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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崔瑀의 寺院政策과 談禪法會 金 光 植* Ⅰ. 序 論 Ⅱ. 談禪法會의 開催와 그 變質 Ⅲ. 談禪法會와 寺院勢力의 推移 Ⅳ. 崔瑀의 寺院政策 V. 結 語 Ⅰ. 序 論 고려 崔氏武人政權期의 佛敎界의 동향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교종계통 사원세력의 衰退와 선종계통 사원세력의 成長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물론 이러한 동향은 불교계 의 思想的 變質을 그 배경으로 진행되었던 것이었으며1) 아울러 당시 國家權力을 장 악하고 있었던 崔氏武人政權의 政治的 利害關係와 밀접한 연관을 갖는 것이라 하겠 다.2) 한편 고려기 寺院勢力의 盛衰는 그 해당 사원 檀越들의 정치 경제적 성쇠는 물론 이거니와 당시 국가권력 그리고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집권계층과의 紐帶關係 에 의해 크게 좌우되어 왔다고 볼 수 있다. 그런데 위와 같은 측면에서 그 이해의 구체적인 면을 보면 당시 정치권력을 장악하고 있었던 최씨무인정권의 佛敎界 運用 * 湖西大學校 講師. 1) 許興植, 13세기 高麗佛敎界의 새로운 경향 ( 한우근박사정년기념 사학논총, 1981). 蔡尙植, 高麗後期 佛敎史의 전개양상과 그 경향 ( 歷史敎育 35, 1984). 崔炳憲, 定慧結社의 趣旨와 創立過程 ( 普照思想 5 6, 1992). 2) 閔賢九, 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一考察 ( 震檀學報 36, 1973). 秦星圭, 崔氏武臣政權과 禪宗 ( 佛敎硏究 6 7, 1990). 金光植, 雲門寺와 金沙彌亂 ( 韓國學報 54, 1989)., 高麗崔氏武人政權과 斷俗寺 ( 建大史學 7, 1989)., 崔沆의 雙峯寺 寺院勢力 構築과 李延年亂 ( 水邨朴永錫敎授華甲紀念 韓國史學論 叢 上, 1992).

2 과 그에 대응적인 각 宗派 사원세력의 움직임에 대해서는 미진한 부분이 적지 않았 다. 즉, 崔氏 執權武人 別의 寺院政策과 시기별 각 사원세력의 움직임에 대한 한층 더 세부적인 검토가 요청된다고 볼 수 있다. 이에 본고에서는 불교계의 변질과 개편이 보다 심화되었던 崔瑀代의 寺院政策을 이 시기의 談禪法會의 문제와 관련하여 천착해 보고자 하는 것이다. 고려초기부터 禪師들의 모임이었던 담선법회는 개경의 普濟寺에서 定例的으로 개최된 국가적 법회 이었다. 이 법회는 최우대에 들어와 확대 변질되고 있었는데 이는 곧 최우의 사원정 책과 아울러 선종계통 사원세력의 동향과 불가분의 연관을 맺고 있었던 것으로 볼 수 있는 一面이다. 이에, 이 시기의 談禪法會의 變質과 당시 寺院勢力의 推移 그리고 崔瑀의 寺院政 策과의 相互 關係를 살펴봄으로써 당시 불교계의 동향을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런데 몽고의 침략으로 인한 고종 19년 江華島로의 遷都는 對蒙抗爭에서 뿐만 아니 라, 불교계의 움직임에 있어서도 또 다른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고 이해되기에3) 본 고에서는 그 서술 범위를 고종 18년 몽고 침략 이전까지로 한정하고자 한다. Ⅱ. 談禪法會의 開催와 그 變質 崔瑀는 고종 6년, 최충헌의 사후 즉시 그 후계자로 등장하였다. 그런데 최우는 이 미 최충헌 집권 후반기부터 寺院政策의 실무를 담당한 것으로 보인다. 이에 그러한 단서로서 볼 수 있는 談禪法會 변질의 문제를 중심으로 최우의 사원정책의 내용을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기의 談禪法會는 태조 왕건 당시부터 정치적 집권화 및 사원세력의 정비를 추 진하는 과정에서 제도화된 禪師들의 모임이었다. 즉 태조가 전국 각지의 비보사찰인 五百禪宇 의 중 창건을 통한 사원세력의 재정비를 추진할 때, 담선법회는 각지의 선 사들을 중앙으로 유도함으로써 그를 통한 중앙집권적 사원통제의 효과를 얻을 수 있 는 장치였다. 담선법회의 이러한 성격은 자연 국가적 이익과 고려왕조 체제의 내적 결속력을 기하려는 것이었다.4) 고려기 談禪法會의 개최 사정을 전하는 醴泉의 龍門寺重修碑 에 의하면, 大禪師 祖膺은 十四世에 慧照國師에 투신하였는데 禪師 英甫와 門弟가 되었다. 3) 金光植, 對蒙抗爭期의 寺院政策 ( 高麗 崔氏武人政權의 佛敎界 運用에 關한 研究, 建國 大 博士學位 論文, 1992). 4) 고려기의 談禪法會에 관한 先學의 연구는 아래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安啓賢, 曹溪宗과 五敎兩宗 ( 한국사 7, 1973)의 談禪法會와 禪風의 振揚.李 萬, 談禪法會에 관한 硏 究 ( 韓國佛敎學 10, 1985).

3 國史館論叢 第42輯 乙巳年 曹溪選中에 합격하고 일곱 사찰을 歷住하였다. 그런데 그 사찰은 모두 名藍 이었다. 癸酉年에 三重大師가 되었고, 己 年에는 禪師가 되었다. 翌年에는 大禪師가 되어 官誥一通을 받고 鳴鳳寺에 住하였다. 乙亥年에 普濟國談禪齋가 개최되니 長安 行을 하다 陰竹縣에 이르렀다( 朝鮮金石總覽 上) 라는 내용이 전한다. 대선사 祖膺이 혜조국사의 문하에 투신하여 僧科에 합격하고 선사, 대선사가 되었는데 官誥에 의해 鳴鳳寺에 주거하다가, 이후 의종 9년에는 普濟 談禪齋에 참가키 위해 개경으로 떠났다는 것이다. 즉, 毅宗 9년(1195) 개경의 普濟寺 에서 개최된 國談轉齋 에 고려중기의 선종 부흥에 일익을 담당한 사굴산문의 慧照國 師5) 및 大監國師 坦然의 법통을 계승하였던 대선사 祖膺이6) 참가하였다는 것이다. 이 내용에 의하면, 보제사에서 개최되었던 談禪法會는 국가의 주도로 실시된 것이었 다. 여기서 이러한 국가적인 주도의 담선법회와는 별도의 담선법회의 존재 가능성도 생각해 볼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국가적인 담선법회는, 談禪法會는 本國의 國初에서 至今까지의 360餘年 동안 三年에 한 번씩 당해년 春에 법회가 열렸다( 高麗史 권104, 金方慶傳) 라는 내용에서 3년에 1회의 간격을 두고 개최된 정기적인 법회로, 법회는 개최되 는 당해 년의 봄에 항례적으로 개최하는 것으로 제도화되어 고려초기부터 지속되었 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정기적인 법회로 제도화되었던 국가적인 담선법회는 최씨무인정권 이전의 경우에는 보제사에서만 열렸던 것이었으니, 이러한 사정은 아래의 西普通寺行前 榜 에서, 本朝에서 三年에 한번씩 談禪大會를 普濟寺에서 실시하는 것은 또한 聖祖의 끼친 法이다( 東國李相國集 권25) 라고 전하는 바와 같다. 즉, 고려조에서는 3년마다 담선법회가 普濟寺에서 개최되 었다. 따라서 國家的으로 制度化되었던 普濟寺의 談禪法會는 전국 각지의 禪師들이 참가하였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한 실례로 普照國師 知訥은, 壬寅年 正月, 上都에 올라와 普濟寺 談禪法會에 참가하였다( 勸修定慧結社文 5) 金相永, 高麗 中期의 禪僧 慧照國師와 修禪社 ( 李箕永博士古稀紀念論叢 ; 佛敎와 歴 史, 1991) pp ) 許興植, 高麗中期 禪宗의 復興과 看話禪의 展開 ( 奎藏閣 6, 1982) p. 10.

4 韓國佛敎全書 6) 라는 내용처럼 명종 12년의 담선법회에 참가하였음을 알 수 있다. 또한 圓眞國師 承逈의 경우도, 丁巳年 春例의 普濟寺 談禪法會에 참가하였다( 寶鏡寺圓眞國師碑 朝鮮金石總 寛 上) 라는 사실이 전한다. 즉 명종 27년의 담선법회에 참가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보제사에서는 국가적 차원에서 담선법회가 개최되었고, 한편 각 지방의 山門에서 는 보제사의 담선법회를 준비하는 예비적인 법회를 개최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아래 의 龍潭寺叢林會榜 에 그 대강이 나오고 있다. 우리 太祖大王이 건국할 때에 禪法을 독실히 존숭한 나머지 이에 五百禪宇를 中外 에 창건하여 승려들들 거처시키고 해를 걸러서 談禪大會를 京師에서 열었으니, 이것 은 북쪽 거란의 군사를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九山의 승려들이 이 대회가 있기 一年 전에 각기 그 山門으로써 外方의 伽藍을 점유하고는 法會를 열어 겨울을 보내 는 데 이를 叢林이라 하였다( 東國李相國集 권25). 즉, 보제사의 담선법회가 개최되기 1년 전에 각 九山의 山門에서 개별적인 예비의 법회가 겨울을 이용하여 열리었는데, 그를 叢林 7)이라고 지칭하였다. 그러므로 고려 기의 禪師 들은 각 선사들이 소속된 九山산문에서의 예비적인 叢林을 거친 후에, 중 앙인 개경의 普濟寺에서 개최되는 國談禪齋 혹은 談禪法會 談禪大會로 표현되는 모 임에 참가하였던 것이다. 요컨대, 고려기의 談禪法會는 각 九山 山門의 개별적인 叢 林8)과 중앙의 普濟寺 法會의 이원적인 구성으로 제도화 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국가적인 보제사의 談禪法會와 이와 관련된 산문의 叢林이9) 제도적으로 수 7) 叢林은 일반적으로는 僧衆이 聚居하는 寺院 혹은 僧衆, 그리고 사원과 승중을 합친 지칭으로 사용된다. 그런데 중국에서의 총림은 馬祖道ー이 始創하고 百丈懷海의 淸規의 제정으로 제도 적 정비가 이루어졌다. 이후 唐末五代를 거쳐 宋代에 이르러서는 총림의 근간이 완비되어 禪 衆이 항상 거주하고 高僧의 禪師가 상주하며 천명 이상의 무리들이 禪의 수행을 하였다. 叢林의 이러한 내용은 佛光大辭典 권7, pp 참조. 8) 許興植은 高麗時代의 僧科制度와 그 機能 ( 歷史敎育 19, 1976)에서 총림과 담선법회의 성격을 僧科의 豫備考試로 이해하고, 태조 때 실시한 총림을 각 지방의 불교계를 회유하려는 목 적으로 시행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그러나 國初에는 담선법회와 총림이 승과의 예비고시적인 성격이 내재하고 있었다 하여도 양 제도의 본래의 역할은 구분하는 것이 타당하리라 본다. 9) 李萬도 주4)의 논문 pp 에서 叢林은 談禪法會, 叢林選은 僧科의 大選을 치루기 위한

5 國史館論叢 第42輯 행되었던 반면에, 선종 사원의 중 창건시에도 자생적인 담선법회가 열리기도 하였다. 이러한 실례는 앞서도 인용한 바 있는 예천의 龍門寺重修碑 에서 찾아 볼 수 있 다. 즉, 祖膺은 癸巳年에 鳴鳳寺 叢林외 法主로 있으라는 命을 받았고, 乙酉年에는 金州 安國寺에서 五十日 동안 談禪이 개최되었는데 이때에도 역시 法主였다( 朝鮮金石總 覽 上) 이라 하여 대선사 祖應이 명종 3년에 鳴鳳寺 叢林의 법주로 있었음을 알 수 있다. 祖膺禪師는 의종 19년에는 金州(金海) 安國寺에서 개최된 50일 간의 담선법회에서도 법주로 활약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己亥年에 창건 공사를 마치자, 九山門 學徒 五百人을 모아서 五十日 간의 談禪會 를 개최하였는데 斷俗寺 禪師 孝淳을 청하여 傳燈錄 楞嚴經 仁岳集雪竇拈頌 등을 敎 習하는 것으로 落成式을 하였다(위와 같음) 라는 내용에 의하면, 龍門寺가 창건된 명종 9년 당시에도 九山門徒 500명의 談禪 會가 50일 동안 개최되었음을 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법회는 대선사 조응과 斷俗寺 선사 孝淳이 관여됨과 아울러 傳燈錄 楞嚴經 등이 교습됨을 보면 고려중기 看話禪 중심의 선풍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음을 알 수 있다.10) 武臣亂으로 야기된 제반 사회적 모순이 심화된 당시의 분위기에서 九山門徒들이 참여하는 이 법회는 국 가적 제도의 담선법회와는 별개의 자생적 법회라고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金州 안 국사와 예천 용문사의 담선법회 개최가 武臣亂 전후에 있었던 것을 보면, 무신란 전 후의 중앙정권에 대한 반발과 함께 불교계의 모순에 대한 새로운 방향의 모색이 있 었을 것으로 보인다. 祖膺 大禪師의 당시 세태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은 무신란에 대한 그의 견해에서도 잘 나오고 있다. 즉, 癸巳年에 國朝의 多亂이 있자, 大禪師는 發願하여 三萬僧齋를 실시하였다. 또한 大 藏 二座 및 堂 三間을 별도로 안치하고 七日 동안 三百餘 人을 모아 법회를 실시하 였는데, 開泰寺 僧統 頴緇를 청하여 講演을 하는 것으로 落成을 함으로써 國難을 구 하고자 하였다(위와 같음) 일종의 豫備考試로 구분하여 이해하고 있다. 즉 총림은 승과의 예비고시로 볼 수 없다고 하 였다. 10) 許興植, 高麗中期 禪宗의 復興과 看話禪의 展開 ( 奎藏閣 6) p. 10.

6 이라 하여 1170년의 무신란과 1173년에도 잔류문신 대부분이 희생당한 癸巳의 亂, 즉 제반 기존질서가 와해되는 사태를11) 國朝多亂 으로 규정 하였던 것이다. 또한 三萬 僧齋와 七日法會를 개최하여 선종 승려 300여 명과 교종 소속인 開泰寺 승통 頴緇를 초청하여 강연케 함은 교 선종 승려들의 시국 인식이 같았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라 이 해된다. 이러한 인식 위에서 사태를 해소하려는 노력, 즉 國難 이라는 현실적 모습을 극복하려는 것은 요컨대 기존의 질서가 와해되는 상황에서 그 사태를 부정하며 새로운 질서를 세움으로써 가능한 것이라 보인다. 명종 9년의 담선법회는 이러한 정치적 상황 에 대한 인식과 아울러 불교계의 정화를 위한 목적으로 개최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武臣亂 및 그에 결부되어 나타난 사회적 모순이 심화되어 가던 명종 5년에는 담선 법회가 개최되었던 普濟寺가 집권무인 鄭仲夫에 의해 중수되고 낙성회가 개최된12) 반면에, 명종 9년의 龍門寺 談禪法會에 당시 현실에 批判的인 禪師들이 참여하고 있 었다는 것은 대조적인 사실로 주목된다. 지눌도 기존 담선법회에 대해 비판적인 생 각을 가지고 있었다. 즉 지눌은 보제사에서 개최된 명종 12년의 담선법회에 참가한 가운데에서, 壬寅年 正月에 개경 普濟寺의 談禪法會에 참가하였다가, 하루는 同學 十餘 人과 약속하여 말하기를, 이 會가 罷하면 우리는 마땅히 名利를 버리고 山林에 은둔하여 同社를 만들어, 항상 禪定을 익히고 아울러 智慧를 닦기에 힘쓰며, 禮佛하고 經 읽기 와 나아가서는 노동으로 運力하는 데까지 각각 제가 맡은 일을 해나가서, 인연을 따 라 심성을 수양하며 平生을 구속없이 지내어 達士와 眞人의 高行을 따르면 어찌 쾌 하지 않겠는가 ( 勸修定慧結社文 韓國佛敎全書 6) 라고 하였다는 바와 같이 당시 세태 및 불교계의 현실에 비판의식을 갖고 當捨名 利 할 것을 다짐하였다. 知訥의 이 같은 의식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定慧結社 로 구 현되면서 불교개신운동으로 진행되었던 것이다. 지눌의 정혜결사 태동은 요컨대 기 존 禪師들의 모임인 보제사 談禪法會의 존재를 부정하고 그에 반발하여 나아가는 상 황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기존 질서 모순의 극복을 위한 새로운 의식의 구현은 비단 知訥에게만 한정되었던 것은 아니었다.13) 白蓮社 결사를 주도하였던 圓妙國師 了世도 비록 후대이지만 神宗 원년 봄에 天台宗 사원인 개경의 高峯寺에서 개최된 법회에 참가하였는데, 요세는 11) 邊太燮, 武臣亂과 崔氏政權의 成立 ( 한국사 7). 12)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5년 11월. 13) 그런데 知訥의 定慧結社文 의 내용에서 移棲是寺 招集昔時同願者 或病或求名利而未會 且與殘僧三四輩 始啓法席 云云 하였다는 것에 의하면 당시 불교계의 현실에 반발한 것은 지눌 뿐만 아니라 다수의 同學的인 승려들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7 國史館論叢 第42輯 당시 개경의 불교계에 대한 실망을 以天性好山水 雖跡名敎非其志也,14) 즉 天性이 山水를 좋아하므로 비록 名敎에 자취를 남겼으나 그의 뜻은 아니었다고 표현하고 있 었다. 또한 圓眞國師 承逈도 然師於名利 殊無芥滞 但欲遊歷名山 15) 云云이라 하여 명리의 굴레에 얽매이기를 싫어했다. 즉 名利 를 부정하려는 의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엿볼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知訥 了世 承逈의 名利 부정으로 표현되는 새 이념은 새로운 선풍 및 결 사의 움직임으로, 요컨대 기존 개경 중심의 불교계의 矛盾과 당시 武人政權에 대한 강한 반발로서 곧 地方 중심의 結社運動으로 진행되었다. 이러한 結社는 지방사회의 독서층 향리층 그리고 점차 일반민들의 호응 속에 각 지방사회에서 그 기반을 자리 잡아갔다.16) 한편 고려기의 담선법회는 최씨무인정권기에 들어오면서 변화가 일어났다. 그는 곧 談禪法會가 크게 擴大되었다는 것이다. 그 변화의 내용은, 이런 때문에 上은 일찍이 公卿 宰執들과 壓勝의 術策에 대하여 의논하게 되었고, 參政相國은 이에 태조가 나라를 창건할 때에 오랑캐를 물리치고 난리를 진압하려는 心法을 천양하는 것으로 법을 정하였는데 그리고 本朝는 3년에 한번씩 談禪大會 를 普濟寺에서 실시하는 것은 또한 聖祖의 끼친 법이라. 진실로 社稷에 이로움이 이 와 같다면 비록 별도로 譚席을 열어서 더욱 眞源을 넓히는 것도 可한 일인데, 어찌 반드시 三年을 기다려야 하며, 또 어찌 普濟寺에서만 해야 하는가 하고 생각하고, 드 디어 이것을 上에게 아뢰니 상도 또한 기꺼이 받아 들이고 이내 有司에게 命하여 그 經費를 마련하여 大會를 三大禪宇에다 열게 하였으니, 三大禪宇는 普濟寺 廣明寺 그 리고 이 절이 하나를 차지한다( 西普通寺行前榜 東國李相國集 권25). 라고 전한다. 고종이 공경 재집들과 거란을 압승할 술책에 대하여 의논하였을 때, 참정상국 최우가 그 方策의 일환으로 3년에 한번씩 보제사에서 열리던 담선대회가 국난극복과 社稷 보전에 이로움이 있음을 강조하면서 普濟寺 廣明寺 西普通寺에서 매년 개최하도록 한 조처가 수용되었음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고종 3년, 거란의 14) 萬德山白蓮社圓妙國師碑銘 ( 東文選 권117). 15) 官誥, 古寶鏡寺住持大禪師贈諡圓眞國師敎書 ( 東文選 권27). 16) 武臣亂 이후의 불교계의 동향은 結社運動으로 함축하여 이해를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결사 운동에 관해서는 아래의 글을 참고할 수 있다. 蔡尙植, 高麗後期 天台宗의 白蓮社 結社 ( 韓國史論 5, 1979)., 高麗後期 佛敎史의 전개양상과 그 경향 ( 歴史敎育 35)., 高麗後期 修禪結社 성립의 사회적 기반 ( 韓國傳統文化研究 6, 1990). 秦星圭, 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 ( 韓國學報 36, 1984). 그런데 위의 글들은 修禪社 白蓮社의 結社運動의 체계에서 그이해의 中心체계를 세우고 있 다. 물론 수선사 백련사의 결사운동의 위상을 부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이 시기의 결사운동 은 敎宗, 禪宗을 망라한 바탕 위에서 재검토 되어야 할 것이다.

8 침략17) 이후 거란 격퇴라는 국난극복 방책의 일환으로 담선법회가 확대된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 내용에서 담선법회의 목적이 국가의 이익에 부합되었다는 측면, 그 법회의 변화를 고종이 승인하고 있었다는 사실, 그리고 그 경비를 국가에서 부담 하였다는 것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담선법회는 거란침략 이전의 普濟寺에서 3 년에 1회의 대회에서 普濟寺 廣明寺 西普通寺에서 매년 개최하는 것으로 확대되었던 것이다. 이렇게 담선법회를 빈번하게 개최케 한 인물은 參政相國 崔瑀였다. 담선법회의 변 화전후관계를 전해 주어 위에서 인용한 바 있는 西普通寺行前榜 의 문장은 李奎 報가 서술한 것인데, 이규보의 당시의 활동 전후관계 등을 참고하면 희종 3년부터 4 년 혹은 고종 7년 이후에 서술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18) 아울러 이 榜 앞 문장에서의 況今國步稍梗 且復有强隣之 謀者 勢不可以無備 云 云한 내용과, 그리고 이 榜의 도입부에 보이는 未嘗不 의 표현들은19) 담선법회의 확 대된 시점을 암시해 주고 있다. 況今國 云云 구절에서 국운이 약간 비색하고 강한 이웃 나라가 엿보고 있는 당시라는 표현은 요컨대 거란이 물러난 고종 6년 이후라는 것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에 未嘗不 의 표현을 이 榜이 서술된 이전의 시점으 로 이해할 수 있을 때 결국 담선법회의 확대된 시점은 고종 3년부터 고종 6년 이전 의 시기가 아닌가 한다. 이규보가 桂陽太守에서 起居注가 되어 개경으로 귀경한 시기가 고종 7년이고,20) 최우는 고종 8년에 參知政事로 제수되었음을 보면21) 이 前榜 은 고종 8년 이후에 이 규보에 의해 기술되었다고 볼 수 있으며 고종 3년 이후, 서보통사에서 담선법회가 개최되어 그 법회가 개최된 淵源과 그 전후 사정을 밝힌 것이라 하겠다. 이에 최씨 무인정권기의 담선법회는 일단 고종 3년부터 고종 6년 사이의 어느 시기에서 최우의 주도에 의해 빈번하게 열도록 개편된 것이라고 하겠다. 담선법회의 확대에 의해 법회의 개최는 기왕에 제도적으로 진행된 것에 9배정도의 외양적인 확대를 가져오게 되었는데, 새로이 법회의 개최 사원으로 선정된 광명사와 서보통사의 법회는 보제사의 법회와는 구별하여 別例談禪 22)이라 칭하기도 하였다. 위와 같이 담선법회가 확대된 단초는 거란침략과 그를 극복하기 위한 방책의 일환이 었다. 그러한 관련 내용들을 전해주는 東國李相國集 권39, 41의 釋道疏, 佛道疏에 서 그 주요 내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17) 高麗史節要 권14, 高宗 3년 閏月 및 8월. 18) 東國李相國集 年譜. 朴菖熙, 李奎報의 본질에 대한 연구 ( 外大史學 1 2, ). 19) 西普通寺行前榜 ( 東國李相國集 권25). 20) 東國李相國集 年譜 참조. 21) 高麗史 列傳 권42, 叛逆3 崔怡. 22) 西普通寺行別例談禪文 ( 東國李相國集 권39).

9 國史館論叢 第42輯 西普通寺의 담선법회에서 행하여진 西普通寺行別例談禪文 23)에는 백성들의 안 녕과 전쟁 억제를 기원하는 내용과 그 기원을 이루기 위하여 특별 도량을 禪宇에서 개최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廣明寺 담선법회의 경우 廣明寺禪會設齋請禪文 24)에 의하면, 국가에서 正法眼藏의 교법과 당시 명망있는 선사의 초청설법으로 외적 침략 의 격퇴와 국가와 백성들의 안녕을 기원하였던 것이다. 특히 광명사 선회의 선문은 최우의 요청에 의해 이규보가 작성한 글이라고 분명히 전하고 있다.25) 이 점에서도 담선법회의 주도 인물이 최우이었음이 확실하다. 국난극복 방책의 일환으로 최우에 의해 주도된 談禪法會는 普濟寺, 廣明寺, 西普通 寺에서, 매년 치루어진 법회와 아울러 각 지방 산문의 叢林26)까지 포함하여 당시 불 교 사회에 끼친 영향은 자못 심대하였을 것이다. 그러한 심대한 변화를 야기시킬 수 있는 담선법회의 확대 변화는 거란의 침략이라는 계기에 의해서 일어난 것이라고 이 해할 수 있겠지만, 보다 근원적인 변화의 동기를 당시 佛敎界의 動向 및 崔氏武人政 權의 寺院政策 등에서 살펴보고자 한다. 앞서 살펴본 담선법회의 自生的 성격과 함께 무인정권 등장 이후의 사원이 연계된 무인정권과 승도들의 대립, 그리고 최충헌 최우의 대사원정책 등의 여러 측면들을 고 려하면 그 이해의 단서를 파악할 수 있다고 보겠다. 아래의 기록은 昌福寺에서 행하여진 談禪榜 인데, 여기에서 최충헌의 선종부흥에 대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으며 아울러 담선법회의 변화의 동기도 찾아볼 수 있다. 무릇 道의 興衰는 모두 시대에 매인 것이다. 그러므로 禪法이 거의 끊어질 정도로 중간에 미약 하다가, 우리 晉康公이 붙들어 일으켜서 힘껏 유지시킨 뒤에 원류가 더욱 넘치고 祖道가 크게 세상에 行하게 되었다. 公이 大安三年에 옛날에 昌福寺를 城의 東 南쪽에서 발견하여 드디어 개척해서 새롭게 하고 今上이 即位한 二年에 장차 叢林을 크게 열어 心法을 闡揚하려고 하였다( 昌福寺談禪榜 東國李相國集 권25). 위의 내용에 의하면 晉康公 崔忠獻이 禪法, 즉 禪宗의 부흥의지를 가지고 있었음 을 이해할 수 있다. 여기에서 최충헌이 희종 7년에 창복사를 중창한 이후 고종 2년 에는 心法 을 크게 떨치려는 의도에 의해 叢林을 개최하게 된 사정을 알 수 있다. 23) 위와 같음 24) 東國李相國集 권41. 25) 위의 책의 崔相國攘丹兵書觀音點眼疏 題目 末尾에 晉康公元嗣也此下十九首皆相國所請 代作 이라고 전하고 있다. 이 19수 안에 廣明寺에서 행한 禪會의 禪文이 포함되어 있는 것 이다. 19수의 내용 대부분이 거란 침략의 격퇴를 기원하는 의지의 소산인 禪文 이라는 것에 서 談禪法會의 의미와 그 개요를 더욱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26) 須彌山 聖住山 迦智山 등 九山山門에서 叢林이 개최되었다는 내용이 있다. 즉 東國李相國 集 권12의 談禪會須彌山參學謁祖師眞文, 談禪會聖住山參學等拜祖師文, 談禪會 迦智山拜祖師文 참조.

10 창복사 총림의 담선은 그 주도 인물이 당시의 집권무인이었던 최충헌이라는 점에 서 그 법회에 최충헌의 적극적인 지원 및 주관이 개재되었을 것이 인정된다. 그런데 이 담선에는 각 지방의 선사들이 대거 참여 하였는데, 그 사정은, 무릇 結社를 하여 佛道를 精修하자 眞公처럼 高行의 人士들이 모두 나라의 부름에 달려오고, 그 나머지 宗門의 宿德들도 구름처럼 모여드니, 禪席의 盛大함이 古今을 통하여 이 모임과 같은 적이 없었다(위와 같음) 이라고 전하는 바와 같다. 즉 山林에 있었던 高行之人 과 其餘宗門宿德 등이 구름 처럼 몰려 들었다는 당시의 분위기는 禪席之盛 古今所無 是會也 로 표현되고 있었다. 창복사 총림은 최충헌의 적극적인 지원과 당시의 국가 권력의 후원 하에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겠다. 최충헌은 이러한 담선총림을 통하여 禪宗의 부흥과 함께 당시 각 지방에 산재하여 있었던 禪師들을 흡수하여 사원세력의 통제와 정권 안정을 기하려 는 목적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최충헌의 이러한 목적과 창복사의 경험을 충분히 체득하고 있었던 것으로 이해되 는 최우는 담선법회를 통하여 더더욱 禪宗勢力의 再編과 그를 통한 政權安定을 기하 였던 것이라 하겠다. 국가적으로 制度化 되었던 普濟寺의 談禪法會가 무신란 전후 점차 불교계의 타락 및 무인정권의 난립상으로 선사들의 무관심을 유발하였고 그 기 능이 감소되었던 것을 앞서 살펴 보았다. 그러한 중앙불교계에 대한 반발이 지방중 심의 불교계 또는 독서층 향리층 중심의 結社運動에서 나타나고 있는 상황에서, 최충 헌이 주도하였던 昌福寺의 叢林은 그 선종 세력의 추이에 대한 대응으로서 불교계의 움직임을 받아들여 정치적으로 운용한 것이라 하겠다. 최우의 談禪法會 확대는 비록 그 계기는 거란의 침입이라는 국난의 극복 방책의 일환으로 시도된 것이지만, 그 이면에는 개경의 불교계 및 무인정권에 반발하고 지 방의 새로운 結社運動을 추구해 가고 있었던 세력, 최충헌이 주도한 창복사 총림에 연루된 최충헌의 擁護勢力 등을 기존의 국가적인 담선법회 제도안에서 재편시키려는 목적을 가졌던 것으로 보인다. 기존 불교계에서 반발해 나간 세력과 최씨무인정권에 우호적인 세력 등 禪宗勢力 전체를 旣存 談禪法會의 확대 개편을 통하여 재편하려 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점은 담선법회가 개최된 보제사 광명사 서보통사 세 사원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 즉, 普濟寺는 고려초기부터 談禪法會의 개최 사원인 동시에 선종 迦智山門의 중심 사원이었다.27) 보제사가 담선법회 개최내용이 변화된 뒤에도 계속 개최 사원에 포함 27) 普濟寺는 天禪院, 大禪院, 唐寺, 大寺, 廣通普濟寺, 演福寺 등의 이름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내용은 韓基汶의 高麗太祖의 佛敎政策 ( 大丘史學 22, 1983) p. 24 참조. 그런 데 普濟寺는 九山 가운데서 중심 山門의 주요한 사원이었음을 東國李相國集 권25의

11 國史館論叢 第42輯 된 것은 기존 제도의 유지라는 점과 함께 가지산문 선종세력에 대한 고려로 이해된 다. 廣明寺는 개경에 위치하였던 선종의 유명한 사원으로 禪佛場이 개최되었던 사굴 산문 계통의 사원이었다.28) 광명사가 담선법회의 개최 사원에 포함된 것은 개경의 유명 선종사원인 것이 고려된 것이라 이해되지만 오히려 사굴산문 소속의 修禪社 선 풍을 주도하였던 지눌의 계승자이었던 慧諶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西普通 寺는 현재 전하는 기록으로는 선종계통으로 이해되지만 山門의 소속이 불분명 하여 어느 산문인지는 알 수 없다.29) 서보통사는 추측건대 최씨무인정권과 직접적으로 연 결된 사원으로 창복사의 경우와 동일한 성격을 갖고 있었다고 추정해 볼 수 있을 것 이다. 이러한 세 사원의 분석에서 나타난 것과 같이 기존 제도를 재편성 하는 데에 있어, 고려중기에 왕사를 배출하고 선종의 명맥을 이었던30)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의 사원에, 최씨무인정권과 연계되는 것으로 이해되는 서보통사를 포함시킨 것은 당시 사원세력의 현실을 인정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담선법회가 빈번하게 된 내용을 더욱 살펴보기 위하여 崔瑀가 취한 선종정책을 보 면, 후세에 와서는, 비록 舊章을 祖述하여 燃燈하는 일은 끊임없이 하였으나, 道는 或 때에 따라 비색하기도 한 때문에 祖風과 祖脈이 거의 희미해져서 不振하였다. 그래 서 국운이 연달아 어지러웠는데 세상에서는 그러한 端緒를 알지 못하였다. 그런데 樞密相國 崔公만이 慨然히 發憤하여 宗綱을 다시 떨치고 祖樹를 거듭 꽃피울 것을 생각해서, 이에 단단히 마음을 먹고 參禪하였으며, 따라서 승려들 중에 명성이 자자 한 者나 깊이 숨어 있는 이들까지도 자신을 굽혀서 맞이하였다( 大安寺同前榜 東國李相國集 권25) 라는 내용이 전한다. 禪風과 禪脈이 세상에서 거의 희미해지고 國運이 미약해지는 이유를 禪의 宗綱의 부재에 있다고 본 추밀상국 최우가 선을 부흥시키려고 개인적으 로는 參禪을 하고, 名聲이 자자한 者나 은둔하는 고승들을 불러들이었다는 것이다. 龍潭寺叢林會榜 에서 況迦智 於九山爲大 而衲之輩 林會霧集 濟濟如也 이라고 표현한 당시 분위기에서 이해할 수 있다. 28) 廣明寺는 太祖의 舊宅을 이용하여 만든 사찰임을 신중동국여지승람 권4, 開城府 上 佛 宇條에서 알 수 있다. 29) 西普通寺에 관한 高麗史 및 高麗史節要 에 전하는 기록은 忠肅王 즉위년 6월 갑술에 上王(충선왕)과 王(충숙왕)이 서보통사에 이르니 百官이 출영하였다는 내용이 유일하다 ( 高麗史 권34, 忠肅王 즉위년 6월 갑술 기사 참조). 서보통사는 현재 전하지 않으나 개 성 영평문 外 西普通院 부근에 있었던 사찰로 추측할 수 있다( 新增東國輿地勝覽 권4, 開城府 驛院). 30) 가지산문의 學一과 사굴산문의 坦然은 각기 王師를 제수받고, 각 山門의 중심 인물로서 고 려중기의 禪宗의 독자성을 견지하였다. 金相永, 高麗 睿宗代 禪宗의 復興과 佛敎界의 變化 ( 淸溪史學 5) pp

12 崔瑀는 국운이 어지러운 현실의 원인을 禪의 부진으로 보고 禪風진작을 적극 주도하 였던 것이다. 최우 자신이 參禪을 하고 명성이 있는 禪師나 산림에 묻혀 있는 禪師 들에게 자신을 굽혀서 적극 초치하였다. 최우의 대사원정책은 그 자신의 關心과 아 울러 당시의 대내외적인 상황에서 선종을 이용한 국난극복의 의도가 포함되었던 것 이다. 그러한 전후 사정을 더욱 이해할 수 있는 다음의 기록에는, 이처럼 힘써 行하니, 數年이 안 가서 禪風이 다시 크게 일고 오랑캐가 국경을 침 입하는 일도 얼마 안가서 스스로 그쳤으니 이것도 필시 禪力으로 그렇게 된 것이리 라(위와 같음) 라 하였다. 최우의 선종 지원책에 의해 禪風이 크게 일어나고, 그 결과 거란의 침 략이 그치게 된 것으로 이해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불교계가 갖고 있는 사회 적 위상을 최씨정권이 적절하게 이용하려 한 것이라고 하겠다. 물론 이 글을 서술한 이규보와 최우가 각별히 친밀한 관계에 있었던 만큼 다소의 우호적인 평가가 포함되 었을 것이지만, 최우의 선종지원의의도와 성격은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위의 내용은 개경 주위에 있었던 大安寺 담선대회의 전후사정을 전하는 것 인데, 이 대안사 담선법회가 개최된 것이 거란이 물러난 고종 6년 이후라는 것, 또한 거란이 물러난 소이를 최우의 선종 지원책으로 귀결시키는 사정에서31) 담선법회의 개최동기와 그 변질의 시기도 더욱 확연해 지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더욱, 위의 인용 문에서 力行如是 及數年 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 고 하겠다. 그러면 최충헌 생존 당시 최우가 담선법회 확대 등의 선종정책을 구현할 정도의 정치적 권한을 소유하였는가 라는 점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최우는 고종 6년 최충헌이 사거할 당시에 이미 樞密院副事로 당시 권력의 중심부에 있었다. 최충헌이 권력의 행사를 忠獻爲傾ー國 獨專政柄 32)으로 구가할 그 즈음에도 최우는 거란 침 31) 大安寺 談禪榜에서 적출되는 주도적 인물 즉, 樞密相國崔公 을 崔瑀로 보고자 한다. 최우는 고종 8년에 參政이 되었지만, 고종 6년 최충헌이 사거하여 집권무인으로 오를 당시에 이미 樞密院副事의 직위에 있었다. 그러므로 이 대안사 담선은 高宗 6년 8년 사이의 기간에서 시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최충헌은 神宗 즉위년 11월에 樞密院知奏事, 신종 5년 윤월에 參知政事, 熙宗 즉위년에는 恩門相國 門下侍郎同中書門下平章事, 희종 즉위년에는 晉康侯를 제수 받았다. 그리고 최충헌은 당시 관련 여러 기록들에는 대부분 晉康公으로 표 현되고 있는 것도 참고할 수 있다. 大安寺의 위치를 알 수 있는 내용은 東國李相國集 권25의 大安寺同前榜 에 지금 鳳城 밖 鵠嶺의 북쪽에 大安寺라는 절이 있어 라는 구절이다. 여기에서 말하는 곡령은 송악 산을 가리키는 것인데 이로 보아, 일단 대안사는 開京 주위에 있었다고 하겠다. 곡령이 송 악산이라는 것은 신증동국여지승람 권4의 개성부 산천조에 松嶽 : 府의 동쪽 5리에 있 는데 鎭山이다. 처음 이름은 扶蘇 또는 鵠嶺이라 하였다 는 내용으로 알 수 있다. 32) 高麗史節要 권14, 熙宗 5년 秋9월.

13 國史館論叢 第42輯 입시에는 최충헌의 命에의해 官兵을 사열하였고,33) 과거 급제자들에게 銀瓶을 하사 할 정도의 개별적인 경제력과,34) 문인들을 초치하여 響應을 베풀 수 있는 정도의 권 력을 행사하고35)있었다. 아울러 최충헌이 임종 직전에 권력의 계승을 최우에게 하기 위한 유언의 내용36) 등을 참고하면 최충헌 당대에서도 최우에게 일정한 권력을 부여 한 것으로 이해된다. 따라서 최충헌 생존시라도 담선법회의 확대와 선종정책 등을 최우가 주도적으로 시행했을 가능성을 충분히 예상 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 확대된 담선법회는 몽고의 침략으로 강화도로 천도하기까지는 대략 지속되었을 것 이다. 담선법회가 전제하고 있는 불교계의 정치적 사회적 기반에 끼치는 영향력이 컸 던 것은 말할 것도 없겠지만, 국난극복을 위해서는 思想的 統一의 기반인 중앙집권적 佛敎儀禮의 효율성은 매우 컸기 때문이다. 국난극복을 위하여 법회가 개최되었던 사 정은 고종 3년의 거란 침입시 최우의 요청에 의해 작성된 法會 관련 문장들에서 쉽게 볼 수 있다. 同前願請設禪文 37)에는 엎드려 바라건대 이 애원에는 정성에 굽혀 한번 미묘한 음성을 떨치사 되놈들로 하여금 멀리 달아나 나라의 운수를 태평에 두소 서 라 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거란의 격퇴와 태평성대를 기원할 때 此頓門之藏 實 爲正法之原 由是有奉崇之心 慨然懷興之志 凡營佛事 必禪論 云云, 즉 이 頓門의 비장 이 사실 정법의 근원이라 이 때문에 숭봉할 마음이 있어 개연히 흥복의 뜻을 품고, 무릇 佛事를 경영함에서는 반드시 禪論을 설하겠다고 말하고 있다. 禪門을 정법의 근 원으로 이해하면서 모든 불사를 행함에 있어서는 필히 禪論 으로 구현하겠다는 의지 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거란 침략 당시에도 담선법회 만을 의지하여 국난극복의 사 상적 통일을 기도한 것은 아니었다. 불교 관련 모든 방략들이 동원 되었던 것이다.38) 고려기의 국가적 행사로서의 불교의례는 護國的 성격과 現世利益의 祈福的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이에 불교의례에서는 禪이나 念佛에의한 安心法이 중시되었다.39) 이 러한 성격의 불교의례로서의 법회는 특히 거란 몽고의 침략을 당한 高宗代에서 국난 극복을 위하여 빈번하게 개최되었다.40) 국가적인 불교의례가 당대 사회의 최대 관심 33) 위의 책 권15, 高宗 5년 夏4월. 崔忠獻 遺其子知奏事瑀 巡閱城郭兵器 以私率自衛 隊甲者 連 旦數里. 34) 위의 책 권14, 熙宗 4년 夏閨4월. 최우는 집권무인으로 권력을 구사한 고종 6년 이전에도 門客을 소유하고 있었는데, 그 문객 을 유지할 수 있는 經濟力과 그를 인정한 최충헌의 의도 등을 주목할 수 있다. 35) 東國李相國集 年譜 참조. 熙宗 4년의 十字閣 건립과 강종 2년의 宴會 개최는 최충헌 생 존 당대에 그를 가능케 한 경제력과 정치적 위상에 따른 권력 소유가 전제되는 것이라 하 겠다. 36) 高麗史 列傳 권42, 叛逆3 崔怡. 37) 東國李相國集 권41. 38) 金煐泰, 高麗歷代王의 信佛과 國難打開의 佛事 ( 佛敎學報 14, 1977) pp 徐潤 吉, 高麗의 護國法會와 道場 ( 佛敎學報 14) pp ) 洪潤植, 高麗史 世家篇 佛敎記事의 歷史的 意味 ( 韓國史硏究 60, 1988) pp ) 尹龍爀, 고려 대몽항쟁기의 불교의례 ( 歷史敎育論集 13 14, 1989) pp

14 사인 國難 을 계기로 인하여 더욱 번창하였고, 같은 배경에서 담선법회도 일정한 역 할을 하였던 것이다. 담선법회는 禪을 토론하고 參禪을 수행하는 禪師들의 모임이었다. 이 모임에서는 或極談禪理 或點破正法眼藏 41)이라 하여, 즉 선리를 궁구해 담설하기도 하고 혹은 정법안장을 깨치기도 한다든가, 혹은 長老輩相與 琢磨志行 硏覃心學 申之整頓宗門規 繩 禀禀乎不可犯也 42)하였다는 것, 즉 장로들이 서로 지행을 연마하고 심학을 연구하 며 거듭 종문을 정돈하니 규승이 늠름해서 범할 수가 없었다는 것은 이 법회의 내용 을 말해주는 것이다. 즉, 법회에서는 禪理 를 궁구해 담설하고, 正法眼藏 을 깨치며, 志行 을 연마하고, 心學 을 연구하며 宗門 을 정돈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담선법회 는 知禪之爲無上大法門也 43)든가, 禪法之爲及最上宗乘 44)이라는 귀결에서 나타나듯 이 禪의 우수성을 재확인하는 모임이었다. 이와 같은 담선법회는 太祖 王建 당시 정치적 집권화 및 사원세력의 재정비를 추 진할 때45) 체계화 되었다. 따라서 담선법회는 자연 국가적인 이익 혹은 고려 왕조 체제의 내적 결속력을 이루려는 목적을 가지고 있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담 선법회를 통한 禪이 갖는 위력과 이익에 대하여는, 우리 太祖大王이 명철한 祖師의 秘要에 따라 宗門을 높이 믿어서, 이에 五百禪宇 를 크게 열어 心法을 천양하였다. 그런 然後에 北兵이 自却하고 국경을 침범하지 않 았으니, 그렇다면 禪이 세상에 이익을 주는 것을 어떻게 말로 다할 수 있으랴( 大 安寺同前榜 東國李相國集 권25) 라는 내용이 전한다. 태조는 宗門을 믿고 五百禪宇를 크게 열어 심법을 천양하였 다는 것이다. 이러한 소치로 北兵이 스스로 물러가 다시는 國境을 침범하지 않았고 그로부터 禪이 세상에 이로움을 주었다는 인식이 있었다. 또한, 아래의 내용에 의하 면, 우리 太祖가 王業을 세울때, 禪法을 독실히 존승하여 이에 五百禪宇를 中外에 창 건하여 승려들을 거처시키고 해를 걸러 談禪大會를 京師에서 열었으니 이것은 北兵 을 진압하기 위한 것이었다( 龍潭寺叢林會榜 東國李相國集 권25) 라고 하여 담선법회가 국가적으로 개최된 연유를 전하여 주고 있다. 談禪法會는 41) 西普通寺行前榜 ( 東國李相國集 권25). 42) 龍潭寺叢林會榜 ( 東國李相國集 권25). 43) 昌福寺叢林會榜 ( 東國李相國集 권25). 44) 西普通寺行前榜 ( 東國李相國集 권25). 45) 韓基汶, 高麗太祖의 佛敎政策 ( 大丘史學 22, 1983) pp

15 國史館論叢 第42輯 以鎭北兵 이라는 외적 격퇴의 정치 군사적 목적이 있었음이 밝혀지고 있었다.46) 그러므로 담선법회의 그러한 성격이 고종 당대의 국난극복시의 경우와 동일한 형 태로 나타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충렬왕 당시 고려와 元사이에 담선법회의 목적에 관한 외교 논쟁이 있었다. 國家 談禪法會所以 咀上國也 라는 이해가 있어서 그 목적 에 대한 외교적 설전이 전개되기도 하였다.47) 談禪法會는 내적으로는 禪을 토론하고 익히는 禪師들의 모임이었지만, 그 모임은 국초부터 있었던 것과 같이 정치적 성격 또한 강한 불교계의 모임이면서, 외적의 격퇴라는 國難克服의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고려초기부터 선종계통 사원 세력에 대한 중앙집권적 통제를 위한 방식의 일 환으로 이용되었던 것도 사실이다. 이같이 국초부터 있었던 불교계의 談禪法會는 이중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는 모임 이었다. 이에 崔氏武人政權期의 담선법회는 외적으로는 거란 몽고의 침략 격퇴라는 국난 극복의 성격을 띠우고 있었지만, 내적으로는 무인정권 및 기존 개경 중심의 불 교계에 반발하여 지방중심의 結社運動을 주도하였던 사원세력과 최씨무인정권과 보 다 긴밀히 연결된 사원세력 등 禪宗 계통의 寺院勢力 전체를 확대된 담선법회의 制 度 안으로 흡수하여, 그 세력들을 재편하려는 최씨무인정권의 寺院政策의 구도에서 확대 운영된 것이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Ⅲ. 談禪法會와 寺院勢力의 推移 담선법회의 전개에서 당시 선종계통 사원의 동향 그리고 최우의 대사원정책과의 상호 관련성을 살펴보고자 한다. 毅宗 24년 武臣亂 이후 정권을 차지한 집권무인들 에게 강력하게 저항한 집단은 寺院勢力의 일부이었다. 물론 그 저항은 사원세력의 존립기반에 대한 이해관계에서 기인하고 있었다. 또한 執權武人들이 사원세력을 권 력의 쟁탈과 정권 유지에 이용하였던48) 속성에서 나온 것이었다. 최씨정권도 사원세 46) 李萬은 주4)의 논문 pp 에서 담선법회의 목적을 直指人心 見性成佛로 표방되는 禪理 를 참구하여 개인의 安寧을 도모하고, 禪理의 신속성과 응집력을 이용하여 國難을 克服하기 위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성격이 후대로 내려올수록 개인적인 신앙의례에서 호국법회로 변질되었다고 하였다. 47) 高麗寺 列傳 권17, 金方慶傳 및 世家 권28, 忠烈王 4년 6월. 48) 武臣亂 직후, 집권무인의 일원이었던 李高는 권력의 완전한 장악을 위해 惡小 및 法雲寺 開 國寺의 僧徒들을 중심으로 黨餘를 조직하여 李義方을 제거하고자 하였다(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원년 春正月). 李義方은 그에 대항한 歸法寺 僧徒 등을 격살하고, 이어서 重光 寺 歸法寺 弘護寺 등의 사찰을 불태워 정권 도전에 대한 근본적인 대책을 기하고자 하였다 ( 高麗史節要 권12, 明宗 4년 춘정월). 그리고 鄭仲夫는 이의방을 제거할 때에 그의 아들 鄭均의 주도하에 從軍僧徒와 연계하여 이의방 등을 제거하고 권력의 정상에 이르기도 하였 다( 高麗史節要 권12, 명종 4년 12월). 李義旼은 경주 중심의 民亂에 관여하여 그 亂을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는 속성을 노출하였고 그 점이 정치적 분쟁의 소지가 되기도 하였다

16 력의 도전을 적지 않게 받았다. 따라서 崔忠獻은 집권이후 사원세력의 근원적인 통제를 위한 다각적인 정책을 시 도하게 되었다.49) 요컨대 최충헌은 선종의 일부세력들을 중심으로 僧政을 운영하였 다. 즉 志謙 承逈을 지원하고 그를 통한 선종부흥 정책을 시행하였던 것이다. 최충헌 은 志謙 承逈을 중심으로 한 선종부흥 정책만을 시도한 것은 아니었다. 최충헌은 당 시 보편화되었던 禪의 부흥을 지겸 승형이라는 대상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진행시키 면서 일면에서는 최충헌 자신이 독자적인 사원경영을 시도하였다. 즉, 昌福寺와 승형 을 법주로 초치한 演法寺가 그러한 대상 사원이었다. 창복사의 경우 고종 2년에 談 禪 叢林을 개최할 때 凡結社精修 如眞公等高行之人 實皆赴召 其餘宗門宿德 無不秦 奏 其集如雲 50)하였다는 것, 즉 무릇 結社하여 佛道를 정수하자 眞公처럼 고행의 인 사들이 모두 나라의 부름에 달려오고 그 나머지 종문의 숙덕들도 구름처럼 모여들었 다는 것처럼, 최충헌이 주관한 이 모임에 각지의 禪師들이 대거 참여하였다는 사실 은 최충헌의 사원정책이 크게 효과를 보았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演法 寺에서는 承逈을 맞이하러 간 최우의 추종자가 數千人 이라는 면에서51) 연법사 개설 법회를 통한 호응도도 대단하였음을 알 수 있다. 昌福寺 叢林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것은 진공 같은 高行之人 들 뿐만 아니라 其餘 宗門宿德 들이 구름처럼 몰려들었다는 표현이다. 물론 그 실상에 대하여 과장은 있었 을지라도 최소한 眞公이 속한 山門 이외에 다른 산문에서도 대거 참여하였다는 것은 유의할 만한 사실이다. 이는 당초 최충헌이 기대한 것은 진공이 속한 산문에서의 선 사들의 참석을 기대한 것이었는데 여타의 산문 선사들도 참가한 것이었는지, 아니면 여타의 산문 선사들도 법회 참가 대상으로 고려하였는데 다만 그 참여 숫자가 많았다 는 것인지는 분명치 않다. 그러나 그러한 다수의 산문에서 다수의 선사들이 참여한 것은 최충헌의 입장에서는 크게 고무적인 것이었으며, 실제 그러한 사정이 창복사 談 禪榜 에 전하여지고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측면이 최우가 담선법회의 확대를 통한 선종계통 사원세력 정비를 기하게 된 경험적인 확신이 되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선종 계통의 사원세력 전체를 재편하려는 사원정책을 더욱 이해하기 위하여 담선 법회 확대 이전의 선종계통 사원세력을 개괄적으로 살펴보고자 한다. 첫째는 최충헌의 집권 이전의 정치권과 긴밀히 연결된 사원세력은 가지산문 및 사 굴산문이라 할 수 있다. 이 세력은 최충헌기에 와서는 소외되어 중앙 정치권력 내에 서는 큰 역량은 발휘하지 못한 것으로 보고자 한다. 이는 가지산문의 경우 가지산문 ( 高麗史 列傳 권128, 李義旼傳). 49) 金光植, 崔忠獻의 執權과 寺院政策 ( 高麗 崔氏武人政權의 佛敎界 運用에 關한 硏究, 建國大博士學位 論文). 50) 昌福寺談禪榜 ( 東國李相國集 권25). 51) 竇鏡寺圓眞國師碑 ( 朝鮮金石總覽 上).

17 國史館論叢 第42輯 소속으로서 경상도 지방의 가지산문 중심 사원이었던 雲門寺가 명종 23년에 일어난 金沙彌亂에 연루되어 있었다는 사정에서 그 단서를 찾아 볼 수 있다. 명종 신종대에 이르기까지 10여 년 동안 무인정권에 항쟁한 金沙彌亂은52) 결과적으로는 가지산문의 위축과 중앙권력내에서의 가지산문의 배척을 뜻하는 것이라 하겠다. 또한 무신란 이 후 중앙불교계의 부패상에 대한 반발로서 보제사 담선법회를 부정하려는 禪師들의 의식은 자연 가지산문이었던 普濟寺의 권위를 손상케 하는 것이었으며 그는 곧 가지 산문의 전통에 대한 부정적인 요인을 제공한 결과가 되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명종 27년, 최충헌 살해 모의에 연루된 10여 명의 승려들이 추방당할 당시 闍崛山門의 대선사 淵湛이 포함되어 있었다. 여기에서 淵湛의 추방은 사굴산문이 최 충헌 집권 이전에는 중앙불교계에서의 입지가 공고하여 반최충헌세력에 연결된 가능 성을 말해주는 것이다. 사건 이후 사굴산문은 중앙불교계 및 정치권력과의 관계가 순탄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므로 가지산문과 사굴산문은 최충헌기에는 정치권력과 의 긴밀성이 문제시 되어 사원세력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바로 그러한 현실 에서 이들은 최우가 주도한 담선법회의 재편 구도에는 산문의 활로를 개척키 위하여 적극 참여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둘째는 최충헌이 적극 후원한 대상으로서의 志謙 承逈 관련의 사원세력은 최충헌 과 연결됨으로 인해 산문이 성장한 潙仰宗 羲陽山門으로 최충헌의 선종부흥정책에 적극 활용된 세력이다. 셋째는 최충헌의 독자적인 사원경영에 직접 연결된 세력이다. 창복사 담선총림에 직 간접으로 간여된 弁公 眞公 高行之人 등으로 표현된 부류로서 이들은 최충헌의 전 위적인 사원세력이 되겠다. 넷째는 무신란 전후의 중앙불교계에 대한 부패상과 모순에 반발하고서 지방에서 結社運動을 추진하고 있었던 세력이다. 修禪社 白蓮社로 구현된 결사운동은 독서층 향리층 일반민들의 호응속에서 최우대에 와서는 점차 불교 개신적 입장에서 사회적 영향력을 증대하고 있었다. 특히 수선사 산문은 집권무인들을 비롯한 지배계층이 참 여하는 가운데 산문의 발전이 가속화되고 있었다. 이러한 여러 갈래의 사원세력의 분포가 대략 담선법회가 확대되기 이전의 선종 사 원계통의 현황이었던 것이다. 최우는 다양한 이해관계와 전통에 따라 분립되어 있었 던 각 산문들을 거란 침입이라는 외적인 계기에 의해 담선법회를 통하여 하나로 재 편하고자 한 것이다. 특히 최충헌이 주관한 昌福寺 叢林에서 각 山門의 禪師들이 대 거 참여하였다는 사실은 최우로서는 이러한 목표가 실현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확신 케 하는 실례가 되었을 것이다. 거란의 침략을 계기로 하여 위에서 살펴본 여러 사원세력들을 이전부터 선사들의 52) 金光植, 雲門寺와 金沙彌亂 ( 韓國學報 54) pp

18 모임으로써 전통을 가지고 있는 談禪法會 體制 안으로 흡수하려는 정책을 시도하였 다. 사원세력을 인정하였다는 것은 기존 담선법회의 개최 사원이었던 普濟寺만 한정 시킨 것이 아니라, 廣明寺 西普通寺도 함께 하도록 한 조처에서 이해할 수 있다. 즉, 迦智山門의 선사 혹은 가지산문과 유대 관계가 있었던 세력들은 가지산문 소속이었 던 보제사의 법회에 참가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리고 사굴산문 선사들과 역시 사 굴산문 계통으로서 새로운 결사운동을 주도하였던 수선사 산문의 선사들은 사굴산문 의 소속으로 이해되는 廣明寺에서 법회를 수행하였을 것이다. 한편, 최충헌정권의 대 선종 중심 정책에 보다 긴밀히 연결되어 있었던 지겸 승형의 계통과 최충헌의 독자 적인 사원경영에 적극 참여한 계통들은 최씨무인정권이 경영하였던 것으로 보이는 西普通寺의 재편된 담선법회에 참가하도록 하였다고 하겠다. 이러한 사정은 西普通寺行前榜 을 통하여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다. 무릇 召集한 納子는 各各 천명을 헤아릴 정도이었고, 암혈에 숨어있는 高人 宿望 같은 者들도 모두 禮를 갖추어 맞이하였으며 거처하고 휴식하는 장소나 세수하고 목 욕하는 기구까지도 특별히 깨끗하게 마련하였으니 대개 마음으로 공경함을 보인 것 이다( 東國李相國集 권25). 즉, 모인 禪僧들은 각각 千名정도나 되었고, 암혈에 숨어있던 高人 宿望 같은 者들 도 모두 禮를 갖추어 맞이하였다는 내용에 의하면, 당시 普濟寺 廣明寺 西普通寺의 법회에 참가한 禪師들이 각 사원마다 千餘 名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세 사원의 개 별적 법회의 참여 선사들을 各滿指千 으로 표현함에서 참여 선사의 숫자를 알 수 있 을 뿐만 아니라, 각 사원의 법회는 개별적으로 진행 되었다는 사정도 알 수 있다. 이 러한 법회의 개최가 개별적이었다는 것은 위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각 연고 산문의 사원에서의 법회에 참가하는 운영방식이라는 점을 추측케 해주면서도 아울러 그 개 별성은 곧 최씨무인정권의 대사원정책에서 기인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즉 각 山門 별의 법회로서 그 산문의 참여의 정도를 점검함으로써 최씨무인정권에 대한 협 조적 자세의 기준을 가늠해 볼 수 있었을 것이다. 그리하여 최우는 각 산문별의 법 회의 상황을 통하여 각 산문의 최씨무인정권에 대한 협조의 정도를 이해할 수 있는 근거로 활용할 수 있었을 것이다. 즉, 최씨무인정권은 각 산문별의 개별적 모임을 진 행시키면서도 전체적으로는 담선법회의 재편구도의 운영을 통하여 선종 사원세력 전 체를 통제해 나갈 수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내용을 이해하는 데에 있어 참고적으로 살펴볼 수 있는 것은, 담선법회가 세 사원에서 동시에 개최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는 아래의 관련 내용이다. 또 文安公과 함께 誥院에 있을 때에 晉陽公이 普濟寺 廣明寺 西普通寺의 三寺에서

19 國史館論叢 第42輯 禪會를 열었다. 破會할 때에 公은 二公과 直講 尹于ー을 청하여 세곳 禪會의 枋을 짓 게 하였다. 俞가 廣明枋을 지었는데 時人이 俞가 지은 枋이 公의 것만 못하다고 하였 다. 그러나 公은 이걸 보고서 감탄하고 가는 곳마다 들어내어 말하기를 오늘 작품은 나의 것이 俞君의 것에 멀리 미치지 못한다고 하였다( 補閑集 권中, 文順公). 즉, 이규보가 文安公 俞升旦과 誥院에 있을 당시 진양공 최우가 보제사 광명사 서 보통사의 사원에서 禪會, 즉 談禪法會를 개최하였는데, 그 선회가 끝날 무렵에 최우 가 李奎報 俞升旦 尹宇一에게 각각 그 사원의 談禪榜을 짓도록 청하였다는 것에서 보제사 광명사 서보통사의 담선법회는 동시에 개최되었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담선 법회가 동시에 개최될 때, 위에서도 언급한 바대로 각 山門 별로 그 산문과 연고가 있는 사원의 법회에 참가하였음을 쉽게 추측되는 바이다. 최우가 주도한 담선법회의 확대 정책은 이전의 사원세력을 재편된 담선법회의 구 도에 끌어들이면서도 각 산문과 연고가 있는 사원의 법회에 참가하도록 한 내용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각 사원의 담선법회를 동시에 개최케 함으로써 각 산문 마다의 최씨무인정권에 대한 協助에 대한 준거를 찾음과 동시에 그를 통한 각 사원 세력의 통제 내지는 運用의 방향을 수립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崔瑀의 談禪法會 주 도는 각 山門 별의 개별적인 담선법회를 유도하면서 전체적으로는 각 산문을 국가적 인 담선법회의 제도라는 체제 안에서 통합 관리하려는 寺院政策이었다고 볼 수 있 다. 최우는 담선법회를 통하여 선종 가지산문들과의 연결을 시도하면서도 수선사 산문 중심의 정책을 펼쳐 나간 것으로 보인다. 이는 修禪社 선풍에 대하여 당시, 독서층 향리층 민들 뿐만 아니라 집권계층 내에서도 광범위한 호응을 받고 있었던 현실과,53) 최씨무인정권의 안정적인 기반의 확보와 거란의 침략격퇴 라는 국난극복을 기하는데 있어 수선사 산문의 비중을 높이 평가하였기 때문이다. 이러한 사정은 거란 침입 당시 최우의 요청에 의해 이규보가 서술한 선회의 개최 및 설법을 요청한 다수의 글에서 볼 수 있다. 물론, 그 내용에서 설법을 요청한 대상 의 확실한 인명은 전하지 않고 있으나, 오직 이 頓門의 秘藏이 事實 正法의 根原이라, 이 때문에 奉崇할 마음이 있어 慨 然히 興復의 뜻을 품었던 것입니다. 무릇 佛事를 경영함에 있어서는 必히 禪論을 설 하는 것이므로 감히 法床을 특별히 높이고 잠시 주장자로 휘두리시길 청합니다( 同 前願請說禪文 東國李相國集 권41) 佛이 心이고 心이 即 佛이므로 이것이 無上之宗이며 공손히 생각건대 某禪師 丈下 53) 蔡尙植, 高麗後期 修禪結社 성립의 사회적 기반 ( 한국전통문화연구 6, 1990) pp

20 는 雪竇의 前身이고 曹溪의 老手이시라( 同前禪會請說禪文 東國李相國集 권41) 반드시 梵力을 힘입어야 松麓의 靈基를 연장하겠고, 비록 法門이 많으나 확실히 曹溪의 正眼에 기대야 하겠습니다( 禪會請說禪文 東國李相國集 권41) 이라는 내용을 본다면 修禪社 선풍에 큰 비중을 두고 있는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正法之原 曹溪老手 曹溪之正眼 이라는 표현들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희종 6년 知 訥의 入寂 이후 수선사 2세 사주로 취임한 慧諶은 강종과 고종의 후원을 받으면서 수선사 산문을 이끌고 있었다. 그러한 혜심에 대하여 최우는, 지금 門下侍中 晉陽崔公이 師의 風韻을 듣고 정성을 기울여, 간절히 사모함을 마 지 못하여 여러 번 서울로 모셔 오고자 하였으나 師가 마침내 오지 아니 하였다. 그 러나 千里의 먼곳에서 서로 마음의 사귐이 마치 對面한 것 같았다. 다시 (復) 二子를 보내어 參禮하여 모시게 하고, 모든 師의 일상의 생활하는 資具 등을 힘을 다하여 마련하여 주지 않는 것이 없었고, 茶 香 餌 珍差 名菓 및 道具와 法服에 이르기까지 항상 때를 맞추어 제공하기를 계속하여 끊지 않았다(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 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東文選 권118) 라 하여, 慧諶의 풍운을 듣고 누차 개경으로 초청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혜심은 끝 내 오지 않았으나 다시 두 아들을 보내어 참례케 하였다. 또한 생활에 소용되는 자 재도구를 마련하여 주고 茶 香 藥 飮食 과일 道具 法服 등을 계속하여 제공하였다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주목하고자 하는 내용은 屢浴邀致京輩 師意不之焉 이라는 것이다. 최우가 누차 개경으로 초치하려고 시도하였으나 혜심은 끝내 개경에는 오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면 최우가 혜심을 개경으로 초치한 근본 목적은 무엇이었을까 라는 점이 문제시 된다. 이는 앞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담선법회의 확대를 시도할 당시 여타의 산문보다도 修禪社 禪風을 중심으로 하려 한 내용과 관련이 있다고 하 겠다. 이는 곧 慧諶을 담선법회의 상징적 주법자로 내세우려는 최우의 사원정책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한다. 그러나 혜심은 그 최우의 의도를 거절하면서도 수선사에 주 지하면서 최우와 밀접한 유대관계를 갖게 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정은 최우가 혜심을 존경하고 아울러 담선법회의 상징적 주법자로 초치 를 하였지만 그것이 이루어지지 않은 이후에 최우의 아들 萬宗 萬全을 수선사 혜심 에게 보낸 전후관계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만종 만전을 수선사로 보낸 시기는 연구 성과에 의하면54) 고종 6년 경으로 보고 있다. 최우가 혜심을 초치한 것과 이후 에 만종 만전이 수선사에 가 혜심의 문하에서 剃髮을 한 것은 각기 개별적인 사실로 54) 閔賢九, 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考察 ( 震檀學報 36, 1973) p. 18.

21 國史館論叢 第42輯 이해된다.55) 그렇다면 혜심의 초치는 대략 고종 6년 이전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고 종 6년은 최우가 집권무인으로서 최충헌의 뒤를 이어 완전한 권력을 구가하기 시작 한 해인데, 최우는 집권 이전부터 혜심에 대한 관심을 갖고 그를 개경으로 누차 초 치하려 했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慧諶이 대선사를 제수받은 시기는 고종 3년이었는데,56) 혜심이 僧科를 거 치지 않고 최초로 승관에 들어가 大禪師 직위에 올랐던 것은 파격적인 정치적 고려 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된다. 그는 곧 고종 3년의 거란 침략 직후의 담선법회 확대와 깊은 연관을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요컨대 고종 3년, 大禪師에 僧科를 거치지 않 은 慧諶을 임명한 것은 談禪法會의 주법자로 내세우려는 의도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고 볼 수 있다. 또한 혜심의 선사 대선사 임명은 명목상 고종에 의해 시행되었지만 실질적인 임명은 최우가 했다는 연구 성과를57) 참고하면 더욱 그러하였다. 담선법회의 중심 산문으로서의 수선사, 담선법회의 주법자로 누차의 초치 대상이 되었던 혜심의 위상이 사상적 사회적으로 더욱 영향력을 갖게 된 것은 최씨무인정권 의 지원하에 가능한 것이었다.58) 이러한 지원에 힘입어 曹溪宗은 더욱 융성해지고 修禪社의 禪風도 더 더욱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이다. 최우 당대의 수선사의 성장을 今行于世 自是公卿貴戚四岳邦伯 聞風慕道 或遙禮爲師或親趨下風者 不可勝紀,59) 즉 公卿 貴戚과 사방의 邦伯들이 소문을 듣고 道를 사모하여, 혹은 멀리서 스승으로 모 시는 禮를 닦고 혹은 친히 그 문하에 나아가 弟子가 되는 이가 있어서 이루 다 기록 할 수 없다 라고 전하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설명한 바와 같이 선종의 각 사원세력 을 담선법회의 확대를 통한 재편구도에 의하여 흡수하고, 각 산문별의 담선법회 참 가를 유도시키면서도 담선법회의 상징적 사상적인 중심은 修禪社 山門에 두었음을 알 수 있었다.60) 최우가 취한 선종계통 사원세력에 대한 운용은 담선법회 재편체제를 통하여 이루 55)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 東文選 권118). 慧諶을 누차 초 치한 崔瑀의 의도가 받아들여 지지 않자, 최우는 만종과 만전을 혜심에게 보내 체발시키고 지속적으로 큰 지원을 하였다는 내용의 冒頭에 復 이라는 표현은 바로 그러한 사정을 전하 는 것이라 볼 수 있다. 56) 張東翼, 惠諶의 大禪師吿身에 대한 檢討 ( 韓國史硏究 34, 1981) p ) 위의 논문 pp ) 閔賢九, 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一考察 (震檀學報 36) pp 秦星圭, 眞覺國師 慧諶의 修禪社 活動 ( 中央史論 5, 1987) pp ) 앞의 眞覺國師 碑文. 60) 高宗代에서도 王師이었던 志謙이 고종 4년에 스스로 돌연 왕사의 지위와 왕의 측근으로서의 은총을 오래할 수 없다는 名分으로, 門人들에게 이야기하고 왕의 허락을 얻어 華藏寺로 내 려 간 것도 談禪法會 변화 내용과 무관할 수 없는 것이다. 그리고 지겸이 사거할 당시 (고 종 13년)에 자신의 入寂에 대한 통고를 高宗 崔瑀 慧諶에게 전하였다는 사실들은 寺院勢力 의 중심이 修禪社 山門에 있었다는 것을 단적으로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위의 내용은 古 華藏寺住持王師定印大禪師追封靜覺國師碑銘 ( 東文選 권117) 참조.

22 어지고 있었다. 東國李相國集 에 의하면, 이것은 대개 우리 聖上 陛下가 굳은 마음으로 숭배하여 받들고 우리 參正相國 崔 公이 따라서 숭배하여 特히 宗門의 外護가 되어 고기처럼 몸을 움직이고 璨忍처럼 마음을 썼다. 그러므로 縉紳 士大夫들이 모두 이를 따라서 心學하지 않은 것을 모두 가 수치로 여겼다. 점점 法味에 맛이 들어 종내에 그 流派가 一國을 휩쓸었으니, 이 것이 所謂 法이 때를 제대로 만난 것이다. 이에 法雄 僧傑들이 모두 叢林으로 달려 가서 祖燈의 光焰이 日月처럼 빛나게 하였으니, 이것이 또한 法이 사람을 잘 만난 것이다( 西普通寺行前榜 東國李相國集 권25) 라는 내용이 전한다. 최우가 禪法을 숭배하여 宗門의 外護가 되니, 진신 士大夫들 이 모두 이 心學을 따르게 되어 결과는 그 法味에 빠져들어 그 유파가 전국에 널리 유포케 되었다는 것이다. 이에 法雄僧傑들이 모두 叢林으로 나아가 선법의 위력이 日月처럼 風味하였던 것이다. 최우는 宗門外護 로 평가될 정도의 큰 지원을 하였는 데, 그 결과로 나라 전체가 禪風으로 휩쓸만큼 위세가 나타났다는 것이다. 더욱이 수 많은 선사들이 叢林으로 나아가 선풍을 익히기에 적극적이었다고 함은 최우가 주도 하는 담선법회에 대다수 禪師들이 참여하는 상황을 전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상황은 곧 선종계통의 사원세력 전체가 담선법회의 재편 구도에 적극 동참하는 당시 의 분위기와 최우의 사원세력 재편체제가 어느 정도 효과를 거두고 있었음을 말해주 는 것이라고 하겠다. 최우가 주도하였던 담선법회의 영향력과 九山의 산문들이 대부분 여기에 참가하였 을 가능성을 보여 주는 것으로 이규보가 서술한 다음의 글들이 전하고 있다. 마음을 전하는 자를 祖라 하고 法脈을 이은 자를 孫이라 합니다. 달빛이 밝듯 遺 影이 흰 깁에 완연히 있으매, 높은 덕을 우러러 뭇중들이 모두 뜰에 늘어서서 사모 한 성의를 다하여 英靈의 도움을 받으려 합니다( 談禪會須彌山參學等謁祖師眞文 東國李相國後集 권12). 三事納을 떨쳐 입고 구름돌고 물 흐르는 곳에 와서 一瓣香을 가지고 丹靑으로 꾸 며진 影幀 아래에 절하오니, 밝게 살피시어 山門을 힘껏 보호하시기 바랍니다( 同 前聖住山參學等拜祖師文 東國李相國後集 권12). 멀리 雲帳을 떠나 바야흐로 玉京을 밟으셨나이다. 나다니기 싫어하시는 걸음인데 도 발바닥이 부르트는 것도 불구하고 멈추지 않고 오셨으니 제자들은 머리를 두번 조아리고 모두 敬拜의 정성을 다했나이다. 祖師께서는 거의 제일의 山門으로 하여금 먼저 무한한 法蔭을 입게 하시고 選席에 오르시어 宗乘을 빛냈나이다 (同前迦智山

23 國史館論叢 第42輯 拜祖師文 東國李相國後集 권12). 이 글들은 수미산문 성주산문 가지산문의 參學들이 담선회에 참가하여 해당 산문 의 祖師들을 배알하는 내용임을 알 수 있다. 이들 문장은 이규보가 微官 시절에 지 은 것이라는 표현을 보면,61) 희종 3년부터 고종 6년 사이에 쓰여진 것으로 보인다.62) 그러므로 이 문장은 이규보가 한림원에 재직 당시 거행된 담선법회와 관련 있는 것 이라 하겠다.63) 비록 현재에는 세 산문의 것만 전하지만 여타의 여섯 산문도 담선법 회에 참가하였고 위와 같은 문장이 쓰여졌을 것이다. 지금은 이규보가 서술하여 東國李相國集 에 수록되어 전해지는 가지산 성주산 수미산 산문의 것만 알 수 있 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禪門祖師禮懴文 에는 선종 구산 산문의 조사와 그들이 활동하였던 산명 을 나열하면서 조사의 師僧과 行蹟을 간략히 전하고 있다.64) 그리고 그 末未에는 보 조국사 지눌의 讚詩도 전하고 있다. 연구 성과에 의하면65) 이러한 구산문은 지눌이 眞影을 갖추는 등의 선종의 부흥을 시도할 때 성립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러므로 이규보의 미관 시절에는 구산문의 조사들의 진영이 완비되었다는 것이다. 또한 慧諶 의 無衣子詩集 에는 九山祖師圖贊 과 普照國師贊 이 전하고 있다.66) 이는 혜심 당대 이전에 구산 조사의 진영이 마련되었다는 사정과 함께, 그 진영이 마련될 정도라면 이미 각 구산의 산문을 중앙으로 흡수 하려는 움직임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따라서 담선법회에 참가한 각 산문의 승도들이 해당 산문의 조사에게 배알하였다 는 의미는, 그 배알이라는 의식을 주관하고 있는 최씨무인정권이 담선법회 재편체제 를 이용하여 선종 계통의 사원세력의 통제를 시행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 다. 이에 담선법회에 참가한 九山 山門의 승도들이 해당 조사들의 진영에 배알한 전 후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을 간접적으로 이해할 수 있는 迦智山門의 경우를 살펴보고자 한다. 가지산문의 惠文 大禪師는 고종 19년경 보제사에 있다가 몽고의 침략으로 운문사에 주거하였다.67) 그 혜문 대선사는 최우와 밀접한 관계에 있었던 이규보를 통하여 당 61) 同前迦智山拜祖師文 ( 東國李相國後集 권12). 62) 東國李相國集 의 李奎報年譜 참조. 63) 九山의 산문들이 참가했다면 여타의 6개의 문장도 있을 법한데, 이는 기록에 전하지 않는다. 위에서 인용한 補閑集 권中의 文順公 편에서 보제사, 광명사, 서보통사의 방문이 최우의 명에 의해 쓰여질 때, 이규보의 서보통사의 것만 전하고 유승단 윤우일이 서술한 광명사와 보제사의 글은 전하지 않는 것과 연계시켜 이해하면 九山의 山門 參學들이 참가하고 이러한 문장이 서술 되었지만 전하지 않는 것과 동일한 사정이라고 이해하고자 한다. 64) 許興植, 禪宗 九山說의 批判 ( 高麗佛敎史研究, 1986) pp ) 위와 같음. 66) 韓國佛敎全書 6, p. 61.

24 시 정권 담당자에게 일을 부탁하고 있었으며,68) 김사미란에 관여되었던 운문사가 第 一大寺刹 이라고 나타나는 것을 보면69)운문사가 기존의 사격을 유지하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더욱이 최충헌과 불편한 관계에 있었던 가지산문의 혜문이 나이 30이 되어 비로소 僧科에 선발되었다고 보는 이규보의 판단과 그 후에 대선사에 까 지 올랐다 함도 그 사정을 암시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그리고 혜문이 입적하였을 때, 혜문의 사후처리가 쓸쓸함을 지적하는 것을 볼 때70) 이는 가지산문이 기존의 사격을 유지하는 형편이었지만, 혜문의 경우는 이규보 를 매개로 하는 무인정권과의 유대관계를 고려할 수밖에 없는 현실과 함께 大禪師의 지위에 있었지만 그의 추종세력이 미약함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혜문의 사정은 곧 迦智山門도 최우의 談禪法會 구도에 협조하였을 내부 사정을 말해주는 것 이라 하겠다.71) 가지산문의 위와 같은 경우는 여타의 산문에서도 그 사정은 거의 같다고 하겠다. 그런데 최씨무인정권이 주도하는 談禪法會 재편체제에 부응하는 각 산문의 입장은 최씨무인정권이라는 국가권력 주도자와의 관련을 통해 보다 공고하게 될 산문의 존 립 문제를 고려하였겠지만 각 산문 간의 경쟁적인 威勢도 문제시 되었을 것이다. 이 러한 사정을 이해할 수 있는 것으로는 비록 후대의 恭愍王에게 말한 普愚의 표현이 지만, 지금 九山의 禪客들이 각기 其門을 짊어지고 彼劣 我優를 따져 싸움이 심하다가, 近者에는 한층 더 甚하여 창과 방패를 쥐고 울타리를 만들어 그로 말미암아 和合을 깨치고 正道를 깨뜨린다( 門人維昌의 行狀 太古集 ) 라고 한 것을 유의해 볼 수 있겠다. 즉 각 구산의 승려들이 그 소속 산문의 이해 관계를 위해 갈등이 심하였다는 것이다. 공민왕 당시의 사정이지만 이러한 상황은 최씨무인정권기에서도 그 성격은 거의 같았을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각 구산의 산문 의 존립과 이해관계에 따른 갈등이 최씨무인정권의 담선법회 체제에 적극 참가하였 을 조건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최우는 담선법회 주도를 사원세력 재편체제로 주도하였을 뿐만 아니라 각 선종 사 67) 文禪師哀詞 ( 東國李相國集 권37). 68) 奇文大禪師手簡 ( 東國李相國後集 권12). 69) 答文大禪師小簡 ( 東國李相國後集 권12). 70) 文禪師哀詞 ( 東國李相國集 권37). 71) 경주중심의 民亂이 거의 진압되었을 즈음, 普濟寺에서 以祈滅賊 을 위해 五百羅漢齋가 개최 되었다는 것은 유의할 만하다( 高麗史 권21, 신종 3년 2월). 즉, 迦智山門의 雲門寺가 金沙彌亂에 관여되어 최씨무인정권과 疏遠한 그 당시 역시 가지산 문인 보제사가 난군의 소멸을 위해 법회를 개최하였다는 것은 山門의 활로를 위한 의도가 개재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면은 각 산문의 경우에도 동일한 속성이라 하겠다.

25 國史館論叢 第42輯 원들의 개별적인 선풍에 대한 지원에 의해서도 진행시켰다. 그러한 전후사정은 아래 의 내용에, 中外에 있는 伽藍을 막론하고 禪法을 닦는 처소라면 매월 殿最를 실시하여, 부지 런한 者에게는 賞을 주고 게으른 者에게는 힐책을 가하여 그 其鋒을 격려시켰다. 이 처럼 힘써 행하니 몇해 안가서 禪風이 다시 크게 일고 頑虜가 국경을 침입하는 일도 스스로 그쳤으니, 이것도 또한 필시 禪力으로 말미암아 그렇게 된 것이다( 大安寺 同前榜 東國李相國集 권25). 라고 전하여 진다. 개경과 지방의 禪宗 사원들을 막론하고 선법을 닦는 곳이라면 매월 殿最를 실시하고, 그 결과에 대한 賞罰까지 가하여 격려하였다. 이러한 지속적 인 선풍 진작으로 인하여 오랑캐의 침입이 스스로 소멸된 것도 선의 힘으로 보고 있 는 것이다.72) 이는 최우의 禪風 振作의 정책이 담선법회의 확대라는 국가적 제도를 이용하는 가운데 사원세력의 통제를 기하면서도, 다른 면에서도 담선법회에 적극적 인 참여를 유도하는 개별 사원들에 대한 선풍 진작의 대책도 고려한 방향에서 진행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이와 같은 崔瑀의 談禪法會를 중심으로 하는 선종계통 寺院勢力의 운용 정책은 고 종 18년 蒙古의 침략까지는 지속되었을 것이다. 강화도 천도 이후에는 對蒙抗爭이라 는 구도에서 담선법회 운영의 변질 및 불교계와 사원세력에 관련된 제반 성격은 또 다른 변화를 수반하는 것이라 하겠다. Ⅳ. 崔瑀의 寺院政策 崔瑀는 고종 6년 崔忠獻의 사거 이후부터 고종 36년에 이르기까지 30년간 권력을 장악하였다. 그러나 본장에서 崔瑀의 寺院政策을 살펴봄에 있어서는 거란이 침략한 고종 3년부터 고종 18년 몽고 침략 이전의 시기를 대상으로 그 범위를 한정 짓고자 한다. 그것은 최우가 거란 침략 이후 확대된 談禪法會를 이용한 사원정책과 고종 19 년 이후 對蒙抗爭期의 사원정책과는 그 내용 면에 있어서 구분해 줄 필요성이 있기 때문이다. 최우의 사원정책을 분석함에 있어 우선 집권무인으로 등장한 고종 6년 이전까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전장에서도 살펴본 바와 같이 최우는 최충헌정권기에서도 일정한 72) 崔瑀의 선종지원책 및 佛事에 대한 관심도를 이해할 수 있는 자료는 東國李相國集 권24 의 又大樓記 이다. 내용에 의하면, 즉 최우의 樓閣 동쪽에 불상을 안치한 감실이 있었는데 크기가 수백명이 이르러도 넉넉할 정도라는 것, 그리고 매번 佛事를 할 때마다 僧侶들을 초 청하였다는 것은 최우의 불교에 대한 적극적인 관심사를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이라고 하겠다.

26 범위 안에서 사원 관련 문제를 전담하였던 것으로 이해할 수 있었다. 熙宗 7년 12월 에 발생한 內侍와 僧徒가 연합하여 최충헌을 암살하려 한 사건으로73) 인하여 희종이 폐위되고 관련 僧徒 대부분이 살해되었던 것이다. 추측건대 최충헌은 이 사건을 해 결한 이후부터는 점차 사원 관련 문제는 최우에게 위임을 하였을 것으로 볼 수 있 다. 이보다 먼저 최우는 이미 사원 관련 문제에 일정하게 관여하였다. 희종 3년 崔詵 에의해 찬술된 大乘禪宗曹溪山重創記 74)를 최우가 敎監하였다는 것과 그리고 희 종 6년 당시 貴戚들이 경기 演法寺를 수리하고 開設 法會를 개최할 때, 圓眞國師 承 逈을 법주로 초치하였는데 승형을 맞이하러 數千人 을 데리고 출영한 것은 최우였 다.75) 이러한 사실로 미루어 볼 때 최우는 사원정책의 실무적인 일을 전담할 수 있 었던 것이 아닌가 한다. 이러한 경험에 의해서 최우는 거란의 침략 당시 談禪法會를 이용하여 국난극복을 주도할 수 있었던 것이다.76) 최우는 고종 6년 집권무인으로 등장하자 최충헌 당시의 강압적 정치로부터 민심의 수습을 위하여 일단 유화적인 정치적 자세를 취하였다. 주지하는 바와 같이 최우 당 대에 政房과 書房이 설치되고 文人이 우대 기용되었던 것은 당시 그 사정을 전하는 것이다.77) 또한 최우는 多拔寒士 以收人望 78)에 전하듯이 寒士들을 발탁하여 인망을 얻으려고 하였다는 것이다. 만약 寒士들의 사상 및 신앙적인 면이 이 시기에 큰 영 향력을 끼치고 있었던 禪風과 관련을 맺고 있었다면79) 최우로서는 불교계를 개편하 는 데에 있어 선풍 문제에 더욱 큰 관심을 갖게 되었을 것이다. 특히 談禪法會의 확대를 통한 선종계통 사원세력에 대한 통제와 이를 이용한 거란 격퇴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으로 모든 종파의 사원세력들을 자신의 권력체제 안으로 흡수하려고 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그 자신이 최충헌 집권 후반기부터 사원정책의 일정 부분을 담당 하였기에, 최충헌의 사원정책을 계승하면서도 최충헌 당대의 사원 세력과의 갈등 대립을 조정함으로써 정치적 안정을 취한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한걸음 더 나아가, 최우는 담선법회 재편 구도를 통하여 수선사 산문을 그 중심세력 73) 高麗史節要 권14, 熙宗 7년 12월. 74) 朝鮮寺刹史料 上, p ) 寶鏡寺圓眞國師碑 ( 朝鮮金石總覽 上) p ) 장동익은 고종 3년, 혜심에게 대선사를 제수하는 데에 실질적인 힘을 발휘한 것은 최우라고 이해하고 있다. 張東翼, 惠諶의 大禪師吿身에 대 한 檢討 ( 韓國史硏究 34, 1981) p. 98 참조. 77) 邊太燮, 武臣亂과 崔氏政權의 成立 ( 한국사 7, 1973) p 南仁國, 崔氏政權下 文臣地位의 變化 ( 大丘史學 22) pp ) 高麗史 권129, 崔怡傳. 79) 이러한 例는 지눌이 정혜결사 초창기에 名譽와 利益을 버린 여러 宗派의 高士輩 들을 널리 맞아 들였다는 것과 아울러, 그 결과 學者들이 盛市를 이루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을 것 이다. 勸修定慧結社文 ( 韓國佛敎全書 권4), 大乘禪宗曹溪山修禪社重創記 ( 曹溪 山松廣寺史庫 ) 참조.

27 國史館論叢 第42輯 으로 설정하면서 선종계통의 사원 세력들을 통제하고, 여타의 교종계통과 소수 종파 의 사원세력과도 유대 관계를 설정함으로써 사원세력과의 갈등을 해소하였다. 즉 최 우에 협조적인 사원세력들을 중심으로 僧政體制를 유지한 것으로 이해한다. 崔瑀의 寺院政策에서 우선 주목할 수 있는 내용은 修禪社 山門과의 관계 설정이 다. 최우는 담선법회를 통한 선종계통을 통제할 때 그 운용의 중심을 수선사 산문에 설정하였음은 전장에서 살펴보았다. 그러면 최우가 수선사 산문을 중심 산문으로 설 정한 근본 이유는 무엇일까? 이러한 문제에 대한 연구는80) 첫째, 최우의 정치적 기반을 확립키 위한 사상적 기 반으로서의 불교세력의 지원이라는 면, 둘째, 수선사 산문을 지원하던 사회계층의 포 섭, 셋째, 전라도 경상도 지방의 최씨무인 정권의 경제적 기반에 대한 관리의 원활성 등을 그 이유로 거론하고 있다. 요컨대 수선사 산문이 당시 사회에서의 광범위한 지 지 기반을 갖고 있었기에, 최우가 그 支持勢力을 포섭하기 위한 의도로 修禪社 山門 을 지원 내지는 중심 산문으로 인정하였다는 것이다. 이에 수선사 산문은 최씨무인 정권 특히 최우의 적극적인 후원하에 큰 성장을 하고 당시의 중심 산문으로 위상이 변화되었다 하겠다.81) 그리고 수선사 산문의 定慧結社 창립과정에서의 포용성과 대 중성이라는 성향이 산문의 성장과정 즉, 대중화에 큰 영향력을 발휘한 것으로 제시 한 바도 역시 주목된다.82) 또한 정혜결사를 주도한 지눌의 사상이 선 교 통합을 해결 할 정도의 개혁적인 방향을 내재하고 있었다면 바로 이 점이 수선사 산문이 불교계 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할 수 있는 내적인 기반이라 볼 수 있는 것이며 이 점이 최씨 무인정권이 수선사 산문을 점차 불교계의 중심으로 인정해 갈 수 있는 배경이라 이 해할 수 있는 것이라 하겠다.83) 그러나 본 고찰에서는 慧諶 당시의 수선사 산문은 최우의 대사원정책 구도에 협조 하면서도 산문의 독자성을 견지한 측면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고자 하는 것이다. 당 시 수선사 산문이 정치적으로는 최씨정권에 협력하면서 사원의 독립성을 유지하려던 양면성은 慧諶이 최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찾아 볼 수 있다. 閣下는 몸이 富貴에 처해 있으면서도 富貴에 빠진 바가 없었고, 일찍 머리를 돌려 一段의 大事가 因緣이 있음을 아셨으니 진실로 生死의 바다의 舟가 되고 橋樑이 될 80) 蔡尙植, 高麗後期 佛敎史의 전개양상과 그 경향 ( 歴史敎育 35, 1984) pp ) 수선사 산문이 불교계의 중심 세력으로 등장한 것은 고종 6년 최우가 집권한 이후라고 이해 하고자 한다. 이는 蔡尙植에 의해서도 제시된 바 있었다. 즉, 고종 6년 이전은 지겸이 王師 로 있었고, 거란 침략 이후 談禪法會의 확대를 통한 修禪社 山門의 지원과 이로 인한 수선 사 산문의 성장 그리고 고종 4년 志謙의 개경에서 華藏寺로의 이주, 지겸이 입적시 혜심에 게 입적예고의 편지를 전한 사실 등에서 당시 사원세력의 변화를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蔡尙植, 修禪結社 성립의 사회적 기반 ( 高麗後期佛敎史硏究, 1991) pp ) 崔柄憲, 定慧結社의 趣旨와 創立過程 ( 普照思想 5 6) 참조. 83) 崔柄憲, 東洋 佛敎史上의 韓國佛敎 ( 韓國史市民講座 4, 1989) pp

28 수 있었습니다. 許多한 公冗의 번거로움을 떨쳐버리고 자주 道人 衲子輩와 이 일을 생각하나 싫증을 내지 않았으니 전생에 심은 信根이 아니면 어찌 이와 같겠습니까. 前書에 적어드린 몇가지 부질없는 장황한 말을 時時로 參詳하시는지요( 答崔尙書 瑀 曹溪眞覺國師語錄 ; 韓國佛敎全書 6). 즉, 최우가 富貴에 처하여 있으면서도 困緣의 깨달음을 알고, 公務의 번거로움 가운 데에도 道人 衲子와 함께 불교 보급에 적극적이라는 찬사를 혜심이 하고 있는 것이 다. 즉, 慧諶은 崔瑀를 富貴에 얽매이지 않으면서 독실한 불교 신앙 생활을 하는 것으 로 평가하였다. 혜심의 최우에 대한 그러한 평가는 아래의 내용에서도 잘 나타난다. 요즈음 들으니 左右가 보통 때와 다르게 모든 시설을 아주 고쳐 此事를 위해 힘을 쓰며, 政治의 敎化는 날로 公平하고 온갖 시설은 갖추어져 모두 外觀을 버리고 內實 을 취하므로, 村野의 無知한 婦人이나 小子들도 칭찬해 마지 않습니다. 嗚呼 아름다 워라 이것은 學佛한 증거입니다. 公은 힘쓰십시오(위와 같음). 즉, 혜심은 최우의 정치가 公平과 內實을 갖추게 되어 시골의 무지한 부인과 아이 들도 칭송하였다고 평하였는데, 이는 불교계를 이해하고 後援하려는 정책에 대한 감 사를 표시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이것은 정치권의 대표자에 대한 예우로도 볼 수 있다. 위의 두 인용 내용에서 보이듯 혜심은 기본적으로 최우의 불교 신앙에 입각한 정치에는 동조한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최우의 입장에서는 혜심을 무인정권의 지지 자 혹은 후원자로 끌어들이는 목적하에 유대관계를 고려한 것이기에 각각의 입장은 완전 합치될 수는 없었다. 최우가 고종 3년 전후부터 지속적으로 혜심을 개경으로 초치하려고 시도하였지만, 혜심이 이에 응하지 않았다는 사실은 최씨무인정권과는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려는 의도를 말해주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84) 최우는 혜심과 밀착하려고 한 반면 혜심은 일정한 거리를 두려고 한 내용은 고종 12년에 최우가 僧俗사회의 책임을 위임한 의미가 개재되어 있는 금란가사를 慧諶에 게 보낸 것과85) 고종 13년 혜심의 禪門拈頌集 의 편찬에서도 이해할 수 있다. 최 우가 僧俗 사회의 책임을 혜심에게 위임한 것은 최우정권 및 고려정부에 대한 정통 성 확인과 후원자가 되어 주기를 요청한 것이라 하겠다. 그러나 혜심은 최우의 그러 한 요청에 대하여 당시 그가 처한 현실의 대응으로서 禪門拈頌集 을 펴낸 것이 아닌가 한다. 이 禪門拈頌集 의 序文은 혜심의 당시 사회인식의 요체와 그의 고 민을 전하고 있다. 이는 최우가 혜심에게 일관되게 요구한 것에 대한 혜심의 대응 84) 慧湛이 崔瑀를 비판하면서 일정한 거리를 두었다는 사정은 秦星圭, 眞覺國師 慧諶의 修禪 社活動 ( 中央史論 5) pp 참조. 85) 上堂 ( 語錄 ; 韓國佛敎全書 6).

29 國史館論叢 第42輯 논리로 볼 수 있다. 이제 그 序文의 내용을 살펴보면, 하물며 本朝는 祖聖때에 삼한을 통합한 以後 禪道로써 國祚를 늘리고 智慧로운 論 理로써 隣兵을 물리쳤으니 선종의 이치를 깨닫고 道를 토론할 자료가 이보다 더 긴 요한 것이 없으므로 宗門의 學者들이 渴之望飮하듯 飢之思食하듯 하였다. 내가 學徒 들의 力請을 받고 祖聖의 본뜻을 생각하여 奉福於國家하고 有裨於佛法하고자 門人 眞訓 等을 데리고 古話 1125則과 아울러 諸師의 拈 頌等 요긴한 말씀을 수록하여 30 卷으로 꾸며 傳燈錄과 짝이 되길 바라노니, 바라는 것은 堯風과 禪風이 영원히 나부 끼고 舜日과 佛日이 항상 밝으며 海는 편안하고 河는 맑으며 時代는 화평하고 시세 는 풍년들어 만물이 각각 제자리에 안정되고 家家가 모두 無爲의 법을 즐기게 하려 함이니 區區의 心이 이에 간절하다( 禪門拈頌集序 韓國佛敎全書 5). 라 하여 혜심은 태조 왕건이 고려 왕조의 건국 과정에서 禪道를 국가의 福의 증진 과 國難 克服의 방책으로 활용하였음을 거론하면서, 고종 당대인 현재도 그와 같은 때임을 자각하고 禪風을 진작하기 위하여 諸禪師들의 語錄 등을 모아 선문염송 집 을 간행 하였다는 것이다. 즉 奉福於國家 有裨於佛法 의 소신은 혜심의 불교관 이었던 것이다. 혜심은 정치권력과의 밀착을 통한 산문의 성장보다는, 정혜결사 운동의 지속을 통 한 불교개신을 구현하고자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 혜심의 禪門拈頌集 의 내용은 결국 당시 최우 혹은 국가권력과의 연계를 가능하게 하는 연결고리가 되는 것이다. 최우는 수선사 산문을 당시 사원세력의 중심 산문으로 인정하면서 혜심의 일정한 지 원 또는 사상적 후원세력으로서의 역할을 끌어내려는 의지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즉 최우는 기본적으로 담선법회 재편구도로 선종 사원세력 전체를 통합 관리하면서 도 중심 산문으로서의 수선사 산문을 인정하였던 것이다.86) 그러나 최우와 혜심의 유대는 어디까지나 國家 우선의 논리가 개재되는 것으로 최우의 입장은 국가 보존을 위한 寺院勢力 統制 및 思想的 통일을, 혜심의 입장은 國家裨補를 위한 불교 존립의 의의에 충실하고자 하였다. 수선사 산문은 불교개신운동으로서의 定慧雙修 의 사상적 성향이 일반 檀越들에게 광범위한 호응을 받음과 동시에 최씨무인정권의 핵심 운용자들의 호응 및 지원을 적 86) 수선사산문이 혜심 당시 선종계통의 산문 뿐만 아니라 교종계통의 사원 및 승려들에게도 큰 영향을 미쳤다는 것은 수선사 산문이 전 불교계에 대한 영향력이라는 점과 최씨무인정권이 이를 인정하였다는 점에서 유의할 사항이다. 즉 혜심의 月南寺址 碑陰記에는 교종계통의 승 려가 나오고 있다. 그리고 혜심의 어록에는 선종계통에서 迦智山門과 羲陽山門의 선사와 교 종계통임을 알 수 있는 桐華寺의 長老 律師 僧統 등과 교류하였던 내용이 있다. 이러한 내용 은 秦星圭, 眞覺國師 慧諶의 修禪社 活動 (中央史論 5, 1985) pp 의 혜심의 교 류 인물도(1) (沙門) 참조.

30 극적으로 받게 되었던 것이다.87) 또한 최우는 談禪法會를 통한 선종세력의 관리와 그 운영의 실제에 있어서는 修禪社 산문을 중심 산문으로 運用하였다. 이와 같이 최 우는 수선사 중심의 선종 세력의 관리를 통하여 정권 안정을 기함과 동시에 사원세 력의 통제를 기도한 것이다. 최우의 이와 같은 수선사 산문에 대한 이용은 산문의 운영권을 점차 장악해 나가는 과정하에서 가능한 것이다. 즉, 수선사 산문의 장악을 통하여 정권의 지지 및 정권유지에 필요한 반대급부를 제공받을 수 있는 것이라 하 겠다. 그러면 최우가 수선사를 장악해 나가는 실례를 살펴보고자 한다. 혜심은 수선사 주위의 황폐해진 사원에 常住寶를 설치함으로써 사원으로서의 정상 적인 기능을 수행할 사회적인 병폐를 막기 위하여 고종 10년 최우에게 글을 올려 그 사정을 전하였다. 즉, 癸未年 八月에 大宰(최우)에게 글을 올려 아뢰니 大宰도 그 사정을 듣고 기뻐하였 다. 이에 大宰가 聖王에게 상세히 보고하니 王도 역시 允許하였다. 드디어 全羅道按 察使 田甫龜에게 명을 내려 小寺로서 매우 殘廢한 것을 조사케 하였다 무릇, 11 개 所에 分穀하여 이식을 늘리게 하고 以前의 國立油香寶 및 諸忌晨寶 等 雜寶의 總 四千石과 지금 判付한 常住寶 六千石을 合計한 正租ー萬石을 本數로 하여, 바라건대 장차 本數는 줄어들지 않게 하고 매년 滋利하여 供佛養僧之費와 鎭兵祝聖之資로 쓰 이게 하였다( 常住寶記 無衣子詩集 권下 ; 韓國佛敎全書 6). 수선사가 상주보를 설치하는 과정에서 최우 그리고 고종의 동의와 최씨 무인정권 의 일원인 전라도 안찰사가 관여되는 것임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비록 혜심의 상주 보를 설치할 대상 사원의 조사 및 선정이 국가나 주현의 裨補를 위한 것으로 주장하 고 있지만, 요컨대 이는 수선사의 경제력의 확대를 통한 수선사의 기반 增大策임은 분명하다. 수선사가 이러한 활동을 전개함에 있어 최우에게 그 전후 사정을 요청한 다는 자체는 수선사도 사원의 기반 확대와 같은 일을 추진함에 있어서는 최씨무인정 권의 지원 및 협조가 없이는 불가능하였다는 것이다. 그리고 위의 기록에서 나오는 以前國立油香寶及諸忌晨寶等雜寶 가 四千石이라는 것은 고종 8 10년 경에 서술된 것으로 이해되는 國師當時大衆及維持費 88)에 나 오는 本傳의 四千石을 지칭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 4천석과 상주보의 기금으로 책정 된 6천석을 합한 1만석의 기금으로 조성된 이자로써 수선사의 운영과 국가를 수호하 기 위한 종교 행사의 자금으로 활용하겠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상주보의 기금으로 조성된 6천석이 어떠한 방법으로 조성되었는지는 정확하지 않다. 단 위의 判付 라는 87) 秦星圭, 위의 논문 pp 에는 혜심의 交友 관계, 특히 집권계층의 일원인 官吏들의 관 련성이 정리되어 있다. 88) 曹溪山松廣寺史庫 (아세아문화사, 1983) pp

31 國史館論叢 第42輯 표현에서 적어도 국가에서 기진하였거나 아니면 수선사의 자체 역량으로 조성하였다 해도 국가가 이를 인정하였다고 볼 수 있다.89) 이처럼 단기간에 6천석이라는 경제력 을 확립하고, 나아가서는 1만석 정도의 경제력을 유지 운영하기 위해서는 국가권력의 협조와 당시 집권무인인 최우의 지원없이는 곤란하였을 것이다. 그러므로 수선사가 막대한 경제력을 관장하기 위해서도 수선사 산문은 최씨무인정권에게 점차 적극적인 협조를 하지 않을 수밖에 없는 내적인 요인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이에 혜심은 최우에게 法語 및 公案을 제공해 주었는데, 당시 혜심이 최우에게 보 낸 아래의 글에서는, 특별히 주신 편지 받자오매 法語를 구하셨으므로 감히 强書를 어길 수 없어 굳이 몇가지 因緣을 적어 請에 답합니다( 答崔尙書 瑀 慧諶語錄 ; 韓國佛敎全 書 6) 라고 하였다. 혜심은 최우의 법어 요청에 대하여 긴밀한 유대의 관계로서 받아들 일 수밖에 없는 현실을 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혜심은 최우의 祝壽를 위한 法 會에서 但願崔公與比法 同身共命 與此法 等福齋壽 라고 표현하였다거나,90) 최우를 上根人 이라고91) 극찬한 이면에는 혜심이 최우의 사원 정책에 수용당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여실히 보여주는 것이며, 그는 곧 수선사 산문을 지키려는 자기 존립을 위한 생존 방식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月南寺址의 眞覺國師碑 음기에 전하는92) 최우와 최우의 가문을 비롯하여 당시 집권 계층의 핵심적인 인물들이 혜심의 檀越로서93) 나타나는 것도 위에서 살펴 본 최씨무인정권과 수선사의 존립을 위한 연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혜심으로서는 최씨무인정권의 주요 인물들을 수선사의 단월로 참여시킴으로써 산문의 강력한 보호 자로서의 역할 뿐만 아니라 산문 위세의 증대를 표현했던 것이라 볼 수 있다. 이에 최씨무인정권으로서는 수선사의 이러한 현실적 입장과 한계를 적절히 이용하면서 정 권 유지를 위하여 수선사 중심의 불교계의 개편에 박차를 가할 수 있었을 것이다.94) 89) 國師當時大衆及維持費 문서의 작성을 국가 관리인 司天臺의 하급관리가 수행하고 手決을 한 것은 국가권력이 수선사 산문의 경제적 운영 및 그 관리를 추인한 것으로 이해된다. 이 는 곧 국가가 수선사 산문의 경제적 상황을 통제 관리하고 있음을 말해주는 것이라 하겠다. 任昌淳, 松廣寺의 高麗文書 ( 白山學報 11, 1971) pp 참조. 90) 劉沖其爲崔相國祝壽請上堂 ( 慧諶語錄 ; 韓國佛敎全書 6) p ) 答崔尙書 瑀 ( 慧諶語錄 ; 韓國佛敎全書 6) p ) 閔賢九, 月南寺址 眞覺國師碑의 陰記에 대한 考察 ( 震檀學報 36). 93) 진성규는 혜심의 語錄 및 無衣子詩集 에 의거하여 官吏, 居士들과의 교류를 분석한 바 있다. 秦星圭, 眞覺國師 慧諶의 修禪社 活動 ( 中央史論 5, 1987) pp ) 혜심의 사거 후 그의 법통을 계승한 修禪社 3세 夢如가 혜심의 비를 세우기를 崔瑀에게 요청 하고, 최우는 이를 고종에게 허락을 얻어 비를 세웠다는 것은 이러한 사정을 단적으로 전하

32 그리고 당시 선풍 구가 및 최우의 사원정책에 있어 살펴볼 다음 문제는 楞嚴 經 에 관련된 문제들이다. 당시 중앙의 선풍은 선의 경향이 농후한 능엄경 이 이용되면서 진행되었다. 특히 昌福寺에서 능엄경 법회가 개최되었다는 것은 유의 해야만 될 사항이다. 崔忠獻의 願堂의 성격으로서 최충헌 사원정책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창복사에서 최우대에 禪的인 경향에 바탕을 둔 능엄경 법회가 개최되었다 는 것은 최우가 당시 풍미하고 있었던 능엄경 의 대세를 최충헌 당대의 선풍 계 승과 선종세력 초치의 중심 역할을 하였던 그 전통을 이어가려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제 최씨무인정권과 밀착하였던 이규보가 서술한 창복사 법회의 사정을 보 면, 엎드려 생각건대 모(최우)는 그릇 중대한 지위에 처해 참으로 조그마한 보과도 모 자라는지라, 다만 法力에 기대어 나라의 터전 쌓기를 꾀할 뿐이어서 무릇 精修한 스 님들께 예경하기를 마치 부처님 곁에 친견한듯 합니다. 사방을 유학할 경우에는 낭 만의 발자취를 한 지팡이에 맡기고 三冬을 지나기 위해서는 몸을 편히 할 조그마한 방이 방해롭지 않아, 이 때문에 京輦의 精廬에 山門의 開士가 거처하는데 다행히 훌 륭한 사람들이 다 모였거늘, 무슨 法인들 충분히 선양치 못하리요만 오직 이 妙蓮花 가 實로 부처의 진면목을 드러낸 것이므로 微言을 겨우 풀이하여도 本覺이 自明해 집니다( 昌福寺冬安居楞嚴法席疏 東國李相國集 권41) 라 하여, 각지의 山門에 있었던 승려들이 개경의 창복사에 모여 冬安居를 지내는 데 그 중 에서도 妙蓮花 로 표현되고 있는 楞嚴經 으로서 불법의 根本을 이해하 려 했던 의지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서 특히 微言을 이해하여도 本覺이 절로 밝아 진다는 것은 禪 敎 절충적이고 話頭(公案)를 이용하는 看話禪에 의한 깨달음을95) 말 하는 것이다. 義天 단계에서부터 고려에 수용되었던 楞嚴經 은 看話禪의 선풍과 결부되면서 점차 선종의 중심 經으로 자리잡았고, 나아가서 불교계 일반 일반관료 사대부들에게 도 애용되는96) 경으로 되어 갔다. 또한 최우도 이 능엄경 을 승려들에게도 膳物 할97) 정도였다면 최우도 능엄경 을 숙지하였을 것인 바 이는 당시 선문 및 재가 고 있다. 曹溪山第二世故斷俗寺住持修禪社主贈諡眞覺國師碑銘 ( 東文選 권118) 참조. 95) 許興植, 高麗中期 禪宗의 復興과 看話禪의 展開 ( 査章閣 6) 참조. 96) 楞嚴經 은 지눌과 혜심의 禪風에서도 주요 經으로 활용되었지만, 여타의 禪師 뿐만 아니 라 華嚴宗 天台宗 승려들에게도 일정한 영향을 주고 있었다고 이해된다. 즉, 承逈 天因 守其 등과 李奎報의 경우도 바로 그러한 실례이다. 이러한 사정은 趙明濟, 高麗後期 戒環解 楞 嚴經의 盛行과 思想史的 意義 ( 釜大史學 12, 1988) pp 참조. 97) 崔怡爲順天知奏使 以書遣茶香及楞嚴經 使還請報書 師曰予己絕俗 何修書往復爲使强追之 且 以詩僧 謝崔怡送香韻 ( 韓國佛敎全書 6 ; 圓鑑國師語錄. 知識沖歲 初以南省亞元 籍金閨 即脫身 往松廣寺修進 晋陽公爲知奏使時因中使 往江南省 以書遣茶香及楞嚴經 補閑

33 國史館論叢 第42輯 지식인층에서도 보편화 되었던 경향을 대변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것이다.98) 이런 제반 사정을 보면 최우는 당시 불교계에 풍미하던 간화선 성격의 능엄경 이 크게 유리한 대세에 합류하여 선풍 진작에 나아갔던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최우의 사원정책에 있어 또 주목할 수 있는 것은 崔瑀와 華嚴宗과의 연계 이다. 당시 불교계의 사상적 전환에 있어서 화엄종도 그 자체 내의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선종계통에서 주로 일어난 結社運動은 교종계통에서도 자생적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華嚴宗의 廖一이 주도하였던 盤龍社와 大嵓의 水岩寺 結社 등은 그러한 사 정을 전하는 것이다.99) 물론 대부분의 중앙의 교종 계통사원에서는 무인정권과의 갈 등 대립을 노정하고 있었다. 이 중 먼저 盤龍社 결사의 정황을 살펴 보고자 한다. 경 상도 고령에 있었던 반룡사는 이인로의 대숙인 승통 廖ー이 주도하여 개창한 사찰이 다. 廖一은 명종과 긴밀한 관계를100) 갖고 있었는데, 명종 27년 興王寺에 住錫하다가, 당시 杜景升이 관련된 최충헌 모해 사건에101) 연루되었으나, 추측건대 이후 고령으로 내려와 반룡사를 개창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반룡사의 결사 사정을 보면, 盤龍精舍는 내가 아직 보지 못했다 後에 李氏의 宗人을 만나 물어본 즉, 實로 盤龍社를 개설한 자는 僧統 一公이었다. 社는 學佛者들이 自暴自棄 하는데 그치는 것 을 민망히 여겨 策礪를 가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라 하니, 더구나 그 學에 힘을 기 울인 것이 적지 않음을 알게 되었다. 그 門徒가 대대로 法을 지켜 떨어뜨리지 아니하 여 지금와서는 東方 華嚴의 大道場이 되었다( 送盤龍如大師序 東文選 권84) 라 하여 廖一이 주도한 이 결사는 學佛者들이 自暴自棄하는 것을 염려하고 華嚴 신앙을 振作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물론 료일이 문제시 한 상황은 당시의 집권무인 과 승려들 간의 갈등이며 구체적으로는 료일 자신의 현실을 말하는 것이다. 따라서 반룡사 결사는 료일로 대변되는 화엄종의 위상을 말해주는 것이고 아울러 점차 화엄 종 내에서도 당시 시대 상황을 정리하고 그 대안을 찾는 입장이 대두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내용이라 하겠다. 이와 같은 사정은 경상도 固城의 水嵓寺 서 나타난 화엄결사에서도 엿볼 수 있다. 즉, 이규보가 서술한 아래의 내용에 의하면, 大狐는 말씀드립니다. 貧道는 일찍이 華嚴에 몸을 바쳐 그릇된 選佛場에 올랐는데, 集 권下. 98) 趙明濟, 高麗後期 戒環解 楞嚴經의 盛行과 思想史的 意義 ( 釜大史學 12, 1988) pp ) 秦星圭, 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 ( 韓國學報 36, 1984) pp 참조. 100) 破閑集 권中, 明皇時 大叔僧統廖ー 出入禁宇間 不問左右二十餘年. 101) 高麗史節要 권13, 明宗 27년 秋9월.

34 얼마 뒤에 名譽에 얽매여서 뜻대로 할 수 없는 것을 생각하여 드디어 名利를 팽개치 고 四方을 다니면서 眞理를 닦고 講學할 장소를 求한 지 이미 오래였습니다. 소 승은 자신의 어리석음을 헤아리지 않고서, 福을 심을 마음을 가졌으나 복을 심을 장 소가 없으므로 정처없이 떠돌아 다녔을 뿐입니다. 항상 이것을 自歎한 끝에 뜻을 같 이해서 道를 닦을 同志들과 함께 山庵에 寄居하여 매일 華嚴을 강론하고 普賢行을 닦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이 소식을 듣고 모인 자가 無慮 五十人이나 되었습니다 ( 水嵓寺華嚴結社文 東國李相國後集 권12). 라고 전한다. 화엄 승려 大孤는 名利를 거절하고 사방을 주류하던 자로서, 혁신적인 학문을 구하고 普賢行을 구할 동지 50여 명과 화엄결사를 주도하고 있었다. 이 결사 는 신종 강종 년간에 조직된102) 것으로 보이는데, 대고의 적극적인 노력과 고성 지 방의 외관이었던 朴文備의 큰 도움, 그리고 王의 制可에 의해 성립된 결사이었다. 이 러한 사정에서 명리를 거절하고 보현행을 추구한 대고의 의지와 이를 지원한 당시 지 배계층의 일원이었던 박문비와 왕의 추인으로 성과를 맺었던 것이다. 더욱이 이 결사 에서 惠資라는 社主도 화엄종 선불장에 올랐던 출신인데 명리를 거절하고 유력하였던 인물이며, 특히 經과 章疏를 講習하고 坐禪의 精進도 함께 행하고 있다는 것은 주목 할 만한 사실이다.103) 이러한 수암사 결사는 화엄종의 一面이지만 화엄종의 변화를 단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으로 주목되는 것이라 하겠다. 이러한 변화를 당시 지배계 층의 일단에서 동의하고 있는 것이다. 이 결사에서 혜자를 사주로 삼을 때, 왕에게 보 고하고 制可를 얻어 시행 하였다는 것은 화엄종의 경우에서도 국가권력과의 연계가 없이는 결사의 존립이 불가능하였다는 사정을 알 수 있는 것인데, 이 점이 바로 최씨 무인정권이 화엄종 계통의 사원세력들을 관리할 수 있는 조건이 되었을 것이다. 당시의 그 교종계통 결사를 주도한 자는 중앙의 불교계에 반발하였거나 혹은 집권 무인과의 갈등으로 지방으로 내려온 승려들이며, 선종계통의 결사는 독서층 향리층 출 신의 승려들이 주도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후원세력의 면에서도 교종계통은 무인귀 족 무장세력인 반면 선종계통은 독서층 향리층과 민들이었다.104) 실제 이러한 이질성은 불교 신앙의 차별성 뿐만 아니라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에서도 큰 차이가 있었을 것 이다. 이 중 선종계통의 결사의 추세가 대세화되면서 이는 점차 집권무인이었던 최충 헌 최우의 관심사와 상호 관심을 갖을 수 있는 현실적인 기반이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華嚴宗 계열의 결사운동의 진행과 함께 나타난 현상은 화엄종 내부에서 의 자체 분화 내지는 갈등으로 인한 義天系의 몰락과 均如系의 대두라 볼 수 있다. 102) 이에 관련된 전후 사정은 秦星圭, 高麗後期 修禪社의 結社運動 ( 韓國學報 36) p. 12 참조. 103) 水嵓寺華嚴結社文 ( 東國李相國後集 권12). 104) 崔柄憲, 高麗時代 華嚴宗團의 展開過程과 그 歴史的 性格 ( 韓國史論 20, 國史編纂委 員會, 1990) p. 210.

35 國史館論叢 第42輯 이는 고종 2년 海東高僧傳 을 찬술한 覺訓의 실례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즉 각 훈은 의천의 직계로 이해 할 수 있는 인물인데 그의 불교 성향은 문인적 교학적이었 다.105) 그의 불교 성향이 고려 중기 문벌귀족체제 하의 개별적 고립적 불교 성향의 특성과 유관한 것과, 당시 불교계의 결사운동과 같은 불교 개신운동의 성격을 갖지 못한 것으로 보아 의천 계통의 마지막 인물로 이해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補閑 集 권下, 華嚴月首座 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각훈도 추측건대 왕명에 의한 海東高僧傳 찬술을 계기로 중앙불교계에 들어가기 이전에는 당시 불교계의 모순 을 지적하고 있었다. 補閑集 에 전하는 그의 행적, 즉 개인적 고답적 수행을 견지 하였다는106) 것은 각훈의 불교 성향을 대변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성향 의 그가 최충헌 당대에 海東高僧傳 의 찬술을 명받을 정도였다는 것은 요컨대 최 충헌의 사원정책에서의 신진인물의 기용 문제를 살펴볼 수 있지만 이는 일면에서는 당시 華嚴宗 계통의 각훈으로 대변되는 신진인사의 한계와 성격도 이해할 수 있는 단서라고 하겠다.107) 요컨대 당시 화엄종의 대세의 동향은 아직 結社運動을 지향하는 단계에는 이르지 못한 것이다. 또한 각훈이 풍류를 즐기고 불교계에 비판적이었다는 실례에서 이미 화엄종의 위상이 축소되어가고 화엄종 내의 교단의 변화가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와 같은 覺訓의 등장 전후에서의 화엄종 계열은 자체 내의 분화를 일정 하게 겪으면서108) 崔瑀와 유화적인 유대 관계를 맺어 나갔을 것이다. 이는 고종 3년 이후의 거란 침략으로 인한 國難에 華嚴宗도 일정한 협조를 해 줄 수밖에 없는 현실 이었기 때문이다. 실제 고종 4년 거란의 침략시 개경의 교종계통 사원의 僧徒들이 從軍僧으로 참여하게 된다. 더욱이 그 종군승들과 최충헌과의 치열한 대립에서 항쟁 승도 대부분이 살해된 사건을109) 겪은 이후에는 더욱 그러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우는 거란 격퇴를 모색할 때 불교 신앙을 활용한 국난극복 방책을 동원 하고 있었다. 거기에는 교 선종 등 모든 신앙들이 망라되었다. 특히 禪 思想을 난국 극복의 이용에 적극 활용하였는데,110) 선종계통의 사원세력들을 국가적 談禪法會 체 105) 위의 논문 p ) 華嚴月首座 ( 補閑集 권下), 有默行者 不知氏族年可五十 或爲髠爲頭陀 不念經不禮佛 終日宴座暝如也 有候之者 無貴賤不擧目改觀 問其名不應 問從甚處來亦不應 故以默行者 名焉 居歸正寺別區 참조. 107) 다만 覺訓이 贈覺禪老 ( 東國李相國集 권1, 古律詩)에서 禪老라고 불리웠다는 것으로 보아, 그가 禪에 관해서도 일가견을 소유하고 있었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한다. 각훈의 불 교신앙은 그가 이규보 이인로 임춘 등과 풍류를 즐겼다는 것으로 보아서는 개인적 고답적 인 것으로 이해된다. 108) 화엄종 내의 변화는 지금껏 의천의 문도에서 균여의 문도로의 주도세력의 변화로 보아왔으 나 각훈의 해동고승전 이 화엄종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경향이 있었다는 최근의 견해를 참고 할 만하다.章輝玉, 海東高僧傳硏究 (민족사, 1991) pp 참조. 109) 高麗史節要 권15, 高宗 4년 春正月. 110) 秦星圭, 崔氏武臣政權과 禪宗 ( 佛敎硏究 6 7, 1990) pp 참조.

36 제를 통하여 활용하였다. 교종계통인 화엄종의 사원들도 무인정권과의 갈등 등으로 인한 자체 내의 분화로 인하여 점차 최우의 유화적인 사원정책에 협조적이었다. 더 욱이 최충헌 이래의 裨補寺刹의 기준으로 경제적 지원 與否를 결정하는 등의 사원 장악 정책이 펼져짐에 이르러서는 화엄종으로서도 대무인정권에 대하여 자신의 한계 를 인식하게 되었을 것이다. 이러한 제반 사정하에서 최우가 靈通寺를 보수하고 大藏經을 피람하였다는데,111) 이때 화엄종의 승려들을 초청하여 법회를 개최한 것을 보면 최우와 화엄종 계통과의 관계가 개선된 것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대장경을 보관하는 화엄종 계통의 사원을 보수한다거나, 그 관련 승려들을 불러들인다고 함은 최우의 화엄종을 인식하는 태도 를 이해하는데 있어서 주요한 시사점을 제공해 주는 것이다. 이 靈通寺는 각훈이 주 지로 있었던 사원이었다. 그러므로 최우가 영통사를 보수하고 이곳에서 법회의 개최 와 대장경을 피람하였다는 것도 기실은 각훈이 최씨무인 정권에게 협조한 것과 무관 할 수는 없는 것이라 보여진다. 바로 이러한 면이 화엄종 계열 사원들의 변화에 일 익을 더하였을 것으로 이해할 수 있는 것이다. 또한 최우가 고종 3년 당시 觀音像을 그려 點眼하였다는 東國李相國集 권41, 釋道疏의 崔相國攘丹兵畵觀音點眼疏 의 내용에 의하면 大悲陀羅尼神呪經 을 최우가 상고하여 그 經으로 환난 외적을 극복하기 위한 의지를 보이고 있었다.112) 이 러한 점은 의천의 문도에서 균여의 문도로 점차 화엄종 내부의 주도권이 변화된다는 당시 사정과도113) 유관한 것이다. 義天의 불교적 성격은 주지하는 바와 같이 國際的 貴族的 合理的 성격인데 반하여,114) 均如의 성격은 統合的 呪術的 성격이 농후하였 다.115) 따라서 對蒙抗爭期의 大藏經 조판시 均如 계통의 승려들이 대장경 조판 작업 에 주도적으로 활약함도 위와 같은 고종 18년 이전의 화엄종의 변화, 그리고 최우의 화엄종에 대한 정책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있었던 것이라 하겠다. 실제 최충헌과 최 우는 거란 침입시 陀羅尼經을 몸에 지니고 다닌 것으로 보아 최충헌 최우가 주술적 인 불교신앙에 심취하였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거란침략 時 거란을 격퇴키 위 하여 최우가 王輪寺에서 神衆들을 위한 법회를 개최하였다는 사정을 전하는 아래의 이 연구에 의하면, 최씨무인정권과 禪과의 긴밀한 관계는 적의 擊退와 災難을 극복하는데 禪의 效能이 크기 때문이라고 제시하고 있다. 111) 靈通寺修補大藏被覽疏 ( 東國李相國集 권41). 112) 陀羅尼經의 祈福의 특성과 心的 不安의 解消의 성격으로 인하여 최충헌 최우가 護身用으로 소지하였다는 것은 이 경에 대한 최충헌 父子의 관심과 아울러 당시 華嚴宗 계통의 변화에 대한 시사점을 제공해 준다고 볼 수 있다. 즉, 特爲晋康侯男 本國特將軍瑀 殿中內給事逈 尤難頓消福壽無疆之願 이라는 내용이 기재된 호신용 다라니 보도기사 참조 ( 동아일보 1979년 5월 18일 자). 113) 崔柄憲, 高麗時代 華嚴學의 變遷 ( 韓國史研究 30, 1980) pp ) 崔柄憲, 天台宗의 成立 ( 한국사 6, 1975) pp ) 金杜珍, 均如의 性相融會 思想 ( 歷史學報 90, 1981)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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