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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2 3 FORWARD '알리는 글' 이 에세이 모음집은 2012년도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국제자원 활동 (International Voluntary Services) 참가자 에세이를 정 리한 것입니다. 2012년도 국제자원활동에 성실히 임한 자원활 동자 여러분께는 지난 기억을 회상하면서 앞으로의 활동에 새로 운 활력소가 될 것을 기대하고, 향후 국제자원활동에 참여하고 자 하는 청년들에게는 이전 참가자들의 후기를 통한 간접경험이 참가 준비를 하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합니다. 아울러 이 에 세이 모음집을 통해 올 한해 적극적이고 자발적으로 유네스코한 국위원회의 국제자원활동에 참여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감사의 인사를 드립니다 년도 국제자원활동 에세이 모음집은 각 국가별로 참가자 들의 에세이들이 정리되어 있습니다. 다만 모든 에세이를 정리 한 것은 아니며 기본적으로 선발된 에세이만이 정리되어 있습니 다. 기타 보고서들은 국제자원활동 홈페이지에서 확인하실 수 있습니다. 이 에세이 모음집이 현재 한국 청년들의 많은 관심을 모으고 있 는 국제자원활동의 한 부분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자료로 기 능하기를 바라며, 자료에 대한 문의나 도움말을 주실 분은 아래 의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으로 연락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아울러 이번 에세이 모음집의 내용이 유네스코한국위원회의 공 식 입장을 대변하는 것은 아님을 밝혀둡니다. 감사합니다. 유네스코한국위원회 청년팀

4 I. 개별파견 국가별 에세이 1. 그리스 남유진 _ 뜨겁게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그 여름 백수빈 _ 이토록 뜨거운 순간 2. 독일 김성용 _ 멘붕 캠프 주수진 _ 나의 길고도 길었던 2주 라오스 김기일 _ 낯선 곳에서 거울을 보다 리투아니아 고영탁 _ 내 인생 최고의 기억들 최진영 _ 아름다운 쿠르트베나이 국립공원에서의 2주 5. 벨기에 권순미 _ 나의 워크캠프 기행기 박현정 _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가 되다 6. 스위스 김민우 _ 내 인생에 꿈 같은 기회와 경험은 바로 워크캠프이다! 안건형 _ 알프스 산을 체험하다. 7. 스페인 이정서 _ 워크캠프? 그 이상.. 황유진 _ 시간이 빠르게 가기만을 바랐던 14일. 8. 아이슬란드 안다홍 _ 워크캠프 뜨거운 추억으로 박주현 _ 아이슬란드에서의 모험 9. 에스토니아 김기은 _ 넘치는 사랑 양기란 _ 히우마, 같이 있었기에 찾을 수 있었던 가치. 10. 영국 임희진 _ 익숙함에서 새로움이란 설레임으로 이승훈 _ 행복을 걸었던 순간 11. 우크라이나 홍가영 _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기 이재우 _ 경험의 공유의 장, 국제워크캠프 12. 이탈리아 이성은 _ 워크캠프를 통해 처음 의 설렘을 느끼다. 김기열 _ RADIO ONDA DURTO 13. 인도 김종혁 _ 인도는 더럽다. 윤가연 _ 상상 그 이상의 인도, 그리고 워크캠프

5 5 CONTENTS 터키 김선미 _ 선물 홍샛별 _ 도전! 따뜻함 그 이상의 정을 느끼다 폴란드 김다솔 _ 폴란드는 프라하, 보다도 훨씬 아름다운 곳 이태호 _ 잊지 못할 14일의 기록들 프랑스 권태영 _ It was like a dream. 황지수 _ 포도나무 밭이 나에게 남긴 수많은 씨앗 II. 단체파견 국가별 에세이 1. 대만 강영정 _ 나의 대만 봉사활동 서주영 _ 마음으로 통해요 유준미 _ 대만, 그곳에서 나와 세상을 경험하다. 2. 라오스 강민준 _ somsak's diary 최민식 _ turning point in my life, LAOS 박갑준 _ 워크 캠프를 다녀와서,,,, 방글라데시 김보현 _ 방글라데시의 다양한 얼굴들과 마주치다 손석준 _ 벽을 넘어서, 가슴으로 베트남 김도희 _ 소중한 만남들로부터 얻은 변화의 에너지 최수진 _ 꿈 같은 도전이였던 국제자원활동을 마치고.. 이현정 _ 잊혀지지 않을 14일 간의 베트남 인도 곽다영 _ 멋진 아이들과 +α 11명 정지혜 _ 방갈로르에서 지낸 인도네시아 김밝은 _ 인도네시아에서의 무더웠던 어느 2월... 지성근 _ Memory in Indonesia 태국 김다솜 _ Volunteer Is Passion 과 함께한 2주간의 태국 봉사활동 필리핀 김용우 _ 무더웠던 아니.. 따스했던 필리핀 이시현 _ 내가 기억하는 CEBU

6 개별파견 국가별 에세이 1. 그리스 남유진,백수빈 2. 독일 김성용,주수진 3. 라오스 김기일 4. 리투아니아 고영탁,최진영 5. 벨기에 권순미,박현정 6. 스위스 김민우,안건형 7. 스페인 이정서,황유진 8. 아이슬란드 안다홍, 박주현 9. 에스토니아 김기은, 양기란 10. 영국 임희진,이승훈 11. 우크라이나 홍가영, 이재우 12. 이탈리아 이성은, 김기열 13. 인도 김종혁, 윤가연 14. 터키 김선미, 홍샛별 15. 폴란드 김다솔, 이태호 16. 프랑스 권태영, 황지수

7 7 I. 개별파견 국가별 에세이 1. 그리스 6 "뜨겁게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그 여름" 그리스_남유진 ELIX03 세종대학교 나는 새로운 자극과 변화, 그리고 새로운 인연을 꿈꾸며 워크캠프에 지원했다. 이제껏 한번도 해외 경험이 없던 나는, 해외에 나가서 생활한다는 것이 어떤 느낌인지 알고 싶었고, 단순한 해외 여행이 아니라 낯선 외국인들과 함께 어울려 그들을 가까이에서 보고, 소통하고, 교감하는 워크캠프는 나 에게 살아있는 깨달음을 줄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낯선 상황과 새로 운 문화, 새로운 사람들을 접했을 때 내가 어떻게 반응하는지, 어떤 기분 이 드는지를 통해 이제껏 내가 몰랐던 내 자신의 모습을 알 수 있고 그 동 안 내가 만들어 놓은 내 세상과 가치관속에 살아가던 나에게 다른 시각을 갖게 해주는 기회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또한 워크캠프를 통해 함께 생활하며 인연을 만들 새로운 사람들을 얻고 싶어 나에겐 워크캠프 가 간절했고 설렘, 그 자체였다. 외국에 한번도 나가 본 적이 없기 때문에 떨리기도 했고, 혼자 찾아가는 것이었으므로 치안이나 언어적인 소통문제로 걱정이 되는 부분도 있었다. 그래서 사전에 그리스를 다녀온 사람에게 현지 치안이나 주의점을 물어보 기도 하고, 그리스 워크캠프를 다녀온 사람들의 후기를 인터넷으로 찾아 보면서 열심히 준비했고 부푼 기대를 안고 뜨거운 여름, 아름다운 그리스 로 떠났다. 우리캠프는 낙소스라는 그리스의 섬으로, 캠프장소는 FILOTI라는 마을 의 college였다. 항구에 도착하여 버스를 알아보는데 끊겨서 택시를 타고 다행이 캠프 장소에 도착, 숙소 앞에 앉아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고 있는 캠프 친구들이 한 눈에 들어왔다. 이제 진짜 캠프가 시작된다는 것에 흥 분되고 내가 여기에 와 있다는 사실이 너무 신기했다.

8 나는 내가 캠프에 왜 오고 싶어 했는지를 잊지 않도록 그 이유를 내 자신에 게 계속 상기시켰다. 그래서 항상 오픈 마인드, 적극적인 자세, 즐겁게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자는 마음으로 캠프에 참여했다. 우리 캠프의 친구들은 보통 영어를 잘 구사하는 편이었는데, 나는 못하는 영어지만 그들에게 먼저 인사 도 하고 다가가려고 노력했다. 최대한 혼자 있기보다는 그들과 어울리고 함 께했다. 하루 이틀은 어색하고 언어적인 어려움도 있었지만 하루가 다르게 점점 친해지고, 가까워지는 것을 느끼며 나는 그곳에서의 생활이 점점 더 재 미있어졌다. 일은 그리스의 더운 날씨 때문에 아침 일찍부터 시작했는데, 우리는 환경에 관한 캠프로 footpath를 만들고 정비하며, 쓰레기를 줍는 등의 일을 했다. 수 많은 가시와 나뭇가지들로 막혀있는 곳에 길을 내는 것이었는데 체력적으로 굉장히 힘들었다. 남자들까지도 일을 힘들어 할 정도로 체력을 요구하는 작 업이었지만 우리의 힘으로 만들어진 길을 보니 뿌듯했고 내가 이 먼 그리스 에 와서 이러한 흔적을 남길 수 있고, 한국에서는 해보지 못한 일들을 한다는 생각에 즐겁게 할 수 있었다. 또 일을 함에 있어서도 서로 도와가며 분업 식 으로 일을 했고, 함께 땀 흘리며 일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더 쉽게 가까워 질 수 있었다. 홈팀2명은 일을 나가지 않고 숙소의 청소와 식사를 담당하는데 각자 자신의 나라의 음식을 만들어 주기도 하여 각 나라의 다양한 음식들을 맛 볼 수 있어 서 좋았다. 처음엔 음식이 입에 안 맞았지만 바로 적응하여 나중에는 정말 맛 있게 먹었다. 지금도 가끔 벨기에 음식과 파스타, 그곳에서 먹었던 샐러드가 생각날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워크캠프란 보통 20대의 대학생들이 가는 경우가 많지만, 이 캠프의 리더들은 30대 후반이었는데 워크캠프에 참가하고 있어 놀랐다. 외국 의 경우는 이런 자원활동에 있어 나이의 제약 없이 참여하는 모습이 부러웠 고 캠프 리더와 이것에 관한 이야기를 나누었을 때 그들은 이것이 너무 자연 스러운 것이라 이것이 놀라운 일이 아니라고 했다. 그들의 자유로움과 여유 를 보면서 우리나라도 이런 활동이 나이 제약 없이 일반적으로 참여할 수 있 는 분위기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다양한 나라의 캠프 친구들이 있었는데, 문화가 다르고 배경이 다른 만큼 성격들도 저마다 달랐다. 처음에 놀랐던 것 은 표현에 있어서 굉장히 솔직하고 개방적이라는 사실이었다. 한국에서는 잘 이야기하지 않는 주제들도 자연스럽게 이야기하는 것에 처음에는 당황했지만 점차적으로 그들을 이해하고 함께 어울렸다. 또 인상 깊었던 것은 그들은 다 른 사람들의 시선을 별로 의식하지 않고 생활한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자기 표현도 자유롭고 항상 자기 자신의 기분과 감정에 솔직하며 즐기는 느낌을 받았다. 그들의 그런 마인드를 배우고 나 또한 그런 자세로 인생을 즐기며 살 아가야겠다고 생각했다.

9 9 8언어적인 문제로 서로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완전히 이해하기 힘들 때도 있었고 진지하게 말하는 것도 장난으로 받아들여 곤란한 적도 있었지만 계속해서 이야기 함으로서 문제들을 해결해 나갔다. 가끔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정확하게 전달할 수 없어서 답답한 적도 있었지만 나는 새로운 공간, 문화, 사람들 속에서 매일매일이 신기하고 재미있었다. 그런 당황스러움과 처음 해보는 경험들로 더 많이 웃고 즐길 수 있었으며 또 친구들이 많이 도와준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캠프를 마 칠 수 있었다. 첫 주는 느리게 가는 것 같았는데 그 다음주, 즉 마지막 주가 되니 시간이 정말 빨랐고 하루하루 가는 게 아쉬웠다. 낯선 동양인이었던 나를 반갑게 맞아주며 매일 인사하던 지역 주민들도, 하루 종일 함께하며 같이 생활했 던 캠프의 친구들이 지금도 너무 그립다. 마치 꿈처럼 아련한 기억으로 남아, 지금도 내가 그곳에 있었다는 생각을 하면 가슴이 벅차다. 약2주라는 짧은 기간 동안 서로 다른 국가에서 온 낯선 사람들이 이토록 교감하고 정을 나눌 수 있다는 것이 무척 신기하 다. 지금 이 순간도 그곳에서 만난 친구들이 보고 싶은 것을 보면, 사람이 서로를 사귀는데 있어서 국가, 언어, 시간은 크게 문제되지 않는 것 같다. 이렇게 한국에서 외국 친구들을 그리워하는 이 감정은 워크캠프가 아니었 으면 경험해 보지 못할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이 워크캠프는 한번도 외국에 나간 적 없던 내가, 이 친구들로 인해 유럽 이 가깝게 느껴지고, 그들이 보고 싶어 빨리 그들이 있는 나라에 가고 싶 어지게 만들어 버렸다.

10 나는 워크캠프를 다녀온 뒤 분명 더 행복해졌다. 그게 내가 워크캠프를 다녀 온 뒤 느낀 나의 가장 큰 변화이다. 생각하면 웃음이 번지는 추억을 갖고 있 다는 사실만으로도 나는 그 전보다 더 행복한 지금을 살고 있다. 그 때의 그 아름다운 기억은 힘든 순간에 나에게 힘이 될 것이고, 비록 워크캠프는 끝났 지만 그 추억과 사람들은 남아 앞으로의 내 인생을 함께 살아갈 것이기 때문 에 이 워크캠프가 분명 나에겐 긍정적인 터닝포인트가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이 워크캠프를 다녀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 푸르른 나의 20 대, 청춘, 대학시절에 이런 경험을 해 볼 수 있었다는 것이 감사하다. 뜨겁게 아름다웠던 젊은 날의 그 여름을 나는 평생 잊지 못할 것이다.

11 10 11 "이토록 뜨거운 순간" 그리스_백수빈 ELIX01 홍익대학교 눈물 나게 뜨거웠다. 사실 눈물 나게 더웠다. 지난 여름 방학 동안 나는 그리스의 외딴 섬으로 워크 캠프를 다녀왔다. work camp, 일정한 기간 동안 지역 공동체를 위해 다른 나라의 학생들과 함께 동고동락하며 일하 는 것이다. 홍익대학교는 유네스코와 손을 잡고 학우들에게 워크 캠프에 참가할 수 있는 특별한 기회를 제공한다. 나는 운 좋게 이러한 기회를 잡 을 수 있었다. 희망하는 나라를 하나 정해서 지원할 수 있는데, 나는 주저 없이 그리스를 선택했다. 그리스는 죽기 전에 꼭 한번 가보고 싶은 나의 꿈의 나라였다. 역사책에 등장하는 문명의 시작 그리스. 장대한 아크로폴 리스와 신선하고 향기로운 그리스 음식, 푸른 지중해가 펼쳐져 있는 아름 다운 섬 산토리니까지. 이 모든 것들이 내 머릿속에서 환상적으로 조립되 어갔다. 그리고 기다리던 합격 발표 날, 나는 정말로 기뻐서 날뛰었다. 환 상을 재조립할 수 있는 기회가 온 것이다. 앞으로 수일 뒤면 내가 밟고 있 을 땅과 그 곳에서 만날 사람들이 궁금했다. 나는 아무런 걱정이 없었고 너무나 자신만만했다. 출국 날, 드디어 비행기로 15시간을 날아 그리스에 도착했다. 첫만남 앞으로 내가 17일 동안 일하며 지낼 그리스의 섬 안드로스. 안드로스는 그리스 키클라데스 제도에 있는 섬이다. 캠프지는 안드로스 섬에서 두번 째로 큰 항구 도시 가브리오에 위치해 있었다. 항구에서 조금 걸어나와 가브리오 초등학교에 도착했다. 나는 제일 먼저 캠프지에 도착했다. 두 명의 캠프 리더가 나를 반겼다. -수빈? 넌 수빈이니? -맞아. 난 한국에서 온 수빈이야. 그들은 이번 캠프에 유일한 동양인 참가자로 한국 여학생이 두 명 있다고 했다. 그 중 하나가 나였다. 자신없는 영어와 낯선 그리스인 캠프 리더.

12 겁 먹은 채로 그들이 해주는 파스타와 그리스식 샐러드를 먹었다. 왜 지원 했니? 그리스는 처음이니? 나이가 몇 살이야? 전공이 뭐야? 처음 만난 사 이에 하는 의례적인 질문들이 오갔다. 그들은 검은 머리카락을 가진 작은 체 구의 나를 신기한 듯 쳐다봤고, 나는 파란 눈의 금발 곱슬머리를 한 그들을 올려다보았다. 세시간 쯤 지나자 모든 워크캠프 참가자들이 도착했다. 프랑 스, 이탈리아, 스페인, 영국, 벨기에 등 다양한 나라에서 온 다양한 얼굴들이 만났다. 서로 통성명을 하고 어색하게 함께 저녁식사를 했다. 저녁은 솔직히 맛이 없었다. 느끼한 파스타와 그리스식 치즈. 벌써부터 라면이 먹고싶었다 낯섦 다음날 아침, 나는 워크캠프의 워크 를 위해 무장을 했다. 몸빼 바지, 챙 있 는 모자, 등산용 팔 토시, 그리고 선크림과 선글라스. 예상대로 일은 정말로 힘들었다. 아침 일찍 산 위에 올라 도끼와 삽, 괭이로 잡초를 뽑고 산길을 냈 다. 그 곳의 잡초는 더운 날씨 때문에 대부분이 가시덤불이었다. 이리 저리 산 속에서 가시 덤불과 싸움하는 탓에 온 몸에 누군가가 할퀸 듯한 상처가 났 고, 뜨거운 햇볕과 흙먼지를 섞어 마셨다. 그렇게 주말을 제외하고 11일 동 안 이 산 저 산 다니며 길을 냈다. 종종 지역 주민들이 아무런 대가 없이 일을 도와주었다. 섬에는 젊은이들이 별로 없었다. 아마 일거리를 찾아 큰 육지의

13 13 도시로 떠났을 것이다. 지역 주민 대부분은 할머니, 할아버지 들이었고 그들은 우리보다 더 멋진 체력을 자랑했다. 일은 일대로 힘들었지만, 더 힘든 것들은 따로 있었다. 바로 낯섦의 문제였다. 12 우선 음식이 가장 힘들었는데, 그들을 쌀을 파스타와 같은 면으로 생각 했다. 쌀을 삶아서 그 위에 소스를 뿌려 먹었다. 매 끼 그리스식 샐러드 는 빠지지 않았다. 그리고 그들은 규칙을 싫어했다. 시간약속을 잘 지키 지 않는다. 그들은 어떤 일을 하든 간에 융통성 있게 하는 것을 좋아했 고, 나는 때때로 저건 융통성 있는 것이 아니라 느릿하고 게으른 것 이라 고 생각했다. 또한 그들은 자기주장이 강했다. 나도 한 목소리 하는 자기 주장 강하고 기가 센 사람이지만, 그 곳에서는 예의상 단체를 위해 조금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어도 이해하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그들은 달랐 다. 작은 불만이 생기면 그때 그때 이야기했고 말싸움, 즉 좋은 말로 토론 을 일삼았다. 하루는 그리스에서 온 이리니가 나에게 말했다. -수빈, 누구에게든 불만이 있으면 바로 이야기 해. 무조건 이야기 해야 하는거야. -그래도 우리는 단체생활을 하잖아. 나 때문에 상대방이 기분 나쁘면 어떡하니? -오 수빈, 그건 그들의 문제야. 그리고 아무도 너의 의견을 듣고 기분 나빠하지 않아. 이리니는 자신이 자신의 불만과 불쾌함을 숨기지 말라고 했다. 그건 오히 려 관계를 악화시키는 것이라고. 캠프 리더중 한명인 코스타스는 나를 수빈아키라고 불렀는데, 그리스어로 little subin 이라는 뜻이었다. 그들은 내가 고작해야 14살 쯤으로 보인 다고 했다. 내가 말했다. -나 한국에서는 엄청난 노안이야. 기도 세고 한 성질 하는데. 나 무서 운 사람이야! 그러자 코스타스가 웃으며 말했다. -너는 수빈아키야. 그냥 영원한 수빈아키로 그리스에서 살아. 그들과 나 사이에 많은 것이 다르다는 것은 이미 알고 있었고 매분 매초 느껴왔지만, 그 차이점은 점점 즐거움으로 변하고 있었다. 위기의 그리스 그리스 하면 떠오르는 생각. 경제 위기, 공황 상태, 유로존 탈퇴 내가 이 번에 그리스에 간다고 하면 주변 사람들은 하나같이 말했다. 왜 하필 그 리스야? 지금 그 곳 분위기 안 좋다던데, 몸 조심하고 살아서 돌아와! 나

14 또한 걱정이 되지 않았다면 거짓말이다. 어느 나라든 경제 상황이 힘들어지 면 타지에서 온 외국인들에게 친절하기 어렵다. 사람들의 마음의 여유가 없 어지기 때문이다. 나는 그리스도 당연히 그러겠거니 하고 긴장을 단단히 하 고 갔다. 복대를 차고,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주변을 살펴보고, 누가 말이라도 걸면 도망갔다. 하지만 안드로스에서 만난 사람들은 우리가 예상했던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괜히 의심하고 경계한 것 같아 미안해지기까지 했다. 어느 날 저녁, 또다른 캠프 리더 디미트리스가 나에게 물었다. -한국에서는 선생님이 되면 한 달에 얼마정도 버니? -음, 정확하는 모르지만 처음 선생님이 되면 200만원 정도 벌거야. -그리스에서는 선생님이 되어도 100만원도 벌지 못해. 그 만큼 돈 벌기가 힘들어. 그렇다고 직장을 쉽게 구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여기 저기 전부 실업자야. 그렇다고 그리스의 물가가 싼 편도 아니었다. 유럽 중에서 그리스의 물가는 싼 편이었지만, 우리나라와 비교했을 때 한참 비쌌다. 내가 이번 워크캠프가 끝나 면 유럽 여행을 할 계획이라고 하자 디미트리스가 또다시 물었다. -부모님이 여행 경비를 주셨니? 여기 올 때 항공비도 많이 들었을텐데. -응, 부모님이 조금 주셨어. 하지만 우리 집이 그렇게 넉넉하지 못해서 내 가 돈을 모아서 왔지. 나는 한국에서 평소에 용돈을 벌기 위해 늘 아르바이트를 했다. 그렇게 이야 기하자 디미트리스는 자기 또한 그렇다고 했다. 그는 이번 캠프가 끝난 후에 돈을 벌기 위해서 다른 섬에 일하러 간다고 했다. 그리고 그는 말했다. -그리스가 요즘 많이 어려운 것 알지? 사람들은 쉽게 말해. 그리스 사람 들이 게으르고 일 하기 싫어해서 결국 경제 위기가 온 것이라고. 하지만 아 냐. 사람들은 살기 위해서 열심히 일해. 세상이 뭐라고 떠들어대도 괜찮아. 우리는 슬프지 않아 행복해. 왜냐면 우리는 삶을 사랑하거든. 우린 괜찮아. 다른 사람들은 어떻게 생각할 지 몰라도 우리는 행복해. 과연 그들은 괜찮을까? 나에게 이야기하는 디미트리스의 눈빛이 흔들렸다. 늘 장난기 많은 얼굴로 웃는 그였지만 그 날 저녁은 달리 보였다. 나는 생각 했다. 많이 힘들구나. 그렇지만 행복하구나. 그러니까 그들은 이겨낼거야. 라고. 그리고 청춘 처음에는 무조건 다르다고만 생각했던 그들이 점차 나와 별로 다르지 않은 사람들이라고 느껴졌다. 친한 친구들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의 표정, 자신의 여 자 친구 사진을 보여주며 입가에 떠오르는 미소, 집안 사정을 이야기할 때 돈 걱정하며 짓는 한숨. 목소리, 머리카락 색, 식성, 야한 농담을 자주하는 문화 까지도 너무 다르지만 그들은 사실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같은 청춘이

15 15 었다. 밤에 항구에 떠 있는 나룻배를 몰래 훔쳐 타기도 하고, 초등학교에 있는 천체망원경으로 별을 보며 함께 탄성을 질렀다. 생긴 것은 분명 달 라도, 표정은 같았다. 오후 자유 시간에 벨기에에서 온 필립이 나에게 물 었다. -수빈 너는 무엇이 되고싶니? -나는 리포터가 되고 싶어. 글 쓰는 것이 좋아서 언론사에서 일하고 싶어. -왜? 너의 전공은 디자인이라고 하지 않았니? -글쎄.. 그냥 글 쓰는 것이 좋고, 그게 더 나한테 맞는 것 같아. 14 사실 내가 영어를 좀 더 잘했다면 나의 장래희망 변천사를 필립에게 구구 절절 말해주고 싶었다. 그들은 매우 흥미로워했다. 곧이어 열두 명의 꿈 들이 그들의 입속에서 뛰쳐나왔다. 의사, 교사, 물리학자, 간호사, 인테 리어 디자이너, 건축가 등 so interesting! 이라는 말을 그 날 스무 번 도 더 들은 것 같다. 잘 하지 못하는 영어, 발음도 다 달라서 한번에 알아 듣기 힘들었지만 각자의 꿈을 말하느라 우리는 정신이 없었다. 아마도 갓 스무살을 넘긴 청춘들이 할 수 밖에 없는 이야기였을 것이다. 바닷바람을 맞으며 나의 꿈을 얘기하며 즐거웠고, 그들의 꿈을 들으며 설렜다. 우리 는 그렇게 꿈으로 소통했다. 그렇게 서로의 이야기를 한 후, 우리는 해변 으로 놀러갔다. 아름다운 지중해에서 마음껏 다이빙을 하고 수영을 했다. 뜨거운 햇볕에 온 몸이 그을렀지만 행복했다. 더운 날 산 속에서 땀 뻘뻘 흘리며 일하고 바로 해변에 뛰어드는 것은 정말이지 상쾌했다. 우리는 밤 에도 종종 해변에 나갔는데, 해변에서 일렬로 누워 별을 보고 맥주를 마

16 시면서 속옷 바람으로 밤바다에 뛰어들기도 했다. 그 어떤 것을 해도 즐거운 날들이었다. 어린 아이가 된 기분이었다. 모든 것을 아무런 걱정 없이, 더 깊 고 복잡한 생각 없이 순수하게 받아들이고, 순수하게 표현하고, 순수하게 즐 거워했다. 행복했다. 그렇게 우리는 꿈을 이야기하고, 꿈을 꾸며 꿈같이 지냈 다. 이별 어색한 첫만남 이후, 내가 이들과 정말 친해질 수 있을까 생각했던 것도 잠 시 우리는 정말 친구가 되었다. 그리고 바닷바람처럼 17일이 금방 날아가버 렸다. 앞으로 다시 볼 수 있을까? 다시 이 섬에 올 수 있을까? 헤어지는 날, 나는 눈물을 참지 못하고 펑펑 울었다. 그들은 나의 볼에 키스를 해주었다. 키스와 함께 17일 동안의 기억이 파노라마처럼 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시원 섭섭했고, 너무 아쉽고, 서글펐다. 언제나 내가 있는 곳을 벗어나면 무 언가를 배우게 된다. 다른 것을 보고, 다양한 것을 경험하고 그 속에서 수용 하고 인정하는 법을 배우는 것. 나는 워크캠프를 통해 당연한 것을 당연하게 배우고 한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한층 성숙해 진 마음으로. 그리고 앞으로 인 생에서 계속되어야 할 배움이다.

17 17 2. 독일 16 " 멘붕 캠프 " 독일 - 김성용 IJGD 2203 부산대학교 이번 캠프를 한 글자로 요약 하자면 바로 멘붕 이었다고 할 수 있다. 캠프 지역부터 나이, 했던 일, 언어, 그리고 마지막 순간까지.. 내가 어떻 게 이 다섯 가지의 멘붕을 이겨내고 2012년 여름을 아름답게 보냈는지 소개한다. 첫 번째 멘붕: 힐데스하임이 어디야? 힐데스하임은 독일 북부의 니더작센 주에 위치한 작은 소도시다. 물론 지원할 때부터 내가 힐데스하임으로 갈 것은 알고 있었지만, 막상 떠나려 니 앞이 깜깜했다. 여행 책자는 물론, 인터넷에도 아무런 정보가 없는 도 시 힐데스하임! 직접 가보니 소박한 사람들과 그 안에서도 반짝이는 문화 를 가지고 있는 사랑스러운 도시였다. 하지만 하루면 둘러 볼 수 있는 작 은 도시라 그런지, 여과 시간이나 주말에는 딱히 둘러볼 곳도, 할 것도 없 는 것이 사실이었다. 대신 우리는 주말이면 근처에 위치한 하노버나 함부 르크로 여행을 다니며 대도시에서 캠프를 하는 것 못지않게 알찬 여가시 간을 보낼 수 있었다.

18 두 번째 멘붕: 내가 노땅이라니! 한국, 이탈리아, 러시아, 독일, 터키. 이렇게 다양한 국적을 가진 10명의 청 년들이 모인 자리에서 캠프 리더보다 내가 나이가 더 많았다는 사실은 나에 게 새로운 멘붕으로 다가왔다. 알고 보니 캠프지원 가능 연령대가 16세부터, 26세까지였던 것이다! 불행 중 다행으로 그래도 제 나이 같아 보이지 않는 나의 외모(?) 덕분에(실은 아시아인 이였기 때문인지도!) 처음 2~3일을 제외 하곤 별 탈 없이 잘 지낼 수 있었다. 문화가 다른 만큼 말도 많았고 탈도 많았 던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기본적으로 모두 열린 마음과 착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인지라 문제가 생겨도 침착하고 차분하게 어려운 상황들을 잘 해결할 수 있었다. 세 번째 멘붕: 오랜만에 잡은 붓! 고등학교 미술 시간 이후로 실제로 붓을 잡고 물감으로 그림을 그린 적이 처 음이 아니었을까.. 한 때는 미술학원을 다니며 미술학도를 꿈꿨던 나에게 다 시 잡은 붓은 나에게 여러 생각을 불러 일으켰다. 캠프에서 주로 했던 일 또 한 축제에 필요한 장식이나 광고 피켓, 여러 가지 설치 미술들을 도와주는 일 이었던 지라 미술을 아쉽게 관둬서인지 누구보다 열심히 예술 활동에 전념할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의 예술적 재능이 실제로 누군가에게 도움이 됐다는 사실이 아주 즐거웠다. 지금은 신문방송학과에 재학중인 평범한 대학 생이지만 언젠가는 미디어와 예술이 접목된 일을 하리라 다짐하게 된 계기가 되었다.

19 19 네 번째 멘붕: 독일어를 모른다! 2주 가까이 축제 준비를 마치고, 드디어 Lyrik Park 2012 페스티벌이 시작되었다. Lyrik Park는 복합 문화 시설인 Kulturfabric이 주관하는 2 년에 한 번씩 열리는 시문학 예술 축제로 지역 아티스트들이 모여 자신들 의 작품을 전시하는 페스티벌이다. 다양한 설치 미술 뿐만 아니라 시 낭 송, 음악 공연 등 다양한 이벤트들이 마련되었다. 하지만 우리 캠프에 한 가지 문제가 있었으니 그것은 바로 독일에서 온 두 친구를 제외하고는 아 무도 독일어를 할 줄 몰라 이 뜻 깊은 문화 이벤트를 제대로 즐길 수 없었 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최측의 배려로 아티스트들을 영어로 인터뷰 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지면서 국제적으로 Lyrik Park를 알리고 우리 또한 이번 축제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되었다. 18 다섯 번째 멘붕: 이탈리아에서 온 편지 우여곡절 끝에 17일간의 캠프가 끝나고 서로 연락처를 교환하며 아쉬운 작별인사를 뒤로하고 나는 독일을 떠나 유럽 여행을 하고 있던 중이었다. 캠프 기간 내내 제일 친하게 지냈던 이탈리아 친구 프란체스카로부터 이 메일이 왔다. 프란체스카는 캠프 내 몇 안되는 20대 중의 한 명이었고 서 로 가고자 하는 진로와 성격이 무척이나 비슷했기에 나와 통하는 면이 참 많았던 친구였다. 이렇게 짧았던 캠프 이후에도 나의 안부를 물어 봐주고 나를 그리워해주는 친구가 생겼다는 것은 이번 캠프에서 얻은 경험 중에 서 제일 소중한 선물이었다. 나와 같은 사람을 알게 되어 참 고맙다고 말 해주는 나의 귀여운 이탈리안 친구! 나에게 유럽을 꼭 다시 가야 할 이유 가 생겼다!

20 " 나의 길고도 길었던 2주" 독일_주수진 IJGD2207 홍익대학교 워크 캠프 장소인 하노버에 하루 먼저 도착해 하루 숙박하고 다음날 아침부터 워크캠프에 들어갈 준비를 하고 있던 나에게, 워크캠프에 참 가하는 한국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인포싯이 잘못되었다고, 오늘 캠프 시작인데 어디냐고 물어보는 내용의 메시지가 어제시간으로 도착해 있었다. 하노버에 그 문자 시간에 있었던 나는 순간 매우 당황하여 나 는 인포싯에 적혀있는 날짜대로 왔을 뿐이라는 얘기를 했다. 결국 리 더가 나를 하노버 중앙역으로 픽업해 간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갑 작스러운 만남과 캠프에 대해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리더를 기다렸다. 하노버 중앙역 저 멀리서 노랑머리의 리더가 도착해서 나에게 손을 흔 드는 모습이 보이자 문득 새로운 것, 새로운 사람에 대한 두려움이 나 를 막막하게 했다. 리더가 이끄는 곳으로 따라가니 캠프원들이 모여 있었고, 한꺼번에 많은 사람과 친해져야 했던 나는, 이미 친해져있는, 너무 다른 사람들의 무리에 낄 용기가 나지 않았다. 리더가 나에 대해 소개해주고 나머지 캠프원이 각자 자신의 이름을 말하며 내 앞에 손을 내밀었고, 악수를 하며 하나하나의 이름을 기억하려고 노력했지만 얼 굴과 이름이 매치도 안되고, 이름이 기억나지도 않았다. 간단한 인사를 끝낸 후 우리는 강 주변으로 가 개별 관광시간을 가졌 다. 그 때 나는 중국인 소녀를 만났는데 그 아이가 나와 같은 방을 쓰 게 되었다. 나보다 2살 어린 중국인 소녀 릴리 는 영어를 매우 잘했 다. 처음 외국인과 제대로 얘기 한 것이 릴리였는데, 릴리는 영어를 쓰는 영국인이나 미국인이랑 프리 토킹이 가능할 정도로 영어를 잘해 서, 나는 처음에 기가 많이 죽었다. 그나마 동양인이라 영어를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던 나의 편견이었다. 릴리와 대화하면서 나는 점점 작 아지는 나를 느꼈고 그것이 가장 큰 잘못이었다. 릴리와 얘기 한 후 매우 작아졌던 나는 다른 캠프원들이 말하는 기초적인 단어조차도 알 아듣지 못했다. 말 그대로 패닉상태가 온 것이다. 평소에 토익 듣기를

21 21 잘 했던 나인데, 그때는 정말 한 단어 한 단어 듣기도 힘들었다. 토익공부 가 영어공부인가에 대해 문득 회의감이 들었다. 20 그렇게 어버어버 거리며 캠프원들과 자유시간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나뭇가지에 불을 붙이고 앉아 있는데 내가 의기소침해져 있는데, 리더 4 명중 한명인 verena가 나에게 다가오더니, 나에게 말을 걸었다. 그때 나 는 베르나에게 나의 영어 실력에 대해 실망중이고 너무 어렵다는 말을 했 고 베르나는 그런 나에게 자신도 영어를 못하며, 영어 못하는 사람 많다 고 하며 나를 위로해 주었다. 베르나의 말에 그나마 기분이 좀 나아진 나 는, 그 후로 캠프원들과 이야기를 하려고 노력해보았다. 그랬더니 정말 영어를 나보다 훨씬 못하는 애들이 보였다. 프랑스에서 온 로만, 스페인 에서 온 안드레아와 다프나는 영어를 썩 잘하지는 않았지만 아이들과 친 하게 잘 지내는 거 같았다. 물론 영어를 잘하면 친해지는 것이나 활동하 는 것이 훨씬 편해지겠지만, 영어를 못한다는 게 큰 문제는 아니라는 생 각이 들었다. 그렇게 정신 없이 첫날이 지나가고, 다음날 우리와 함께 일할 장애인 분 들이 숙소에 왔다. 나는 장애인에 대해 조금 겁이 났던 것이 있었는데, 우 리와 같이 일할 장애인 분들은 정말 장애인인 것이 처음에는 구분이 잘 안될 정도로 일반인 같았다. 리더에게 그분들은 몸은 성인이지만 아이같 이 생각을 한다는 얘기를 전해들은 나는 생각보다 장애인분들이 무섭지 않았다. 때로는 하는 행동이 어린아이 같아서 귀엽게 보이기도 했다. 예 를 들면 다니엘은 매일 밥 먹을 때 사람들 이름을 하나하나 불러가면서 I love you를 크게 외쳤는데, 재미있었고 웃겼다. 장애인들의 가장 큰 문 제는 영어가 안된다는 것이었다. 영어가 안돼서 리더들이 독일어와 영어

22 를 통역해 주면서 일을 했다. 그런데도 딱히 불편한 것은 못 느꼈다. 장애인 분들과의 공사가 끝나고 마지막 굿바이 파티에서 헤어짐을 지켜보는 나의 눈 에서 눈물이 나왔다. 생각보다 너무 잘해주시고 그분들에게 관심을 가져주면 너무 좋아해주셔서 나는 캠프원들보다 장애인 분들에게 더 정이 갔던 것 같 다. 장애인분들과 헤어지고 캠프원들과도 헤어지면서 나의 길었던 2주는 끝 이 났다.

23 23 3. 라오스 22 "낯선 곳에서 거울을 보다." 라오스 - 김기일 AVAN 경북대학교 라오스 워크캠프를 지원하기 위해 선택 가능한 국가의 목록을 보며, 나 라의 이름을 속으로 읽다 어감이 좋아 잠시 멈칫했었다. 그때 까지만 해 도 라오스에 대한 나의 지식은 전혀 없고, 단지 못사는 나라,TV 여행 다큐에서 본적 있는 나라로만 알고 있었다. 어차피 어떤 나라에 지원해야 할지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황이고, 난생 처음 자원활동을 해보는 거 못 사는 나라에 가서 열심히 도와주고 와야지 라는 오만한 생각에서 라오 스 캠프를 선택하게 되었다. 또한 아무것도 아는 정보가 없다는 사실 자 체가 나에겐 흥미를 주었다. 얼마 뒤 라오스 캠프 참가자로 선발이 되고, 그 사실을 가족과 주변 친구 들에게 알렸다. 이 소식을 전할 때마다 그들은 되물었다. 라오스는 어 디에 있는 나라지?, 어떤 나라니? 난 대답 할 수 없었다. 나도 아 는 것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제서야 나는 라오스에 대해 나름의 조 사를 해보았고, 라오스에서는 공용어로 라오어를 사용하며, 인구 구성으 로 크게 3개의 종족으로 분류되는 다양한 소수민족으로 이루어진 다문화 의 국가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라오어라는 그들 고유의 언어를 사용한다 는 것을 알게 되어 간단한 표현을 익혀가기 위해 서점에 회화 책을 사러 갔다. 쉽게 구할 수 있는 라오스 주변의 태국어 회화책처럼 쉽게 찾을 수

24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 출판된 라오어 관련 서적의 종류 가 적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절판되고 없었다. 결국 내가 살고 있는 대구에 서도 가장 큰 서점에서 겨우 구할 수 있었는데, 이곳에서도 내가 구입한 책이 재고가 남은 한 종류의 책의 마지막 남은 한 권이었다. 이때 또 한번 라오스 와 우리나라의 아직은 서로가 낯설게 느끼는 거리감과 마주치게 되었다. 그렇다 라오스는 아직까지 대한민국과 친숙한 나라라고 할 수 없다. 분명히 라오스에 발을 붙이기 전까지는 적어도 나에겐 그랬다. 그러나 첫날에 실제 로 마주친 라오스의 거리에서 가장 많이 볼 수 있던 자동차는 우리나라 기업 현대차의 승합차(스타렉스)였다. 이 때문에 나는 외국에 나와있다는 느낌보 다는 한국에서 한적한 시골로 여행을 온 기분이 들었다. 현대차의 인기는 수 도 위앙짠(비엔티엔) 뿐만이 아니였다. 나의 워크캠프 개최지인 왕위앙(방비 엥)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과장하지 않고 가장 많이 볼 수 있는 차량이 한국산 중고차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한국에서는 버려졌다고 말 할 수 있는 차들이 한국에서는 잘 알지 못하는 라오스를 누비고 있었던 것이다. 워크캠프지인 왕위앙에 도착한 첫 주의 나의 활동은 왕위앙 시내에서 조금 떨어진 위앙싸마이라는 한 마을에서 진흙벽돌을 만드는 일이었다. 내가 주로 활동했던 푸딘댕이라는 마을은 청소년센터가 운영되면서 지역의 아이들에게 놀이터이자 배움터로서 충실히 역할을 하고 있다. 그러나 위앙싸마이의 어린 이들은 푸딘댕 마을보다 시내에서 좀 더 떨어진 지리적인 영향과 어려운 마 을의 형편 때문에 혜택을 받지 못하고 있다. 따라서 푸딘댕의 청소년 센터 같 은 곳을 위앙싸마이 마을에도 세우고자 하는 것이다. 그 첫걸음이 내가 만드 는 진흙 벽돌이라고 생각하니 좀 더 사명감을 가지고 활동에 임할 수 있었다. 그리고 진흙벽돌을 만드는 동안 위앙싸마이를 비롯한 지역의 청소년들이 일 을 도와주러 왔고, 그 기간 동안 많은 인연을 만들 수 있어 더욱 소중한 시간 으로 남았다.

25 25 활동 2주차부터 마지막 4주차까지는 청소년 센터에서의 활동에 집중되었 다. 여름방학 동안 센터를 찾은 학생들을 위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것이 다. 나는 한국어, 음악, 어린이들을 위한 영어 수업을 맡게 되었다. 한국 어 시간에는 간단한 문장을 익혀 대화를 나누는 수준으로 학생들과 고민 을 하여 학생들이 알고 싶어 하는 주제를 선정하여 프로그램을 진행했다. 24 나는 모국어로서 쉽게 사용하는 한국어를 외국인에게 가르쳐주는 일을 직 접 해보고, 그 와중에 나는 어렵게만 느껴지는 그들의 라오어를 배워보 니, 쉽고 어렵다는 것 같은 판단의 기준이 얼마나 자기중심적인가를 알게 되었다. 나는 지금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살면서 편협한 나의 기준으로 세상 전부 를 보려고 했던 것이다. 라오스를 선택할 때도 나는 나의 기준으로 라오 스는 못사는 나라이니까 내가 도와줘야 하는 불쌍한 나라라는 식의 자기 중심적인 오만한 생각을 했었다. 그러나 워크캠프 기간 동안 도움을 받고 무언가를 배우는 쪽은 나였다. 이 한국어 수업을 열고 이것을 깨달은 후의 나는 워크캠프 동안 내가 무 언가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을 버리고, 자연스럽게 그들의 친구가 되어 내 가 배울 만한 점은 배워가겠다는 자세로 활동에 임하기 시작했다. 이런 생각으로 활동에 임하게 되니 나의 취미였던 노래 부르기를 살린 음악시 간, 귀여운 꼬마들과 함께한 영어시간에서도 나는 망가짐을 두려워하지 않고 그 시간 속에 뛰어들어 소중한 순간들을 즐길 수 있었으며 마침내 함께한 사람들과 친구가 될 수 있었다. 즐거운 기억들은 숙소였던 농장에서도 많이 있었다. 그곳은 마산출신 열 혈사나이 용구형님이 운영하고 계신 농장인데, 나는 그곳에서 팜스테이를 가장하여 즐겁게 빌붙어 살며 귀찮게 하기 를 했다. 그 농장에는 용구형 을 도와 현지 특전사 출신 누형, 나의 라오스 동생들이 된 위싸이, 따모, 뎅이 일을 하고 있다. 이 농장 식구들은 정말로 나를 가족처럼 대해주었 고 나도 라오스에 내 가족이 생긴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이 때문에 낯을 가리는 편이었던 내가, 나를 위해 식사를 준비하고 있거나 농장 일을 열 심히 하고 있는 그들에게 먼저 다가가 장난을 치고 농담을 하는 장난꾸러 기 남동생이자, 형, 오빠 역할을 한 건지도 모르겠다. 워크캠프 기간 동안 센터에서 일을 하는 시간 이외에도 이 농장 식구들 덕분에 나는 늘 즐거웠고 많이 웃으며 지냈던 행복한 시간을 보낼 수 있 었다. 그들과 헤어지는 게 너무도 아쉬웠던 나는 캠프기간이 종료하고도 이틀을 더 신세지고 돌아왔다. 그 이틀 동안 나의 라오스 동생들은 기꺼 이 나를 그들의 집에 초대해주었고, 그들의 집에 방문했을 때 느낄 수 있 었던, 이전의 오만한 나의 시각으로는 가난한 그들의 형편에도 불구하고, 나를 위해 내가 평소에 좋아하던 탄산음료를 준비해 나에게 내어주었다.

26 나의 라오스 동생들은 정말로 나와의 인연을 중요하게 생각해주어 나를 초대 했고, 정말로 정성을 다해 나를 대접해준 것이다. 나는 큰 감동을 받았고 부 족한 영어와 손짓발짓으로 감사함을 표현했다. 또한 그들은 진심으로 훗날에 다시 만나기를 원한다는 말로 대답해주었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생각해보면, 거리마다 보이는 한국차 때문에 친근한 첫인상을 준 라오스는 첫인상만큼이나 친근한 착한 마음씨의 사람들이 많았 다. 나의 워크캠프의 무대였던, 길을 걷다 눈이 마주치면 싸바이디 하고 인 사를 건내던 현지주민 분들이 그랬고, 푸딘댕 청소년 센터의 스탭들, 청소년 센터에서 나와 함께 웃고 뛰놀고 공부한 어린이들과 중, 고교학생들, 방학을 맞아 내가 머물던 숙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나의 매 끼니를 준비해준 나 의 라오스 동생들이 그랬다. 나는 문득 내가 태어나고 자라난 한국의 모습이 떠올랐다. 같은 동네 심지어 한 아파트 단지의 같은 층에 살면서도 서로를 알 지 못하는 사람들, 지하철이라는 사람이 넘치는 공간에서도 손바닥안 스마트 폰 속으로 자신을 고립시키는 외로운 사람들. 그들이 떠올랐고, 내가 떠올랐 다. 나와 달리 그들은 남을 보고 인사를 건네는 방법을 알았고, 싱긋 웃어주 어 마음을 전하는 방법을 알았고, 이렇게 진짜 친구를 사귀는 방법을 알았다. 난생처음 해보는 나의 자원활동에서 이전의 내가 갖고 있던 자원 활동자는 내가 있는 곳 보다 못한 곳에서, 나보다 안 좋은 환경에 있는 사람을 위해 무 언가 해주어야 한다는 생각이 잘못된 것임을 알게 해주었다. 또한 워크캠프 동안 낯선 사람들 속에서 따스함과 친근함을 느끼며 내 자신을 돌이켜 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이처럼 나에게 이번 여름은 소소하고 잔잔한 드라마 속에 살다 온 가장 기분 좋은 따뜻함을 느낀 계절이었고, 그 드라마를 나는 잠시 볼 수 없지만 아쉽지 않다. 나는 그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지금도 그들의 소소한 드라마를 계속 만들어 가고 있음을 알기 때문이다.

27 27 4. 리투아니아 26 "내 인생 최고의 기억들" 리투아니아_고영탁 CYVA 07 전남대학교 리투아니아로 워크캠프를 떠난다는 말에 내 지인들의 90%는 이렇게 말하 였다. 리투아니아? 그게 어디에 있는 나라야? 아마 대다수의 사람들 이 이러한 반응을 보일 것이라 생각된다. 발트해에 위치한 리투아니아는 우리나라의 약 3분의 2크기이며 소련의 지배를 받다가 1991년 독립하였 다. 그래서인지 리투아니아에 도착한 첫 느낌은 약간 어두웠다. 뭔가 영 화에서나 접했던, 그런 동유럽 특유의 분위기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마 도착한 날이 흐려서 그랬는지도 모르겠다. 캠프지로 가기 위하여 리투아니아 수도 빌뉴스에서 버스를 타고 카우나스 로 이동하였다. 카우나스는 리투아니아의 제2의 도시로 빌뉴스 이전의 수 도였다고 한다. 카우나스에 도착한 나는 너무 당황스러웠다. 일단, 영어 가 통했던 빌뉴스에 비해 카우나스에서는 영어로 의사소통이 가능한 사람 이 거의 없다보니 너무 애를 먹었다. 더욱 당황스러운 건 캠프장소가 나 와있는 인포싯과 현지인들의 말이 정 반대였다. 말도 안 통하고 한참을 고민하던 중 터미널에서 동양인 친구가 걸어나오 는 것이다. 바로 우리 캠퍼 중 한명인 혜민이었다. 너무 반가워하며 이런 저런 이야길 나누다가 결국 인포싯 내용을 따르기로 결정하고 버스를 타

28 고 이동하였다. 그런데 암만 버스를 타고가도 botanical garden은 나오지 않 는 것이다. 분명 인포싯에는 약 20분정도만 버스를 타면된다고 하였는데, 이 건 무슨 30분이상을 버스를 타도 목적지가 안 나온다. 당황한 우리는 다행히 영어를 할 줄 아는 여학생을 만났고, 그를 통해 우리가 버스를 반대방향에서 탔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믿었던 인포시트가 잘못되다니 어깨를 짓눌러 오는 배낭의 무게는 우리를 더욱 지치게 만들었다. 하지만 뭐 어떠랴~ 남는 건 시간인데.. 우리는 버스를 기다리며 정류장에 앉아 맥주를 사 마셨다. 햇 살 좋고 한적한 곳에서의 맥주한잔.. 긴 여행의 피로를 달래주는 듯 싶었다. 우여곡절 끝에 도착한 캠프! 캠프에 도착하니 프랑스 친구 존폴, 독일 베지테 리언 커플 필립과 기스크, 리투아니아리더 이자벨라가 우릴 반갑게 맞이해주 었다. 남자 셋 여자 셋..다른 캠프에 비해 소규모 였지만 뭔가 재미있을듯한 예감이 들었다. 우린 서로 2주동안 함께 생활하면서 필요로 하는 규칙등을 만들며 서로에 대해 알아갔다. 밤새 이야기 꽃을 피우다 잠이 든 우리.. 다들 단잠에 빠져있는데 갑자기 우 르르 소리가 들려온다. 뭐지 싶어 눈을 떠보니 우리의 숙소의 한쪽 벽면이 무 너져내려 버린 것. 그냥 헛웃음이 나왔다. 일단 일어나서 피해야 하지만 우 린 너무 피곤한 나머지 그냥 옆으로 살짝 이동하고 다시 잠들었다. 이 건물이 200년이 다 된 건물이라고 하니 무너져 내릴만도 했다. 그 당시에는 내장재 로 석탄을 썼었다고 한다.

29 29 다음 날 아침, 이를 치우는데 어찌 힘들던지.. 근데, 애들 삽질이라든지 치우는게 영 시원치 않아 보였다. 문득, 워크샵 때 워캠에서 한국 예비역 들을 좋아한다는 말이 떠올랐고, 조용히 삽과 걸레를 잡았다. 군대에서 갈고 닦은 삽질과 왁싱실력을 보여주니 외국 친구들 모두 감탄을 금하지 못하며 신기해 했다. 28 무너진 벽을 치우고 우린 사무실로 이동하여 botanical garden에 대한 간단한 오티 후 작업에 임했다. 우리는 2주동안 항상 남자팀과 여자 팀 두 팀으로 나눠 튤립캐기, 페인트 칠, 허브가꾸기등의 일을 하였다. 매일 5시간씩 일을 하고 우린 오후의 자유시간을 이용해 카우나스 주변의 강에 놀러가 수영을 하거나 자전거를 타기도 하였고, 카약킹을 즐기기도 하였 다. 캠프를 하며 가장 적응하기 어려웠던 것은 베지테리언들의 식단이었다. 2 명의 베지테리언 그리고 한명의 반베지테리언.. 그러다 보니 식단자체가 고기나 소시지류보다는 야채와 치즈 과일 위주의 음식을 먹게 되었다. 덕 분에, 한국에서 준비해간 불고기 소스나 미션 때 사용하려던 특제소스등 은 사용도 못하였지만, 2주간 웰빙음식을 경험한 덕분에 몸엔 더 좋지 않 았을까 생각한다. 우리 캠프는 다소 정적이었다. 술을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고.. 아마 워크 캠프 역사상 이렇게 건전한 캠프는 처음일 것이다. 다른 캠프들의 말을 들어보면 캠프기간 내내 술을 먹고 놀았다고 하는데, 우리는 그런 적이 없었다. 6명중 술을 즐기는 친구는 나밖에 없었으니... 맥주가 먹고싶을 때면 언제나, 혼자 마트에 가서 사 마시곤 했었다. 비록 남들만큼 술을 많 이 마시지는 않았지만 알코올 없이도 즐거웠던 우리다. 캠프기간 동안 우리는 많은 이야기를 나누었다. 정치, 경제, 스포츠 연애 등 이러한 이야기를 외국친구와 나누고 있는 내 자신이 참 놀라웠다. 영어실력이 그리 뛰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서로를 이해하고 배 려하였기에 이는 별로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프랑스 친구 같은 경 우는 영어를 거의 하지 못했지만, 우린 손짓 발짓으로 대화를 시도하며 같이 웃고 즐겼다. 2주라는 시간은 정말 빠르게 지나갔다. 이 짧은 시간동안, 우리는 국적, 나이를 불문하고 너무도 친해져 버렸고, 헤어진다는게 믿겨지지가 않았 다.

30 앞으로 그 친구들을 다시 볼 수 있을지, 없을지는 모른다. 아니.. 평생 다시 못 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학생활 마지막 방학을 함께 했던 다섯 친구들과 의 추억은, 절대 잊지 못 할 것이다. 이런 멋진 기회를 선사해준 기아자동차 와 유네스코 측에 다시 한번 정말 감사하다는 말을 드리고 싶다.

31 30 31 "역사와 전통의 리투아니아, 아름다운 쿠르트베나이 국립공원에서의 2주" 리투아니아_최진영 CYVA06 홍익대학교 1. 리투아니아???어디 있는 나라야? 처음 리투아니아 라는 이름을 처음 접하였을 때가 생각난다. 속마음은 독일이나 프랑스와 같은 유명한 나라에 방문하고 싶다는 마음이 굴뚝같 았다. 그래서 처음 유네스코에서 주최하는 글로벌 워크캠프에 지원하고 자 했을 때 열심히 머리 속으로 계산을 할 수 밖에 없었다. 실질적으로 많 은 경쟁자를 뚫고 원하는 나라에 들어갈 확률과 이렇게 좋은 기회를 절대 놓치고 싶지 않다는 두 가지의 마음은 절충점을 찾아내기에 이르렀고 생 소한 나라는 경쟁률도 적을 것이라는 단순한 생각이 리투아니아로 지원을 하게 되었다. 그 때부터 혹시라도 방문해볼지 모르는 나라에 대해서 관심 을 가지고 열심히 정보를 찾기 시작했다. 주변 사람들에게 리투아니아가 어떤 나라인 줄 아냐고 물어보았지만 10 명중 7명은 모른다고 대답했다. 나머지 3명도 농구(리투아니아는 농구강 국이다) 등 국제 경기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기 때문에 나라이름 정도만 간단히 아는 수준이었다. 관련 서적을 알아보아도 국내에는 발트3국이 그 렇게 인기 있는 여행지도 아니고 인터넷을 통해서도 생각만큼 많은 정보 를 얻을 수 없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한 사이트에 한국 교민이 운영하고 있는 발트3국 전용 카페가 있어서 기본적인 정보부터 여행루트까지 많은 정보를 얻을 수 있었다. 혹시라도 발트3국에 워크캠프를 가게 되는 분이 있다면 꼭 검색해보시길 바란다.

32 리투아니아는 발트해 연안에 있는 발트3국(에스토니아,라트비아,리투아니아) 중 가장 큰 영토를 보유한 나라이다. 지리적인 위치 때문에 러시아, 독일 과 같은 강대국에 침입을 수차례 받기도 했고 비교적 최근까지는 소련의 지배하 에 놓여있었다. 하지만 독립에 대한 열망과 끝없는 투쟁으로 결국 주권을 회 복하였고 지금은 시장개혁을 통해서 경제력 향상에 박차를 가하고 있는 중이 다. 리투아니아의 역사를 보면서 우리나라 역사와 상당수 닮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고 이점이 리투아니아에 대해서 흥미를 불러일으키고 한번은 꼭 가보고 싶다라는 열망이 생기고 있음을 느낄 수 있었다. 2. 합격! 그리고 준비하기 합격소식을 듣고 너무나 기쁜 나머지 무엇을 먼저 해야 할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다른 해외 봉사도 다녀왔었지만 그 때와는 다르게 비행기표 끊는 것 부터 스스로 해야 했기 때문에 두려움이 있었던 것도 사실이었다. 일단 시간 이 지날수록 가격이 높아지는 항공권 예약이 먼저였다. 인기가 있는 여행지 가 아니었기 때문에 비행기표도 아주 싸게 구할 수는 없었지만 이왕 리투아 니아에 가게 된 마당에 발트3국은 다 돌아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고 에스토 니아 수도 탈린으로 들어가는 비행기 표를 구매했다. 발트3국간에는 버스가 수시로 운행되고 있기 때문에 국가간 3~4시간이면 이동이 가능하다는 정보 를 얻은 뒤여서 과감히 표를 예약할 수 있었다. 다음은 워크캠프를 위해 준비 를 해야 했는데, 사전에 캠프기관에서 가져오라고 한 필수 물품들 이외에 개

33 33 인적으로 필요한 물품들을 구매했다. 다만 나중에 모기와 관련된 약품들 을 있는 데로 다 챙겨 올걸 그랬다는 후회를 했다. 현지에서 안티모기크 림을 구매할 수 있긴 하지만 번거롭기도 하고 챙길 수 있으면 챙기는 게 현명할 것 같다는 생각을 해본다. 또한 우리 캠프 같은 경우에는 철저하 게 식사를 자충해야 했기 때문에 레시피도 필수적으로 필요했고 리투아니 아에서 한국 음식 재료를 구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은 할 수 조차 없었는 데 역시 예상대로 리투아니아에 있는 3주정도의 시간동안 한국음식재료 파는 곳은 본적이 없었다. 다만 발트3국은 현재 스시 붐이기 때문에 간 장, 와사비와 같은 일식을 준비하는데 적합한 재료들은 쉽게 구할 수 있 다. 뛰어난 요리 실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 때문에 간단하게 비빔밥과 주먹밥을 큰 틀로 정하고 고추장, 참기름, 가루 김, 부비또(밥에 비벼먹 는 양념) 등을 구입했고 국을 끓일 기회가 있을 것만 같아서 다시다 가루 도 따로 챙겼다. 쌀과 같은 것은 기본적으로 국내에서 구매해서 가져가기 엔 무게도 상당하고 질이 다르긴 하지만 현지에서도 구할 수 있을 것이라 판단, 구매하지 않았다.(예상은 적중했다) 사전에 기아워크캠프참가자로 서 같은 워크캠프에서 일을 하게 될 재운이형을 만나서 서로 준비해야 할 것등을 조율했고 어느 정도 분담을 했는데 미리 같은 캠프에서 일하게 될 사람과 접촉이 가능하다면 훨씬 더 준비과정이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한 다. 기타 한국에서 가져온 질 좋은 목장갑, 그리고 외국인 친구들을 위한 소정의 선물 등을 챙겼다 리투아니아 수도 빌니우스에서 한류소녀를 만나다. 열흘 정도 일찍 출국해서 에스토니아로 들어가서 라트비아를 거쳐서 리투 아니아로 이동했다. 리투아니아에는 다섯군대 정도의 알려진 관광 도시가 있었는데 아마 많은 사람들이 제일 처음에는 수도 빌니우스로 이동할 것 이라고 생각한다. 가장 유명한 관광도시이자 교통편도 많기 때문에 워크 캠프장소로 가기 위해서도 수월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난 관광을 하기 위 해서 빌니우스로 먼저 들어왔지만 라트비아에서 리투아니아로 들어오는 경우 워크캠프 장소인 샤울레이는 리투아니아 시내보다 라트비아 수도 리 가에서 가는 방법이 훨씬 가깝고 좋은 방법이라는 것을 뒤늦게 알게 되었 다. 워크캠프장소로 이동하기 전날 같이 리투아니아를 여행하던 타 워크캠프 친구들과 어울리고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었는데 우리가 한국말로 이야기 하는걸 유심히 쳐다보던 리투아니아 소녀가 있었다. 나랑 눈이 마주쳤었 는데 아직도 우리를 쳐다보던 그 눈빛을 잊을 수가 없다. 어디서 왔냐고 물어보는 그 소녀에게 난 한국을 아냐고 물어봤고 그 소녀는 자신의 이어 폰을 내게 건내며 자기는 지금 슈퍼쥬니어와 엠블랙의 노래를 듣고 있다 고 답했다. 여러 매체를 통해서 한류가 열풍이라는 소리를 듣긴 했지만

34 진짜 이렇게 한국에서 잘 알려져 있지 않은 곳에서도 한국을 자국민보다 더 좋아해주는 소녀를 만나니 신기하기도 했고 자부심도 느껴졌다. 이 소녀와는 따로 연락해서 워크캠프 가기전과, 워크캠프 후에도 만났었고 캠프를 마치 고 다른 나라로 떠나는 나에게 샌드위치와 편지까지 써준 고마운 친구였다. 편지의 내용중 주변에서 한국을 좋아하는 나를 이상하게 생각해서 한국어를 전공으로 하고 싶다는 꿈을 포기하려고 했는데 너를 만나고 나서 난 내 길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신했어, 고마워 라는 구절은 스스로에게 많은 생각 을 하게 했다. 이 소녀와는 지금도 연락이 닿고 있고 한국어를 배우려고 하는 의지가 확실해서 초급용 한국어 교본을 구매해서 보내주기로 약속했다. 4.쿠르트베나이 마을에 도착하다. 워크캠프장소인 쿠르트베나이 마을에 가기 위해선 리투아니아 네 번째 도시 인 샤울레이로 이동해야 했다. 수도 빌니우스에서 버스로 3시간30분 정도 걸 려서 샤울레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다른 도시 관광을 하고 온 재운이형하고 합류했고 쿠르트베나이 마을행 버스를 기다렸다. 마을로 가는 방법이 하나 뿐 이었기 때문에 우리와 같은 캠프 참가자인 에스토니아에서 온 나스티아를 만날 수 있었다. 나스티아는 영어가 굉장히 능숙해서 영어실 력이 짧은 우리들을 당황시켰는데, 알고 보니 이러한 워크캠프에 참가한 적 있는 경험자였다. 한국인 친구도 있다며 자랑했었는데 버스 안에서 나스티아 와 앞으로 우리가 겪게 될 여러 가지 상황에 대해서 즐겁게 이야기 하면서 무 사히 캠프장소에 도착했다.(물론 가는 도중 내려야 할 곳을 몰라 인근 마을 주민의 도움을 받긴 했다.) 쿠르트베나이 마을은 거대한 쿠르트베나이 국립공원 안에 위치해 있는 작은 마을이었다. 동화속에서나 나올법한 풍경을 가지고 있었는데 도착해 보니 우 리와 함께할 나머지 워크캠퍼인 이자벨, 로만, 에밀 리가 미리 도착한 상태였 다. 로만과 에밀리는 날짜를 착각해서 2일전부터 와있었다고 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캠프원 상당수가 영어에 능숙하지 않았다. 이자벨, 로만, 에밀리 는 불어권 국가에서 왔기 때문에 세명이서 대화할 때에는 나머지 캠프원들은 쳐다보는 것 밖에 할 수 없었다. 영어와 러시아어를 구사하던 나스티아는 이 런 상황에 대해서 못마땅했는지 계속해서 영어를 사용하도록 요구했고 처음 에는 나도 한국어를 사용하지 말라고 몇 번 혼이 난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 해보면 이런 나스티아 덕분에 캠프원들이 좀 더 빨리 친해지지 않았나 싶다. 바르셀로나에서 온 제라드를 끝으로 캠프원은 나 포함 총 7명이었다. 다른 캠프와는 다르게 캠프리더 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고 관리를 해주는 유르 기타 라는 중년 여성분이 계셨다. 첫날은 서로 자기 소개를 하고 앞으로 일에 대해서 간단히 논의 한 뒤 친해지기 위해서 여러 가지 게임도 하고 밤에 한 텐트에 모여서 수다도 떨면서 시간을 보냈다.

35 35 5.작업 우리의 일은 오전 9시에 시작해서 12시까지가 오전타임이다 이후에 12시 부터 1시까지 점심식사를 하고 이후 오후 3~4시까지 오후타임 일을 하면 하루 일과가 끝났다. 사전에 알고 있었던 것과 마찬가지로 우리의 임무는 옛날 방식 그대로 공원에 있는 화단에 식물을 심는 일이었다. 식물을 심 기 전에 잡초 등 각종 식물로 뒤덮여 있는 땅을 깨끗하게 정돈할 필요가 있었다. 꽤 깊이 박혀있는 잔디를 뽑기 위해서 삽으로 땅을 퍼서 뿌리 채 제거 하는 방법을 택할 수밖에 없었고 일은 간단해 보였지만 무엇보다 해 야 할 부지가 넓었다. 34 우리가 열심히 땅을 고르고 잡초를 뽑아 놓으면 정원사 로베르토씨가 기 계를 통해서 마구간에서 양분이 가득한 흙을 퍼온 뒤 작업한 땅에다가 부 으신다. 그렇게 흙으로 된 조그마한 언덕이 탄생하게 되는데 우리는 또다 시 그 언덕을 파헤쳐서 평평하게 땅에다가 고르게 펼쳐주어야 했다. 이러 한 작업이 몇 번 반복되고 그 뒤에 지정된 위치에다가 꽃을 심고 물을 주 면 되었다. 때로는 로베르토씨가 작업할 땅에 지주핀으로 길을 표시를 해 주시면 우리는 그 길을 따라 작업을 해 나갔고 그 결과 잔디 밭 위에 하나 의 멋진 화단길이 탄생하기도 했다. 작업은 대부분 유쾌한 분위기에서 진행이 되었다. 예상했던 것과는 달리 여자아이들이 남자들 못지않게 힘을 잘 썼고 일하는 시간과 쉬는 시간을 비교적 잘 준수하며 성실하게 작업했다. 일하는 도중 한국에서 귀한 장수 풍뎅이를 발견해서 같이 사진을 찍기도 하고 엄지손가락만한 작은 생쥐를 발견해서 즐거워하기도 했다. 다행히 2주동안 작업할 때 비가 내리는 일 은 없어서 훨씬 수월했다. 하지만 한가지 문제가 있었는데, 생태계도 잘 보존되어있고 숲과 같은 환경이다보니 수없이 많은 모기 때의 습격이 바 로 큰 일이었다. 지금까지 태어나서 그렇게 많은 모기를 경험해 본적이 없었는데 마치 벌통을 잘못 건드렸을 때 벌들이 화가 나서 몰리는 것 마 냥 그와 비슷한 수의 모기들이 눈앞에서 소리를 내고, 기회만 되면 피를 얻기 위해 달라붙는 탓에 꽤 많은 고생을 해야 했다. 캠프원들은 각자 안 티모기크림을 뿌리면서 저항했지만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별 효과는 없었 던 것 같다. 외부인인 탓인지 모르겠지만 유독 재운이형과 나한테만 모 기들이 몰려서 캠프원들 사이에서 모기는 코리안을 좋아한다 라는 말이 나올 정도였다. 6.여가시간 활용하기 일은 오후 3시~4시 사이에서 끝났기 때문에 많은 여가 시간이 있었다. 날이 좋을 때면 하이킹을 가기도 했는데 쿠르트베나이 국립공원자체가 자 연환경이 너무 좋기 때문에 걸어가다가 보는 풍경도 한 폭의 그림 같았

36 다. 근처 호숫가를 걷기도 하고 또 갈대밭 사이에 있는 오두막집에 일곱명이 앉아서 서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었다. 외국인 친구들이 수영하 는 것을 너무나 좋아했기 때문에 공원 안에 있는 호숫가로 자주 수영을 하러 가기도 했다. 이럴 때면 수영을 못하는 본인은 먼 발치에서 그들의 사진을 찍 어주며 나름 고통스러운 시간을 보냈다. 쿠르트베나이 국립공원 중 쉬운 코스를 골라서 자전거를 타고 놀기도 했는데 호수가에서 수영을 하고 다시 자전거를 타고 돌아오던 도중 나스티아와 로만 이 충돌하는 사고가 있었다. 덕분에 캠프가 끝날 때까지 둘은 팔과 다리 등에 상당히 큰 멍자국을 가지고 있어야 했는데 당시에는 심각한 상황이었지만 꾸 준한 치료덕분에 많이 상황이 호전되고 그 둘은 예쁜 상처가 아니냐며 장난 치기도 했다. 하지만 그 사건 뒤 자전거를 탄 일은 없었다. 비가 오거나 돌아다니기가 피곤할 때면 우리는 모여앉아서 각자 가져온 여러 가지 게임을 즐기기도 하였다. 재운이형은 특히 나스티아와 잘 어울렸는데 나스티아에게 베스킨라벤스31 이라는 술자리 게임을 알려주어서 서로 캠프 가 끝나갈 때까지 경쟁구도로 열심히 게임을 했었다. 흔히 한국 학생들이 어 디 놀러가거나 할 때 모여서 하는 마피아 라는 게임을 다른 캠프원들도 각자 의 나라방식으로 알고 있다는 것을 알고 정말 놀랐는데 기본적인 룰이 아주 비슷해서 서로 즐겁게 게임을 하면서 어울릴 수 있었다. 나중에는 캠프리더 격인 엘피다로부터 여러 가지 게임을 받아서 밤 늦게까지 게임을 하기도 했 다. 우리의 일은 기본적으로 주중에만 이루어졌기 때문에 주말에는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캠프원들과 관리자인 유르기타가 상의를 해서 어디를 갈지 대화를 했고 리투아니아의 대표적 휴양지인 팔랑가 로 결정이 되었다. 아침 일찍 버스를 대여해서 출발하고 사람들이 붐비는 해변가에서 즐거운 시 간을 보내고 녹초가 되어서 다시 돌아왔었는데 대표적 관광지다보니 사람들 도 너무 많고 무엇보다 음식가격이 너무 비싸서 캠프원들 모두 불평했었다. 떠나는 날 전날에는 샤울레이 근처에 있는 십자가의 언덕 을 같이 관광하기 도 했었다. 어느 날 밤에는 댄스파티가 열리기도 했었는데 이상하게 그날따라 몸이 피곤 해서 먼저 잠을 청했는데 다음날 아침에 캠프원들이 보냈던 광란의 밤을 사 진으로 확인하니 일찍 자길 잘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7.나스티아의 생일 러시아계 에스토니아인인 나스티아가 18번째 생일을 워크캠프 기간에 맞게 되었다. 사전에 이 정보를 알고 있던 우리는 조그마한 생일파티를 하기로 결 정했다. 때 마침 쿠르트베나이 마을에서 음악회가 열렸고 우리는 음악회가

37 37 열리는 사이 샤울레이로 나스티아의 생일파티 준비물을 사러 떠나기로 했 다. 재운이형과 나, 그리고 캠프리더격인 엘피다가 같이 샤울레이로 가서 케익, 풍선, 조그마한 선물 등을 사서 돌아왔고 나름대로 안들키려고 열 심히 준비하였지만 나스티아가 케익이 들어있는 냉장고를 열어버리는 바 람에 모든 게 다 물거품이 되어버렸다. 하지만 나름대로 그것도 좋은 추 억이었던 것 같다. 우리들이 어설프게나마 준비했던 조촐한 생일파티가 나스티아 본인은 티를 내진 않았지만 꽤 많은 감동을 받은 것 같았으니 절반의 성공이라고 치자 식사 및 먹을 것 해결 식사는 철저하게 우리의 자충으로 해결되었다. 유르기타가 식사당번 표를 만들어 주었는데 예상과는 다르게 전혀 다른 국가 친구들을 같은 날에 당 번으로 배정해 놓았다. 오히려 같은 나라 출신끼리 당번을 묶어놓아야 좀 더 제대로 된 음식이 나올 수 있을텐데... 유르기타는 오히려 더 흥미 로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 싶어서 이런 식으로 배정했다고 말했다. 우리의 첫 식사는 바르셀로나 출신 제라드와 프랑스 출신 로만의 합작인 버터밥과 스파게티였다. 양조절이 잘못되었는지 스파게티는 아무런 맛이 나지 않았다. 다들 이것말고는 차선책이 없었기 때문에 아무런 표정없이 맛있게? 먹었지만 지금은 자신있게 말할 수 있을듯하다. 진짜 맛이 없 었다. 내가 당번이었을 첫날은 점심에는 같은 파트너인 스위스 출신 이자벨의 전통 튀김요리였다. 하지만 튀김요리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서 예상 시 간을 훨씬 넘어서 겨우 완성이 되었고 요리를 마치고 둘러본 주방은 정말 최악의 상태였다. 요리를 준비하는 것도 힘들었지만 기름이 범벅이된 주 방을 닦는 것이 더 힘들었다. 저녁에는 자신있게 비빔밥을 선보였는데 제한된 재료로 인해서 비빔밥에 많은 재료가 들어가지 못했고, 외국인 친구들이 매운맛을 굉장히 힘들어 했기 때문에 고추장도 소량이 첨가되었다. 원래 비빔밥은 고추장맛이라고 생각했지만 그래도 친구들이 맛있게 먹어줘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두 번째 당번일 때는 주먹밥을 한 뒤 계란옷을 덮혔다. 외국인 친구들의 입맛을 고려해서 스크렘블에그와 함께 케첩까지 첨가해주니 생각보다 반 응이 좋았다. 요리를 해보니 생각보다 재미도 있고 또 다양한 시도도 해 보고 싶어서 가지고 간 다시다를 이용해서 감자 양파 계란국을 끓여보기 도 하고 재운이형이 가져온 불고기 소스를 소세지와 볶아서 불고기맛 소 세지를 선보이기도 하고 다양한 음식들을 만들었는데 생각보다 친구들이 많이 좋아해주었고 나중에 헤어질 때 서로에게 쓴 롤링페이퍼 비슷한 쪽

38 지에서 진정한 남자 요리사 라는 글귀를 많이 찾을 수 있었다. 특히 나스티 아는 레시피를 넘기라며 지금까지도 연락이 오고 있다. 내가 완성된 조미료 를 사용한 것을 알면 화를 낼까 조심스럽지만 인터넷 등을 찾아서 제대로 된 레시피를 번역해서 넘겨야겠다. 그밖에 간식거리는 마을에 있는 조그마한 슈퍼마켓 두 곳을 번갈아 가며 이 용했다. 그곳에서 맥주를 사기도하고 여자아이들 같은 경우 아이스크림과 쵸 콜릿을 주로 구입했다. 아무것도 없는 시골마을에서 슈퍼마켓에 가는 그 기 분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이고 우리의 보물창고나 다름없었다. 물론 유 료였지만... 9.카탈로니아 출신 제라드 처음 바르셀로나에서 온 제라드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을 카탈로니아에서 왔 다고 소개했다. 캠프원들은 전부 어리둥절하면서 카탈로니아가 어디 있는 나 라인지에 대해서 생각하기 시작했고 곳 바르셀로나는 스페인의 유명한 도시 라는 결론을 냈다. 처음 안 사실이지만 스페인은 지금 지역갈등이 굉장히 심 한 상태이고 바르셀로나를 중심으로 한 해안 인근 지역 영토들이 카탈로니아 라고 불리우고 있다는 것이다. 이 카탈로니아 지역 사람들은 자신들이 엄연 히 스페인과 구분되어져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스페인어와는 살짝 다른 언어를 사용하고 있고 문화도 다르고 많은 것들이 스페인과는 차이가 있었지 만 카탈로니아를 아는 사람은 많지도 않고 어쨌든 대외적으로는 스페인의 일 부일 뿐이었다. 제라드는 자신이 카탈로니아 출신인 것에 대해서 자부심을 느끼고 있었다. 가끔 캠프원들이 제라드를 골려줄 때 스페인이라고 부를 때 면 불같이 화를 내면서 자신은 카탈로니안 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제라드는 특이하게 한국의 태권도 유단자였다. 어렸을 때부터 태권도를 배워 서 지금은 검정띠이고 태극 1장, 태극2장, 바깥다리, 안다리, 차렷, 경례 와 같은 한국어를 구사할 수도 있었다. 제라드가 태권도를 알고 상대적으로 한 국을 잘 알았기 때문에 재운이형과 나에게 거부감없이 접근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이런 제라드와 재운이형이 가져온 세계지도를 보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다가 대화는 북한과 남한으로 흘러가게 되었다. 난 내 가 알고 있는 데로 북한과 남한의 관계, 6.25 전쟁을 비롯해 미국과 일본 그 리고 중국 등 열강과 우리 한국의 현재 관계 정치적 문제 등을 어설픈 영어로 열심히 사전을 찾아가며 설명했다. 설명을 다 들은 제라드는 굉장히 흥미로 워 했고 유럽국가 어디에서도 이러한 것들은 가르쳐 주지 않는다며 안타까워 했다. 그는 단순히 한국과 북한 그리고 일본은 사이가 안 좋은데 왜 안 좋은 지 그동안 몰랐었는데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되었다고 말했다. 내가 카탈로니 아를 몰랐고 제라드가 한국역사를 몰랐던 것처럼 서로를 확실히 이해하려면 세계적으로 여러 국가의 역사에 대해서 기본적으로는 알고 있어야 한다는 깨 달음을 얻은 순간이었다.

39 사마고나 사건 캠핑장 관리인 달래의 초대를 받아서 달래와 그 남편, 그리고 그의 친구 와 술을 같이 마시게 되었다. 달래의 남편은 우리에게 리투아니아 전통주 를 권했는데 후에 알고 보니 사마고나 라는 러시아의 전통술로 기본 40도 는 훌쩍 넘어가는 아주 독한 술이었다. 권하는 것을 거절하기 그래서 한 잔씩 마셨는데 여자아이들이 상대적으로 잘 피해갔던 반면 나와 제라드는 붙잡혀서 계속 마셔야 했다. 여덟잔 정도를 마시고 도망가다시피 벗어나 서 잠시 숨을 돌리고 다시 돌아왔는데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서 다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중 술을 덜 마신 나스티아와 로만, 그리고 재 운이형은 잠을 자러 텐트에 무사히 들어갔는데 문제는 과도하게 마신 에 밀리와 이자벨이 토하고 정신을 못 차리고 있었다. 토하는 이자벨과 에밀 리의 등을 열심히 두드려주고 챙겨서 텐트로 보냈는데 여자 텐트에서 나 스티아와 로만이 언제 토할지 모르는 이자벨과 어떻게 잠을 자냐며 제라 드와 나에게 항의했고 남자텐트에서 재우던지 아니면 부엌에서 재우라며 이자벨을 그녀의 침낭과 함께 밖으로 내동댕이쳤다. 순간적으로 화가 너 무 나서 친구한테 어떻게 이럴 수 있냐며 나스티아 로만과 말싸움을 하다 가 이자벨 본인이 남에게 피해가 되기 싫어하는 거 같아서 결국 부엌 구 석에서 자리를 마련해서 잠을 자게 했다. 한국에서는 술취한 친구가 있으 면 잘 챙겨주고 했었는데 서양 문화는 살짝 개인주의적 성향이 있어서 이 런 것에 있어서는 많이 다르구나 싶었다. 결국 무슨 일이 있을지 몰라 이 자벨이 자는 부엌 옆 구석에 나도 침낭을 가지고 와서 같이 잠을 잤는데 다음날 모기로 인해 얼굴이 엉망진창이 된 이자벨을 보고 절대 술 마시지 말라고 한마디 해주었다.

40 다음날 로만과 나스티아가 좀 심했다고 생각했는지 전날밤일에 대해서 사과 를 해왔다. 나는 별것 아니라며 괜찮다고 답했다. 이 사건 이후로 캠프원들을 나를 아빠 또는 삼촌 으로 부르기 시작했다. 독한 술을 많이 마셔놓고도 멀 쩡히 살아서 캠프원들 뒷정리를 다했다 는 사실에 대해서 크게 감동을 받은 듯 했다. 사실 술이 쎈 게 도움이 된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11.떠나는 날 및 마무리 시간은 정말 빠르게 흘러 떠나는 날이 되었다. 서로 유난히 말이 없어졌고 각 자의 짐을 싸는데 집중했다. 재운이형은 자신이 가져온 선물과 엽서를 써주 었는데 그것을 보고 중간에 선물을 미리 줘버린 것을 후회했다. 캠프 중간 즈 음에 재운이형이 덥다고 부채를 캠프원들에게 나누어 주는 것을 보고 따라서 내가 가져온 황금으로된 한국전통문양 책갈피를 나누어줬었는데 재운이형이 마지막 선물도 따로 준비해놓았는지는 예상못했다. 지금와서 생각해보니 재 운이형한테 살짝 당했다는 우스운 느낌도 든다. 재운이형 혼자 너무 멋있었 다. 앞으로 워크캠프를 가실 분들이 있다면 선물은 꼭 마지막 날에 주는 걸 로. 캠프원 저마다 자신의 수첩에다가 각자 자신의 국가 언어로 글을 남겨달라고 했고 서로의 종이 혹은 수첩에다 편지를 쓰면서 버스 시간을 기다렸다. 특이 하게 제라드는 자신의 여행일정에 맞추어서 캠프를 떠나지 않고 한 5일가량 일하면서 머물기로 했다. 따라서 우리가 떠날 때 버스 정류장까지 마중 나왔 는데 우리가 버스 타는 그 순간까지도 사진으로 남기려고 노력했다. 샤울레이 버스터미널에 도착해서 워크캠프중에 실질적인 리더로서 정말 열심 히 했던 나스티아가 먼저 떠나게 되었다 덕담을 하고 서로 꼭 연락하기를 당 부하고 버스시간이 가까워져서 서둘러 그녀를 보냈다. 재운이형, 로만, 에밀리, 이자벨,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명은 다음 행선지까 지 리투아니아의 두 번째 교통의 요지인 카우나스까지 동행하게 되었다. 따 라서 카우나스 버스터미널에서 서로 작별인사를 하고 각자의 목적지로 향했 다. 어떻게 보면 짧기도 하고 길기도 한 2주간의 워크캠프 기간이었다. 막연하게 외국을 나가고 싶었던 마음이 커서 신청한 워크캠프였지만 돌아올 때는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꽉찬 마음을 안고 귀국했다. 7명이라는 적은 인원이여서 그 런지 모르겠지만 어느 캠프보다도 더 결속력이 좋았고 서로 대화한 시간이 많았다고 자부한다. 2주동안 지내는 과정에서 생활방식도 달라서 불편한 점 도 많았지만 조금씩 배려를 했고, 언어적인 측면에서도 처음에는 각자 나라 의 언어로 이야기 하다가 점점 영어를 쓰려고 노력해서 나중에는 서로 영어 로 농담까지 하면서 어울릴 정도였다. 한 가지 아쉬웠던 점이 있다면 스스로

41 41 가 영어를 못한다는 생각에 초반에 말을 잘 안하려고 했었는데 조금만 더 일찍 적극적으로 어울리려고 노력했다면 좀더 빨리 캠프원들과 친해져서 더 재미있는 시간을 많이 가졌을 텐데 그렇지 못했다는 것이다. 40 언어도 국가도 인종도 달랐지만 그러한 차이를 넘어서 우리는 2주동안 하 나였다고 생각한다. 서로 고민거리를 공유하고, 다쳤을 때 서로 치료해주 고, 때론 기분이 상하기도 했지만 같이 즐기고 웃고...내게는 분명 잊 을 수 없는 소중한 추억이고 앞으로의 진로 설정에 있어서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고 생각한다. 그들과 함께 하면서 인종과 국가를 뛰어넘어 서로 하나가 될 수 있다는 것을 확인했고 앞을 우리가 세계화시대를 살아가면서 추구해야할 목표가 아닐까 라고 생각한다. 그 첫걸음으로 나는 언어를 배우고 싶다. 나스티 아에게 약속했듯이 나는 언어 마스터가 되기 위해서 영어를 시작으로 최 대 3개의 언어를 더 배울 생각이다. 열심히 생활하다보면 언젠가 다시 그 들과 만날 수 있는 기회가 찾아올 것이라고 믿는다. 마지막으로 이렇게 훌륭한 기회를 제공해 주신 홍익대학교 관계자 분들과 한국 유네스코 관계자분들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올린다.

42 5. 벨기에 " 나의 워크캠프 기행기 " 벨기에_권순미 JAVVA01 한국외국어대학교 워크캠프 합격 날! 이루 말할 수 없이 들떴다. 내가 워크캠프에 간다 니. 기쁘기도 했지만 마음 한편으로는 불안하기도 했다. 나는 국내 여 행조차 단 한번도 혼자서 해 본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런 내 가 비행기를 타고 14시간을 날아서 저 대륙 저편 유럽을 혼자 다녀와 야 한다니. 내가 원해서, 참가하기를 간절히 원했던 캠프였지만, 한편 으로는 걱정이 되기도 했다. 하지만, 합격의 설렘을 만끽할 여유도 없이, 바쁘게 캠프를 준비해야 했다. 여권 발급받고, 백신도 맞고, 사이버 외교단에 신청해서 친구들 에게 줄 한국 홍보자료와 엽서도 받아놓고, 친구들과 캠프에서 만나게 될 아이들에게 줄 공기, 윷놀이도 사고 한국 과자도 샀다. 시간은 너 무도 빨리 지나갔고, 어느 새 출국 일이 성큼 다가와 있었다. 출국 날, 공항까지 바래다주신 부모님께 인사를 드리고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만감이 교차했다. 앞으로 내가 잘해낼 수 있을까? 기대와 설 렘으로 가득했던 준비기간이 지나고, 캠프 시작을 목전에 둔 나에게 그제서야 두려움과 걱정이 엄습했다. 내가 워크캠프를 가고 싶었던 이유는 크게 두 가지였다. 하나는 내 자신에게 변화 를 주고 싶어서였고, 또 하나는 내가 참가하려는 워크

43 43 캠프가 내 국제 기구에 대한 관심사를 충족시켰기 때문이다. 나는 완곡히 표현하자면, 도전에 있어 신중한 사람이다. 여러 번 생각하 고, 가능성과 변수에 대해 사려 깊은 판단을 하는 데 많은 부분을 할애하 기 때문이다. 이런 신중함은 자연스럽게 나를 변화와 도전에 거리를 두게 만들었다. 이에 워크캠프는 내 스스로 갈증을 느꼈던 이 부분에 있어 도 움이 될 것이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42 또한, 나는 예기치 않은 변화에 대한 적응력과 순발력이 낮은 편이다. 스 스로 계획한 일이 마음 먹은 대로 흘러가지 않는 데에서 쉽게 스트레스를 받기 때문이다. 때문에 워크캠프에서 경험할 수 있을 것이라 생각했던 새 로운 환경과 전혀 다른 배경을 가진 사람들과의 생활은 이러한 부분에 적 응력을 높이는 데에 도움이 되리라 생각했다. 내가 하는 캠프는 적십자사에서 운영하는 망명자 보호센터에서 하는 일 이었다. 대체로 다른 캠프들이 한 가지 일을 한다면, 내가 하는 캠프는 두 가지 일을 해야 했다. 하나는 망명자 가정 아이들의 놀이상대가 되어주는 일이었고, 또 다른 하나는 센터의 규율에 동영상을 찍는 일이었다. 그곳에는 다양한 국적의 망명자들이 있었다. 아프가니스탄, 네팔, 방글라 데시아, 콩고, 토고. 약 120여명의 주민들이 있는데 얼마나 다양한 국적의 사람들이 있겠는가. 센터의 직원들은 주로 프랑스어나 영어를 썼 다. 따라서 주민들이 이 외의 언어를 쓴다면 서로 의사소통이 힘들었다. 언어가 통하지 않기 때문에 센터가 어떻게 운영되는지, 센터의 규율은 어떤 것인지 설명해 주기 힘들었다. 따라서, 센터에서는 언어 를 모르더 라도 비디오를 보면 센터의 규율을 이해할 수 있도록 비디오를 제작하기 로 했다. 우리가 해야 하는 두번째 일이 바로 그 비디오를 만드는 것이었 다. 캠프 첫 날에는 센터를 둘러 보고 서로 인사하고 앞으로 어떻게 지내야할 지 이야기를 하다 보니 날이 훌쩍 가버렸다. 우리는 오전에는 비디오를 제작하는 일을 하기로 하고, 오후에는 아이들과 시간을 보내기로 했다. 일은 생각했던 거 보다 까다로웠다. 비디오를 제작하기 위해, 우리는 센 터의 규율을 숙지해야만 했다. 하지만, 똑같이 성문으로 금지된 행위라고 할지라도, 어떤 행위는 그대로 금지되는가 하면 또 어떤 행위는 그냥 관 습적으로 용인되기도 했다. 우리는 이에 대해 정확한 기준을 정해야 했다. 또, 언어를 알아듣지 못해 도 비디오를 보고 내용을 이해할 수 하기 위해서, 내용을 표현하는 방식 이 최대한 쉽고 단순하며 오해의 소지가 없도록 해야 했다. 우리는 장면 마다 어떻게 표현하고 어떻게 촬영하는 게 좋을지 고민했다.

44 우리는 비디오 촬영을 할 때, 주민들이 연기해주길 바랐지만 어떤 주민들은 비디오에 나오는 걸 꺼려하기도 했고, 또 어떤 이들은 흔쾌히 비디오 촬영을 도와주겠다고 해놓고 나중에 마음을 바꿔서 거절하기도 했다. 그럴 경우, 우 리는 또 다른 이들에게 비디오 촬영을 부탁해야 했다. 아이들과의 놀아주는 일도 쉬운 것만은 아니었다. 캠프에 가기 전에는 아이 들과 노는 것이 막연히 재미있고, 즐거울 거라고 생각했다. 30여명의 아이들 이 나이대가 다양하므로 우리는 아이들과 다 같이 놀기 위해서 최대한 쉽고, 단순한 게임을 준비해야 했다. 또, 벨기에의 날씨가 변덕스럽기 때문에 날씨 가 맑을 때 할 활동과 비가 올 때 할 활동을 다 준비해야 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데에는 언어의 장벽도 있었다. 센터가 벨기에의 프랑스어 권 지역에 있었기 때문에 센터의 주민들 중 절 반 이상이 프랑스어를 했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프랑스어를 사용했다. 따라서 아이들과 친해지고 싶고, 같이 놀고 싶어도 언어가 잘 통하지 않아 힘든 적도 여러 번 있었다. 특히나 아이들끼리 싸웠을 때, 이를 말리고 상황을 정리해야 하는데, 프랑스어가 서 툰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언어의 장벽에도 불구하고, 마음을 나눌 기회가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캠프 참가자 중에 당찬 스페인 소녀가 한 명 있었다. 이름은 잇치(Itzi) 고 나 보다 두 살이 많았다. 잇치와 나는 같은 방을 썼었는데 하루는 수다를 떨다가 이야 기의 주제가 캠프에 왜 참가하게 되었는가 로 흘러 들어왔다. 이전에 워크캠 프를 두 번 참여해 본 경험이 잇치는 자기가 캠프에 참가하고 있을 때 행복함 을 느끼고 즐겁다고 했다. 그녀는 단순히 자신이 좋아하는 일을 그저 선택하 기 때문에 캠프에 또 참여하게 되었다고 했다. 당당하게 말하는 그녀의 태도에 놀라기도 했지만, 말의 내용도 놀라웠다. 단

45 45 순히 내가 좋아한다는 일을 한다니. 사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한다. 좋아하는 일을 하라고. 나는 잇치의 말을 듣다가 깨달았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일이 무엇인지 알고, 그것을 하려고 노력 하기보다는 내가 해 야 할 일 이 무엇인지 생각하고 그것을 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는 것 을.사회가 나한테 요구하는 것들을 해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살아왔다는 것을 말이다. 잇치를 보면서 그녀가 부럽기도 하고 존경스럽기도 했다. 44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던 사람은 또 있다. 망명자 거주민 중에서 남아프 리카에서 온 케바 라는 남자가 있었다. 30대 중후반으로 보이는 케바는 망명 오기 전에 요리사였다고 했다. 우리는 아이들을 위해 제빵을 하는 액티비티를 계획한 적이 있었고, 우리는 그를 초청했다. 그는 아이들을 위해 하루 선생님이 되어서 빵을 만드는 법을 아이들에게 가르쳐주었다. 그 후, 캠프의 마지막 날 그와 몇몇 주민들은 우리를 자신의 거처로 초대 했다. 우리가 떠나기 전에 아프리카 음식을 대접하고 싶었다는 이유에서 였다. 우리는 그 덕분에 여러 아프리카 음식을 맛 볼 수 있었다. 쌀과 닭 고기를 요리한 음식, 식혜와 비슷하게 생겼으나 새콤한 맛이 강한 음식 등 예전에는 한 번도 보지 못한 음식을 맛있게 먹었다. 식사를 마치고 나 서 케바가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다. 사실, 우리가 처음 센터에 도착했을 때 자신을 비롯한 몇몇 주민들은 그 다지 우리에게 관심이 없었다고 한다. 그저 며칠 있다 갈 사람들이라고 생각했댄다. 그러나 우리가 아이들과 노는 모습을 보면서 점점 생각이 바 뀌었다고 한다. 아이들을 위해 놀이를 준비하고, 아이들과 어울리는 모습 을 보면서 왠지 모르게 자신은 감동을 받았다고 했다. 먼 곳에서 벨기에 의 이 작은 마을까지 와서 이렇게 있어줘서 고맙다고 했다. 그리고 케바 는 자신의 삶에 대한 이야기를 덧붙여 나갔다. 케바는 망명을 한 뒤, 여태까지 쌓아 올려 왔던 모든 것이 한 순간에 무너 지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다른 나라에서 새로운 삶을 다시 시작해야 하는 그는 여태까지 해왔던 것들은 모두 사라지고 영점 에 서있는 자기 자신을 발견했다고 했다. 자신이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다시 일어서야 한다는 것을 느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가 말하길, 자신은 전혀 스트레 스 받지 않으며, 다시 잘 살아갈 수 있을 거란 희망을 갖고 있다고 했다. 그는 우리 모두를 응원한다고 했다. 앞으로, 하고 싶은 일이 있거나 해야 겠다는 일이 있으면 자신을 믿고 해나가라고 했다. 아무리 힘든 순간에도 좌절하지 말고 그 순간을 즐기라고. 언제나 희망을 잃지 말고, 스트레스 받지 말고, 자기 자신을 믿고 나아가라고 했다. 케바의 말을 듣고 있자니, 마음 한 쪽 구석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꼈다. 어 쩌면 케바가 나에게 들려준 말은 스스로 느꼈던 부족함에서 워크캠프를 채우고자 했던 내가 가장 듣고 싶어했던 위로의 한마디였을 지 모른다는

46 생각이 들었다.. 워크캠프에 참가하기 이전까지, 나는 하고 있는 일이 잘 풀 리지 않거나 예상했던 대로 일이 잘 흘러가지 않으면 스트레스를 받았다. 예 민한 성격이라, 긴장을 하거나 스트레스를 받으면 몸 어느 한 구석이 쉽게 아 팠고 자주 피곤했다. 나는 나 자신이 자신감이 부족한 성격이라고 생각했고, 언제나 내 자신에게 자신감을 갖자 고 되뇌어 왔다. 앞으로 내가 어떤 일을 해야 할지, 어떤 진로를 선택해야 할지, 무엇을 해야 할지 아무런 확신도 없 는 상태였다. 워크캠프에 참여하고자 했던 이유와도 관련된 것이었다. 나는 이런 내 자신에게 변화 를 주고 싶었다. 더 넓은 세상에서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많은 것을 경험하고 배우다 보면, 내 자신이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알 수 있을 것만 같았고 내 성격에도 변화가 있지 않을까하고 막연하게 기대 하고 있었다. 케바의 말은 문득 내가 어디에 와 있는 지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만들었다. 센터에 있는 다른 사람들은, 그리고 케바는 자신의 나라를 떠나 망명자 보호 센터에 와 있는 상태였다. 타국의 영주권을 확보하기 위해 얼마가 걸릴지 모 르는 시간을 센터에서 보내야 한다. 영주권을 신청하는 서류를 보내고, 정부 에게서 회신을 받고, 면접을 보고, 거절 받으면 다른 나라에 다시 서류를 내 고. 끝이 보이지 않는 싸움과 같았다. 센터에 앞으로 얼마나 더 머물러 야 할지도 알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데도 그가 우리를 격려해준 이 아이러 니한 상황에 묘한 기시감을 느꼈다. 곧, 좋은 소식이 있을 거라고, 빨리 영주 권을 얻길 바란다고 응원해줘야 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던가? 하는 생각이 머 리 속을 스쳤다. 그런데도 그는 우리를 응원해줬다. 농담을 잘 던지고 쾌활하 게 웃던 케바는 전혀 자신의 처지를 비관하지 않고 우리에게 열심히 살라고 따듯한 말을 남겨주었다. 케바의 말은 감동적이었지만, 프랑스어가 서툴렀던 나는 내가 그의 말을 듣고 느꼈던 감정을 잘 얘기해주지 못했다. 만약 내가 다시 케바를 만날 수 있다면, 그 때는 그런 멋진 말을 해줘서 정말 고마웠다 고 전하고 싶다. 캠프를 떠나는 날이 밝아왔다. 나와 3명의 친구가 같이 브뤽셀로 가는 기차 에 탔다. 가장 먼저 기차에서 내린 건, 다른 기차로 갈아타야 하는 로리였다. 18살의 프랑스인인 로리는 호기심 많고 장난기가 많은 아이였다. 로리는 내 려서 그녀를 배웅하는 나에게 고마워, 순미. 너 덕분에 한국에 대해 많이 알게 됐어. 라고 말했다. 나는 그녀의 말을 듣고 나서 뭐라고 대답했던 거 같은데, 사실 뭐라고 했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기억나는 건, 그렇게 로리 가 가고 나서 나는 결국 눈물을 터뜨렸다는 사실이다. 그 때서야 진짜 우리가 헤어진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에 산다면, 언젠가 만날 수 있겠지만 너무 멀 리 떨어져 사는 우리가 앞으로 또 언제 만날 수 있을까, 생각하니 눈물이 났 다. 브뤽셀에서 내린 독일 소녀 알린과 나는 파리로 가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었 다. 역 안에만 있기는 답답해서 역 밖에 앉아 공기를 쐬고 있었다. 그녀와 나

47 47 는 캠프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었다. 알린은 캠프에서 만난 이란 소년이 자꾸 생각난다고 했다. 17살의 나이에 혼자 이란에서 벨기에까지 온 소 년. 그녀의 어머니는 이란에 있지만 지금 편찮으셔서 소년에게 계속 이란 으로 돌아오라고 연락을 한다고 했다. 그 소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 겠다고 했다. 프랑스어도 영어도 할 줄 모르던 그 소년. 센터의 직원들 중 에 영어나 프랑스어를 하는 사람들은 많았지만, 그 이외의 언어를 할 줄 아는 직원은 거의 없었다. 그 소년은 이란어를 할 줄 아는 친구를 통해서 만 다른 사람들과 얘기할 수 있었다. 알린은 홀로 언어도 통하지 않는 낯 선 나라에 온 그 소년에게 제대로 작별인사를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린 다고 했다. 나는 나를 찾던 아이들이 자꾸 생각났다. 한 명 한 명, 아이들 의 얼굴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갔다. 우리 없이 이제 방학을 보내야 할 아이들. 시골 마을에서 할 일이 없어서 심심해 하던 아이들. 내가 마당을 가로질러 지나가면 창문에서 내려다보고 있다가 단숨에 3층을 뛰어내려 와 이름을 부르며 품에 안기던 아이. 형제가 있냐고 물어보자 언니가 한 명 있었는데 태어난지 3일만에 전쟁 때문에 죽었다고 아무렇지 않게 이 야기 하던 아이. 우리가 떠나기 전날, 우리에게 벌써부터 너희가 보고 싶 어 고 말해주던 아이 46 알린과 나는 그렇게 역 앞에 앉아 이야기를 나누다가 결국 울고 말았다. 워크캠프의 3주가 언제나 신나고 즐겁고 새롭게 느껴지던 건 아니었다. 놀아달라는 아이들의 재촉이 힘겨워서 간절히 쉬고 싶었던 적도 있고, 언 어가 잘 통하지 않아 고생했던 적도 있고, 시골 마을에 있는 것이 지루하 게 느껴졌던 적도 있었다. 워크캠프 기간 동안, 누군가는 워크캠프에서

48 많은 것을 배우고 얻어간다고 하던데, 나는 무엇을 배우고 얻어가게 될까? 하고 궁금해했었다. 앉아서 알린과 이야기를 나누다가 그 답을 찾게 된 것만 같았다. 열심히 일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전하던 센터 직원들, 호기심 있게 다가오며 우리와 친해지고 싶어 하던 망명자 주민들, 순수하고 예쁜 아이들, 어느 한 구석 모난 사람 없이 3주 동안 잘 지낸 우리 캠프 친구들, 그들과 함 께했던 즐겁고 재미있던 순간과 내가 힘들고 지루해했던 그 순간까지도 모두 가 경험이고 추억이었던 것이다. 이상한 일이었다. 캠프를 시작하기 전, 내가 기대했던 것 보다 더 많은 것을 깨닫고, 더 많은 것을 얻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는데, 나는 기쁘기는커녕 눈 물이 차 올랐다. 캠프를 다녀오고 나서 나의 일상에 크게 달라진 점은 없다. 짧은 방학을 보 내고, 개강을 하고 다시 학교로 돌아갔으며, 진로에 대해서는 여전히 고민 중 이다. 하지만 그 이면에 내적으로 크게 변화한 내 자신을 느낀다. 우선 새로 운 일을 시작하는 데 있어 긍정적이고 즐거운 마음이 들기 때문이다. 또한 지 금 이 순간 함께하는 사람과의 인연이 매우 소중한 것임을 느낀다. 그리고 이렇게, 워크캠프가 나에게 남긴 족적은 앞으로의 내 삶에 있어 긍정적인 에 너지가 될 것임을 확신하다.

49 49 처음 경험한 해외봉사도 아니었고 나름 다양한 해외 경험이 있다고 자부 하였기 때문에 워크캠프를 가기 전 저는 자신감이 충만하였습니다. 하지 만 그 곳에서 그동안 저는 우물안의 개구리였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 다. 아직도 지구 구석구석에서는 상상치 못한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48 " 우물을 벗어난 개구리가 되다" 벨기에_박현정 JAVVA03 홍익대학교 제가 머물렀던 캠프는 벨기에 우아니 영 뜨에하슈 지역에 있는 레드크로 스(적십자)센터입니다. 이 센터는 불법이민자들이 거주하는 곳으로 센터 에선 레지던스들에게 숙식을 제공할 뿐만 아니라 작지만 용돈도 정기적으 로 주고, 센터 내에서 일을 할 수 있도록 해주며 그 사람들이 페이퍼(비자 나 서류 등)을 받을 수 있도록 노력하고 있습니다. 제가 캠프에 지원하였을 때는 아이들 봉사활동이었지만 막상 그 곳에서는 아이들뿐만 아니라 모든 레지던스들을 위한 활동을 하였습니다. 시골에 위치한 센터기 때문에 딱히 할 일이 없는 무료한 사람들을 위해 캠퍼들이 스스로 프로그램을 짜서 그들과 어울리고 함께 하는 것이 제가 하는 봉사 활동이었습니다. 처음에는 그곳 사람들과 친해지기 위하여 게임이나 미술, 음악같은 실외 활동을 위주로 진행하였습니다. 아이들도 구체적으로 연령대를 나누어 초 등학생 정도의 아이들, 혹은 10대 후반의 아이들에 따라 각기 다른 활동 을 구성하고 진행하였습니다. 캠퍼들은 매일 저녁식사가 끝난 후 모여서 회의를 하며 그 날 하루 프로그램이 원활하게 돌아갔는지 그리고 레지던 스들이 좋아했는지 점검하고 다음날의 프로그램은 어떻게 진행할 지 계획 했습니다. 물론 큰 활동틀은 매주 월요일 크게 일주일 치를 정하였고, 날 씨와 환경에 따라서 각각의 날에 진행을 할 수 있는지에 대한 부분의 매 일 하는 회의의 요소였습니다. 캠퍼들은 회의 때 각자 아는 게임에 대하여 이야기했습니다. 주로 자신이 어린 시절에 친구들과 하는 게임을 말해줬는데 각각 이름은 틀려도 전체 적으로 비슷비슷한 게임들이었습니다. 이 부분도 흥미로웠습니다. 캠퍼들 이 저 빼고는 전부 유러피안 때문에 친구들이 제가 이해 할 수 없는 게임 에 대하여 말하면 어떡해해야하나 생각했었습니다. 하지만 전 세계 꼬맹 이들이 노는 것은 비슷하구나를 알게되었습니다. 저 역시도 어떤 게임에 설명하면 아! 그거 우리나라에서는 게임인데! 하면서 친구들도 제 게임에 대해 반응해줬습니다. 봉사활동은 월요일부터 금요일까지 진행되었습니다. 캠퍼들을 위한 숙소 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센터 내의 텐트에서 생활하고 레지던스들과 같 은 식당을 쓰기 때문에 일정하게 정해진 시간만 봉사활동을 한다고 하기 보다는 거의 하루 종일 그들과 함께 있으려 애썼습니다. 회의 때 프로그 램들은 주로 오후 6시, 저녁식사 이전까지였지만 자발적으로 오늘 저녁은

50 캠프파이어를 하자고도 하고, 다 함께 영화보자고 하며 포스터를 만들어 붙 여 홍보하고 만나는 사람마다 우리가 오늘 저녁에 어떤 것을 할 것이니 와달 라고 말을 하고 다녔습니다. 매주 금요일 밤은 딱 우리 캠퍼들을 위한 시간으로 센터 내에서 주류가 안되 기 때문에 그 날 저녁식사 후에는 늘 가는 펍에 가서 술을 마시고, 파티를 하 며 놀았습니다. 그 펍에서 저희끼리만 놀았다기보다는, 그 지역 주민들이 펍 에서 술을 마시면서 같이 춤을 추고 어울리게되었습니다. 주민들은 아무래도 벨기에 사람들이고, 시골 지역의 특성 상 젊은 사람들 보다는 중장년 층이라 영어를 잘 못하셨습니다. 하지만 필요할 땐 불어를 쓰는 친구들이 통역을 해 주어 대화를 하였고 블루스, 살사 같은 춤도 추며 재밌는 시간을 보냈습니다. 첫 번째 주 주말에는 벨기에 내 다른 레드크로스센터에서 봉사활동을 하고 있는 그룹과 우아니 엉 뜨에하슈 근처 나무르에서 만났습니다. 정해진 규칙 으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우리 캠프 리더가 그 캠프 리더와 개인적인 친분이 있어서 생긴 기회였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센터 상황에 대해서 공유하였고, 특히 저는 그 캠프에 한국 친구가 두명이 있어서 좀 더 생생하게 이야기를 전 해들을 수 있었습니다. 두 번째 주 주말에는 브뤼셀로 가서 일박이일 동안 관광을 하였습니다. 딱히 투어코스가 있었다기 보다는 리더가 브뤼셀에 살기 때문에 리더의 친구들을 만나서 어울리고, 가고 싶었던 곳을 같이 다니면서 맛있는 음식을 먹고 왔습 니다. 개인적으로는 브뤼셀이 처음이라서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마지막 주말은 그 다음 월요일 날 떠나기 때문에 레지던스들과 함께 보내자 는 뜻으로 의견이 모아졌습니다. 우리는 빌리아드 룸에서 작은 클럽을 열어, 디지털자키에 관심이 있는 레지던스 친구가 사운드를 담당하였고 레지던스 들과 춤을 추며 놀았습니다. 마지막 한 주는 우리에게 따뜻했던 그들을 위해 고맙다는 메시지가 담긴 노래를 만들어 그날 사람들 앞에서 공연을 하였습니 다. 처음 시작은 좀 부끄러웠지만, 쉬운 노랫말이라 다들 함께 부르며 좋아해 주어서 재밌었습니다. 다른 캠프처럼 언제까지 무엇을 완성시켜야 된다는 룰이 전혀 없었는데, 첫 주 회의 때 10대 친구들 건물 벽이 횡 하여서 우리 스스로 이 곳에다가 벽화 를 그리는 것을 목표로 잡았었습니다. 저는 디자인 전공을 하였고, 스위스 친 구 하나가 애니매이션 전공이라 둘이 함께 스케치를 하고 친구들에게 도색을 함께하자 부탁하여 마지막 날에는 벽화도 완성시켰습니다. 주중에 항상 센터 안에서만 봉사활동을 한 것은 아닙니다. 야외수영장과 미 니골프, 미니보트 등의 시설이 있는 리조트로 하루 날 잡아서 몇몇 레지던스 들과 다녀온 적도 있었고, 센터 근처의 캠핑장에 가서 바비큐파티를 하고 돌 아온 적도 있습니다. 사람들과 등산도하고 공원에도 다녀왔습니다.

51 51 제가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은 너희들이 와서 너무 기쁘다. 요즘은 하루하 루가 즐겁다. 입니다. 무료한 그들의 삶에 작지만 따뜻하고 즐거운 마음 으로 함께 할 수 있어서, 그리고 저의 마음이 전해졌다는 것을 느낄 수 있 어 보람있었습니다. 50 캠프를 떠나는 날이 가까워 질 수록 그 말은 앞으로 너희들이 없어서 심 심해서 어쩌지. 가 되어 마음이 아팠습니다. 3주가 짧다면 짧은 시간이었 지만 캠퍼인 우리는 우리대로, 그들은 그들대로 많은 커뮤니케이션이 이 루어졌고 정도 들었던 시간이었습니다. 저는 르완다 친구와 했던 대화로 제가 캠프를 통해 성장할 수 있었던 이 야기를 시작하려 합니다. 그 친구는 제 또래의 키도 크고 꿈도 많은 남자 입니다. 고등학교 때는 농구선수를, 대학은 르완다에서 가장 좋은 학교를 갔지만 독재정권 속 강제 군징용으로 그 친구는 꿈을 접고 군대를 가야만 했습니다. 충격적이었던 것은 모든 시민들이 잠재적으로 데모할 가능성 을 가진 반정권 시민들이기 때문에 아이, 노인 할 것 없이 위에서 시키는 데로 무고한 사람들을 총으로 쏴야했다고 고백한 것입니다. 이 친구는 그 곳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것은 나라로부터 도망치는 일 뿐이었단 생각을 하였습니다. 그 후 여러 나라를 떠돌다 벨기에 레드크로스 센터로 오게 되었다 합니다. 제가 캠프생활을 했던 센터에서는 특히나 10대 아프가니스탄 남자 아이 들이 많았는데, 아프가니스탄하면 테러리스트 집단이라는 고정관념 때문 에 처음에는 그 친구들을 멀리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저의 큰 착각과 실수였습니다. 그 친구들 역시 제가 10대였을 때처럼 꿈이 있고 가고 싶 은 학교가 있고 하고 싶은 일들이 많은 아이들이었습니다. 하루하루 그 곳 레지던스들과 가까워 질 수록 저는 제가 무지했던 부분과 세상이 얼마나 큰 지 깨달아나갔습니다. 불법이민자, 망명자 하면은 자국에서 못 사는 사람들이 도망쳐 나온 것이 라 생각하겠지만, 그 속에는 멀쩡히 은행을 다니던 아빠가 자신의 가족을 데리고 도망친 사연도 있었고 여러 나라에서 일을 하다가 다른 일을 찾지 못하여서 온 사람 등 제각각 자신의 사연이 있었습니다. 레지던스들이 페이퍼가 없기 때문에 센터의 오피스를 들어가면 사람들 의 증명사진과 그 옆에는 센터에서의 고유 넘버, 이름, 그 사람들의 출신 과 방의 호수가 적혀져있습니다. 아이러니하게도 교도소같은 느낌이었습 니다. 정해진 시간 외에는 밥을 먹을 수 없으며, 한달에 열흘 이상 외박이 있을 시 센터를 나가야되는 규칙. 그리고 일정 기간에 따라 받을 수 있는 생활용품들... 한국에 돌아와서도 센터의 레지던스들과 채팅을 할 때 다 들 프리즌 을 벗어나고 싶다 말합니다. 이 단어가 그들에게 이중적인 의

52 미를 띄고 있다 생각합니다. 정해진 규칙인 속박 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그리고 페이퍼 를 갖고 자유롭게 살고 싶은 마음. 새삼스레 하고 싶은 일 마 음데로, 항상 든든하게 지원해주시는 부모님의 소중함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 다. 개인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레지던스들이 똑똑한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왜냐 하면 최악의 상황이라면 그들은 타국에서 동냥을 하며 길에서 나앉을 수도 있을 상황이지만 센터의 유용함을 알고 일찍이 컨택을 하여 영리하게 대처하 였다 생각합니다. 그래서 대부분의 레지던스들은 대학교에 입학하기도 하고 직업을 구해서 페이퍼를 받는 등 평균적으로 3,4개월 후면 스스로 센터를 나 갑니다. 아프리카계 친구인 마노는 유럽정치외교학과가 있는 벨기에의 대학교에 가고 싶어 제가 캠프에 있는 동안 같이 에세이와 기타 서류들을 준비하였습니다. 한국에 와서 들은 가장 기쁜 소식은 그 친구가 대학교 입학에 합격하여 곧 합 법적인 사람이 되고 센터를 떠난다는 것입니다. 저는 센터에서 있었을 캠프 때 뿐만 아니라 한국에 돌아온 지금까지도 캠프 생활에 대한 보람을 느끼고 있습니다. 지금도 소셜 네트워크를 통해 그들의 일상과 비자나 페이퍼가 생긴 좋은 뉴스를 듣게 됩니다. 이에 양면적인 사실은 많은 사람들이 센터에 들어오고 싶어 하며, 센터 측에 서도 역시 거주자들을 위해 애쓰고 있지만 정부로 부터는 비공식적인 곳이기 때문에 지원을 받지 못하는 실상인 것입니다. 캠프 첫 날 센터장에게 센터의 시스템 뿐만 아니라 예산 정책부터 향후 레지던스들의 행보 등 궁금한 것을 전부 물어볼 수 있는 시간이 있었습니다. 저 뿐만 아니라 캠퍼 친구들은 궁금 한 것에 대해서 전부 물어봤습니다. 사실 저는 예산안이나 사람들의 포켓머 니가 어디서 나오는 것인가 같은 질문은 하기 어려운 것이 아닌가 생각했었 는데 다른 캠퍼 친구들이 거리낌 없이 물어보았고 센터장도 숨김 없이 그 곳 의 상황을 이야기해주었습니다. 봉사활동을 시작하기도 전에 미팅을 하고 나 니 진이 빠졌습니다. 충족치 않은 상황으로 안타까운 마음에 마음이 무거웠 지만 이내 제가 할 수 있는 것은 이 기간동안 그들에게 최선을 다하여 사람대 사람으로 가까워지자라는 생각이었습니다. 캠프를 다 마치고 저는 제가 할 수 있는 한 그들과 가까워졌다 생각합니다. 앞으로 언제 그들을 다시 볼 수 있는 날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어디서든지, 항 상 그들이 잘 될거라 믿고 세상 사람 모두가 걱정없이 일상의 행복을 느낄 수 있는 그 날이 오길 소망합니다.

53 53 6. 스위스 52 " 내 인생에 꿈 같은 기회와 경험은 바로 워크캠프이다! " 스위스_김민우 WS12FR01 고려대학교 해외에 나간다는 것 설렘 그 자체인 것 같다. 나는 어려서부터 운동을 해 서 훈련을 하기 위해 해외에 자주 나가곤 했다. 매년 해외에 나가지만 누 군가의 통제아래에 움직이고 틀에 박힌 생활과 힘든 훈련으로 해외에서의 그 설렘을 느껴 본적이 단 한 번도 없었던 것 같다. 이번 여름에 드디어 나 혼자 가는 해외와 그곳에서 만날 여러 사람들 그 리고 새로운 경험을 할 생각을 하니 가슴이 두근거리고 설렘으로 밤잠을 설친 적이 한 두 번이 아니었다. 그런데 이 캠프를 위해서 어떤 것을 준비 해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고민 끝에 캠프를 잘하기 위해서는 우 선 언어와 캠프 사람들과의 어울림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많은 준비를 하지 못했는데 어느덧 나는 스위스에 도착해 있었고 드디어 캠프 지에서 캠프 사람들과 만나게 되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고 어색했지만 한국에서의 기대감과 설렘이 어색 함과 낯설음을 이기지는 못했다. 스위스 캠프는 청소년 언어캠프로 봉사 자들은 식사준비와 설거지 그리고 스포츠 활동을 함께하는 일을 했다. 처음엔 식사당번 계획표를 세우고 그 계획에 따라서 식사준비를 하고 설 거지는 모두 함께하고 나머지 시간에는 아이들과 함께 스포츠 활동을 하 는 패턴으로 하루 일과를 보냈다.

54 아침은 보통 8시에 했으며 빵과 요플레 그리고 음료 등으로 먹었고, 스위스 는 저녁보다 점심을 더 푸짐하게 먹는 편이라서 점심은 항상 힘든 편이었다. 점심, 저녁 메뉴로는 닭고기나 파스타와 샐러드, 햄버거나 리조또 등으로 특 유의 유럽 음식들이었다. 내 입맛은 조금 까다로운 편이었는데 캠프지에서 2 주 동안 먹었던 음식들은 나에게 너무나 잘 맞았고, 맛있어서 항상 더 먹곤 했다. 스포츠 활동으로는 비치가 캠프지에서 멀지 않아 거의 매일 비치에 가서 수 영을 했고, 축구와 배구, 배드민턴 그리고 번외 활동으로 야구도 함께 하며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야구를 할 때는 내가 야구선수였는지 몰라서 그런지 내가 야구하는 것을 보고 다들 입을 다물지 못했던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다. 이렇게 내가 캠프 사람들과 더 많이 친해질 수 있었던 활동이 바로 스포츠 활동이었다. 캠프에서 나는 캠프리더(스위스 남자 2명)와 체코, 우크라이나, 대만, 이탈리 아, 스위스 여자 7명으로 총 10명(나 포함) 정도와 함께 동고동락했다. 대부 분 나이는 18~25살 까지 있었고, 그 중 내가 나이가 가장 많았다. 숙소는 건 물 안에 있었으며 청소년들과 함께 자야 하기 때문에 침대가 부족해서 봉사 자 5명 정도는 텐트에서 자야 했다. 봉사자 중 남자는 나 혼자여서 엄청 큰 텐트에서 혼자 자게 되어 침대보다 편했던 것 같다. 무엇보다 샤워시설과 화 장실이 깨끗했고, 했던 일이 음식준비라서 그런지 배고프거나 목이 마를 때 자유롭게 부엌을 오갈 수 있어서 좋았다. 평일에는 아이들이 불어 수업을 들었고, 주말에는 가까운 지역으로 소풍을 갔었다. 소풍 가서 둘러 본 마을과 풍경은 정말 아름다운 곳이었다. 대부분 스위스를 보고 그냥 카메라만 갖다 대면 다 엽서라고 하는 말이 괜히 생긴 것

55 55 이 아닌 것 같았다. 너무 예뻐서 카메라 셔터를 멈추지 못했었다. 그리고 스위스에 있으면서 놀랐던 것은 밤 10시가 넘어서도 밖이 밝았다는 것이 다. 근데 그 시간에 캠프지 주변을 보면 너무 아름다운 광경이 펼쳐져서 눈을 땔 수 없을 정도였다. 54 캠프를 하면서 조금 놀랬던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한국의 박지성은 몰라 도 북한의 김정일, 김정은 그리고 북한 여자 아나운서는 거의 알고 있었 다는 것이다. 그리고 처음엔 나를 보고 South냐 North냐 물어보는데 기 분이 별로 좋지 않았었다. 2주라는 기간 동안 캠프 생활을 하며 힘들었던 것은 바로 언어였다. 간단 한 대화는 가능했지만 뭔가 진솔한 얘기들을 나누고 싶었지만 그 정도의 영어 실력은 안됐기 때문에 너무 아쉬웠었다. 그 때 결심한 것이 한국에 서 꼭 회화공부를 열심히 할 마음을 가졌었다. 약간 힘든 점도 있었고 아쉬움도 있었지만 2주라는 기간이 너무 즐겁고 행복했던 시간이었다. 모든 일정을 마치고 인천 공항에 도착했을 때 가장 먼저 무언가 꿈을 꾸고 깨어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언젠가 꼭 다시 가고 만다" 라는 마음으로 인천 공항을 떠났다. 캠프 전에는 늘 빡빡하고 숨통이 막힐 정도로 어지럽게 살았다면 캠프 후 에는 어떤 일이 있더라도 침착하고 여유롭게 생각하고 생활할 수 있겠다 는 마음가짐을 하게 되었다. 무엇보다 짧다면 짧은 시간이지만 정말 평생 잊지 못 할 시간이었고, 인생을 살면서 지치거나 힘들 때 다시금 끄집어 내어 그때의 설렘과 자신감을 가질 수 있게 해줄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내 인생에 있어 없어서는 안됐을 기회와 경험이었고, 내 인생의 터닝포인 트가 바로 워크캠프였다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56 " 알프스 산을 체험하다." 스위스_안건형 ws12sc 홍익대학교 알프스 산이 위치한 스위스의 다보스 플라츠 지역에서 저는 정원관리 를 했습니다. 빼어난 경관과 좋은 공기 및 좋은 환경 속에서 저는 각 국의 친구들을 만날 수 있었고 이로 하여금 다양한 국가의 문화를 간 접적으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다시 알프스 산에 오른다면 또 다시 다보스 플라츠에서 워크캠프를 해 보고 싶었습니다. 날씨는 일교차가 심하긴 했지만 두꺼운 옷들을 가져 가서 다행이었으며 문화적인 충격 또한 별다를게 없었습니다. 스위스 사람들은 매우 친절했으며 다들 동양인인 저를 위하고 챙겨주는 문화 가 인상 깊었습니다. 워크캠프를 가기 전에는 단순히 처음 가는 해외여행이다보니 긴장했 지만 스위스 전역에서 돌아다니면서 불편함을 못느낄 정도로 사람들 은 매우 친절했습니다. 저는 친구들을 위해서 한국 부채를 선물로 들 고 갔으며 이들은 저의 선물을 받고 매우 기뻐하였습니다. 일은 아무래도 산악지형에서 하다보니 높은 고지라서 쉽게 피로감이 쌓였고 일 또한 매우 힘든 작업의 연속이었습니다. 하지만 좋은 환경 속에서 일을 하다보니 금새 적응 할 수 있었고 힘든 것보다는 좋은 경 험과 추억이 함께하는 것 같아서 매우 만족스러웠습니다.

57 56 57 다녀와서는 한국을 더 알리고 다른 나라를 더 경험해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14일 동안 제게 추억을 만들어준 모든 이들에게 감사하며 처 음으로 떠나는 해외여행 속에서 많은 경험을 이루어 냈고 배운 것들이 많 아서 다음에 또 다시 갈 수 있다면 꼭 신청하고 싶습니다. 저에게는 너무 벅차고 감동적인 순간들이었습니다. 자연 경관에 놀라고 사람을 만나는 것이 즐겁고 생활하는 것이 이렇게 행복하다고 느낀 적은 처음이었습니다. 만약 이 도시에 가고 싶은 친구들이 있다면 얼마든지 다 시 추천해주고 싶은 마음이 간절합니다. 문화와 나를 알게 해준 워크캠프 와 유네스코에 진심으로 감사의 말을 전합니다.

58 7. 스페인 " 워크캠프? 그 이상 " 스페인_이정서 SVIAR061 성균관대학교 운이 좋았다. 비행기표와 참가비를 지원 받았으니. 게다가 내가 원하 는 스페인이라니 난 스페인에 관심이 많다. 그래서 전공과 무관하 지만 스페인어도 조금씩 배우고 있다. 왜 좋은지 나도 몰랐다. 군대에 서 이상하게 병장이후부터 스페인이 좋았다. 이 기회는 내가 좋아하는 스페인을 가는 기회이자 내가 왜 좋아하는지.. 그 나도 모르는 이유를 알 수 있는 기회다. 게다가.. 워크캠프.. 솔직히 자유여행에서 외국인 친구를 얻기는 힘들다고 생각한다. 호스텔에서의 만남과 몇마디 그리 고 헤어짐. 그러나 워크캠프는 2주를 같이 동고동락한다. 그래서 정말 친구를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기대 또한 있었다. 그리고 워크캠프지로 찾아갔다. 고속도로 옆으로 삐져나온 길이 300m정도있고 그 길 양옆으로 집들 이 전부인 캔프랑크 마을.. 우리는 모두 모였고 디렉터2명과 참가자 19명이었다. 스페인 친구들, 독일 프랑스 터키친구들 그리고 나.. 사 실 놀란 점은 내심 새로운 경험을 쌓고 싶어서 동양인이 많지는 않으 면 좋겠다 생각하면서도 그래도 힘들때 기댈 수 있는 1,2명정도는 기 대했다. 그러나 홀로 한국인 사실 마을에서 유일한 동양인이었다. 상당히 새로운 느낌이었고, 내 눈으로 동양인을 볼 수 없고 서양인만 보니까 가끔은 내가 서양인인가 하고 느낄 때도 있었다. 그리고 우리는 일정을 시작했다. 일과는 일하는 시간 점심겸 휴식시간 (1시~5시) 활동으로 나뉜다.

59 59 일은 그리 어렵지 않다. 철조망을 다시 치거나 주변을 정리하거나 풀을 뽑는 활동, 나는 풀을 뽑는 활동이 제일좋았다. 풀이 뭐 5cm풀이 아니라 갈대처럼 크고 뿌리도 꽤 깊은 풀이라 여간 쉽게 뽑히진 않으나 뽑히긴 뽑힌다. 그리고 그 느낌은 낚시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낚시란 힘들게 싸 우다가도 한순간 물고기가 지치면 마지막 순간 통쾌하게 들어 올릴 수 있 다. 풀뽑기도 처음엔 힘들지만 어느 순간엔 뿌리 통채로 뽑히기때문에 기 분이 꽤나 좋다. 58 점심겸 휴식시간은 점심 먹고 다들 자거나 정말 휴식을 했다. 내가 볼 때 모두가 그 시간을 즐겼다 1~5시.. 스페인을 제외하면 거의 모든 국가 에서 한참 활동할 시간이다. 그 시간에 휴식한다는 자체가 모두들 굉장히 신기해 했다. 나도 물론이고.. 그래서 우린 항상 정말 기쁘게 방에 침대에 누워서 잡담을 한다든지 앉아서 카드게임을 한다던지 자면서 그 시간을 즐겼다 활동은 너무 많아서 열거하기 힘들다. 소풍 클라이밍 아이스스케이팅 치즈공장 마을탐방 등 너무 많았고 모든게 재미있었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들은 사람.. 내 친구들이다. 나를 포함한 참가자 19명 디렉터2명 모두 끝날때까지 큰 불화 한번 없이 항상 즐겁게 잘 지 냈다. 나라마다 분명 성향 차이가 있지만 워크캠프에 오는 사람들은 일단 시야가 넓고 관용적이며 외향적이라 항상 재미있었다. 그래서 헤어지는 날 몇은 울었고 몇은 울뻔 했고 몇은 억지로 웃으려했다. 지금도 생각하 면 울컥한다. 절대 그 헤어지는 날의 호스텔 앞 길가에서 작별하는 우리 의 모습을 잊지 못할 것 같다.

60 한국에 와서 나는 달라진 건지 모르겠다. 내 생각이 달라진 게 아니라 깊어졌 다고 말하고 싶다. 내가 스페인을 좋아하는 이유를 이제 알았으며 스페인에 대한 확신이 섰기 때문이다. 스페인어공부와 여타 공부를 더 열심히 할 것이 다. 그리하여 헤어지는 날 거리에서 모두가 다짐했던 21명 모두 언젠가 다 시 캔프랑크역 호스텔에 모이는 날에 나 역시 그곳에 있을 수 있기를 바라며 열심히 살 것이다.

61 60 61 "시간이 빠르게 가기만을 바랬던 14일 " 스페인_황유진 SVICS012 홍익대학교 나에게는 유네스코 워크캠프에 대한 환상이 있었다. 캠프에 가기 전까지 나는 다국적인 학생들과 교류하며 서로의 문화를 존중해주고 알려주며 우 정을 키워나가는 그런 모습을 상상했었다. 캠프 참가자는 7명이라는데 그 들은 어떤 나라에서 왔을까. 몇 살일까. 남자일까 여자일까. 이런 사소한 궁금증들은 나를 설레게 했다. 그러나 막상 캠프에 도착하고 나니 캠프는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너무나 도 달랐다. 일단 참가자가 너무나 많았다. 분명히 사전 정보에는 7명으로 나와 있었는데 25명은 넘는 것 같았다. 그리고 구성원이 다국적이지도 않 았다. 스무 명 남짓이 스페인 참가자들이었고 이방인은 나를 비롯한 한국 인 3명과 터키인 여자 2명이었다. 봉사활동의 내용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뉘어졌다. 월, 수, 금은 마을에 있는 장애인 센터로 가서 장애인들이 폐화분을 꾸미는 것을 돕는 일을 했다. 화, 목은 장애인들과 함께 호수나 수영장에서 물놀이를 했다. 첫 주에는 이렇게 했지만 둘째 주부터는 거의 매일 물놀이를 하거나 체육관에서 같 이 운동을 했다. 첫 주의 월요일은 폐화분에 풀칠을 하고 신문지 조각을 붙여서 화분을 완 전히 감싸는 작업이었는데 하나를 끝내면 다른 화분을 건넸고 그것을 끝 내면 또 다른 화분을 건넸다. 아무리 장애인이라지만 이렇게 반복되는 작 업은 지겹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수요일에는 신문지가 붙여진 폐화분을 물감으로 칠하고 스티로폼 같은 것 을 붙여 꾸미는 일을 했다. 내가 맡아서 도와주는 아저씨는 몸이 많이 불 편해서 화분에 물감 칠을 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처음에는 화분을 예쁘 게 꾸미고 싶은 욕구가 들었다. 그러다보니 어느 순간 이 화분은 아저씨

62 의 작품이 아닌 내 작품이란 생각이 들었다. 나는 화분을 만들려고 온 것이 아니라 화분을 만드는 아저씨를 도와주기 위해 이곳에 있는 것인데 예쁘게 만들겠단 생각이 봉사활동의 목적을 흐려지게 한 것이다. 나는 생각을 다시 하고 최대한 아저씨가 스스로 칠할 수 있도록 도움만 주기로 했다. 가끔 칠하 는 색만 바꿔주고 아저씨가 어떻게 칠하던 신경 쓰지 않았다. 완성된 화분은 거의 추상화에 가까웠지만 아저씨가 열심히 꾸민 것이라고 생각하니 다른 누 구의 작품보다도 멋있었다. 금요일에도 같은 작업을 반복했다. 어디서 가져온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또 폐화분에 신문지를 붙이고 말리고 칠을 하는 작업을 했다. 나는 굉장히 지루 했고 장애인들도 그래 보였다. 캠프에서 정말 대충 봉사활동 프로그램을 기 획한 느낌이 들었다. 화분을 꾸미지 않는 날에는 호수나 수영장으로 가서 장애인들과 함께 물놀이 를 했다. 스스로 수영이 가능한 사람들도 있었고 물에 발을 담그는 정도만 가 능한 사람들도 있었다. 나는 물을 별로 좋아하지 않았지만 봉사의 일환이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물에 들어갔다. 처음에는 정말 싫고 불편했는데 물놀이 를 하면 할수록 재미를 느꼈다. 봉사 막바지 즈음에는 호수가 아닌 수영장에 서 물놀이를 했는데 그곳에서는 그들과 물싸움을 하며 정말 신나게 놀았다. 그 순간만큼은 그들이 장애가 있다는 사실을 잊었다. 나도 그들도 그냥 똑같 은 사람이었다. 캠프에 있으면서 대다수였던 스페인 참가들에게서 인종차별을 느낄 때가 종 종 있었다. 그들 중에서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들에게 스페인어로 진행된 공 지사항 등을 물어보면 그들은 거의 나도 모른다는 식이나 대충 설명해주고 말았다. 그리고 식당에서 밥을 먹을 때 한국인들끼리 앉아 있는 식탁에 자리 가 아무리 많이 남아도 그들은 절대로 우리 옆에 앉지 않았다. 심지어 우리가 그들이 앉아있는 자리로 가면 그들은 식판을 들고 자리를 떠났다. 처음 당해보는 인종차별이었고 모욕감을 느꼈다. 그들은 대학생들이거나 대 학을 졸업했거나 하는 배울 만큼 배운 나이의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국제 워 크캠프의 참가자들이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피부색이 다르다는 이유로 나라 가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을 했다. 그렇지만 오히려 장애인들은 아무런 편견 없는 눈으로 나를 대했다. 말은 통 하지 않았지만 따듯한 눈빛으로 나를 반겨주었다. 장애인들에게 받은 친절이 내가 이 캠프에서 받은 최대의 친절이었다. 이 경험을 통해 나는 과연 누가 장애인가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육체가 멀 쩡해도 마음에 병이 든 사람들이 많다. 육체가 불편해도 마음이 따뜻한 사람 들도 있다. 나는 마음에 병이 든 사람들이야 말로 정말 장애가 있다는 생각을 했다. 그리고 지금까지 내가 장애인에 대해 가졌던 모든 편견어린 시각들을

63 63 반성하게 되었다. 캠프 시작일이 주말이었기 때문에 그 주 토요일, 일요일은 문화의 차이를 몸소 느끼게 하는 활동만 했다. 이 날 한 활동에 나는 뽀뽀게임이라는 명 칭을 붙였다. 규칙은 간단하다. 참가자들을 두 그룹으로 나눠서 한쪽에는 스페인 알파벳, 다른 한쪽에는 스페인 숫자를 알려준다. 그리고 한 사람 을 뽑아서 가운데 앉혀 놓는다. 그 사람이 숫자나 알파벳, 혹은 알파벳과 숫자를 부른다. 그러면 앞에 불린 사람은 앉아있는 사람에게 뽀뽀를 해야 한다. 뒤에 불린 사람은 앞에 불린 사람이 앉아있는 사람에게 뽀뽀를 못 하게 막는 동시에 앞에 불린 사람에게 뽀뽀를 해야 한다. 둘 중 먼저 뽀뽀 를 하는 사람이 이기는 게임이다. 62 게임하는 도중에는 서로 수비와 공격을 하면서 가끔 민망한 상황들이 연 출 되었다. 이 게임을 하면서 우리나라에서 대학 오리엔테이션에서의 술 문화에 대해 종종 올라오는 기사가 떠올랐다. 이 게임을 우리나라에서 한 다면 분명히 언론에 회자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는 이렇게 아무렇 지도 않게 이런 게임을 하고 있다. 생각해보면 별 거 아닌 행동인데 이것 을 이상한 눈으로 보기 때문에 문란해지는 것 같기도 하다는 생각을 했 다. 그렇다. 이때까지만 해도 나는 내가 느끼기에는 약간은 문란한 이 놀 이가 문화의 차이이고 그렇기 때문에 문화 상대주의적 관점으로 이해해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주문을 걸었다. 활동은 매일 두 개씩 진행했다. 점심 먹고 두 시간 가량, 저녁 먹고 늦은 밤에 두 시간 가량. 이날 저녁에 한 활동은 어두운 숲속에서 하는 숨바꼭 질이었다. 술래가 숫자를 세는 동안 우리는 나무 뒤나 덤불로 몸을 숨겼 다. 술래는 그 자리에서 손전등을 비춰 숨은 사람이 누군지 이름을 호명 했고 그 이름이 자신의 이름이 맞으면 술래에게 잡힌 것이다. 어두운 밤 의 숲 속은 매우 위험했다. 근처에 가시나무가 있었는지 옷과 신발이 온 통 가시로 박혀 있었다. 그러나 낮에 했던 게임보다는 재밌었다. 물론 몇 몇 사람들은 다쳤다.

64 주로 낮에 했던 활동은 힘들지만 건전했다. 수영장에서 미니 올림픽을 했다. 6명이 한 침으로 총 4팀이 경기를 리그전으로 했다. 입으로 물을 받아서 물 통에 물을 더 많이 채우는 게임, 수영장에 던져진 열쇠 먼저 찾기, 서핑보드 위에서 밀치기 게임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하루는 컵게익을 만들었다. 6명이 한 조로 레시피와 앞에서 하는 설명을 따 라 컵케익을 만들었다. 컵케익 만들기는 나에게 캠프 활동 중에서 가장 기억 에 남고 즐겁고 평화로운 활동이었다. 또 하루는 카누를 탔다. 나는 여기 와 서 카누를 처음 타 봤는데 좋은 경험이 되었다. 밤에 했던 활동은 거의 매번 나에게 문화 충격을 주었다. 사람 속이기 게임이 란 것도 있었는데 나를 비롯한 몇 명을 다른 곳으로 보내서 한 10분 정도 있 게 한 다음 대표가 찾아와서 내 눈을 가리고 나를 사람들이 있는 곳으로 데리 고 갔다. 어떤 남자 참가자가 옷을 지어주기 위해 재단을 해준다면서 몸의 이 곳저곳을 만지는데 나는 너무 놀라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물론 목소리만 남 자가 낸 것이고 만지는 것은 여자 참가자가 한 것이다. 솔직히 왜 이런 게임 을 하는지 그 당시에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물론 지금도 이해는 되지 않는 다. 또 하루는 밤에 숲에 가서 팀별로 미션을 수행하는 게임을 했다. 팀은 남자1 명, 여자3명으로 구성되어 있다. 숲에 숨어 있는 동물들이 내는 소리를 듣고 그들을 찾아내 그들에게 미션을 받고 성공하면 종이에 사인을 받을 수 있다. 술래도 1명 있어서 술래는 돌아다니면서 사인을 지운다. 그러면 다시 미션을 수행해야 한다. 미션으로는 인간 탑 쌓기, 엉덩이로 이름쓰기 그리고 도로변에서 아래속옷과 바지를 바꿔 입는 것이 있었다. 어두워서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도로로 차가

65 65 지나갈 때마다 라이트가 환히 사람들을 비췄기 때문에 정말 미션을 수행 하기 곤욕스러웠다. 그리고 풍선 터트리기 게임도 있었는데 우리가 일상 적으로 하는 풍선 터트리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마치 성행위 동작을 연상 시키는 모습으로 풍선을 터트려야만 했다. 64 이러한 불건전한 활동을 할 때마다 나는 이것을 문화의 차이로 받아들여 야 하는지 의문이 생겼다. 아무리 서양문화가 성적으로 개방적이라지만 매일 같이 계속되는 문란한 게임들을 문화의 차이로 설명할 수 있을까. 그리고 이 게임들은 참가자들이 회의를 통해 자발적으로 만든 내용이 아 니라 순전히 캠프 매니저의 독단의 의한 게임이었기 때문에 나는 이것을 문화의 차이로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또한 이에 대해서는 몇 몇 스페인 참가자들 사이에서도 불만이 나왔다. 또 이런 문화충격적인 게임들 말고도 진행된 활동은 즐거움을 위해서라기 엔 너무나도 빡빡하게 진행되었다. 일주일도 되지 않아 부상자가 나왔고 그들은 캠프를 떠났다. 내가 원했던 캠프는 레이시즘으로 똘똘 뭉친 캠프도 아니었고 한 명의 독 단으로 모든 프로그램이 진행되는 비민주적인 캠프도 아니었기에 너무나 도 실망스러웠고 이곳에서 지내는 것이 너무나 괴로웠다. 캠프는 정말이지 내가 생각한 모습과는 너무나도 상이했다. 사전정보에 나온 것과 너무나도 달랐다. 공용어는 스페인어였고 7명이라던 참가자는 스물다섯 명이 넘었다. 그리고 그중 스무 명이 스페인 사람이었다. 어쩌 면 인종차별적 분위기가 생기는 것도 당연했다. 인종차별이 아니더라도 대다수가 같은 나라였기 때문에 굳이 이방인과 친하게 지낼 이유도 그들 에겐 없었을 것이다. 처음 일주일은 모든 상황을 참았다. 그리고 더 잘해보려고 노력했다. 그 렇지만 참으면 참을수록 상황이 악화되었지 나아질 기미는 보이지 않았 다. 결국 나와 한국인 친구는 캠프 매니저에게 왜 사전정보를 거짓으로 기재했냐고 따졌다. 그리고 우리는 그전부터 룸메이트와 문제가 있었기 때문에 더 이상 그들과 사이가 틀어지지 않기 위해서 방을 바꾸기를 원한 다고 3번이나 요구했지만 여유 방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요구는 빈번히 묵살되었었다. 이 사항도 우리는 집요하게 따졌다. 30분 가까이 설전을 벌였고 그 이후 많은 사항이 개선되었다. 우리나라 문화는 부당한 것이 있어도 밑에 사람이 따지면 안 되는 분위기 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나라 학생들은 가끔 할 말을 못하는 경우가 있 다. 하지만 이번 경험으로 인해 부당한 경우 참고만 있으면 득이 될 게 하 나도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66 또한 외국에 나가 처음으로 이방인이 돼서 내 의지와는 별개로 이유 없이 가 해진 인종차별이라는 폭력을 경험하면서 나에 대해 돌아보게 되었다. 나도 단지 피부색이 다르단 이유 하나만으로 나보다 못사는 나라에서 왔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 사람에 대해 알려고 하지도 않고 인종 차별적 시선으로 외국 인을 바라본 적이 있다. 그리고 이 기회를 통해 그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 지 느끼게 되었다. 비록 유쾌하지 만은 않은 경험이었지만 이 경험을 타산지석으로 삼아 좀 더 나은, 한 층 더 성숙한 내가 되기로 했다.

67 67 8. 아이슬란드 66 "워크캠프 뜨거운 추억으로" 아이슬란드_안다홍 SEEDS 042 광운대학교 누구나 그렇듯이 워크캠프를 참가하기 전 많은 상상과 기대에 떨리고도 두려웠다. 보통의 워크캠프는 Info sheet에 나와있는 시각에 meeting point에서 만나겠지만 아이슬란드는 특수한 지리적 위치로 인하여 하루 전에 대부분의 캠퍼들이 모여있는 상태였다. 나는 그 중에서 가장 늦게 도착하여서 먼저 친해져 있던 그들 틈에 잘 낄 수 있을지 걱정스러워하며 캠프의 첫날을 시작하였다. 우리는 먼저 우리가 하게 될 일에 대하여 IFAW의 관계자로부터 설명을 들었다. 우리가 하는 일은 행인들에게 고래를 먹지 않을 것이며 고래사냥 을 금지할 것을 요구한다는 내용이 적혀있는 카드에 이름과 국적을 적도 록 부탁하는 것이었다. 관계자는 서명운동 도중 아이슬란드인과 부딪힐 것에 대비하여 아이슬란드가 언제부터, 왜 고래사냥을 시작하였는지 그 역사를 설명해주고 대비 훈련을 하였다. 그런데 사실 그 역사설명이 아주 길어서 조금 졸고 말았다. 그리고 영어로 어려운 단어들을 많이 듣다 보 니 이해하지 못하는 부분이 많았다. 나뿐만 아니라 다른 캠퍼들도 나중에 기억하는 것은 고래사냥을 합법적으로 허용했던 연도뿐이었다. 그래서 내 용이 정리된 페이퍼를 주었다면 좋았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을 시작한 첫날, 설명을 들었던 것 보다 더 일은 어려웠다. 지나가는 사 람을 붙잡고서 영어로 말을 건다는 것 자체가 처음에는 두려웠다. 하지 만 그것도 잠시, 모두들 열심히 일하기 시작했다. 일을 하는 동안 살면서

68 No라는 말을 가장 많이 들어본 것 같다. 많은 사람들이 말을 들어보지도 않 고 거절했다. 처음에는 많이 당황스럽고 마음이 안 좋았다. 그러나 생각해보 니 내가 한국에 있을 때 도 길거리에서 서명운동을 한다거나 광고지를 나눠 줄 때 피한적이 많았다. 지나가는 사람은 그저 한 번 No라고 말하고 지나가 는 것이지만 그 일을 하는 사람은 하루에도 수십 번씩 거절당한다는 것을 느 끼고 나니 그 동안 내가 그냥 지나쳤던 것이 후회됐다. 이 경험으로 인해서 한국에 돌아온 후에는 더 이상 그냥 지나치지 않게 되었다. 일을 시작한 첫 주에 당황스러운 일이 일어났다. 그 날 일을 시작하기 전 미 팅에서 IFAW관계자가 우리나라가 고래사냥을 합법적으로 허용하겠다는 선 언을 했다고 말했다. 이는 정치적 이유에서 비롯된 것이며 제안도 아닌 일방 적인 선언이라는 것이 놀랍다고 말했다. 또한 이는 시대를 역행하는 것이라 고 말하는데 나를 비롯한 나머지 두 명의 한국인 캠퍼들도 당황했다. 마치 우 리가 잘못한 것처럼 조금 눈치가 보였지만 한국에 돌아가서도 캠페인을 해야 겠다며 웃으며 넘겼다. 그런데 그 날 서명운동을 하면서 우리나라가 고래사 냥을 합법 선언했다는 사실을 아는 관광객들을 여러 명 만났고 굉장히 놀라 웠다. 바로 1일 전의 일이었는데 많은 사람이 알고 있다는 것이 신기했다. 그 만큼 지금 이 세상은 얼마나 세계화되어 있으며 그만큼 한 국가가 내리는 결 정이 얼마나 중요한지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일을 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날이 있었다. 그날 아침부터 지나가는 행인에게 Excuse me 만 했을 뿐인데 그 사람이 No, no! no! 하며 거칠게 욕 을 하고 지나갔다. 그리고 나서 오후에 큰 사건이 일어났다. 우리는 일을 할 때 두 명이 고래코스튬을 입고서 일했었는데, 그 코스튬은 철로 만든 것이어 서 아주 무겁고 장비를 해야만 입을 수 있는 것이었다. 그 날 내가 고래코스 튬을 입고 있었다. 젊은 남자 3명이 나에게 건들거리며 다가오는 것이 보였 고 나는 장난치는 줄 알고 똑같이 따라하며 다가갔다. 그러나 그들은 마구 소 리치며 나를 잡아당기고 밀치다가 다른 캠퍼들이 오자 도망갔다. 그날 나는 굉장히 정신적으로 충격을 받고 일하는 내내 침울한 기분이 들었다. 이 뿐만 아니라 다른 여자캠퍼가 아이슬란드인 남자 3명과 얘기하다가 언쟁이 일어나 그 남자가 때리려는 시늉을 하는 등 어려운 일이 많았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그들에게는 고래사냥이 생업의 하나이고 더군다나 우리는 외국인이기에 이 캠페인은 그들에게는 심기가 불편한 것이 당연하기도 했다. 마치 우리나라에 와서 외국인들이 개고기를 먹지말자고 서명운동을 하는 것 과 같다는 생각이 들며 이해하려고 노력하고 마음을 다스렸었다. 캠퍼들과의 관계도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우리 캠프는 아일랜드남자 리더와 프랑스여자 한 명, 독일여자 한 명, 스페인남자 세 명, 타이완여자 두 명, 홍 콩여자 한 명, 한국여자 세 명으로 이루어졌다. 캠프 초기에 독일인 여자캠퍼 의 행동이 문제가 되기 시작했다. 그 아이는 약간 여자보다는 남자와 잘 어

69 69 울리는 친구였고 나를 포함한 동양여자아이들은 그녀와 리더가 서로 관심 이 있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68 하루는 그 여자아이와 나와 다른 한국인이 저녁식사 준비팀이었는데 일을 끝마치고 다같이 공연을 보러 갔다가 돌아왔는데 공연을 보러 가지 않았 던 독일여자아이와 리더가 숙소에 있었다. 분명 우리 셋은 저녁메뉴를 생 각하기로 했었고 다른 한국인이 그녀에게 뭐 할지 생각해봤느냐고 물었는 데 아무런 대답도 없고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 옆에 있던 리더가 대신해 서 지금 얘 카드 쓰는 중이라고 말하며 냉장고에 무엇 무엇이 있으니 뭘 만들면 되겠다고 말했다. 그리고 우리가 부엌으로 들어갔는데도 그 독일 인 캠퍼는 오지 않았다. 평소 그 친구가 식사준비와 정리를 할 때 일을 잘 하지 않아서 불만이었는데 그날 이후로 모든 일이 복합되어 우리는 더 화 가 났다. 뿐만 아니라 스페인 남자 캠퍼 한 명은 캠프가 시작 된지 일주일이 지났 음에도 불구하고 동양인 캠퍼 6명중 단 한 명의 이름밖에 알지 못했다. 캠프가 시작할 때 자기소개 후에 유럽인 캠퍼들은 동양인 캠퍼들이 왜 영 어 이름을 쓰는지 궁금해했었다. 우리는 그들에게 동양이름은 발음하기 어렵기 때문에 너희들의 편의를 위해서 영어이름을 쓰는 것이라고 설명했 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름도 기억하지 못하고 왜 영어이름을 쓰는지 나중에도 수 차례 물어보는 모습에 우리는 실망스러움을 감출 수 없었다. 이 외에도 우리가 각자 어느 나라에서 온지 기억도 못하고 홍콩인에게 일 본인이라고 하는 등 많은 사건들이 쌓이고 쌓여서 결국에는 캠프가 끝나 기 이틀 전 크게 언쟁이 일어나고 말았다. 결국 그 언쟁 끝에 서로를 조금 은 더 이해하고 잘 지낼 수 있을 것 같았는데 금방 캠프가 끝나버려서 아 쉬웠다.

70 비록 실망스러운 일들은 꽤 있었지만 돌이켜보면 문화적 차이를 극복하지 못 한 것은 아니었나 후회스럽기도 하다. 사실 캠프 중에도 이 것이 문화적 차이 때문인지 그 친구들의 생각이 어리기 때문인지 고민이 많이 들었고 서로 이 야기도 많이 했었다. 그 두 가지 경우 중 어느 것인지 아직도 결정하기 어려 운 것 같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후자의 경우였을지라도 내가 진정 그들을 이 해하려고 노력하고 그들에게 설명하고 알려주려고 하는 노력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캠프 후반에는 서로 대화도 많이 하면서 조금 더 가까워졌었 기에 더욱 아쉬움이 드는 것 같다. 몇 일전 홍콩인 캠퍼의 페이스북에서 아이슬란드의 사진들이 있는 사진첩제 목을 보고 인상 깊었다. 그 제목은 Iceland, the Realm of Ice & Fire 였는 데 Ice는 이해하겠는데 Fire는 뭘 뜻 하는건지 궁금했다. 그런데 이렇게 에 세이를 쓰다 보니 그 친구의 뜻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7월의 아 이슬란드는 여름임에도 불구하고 아주 쌀쌀하고 추웠다. 그러나 내가 본 그 곳의 사람들은 정이 많기도 하면서 동시에 조금은 과격하고 다혈질인 뜨거운 사람들이었다. 그리고 우리 12명의 캠퍼들이 함께했던 워크캠프의 기억은 나 에게 뜨거운 추억으로 영원히 남을 것이다.

71 "아이슬란드에서의 모험" 아이슬란드_박주현 seeds047 홍익대학교 처음 아이슬란드 워크캠프에 지원하기 전에는 아이슬란드가 어디에 위치 해 있는지도 모르고 그 나라는 그저 추운 나라라고만 생각했었습니다. 여 러 나라 중 아이슬란드를 검색하고 그 나라에 다녀온 여러 사람들의 이야 기들과 여행후기들을 보면서 다른 나라보다 더욱 가고 싶다는 느낌을 갖 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지원을 했는데 붙게 되었고 한달 간의 준비기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저는 학업과 여러 가지의 이유로 아니 사실 귀찮고 가면 다 알아서 하겠지 잘 되겠지 라는 안일한 생각으로 영어공부나 여러 가지 계획을 미루고 있었습니다. 그러다 출국 일주일 전부터 허겁지겁 준 비를 하면서 떠나게 되었습니다. 해외여행도 처음이었고 모든 것이 처음 이었던 제게 영어가 처음 부딪히게 되는 벽이었습니다. 미팅 포인트에서 만나기 전 숙소에서 이틀 정도 지냈는데 그 동안 그곳에 지내는 여러 친구들과 많은 얘기도 못 나누고 혼자 소심해서 밖에 나가서 돌아다니기만 했습니다. 그 때 내가 한 달의 시간 동안 만이라도 영어공 부를 열심히 했더라면 좀 더 친하게 지내고 많은 얘기를 할 수 있었을 텐 데라는 후회를 했습니다 그래서 한국으로 돌아가면 영어공부를 꾸준히 해서 다음에 해외에 다시 갈 기회가 생겼을 때 좀 더 자유롭고 자신감 있게 말해야겠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미팅포인트에서 워크캠프 팀원들을 처음 만났을 때는 서로 별로 말도 없 고 어색한 웃음만 지었었는데 워크캠프에서 하루하루 더해 갈 때 마다 좀 더 관계가 좋아지고 서로 웃는 일이 많아졌습니다. botanic garden에서 우리가 하는 일은 생각보다는 하는 일이 너무 단순 했습니다. 그저 잡초만 단순 노동이었습니다. 그 점에서는 조금 실망을 했지만 팀원 모두 하루하루 열심히 일했습니다. 일할 때는 열심히 쉴 때 는 즐겁게 쉬었고 매일 점심메뉴가 다르고 항상 기대가 될 정도로 맛있어 서 좋았습니다. 그 중에서도 가장 인상 깊었던 것은 말고기였습니다. 말고기는 먹어본 적 도 없고 생소한 음식이라 정말 그 맛이 어떨지 궁금했었는데 처음 딱 입 에 들어갔을 때 맛있다고 생각했다가 먹다 보니 너무 느끼하고 조금 냄새 가 나는 것 같아 제게는 별로 추천하고 싶지 않은 음식입니다. 2주간의 워크캠프에서 일과시간 이후에 선택적으로 여러 관광지를 갔었 는데 저는 3군데를 갔었고 각 관광지에 드는 참가비가 조금 비싸긴 했지 만 뒤돌아 봤을 때는 후회 없는 선택이었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그 3군데보다는 우리 팀원끼리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1시간 거리 에 있는 이름 없는 산을 올라갔는데 그것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그 산 은 높지는 않지만 경사가 좀 있고 나무가 있는 산이 아니라 절벽이라는

72 느낌이 강한 산이었는데 바람도 많이 불고 정상부근에서는 더욱 올라가기 위 험했기 때문에 더욱 기억에 남고 정상에 올라갔을 때 주위의 경치가 너무 아 름다웠던 기억이 생생합니다. 워크캠프 내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바로 건조함이었습니다. 우리나라는 여 름에는 건조하지 않고 습하기 때문에 피부가 트는 일은 거의 없었는데 아이 슬란드는 바람이 많이 불고 약간 추우면서도 햇빛은 강했습니다. 그러다 보 니 제 피부는 건조해지고 결국에는 트게 되었고 하루하루 따갑고 힘들었습니 다. 수분크림을 가져갈까 말까 고민을 했었는데 가지고 오지 않은 것이 후회될 정도로 아이슬란드뿐만 아니라 워크캠프 숙소도 건조했습니다. 워크캠프 활동에서 가장 후회되는 것은 팀원들과 많은 얘기를 나누지 못한 것인데 즉 영어였습니다. 그 친구들은 생각보다 영어를 너무 잘했고 저는 그 저 옹알이 수준이었습니다. 그 친구들은 저에게 먼저 다가갔지만 저는 영어 를 못한다는 이유로 그저 한 두 마디만 하고 대화가 이어지지 않았습니다. 그 점에서 그 친구들과 더욱 친해지지 못했던 것이 아쉬움이 남습니다. 하지 만 그 팀원들 중에서도 영어를 못하는 프랑스 남자애가 있었는데 그 친구와 는 처음에는 별로 얘기도 안하고 맘에 들지 않았었는데 같이 일을 하면 할수 록 서로 친해지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순간에는 둘이 거의 단짝같이 되 었습니다. 워크캠프가 끝나고 서로 헤어지게 되었을 때 이상한 기분이 들었습니다. 2주 동안 정이 들어 헤어지는 것이 너무 아쉽고 우리가 서로 많은 말은 하지 않아 도 우리는 친구가 되었구나 라는 느낌이 많이 들었습니다. 헤어지던 순간 포옹을 하고 서로 아쉬워하던 순간이 가장 기억에 남습니다.

73 73 9. 에스토니아 72 " 넘치는 사랑 " 에스토니아_김기은 EST 27 이화여자대학교 현재 대학에서 디자인을 공부하지만, 교육 전공을 병행하고 있다. 그 이 유는 아이들에 대한 깊은 관심이 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아 이들과 오랜 기간 함께 할 기회가 없었다. 이번 캠프를 통해, 아이들과의 일이 정말 적성에 맞고, 행복하다는 것을 느꼈다. 사랑을 주는 만큼 정말 많은 사랑도 받았다. 실제로 캠퍼등 중에는 아이들에 관심이 없는데 이성친구를 사귀기 위해 서 오늘 캠퍼가 다반사였다. 진실은 통한다고, 아이들을 사랑하는 진심으 로 대하니, 그 어느 캠퍼들과는 달리 아이들이 엄청 사랑해주었다. 특히, 예술고등학교 때 배웠던 예술분야가 아이들과의 교류에 직접적인 도움이 되었다. 아이들을 위해 그림을 그려주고, 자화상도 그려주고, 한국문화에 대해 많은 교류를 나눴다. 혼자 즐기는 예술보다는 아이들과 함께 나누는 것이 참 행복하다.

74 유럽에는 자주 가보았지만, 혼자 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나는 북유럽 디자인여행을 스스로 짜서 기획했는데, 스스로의 전공분야에도 잘 맞고, 앞 으로 나의 방향에 대해서도 고민해 볼 수 있는 소중한 기회가 되었다. 이번 워크캠프에서 아이들에게 받은 사랑과, 북유럽 디자인을 보고 느낀 많은 감 각들이 향후 나의 전공공부를 하고, 꿈을 펼칠 때에 소중한 자양분이 될 것이 다.

75 74 75 " 히우마, 같이 있었기에 찾을 수 있었던 가치 " 에스토니아_양기란 EST14 홍익대학교 누군가의 삶에 뛰어든다는 것은 굉장한 일이다. 한 지붕아래 같은 공기 속이라도 사람 수만큼의 다양한 삶과 생각이 흘러간다. 시간이 지날수록 개인의 가치관은 단단해지고, 나이가 들수록 우리는 갑작스럽게 내 삶에 찾아오는 나와 다른 무언가에 거부감을 갖는다. 9명의 사람이 288시간을 함께 한다는 것은 그들이 지금까지 살아온 삶과 가치를 공유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이었고, 우리는 히우마 섬에서 수많은 인생과 가치관, 삶을 살아가는 다양한 방법들과 마주하게 되었다. 나는 이 보고서를 통해 객관 적인 히우마에서의 워크캠프 활동과 개인적인 감상과 더불어 그곳에서 함 께 고민했던 문제와 가치들도 함께 전달될 수 있기를 바란다. 2012년 7월 15일 이전의 시간 유네스코 국제워크캠프에 지원하고 면접을 보고, 준비하는 기간은 나에 게 계속해서 무언가에 쫓겨 전력질주 해야 하는 학기중이었다. 나는 건축 학과 4학년 1학기에 재학중이었고, 주말 아르바이트와 친구와 뛰어든 공 모전 마감 준비, 이제 쉽게 넘어갈 수 없는 교양 과목 학점, 거기에 아무 리 해도 시간이 모자라는 설계까지. 눈을 떠도 쏟아지는 잠에 10분을 쪼 개 잠을 보충하던 그 때, 솔직히 깊게 생각할 시간이 없었다. 워크캠프 지 원기간이라는 공지사항을 보았고 1초의 망설임도 없이 지원서를 쓰기 시 작했다. 아마 저번 겨울방학 홍익봉사단으로 네팔에 다녀온 것이 좋은 경 험과 인생의 자산이 되었고, 그보다 더 좋은 친구들을 만났기 때문에 이 런저런 고민 없이 가야겠다. 라고 느꼈던 것 같다. 수많은 캠프 활동 중 에 전공과 관련된 활동을 지원해볼까 했다가 평소 궁금했던 도시가 아닌 곳에서의 삶을 느낄 수 있는 활동을 지원하기로 결정했다. 에스토니아가 좋았다기보다는 캠프장소가 섬이라는 점이 나의 마음을 움직였다. 섬, 바 다, 철새, 친환경 농장, 자연과 함께하는 삶. 캠프를 마친 지금, 캠프에

76 대한 사전 정보와 실제 환경이 얼마나 다르냐고 묻는다면 같으면서도 다르다 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면접을 보는 날은 공교롭게도 공모전 마감 날이었다. 밤을 꼬박 지세우고 면 접 시간이 다가올 때, 나는 이제 면접 준비를 해야 한다고 머릿속으로 생각하 면서도 손은 마우스를 수없이 클릭하며 공모전 제출 패널을 만들고 있었다. 옆에 있던 후배가 에스토니아에 대해 검색해서 읽어주었고, 면접 장소로 뛰 어가며 자기소개를 되뇌었다. 그 순간만큼은 최선을 다했지만 준비를 많이 하지 못한 아쉬운 면접이었고, 다행히 후회할 시간도 없이 빠르게 다시 내 삶 으로 돌아가야 했다. 합격 소식을 듣고 비행기를 타는 그 순간까지도 상황은 같았다. 나는 바빴고, 처리해야할 리스트만 늘어갔다. 출국 3일 전이 돼서야 한학기가 마무리 되었 고, 3일 만에 적어놓은 리스트를 지워나갈 수 있었다. 정신없이 준비했지만 그 목록 덕분에 놓친 것 하나 없이 잘 준비할 수 있었다. 워크캠프는 7월 15일부터 7월 27일까지 12일간의 일정. 나는 워크캠프 앞뒤 로 여행을 하기 위해 7월 11일에 출국해서 8월 8일에 귀국하는 계획을 짰다. 간단하게 워크캠프 장소까지의 이동 방법을 설명하자면, 헬싱키 서부터미널 에서 페리를 타고 에스토니아 탈린으로 약 1시간이 소요되었고, 탈린 페리선 착장에서 도보로 약 15분, 버스정류장까지 이동 후 버스를 타고 캠프참가자 미팅포인트인 autobussijaam에 도착하였다. 기존 계획은 집결시간보다 일 찍 도착해 탈린을 조금 둘러보고자 했지만 폭우가 쏟아지는 바람에 정류장에 4시간이 넘게 있어야 했다. 캠프 기간 동안 날씨가 얼마나 중요했는지는 아무리 말해도 모자랄 것이다. 생각보다 에스토니아는 추웠고, 그래도 여름인데, 겨울 같지는 않겠지 라고 생각했던 나의 예상은 빗나갔다. 다음에 워크캠프를 가게 되는 참가자는 꼭 그 나라의 기온을 확인하고 우리나라의 계절과 비교해보기를 바란다. 버스 정류장에서 캠프참가자들을 기다리는 시간은 기나긴 한 달 중에 가장 외로운 시간이었다. 비는 세차게 쏟아졌고, 수많은 사람들이 정류장을 출발했고, 정 류장에 도착했다. 나는 배낭을 메고 있거나 침낭을 들고 있는 사람 한명 한명을 혹시 캠프참가 자가 아닐까 하며 바라보았다. 집결 시간이 다 되어가자 참가자들이 하나 둘 모였다. 8명의 참가자 중에 7명이 모였고 우리는 약속된 버스를 타고 우리를 초대한 농장을 향해 출발했다. 버스는 배를 한번 탔고, 히우마 섬에서 버스를 한번 갈아타고 LEISU에 도착 했다. 농장 주인의 이름은 PRIDU. 우리가 묵게 될 곳은 마을 유치원이었다. 시설은 생각보다 깨끗했고, 잠자리도 그다지 춥지는 않았다. 짐을 풀고 침낭 을 깔고, 첫 저녁을 먹었다.

77 77 캠프 참가자 중 한명은 아직 도착하지 않았고, 캠프 리더 역시 개인적인 사정으로 이틀 뒤에 도착한다고 했다. 아직은 서먹해서 눈이 마주치면 싱 긋 웃어보이던 그날, 우리의 12일이 시작되었다. 76 농장으로부터 오는 것들 ALLIKSAARE 농장에는 소, 양, 토끼, 강아지, 약 200마리의 가축이 있 다. 대부분 농장에 있고 소는 근처 바닷가에 있다. 12일 동안 우리가 먹 은 음식은 모두 히우마에서 왔고, 대부분은 우리가 일하는 농장에서 왔 다. 소에서 갓 짜낸 신선한 우유, 그 우유로 만든 치즈와 버터, 캐피어 (우유를 발효시켜 만든 것으로 요구르트와 비슷하다.), 소의 고기로 만 든 살라미, 히우마 제빵회사에서 만든 빵, 히우마에서 나온 곡물로 만든 KAMA(곡물을 빻아 만든 가루로 미숫가루와 비슷하다.). 식탁에 있는 음 식의 대부분이 소에게서 온 것이었다. 몸에서는 소 냄새가 나는 것 같았 고, 실제로도 그랬다. 난 사실 유제품을 좋아하지만 많이 먹으면 탈이 나 서 잘 먹지는 못한다. 그런데 신기하게도 워크캠프를 하는 내내 삼시세끼 우유와 유제품들을 먹고도 탈 한번 나지 않았다. 12일중 주말 이틀을 제외하고 10일을 일했는데, 그중 이틀은 농장에서 양털을 손질하는 일을 했다. 일 년에 한번 봄과 여름사이에 양털을 깎는 데, 뭉쳐있는 양털을 두 손으로 솜사탕을 먹는 것처럼 뜯어내기를 반복하 다보면 먼지와 이물질은 떨어져나가고 복슬복슬한 양털만 남게 된다. 흰 색과 검은색을 구분해서 공장으로 보내면 몇 개의 기계를 거쳐 털실이 되 고, 그 털실을 엮어 따뜻한 옷과 장갑, 모자를 만든다. 주말에 히우마 여 행을 하다가 양털로 털실을 만드는 공장에 방문했는데 100년이 된 기계 를 거쳐 보송보송한 양털이 털실로, 털실이 아름다운 조직으로 짜지는 과 정이 인상적이었다.

78 소를 모는 방법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을 동물과 함께 했다. 숙소에는 주인 없는 고양이 한 마 리가 주변을 맴돌고 있었고 우리의 일 대부분은 가축과 관련된 일이었기에 그럴 수밖에 없었다. 첫째날 우리가 한 일은 소를 모는 일이었다. 농장에서 트랙터로 15분 정도 떨어진 바닷가에는 3개의 울타리가 있고 검은 소떼와 누 렁소떼 두 무리가 서로 다른 울타리에서 풀을 뜯고 있었다. 울타리 안의 풀을 다 뜯어먹으면 다른 울타리로 소를 몰아 이동시켜야 한다. 소들은 겁을 먹으 면 동그랗게 모인다. 사람이 다가가면 겁을 먹어 풀을 뜯던 것을 멈추고 빤히 쳐다보는데 어찌나 귀엽던지 덩치만 커다랗지 갓난아기 같았다. 천천히 소 무리를 둘러싸고 원하는 방향으로 소를 몬다. 처음에는 소들에게 이동해야 한다는 것을 알리기 위해 반복적인 소리를 내는데, 에스토니아어로 비수비 수비수 하면 소들이 약간 겁을 먹고 걸음을 빠르게 한다. 가자는 뜻이라고 했 다. 같은 무리라도 똑똑한 소들이 먼저 가면 다른 소들이 따라 간다. 뒤처지 는 소도 있고 방향을 잃어버리는 소도 있다. 처음엔 장화에 물이 들어갈까봐 조심해서 한발 한발 내딛던 우리는 소가 방향을 잃자 다시 제자리로 돌아오 게 하기 위해 바닷가를 뛰어다녀야 했고 장화에 물이 들어가고 옷이 젖는 것 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워크캠프 기간 동안 소를 네 번 몰았는데, 내 가 아는 가장 좋은 방법은 소를 모는 영리한 개에게 맡기는 것이다. 왜 나무를 태워야 할까 아름다운 농장에서 귀여운 가축들을 돌보며 자연을 즐기는 꿈에 그리던 워크 캠프는 없었다. 문론 자연은 충분히 즐겼다. 양털을 손질하던 이틀을 제외하 고 모든 일정은 바닷가에서 이루어졌고, 개인적으로 유일하게 싫었던 일 하 나가 나무를 태우는 일이었다. 소를 모는 것, 울타리를 점검하고 고치는 것, 양털을 손질하는 것 모두 처음하는 농장 일이라 쉬운 것이 없었지만 모두 보 람있는 일이어서 힘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바닷가의 나무를 베고 태우는 일 은 정말 끔찍했다. 남자들이 전기톱으로 나무를 베고, 가지들을 잘라냈다. 두 꺼운 기둥 부분은 겨울용 땔감으로 모아두고 잔가지들은 모두 태웠다. 여기 저기에 불길이 치솟았고 열기가 온 몸을 후끈거리게 했다. 햇빛이 아니라 불 의 열기에 피부가 타는 것 같았다. 왜 멀쩡한 나무를 베고 태워야 하는 걸까. 이곳은 농사를 짓는 땅도 아니고 단지 바닷가를 둘러싸고 있는 숲일 뿐인데. 이유는 간단했다. 우리가 일하는 바닷가는 철새보호구역으로 지정되어 있는 곳으로 작은 철새들의 서식지이다. 철새들의 알을 먹는 큰 새가 나뭇가지에 올라가 알을 발견하는 것을 막고, 서식지를 더 잘 관리하기 위해서 큰 나무들 을 베어낸다고 했다. 우리는 잔가지를 태우지 않고 사용할 방법을 틈틈이 생 각해봤지만 딱히 좋은 방법은 없었다.

79 79 히치하이킹 목적지를 향해 운전하던 사람이 길가에서 손가락을 치켜세운 여행자를 보 게 되고 그 순간부터 서로에 대한 근거 없는 믿음을 가지고 함께 짧은 여 행을 하게 된다. 얼굴을 마주할 수 없기에 대화가 이어져야만 하고 서로 에 대해 전혀 모르기에 아무런 편견 없이 그 대화에 집중할 수 있다. 바닷 가에서 일하는 마지막 날, 우리를 픽업해주던 Pridu에게 급한 일이 생겨 트랙터를 타고 가던 길을 걸어야했다. 그날 하루 종일 지금까지 하던 바 닷가 일을 마무리 하느라 쉴 새도 없이 일했던 터라 우리는 꽤 피곤했고 길을 걷다가 히치하이킹에 도전! 지나가던 버스가 섰고 즐겁게 집에 갈 수 있었다. 78 히우마에서의 12일을 글로 모두 적으려면 정확히 12일 걸릴 것이다. 히 우마의 물, 블루베리와 모기, 히우마 TIME, 계획과 약속, 끔찍한 음악적 추억, 히우마의 울타리, 쿠라디마사사드, 옙, 빌어먹을모기, 사우나. 우리 는 우리의 추억들을 화이트보드에 적기 시작했고 워크캠프가 끝날 땐 칠 판이 가득 차있었다.

80 10. 영국 " 익숙함에서 새로움이란 설레임으로" 영국_임희진 VAP UK02 서강대학교 맨 처음 워크캠프에 합격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마냥 기뻤다. 올 림픽이 개최되고 있는 시기에 맞추어 영국으로 가게 되다니! 너무 설 레고 심장이 두근거렸다. 하지만 그러한 기쁨도 잠시, 점점 출국 날짜 가 다가오면서 설렜던 감정은 두려움으로 변화하고 있었다. 새로움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었다. 새로운 환경에서, 새로운 사람들을 만나고, 새로운 문화를 경험한다는 것에 대한 두려움. 이러한 두려움은 내가 항상 무엇을 새롭게 시작하려 할 때 나를 덮쳐오는 문제점이었다. 비 행기에 올라타는 그 순간까지도 나에겐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워크 캠프지 까지 찾아가는 데에는 생각보다 오랜 시간이 걸렸다. 비행기에 서 내려 총 두 번의 지하철과 한번의 버스를 타고 10분 정도를 걸어야 만 Stanley Youth Centre에 도착할 수 있었다. 내가 도착했을 때는 이미 4명의 참가자들이 도착해있었는데 그들과 어색한 인사를 나누고 각자 어느 나라에서 왔는지 소개를 했다. 내 뒤로 나머지 5명의 참가 자들이 도착했고 우리는 그렇게 2주 동안 함께 생활할 친구들을 만났 다. 워크캠프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날은 월요일이었기 때문에 토요 일과 일요일에는 동네를 둘러보고 모두 둘러앉아 카드게임을 하기도 했다. 함께 장을 보고 저녁을 먹었는데, 이후로 2주 동안 우리의 생활 에서 가장 크게 차지했던 부분이 바로 함께 장을 보는 것이기도 했다.

81 81 서로를 조금씩 알아가며 서로가 서로에게 조금씩 익숙해지며, 드디어 워크캠프의 공식적인 첫 번째 날이 밝았다. 나와 이탈리아에서 온 친 구 Julia, 그리고 러시아에서 온 Dasha가 함께 5-8살 그룹에 배정되었 고, 스페인에서 온 친구 Guillium과 대만에서 온 Barry와 Vic이 Boys Club에, 마지막으로 포르투갈에서 온 Mafalda와 체코에서 온 Annie와 Claire,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에서 온 Claudia가 함께 9-12살 그룹을 맡 게 되었다. 80 우리의 할 일은 이미 몇 년째 이 summer camp를 진행해오고 있는 지역 봉사자들을 도와 아이들과 함께 프로그램들이 순조롭게 진행될 수 있도록 돕는 역할이었다. 모든 프로그램의 진행은 지역봉사자들이 맡고 있기 때 문에 국제봉사자들은 아이들이 화장실에 갈 때 escort해주거나 다친 아이 들을 office에 데려다 주는 것, 함께 게임이나 미술시간과 같은 진행프로 그램에 참여하여 아이들과 함께 놀아주는 것, 그리고 쉬는 시간과 점심시 간에 아이들이 다치지 않게 supervise하는 것과 같은 자잘한 역할들이 부 여되었다. 아이들이 무사히 그리고 즐겁게 매일의 프로그램을 참여하도 록 장려하고 함께 놀아주는 것이 우리의 주된 임무였지만 처음에 쉽게만 생각했던 일이 사실은 굉장히 고단한 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그 이유는 바로 아이들과 하루 종일 놀아주다 보면 이리저리 뛰어다니기 일수였고, 나에게 비행기를 태워달라고 시도 때도 없이 달려드는 아이들과, 하루에 도 수 차례 아이들을 조용히 시키고 줄을 세우다 보면 내 에너지가 다 빠 져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나뿐만 아니라 캠프에 참가한 모든 국제봉사 자들이 그렇게 느꼈는데 우리는 하루하루가 갈수록 너무 지쳐서 4시가 되 어 아이들이 모두 집에 가고 나면 한동안 멍하니 앉아 서로를 바라보며 바보 같은 웃음을 짓기 일쑤였다. 그래도 하루하루가 지나갈수록 우리는 서로와 더 친해졌고 나중에는 서로의 표정만 봐도 어떤 생각을 하고 있는 지 맞추기도 했다. 그렇게 첫 일주일이 지나고 주말이 찾아왔을 때 우리는 Stanley에서 멀지 않은 Edinburgh와 Durham지역으로 여행을 떠나기로 했다. 그런데 여 기서부터 문제가 발생하기 시작했다. 물론 첫날부터 조금씩 개인주의 성 향이 보이는 몇몇 참가자들이 있긴 했는데, 그 중 사이가 서로 안 좋았던 이탈리아에서 온 두 친구와 체코에서 온 두 친척이 자신들은 가지 않겠 다고 선언을 해버린 것이다. 나는 다같이 캠프에 왔으니 다같이 가는 것 이 옳다고 생각했고, 또 다같이 가서 서로 더 친해질 수 있는 기회라고 생 각했기 때문에 함께 가자고 설득을 했지만 결국 그들을 빼고 나머지 친구 들과 리더가 함께 여행을 가게 되었다. Edinburgh에 도착해서도 개인주 의적인 성향이 강한 유럽에서 온 친구들 때문에 서로 감정이 상하는 일 이 생겼고, 그 사이에서 나는 좋은 분위기를 유지하려 애썼지만, 나도 나 중에는 마음이 지쳐 결국 우리는 각자 구경을 하게 되는 상황에 이르기도

82 했다. 나는 그들을 보면서 왜 이렇게 매정할까 하는 생각도 들었고, 서로 배 려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부분이 2주 동안 워크캠프에서 생활 하면서 가장 아쉬웠던 부분이라고 할 수 있겠다. 워크캠프를 참가했던 다른 사람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때는 서로 너무너무 친 해져서 가족 같은 분위기에서 마지막 날 서로 헤어지기 싫어서 펑펑 울었다 는 이야기도 들었었는데, 우리 캠프는 내 예측과는 달리 매우 조용한 캠프였 다. 나같이 혼자 온 사람도 있었지만 체코에서 온 두 여자친구들은 서로 사촌 이었고, 이탈리아에서 온 두 친구들은 서로 어렸을 때부터 알던 사이라 다른 참가자들과 함께 놀기보단 그들끼리 다른 곳을 가거나 각자 다이어리를 쓰며 조용히 있는 시간들을 훨씬 좋아했다. 그리고 이탈리아 친구들과 체코친구들 사이가 안 좋아지면서 이러한 갈등은 더욱 깊어졌었다. 나는 그 사이에서 최 대한 모두가 같이 함께 이야기 하고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노력했지만 내 노력과 달리 그들은 캠프의 마지막 날까지도 서로 얘기조차 하지 않았고 서로 같은 테이블에서 밥을 먹지도 않는 불상사가 일어나기도 했다. 하지만 대부분의 워크캠프에서의 기억들은 좋은 기억들이다. 매일 밤 옹기 종기 모여 앉아 차의 나라인 영국답게 밀크티를 마시며 서로의 가족이야기나 친구이야기들로 이야기 꽃을 피웠다. 우리 모두가 가장 놀랬던 이야기는 바 로 러시아에서 온 친구에게 4살이 된 아이가 있다는 것이었는데, 알고 보니 이 친구의 언니가 아이를 키울 수 없는 상황이 되어 이 친구가 합법적인 절차 를 모두 밟으며 언니의 아이를 입양했다는 것이었다. 나는 나보다도 세 살이 나 어린 러시아에서 온 Dasha라는 친구가 이런 결정을 내리고 이 아이를 자 신의 엄마와 함께 양육해오고 있다는 사실에 매우 놀랐고 이 친구의 큰 결정 이 참 대단해 보였다. 그래서였는지 Dasha라는 친구는 캠프의 아이들을 대 할 때 우리보다 훨씬 더 진심을 가지고 아이들을 대했고, 그래서였는지 캠프 아이들에게 가장 인기가 많은 국제봉사자이기도 했다. 나는 이 친구의 사연

83 83 을 들으면서 놀라움과 동시에 이 친구의 결정과 그 결정을 해쳐나가고 있 는 상황들이 참 대단해 보였다. 또한 다른 친구들과도 각 나라의 문화와 음식얘기, 또한 각 나라의 아름다운 경치 등에 대해 이야기 하며 내 마음 속에서 점점 더 넓은 세계에 대한 동경이 생기기 시작했다. 82 항상 매일 먹던 음식을 시키고, 항상 가던 길로만 다니고, 새로운 기기보 다는 내 손에 익숙한 옛 것을 좋아하던 내가, 2주 동안 서로 다른 국가의 친구들이 모여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문화를 나누고, 생각을 교류하고, 서로의 마음을 주고받으며 나는 점점 새로운 것에 대한 두려움을 떨쳐내 기 시작했다. 새롭게 무엇인가를 도전하고 싶어졌고, 앞으로 내 인생에 있어서 끊임없이 도전하며 살고 싶은 강한 의지가 생겨났다. 무엇이든지 일단 부딪혀보면 내가 처음에 갖고 있던 고정관념들과 달리 새로운 것도 단순히 두려운 것이 아닌 나에게 즐거움을 주고 인생의 가르침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을 깊이 느꼈다. 캠프를 끝내고 한국에 돌아오니 벌써부터 추억 이 되어 버린 2주간의 워크캠프생활이 그립다. 막상 그 당시에는 너무 힘 들어서 얼른 집에 가고 싶었던 적도 있었지만 그래도 그 시간들을 되돌아 보았을 때 나에게 있어 워크캠프는 내 고정관념을 깨어주고, 나에게 도전 의식을 가져다 준 고마운 인생의 선생님이었다고 할 수 있다. 아직도 새 로운 것을 많이 배우고 느껴야 할 20대인 만큼, 내가 스스로 만들어놓았 던 내 틀에서 벗어나서 다양한 분야의 세상을 체험하고 그런 경험들이 모 여 내가 점차 발전할 수 있는 계기들이 많이 있었으면 좋겠다. 아니, 이제 는 수동적으로 그런 기회를 기다리기 보단, 나 스스로 그런 기회들을 쟁 취하는 사람이 되어가고 싶고 이미 그 첫 발자국은 띄어졌다고 생각한다.

84 " 행복을 걸었던 순간 " 영국_이승훈 VAPUK03 홍익대학교 해외를 한 번도 다녀오지 않았고 실제로 해외에서 생활을 한 번도 안 해봤던 터라 어떻게 준비해야 할지 몰라서 너무 당혹스러웠는데 유네 스코 관련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고 지난 사례를 많이 찾아보고 유네스 코 워크샵에서도 많은 정보를 얻어서 이것 저것 한국에 대해 알릴 것 도 준비하고 워크캠프도 준비하면서 워크캠프를 가기만을 기다렸습니 다. 저 같은 경우에는 한국의 소리를 알리고 싶어서 워크캠프를 떠나기 전 까지 단소를 연습했습니다. 단소를 구입하는 것에 있어서도 평범한 단 소 보단 정말 우리의 소리를 가진 단소를 구입하기 위하여 수소문 끝 에 전통단소를 만드시는 분을 찾아가서 직접 구입하기도 하였습니다. 드디어 출국 날, 12시간이나 되는 긴 여정을 거쳐 영국에 도착하였습 니다. 제가 워크캠프를 하는 곳은 영국의 시골 마을에 있는 단체였습 니다. 몇몇 친구는 저와 같은 기차를 타고 캠프까지 같이 갔습니다. 그 곳에 도착하니 몇몇 친구는 먼저 도착해있었습니다. 워크캠프 첫날 저희는 서로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영국, 프랑스, 독일, 스페 인, 오스트리아 그리고 벨기에 까지 다양한 나라에서 워크캠프에 참여 하기 위해왔습니다. 저희 워크캠프 같은 경우는 캠프 리더가 중간에 한 번 바뀌었습니다. 문제가 있어서 바뀐 것은 아니고 영국 캠프 측의 원래 계획이였던 것 같습니다. 처음부터 정든 리더와 헤어지는 것이 못내 아쉬웠지만 새 로운 캠프 리더와 지내는 것도 새롭고 조금은 다른 분위기라서 좋았습 니다. 그리고 저는 캠퍼들이 다 젊을 줄 알았는데 14살 독일 여자 아 이와 그 아이의 엄마가 같이 캠프에 참여 하여서 엄마 같은 분이 저희

85 85 캠프에 같이 참여 하였습니다. 하지만 엄마라는 생각이 안 들고 친구 같 을 정도로 다들 잘 어울려서 잘 지냈습니다. 게임도 같이 하고 모든 활동 을 같이 하니까 세대 차이를 못 느꼈습니다. 한국 이였으면 좀 젊은 층과 나이가 있는 분들이 어울리기가 조금은 어렵고 서먹한데 서양 같은 경우 는 서로 이름을 부르면서 조금은 친구 같이 지낼 수 있어서 색 달랐습니 다. 84 워크 캠프가 시작하자 모두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저희의 첫 번째 일은 창고 같은 오래된 건물을 청소하는 일과 주변 풀베 기 였습니다. 저는 서양 사람들이 게으르고 일을 열심히 안하는 편이라는 얘기를 유네스코 워크샵 때 들었었는데 그것과는 다르게 모두들 열심히 일을 했습니다. 특히 벨기에 친구는 군대를 나온 저보다 더 열심히 일하 고 의욕이 너무 넘쳐서 모든 일을 잘 하였습니다. 그래서 제가 오히려 조 금 힘들 정도 였습니다. 다음 주어진 일은 연못 주변 가꾸기였습니다. 풀도 베고 식물도 심었습니 다. 또 다른 일은 땅을 파고 식물을 묻는 일이였습니다. 비가 많이 올 때 건물 주위로 물이 차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서입니다. 또 건물의 창문과 계단 청소와 페인트칠을 하였습니다. 대부분의 일은 페인트칠과 풀 베기 였습니다. 그리고 삽질. 그래서 모두들 일 할 때 Dig For victory!를 외치 면서 재미있게 일 하였습니다. 저희 워크캠프 경우에는 매주 금요일에 탤런트 쇼가 있었습니다. 노래, 연주, 마술, 동화구연 등등 사소한 탤런트라도 쇼에 출연하여 다같이 즐 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부터 준비한 단소 연주를 한복을 입고 선보였습니다. 또한 연주 전에 한국에 대한 간략한 소개와 독도 이

86 야기도 했습니다. 한곡은 아리랑을 혼자 독주 하였고 한곡은 오스트리아 친 구의 리코더와 저의 단소를 같이연주하였습니다. 한국의 음식을 소개하기 위해서 호떡, 라면, 불고기, 초코파이도 가져갔습니 다. 저희 캠프는 각국의 음식을 소개 하는 시간이 없어서 제가 직접 캠프 측 담당자님께 말씀드려서 저녁 식사를 한국 음식으로 준비하는 시간을 갖게 되 었습니다. 제 생각에는 그냥 소박하게 불고기를 요리해서 맛만 소개하려고 했는데 캠프 측 담당자가 대략 50인분의 요리를 해달라고 하셔서 조금 당혹스러웠지만 프 랑스 친구가 도와준다고 하여서 열심히 준비했습니다. 비록 50인의 저녁식사 가 저와 프랑스 친구에게 달려 있다는 중압감이 많았습니다. 밥도 짓고 매운 것을 못 먹는 사람과 잘 먹는 사람을 위하여 각각 다른 소스 의 불고기를 요리 하였습니다. 열심히 정성껏 요리한 덕분에 다들 맛있었다 며 남은 음식이 거의 없을 정도였습니다. 또 하루는 캠프측 관계자분의 생일 이여서 파티가 있었는데 스페인 친구가 스페인의 전통 음식인 하몬을 파티음식으로 준비 해주었습니다. 돼지고기를 소금에 절여서 훈제한 음식이였는데 맛있었습니다. 그리고 이탈리아 친구도 이탈리아식 스파게티를 요리해주었는데 한국에서 먹는 스파게티와 맛이 똑 같았습니다. 보통 저녁 늦게 까지 이야기를 하는 편이 였는데 조금 출출 하다 싶을 때 제 가 라면을 끓여서 같이 나눠 먹었는데 대부분 친구들은 잘 먹었지만 스페인 친구 둘은 너무 맵다며 울기 까지 했습니다.한국의 소주도 가지고 가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보냈습니다. 호떡 역시 제가 가지고 가서 오스트리아 친구와 함께 만들었는데 오스트리아 친구가 제가 만든 호떡보다 오히려 더 예쁘게 잘 만들었습니다. 모두들 맛있 게 잘 먹어 주었습니다. 심지어 더 없냐고 한 친구도 있었습니다. 저희 워크캠프는 주말에 쉬지 않고 휴일을 따로 정해서 쉬기로 했었는데 휴 일에 다 같이 하이킹도 가고 주변 마을에 놀러가기도 하였습니다. 조금 특별 한 것은 런던 올림픽이 저희 워크캠프 날짜와 같았기 때문에 다 같이 올림픽 스타디움에 구경을 갔었는데 정말 사람도 많고 세계 각국의 사람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올림픽 경기 표가 너무 비싸서 경기를 보지 못한 것이 조 금 아쉬웠습니다. 앞으로 세계 어느 나라나 갈 수 있겠다라는 생각과 여러 나라의 언어를 공부 하고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한 터키 친구를 만났는데 그 친구는 터키어, 영어, 스페인어, 프랑스어, 독일어를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어느 나라의 친구와도 깊은 대화를 했었고 더 빨리 친해 질 수 있었습니다. 그런 점에서

87 87 저도 다른 나라의 언어를 공부하고 싶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더욱더 활발한 성격을 가져야 겠다는 생각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한 영국 친구는 너무 너무 밝고 활기찼는데 그 친구도 역시 다른 나라의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모습이 보기 좋았습니다. 86 그렇기 때문에 앞으로 한국에서 더욱더 활발한 성격과 국제적 사고를 가 지고 외국어도 공부를 많이 해서 국제적으로 일을 하거나 여행을 가면서 잦은 해외 활동을 하고 싶습니다. 물론 워크캠프에서 만난 친구들과도 계속 적인 연락을 하고 그 친구들이 한국에 온다면 적극적으로 도움을 주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이순간, 워크캠프의 모든 것들이 너무 꿈같아서 꿈속에 또 다른 꿈을 꿨던것 같고 그 시간들이 정말 너무 행복해서 절대로 잊고 싶 지 않습니다.

88 11. 우크라이나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기" 우크라이나_홍가영 ALT 08 숭실대학교 첫 연애, 첫 등교, 첫 데이트, 첫 여행.. 세상 모든 시작은 설렘과 두 려움으로 시작됩니다. 언제나 새로운 길 위에서 길을 잘 못 들까봐 두 렵고 시간이 더 걸릴까봐 조급합니다. 하지만 낯선 길을 헤매는 즐거 움이 얼마나 큰 것인지를 잘 알고 있고, 그 속에서 저는 더 넓어지고, 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만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제 여정의 시작도 두려움과 설렘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워캠을 가기 전 저는 항상 안정적이고 후회 없는 생활을 하길 원했습 니다. 그래서 항상 미래가 보이지 않는 것에는 도전하지 않고 보장된 도전에만 도전하는 척 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캠프를 통해서 저는 처음으로 보이지 않는 도전을 했고 인 생관이 너무 많이 바뀌었습니다. 정해지지 않는 길을 가는 도전 정신 의 짜릿함을 맛 보았고, 조금 더 돌아가더라도 제가 하고 싶은 것, 떨 리는 것을 하고 싶단 생각을 가지게 되었습니다. 워크캠프는 저에게 이런 의미로 터닝 포인트 인 것 같습니다.

89 89 유럽의 문화도 저에게 위와 같은 의미로 다가왔습니다. 처음 캠프를 할 때 든 생각은 아~ 다른 문화를 가졌으니 무조건 이해해야겠구나! 였 습니다. 그러나 저의 이러한 오만방자한 생각은 3일도 안되어 산산 조각 나 버렸습니다. 유럽 아이들과 아침부터 저녁까지 그리고 잠도 같이 자 는 생활 속에서 저는 완전히 다른 정서와 문화를 경험했습니다. 처음에는 다르니까 무조건 이해해야지. 다른 문화이니까 에서 어디까지가 서 양의 개인주의이고 어디까지가 이기주의인가? 에 대한 물음에서 대립이 일어나더군요. 88 결국 저희 캠프 멤버들은 1주일이 지날 무렵 서로에 대한 이해에 지치기 시작했고 트러블이 일어나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한계를 느낀 저희 멤버 들은 간단한 술이 있는 주말 저녁 서로에 대해 의사소통하기 시작했고, 서로에 대해 진정으로 이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저는 정말 뼛 속부터 다름을 느꼈고 더욱더 흥미롭고 재미있었습니다. 무조건 이해하는 다른 문화가 아닌! 마음으로 이해하는 문화가 진정으로 그들과 소통하는 방법 이었음을 깨달았습니다. 저는 정치외교학을 공부하면서 제일 흥미를 느꼈던 분야가 각 나라의 정 당과 의회를 배우는 비교정치 분야였습니다.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공부하는 재미를 느껴보았던 분야입니다. 그래서 그런지 다른 나라의 정 치에 대해서 들을 때면 정말 흥미가 솟구칩니다. 그런데 이번 워크캠프에서 저는 독립운동을 하는 스페인 친구를 만났습니 다. 그 친구를 통해 BASQ Country에 대해서 알게 되었습니다. 스페인 안에 작게 존재하는 이 자치정부는 스페인으로부터 독립을 원하며 정서적 으로나 정치적으로 스페인으로부터 독립되어있지만 아직은 스페인에 속 해있는 나라였는데요. 분리된 국회가 존재했고, 심지어 대통령도 국기도 따로 존재했습니다. 국적은 스페인이지만 자신은 Spanish가 아니며 심지 어 스페인이 싫다고 말하는 우나이에게서 저는 정서적인 이유와 경제적인 이유 등 각가지 이유에 대해서 들었고 너무나 흥미로웠습니다. 직접 BASQ Country 친구에게 듣는 독립운동 이야기는 책에서 보고 인 터넷으로 보는 어떤 경험보다 저에게 흥미를 주고 관심을 주었습니다. 서 로의 문화, 정치적인 사건 뿐만 아니라 각 나라의 결혼 문화 등 생활 문화 의 다양함도 너무 재밌었습니다. 사건의 중심에 있는 사람에게 직접 전해 듣는 그 나라의 문화는 더욱 더 직접적으로 다가왔고, 한국에 도착한 지 금 다양한 기사와 인터넷 자료를 보며 공부도 하게 되었습니다.

90 마지막으로 워크캠프는 제게 가슴이 뛴다는 것을 주었습니다. 저의 생애 첫 해외여행과 첫 워크캠프는 저에게 가슴이 뛴다는 것과 마음 속에, 가슴 속에 열정을 한 아름 꽉 채워 주었습니다. 22년만에 처음으로 익숙하지 않은 외 모, 익숙하지 않은 거리, 익숙하지 않은 언어 속에서 그리고 그 낯설음을 몸 소 헤쳐나가며 얻은 가슴 속 뜨거움을 잊지 못하였고 저에게 그 어떤 체험으 로도 얻지 못할 자신감을 주었습니다. 학벌에, 스펙에 쌓여 지내던 저에게 무 엇이든 할 수 있을 거란 자신감을 주었고, 미래의 안정감 대신 가슴이 뛰는 것을 할 수 있는 용기를 주었으니까요.

91 90 91 "경험의 공유의 장, 국제워크캠프" 우크라이나_이재우 Alt10 홍익대학교 올해 초에 학교에서 주관하는 동계 해외봉사에 참여하여 네팔에 다녀온 적이 있다. 이때의 경험을 계기로 해외봉사활동에 조금 더 관심을 갖게 되었고 하계 유네스코 워크캠프에도 지원하게 되었다. 원래 1지망으로 신 청하였던 프랑스는 탈락하였지만 운이 좋아 2지망인 우크라이나에 합격 할 수 있었다. 이후 워크샵과 기타 오리엔테이션 등을 통하여 다른 장소 로 워크캠프를 가는 사람들을 만나면서 서로 정보와 의견을 교환하면서 워크캠프의 진정한 의미에 대해서 찾아가기 시작하였다. 재밌는 점은 그 어느 곳을 가는 사람이든 서로 상대방을 부러워하였다. 독일에 가는 참가 자가 인도 참가자를 부러워하고 인도 참가자는 에스토니아 참가자를 부러 워하였다. 아마도 자기가 해보지 못할 경험을 상대방이 할 것이라는 점에 서 다들 워크캠프 탈락자들이 들었으면 화났을 법한 부러움을 표현하였 다. 이렇게 다른 참가자들과 대화를 할수록 합격했을 때의 기대와 희망은 근심과 고난으로 바뀌어 버렸다. 이전의 봉사활동과는 달리 모든 것이 내 개인의 판단 하에 이루어져야 했기 때문이다. 미팅 장소까지 가기 위한 교통편, 워크캠프 기간 중에 발표 및 선보일 여러 가지 준비물 등을 도와 주는 사람 없이 모두 내가 직접 해야만 하는 것이다. 다른 참가자들은 서 로의 정보통일 뿐 직접적인 도움을 주지는 않는다. 서구 문화 특유의 개 인주의를 이렇게 간접적으로 맛보기 시작하였다. 일정을 짜는 것이 순조롭지만은 않았다. 대부분의 워크캠프 참가자들이 그러하듯 워크캠프 및 유럽 배낭여행 카페를 찾아 가입을 하였고 정보를 수집하였다. 우크라이나는 엄연히 유럽권의 국가이면서도 다른 유럽의 국 가들만큼 많이 알려지지 않아서 정보가 많지 않아 처음에 고생하였다. 게 다가 같은 참가자를 찾아보았지만 나타나지 않아서 답답하였다. 어쩔 수 없이 혼자만의 일정을 계획하였다. 출국 날짜와 워크캠프 전, 후로 다닐 여행 계획을 미리 짜고 인포싯이 나온 후에 구체적인 계획을 확정해 나갔

92 다. 일정이 완성된 후에는 짐과 준비물들을 하나둘씩 챙기기 시작하였다. 다 행스럽게도 내가 참여하는 캠프는 식사와 숙박이 모두 완벽하게 제공되는 곳 이라 침낭이나 요리 재료를 개인적으로 가져가지 않아도 되었다. 다만 가끔 씩 각자 나라의 요리를 선보일 기회가 있을 수도 있다는 정보에 의해 몇 가지 양념들을 준비해 갔다. 교통편과 숙박을 모두 예약하고 워크캠프 이후에 갈 러시아 여행과 우크라이나의 이해를 돕기 위해서 학교에서 러시아 문화 관련 수업도 수강하였다. 이렇게 날짜가 흐르고 대망의 7월 11일, 42일간의 여정 을 인천 공항에서 시작하였다. 처음 여행의 시작은 런던이었다. 어렸을 적 영국에서 살았던 경험이 있어서 옛 추억을 되살리고 싶어서였다. 변한 것은 거의 없었다. 사람만 바뀌었을 뿐 장소나 풍경은 그대로였다. 한국이었으면 재개발이나 재건축 등으로 많이 바 뀌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서 다행이면서도 1년만 지나도 순식간에 바뀌는 한 국의 풍조를 생각하니 다소 씁쓸하기도 하였다. 이후 런던에서 체코의 프라 하, 폴란드의 크라쿠프와 바르샤바를 거치면서 여러 종류의 사람들을 만났 다. 한국인들을 비롯한 동양인들도 간간이 볼 수 있었고 유럽인들은 물론 미 국, 남미, 호주같이 먼 곳에서 온 사람들도 만날 수 있었다. 이렇게 그들과 교 류하면서 서서히 나의 경험을 늘리기 시작하였다. 바르샤바에서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로 당초에 야간열차를 이용하려고 하 였으나 유레일패스가 적용되지 않아(애초에 있지도 않았지만) 가격도 비싸고 시간도 너무 오래 걸리기에 급하게 저가 항공사로 계획을 변경하고 숙소도 새로 예약하였다. 이때 재미있었던 점은 키예프의 보리스필 공항에 착륙하니 기내에 있던 승객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하였다. 소문으로만 듣던 러시아 항 공사의 박수갈채를 우크라이나 항공사에서 경험하니 나도 모르는 사이에 죽

93 93 다 살아난 경험을 했다는 생각에 순간 소름이 돋았다. 이런 해프닝을 뒤 로하고 공항을 나와 예약한 숙소로 향하였다. 그전까지는 어느 정도 통하 던 영어가 이곳에서부터 먹통이 되기 시작했다. 우크라이나 사람들은 영 어를 잘 하지도 못 할 뿐더러 할 줄 알아도 발음이 매우 안 좋았다. 그래 서 서로 영어를 못하는가보다 하는 오해가 종종 발생하곤 했다. 92 다음날 미리 약속된 미팅 포인트로 향하였다. 뜨거운 태양 아래에 캐리어 와 짐들을 이끌고 미팅 포인트에 조금 이르게 도착하니 예상대로 아무도 없었다. 조금 기다리니 하나 둘씩 나타났다. 캠프 장소로 떠나야 하는데 나를 제외한 한국인 두 명은 비행기 시간이 맞지 않아 다음날 도착한다고 한다. 그렇게 모여서 우리는 캠프 장소로 이동하였다. 짐들은 모두 현지 기관에서 나온 사람의 차에 실어서 미리 보내고 우리는 몸만 버스를 타 고 이동하였다. 도착한 곳은 키예프에서 남동쪽으로 100km 정도 떨어진 페레야슬라브 - 흐멜니츠키 란 지역이다. 우리가 일을 해야 할 박물관과 숙소가 있는 곳이다. 숙소는 박물관 근처에 방학을 맞아 비어있는 학교 기숙사를 잠시 사용하기로 하였다. 간단히 짐을 풀고 저녁을 먹고 나서 본격적인 자기소개가 시작되었다. 총인원은 캠프 리더까지 합쳐서 열 세 명이었다. 두 명의 우크라이나 캠프 리더, 나를 포함한 한국인 셋, 스페인 과 프랑스에서 남녀 둘씩, 터키 남학생 한명, 세르비아, 러시아, 체코에서 각각 여학생이 한명씩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후에 간단한 게임과 술자 리를 통해 서로에 대해 조금씩 알아가면서 첫날을 마무리하였다. 두 번째날 우리가 일해야 할 박물관을 찾아갔다. 야외박물관이라는데 직 접 보니 민속촌 같은 곳이었다. 전체적으로 한번 둘러보면서 가이드를 받 은 뒤 우리가 작업해야 할 집으로 향하였다. 마지막으로 페인트칠한 지 10년도 더 돼서 많이 낡아 보이는 우크라이나 전통 방식의 집이었다. 우 리가 약 2주간 해야 할 일은 바로 그 집의 낡은 페인트를 벗겨내고 새로 칠하는 것이었다. 작업은 다음날부터 하기로 하고 점심을 먹고 나니 나머 지 한국인 두 명이 도착하였다. 둘 다 공군사관학교 생도들이었다. 캠프 리더들이 이 캠프는 보통 여자가 더 많은데 이번 기수는 특이하게 남자가 더 많다고 하였다. 덕분에 열심히 일할 의지가 생긴 계기였다. 앞으로 생 활할 때 알아야 할 것들을 전반적으로 배우면서 오후를 보내고 저녁에 리 더들이 우크라이나에 대해서 소개하는 발표를 듣고 간단한 술자리가 이어 졌다. 이후의 평일 생활은 대체적으로 비슷했다. 오전 9시부터 오후 1시까지 작 업을 한 뒤 2시쯤에 시내에 있는 카페에서 점심식사를 한다. 스페인에서 온 참가자들 덕분에 점심 식사 후에는 씨에스타를 갖고 오후 4,5시쯤 일 어나서 근처의 강가에 가서 수영을 하거나 운동장에서 축구, 배구 등 다 같이 운동을 한다. 그 후 저녁 7시 반쯤에 저녁 식사를 하고 숙소로 돌아 와 참가자들이 각자의 나라에 대해 소개하는 시간을 갖는다. 발표가 끝나

94 면 맥주를 한두 병씩 마시고 잠에 든다. 작업은 남자들이 많은 덕에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어 다소 여유롭게 할 수 있었다. 단합도 좋고 참여도 좋아서 오후 일정에 모두 빠짐없이 함께하였으며 술 좋아하고 떠들썩한 사람들이 모인 덕 에 매번 술자리는 즐거우면서도 과음하지 않도록 주의하였다. 주말에는 참가자 모두 함께 키예프로 나들이를 나왔다. 리더들의 주도하에 체르노빌 박물관, 성 앤드류 대성당, 성 소피아, 성 미카엘 대성당, 독립광장 등을 돌아보며 우크라이나의 역사와 문화, 예술 등을 엿볼 수 있는 기회였다. 특히 흰색 벽과 초록색 및 금으로 덮인 지붕으로 꾸며진 성당들은 과거 러시 아 역사의 시발점이었던 키예프의 위용을 실감할 수 있었다. 또한 우크라이 나 리더들 덕분에 여러 가지 우크라이나의 생활 적인 면모도 경험해 볼 수 있 는 좋은 기회였다. 그렇게 2주에 가까운 시간이 금방 지나가고 토요일까지 예정이었던 캠프가 목요일에 모든 작업이 끝남으로 사실상 종료가 되었고 먼저 떠나는 참가자들 이 있어서 하나둘씩 정리를 시작하였다. 그 2주 동안 서로와 많은 대화를 하 고 함께 많은 것들을 경험하여서 떠날 때 다들 아쉬워서 쉽사리 발걸음이 떨 어지지 않았다. 언제가 될지 모르는 다음을 기약하면서 작별인사를 하고 서 로의 일정을 향해 떠나갔다. 캠프 종료 후에 나는 함께했던 스페인 남학생과 우크라이나의 옛 수도인 르비브로 여행을 떠났고 이틀 뒤에 서로의 길이 갈 리면서 다시 혼자가 되었다. 이 워크캠프에 참가하기 전에 지인들에게 가장 많이들은 질문 중에 하나가 바로 유럽의 국가가 왜 봉사활동이 필요한가? 였다. 흔히들 국제워크캠프가 단순한 해외봉사활동이라고 알고 있다. 큰 의미에서 보면 워크캠프는 해외봉 사활동이 맞다. 하지만 직접 참가하여 활동하다 보면 단순한 봉사활동 이외 의 것도 발견할 수 있으며 워크캠프를 통해서 봉사 에 대한 나만의 정의를 내릴 수 있었다. 사실 겨울에 학교에서 주관하는 해외봉사활동에 참가하여 네팔에 방문할 때까지 봉사란 조금 더 여유롭고 기회가 많은 사람이 그렇지 못한 사람에게 단지 베푸는 행동이라고 생각하였다. 하지만 네팔에서 아이들 의 순수한 눈빛과 경제력이 약한 나라임에도 우리나라 사람들보다 더 행복하 게 사는 모습을 보면서 내가 과연 베풀기만 하였는가하는 의구심이 들었다. 그런 의문이 이번 워크캠프를 하면서 봉사란 바로 베품이 아닌 나눔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단지 물질적인 것에만 국한된 것이 아닌 서로가 가지고 있는 경험과 생각들을 아무런 물질적 대가없이 나누는 것, 비록 어느 한 쪽이 더 많거나 적을지라도 조금이라도 나눌 수만 있다면 그것이 바로 진정한 봉사활 동이라는 것이다. 누군가 혹은 어느 단체에게 좋은 일을 행할 때, 단지 그들 이 나에게서 배웠을 뿐만 아니라 나또한 그들의 일상과 고난을 보면서 그들 의 경험을 공유하며 서로가 한층 성숙해지는 것이 봉사이기 때문에 어느 한 쪽이 우월하고 열등한 관계란 의미가 없는 것이다. 어찌 보면 우리는 매일매 일 상대방과 마주치고 교류하면서 일상에서 자연스럽게 봉사를 하고 있는 셈

95 95 이다. 다만 그런 일상적인 교류가 아닌 내가 쉽게 겪어보지 못할 경험들 을 나누는 것을 특별히 봉사 라 지칭한다고 생각한다. 94 장기 유럽 여행이나 이런 국제워크캠프에 참가했다가 귀국한 학생들이 흔 히들 꿈만 같았다. 한국으로 가면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 라는 푸념을 한다. 워크캠프 이전에는 나도 같은 생각을 하였다. 언젠가 이 꿈이 끝나 면 다시 현실로 돌아가야겠지 하고 말이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경험 을 공유하고 친구들과 함께 했던 시간들은 매일매일 나의 사고를 새롭게 해주었기에 이 모든 것들은 현실이며 꿈과 현실이 아닌 단지 일상과 비일 상으로 구분할 것이다. 꿈으로 치부하기엔 내가 사귄 친구들과 함께했던 시간은 너무나 생생했으며 소중하기 때문이다.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한 번 더 워크캠프에 참가하여 또 다른 경험을 나누어 보고 싶다.

96 12. 이탈리아 " 워크캠프를 통해 처음 의 설렘을 느끼다." 영국_임희진 VAP UK02 서강대학교 워크 캠프를 가기 전에 언어에 대한 막연한 두려움이 있었습니다. 이 탈리아 사람들은 우리 나라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영어를 잘 쓰는 편이 아니라던데.., 그렇다면 그들이 원하는 것을 내가 어떻게 알아차릴 까?, 나는 이탈리아어도 모르는데 과연 장애인분들과 친해질 수 있 을까? 와 같은 언어로 인한 문제에 대해 두려움을 안고 떠났습니다. Meeting point에 여유 있게 도착하기 위해 2일 전에 도착하는 일정 을 세웠고, 그 2일 동안 잠깐이나마 이탈리아 사람들이 영어를 쓰는 곳에서의 경험을 하게 되었습니다. 이탈리아어의 억양이 섞인 영어였 지만, 조금은 알아들을 수 있었고 이때부터 그에 대한 두려움은 점차 사라졌습니다. 또한 Operator 중 한 명인 Barbara가 영어를 아주 잘 했기 때문에 그 Operator가 캠프 생활하는 데 아주 많은 도움이 되었 습니다. 물론 이 분뿐만 아니라 우리를 위해 쉬운 영어를 섞어서 바디 랭귀지로 우리에게 도움을 주었던 Operator들도 많이 있었습니다. 사전에 알고 갔듯이, 캠프 봉사자들에게 주어진 일은 센터에 있는 장 애인분들과 아침 9시부터 오후 5시까지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입니 다. 대상이 장애인분들이었기 때문에 일과가 매일 같았습니다. 9시부 터 10시까지는 서로의 안부를 묻는 시간, 10시부터 12시까지는 집안 일(예를 들어 센터를 청소하는 일, 점심식사 준비하는 일, 재활용 종

97 97 이 만드는 일 등), 12시부터 오후 2시까지는 점심식사시간, 오후 2시부터 오후 5시까지는 창의적인 활동들을 했었습니다. 96 함께 활동을 했던 것 중에서 첫날부터 가장 인상 깊게 느꼈던 것은 그들 의 식사 모습에서였습니다. 우리 나라는 물론이고 캠프 친구들의 나라이 었던 리투아니아, 터키 또한 한 상에 다 차려 놓고 먹는 것이 일반적입니 다. 그러나 이들은 세 번째까지 음식까지 먹고 게다가 식사 시간은 2시간 으로 상당히 깁니다. 첫 번째 음식은 파스타 또는 리조또를 먹고, 두 번째 음식은 샐러드와 치 즈 그리고 육류 또는 생선을 먹고 빵을 먹기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과일 과 이탈리아 커피를 마시는 것으로 식사를 마무리합니다. 이들에게는 식 사 순서를 거스르는 것은 이상한 일입니다. 제가 한 번은 바나나를 먹다가 감자튀김을 먹었는데 그것이 이상해 보인 다고 얘기를 해주기도 했고, 또 이들에게 리조또는 점심 또는 저녁에 한 번씩 먹는 음식인데 쌀 요리를 세끼 모두 챙겨 먹는 한국인도 신기하다고 느낍니다. 첫 날에는 Operator들, 장애인분들과 인사를 하고 식사만 함께 했었는데 단지 식사만 함께 했을 뿐인데 그때부터 서로에 대한 신세계가 펼쳐지기 시작했습니다. 첫날은 새로운 식사문화도 처음이었고 서로 다른 나라에 살던 친구들을 만나는 것도 처음이었던 날이었습니다. 나와 다른 모습으로 다른 환경에 서 살고 있던 친구들이 좋은 일로 한 자리에 만나는 것이 엄청난 인연처 럼 느껴졌기 때문에 아주 친한 친구 관계가 되고 싶었습니다. 특히 저와 마음이 맞았던 두 명의 터키 친구들과 시간을 많이 보냈습니

98 다. 부족한 영어이지만 그들과 생각을 공유하는 과정에서 정이 많이 들었고, 헤어질 때는 그들과 헤어지는 것이 아쉬워 많이 울기도 했습니다. 캠프가 끝 나고 함께 여행을 하고 싶었으나 저의 너무 딱 맞는 스케쥴로 인해 그들과 함 께 하지 못해 한국에 돌아 온 지금까지도 아쉬움이 떠나질 않습니다. 반면, 저의 생각과 아주 다른 친구도 있었습니다. 캠프리더이었던 리투아니 아 친구였는데, 이 친구의 성격은 다름의 하나로 받아들여야 함을 알게 되었 습니다. 제 일기를 보면 이 친구에 대해 고민한 흔적이 가장 많습니다. 왜냐 하면, 제 입장에서는 짧은 3주 동안 몇 안 되는 캠프 친구들이 항상 함께 무 언가를 (예를 들어 당일치기 여행 또는 저녁 식사 등) 했으면 좋겠다는 것이 었지만 그 친구의 입장은 당일치기 여행도 자신이 가고 싶은 곳 에 가야 하 고 저녁식사도 꼭 함께 가 아니라 자기가 먹고 싶은 음식을 먹고, 먹고 싶은 때에 먹는 것 이라고 생각하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언제나 혼자 다니거나 한국인 오빠와 함께 다녔습니다. 이 오빠는 리 투아니아 친구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를 했고 오히려 자기 하는 일을 열심히 하는 친구 라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같은 한국인이라도 이 오빠와 저의 생 각이 다른 데 당연히 리투아니아 친구와의 생각이 다를 수 밖에 없었음을 캠 프가 끝날 때쯤 되어서야 깨달은 것 같습니다. 이 친구로 인해 심리적으로 조금은 힘들었지만 이 경험을 통해서 다름 을 어 떻게 이해해야 하는 것인지 맛 을 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맛 을 보았다 는 것은 아직도 제가 다름 을 이해하기에는 부족한 이해력을 가지고 있음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첫날의 설렘은 한 주가 정신 없이 지나가고 나서야 조금씩 줄어들기 시작했 습니다. 이러한 설렘이 사라졌다고 느끼게 된 것은 이탈리아어가 익숙해지는 순간부터였습니다. 그래서 앞서 느꼈던 언어에 대한 두려움도 오히려 장애인 분들을 대하면서 많이 사라졌습니다. 장애인분들 중에서도 말씀을 잘하시는 분도 있고, 심지어 음악에 나오는 영어를 외어서 우리에게 얘기해주시는 분 도 있었지만, 반면 짤막한 단어만 구사하시는 분도 있었습니다. 여기서 저는 반신반의 했던 것을 처음으로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것은 그들 과 친해지는 데에는 언어가 중요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단지 간단한 안부인 사를 하고, 반갑다고 안고 뽀뽀를 하고, 손을 잡고 춤을 추는 과정에서 그들 과 더 빨리 친해졌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들의 언어 아주 신경을 쓰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이탈리 아어가 어느 정도 선에서 필요하다고 느꼈기 때문에 그들로부터 간단한 이탈 리아어를 배우기도 하고, 우리도 한국어를 알려주기도 했습니다. 이 과정에 서 그 전보다 더 친해진 분들도 있습니다. 처음 갔던 이탈리아에서 제 일생에 있어서 처음 의 경험을 많이 하고 돌아

99 99 왔습니다. 처음이었던 대학생활이 지나고 3년째 학교를 다니며 처음 이 라는 단어보단 익숙 하다는 단어를 더 많이 썼던 제게 이번 워크 캠프의 새로운 경험은 대학교 신입생 때 느꼈던 풋풋함 을 안겨주었습니다. 소 중한 이 경험이 저의 일부분이 되었다는 사실이 아직도 믿어지지 않습니 다. 98 믿기지 않는 특별한 경험을 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어떤 일을 함에 있어서 그 전보다 두려움 이란 단어가 생각나는 빈도수가 많이 줄었습니다. 그 전에는 두려움 이란 단어로 인해 고민을 했던 시간이 더 많았던 반면, 지 금은 일단 해보자. 라는 생각부터 먼저 생각납니다. 앞으로 제가 어떤 모 습으로 변화할지 궁금하고 그 모습이 기대되기까지 합니다.

100 "RADIO ONDA DURTO" 이탈리아_김기열 CPI12 홍익대학교 4월의 어느 날, 기다리던 유네스코 워크캠프 공지가 학교 홈페이지에 떴다.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많은 나라들이 있었다. 그래서 오히려 고 민을 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독일과 스페인이 가고 싶었는데 고민 끝 에 이탈리아를 선택 했다. 평소 관심이 있었던 나라이기도 하고 한번 쯤 가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워크캠프의 내용이 축제였기 때 문에 더욱 끌렸다. 물론 가고 싶다고 갈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나라 를 선택한 후 신청하고 면접도 봐야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느 나라 를 선택하느냐에 따라 워크캠프의 내용이 달라지는 것이기 때문에 중 요한 문제였다. 그렇게 신청서를 작성하였다. 신청서에는 나에 대한 기본 정보는 당연히 있었고 신청 동기, 하고 싶은 것들을 적게 되어 있었다. 이런 것들을 적다 보니 지난 겨울의 해외 봉사 이야기를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사실 학교에서 하는 봉사 활동을 처음 한 것은 1학년 때 갔던 농활이 다. 그 때는 뭣도 모르고 학교 선배들이 가는 농활을 따라가는 정도였 다. 그러다가 2학년이 되어서는 1학년 후배들을 이끌고 농활을 갔었 다. 그리고 군대를 다녀온 후에는 방과후 학교라는 것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적이 있다. 이렇게 봉사 활동을 몇 번 하다 보니 해외 봉사라 는 것을 알게 되었다. 학교 사람들과 함께 외국에 나가서 봉사 활동을 하는 것이었다. 봉사에 큰 관심이 있었던 것은 아니었지만 학교 사람 들과 함께 외국에서 무언가를 한다는 것은 나에게 정말 흥미로운 것이 었다. 그래서 지난 겨울에 네팔 해외봉사를 신청해서 다녀왔다. 그 때 이후 로 단체활동에 관심이 더 많아졌다. 내가 원래 좋아했던 사람들과의 모임에 봉사라는 공동의 목표가 더해지니 재미있는 활동이 되었다. 그 래서 올해는 유네스코 워크캠프를 기다렸고 지원하게 되었던 것이다.

101 101 그리고 운이 좋게 합격하게 되었다. 처음에는 합격 여부를 걱정했었는데 합격을 하고 나니까 워크캠프를 준비하는 것에 대해 걱정이 되기 시작했 다. 비행기 티켓부터 시작해서 다른 사람들은 앞뒤로 여행도 한다는데 어 떻게 해야할지도 모르겠고 비자, 경비, 준비물 등 하나부터 열까지 혼자 준비해야 하는 것이다 보니 막막해지기 시작했다. 그래도 내가 하고 싶어 한 것이니 하나씩 준비하기 시작했다. 100 가장 중요한 것은 비행기 티켓이었는데 일정이 대충이라도 짜여져야 티켓 을 살 수가 있었다. 그래서 먼저 워크캠프를 포함한 나의 여행 일정을 짰 다. 유럽 여행을 다녀본 사람들한테 물어보기도 하고 유럽 여행을 위한 카페인 유랑에 가입해서 정보를 찾기도 했다. 그래서 결정한 것은 이탈리 아만 둘러 보는 것이었다. 비싼 비행기 티켓을 사서 가는 것이기 때문에 유럽의 많은 나라를 둘러보 고 오는 것도 맞는 말이긴 한데 여유있게 하나의 나라만 보고 오는 것도 좋다고 하여서 그렇게 결정하였다. 그리고 혼자서는 처음 가는 해외 여 행이라 잘 모르는 것도 많고 경비 문제도 있어서 이탈리아만 보고 오기로 결정하였다. 그리고 비행기 티켓을 샀다. 두달 전인데도 티켓이 없어서 꽤 비싸게 티 켓을 샀다. 그런데 주위 사람들을 보니 싸게 구입한 사람들도 많았다. 뭐 든지 잘 찾아봐야 하는 것 같다. 그렇게 하나씩 준비를 해나갔다. 처음에 는 아무 것도 없는 것 같았는데 방학을 하고 워크캠프가 다가올수록 이것 저것 준비한 것들이 쌓여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8월 1일 출국날이 되었 다. 첫 일정은 패션의 도시라 불리는 밀라노로 가는 것이었다. 워크캠프를 하 게 되는 브레시아라는 지역이 밀라노 근처에 있어서 밀라노로 먼저 가게 되었다. 여기서 2박을 지낸 후 캠프가 시작하는 일정이었다. 유럽 여행을 다녀간 사람들 중 대부분이 밀라노는 볼 것이 없다고 하는 글을 많이 보 고 갔다. 그래서 걱정하긴 했지만 처음 보는 도시여서 그런지 정말 멋진 도시라는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유럽의 건물들이 눈 앞에 있는 것이 신 기하기만 했다. 그리고 그 곳을 걸어 다니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처음 도착해서 이틀동안은 금방이라도 한국으로 돌아갈 것만 같았다. 그렇게 밀라노 관광 후 8월 4일 캠프가 시작하는 날이 되었다. 브레시아 로 가는 방법은 밀라노 중앙역에서 기차를 타는 것이었다. 아침 일찍 일 어나 짐을 싸서 출발했다. 기차도 자주 있고 가격도 6.8유로밖에 하지 않 아서 불편한 것은 없었다. 기차에서 내려서는 걸어서 갈만한 거리에 미팅 포인트가 있었다. 그래서 미리 뽑아온 구글 지도를 보면서 찾아 갔다. 조금 일찍 도착했더니 캠프 리더 두 명과 아르메니아에서 온 남자 둘이

102 있었다. 짧은 영어였지만 인사를 나누고 짐 정리를 했다. 그리고 하나둘씩 오 는 사람들을 맞이 했다. 저녁에 다 같이 모여 인사를 나누고 서로 친해지자는 의미에서 게임도 하였다. 그리고 맥주와 함께 이야기를 나누며 하루를 마무 리 했다. 워크캠프라고 해서 처음부터 일만 할 줄 알았는데 그렇지는 않았다. 일단 축 제 시작하기까지 며칠의 여유가 있었다. 그래서 브레시아라는 지역에 대해 알기 위해 다 같이 걸어서 구경하기도 하고 베로나로 관광을 가기도 했다. 베 로나로 관광갔던 날에는 근처에 있는 호수에 가서 수영도 했다. 바다는 아니 었지만 바다같이 넓은 호수가 신기했다. 그리고 하루는 저녁을 먹기 전에 다 같이 쇼핑을 갔다. 왜냐하면 저녁을 각자 본인의 나라 음식을 만들기로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난 같이 있던 한국 친구 한명과 소불고기를 만들기로 했다. 미리 불고기 양념을 준비해왔기 때문에 어려운 것은 없었다. 마트에서 고기와 야채를 사서 요리 하였다. 그리고 다 같이 식사를 했는데 다양한 음식들이 보는 것만으로 신기했다. 그

103 103 리고 하나씩 먹어보니 익숙한 맛도 있었고 처음 맛보는 것도 있었다. 그 래도 전부 맛있게 먹을 수 있었다. 이렇게 다양한 나라의 음식들을 한번 에 맛볼 수 있는 기회가 있어서 좋았다. 그리고 하루는 우리가 참여하는 음악 축제 관련 라디오 방송에 출연하게 되었다. 대사가 많지는 않았지만 못해봤던 것을 해볼 수 있어서 좋았다. 102 그렇게 며칠을 보내고 축제 시작일이 되었다. 하는 일은 빵과 소세지 썰 기, 야채 썰기, 햄버거 만들기, 피자 서빙, 설거지 크게 다섯 가지였다. 이것을 14명이 나눠서 일했다. 일하는 시간은 하루 6시간이고 남는 시간 에는 축제를 즐길 수 있었다. 숙소와 축제 장소까지는 꽤 거리가 있어서 차를 타고 이동해야 했다. 보통 오후 3시에서 4시 사이에 축제 장소로 가 서 일을 시작했다. 그리고 끝나는 시간은 새벽 1시였다. 그때 바로 집으 로 올 수도 있고 다같이 모여 놀다가 와도 괜찮았다. 대부분 함께 술을 마 시며 놀다가 집으로 왔다. 영어를 잘 못하는데도 사람들과 친해질 수 있 었던 것은 워크캠프의 스케줄 덕분이었던 것 같다. 같이 술도 마시고 춤 도 추고 게임도 하고 하다보니 자연스럽게 친해질 수 있었다. 하는 일은 주로 서빙이다 보니 쉽지만은 않았다. 축제였기 때문에 손님들 도 많았고 이탈리아 사람들과 말도 안 통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가게에 는 항상 음악이 틀어져 있었고 사람들은 춤을 추고 즐기며 일했다. 그래 서 우리도 함께 즐길 수 있었고 덜 힘들게 일할 수 있었다. 그 곳에 있는 이탈리아 사람들은 대부분 영어를 못했지만 가끔 영어를 할 줄 아는 사람 이 있으면 함께 어울리기도 했다. 그렇게 하루 하루 하는 사람들이 생기 고 인사하는 사람들이 늘어가면서 일하는 곳의 분위기는 더 좋아졌다. 그 래서 마지막 날에는 이탈리아 사람들에게 인사를 받기도 했다. 또 오기를 바란다는 말 한마디는 정말 기분을 좋게 해주었다.

104 그렇게 매일을 보내다보니 2주라는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아쉬웠던 것은 집 에 가는날인 8월 18일 전날에도 일을 하는 바람에 마지막날에 제대로 인사도 못하고 헤어진 친구들이 있는 것이다. 그래도 페이스북을 통해서 연락할 수 있는 것은 다행이다. 여태까지 원래 알던 친구들이나 학교 선배, 동생들과 함 께 봉사를 가본 것이 전부였는데 외국에서 모르는 사람들과 만나 친해지면서 2주를 함께 해본 것은 새로운 경험이었다. 말이 안통해서 힘들기도 했고, 새 벽까지 일해서 피곤하기도 했고, 먼 타지까지 와서 고생도 했지만 경험해보 지 못한 것들을 해보고, 외국인 친구들도 사귀고, 많은 생각도 할 수 있는 좋 은 기회가 되었던 것 같다.

105 인도 104 "인도는 더럽다." 인도_김종혁 RC 08/12 건국대학교 * 머리말 - 이야기를 시작하며. 온살배기라 아직 20살이 덜 된 성년도 소년도 아닌 아이는 여행기를 무 척이나 좋아했다. 현실은 무거웠고 눈앞은 한 치도 볼 수 없을 정도로 어두웠다. 아이에게 여행기는 현실을 외면할 수 있는 유일한 창구였다. 프랑스의 화가 앙리 루소가 한 번도 가보지 않았던 자연을 상상으로만 그린 것처럼 아이는 꿈속에서 세계 일주를 하고 있었다. 비록 그 꿈이 20분간의 짧은 휴식시간에만 허락된 것일 지라도 년 어느 여름날. 7년이라는 시간이 참으로 빠르게 지났다. 턱밑의 수염이 그때와는 비교할 수 도 없을 정도로 두꺼워 져서 새삼 제법 성인이 되었음을 느낀다. 한국 에서 나이 든다는 말은 철이 든다는 말로 통하고, 그것은 현실적이 된다 는 - 그 비슷한 말인 것 같다. 그렇게 어른흉내를 내며 살다 보니 어느새 세계일주니- 작가가 되겠다느니- 하는 꿈들은 먼지 앉은 헌책처럼 낡은 것이 되었다.

106 앞만 보고 살아왔다. 기아자동차에서 후원해주는 기아 글로벌 워크캠프 프로그램이 아니었다면 인도 라는 나라는 대학교 신입생 때 배운 요들송만큼 이나 요원한 존재였을 것이다. 그럴만한 시간적, 경제적 여유가 없다는 의미이다. 하느님은 언제나 그러했듯 나에게 이런 기회를 주셨고, 나는 언제나 그러했 듯 감사히 기회를 잡으려 했다. 혼자였다면 생각하지 않았을 20살의 꿈을 다 시금 떠오르게 해준 모든 분들께 감사한다. 유네스코 워크캠프에 참여하는 것이 이 여행의 일차적 목적 이었다. 동시에 내가 인도에서 하고 싶었던, 알고 싶었던 문화를 행하는 것이 부수적 목적 이 었다. 흉내 내지 않을 것이다. 미화 하지 않을 것이다. 이 두 가지의 원칙은 나의 한 달간의 여행을 풍요롭게 했다. 현지 옷을 입고 현지 음식만을 억지로 고집하는 것은 내 성격에도 나의 여행 방법에도 맞지 않았다. 한 달이라는 짧은 기간 동안 내가 인도를 가장 정확히 볼 수 있는 방 법은 결국 사람 이었다. 흥정, 말다툼, 악수, 사기, 우정, 혐오, 동정 같은 인 도 사람들과의 부대낌이 내가 경험한 인도의 전부였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 의 인도체험 이었다. # 01 델리 Delhi * 이야기 하나 인도는 흥미로운 나라다. 여러 책에서 소개 되었듯이 때론 신성하고 숭고하 며 뻔뻔하다. 그런 막연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다. 인도를 가보지 않은 사람들 이 말이다. 얼마나 바보 같은 편견인지, 아니면 정말 그것이 진리인지 조차 알 수 없다. 델리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려 하고 있었다. 첫 해외여행의 흥분 같은 것은 생각 했던 것 보다 컸다. 한동안 꿈꾸던 일이 실현되는 순간 이었기에 더욱 의미가 있었다. 바람이 찼다. 구름이 일었다. 하늘을 보면서 항공기에 몸을 실었다. 델리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려 하고 있었다. 전날 밤 메모장에 새겨놓은 글을 곱씹으니 꽤 담박했다. 7년간의 고생에 대 한 허세나 뜬금없는 각오 따위가 아닌 그대로의 담담한 심정이 마음속에 새 겨졌다. 델리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였다.

107 107 시간을 되돌릴 수 없기에 이륙하고 창밖으로 보이는 별들을 눈에 담았다.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이 한 달간의 여행에서 가장 아름다운 순간일지도 모 른다고 생각했다. 자이살메르(인도 서부의 사막지대) 밤의 별이 이러할까? 106 연신 눈꺼풀의 셔터를 눌러대며 이 일렁거리는 느낌을 소중히 하려 하였 다. 방귀가 나오는 걸 간신히 참으며 거북스럽게 착륙했다. 그나마 한 시 간 전에 화장실에 가서 비운게 다행이라 여겨졌다. 도착 후 한국인 여행 자들을 찾다 홍지수-홍원경 남매를 만났다. 귀여운 남매였다. 지루한 6 시간의 공항 노숙을 끝내고 프리페이드 택시를 타고 시내로 향했다. 사람 좋게 생긴 기사는 역시나 내 기대를 져 버리지 않고 택시비를 가지고 실 랑이를 벌였다. 이 새끼가 어디서 개수작이야 라는 한국말을 연신 내 뱉 었지만 알아들을 리 없었다. Don't do that to me" 내가 이겼다. 인도에서의 상쾌한 출발이었다. 빠하르간즈 (델리의 여행 자 거리)는 언젠가 그림에서 본 지옥의 문을 연상케 했다. 만약 내가 죽어 지옥 사거리에 간다면 이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역한 냄새와 수많은 소 음, 달갑지 않은 시선들이 쏟아졌다. 일단은 도망치자. 일단 대충 숙소를 정해 여장을 풀었다. 한국인 여행자 네 명을 만났지만 별로 마음에 안 들 어 반가운 척만 하고 시내관광을 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지옥의 문이 점 점 더 활짝 열리고 마수들이 거리를 채우는 것이 느껴졌다. 이곳은 지옥 사거리가 확실했다. 갑자기 뱅뱅 사거리가 그리워졌다. * 이야기 둘 델리 도착 첫날, 장장 11시간을 잤다. 공항에서 노숙하면서 생긴 여독과 피곤함이 그대로 남아 있었던 탓이다. 새침한 아이의 미소 같은 새벽 여 섯시의 해가 빠하르간즈를 밝히고 있었다. 어제 보았던 전쟁 같은 삶과는 대조적으로 거리가 평화롭게 보였다. 사진기 하나를 들고 낮선 거리로 나 섰다. 다른 세계에서 온 동양인의 모습을 지그시 바라보는 시선이 느껴졌 다. 달갑지는 않았다. 억지웃음으로 빙긋 웃어주니 그쪽에서는 자연스러 운 미소로 화답해 준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안 된 건 내 쪽 이었다. 공상 속에서 나는 인도를 거침없이 누볐었다. 타지마할의 대리석을 만져보고 짜이 와 라씨 를 즐겨 마시는 자유인 이었다. 그렇게 꿈꾸던 인도가 지 금 내 발 밑에 고약한 냄새를 풍기며 있었다. 희미한 감동을 느끼었다. 동 시에 주눅 들어 있는 내 모습에 실망감도 들었다.

108 언젠가의 내가 오늘의 내가 되어 있었다. 이틀째의 델리는 활기를 띌수록 어제와는 다른 모습을 보였다. 거리와 상점 의 모습들이 점차 눈에 익어가고 소음들이 귀에 먹혀가고 있었다. 하나하나 를 알아가고 있었다. 허니까페 라는 한국인 여행자들의 아지트에서 몇몇 사 람들을 만났다. 일 년간 휴가를 내고 온 40대의 형님과 홀로 하는 여행을 즐 기는 서른 살의 형님, 인도여행에 걸 맞는 사람들이 아닐까 싶을 정도로 단 출한 차림의 사람들이었다. 인도 음식이 내 입에 안 맞을 거라는 것을 단박 에 알아챈 나는 최대한 서양식의 음식들을 먹었다. 인도는 유럽에서 오는 여 행자들이 엄청나게 많기 때문에 서양식 레스토랑이 많았다. 다행이었다. 아 침 식사로 기운을 차린 후 기분을 띄우려 쇼핑에 나섰다. 잡스러운 물건들 일 색인 델리의 여행자 거리였지만 나름 이색적인 분위기로, 명동같이 촌스러 운 거리는 아니었다. 쇼핑 후 홍남매와는 헤어졌다. 그들은 낙타사파리를 하 러 자이살메르로 향했다. 나는 워크캠프 멤버인 윤가연 을 기다려야 했기에 하루 더 델리에 있기로 했다. 홀로 레드포트 라는 유적지를 방문했다. 무굴 제국 시대의 성인 레드포트는 타지마할 같은 로맨스는 없지만 나름 슬픈 역 사를 가지고 있다. 정확한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는다. 꽤 꼼꼼하게 유적지를 보는 편이기 때문에 관람에 두 시간을 썼다. 피곤했다. 출구에서부터 나를 유 심히 지켜보던 릭샤꾼 한명이 끈질기게 나를 따라붙었다. 그들의 입에는 마 이 쁘렌(My Friend) 이 항상 붙어 다녔다. 일종의 유행어가 아닐까 생각했 다. 헤이 한국친구- 안녕하십니까투리- 같은 느낌의. 먼저 달라붙는 호 객꾼은 백프로 꺼지라고 하는 것이 맞지만, 너무 피곤했기에 그 쁘렌 의 사 이클 릭샤에 몸을 실었다. 나는 알지 못했다. 그것이 이 친구와의 랩 배틀의 시작이 될 줄은. 한 릭샤꾼의 일기. 나는 가장이다. 이 빌어먹을 인도라는 나라에서 태어난 것도 억울해 죽겠는 데 가진 거라곤 몸뚱이 뿐이다. 그래도 먹여야 할 식솔이 예닐곱은 되기 때 문에 몸이 부서져라 일한다. 나 같은 사람이 인도에서 할 수 있는 일은 몇 되지 않는다. 델리의 여행자를 상대로 하는 벌이가 괜찮다고 해서 사이클 릭샤를 하나 임대했다. 인도인들은 태워봤자 릭샤 임대료도 안 나올 것이 뻔 하기 때문에 어리바리해 보이는 여행자들만 태우는 것이 이득이다. 그래 야 겨우 내 새끼들을 먹여 살릴 수 있다. 오늘도 꺼벙해 보이는 동양인 하 나를 태웠다. 곧바로 빠하르간즈로 가달라고 하는 놈을 몰래 올드 델리 사 이클 릭샤 투어에 끼어 넣어 버렸다. 놈은 넋 놓고 있다가 한참 뒤에 우리 가 지금 어디로 가냐고 물어봤다. 나는 올드 델리를 구경시켜 주겠다고, 돈 은 안 받겠다고 말해주었다. 놈도 믿는 눈치는 아니었지만, 귀찮았는지 올 드 델리의 거리를 구경하기 시작했다. 원래 서양 놈들에게만 알려져 있는 올드델리 사이클 릭샤 투어 기 때문에 이놈에게도 이득이 되는 거다. 동양 인들은 몰라서 못하는 투어다. 이 투어는 힘들다. 오직 인력으로만 움직이

109 는 사이클 릭샤로 혼란스러운 올드델리의 거리를 누비는 것은 보통 어 려운 일이 아니다. 투어를 시작한지 20분이 넘도록 호기심 어린 눈빛으 로 올드델리를 살피던 동양인은 슬슬 실증을 느끼는 듯 했다. 동양인이 그만 빠하르간즈로 돌아가자고 했을 때는 이미 30분정도의 투어가 진 행되었을 때였다. 나도 꽤 지쳐있었기 때문에 이쯤 하고 빠하르간즈로 가기로 했다. 돈은 왕창 뜯어낼 생각 이었다. 올드델리와 뉴델리 사이 에 4차선의 고가도로가 하나 있다. 사이클 릭샤를 천천히 몰고 가다가 그 중간쯤에 서서 험상궂은 얼굴로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40 Dollar. Give me 40 Dollar. 대부분의 여행객들은 이 상황에서 겁을 먹거나 협상을 시작한다. 대부 분의 협상은 내가 원하는 가격대에서 끝나고 나는 그 승객을 목적지까 지 데려다 준다. 이것은 엄연히 공정거래이고, 서로 Win-Win하는 해 피엔딩이다. 하지만 이 조그만 동양인은 만만치 않은 놈이었다 Dollar. It was really hard work. Give me 40 Dollar. or You can't go home - What? Are you fucking kidding me? Do you know who I am? If you don't take me home, I Can call my guard. I'll will give you the money. but going home is the first. O! K!??? - H..H..How much..? - Shut up. Just go. GO!!!!!!! 이 자식은 정말 미친놈일지도 모른다. 내가 수를 쓴다는 느낌을 받는 순 간부터 눈에 광기가 서렸다. 어쩌면 오늘은 운수 나쁜 날일지도 모른다 는 생각이 들었다. 도착하자 동양인은 언제 그랬냐는 듯이 내게 싱긋 웃 어보였다. 나는 액수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어쩌면 착한 놈일지도 몰 라. 동양의 돈 많은 집 자식쯤 되겠지? 그가 내가 내민 액수는 200루피 (4달러) 이었다. 그때부터는 나도 화가 치밀기 시작했다. 나는 힌두말 로 욕을 쏟아 붓기 시작했다. 그 동양인도 자기네 말로 지껄이기 시작했 다. 욕인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렇게 1분을 떠드니 이건 시간낭비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 Give me 500 rupee. - No way. It's my last. 그 자식이 50루피를 더 내놓았다. 나는 300루피를 요구했다. 동양인은 회심의 미소를 보이며 300루피를 주었다. 당했다. 그 놈은 처음부터 300루피를 계산하고 있었던 게 틀림없다. 300루피를 주고 홀연히 떠나는 그의 발걸음이 가벼워 보였다. 300루피면 꽤 괜찮 은 액수였지만 뭔가 당한 느낌에서 헤어 나올 수 없었다.

110 * 이야기 셋 윤가연은 루치 워크캠프에 같이 들어가는 한국 멤버 중 한명이었다. 홍익대 학교 공대를 다니는 아이였다. 한국에서 두 번 만났을 때는 몰랐는데 공대생 이라는 것을 느끼게 할 만큼 털털한 녀석이었다. 재밌는 녀석이기도 했다. 이 친구가 얼마나 재밌는 녀석이냐면 인도에서 만난 첫 날 망고를 먹더니 그 날 새벽 내내 설사를 했다. 다음 날, 도저히 사람 몰골이 아니어서 응급실로 데 려가는 상황까지 간다. 다행히 응급실 앞에서 초록색 토를 하고 주사 두 방 맞더니 상태가 호전 되었다. 후에도 인도약이 워낙 독한지라 먹고 나면 자고 먹고 나면 자서 좀 심심한 감이 없지 않았지만 그만하니 천만 다행이라는 말 이 절로 나왔다. 윤가연이 몸 져 누운 관계로 델리에서의 체류가 하루 더 늘어났다. 뭘 할까 하다가 빠하르간즈의 곳곳을 더 살펴보기로 했다. 이곳저곳 추접스러운 골목 을 기웃 거리다 보니 매트로 역이 나왔다. 인도에서는 지하철을 탈 때 공안경 찰이 몸수색을 한다. 그것이 하도 신기해서 사진을 한 장 찍으니 경찰이 나를 불렀다. 여행책자에서 경찰을 찍으면 벌금이라고 하는 구절을 읽은 기억이 났다. 얼른 달려가 애교 섞인 표정을 지으며 "Why?"라고 되묻는 나 스스로에 게 구역질이 났다. 역시나 벌금을 내라는 것 이었다. 정말 벌금이 있는 건지 뒷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기 싫은 것은 분명했다. 어머-쏘리쏘리,아윌 이레이즈 이레이즈 오케이?오케이?쏘리쏘리 자괴감이 들었다. 경찰은 황당한 표정을 지으며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나는 재빨리 자리를 떠났다. 그 후 몇 번 경찰과 마찰이 생길만한 일이 생기면 지 킬 박사와 하이드의 조승우가 된 마냥 연기를 해 댔다.

111 111 지금 이 순간 을 부르라고 했다면 불렀을 것이다. 혼자 저녁 먹기가 심심해서 한국인 여행자들을 찾아다녔다. 마침 형제끼 리 온 여행자가 있어서 같이 끼어 치킨 샌드위치를 먹었다. 한 달간 빡시 게 인도를 돌았다는 형제의 얼굴에 자부심이 느껴졌다. 한국에 가면 아라 비안나이트를 보았다는 식의 과장된 수사가 가득한 여행담을 쏟아낼 만반 의 준비를 끝낸 상태였다. 아라비안나이트는 마산에 있는 나이트인데 지 금은 물이 많이 안 좋아 졌다라고 훼방 놓고 싶은 마음이 간절했다. 그만 큼 그들의 여행담엔 기름기가 가득했다. 그것이 진실이라면 참 부러울 것 이기 때문에 나도 모르게 삐딱하게 들은 것인지도 모르겠다. 110 # 02 루치 Ruchi * 이야기 넷 루치로 가기 위해선 먼저 칼카역으로 가야 했다. 칼카로 떠나는 아침, 허 니까페의 주인인 허니가 물었다. - Honey : 어디가? - 나 : 칼카요. - Honey : 칼카? 거기 왜 가? 거기 아무것도 없어. - 나 : 아~ 나는 캠프. 캠프하러 가요. - Honey : 아~ 잘 갔다 와. 칼카에는 아무 것도 없다? - 허니는 틀렸다. 칼카로 가기 위해 기차를 탔다. 비행기로 치면 비즈니스 석에 해당하는 A 석으로 잡았다. 자리가 없어서 억지로 잡은 고급석 이었지만 이내 굳 초 이스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모든 서비스가 항공기의 서비스와 흡사했다. 아시아나 항공사의 예쁜 누나들 대신 아시아냐? 스러운 인도 홍익회 아저 씨가 서빙을 해주는 것 빼곤 다 좋았다. 기분 좋은 여행이었다. 칼카로 가 는 길,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낯설고 초라했다. 천막촌의 난민들이 보 였고, 황폐해진 도시가 보였다. 농작물이 익어가는 모습이 보였지만, 비 쩍 마른 소의 모습도 보였다. 저 농작물은 가난한 이들에게 온전히 돌아 갈까? 자격 없고 기만적인 동정심이 들었다. 오직 한 가지 확실한 사실이 인도인들에게서 내가 느끼는 유일한 연민의 이유였다. 가난은 생각의 깊이와 꿈의 크기를 축소시킨다. 멍하니 창문을 보다가 칼카 역에 도착했다. 역에 마중을 나오기로 했던 캠프 사람이 나와 있지 않았다. 전화를 하니 처음 듣는 이야기라는 식의 대답이 들렸다.

112 어제 분명히 전화로 픽업 온다고 했잖아 이 새끼야. 라는 말이 속에서 메 아리 쳤지만 점잖게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물었다. 결국 우리는 스스로 캠프 지까지 가게 되었다. 가는 중간에 우수에 젖은 눈을 가진 인도 친구가 우리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었다. 감사한 일이다. 그렇게 칼 카 역에서부터 4시간 후 캠프지인 루치에 도착 할 수 있었다. 캠프 지는 산 장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었다. 하지만 아늑한 맛이 있었다. 잘 지어진 건물 이었다. 하지만 9시간에 걸쳐서 올만한 곳은 아니었다. 칼카에는 아무것도 없다던 허니의 말이 귓속에서 메아리 쳤다. * 이야기 다섯 일주일 만에 드디어 올 것이 왔다. 말로만 듣던 물갈이였다. 그것만 왔다면 다행일 것을, 몸이 단단히 고장이 났다. 고열과 복통, 설사가 반복되었다. 한 국에서도 잔병치레가 많아 웬만한 몸살은 하루 이틀이면 털고 일어 날만큼 면역이 되어 있었다. 처음엔 그 정도로 생각했다. 도착 다음날부터 시작된 고 열은 오 일간 내렸다 올랐다를 반복했다. 자이로드롭같은 고열과 해열의 싸 움에서 나의 총알인 한국제 해열제는 바닥이 나기 시작했다. 애초에 한국제 지사제는 씨알도 안 먹혔었다. 모든 음식물을 노란 물로 변화시키는 내 장의 새로운 기능이 신선했다. 고열이 삼일 째에 사점에 다다랐다. 어쩌면 일정에 도 없던 바라나시 수장( 水 葬 )코스를 직접 시현하게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에 휩싸였다. 그렇다. 이곳은 인도였다. 쉽게 볼 병이란 건 없었다. 캠프 리 더인 무케쉬에게 응급실로 대려가 줄 것을 부탁했다. 내 상태를 걱정하던 무 케쉬는 한국의 산업화를 이끌었던 것 같은 소형차에 나를 태웠다. 시동과 함 께 무케쉬가 좁은 산길의 첫 번째 코너를 돌았다. 거대한 트럭이 보였다. 사 고는 순식간이었다. 무케쉬가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를 들은 것 같다. 충돌 과 함께 나는 앞으로 튕겨져 나갔다. 만약 앞좌석 이었다면 스키점프 자세로 앞 유리창을 향해 날아갔을 지도 모른다. 신은 항상 내 곁에 있기에 나를 뒷 좌석에 타도록 인도하셨다. 다행히 나는 앞좌석 쿠션에 정확히 꽂히며 가벼 운 멍과 찰과상만 입을 수 있었다. 무케쉬도 안전벨트를 한 덕분에 핸들에 머 리를 부딪쳐 부어오른 혹을 어루만지는 정도로만 다쳤다. 사건의 내막은 트 럭운전사가 낮술을 하고 산길을 가다 트럭바퀴만한 소형차를 보지 못해 난 사고였고, 사고는 쌍방과실에서 일방과실로 마무리 되었다. 사고의 충격 때 문인지 그날 엄청나게 많은 땀을 뽑아내며 열은 내려갔다. 어쩌면 그것이 하 느님이 주신 극약처방인지도 몰랐다. 다음날도 바통을 이어받아 고열은 계속 되었지만 왜인지 조만간 나을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미뤄뒀던 뜨거운 물 샤 워를 할 때가 임박해 왔음을 느꼈다. 인도제 해열제를 먹고 샤워를 감행하기 로 했다. 인도는 대부분의 뜨거운 물을 순간온수기에 의지하기 때문에 가열 시간이 필요했다. 머리맡에 매달려 있는 순간온수기의 스위치를 켰다. 순간 강한 전류가 손끝에 느껴졌다. 설명할 수 없는 느낌이었다. 냉장고 옆면을 매

113 113 만질 때 나는 간지러운 느낌이 아니었다. 팔 전체가 단단하게 굳어서 뗄 수 없음을 느꼈다. 어떻게 손을 뗏는지 모르게 손이 떨어졌다. 몇 초간 설 명 할 수 없는 공포를 느꼈다. 찬물로 대충 씻고 나와 침대에 앉았다. 왼 팔이 부어올랐다. 어쩐지 인도는 격렬하게 나를 환영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나는 모험을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다. 좌우명이 무리하지 말자 일 정도다. 그런 내게 인도는 끊임없이 자극을 주고 있었다. 112 나는 지금 인도에 있다는 느낌 거대한 유적이나 뻔뻔한 사람들이 아닌 생명의 위협에서, 나는 그것을 여실히 느끼고 있었다. * 이야기 여섯 감전사고가 있은 다음 날 몸이 거짓말처럼 가벼워졌다. 그래도 혹시 몰라 예비 약을 사러 요리사인 찬두 와 가까운 시내로 향했다. 시내라고 해봤 자, 슈퍼와 약국 같은 작은 상점이 몇 개 운집해 있는 정도에 불과 했지 만 사실 다른 상점의 필요성이 느껴지진 않았다. 찬두 와 찬거리를 좀 사 고 약사를 기다렸다. 약사는 점심시간이라 삼십분 후에나 온다고 했다. - 찬두, 넌 어떻게 루치로 오게 됐어? 찬두는 작은 청년 이었다. 하지만 단단하고 날렵한 근육의 모양새나 짙고 곧게 뻗은 눈썹의 매무새에서 보통의 인도인들 보다 훨씬 건강하고 총명 한 인상을 받았다. 그는 천천히 말을 받았다. 찬두의 이야기. 나는 원래 쉼라 라고 하는, 너희가 주말에 가게 될, 여기서 네 시간 정 도 떨어진 곳에서 살았어. 오 남매 중에 막내로 태어났는데, 우리 집은 그렇게 잘살지도 못살지도 않았지만 대부분의 인도인들이 그렇듯, 여 유롭진 않았어. 어느 정도 크면 내 밥벌이를 해야 했지. 처음 내가 일을 한 곳은 건설현장 이었는데 그곳의 일은.. 생각하고 싶지 않아. 너무 힘 들었거든. 견디다 못해 친구인 무케쉬한테 전화를 했어. 혹시 니가 일 하는 루치 라는 곳에 일자리가 있냐구. 그런데 일자리가 있다는 거야. 요리사 자리가 말이지. 난 요리를 못했지만 무케쉬가 가르쳐 주겠다며 선뜻 내게 기회를 줬어. 좋은 친구지. 그렇게 열흘 동안 교육을 받고 나 는 루치의 요리사가 됐어. 처음엔 영어도 못했었는데 여기서 일하면서 영어도 배우고, 돈도 어느 정도 모으게 되었어. 조금 심심하다는 것만 빼면 이곳의 일은 좋은 것 같아. - 그럼, 너의 꿈은? 평생 루치에 있진 않을 것 같은데? 나는 운전 하는 게 좋아. 어릴 때부터 그랬고, 그래서 트럭 운전수가 되고 싶어. 프라이빗 트럭 운전수 말이야. 하지만 우선 결혼부터 해야겠지? 루

114 치에서 돈을 벌어서 장가를 가고, 그 후에 트럭 한 대를 사서 용달 일을 할 꺼 야. 그 정도 시기가 되면 내게도 여유가 좀 생길 테니까, 일을 하면서 다른 인도인들을 도와주고 싶어. 특히 이 주변의 사람들은 물 때문에 고생을 많이 하거든. 물로 고통 받는 사람들을 도우며 살고 싶어. 그게 내 꿈이야. - 그거 알아? 넌 참 행복한 꿈을 가졋어. 대다수의 한국인들 보다 말이 야. 정말? 니 꿈은 뭔데 킴? - 나? 나 방금까지 있었는데 너 때문에 다시 생각해 볼려구. 내 꿈속에는 나만 있거든. 다른 사람은 없어. 그거 좀 별로다. 쪽팔려. (빙긋) (빙긋) * 이야기 일곱 루치에서의 워크캠프가 끝나가려 하고 있었다. 이곳에서의 일은 Water Conservation work라 하여 쉽게 말해 물탱크를 만드는 일이었는데 내가 많 이 아팠던 관계로 작업에 많이 참여를 못해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루치 캠프 에는 대만 친구들 21명, 프랑스 3명, 스페인 2명, 한국 5명해서 총31명의 대 식구가 있었다. 원래 대만 친구들을 위한 일이였는데 우리가 꼽사리를 낀 모 양새였다. 주말에는 쉼라라는 휴양지로 여행을 갈 계획이었기 때문에 금요일 밤 파티가 열렸다. 한국식이라고 하기엔 추접스럽게 맛이 없는 돼지갈비양 념 국수와 대만전통 음식이라고 하기엔 가축사료 같은 음식을 만들었지만 우 리는 서로 맛있다고 말해 주었다. 우리는 예의 바른 동방의 나라들이니까. 그 후 춤판이 벌어 졌는데 대만 친구들은 각종 공연과 전통춤을 준비해 아무 것 도 준비하지 않은 한국과 프랑스, 스페인 팀들의 모골이 송연하게 만들었다. 한국 팀에서 준비한 것은 김원준의 쇼 에 맞춘 조잡스러운 응원단 군무였고, 분위기가 무르익은 탓에 제법 깔끔하게 넘어갔다. 곧 인도클럽음악 ( 정말 클 럽에서 이 음악을 틀지는 장담하지 못하지만 난 그 음악에 반댈세. ) 이 나오 고 무케쉬와 3분 카레들 의 공연이 시작되었다. 그들의 춤은 흡사 공옥진 여 사의 곱추춤 을 연상시켰는데 제발 그게 인도 전통춤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부탁하고 싶은 수준이었다. 하지만 이내 우리들은 그 춤을 따라 추기 시작했 다. 만약 이 춤을 홍대에 가져 온다면 일대 파란이 일어날 거라 확신했다. 그 렇게 흥겹게 루치에서의 공식 일정이 끝났다. 파티 후 대만 친구들이 편지와 선물을 전해주었다. 정말 귀여운 자식들이었다. 서로 메일주소를 교환하고 포옹을 하며 아쉬움을 달랬다. 루치의 청명한 밤하늘도 마지막이었다. - 칼카? 거기 아무것도 없어. 출발 전 허니의 말이 귓가에 메아리 쳤다.

115 115 - 허니. 니가 틀렸네? 밤바람에 내 대답을 실었다. 114 # 03 쉼라 Shimla * 이야기 여덟 쉼라로 가기 위해 토이 트레인이라 불리는, 우리나라로 치면 비둘기 호 쯤의 열차를 탔다. 열차가 작고 귀여워 이런 이름이 붙여 진 것도 있지만 해발 2600미터에 위치한 쉼라를 기차로 오르기 때문에 무척 느리게 운행 되는 점도 이유 중 하나였다. 쉼라는 예전 영국인들이 인도를 통치할 때 휴양을 위해 전략적으로 개발 한 도시였다. 영국인들도 인도 본토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가졌을 것이 분명했다. 출발 다섯 시간 만에 도착한 쉼라는 엄청나게 많은 인파와 잘 정돈된 도시로 휴양지로써의 삼박자를 갖추고 있었다. 인도 내지인들도 휴양을 위해 많이 찾는다고 하니 정말 좋은 곳이긴 한가보다. 일행들과 맛집을 찾아다니고 쇼핑을 하다 보니 하루가 금방 갔다. 이곳의 인도인들 은 여행을 할 정도로 여유가 있어서 인지 거리에 활기가 넘쳤다. 스페인 친구들인 메리와 헬레나들과 술자리를 가졌다. 스페인의 정치/문화/경제 에 대한 다각적인 토론이 벌어졌다. 한국과 유사한 점이 많아 흥미로웠지 만 최근 급격히 나빠지는 스페인 경제에 대해 같이 고민해 주었다. 너희 나라에도 명박이가 있나보구나. 아름다운 밤이 가고 다음 날 오전 부지런히 원숭이 사원이라 불리는 하 누야 사원 을 올랐다. 사실 처음 쉼라에 도착했을 때부터 저건 뭐지 하며 봤던 것이 하누야 동상이었다. 산꼭대기에 붉은 동상이 하나 있었는데 육 안으로는 식별이 잘 안되고, 브라질의 예수상 비슷한 모습이었다. 사원을 오를수록 그 형체를 드러내는 하누야신은 정말 엄청나게 컸다. 자유의 여 신상이나 에펠탑을 못 본 나에게 이정도 크기의 동상은 신선한 충격 이었 다. 사원으로 오르는 길은 원숭이 사원답게 많은 수의 야생원숭이들이 돌 아 다녔다. 자신들의 신이 있어서 그런지 원숭이들은 안하무인의 극치이 었고, 관광객들의 가방이나 안경, 지갑 같은 것을 뺏어서 음식물과 바꾸 는 치밀함도 가지고 있었다. 출발 전 주의를 들은 우리는 안경을 벗고 지 팡이를 하나 들고 그들을 쫓으며 사원에 도착했다. 한국인들의 필수, 인 증 샷을 찍어대고 하누야 신의 발가락을 유심히 살폈다. 발가락이 참 이 쁘구만. 사실 동상 빼고는 크게 볼 것이 없어 먼저 사원의 입구 쪽에 서서 일행을 기다렸다. 내려갈 때 쯤 되니 원숭이에 대한 긴장이 풀렸다. 안경 을 쓰고 주변의 경치를 살폈다. 묵직한 돌덩이가 내 가방에 떨어지는 것을 느꼈다. 내 등이 뒤로 젖혀질

116 세도 없이 가방을 타고 오른 원숭이의 손이 내 귀 뒤를 강하게 할퀴는 것을 느꼈다. 놈이 노린 것은 안경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귀 뒤의 살점이 파이는 상 처가 났다. - 이런 adfl;로20jfla;lㅏ어로잘이ㅏ러;zdkjfa!!!!!!!!!!!!!!!!!!!!!!!!!! 나의 거친 언행이 산을 울렸다. 인도인들이 숨을 죽이고 나를 쳐다 보았다. 정적이 흘렀다. 그곳은 원숭이 신이 있는 하누야 사원 앞이었다. 하지만 신이 나를 용서하시길 바란다. 그의 자식중 하나가 나에게 해코지를 했고 나는 그 에 대한 반응을 했을 뿐이었다. 이 앙큼한 원숭이 덕분에 나는 평생 한번 맞 기 힘들다는 (한국에서는 희귀 의약품으로 분류되어 직접 백신을 구해야 하 는) 광견병 백신을 다섯 번에 걸쳐 맞아야 했다. 만약 여행자 보험 적용이 안 되어 내 돈을 내고 이 치료를 해야 했다면, 나는 그 원숭이를 고소했을 것이 다. 그놈은 원숭이 흉내를 내는 사람이었을 지도 모른다. # 04 맥그로드 간즈 Mcleod Ganj * 이야기 아홉 총 5번의 환승을 거쳐 두 번째 캠프지인 맥그로드 간즈에 도착하였다. 10시 간이 넘는 여정이었기 때문에 다들 지친기색이 역력했다. 그래도 산속에 위 치한 루치와는 달리 유명한 여행지로 꽤 쾌적한 곳이었다. 미친 원숭이 덕분 에 광견병 접종을 하고, 조금 쉴 겸 마을 구경을 했다. 숙소가 있는 곳은 다람 콧이라 하여 맥그로드 간즈에서 도보로 이십 분정도 떨어진 곳인데 매우 아 담했다. 상점 열 댓 개 정도가 전부인 이 마을에도 인터넷 카페가 군데군데 있는 걸 보면 인도는 정말 IT강국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생각해보면 인도의 어느 시골 마을을 가도 Airtel 이나 vodafone의 지점을 쉽게 찾을 수 있고, 핸드폰의 3G또한 원활하게 기능했다. 충남 조치원에 있는 우리 할아버 지 댁에선 3G가 안 터지는 걸 생각하면 인도의 IT 인프라는 대단한 수준인 것 같다. 우리의 일정은 단순했다. 오전부터 초등학교의 페인트 작업을 하다가 오후 늦게부터는 맥그로드 간즈 관광을 했다. 맥그로드 간즈는 티베트의 망명정부 가 있는 다람살라를 포함하고 있기 때문에 티베트의 문화 또한 접할 수 있었 다. 승려들의 모습이 아름다웠다. 광견병 접종 때문에 둘째 날부터 페인트 작업에 참여했다. 조그마한 학교의 벽면을 하얀 바탕으로 칠하고 알파벳이나 숫자 등을 채워 넣는 작업이었다. 전교생이라고 해봤자 6명이 전부인 학교에는 두 분의 선생님이 운영하고 계

117 117 셨다. 간판은 학교였지만 사실상 어린이집 정도의 기능도 하지 못하는 느 낌이었다. 출입문에 적혀 있는 글귀가 내 마음을 먹먹하게 했다. 116 Here is our start line of learning". 출발점이 다르게 시작하는 아이들에게 마음속으로 응원을 보냈다. 페인트 를 칠해 주는 것이 내가 할 수 있는 전부였지만 이 조용한 마을에 외국인 이 와서 다른 말을 하고 다른 놀이를 가르쳐 주는 것만으로도 아이들에게 자극이 되길 바랐다. 욕심일까. 페인트 작업은 4일에 걸쳐 진행 되었다. 배경을 칠하는데 2일, 그림을 디 자인 하고 색을 칠하는데 꼬박 이틀이 걸렸다. 나의 작업은 알파벳의 디 자인을 하는 것 이었다. 그림 그리기에 천부적인 졸렬함을 가지고 있는 나였지만 최대한 도구의 도움을 받아 그럭저럭 형태를 완성시켜 나갔다. 알파벳 말고도 숫자, 인도 국가, 국조인 공작새, 국화인 연꽃등을 그려 넣 었다. 완성된 그림을 보는 것은 흐믓 했다. 페인트칠을 할 때는 느끼지 못 했던 디자인의 조악함이 마음에 걸렸지만, 그 또한 초등학교라는 장소에 어울리지 않을까 하고 합리화 해 보았다. 무엇보다 아이들이 그림을 보며 환하게 웃어줘서 더없는 행복감을 느꼈다. 일을 하며 캠프리더인 무케쉬와 많은 이야기를 하였다. 올해로 4년째 인 도 워크캠프를 담당하고 있는 그는 우리 같은 외국인들이 인도를 찾아주 는 것은 굉장히 고마운 일이라 했다. 그나마 수익의 순환을 어느 정도 시 켜준다는 이야기였다. 무케쉬를 통해 인도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알 수 있 었다. 무케쉬와의 이야기. - 무케쉬. 이 아이들이 커서, No offence, but, 꿈꿀 수 있을까? 자기 가 하고 싶은 것을 하고 있을까? 힘들어. 너도 알다시피 인도는 그렇게 부유한 나라가 아니야. 빈부격 차도 대단히 심해서 1%의 사람들이 국가를 운영하고 부를 축적하고 있 어. 그들이 변하지 않는 한 이 시골의 아이들이 충분한 교육을 받고 양 질의 일자리를 찾는 건 불가능해. - 넌 어땟어? 이 일은 너에게 잘 맞는 것 같은데? 난 운이 참 좋았어. 나도 어렸을 땐 이 아이들 처럼 어려운 환경이었 어. 내가 어렸을 때 우리가족은 Village에 살았어, 아 - 우린 그곳을 Village라고 불러, 가난한 마을.. 그때는. 생각하고 싶지도 않아. 굶는 건 일상이었고 삶의 희망은 보이지 않았지. 운이 좋게도 나는 어떤 분의 눈에 띄어서 후원을 받게 되었고, 어느 정도 교육을 받을 수 있었어. 대 학도 졸업했지. 그 후 인도 워크캠프에 지원해서 이렇게 좋은 일자리를

118 얻을 수 있었어. 하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교육의 기회도, 진로를 선택할 기회도 없어. 이 나라에는 아직 그 정도로 공평하진 않아. - 다른 나라와 비교해서? 넌 홍콩이랑 유럽에 다녀왔잖아? 어때- 비교해 보면?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나는 인도가 싫어. 예전에는 카스트 제도가 있었지만 요즘은 부( 富 )의 정도가 곧 신분이거든. 그런 것들이 아직까지도 개인의 자 유를 억눌러. 대학교육을 못 받으면 해외에도 못 나가지. 난 인도가 싫어. 홍콩이나 유럽은 굉장히 아름다웠어. 무엇보다 사람들의 모습이 인상적이 었어. 자유로워 보이고 세련 됐지. 이 나라가 그런 모습을 가지려면 앞으로 얼마나 더 많은 시간이 지나야 할지 알 수 없어. 얼마나 더 지나야 할까.. * 이야기 열 비가 곧잘 내렸다. 지금이 인도에서 몬순이라 부르는, 우리나라로 치면 장마 기간이라 항상 습하고 비가 내리다 말다를 반복했지만 막상 비를 맞으면 쾌 적한 느낌이 들었다. 깨끗한 비 라는 생각 때문일 것이다. 맥그로드 간즈에 서 지내면서 참 많은 곳을 다녔다. 박수 폭포, 트리뷴드, 다람살라, 남 걀 사원 등 여행안내책자에 나오는 곳은 다 가 본 것 같은데 하나같이 이색적 이었고 아름다웠다. 이즈음에는 인도생활에도 어느 정도 적응이 되고 맥그로 드 간즈 자체가 워낙 아름다운 도시라 (물론 다른 인도의 도시들에 비해서 상 대적으로) 내 마음이 한결 유순해져 있었다. 티베트 음식들이 한국 사람들의 입맛에 딱 맞는 것도 한 몫 했다. 우리가 자주 가던 티베트 음식점에 까마 라 는 종업원이 언제부턴가 우리가 들어가자마자 Spacy?'라고 말하는 걸 보면 우리가 유난을 떨었던 것 같기도 하다. 어쨌든 나에게 맥그로드 간즈는 행복한 기억으로만 남아있다. 이것은 내가 이방인이기 때문일 것이다. 사실 맥그로드 간즈는 슬픈 도시다. 지난 역사의 뒤안길이고 아직도 진행 중인 분쟁의 씨앗이다. 그 한가운데에 달라이 라마 가 있다. 달라이 라마를 신이라고 칭하는 이들도 있지만 기본적으로 지도자라고 보는 것이 옳다. 달라이 ( 큰바다 ), 라마 ( 영 적스승 ), 즉 바다와 같이 넓고 큰 덕을 소유한 스승' 이라 보는 것이 더 적당 하다는 의미이다. 1959년 라싸 독립운동이 유혈 진압 되자 10만여 명의 추 종자들을 이끌고 다람살라로 탈출한 달라이 라마. 그때부터 독립운동의 방향 은 수정되고 있지만 계속적으로 비폭력의 평화적 방법으로 독립운동을 펼치 고 있다. 하지만 중국의 티벳에 대한 종속이 점차 심화되고 있어 그 끝이 밝 아 보이지 않는다. 게다가 높아지는 티벳인들의 인구는 머지않은 미래에 인 도인들의 인식에도 부정적인 영향을 끼칠지 모른다. 그 모습이 예전 내 나라의 모습 같아 마음 한구석이 아렸다.

119 119 고통받고 있는 사람들에게! 118 당신의 마음이 훈련되어 있지 않을 때, 마음의 평화와 평온함은 당신이 갖고 있는 부정적인 생각과 감정에 쉽게 무너질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적은 밖에 있는 것이 아니라 안에 있는 것이다. 모든 사람이 적이 되어 당신을 헤칠지라도 평온한 마음만 유지한다면 내면의 평화를 깨뜨릴 수 없다. 하지만 당신의 마음속에서 생겨난 하나의 망상은 내면의 평화와 안정을 한 순간에 무너뜨릴 수 있다. 망상과 그 뿌리에 있는 무지의 지배를 받 는 한 당신은 진정한 행복을 누릴 수 없다. 당신이 망상에 의해 심한 혼란을 느낀다면 그것으로부터 자유로운 상 태, 즉 니르바나의 상태를 추구함으로써 그것을 극복할 수 있다. 당신은 한결같은 마음으로 불법수행을 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이런 가르침에 대해 가능한 한 많이 생각하고 모든 불리한 상황들이 일 시적이라는 것을 깨닫는 것은 매우 도움이 된다. 그런 상황들은 호수에 일렁이는 물결처럼 곧 사라질 것이다. 내부의 적, 즉 마음을 어지럽히는 생각과 전쟁을 벌이기 위해서는 단지 지혜를 키우고 현상의 궁극적인 본질을 깨닫기만 하면 된다. - 달라이 라마 * 이야기 열 하나 워크캠크가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그동안 함께한 마리와 무드(프랑 스), 헬레나와 메리(스페인), 레홍이형-나리-가연이. 정이 참 많이 들었 다. 마지막 금요일, 우리만의 작은 파티를 했다. 인도에서는 기본적으로 술과 담배를 자제하라는 한국에서의 경고와는 달리 마음만 있다면 한껏 난해질 수 있었다. 술은 저렴했고 대마초를 해도 지드래곤처럼 잡혀갈 일 은 없었다. (물론 불법이지만 단속은 거의 없다.) 하지만 굳이 이 깨끗한 도시에서 내 몸 더렵혀 가며 놀 필요는 없었다. 그것은 한국에서 하는 걸 로 충분하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술이 없으면 담백해 질 수 없기에 아이 들과 술 한 잔 했다. 한국식 술게임이 주를 이루었지만 스페인식 술문화 와 프랑스식 술문화도 접할 수 있어 흥미로웠다. 깐깐한 줄만 알았던 프 랑스 아이들은 소탈했고, 스페인 친구들은 뜨겁고 따뜻했다. 결국 민족성 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어 낸 울타리 일지도 모른다. 개개인이 만나 우 정을 나눌 때, 그런 속성은 참 과도하게 일반화 되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우리가 곧 세계지 않은가. (오- 위 아 더 월드) 유네스코 워크캠프가 줄 수 있는 가장 큰 가르침은 바로 이 사실을 깨닫

120 게 하는 것이 아닐까 싶다. 유쾌한 밤이 지나고 안락한 주말을 보냈다. 아이 들이 제 갈 길을 떠났다. 맥그로드 간즈가 마음에 들었던 나는 나머지 일정을 그곳에서 더 보내다가 한국으로 돌아왔다. * 이야기 열 둘 한국으로 가기 전 델리에서 이틀을 보냈다. 이젠 델리라면 셜록 에 나오는 셜록 홈즈 처럼 머릿속에 지도를 그릴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했었는데 막 상 여행책자를 뒤져보니 안 가본 곳이 많았다. 마지막 마무리라 생각하고 이 곳저곳을 다니기 시작했다. 이상한 것은 인도에 온 첫 주에 본 델리와 지금의 델리는 사뭇 다른 냄새를 풍기고 있었다는 것이다. 미워 보이던 릭샤꾼들과 호객꾼들, 더럽게만 보이던 길가의 음식들, 금방이라도 무너질 것 같은 건물 들. 모든 것이 진한 원색의 풍경에서 파스텔 톤의 풍경으로 바뀌어 있었다. 익숙해 져 있었다. 덕분에 이틀간의 델리여행은 정말 유럽의 아름다운 도시에 있는 듯 한 느낌 으로 할 수 있었다. 입국날, 언제나 그렇듯 한국인 일행들을 찾아내 함께 공 항으로 향했다. 델리 공항 3번 터미널이 눈부시게 빛을 내고 있었다. 수속을 마치고 승강장 앞에 앉아 있으니 공허함이 밀려왔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려 하고 있었다. 그동안 쓰던 일기를 뒤적이니 쓰기 싫어서 억지로 쓴 흔적이 역력했다. 평소 에 일기 같은걸 잘 안 쓰니 여행 왔다고 크게 바뀔 내가 아니었다. 처음 공항 에서 만났던 홍남매에서 시작하여 수십 명의 사람을 거쳐 지금 내 옆에 또 다 른 일행이 앉아 있었다. 여행이란 이래서 인생의 축소판이라 불리는 지도 모 르겠다. 피천득의 인연이 생각났다.

121 121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려 하고 있었다. 한국인 아저씨 여행객이 말을 걸어왔다. 가방에 걸어서 오지 속으로 라 는 마크가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고압적이었다. 아저씨는 연신 인도에 대한 불만을 털어내기 시작했다. 몽골, 남아공, 네팔 등 안 가본 곳이 없 다는 아저씨는 인도처럼 더러운 곳은 처음 본다는 이야기를 하셨다. 동감 했다. 120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이륙하려 하고 있었다. 비행기 옆자리에 인도인이 앉았다. 한국말이 유창했다. 그는 울산에서 직 장생활을 하는 사람이었는데 인도여행이 어땟는지 퉁명스럽게 물었다. 차 마 욕을 할 순 없어서 적당히 에둘러서 칭찬을 해 주었다. 그는 코웃음을 치더니 그래도 힘들지 않았냐고 물었다. 심안( 心 眼 )을 가진 그에게 격렬 하게 동의하였다. 한국으로 향하는 비행기가 마침내 이륙하였다. * 맺음말 - 이야기를 끝내며. 여행 후 체중을 재니 5kg이 빠져 있었다. 5kg만큼의 경험을 하고 왔구 나 생각했다. 덥수룩하게 자란 수염의 길이가 한 달의 시간을 말해주었 다. 원래 40일간의 여행을 계획했었지만 또 시작될 한국에서의 생활을 위해 이주 정도 앞당겨 입국했다. 없어진 5kg는 8월 한 달 동안 회복 될 것이다. 내가 있든 없든 한국은 더웠고, 깨끗했고, 쾌적했다. 인도여행을 시작한 첫날, 아침을 먹으며 40대의 형님께서 이런 말을 하 셨다. -인도가.. 처음엔 참 별론데, 한 달 정도 지나믄 좋심니더. 또 오고 싶을 기라. 그땐 몰랐던 이 말의 의미를 인도를 떠날 때 즈음 느끼기 시작 했다.나 는 점점 인도가 좋아졌다. 인도는 한국에서 생각했던 것만큼 아름답지 않았고 사람들도 철학적이지 않았다. 오히려 거리는 더럽고, 사람들은 뻔뻔했다. 하지만. 나는 점점 인도가 좋아졌다. 화룡정점으로 찍으려 했던 타지마할을 남겨두고 왔다. 내가 다시 인도 를 올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기 때문이다. 나는 내 상상속의 인도를 확인하고 싶었다. 기대는 무너졌다. 결국 경 험해 보지 않은 지식은 의미가 없다. 박제된 지식. 그것은 열거 할 순 있지만 표현할 순 없다. 내가 경험한 모든 것이 오롯이 내 몸에 체화됨을 느낀다.

122 "상상 그 이상의 인도, 그리고 워크캠프" 인도_윤가연 RC0812 홍익대학교 4학년이 바로 전, 3학년 겨울방학 때 해외 봉사를 다녀왔다. 그리고 사람들이 왜 외국에 나가보라고 하는지 그때서 조금은 알 것 같았다. 그리고 4학년 1학기가 끝날 즈음에 유네스코 워크캠프를 가기로 결정 했다. 4학년이라는 이유로 내가 이 시기에 가도 될까? 너무 늦은 것 은 아닐까?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늦었다고 했을 때가 가장 빠른 때 아닌가. 나는 주저 없이 워크캠프에, 그리고 인도로 참가를 하게 되었 다. 인도를 선택했던 이유 중 하나는 내가 졸업을 했을 때에 가기 어 려울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결론적으로는 가기를 잘 했다는 생 각이 든다. 지난 번 해외 봉사 때와는 달리 내가 모든 것을 다 준비해야 하기 때 문에 생각보다 할 것이 많았다. 일단 워크캠프 날짜를 포함하여 여행 날짜를 잡았는데 7월 중으로는 끝마쳐야 8월을 알차게 쓸 수 있을 것 이라는 생각에 귀국 날짜를 7월 21일로 잡았다. 캠프 말고도 여행을 조금 더 하고 싶어서 캠프 날짜의 일주일 전을 더 포함하여 총 3주로 생각하고 비행기 표부터 끊었다. 보통 가는 다른 나라와 다른 점이 있 다면, 비자가 있었다는 것인데 생각보다 서류가 복잡해서 시간이 걸렸 었다. 캐리어를 끌고 가기에는 길이 좋지 않다고 들어서 배낭을 구했 다. 나머지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던 것을 챙기고 인터넷을 보고 준비 했다. 그리고 7월 9일, 싱가폴을 경유하여 델리의 인디라간디 국제공 항에 도착했다. 새벽 2시에 도착을 해서 아침 8시까지 공항에 있은 후 택시를 타고 뉴델리 스테이션으로 이동했다. 공항에서 여행을 온 한국 남매를 만나서 함께 이동했는데, 일주일 동안 여행을 할 때 이런 식으 로 한국 사람과 동행해서 다녔었다. 나는 혼자 왔지만 혼자가 아니었 다. 공항을 나오자마자 느낀 것은 찌는 더위였다. 그리고 택시에서부터 당

123 123 했던 사기성 짙은 여행사. 결국 원래 주기로 했던 차비보다 3배를 더 물 었지만 그래도 물가가 싼 덕분에 큰 타격은 입지 않았다. 인도를 선택했 던 이유 중 다른 하나는 물가가 다른 외국 보다는 쌌기 때문도 있다. 비행 기 값이 가장 큰 지출이었다. 결국 뉴델리 기차역에 도착 했고, 그 곳에 있는 숙소를 잡았다. 워크캠프는 도착 후 약 일주일 후였는데 그 사이에 는 관광을 했다. 원래는 16일 월요일에 미팅 포인트에 가야 하는데 한국 에서 같은 캠프인 것을 알게 된 오빠와 이틀 먼저 가기로 했다. 처음에는 픽업을 해주는 줄 알고 갔는데, 결국 연락을 받고 가는 깔카역에서 캠프 장소인 루치 사무소까지 가는 방법의 문자를 받고 찾아 갔다. 버스를 타 고 구불구불한 길을 1시간 정도 갔던 것 같다. 델리에서 깔카역 까지 가 는 기차를 예약 할 때에 가장 좋은 등급밖에 남지 않아서 그것을 타고 갔 는데 그 기차로 탔던 5시간 보다 버스를 타고 갔던 1시간이 더 길게 느껴 졌었다. 122 도착하고 이틀 동안은 일단 휴식을 했다. 인도에서의 일주일이 생각보다 나에게 크게 다가왔기 때문에 휴식이 필요했다. 그리고 월요일, 같은 캠 퍼들이 한 번에 도착했다. 우리 캠퍼의 구성은 인도 리더와 나를 포함한 한국인 4명, 스페인 2명, 프랑스 2명이였다. 리더와 한국사람 2명은 남자 였고 스페인은 언니들이고 프랑스는 동생들이였다. 우리 프로그램은 일 을 하는 곳이 첫 주와 둘째 주가 다른데, 첫째 주는 루치 사무소에서 물탱 크를 만드는 활동을 했다. 식사 당번은 2명씩 돌아가면서 했고 그 날에는 활동은 하지 않았다. 산이기 때문에 물이 부족한 편이라 물탱크를 만든다 고 한다. 캠프는 우리 말고 2개가 더 있었는데, 하나는 21명의 타이완 아 이들로 구성된 캠프와, 리더를 포함에 4명만 있는 캠프가 있었다. 여기에 도 한국인 여자 아이가 있었다. 일은 다 같이 했다. 우리가 했던 부분은 돌을 옮겨 바닥을 평평하게 정돈하고, 철사를 이용해 물탱크의 뼈대를 만 드는 것이었다. 우리 캠프에서는 일주일 동안만 루치사무소에서 일을 했 기 때문에 완성된 물탱크는 보지 못했는데 조금 아쉬웠다.

124 평상시의 오후에는 일단 일을 마친 후 항상 더웠기 때문에 샤워를 하고 조금 있으면 저녁 시간이 된다. 인도의 쌀은 점성이 별로 없는 편이어서 밀가루 같 이 먹으면 금방 소화가 되는 것 같다. 그래서 많이 먹었다. 저녁을 먹고 캠퍼 들끼리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거나 노트북으로 영상을 봤다. 해가 지기 전에 방 문에 모기장을 치고 일기를 쓰고 잠을 잤다. 한국과 다른 점이 있다면, 정 전이 아주 잦았다는 것을 빼 놓을 수가 없을 것 같다. 그리고 더운 지방이었 기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북부 지방에는 선풍기가 없었다. 아니 필요 없었 다.) 보통 방 천장 한 가운데에는 전등이 아닌 대형 선풍기가 있는데 전등 옆 에 스위치가 함께 있다. 그래서 잘 때는 더우니까 문을 열어 두고 선풍기를 틀고 자는데, 중간에 정전이 되었는지 선풍기가 꺼져서 잠에서 깬 적도 있다. 요리를 할 때에도 아침에는 토스트기로 빵을 굽다가 중간에 정전이 되어서 난감했던 적도 있다. 저녁에 밥을 먹다가 정전이 되어서 촛불을 켜고 먹었던 적도 있다. 그래서 냉장고가 있지만 제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던 것이 가장 아 쉬웠다. 나를 포함한 동양권 사람들은 차가운 물을 많이 선호했는데 (상당히 더워서 일수도 있지만) 인도 리더가 우리에게 왜 차가운 물을 찾는지 물어본 적도 있다. 그런데 설명을 할 수가 없었다. 갈증이 더 잘 해소 된다고 했었어 야 하나. 이해를 하지 못할 만도 했던 것이, 일을 하는 중간 쉬는 시간에 간식 을 가져다 줬는데 과자와 인도의 국민차인 짜이를 정말 뜨겁게 가져다 줬었 다. 처음에는 정말 이 뜨거운 것을 어떻게 먹나 했었는데 어느 정도 지나니까 이열치열이라고 뜨겁게 먹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차는 내 입맛에 딱 맞았다. 루치에서의 마지막 주 금요일 저녁에는 각 국의 음식을 서로 만들어서 먹는 음식교류도 했다. 이 날은 나와 나리 언니도 식사 당번이었는데 내가 싸온 김, 참치, 라면 등을 가지고 무엇을 할 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막상 인도에 와 서 생각해 보니 참치와 라면 같은 것은 채식주의자는 인도 사람이 먹지 않는 것이고 여태까지 먹는 것을 봐서는 우리 캠퍼들은 매운 것을 정말 잘 먹지 못 했다. 그래서 나온 아이디어가 계란 찜! 다행히도 계란은 있었고, 간은 어느 나라에나 있는 소금이 있었다. 원래 파 같은 야채를 넣어야 하지만 보통 여기 서 먹는 야채라고는 오이와 양파, 매운 무뿐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어울릴 것 같은 양파와 한국에서 가져온 돌김을 넣어서 만들었다. 처음에는 조금만 만 들어서 일하는 사람들에게 맛을 보게 했다. 반응은 좋았는데, 인도의 채식주 의자들 중에 계란까지 먹지 않는 사람도 꽤 있어서 많이 놀랐다. 세상에는 맛 있는 것이 정말 많지만 고기를 먹지 않는 것은 나에게 상상할 수 없는 일인데 우리나라처럼 반찬이 다양한 것도 아니고 정말 삼시 세끼 같은 것 만 먹으면 서 살 수 있을까 싶었다. 북쪽 지역에서는 돼지고기가 하층민만 먹는 음식이 라는데, 나는 하층민이여도 좋으니 고기를 먹을 것 같다. 기본적인 인도의 커리와 짜파티, 프랑스의 크레페, 특히 크레페는 정말 내 입 맛에 딱 맞았는데 속 재료가 없어서 땅콩 잼과 딸기 잼을 먹었지만 그 밀가루

125 125 반죽이 정말 맛있었다. 나중에는 둠이라는 프랑스친구에게 레시피를 따로 받았다. 타이완의 춘장을 넣은 면, 하지만 면의 양 조절을 실패하여 많은 면이 그냥 남았었다. 이것을 감당할 소스가 더 이상 없었는데 마침 저번 캠퍼들이 두고 간 돼지고기 양념(고기가 없었으니 당연히 쓰지 못했을 것 같다.)이 있어서 임기응변으로 거기에 물을 더 넣어 간을 맞춘 다음에 담 가 먹는 것을 만들었었다. 그래도 그것 말고 콩으로 만든 고기 맛 나는 것 과 계란찜과 비슷한 계란 음식, 메추리알인데 그것을 엄청 졸여서 검정색 이 된 것과 어떤 씨를 물에 넣어 주물렀더니 젤리처럼 되었었는데 그것을 음료수로 만든 것 등 다양한 타이완 음식을 맛 볼 수 있었다. 124 저녁을 먹고 타이완 s day 라고 해서 타이완 학생들이 준비한 장기자랑 도 봤는데, 한국 사람은 5명으로 다른 나라 사람보다 비교적 많았는지라 타이완 아이들이 장기자랑 하나만 준비 해 달라고 해서 정말 급하게 준비 했었다. 우리나라 곡도 찾아보고 이것저것 생각했었는데, 결국 내가 저번 겨울방학 때 베트남 봉사단에서 배운 응원 팀의 액션을 하게 되었다. 처 음에는 나는 정말 춤을 못 춰서 춤은 못하겠다고 강하게 어필하고 할 거 면 액션을 하겠다고 한 것이었는데, 안무를 보여줬더니 괜찮다는 의견이 많아서 결국 액션으로 결정이 났다. 정말 많이 부끄러웠지만, 이 안무를 또 써먹었다는 것에 대해서는 뿌듯했다. 중간에 1단 탑을 쌓는 것으로 마 무리를 하였다. 주말에는 휴양지인 쉼라를 갔다. 인도의 시간이 그렇듯 가는데 만 기차 로 5시간 정도 걸리는 곳 이였는데 가기를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 산 지대에 있어서 그런지 시원했는데 영국에게 점령을 당했을 때 영국 사 람들이 쉬기 위해서 만든 지역이라고 한다. 그래서 건물도 다 영국식이라 인도의 작은 영국이라고 불린다. 인도 사람들도 신혼여행을 가거나 관광 을 할 때 이곳을 찾는다고 한다. 영국의 건물과 인도의 문화가 만나서 또 다른 색을 내고 있었다. 원숭이도 처음 봤는데 순한 원숭이도 있었지만 안경을 가져갈 정도로 영악한 원숭이도 있었다. 하루 밤을 자고 다시 숙 소로 돌아왔는데 날씨도 그렇고 꿈만 같았다. 그리고 일요일, 우리 캠프는 그 다음날 다른 지역으로 이동을 해야 했기 때문에 저녁 시간에 타이완 사람들과 작별인사를 했다. 생각보다 많이 아 쉬웠다. 조금 더 이야기 해볼 걸 하는 생각도 들고 인도에서 언제 이렇게 많은 타이완 학생들을 만날까 싶다. 그래도 요즘에는 SNS을 많이 하고 해서 서로 아이디도 교환했다. 서로 사진도 찍고 작은 선물도 교환했는데 우리에게 편지를 써준 귀여운 여자아이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그리고 그 다음날 아침 일찍 가는 시간만 12시간이 걸리는 다람샬라를 향 했다. 버스만 5번을 갈아탔는데 글로만 쓰니까 5번이 정말 작게 느껴져서 좀 아쉽다. 정말 타보지 않았으면 나도 몰랐을 것이다. 중간에 정류장에

126 서 간단한 점심을 먹을 때 우리를 제외한 모든 인도인이 우리를 신기하게 보 고(다른 관광지에서도 그랬지만) 더워서 모두 창가 쪽에 앉았는데 갑자기 비 가 온 것 까지는 좋았으나 버스가 물이 새서 온통 젖었던 기억이 강렬했다. 그래도 그 때 먹은 사모사라는 간식이 정말 맛있었다. 새벽 일찍 가서 해질 무렵에 도착했는데, 리더도 힘들었는지 그 다음날 활동 을 하지 않고 쉬기로 했다. 그래도 이곳의 첫 느낌은 정말 시원하고 고기를 먹을 수 있는 곳이 있었고 비교적 가까운 곳에 상점이 있었다. 전의 숙소는 슈퍼를 가는 데에만 걸어서 3~40분 정도였다. 우리가 묵은 곳은 다람콧이 라는 지역의 호텔이었다. 이곳에서 하는 활동은 벽화인데 학교에서 아이들이 공부를 할 때 영어 알파벳과 숫자가 없어서 그 학교 선생님이 의뢰를 했다고 한다. 세부적으로 쓰자면 한 벽에 흰색으로 원래 있던 그림을 덮고, 그 위에 알파벳 과 숫자를 그리는 것 이였다. 일단 흰색으로 벽을 칠했는데, 생각했던 것 보 다 재료가 조금 부실해서 어려움이 있었다. 흰색 페인트는 너무 묽었고, 벽이 작지 않은 편이였는데 롤러도 없었다. 5번 이상을 덧칠했는데도 완전히 가려 지지 않았는데 일주일은 짧았고 실제로 일을 한 날은 3일 뿐 이여서 시간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원래하기로 했던 시간보다 더 길게 했고, 마지막 날에 약간 미흡한 상태로 알파벳과 숫자를 그렸다. 옆에는 인도 국조인 피코와 국 기를 그렸다고 한다. (나는 마지막 날에 식사 당번이어서 참여하지 못했다.) 그래서 느낀 것은 한국 사람이 대체적으로 일을 잘 한 다는 것이다. 워낙 더 운 나라라 그런 것일 수도 있지만 뭔가 일 처리가 한국과는 달랐다. 저녁 시간에는 다람살라 곳곳을 구경했다. 달라이라마가 있는 곳이기 때문에 사원도 가고 맥그로드 간지(맥간)가 가까워서 걸어가고 거기서 물건도 조금 샀다. 인종도 북부 지역이라 그런지 말로만 듣던 한국 사람과 비슷한 티벳 사 람들도 있었는데 정말 길을 물어보면 한국말을 할 것 같았다. 가장 좋았던 점은 맥간에는 고기를 비롯한 맛있는 음식들이 많았다는 것이 다. 주로 양고기와 닭고기였지만 적당히 매운 음식도 많았고 (우리는 항상 이 음식이 매운 것이냐고 물어보고 그런 것만 찾았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까 이 상한 사람들로 봤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 입맛에 맞는 음식도 많았다. 먹을 때만큼은 한국 사람들끼리 뭉쳐서 갔는데 그 매운 맛을 함께할 사람이 없어서 어쩔 수 없었다. 숙소에서 고기를 먹을 수 있던 것은 아니었는 데, 중간에 스페인 언니들의 방에 가서 스페인 음식인 하몬을 먹었을 때가 정 말 재미있었다. 돼지 앞다리 살을 말린 것이었는데 우리나라에는 없는 음식이었다. 익히지 않은 것이라 걱정은 했지만 그래도 고기고 스페인의 대중적인 음식이라고 해 서 맛있게 먹었다. 스페인 언니도 고기가 필요했던 것 같다. 우기라 비가 오 지 않은 날이 없었지만 7월에 이런 선선함을 느낄 수 있어서 좋았다. 주말에

127 127 는 트레킹을 할 예정이었는데 나는 비행기 날짜가 조금 촉박하여 리더에 게 양해를 구하고 하루 일찍 왔다. 트레킹을 하지 못해서 조금은 아쉬웠 지만 인도의 교통이 어떻게 될지 모르기 때문에 적어도 이틀 전에는 델리 에 도착해야 했다. 델리로 돌아갈 때에는 한 번에 가는 사설 버스를 이용 했다. 다른 캠프에 있던 가현이도 같은 날짜의 비행기라서 같이 갔는데 그래서 심심하지는 않았다. 126 다시 찌는 더위가 찾아왔다. 마지막 이틀 동안에는 뉴델리의 빠하르 간지 에서 선물할 기념품들을 샀다. 이미 그 전에 무엇을 살지 조금 정해 두었 는데, 시장 곳곳을 돌아보니까 맥간에서 샀던 물건들도 다 이곳에 있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가격은 더 비쌌으니까 만족한다. 델리에도 세계문화유산 등 볼거리가 많은데, 미처 보지 못한 것을 몇 곳 더 보았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첫 주에 델리에 꽤 오래 있었는데 안보고 갔으면 후회했을지도. 한국인 아주머니를 만나서 동행했는데, 그 분 덕분 에 한국말을 잘하는 인도 가이드와 함께 해서 종교, 문화 등 인도에 대해 더 잘 알 수 있었다. 마지막 날, 가현이는 타지마할을 보러 새벽 일찍 아그라를 향했고 한국 공항에서 다시 보기로 했다. 근데 그날 숙소가 정전이 되었다. 정전이 일 상이기는 했지만 밤에 에어컨이 나오지 않아서 정말 고생했다. 심지어 에 어컨방과 에어컨의 없는 방의 가격 차이가 많이 났는데 정전이라 누구를 탓 할 수도 없었다. 여차저차 해서 공항에 도착하고 비행기를 무사히 탔 는데 경유를 할 때 신문을 보고 깜짝 놀랐다. 델리 지역부터 시작해서 북 부 전체가 정전이 되었다는 기사가 있었다. 인도에서도 이례적인 일이었 나 보다. 마지막까지 나에게 깊은 인상을 준 인도! 한국에 도착하자마자 가현이와 삼겹살을 배부르게 먹었다. 식당에 에어컨 이 나온다는 것, 핸드폰을 그냥 충전 해 준다는 것, 고기가 있다는 것 등 우리에게는 일상이었던 것들이 너무 소중하다는 것을 실감했다. 한국뿐 아니라 인도에 대해서도 정말 감사하게 생각한다. 한국에 온지 아직 한 달이 안 된 지금은 취업 준비를 하고 있고 특히 영어 공부를 하고 있는데(그래 봤자 토익 스피킹 이지만) 이 공부를 하면서도 그렇고 인도에만 가도 정말 언어를 잘하고 싶다는 생각이 많이 든다. 그리고 언젠가는 스페인을 꼭 가겠다고 다짐하면서 스페인어를 배워 볼 생각이다. 그리고 우리 집에서 나만 유일하게 여권이 있는데 좋은 경험을 하게 해줘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다른 외국도 마찬가지지만 특히나 치안 이 좋지 않은 인도였는데 허락해주셔서 내가 갈 수 있었으니까. 돈을 벌 면 꼭 부모님에게 가까운 곳으로 해외여행을 보내드려야겠다. 내 동생은 나중에 혼자서 잘 갈 것 같다.

128 인도에 와서 하루하루를 잊지 않으려고 거의 매일 일기를 썼는데 이 일기를 보지 않고도 많은 양의 글을 쓰고 있다. 캠프 전 일주일과 사이사이의 사건들 등 아직도 쓰지 못한 일들이 많은데 그래도 큰 맥락은 어느 정도 쓴 것 같아 서 이만 쓰도록 하겠다. 사진을 담아 두었던 USB를 한국에 와서 잃어버리는 바람에 백업은 해 놓았지만 마지막 4일이 없는 것이 너무 아쉽다. 같이 찍은 사진도 많고 그랬는데. 하지만 그 기억은 절대 잊을 수 없으니까.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고 정말 고생을 잘 했다고 생각한다. 잘 다녀왔습니다! 인 도!

129 터키 128 "선물" 터키_김선미 GEN 23 부산대학교 어학연수 시절 각 국의 친구들에게서 따뜻한 정을 선물 받았고, 진심이라 는 마음을 느꼈고, 다름을 인정할 수 있는 포용력을 배웠습니다. 그들은 나에게 사람의 소중함을 일깨워주었습니다. 이제는 워크캠프를 통해 내가 그들에게 받았던 소중한 선물들을 하나씩 전해 주고자 합니다. 거창한 선물을 주기 위함이 아닌 워크캠프. 내가 줄 수 있는 건 그들을 이해할 수 있는 열린 마음가짐, 함께함의 소중함, 힘들 때 힘이 될 수 있는 말 한마디를 건네는 용기, 행복을 줄 수 있는 미소. 워 크캠프에 참가하기 전 터키를 비롯해 멤버들이 살고 있는 나라에 대한 역 사와 문화에 대한 책을 읽어 보고, 영화를 보고, 노래를 들어보고, 여행을 다녀보면서 그들에게 줄 선물을 준비하고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포장하였 습니다. 또한 한국의 정을, 한국의 이미지를, 한국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 를 선물해 주고자 한국을 나타낼 수 있는 것들을 옷으로 디자인 하여 예 쁘게 포장했습니다. 선물 꾸러미를 한 가득 싣고 떠난 워크캠프. 나의 첫 선물은 행복을 줄 수 있는 미소. 환한 미소를 지으면서 워크캠프 멤버들에게 다가가 인사를 건 넸고, 그들 또한 환한 미소와 인사로 답하였습니다. 인사만으로도 화기애 애해진 멤버들. 우리는 그 미소를 머금은 채 워크캠프 장소인 터키의 아

130 주 작은 마을 셀렌디로 향했습니다. 우리가 하게 될 일은 새하얀 눈처럼 새 하얀 페인트로 마을의 건물 외벽들을 칠하는 것과, ALLIANCE 30주년 행사 를 준비하는 것이였습니다. 40도 가까운 무더운 날씨,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 아래 하루에 6시간씩 페인트를 칠해야 했던 우리들. 더위와 싸우고 계속되는 고된 노동을 견뎌야 했던 시간. 그 시간 속에서 내가 줄 수 있는 선물은 힘이 될 수 있는 말 한마디를 건네는 용기였습니다. 사소한 말이지만 큰 힘이 될 수 있는 말들- 힘들면 잠시 쉬 어도 돼., 힘들면 내가 도와줄께., 괜찮아? -을 건네며 더위와 노동 으로부터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었고, 우리는 무사히 우리가 할당 받았던 일을 끝마칠 수 있었습니다. 함께 풍선을 불고, 축하 메시지를 작성하고, 바라는 소원을 적고, 한국과의 소통을 통해 하나가 됨을 보여 줄 수 있는 무대를 준비했던 ALLIANCE 30주 년 기념일. 준비해온 한국을 그린 티셔츠를 선물했고, 우리는 한국을 입었고, 한국과 소통하였습니다. 그 속에서 함께 웃고, 함께 즐길 수 있었던 잊지 못 할 시간. 워크캠프 멤버들에 대해, 그들의 나라에 대해 알고자 마련했던 문화의 날. 프 랑스의 아름다운 샹송에 취하고, 스페인의 달콤한 오믈렛을 맛보고, 홍콩과 대만의 고풍스런 서체를 배워보고, 터키의 진한 커피를 마시고, 한국의 따뜻 한 정을 나누었던 시간들. 그 시간들을 통해 나는 그들을, 그들은 나를 이해 하게 되었고, 우리 의 의미를 재조명 해 볼 수 있었습니다.

131 131 휴식시간이 되면 언제나 얘기가 끊이지 않았던 워크캠프. 사랑이란 주제 에서부터 남녀평등, 호모섹슈얼, 민주주의와 사회주의의 이념대립 문제 등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하면서 나의 마지막 선물을 그들에게 주었습 니다. 다름을 인정하는 열린 마음. 그저 더 나은 방안을, 정답이라고 할 만한 것을 찾기 위한 항해. 각자의 가치관이 다르고 생각이 다르기에 정 답은 없습니다. 자신의 생각만이 옳다고 단정지을 때 우리는 그 사람에게 마음의 문을 닫게 됩니다. 한 사람의 마음의 문도 닫히게 하지 않기 위해, 열심히 중재자 역할을 했던 나. 그래서 워크캠프 멤버들 모두가 서로의 다른 생각들을 포용할 수 있었고, 무엇이 좀 더 나은지에 대해 머리를 맞 대고 고민할 수 있었습니다. 130 내가 주려고 했으나 오히려 받아버린 함께함의 소중함. 워크캠프 기간 동안 함께 일했기에 혼자라면 불가능 했었을 것들, 포기해 버리고 말았을 것들을 포기하지 않고 해낼 수 있었고, 함께 생활했기에 가족과 친구들이 그리운 마음을 달랠 수 있었고, 함께 여행했기에 길을 잃고 산속에서 잠 을 자야 했던 순간도 무섭지 않았습니다. 함께여서 서로의 손톱을 색색깔 로 물들일 수 있는 작은 행복을 찾을 수 있었고, 함께 더위와 싸웠기에 선 풍기조차 없었던 워크캠프지가 덥지만은 않았습니다. 여행 중 터키 친구 의 할머니께서 돌아가셔서 급히 집으로 가봐야 했던 순간에도 죽음에 대 해 함께 슬퍼하고 같은 마음으로 친구를 걱정해주고 위로의 말을 건네주 면서 집으로 향하는 길까지 함께 배웅했기에, 친구를 보내는 마음이 쓸쓸 하지만은 않았습니다. 워크캠프를 끝내고 헤어지는 순간에도 함께했던 추 억이 많기에 슬프지만은 않았습니다. 워크캠프를 통해 내가 받은 선물은 이것뿐만이 아닙니다. 프랑스인들은 자존심이 세고 자기 주장이 강하다, 독일 사람들의 생활패턴이나 사고는 너무 엄격하다, 스페인 사람들과 멕시코 사람들은 놀기를 좋아한다 등의 편견을 가지고 있었던 나. 하지만 워크캠프에서 만났던 그들은 나에게 편 견의 자물쇠를 풀 수 있는 열쇠를 주었습니다. 누구보다도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포용하려 했던 프랑스 친구 루이스와 엠마, 논리정연한 성격이 일의 효율성을 가져다 줄 수 있다는 가능성을 제시해준 독일 친구 실비아, 누구보다도 열심히 일하고 열심히 즐길 줄 아는, 모든 일에 열심 히였던 정열적인 스페인 친구들 요하네와 안데르, 멕시코 친구 미셸. 동 양 사람들은 서양 사람들에 비해 수줍음이 많고, 조용하다는 편견을 깨준 자랑스러운 한국 친구들, 지은이와 샛별이, 우진이 그리고 대곤오빠, 멋 진 홍콩과 대만 친구 호이캄과 제시카. 그리고 편견의 자물쇠를 풀 열쇠 를 찾게 끊임없이 도와준 터키 친구들 오잔과 셀린, 세르비아 친구 옐레 나. 워크캠프에서 이들을 만났기에 꽁꽁 묶인 편견의 자물쇠를 풀 수 있 었고, 편견 없이 바라보는 시각을 배울 수 있었고, 더 멀리 생각할 수 있 는 힘을 키울 수 있었습니다.

132 워크캠프는 나를 한 뼘 더 성장하게 해 주었던 한 여름의 크리스마스 같은 선 물 이였습니다. 그 선물은 무더운 여름의 태양을 이겨내고,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을 견뎌야만 곡식이 익어가듯 나에게 성장의 밑거름을 주었고, 그 성 장에는 뜨겁게 내리쬐는 태양도, 거세게 몰아치는 비바람도 꼭 필요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이 커다란 성장을 통해 앞으로 누군가를 성장할 수 있게 하는 씨앗이 되어줄 것이고, 함께함의 소중함, 열린 마음, 용기, 행복을 줄 수 있는 미소로 그 싹이 튼튼히 자랄 수 있게 해 주는 밑거름이 되어줄 것 입니다.

133 "도전! 따뜻함 그 이상의 정을 느끼다" 터키_홍샛별 GEN23 홍익대학교 #1. 나 가 아닌 누군가 를 향한 뜨거운 청춘 4학년이면 취업준비하고 공부해야지 무슨 워크캠프야! 라는 말을 인 터뷰때 듣게 되었습니다. 그 순간 머릿속으로 아 그런가? 내가 지금 선택한 이것이 이미 해외봉사 활동을 다녀온 저로써..시간낭비이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제가 인터뷰를 준비하며 생각해왔던 저의 다짐을 떠올렸습니다. 지난학기에 세계가 내 가슴에 다가왔다 라는 책에서 봉사 활동자들의 수기를 읽게 되면서, 저 역시 해외자원봉사활동을 꿈꾸고 계획하게 되었 습니다. 그 책속에서 젊음을 팔아가면서 다른 사람을 섬기는 삶을 살아가는 젊은 봉사자들을 글을 읽고, 가슴이 벅차오르는 것을 느꼈습니다. 또한 지금까 지 너무 내 자신의 부귀영화만을 바라는 이기적인 삶을 살지는 않았는지 반성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단지 수동적으로 책을 읽고 그들의 뜨거운 심장에 감동하는 것이 아니라, 능동적으로 봉사활동에 참여하여 따뜻한 눈빛과 뜨거운 심장과 열정, 먼 저 내민 손으로 삶에 지친 아이들에게 희망의 메시지를 전하고 감동을 주 는 사람이 되고 싶었습니다.

134 대학교 생활 중 가슴깊이 청춘에 대해 뜨거웠던 적이 없었습니다. 이번 봉사활동을 소위 스펙을 위한 활동이 아니라 대학생활에 있어 저에게 주어진 마지막 기회로, 대학 생활을 하며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나 가 아닌 누군가 를 향한 뜨거운 청춘을 느낄 수 있는 장이 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 하며 누구보다 진실되고 간절하게 원했습니다. 정의롭고 바람직한 사회로 나아감에 있어, 보탬이 되는 지성인으로 살아가기 위해서, 이번 해외자원봉사활동은 저에게 새로운 봉사활동의 시작이자 도전 입니다! 저의 간절한 진심이 전달되었는지, 저는 합격하게 되었고 유네스코 워크샵에 참가하게 됩니다. #2. 유네스코 워크샵 1박2일,짧은 일정으로 유네스코 워크샵에 참가하게 되었습니다. 다양한 프로그램으로 워크캠프를 준비하는 저희들에게 꽉 찬 정보들을 주셨 습니다. 가장 유익했던 시간은 아무래도 저희에게 필요했던 무엇을 챙겨가면 좋을 까? 였습니다. 궁금했던 점을 질문을 통해서 대답해 주셨는데요, 가려웠던 부분을 시원하게 긁어주신 느낌 이였습니다. 6개월간 장기 봉사활동을 영국에서 했던 저로써 외국인친구들이 무엇을 궁금해 하고 또 어떤 음식을 좋아하며 어떤 선물에 매력을 느끼는지 알고 있었지만, 그 시간을 가지며 좀 더 풍부한 정보를 얻을 수 있는 시간을 가지게 되어 좋 았습니다. 하계 워크캠프는 개인이 알아서 그 곳까지 찾아가는 시스템이여서 함께 연수 받은 친구들과는 겹치는 프로그램이 없어 조금 아쉬웠습니다. 서로 공감대가 조금 부족한 느낌이였어요. 뭔가 혼자 모든 것을 알아서 해야 될 것만 같은 기분이랄까? 하지만 이것 또한 워크캠프의 취지이고 도전 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이제 정말 내가 가는구나! 라는 생각도 들었고 선배기수들의 피티를 들으며 괜히 기대도 되고 설레였던 시간이였습니다.

135 #3. 설레이는 첫만남 누군가와의 첫 만남은 항상 설레고 떨리기 마련입니다. 인포싯을 받은날부터 내가 가게될 캠프에 대한 정보를 자세히 알게되어 워크캠프의 일원이 된 기분이 들었고 미리 캠프리더께서 캠퍼들을 페이스 북 비공개방으로 초대해주셔서 사이버상으로 만날 친구들과 연락하며 서 로 간단한 인사를 주고받는데 왜 그렇게 설레던지요... 지금생각하면 그 때의 설렘을 다시 느끼고 싶어요. 먼저 인포싯에 있던 미팅포인트 주소를 구글맵으로 찾아보고 출력했습니 다. 평소 길 찾기엔 자신이 있는 Map샛별로 위치를 정확히 숙지했습니다. 터키로 향하는 비행기안, 워크캠프를 지원하게 된 동기를 떠올리며 마음 을 되잡았습니다. 드 디 어! 7월20일 그들과 만나는 날입니다. 하나 둘 cenctur office로 모이기 시작하는데 다들 너무나 반갑고 같은 목적으로 만나게 된 친구들이여서 남모를 친근감도 들었습니다. 이스탄불에서 셀렌디라는 도시까지 버스로 12시간이 걸렸습니다. 아직 친구들과는 서먹서먹하고 어색합니다..과연 우리가 친해질 수 있을 까? 하는 생각으로 버스에 몸을 싣습니다...그리곤 다음날 도착한곳은 한적한 시골마을!

136 아 ~ 이곳에서 2주간 나의 젊음을 불태우리!!! 생각하고 다짐합니다. 터키와 한국은 형제의 나라라고 할 만큼 정서가 비슷한데요 한국의 시골과 다를 바가 없었습니다. 말이 통하지 않지만 마음은 통하잖아요~ 저희들을 반 기시는 마을 사람들의 표정이 아직도 생생히 기억이 납니다. #4. 다양한 국적의 친구들과2주간 동거동락 :문화도 다르고 말도 다르고 살아온 환경도 다른 15명의 친구들과 과연 2주 동안 별탈없이 지낼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하루가 시작되었습니다. 아침 9시부터 12시까지 오전일을 하고 점심을 먹고 낮잠시간을 가진 뒤 오후 일을 하고 저녁을 먹고 휴식을 가지게 되는 시스템으로 워크캠프가 진행됩니 다. 첫날부터 위기는 시작되었습니다. 38,39도가 넘는 더운 날씨에 선풍기라곤 찾아볼 수 없는 마을에서 페인트칠 을 하게 됩니다. 더운 날씨에 햇볕아래서 페인트칠을 열심히 하다 보니 친구 들이 하나 둘 아프고 짜증이 나게 됐습니다. 날씨도 덥고 샤워실도 하나뿐이 니 이기적인 마음이 들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우리는 워크캠프를 지원한 캠 퍼들이고 해외자원봉사활동을 하러온 학생들이라는 첫 다짐을 회상하며 마음 을 다잡아 다시 한마음으로 서로 격려하며 무사히 일을 마칠 수 있게 됐습니 다. 일을 할 땐, 한집 한집 내집이다 생각하고 열심히 최선을 다해서 일했습니다. 마을분들과 말은 통하지 않았지만 간단한 터키어를 배웠던 것으로 감사합 니다 라고 터키어로 말하면 어찌나 좋아하시던지... 항상 캠퍼들에게 시원 한 물과 음료수를 제공해주시고 무언가 저희들에게 더 주시려고 했습니다. 긴말을 나눈 적은 없지만 마음으로는 수백 수천만의 말을 나누어 그들의 따 뜻한 정을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일을 시작하다보니 친구들과 동질감도 생기고 서로 공감대가 형성되어 장난 도 치며 대화가 자연스럽게 이어졌습니다. 처음의 걱정과는 다르게 우리는 시골에서 휴식시간을 보내는 법을 익혀갔습니다. 유럽친구들과 아시아친구들 이 가지는 생각들과 서로의 나라에 대해 알아가며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서 로에 대해 이해하는 마음도 커져만 갔습니다. #5. 우리에게 잘가! 는 없어 오직 안녕! 만 있을뿐 No gulegule Only Merhaba 마지막주가 돼서는 우리모두 헤어짐이라는 시간을 인지하게 되었고 함께하는 매 시간이 너무 아쉽고 아깝고 소중하다는 생각이 들어 어떻게 하면 더 많은

137 137 시간을 함께 보낼까? 라는 생각을 친구들과 함께 하게 되었습니다. 마지막날 그누가 시키지도 않았지만 서로에게 편지를 쓰게 되었습니다. 몇몇 친구들은 눈물을 보이기도 했습니다...2주라는 시간 짧다면 정말 짧 은시간 우리는 무엇을 느꼈길래 눈물을 흘리며 헤어짐을 맞이하게 되었을 까요... 가슴이 벅차올랐습니다 주라는 시간동안 서로에게 정이 쌓여 헤어짐이 라는 슬픔을 맞이하게 됩 니다. 힘들 때 서로를 믿어가며 응원해주었던 뒷받침이 있었기 때문에 무 사히 워크캠프를 마치게 될 수 있었습니다. 아직도 사진을 보면 그때의 추억이 생생히 기억납니다. 제 삶에 있어 잊지 못할 한 순간을 선물해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그때 느 꼈던 뜨거운 감정을 잃어버리지 않고 매순간 최선을 다해서 살아가리라 다짐합니다. 사랑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138 15. 폴란드 "폴란드는 프라하, 부다페스트 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 폴란드_김다솔 FIYE 204 연세대학교 가기 전에 인포시트를 접했을 때는, 아무런 감도 오지 않았다. 몇 시 까지 모여야 하는지, 정확한 약도가 어떻게 되는지, 영어 캠프라고 하 였는데 정확한 나의 역할과 커리큘럼이 어떤 것인지. 가장 자세했던 정보는 폴란드 관광정보 뿐이었다. 심지어 인터넷에 컨퍼메이션 슬립 을 작성하는 일도 순조롭게 되지 않아 리더와 사무국에 몇차례 메일 을 보내야하는 번거로운 일도 발생하였다. 왠지 불안한 나의 캠프, 나 는 여행 계획으로 캠프를 끝나는 즉시 프라하로 떠나는 일정을 잡았 다. 그리고 실제로 폴란드의 수도 바르샤바에 도착하자마자 중앙역으 로 가서 프라하 행 기차표를 샀다. 그러나 그 성급했던 표 구매는, 캠프 내내 가장 후회되는 결정이었다. 걱정으로 도착한 자코파네의 숙소는 일단 시설이 생각보다 굉장히 좋 았다. 아늑한 침대, 깨끗한 샤워실과 화장실이 딸린 3인실을 배정 받 았고 도착하자마자 먹은 저녁도 따뜻하고 맛있었다. 가장 인상 깊었 던 것은 이 캠프에 이미 2회 이상 참가한 자원봉사자가 3명이나 있었 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 캠프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을 것이란 예감을 주었다. 스페인, 폴란드, 멕시코, 우크라이나 등 영어가 모국어인 참 가자는 미국 참가자 한 명밖에 없었던 우리 9명은 쭈뼛거리며 어색하 게 대화를 시작했고, 각자 다른 억양과 발음을 알아들으려고 노력하다 보니 자연스럽게 서로를 더욱 경청하게 되었다.

139 139 내가 캠프를 참가하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생각했던 것은, 아이들에게 좋 은 영어 교육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고, 그렇다고 한국의 문화를 적극적으 로 알리는 홍보대사가 되는 것도 아니었다. 만약 워크캠프에서 양질의 영 어교육이 캠프 취지였다면 아무런 자격증 없고, 모국어가 영어도 아닌 세 계 각국의 젊은이들을 자원봉사자로 받지 않았을 것이다. 138 또한, 5개 이상의 서로 다른 국적의 사람들이 서로의 문화만을 알리고 주 장한다면 캠프는 혼란 그 자체일 것이다. 그리하여 내가 선택한 것은, 최 대한 그들에게 동화되어 현지의 문화를 스펀지처럼 빨아들이고 체험하고 배우는 입장이 되는 것이다. 어떤 음식이 나오던 마다하지 않고 체험해보 았고, 자유시간이 많을 때 최대한 방에 있는 시간과 와이파이를 이용하는 시간을 줄이고 밖에 나가 아이들 혹은 자원봉사자들과 대화했다. 자원봉사자들이 자신들의 문화를 알리기 위해 가져온 소품이나 의상등에 적극적으로 관심을 보였으며, 십대 아이들에게도 대답보다는 질문을 많이 하였다. 이러한 태도는 그들에게 낯선 동양여자에 대한 벽을 허물게 했던 것 같다. 나의 영어 실력은 대학교 시절 영어 토론 동아리 활동으로 쌓여진 것으 로, 일상대화가 가능 하지만 다소 딱딱하고 해외 장기 체류 경험도 없어 유창하진 않은 수준이었다. 그러나 캠프 참가 아이들과 자원봉사자들 역 시 영어가 모국어가 아니었고, 그런 수준의 대화는 오히려 나를 편하게 해주었다. 또한, 부족한 영어 실력을 부끄러워하지 않고 나오는 대로 얘기하고 한국 식 표현 역시 섞어서 사용하니, 오히려 그것이 사람들에게 긍정적이고 밝 은 인상을 주었던 것 같다. 오히려 미국에서 온 자원봉사자는 유창한 영 어, 생소한 현지 표현 사용으로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반감을 사게 하였 다.

140 색다르게 느낀 것은 영어를 사용하기 때문에 서로 호칭에 대한 부담도 없고, 우리 나라처럼 높임말도 없기 때문에 나이를 전혀 생각하지 않게 되었다는 것이다. 자원봉사자들 중에서 내가 나이가 두 번째로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다른 자원봉사자들은 오히려 나를 동생취급할정도로 편하게 대했다. 자원봉 사자들은 물론이고 캠프 참여한 십대아이들 역시 나를 친한 친구로 대하였 고, 그것은 그들과의 교감을 더욱 깊게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만약 한국 이었으면, 자원봉사자들끼리 관계도 이만큼 돈독하게 쌓여질 수 없었을 것이 고, 아이들도 우리에게 거리감을 느끼지 않고 다가올 수 없었을 것이란 생각 이 들었다. 그런 환경 속에서, 서울에서 딱딱하게 굳어있던 내 표정은 점점 항상 웃는 표 정으로 변해갔다. 처음 도착했을 때 사진을 찍을 때 웃기가 참 힘들었던 나 는, 어느새 항상 웃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이번 캠프를 계기로 나는 피부와 머리색이 다르고 다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과도 친해질 수 있다는 것을 알았고, 너무 늦게 안 내 자신이 부끄러웠다. 꿈과 같은 2주일이 지나고, 캠프리더는 자신의 집인 바르샤바로 나를 초청했 다. 하지만 프라하행 표를 성급하게 사고 영수증조차 보관해놓지 않았던 나 는 표를 취소 못하고 아쉽게 작별인사를 할 수 밖에 없었다. 서로의 차이 때 문에 당연히 친해지지는 못할 것이라는 내 예상을 깨고 우리는 생각보다 훨 씬 가깝고 친한 사이가 되어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나에게 폴란드는 그 아름 답기로 유명한 프라하, 부다페스트 보다 훨씬 아름다운 곳으로 남아있다.

141 "잊지 못할 14일의 기록들..." 폴란드_이태호 FIYE206 홍익대학교 이번 워크캠프를 가기 전에 나는 농활과 필리핀 홍익봉사단 등을 하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느낀 점이 많았다. 예를 들어 농촌 봉사활동을 통해, 동 아리 친구들과 유대감과 추억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농촌 어른신들과 이야기를 통해 내가 잘 알지 못했고, 관심 갖지 않았던 농촌의 현실에 대 해서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또한, 필리핀 홍익봉사단을 통해 다양한 과 친구들과 그리고 필리핀 현지 선생님들 아이들을 통해서도 많은 것을 알고 깨달을 수 있었다. 유네스코 워크캠프를 지원하게 된 동기 역시 새로운 경험을 통해 무언가 를 깨닫고 느끼기 위해서였다. 워크캠프를 가기 전 모든 일을 내가 하나 부터 열까지 다 해야 된다는 것부터가 그 전의 활동들과는 사뭇 달랐다. 그리고 해외이기 때문에 좀 더 신경이 쓰이지 않을 수 없었다. 항공권을 비롯한 유럽의 교통편 등 기본적인 것부터 폴란드의 문화, 언어, 그리고 역사적 배경 등을 공부해갔다. 점점 시간이 다가올수록 기대보다는 걱정이 앞서기도 했다. 다행히 워크 캠프는 생각이상으로 나를 충족시켜주었다. 동양인이라면 낯설어하거나 무시한다는 이야기를 많이 들었었는데, 그들은 내게 호기심을 가지고 친 절함으로 다가와 주었고, 영어가 부족한 나를 항상 배려해주었다. 한국과 많이 다를 것 같았던 생활방식이며 생각 역시 비슷해서 잘 어울릴 수 있었다.

142 또한, 배울 것도 많았다. 항상 일을 시작하기 전과 일이 끝나고 나서 토론을 진행했다. 누군가가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 아닌, 일을 하는 당사자인 우리 가 생각하고 우리가 정해서 했고, 리더가 있다고 해서 그들의 말을 따르는 것 이 아니라 모두가 주체가 되어서 일을 해나갔다. 이런 점은 내가 그전에 했던 농활이나 홍익봉사단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점이었다. 이러한 점 때문에 나는 처음에 약간 낯설고 내 주장을 못 펼쳤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어느 순간 그 들과 토론하고 있는 나를 보고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당장에 워크캠프를 통해 무엇을 얻었느냐는 질문에 나는 바로 대답 못할 것 이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또 워크캠프를 하면서 나 역시도 너무 자연스러운 것들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일과 이외에도 자유시간이 많았다. 예를 들면, 각종 스포츠 (배드민 턴, 탁구, 농구, 하키 등)와 각국의 게임, 바비큐 파티, 관광 등 이주라는 시 간동안 단순히 일만 하는 것이 아니라 다른 활동들도 많이 할 수 있었다. 올 림픽 기간이었기 때문에 스포츠에서 좀 더 승부욕이 생겼고, 다행히 배드민 턴은 내가 일등을 함으로써 한국의 위상을 조금은 높일 수 있었다. 그 외의 활동 역시 주최측이 아닌 우리들의 의견이 가장 많이 반영되었다. 관광 역시 우리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정하고, 모두가 한쪽으로 통일되는 것이 아닌 자 기가 원하는 대로 선택할 수 있었다. 그 덕분에 나는 워크캠프가 끝나고 여행 할 도시인 토룬 을 가기로 한 대부분의 우리 워크캠프 참가자들과는 달리 다 른 캠프 참가자들과 폴란드의 제 2의 도시 크라코프 를 갈 수 있었다. 일은 간단했지만, 생각보다 많이 걷는 일이 많아 힘들기도 했다. 하지만, 언 제나 내 의견이 반영되고 다 같이 하는 활동이기에 만족스러웠다. 처음에는 강가를 치우는 일이었는데, 이틀 동안 큰 검은 봉투 30개는 채웠을 것이다. 그러던 중, 리더 중 한명인 필립이 비효율적이지 않냐며 의견을 꺼냈다. 이유 는 강가에는 늘 마을주민들이 붐볐고, 우리가 청소하는 사이에도 많은 쓰레

143 143 기들을 치우지 않고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 순간 바로 토론이 진행됐고, 다수결의 원칙에 따라 다음 날부터 다른 일을 했다. 142 다른 일은 죽은 나무 찾기였는데, 영양이 부족하거나 죽은 나무를 체크하 는 일이었다. 이 일 역시 정당하게 두 세명씩 팀을 이루어 지도상의 도로 를 할당해 주었다. 그 결과 아무도 의의제기를 하지 않았다. 워크캠프를 하면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우리나라의 소극적인 면이었다. 우선 나부터가 누가 정한 일에 대해서 크게 뭐라하지 않는 편이었다. 내 가 동아리 회장을 했을 때도 누군가가 내가 말한 의견에 반발을 하면 이 해를 하기보다 이해를 시키려고 했다. 주위 애들도 크게 내가 잘못된 게 없으면 다 같이 순응하는 분위기였다. 나는 이런 점을 고쳐야겠다는 생각이 커졌다. 그리고 앞으로 누구보다도 내 의견을 스스로 존중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비록 14일에 짧은 워 크캠프 활동이었지만, 이를 통해 얻은 점은 그 어는 내 인생의 14일 보다 컸다. 물론 위에서 말한 내용만이 전부가 아니다. 워크캠프를 통해 외국 인 친구들도 사귀고 그중에는 베스트 프랜드도 있다. 그리고 한국인 여동 생 두명도 이번 기회에 생겼다. 이렇듯 워크캠프는 내게 잊지 못한 14일 의 기록이 되었다. 다음번에 또 이와 같은 기회가 있다면 나는 주저 하지 않을 것이고, 또한.. 이번처럼 걱정없이 즐길 것이다.

144 16. 프랑스 " It was like a dream." 영국_임희진 VAP UK02 서강대학교 방학 동안 딱히 뭘 해야 할지 몰라 인터넷을 돌아 다니던 중 우연히 내 눈에 들어온 기아자동차 및 유네스코에서 주최하는 워크캠프. 그 네 글자가 나를 끌어당겼다. 보통 이런 거 지원해봤자 될 리 없어 라 는 생각을 갖고 있던 나였지만, 왠지 이번만큼은 포기하고 싶지 않았 다. 그런 나의 마음을 알아주었을까, 나는 최종합격을 했고 꿈에 그리 던 유럽으로 워크캠프를 가게 되었다. 떠나기 전 준비하는 동안 학교 시험기간과 겹쳐 굉장히 바쁜 날을 보 냈지만 마음은 이미 유럽에 가있었고 준비하는 동안에도 매일 매일 설 레는 나날을 보냈다. 캠프친구들에게 줄 선물을 사고, 어떤 요리를 해 줄까 하고 어머니한테 요리를 배우는 것부터 하나하나 모든 게 나에겐 설레임 그 자체였다. 그리고 드디어 출국. 나는 캠프에 들어 가기 전 약 2주간 먼저 여행을 했다. 여행을 하면서도 항상 캠프엔 어떤 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을까, 날 어떻게 생각할까 걱정 반 기대 반으로 돌아다녔다. 그리고 기다리 고 기다리던 날이 왔다. 프랑스 파리에서 기차로 약 3시간 걸려 도착한 Joinville. 처음 도착했 을 때 느낌은 굉장히 조용하면서도 평화로운 이미지였다. 그리고 리더 2명중 한명인 프랑스 친구Laurine 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굉장히

145 145 친근한 이미지의 그녀는 나를 데리고 3주동안 지낼 숙소로 안내해주었다. 숙소는 마을의 큰 공원 안에 있는 작은 집이었는데, 마당도 있고 꽤 맘에 들었다. 그 곳엔 이미 와있던 캠프친구들이 기다리고 있었고, 나는 반갑 게 인사했다. 그 중엔 인상이 약간 험한 친구도 있었지만, 대부분 친근한 이미지여서 3주간의 생활이 더욱 기대되는 순간이었다. 낯선 친구들을 만 나 사귀는 것을 좋아하는 나에겐 즐거운 시간이지만, 영어실력이 뛰어나 진 않은 만큼 걱정이 되는 것도 사실이었다. 144 어색한 분위기의 첫날. 외국인들은 굉장히 개방적이라고 들어서 서로간에 편하게 대할 줄 알았는데, 첫만남에서 어색한 것은 어느 나라나 비슷한 거 같다. 하지만 대화 및 게임 등을 통해 우리는 금새 친해져서 장난도 치 는 사이가 되었다. 우리캠프의 총 인원은 모두 합쳐 14명이었고 각각 프 랑스3명, 스페인2명, 대만2명, 한국2명, 체코1명, 터키1명, 알바니아 1 명, 그리고 러시아 2명이었다. 우리가 그 곳에서 맡은 일은 등산로의 계단을 보수 하는 일이었는데, 수 년 동안 관리되지 않아 풀,나무가 자라 계단이 보이지 않는 것은 물론, 사 람이 다니기 힘들었다. 그 길을 정리하고, 망가진 계단을 다시 만들며, 약해진 벽을 시멘트 로 채워 보수하는 일이었다. 막노동 수준이었다. 하지만 군대를 다녀 온 나에게 낯선 일은 아니었고, 캠프 친구들과 함께 한다는 것 자체 가 나에겐 큰 즐거움이었기에 기쁜 마음으로 일했다. 또 일하는 중간 에 마 을 주 민 들 이 다 녀 가 면 서 응 원 을 해 주 어 서 더 욱 힘 을 낼 수 있 었 다. 일을 하며 조금 놀랐던 점은 여자인 캠프 친구들도 남자들만큼 험한 일을 나서서 하는 것이었다. 곡괭이질, 삽질을 비롯해 위험한 일도 있었지만 우리나라에선 그런 일은 주로 남자가 하는 만큼 나이도 어린 친구들이 그 렇게 일하는 모습이 나에겐 조금 신기했다.

146 캠프동안 식사는 아침,점심은 항상 바게뜨로 샌드위치를 만들어먹었다. 매일 먹는 빵이 처음엔 적응이 안되기도 했지만, 배고픔을 못 참는 나에겐 그런 빵 도 치즈도 꿀 같은 음식들이었다. 그리고 저녁은 매일 나라별로 돌아가며 각 나라의 음식을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는 2번 요리를 했는데 한번은 비 빔밥, 한번은 불고기 요리를 해주었다. 반응은 음식투표에서 1위를 할 정도로 인기가 좋았다. 다들 브라보 코리아 를 외쳤다. 러시아친구 한 명은 한국음식을 먹으러 한국에 와야겠다고 까지 했다. 그리고 요리를 하며 친구들이 좋아하는 것도 뿌듯했지만, 또 들었던 생 각은 어머니 생각이었다. 겨우 두 끼 준비하면서 이렇게 머리 아프고 손이 많 이 가는 일을 집에선 매일 하시니 얼마나 힘드실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집에 가면 어머니에게 더 잘해야겠다는 생각도 들었고, 우리 가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 하는 시간도 가지게 되었다. 그리고 우리는 근교도시로 여행도 많이 다녔다. 프랑스의 역사적인 곳을 찾 아 가이드를 듣고, 유명하진 않지만 그래서 아시아인도 거의 없지만 아름다 운 곳을 많이 다니면서 뜻 깊은 시간들을 많이 보냈다. 마을에서는 체육관 등을 지원받아 스포츠도 많이 즐겼다. 수영장도 가고 탁구도 치고, 마을동네 주민들과 축구도 즐겼다. 집앞 강에서 소릴 지르며 놀기도 했다. 매일 저녁엔 가볍게 와인이나 맥주를 마시며 서로의 나라에 대해 얘기하고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러한 우리모습은 프랑스 지역 신문에도 소개되었 고, 태어나서 처음으로 신문에도 나와봤다. 주민들이 알아봐주기도 하고 부 끄럽지만 너무 뿌듯했다. 아쉬운 점이 있었다면 캠프 2주차 끝 무렵 러시아친구1명,스페인친구1명이 캠프의 생활을 답답해하며 끝까지 함께하지 못했다. 생활이나 음식 면에서 리더와의 마찰이 있었다. 그래서 정말 아쉬웠지만, 그 두 친구와는 작별인사 를 조금 빨리 하게 되었다. 그리고 첫 주에 내 피부에 두드러기처럼 빨갛게 부어서 고생도 조금 했다. 마을이라 병원도 없어 의사를 만나 집에서 진찰을 받았다. 다행히 그냥 벌레 라고 진단을 받았고, 지금도 흉터가 약간 남았지만, 받은 약을 바르고 먹으며 나을 수 있었다. 그렇게 처음엔 길게 느껴졌던 3주라는 기간이 순식간에 지나가버렸다. 생각 도 않다가 갑자기 이 친구들과 이제 이별해야 한다는 생각에 너무너무 아쉬 웠다. 하지만 시간은 흐르고 결국 헤어짐의 시간은 왔다. 다시 만날 것을 약 속하고 우린 다시 각자의 갈길을 갔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금, 비록 모두 함께 있진 않지만, SNS나 메일을 통해 모 두들 자주 연락하고 있다. 캠프가 끝난 지 한 달이 넘었지만 어제 일처럼 생 생하다. 내가 캠프에 가지 않고 행복한 꿈을 꿨다면 이런 꿈이었을까. 평생

147 147 기억에 남을 소중한 추억을 남긴 기회를 만들어준 유네스코&기아자동차 에 너무 감사하다. 146 그리고 기회가 된다면 다음엔 캠프원이 아닌 리더로써 외국인친구들을 꼭 한번 이끌어 보고싶다. 또한 후회 없는 20대를 보내고 싶은 우리나라 청 년들에게 반드시 추천해주고 싶다. 살아있는 공부. 인생의 터닝포인트.워크캠프. It was like a dream.

148 "포도나무 밭이 나에게 남긴 수많은 씨앗" 프랑스_황지수 sj20 홍익대학교 대학생으로서의 마지막 여름방학을 맞는 것은 정말 불행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취업을 위해 더운 땀을 뻘뻘 흘려야만 하는 시기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홍익대학교 학생으로서 유네스코 워크 캠프에 참가할 수 있는 기회도 마지막이었고, 워크캠프에서 또 다른 방식으로 나의 미래를 준비할 수 있는 방향을 배울 수 있을 거라는 설 레는 기회 또한 마지막이었기에, 도전하는 마음으로 신청서를 냈다. 캠프 전 혼자 스페인 여행을 일주일정도 한 후, 야간기차를 타고 프랑 스 국경을 넘어 미팅포인트인 Angouleme역에 하루 일찍 도착했다.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던 Angouleme에서 워크캠프에 들어가기 전, 혼 자 조용한 하루를 보냈는데, 앞으로 생활할 새로운 환경과 새로운 사 람들을 만날 준비를 하며 스페인에서 떠들썩하게 들떴던 마음을 차분 히 가라앉힐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한국인, 그리고 홍익대학교 학생 의 대표가 되어 다른 나라의 사람들과 함께 생활해야 된다는 점은 분 명 이제까지 경험했던 많은 여행과는 매우 다르게 느껴졌다. 드디어 첫째날, 오후 6시가 미팅타임이었지만 나는 일찌감치 역으로 나가 사람들을 기다렸다. 맨처음 27살 왕언니인 프랑스 다른지역에서 온 클로틸을 만났고, 같은 한국인인 은지를 만났다. 그 후 러시안 보 이즈 알톨과 예브게니, 터키보이 우뭇, 체코걸 케이트, 오스트리아에 걸 케이티, 벨지엄보이 벤, 프랑스 커플 폴과 매리, 스페인 커플 페란 과 라우라까지. 모두 13명의 캠퍼들을 차례로 만났고, 마지막으로 캠

149 149 프 리더였던 루도빅과 제레미(특이하게도 캠프 리더가 두명이었다!)를 만 나서 다른 스텝들의 차를 타고 1시간 거리인 HAIMPS를 향해 출발했다! 148 보통 다른 캠프들의 기간은 2주였지만, HAIMPS 워크캠프의 기간은 3주 였고, 그 또한 HAIMPS 캠프의 큰 장점으로 작용했다. 분명히 2주로는 모자랐을 많은 것을 더 얻을 수 있었던 기간이었다. 나는 캠프의 첫날부 터 너무나도 좋은 사람들을 만난 것에서부터 시작해 매일 매일 의미 있는 행운들을 만날 수 있었다. 일단 첫 번째 행운은 우리의 워크캠프 자체였다. 육체적으로 힘든 작업을 하기도 하는 다른 캠프들이나 정신적으로 힘든 종류의 캠프들에 비해, 우 리는 매일매일 너무나도 즐겁게 작업을 할 수 있는 환경이었다. 캠프의 마지막 주 주말이었던 7월 20일에 열릴 락 페스티벌이라는 즐겁고 뚜렷 한 목표를 향해, 첫째 주부터 열심히 작업에 몰두했다. 첫째 날, 우리는 도착하자마자 이름외우기 게임을 시작했었는데, 그때 이 름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 내가 우리 캠퍼들 얼굴을 종이 위에 귀엽게 캐리커처로 그려서, 이름과 함께 다이닝룸 벽에 붙여놓았었다. 그것을 본 테크니컬 리더였던 프로이드가 나에게 본격적인 드로잉 일을 맡겨주었는 데, 덕분에 나는 소질에 없던 망치질이나 톱질에서 벗어나 페인트와 마카 등으로 페스티벌을 장식할 푯말과 테이블 무늬, 간판, 현수막 등의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들에 책임자 역할을 하게 되었다. 캠프 리더인 제레미와 루도빅은 둘다 프랑스인이었고, 27살, 28살의 키 큰 남자들이었는데, 그 둘도 캠프로 인해 처음 만난 사이었지만, 정말 좋

150 은 콤비였다. 리더가 한명일 때보다 분명 서로의 장단점을 잘 보완하며 캠프 를 이끌어갔고, 서로가 필요한 부분을 잘 알고 있는 것 같았다. 예를들면 루 도빅은 좀 마음이 약하고 답답한 성격이어서 캠프원들이 무언가를 잘못 행동 했을때 그들에게 충고를 하기보다는 눈치를 보며 말을 빙빙 돌려서 하고, 쓴 소리는 절대 못하는 편이었다면, 제레미는 확실히 리더쉽이 있어서 루도빅이 할 수 없는, 캠퍼들을 이끄는 역할을 잘 해주었다. 하지만 어쩔 땐 조금 딱딱 한 제레미의 성격을 루도빅이 보완해서 부드럽게 상황을 이끌어나간 적도 많 은데, 예를 들면 아침에 자율적으로 일어나는 시스템이 잘 안 지켜지고 모두 가 늦잠을 자고 있던 상황에서, 제레미는 캠퍼들에게 주의를 주고 경고적인 멘트를 할 뿐이었지만, 루도빅은 어디선가 피리를 갖고 와서, 모두가 자고있 는 방에 와서 형편없이 연주를 하며 재밌게 사람들을 깨운다거나, 신나는 음 악을 틀어서 좀 더 부드러운 아침을 만들기 위해 항상 노력하는 모습을 보여 줬다. 이런식으로 두 리더들의 모습은 나에게 의외로 많은 것을 배울 수 있게 해줬다. 나는 3주동안 정말 새로운 것을 많이 배웠다. 아시안이 나와 은지밖에 없었 고 모두가 유럽권 사람들이어서 그랬는지, 생각보다 많은 상황에서 한국적인 정서와 가치관이 충돌하기도 했지만, 그것은 모두 익숙한 방식의 해결점이 아닌 새로운 시선에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신선한 경험들이 되었다. 그렇 다고 해서 한국적인 것이 틀린 것은 아니었다. 다만 다양한 사람들과 함께 녹 아 있을 때, 좀 더 유연하고 지혜로운 방식이 있었던 것 이었다. 나는 한국에 서 취업준비를 하면서는 절대 배울 수 없었을, 수많은 것들을 HAIMPS에서 느끼고 경험할 수 있었다!

151 151 우리는 성공적으로 즐거운 락페스티벌을 마치고 어느새 3주동안 생각보 다 훨씬 많이 친해져 있었다. 그곳의 페스티벌 스텝들, 마을사람들, 아티 스트들과 모두 친해져서, 우리는 함께 마지막 송별파티를 하고 숲속에서 춤을 추고 새벽 내내 술을 마시고 내가 가르쳐준 한국 술게임들(바니바 니, 공동묘지 등의 한국 술게임들을 가르쳐주었다)을 러시안 보이들이 가 지고온 보드카와 함께 복습하면서 마지막까지 후회없이 진이 빠지도록 함 께 놀았다. 우리는 어느새 세계 각국어로 건배를 외칠 수 있게 되었고, 프 랑스 전통노래를 함께 부를 수 있게 되었고, 누군가 기타로 작곡한 우리 만의 주제가를 결국엔 모두가 외워서 신나게 불렀다. 모든 것이 잊지못할 추억이었다. 마을 사람들도 진심으로 우리가 떠나는 것을 슬퍼해서 우시 기도 했다. 나는 그동안 시간 날때마다 틈틈이 만들었던 팔찌를 모두에게 나눠주었다. 150 특히 나는 축제 마지막날 쓰였던 프리젠테이션 종이에 정말 내 혼을 담아 서 전지 사이즈에 펜으로 우리 캠프의 지난날을 소개하는 그림을 그렸는 데, 그건 정말 내가 최근 4년간 그렸던 그림들 중에 가장 대작이라고 말 할 수 있을 정도로 오래 걸리고 열정을 담아 모든 추억을 그린 작품이었 다. 그 그림속에는 우리 모든 캠프원들의 얼굴들과 스텝들, 테크니컬 리 더 프로이드의 얼굴들이 있었고, 우리가 3주동안 만들었던 테이블과 의자 및 로봇도 깨알같이 그렸고, 마지막에는 우리가 그동안 했던 엑티비티들 의 내용을 모두 정리해 한곳에 그려놓았다. 내가 진심을 담아 열심히 그 린 그림을 모두가 좋아해주었고, 마을 사람들은 그 그림을 보관한다며 어 디론가 가져갔다! ㅎㅎ 아무튼 나는 특히 그 마지막주에, 끝이 다가오는 것이 아쉬워서 모든 것에 온통 진심을 다했던 것 같다. 캠프가 끝난 후 나는 4일뒤 파리에서 출국 비행기를 타야했기 때문에, 기 차표를 구해서 파리로 갈 예정이었는데, 너무나 놀랍고 감동적이게도 페 스티벌 프레지던트였던 시몬이 나를 파리까지 차로 5시간이 넘는 거리를 데려다 주었다... 덕분에 나는 20만원 가까이 하던 기차표 값을 아낄 수 있었을 뿐만 아니라, 친절한 프랑스 사람들의 마음에 마지막까지 감동할 수 있었던 잊지 못할 경험이었다. 나는 진심으로 시몬에게 감사했고 언제 다시 만날지 모르지만 웃으며 서로 안아주고 헤어졌다. 왠지 HAIMPS 사 람들을 꼭 다시 만날 것 같았다. 캠프가 끝났지만 서로 그리워한 우리 캠퍼들은 결국 파리에서도 계속 만 났는데, 우뭇과는 몽마르트 언덕에 앉아 한참을 미래에 대해 얘기 하기도 했고, 러시안들 알톨과 예브게니와는 같이 파리에 사는 루도빅네 집에도 가서 부모님을 뵙기도 하고, 새벽 3시에 자전거를 타고 세느 강변을 달려 서 에펠탑까지 가 밤새도록 와인을 마시기도 했다. 그때 파리는 내가 작 년과 재작년에 왔던 파리가 확실히 아니었다. 많이 달랐다. 훨씬 더 특별 하고 아름다운 곳이 되어 있었다. HAIMPS에서의 3주는 생각했던 것보

152 다 더 많은 것을 바꾸어 놓았다! 벌써 많은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도 HAIMPS의 모든 것들이 생생하다. 많은 것을 느끼게 해주고 배우게 해준 3주동안의 시간이, 분명 나의 지난 시간들 중에서도 커다란 의미로 남아 앞으로의 나의 미래의 열매를 위한 중요한 씨 앗들이 될 것 같은 느낌이다. 나는 이제부터 그 소중한 씨앗들을, 나만의 영 양분으로 잘 일궈나갈 것이다.

153 153 단체파견 국가별 에세이 대만 강영정,서주영,유준미 2. 라오스 강민준,최민식,박갑준 3. 방글라데시 김보현,손석준 4. 베트남 김도희,최수진,이현정 5. 인도 곽다영,정지혜 6. 인도네시아 김밝은,지성근 7. 태국 김다솜 8. 필리핀 김용우,이시현

154 II. 단체파견 국가별 에세이 1. 대만 "나의 대만 봉사활동" 대만_강영정 VYA 영남대학교 새해 첫 날 대만으로 봉사활동을 떠나 약 2주간 캠프 일정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 온 지금, 그 때 기억이 너무나도 생생하고 그리운 마음이 크다. 작년 10월부터 국제자원활동을 지원하고 합격되어 약 3달간의 준비와 캠프기간 동안의 경험이 대학생활 중에 가장 큰 의미로 마음 속에 남아있다. 처음에 지원하였을 때는 만만하게 봤었는데 지나고 보니 결코 만만한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봉사활동이라는 것을 이번에 처음으 로 해봤는데 정말 왜 사람들이 봉사를 하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내가 누군가에게 도움을 주고 느끼는 뿌듯함이란 격어보지 않고 느낄 수 없 는 감정인 것 같다. 이번을 계기로 봉사 대한 마음가짐도 달라졌을 뿐 만 아니라 지속적으로 국내에서도 해야겠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계기 가 되었다. 대만이라는 나라에 지원하게 된 이유는 고등학교 때 중국어를 배웠었 고, 또 중국이라는 문화와 대만문화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있었는데 마침 좋은 기회가 있어서 지원하게 되었다. 그런데 막상 현지에 도착 해보니 중국어가 아니라 영어로 의사소통을 해서 영어에 대한 중요성 과 영어회화의 필요성을 다시 한번 느끼게 되었다. 그렇지만 주말 자 유여행이나 자유 시간에 중국어로 길도 찾고 물건을 살 때 매우 흥미 로웠다. 또한 캠프기간 내에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한국인의 밤 행사 를 할 때 중국어로 사회를 본 기억이 가장 크게 남았다. 짧은 시간의 연습과 그 떨림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다. 아쉬운 점은 우리가 머무른 곳이 수도에서 떨어진 작은 어촌마을이라 할아버지,할머니들이 많아 서 중국어 보단 대만어를 많이 쓰셔서 중국어를 잘 모르시는 분이 많 아서 조금 아쉬웠다. 그 다음으로는 2주 동안 아침잠과 추위를 이겨가며 끝낸 벽화작업이 다. 처음으로 그려본 벽화였고, 또 우리 팀 모두가 협동하여 이뤄낸 성과라서 그 의미가 더욱 뜻 깊다. 추위에 떨며 바람에 맞서가며 힘들 게 고생하면서 완성시켰기 때문에 정말 뿌듯하고 너무 많이 기억에 남 는다. 마지막으로는 VYA캠프 팀원들에게 감사하고 좋은 추억과 기억을 남

155 155 기게 해줘서 고맙다. 우리를 위해 매 끼니 마다 음식준비를 하는 안토니 오, 팀가이드 클레어,켈른 등, 이분들의 친절함과 그 동안의 정을 잊을 수 없을 것이다. 154 캠프시작 날부터 끝나는 날까지 모두 다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왜냐하면 내게 있어 그 시간들이 너무 소중하기 때문이다. 국제자원활동이 아니면 보고 배우고 느낄 수 없는 것들을 다 느끼고 돌아 오게 되어서 너무 좋았 다. 대학생이라면 국제자원활동을 한번 쯤은 꼭 가 보는게 좋을 것 같다, 한국에 돌아와서 가장 크게 느낀 점은 영어공부를 열심히 해야겠다고 생 각했다. 한국이 아닌 해외에서 외국인과 소통하고 공감할 수 있는 것이 언어이기 때문이다. 영어 뿐만아니라 중국어도 열심히 공부하여 기회가 된다면 국제자원활동을 다시 한번 가보고 싶다.

156 출국 전 팀원들과 프로그램을 구성하고 준비하며 하루하루를 두근거 리는 마음으로 지냈다. 전부터 꼭 해보고 싶었던 해외봉사라서 그런지 더 애착이 생겼고, 팀원들과 잦은 회의를 통해 하나하나 준비되어가는 과정에서 보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마음으로 통해요"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드디어 출국! 타이베이 공항으로 대만 자원봉사 자들이 우릴 기다리고 있었다. 그곳에서는 중국어를 쓰는데 중국어를 하나도 할 줄 몰라 걱정이었지만, 대만 자원봉사자들이 영어를 할 줄 알아 다행히 언어에는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대만_서주영 목포대학교 4시간정도 버스를 타고 숙소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우릴 반갑게 맞아 주는 대만 자원봉사자들과 인사 후 숙소에 짐을 풀어놓고, 타이시주변 에 뭐가 있는지 거리를 다니며 설명을 들었다. 그리고 다시 숙소로 돌 아와 저녁식사를 하고, 대만 자원봉사자들이 준비한 환영식을 보았고, 정식으로 서로를 소개하고 알아가는 시간을 가졌다. 첫 만남의 느낌이 너무나 좋아 앞으로 그곳에서의 모든 일정들이 기대 되는 밤이었다. 타이시에서의 첫날밤... 예상밖으로 타이시는 너무 추 워 침낭으로는 그 추위를 견딜 수가 없었다. 다행히 여분의 이불을 그 쪽에서 지급해주어 그 다음날부터는 따듯하게 잠을 잘 수 있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숙소의 샤워시설이 너무 좋았다. 공용샤워실 이지만 칸칸이 나눠져 있었고, 따뜻한 물을 언제든지 쓸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듯한 물은 기대도 하지 않았었는데 이렇게 좋은 환경에서 봉사하게 되어 너무 감사했고, 한편으로는 타국에서 고생하고 있을 팀원들에게 미안하기도 했다. 다음날, 앞으로 우리가 그곳에서 지역아동들을 대상으로 펼치게 될 프 로그램을 전체적으로 수정하는 회의를 해야했다. 현지팀이 정해놓은 프로그램이 있어서 우리가 준비했던 프로그램을 거의 수정해야 했기

157 때문이다. 처음엔 좀 당황스러웠지만 어떻게든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을 활용할 수 있도록 회의에 회의를 거듭했다. 그렇게 하루가 후딱 가고, 저 녁시간엔 대중가요 교류시간으로 대만에서 유행하는 아이돌그룹의 노래 를 함께 배우는 시간을 가졌다. 처음엔 좀 어색했던 사람들이 그것을 계 기로 좀 더 친해질 수 있었던 것 같다. 그렇게 또 하루가 흘러가고 다음날부터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을 본격적 으로 시작했다. 아이들과의 첫 만남이 조금 걱정되기도 하고, 기대되기도 했다. 아이들이 너무 적게 오면 어쩌지 했는데 다행히 첫 날 적당한 인원 의 아이들이 왔다. 아이들과 명찰을 만들고 글라스데코를 하고 어찌어찌 하다보니 오전시간이 금방 흘러갔다. 그리고 오후엔 태권도도 배우고 율 동도 배우고, 단체줄넘기도 했다. 너무 정신없이 흘러간 하루였다. 모든 프로그램을 마치고 팀원들과 회의를 하며 다음부터는 더욱 알차게 프로그 램을 진행하도록 계속해서 프로그램을 수정해 나갔다. 그렇게 우리팀은 아동들과 매일 오전 오후로 시간을 나눠 연날리기, 축구, 피구, 종이접기, 영화감상, 윷놀이, 한국민속놀이 체험등등...을 했다. 아이들과 함께하며 가장 어려웠던 점은 언어였다. 일단 아이들에게 다가 가는 것도 언어에서부터 문제가 되니 친해지는 것에 시간이 오래 걸릴 수 밖에 없었고, 아이들도 우릴 더 거부하게 됬었던 것 같다. 다행히 현지 자 원봉사자들이 도와줘서 프로그램을 진행하는 데는 큰 문제가 없었다. 지 금생각해도 너무 고마운 친구들이다. 그들이 없었다면 아마 아무리 많고 알찬 프로그램들이 있다고 해도 하나도 실행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이들과 함께 오후 활동까지 끝내고 나면 저녁식사후엔 주로 대 만의 문화를 체험할 수 있는 프로그램들을 했다. 토요일마다 열리는 야시 장도 가보았고, 2월 대보름에 하는 전통 행사로 램프페스티벌도 체험하게

158 되어 좋았다. 아동들과 함께한 시간이 어떻게 보면 너무 짧아 아쉬운 마음도 들었다. 그리고 우리가 준비했던 일정 중 2월 9일에 있었던 Korean night때 우리와 함께 했던 아동들이 많이 와줘서 너무 감동받았다. Korean night은 우리가 타이시 지역주민들을 위해 준비한 한국문화의 밤으로, 한국의 문화를 교류하 기 위해 준비한 프로그램이다. 우리팀은 한국음식 중 부침개와 주먹밥을 만 들어 주민들에게 나눴다. 다행히 다들 맛있게 잘 먹었다. 한국음식을 함께 공 유하고, 문화를 공유하기 위해 우리팀이 한국 가요에 맞춰 여러 가지 공연을 보여줬다. 그리고 다양한 경품추첨으로 거기 온 모든 사람들이 경품을 하나 정도는 탈 수 있도록 했다. 우리가 준비했던 프로그램 중 가장 크고 그만큼 연습도 틈틈이 하며 열심히 준비했던 Korean night이 성황리에 끝나서 너무 다행이었다. 이렇게 우리가 준비한 모든 프로그램을 마치고 타이베이로 관광을 떠났다. 그때 대만 자원봉사자들이 모든 일정을 다 짜주었고, 몇 명이 가이드해줘서 너무너무 고마웠다. 이번 봉사활동은 정말 감사함이 넘치는 봉사활동이었다. 일단 현지 자원봉사 자들과 지역주민들 모두 너무 친절하게 대해 주셔서 감사했고, 또한 단 한 번 도 마찰 없이 모든 프로그램을 잘 소화해낸 우리 팀원들에게도 고맙다. 그리 고 이번 봉사활동을 통해 가장 크게 와닿았던 것은 나라, 종교, 생김새, 언니 가 달라도 마음만큼은 하나로 통한다는 것이다. 비록 우리와 아동들이 언어 가 통하지는 않았지만 진심어린 마음으로 다가가니 아이들도 우리에게 마음 을 열어주었다. 듣기 좋은 말이 아닌 그들을 바라보는 눈빛과 다정한 손길 하 나하나의 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되었다.

159 "대만, 그곳에서 나와 세상을 경험하다." 대만_유준미 홍익대학교 교육봉사에 꽤나 관심이 있던 나는, 이번에도 역시 교육봉사에 지원했다. 차이점이 있다면 국내가 아닌 해외봉사. 학점도, 영어능력도, 다양한 봉 사경험도 없던 내가 교육봉사를 하고싶다는 열정 하나로 무모하게 지원을 했다. 주변에서는 내가 스펙을 쌓기 위해 봉사를 가는 것이라고 생각했지 만 전혀 아니었다. 다양한 경험을 체험할 수 없는 농촌의 아이들을 위해 짧은 시간 이나마 많은 것을 깨닫게 해주고 싶었다. 고백컨데, 사실 면접 을 본 후 떨어졌음을 확신했었다. 영어소개, 대만에 대한 사전지식, 모교 에 대한 정보 등 무엇 하나 제대로 답한 것이 없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2 학년이라는 어린 학년 때문에 고학년들에게 많은 기회를 줄 것이라는 뜻 을 내비친 선생님의 말을 듣고 떨어짐을 예상했고, 발표 날에 홈페이지 에서 떨어짐을 확신했다. 하지만 몇 주 뒤 추가합격이라는 엄청난 기회를 얻음으로 인해 1월2일부터 1월 15까지 이뤄지는 유네스코 워크캠프에 참 가할 수 있게 되었다. 운이 좋았다. 기회를 준 유네스코팀과 학교에 실망 시키지 않도록 열심히 봉사하겠다는 마음을 가진 채 비행기에 탔다. 새해 첫날을 베이징에서 보내고 1월 2일에 타이페이에 도착했다. 영남대 학생들과 함께 버스를 타고 타이시로 향했다. 타이시는 대만사람들도 잘 모르는 동네였고, 해안가라 바람이많이 부는 지역이라고 했다. 꽤 오랜시 간에 걸쳐 타이시에 도착했고 2주간 머무를 크고 화려한 절 앞에 도착했 다. 우리는 숙소에 짐을 풀고 1층에 내려와 자기소개하고 역할분담을 했 다. 교육 팀의 리더인 karen과 벽화 팀 리더인 claire 총 리더인 안토니 오와 간단하게 인사를 나누었다. 그 다음날 아침에 타이시 주변을 돌아다 니면서 설명을 들었다. 타이시의 벽에는 수많은 벽화가 그려져 있었는데, 설명에 의하면 매년 여름, 겨울에 봉사자들이 와서 벽화를 그렸고, 이 벽 화가 유명세를 탔다고 했다. 마을 주변에는 해안도시라는 이름에 걸맞게 굴껍질이 산처럼 쌓여있었고, 할머니들이 구멍을 뚫어 철사줄에 꿰고 계 셨다. 이곳 사람들은 굴을 엮은 것들을 바다안에 집어넣고 새로운 굴이

160 자라나게끔 한다는 설명을 들었다. 우리는 벽화와 마을 곳곳에 신기한 것들을 사진을 찍으며 구경을 했고, 지리 를 익혀갔다. 다음날 아침에 수업준비를 하고, 오후에 학생들을 만나기 위해 버스를 타고 학교로 향했다. 버스로 몇 정거장 거리인 가깝지도 멀지도 않은 분교였다. 학 생들의 영어실력이 뛰어나지 않다는 말을 듣고 의사소통에 대하여 걱정, 학 생의 수가 적어 학생 한명한명과 친해질 기회가 많아질 것이란 기대, 이 두 가지 생각을 하며 학교에 갔다. 학생들을 처음 만났을 땐 서로 어색한 기운이 돌았지만, 유독 한명이 아주 적 극적인 자세로 우리를 대해주었다. 먼저 우리는 아이들을 쉽게 통솔하기 위 해서 팀을 나누었다. 나는 여자아이 4명과 남자아이 1명을 맡게되었다. 첫 번째 시간으로 학생들의 영어 이름 짓기와 명찰 만들기를 했다. 우리팀 아 이들을 소개하자면 작고 귀여운 lily와 활발한 Ann, 나를 정말 잘 따라주고 좋아했던 Jenny 그리고 뾰루퉁한 표정을 짓고 있지만 사실 우리를 매우 좋아 해주던 Annie, 마지막으로 청일점인 scandy, 이렇게 5명으로 이루어져 있었 다. 그 다음에 한국놀이인 딱지치기, 제기차기, 공기를 했다. 리더인 karen의 통 역으로 설명할 수 있었고, 예상대로 아이들은 너무나 재미있게 놀아주었다. 해맑게 웃는 아이들의 웃음을 보면서 내 마음도 싱그러워짐을 느꼈다. 놀이가 끝난 후 한국과자를 다 같이 나누어 먹었다. 과자를 꽤 많이 구입해왔 기에 매번 수업 후에 한국과자를 먹을 수 있었다. 약 3시간 가량 수업을 했는 데 너무 짧아서 매번 돌아가는 길이 아쉬웠다. 학생들과 친해지기 위해 잘하 지도 못하는 중국어를 쓰느라 곤혹을 치렀다. 다른 팀원들에 비해 간단한 회 화를 할 수 있었던지라 아이들과 더 쉽게 친해질 수 있었다. 아이들을 보고 있으면 너무 예뻐서 더 챙겨 주고 싶고, 말 한 번 더 걸고 싶고, 안아주고 싶 어서 그렇게 행했고 그래서인지 아이들이 잘 따라주었다. 우리는 날씨가 좋을 때는 운동장에 나가서 풀밭위에서 둥글게 둥글게와 꼬리 잡기, 축구등 여러 야외 활동도 했다. 영어를 중점적으로 교육시켜달라는 학 교 측의 요구사항이 무색할 만큼 학생들과 함께 뛰어다녔고, 웃고 재밌게 놀 았다. (물론 영어 교육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다) 학생들에게 태권도를 가르 쳐주었을 때 발차기만 열심히 하는 남자아이들을 보며 웃음이 절로 나왔고, 미술 수업을 했을 때 내 얼굴이라며 알 수 없는 이상한 여자를 그려온 아이들 을 보면 그렇게 예쁠 수가 없었다. 우리는 대만아이들의 놀이도 배웠다. 가 위바위보를 대만어로 배우기도 했고, 가위바위보를 이용한 응용 놀이도 함께 했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간단한 언어를 알려주기도 했다. 말이 잘 통하지 않 아도, 국적이 달라도, 살아온 배경이 달라도 교감을 할 수 있음에 가슴이 벅

161 161 찼다. 마지막 날에 아이들과 헤어지는 것은 내게는 큰 고역이었다. 마지막 수업 에는 롤링페이퍼를 적는 시간을 가졌다. 아이들을 위해 사진을 인화 해서 한 장씩 나누어주었고 롤링페이퍼에 붙이도록 했다. 학생들에게 한국어로 매우 길게 써주었고, 중국어로 나를 잊지 마세요 라고 적었다. 처음에 울 지 않으려고 마음 먹었는데, scandy가 롤링페이퍼 후 나에게 조개로 만 든 물고기 모양 핸드폰 고리를 건내면서 오직 나에게만 주는 선물이라고 할 때 울컥 했다. 결국 울음을 터트리고 말았고, 그 밝던 scandy도 눈시 울이 붉어졌다. 160 롤링페이퍼 시간이 끝나고 나서 보물찾기 시간을 가졌다. 마지막으로 학 생들에게 학용품과 먹을거리를 선물하기 위해 준비한 놀이였다. 다 찾은 후 아이들에게 찾은 목록대로 선물을 나누어준 후 마지막 작별 시간을 가 졌다. 우리가 의자에 동그랗게 앉았고 학생들이 가운데로 한명 씩 들어와 하고싶은 말, 인사 등을 하는 시간이었다. 처음 너무나 적극적으로 우리를 반겨주었던 lester라는 아이가 나와 병곤 이에게 scandy가 주었던 비슷한 조개로 만든 물고기모양 핸드폰 고리를 주었고, 나는 계속 울기만 했다. 너무나도 밝던 lester가 울음을 터트려서 너무나도 마음이 아려왔다. 우리 조 4명 여자아이들은 하나씩 선물을 주 면서 우리가 다시는 이 곳, 타이시에 오지 않을 거라며, 우리와 함께 한국 으로 가고 싶다고 우는데 나는 너무 슬퍼 울기만 했다. 이렇게 정들었는 데 헤어질 수 밖에 없다는 사실이 슬프기만 했다.

162 그렇게 우리는 눈시울을 붉히며 기약없는 이별을 했다. 아이들과의 시간도 기억에 남지만, 문화교류의 밤도 기억이 매우 남는다. 우 리는 문화교류의 밤을 위해 매일 저녁 공연을 준비했다. 영남대팀의 태권무 와 홍익대팀의 써니, 그리고 팀장오빠의 노래, 마지막으로 다함께 플래시몹 을 열심히 준비했다. 시간이 많지 않아서 우리는 맹연습을 했고, 연습 하는 도중에 뜻이 맞지 않아 부딪치는 경우도 꽤많이 있있다. 영남대 팀과의 마찰 도 있었고, 팀내의 갈등도 많았지만 결과적으로 안무를 틀리지 않고 잘 해주 어서 서로 껴안고 웃음지었다. 대만 사람들을 위해 한국 음식을 준비하기도 했다. 떡국과 떡볶이, 잡채를 준비했다. 우리는 사람들이 30~40명이 올거라 기대하고 재료를 많이 준비해왔지만, 우리포함 30명정도 와서 많은 양의 음 식이 남았다. 놀라웠던 것은 지역 신문기자가 와서 우리를 취재했다는 것이 다. 타이시는 매우 조그마한 도시이기 때문에 한국, 일본, 독일 등 선진국에 서 해외봉사자가 오는 것이 신문에 실릴 정도로 큰 의미라고 했다. 나중에 그 기사를 보았는데 내 모습이 정가운데에 있어서 많이 민망했다. 음식과 공연 이 끝난 후 우리는 사전에 배운 대만 전통 노래를 함께 불렀다. 대만 사람들 의 공연과 노래 등을 보았으면 더 좋았겠지만 한국을 알렸다는 점에서 매우 뿌듯했다. 15일간 타이시에서 대만 생활은 100점 만점에 100점이었다. 음식, 물가, 여 행, 사람 모두 좋았다. 첫 번째로 음식에 대해 얘기를 해보자면, 우리의 밥은 안토니오가 해주었다. 아침, 점심 저녁으로 수고 해주었다. 한국과 음식이 별 반 다를 바가 없어 딱히 고생하지는 않았다. 다만, 아침밥으로 아무 것도 들 어 있지 않은 맨빵과 홍차만 나와서 아침을 든든하게 먹는 나에겐 너무나 힘 들었다. 대만은 길거리 음식이 발달한 나라여서 매 식사 후 간식과 버블티를 사먹느라 체중이 심하게 불어났다. 가격도 싸서 부담없이 사먹었다. 버블티 의 원조인 대만에서 먹는 버블티의 맛은 최고였다. 주황색 간판인 julie라는 곳에서 아침, 점심, 저녁 매일 사먹었고 주인 아주머니께서 함께 사진 찍는 것을 요청할 정도로 친해졌다. 튀김집과 꼬치집, 세븐 일레븐, 계란지짐집, 베이커리 등을 우리가 휩쓸었다. 대만의 특산품인 파인애플 케잌을 기념품으 로 사갔는데, 너무 맛있어서 가족들이 좋아했다. 대만의 음식은 대체적으로 너무 맛있고 싸서 대만족이었다. 두 번째로 사람들이 너무 친절하고 상냥했다. 우리는 중국을 경유해서 와서 중국에서 하루 머문 적이 있었다. 그때 중국사람들에게 느낀 점은 매우 불친 절 하고 여행객들에게 바가지를 씌워서 이미지가 안 좋았다. 대만은 너무 다 르게도 사람들이 친절했고 공공시설 또한 깔끔했다. 안토니오와 캐런, 클레 어는 말할 것도 없이 잘해주었고, 특히 캐런은 봉사자들에게 천사라고 불릴 정도로 착했다. 타이시 사람들도 따뜻하게 우리를 대해 주어서 너무나도 고 마웠다.

163 163 세 번째로 여행. 우리는 캠프일정 중 주말에 대만의 3대 도시중 하나인 가오슝에 다녀왔고, 캠프가 다 끝난 후 타이페이에서 여행을 했다. 캐런 의 고향이 가오슝이기 때문에 캐런이 가이드를 해주어서 여행이 수월했지 만, 타이페이는 캐런이 하루종일 함께 할 수 없어서 약간의 어려움을 겪 었다. 162 가오슝에서의 첫째날에는 룽후타, 치밍탕, 춘추거에 갔다. 엄청나게 큰 호수와 공원이 펼쳐졌고 크고 웅장한 나무가 많아서 이국적인 느낌이 들 었다. 그곳에서 대만의 대표음식인 우육탕도 먹었고, 신년사주도 뽑아보 았다. 돌아올 때는 해가 저물어 불이 켜진 전등에, 진파랑의 하늘 그리고 상아 색 보름달이 떠있는 아름다운 야경을 보면서 다음 장소로 이동하였다. 다 음 장소는 야시장이었다. 대만은 야시장이 매우 발달한 나라다. 야시장마 다 운영시간은 다른데 보통 저녁 7시부터 새벽 1시까지 열린다고 한다. 야시장에는 매우 신기한 것들이 많았다. 숭어의 난소를 말린 음식도 팔았 고, 맛있는 꼬치, 메추리알과 새우를 이용한 맛있는 간식, 뱀 요리 등등 한국에는 없는 것들이 많았다. 물가도 싸서 배불리 먹고 즐기는데 우리나 라 돈으로 6천원 정도 사용했다. 가오슝에서의 두 번째 날은 치진 섬에 갔다. 자전거를 대여하고 배를 타 고 섬으로 들어갔다. 대만은 거의 온국민이 고등학교 때부터 오토바이를 탄다고 하는데, 배를 탈 때 배 안에 엄청나게 많은 오토바이를 볼 수 있었 다. 섬에 도착해서 우리는 하얀등탑에 올라갔고 그곳에서 아름다운 경치 를 볼 수 있었다. 그날은 매우 시끄러웠는데, 치진섬의 절에서 모시는 한 신의 탄생일이어서 축제가 열리는 것이라고 했다. 등탑에서 내려가서 축 제 현장에 가까이 갔을 때는 전쟁이 난 줄 알았다. 폭죽 소리가 너무 시 끄러웠고, 연기 또한 뿌옇게 되있어서 우리는 재빨리 그 자리를 빠져나왔 다. 맛있는 해물요리를 먹고 난 후 자전거로를 따라가다, 해가 저무는 광 경을 보고 난 후 타이시에 돌아왔다. 타이페이에서의 여행은 사실 날씨가 좋지 않아 고생했다. 온에어의 촬영 지인 지우펀에 갔는데, 높은 산에 위치한 도시여서 바람이 많이 불고 안 개가 자욱했다. 비까지 와서 춥기 까지 했다. 빨간 등이 길을 따라 쭉 달 려있어서 매우 인상깊었다. 그 다음으로 대만에서 제일 큰 스린 야시장에 갔는데 끝이 보이지 않았다. 숙소에 돌아오니 캐런이 우리의 숙소에 와있었고, 우리 끼리 마지막으로 맥주를 마시면서 여러 이야기를 나누었다.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다이어리 를 마무리함으로써 나의 봉사활동은 끝이났다.

164 17일간 대만에서의 봉사활동과 여행은 정말 잊지 못할 추억이 될 것이다. 어 린 학년임에도 불구하고 성실히 일하려고 노력했고, 가슴으로 봉사하려고 노 력했다. 아이들과 만난 시간은 내 인생에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내게 큰 의미를 부여해주었다. 다시 한번 교육에 대한 나의 열정을 확인 할 수 있었 고, 아이들이 나를 잘 따라주고 함께 소통 할 수 있는 나의 재능을 발견 할 수 있었다. 또한 영어 회화의 중요성을 깨닫게 되었고, 될 수 있는 한 많은 것을 보고 느껴야 겠다는 생각을 하게되었다. 나는 앞으로 계속 봉사를 할 것이고, 더 큰 세상을 체험하기 위해서 많은 것을 노력할 것이다.

165 라오스 164 "somsak's diary" 라오스_강민준 부경대학교 한 달이 지난 지금도 라오스에서의 9발10일은 생생히 기억난다. 우리는 라오스로 출발하기 전 한달 전부터 모여서 준비를 하였다. 처음 며칠 동 안은 테이블에 앉아 이런저런 아이디어 회의와 사담으로 보냈다. 그리고 점점 괜찮은 아이디어가 나오고 각자 맡은 준비물을 챙기고 라오스 행 비 행기에 올랐다. 돈을 한 푼 이라도 아껴보고자 베트남을 경유해서 비엔티엔으로 들어가는 비행기를 탔다. 베트남에서는 동남아시아 특유의 고온다습함을 느끼지 못 하였는데 불과 비행기로 1시간 떨어져 있는 라오스에 도착하였을 때 숨이 턱 하고 막혔다. 비로소 동남아시아를 실감했다. 입국심사를 하고 나가자, 현지 코디네이터 선생님과 AON 이라는 현지 친 구가 나와 있었다. 우리가 저녁이 되서야 내려서 선생님의 첫 말씀은 이 랬다. 배고프죠? 머 먹고 싶어요? 우리는 이구동성으로 라오스 음식 이라고 말하자 선생님께서 전통 라오스 음식점으로 데려가 주셨다. 라오 스 음식이라서 입에 안 맞을 줄 알았는데 너무 맛있어서 밥을 두 그릇이 나 비웠다. 우리의 일정이 바로 캠프장소로 가는 게 아니고 이틀정도 여행을 하고 들 어가는 일정이라서 주말을 비엔티엔에서 보냈다. 낮에는 여러 관광명소를 둘러보고 저녁에는 야시장을 둘러보았다. 그리고 월요일 아침 비엔티엔에 서 30분 정도 떨어져있는 캠프 장소로 출발하였다. 가는 도중 현지친구들 다섯 명을 태웠다. 가는 길은 시골에 계시는 할아버지 댁에 가는 길과 별 반 다른 게 없었다. 캠프 장소에 도착해서 짐을 풀고 현지 친구들과 간단히 자기소개를 한 다 음 학교를 둘러보러 갔다. 학교 운동장은 온갖 배설물들이 군데군데 있었 고 그곳에서 아이들은 배설물 따위는 신경 쓰지 않고 신나게 뛰어놀고 있 었다. 시간이 마침 수업이 다 끝난 시간이여서 아이들은 우리들 주위를 둘러싸며 신기한 듯이 쳐다보았다. 그중에 한 꼬마아이가 종이를 내밀더 니 싸인을 해달라고 하자, 진짜 학교에 있는 모든 아이들이 종이와 펜을 들고 와서 싸인을 해달라고 했다. 우리는 연예인이 된 마냥 이름과 그 옆 에 싸인을 해 주었다.

166 그리고 그 다음날부터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하였다. 크게 두 팀으로 나누어 한 팀은 힘쓰는 일, 한 팀은 아이들과 활동으로 나누어 진행하였다. 힘쓰는 일은 도서관 내부 벽화 그리기, 교실과 학교 외벽 페인트 칠 하기, 교실 안에 선풍기 다는 일이 주요활동 이였고 아이들과의 활동은 위생교육, 데칼코마 니, 동요 부르기, 영어 교육 등이 있었다. 그렇게 오전 오후가 눈 깜짝할 사이 에 지나가고 있었다. 그 중에 기억에 남는 활동은 운동회와 바자회였다. 먼저 운동회는 오전부터 시작하여 하루 종일 진행되었다. 오전에는 현지 친구들이 프로그램을 진행했 고, 오후에는 우리들의 프로그램으로 진행을 하였다. 운동회는 한국과 마찬 가지로 남녀 구분 없이 너무나도 좋아하였다. 특히 오후에 축구를 하였는데 초등학생인데도 주장이 각자 포지션을 정해주는 것을 보고 깜짝 놀랐다. 나 는 군대이후로 축구를 처음 했는데 운동장이 얼마나 넓은지 얼마 지나지 않 아 주저앉고 말았다. 마음먹은 대로 몸이 따라주질 않았다. 그리고 바자회는 아이들 뿐 만 아니라 마을 주민들까지도 참여하는 형태로 준비를 하였다. 바자회를 하기전날 우리가 한국에서부터 낑낑대며 가지고 온 물품을 라오스 시세에 맞게 책정하고 요깃거리로 간단한 주먹밥을 준비하였 다. 그리고 바자회 당일, 우리의 물건들은 불티나게 팔렸다. 옷 몇 벌의 제외 하고는 시작한지 몇 분만에 다 팔려 버려서 깜짝 놀랐다. 아이들 뿐 아니라 어른들도 많이 동참해주셔서 감사했다. 그리고 거기서 모은 수익금으로 학교 도서관에 넣을 책들과 선풍기를 살 수 있었다. 이렇게 하루하루가 빠르게 흘러가고 마지막 날이 왔다. 아침을 먹고 학교를 가보니 학교 측에서 직접 우리들을 위해 환송식을 열어 주셨다. 행사가 끝나 고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우리들의 팔목에 실을 묶어 주었다. 처음에는 어리 둥절 하였는데 알고 보니 라오스에서는 친한 사람을 먼 곳에 보낼 때 손목에 실을 묶어주는 풍습이 있다고 하였다. 이야기를 듣고 나자 나는 눈시울이 붉 어졌다. 지금도 나의 왼 손목에는 아직도 실이 묶여져 있다. 그렇게 양 손목 에 실을 가득히 묶고 우리는 무거운 발걸음을 옮겨야했다. 마지막에는 모두 눈물바다가 되었다. 나 또한 마음속으로 눈물을 흘렸다. 이 렇게 짧지만 짧지 않은 9박10일의 캠프는 마무리 되었다. 한국에서 떠나기 전에 내가 과연 이 친구들과 같이 어울려 캠프를 잘 마칠 수 있을 까 하는 두 려움이 컸다. 나는 한 번도 능동적으로 봉사를 해본 적이 없었기 때문에 더 욱 더 두려움이 앞섰다. 하지만 그런 두려움은 시간이 갈수록 즐거움으로 바 뀌었고 어려움 이웃을 물질적으로 도와주는 게 봉사의 다가 아니라고 생각했 다. 비록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마음으로 느끼고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러한 시 간들이 좋은 추억으로 남는 것 또한 하나의 봉사라고 생각한다. 또한 이곳 아 이들은 어떤 게 가난인지, 어떤 게 풍족한 건지 느끼지 못 한 체 살아가고 있 다.

167 167 내 자신에 대한 선입견 때문에 이곳 을 처음 보았을 때 여기 아이들은 힘 들게 살아가고 있구나 라고 느꼇다. 하지만 나의 생각이 잘못 된 것 이였 다. 나보다 이곳 아이들이 훨씬 더 풍요롭게 살아가고 있었다. 경제적인 면은 아니지만 마음속으로는 말이다. 166 나는 이 캠프를 통해 많은 도움을 주고 가려고 했지만 반대로 내가 너무 많은 부분을 채워가는 것만 같아서 미안한 마음이 든다. 마지막으로 9박 10일 동안 우리 팀을 아무 탈 없이 잘 이끌고 가준 팀장을 비롯해 모든 팀 원들과 현지 친구들, 아이들에게 2012년 첫 시작을 잊지 못할 추억을 선 물로 준 것에 대해 감사하다는 말을 전하고 싶다, 9박10일의 캠프는 영원히 잊지 못할 것 같다.

168 "turning point in my life, LAOS" 라오스_최민식 영남대학교 ~ 지금 에세이를 적고 있는 내 심장은 아직도 쿵쾅거린다. 해외자원봉사 단에 선발되기 전까지는 알지 못했던 미지의 나라, 라오스. 하지만 지 금 내게 있어서 라오스는 앞으로의 인생을 살아감에 있어 더할 나위 없는 값진 경험과 나를 성장시킨 원동력이 되어준 고마운 나라이다. 라오스에 대해 쉽게 접근해보면 우리나라와 가까이 있는 나라, 중국을 떠올리면 될 듯하다. 중국과 같이 라오스도 사회주의 체제이지만 경제 는 자유로운 국가이다. 부익부 빈익빈이 중국만큼 격차가 나 있으며, 마을 사람들의 인심은 동방예의지국인 우리나라 못지 않게 좋은 나라 이다. 처음 해외자원봉사활동을 가고 싶었고, 단지 스펙에 끄적거릴 수 있겠 다라는 마인드로 접근한 나로써는 라오스에 파견되어 봉사활동을 하 는 내내 부끄러움을 감출 수가 없었고, 이제는 진정한 의미로써의 봉 사활동을 한 내 자신에게 대견스럽기까지 하다. 라오스의 사람들은 웃음을 잃지 않는다. 어떠한 상황이 와도 결코 웃 음을 잃는 법이 없었다. 무언가에 쫓기는 듯한 각박함 또한 전혀 볼 수 없었으며 유유히 살아가는 사람들인 것 같다. 여기에서 나는 내 자 신을 되돌아 보게 되었다. 항상 직진하려고만 하고 무언가에 쫓기던 나 자신으로써는 상당히 신선한 충격을 받을 수 밖에 없었다. 때로는 내가 추구하는 방향이 맞을 수도 있겠지만, 여유를 가지고 가끔은 뒤 를 돌아보며 웃음을 잃지 않고 유유히 살아가는 것 또한 내게 있어서 꼭 필요한 요소가 되어 감명 깊었다. 현지 주민들과의 만남, 초등학교 아이들과의 만남.. 그들은 언제나, 항상 나를 반겨주었다. 봉사활동의 일환으로 나는 초등학교 벽화 그리 기, 유치원 지붕 짓기, 소각장 짓기 등을 하였는데, 작업하는 내내 아 이들의 관심과 무엇보다 내가 인상 깊었던 것은 아이들이 손수 같이 작업을 하려고 하는 것이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거의 막노동에 가까 운 일들인데 많아 봤자 12살일 듯한 아이들이 무거운 돌을 나르고 삽 을 가져다 삽질을 하고.. 정말 나는 아이러니 했다. 현지 아이들도 물론 알 것이다. 우리가 봉사활동을 하러 왔다는 것을. 그렇다면 봉사활동을 하러 온 우리가 일을 하는 것이 맞는 건 당연한 데, 옆에서 웃으면서 도와주니 정말 크나큰 힘이 되었고 사회의 때가 묻어버린 나 자신이 부끄러워지며 봉사하는 내내 나를 뒤돌아 볼 수 있는 자아성찰의 시간을 가지게 된 것 같아 너무나 기분이 좋다. 현지 주민들에게 받은 게 너무 많아서, 너무나 크나큰 환영을 받아서 인지 상대적으로 베푼 게 없는 것 같아 우리는 코리안데이를 개최하였 다. 주민들의 반응은 폭발적이었다. 코리안데이 행사 때 우리는 우리 가 거취하고 있는 숙소에 주민들을 초대하여 우리나라 전통음식과 과

169 169 자류들을 대접하며, 빔 프로젝트를 설치하여 우리나라의 사진과 문화들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우퍼를 설치해 현지 사람들과 밤새도록 마당에서 춤 을 추며 술 한잔하는 시간을 가졌다. 이 사람들은 내게 있어서 정말 내 인 생에 있어서 잊지 못할 순간을 만들어 주었고, 그것이 내 발전에 있어서 상당한 값진 보물이 된 것 같아 앞에서 절을 하고 싶을 정도이다. 언젠가, 훗날이 아닌 나는 반드시 라오스, 내가 거취 했던 날럿 마을에 다시 갈 것 이며, 그 고마운 사람들과 언제까지나 함께이고 싶다. 168 내 삶의 터닝포인트가 되어준 라오스, 감사합니다.

170 "워크 캠프를 다녀와서 " 라오스_박갑준 국립목포대학교 라오스에 가기 전에 우리 한국 팀원들 몇 번 만났다. 만나서 필요한 물품들도 알아보고 예산도 맞춰보고 거기서 가서 어떤 프로그램을 할 지 회의도 많이 했다. 처음 라오스에 도착 했을 때는 해가진 저녁이었 다. 우리가 대략 2주 동안 머무를 곳에 도착했는데 그 곳에는 벌써 일 본인과현지인봉사자들이 미리와 있었다. 늦은 시간이라 간단하게 인 사만하고 집을 풀고 취침했다. 우리가 작업할 곳인 유스센터에 갔다 차로 대략5분 거리인 것 같다. 처음 가서 한일은 담장 만들기였다. 대 나무를 적당한 크기로 톱으로 잘라 철사로 고정을 해서 학교 주변의 담을 만들었다. 점심을 먹고 나서도 이 일을 계속했다. 하고 시원해질 쯤 학생들이 하나하나씩 왔다. 우리는 이 시간에 학생들에게 우리 이 름을 알려주고 친분을 쌓고 숙소로 갔다. 같이 일하는 봉사자들이 많아서 이름을 외우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더군다나 다른 나라 사람이라서 외우기가 더더욱 힘들었다. 이젠 아 침에는 일하고 점심 먹고 2시부터 일을 다시 시작하고 5시부터는 3클 래스로 나누어 첫 번째 클래스, 두 번째 클래스는 30분씩, 세 번째 클 래스는 아마 고학년인 것 같다. 1시간씩 이렇게 수업을 하고 하루 일 을 마무리 하기로 했다. 나는 명옥 언니랑 선진이랑 일본사람인 나베 랑 첫 번째 클래스를 맡기로 했다. 그 다음날은 황토 흙을 물에 풀어 채에 걸러서 고운 진흙을 드럼통에 담아 놓는 일을 했다. 이 진흙으로 페인트를 만들어 벽을 칠한다고 한다. 첫 번째 클래스 애들을 만났는 데 엄청 어린 애들이었다. 초등학생 1~2학년 되는 애들 더 어리게 보 이는 애들도 많았다. 아직 영어를 잘 모르는 애들이라서 현지인의 도 움이 필요했다. 전에 만들었던 진흙을 풀과 모래를 섞어서 페인트를 만들었다. 우선 학교 벽에 있는 흙 페인트를 벗겨내고 물을 뿌리고 그 위에 진흙을 발랐다. 다른 날에는 시멘트 벽에 페인트를 바르는 작업 도 했다. 그리고 여기는 밝을 때와 어두울 때 기온 차가 엄청 심했다.

171 171 다행이 감기 걸렸던 사람은 없어서 다행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힘들었 던 일들이 많았다. 한국에는 여자봉사자밖에 없어서 엄청 힘들었던 일들 을 일본 남자 분들 이해해주셨다. 이점에서 일본 분들께 정말 감사했다. 그리고 이런 워크 캠프에는 남녀가 꼭 있어야 할 것 같다. 남자가 못하는 일들도 있고 여자가 못하는 일도 있기 때문에 한국인중에서 남자캠프자가 없어서 일본 분들에게 정말 정말 고마웠다. 170 화요일을 프리데이었다. 봉사활동을 안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하는 날이다. 자원봉사 모두들 타운으로 놀러 가기로 했다. 한국팀은 타운 돌 아다니다가 현지인 인 티아 의 집에 놀러 가 전통의상을 입어보고 여기 사람들은 어떻게 생활하는가 체험도 하였다. 주변쓰레기도 줍고 청소하 고 쓰레기 창고도 짓고 저녁이면 다 모여서 하루에 한번씩 회의리더가 되 어서 회의를 한다. 오늘 어땠는지 내일 애들한테 뭘 가르칠지. 내일 일정 은 어떻게 되는지 요리하는 팀 청소하는 팀 쉬는 팀 나누어서 하루에 한 번 돌아가면서 하는데 요리하는 팀은 어떤 음식을 요리할지 회의도 하고 한다. 마지막 날에는 저녁에 유스센터에 모여서 작별인사를 했는데 전통작별인 사 같았다. 달걀과 과자 과일로 상을 차리고 현지인들이 한 명 한 명 봉사 자들 손목에 흰 줄을 묶어주면서 덕담을 해주었다. 정말 고마웠고 감동이 었고 이 캠프를 하면서 나에게 덕이 된 게 많았다. 해외 봉사하면 도와주 러 가는 건 줄 알았는데 오히려 내 자신이 봉사 받은 느낌이었다. 책으로 배운 영어보다 직접 가서 현실에 맞닿아서 영어해보고 하니까 하루하루 그곳에 살면서 점점 영어도 늘었다. 주말에는 애들을 가르치지 않는다. 댄스 클래스를 하기 때문이다. 라오스 전통 춤을 추는데 정말 어려웠지만 애들하고 같이 춤을 추니까 재미있고 좋았다. 이곳에 한국인이 봉사하러

172 많이 와서 그런가 아이들이 한국가요를 틀어놓고 한국 가수처럼 춤을 추었 다. 정말 잘 췄다. 아이들한테 춤도 배우고 좋았다. 앞으로 곧 개강이다. 학기 중에 해외봉사 활동 가는 건 무리라서 주말이나 시 간 나는 틈에 이곳 저곳 봉사활동 하는 곳이 있다면 할 것이다. 또 방학이 돼 서 해외여행을 할 수 있는 여건이 주어진다면 다시 한번 라오스에 가고 싶다. 해외봉사활동도 여건만 주어진다면 또 하고 싶다.

173 방글라데시 172 "방글라데시의 다양한 얼굴들과 마주치다" 방글라데시_김보현 BWCA 경희대학교 도착, 그리고 혼돈 서울에서 광저우를 거쳐 방글라데시 수도 다카에 도착한 건 예정시간보다 한 시간 늦은 새벽 한 시였다. 내가 출발한 날 서울의 기온은 영하 10도 에 이를 정도로 추웠는데 불과 몇 시간 만에 나는 공항 안의 모기들과 사 투를 벌이고 있었다. 그러면서 느꼈다. 아 드디어 내가 방글라데시에 왔 구나... 워낙 늦은 시간이라 서둘러 입국 수속을 마치고 픽업 나온 차를 타고 숙소로 이동했다. 어두워서 시내의 모습을 제대로 볼 수는 없었지만 우리에겐 낯선 벵골어로 된 간판들, 낡은 건물과 차들을 보면서 앞으로 이 나라에서 어떤 일들을 겪을지에 대한 호기심이 가득했다. 다음날, 현 지 캠프주관 단체인 BWCA 관계자들과 우리팀원 10명이 모두 모이게 되 었고 우리는 바로 다카를 떠나 캠프 장소인 보그라로 이동했다. 보그라는 방글라데시 북서부에 있는 지역으로 수도 다카에서 차로 6시간이 넘게 걸 리는 거리였는데 이날 이동하는 동안 우리는 엄청난 혼돈과 마주하게 된 다. 도로엔 신호등이나 횡단보도는 찾아볼 수 없었고 사람들은 차들 사이 로 아무렇게나 지나다니고 있었다. 거기에 인력거인 릭샤들까지 차들 사 이사이로 돌아다니니 차들은 끊임없이 경적을 울려댔는데 도로상황을 보 는 것만으로도 멀미가 날 지경이었다. 시내에서의 상황이 이랬다면 시골 의 도로를 달리면서는 중앙선을 무시하는 추월과 역 주행이 이어졌다. 그 과정에서 상대편에서 오는 차와 충돌할 뻔한 아찔한 순간이 한 두 번이 아니었음은 말할 것도 없다. 그럼에도 교통사고가 나지 않는다는 것이 신 기할 따름이었는데 이런 혼돈 속에서 6시간을 이동하며 우리 모두는 방글 라데시에 서서히 적응해가고 있었다. 보그라, 또 다른 방글라데시를 만나다 6시간이 넘는 이동 끝에 도착한 우리의 캠프 장소 보그라는 한적한 시골 마을이었는데 들어가는 동안 가로등도 거의 없고 인적도 드물어 정말 오 지로 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다카 시내에서 그리고 이동하면서 겪은 소 란스러움 때문인지 그러한 한적함이 되레 편안하고 반가웠던 것 같다. 도 착하면서 우리를 감탄케 했던 것은 밤하늘의 수많은 별들인데 그처럼 쏟 아질 것 같이 많은 별들을 본 것은 난생 처음이 아닌가 싶다. 그렇게 전날 보다는 다소 차분한 마음으로 우리 숙소에 도착했다. 사실 해외봉사를 가 는 많은 이들이 우려하는 것이 숙소의 시설 문제일 것이다. 우리 역시 가

174 는 내내 여기에 대한 걱정을 떨칠 수 없었는데 내 개인적으로는 만족스러웠 다고 말하고 싶다. 한국의 집처럼 안락하고 편리한 곳에 비할 수는 없겠지만 화장실, 침대, 주방, 식사장소 등을 둘러보니 크게 불편할 정도는 아니었다. 다만 세면대의 수돗물은 모두 녹물이었고 이마저도 온수가 나오질 않는다는 점이 머무르는 동안 매우 불편했다. 다음날 아침부터 우리 팀은 본격적으로 VTC 건설에 나서게 되었다. 우리가 숙소에서 일하는 장소까지 가는 동안 동 네 아이들이 우리에게 반갑게 인사하고 손도 잡으며 격의 없이 달려드는 모 습에 매우 놀랐는데 이전에도 많은 봉사팀들이 이곳에 와서인지 외국인들에 대한 어려움은 없어 보였다. 어린 아이들을 다루는데 다소 서툰 나로서는 처 음엔 부담스럽긴 했으나 제대로 된 옷도 못 입으며 가난하게 살아도 밝게 웃 는 얼굴들 그리고 맑은 눈들을 보면서 서서히 마음의 문을 열어갔다. 우리가 일하는 곳 주위에는 벽돌공장 하나를 제외하곤 사방이 논밭인 전형적인 농촌 마을의 모습이었다. 그러다 보니 낮에도 다카에서 느꼈던 소란스러움은 없었 으며 너무나도 평화로운 곳이었다. 어떤 날에는 캠프에 있는 자전거를 빌려 마을 주위를 돌아보았는데 그 순간만큼은 가난한 나라에 봉사활동 온 것이 아니라 한적한 시골에 요양이라도 온 기분이었다. 우리가 이곳에 온 이유 우리가 방글라데시에 있으면서 가장 중점적으로 한 일은 바로 VTC 건설을 돕는 일이었다. 학교방문 등 특별한 행사가 있는 날이 아니면 우리는 매일같 이 오전엔 이곳에 나가 작업을 했는데 솔직히 말해서 우리가 했던 일이 우리 기대에 크게 못 미처서 실망감이 많이 들기도 했다. 우리들이 했던 일은 벽돌 을 부수거나 일렬로 서서 나르기 그리고 그것들을 바닥에 까는 정도를 벗어 나질 못했다. 짧은 기간이지만 이왕 간 김에 가시적인 성과를 내고 싶었던 우 리로서는 열흘 동안 비슷한 일들만 하고 진전이 없어 보이니 답답하고 의욕 이 나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이는 아무래도 우리가 건설작업에 숙련되지 않 다 보니 어려운 일들은 현지에서 고용한 몇몇 직업일꾼들에게 맡김으로써 나 타난 결과이기도 했다. 물론 우리가 했던 일들이 전혀 의미가 없었다고 할 순 없겠지만 VTC의 일은 우리 모두에게 가장 큰 아쉬움으로 남게 되었다. VTC 건설만큼이나 비중이 컸던 것이 바로 현지 학교방문이었다. 우리는 보그라에 서 총 2곳의 고등학교를 방문했는데 처음에 갔던 곳은 초,중,고등학교를 한 곳에서 운영할 정도로 규모가 매우 큰 곳이었다. 나는 팀장이었기 때문에 학 교 방문일 며칠 전에 현지캠프 staff 두 명과 함께 사전답사를 갔었는데 내가 학교에 들어가는 순간 많은 아이들이 오직 나만을 뚫어지게 쳐다보고 내가 움직일 때마다 계속 따라왔다. 우리 숙소 주의의 동네 아이들과 달리 피부색 깔이 다른 외국인 한 명이 학교에 들어온 게 매우 신기했던 모양이다. 그렇게 답사를 마치고 며칠 후 다른 팀원들과 함께 방문을 했던 날에는 예정대로 기 후변화의 심각성과 환경보호의 중요성에 대해 선발된 고등학생들 앞에서 발

175 175 표를 했고 발표 후에는 퀴즈를 내고 한국에서 준비해 간 선물을 상품으로 주기도 했다. 발표 시간 이후에는 운동장에 나와 학생들과 같이 단체줄넘 기, 제기차기 등 한국 전통놀이와 미리 준비해 간 댄스공연을 했다. 아무 래도 이슬람 국가여서 그런지 남학생들은 좀 더 적극적으로 참여하고 호 응하는 반면 여학생들은 다소 얌전하고 조용했다. 두 번째로 방문한 학교 는 우리가 묶는 숙소 근처의 여고였는데 처음 학교에 비해서 규모가 그리 크지 않은 곳이었지만 이슬람 국가에서 남자가 여고를 방문한다는 게 다 소 긴장되고 떨리는 일이었다. 이번에도 역시 발표 시간이 있었는데 주제 를 바꿔서 한국전쟁 이후 우리의 개발 및 경제발전 과정을 설명했다. 이 는 우리나라에 대해 알림과 동시에 방글라데시와 같은 가난한 나라도 얼 마든지 발전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보여주기 위해 우리 쪽에서 제안한 발표였다. 다행히도 우리가 공들여 준비했던 프레젠테이션에 대한 호응이 좋았고 이후에는 다시 운동장에 나와 놀이를 했는데 특이했던 점은 남녀 공학에서 봤던 여학생들과 달리 매우 적극적이고 활동적인 여학생들의 모 습을 많이 볼 수 있었다는 것이다. 문화적, 관습적인 이유 때문에 다소 억 눌려있을 뿐 자유로운 우리나라의 여고생들의 모습과 크게 다를 바가 없 었다. 이렇게 두 학교를 방문하면서 학교프로그램이 끝났는데 개인적으로 는 일에 진전이 없어 다소 지루했던 VTC 작업 보다는 많은 현지 학생들 과 직접 만나보고 같이 즐길 수 있었던 시간이 좀 더 재미있었고 기억에 많이 남는다. 174 가난과 행복의 상관관계 흔히들 방글라데시를 가난하지만 행복지수가 가장 높은 나라로 알고 있으 며 이는 물질적인 풍요로움이 행복의 절대적인 조건은 아니라는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 여겨져 왔다. 사실 방글라데시 파견이 결정되면서 과 연 이것이 사실일까? 가난하고 못살아도 정말 행복할 수 있을까? 하는 궁 금증에 대한 답을 현지에서 직접 얻고 싶은 마음이 들었다. 그렇지만 결 론부터 말하자면 여기에 대해서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고 말할 수밖에 없 을 것 같다. 알려진 대로 방글라데시는 세계적으로도 최빈국에 속한다. 영토 규모는 그리 크지 않음에도 인구는 1억 6천이어서 인구밀도는 세계 최고인 나라다. 국가에 돈은 없고 해외원조에 의존하는데 인구는 너무 많 다 보니 대부분의 국민들이 최저생계비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입으로 연 명한다고 한다. 우리가 갔던 보그라의 작은 마을에는 대도시와 달리 구걸 하는 거지들이나 관광객들을 노린 범죄자들이 있는 곳은 아니었지만 몇 몇 아이들은 제대로 된 옷을 입지도 않았고 위생상태도 매우 좋지 못했 다. 몇몇 가옥들은 지푸라기와 나무로만 간신히 엮어 만들어진 것들이었 다. 하지만 아이들은 언제나 밝게 웃고 있었고 또래들끼리 몰려다니며 노 느라 정신이 없었다. 비록 깨끗한 옷을 입거나 맛있는 음식을 먹거나 좋

176 은 교육을 받지 못해도 아이들 입장에선 그렇게 마음껏 즐기며 사는 것 자체 가 즐겁고 행복한 것일 게다. 아이들뿐만 아니라 어른들 특히 남자들의 경우 오후에는 끼리끼리 모여 차를 마시거나 자신들만의 게임을 하는 모습을 심심 치 않게 볼 수 있다. 한창 일해야 할 시간에 건장한 남자들이 일은 안하고 놀 기 때문에 여자들이 더 고생하고 경제적으로도 잘 살 수가 없겠다는 비판을 하면서도 한편으로는 일하는 기계처럼 스트레스 속에 사는 것보단 정신적으 로 훨씬 건강하고 자신들의 삶을 누리는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 같 다. 결국 가난한 사람들도 부유함에 대한 갈망이나 욕심 없이 지금의 상태에 만족하고 스스로 즐기는 법을 안다면 얼마든지 행복해질 수 있는 것이다. 하 지만 도시에 나가보면 사정은 딴판이다. 거리에 넘쳐나는 인력거꾼들은 얼마 되지 않은 수입을 위해 하루 종일 거리에서 매연을 마신다. 이들은 수명이 길 지 않은 이 나라에서도 가장 수명이 짧다고 한다. 내 눈으로 직접 보지는 못 했지만 방글라데시에서는 아동 노동 문제도 심각한데 가난한 집의 아이들은 학교 대신 공장에서 하루 종일 일하며 가족들을 먹여 살려야 한다. 꼭 공장이 아니더라도 다카 시내를 돌아다니다 보면 외국인들을 붙잡고 구걸하는 아이 들을 심심치 않게 만날 수 있다. 구걸하는 아이들은 시내를 다니면서도 늘 문 제였는데 한번 잡으면 좀처럼 쉽게 물러나거나 포기하는 법이 없었다. 내가 지금 말한 이런 사람들은 이 가난한 나라에서도 하위 계층에 속하는 이들이 다. 과연 이들에게도 행복하냐고 물어보면 그렇다고 답할지 의문이다. 그들 의 표정을 보면 보그라의 마을에서 봤던 밝음 보다는 삶의 고단함에 지친 모 습이 역력하기 때문이다. 나의 잣대로 본다면 빈곤과 무질서 그리고 비효율이 가득한 방글라데시는 분 명 바람직한 사회의 모습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속에서 오히려 행복을 느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이 충격으로 다가오기도 했고 한편으론 그 들의 행복이 물질적 풍요로움에 대한 무지에서 오는 행복이 아닐지, 그렇기 때문에 그들의 행복이 진짜 행복이라고 볼 수는 없다는 생각이 좀 더 강하 게 들었다. 물론 이러한 생각의 이면에는 물질적 풍요와 행복은 관련이 있다 는 나의 견해가 있는 것이어서 고정관념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일 수도 있다. 그렇기에 행복과 가난의 상관관계에 대해서 나는 여전히 명쾌한 답을 얻기가 힘든 것 같다.

177 "벽을 넘어서 가슴으로." 방글라데시_손석준 BWCA 영남대학교 사실 이번 활동에 가게 된 것은 하늘이 내려주신 기회나 다름없다. 원래 탈락자로 후보에 배치되어 있다가 우연히 초기 합격자들 중에서 포기한 사람이 생기면서 나에게도 방글라데시를 방문할 기회가 주어진 것이다. 예전에 이라크에서 겪었던 일들이 몇 가지 떠오르기도 했다. 외국에 나가 는 일은 언제나 설렘이 가득한 일. 우리에게는 세계에서 정말 못사는 나라에 속하면서도 행복지수가 정말 높 은 나라라고 인식되어 있는 방글라데시. 사실 해외자원봉사활동이라고 방 글라데시를 가는 것이기 때문에, 나는 그들에게 뭔가 가르쳐주러 간다는 생각이 컸다. 하지만, 지금 와서 생각해보면 내가 가르쳐 준 것 보다는 그 들로부터 내가 배운 것이 더 많다는 느낌이 드는 건 왜일까. 누가 말했는지는 생각이 잘 안 나지만, 일이 있기 이전에 사람이 먼저라 고 그랬다. 그들은 한국말을 전혀 할 줄 몰랐고, 나는 영어실력이 영 아 니었기에, 내가 하고자 하는 말을 정확하게 전달하는 데는 어려움이 있었 다. 하지만 그들은 내가 말하고자 하는 얘기가 무엇인지 알려고 노력하였 으며, 가끔씩 밀려오는 답답함을 빼자면 언어의 장벽이 사람과 사람 사이 를 막는다고는 느껴지지 않았다. 그건 서로가 서로에 대해서 알려고 노력했기 때문에 그랬던 것일지는 몰 라도, 언어가 가로막는 그 벽을 뛰어넘는 무언가가 그들과 내 사이에 분 명 존재했기에 우리는 3주에 가까운 그 시간들이 짧게 느껴질 정도로 즐 겁게 웃으며 지낼 수 있었던 것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작년에도 한국에서 방글라데시를 방문한 팀이 있어서, 그들은 한국문화와 음식에 관해서는 낯설어 하지 않았고, 각자가 좋아하는 한국음식과 싫어 하는 한국음식이 다들 있었다. 나는 그들이 맛보지 못한 한국음식을 그들 에게 보여주고 싶었고, 현지 음식이 입맛에 맞지 않아 고생하는 팀원들이 잘 먹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어서 내 실력을 발휘해서 종종 식사시간에 한 국음식을 만들어 내놓곤 하였다. 그리고 그들이 내가 해준 음식을 맛보고 맛있어요 라고 하는 그 한마디는, 세상 어떤 말을 쓸어 담아도 빗댈 수 없는 최고의 찬사라는 것을, 알 사람은 알 것이라고 생각한다. 말이 통하지 않아도 마음이 통하는 그들과의 시간은 어느덧 끝을 향해 다 가가고 있었고, 한국 사람들 못지않게 정이 많은 방글라데시 사람들도,

178 우리가 떠날 때는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우리도,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보 그라를 떠나고 다카로 향하는 버스 안에서, 우리나라와 다른 것이 너무 많아 서 모든 것이 정 반대일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과는 달리 그들이 우리에게 베 풀어준 너무나도 많은 정을 다시 떠올렸을 때, 아까 전 그들이 흘리던 눈물이 다시 생각나 괜히 코끝이 시큰해지는 것을 느꼈다. 한국에 돌아온 나는, 취업 준비생이라는 신분으로 정신 없는 하루하루를 보 내고 있다. 하지만, 내가 방글라데시에 있던 그 시간 동안 있었던 모든 일들, 특히 언어의 장벽을 넘어서는 순간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느꼈던 뜨거웠던 그 감정만큼은, 두 번 다시는 잊지 못 할 것 같다.

179 베트남 178 "소중한 만남들로부터 얻은 변화의 에너지" 베트남_김도희 VPV 경희대학교 지금의 나를 만들어 준 것은 무엇이지? 성공, 돈, 명예, 아니면 꿈에 대한 열망? 10대의 나는 좋은 대학에 가고 좋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 목표였기 때문에 그저 주어진 환경에서 공부만 열심히 하며 살아왔다. 막상 20대가 되어서는 내가 무엇을 원하는지, 어떻게 하면 행복한 삶을 살 수 있는지 에 대한 답을 내리지 못한 채 방황을 거듭했다. 하지만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고 이야기를 나누면서 행복한 삶이 무엇인지, 내가 추구하고자 하는 가치는 어떠한 것인지에 대한 답을 조금씩 찾아나갈 수 있었다. 비록 개 개인은 다양한 개성을 가지고 있기에 생각하는 방식이 달랐지만, 오히려 그 덕분에 다름 에 대한 이해심을 기르고 내가 몰랐던 또 다른 가치를 발 견할 수 있었다. 그렇다. 나를 키운 건 팔 할이 사람 과의 만남이다. 그리 고 올 겨울 또 한 번의 소중한 만남이 주어졌다. 바로 베트남 워크캠프에 참가해서 만난 사람 들이었다. 작년 10월 나에게는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힘이 든 시간이었다. 소중한 누 군가와의 이별은 내게 너무나도 큰 슬픔을 가져다주었고, 지금껏 내가 살 아온 인생에 대한 회의감이 들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벗어나 혼자 생각을 정리할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던 중 워크캠프 모집 요강을 보게 되었고, 어렸을 적부터 봉사하는 것을 좋아했던 나였기에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지원하였다. 한편, 아이들을 위한 봉사 및 활동을 많이 해왔었기에 아이 들의 재활치료와 교육을 돕는 베트남에 지원하였는데 다행히 합격하였다. 베트남으로 출국하기 전 11명의 팀원들과 교육, 문화, 체육 팀으로 나누 어 워크캠프에 필요한 것들을 준비하였는데 나는 교육봉사를 맡았다. 준 비기간 동안 동대문 문구거리 시장조사도 하고 인터넷에서 교육봉사와 관 련된 정보들을 살펴보며 화산폭발 실험, 손 씻기, 그림그리기, 클레이, 손 도장 찍기 등 다양한 프로그램을 준비하였다. 그리고 우리가 열심히 준비 한 프로그램을 아이들이 좋아해주길 바라며 설렘을 안고 베트남으로 출발 하였다. Thuy An센터에서 팀원들과 다른 나라에서 온 자원봉사자들과 함께 화단 을 정비하거나 아이들을 돌보았다. 그리고 이들과 함께한 2주는 내게 변 화의 발판을 마련해주었다. 첫째로, 아이들과 함께 지내면서 만족을 모른 채 욕심만 부려왔던 내 자신을 반성할 수 있었다. 센터의 아이들 중 대부 분은 부모님이 안계시거나, 신체적 또는 정신적으로 장애가 있었다. 하지 만 어려운 환경에 처해있음에도 아이들은 항상 작은 것에 감사할 줄 알고 행복해했다. 가령, 우리가 캔디나 초콜릿을 주거나 포옹을 해주고, 함께

180 사진을 찍어주는 것과 같은 작은 활동에도 정말 기뻐했다. 그러한 아이들을 보면서 나는 그 동안 내 자신이 너무나도 욕심만 부려왔다는 것을 깨달았다. 사실 일적으로나 물질적으로나 모든 것을 한 번에 다 가지기 위해 애쓰면 살 아왔다. 더군다나 이러한 욕심을 충족시키기 위해 성공을 꿈꾸며 현재의 행 복을 미룬 채 살아왔었다. 하지만 조그만 것에 감사할 줄 알고 현재의 행복에 충실한 아이들을 보면서 어떤 삶이 행복한 삶인지, 그리고 만족하며 살아가 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게 되었다. 한편, 두 번 째 소중한 만남은 외국인 자원봉사들과의 만남이었다. 대부분 나 와 또래이거나 많게는 5살 정도 더 많았는데, 함께 하는 2주 동안 깊은 대 화를 나눌 시간들이 많았다. 친구들에게 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지 물어보 니 대부분 자신의 인생을 목표를 찾기 위해 이곳에 오게 되었다고 말해주었 다. 다른 나라에서 왔지만 대부분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간다는 사실이 어 느 정도 위안이 되었다. 그런데, 그 것에 대처하는 마음가짐은 너무나도 달랐 다. 그들은 인생을 살아가는 데 있어 빨리빨리 만이 답이 아니라는 것을 가 르쳐주었다. 여태껏 나는 무엇이든 빨리 성취 해야하고 결과를 얻어야만 직 성이 풀렸고 그렇지 않으면 마음의 안정을 잃고 스트레스를 많이 받았다. 더 욱이 3학년 진학을 앞두고 안정적이고 좋은 직장에 취직하기 위해 스펙을 쌓 는 데에 큰 스트레스를 받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들은 정말 여유로웠다. 특히 두 친구가 직장을 그만두고 인생의 목표에 대해 생각해보기 위해 자원봉사에 참가했다고 했을 때는 머리가 돌로 맞은 기분이었다. 많은 돈을 버는 것을 성 공으로 여기며 자신의 행복과 목표를 찾는 것을 유예한 채 살아가는 한국 사 회에서는 일어나기 어려운 일이기 때문이다. 그 동안 삶의 중심을 잃은 채 흔 들렸었는데, 친구들을 보면서 남들이 사는 삶이 아니라 오직 나의 행복을 위 한 목표를 명확히 세우고, 나아갈 용기를 얻을 수 있었다. 사람, 사랑 으로 함께 했던 베트남에서의 2주는 꿈 같이 매일 매일이 행복 했던 시간들임과 동시에 내 안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삶의 중심을 찾을 수 있는 기회를 주었다. 베트남에서 돌아 온 후 내가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그리고 나의 목표를 찾기 위해 한 학기 휴학을 결심했다. 그리고 휴학을 하고 내가 원하는 공부를 하며 여전히 그 답을 찾기 위해 노력중이다. 때로는 지치 고 힘들 때도 있지만 베트남에서 만난 좋은 사람들과 함께 보낸 기억들은 여 전히 나의 긍정에너지의 원천이 되고 있다. 나의 긍정 에너지가 친구들에게 도 닿길 바라며, 다시 만날 그 날을 기약해 본다.

181 "꿈 같은 도전이었던 국제자원활동을 마치고.." 베트남_최수진 VPV 영남대학교 작년에 나는 어디서 자극을 받았는지 모르겠지만 무작정 시간이 날 때마 다 친구들과 봉사를 하러 다녔다. 내일은 희망이라는 단체와 대구에서 봉 사를 하기 시작했고 아무 생각 없이 학교에서 해외자원봉사자 신청을 받 는다는 소식에 바로 지원했다. 그렇게 갑작스럽게 아무런 준비도 없이 시 작하게 되었다. 어색한 첫 O.T를 시작으로 우리 10명의 팀원들은 학기를 마무리하고부터 매일같이 모여 회의하고 함께 시간을 보냈고, 서툴지만 즐겁게 내 생의 첫 댄스공연도 준비했다. 이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내가 기획하고 계획해야하는 봉사는 처음이기 때 문에 작은 일까지도 제대로 계획하고 실행하고 싶었다. 지금 생각해보면 열정 가득한 개개인들이 모였기 때문에 그렇게 회의가 길어졌을지도 모른 다. 우리 팀원들은 모두 한가지 씩 남들보다 잘하는 특기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것은 우리 봉사준비를 위해 큰 도움이 되는 것들이였고 나는 그들보다 부족한 것이 많다는 생각에 미안하고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렇게 때문에 더욱 최선을 다 할 수 있었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었던 시간이 였지 않았 을까.. 우리가 가장 많이 회의하고 신경 쓴 부분은 교육 봉사였는데 어디서 잘못 되었는지 생각보다 짧은 교육봉사 일정에 조금은 화가 났었다. 다양한 것 들을 알려 주고 싶었는데 그러지 못했기 때문인 것 같다. 그치만 아이들 이 정신없는 우리들의 교육을 잘 따라와주고 자신들의 소박한 작품들을 선물로 줄때는 너무 기쁘고 행복했고 항상 웃고 장난기 많은 아이들의 모 습을 보면 나도 맑고 순수해지는 것 같았다. 베트남의 아이들은 현실을 잊고 사는 듯 행복하고 정도 많다. 특히 coung 이라는 아이가 있었는데 학교에 가면 매일매일 손을 잡고 장난치던 귀여 운 친구였다. 잘해 준 것도 없는데 먼저 마음을 열어 주어서 무척 고마웠 다. 헤어질 때 이 친구의 눈물이 아직까지 잊혀지지 않는다... 조금 더 잘해줄 걸.. 해준 것도 없는데 너무 미안하고 한명 한명 모든 친구들을 챙겨주지 못해 아쉽다. 이렇게 짧은 시간을 아이들에게 많은 것을 받고만 가는 거 같아 미안하고 우리가 갈 걸 알면서도 마음 준 아이들이 정말 고맙다. 기

182 회만 된다면 같은 친구들을 또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싶다. 나는 캠프기간은 끝이 났지만 이것으로 끝났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도 아이들의 웃는 얼굴이 눈앞에 선하고 지금도 현지 친구들과 face book을 통 해서 지속적으로 연락하고 있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다시 보고싶다. 헨갑라이(다시만나요.)

183 "잊혀지지 않을 14일 간의 베트남" 베트남_이현정 홍익대학교 워크캠프를 다녀오기 전 가장 당황스러웠던 순간은 누군가가 왜 베트남으 로 봉사활동을 봉사를 간다고 신청했는지 뚜렷한 이유를 찾지 못했었다. 그냥 해외봉사활동은 대학생 때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 하고 또 갔 다 오는 것이라고 생각했을 뿐이었다. 하지만 모든 활동을 마치고 돌아온 지금, 베트남에서의 워크캠프는 잊지 못 할 추억으로 남아있다. 팀원들 모두가 매우 적극적이어서 워크캠프를 준비하는 동안 어려움을 느 낀 적은 없었다. 다만 어려움이 있었다면 원래 팀장이었던 오빠가 함께 가지 못하게 되는 바람에 팀장의 공석과 팀원교체로 인한 혼란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새로 온 팀원, 세영이의 뛰어난 친화력으로 인해 팀에 위 화감 따위는 전혀 찾아볼 수도 없었다. 나의 또다른 걱정이었다면 내가 팀장이라는 것. 공석이었던 팀장의 자리 를 내가 채우게 되었다는 것이 큰 부담이었다. 다들 적극적이고 능동적이 어서 딱히 팀장의 역할이 크지는 않았지만 팀장이라는 타이틀만으로도 나 에게 오는 중압감은 컸다. 팀을 대표하여 센터 측과 연락을 주고 받고 또 센터에서 팀원들과 센터 사이에서 전달자 역할을 해야 했기에 생각보다 해야 할 일은 없었지만 생각보다 그 부담은 무시할 수 없었다. 그래도 팀 원들의 격려와 각자의 위치에서 열심히 해 준 팀원들이 있어서 무사히 워 크캠프를 끝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우리 팀의 워크캠프 초반은 난항이었다. 우리가 예상하고 준비해서 갔던 것과 센터에서 원하는 활동의 차이가 있었기 때문이다. 캠프 사이트가 급 작스럽게 바뀌었었고 그에 따른 인포시트도 없어서 충분한 자료가 없었 다.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자료는 현지 코디네이터에게 부지런히 메일을 보내서 받는 답장이 전부였다. 우리가 캠프의 구체적인 일정을 알 수 있었던 것은 매일 아침이었다.

184 센터에 도착하고서 센터장과의 만남에서조차 대략적인 일정은 들을 수 있었 지만 구체적 일정은 알려주지 않았다. 일정은 그때그때 변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이 그들의 말이었다. 아이들과 만나는 첫 날. 우리는 아이들과 함께할 놀이를 구상해 와달라고 해 서 그냥 다같이 모여서 웃고 놀 수 있는 비눗방울 놀이를 준비해서 나갔는데 센터 측에서 원하는 것은 단지 놀이가 아니라 승자를 정할 수 있는 경쟁식의 놀이를 원하는 것이었다. 비눗방울 놀이는 승자를 정하는 놀이가 아니었기 때문에 우리는 다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부랴부랴 빙고게임으로 전환하여 게임을 진행하려고 했지만 시간이 부족하다며 이 또한 진행 중간에 중단하고 말았다. 우리 입장에서 나름 열심히 준비한 내용들이 센터 측으로 부터 약간은 무시당했다는 느낌도 들었고 우리를 대하는 센터 선생님들의 태 도도 다소 불쾌하다고 느꼈다. 우여곡절 끝에 아이들과의 첫 만남을 마무리 짓고 숙소로 올라와 긴급회의를 열었다. 우리가 준비해 온 것들과 센터 측에 서 원하는 것의 괴리감이 큰 것을 감지하고 다음날 센터 선생님들과 함께 회 의를 하기로 결정을 했다. 다음날, 선생님들과의 회의를 진행했다. 회의결과 센터 선생님들이 원하는 것은 아이들이 센터에 지속적으로 나올 수 있도록 우리가 흥밋거리를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센터 선생님들과의 회의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팀원들끼리의 긴급회의를 열었다. 앞으로 아이들과의 수업을 어떻게 꾸려나갈지에 대해서 고민해 보았다. 우선은 영어 수업용으로 준비한 알파벳과 기초 단어들은 레 벨 1아이들에게만 사용하기로 했다. 그리고선 준비해온 전지들과 에코백, 스 케치북과 크레파스들을 어떻게 사용하여 수업을 꾸며나갈지 생각해 보았다. 우리가 하나의 반과 지속적인 교류를 갖는 것이 아니라 센터의 모든 아이들 과 만나며 수업을 하는 것이어서 진도를 나누어 알려주는 식의 수업은 절대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그래서 생각해 낸 것이 한국의 동요 알려주기와 종이 접기, 에코백 꾸미기, 빙고 수업이었다. 초반에 센터 측과의 의견 불일치로 인해 사실 기분도 많이 상하고 워크캠프 에 대한 열정도 많이 없어졌었다. 하지만 막상 아이들을 만나고 보니 다시 열 정이 살아나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45분을 무엇을 하면서 어떻게 이끌어나 가나 고민했었는데 수업에 들어가 아이들을 만나고 그 아이들과 함께 수업 을 해보니 하루에 45분은 우리에게 너무나도 짧은 시간이었다. 매일매일 다 른 반의 아이들을 만났는데 그 아이들과 만나고 헤어질 때마다 이 아이들을 다시 볼 수 없다는 슬픔과 아쉬움이 밀려왔다. 아이들과 했던 수업 중에 가 장 기억에 남는 것은 에코백 수업이었다. 아이들이 사포지에 크레파스로 예 쁘게 그림을 그려오면 그것을 다리미로 에코백 위에 다려주어서 에코백을 꾸 미는 수업이었다. 처음에는 내가 다리미로 다려줬다. 꼼꼼히만 눌러주면 되 는 줄 알았는데 힘이 필요한 일이었다. 내가 다려준 아이들의 에코백은 생각 보다 흐릿하게 무늬가 나타났다. 실망하는 아이들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

185 185 하고 그 아이들에게 미안한 마음 뿐이다. 그래서 결국 함께 수업을 들어 간 주필오빠에게 다리미를 넘겨주었다. 그렇게 좁은 교실에서 땀을 삐질 삐질 흘리며 수업을 끝내고 나오려는데 꼬마 아이 두 명이 화실언니와 나 에게 자신들이 만든 에코백을 선물로 주었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가방을 선물받은 것이다. 명품도 아니고 그렇다고 디자인이 예쁜 가방도 아니지 만 아이들의 마음이 담긴 값을 매길 수 없는 가방을 받으니 기분이 날아 갈 듯이 좋았다. 아이들이 우리에게 주는 마음이 크다는 것을 이 수업을 통해 새삼 느낄 수 있었다. 에코백 수업은 우리가 했던 두 번째 수업이었 는데 이 수업이후로 아이들을 대하는 태도가 좀 더 적극적으로 변했던 것 같다. 아이들이 주는 마음에 대해 보답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 다. 진심으로 아이들에게 다가갈수록 아이들도 나에게 점점 더 가까이 다 가오는 기분이 들어 매우 기뻤다. 184 우리가 한 활동 중에 또 다른 하나는 벽화 작업이었다. 사실 이번 워크캠 프에서 가장 비중이 높았던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아침에 눈뜨면서 바 로 시작한 일이자 워크캠프를 마무리 짓는 날까지 손에서 놓지 않았던 것 이 벽화작업이었다. 우리보다 앞서 다녀간 영남대 봉사자들이 그려놓은 것보다 훨씬 더 예쁘고 깔끔하게 그리고 싶다는 욕심에 더 열심히 했던 것 같기도 하다. 우리가 맡아서 그림을 그려야 하는 벽은 총 6개였다. 처음 도착한 날, 그 리고 캠프에 머무는 동안 필요한 물품 구입을 위해 장본 날, 토요일, 일요 일을 제외하고서 우리가 벽화작업을 할 수 있는 것은 총 8일이었다. 6개 의 벽을 모두 마무리 짓기 위해서는 거의 하루에 하나의 벽을 완성해 나 가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었다. 벽화 작업에 착수 하기 시작한 첫날부터 우리의 움직임은 분주했다. 우선 은 밑그림팀, 채색팀으로 나누어서 활동했다. 벽화 총괄을 맡은 강은이의

186 지시아래 각자 붓을 하나씩 들고 부지런히 색칠해나갔다. 그래서 굉장히 열 심히 했던 벽화작업임에도 불구하고 작업하는 동안 찍은 사진이 얼마 없다. 이렇게 아쉬울 줄 알았다면 부지런히 사진도 많이 찍어놓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우리가 가장 많은 시간을 투자한 작업이어서 그런지 가장 애착이 갔다. 벽화작업을 할 때면 다들 말없이 벽에 붙어서 색칠해 나가기 바빴다. 다들 말 없이 각자의 역할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니 정말 보기 좋았다. 한 두명 쯤은 꾀도 부리고 하기 싫다고 도망가고 안 보이는 사람도 있을 법 한데 우리 팀은 그런 사람 한명도 없이 각자 자신의 위치에서 묵묵히 일했기 때문에 큰 탈 없이 잘 마무리 할 수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벽을 하나씩 마무리 해 나갈 때마다 센터 선생님들이 해주시던 칭찬이 생각 난다. 전에 왔던 팀보다 훨씬 잘 그렸다고 많은 칭찬과 격려를 해 주셨다. 그 격려에 더 힘입어 열심히 했던 것 같다. 벽화 그림에 우리 학교 이름과 팀원 들의 이름까지 새기고 모두 완성한 것을 보니 매우 뿌듯했다. 우리들이 벽화 작업을 완성한 교실로 수업을 들어간 적도 있었는데 아이들이 좋아하는 모습 을 보니 기분이 좋았다. 워크캠프 기간 동안 가장 잊지 못할 것은 사람들과의 소중한 인연이다. 베트 남에서의 14일 워크캠프 동안 우리를 매일같이 찾아와주고 우리와 함께 있는 시간을 매우 좋아하고, 우리에게 정말 큰 사랑을 주었던 고등학생들이 있었 다. 한국의 문화를 좋아하고 한국을 좋아하는 아이들이어서 그랬는지 우리와 보내는 시간을 굉장히 좋아하는 듯했다. 린, 징, 유연, 뚜엣, 타어, 안. 이 여섯 명의 이름은 정말 잊지 못할 것이다. 우리가 벽화봉사를 하고 있으면 음료수와 간식거리를 사와서 우리의 입 속에 넣어주었다. 베트남 사람들이 즐겨먹는 간식거리들을 거의 이 아이들을 통해 서 접해 볼 수 있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하루 일과가 끝나고 저 녁 식사 이후에 이 아이들과 함께 한 일들은 정말 잊을 수가 없다. 하루는 아 이들과 함께 노래방에 가서 놀았는데 한국 노래가 있을 줄 알았는데 한국 노 래가 없어서 팝송만 계속 부르고, 우리가 알고 있는 베트남 노래인 사이곤 뎁 람 과 뉴코바코~ 노래만 부르다 온 기억이 난다. 한국 노래는 없었지만 우리가 부를 수 있는 노래 범위 안에서 즐거운 추억을 남기고 왔다고 생각한 다. 주말에 고등학생 아이들과 스포츠 경기를 가졌다. 남자들은 축구 경기를 하 고 여자들은 배구와 피구를 했다. 사실 주 경기는 남자들의 축구경기였다. 여 자들은 남자들의 축구 전반전과 후반전 사이에 정말 친선으로 간소하게 배구 와 피구를 했다. 인원이 많지 않아서 게임이 금방 끝난 것이 아쉬웠지만 배구 를 제대로 배워 볼 수 있는 기회가 되어서 좋았다. 스포츠 경기가 끝나고 난 다음에는 함께 저녁식사를 하고 밀크티를 마실 수 있는 카페에 갔다. 그 카페 에서는 한국 가요들이 흘러 나오고 있었다. 사실 가요로 댄스 준비를 하면서

187 187 베트남으로는 우리나라 노래가 좀 더 늦게 전파될 것이니 조금 지난 노래 로 준비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내가 알지도 못하는 한국 신곡들이 그 카페에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정말 매체 의 발달이 엄청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외에도 아이들과 함께 한 일들 은 매우 많다. 발렌타인 데이 때에는 아이들이 초콜릿을 만들어서 우리를 찾아오기도 했다. 내 영어 이름인 MEI를 하나하나 따서 만들어 준 것이 너무나도 감동이었다. 186 돌이켜 보면 이 외에도 많은 사소한 일들이 우리에게 있었고 그 일들이 우리에게 소소한 웃음과 행복을 안겨주었다. 해외 봉사를 간다고 해서 정 말 사람들과의 교류를 가장 걱정하고 떠났었지만 오히려 웃는 얼굴로 먼 저 다가 와준 사람들 덕분에 의사소통이나 교류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다. 정과 사랑을 듬뿍 주고 받았던 봉사활동이었다. 다들 봉사를 다녀와서 힘 들지 않냐고 나에게 물어봤지만 나는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힘이 든 것 을 떠나서 얻은 것이 훨씬 많았던 시간이었다고 말이다. 그곳에서 함께한 우리 팀원들, 그 팀원들과의 팀워크, 그리고 그곳에서 만난 수많은 인연 들. 이 모든 것이 금방 잊혀질까 두렵지만 마음 한켠에 그 언제나 남아있 을 것이라 믿는다.

188 5. 인도 "멋진 아이들과 + α 11명" 인도_곽다영 FSL-INDIA 영남대학교 해자봉 이후, 나는 분명 바뀐 것 같다. 내 전반적인 생활에 영향을 미 쳤고, 계속해서 나를 자극해 주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고마웠고, 고맙 고, 미리 고마워하고 있다. 먼저, 아이들에게 너무 고맙다는 말을 해주고 싶다. 처음 아이들을 위 한 교육 프로그램을 구상할 때, 우리가 만날 아이들이 어떤 아이들일 까 생각해볼 때, 우리는 아이들의 학습 수준, 연령대, 인원 수, 아이들 이 다니는 학교의 평수, 교실 수 등 수치로만 그들을 생각하려 했다. 그래서 그에 맞춰 프로그램을 준비했고. 그러나 학교에 첫 발을 디뎠 을 때, 그 어떤 한국 운동장보다 작지만, 시설이 부족하지만, 그 어떤 운동장들보다 멋지게 뛰어놀 수 있는 자유로운 놀이터에서 우리를 반 기는 아이들은 계산적으로 수치적으로 그들을 판단하려 했던 우리들 의 태도를 무색하게 했다. 입국 신청서 입국 목적란에서는 아무렇지 않게 volunteer'에 체크했었지만, 출국 때 인도 입국 목적이 무엇이 었냐는 물음에 나는 체크란을 비울 수 밖에 없었다. 봉사라는 단어가 부끄럽게 나는 그들에게 배운 게 더 많고 나와 함께해줘서 오히려 내 가 그들보다 더 기뻤다. 기쁨의 정도를 저울로 잴 순 없지만 아이들과 있을 때, 내 상태는 최고였으니까. 생각해보면 아이들은 처음부터 끝 까지 우리들을 감동시켰다. 처음 우리 팀원 한 명 한 명씩 열려 있는 나지막한 교문을 입장했을 때, 하늘색 교복을 입고 우리를 향해 소리 지르던 모습, 정작 얼굴을 맞대니 부끄러워하던 모습, 사복 입고 등교 하는 날이면 자기 옷에 대해 평해달라던 모습, 절대 우리가 주는 것만 받지 않던 예의바른 모습, 하교할 때면 아쉬워 발걸음을 자주 돌리곤 했던 모습, 자기들과 같은 모습을 하고 비슷한 행동을 하면 좋아해주 던 모습, 헤어지는 날엔 눈물을 보이고 어른이 되면 한국에 오겠다고 약속하던 모습, 그리고 지금, 나는 해자봉 활동이 끝났구나 라고 생 각할 뻔한 이 시점, 마지막 날 손에 받아 적어간 내 휴대폰 번호를 기 억해 전화하는 아이들의 모습까지. 그들은 끝까지 우리를 감동시키고 있다. 그래서 나는 몇 년이 흘러, 지나가는 약속 아닌 약속들을 그들 이 잊고 있다면, 이번엔 내가 지켜나가 그들에게 감동을 주고 싶다. 그리고 언제나와 같이 팀원들과 선생님께 감사하다. 생각없이 철없 이 어떤 무언가에 늘 느낌없이 흥미없이 지내던 나를 일깨워주고, 내

189 189 가 잘못됐다는 걸 스스로 깨닫게 해 준 이 사람들은 정말이지 나에겐 그 어떤 위인들보다 멋있는 사람들이다. 어찌보면 아직 인생의 절반도 채 살 지 않은 20대, 30대 구성원임에도 불구하고, 한 분 한 분 모두 출중한 실 력과 깊은 생각을 가지고 계시고, 그것은 당신들이 굳이 말하지 않아도 언제나 은연중에 뿜어져 나오고 있었다. 그 향기에 그 아우라에 나의 초 라함을 느꼈고, 그 향기에 그 아우라에 나도 일부분이 되고 싶어 나 스스 로 각성시키려 더욱 노력했고, 지금쯤 나도 그 향기, 그 아우라에 조금이 나마 다가갔으면 한다. 어린 친구들의 생각을 이해하고 배려하려고 노력 하시던 멋진 분도, 자기 자신의 즐거움을 마다한 채 한 명 한 명의 고민 을 다 들어주고 자기 일처럼 여기시고 한동안 머리가 아프셨을 멋진 분 도, 굳이 말하지 않아도 타인의 기분과 상황을 깨닫고 그에 대한 배려와 보살핌으로 일관하시던 멋진 분도, 충분히 말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는데 도 충분히 말할 것이 더 많은 분이었음에도 단 한 번도 자신의 고충을 드 러내지 않으시고 지금까지도 언제나 괜찮다고 말씀하시던 멋진 분도, 늦 은 합류를 자신의 잘못이라고 생각하시고 타 팀원들의 진행되는 활동에 누가 될까 하루하루 스스로를 더욱 채찍질하시던 멋진 분도, 상황을 나 쁘게 만들지 않으려고 그 어떤 상황에서도 항상 자기 자신을 낮추고 다른 사람 밑에서 받아주고 웃어주시는 멋진 분도, 묵묵하지만 간혹 내뱉는 그 말 한마디 한마디마다 농도 짙은 말들로 남몰래 감동하고 있는 내 모습을 확인하게 하던 멋진 분도, 자기보다 나이가 어린 친구들도 나이가 많은 분들도 모두 챙기시고 보살피시던 멋진 분도, 자신의 아픈 몸이 타 팀원 들에게 누가 될까 걱정 되 마음도 아프셨을 하지만 최선을 다해주신 멋진 분도, 나와 나이는 같지만 나와는 달리 깊은 생각을 가진 멋진 분도, 그럴 리 없을 테지만 잊고 싶지 않고, 정말 좋아한다. 당신들보다 부족한 나를 이끌고 3개월동안 함께해 주셔서 다시 한번 정말 마음 깊이 감사한다. 188 해자봉 합격 명단을 확인하고 기뻐하고 팀원들과의 첫만남에 설레하고 팀 원들과 함께 준비하는 시간동안 진실된 재미를 느끼고 인도에서 아이들과 또는 팀원들과 생활하며 사람이 이렇게 아름답고 예쁘게 살 수도 있구나 하는 것을 느꼈다. 그래서 나는 행복이라는 단어로 이번 해외자원봉사 22 기 인도팀을 제 기억 속에 남기고 싶고, 계속해서 그렇게 기억 속에 기록 하고 싶다.

190 " 방갈로르에서 지낸 15일" 인도_정지혜 홍익대학교 항상 지내던 곳을 떠나 새로운 환경에서 지내면서 현지인들과 소통하 는 일은 정말 즐겁다. 이번 워크캠프도 가까이서 순수하고 맑은 아이 들과 함께 활동할 수 있어 너무도 즐거웠다. 날씨도 다르고, 길거리 풍경도 정말 다르고, 선호하는 방향, 옷가지, 몸으로 표현하는 언어까 지 모두 색다르기 때문에 하루하루 매 시간이 즐겁고 재미있었다. 활 동 할 때마다 흥미를 가지고 열심히 따라와 준 아이들이 정말 예뻤고 고마웠다. 지내면서 어려웠던 점은 별로 없었던 것 같다. 숙소도 생각보다 지낼 만 했고, 음식도 정말 잘 맞았다. 단지 불편한 점이 있다면, 물이 맞지 않아서 잘못 마시면 배탈이 났기 때문에 신경 써야 했던 것, 햇빛이 오후쯤 강해서 벽화 칠할 때 금방 힘들어 진 점 정도 밖에 없던 것 같 다. 모두가 팀원들을 위해 항상 안전을 걱정하고 아플 때 특히 극진히 돌봐준 현지 캠프리더와 도우미리더 둘의 도움이 가장 컸던 것 같다. 욕심이 많았기 때문에 아쉬움도 많이 남는다. 교육활동을 미리 좀 더 많이 준비해 갔다면 좋았을 것 같다. 점심시간에 그냥 개인들이 놀기 보다 계획해간 놀이를 학생 모두와 우리 모두 다 같이 할 수 있도록 했으면 더 좋았을 것 같다. 마지막 날 함께 장기자랑을 할 때 모두가 할 수 있는 코너도 준비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 가장 아쉬운 점은 학교 벽화를 하면서 그림 안에 과녁 그려 넣어주기, 농구대에 실제 농구 링을 달아주어서 다양한 놀이감으로 활용하도록

191 191 계획한 것이 제대로 이루어 지지 못한 것이다. 흙에서 항상 뛰어 다니며 놀기만 하던 아이들을 보니 좀 더 많은 종류의 놀이를 오래 제공하고 싶 었다. 또 안타까웠던 것은 대부분의 아이들이 바닥에서 공부를 하는 것이 었는데, 책상이 너무 비싸서 구입하지 않고 있었다. 지원받은 공금을 정 작 필요한 시설 등에 투자하지 못하여 너무 아쉬웠다. 190 다음에도 또 훌쩍 떠나서 나의 작은 활동이 의미가 되는 기회가 생긴다면 주저 없이 잡을 생각이다. 이번 인도에서 근 보름간의 활동은 영원히 잊 을 수 없을 것 같다. 꼭 나중에 기회가 된다면 혼자서라도 그 학교에 들러 보고 싶다. 따뜻하게 맞아주던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벌써 정말 그립다.

192 6. 인도네시아 " 인도네시아에서의 무더웠던 어느 2월..." 인도네시아_김밝은 경희대학교 2012/2/2~2012/2/ 년 2월 2일, 처음 인도네시아 Semarang 공항에 도착했을 때 무더운 공기에 콱 숨이 막혔던 기분을 아직도 나는 잊지 못한다. 작 은 공항 그리고 자동차와 오토바이가 뒤 섞인 거리, 뜨거운 여름 햇 볕은 13일 내내 우리 워크캠프 팀원들과 함께였다. 우리 경희대학 교 인도네시아팀은 여자1명 남자2명 총 13명으로 인도네시아 현지 대학생 5명, 프랑스 자원봉사자 1명과 함께 Semarang의 시골 동네 Mangkang의 Volunteer house에서 함께 생활했다. 인도네시아 사람들은 무슬림이란 종교를 가지고 있어서 왠지 보수적 일 것 같다는 생각과 다르게 오픈마인드를 가지고 한국문화, 음식, 드 라마, 음악등에 많은 관심을 보여 금방 친해질 수 있었다. 사실 Volunteer house의 시설은 그리 좋지 않았다. 방이 3개나 되고 화장실과 샤워실이 따로 있긴 했지만 재래식 변기와 흙탕물 샤워는 낯 설기만 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였고 돌아가는 날 쯤에는 흙탕물 양 치를 하는 여유까지 부릴 수 있었다. 내가 제일 두려웠던 것은 엄지 손가락만한 인도네시아 바퀴벌레였는데 흙벽이여서 발견하기 쉽지도 않았지만 그 크기는 우리 팀원들을 항상 공포에 떨게 하곤 했다. 13일 내내 많은 활동들이 진행되었는데 우리에게 주어진 주 활동은 Mangrove(뿌리에 미생물들이 플라스틱 쓰레기들을 쉽게 분해시키는 데 도움을 주는 나무)를 심는 것과 학교 방문이었다. Mangkang 해변 에는 마을에서 떠내려 온 쓰레기들이 엄청났다. 나무를 심기 전에 쓰 레기 수거를 했지만 그 많은 지역을 우리 13명이 청소하기에는 역부 족 이였다. 이틀에 걸쳐 6000그루의 Mangrove 나무를 심고 먹었던 점심식사를 나는 평생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보람차게 일하고 난 뒤 먹은 밥 이여서 그런지 꿀맛 그 이상이었다. 우리는 캠프기간에 초등학교, 중학교, 대학교 총 3군데의 학교방문 과 고아원 1곳을 방문했다. 방문 때 마다 한국의 지도, 태극기, 한복 을 가지고 다니며 홍보를 하고 한국해외문화홍보원에서 받아온 한국 홍보 티셔츠와 가방을 배포했다. 또 Wonder girls의 노래를 리믹스해 서 댄스공연도 했는데 많은 사람들이 노래를 알고 춤을 따라하는 것을 보고 인도네시아 내 한류의 열기를 느낄 수 있었다. 댄스 공연이 끝난

193 193 뒤에는 항상 몇 십장의 기념사진촬영이 이루어졌고 심지어는 사인을 받아 가는 사람들도 있었다. 우리가 만난 인도네시아 아이들은 순수하면서도 때로는 어른스러웠으며 얼굴에는 장난 끼 가득 찬 미소를 띠고 우리를 잘 따르곤 했다. 서투른 인도네시아어로 아이들과 대화하고 게임도 하며 정 이 많이 들기도 했다. 192 가끔은 살다보니 지독한 시골 Mangkang이 살만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좌식이지만 24시간 PC방에서 수강신청도 성공할 수 있었고 어느 곳에서 나 언제든 식당에 갈 수도 있었다. 인도네시아 음식이 맞지 않아 고생하는 팀원들도 있었지만 나는 개인적 으로 음식이 너무 잘 맞아 인도네시아를 떠날 때 라면과 과자를 한보따리 싸왔었다. 무더운 여름 날씨에도 불구하고 땀날정도로 매운 삼바소스와 튀긴 음식들 그리고 뜨거운 차들은 마시는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처음엔 낯설게 도 느껴졌지만 어디를 가든 맛있는 음식들과 다양한 음료들이 가 득해 식사시간에는 내내 행복했다. Volunteer house 에서는 cooking/washing/cleaning team 세 팀으로 나누어 역할을 매일 분담했고 주로 인도네시아 음식을 요리했다. 한국음 식으로는 호떡, 불고기, 된장찌개, 부침개를 해 마을주민들과 함께 나누 어 먹었다. 인도네시아는 생각보다 빈부격차가 굉장히 큰 나라였다. 개인 기사와 가정부를 가지고 으리으리한 2층 집에서 사는 인도네시아 워크캠 프 팀원도 있었지만 Mangkang 지역에는 신발도 안 신고 돌아다니고 허 름한 집에서 살아가면서도 우리에게 밝고 행복한 미소를 보여주는 아이들 이 가득 찼다. 마지막으로 한국으로 돌아가던 날 Semarang 공항에서는 팀원들의 눈물 이 터졌다. 13일동안 정들었던 Mangkang, 이웃주민들, 친동생 같은 아 이들 그리고 진짜 가까운 친구가 되어버린 인도네시아 친구들을 떠날려 하니 마음 한구석이 아련하면서도 언젠가 다시 한 번 꼭 인도네시아에 와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인도네시아는 여러 개의 섬만큼이나 여러 색깔을 가지고 있는 나라이다. 인도네시아의 환경문제에 작게나마 워크캠퍼로써 도움을 준 기억과 한국 을 알림으로써 느낀 보람은 영원히 내 가슴속에 남을 것이다. 이후에도 많은 워크캠프와 다양한 국제적 도움으로 인도네시아가 하루 빨리 쓰레기 처리문제를 딛고 올라 깨끗한 환경국가로 거듭나기를 바란다.

194 "Memory in Indonesia" 인도네시아_지성근 영남대학교 IIWC/ 인도네시아 해외자원활동을 가기 전의 나는 가벼운 봉사나 휴식을 마 음속으로 바라고 출발했었던 부끄러웠던 때가 기억이 난다. 아무리 힘 들어도 내가 버틸수 있겠지라는 아주 방만한 생각으로 나를 너무나 믿 고 여행을 출발했었다. 하지만 워크캠프가 있는 인도네시아 스마랑에 도착하기도 전에 수많은 경유를 거친 jet leg로 인해서 몸과 마음이 벌 써 녹초가 되어버렸고, 워크캠프에 도착하고 나서 현지의 열악한 환경 에 너무나 충격을 먹었었다. 닭똥이 가득한 땅바닥을 맨발로 걸어나갔 다가 맨발로 들어오는 소위 맨발로 생활하는 비위생적인 환경, 0.5 평 도 안되는 물받이 샤워칸에 재래식 변기, 왼손으로 볼일을 보고 해결 하는 사람들, 향신료가 너무나 쎄고 한국사람들이 적응하기 힘든 역한 냄새들은 안일하게 생각했던 나의 태도를 바꿔놓기엔 충분했다. 우리가 도착한 곳은 스마랑의 한 고아원인데 여기서 아이들과 같이 생 활을 하며 인근학교 두군데와 여기서 교육봉사를 하는 것이었다. 고아 원과 학교에서 한국의 전통문화와 전통놀이, 한국어 등을 가르치고 싶 어서 많은 교육 재료들을 사갔지만, 현지와의 커뮤니케이션이 미흡하 여, 교육봉사를 진행하는데는 많은 차이점과 어려움이 있어서 무용지 물이 된 것들이 여러 가지가 있었다. 하지만 그런것에 굴하지 않고 우 리는 학교에 가서 태극기의 모양, K-pop, 공놀이, 영어교육 등 여러 가지를 실시해서 아이들과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하지만 2주라는 어떻게 보면 짧다면 짧은 시간, 길다면 긴 시간인데, 2주동안 생활하면서 더운 날씨와 열악한 환경에서 너무나 힘이 들어 주저앉은 적이 한 두번이 아니었다. 하지만 거기서 장기적으로 자원봉 사를 하는 현지인과 프랑스 독일인 등 우리와 동갑인 사람들이 생활하 는 것을 보고 너무나 놀랍고 경이로웠다. 어떻게 누가 이런 젊은날을 보상해 주는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한결같이 즐거워할 수 있을까?라 는 생각이 들면서 정말 주도적인 삶을 사는 그들이 부럽기도하고 존경 스럽기도 했었다. 그리고 덧붙여서 이슬람문화는 정말로 신기한 것이 많다. 항상 모든 것이 신의 뜻이라 생각하며, 맹목적인 믿음이 있다고 생각이 되었다. 도시에서 많이 멀어지면 멀어질 수록 그 지역의 종교나 문화는 매우 보수적이며, 도시와는 다르게 어떠한 경우라도 기도시간을 간소화시 킨다거나 생략하는 것을 볼 수는 없었다. 하루에 기도를 다섯 번을 하 는데 새벽 3시에 기도를 할때에는 정말이지 자는 도중에도 기도소리 가 너무 시끄러워서 잠에서 깬적이 한두번이 아니었었던걸로 기억한 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은 힘들어하는 내색조차 없이 그들은 묵묵히 수행하였던 모습이 놀라웠다. 이러한 것을 보면 평소에 아침잠이 많은 나로서는 꼭두새벽에 경건한 마음으로 몸을 씻고 기도를 한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기도실이나 다른 여러 가지 환경들

195 195 이 너무나 열악해서 어린 애들이 생활하기엔 여러 가지 힘든점들이 많이 따랐었다. 애들 먹거리의 위생도 좋지 않고, 어린애들이라서 위생에 대한 문제점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며 지내지 않은 것 같아서 너무나 아쉬웠 다. 이러한 여러 가지 열악한 환경에서 너무나 많은 지원들이 필요하다고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떠한 많은 지원이 없어서 아쉽기도 하였다. 194 여차여차 봉사활동을 끝내고 한국에 돌아와서는 부모님과 우리가족께 너 무나 잘하고 있는 것 같다. 어떻게 보면 우리 부모님은 나를 낳으시고 여 태껏 바라는 것 하나 없이 봉사를 하고 계시는데, 먼 타국까지가서 봉사 활동을 하는것 보면 왜 가장 나를 아껴주고 사랑해주신 나의 가장 주변 분들인 가족들에게 왜이렇게 소홀했나 생각이 들기도 했다. 앞으로도 가족들에게 좋은 아들 좋은 동생 좋은 구성원이 되도록 최선을 다하겠고, 2주간의 봉사활동은 나에게 많은 영감과 좋은 추억을 안겨주었 던 것 같았다. 기회가 된다면 한번 더 찾아가서 봉사활동을 하고 싶다. 같 이 2주간 생활한 조원들과 인솔자 계장님께 너무나 감사드린다.

196 7. 태국 "Volunteer Is Passion과 함께한 2주간의 태국 봉사활동" 태국_김다솜 목포대학교 VIP 팀은 태국 봉사활동을 위해 한달여 정도 전부터 자주 만남을 갖 았다. 여러 가지 프로그램을 만들고 준비하며 팀원들 간에도 많이 가 까워지는 시간이었다. 위생교육, 환경교육, 문화교류 등 두명씩 짝을 지어 6~7가지 프로그램을 준비하고 단원 전체가 한류춤을 배우고 익 히는데 여념이 없었다. 목포와 광주를 오가며 회의를 하던 정신없는 준비기간이 다 가고 버스에 오르는 당일에는 해외로 떠난다는 흥분과 가서 만나게 될 아이들에 대한 기대로 잠도 이루지 못할 지경이었다. 인천공항에서부터 일은 순탄치 못했다. 우리가 준비한 프로그램이 많 다 보니 준비물이 어마어마했고 수화물 규정치를 넘겨 생긴 예상치 못 한 비용발생과 15명이라는 단체의 어수선함, 13KG 정도 나가는 개인 짐을 매고 비행기에 탐, 우여곡절 끝에 비행기를 탔지만 방콕에 들어 서는 순간 습한 공기와 공항 에어컨으로는 해결해 주지 못하는 더위가 모두를 피곤함에서 짜증으로 변하게 하는 등 지금 생각해도 머리가 어 지러울 정도로 시작부터 단체 생활의 불편함이 속속 나오기 시작했다. 활동을 시작도 하기 전이였지만 모두가 단체생활에서의 인내와 배려 의 필요성을 크게 느끼며 앞으로를 걱정하기 시작했다. 다음날 우리는 타이항공을 타고 핫야이로 향했다. 순간 방콕보다 더 더운 핫야이에 깜짝 놀랐다. 우리를 데릴러 온 현지 리더단 덕분에 미 니벤을 타고 바로 베이스캠프에 도달 할 수 있었다. 미니벤 안에서도 우리의 프로그램 준비는 계속되었다. 우리를 소개하는 PPT 와 사진 준비하기, 영어로 자기소개 준비하기 등 모두 열의에 차 막바지 준비 에 박차를 가하였다.

197 197 도착하자 마자 15명은 모두 놀란 표정을 감출 수 없었다. 우리를 제외한 예상치 못한 다양한 외국 자원봉사자들, 그들과 함께 사용하는 텐트, 휴 지와 쓰레기통 대신 물이 있는 화장실, 빨래를 하는 우물, 덜컹거리는 나 무바닥,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은 도둑고양이들, 모기, 젓가락도 없고 뜨 거운 기름음식 뿐인 점심, 빠른 영어대화 등 당황스럽고 당장 돌아가자는 사람이 있으면 동행할 마음이 생길 정도로 앞일이 막막했다. 어리둥절하 였지만 자원봉사자 외국친구들과 친해지는 것을 첫 번째 일로 생각하였 다. 빠르게 친해지기 위한 각국의 노력으로 자기나라의 게임을 소개해주 며 중국, 타이완, 독일, 일본, 프랑스, 태국 자원봉사자들과의 생활이 시 작되었다. 196 첫날은 KOKPAYOM에서 진행되는 봉사활동을 소개받는 워크숍이 진행되 었다. 다양한 생활 태국어를 배우고앞으로의 진행상황에 대한 회의를 하 였다. 다음날부터 우리는 콩틀렘 아카데미를 건설하는 임무를 안고 매일 밥과 물을 들고 배를타서 아카데미 건설현장으로 이동했다. 페인팅, 잡초 뽑기, 나무 껍질 벗기기, 각각 조를 나누어 진행하고 모두가 힘을 모아 나 무 뿌리 뽑기, 시멘트 나르기, 우물물 기르기 등 고된 일들의 연속이었다. 아이들과 함께할 많은 프로그램을 준비해온 우리는 아이들은 보이지도 않 고 삽으로 땅을 파고 있는 현실에 불만이 터져 나왔다. 게다가 덥지만 시 원하지 않은 물, 뜨거운 밥, 불개미와의 전쟁, 모두가 탄산음료와 한국음 식을 주문처럼 외우며 괴로워했다. 이 모든 불만은 지역주민과 함께하는 홈스테이에서 조금 누그러지고 나름 의 재미를 찾았던 것 같다. 말은 통하지 않지만 많이 먹이고 싶어하는, 편 하게 재워주려는 아주머니와 아저씨의 호의는 정말 너무나 감사했다. 홈 스테이를 마치고 베이스캠프로 돌아오면 너나 할 것 없이 자신의 집, 부 모님을 자랑 하는데 여념이 없을 정도였다. 그렇게 마을 사람들과 친해지 고 첫 주말, 우리는 마을 운동회를 열었다. 각국의 스포츠를 모두 가미한 여러 가지 시합이 진행되었다. 그중에는 닭싸움과 줄다리기, 2인 3각 달 리기등 주변의 여건을 알뜰하게 이용한 재미난 시간이었다. 운동회가 진 행되는 동안 우리는 마을 아이들이 때묻지 않은 순수함과 어리지만 청년 들처럼 적극적이고 열심히 일을 하는 모습에 놀라고 이때까지 힘들다며 불평하던 우리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우리 또한 그날은 우리를 반겨주고 좋아해주는 마을 아이들 덕분에 정신없이 놀고 즐길 수 있었던 것 같다. 이런 다양한 교류가 있고 나서는 모든 고된 일도 여기서 공부하게 될 마 을 아이들을 생각하며 재미나게 할 수 있었던 것 같다. 화장실의 페인팅 도 한껏 밝아졌고 왠만한 일에는 힘든 기색 없이 모두 열심히 였다점점 건물의 모습은 완성되어 갔고 우리는 마지막으로 주변 정리를 끝으로 2주 동안 함께 만든 콩틀렘아카데미 완성작을 볼 수 있었다. 힘들고 고되었지 만 우리가 중도 포기 없이 완성을 시켜, 보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 큰 보

198 람을 느꼈다. 또한 지역주민들과 아이들이 좋아하던 모습은 지금도 잊을 수 가 없다. 일을 마친 저녁에는 주변 마을의 야시장을 들리거나 길에 누워 밤하늘을 보 는 것이 큰 재밋거리였다. 야시장은 주변에 마트가 없어 불편해 하는 우리를 위한 지역 리더단의 배려였다. 우리는 다들 맛있는 것도 먹고 바지를 사입으 며 태국여성처럼 하고 다니는 등 점점 생활에 적응해 가기 시작하였다. 덕분 에 불편함보다는 재미를 느끼고 현지생활을 즐기고 있었던 것 같다. 밤하늘 의 별들을 볼 때면 하루의 피로가 싹 풀리는 듯 하였고 좀 부족하고 힘들게 살지만 그곳이 행복한, 살고 싶은 마을임을 매 순간 느꼈다. 또한 밤하늘의 쏱아질 것만 같은 별들은 행여 우리 때문에 환경오염 등의 피해가 갈까 쓰레 기나 주변정리를 스스로 하게 만들었다. 매일 밤 우리는 다양한 국적을 가진 자원봉사자들 덕분에 댄스를 배우고, 짧은 동요를 따라 부르며, 서로의 나라 에 관심을 보였고 한국에서 준비해간 영화를 보고, 함께 라면과 떡볶이 같은 야식을 즐기며 나날이 친해지고 가까워지며 마지막 날이 오는 것은 안타까워 했다. 태국현지인과 만나기도 급급했던 처음에는 자원봉사자 외국 친구들은 그저 불편한 존재였지만, 점점 가장 헤어지기 싫고 그리운 친구들이 되어버 린 것이다. 기어코 긴 시간은 지나가고 마지막 날이 다가왔다. 마지막 날 콩틀렘 아카데 미건설과 마을 쓰레기 줍기 까지 끝낸 우리는 CULTURE DAY를 진행했다. 지역주민과 아이들이 모두 모여 저녁을 먹는 시간으로 각국의 음식, 디저트, 의상을 보는 시간이었다. 큰 부피를 차지해서 힘들었던 한복이 빛을 발하는 순간이었다. 모두가 폴라로이드 사진을 찍으며 헤어지는 아쉬움을 달랬고 2 주간의 사진을 보면서 추억을 되새기는 시간을 갖았다. 오늘까지도 이때까지의 사진을 보며 2주간을 되돌아본다. 비치에 갔던 일,

199 199 멋모르고 야시장에서 왕창돈을 쓴일, 모기와 개미밥이 된 다리. 모두가 추억이 되어 지금도 메일이나 SNS로 태국의 친구들을 찾거나 짧은 영어 로 대화를 이어나가며 15명 모두가 태국에서의 그리움을 표현하고 있다. 198 태국 단체 봉사활동을 하면서 15명이라는 단체가 한번씩만 불만을 해도 너무나 크게 들려왔다. 때문에 우리를 배려해주려 노력한 현지 리더단에 게 정말 미안함과 고마움을 느낀다. 2주간의 힘들었지만 값진 시간들은 우리 15명 모두에게도 많은 것을 가르쳐 주었다. 한국에서의 일생생활들 의 소중함과 고마움, 그리고 얼마나 부족함 없이 편하게 누리고 살았는지 를 서로가 일하는 내내 계속 언급하면서 많이 느꼈다. 또한 낯선 타지에서 많이 불편했지만 싸움한번 없이 무사히 활동을 마치 고 온 15명 모두에게 박수를 보낸다. 처음엔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라는 생각으로 시작하였지만 내가 느끼고 배우고 온 것이 너무도 많아 도 움을 주러 갔다가, 오히려 짐만 되지 않았나 생각하면서 열심히 하지 않 은 순간순간을 떠올리고 반성하고 있는 나를 보면, 지금 이 순간에도 내 가 태국 봉사 덕분에 많이 배웠고 성숙했음을 느낀다.

200 8. 필리핀 "무더웠던 아니.. 따스했던 필리핀" 필리핀_김용우 영남대학교 ~ 오랜 기간 사회생활을 하면서 이기적인 면에 익숙해져 있고 스펙에만 연연하던 나에게 이번 봉사는 내 자신을 돌아볼 수 있는 큰 계기이자 인생의 터닝포인트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지금 봉사활동을 마치고 일상으로 돌아온 나는 크게 변화된 모습은 당 장 보이지 않지만 나의 생각과 이상이 달라졌으며 가치관이 바뀌었음 을 느끼었을 때 비로서 나의 관점이 바뀌게 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처음 도착한 필리핀 세부공항의 더운 공기는 내 목을 조르듯이 숨이 턱하니 막혔다. 이런 무더운 환경 속에서 봉사를 어떻게 할까 라는 생각이 내 머리를 스쳤다. 하지만 그것은 나의 잘못된 생각이었다라는 것을 나중에 깨달 았다. 열대지방의 특유의 야자수와 피부색이 다른 필리핀 사람들을 처음 보 았을 때를 나는 잊을 수 없다. 우리를 신기한 마냥 바라보는 내내 미소를 잊지 않았으며 장난을 치며 손을 내밀었다. 대한민국이라는 무한경쟁 시대를 사는 나로선 이러한 순수한 사람들 의 행동에 금방 경계를 풀고 미소가 번졌다. 좋은 첫인상을 기억하며 우리가 봉사할 학교로 향했다. 아기자기한 학교에는 자그마한 아이부터 청소년들이 우리를 반겼다. 그렇게 우리들의 공식적인 필리핀과의 첫 만남은 시작되었다. 정성껏 준비한 장기자랑과 열심히 그렸지만 어색한 태극기를 가지고 우리를 환영해 주었을 때 이곳 사람들은 정말로 우리를 원하고 진심으 로 대해 주는구나 것을 느꼈다. 누구를 만나는것에 진실성은참으로 중요하다. 이것은 곧 신뢰로 연결 되는데 나는 그 순간 이 곳 아이들에게 나의 사랑과 열정을 모두 드리겠다 라는 다짐을 마음속으로 했다.

201 201 그렇게 아이들과 하루하루 허물없이 지내며 마치 오래 지내온 친구처럼 장난도 치고 서로의 꿈에 대해 물었다. 200 아이들은 어딜가나 개구쟁이다. 하루는 또래들이서 심한 장난을 치다 넘 어져 머리에 피가 난 친구가 있었다. 내가 처음 목격을 하였는데 머리에 피나 나는 것을 보고 곧 심각성을 깨 달았고 무작정 달려가 그 친구의 이마를 옷으로 지혈을 시켰다. 마치 큰 우주 속에 작은 자석처럼 반사적이었다. 적당한 응급처치를 통해 그 친구 는 무사했다. 그 후로 그 친구와 더 가깝게 지내었는데 이런 작은 배려와 헌신이 그 나라의 언어보다 소중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마음과 마음이 통 하면 언어란 장벽을 허물어 버릴수 있다는 것 말이다. 이렇게 아이들 주민사람들 학교선생님외 관계자들과 정이 들어갈 때 쯤 우린 작별의 순간을 맞았다. 모든 아이들이 마중 나와주었고 따뜻한 눈물이 주위를 가득 메웠다. 얼마 나 아쉬웠던 순간인줄 모른다. 지금의 헤어짐이 나중에 만남이라고 나는 영어로 말했다. 아쉽지만 우린 각자 할 일이 있고 언젠간 다시 만나게 될 것 이라고 말이다. 약속은 신뢰이기에 작은 희망과 그때의 다 짐을 잊지 않으며 나는 지금 현재를 살아갈것이며 봉사를 통해 깨달았던 것을 마음에 새긴채 하루하루를 살아 갈 것이다. 무더웠던..아니 따스했던 필리핀

202 "내가 기억하는 CEBU" 필리핀_이시현 고구려대학교 처음 필리핀으로 해외봉사를 갈 생각을 없었다. 말도 안통하는 낯선 땅에 가서 내가 그 사람들과 의사소통을 잘 할수 있을지, 가면 적응을 잘 할수 있을지 많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다가 친구의 권유로 같이 해외봉사를 신청하여 결국에는 가게 되 었다. 가기 전에도 걱정 반, 설레임 반인 감정이 공존했다. 모르는 사 람들과 2주동안을 생활해야 돼서 걱정인 반면에 한국이 아닌 다른 나 라를 가 본다는 설레임이 있었다. 그리곤 거기서 생활해야 되기 때문 에 필요한 물품인 생필품과 식품들, 아이들과 같이 프로그램 활동을 해야 될 준비물 등을 팀을 나누어서 각자 준비하고, 사게 되었다. 모든 팀원들이 모여 회의를 갖고 거기서 각자의 의견을 모아 필요한 용품과 프로그램을 열심히 짯다. 그리고 마침내 필리핀 세부로 출국하였다. 처음으로 해외를 나가 본 것이어서 무척이나 설레었다. 그러나 배낭과 많은 짐들을 메고 들고가 고, 또 저녁비행기이고, 비행기도 많이 흔들려서 가는 과정에서 힘들 고 피곤했다. 그렇게 현지에 도착해보니 현지 관계자인 분들이 마중나 와 짐을 차에 싣고 우리 모두 팀원들도 차에 탔다. 그렇게 1시간 30분 정도 차는 달렸고, 새벽이라서 불이 켜진 건물들은 드문드문 있었고, 무엇인가 무서웠다. 그렇게 차는 달리고 마침내 우리가 생활하게 될 곳에 도착했다. 자연 과 집이 어울려져 있고, 학교가 가까이 있었으며, 농구장같은 운동장 도 있었고, 곳곳에 매점 같은 데가 있었다,

203 203 그렇게 시간이 가고 아침에 마을 주변을 구경하고 초등학교 6학년들이 환 영식을 해주었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있는 초등학교는 약 160명 정도 학생이 있는거 같았다. 아이들이 우리를 보고 신기하게 쳐다보고, 환영 식 해주려고 춤도 춰주고 해서 우리 팀원들도 처음에 어리둥절 하였지만 그 마음이 너무 고마웠다. 그리곤 우리가 해야 될 박물관 만드는 것과 아 이들과 함께 할수 있는 프로그램을 어떻게 진행되고, 몇요일날 하게 될지 논의하고 설명을 들었다. 그리곤 우리가 머문 곳에서 아침과 점심을 제공 해 주고, 저녁은 우리가 그분들에게 제공해주게 되었다. 202 세부도 우리와 같이 쌀밥을 먹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 쌀이랑은 쫌 다르 게 쌀이 하나하나 분리가 되어서 맛이 생소했다. 그리고 접시 하나에 모 든 음식을 조금씩 덜어먹는 것에서 생소하다고 많이 느꼈었다. 그리곤 세 부는 날씨가 덥고 습하다. 햇빛 쨍쨍 찌다가도 갑자기 소나기가 내린다. 그래서 빨래를 할 수 없었다, 또한 세탁기도 없긴 마찬가지였다. 문득 우리나라 50 60년 대 보는 거 같았다. 경제상황이라던가 사람들이 생활하는 방식에서 그 걸 찾아볼수 있었다. 또한 우리나라에 비하면 물가 가 굉장히 쌌다. 그래서 더 그런 생각이 드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우리가 지낸 지 3일 뒤에 지진이 발생하였다. 평소처럼 점심을 먹고 있는데 갑자기 테이블이 흔들려서 처음에는 누군가 가 장난을 치는 줄 알았다. 처음 미세한 진동이 점점 더 강도가 세지더니 천장에 있던 유리 들이 깨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어쩔줄 몰라서 우왕좌왕 하고 있는데, 현지인분들이 테이블 밑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해서 지진이 멈출 때 까지 들어가 있었다, 그러다가 조금 지진이 약해졌을 때 밖으로

204 대피하였다, 한국에서는 느껴볼 수 없는 새로운 경험이었다. 그런데 정말 지 진이란 건 무서웠다. 필리핀 다른 지역에는 지진의 피해가 엄청 커서 땅이 갈라지고 인명피해도 있고 하여서 우리가 있는 데까지 그 여파로 지진이 온것이라고 현지분들이 말을 해주셨다, 그렇게 지진이 끝난 줄 알고 다시 들어갔는데, 여진으로 미세 한 진동이 계속 느껴져서 더 무서웠다. 그렇게 몇일 더 지진이란 아이와 싸우 면서 지냈다. 그러다가 이제는 여진이 와도 적응되서 여진이 멈출때까지 밖 으로 나와 대피하였다. 그리곤 요일에 맞는 봉사활동을 꾸준히 활동하면서 지역민들과도 초등학교 아이들과도 친하게 되었다. 거기서는 모든 사람이 영어를 써서 처음에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하지 못 하니까 답답하였는데, 시간이 지나면서 핸드폰 사전으로 단어를 찾고 바디랭 귀지를 써가면서 의사소통이 잘 되었다. 그러면서 정말 영어의 소중함을 알 게 되었다. 시간이 안 갈 것 같았지만 11일이라는 시간은 정말 금방 갔다. 마지막 날 학 교에 가서 아이들과 인사를 한 후 우리들의 애장품을 자기가 좋아하는 아이 들에게 주고, 또 아이들은 자신들이 좋아했던 사람에게 편지를 써서 주었다. 정이 많던 아이들은 주면서 눈물바다가 되었다. 비록 긴 시간을 함께하지는 못하였지만, 순수했던 그 아이들의 마음이 내 마 음에 너무 와 닿았다. 그래서 나도 눈물이 났다. 또 우리가 머물렀던 집 가족 들과도 정이 너무 떠나는 날 인사를 하면서도 눈물이 났다. 만남이 있으면 이별도 있다라는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영어가 되지 않아 해 주지 못했다. 그렇게 비행기 타고 한국으로 입국했다. 그리고 새벽 1시에 서울에서 광주 가는 막차가 있어서 타고 내려와 광주첫차 고속버스를 타고 우리 집인 목포를 왔다. 막상 집에 도착하니 어색했다. 그리 고는 내가 갔다 왔다는게 꿈만 갔다는 생각도 들었다. 너무나 짧게 느껴져서 그런지는 몰라도.. 필리핀 세부에서는 한국에서는 느낄 수 없는 여유를 나는 느꼈었다. 그 사람들은 부지런하면서도 모든 일에 여유가 있고, 근심`걱정이 없어 보였다. 내가 한국 왔을 때 다시 느낀 것은 해외로 다시 나가고 싶다는 것이었다. 어떤 이유가 돼서든지 나는 여행을 해보거나 해외에서 한 번 살아보고 싶다 는 생각을 했었다. 전부터 한국이 아닌 나라에 가서 살거나 공부를 해보고 싶 다는 생각을 자주 했었다. 그러다가 이번 계기로 결심을 굳건히 하게 되었다.

205 지금 현재 한국에 있으면서 공부를 위해서든지, 아니면 내 자신을 위해서 해외로 나가 꿈을 펼치기로 마음을 정하고 준비 중이다. 어떤 결과를 낳 을지는 아무도 모를 이 시점에서 나는 무모한 도전을 해보려고 준비하고 있다.

206 2012 유네스코 국제자원활동 에세이집 이 책은 유네스코 한국위원회가 진행하는 '2012 국제자원활동'의 에세이집입니다. 펴낸곳 펴낸이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민동석 주소 서울시 중구 명동길(유네스코길) 26 전화 팩스 홈페이지 전자우편 기획 진행 디자인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청년팀 유정환 최고은 c 유네스코 한국위원회, 2012 * 이 책은 저작권법에 따라 보호 받는 저작물이므로 무단전재와 무단복제를 금하며, 이 책 내용의 전부 또는 일부를 이용하고자 할 경우에는 유네스코 한국위운회러 문의해 주시기 바랍니다. 한위 간행물 등록번호: YT/2012/RP/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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