찬미가주해서에서그는성모에대한자신의열렬한신심을보여주기도했다. 루터는 미사의오용 이라는소책자를발간해비텐베르크수도원의수도자들에게사제직과주교직이비성서적요소를담고있다고주장하면서미사를거부하도록했다. 성직자의독신생활은원래자발적선택의문제였는데교회법에의해서강요된의무로바뀌었다고비판했다. 수도서원 을통해서는수도자의서원이하느님의계명인사랑, 특히자녀의부모사랑에위배된다고주장했다. 수도생활과서원은그자체로나쁜것은아니지만이때문에인간의복음적자유를속박할수는없으며따라서종신서원이후라도언제든지수도생활을떠날수있는인간의근본적자유가있고이는신이인간에게부여한자유라고주장했다. 그동안비텐베르크에서는루터의개혁사상을따르는무리들이벌써부터루터의이론을직접실천하기시작했다. 이들은미사를없애고신부 [64] 보름스제국의회 143
144 들은결혼을하고수도자들은수도원을뛰쳐나왔다. 루터추종자들은비텐베르크곳곳에서매우과격하고극단적인설교를일삼았고이로인 해큰혼란이이어졌다 년 10 월비텐베르크성채성당의대부제인칼스타트는성직을포기하고양형영성체를도입하면서성화상공경을공격했다. 성탄절에는 제의도입지않고세속옷을입은채신자들에게성혈을영해주었다. 루터와같은수도회수사였던쯔빌링은미사와수도생활을강하게반대 하는강론을하면서수도자들이집으로돌아갈것을종용했고미사는제사가아니라고주장했다. 그로인해비텐베르크의학생들과주민들은성화상을파괴하고미사를봉헌하는사제를폭행했으며루터의 수도서원 에영향을받은아 우구스티노은수자회수도자들은속속수도원을떠나고일부지역에서는성직포기와환속이뒤따랐다. 급기야 1522 년초츠비카우 (Zwickau) 에서일부급진파들은자신들이신의계시를받았다면서세상종말이다가왔다고주장하는등혼란이극에달했다. 1522년 3월비텐베르크로돌아온루터는여전히옛날수사복을입고머리는삭발한채매일성당에서강론을하면서자신이처음시도한복음적자유를오용해새법을만들려고하는거짓개혁자들을질책하면서 약한양심의신자들을고려해서함부로개혁하지말것 을촉구했다. 그는미사제의도다시도입하고후에자신이신부개인미사의관례를없앨때까지는옛날교회의의식그대로를보존하려고했다. 그러자칼스타트는루터를 새교황 이라고공격하면서격렬한논쟁을벌였다. 결국루터는자기가오직성경만이유일한신앙의원천이며그리스도교신자는복음적자유를누리고있으므로성경을통해직접하느님의 말씀을듣는다고주장했으나다른개혁자들이각자나름대로의개혁을시도하자이를거짓개혁이라고공격한셈이다 년독일남서부지방에서발생한농민반란이살인과방화같은과격한행동으로나타남에따라루터는사회질서회복을위해제후들의 무력진압을요청하는글을발표했다. 이를통해민중중심의종교개혁이이제는세속군주주도의종교개혁으로변질됐고농민의패배로 끝난농민전쟁으로인해루터는보름스제국의회이후누렸던대중적지지를상실하게된다. 독일에서이어지던교회문제는정치쟁점화되어제국의회에서논의되기시작했다. 1526년열린제1회스파이어 (Speyer) 제국의회에서황제는공의회소집까지보름스칙령의시행을유보하고종교문제의결정권을루터를후원하는제후들에게위임하기로잠정결정했다. 이에따라작센과헷세 (Hesse) 에서는새교회령이반포돼국교회형태의연방교회가형성됐고가톨릭성직자들이추방됨으로써이지방들은신교화 ( 新敎化 ) 됐다. 하지만 1529년에열린제2차스파이어제국의회에서는황제의명령에따라루터파의교회개혁을중지하고보름스칙령을시행할것을결의했다. 이에대해신교파제후들은격렬하게항의 (Protest) 했고이때부터그들을프로테스탄트로부르게됐다 년 5 월루터의후원자였던프리드리히선제후가사망한뒤종교개혁의주도권은작센의제후에게서헷세의백작필립에게로옮겨졌고 필립공은 1529 년 10 월 1 일루터와츠빙글리양측신학자들을마르부르크로초대, 신학적대화를나누게해 마르부르크조항 15 개항중 성체의현존에관한항을제외한 14 개항에대해의견일치를봤다. [64] 보름스제국의회 144
145 [65] 아우크스부르크제국의회 :58 <== 가톨릭과프로테스탄트의대립이이어지자황제카알 5세는 1530년아우크스부르크에서제국의회를열었으나대립은계속됐다. 1555년아우크스부르크협정으로루터교는공식적으로인정됐고독일의분열은고정됐다. 사진은아우크스부르크시에있는성울리히와아프라성당. 가톨릭과루터교화해시도 1530년황제카알 5세는가톨릭과프로테스탄트의화해를위해아우크스부르크에서제국의회를소집한다. 신앙의대립은평화적인담판에서토의되고개혁이협의되지않으면안되는상황이었던것이다. 루터는이미파문을당해제국의법익을박탈당했기때문에의회에참석할수가없었고코부르크 (Coburg) 성에서프로테스탄트들과빈번하게서신을교환하면서배후에서협상을조정했다.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 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루터의동료이자친구인필립멜란히톤 (Philipp Melanchthon, 1497~1560) 이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 을제출했고그것이 1530 년 6 월 25 일의회에서낭독됐다. 종교개혁가중인문주의자였던멜란히톤은타협의자세를견지하던인물이었고자신이작성한새교리를실제로가톨릭과거의차이가없는것으로인식했다. 그래서그는신앙고백끝에이렇게덧붙였다. 이신조는가톨릭교리의전체안에존재한다. 보는바와같이저자가아는한거기에는성서나가톨릭또는로마교회에위반되는것은하나도없다 그에게논쟁의대상은신앙이아니라일부예식에서의몇가지개혁요구였던것이다. 이에대한반론으로가톨릭측에서는라이프치히토론회에서루터와논쟁을벌였던에크 (Johann Eck, 1486~1543) 를중심으로한신학자들이 아우크스부르크신앙고백에대한반론 을제출했다. 멜란히톤은그에대한대응으로다시 변호 (Apologia) 를저술했으며멜란히톤의이두가지저술은즉시루터교의권위있는신앙고백 서로공식적인상징이됐다. 양측은담판에서서로양보하려는자세를갖고있었고황제역시긍정적인결과를예상했다. 마침내 5 개조항만이논점으로남았는데그것은 평신도의양형영성체, 사제의결혼, 수도자의서원, 프로테스탄트제후들이약탈한교회재산의반환, 그리고미사의희생적성격에대한문 [65] 아우크스부르크제국의회 145
146 제였다. 멜란히톤은평신도의양형영성체와사제의결혼문제에대해가톨릭이양보한다면재일치를방해할것이아무것도없을것이라고말했다. 하지만루터는멜란히톤의양보를신랄하게비난하고모든토론을근본적으로거부했다. 멜란히톤은갈피를못잡았고담판은좌절됐다. 마침내 1530 년 9 월 23 일의회는종교담판이끝났음을결의, 선언하고프로테스탄트에게는 1531 년 4 월 15 일까지미결된문제에대해가톨릭 교리에동의하도록요구했다 년프로테스탄트제후들은비밀리에작센남부의슈말칼덴 (Schmalkalden) 에서동맹을체결하고세력을키워나갔다. 황제는때마침터키군의발칸침입에직면해의회의결의를관철할수있는시간과여력을갖지못했기때문에이들제후들의원조를얻기 위해그들과신앙문제에있어서공의회까지휴전할것을협정했다. 레겐스부르크제국의회 하지만공의회개최가계속미뤄짐에따라다시신학자와평신도사이의종교토론을통해독일의분열을종식시키자는것이합의됐다. 그에 따라요한에크, 멜란히톤등타협적성향의인물들이토론회에나서하게나우와, 보름스등에서예비회담을가진뒤 1541 년 4 월 5 일레겐스 부르크제국의회에서담판을벌이게된다. 그러나성사와교회에관한교리에서양측의노력은또다시무위로돌아갔다. 루터는물론칼빈도이담판을맹렬히비난했고레겐스부르크조약은결국양측의비위를다거슬렀다. 카알 5세는이제더이상협상으로문제가해결될수없다고생각했으며 1543년부터무력으로일치를강요하기시작했다. 그리고 1546년벌어진슈말칼덴전쟁은프로테스탄트제후측의패배로끝이났고황제는이러한군사적승리와함께주요적대자들과도이별하게됐다. 즉 1546년 2월 18일마르틴루터가세상을떠난데이어 1547년 1월 28일에는영국왕헨리 8세, 그리고 1547년 3월31일에는프랑스왕프랑소아 1세가사망했다. 교황과대립하는황제 황제는이제교황과대립하게됐다. 그는독일의종교문제를스스로해결하고자결심하고 1547 년아우크스부르크무장제국의회에자신의 해결책을제시했다. 여기서이듬해, 5 월 30 일자로완성된아우크스부르크잠정규정이공의회에서최종적인결정이나기까지통용되기로했 다. 하지만개신교에게평신도의양형영성체와사제결혼을양보하는한편, 교리면에서는가톨릭적인이규정은프로테스탄트나가톨릭모두로 부터반발을가져왔다. 여기에영주들의혁명이일어나황제는몰락했고독일종교문제의조정을자신의동생에게맡겼으며 1552 년파싸우 휴전조약이체결됐다. 결국가톨릭과프로테스탄트는 1555 년 9 월 25 일아우크스부르크협정을체결하게되는데여기서독일의가톨릭과루터파는동등한권리를갖 고공존하며영주들은자기영지의종교를자유로이결정할수있도록함으로써분열은고정됐다 년 95 개조발표로시작된분란은일단 끝났고루터파는종교적자유를얻게됐다. 하지만분쟁의불씨는계속남아있었고종교전쟁의시대가시작됐다. 마침내 30 년전쟁 (1618~1648) 이일어났고이전쟁은독일을외국군대 [65] 아우크스부르크제국의회 146
147 의싸움터로만들어마침내독일을황폐화시켰다. 루터교는협정체결이후빠른속도로전파됐는데 1560 년경부터 1570 년까지독일의 3 분의 2 가프로테스탄트로넘어갔다. 이후폴란드, 헝가 리, 보헤미아, 오스트리아에도전파됐고스칸디나비아지방들은완전히루터교로넘어갔다. [65] 아우크스부르크제국의회 147
148 [66] 츠빈글리와스위스의종교개혁 :03 <=== 그로스뮌스터성당 ( 왼쪽쌍둥이탑 ) 은스위스에서가장크고웅장한로마네스 크양식의성당이다. 츠빈글리가이곳에서설교한이유로 종교개혁의어머니교 회 라고불리기도한다. 성서만이원칙 급진개혁전개 영세중립국스위스의독창적이고특색있는도시들은방문객들로연중북적거린다. 그중에서도취리히는세계에서가장살기좋은곳으로꼽힌다. 유럽의여러도시에서볼수있듯이이곳에서도눈여겨볼만한성당과교회들이즐비하다. 1100년부터 1250년사이에지어진그로스뮌스터성당은스위스에서가장크고웅장한로마네스크양식의성당이다. 취리히를상징하는명물가운데하나인쌍둥이탑이있는이성당은스위스의대표적인종교개혁가가운데한사람인츠빈글리가 1519년부터이곳에서설교한이유로 종교개혁의어머니교회 라고불리기도한다. 츠빈글리의흔적은도시의여러곳에서발견된다. 리마트강변에있는바세르교회는후기고딕양식으로지어진건축물로교회앞에는츠빈글리의동상이있고근처에는그가살았던집이있다. 아름다운풍광, 한가롭고여유로운취리히는그러나 15세기말부터격렬한종교개혁의바람이잦을날없었고그한가운데츠빈글리와재세례파들이자리하고있다. 취리히에서발단했다는공통점을갖고있지만츠빈글리와재세례파를동일하게취급할수는없다. 이둘은루터가 광신자 로형용했듯이모두심령주의적경향을갖고있었다. 츠빈글리와칼빈, 재세례파는루터와마찬가지로성서중심, 신앙과의화의개념, 새로운교회상, 반가톨릭등의공통된기본원칙을갖고있었다. 하지만그들은각기고유의특징을지니고있으며따라서츠빈글리는단순히루터의아류로취급될수는없다. 츠빈글리는 1484 년토겐부르크의부유한가정에서태어나성직자인숙부로부터교육을받으며성장했다 년부터 1498 년까지바젤과베른 의학교에다녔고 1502 년까지빈에서공부한후끝으로바젤의인문주의학교에서 1506 년에수학을마쳤다. 그는바젤의인문주의자들과항상교분을나눴고그들과함께에라스무스에게서인문주의적인영향을받았다. 인문주의자들과사귀면서그는 스콜라신학에대한흥미를상실하고인문주의적사고방식을신학의영역에적용할수있는가능성을모색했다. 1506년콘스탄츠에서신부가되어글라루스의본당신부로지내는데그기간동안군종신부로스위스용병들을따라두차례전장에파견되기도했다. 1510년부터스위스용병제도를비판해왔던그는주요한수입원이기도했던용병수출에대한비판때문에아인지델른으로전임하게된다. 그자신의고백에따르면그는아인지델른에서불륜한생활을하기도했지만, 페스트로인해죽음의문턱을넘나들던경험과 1518년취리히 [66] 츠빈글리와스위스의종교개혁 148
149 대성당의주임사제를맡게된것이그를종교적, 교리적문제에있어서개방적인인물로변모시키는계기가됐다. 당시 성서주의 는새로운유행이었다. 취리히시의회는유행을따르려했고그를채용하면서성서에적합한설교를할임무를주었다. 인 문주의자로서그는이요구에기꺼이응했고 1522 년까지그의성서주해는완전히에라스무스적인특성을갖고있었다. 그러던중 1519 년라이프치히토론회가있은후그는처음으로루터에게관심을가지기시작했다. 그에대한루터의영향은사실미미한것 이었다 년그가제시한개혁안은루터와같은깊은개인적, 종교적투쟁과탐구에서가아니라실천적인문제로부터나온것이었다. 그는교회의 재계규정과사제의독신제를반대했다. 그는이미오래전부터부유한한과부와함께살았고 1524 년에는공개적으로결혼했다. 콘스탄츠의교구청이그를고발했을때그는주교와긴장관계에있던시의회의지지를유도해냈다. 시의회는두차례의공개토론회를열어츠빈글리가수도자들과성서원칙, 성화상공경, 미사에관해토론을벌이도록했다. 츠빈글리는이제 오직성서 (sola scriptura) 라는원칙을개혁과관련해새롭게해석했다. 성서적생활로돌아갈것을강조하면서그는급진적인개혁안을전개해모든예식과축성의폐지, 성당성화상의제거, 미사폐지, 수도회해산, 시립혼인재판소의설치등을주장했다 년그가미사대신루터파의성찬식을도입하려했을때시의회는중지를명령했다. 2 차토론회이후파문이일어나고있었고 1524 년 1 월 26 일스위스의 12 개동맹주들이가톨릭신앙의수호를내걸고취리히에대항해나섰다. 시의회는이러한압력에의해더이상개혁적조 치를취하려하지않았고츠빈글리가시의회의지시를따르자자신의신봉자들중과격한이들로부터격렬한저항에부딪히게됐다. 게다가유아세례문제를둘러싸고츠빈글리와그의신봉자들사이에는급격하게분열이일어나기시작했다. 과격파들은주체적인사고를할수없는유아들에대한세례가거짓이고무익하다고확신했다. 따라서아이들이자주적으로사고할수있을때까지세례를주지않았고마침내유아세례받은모든이들의은총을인정하지않았으며재세례의필요성을주장했다. 그러나츠빈글리는유아세례를고수했고이들로부터격렬한공격을받았다. 그러는동안에도츠빈글리는탁월한정치적역량을발휘해시의회의지지를바탕으로개혁조치들을추진해나갔고 1525년 4월당국에의해미사가폐지됐다. 같은시기인 1524년 4월 5개주에서는가톨릭의수호를위해연합체제를형성했고이듬해 1월동맹을맺어취리히에대항했다. 스위스의회는 1526년바덴에서종교토론회를개최해성체성사, 원죄, 연옥, 성화상공경, 성인공경, 계명에대한토론을벌였다. 의회는가톨릭을절대다수로옹호했지만이미오래전부터츠빈글리의영향하에있던취리히는판결을거부했다. 취리히는영향력을다른주로확대시켜 1528 년베른을개혁정책으로이끈데이어콘스탄츠, 상트갈른, 바젤, 스트라스부르크까지도이에가 세했다. 가톨릭의 5 개주도프라이부르크, 발리스와더불어프로테스탄티즘을저지하기위해연합했고결국 1529 년 6 월, 1531 년 10 월에전쟁 이발발했다. 이전쟁은가톨릭이승리했고츠빈글리는 1531 년 10 월 11 일전사했다. [66] 츠빈글리와스위스의종교개혁 149
150 [67] 칼빈의개혁운동 :06 <=== 플랑드르의판화. 칼빈주의자들이가톨릭교회의성상을부수 는모습. 사도시대의순수로돌아가자 만년설의알프스, 아름다운호숫가도시, 때묻지않은자연, 그리고 그속에서세상어떤불화와도어울리지않을듯한여유있는사람 들. 스위스를거론할때면떠올리는모습들이다. 하지만그런전형적인이미지와는조금다른스위스를만날수있는 곳이제네바이다. 지리적으로는스위스에서삐죽얼굴을내밀고프랑스령내에파묻혀있는형상, 그래서인지불어가통용되고전체적인도 시분위기도프랑스문화의흔적을안고있는듯하다. 하지만누가뭐라해도이곳은연중으로전세계의굵직한외교적활동들이이뤄지는곳이고 16 세기에는루터이후가장큰영향력을발휘한 칼빈이활동함으로써스위스의종교개혁운동에중심이됐던지역이다. 교회와갈등 칼빈은 1509 년프랑스느와용의중산층가정에서태어났다. 이곳주교좌성당참사회의재산관리인을지냈던아버지는모종의불화로인해 참사회, 주교와소송을하게됐고 1531 년파문된채세상을떠났다. 같은무렵보좌신부였던그의형도교회와틈이벌어지고병자성사조차 받지않은채죽음을맞았다 년파리로건너간그는 1528 년까지신학을공부한뒤오를레앙과부르쥬에서법학을공부했다 년경부터성직과신앙에회의를갖기 시작한그는 1531 년부친이사망하자파리로돌아와인문주의연구에몰두했다 년에라스무스와루터를인용한이단적강연의초안을잡았다는혐의를받고은신하면서칼빈은이른바 돌연한개종 의시기를맞는 다. 교회를초창기사도시대의순수성으로복귀시켜야한다는사명감에불탄그는급기야가톨릭과결별하고프로테스탄트가된다 년과 1535 년사이의겨울에그는슈트라스부르크를거쳐바젤에이르고거기에서그뤼네우스, 뮈코니우스부쩌, 카피토등을만나본격 적인개혁가로활동하기시작했다. 이듬해그는저유명한 그리스도교요강 (Institutio religionionis Christianae ) 을작성해처음에는익명으로다음해에는자신의이름 [67] 칼빈의개혁운동 150
151 으로바젤에서출판한다. 이저서는박해받는프랑스의프로테스탄트를변호하는저술이었는데그후여러차례수정보완되면서그의신학 사상의근본적인면모를담고있다. 이저술에서그는참된교회는하느님말씀의순수한설교요성사의올바른관리이므로기성교회의가 시적인모습은필요하지않다고주장했다. 완전한결별 그가슈트라스부르크로돌아가기위해잠시제네바에들렀을때그는빌헬름파렐 (1489~1565) 을만나고그의청을받아들여제네바에머물게 된다. 인구 1 만 3000 명의도시제네바의시민들은자치권을얻기위해이웃도시베른의프로테스탄트들의도움을받아투쟁하고있었다. 칼빈은로마서주해와설교를통해종교적영향력을행사하기시작했고시참사회에 신정정치 사상에바탕을둔엄격한개혁안을담은규정을제출하는등가톨릭세력의반발을샀다. 결국 1538년그는파렐과함께추방돼슈트라스부르크로돌아가신학교에서강의를맡고부쩌 (Martin Butzer, 1491~1551) 등과친교를맺으면서종교개혁가로성장했다. 그는당시슈트라스부르크를대표해프랑크푸르트, 하게나우, 보름스, 레겐스부르크등의종교토론회에참석했고독일의종교개혁가들과도만났다 년칼빈은자신의신봉자들이다시권력을장악하게됨에따라다시제네바로돌아가게되는데그에앞서그는제네바를가톨릭안에머 물도록요구했던사도레토추기경과논쟁을벌였다 년저술한 추기경사도레토에게보내는서한 에서그는가톨릭과완전히결별하 고교회, 의화, 성사에관한자신의고유한사상을결정적으로피력했다. 개혁의중심 제네바로돌아온그는그후 14 년동안 신정정치 를철저하게구현하려했다. 이로부터이상적인신앙적도시국가를향한그의여정이 시작됐다. 교회와세속의법규는긴밀하게조립됐고제네바시민들의사생활은물론오락과여흥까지도법률로금지되고목사와장로들로구성된조직 은마음대로시민들의사생활을파악하고품행을감독했다. 교회의처벌을두려워하지않는사람들은시의회에넘겨속권의처벌을받게했 다. 과도한엄격성으로빚어진자유주의자들의반발은첫 5 년동안무려 56 건의사형선고와 78 건의추방등혹독한진압으로굴복됐다. 신국형성 그리하여 1555 년까지엄격하게조직된 신국 ( 神國 ) 이형성됐고제네바는새로개혁된교회의중심지로자리잡았다 년에설립된신학 교는곧비텐베르크를능가해수많은설교가와교사들의양성소가됐고이들은칼빈의교회제도와신학설을전유럽에보급시켰다. 그가통 치하는동안제네바에는인근지방으로부터많은피난민들이유입되기도했다. 칼빈은빼어난이론가이며체계적인조직가, 능수능란한정치적수완을겸비한교육자로서모든개혁가들중에서가장영향력있는저술가였다. 그는신학적통찰력과주석학적재능을바탕으로성서에관한주석들뿐만아니라개혁과예정에관한많은논문들을집필함으로써그의사상과이념은제네바를중심으로프랑스는물론네덜란드, 영국, 스코틀랜드, 독일의라인강지방으로전파됐다. 특히그의사상을지지하는프랑스의칼빈주의자들은위그노로불리며가톨릭과의충돌로위그노전쟁을일으켜낭트칙령을통해신앙의자유를얻어내기도했다 [67] 칼빈의개혁운동 151
152 말년에이르러중병에시달리면서도칼빈은설교를계속하면서교회국가의지도적위치를유지하다가 1564 년세상을떠났다. [67] 칼빈의개혁운동 152
153 [68] 헨리 8 세와영국의교회분열 :26 <== 헨리 8 세와에드워드 6 세.' 반교황적형태로그리라 ' 는 1548 년크 랜머대주교의지시이후그려진것으로추정된다. 가톨릭교회권위에도전 국왕이혼과결혼 다분히개인적문제가발단 39 개항신조인준, 성공회의국교회체제확립 영국에서의종교개혁은다른지역의종교개혁들과는달리그기원에 있어서종교적이라기보다는국왕의개인적인문제와교회정책적인문제에서시작됐다. 즉튜더왕조의헨리 8 세국왕의이혼과결혼문제를 둘러싼다분히개인적인문제가발단이됐다고할수있다. 헨리 7 세 (1485~1509) 에의해시작된튜더왕조 (1485~1603) 는강력한정부의힘을바탕으로평화와번영의시기를누렸다. 그러나헨리 8 세 (1509~1547) 에와서가톨릭교회의권위에대한도전에의해혼란에빠지기시작했다. 영국교회는이미 14 세기무렵부터교회의국교화추세가나타났다. 원칙적으로는교회의문제에대해서는교황이권한을지닌다고인정됐지 만실제로교회법은왕권에의해제한됐다. 에드워드 3 세 (1327~1377) 는 성직임명제한법 (1351) 으로교황의성직자임명을제한했고성 직에대한분쟁에서교황청에상고하는것을금지한 상고금지법 (1353) 을발표했다. 하지만어느교황도이제한에저항하지못했다. 이러한국교화추세는영국교회가로마와단절하는데현실적인배경이됐다. 헨리 8 세의결혼문제를계기로발생한일련의사건들을통해 영국교회는종교개혁적성격을띤국가주의교회로발전했다. 하지만그위계제도나전례, 신심생활등에있어서는늘전통적, 가톨릭적 특성을간직했다. 헨리 8 세는원래아라곤왕가의캐서린과결혼했었다. 캐서린은 15 세때, 4 개월간헨리의형이자왕위계승자인 14 세의아서와결혼했었는데 중병을앓고있던아서가사망했고 1503 년, 교황으로부터관면을받은후 12 세의헨리와약혼했다 년헨리가즉위한뒤결혼식이거행 됐고 18 년동안의결혼생활에서 7 명의아이를두게된다. 나중에여왕이된메리 (1553~1558) 공주를제외하고는모두어려서사망하고헨리는정부인앤불린과의사이에적자를갖기를원했는데그녀는결혼에대한보장없이는이에응하지않았다. 1529년그는캐서린과의결혼무효선언을교황청에청원했지만 1531년교황글레멘스 7세 (1523~1534) 는의회와어떤법정에서도만일교황의명을어기면파문될것이라는위협아래왕의결혼을풀거나또는무효로선언하는것을금지했다. [68] 헨리 8 세와영국의교회분열 153
154 헨리는독자적으로행동할결심을하고토마스크랜머 (T. Cranmer, 1489~1556) 를캔터베리대주교로만든후궁정고문인크롬웰 (T. Cromwell, 1485~1540) 의도움을받아 1531 년영국성직자전체회의를개최하도록했다. 이회의를통해영국의성직자들은 그리스도의법이허용하는한국왕은영국교회와그성직자들의최고으뜸이며보호자 라고선언했 다 년에는 상소제한법 으로의회가어떤소송도교황청에제기하지못하도록했고 1534 년에는의회가국왕이영국교회에대한전 권을지녔다고규정한 수장령 ( 首長令 ) 을제정해교황청과의관계를단절하고자치권을행사하는국교회를탄생시켰다. 한편크랜머대주교는 1533 년 1 월비밀리에헨리를앤과결혼시켰고이어 1533 년 5 월 23 일캐서린과의결혼을무효로선언했다. 교황은 7 월 11 일파문을경고했고이듬해 5 월교회재판을통해헨리의캐서린과의결혼이유효함을확인한뒤 7 월헨리 8 세, 앤불린, 크랜머대주교 모두에게각각파문이내려졌다. 영국교회는여전히가톨릭체제를유지했다 년에헨리 8 세는수장령을거부하는수도자들을처형하고수도회를해산, 재산을압수했지 만 1539 년에는가톨릭교리와규율을담은 6 개항령 (Six Articles) 를반포하기도했다. 이러한상황을종합해볼때헨리 8 세의교회개 혁은종교적동기보다는개인적이며정치적목적에서비롯된것이었다. 1547년헨리 8세가사망한뒤셋째아내인시모어에게서태어난에드워드 6세 (1547~1553) 가 9세로왕위에오른뒤영국의프로테스탄트화가시작됐다. 외삼촌인에드워드시모어의섭정아래칼뱅주의성향의서머싯공과크랜머의주도로영국교회는프로테스탄트화하기시작해 1547년에성당에서성화상이철거되고교황권을반대하며국왕의수장권을지지하는설교를명하는국왕포고령들이반포됐다. 의회는 6개항령 을폐기했고크랜머가 1549년에작성한기도서와 1553년루터와칼뱅주의를절충한 42신조 는명백하게프로테스탄트적이었다. 영국교회는그러나 1553 년 7 월에드워드 6 세사망후즉위한메리 (Mary, 1553~1558) 여왕으로인해다시금가톨릭으로전환됐다. 캐서린에 게서태어난메리는가톨릭정신을바탕으로반교황적이고반가톨릭적인법령들을폐기하고친가톨릭교회정책을펼쳤다. 하지만메리여왕의교황청과의관계회복은영국국민의민족적자존심에상처를줌으로써반란이이어졌고 1558 년메리의사망으로가톨릭 복귀에대한희망은사라졌다. 메리에이어헨리 8 세와앤불린사이에서태어난엘리자베스 1 세 (1558~1603) 는왕위에올라종교분쟁을해결하고자했다 년여왕을 국가와교회의최고통치자로선언한개정된 수장령 과 예배통일법 이공포됐고메리시대에반포된법들은폐기됐다. 하지만엘리자베스 1 세는신학과전례에있어서프로테스탄트와가톨릭의중간을유지하려고했고 1563 년성직자회의는칼뱅주의적성향의 39 개항신조 를인준, 1571 년여왕의공포를거쳐영국교회의공식교리체제로자리잡았다. 이로써영국성공회의국교회체제가확립됐 다. [68] 헨리 8 세와영국의교회분열 154
155 [69] 트리엔트공의회 :31 <== 트리엔트공의회의제 1 차회기. 이공의회에서는 1960 년대까지 가톨릭교회내에서유효했던종교적. 실천적조항들이경정됐다 항상쇄신되어야할교회 (Ecclesia semper reformanda)! 2천년교회역사를살펴보면가톨릭교회는이를언제나자신의소명으로인식하고실천해왔다. 15세기와 16세기, 교회를거슬러괴롭힌종교개혁의바람역시다른한편으로보면이거대한쇄신의바람이몰고온풍랑의한조각이라고할수있을것이다. 교회를거슬러서만이아니라교회를위한, 다시말해서교회내부로부터터져나오는쓰라린참회와불만이당시교회안에서봇물처럼쏟아졌다. 종교개혁자체도이러한교회의개혁요구의한표현이었다. 교회안에서진행된개혁운동은오랜시간이필요했다. 그러나그것은거대한흐름이었다. 교회개혁운동급물살 교회내적개혁운동은이미 15세기초부터시작됐다. 하지만문예부흥기의교황들은개혁을수행하기에는너무나허약했다. 마르티노 5세 (1417~1431), 비오 2세 (1458~1464), 식스토 6세 (1471~1484) 와알렉산델 6세 (1492~1503) 때에도개혁이시도됐고율리오 2세 (1503~1513) 는 1512년 8명으로구성된추기경위원회를통해개혁안을작성했다. 특히레오 10세 (1513~1521) 때에는가장근본적이고광범위한개혁안이제시됐다. 이러한개혁시도들이이뤄졌음에도불구하고정작그실천에있어서는성과를거두지못했다. 교황들이주도하는개혁안이제대로실천되지 못한가장중요한이유는바로교황들자신과교황청이개혁을관철할만한내적, 종교적역량을갖추지못했다는것이다. 교황의개혁이수행되지못함으로써이제는개혁을원하는사람들이직접개혁에나서게된다. 15 세기가톨릭교회안에서부정적이고어두운 면만을보려는사람들에게당시개혁의시도들은매우놀라운것이다. 독일에서는열정적이고유능한많은주교들이개혁을시도했고각수 도회안에서도개혁에열중했다. 수도회마다개혁파들이생겨났다. 황제카알 5 세는공의회개최를위해역대교황들과의투쟁에나섰다. 카알은진작부터공의회개최를주장했고루터역시이미 1518 년공의 회에공소했다 년보름스제국의회에서루터사건을공의회에서처리해야한다는의견이다시제기됐고독일의제후들은지속적으로공 의회개최를요구했다. [69] 트리엔트공의회 155
156 카알 5 세공의회주장 교황글레멘스 7 세 (1523~1534) 는공의회에대해두려움을가졌다. 공의회수위설에대한두려움과교황령의문제가그이유였다. 카알 5 세는 프랑스의프랑소아 1 세와의전쟁에서승리 (1526) 한뒤독일로가려했으나프랑소아 1 세가재차전쟁을선언하고교황이그편에섰다. 카알 5 세는교황이즉각동맹에서손을떼지않으면교황을공의회에출두시키겠다고위협한뒤군대를로마로진군시켰다 년 5 월 6 일로마를점령한난폭하고거친스페인군과독일용병들로인해강도와약탈과살인이몇주간동안영원한도시로마에만연 됐다. 로마약탈점령 (Sacco di Roma) 은대재난이었다. 그것은교황청을속죄와회개로경고하는하느님의시련이었고로마의문예부 흥활동을종결시킨동시에개혁을시작하게한계기가됐다. 바오로 3 세 (1534~1549) 교황에이르러비로소공의회와개혁에대한전망이밝아졌다. 교황은일련의개혁투사들을추기경으로임명하고개 혁위원회를구성했다 (1536). 마침내 1545 년 3 월 15 일소집된공의회첫회의가 12 월에이뤄졌다. 18 년간 3 개회기로실시 1545 년부터 1563 년까지약 18 년간에걸쳐이탈리아의북부트리엔트에서개최된이공의회는종교개혁으로혼란스러워진가톨릭교의를명백 히했고교회개혁을추진하는데크게기여했다. 공의회는 3 개회기로나눠진다. 제 1 회기 (1545~1548) 에서교부들은성서만이신앙의유일한원천이라는주장을이단으로배척하고성서와성전모두를신앙의원천으로확인 했다. 아울러성서의해석은교회만이권위를가짐을명백히하고프로테스탄트의은총절대설과정의가산설을배척하고원죄와의화에대한정의 를규정했다. 성사에대한교리도이때규정됐다. 첫회기는황제카알과교황사이의관계악화로중단됐다. 제2회기 (1551~1552) 는바오로 3세에이어율리오 3세교황이즉위해속개됐다. 1년여에걸친 2기에서는성체성사에서의그리스도의현존과실체변화, 고해성사, 병자성사, 사죄, 비밀고해, 보속등의교리가정의됐다. 2기에는 1기에참여하지않았던독일의주교들이참석했고프로테스탄트들도참석했다. 그런데이들은교황의권위를인정하지않았고지금까지의결정을취소할것을요구했다. 결국공통된토론의토대가없었음이명백해졌고교황은프로테스탄트의요구에대해더이상토의하는것을금했다. 이어독일제후들의봉기로공의회가중단됐다. 제3회기 (1562~1563) 는가장성과가많았다. 2기가끝난뒤 10년후에이어진제3기에서가장중요한심의대상은성체성사와미사, 사제서품, 혼인성사에관한것들이었고이에대한교리가규정됐다. 그외에도모든성인의통공, 성인유해의공경, 연옥, 대사, 성화상의사용, 교구신학교설립, 주교임명, 교구시노드, 강론등에대한교령이반포됐다. 199명의주교와 7명의대수도원장, 7명의수도회총장들은수많은교령과개혁령을서명해교황에게보냈다. 바오로 4세는 1564년 1월 26일모든교령과개혁령을예외없이승인했다. 예딘 (H. Jedin) 은공의회에대해 프로테스탄트의종교개혁에대한교회의최고교도직의대답이었다 고말했다. 그것은논쟁신학적인대 답이아니라교도직에의한가톨릭신앙교리에관한명확한선언이요, 교회의내부적인자각이며참된종교개혁이었다. [69] 트리엔트공의회 156
157 [70] 공의회이후성인시대 :34 종교개혁을거치면서신앙교리의혼란과교회관습, 전통의극심한혼돈상태에빠져들었던가톨릭교회는트리엔트공의회를거치면서교도직에의해신앙교리의명확한선언을이룸으로써쇄신의면모를일신하게된다. 그리고공의회의성과로교령들이반포되고실시됨으로써가톨릭교회의개혁작업은비로소충만하게된다. 이개혁의과정은아주오랜시간을요했으며집요할정도로철저하고개혁적인성장과성숙의과정이었다. 가톨릭신자대중을마치패전한군대처럼침체시켰던체념은서서히새로운투쟁정신과다시금각성된자아의식을바탕으로극복되기시작했다. 종교개혁과분열의충격이점차극복됐고교회에충실했던사람들은한때의좌절과 혼돈을넘어서자신들의신앙에대한기쁨을새삼느끼기시작했던것이다. 스페인의아빌라의성녀데레사 (1515~1582) 는 깊은신비사상과무한한사랑으로가르멜회를 쇄신했다. 종교개혁가들은너무나자주옛전통과지혜와가르침을하등의경외심없이마구대했다. 약간의기술적개선을통해교회를개혁할수있다고생각한일부개혁가들은광신적인신도에게서와마찬가지로참된역사적감각이결여돼있었다. 그럼으로써다소간의폐해를제거할수는있었지만거룩함과내적이고영적인회복을가져오지는못했다. 트리엔트공의회후기에있어서가톨릭교회는수많은위대한성인들을배출한다. 이를일컬어 성인들의시대 라고부르는것도그리무리 는아니다. 이들은대부분일정한시대적사명을지니고있었고실제로이들은시대적요청에대한하느님의응답이었던것이다. 성인교황비오 5 세 교회사안에서무려 300 년만에비오 5 세 (1566~1572) 에이르러우리는다시금성인교황을만난다. 성인으로서비오 5 세교황의존재는당시 머리의개혁 (reformatio in capite) 을통해교회쇄신의진지함을엿보게한다. 그는공의회의방침을따라교회를내적으로쇄신하는것을가장중요한교황의과제로여겼고따라서추기경단의개혁으로부터시작해전임 자인비오 4 세에의해시작된공의회의성과를실천하기위한위원회를구성해힘있게개혁을추진했다. 쇄신의정신에따라자신의직무를수행한주교들도많았다. 베로나의마태오지베르티, 볼로냐의가브리엘팔레오티, 그리고다른누구보다 도밀라노의대주교인가롤로보로메오 (1560~1597) 와같은주교들이그들이다. 특히가롤로대주교는교황비오 4 세의조카로교황을보좌하면서개혁의의지를굳게하는데많은영향을주었다. 그는자신의교구에서트 [70] 공의회이후성인시대 157
158 리엔트공의회의개혁의지를아주강력하게실현함으로써밀라노를넘어다른교구에까지개혁의바람을불러일으켰다. 수도회영적쇄신에노력 종교개혁을전후해엄청난동요와혼란에휩싸였던수도회의개혁이이시기에이르러절정에달했다. 베네딕도회, 프란치스코회, 도미니코 회, 아우구스티노회등역사가오랜수도회들은대부분 15 세기부터이미개혁의노력을지속해왔다. 개혁된수도회들과새로창설된수도회들은모두교회의개혁을위한작업에적극적인자세로임했으며사도직의소명이어떤것이든자신들 의활동에내적이고영적인생활의쇄신을결합시켰다. 그럼으로써가난한사람들을돕는빈민구제, 병자간호, 성직자양성, 교육등수도회 카리스마가어떤것이든그바탕에는내적으로쇄신된영성생활이밑거름이되었던것이다 년피렌체에서태어나 1551 년사제가된성필립보네리 (1515~1595) 는사제가된이듬해오라토리오회를창설했다. 성이냐시오로욜라 의친구로함께로마에서활동하던매혹적인사도였다. 스페인의아빌라의성녀데레사 (1515~1582) 는깊은신비사상과무한한사랑으로가르멜회를쇄신했을뿐만아니라 17 세기스페인과프랑스 의정신과신앙에도큰영향을미쳤다. 가르멜회원인십자가의성요한이그녀를도왔으며성녀안젤라메리치는 1535 년우르술라회을창설 했다. 천주의성요한 (1495~1550) 은 1572 년천주의성요한수도회를창설했고성가롤로보로메오 (1538~1584) 는 1578 년재속사제회를설립했고 렐리의성가밀로신부 (1550~1614) 는 1584 년중환자와임종자를위한가밀로회를창설했다. 샹탈의성녀요안나프란치스카프레미오 (1572~1641) 는 1610 년마리아방문수도회를세웠다. 17 세기중엽에는엄격한트라피스트회가탄생했다. 심오한신비사상가이며기도하는사람이자성인인로욜라의이냐시오 (1491~1556) 는 1540년예수회를세웠다. 파리에서 6명의동료들과함께창설한예수회의모토는 하느님의더큰영광을위하여 이다. 이냐시오성인이저술한 영신수련 은이목표를위한수행의지침이되고있다. 예수회는교육과학문을통한봉사와선교를목표로하고특히일반교육사업을일상적업무에넣은최초의수도회이다. 수련과활동에있어다방면에걸친학문적성취는중요한힘이되고있으며이를바탕으로하여 16세기이후유럽의고등교육의융성과교황을보좌하여가톨릭개혁운동에기여한바크다. 내적쇄신으로참된면모갖춰 트리엔트공의회와그이후시대는쇄신된교회와개혁의시대정신이발휘된위대한시기였다. 내적개혁에봉사하기위해짐꾼처럼고된 삶을살았던그들은참된개혁가였다. 그과정에서때로는쓰라린실패와좌절, 심하게는악의적인중상모략까지도감수해야했다. 그럼에도불구하고당시의가톨릭교회는역사상유례없는위대한성인들을배출했고이들의깊고심오한영성과내적쇄신을통해 항상 쇄신되어야할교회 (Ecclesia semper reformanda)! 로서의참된면모를지닐수있었다. [70] 공의회이후성인시대 158
159 [71] 반종교개혁 :57 제도. 조직정비 등개혁추진 쇄신운동의일환 교회영향력회복도모 독일중심, 반가톨릭적개혁확산저지한몫 16 세기가톨릭교회는한편으로는시대적인혼란과신앙교리, 교회관습과전통의 혼돈으로점철됐지만다른한편에서는이러한어려움을딛고일어설수있는개혁 과쇄신의노력이빛나던시기이기도했다. 15 세기초콘스탄츠공의회 (1414~1418) 는서구대이교사건 (1378~1417) 을종결지었 지만교회의쇄신이라는목표는달성하지못했다. 이는세속적인정치권력의간섭 과영향때문이기도했지만세속화된교회자체의약점때문이기도했다. 이러한현실을인식한교회는다양한계층에서복음과초기교회의정신으로돌아 가자는쇄신의목소리가높아졌다. 하지만그럼에도불구하고교회쇄신의여정은 쉽지않았고성과는미진했다. 30년전쟁. 가톨릭은 1631년마그데부르크에서승리함으로써개신교잔당들을소탕했다. 전투는중부유럽전역에서벌어졌는데, 이는그곳의교회가영적으로계속불안했음을보여주고있다. 그런가운데 15세기말에서 16세기에걸쳐루터등에의한종교개혁운동으로교회는분열됐고이분열을치유하려는운동이 16세기들어서본격적으로전개됐으며이러한가톨릭개혁을 19세기초역사가들은 반종교개혁 (Gegenreformation) 이라고불렀다. 16세기교회분열치유노력 하지만여기서우리가반드시구별해야할것은 가톨릭개혁 과 반종교개혁 이결코동일한역사적운동을가리키는것은아니라는 점이다. 이두가지개념은기본적으로가톨릭신앙에서분열된프로테스탄트와관련된역사적사건들을지칭하는 종교개혁 의개념을전제로한 다. 하지만반종교개혁이루터의시대에일어난가톨릭교회의모든쇄신운동전체를지칭하는것은아니다. 반종교개혁은루터의종교개혁과프로테스탄트에대응해가톨릭교회의영향력을회복하고교회의쇄신을이루기위해특정지역에한정돼 발생한운동이다. 하지만교회의쇄신운동은이러한반종교개혁보다훨씬앞서이미시작된것이었기때문이다. 반종교개혁이일어나기이미오래전부터교회안에서는쇄신을열망하는수많은주교와수도자, 평신도들이각자자신의위치에서거룩한 생활을하면서교회쇄신을위한다각적인노력을기울여왔다. [71] 반종교개혁 159
160 가톨릭교회의쇄신운동은루터의종교개혁이전부터이탈리아와스페인이중심이되어점차전체교회로확산됐지만반종교개혁은루터의종교개혁이후에생겨난것으로반가톨릭적인개혁운동의확산을저지하고가톨릭교회의가르침을명확히하려고했다. 반종교개혁은특히가톨릭교회의내외적인개혁을정치적으로후원했으며정치적결속을공고히하고잃어버린교회의영향력과영토회복을도모하기도했다. 그런의미에서반종교개혁을수행한대표적인나라가독일이었다. 개혁중추는 예수회 가톨릭교회는날로거세지던프로테스탄트의반가톨릭적인가르침들을논박하고정통신앙교리를재확인함으로써프로테스탄트로돌아선 사람들을다시금교회의품안으로끌어안기위해노력했다. 독일에서가톨릭교회가침체를거듭하고있을때 1560 년경부터여러곳에서활발하게프로테스탄트에반대하는운동이일어나기시작했다. 하지만이러한움직임은오직프로테스탄트에대항하는투쟁으로서만인식되어서는안될것이다. 즉이운동은가톨릭교회안에서이미지 속되고있던개혁운동과보조를맞춰진행됐다. 교황청은공의회에서결의한것을각지역교회가충분히이해하고과감하게실행하도록촉구했고교황으로부터쇄신의주역으로각별한관심 을받던예수회는 16 세기가톨릭개혁운동의중추가됐다. 예수회는특히영성생활지도와선교활동, 자선사업, 청소년교육과신학연구 등을통해독일에서반종교개혁과가톨릭신앙복구의원동력이었다. 이러한운동은독일뿐만아니라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폴란드, 헝가리등여러유럽제국에서거의동시에나타났다. 독일의가톨릭제후들은새롭게변모하는가톨릭교회의모습에고무돼쇄신을실행했고자기들의영지안에서가톨릭만을인정했다. 이에 따라가톨릭제후들이통치하는지역에서프로테스탄트교회가확산되면서정치적종교적갈등이야기됐고 1555 년아우크스부르크종교회의 를통해제국의가톨릭제후들은자기영토안에서가톨릭신앙만을인정하도록허용됐다. 합스부르크가의헝가리왕도동유럽에프로테스탄트가확산되는것을억제했고신성로마제국의페르디난드 1 세 (1556~1564) 와페르디난드 2 세 (1619~1637) 도제국전체를가톨릭신앙의전통대로수호했다 년페르디난드 2 세가보헤미아의왕이됐을때프로테스탄트를억제하려함으로써 30 년전쟁 (1618~1648) 이일어났다. 베스트팔렌조약으 로전쟁이끝났을때정치적으로는독일황제의권위가실추됐고종교적으로는가톨릭과프로테스탄트모두동등한권리를갖는데합의함으 로써적어도형식적으로는반종교개혁과종교분쟁이종결됐다. 전체교회의쇄신을위한역사적인물결을가리키는용어는 가톨릭쇄신운동 이적절할것이다. 반종교개혁운동은대부분의경우특정 지역의한정된지역에서일어난운동이기때문이다. 반종교개혁이가톨릭교회의개혁과쇄신전체를의미하지는않지만그성과는적지않았다. 교회는제도와조직을정비함으로써개혁과쇄 신의발걸음을더욱힘차게내디딜수있었다. 하지만프로테스탄트측에서는반종교개혁으로인해가톨릭에대해더욱공격적이됐고첨예한종파적대립을야기했다. [71] 반종교개혁 160
161 [71] 반종교개혁 161
162 [72] 지리적발견과식민지포교 :03 교회, 원주민강제개종시켜 지난 2000년대희년 3월 12일, 교황요한바오로 2세는교회역사상처음으로하느님백성인교회구성원들의역사적과오에대해서공개적으로용서를청하는예식을거행했다. 교황은이자리에서교회의커다란과오중의하나로중세종교재판에서이교도들에대한박해, 십자군전쟁과함께 폭력을동원한원주민들의강제개종 에대해 진리의이름으로행한폭력 이라고고백했다. 불순한동기의선교 17세기지리상의발견과함께시작된서구열강의영토점령은정치적, 경제적, 군사적동기외에도자주잘못을드러낸종교적인열정에도크게기인했다. 가장난폭한 정복자 들까지도정복된민족들에게그리스도교를전파하는것을본래의의무로느꼈다. 지리상의발견에따른식민정책과강제적개종은원주민들에게그리스도교를착취자와압제자의종교로보이게했다. 사진은달리의작품 크리스토퍼콜롬버스의아메리카발견. 스도교최후의보루가됐다. 물론교회는자신의주님으로부터선교의사명을명백히받았다. 하지만그것이폭력을동반하고정치, 경제, 군사적인불순한동기와함께뒤섞임으로써교회의역사안에서부끄러운오점의기록을남기게된것이다. 지리적발견이시작되기바로전, 16세기종교개혁은서구교회가빈곤해지고축소되어가는과정에서만난최후의일격이었다. 대부분의북부지방을잃어버린후가톨릭교회는동남부유럽에국한됐고이탈리아와스페인이오랫동안유럽에서그리 바로이때위대한지리상의발견시대에있어서세계선교의새로운과제가교회에주어졌다. 15 세기중엽이래스페인과포르투갈은남쪽으 로항해를시작했다. 포르투갈은아프리카서해안을따라항해하면서 1486 년에희망봉에도달했다. 바스코다가마는 1498 년아프리카를돌아항해를계속해인도 에도달했다 년카브랄은브라질을발견했고도처에식민지가생겨났다. 마젤란은 1519~1522 년에걸쳐최초로세계일주항해를성공했 고 1516 년포르투갈의상인들은중국에, 1542~1543 년에는일본에도발을디뎠다. 스페인역시포르투갈못지않게성공을거둬특히제노바출신의콜럼버스는 1492 년이래아메리카를발견했다. 그는우선중미군도의섬 들을발견한후자신이인도에도착한것으로믿어그것을서인도로불렀다. 코르테스 (Hernan Cortes) 는 1519~1521 년에멕시코에도착했 고 1520 년에는칠레, 1525 년에는아르헨티나, 그리고 1532 년에는페루가발견되고정복됐다. [72] 지리적발견과식민지포교 162
163 민족과문화무시 이러한모든지리상의발견에서종교문제는중요한동기였다. 식민정책과강제적개종은원주민들에게그리스도교를착취자와압제자의종 교로보이게했다. 그들은정복과동시에이교를그지역에서근절시키고그리스도교신앙을강제로이식하는것을명예로여겼다. 정복자들 은늘선교사들을대동했고항상긴밀한협력관계를유지했다. 이러한선교정책은선교지자체에축복을주지못했고그리스도교가현지의민족과문화와유기적인융합에이르지못하게했다. 따라서선 교는식민지지배가확고하고현지종교가큰내적저항을보이지않는중미와남미지방에서만원할하게이뤄졌다. 인도, 중국, 일본등오 랜문화와전통을지닌나라에서는그리스도교가그기반을확고히할수없었다. 이러한선교활동에대해신학자와선교사들은상반된견해를보였다. 세풀베다 (Juan Gines de Sepulveda, 1490~1573) 는식민지지배를일종의의무로받아들였다. 하지만스페인의도미니코회선교사였던라스카사스 (Bartolom de Las Casas, 1474~1566) 는이러한생각에반대해수십년간인디언의인간다운취급과평화적인선교방법의도입을위해싸웠다. 스페인출신의도미니코회선교사비토리아 (Francisco de Vitoria, 1492~1549) 는라스카사스보다더명확하게식민지화의문제점을제기했다. 이처럼그리스도교의선교에있어서모든이교도들은죄의상태에있을뿐만아니라구원의길에서도벗어나있다는것이당시의대체적인 사고방식이었다. 교회는이에대해적극적으로반대의논리를전개했다고볼수는없다. 노예매매범죄규정 하지만그런중에도교황비오 2 세 (1458~1464) 는 1462 년에노예매매를중대한범죄로규정했고교황바오로 3 세 (1534~1549) 는 1537 년에발 표한서한에서신세계의식민지확장으로위협당하고있는원주민의존엄성을옹호했다. 하지만이러한교회의움직임들은실효를거두기 어려운것이당시의정치, 경제적상황이었다. 오늘날아시아에서그리스도교는여전히외래종교로간주되고있다. 인도나파키스탄등일부국가에서는걸핏하면자국민들에대한강제 개종혐의가외국인선교사들에게씌워지기일쑤이다. 이런자세는식민지배와강제개종시도가동일시됐던, 뿌리깊은역사적경험과도무 관하지않을것이다. 교회는 1960 년대이후제기된신식민주의에대해관심을표명하면서 교회는기아, 질병, 문맹, 빈곤, 국제간의부정, 과거정치적식민주의 의잔혹과같은경제적문화적신식민주의등에의해생명의극한적상황에로강요당하는 ( 교황권고 현대의복음선교 ) 많은사람들에게 해방을선포해야할의무를지니고있다고선언했다. 가톨릭교회가가진자, 권력자의종교일때복음의선포를가장한강제와억압이나타날수있다. 오늘우리교회는과연어디에서있는지 다시한번생각해볼필요가있다. 아직도비그리스도교인들은야만인들이며하위의사람들이고구원의길에서완전히벗어나있는사람들이 라는완고한오해가우리마음속에존재하지는않는지깊이성찰해야한다. [72] 지리적발견과식민지포교 163
164 [72] 지리적발견과식민지포교 164
165 [73] 중국선교와적응논쟁 :50 서양학문기술문물앞세워선교 예수회 제사는민속 신자수 27 만까지 교황청 적응주의 단죄로선교지는사멸 인류구원의보편적성사인가톨릭교회가고유의전통종교와문화를지닌동양인에게어떻게선포돼야하는지는지리상의발견을통해세계선교의새로운과제가주어진이래지금까지도여전히큰과제로남아있다. 마태오리치 (1552~1610) 가적응주의를채택하고놀라운성공을거뒀던중국의선교는비극적인운명을겪었다. 이탈리아의예수회회원으로천문학자요수학자였던리치는 1585년유럽주의의근시안적인승리는아시아선교지의사멸을의미했다. 오미켈레루이지에리 (1542~1607) 와함께중국남부지방에도착해중국늘날보편교회는중국선교를가장간절히염원하고있다. 사진은중정부의허락하에서중국진출에성공했고 1599년에는난징에서선교국교회의모습들. 활동을하다가 1601년황제만력제신종 (1572~1620) 의허가를받아북경에입성했다. 그는처음부터적응주의에따른선교방법을채택했다. 그리스도교가중국에서뿌리를내리기위해서는가능한한외래적요소를극소화할필요가있음을깨달았고처음부터중국인의사고방식과생활양식에적응하는프란치스코하비에르 (1506~1552) 의적응방식을채택했다. 서양의학문과기술, 문물을이용해중국지도층의서구에대한관심을불러일으킴으로써서양의새로운학문을수용하려는중국지배층의학자들과교분을가질수있었고그들의관할지역에서선교의허가를받아내고나아가서그들을입교시킬수있었다. 리치의사망당시중국지도층에서만 2000여명의신자들이있었다. 역시예수회원인아담샬 (1592~ 1666) 은고관의자리에오르고북경에공공연하게성당을세웠으며전국적인종교자유를획득하기에이르렀다. 그가사망했을때중국에는거의 27만여명의그리스도교신자가있었다. 그러나리치의이러한선교방법은몇가지심각한문제에봉착했다. 하나는신학용어문제로하느님에대한중국어명칭이었다. 즉경서에나오는 상제( 上帝 ) 혹은 천( 天 ) 을교회가채택할수있는가의물음이었다. 이에대해리치는 천주( 天主 ) 라는용어를사용했고상제 ( 上帝 ) 와천 ( 天 ) 도경서본래의의미는하느님을지칭하기때문에사용할수있다고믿었다. 배공제조 ( 拜孔祭祖 ), 즉공자를공경하고조상에게제사를드리는문제에대해리치는이를종교적의미를지니지않는민속으로규정하고중국가톨릭신자는이런의식을집전하거나참석할수있다고보았다. 수도회의편협한대립이런문제들은중국교회에서는생사가달린문제였다. 그런데서구국가들의정치적경쟁과선교수도회들의편협한대립은의례를둘러싼문제들을더욱복잡하게만들면서결국은이에대한격렬한논쟁을야기했다. 도미니코회와프란치스코회의선교사들은리치의적응주의적태도를지나친것으로간주하고리치와예수회원들을교황청에고발했다 년도미니코회의선교사모랄레스 (1597~1664) 는 17개항으로작성된질문서를교황청에제출했고 1645년교황인노첸시우스 10세는예수회의중국의례내용을잠정적으로금지했다. [73] 중국선교와적응논쟁 165
166 예수회는 1651년마르티노마르티니 (1614~1661) 를로마에파견해자신들의선교정책의필요성과정당성을역설했고 1656년교황청은알렉산더 7세의인가를얻어선교사들에게광범위한관면권을부여하는결정을내렸다. 도미니코회는다시 1645년의결정이 1656년의결정에의해효력이상실하는지질의했고교황청은이에대해두교령이모두사안에따라서적용될수있다고대답했다. 중국현지에서는예수회, 도미니코회, 프란치스코회대표들이모여 1656년의교령을따르기로결정했는데이후파리외방전교회가예수회의선교자세를반대하고나서면서사태는더욱악화됐다. 1693년파리외방전교회소속의샤를르매그로주교가자신의관할지역신부들에게일체의배공제조의식과상제, 천의용어사용을금지시키고교황청에특사파견을요청했다. 1701년교황청에서는신학자들이양측의주장을검토한뒤예수회의선교방법을단죄하고하느님을상제와천으로부르는것을금지해오직천주만을인정했으며배공제조와위패안치도금지시켰다. 교황클레멘스 11세는중국의례논쟁을마무리하기위해교황특사로샤를르매아르드드투르농을중국에파견했고 1704년적응주의의금지를다시확인했다. 이에대해중국황제강희제는교황특사의자세와거동에불만을표시하고매그로주교를추방했으며리치의선교정책을따르지않는외국선교사들에게중국을떠나라고명령했다. 황제는투르논이후파견된교황사절메자바르바에게이렇게신랄한비난을퍼부었다. 당신은당신의종교를파괴했습니다. 당신은이곳에사는유럽인들을비참하게했습니다. 벌써죽은오랜사람들의훌륭한이름을당신은더럽혔습니다 1715년교황은다시교령을반포해서 1704년의금지를재확인했고 1742년교황베네딕투스 14세도재차교서를통해모든적응주의에대해근본적인금지령을반포했다. 이유럽주의의근시안적인승리는아시아선교지의사멸을의미했다. 이어중국에서는그리스도교인들에대한오랜박해가시작됐다. 중국선교의기회가사라진것이다. 비오 11세와비오 19세가마침내중국그리스도교에대한중국의례금지령을철회했으나이미때는늦었고새로공산화된중국에서는구전통과의례가하등의역할을하지못했다. 중국공산화와함께선교지로서중국땅에는그리스도교의엄청난비극이발생했고지금에와서야중국선교는보편교회의오늘날가장간절한염원의대상으로남아있게됐다. [73] 중국선교와적응논쟁 166
167 [74] 갈릴레오갈릴레이 :21 신앙과과학의대표적갈등불러 1992년 10월 31일교황청과학원회의에참석한교황요한바오로 2세는 고통스러운오해와다시되풀이되어서는안될가톨릭교회와과학사이의비극적인상호이해부족에서비롯된것 이라고선언했다. 신앙과과학사이에벌어졌던역사적분쟁의종지부를찍은이선언은 그래도지구는돈다 라는말로유명한갈릴레오갈릴레이 (Galileo Galilei, 1564~1642) 사건을두고한것이다. 359년만에이뤄진위대한과학자갈릴레이에대한교회의태도는편견과선입견, 편협한교조주의가일궈낸부끄러운교회역사의한장면이었다. 갈릴레이가종교재판에회부돼지동설포기를수락한뒤혼잣말로중얼거렸다는말은사실이아니며 100년이지난뒤작가가지어낸말이라고한다. 하지만비록자신이한말은아닐지라도그말은그의심정을너무나잘드러내고있는것이었다. 갈릴레이와관련된일화는많다. 유명한것은피사의사탑에서행한실험에대한이야기이다. 이탑은대리석으로된 8층의종탑으로 1173년에시작해 1350년에완성됐갈릴레이는자신의연구에대한박해에도불구하고결다. 탑을세우는동안에지반이내려앉아이처럼기울어졌고그래서탑의무게를코가톨릭신앙을버리지않았다. 층마다올라갈수록달라지도록궁리를하면서공사를했다고한다. 갈릴레이는이사탑에서무게가다른물체는서로다른속도로떨어진다는아리스토텔레스의이론이틀리다는것을증명하겠다고발표했다. 흥미로운실험을보리라는기대로많은구경꾼들이모여들었다. 이실험은나무공과쇠공을탑위에서동시에떨어뜨려어느공이먼저떨어지는가를보려는것이었다. 2층에서 6층까지각층마다나무공과쇠공을동시에떨어뜨렸다. 두개의공은동시에땅바닥에떨어졌다. 그렇게각층마다 5번의낙하실험이진행됐고실험은끝났다. 구경꾼들은뭔가재미난것을보리라고기대했다가어이가없다는듯흩어졌다. 역사적인대실험이끝났지만찬사를보내는사람은아무도없었다. 물리학자, 수학자, 천문학자로실험적. 경험적과학방법의선구자로평가되는갈릴레이는이탈리아피사 (Pisa) 에서태어나피렌체인근의수도원에서시와음악, 미술과기술등의교육을받았다. 18세때인 1581년피사대학의학부에입학해의학을공부했으나수학과물리학에더흥미를느꼈고기하학에심취했다. 경제적어려움으로의학공부를포기한그는피렌체아카데미에서강의를하면서 1586년발표한논문으로명성을얻게된다. 1589년 25세의젊은나이로모교인피사대학에서수학강사가되는데여기서그는유명한피사의사탑낙하실험을했다. 하지만진보적인사고를가졌던그는취임 2년만에보수적인사람들과사이가벌어져사임하게된다. 1592년북이탈리아파도바 (Pado va) 대학교의수학교수로취임한그는이곳에서 18년동안재직하면서전유럽에명성을떨쳤고수많은학생들이문하로들어왔다. 그는이곳에서자유로운연구활동을하면서천문학, 수학, 물리학등광범위한연구를했고건축이나토목, 성의건축에도빼어난솜씨를발휘했다. 1609년에는그는네덜란드에서개발된망원경을개량해 32배율의망원경을제작했으며이를사용해처음으로천체관측에나섰다. 이로써그는달표면이고르지않다는것을발견했고목성의위성들을관측하기도했다. 특히그는일찍부터지구를포함한행성들이태양의주위를돈다는코페르니쿠스의이론을믿고있었는데, 자신의천체관측활동을통해이 [74] 갈릴레오갈릴레이 167
168 러한지동설을더욱확신하게됐다. 1610년자신의천체관측결과를 별들의사자 (The Starry Messenger) 라는제목으로출간하면서이는철학자들과천문학자들의격렬한논쟁을불러왔다. 1613년코페르니쿠스이론을지지한다는자신의입장을명백히하면서갈릴레이는격렬한반대를받게된다. 피사대학학장인델치와철학자콜롬베를비롯한많은신학자들은성서를근거로그의지동설을반박했다. 갈릴레이는이에대해성서가절대적진리임은분명하지만성서를문자그대로해석하는사람들의어리석음을논박했다. 교황청은 1616년교령을반포해코페르니쿠스의 천체궤도운행에관하여 를금서처분하고그의이론을주장하거나전파하는것을금지했다. 갈릴레이는그후피렌체인근에서은거하며연구에몰두하다가 1624년로마에가서교황으로부터교령을해제하는대신편파적토론을하지않는다는조건으로코페르니쿠스의학설에대한연구를허락받았다. 다시피렌체로돌아온그는 1632년프톨레마이오스와코페르니쿠스의학설을비교한 두주요우주관에대한대화 를발표해코페르니쿠스의지동설을옹호했다. 결국그는이로인해종교재판에회부됐고자신의주장을철회한다는선서를한후에야풀려날수있었다. 바로그때그는 그래도지구는돈다 라고말했다는것이다. 이책은 1633년금서처분됐다가 1822년해제됐다. 갈릴레이는그후에도 1642년 1월 8일세상을떠날때까지피렌체교외의자택에서엄중한감시속에서도연구를계속했고근대역학의출발점이된 두개의신 ( 新 ) 과학에관한대화 를완성해 1638년네덜란드에서비밀리에출간했다. 1636년시력을잃은후에도죽는날까지연구를계속했고자신의연구에대한박해에도불구하고결코가톨릭신앙을버리지않았던그였지만교회는그의장례식까지간섭해조사낭독도금하고갈릴레이일가의가족묘지에매장하는것도허락지않았으며비석까지도세우지못하도록했다. [74] 갈릴레오갈릴레이 168
169 [75 ] 아시아선교, 인도와일본 :23 위대한선교사하비에르등장 인도와일본선교역사의첫장을연것은위대한예수회선교사프란치스코하비에르 (1506~1552) 에의해서였다. 교황사절이자포르투갈왕요한 3세로부터위임을받아해외선교에나선그는 1542년인도고아에가서말라카에서성공적으로포교사업을펼쳤고 (1545~1547) 1549년에새로발견된일본으로건너가일본교회의초석을놓았다. 그는이어중국으로가던도중세상을떠났다. 인도는포르투갈의바스코다가마 (1460~1514) 가 1498년캘리컷에도착함으로써유럽과처음접하게됐고이후포르투갈은인도의향료무역을독점했다. 그후포르투갈은인도를군사적으로정복하고상업지를건설했다. 1580년포르투갈이스페인에점령된이후에는스페인인도와일본선교역사의첫장을연것은위대한예수회선교사프역시인도에진출했다. 정복자인포르투갈과스페인은국가적차원에란치스코하비에르에의해서였다. 사진은 1549년하비에르가첫발을서선교활동을적극후원했다. 디딘일본나가사키항. 인도선교인도에서원래선교활동의선구자는 1518년에가장먼저고아에수도원을설립한작은형제회였다. 하지만선교활동이본격적으로성과를얻기시작한것은하비에르의도착이후였다. 그는고아에도착한뒤남부지방의언어인타밀어로교리문답서를만들고주로낮은계층의사람들과접촉하면서봉사와헌신의모범을보임으로써선교활동을왕성하게펼쳐나갔다. 한편도미니코회는 1548년인도에도착했다. 도미니코회는코친과고아에수도원을세우고 1600년에는고아인근에철학과신학을가르치는대학을설립했다. 1572년에는아우구스티노회가진출해고아에대규모수도원을세웠고동부벵골지방의무슬림을상대로선교활동을했으며아우구스티노수녀회는 1606년고아에산타모니카수녀원을설립했다. 인도에서교계제도의발전은매우더디게이뤄졌다. 초대주교인후안이고아에도착한것이 1538년으로고아는 1558년에코친과말라카를포함하는대교구가됐다. 교회는정부의지원을받아자선소를전국 25개지역에설립하고교리교사를양성하는등선교활동을확대했다. 1572년경인도에는약 28만명의가톨릭신자가있었던것으로추정된다. 인도에서이처럼선교가성과를거둔것은인도의생활양식과사고방식에적응하는적응주의적인선교정책에서요인을찾을수있다. 이탈리아출신의예수회원인로베르토데노빌리 (1577~1656) 는마두라에파견돼산스크리트어와타밀어를배워서힌두인들에게익숙한언어로설교하고인도의고행자들처럼금욕적인생활을솔선수범하면서유럽인들을멀리하고힌두인처럼살아가려했다. 새로개종한사람들에게는그들이지니고있던모든인도종교의관습을직접적으로이교적이아닌한유지할수있도록허용했다. 전례와신자공동체생활에서도인도종교의관습을차용하는등모든종교문제에대해관용적으로대했다. 하지만이러한선교방식은곧교황청의제재를받았다. 17세기말이에대한논쟁이시작됐고 1744년교황베네딕토 14세에의해단죄됨으로써그리스도교는인도에서기반을잃었다. 일본선교인도에서선교활동의기반을구축하고일본으로떠난하비에르는 1549년 8월 15일고아에서입교한한일본인의안내를받아가고시마에입국했다. 일본에서는이때부터그리스도교신자는물론교회에관한모든것을포르투갈의발음을따라 기리시탄 이라고불렀다. 이기리 [75 ] 아시아선교, 인도와일본 169
170 시탄의교회사는이후 1858년개항장에서거류외국인들의그리스도교신앙활동이인정될때까지 300년간에걸친일본교회사를일컫는말이된다. 하비에르는 2년반동안일본에머물면서히라도, 교토, 야마구찌, 후나이등주로규우슈우와혼슈우서부지역의선교활동에힘썼다. 초창기불교적인문화와전통에젖은일본인들은하비에르일행을인도에서온천축승으로알았고하비에르역시불교적인용어를사용해일본인들에게교리를설명했다. 특히그는서양의새로운자연과학을일본에전달해그들의호감을얻었고큰영향을주었다. 선교사들에의해전달된유럽의새로운문물은전란에시달리던일본사회에새로운희망을주었다. 700여명의일본인들에게세례를주고중국으로떠난하비에르의뒤를이어토레스신부가적응주의노선과포르투갈상선의일본출입을선교활동과연계지으며선교활동에나섰다. 그는 18년동안약 3만여명에게세례를주고전국에 40여개의교회를세웠다. 또병원, 육아원, 양로원등을운영하면서서민대중들에게접근했다. 그뒤를이어카브랄신부는 1570년성직자회의를개최해일본선교방침을확정짓는한편오다노부나가와각지의기리시탄다이묘의후원으로교세를크게늘려나갔다. 이후 1580년경일본에는신자수가약 10만명정도까지늘어났다. 오다노부나가는서양문화를받아들이고불교세력을억누르기위해기리시탄을지원했고 1556년후나이에처음으로병원이세워지는등의료사업이확장되면서구호를받은가난한서민층에서많은입교자가생겨났다. 1579년예수회의동양순찰사발리냐노 (1538~1606) 의입국은일본선교의또다른전기를가져왔다. 1580년나가사키를예수회의근거지로삼고일본인에대한편견으로물의를빚던카브랄신부를출국시킨뒤일본의사정을고려한선교지침서를저술해교세를크게신장시켰다. 또인도관구에속했던일본교회를대목구로승격시키고포교체제를정비했다. [75 ] 아시아선교, 인도와일본 170
171 [76] 한국교회창립 :24 자발적으로받아들인신앙 이땅에빛을 여러분의사랑하는나라에그리스도신앙이들어온 200주년맞이를기쁨과고마움으로경축하면서, 여러분은하느님은총으로 이땅에빛을 가져오기로결의했습니다 ( 교황요한바오로 2세, 한국교회창설 200주년전국사목회의개회식에서 ) 교황요한바오로 2세는한국교회가창설된지 200주년을맞은지난 1984년한국을방문하고세계어느나라에서도그유례를찾아볼수없는, 평신도들에의해자발적으로신앙을찾아나섰던한국교회에경축의인사를했다. 이땅에빛을 이라는주제로열린 200주년기념행사들은한반도에복음의빛을비추게한하느님의섭리와선조들의뜨거운믿음을기리는뜻깊은자리들이었다. 실로한국교회의성립은기적에가까운일이었다. 이웃중국이나일본은물론이고아시아어느나라에서도복음의선포는서구로부터선교사들을통해전해진것이었다. 그렇기에일단의평신도지식인들의자발적인열정을통해전해진한국교회의역사는그자체로하느님의섭리요기적이라고할만하다. 하지만조선땅에그리스도교가들어오게된것은나름대로의역사적배경과사회적요인들이있음을학자들은지적하고있다. 여러사학자들은한국교회창립이지니고있는구세사적의미를강조하면서도그것이결코기적으로서만이아니라나름대로의역사적필연성을갖고있었음을설명한다. 역사적필연성도제기우선당시지리상의발견과이에따른서구사회의전세계탐험여행은 서세동점( 西勢東漸 ) 을초래했고이로써선교사들이중국과일본등이웃나라들에발을디딜수있었다. 임진왜란당시일본예수회는스페인출신의예수회원인세스페데스신부를조선남해안에파견해일본인천주교병사들을돌보게했는데그는아마도조선사람들에게도그리스도교를전하려했을것으로추정된다. 한편일본으로끌려간사람들중에서천주교에입교한이들이있을것으로보인다. 중국에서도선교사들은북경에왕래하는조선사신들을통해조선의선교에관심을갖고있었다. 서양문물을접한사신들은새로운지식에대한열망으로선교사들을찾았고선교사들은서양문물을이들에게전해주었다. 이처럼조선사신들을통해서양문물이처음으로조선에도입됐지만중국으로부터의선교노력은무위로돌아갔다. 하지만중국선교사들이한자로저술한교리서등천주교관련서적들은 17세기초엽부터계속조선에전해졌다. 천주교서적들은처음부터신앙의차원에서읽혀진것은아니다. 당시남인학자들은이서적들을탐구함으로써실학운동에자극을주는동시에서학이라는새로운학풍을낳게했다. 이미이수광, 유몽인, 이익등에서학문적인관심을바탕으로이뤄졌던천주교는이내홍유한, 권철신, 정약전, 이벽등에이르러서는주요한인생의문제를서학서에서찾고자하는시도를하게됐고이어기도와재계등으로천주교계명의일부를실천하기시작했다. 여기에서한국천주교가성립되는두번째배경을엿볼수있다. 18세기후반은급속한사회변동이일어나고있던때였다. 당시주류를이루던성리학에대한본격적인반성이일어나실학이등장했고사회변화의과정에서신분제도가무너졌다. 여기에심각한기근과전염병등자연재해를겪고정치문란으로인한탐관오리의횡행등으로사회적으로나개인적으로새로운가치체계에대한희구가지식인들을포함한사회전반에깃들었다. 1784년이승훈영세한국교회는마침내 1784년이승훈이북경에서영세하고돌아와이벽, 정약전등과함께신앙공동체를꾸림으로써태동하게된다. [76] 한국교회창립 171
172 부친을따라북경으로간이승훈은처음부터천주교를관심사로품고가지않았던것으로보인다. 이승훈이동지사편에북경으로간다는소식을들은이벽은그에게반드시선교사를찾아만나고영세를청한뒤성서와성물을갖고돌아와줄것을간곡히청했다. 이에따라이승훈은북경북당의그라몽신부를만나필요한교리를배우고베드로라는세례명으로영세한뒤돌아왔다. 이승훈은귀국후북경에서가져온성서와성물을바탕으로이벽과함께교리를연구하고이벽, 권일신, 김범우등가까운이들에게세례를베풀기시작했다. 이로써세례를받은신자들로구성된교회가탄생했던것이다. 이후한국천주교회는혹독한박해의시기를거치게된다. 조상제사문제에서부터본격화되기시작한한국천주교회의박해와그박해시기를거치면서도깊이뿌리를내리는순교의역사가바로한국교회사이다. 그리하여한국천주교회는평신도들의자발적인신앙수용과순교의역사를통해오늘날의성장을이루게됐고이제는아시아선교, 특별히초기교회복음을받아들였던중국교회에까지복음을선포하는명실상부한세계교회의일원으로서면모를갖추고있다. [76] 한국교회창립 172
173 [77] 갈리아주의 (Gallicanism) 태동 :26 신앙의분열이가져온붕괴의시기에이어트리엔트공의회를거친뒤다시금 교회의강력한중앙집권적시기가시작됐다. 종교개혁은교황직에위기를가져 왔으나그것은다른한편으로는또다른전기가되기도했다. 공의회통해교황직강화갈등과분열의어렵고힘든시기를거치면서교황직은공의회를통해쇄신되고강화됐다. 공회의에참석한교부들은교회를쇄신하고개혁하는작업을교황에게명확하게일임했다. 그로써가톨릭교회안에서교황의지도적인위치는분명하게인식됐고이에따라교회의모든생활에서교황의영향력은매우강력하게행사될수있었다. 이후교황청은개혁과감독과순찰의역할을하면서국가와교구들의내부사정에깊숙하게관여하고교황의재치권은대내외적으로증대됐다. 이러한중앙집권주의는시간이갈수록점점저항에부딪히게됐다. 각지역의주교들과제후들은이제교황의보호를도움이아니라후견, 간섭과관여로느끼기시작했다. 반교황주의성향태양왕루이 14세. 프랑스에서는루이 14세의절대주의적프랑스를의미하는라틴어형용사 갈리카누스(Gallicanus) 에서파생된통치아래반로마적이고, 국가주의교회적인경향이그절 갈리아주의(Gallicanism) 는이러한저항의가장대표적인움직임이었다. 정에도달했었다. 갈리아주의는 14세기무렵부터프랑스혁명때까지프랑스교회가자율권을주창하고교황권의행사를제한한반 ( 反 ) 교황주의성향의사상과운동을지칭한다. 이용어는 19세기파리시의회에서피에르피투 (Pierre Pithou, 1539~1596) 의영향을받은한법률가가교황지상주의에반대하고프랑스교회의자유를다룬논문에서사용함으로써널리알려지게됐다. 갈리아주의는교황의수위권을크게제한하는권리를 프랑스교회 (Ecclesia gallicana) 를위해요구했다. 갈리아주의는몇세기에걸쳐서여러가지형태로나타났지만그기본정신은프랑스국왕이국가질서에있어서자주권을행사하며공의회는교황보다우위에있고국왕과성직자는단합해교황청의프랑스간섭을제한한다는것이다. 중앙집권주의에대한저항이 17세기이래각국에서나타났고그것이프랑스에서결정적으로등장했다는것은우연이아니다. 그한가지동인이프랑스왕가의자존심에서드러난다. 그자존심은이미 754년카롤링가의프랑크국왕피핀 3세와교황스테파노 2세가동맹을맺고프랑크왕가가로마교회의보호자가됨으로써시작됐다. 이는프랑스국왕이국가교회를주장하는계기가됐고교황청은프랑스국왕이교회내정을간섭한다고반대했다. 교권과속권의충돌은교황보니파시오 8세 (1294~1303) 와필립 4세 (1285~1314) 사이에서표면화했고이투쟁이속권의승리로끝난뒤갈리아주의가구체화되기시작했다. 1398년샤를르 6세가전국공의회를통해교황에대한순명선서를해제하고교황과의관계를단절했다. 샤를르 7세는 1438년부르즈에서열린공의회에서법령을반포하고공의회우위설을내세우면서교황권의행사를국왕의통제를받게했고이로써프랑스교회는교황의관할권에서벗어난국가교회의성격을띠게됐다. [77] 갈리아주의 (Gallicanism) 태동 173
174 프랑스교회의자유 주장이후 1600년부터 1800년사이에교회를심하게괴롭힌여러가지움직임들이모두프랑스에서일어났다. 그것은갈리아주의를포함해국가절대주의, 얀세니즘, 에피스코팔리즘등이다. 1594년파리시의회의법률가였던피에르피투는 53쪽에달하는 프랑스교회의자유 (Les libertes de l Eglise gallicane, 1638) 라는책자를발표했다. 그요지는프랑스왕이전국공의회를독자적으로소집하고프랑스에서의교황대사의재치권을제한하며교황에대해서도공의회에공소하고교황칙서의유효를왕의인가에매이게할수있는권한을갖는다는것이다. 얀세니즘의추종자들과반로마적인감정이점점더사태를악화시키기시작했다. 태양왕루이 14세 (1643~1715) 의절대주의적정체하에서반로마적이고국가주의교회적인경향이그절정에도달했었다. 1663년, 파리시의회는소르본느대학에교황의무류권을거부하고공의회우위설을주창하도록강요했고 1682년성직자총회에서 갈리아주의 4개조 가프랑스성직자들의이름으로정식으로공포됐다. 루이 14세가비록교황의항의로 1693년철회했지만실제로 19세기까지프랑스에서이선언은유효했다. 물론역대교황들은갈리아주의에대해공적으로단죄했다. 교황레오 10세는 1516년프랑스갈리아주의의공의회우위사상을비난했고알렉산델 6세는 1690년교서를통해갈리아주의를단죄했으며이는 1794년비오 6세교황으로부터재확인됐다. 갈리아주의는 1864년오류표 (Sylabus errorum) 에포함되고마침내제1차바티칸공의회에서교황의수위권과무류권이선언됨으로써교회의역사에서사라지게됐다. [77] 갈리아주의 (Gallicanism) 태동 174
175 [78] 에피스코팔리즘 :27 <== 에피스코팔리즘은교황이각개별주교보다는상위에있지만주교단전 체보다는하위에속한다는주장이다. 주교단이교황보다우위 주장 로마의중앙집권주의와교황의수위권에대한반대와저항은프랑스로부터결정적으로나타났다. 갈리아주의는 프랑스교회를위해 교황의수위권을크게제한하려고시도했다. 갈리아주의와함께국가절대주의, 얀세니즘, 에피스코팔리즘등다양한형태로나타난이같은저항은제1차바티칸공의회가열리기까지교회를격렬하고끈질지게괴롭혔다. 주교주의그중에서에피스코팔리즘 (Episco palismus) 은세계의전체주교들, 또는공의회에서의주교들이교황보다위에있다고주장하는이론과운동을지칭한다. 주교주의 또는 주교단우위설 로도불리는에피스코팔리즘은 13세기절정을이룬교황권의정치적발전에대한반동으로시작된것으로평가된다. 이러한반동에는아우구스티노까지거슬러올라가는교회중심적인고대의영성적인교회이념이 12세기영성주의자들에의해새롭게각성되고, 비슷한시기에존속된단체적교회이념에대한의식이주요한이유를형성했다. 여기에 13세기, 교황청교회법학자들이교황권력의증대와교황의전권을주장하는데대한반발이극단적인공의회우위설로발전했고 14 세기프랑스와독일에서국교회적이고왕권절대주의적인이념이관철됨으로써에피스코팔리즘은그본격적인틀을갖춘다. 서구대이교 (1378~1429) 로인한분열을극복하기위해콘스탄츠공의회 (1414~1418) 에서는공의회우위설이일치의해결책으로제시되기도했으나그것이갖는비상수단적인성격으로교부들의승인을얻지못했다. 이어바젤공의회 (1431~1437) 에서다시한번공의회우위설이제기됐으나교황권은다시금보편교회에대한재치권적인수위권을새롭게확립하고에피스코팔리즘을극복할수있었다. 그런데에피스코팔리즘은갈리아주의, 얀세니즘등과함께다시금재연돼나타났다. 갈리아주의가교황의재치권제한으로교구에서주교직의자주성을지키려는데그침으로써상대적으로온건했던데반해에피스코팔리즘은 페브로니우스주의 (Febroniani smus) 나 요셉주의 (Josephinismus) 에서볼수있듯이매우극단적인양상으로나타났다. 페브로니우스주의에피스코팔리즘의옹호자들은로마의중앙집권주의에대해자신들의주교직의자립을주장했다. 특히독일의경우이미 17세기에독일교회에큰위기를가져오게한다. 18세기에트리어의보좌주교인혼타임 (J. N. von Hontheim, 1701~ 1790) 은 유스티노페브로니우스 (J. Febronius) 라는가명으로 교회의상황과로마주교의적법한권한 (1763) 이라는저서를펴내면서공의회지상주의적이고국가주의교회적인원칙을기반으로에피스코팔리즘의사상을종합했다. [78] 에피스코팔리즘 175
176 당시유행하던계몽주의와얀세니즘의영향을받은그는이책에서교황의군주적인체제대신에교회를대표하는신자단과교회의최고기관인공의회로대치돼야한다고주장했다. 그는교황에게극히제한된통치권만을인정했고교황은각주교보다는상위에있지만주교전체보다는하위에속한다고주장했다. 즉교황은교회안에서수위권을행사하지만교회를초월해서수위권을행사하는것은아니며교황의모든결정은주교들의동의와밀접하게연결된다는것이다. 또한보편공의회역시교황보다우위에있고따라서교황을반대하는상소를공의회에제기할수있다는것이다. 페브로니우스주의라불린이사상은급속하게보급돼많은추종자가나타났다. 쾰른, 트리어, 마인츠, 짤츠부르크의독일대주교들은 1786년엠스회의에서전년에신설된뮌헨의교황대사관에대해공동으로대처할것을합의했다. 이들의목표는교황대사가대표하는교황의전권을근본적으로격퇴시키려는대담한의도였다. 같은해에열린피스토아교회회의에서는얀센주의적이고계몽주의적인극단주의자들에의해이러한이념을알리고이탈리아에서그기반을구축하려는시도가있었다. 요셉주의요셉주의는가톨릭국가인오스트리아에서큰성과를거뒀다. 요셉주의는계몽주의자인황제요제프 2세 (1780~1790) 의이름을따라요셉주의로불리게됐다. 그는자신의절대주의적인국가권력제도를이용해독재적인개혁을실시하고교회의재치권을자기권리로요구했으며수많은수도원과교회시설들을폐지했다. 그가사망한후에도이정책은 1850년까지무려 60년동안이나계속적용됐다. 비오 6세교황 (1775~1799) 이중재를위해직접비엔나를방문했을때그는쓰라린실망과심한모욕까지감수하지않을수없었다. 교황직의위신은이무렵또다시크게실추됐던것이다. 에피스코팔리즘적조류들은 19세기까지이어졌다. 하지만가톨릭의부흥과함께그의의를잃었고공격의주대상이었던교황재치권의수위권이제1차바티칸공의회에서신조로선언됨으로써결국에피스코팔리즘은역사의무대에서사라지게됐다. [78] 에피스코팔리즘 176
177 [79] 얀센주의 (Jansenism) :29 <== 얀센과루뱅대학교내 얀센의망루 ( 위 ). 아래는얀센주의의근거지였던포르루 아얄수녀원. 선택받은자만이구원 주장 극도로엄격한신앙생활과윤리강조 교회 극단적인원리주의 공식단죄 구원을위한하느님의은총과인간의의지와의관계는오랫동안신학의대상이었고정통신앙과이단적인사상과의많은논쟁을야기했던주제였다. 인간이구원되기위해서는오직하느님의은총만이필요하다는주장이나또는인간의의지로그것을얻을수있다는주장은모두잘못된것이다. 벨기에루뱅대학교의대표적인신학자였던얀센 (C. O. Jansen, 1585~ 1638) 에의해비롯된얀센주의는원죄로타락한인간은죄와욕정으로부터자유롭지못하고오직은총을통해서만자유로워질수있다고주장했다. 더욱이그은총은모든사람에게주어지는것이아니라오직선택된사람에게만주어진다고주장함으로써칼뱅파의영향, 특히예정설을되살렸으며일방적으로과장된아우구스티노의원죄설과은총설을가톨릭신학과신심에도입했다. 얀센주의추종자들은신앙생활에서는극도로엄격한생활을강조하고고해성사나성체성사를받기위해서는오랜준비를철저히할것을요구했다. 이러한경건한신앙생활에대한엄격성은교회가복음적인삶에서멀어지고세속의풍조에휩쓸리고있다고우려한많은열심한신자들로부터호응을받으며 19세기까지많은영향을미쳤다. 비록 1653년인노첸시오 10세교황 (1644~1655) 으로부터단죄되고이후에도여러교황들에의해단죄됐지만얀센주의는프랑스뿐만아니라이웃의여러나라들로파급되면서오랫동안신자들의신심생활, 특히윤리생활에큰영향을미쳤다. 아우구스티노사상강조얀센은 1602~1604년과 1607~ 1609년에루뱅대학교의학생이었다. 그는엄격한아우구스티노신학을견지하는벨기에신학자바유스 (Michel Bajus, 1513~1589) 의사상에영향을받아아우구스티노의신학사상에비상한관심을갖게된다. 바유스는은총에관한아우구스티노신학을극단적으로강조하면서이단적인교리를주장했다. 그의신학에심취해인간자유와그리스도에의한구원의보편성을충분히인지하지못한얀센은자신의저서 아우구스티노 에서첫째, 그리스도가인류를위해목숨을바쳤고둘째, 하느님이모든의인들에게계명과그것을수행할은총을주셨으며셋째, 선악에대한내적요청은필연적이라는가톨릭의정통신학을부정했다. 그는특수한신심과윤리, 도덕및신앙의엄격성을가장하고아우구스티노의원죄론과은총론을극단적으로이해해가톨릭의정통신학과신심에접목시키면서칼뱅파의예정설까지가미했다. 그는또인간이욕정의노예상태에서벗어나는길은오직은총으로만가능한데이은총은선택된사람에게만주어졌다고주장했다. 얀센은 1636년이프르 (Ypres) 의주교가되지만 2년뒤세상을떠났다. 그가죽은지 2년뒤정식으로얀센의신학사상이 아우구스티노 [79] 얀센주의 (Jansenism) 177
178 라는제목의책으로출간되면서그의이단적인신학사상은본격적으로파급되기시작했다. 그의사상이프랑스에전파되면서많은추종자들이생겨나기시작했는데그근거지는엄격한수도원으로이름난포르루아얄수녀원이었다. 얀센의추종자들가운데에는신심이깊은사람들이많아미지근한신앙생활을하는사람들에게좋은영향을미치기도했지만그엄격함이너무나지나쳤다. 과도한윤리성이요구됐고성사생활에서도지나치게엄격한규범과기준을요구해오히려고해성사나성체성사받는것을더어렵게만들었다. 얀센주의는자신들의이단적요소를논박하는예수회회원들을세속주의에야합한타락한집단이라고비난했다. 이같은혼란을보다못한프랑스교회의주교 83명은이에대해교황에게판결을요청했고인노첸시오 10세교황은 1653년은총과인간의지와의관계에대한얀센의다섯가지명제를단죄했다. 이처럼교회로부터공식적으로이단단죄를받았음에도불구하고얀센주의는여전히적지않은영향력을발휘하며내적으로존속했고후에는갈리아주의, 에피스코팔리즘과도연계돼정치성까지띠게됐다. 교황청과의오랜대립은교황직자체에대한격렬한대립으로까지야기됐는데이러한투쟁은오라토리오회의신부로극단적인갈리아주의자인케넬 (P. Quesnel, 1634~1719) 에의해절정에이르렀다. 루이 14세는 1710년그를프랑스에서추방했고포르루아얄수녀원을폐쇄했다. 그런데얀센주의자들은네덜란드에서지속됐고교황은 1713년교황칙서 우니제니투스(Unigenitus) 를발표해케넬의저서내용중 101개명제를단죄했다. 이에대해일부주교들은이문제를공의회에서다루자고주장했는데이로써얀센주의문제에이른바 프랑스교회의자유 문제가겹쳐새로운양상으로전개됐고이들은교황의수위권을격하시켜교황도공의회의결정에예속된다는교계제도적인면에서이교적인경향까지드러냈다. 교황은 1718년그들을파문했다. 얀센주의는보다엄격하게신앙생활을해야한다고생각하는일부신자들에게큰영향을미쳤다. 하지만보편성을존중하는가톨릭교회는적응이라는구실로신앙생활을이완시키거나, 순수성을수호한다는이유로극단적인원리주의를주장하는것모두를거부한다. 얀센주의는그런면에서오늘날의교회에도적지않은시사점이있음에주목해야할것이다. [79] 얀센주의 (Jansenism) 178
179 [80] 계몽주의와교회 :30 <== 계몽주의는베이컨 ( 위왼쪽부터시계방향 ) 과홉즈로부터시작돼칸트에이르기까지 다양한이론을낳으며그사상이더욱깊어졌다. 데카르트 ( 아래왼쪽 ) 의합리론은계몽주 의의사상적배경을이루기도했다. 대결속교회개혁의단초얻어 계몽이란인간이자기탓으로초래한미몽 ( 迷夢 ) 또는미성숙 ( 未成熟 ) 에서벗어나는것이다. 그리고미성숙이란자기자신의이성을남의도움없이는사용하지못하는것으로, 자기이성의결함때문이아니고다만자신의결단과용기의결함때문인경우이다 칸트는 계몽주의 라는말이혼란을일으키는무의미한개념이라는개탄에대해이렇게요약했다. 그는따라서계몽의목표는 첫째, 인간을그후견인 ( 後見人 ) 으로부터해방시키고둘째, 인간이자기이성을스스로자유롭게사용하도록가르치는일 이라고말했다. 그가간결하지만핵심적으로지적한것과같이계몽주의는인간이성의자율성과독자성을그핵심으로하고있다. 이성은그자체로진리의척도이며종교의신성함까지도계몽의대상으로삼기에이르렀다. 결국계몽주의는종교, 특히계시종교로서의그리스도교가인간에게타율과미성숙을강요한다고보아그일차적인비판의대상으로삼았다. 계몽주의와계시종교사이에는처음부터서로를용납할수없는적대적관계로시작됐던것이다. 그리스도교와적대적계몽주의는영국에서일어나프랑스를거쳐독일, 전유럽을휩쓸었다. 베이컨, 홉즈로부터시작돼칸트의 순수이성비판 까지계속되는동안이사조는새로운이론을낳고더깊은시각에서계몽사상이표출되기도했다. 영국에서는로크의계몽사상이허치슨, 흄, 티달, 콜린스, 기본등에게로이어졌고프랑스의계몽주의에영향을미쳤다. 이후프랑스의계몽주의는볼테르, 디드로, 루소, 달랑베르, 돌바크, 콩디약으로이어지면서활짝꽃을피웠고유물론적입장의이데올로기를주장하는사상가들에의해계승발전된계몽사상은이탈리아의 경험철학 으로자리를잡게된다. 독일에서는멘델스존, 니콜라이, 에베하르트, 헤르더등에이어칸트가탄생한다. 18세기후반까지유럽전역으로확산되던계몽주의는낭만주의에밀려나기시작했지만근대사안에서계몽주의의영향은엄청난것이었다. 그것은전진적인간정신의발전단계로서전유럽의사상을북남미까지포괄한마지막거대한정신운동이었으며낡은사고와생활양식에서중세기적속박을극복함으로써처음으로근대적발전을가능케했다. 학문과근세문화전체의자유로운발전은계몽사상에크게근거했던것이다. 역사. 사상. 문화적배경계몽주의가등장하게된배경을역사적으로살펴보면우선프랑스의루이 14세로대표되며 18세기까지계속된절대군주제를들수있다. 신의대리자인군주를거스르는것은독성죄였다. 그리고 17세기중반까지계속된종교개혁, 종교전쟁을들수있다. 종교를빙자해서로를살육하는것을목격한사람들은종교를근본적으로불신할빌미를주었고이는인간이성에삶의토대를두고자하는사조를야기했다. 사상적배경으로는근대의경험론과합리론을들수있다. 베이컨에서시작된경험론은잘못된표상, 즉우상들을제거하고인간의식에잠 [80] 계몽주의와교회 179
180 재한미신들을타파하려했다. 인식의유일한원천은경험이고귀납법으로얻어낸지식을바탕으로인간은자신의힘을기를수있다고했다. 데카르트에의해제기된합리론은생각하는존재로서의내이성으로명확하게인식되는것만이진리이며이성만이신뢰할수있는유일한것이었다. 문화적으로는 14세기와 15세기유럽에영향을준르네상스가그배경이됐다. 이전의학문과권위, 원리에반대하며갈릴레이가제시한새로운천체관은계몽주의를실제적으로자극했다. 계몽주의자들의유리주의 ( 唯理主義 ) 는계시종교인그리스도교, 특히가톨릭교회에가장크고가장위험한위기였다. 선천적이고따라서특별한계시는소용이없고오히려해로운것이라는 자연종교 의체계는존로크등에의해 이신론( 理神論 ) 의철학으로완성돼그리스도교에대항했다. 최고존재에대한지식, 영생의희망, 상선벌악에대한신앙등이참된종교의본질적핵심이었으며그리스도교역시이핵심으로축소돼야한다고주장했다. 이러한경향들은프랑스에서는반교회적이고투쟁적인모습으로나타났다. 그리하여그리스도교의신성한것들이풍자되고조소받았으며일부는 치욕적인것을분쇄하라 는구호와함께투쟁을선포했다. 이러한급진적인계몽주의는결코교회안에서용납될수없었다. 하지만계몽주의와교회는그러한긴장과적대관계를통해많은것을주고받을수있었다. 교회는계몽주의와대결하면서자신을좀더명백하게이해할수있었고계몽주의는계시종교와의대결에서참된계몽이란이성이전통이나권위, 계시종교등다른것을계몽하는데그치지않고자기자신을계몽해야한다는것을깨달았다. 계몽사상이주는의미를포착한많은성직자와평신도들은교회개혁을계몽사상에서착수할계획을세웠다. 물론다른많은가톨릭계몽주의자들의무분별하고과격한비판은모든운동을불신하게했고교회의발전에해악이됐다. 하지만그것이계몽사상이던져준과제와정당한요구를무의미하게하지는않는다. [80] 계몽주의와교회 180
181 [81] 프랑스혁명과교회 :34 <== 1793 년루이 16 세가시민들의손에의해단두대에서처형되고있다. 이처 럼프랑스교회도단두대위에올려져많은성직자들이처형당하고국가기반 위에교회가새롭게구성됐다. 프랑스교회봉건질서붕괴 넓은광장한가운데단위에높이세워진기요틴 (guillotine 단두대 ), 작두처럼시퍼렇게선날이덜컥하고떨어지면겹겹이둘러싼군중들의함성소리는더높아진다. 18세기말프랑스에서일어난혁명을거론하면떠올려지는이러한광경은프랑스혁명이얼마나혁신적이고광범위한영향을서양의역사에미쳤는지를알아차리게한다. 혁명의바람은온프랑스를휩쓸었고이어전유럽을뒤흔들었다. 그리고혁명은교회에도일대전환기를초래했다. 산업자본가의권력장악 1789년부터 1799년까지 10년간에걸쳐일어난혁명은중세봉건사회에서근대자본주의사회로의이행과정이면서동시에앙생레짐 (anciem regime 구체제 ) 아래에서꾸준하게성장해온산업자본가가봉건영주와성직자들의지배기반을파괴하고국가권력을장악한과정이었다. 하지만프랑스혁명이처음부터교회에적대적이지는않았다. 1789년 5월 5일루이 16세가귀족과성직자각각 300명, 시민대표 600명으로전국삼부회 ( 三部會 ) 를베르사이유에서개최했다. 평민위원들이 6월 13일그들만으로삼부회를영국식의회로개조하는결의를하고국민의회를구성했을때, 6월 23일 149명의주임신부와 4 명의주교가혁명적인제3신분, 즉시민들의편을들었다. 그해 7 월 14 일약 1 만명의시민들이시의동부요새이며정치범을수용하는바스티유감옥을습격했고진압을위해달려온군인들은시민들 에게압도돼아무런조치를취할수가없었다. 이때역시종교적인이해관계가결정적으로관련돼있지는않았다. 바스티유감옥습격사건은순식간에지방으로번져각지에서격렬한농민반란이일어났다. 왕성과성당과수도원들이습격을받았고전국 은공포분위기에휩싸였다. 사태를우려한국민의회는 1789 년 8 월 4 일봉건적신분제와영주제의폐지를단행했다. 여기서도성직자들은귀족들과함께그들의옛봉건제도의권리를포기하고시민과농민들을위해특전을단념했다. 이로써프랑스교회의중세적봉건질서전체가단번에붕괴됐다. 8월 5일날이새자국민의회는주님을찬미하는 떼데움 (Te Deum) 을노래했다. 모든신분의차별이사라졌고시민들은법앞에평등해졌다. 8월 27일시민권과인권이엄숙하게국법으로승인됐다. [81] 프랑스혁명과교회 181
182 재산문제로교회와대립 하지만교회는재산문제에서곧과격파와대립됐다. 혁명의직접적인원인의하나인국가재정의궁핍을메우기위해국민의회는모든교회 재산을징수하게된다 년 10 월 10 일의회에서탈레랑주교 (1754~1838) 는교회토지와재산의국가관리를주장하는파격적인제안을했고의회는즉각그제안 을받아들인다. 성직자들은이에항의해서회의장을떠나고분열이일어났다. 분위기는급변했다 년 2 월 13 일비자선적인모든수도회는폐지됐다. 4 월 14 일전교회재산의몰수와국유화에관한법률이반포됐고 7 월 12 일에는이른바 프랑스성직자공민헌장이라는새헌장이반포됐다. 이로써프랑스교회는로마와분리돼순전히국가적기반위에서새로구성됐고주교도 개신교와유다교도포함된선거단체에서선출됐다 년 11 월모든성직자들에대해성직자공민헌장에대한선서가강요됐다. 전성직자의 3 분의 2 가이선서를거부했고이에따라피비린 내나는박해가시작됐다. 이들비선서성직자들은처음으로혁명진영에서이탈한자들이됐다. 당시 4 만여명의성직자들이체포, 유배, 처 형됐다. 큰희생부른 9 월학살 1791 년 11 월이들에대해국외추방령을내렸고이듬해 9 월부터혐의자 1400 여명을파리감옥에서학살했다. 소위 9 월학살 때희생된많 은사람들이후에시복됐다. 이학살과더불어공포정치시대가도래했고이는 1795 년 10 월까지계속됐다 년 1 월 21 일루이 16 세가처형됐고이어 10 월에는왕비마 리앙트와네트도처형됐다. 공포정치는로베스피에르에의해계승됐다. 당시자코뱅당이주도하던프랑스정부는국민생활의여러면에서또다시새로운개혁을시도했는데, 가장먼저강력한반 ( 反 ) 그리스도교 운동이시작돼교회가폐쇄되고성상들이파괴됐다. 그리스도교의폐지가선언되고특히 이성 ( 理性 ) 숭배 가도입돼 11 월에는노틀담대 성당에서이성의여신을숭배하는축제가벌어지기도했다. 그러다가로베스피에르역시 1794 년 7 월 28 일단두대에서처형됨으로써공포정치는종언을고했고 1795 년 2 월 전례의자유 가보장돼종 교의자유도촉진됐다. 하지만 1797 년또다시공포정치가에게권력이넘어가고외국에서돌아온많은성직자들이체포, 처형됐다 년 11 월 9 일쿠데타로집권한나폴레옹에의해비로소그리스도교에대한박해는중지됐다. [81] 프랑스혁명과교회 182
183 [82] 나폴레옹과교회 :35 <== 퐁텐블로에서나폴레옹과교황비오 7세가만나고있다. 나폴레옹은로마와교황청을점령하고교황을감금했으며, 교황령을프랑스제국에합병시켰다. 이에교황은나폴레옹을파문하는교서를작성했다. 파문빌미로교황납치감금 프랑스혁명으로인해일어난프랑스교회의박해는젊은장군나폴 레옹보나파르트 (Napoleon Bonaparte) 가 1799 년 11 월 9 일쿠데타 를일으켜집권함으로써비로소막을내렸다 년부터 1814 년까지의유럽사는프랑스의역사였다. 그리고유럽의중심국가였던프랑스를나폴레옹이장악한이시기는 나폴레옹시 대 라고불러도될만큼나폴레옹과프랑스는당시유럽의중심이었다. 나폴레옹은종교에대해무관심했다. 그에게있어서종교는단지하나의정치적요소로간주됐다. 나폴레옹의시대에가톨릭교회의중심은교황비오 7세였다. 1742년이탈리아체세나에서태어난비오 7세는전임교황비오 6세가 1799년 8월프랑스에서사망한뒤그해말부터오스트리아의보호아래베니스에서무려 14주동안개최된교황선거에서만장일치로선출됐다. 그때가 1800년 3월 14일이다. 58 세에교황이된비오 7 세는박해와혼란속에서도교회는영원히존재한다는것을강조한회칙 디우사티스 (Diu Satis) 를그해 5 월 15 일반포했다. 이어그는 7 월 3 일여전히나폴레옹군대에의해점령된상태인로마로가교황좌에착좌했다. 교황비오 7 세는전쟁으로와해된교황청을내부적으로복원하는일을추진하는한편프랑스교회를재건하기위해나폴레옹과협상을시도 한다. 나폴레옹역시자신의통치를지지받기위해서는성직자들의협력뿐만아니라종교를이용할절대적인필요성을느끼고있었다. 그결과 1800 년 6 월부터시작된협상은 13 개월의오랜시간을거쳐이듬해 7 월 15 일프랑스와의정교조약체결로이어진다. 프랑스혁명의산물로, 프랑스교회를로마와분리시키고주교를개신교와유다교까지포함된선거단체에서뽑아야했던 성직자공민헌 장 은교황청과프랑스사이의관계를악화시키고국민의대다수를차지하는가톨릭신자들을불안하게만들었다. 이에나폴레옹은국가주의적교회정책의유지와함께교황청과의관계를개선하기위해이협약을체결하기에이른것이다. 이조약을통해교회전례의자유롭고공적인시행이보장됐으며교황청의관할권도인정됐다. 조약의전문에서는가톨릭적, 사도적, 로마적 종교인가톨릭이프랑스국민대다수의신앙임을확인했다. 교회는혁명정부에의해몰수, 매각된모든교회재산에대한권리를포기하는 대신국가는모든본당신부의봉급을지급하기로했으며프랑스내의각교구들을조정해새롭게설립하기로했다. [82] 나폴레옹과교회 183
184 비오 7세는많은반대를무릅쓰고조약의체결을비준했고교서를발표해종교적평화를위해주교들이사임할것을촉구, 135명의주교들이사임했으며프랑스정부의주교임명권을인정했다. 하지만 1802년, 프랑스는교황이정부허락없이프랑스에관할권을행사할수없다는내용을포함한 77개의 기초조항 을정교조약에첨부했다. 이는조약의일부를다시취소하는셈이었다. 일방적으로이뤄진이처사에대해비오 7세는강력히항의했으나아무소용이없었다. 비오 7세는이후줄곧나폴레옹으로부터더많은어려움을겪게된다. 1804년나폴레옹은자신을프랑스황제로선출하게한다. 교황이나폴레옹을도유 ( 塗油 ) 했고대관은나폴레옹자신이직접자신의손으로했다. 비오 7 세교황은이때에도기초조항들을수정하려시도했지만실패했고결국교황과나폴레옹의사이는급속도로악화됐다 년나폴레옹은다시금이탈리아의왕으로밀라노에서즉위식을거행하려했으며교황은전유럽교회를프랑스제국에예속시키려는나 폴레옹의종교정책을우려하게된다. 이러한염려는마침내나폴레옹이이혼법을포함한시민법을이탈리아왕국에도입하고교황령인안코 나를점령함으로써가시화됐다. 1808년 1월로마와교황청을점령하고교황을감금한나폴레옹은 3월에는교황청군대를나폴레옹군대에병합하고이듬해에는교황령을프랑스제국에합병하는칙령을발표했다. 이에교황비오 7세는 1809년 6월 10일나폴레옹을파문하는교서를작성했는데미완성인채유럽과프랑스에유포된이교서를빌미로나폴레옹은교황을납치, 1812년까지 3년동안감금했다. 교황은 1812년 6월파리근처의퐁텐블로로이송됐다. 나폴레옹은러시아원정에나섰으나실패하고 1813 년 10 월라이프치히전투에서패함에따라그의지배는무너지게됐다. 여기에 1814 년 3 월 연합군이파리에입성했다 년 1 월퐁텐블로를떠나사보나로돌아간교황은 1815 년 6 월 7 일대대적인환호를받으며로마로귀환했다. 이후빈회의 (1814~1815) 를 통해거의모든교황령이복구됐으며유럽의질서가다시금정리됐다. [82] 나폴레옹과교회 184
185 [83] 교황령의소멸과바티칸시국 :36 1 천년부침하다도시국가로 프랑스혁명으로교황령침탈시작 통일추구이탈리아에마침내병합 전세계가톨릭교회의중심지이자교황의세속적인권한과영적인권한이일치되어행사되고있는유일한장소바티칸시국은이탈리아의로마시내테베레강서쪽에있다. 성베드로광장이있는남동쪽을제외하고는모두중세와르네상스시대에세워진성벽으로둘러싸인 0.44km2규모이다. 이작은나라는 1929년교황청과이탈리아사이에맺어진라테란조약에의해세워졌다. 바티칸시국이탄생하게된역사적배경에는 1천여년에걸친교황령의길고긴부침의역사가깔려있다. 교황의세속적인지배권이미치는영토였던 교황령 (Papal states) 은 8세기중엽에형성돼 1870년까지근천년동안지속바티칸시국은 1929년라테란조약에의해세워졌다. 됐다. 처음에는교회가이미소유하고있던로마와그인근의토지, 즉이른바베드로세습령에롬바르디아족이점령했던광대한영지가추가됨으로써시작됐다. 교황령은중세를거쳐오면서북으로는토스카나, 파르마와모데나, 남으로는캄파냐와스폴레토까지확대됐다. 교황의아비뇽체류 (1305~ 1378) 를전후해한때는남부프랑스의일부지역까지확대되기도했고교황율리오 2세 (1503~1513) 에이르러정점을이루었다. 이후 17~18세기교황령은절대군주제로비교적평안을유지해왔다. 하지만 19세기에이르러상황은달라졌다. 프랑스혁명이일어나국제전쟁으로확대되면서북쪽의이탈리아가프랑스군에의해점령됐다. 이에따라이지역의교황령들이희생됐다. 1798년로마가점령되고나머지교황령도양도됐으며비오 6세는프랑스로끌려가세상을떠났다. 하지만상황은또다시비오 7세 (1800~ 1823) 때변했다. 나폴레옹이교황에게감행한폭력행위는오히려교황의도덕적권위를높여주었고 1815년빈회의에서나폴레옹에게빼앗겼던교황령이수복될수있었다. 하지만교황령은여전히교황직의수행에큰부담이될수밖에없었다. 프랑스혁명의여파는곳곳에서자유주의, 입헌주의, 민족주의적운동을불러왔고교황령에서는종래의철저한군주제를그대로고수하는것이불가능해졌다. 이탈리아는국가적통일을추구하고있었다. 레오 12세, 비오 8세, 그레고리오 16세등의교황들은이러한움직임들을박해, 이탈리아통일운동을자초했을뿐만아니라그들의적대감을불러왔다. 교황비오 9세 (1846~1878) 는처음에자유주의적이고애국적인성향으로간주됐었다. 1848년 3월 14일교황령에서헌법을제정해백성들이어느정도정치에참여할수있도록했을때대대적인환호와열광을받았다. 하지만교황령의초대수상이라고할수있는펠레그리노롯시백작이 1848년 11월민의원의회개회식에서과격파혁명가들에의해살해됐고교황은가에타로피신하는동시에로마에서는혁명이일어났다. 비오 9세교황은이러한일련의사태끝에태도를바꾸고구체제로돌아가게된다. 교황은프랑스군대의도움을받아로마와교황령을탈환했고종전의전제군주체제를회복했다. 이러한처사는반대자들을더욱자극했고빅토리오엠마누엘 2세 (1849~1878) 를정점으로하는이탈리아의민족적통합운동은걷잡을수없는눈사태로커져버렸다. 1859년로마냐가 [83] 교황령의소멸과바티칸시국 185
186 교황령에서떨어져나갔다. 교황의군대는카스텔피다르도에서패전한뒤 (1860년 9월 18일 ) 우므리아와마르케스도내어주어야했다. 엠마누엘 2세는 1861년 3월피렌체에서자신을이탈리아의왕으로선포했다. 하지만아직로마는프랑스군의점령으로이들의세력으로부터보호될수있었다. 가리발디의침입은 1862년과 1867년프랑스의지원으로격퇴할수있었다. 그러나 1870년독일이프랑스를침략하면서보불전쟁이일어나자프랑스는군대를로마에서철수시킬수밖에없었다. 프랑스군이로마의주둔지에서철수하자마자이탈리아의통일운동세력들은즉시로마로진군했고결국 1870년 9월 20일로마는이들에게점령됐으며이탈리아왕국에병합됐다. 이로써천년동안이어지던교황령은마침내종말을맞게됐다. 교황비오 9세는바티칸으로물러났다. 1871년 6월빅토리오엠마누엘은로마에거처를정했고교황의항의와파문은무시됐다. 새정부는 1871년 5월 13일자소위 보정법 을통해교황에게연금을보상으로지급하고일신상의불가침성및주권의인정과더불어모든영적기능의자유로운행사를보장했다. 하지만교황은이러한모든제의를일축하고계속항의하며 바티칸의포로 로머물렀다. 그는이탈리아의가톨릭신자들에게교령을통해정치선거에참여하는것을금지했지만이는오히려과격파들에게싸움터를넘겨주는결과를가져왔고이탈리아정부는점점더반교회적이됐다. 결국이 로마문제 의해결책은제1차세계대전후에야논의되기시작했고오랜협상끝에마침내 1929년 2월 11일교황비오 11세와이탈리아의파시스트정부간에라테란조약이맺어졌다. 교황은이로써종래의교황령을포기했고바티칸시국이라는상징적인도시국가의설립과더불어교황의세속주권이인정됨으로써원만한해결을보게됐다. 교황령의보유는교황이자신의영적임무를수행하는데있어서대체로부정적이었다는것이역사가들의평가이다. 교황령의상실은도리어교황의위신을향상시키고가톨릭세계의일치를더욱확고하게했다는것이그들의견해이다. [83] 교황령의소멸과바티칸시국 186
187 [84] 제 1 차바티칸공의회 :40 <== 교황의무류성과수위권을선언한공의회의결정에대해, 독일의일부주교들을제외하고는대부분의주교들이수용함에따라교황권은더욱강력해져중앙집권적인힘을발휘할수있게됐다. 사진은 1870년 7월 18일제1차바티칸공의회폐막식광경. 교황수위권과무류성승인 공의회우위설사라지고교황의영적권위는강화 1869 년교황비오 9 세에의해소집된제 1 차바티칸공의회는시초부터교황의무류성과수위권의신조화가이뤄질역사적배경속에서시작 됐다. 트리엔트공의회 (1548~63) 이후 300 년의시간이흐른뒤교회는중대한시점에도달했다. 프랑스대혁명은나폴레옹의승리로끝났으나, 계 몽주의와함께혁명이가져온자유주의의이념은전유럽에전파됐다. 교회는혁명과자유주의에대한혐오로보수적전제군주들과제휴했는데프랑스의 2 월혁명과오스트리아의 3 월혁명으로보수적전제군주 제가무너지면서유럽은자유주의와민족주의시대로들어섰다. 자유주의자였던교황은그러나민족주의자들의봉기로인해어려움을겪게되면서자유주의적인태도를바꾸었고, 교회가직면한정치적난 국을타개하기위한하나의해결책으로공의회의소집을염두에두고있었다. 비오교황은 1854 년 12 월 8 일 마리아가원죄없이잉태됐다 는오랜신앙을교의로선포했다. 여기서주목되는것은선포자체보다는오 히려선포방식이었다. 즉그것은공의회의결정이아니라교황좌의선언이었다. 여기서교황이어느정도까지공의회를거치지않고신앙진리를홀로결정하고선포할수있는가하는문제가새로토론되지않을수없었다. 물론이에대해교황은모든주교들에게의견을물었고성대하게선포할때추기경과주교들이참석했다. 하지만결정한것은결국교황혼자였다. 10년뒤인 1864년 12월 8일교황은가톨릭의입장에서배척돼야할 80개의오류를총괄한 오류표 (Syllabus) 를모든주교들에게보냈다. 여기에서범신론, 자연주의, 유리주의 ( 唯理主義 ), 나아가사회주의와공산주의, 교회와국가의관계등을포함해특히자유주의와진보주의가예리하게배척됐다. 한편서유럽에서는갈리아주의, 요셉주의, 페브로니우스주의, 얀센주의에대응해교황권강화를내세운교황지상주의가다시등장했다. 이들 은강력한교황중앙집권체제를주장하면서교권과속권을모두지닌교황의수위권과무류권을강력하게내세웠다. 하지만독일의될링거 [84] 제 1 차바티칸공의회 187
188 (Dollinger, 1799~1890) 를중심으로하는일단의지성인들은지성의자유를내세우면서교황의무류권과수위권에대해서반박하고공격했 다. 교황은 1869 년 6 월 29 일공의회개최를정식으로발표했다. 개막전부터찬반의첨예한대립을가져왔던무류성문제는 12 월 2 일공의회가 개막되고나서도계속해서그치지않았다. 이에따라서무류성문제는일단의제에서제외됐고교회에위협을주던세속주의사조들의문제부터먼저다루기시작했다. 1870년 4월 24 일만장일치로통과된가톨릭신앙에관한교의헌장 하느님의아들 (Dei Filius) 은창조주, 삼위일체, 천주강생, 계시, 신앙, 신앙과이성등의정통교리를제시했고이러한교리를거부하는유물론, 합리주의, 범신론, 이신론, 합리주의적성서관, 신앙주의, 회의론, 자유주의신학과같은사상들을오류로단죄했다. 이후공의회에서는무류성에대한의제가채택됐고교황은이의안을교회에관한헌장에서다루도록지시했다. 이에대해대다수의주교들은찬성했으나일부주교들은시기상으로부적절하다는이유를들어반대입장을표명했다. 하지만마침내 1870년 7월 18일성베드로대성전에서실시된표결을통해교황의무류성과수위권교리를담은교회에관한헌장 영원한목자 (Pastor Aeternus) 가 533대2로승인됐다. 제1차바티칸공의회최종표결을통해결정된이내용은베드로의후계자이며그리스도의대리자, 교회의최고권위자로서교황은전교회와각교구에대해완전히정상적이고직접적인주교권, 즉전교회의주교로서의교황이지니는수위권을지닌다는것이다. 아울러교황이직무의소유자로서 (ex cathedra), 전교회를위해신앙이나도덕에관해최종결정을내린다면그것은그자체로서 (ex sese) 그르칠수없다는무류성의교리를포함하고있었다. 교황의무류성과수위권을선언한공의회의결정에대해, 독일의일부주교들을제외하고는대부분의주교들이수용함에따라교황권은더욱강력해져중앙집권적인힘을발휘할수있게됐다. 이로써교회안에서는 13세기부터내려오던 공의회우위설 과갈리아주의가내세웠던국교회사상이사라지게됐다. 또교황령의붕괴와함께교황의속권은상실됐으나그영적인권위는오히려더욱강화됐고교황은이제세속군주가아니라세상안에서는정신적지도자로, 교회안에서는절대적인영적지도자로서의자리를확고히굳혔다. 하지만이교리결정이이뤄진직후공의회는갑자기중단될수밖에없었다. 프로이센 - 프랑스전쟁 (1870~1871) 이일어나많은교부들이 귀국해야했고 1870 년 9 월 20 일로마가민족주의자들에의해점령됨으로써공의회를계속할수없었다. 교황의수위권이정립됐으나주교직과의관계는정확히규정되지않았고단체성보다수위성이지배적이었다. 따라서이문제에대한보다충 분한논의가이뤄졌어야했지만결국유럽의혼란으로더이상논의되지못한채공의회는폐막됐고이문제는 1962 년제 2 차바티칸공의회에 와서야다뤄지게된다. [84] 제 1 차바티칸공의회 188
189 [85] 노동헌장 (Rerum Novarum) 반포 :46 <== 증기기관을필두로하는 18 세기중엽영국의산업혁명은자본가와노동자의대립 을격화시켰으며이는교황레오 13 세 ( 사진 ) 가 노동헌장 (Rerum Novarum) 을반포 하게한배경이됐다. 사회교리분야의대헌장 산업혁명후자본가. 사회주의기승 노동자권익과사회구조개선강조 교황비오 11세의 사십주년 과함께가톨릭사회회칙의초석을놓은문헌이바로교황레오 13세의 노동헌장 (Rerum Novarum) 이다. 문헌의첫머리를따 레룸노바룸 ( 새로운사태 ) 이라고불린이회칙은산업혁명이후사회발전에있어서자유방임적인자본주의와집단주의적사회주의가갖는문제점들을함께지적하면서복음적시각에바탕을둔대안을모색한혁명적인문헌이다. 특히 노동헌장 이제시한사회적전망의예언자적인면모는오늘날에와서더욱분명해졌다. 자본주의체제들은이미지난세기초에경제에대한국가의개입과통제를강화하면서노동조합을합법화했다. 그런가하면사회주의체제들은최근에와서자신들이반대했던사유재산제도와자유시장경제원리를도입하고경제와노동조합에대한국가의통제를축소하고있다. 그럼으로써자본주의자들과사회주의자들은자신들이각각비난하던 노동헌장 의노선에양쪽으로부터접근하고있는것이다. 가톨릭의입장에서보면이문헌이야말로사회문제에대해서그이전까지의자선적인접근에서벗어나, 가톨릭적해결이처음으로전개된것이라고할수있다. 18세기중엽영국에서시작된산업혁명은유럽의여러나라로확산됐다. 산업혁명은경제구조상의혁명적인변화를가져왔으며이는정치적, 사회적구조에도커다란변화를가져왔다. 특히공업화가촉진되면서도시에서는이른바 부르주아지 라고불리는자본가계급과 프롤레타리아트 라는노동자계급이형성됐다. 산업혁명이후의사회상은중세적경제질서가지배적이던사회와는근본적으로달랐다. 산업혁명이가져온많은사회문제, 특히열악한노동조건과생활환경, 노동자들의빈곤문제가축적되면서자본가와노동자의대립이격화됐다. 노동자문제는그야말로 새로운사태 에속했다. 이에가톨릭교회는이새로운사회적현상이어디에서부터기인했는지그원인을규명하고어떤방향으로이사회문제들을극복할수있는지를고민해야했다. 특별히노동자들의비참한삶을바라보면서교회는이들을어떻게든도와야했다. 한편으로자본가와노동자의대립와중에서사유재산제도의폐지와무신론, 계급투쟁을통한혁명을내세우는사회주의가유럽을휩쓸었다. 이러한풍조는가톨릭교회에근본적으로큰위협으로다가왔다. 교회는이러한사회주의적주장들을거부하고배격하는가운데, 교회의정통적인가르침들에충실하면서도노동자들의비참함을야기하는불의한사회구조를개선하고노동자들의권익을옹호하기위한노력을기울이기시작했다. 특별히독일을중심으로활발하게이루어진이러한시도들은교황레오 13세의 노동헌장 반포에이르러획기적인전환점을맞게된다. [85] 노동헌장 (Rerum Novarum) 반포 189
190 회칙이갖고있는근본적인관심은노동자의비참한처지였다. 레오 13세는무엇보다도노동자들이착취당한다는사실에주목했고그비참한처지가소수자본가들의생산수단독점때문임을분명히인식하고있었다. 문헌은자유경쟁과시장의원리를신봉하고경제에대한국가개입이나입법, 노동조합을반대한자유방임적자본주의, 사유재산제도를반대하고재산의국유화와국가의권력독점을주장한사회주의를모두반대했다. 문헌은나아가문제의해결책으로경제에대한국가의더욱강력한개입과입법, 그리고노동조합의육성과보호를내세웠다. 또한노동자와자본가가형제적사랑으로결합해야한다고강조했다. 계급간의적대감이자연적이라는주장에대해교황레오 13세는오류라고지적했다. 부자인자본가와가난한노동자는모두함께교회의자녀이며인간으로서의똑같은존엄성을갖고있다. 교회는복음의가르침에따라노동분규를종식시키거나완화시킬수있다. 또국가는공동선의실현을위해개입해야하며특히가난한노동자의권익을보호하기위해최선의노력을기울여야한다고문헌은강조했다. 문헌은이처럼제도적인개선의제안과함께궁극적으로마음의개혁을강조했다. 참된의미의그리스도교적윤리가재건돼야하며그핵심은바로사랑이다. 노동헌장은반포당시에는노동자계층이나사회주의자들, 자본가들로부터도큰호응을얻지못했다. 일부반대파로부터는반혁명적이라는비난을받기도했다. 하지만노동헌장은교회가감당하기어려운 새로운사태 에직면해서뒷걸음질치지않고사회문제, 노동자문제에대한적극적인지침과해결방법을모색하고제안했다는점에서가톨릭사회교리분야의대헌장이라고할만하다. 교황비오 11세는그런의미에서이문헌이모든그리스도교적사회활동의기초가되는대헌장이라고불렀고, 요한 23세교황은새로운사회와경제질서의대헌장으로평가했다. [85] 노동헌장 (Rerum Novarum) 반포 190
191 [86] 루르드성모발현 :48 회개하라! 내적치유이끌어 1858년 2월 11일프랑스남서부피레네산맥북쪽산기슭에위치한조그만도시루르드. 정오께어머니를대신해어린동생들을돌봐야했던 14세의벨라뎃다라는한어린소녀가나무와짐승의뼈를줍기위해강둑을따라가고있었다. 다른두명과함께마을에서서쪽으로 1km가량떨어진가브강변의동굴근처로간벨라뎃다는강을건너기위해신발을벗다가이상한소리를듣고놀라지않을수없었다. 주위를둘러봤지만사방은고요했고나무조차움직이지않았다. 그러다가벨라뎃다는마사비엘이라불리던동굴의움푹들어간자리에서머리위로빛이나고흰옷에하얀베일과파란색허리띠를두르 고, 양발위에는노란장미가있는, 한젊게보이는여인을보았다. 놀란벨라뎃다는미소를지어보이는부인앞에서잠시묵주기도를바치고집으로돌아왔다. 오는길에비밀을지켜줄것을약속받고언니에 게그이야기를해주었으나비밀은오래가지않았고어머니에게두소녀가모두혼찌검이났다. 벨라뎃다는그러나며칠뒤, 14 일과 18 일에또다시동굴앞으로갔고그여인에게서 앞으로 15 일동안매일이곳에와달라 는요청을받 고 19 일금요일부터 3 월 4 일목요일까지매일아침동굴로갔다. 그동안벨라뎃다는 2 월 22 일과 26 일을제외하고는매일여인을만났고여인은벨라뎃다에게메시지를전하기시작했다. 8 월 24 일여인은 회개하시오. 죄인을위해기도하시오 라고메시지를전했다. 여인의메시지는기도와보속, 그리고특히회개의증표가보이는회개가그핵심이었다. 여인의메시지는계속됐다. 회개하라! 회개하라! 회개하라! 죄인들의회개를위해무릎을꿇고땅에입을맞추어라 샘물을마시고씻어라 13 일째인 3 월 13 일에는 사제들에게알려이곳에사람들이몰려오게하고성당을짓게하라 고일렀다. 곧많은사람들이이이야기를전해듣고몰려들었다. 하지만기적을고대하던사람들은아무것도볼수가없었고실망해흩어졌다. 하지만마침내 3 월 25 일벨라뎃다가다시동굴로갔을때여인은처음으로자신의신분을밝혔다. 나는원죄없는잉태이다 (Imma culata Counceptio). 원죄없는잉태 성모마리아가잉태의첫순간부터원죄의모든흔적을받지않았다는원죄없는잉태의교리는이미오래전부터교회안에내려왔다. 초대 [86] 루르드성모발현 191
192 교회교부들은성모마리아를거룩하다고생각했으나원죄의흔적이없다고보지는않았다. 하지만시간이지나면서원죄없는잉태신심이발전하기시작했는데, 동방교회와는달리서방교회에는서서히퍼지면서수세기에걸쳐논의돼왔다. 그러다가마침내교황비오 9세는마리아가잉태의순간부터죄로부터벗어나있다는교의를선포했는데그것이바로루르드발현 4 년전이었다. 이에따라루르드의성모발현은교회의원죄없는잉태교의를확인시켜준사건이었다고할수있다. 그후벨라뎃다는 4월 7일과 7월 16일다시성모마리아의발현을볼수있었는데, 촛불이그녀의손가락위에서오랫동안타들어갔지만전혀상처를입지않는기적이있었다. 발현의진위에대한조사가시작됐다. 타르브교구장로랑스주교는벨라뎃다의증언, 기도와회개운동, 그리고많은치유기적에근거해 1862년 1월 18일발현을공식적으로인정했다. 천주의모친이마사비엘동굴에서벨라뎃다수비루에게 18번에걸쳐발현했다 는이인정서를통해주교는교구내신자들에게루르드성모에대한공경을허락했고메시지의요청에따라성당을동굴위에세울것을발표했다. 한국교회의수호성인 루르드의성모는한국교회와도깊은연관을갖고있다. 한국교회의수호성인은성요셉과함께원죄없이잉태되신성모이기도하려니와 한국신자들의각별한성모신심을바탕으로교회곳곳에성모님에대한깊은신심이깃들어있다. 예컨대한국교회에서는성모와관련된내용을수호자로모신본당이 200 군데가넘고그중에서도원죄없이잉태되신성모를수호자로정한 본당이 20 곳이넘는다. 오늘날루르드에는매년약 400만명에달하는순례객들이찾아온다. 수많은순례객들중에는환자들도많고이들중에병이치유되는사례들이종종보고됐다. 특히 1866년부터발간되는 루르드연보 에따르면 1905년까지모두 2천여건에달하는기적적인치유사실들이증명됐다. 루르드는프랑스에서두번째로호텔이많은지역이됐다. 400여개에가까운숙소들이들어서있고야영장소만도 20여개에달한다. 여름철이면이곳을찾은순례객들이보내는엽서가무려 700만장에달한다고한다. 특히루르드에는휠체어를타고온환자와늙고허약한노인들, 정신박약아나지체부자유아등전세계에서온환자들로붐빈다. 또이곳에서 봉사를하는자원봉사자들의수도갈수록늘어나고있다. 루르드는이처럼질병의치유를위해찾는사람들에게기적을선사하는곳이기도하지만무엇보다도회개와보속을통한내적치유라는참된 의미의기적을만들어내는순례지이다. [86] 루르드성모발현 192
193 [87] 제 1 차세계대전과교회 :51 평화중재. 후유증최소화노력 바티칸에포로 - 가족상봉사무소설치 전례쇄신. 성서보급. 평신도운동시작 20 세기에접어든세계는이전까지의역사상어느전쟁보다도참혹한대규모의전쟁을 겪게된다. 무려 3700 만명의사상자를낸전쟁을겪으면서인류는인간성에대한회의 와인간이성에대한불신을가슴속에품을수밖에없었다. 1914년부터 4년간에걸쳐유럽전역에서벌어진제1차세계대전의와중에가톨릭교회는나름대로국제평화를위한각고의노력을기울였지만비극을막을수는없었다. 하지만전쟁의체험이교회안팎에서놀라운변혁의동기가된것은그나름대로의역사적인의미가있었다고할수있다. 제1차세계대전은 3700만명의사상자를낸참혹한전쟁이었다. 전쟁이발발한당시의교황은베네딕도 15세 (1914~1922) 였다. 1914년 7월 23일오스트리아는세르비아에최후통첩을한데이어즉각세르비아와국교를단절하고 28일선전포고를했다. 전쟁이시작된후한달반가량지난 9월 6일새교황의착좌식이거행됐다. 이탈리아출신의자코모델라키에사추기경은서임된지불과석달도채안된 8월 20일전임교황비오 10세가서거함에따라열린교황선거에서신임교황으로선출됐다. 전쟁의와중에서아주검소하게착좌식을가진베네딕도 15세는 1차세계대전으로 인한폐허와혼란속에서평화를회복하기위해노력했고엄격한중립정책을추구하면서각교전국에평화협정체결을요청했다. 교황은 전쟁은아무쓸데없는대학살 이라고정의하면서공명정대하게민족과나라들간의증오와폭력을진정시키려고노력했다 년 8 월 1 일교황은공정한평화협정을위해교전국들에게미리준비한장문의평화협정안을제안했다. 이협정안의조항에는 무력에의하지않는, 권리에의한평화수립 군비축소 강제력에의한분쟁조정방지 해양의자유 배상금제도철폐 점령지역회복 영토권에대한우호적인검토등이포함돼있었다. 하지만그의이러한제의는철저하게무시됐다. 교전당사자들은정중하게교황의제안을검토했지만본래부터이중성을지니고있었으며전 혀받아들일마음의자세를갖고있지않았다. 다만당시미국대통령윌슨만이상세하게답을보내왔을뿐이었다. [87] 제 1 차세계대전과교회 193
194 전쟁과함께재위를시작한베네딕도 15세교황은지치지않는정열로세계평화의중재자로서구체적이고적극적인활동을했지만결국평화를위한제안은실패하고말았던것이다. 그러나교황은결코굴하지않고지속적이고꾸준하게평화의노력을포기하지않았고전쟁이끝나고나서도전쟁의비극이비인간화로이어지지않도록다각적인노력을기울였다. 교황은종전후포로와그가족들의상봉을위한국제사무소를바티칸에설치했고전쟁으로인해희생된이들과행방불명된군인들을찾는일, 부상병과포로들의송환, 망명자와기아에시달리는아이들을돌보는일등전쟁의고통과후유증을완화시키는데최선을다했다. 특히유럽이승자와패자로갈려전쟁의비극이계속되는일이없도록우려하고경고했다. 전쟁이끝난후유럽교회에는넓고깊은변화와쇄신의물결이일렁이기시작했다. 전임교황들이교권을수호하고교회공동체의결속을위해지속적인노력을기울인데다가특히전쟁이라는극단적인상황의체험을통해새로운자각이일어나기시작했다. 인류는낡은구속을폐기하고새로운시작의실마리를찾아야했다. 교회안에서도커다란변화가시작됐다. 사람들은지난날의과오를성찰하고새로운길을모색하기시작했다. 과거를돌이켜보면 19세기는가톨릭교회가많은성공을거두었음에도불구하고내적으로위축되어있었음을확인할수있다. 국가주의적교회, 종파주의, 민족주의, 자유주의적오만함이교회를향해계속적인공격을했다. 그것은독일의문화투쟁, 교황직및교황령에대한투쟁을겸한이탈리아의리소르지멘토, 19세기전환기에있었던프랑스의반교회적투쟁등때로는존립마저위협할정도로교회는수세에몰렸었다. 하지만이에대한교회의대응은세계로부터의격리였으며이는학문, 문화, 정치등에있어서세상과공동의작업을어렵게했다. 결국교회 는근세의가장중요한업적들에함께참여하는기회를놓쳤다. 구체적으로 19세기공화주의적, 민주주의적노력이가톨릭교회안에서무시됐었다. 프랑스에서교회의공화제에대한거부는 19세기말반교회투쟁을낳게했고독일에서는 1차대전이후까지도바이마르공화국에대한민주주의적이해가결여됐었다. 사회문제에있어서도교회는제때에그특성이이해되지못했었다. 교회가뚜렷한사회정책적개념을갖고거기에이웃사랑만으로는해결할수없는구조적문제가있음을이해하는데에는오랜시일이필요했다. 그러는동안노동자들은교회를떠나마르크스와엥겔스에게로향했고레오 13세교황의사회회칙은너무늦게나왔다. 교회가자신의유산층을고집하고있는동안노동자를포함한무산계급은무신론적마르크스주의로넘어갔다. 교회안에서자각되고있던이러한문제점들에대한인식은전쟁의체험을통해얻게된새로운시작의필요성과함께제1차세계대전후의교회변혁과쇄신의원동력이됐다. 19 세기부터국지적으로일어나고있었던쇄신노력들은 20 세기초반에접어들어본격화된다. 그대표적인것이전례쇄신운동과성서보급운 동, 그리고평신도운동들이며이러한움직임들은마침내교회역사상가장중대한의미를지니는쇄신운동중의하나인제 2 차바티칸공의회 의교회쇄신으로까지이어지게된다. [87] 제 1 차세계대전과교회 194
195 [88] 파티마의성모발현 :52 죄인들회개위해기도당부 세어린이앞에수차례성모님발현 파티마제 3 의비밀은교황암살기도 지난 1997년 5월교황요한바오로 2세는포르투갈파티마의세라핌데수자페레이라주교에게한통의편지를보냈다. 파티마성모발현 80주년을맞아발표한이편지에서교황은인류에게보낸성모마리아의메시지를기억해야한다고강조하고모든그리스도인들이매일묵주기도바칠것을권고했다. 교황은포르투갈어로쓰여진이편지에서 동정마리아가인류에게보낸메시지는지금도생생하게살아있다 며 모든그리스도인들이내적쇄신과함께자신은물론다른사람들의죄까지도씻어내도록기도하라 고말했다. 그로부터 3년뒤인 2000년 5월 13일, 교황은오랫동안세인들의억측과온갖사교가파티마성모발현을목격한 3명의목동어린이들. 맨난무했던이른바 파티마제3의비밀 을밝혔다. 성모발현을목격했던 2명의목오른쪽이발현사실을동에대한시복식을거행한교황은미사끝에이제3의비밀은 1981년 5월 13일로기록한루시아수녀. 마성베드로광장에서자신이암살범에피격된사건을예언한것이라고공식발표했다. 일부에서는엄청난비밀이숨겨져있으리라고생각했던파티마제3의비밀이단지과거의사건을예언한것이었다는설명에의구심을가지기도했지만결국참으로중요한것은인류가자신의모습을성찰하고겸허하게회개와반성을해야한다는것이었다. 1917년에제1차세계대전은최종단계로접어들었다. 역사상어느때보다도가장처참한전쟁이막바지에들어섰다. 러시아에서는혁명이시작됐다. 바로그해 5월인류는구세주의모친인동정마리아로부터회개와참회의메시지를받는다. 포르투갈의한시골마을인파티마에서는목동어린이 3명에게성모마리아가거룩한모습을드러냈다. 후일가르멜회수녀가되어이발현에대해저술하고가르멜회에입회한루시아 (Lucia dos Santos) 수녀와그사촌남매히야친타 (Jacinta Marto, 1910~1920), 프란치스코 (Francisco Marto, 1908~1919) 등세목동들이성모를직접보고그말씀을받았다. 첫발현이있었던 5월 13일은토요일이었다. 정오경한줄기밝은빛이아이들을비추었다. 아이들은나무위에서찬란한모습의한부인을보았다. 이첫발현때부인은죄인들의회개와전쟁의종식을위해기도하라고이르면서매달 13일에다시오겠다고일러주었다. 그후발현은 6월 13일과 7월 13일에도일어났다. 네번째발현일인 8월에는지역당국의방해로발현장소에가지못했지만 19일부인을다시만났고 9월 13일, 전쟁이끝나도록묵주기도를바치라고요청했다. 발현횟수가거듭됨에따라처음에는의구심을품었던사람들이이를믿게되고이에따라서많은군중들이모여들었다. 성모마리아가자신의정체를밝히겠다고약속한 10월 13일부인은자신을 로사리오의모후 라고알려준뒤기도하고보속할것을다시권고했다. 그때놀라운사건이벌어졌다. 태양이빙빙돌면서수직으로땅에떨어지며찬란한광채를발하는 태양의기적 을 7만여명의군중이목격했다. 성모마리아는이들세어린목동들을통해속죄의기도와묵주기도를자주바치고죄인들의회개를위해기도와고행을바치며성직자들을위해기도할것을당부했다. [88] 파티마의성모발현 195
196 또모든사람이성모의티없는성심께봉헌할것과매달첫토요일에속죄의영성체를할것을요청했고그대가로많은영혼이구원되고더끔찍한세계대전을피할것이며러시아의회개와세계평화를가져다줄것을약속했다. 교황이대희년에발표한제3의비밀을포함해성모마리아는이들어린이들에게세가지비밀을알려주었다. 환시형태로받은세가지계시중에서두가지는이미오래전에공개됐던것이다. 첫번째는지옥의모습이었다. 이것은두차례에걸친세계대전에대한것이었고두번째는러시아가언젠가는그리스도교로돌아올것이라는예언이었다. 그리고그것은공산주의소련과동유럽의화해로증명됐다. 그리고교회의대시련을예고한마지막세번째비밀은여지껏알려지지않았다가 2000년 5월교황의암살사건을예언한것이라는발표가있었다. 파티마의성모발현은지난 1930년포르투갈의주교들에의해공식적으로인정됐다. 이어 1942년교황비오 12세는성모의요청대로러시아에대해특별히지적하면서세상을성모의티없는성심에봉헌했고 1967년바오로 6세교황은발현 50주년을맞아개인적으로파티마를찾아순례하기도했다. 그리고 2000년 5월, 발현을목격한세어린이들중에서프란치스코와히야친타가시복됐다. 파티마성모의메시지는루르드성모의메시지와거의같다. 어린아이들을통해죄인들을위한기도와묵주기도, 그리고보속행위를하라고요구했기때문이다. 지난 20세기두차례의엄청난참상을경험한인류는새로운세기를보내면서회개와반성을촉구한파티마성모의메시지를다시한번깊이성찰하고되새겨야한다는것이바로교황이제3의비밀을공개한진짜이유였다. 하지만여전히지구촌곳곳에서는오히려전보다더광범위하고더욱첨예하고빈번한온갖무력분쟁이무고한사람들을고통으로몰아넣고있다. 그렇기에파티마성모의메시지는오늘날에도여전히유효할뿐만아니라오히려지금더큰울림을우리에게전해준다. [88] 파티마의성모발현 196
197 [89] 한국순교자 79 위시복 :54 한국순교사세계교회가인정 교회창설이래최대경사 순교신심다양하게확산 교황비오 11세제1차세계대전으로인류가대규모전쟁의참상을경험한뒤가톨릭교회는참된평화와공동체, 그리스도의왕국에대한열망을품게된다. 전쟁이끝난얼마뒤인 1922년교황으로선출된비오 11세 (1922~1939) 는 그리스도의나라에서그리스도의평화 를교황직의목표로간주했고이에따라 1925년 12월 11일회칙 과스프리마스 (Quas primas) 를통해매년 10월마지막주일을 그리스도왕대축일 로제정한다. 바로그해교황은아시아대륙의한켠에서피로써복음을증거함으로써스스로구원의기쁜소식을받아들였던조선의순교자 79 명을복자 로선포한다. 이는일제식민치하에서민족과교회의미래를확신할수없었던조선교회에있어서교회창설이래가장큰경사였다. 그리 고훗날 24 위의복자가새로탄생함으로써한국교회는 103 위의성인을갖는영광을누리는토대를마련하게됐다. 조선에복자를탄생시킨비오 11세교황은토마스아퀴나스, 아시시의프란치스코, 프란치스코드살등의성인들을기념하는회칙을발표함으로써가톨릭의일치를재확인하려했다. 아울러가니시오, 십자가의성요한, 벨라르미노, 대알베르토등의성인을교회학자로발표함으로써지난세기교회에필요한가르침을제시하려고했다. 이러한취지에서비오 11세는많은이들을시성했다. 그러한시기에한국순교자 79 위가시복됐다. 파리외방전교회서추진당시한국천주교회의시복시성운동은프랑스파리외방전교회에의해서시작되고추진됐다. 조선제3대교구장이었던페레올고주교는 1845년현석문가롤로와이재의토마스가수집해서정리한기해박해 (1839년) 순교자 73명의행적과자신이직접수집한병오박해 (1846년) 순교자 9명의행적을프랑스어로번역해이듬해홍콩에있는파리외방전교회극동대표부로보냈다. 1847년최양업부제는이 기해? 병오박해순교자들의행적 을라틴어로번역해프랑스파리외방전교회본부로보냈으며그해 10월 15일루케주교가교황청예부성성에시복시성을위해접수하게된다. 교황청은이렇게제출된자료들을검토하고난뒤매우엄밀하게작성된자료들에대해감탄하고일반적으로요구되는절차들을면제시키는것이가능하다고판단했다. 이에따라교황비오 9세는 1857년 9월 82명의기해, 병오박해순교자들모두에대해조선교구의시복조사를접수하고허락하는법령을반포했다. 이로써김대건신부, 정하상, 현석문, 유진길등천주에대한신앙을죽음으로증거한순교자들이가경자로선포됐다. 그리고마침내모든절차를마치고 82명중에서 79명이 1925년 7월 5일교황비오 11세에의해시복됐다. [89] 한국순교자 79 위시복 197
198 한편한국교회는병인박해 (1866 년 ) 당시순교자들에대한시복시성도역시추진했다 년조선교구장이었던뮈텔주교는병인박해당시 의순교자들에대한자료를수집, 정리해서 치명일기 를펴냈다. 서문에서순교자들의시복시성을위한뜨거운마음을표시한뮈텔주교는다시금이문헌을토대로 26 명의순교자들을선정해 1918 년교황청 예부성성에이들의행적을담은문헌을접수하게된다. 그리고그로부터 50 년뒤인 1968 년이들중 24 명이교황바오로 6 세에의해시복됐 다. 50년뒤 24위도시복한국교회의가장큰특징은평신도들의자발적인복음의수용, 그리고그복음의씨앗을키우기위해그험한박해속에서도목숨을바쳐야했던순교의역사라고할수있다. 79위순교자들의시복은이처럼엄청난피의순교로구원의소식을전했던한국교회의면모가전세계적으로인정을받게됐다는점에서기념할만한일이다. 시복은또내적으로는순교자들에대한신자들의신심이확산되고한국교회안에서다양하게순교성인들의정신을기리기위한노력이본격적으로나타나게됐다는점에서도큰의미를갖는다. 79위시복식을계기로한국교회에서는복자들이가장많이순교한 9월 26일을 한국순교복자대축일 로정하고 9월을 복자성월 로지내기시작했다. 후일복자성월은 1984년한국순교복자 103명전원이시성됨에따라서 순교자성월 로명칭이바뀌었고 9월 26일에기념되던 한국순교복자대축일 도날짜와명칭이변경돼현재는 9월 20일에 성김대건안드레아와정하상바오로와동료순교자대축일 로기념되고있다. 제 2 의시복시성추진 오늘날한국교회는다시금한국교회순교자들의시복시성을추진하고있다. 그결과지난해말시복시성사안을관할하는교황청시성성은 시복시성을통합추진하는한국주교회의에서요청한한국순교자 124 위의시복시성통합추진건을승인함으로써한국교회제 2 의시복시성 추진이본격화됐다. [89] 한국순교자 79 위시복 198
199 [90] 교황비오 11 세와라테란조약 :56 <== 1929 년라테란궁전 ( 사진위 ) 에서체결된조약으로바티칸시국에대한교황 의완전한통치권이회복됐다. 사진아래는조약비준후교황청에서기념촬영한 가스파리추기경 ( 앞줄왼쪽 ) 과무솔리니. 교황바티칸통치권완전회복 영토와주권지닌독립국가로인정 이탈리아와의오랜갈등대립해소 세계에서가장작은국가중의하나인바티칸시국. 그러나총면적 13만3천여평, 그 3분의 1이정원으로되어있는이작은도시국가는전세계가톨릭교회의심장부이다. 뿐만아니라바티칸시국은오늘날세계에서가장많은나라와공식외교관계를맺고국제무대에서막대한영향력을행사하는엄연한독립주권국가이다. 바티칸시국은교황청과분명하게별개의명칭이지만국제법적으로는동등하게인정받고있으며이국가의통치자인동시에교회의수장인교황안에서분리시킬수없게일치돼있다. 한마디로바티칸시국은교황의세속주권이인정되는장소이자세속적인권한과영적인권한이일치돼행사되는유일한장소이다. 바티칸시국이성립된것은 1929년이탈리아를파시즘정권이장악하고있던시기로거슬러올라간다. 그해 2월 11일라테란궁전에서교황청을대표하는가스파리추기경 (P. Gaspari) 과이탈리아정부의무솔리니 (Benito Mussolini, 1883~1945) 수상은협정과재정협약, 그리고정교협약등세가지를포함하고있는조약에서명했다. 이조약으로바티칸시라는새로운국가에대한교황의완전한통치권이회복됐다. 라테란조약이필요했던것은이탈리아와교황청과의오랜갈등과대립에뿌리를두고있다. 이른바 로마문제 는교회와국가간의대립 과혼란을가중시키고상호불신과증오와불화를심화시켜왔던것이다. 로마문제는이탈리아의민족주의자들이로마를점령하고이를이탈리아왕국에병합함으로써시작됐다. 이탈리아의통일운동세력들은 1861 년로마를새로운국가의수도로선포했다 년독일과프랑스간의보불전쟁이발발해프랑스군이로마에서철수하자즉시로마로진군해 9 월 20 일로마와교황령을점령했고로마는이탈리아왕국에병합됐다. 이로인해천년동안이어지던교황령이종말을고하고교황은바티칸으로물러났다. 교황들은이에대해지속적으로부당한것으로규정하 고항의했지만이탈리아정부는물러서지않았으며이후 60 여년동안이러한 로마문제 는교회와국가간의끊임없는불화를일으켜왔다. [90] 교황비오 11 세와라테란조약 199
200 무솔리니도해결의지 1922년 2월 6일밀라노대교구장인레티 (Ambrogio Damiano Achille Ratti, 1857~1939) 추기경이비오 11세교황으로선출된다. 민족주의자는아니지만 1800년대전형적인애국주의자였던비오 11세는교황으로선출된직후베드로대성전중앙발코니에서의첫축복식때 로마문제 해결에강한의지를보였다. 비오 11세는또같은해회칙 우르비아르카니 (Urbi arcani) 에서도 그리스도의나라에서의그리스도의평화 라는함축적인뜻으로교황령점령에반대한역대교황의정책을계승하면서 로마문제 를해결하려는뜻을밝혔다. 한편무솔리니역시파시즘의승리로권좌에오른이후 로마문제 해결에강한의지를나타내면서이탈리아정부역시 교회에관한입 법계획 을시작했다. 그는이탈리아의국제적위상을높이기위해서는교황과의화해와교회와의관계개선이필요함을인정했다. 1926년비공개협의가시작됐고같은해 10월 4일부터는공식적으로협상이진행됐다. 교황청의위임을받은변호사파첼리 (Francesco Pacelli) 교수와정부의위임을받은바로네 (Domenico Barone) 는 11월 24일조약초안을완성하고이듬해 2월부터초안의재검토가진행됐다. 파시스트들의방해등으로어려움을겪은끝에 1928년 11월조약의구체적인내용이드러났고이때양측으로부터전권을이양받은가스파리추기경과무솔리니수상은마지막실무협상을이끌었다 년 2 월 7 일가스파리추기경은교황청주재외교관들에게조약체결이임박함을알렸고 11 일라테란궁전에서마침내라테란조약이서 명됐다. 조약은전문과 27 개항목및 4 개부칙으로구성된협정과재정협약, 그리고 45 개조항의정교협약등세가지로구성돼있었다. 이조약으로이탈리아는바티칸시국이일정한영토와국민및주권을지닌독립국가임을인정하고따라서주권국가로서바티칸시국은화폐와우표를발행하고국민을다스리며외교사절을파견하고받아들이는등국제사회에서도주권을행사할수있게됐다. 조약은또가톨릭을이탈리아의국교로인정하고이탈리아의상수도시설이나철도를연결하며방송국과우체국의신설등세부적이고구체적인사항들에대해서도합의했다. 교황청의소유를인정하고국제법상치외법권이인정되는건물들을규정하며교회의주요법인조직체들은이탈리아정부의어떤간섭도받지않도록합의했다. 한편교황청은로마를수도로한이탈리아왕국을정식으로인정했고양측은라테란조약에반대되는이전의모든법들을폐기하는데합의했 다. 이로써교황청과이탈리아가 60 여년동안대립됐던문제는완전하게해결됐다. 교황은 이탈리아는하느님에게돌아왔고하느님도이탈 리아에되돌아왔다 고말할정도로조약에대한만족을표시했다. 라테란조약은파시즘정권이물러나고 1944 년공화국이된뒤에도새헌법에의해채택됐다. 다만 1985 년양측합의로가톨릭을국교로존 속시키지않는다는내용으로갱신됐다. [90] 교황비오 11 세와라테란조약 200
201 [91] 전례운동 :58 <== 전례운동은한마디로교회전례에가능한한많은사람들을참여시키려는운동 이다. 오늘날과같은일반신자들의적극적전례참여의역사는그리오랜것이아니 다. 적극적능동적미사참례길터 벨기에독일서시작유럽으로확산 성서보급운동도새롭게나타나 제1차세계대전은인류에게거대한비극을체험하게했다. 그리고그것은새로운정신적상황의조성으로이어졌다. 낡은사고와구속이폐기되고새로운시작이요청됐다. 물론이것은교회에도마찬가지였다. 그것은놀라운변혁의시기였다. 교회안에서새롭게일기시작한자각과쇄신이구체적으로나타난것이바로 20세기초반의전례운동과성서운동이었다. 이운동들은이미지난세기부터일부에서부분적으로일어나기시작했던교회쇄신의노력들이서로영향을주고받으면서확산된것이다. 그리고이운동들은나아가공동체로서의교회, 그리스도신비체로서의교회에대한인식과함께금세기최대의교회쇄신노력인제 2 차바 티칸공의회로이어지게된다. 전례운동은한마디로교회전례에가능한한많은사람들을참여시키려는운동이다. 오늘날일반신자들이미사를포함한전례에적극적이고능동적으로참여하는것은당연한것으로받아들여지고있지만그러한적극적인참여의역사는사실그리오랜것이아니다. 전례운동은모든신자들이전례, 특히미사를정확히알고제2차바티칸공의회이전에는라틴어로돼있던사제의기도를이해하도록하는운동으로일종의교회내적인개혁운동이라고할수있다. 이운동은 19세기말베네딕도수도회를중심으로벨기에와독일에서일어나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등유럽각국으로확산됐다. 벨기에에서는 1882년일반신자대상의미사전례서가출판되면서신자들이전례에더쉽게참여할수있도록하자는움직임이일기시작했다. 교황비오 10세는 1903년발표한교서에서신자들의쇄신을위해서성사생활과전례에능동적으로참여해야한다고권고하고 1905년에는교령을통해자주미사에참례하고영성체할것을권고했다. 새로운전례운동이본격화된것은 1909년벨기에멕헬른에서부터이다. 벨기에의가톨릭신자대회에서베네딕도회원인보뒤앵은 전례를민주화해야한다 고외쳤고대회를소집한메르시에추기경은미사전례서가기도서로보급돼야한다고주장했다. 메르시에추기경은특히미사전례본문과주일저녁기도는자국어로번역돼야한다고주장했다. 이같은요청은미사전례서가모두라틴어로만쓰여져있는상황에서큰반향을불러왔다. [91] 전례운동 201
202 그메아리는즉시독일과오스트리아등으로파급됐다. 독일에서는가톨릭청년운동을중심으로전례쇄신의바람이불어왔다. 가톨릭청년운동의정신적지도자인로마노과르디니는저술과강연 을통해전례정신을배양하고심화시켰다. 국가사회주의의탄압으로교회활동이침체돼있던독일에서교회전례의공동체적구성력이새 롭게체험됐다. 청년신자들은전례의공동체성을새롭게인식하면서영적인힘과활력을얻게됐다. 특히제 2 차세계대전등으로고난과비참의시대속에 서살아가던사람들은전례를통해서이러한힘을얻을수있었다. 전례의공동체성에대한인식은자연스럽게교회에대한새로운인식, 그리스도의신비체 로서의교회상이부각되는계기가됐다. 전례운동의급속한확산에교회당국은처음에는다소당황했지만이내개방적인자세를취했다. 교황비오 12세 (1939~1958) 는 1943년회칙 신비체 (Mysici corporis) 를반포하고 1947년에는전례에관한회칙 중재자이신하느님 (Mediator Dei) 을발표하며이운동에개방적인자세를취했다. 이문헌들은제2차바티칸공의회의전례헌장으로이어지는흐름을갖고있다. 전례운동은전례쇄신그이상의것을요구했다. 그것은전례정신에서신자들의쇄신을이루려는것이고 성령을그의교회를통해침투시킴으로써 ( 비오 12세 ) 그것을체험하게하려는것이다. 전례운동이확산되면서새롭게나타난경향이바로성서보급운동이다. 18 세기초독일, 영국과미국의개신교에서는다양한성서학회들이생겨나성서연구및보급운동이활발하게이뤄졌다. 하지만가톨릭에서 는프로테스탄트의성서신학에대한대응이주된과제였고성서의보급은침체돼있었다. 하지만교황레오 13세가 1893년회칙 섭리하시는하느님 을통해성서를읽도록장려하고 1898년에는성서를읽는신자들에게대사를부여하면서상황이바뀌기시작했다. 이어다양한성서학회가설립돼가톨릭의성서연구와보급이활기를띠기시작했다. 이러한움직임들은전례운동의확산과맞물려더욱활발하게진행됐다. 교황비오 12세가회칙에서강조한전례정신은제2차바티칸공의회를통해구현됐다. 그결정판이바로공의회문헌인 거룩한전례에관한헌장 이다. 전례운동은그리스도의위대한보화들이모두전례안에구체화돼있기때문에전례에의참여가중요한의미를갖는다는사실에기초를두고있다. 즉전례에의능동적인참여를통해모든신자들은그리스도가유일하고위대한중재자이며유일한사제, 희생과구원의근원임을알게된다. 전례는하느님나라, 거룩한공동체로의참여이며따라서전례를통해서만신자들은참된공동체참여가가능하다는것이다. [91] 전례운동 202
203 [92] 제 2 차세계대전과교회 :00 나치 교회는위험한저항세력 정교조약불구공공연한탄압계속 일부 히틀러정권에협력 주장도 예수회소속의역사학자찰스 R. 갤러거는미국뉴욕에본부를둔예수회잡지 아메리카 9월 1일자에서교황비오 12세에대한불명예스러운혐의를씻어줄또하나의사실을보고했다. 갤러거는이보고서에서교황청국무원장으로후에비오 12세가된에우제니오파첼리추기경이고위급외교관들과의모임에서나치와히틀러에대해이교도이며반종교적인인물이라고신랄한비난을퍼부었다고전했다. 그는특히파첼리추기경이히틀러정권에대해전혀어떠한정치적타협의여지도있을수없다고말했다는점을강조했다. 비오 12세는일부사가와유다교지도자들로부터나치대학살에대한적극적인반대의사를표명하지않았고심지어는나치독일에협력했다는비난과혐의를받아왔다. 이러한혐의는사실매우오래된것이다. 최근들어교황청이비오 12세의시복문제를놓고검토중이라는사실이알려지면서유다교학자들은격렬한반대의사를표시해왔다. 히틀러는정교조약에도불구하고교회를탄압했다. 교황청은지난해 2월성명서를통해바티칸비밀문서고의제2차세계대전관련문서들을공개하기로결정했다고밝혔다. 이문서들은교황청과독일과의관계및비오 12세가전쟁기간중유다인들을구출하기위해시도했던노력들에대한새로운사실을담고있다. 비오 12세에대한혐의는역사상가장참혹한전쟁이고인간의상상력을뛰어넘는잔혹한시대에교회가과연무엇을했고, 할수있었는가하는문제와연결된다. 제2차세계대전이발발하기얼마전인 1939년 2월 10일전임교황비오 11세가타계했다. 추기경들은오랫동안교황청에서근무해온법률가집안출신의에우제니오파첼리추기경을교황으로선출했다. 추기경들은그외에는결코무서운곤궁의시대를거슬러베드로의배를조종할사람이없다고생각했다. 그는이미교황청국무원장으로서비오 11세교황밑에서 1930년이래교황청의정치적진로를결정지었고히틀러와의관계에서도교황청의입장을주도했었다. 특히비오 11세의정교조약정책에중요한역할을담당해 1933년 6월에오스트리아, 7월에독일과정교조약을체결했다. 하지만독일과맺은정교조약에도불구하고교회는탄압을받기시작했다. 1934년까지는히틀러자신이표면에나서지는않고 위장된조치 들로가톨릭지도자들을살해하기도했다. 이후공공연한탄압이시작됐다. 모든영역에서교회생활이제한됐고성직자와평신도들이체포됐다. 1938년 11월유다인에대한최초의조직적인대학살이실시됐다. 전쟁발발후에도교회에대한탄압은이어졌다. 정복된폴란드에서는교회가근절됐고유다인에대한섬멸계획과함께그리스도교의청산을위한잔혹한탄압이진행됐다. [92] 제 2 차세계대전과교회 203
204 그러면교회는무엇을했던가. 나치독일의범죄행위가지닌잔혹함과방대함에비추어볼때교회의저항은불충분하게보일지도모른다. 실제로교회는많은이들에게비난을받아왔다. 하지만적어도그리스도교는당대의모든사람들과수난을함께했다는것은분명한것으로보인다. 사실교회의저항은끈질기고격렬했다. 교회는나치정부에의해가장위험스러운적으로인식됐던유일한저항세력이었다. 비오 12세는당연히, 전쟁을막기위해외교적인노력을기울였다. 하지만히틀러와의외교교섭이 1939년 5월초좌절되고 8월독일과소비에트연방사이에폴란드가양분되자교황은 평화와함께잃는것은아무것도없지만전쟁과함께모든것을잃는다 고마지막으로평화를호소했다. 교황은전쟁기간내내이러한입장을고수했지만공식적으로는침묵을지켰다. 사실히틀러전쟁의윤리성에대해언급하는것은교회내적으로필요하지않았다. 왜냐하면모두가, 특히독일의주교와신자들모두이에대해명백히알고있었다. 대외적으로는교황의이러한입장표명은정치적으로이용되는데불과했다. 그리하여비오 12세는정치적으로중립을지켰다. 하지만그는인도주의와평화, 그리스도교적사랑으로돌아가도록모든이들에게더욱강력하게호소했다. 주교들은정부에대해항의서와사목서한을통해반대했다. 이미 1933년시작된항의는시간이지나면서더욱격렬해졌다. 쾰른의슐트추기경은 1934년 2월히틀러를직접방문해항의한뒤이렇게말했다. 히틀러는무서인인간이다. 우리는그로부터더무서운일을겪게될것이다 정교조약체결후주교들은정부의조약사항위배를비난했다. 1937년비오 11세교황은회칙 미트브레넨데르조르게 (Mit brennen der Sorge) 를발표해독일의인종차별주의와나치즘을비난했다. 그회칙은사실상파첼리추기경이작성한것이다. 대단히구체적이고예리한표현으로작성된이회칙은히틀러의정치체제에대한최대의고발이었다. 독일교회역시침묵하고있지는않았다. 뮌스터의주교폰갈런의용감한설교는 1941년전독일을, 아니전세계를한바퀴돌았다. 나치지도자마르틴보르만은그를교살하려했지만사람들의눈때문에전쟁동안은그를해칠수없었다. 당시역사속에서교회는, 주교들은유다인박해를비롯한인간성말살의행위들을혹은묵인하고, 혹은반대해수용소로끌려가거나처형됐다. 그에대한역사적인평가는여전히진행되고있다. 그것은오늘의잣대로만, 혹은어쩔수없는역사적상황이었다는변명의어느한쪽으로만예단할수없는, 비극적인역사의한장이다. [92] 제 2 차세계대전과교회 204
205 [93] 제 2 차바티칸공의회 :01 현대교회모습형성의계기 제 2 차바티칸공의회의결과는전세계지역교회의사 목과교회생활에큰영향을미쳤다. 이번공의회가본질적으로불변의교리와다른어떤신기한것을발견해내는것이아니라그것을현대에맞추어바꿀수있는것을바꾸어가면서시대가주는위험에서신자들을보호하고신앙생활을완전히하도록하는길을연구하고탐구하는것뿐이다 ( 가톨릭시보 1963년 9월 15일자사설 공의회를정확히인식하라 중에서 ). 1962년 10월 11일, 전세계에서온 2540명의주교들이긴행렬을이루며바티칸성베드로광장을가로질러성베드로대성전으로입장했다. 이장엄한행렬은전세계에라디오와 TV로생생하게중계됐다. 현대교회의모습을형성한제2차바티칸공의회의개막이었다. 교황요한 23세는개회연설에서이공의회는예전의공의회들과달리교회의주요교리를다시확인하거나오류와이단을단죄하기위한것이아니라 자비의약으로고치고자신의가르침을제시하면서, 현대요구에응답하기위한것 이라고천명했다. 그의말대로제2차바티칸공의회가막을내리고발표된 16개의주요문헌들중에교리결정이포함된것은하나도없었다. 그것들은실제교회생활안에서실천돼야하는사목적교령들이었다. 그리고그가르침과지침들은세계각지역교회의실생활을통해지난 40여년동안구현돼야하는시대적인소명이었다. 교황요한 23세교황요한 23세가처음으로공의회개최의사를밝힌것은 1959년그리스도교일치를위한기도주간의마지막날인 1월 25일이었다. 더욱이그것은사전에계획된것이아니라마음에떠올라이뤄진것으로그는이것을초자연적인영감으로판단했다. 요한 23세의, 시대를넘어서는담대한결정은 아조르나멘토 (aggiornamento) 라는표어에서그대로나타난다. 그것은현시대에대한외적인 적응 을넘어서완전한의식의변화를전제로한것이었다. 그것은인식의전환, 과거의범주에서벗어나현재와또한완전히변한세계의요구에순응해야한다는것이다. 종교와정치, 권력과교회간의밀접한접촉을통한콘스탄티누스시대의극복, 교회내에서종파주의의반종교개혁적편협한정신의거부, 트리엔트적신학과생활양식으로부터현대의정신상태와인식에부합하고이세상에서의교회실존에맞는시대로의전환등모든것이바로 아조르나멘토 라는개념에포함돼있었다. 비판의소리도실로거대한프로그램이라할수있는이일이과연성공할수있을까하는것은누구나가질수있는의문이었다. 특히공의회개최가교회안팎으로열렬한환영을받았음에도불구하고일각에서는비판의소리가있었다. 신학의다원주의로인한신앙의혼란, 교회의민주화로인한교황과주교의권위약화, 종교자유와종교간대화에대한개방적인자세가가져올수있는종교무분별주의등은보수주의자들의우려였다. 공의회를준비하는과정에서보수주의와진보주의의충돌은피할수없는것 [93] 제 2 차바티칸공의회 205
206 처럼보였다. 하지만공의회초에결정이났다. 10월 13일 1차총회에서공의회는그동안활동한위원들을승인해달라는요청을거부했다. 교부들은교황청에서제출한 10개위원회의위원구성에서엄격한로마적신학세력의우세와, 그것이구시대적인정신이공의회전반을이끌어갈위험성을내포하고있음을보았는지모른다. 그래서 1차총회는 20분만에끝났고이탈리아주교들의수가대폭줄고세계각국의주교들이대거참여한위원회명단이 10월 16일확정됐다. 공의회는 1965년 12월 8일성베드로광장에서거행된감동적인폐회식으로막을내리기까지모두 4차례의회기로진행됐다. 제1회기에는전례, 계시, 매스컴, 동방교회에관한안건들이토의됐지만어떤의안도통과되지못해뚜렷한성과없이마쳤다. 제2회기를준비하는도중, 요한 23세가 1963년 6월 3일세상을떠났다. 후임교항바오로 6세는즉시공의회를계속할것임을알렸고 1963년 9월 29일부터 12월 4일까지제2회기가계속됐다. 제3, 제4회기를거쳐 1965년 12월 7일 현대세계의교회에관한사목헌장 을포함한 4개의문헌이발표됨으로써공의회는 4개헌장, 9개교령, 3개선언등총 16개의공식문헌을반포했다. 바로이날교황바오로 6세는 1054년로마와비잔틴이서로파문하고, 그래서대이교 ( 大離敎 ) 를초래했던파문선고의폐기를진지하게선언했다. 공의회의결과는전세계지역교회의사목과교회생활에큰영향을미쳤다. 현대교회의모습은공의회의가르침에의해형성된것이라고할수있다. 한국교회역시공의회를통해전환기에처한자신의입장을확인하고쇄신과봉사의자세를다시점검했다. 전례가현대화됐고교회의울타리를넘어민족과사회문제에능동적인관심을갖게됐으며개신교와의일치운동, 타종교와의대화에도열린자세로임하게됐다. 지난해세계교회는공의회개막 40주년을지냈고 2005년이면폐막 40주년을맞게된다. 공의회의정신이과연얼마나세계교회안에, 특별히한국교회안에스며들고뿌리를내렸는지에대해우리는이제좀더엄정하게성찰해볼필요가있다. 일각에서는제3차바티칸공의회를논하지만 2차공의회의결실이완전히꽃피우지못하고있다는점에서공의회는여전히진행중이다. [93] 제 2 차바티칸공의회 206
207 [94] 한국교회 103 위성인시성 :03 세계속의한국교회 자리매김 유래없는대규모에현지서거행 교회의중심이동예시해준사건 이날은 200년의역사에단한분의성인도모시지못한초라한교회가전세계가톨릭교회사상최초로한꺼번에 103위성인을모시게된풍성한교회로, 복자들의후손이성인들의후손으로그리고한국속의교회가세계속의교회로격상되고새롭게태어난영광과축복의날이었다 ( 가톨릭신문 1984년 5월 13일자 ). 1984년 5월 6일교황요한바오로 2세는서울여의도광장에서한국의순교복자 103위에대한시성식을거행했다. 한국교회최대경사 1984년 5월 6일, 교황요한바오로 2세는서울여의도광장에서 100여만명의인파가운집한가운데한국의순교복자 103위에대한시성식을거행했다. 한국천주교회 200주년기념대회 미사중에이뤄진 103위성인시성식은아시아의한변방에위치한, 숱한순교의피를자양분으로 200년교회역사의텃밭을일군조선교회, 그리고현대사의고난과역경을분단의현실속에서상징적으로품고있는한국교회의최대경사였다. 뿐만아니라그것은날로쇠퇴해가는서구교회로부터보편교회의중심이아시아를포함한제3세계의교회로옮아가고있음을미리보여준세계교회사의사건이기도했다. 103위성인이탄생한당시한국사회는 79년박정희대통령의피살, 12?12 사태에이 어광주의비극으로시작된 80년대의암울한독재의시대를거슬러가던시절이었다. 70년대사회정의실현에눈뜨고민족과사회를위한봉사의새로운차원을열었던한국교회는 80년광주를겪으면서민주화투쟁의시대적징표를읽기시작했다. 82년미문화원방화사건을기화로교회와정부가긴장과갈등관계에놓이게됐고, 80년대중반이후교회와정부의갈등이본격화됐으며, 87년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의폭로로범국민적항쟁이불붙어 6?29 선언에이르기까지교회는예언자로서의사명에충실했다. 민주화를향한그러한일련의정치사회적흐름속에서시대의징표를읽고실천했던한국교회는그와중에대규모의행사들을속속개최함으로써성장과성숙의모습을교회안팎에드러냈다. 81년 10월 18일조선교구설정 150주년기념신앙대회에는 80만명의신자들이참석했고이어 이땅에빛을 이라는주제로 84년 한국천주교회 200주년 을맞아이뤄진일련의사업들은한국교회사에서하나의분수령을이뤘다. 특히교황요한바오로 2 세의첫방한, 유례없는규모에바티칸에서이뤄지던시성식관례를깨고현지에서거행된 103 위성인시성식은한 국가톨릭교회가대규모종교집회로내외에저력을과시한대표적인사례였다. [94] 한국교회 103 위성인시성 207
208 한국교회는또교황이함께자리한가운데 200 주년기념전국사목회의를열고 4 년동안준비해온 12 개의안을확정했다. 200주년에이어 1989년 10월에는 그리스도우리의평화 를주제로제44차세계성체대회가서울에서개최됐다. 교황의두번째방한이이뤄진서울성체대회를통해한국교회는명실공히자신의성장한모습을세계교회에드러냈다. 세계교회의구성원으로서한국교회의면모는다양하게나타났다. 80년대들어서해외선교에본격적으로나서기시작했고대규모종교집회를통해다져진자부심과긍지, 대사회적지명도는폭발적인신자증가율로이어졌다. 연평균 7.54% 를기록한 80년대신자증가율은휴전이후 50년대의폭발적인교세증가에비견되는높은성장률이었다. 한편 103위시성으로한국교회에성인이탄생한것은한국교회와신자들의순교신심에결정적인토대를놓았다. 한국교회는태생부터가순교자의교회였다. 그토록오랜기간동안그렇게혹독한박해를거치면서오늘에이른한국교회의잠재력과저력은바로순교정신이었다. 따라서한국교회영성의기본적인토양은순교의영성일수밖에없다. 이후한국교회는순교자의삶과정신, 믿음을본받기위한다각적인노력을해왔다. 아울러한국교회는 103위시성이이뤄진직후부터제2의시복시성운동을추진해이제그성과가구체적으로나타나기시작했다. 세계복음화의주역 103위시성으로세계교회안에자신의모습을알린한국교회는이제새천년기를맞아보편교회안에서자신감넘치게자신의소명과역할을이해하고수행하기시작했다. 제삼천년기보편교회의기대와전망은아시아교회로쏠리고있다. 유럽교회는이제활기를잃고신자수마저줄어들고있다. 반면아시아와아프리카등제3세계의교회들은넘치는활력과풍성한성소자수, 높은신자증가율등으로세계교회의기대를안고있다. 특히심오한정신문화의요람인아시아대륙의교회는세계복음화의여정에서그중차대한몫을인정받고있다. 한국교회는아시아에서도신앙적활력이넘치는곳이다. 더욱이순교정신으로무장하고단순하지만뜨거운신앙의열기를간직한한국교회는가히제삼천년기세계복음화의주역이라고할만하다. 하지만한편 103 위성인탄생의환회와열정이한국교회안에서퇴색하고있지는않은가하는우려이다. 이제남은과제는과연한국교회의 신자들이 103 위성인을비롯한한국순교자들의숭고한정신과굳건한신앙을어떻게구체화하고, 삶속에서실천하며모든교회생활과신 앙생활의바탕으로뿌리를내리게하는가하는것이다. [94] 한국교회 103 위성인시성 208
209 [95] 메데인문헌 (Medellin Documets) :05 불의개선위해정치참여를 라틴아메리카사회개혁지침제시 해방신학과기초공동체출범촉진 교회가가난한이들을우선적으로선택한다는것은영적인문제일뿐만아니라사회현실적인문제이다. 그리스도는자신의복음을가난한사람들과만나그들에게전해주었고가난한사람들에대한사랑을몸소보여주었다. 라틴아메리카의사회경제적현실속에서나온메데인문헌은가난한사람들의해방을위해교회가어떻게접근해야하는지에대해혁신적으로진술하고있다. 그래서일부에서는메데인회의가적어도라틴아메리카에서는제2차바티칸공의회보다도더욱뜻깊은성과를남겼다고평가한다. 라틴아메리카주교총회메데인문헌 (Medellin Documents) 은 1968년 8월 24일부터 9월 6일까지콜롬비아의보고타와메데인에서개최된제2차라틴아메리카주교단총회의결과를담은문서를말한다. 1955년창설된라틴아메리카주교회의는 10년마다총회를개최하는데, 특히 1966년초본격적인회합들을추진하면서당시로서는놀라운문헌들을발표했다. 메데인회의를준비하는분과위원회도이때설치됐다. 제2차바티칸공의회에서라틴아메리카의주교들은 침묵의교회 로불릴만큼발언에소극적이었다. 의제들이라틴아메리카가처해있는상황과는달랐기때문이었다. 그래서주교들은공의회가제시한 세상안의교회 와 교회의쇄신 이라는관점을라틴아메리카의정치, 경제, 사회현실에맞게적용하고자했다. 하지만메데인회의가시작되자이는공의회의가르침을적용하는정도를넘어서, 라틴아메리카의역사적현실에서출발해공의회가르침을해석하고라틴아메리카의현실에비추어공의회를바라봄으로써놀라운진전을이뤘다. 이는공의회가폐막되고메데인회의가시작될때까지 3년동안라틴아메리카교회의경험에따른것이다. 즉이시기는해방신학이태동한시기였다. 가난 과 가난한사람들 의개념은이제종교적, 신학적, 영성적차원에머물지않았다. 메데인회의는준비과정과회의에서부터문헌작성에이르기까지성직자와주교들뿐만아니라각분야의전문가와대표들이폭넓게참여했다. 회의결과를담은문헌은, 보수적인콜롬비아주교단이채택을거부할정도로충격적이고진보적이었다. 전부 16개의장으로나눠진메데인문헌중에서 정의 를다룬제1장은불의한사회구조를개선하기위해서모든그리스도인들은양심의의무로정의를실현하기위한정치참여를해야한다고지적했다. 주교들은라틴아메리카의상황을 하늘을향하여울부짖는불의 라고규정했다. 불의한구조 를지닌라틴아메리카사회의상황을성찰하면서 노예상태에서만민을해방시키는하느님 을고백하고따라서진정한해방을얻기위한인간의회개는구조의변혁을요구하며그리스도인들은사랑을통해세상안에서정의를실현하도록노력해야한다고단언했다. 이러한성찰에바탕을두고라틴아메리카사회의개혁을위한지침들이제시된다. 특히자본주의적자유주의체제와마르크스주의적체제모두를지양한 제3의길 을모색한다. 메데인문헌은인간이처한현실상황에입각해복음과인간구원의총체적발전을바라본다. 인간구원과진보는깊이연결돼있으며교회는하느님의섭리에따라세상을변혁하는일에투신해야한다는것을증언해야한다고말한다. [95] 메데인문헌 (Medellin Documets) 209
210 문헌은또라틴아메리카가처해있는상황을 종속 으로평가하고역사안에서하느님의활동은인간을총체적으로해방시키고발전시키는것이기에종속을거부한인간의발전을 해방 으로부른다. 특히그리스도인들은능동적으로진보를성취하는복음적인사명을갖고있으며해방을향한투신은그리스도인의의무이다. 문헌에서특별히주목해야할주제는가난과폭력의문제이다. 문헌은이전까지교회의가르침에서비교적모호했던가난의개념을분석하고, 교회는재화가결여된이세상의불의를단죄하고주님께자기자신을개방하는태도로영적가난을설교하며, 교회스스로물질적가난속으로뛰어든다고말한다. 문헌은폭력과관련해 제도화된폭력 또는 구조적불의 를지적하며이러한폭력에직면한그리스도인들의 정당한반란 을인정한다. 폭력적혁명은불의에대한부적절한해결책이지만예외적상황이있을수있다는서술은오늘날가톨릭사회교서의맥락과일치한다. 공의회가선진국들에서출발했다면메데인회의는가난한나라자신들에서부터시작해문제를보았으며, 메데인회의가라틴아메리카교회의운명을스스로개척해나가는계기가됐다는점에서공의회보다더욱특별한성과를남겼다. 공의회가교회쇄신을위한노선을제시했다면메데인회의는라틴아메리카에서교회가올바르게현존하기위해서교회가쇄신돼야할규범들을제시했다고할수있다. 메데인회의는해방이라는말을인간화와연결시키며복음화의중요한과제로제시하고이미그리스도인들이참여하고있는해방의실천에 교회의권위를실어주었다. 무엇보다메데인문헌은이미싹트고있던해방신학을정식으로출범시키고기초공동체와같은새로운형태의 공동체가존재할수있는기반을마련했다. [95] 메데인문헌 (Medellin Documets) 210
211 [96] 남미해방신학의태동 :07 <== 해방신학은당시기득권자들의강한반발과탄압을불러왔다. 사진은 1980 년 미사중에저격당한엘살바도르의로메로대주교를추모하고있는모습. 억압수탈서인간해방추구 1960년대후반라틴아메리카에서는모든억압과수탈로부터인간을해방시키는신학으로서의해방신학이태동한다. 그결정적인계기가된것이 1968년콜롬비아의보고타와메데인에서개최된제2차라틴아메리카주교단총회이다. 이른바메데인문헌으로불리는이총회의후속문헌은가난을단지종교적인차원에머물게하지않고세상과인간의구원으로서해방을위한그리스도인의노력을촉구하면서남미의상황을 제도화된폭력 과 구조적불의 로규정했다. 해방신학의태동은우선가톨릭국가인스페인과포르투갈의식민통치에서오는불의한상황에기인한다. 완강한봉건제도와중앙집권적군주제에바탕을둔스페인과포르투갈은무력을앞세워토착민들을정복하고지배계급을형성해식민통치를펴면서민중들을억압했다. 남미여러나라는경제적자원의공급기지가됐고지배자들은강력한군대세력으로조직됐으며독재체제가구축됐다. 식민통치는남미경제를파탄에빠뜨렸다. 지배계층은부정부패를통한부의축적에혈안이됐고서구다국적기업의횡포와집권층의결탁으로국민들은기아에허덕이며인간의존엄성을위한최소한의경제적인조건마저도충족되지못했다. 민중들은지배층의축재를위한착취의수단일뿐이었다. 남미국가들은제2차세계대전을전후한전시특수로호황을누렸고나름의경제발전도급속하게이뤄졌으며외국차관과다국적기업의자본도입으로근대화를꿈꿨으나구조적인문제는해결되지못했고국민들의빈곤은더욱악화됐으며오히려막대한외채만을짊어지고말았다. 교회안에서는이러한사회현실을새롭게인식하고그러한불의한상황을변혁하는데투신하는예언자적소명을새롭게인식하는사람들이생겨났다. 그리고그본격적이고공식적인논의가이뤄진것이바로메데인회의라고할수있다. 하지만사실메데인회의를통해드러난라틴아메리카의현실인식과그에대한남미교회들의입장은이미제2차바티칸공의회이후교회안에스며든새로운인식의연장선상에놓여있다고할수있다. 즉해방신학은어느날갑자기교회의전통적인가르침과무관하게돌출된것이아니다. 해방신학의출범에결정적동기를부여한것은교회의공식적인가르침이다. 특히교황요한 23 세의회칙 지상의평화, 제 2 차바티칸공 의회문헌중 현대세계의사목헌장, 그리고교황바오로 6 세의회칙 민족들의발전 은해방신학의입장에바탕을이루고있다. [96] 남미해방신학의태동 211
212 제2차바티칸공의회를통해가톨릭교회는자기중심에서벗어나인류에봉사하고인류를사랑하며인간을향한순례의여정을떠났다. 공의회는사목헌장 7항에서 기쁨과희망, 슬픔과번뇌, 특히현대의가난한사람과고통에신음하는모든사람들의그것은바로그리스도를따르는신자들의기쁨과희망이며슬픔과번뇌 라고천명했다. 공의회는나아가 4항에서 교회는시대의징표를탐구하고, 복음의빛으로그것을해명해줄의무를갖고있다 고선언함으로써교회의사회개혁을위한투신을촉구했다. 공의회의가르침에따라남미의해방신학자들은다수민중의삶이가난과착취와억압으로점철된자신들의역사에대한 시대의징표 를진단하기시작했다. 그럼으로써해방신학은 불의한사회체제하에서하늘을향해울부짖는소외된계층들의한맺힌고통의실체를 신앙의빛 으로비추어보려는신학적성찰 이었다. 이러한예언자적소명의실천노력은당연히당시기득권자들의강한반발과탄압을불러왔다. 엘살바도르의로메로대주교를비롯한수많은성직자, 수도자, 평신도들의희생이수반됐다. 남미해방신학은가톨릭신학자들에의해주도됐다. 남미자체가가톨릭이다수를차지하는지역으로가톨릭신학자들이주를이루는것은놀라운것은아니다. 페루의구스타보구티에레즈, 브라질의레오나르도보프와휴고아스만, 멕시코의호세미란다, 우루과이의후안루이스세군도, 엘살바도르의스페인태생인혼소브리노등이그들이다. 해방신학에대한교황청의공식적인입장은 1984년 8월 6일에반포된 해방신학의일부측면에관한훈령 과 1986년 3월 22일반포된 그리스도인의자유와해방에관한훈령 두가지이다. 하지만적지않은이들이오해하듯, 교회는해방신학을단죄했다고보기는어렵다. 1986년의훈령은 자유의신장을저해하고인간존엄성을침해하는여러장애에대한명확한인식에서강렬한해방의열망이일어나우리들의세계를휩쓸고있다 며 그리스도의교회는이러한열망을자신들의열망으로삼는다 고밝혔다. 따라서교회는가난하고소외된이들에대한관심과투신을의도한해방신학의취지와문제의식에대해서타당하다고평가한다. 다만그의도와목적을실천하기위한방법에있어서, 즉현실분석과극복의수단으로마르크스주의개념을신학에도입한점에있어서비판과거부의대상이된측면도있다. 실천적성격을띤해방신학은그실천방식에따라다양한양상으로나타난다. 해방신학의명분아래마르크스주의적노선을걷는소수의무 리도있다. 하지만사실이들은순수한복음적해방신학자들로부터는환영받지못하는무리이다. 따라서해방신학을논하거나비판할때그 조류들을구분해평가해야할필요성이있다. [96] 남미해방신학의태동 212
213 [97] 교황요한바오로 2 세 :10 <== 교황요한바오로 2 세는 25 년간 102 차례 131 개국을순례하며용서와화해, 사 랑과평화를촉구해왔다. 사진은 1984 년한국을찾은교황이사제서품식을주례하고 있다. 20C 냉전녹인평화의사도 131 개국찾아용서화해사랑촉구 고르바초프만나 냉전청산 길터 20세기는인류역사상가장참혹했던양대전쟁으로얼룩졌다. 그중하나인제2차세계대전후세계는두개의진영으로나뉘어져대량살상무기를서로에게겨눈채지구촌곳곳에서기아와질병으로수많은사람이죽어가는가운데군비경쟁에열을올렸다. 이른바냉전 (Cold War) 의시대였다. 냉전이라는용어는미국의평론가 W. 리프먼이저술한 냉전 (The Cold War, 1947) 이라는논문에서비롯됐고미국의재정전문가이며대통령의고문이었던버나드바루크가의회토론에서처음이용어를사용했다. 한반도의분단을포함해인류를양분했던비극적인대립체제로서의냉전은이후상대진영을초토화할수있는핵무기개발경쟁, 그리고자칫지금까지의전쟁과는양상이다른핵전쟁의위기까지감으로써절정에달했다. 하지만동서냉전은동유럽을중심으로한공산권의붕괴와구소련의몰락이대결과분열의시대를끝냄으로써종말을고하게됐다. 비이탈리아계교황교황요한바오로 2세는이처럼동서가서로갈려서로를노려보던시기에교황으로선출됐다. 지금으로부터정확히 25년전인 1978년 10월 16일, 시스틴성당굴뚝에서흰연기가피어올랐다. 전임교황요한바오로 1세가서거한뒤세계는그뒤를이을교황을열렬히기다려왔기에전통적으로새로운교황의탄생을알리는흰색연기를본전세계가톨릭신자들은일제히환호성을올렸다. 하지만사람들은곧이어커다란놀라움과당혹감을감출수없었다. 제264대교황으로선출된카롤보이티야, 그는이탈리아출신이아니었다. 더욱이공산국가폴란드출신으로크라코프대교구를맡고있던추기경이었다. 1523년네덜란드출신의하드리아노 6세교황이래무려 455년만에탄생한비이탈리아계교황, 그것도공산국가출신의추기경이교황으로선출된데대해사람들은다시금하느님의섭리를곰곰이생각하게만들었다. 잠시후베드로대성전발코니에모습을드러낸새교황은 예수그리스도는찬미받으소서 라고외쳤다. 잠시놀라움을감출수없었던 사람들은이윽고 주님의뜻이이루어지소서 라고기도할수밖에없었다. [97] 교황요한바오로 2 세 213
214 102차례해외순례서로분열돼증오와미움의고리에얽혀있던세상은이제새교황의탄생을통해평화와화해의메시지를전하는하느님의구원경륜에새삼감탄을하게됐다. 그리고그러한기대와희망은 평화의사도 로서세상을순례하며용서와화해, 사랑을구현한요한바오로 2세교황의발걸음으로현실화된다. 교황은즉위이듬해인 1979년부터본격적인해외순방에나선다. 그해 1월중남미의멕시코와도미니코공화국방문을시작으로올해 9월슬로바키아방문에이르기까지 25년동안무려 102회에걸쳐 131개국을방문했다. 교황의해외순방은대개사목적인것이었지만그것은그지역의모든갈등과분쟁을완화하고사람들의가슴에숨겨진평화에대한열망을바탕으로화해와용서를이끌어내곤했다. 포클랜드전쟁이일어났던 1982년영국과아르헨티나를방문해평화를호소했고 1991년유고슬라비아가해체되면서인종학살이자행되자이를비난하고평화적해결을촉구했다. 1999년코소보전쟁때에는유고에특사를파견했고지난봄이라크전쟁때에도비극적인전쟁을막기위해모든노력을기울였다. 무엇보다도교황은 1989년 12월소련공산당서기장미하일고르바초프와의역사적인만남을통해냉전의시대를청산하는초석을놓았다. 이어 1990년 4월에는또다른공산국가인체코슬로바키아를방문했다. 1998년에는쿠바를방문해닫힌문을세계로열어젖혔다. 그에앞서 1997년에는 4월과 5월에레바논과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지역을잇달아방문했고대희년에는성지를방문해중동평화의회복을위한또다른전기를마련했다. 중국과러시아방문염원교황은이처럼평화를위한세계순방중에여러차례죽음의문턱을넘나들었다. 1981년 5월저격범의흉탄에쓰러졌고 1992년에는담석제거수술, 1994년에는숙소에서넘어져순방일정을연기해야할정도로심각한수술을받기도했다. 이제교황은고령에파킨슨병과관절염등으로고통을겪는등육체적으로쇠약한모습을숨길수없는상태이다. 하지만교황은지금까지그래왔듯이여전히초인적인의지로세상을향해발걸음을옮기고있다. 세계곳곳을누비며평화의메시지와복음을전해온교황요한바오로 2세가간절히방문하기를원하는곳이두곳있다. 하나는중국이다. 중국순방은교황의가장열렬한희망이다. 제삼천년기세계교회의중심은아시아가될것으로보인다. 중국은아시아복음화에가장큰과제이다. 중국과함께러시아방문은교황의또다른염원이다. 하지만러시아는이전의여러대통령들이교황의방문을요청했지만정교회와의관계가큰걸림돌이되어아직실현되지못하고있다. [97] 교황요한바오로 2 세 214
215 [98] 새교회법반포 :15 공의회정신담은개혁적법률 새로운사회변화. 질서에따른요청 1983 년교황요한바오로 2 세반포 사회변화와공의회의새로운제안들로인해교회법의재검토가제기, 1983년 1월새교회법을반포했다. 사진은바티칸시국재판정모습. 1981년 10월 28일교황청세계주교대의원회의회의실에서는전세계에서모인교회법전문가와학자, 주교들 80여명이모여서새교회법전의초안을놓고마지막논쟁과토론을벌이고있다. 이미 8일째에들어선이날은지난 2000년간있어온수많은교회법령들을하나로집대성해서새로운세계와사회상황, 교회현실에맞도록집대성하는역사적인날이었다. 휴식도없이오후늦게까지이어진이날회의를거쳐참석자들은새교회법전의초안을만장일치로가결했다. 추기경과주교들은 이초 안을될수있는대로빨리교황에게제출해교황이적합하게여기는때와방법으로법전을발간하도록하는것을합당하게생각한다 는문건에서명했다. 이교회법초안은곧교황요한바오로 2세에게제출됐고마침내 1983년 1월 25일교황은이법을반포해그해 11월부터시행했다. 법전개정을위해교황청교회법개정위원회가구성된지무려 20여년만의일이었다. 교회법전이란? 법전은법률적인의미에서볼때질서정연하고체계적인방법으로배열된법률들의집합체를의미한다. 교회는눈으로볼수없는영적인공동체로서의그리스도의신비체인동시에볼수있는교계제도로조직된사회이다. 일반사회공동체가그조직과구성원들사이를조정하기위한규범들을담아법전을시행하듯이교회도가시적이고조직적인조직체인만큼조직체의운영과교회의임무및목적완수를위한규범이필요하다. 이러한규범들을하나로모아체계적으로편집한것이바로교회법전이라고할수있다. 서방라틴가톨릭교회의교회법전으로는 1917년 5월 27일반포된 비오-베네딕도법전 또는 1917년법전 이라고불리우는구법전과 1983년반포돼현재에이르고있는새 교회법전 이있다. 이법전은전세계라틴가톨릭교회안에서유일하고일반적인성격을갖는보편법들을담고있다. 한편동방가톨릭교회들을위한교회법전으로는 1992년 5월 13일에반포된 동방교회들의교회법전 (Codex Canonum Ecclesiarum Orientalium) 이있다. 새법전형성과정현행 교회법전 의형성과정은 20세기중반에들어서면서급격하게이뤄진세계적인질서변화에기인한요소들을바탕으로이뤄졌다. 사회변동과정에서인간적요소와신적요소의결합으로이뤄진교회라는사회의정체성과구조를보호하는것이교회법의주요기능이므로구법전이반포된 1917년의사회상황에비해판이하게달라진 1959년의사회상황이새로운교회법을요청했다. 즉종교적다원주의, 세속국가출현, 동유럽의정치권력과교회사이의긴장, 새로운경제체제의도입등이새로운사고와새로운사회질서의탄생으로이어지면서새로운교회법전이필요하게된것이다. [98] 새교회법반포 215
216 세속사회, 세속국가, 종교의다원화등으로특징지워지는현대사회의상황은과학주의, 상대주의, 물질주의, 진화주의, 환경주의등전사회 적으로하느님이사라진상황을야기했으며이러한사고방식들은신정법이나자연법을기반으로하는교회법과시민법의가능성을부정하게 됐다. 이러한상황은신적요소와인간적요소의결합으로이뤄진사회, 즉교회의법체계에대해서도논란을불러왔다. 사회와교회가직면한이러한변동의상황속에서 2차바티칸공의회로부터제안된새로운이해들은교회법의재검토를요청했다. 실제로새교회법은공의회의소리를법적으로구현하게됐다. 이미공의회이전부터교회법과전례, 수도생활등교회의법적쇄신운동이시도됐었다. 초기에제안된공의회의제들은이러한쇄신운동에기반을두었다. 교황요한 23세는 1959년 1월 25일에제2차바티칸공의회의개최와교회법전의개정의사를표시했다. 하지만법전을개정하기에앞서공의회를통한교회쇄신의필요성이먼저요구됐기때문에법개정은공의회이후로미뤄졌다. 이에따라공의회첫회기가끝난직후인 1963년 3월 28일 40명의추기경들로성청교회법개정위원회를구성하고같은해 11월 12일에첫전체회합을가짐으로써교회법전개정의긴역사가시작됐다. 요한 23세의뒤를이은교황바오로 6세는첫훈화에서교회법전의개정은무엇보다도먼저 교회법률들을단순히새롭게재배치하는것이아니라시대에적합하고공의회문헌들의정신에맞는심도있는개혁 임을강조했다. 그결과 1967년 10월에개최된주교대의원회의총회에서개정의 10개기본원칙들이결정됐고이에따라개정작업을진행해 5번의부분적인시안을거쳐마침내 1983년교황요한바오로 2세에의해반포됐다. 제7권 1752개조항법전은모두 1752개조항으로이뤄져있다. 제1권 총칙 은교회법의일반원칙을다루며제2권 하느님백성 은교회구성원들에관련된규범과교회사목행정을위한봉사직무의구성과조직, 제3권은교회의교도임무, 제4권은성화임무와성사, 경신례를다룬다. 제5권은교회의세속재산법, 제6권은형법, 그리고제7권은교회의소성법을다루고있다. 새교회법전은교회의입법전통에충실하면서공의회의정신에입각한새로운법률을담고있기에구법전과는근본적으로다른새로운점들을많이내포하고있다. 특히 영혼들의구원은교회내에서항상최상의법 (1752조) 이라는사목적특성을갖고있다. [98] 새교회법반포 216
217 [99] 2000 년대희년개막 :17 <== 1999 년 12 월 24 일자정, 교황요한바오로 2 세는성베드로대성당의육중한 청동 성문 (the Holy Door) 을활짝열어젖히며역사적인 2 천년대희년의문을 열었다. 화해 일치향한새천년기열어 교회의과거잘못과감히용서청해 사형제폐지 부채탕감운동도전개 1999년 12월 24일자정, 교황요한바오로 2세는성베드로대성당의육중한청동 성문 (the Holy Door) 을활짝열어젖히며역사적인 2천년대희년의문을열었다. 예수강생 2000년, 세상의죄를보속하고인류를구원하기위해인간의모습으로가장낮은곳으로임했던예수그리스도의탄생 2000년을기념하고새로운천년기의막을연대희년의개막은실로교회뿐만아니라인류역사에서도큰의미를갖는역사적인순간이었다. 세계교회의대희년교황요한바오로 2세는 2000년대희년을준비하기위해 1994년 11월 10일자로교황교서 제삼천년기 (Tertio Millennio Adveniente) 를반포해대희년의의미와중요성을일러주고대희년을위한영적준비를갖출것을권고하고대희년을맞는직접적인준비를단계별로권고했다. 대희년을기념하는 2000 년에는그야말로역사적인의미를갖는다채로운기념행사들이마련됐다. 교황청을중심으로세계교회는한해동안 희년정신을구현하기위한다양한행사와운동들을펼쳤다. 특히교황요한바오로 2세의용서청원은전세계적인반향을불러왔고함께그리스도를구세주로고백하면서도갈라져있던다른그리스도교들과의일치운동에획기적인전환점을마련했다. 사형제도폐지와극빈국에대한부채탕감운동, 그리고거의일주일에두세번씩지내는다양한대희년관련행사들은새천년기전세계가톨릭교회의쇄신을향한끊임없는노력의일환이었다. 우선교황은사순제1주일인 2000년 3월 12일성베드로대성전에서인류와하느님앞에서과거 2000년가톨릭교회의역사안에서교회의구성원들이잘못한일에대해고백하고용서를청했다. 교황은이날미사에서교회분열, 유다인과타종교인에대한박해, 여성에대한억압과원주민들에대한폭력등지난 2000년동안교회의구성원들이범한과오들에대해잘못을인정하고하느님께용서를청하는예식을거행했다. 교황요한바오로 2세가 2000년대희년을맞아 용서의날 을정하고공개적으로교회구성원들의과오에대해용서를청한것은가톨릭교회 2000년역사상처음인것으로보이며가히새천년을여는획기적이고겸허한자세인것으로평가된다. [99] 2000 년대희년개막 217
218 교황은이미지난 94년대희년을준비하는 제삼천년기 에서교회는 자기자녀들이참회를통하여과거의과오와불충한사례들, 항구치못한자세와구태의연한행동에서부터자신을정화하도록격려하지않고는새로운천년기의문턱을넘어설수없다 (33항) 고천명한바있다. 교황은또 2000년대희년이야말로교회가용서를청할수있는가장적절한때임을여러차례에걸쳐지적한바있다. 교황의고백은결국새천년기로들어서는가톨릭교회가참된하느님의백성으로성장하고성숙하기위한바탕이었던것이다. 이러한교황의용서청원은즉각전세계적인반향을불러왔고지역의주교회의와교회들에서과거사반성이잇따랐으며한국교회역시그해 12월초이에응답했다. 전세계적인반생명적경향에대한교회의대응은먼저사형제도폐지의촉구로집중됐다. 교회는생명의존엄성에대한확신과하느님의창조질서보존의가르침에바탕을두고가장비인간적이고야만적인제도의하나인사형제도를폐지하거나적어도대희년기간동안만이라도집행을유예하자는운동을통해실제로각국에서집행될예정이었던여러건의사형집행을연기하도록했다. 교회일치에있어서대희년의성과는놀라운것이었다. 지난 1천년이교회의분열로얼룩져있었다면제삼천년기는모든그리스도교의일치를이룩해야한다는사명감을바탕으로교황청에서는 1월 18일부터시작된일치주간을맞아전세계 23개교파지도자들이함께모여기도를바쳤다. 연중거의매주두세건씩치러진각종국제적인대희년행사들은각지역교회에서도마찬가지로치러지면서지역에맞는다양한사목적대응방안들이모색됐고교회구성원모든계층의문제들이토론되고고민됐다. 한국교회의대희년 대희년의바람은한국교회에도불었다 년유례없는국가적위기를겪은한국교회는이러한행사들을통해나름대로이전의구태를벗고 새로운복음화를위한전기를마련하기위해노력했다. 한국교회는신자들의신앙생활을쇄신하고새시대에걸맞는그리스도인의정체성을확립하기위해 새날새삶 운동을전개했다. 대희년 의정신을삶속에서구현하는것을목표로시작된이운동은 1998 년 10 월주교회의가을정기총회에서대희년실천운동으로선포됐다. 대희년기간중에는크게 민족의화해와일치를위한기도의날 (6월25일춘천교구 ), 전국청소년축제 (7월 25~27일대구대교구 ), 전국생명환경신앙대회 (9월 24일안동교구 ), 전국가정대회 (10월 14~15일청주교구 ) 등모두 4개의전국규모행사가열렸고그외에 전국평신도대회 (10월 26일 ~11월 5일 ) 가있었다. 아울러대림제1주일인 12월 3일에는역사적인과거사반성문건 쇄신과화해 를발표하고각교구주교좌성당에서참회예식을통해역사와민족앞에교회구성원들이소홀했던점과잘못들을고백하고용서를청했다. [99] 2000 년대희년개막 218
219 [100] 복자마더데레사수녀 :19 가장가난한사람들과한평생 참평화의길제시한 사랑의혁명가 새천년기인류의나아갈방향제시 2000년대희년은교회와인류에새로운세상, 하느님의평화와사랑이더욱넘쳐나는세상이되기를고대하는인류의염원이절정에달한순간이었다. 새천년기를맞는전세계가톨릭교회는막문을연제삼천년기가하느님의참평화가지구촌을가득메우게되기를간절하게염원했다. 하지만그것도잠시, 또다시인류는끊이지않는갈등과반목속에서서로를향해총칼을겨눈채형제의피를흘리는데여념이없었다. 마침내인류는초강대국미국의심장부를향한초유의항공기테러에직면하게된다. 세계무역센터쌍둥이빌딩이하릴없이무너져내린그아수라장속에서전세계인들은인간의증오가얼마나참혹한비극을자아낼수있는지너무도또렷하게목격했다. 한평생가장가난한이들의어머니가되었던마더데 레사는 1997 년 9 월 5 일세상을떠났으며교황요한 바오로 2 세에의해 2003 년 10 월 19 일시복됐다. 이후전세계는테러와대테러전쟁의소용돌이속으로휩쓸려들어갔다. 미국은아프가니스탄에이어이라크를공격해이른바세계의경찰국으로서의면모를과시하려했지만결코테러는멈추지않았고오히려더조직적이고대범한테러행위들이세계도처에서연이어발생하고있다. 오늘세계에서진정으로평화는요원한것처럼보인다. 더위력적인무력은전쟁을잠재우지못하고오히려더잦고더잔혹한투쟁만을불러오고있다. 결코포기할수없는참평화는오히려초라하고보잘것없는빈민촌한켠에서부터인류에게다가오고있었다. 지난 10 월 16 일바티칸에서는교황요한바오로 2 세의교황재위 25 주년을기념하는미사가거행됐다. 사흘뒤바로이자리에서교황은이미 살아서부터성녀로추앙받았던마더데레사수녀의시복식을거행했다. 가난한이들중에서가장가난한이들에게어머니가되어주었던데레 사수녀의시복은그야말로가난한사람들에게커다란축복이었다. 교황은 30여만명의순례자들이모인성베드로광장에서 오늘하느님은우리에게마더데레사를새로운거룩함의모범으로제시해주셨다 며마더데레사의시복을선언했다. 시복식이거행된광장의맨앞줄에는가난한사람들을최우선적으로선택했던그녀의정신에따라 3천여명의빈민들이초대돼자리를잡고있었다. 마더데레사의뒤를이어사랑의선교회를이끌고있는니르말라조쉬수녀는시복식에즈음해가진기자회견에서데레사수녀의시복식은바로 우리모두가성인이될수있다는표지 라고말했다. [100] 복자마더데레사수녀 2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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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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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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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288-5854 Print ISSN 2289-0009 online DIGITAL POST KOREA POST MAGAZINE 2016. APRIL VOL. 687 04 DIGITAL POST 2016. 4 AprilVOL. 687 04 08 04 08 10 13 13 14 16 16 28 34 46 22 28 34 38 42 46 50 54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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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및 대도시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 고교를 설립하여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겠습니다. 농어촌 지역과 중소도시 등 낙후지역에 150개의 기숙형공립고교를 설립 학생의 80% 정도가 기숙사에 입주할 수 있는 시설을 준비하고, 기숙사비는 학생의 가정형편을 반영한 맞춤형 장학금으로 지원하여 더 이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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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생활 문화 매거진 235 Cover Story ISSN 2005-2820!!2 3! 3 201002 002 !!4 5! 201002 !!6 44 7! 201002 !!8 February 2010 VOLUME 35 Publisher Editor-in-Chief Editor Planning & Advertising Advertising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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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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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눔 2017 SPRING Vol.370 CONTENTS 04 2017 06 2017 12 CSCaritas Seoul 16 20 22 2016 Mission. Vision - - - - Caritas,,. 28 Yes, I Do 32 DO CAT 2017 SPRING 2017 3 25 80 4 02-776-1314 02-754-5636 www.caritasseoul.or.kr/bokji
More information120~151역사지도서3
III 배운내용 단원내용 배울내용 120 121 1 2 122 3 4 123 5 6 124 7 8 9 125 1 헌병경찰을앞세운무단통치를실시하다 126 1. 2. 127 문화통치를내세워우리민족을분열시키다 1920 년대일제가실시한문화 통치의본질은무엇일까? ( 백개 ) ( 천명 ) 30 20 25 15 20 15 10 10 5 5 0 0 1918 1920 ( 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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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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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E.L.P. Vol. SUMMER Vol. WINTER 2015. vol 53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4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5 Pearl S. Buck Foundation Korea 프로그램 세계문화유산 걷기대회 Walk Together 탐방길곳곳에서기다리고있는조별미션활동! 남한산성 탐방길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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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 1. 객사(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48호) 객사는 영조 35년(1759년)에 지어진 조선 후기의 관청 건물입니다. 원래는 가운데의 정당을 중심으로 왼쪽에 동대청, 오른쪽에 서대청, 앞쪽에 중문과 외문 그리고 옆쪽에 무랑 등으로 이 루어져 있었으나, 지금은 정당과 동대청만이 남아있습니다. 정당에서는 전하 만만세 라고 새 긴 궐패를 모시고 매월 초하루와 보름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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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More information학부모신문203호@@
02 05 06 08 11 12 2 203 2008.07.05 2008.07.05 203 3 4 203 2008.07.05 2008.07.05 203 5 6 203 2008.07.05 2008.07.05 203 7 8 지부 지회 이렇게 했어요 203호 2008.07.05 미친소 미친교육 촛불은 여전히 건재하다! 우리 학부모들은 근 2달여를 촛불 들고 거리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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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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Ⅳ 성은 인간이 태어난 직후부터 시작되어 죽는 순간까지 계속되므로 성과 건강은 불가분의 관계이다. 청소년기에 형성된 성가치관은 평생의 성생활에 영향을 미치며 사회 성문화의 토대가 된다. 그러므로 성과 건강 단원에서는 생명의 소중함과 피임의 중요성을 알아보고, 성매매와 성폭력의 폐해, 인공임신 중절 수술의 부작용 등을 알아봄으로써 학생 스스로 잘못된 성문화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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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초고를읽고소중한조언을주신여러분들게감사드린다. 소중한조언들에도불구하고이글이포함하는오류는전적으로저자개인의것임을밝혀둔다. 2) 대표적인학자가 Asia's Next Giant: South Korea and Late Industrialization, 1990 을저술한 MIT 의 A. Amsden 교수이다. - 1 - - 2 - 3) 계량방법론은회귀분석 (regres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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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ww.neuro.or.kr 2010 1 Vol. 82 www.neuro.or.kr 01 5 January 2010 2007 Newsletter of THE KOREAN NEUROLOGICAL ASSOCIATION 2010 NO.82 2010.JANUARY C o n t e n t s 04 05 06 10 13 17 18 20 22 25 28 32 33 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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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RAGONS JEONNAM DRAGONS FOOTBALL CLUB MATCH MAGAZINE VOL.136 / 2014.10.16 Preview Review News Poster PREVIEW K LEAGUE CLASSIC 32R JEONNAM VS SEOUL / 14.10.18 / 14:00 / 광양축구전용구장 서울과 뜨거운 한판 승부! 전남드래곤즈가 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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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제헌헌법의제정과정 1945년 8월 15일: 해방 1948년 5월 10일: UN 감시 하에 남한만의 총선거 실시. 제헌 국회의원 198명 선출 1948년 6월 3일: 헌법 기초 위원 선출 1948년 5월 31일: 제헌 국회 소집. 헌법 기 초위원 30명과 전문위원 10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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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04 06 08 10 12 13 14 16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지나가고 어느덧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소현이가 이 곳 태화해뜨는샘에 다닌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네요. 해샘에 처음 다닐 때는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도 남을 의식해 힘들어하고, 사무실내에서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신경 쓰여 어려워했었습니다. 그러던 우리 소현이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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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_ 02 _ 04 _ 06 _ 08 _ 14 _ 15 _ 16 _ 21 _ 24 _ 30 _ 32 _ 35 _ 38 _ 44 _ 56 _ 62 _ 66 _ 68 _76 _84 _86 _92 _112 COVER STORY CEO Message 02 03 KSD HISTORY HISTORY 2006-2010 2011-2012 04 05 ISSU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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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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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pyright eyesurfer. All rights reserved.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04면 종합 -9- 2007년 11월 14일 수요일 [내일신문] 17면 산업/무역 - 11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매일경제신문] 37면 인물 - 16 - 2007년 11월 15일 목요일 [동아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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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PAN Global 한국 팝음악, 즉 K-POP이 일본 내 한류 열풍의 선봉에 나섰다. 인기 걸그룹 카라가 도쿄 아카사카의 그랜드프린스호텔에서 기자회견을 마친 뒤 데뷔 무대를 선보이고 있다. 사진_ 이태문 통신원 또다시 열도 뒤흔드는 한류 이번엔 K-POP 인베이전 아이돌 그룹 대활약 일본인의 일상에 뿌리내린 실세 한류 일 본에서 한류 열풍이 다시 뜨겁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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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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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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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생명순활동상황 생명순(구역예배)활동상황 분당판 21권 30호 2015년 7월 26일 생명순 보고는 토요일 오전까지 마쳐주십시오. 보고자 : 김연호 목사 010-9251-5245 보고 : 각 교구 조장님께서 교구 사역자에게 보고해 주세요. 분당판 21권 30호 2015년 7월 26일 생명순(구역예배)활동상황 전도실적은 전도 한 분이 소속한 교구의 생명순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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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 Vol.159 www bible ac kr 총장의 편지 소망의 성적표 강우정 총장 매년 1학년과 4학년 상대로 대학생핵심역량진단 (K-CESA)을 실시한지 5년이 지났습니다. 이 진 단은 우리 학우들이 사회가 필요로 하는 직업인으로서 핵심역량을 어느 정도 갖추었나를 알아보는 진단입니다. 지난번 4학년 진단 결과는 주관처인 한국직업능력개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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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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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yot.Prot.N.1/2012 2012년 주교사목서한 신앙 파트2 ~신앙의 은총을 살자~ 교오또교구 주교 바오로 오오츠카 요시나오 로사리오기도 교오또교구는 작년 2011년 신앙을 테마로 그리스도인이 하느님으로부터 에로 불림 받아 이 되는 것을 목적으로 하여, 각자의 신앙을 내면에서부터 바라보았습니다. 올해에는 신앙을 증거하는 생활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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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5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7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3) 119 새국어생활제 14 권제 4 호 (2004 년겨울 ) 네티즌들이궁금해하는어원몇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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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께찬양합니다 Rady Vader & Jay Ruse 곡/Camp Kirlad a ff f f (G Gely =60) l l l l 4 a ff f f 4 4 l l l l b f f f f4 4 l l l l b f f f f4 l l l l 4 a ff f f 4 z f mp b f f f f4 4 z s z f 편곡 5 a ff f f m mp s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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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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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성찬경 a ff 4 4 l l a ff 4 l l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b f f 4 b f f 4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l l l l l l l l a ff 4 4 G =72 m e f 5 b f f 4 4 a ff l 더럽기가한량없던우리들 a ff l 더럽기가한량없던우리들 b f f l l 아무공로없이 b f f l l a f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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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01 16 22 28 32 36 40 44 50 54 58 02 62 68 90 94 72 98 76 80 102 84 03 04 106 142 110 114 118 122 126 130 134 148 154 160 166 170 174 138 05 178 182 186 190 194 200 204 208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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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anhak Foundation News VOL. 150 * 2011. 12. 30 논단 이슈별 CSR 활동이 기업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 국가별 및 산업별 비교분석 최 지 호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Ⅰ. 서론 Ⅰ. 서론 Ⅱ. 문헌 고찰 및 가설 개발 2. 1.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기업의 사회적 투자에 대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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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8 15 18 4 5..!!,.,.,.,..,,,,...,. 124,., TV, CNN.,,.,,., (,, ),,,,. - 1 - 2. 1) 7 (2014.9.16). (1) 1),. ( 湖西 ),. 19,.,.. 1801, 1790 1801. (2).,,,,.,,., 1784 9 1785.... 2),.. 1) 조광, 초기천주교의충청도선교와그사회문화적특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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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311153-000111-08 ISSN 1976-5754 2011 SPRG + Vol.14 Tel _ 042.481.6393 Fax _ 042.481.6371 www.archives.go.kr CONTENTS 2011 SPRG Vol.14 7 4 8 16 76 104 112 122 53 58 66 131 130 11 80 77 Column 4 5 Colum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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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국민과 경찰이 함께 하는 역사와 체험의 복합 문화공간입니다. 국립경찰박물관은 우리나라 경찰 역사의 귀중한 자료들을 보존하기 위해 만들어 졌습니다. 박물관은 역사의 장, 이해의 장, 체험의 장, 환영 환송의 장 등 다섯 개의 전시실로 되어 있어 경찰의 역사뿐만 아니라 경찰의 업무를 체험해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멀고 어렵게만 느껴지던 경찰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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캥거루는 껑충껑충 뛰지를 못하고, 여우는 신경질이 많아졌어요. 동물 친구들이 모두 모두 이상해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멧돼지네 가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염소 의사 선생님은 상수리나무 숲으로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상수리나무 숲에는 어떤 비법이 숨겨져 있는 지 우리 함께 숲으로 가볼까요? 이 동화책은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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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40242-000001-08 2013-927 2013 182 2013 182 Contents 02 16 08 10 12 18 53 25 32 63 Summer 2 0 1 3 68 40 51 57 65 72 81 90 97 103 109 94 116 123 130 140 144 148 118 154 158 163 1 2 3 4 5 8 SUMM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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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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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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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넋두리 * 저는주식을잘한다고생각합니다. 정확하게는주식감각이있다는것이맞겠죠? 예전에애널리스트가개인주식을할수있었을때수익률은엄청났었습니다 @^^@. IT 먼쓸리가 4주년이되었습니다. 2014년 9월부터시작하였으니지난달로만 4년이되었습니다. 4년간누적수익률이최선호주는 +116.0%, 차선호주는 -29.9% 입니다. 롱-숏으로계산하면 +145.9% 이니나쁘지않은숫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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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3 연구보고서 220-13 교사의성인지적교육활동능력제고를위한프로그램개발 () 한국여성개발원 교사의성인지력향상프로그램개발진 발간사 년 월 한국여성개발원원장 연구요약 ,,,', 20 60 ( 1). Ⅰ Ⅰ. 서론 교사의성인지적교육활동능력제고를위한프로그램개발 Ⅰ. 서론 교사의성인지적교육활동능력제고를위한프로그램개발 Ⅰ. 서론 교사의성인지적교육활동능력제고를위한프로그램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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