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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한지식사전 개발 연구결과

2 일러두기 이 책은 북한을 이해하는데 필요한 기본적이고 핵심적인 용어들을 선정하여 사전( 事 典 ) 방식으로 배열하였다. 선정된 용어들을 자모 순서대로 배열하고 그 뜻과 어원들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통상적 으로 우리가 접하는 사전이 아니고 독자들의 폭넓은 이해를 돕기 위해 용어에 대한 개념과 의미를 설명한 것이다.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주체사상 및 선군사상을 통치이념으로 하는 유 일지배체제를 유지하고 있으며, 3대에 걸쳐 권력을 세습하였다. 북한체제의 이러한 특성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북한 사회의 본질을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다. 따라서 북한체제에 대한 외형적 이해를 넘어 서 북한 사회의 본질을 좀 더 심층적으로 이해해야 할 필요가 있다. 원래 개념어를 이해할 때에는 그 전반적 이미지가 중요하다. 그러나 개념어는 사용하는 사람에 따라 다른 의미와 해석을 가질 수 있다. 따라서 개념어를 사전적으로 정리하면 그 개념의 의미를 고 정시키는 결과를 초래할 우려가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같은 사전 방식의 책 편찬을 시도하게 된 것은 북한 용어들이 정확한 사실에 근거하여 인식되고 사용되기 보다는 막연하게 전달됨으로써 혼란을 야기시키는 경우가 종종 있었기 때문이다. 특히 북한의 신문이나 방송 등 언론매체들은 북한체제 선전의 성격이 강하기 때문에 이를 통해 북한 용어의 의미를 정확히 파악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따라서 보다 정확하고 실제적으로 의미를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다. 이 책을 통해 북한 용어에 대한 정확한 의미를 파악하고 이해를 높이는데 기여하고자 하였다. 이와 함께 북한에 관심이 있거나 공부를 하는 사람들이 사실적 기초에 부딪혀 시간을 허비하는 애로를 덜어주는 것이 이 책을 출간하게 된 또 하나의 목적이다. 관련 용어들이 사전 형태로 정리되 어 있다면 언제 어디서든 쉽고 간편하게 궁금증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더하여 그 용어의 배경과 주요 내용, 의미 등을 매듭을 이어가듯 객관적이고 체계적으로 풀어나간다면 북한에 대한 지 식의 폭을 넓히는데 도움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바로 이러한 수요에도 부응하고자 하였다. 이 책에 수록된 용어들은 하나하나가 독립적이기는 하지만, 그 용어에서 파생되거나 그 용어와 연관된 다른 용어들과 유기적으로 연계되도록 하였다. 아무쪼록 이 책이 북한에 대한 올바르고 정확한 이해를 높이는데 새로운 길잡이가 되기를 바란 다. 수록범위와 표제어 선정 북한의 정치, 군사, 외교,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주요 정책, 주의 주장, 기관(단 체), 행사, 사건 등의 용어를 수록하였다. 중 고교 교과서, 통일교육 기본교재, 북한 관련 전문서적, 각종 언론매체 등에서 사용하는 용어 가운데 비교적 빈도가 높은 것을 참고하였다

3 표제어의 배열 사전 형식의 한글 자모순으로 표제어를 배열하였다. 숫자로 시작되는 표제어의 경우 표기는 숫자를 쓰되 순서는 소리 나는 대로 한글 자모순에 편입 하였다. * 예 : 3대혁명소조운동 삼대혁명소조운동으로 순서 배열 표제어 설명 기술 방법 표제어에 대해 설명할 내용이 많거나 부문별로 나누어 설명할 필요가 있는 경우 소제목(중간제 목)을 설정하였다. 표제어에 대한 설명은 대체로 그 연원과 배경에 이어 주요 내용과 경과를 설명한 다음 그 의미와 특징을 평가하는 형식을 취하였다. 각 표제어별로 연관되는 표제어가 있거나 그 개념을 보다 심층적으로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는 표제어를 찾아볼 수 있도록 관련 검색어 를 부기하였다. 표제어로서의 가치를 지니고 있기는 하나 그 상위 개념이 표제어로 되어 있을 경우 상위 개념 안에서 내용을 설명하였다. 그 표제어는 이를 참조토록 하였다. 그러나 특히 중요한 표제어는 별도로 분리하여 세부적인 설명을 하였다. * 예 : 낮은 단계의 연방제 는 표제어를 두기는 하지만 북한의 연 방제 에서 일괄하여 설명하였다. 표제어 및 북한의 원전은 우리말식으로 고쳐서 표기하였다. 다만 인명은 북한식으로 표기하였다. 한국을 표기할 경우에는 한국, 남한, 우리 등으로 그 설명방식에 적합한 표기를 혼용하였다

4 목록 강계정신 강성대국론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고난의 행군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고려성균관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 관병일치 광명성 광폭정치/인덕정치 교도대 국가경제개발총국 국가계획위원회 국가명절 명절 참조 국가안전보위부 국가영화위원회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 국방위원회 국제친선전람관 국토관리총동원기간 국토환경보호사업 참조 국토완정론 국토환경보호사업 군무생활 10대 준수사항 군민일치 운동 군사 경제 병진 노선 군사칭호 군수동원총국(군수동원지도국) 군정배합 군중문화사업 군중예술론 군축 및 평화연구소 금성친위칭호쟁취운동 금수산태양궁전 금요노동 기동예술선전대 기술개건사업 김일성고급당학교 김일성광장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김일성정치대학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헌법 북한 헌법 참조 - 4 -

5 김일성훈장 북한 훈장 참조 김정일애국주의 김정일훈장 북한 훈장 참조 김책공업종합대학 김책제철연합기업소 나남의 봉화 나진 선봉 경제특구 남북 연방제 북한의 연방제 참조 남북연석회의 남조선 혁명 낮은 단계의 연방제 북한의 연방제 참조 노농적위군 노동당 노동당 규약 노동당 대표자회 노동당 대회 노동당 비서국 노동당 정치국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노동당 중앙위원회 노동신문 노동자구 농민시장 다국적 군축협상 다박솔 초소 단군릉 단번도약 답사행군 당세포 대남방송 대민족회의 대안의 사업체계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대홍단정신 독립채산제 독보회 뙈기밭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만경대혁명학원 만경봉호 - 5 -

6 만수대의사당 만수대창작사 명절 모란봉악단 보천보전자악단 참조 미사일 개발 민속명절 명절 참조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민족공조 민족대단결 5대 방침 민족주의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민주기지론 민주조선 배급제 백두혈통 벼랑끝 전술 보위사령부 보천보전자악단 북남경제협력법 북 러조약 북조선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회의 북 중조약 북한의 연방제 북한의 핵실험 북한 헌법 북한 훈장 분조관리제 붉은기사상 붉은청년근위대 비사회주의 그루빠 4대 군사노선 4.25문화회관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사회주의 대가정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소유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사회주의헌법 북한 헌법 참조 3대 제일주의 - 6 -

7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3대혁명소조운동 3대 혁명역량 강화 생활총화 서울 불바다 서해갑문 선군경제건설 노선 선군정치 선군혁명문학예술 선전선동부 소년단 소조활동 속도전 속도창조운동 수령결사옹위정신 수령론 수령형상문학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 신사고 실리사회주의 10대 시정방침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참조 아리랑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참조 연합기업소 영변 5MWe 원자로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 우리민족제일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유일사상체계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 유일사상체계 참조 유훈통치 음악정치 인민경제계획 인민경제대학 인민대학습당 인민무력부 인민반 인민보안부 인민생활공채 일괄타결 동시행동 일 북 수교협상 자력갱생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장마당 - 7 -

8 전민군사복무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전민족대회 전 인민적 소유 사회주의적 소유 참조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 정치범수용소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제2경제위원회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국통일 3대 원칙 조국통일 3대 헌장 참조 조국통일 3대 헌장 조국통일 5개 방침 조국통일 5대 강령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사회민주당 조선신보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조선직업총동맹 조선천도교청우당 조직지도부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종자론 종합시장 장마당 참조 주석 주체농법 주체문예이론 주체사상 주체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참조 주체연호 주체의 사회역사관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 중앙인민위원회 주석 참조 직통생 집단주의 천리마운동 청년돌격대 청년영웅도로 청산리정신 방법 총대가정론 총정치국 - 8 -

9 총참모부 최고인민회의 7.1 경제관리개선조치 타도제국주의동맹(ㅌ ㄷ 동맹) 토지정리사업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전술 8.3 인민소비품 8월 종파사건 평양국제상품전람회 포전담당제 프롤레타리아 독재 핵 불능화 중단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 핵연료봉 제조공장 핵 재처리시설 혁명가극 혁명열사릉/애국열사릉 혁명적 수령관 수령론 참조 현지지도 협동농장 협동적 소유 사회주의적 소유 참조 호위사령부 화폐개혁 황색바람 - 9 -

10 강계정신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연이은 자연재해가 겹치면서 아사자가 발생하고 경제난이 더욱 심각해지자 이른바 고난의 행군 을 전개했다. 이 과정에서 북한의 자강도 지역이 가장 모범을 보였다. 강계정신은 자강도 강계지역을 중심으로 한 자강도 주민들의 경제난 극복 정신을 본받자는 뜻에서 붙여졌다. 연원 북한에서 강계정신이 제시된 유래는 1998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1998년을 사회주의 강 행군의 해 로 선언하였다. 김정일은 그해 1월 중순 자강도의 경제 부문을 현지지도하면서 전후 시련 의 시기에 강선(강선제강소)의 노동계급이 그러했던 것처럼 자강도에서는 오늘의 강행군의 앞장에 서 새로운 혁명적 대고조의 봉화를 높이 들고 나가야 한다. 고 강조했다. 이어 그해 2월 북한 노동신 문이 사설에서 사회주의 강행군을 다그치려면 강계의 혁명정신으로 싸워야 한다. 면서 자강도 노동 계급과 인민들이 창조한 이 정신은 오늘의 강행군 정신 이라고 말한 이후, 강계정신은 김일성 사후 김정일과 연관 지어 제시된 최초의 경제선동 구호가 되었다. 주요 내용 당시 자강도가 추진한 대대적인 중 소형발전소 건설과 두벌농사, 세벌농사 등 지방경제 개선사업 이 자력갱생의 전형으로 높이 평가되었다. 김정일은 1998년 한 해 동안 무려 다섯 차례나 자강도를 현지지도 했는데, 이는 강계정신이 혁명적 대고조를 일으키고 추동하는 투쟁정신 이라는 점을 부각 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자강도를 방문했다고 볼 수 있다. 당시 북한은 지역적으로 자강도를 택한 이유 도 언급한 바 있다. 즉 자강도는 불리한 자연조건, 식량난 등 현실적 난관이 큰 지역임에도 불구하고 창조적인 투쟁정신을 발휘했다고 하여, 파급효과를 극대화하려는 의도가 깔려 있음을 시사하기도 하 였다. 북한의 관련 자료에 따르면 강계정신은 크게 수령절대숭배의 정신, 결사관철의 정신,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으로 구성된다. 수령절대숭배의 정신 은 자기 영도자만을 굳게 믿고 받드는 것을 의미하며, 결사관철의 정신 은 김정일의 경제건설 구상과 의도를 실현키 위해 투쟁하는 정신이 다. 자력갱생 간고분투의 정신 은 자신의 힘을 믿고 자기 단위의 살림살이를 자체로 꾸려나감을 의 미한다.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은 사회주의 미래에 대한 믿음과 희망을 잃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북한은 2012년 당창건 67주년을 맞아 자강도 강계시에 김일성 김정일 동상을 건립했다고 보도한 바 있다. 지방 단위에서 김일성과 김정일 동상이 함께 세워진 것은 강계시가 처음인 것으로 알려졌는 데, 이는 강계정신이 창조된 곳으로 김정일이 자주 방문했던 점에 연유된 것으로 보인다. 평가 강계정신은 1950년대 후반의 천리마정신과 같이 경제투쟁의 정신적 자극을 유도하는 슬로건이

11 되었다. 극심한 경제난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북한이 체제를 유지하고,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 주민들에게 요구하는 시대정신이자 경제회생의 기치로 활용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고난의 행군, 나남의 봉화, 대홍단정신, 천리마운동

12 강성대국론 강성대국( 强 盛 大 國 )론은 말그대로 부강하고 융성한 나라 라는 뜻으로, 김정일이 주창한 북한식 생존전략이다. 1998년 김정일의 자강도 현지지도에서 본격적으로 등장하기 시작하였으며, 이후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 발표된 김정일의 공직 승계(국방위원장 재추대)와 관련하여, 북한이 경제적인 부국과 군사적인 강국 건설을 지향한다는 것을 표현하기 위해 명시된 개념이다. 배경 김일성 사후 4년여 동안 북한은 새로운 지도이념이나 정책 프로그램을 제시하지 못한 가운데 사 망한 김일성의 권위에 의존하여 김정일은 곧 김일성 이라는 등식하에 김일성식대로 사회주의 혁명 과 건설을 추진한다는 입장을 견지했다. 그러나 북한은 1998년 8월 31일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광 명성 1호) 이후, 이를 강성대국으로 진입하는 신호탄으로 의미를 부여하면서 대대적으로 선전하기 시작했다. 또한 대외적으로 북한체제가 붕괴할 것이라는 비관적 인식을 불식시킴으로써 정권의 건재를 과 시해야 할 필요성이 작용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사회주의권의 붕괴, 김일성의 사망, 잇따른 자연재 해 등으로 북한 경제는 침체일로를 걸었고, 민심은 극도로 악화되었으며, 이는 김정일의 권위 저하를 야기했다. 북한은 위기극복을 위해 고난의 행군정신, 강계정신 등의 다양한 주민동원 구호를 제시 했지만 큰 실효를 거두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김정일 정권의 공식 출범을 앞두고 민심 수습을 위한 분위기 쇄신과 경제회생을 위한 새로운 비전제시가 절실해졌으며 바로 이러한 필요가 강성대국 건설이라는 적극적이고 공세적인 구호로 나타난 것이라 할 수 있다. 주요 내용 북한이 말하는 강성대국은 사상강국, 정치강국, 군사강국, 경제강국을 의미한다. 북한이 주장하는 강성대국론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사상강국은 온 사회가 하나의 사상, 수령의 사상으로 통일되어 사상의 위력으로 존재하고 발전하는 나라, 위대한 지도사상으로 시대발전을 앞장에서 이끌어나가는 나라 이다. 정치강국은 영도자의 주위에 전체 인민이 일심단결된 튼튼한 정치적 역량에 의거하여 철저한 자주정치를 실시하는 나라 이다. 군사강국은 어떠한 제국주의자들의무력침공도 일격에 타 승하고 나라의 자주권과 존엄을 지킬 수 있는 강대한 군사력을 가진 무적필승의 나라 이다. 경제강 국은 자립적 민족경제의 튼튼한 토대 위에서 끊임없이 발전하는 나라이며 인민대중의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물질생활을 원만히 보장하고 세계적으로 가장 발전된 나라들과도 당당히 겨룰 수 있는 경 제력을 가진 나라 이다. 북한이 밝힌 강성대국 건설론의 주요 내용은 첫째로 주체의 사회주의 나라 건설, 둘째로 수령중 심의 강성대국 건설, 셋째로 선군정치, 일심단결, 자력갱생 등 기존의 주체노선을 유지 고수하는 것 으로 선( 先 )사상 군사 건설, 후( 後 )경제건설 방식으로 요약할 수 있다. 즉 사상의 강국으로 만드는 것부터 시작해서 혁명의 기둥으로서 군대를 튼튼히 세우고, 그 위력을 바탕으로 경제건설을 추진한 다는 것이다

13 북한은 그동안 주체사상과 선군사상, 수령과 인민의 일심단결을 통해 정치 사상강국을 실현하였 고, 강대한 군사력을 통해 군사강국을 실현했으므로 경제강국 실현만 남았다고 선전하면서, 2012년 을 강성대국을 실현하는 목표연도로 내세웠다. 그러나 2012년 강성대국 건설 목표가 사실상 실현이 불가능하게 되자 2011년에 강성대국 이라는 용어를 강성국가 로 격하시켰다. 2012년 신년공동사설 에서는 다시 강성부흥 이라는 용어로 바꾸어 주장하였고, 강성국가 와 강성부흥 등 용어사용 횟수 도 총 5회로 2011년의 19회보다 급감했다. 강성대국 대신 강성국가를 강조하게 된 이유는 궁극적으로 경제난 극복을 위한 구체적인 대안이 되지 않은 현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강성부흥 또한 경제난 극복을 위해 북한주민들이 자력갱생 의 기치 밑에 당과 지도자를 위해 국가가 원하는 사회노동과 의무를 기꺼이 수행할 것을 독려하는 이데올로기적 구호라고 할 수 있다. 평가 강성대국론은 북한체제를 운용하는데 있어서 통치이데올로기적 기능과 국가전략적 기능을 수행 한다. 통치이데올로기적 측면에서 강성대국론은 주민동원을 위한 정당화의 기능, 비전과 희망제시를 통한 일체화의 기능, 그리고 위기극복을 위한 결속화의 기능을 수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강성대국 이 추구하는 이상과 북한이 처한 현실 사이의 괴리는 강성대국론이 갖고 있는 통치이데올로기로서의 기능을 점차 잠식하고 있다. 강성대국론은 21세기 북한의 국가발전전략으로서도 한계를 가지고 있다. 북한은 정치사상강국과 군사강국이 완수되었으므로 경제강국만 실현되면 강성대국이 완성된다고 주장하고 있으나, 경제회 생에 필요한 내부자원과 재원이 턱없이 부족하여 이러한 주장을 뒷받침하는 정책에 허점이 있다. 강 성대국 건설구현의 원칙으로 제시한 우리식 과 자력갱생 은 세계화 시대에 부적합한 원칙으로 경제 강국 실현을 어렵게 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고난의 행군,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 실리사회주의

14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는 세부적인 생산물에 이르기까지, 중앙으로부터 말단 기업에 이르기까지 위계적인 조직체계에 의해 계획화를 추진하는 방식을 의미한다.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는 북한 계획경제체제의 기본 축을 이루고 있는 방침이며, 북한은 1964년에 계획의 일원화를, 1965년에 계획의 세부화를 도입하였다. 배경 북한 경제는 중앙집권적 계획경제의 원칙하에서 운영되어 왔다. 계획수립을 비롯한 모든 경제적 의사결정과 이에 필요한 흐름이 중앙당국에 집중되어 있으며, 하부조직은 중앙의 명령에 절대적으로 복종하도록 되어 있어 중앙집권적 명령경제체제 라고도 한다. 북한의 중앙집권적 계획화 체계는 국가계획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부 경제단위에 이르기까지 계획 의 일원화 세부화 체계에 의해 이루어진다. 계획의 일원화는 단일한 수직적 계획사업체계를 통해 인 민경제계획을 국가의 의도와 요구에 맞게 실행하고자 한 것이며, 계획의 세부화는 모든 단위에서 노 동력, 설비, 자재의 낭비와 사장을 없애고 계획수행에 내부예비를 최대한 동원하고자 한 것이다. 주요 내용 계획의 일원화는 사회주의 국가의 통일적인 지도하에 계획화의 유일성을 보장하는 체계이다. 이 는 모든 부문과 단위의 계획이 국가의 통일적인 계획이 되도록 한다는 의미이다. 계획의 일원화는 국가가 모든 부분의 경제활동을 통일적으로 장악하고 전국가적 범위에서 생산의 물적 인적 조건을 장악할 수 있게 해준다. 계획의 세부화는 모든 경제 부문들과 기업소들의 경영 활동이 세부에 이르기까지 서로 맞물리도 록 계획을 구체화하는 것을 뜻한다. 계획의 세부화는 모든 계획지표들의 수행에 법적 의무성을 부여 한다. 북한은 계획의 일원화와 관련하여 1964년에 전국적인 계획기구를 개편했다. 국가계획위원회의 하부기관으로서 지구계획위원회를 각 도에 2개씩 신설해 계획사업을 관장토록 했다. 아울러 시(구 역) 군 국가계획부, 공장 기업소 국가계획부를 신설하는 한편 이들 기관을 비롯해 정무원(현 내각)의 부와 위원회, 중앙기관 및 전국의 모든 계획부서를 국가계획위원회의 팔다리(하부세포)로 규정해, 각 각 자신의 해당 상급기관과 국가계획위원회에 이중으로 종속시키는 체계를 확립했다. 이때 최상위 국가계획위원회는 국가의 계획체계 중심으로서 중앙집권체제의 원칙에 따라 전국의 계획 업무를 통일적으로 지도 통제한다. 그리고 각 경제기관과 기업소의 계획부서는 국가계획기관의 하부구조로서 국가계획기관의 지도하에서 통일적인 계획업무를 수행하는 단위 사업부문이다. 국가계획기관이 주관하는 계획체계에 따라 계획지표는 작성단위별로 국가계획위원회 지표, 성 지표, 연합기업소 지표, 지방지표 등으로 나뉘고, 측정방법에 따라 현물지표(생산량 목표)와 금액지 표(생산총액)로 구분되며, 포괄범위나 중요성에 따라 종합지표와 세부지표, 기본지표와 부속지표 등 으로 분류된다. 단위별 계획지표가 수립되고, 각 생산단위에 내려온 생산량 목표는 무조건 수행해야

15 하는 과업이 된다. 또한 국가계획위원회를 통해 조정 수립되는 단위별 계획은 매우 엄격하고 경직적 이어서 조정의 여지가 없다. 모든 재화와 용역에 대한 중앙의 계획은 수직 수평적으로 서로 맞물려 있기 때문에 단위별 생산계획을 완수하는 것만이 중요하게 제기된다. 평가 엄격한 계획과 생산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국가의 명령은 종종 기업 간 내부교섭, 형식적 장부기 입 등 형식주의, 관료주의를 발생시킨다. 또한 생산목표의 초과 달성을 위해 개별경제 단위들은 제한 된 자원을 가능한 한 많이 축장하고자 하기에 재화와 용역에 대한 수요는 항상 공급을 초과하여 만 성적인 부족 상태가 초래된다. 월말이나 분기말, 연말과 같이 계획지표 달성에 대한 평가가 이루어지 는 시기가 되면 생산을 몰아치게 되어 생산에서의 파동이 발생하고 이로 인해 계획의 실효성과 의미 는 상실된다. 관련 검색어 _ 국가계획위원회, 대안의 사업체계, 독립채산제, 연합기업소

16 고난의 행군 고난의 행군은 1994년 김일성 사망 후 나라의 경제사정이 극히 어려워지자 이를 극복하기 위해 주민들의 희생을 강요하며 김정일이 내놓은 당적 구호로서, 1996년 신년공동사설을 통해 제시되었 다. 고난의 행군이라는 용어는 1938년 말~1939년 초, 김일성이 이끄는 항일빨치산이 만주에서 혹한과 굶주림을 겪으며 일본군의 토벌작전을 피해 100여 일간 행군한 데서 유래했다. 1996년부터 시작되었 다고 하는 이 고난의 행군은 이러한 담론방식에 따라 공식적으로 세 번째 고난의 행군이라 일컬어지 고 있다. 첫 번째 고난의 행군은 앞서 말한 김일성의 빨치산 시절인 1938년 12월부터 1939년 3월까지 중국 몽강현 남패자로부터 압록강 연안 국경일대로 행군한 것이며 두 번째는 1956년 8월 종파사건 전후부터 천리마운동이 전개되는 시기까지였다. 1996년 신년사를 통해 제시된 세 번째 고난의 행군은 전체 당원들과 인민군 장병들과 인민들은 백두밀림에서 창조된 고난의 행군정신으로 살며 싸워 나가야 한다. 는 언술에서 나온 것으로 1990년 대 계속되는 경제난과 기아를 극복하고 사회적 이탈을 막으며, 주민들의 희생과 김정일에 대한 충성 을 강조하기 위해 제시되었다. 북한당국은 1996년 공동사설 발표 이후 고난의 행군정신 을 강조하면서 군인건설자들을 경제건 설 전면에 내세우기 시작했다. 이들에 의해 안변청년발전소와 원산-금강산 철도 등의 건설 실적을 남겼으며, 그 외에도 체육, 과학, 문예 등 사회 전 부문에 걸쳐 고난의 행군정신을 강조하며 사회적 동원을 불러 일으켰다. 특히 문예부문에서는 서정시 끝나지 않는 행군길, 가요 고난의 행군정신으 로, 아버지 어머니의 청춘시절 등과 영화들이 제작, 발표되어 고난의 행군정신을 전 분야에 걸쳐 보 급하는데 적극적인 역할을 담당했다. 그러나 모순되게도 1990년대 고난의 행군시기를 상징하는 것은 배급의 중단, 배고픔과 굶주림, 질병과 죽음의 그림자이다. 2010년 대한민국 통계청이 유엔의 인구센서스를 바탕으로 발표한 북한 인구 추계에 따르면, 고난의 행군(1996~2000년) 시기 아사자 수는 대략 33만여 명이다. 더불어 북한 은 1990년대 중반 이후 10여 년(1994~2005년)간 식량난으로 61만 명의 인구 손실을 본 것으로 추산된 다. 즉 고난의 행군이란 용어가 북한당국에게 사상의지를 강조하는 정치적 구호였다면, 북한주민들 에게 고난의 행군은 국가의 배급중단으로 인하여 자체적으로 생계문제를 해결해야만 했고, 살기 위 해서는 무엇이던 해야만 했던 절박한 생존의 시기를 의미한다. 이후 고난의 행군 은 당시의 절박했 던 삶과 죽음의 경계를 대표하는 하나의 상징어가 되었다. 이후 고난의 행군은 북한 사회의 변화를 진단하는 새로운 기준점이 되었다. 고난의 행군시기를 전후하여 많은 변화들이 발생하기 시작했고, 새로운 사회적 현상이 대두하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이 시기를 전후하여 산업이 붕괴되고 배급이 중단되었으며, 북한주민들이 장마당을 활성화시키면서 스 스로의 생존과 생활을 꾸려나가기 시작했다. 집단주의 의식과 주체사상으로 무장한 사회주의적 가치 관들이 흔들리면서 다양한 비사회주의적 행위가 확대되기 시작한 시기이기도 하다. 관련 검색어 _ 강계정신, 배급제, 장마당

17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북한이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당대회에서 기존의 통일방안과 제안들을 다시 정리하여 제시한 것으로, 그 내용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선결조건, 연방제의 구성 원칙, 10대 시정방침으로 나눌 수 있다. 배경 1980년 10월 북한은 제6차 당대회를 열어 김정일로의 후계체제 완성을 대외적으로 공식화했다. 아울러 김일성은 제6차 당대회 개막일인 10월 10일 당중앙위원회 사업총화 보고(이하 보고 )를 통해 통일 문제와 관련하여 다음과 같이 언급하였다. 우리 당은 조국을 자주적으로, 평화적으로, 민족대 단결의 원칙에서 통일하는 가장 현실적이며 합리적인 방도는 북과 남에 있는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북과 남이 연합하여 하나의 연방국가를 형성하는 것이라고 인정한다. 이른바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은 이렇게 김정일의 공식 등장과 더불어 7년 만에 소집된 노동당 당대회라는 극적인 형식을 통해 등장했다. 주요 내용 사실 북한이 연방제 통일방안 앞에 고려 라는 국호를 사용한 것은 1980년이 처음은 아니었다. 북 한은 이미 1973년 분단현실 인정 및 평화공존을 주장한 박정희 대통령의 평화통일외교정책 선 언 (6 23 선언)에 맞대응해 기존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약간 변형시킨 연방제 통일안을 제시하면서, 통일된 연방제 국가의 이름을 고려 라고 붙인 바 있다. 1980년의 제안에서 고려연방공화국 은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으로 바뀌었다. 여기서 우선 고려 와 연방 사이에 민주 라는 새 단어가 덧붙여진 부분은 주의를 요한다. 여기에 는 당시 남한의 정치적 상황을 김일성 유일체제와 대비시켜 후계체제 안정화에 또 하나의 포석을 보태겠다는 북한의 의도가 엿보인다. 김일성은 보고에서 남조선에 오늘과 같이 민주주의가 여지없 이 말살되고 가혹한 군사파쇼 통치가 실시되는 조건에서는 민족적 화해와 단결을 이룰 수 없으며 조국을 평화적으로 통일할 수 없다. 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바뀐 것은 민주 라는 용어가 추가된 것뿐 만 아니었다. 당초 1960년 최초의 연방제는 통일을 위한 남북한 자주 총선거의 실시에 따른 과도적 국가 형태 로서 제시된 것이다. 남북한 자주적 총선거 라는 꼬리표는 떼어버렸지만 1973년 고려연방제안도 여전히 통일을 위해 남 과 북에 현존하는 상이한 두 제도는 당분간 그대로 두고 연방 국가를 창설한다는 일종의 중간단계 를 설정하고 있었다. 그러나 1980년의 고려민주연방국 창립방안 에서는 이 같은 중간 단계를 생략 하고 연방상설위원회를 구성하여 이 국가기구가 곧장 북과 남의 지역 정부들을 지도 하도록 하는 완성형 연방제 를 제시하는 한편, 연방국가가 외교 결정권을 갖되 중립국가를 지향하겠다는 새로운 내용 이 추가되었다. 아울러 김일성은 이 보고를 통해 새 연방제안의 부록 격으로 동서 어느 진영에 속하지 않는

18 자주국가, 민주주의 실시, 남북 경제 교류협력 추구, 과학, 문화, 교육 분야의 교류, 교통, 체 신의 연결, 인민의 생활 안정 도모, 군사적 대치 상황의 해소 및 민족연합군의 창설, 해외동포 의 권익 도모, 연방공화국에 의한 통일 이전 대외 관계의 재조정 등 10개 항에 이르는 이른바 10대 시정 방침 을 제시했다. 이 시정 방침에서 군사적 대치 상황의 해소를 위한 방안의 일환으로 쌍방의 군대를 각각 10만~15 만 명으로 줄일 것 과 북과 남의 민간 군사 조직(북한의 노농적위대와 남한의 예비군을 의미)을 해 산 하자고 하였다. 특히 군대 규모를 특정하여 감축하자는 제안은 북한이 군축을 제의할 때마다 단골 메뉴로 되풀이되었다. 평가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몇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내포하고 있었다. 첫째, 우리 정부를 극렬한 언사를 통해 부정하는 한편, 우리 사회의 민주화 운동을 애국 투쟁 또는 영웅적 투쟁 으로 묘사하며 우리 사회 내부 갈등을 격화시키고 이를 활용하려는 의도를 드러내 었다. 둘째, 연방제를 하자면서 당시로서는 실현 가능성이 매우 낮은 요구 조건들을 선행 조건으로 내 걸었다. 남한의 반공법 및 국가보안법 철폐, 당시 남한 정권 퇴진 및 민주주의 정권으로의 교체, 북 미 평화협정 체결 및 주한미군 철수 등이 바로 그것이었다. 즉 남조선 혁명 이라는 전통적인 노선에 근본적인 변화가 없었던 것이다. 셋째, 연방제안 자체의 모순이 발견된다. 예컨대, 두 지역 정부 의 사상과 제도 차이를 인정한다면 서도 연방 정부가 정치, 외교, 군사권을 통일적으로 행사한다고 못 박음으로써 지역 정부의 독자적인 외교 및 군사권 행사 기회를 봉쇄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은 남한의 새로운 정치질서가 안정되어 가는 데 따라 남북관계에서 통일문제의 이슈를 선점하고 우리 내부의 반정부 투쟁을 연계시켜 남조선 혁 명의 동력을 지속적으로 제공하려는 한편, 김정일 후계체제가 공식화된 상황에서 새로운 통일 청사 진을 제시하려는 등 다목적 차원에서 제시되었다고 하겠다. 북한은 이후 모든 정당과 사회단체를 동원하여 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을 지지, 옹호케 하고 남한에 대해 창립준비위원회 의 구성이나 민족통일촉진대회 의 소집을 요구하면서 남북당국 간의 대화를 거부하였다. 김정일은 김일성 사후 1997년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을 조국통일 3대 헌장 의 하나로 내세우며 계승의 의지를 밝혔다. 관련 검색어 _ 북한의 연방제, 조국통일 3대 헌장

19 고려성균관 고려성균관은 황해북도 개성시 방직동에 소재하고 있으며,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과 함께 북한의 3대 종합대학이다. 그러나 흔히 말하는, 사회 인문 및 이공계가 모두 포함된 명실상부한 종합대학이 아니라 경공업 분야의 종합대학이다. 성균관은 고려시대 992년에 국자감 으로 창설되었다. 인재를양성하는 최고 교육기관이었던 국자 감은 1298년에 성균감, 1308년에는 성균관 으로 개편되었다. 그러나 조선이 도읍을 옮기면서 새로운 성균관을 세우고 이를 최고의 교육기관으로 정함에 따라 개성에 있는 성균관은 겨우 명맥만 유지한 채, 지방 향교 수준으로 전락했다. 김일성은 1992년 5월 5일 개성의 성균관을 방문하여 성균관 건물을 고려박물관으로 쓰고 있는 것을 바꿔, 고려박물관은 다른 데 짓고 성균관을 대학으로 쓰는 것이 좋겠다고 지적하였다. 이후 성 균관을 고려성균관이라 명명하고 경공업종합대학으로 만들 것을 지시하였다. 이와 더불어 성균관 건 물은 그대로 보존하고 새로운 건물과 기숙사를 성균관 주변에 따로 지을 것도 지시하였다. 이에 따라 중앙인민위원회는 정령을 발표하여, 개성경공업단과대학을 경공업종합대학으로 승격 시키고, 고려시대에 세운 성균관(대학)을 계승하여 고려성균관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고려성균관 의 창립연도를 성균관의 전신인 국자감이 설립된 992년으로 하며, 창립 1천년이 되는 고려성균관의 창립날짜를 9월 1일로 정했다. 대학에는 김일성이 친필로 새긴 대학명판비가 있다. 대학 산하에는 고려인삼학부, 고려도자기학부, 고려방직학부, 고려수예학부 등 7개 학부와 19개 전공학과를 두어 경공업 부문에 필요한 기술인재들을 종합적으로 양성하게 했다. 고려성균관은 경공 업 부문의 종합적인 민족간부양성기지로서의 임무를 수행 했다. 고려성균관은 남북한 교류사업에도 참여한바 있다. 1998년 4월 28일부터 5월 5일까지 아시아태평 양평화위원회 초청으로 성균관대학교와 고려성균관 간에 학술교류 및 시설지원을 하기로 하는 등 자매결연을 하기도 하였다. 2006년에는 고려박물관 옆에 교사와 체육관, 도서관, 실습공장, 기숙사를 증축하였다. 2012년 2월 2일에는 북한 최영림 총리가 고려성균관의 새 건물 건설과정을 시찰하였으 며, 그해 9월 19일에는 준공식을 가졌다. 2012년 9월 1일에는 고려성균관 창립 1020돌 기념행사를 개최하는 등 고려성균관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보이고 있다. 북한당국이 고려성균관에 대해 지속적으로 관심을 두고 있는 이유는 고려성균관이 경공업 분야 인재양성의 대표적인 상징물로 여겨지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

20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은 북한이 1차 5개년 계획(1957~60년)을 실행하는 과 정에서 더 많은 기계를 필요로 하고 기계제작공업을 확립할 필요에 직면하였을 때, 주을 아마공장 노 동자의 제안에 의해 전국적으로 확산시킨 대중적 노력경 쟁운동이다. 배경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은 1958년 9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제시되었다. 당시 북한은 중공 업 우선발전 노선을 확립하고 자립경제를 표방하면서 기계제작 공업과 금속공업의 수준을 제고시키 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김일성은 철과 기계는 공업의 왕이다 라는 구호를 제시하고, 1차 5개년 계 획시기 기계제작공업과 금속공업에서의 증산을 과업으로 제시하였다. 김일성의 요구에 따라 주을 아마공장 은 이미 만들어낸 만능선반을 모체로 하여 1959년 한 해 동안에 50여대의 공작기계를 추가 생산하였고, 이의 성공적 사례는 곧바로 전국으로 확대되어 대중 적 노력경쟁운동으로 전환되었다. 전개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은 모든 공장과 기업소가 자체 보유하고 있는 공작기계로 기본업무를 수 행하면서, 각 기계별로 별도의 선반, 볼링반 등 공작기계를 한 대 이상 제작토록 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였다. 당시 북한 보도에 의하면 용성기계공장, 덕천자동차공장, 기약기계공장 등에서 공작기계 새끼 치기 운동 결과로 곳곳마다 기계가 기계를 새끼치고 공장이 공장을 낳는 기적이 창조되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은 1960년대 중반부터 공식 언술에서 사라지게 된다. 대 중적 노력동원방식의 한계이자 기술발전의 부재가 낳은 결과이다. 이후 1985년 6월 김일성이 함경북도를 현지지도하면서 재차 이 운동이 발기되어 다시 한 번 기계 공업육성의 주요 방법으로 추진되었다. 이 운동은 초기의 운동과 구별하여 85년 6월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 으로 불렸으며, 김정일에 의해 80년대 속도창조운동 과 밀접히 연계되어 전국적으로 전개되었다. 두 번째로 추진된 85년 6월의 공 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은 과학기술과의 밀접한 연관을 추진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특히 이 운동의 성과를 높이기 위해 1988년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14차 전원회의에서 공작기계공업과 전자자동화공 업 발전대책을 세우고, 이에 의거해 생산 공정의 자동화, 로봇화, 전산화를 통한 공작기계의 양산 및 품종확대, 수치조종공작기계, 집적회로, 전자자동화계기 양산 및 품종확대 등을 추구함으로써 공작 기계공업을 전자자동화공업과 밀접한 연계 아래 추진하고자 했다. 그러나 이 역시 1990년대 심각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발전하는데 한계에 직면하였다. 평가

21 공작기계 새끼치기 운동은 기계제작과 금속공업의 증산을 위한 대중적 노력경쟁운동이다. 그러 나 기계제작과 금속공업 등 중공업 부문의 핵심 산업은 고도의 과학기술발전과 자본투자가 뒷받침되 어야 하는 부분이다. 자립을 강조하며 세계적 기술발전 추세와 거리를 두고, 자체 생산을 강조하며 국제적 표준과 검증기준을 따르지 않았던 북한은 대중적 노력동원운동이 요구하는 성과에 치중하여 낮은 수준의 기계를 양적으로 생산하며, 오히려 원료와 자재를 낭비하게 되는 역효과를 동반하였다. 관련 검색어 _ 속도창조운동,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

22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 북한은 김정일이 1997년 9월 총비서로 추대된 이후 과학중시사상 을 내세우고 과학기술발전을 강조하면서, 1998년 3월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다. 계획은 1998년부터 2012년까지 5년씩 3번에(1998~2002년/2003~2007년/2008~2012년) 걸쳐 전개되었으며, 2022년까지 계속될 것으로 보인다. 계획의 주요 내용은 과학기술정책과 관련하여 일반산업 부문의 실용적 기술발전보다는 전자공학, 컴퓨터 프로그램 등 첨단과학 부문의 발전에 더 큰 정책우선순위를 부여하고 과학기술 연구 사업에서 혁명적 전환을 일으키겠다는 것이었다. 배경 북한의 과학기술발전 계획은 3차 7개년 경제발전 계획시기(1987~1993년)에 과학기술 부문에 대 한 투자를 확대하면서 시작되었다. 이어서 제1차 과학기술발전 3개년 계획(1988.7~1991.6), 제2차 과 학기술발전 3개년 계획(1991.7~1994.6)을 추진했다. 그러나 과학기술에 대한 투자를 증대하고, 과학 기술에 의한 경제성장을 유도하겠다는 북한의 정책 시도는 1990년대 심각한 경제위기 앞에 그 성과 를 공식 발표하지 않았다. 이후 북한은 단기간 내 과학기술발전을 이루는 것이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판단 아래 장기계획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과학인재 양성과 첨단과학 부문 발전에 더 큰 우선순위를 두는 과학기술발전 5 개년 계획을 수립하게 된다. 주요 내용 북한은 먼저 과학기술발전에 관한 전망목표를 설정하고, 그 계획실행 기간을 5년 단위로 설정하 였다. 과학기술만이 경제의 단번도약을 이룰 수 있다는 중장기 전망계획으로 수립된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의 중심 내용은 첨단과학기술의 수준 확보이다. 이에 기초과학을 포함한 전자공학, 컴퓨터 프로그램 등 첨단과학 부문에 우선순위를 두고 있다. 이전 시기 과학기술발전 계획이 전자, 기계, 생 물, 화학공업 등 주요 부문의 과학기술 수준을 선진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 아래 추진된 것과 차이를 보인다. 또한 이를 위해 이전 시기와 달리 과학기술 인재양성에 큰 비중을 두고 있다. 제1차 과학기술발전 계획기간 동안인 1999년 3월 북한은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부문 선동집회인 전국 과학자 기술자대회 를 8년 만에 개최하고, 1999년을 과학의 해 로 설정하였다. 제1차 계획에서 는 전반적으로 에너지, 식량 등의 기초적인 문제 해결에 일차적인 관심을 두면서 전자공학, 생물학, 열공학, 신소재 등 첨단기술 분야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북한은 2003년 10월 29일부터 30일까지 개최된 전국 과학자 기술자대회 에서 제1차 과학기술발 전 5개년 계획을 결산하고, 제2차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방안을 논의했다. 그리 고 제2차 계획에서는 정보기술, 나노기술, 생물공학을 발전시키는 데 우선 힘을 기울이며 기계, 금속, 열기술 공학을 발전시켜 국방공업과 인민경제를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밝혔다. 제3차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은 2008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1기 제6차 회의에서 정식으로 채

23 택되었다. 제3차 계획에서는 식량문제, 전력문제 등 인민생활문제를 해결하는데 필요한 과학기술적 문제를 해결하고, 첨단과학기술을 발전시켜 나갈 것임을 밝혔다. 평가 북한이 과학기술발전을 위한 계획을 수립하고, 전국 규모의 과학자 기술자대회를 개최한다는 것 은 과학기술발전에 강한 의지를 나타낸 것으로 보인다. 특히 전국 규모의 과학기술행사를 통해 첨단 기술 도입과정에서 외부사조의 영향을 받게 될 과학기술자들의 이완된 규율을 바로잡고 연구개발 및 생산성을 독려해 IT산업 등 첨단과학기술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것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현재의 과학기술발전 계획은 인민경제의 전반적 기술수준을 높이는 것과 무관하게 국방 공업발전과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다. 김정일 시대를 관통했던 과학기술발전 계획은 선군시대의 선 군정치를 뒷받침하며,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을 추진하기 위한 전략적 요구가 담겨있는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 기술개건사업, 단번도약

24 관병일치 북한에서 관병일치( 官 兵 一 致 )란 군대 내에서 지휘관과 대원들이 서로 존경하고 아끼면서 추호의 간격도 없이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단결된 관계 를 의미한다. 북한은 상하부 간에 계급적 모순이 없고 다 같이 근로자들의 아들딸들로 구성된 사회주의 국가 내의 군대 이기 때문에 관병일치가 가능 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관병일치를 군대 내에서 공산주의 도덕교양, 계급교양 강화 차원에서 강조하고 있으며, 그 역사적 뿌리를 항일무장투쟁시기 지휘관과 전사들 사이 생사고락을 같이한 것에서 찾고 있다. 관병일치는 병사를 대하는 지휘관의 태도 개선에 우선적 가치를 두고 있다. 곧 개인 이기주의 사 상을 버려 군관들이 언제나 전사들과 고락을 같이 하는 심정으로 자기 생활을 마련하며 전사들의 생활에서 떨어지지 않도록 의식적으로 노력할 것을 강조한다. 예를 들어 먹는 음식, 잠자는 것 등에 서 지휘관은 혼자만 편하게 지내지 말고 언제나 전사들과 같이 생활하는 것이다. 북한은 이렇듯 윗사 람이 아랫사람을 사랑하는 자세로 대하고, 아랫사람 역시 윗사람을 존경하고 옹호할 때 상하의 굳은 단결이 이루어질 수 있다고 설명한다. 북한 문헌은 관병일치 실현이 군대가 당의 군대, 계급의 군대, 혁명의 군대로 되는 데 있어 중요하 다고 보고 있다. 북한 군대는 이러한 관병일치를 실현하기 위해 상좌 이상 장령급 군관들에게 사병의 애로사항을 파악하도록 3개월간 분대급에서 사병들과 생활하도록 하고 있으며, 이때 계급장은 물론 복장까지도 전사복을 입힌다. 그러나 장령들의 병사생활은 부작용도 있다. 소대장 이상 간부층들은 부조리 노출로 인해 이들에 게 환심을 사기 위해 부정행위를 저지르고 있으며, 중간 간부들도 함께 생활하는데서 오는 정신적 스트레스가 심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군민일치운동, 군사칭호, 군정배합

25 광명성 광명성이란 북한에서 김정일을 부르는 별칭이며 백두광명성이라고도 한다. 김일성이 태양 이라는 별칭을 가졌듯이 김정일은 광명성 이라는 별칭을 가지고 있다. 연원 북한에서 광명성이란 용어가 널리 알려진 것은 1992년이다. 당시 김일성은 김정일의 50세 생일 (2.16)을 축하하며 <광명성찬가>를 썼는데, <광명성찬가>에서 김정일의 출생에 대해 광명성탄 이 라고 적고 있다. 그리고 <조선어대사전>(1992년)에는 광명성에 대하여 1 환하게 빛나는 별 2 항 일혁명투쟁시기; 환하게 빛나는 별이라는 뜻으로 친애하는 김정일동지 를 높이 우러러 이르는 말. 최근에는 백두광명성 이라는 단어를 더 많이 쓴다. 고 표기하고 있다. 그 이전에 출판된 <조선어 사전>에는 등록되어 있지 않은 단어이다. 주요 내용 김정일의 출생지에 대해서 소련 하바로프스크에서 태어났다는 것이 통설이지만 북한에서는 김정 일이 백두산 밀영의 귀틀집에서 출생했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출생 시 백두광명 이 떠올랐다고 선전 한다. 이는 김정일이 백두의 혈통임을 강조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은 두 달 후 1992년 4월에는 공화국 원수 칭호를 부여받았고, 1993년 4월에는 최고인민회의에서 국방위원회 위원장에 올 랐다. 광명성이라는 용어는 1989년 12월 노동신문에도 등장했었다. 당시 노동신문은 백두산 일대에 김 일성을 잇는 김정일의 탄생에 대한 구호나무 가 발견되었다고 보도한 바 있다. 백두산에 김일성 장군의 계승인 백두광명성 탄생, 삼천리 강산에 밝은 빛을 비추이는 백두광명 성 만세 등의 구호 역시 김일성의 백두혈통을 잇는다고 강조, 선전하며 김정일의 정통성과 체제의 단결을 확보하려 한 것이다. 이듬해 1990년 김정일은 국방위원회 제1부위원장이 되었다. 한편 북한은 김일성 사후 1997년 7월 8일 북한의 주요 5개 기관인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 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현 내각)의 공동결정서 공표를 통해 김일성의 출생연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주체연호 를 채택하고출생일인 4월 15일을 태양절 로 제정하였다. 그리고 김정일 사후 2012년 1월 12일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특별보도를 통해 김정일의 출생일인 2월 16일을 광명성절 로 제정하였다. 평가 김정일의 광명성 별칭은 김일성의 태양 별칭에 대응하는 것으로서 지도자로서의 정통성을 강조 하고,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를 통해 세습체제의 안전을 구축하기 위한 일환이었다. 이러한 광명성은 김정일의 통치과정에서 핵심 분야에 사용되었다. 먼저, 선군정치를 강조하면서 그 핵심으로 과학기 술을 중시했던 김정일은 인공위성의 이름에 광명성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그리고 경제 분야에서는 광명성무역총회사, 광명성경제연합회 등을 두어 외화벌이를 하였다

26 관련 검색어 _ 명절, 백두혈통, 주체연호

27 광폭정치/인덕정치 광폭정치와 인덕정치는 북한이 김정일의 지도자적 자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사 용한 정치용어이다. 광폭정치란 대담하고 통이 큰 정치를 상징하는 용어로 북한 이 김정일의 통치방식으로 선전하기 위해 사용한 말이다. 인덕정치 역시 김정일 의 정치스타일을 다정다감한 것으로 선전하기 위해 내세운 통치방식을 말한다. 연원 광폭정치는 1980년대 후반 김정일의 자질을 부각시키기 위해 주민교양 등 사상학습에서 내부적 으로만 거론되다가 1992년 8월 10일자 노동신문을 통해 처음 사용되었다. 1993년 1월 28일자 노동신 문을 통해 김정일의 통치방식을 인덕정치와 광폭정치로 규정한 이후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였다. 인덕정치는 본래 김일성의 우상화를 위해서 1990년대 초반에 처음으로 선전된 용어이다. 북한은 김일성이 일찍부터 인민에 대한 사랑을 지니고 있었으며 이것은 그의 아버지인 김형직의 사상인 이 민위천, 이신위민 에 근거한다고 주장하였다. 김일성 사후에 김정일의 인덕정치가 다시 등장하였는 데, 이는 김일성의 뜻을 이어받아 우리식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켜나가려는 김정일의 의지를 표출하 기 위한 것이라 할 수 있다. 1993년 1월 28일자 노동신문은 인덕정치가 실현되는 사회주의 만세 라 는 글에서 인민을 위한 정치는 그릇이 커야한다., 노동계급의 당의 정치는 어디까지나 정치의 폭 이 넓어야 한다. 고 주장하여 김정일의 통치방식을 광폭정치로 표현하였다. 주요 내용 북한은 광폭정치의 일례로, 김정일이 노동계급 출신뿐만 아니라 계급적 토대나 성분이 좋지 않은 주민들도 차별 없이 포용하는 정치를 실시하고 있다고 주장하였다. 또한 북한은 광폭정치의 대상이 북한주민뿐만 아니라 남한 국민과 해외동포들까지 포괄한다고 주장하면서, 김정일의 정치가 한민족 을 하나로 아우르는 정치라고 선전하였다. 북한은 인덕정치에 대해 인덕( 仁 德 )의 정치 역사적 의미를 강조한다. 그리고 인덕정치의 실례로 환자 한 명을 구하기 위해 대규모 군단과 장비를 동원하고, 유공자에게 직접 환갑상을 차려주고, 쌍 둥이의 탄생을 축하하고, 비전향장기수에게 관심을 보이고 직접 챙겨주었다는 것 등을 들며 선전하 였다. 또한 북한은 인덕정치가 사회주의에서 보편적으로 통용되는 것이 아니라, 북한만이 가지는 수 령중심의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에서만 가능한 독특한 통치방식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1990년대 이후 본격적으로 인덕정치를 김정일의 주된 덕목으로 선전하였는데, 북한은 김일 성이 직접 작성했다는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에 인덕정치와 광폭정치가 구현되고 있다고 주장하면 서 이 강령의 기치 아래 민족대단합을 이룩하고 조국통일을 앞당기자고 선전하였다. 2000년 6 15정 상회담 때에도 김정일은 공산주의에도 도덕이 있습니다. 라며 김대중 전 대통령을 예우했고,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방북 당시에는 나(나이) 어린 제가 가운데 서서 찍을 수 있겠습니까? 라고 말하는 등 겸손과 효심을 부각하려 했 던 것 역시 광폭정치 인덕정치의 한 부분으로 선전하였다

28 평가 북한은 인민에 대한 끝없는 사랑을 지닌 정치지도자 인 김정일이 참다운 인덕정치 를 베풀고 있 으며, 이로 인해 북한 사회주의 체제가 옹호고수 되고 있음을 강하게 시사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광폭정치로 노동자뿐만 아니라 모든 인민을 혁명의 영원한 동행자로 보고 이들 역시도 사상적으로 개조하여 주체혁명의 위업을 다그치겠다는 것이다. 이와 같이 광폭정치와 인덕정치의 강조는 본질적으로 김정일의 위대성을 부각시켜 우상화하기 위한 것이다. 이를 통해 김정일의 권력 승계를 정당화시키고 지도자로서의 자질을 강조하여 김정일 에 대한 충성을 요구하는 강한 규율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음악정치

29 교도대 교도대는 북한의 민간인 군사조직 중 가장 핵심적인 조직이다. 6 25전쟁에 참전했던 중국인민지 원군이 1958년 완전 철수하자 북한은 그들의 빈자리를 채우기 위해 노농적위대(현 노농적위군)를 1959년 창설했다. 북한은 1962년 노농적위대를 연령에 따라 훈련 강도를 달리 하기 위해 교도대와 노농적위대로 다시 나눴다. 교도대의 대상은 17세부터 50세까지의 남성과 17세에서 30세까지의 미혼 여성으로, 행정 단위별 지역과 직장 내에 설치되어 있다. 북한의 교도대에 소속된 인원은 약 60만 명으로 추정된다. 우리 지상군의 경우 평시 예비사단이 전시에 예비군으로 병력을 보충해 정규사단 역할을 하는 것처럼, 교도대는 전쟁 발발 시 정규군에 배속되어 전방으로 투입되거나 후방지역의 방어임무를 수 행하게 된다. 교육훈련은 정규군과의 합동훈련 등 현역에 준하는 강도 높은 훈련이 실시되고 있다. 교도대는 1년에 40일에 걸쳐 현역군인과 비슷한 수준의 강도 높은 훈련을 받는다. 북한의 교도대 소속 대학생은 전시에 정규군의 병종과 병과의 초급장교 임무를 수행할 수 있도록 전공별로 조직된다. 대학생 교도대는 또 연간 190여 시간의 교내훈련과 2학년 재학 시 6개월간 군부 대에 동원되어 실시하는 입영 집체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북한에서 교도대는 지역과 직장의 규모에 따라 사단과 여단으로 편성되며, 정규 보병사단과 여단에 준하는 편제와 무장을 하고 있다. 북한 예비전력의 핵심이라고 할 수 있는 교도대는 전시와 평시 모두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예하 에서 해당지역을 담당하는 정규군 군단장이 관할 통제한다. 북한 전역에 60여 개의 교도사단 여단과 80여 개의 대학생 교도여단이 존재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교도대는 개인화기인 AK소총 외에도 정규군의 장비 현대화로 교체되는 주요 장비를 인수하여 전력을 보강한다. 교도대는 유사시 정규전 부대의 전투력을 보강할 수 있도록 평소 강도 높은 훈련을 실시하고 있다. 훈련은 야외전술 및 종합훈련, 병과별 훈련, 정규군과의 합동훈련 등이 있다. 북한은 예비전력 가운데 교도대가 가장 강력한 전투력을 갖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북한의 다 른 예비전력인 노농적위군의 훈련은 교도대보다 약하고 주로 후방경계 역할을 담당한다. 북한의 또 다른 예비전력인 붉은청년근위대 역시 만 14~16세 학생을 주요 대상으로 한다는 점에서 성인 남성 중심의 교도대보다 전투력이 강력하다고 하기는 어렵다. 북한의 예비전력 현황 북한의 예비전력 현황북한은 4대 군사노선의 전인민 무장화 에 따라 14세부터 60세까지 인구의 약 30%를 동원 대상으로 하여 현재 770만여 명에 달하는 예비전력을 확보하고 있다. 북한은 1958년 중공군의 철수로 발생한 전력공백 보충을 위해 1959년 1월 14일 노농적위대를 창설하였고, 1963년 대학생들을 주축으로 교도대를 조직하였으며, 1970년 9월에는 만 14~16세의 학생들로 붉은청년근위대를 잇따라 발족하여 주민 동원체계를 갖추었다. 이 외에도 준군사부대로 인민보안부, 경제건설현장에 투입되는 속도전 청년돌격대 등 약 40만여 명에 이르는 예비병력이 있는데, 이들은 상시적으로 즉각 동원이 가능하다. 구분 규모 구성 임무 노농적위군 570만여 명 교도대 비편성 노동자, 농민 등 직장인 위주 후방방어, 주요시설 경계 등 교도대 60만여 명 현역 제외 대학생 위주남자 17~50세, 미혼여자 17~30세 전시 지역방어, 전방증원 붉은청년근위대 100만여 명 학생 군사조직(14~16세 남녀) 전시 후방군단 지휘 하 민방위 임무 수행 준군사부대 40만여 명 인민보안부, 속도전 청년돌격대 등 계 770만여 명 * 출처 : 국방부, 2012 국방백서 (2012)

30 관련 검색어 _ 노농적위군, 붉은청년근위대

31 국가경제개발총국 북한은 2011년 들어 연초부터 경제개발에 대한 의욕을 나타냈는데, 국가경제개발 10개년 전략계 획 에 관한 내각결정을 채택하고 경제개발계획을 수행하기 위한 정부기구로 국가경제개발총국 을 설 립키로 했다고 발표했다. 새로 설립되는 국가경제개발총국은 국가경제개발 전략대상들을 실행하는 데서 제기되는 문제들을 총괄하게 된다고 하였다. 이어 개발계획을 전적으로 맡아 실행할 기구는 조 선대풍국제투자그룹 이라고 밝혔다. 북한은 또 국가경제개발 10개년 전략계획에 따라 하부구조 건 설과 농업, 전력, 석탄, 연유, 금속 등 기초공업, 지역개발을 핵심으로 하는 국가경제개발의 전략적 목표가 확정됐다. 며 이 계획이 수행되면 당당한 강국으로서뿐 아니라 동북아시아와 국제경제관계 에서 전략적 지위를 차지하게 된다. 고 주장했다. 10개년 전략계획은 2009년부터 북한이 준비해온 것으로 알려진 바 있는데, 이번에 제시된 계획의 핵심은 외국에서 1천억 달러의 외자를 들여와 식량난과 에너지난을 해결하자는 것이다. 알려진 바로 는 동 계획에서 제시된 분야는 12개로서 농업개발, 5대 물류산업단지 조성(나선, 신의주, 원산, 함흥, 청진), 석유에너지 개발, 2천만t 원유 가공, 전력 3천만kW 생산, 지하자원 개발, 고 속도로 3천km 건설, 철도 현대화 2천600km, 공항 항만 건설, 도시 개발, 국가개발은행 설립, 제철 2천만t 생산 등이다. 이중 자금조달을 담당할 국가개발은행은 2010년 1월 국방위원회 결정으 로 설립되었고, 그해 3월 첫 이사회를 열고 노동당 39호 실장인 전일춘을 이사장으로 선임한 바 있다. 북한당국이 10개년 전략계획을 발표하면서 동시에 동 계획의 실행을 전담할 국가경제개발총국을 설립한 것은 주민들에게 경제난 해결을 위한 종합계획을 제시하는 모양을 갖추어 인민경제생활 향상 이라는 업적을 쌓아야하는 만큼 경제에 총력을 기울일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북한의 정부기구에서 이른바 총국 이라 함은 내각 내에서 특정업무를 독립적으로 전담 수행하 는 성격의 기구이다. 우리의 청(처) 단위에 해당될 수 있으며, 북한의 국가경제개발총국은 기존의 국 가계획위원회에서 개발계획 및 대외경협 담당부서들을 모아 재편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강성대국론, 나진 선봉 경제특구

32 국가계획위원회 국가계획위원회는 북한의 경제정책의 기획, 수립, 지도, 감독을 총괄하는 내각의 중앙행정기관이 다. 국가계획위원회는 1946년에 발족된 북조선임시위원회의 계획부서에서 출발하여 1948년 9월 9일 북한정권 수립 시 공식 출범한 행정기관이다. 북한의 행정기관 중 명칭이 변경되지 않고 정권 수립 시부터 현재까지 명칭을 유지하고 있는 기관이다. 북한에서 경제계획의 작성과 집행 및 감독은 국가계획위원회를 중심으로 하여 도 시 군 및 기업 소에 이르기까지 일원화된 체계로 이루어지고 있다. 이는 특히 1965년 9월 23일 발표된 계획의 일원 화와 세부화 원칙 에 따라 각급 단위의 계획부서들을 국가계획위원회 직속으로 개편하는 등 계획체 제의 중앙집권화를 더욱 강화시켰다. 국가계획위원회는 계획의 일원화 원칙에 따라 경제 전 분야에 걸쳐 당의 정책을 계획화하고 집행 을 감독하는 것을 담당하고 있다. 내각의 각 위원회 및 부처들에도 계획부서가 있지만 여기서 작성한 모든 계획들은 국가계획위원회의 통제와 조정을 받도록 하고 있다. 계획의 일원화체계는 국가계획위 원회, 지구계획위원회, 내각의 성 위원회 계획부서, 도(시) 계획부서, 군(구역) 계획부서, 공장(기업 소) 계획부서를 관통하는 하나의 수직적인 체계로 되어있다. 국가계획위원회는 또한 계획의 세부화 원칙에 따라 북한 경제에 있어서 산업부문 간, 공장 기업 소 간의 계획이 상호 맞물리도록 하는 조정 역할을 담당한다. 이처럼 북한의 계획경제 운영에서 계획 의 일원화와 세부화는 서로 유기적인 상호관계 속에서 이루어지고 있다.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체계 에 따라 북한 경제의 공식부문을 운용하는 국가계획위원회에는 건설 경공업 과학교육 광업 금속공 업 기계공업 노동 농업 도시경영 발전 운수 연유 등 부문별 계획 담당부서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으 며, 이외에 경제조사 기준제정 재정원가 등의 부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2011년 북한이 국가경제개발 10개년 전략계획 을 발표하면서 동 계획의 실행을 전담하는 국가개발총국 을 설립한 이후에는 국가 계획위원회 내의 조직도 개편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검색어 _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독립채산제, 인민경제계획

33 국가안전보위부 북한에서 가장 중요한 체제 보위 규율 기관의 하나가 국가안전보위부이다. 우 리의 국가정보원과 대비될 수 있지만, 북한의 국가안전보위부는 북한 특 유의 체제 보위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주로 간첩 및 반혁명분자 색출, 주민들의 사 상적 동향 감시, 대남 정보업무 등을 담당하고 있다. 연혁 국가안전보위부가 오늘날에 이르기까지는 여러 번의 변천이 있었다. 북한정권 수립 전 1947년 2 월 북조선인민위원회 보안국으로 출발하였으며 정권 수립과 함께 내각에 소속되었다. 1951년 3월 사 회안전성(현 인민보안부)이 창설되면서 이 기구에 편입되었고, 1952년 10월에 내무성으로 이관되었 다가 1962년 10월에 사회안전성으로 복귀하였다. 1973년 5월 사회안전성 내의 비밀사찰기관이었던 정치보위부에서 분리되어 국가정치보위부로 설치되었다. 국가정치보위부는 1982년 4월 당시 정무원 에서 분리되면서 그 명칭도 국가보위부로 개칭되었다가, 1993년에 오늘날의 명칭인 국가안전보위부 로 바뀌었다. 북한은 국가안전보위부의 창립일을 1945년 11월 19일이라고 내세우고 있는데 이는 김 일성이 남포에 있던 보안간부훈련소를 처음으로 현지지도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기구가 공식 독립부처로서의 체제를 갖추고 출범한 시기가 1973년의 국가정치보위부 시기였 는데, 이는 당시 김정일의 후계구도가 가시화되는 시대적 배경과 맞물려 있다. 당시 국가안전보위부 는 김정일 체제를 옹위하고 체제의 확립과 유지에 저해되는 모든 장애요소들을 적발 색출 제거하는 것을 기본 임무로 하였다. 한마디로 김정일 유일지도체계를 구축하는 것이 이 기구가 독립 재편된 이유였다고 볼 수 있다. 기능과 역할 국가안전보위부는 기본적으로 반탐업무와 해외정보 수집 및 공작, 체제저해요소 색출 제거, 대남 접촉 회담 지원 업무 등을 수행한다. 이러한 분장에 근거하여 사상동향 감시, 반체제 사범 및 지도층 비방사건 수사, 정치범 관리 등 체제유지와 정권 위협요소를 색출 제거하는 반탐활동이 핵심 임무라 할 수 있다. 현재 국가안전보위부는 인민무력부 및 인민보안부와 함께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되어 있다. 국가 안전보위부는 당 정 군 그리고 기업소까지 파견되고 있고, 지방조직까지 설치하여 전국적인 규모를 갖추고 있다. 국가안전보위부의 중앙기구는 부장 아래 제1부부장 등 수 명의 부부장이 있고 기능별 부서들로 구성되어 있다. 산하에 행정체계에 따라 각 시 도 안전보위부 및 시(구역) 군 안전보위부와 인민군 안전보위부를 두고 있다. 최말단 지방조직으로는 농촌의 리 단위와 인민반까지 보위부원이 상주하고 있어 철저한 주민정보망을 갖추고 있다. 군대에는 중대급까지 보위부 요원을 파견하여 동 태를 감시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인민무력부, 인민보안부

34 국가영화위원회 국가영화위원회는 북한에서 유용한 선전수단으로 활용되고 있는 영화와 관련된 업무를 담당하기 위해 2009년 새롭게 설치된 기관으로 내각 소속이다. 연혁 북한은 2009년 2월 11일 최고인민위원회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국가영화위원회 를 새로이 설 치한다고 발표했다. 동 정령에서는 이 위원회가 내각 위원회급 으로 규정된다고 하여 종래의 영화업 무 담당기관을 내각 소속 부서로 격상시킨 것으로 보인다. 당시 김정일이 각별한 관심을 갖고 있는 영화 관련 업무를 더욱 효율적이고 조직적으로 관리하기 위한 것으로 풀이된다. 그간 영화 관련 업무는 내각의 문화성 안에 영화총국 에서 총괄해오고 있었다. 영화총국 내에는 영화보급지도처, 영화제작지도처 등의 부서가 편제되어 있었으며, 특히 김정일 지침과 당 선전선동 부의 지도 통제를 받으며 영화 제작 보급 업무를 수행해 왔다. 신설된 국가영화위원회는 영화총국 부서를 확대 개편한 것으로 보인다. 초대 위원장은 김정일의 후계자 시절 영화제작을 함께 한 최측근 인 영화감독 출신이자 당 선전선동부 부부장을 지낸 최익규가 맡았었다. 기능 및 역할 북한 영화는 기본적으로 교육과 선전의 수단이다. 사회주의 이념의 확산, 지도자를 위한 헌신적 충성을 유도하는 것이 최고의 목표이자 가치다. 그런 만큼 북한에서 영화는 다른 어느 예술장르보다 중요하게 취급되고 있다. 일체의 영화촬영 시설을 정부가 운영하며, 유능한 배우나 감독을 선정하여 인민배우 또는 공훈배우로 대우하는 것은 영화가 차지하는 중요성이 그만큼 크다는 것을 반증한다. 국가영화위원회를 신설한 것도 영화가 음악, 미술, 연극 등 모든 예술적 요소가 결합된 종합예술 장 르로서 대중에게 호소력과 전파력이 강한데서 연유되었다고 본다. 그뿐만 아니라 김정일의 영화에 대한 특별한 관심도 크게 작용하였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은 영화는 정치사상교양의 힘 있는 수단 이며, 문화정서교양의 강력한 무기 라고 하면서 영화제작 과정에 직접 지침을 줄 정도로 영화에 관 심이 많았다. 대부분의 북한 영화는 김정일의 지시로 긍정전형을 통한 감화 를 추구하는 내용이 강화되어, 오 류를 범한 사람이 긍정적 주인공의 감화로 오류를 시정하는 이야기로 구성되고, 시기에 따라 주제도 북한 사회의 시대성을 반영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1960년대에는 천리마운동 등 사회주의 건설을 부각시키는 창작물에 이어 부정부패 관료주의 문제를 많이 다루었고, 1990년대부터는 사회주의권 붕 괴에 영향을 받아 자주성을 강조하고 자본주의 사회의 부조리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김정일의 인덕정 치를 과시하는 시리즈 <민족과 운명>을 2006년까지 70부작으로 제작하였다. 그 후 선군혁명 문학예 술론에 따른 모범적 군인의 삶을 그린 영화가 많이 창작 보급되었고, 2009년에는 김정일 일대기 기록 영화를 시리즈로 제작하는가 하면, 3대 세습후계 구축과 관련된 것으로서 대를 잇는 충성 을 강조한 주제의 작품들도 제작되었다. 당에서 지정한 영화는 직장, 학교별로 의무적으로 감상해야 한다. 영화를 본 후에는 영화실효투

35 쟁 이라 하여 감상을 서로 이야기하는 토론회가 열리며, 어떻게 하면 영화의 주인공과 같이 될 수 있을까 의견을 교환한다. 영화 주제가를 부르는 노래경연이 열리며, 중요한 영화의 대사는 학습 자료 로 사용하며, 유명한 것은 암기하도록 요구 받는다. 북한의 주요 영화촬영소로는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선4.25예술영화촬영소, 조선기록과학영화촬 영소, 조선4.26아동영화촬영소가 설치되어 각각 명칭에 맞는 영화를 창작하고 있다. 영화인들은 문학 예술총동맹 산하 조선영화인동맹에 소속되어 집단적인 창작활동을 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문학예술총동맹, 선군혁명문학예술, 선전선동부

36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 북한은 2002년 9월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 시에 발전시킨다는 선군시대의 경제건설 방향 을 제시하였다. 북한은 이러한 전 략하에서 기존의 중공업 일반에 대한 강조보다 국방공업과 직접 관련된 기계공 업이나 전자공업 등에 제한된 자원을 집중시켜 선군정치를 경제적으로 뒷받침 하였다. 배경 1990년대 이후 심화된 경제난은 북한이 체제유지의 마지막 보루로 삼는 군수산업 및 군경제에도 위기를 초래할 가능성을 가져왔다. 이에 김정일 정권이 출범하면서 북한은 재원을 국방공업 부문에 우선적으로 배분하는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을 제기했다. 이는 김정일 입장에서 체제유지를 위해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 개발과 같은 국방공업의 발전이 최우선적으로 요구되는 상황이었으나, 경제난 으로 전반적인 재원이 축소됨에 따라 국방공업 부문에 최우선적으로 자원을 배분할 명분과 논리가 필요하였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북한은 국방공업 부문을 경제회복의 토대로 삼아야 기본 경제구조 가 유지될 뿐만 아니라, 여타 경제 부문들도 회복되고 단번도약 도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전개 과정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 수립 이후 경제발전의 기본노선 으로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 전시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전략을 고수해 왔다. 1960년대 경제건설과 국방건 설의병진노선 을 채택한 적이 있었지만 이 시기에도 그 기본노선은 중공업 우선발전과 경공업, 농업 의 동시발전론 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2002년 이후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은 중공업 부문에 서도 국방공업에 보다 우선순위를 두는 것으로써 전략적 노선변경을 의미한다.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에 따라 북한은 국방공업 부문에 기계설비와 자재, 연료와 동력을 무조건 최우선적으로 보장해주며, 군수생산을 정상화하는 것을 최우선적 과제로 설정하였다. 이때 군수생산 이란 군사적 목적에 이용되는 생산물로서 각종 무기와 탄약, 군사 장비들을 생산하는 부문 으로 국 방공업은 일반적 중공업 부문과 또 다른 측면을 의미한다. 따라서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은 국방공 업 부문에 대해 우선적 보장, 우선적 정상화, 우선적 현대화 정책시행으로 나타났다.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을 표방한 2002년 이후 북한은 중공업 도시인 함경북도 내 김책제철연합 기업소, 무산광산연합기업소, 청진광산금속대학, 5월 28일 공장 등의 주요 산업시설에 우선적으로 기 술개건사업을 전개했고, 또 다른 중공업 도시인 자강도 내 공장 기업소의 현대화와 정보화를 추진했 다. 중공업 부문에서는 구성공작기계공장을 본보기 공장으로 하여 천리마제강연합기업소, 황해제철 연합기업소, 성진제강연합기업소, 대안중기계연합기업소, 용성기계연합기업소, 낙원기계연합기업소 등이 우선적으로 기술개건사업을 착수했고, 2.8 직동청년탄광, 승리자동차연합기업소 등과 같은 특 급기업소들 역시 해외투자 및 현대화 작업을 진행했다. 평가

37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은 과거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을 확대 변형시킨 것으로, 이는 북한의 경 제구조를 더욱 왜곡시키고 민생경제 부문의 어려움을 가중시키고 있다. 일찍이 중공업 우선발전 노 선에 따라 재원을 중공업 부문에 집중투자 함으로써, 경공업과 농업의 발전을 심각하게 위축시켜 북 한주민들은 생활필수품 부족을 겪어 왔는데,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이 이러한 현상을 더욱 심화시 켰다. 결국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은 전체 경제 발전의 불균형성을 확대하여 주민 생활을 더욱 힘겹 게 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군사 경제 병진 노선, 선군경제건설 노선, 중공업 우선 발전 노선

38 국방위원회 국방위원회는 북한의 국방정책을 총괄적으로 관장하는 최고국방지도기관 이다. 1998년 9월 주석제가 폐지되면서 북한의 최고정치기관으로 격상되었다. 연원 국방위원회는 1972년 12월 27일 채택된 사회주의헌법에 의해 설치됐다. 출범 당시에는 중앙인민 위원회 산하기관이었지만 1990년 5월 최고인민회의 결정에 따라 중앙인민위원회로부터 분리되어 독 립기관이 되었고 1992년 4월 개정헌법에 따라 헌법기관이 되었다. 초기에는 주석이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 국방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일체의 무력을 지휘 통솔하도록 되어있었으나, 1992년 4월 개 정된 사회주의헌법에서는 국방위원장이 일체의 무력을 지휘 통솔하도록 규정되었다. 김일성 사후인 1998년 9월 5일에는 인민무력부를 중심으로 하는 국방 군사 분야의 중앙기관을 설치하거나 폐지할 수 있고, 중요 군사 간부를 임명할 수 있으며, 전쟁 선포 권한을 가진다는 헌법 개정이 이루어져 국방 위원회의 기능이 강화되었다. 200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에서 국방위원회의 위상과 역할은 더 강화되었다. 국 방위원회 구성 인원이 늘어났고 그 범위도 확대되었다. 2003년 최고인민회의 제11기 제1차 회의에서 는 9명이었는데 12명으로 3명이 더 추가되었고, 군부인사 이외에 사회통제기구인 당 행정부, 국가안 전보위부, 인민보안부, 군 총정치국 등의 책임자들이 총망라됐다. 그런데 이때까지만 해도 인민보안상은 국방위원회 구성원이었지만 인민보안부는 국방위원회 산 하 기구가 아닌 내각 소속이었다. 기구와 그 책임자 간 명령계통에 불일치가 있었던 것이다. 이에 북한은 2010년 4월 인민보안성을 인민보안부로 개칭하고 이를 국방위원회 산하에 배치함으로써 국 가안전보위부, 인민무력부, 인민보안부 등 공안기구 전부가 국방위원회로 모아지게 되었다. 국방위 원회의 공안기구에 대한 일원화된 통제가 가능하게 된 것이다. 기능과 역할 국방위원회는 다음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북한 헌법 제109조). 1 선군혁명노선을 관철하 기 위한 국가의 중요정책을 세운다. 2 국가의 전반적 무력과 국방건설사업을 지도한다. 3 조선민주 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명령, 국방위원회 결정, 지시집행정형을 감독하고 대책을 세 운다. 4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명령, 국방위원회 결정, 지시에 어긋나는 국 가기관의 결정, 지시를 폐지한다. 5 국방부문의 중앙기관을 내오거나 없앤다. 6 군사칭호를 제정하 며 장령이상의 군사칭호를 수여한다. 한편, 국방위원장은 북한의 최고영도자 로서 전반적 무력의 최고사령관이며 국가의 일체 무력을 지휘 통솔한다. 북한은 2009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장의 중요성과 그 지위를 승격하였다 년 헌법에서는 국가를 대표하던 직위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었는데, 이제는 국가의 영도자로 서 국가전반 사업을 지도하게 되었다. 이는 국방위원장이 단순한 국방부문의 수장이 아니라 실질적 으로 북한의 최고통치자라는 것을 천명한 것으로, 사실상 주석을 대체하는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고

39 볼 수 있다. 2012년 4월 헌법개정에서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으로 추대하고 김정은은 예전 국 방위원장과 같은 임무와 권한을 가진 제1국방위원장에 추대되었다. 제1국방위원장의 임무와 권한은 다음과 같다(북한 헌법 103조). 1 국가의 전반사업을 지도한다. 2 국방위원회 사업을 직접 지도한다. 3 국방부문의 중요간부를 임명 또는 해임한다. 4 다른 나라 와 맺은 중요조약을 비준 또는 폐기한다. 5 특사권을 행사한다. 6 나라의 비상사태와 전시상태, 동 원령을 선포한다. 또한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명의로 명령을 내며, 최고인민회의에서 토의할 의안을 직접 제출할 수 있다. 이는 김정은의 교시 가 당정책화 하고 그것이 법제화하는 방식으로 작동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것으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국가안전보위부, 북한 헌법, 인민무력부, 인민보안부, 주석

40 국제친선전람관 국제친선전람관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각국의 국가수반이나 저명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을 모아 놓은 전시관이다. 국제친선전람관은 평양에서 북쪽으로 160km 떨어진 평안북도 향산군 묘향산 계곡 에 세워져 1978년 8월 26일 개관하였다. 연건축면적 4만 6천m2에 100여 개의 전시실을 가지고 있다. 김일성이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곳은 6층 규모의 한식 건물이다. 이 건물은 나무를 하나도 쓰지 않고 지은 것이지만 나무로 지은 것처럼 보이며, 창문도 하나도 없지만 있는 것 같이 보이는 건물로서 빛과 습도를 자동적으로 조절하게 되어 있다. 김정일이 받은 선물을 전시하는 곳은 2층 규모의 서양식 건물로 1989년 3월 31일 개관하였다. 김일성이 180여 개국의 인사들로부터 받은 22만여 점의 선물이 국가별로 진열되어 있다. 김정일 이 받은 선물은 2007년 당시 5만 5천여 점이 전시되어 있었다. 스탈린이 1945년에 보낸 방탄 리무진, 루마니아 차우세스쿠가 보낸 박제된 곰의 머리, 리비아 카디피가 보낸 금장 검, 장쩌민이 보낸 수예 화와 도자기 꽃병, 쿠바의 카스트로가 보낸 악어가죽 가방, 빌리 그래엄 목사의 박제된 새, 어떤 독일 작가의 베를린 장벽의 벽돌조각 등 오래 전에 받은 선물들이 있다. 2000년에 미국의 울브라이트 국무 장관은 마이클 조던의 서명이 있는 농구공을 선물하였고, CNN의 창시자 테드 터너는 시계를 선물했 다. 남측 인사들로부터 받은 선물들을 모아 놓은 전시관도 마련되어 있다. 국제친선전람관은 이처럼 명품 선물들을 전시함으로써 북한의 지도자가 세계 각국으로부터 존경 과 지지를 받고 있다는 선전을 하기 위한 시설이다. 이 기념관은 북한주민과 군인 학생 대표들이 견 학하는 우상화 순례지일뿐만 아니라 북한을 방문하는 외국 인사들의 참관코스로 활용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금수산태양궁전

41 국토완정론 김일성은 1948년 정권수립 다음날인 9월 10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정부 정강 을 발표하고 국토완정과 민족통일의 선결조건으로 미 소 양국 군대의 동시철수를 내세웠다. 여기서 국토완정이라 고 함은 전 한반도를 공산화 한다는 것을 말한다. 다시 말해 민주기지론에 입각한 북한 지역에서의 혁명기지 구축이 어느 정도 이루어짐에 따라 전 한반도의 공산화를 통한 통일을 적극적으로 추구하 겠다는 것을 의미했다. 북한은 그들이 이른바 전 조선혁명을 위한 혁명기지를 건설했으나 남한은 미 제국주의자들에 의 해 강점되어 미( 未 ) 해방지구로 남아있는 만큼 미 제국주의 침략 군대를 몰아내고 식민지 통치를 청 산하여 남조선 인민들을 해방시키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기치하에 조국통일을 완성해야 한다고 주장했는데, 이것이 국토완정인 것이다. 이 국토완정이야말로 당시 북한 정권의 일차적 사명이었으며 이를 위해 화전 양면의 전략을 택하 였다. 그 하나는 북한군을 강화하고 소련의 군사적 지원을 받으면서 무력남침을 준비해 나가는 것이 었다. 다른 하나는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을 발족시켜 연석회의, 남북총선거, 남북 국회 통합 등 일련 의 평화공세를 전개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마침내 1950년 남한에 대한 전면 기습공격으로 이른바 민족해방전쟁 을 일으켜 국토완정 을 실행하고자 했으나 유엔군의 참전으로 그들의 목표는 좌절되었다. 그 이후 북한은 1960년대 다시 군사노선으로 돌아설 때까지 당분간 평화통일을 내세우며 경제적 기반을 복구하고 정치적 안정을 기하는 등 체제 정비에 진력하면서 이 국토완정이라는 말도 잠적했다. 관련 검색어 _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민주기지론

42 국토환경보호사업 국토환경보호사업은 토지정리를 비롯한 도로, 하천, 산림 및 자연보호 등 국토 의 개발과 보호 관리사업 총체를 의미한다. 배경 북한은 1984년 김정일 저작 <국토관리사업을 개선강화할데 대하여>를 발표한 이후 국토관리사 업을 중심사업으로 추진해 왔다. 그러나 경제난을 겪으면서 보다 적극적인 국토관리사업을 전개하기 시작한다. 대표적인 사업은 1996년 10월에 처음 실시된 대규모 국토관리총동원기간 사업이다. 이 기간 동안 주민들은 나무심기, 도로정비, 강 하천 정비, 제방건설, 강바닥 파기 등에 동원되며 이 중 가장 무게를 두는 사업은 나무심기 사업이다. 북한이 이처럼 국토관리총동원기간을 설정하고 전 주민을 동원해 대대적인 국토정비사업을 전개 하는 것은 지난 1970년대부터 농경지 확대를 위해 무분별하게 진행한 자연개조사업 의 결과로 인해 국토가 황폐화된 데 따른 것이다. 더군다나 지난 1995년 대홍수 이후 매년 자연재해(냉해, 가뭄, 홍수 등)를 경험했던 북한은 이를 미연에 방지하고 대비하기 위해 국토관리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나아가 식량난 해결을 위해 농경지 부족 원인을 분석하고, 개간지 확보를 통해 식량생산을 높이기 위한 목적 도 있다고 보아진다. 주요 내용 북한은 국토환경보호사업을 추진하면서 1996년 10월 효율적이고 체계적인 국토관리를 위해 내각 에 전문부서(국토환경보호성)를 설치하고, 3월 2일 식수절과 함께 10월 23일을 국토환경보호절로 제 정하는 등 국토환경보호사업의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국토환경보호사업은 두 측면으로 전개되고 있다. 하나는 산림조성 10개년 계획기간(2001~2010년) 을 수립하고, 도시와 농촌의 수림화 원림화 를 실현하는 것이다. 이를 실현하기 위한 방법으로는 국토관리총동원기간 을 설정하여 매년 봄(3-4월), 가을 (10-11월) 연 2회에 걸쳐 국토관리사업의 대중적 참여를 촉구하고 있다. 또 다른 하나는 국토환경보 호사업의 정보화 를 목표로 1 화재 홍수피해 최소화를 위한 위성사진 분석능력 향상 2 산림자원 데이터베이스화 등 업무의 전산화를 추진하고 있다. 국토관리총동원 기간에는 소학교부터 대학생, 일반 주민 모두가 참여하여야 하며, 주민동원의 효 과를 높이기 위해 부문 일꾼대회를 비롯해, 궐기모임을 개최하는 등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한다. 또한 국토관리총동원 사회주의경쟁요강 을 채택해 국토관리사업에 등수를 매기고, 잘한 단위에는 자동차 를 비롯한 일정한 상품을 부상으로 내려주기도 한다. 최근까지도 국토관리사업은 지속되며 확대되는 추세이다. 평가 국토관리사업은 과학적 시스템을 기반으로 하여 기술적으로 전개되기보다, 도로건설과 보수, 도

43 시와 마을의 정비 및 산림조성 등 주민동원사업의 일환으로 전개되고 있다는 점에서 주민들의 불만 이 누적되고 있다. 주민동원사업은 주민들의 열의와 헌신성에 의해 긍정적 성과를 창출할 수도 있지 만, 요령과 형식주의에 의해 낭비와 비효율의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 관련 검색어 _ 토지정리사업

44 군무생활 10대 준수사항 군무생활 방침은 1977년 11월 30일, 조선인민군 제7차 선동원대회에서 김일성의 정치사업을 잘 하여 인민군대의 위력을 더욱 강화하자 는 연설에서 발표되었다. 이는 군대의 정치사업이 잘 진행되 지 못하고 있으며, 군인들 속에서 군사규정을 잘 지키지 않는 현상들을 없애기 위해 제시되었다. 김 일성이 동 연설을 통해 강조한 군무생활 방침 을 김정일이 직접 10대 준수사항 으로 구상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군무생활 10대 준수사항은 인민군이 반드시 지켜야할 10가지의 사항이며,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첫 번째는 군사규정을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다. 이는 군인들이 내무규정과 규율규정을 비롯한 군사 규정들에 대한 학습의 강화를 의미한다. 두 번째는 무기에 정통하며 철저히 관리하는 것이다. 세 번 째는 군사명령을 철저히 집행하는 것이다. 이는 최고사령관의 명령에 근거하여 지휘관들의 명령을 반드시 집행하는 기풍을 말한다. 네 번째는 당 및 정치조직들에서 준 임무를 반드시 집행하는 것이 다. 이는 당중앙위원회에서 준 과업과 당중앙위원회의 결정과 지시를 집행하기 위하여 각급 당조직 들과 사로청조직들에서 준 과업을 반드시 집행하는 것을 뜻한다. 다섯 번째는 국가기밀 군사기밀 당 조직기밀을 엄격히 지키는 것이다. 여섯 번째는 사회주의 법과 질서를 철저히 준수하는 것이다. 이는 노동자, 농민, 병사, 사무원을 비롯한 전체 인민들을 보호하며 그들의 이익을 옹호하는 것을 의미한 다. 일곱 번째는 군사정치훈련에 반드시 참여하는 것이다. 여덟 번째는 인민을 사랑하며 인민의 재산 을 침해하지 않는 것이다. 이는 군민일치 에 의거해서 군인들이 인민들의 이익을 침해하지 않도록 사업하는 것이다. 아홉 번째는 국가재산과 군수물자를 철저히 보호하며 절약하는 것이다. 열 번째는 군대 안의 상하가 일치단결하는 것이다. 이는 혁명적 동지애 를 바탕으로 군관은 병사를 사랑하고, 병사는 군관을 존경하며, 군관과 병사들 모두가 친형제처럼 서로 사랑하는 것을 말한다. 북한은 군인들에게 군무생활 10대 사항을 준수시키기 위해 군대 안의 선전원, 선동원 등의 정치 일꾼들이 군인들 속에서 정치사업을 통해 일을 진행 할 것을 주문했다. 이는 군의 밑바닥에서부터 군대에 대한 당적 지도를 강화한 것으로 볼 수 있으며, 이는 사회주의 군대의 일반적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특히 이 가운데 4항 당 및 정치조직들에서 준 임무의 어김없는 집행 은 최고지도자가 당을 통하여 군권을 장악하고 군을 통제한 것으로 볼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관병일치, 군정배합, 전민군사복무제

45 군민일치 운동 군민일치 운동은 군대와 인민이 한마음 한뜻으로 굳게 뭉쳐 서로 존경하고 사랑하며, 생사고락을 같이하면서 혁명의 승리를 위하여 함께 싸워나가는 기풍을 의미한다. 연원 북한은 군민일치 운동의 연원을 김일성이 항일무장투쟁 시절 고기가 물을 떠나 살 수 없는 것처 럼 유격대가 인민을 떠나서 살 수 없다. 고 언급했다는 데서 찾고 있다. 북한은 군대가 인민의 이익과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위하여 투쟁하고 있기 때문에 군대와 인민은 하나의 목적을 위하여 싸우는 계 급적 전우이며, 혁명적 동지 관계에 있다고 주장한다. 따라서 군민일치 관계는 오직 인민과 군대의 이해관계와 목적이 같을 때에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한다. 군대는 언제나 인민의 이익을 보호하고 이들을 진심으로 도와주는 입장에서 사고하고 행동해야 하며, 인민은 자신들을 보호하는 군대를 혈 육과 같이 아끼고 사랑하며 모든 것을 다하여 도울 것을 요구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하여 군민일치 기풍이 확립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주요 내용 군민일치 운동은 군의 대민지원과 주민들의 군대지원의 양방향으로 이루어지고 있다. 군의 대민 지원은 농촌일손돕기, 농촌시설지원 및 재해복구지원 등이 있고, 주민들의 군대지원은 군의 예비대 역할, 군수물자 및 군 장비 헌납, 군 의료지원 등이 있다. 김일성 시기 군민일치 운동은 하나의 노력동원운동으로 사회주의 혁명의 추동세력인 북한군에 대한 주민지원사업 명목으로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김정일이 1991년 최고사령관에 취임하면서 군 위상 제고, 군 영향력 증대와 더불어 군민일치 운동이 체계화되어 정권유지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북한은 군민일치 운동의 확산을 위하여 1992년 3월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으로 군민일치 모범군 (시, 구역) 칭호 를 제정하고, 같은 해 4월 헌법을 개정하면서 군민일치의 개념을 국가운영의 기본 방향으로 격상시켰다. 군민일치 모범군 칭호 는 시 군 구역을 단위로 군부대 지원에서 특출한 모범 을 보인 단위들에게 중앙인민위원회( 이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수여하는 명예칭호 이다. 이 칭호는 1992년 6월 개성시 장풍군에 수여된 것을 시작으로 수많은 모범 단위들에 수여되었 다. 이후 군민일치 모범군 칭호 는 군민일치 모범군 칭호 쟁취운동 으로 전개되었는데, 사실상 지역 별 군부대 지원경쟁을 벌리는 식이었다. 군민일치 모범군 칭호 쟁취운동 은 일반 주민들로 하여금 각종 보급품의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 고 있는 군부대를 지원하고 위문하도록 하여, 군의 사기를 진작시키려는 것으로 군( 郡 )별 노력경쟁운 동의 형태로 추진하고 있다. 각급 학교와 군부대를 자매결연 형식으로 연결시킴으로써 군민일체감을 조성하고 애군사상을 고취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군민일치 운동 강화차원에서 북한은 우리초소-우리학교운동 을 활발히 전개하고, 우리초소-우리공장운동, 우리초소-우리농장운동 으 로 확산 운용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군민일치의 모범적 주민들을 영웅으로 내세워 대중운동을 추동하였다

46 평가 북한의 군민일치 는 표면적으로는 군대와 인민이 서로 도와주고 보호해준다는 의미에서 공생적 관계를 나타낸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김정일 시대에는 혁명의 기둥, 주력군인 인민군대의 투쟁정신 과 투쟁기풍을 인민들이 본받고 따라 배우도록 하는 데서 군민일치가 완벽해진다고 하였다. 이는 인 민이 군을 원호해준다는 강제적 측면이 더욱 강하다고 볼 수 있다. 김정일의 선군정치로 인한 체제의 보위세력으로서 군을 강화시킨 것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군민일치 운동에도 불구하고 병사들의 일탈현상으로 인해 주변 지역 사람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식량난으로 배고픔을 참지 못한 병사들이 밤에 부대 주변 민가에 내려가 가축, 생필품을 약 탈해 가는 등 절도, 강도 행위가 점증하였다. 이로 인해 주민들의 군에 대한 불신감이 증폭되자 북한 은 각 군별로 이에 대한 예방책 수립 및 군 내부의 각종 비행 근절을 촉구하기도 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군무생활 10대 준수사항, 군정배합

47 군사 경제 병진 노선 북한의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은 국방력 강화와 경제건설을 동시에 추진한다는 방침이다. 북한은 이 노선의 채택 이후 군수공업에 우선적으로 자원을 배분함에 따라 차츰 민생경제는 만성적인 침체국면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배경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을 채택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는 사회주의 진영 내 이념분쟁 및 중 소분쟁이 었다. 특히 1962년 10월 발생한 쿠바 위기에 대한 소련의 태도에 북한은 크게 실망하였다. 소련은 미국과 타협하여 사회주의 약소국 쿠바의 안보문제를 도외시 했을 뿐 아니라 북한의 군사적 지원 요청을 거절하였다. 또한 쿠바 사태 해결 이후에도 1965년 남한이 일본과 국교정상화를 매듭지음으로써 한 미 일 3각 안보체제를 갖추고, 베트남전쟁의 발발 등 긴장이 고조되는 가운데 북한은 군사력 경쟁에서 끊임없 이 우위에 서고자 무력을 강화하기 시작하였다. 이처럼 북한은 1960년대 중 소분쟁과 함께 한반도를 둘러싼 긴장의 고조 등 국제 정세를 반영한 사회주의 건설노선의 하나로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을 채 택하였다. 주요 내용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은 196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5차 전원회의를 통해 처음으로 제시되 었다. 이 회의에서는 전체 당원과 근로자들은 한 손에 무기를 들고, 다른 한 손에 낫과 망치를 들고 조국을 보위하며 동시에 사회주의를 건설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후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은 1966 년 10월 제2차 당대표자회에서 전면적으로 제기되었고,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채택되었다.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은 사회주의 경제건설 시기에 국방력 강화도 동시에 추진하겠다는 것을 의미 한다. 따라서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은 많은 물질적, 인적 자원을 국방으로 돌리게 되었다. 이로 인해 국방비는 1960년 내내 가파른 상승곡선을 그렸다. 1960년 재정의 3.1%에 불과했던 국방비는 북한 전체 예산의 30% 이상의 비율로 확대되게 된다. 년도 국방비(%) 자료 : 고승효, 현대북한경제 입문, 대동출판사, 년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을 제시하면서 북한은 전국토의 요새화, 전군의 간부화, 전인민의 무 장화, 전군의 현대화 등 4대 군사노선도 채택하였다. 나아가 1967년부터는 적극방어 개념에 입각하여 북한의 군부 강경파들이 부상하기 시작하였다. 이들은 남북 간긴장관계를 자신들의 당권 장악에 이 용하기 위해 군사적으로 모험주의 노선을 걸었다. 그 결과 1968년 1.21 청와대 습격사건, 미국 푸에블 로호 나포사건과 1969년 울진 삼척 무장공비 침투사건, 미 정찰기 EC-121기 격추사건까지 일으키면 서 군사적 대립과 충돌이 확산되는 결과도 수반했다

48 평가 1960년대 중반부터 추진된 군사 경제 병진노선은 북한 경제에 많은 문제점을 야기했는데, 가장 큰 문제는 북한의 산업을 군산복합형 으로 변형시켰다는 점이다. 즉 중화학공업이 기계 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군수산업에 계열화됨으로써 군수산업과 민수산업 간의 구별이 어렵게 되었다. 군수산업은 민수산업을 관리하는 제1경제위원회 와 별도로 구성된 제2경제위원회 에서 관리됨으로써 북한 경 제구조는 제1경제(민간경제)와 제2경제(군수경제)로 이원화되었다. 또 다른 문제점으로는 군수산업으로 투자재원이 집중되어 민수산업의 성장이 제약되고 소비생활 부문의 발전이 저해되었다는 점이다. 이 노선이 채택된 이후 북한 총예산에서 군사비 비중은 급격하 게 증가하였다. 1966년까지만 해도 북한 총예산에서 군사비의 비중은 약 10%정도였지만, 1967~1971 년 사이에 30%이상으로 증가되었던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 선군경제건설 노선, 제2경제 위원회,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

49 군사칭호 북한에서는 군인의 계급(rank)을 군사칭호 라고 부른다. <조선말대사전>에서는 군사칭호를 군 인의 군사적 전문 부문과 자격 및 상하급 관계를 규정하는 국가가 제정하는 칭호 라고 설명하고 있 다. 북한군의 계급구조는 서방국가는 물론, 공산국가와도 다소 다른 형태를 보이고 있다. 계급장은 소위에서 대장까지 각급 군관과 장성이 모두 별을 사용하고 있으며, 별의 숫자와 크기 및 바탕무늬로 계급과 군이 구별된다. 차수는 특대성 (왕별)으로 되어있으며, 원수는 특대성( 特 大 星 )과 함께 북한의 국장 이 표시되어 있어 강력한 권위를 부여하고 있다. 북한의 군사칭호는 1952년 12월 31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에서 최초로 제정되었으며, 군사 칭호는 크게 원수, 장령, 군관으로 분류된다. 원수급은 (대)원수, 차수이며, 장령급은 대장, 상장, 중장, 소장이다. 군관급에서 좌급군관(영관급)은 대좌, 상좌, 중좌, 소좌이다. 마지막으로 위급군관은 대위, 상위, 중위, 소위이다. 원수급은 북한 특유의 군사계급으로 원수-차수로 나누어지며, 6 25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1953 년 2월 최고인민회의 결정( )에 의거해 김일성과 최용건 민족보위상이 각각 원수 와 차수 에 올랐다. 특히, 대원수 계급은 1992년 4월김일성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당중앙위 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공동 결정으로 김일성을 대원수로 추대함으로 써 최초로 등장한 계급이다. 김정일은 사망한 이후에야 대원수에 추대되었다. 원수는 공화국 원수 와 인민군 원수 로 나누어지는데, 김정일은 생전에는 공화국 원수를 가지고 있었고 김정은은 2012년 7월에 공화국 원수에 올랐으며, 리을설은 인민군 원수로 불린다. 한편, 인민군 사병은 사관(하사관)과 병사로 나뉜다. 사관에는 특무상사, 상사, 중사, 하사가 있으 며 병사는 상등병, 전사로 구분됐다. 그러나 1998년 4월 사병 계급체계 세분화 작업을 통해 전사와 상등병의 2단계를 전사 초급병사 중급병사 상급병사의 4단계로 세분하고 군 복무기간을 13년으로 연장했다. 이러한 조치는 1999년 4월 김정일의 명령에 의해 이루어진 것으로 장병들의 불 만을 무마하고 복무기간 연장에 따른 장기 복무자의 사기진작과 우대를 위해 취해진 것이다. 북한이 취한 이러한 계급 세분화의 배경은 신참병사와 고참병사 간의 위계질서가 문제시되어 왔 는데 이 조치 이후 상등병들은 계급 세분화 조치에 대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인 반면, 일부 사관들은 계급이 재조정돼 사관에서 (상급)병사로 떨어지는 경우도 발생해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고 있다고 한 다. 북한은 이 같은 기본 계급체계 외에 1957년부터 초기복무사관 제도를 운영하고 있다. 초기복무 사관은 별도의 계급체계가 아니고 레이더, 통신기기 등 특수 분야에서 복무하던 사병들을 제대시키 지 않고 장기 복무시켜 공백 기간 없이 전문성을 유지하려는 의도에서 만든 제도이다. 관련 검색어 _ 관병일치, 전민군사복무제

50 군수동원총국(군수동원지도국) 국방위원회 산하 기관인 군수동원총국은 북한에서 연유(연료용 기름), 식량, 군복류, 자동차, 타이 어 등 군대와 민간에서 사용하는 전시보급물자의 비축을 담당한다. 군수동원총국의 주된 임무는 해 당 도, 시, 군, 구역 산하 사유기관을 포함한 일체 공장기업에서 생산된 모든 재화를 관리 비축 운용 하는 것이다. 북한은 인민무력부 양식국에서 군사용 비축미를 관리하고, 민군 공용은 군수동원총국에서, 민수 용 비축미는 내각 양정부 2호관리국에서 각각 관리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를 위해 군수동원총 국은 각 도에 관리국을 두고 있으며, 관리국은 각 군에 2~3개의 관리소를 두고 있다. 도에 있는 군수 동원총국 관리국은 공습이 어려운 산간지대이면서 교통이 용이한 곳에 주로 위치하고 있다. 북한의 전시물자 비축에서 가장 말단 단위인 관리소는 관리물자의 특성상 비밀에 속하거나 대량 의 전시보급물자를 비축하고 있다. 식량은 3~4년, 천과 피복류는 7~8년에서 10년 이상 보관하는 것도 있다. 군수동원총국의 중요 임무 가운데 하나는 4호물자(전시 소비품과 소비품 원자재) 비축을 위한 지 도활동이다. 북한은 전시생활에 필요한 4호물자를 6개월치 확보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전해 지고 있다. 4호물자 비축은 군수동원총국이 주관하고, 매년 징수할 4호물자 계획을 국방위원회 검토 를 거쳐 당중앙군사위원회의 명령으로 상업관리소나 공장 기업소에 하달하며, 내각의 각 성 부를 통 해 생산된 4호물자를 징수한다. 군수동원총국은 전시물자 마련을 위해 외화벌이 사업에도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국방위원회

51 군정배합 군정배합은 최고지도자의 지시나 당의 방침이 군에 하달될 경우 군관과 정치지도원(정치군관)들 로 구성된 초급 당위원회를 소집해 이를 논의하는 것을 말한다. 곧 군사지휘관과 정치일꾼이 일심동 체를 이루는 것으로서 군대 내의 통합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군대 내 당위원회에서는 야전 경험이 없는 정치지도원들이 지휘관들의 고유 업무에 사사건건 간 섭하여 불화를 조성하는 것을 방지하고, 지휘관들의 결정에 제동을 걸거나 의견대립을 벌여 갈등을 빚는 일이 생기지 않도록 이를 예방하자는 뜻도 담겨있다. 북한은 군대 내 군정배합을 강조하면서, 다른 부문에서도 북한군의 군정배합을 따라 배울 것을 추동하고 있다. 언론매체를 통해 모든 단위에서 인민군대의 군정배합의 모범을 따라 배워 당, 행정 의 일치를 확고히 보장해야 한다. (노동신문, )라고 강조하면서, 그러한 예로 함경북도 무산 광산연합기업소 등에서 북한군의 군정배합을 따라 배워 당 행정의 일치 를 이루자는 운동이 확산되 고 있다고 선전하였다. 북한의 군정배합 강조는 북한 헌법에도 반영되어 있다. 북한은 2009년 헌법을 개정하면서 제4장 국방 부문에서 군정배합 이라는 용어를 추가함으로써 이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한편 군정배합은 그 실현에 있어 정치일꾼들의 처신문제를 중요하게 다루고 있다. 북한은 정치일 꾼이 처신을 바로하지 못하면 당의 권위가 훼손되고 군정배합이 헝클어지기 때문에, 군대에서 정치 일꾼의 처신이 중요하다고 주장하고 있다. 다시 말해 군에 대한 당의 영도는 당조직을 통하여 실현되 며 당조직은 정치일꾼들에 의하여 움직이고, 정치일꾼은 부대에서 군인들을 교양하며 당정책을 관철 하기 위해 그들을 조직 동원한다는 것이다. 군부대 내 부대기강이 일부 이완되는 현상을 극복하기 위해 군정배합을 강조한 측면도 있다. 그 러나 실상, 군대의 당위원회는 집체적 지도기관이지만 정치군관이 일상적으로 당정치사업을 관장한 다는 점에서 당위원회는 곧 정치군관이며 이는 그대로 부대 내의 권력관계를 규정한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당적 통제를 강화하기 위해서 정치군관의 우위가 나타나고 있으며, 이는 북한군의 전투력 및 군 지휘체계의 효율성을 약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관병일치, 군무생활 10대 준수사항, 군민일치운동

52 군중문화사업 군중문화사업은 북한에서 대중들에 대한 정치사상교양과 기술문화 지식수준의 제고를 위해 대중 적으로 진행하는 사업이다. 군중문화사업은 문학과 예술을 대중화하여 광범한 근로자들을 문학예술활동에 참가시키는 것을 가장 주된 사업으로 삼고 있다. 따라서 군중문학예술에서는 전문 작가나 예술인이 아닌 대중에 의해 집단적 군중적으로 창조되고 발전하는 것을 강조한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문예정책에 의해 공장 광 산 협동농장 학교 군대 등지에서 문학예술소조들이 조직 운영되어왔으며, 예술소조 축전 등이 널리 행해지고 있다. 군중문화는 우리의 대중문화에 상응하지만, 정치적 목적에 의한 군중동원방식으로 작동되는 특 징을 가지고 있다. 북한은 군중문화사업을 활발히 전개하며 인민들 속에 있는 재능을 찾아내고 발 양시켜 노동하는 사람들 자신이 가는 곳마다에서 문학예술활동에 참가하고 예술을 마음껏 즐길 수 있게 하여야 한다. 고 강조하고 있다. 북한에서 문화는 정치적 수단으로써 북한 체제와 당정책을 정당화, 합리화하는 역할이 크다. 북한 에서 정의하는 문화 는 근로자들을 공산주의적으로 교양하여 온 사회를 혁명화, 노동계급화하는데 복무하는 수단 이며, 모든 문화 활동은 공산주의 인간개조, 노동의욕 제고 등 당정책을 구현하는데 목표를 두고 있다. 결국, 북한에서의 문화란 독자적인 목적과 의미가 아닌 통치이데올로기에 입각한 북한식의 공산사회를 구현하는 수단이다. 요컨대, 북한에서의 군중문화는 우리가 이해하는 대중문화 와는 다르다. 그리고 군중문화사업은 개인보다는 집단에 의해 창조되고 광범위한 군중이 공유하여 체제의 동력을 재생하는 북한 문화예술 정책의 일환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군중예술론, 기동예술선전대,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53 군중예술론 군중예술론은 예술의 본질이 독창적이고 창조적인 개인에 의해서가 아니라 집단에 의해서 창조 되고 향유되는 것을 말한다. 이는 곧 창작의 주체가 개인보다는 군중이나 집단임을 의미하며 한편으 로는 대중의 참여를 고무하는 이론이다. 군중예술론은 문예창작이 타고나거나 선천적인 것과 같은 재능의 문제가 아닌 사회적 실천의 산물이라고 주장하는 이론이다. 또한 창작은 신비한 것도 아니며 단지 혁명적 세계관으로 튼튼히 무장하기만 하면 된다고 주장한다. 군중예술론은 1950년대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시기에 등장한 문예정책으로 근로대중에게 문학예 술활동을 장려함으로써 문학예술을 대중화, 생활화하여 주체사상과 혁명적 군중노선을 구현하고자 한 것이었다. 문학예술의 군중화는 1982년 김정일이 전국문학통신원 열성자회의 참가자들에게 보낸 서한에서 문학예술활동을 대중화할 데 대한 당의 방침 관철에서 문학통신원들의 역할을 높이자. 고 강조한데서 비롯되었다. 이 서한을 통해 창작의 군중화 라는 당의 방침을 강조하여 모든 군중이 예 술을 통해 좀 더 쉽게 사상을 접할 수 있게 하였고, 이로 인해 집체작과 집체적 예술 형태들이 등장하 게 되었다. 김일성의 교시에 토대를 두고 있는 군중예술론의 요지를 정리하면, 문학예술에서 전문가 중심주 의는 금지 파괴되어야 하고, 군중적으로 발전해야만 하며, 선천적인 재능이 필요한 신비주의의 소산 이 아니라 중학교(우리의 중 고등학교)만 나오면 누구나 가능한 작업이라는 것이다. 군중예술론은 북한 문예의 한 특징을 보여주는 것으로 개인의 창조적 재능을 부정하는 집단주의 와 종합예술의 우월론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는 군중이라는 집단을 강조함으로써 예술의 대중화를 이야기할 뿐만 아니라, 온 주민이 모여 집단행사를 치르는 것을 통해 일체감을 형성 할 수 있는 효과를 준다. 이것은 예술을 하나의 도구로 사용해 북한 전체를 하나의 집단으로 인식시 킴으로써 개인보다 집단을 우선시 여기게 만들고 있다. 결국 북한에서 예술은 독창성이나 창조성보 다는 정치적 목적에 구속되어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군중문화사업,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수령형상문학, 혁명가극

54 군축 및 평화연구소 군축 및 평화연구소는 북한 외무성 산하의 단체로 대내외 각종 초청회의나 학술회의 등에 참석해 외교 및 군사정책을 홍보하기 위해 1988년 10월에 설립되었다. 연구소에서는 소장과 부소장, 연구원 등 50여명이 일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연구소의 주요 관심분야는 군축 문제, 한반도 통일 문제, 국제평화 문제 등이며, 주요 업무는 각종 국제회의에 요원을 선발 파견하며 북한을 방문하는 서방 측 인사들과 접촉하여 북한의 외교 및 군사정책을 대외적으로 선전하는 역할을 하고 있다. 외교관 출신 탈북자들에 따르면, 군축 및 평화연구소는 비상설기구이며 북한 외무성을 주축으로 대남 및 군 관련 기관 관계자로 구성되어 있다고 한다. 이 연구소에는 외무성 내에서 남북문제를 관 장하는 조국통일국 을 중심으로 국제기구국 의 군축과, 미국국, 일본국, 노동당 산하 국제문제연구소 와 남조선문제연구소, 인민무력부 등의 군축 전담 관계자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은 동 연구소를 설립한 이후, 군축 문제에 대한 주장을 뒷받침해오고 있으며, 한반도 평화 및 북한의 외교 군사 문제에 대한 전문가들을 초청함으로써 북한의 외교정책과 군사정책을 선전하기도 하였다. 또한 군축 및 평화연구소는 여러 국제회의에서 한반도 평화체제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기 도 했다. 1998년 2월에는 영국 외무부 산하 연구기관인 윌튼 파크(Wilton Park) 가 동아시아 안보: 한반도와 여타 위험지역을 중심으로 라는 주제로 개최한 국제 학술회의에 대표단을 파견해 한반도 평화체제 관련 4자회담의 주 의제는 미 북 간에 해결해야 하는 미 북 평화협정 체결, 주한미군 철수 문제이며, 4자회담에서 한국과 중국의 역할은 옵서버 자격일 뿐이라고 강조하기도 했다. 2012년 10월에는 북한 외무성 군축 및 평화연구소 대변인 담화를 통해 조선정전협정의 당사자인 우리와의 협의도 없이 미국이 제멋대로 그어놓은 북방한계선은 아무런 국제법적 근거도 없고 정전협 정에 전면배치되는 유령선 이라고 주장함으로써, 북한의 대남정책에 대한 선전 창구로서의 역할도 수행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다국적 군축협상

55 금성친위칭호쟁취운동 금성친위 칭호는 유일사상에 크게 기여하거나 전투력이 우수한 사 여단급 부대 단위에게 수여 하는 북한 군대의 가장 명예로운 칭호이다. 금성친위칭호쟁취운동은 1975년 2월 김일성이 제시한 5 대 훈련방침 을 관철시키기 위한 군대 내 대중운동으로 금성( 金 星 )은 김일성을 상징한다. 김일성은 1975년 2월 17일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10차 전원회의에서 북한군의 간부화와 현대화 를 실현하기 위해 강의한 혁명정신, 기묘하고 영활한 전술, 백발백중의 사격술, 무쇠 같은 체력, 강철 같은 군사규율 을 기본내용으로 하는 5대 훈련방침을 제시했다. 강의한 혁명정신은 최고지도자 에 대한 충성심, 기묘하고 영활한 전술은 전략전술적 우세로서 적을 이기는 것, 백발백중의 사격술은 적을 소멸하는 기본요소, 무쇠 같은 체력은 완강한 인내력으로 전투력 강화, 강철 같은 군사규율은 군사행동의 통일성을 의미한다. 김정일은 1975년 3월 총정치국 책임일꾼들을 통해 5대 방침을 관철하기 위한 사업에서 집단적 혁신을 이룩한 부대들에 대해 수여하는 새로운 칭호를 제정할 것을 주문하면서, 젊은 시절의 김일성 을 상징한 금성 을 따와서 금성친위 칭호를 제정할 것을 결정하였다. 초기 금성친위 칭호 제정 준비 는 인민무력부에서 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수여 원칙은 전투준비 완성과 전투력 강화에 크게 이바 지하였거나 전투공로가 큰 단위들에 수여한 것으로 보인다. 금성친위칭호쟁취운동은 제정 이후 대중 운동이었던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과 결합되어 진행됐다. 금성친위 칭호를 수여 받은 대표적인 군 기관으로는 서울류경수 제105탱크사단, 강건종합군관학교, 김일성군사종합대학 등이 있다. 금성친위칭호쟁취운동은 본질적으로는 북한 군대의 훈련강화와 이로 인한 무장력 강화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김정일이 군대 내 당조직을 통해 금성친위칭호쟁취운동 이라는 대중운 동을 진행했다는 점에서, 군부 내 당조직을 통한 군부장악의 의도가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

56 금수산태양궁전 금수산태양궁전은 1977년에 건설되어 김일성의 관저로 사용하였던 금수산의사당(주석궁)을 김일 성 사후에 그의 시신을 영구 보존하는 목적으로 개조한 시설이다. 북한은 김일성 사망( ) 이듬 해인 1995년 6월 12일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현 내각) 연명으로 김일성 시신을 금수산기념궁전에 영구히 안치하도록 하였다. 김일성 사망 1주기인 1995년 7월 8일 개관하여 2012년까지 금수산기념궁전으로 불렸으며, 2012년 2월 김정일의 70번째 생일을 맞 아 금수산태양궁전으로 개칭하였다. 2011년 12월 17일 사망한 김정일의 시신도 함께 안치되어 있다. 이 건물이 자리 잡은 곳은 평양 대성구역 미산동 모란봉의 연봉인 금수산 기슭이다. 평양 중심가 에서 약 8km 가량 떨어져 있다. 총 부지면적은 350만m2에 달한다. 외관은 궁전 구조로 되어 있고 시신의 유지 및 관리는 러시아의 기관이 담당하고 있다고 한다. 북한은 1996년 7월 27일부터 김일성 시신을 일반에 공개해 왔고, 외국인도 방문할 수 있도록 하고 있다. 이곳에는 어떠한 소지품도 가지 고 들어갈 수 없고 입장객은 멈춰 서서 보는 것은 허가되지 않는다고 한다. 건물 내부에는 김일성이 생전에 사용하던 유품도 전시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김일성 사후에도 1년간의 공사기간을 거쳐 내부 참배공간을 마련했던 것처럼, 시설을 개보수하여 김정일 시신의 참배 공간과 유품 전시실 도 마련하였다. 건물 앞에는 20만 명을 수용할 수 있는 콘크리트 광장이 있는데,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상징 하는 폭 415m, 길이 216m의 크기로 조성되어 있다. 이 광장은 김일성광장과 함께 각종 정치적 행사 에 활용되는 대표적 장소이고 김정일의 장례식도 이곳에서 열렸다. 2012년에 북한당국은 이 광장을 새롭게 꾸미기 위해 대규모의 공원 조성 공사를 진행한 바 있다. 광장의 공원화는 금수산태양궁전에 대한 접근성을 높이고 방문 편의 공간을 조성하여, 많은 북한주민들이 김일성 김정일 시신을 참배하 게 함으로써 3대 세습의 정당성을 부각하고 김정은 체제에 대한 충성도를 높이려는 의도가 있는 것 으로 보인다. 북한에서 금수산태양궁전은 주체의 최고 성지 라며 신성시해 왔다. 북한에서는 앞으로 해마다 신 년 1월 1일, 김정일 생일(2일 16일), 김일성 생일(4월 15일), 김일성 사망일(7월 8일), 정권 수립일(9월 9일), 노동당 창건일(10월 10일), 김정일 사망일(12월 17일) 등에 김정은이 당 정 군 요인과 각계 대 표를 대동하고 참배하는 관례가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광장, 국제친선전람관

57 금요노동 금요노동은 의무노동의 한 형태로서 당 정 간부 및 사무원들을 그 대상으로 한다. 주로 금요일에 노동에 참여한다고 하여 이와 같이 이름이 붙여졌다. 북한은 1959년 3월 1일 내각결정 18호 로 사회 의무노동제를 도입하였으며, 학생과 사무원들을 매년 일정기간 육체노동에 동원하고 있다. 북한은 고위간부에서 하급 사무원에 이르기까지 매주 금요일마다 중요 건설장과 환경미화 작업 장에서 육체노동을 진행하도록 의무화하고 있다. 금요노동은 1970년대 후반 시작되었으나, 1990년대 들어서서 매년 첫 번째 금요노동에 즈음해 각종 선전매체를 동원하여 당 정 간부 및 사무원들이 노 동에 참여한 사실을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강조하고 있다. 1990년 1월 5일 당시 중국 국영 베이징 한국어방송은 북한 당 정 간부와 사무원들이 매주 금요일에 의무적으로 해당지역 각종 건설장에 나가 노동자들 과 함께 노동했다. 고 보도한바 있다. 이후 북한도 각종 선전매체를 통해 금요노동 실시 사실을 전하 면서 금요노동이 당 정 고위간부들과 군중들의 관계개선 및 간부들의 사상 강화와 사업작풍을 유지 하는데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예를 들어 2000년 4월 첫 금요일인 7일에는 김일성 시신이 안치돼 있는 금수산기념궁전 주변과 수목원에서 환경미화작업을 벌였으며, 5월 5일에는 북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내각 사무국, 전 기석탄공업성 등을 비롯한 60여 개 중앙기관의 관련 인원 3000여 명이 평양-남포고속도로(청년영웅 도로) 건설장에 나가 금요노동을 실시했다고 중앙TV가 보도한바 있다. 이렇게 지속적으로 금요노동 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실제로는 많은 간부들이 각종 핑계를 대고 불참하는 등 기피현상이 심화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이 금요노동 이탈을 막기 위한 계몽영화를 제작하여 방영하고 있으며, 표어를 제시하는 등 각종 방법을 동원하고 있다

58 기동예술선전대 기동예술선전대는 경제건설 현장을 순회하면서 경제과업 관철을 독려하는 소규모 경제선동 조직 이다. 기동예술선전대(기동예술선동대)는 1961년 12월 28일 전국청년기동선동대종합공연 이 진행된 후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만들어졌다. 시 군 공장 광산 기업소에 주로 설치되어 있으며 각 단체에 따 라 청년기동예술선동대 가 조직되어 있다. 목적은 광범위한 군중 속에 당정책을 기동성 있게 해설 침 투시키며 그 관철을 위한 투쟁으로 노동자들을 이끌기 위한 것이다. 농업근로자동맹, 민주여성동맹,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직업총동맹 조직들이 운영을 맡고 있다. 1991년 12월 28일 중앙노동자회관에서 진행된 공장, 기업소 기동예술선전대창립 30주년 기념 중 앙보고회 에서 예술 선전과 선동을 강화하여 노동자 대중이 경애하는 수령님과 우리 당의 위대성을 더욱 깊이 체득하며 주체사상과 조선민족제일주의 정신으로 튼튼히 무장하고 가장 우월한 우리식 사회주의제도에서 살며 혁명하는 긍지와 자부심을 간직하도록 하여야 한다. 고 강조했다. 조선민족 제일주의 와 우리식 사회주의 라는 구호가 기동예술선전대 활동의 밑바탕이 됨을 밝힌 것이다. 그리고 이 조직의 활동을 강화하기 위해 각 조직별 또는 계층별 경제선동경연을 개최하고 있다. 1992년부터 개최하고 있는 전국시 군기동예술선전대 경제선동경연 (1992.9)과 전국청년기동예술선 동대 집중경제선동경연 등의 경연이 그것이다. 경연대회에서는 각 시 군 기동예술선전대들이 음악, 무용, 기악, 연극 등의 각종 공연작품을 가지고 참가해 다양한 형식의 예술선동 실력을 발휘한다. 기동예술선전대는 현장 경제선동, 축하공연, 출근길 환영모임 등을 비롯해 다양한 형식의 예술선 동 방송선동 등을 재현하고 있다. 이와 함께 계층별로 조직된 기동예술선전대의 활동도 본격화되었 는데 전쟁노병기동예술선전대, 학생기동예술선전대, 여성기동예술선전대 등이 있다. 특히 각 도의 군과 읍, 구, 동별 여성들로 편성된 여성기동예술선전대는 1990년대 후반 들어 전국적으로 1천500여 개나 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기동예술선전대와는 별도로 각 도별 예술선전대 와 직총산하의 노동자예술선전대 가 조직 운영되고 있다. 도( 道 )예술선전대는 6개년 계획(1971~1976년)을 추진하는 과정에서 근로자의 노동의 욕을 북돋아 목표달성을 꾀하기 위해 1973년 1월 26일 결성됐다. 예술선전대는 예술단과는 달리 당 정책 중에서 경제선동을 주로 담당하기 위해 조직되었다. 중앙과 도, 시에 주로 경제선전 선동사업을 담당해서 건설장이나 공장, 협동농장 등을 다니면서 활동한다. 관련 검색어 _ 군중문화사업, 우리민족제일주의, 우리식 사회주의

59 기술개건사업 기술개건이란 공장 기업소들을 새로운 현대적 장비와 기술로 정비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노후 설비들을 보수 정비 및 교체하고 생산공정을 현대화하는 것을 말한다. 배경 199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고난의 행군 시기 북한 경제는 거의 마비되었다. 식량난에 따른 배급 제의 중단으로 사회에 대한 국가의 통제능력은 현격히 저하되었으며, 공장 기업소 관리는 그 가동률 이 20~30%에 머무는 등 최악의 상태로 전락했다. 특히 공장 기업소의 낡은 설비와 기기마저도 경제 난 심화 이후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는 고철 덩어리 로 변화해 갔다. 따라서 북한당국이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30% 이하로 추락한 공장가동률을 제고하여 산업 정상화를 추진하는 것이 급선무 였다. 이 같은 상황에서 북한은 공장 기업소의 낡은 설비를 교체하고 최신기술을 도입하여 현대화를 추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사업은 기술개건사업 이라는 이름으로 전개되었다. 주요 내용 김정일은 1998년 이후 내각을 중심으로 새로운 경제관리체계를 개선하기 위한 몇 가지 정책을 단행하였다. 그 중 하나가 경제관리의 개선과 합리화를 위하여 공장 기업소를 대대적으로 재조직하 는 것이었다. 특히 경제 부문별로 선별해서 소규모 투자로 최대 이익을 가져오는 생산단위부터 개발 해 나가고자 했다. 이러한 전략에 따라 저생산성에 추가 투자할 가치가 없는 전력 다소비형 공장들은 다수 폐쇄되었고, 설비교체와 최신기술을 도입하여 현대화된 공장으로 거듭나는 신형 공장들이 등장 하게 되었다. 이때 기존의 낡은 공장 기업소를 설비교체와 최신기술을 도입하여 현대화된 공장으로 만드는 과정을 기술개건사업 이라 칭하며, 이후 전 산업 부문에 걸쳐 기술개건사업을 주요 목표로 제시하였다. 북한은 모든 생산 공정이 컴퓨터에 의해 조작되는 최신설비를 갖춘 본보기 공장을 각 지역별로 건설하고, 이 경험을 인근 공장들이 따라 배우게 하는 방식으로 기술개건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본보 기 공장의 선정은 전력, 석탄, 금속 등 선행부문 공장 기업소를 1차적 대상으로 하였다. 특히 중공업 부문에서는 대표적인 특급기업소를 중심으로, 경공업 부문에서는 비단, 신발, 식품 등 국가급 사업소 를 선정하여 추진하는 방식으로 기술개건사업을 전개하였다. 기술개건사업의 주요 내용은 기존시설 의 정비 보수 및 현대화 그리고 정보화 추진 등의 양대 축으로 구성되어 추진되었다. 북한은 기술개건사업을 추진하기 위해 다음의 사항을 강조하였다. 첫째는 핵심적인 경제 부문, 품을 적게 들이면서도 경제적인 효과가 큰 부문 및 생산 공정부터 기술개선을 단행해야 한다. 둘째는 경제전반을 시급히 현대적 기술로 개선하기 위해서는 최신 과학기술을 갖춘 새로운 공장 등을 건설 하는 것이 절실하다. 셋째는 공장을 건설할 때는 100년이나 200년을 내다보고 설계 완성해야 하며, 최첨단 기술을 도입하고, 설비를 일식( 一 式 )으로 바꿔야 한다. 넷째는 모든 간부들이 새로운 요구에 맞게 사상관점과 사고방식, 투쟁기풍과 일하는 자세에서 근본적 혁신을 이룩해야 한다. 각종 보도매체를 통해 끊임없이 기술개건을 강조하고 있는 북한은 이를 주체의 과학정치, 강성

60 부흥 과 같은 경제 슬로건과도 연결시키고 있다. 즉 주민의 과학기술에 대한 인식을 제고시키기 위해 주체의 과학정치를 강조하고 있다. 기존의 강성대국 대신 강성국가 와 강성부흥 이라는 용어를 병 행하여 사용하면서, 기술개건을 통한 경제건설로 강성부흥하자는 논리를 전개하고 있다. 평가 기술개건사업은 북한의 중앙 및 지방 차원에서 다각적으로 추진되어 생산성 향상에 일부 긍정적 인 효과를 창출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전력 정보통신 등 기초 인프라가 열악하고, 자체 자원 기술에만 의존하는 개별공장들의 자구노력에 의한 기술개건사업은 한계가 있기 때문에 산업구 조의 현대화 정보화를 위해서는 선진기술의 도입과 해외자본의 유치가 필수적이다. 관련 검색어 _ 강성대국론

61 김일성고급당학교 김일성고급당학교는 당 일꾼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는 당 교육기관이다. 북한은 정권 초 체제 형성기에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국가건설과 경제의 재건에 필요한 간부와 인재가 절대 적으로 부족한 형편이었다. 김일성은 권력 장악과 함께 인사정책에서 자신의 독자적인 기준을 정립 해 나갔다. 당시 제시된 간부정책의 방향은 노동계급들을 정치엘리트로 충원하되 이들의 약점인 교 육수준을 보강하며, 기존체제의 수혜자들인 기술전문엘리트들을 전문분야에 충원하되 이들의 약점 인 사상을 개조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방향에서 북한은 정권 초기 부족한 간부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 빨치산 측근들을 내세워 군사정치 간부양성기관인 평양학원을 설립하고, 중앙당학교(현재의 김일 성고급당학교) 등 간부양성기관들을 창설하였다. 또한 김일성대학 등 북한 각지에 여러 대학과 전문 대학을 설립하였다. 김일성고급당학교는 이러한 역사적 배경하에 1946년 6월 1일 북조선공산당 중앙당학교로 발족했 으며, 1972년 4월 김일성의 회갑을 맞아 현재의 명칭으로 바꿨다. 현재 평양시 동대원구역 동대원 2동에 위치하고 있다. 창립 당시에는 2개월반으로 시작해 점차 3개월반, 6개월반, 1년제와 2년제로 확대했으며, 1955년에는 3년제 기본반과 4년제 통신학부를 설치해 고등교육 체계를 갖춘 교육기관으 로 발전하였다. 또 1973년에는 맑스-레닌주의학원을 통합, 3년제 연구원의 학제까지 갖췄으며 1983 년에는 3년제 기본반을 4년제로 개편했다. 이 학교는 1978년부터 학내에 당간부양성기관지도국을 설 립하여 전국 당간부양성기관의 중앙기관으로서 역할을 수행하고 있다. 지방의 당간부양성기관으로 는 도(시) 공산대학, 군(구)의 당학교들이 있다. 북한에서는 당 간부로 배치된 후 고위 간부로 승진하려면 반드시 이 학교과정을 거쳐야 하는 것 으로 알려져 있다. 김정일은 1991년 김일성고급당학교 창립 45주년을 맞아 김일성고급당학교에서는 앞으로 김일성종합대학을 비롯한 일반대학이나 공산대학을 나오고 몇 해 동안 현직에서 일을 잘하는 전망성 있는 일꾼들을 선발하여 공부시키는 체계를 세워야한다. 고 강조한 바 있다. 김일성과 김정일 이 직접 간부정책을 관장하면서 이 학교를 수차례 현지지도를 하였고, 1972년과 1996년 두 차례 김 일성훈장 을 수여할 만큼 북한 지도부의 관심을 받는 기관이다. 관련 검색어 _ 인민경제대학

62 김일성광장 북한은 광장의 정치 를 통해 국가의 결속을 도모하는데 아주 뛰어난 체제이다. 북한 텔레비전방 송에서 며칠이 멀다하고 집단 퍼레이드, 군중대회, 열병식 장면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사시사철 계 절에 상관없이 수십만 군중집회가 일사불란하게 벌어지는 평양 한복판, 그곳이 바로 김일성광장이 다. 광장의 위치는 평양시 중구역의 남산재 동편에 있다. 광장의 머리 부분에 인민대학습당과 접해 있으며, 정면 맞은편으로 대동강을 넘어 주체사상탑을 바라보고 있는 구조이다. 광장은 1954년 8월에 착공되었다. 화강석으로 포장된 넓은 직사각형 주광장과 보조광장, 대주석 단 등으로 구성돼 있다. 넓이는 75,000m2이며 10만여 명을 수용할 수 있는 공간이다. 광장 주변에는 내각 종합청사와 외무성 청사, 조선중앙역사박물관, 조선미술박물관, 평양제1백화점이 들어서 있다. 대동강 쪽으로 연한 광장의 축에 맞추어 동평양 강안에 주체사상탑이 건립되어 있어 도시 중심부와 광장의 건축공간은 더욱 종심 깊게 보이고 있다. 1996년에는 북한 도로망의 출발점, 즉 나라길 시작점 인 도로원표를 이 광장의 주석단 아래로 옮 겨왔다고 한다. 여기에 평양 나라길 시작점 이라고 적힌 비석이 세워져 있다. 이 비석은 1990년대 초까지만 해도 평양 중구역 중성동 승리거리에 있는 해방산여관 앞마당에 세워져 있었으나, 이후 평 양 중구역 평양성 중성( 中 城 ) 출입문 가운데 하나인 함구문으로 바꿨다가 1996년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현재의 위치로 옮겼다. 북한은 나라길 시작점을 혁명활동 역사와 결부시켜 올바로 정한다. 는 것이 옮긴 이유임을 밝혔다. 이 광장에서는 군중대회를 비롯하여 각종 군중집회, 주요 정치문화행사와 경축야회, 군중궐기대 회와 군사 퍼레이드 등이 수시로 개최되고 있어 북한 최대의 대중선전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금수산태양궁전

63 김일성군사종합대학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은 고급 장교 양성을 위한 군사교육기관으로 소련군의 지원을 바탕으로 6 25 전쟁 중이던 1952년 10월 28일 고급군사학교 로 문을 열었다. 이후 1954년 8월 김일성육군대학 으 로 잠시 개명되었다가 1956년 10월 25일 현재의 명칭으로 바뀌었다. 북한 최고의 종합군사학교로 김일성군사대 로 줄여 부르기도 한다. 중대장급 이상의 군사 지휘관 에 대한 직무별 보수교육 전담을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최상급 군 교육기관으로 남한의 육 해 공군대 학과 국방대학원을 합친 것과 유사하다. 북한 문헌에서도 김일성군사종합대학이 인민군 부대와 연 합부대의 중견 군사간부들은 모두 이 대학에서 양성되어 나가고 있으며, 그들은 인민군대의 핵심을 이루고 있다. 고 언급하고 있다. 김정은은 2002년부터 2007년까지 이 대학을 다닌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군 총참모부에서 운영하며, 본과와 연구원 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본과는 고급 군관 양성을 목적으로 대위에서 중좌(소령에서 중령 사이)까지의 현역 군관을 입교대상으로 한다. 교육기간은 보 병, 정찰, 포병 병과의 경우 3년이며, 통신, 공병, 화학 병과의 경우 4년이다. 본과 교육생들은 졸업과 동시에 1계급 진급과 함께 상위보직에 배치되는 등 인사상의 혜택이 주어진다. 연구원 과정은 상좌(중령에서 대령 사이) 이상의 육 해 공군 고급 간부들의 재교육을 목적으로 하며 교육기간은 1년이다. 강건종합군관학교, 김정숙해군대학, 김책공군대학 등 초급 지휘관 양성 목 적의 기관이 사병 가운데 입교생을 받는 것과는 달리, 군 장교의 재교육을 위한 목적에서 설립되었 다.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약 30만 평 규모로 자리 잡고 있고, 김일성 김정일 혁명사상 연구실, 강의동, 실습동 등 제반 부대시설을 갖추고 있으며, 교직원은 약 600여 명, 학생 수는 2000여 명 정도로 알려 져 있다. 북한의 많은 군 고위인사들이 거쳐 간 이 대학은 2003년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선거 때 김정일이 이 학교에서 투표에 참가했을 정도로 선군정치 시대에 중시되고 있는 기관이다. 2012년 10월 설립 60주년을 계기로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이 대학에 김정일 훈장을 수여한다는 정령 을 발표하였고 훈장수여식도 거행되었다. 또 설립당일인 10월 28일에는 이 대학 연구원을 김정일군사 연구원 으로 명명하는 행사를 열기도 하였다. 또한 창립 60주년 기념연회도 이례적으로 개최되어 김 정은의 특별 배려 의도가 담긴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더구나 김정은은 10월 29일에도 창립 60주년을 맞아 이 학교에 김일성 김정일의 동상 제막식에 직접 참석하여 연설하고 기념촬영까지 하였다. 북한의 군사대학 군사대학북한에는 20여 개의 군사대학과 군관학교가 있다. 가장 오래된 종합군관학교인 강건종합군관학교(평양직할시), 최고 군사교육기관인 김일성정치대학(평양직할시), 최고의 종합 군사학교인 김일성군사종합대학(평양직할시) 등이 가장 대표적인 학교이다. 이외에도 김책공군대학(함경북도 청진시), 김정숙해군대학(함경남도 함흥시), 김형직군의대학(평양직할시), 자동화대학(평양직할시), 김철주포병종합군관학교(평안남도 은산군), 태천군관학교(평안남도 태천군), 최현군관학교(평안북도 태천군), 비행군관학교(함경북도 경성군), 고사포병군관학교(평안북도 정주시), 통신군관학교(함경남도 함흥시), 후방군관학교(평안북도 박천군) 등이 있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정치대학, 총참모부

64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이하 청년동맹)은 만 14세부터 30세에 이르는 모든 청 년 학생층이 의무적으로 가입되어 있는 북한 최대의 청년 근로단체이자 사회단 체이다. 연혁 청년동맹은 그 전신인 사로청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이란 이름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조직 의 역사를 살펴보면, 1946년 1월 17일 북조선민주청년동맹 으로 창립되었고 1951년 남조선민주청년 동맹 과 통합되어 조선민주청년동맹 으로 되었다. 이후 1964년 5월 제5차 대회에서 사회주의노동청 년동맹 으로 개칭되어 30여 년 동안 사로청 이란 이름으로 활동하였다. 김일성 사후 1996년 1월 현재 명칭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바뀌었다. 조직 및 역할 청년동맹의 중앙조직으로 노동당 근로단체부의 지도를 받는 청년동맹중앙위원회가 있고, 그 산 하 조직으로 도 직할시위원회, 시(구역) 군위원회와 각 단위별 위원회(공장, 기업소, 교육문화, 보건 기구, 인민군대 및 기타 단위), 그리고 산하에 초급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현재 맹원 수는 500만 명으 로 추정된다. 청년동맹원의 조직적 기반은 학교와 군대에 집중되어 있다. 학교 청년동맹은 만 14세의 나이부터 가입한다. 대학에는 대학별 청년동맹위원회와 그 산하에 학부 초급위원회, 학년과 학급별 초급단체가 있다. 인민군에는 청년동맹 조선인민군위원회와 그 산하에 소대는 분조, 중대급은 초급 단체, 대대나 연대급 이상에는 청년동맹위원회가 별도로 구성되어 있다. 일반직장에서는 직업총동맹 이 기본적인 근로단체이지만, 30세 미만의 청년 노동자들은 청년동맹에 가입하여 활동한다. 다만 당 원은 청년동맹에서 제외된다. 북한의 근로단체들 중에서도 청년동맹은 당의 후비대 로서 중요하게 취급된다. 이는 혁명과 건설 에서 발휘되는 청년층의 역할과 가치가 크고 후계 계승자들이기 때문이다. 현재 북한당국은 청년동 맹을 당, 군과 함께 체제유지를 위한 3대 보루의 하나로 중시하고 있다. 노동당 규약 제9장에는 사회 주의청년동맹을 혁명과업을 직접 계승하는 청년들의 혁명적 조직이며 노동당의 전투적 후비대 라 고 규정하고 있다. 청년동맹이 수행하는 기능은 크게 사상교양단체로서의 사업, 당의 후비대로 서의 사업, 경제건설에의 동원, 당의 통일 및 대남 정책 지원 등이다. 김정일이 등장하면서 청년동맹은 혁명의 후비역할이 더욱 강화되어 혁명전통교양의 강화와 유일 사상체계 확립에 박차를 가하였다. 이에 따라 청년동맹은 북한의 사회주의 건설에서 어렵고 힘든 일 을 맡아서 돌격대로 나서는 역할을 해왔다. 1970년대 중반 이래 여러 건설현장에 청년돌격대, 청년작 업반, 청년직장 등의 형태로 동원되어왔고, 특히 청년돌격대 의 속도전 캠페인은 군사체계로 조직화 되어 추진되었다. 이처럼 청년동맹이 중요한 위상을 차치하고 있는 만큼 청년간부 양성사업도 강화 해 왔다. 1946년 11월 5일에 중앙청년간부학교가 발족된 이후, 이 교육기관이 사로청중앙학교 사 로청대학으로 승격 과정을 거쳤고, 1974년 11월 1일 사로청대학은 금성정치대학으로 개편되었다. 청년동맹은 과거 김정일의 후계 구축과 정권 유지 과정에서 김정일의 중요한 대중적 기반이 되었

65 는데, 세습 후계된 김정은 체제에서도 정치적 기반 구축을 위한 청년동맹 조직의 활용은 불가피할 것으로 전망된다. 김정일 사후 김정은 체제로 세습되면서 권력의 핵심실세로 등장한 총정치국장 최 룡해도 원래 사로청에서 오랜 경력을 쌓은 인물이다. 그는 1980년부터 사로청에 들어가 부위원장을 거쳐 1986년 이 단체의 위원장에 올라 10년여 재직했다. 1996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으로 개편된 뒤에도 중앙위 1비서직을 맡다가 1998년 해임된 바 있다. 관련 검색어 _ 소년단, 청년돌격대

66 김일성정치대학 김일성정치대학은 북한군 내 정치사상 교육을 담당하고 정치 간부의 양성 보수 교육을 맡고 있는 북한 최고 군사교육기관이다. 북한군은 당의 군대로 지도 지휘 체계가 정치와군사 부문으로 2원화 되어 있어 일반 군 간부와 정치 간부 양성을 구별하여 실시하고 있다. 김일성정치대학은 1946년 2월에 군사 정치 간부 양성을 위해 설립된 평양학원 이 그 전신이다. 그 후 정치 간부 양성반이 1947년 5월 제2군관학교 로 재창설되었다. 1952년 2월에는 김일성의 빨치 산 동료인 김책의 이름을 빌려 김책군관학교 로 개명됐다가 1972년 2월 현재의 김일성정치대학 으 로 바뀌었다. 이 대학의 교육과정은 양성과정과 보수과정으로 나누어져 있다. 양성과정은 3년 이상 복무한 병 사 부사관 중에 당성이 강하고 근무 성적도 우수한 사람을 선발하여 초급 정치 장교로 양성하는 과 정으로 교육기간은 4년이다. 교육생들은 졸업 후, 소위로 임관되며, 최우수 졸업생은 중위로 특전하 게 된다. 보수 과정은 기존의 정치 장교들의 심화 재교육을 위한 것으로 중대 지도원 급 이상이 입교 하는 직무보수 과정 (3년)과 승진 예정자 등을 대상으로 한 단기보수 과정 (6개월)으로 나누어져 있 다. 교육 후에는 원칙적으로 원래의 부대에 복귀하게 되어 있다. 현재 김일성정치대학은 평양 형제산구역 서포동에 위치하고 있다. 평상시 약 1000명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으며, 김일성, 김정일의 혁명업적실 강의동 실습동 연병장 등의 교육 시설을 갖추고 있 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군사종합대학, 총정치국

67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이하 청년동맹)은 만 14세부터 30세에 이르는 모든 청 년 학생층이 의무적으로 가입되어 있는 북한 최대의 청년 근로단체이자 사회단 체이다. 연혁 북한은 해방 후 간부를 육성하는 것을 절박한 문제로 인식하고, 종합대학 설립을 추진하였다. 이 전 시기에 북한지역에 종합대학이 없었던 사정으로 인하여, 우선 종합대학을 설치하고 그것을 모체 로 하여 많은 대학을 설치하려는 방침을 세웠던 것이다. 해방 이후 1년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1945 년 11월에 대학건설기성회를 결성하고, 1946년 5월 25일 종합대학 창립준비위원회가 구성되었다. 1946년 7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대학설치 결의 를 채택하고, 1946년 10월 1일 김일성종합대학 을 공식 개교하였다. 평양시 대성구역 용남산 기슭에 건설되었는데, 설립 초기에는 7개 학부, 24개 학과, 학생 1500명 정도였다. 1948년에 일부 학부들을 분리하여 평양공과대학(현 김책공업종학대학), 평양의학대학, 사리원농업대학(6 25전쟁 전에 원산으로 옮겨진 현 원산농업대학)을 비롯한 여러 기 술대학들을 신설하기도 하였다. 현황 현재 김일성종합대학의 모습은 창립 당시에 비하여 매우 달라졌으며, 그 규모 역시 확장되었다. 156만m²의 넓은 부지에 본관, 1호 교사, 2호 교사, 도서관, 자연박물관, 출판사, 인쇄공장, 기숙사, 병 원, 야간정양소 등 거대한 대학촌을 이루고 있으며 150여 정보의 실습농장, 3천 300정보의 학술림 등도 갖추고 있다. 특히 2호 교사는 22층에 연건평 5만 2천m², 200여 개의 강의실과 170여 개의 실험 실, 강좌실 등 모두 600여 개의 방, 500석과 200석의 합동강의실도 갖추어져 있다. 2011년 기준으로 15개 학부에 60여 개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다. 대학에는 경제학부, 역사학부, 철 학부, 법학부, 조선어문학부, 외국어문학부, 수학역학부, 물리학부, 원자력학부, 자동화학부, 화학부, 생물학부, 지리학부, 지질학부, 재교육학부 등 15개 학부와 자연과학 부문의 계산연구소, 전자계산기 연구소, 전자물리연구소, 전자재료연구소, 촉매연구소, 생물공학연구소, 분석연구소, 과학실험기구연 구소, 원자에네르기연구소 등 10개의 연구소가 있다. 최근에는 기존의 자동화학부 등을 통폐합해 컴 퓨터과학대학을 신설하고 법학부를 법률대학으로, 조선어문학부를 문학대학으로, 경제학부를 확대 하여 재정대학으로 각각 승격시켰다. 2010년에 평양의학대학과 평양농업대학, 계응상농업대학 등 3 개 대학이 소속되면서 김일성종합대학 단과대가 7개로 늘었다. 대학생 수는 12,000명, 교직원 수는 5,500명 정도라고 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인문사회과학부의 수업연한은 4년 6개월, 자연과학부의 수업연한은 5년 6개월 로 규정되어 있으나, 정예화의 방침에 따라 종합대학에 모집된 학생들은 먼저 1년간의 예비과정을 거쳐야 본과에 진학할 수 있다고 한다. 그것을 포함하면 인문사회과학부가 5년 6개월제, 자연과학부 가 6년 6개월제로 규정된다. 종합대학에서는 한 학년도를 2학기로 나누고, 방학기간은 매 학년도마다

68 9주간이다. 북한의 대학에서는 학년학과제를 실시하여 종합대학의 학생은 재학기간에 총 과목 수 24~35개를 이수해야 한다. 동시에 실험실습이 요구되는데 사회과학부는 30%, 자연과학부가 50%를 차지한다. 김일성종합대학의 입학 합격자 선발에 있어서 출신학교의 졸업성적, 시 군 교육위원회 또는 소속 직장과 출신학교장의 추천, 철저한 신분검사가 필수적이다. 출신성분, 정치조직생활, 예비시험과 본 고사 성적은 각각 1/4씩 반영한다. 졸업생들은 북한의 정 관계에 대거 포진되어 활동하고 있다. 북한 에서 내각 부장급 이상 1/2, 부부장급 이상 1/3이 이 대학 출신이라고 할 만큼 김일성종합대학은 북 한의 대표적 대학의 위상을 갖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총장 아래 제1부총장, 교무부총장, 과학부총장, 경리부총장 등 10여 명의 부총장을 두고 있다. 또 한 노동당은 대학 당 위원회의 책임비서를 두고 있으며, 책임비서는 대학 내의 모든 정치 사상 문제 관련 사항을 전담하고 있어 강의나 활동에 있어 사상성을 수시로 점검 감독하는 등 교육내용 전반에 걸쳐 당적 통제를 관장하는 역할을 한다고 한다. 관련 검색어 _ 고려성균관, 김책공업종합대학

69 김정일애국주의 김정일애국주의는 온 사회를 김일성-김정일주의화 하기 위한 실천담론으로 지도자에 대한 충실성을 그 핵심으로 한다. 김정은의 노작 <김정일애국주의를 구현하여 부강조국건설을 다그치자>( )에서 김정일애국주의는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최고정화 라고 규정하고 있으며, 숭고한 조국관, 인민관, 후대관 에 기초하여 사회주의강성국가 건설, 부강조국 건설의 실천활동에서 김정일애국주의를 철저히 구현할 것을 강조하고 있다. 연원 북한의 지도사상은 맑스-레닌주의에서 주체사상, 선군사상, 김일성 김정일주의로 진화하였다. 시 대적 요구와 국내외 정세, 지도자와 지도체제의 변화에 따라 변화해 온 것이다. 제4차 당대표자회 개최 이전의 당 규약은 김일성동지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유일한 지도사상 으로 한다고 규정하였 다. 그러나 2012년 4월 11일 개최된 제4차 당대표자회는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우리 당의 지도사상 으로 한다고 당 규약을 개정하였다. 김정은 체제는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구현하기 위해 일종의 하위 사상 또는 실천지침을 필요로 했고, 김정일애국주의를 매개로 전국적 차원의 일색화 운동을 전개하 고 있다. 2012년 3월 2일 김정은은 전략로켓사령부를 시찰하면서 어버이 장군님(김정일)의 모범을 따라 배워 김정일식 애국주의 를 높이 발휘하는 데서 인민군대가 앞장서야 한다. 고 강조했다. 여기서 김정일식 애국주의 라는 표현이 등장하였으며, 2012년 5월 12일 자 노동신문 사설에서 김정일애국주의 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하였다. 5월 14일 조선중앙방송의 사설 모두 다 김정일애국주의로 심장을 불태우자 에서는 김정일애국주의는 수령에 대한 절대불변의 충 실성을 핵으로 하여 한평생을 애국으로 수놓아오신 장군님의 업적과 위대성을 특징짓는 사상 이라 고 정의하고 있다. 주요 내용 북한은 언론매체를 통해 김정일애국주의를 강조하는 논문과 기사들을 수없이 내보내고 있으며, 사회주의강성국가 건설, 부강조국 건설 의 지침이라고 밝히고 있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김정일 애국주의는 크게 숭고한 조국관, 인민관, 후대관 세 가지로 구성된다. 숭고한 조국관은 조국보위와 조국에 대한 헌신을 강조하며 조국과 수령을 동일시한다. 따라서 조 국에 대해 헌신하는 것은 수령에 대해 충실하는 것과 같고 이는 곧 애국주의의 최고표현이다. 숭고한 인민관은 인민을 하늘처럼 여기는 김정일의 애국신조를 강조하며 인민이 있어 나라도 있고 조국도 있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숭고한 후대관은 자기 대에는 비록 덕을 보지 못하더라도 먼 훗날에 가서 후대들이 그 덕을 볼 수 있게 모든 일을 완벽하게 훌륭하게 할 것을 강조한다. 북한은 김정일애국주의를 실현하기 위해 모든 당조직들과 근로단체조직들이 자기 책임과 역할을 다해야 하며, 모두가 헌신적인 일꾼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그리고 김정일의 헌신성을 따라 배워 조국과 인민에 대한 사랑과 헌신을 체질화해 나갈 것을 주민들에게 독려하고 있다. 또한 김정일애국

70 주의를 강조하면서 일꾼들 속에서는 특전과 특혜를 바라는 현상이 절대로 허용될 수 없다고 당 간부 들을 질타하고 있다. 이는 김정일애국주의가 당조직생활의 이완현상을 바로잡고자하는 목적임을 짐 작할 수 있다. 북한은 김정일애국주의의 개념을 조국사랑과 인민사랑에서 출발하여 후대사랑, 미래사랑으로 점 차 저변을 확장시켜가고 있다. 2012년 6월 소년단 창립 66주년을 계기로 김정일애국주의 차원에서 김정은의 후대관과 미래관을 적극 선전하면서 김정일애국주의에 김정은의 활동을 접목시키기 시작 하였다. 북한은 김정은이 만경대 유희장 및 능라유원지 등 놀이시설과 근린생활시설을 확대 개선하 고 있으며, 여성을 위한 병원시설 확충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고 선전하고 있다. 2012년 9월 2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6차 회의에서 12년 의무교육제 실시를 의제로 선정한 것도 유사한 맥락에서 해석되고 있다. 평가 김일성 사후 김정일이 했던 것처럼, 북한은 김정은 체제의 구축과 안정화를 위해 선대의 사상을 계승하는 통치이념으로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공표하였고, 김정일애국주의를 김정은 유일영도체계 확립에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다. 수령이자 최고지도자로서 약관의 나이, 후계자수업과 계승의 불 충분한 시간 등 약점을 보완하고, 어버이 로서의 인격을 인민들에게 자리매김 하는 데에 김정일애국 주의를 활용하는 것이다. 김정은의 권력 승계 과정은 충분한 시간을 확보하지 못하였기에 자신만의 사상을 제시할 수 없었 다. 따라서 선대의 사상을 계승한 것으로 분석된다. 향후 김정은의 권력이 공고화되고 나면, 선대의 사상을 계승 발전시킨 자신만의 지도사상을 추가할 것으로 예측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광폭정치/인덕정치, 선군정치, 수령결사옹위정신

71 김책공업종합대학 김책공업종합대학은 북한에서 과학 기술 교육의 최고전당으로서 과학기술, 특히 공업 분야에서 의 전문 인력을 양성하는 종합대학이다. 평양시 중구역 교구동의 대동강 기슭에 자리 잡고 있다. 1948년 9월 27일 김일성종합대학의 공학부와 철도공학부를 모체로 하여 초기에는 금속공학부, 전기 공학부, 야간학부 등 9개 학부에 불과했으며 교명도 평양공업대학으로 불리었다. 그러다 1951년 김일 성의 항일빨치산 동료이자 6 25전쟁 시 전선사령관으로 사망한 김책의 이름을 따 교명을 김책공업대 학으로 바꿨다. 1988년에 대학 창건 40주년을 기념하여 김책공업종합대학으로 승격되고, 1990년에는 조선콤퓨터쎈터 의 일꾼을 양성하는 김책공업종합대학 분교(강동분교)가 창설되었다. 이 대학은 1990년대 초반부터 시설이 현대화되면서 15층 규모의 본관 건물과 15층의 기숙사 시 설, 집적회로 실습장, 도서관, 체육관 등이 새로 건축되어 그 면모가 일신되었다. 현재 김책공업종합 대학은 3개의 단과대학과 11개의 학부, 즉 컴퓨터과학대학, 기계과학기술대학, 정보과학기술대학, 공 업경영학부, 광업공학부, 금속공학부, 자동화공학부, 동력기계학부, 재료공학부, 전자공학부, 전기공 학부, 선박공학부, 체신학부, 열공학부 등이 설치되어 있다. 공업 관련 부문의 다양한 학부와 함께 지질, 광업, 금속, 재료, 로봇, 전자계산기, 반도체직접회로, 물리공학 등 부문별 연구소와 박사원, 전 자계산소, 종합분석소, 종합실습공장 등을 갖췄다. 북한에 정보화 바람이 불면서 1990년대 들어 컴퓨터 프로그램학과, 정보센터 등을 설치했으며, 특히 20~30대 컴퓨터 전문가들이 주축을 이루고 있는 정보센터는 컴퓨터 소프트웨어 개발의 중추기 관으로 기능하고 있다. 이 대학에는 13,000여명의 학생이 재학하고 있고 3,000명의 교직원이 근무하 고 있다. 박사원에서는 준박사과정과 박사과정을 전공하는 학생 700여명이 있으며, 야간과정과 1년 내지 6개월 코스의 재교육학부, 기술교원양성반 등 특수과정도 운영하고 있다. 또한 이 대학은 2006년 1월에 개관한 전자도서관을 갖고 있다. 이 도서관은 연면적 16,000m2로 지상 5층, 지하 1층으로 구성되어 있다. 12개의 전자열람실을 비롯한 28개 열람실이 있으며, 전자도 서관은 북한 내 인트라넷 시스템인 광명 네트워크와 연결이 되어 있다고 한다. 관련 검색어 _ 고려성균관, 김일성종합대학

72 김책제철연합기업소 김책제철연합기업소는 함경북도 청진시 송평구역 사봉동에 있는 북한의 대표적 특급기업소이다. 이 기업소는 근처에 위치한 무산광산연합기업소에서 철도와 장거리 정광수송관을 통해 공급하는 철 정광을 처리하여 선철로부터 압연강재까지 흐름식으로 생산하는 북한 최대의 종합야금 생산기지이 다. 김책제철연합기업소는 용광로종합직장 해탄종합직장 강철직장 내화물직장 압연분공장 열간압연 직장 냉간압연직장 소결직장 등 수십 개의 직장으로 구성된 모체기업소와 대보수사업소 관수송사업 소 청암광산 무산광산 등 관련업체, 강철설계사업소와 금속연구소 등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선철과 여러 가지 압연강재, 콕스 및 수십 종의 화학제품들을 생산하고 있다. 기업소에는 또한 후방공급을 위한 농 목장과 수산사업소, 병원, 요양소, 정양소, 그리고 노동자회관, 공장대학 등 보조시설이 있다. 1938년에 설립된 일본제철주식회사 청진제철소가 모체이며, 1951년 2월 김책제철소로 개칭되었 다. 그 후 기업소의 생산규모가 확장됨에 따라 1974년부터 관련업체들을 통합하여 김책제철연합기업 소로 그 기구체계를 개편하였다. 6 25전쟁 후 제철소를 개건확장하며 1954년 10월에 제1호 해탄로를, 1955년 5월에 제1호 용광로(25만 톤)를 복구하여 조업하였다. 1958년 11월에는 제2호 용광로(25만 톤)를 복구하여 조업을 시작하였으며, 40만 톤 능력의 강철직장을 건설하여 처음으로 강철을 생산하 였다. 이후 계속 시설확장을 서둘러 1960년 소련으로부터 기술도입에 의한 철광소결공장( 鐵 鑛 燒 結 工 場 )과 구단광공장( 球 團 鑛 工 場 )이 각각 설치되었다. 1968년 북한당국의 대야금기지 구축을 위한 건설 공사 추진계획에 따라 1971년부터 소련의 지원으로 100만 톤 능력의 강철공장 및 85만 톤 능력의 압연공장 등 대대적인 시설확장공사를 통해 일관제철소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1984년에도 소 련의 지원을 받아 150만 톤의 제철생산능력을 240만 톤 규모로 확장하기 위한 2단계공사를 추진했 다. 1990년대 경제난 시기 코크스가 부족하여 6개의 용광로 중 3개만 가동될 정도였으나, 현대화 공 사를 추진하여 2010년 이후 자체 개발한 연료로 선철 증산에 힘을 쏟고 있다. 이것은 중국자본의 북 한 지하자원 투자가 배경이 되고 있다. 무산광산이 재가동되면서 무산에서 생산되는 철광석을 받아 원료로 사용하고 있는 김책제철연합기업소의 현대화와 선철증산에 기여하게 되었다. 2010년 기준 총 생산능력은 선철 222.7만 톤, 강철 240만 톤, 압연강재 147만 톤 등으로 철강생산능력이 북한 전체 능력의 36%를 차지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연합기업소

73 나남의 봉화 나남의 봉화 는 북한이 2001년 11월 22일 새롭게 내건 경제슬로건이다. 2001년 8월 김정일은 러 시아를 방문하고 귀국하면서 나남 탄광기계연합기업소를 현지지도하고, 현대적인 기계공업기지로 발전한 점을 높이 평가하였다. 나남의 봉화는 나남 탄광기계연합기업소 노동자들이 당이 제시한 경 제 과제를 성과적으로 수행한 것과 관련하여 그들의 사상정신세계를 장려하고 확산하기 위해 제시되 었다. 나남의 봉화는 당시의 북한 현실을 이해하는 열쇠가 되는 슬로건으로 간주할 수 있다. 김정일 시 대 이후 북한은 강계정신, 성강의 봉화, 낙원의 봉화 등의 여러 경제슬로건을 내걸고 생산증대를 독려하여 왔다. 그러나 대체로 이 같은 경제슬로건은 자력갱생, 내부예비의 철저한 동원 등 사상의식을 강조하고 의 식전환을 요구하는 슬로건이었을 뿐 구체적인 방향을 제시하지는 않았다. 반면 나남의 봉화는 자력 갱생을 동일하게 강조하고는 있지만 그동안 김정일 시기 추진되었던 경제정책의 내용, 즉 실리, 종자 론, 과학기술중시, 기술혁신, 생산 공정의 현대화 등이 결합되어 제시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좀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노동자들이 현대적인 과학기술에 기초하여 자력갱생을 이루었다고 평가하거나, 주요 설비 생산에 있어 자재 및 기술이 부족한 상황에서도 폭넓은 기술혁신운동을 벌려 여러 가지 기법들을 창안하고 기술자와 노동자 간의 창조적 협조를 강화함으로써 당면한 어려움들을 자체로 해결해 나갔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그리고 바로 이러한 모범을 선군시대의 요구에 맞게 발휘하여야 할 작업의 본보기 로 평가한다. 결국 나남의 봉화는 창조적이고 혁신적인 불굴의 자세 강조, 과학기술개발을 비롯하여 유휴자재 활용, 열정적 진취적 사업기풍, 적극적인 실리추구 등 당시 북한이 추진하고 있는 현대적 기술개건, 과학중시사상과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는 경제슬로건으로 제시된 것이다. 북한은 1990년대 경제위기를 맞아 고난의 행군정신, 사회주의 강행군 등 경제난을 극복하기 위 해 각종의 정치슬로건을 제시해 왔고, 생산증대를 촉구하는 강계정신, 성강의 봉화 등 경제슬로건 도 꾸준히 제시해 왔다. 그러나 명확한 모범을 창출하며 대중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했다. 슬로건의 제기가 더 이상 사회적 운동으로 확산되지 못하는 데에는 주민들의 피로도가 누적되어 있을 뿐 아니 라, 현실 경제가 주민들의 애국적 헌신성을 불러일으키지 못하기 때문이다. 관련 검색어 _ 강계정신

74 나진 선봉 경제특구 나진 선봉 경제특구(이하 나선경제특구)는 북한이 지난 1991년 12월 체제유지와 심각한 경제난 해소를 위해 지정한 개방특구이며,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무역 금융 관광 기지를 목표로 하는 경제무역지대이다. 나선경제특구는 중국, 러시아, 북한의 3각 무역이 가능한 국경지대이며 중국이 북한을 통하여 동해로 무역을 할 수 있는 지리적 요충지라는 점에서 유리한 입지를 갖고 있다. 그러나 안보불안 및 투자유치 부진으로 인해 실패와 좌초 위기에 놓여 있다가 2010년 이후 중국과의 활발한 경제협력을 통해 특구로서의 면모를 일신하고 있다. 배경 일반적으로 경제특구란 외국의 자본과 기술을 유치할 목적으로 자국 내에 설치하는 특별 구역으 로, 외국 자본과 기술의 국내 유치를 유도하기 위해 각종 인프라 제공과 세제 및 행정적 특혜를 부여 하는 특정 지역이나 공업단지를 말한다. 북한의 나선경제특구 역시 특구개발을 통한 외자유치의 필요성에서 비롯되었으며, 무엇보다 경 제난을 해결하기 위해 무역기지 및 대외무역의 중요성을 인정하여 도입한 조치이다. 북한은 1993년 부터 2010년까지 동북아시아의 국제적인 화물 중계지와 수출가공 관광 금융 기지로 발전시킨다는 목표를 설정하고, 지난 1991년 12월 함경북도 나진 선봉지역을 자유경제무역지대로 설정하였다. 경과 및 주요 내용 자유경제무역지대로서 나진선봉특구 사업은 본래 3단계 개발계획이었으나, 1995년 초에 당면단 계(1995~2000년)와 전망단계(2001~2010년)의 2단계로 조정하고 사업에 착수하였다. 당면단계에서는 도로 항만 등 경제 하부구조의 확충 및 현대화에 주력해 국제화물 중계 수송기지를 건설하고, 전망단 계에서는 21세기의 세계 경제발전에 부응하는 종합적이고도 현대적인 국제 교류의 거점으로 성장시 킨다는 계획이었다. 실천 방안으로 정책 입안 및 대외경제협력을 담당할 대외경제협력추진위원회를 설립하고 외국 기업 및 외국 자본 유치에 힘쓰는 한편, 외자 유치를 위해 외국인투자법 자유경제무역지대법 등 57개 항목의 외자유치법령을 제정해 소득세율 14%, 무사증 출입 등의 특혜를 부여하였다. 또한 1995년 나진 선봉시를 직할시로 승격시켰고, 1997년에는 환율 현실화 조치와 외화사용규제 를 폐지하고 지대 내 자영업 허용과 국제자유시장을 개설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외 국인 투자는 매우 저조했고 특구개발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후 1998년부터 자유 를 제외한 나진 선봉 경제무역지대로 로 개칭하고 경제특구에 대한 정부통제가 강화되면서 나선경제특구 개발은 소강상 태에 진입했다. 나선경제특구가 다시 탄력을 받기 시작한 것은 2009년 12월 김정일의 나선시 방문과 현지지도, 2010년 두 차례의 중국 방문이 기점이 되었다. 2009년 10월 원자바오 총리 방북으로 북한과 중국의 경제협력은 강화되었고, 2009년 11월 중국의 창지투선도구 ( 長 吉 圖 先 導 區 ) 공식발표는 중국 자본과 기업투자가 필요한 북한에게 호재로 작용했

75 다. 최근 북한은 중국 자본을 유치해 나선경제특구를 대외무역전진기지로 육성하는 특구개발을 재추 진하고 있다. 현재 중국은 동북3성의 창지투(장춘-길림-도문) 개발계획을 출해( 出 海 )통로인 북한의 나진 선 봉항과 연계하여 추진하면서 이 지역의 도로 항구 인프라 개선 등 북한과의 경제협력을 전개하고 있다. 중국은 특히 나진항을 통해 동북지방의 지하자원과 농산물을 국내외로 수출할 해양물류망 확 보에 주력하고 있다. 북한도 2010년 1월 동북3성과의 연계개발전략으로 나선특별시 승격과 함께 나선경제무역지대 법 을 개정했다. 2010년에 개정된 법에는 지도기관 및 지방기관의 자율성과 권한 확대(10조, 13조), 투자기업 인센티브 및 세제혜택 강화(40조), 상품가격에 대한 국가의 개입 축소(25조) 등 특구개방을 확대하는 내용이 대거 포함되어 있다. 특히 한국 기업의 나선경제특구 참여를 허용하는 것으로 볼 수 있는 내용도 있다(8조). 향후 나선경제특구는 나진항을 중심으로 인접한 선봉항, 웅기항 등이 종합 개발되며 지난 개발총 계획완성단계 2년을 제외하고, 향후 실현당면단계 5년, 실현전망단계 15년의 총 20여 년에 이르는 장기구상 아래 특구사업이 추진된다. 평가 북한이 1990년대에 추진한 나선경제특구는 실패하였는데 그 원인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대내 적 요인으로는 1 해외투자에 필요한 인프라 미비, 2 중앙의 실질적 재정지원 부재와 과도한 행정적 관여 및 정책의 비효율성, 3 투자유치 관련 제도와 행정서비스 부진 및 투자기업 우대 등의 관련 특구정책 부실, 4 백화점식 특구개발과 지정학적 이점을 살리지 못한 것 등이다. 대외적 요인으로는 1 중국의 투자유치 부진 및 중국의 관련 정책 부재, 2 체제전환 후 극동지역에 대한 러시아의 투자 여력 부족, 3 북한의 경제난과 안보불안 등을 원인으로 한국 일본의 소극적 참여, 4 미국, 중국 등 주변국과의 관계 소원에 따른 국제사회의 불신 등이다. 2010년 이후 중국의 적극적 참여와 북한의 유연한 정책변화가 시도되고 있지만 북한의 안보불안 야기 및 국제사회의 불신을 북한이 어떻게 극복하여 나선경제특구를 대외개방의 성공적 실험장으로 만들 수 있는지는 여전히 과제로 남아있다. 관련 검색어 _ 국가경제개발총국

76 남북연석회의 남북연석회의란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의 준말이다. 즉 남북의 정당과 사회단체 대 표자들이 한 자리에 모여 관심사인 문제를 토의하는 회의 방식이다. 남북연석회의는 1948년 4월 19~23일 평양에서 열려 남한의 단독 총선거를 반대하는 투쟁을 결의 한 것이 시초이다. 당시 북한은 한반도 전역에서의 총선거 실시라는 유엔 결의를 수행하기 위해 파견 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입북을 가로 막았으며 내부적으로는 인민회의에서의 헌법 초안 마련, 인민 군 창설, 주요 산업 국유화 등 사회주의 개조 작업을 진행하여 독자 정권 수립을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북조선노동당을 비롯한 9개 정당 단체의 이름으로 평양에서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를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마치 남북한 주민 대표들의 의사인 것처럼 포장하여 남한의 총선거를 저지하고 나아가 그들이 창건하는 정권에 대해 정통성을 뒷받침하려는 목적이었다. 김구와 김규식 등은 회의 참가를 위해 북행길에 올랐으나, 이 회의는 북한이 미리 준비한 각본에 의해 일방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이에 두 사람은 북한 요인들과의 회담을 제의했고 김일성, 김두봉 과의 회담과 15명이 참가한 남북 정당 사회단체 지도자협의회 가 열렸지만, 4월 30일 외국군대 철수, 임시정부 수립, 총선거 등을 내용으로 공동성명서를 발표하는데 그쳤다. 북한은 이후 대남전략에 입각하여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또는 정치협상회의를 남북관계와 통 일문제를 협의하는 회의체 형식으로 지속적으로 주장해 왔다. 1970년대에 들어와 당국 간 회담인 남 북조절위원회가 가동되어 불완전하나마 사실상 서로의 실체를 인정한 후에도 이 연석회의 주장은 계속되었다. 그 명칭은 시기에 따라 바뀌어 왔지만 기본적으로 각계를 대표하는 인사들이 모여 남북 의 입장을 떠나 개인적인 의사를 표명하고 이를 집합하여 결론을 낸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그리고 여기에 참가하는 남측의 대표를 그들이 일방적으로 지명하기도 하였다. 북한의 연석회의 주장은 결국 우리 정부의 실체를 불인정하고 협상대상으로 삼지 않으면서 우리 내부의 반미 용공 인사들과 합작하여 공산화 통일의 여건을 조성하려는 통일전선전술에 기초하고 있다고 하겠다. 관련 검색어 _ 대민족회의, 전민족대회

77 남조선 혁명 남조선 혁명론 은 1960년대 들어 지역혁명론으로 제기되었으며,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를 위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론 으로 정식화된 북한의 대남 혁명전략 이다. 북한이 종래 추구해왔던 민주기지노선 은 북한의 혁명역량(정치 경제 군사역량)을 강화하고 그 역량을 바탕으로 전 한반도의 공산혁명을 완수한다는 전략이었다. 이에 반해 지역혁명을 전제로 한 남조선 혁명론 은 남한의 노동자 농민 등 근로인민들이 주체가 되어 혁명을 수행한 후 남한의 애국 적 민주주의 역량과 북한의 사회주의 역량과의 합작에 의해 통일이 이루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북한이 이처럼 남한에서의 혁명 승리 후 조국통일이라는 단계를 설정한 것은, 미군이 남한에 주 둔하고 있는 상황에서 무력을 동원한 통일은 사실상 불가능하며, 다른 한편으로는 북한에서의 사회 주의 건설 추진으로 인해 남북한 간에 사회성격의 차이가 더욱 심화되었다는 인식에 기인한 것으로 보인다. 남조선 혁명론에 의하면 남한 혁명에서는 북반부 혁명기지 의 강력한 지원을 받지만 기본적으로 남조선 인민들의 혁명역량의 장성과 그들의 결정적인 투쟁에 의해서만 승리할 것 이라는 점이 강조 된다. 이러한 맥락에서 북한의 1960년대 대남정책에서는 혁명역량의 준비와 강화가 중요한 과제가 되었고, 남한 내에 혁명적인 맑스-레닌주의 정당의 건설에 집착하게 되었다. 이는 이미 1961년 9월에 개최된 제4차 당대회에서 한 김일성 보고연설에서 분명하게 제시되었다. 김일성은 이 연설에서 남조선 인민들이 반제 반봉건투쟁을 성과적으로 진행하며 이 투쟁에서 승리를 쟁취하기 위해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지침으로 하며, 노동자 농민을 비롯한 광범한인민대중의 이익을 대표하는 혁명적 당을 가져야 한다. 고 강조하였다. 결국 북한은 남조선 혁명론 에 기초해서 남한의 혁명세력 을 지원 하여 1964년 3월 5일 지하정당인 통일혁명당 창당준비위원회를 결성케 하였으며 1969년 8월 25일에 는 당중앙위원회를 창립시켰다. 또 한편으로는 남한의 혁명운동을 지원하기 위한 방편으로 국지적인 군사적 모험도 서슴지 않았 다. 1968년에 발생한 북한 무장게릴라부대의 청와대 기습사건 이나 울진삼척지구 침투사건 등이 대 표적인 예다. 그러나 1968년 7, 8월에 남한에서 김종태 등 통일혁명당 관련 핵심지도 인물들이 대거 검거됨으 로써 북한의 혁명적 지하당 건설을 통한 남조선 혁명 의 실현 구상은 좌절되었다. 그리고 게릴라 침 투도 국제사회에 그들의 부정적 이미지만 증폭시킨 채 실패로 끝났다. 관련 검색어 _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민주기지론

78 노농적위군 노농적위군은 1959년 1월 14일 창설된 북한 최초의 민간군사조직이다. 평상시 에는 공장과 농장에서 일하면서 민방위 업무를 수행하고, 유사시에는 군과 함 께 지역 방어임무와 같은 정규군 보충 및 군수품 수송 임무를 수행하는 역할 을 맡고 있다. 연혁 북한은6 25전쟁에 참전했던 중공군이 1958년 4월부터 철수함에 따라 병력부족을 보충하기 위해 종래 사회안전부의 지휘를 받던 자위대를 해산하고 1959년 1월 14일에 노동자, 농민, 제대군인, 학생 등 약 50만 명으로 노농적위대를 창설하였다. 처음에는 생업에 종사하면서 군사훈련을 받도록 하였 으나 1962년에 전인민 무장화 정책에 따라 18~45세의 남자와 18~35세의 미혼여성까지 편입시켜 조 직을 확대하였다. 또 1971년에는 노농적위대의 해당연령을 50세로 연장하고, 다시 17~60세의 남자와 미혼여성 가운데 교도대에 편입되지 않은 주민을 모두 편성대상으로 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년 10월 10일 당창건 65주년 기념 군사 열병식에서 노농적위군 이라는 명칭이 최초로 등장하였고, 이후 북한은 노농적위군 으로 호칭하기 시작하였다. 기능 및 조직 노동당 중앙위원회의 통제하에 평상시 인민보안부를 지원하여 민방위 업무와 함께 직장 및 주요 시설의 경계, 지역방위, 대공( 對 空 )방어 등을 주요임무로 하고 있다. 유사시에는 정규군 보충 및 군수 품 수송 등을 담당하고 특수 적위군은 새로 편성되는 사단에 배속되어 정규군과 함께 게릴라활동을 하도록 되어 있다. 만 17~60세까지의 남성과 미혼여성 중 교도대 미편성자와 노동자 농민 사무원(남자 위주) 등을 대상으로 직장 및 행정단위별로 편성되어 총 대원이 약 570만여 명에 이르는 규모면에서 가장 큰 군사조직이다. 조직은 노동당의 지휘하에 노농적위군 총사령부를 두고, 예하에 도 및 직할시 노농적 위군(군단급), 시(구역) 노농적위군(연대급), 리(동) 노농적위군(대대급), 부락 및 직장 노농적위군(중 대 또는 소대급) 등 직장 및 행정단위별 제대로 편성되어 있다. 제대별 지휘관은 해당 직장 및 지역의 당 책임비서가, 부지휘관은 인민보안부의 지역 부장이 당연직으로 겸직한다. 훈련시간은 연간 160시 간이며, 모든 대원이 개인화기로 100% 무장하고 있다. 특히 지역단위의 일반 적위군을 제외한 2급기 업체 이상의 직장단위 및 학교에 편성된 특수 적위군은 대공포와 대전차포, 탱크 등으로 중무장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교도대, 붉은청년근위대

79 노동당 노동당은 북한에서 최고의 위상과 권한을 지닌 권력의 원천으로 타 기관이나 단체보다 상위에 위치하는 권력기구이다. 북한의 모든 정책들은 노동당의 지도 와 통제하에서 추진된다. 연원 북한은 조선공산당 서북5도 당책임자 및 열성자대회가 개최된 1945년 10월 10일을 조선노동당 창건일로 공식화하여 1949년부터 사회주의 명절 로 기념하고 있다. 북한은 동 대회에서 채택한 정치노선과 조직강화에 관한 결정서 에 따라 10월 13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을 창설하였다.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은 1946년 4월 말에 북조선공산당으로 되었다가 8 월 29일에는 중국 연안으로부터 돌아온 조선독립동맹 계열이 중심이 된 조선신민당과 합당하여 북조 선노동당으로 발족되었다. 또한 북조선노동당은 1948년 8월 정권수립을 위하여 남조선노동당과 연 합중앙위를 구성하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출범 후 1949년 6월 30일에 조선노동당으로 통합되 었다. 기능 및 역할 북한 헌법 제11조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진행한다. 고 규정하고 있으며, 당 규약 서문에는 노동당이 근로인민대중의 모든 정치조직들 가운데서 가장 높은 형태의 정치조직 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노동당의 이념과 목표는 역대 당대회와 당대표자회를 거치면서 수정을 거듭해 왔다. 북한정권 창 립 이전에 개최된 제1, 2차 당대회에서 채택한 당 규약은 당의 이념을 명시하지 않은 채, 독립국가 건설과 인민대중의 정치 경제 문화 생활 수준의 향상을 당의 목표로 제시하였다. 1956년 제3차 당대 회에서는 맑스-레닌주의를 당 활동의 최고지침으로 제시하고, 공산주의 사회건설 을 최종목적으로 내세웠다.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는 맑스-레닌주의와 함께 김일성의 주체사상 을 지도이념으로 삼은 후,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는 맑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김일성의 주체사상 만을 지도이념 으로 삼았다. 또한 당의 최종목적이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와 공산주의 사회건설 에 있다고 규정하였 다.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는 최종목적에서 공산주의 사회건설 을 삭제하였고,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당이다. 라고 규정함으로써 당의 성격을 김일성 개인의 정당으로 변화시켰다. 2012년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는 노동당을 김일성과 김정일의 당으로, 김일성-김정일주의 를 유일지도사상 으로 규정하였다. 당 규약에 따르면 노동당은 민주주의 중앙집권제 원칙 에 의하여 운영된다고 하여 외형상 민주주 의를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당원은 당조직에 복종하고 하급 당조직은 상급 당조직에 복종하며, 모든 당조직은 당중앙위원회에 절대 복종하도록 되어 있어 실제로는 일당 지배체제를 제도화하고 있다. 각급 당조직은 지역 또는 생산 및 노동단위별로 조직되어 있으며, 각급 당위원회는 각 해당 단위 의 최고지도기관이 된다. 당조직의 최고지도기관은 당대회이며, 당대회가 열리지 않을 때에는 당대

80 회가 선출한 당중앙위원회가 최고지도기관이 된다. 노동당 발족 초기에는 당대회와 당중앙위원회가 주요 권한을 행사해 왔으나, 1956년 제3차 당대회 이후부터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의 권한이 커 졌다. 1966년 10월 당중앙위원회에 비서국이 신설되면서 당의 운영이 김일성의 지시를 받는 비서국 중심체제로 전환되었다. 이후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의 정치위원회를 정치국으로 변경하고 그 안에 상무위원회를 신설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도록 하였다. 평가 노동당은 북한정권 수립 이후 사실상 유일정당으로 당국가체제하에 실질적인 권력행사에 독점적 으로 활동하고 있다. 노동당의 조직 운영은 당원의 합의보다는 수령을 정점으로 한 소수집단의 하향 식 지시에 따르는 운영체계로 변화되었으며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1인 지배를 위한 제도적 장치로 기능하고 있다. 2000년 이후 북한이 군대를 앞세운 선군정치 를 내세움에 따라 군대와 당의 우위에 대한 논란이 있었으나 북한은 공식적으로 노동당을 북한의 최고지도기관으로, 군대는 당의 군대로 명명하였다. 조선인민군은 당의 위업, 주체혁명위업을 무장으로 옹호 보위하는 수령의 군대, 당의 선군혁명영도 를 맨 앞장에서 받들어나가는 혁명의 핵심부대, 주력군이다., 조선인민군은 모든 정치활동을 당의 영도 밑에 진행한다. 등이 헌법 및 당 규약에 명시되어 있다.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규약, 노동당 대표자회, 노동당 대회, 노동당 비서국, 노동당 정치국,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노동당 중앙위원회, 노동신문

81 노동당 규약 북한 노동당 규약(이하 당 규약)은 당의 성격, 당조직 및 당원들이 지켜야 할 규 범과 활동원칙을 규정하고 있다. 북한에서 노동당은 국가에 우선하므로, 노동 당 규약이 북한 헌법보다 상위규범이라 할 수 있다. 규약 내용은 전문에서 당의 성격, 활동목표를 규정하고 있으며, 각 장에서는 당원의 자격, 입당 절차, 임무 와 권한, 조직원칙과 구조, 그리고 각 조직의 활동범위, 군 당의 조직, 당비 등 을 규정하고 있다. 당 규약의 변천 1948년 8월 28일 최초로 당 규약이 채택된 이래 당대회와 당대표자회를 통해 수정 보완되었다. 이 과정에서 당 규약은 북한 체제의 요구에 따라 그리고 체제의 합리화를 위해 변화하였다. 개정되어 왔던 당 규약들의 전문을 살펴보면, 먼저 당의 성격이 노동계급과 전체 근로대중의 선 봉적 조직적 부대 (1956, 1961)에서 노동계급과 노동대중의 선봉적 조직부대이며 우리나라 노동대 중의 모든 조직 중에서 최고형태의 혁명조직 (1970),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에 의해 창건된 주체형 의 혁명적 맑스-레닌주의당 (1980),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 (2010)으로 바뀌어 왔다. 근로대중의 정당에서 김일성 개인의 정당으로 변화시켜온 것이다. 2010년 개정된 당 규약은 30년 만에 개정되는 것이어서 북한 현실과 규범을 일치시키기 위해 많 은 것을 함축하고 있다. 당의 위상과 관련하여 국가영도조직으로서의 노동당의 위상을 강화하였고, 국가최고 정치조직, 혁명의 참모부인 노동당의 국가 영도기능을 세부적으로 명확히 규정함으로써, 군사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국가부문에 대한 당의 지배력을 명문화하였다. 북한 내부현실을 반영하는 노동당의 목적도 변화하였다. 당면 목적은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 의 완전승리 에서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강성대국건설 로, 최종목적은 온 사회의 주체사상 화와 공산주의사회 건설 에서 온 사회를 주체사상화하여 인민대중의 자주성을 완전히 실현하는 것 으로 변경되었다. 당 건설에서 기본원칙으로는 사상 영도의 유일성 및 계승성 보장을 규정함으로써 당 차원에서의 권력세습의 제도화를 추진하였다. 당 규약 개정에 관해서도 당대회를 통해 변경할 수 있었던 것을 당대표자회에서도 가능하게 하였고, 당대회 개최기간과 의제사전공개 조항을 삭제하였으며, 당대회 개최는 6개월 전 공고하도록 하였다. 총비서의 선거 절차에 대해서도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김일성의 총비서 선거절차는 수령제와 맞지 않았는데 2010년 당 규약에서 교정되었다.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는 김정일을 먼저 총비 서에 추대 하고 당연직으로 정치국 상무위원 정치국원 당중앙군사위원장을 겸직하도록 하였다. 이 로써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의 후계체제가 수월하게 이루어지도록 현실과 규범을 일치시켰다. 2012년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 당 규약 개정의 핵심 3가지를 들자면, 첫째, 김정일을 노동당의 영 원한 총비서 로, 김일성을 노동당의 영원한 수령 으로, 노동당을 김일성과 김정일의 당이라고 규정하 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업적 에 대하여 보충하였다. 둘째, 노동당은 김일성 김정일주의 를 유일 한 지도사상으로 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 김정일주의화 를 당의 최고강령으로 하며, 김정은의 영도 밑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위업, 주체혁명위업의 승리를 위하여 투쟁한다고 규정하였다, 셋째, 노동당

82 제1비서직 을 신설하고, 노동당 제1비서는 당의 수반으로 당을 대표하고 전당을 영도하며 김일성과 김정일의 사상과 노선을 실현해나간다고 규정하였다. 평가 일반적으로 공산주의 국가는 정치가 법에 우선한다. 그리고 공산주의 국가에서 헌법은 당 강령에 기초하여 구성되며 작동한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북한 체제에서도 확인된다. 북한 정권도 헌법과 당 규약을 통해 그들이 표방하는 사회와 당시에 구축된 체제를 합리화하는 작업을 수행하여 왔다. 당 규약은 북한의 국가정체성 원칙을 명문화하고, 이 원칙에 기초하여 정치, 경제, 사회, 대외정책 등에 대한 사실상의 최고지침의 의의를 갖는다. 따라서 당 규약의 개정은 새로운 당적 방침을 제시하며, 북한 체제의 향방을 가늠할 수 있다는 지표가 된다. 북한의 당 규약 개정이 현실 과 규범 의 부정합성을 극복하고자 하는 측면이 없지 않지만, 북한이 지향하는 당 규약 개정의 방향은 사당화 군사화 권력집중화를 향하고 있다. 2012년 당 규약의 핵심 은 전문에서 조선노동당은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의 당 이라고 밝히고 있으며, 당의 지도이념 또 한 김일성 김정일주의 라고 명기하였다는 것이다. 즉 김일성에서 김정일, 김정은으로의 3대 세습체 제의 합리화를 위해 당 규약이 역할하고 있는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노동당 대표자회, 노동당 대회

83 노동당 대표자회 노동당 대표자회는 당중앙위원회가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 필요에 따라 소집 하는 회의를 말한다. 통상적으로 임시 당대회 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기능과 역할 당대표자회 대표자들은 당중앙위원회가 정한 선출비율과 선거절차에 의하여 각 도(직할시) 당위 원회 전원회의에서 선거된다. 당대표자회는 당의 노선과 정책, 전략전술의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하 고 결정하며, 당 중앙지도기관 성원들을 소환하고 보선한다. 또한 당 최고지도기관을 선거하거나 당 규약을 개정할 수 있다. 특히, 당대표자회의 당 중앙지도기관 소환 보선 규정은 1958년과 1966년 당 대표자회에서 김일성이 반대세력을 숙청하는 데 큰 기여를 하였다. 개최현황과 주요 안건 제1차 당대표자회는 1958년 3월에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인민경제발전 5개년(1957~1961) 계 획과 당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는 것에 대한 문제가 토의 결정 되었으며 당조직문제 등을 안 건으로 다루었다. 당의 통일과 단결, 조직문제는 1956년 8월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반대세력의 숙청에 주안점을 두었다. 전후복구 3개년 계획 이후로 약속했던 주민생활 향상이 전혀 실현되지 않았고 5개 년 계획의 전망이 어두워져 김일성의 지지세력이 약화되어가고 있었기에, 이 회의를 통해 김일성은 하부 맹종자들을 발탁하고 반김일성세력들을 축출하였다. 따라서 차기 전원회의에서의 김일성파의 승리를 확보하였으며 소련이나 중국의 간섭을 막을 수 있는 방패를 마련했다고 볼 수 있다. 제2차 당대표자회는 1966년 10월에 개최되었다. 현정세와 당의 과업,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당면 과업 에 대한 결정과 베트남 문제에 대한 성명이 채택되었다. 제2차 당대표자회 역시 조직문제, 숙청 의 논의들이 다루어졌는데, 김일성 독재노선에 반기를 들었던 자와 친중국, 반소련노선을 택했던 시 기에 반소련 선전에 앞장섰던 자들을 대량으로 숙청하여 김일성 자신의 반소적 과오를 은폐하고자 했다. 제3차 당대표자회는 2010년 9월에 개최되었다. 제2차 당대표자회 이후 44년 만에, 제6차 당대회 이후 30년 만에 열리면서,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재추대하고 당 규약을 개정하였으며 당 중앙지도기 관을 선거하였다. 특히 김정은을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하여 3대 세습의 공식화와 이를 위한 제도적 기반을 마련하였다고 볼 수 있다. 종전까지 당중앙위원회 위원은 60여 명만이 남아 있었 으나,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총 124명을 선출하였다. 30년 만에 개정된 당 규약은 당대표자회에도 당 규약 개정권한을 부여하였다. 제4차 당대표자회는 김일성의 100회 생일을 앞두고 2012년 4월에 개최되었다. 김정일 사후에 처 음으로 열리는 규모 있는 회의로써 김일성과 김정일을 영원한 수령, 영원한 총비서 로 추대하고, 김 일성 김정일주의 를 유일지도사상으로 명문화하였다. 그리고 제1비서직을 신설하여 김정은을 제1비 서,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 당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추대하였다. 조직문제와 관련 해서 정치국 상무위원회 및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최룡해, 정치국원으로 장성택, 당중앙위

84 원회 비서에 김경희를 포함시킨 것이 주목된다. 노동당 대표자회 개최현황 차수 개최일 주요의제 제1차 당대표자회 제2차 당대표자회 제3차 당대표자회 제4차 당대표자회 인민경제발전 1차 5개년 계획(1957~1961) 당의 통일과 단결을 더욱 강화하는 문제 당조직 문제 현정세와 당의 과업(국방 경제 병진정책)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당면 과업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 3년 연장) 월남문제에 관한 당대표자회 성명 채택 당조직문제(당중앙위원장제 폐지 및 총비서직제로 개편, 선거)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재추대 정김은을 당 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에 임명 당 규약을 개정(당대표자회에도 당 규약 개정권한을 부여) 당 중앙지도기관, 당중앙위원회 선거 김일성과 김정일을 영원한 수령, 영원한 총비서로 추대 김일성 김정일주의를 유일지도사상으로 명문화 제1비서직을 신설 김정은을 제1비서, 정치국 위원, 정치국 상무 위원회 위원,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장에 추대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노동당 규약, 노동당 대회

85 노동당 대회 북한의 노동당 대회는 당의 최고기관이다. 당대회는 당중앙위원회가 소집하며 당대회 소집날짜는 여섯 달 전에 발표한다. 기능과 역할 당대회는 초기에는 북한의 건국 문제, 노동당의 강령 및 규약 등 국가의 주요한 정책과 방향을 결정하는 역할을 수행하기 위해 개최되었다. 이후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검사위원회의 사업 총화 보 고 등의 의제뿐 아니라 다양한 정치적 이슈들을 해결하기 위한 필요성에 의해서도 비정기적으로 개 최되었다. 당대회에 참가하는 대표자 선거 절차와 선출비율은 당중앙위원회가 결정하고 대표는 차하급의 당조직인 도(직할시) 당대표회에서 선출한다. 1980년 개최된 제6차 당대회 대표자 선출비율은 당원 1,000명에 결의권 대표자 1명, 후보당원 1,000명에 발언권 대표자 1명으로 되어 있다. 한편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 당의 노선과 정책 또는 전략전술에 관한 긴급한 문제를 토의 결정하기 위해 당중앙위 원회는 임시 당대회인 당대표자회를 소집할 수 있도록 되어 있다. 노동당 규약에 의하면 당대회의 사업은 다음과 같다. 1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검사위원회의 사 업을 총화한다. 2 당의 강령과 규약을 채택 또는 수정보충한다. 3 당의 노선과 정책, 전략전술의 기본문제를 토의결정한다. 4 당 총비서를 추대한다. 5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검사위원회를 선거한 다. 개최현황과 주요 안건 지금까지 여섯 차례에 걸친 당대회의 현황과 주요 의제는 다음과 같다. 1946년 8월 28일 개최된 제1차 당대회의 의제는 북조선공산당과 신민당의 합당문제, 북조선노동당 강령 및 규약 채택 등이었 다. 1948년 3월 27일 개최된 제2차 당대회의 의제는 북조선노동당 규약 개정이었다. 북한이 창건되고 난 뒤인 1956년 4월 23일 개최된 제3차 당대회의 의제는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검 사위원회 사업 총화 보고, 당 규약 채택, 당중앙위원회 기관 선거, 평양통일선언문 채택, 신경제개발 5개년 계획 발표 등이었다. 1961년 9월 11일 개최된 제4차 당대회의 의제는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 획, 당중앙위원회 중앙검사위원회 사업 총화 보고,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등이었다. 김일성 유일지배체계가 구축된 이후인 1970년 11월 2일 개최된 제5차 당대회의 의제는 당중앙위 원회 위원 및 후보위원 선출, 당중앙검사위원회 위원 선거, 총비서(김일성) 및 비서, 정치위원 및 후 보위원 선거, 당중앙위원회 부장들과 노동신문 편집주필 임명, 당검열위원회, 중앙검사위원회 위원 장 부위원장 선거 등이었다. 1980년 10월 10일 개최된 제6차 당대회의 의제와 주요 결정사항은 김정일의 후계지위 공식화(김 정일을 당대회 집행위원회 29명 중 서열 5위로 선출), 사회주의 건설 10대 전망 목표 제시, 고려연방 제통일방안 제안, 비동맹 자주노선 등이었다. 당대회는 지금까지 여섯 차례 개최되었으나 당 규약상 규정한 대로 제때에 개최된 적은 한 번도

86 없었다. 북한은 제6차 당대회 이전에 4년에 1회씩 개최하기로 되어 있는 정기대회를 8년 간격을 두는 등 불규칙하게 개최했으며 제5차 당대회(1970년 11월) 이후 제6차 당대회(1980년 10월)도 10년 만에 열렸다. 이는 김정일 시대에 당이 1인 지배체제에 편입되었음을 시사한다고 할 수 있다. 당대회와 당대표자회 북한이 2010년과 2012년 당의 최고지도기관인 당대회 대신 임시 당대회 격인 당대표자회를 개최한 것은 당조직 개편이 일차적인 목적이었던 것으로 분석된다. 1980년 6차 당 규약에 따르면, 당대표자회는 당대회 사이에 소집 되는데 당의 노선과 정책에 관한 긴급한 문제들을 결정하고 당중앙위원회 위원들을 제명 보선한다. 이런 측면에서 당 규약상 당대회와 당대표자회의 기능은 크게 다르지 않아 보이지만, 실제 기능에는 다소 차이가 있다. 1960년대 이래 10년 단위로 개최된 당대회는 북한의 장기전망을 발표하는 자리였다. 그런데 북한은 1990년대 전후로 대외정세가 불투명하고 경제가 어려워지자, 제6차 당대회 이후 30년 동안 당대회를 개최하지 않았다. 현 재도 핵문제ㆍ경제문제 등 불확실한 상황으로 인해 중장기 발전전략을 수 립ㆍ제시하기에 역부족이다. 그러나 1994년 김일성 사후 거의 방치된 당조 직의 개편을 더 이상 미룰 수 없는 상황이기 때문에 당대회 대신 당대표자 회를 선택한 것이다. 노동당대회 개최현황 차수 개최일 주요의제 제1차 당대회 제2차 당대회 제3차 당대회 제4차 당대회 제5차 당대회 제6차 당대회 당 창립에 대한 보고 당 강령 규약 기관지에 대한 보고 당중앙위원회 및 중앙검열위원회 선거 당중앙위원회 사업 결산 보고 당 규약 개정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 조국의 평화적 통일을 위하여 채택) 당 규약 개정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인민경제발전 7개년 계획(1961~1967) 당 규약 개정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인민경제발전 6개년 계획(1971~1976) 당 규약 개정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당중앙위, 당중앙검사위 사업 총화 (사회주의 건설 10대 전망 목표 제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 제안) 당 규약 개정 당 중앙지도기관 선거 (김정일 당 정치국 상무위원 선출)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노동당 규약, 노동당 대표자회

87 노동당 비서국 노동당 비서국은 당 내부사업에 관한 문제와 그 밖의 실무적 문제들을 주로 토의 결정하고 그 집행을 조직 지도한다. 비서국은 중앙위원회의 필요에 따라 설치된 부서를 일상적으로 지휘 감독하 는 역할을 하며당의 중추기관이다. 본래 비서국은 1966년 10월 12일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14차 전원회의의 결정에 따라 설치된 것 인데, 이때 종전의 중앙위원회 위원장, 부위원장제를 폐지하고 당의 최고 실권자인 총비서와 비서로 구성되는 비서국을 두게 되었다. 총비서제의 도입으로 김일성의 유일지배체계를 확고하게 구축하게 되었다. 그러나 김정일 시대에 들어와 당대회나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가 장기간 열리지 않는 상황에서, 비서국이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대신하여 당중앙위원회를 실질적으로 주도하기 시작했다. 즉 당의 최 고지도기관들이 회의조차 열지 못하고 그 위상이 떨어진 것과 반대로 당의 모든 정책은 비서국을 통하여 이루어졌던 것이다. 비서국 회의는 총비서 또는 조직비서의 사회로 진행되는데, 당과 국가, 군대, 행정 및 경제 등 모 든 부문의 고위간부들의 임명 및 해임 등 중요인사업무에 대한 결정, 모든 당적 조치들의 채택 등을 주관하고, 비서국 결정, 비서국 지시문 등을 전당에 하달하는 사명을 수행하였다. 김정은 시대에 들어와 정치국이 본래의 모습을 갖기 시작하자 비서국은 김정일 시대보다 그 역할이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황장엽의 증언에 따르면, 당중앙위원회는 정치국과 비서국을 두고 있으며, 정치국은 지도기관, 비 서국은 최고집행기관의 성격을 가지고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형식상 당의 최고기관으로 되어 있지만 심의에 제기된 정책안들은 비서국의 지도를 받는 집행부서들이 작성하며, 중앙위원회의 심의는 형식 에 불과하다고 한다. 그리고 당정책안의 비준 또한 담당비서의 역할이라고 한다. 따라서 실질적으로 당사업을 책임지고 지도해 나가는 것은 비서국 성원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비서국의 분야별 담당비서는 소관별 각 부서를 관장하고, 구체적인 계획 수립과 집행을 지도, 통 제하는 권한을 가지고 있으며, 각 담당비서는 총비서를 보좌한다.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노동당 정치국, 노동당 중앙위원회

88 노동당 정치국 노동당 정치국은 당의 최고정책결정기관이자 당중앙위원회 위원들 중 가장 권 력서열이 높은 간부들의 집합체이다. 연원 정치국은 1946년 8월 28일부터 30일까지의 3일간에 걸쳐 개최된 양당합당대회(신민당과 합당)에 이어 열린 제1차 중앙위원회에서 처음으로 선출되었다. 조선노동당 발족 초기에는 당대회와 당중앙 위원회가 주요 권한을 행사해 왔으나, 1956년 제3차 당대회 이후부터는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 의 권한이 커졌으며, 1966년 10월 당중앙위원회에 비서국 이 신설되면서 당의 운영이 김일성의 지시를 받는 비서국 중심체제로 전환되었다. 또한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개정된 당 규약에 따라 당중앙 위원회 정치위원회 를 정치국 으로 변경하고 그 안에 상무위원회 를 신설해 핵심적인 기능을 수행하 도록 하였다. 위상과 변화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는 전원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기간 당중앙위원회의 명의로 당의 모 든 사업을 조직 지도하도록 되어 있다. 즉 전원회의가 짧게는 수개월에서 길게는 일 년여 만에 개최 되고, 회의도 수백 명이 참석하기 때문에 보다 실질적인 회의는 소수의 엘리트만이 모인 정치국 회의 에서 결정하는 것이다. 정치국은 정위원과 후보위원으로 구성되는데, 정치국이 당 규약상 북한 최고 권력의 핵심체이자 절대권력기관이므로 이들은 북한 당 정 군의 핵심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일성이 사망한 이후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가 열리기 전까지 당정치국 회의가 열렸다 는 공식적인 보도는 나타나지 않았다. 이 시기 동안 당 규약상 당의 최고지도기관이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고 따라서 국가기관에 대한 당적 영도는 약화된 것으로 보인다. 선군정치를 내세웠던 김정일 체제에서는 국방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군부가 권력을 이끄는 핵 심그룹이었다. 하지만 2010년 이후 당의 위상이 높아지는 변화를 보인다. 2010년 9월 28일 제3차 당 대표자회에서 김정은이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과 당중앙위원회 위원에 선임돼 후계자로 공식화 되면서 이전까지 공석이 많았던 정치국과 비서국, 중앙군사위원회 등을 채워 재정비한 것이다. 특히 2011년 12월 김정일 사망 이후 김정은 체제가 들어서면서 당 재정비작업이 본격화되고 있 다. 정치국은 2011년 12월 30일 회의를 열어 김정은을 군 최고사령관에 추대하는 결정서를 채택하고 당 구호를 심의하였고, 2012년 1월에는 특별보도를 통해 김정일의 유해를 금수산태양궁전에 안치하 도록 결정하였으며, 2012년 7월 15일 회의를 열어 리영호 군 총참모장 해임안을 처리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를 계기로 노동당에 대한 정비가 이뤄졌고 김정은 체제에 들어서 면서 정치국 회의가 정상 가동되는 상황에 비추어 북한 사회에 대한 당의 통제가 강화되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노동당 비서국, 노동당 중앙위원회

89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는 당의 군사노선과 정책을 관철하기 위한 대책을 토의 결정하며 혁명무 력을 강화하고 군수공업을 발전시키기 위한 사업을 비롯하여 국방사업 전반을 당적으로 지도한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에 군사 분야에서의 모든 사업을 당적으로 조직 지도한다. 북한이 군사위원회를 설치한 것은 1962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김일성 이 제시한 4대 군사노선 을 채택하는 등 국방력 강화에 대한 결정이 이루어진 뒤였다. 당중앙위원회 산하기구였던 군사위원회는 1982년경 승격되어 당중앙군사위원회로 개칭되었다. 당중앙군사위원회 는 북한 전역을 병영체제화하는 4대 군사노선 의 핵심 역할을 담당했으며, 전국적으로 도, 시, 군 단 위에 각급 군사위원회를 두었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기본적인 군사정책이나 전략수립 업무만을 관장하고 있을 뿐 세부적인 업무 는 국방위원회에서 담당하고 있으며, 1년에 한 두 차례 정도 회의를 개최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하지 만 회의 개최시에도 중요한 군사정책을 결정하기보다는 군수관련 사항 정도를 결정하고 있어, 실질 적인 국가주권의 최고군사지도기관이자 결정기관인 국방위원회에 비해 상대적으로 기능이 미미한 상태이다. 그러나 북한은 국가적인 주요 결정이나 발표가 있을 때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공동명의로 하는 경우가 적지 않다. 이는 당중앙군사위원회의 위상이나 권위가 격하되지 않았음을 보여주는 근거가 되고 있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국방정책에 관한 군사노선의 결정, 노농적위군을 비롯한 민간방어계획 및 집행, 국토요새화계획과 그 집행, 군의 간부화 및 현대화계획의 추진, 군사산업시설 발전의 사업수행, 내각 산하 각 부의 군사관련 업무를 담당한다. 이를 수행하기 위해 군사동원부, 훈련과, 대열과, 작전 과, 병기과, 교양과, 통신 및 수신과 등의 전담 부서를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당중앙군사위원회는 김정은의 권력승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 서 후계자로 공식화된 김정은의 직책이 당중앙군사위원회 부위원장이었던 것이다. 원래 후계체제는 당을 근간으로 구축되어야 하는데, 선군정치를 실시하고 있는 상황하에서 당과 군의 가교역할을 담 당하고 있던 당중앙군사위원회가 후계구축 과업을 부여받은 것이다. 당 규약에서 총비서가 당중앙군사위원장을 겸직하기로 되어 있으므로, 김정은은 2012년 4월 당 제1비서에 취임함으로써 당중앙군사위원장이 되었다. 한편 김정일 시대의 당중앙군사위원은 군부의 원로들로 구성되었던 반면, 김정은 시대에는 야전 군인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다. 이러한 특징으로 짐작컨대, 김정은 시대에 들어 당중앙군사위원회가 군부의 이익을 대변하는 역할도 수행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관련 검색어 _ 국방위원회, 노동당

90 노동당 중앙위원회 노동당 중앙위원회는 당대회와 당대회 사이의 모든 당사업을 관장하는 당조직 의 최고지도기관이다. 당중앙위원회는 1946년 8월 북조선노동당 창립대회에서 처음 조직되었다. 기능과 역할 당중앙위원회는 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적 영도체계를 확고히 구축하며, 당과 혁명대오를 수 령결사옹위의 전투부대로 만들고 그 위력을 높이며, 주체사상, 선군사상을 구현하여 당의 노선과 정 책을 수립하고,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을 정치적으로 지도하며, 국내외의 각 정당, 단체들과 사업하고, 당의 재정을 관리한다. 당중앙위원회의 조직기구는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 비서국, 검열위원회 등으로 이루어져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위원, 후보위원 및 준후보위원으로 구성되며, 그 수는 당대회에서 결정한다.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은 145명, 후보위원은 103명이었는데, 2010년 제3차 당대표자회에서 당중앙위원회 정위원은 124명, 후보위원은 105명이었다. 또한 당중앙위원회 산하에 20여 개의 전문부서가 설치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으며, 2013년 4월 현재 조직지도부, 간부부, 경공업 부, 계획재정부, 과학교육부, 국제부, 군사부, 근로단체부, 기계공업부, 당역사연구소, 문서관리실, 민 방위부, 선전선동부, 신소실, 재정경리부, 총무부, 통일전선부, 행정부, 38호실, 39호실 등이 있다. 당중앙위원회는 전원회의를 1년에 한 번 이상 소집할 수 있다.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는 해당 시 기 당의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 결정하며, 당중앙위원회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를 선거하며, 당 중앙위원회 비서들을 선거하고 비서국을 조직하며, 당중앙군사위원회를 조직하고 당중앙위원회 검 열위원회를 선거한다. 필요에 따라서는 중앙과 지방의 당 정 기관 및 경제 기관 등의 책임자들이 참 가하는 확대 전원회의를 개최하기도 한다. 개최현황 김일성 시대에는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정상적으로 개최하였으며, 전원회의가 개최되지 않는 기간에는 산하의 정치국과 정치국 상무위원회가 당의 모든 사업을 조직하고 지도하였다. 그러나 1993년 12월 8일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 회의를 마지막으로 김정일 시대에는 전원회의가 한 번 도 열리지 않았다. 북한은 1997년 10월 8일 당중앙위원회와 당중앙군사위원회 특별보도를 통해 김일성 사후 3년 3개 월 동안 공석이었던 당총비서직을 김정일에게 공식 이양했다. 당 규약에 명시된 바에 따르면 전원회 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추대되어야 하지만 특별보도라는 편법으로 승계가 이루어진 점이 주목되었다. 가장 최근에 개최된 전원회의는 17년 만에 이루어진 2010년 9월 전원회의였다. 이 회의에서 김정 은이 후계자로 공식화되었는데, 이때 안건은 1 당중앙위원회 정치국 상무위원회 선거, 2 당중앙위 원회 정치국 선거, 3 당중앙위원회 비서 선거, 비서국 조직, 4 당중앙군사위원회 조직, 5 당중앙위 원회 부장, 노동신문 책임주필 임명, 6 당중앙위원회 검열위원회 선거 등이었다

91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노동당 정치국, 노동당 비서국

92 노동신문 노동신문은 노동당 중앙위원회 기관지로 노동신문사가 편집 발행하고 있는 북한 최대의 일간 신 문이다. 노동신문은 1945년 11월 1일 <정로>라는 제호로 출발했으며, 1946년 9월 1일 현재의 이름 으로 개칭되어 일간으로 발행하고 있다. 북한의 조선대백과사전에 따르면, 신문의 사명은 주체의 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끝까지 완성해 나가는데 적극 이바지하는 것 에 있고, 그 기본 임무로 주체사 상의 요구대로 자연과 사회, 인간을 개조하고 전당과 인민을 김정일 동지의 주위에 묶어세우며 당대 열의 정치사상적 통일을 보장하기 위해 투쟁하는 것 을 제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노동신문은 대내 외 주요 현안 및 정론이나 사설을 통해 북한정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어, 북한 언론의 총참모부 역할을 하고 있다. 노동신문사는 1972년 11월부터 평양시 중구역에 있는 현재의 청사에서 신문을 발간하고 있는데, 1974년부터 6면으로 늘려 현재 발간부수는 150만부로 알려지고 있다. 연중무휴로 발간되고 편집형태 는 전면 가로쓰기를 채택하며 모든 기사는 한글전용이다. 사진과 활자는 특간호의 경우를 제외하고 는 거의 흑백으로만 인쇄된다. 김일성 김정일 김정은 이름은 호수를 크게 하고 진하게 표기하고 있 다. 신문의 1면과 2면은 정치면으로 북한 고위층의 동정, 찬양 등 관련 기사와 정책관련 사설, 정론 등이 고정적으로 실리고 있다. 3면은 경제면으로 각지 경제관련 소식이, 4면은 사회면으로 북한 내 사회 문화 체육 소식이 소개되고 있다. 간지인 5면은 남한 및 통일관련 기사, 6면은 국제 뉴스로 채워 지고 있다. 노동신문사에서는 당보를 발간하는 일 외에 당 일꾼들을 위한 참고 자료들을 편집 발행하 고 있으며 <국내국제주요일지>, <노동신문 주요사론설집> 등 도서들도 발행하고 있다. 노동신문에서 비중 있게 다루어지는 기사는 사설과 논평이다. 사설은 당의 방침이고 논평은 정세 에 관한 당의 입장으로, 여타 보도매체들은 노동신문의 논조를 기준으로 편집방향을 결정한다. 한국 등 서방 나라들의 보도 경향과 달리 노동신문에는 생활정보 기사나 범죄 등의 사건기사, 정책비판 기사들을 찾아 볼 수 없는 것이 특징이다. 북한 사회 내부의 사건 사고 기사는 한 줄도 없는 반면, 한국의 시위나 파업, 부정적인 사건들의 동향은 지면을 할애하여 보도하고 있다. 노동신문사는 편집국, 당역사교양부, 당생활부, 혁명교양부, 공업부, 농업부, 과학교육부, 남조선 부, 국제부, 보도부, 대중사업부, 사회문화부 등의 부서들을 두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민주조선, 조선신보

93 노동자구 북한은 기초 행정구역 중 거주민의 대부분이 노동자로 구성된 경우 노동자구를 설치하여 행정체 계를 운용하고 있다. 북한은 행정구역 체계를 여러 번 개편했는데, 오늘날의 기초 행정단위 체계는 1952년 12월 단행된 대규모 행정 개편조치에 근간을 두고 있다. 당시 개편에서는 전통적인 행정 구역 체계인 도(특별시 직할시), 군(시 구역), 면(읍), 리로 구성된 4단계행정 체제에서 면을 폐지하고 도, 군, 리 3단계로 간소화했다. 이 때 리에 해당되는 지역 가운데 인구 중 노동자 비중이 65%가 넘는 곳은 노동자구로 편성했다. 북한은 당시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에 의해 공업의 합리적 배치 를 목적으로 노동자구 를 설치했다. 노동자구는 공업발전과 함께 급속히 증가한 노동자들의 후방공급사업(주 부식 조달)을 개선하고 국가 관리를 원만히 보장할 목적으로 주민의 400명 이상이 성인이고 그들의 65% 이상인 지역을 대상으로 하였다. 주로 공업단지, 탄전지대, 광산지역, 염전, 발전소, 임산마을, 어촌, 특수농장 등 인구밀집 주거지역을 중심으로 노동력을 집단적으로 관리하여 생산성과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설치한 구역화 제도로 볼 수 있다. 2011년 말 현재 북한 전역에는 267개의 노동자구가 있다. 노동자구에 있는 노동자구사무소 는 주 민행정사업과 함께 후방공급사업을 맡아서 한다. 노동자구의 각 도(직할시) 시 군별 현황을 살펴보 면, 평양시(10), 평안남도(26), 평안북도(31), 자강도(23), 양강도(67), 황해남도(11), 황해북도(8), 함경 남도(35), 함경북도(44), 강원도(7), 남포특별시(5) 등이다. 관련 검색어 _ 인민반

94 농민시장 농민시장이란 텃밭이나 부업밭, 뙈기밭 등을 통해 생산되는 농축산물이나 부업을 통한 생산물을 매매하거나 교환하는 농촌의 장터이다. 북한의 농민시장은 북한당국에 의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합법적인 사회주의적 상업 의 한 형태이다. 배경 북한은 농민시장을 1958년 이후부터 허용해왔다. 사회주의 초기에는 아직 생산력 발전이 높지 않 아 일부 부식물과 일용품을 충분히 공급하지 못하므로, 농민들의 생활편의를 도모하고 노동자 사무 원들에게 여러 가지 농산물을 공급함으로써 생활향상에 이바지할 수 있다고 보았기 때문이다. 당시 북한은 농민시장을 자본주의의 잔재로 보면서도 국가가 모든 물건을 넉넉히 생산하고 공급할 정도로 생산력이 발전될 때까지는 일시적으로 허용할 수 있다고 보았다. 즉 농민시장을 사회주의가 완성되 기 전 과도기에서의 일시적 현상으로 보았다. 그러나 북한은 개인경리나 개인부업을 통하여 나온 생산물을 농민시장에서 팔게 함으로써 협동 농민, 노동자, 사무원에게 부수입을 얻을 수 있게 하는 한편, 텃밭의 규모를 30~50평 정도로 제한하여 일부 농민들이 공동노동에 적극적으로 참가하지 않고 개인경리에만 매달리는 경향을 통제하였다. 또 한 식량이나 공업제품 등 일부 품목의 거래를 엄격히 금지해 농민시장을 통해 부정적인 요소들이 조장되지 않도록 하였다. 운용방식과 변화 농민시장은 인민위원회 상업과의 지도에 따라 도시에는 구역마다 농촌에는 군마다 설치되어 지 정된 장소에서 장세를 받으면서 운영되었다. 평양 등 대도시에는 상설화 되어 있었으며, 대부분의 지방에서는 군단위로 1~2개 장소에서 10일장으로 개장되었다. 지방에서 농민시장이 10일장 형식으 로 개장되는 이유는 협동농장이 쉬는 날인 매달 1일, 11일, 21일에 맞추었기 때문이다. 1958년 이후 경제적 호황기를 누렸던 1970년대까지는 농민시장의 규모가 크게 위축되었다가, 1980년대부터 경제성장이 둔화되면서 농민시장 이용이 활발해지기 시작했다. 1990년대에 들어 경제 난에 따라 농민시장의 거래품목이 다양해지고 지정된 장소를 벗어나 골목 어느 곳에서나 장이 서며, 지방의 10일장도 매일장으로 바뀌었다. 경제난이 가중되면서 가내작업반, 부업반, 텃밭, 개인부업밭, 개인뙈기밭 등이 확산되어 사적 생산물이 늘어남에 따라 자연히 그 유통통로인 농민시장도 확대되었 다. 또한 농민시장은 당국의 통제를 벗어나 점차 암시장으로 변질되어 갔다. 거래가 금지된 곡물이 거래되기 시작했고 가내수공업 제품만이 아니라 국영기업에서 생산된 소비재나 수입품이 국영유통 망을 벗어나 농민시장으로 유입되었다. 이에 따라 당국은 1987년, 1988년, 1992년, 1994년, 1999년에 농민시장을 통제하기 위한 대대적인 단속조치를 취했는데, 그때마다 주민들의 반발과 중하층 관료들의 비협조로 수포로 돌아가고 말았 다. 이 과정에서 농민시장의 규모와 시장 참여 주민의 숫자가 점차 확대되었고 거래품목과 거래유형 역시 다양해지고 대범해졌다. 이러한 상황에 1990년대 배급제 및 국영유통망이 붕괴가 더해지자 농

95 민시장은 식량과 소비재 영역에서 국영유통망을 대체해갔다. 결국 2003년 3월 북한은 농민시장을 확대 개편하여 시장 으로 명칭을 변경하였다. 같은 해 5월에 는 시장의 설립과 관리운영에 대한 세부적 지침을 만들고, 6월에는 농민시장을 합법적 상업시장인 종합시장 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관련 검색어 _ 뙈기밭, 배급제, 장마당

96 다국적 군축협상 북한은 1986년 1월 20일 팀스피리트 한미합동군사훈련을 빌미로 진행되던 모든 남북대화를 중단 시켰으며, 이후 1986년 6월 남 북 미 군사당국자회담을 제의하고 12월에는 남북고위급 정치군사회담 을 개최하자고 제의하였다. 1987년에 들어와서도 북한은 이 정치군사회담의 결실 여하에 따라 여러 분야의 남북대화가 재개되고 최고위급회담도 마련될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연장선상에서 북한은 1987년 7월 23일 한반도에서 단계적 군축실현 문제를 논의하기 위 한 다국적 군축협상 개최를 제의하였다. 중립국 감시위원회 성원국인 폴란드, 체코, 스위스, 스웨덴 대표들이 옵서버로 참가하는 방식이었다. 그리고 이 협상을 1988년 3월에 제네바에서 개최하자고 주 장하였다. 이 제의에서 북한은 남북한의 무력을 1988년부터 1991년까지 3단계에 걸쳐 축소해 1992년부터는 각각 10만 이하의 병력을 유지할 것과, 남북 간에 이러한 군축이 진행되는데 따라 미국은 핵무기를 포함한 모든 무력을 철수하고 미군기지도 철폐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면서 북한은 1987년 말까지 북 한군 10만 명을 일방적으로 축소할 것임을 밝혔다. 북한이 주장하는 다국적 군축협상은 기존에 제의해 온 남 북 미 3자회담 연장선에서 변형된 형태 에 불과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 3자회담의 전략적 구도와 결부된 변형물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다국적 군축협상을 제의하면서 개최일자를 8개월이나 뒤로 미루고 있는 것은 이례적인 것이 었다. 이것은 긴장완화나 협상에 관심이 있다기보다는 당시 남한에서 민주화가 진행되고 대통령 선 거 과정에 들어간 시기를 겨냥하여 주한미군과 군축 문제를 쟁점화하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으로 보 인다. 또한 제네바를 장소로 정하고 중립국감독위원회 성원국들을 옵서버로 참여할 것을 제안한 것 은 한반도 평화 문제를 국제 이슈화하고 88서울올림픽 개최 분위기를 흐려보려는 의도가 있었던 것 으로 보인다. 이에 대해 우리 측은 1987년 8월 3일 남북외무장관회담 개최를 제의하고, 기존대화 재개 등 신뢰 구축 문제, 긴장완화와 평화정착을 위한 군축 등 남북 간 모든 관심사를 협의할 수 있다고 밝혔다. 1988년 이후 북한은 다국적 군축협상 개최 문제를 더 이상 제기하지 않았다. 관련 검색어 _ 군축 및 평화연구소

97 다박솔 초소 다박솔 초소는 북한이 선군정치에 대해 최초로 언급한 군부대 명칭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곳이다. 부대명과 관련해 평양방송은 부대를 찾은 김정일이 다박솔이 우거진 이런 곳을 다박솔 중대 라고 한다. 고 말함으로써 다박솔 이란 이름이 붙게 됐다고 전했다. 그러나 북한은 그동안 다박솔 초소에 관해 구체적으로 밝히지 않았으며, 현재까지도 평양시 만경대구역 교외라는 것 이외에는 부대의 정 확한 위치는 알려지지 않은 상태이다. 북한은 김정일이 1995년 1월 1일 이 초소를 현지지도하면서 선군정치 라는 것을 처음으로 밝혔다 고 주장하고 있다. 노동신문( )은 1995년 1월 1일 장군님(김정일)이 다박솔 초소를 찾은 날 은 이 땅위에 선군정치의 첫 포성이 울린 역사의 날이라며 이 날은 건군사에 가장 영광스러운 날로 전해지게 될 것 이라고 선전하고 있다. 평양방송( )이 장군님(김정일)께서는 1995년 1월 1일 다박솔 중대부터 찾으셨다며 장군님께서 푸르싱싱한 다박 솔(가지가 다보록하게 많이 퍼진 어린 소나무)로 뒤덮여 있는 포진지와 주변을 돌아 봤다. 고 보도한 것으로 볼 때 다박솔 초소는 포병중대로 추정된다. 한편 북한군 출신의 탈북자는 지난 1995년 1월 1일 김정일이 214군부대를 방문했을 때 평양고사 포 사령관 남상락 상장(우리 군의 중장)이 영접했다는 북한 보도로 미루어 다박솔 초소는 평양고사 포 부대의 예하부대인 평양시 만경대구역의 여성고사포병 중대일 가능성도 있다고 한다. 관련 검색어 _ 선군정치

98 단군릉 북한은 단군릉을 단군과 단군 부인의 무덤이라고 주장하고 있으며, 북한의 국보 문화유물 제174 호로 지정하였다. 북한은 1993년 10월 2일 사회과학원의 단군릉 발굴보고 를 통해 고구려 양식의 돌 칸 흙무덤에서 단군부부의 유골을 발견하였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1993년 10월 단군릉 발굴보고 를 통하여 단군이 5,011년 전의 실존 인물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이 보고에 의하면 이곳에서 두 사람 분의 유골 86개와 금동왕관 앞면의 세움장식, 돌림띠 조각 등이 출토되었으며, 감정한 결과 하나는 남자, 다른 하나는 여자의 것으로 확인되었고 단군부부가 함께 묻힌 것이라 하였다. 또 이 유골을 전문연구기관에서 연대측정한 결과 약 5,011년 전의 것으로 입증되었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1994년 10월 11일 단군릉을 평양직할시 강동군 문흥리 대박산 기슭에 조성하였다. 화강석 1,994개를 다듬어 쌓아 올린 무덤의 높이는 22m, 한 변의 길이는 50m이다. 단군릉의 내부는 한번에 10여 명이 들어가 볼 수 있으며 단군과 그 왕비의 유골이 보존되어 있다. 단군릉의 앞과 주위의 넓은 마당에는 상돌 향로 호랑이 망주석 석등 검탑 등이 세워져 있다. 단군릉의 네 모서리에는 돌호랑이 들이 서 있으며 그 아랫단 네 모서리에는 고조선의 대표적 무기인 비파형단검을 형상한 검탑이 서있 다. 능 앞의 낮은 단과 계단 양편에는 단군의 네 아들인 부루 부소 부우 부여 등과 8명의 측근 신하들 의 조각상이 세워져 있다. 이 조각상들은 그들이 각기 맡은 직무의 특성에 맞게 개성을 살리면서 의 상이나 장신구 등에서는 큰 차이가 없게 만들었다. 북한은 단군릉을 발굴하고 새 능을 대대적으로 신축하면서 종래에 신화적 전설적 인물로 간주되 어온 단군이 실존인물이라는 사실과 단군이 우리 민족의 원시조이자 고조선의 건국시조라는 것이 밝혀졌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의 이러한 주장에 대하여 한국과 외국 역사학계에서는 북한이 사용한 연대추정 방법의 문제점과 북한 단독의 발굴조사였다는 점을 들어 회의적인 평가를 내리고 있다. 한편, 일부에서는 김일성, 김정일의 세습권력체제를 정당화시키기 위하여 민족정통성의 조작에 의해 이루어진 측면이 강하다고 비판하기도 한다. 실제로 단군릉 발굴 이전에 북한은 단군과 관련하 여 봉건 사가나 부르조아 민족주의 사가에 의하여 실재한 고대국가, 실재한 인물인것처럼 과장되기 도 하였다. (역사사전Ⅰ, 1971년)라고 부정적인 견해를 나타내고 있었다. 그런데 단군릉 발굴 이후, 입장을 바꿔 민족의 시발점이 평양이라며 북한정권의 정통성 조작에 활용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민족주의

99 단번도약 단번도약이란 북한 사회주의 경제체제를 그대로 온존시킨 채 과학기술 육성과 정보기술 산업의 발전을 통해 현재의 경제난을 빠른 속도로, 질적으로 새롭게 극복해 보이겠다는 의미이다. 북한이 낙후한 상황을 타개하고 단번도약할 수 있다고 자신하는 근거는 과학기술의 힘이다. 첨단 기술을 개발하고 경제 각 부분에 응용 도입함으로써 선진국을 추격발전할 수 있다는 생각이다. 북한 은 새로운 연대에 들어선 만큼 우리는 지난날 다른 나라식의 낡은 틀과 관례를 전면적으로 검토하 여 보고 모든 사업을 우리식대로 전개해 나가야 한다. 고 지적하면서 우리식 은 곧 단번도약의 의미 라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우리는 단번도약의 본때를 이미 맛보았다. 인공지구위성 광명성 1호 의 탄생도 그것이었고 토지정 리의 천지개벽도 그것이었다. 고 덧붙였다. 즉 첨단산업만이 살길이라는 의지가 단번도약이라는 표 현으로 제시된 것이다. 북한에서 과학기술 중시문제는 1980년 이후 강조되어 왔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위기 속에 잠시 주춤하다가 2000년 5월 김정일이 중국의 실리콘 밸리인 베이징 소재 중관촌( 中 關 村 )을 방문한 이후 구체화되기 시작하였다. 2000년 7월 4일 과학중시 사상을 틀어쥐고 강성대국을 건설하자 라는 논설 을 계기로 과학중시사상, 과학기술발전계획, 과학기술연구사업, 과학자대오육성 등을 적극 추진하였 다. 현재 북한에서 추진하고 있는 선군( 先 軍 )의 강조, 국방공업의 강조, 신사고와 첨단과학기술의 강 조, 그리고 단번도약으로 대표되는 경제비약의 의지는 하나의 맥락을 형성하고 있다. 반면 북한이 강조하는 과학기술의 힘과 이를 통한 단번도약의 강조는 여전히 민족적 자립경제체 제를 근간으로 하고 있다. 북한은 경제난을 타개하기 위해 요구되는 대외개방, 즉 기술혁신과 외자도 입, 서방과의 무역확대 등을 자원이나 팔아먹고 관광업이나 해서 먹고사는 방식이라고 일축한다. 외 부에 기대어 경제문제를 해결하기 보다는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이를 통해 먹는 문제도 해결하고, 경 제강국도 건설해야만 우리식 사회주의를 지킬 수 있다고 인식한다. 이에 따라 단번도약은 여전히 자 력갱생의 정치사상적 각오가 강조되는 회로 위에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 신사고, 자력갱생

100 답사행군 북한은 답사행군을 일정한 대상을 답사하기 위해 조직 진행하는 행군이라고 정의한다. 답사행군의 목적은 청소년들과 근로자들을 생동한 현실을 통하여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깊이 간직하도록 교양하며 그들의 사상의지와 체력을 단련시키는데 있다고 강조한다. 배경 답사행군은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 명승고적 등 여러 대상을 답사하기 위하여 진행하는 행군 이지만, 중심이 되는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에 대한 답사행군이다. 북한 에서 답사행군이 대대적으로 벌어진 것은 김정일에 의해서다. 김정일은 1970년대 초 후계자로 선출 된 이후 김일성을 따라 배우는 차원에서 소학교와 중학교에서 배움의 천리길 과 광복의 천리길 답사 행군을 정례화하도록 했다. 대학에서는 백두산혁명전적지와 왕재산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을 정례화하 도록 했고, 이후 각 공장, 기업소, 기관 등 단위별로 다양한 형태의 답사행군이 하나의 정치행사로 자주 진행됐다. 주요내용 북한은 답사행군을 혁명전통 의 교양방법 중 가장 중요한 방법으로 평가하고 있으며 철저한 계획 에 의해 운영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대상과 시기, 규모 등 다양한 형식의 답사행군을 조직하여 어린 학생들부터 성인까지 거의 모든 주민들이 정기적으로 참여하거나 동원될 수 있게 하였다. 답사행군은 전국적 범위를 포괄하는 형식과 지역별 또는 기관별 학교단위로 진행하는 형식이 있 고, 참가대상의 구성과 답사대상지에 따라 여러 가지 명칭으로 진행된다. 백두산혁명전적지 답사행군, 어은 장자산혁명사적지 답사행군, 왕재산혁명전적지 답사행군은 주 로 대학에서 학년 단위로 진행하며 소속 학생들을 전부 참여대상으로 하고 있다. 반면 배움의 천리 길 과 광복의 천리길 답사행군에 참여할 수 있는 학생은 우등생 또는 출신성분이 좋은 학생들, 그리 고 학교의 활동에서 적극적으로 참여하여 업적을 쌓은 학생이어야 한다. 답사행군은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를 돌아보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발표모임과 결의모 임 등 여러 가지 문화행사들을 조직하도록 하고 있다. 또 감상문, 참관기, 기행문 등 글쓰기를 하고 사진촬영 등의 창작활동과 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를 꾸리는 활동에 참여하게 한다. 답사를 진행한 다음에는 회의, 감상문 발표, 귀환 보고회, 창작품 전시회 등을 통하여 개인의 답사행군을 통한 실제 경험과 느낌, 감회 등을 발표하게 함으로써 경험하지 못한 일반 주민들이 간접 경험하도록 한다. 평가 북한은 답사행군에서 혁명사적에 대한 직접 체험과 함께 혁명사적물을 비롯한 자료들을 보고 해 설 강의를 듣는 것과 같은 교양방법을 통해 청소년들과 근로자들을 비롯한 주민들을 김일성과 김정 일에게 끝없이 충직한 공산주의혁명가로 교양하는데 큰 의의를 두고 있다. 또한 답사행군은 권력자 들의 정치적 의도를 일반 주민들에게 전달하기 위한 매우 중요한 혁명전통교양방법으로 여겨지고

101 있다. 특히 김정일의 공식적인 등장 이후혁명전적지와 혁명사적지를 통한 혁명전통의 교양에서 가장 중요한 의의를 가지는 공간이 백두산밀영 을 비롯한 백두산혁명전적지이다. 북한은 백두산밀영을 중심으로 백두산혁명전적지를 잘 꾸리고 보존하여 그를 통한 혁명전통교양을 강화하는 것은 백두 밀림에서 시작된 주체혁명위업을 대를 이어 계승완성하기 위한 투쟁에서 빛나는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담보 라고 설명한다. 곧 답사행군의 장소는 모든 혁명전통의 내용을 포괄하지만 답사행군이라 는 형식 자체는 김정일이 만들어낸 업적으로 평가되어 김정일의 혁명전통 계승성과 정치권력자로서 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데 활용되고 있는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백두혈통

102 당세포 당세포는 당의 최하위 말단 기층조직을 유기체의 세포에 견주어 이르는 말이다. 북한은 당세포를 당원들에 대한 일상적인 교양훈련을 통해 조직 사상적 통일성을 강화하고, 이를 통해 북한주민들 속 에서 당의 노선과 정책을 구현하는 기본조직, 전투단위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렇듯 당세포의 기본임 무는 당원들의 당 생활을 조직지도하여 당원들을 혁명과업 수행에 조직동원하는 것이다. 당세포는 보통 당원이 5명부터 30명까지 있는 단위에 조직하도록 되어있다. 당원수가 적어 세포 구성이 어려울 경우에는 주변의 다른 세포에 소속되거나, 사업의 성격과 인접관계를 고려해서 2개 이상 단위의 당원들을 합하여 1개의 세포를 이루는 경우도 있다. 한편 당원이 3명이 못되는 단위에는 시-군 당 위원회가 추천하는 당원을 책임자로 하는 당소조 를 조직할 수도 있다. 당의 영도적 기능이 헌법에까지 명문화되어 있는 북한에서는 고위간부에서부터 말단 평당원까지 모두 당세포에 소속되어 생활하고 있으며, 당 총화를 통해 평가를 받는다. 그 평가내용은 상부에 보 고되어 각 개인의 평가자료로 사용될 뿐만 아니라 사안의 경중에 따라 비판과 처벌까지 받게 된다. 즉 당원의 모든 생활은 당세포 활동을 통해 이루어진다고 할 수 있으며, 이에 따라 북한은 당세포의 역할을 강화하는데 주력하고 있다. 전국 규모의 당세포비서 행사는 1991년 5월 전국 당세포비서강습회, 1994년 3월 전당 당세포비 서대회, 2007년 10월 전국 당세포비서대회, 그리고 2013년 1월 28일 전당 당세포비서대회 등 총 4차례 개최되었다. 1991년 노동당 조직비서를 맡고 있던 김정일은 당세포비서강습회 참가자들에게 당을 구성하고 있는 당세포가 건전하고 기능과 역할을 원만히 하여야 당이 강해진다. 라고 당세포의 중요성을 역설 한 바 있다. 그리고 1994년 대회 때는 김일성이 참가자들에게 당 중앙(김정일 지칭)의 유일적 영도를 충성으로 받들라 는 내용으로 된 당세포의 5대 과제 를 제시했다. 김정일 체제 출범 이후 처음으로 2007년에 전국 당세포비서대회가 개최되었다. 이는 1차 핵 위기 때 미 북 간 긴장이 최고조로 달했던 시기에 개최된 제2차 당세포비서대회(1994.3) 이후 13년 만에 재개된 것이다. 이는 당세포조직의 전국 집체행사를 통해 전국적인 당세포조직의 이완현상과 일탈상 황을 재점검하며, 이를 단속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당세포의 역할을 강화함에 따라 당세포들의 행정사업에 대한 지나친 간섭과 통제, 월권행 위 등의 문제가 발생하면서 일선 행정기관과 잦은 마찰과 갈등 역시 존재하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여, 최근 북한군 내부에서도 당세포, 청년동맹 조직별로 군인들 사이에 친우관계, 관병관계(장교 사병 관계)를 집중 조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또한 북한은 김정은 체제 출범 이후 2013년 1월 처음으로 전당 당세포비서대회를 개최하였으며, 김정은은 당세포비서대회에 직접 참석하여 개회사를 육성으로 낭독하였다. 이는 김정은의 당조직 강 화 의지를 대중적으로 표출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김정은의 개회사에서 당중앙위원회는 이 번 당세포대회를 당 사업 전반에서 일대 전환을 일으키는 결정적인 계기로 만들 것을 결심했다. 고 밝힌 것도 이런 의지를 뒷받침한다. 또한 북한 지도부가 당세포비서의 기능을 강화시켜 김정은 체제 를 더욱 공고화하겠다는 의도를 담고 있는 것으로 분석된다

103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노동당 규약, 인민반

104 대남방송 북한의 대남방송은 남한주민들을 대상으로 김일성 김정일 찬양,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우월성 선 전, 남한 체제의 비방 등을 목적으로 하는 방송이다. 북한의 대남방송은 라디오 방송과 텔레비전 방 송으로 운영되어 왔다. 대남 라디오 방송은 북한이 남한에서 자생적으로 생겨난 조직이라고 주장하는 구국의 소리방송 과 조선중앙방송에서 분리돼 운영되고 있는 평양방송이 있다. 두 방송 모두 남한 체제와 사회에 대해 노골적인 비난, 비방을 주로 다루었다. 구국의 소리방송은 대남 혁명투쟁의 선전 전위 조직인 한국민족민주전선의 기관방송이다. 소재 지는 평양시 모란봉구역이며, 황해남도 해주 남산에 있는 송신소에서 송출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 다. 구국의 소리방송은 1967년 3월 평남 순안에 남조선해방민주민족연맹 방송 이라는 이름으로 개설 되었으며, 1968년 남한의 지하당이었던 통일혁명당 이 와해되자, 1970년 6월 통일혁명당 목소리방 송 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으며, 1985년 8월 구국의 소리방송 으로 변경됐다. 구국의 소리방송은 1일 3회 16시간씩 대남 각종 당면 투쟁 선언문, 성명, 담화, 기자회견 등을 지 속적으로 발표해 남한 내 반정부 선동을 집중적으로 전개했다. 북한은 이 방송이 남한 내 지하 운동 세력에 의해 운영되고 있다고 하면서 서울 말씨, 억양 등을 사용했다. 남한 출신 월북자들을 방송요 원으로 활용하기도 했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 이후 휴전선 근처에서 확성기를 통해 해오던 대 남비방 방송을 중단하고, 남북 간 상호비방 방송 중지 합의에 따라 2003년 8월 1일부터 구국의 소리 방송은 중단됐다. 평양방송은 북한의 제2방송에 해당하는 국영 라디오 방송이자 대남 및 대외 전문방송이다 년 조선중앙방송에서 분리되었으며, 1972년 11월 10일 평양방송으로 개칭하였다. 평양방송은 대남 이외 재일 조총련 및 재중, 재소 해외동포들과 기타 외국인들을 상대로 북한 체 제의 우월성과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를 선전하는 방송이다. 특히 평양방송에는 조선중앙방송에는 없 는 김일성방송통신대학강좌 등의 강좌프로그램을 통해 주체사상 교육을 하고 있으며, 남조선 국군 장병에게 보내는 방송, 남조선 청년 학생에게 보내는 방송, 재일동포를 위한 방송 등의 프로그램이 고정 편성되어 있었다. 이는 노동당 대남사업부에서 운영 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외, 대남용 방송으로 하루 23시간 30분 방송하며, 총 9개 채널로 이루어 져 있다. 이외에도 음악, 드라마 위주로 편성해 남한의청소년들을 겨냥한 대남 심리전 방송인 평양FM방송 도 있다. 1989년 1월 1일부터 시작한 평양FM방송은 서울까지 가청권으로 하여 평일에는 저녁 9시부 터 다음날 새벽 5시까지 8시간, 휴일에는 24시간 방송을 하고 있다. 텔레비전 방송의 경우에는 개성텔레비전방송이 대표적이다. 개성텔레비전방송은 1971년 4월 15 일 개국하였으며, 대내용과 대남용의 2원 방송체제로 운영된 유일한 지방텔레비전 방송국이다. 대내 방송은 조선중앙텔레비전 프로그램과 동일하다. 대남용은 남한에서 사용하고 있는 주사선 방식과 동 일한 NTSC 방식으로 전환하여 대남 선전을 위한 지상파텔레비전 방송으로 운영되었으며, 북한 내 에서는 시청이 불가능했다. 주로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를 찬양하는 프로그램 으로 이루어져 있다

105 평일에는 15시부터 22시까지, 토요일에는 15시부터 23시 30분, 휴일에는 9시부터 22시까지 주간 총 56시간 30분을 방송했다. 1997년 2월 15일에 폐쇄되고 난 후, 1997년 2월 16일에 개성텔레비전방 송을 개편해서 교육문화텔레비전방송이 개국하였다. 북한은 2012년 12월 1일부터 통일의 메아리 라는 대남 선전방송을 다시 송출했다. TV, 라디오 방송 이외 우리민족끼리 와 같은 인터넷 사이트로도 대남선전을 전개하고 있다. 그러나 1970~80년대 남북 간의 체제경쟁과 대립이 심했던 상황에서와는 달리 남한사회의 IT기술 의 발달과 방송의 다양화로 인해 북한의 실상이 남한의 국민들에게 알려지고, 남북 간 왕래 교류 등 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북한의 대남방송은 그 효용성을 상실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통일전선부, 통일전선전술

106 대민족회의 김일성은 1973년 6월 23일 발표한 조국통일 5대 강령 에서 대민족회의 를 처음으로 제안했다. 김 일성은 통일문제를 인민의 의사와 요구에 맞게 해결하기 위해 남북의 각계각층 인민이 조국통일을 위한 거국적 애국사업에 참여해야 한다. 며, 대민족회의를 열어 통일문제를 협의 해결하자면서도 이 와 함께 고려연방공화국 국호로 남북연방제를 실시하자고 주장했다. 결국 남북연방제를 실현하기 위 한 군중집회를 갖자는 것이었다. 이후 북한은 1973년 7월 24일 노동당 외곽단체인 조국전선(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중앙위 제59 차 확대회의 호소문을 통해 대민족회의 소집을 위해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실무자회의를 조속히 개최하자고 제의했다. 이후 북한이 그동안 자주적,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남북한 자유총선거를 실 시하자던 주장은 사라졌다. 북한은 1973년 8월 28일 남북대화를 중단한다고 선언한 이후 약 1년 만인 1974년 8월 6일 역시 조국전선 중앙위 제61차 확대회의 호소문을 통해 대민족회의 소집을 요구하는 제안을 또 다시 내놓 았다. 당시 북한의 제안은 그해(1974년) 안으로 남북 쌍방의 합의에 의해 판문점 또는 기타 장소에서 남북한의 각계각층 사람들, 정당 사회단체 개별적인사와 모든 해외교포단체들이 참가하는 대민족회 의를 소집하자는 것이었다. 추진방법으로 먼저 실무자회의를 열고 여기서 공동준비위원회를 구성한 다음 동시에 모든 정당 단체들 사이의쌍무적 다무적 접촉을 전개하는 방법을 제시했으며, 이 회의 소집을 원만히 보장하기 위해 한국의 2개 조선 조작 책동 중지, 반체제인사 즉각 석방 등을 요구했 다. 북한은 이어 같은 해 11월 28일 조국전선 중앙위 제63차 확대회의 성명을 통해 한국사회의 민주 화 실현, 주한미군 철수, 평화협정 제의 수락 등을 요구하고 또 다시 남북정치협상회의 또는 대민족 회의 소집을 제안했다. 북한은 1970년대 내내 대민족회의를 주장했으나 1980년 10월 김일성이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 방안을 제의하자 창립준비위원회, 민족통일촉진대회, 남북 정치인 100인 연합회의 등 명칭을 바꾸 어 나왔다. 그러나 이 회의체들 역시 대민족회의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들이었다. 관련 검색어 _ 남북연석회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국통일 5대 강령

107 대안의 사업체계 대안의 사업체계란 집단주의 정신에 입각한 북한의 경제관리 형태를 말한다. 즉 대안의 사업체계는 공장의 최고지도기관으로서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체계를 확립하고 계획 생산 기술을 통일적 종합적으로 지도하는 생산지도체계를 뜻한다. 배경 대안의 사업체계는 1961년 12월 김일성이 대안전기공장(남포시 대안구역)을 방문하여 지시한 공 업 부문 관리방법이다. 김일성의 현지지도 이전까지 대안전기공장은 공장 지배인을 중심으로 한 지 배인 유일관리제였다. 이 체제 아래 공장 지배인은 생산을 포함한 공장관리운영에 대한 모든 권한과 책임, 그리고 최종결정권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김일성은 현지지도를 통해 지배인 유일관리제는 관 료주의적 기관본위주의적 이기주의적 요소가 많이 남아있다고 지적하며, 공장관리운영에 관한 최종 권한과 책임을 공장 당위원회로 넘겼다. 운영방식과 주요 내용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대안의 사업체계는 당의 지도적 역할 강화, 경제적 자극보다 정치 도덕적 자극을 앞세우는 정치사업 중시, 공장 기업소의 관리운영에서 공장 당위원회의 집체적 토의와 지도 및 당 간부와 지배인의 생산현장지도 강화를 포함한 군중노선 관철, 중앙집권화된 계획적 관리, 독립 채산제 실시 등을 주요 원칙으로 하고 있다. 김일성은 대안의 사업체계에 대해 공장 기업소들이 당위원회의 집체적 지도 밑에 모든 경영활동 을 진행하며 정치사업을 앞세우고 생산자 대중을 발동하여 제기된 경제과업을 수행하며 위가 아래를 책임적으로 도와주며 생산에 대한 기술적 지도를 강화하고 생산을 종합적으로 지도하며 생산자 대중 의 생활을 책임지고 돌봐주는 경제관리체계 라고 주장하였다. 공장 당위원회에는 당 간부, 행정 간부, 지배인, 기사장, 기술자, 근로자(생산 핵심당원) 등이 참여 하여 기업소 운영에 관한 문제를 집단적으로 토의 결정한다. 이때 공장 당위원회는 최고지도기관으 로 그 기업을 집체적으로 관리운영하고 기업 활동 결과에 대해 전적으로 책임진다. 또한 생산기술적 인 문제는 전문지식을 갖춘 기사장을 중심으로 계획부, 생산지도부, 공무동력부 등 단일한 지도체계 로 결합시켜 계획작성, 생산조직, 기술지도 등 전 과정을 일원적으로 조직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공 장가동률을 높이기 위한 방책으로 원료와 자재공급을 일원화하여 필요한 공장에 제때에 공급하며, 쓸모없이 배정된 인원을 줄임으로써 원부자재의 공급, 누수, 손실 등을 막기 위함이었다. 이러한 가 운데 노동자들의 생활을 안정시키고 노동력의 유동을 막기 위해 기업소가 근로자와 주민에게 생활필 수품을 직접 책임지고 보장하도록 하였다. 평가 대안의사업체계는 1962년 이후 북한 공업관리체계로 정식화되어 당조직의 집중지도가 모든 공 장 기업소에서 이루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대안의 사업체계는 경제 관리에 대한 당의 지배를 제도화

108 함으로써 당조직들이 당 사업보다 경제캠페인에만 치중하면서 행정을 대행하는 현상을 파생시키기 도 하였다. 관료주의를 극복하기보다 중앙집권적 통제체제를 강화하고 공장 지배인의 권한과 역할을 축소함으로써 공장 자율권을 박탈하고 기업의 창의력을 위축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집단주의

109 대외문화연락위원회 대외문화연락위원회는 다른 나라들과의 비정부급 민간 외교활동을 전담하고 있는 기구이다. 외 무성이 외교관계를 가진 다른 나라 정부들과의 외교를, 노동당 국제부가 다른 나라 정당과의 외교를 각각 전담한다면 대외문화연락위원회는 다른 나라들의 비정부급(NGO) 기구와 단체, 친북조직과 친 북인사들과의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1956년 4월 3일 대외문화연락협회로 출범하였고, 1980년대 들 어 현재의 명칭인 대외문화연락위원회로 개명했다. 외국의 민간을 대상으로 하는 북한의 대외 선전 활동은 공식적 외교채널 외에 국제혁명역량과의 연대성 을 강화하기 위한 차원에서 여러 보조수단 을 활용하고 있다. 해외 일선에서 민간외교를 수행하는 대외문화연락위원회는 당의 외곽기구로 민간차원의 학술 문 화 교류를 통해 상호간의 우호관계를 증진시키는데 목적을 두고 설립되었다. 이 기구는 노동당 국제 부의 지도하에 주로 미국과 서유럽, 제3세계 나라들에 조선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지지하는 등의 친 북단체들을 조직하거나 주요 인사들을 포섭하여 친북화하는 방법으로 국제적 연대성을 확보하고 있 다. 아울러 이들 나라와의 국교정상화를 위한 사회 문화적 여건과 환경을 마련하는 업무를 주관하고 있다. 대외문화연락위원회가 선발대로서 길을 개척하면 외무성이 따라가며 수교교섭을 하는 식이다. 이외에도 당의 방침에 따라 친선대표단을 구성, 해외 각국을 순방하기도 하고 문화교류협정을 맺는 일도 수행하고 있다. 또한 매년 선전 책자를 해외에 배포하는 등 각종 선전활동을 대대적으로 전개하 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110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예술과 체 육을 결합한 북 한 특 유의 공 연형태로, 2000년에 처음 등장했다. 본래의 매스게임이 변형된 형태이다. 수만 명이 참가 하는 대규모 매스게임이라는 뜻의 대집단체조가 종전의 매스게임처럼 단순히 체조방식만이 아닌, 예술공연을 적절히 배합한 새로운 형태의 공연으로 변형되 면서 생긴 용어라고 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종전에는 주로 학생들의 단기간 훈 련을 통해 집단체조가 만들어졌다면,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예술단의 주도 로 기획 창작되고 학생들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인들이 투입되고 있다. 주요 내용 북한은 1930년 김일성이 창작 지도했다는 꽃체조 <조선의 자랑>을 집단체조의 시원( 始 原 )으로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실제 북한의 집단체조는 1946년 5월에 열린 <소년들의 연합체조>로부터 2002년 4월의 <아리랑>까지 모두 85개의 작품이 창작되어 총 900여 회에 걸쳐 공연을 했다. 그리고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은 체육과 예술이 융합된 것으로, 음악무용종합공연, 대공연 등 기존의 작품들과 구별되는 새로운 형식의 종합공연예술이다. 이러한 새로운 형식의 작품은 2000년에 들어서 창작됐는데 첫 선을 보인 것이 2000년 10월 12일부터 5.1경기장에서 진행된 <백전백승 조선 노동당>이다. 이 작품은 처음으로 체육과 예술이 결합되어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이란 형식으로 진 행되었다. 또한 저녁에 공연을 함으로써 조명효과를 최대한 살리는 등 새로운 형식과 기술이 도입되 었으며, 출연자 규모에 있어서도 처음으로 10만 명을 기록했다. 현재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으로 가장 잘 알려진 <아리랑>은 2002년도에 처음 공연되었고, 2005 년 재공연 된 이후 지속적으로 기념일에 맞춰 공연하고 있다. <아리랑>은 음악, 카드섹션, 군무, 체 조, 연극, 무대미술 등 다양한 예술 장르들이 총망라된 대규모 종합공연예술이다. 2002년 6월에 김일 성상을 수여받은 <아리랑>은 2007년 8월 세계적으로 가장 큰 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으로서 기네스 세계기록에 등록되었다. 평가 김정일은 집단체조는 당원들과 근로자들을 주체사상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며 우리 당의 노선과 정책의 정당성과 생활력을 시위하는 중요한 수단이다. 라고 밝혔다. 이렇듯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은 체육과 예술을 결합한 선군시대의 독특한 종합예술로서 예술공연이라는 장르를 통해 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육과 체제의 결속을 다지기 위한 대표적 도구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대집단체조와 예술공연 형식은 대외적인 환경의 변화뿐만 아니라 대내적인 변화에 따른 북 한의 정책들을 대거 반영함으로써 김정일의 선군정치와 북한체제의 정당성을 대내외에 널리 홍보하 는 동시에 외화벌이 수단의 목적도 가지고 있다고 하겠다. 북한이 이 공연 관람을 방북하는 외국 인 사들과 관광객들의 단골 코스로 삼고 있는 데서 알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군중문화사업, 군중예술론

111 대홍단정신 대홍단정신은 북한이 강조하는 자력갱생, 간고분투 정신을 담고 있는 정치적 구호이며 아무리 상황이 어렵더라도 이를 극복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을 요구하는 사상적 구호이다. 대홍단정신은 감자생산에서 크게 혁신을 일으킨 양강도 대홍단군 농업근로자들의 노력과 끈기의 정신을 뜻하며, 단순히 농업 증산만이 아니라 자재와 기계, 전력 등 농업에 필요한 모든 것을 자체적으로 해결하는 자력갱생, 간고분투 정신을 기본으로 하고 있다. 배경 북한은 2001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농업의 생산성 증대를 위해 대홍단정신 을 강하게 요구하며 농업근로자들은 돌 위에도 꽃을 피우는 대홍단정신, 대홍단 일본새 로 21세기 농사에 풍작을 이룩하 자고 강조하였다. 이로부터 대홍단정신은 전국의 농업생산 증대를 이룩하기 위한 하나의 정치사상적 구호로 제시되었다. 1998년 초 김정일은 자강도를 시찰하며 공업 부문에서 강계정신 을 구호로 제시하였다. 이 정신 의 강계 란 말은 국가의 지원 없이 모든 것을 자급하여 북한 공업 부문의 모범으로 꼽히고 있는 자강 도의 중심 도시 강계시에서 따온 말이다. 대홍단정신은 공업 부문에서 강계정신을 제시함과 동시에 농업 부문에서도 새로운 자력갱생 모델을 수립하여 농업생산의 획기적 증산을 촉구하기 위한 것이었 다. 양강도 대홍단군은 북한에서 주식( 主 食 )화되고 있는 감자 생산의 중심지이다. 김정일이 1998년 10월 양강도 대홍단군을 현지지도할 때 감자는 흰 쌀과 같다. 며 감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감자를 비롯한 농업 증산과 관련한 지시를 내린 것을 계기로, 이 지역에서 감자 증산을 이룩한 것이 대홍단 정신의 모태가 되었다. 전개과정과 의미 김정일은 1998년 당시 대홍단군 종합농장과 농업과학원 감자연구소를 시찰하면서 1 식량문제, 먹는 문제는 반드시 우리식으로 해결해 나가야 하고, 2 농업생산에서 적지적작, 적기적작의 원칙을 구현해야 하며, 3 과학기술발전의 세계적 추세에 맞게 종자혁명을 통해 농업생산의 비약을 이루어 야 한다는 내용의 감자농사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킬 것을 강조하였다. 김정일의 현지지도를 계기로 대홍단군 감자농사에 필요한 과학자, 기술자를 파견하고 제대군인 수백 명을 배치하여 이들로 하여금 자력갱생 혁명정신으로 감자 증산의 혁명을 이룩할 것을 촉구하 였다. 대홍단군 내 감자연구소에는 2 17과학자, 기술자돌격대(유사시 인민경제 각 부문을 지원하기 위 해 구성되는 과학기술 부문의 전문가집단)가 파견되어 영농에 필요한 기술을 지원하였다. 특히 북한 이 강조하는 종자혁명, 바이러스 없는 감자 개발에 주력하였다. 또 100여 대의 감자가공설비를 설치 한 감자 가공식품 공장을 건립하여 감자를 원료로 한 국수, 쌀, 빵, 순대를 비롯한 다양한 종류의 감 자음식물을 생산하였고, 감자파종기, 감자선별기, 감자수확기 등을 개발 지원하였다. 그 외에 대홍단

112 군 내에 자체발전시설 및 전분공장을 건설하고 화물차, 트랙터 등도 지원하였다. 무엇보다 대홍단군 에 제대군인 수백 명을 배치했으며 이들이 이곳의 농업생산에 크게 기여할 것을 촉구하였다. 그 결과 대홍단군의 협동농장들이 감자생산의 비약적 증산을 이루게 되자 북한 전역에서 감자농 사 바람이 불기 시작했다. 2000년 11월 평양에서 전국 감자부문 과학기술발표회 가, 2002년 6월에는 전국 학술토론회 가 열렸으며 2004년 초에는 북한 최초로 감자농사 혁명 선구자대회 가 열렸다. 감자농사가 활성화되면서 감자를 이용한 음식도 대대적으로 보급되었다. 농마(녹말)국수, 농마 지짐, 언감자국수, 감자꽈배기, 감자토장국, 언감자떡 을 비롯해 1천여 가지의 요리가 등장했다. 아울러 감자 가공 공장에서는 감자를 원료로 하는 전분, 분탕, 엿, 술 등도 생산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강계정신, 자력갱생

113 독립채산제 독립채산제는 북한이 사회주의 계획경제체제에서 제기되는 생산력 저하 문제 를 해소하기 위해 공장 기업소가 부분적으로나마 독자성을 가지고 경영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한 경영관리방법을 말한다. 배경 북한에서 본래적 의미의 독립채산제가도입된 것은 1960년대 초반이다. 농업 부분에서는 1960년 부터 작업반우대제 나 작업장 독립채산제 및 상금제 라는 이름으로, 공업 부분에서는 1962년부터 중앙의 국영기업소를 대상으로 완전독립채산제 라는 이름으로 이를 실시하였다. 이후 1973년 9월 당 중앙위원회 제5기 제7차 전원회의에서 대안의 사업체계에 맞는 독립채산제 실시문제 가 토의된 결 과, 국영기업소 독립채산제에 관한 규정이 채택되면서 시행되기 시작했다. 공장관리체계인 대안의 사업체계가 확립되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실현하고자 독립채산제를 확대 실시하게 된 것이다. 1984년 5월 독립채산제 규정과 세칙 개정작업이 착수되어 동년 8월에 기업관리 운영규정이 마련 되면서 독립채산제는 기업자주권의 부분적 확대를 법적으로 뒷받침하는 형태로 확대 강화되었다. 특 히 1985년부터 광범위하게 연합기업소 형태가 확대되면서 연합기업소를 이중독립채산제, 각종 기관 들을 반독립채산제 형태로 운영하면서 국가의 지원폭을 줄이고 기업단위의 경제관리를 과학화, 합리 화하려는 입장에서 독립채산제를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운영방식 북한에서는 독립채산제를 국가의 중앙집권적인 지도와 통제 밑에서 기업소가 상대적 독자성을 가지고 경영활동을 해 나가면서 생산에 지출된 비용을 자체로 보상하고 국가에 이익을 주는 경영관 리운영방법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독립채산제가 사적 소유를 인정하지 않는 북한체제에서 기업소 경영활동에서 파생되는 문 제점들, 즉 기업운영 및 생산조직상의 형식주의와 낭비, 국가재산 애호정신 결핍, 개인 이기주의, 기 관 및 지방 본위주의적 사업태도, 노동제일주의 의식 결여를 해결하고, 노동력과 자재 자금의 절약, 비생산적 지출 축소, 노동생산성의 제고 등을 도모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독립채산제를 올바로 적용하는 문제는 기업운영에서 가치법칙과 경제공간을 올바르게 활용하는 문제이다. 예컨대 노동생산성, 설비이용률, 원자재의 소비기준 개선, 물질적 인센티브 활용 등의 문제 이다. 따라서 독립채산제를 확대하고 강조하게 되면 물질적 인센티브를 경시하는 현상이 비판되고, 기업에 대한 이윤배분을 증가시키며, 개별 작업반 누진성과급제 등에 의해 현장 근로자들이 창의성 을 적극적으로 높이고 낭비현상을 없애며 원가인하에 힘을 쏟게 된다. 독립채산제는 반독립채산제, 이중독립채산제 형식으로도 실시되는데, 반독립채산제는 운영자금 의 일부만 국가가 지원함으로써 국가의 재정 지출을 줄이려는 것이고, 이중독립채산제는 생산조직과 상위의 관리조직이 별도로 독립채산제를 실시하는 것이다. 그러나 북한은 기업 재산운용에 있어서 기업소의 노임자금, 상금, 기업소기금의 적립규모 등 모든

114 경제관리를 정확히 규정하고 고정재산의 관리 및 이용을 제도화하여 재정의무수행 및 기업소의 실적 에 대해 엄격한 감독과 통제를 실시하는 등 독자적 경영활동이라는 독립채산제의 본래 의미는 매우 제한적이라 할 수 있다. 7.1 조치 이후 변화 북한은 2002년 7월 1일 무너진 경제를 재건하기 위해 부분적으로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7.1 조치를 취하였다. 핵심내용은 가격 및 임금의 대폭 인상, 배급제 개편, 공장 기업소의 자율성 확 대 등이다. 특히 공장 기업소의 경영활동 자율권을 확대하고 독립채산제를 실시함에 따라 기업경영지표를 생산량에서 번수입 (수익)으로 전환하고, 번수입의 자체 사용을 허용하였다. 계획외 생산을 30% 보장 하고 시장판매를 허용하였다. 기업소는 자체 시장판매 제품의 가격결정권을 가지며 노동자에 대한 일률적 임금제도 역시 폐지하였다. 국가와 기업소가 일체화되어 모든 것을 국가가 보장해 주었던 사회주의 시기 공장 기업소 운영방 식은 전면적인 독립채산제를 실시함으로써 국가와 기업소가 분리되고, 기업소와 노동자가 분리되는 형태로 변화를 시행하고 있다. 이에 따라 공장 기업소는 자체의 자율성을 확보하는 대신 세금납부 및 생산활동 정상화, 이윤창출의 책임을 지는 범위가 증대하였다. 반독립채산제와 이중독립채산제 반독립채산제란 비생산 부문의 기관 기업소들 가운데 독립채산제로 운영할 수 없는 단위들에 적용되는 독립채산제의 한 변형이다. 즉 반독립채산제는 대상 기업 또는 기관의 관리 운영에 필요한 자금 중 일부는 자체의 수입으로 충당하고 나머지는 국가예산의 지원을 받는 부분적 독립채산제로서 대상 기관 및 기업소들의 수입을 제고시켜 재정지출을 줄이겠다는 목적을 담고 있다.이중독립채산제란 중간 관리조직인 연합기업소 총국 관리국 등이 산하에 독립채산제로 운영하는 공장 기업소를 많이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종합적으로 하나의 계획단위 생산단위 집행단위로서 기능함에 따라 독립채산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다. 즉 하부 단위조직인 공장 기업소가 독립채산제를 실시하고 상위조직인 연합기업소 총국 관리국 등도 각각 독립채산제를 실시함으로써 이중적인 독립채산제구조를 형성한다는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대안의 사업체계, 연합기업소

115 독보회 독보회는 비교적 적은 수의 사람들 앞에서 신문을 비롯한 교양자료를 소리 내어 읽으면서 당정책 과 시사 문제 등을 습득하도록 하는 모임이다. 북한의 모든 기관, 단체, 공장, 기업소 등에서는 아침 업무를 시작하기에 앞서 부서별로 30분 정도 독보회를 갖는 것이 일상화되어 있다. 각 기관, 단체 등에서는 대체로 매일 아침 독보회에 이어 조회 를 간단히 한 뒤 일을 시작하기 때문에 독보회는 하루 첫 일과로 당연시 되고 있다. 군부대에서도 소대나 분대별로 독보회를 갖는다. 사무원들이 건설장에 노력동원을 나갔을 때에 는 작업을 시작하기에 앞서 현장에서 독보회를 갖기도 한다. 생산현장인 공장과 농촌에서는 주로 휴 식시간을 이용해 독보회를 갖기도 한다. 독보회 자료는 상부에서 정해주거나 부서별로 선정하기도 하는데 노동신문을 중심으로 각종 신 문이나 도서 등에 실린 노동당의 정책이나 시사적 내용의 글들이 이용된다. 북한이 독보회를 북한주민들이 기본적인 생활질서로서 지켜야함을 강제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최 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을 강화시키는데 그 목적이 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러한 독보회 활동이 전 사회, 부문에 걸쳐 일상적으로 행해지고 있는 것은 북한 사회가 지향하는 집단주의적 사회질서를 강 화시키는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최근 북한의 독보회 실상은 각 부문마다 상이하게 나타나고 있다고 한다. 주로 평양이나 중앙기관 사무직 등에서는 독보회가 잘 진행되고 있지만, 지방이나 노동자 농민 등 생산직장 등에서 는 예전에 비해 해이해져 참석률도 매우 저조하고 형식적으로 이루어지고 있다고 한다. 이러한 독보 회에 대한 참여도가 부문마다 다르게 나타나는 것은 북한의 집단주의적 사회의 변화 또는 균열의 한 현상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금요노동, 생활총화

116 뙈기밭 뙈기밭은 국어사전에 따르면 큰 토지에 딸린 조그마한 밭 을 의미하며, 북한에서의 뙈기밭은 매 우 작은 규모의 농지를 지칭하는 용어이다. 따라서 북한에서 텃밭이나 농장 기관 기업소의 부업지 중에서 작은 규모의 것은 모두 뙈기밭이라 할 수 있다. 이 가운데 개인경작이 공식적으로 허용된 텃 밭이나 부업밭 이외에 야산에서 화전 등을 일궈 불법적으로 경작하는 것은 개인뙈기밭 이라 칭한다. 경제난 이후 불법적인 개인뙈기밭이 증가하면서 현재는 뙈기밭 용어가 경작 주체로서 개인, 합법성 여부에서는 불법 을 대표하는 단어로 사용되고 있다. 즉 규모와 관련 없이 불법적 사적 경작 일반을 지칭하는 개념으로 변화되었다. 북한에서 개인뙈기밭 경작 현상은 1980년대 초반부터 농촌에서 시작되어 1980년대 중반 이후 국 가배급체계가 약화됨으로써 활발해졌다. 1980년대 말에는 단속의 대상이 되어 한동안 통제된 적도 있었지만 1990년대에 들어와 식량난의 악화로 당국의 묵인하에 다시 활성화되었다. 당시 북한에서는 주민들뿐만 아니라 이를 감독해야 할 보위부원, 심지어 군당비서까지도 불법적인 개인농사를 지을 정도로 뙈기밭의 경작이 확산되었다. 따라서 뙈기밭은 공식적으로는 불법이지만 실제로는 반합법의 성격을 띠고 있는 것으로 보아도 무방하다. 예컨대 당국은 개인뙈기밭 경작을 적발하고 벌금 등의 처벌을 내릴 수도 있지만, 오히려 모르는 채 내버려뒀다가 수확시기가 오면 뙈기밭 검열 그루빠 를 만들어 돌아다니며 수확량을 계산 해서 협동농장에서 분배할 때 그만큼 공제하고 주는 경우도 허다하다. 이러한 방식은 2002년 7.1 조치를 통해 뙈기밭에 토지사용료를 부과하는 대신 합법화하는 방식으 로 변화되었다. 군 인민위원회 소속의 집금소 에서 부동산 관리 등을 하며 주택의 땅값(건평과 건평 의 100%에 대해서는 세금이 없고, 이를 초과하는 땅에 대해)으로 세금을 걷는데 이때 개인뙈기밭 또한 세금부과의 대상이 된다. 개인경작자는 매년 11월경 세금을 지불하고 경작을 할 수 있다. 그러 나 북한당국이 공식적으로 개인영농을 합법화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당국의 정책변화에 따라 언제든 지 단속의 대상이 될 수 있다. 현재 이 같은 뙈기밭의 허용정책은 중하층 관료와 사적 경작자 간의 결탁과 그로 인한 세수 결손을 방지하기 위한 조치로 파악된다. 관련 검색어 _ 농민시장, 토지정리사업

117 만경대학생소년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평양시 만경대구역 팔골동에 위치하고 있는 과외교육기관이다. 북한에서 는 소학교부터 중학교까지 학생들의 과외활동을 위해 건설된 일종의 학생회관 중에서 규모가 큰 곳 을 학생소년궁전 이라고 부른다.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1986년 9월 5일에 착공하여 1989년 5월 2일에 준공되었고, 하루 1만2,000 명을 수용할 수 있는 대규모 시설이다. 말발굽형의 중심축을 기준으로 양쪽에 대칭성을 강조하여 건 축되었으며, 건물의 길이는 2백70m, 폭은 1백90m, 높이는 60m, 총 건축면적은 10만3천m2에 이르고 있다. 건물내부에는 2천석 규모의 극장과 도서관을 비롯해 과학기술 체육 문화예술 등 각 부문의 소 조실과 활동실 2백여 개가 갖춰져 있고, 이밖에 체육관과 수영장 및 과학기술제품 전시장 등이 들어 서 있다. 건물 밖에는 자동차실 트랙터실 전자계산기실 녹화강의실 천체망원경실 등이 갖춰져 있다. 이곳에서는 하루 평균 5천명의 평양시내 소학교와 중학교 학생들이 방문하여, 과학토론회 실험실 습 실기훈련 제작활동 등을 통해 1인 1기를 습득하고 있다. 이러한 교육은 5백여 명의 상근 교직원에 의해 이뤄지고 있으며, 이밖에 각 연구기관과 대학의 교수 부교수 과학자 기술자들이 객원교사 및 교육보조원으로 위촉돼 있다. 특히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컴퓨터수재 교육체계를 운영해 금성제1중 학교, 금성학원과 함께 컴퓨터 수재를 육성하는 기관이다. 이렇듯 만경대학생소년궁전은 평양학생소년궁전과 더불어 평양의 대표적인 어린이 청소년 시설 로서 단순한 교육기관이 아닌 수재를 양성하는 특수교육기관이면서 북한의 중요한 후대 양성기관으 로 자리 잡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소조활동, 인민대학습당

118 만경대혁명학원 만경대혁명학원은 북한체제 수호에 기여한 소위 공화국영웅이나 군인, 대남공작원 등 혁명유가 족의 자녀들과 당 군 정 간부의 유자녀들에게만 입학이 허용되는 북한의 대표적인 특수 교육기관이 다. 현재 북한의 당 군 정의 주요 요직에 이른바 만경대혁명학원 출신 인사들이 많다고 한다. 이 교육기관은 1947년 10월 12일 평남 대동군에 혁명자유가족학원 이라는 이름으로 세워졌다가 1년 뒤에 현재 위치인 평양시 만경대구역에 교사를 신축 이전했다. 이 학교는 초창기에는 일제시기 만주에서 항일투쟁을 하다가 죽은 혁명열사 의 유가족 자녀들을 배려하고 이들을 체제의 핵심간부 로 양성하기 위한 목적으로 출발하였다. 6 25전쟁 이후에는 전쟁영웅의 유자녀까지 입학대상에 포함 되어 운영하였다. 현재는 대남공작원, 공화국영웅 칭호를 받은 군인이나 주민의 유자녀들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초창기에는 항일운동가 유자녀들이 많아 우리의 초등학교부터 고등학교에 해당하는 과정이 있었 으나 이후 유자녀가 줄어들면서 초등학교 학제를 없앤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의 기본 학제는 중학교 (우리의 중 고등학교) 과정 6년으로, 11세부터 17세까지의 학생들이 재학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특수학제로 소학교(우리의 초등학교) 과정을 만들기는 했지만, 극소수의 대남 공작원 유자녀들만 엄선해 특수학제 형태로 운영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 외에는 각지의 소학 교 졸업반에서 공화국영웅이나 대남공작원의 유자녀, 북한체제에 기여도가 큰 군인이나 주민의 유자 녀를 선발해 기본 학제인 중학교 과정에 입학시키고 있다. 이 학원은 다른 학교와 달리 교육성이 아 닌 인민무력부 소속으로 되어 있어, 학생들은 재학기간 중 군복장을 하고 의무적으로 모두 기숙사 생활을 하게 된다. 학생들이 공부하는 과목은 사회정치과목, 군사학, 수학, 물리학, 화학, 생물학, 외국어 등 일반기초 과목 등이 있다. 학교 교육시설로서는 현대적인 교육설비를 갖춘 여러 개의 교육관 건물들과 체육관, 수영장, 문화회관, 도서관이 있으며 기숙사, 식당, 병원, 종합편의시설을 비롯한 실습공장, 온실 등 학생들의 학습과 생활에 필요한 설비들이 갖추어져 있다. 이 학원 출신들은 졸업 후 군복무가 필수로 알려졌다. 군복무를 거쳐 김일성종합대학, 김일성군사 종합대학 등 정치군사 분야 대학에 진학하거나 당 군 정의 초급간부로 기용되고 있다. 이 학원 출신 들은 1960년대 후반부터 북한정권의 주요 간부세력으로 자리 잡았다. 혁명위업을 계승하는데 있어 중추세력으로 등장한 그룹이 바로 만경대혁명학원 출신들이었던 것이다. 1970년대 김정일 후계체제 이후부터 권력층에 등용되었던 인사로는 강성산, 김국태, 김병률, 김시 학, 김유순, 김환, 림수만, 리길송, 리용익, 리철봉, 박송봉, 방철갑, 방철호, 심창환, 연형묵, 오극렬, 한상구, 현철규, 현철해, 최창환, 최영림 등을 들 수 있다. 동 학원 출신들은 김일성과 함께 항일빨치 산 투쟁을 했거나 북한체제를 위해 일하다가 일찍이 사망한 사람들의 자녀인데다 북한당국이 체제의 골간, 미래의 핵심간부 양성 차원에서 물질적 지원을 아끼지 않고 육성한 만큼 그 어느 그룹보다 지 도자 개인에 대한 높은 충성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인민무력부, 혁명열사릉/애국열사릉

119 만경봉호 만경봉호는 1971년부터 일본의 니가타와 원산을 오가며 북한으로 이주하는 재일교포, 조총련대 표단, 화물 등을 운송하는 북한의 대표적인 선박이다. 만경봉호는 1971년 8월 18일 취항하였으며, 대외적인 취항 목적은 재일 조총련동포의 조국방문단 을 수송하는 것이다. 그러나 만경봉호는 북한 사회주의의 선전에 이용되는 이중임무를 가지고 있었 다. 원산과 니가타 간 운항하는 데는 약 27시간(1박2일)이 소요되는데, 그동안 조총련에 대한 선내 정치학습과 조직사업을 지도하였던 것이다. 북한과 일본을 왕래하는 대표적인 선박에는 만경봉호 이외에도 만경봉92호 와 삼지연호 가 있다. 삼지연호는 네덜란드에서 건조되었으며, 순수한 객선이다. 1979년 8월부터 주로 조총련의 단기조국 방문단 수송을 위해 운항되어 왔다. 1992년 조총련계 상공인들은 김일성의 80회 생일을 기념하여 만 경봉 92호를 북에 제공하였고 1992년 6월부터 운항하였다. 만경봉92호는 2002부산아시안게임에 북 한 응원단을 싣고 왔으며, 북한 응원단의 숙소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북한 선박의 일본 왕래는 순탄하지 않았다. 북한이 미사일 발사와 핵실험을 할 때마다 경제제재 의 명분으로 일본은 입항을 중지시켰다. 2009년 북한의 2차 핵실험 이후 여전히 일 북 간에 선박의 왕래는 중단되어 왔다. 일본 입항이 금지된 만경봉호는 2012년부터 중국 각 항구와 북한 남포항을 오가는 관광여객선으로 이용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조총련

120 만수대의사당 만수대의사당은 우리의 국회의사당에 해당하는 것으로 평양시 중구역 만수대에 위치해 있으며, 여기서는 우리의 국회격인 최고인민회의를 비롯한 중요한 정치행사가 열린다. 1984년 10월 완공된 만수대의사당은 지상 4층 규모이며, 연 건축면적은 4만 5천m²이다. 내부에는 2천여 석의 대회의실, 소분과 회의실, 면담실, 휴게실 등이 있다. 만수대의사당의 벽과 기둥은 천연 대리석으로 호화롭게 장식돼 있는 등 북한에서는 조선혁명박물관, 만수대예술극장, 인민대학습당과 함께 이른바 대기념비 적 건축물로 내세우고 있다. 평양에는 만수대 대기념비, 만수대예술극장, 만수대예술단, 만수대창작사 등 만수대 란 이름이 붙 은 기관이나 건축물이 많다. 만수대란 평양시의 중심부 대동강 오른쪽 연안에 위치해 있는 언덕이다. 해발 60m이며, 모란봉의 남쪽 능선에 연결되어 솟아 있다. 여기에 김일성 동상과 혁명박물관이 소재 해 있어 북한에서는 신성시하는 지역이다. 만수대의사당은 최고인민회의 회의장으로 사용되는 외에도 북한의 헌법상 대외적으로 북한을 대 표하는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이 외국 인사들을 면담하는 장소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2000년 남북정상회담시 이 의사당에서 양측 간 면담이 이루어진 바도 있다. 관련 검색어 _ 최고인민회의

121 만수대창작사 만수대창작사는 미술작품의 창작과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북한의 예술기관이다. 1959년 11월 17 일에 창립되었으며, 1970년대 초에 들어와서 조각창작단을 모체로 하여 거기에 중앙미술제작소를 비 롯한 미술창작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종합적인 미술창작기지로 꾸려졌다. 만수대창작사라는 이름 은 김정일이 지은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로 김일성 김정일과 관련된 미술작품 창작에 주력하며, 이른바 혁명미술창작의 산실 로 일컬어 지고 있다. 만수대창작사 산하에는 여러 창작단들과 제작단, 그리고 창작과 제작, 미술 작품의 보존 과 보급을 위한 기술집단과 지원부서들이 있다. 산하에 공예, 도안, 도자기, 벽화, 보석화, 수예, 유화, 조각, 조선화 창작단과 동상, 돌조각, 미술기 재 제작단 등 약 20개 창작단 및 제작단을 거느리고 있다. 전문인력은 인민예술가 공훈예술가 90여 명을 포함, 1천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만수대창작사는 창립 이후 창작활동을 활발하게 벌여 대표작인 금수산기념궁전 을 비롯해 보천 보전투승리기념탑 (1967년)과 인민상 계관작품 천리마동상 (1961년), 만수대기념비 (1972년), 주체 사상탑 (1982년), 개선문 (1982년), 대성산혁명열사릉 (1985년), 서해갑문기념비 (1986년), 조국해방전쟁승리기념탑 (1993년) 등의 작 품들을 창작 건립하여 북한체제의 유일사상체계를 세우기 위한 사업에 주로 동원되었다. 만수대창작사는 또한 기념탑과 건축물과 함께 다양한 형식의 조선화, 주제화와 풍경화도 제작하 였다. 평양지하철의 벽화들과 인민문화궁전, 만수대예술극장, 인민대학습당을 비롯한 건축물들의 안 팎을 장식한 미술작품들도 이 창작단에서 제작되었다. 김일성 김정일 관련 미술품은 1호 작품 으로 분류돼 특별히 관리하고 있으며 이 작품들은 1호 작품과 소속의 1호 작품 미술가 외에는 어느 누구도 제작할 수 없게 되어 있다고 한다. 만수대창작사는 1990년대부터는 김일성 김정일 우상화와 주민 사상교육에 필요한 각종 작품 창 작에서 나아가 다양한 작품 창작 및 제작을 통해 외화벌이에도 적극 나서고 있다. 창작단 내에 만수 대윈드합작회사 등 대외판매를 겨냥한 회사들을 설립하고 유럽, 미국, 일본 등에서 도자기, 조선화, 보석화, 수예품 등 다양한 미술작품뿐만 아니라 목걸이, 팔찌 등 각종 액세서리까지 만들어 판매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서해갑문, 인민대학습당, 조선문학예술총동맹

122 명절 북한에서 명절은 국경일, 기념일, 전통민속명절 등을 일컬으며 국가명절은 국가 사회적으로 경축하는 사회주의 명절이고, 민속명절은 해마다 민족적으로 즐기는 명절이다. 국가명절은 김일성(4.15) 김정일(2.16) 생일, 정권창건일(9.9), 노동당 창건일(10.10), 인민군 창건일(4.25), 조국해방전쟁 승리기념일(7.27), 해방기념일(8.15), 헌법절(12.27), 국제부녀절(3.8), 국제노동자절(5.1) 등으로 주로 우상화 및 체제선전에 맞추어 지정하고 있다. 민속명절은 음력설(음1.1), 정월대보름(음1.15), 한가위(음8.15) 등이 있다. 민속명절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 생일 등을 국가명절로 하여 가장 큰 비중을 두어 왔지만, 추석을 명절에서 제외하거나 성묘를 금지한 적은 없다. 북한이 봉건유습 타파와 사회주의 생활양식을 외치며 조상숭 배와 민간풍속을 봉건적 잔재로 매도했던 1960년대 말~1980년대 중반에도 추석은 그대로 유지시켜 추석 당일은 휴일로 지정하였다. 민족 최대 명절이었던 추석을 일반 민속명절로 퇴색시키기는 했지 만, 완전히 없애버리지는 않았기 때문에 주민들은 매년 추석이면 성묘를 다니기도 했다. 설은 김일성이 음력설을 쇠는 풍습을 봉건잔재 로 규정하여 1946년께 양력설(신정)을 공식적인 설로 선포했고, 1953년 6 25전쟁이 끝난 직후부터 음력설은 북한에서 자취를 감췄다. 그러나 북한은 1989년부터 음력설을 부활시켰다. 이때부터 음력설에 연날리기, 팽이치기 같은 민속놀이와 윷놀이, 씨름 등 민속경기를 진행했다. 북한에서는 2002년까지 양력 1월 1일을 설날 이라고 부르며 크게 쇠었지만, 음력설은 당일 하루만 휴식하는 휴일이었다. 2003년부터는 음 력설에 3일간 휴식을 주고 과거에 크게 쇠던 양력설에는 1~2일만 휴무했다. 북한은 단오와 추석을 예전의 명칭인 수리날과 한가위로 부르기도 한다. 이는 남북한이 같은 전 통, 같은 문화 를 가진 단일민족이라는 점을 부각시키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명절에 북한주민들은 친지간에 인사를 나누며 차례를 지내고 조상의 묘소를 찾아 성묘하는 등으 로 하루를 보낸다. 새해를 맞이하는 양력설에는 웃어른을 찾아 세배를 드리고 덕담을 나눈다. 그러나 이와 함께 김일성, 김정일, 김정숙의 동상이나 초상화 앞에 꽃다발을 바치고 인사를 올리는 것이 새 로운 세배 풍습 으로 전통화되고 있다. 국가명절 전래명절 부활 추세에도 불구하고 북한에서는 여전히 국가명절을 보다 비중 있게 다룬다. 특히 김일성, 김정일 생일은 북한에서 가장 중요하게 취급되는 국가명절이다. 김일성 생일은 50회 생일인 1962년 4월 15일부터 임시공휴일로 지정된데 이어 56회 생일인 1968년부터는 정식 명절 공휴일로 지정되었으며, 1972년 환갑을 계기로 민족 최대의 명절로 격상되었다. 김일성 생일인 4월 15일부터 16일까지는 휴무일이다. 김정일 생일은 33회 생일인 1975년 2월 16일부터 임시공휴일로, 그 다음해인 1976년에 정식 명절 공휴일로 지정되었다. 1986년부터는 생일 다음날까지 공휴일로 연장하였고, 1995년부터 민족 최대의 명절로 격상되었다. 김일성 김정일 생일을 민족 최대의 명절 이라고 하여

123 충성의 편지전달 이어달리기, 예술 공연, 체육 행사, 그리고 토론회 및 전시회 등 각종 행사를 진행하 고 있고, 김일성 사망 후에도 생존 시와 같이 김일성 생일기념 행사를 다양하게 개최하고 있다. 한편 북한의 명절은 노동여부와 의미에 따라 쉬는 날, 휴식일, 기념일로 나뉘기도 한다. 쉬는 날은 노동하지 않는 날로 설, 김일성(4.15) 김정일 생일(2.16), 인민군 창건일(4.25), 국제노동절(5.1), 정전 협정 체결일(7.27), 해방기념일(8.15) 등이다. 휴식일은 해당 일은 쉬지만 앞뒤 일요일에 보충 노동을 하는 날로 음력설, 추석 등 민속명절이 이에 속한다. 평가 다른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북한도 국가적 차원의 기념일, 명절을 정하여 지키고 있다. 다만 북한 의 경우 김일성, 김정일 생일을 매우 성대하게 치른다는 점에서 우상숭배적 경향이 강하다. 한편 북 한의 민속명절에 대한 관심은 민족주의 강조에 따른 전래명절의 부활이라는 측면뿐만 아니라 과도한 주민 노력동원 등에 따른 불평불만의 해소, 해외 교포들의 북한방문이 점증하는 추세에 대비하여 취 한 일련의 조치라고 평가할 수 있다. 그러나 북한이 민족문화를 중시한다고 하더라도 사회주의라는 체제의 근간에서 벗어나는 것은 아니다. 추석이나 설날과 같은 민속명절보다 여전히 김일성, 김정일 생일 그리고 노동절과 같은 사회주의적 명절을 더욱 중요하게 여기는 태도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광명성, 우리민족제일주의, 주체연호

124 미사일 개발 북한은 1970년대 후반 미사일 개발에 본격 착수했다. 이집트에서 제공받은 소련제 스커드 (SCUD)-B(사정거리 300km) 미사일을 모방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북한은 1984년 스커드-B를 자체 제작한 데 이어 2년 뒤에는 사정거리가 500km에 이르는 스커드-C 개발에 성공했다. 이를 통해 북한 은 남한 지역 전역을 미사일 사거리 안에 두게 되었다. 이후 북한은 미사일 사거리 연장 프로그램을 지속적으로 추진해왔다. 그 방법은 새로운 미사일 추진 시스템을 개발하는 것이 아니라, 기존의 미사일 추진 체계 여러 개를 묶어서 사거리를 연장하는 방식이 주로 이용되었다. 이 결과 북한은 1990년대 사거리 1,300~1,500km, 탄두중량 600~700kg의 노동 미사일 개발을 완료하고 작전 배치했다. 동시에 북한은 1990년대 초부터 액체연료를 사용하는 다단계 미사일인 대포동 1호(사거리 2,500 km)와 대포동 2호(사거리 6,700km 이상) 개발에 착수하였다. 이후 1998년 8월 대포동 1호를 시험 발사 했으며, 2006년 7월 대포동 2호를 시험 발사했다. 그리고 2009년 4월에 위성 발사라고 주장하며, 장거 리 미사일(은하 2호)을 발사하였다. 계속해서 2012년 4월에 장거리 미사일(은하 3호)을 발사하였으나 실패하였고, 2012년 12월에 다시 발사하여 성공하였다. 2006년, 2009년, 2013년 핵실험을 실시한 북한은 핵탄두 운반수단으로써 탄도미사일의 유용성을 잘 알고 있다. 북한이 대륙간탄도미사일 수준의 장거리 미사일 개발을 지속하는 것은 미국에 핵탄두 를 투하할 수 있는 능력을 북한이 갖고 있다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미국과의 협상에서 보다 많은 보 상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 1차적인 목적으로 보인다. 북한의 미사일 개발은 대내 정치적 환경과도 상관이 있다. 1998년의 대포동 1호는 강성대국으로 의 진입 선포와 김정일 체제 공식 출범에 맞춰 이루어졌다. 2012년의 장거리 미사일도 김정은 체제의 출범과 관련한 정치적 의미와 함께 군사강국으로서의 면모를 과시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할 수 있 다. 한편, 북한은 남한의 수도권과 주요 거점 지역을 타격하기에 충분한 단거리 탄도미사일을 보유하 고 있다. 막강한 미사일 전력을 보유한 북한은 최근 미사일지도국을 전략로케트사령부로 확대 개편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의 미사일 제원 구분 SCUD-B SCUD-C 노동 중거리 미사일 대포동 1호 대포동 2호 사거리(km) ,300 3,000 이상 2,500 6,700 이상 탄두중량(kg) 1, ~1,000(추정) 비고 작전 배치 작전 배치 작전 배치 작전 배치 시험발사 개발 중 출처 : 국방부, <2012 국방백서>, p.292 관련 검색어 _ 벼랑끝 전술, 북한의 핵실험

125 민족경제협력연합회(민경련) 민족경제협력연합회는(이하 민경련) 북한에서 대남 민간경협을 담당하는 기구로, 1990년대 정무 원(현 내각) 시절 대외경제위원회 산하 단체로 출발했다. 1998년 5월 이후부터 현재의 이름으로 활동 해오고 있고, 2000년대 남북경협이 비교적 활발한 시기에 남측 업체들의 대북 교역협의 창구역할을 해왔다. 당시 이 기관은 광명성총회사, 삼천리총회사, 개선무역회사, 금강산국제관광총회사, 고려상 업은행 등을 산하에 두고 있는 것으로 알려진 바 있다. 광명성총회사는 피복, 경공업, 농수산물 분야 에서 대남경협을 전문으로 하고 있고, 삼천리총회사는 주로 전자, 지하자원, 화학 분야에서의 투자와 교역을 담당하고 있으며, 회사 간 분야가 뚜렷이 구분되는 것은 아니다. 2000년 들어 개최된 남북회담에서 민경련 대표가 북측 회담대표단의 일원으로 참석하기도 하였 다. 2000년 6월 남북정상회담시 김대중 대통령과 북한 김영남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간 공식면담 에 정운업 민경련 대표가 배석하였고, 2000년 9월 제주도에서 열렸던 제3차 남북장관급회담에 허수 림 민경련 총사장이 나온 바 있다. 한편, 민경련은 중국지역에서의 한국기업들과의 경협협의를 사실 상 전담하고 있는데, 한때 중국의 베이징, 단둥, 옌지에 대표부를 두고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005년 10월부터는 남북합의에 따라 개성에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를 설치했는데, 민경련 소속 인원들 10여 명이 동 사무소에 근무하기도 하였다. 현재 남북경제협력협의사무소의 근무 인력은 북 한의 각종 대남도발 사건으로 인해 남북관계가 경색됨에 따라 개성 현지에서 철수한 상황이다. 특히 2007년 말 위원장을 맡았던 정운업을 비롯한 민경련 관계자들이 비리 혐의로 조사를 받고 처벌을 당하면서 기구가 대폭 축소되기도 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현재 민경련은 남쪽의 대북지원단체 등 과 소규모 사업을 하면서 명맥을 이어가고 있는 상황이다. 관련 검색어 _ 민족화해협의회

126 민족공조 북한의 민족공조 주장은 중국, 소련 등 사회주의 동맹국들이 떨어져 나가고 동구 사회주의가 몰 락한 데에서 발생한 체제 위기를 돌파하기 위한 구호의 성격을 지니고 있다. 김일성은 수령 중심의 당 체제라는 특징을 묶어 이를 붕괴하거나 실패한 다른 사회주의 체제와 차별되는 우리식 사회주의 라고 대외적으로 선전했다. 이런 정당화 작업은 1992년 4월 최고인민회의를 열어 헌법을 개정하면서, 국가의 지도 이념으로서 맑스-레닌주의를 삭제하고 주체사상의 독자성을 강조한 데에서도 나타난 다. 이와 같은 민족공조론은 북핵 위기가 고조되기 시작한 1993년 3월 이후 한층 더 강조된다. 1993년 4월 6일, 김일성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을 발표했다. 이 문건에서 연방제 통일안 을 다시 한 번 강조하는 한편, 이 무렵 대두되기 시작한 남한에서의 흡수통일론을 겨냥하여 북과 남은...서로 상대방에게 자기의 제도를 강요하려 하지 말아야 하며 상대방을 흡수하려 하지 말아야 한다. 는 것을 직접 언급하기도 했다. 또한, 동족끼리 적대시하지 말고 민족의 힘을 합쳐 외 세의 침략과 간섭에 공동으로 대처하여야 한다. 고 주장했다. 북한은 2002년 10월 2차 북핵문제가 대두되면서부터 핵문제 해결의 유일한 방법은 북 미 불가 침조약 체결 이라고 하면서 민족공조로 북 미 불가침조약 체결을 위한 운동과 투쟁을 벌이는 것은 핵전쟁 위험을 막고 민족자주통일을 가져올 수 있다. 고 주장하였다. 2003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서 도 한반도 정세를 조선민족 대 미국 간의 대결 이라고 규정하면서 민족공조를 통해 미국의 대북 압살책동을 분쇄해 나갈 것 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이 북한이 민족공조를 내세우고 있는 것은 핵 문제로 인한 긴장된 정세하에서 한 미 간에 갈등을 유발하여 미국과 국제사회의 대북 압박을 완화하고 남북이 공동으로 대처해 나갈 명분을 확 보하는 한편, 남한 내 대북정책을 둘러싼 국론분열의 공간을 넓히면서 대북 지원의 분위기를 조성하 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이와 함께 민족공조는 조선민족 제일주의 등 논리와 결부되어 북한주민들의 불안감을 해소하며 남한으로부터의 지원이 민족전래의 상부상조 전통에 의한 것이라는 선전논리로 도 활용되었다. 북한은 우리 측에는 민족공조를 내세웠지만, 내부 또는 제3자에게는 남한 정부를 여전히 미제의 앞잡이 라고 헐뜯었으며, 남한 정부가 추구하는 국제공조를 외세 의존의 길 이자 북남 대결의 길 이라고 비난했다. 이와 동시에 북한은 핵 문제에 관한 한 남한을 결코 대화의 상대 로 인정하지 않으려 했다. 결국 북한이 주장하는 민족공조는 진정한 남북관계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것과는 거리가 먼 대남전략 차원의 구호에 불과하다는 것을 드러낸 셈이 되었다. 한편 북한은 2008년 이후 남북관계가 경색되면서 또 다시 우리 민족끼리, 민족공조 를 내세워 우 리 정부가 6 15 남북공동선언을 부정하고 있다. 고 비난 공세를 전개하는 등 우리 사회 내에서의 남남갈등을 조장하는데 힘을 쏟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북한의 연방제, 우리민족제일주의,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127 민족대단결 5대 방침 김정일은 1998년 4월 18일 남북 정당 사회단체 대표자 연석회의 50주년 기념 중앙연구토론회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 조국의 자주적 평화통일을 앞당기자 라는 제하의 서한을 보냈으며, 여기에서 민족대단결 5대 방침 을 제시하였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1 민족의 대단결은 철저히 민족자주의 원칙에 기초하여야 한다. 2 애국 애족의 기치, 조국통일의 기치 밑에 온 민족이 대단결하여야 한다. 3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이룩하 자면 남과 북 사이의 관계를 개선하여야 한다. 4 우리 민족의 대단결을 위해서는 외세의 지배와 간 섭을 반대하고 외세와 결탁한 민족반역자들, 반통일세력을 반대하여 투쟁하여야 한다. 5 민족의 대 단결을 이룩하기 위해서는 남과 북, 해외의 온 민족이 서로 내왕하고 접촉하며 대화를 발전시키고 연대 연합을 강화하여야 한다.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은 김일성이 1993년 4월 6일 제시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의 내용을 기초로 이를 압축적으로 재정리한 것이다. 그 핵심이 되는 민족 대단결론은 북한 정권이 역사적 정통성을 갖고 있고 통일의 중심체가 되어야 한다는 점을 과시하면 서 민족이라는 혈연적 동질성을 앞세워 광범위한 통일전선을 형성하려는데 목적이 있다. 탈냉전이라 는 급격한 정세변화에 따라 북한주민의 충격을 완화시키고 내부 정비의 시간을 벌기 위한 책략의 일환으로 제시되었다. 민족대단결 5대 방침이 제시된 시기는 김정일이 유훈통치를 끝내고 본격적인 김정일 시대를 여는 준비과정과 맞물려 있다. 김정일은 1997년 조국통일 3대 헌장 을 발표하여 대남 통일정책과 관련한 기본노선을 그대로 답습할 것임을 밝혔지만, 이를 김정일의 이름으로 다시 한 번 확인하면서 통일지 도자상을 과시하려 한 것이다. 한편 이 시기에 출범한 김대중 정부에 대해 북한은 외세와의 공조 파기, 국가보안법 철폐, 합동군 사훈련 중단 등을 선행 실천사항이라며 줄곧 주장하면서도 1998년 4월 남북 당국대표회담에 응해왔 는데, 상호주의를 받아들이지 않고 일방적인 시혜만을 고집함으로써 성과 없이 끝나고 말았다. 민족 대단결 5대 방침은 그 직후에 발표되었는데, 남북 간의 관계를 개선하고 민족 간 접촉 왕래 대화를 발전시켜야 한다고 했지만 2000년 남북정상회담이 개최되기까지 북한은 남북 당국 간 대화를 계속 회피하는 태도를 취했다. 관련 검색어 _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조국통일 3대 헌장

128 민족주의 북한에서 민족주의는 체제의 위기를 극복하고 자신들의 독자성을 강조하는데 그 특징이 있다. 민족주의는 정권수립 초기부터 상당한 자율성과 고유성을 확 보하는 중요한 내적 동력이었으며 사회주의가 붕괴한 이후에도 그들의 체제를 유지시켜 나가는 중요한 정치적 기능을 담당하고 있다. 북한에서 민족과 민족 주의에 대한 정의는 주체사상의 체계화, 남북관계 및 통일문제, 국내외적 상황 에 따라 시기별로 변화해 왔다. 민족 개념의 변화 북한의정권수립은 소련의 영향을 많이 받았기 때문에 1960년대까지의 민족 개념 역시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상태의 공통성을 중요시한 스탈린적 정의를 그대로 차용하였다. 북한의 민족 개념은 자본주의 민족과 사회주의 민족을 구분하는 동독식 민족 논리를 따랐으므로 민족이 근대로부터 형성 되고 전세계의 공산주의 실현과 함께 민족이 소멸될 것으로 바라보았다. 수령중심의 유일적 지도체계가 수립된 1970년대는 북한식 민족 개념 형성에 있어 과도기였다. 이 때에도 스탈린적 민족 개념을 그대로 사용하고는 있었으나 시간이 흐름에 따라 민족 개념에 혈통을 추가하였고 언어의 공통성을 강조하였다. 또한 1960년대와 달리 민족의 형성이 근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니라 오래 전에 국가의 형성과 함께 나타난 것으로 설명하였다. 그러다가 1980년대 들어 북한은 맑스주의적 민족 개념을 비판하면서 혈통과 언어를 중요시하고 경제생활과 심리상태를 제외시킨 북한식 민족 개념을 정식화하였다. 이는 민족 개념을 통일문제, 한 반도문제로 확장시킨 것으로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제안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창립방안과 깊은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이후 북한의 통일방안은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에 기초한 연방제로 전환 하였으며, 1민족, 1국가를 주장하기 위해서는 경제생활보다는 혈통을 강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1990년대 민족 개념은 기본적으로 1980년대 연장선상에 있었다. 먼저 연방제 통일방안과 연관시 켜 민족 자주성을 전면에 내세우면서 주체사상의 자주성 원칙을 민족 단위로까지 확장하였다. 다음 으로 계급, 계층문제에 대한 민족문제 우선의 원칙을 보다 강조하면서 민족은 오늘날에 있어서 사 회생활의 기본단위로 될 뿐 아니라 미래 공산주의 사회에 가서도 사회생활의 기본단위로 존재하게 되는 것 이라며 민족소멸론 대신 민족영원론을 주장하였다. 한편, 북한은 1990년대 중반에 들어 지 금 해외동포들은 조선민족을 김일성민족이라고 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수령님의 존함으로 빛나는 조 선민족의 자존심을 높여나가기 위한 사업을 더욱 잘하여야 합니다. 등의 직 간접적 형식으로 김일성 민족 을 가끔 사용하였다. 이는 우리민족제일주의에서 주장한 수령의 지도를 받는 민족으로서 북한 민족 을 우월한 민족이라고 주장하는 것과 관련된다. 민족주의 개념의 변화 1970년대까지의 민족주의에 대한 북한의 인식은 민족주의 자체를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로 폄하하 면서 이를 부르주아의 계급적 이익을 전민족적 이익으로 가장하고 다른 민족을 멸시하는 배타주의로 간주하여 배격하였다. 대신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 이라고 표현되는 사회주의적 애국주

129 의를 강조하였다. 그런데 북한식 민족 개념이 정식화된 1980년대에는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의 긍정적 측면을 인정 하기 시작했고, 1986년 김정일이 우리민족제일주의를 주창하면서 민족애에 대한 강조와 더불어 사회 주의는 계급적 위업인 동시에 민족의 발전과 번영을 위한 위업, 우리민족제일주의는 한마디로 말 하여 혁명과 건설을 자주적으로 해 나가야 한다는 투철한 민족자주정신 민족제일주의 정신은 민족의식 발전의 최고형태 라며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등치시켰다. 그러나 공산주의자는 민족주 의자가 될 수 없다. 는 김정일의 말처럼 아직까지는 민족주의에 대한 전면적 동의는 이루어지지 않 았다. 1990년대 북한의 민족주의는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북한은 민족의 이익을 진정으로 옹호하는 참 다운 민족주의 와 자본가계급의 이해관계를 대변하는 사상적 도구로서의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는 구 별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북한은 부르주아적 민족주의와 참다운 민족주의 를 구분하여 민족주의 의 긍정성뿐만 아니라 그 발생의 진보성을 전면적으로 인정하였다. 민족주의가 공산주의와 마찬가지 로 자주적인 목적과 지향이라는 공통성을 가지고 있고 그 기초에는 애국심이라는 최대공약수가 전제 되어 있다고 주장한 것이다. 즉 애국애족은 공산주의를 참다운 민족주의와 연결시켜 주는 대동맥이 고 참다운 민족주의를 연공의 길로 이끌어 주는 원동력이라며 민족주의와 공산주의를 접목시켰다. 이러한 민족주의 개념의 변화는 급기야 김일성이 자신은 민족주의자라고까지 주장하게 만들었다. 민족 민족주의 개념의 변화 시기 민족 민족주의 1960년대 까지 1970년대 1980년대 1990년대 이후 <스탈린적 정의> 언어, 영토, 경제생활, 심리상태 자본주의 민족과 사회주의 민족 구분 민족 근대형성론 민족 소멸론 <스탈린적 정의와 북한식 정의 절충> 언어, 지역, 경제생활, 혈통과 문화, 심리 혈통 추가, 언어 강조 국가의 형성과 함께 민족 형성 <독자개념 구축> 핏줄, 언어, 지역, 문화 핏줄과 언어 강조 심리상태와 경제생활 제외 연방제 통일방식과 연관성 부각 민족문제 해결의 선차성 <민족자주성론> 연방제 통일방식 강화 민족문제 해결의 선차성 강화 김일성민족 거론 민족 소멸론 부정 민족주의 배격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上 同 부르주아 민족주의의 반제적 측면 인정 우리민족제일주의, 사회주의와 민족주의 등치 민족주의자 반대 참다운 민족주의 민족사적 정통성 주창, 문화와 역사 강조 관련 검색어 _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우리민족제일주의

130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북한은 1970년 11월 제5차 당대회에서 1960년대의 남조선 혁명론을 더욱 구체화한 민족해방 인민 민주주의혁명 전략을 공식 채택하였다. 여기서 민족해방이란 남한에서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반 대하는 투쟁 을 통해 주한미군을 철수시키고 남한이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적 지배로부터 벗어나게 한다는 것이다. 인민민주주의혁명론은 남한의 혁명세력이 주체가 되어 수행해야 한다는 일종의 지역혁명론으로 서, 우선 1단계로 남한 내 노동자, 농민 등이 주체가 된 인민민주주의혁명을 통해 남한 정권을 타도하 고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인민정권을 수립한 다음, 2단계로 남북한 정권 사이에 평화적 으로 통일을 한다는 것, 즉 연공정권의 수립을 통해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실현한다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김일성은 제5차 당대회 보고를 통해 남조선 혁명의 기본성격을 다음과 같이 민족해방 인민민주 주의혁명 으로 규정하였다. 남조선 혁명은 미 제국주의 침략자들을 반대하는 민족해방혁명인 동시 에 미제의 앞잡이들인 지주, 매판자본가, 반동관료배들과 그들의 파쇼 통치를 반대하는 인민민주주 의혁명이다. 이 혁명의 기본임무는 남조선에서 미 제국주의 침략세력을 내쫓고 그 식민지통치를 없 애며 군사파쇼 독재를 뒤집어엎고 선진적인 사회제도를 세움으로써 민주주의적 발전을 이룩하는데 있다. 김일성은 남한의 혁명가들과 인민대중의 중요한 과업은 미 제국주의의 식민지 통치와 그 앞잡이 들의 파쇼적 폭압을 반대하고 사회의 민주화를 실현하기 위한 대중투쟁을 적극 발전시키는 것 이라 고 하면서, 폭력적 혁명역량 준비와 남한 정권의 타도를 통해 인민민주주의 정권 을 세우는 것이 남 조선 혁명의 목적이라고 주장했다. 김일성은 또 남조선 혁명에서 평화적 이행 은 있을 수 없고, 평화 적 통일은 남조선 혁명 후의 일이라는 것을 명확히 하였다. 북한이 초창기 민주혁명기지 전략에서 이처럼 단계적인 지역혁명론을 주장하게 된 배경에는 6 25 남침의 실패로 분단이 장기화됨으로써 남북한의 상반된 정치 사회체제가 고착화되고 무력적화통일 이 점점 어려워질 것이라는 인식이 작용한 것이다. 즉 북한으로서는 무력통일 가능성이 어려워지고 있는 상황에서 혁명의 우군으로서 남한 내 친북혁명세력의 생성과 자생력 확보를 통해 혁명기지 전 략의 한계를 극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북한이 남한 혁명의 성격을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으로 규정하고 혁명의 주인을 남한주민 자신이라고 선동하는 것과, 혁명역량의 편성을 주력군과 보조역량으로 구분하면서 주력군 편성에 역 점을 두도록 강조하고 있는 것은 이러한 인식의 구체적 표현이다. 여기서 말하는 주력군이란 노동자, 농민과 그 속에 뿌리박은 노동계급의 당을 지칭하는 것인데 그 중에서도 혁명적 당의 건설을 선차적 과업으로 내세우고 있다. 주력군 편성문제에 대해 북한이 구체적으로 언급한 것은 이 제5차 당대회에서였다. 김일성은 남조선 혁명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라 는 사업총화 보고를 통해 혁명역량을 마련하는데서 가장 중요한 것은 혁명의 참모부인 맑스-레닌주 의 당을 강화하며 그 둘레에 노동자, 농민을 굳게 묶어세워 혁명의 주력군을 튼튼히 꾸리는 것 이라 고 주장하였다. 이후 북한은 1985년 7월 한국민족민주전선(민민전)이라는 지하조직 구성과 때를 맞추어 그동안 보조역량으로 규정해온 진보적 청년학생을 혁명의 주력군으로 격상시킨 데 이어, 1993년 8월부터는

131 진보적 인텔리(지식인)도 주력군에 포함시키는 전술변화를 보이고 있다. 북한의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전략은 주한미군 철수요구와 남한 내 지하당 구축시도로 구 체화되어 나타났다. 북한은 1960년대 후반의 통혁당을 시작으로 1970년대 남조선민족해방전선, 1980 년대 한국민족민주전선, 1990년대 조선노동당 중부 지역당 등 남한 내 지하당 구축을 지속적으로 시 도해 왔으며, 주한미군철수 주장도 되풀이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남조선 혁명, 민주기지론, 통일전선전술

132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 민족화해협의회(이하 민화협)는 북한의 정당, 사회문화계, 종교계 등 각계 단체와 인사들로 구성 하여 조직한 대남 통일전선 단체로서 1998년 6월 8일 결성되었다. 이 단체는 경제를 제외한 분야의 남북교류협력에서 북측 창구역할을 담당한다. 북한은 1998년 6월 10일 평양에서 정당 단체 대표자회의 를 열고 이해 8월 15일 판문점에서 통일 대축전 을 개최할 것을 제의하였다. 당시 김용순 조선노동당 비서 겸 최고인민회의 통일정책위원회 위원장은 이 회의에서 조국광복 53돌에 즈음하여 판문점에서 북과 남, 해외가 참가하는 민족의 화 해와 단합을 위한 대축전 을 성대하게 개최할 것 을 제의하였다. 북한은 이 회의가 개최된 날 남북 교류와 대화, 협력을 추진하기 위해 북한의 정계, 사회문화계, 종교계 등 각계 단체와 인사들로 구성된 민족화해협의회 라는 이름의 단체를 결성했다고 밝혔다. 북 한은 이 단체에 대해 통일을 바라는 남조선과 해외 여러 단체 및 인사들과의 내왕과 접촉, 대화와 협력을 적극 추진해 나갈 것 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으며 대남 접촉 대화를 추진하기 위한 실무기 구로서의 역할을 수행할 것이라고 밝혔다. 이후 민화협은 실제로 민간급 남북교류에서 창구역할을 해 왔다. 민화협은 당시 북한의 조선사회민주당 중앙위원회 부위원장인 김영호를 회장으로 하고 10명의 부회장과 각계 대표들로 구성된 위원을 두도록 하였다. 김영호 회장은 2002년 8.15 민족공동행사에 김영대 라는 이름으로 북측 대표단을 인솔해 서울을 방문한 후 여러 차례 남북공동행사시 북한 대표 단의 얼굴 역할을 해왔다. 관련 검색어 _ 민족경제협력연합회, 조선사회민주당

133 민주기지론 김일성은 1945년 12월 17일 북한을 통일된 민주주의적 독립국가를 위한 강력한 민주기지로 전변 시킬 것을 선언했다. 여기서 민주기지란 전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한 공산주의 혁명기지를 의미한 다. 따라서 북한의 초기 단계의 대남전략은 여러 가지로 유리한 조건에 있는 북한 지역에서 먼저 민 주기지를 강화해서 이를 토대로 전국적 범위에서 공산주의 통일을 완성한다는 것이었고, 이것이 민 주기지론이다. 원래 민주기지란 어떤 지역을 확보한 후 공산주의 방식으로 정치 경제 군사적 역량을 강화하여 하나의 근거지로 삼고, 다시 타 지역으로 이러한 혁명을 수출하는 스탈린의 세계혁명 전략에서 유래 된 것이다. 북한은 혁명적 민주기지론에 따라 해방 직후부터 건당, 건국, 건군이라는 구호를 내세워 혁명의 참모부인 노동당을 먼저 건설하고 그 무장력으로서 인민군을 창설하였으며, 이어 1948년 9월에 정권 수립을 선포하였다. 1950년 북한의 남침으로 시작된 6 25전쟁은 이 같은 혁명기지 전략의 결정적 실 행수단이었다. 김일성은 1955년 4월 우리 혁명의 원천지인 북반부의 민주기지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더욱 강 화하여 민주기지를 비단 제국주의와 그 주구들의 침략을 반대하며 공화국 북반부를 보위할 강력한 역량으로 되게 할 뿐 아니라, 우리나라의 통일독립을 쟁취할 결정적 역량으로 전변시켜야 할 것이 다. 며 민주기지 건설의 중요성을 새삼 강조한 바 있다. 북한의 기본적인 대남혁명 전략인 민주기지론은 이후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전략으로 발전 하였고, 3대 혁명역량 강화 노선의 기초가 되었다. 관련 검색어 _ 국토완정론, 남조선 혁명,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3대 혁명역량 강화

134 민주조선 민주조선은 북한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내각 기관지이다. 1945년 10월 15일 평안남도 인 민위원회의 기관지로 만들어진 <평양민보>를 개편하여 1946년 6월 4일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기관 지인 <민주조선>으로 창간되었다. 그 후 1948년 9월 북한정권이 수립된 후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 회와 내각의 공동기관지로 발전되었다. 북한의 조선백과사전에 따르면, 민주조선 신문의 사명에 대 해 인민정권기관일꾼들과 국가경제기관일꾼들을 수령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으로 무장시키며 그들 을 당과 수령의 둘레에 굳게 묶어세워 당정책 관철에 힘 있게 조직 동원함으로써 온 사회의 주체사 상 위업에 적극 이바지할 것 을 제시하고 있다. 현재 민주조선은 민주조선사에서 대형판으로 주 6회 (4면 4회, 6면 화요일과 금요일 2회) 발행되 고 있다. 이 신문은 내각 기관지라는 성격에 맞게 편집에서 행정실무와 관련된 문제 등을 많이 취급 하는데 최고인민회의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 그리고 내각의 결정과 지시, 법령, 시책, 규정, 법규 등 을 소개한다. 1972년 12월부터 헌법 개정에 따른 국가기관 체계에 의한 정부 대변지의 임무를 수행해 오다, 1998년 9월부터 다시 새로 개편된 국가기구체계에 맞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및 내각지의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조직은 책임주필을 최고 책임자로 하고 그 밑에 15명 내외의 부주필을 두고 있으며, 편집국과 국 제부, 이론선전부, 인민행정부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련 검색어 _ 노동신문, 조선신보, 최고인민회의

135 배급제 사전적 의미로 배급제란 국가가 공급량이 제한되어 있는 상품(식량)의 분배와 소비를 조절하기 위해 일정한 기준에 따라 상품(식량)을 판매 공급하는 제도이다. 북한에서는 주민들에게 의식주에 필요한 생활필수품을 배급제를 통해 공급해왔다. 배경 배급제는물질적 재화에 대한 국가의 중앙공급체제를 의미한다. 북한에서 사람들을 통제하는 가 장 기본적인 수단은 배급제도이다. 또 북한에서 배급제는 단지 물질적 통제로서의 의미만이 아닌, 주민이동과 일상생활에 대한 통제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다. 북한이 배급제를 시행하게 된 것은 제한된 투자조건 속에서 중공업 우선의 축적성장전략을 채택 하면서 소비를 강력히 억제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북한에서는 국가가 식량을 비롯한 개인의 기본생 활필수품의 생산과 유통 그리고 분배과정에 개입하여 가격을 유지하고 소비를 통제하며 기업에 대해 선 국가가 보조금을 지급하기 때문에 주민들의 소비생활에 있어서 국가의 역할은 결정적이다. 배급기준과 방식 북한은 1947년 1월 6일 식량배급을 시행하기 위한 일종의 시행세칙으로 식량배급에 관한 조례 를 작성하여 식량배급대상과 배급기준, 대상자 결정절차와 배급사무 절차들을 구체적이며 자세하게 명 시하였다. 북한은 또한 출신성분에 따라 주민들을 핵심계층, 적대계층, 복잡계층 등으로 분류하고 이 러한 계층분류에 따라 배급정책과 사회보장혜택을 차등적으로 제공하고 있다. 급수별 1일 식량배급량 급수 배급량 계층분류 9급 100g 영유아 8급 200g 2~4세 아이, 죄수 7급 300g 유치원생, 연로보장, 가두여성 6급 400g 소학생 5급 500g 중학생 4급 600g 대학생, 연로보장 중 공로자, 환자 3급 700g 일반 노동자 2급 800g 탄광, 광산 갱내외 운반공, 중장비 다루는 노동자 1급 900g 탄광, 광산 막장에서 직접 탄이나 광석을 캐는 중노동자, 각 공장기업소 유해직장 노동자 북한은 1952년 3월 내각결정 제56호로 국가식량배급에 관한 규정을 제정하고 같은 해 5월부터 공식적으로 식량배급제를 실시해왔다. 그러나 엄격한 의미에서 완전한 식량배급제는 1957년 11월 식 량판매를 국가적 유일체계로 할 데 대하여 라는 내각결정 102호가 채택된 이후 실시되었다고 할 수 있다. 식량배급은 각 직장의 경리부에서 본인과 부양가족을 포함한 식량배급표 를 지급받아 매달 l일 부터 15일 사이에 정해진 날짜에 따라 지정된 거주 지역 배급소에 가서 배급표와 식량대금을 지불하

136 고 배급을 받는 형태로 이루어졌다. 또한 북한은 1957~1958년 양곡을 제외한 일체의 소비품들에 대한 배급을 폐지하고 국정가격에 의한 판매제로 전환하였다. 그러나 실제로는 주민들이 제한된 물품을 할당받는 형태이므로 엄밀한 의미에서 배급제가 폐지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공급체계가 원활하게 돌아가던 시절에는 대다수 북 한주민들이 인민반을 통하여 공급카드를 발급받은 뒤 각자 상점에 가서 카드를 제시하고 자신에게 돌아올 옷감과 의복을 국정가격으로 구매하여 사용하였다. 주택의 경우 집단적 소유물이기 때문에게 개인은 소유권을 가질 수 없으며, 북한주민들은 주택을 배정받아 매달 사용료를 내고 거주한다. 주택은 크기 및 부대시설의 차이에 따라 구분되며, 지위와 계층, 소속 등에 따라 주택을 배정받게 된다. 경제난 이후 배급방식의 변화 식량은 정해진 날짜에 정해진 양이 공급되는 것은 아니다. 이미 1980년대부터 애국미 라는 명목 으로 10%를 감축하고, 다시 전쟁 비축미라는 명목으로 12%를 감축하는 등 그 양을 지속적으로 줄여 왔다. 배급도 한 달에 2번씩 하도록 되어있지만 한 달에 한 번 하기도 하고 한두 달씩 건너뛰기도 하였다. 이러한 북한의 배급제도는 1990년 이후 북한의 경제난이 악화되면서 제대로 작동되지 않았고, 급 기야 1995년 말에 이르면 특정계층을 제외하고는 배급을 중단하였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농민시장 에서 식량과 물품을 구입하는 비율이 높아졌으며, 북한 전역을 휩쓴 장사바람으로 인해 출신성분에 기초한 배급제도의 유용성은 사실상 유명무실해졌다. 특히 2002년 7.1 조치를 통해 식량의 국정가격을 현실화(쌀 kg당 8전 44원)함으로써 종래 무상 에 가까운 배급제를 적절한 가격의 배급제로 전환하였다. 또한 2004년 3월 군, 국가안전보위부, 인민 보안부 등 체제보위 계층을 제외한 주요 기관, 기업소에서는 식량 자력조달제를 강화하였다. 그러나 2005년 10월 식량배급제 정상화 선언 이후에는 평양 등 일부지역에서 개인의 곡물거래를 금지하고 국가가 식량공급소를 통해 독점적으로 식량을 판매하는 조치를 시행하였다. 2009년 11월 화폐개혁 이후에는 계획경제 복원의 일환으로 국가배급망 복원을 시도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 같은 정상화 시도에도 불구하고 식량배급은 도시근로자, 당원 등을 중심으로 실시되고 있다. 배급의 실시, 중단이 반복되거나 평양과 지방의 지역적 배급편차가 보이는 등 불안정한 모습을 보임에 따라 북부 산간지역 또는 농민 등 일부 계층은 시장 구매나 텃밭, 뙈기밭 등을 통해 자체 해결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고난의 행군, 농민시장, 뙈기밭, 장마당

137 백두혈통 북한은 김정은 후계체제의 정통성을 백두혈통에서 찾고 있다. 이는 김정은이 백두산 항일혁명가 인 김일성과 김정숙의 적자인 김정일을 이은 혁명위업의 계승자 가 된다는 것이다. 북한은 김정일의 후계체제 확립 과정에서도 백두혈통을 강조하였다. 그 시초는 1971년 6월 24일 개최된 사로청 제6차 대회에서 행한 김일성의 연설이며, 김일성은 연설을 통해 후계문제를 공개적으 로 표명했다. 당시 김일성은 청년들은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하여야 한다 는 연설에서 자라나는 새세대들이 혁명을 계속하여야만 혁명의 대를 이어나갈 수 있으며 우리의 성스러운 혁명위업을 완수 할 수 있다. 고 언급하여 김정일의 등장을 간접적으로 시사하였다. 이후 김정일도 1971년 10월 1일 당중앙위원회 청년사업부 및 사로청 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과 한 담화에서 이러한 김일성의 세대교 체 발언을 상기시키면서, 청년들이 대를 이어 혁명을 계속 수행해 나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은 사회주의 몰락이 혁명선배에 대한 배신(혁명전통 계승의 부정) 에서 비롯되었다며, 북한 지도부와 체제에 대한 비판을 원천적으로 봉쇄한 바 있다. 그 이후 북한은 대를 잇는 혁명의 계승 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이렇듯 북한이 말하는 혁명적 전통의 계승은 결국 주체의 혈통론 으로 이어진다. 북한의 혈통론에 따르면당은 수령에 의해 마련된 혈통을 계승해 나가면서 수령의 당을 끊임없이 강화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김일성, 김정일로 이어 지는 백두혈통을 강조하기 위한 논리로,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수령 혈통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것이다. 또한 이러한 혈통 논리를 통해 북한주민들로 하여금 수령과 당의 지시에 무조 건적으로 복종하는 규율을 강요하고, 이를 통해 체제 안정을 도모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북한의 후계자론에 따르면, 후계자의 요건은 1 수령에 대한 충실성(수령의 노선과 정책 관철), 2 비범한 사상이론적 예지와 뛰어난 영도력 그리고 고매한 공산주의적 덕성, 3 업적과 공헌 으로 인민들 속에서 절대적인 권위와 위신, 4 세대교체론 등이다. 여기서 가장 중요한 것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다. 수령에 대한 충실성은 김일성체현론 을 거쳐 결국 혈통계승론 으로 연결된다. 혈 통계승론은 김일성이 당건설과 혁명을 개척하고 이끌어가는 노정에서 창시하고 발전시킨 모든 혁명 적 재부 인 혈통 을 후계자가 계승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혈통 은 생물학적 혈통이 아니라 김일성의 사상과 이론, 혁명업적, 투쟁경험, 사업방 법 등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주장을 하지만, 현실에서는 생물학적 의미가 강하여 김정은의 후계자 선 정에 있어 가장 중요한 근거로 작용하였다. 하지만 김정은은 김정일과 재일동포 출신인 세 번째 부인 고영희 사이에서 태어났다는 점에서 그들이 강조하는 백두혈통의 명분에 있어 한계점을 노출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광명성, 답사행군

138 벼랑끝 전술 벼랑끝 전술 (brinkmanship)은 자신이 원하는 대로 상황을 유도하기 위해 상대에게 겁을 주거나 위기를 조성하는 전술을 의미한다. 냉전시기 미 소 간 대립 상황에서 외교협상을 유리한 방향으로 이끌기 위해 양측이 사용하던 외교 전략에서 유래하였다. 최근 들어서는 북한의 핵실험, 미사일 발사 등 일련의 위협 조치와 협상행태를 설명하는 개념으로 주로 사용되고 있다. 연원 1990년 들어 북한은 미국 등 국제사회와 핵문제 관련 협상을 해오는 과정에서 종종 강도 높은 위협 조치를 통해 국면을 전환시키거나 협상에서 자신들의 입장을 유리하게 만드는 극단적인 전술인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 왔다. 북한은 자신이 궁지에 몰린다고 판단할 경우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는 경우가 많았으나, 반대로 자신의 입장이 유리하다고 판단될 때 더 많은 양보를 얻어내기 위해 벼랑끝 전술을 구사하는 경우도 있었다. 넓은 의미에서 벼랑끝 전술은 북핵문제 외에 북한의 대남정책이나 대외관계를 설명하는데 적용되기도 한다. 경과 1990년대 들어 북한이 핵문제 해결 과정에서 위협 조치를 통해 벼랑끝 전술을 구사해 온 사례는 다음과 같다. 1993년부터 시작된 1차 핵위기 당시 북한은 2월 25일 국제원자력기구(IAEA)가 북한에 대한 특별 사찰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하자, 3월 12일 핵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하는 것으로 맞섰다. 이후 6월부터 미 북 고위급회담을 통해 북한 핵문제가 논의되는 과정에서 당시 김영삼 정부 의 반대로 협상에 진전이 없자, 북한은 1994년 5MW급 원자로에서 사용 후 핵연료봉 을 추출하는 강수를 둠으로써 한반도는 전쟁위기에 직면하는 상황으로 치달았다. 이런 상황에서 지미 카터 전 미 국 대통령이 6월 평양을 전격 방문하면서 위기의 돌파구가 마련된 데 이어, 미 북 양측은 10월 21일 북한의 핵활동 동결, 미 북관계 개선, 북한에 대한 경수로 제공 등을 담은 미 북 제네바 합의 를 채택 하였다. 2002년 10월 발생한 2차 핵위기 상황에서도 북한은 자신의 입장을 강화시키기 위해 벼랑끝 전술 을 구사했다.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 계획과 관련해서 미국은 제네바 합의에 따라 북한에 제공하 던 중유 공급을 중단하고 북한과 대화를 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했다. 그러자 북한은 그동안 취해 온 핵동결 조치를 해제하고 IAEA 사찰관을 추방하는 한편, 2003년 1월 10일 또 다시 NPT 탈퇴선언 을 하고 이후 5MW급 시험용 원자로 가동에 들어갔다. 그 후 북한은 방코델타아시아(BDA)은행 문 제로 미 북 간 대립이 심화되고 9 19 공동성명 이행이 지체되자 2006년 7월 미사일 시험 발사에 이어 10월 9일에는 핵실험을 감행 함으로써 다시 한반도의 긴장을 고조시키는 위협 조치를 취했다. 이러한 북한의 위협 조치에 대해 국제사회는 유엔 안보리의 제재 결의를 통해 북한의 행위를 규탄하고 압박을 가하였다

139 북한 핵문제는 2008년으로 접어들면서 북한의 핵프로그램 신고목록 작성과 검증 문제로 다시 어 려운 국면으로 빠져들었다. 미국이 신고목록 작성과 검증문제를 이유로 테러지원국 해제를 연기하겠 다고 하자, 북한은 2008년 8월 26일 핵 불능화를 중단하겠다는 발표를 했다. 이후 크리스토퍼 힐 수 석대표가 방북을 하여 검증의정서와 테러지원국 해제 문제에 합의를 함으로써 미국은 북한을 테러지 원국에서 해제했으며 북한도 핵 불능화 조치를 재개했다. 그러나 검증방법에 대한 이견으로 양측 간에 논란을 빚는 상태에서, 12월에 열린 6자회담 수석대 표 회의에서 검증의정서가 채택되지 못하고 미국의 오바마 행정부가 출범하면서 6자회담은 다시 미 궁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북한이 2009년 4월 5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하고 유 엔 안보리가 북한에 대한 제재조치를 강화하자 북한은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실시하는 한편 6자회 담에도 참여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그 후 북한의 내부 상황과 남북관계 정체 지속 등으로 6자회담 은 구체적 진전이 없는 상태에 있다. 김정은 정권 출범 이후에도 북한은 2012년 4월 13일과 12월 12일 실시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 국제사회의 제재조치가 취해지자,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실시해 긴장 상황을 더욱 고조 시켰다. 평가 북한의 벼랑끝 전술의 특징은 불확실성과 불예측성, 비합리성이라고 할 수 있다. 게임의 이론 측 면에서 볼 때, 실제로 벼랑에서 뛰어내리겠다는 주장은 신뢰하기 어렵다. 합리적인 행위자는 자신의 모든 것을 잃게 되는 선택은 피하려 할 것이기 때문이다. 북한이 남북관계나 대외관계에서 보이는 대부분의 위협적 행동을 벼랑끝 전술로 평가하는 것은 북한의 실제 의도를 파악하고 상대해 나가는데 적절치 않다는 지적이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가 자신 들의 벼랑끝 전술에 대해 갖고 있는 인식을 역으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동안 북한은 벼랑끝 전술을 통해 단기적으로는 나름대로의 성과를 거둔 것처럼 보였으나, 결과적으로는 북한에게 도움이 되지 않았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북한의 반복되는 벼랑끝 전술로 인해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평가가 회복하기 어려운 정도로 떨어지고, 시간이 갈수록 대북 강경정책에 힘을 실어주고 있다는 것 이다. 특히 북한이 벼랑끝 전술의 단 맛에 빠져, 스스로 경제 회복과 국제적 고립에서 벗어날 수 있는 기회를 상실하게 됨으로써 최종적인 피해는 북한에 돌아갈 수밖에 없다는 지적이다. 관련 검색어 _ 미사일 개발, 북한의 핵실험

140 보위사령부 북한군 보위사령부는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와 함께 북한의 3대 정보 사찰기관 중의 하나이며, 군을 정치적으로 감시하는 기관이다. 선군정치 이후 혁명적 군인정신 을 전 사회적으로 확산시키면서 보위사령부 권한이 강화돼 군 인뿐만 아니라 민간인 정보기관들까지 통제하는 등 실질적인 사회통제의 중심 기관으로 자리매김하고 있다. 연혁 인민군 창건 초기에는 내무성 특수정보처 요원으로 안전군관을 파견하고 정치국(당시 문화부) 소 속으로 배속시켜 정치사찰 및 반탐업무를 수행토록 하였다. 1952년 말 정치안전군관양성학교를 설립 하여 정치안전군관 양성 및 재교육을 실시토록 하였고, 1953년 말부터 인민군 내 정치안전군관을 대 폭 증원하여 사단에는 안전소대, 군단에는 안전중대, 집단군에는 안전대대를 각각 설립하고 수사, 구 속, 연행 등 업무를 수행하였다. 6 25전쟁 이후에 군대 내 안전기관을 강화하여 1956년과 1968년에 군사쿠데타 음모를 적발하고 특히 김창봉, 허봉학과 같은 김일성 반대파를 숙청하는데서 결정적인 역할을 하였다. 1960년대 말에는 총정치국의 지휘통제하에 있던 정치안전군관들을 독립시켜 정치안 전국을 설립하였다. 그리고 안전국에서 김일성에게 중요 사항을 직접 보고하는 체제로 운영하였다. 1970년대 초 정치안전국을 보위국으로 개칭하고 활동범위도 확대시켰다. 그러나 1973년 3월 15일 국가정치보위부가 창설됨에 따라 동 보위부 요원들이 군대 내 정치사찰과 반탐활동 등을 수행하게 되고 보위국은 국가정치보위부의 통제 하에 업무를 수행하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 이후 김일성 지시로 국가정치보위부는 군에 대한 정치사찰 업무를 일체 중단하고, 보위국이 독립적 부서로서 군 대 내 독자적인 기능과 역할을 수행토록 하였다. 1980년대 말부터는 군대 내 보위군관 양성학교를 별도로 설립하여 보위군관을 양성하였다. 특히 1992년경 러시아 푸룬제 군사대학 사건, 1995년 6군단 부정부패사건을 사전 적발하여 1996년경 보위국에서 보위사령부로 증편되었고 위상이 더욱 강화되 었다. 기능 및 현황 북한군의 모든 부대에는 보위군관 또는 이들의 비밀정보원이 활동하고 있다. 군단과 사단 보위부 의 경우 군단장과 사단장의 일거수일투족을 파악하며, 특히 반체제 활동에 대해 중점적으로 내사한 다. 보위사령부는 이와 같이 각 군 본부에서 말단부대까지 요원이 파견돼 있으며 다른 정보조직과는 별개로 최고지도자에게 직접 군부 핵심인물 동향과 관련정보를 보고하게 되어있다. 즉 보위사령부는 인민군 내의 모든 군사범죄활동에 대한 수사, 예심, 처형까지 담당하며 간첩 색출, 반체제 활동 관련 자 색출, 처벌하는 것을 주 임무로 하고 있다. 보위사령부의 구체적 임무는 군대안의 반당, 반혁명, 반국가 분자들을 색출 및 검거, 능동적이고 독자적인 방첩임무, 최고지도자의 군부대 방문 시 경호임무, 군대안의 주민등록 사업, 일반 범죄자들을 색출, 처리하는 것 등이다. 보위사령부는 군대 안에 조직된 독립적인 방첩 반탐기관으로서 임무수행 방법에 있어서도 총정치국과 달리 비공 개적이고 비밀스런 방식으로 군을 감시하고 통제하고 있다. 보위사령부는 북한군 내 각급 단위 부대

141 에 조직돼 있는 보위기관들을 행정적으로 지휘 장악 통제하고 있다. 김일성은 북한군 창설 시부터 군의 효과적 통제를 위해 첩보기관을 조직했으며, 김정일도 보위사 령부의 역할과 기능을 강화해 통치에 적극 활용하였다. 이 기구는 현재 각 대학에도 군 보위사령부요 원으로 구성된 군사대표단 까지 상주시킬 정도로 사회문제에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검색어 _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142 보천보전자악단 보천보전자악단은 왕재산경음악단과 함께 북한을 대표하는 전자음악단의 하나이다. 보천보 라는 이름은, 1937년 6월 4일 김일성이 인솔하는 유격대 부대가 백두산 부근의 보천보에 있는 일본군 주재 소를 기습했다는 보천보 전투를 기념하여 지어진 이름이다. 이 악단은 1985년 6월 4일 만수대예술단 의 전자음악연주단을 분리하여 결성한 것이다. 전자악기를 주축으로 음악적 특성에 따라 피아노 등 의 양악기와 꽹과리와 같은 전통악기도 적절히 혼용해 우리식 전자악기 를 추구하였다. 대표적 전속가수는 전혜영, 김광숙, 리경숙, 리분희, 조금화로 이들은 북한주민들 사이에서 최고 의 가수로 각광을 받았다. 노래는 김일성 및 김정일과 관련된 노래와 사회주의 혁명을 찬양하는 내용 의 곡이 많으며, 통일에 관련된 노래, 서정적인 노래, 우리 민요 및 북한의 옛 민요와 가곡을 재구성 한 것도 있다. 최근에는 일제강점기시기 때 계몽기 가요도 연주하고 있다. 보천보전자악단의 대표적인 히트곡은 전혜영이 부른 <휘파람>과 리경숙이 부른 <반갑습니다> 이다. 특히 <휘파람>은 북한 청소년들 사이에서 선풍적인 인기를 모았고 남측에도 꽤 많이 알려졌 다. <반갑습니다>는 남북공동행사시 북측 공연에서 빠짐없이 등장하는 곡이다. 한편, 최근 북한의 공연 무대에서 새로운 악단이 등장해 관심을 모으고 있다. 전자밴드를 가진 모란봉악단과 관현악을 주로 연주하는 은하수관현악단이다. 이 중에서도 모란봉악단이 2012년 7월 시범공연을 한 이후 김정은이 참석하는 기념공연에 자주 등장하고 있다. 특히 모란봉악단은 기존 북 한식 공연과 달리 화려한 조명, 현대적 전자악기, 연주자들의 세련된 의상, 여성 보컬들의 경쾌한 음 악을 바탕으로 과감한 무대를 선보였다. 김정은 부인 리설주가 처음 언론에 모습을 드러낸 것도 김정 은과 함께 본 모란봉악단 공연이었다. 최근의 북한방송 보도에 따르면, 김정은 등장에 맞추어 기존의 보천보전자악단을 개편하여 모란봉악단을 결성한 것으로 알려졌다. 김정일에서 김정은으로 대를 이 은 것처럼 1985년에 만들어진 보천보전자악단도 이제 모란봉악단으로 자리바꿈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음악정치

143 북남경제협력법 북한은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를 실시하고 신의주, 개성, 금강산지구에 경제특구를 설 치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남한과 외국의 자본을 유치하기 위한 조치를 취하고, 이에 관한 기본법 제정의 필요성을 느껴 2005년 7월 6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제1182호로 북남경제협력 법 을 제정하였다. 총 27조로 구성되어 있는 북남경제협력법 은 남한과 북한 사이에 진행되는 건설, 관광, 기업경 영, 임가공, 기술교류와 은행, 보험, 통신, 수송, 봉사업무, 물자교류 등 경제 분야 전반을 남북경제협 력의 정의(제2조)에 포함시키고, 남측과 경제협력을 하는 기관, 기업소, 단체를 적용대상(제3조)으로 명시하고 있다. 또한 전민족적 이익, 균형적 민족경제 발전, 상호존중 및 신뢰, 유무상통 등 남북경제협력의 원칙 제시(제4조), 남북당사자 사이에 계약에 기초한 직접거래방식 채택(제7조), 다양한 재산의 이용 및 투자재산의 보호(제16조), 남북경제협력물자에 대한 무관세 원칙(제19조) 등 각종 원칙과 절차를 규 정하고 있다. 한편 북남경제협력법 에 따르면 남북경제협력에 대한 승인은 중앙민족경제협력지도기관이 한다. 이러한 승인이 없을 경우 남북경제협력을 할 수 없다(제10조). 이러한 규정을 살펴보면 남북경 제협력사업의 승인이 상당히 어렵다는 점을 알 수 있다. 북한의 경제가 발전하기 위해서는 남한의 자본이 자유롭고 안전하게 북한에 투자할 수 있는 법적 환경을 갖추어야 한다. 하지만 그러한 환경을 마련하기에는 북남경제협력법 이 기대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있는 현실이다. 남북의 경제협력이 활성화되기 위해서는 자유로운 자본투자와 이윤을 추구할 수 있는 합리적인 경영활동이 보장되어야 한다. 남북협력기업의 경영활동으로 중요한 것은 상품의 생산과 판매활동이 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현행 북한의 기업법제에 의하면 남북협력기업이 생산과 판매활동에 있어서 많은 제약이 있다. 그리고 3통(통행, 통신, 통관)문제 등 북한에서 남북협력기업의 자유로운 경영활동 에는 아직 제한점이 많이 존재한다. 북남경제협력법 의 주요 조항과 내용 제1조: 사명 조항 제3조: 적용대상 제4조: 원칙 제8조: 금지대상 제16조: 재산이용 및 보호 제17조: 근로자 채용 제19조: 관세 제20조: 세금납부, 동산 및 부동산 이용, 보험가입 주요 법안 내용 경제협력에서 제도와 질서를 세워 민족경제 발전에 이바지 북측은 경제협력을 하는 기관, 기업소, 단체에 적용 남측은 경제협력을하는 법인, 개인에게 적용 전민족의 이익, 민족경제의 균형적 발전 상호존중과 신뢰, 유무상통의 원칙 사회의 안전과 민족경제의 발전, 주민들의 건강과 환경보호, 미풍양속에 저해를 줄 수 있는 대상 금지 화폐재산, 현물재산, 지적재산 이용가능, 투자재산 보호 북측의 근로자 채용 남측 또는 제3국의 근로자 채용 시 중앙지도기관의 승인 필요 무관세 해당법규 따름

144 관련 검색어 _ 7.1 경제관리개선조치

145 북 러조약 북한과 소련은 1961년 7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 소비에트 사회주의연방공화국 간의 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이하 조소우호조약)을 김일성의 소련 방문 중 체결하였다. 이 조약은 6개 조항으로 이루어져 있었으며, 자동군사개입 을 비롯하여 북한과 소련 간의 군사 경제 문화 기술 의 원조 제공 등을 주요 내용으로 담고 있었다. 그러나 소련이 1990년 9월 한국과 수교를 맺고, 1991년 8월에는 소련이 해체되자 북 러관계는 군 사적 이데올로기적 관계에서 경제적 정치적 관계로 전환되었다. 이후 러시아는 1995년 9월 조소우호 조약을 더 이상 연장하지 않겠다고 공식 발표함으로써, 1996년 조소우호조약은 폐기되었다. 이에 따 라 북한과 러시아는 변화된 국제환경과 북 러관계를 고려하여 새로운 조약을 체결하기 위한 외교적 협상을 진행했다. 이후 2000년 2월 9일 이바노프 러시아 외무장관의 평양 방문 중 북한과 러시아는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과 러시아 연방 사이의 친선, 선린 및 협조에 관한 조약 을 체결했다. 새 조약은 총 12개 조항으로 되어 있으며, 특히 제2조에서 평화 및 안보 강화를 위해 노력한다고 하면서 쟁점조항인 자 동군사개입 규정을 삭제하였다. 그리고 경제 과학 기술 문화 분야 등에서의 협력이 주요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북 러 간 새 조약의 체결은 한 소 수교 이후 소원해진 관계를 정상적인 관계로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2000년 7월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소련 및 러시아 지도자로는 처음으로 북한을 방문하였고, 상호 간 협조와 협력에 관한 내용을 담은 북 러 공동선언 을 채택하였다. 이에 대한 답방으로 김정일 이 2001년 7월부터 8월까지 러시아를 방문하였고, 북 러 간의 협력관계 복원과 한반도 종단철도와 시베리아 횡단철도의 연결사업에 대한 합의 등을 담은 북 러 모스크바 선언 을 채택하였다. 러시아는 북 러관계의 회복 및 발전을 바탕으로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 제고 및 동북아에서의 입 지 강화를 위한 기회로 활용하려 했다. 북한은 미국을 견제하기 위해 낙후된 재래식 무기를 현대화할 수 있는 러시아의 군사 원조를 기대했으나, 러시아는 군사협력보다는 경제협력에 무게를 두었다. 이 러한 상호 간의 이익에 대한 견해차는 북한과 러시아의 협력이 취약성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 한다. 즉 북 러관계는 냉전 시기처럼 이념이나 혁명적 연대가 아닌 철저한 국익과 상호주의 원칙에 입각하는 방향으로 재정립되어 가고 있다는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북 중조약, 일 북 수교협상

146 북조선인민위원회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인 1947년 2월에 창설된 북한의 최고집행기관이 다. 북한 지역의 정치 경제적 기반과 통치력을 강화하여 한반도 차원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완수하고 자 하였다. 1948년 9월에 북한 정권이 수립되면서 모든 권한을 정권에 이양하고 해체되었다. 북한에 서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최초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으로 규정하고 있다. 1945년 12월 모스크바 3상회의 이후 한국 임시정부 구성과 신탁통치 문제가 크게 대두되었다. 전 국에서 반탁운동이 벌어진 가운데 좌익 진영은 1946년 1월 찬탁으로 태도를 바꿈으로써, 북한 지역 에서는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과 좌익 진영 간 찬반양론이 첨예하게 대립하였다. 당시 소련군은 조만식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을 억압함으로써 김일성의 정권 장악을 도왔고, 1946 년 2월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창설되었다.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북 한 지역을 총괄하는 통일적인 중앙행정기관으로서 토지개혁 추진과 함께 생산수단의 국유화 조치 등을 단행함으로써 실질적인 정권기구의 역할을 수행하였다. 이후 북한은 법적 정당성과 대중적 지지를 확보하기 위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를 북조선인민위 원회로 발전시키기 위한 선거 실시를 결정했다. 1946년 11월 3일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가 북한 전역에서 실시되었다. 그 결과 도 위원 452명, 시 위원 287명, 군 위원 2,720명 등 총 3,459명의 위원들 이 선출되었다. 김일성은 평남 제57선거구에 출마했다. 그리고 1947년 2월 17일 평양에서 인민위원 회, 정당, 단체 대표 1,157명이 참석한 가운데 시 도 군 인민위원회 대회 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간접선거로 선출된 237명의 대의원들로 북조선인민회의를 구성하였다. 그리고 인민회의는 제1차 회 의를 통해 김일성을 위원장으로 하는 북조선인민위원회를 결성하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와는 달리 최고주권기관인 북조선인민회의와는 별도 로 조직된 최고집행기관이었다. 즉 북조선인민위원회에는 집행기능이, 북조선인민회의에는 주권기 능이 집중되었다. 그러나 북조선인민위원회는 북조선인민회의가 휴회 중일 경우 추후 승인을 조건으 로 입법권과 예산안 수립 등을 수행하였다. 북조선인민위원회는 1947년과 그 이듬해에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기초한 인민경제계획을 실행하 고, 인민군 창건 업무를 수행하였다. 또한 세금제도, 예산제도, 사법제도 등을 재정비하고, 화폐교환 사업을 통해 인민정권이 시장을 통제하고 상업금융을 국가계획하에 통제할 수 있는 기반을 다졌다. 북한은 1947년 5월 재개된 미소공동위원회에 보낸 서신을 통해 한국에 임시정부가 수립되더라도 지방정권기관들과 인민위원회 형태를 보존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주장은 자신들이 독자적인 분단정권을 추진했다는 비판을 피하고, 북조선인민위원회의 활동을 한반도 차원의 정권수립과 연계 시키려는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전략이 실패할 경우를 대비해 1947년 11월 조선임 시헌법제정위원회 구성과 한반도 전체에 적용할 수 있는 임시헌법을 준비하는 등 독자적인 정부 수 립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갔다. 관련 검색어 _ 북조선인민회의

147 북조선인민회의 북조선인민회의는 북한 정권이 수립되기 이전에 북한에서 입법권을 행사한 최고주권기관이다. 1946년 11월 3일 북한에서의 첫 선거인 도 시 군 인민위원회 선거에서 인민위원을 선출하였다. 이에 기초하여, 이듬해인 1947년 2월 17~20일 사이에 북조선 도 시 군 인민위원회 대회를 개최하여 북조 선인민회의를 조직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상임위원회 선거, 북조선최고재판소장의 선거, 북조선 최고검찰소장의 임명, 대외무역의 결정, 국가안전의 보호, 인민경제계획의 채택, 국가예산의 승인, 행 정구역의 신설 및 변경, 대사실시에 관한 결정의 발표 등의 권한을 행사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3개월에 1차례씩 개최되었으며, 휴회기간에는 북조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대신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1947년 11월 제3차 회의를 열어 전 조선에 적용할 헌법을 만든다는 명분으로 김두봉을 위원장으로 하는 조선임시헌법제정위원회 를 구성하였다. 1947년 12월 20일에 임시헌법 초안이 제출되었고, 1948년 2월 6~7일에 열린 북조선인민회의 제4차 회의에서 임시헌법 초안을 전 인민적 토의 에 붙이기로 결정하였다. 남북연석회의의 결정에 입각하는 형식을 취해서 북조선인민회 의는 1948년 7월 9일 제5차 회의를 열어, 그동안 토의되었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헌법 초안에 기초한 정부 수립을 결정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1948년 8월 25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최고 인민회의가 성립되면서 그 임무를 마감하였다. 북조선인민회의는 약 2년간의 짧은 활동을 하였으나 북한 정권의 기틀을 형성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북조선인민회의는 다섯 차례의 회의를 통해 선거와 헌법 등 정권 수립에 필요한 다양한 사업 을 이끌었다. 하지만 북조선인민회의는 형식상 한반도의 선거를 표방하였지만 남한지역의 대표선출 을 책임진 남로당의 경우 비밀 지하선거를 실시하여 그 대표성에 한계가 있다. 또한 당시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을 잡기 위해 소련정부의 지원하에 조직 및 운영되었다는 평가를 받는다. 관련 검색어 _ 남북연석회의, 북조선인민위원회

148 북 중조약 북 중조약은 1961년 7월 11일 북한과 중국이 맺은 조약으로 정확한 명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 화국과 중화인민공화국 간의 우호, 협조 및 호상원조에 관한 조약 이다. 1960년 당시 중국은 구소련과 갈등관계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인도와의 국경 문제를 가지고 있었 다. 따라서 중국은 주변국과의 관계개선을 위해 외부적 마찰을 최소화하고자 했다. 이런 정책하에 중국은 북한뿐만 아니라 베트남과 몽고 등의 주변국과 조약을 맺었다. 북 중조약은 다른 어떤 국가와 맺은 조약보다도 양국 간에 상호의존도가 높다. 북 중조약은 군사자동개입 조항까지 포함하고 있는데, 이렇게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특성을 지니 게 된 것은 북한이 가진 지정학적 특징, 다시 말해 북한은 소련과 중국 사이에 위치하고 있으며 미국 과 동맹관계인 한국과 마주보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북 중조약은 중국과 북한 모두의 이해관계가 반영되었던 것이다. 한편 모두 7개 항으로 이뤄진 북 중조약은 북한이 소련과 조소우호협조 및 호상원조조약 을 맺은 1961년 7월 6일 이후 단 5일 만에 체결된 조약이다. 1961년은 사회주의권 안에서 중국과 소련의 갈등 과 대립이 고조되는 시기로 아직까지 북한은 자신의 노선을 드러내지 않은 때이다. 따라서 북한이 소련 및 중국과 맺은 조약의 시대적 배경과 비슷한 내용, 체결 시기가 가까운 점으로 보아 북 중조약 을 소련과 중국의 경쟁구조 속에서 북한이 취한 이득의 산물로 분석하기도 한다. 북 중조약 제2조는 군사개입조치를 규정하고 있는데, 이는 북한에 최고지도자의 부재 등으로 인 해 북한 내부에 위기가 발생할 경우 중국이 개입할 가능성이 있다는 점에서 우려가 되는 것이다. 북 중관계는 상호 완전한 신뢰형성 및 공동의 목표 이익에 기반을 두기보다 상호 전략적 필요성 에 의해 이루어지고 있는 한계도 존재한다. 1992년 한 중 수교는 이미 상호 간의 대외정책을 규정하 고 있는 제3조를 위반한 것으로 볼 수 있기에 본 조약보다는 양국 간의 실리관계의 변화에 주목해야 한다. 또한 계속된 북한의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은 중국내 북 중조약의 폐기 분위기를 형성했었 다. 그러나 북 중 간에 균열 조짐이 나타남에도 불구하고 북 중 접경지역의 경제협력은 확대되고 있 으며, 북한의 중국에 대한 경제 의존도는 더욱 심화되고 있다. 요컨대, 남북과 주변국 간의 상황과 환경이 바뀐다면 북 중관계에도 균열이 나타날 수 있으며 따 라서 본 조약의 실효성에 의문을 제기할 수도 있다. 현 한반도의 정치경제적 구도가 대립과 분단의 상태로 유지되는 한, 북 중관계는 양국 간 정책 목표와 견해의 차이, 갈등을 조율하면서 협력적으로 발전할 것으로 전망된다. 관련 검색어 _ 북 러조약, 일 북 수교협상

149 북한의 연방제 연방제는 북한이 주장하고 있는 통일방안이다. 연방제는 시대의 변천에 따라 그 내용을 달리해 왔다. 북한은 남조선 혁명론에 입각하여 전 한반도의 공산화 통일을 종국적 목표로 내걸고 환경 조건에 따라 대남정책을 변화시켜 왔다. 북한은 이 대남정책의 연장선상에서 연방제의 내용을 변형시켜 온 것이다. 개요 연방제란 국가결합의 일종으로서, 그 결합의 정도에 따라 형태와 내적 관계에서 많은 차이가 있 다. 보통은 연방 자체가 국가가 되어 국제법상의 능력을 갖고 있으며 연방 내부관계는 국내법 관계이 고 연방 조성국은 자치적 존재인 경우를 말한다. 영연방의 경우는 이와 달리 서로가 대등한 지위에 있는 주권국가이며, 그 결합의 정도가 매우 약하고 우호협력을 기초로 특수한 관계를 유지하는 집합 체이다. 북한의 통일방안은 시대적 조건과 환경에 따라 변화해 왔다. 1960년대의 남북 연방제는 두 체제 의 공존을 바탕으로 한 통일의 과도적 형태로서의 특징을 갖고 있으며, 당시 경제역량의 우위를 업고 남한 사회의 혼란한 상황을 부채질하기 위하여 제안되었다. 1970년대의 남북 연방제는 고려연방공화 국이라는 국호를 제시하고 단일 국호로 유엔에 가입하자고 했으며, 통일전선 형태의 대민족회의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 특징이다. 1980년대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은 외교 군사권을 중앙정 부가 갖는 완성형 연방국가를 바로 창립하자는 것인데, 이를 위해 주한미군 철수 등 남조선 혁명 의 선결조건을 내걸고 있다. 1990년대 이후에는 지역정부의 권한을 점차적으로 중앙정부로 옮겨가자는 느슨한 연방제 와 이를 좀 더 구체화하여 두 개 정부가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갖는다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를 제시하였으며, 제도적 통일은 후대에 맡기자고 주장하는 등 단계적 통일론으로 선 회하였다. 그러나 북한의 연방제는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의 관계가 어떻든 우선 연방국가부터 만들고 보자 는 것과 그 실현은 연석회의 방식의 정치협상회의나 대민족회의 등을 상정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변 함이 없다. 이념과 체제가 다른 지역정부 간에 연방을 구성한다는 것은 선례도 없고 현실성도 없다. 상호 입장 차이가 뚜렷한 이질적인 대표들로 연방정부를 구성할 경우 전반적인 의사결정에 실패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북한의 연방제는 화해와 협력을 통해 민족공동체를 회복하면서 통일국가를 완성하자는 우리의 통일방안과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주요내용 년대의 남북 연방제 김일성은 1960년 8월 14일 8 15 해방 15주년 기념연설에서 처음으로 연방제를 제의하였다. 김일 성은 어떠한 외국의 간섭도 없이 민주주의적 기초 위에서 자유로운 남북총선거를 실시하는 것이 평 화적 조국통일의 가장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방편이지만, 남한 당국이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면 과도 적인 대책으로서 연방제를 실시할 것을 제의한다고 했다. 그 내용은 당분간 남북한의 현재 정치제도

150 를 그대로 두고 두 정부의 독자적인 활동을 보존하면서 두 정부의 대표들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 회 를 조직하여 남북한의 경제 문화 발전을 통일적으로 조정하자는 것이었다. 이 연방제는 지방정부의내정 외교 군사권을 그대로 존속시키고, 정부당국의 대표들로 일종의 협 의기구를 구성하여 경제와 문화 등 분야에서 교류협력하자고 함으로써 사실상 국가연합적 성격이 강하였다. 당시 우리 사회는 4 19 혁명 이후 백가쟁명식의 통일논의가 전개되는 등 혼란한 상황을 겪고 있었으며, 북한은 이를 남조선 혁명의 호기로 보고 대남 평화공세 차원에서 이 점진적인 방식의 연방제를 들고 나왔다 년대의 남북 연방제 김일성은 1973년 6월 23일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총서기 후사크 환영대회 연설을 통해 이른바 조국통일 5대 강령 을 발표하면서 고려연방공화국 국호에 의한 남북 연방제를 제시하였다. 조국통일 5대 강령 의 주요 내용은 1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 2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의 실현, 3 각계각 층 인민들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는 대민족회의 소집, 4 고려연방공화국 국호에 의한 남 북 연방제 실시, 5 고려연방공화국 단일 국호로 유엔 가입 등이었다. 이 연방제 안은 1960년대 연방제와는 차이가 있다. 우선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라 는 기구가 없어지고 그 대신 통일전선 형태의 대민족회의를 전면에 부각시켜 남한 정부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또한 지방정부의 외교 군사권 인정 등 독자적 활동을 보장하는 부분이 불명 료해지고 과도적 대책 이라는 표현이 사라짐으로써 단계론적 인식이 상당부분 사상되었다. 이 제안은 같은 날 우리 측이 평화통일외교정책에 관한 특별 선언 (6 23 선언)을 통해 당장의 통 일 보다는 분단현실을 인정할 것을 강조하고 통일에 장애가 되지 않는다는 전제하에 남북한이 함께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반대하지 않는다고 발표한데 대한 즉각적인 반응이었다. 북한은 이후 남북한 동시 유엔 가입을 두 개 조선 조작 책동 이며 분단을 영구화하는 분열주의 노선이라고 비난하였다. 3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1980년대) 김일성은 1980년 10월 10일 제6차 당대회에서 기존의 연방제 통일방안을 보다 구체화하여 고려 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을 제시하였다. 이 방안은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선결조건, 연방국가의 구성과 운영원칙, 10대 시정방침의 세 부분으로 나뉜다. 우선 자주적 평화통일을 위한 선결조건으로 1 반공법 국가보안법 폐지, 군사파쇼정권의 교체 등 군사파쇼정치 청산과 사회 민주화 실현, 2 평화협정 체결과 주한미군 철수, 3 자주, 평화, 민족대단 결 3대 원칙에 기초한 통일 실현을 제시하여 남조선 혁명의 여건 조성을 위한 의도를 그대로 드러내 었다. 연방국가의 구성 운영에 대해서는 남과 북에 현존하는 사상과 제도를 인정하는 기초 위에 각각 지역자치제를 실시하는 통일연방국가를 창립하자면서, 남과 북의 동수의 대표들과 적당한 수의 해외 동포 대표들로 최고민족연방회의를 구성하고 거기에서 연방상설위원회를 조직하여 지역정부를 지도 하며 연방국가의 전반적인 사업을 관할케 하자고 주장하였다. 또한 국호를 고려민주연방공화국으로 하고 대외정책노선은 어떠한 정치군사적 동맹이나 블록에도 가담하지 않는 중립국가로 하자고 주장 하였다. 그 밖에 고려민주연방공화국이 실천해야 할 10대 시정방침으로 경제적 합작과 교류, 과학 문화

151 교육 분야에서의 교류 협력, 교통 체신 연결, 지역정부의 대외활동 조절, 민족연합군 조직 등을 제시 하였다. 1980년대의 연방제는 기존의 연방제와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첫째, 과도적 방안이라는 성격을 완전히 배제하고 바로 통일국가를 창립하자는 완성형 연방제이다. 둘째로 남북한 사이의 제반 문제 를 협의 조절하는 기구가 없어지고 연방정부가 바로 지역정부를 지도하도록 했다. 특히 정치 외교 군사권을 연방상설위원회가 행사하도록 하였다. 이것은 두 체제의 사상과 제도를 그대로 두고 연방 국가를 형성하자는 전제에도 맞지 않는다. 셋째로 남한 현 정권의 퇴진과 주한미군 철수 등 남한 체 제의 무장 해제를 겨냥한 사안들을 전제조건으로 제시하였다. 넷째로 현 남북관계에서 추진이 필요 한 각 분야의 교류협력을 시정방침에 포함시켜 통일국가 창립 후로 미루어 버렸다. 다섯째, 연방국가 의 구성과 운영원칙만 있고 연방헌법 등 창설절차가 제시되지 않았다. 북한은 이후에 각계각층을 망 라한 적당한 수의 대표들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준비위원회를 발족시킬 것을 제의해 왔는데 남 한 정부를 협의의 대상에서 제외함으로써 이 연방제 안의 의도를 읽게 해준다. 4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 연방제(1990년대) 북한은 1990년대에 들어와 기존의 완성형 연방제 주장에 전술적 변화를 보이기 시작했다. 김일성 은 1991년 신년사에서 북과 남에 서로 다른 두 제도가 존재하고 있는 우리나라의 실정에서 조국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 나 누구에게 먹히우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으로 실현되어야 한다. 북과 남의 서로 다른 제도를 하나의 제도로 만드는 문제는 앞으로 천천히 순탄하게 풀어 나가도록 후대에게 맡겨도 되지만 사상과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하나의 민 족으로서 하나의 통일국가를 세우는 일은 이제 더는 미루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고려민주연방공화 국 창립방안에 대한 민족적 합의를 보다 쉽게 이루기 위하여 잠정적으로는 연방공화국의 지역자치정 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더 높여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하는 문제도 협의할 용의가 있다. 고 주장하였다. 이것은 북한이 선 제도통일과 중앙정부 권한 집중을 바탕으로 한 1980년대의 연방제로부터 제도 통일 후대론 과 지역자치정부 권한 강화론 으로 선회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1990년대 들어 북한은 동구 공산권의 붕괴, 독일통일 등 급변하는 세계질서에 충격을 받았으며, 체제생존을 위해 정세를 관망하면서 수세 적 방어적 태도로 일관하였는데, 이로 인해 점진적이고 단계적인 통일 경로를 택한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1민족 1국가 2제도 2정부 연방제는 중앙정부의 권한이 제한적이고 결합력이 떨어진다는 점에서 느슨한 연방제 로도 불린다. 그러나 북한은 이후 2제도 2정부 형태의 연방제를 주장하면서도 그 구체적 내용은 더 이상 거론하지 않았다. 김정일은 1997년 8월 4일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조국통일 유훈을 철저히 관철하자 라는 논문을 통해 조국통일 3대 원칙,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과 함께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을 이른바 조국통일 3대 헌장 으로 규정하여 북한의 공식적인 통 일방안이 여전히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임을 확인하였다. 5 낮은 단계의 연방제(2000년대) 북한은 2000년 6 15 남북공동선언 에서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을 제기하였다. 이에 대한 구체적

152 내용에 대해서는 같은 해 10월 6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제시 20주년 기념 보고대회에서 안경호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서기국장이 밝혔다. 그는 낮은 단계의 연방제 안은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두 개 정부의 원칙에 기초하되 북과 남에 존재하는 두 개 정부가 정치 군사 외교권 을 비롯한 현재의 기능과 권한을 그대로 가지게 하고 그 위에 민족통일기구를 내오는 방법으로 북남 관계를 민족공동의 이익에 맞게 통일적으로 조정해 나가는 것을 기본내용으로 하고 있다. 고 설명하 였다. 이 내용은 2000년 12월 15일자 노동신문을 통해 다시 확인되었다. 이 연방제 안은 느슨한 연방제 에서 중앙정부와 지역정부와의 관계가 모호했던 것에 비해 지역정 부가 갖는 권한을 보다 명백히 하였으며, 정치 외교 군사권을 지역정부에 맡김으로써 최대한 독자성 을 부여하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그러나 낮은 단계라고 해도 여하튼 하나의 국가이며 연방헌법에 의해 중앙정부가 주권을 행사한다는 점에서는 변함이 없다. 다만 연방정부가 완전한 의미의 권능을 확보하고 제도적 통일을 이룰 때까지 과도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인정한 것이 과거 완성형 연방제와 다른 점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민주기지론, 조국통일 3대 헌장, 조국통일 5대 강령

153 북한의 핵실험 북한은 1960년대에 영변에 핵시설을 건설하였으며, 1970년대에는 핵연료 기술 을 집중적으로 연구하였다. 1980년대 이후 5MWe 원자로를 가동하고 폐연료 봉을 재처리하여 핵물질을 확보하는 등 핵연료 확보에서 재처리에 이르는 일 련의 핵연료 주기 를 완성하였다. 북한은 2006년 10월, 2009년 5월, 그리고 2013년 2월 세 차례의 핵실험을 감행함으로써 대한민국과 국제사회에 큰 충격 을 주었다. 개요 2002년 10월 제임스 켈리 당시 미 국무부 동아시아태평양 담당 차관보의 평양 방문 결과 북한의 고농축 우라늄(Highly Enriched Uranium, HEU) 프로그램 의혹이 불거지면서 1993~1994년의 1차 북 핵 위기에 이어 2차 북핵 위기가 시작 되었다. 이후 약 1년간 북한과 미국 간 대립 양상이 지속되면서 북한은 미국에 대해 보다 위협적인 수단을 강구하게 되었고, 이는 2006년 7월의 미사일 발사 시험에 이어 10월 9일의 지하 핵실험이라는 초강수 로 나타났다. 북한은 10월 3일 핵실험 강행 을 대외적으로 공식 천명한 북한 외무성 성명에서 핵전쟁, 제재, 그리고 압력 등 미국의 극단적인 위협이 공화국으로 하여금 핵실험을 행하도록 강요하고 있다. 며 핵실험 강행에 따른 책임을 미국에 떠넘겼다. 한편 북한당국은 지하 핵실험을 김정일의 권력 장악력을 높이고, 내부 강경파인 군부를 달래며, 북한주민에게 강성대국 자부심을 고취시키는 등 국내 정치적 목적으로 활용한 측면도 있었다. 이후 북한은 2009년 4월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이어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단행하였으며, 2012년에도 4월 과 12월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이어 2013년 2월 12일 3차 핵실험을 단행하였다. 경과 1 제1차 핵실험 북한의 1차 지하 핵실험은 2006년 10월 9일 오전 10시 30분경 평양으로부터 동북 방면으로 약 385km 떨어진 함경북도 길주시 풍계리의 험준한 산악지대에 자리 잡은 핵실험장에서 행해졌다. 북 한의 지하 핵실험 사실은 한국, 일본, 중국, 오스트레일리아, 우크라이나, 그리고 미국 등 전 세계 20 여 곳의 지진 관측소가 폭발에 의한 충격파를 감지해냄으로써 확인되었으며, 추가적인 정보 분석을 통해 핵실험의 폭발력이 TNT 5백 톤 분량에 해당하는 5백 킬로톤에 이른 것으로 판명되었다. 이는 미국이 1945년 8월 일본 나가사키에 투하했던 플루토늄 원자폭탄보다 훨씬 더 큰 규모였다. 북한의 핵실험은 이보다 앞서 2006년 7월 5일 새벽(미국 워싱턴 시각으로는 독립기념일인 7월 4일 오후) 북한이 강행한 또 다른 위협행위인 미사일 시험 발사 사건의 연장선상에 있었다. 주변국의 우려, 특히 중국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북한이 미사일 시험 발사를 강행하자 미국은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압박을 의미하는 유엔 결의를 주도했다. 즉 북한의 미사일 발사를 규탄하고, 북한에 대한 미사 일 및 대량살상무기 관련 물자와 재정적 지원을 금지하는 등 제재를 주요 내용으로 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을 통과시켰던 것이다

154 북한은 이에 대해 외무성 대변인의 성명 형식으로 공화국의 자위를 위해 모든 수단과 방법을 동 원해 전쟁 억지력을 강화해 나갈 것 이라며 정면 반발했다. 따라서 유엔 안보리 대북제재 결의안 통 과, 미국의 대북 강경정책 등에 대한 전형적인 벼랑끝 전술로써 핵실험이 강행된 것이라 할 수 있다. 이는 북한이 핵실험을 준비하고 있다는 징후가 이미 미사일 시험 발사 직후인 동년 8월 초부터 포착되었던 사실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미국 정보 당국은 이 무렵 북한 동북 지역의 지하 핵실 험 시설로 여겨지던 곳에서 의심스런 차량 이동, 대규모 케이블 매설 작업 등 북한의 핵실험 준비로 해석할 수 있는 수상쩍은 움직임을 추적하고 있었다. 북한의 핵실험 직후 관련 당사국은 이에 대해 격렬하게 반응했다. 특히 북한 편에서 대화와 협상 을 통한 핵문제 해결에 공을 들였던 중국은 북한의 핵실험을 뻔뻔한 행위 로 표현하며 강경한 비난 성명을 냈다. 납치자 문제를 둘러싸고 북한과 대립하고 있던 일본은 더욱 강도 높은 유엔결의를 주장 했다. 미국 또한 북한의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했다. 북한의 핵실험에 대한 관련 당사국들의 대응은 핵실험 실시 닷새 뒤인 2006년 10월 14일, 북한 핵실험을 강력히 규탄하고, 대량살상무기 개발 관련 물자 장비 기술 및 자산의 거래와 이전을 방지하 며, 관련 북한 인사의 입국과 경유를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로 나타났 다. 2 제2차 핵실험 북한은 2009년 5월 25일 2차 핵실험을 감행하였다. 장소는 1차 핵실험 때와 같은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였다. 북한은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각종 매체를 동원하여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과 한미동맹을 강하게 비난하면서 자위적 핵 억제력을 강화할 것이라고 누차 주장해 왔다. 이러한 북한의 주장은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안 1718호를 복원하는 의장성명을 발표한 이후 더 욱 격화되었다. 북한은 4월 14일 유엔 안보리 의장성명을 비난하는 외무성 성명에서 6자회담 거부, 미사일 지속 발사, 불능화 되었던 핵시설 원상복구와 함께 자위적 핵억제력을 백방으로 강화해 나갈 것 임을 밝힘으로써 2차 핵실험을 강력히 시사하였다. 북한이 2차 핵실험을 감행하자 국제사회는 한 목소리로 북한의 핵실험을 비난하였고 유엔 안보리 는 2009년 6월 12일 더욱 강화된 대북제재를 내용으로 하는 대북제재 결의안 1874호를 채택하였다. 미국 정부는 유엔 제재와 별도로 대북제재 조치를 취하였고 우리 정부도 상응하는 조치를 취했다. 북한 외무성은 우라늄 농축작업에 착수하고 새로 추출한 플루토늄 전량을 무기화 하겠다. 핵포기는 절대로 있을 수 없는 일로 되었다. 고 하면서 6자회담에는 영원히 돌아가지 않겠다고 공언했다. 북한이 대미협상에서 기선을 잡고 우리 정부의 대북정책의 방향 전환을 압박하기 위한 목적에서 2차 핵실험을 단행했을 것으로 보이나, 결과는 이러한 북한의 기대와는 다르게 나타났다. 북한의 핵 실험 이후 6자회담은 물론이고 미 북대화나 남북대화에서도 어떤 의미 있는 진전을 보이지 못했다. 북한이 2차 핵실험까지 강행한 마당에 이제 더 이상 회담만 되풀이할 수는 없으며, 6자회담이 열리려 면 북한의 성의 있는 조치가 선행되어야 한다는데 6자회담 구성국들의 공감대가 이루어지게 된 것이 다. 3 제3차 핵실험

155 북한은 2013년 2월 12일 1, 2차 핵실험을 실시한 함경북도 길주군 풍계리에서 3차 핵실험을 감행 하였다. 북한은 2012년 12월 12일 실시한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대해 유엔 안보리가 대북제재 결의안 2087호를 채택하자, 외무성과 국방위원회 성명을 통해 3차 핵실험을 시사하는 발언을 하였다. 국제사회가 북한의 도발에 강력한 조치를 취하겠다고 지속적으로 경고하였음에도 불구하고 북한 은 3차 핵실험을 강행하였다. 그리고 조선중앙통신 보도를 통해 폭발력이 크면서도 소형화 경량화 된 원자탄을 사용 했다고 밝히며 핵능력을 과시하였다. 북한은 핵실험 당일 발표한 외무성 대변인 담화에서 3차 핵실험이 미국의 적대행위에 대한 자위적 조치라고 주장하며, 미국의 적대행위가 계속 된다면 추가 조치를 취하겠다고 위협하였다. 북한의 3차 핵실험 이후 미국, 중국 등 국제사회의 비난이 이어졌다. 미국은 핵실험을 심각한 도 발행위 로 규정하고, 유엔 차원에서 뿐만 아니라 자체적인 대응방안을 강구할 것이라고 밝혔다. 중국 도 북한의 핵실험에 대해 강력히 반대한다고 하면서, 한반도 상황을 악화시키는 행동을 하지 말라고 촉구하였다. 북한이 또다시 핵실험을 감행한 것은 유엔 안보리 결의안 1718호, 1874호, 2087호에 대한 명백한 위반으로서 한반도와 동북아의 평화와 안전에 대한 위협일 뿐 아니라 국제사회 전체에 대한 정면도 전 행위였다. 유엔 안보리는 결의안 2094호를 가결하여 북한에 대한 강도 높은 제재를 가하기로 했으 며 중국을 포함한 대부분의 국가들이 북한의 핵실험을 규탄하고 대북제재에 동참하였다. 관련 검색어 _ 미사일 개발, 벼랑끝 전술

156 북한 헌법 북한은 194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차 회의에서 최초의 헌법을 채택하여 조 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을 수립한 후 2012년 4월 개정하기까지 11번의 헌법 개 정을 하였다. 그 중 대표적 개정은 1972년과 1992년, 그리고 1998년에 있었다. 1972년을 경계로 그 이전의 헌법을 인민민주주의헌법 으로, 그 이후의 헌법을 사회주의헌법 으로 불렀다. 그리고 1998년 개정헌법은 김일성헌법 으로 규정하 였고, 2012년 개정헌법부터는 김일성-김정일헌법 으로 부르고 있다. 헌법의 채택과 개정 년 헌법 채택 1948년 헌법은 개인의 생산수단 소유를 인정하는 등 아직 봉건적 잔재와 자본주의적 잔재가 완전 히 청산되지 않은 상태인 인민민주주의 단계에서의 헌법이라고 할 수 있다. 인민민주주의 단계는 사 회주의의 발전단계에 있어서 과도기의 단계로, 1948년 헌법은 사회주의 사회건설까지의 임시적 성격 을 띠고 있다. 1948년 헌법은 수도를 서울이라고 규정함으로써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는 헌법적 구상 을 피력하고 있으며, 1972년과 1992년의 헌법에서는 사라진 헌법 개정 절차를 규정하고 있다 년 헌법 채택 북한은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기존 헌법을 폐지하고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였다. 1972년 헌법은 주석제를 도입하여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를 제도적으로 보장하였다. 주 석은 국가의 수반으로 국가주권을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국가의 최고 직위였다. 그리고 김일성의 주 체사상을 통치 이념으로 명문화하고, 김일성을 우상화하기 위해 김일성이 교시 내지 지도하였다는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 천리마운동, 대안의 사업체계 등을 헌법조항으로 규정하였다. 한편 북한의 수도를 서울에서 평양으로 수정하였다 년 헌법 개정 북한은 1992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3차 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을 개정하였다. 1972년 헌법 이 김일성 독재권력 구축 이후 이를 정당화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1992년 헌법은 김정일에게 권력을 승계하기 위한 과도적 헌법이라는 성격이 짙었다. 권력구조면에서 국방위원회를 중앙인민위원회로부터 분리하여 주석과 중앙인민위원회가 가지고 있던 군사 관련 제반 기능과 권한을 국방위원회로 이관하였다. 이를 통해 군정을 국방위원장 산하로 일원화하고 국방위원회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그리고 1993년 국방위원장에 김정일을 선출함으로 써 김정일의 위상 강화와 군부 장악을 법적으로 뒷받침하였다. 또한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로 인한 대내외적인 환경 변화를 반영하여 국가 지도이념면에서 맑 스-레닌주의를 삭제하는 대신 주체사상의 독자성을 강조하였다. 대외정책 추진원칙에 있어서는 종 래의 맑스-레닌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 을 자주성을 옹호하는 세계인민들과의 단결, 자주 평화 친선 등으로 바꾸어 명시함으로써 이념적 색채를 약화시켰다

157 4 1998년 헌법 개정 북한은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 헌법을 대폭 개정하고, 서문을 신설하여 개정헌법을 김일성헌법으로 명명하였다. 1998년 헌법은 김정일이 1997년 유훈통치를 끝내고 당 총비 서로 추대되어 실질적으로 정권을 장악한 상황에서 김정일의 통치 스타일을 헌법적으로 구현하기 위해 개정된 것이다. 이를 통해 김정일 시대의 출범을 선언하는 의미가 있다. 1998년 헌법의 특징은 주석제를 폐지하고 정무원을 내각으로 개편하였으며, 국방위원회와 최고 인민회의 상임위원장 체제로 정치의 틀을 바꿨다는 점이다.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로 그 이름을 바꾸고, 국방위원회의 권한을 대폭 강화하였다. 이에 따라 최고인민회의 상 임위원장은 명목상 북한을 대표하는 국가수반이 되었으며, 김정일은 그 위상이 한층 강화된 국방위 원회를 통해 군대뿐만 아니라 국정 전반을 실질적으로 장악하게 되었다. 경제 관련 분야에서는 사적 소유 범위를 확대하고, 대외무역에 대한 통제를 완화했으며, 기업들의 자율권을 증대시키고자 했다. 1998년 헌법은 김정일이 공식적인 권력승계를 마무리하면서 개정되었다는 데에 가장 큰 의미가 있다. 1972년 헌법이 주체사상을 전면에 내세웠다면, 1998년 헌법은 북한이 김일성 개인의 나라임을 공포하고 있다. 이미 1972년 사회주의헌법 제정에서부터 유일체제를 공식화하였기에 예고된 것이지 만, 1998년에 북한은 김일성주의를 헌법 원리로 제도화했던 것이다 년 헌법 개정 이후 북한은 2009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를 통해 헌법을 일부 개정하였다. 국방위원장 을 국가기구로 별도로 다루면서 최고영도자 로 국가의 전반 사업을 지도한다고 명시하여 국방위원 장의 법적 지위와 권한 강화를 헌법으로 명문화하였다. 또한 공산주의 라는 용어를 삭제하고 선군사 상 을 국가 활동의 지도적 지침으로 삼는다고 하는 등 전반적으로 김정일의 권력 강화를 뒷받침하였 다. 북한은 김정일 사망 이후인 2012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에서 김정은으로의 권력 승계를 위해 헌법을 개정하였다. 서문에서 김정일을 영원한 국방위원장 으로 명문화하고, 개정헌법 을 김일성-김정일헌법으로 명명하였다. 그리고 국방위원회 제1위원장 직제를 신설하여 국방위원장 의 권한을 그대로 승계하도록 하였다. 평가 북한은 헌법에 공화국은 조선노동당의 영도 밑에 모든 활동을 집행한다. 고 규정하고 있듯이 당 이 모든 것을 결정하고 국가기관은 당의 의사를 그대로 집행한다는 점에서 당이 지배하는 체제이다. 따라서 자유민주주의 사회인 우리와는 헌법이 갖는 의미가 다르며, 헌법의 규정과 현실의 실제 내용 도 다르다. 또한 북한은 헌법을 권력세습과 김일성 김정일의 우상화를 정당화시키는 근거로 활용하 기도 하였다. 북한의 헌법 채택 개정 현황

158 연번 날짜 회의 비고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차 회의 채택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7차 회의 수정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8차 회의 수정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9차 회의 수정 최고인민회의 제1기 제12차 회의 수정 최고인민회의 제3기 제1차 회의 수정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 채택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3차 회의 수정보충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 수정보충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1차 회의 수정보충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2차 회의 수정 최고인민회의 제12기 제5차 회의 수정보충 관련 검색어 _ 국방위원회, 주석, 최고인민회의

159 북한 훈장 북한은 체제유지와 사회주의 건설, 남조선혁명 활동, 북한과 친선관계 발전 등에서 공로가 있는 사람 또는 집단에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훈장을 수여한다. 북한의 최고훈장은 김일성 훈장과 김정일훈장이다. 김일성훈장은 1972년 3월 20일 김일성의 생일 69돌을 맞아 제정했다. 빨치산 출신, 당 정 군 간부 와 대남활동에 이바지한 공로자, 교포 등 개인과 공로 있는 기관 기업소 단체 협동농장 군부대 등 집 단에게 수여해 왔다. 강선제강소, 성진제강소, 대안전기공장 등 공장, 기업소들과 김일성종합대학, 인 민경제대학을 비롯한 100여 개 단위들에 김일성훈장이 수여된 바 있다. 김일성훈장은 해마다 김일성 의 생일인 4월 15일을 전후로 수여된다. 김정일훈장은 김정일의 70회 생일(2월 16일)을 앞두고 2012년 2월 4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을 통해 제정됐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국가건설 위업을 수행하기 위한 투쟁에서 특출한 공로를 세운 일꾼과 인민군장병, 기관 등을 국가적으로 표창하기 위해 김정일훈장을 제정한다며 이 훈장은 김일성훈장과 함께 북한 최고 훈장이라고 밝혔다. 이어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위원회는 같은 날 정령을 통해 김정일상, 김정일청년영예상, 김정일소년영예상도 제정했다. 북한은 2012년 2월 9일 132명, 10월 9일 만경대혁명학원과 강반석혁명학원, 10월 24일 김일성군사종합대학에 김정일훈장을 수여했다. 한편 북한 훈장의 종류들을 보면, 북한 최초의 훈장은 국기훈장(1, 2, 3급)으로 1948년 10월 12일 에 제정되었다. 이외 6 25전쟁 당시인 1950년 7월 7일에는 자유독립훈장(1, 2급), 1950년 7월 13일에 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이순신훈장(1, 2급)을 제정했다. 그 외에도 농촌테제발표30돌 기념훈장, 총련결성기념훈장 등 사회의 각 분야에서 공로가 있는 사람 또는 집단에게 수여하는 훈장 을 제정했다. 북한은 훈장 패용 규칙을 정해놓았다. 초기(1954년)에는 훈장 및 메달은 각 훈장 및 메달 정령에 의하여 패용하되, 훈장 및 메달이 2개 이상일 경우 그 급수에 따라 공화국영웅 메달, 노력영웅 메달, 국기훈장 제1급, 자유독립훈장 제1급, 이순신훈장 제1급 등을 순위로 하여 일렬로 맞추어 패용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훈장 패용 순서는 이후 좀 더 세분화됐다. 현재 북한의 훈장은 훈장 급수에 따라서 왼쪽 가슴과 오른쪽 가슴으로 나뉘어 달게 되어 있다. 왼쪽 가슴에 달 수 있는 훈장은 김일성훈장, 김정일 훈장, 국기훈장, 자유독립훈장 등으로 훈장 순위가 높다. 오른쪽 가슴에 달 수 있는 훈장은 정권창건 기념훈장, 인민군창건 기념훈장, 석탄광업복무영예훈장 등으로 훈장 순위가 낮다. 북한이 훈장을 제정 및 수여하는 이유는 기본적으로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높이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이를 위해 북한은 공로가 있는 사람에게 훈장을 수여할 때 표창식을 열며, 각종 언론매체 에 이를 소개한다. 특히 북한이 김일성과 김정일의 생일을 기해 훈장을 주요 인사들에게 수여한 것은 노동신문 등을 통해 크게 보도된다. 이는 최고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을 과시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혁명열사릉/애국열사릉

160 분조관리제 북한 협동농장에서 분조( 分 組 )란 협동농장의 최말단 기층조직이다. 따라서 분 조관리제는 협동농장의 기층조직인 분조를 단위로 하여 실시하는 농장 내부의 운영관리 형태이다. 배경 분조관리제는 김일성이 1965년 5월 강원도 회양군 포천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면서 처음으로 제 시했으며, 1966년부터 북한의 각 협동농장에서 실시하기 시작했다. 북한의 행정구역은 도 시 군 체계로 형성되어 있다. 이때 군 이하 리 단위는 1개의 협동농장으로 편재하고, 협동농장별 5~7개의 작업반, 작업반별 4~6개의 분조, 분조별 10~15명이 편성되어 있다. 이 때 작업반은 협동농장의 생산규모와 지역적 조건에 따라 농산작업반, 축산작업반, 농기구수리반 등 으로 구성된다. 협동농장의 기본 생산단위는 작업반이지만, 작업반의 인원이 150여 명 정도이기 때문 에 생산의 효율성과 전문성, 노동의욕고취 등을 이유로 분조관리제를 실시해 왔다. 북한은 분조관리제가 농민들을 집단경리의 관리운영에 적극 참여시키는 훌륭한 생산조직 형태 라고 설명하면서, 분조관리제를 실시하는 이유에 대해 농업생산의 특성을 감안해 농민들의 자각성 과 책임성을 높이고, 농업에 대한 국가의 기업적 지도를 철저히 하며, 사회주의 분배원칙을 관철하기 위한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운영방식 분조관리제는 협동농장의 각 분조들에게 일정한 면적의 경작지와 근로자, 농기구, 부림소(짐을 운반하거나 밭을 갈기 위해 기르는 소), 그 밖의 생산도구 등을 할당하고 국가생산계획에 준하여 수 확고 계획과 노력일 ( 勞 力 日 ) 투하계획을 설정해 준 다음 생산계획량을 달성한 실적에 따라 식량과 현금을 분배해 주는 방식이다. 경제난 이후 북한은 1996년 새로운 분조관리제 를 일부 실시하기 시작하였다. 우선 분조 규모를 10~25명에서 7~8명 선으로 축소하고 친인척과 가족을 포함하여 분조를 구성하는 것도 허용하였다. 그리고 생산계획량을 현실에 맞게 조정해 주었으며 특히 계획 외의 초과생산분에 대해서는 자유로이 처분할 수 있도록 했다. 이는 식량난이 계속됨에 따라 농민들의 영농의욕을 높여 생산성을 증대시켜 보고자 분조관리제를 개선하여 운영한 방식이다. 2002년 7.1 조치는 새로운 분조관리제 를 전면 확대 하였을 뿐 아니라 포전담당제를 시범적으로 부분 실시하면서 분조단위별 분배권한을 부여하였다. 평가 분조관리제의 도입, 분조규모의 축소, 포전담당제의 실시, 개인영농의 허용 등은 북한이 식량문제 를 해결하기 위해 취한 조치들이다. 그러나 대체로 분조를 통해 증산된 알곡은 군량미로 군부에서 통째로 걷어가기 때문에 분조원들에서 정상적 분배가 이뤄지지 않았고, 이 때문에 분조에 출석하지 않는 농장원들이 증가할 수밖에 없는 형편이다. 따라서 분조관리제의 기본적 형태는 유지되고 있지만 내용적으로는 분조원들이 관리자에게 일정

161 액의 금품을 제공하며 장사행위를 하는 등 그 경영방법이 효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나아가 2005년 10월 식량배급제 강화를 위해 포전담당제를 폐지하고, 2006년 이후에는 개인 영농 및 개인 간 곡물거 래를 금지시키면서 명목상의 분조관리제는 그 실효성이 불투명하다. 관련 검색어 _ 배급제, 포전담당제, 협동농장

162 붉은기사상 북한이 주장하는 붉은기사상 에서의 붉은기 는 1920~30년대 김일성의 항일 빨치산 시기에 불렸다는 적기가( 赤 旗 歌 ) 에서 유래하였다. 이는 항일 빨치산의 정신 을 지칭하는 것이며, 1990년대 중반에 강조된 붉은기사상 이란 이러한 항일투쟁 시기에 김일성을 향하여 혁명동지들이 보여 주었던 자력갱생 간고분투 정신, 수령결사옹위정신, 혁명적 낙관주의 정신 등을 주된 내용으로 하고 있다. 배경 1990년대 북한이 붉은기사상을 적극적으로 제기한 배경은 1990년대 중반의 상황을 국가의 총체 적 위기로 인식하는 것과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즉 1980년대 말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이어 1994년 김일성의 사망, 연이은 자연재해 등 총체적 국가위기의 절박한 상황에 직면해 체제수호를 위 한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절실히 요구되었던 것이다. 이러한 정치적인 위기감을 극복하기 위하여, 북 한은 1930년대 고난의 행군 시절에 고취했던 붉은기의 상징성을 차용해 이를 붉은기사상으로 구체 화했던 것이다. 또한 김일성 사망 이후 김정일의 부족한 카리스마를 보강하기 위해 새로운 이데올로기가 필요하 게 된 것도 붉은기사상이 제기된 배경 중 하나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은 김일성의 그늘에서 벗어나 명실상부한 최고지도자의 지위를 확보하기 위한 방법을 모색했으며, 그 방법의 하나로 붉은기사상이 라는 이데올로기를 제기한 것이다. 내용 붉은기는 노동계급의 혁명사상을 상징하는 깃발이다. 북한은 붉은기를 붉은기사상으로 이데올로 기화하기에 앞서 이미 중요한 이념적 표상으로 삼아 왔다. 이는 붉은기에 대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이라 할 수 있다. 조직의 이름에 붉은색의 의미가 가미된 것은 1959년 1월에 창설된 노농적위군이 대표적이다. 이 후 1970년대 들어 붉은청년근위대 등이 창설되었다. 대중운동에서는 1960년 8월 김일성이 군부대를 현지지도하면서 제기한 것을 계기로 붉은기대중운동 이 처음 등장했다. 이후 북한은 1974년 2월에는 3대혁명 추진을 뒷받침하기 위한 노력경쟁운동의 일환으로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을 벌이기 시작 하면서 붉은기를 주체의 깃발 이라는 의미로 지금까지 사용해오고 있다. 북한은 1996년 타도제국주의동맹 결성 70주년을 맞이하여, 타도제국주의동맹이 창조한 혁명정신 이 붉은기정신이라고 주장하면서 붉은기사상의 기원을 1926년 10월 17일로 끌어올렸다. 그러나 북한 이 붉은색 또는 붉은기의 상징적 의미를 정치사회적인 부문에 대입해 좀 더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것은 대략 1950년대 말 이후부터로 볼 수 있다. 이때부터 일부 조직의 이름에서 붉은색의 의 미를 부각시키는 동시에, 각종 대중운동과 문예물에 붉은기를 강조하는 사례가 나타났다. 무엇보다 북한의 붉은기사상은 모든 주민들이 항일투쟁에서 고난의 행군 시절에 혁명 선배들이 지녔던 혁명적 신념으로 무장하여 수령을 결사옹위함으로써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해나갈 것을 독려 한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163 평가 북한은 현재 붉은기사상, 붉은기철학, 붉은기정신 등을혼용하여 사용하고 있다. 붉은기사상은 1998년 김정일 정권의 공식적 출범과 더불어 그 강조가 약해지기 시작했다. 붉은기사상은 짧은 기간 내에 그 사상체계가 완전히 구축되지 못함으로써 과도기적 담론에 머물렀던 것이다. 또한 붉은기사 상은 기본적으로 충성과 내핍을 강요한 통치이데올로기로, 대내외적으로 곤경에 처한 시기에 내부결 속을 위한 것이었다. 붉은기사상은 그 이후에 등장한 사회주의 강성대국론에 핵심 담론의 자리를 넘 겨주었다. 관련 검색어 _ 강계정신, 강성대국론, 고난의 행군, 타도제국주의동맹

164 붉은청년근위대 붉은청년근위대는 1970년 김일성의 지시로 창설된 당시 만 14~16세의 남녀 학생을 대상으로 한 학생군사조직을 말한다. 1968년 1 21 사태 및 푸에블로호사건에 따른 내부의 긴장상태를 이용해 창설 및 발기되었다. 당시 북한의 각 사회단체에서는 당과 김일성의 명령 지시 관철에 근위대 결사대가 되자 는 구호를 외치 며 결의문을 채택해 김일성에게 전달했다. 이 결의문을 받은 김일성은 1969년 4월 각 단체의 결의문 을 수락하는 형식으로 학생조직인 붉은청년근위대의 편성을 지시했는데, 이 지시에 따라 1970년 9월 에 정식으로 창설되었다. 북한은 붉은청년근위대를 항일혁명투쟁시기의 청년의용군과 소년선봉대의 영광스런 계승자 라 고 선전하고 있다. 그리고 이들은 중국의 홍위병처럼 젊을 때부터 사상을 개조하여 반혁명적 요소 를 제거시켜 주체사상의 첨병으로 매어두려고 하는 전위부대이자, 동시에 김정일의 친위대인 3대혁명소조의 예비대로서의 사명, 그리고 유사시에는 정규군의 하급간부(하사관) 보충요 원으로서의 사명을 띠고 있다. 붉은청년근위대는 학교단위별로 중대 또는 대대급으로 편성되며 총인원은 100만여 명 정도로 알 려져 있다. 지휘통제는 과거에는 당 군사부가 맡았던 것으로 보이지만, 얼마 전까지는 당 민방위부가 담당하고 있었다. 전시가 되면 인민무력부의 지휘통제하에 들어가게 되며, 훈련 동원 시에는 청년동 맹과 내각 산하의 교육위원회 예하로 편입된다. 이들은 연간 160시간의 교내훈련과 재학 중 한 번 여름방학기간을 이용하여 7일간의 야영훈련소 입영훈련과 비상소집훈련 등을 받는다. 병영훈련 시 에는 일부에게 개인화기 및 공용화기가 지급된다. 이들의 주요 임무는 반혁명적 요소를 제거하여 최고사령관을 결사옹위하는 친위대로서 전투력 향상의 선도적 역할을 하며 유사시에는 후방지역 방어 및 군대 하급간부 보완을 위한 후비대 결사대 로서의 임무를 수행한다. 훈련은 교내 군사교육, 비상소집훈련, 훈련소 입소훈련 등으로 구분할 수 있다. 교내 군사훈련은 매주 토요일 4시간씩 실시하며 제식훈련, 각개전투 등 기본 군사훈련은 물론 장애물 극복, 수류탄 투척, 민방위 경보시 대응요령 등의 훈련을 받는다. 북한은 붉은청년근위대는 정규군이 신뢰할 수 있을 만한 예비대로서 준비되어 있다. 며 그 성장 모습을 평가하고 있는데, 북한은 이들을 언제라도 대량 동원할 수 있도록 준비시키고 있다. 또한 북한은 2012년 4월 15일 태양절에 대규모 군 열병식을 진행하였는데, 2010년 10월 노동당 창건 65돌 경축행사에 이어 1년 6개월 만에 다시 붉은청년근위대가 참가하였다. 이는 김정은 시대 의 개막에 맞춰 청년층의 지지를 대내외에 과시하려는 의도가 담긴 것으로 분석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교도대, 노농적위군

165 비사회주의 그루빠 북한은 1980년 말 소련과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 이후 외부사조의 유입 증가로 주민들의 일탈행위가 빈발함에 따라 이를 단속하기 위해 비사회주의 그루빠를 조직하였다. 배경 비사회주의 그루빠(이하 비사 그루빠)는 1992년 10월 북한 내부의 비( 非 )사회주의적 현상 을 제거 및 감시하기 위해 김정일의 지시로 만들어진 비상설 검열대로 북한 전역을 활동범위로 삼는다. 비사 그루빠는 북한당국이 중앙당, 최고검찰소, 최고재판소,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5개 기관에서 인 력을 차출하여 그룹을 조직해 주민들의 생활에 있어 비사회주의적 요소들을 검열 단속하는 임무를 수행한다. 1990년대 초 북한은 사회주의 체제전환과정을 목격하면서 사회주의 배신자 혹은 수정주의 유입 을 차단하기 위해 곳곳에 사회안전원들을 증가 배치하였다. 이와 함께 6.4그루빠, 노동자 규찰대, 비사회주의 타파 그루빠 등 각종 사상교양조직, 사상적 계도조직, 주민 감시조직들을 결성하여 주민 들의 일상생활을 감시하고 통제하였다. 그러나 1993년 기득권의 반발로 해체하였다. 2004년 7월 10일부터 국경지역에서부터 6.4그루빠의 활동이 재개되었다. 1990년대 초반 6월 4일 조직된 비사 그루빠에서 유래된 6.4그루빠는 일반 계층뿐 아니라 도당 책임비서 등의 간부와, 각 지 역 보위부 성원 등 전 인민을 감찰대상으로 삼았다. 주요 내용 국방위원회가 주도하여 조직된 비사 그루빠는 2007년 회령시를 중심으로 국경지역에서 통신 및 무역행위를 차단하기 위해 엄격한 활동을 벌였으며, 마약밀매범에 대하여 사형에 처하기도 했다. 2008년 2월에는 국경지역을 중심으로 7가지 비사회주의 검열 요강 강연이 있었다. 7가지 비사회주의 범죄로는 1 인신매매, 2 가족 일부가 월남한 것, 3 중국, 한국, 일본으로부터 금전적 지원을 받는 것, 4 손전화기(핸드폰)로 중국에 있는 사람과 통화하고 친척을 찾아주는 일 등으로 돈을 받는 것, 5 마약 장사 또는 중국 거래자들과 밀수하는 것, 6 직업 없이 무직으로 지내는 것, 7 무단 숙박 등이다. 2010년 10월 당대표자회 이후에는 100돌 그루빠 가 조직되었다. 100돌 그루빠의 본래 명칭은 위 대한 수령님 탄생 100돌 당 지도소조 검열대 이다. 100돌 그루빠는 김일성 100회 생일을 맞은 2012년 4월까지 비사회주의 현상을 없애는 것을 목표로 조직되었고, 검열 대상을 3가지로 분류하여 1 마약, 탈북, 인신매매 등 엄중 범죄는 보위부에서 2 강도, 폭력, 도적질 등 치안폭력문제는 보안서에서 3 뇌물, 밀수, 불법장사 등 생활범죄는 당에서 교양처리 취급한다. 비사 그루빠는 1990년대에 처음 조직될 때는 반체제선전물이나 정치지도자에 대한 유언비어 유 포 등의 정치적 현상에 집중하였다. 그러나 2000년대 이후 무직, 건달, 가정교사, 집에서 진찰하는 의사, 간호사, 약장사 등 검열 영역을 확대하고 있다. 특히 무역 등 경제활동도 정치적 활동의 일환으 로 간주하여 비사회주의 검열에 포함시켰으며, 국경지역 검열을 강화하고 있다

166 북한주민들의 비사회주의 행위 유형에는 도박, 사기, 매춘 등의 일반범죄와 고리대 등 불법 영리 활동을 비롯하여 관상, 사주, 궁합 등의 미신행위 및 서구식의 복장 및 머리모양과 한국가요 애창 등의 풍속범죄가 주이다. 그리고 간부들의 뇌물수수, 월권행위, 인사 청탁 등의 비리와 일반 주민들 의 무단결근, 근무태만 등도 비사회주의 행위로 간주되며 이에 대한 검열도 강화하고 있다. 2010년 비사 그루빠는 각 지역 부분 영역별로 세분화되어 북한 사회 곳곳을 수시로 검열하는 통제기구로 변 화하였다. 평가 이처럼 비사 그루빠를 조직하여 주민들에 대한 통제를 강화한 이유는 경제난 이후 북한주민들의 시장 활동이 확대됨에 따라 유입되는 자본주의 문화생활양식으로 인해 그들의 의식과 행위가 변화하 고 있기 때문이다. 북한당국은 비사회주의적 행위가 나날이 확산됨에 따라 비사 그루빠를 통한 검열 과 통제를 주기적으로 진행하고 있다. 현재 북한 내 비사 그루빠의 검열단속은 국방위원회 소속, 중 앙당 소속, 보안대 소속, 각 사회단체 소속별로 나뉘어 사안의 경중에 따라 진행되고 있다. 비사 그루 빠의 단속에 걸리면 몰수를 시작으로 단련대 등의 처벌을 받게 된다. 관련 검색어 _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황색바람

167 4대 군사노선 4대 군사노선은 북한이 1960년대 초에 제시한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 를 의미하여, 이후 군사력 증강을 위한 기본노선이 되었다. 배경 4대 군사노선은 북한이 1960년대 국방력 강화를 위해 채택한 노선이며, 1962년 12월 열린 당중앙 위원회 제4기 제5차 전원회의에서 정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50년대 후반 시작된 소련과 중국 사이의 본격적인 갈등은 북한이 군비증강을 추진할 수 있는 외적 환경을 조성했다. 이로 인해 북한은 1950년대 후반까지 6 25전쟁으로 인한 복구사업에서 거둔 경제적 성과를 바탕으로 1960년대 들어서 본격적인 군비증강을 시작하였다. 중국 및 소련과 등거리 외교 노선을 견지하며 양국 모두에게서 군 비증강을 위한 물적 지원을 받을 수 있었다. 물론 일본 식민지 시대의 유산으로 북한 지역에 많이 남겨져 있던 중화학공업 시설이 군비증강의 모태가 되기도 하였다. 1960년대 초에 북한이 4대 군사노선을 추진한 이유는 미국의 베트남전쟁 개입, 소련의 쿠바 미사 일 배치와 관련한 미국과 소련 사이의 갈등, 사회주의 종주국인 소련과 아시아권에서의 사회주의 대 국인 중국 사이의 갈등, 쿠바의 미사일 위기에 대한 소련의 자세 등이었다고 할 수 있다. 주요 내용 4대 군사노선은 전인민의 무장화, 전군의 간부화, 전지역의 요새화, 전군의 현대화 등이라는 4 가지 내용으로 구성되어 있다. 전인민의 무장화 는 말 그대로 북한주민을 무장하게 한다는 것이다. 북한은 우리의 예비군과 비 슷한 개념인 교도대를 운영하고 있으며, 공장 기업소에서 일하는 노동자와 협동농장 등에서 일하는 농민으로 구성된 노농적위군이라는 준( 準 )군사조직을 인민군과 별도로 운영하고 있다. 전군의 간부화 는 북한의 인민군 전체를 간부와 같은 정신상태를 갖게 하고 간부처럼 조직 운영 한다는 의미다. 일반적으로 북한주민은 인민군에 우리의 사병에 해당하는 하전사로 입대한 뒤 여러 과정을 거쳐 간부가 될 수 있다. 북한은 하전사로 입대한 군인들도 간부와 같은 충성심과 마음가짐을 갖게 하기 위해 강력한 사상 및 정신교육을 실시하고 있다. 전지역의 요새화 는 북한의 모든 국토를 전쟁에 대비해 요새처럼 만든다는 의미이다. 북한은 주 요 군수공장을 지하에 건설하고, 고지와 같은 주요 거점에 군사적 시설을 설치해 운용하고 있다. 전군의 현대화 는 인민군이 보유 운용하고 있는 장비를 현대화한다는 의미다. 이는 구형무기를 개량하는 것뿐 아니라 신형무기를 도입 개발해 구형무기를 대체하는 것까지를 모두 포함한다. 이를 위해서 북한은 중국 및 소련으로부터 무기를 수입하기도 하지만 독자적인 군수산업을 통해 상당한 정도의 무기를 자체 개발 생산하고 있다. 평가

168 북한은 1960년대 4대 군사노선을 정립하고 국방에서의 자위 를 천명하면서 국가의 모든 영역을 군사적인 체계로 갖출 수 있는 기반을 닦았다. 이로 인해 민수산업보다 군수산업을 집중적으로 육성 하기 시작했고, 결국 북한의 이 같은 비생산적인 정책은 1960년대 후반 들어 경제성장률이 급격하게 저하되는 결과를 초래하는 한 원인이 되었다. 이는 김일성 사망 이후 1990년대 중 후반 구조적 경제 난 으로까지 이어졌고, 아직까지도 북한은 만성적 경제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한편 북한은 1992년 개정헌법부터 국방 과 관련된 조항에 4대 군사노선의 4개항을 자위적 군사노 선 이라고 명기하여 헌법 차원으로 격상시켰다. 그러나 4대 군사노선이 북한 노동당의 군사노선임에 도 불구하고, 노동당 규약에는 관련 내용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 관련 검색어 _ 군사 경제 병진 노선

169 4.25문화회관 4.25문화회관은 평양시 모란봉구역에 위치하고 있는 대중문화회관이다. 중요 회의나 행사, 예술 공연들이 진행되며, 각종 군사 정치 집회의 장소로도 활용되고 있다. 건설을 본격적으로 시작한지 1년 7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되어 1975년 10월에 개관했다. 처음에는 2.8문화회관으로 불리다가 1995년 10월 현재의 이름으로 변경됐다. 이는 인민군 창설일 이 1948년 2월 8일인 것에서 유래되었는데, 1978년 북한이 인민군의 창설 시점을 김일성이 항일유격 대를 창설한 날인 1932년 4월 25일로 소급 변경한데 따라 4.25문화회관으로 명칭이 바뀌게 되었다. 2.8예술영화촬영소도 마찬가지 이유로 4.25예술영화촬영소로 바뀌었다. 4.25문화회관은 총 부지면적이 12만 4천여m², 연건축면적 8만여m²에 세워진 석조 건물이다. 총 7층 규모로서, 크게 중앙현관홀, 관람홀, 무대 등으로 구성되었다. 중앙현관홀은 2층 관통홀로 구성돼 있으며 홀 양쪽의 복도에서는 사진전 등의 전시도 진행할 수 있다. 관람홀은 6,000석 규모의 대형극 장과 1,100석의 극장, 600석짜리 영화관으로 이루어져 있다. 무대부분은 기본무대, 옆무대, 뒤무대 등 으로 나뉘어있으며 현대화된 무대설비, 음향설비, 공기청정설비 등을 갖추었다. 4.25문화회관의 외양은 지형적 특성, 평양시의 전반적인 건축설계 구도, 문화건물로서의 상징성 등을 적절히 고려하여 처리되었다고 한다. 건물의 바깥 벽 아래층 오른쪽과 왼쪽 및 위층 양쪽에는 각각 혁명의 사령부를 보위하여, 불패의 혁명대오 등의 이름이 붙은 모자이크식 벽화가 그려져 있 다. 실내에도 주석단의 상하 전면과 중앙홀의 좌우 벽면에 여러 개의 우상화 문구가 새겨져 있다. 관련 검색어 _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인민대학습당

170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란 사회정치적 존재인 개개인이 당의 영도 밑에 수령을 중심으로 하여 조 직사상적으로 결속하면 영생하는 생명력을 지닌 하나의 사회정치적 생명체 를 이룰 수 있다는 주장 이다. 즉 당을 중심으로 하여 일반 대중을 이끌어가기 위한 통치논리라 할 수 있다. 사회정치적 생명 체론은 1986년 7월 15일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 앞에서 행한 주체사상교양에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라는 담화에서 처음 제시되었다. 혁명의 주체는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삼위일체)로 이루어진다. 여기서 수령 은 사회정치적 생 명체의 최고뇌수로 생명의 중심이다. 당 은 수령을 중심으로 조직사상적으로 공고하게 결합된 인민 대중의 핵심부대로서 자주적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추이다. 인민대중 (노동자, 농민, 인텔리)은 자주적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담당자이다. 따라서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가 역사의 자주적인 주체 로 된다는 것이다. 이는 북한에서 사람의 생명을 육체적 생명 과 사회정치적 생명 으로 나누고 사회정치적 생명이 육체적 생명보다 귀중하다는 전제에서 출발한다. 집단주의 생명관에 기초하여 개개인의 육체적 생명 은 유한하나 사회정치적 생명은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를 이룰 경우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통해 영 생하는 생명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도덕의무와 관련하여서는 혁명하는 사람들이 수령에게 충성과 효성을 다하여 수령을 높이 받들어 모시고 끝까지 따르는 것은 그들 자신의 사회정치적 생명의 근본요구이고 마땅한 도리이고 더없는 기쁨이고 영광 이라고 주장하고 있어 이러한 사회정치적 생명의 특징을 잘 나타내고 있다. 북한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에 의하면, 사회정치적 집단으로 결합된 인민대중의 사회정치적 생 명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이 집단의 최고뇌수인 수령이다. 일반적으로 생명유기체의 뇌수 는 각 기관들과 구조의 내적 생물학적 요구를 분석 종합하여 하나로 통일시키며, 생명유기체를 이루 는 각 기관들과 구조의 모든 활동을 통일적으로 조절하고 지휘함으로써 하나의 방향으로 활동을 하 도록 한다. 이와 마찬가지로 자주적인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활동을 하나로 종합하고 통일시켜 하나 의 목적 실현에로 조직 동원하고 지휘하는 것은 노동계급의 수령으로서 사회정치적 생명체에서 가장 중요하다. 또한 생명활동이 원만히 이루어지려면 생명유기체의 매개 요소들의 기능과 활동을 하나로 통일 시키고 일치시켜 나가는 뇌수가 있어야 하고, 뇌수의 지휘와 조절을 실현하는 중추가 있어야 한다. 생명유기체에서 중추는 뇌수의 지휘와 조절을 실현하고 외부의 자극을 뇌수에 전달하는 기능을 수행 하게 된다. 뇌수의 지휘와 조절이 중추를 통하여 실현되고 전달되어야 유기체의 기관과 계통이 움직 이고 조직과 세포들이 작용하여 생명활동이 이루어지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수령, 당, 대중의 통 일체로서의 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생명활동이 원만히 진행되려면 이 생명체의 최고뇌수인 수령의 지 휘를 실현하는 중추로서의 당이 있어야 한다. 인민대중은 당을 통하여 수령의 지휘를 받고 당의 영도 밑에 수령을 중심으로 조직사상적으로 결속되어야만 자주적인 사회정치적 생명체로 존재하고 활동 할 수 있으며 혁명의 주체로서의 지위와 역할을 원만히 수행할 수 있다. 북한이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을 강조한 이유는 크게 5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혁명의 주체는 수령, 당, 대중의 통일체라는 명제 아래 혁명적 수령관을 확립하여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보장하기

171 위한 것이다. 둘째, 인민대중을 당과 수령의 영도하에 조직사상적으로 통일단결시키기 위한 것이다. 셋째, 집단주의적 생명관에 기초하여 개인의 육체적 생명의 유한성과 구별되는 사회정치적 생명의 영생을 강조함으로써 수령중심의 전체주의적 독재체제를 확립하고, 수령의 계승 즉 김일성과 김정일 의 권력승계를 정당화하고자 한 것이다. 넷째, 사회주의권 전반의 어려움, 중국의 개혁 개방 그리고 경제난 등 대내외적 위기요인에 직면하여 사회통합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다섯째, 북한식 사회주 의 제도의 우월성을 강조하기 위한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수령론, 유일사상체계, 집단주의

172 사회주의 교육에 관한 테제 1977년 9월 5일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4차 전원회의에서 발표된 사회주의 교 육에 관한 테제 (이하 교육테제 )는 현재 북한 교육체계의 기본골격과 교육 운 영의 기본방침이다. 배경 해방 이후 북한의 교육정책은 소련의 영향을 받아오다가 점차적으로 주체사상의 영향을 받았으 며, 이로 인해 북한만의 독자적인 교육정책의 수립을 요구받게 되었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77년 이 전의 교육 관련 김일성 지시를 모아 북한 교육정책의 기본원칙을 체계화하는 작업을 하였는데, 그 결과물이 교육테제 이다. 이에 대해 북한의 정치사전은 교육테제 를 불멸의 주체사상을 빛나게 구현 하여 사람들을 자주의식과 창조적 능력을 가진 공산주의적 혁명인재로 키우는 참다운 길을 밝혀 준 주체의 교육헌장 이라고 정의한다. 곧 교육테제 는 주체사상을 기초로 하여 북한식 사회주의 교육이 론으로 정립시킨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교육테제 발표일인 9월 5일을 교육절 로 기념하고 있 으며, 이날 각종 대회와 모임을 진행하고 있다. 주요 내용 교육테제 는 전문과 사회주의 교육학의 기본원리, 사회주의 교육의 내용, 사회주의 교육의 방법, 사회주의 교육제도, 교육기관의 임무와 역할 및 교육사업에 대한 지도와 협조 등 교육전반에 걸쳐 종합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첫째, 전문에는 공산주의의 사상적 요새와 물질적 요새를 점령하는데서 교육사업이 가지는 중요 성과 교육사업에서 이룩된 성과들을 개괄하고 있다. 둘째, 사회주의 교육학의 기본원리는 사람들을 자주성과 창조성을 가진 공산주의적 인간으로 육 성하는 것이다. 셋째, 사회주의 교육의 내용은 정치사상교양, 과학기술교육, 체육교육이다. 정치사상교양은 학생 들에게 주체사상, 혁명교양, 공산주의교양을 강화하여 이들을 노동계급의 혁명의식과 공산주의 도덕 으로 튼튼히 무장시키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과학기술교육은 학생들에게 선진과학과 기술의 성과를 체득시키고 활용능력을 키워 주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체육교육은 청소년학생들의 체력을 증진시켜 이들을 노동과 국방에 튼튼히 준비시키는데 있다는 것을 지적하는데, 특히 체육교육을 체계적으로 하고 국방체육을 강화하며 체육을 대중화, 생활화하는 것을 내용으로 하고 있다. 넷째, 사회주의 교육의 방법은 깨우쳐 주는 교수교양, 이론교육과 실천교육, 교육과 생산노동의 결합, 조직생활, 사회정치생활의 강화, 학교교육과 사회교육의 결합 그리고 학교 전 교육, 학교교육, 성인교육의 병진이 사회주의교육의 목적과 사명에 맞는 교육방법이라는 점을 기술하고 있다. 다섯째, 사회주의 교육제도 부분에서는 노동계급의 혁명위업,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 위업에 복 무하는 혁명적인 교육제도이며 국가가 완전히 책임지고 전체 인민을 공부시키는 가장 인민적인 교육 제도임을 선전한다. 그리고 이러한 교육제도의 역사적 뿌리가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있음을 기술하고 있다

173 여섯째, 교육기관의 임무와 역할, 교육사업에 대한 지도와 협조 부분에서는 학교의 사명과 임무, 교원의 위치와 역할을 밝히고 교육사업에 대한 당적 지도와 국가적 보장, 사회적 지원을 강화할 것을 밝히고 있다. 평가 교육테제 를 통해 북한은 학교교육과 사회교육 등 모든 교육이 주체사상을 중심으로 한 교육체계 가 이루어지게 되어, 본질적인 전인교육 양성을 하지 못하고 편향된 정치교육에만 집중하였다. 결국 북한의 교육은 개인의 자아발달보다는 북한식 사회주의 건설에 헌신할 수 있는 구성원의 양성을 위해 학생들을 혁명화, 노동계급화, 공산주의화 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 그리고 지도자 에 복종하는 충직한 인재양성을 목표로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유일사상체계, 주체사상

174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이하 농촌테제 )는 북한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사회주의 농촌건설의 지도적 지침이다. 북한 사회주의 체제에서 농촌문제 의 본질과 농촌문제 해결을 위한 원칙과 방안이 주된 내용으로 되어있다. 배경 북한은 6 25전쟁 이후 본격적인 사회주의 체제로의 진입을 시도하였다. 이에 따라 농촌 부문에서 도 사회주의화를 추진하였다. 여러 단위에 나뉘어 있는 농장들을 통합하여 협동농장화를 추진한 결 과 1950년대 말 농촌 부문에서 사회주의를 완성하였다. 이후 1960년대 들어서면서 협동농장들의 경 제지도 및 관리에 있어 개혁을 단행(청산리 방법)하는데, 그 결과 군 농업협동조합 경영위원 회 (1961)라는 군( 郡 ) 단위를 중심으로 하는 지역거점의 통일적 농업 지도체제를 조직하였다. 이는 북한식 농촌 부문에서의 자력갱생 전략이었지만 그 결과 북한의 농업은 공업보다, 농촌은 도시보다 더디게 성장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제약을 벗어나지 못했다. 이러한 상황에 직면하여 김일성은 1964 년 2월 25일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 농촌테제 를 발표함으로써 농업에 대한 개혁을 다시 단행하였다. 주요 내용 농촌테제 는 네 개로 구성되어 있다. 전문은 농촌문제가 혁명의 기본적인 전략적 문제로서 사회 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가장 중요한 구성부분으로 된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사회주의에서 농촌문 제는 도시와 농촌 간의 차이, 노동계급과 농민 간의 계급적 차이를 없앨 때 종국적으로 해결된다는 내용이다. 농촌테제 의 첫 번째 부분인 사회주의하에서의 농촌문제해결의 기본원칙 에서는 혁명발전의 서 로 다른 단계에서 서로 다르게 제기되는 농촌문제의 기본내용을 다루고 있다. 농촌테제 의 두 번째 부분인 사회주의 농촌건설의 기본과업 은 사회주의 농촌경리제도의 우월 성을 전면적으로 제기하며 사회주의 농촌건설을 더한층 촉진시키기 위한 과업들을 기술하고 있다. 기본과업으로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의 농촌기술혁명, 농촌기술간부 육성, 사상교육 강화, 노농동맹 강화, 공업과 농업의 균형적 발전, 군 협동농장 경영위원회 기능 강화 등을 강조하였다. 농촌테제 세 번째 부분인 사회주의 농촌건설에서의 군의 역할과 임무 에서는 군( 郡 )의 역할을 높여 사회주의 농촌의 발전과 지방의 정치, 경제, 문화의 전반적 발전을 촉진하는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여기서는 군 내 지방공업의 역할을 높이는 문제, 농촌문화혁명의 거점으로서의 군의 역할을 높이는 문제를 지적하고 있다. 농촌테제 네 번째 부분인 협동농장들의 경제토대를 강화하며 농민들의 생활을 높이기 위한 당 면한 몇 가지 대책 은 협동농장들과 농민들의 부담을 덜고 그들에게 더 큰 국가적 혜택을 주기 위한 일련의 대책들이라고 밝히고 있다

175 평가 농촌테제 는 농촌의 협동화를 한 단계 발전시켜 농촌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제시된 농촌문제에 관한 종합지침서이다. 농촌기술혁명의 기본과업인 수리화, 기계화, 전기화, 화학화를 의욕적으로 추 진하여 단기적으로는 농업생산량 증가에 일정부분 성과를 거둔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장기적으로 는 경제성장에 필요한 기초적인 자원의 부족으로 한계에 부딪혔다. 특히 1980년대 중반부터 경제 전 반이 추락하고 1990년대 많은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을 겪으면서 지속적인 식량난 등 경제적 인 어려움이 누적되는 현상을 탈피하지 못함에 따라 북한에서 농촌테제 는 실질적인 성과를 내지 못하는 결과를 가져왔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주의적 소유,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주체농법, 협동농장

176 사회주의 대가정 사회주의 대가정 은 북한 사회 전체를 하나의 가정으로 보고, 수령 당 인민의 관계를 아버지와 어머니, 자녀의 관계와 같다고 보는 개념이다. 북한은 사회주의 대가정론에 기초하여 수령이 은덕을 베풀면 모든 사회구성원은 수령을 향해 충성과 효성을 바치는 것이 당연하다는 점을 강조한다. 특히 어린이와 청소년을 대상으로 수령에 대한 충성동이 와 효자동이 로 자라나야 한다는 것을 교육의 목표이자 공산주의 도덕의 규범으로 제시하고 있다. 김일성은 1962년 신년사에서 사회를 화목하고 단합된 하나의 대가정으로 변화시키기 위해 대중 들이 애국적 헌신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를 발휘할 것을 강조했다. 이는 집단주의 정신을 통해 전체 인민을 단합된 하나의 대가정으로 만들고자 한 것이다. 이와 같이 1960년대에 처음 등장한 대가정론 은 등장 이후 붉은 대가정, 혁명적 대가정, 공산주의적 대가정 등 시대에 따라 조금씩 변화하며 사회주의 체제유지에 영향력 있는 담론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사회주의 대가정론은 국가의 이미지가 가정의 이미지로 확대 된 것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은 이를 통해 국가 라는 2차 집단을 가정 이라는 1차 집단에 접목함으로써 혁명의 최고영도자인 수령 이 각 가정에서 육체적 생명을 준 부모보다 더 중요한 구심점의 역할을 한다는 논리를 전개하고자 한 것이 다. 북한은 이러한 국가의 가정화 를 통해 수령의 대중에 대한 믿음과 사랑, 그리고 수령에 대한 대중 의 충성과 효성을 강조한다. 이것은 각 가정의 가장 좋은 벽면에 김일성 김정일의 사진을 정성껏 모 시는 생활방식을 통해 수령을 진정한 어버이 로 인식시키고 있는 것을 통해 나타난다. 이로써 수령- 당-대중 의 삼위일체적 관계로 형성된 국가는 가부장제적이고 유기체적 성격을 갖게 되는 형태가 된 것이다. 본격적인 사회주의 대가정 이념의 강조는 1990년에 들어서 이루어졌다. 북한은 1990년대 중반 대 내외적인 어려움으로 인해 약화된 집단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수령-당-대중 을 하나로 묶는 사회주 의 대가정 을 강조하였다. 이는 전통적인 가족을 사회적 의미로 확대함으로써 정권의 안정과 체제의 정당성을 구하려는 것이다. 즉 사회주의 대가정론은 김일성의 사망으로 인해 떨어진 수령의 권위를 회복하고 지배 권력을 더욱 강화하여 수령을 정점으로 사회를 결속시키고자 한 것이다. 특히 이는 김일성의 사망에 이어 자연재해와 경제난으로 대내외 혼란 상황이 야기됨에 따라 주민들의 동요와 이탈을 막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또한 사회 전반적으로 노동당 조직과 근로단체에서 김일성 김정일 의 지시를 집행하는 당 간부가 절대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대중 위에 군림하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 이는 의식구조를 형성하는 요인으로 작용하기도 한다. 관련 검색어 _ 수령론, 주체사상

177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단순한 사실적 묘사에 그치지 않고 사회주의 사상을 기반으로 하여 현실 을 그려낼 것을 요구하는 이론이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는 1930년대 소련의 스탈린 정부에 의해 주도된 예술경향이다. 이 이론이 공 식적인 예술방법론으로 채택된 것은 1934년 소비에트 작가 총연맹 제1차 대표자회의에서였지만, 이 미 그 이론은 1917년에 있었던 10월 혁명 직후에 시작되었고, 소련의 경제개발 5개년 계획 시대에 이어 사회주의적 건설의 과정을 거치며 성장하였다.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특징은 첫째, 전형성( 典 型 性 )이다. 현실을 단지 사실적으로 그려 보여 주 는 것이 아니라 도래할 사회주의 사회의 당위성을 제시한다. 둘째, 당파성( 黨 派 性 )이다. 당이 채택한 노선이나 정책에 절대적으로 순응하여 그것을 작품으로 형상화한다. 셋째, 대중성( 大 衆 性 )이다. 내용 면에 있어서 프롤레타리아 계층을 작품의 중요한 소재로 취급한다. 넷째, 이상성( 理 想 性 )이다. 사회 주의적 이데올로기를 강조하는 태도로 예술을 통해서 사회주의의 이상을 제시한다. 북한은 사회주의적 사실주의를 유일하게 옳은 창작방법 으로 취급하기 때문에 어떠한 비판이나 도전도 용납하지 않는다. 북한의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에서는 민족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는데, 민족적 형식에 사회주의 내용을 담는 것을 의미한다. 다만 북한 사회에서 주체 가 강조되면서 민족적 형식이란 일제 강점기 김일성에 의해 지도 창작된 문예형식이며, 사회주의적 내용은 김일성의 혁명사상으로 변화하게 됐 다. 또한 김정일 후계체제가 구축되고 김정일이 문학예술분야를 직접 지휘하면서 사회주의적 사실주 의 대신 주체사상에 기반을 둔 주체사실주의 로 변형되었다. 주체사실주의의 핵심은 사회주의를 드 러내는 전형적인 주체적인 인간을 그 중심에 놓고 그리는 창작방법이다. 이는 주체사상의 철학적 원 리에 기초한 것이다. 주체사실주의는 1980년대 북한 문예정책과 노선의 유일한 지침인 김정일의 주 체문학론의 핵심이다. 인민이 역사 발전의 중심인 주체사회 인 것을 강조하면서 주체시대에 맞는 주 체사실주의를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이렇듯 북한은 기본적인 창작방법론으로 사회주의적 사실주 의가 있지만 북한만의 방식으로 그것을 변형하여 사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주체문예이론

178 사회주의적 소유 북한은 사회주의적 소유를 사회주의적 생산관계의 기초가 되는 생산수단과 생산물의 전 사회적 또는 집단적 소유 라고 개념화하고 있다. 사회주의적 소유에는 생산수단의 소유 형태에 따라 국가가 소유하는 전 인민적 소유 와 사회협동단체가 소유하는 협동적 소유 가 있다. 내용 북한의 헌법에 의하면 국가 소유는 국가가 전 인민을 대표하여 소유하는 전 인민적 소유 를 말하 는 것으로 그 대상에는 제한이 없다. 지하자원, 산림자원, 수산자원 등의 기본적인 자연자원과 중공 업 경공업 등의 중요 공장, 항만, 은행, 교통수단, 방송기관, 학교 및 중요 문화 보건시설 등이 국가 소유의 대상이다. 협동적 소유 는 한정된 범위 내에서 사회단체와 협동단체가 그 소유권의 담당자가 되는 집단적 소유 형태를 말한다. 사회단체는 농업근로자동맹, 직업총동맹, 민주여성동맹,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 맹 등이 있고, 협동단체의 대표적 형태는 농업협동농장이 있다. 토지, 농기계, 배, 중소공장, 기업소와 그 외 경영활동에 필요한 것이면 소유의 대상이 될 수 있다. 사회협동단체 소유권은 시효의 제한이 없으며 국가는 사회협동단체의 소유권을 보호한다. 북한은 전 인민적 소유 와 협동적 소유 의 두 가지 형태가 있는 것은 사회주의 사회는 도시와 농 촌 간의 기술, 문화, 사상 분야에서의 차이가 남아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협동적 소유 는 모든 산업이 국가 소유가 되는 사회주의 체제로 이행하는 과도기에 발생하는 불완전한 소유 형태 라고 규정하고, 사회주의가 발달함에 따라 모든 생산수단은 국가 소유로 이행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즉 북한은 국가 소유를 더 고차원적 소유 형태로 보고 있다. 경과 북한은 생산수단에 대한 사회주의적 개조를 1946년에 착수하여 1958년에 완수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1946년 2월에 조직된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는 같은 해 3월에 토지개혁에관한법령 을 발표 하여 무상몰수 무상분배의 원칙 에 따라 토지개혁을 실시하였다. 같은 해 8월에는 중요산업국유화 법령 을 발표하여, 공장 광산 철도 체신 은행 등의 주요산업을 국유화하였다. 그 결과 전체 산업의 90% 이상인 1,034개소의 산업시설이 사회적 소유로 전환되었다. 1947년부터는 산업에서의 국유화 부문을 계속 확대시키는 한편, 농업 부문에서는 국영 농 목장을 설치하는 등 사회주의적 개조 를 점 진적으로 실시해 나갔다. 휴전 이후 1953년 8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2기 제6차 전원회의에서 북한은 1954년부터 농업협 동조합을 조직하기로 결정하였다. 이에 따라 1953년 말부터 1954년 초에 걸쳐 1개 군에 1~2개씩의 농업협동조합이 만들어졌는데, 이러한 예비적 단계를 거쳐 1954년부터 집단화운동이 본격적으로 전 개되었다. 그리고 1958년 8월에 전 농가를 협동조합에 가입시켜 농업집단화 를 완료하였다. 1961년에는 군(구역) 인민위원회로부터 농촌경리에 대한 지도기능을 분리시켜 전문적 농업 지도

179 기관인 군(구역) 농업협동조합 경영위원회를 조직하고, 군내에 있는 농기계작업소, 관개관리소, 자재 공급소, 수의방역소 등을 직접 운영하게 하였다. 1962년부터 농업협동조합을 협동농장으로 개칭하였 으며 지금의 협동농장 경영체제가 확립되었다. 1964년 2월에 열린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는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를 발표하면서 농업의 협동적 소유 형태를 전 인민적 소유 형태로 전환하겠다는 방침을 제시하였다. 그러나 여전히 농경지의 약 90%는 협동농장에 속해 있어 협동적 소유 형태를 유지하고 있다. 평가 북한의 경제체제는 사회주의적 소유제도에 토대를 두고 있어 개인 소유의 범위는 근로소득과 일 용 소비품에 한정됨으로써 극히 제한적이다. 이와 같은 북한의 소유제도는 북한주민이 경제 활동에 참여하는 목적, 경제 의식, 경제기구의 조직과 기능 등에서 자본주의 경제체제와 현격한 차이를 갖게 하는 근본 요인이 되었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난 이후 시장화 현상이 확산되면서 사회주의적 소유 제도의 엄격한 틀이 흐트러지는 현상이 발생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협동농장

180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부르주아적 민족주의를 배격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노동계 급과 근로인민이 사회주의를 가진 조국을 사랑하는 사상과 관점을 일컫는 말이다. 김일성은 1958년 전국 시 군당위원회 선동원들을 위한 강습회에서 공산주의 교양에 대하여 라 는 연설을 통해 인민들을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와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정신 으로 교양할 것을 선언하였다. 그리고 자기 조국에 대한 애국적 복무는 곧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와 일치하는 것이라 고 밝혔다. 그 이유는 근로인민이 국가주권을 쥐고 있는 상태에서 사회주의 조국을 사랑하는 힘이 강화되어야 전세계 노동계급의 국제적 이익을 옹호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북한에서 1966년에 발표된 <우리 당의 주체사상과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에 따르면,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사회주의 조국에 대한 사랑의 감정으로서 첫째, 근로 인민이 나라의 주인으로 된 사회 주의 조국과 향토, 사회주의 제도, 자기 인민에 대한 사랑과 충실성이며 둘째, 사회주의 조국의 번영 과 공산주의 승리를 위하여 모든 것을 다 바쳐 일하는 투지와 자기 희생성이며 셋째, 사회주의 혁명 과 건설에서 이룩된 모든 혁명적 전위물과 그것을 창조한 인민에 대한 민족적 긍지와 자랑의 감정 이라고 한다. 또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본질적 특성을 인민적 사상감정, 노동계급을 위해 복무하는 계급적 사상감정, 당을 위해 모든 것을 다 바치는 당적 사상감정 등 세 가지로 구분하고 이런 특징으로 인해 과거의 어떤 애국주의와도 구별되는 최고의 애국주의 라고 주장한다. 북한은 이러한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본질적 특성 가운데 가장 중요한 것은 인민적 및 계급적 사상감정의 최고 표현인 당적 사상감정 이라고 주장함으로써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에서의 당적 영 도체계 확립이 애국적 투쟁 전통과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 원칙을 뛰어 넘는 원칙임을 분명히 하고 있어 1950년대 말부터 1960년대 후반기까지 진행된 당적 유일영도체계 확립이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내용의 핵심개념으로 자리 잡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를 체계화하는 시기는 중분쟁이 심화되고 북 중갈등이 일기 시작하던 때 였으며, 주체사상이 전면적으로 나타난 시점이기도 했다. 그리고 주체사상이 가장 철저한 사회주의 적 애국주의로 정의되는 때이기도 하였다. 그동안 민족주의에 대해 부정적 인식을 보여주던 북한 지 도부는 1960년대 이후 대외적으로 강한 민족주의적 성향을 나타냈다. 이렇게 1960년대 중반 이후 북 한이 사상의 주체 로 나아가는 데 사회주의적 애국주의가 중심 역할을 수행하였다. 사회주의적 애국주의 교양의 중요 내용은 첫째 수령에 대한 무한한 충실성, 둘째 근로인민들에게 혁명과 사회주의, 공산주의에 대한 자부심을 키워 사회주의제도의 공고발전과 근로인민의 행복을 위 해 투쟁하도록 할 것, 셋째 근로인민들의 민족적 자주의식을 높여 남조선 해방과 민족통일, 그리고 민족적 번영을 위해 투쟁하는 정신을 배양할 것, 넷째 근로인민들을 혁명적 낙관주의로 교양할 것 등이다. 요컨대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지향하는 노동계급과 근로인민의 애국주의 로 설명된다. 또한 계급의식과 민족적 자주의식을 결합시키고 자기계급과 제도에 대한 사랑을 자기 민족과 조국에 대한 사랑을 결합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리고 사회주의적 애국주의는 프롤레타리

181 아 국제주의와 밀접히 연관되어 있다. 즉 모든 나라의 근로자들이 연대성과 원조의 정신을 갖지 않는 다면 사회주의 조국의 융성 발전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 그이유이다. 마지막으로 북한은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전통을 김일성의 항일무장투쟁에서 찾고 있으며, 사회주의적 애국주의의 전통이 혁명과 건설에 있어서 근로자들의 애국적 헌신성과 대중적 영웅주의로서 재현되고 있다고 주장한다. 관련 검색어 _ 민족주의, 우리민족제일주의

182 3대 제일주의 3대 제일주의는 북한이 1994년부터 농업 무역 경공업의 3대 부문을 활성화시키기 위해 추진한 정 책이다. 북한은 전통적으로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을 표방하며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성장시키는 사회주의 공업화 전략을 구사해왔다. 그러나 1993년 12월에 개최된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21차 전원 회의에서는 3차 7개년 계획(1987~1993)의 실패를 공식 인정하고 3년간의 완충기(1994~1996)를 설정 하였다. 북한은 완충기 과제로서 이른바 3대 제일주의 즉 농업, 경공업, 무역 제일주의 노선을 천명 하였다. 농업 생산기반이 약화된 상황에서 먹는 문제의 해결을 강조했고, 인민 소비품의 증산을 위해 경공업을 강조했으며, 1980년대 말 이후 사회주의권의 붕괴에 따른 대외무역의 급속한 위축을 타개 하기 위해 무역 활성화를 강조하였다. 3대 제일주의는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의 핵심이었던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이 전체 경제의 균형을 왜곡시켰다는 자기 비판적 정책전환이라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또한 이 같은 경제 정책상의 변화는 북한이 1990년대 경제 위기와 사회주의 붕괴에 직면하여 인민 대중 중심의 우리식 사회주의 를 유지하기 위해서는 인민 대중의 물질 문화적 수요를 실질적으로 원만히 보장해야 한다 는 절박한 요구에서 비롯되었다. 실제 3대 제일주의는 북한의 정책 방침에 반영되었고 1994년 4월에 열린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7 차 회의에서는 1994년 예산 중 이들 3대 부문의 비중이 평균 이상으로 증가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3대 제일주의 정책은 큰 효과를 거두지 못했다. 1994년 이후 가뭄과 홍수 등 자연재해로 최악의 식량 위기를 겪은 데다 무역 부문 역시 외환 부족, 미국의 경제제재, 국제사회에서의 신용불량 탓으로 자 본주의권과의 교역을 확대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경공업 정책에서도 북한은 투자의 우선순위를 중공 업에서 경공업으로 전환하지 않고 하부 단위의 자발성을 촉구하는 대중운동으로 진행함으로써 효과 를 거두지 못했다. 결국 북한은 여전히 경제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3차 7개년 계획 이후 아직까지 경제계획도 발표하지 못하고 있다. 2012년 4월 북한은 최고인민회의를 통해 경공업과 농업에 역량을 집중하여 경제강국의 토대를 마련하겠다고 밝혔다. 이른바 인민생활을 향상시키고 경제강국을 건설하기 위해 내세운 정책이 식량 문제해결, 경공업문제해결, 에너지문제해결, 그리고 지식경제강국 건설을 위한 과학기술 중시이다. 북한에서는 1994년 제시한 3대 제일주의 과제가 여전히 제기되고 있는 셈이다. 관련 검색어 _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우리식 사회주의,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

183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사회주의의 완전승리와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위 한 기본과업으로, 사상 기술 문화의 3대혁명을 대중 속에서 강력하게 추진하 기 위해 제창된 대중동원운동이다. 또한 경제건설에 나서는 여러 어려움을 돌 파하기 위한 주민들의 노력경쟁운동이기도 하다. 하지만 3대혁명붉은기쟁취운 동의 궁극적 목표는 유일체계 확립을 위한 3대혁명 수 행과 북한 체제의 일상 적 규율 확립에 있었다. 배경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1975년 11월 19일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11차 전원회의에서 발기되었 다. 이 회의에서 김정일은 사상도 기술도 문화도 주체의 요구대로! 라는 구호를 제시하여 운동의 성격과 목표, 그리고 방향을 공식화하였다. 이후 같은 해 12월 1일 함남 단천군 검덕광산 등에서 궐 기집회가 이루어진 이후 전 지역으로 확산되었다.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발기한 김정일은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의 기본 과업을 실현하기 위 해서는 무엇보다 사상개조운동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를 주장하였다. 1974년에 공식적으로 선언된 온 사회의 주체사상화 는 당시 김정일에 의해 주체사상이 체계화되어 가고, 수령제 의 제도적 장치가 마련되어 가면서 가장 중심에 놓인 과제였다. 김정일은 대규모 공장과 기 업소를 대상으로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당조직이 직접 지도하게 하였으며, 주체 확립을 위한 사 상투쟁을 통해 김일성 노선에 대한 대중적 정당성을 부여하였다. 이를 통해 김정일은 김일성 노선의 전면화, 체계화, 일상화를 실현하고자 하였다. 성격 및 활동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발기 이후 주요 공업 및 농업 분야뿐만 아니라 교육, 과학, 문학, 예술, 보건 등 북한 사회경제의 모든 부문에서 대중적 혁신운동으로 확대 전개되었다. 여기에는 공장, 기업 소, 협동농장, 군부대, 의료부문, 과학, 교육, 체육, 문화예술단체, 인민반 등 북한의 거의 대다수 기관 들이 참가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이를 통제하는 당과 정권기관, 그리고 출판보도기관은 운동의 도입 에서 제외되었다. 북한은 3대혁명이 낡은 사회의 유물을 청산하고 새로운 것의 창조를 위해 창설된 것이라고 밝히 고 있으나,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이후에는 북한주민들을 경제건설에 총동원해 우리식 사회주의 정신으로 무장시킴으로써 체제를 유지 강화시켜 나가는데 더 큰 비중을 두게 되 었다. 1977년 9월에는 이 운동을 정착시키기 위해 붉은기 수여 판정위원회 를 설치했다. 그리고 3대혁 명 추진에 관한 일정한 결의 목표를 달성한 단위에 3대혁명붉은기 를 수여했다. 3대혁명붉은기 는 김 일성 생일(4.15)과 김정일 생일(2.16)이나 정권수립일(9.9), 당창건기념일(10.10) 등 특정 기념일에 여 러 해당 단위들에게 집중적으로 수여되었고, 기타 필요한 시기에 중앙인민위원회 정령 을 통해 수여

184 되기도 하였다. 북한은 3대혁명붉은기 를 받은 해당 기관 및 대상에 대해서는 국가적으로 특별한 예우조치를 취 한다. 붉은기를 수여받은 단위의 성원들을 3대혁명기수 로 호칭하여 3대혁명 명예휘장 을 달고 다니 도록 하고, 축하모임 경험토론회 등을 마련하며, 각급 행사 시에는 붉은기 수여단위를 앞자리에 서게 할 뿐 아니라 모범적인 3대혁명기수 를 주석단에 앉히고, 혁명전적지 답사와 평양 견학사업에서 우 선적으로 선정되는 것 등이 대표적인 예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1970~80년대 북한의 대중 동원의 기본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으며,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북한의 사회주의 총노선으로 등장하였다. 1996년까지 수여된 2중3대혁명붉은기와 3대혁명붉은기가 모두 16,000여 개로 추계되었으며, 1999년도에는 630 개, 2000년에는 600개가 수여되었다. 1996년까지 붉은기를 수여받은 기관의 인원은 516,000여 명에 이르는 것으로 추계되었다. 그리고 2006년 2월에는 전국적으로 3대혁명붉은기 22,061개, 2중3대혁명 붉은기 3,297개, 3중3대혁명붉은기 136개가 수여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붉은기쟁취운동의 상금은 노동자의 경우 기본생활비의 150%까지 수당의 형태로 지급되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평가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당중앙위원회의 직접적인 지도를 받는 당적 운동이자, 북한 노동자 및 농민들이 가진 사상의식의 변화를 우선적으로 요구하는 운동이다. 3대혁명소조운동이 주로 간부정 책의 일환이었다면,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은 전 인민이 참여하는 대중노력동원운동으로 전개되었 다고 볼 수 있다. 2012년 2월 21일에는 황해북도 연탄군 식료공장이 3대혁명붉은기와 표창을 받았으며, 모범적인 일꾼과 종업원들에게 훈장이 수여됐다고 보도되었다. 또한 사흘 뒤인 24일에는 황해북도 봉산군 봉 산국수집에 3대혁명붉은기가 수여되었다고 보도되었다. 최근 활발해지고 있는 이러한 포상 세례 는 김정일의 사망 이후 다시금 북한 지도부가 주민들로부터 충성과 결속을 끌어내고, 김정은에 대한 지 지를 높이려는 의도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3대혁명소조운동, 속도창조운동, 천리마운동

185 3대혁명소조운동 3대혁명은 사회주의 이후 공산주의를 완성할 때까지 노동계급이 수행해야 할 혁명의 과업으로서 사상 기술 문화혁명으로 나누어진다. 북한에서 3대혁명소 조운동 이란 기존의 혁명 추진 과정에서 문제가 되었던 옛 간부들의 기술실무 수준을 제고하고, 이들이 가지고 있는 기술신비주의를 타파하며, 현대적인 과 학기술로 무장하기 위하여 지식청년들을 광범위하게 생산현장으로 결합시킨 운동이다. 배경 3대혁명소조운동은 1973년 2월 1일 당중앙위원회 정치위원회에서 공식적으로 발기되었다. 북한 은 그 첫 단계로 1972년 9월 당조직들에서 선발된 당핵심들과 대학생들로 지도소조 를 조직하여 지 방의 경공업 공장들에 파견하였으며, 이후 이러한 작업을 점차 인민경제의 여러 부문에 파견하는 확 대조치를 취했다. 이는 당시 북한이 추진하였던 6개년 경제개발계획 의 실패를 극복하기 위하여 만들어진 것으로 과학자, 기술자, 청년, 지식인 등으로 구성된 수십 명 단위의 소조가 지방의 공장이나 협동농장 등 생산현장에 직접 파견되어 노동자 및 농민을 돕거나 지도하게 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3대혁명소조운 동을 통한 3대혁명 과제 실현을 주된 목적으로 하였으며, 당시 침체된 북한 사회 전반에 활력을 불어 넣고자 하였다. 성격 및 활동 3대혁명소조운동의 공식적인 발기 이후 북한은 3대혁명소조 구성원들의 범위를 지속적으로 확대 하여 당원, 국가경제기관 종사원, 근로단체 종사원 그리고 과학기술자, 청년인텔리 등까지 점차적으 로 포함시켰다. 초기에는 특정한 운동의 지도체계가 마련되지 못했으며, 주로 김일성의 교시와 공장, 기업소, 협 동농장 등에 대한 현지지도를 통하여 주로 이루어졌다. 그러나 김일성 김정일의 친위대, 근위대 의 역할을 부여받은 소조원들이 주도하는 직접적인 지도 방식은 기존의 각 지역에 존재하였던 당, 행정, 경제 분야의 간부들을 위축시키고 위계질서가 흔들리는 부작용을 가져왔다. 이후 1974년 2월, 북한의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운동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하 기 위하여 3대혁명소조를 당중앙위원회가 통일적으로 지도한다는 새로운 조치를 발표하였다. 또한 1975년 3월에는 중앙과 도, 시, 군에 있던 3대혁명소조 종합실을 당중앙위원회의 산하 기구인 3대혁 명소조 지휘부로 개편하는 조치를 취하였다. 3대혁명소조운동은 북한이 그동안 추진하였던 동원운동과 명백히 구별되는 구조적인 특징이 있 다. 그 중 대표적인 것이 지도방식이다. 이전의 지도방식은 사상검열이나 경제와 관련된 지도 중 한 쪽에 치우치는 경향을 보였으나, 3대혁명소조의 지도는 정치사상적 지도와 과학기술적인 실무적 지 도를 결합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둘째는 지도소조원의 파견 규모와 그 시기이다. 이전의 동원운

186 동들은 대부분은 짧은 기간에 소규모의 지도인원을 파견하여 그 지속성이 약했으나, 3대혁명소조운 동은 대규모의 인원이 장기간 머무르며 지도하도록 했다. 이러한 차이점은 3대혁명소조운동이 김일 성의 혁명적 군중노선에 기초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러한 3대혁명소조운동의 기능적인 특징은 크게 두 가지이다. 첫째는 그 목적을 보수주의, 경험 주의, 관료주의를 비롯한 낡은 사상 타파에 두고, 이를 통해 기존의 당 행정 관료들에 대한 정치사상 적 투쟁을 전개함으로써 김정일의 정치적 기반을 구축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둘째는 3대혁명소조의 당위성과 이론적 전개, 그리고 그 실제적 성과를 김정일의 지도력과 결부시킴으로써 김정일의 후계자 이미지를 구축하는데 활용되었다는 것이다. 평가 3대혁명소조운동은 정치사상적 지도를 통한 사상혁명 을 촉진하여 당조직의 역할과 행정기관인 정무원에 대한 당의 통제를 강화시키는데 기여하였다. 이러한 성과는 이후 북한의 유일지도체계 형 성의 사회정치적 토대가 되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3대혁명소조운동이 김정일의 후계체계의 확립에 활용되었다는 점이다. 1974년 2월 정치무대에 본격적으로 등장한 김정일은 3대혁명소조운동을 직접 지도하였으며, 김정일 의 지도 이후 당에 입당한 3대혁명소조원이 1만 1,600여 명에 달한다는 사실은 김정일 후계구축과 3대혁명소조운동이 매우 밀접한 연관을 가졌다는 것을 의미한다. 1990년대 중반 이후 중단되었던 북한의 3대혁명소조운동이 2011년에 재개된 것으로 나타났으며, 2013년 2월에는 3대혁명소조 전국회의를 30여 년 만에 개최하였다. 이는 김정은 체제의 공고화와 밀 접한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평가된다. 관련 검색어 _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187 3대 혁명역량 강화 북한은 남조선 혁명 을 완성하는 실천적 요소로서 이른바 3대 혁명역량, 즉 북 한 자체의 혁명기지역량, 남한혁명역량, 그리고 국제적 혁명지원역량의 강화를 내세우고 있다. 연원 3대 혁명역량 강화노선이 공식적으로 채택된 것은 1964년 2월 27일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였으나, 이보다 앞선 1954년 11월 3일 김일성이 3대 혁명역량 강화를 암시하는 발언을 처음으로 하였다. 한 방면으로는 남조선 인민들에게 꾸준히 우리 당의 영향을 주어 그들로 하여금 미제와 이승만 역도를 반대하여 궐기하도록 해야 하며, 다른 방면으로는 북반부 민주기지를 더욱 철옹성 같이 강화 해야 합니다. 여기에 더해 그는 북한이 세계평화옹호운동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 고 말하면서 그 이유를 국제적인 평화역량이 성장하고 평화운동이 강화되면 될수록 그것은 조국통일 사업에 더욱 유리할 것이기 때문 이라고 강조하였다. 1957년 8월 25일 김일성은 송도정치경제대학 졸업식 연설에서도 3대 혁명역량 강화에 대해 더욱 분명히 지적하였다. 첫째로 남반부에서 노동운동이 발전되고 앙양되어야 합니다. 둘째로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 이 더욱 성과적으로 진행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남조선 인민들의 투쟁을 고무할 것입니다. 셋째로 사회주의 진영 국가들에서 사회주의 건설이 더욱 승리적으로 진행되어 이 진영이 더욱 강대해지며 제국주의를 반대하는 세계인민들의 역량이 강화되어야 합니다. 이러한 조건들이 성숙되는 때에는 미 제가 남조선에서 손을 떼지 않을 수 없게 될 것입니다. 이러한 김일성의 연설은 3대 혁명역량을 강화해야 미국이 남한에서 철수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조성하여 통일을 이룰 수 있다는 북한의 전형적인 통일관을 보여준다. 주요 내용 및 경과 1964년 2월 27일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8차 전원회의에서에서 김일성은 3대 혁명역량을 첫째, 공화국 북반부에서 사회주의 건설을 잘하여 우리의 혁명기지를 정치 경제 군사적으로 더욱 강화하 는 것이며, 둘째 남조선 인민들을 정치적으로 각성시키고 튼튼히 묶어세움으로써 남조선의 혁명역량 을 강화하는 것이며, 셋째 조선인민과 국제혁명역량과의 단결을 강화하는 것 이라고 정의하고 조 국의 통일, 조선혁명의 전국적 승리는 3대 역량의 준비에 달려 있다. 고 강조하였다. 북한이 이처럼 3대 혁명역량 강화를 강조하게 된 것은 6 25 남침의 실패원인 중의 하나가 대내외 적 혁명역량 부족에 있었으며, 남한의 4 19 혁명 시 노동자, 농민의 참여가 적었고 그들을 지도할 독자적인 정당이 없었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3대 혁명역량 강화노선의 내용은 우선 대내적으로 민주혁명기지노선에 기초하여 남한 혁명을 수 행하기 위한 혁명기지로서의 북한의 능력과 역할을 제고시킨다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주체사상 체계에 의한 북한주민들의 정치사상적 무장 강화, 자립적 민족경제 건설을 통한 경제역량 강화, 혁명

188 의 승리를 보장하는 수단으로서의 군사역량 강화 등 세 가지 방도를 강조하고 있다. 특히 군사역량 강화를 위해서는 자위적 군사노선에 따라 전군의 간부화, 장비의 현대화, 전인민의 무장화, 전국의 요새화 등 4대 군사노선을 철저히 관철할 것을 규정하고 있다. 대남차원에서는 남한 내부의 모순을 최대한 첨예화시키고 지하당 조직의 확대, 다양한 형태의 통 일전선 형성 등으로 사회혼란을 유도하여 남한 내부에서 인민혁명이 일어날 수 있도록 유도해야 한 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이 같은 남한혁명역량 강화는 남한 민주주의 운동 적극지원, 남한주민의 정치사상적 각성, 혁명당과 혁명의 주력군 강화 및 통일전선 형성, 반혁명역량 약화 등으로 집약되고 있으며, 이는 남한 내 지하당 건설공작과 국가보안법 철폐를 주장하는 대남선동으로 나타나고 있다. 대외적으로는 혁명 차원에서 추진되는 한반도 공산화 통일을 용이하게 할 수 있는 국제적 여건을 조성하려는 목적으로 외교적 노력을 병행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소련을 비롯 한 동구 공산권의 몰락과 북한의 경제위기 심화, 남측의 민주화 진전 등으로 북한의 3대 혁명역량 강화전략은 기대할 수 없는 상황으로 변화되었다. 관련 검색어 _ 남조선 혁명, 민주기지론

189 생활총화 생활총화란 북한주민들이 당이나 근로단체와 같은 소속 조직을 매개체로 주, 월, 분기, 연별로 각 자의 업무와 공 사생활을 반성하고 상호 비판하는 모임을 말한다. 초창기 생활총화는 한 달에 한 번씩 개최하고, 엄격하게 참가를 강제하지 않는 느슨한 의례였다. 그러나 1967년 이후 북한은 유일사상체계의 확립과 국제사회의 데탕트 분위기 등에 맞서 내부단속을 강화하였으며, 이를 위해 당조직생활체계를 재정립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장 중요한 변화는 당생활 총화제도를 만든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김정일이 재정립한 새로운 당생활총화제도 는 초창기 생활총화에 비해 강도가 훨씬 강했다. 새로운 당생활총화제도에서 생활총화는 10명 내지 15명씩 묶어 당세포와 같은 기층조직처럼 치 밀하게 조직되었다. 북한 전체 주민이 빠짐없이 생활총화에 참가하게 된 것이다. 생활총화는 사소하 고 일상적인 의례이지만 북한주민의 일상을 철저하게 장악하고 통제할 수 있는 수단이 되었다 년 4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에서 조직생활총화에 적극 참가하는 것을 명시함으로써 이러 한 주민통제는 더욱 강화되었다. 소학교(우리의 초등학교) 2학년 이상의 북한주민이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생활총화에 무조건 참여해야 한다. 당원들은 소속 당세포, 비당원인 경우 청년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초급단체, 전 업주부는 민주여성동맹 초급단체, 직장인은 직업동맹 초급단체, 농민들은 농업근로자동맹 초급단체 등 각자 자신이 소속된 조직에서 생활총화를 한다. 대학생의 경우도 당원은 소속 당세포, 청년동맹원 은 소속 초급단체에서 생활총화를 한다. 청년동맹에 가입한 학생들은 학급별 동맹 초급단체에서, 소 년단 기간인 학생들은 분단(학급)별로 생활총화를 해야 한다. 해외 주재원이나 유학생들도 당생활총화에는 의무적으로 참가해야 한다. 각 대사관과 무역대표 부에는 임시 당세포나 동맹 초급단체 등이 조직돼 있어 해외에 나온 북한주민이라면 누구나 이 조직 에서 생활총화를 해야 한다. 생활총화는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통해 자신의 잘못을 비판하고 반성하는 방식으로 진행되며, 다른 사람의 잘못을 비판한다는 점에서 당조직이든 근로단체 소속이든 성격과 방식이 모두 같다. 당 생활총화는 세포비서가, 동맹생활총화는 동맹 초급단체위원장이 집행하며, 각 개인이 차례로 일어나 비판을 하는 형식으로 진행한다. 생활총화를 하는 요일은 조금씩 다른데, 사무원이나 학생들의 경우 매주 토요일에 40~50분정도 진행한다. 노동자, 농민 등 생산직 근로자들은 도별로 지정된 휴일 전날에 한다. 월 생활총화는 매달 마지막 생활총화 요일에 그 달에 나타난 결함을 종합적으로 분석 비판하는 방식이다. 분기 생활총화 는 주, 월 생활총화와 달리 기관 단위로 진행되며, 상급조직 간부의 참석하에 당총회, 동맹총회 형태 로 진행한다. 연간 생활총화는 12월 말에 하며 형식은 분기 생활총화와 같다. 김일성은 자아비판과 상호비판을 잘하는 것은 당성을 높이는 최고의 무기라며 비판사업을 강화 할 것을 역설해왔다. 김정일은 후계체제 구축이라는 맥락 속에서 비판을 정상화하는 생활총화를 제 도화시켰다. 이를 통해 생활총화는 주민들을 정치사상적으로 조직 속에 완전히 얽어매는 강력한 통 제기제로 기능했다고 볼 수 있다

190 현재 북한의 생활총화는 집단주의적 사회의 균열로 인해 과거에 비해 형식적으로 진행되고 그 진정성도 퇴색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북한주민들이 평생을 강제로 생활총화를 비롯한 조직생 활에 참석해야 한다는 점에서 북한 사회에서 생활총화가 갖는 의미는 여전히 유효하며, 전 주민을 통제하는 수단으로 그 역할을 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독보회, 인민반, 집단

191 서울 불바다 1993년 3월 12일, 북한이 영변의 미신고 시설에 대한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 요구에 불응하며 핵비확산조약(NPT)을 탈퇴하겠다고 선언함으로써 한반도에 1차 북핵 위기 국면이 조성되 었다. 이 와중에서도 남북 사이에서는 정상회담 및 남북 간 현안 협의를 위한 특사교환과 이를 위한 남북한 실무대표 접촉이 합의되었다. 1993년 10월 5일 시작된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접촉이 중간에 중단되기도 했지만 8차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마지막 접촉인 1994년 3월 19일의 8차 접촉에서 북한 측 대표가 회담 도중 이른바 서울 불바다 폭언을 하면서 북핵 위기는 크게 증폭되었다. 1994년 3월 19일 판문점에서 개최된 특사교환을 위한 실무대표 제8차 접촉에서 북측 수석대표 박영수는 여기서 서울이 그렇게 멀지 않다. 미국과 남조선이 압박을 계속하여 전쟁이 벌어지면 서 울은 불바다가 될 것 이라는 요지의 서울 불바다 폭언을 하고 회담장을 일방적으로 퇴장한 것이다. 서울 불바다 발언의 파장은 매우 컸다. 서울 불바다 발언이 방송을 통해 우리 국민에게 대대적 으로 보도되어 전쟁 위기 에 대한 공포감과 북한에 대한 적대감 내지 혐오감이 크게 증폭되었다. 서울 불바다 발언은 북한의 호전성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 계기가 되었다. 북한이 분단 이후 공 세적 대남 혁명전략을 전개해왔고 무력도발도 거리낌 없이 그 수단으로 삼아오기는 했지만, 대화의 자리에서 상대방을 앞에 두고 직접적으로 전쟁을 불사하겠다고 위협하는 언동을 함으로써 우리와 국제사회에 충격을 주었다. 더구나 당시는 북한이 유엔 회원국이 되었으며 남북기본합의서를 통해 체제존중과 무력불가침, 정전협정의 준수를 확약하고 민족의 화해를 도모해 나가기로 남북 간에 합의한 상황이었다. 북한이 서울 불바다 를 운위함으로써 유엔 헌장과 남북기본합의서의 이행 의지에 대한 신뢰는 기대할 수 없게 되었다. 관련 검색어 _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

192 서해갑문 서해갑문은 남포시와 황해남도 은율군 송관리 사이의 대동강 하구에 위치한 북한 최대의 갑문이 다. 본래 이름은 남포갑문이었으나, 완공직후인 1986년 9월부터 서해갑문으로 부른다. 대동강종합개발계획의 일환으로 1981년 5월 4일 착공하였으며 1986년 6월 24일 완공하였다. 영남 리와 은율군 피도 사이에 폭 14m, 길이 7km의 제방(흙제방 5.2km, 콘크리트제방 1.8km)을 축조하고, 피도와 송관리 간 약 800m에 3개의 갑문(5천 톤급, 2만 톤급, 5만 톤급)과 댐을 건설하는 등 총연장 8km의 방조제를 쌓았으며, 대형 선박의 통행이 가능하도록 90m 정도의 90 회전교량을 설치하였다. 또 제방과 갑문 위에 4차선 도로와 철도를 부설하였다. 미림갑문( 美 林 閘 門 ) 봉화갑문( 烽 火 閘 門 )과 함 께 북한의 3대 갑문의 하나로 알려져 있다. 갑문의 건설 목적은 27억 톤의 담수능력을 지닌 인공호를 조성하여 남포항의 접안능력을 2만 톤 에서 5만 톤 수준으로 향상시키는 것을 비롯해, 서해안에 새로 조성하는 총 30만 정보의 간석지 가운 데 평남 황남의 20만 정보에 농업용수 공급, 남포공업지구의 공업용수 확보, 수량조절로 대동강 하류 지역의 홍수방지, 내륙 수상운수 확충, 남포와 황남 간의 육로수송 단축, 남포 대동강 지역의 풍치 조성, 인공호수에서의 양식업 개발 등이다. 당초 3년 내 완공한다는 목표 아래 3개 사단 규모의 군병력 및 각지에서 동원된 청년돌격대와 장비를 투입했다. 그러나 공사규모가 방대하며 작업지역의 유속이 빠르고(초속 11m) 수심이 깊어(최 고 30m) 작업조건이 극히 나쁜데다, 북한의 토목공사 기술수준이 낮아 두 차례 완공시한을 연기 (1985년 4월 15일, 1985년 10월 10일)한 끝에 1986년 6월 24일 완공했다. 열악한 작업조건 속에서 정 해진 시일에 맞춰 무리하게 공사를 추진하면서 많은 인명 피해가 발생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갑문이 건설됨으로써 미림 봉화 성천 순천 갑문과 함께 남포 평양 순천 덕천의 주요 공업 광 업 농업 지역을 연결하는 운하망이 생겼으며, 남포는 이전보다 더 큰 비중을 지닌 국제항구로서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그러나 서해갑문의 건설비용으로 40억 달러 이상 소요되어 북한 경제에 큰 부담을 주었으며, 대동강 지역의 환경오염을 유발하기도 하였다. 관련 검색어 _ 청년돌격대, 청년영웅도로

193 선군경제건설 노선 선군시대 경제건설 노선이란 군사중시, 군사선행 원칙하에서 국방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키는 경제건설 노선이다. 소련, 중국 등 과거 사회주의 국가들은 자본주의 진영과의 체제경쟁에서 우위를 확보하기 위해 군수산업 육성과 사회주의 경제건설을 동시에 추진하는 경제정책을 시행하였다. 남한과 체제경쟁을 해야 했던 북한도 1960년대 중반 이러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건설 노선을 수용해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을 1966년 10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를 통해 공식적으로 채택하였고, 지금까지 북한의 기본정 책기조로 유지되고 있다. 김정일은 이 노선을 선군경제건설 노선 이라는 이름으로 변형하여 군사선행의 원칙을 명확히 하 였다. 이에 따라 김정일 시대 이후 북한의 경제정책은 군수공업의 활성화와 발전 문제를 우위에 놓 고, 중공업과 경공업, 농업 등의 정상화와 활성화 문제를 배치하는 정책을 시행해 왔다. 1990년대 경 제위기 속에서 체제유지의 마지막 보루로 삼는 군수산업 및 군경제에도 위기가 초래하자 축소된 국 가 재원을 국방공업에 우선적으로 배분하고자 하는 의도로 추진되었다. 북한이 1960년대 중반부터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을 추진하면서 북한 경제에 많은 문제점이 발생하 였다. 첫째, 북한의 산업을 군산복합형 으로 정착시켰다. 중화학공업이 기계 화학공업을 중심으로 군 수산업에 계열화됨으로써 군수산업과 민수산업 간의 구별을 어렵게 만들었다. 둘째, 군수산업으로 투자재원이 집중되어 민수산업의 성장이 제약되고 소비생활 부문의 발전이 저해되어 오늘날까지 민 생경제 부문이 빈곤의 늪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요인이 되고 있다. 셋째, 군수산업이 단순히 국방경 제로만 한정되지 않고 점차 민수산업의 일부도 전용하고 경제적 잉여를 얻기 위한 독자적 경제 공간 의 성격으로도 발전하면서 북한 경제 내에서 군경제라는 특권경제 부분이 차치하는 영역을 확대시켜 나갔다. 북한은 체제유지를 위해 장거리 미사일, 핵무기 개발과 같은 국방공업의 발전을 최우선의 목표로 삼아왔으며, 경제난으로 전반적 국가 재원이 축소되었음에도 국방공업에 최우선적 자원배분의 명분 과 논리를 내세워 선군경제건설 노선을 채택하였다. 그 결과 북한 경제는 민생 부문이 높은 물가와 부족한 상품, 계층별 소득격차 확대, 지역 간 생활조건의 차이 등 여전히 어려운 경제 상황임에도 불구하고, 국방공업은 북한이 핵능력 강화를 지속해 나갈 수 있을 정도로 활성화되어있는 이원적 구 조로 되어 있다. 선군경제건설 노선에서는 군수공업에 대한 우선적 자원배분을 민생경제의 위기상황 에서도 언제나 기본으로 삼고 있기 때문에 북한 경제의 왜곡과 불균형은 더욱 심화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군사 경제 병진 노선, 선군정치

194 선군정치 선군정치는 김정일 정권의 출범을 계기로 등장한 김정일의 정치방식이다. 선군정치는 군사력 강화를 최우선 목표로 하고,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모든 부문에서 군이 중심이 되는 정치방식이다. 배경 북한에서 선군정치가 등장한 것은 김일성 사망 이후 지속된 경제난과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 로 초래된 외교적 고립 등 대내외적으로 처한 어려운 상황에서 비롯되었다. 선군정치는 군이 가진 자원과 역량을 활용하여 경제를 회복하고, 약화된 당의 사회통제 기능을 군 조직을 통해 보완하여 김정일 체제의 안정을 도모하기 위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즉 북한이 군대를 전면에 내세워 정권과 체제유지는 물론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의 주력군으로 활용하기 위해 선군정치를 강조하기 시작하였 다고 볼 수 있다. 한편 북한은 그동안 자위적 군사력을 강화하여 왔고, 오랜 기간 축적된 거대한 군조 직의 존재는 선군정치를 뒷받침하였다. 경과 및 주요 내용 선군정치라는 용어는 1997년 12월에 처음으로 등장하였다. 북한은 선군정치가 김정일이 1995년 1월 1일 다박솔 초소 를 방문한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선군정치의 개시와 더불어 군은 북한 사회에서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1998년 신년공동사설에서는 사회가 군을 따라 배울 것을 독려하였고, 군민일치 모범군 쟁취운동 등을 통해 군과 사회의 일체화를 꾀하였다. 2002년부터 는 군민일치 관병일치 군정배합의 실현을 강조하였고, 2004년에는 선군사상 일색화 를 주창하며 혁 명의 수뇌부 결사옹위정신을 사회 전체에 확산시키고자 하였다. 또한 국방위원회의 위상 강화, 군인 사의 주석단 서열 상승, 사회통제기구의 인민무력부 편입, 김정일의 군부대 현지지도 등을 통해 군의 위상을 강화하였다. 2009년 4월 개정된 북한 헌법에서는 선군사상이 핵심적 이념으로 채택되었다. 개정헌법에서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주권은 노동자, 농민, 군인, 근로인테리를 비롯한 근로 인민에게 있다. 라는 조항에서 이전 헌법에 없던 군인 을 추가하였다. 또한 선군혁명역량, 선군혁명 노선, 혁명적 영군체계 등의 단어를 포함함으로써 노골적으로 선군사상을 부각시켰다. 북한은 선군정치를 군사선행의 원칙에서 국정을 운영해 나가며 인민군대를 혁명의 주력군으로 하여 사회주의 혁명과 건설을 이끌어나가는 정치라고 주장한다. 선군정치에서 군은 단순히 전쟁과 방위를 위한 수단으로서만이 아니라 혁명과 건설을 함께 수행해나가는 역할을 담당한다. 전기, 식량, 석탄, 금속, 철도운수를 비롯하여 사회주의 건설의 주공전선에 인민군대를 내세워 경제회생의 돌파 구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과거 북한은 경제난, 에너지난으로 경제전반에 걸쳐 크나큰 위기가 닥쳤을 때 군대가 그러한 정체된 부분을 해결함으로써 경제의 전 분야에서 정상적인 회복의 길을 열어 놓았 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에서는 이 같은 선군정치를 군대는 곧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 으로 확대 해석하고 있다. 또한 김정일을 국방위원장에 추대한 것도 군 중시정책을 실시하여 불멸의 업적을 쌓아올린 장군님에 대

195 한 전체 인민들의 절대적인 신뢰의 표시였다. 고 강조하였다. 이렇듯 북한은 선군정치가 김정일 특유 의 영도방식이라면서 조성된 난국을 성과적으로 타개하고 사회주의 위업을 끊임없는 앙양에로 이 끌어 나가는데서 결정적 역할을 하는 것은 바로 영도자의 정치방식 이자, 혁명무력을 혁명의 기둥 으로 키우고, 그 역할을 최대한으로 높여 전반적인 사회주의 위업을 줄기차게 이끌어 나가는 군중시 의 영도 라고 주장한다. 또한 북한은 미 일 양국의 대북 관계개선 움직임에 대해서도 북한의 선군정 치에 의한 자주외교의 결실로 평가하면서 앞으로도 확고부동하게 선군정치에 의한 자주적인 대외정 책을 실시하며 자주권을 당당히 행사해 나갈 것이라고 강조한다. 평가 선군정치는 북한의 대내외적 위기를 극복하고 체제유지를 위해 제기된 김정일의 통치방식이었다. 그러나 선군정치는 부족한 자원을 국방을 중심으로 한 특권적 부문에 집중시킴으로써 자원 배분을 왜곡하였고, 이로 인해 경제가 피폐해지고 주민생활이 궁핍해졌다. 북한은 경제난과 안보위협이라는 이중과제가 해결되어 체제 안정화가 이루어지지 않는다면 선군정치를 포기하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김정은 역시 김정일의 유훈을 계승하는 차원에서 선군정치를 고수하고 있지만, 최근에는 인민을 위 한 군대 를 부쩍 강조하고 있다. 이는 선군을 표방하면서도 민심을 다독여 권력을 공고히 다지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군민일치운동, 다박솔 초소, 선군경제건설 노선

196 선군혁명문학예술 선군혁명문학예술은 북한이 선군시대를 맞이하여 주체사실주의 문학이 새로운 단계에 올라섰다고 주장하는 문학이다. 주체사실주의 문학이 집단의 생명을 귀중하게 여기는 집단주의적 생명관을 내세우는데 비해, 선군혁명문학은 사회정치적 생명체에 자기 운명을 맡기고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살며 싸우는 인간들을 가장 아름답게 형상한다는 것이다. 배경 북한은 1990년대 대규모 아사자가 발생한 고난의 행군 으로 인한 사회적 혼란을 막고 체제유지를 위해 군을 앞세웠다. 그 과정에서 선군정치와 선군시대라는 시대적 상황에 맞추어, 선군혁명의 정당 성을 확산시키는 차원에서 문예 분야에도 선군혁명이라는 이름을 붙인 것이다. 김정일의 통치방식인 선군혁명노선, 선군영도, 선군정치 등이 1998년 10월 공식화하면서 2000년 말에는 선군혁명문학 이란 개념이 생겨났다. <조선문학> 2001년 1월호는 선군혁명문학을 김정일의 사상과 이념, 영도업 적을 반영한 독창적인 문학이라고 주장했다. 북한의 <천리마>라는 잡지는 1994년 7월 김일성 사후, 북한 문단에서 2000년 하반기에 이르는 시기까지 약 1만 5천여 편의 작품이 창작됐다며 이 작품들을 선군혁명문학이라고 지칭하였다. 선군혁명문학이 오늘날에는 선군혁명미술, 선군혁명음악, 선군영화 등 다른 장르로 빠르게 확 산되면서 선군문학예술론으로 체계화되었다. 주요 내용 선군혁명문학예술은 문자 그대로 김정일의 선군영도업적, 선군정치, 선군제일주의 등 선군을 문 학예술작품 전반에 반영한 것으로 여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지도자의 선군영도를 담는 것이다. <조선문학> 2003년 1월호 머리글은 선군혁명문학 창작에서 가장 집중해야 할 주제를 어버이 수 령님과 경애하는 장군님의 형상을 더욱 완벽하게 최상의 높이에서 창조하는 것 으로 규정하면서, 형 상을 집중해야 할 미학적 문제는 혁명적 군인정신을 체현한 새로운 성격을 창조하는 것 이라고 강 조하였다. 선군혁명문학예술은 총대철학 과 미학사상을 유기적으로 결합시킨 독특한 선군정치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여기서 총대철학이란 군대가 곧 당이고 국가이며 인민이라는 독특한 철학으로, 모든 것 은 총대에서 비롯된다는 내용이 미학사상으로까지 끌어올려지는 것이 특징이다. 그리고 선군혁명문 학예술은 인민군대의 혁명적 문학예술을 본보기로 하고 있다. 선군혁명문학예술의 중요한 주제의식 중 하나는 혁명적 군인정신 이다. 그 내용은 수령결사옹위 정신, 결사관철정신, 영웅적 희생정신 등 수령에 대한 충실성에 기반을 두고 있으며, 구체적인 표현은 총폭탄정신, 자 폭정신, 육탄정신 등으로 드러난다고 한다. 따라서 창작의 주체가 군인이 되기도 한다. 대표작으로는 서사시 <영원한 우리 수령 김일성 동지>, <평양시간은 영원하리라>, <철령>, 가요 <수령님은 영원히 우리와 함께 게시네>, <높이 들자 붉은

197 기>, 소설 <영생>, <붉은 산줄기>, <역사의 대하>, <평양의 봉화> 등이 있다. 평가 선군혁명문학예술의 등장은 김정일 정권이 1990년대 중후반에 나타난 체제붕괴 위기의 극복을 반영하는 문화적 슬로건이며 수령형상문학의 현재적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당시의 심각한 경제난 이 사회 전반에 불안과 위기를 불러오자 김정일은 군을 내세워 이를 통제하고 극복했으며 결국 군 제일주의, 선군정치가 북한체제를 지탱하고 전 사회를 지배하게 됐다. 이에 따라 주민 세뇌교육에서 가장 효과가 높은 문예 부문에서 선군을 주제로 한 다양한 작품을 무차별적으로 내놓음으로써 선군 혁명문학예술은 전 주민에 대한 사상교육과 선전선동의 수단으로 역할을 한 셈이다. 김정일 정권이 등장하면서 선군정치에 맞춘 통치 도구화를 위해 등장한 문예이론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선군정치, 수령형상문학, 주체문예이론

198 선전선동부 북한은 이른바 당-국가체제로 통치되고 있으며, 노동당의 영도적 역할이 체제의 조타수가 되고 있다. 노동당의 영도적 역할은 당생활 지도와 당정책 지도로 구분되고, 이 중 당생활 지도는 다시 조직생활 지도와 사상생활 지도로 세분된다. 여기서 전자는 당 조직지도부가, 후자는 당 선전선동부 가 담당하도록 되어 있다. 이렇듯 노동당의 조직지도부와 선전선동부는 북한체제를 이끌어가는 수레 의 두 바퀴처럼 양대 핵심부서라 할 수 있다. 더구나 김정일이 1964년 대학을 졸업하고 당조직 생활을 시작한 부서가 조직사업과 선전선동 담 당부서였다는 점은 이를 잘 말해 주고 있다. 김정일은 1974년 8월 전국당조직일꾼강습회 에서 당사업 의 개선 강화를 역설하면서 조직지도부가 당생활을 장악하고 나타나는 결함과 원인을 과학적으로 분석 판단하면, 이에 기초하여 선전선동부가 결함을 고치는데 맞는 사상교양을 하여야 한다고 지적 하였다고 한다. 이처럼 선전선동부는 김정일 체제하에서 당 조직지도부와 밀접한 연관을 맺으면서 그 기능과 역 할이 크게 증대되었다. 특히 김정일은 선전선동부 과장, 부부장, 부장을 거쳐 선전 담당비서를 역임 하면서 주민교양과 선전선동을 직접 이끌어 후계자로서의 정당성과 업적을 과시했다. 김정일은 선전 선동부를 통해 문학예술작품 창작지도 등 다양한 방법을 동원하여 당원들과 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양 과 우상화 선전, 당정책의 침투와 경제선동, 각종 정치행사를 주관하였다. 이와 같이 선전선동부는 김정일의 직할부서로서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정에서 정치경력을 쌓는 요람이었다는 점에서 김정일의 측근인사들이 자연스럽게 이 부서에서 많이 배출되기도 하였다. 선전 선동부에서 근무했던 대표적인 인사로는 김국태, 김기남, 김충일, 리명제, 리성복, 최익규 등을 들 수 있다. 이중 김기남은 김일성-김정일-김정은 3대에 걸쳐 체제의 통치이데올로기와 체제선전의 방향 을 제시하는 이론가 역할을 해온 인물이다. 또 하나 특이한 점은 선전선동부 간부들 중 리명제, 리성 복, 김충일 등 3명은 김정일 서기실에도 근무하게 되었는데, 이는 그만큼 선전선동부가 김정일의 신 임을 받는 측근집단임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수 있다. 선전선동부는 공식적인 임무로서 선전활동사업 총괄 지도, 사상교육 및 출판물 통제, 국내 외 출판물 검열 등의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이러한 임무에 따라 당 및 중앙기관에 대한 지도업무를 비롯하여 교양, 영화, 예술, 신문, 출판, 사적 등의 분야를 통제하고 있다. 이에 따라 내각의 문화성과 출판지도국은 물론 조선중앙방송위원회, 조선중앙통신사, 노동신문, 조선노동당출판사, 민주조선, 공 업출판사 등 주요 언론사 및 출판사, 조선예술영화촬영소, 조선기록영화촬영소, 만수대창작사 등 주 요 문학예술기관단체도 전부 선전선동부 직속이다. 각 도 시 군 당에도 선전부가 있어 중앙당 선전선 동부의 지휘를 받아 지역 주민에 대한 체제선전과 사상교육을 담당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조직지도부

199 소년단 소년단은 1946년 6월 6일 북조선민주청년동맹(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산하에 조직된 소년 단체이다. 북한의 길거리에서 흰색 상의에 붉은색 머플러를 목에 두른 어린 학생들이 줄지어 걸어가 는 모습을 본 적이 있을 것이다. 또 이런 복장을 한 소년 소녀들이 학생 공연이나 행사장에서 한 팔을 머리위로 지켜들고 맹세문을 합창으로 낭독하는 장면도 보았을 것이다. 이들이 바로 소년단 학생들 이다. 북한은 해방 직후부터 문맹퇴치운동의 일환으로 각급 학교를 신설하면서 인민학교(현 소학교)를 세우고 교내에 소년단 조직을 만들었다. 이러한 교육제도로 말미암아 북한주민들은 소학교 2년부터 소년단에 의무적으로 가입해 어린 시절부터 조직생활을 하게 된다. 소년단은 만 7세부터 13세에 해 당되는 소년 소녀들로 이루어지고, 현재 단원 수는 300여만 명으로 추산된다. 소년단 입단식은 김일 성 김정일 생일, 소년단 창립 기념일 등에 행해진다. 소년단의 기본 임무는 주체의 혁명위업, 사회주의 공산주의 위업을 떠메고 나갈 주체형의 공산 주의 혁명가, 지덕체를 갖춘 공산주의 건설의 역군으로 키우는 것 이다. 구호는 공산주의 건설의 후비대가 되기 위하여 항상 준비하자 이며, 활동목표는 정리사업, 학습회의, 행사동원 등을 통한 공산주의사상 주입, 학생규율 상태 및 집단행동 통제, 학생들의 공산주의적 도덕 윤리관 확립, 경제현장에 동원된 학생들에 대한 감독 통제, 학생들의 개인 생활 지도 등에 중점을 두고 있다. 북한은 2012년 6월 6일 소년단 창립 66주년을 맞아 김정은이 직접 참석하는 등 대대적인 전국연 합행사를 열었다. 전국 각지에서 소년단 모범단원들 2만여 명을 참석시킨 가운데 김정은이 축하연설 까지 한 바 있어, 후계세대들에 대한 배려와 관심을 의도적으로 나타낸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북한 에서 소년단 행사에 최고지도층이 참석한 것은 1994년 6월 평양에서 열린 소년단 제5차 대회 이후 처음이다. 당시 김일성은 사망 한 달 전 이 대회에 참석해 소년단 대표들과 기념사진을 찍은 바 있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200 소조활동 소조( 小 組 )활동이란 특정 과목을 중심으로 방과 후에 교원의 지도를 받으며 예 복습이나 실험실 습, 연습 등을 하는 일종의 동아리 성격의 활동을 말한다. 소조의 종류로는 수학, 물리, 화학, 외국어 등 주요 학과목 소조와 각종 예체능 소조 등이 있으며, 매일 방과 후 2~3시간 정도 한다. 북한에는 개인이 운영하는 사설 학원이 없다. 학생들은 학교 수업 이 끝난 뒤 소조 라는 일종의 동아리 활동을 통해 예능이나 체육 등을 배우는 것이다. 소학교는 예 체능 중심으로 소조가 운영되며, 중학교는 예 체능 소조 이외에도 문학 수학 물리 등 주요 과목별 소조가 운영되고 있다. 또 소조는 학생들만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각 기업소나 공장 등 모든 직장에도 조직돼 있다. 소조활동은 기타 하모니카 손풍금 피리 등의 악기를 다루는 것에서부터, 탁구 농구 등 각종 운동 과 미술 컴퓨터 교육 및 외국어 학습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특히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소조활동은 음악이다. 이것은 북한이 학교에서 예술소조활동을 대대적으로 벌여, 학생들이 한 가지 이상의 악기 를 다룰 수 있도록 지도하고 있기 때문이다. 우수한 실력과 재능을 갖춘 학생으로 선발되면 수업을 마친 후에 학생 과외 교육기관으로 따로 가서 교육을 받는다. 선발된 우수학생들이 따로 모여서 교육을 받는 대표적인 기관으로는 평양에 있 는 평양학생소년궁전, 만경대학생소년궁전, 2.16학생소년궁전 등이 있다. 북한의 소조활동은 학생들의 지식과 소양을 쌓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집단생활을 통해 사회주의 경험을 체험하게 하고, 방과 후나 방학 중 소조활동으로 학생들을 조직화하여 단체에서의 이탈 및 개인 활동을 막는 통제수단으로 활용하기도 한다. 또한 1인 1기 라 하여 각종 악기 배우기를 권장하여 연중 열리는 정치 모임이나 건설 현장 등에서 벌어지는 각종 선전 선동 활동에 이용하려는 목적도 있다. 관련 검색어 _ 만경대학생소년궁전

201 속도전 북한의 속도전이란 모든 사업을 전격적으로 밀고 나가 최단기간 내에 양적으로 나 질적으로 최상의 성과를 이룩해 나가는 사업방식이다. 속도전은 전격전, 섬 멸전을 기본원칙과 방법으로 삼고 있는 기본적인 전투형식으로 사상혁명, 기술 혁명, 조직지도사업의 세 가지 조건을 필요로 한다. 이 가운데 기본은 사상혁명 이다. 즉 속도전은 사상사업을 앞세워 모든 역량을 총동원하며 사업을 최대한 으로 빨리, 그 질을 가장 높게 보장하는 전투적 사업방식이다. 배경 북한의 속도전은 기술, 노동력, 자본, 설비, 노동의욕의 부족을 근로자들의 혁명적 열의를 최대한 동원하여 극복하기 위한 것으로 그 시초는 천리마 운동시기로 거슬러 올라간다. 북한은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천리마를탄 기세로 달리자 는 구호를 제시하고 빠른 속도와 높은 질을 담보하는 천리마운동을 발기하였다. 이때 제기된 천리마속도 에 이어 1950년대 말부터 각 부분에서 평양속도, 비날론속도, 강선속도 를 강조해왔다. 원래 00속도 라는 명명은 어느 한 생산부문에 집중하여 높은 효율의 생산결과 나왔을 때 이를 모범으로 삼아 전파시키고 본받도록 하는 형태이다. 속도전이 모범사례를 넘어 새롭게 정의되고 전 사회의 작동원리로 확장되기 시작한 것은 1974년 당중앙위원회 제5기 제8차 전원회의를 통해서이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10대 전망목표를 제시하며 사회주의 건설의 모든 전선에 서 속도전을 힘 있게 벌일 것을 요구하였다. 이후 속도전은 어느 한 분야만이 아니라 북한 전 사회의 모든 사업에서 전격적으로 밀고 나가는 사회주의 건설의 방식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요 내용 북한이속도전을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기본전투형식으로 명명했지만 늘 동일한 비중으로 강조하 지는 않는다. 북한은 인민경제계획을 수행함에 있어 속도와 균형 의 관계를 중시한다. 일반적으로 인민경제계획 기간에는 목표완수를 위해 속도를 강조하지만, 인민경제계획 이후 완충기 시기에는 균 형을 강조한다. 따라서 속도전은 일정한 기간에 주기적으로 반복되어 나타난다. 북한에서 속도전이 구체적 형태로 제시된 것은 70일 전투 이다. 당시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10대 전망목표를 제시하고 전 사회적으로 속도전을 천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하지 못하자, 1974년 10월 하순부터 12월 말까지 인민경제 모든 부문에서 70일 전투를 실시하였다. 후계자 김정일에 의해 추진된 70일 전투는 근로자들에게 당과 수령에 대한 충실성 교양 등 사상전을 기본으 로 하여 전국 2천여 개의 단위에 1만 1천여 명의 간부를 파견하였고, 12개의 중앙예술단과 48개의 지방예술단으로 구성된 경제선동대를 통해 현지공연을 하는 등 경제사업의 높은 성과를 촉진하였다. 이 밖에도 1970년대 이후 김정일이 발기하거나 김정일과 관련 있는 것으로 주장되는 속도전식 사업방식은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을 포함하여 수없이 많다. 제2차 7개년 계획(1978~1984년)이 시작 되던 해인 1978년에는 그 해의 목표를 앞당겨 달성하자며 100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1988년 2월에는 제13회 세계청년학생축전의 주요시설공사의 기한 내 완공을 위해 200일 전투가 전개되었고, 첫 번째

202 200일 전투가 끝난 직후 1988년 9월에는 제2차 200일 전투를 전개하기로 하여 1989년 4월까지 속도 전을 연장하였다. 2000년대 이후에도 김정일은 2009년에 강성대국 건설을 위한 돌파구 마련과 체제 단속 및 내부결속 강화를 목적으로 150일 전투를 전개하였다. 속도전식 사업의 주요 사례 실시년월 속도전식 사업의 명칭 일 전투 일 전투 제1차 200일 전투 제2차 200일 전투 일 전투 평가 북한에서 속도전은 경제건설의 기본방식이지만 항상 정치사업과 연계되어 전개되었다. 특히 김 정일에 의한 70일 전투는 이의 성공적 수행으로 김정일의 지도영역이 기존의 문화예술 분야에서 경 제 분야로까지 확산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속도전 방식의 경제적 효과는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사상전에 기초한 속도전 방식은 북한 경제의 불균형을 심화시키고 동원경제의 성격을 강화하 면서 내포적 발전의 필수요인인 창의력에 바탕을 둔 기술혁신을 어렵게 만들기 때문이다. 특히 속도 전은 계획의 양적 달성만을 강조하는 경향을 보이게 되어 제품의 질 하락, 낭비와 비효율의 악순환으 로 이어지게 된다. 관련 검색어 _ 속도창조운동, 천리마운동

203 속도창조운동 속도전 의 개념은 대중운동 의 운영 방침을 규정하는 기본원칙이다. 김정일이 70일 전투 과 정에서 발기한 속도전은 1980년대에 80년대 속도창조운동 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리고 1990년대에는 제3차 7개년 계획과 함께 90년대 속도창 조운동 으로 이어진다. 즉 속도창조운동이란 북한 특유의 속도전 방식이 1980 년대, 1990년대에 구현된 대중운동을 의미한다. 80년대 속도창조운동 1982년 7월 6~7일 직업동맹 제6기 제3차 회의에서 김정일이 제시한 운동으로 7월 9일 김책제철소 노동자들의 집회를 시발로 북한 전역으로 확산된 노력동원운동이다. 1978년부터 실시된 제2차 7개년 계획을 기한 내 완수하고 제6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10대 전망목 표를 달성하는 한편, 1982년 김일성의 70회 생일과 때를 맞춰 주체사상탑, 개선문, 김일성경기장, 인 민대학습당, 평양산원, 창광원, 빙상관 등의 축조물과 창광거리를 완성하였다. 1950년대의 천리마운동과 1970년대의 속도전을 계승한 80년대 속도창조운동을 일컬어 노동신문 은 천리마 대고조시기의 기세를 계속 견지하면서 거기에 속도전의 기세를 더 가하는 위력한 속도 라면서, 80년대 속도를 창조하기 위한 근본적인 3가지 요구로서 1 당 정책에 대한 절대성 무조건성 정신, 2 자력갱생의 혁명정신, 3 치밀하고 책임적인 조직 정치사업 등을 제시했다. 90년대 속도창조운동 80년대 속도창조운동을 1990년대까지 연장한 것으로 1990년 1월 김일성의 신년사를 통해 제시됐 다. 이것이 1993년 5월 우리식 사회주의 총진군 속도창조운동 으로 구체화되었다. 1993년 5월 11일 전승(휴전협정체결) 40주년 기념에 즈음해 당중앙위원회 명의로 발표된 구호에 서 우리식 사회주의 총진군 운동 이 제시되었다. 이 운동은 북한이 제국주의의 반북 반사회주의 공 세에 맞서 사회주의 체제를 고수하고 나아가 사회주의를 건설하기 위한 투쟁을 대중운동으로 벌여 나갈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운동은 내용면에서 체제고수를 위한 주민 사상무장 강화 및 사회주의 건설을 위한 주민 노동력 제고 등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 특히 이 운동은 노동력 제고를 위해 속도 전 방식의 우리식 사회주의 총진군 속도창조운동 을 병행하였다. 평가 속도창조운동은 북한의 정치적 필요에 의해 주민들을 건축물 축조에 이용하고 체제를 결속하기 위한 노력동원운동이다. 80년대 속도창조운동이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과 사회주의 건축물 축성을 위 해 속도를 강조했던 운동이라면, 90년대 속도창조운동은 사회주의 체제고수와 사상무장, 그리고 3차 7개년 계획시기 기본건설을 위한 속도전 운동이다

204 관련 검색어 _ 속도전, 천리마운동

205 수령결사옹위정신 수령결사옹위정신은 북한에서 최고지도자(김일성, 김정일, 김정은)에 대한 충성과 자신에게 주어 진 과업을 지도자인 수령의 지시로 여겨, 이를 목숨으로 관철할 것을 요구하는 정치선동구호이다. 1992년판 <조선말대사전>에 따르면, 수령결사옹위정신은 수령의 신변을 결사호위하고 수령의 권위를 결사옹호하는 정신이며, 수령의 업적을 결사고수하고 수령의 사상과 노선, 정책을 결사관철하는 정신 이고, 항일혁명투쟁시기에 창조되어 북한 혁명의 전 과정에 구현되어온 인민의 전통적인 혁명정신이며 혁명위업의 승리를 이룩하기 위한 가장 숭고한 혁명정신 으로 정의하고 있다. 그러나 1996년 수령결사옹위정신은 김정일에 의해 혁명적 군인정신으로 재규정되어 위기극복을 위한 구호가 되었다. 1996년 9월 군인들이 안변청년발전소의 공사를 완공하였을 때, 김정일은 군인건 설자들의 위훈을 높이 평가하면서 이를 혁명적 군인정신 으로 명명하고 그 정신을 전당, 전국, 전민이 따라 배우도록 하였다. 이후 북한은 수령결사옹위정신을 선군( 先 軍 )시대의 실천적 구호로 부각시키면서, 전체 북한주민 의 사색과 실천의 출발점이자 행동의 구호이고 김정일에 대한 절대적 숭배심에 근본바탕을 둔 일심 단결의 정신이라고 강조했다. 북한은 수령을 결사옹위하는 것이 혁명 승리의 근본 담보이며 공산주의 혁명가의 첫째가는 임무 라고 주장하고 있다. 혁명의 최고 뇌수이고 심장인 수령에 의해 혁명이 개척되고 승리적으로 전진하 기 때문이라는 것이 북한 주체철학의 기본이기 때문이다. 수령결사옹위정신은 우선 수령에 대한 절 대적인 숭배심에 기초한 가장 고결한 충효정신으로서 최고의 애국도 수령결사옹위에 있고 최대의 충성도 수령을 위하여 한 목숨 바치는데 있다는 철학에 근거한다. 따라서 수령의 명령이나 지시를 관철하기 위해서는 어떤 난관도 극복해야 하며 혁명의 길에 나선 사람은 그 순간부터 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수령의 전우이자 전사이며 수호자가 돼야 한다고 강조하고 있다. 이와 같이 수령결사옹위정신은 1990년대 중반 이후 고난의 행군시기와 김정일 정권의 공식 출범 (1998년)에 맞추어 북한주민에게 김정일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는 선전구호로 활용되었다. 2000년 대 들어와서도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 등으로 국제사회의 제재가 강화되자 북한은 주민들의 배고픔을 외부세력의 잘못으로 규정하면서 이 시기를 헤쳐나기 위한 유일한 방법은 김정일을 목숨으로 옹호하 는 수령결사옹위정신이라고 거듭 강조하였다. 최근 수령결사옹위정신은 김정은 옹위정신 으로 수정 강화되고 있다. 북한은 선전매체들을 통해 김정은 결사옹위 구호를 더욱 확산시키고 있으며, 문학 예술 분야에서도 수령결사옹위정신이 담긴 작품을 다수 만들어 김정은 체제에 대한 충성심을 강요하고 내부결속을 다지는데 사용되고 있다. 이 와 같이 수령결사옹위정신은 북한의 세습을 정당화하는 구호이며 독재국가적인 면을 대표하는 구호 인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수령론,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

206 수령론 수령론은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하는 것을 목표로 전개된 이론이다. 이 러한 정치논리 속에서 북한은 곧 수령의 체제가 되었고, 김일성과 북한체제가 등식이 되는 체제가 되었다. 이후 김일성-김정일 권력승계를 정당화하는 논리 로 변화하였다. 배경 북한은 수령을 인민대중의 자주적인 요구와 이해관계를 하나로 통일시키고 인민대중의 창조적 활동을 통일적으로 지휘하는 중심이며 전당과 전체 인민의 끝없는 존경과 흠모를 받고 있는 가장 위대한 영도자 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수령을 사전적 의미를 넘어 통치이념으로 기능하는 개념으로 승화시켰다. 이는 처음에는 김일성을 우상화하여 유일무이한 수령의 존재로 치켜세우기 위한 의도였다. 하지만 이후에는 사회 적 주체인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수령의 올바른 영도를 받아야 하며 수령에 대한 충실성이 주체 확립에서 핵이 된다. 는 혁명적 수령관으로 그 용어 및 내용이 변화를 겪게 되었다. 주요 내용 김일성을 수령으로 부르는 것이 일반화되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후반부터였다. 이때는 북한 내 부의 권력투쟁이 일단락되고 김일성 지배체제가 공고화되던 시점이었다. 1969년 4월 전국 사회과학 자 토론회에서는 수령을 당과 정권기관, 근로단체들을 유일적으로 지도하는 최고 뇌수 로 정의하였 다. 1974년에는 김정일이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의 10대 원칙 을 발표하면서 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 성심을 강조하였다. 김일성 유일지배를 정당화시킨 수령론은 1980년대 혁명적 수령관으로 발전하게 된다. 이는 김정일에 의해 사회정치적 생명체론이 새롭게 제기되면서, 이에 기초하여 기존의 수령론 을 넘어 혁명적 수령관을 재정립했기 때문이다. 수령론의 주창 및 변화는 북한의 정치적 변화와 밀접한 연관을 지닌다. 김일성이 북한에서 권력 을 장악한 이래 계속된 권력투쟁은 대체로 1960년대 후반에 일단락되었다. 이후 후계구도마저 윤곽 이 확실해짐에 따라 지배구조에 대한 논리적 이념체계를 보다 실질적인 것으로 체계화할 필요성이 대두되었다. 이런 필요성에서 제시된 것이 바로 혁명적 수령관이다. 따라서 혁명적 수령관의 체계화 는 자연스레 김정일에 의해서 추진되었다. 혁명적 수령관은 수령에 대한 충실성을 혁명적 신념과 의리로 간직해야 하며, 수령을 옹호보위하 고 수령의 혁명사상과 영도를 무조건 받들고 철저히 관철해 나가는 자세와 입장을 요구한다. 북한에서는 노동계급의 수령을 비범한 예지와 과학적 통찰력을 지니고 있고 혁명의 지도사상, 지 도이론을 창시하는 위대한 사상이론가로 규정하고 있다. 또한 노동계급의 수령은 풍부하고 세련된 영도방법과 예술을 지니고 수백만 근로인민대중을 혁명투쟁으로 조직 동원하는 혁명과 건설의 탁월 한 영도자라고 주장한다. 그뿐만 아니라 노동계급의 수령은 인민대중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헌신적 복무, 공산주의 혁명위업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끝없는 충실성, 강직한 혁명적 원칙성과 백절불굴의

207 투지 등 고매한 공산주의적 덕성과 혁명적 풍모를 지니고 있는 인민의 자애로운 어버이라고 주장한 다. 이와 같이 북한은 수령을 노동계급의 위대한 혁명가로 규정함으로써 혁명과 건설에서 수령의 절 대성을 강조하고 있다. 또한 수령론은 주체사상의 중심테제이기도 하다. 주체사상에서는 역사발전의 원동력을 인민대중 이라고 밝히면서도, 인민대중이 역사의 주체로서의 지위를 차지하고 역할을 다하자면 반드시 수령의 지도와 대중이 결합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평가 북한의 수령론은 김일성의 권력장악을 위해 제시되고, 김일성과 김정일의 유일지배체계를 확립 하기 위한 과정에서 발전된 논리이다. 수령론은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보장해주는 이데올로기의 역할 을 담당했다. 북한 사회가 이전의 사회주의 국가와는 다른 차별성을 갖는 것도 북한 사회가 신격화된 수령, 즉 김일성의 유일지도체계를 바탕으로 형성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수령론에 기초한 북한 정 치체제에서 법과 제도는 수령의 사상을 실현하기 위한 도구일 수밖에 없으며, 일반적인 사회주의 이 념 또한 수령제 중심의 사회주의인 우리식 사회주의 의 구호 속에서 그 사상이론적 기반을 상실하게 되었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수령결사옹위정신, 수령형상문학, 유일사상체계

208 수령형상문학 수령형상문학은 주체사실주의 문 예이론의 핵심으로 수령을 전형적인 인물로 형상화하는 것을 의미한다. 연원 북한의 문예정책은 1967년을 기점으로 해서 큰 변화를 가져왔다. 이 시기에 주체사상이 확립되면 서 문예이론 또한 김정일에 의해 주체적인 것과 혁명적 투쟁의식을 중시한 수령형상문학 과 항일혁 명문학 으로 정립되었기 때문이다. 특히 김정일이 후계자로 등장한 이후 김정일의 직접적인 지휘 아 래 수령형상문학을 중심으로 수령형상작품이 대대적으로 창작됐다. 1967년 북한 최고의 작가들로 구 성된 수령형상 전문 문학작품창작단인 4.15문학창작단 이 설립됐다. 또 김일성과 그 일가족을 주인 공으로 그들의 이른바 혁명활동을 각색한 수령형상 영화제작 전담 창작단인 백두산창작단 이 만들어 졌다. 백두산창작단은 초기에는 <피바다> 같은 김일성이 만들었다는 항일작품들을 영화로 각색하는데 중점을 뒀다면 1980년대 들어서는 <조선의 별>처럼 김일성을 주인공으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우 상화한 영화를 제작했다. 그러나 지나친 우상화와 다큐 수준의 다작 등으로 인해 1980년대 후반에는 대중들에게 외면당하면서 제작도 조금씩 줄어들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1990년대 김일성의 사망과 자연재해로 인해 수령형상문학은 세습체제 안착과 낙후한 경제수준을 끌어올리기 위해 다시금 강조 되면서 활발히 등장하기 시작했는데, 주인공 수령은 김일성에서 김정일로 옮겨졌다. 그러나 김정일 관련 문예창작품은 소설 등 문학작품에 국한돼 예술영화와 연극 등은 제작되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 다. 내용 수령형상문학은 수령형상창조이론 에 근거하여 그려지는데, 수령의 위대성을 높은 예술적 경지에 서 그려내는 것이다. 수령형상창조이론은 수령의 혁명역사와 공산주의적 풍모를 예술적으로 형상화 하는 이론을 의미한다. 주체문학의 목적이 김일성의 혁명사상, 주체사상을 전 사회에 일색화하는 것이기 때문에 김일성 의 형상을 창조하는 것은 가장 중요한 과업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수령을 주체형의 공산주의적 인 간의 풍모와 자질을 높은 수준에서 체현하여 주체문학예술의 주인공으로 내세울 것을 강조한다. 이 를 통해 주민들이 수령의 정신세계와 풍모를 따라 배우도록 독려하고 있다. 수령형상 창조의 기본적인 원칙은 1 수령의 위대성 을 형상화, 2 수령 당 대중의 3위 일체 에서 수령의 형상화(사회정치적 생명체의 중심으로서 수령의 형상화), 3 수령의 혁명역사와 업적의 형상 화, 4 수령 후계자의 위대성을 형상화(수령에 대한 절대적 충실성, 지도자로서 풍모와 업적을 형상 화)하는 것이다. 곧 수령형상화의 모든 원칙은 주체로부터 출발하여 주체로 귀결되며, 수령 외의 인물형상화 역시 수령형상화를 위한 인물, 즉 주체시대 공산주의적 인간으로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을 다하며 이를

209 온몸으로 실천하는 인간으로 형상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수령형상작품으로 김일성과 그 가계를 형상한 작품은 수도 없이 많다. 김일성을 우상화한 대표적 예술영화로 <조선의 별>(1-10부)과 <백두산>, 김정일의 생모인 김정숙을 주인공으로 김일성이 등 장한 <사령부를 찾아가는 길에서>, 김일성의 동생을 우상화한 <누리에 붙는 불> 등을 꼽을 수 있 다. 소설로는 김일성을 주인공으로 그의 항일투쟁을 그린 시리즈 <불멸의 역사>, 김일성의 어린 시절을 그린 <배움의 천리길>, 김정일을 주인공으로 내세운 장편 시리즈 <불멸의 향도> 등을 꼽을 수 있다. 평가 수령형상문학은 수령의 혁명역사와 공산주의를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으로 김일성의 형상을 창조하는 것이 핵심이다. 이를 통해 주민들이 수령을 따라 배우도록 하여 우상화를 극대화하는데 주 요한 도구로 활용하였다. 또한 이는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서도 후계자의 위대성을 형상화하여 전파 함으로써 김일성 김정일의 권력체제 유지에 실질적으로 활용되었다. 관련 검색어 _ 수령론, 주체문예이론

210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은 1979년 10월 과학원 식물학연구사 백설희 등 4명의 과학자에게 노력 영웅 칭호를 수여하면서 모든 근로자들이 이들의 모범을 따라 배우도록 한데서 비롯된 대중노력경 쟁운동이다. 이 운동은 생산성 증대와 노력경쟁을 강조했던 대중운동들과 달리, 일상생활에서 누가 보건 말건 평가에 상관없이 묵묵히 자기 앞에 맡겨진 일을 해나가는 사람들을 숨은영웅 으로 규정하고, 이들을 따라 배우도록 강조한 운동이다. 김정일의 통치기반 강화와 연계시켜 추진되었다. 북한은 이 운동을 김정일이 발기 지도했다며 김정일의 지도력 선전에 적극 이용하였다. 북한에서는 사회주의 경제건설의 생산성 증대와 노력경쟁 차원에서 천리마작업반운동, 3대혁명 붉은기쟁취운동 등 다양한 운동을 전개했는데,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은 충성심에 의한 생산성과 더불어 그 누구의 평가를 바라지 않고 음지에서도 말없이 노동당에 충성을 다하는 사람들을 본받자 는 의미였다. 이 운동은 특히 김일성이 1986년 2월 당중앙위원회 제6기 제11차 전원회의 기간 중 5명의 숨은 공로자 를 초청해 훈장을 수여하고, 이어 숨은영웅 따라배우기 위한 평양시 근로자궐기모임 (1986.2), 숨은 공로자대회 ( )를 개최한 것을 시작으로 북한의 핵심적인 노력경쟁운동으로 추진됐다. 북한은 이후에도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 10주년 기념보고회 ( ), 전국 영웅대 회 ( ), 숨은 공로자 경험토론회 (1991.9)를 잇따라 개최하는 등 이 운동의 확산에 주력했다. 또 한 1998년에는 영웅을 키워낸 교장, 담임교원회의, 1999년에는 우리시대 영웅 따라배우기운동, 2003년에는 선군시대 영웅대회, 숨은 공로자회의, 2004년에는 선군시대 숨은영웅, 공로자회의, 선 군시대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 등 지속적으로 영웅을 매개로한 당과 수령에 대한 충성의 모범, 경제재건의 모범, 일상생활에서의 모범 등을 제시하며 체제유지에 활용하고 있다. 북한은 1980년대부터 숨은영웅에 대한 새로운 평가를 진행하고 더불어 사회적으로 큰 관심거리 로 선전하였다. 이를 통해 북한 지도부는 주민들로 하여금 일상적인 삶에서 수령에 대한 충실성, 더 나아가 체제에 대한 순응의 강도를 더욱 높이려고 독려 차원에서 이 운동을 적극 전개한 것이다. 그 리하여 주민들의 수뇌부에 대한 충성과 함께 체제결속의 계기 마련을 위해 지속적으로 확산 추진 한 것으로 평가된다. 북한의 영웅칭호 북한에서는 최고의 영예로 공화국영웅 칭 호와 노력영웅 칭 호를 수여한 다. 공화국영웅 칭호는 북한의 각종 명예 칭호 가운데 제일 권위 있는 것으 로, 6 25전쟁 시기인 1950년 6월 30일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으로 제정되었다. 6 25전쟁에서 공로를 세운 이들이나 체제보위에 공이 있는 군 인이나 군 관련 종사자, 대남관련 종사자, 인민보안원, 국가안전보위요원 등 에게 수여되었다. 노력영웅 칭호는 1951년 7월 17일에 제정되었으며 경제 문화 건설 부문에서 특별한 공로를 세운 이들에게 수여되었다. 공화국영웅 이 노력영웅보다 급이 높으며, 공화국영웅이나 노력영웅 칭호가 수여되면 보통 국기훈장 제1급을 함께 받게 되어 다양한 혜택을 받는다. 관련 검색어 _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211 신사고 북한은 2001년 벽두부터 신사고 캠페인을 전개하기 시작하였다. 여기서 말하는 신사고란 이전의 낡은 방식에서 벗어나 새로운 사고로 근본적인 혁신을 이룩해야 하며 사업에서 실리를 내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배경 1990년대 북한은 구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 붕괴, 김일성 사망(1994년), 경제난 심화 등 총체 적 위기상황에서 군부를 중심으로 한 위기관리체제 유지에 총력을 쏟아왔다. 이 시기 김정일은 국제 사회가 전하는 북한의 체제변화 필요성에 대해 나에게서 그 어떤 변화도 기대하지 말라. 고 천명하 기까지 했다. 그러나 1998년 9월, 김정일 체제가 공식 출범하면서 북한은 정치적 안정을 회복하는 한편, 경제문제 해결을 위한 각종 변화를 모색하기 시작하였다. 특히 김정일은 모든 부문에서 실리를 추구하는 새로운 사고와 근본적 혁신을 강조하면서 인민경 제의 현대화 를 촉구하는 신사고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이 당시 제기된 신사고는 낡은 관념 아래 주어진 조건과 환경에 안주하지 말고, 참신하고 창의적인 발상을 통해 북한식 위기 타개책 을 마련해보고자 제시되었다 주요 내용 북한은 2001년 1월부터언론매체를 통해 모든 문제를 새로운 관점과 높이에서 풀어나갈 것 을 주 장하는 등 신사고 캠페인을 대대적으로 전개하였다. 신사고란 낡은 관념과 일본새에서 대담하게 벗 어나 모든 일을 새 맛이 나게 해나가는 것 이며, 실리란 경제조직사업에서 주민들이 실제적으로 덕 을 볼 수 있게 사업을 전개해 나가는 것 으로 정의된다. 신사고가 강조하는 논리의 핵심은 모든 부문 에서 실리를 우선시하는 것이었다. 신사고의 강조는 경제정책의 측면에서 폐쇄적 자력갱생 대신 개방적 자력갱생 을 강조하는 것 으로 나타났다. 종래의 안으로 문을 닫아걸고 자력갱생을 강조했던 방식에서 벗어나 첨단과학기술 도입 및 외화 획득을 목표로 외부와의 접촉을 허용하는 개방적 자력갱생 노선으로 변화를 모색하는 방식이다. 북한은 실제로 1998년 이후 IBRD, IMF, ADB 등 국제기구 가입노력, 대서방 경제자원 외 교 강화, 시장경제 연수 등 일련의 자본주의 경제질서 학습을 진행했으며, 서방과의 관계개선과 무역 증대 노력을 전개하였다. 경제관리 측면에서는 효율성 및 수익성에 기초한 실용주의 노선을 추구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특 히 신사고의 핵심 내용은 정보기술 산업을 북한의 주력산업으로 특화하여 과학기술을 통해 경제위기 를 극복하는 것이다. 북한은 첨단산업을 통한 경제회생을 위해 2000년 이후 과학기술중시사상을 천 명하고 과학기술개발계획을 수립하는 등 첨단과학기술 및 정보통신 산업에 많은 자원을 배분하였다. 사상과 생활기풍에 있어서도 새 세기의 요구에 맞게 사상관점과 사고방식, 투쟁기풍에서 근본적 인 혁신을 이룩해 나갈 것 을 강조하였다

212 평가 낡은 관념에서 벗어나 새롭게 사고하고 창의성을 발휘한다는 것은 전제조건을 필요로 한다. 그것 은 바로 낡은 사고 위에서 작동되었던 지난 시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평가가 제기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북한에서 지난 시기 사업에 대한 비판적 평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은 지도자뿐이다. 북한은 위 에서 아래로 과업을 지시하며, 주민들은 주어진 목표를 달성하는 방식으로 운영되어 왔다. 때문에 신사고가 제시하는 자유롭고 창의적인 인식의 토대가 매우 옅을 수밖에 없다. 정치적으로도 자유롭 지 못하다. 결과적으로 신사고는 2000년대 초반 7.1 조치 탄생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으나, 지속되지 못했고 번번이 과거로 회귀하는 현상을 동반했다. 관련 검색어 _ 과학기술발전 5개년 계획, 실리사회주의

213 실리사회주의 북한은 2000년대에 들어와 경제회복을 위해 북한식 사회주의 체제를 유지하 면서도 계획경제 체제의 모순을 개선하고자 새로운 경제정책 노선을 제시하게 되는데 이것이 이른바 실리사회주의 노선 이다. 배경 북한에서 실리의 개념은 김정일이 공식적인 권력승계를 완료한 1998년부터 강조되기 시작하였으 며, 이것에 기반을 두고 북한 경제의 체질개선이 진행되었고 과학기술의 중요성이 강조되기 시작하 였다. 그리고 2002년에는 실리사회주의 로 정식화되고 우리식 사회주의 의 내용적 특성으로 자리 잡 았다. 북한이 표방하는 실리사회주의는 인민경제 차원에서부터 기업소 경영활동에 이르기까지 경제활 동의 성과, 즉 최대의 실리를 획득하는 것을 기본적 요구로 삼고 있다. 실리사회주의는 북한의 우리 식 사회주의 에 대한 2000년대식 표현이며, 당면한 경제재건을 위해 현실적으로 요구되는 이윤(소득) 창출을 원칙적 요구로 수용한 논리이다. 주요 내용 북한에 따르면 실리사회주의란 사회주의 원칙을 지키는 가운데 가장 큰 실리를 추구하는 것 을 의미한다. 따라서 실리사회주의는 지도와 대중, 보편과 특수 등 사회주의 원칙과 실리의 결합 이라 는 북한 특유의 모순적 용어를 조합하여 표방한 것으로 그 내용과 실체의 추상성이 존재한다. 원칙이 강조되기도 하고, 실리가 강조되기도 하는 이중적 상황에 직면하기도 한다. 따라서 실리사회주의가 표방하는 실리의 개념은 단순한 실제 이득을 의미하기도 하고, 새로운 혁신의 기치일수도 있다. 실제 이득의 개념에서 고찰할 때 실리 는 기업소 협동농장 등 각 경제 단위들은 집단적 이익을 우선시하면서도 개별 단위의 실리 추구도 경제활동의 목표가 된다는 의미이다. 이것은 현상적으로 보기에 기존의 집단적 이익을 최우선시하는 계획경제 논리의 반복된 표명에 불과하다. 그러나 새로 운 혁신의 기치로서 실리 는 계획경제 시스템의 개혁 요구를 부분적으로 담고 있다. 그 이유는 경제 주체들의 경제활동 목표가 더 이상 최대생산량 이 아닌 최대수익 이 되었으며, 경제조절 도구로서 시 장의 기능을 일부 도입 허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공장 기업소 등 경제 단위들이 수익성 위주로 경제활동을 하기 위해서는 경제관리체계도 이러한 방향으로 수정되어야 하고 시장경제 공간도 경제 활동 공간으로 허용되어야 할 것이다. 평가 북한은2002년 7.1 조치를 시행할 당시 21세기라는 새로운 경제 환경에 부응하여 모든 문제를 새 로운 관점과 높이에서 풀어나갈 필요가 있다. 고 하면서 계획경제의 틀 내에서 관리되는 시장경제 요소를 일부 작동시키려고 의도하였다. 그러나 실리사회주의 노선은 북한이 2008년부터 다시 집단주 의와 사회주의 계획경제의 우월성을 강조하고 경제정책의 보수화 경향을 나타냄에 따라 일정 퇴보하

214 는 흐름을 보이고 있다. 김정일 체제하에서 실리사회주의는 체제의 근본적인 개혁이라기보다 경제의 효율성을 높이고자 하는 의도에서 제기되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신사고, 7.1 경제관리개선조치

215 연합기업소 연합기업소란 국가적으로 중요하고 핵심적인 공장을 모공장(어머니 공장)으로 삼아 업종과 지역별로 유사한 공장들(아들 공장들)을 주위에 배치하는 대규모 공장 트러스트이다. 북한에서는 1973년부터 조직되기 시작하여 1984년 이후 북한의 공장체제를 대표하게 된다. 배경 북한에서 독자적으로 경영활동을 직접 조직하고 진행하는 경제 단위 는 기업소로 불린다. 기업소 는 일정한 노동력, 설비, 자재, 자금 등을 가지고 생산 활동을 진행하며 얻은 수입으로 지출을 보상하 고 채산을 맞추면서 경영활동을 진행한다. 북한의 기업연합체로 대표적인 것이 연합기업소 이다. 북한에서 연합기업소는 1973년 조직되기 시작하여, 1974년 황해제철연합기업소, 강선제강연합기업소, 김책제철연합기업소, 2 8비날론연합기 업소 등 6개의 연합기업소가 공식적으로 발족했던 것으로 파악된다. 연합기업소가 북한 기업소 체제 를 대표하게 된 것은 1984년 11월 정무원 상무회의의 방침을 통해 관리국과 연합기업소를 새로 내오려는 결정 을 내리면서부터이다. 당시 연합기업소의 도입 목적은 1 산업생산 부문별 관리의 효율화, 2 대안의 사업체계 의 효과 적 운영, 3 분권화와 물질적 자극 강화, 4 자재공급문제에 대한 대처의 측면으로 살펴 볼 수 있다. 특히 대안의 사업체계 실시 이후 경제전문가도 아닌 당비서가 경제전문가 행세를 하면서 공장 기업 소의 경영을 좌지우지 하는 현상을 제거하기 위해 유관 공장 기업소를 한데 묶어 관리하는 방식을 채택하였다. 조직체계 연합기업소는 다양한 형태를 취하는데 그중 중요한 형태의 연합기업소는 다음과 같다. 1 모공장 을 중심으로 하고 그에 종속되는 기업소들을 망라하여 조직한 형태, 2 일정한 지역의 같은 제품 생 산 기업소(동종 기업)들과 그에 종속하는 기업소들을 망라하여 조직한 형태, 3 전국적 범위에서 같 은 제품 생산 기업소들을 망라하여 조직한 형태, 4 기타 특수한 형태의 기업소 등이다. 북한에서는 대체로 3의 형태의 연합기업소가 지배적이다. 예를 들어 함경북도 청진에 위치한 청진화학섬유연합기업소를 보면 다음과 같다. 모공장은 청진 화학섬유공장이며 아들공장으로 길주팔프공장, 화성탄광, 상화탄광, 화성화학공장, 길주경관지공장, 스레트공장, 길주경제림공장 등이 하나의 연합기업소를 구성하고 있다. 그리고 연합기업소 지배인과 연합기업소 당위원회가 연합기업소 전체를 관리하게 된다. 평가 북한의 연합기업소는 유관기업과동종업종이 서로 계획과 생산을 맞물려 진행하는 체제이기 때문 에 산업 간, 부문 간 연쇄적 파급효과가 클 수밖에 없다. 따라서 모든 조건과 환경이 서로 잘 갖추어 져 있다면 유기적 연관 아래 안정적 생산을 보장할 수 있지만, 역으로 어느 한 부분에서 계획과 생산

216 에 차질을 빚게 되면 곧바로 파급효과를 미치게 되어 전반적 생산에 부정적 효과를 초래하게 된다. 북한의 연합기업소 체제는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대부분이 그 기능을 상실 하고, 서로의 연관 고리들이 끊어지는 위기상황에 봉착했다. 이에 1998~2001년 사이 대대적으로 연합 기업소들을 해체했다가 다시 재구성하는 우역곡절을 겪었다. 현재 북한의 대부분 공장 기업소들이 생산을 정상화하지 못하는 상태이기 때문에 연합기업소 체제의 정상적 운영은 차질을 빚고 있으며, 특급기업소를 중심으로 몇몇 기업소만이 연합기업소 체제를 유지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김책제철연합기업소, 독립채산제

217 영변 5MWe 원자로 영변 5MWe 원자로는 사용 후 폐연료봉에서 북한이 핵무기를 만들 수 있는 플루토늄을 추출했던 원자로로 유명하다. 북한이 이 원자로를 만들기로 계획한 것은 1970년대 말로 추정되며, 1980년 7월 건설되기 시작하여 1987년 12월 가동을 시작하였다. 영변 5MWe 원자로는 5MWe의 전기출력을 내는 발전 겸용 시험 원자로이다. 천연 우라늄을 핵 연료의 원료로 사용하며, 탄산가스를 냉각재로 이용한다. 연쇄 핵반응을 일으키는 중성자의 에너지 를 낮추는 재료(감속재)로 흑연을 사용하기 때문에 흑연감속로 로 불리기도 한다. 영변 5MWe 원자 로는 대표적 흑연감속로인 영국의 마그녹스 콜더홀(Calder Hall) 원자로를 모델로 한 것으로 추측된 다. 콜더홀 원자로는 열출력이 268MWe인데 반해 전기 출력이 60MWe이기 때문에 열효율이 약 22.4%로 매우 낮다. 영변 5MWe 원자로의 열효율도 약 17%에 불과하다. 영변 5MWe 원자로는 천연 우라늄을 핵연료의 원료로 사용하기 때문에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하다. 핵반응에 이용되는 원소는 우라늄-235이지만 자연 상태에 우라늄-235는 매우 적은 양만 존재한다. 우라늄 계열의 동위원소 가운데 자연 상태에 가장 많이 분포하는 원소가 우라늄-239인데, 이것이 핵반응을 일으키면 핵폭탄에 이용되는 플루토늄-239로 변하게 된다. 이로 인해 천연 우라늄 을 핵연료의 원료로 사용하는 원자로는 무기급 플루토늄 생산에 있어서 다른 재료를 핵연료의 원료 로 사용하는 원자로보다 유리하다. 북한은 영변 5MWe 원자로에서 생산한 플루토늄으로 2006년 10 월 9일 제1차 핵실험을 단행한 것으로 추정된다. 북한은 제1차 북핵 위기가 진행되던 1993년 말 5MWe 원자로는 손상되어 제거된 일부 핵연료봉 을 제외하고는 초기장전 연료 그대로 운전되고 있다고 주장했다. 원자로 가동 이후 초기 전력실험 동안 전력밀도를 고르게 하기 위하여 연료 배치를 수정하고, 많은 연료봉을 교체했다고 밝히기도 했 다. 북한은 나중에 연료봉 교체 과정에서 손상된 일부 핵연료봉을 인출하여, 그 중 일부에 대해 재처 리 실험을 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재처리에 대한 부분은 북한도 인정하고 있지만, 재처리에서 추출한 플루토늄의 양에 대해서는 북 한과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의견이 달라 1994년 제1차 북핵문제가 발생하는 한 원인이 됐다. 5MWe 원자로가 최대출력으로 운전될 경우 약 11kg 정도의 플루토늄을 생산할 수 있으며, 1994년까 지 열출력 8~12MWe에서 멈추지 않고 가동됐으므로 매년 약 5~6kg 정도의 플루토늄 생산이 가능하 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후 북핵문제 해결을 위한 6자회담이 많은 어려움 속에 지속적으로 개최되어 9 19 공동성 명 ( )이 발표되었다. 그리고 2007년 2월 13일 9 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1단계 조치 (2 13합 의)에 합의했고, 같은 해 10월 3일에는 2단계 조치(10 3합의)에 합의했다. 북한은 합의에 따라 2008년 6월 27일 영변 5MWe 원자로의 주요 구성물인 냉각탑을 폭파함으로써 원자로는 가동될 수 없는 불 능 상태가 되었다. 그러나 북한은 2013년 4월 2일 영변 원자로를 재정비, 재가동하는 조치를 취하겠 다고 발표하였고, 이에 대해 국제사회는 유감을 표명하였다. 관련 검색어 _ 북한의 핵실험, 핵 불능화 중단,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 핵연료봉 제조공장, 핵 재처리시설

218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은 군인의 정치사상 강화를 목적으로 진행된 대중운동으로 김정일에 의해 1996년 1월 1일 발기됐다. 김정일의 친위대, 결사대 준비를 목적으로 군부대에서 실시한 운동이다. 이 칭호는 군대에 파견된 당조직의 판정검열에 합격된 군부대에 수여된다. 판정 결과가 우수하면 입당, 견학, 포상, 휴가, 자재공급이 우선적으로 이루어진다. 배경 오중흡은 항일빨치산의 대표적인 인물이며, 본격적으로는 김정일에 의해 정치적 차원에서 강조 되었다. 김정일은 1979년 12월 17일 오중흡 사망 40돌을 기점으로 하여 오중흡동지를 따라배우는 운동 을 전군( 全 軍 )적으로 실시할 것을 지시했다. 당시 북한은 오중흡의 혁명의 수뇌부 보위, 수령에 대한 충실성, 수령의 명령 결사관철 등의 정신자세를 따라 배울 것을 주민들에게 독려했다. 오중흡 따라배우기운동 은 주로 군대 내에서 전개되었다. 1996년 1월 1일 김정일이 인민군 지휘성원들과의 담화에서 전군의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는 오늘의 7연대가 되자! 라는 구호를 제시하면서, 오 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 을 벌릴 것을 지시하였다. 주요 내용 오중흡7연대 는 일제강점기 시절인 1930년대 후반 일본군을 유인하여 김일성의 사령부를 보호 하고 주력부대를 압록강 연안까지 무사히 도달하게 한 빨치산부대이며, 당시 7연대를 지휘한 오중흡 은 북한에서 수령결사옹위정신 을 발휘한 대표적인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오중흡7연대 정신의 핵심은 수령결사옹위정신으로 자기 영도자에 대한 절대적인 숭배심에 기초 하고 있으며, 사령부의 안전을 위해서라면 적진 속에도 서슴없이 뛰어 들어가는 육탄정신, 적탄도 한 몸으로 막아내는 성새정신, 방패정신 을 의미한다. 북한은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은 7연대의 모범을 따라 배워 우리 혁명의 수뇌부를 견결히 결 사옹위하기 위한 새로운 높은 형태의 공산주의적 대중운동 이며, 모든 장병들을 혁명의 수뇌부를 결사옹위하는 총폭탄으로 튼튼히 준비시켜 인민군대를 최고사령관동지의 친위대, 결사대로 만들기 위한 집단적 혁신운동 이라고 설명한다. 오중흡7연대 칭호는 1998년 4월 인민군 황명일소속부대 에 처음으로 수여되었다. 2000년대 들어 김정일은 칭호를 받은 부대들에 대한 현지지도를 하기도 했다. 북한은 이 운동의 확대를 위하여 2003 년과 2006년 두 차례에 걸쳐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 열성자대회 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평가 1990년대 중반 북한이 오중흡7연대칭호쟁취운동을 발기하고, 이 운동을 강화한 이유는 국제적 고 립, 김일성 사망, 경제난 악화 등으로 인해 나타난 정치, 경제, 군사적 위기감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사회적으로 위기감의 확산은 질서의 와해를 불러오기 때문에 수뇌부에 대한 충성의 상징물을 내세워 다시금 도덕적인 힘으로 집단적 단결을 복귀하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볼 수 있다

219 또한 수령결사옹위의 상징인 오중흡은 북한 선군사상의 핵심개념인 혁명적 군인정신 의 역사적 실현체를 의미한다. 오중흡에 대한 강조는 본질적으로 선군정치의 강화를 의미하며, 그를 따라배우 기 위한 군대 내의 대중운동은 김정일에 대한 충성과 체제결속에 이용하기 위한 것이었다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금성친위칭호쟁취운동, 수령결사옹위정신, 숨은영웅 따라배우기운동

220 우리민족제일주의 우리민족제일주의는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붕괴에 위기의식 을 느낀 북한이 여타 사회주의 국가와의 차별성을 부각해 주민들의 사상 동요 를 막고 체제결속을 도모하기 위해 제시한 통치이념이다. 배경 1980년대 말부터 시작된 사회주의권의 급격한 변화는 북한에게 엄청난 충격을 주었다. 밖에서는 소련을 비롯한 사회주의권에서 개방 개혁 바람이 불어오고, 안으로는 자립경제가 흔들리는 체제위기 국면을 맞게 됨으로써 체제수호를 위한 대책마련의 필요성이 시급히 대두되었다. 이에 따라, 종래의 주체사상만으로는 주민들을 설득하기가 어렵다는 점을 알고 새로운 통치담론들을 제시하게 된다. 우 리민족제일주의도 이러한 배경을 가지고 우리식 사회주의 와 함께 등장하였다. 외부로부터 오는 위 기에 대응하기 위한 당연한 귀결로 이들 담론들은 주민의 사상 동요를 막고 체제를 지키는 논리를 동원하여 이론체계를 세우는 것이었다.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우리식 사회주의 를 더욱 정교화 하여 북한이 소련, 동유럽 사회주의권과는 전혀 다른 민족임을 내세워 그들 나라들로부터 불어오는 변화 외풍을 차단, 단절하고자 하는 체제수 호 차원에서 출발하였다. 1985년 무렵부터 민족주의를 새롭게 정의하고 해설하는 논문이 대거 출판 되었고, 1986년 7월에는 김정일이 당중앙위원회 책임간부들과의 담화에서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 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 라는 논문을 통해 우리민족제일주의 라는 용어가 공식 등장하였다. 1989년 9월에는 <우리민족제일주의론>이라는 단행본이 발행되기에 이르렀다. 주요 내용 이들 출판물들의 해설논리를 들여다보면 민족주의에 관한 개념이 이전과 매우 달라졌음을 알 수 있다. 민족을 특징짓는 가장 중요한 징표가 무엇보다 핏줄과 언어의 공통성에 있다고 하여 이전의 계급론에 기초한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적 개념 정의와 매우 다르다. 민족의 개념에 핏줄과 언어라 는 요소를 부각시키는 반면, 프롤레타리아 국제주의를 배척한 데에는 무엇보다도 주변의 사회주의 국가들의 민족과는 핏줄도 다르고 언어도 다르다는 점을 강조하고자 하는 의도가 담겨져 있다. 이렇 게 함으로써 다른 사회주의 개혁에 눈길을 돌리지 말며 북한 고유의 우리식 사회주의 노선을 따르 도록 하는 효과를 노리고 있는 것이다. 당시 세계는 탈냉전과 그에 이은 세계화 흐름으로 거대한 변 화를 겪고 있는데 북한만은 오히려 국경과 민족의 구별을 내세우니 실로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렇듯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여러 가지 정치적 목적하에 북한판 사회주의를 강화하기 위해 외부 와의 차단을 합리화하는 통치담론이라 할 수 있다. 북한이 2002년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4대 제일주 의 (우리 수령 우리 사상 우리 군대 우리 제도 제일주의)를 제시한 것도 우리식 을 강조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다. 맨 앞에 설정된 우리 수령 제일주의는 그 해가 김정일 60회, 김일성 90회 생일을 맞는 해였던 만큼 김정일을 중심으로 충성심을 고취하고, 우리 사상 제일주의는 정세변화를 감안해 주민들을 주체사상으로 무장시켜 체제를 한층 공고히 하겠다는 의도로 풀이된다. 우리 군대 제일주

221 의는 선군정치의 강화를, 우리 제도 제일주의는 경제강국 건설 방침을 포함하는 사회주의 제도 고 수를 겨냥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평가 북한의 우리민족제일주의는 우상화 논리로도 연결되고 있다. 앞서 언급한 단행본 <우리민족제일 주의론>에서는 이 이론의 원천을 김일성과 김정일이라는 지도자, 주체사상, 노동당의 혁명전 통, 북한식 사회주의 제도, 우리 민족의 유구한 투쟁의 역사를 들고 있다. 북한이 다른 민족과 다르며, 제일 이라고 부각하는 것은 다름 아닌 김일성 김정일과 주체사상, 혁명전통이다. 이 통치담론도 결 국은 김일성과 김정일의 우상화로 귀결된다. 더구나 북한의 민족주의가 수령론과 결합하여 헌법에서 까지 김일성민족 을 규정하고 있어 우리와의 괴리감은 더 커지고 있다고 하겠다. 관련 검색어 _ 민족주의, 수령론, 우리식 사회주의

222 우리식 사회주의 우리식 사회주의는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의 물결을 차단 하고 체제유지를 위해 개발된 북한의 통치이데올로기이다. 우리식 사회주의는 북한의 통치이념인 주체사상 에 기초한 북한식 사회주의로서 1980년대 후반부 터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연원 우리식 사회주의는 1978년 12월 중국의 개혁 개방과 1980년대 중반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개혁 개방에 대응하기 위한 논리로 개발되었다. 1970년대 말부터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는 구호 를 제시하다가 1980년대 말 소련 및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하자 우리식 사회주의를 대대적으 로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우리식대로 살아나가자 라는 구호는 김정일이 1978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책임간부협의회에서 행한 당의 전투력을 높여 사회주의 건설에서 새로운 전환을 일으키자 라는 연설에서 처음으로 제시되었 다. 이후 김일성도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 사업총화보고에서 우리는 사람들을 교양하는 사업도 우리식대로 하고 경제와 문화를 건설하는 사업도 우리식대로 하여야 합니다. 라고 강조한 바 있다. 주요 내용 1980년대 말 동유럽 사회주의가 몰락하고 소련이 해체되자 북한은 엄청난 충격을 받고 체제유지 에 총력을 기울였다. 북한이 사회주의 몰락의 도미노 현상을 차단하고, 변화의 물결이 침투하지 않도 록 주민들을 단속하기 위하여 내놓은 통치이데올로기가 우리식 사회주의 이다. 김정일은 1989년 12 월 28일 당중앙위원회 책임일꾼들 앞에서 한 연설 조선민족제일주의정신을 높이 발양시키자 에서 우리식 사회주의 라는 용어를 처음 사용하였다. 북한은 동유럽 사회주의의 몰락에 대해 오늘날 일부 나라들에서 사회주의가 좌절한 것은 일시적 현상이며 인류가 사회주의에로 나아가는 것은 그 어떤 힘으로도 막을 수 없는 역사의 법칙 이라고 강조하면서, 이들 국가의 사회주의의 좌절은 주체사상과 같은 사상이 없었고 김일성 김정일 부자와 같은 지도자가 없었기 때문이라고 주장하였다.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의 개혁 개방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자들이 사회주의를 파괴하기 위해 경 제협력과 원조를 미끼로 침투해 들어온 반동적 책동의 결과 라고 하면서, 사회주의 사회에서 사상 의 자유화와 정치에서의 다당제를 허용하는 것은 결국 사회주의 사회의 기초를 허물고 인민의 정권 을 전복하기 위한 반혁명적 책동의 길을 열어주는 것 이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우리식 사회주의 체제는 인민대중에게 자주적이며 창조적인 생활을 보장해주는 가장 우월 한 사회제도 라고 선전하면서 수령, 당, 대중이 일심단결하여 사회주의 제도를 튼튼히 고수하고 사 회주의 위업을 끝까지 완성시켜 나아가기 위해 몸바쳐 투쟁하자. 고 주민들을 학습시켰다. 즉 우리식 사회주의란 영원불멸의 주체사상 에 기초한 가장 독창적이고 우월한 사회주의, 다시 말해서 인류의 참된 복지생활이 보장되는 이상사회를 구현한 정치제도라고 주장하였다. 또한 주민들에게는 어떠한 시련이 닥쳐오더라도 한 걸음도 물러서거나 주저함이 없이 김정일 중심으로 굳게 뭉쳐 주체사상을

223 구현한 우리식 사회주의를 끝까지 지켜 나갈 것을 촉구하였다. 평가 우리식 사회주의는 탈냉전의 정치경제적 위기 속에서 김정일의 권력 강화와 체제유지를 위한 사 상적 구호라 할 수 있다. 1980년대 말 사회주의권 붕괴에 따른 체제위기를 극복하는 것이 최대 과제 였던 김정일은 사회주의를 포기하고 자본주의로 복귀한 나라들이 겪고 있는 어려움을 부각시키면서 우리식 사회주의를 강조하였다. 결국 북한은 다른 사회주의 국가들과 차별화되는 우리식 사회주의를 내세워 주민들의 동요를 막 고 체제유지에 적극 활용하였으며, 북한 스스로 외부의 변화 바람을 차단하고 사회주의 국가들이 취 한 개혁 개방을 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우리민족제일주의, 자력갱생, 주체사상

224 유일사상체계 유일사상체계는 수령의 혁명사상만이 유일적으로 지배하게 하고 수령의 유일 적 영도 밑에 전당이 하나와 같이 움직일 것을 요구하는 수령의 사상체계이자 영도체계이다. 배경 조선노동당은 1967년에 유일사상체계를 지도체계로 채택하였다. 맑스-레닌주의와는 사실상 결별 하면서 김일성이 제창한 주체사상을 도입하여, 주체사상만을 당과 사회 전반의 유일한 이데올로기로 인정하는 것이다. 북한은 1972년 헌법을 개정하며 주체사상을 유일로 한다는 결정을 명문화시켰다. 이후 점차적으로 수령의 신격화가 이루어지기 시작했다. 대외적으로는 중분쟁과 경제계획의 차질, 대내적으로는 8월 종파사건 에서부터 1969년 군부파 의 숙청까지 일련의 과정은 김일성이 당내부사업을 직접 관장하고 김정일이 후계자로 부상한 시기와 일치하면서, 북한은 당면한 위기를 극복하고 김일성 유일체제의 확립과 김정일 후계체제 구축을 위 해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더욱 강화하기 시작했다. 주요 내용 유일사상체계의 핵심은 수령의 혁명사상으로 당을 무장시켜 어떤 다른 사상도 용납하지 않으며, 수령을 중심으로 하는 당의 사상의지 및 행동의 완전하고도 무조건적인 통일을 이루어 수령 외에는 그 누구도 모른다는 확고한 신념을 갖게 하며, 수령의 혁명사상을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삼고 유일 적 영도 밑에 혁명사업과 건설사업을 진행한다는 것이다. 북한의 주장에 의하면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은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를 위한 근본요구이다. 온 사회를 김일성주의화한다는 것은 모든 사회성원들을 다 수령님께 끝없이 충직한 참다운 김일성주 의자로 만들며 김일성주의의 요구대로 사회를 철저히 개조하여 공산주의의 사상적 요새와 물질적 요새를 점령하는 것 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김정일은 1974년 4월 당의 유일사상체계 확립을 위한 10대 원칙 (이하 10대 원칙)을 발표하였다. 10대 원칙은 북한주민들을 일상적으로 규율하는 최고의 규범으로 기본내용은 다음과 같다. 1 김일 성의 혁명사상으로 온 사회를 일색화, 2 김일성을 충성으로 모심, 3 김일성의 권위를 절대화, 4 김일성의 혁명사상을 신념으로 삼고, 수령의 교시를 신조화, 5 김일성의 교시 집행에서 무조건성의 원칙을 준수, 6 김일성을 중심으로 하는 전당의 사상의지적 통일과 혁명적 단결을 강화, 7 김일성 을 따라 배워 공산주의적 풍모와 혁명적 사업 방법, 인민적 사업 작풍을 소유, 8 김일성의 정치적 생명을 귀중히 간직하며, 수령의 정치적 신임과 배려에 정치적 자각과 기술로써 충성, 9 김일성의 유일적 영도 밑에 전당, 전국, 전군이 한결같이 움직이는 강한 조직규율 확립, 10 김일성의 혁명위업 을 대를 이어 계승 완성해야 한다. 실제 10대 원칙은 실질적으로 북한을 지배하는 원리가 되고 있다. 당이 법과 인민 위에 있고, 수령 이 당위에 군림하는 북한체제에서 10대 원칙은 모든 북한 사회를 움직이는 지침이 되고 있다. 즉 유 일사상체계란 북한주민들이 김일성의 사상만을 알고 그 사상과 의지대로만 사고하고 행동하게 하며,

225 그럼으로써 김일성의 사상을 유일한 지도적 지침으로 하여 김일성의 유일적 지도하에 혁명과 건설을 추진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당의 유일사상은 김일성의 혁명사상이며 주체사상인 까닭에 그 사상으로 북한주민들을 무장시키는 것이 바로 유일사상체계의 확립이라 할 수 있다. 한편 북한은 당의 위상과 기능을 강화하고, 김정은의 권력 세습을 정당화하기 위한 일환으로 10대 원칙의 내용을 2013년에 일부 개정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평가 유일사상체계는 1950년대 중반부터 시작된 김일성의 반대파와 정적들에 대한 숙청을 완료하고 김일성 1인 지배체제를 확립하기 위해 채택되었다. 이후 북한은 김일성의 신격화 절대화와 김정일의 후계체제 구축을 위해 유일사상체계를 강조하였다. 일각에서는 최근 김정은의 권력승계가 순조롭게 이뤄진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영도체계에 입각한 수령제 통치 시스템을 구축 해 놓은 것이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수령론, 주체사상

226 유훈통치 유훈( 遺 訓 )의 본뜻은 세상을 떠난 사람이 생전에 남긴 훈계나 교훈이다. 북한 에서는 김일성과 김정일이 사망한 이후 일정기간 동안 김정일과 김정은이 유훈 통치를 하였다. 배경 1994년 7월 8일 김일성 사망 이후 북한은 그야말로 고난의 연속이었다. 북한은 유례없는 이 어려 움을 극복하기 위해 유훈통치 방식을 선택했다. 공식적인 정치일정이 사실상 중단되고 김일성의 유 훈에 의존해 국정을 이끌어 나가는 특이한 체제가 탄생한 것이다. 이는 당면한 체제위기 극복을 위해 시간을 벌고 김일성의 후광을 최대한 활용하려는 의도에서다. 김정일을 정점으로 한 북한 지도부는 난국을 타개하기 위해 김일성 사후 3년을 애도기간으로 설정하고 그 명분 아래 공식 권력승계도 미 룬 채 비상체제를 가동시켰다. 이 기간 북한은 김일성의 권위를 빌어 유훈통치를 지속하면서 군부 주도의 위기관리체제를 운영했던 것이다. 주요 내용 북한에서 유훈통치는 김정일이 1994년 7월 8일 김일성이 사망한 뒤 삼년상을 이유로 김일성의 유훈을 내세우며 얼굴 없이 통치하던 것을 말한다. 또한 김정일이 2011년 12월 17일 사망한 뒤에, 그 뒤를 이은 김정은이 다시 북한의 두 번째 유훈통치를 실시하였다. 김정일의 유훈통치 기간은 약 3년이었지만, 김정은의 유훈통치 기간은 4개월에 지나지 않았다. 김정일은 김일성이 사망한 1994년 7월 이후 김일성 생전의 정책과 노선을 답습하면서 그의 후광 을 최대한 활용하는데 주력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바로 이러한 김정일의 독특한 통치행태를 일컬 어 전문가들은 유훈통치라고 불렀다. 이에 대해 북한은 세상에 그 어떤 압력이 가해지고 그 어떤 역경에 부닥친대도 우리 수령님이 쌓으신 업적을 0.001mm도 허물 수 없으며 수령님 한 평생 들고 오신 붉은기의 색소를 한 점도 흐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이 우리 장군님의 의지이다. 라면서 김정일의 노선과 김일성의 노선이 전혀 차이가 없음을 강조하였다. 북한은 김일성의 3주기 탈상을 마치며 유훈통치를 끝낸 뒤 1997년 10월 김정일을 당 총비서로 추대했다. 북한은 1998년 9월 헌법 개정을 통해 국가제도도 새롭게 정비했다. 김일성 사망 이후 권력 체계를 국방위원장 중심으로 전면 재편함으로써 명실상부한 김정일 시대를 열었다. 김정일 사후에도 북한은 유훈통치를 채택했다. 김정은은 북한 사회에서 김정일의 권위가 절대적 이기 때문에 그의 권위를 뛰어넘거나 제약하려고 하기보다는 오히려 자신의 리더십을 정당화하고 권력기반을 확충하기 위해 아버지의 권위와 위업을 이용하는 유훈통치를 통해 아버지와 자신을 일체 화하면서 자신의 정권을 공식 출범시켰다. 평가 북한에서 유훈통치는 전임자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다짐하고 전임자의 유훈에 의해 후계자에 대 한 충성을 유도하는 것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김일성 김정일에 대한 우상화가 진행되었고, 그 우

227 상화는 김정은의 우상화로 이어졌으며, 결국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은 일체화된 백두혈통임을 부각 시켰다. 북한은 김정은의 후계자 추대와 후계정권의 공식 출범이 사실상 김정일의 유훈에 의해서 이루어 졌다고 주장하고 있다. 2011년 말 북한은 당정치국 회의를 열어 김정은을 최고사령관에 추대하면서 김정일의 10월 8일 유훈 을 언급하였다. 2012년 제4차 당대표자회에서도 김정은의 당 최고수위 추대 가 김정일의 유훈에 따라 진행되었다고 강조하였다. 관련 검색어 _ 백두혈통

228 음악정치 북한에서 음악정치 는 음악과 정치, 노래와 혁명을 하나로 결합시킨 영도( 領 導 )예술로 규정된다. 북한에서는 음악을 정치 이념과 주체사상 및 김일성 김정일을 찬양하는데 활용하고 있다. 연원 음악정치란 말은 2000년 2월 7일 평양에서 열린 인민무력성 집회에서 처음 등장했다. 이 집회에 서 당시 총정치국장인 조명록을 비롯하여 인민군 고위 장성들은 토론을 통해 우리나라에서는 지금 그 어느 시대에도 있어보지 못한 우리식의 특이한 음악정치가 펼쳐지고 있다. 고 하면서 음악정치라 는 말을 처음으로 사용했다. 음악정치란 용어는 1990년대 초 등장한 인덕정치 와 광폭정치, 1990년 대 말에 등장한 선군정치 와 과학중시정치 에 이어 새롭게 추가 된 것이다. 이는 음악을 통해 당면한 온갖 어려움과 난관을 극복하고 사회주의 건설을 향해 매진해나간다. 는 일종의 김정일식 통치방식 을 일컫는 말이다. 또한 김정일은 음악이 때로는 수천, 수만의 총포를 대신했고 수백, 수천만 톤의 식량을 대신했다. 면서 음악정치를 강조한 바 있다. 특징 음악정치는 북한의 또 다른 주민세뇌교육 방식이라고 하겠다. 주민들에 대한 사상교육을 강연이 나 사상학습 같은 딱딱한 방법이 아니라 누구나 즐기고 따라 부를 수 있는 음악이라는 장르를 통해 자연스럽게 주입시키겠다는 의도라고 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경제적 어려움 등을 이겨내고 체제와 수령에게 충성해야 한다는 내용의 노랫말을 주민들이 좋아하는 운율에 담는다면 그 파괴력은 훨씬 크다는 인식에 따른 것이다. 북한에서는 음악은 정치사상적 무기로서 인민의 이익과 혁명의 이익에 복무해야 한다. 는 원칙에 따라 음악을 정치적 수단으로 적극 이용하여 왔다. 또한 음악정치에 사용하는 노래 속에서 강조하고 있는 것은 혁명성과 인민성, 통속성, 그리고 민족성이다. 음악정치에 사용되는 노래의 핵심 주제는 수령결사옹위정신과 수령과 군사, 인민의 혈연적 연계 강조, 혁명 찬양 등으로 정리된다. 2000년 5월 29일 조선중앙통신에서 조선은 노래가 많은 나라, 노 래를 통해 위기를 극복해 나가는 나라 라는 점을 강조하면서 노래가 갖는 사회적 힘을 말한 바 있다. 평가 기본적으로 음악 은예술적인 측면에서 인식되어지지만, 북한의 경우 음악 은 음악정치와 동일한 의미로 받아들여진다. 이는 음악이 대중에게 정치를 좀 더 다가가기 쉽게 만드는 도구적 역할을 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북한에서는 음악정치의 유형으로 근로 현장에서 음악으로 생산을 독려하는 방식 과 중요한 정책을 노랫말에 담아 전하는 방식을 한 형태로 소개한다. 그리고 공식석상에서 연설을 하는 대신 공연을 하는 것도 음악정치의 한 예로 들고 있다. 이처럼 북한에서 음악은 주민들에게 당 국의 사상을 자연스럽게 전하는 도구로 사용되고 있다

229 관련 검색어 _ 광폭정치/인덕정치, 보천보전자악단

230 인민경제계획 인민경제계획은 경제를 계획적으로 발전시키기 위해 작성하는 기관 기업소 단 체의 수량적 질량적 목표를 의미한다. 인민경제계획은 사회주의 경제법칙들에 따라 철저하게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에 입각하여 작성된다. 그 내용은 계획 항 목과 지표들을 통하여 반영되며, 포괄하는 기간에 따라 전망계획과 현행계획으 로 나뉜다. 배경 계획이 자원배분을 담당하는 사회주의 경제체제에서 주된 관심사는 효율적인 계획의 수립이다. 북한의 계획화 사업은 기본적으로 구소련의 현물중심의 계획과 과도한 집중화, 관료적 조정을 통한 경제 관리에 의존하고 있다. 현물중심의 계획은 생산물에 대한 생산과 소비의 대차대조표를 작성, 계획을 편성하여 이를 통제숫자로 제시하는 방식이다. 그러나 이 같은 방식은 자원이용의 합리성이 무시되며, 부족재가 발생할 때마다 연관 부문에 파급되어 계획실행에 불균형을 조성한다. 이에 계획 자는 부족재에 대한 수요를 줄이는 방식을 통해 계획을 조정하게 된다. 따라서 계획경제는 수요를 줄이는 방식으로 계획의 불균형을 완화하려 하지만, 필요한 것은 부족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은 과잉 공급되는 만성적 부족과 불균형이 동시에 존재하게 된다. 북한은 1964년 3월 내각결정 제21호 인민경제 계획화 체계를 개편할 데 대하여 를 통하여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체계를 도입하였다. 이는 구소련의 현물중심의 계획체계의 문제점을 극복하고자 한 것으로, 북한식 해결책은 국가계획위원회 밑에 도 시 군 계획위원회를 조직하여 중앙으로부터 지방 에 이르기까지 계획사업을 통일적으로 집행하고, 계획지표가 1만종이 아니라 몇 만종이 된다고 하더 라도 세부계획화를 실행하는 것이었다. 즉 계획사업의 초세부화 를 통해 문제를 극복하고자 했다. 주요 내용 북한의 정의에 의하면, 사회주의 체제에서 모든 경제활동은 인민경제발전계획에 따라 진행된다. 따라서 인민경제발전계획은 당의 지령이며 국가의 법으로 규정된다. 인민경제발전계획은 당의 노선 과 정책, 객관적 경제법칙의 요구를 반영하여 작성되기 때문에 그 누구도 고칠 수 없으며 오직 집행 할 의무만 있다. 인민경제계획의 항목체계는 네 가지 부류로 이루어진다. 첫째, 물질적 생산부문의 발전을 표현하 는 항목들로 공업생산계획, 기본건설계획, 기술발전계획 등이 있다. 둘째, 사회생산물의 유통과정을 표현하는 항목들로 물자계획, 상품유통계획, 수매양정계획, 무역계획 등이 있다. 셋째, 생산과 유통과 정에 공통되는 문제를 반영하는 항목들로 노동계획, 원가계획, 재정계획 등이 있다. 넷째, 비생산적 부문들의 발전을 반영하는 항목들로서 교육계획, 문화계획, 보건계획 등이 있다. 또한 인민경제계획 의 지표체계는 종합지표, 세부지표, 양적지표, 질적지표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계획항목과 지표 체계는 고정불변한 것이 아니라 당이 제시하는 정치경제적 과업에 따라 변화한다. 이 밖에도 인민경제계획의 형태는 계획기간에 따라 전망계획과 현행계획으로, 계획 작성단위에 따라 전략계획, 작전계획, 전투계획으로 구분한다. 또 해당 단위 앞에 내세우는 과업에 따라 부문계

231 획과 지역계획으로 구분한다. 그리고 이 모든 계획화 사업은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방침이 철저히 관철되도록 하고 있다. 인민경제계획의 법제화 위와 같이 북한의 인민경제계획은통치자의 교시를 지침으로 삼아 통제가 이루어져 오다가, 1999 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2차 회의에서 인민경제계획법 을 채택하여 북한 역사상 처음으로 법제화되었다. 당시 인민경제계획법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아닌 전체회의 의안으로 채택됨 에 따라 인민경제계획법이 가지고 있는 법률로서의 비중을 나타내었다. 인민경제계획법은 6장 48조 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2001년, 2009년, 2010년에 세 차례 개정이 이루어졌다. 2001년 개정에서는 수출 강조, 계획 작성 시 현실조건 반영, 경제사업에서의 실리 중시, 계획사 업에서의 하부단위 및 생산자의 열의와 창의성 강조 등 실용주의적 측면이 포함돼 있음을 알 수 있 다. 또한 기존의 통제숫자 와 예비숫자 로 통제되어 있는 계획 작성절차가 보다 간소화되고 하부 기 관, 기업소 간 수요에 맞물리는 방식으로 권한이 위임되었다. 그러나 2010년에는 다시 국가의 관리 통제를 강화하는 방향으로 개정되었다. 법안 제정의 일차적 의미는 현재 북한이 처해 있는 경제 현실을 반영하여 북한 경제가 나가야 할 방향을 확고하게 하기 위해 제정되었으며, 동법의 제정을 통해 이완된 공식부문의 규율 및 질서를 재확립하겠다는 의도를 나타내고 있다. 또한 1990년대 이후 추락한 현실 경제규모를 반영하여 사회 주의 경제계획을 원점에서 새롭게 재작성해야 할 필요성도 제기되었다. 이에 따라 경제 활성화 정책 을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효과적인 계획안 작성과 이에 기초한 계획화 사업의 변화가 필요하다 는 현실을 반영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계획의 일원화 세부화, 국가계획위원회

232 인민경제대학 인민경제대학은 북한의 대표적인 경제 및 행정 부문의 간부양성기관이다. 이 대학은 중앙과 지방 의 각급 행정기관과 공장 기업소들의 경제 및 행정일꾼 양성을 그 목적과 기능으로 하고 있다. 현재 평양시 대동강구역 의암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고급 경제간부 양성에 목적을 두고 있는 만큼 김일성 고급당학교와 금성정치대학 등과 함께 중앙당이 학교의 전반적인 관리를 담당한다. 1946년 7월 1일 중앙고급지도간부학교로 창립되어 초기에는 3개월을 기본으로 하여, 6개월 및 1 년의 학제를 두고 중앙과 지방의 정권기관일꾼들과 경제기관, 기업소일꾼들을 체계적으로 양성하는 기관으로 기능했다. 1954년 정치경제대학과 통합되어 인민경제대학으로 확대 개편했다. 1990년대 후 반에는 외교 및 무역 부문 일꾼 양성을 담당해오던 국제관계대학을 흡수 통합하였다. 국가 및 경제관리의 모든 부문에 요구되는 간부들을 종합적으로 양성할 수 있는 여러 학과가 개 설되어 있다. 국가경제건설학과, 인민경제계획학과, 공업경제학과, 상업경영학과, 재정운영학과, 농 업경제학과, 부기학과, 통계학과 등의 학과가 개설되어 있으며 300명의 교직원에 학생은 통신학부 1천여 명을 포함해 3천여 명에 이른다. 학제는 후비간부들(주로 30세 이하의 젊은층)을 양성하는 4년제 기본반과 일반대학 졸업생들을 대상하는 2년제 기본반, 현직 간부들을 재교육하는 6개월반과 한 달 강습반, 경제 부문 일꾼들을 키 워 내는 연구원 등이 설치되어 있다. 이밖에 대학에는 혁명사상연구실, 대안의 사업체계 연구실, 농업지도체계연구실을 비롯한 수많은 인민경제 부문별 연구실과 영화강의실, 외국어녹음강의실, 도서관 등이 설치되어 있다. 1972년 4월과 1996년 6월 두 차례에 걸쳐 김일성훈장을 수훈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고급당학교

233 인민대학습당 인민대학습당은 북한의 중앙도서관 격인 대표적 복합문화시설 중 하나이다. 1945년 11월 5일 평 양시립도서관으로 처음 개관되었으며, 1946년부터 국립중앙도서관으로, 1973년부터 중앙도서관으로 개명되었다. 이 중앙도서관은 다시 김일성의 교시에 의하여 인민대학습당으로 발전되었다. 1982년 4월 평양 남산재 위에 처음 개관한 이 건물은 1979년 12월에 착공하여 1년 9개월이라는 짧은 기간에 완공되었는데, 총 건축면적 10만m2에 10개 동의 한식 10층 건물로 이루어져 있다. 6,000 석의 좌석을 가진 23개의 열람실과 14개의 강의실, 여러 개의 통보실과 문답실, 음악감상실이 배치되 어 있으며 강의실과 통보실에는 녹음기, 녹화기, 텔레비전, 영사기, 환등기 등 현대적인 교육 설비들 이 갖추어져 있다. 북한에서는 인민대학습당을 사회교양중심기지 라고 부르고 있다. 도서관 운영과 관련하여 전국 의 도서관을 학술적 통일적으로 지도하고 있다. 도서관의 기능 외에도 일반 주민들을 대상으로 한 교육 프로그램을 운용하여 주민들의 종합적인 학습터 라고도 불리고 있다. 교육 내용은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및 외국어 강의 등이며 강 의 내용은 매달 라디오와 텔레비전을 통해 방송된다. 특히 최근에는 컴퓨터 교육시설도 확충하여 주 로 직장인들을 대상으로 컴퓨터 재교육과 활용법을 가르치고 있다. 또 강의실과 열람실에는 열람자 들에게 편의를 제공하기 위해 현대적 과학기술 기재와 특수교육설비가 갖추어져 있다. 인민대학습당에서는 강의를 기본으로 하면서 여기에 통보, 문답, 녹음 강의를 배합하고 있다. 인 민대학습당에서는 대학에서 가르쳐주지 않은 새로운 과학기술적 문제들을 가지고 강의를 조직하며 과학이론 강연, 과학기술 강습, 요청강의, 집중강의, 외국어 강습을 진행하고 있다. 북한의 과학기술 보급기지, 정보기지로도 여겨지며 자료 조사와 과학기술정보사업을 진행하여 100만여 건의 자료기 지를 조성하고 김일성종합대학과 중앙과학기술통보사, 발명국을 비롯한 전국의 100여 개 단위의 과 학 연구기관, 공장, 기업소들과 컴퓨터 망을 형성하여 과학기술 정보자료를 제공하고 있다. 개방 시 간은 평일 오전 9시부터 오후 9시까지이고, 주말에도 개방하며, 휴관은 매달 격주로 월요일에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광장, 만경대학생소년궁전, 4.25문화회관

234 인민무력부 인민무력부는 군 관련 외교업무와 군수, 재정 등 군정권( 軍 政 權 )을 행사하는 기관이다. 인민무력 부는 1948년 북한정권 수립 시 민족보위성으로 출범했으며, 1972년 12월 사회주의헌법 채택 시 현재 의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1982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7기 제1차 회의 결정에 따라 정무원(현 내각)에 서 분리되었으며, 1986년 제8차 내각 출범 시 중앙인민위원회 직속기관으로 이관되었다. 그 후 1998 년 헌법 개정 및 후속 국방위원회 명령으로 국방위원회 직속의 인민무력성으로 개칭되었다가, 2000 년 9월에 다시 인민무력부로 개칭되었다. 북한의 군사조직과 군 지휘체계는 제도적으로 특이한 면이 있다. 인민무력부는 외형상 우리의 국 방부에 해당하지만 조직의 기능과 권한 면에서 매우 다르다. 북한의 군사조직과 제도를 보면, 우선 북한 헌법상 북한의 최고 군사지도기관은 국방위원회이며, 국방위원회는 전반적인 국방사업을 결정 하고 지도하는 기관으로 되어 있다. 총정치국은 군의 당조직과 정치사업을 관장하면서 군 인사권 등 실질적 군정권을 행사하고, 총참모부는 군사작전을 지휘하는 군령권( 軍 令 權 )을 행사한다. 한편 인민 무력부는 총정치국과 총참모부와는 외견상 수평관계를 유지하면서 제한된 군정권을 행사한다. 과거에 비해 인민무력부의 위상과 기능은 약화되었으나 군의 대표기능을 수행하면서 주로 후방 사업을 담당하고 있다. 인민무력부의 산하 핵심부서는 후방총국 이다. 북한에서는 군인들에게 식품, 의류, 유류, 의료 등을 공급하는 사업 전체를 후방사업 이라고 부르며, 후방총국은 보급품 군수물자 의 지원과 전시 대비 비축물자 확보 및 조달업무를 담당한다. 후방총국 외에 인민무력부 산하 주요부 서는 대외사업국, 군사건설국, 군사동원국, 기술총국 등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국가안전보위부, 국방위원회, 인민보안부, 총정치국, 총참모부

235 인민반 북한에는 해방 직후부터 최말단 행정 협조조직으로 인민반 을 두고 있다. 우리도 주민 거주지에 동 단위 밑에 통 반이 있는데 서로 형식은 비슷하다. 북한의 인민반은 1946년 토지개혁 초기에 인민 위원회의 사회적 협조단위로서 전국적으로 조직된 것이 그 시초라 할 수 있다. 당시 토지 면적 통계 를 인민반 단위, 부락 단위, 리 단위, 면 단위로 집계하는 방식을 채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북한은 인민반 제도를 강화시켜 오늘날 북한주민은 누구나 할 것 없이 모두 인민반에 소속되어야 한다. 각 반은 반장에 의해 지도된다. 반장은 소속 주민들의 추천형식을 거쳐 시 군(구역) 인민위원회 동사무소에서 지명한다. 대체로 충성심과 신분이 좋은 집안의 여성 중에서 선택된다. 이외 구성원으 로는 세대주 반장, 위생반장, 선동원 등이 있다. 원래 20~30가구로 구성됐으나 아파트 건설 등 도시의 인구 밀집화 현상이 두드러짐에 따라 1994년 이후 20~40가구로 10가구 늘려 조직되고 있다. 북한은 인민반에 대해 당과 국가의 정책을 관철하며 국가사회사업을 집행하고 생활을 알뜰히 꾸 리기 위하여 일정한 수의 가구를 묶어 조직한 국가 사회생활의 기층조직의 하나 로 규정하고 있다. 인민반은 생활총화 등을 거치면서 양육문제, 청소 노력동원, 공공질서 유지 등 해당 거주지역내의 현안들을 처리하는 시스템으로 운영된다. 북한은 고난의 행군 이후 사회체제가 점차 이완되어가자 인민반 제도를 통한 주민통제를 강화해 오고 있다. 인민반 안에 인민반장 외에 세대주 반장도 두고 있다. 인민반장은 인민반의 전체 주민의 동태 감시를 맡고, 세대주 반장은 남편들만 별도로 관리하는 역할을 맡는다. 지방은 덜하지만 평양시 같은 경우, 1970년대 중반 이후 세대주 반장제도가 활성화되어 있다. 인민반장은 전체 주민들을 대상 으로 대 주민활동을 하는 가운데 세대주 반장은 남편들만을 상대로 인민반 회의, 인원 동원, 강연 등을 주최하기도 하고 특히 거주민들의 퇴근 후 동태까지 파악 보고하는 임무가 주어져 주민들 사이 에 막강한 권력자로 통한다고 한다. 일반 행정기관에 근무하는 사람들은 동 인민반의 감시를 벗어나기 위해 기관아파트를 기피하고 있다. 또 국가 배급제가 여의치 않고 시장이 확산되면서 조직 연대감이 희박해지고 있어 인민반의 역할 체계도 과거에 비해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노동자구, 생활총화

236 인민보안부 인민보안부는 치안 유지를 주 임무로 하는 국가기구로서 우리의 경찰청에 준한 다.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무력부와 함께 북한의 3대 체제 보위기구이다. 연혁 인민보안부는 소속과 명칭 변경 등 조직 역사가 복잡한 편이다. 북한은 1945년 10월 노동당을 창 당하고 곧이어 정치보안국을 창설하여 치안을 전담시켰다. 정치보안국은 1948년 북한정권 수립과 함 께 내무성의 1개국으로 존재하다가 1951년 3월 사회안전성으로 독립되었다. 1972년 12월 사회주의헌 법 개정과 함께 사회안전부로 이름이 바뀌어 정무원(현 내각) 산하로 들어갔으나, 1982년 4월 최고인 민회의 제7기 제1차 회의 결정에 따라 정무원 산하부서에서 제외되었다. 1986년 12월 말 최고인민회 의 제8기 제1차 회의에서 다시 정무원 산하부서로 편입되었다. 1998년 9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 차 회의에서 사회안전성으로 개칭되었고, 2000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3차 회의에서 인민보안 성으로 개편되었다. 2010년 4월 인민무력부, 국가안전보위부와 함께 국방위원회 직속으로 되면서 현 재의 인민보안부로 개칭되었다. 기능 및 역할 인민보안부의 기본임무는 사회의 안전질서를 유지하고 국가와 인민의 재산과 생명을 보호 하는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으로 가장 중요하게 수행하는 임무는 사회주의 건설에 방해되는 요소를 적발 하여 제거하며, 노동당 독재를 강화하고 전체 주민을 통제하는 일이다. 인민보안부는 다음과 같은 임무를 수행하고 있다. 첫째, 체제와 정권수호를 위해 반국가, 반혁명 행위를 감시하는 것을 최우선적인 임무로 수행하고 있다. 둘째, 당과 국가의 보안사업을 총괄하고 있어 국가기관의 기밀문서 보관 관리 및 운반(문서수발) 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셋째, 치안질서 유지 업무를 총괄하는 기본기능을 담당하면서, 각종 범죄예방 및 수사활동, 비사회주의 요소 적발 업무에 주력하고 있다. 또한 교통질서 유지 및 단속, 교통사고 처리, 운전면허, 자동차관리 등의 업무를 수행 한다. 넷째, 주민의 사상동향 감시를 담당하면서, 주민 성분분류, 주민의 거주이동 통제, 공민증 발급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다섯째, 국가 주요 시설물 건설 및 도로관리 업무를 수행한다. 하천관리, 산림 보호, 수자원보호 등의 환경 및 국토관리 업무도 지원한다. 여섯째, 일반 경찰업무 이외에도 소방관 리, 지진관리, 지하철 운영관리, 교화사업, 자체 외화벌이 사업, 주소 안내 등의 업무를 수행한다. 또 한 여객열차의 안전 및 여행 질서 단속, 북한 전역의 교화소와 노동교양소 지도 감독 등의 업무도 수행한다. 조직 현황 인민보안부의 중앙조직은 인민보안부장, 제1부부장과 10여 명의 부부장 그리고 여러 개의 부서로 편성되어 있다. 먼저 당조직으로 정치국과 보위부가 있으며, 참모부서는 경비총국, 경비훈련국, 공민

237 등록국, 공병총국, 교화국, 도로총국, 외사국 등의 부서를 두고 있다. 체제보안 간부를 양성하는 교육 기관인 인민보안대학은 2012년 10월 김정일인민보안대학으로 개명하였다. 인민보안부의 지방조직은 특별시, 직할시 및 도 보안국, 시와 군 및 구역의 보안부, 동, 리의 보안 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각 도 보안국(우리의 시 도 지방경찰청)은 전국 12개 시 도별로 편제되어 있고, 200여 개의 시 군 구역에 보안부(우리의 경찰서)가 있다. 북한은 김정은 정권 첫해인 2012년 11월 23일 우리의 파출소장격인 전국 분주소장들을 평양에 불러 모아 불순분자 색출 강화를 골자로 하는 회의를 13년 만에 열기도 하였다. 우리의 경찰관을 북에서는 과거에 안전원 이라고 부르다가 인민보안성(부)으로 바뀐 이후로는 인민보안원 이란 명칭으로 부른다. 관련 검색어 _ 국가안전보위부, 국방위원회, 인민무력부

238 인민생활공채 인민생활공채란 북한이 재정확보와 시중의 통화량 조절 등을 위해 2003년에 발행한 10년 만기 채권 3종을 말한다. 배경 인민생활공채는 북한이 재정적자를 보전하고 2002년 7.1 조치 이후 늘어난 통화량을 조절하기 위 해 발행한 것으로 1등 당첨 시 액면가의 50배를 돌려준다는 조건으로 북한주민은 물론 해외동포를 상대로 대대적인 판매사업을 벌였다. 또 모든 도 시 군과 리 동 읍까지 총망라하는 운영조직을 설치 하여 전 주민의 참여를 유도하였다. 북한당국은 인민생활공채 판매대금을 발전소 건설과 현대화에 우선적으로 사용하며, 평양 중심지역의 주택 및 거리 정비, 평양시와 평안남도, 남포시 경지정리, 백 두산지역 혁명사적지와 혁명전적지 건설에 사용한다고 발표했다. 주요 내용 북한은 2003년 3월 27일 2002년 국가 예산집행의 결산과 2003년 국가예산에 대한 보고 를 실시 하며 인민생활공채의 발행을 선언하고 5월부터 판매에 들어갔다. 북한이 발행한 인민생활공채는 액 면가 500원, 1천원, 5천원 등 3종류로 5월 1일부터 2013년 4월 말까지 10년 만기이며, 추첨에 의해 당첨금과 원금을 되돌려 주는 방식이다. 인민생활공채는 북한 정권 수립 이후 두 번째로 시도된 공채 발행이었다. 북한은 1950년에 인민 경제발전채권 이라는 공채를 발행한 적이 있다. 공채발행은 기본적으로 북한이 중앙은행 차입이나 화폐증발 없이 시중의 자금을 흡수할 수 있어 인플레이션을 억제하고 경제 내부의 자금순환을 원활 하게 하는 방법이다. 그러나 공채발행이 2003년도 1회에 그치고 있어 당국의 채무 누적 상환부담은 없는 반면 인플레이션 억제나 자금순환 촉진방안으로서의 실효성은 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다만 북한은 공채판매를 통해 수출입 불균형과 과도한 군사비 지출 등으로 인한 심각한 재정적자 를 보전하고 경제개혁 기반조성을 위한 인프라 투자재원으로 활용하면서 단기적으로는 7.1 조치 이 후 심화된 물가상승을 일부 억제하는 효과를 거두고자 하였다. 특히 북한은 만성적인 에너지난과 원 자재난 등의 문제를 내부 자본을 동원하여 해결하고자 하였다. 평가 인민생활공채는 경제 활성화를 위한 역할만이 아니라 공채를 구매한 개인들을 애국적 소행으로 치켜세우고 공채구매 운동을 벌임으로써, 미국과 일본의 경제봉쇄에 대항하는 모습을 밖으로 내세우 고 안으로는 애국심으로 고취시켜 일심단결의 정치사회적 통합을 추구하는 등 다양한 목적과 의도로 진행되었다. 인민생활공채는 북한주민들의 큰 인기를 받지는 못했다. 기관, 기업소 단체들에게 일괄적으로 강 제의무를 매겨 판매할당을 하기도 했다. 2003년 판매한 공채는 2011년부터 환불 상환이 가능하도록 하였고, 일부 주민들은 환불을 받은 사람도 있는 것으로 보도되었다. 또 추첨을 통해 1등에 당첨되면

239 5천원짜리를 몇 만원씩 주는 것으로 전해진다. 북한보도에 의하면 4차례(2003년 12월, 2004년 7월, 2004년 12월, 2005년 12월) 추첨을 실시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추가 발행여부에 대해서는 알려지지 않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7.1 경제관리개선조치, 화폐개혁

240 일괄타결 동시행동 일괄타결 동시행동 원 칙은 북한 핵문제 해결을 위해 개최된 6자회담에서 북한 이 제기한 것으로, 북한에 대한 미국의 체제보장과 경제지원 그리고 북한의 핵 포기 문제를 일괄타결하고 합의사항을 동시해 조치해 나가는 것을 의미한다. 배경 북한은 2003년 4월 베이징에서 개최된 미 북 중 3자회담에 이어 같은 해 8월 개최된 6자회담에서 북핵문제 해결에 대한 기본입장으로 일괄타결 동시행동 원칙을 제시했다. 북한은 미국의 북한에 대 한 체제보장과 경제지원이 북한의 핵포기와 일괄타결 동시행동 원칙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고 주 장했다. 이에 대해 미국은 북한의 고농축우라늄 개발계획이 제네바 합의를 위반한 행위이므로, 선 핵포 기 가 이루어져야 하며 이 과정에서 보상은 없다는 입장을 강조했다. 북한은 미국과 북한이 서로 상 대측에 요구하는 사항들을 일괄타결 하고 이를 단계별로 나눠 동시이행 해 나갈 것을 제의하였다. 미국 역시 완전하고 검증가능하며 불가역적인 폐기(CVID) 원칙에 입각한 선 핵폐기 입장을 견지했 다. 협상이 진행되면서 북한은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도 가능하다는 식으로 완화된 태도를 보였으 며, 미국도 동시행동 조치를 부분적으로 수용했다. 이러한 논의의 결과로 9 19 공동성명 과 2 13 합 의(초기 조치), 10 3 합의(2단계 조치) 가 도출되었다. 관련 경과 북한은 2003년 8월 27일 개막된 제1차 6자회담에서 일괄타결 동시행동 입장을 구체화한 4단계 로드맵을 제시하고, 북한과 미국이 동시행동에 나설 것을 제안하였다. 1단계에서 미국의 중유공급 재개 및 북한의 핵개발 포기 의사 천명, 미 북 불가침조약 체결을 동시에 실시하고, 2단계에서 북한 의 핵사찰 수용과 미 북, 일 북 수교를 이행하며, 3단계에서 미사일 문제 해결과 경수로 건설이 이루 어진 다음, 마지막 4단계에서 핵폐기를 하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미국은 선 핵폐기 입장을 견지 하면서, 북한이 먼저 핵을 폐기한 후에 대북 경제지원과 식량지원 등을 논의할 수 있다는 입장을 밝 혔다. 양측의 팽팽한 입장 차이로 1차 회담이 성과 없이 종료된 상황에서, 미국은 2004년 대선을 앞두고 선 핵폐기 에서 핵폐기를 위한 준비조치 로 입장을 다소 완화했다. 북한도 2003년 12월 9일 외무성 대변인을 통해 다음번 6자 회담에서는 최소한 말 대 말 공약과 함께 첫 단계 행동 대 행동 조치라도 합의하자. 는 다소 유연한 태도를 보였다. 미국과 북한은 이러한 과정을 거쳐 2004년 6월 23일 개최된 제3차 6자회담에서부터 양측의 구체 적인 협상안을 제시하고 실질문제를 협의하기 시작하였다. 미국은 초기단계와 핵폐기 단계를 나누어 초기단계에서 북한이 모든 핵 프로그램을 신고하고 동결조치를 취할 경우 중유 제공, 잠정적 다자안 전보장, 테러지원국 명단 삭제 및 경제제재 해제문제 협의 등 상응조치를 취한다는 입장을 제안했다

241 이처럼 조정된 입장을 바탕으로 6자회담 참가국들은 2005년에 북핵문제 해결과 관련된 서로의 요구사항을 포괄적으로 담은 9 19 공동성명 을 채택하였다 공동성명 제5항에서 참가국들은 말 대 말,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 방식으로 상호 조율된 조치를 취하기로 합의했다. 2007년에는 9 19 공동성명의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를 담은 2 13 합의 와 2단계 조치를 담은 10 3 합의 를 도출해 냈다. 평가 북한이 일괄타결 동시행동 원칙을 내세운 것은 무엇보다 미국의 선 핵폐기 주장에 대응하려는 측면이 강한 것으로 평가되고 있다. 핵문제가 미국의 대북 적대시 정책에서 비롯된 것이라는 자신들 의 입장을 정당화하고, 핵폐기를 핵문제 해결 프로세스의 마지막 단계에 설정할 수 있다는 논리에 기초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협상 전술적 측면에서도 일괄타결 동시행동 이 유리하다고 보고 있다. 북한이 제시할 수 있는 협상카드가 상대측보다 많지 않은 상황에서 양측의 카드를 포괄적으로 놓고 협상하는 것이 자신들에게 이익이라는 계산이다. 북한의 주장은 최대한 핵폐기를 늦추면서 경제적 보상을 확보하려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던 반면, 우리 정부와 미국의 입장은 실질적이고 불가역적인 핵폐기 목표를 달성하는데 목적이 있다는 점에서 차이가 있었다. 관련 검색어 _ 벼랑끝 전술, 북한의 핵실험

242 일 북 수교협상 일 북 수교협상은 1990년 북한의 노동당, 일본의 자민당과 사회당의 3당 공동 선언 이 래 본격적으로 추진되었다. 예비회담이 개최된 1990년 이후 20여 년이 지났지만 북한과 일본 간의 수교협상은 여전히 난항을 겪고 있다. 2차례의 정 상회담과 13차례의 수교협상의 쟁점은 크게 북한의 핵 미사일 문제, 식민지배 배상 및 전후 배상 문제, 일본인 납치 문제, 과거사 청산 및 사죄 문제였다. 그 리고 협상의 결렬과 재개는 미 북관계의 변화에도 밀접하게 연관되어 있었다. 배경 1980년대 말 북한은 동유럽 사회주의권의 붕괴와 중국의 개혁 개방 영향을 받아 대외관계에 보다 적극적인 관심을 갖게 되었다. 특히 지리적으로 가깝고 앞선 기술과 자본이 있어, 경제 지원을 받을 가능성이 있는 일본이 그 첫째 대상이었다. 북한의 대일본 접근은 또한 우리 정부의 북방정책에 대한 외교적 대응이라는 측면도 있었다. 한편 일본 또한 당시 탈냉전 이후 전개될 세계 질서의 재편 흐름을 예의주시하며 북한과 새로운 관계를 모색하기 시작했다. 1989년 3월 다케시타 노보루 일본 수상은 국회발언을 통해 북한을 포함 한 한반도에 대한 과거 식민지 지배를 반성하고 사과한다는 뜻이 담긴 신견해 를 밝힘으로써 북한과 의 수교협상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했다. 일본 사회당은 북한과 일본 정부의 중재 역할을 수행하였으 며, 3당 공동선언 이후 본격적인 수교협상이 시작되었다. 경과 3당 공동선언 에 따라 1990년 11월~12월 일 북 국교 정상화를 위한 예비회담이 베이징에서 개최 되었으며, 이후 1991년 1월부터 1992년 11월까지 8차례에 걸친 본회담이 진행되었다. 그러나 식민지 지배에 대한 보상 문제, 북한 핵개발 문제, 이은혜 문제 등에 대한 입장 차이로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후 북한의 외교 중심은 대일 국교 정상화 노력으로부터 북한 영변 핵시설에 대한 국제 사찰을 둘 러싸고 미국과의 협상으로 이동하였다. 미 북관계가 호전되고 1995년 KEDO(한반도에너지개발기구)가 발족함에 따라 북한의 초청으로 일본 연립 3여당 대표단이 방북하였고, 북한 노동당과 협상 재개에 합의하였다. 그러나 1997년 2월 여중생 요코다 메구미의 북한 납치 의혹이 제기되자, 일본의 여론이 극도로 악화되었다. 1998년 8월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 시험 발사를 계기로 일본은 북한과 수교협상을 동결하고, 대북 식량지원 유보 등 제재조치를 단행함으로써 양국관계는 급랭하였다. 1999년 9월 미 북 고위급회담에서 북한 미사일 발사 유예, 경제제재 완화 등에 합의함에 따라 일 북관계도 다시 호전되기 시작하였다. 같은 해 12월 무라야마 전 총리를 단장으로 하는 초당파 의원 대표단이 평양을 방문하여 북한 노동당 김용순 비서와 수교회담을 재개한다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2000년 4월부터 10월까지 3차례 회담이 진행되었으나 결렬되었고, 일본 경찰의 조총련계 은행 수색, 괴선박 사건 등으로 다시 양국관계가 경색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꾸준한 물밑 접촉을 통해 2002년 9월 17일 고이즈미 총리가 평양을 방문하여

243 제1차 정상회담이 개최되었다. 여기에서 합의된 평양선언 은 국교 정상화 교섭 재개, 일본의 식민지 지배 사과와 경협 방식에 의한 대북 경제지원, 일본인 납치 문제 사과와 재발 방지, 핵 관련 국제합의 준수 및 미사일 발사 유예 등이다. 그러나 일본인 납치 사건에 대한 일본 내의 여론이 급격하게 악화 되고 북한의 우라늄 핵개발 의혹에 따른 2차 북핵 위기가 발생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2002년 10월 개최된 제12차 회담은 아무런 성과도 내지 못하고 결렬되었다. 2004년 5월 22일 제2차 정상회담이 개최되어 수교회담 재개, 납치 생존자 5명 귀국, 행방불명자 재조사 등에 합의하였다. 하지만 2차 정상회담 이후 납치자 가족 중 생존자 5명이 일본으로 귀국했음 에도 불구하고, 이후의 일본 내 여론은 다시 젠킨스 가족 귀환 문제와 가짜 유골 사건 으로 악화 일 로를 걷게 되었다. 2006년 2월 개최된 제13차 회담도 서로의 입장 차이만 확인하고 결렬되었다. 한편 북핵문제와 더불어 점차 증폭되고 있는 일본 내 보수화로 인하여 일 북 간 수교협상은 진전을 보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북 러조약, 북 중조약

244 자력갱생 북한에서 자력갱생이란 오직 자체의 힘으로 온갖 난관을 물리치고 살아가는 것을 의미한다. 즉 혁명과 건설에서 모든 문제를 자체의 힘으로 끝까지 하려는 혁명정신과 투쟁원칙을 말한다. 배경 자력갱생은 본래 중국공산당의 중요 지도방침의 하나로, 1959년부터 계속된 3년간의 자연재해와 1960년대 소련의 지원이 중단되면서 중국 내에서 제기되었던 혁명적 슬로건이다. 북한 역시 1960년 대 중분쟁으로 중국과 소련의 원조가 삭감되어 5개년 계획(1957~1961년)에 차질이 생기자, 주민의 노력동원 일환으로 이 슬로건을 차용하였다. 이후 자력갱생은 자립적 민족경제건설의 원칙적 요구로 정식화되었으며, 경제정책 수행의 기본자세와 태도로, 혁명적 기본노선의 원칙적 입장으로 강조되고 있다. 주요 내용 김정일은 <주체사상에 대하여>란 글 속에서 자력갱생이란 자기의 힘으로 혁명을 끝까지 하려는 공산주의자들의 혁명정신이며 투쟁원칙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이처럼 사상정신과 사업원칙으로 절 대적 중요성을 갖고 있는 자력갱생은 다음과 같은 의미를 담고 있다. 첫째, 자력갱생은 독자성과 함께 자주적 입장이 주되는 내용 구성을 이룬다. 혁명과 건설에서 모 든 문제를 자신이 책임지고 자체의 힘으로 풀어나감으로써 책임을 회피하는 것이 아닌 주인다운 입 장 을 지켜나가도록 하는 원칙이 자력갱생이다. 이로부터 없는 것은 만들어내고 부족한 것은 찾아내 며 부닥치는 난관과 시련을 자체의 힘으로 뚫고 나가는 것이 자력갱생의 중요한 내용을 이룬다. 둘째, 자력갱생은 혁명적 입장, 노동계급의 입장과 관계되어 내용 구성을 이룬다. 자력갱생은 자 립적 민족경제건설의 원칙으로써 모든 것을 자기 국민의 힘과 자기 나라의 자원을 동원하고 자체의 자금과 기술에 의거하여 경제를 주동적으로 발전시켜 나간다는 것이다. 자원이나 기술이 부족한 북 한이 외국에 의존하지 않고 자체의 자원과 기술에 의거하여 경제를 이끌고 나간다는 것이다. 셋째, 자력갱생은 어디까지나 자신이 책임지고 끝가지 수행하는 혁명적 입장을 철저히 견지할 것 을 요구한다. 이것은 어떤 어려움이 있어도 중도반단( 中 途 半 斷 )하지 않는 강한 희생정신을 요구하며 최대한 증산하고 절약하는 애국정신을 의미한다. 넷째, 자력갱생은 모든 일꾼들이 정치적 자질과 과학기술수준을 끊임없이 높일 것이 요구된다. 이는 부족한 자원부존을 효과적으로 이용하며 나라의 살림살이를 발전시키기 위한 요구로 제시된다. 오늘날 북한의 자력갱생은 북한식 사회주의 건설의 사상적 정수이자, 원칙적 입장이며, 자력갱생 으로 모든 문제를 해결하는 사업방법의 근본열쇠로 제기되고 있다. 평가 북한이 주장하는 자력갱생의 개념은 기본적으로 주민들에게 높은 사상의식의 강조를 통해 헌신

245 성, 희생성, 절대성, 무조건성을 강조함으로써 체제의 무비판적 태도, 순응적 태도를 내면화시키게 된다. 최근 북한의 자력갱생 개념은 강조점을 달리 하며 폐쇄적 자력갱생 에서 개방형 자력갱생 으 로 변화하고 있다. 2000년대 들어서서 북한은 실리를 강조하고, 지도일꾼들의 과학기술수준을 높일 것을 요구하는 21세기형 자력갱생, 개방형 자력갱생을 통해 보다 유연하게 자력갱생 개념을 사용하 고 있다. 그러나 자원과 기술이 부족한 북한의 경제회복을 위해 적극적인 대외개방과 국제협력이 필 요한 상황에서 자력갱생에 대한 강조는 결국 북한 낙후화의 원인이 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단번도약, 대홍단정신, 우리식 사회주의, 자립적 민족 경제건설 노선

246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북한이 말하는 자립적 민족경제란 생산의 인적 물적 요소들을 자체로 보장할 뿐 아니라 내부에서 생산 소비적 연계가 완결되어 독자적으로 재생산을 실현 해나가는 체계를 의미한다. 따라서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한다는 것은 남에 게 예속되지 않고 제 발로 걸어 나가는 경제, 자기 인민을 위하여 복무하며 자 기 나라의 자원과 자기 인민의 힘에 의거하여 발전하는 경제를 건설한다는 것 을 말한다. 연원 북한의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은 북한의 대내외 경제정책을 전면적으로 지배하여 왔다. 북한 은 1960년대에 대내 지향적 수입 대체적 발전전략 을 채택했던 제3세계 국가들보다도 대외경제관계 를 최소화하여, 북한 경제를 국제 분업질서로부터 유리된 폐쇄형 경제체제로 만들었고, 산업구조도 국제시장에서의 비교우위의 원칙이 무시된 내적 산업구조로 고착시켰다. 즉 내부자원에만 의존한 산 업기술을 구축함으로써 세계기술 발전 추세와 격차가 큰 경제구조가 조성되었으며, 북한 경제가 기 본적으로 국제경제 환경 변화에 동태적으로 대응할 수 없는 경제체질로 전락하도록 만들었던 것이 다. 주요 내용과 변화 북한은 사회주의 경제체제 확립 이후 경제 건설의 기본 정책노선으로 자력갱생의 원칙에 입각한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을 표방해 왔다. 이때 자립적 민족경제란 1 자립성과 주체성을 본성으로 하는 경제, 2 남에게 예속되지 않고 제발로 걸어나가는 경제, 3 다방면적이며 종합적인 경제구조를 갖춘 경제, 4 모든 부문이 현대적 기술로 장비된 경제, 5 자체의 원료, 연료기지에 의거하여 발전하 는 경제, 6 자체의 민족기술간부에 의하여 관리운영되는 경제로 정의된다. 북한의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에는 네 가지 원칙이 존재한다. 첫째, 자립적 민족경제를 건설하 기 위해서는 자력갱생의 원칙을 견지하여야 한다. 둘째, 경제건설에서 중공업을 우선적으로 발전시 키면서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키는 노선을 관철하여야 한다. 셋째, 자체의 민족기술인재를 육성해야 한다. 넷째, 사회주의 나라들, 신흥세력 나라들이 서로 경제기술적으로 긴밀히 협조해야 한 다는 것이 그 내용이다. 북한은 1970년대부터 그동안 주장해 왔던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을 일부 완화하고 대외개방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하였다. 서방 자본주의 국가들로부터의 차관을 매개로 한 선진기술도입을 시도 하고, 1980년대에는 합영법의 제정을 통한 외국인투자 유치를 추진했다. 그러나 1980년대까지의 대외개방 정책은 어디까지나 전술적 변화에 그쳐 대외경제 부문은 여전 히 보완적으로만 인식되는 수준이었다. 북한 경제를 국제 분업질서 내에 편입시키고자 하는 보다 적 극적인 대외개방 정책은 사회주의 경제권이 붕괴된 1990년대부터 추진되었다. 북한은 1991년 최초의 경제특구인 나진 선봉 경제 무역지대를 설치하고 외국자본과의 합작 및 직접투자를 적극 추진하기 시작하였으며, 1990년대 중반부터는 체제경쟁 상대인 남한 자본의 제한적 투자도 허용하기 시작했 다. 나아가 2006년 김정일은 경제일꾼들과의 대화 자리에서 우리에게 없는 것, 우리가 잘 만들지

247 못하는 것까지 자체로 만들려하기보다는 외국에서 사다 써서 노력과 자재의 낭비를 없애야 한다. 라 고 하며 국제 분업을 강조하는 유무상통의 원리를 제시한 바 있다. 평가 북한은 대외무역 방면에서는 변화된 언술과 교역관계를 보이고 있지만 대내산업 부문에서는 여 전히 자력갱생의 원칙을 강조하며 경제의 주체성과 자립성을 강조하고 있다. 이는 대외의존과 사대 주의의 사소한 요소도 없는 자력경제, 주체사상화된 경제를 건설하는 것이 우리 당의 확고한 의 지 ( 노동신문), 자력갱생은 우리 혁명의 승리를 위한 근본담보 ( 노동신문)라고 주장한데서도 알 수 있다. 산업 부문에서도 주체적인 생산 방식을 강조하며 주체섬유(2.8비날론 생 산 재개), 주체비료(남흥청년화학 석탄가스화 공정 조업) 등을 선전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자력갱생,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

248 장마당 장마당은 북한의 경제난이 심화됨에 따라 기존의 농민시장이 확대되면서 불 법적 시장으로 그 성격이 변화된 1990년대 북한 시장을 통칭하는 용어이다. 2003년 북한은 이 같은 불법적 장마당을 종합시장으로 합법화하였다. 내용적 으로 북한의 농민시장, 장마당, 종합시장은 경계와 구분이 존재하지만 일반적 으로 북한주민들에게는 시장을 지칭하는 광의의 개념으로 사용되기도 한다. 시장의 확대발전 이론적으로 볼 때 사회주의 경제체제는 소유의 사회화를 통해 상품화폐관계가 존재하지 않는다. 이로 인해 자본주의적 거래가 이루어지는 시장 이 존재할 수 없다. 그러나 현실 사회주의는 수요를 만족시키는 물질생산이 충분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국가의 계획적 공급 이외에서도 주민들 간의 물물 교환이 이루어지는 장 이 존재해 왔다. 북한 역시 1958년부터 개인들이 부업을 통해 생산한 농축산 물을 농민시장에서 거래할 수 있게 하였다. 즉 농민시장을 통해 계획체계 밖의 상품을 교환하거나 판매할 수 있도록 해왔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난이 심화되자 국가의 배급과 공급이 중단되었고, 북한주민들은 스스로의 생존 문제를 해결하여야만 했다. 이에 따라 주민들은 자구적 생계활동의 일환으로 농민시장을 활성 화시키게 되었다. 이제 보편적 명칭으로 사용되었던 장마당은 모든 상품거래가 가능하였고, 거래 참 여자도 기존의 농민과 협동농장원뿐만 아니라 공업 부문 종사자와 사무직 노동자로 확대되어 자본주 의적 시장의 성격을 띠기 시작했다. 장마당은 장사형태를 물건을 사서 다시 다른 사람에 되파는 되거 리장사, 지정된 매대나 고정된 자리가 없이 여기저기를 옮겨 다니며 물건을 파는 메뚜기장사, 어떤 지역에서 물건을 구입해 다른 지역으로 이동하여 판매하는 달리기장사 에서 상설시장에 앉아서 장 사하는 매대장사 로 정착시켰고, 북한 전역에는 약 300개 이상의 상설시장이 형성되는 등 전국적으 로 발달되어 나갔다. 2003년에 등장한 종합시장은 이처럼 상설화된 장마당을 북한당국이 더 이상 통제할 수 없어 합법 화한 북한 시장의 공식 명칭이다. 북한은 7.1 조치와 함께 소비재 시장인 종합시장, 중간재 시장인 사회주의물자교류시장, 수입원자재 시장인 수입물자교류시장 등을 도입하여 전국적 유통네트워크가 형성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시장정책의 변화 북한은 1990년대 중반 이후 확산되어 온 장마당에 대해 정책적 필요에 따라 묵인 내지 양성화하 기도 하고 통제하기도 하였다. 북한은 경제회복을 위해 2002년 7월 1일 경제관리개선조치를 발표하 고, 2003년에는 음성적으로 확산된 장마당을 양성화하여 종합시장으로 상설화하였다. 북한이 시장을 합법화한 것은 부족한 재원을 마련하고자 하는 이유도 있었다. 실제로 종합시장의 각 매대는 개인 및 기관, 단체 등에 임대하여 영업활동을 하도록 하고, 시장임대료 와 수익금의 일부를 국가납부금 의 명목으로 거둬들였다. 시장의 확산은 주민들로 하여금 조직생활보다는 돈벌이에 더 관심을 갖게 하였고 각종 사회적 부정부패를 증가시켰다. 그뿐만 아니라 시장은 외부정보를 유통시키는 통로 역

249 할을 하기도 하였다. 7.1 조치 이후 장마당이 급속도로 확산되고 그 과정에서 여러 가지 문제들이 발생하게 되자, 북한 은 시장이 비사회주의의 온상 이 되어가고 있다면서 시장을 통제하기 시작하였다. 2005년 하반기부 터 종합시장의 개장시간 제한, 장사 연령 제한, 매대장사 품목 수 제한, 장사 품목 제한, 메뚜기 장사 꾼(종합시장에서 고정 매대가 없는 장사꾼)의 단속 등을 통해 시장을 적절한 수준에서 관리 통제하 고자 하였다. 그러나 시장통제정책이 실효성을 거두지 못하고 오히려 시장의 사회적 파급력을 키워 나가게 됨에 따라 2008년 이후부터는 종합시장마저 철폐하고 과거의 농민시장으로 되돌리려는 시도 를 하였다. 하지만 시장을 없애려는 북한당국의 조치는 주민들의 반발로 성공하지 못하였다. 왜냐 하면, 대다 수 북한주민들에게 공식 임금은 있으나마나 한 금액이므로 시장을 매개로 한 개인경제활동을 통해 생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 북한에서 세대주(남편)는 사회주의를 하고, 아내는 자본주의 를 해야 먹고산다는 말이 있을 정도이다. 시장의 파급효과 북한 시장의 구조적, 질적 발전에 따라 북한의 시장은 생계형적 형태에서 부의 축적공간으로 변 화하여 나갔고, 이를 활용해 부를 축적하는 새로운 중간계층들도 형성되었다. 다양한 형태의 개인경 제활동(임노동, 장사, 개인 경작, 개인 가정교사, 개인 식당운영, 개인 숙박업 등)이 급속도로 성장하 면서 계획경제 부문에서의 노동력 이탈현상이 확대되었다. 나아가 계획경제 부문이 점차 시장경제 부문에 침식당하거나 의존하는 현상도 나타났고, 인민경제 내에 군경제, 당경제 등 특권경제 부문의 비중이 더욱 높아지는 현상도 나타났다. 즉 시장은 공식경제를 이완시키면서 특권경제기관들이 권력 을 배경으로 하여 불법적으로 시장에서 더욱 부를 축적하는 현상이 초래된 것이다. 이 과정에서 극심 한 양극화 현상과 부패경제의 확대 현상도 나타났고, 북한주민들의 대부분은 공식경제가 아닌 시장 경제에 의존해 생계를 꾸려나가게 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시장이 곧 북한 사회주의 체제의 시장화로 연결되지는 않는다. 시장의 도입은 많 은 부분 북한주민들의 의식과 가치관을 변화시키고, 영리활동을 비롯한 일상생활을 변화시켰지만, 여전히 시장 운영의 핵심적 메커니즘 중심에는 권력기관이 있기 때문이다. 관련 검색어 _ 농민시장, 배급제, 7.1 경제관리개선조치

250 전민군사복무제 전민군사복무제는 북한이 2003년 채택한 사실상의 징병제이다. 북한은 군사 복무법 에 따라 기존에 초모제 라 부르며 명목상으로 유지하던 지원병제를 대 상자 모두가 입영하는 징병제로 바꿨다. 배경 북한은 2003년 이전까지 모병제와 유사한 초모제 ( 招 募 制 )를 시행해왔다. 북한에서 초모란 군대 에 지망하는 사람을 모집하여 뽑는 것 을 의미하며, 이는 형식상으로 볼 때는 지원병제에 해당한다. 그러나 실제로는 초모 연령이 되면 신체 불합격자, 사회 중요직 근무자 및 산업 필수요원, 성분 불량 자, 대학생 등을 제외하고는 대부분 군복무를 하였다. 탈북자들에 따르면 이른바 1990년대 중후반 고난의 행군 이전까지는 군대에서 복무한 뒤에야 노동당에 가입도 가능하기 때문에 입대에 대한 인기가 높았다고 한다. 그러나 고난의 행군 이 어느 정도 마무리 된 뒤 북한주민들은 먹고 사는 것 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인식하기 시작했고, 먹고 사는 것에 별다른 도움이 되지 못하는 경력은 별로 중요하지 않게 인식함으로써 과거처럼 입영에 대한 인기가 높지 않게 됐다고 한다. 이로 인해 북한은 사실상의 징병제인 전민군사복무제를 채택한 것으 로 보인다. 주요 내용 북한은 2003년 3월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6차 회의에서 군사복무법 을 제정하고 전민군사복 무제의 시행에 들어갔다. 군 복무기간은 남성의 경우 13년에서 10년으로, 여성의 경우 10년에서 7년 으로 각각 3년씩 단축했다. 또 징집 연령층을 17세 이상 25세 이하로 조정했으며, 병역을 마치지 않 은 28세 미만의 남성은 무조건 징집하도록 했다. 북한에서 남성은 만 14세가 되면 초모대상자로 등록해야 하며, 만 15세에는 두 차례에 걸쳐 신체 검사를 받는다. 시 군 군사동원부에서 기초 신체검사를 실시한 뒤 이를 기초로 도 군사동원부가 정밀 신체검사를 실시하고 기초 체력검사를 통해 각 군별로 필요인원을 할당한다. 이후 중학교(우리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면서 사단 또는 군단에 사병으로 입대한다. 전문학교 진학자는 졸업 후에, 취업자는 근무한지 3년이 지나지 않은 사람을 징집 대상으로 한다. 1995년까지 는 중학교 졸업 시기인 8~9월에 75~80%를, 3~4월에는 20~25%를 징집했지만, 1996년 중학교 졸업 시기를 3월로 변경하면서 그해부터 3~4월에 주로 징집하고, 병력충원 필요시에는 수시로 징집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북한에서는 신체검사 불합격자 및 인민보안부 보안원, 과학기술 산업 필수요원, 유망 예술인과 체육인, 군사학 시험 합격 대학생, 노부모를 부양하는 독자에 대해서는 군복무를 면제해주 고 있다. 이외에도 정치적 이유로 병역면제를 받는 경우가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특히 소위 적대계층 의 자녀라고 할 수 있는 반동 및 월남자 가족 중 친가 6촌 외가 4촌 이내, 월북자, 형복무자 등의 성분 불량자는 의무징집에서 제외시키고 있다

251 한편 1990년대 중반 무렵부터 북한 내에서 자유주의와 배금주의 사조가 만연해져 중노동 직장을 희망하는 청소년이 줄어들자 1996년부터 군사복무 대상 자원을 6~7년간 탄광에서 근무하도록 조치 하고, 이들의 탄광복무 기간을 군사복무로 인정해주는 탄광복무제를 운영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평가 북한은 식량난 및 군 기피 풍조 등으로 인한 병력 자원이 감소함에 따라 일부를 제외하고 예외 없는 군입대를 실시하고, 이를 통해 병력의 세대교체를 단행해 군의 일탈행위를 억제하고자 전민군 사복무제를 시행하였다. 그러나 대학을 졸업했거나 사회생활을 하던 사람들이 늦은 나이에 군에 입 대함으로써, 이들이 군의 규율생활에 적응하지 못하고 탈영하는가 하면 구성원 간 갈등을 야기하는 경우도 적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 관련 검색어 _ 군무생활 10대 준수사항, 군민일치운동

252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은 1993년 4월 6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강성산 총리의 보고를 통해 제시된 통일 강령이다. 정식 명칭은 조국통일을 위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이다. 배경 1990년대 들어와 북한은 1970년대 초반 남북대화 시기 때 처음 제기한 민족대단결론을 유난히 강조하기 시작했다. 김일성은 1990년 5월 긴장상태 완화와 조국통일을 위한 평화적 환경의 조성 등 조국통일 5개 방침 을 제시하면서, 전체 조선 민족은 계급적 차이, 사상과 정견, 신앙의 차이를 가리 지 말고 오직 민족 공동의 이익을 앞세우는 원칙에서 단결해야한다. 며 민족대단결론을 내세웠다. 김일성은 3개월 뒤 범민족대회 참가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에서 같은 주장을 되풀이했으며, 이듬해 1월의 신년사에서도 조국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민족대단결 을 강조했다. 이와 같은 기조는 1993년까지 계속 이어지며, 그간 김일성이 민족 통일과 관련하여 내놓았던 1972년의 조국통일 3대원칙, 1973년의 조국통일 5대 강령, 1980년의 고려연방제 통일방안 등 각종 통일 관련 제안과 합쳐져 10개 항의 강령 형태로 요약되었다. 주요 내용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의 제1항은 전민족의 대단결로 자주적이고 평화적이며 중립적인 통일국 가를 창립해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김일성은 연방국가 통일방안을 되풀이했다. 제2항에서는 민족애와 민족자주 정신에 기초해 단결할 것을 주장했다. 여기서는 특히 주체 의식 을 좀먹는 사대주의와 민족허무주의를 배격해야 한다. 고 강조했다. 제3항에서는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조국통일 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 할 것을 촉구했다. 종래 주장했던 사상과 이념, 제도의 존재를 인정하고 존중할 것 이 이 항에 포함 되어 있다. 제4항에서는 동족 사이 분열과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의 정쟁을 중지하고 단결하자고 제안했다. 외세의 침략과 간섭에 공동으로 대처하자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다. 제5항에서는 북침과 남침, 승공과 적화의 위구를 다 같이 가시고 신뢰하고 단합하자고 주장했다. 이 항목의 진정한 의도는 이 강령이 발표될 당시 우리 측에서 일었던 흡수통일론을 경계하려는 것으 로, 김일성은 상대방을 흡수하지 말아야 한다. 고 직접 언급하고 있다. 제6항에서는 민주주의를 귀중히 여기며, 주의 주장이 다르다고 배척하지 말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여기서 언급된 민주주의 의 요점은 통일 논의와 활동의 자유를 보장하라는 것이며, 이는 당시 북한의 통일론에 동조 또는 공감하는 남한 내 세력의 통일 논의를 보장하라는 의도를 담고 있다. 제7항에서는 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 재부를 보호하고, 이를 민족대단결을 도모하 는 데 이롭게 쓰자고 주장했다. 고려연방제를 제안할 당시 내놓았던 통일된 이후에도 국가 소유, 협동 소유, 사적 소유를 인정한다. 는 방침을 되풀이했다

253 제8항에서는 남북한의 접촉, 왕래, 대화를 보장할 것을 다시 한 번 강조했다. 김일성은 이 항에서 접촉이나 왕래를 가로막는 온갖 장애물을 제거하고 누구에게나 차별 없이 왕래의 문을 열어놓아야 한다. 고 주장했다. 여기서 북한은 차별 없는 왕래 를 강조했으나, 정작 북한 자신은 접촉과 왕래, 대화를 허용할 때 자신의 유불리 판단에 따라 대상 인사를 선별 했다. 제9항에서는 남과 북, 해외 동포의 연대성 강화를 역설했다. 여기서 북한은 북과 남, 해외의 모든 정당, 단체와 각계각층 동포들의 조직적 연합 을 강조했지만, 이는 어디까지나 북한 당국이 주도권을 갖는 조건에서의 연대성 강화를 뜻한다.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의 마지막 항에서는 민족대단결과 조국통일을 위하여 공을 세운 사람들, 애국 열사와 그 후대들에게 특혜를 베풀 것을 제안하고 있다. 평가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은 한편으로는 민족주의 감정에 호소하여 통일을 내세우면서, 다른 한편 으로는 반외세 통일 투쟁을 은연중에 부추기는 내용을 담고 있다. 이 강령은 1990년대 초반 사회주의 권 붕괴와 이로 인한 내부 경제 붕괴 등으로 위기에 몰린 북한이 대남 관계에서 과거의 공세적 입장 에서 수세적 입장으로 돌아서면서 민족대단결 을 내세워 우리 내부의 흡수통일론을 봉쇄하고 핵문 제 등에서 한 공조를 차단 또는 방해하기 위한 방편으로 활용하려는 목적에서 제시되었다. 관련 검색어 _ 민족대단결 5대 방침, 북한의 연방제, 조국통일 3대 헌장, 조국통일 5개 방침, 조국통일 5대 강령

254 전민족대회 1979년 1월 19일 박정희 대통령이 시기와 장소와 수준에 구애됨이 없이 남북당국 간에 무조건 만나서 모든 분야의 문제들을 직접 논의하자고 제의했다. 이에 대해 북한은 1월 23일 조국통일민주 주의전선 중앙위원회 명의로 전민족대회 를 소집할 것을 주장하고 나섰다. 북한은 이 제의에서 남북의 각 정당 사회단체 대표와 각계각층 인사, 해외동포 조직의 대표 또는 개별적 인사들이 참가하는 전민족대회 를 소집하여 1 자유로운 정당 활동, 사회의 완전 개방, 2 정치 경제 문화 군사 등 다방면적 합작과 교류 실현, 3 기타 통일문제의 해결에 이로운 제반 문제를 협의하자면서, 이 대회의 준비를 위해 6월 초순 평양에서 각 정당 사회단체들의 실무급 대표들이 쌍 무적 또는 다무적 예비회담을 갖자고 주장했다. 우리 측은 쌍방 당국 간의 대화를 촉구하고 북한당국의 책임 있는 답변을 요구하는 한편, 기존 남북 간 대화기구인 남북조절위원회를 재개하자고 제의하였으나, 북한은 남북조절위원회는 그 존속 의 의의를 상실했다. 면서 전민족적인 대화와 협의기구를 마련하기 위해 예비적으로 민족통일준비 위원회 를 발족시킬 것을 주장했다. 북한은 이미 남북조절위원회가 진행되는 동안 이와 별도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열어 각계 각층의 의사를 반영하자고 주장하면서 그 성격을 변질시키려고 시도해왔다. 더구나 김일성은 1973년 4월 시아누크 환영대회에서 조절위원회에 각계각층 인사를 참여시키거나 별도로 정치협상회의를 소 집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6월의 후사크 환영대회에서는 노골적으로 각계각층 인민이 대민족회의 를 열어 통일문제를 협의 해결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이로부터 북한은 1970년대 중후반 이 대민족회 의 또는 정치협상회의 소집을 위한 선전전에 총력을 기울였다. 전민족대회 는 대민족회의 를 명칭만 바꾼 것으로서 책임 있는 당국 간의 정상적인 대화를 외면 하고 정당 사회단체 대표 또는 개별적 애국인사라는 명분하에 군중집회를 열어 남한 정부를 무력화 시키려는 철저한 통일전선방식의 책략이다. 관련 검색어 _ 남북연석회의, 대민족회의,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통일 전선전술

255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는 북한이 1990년대부터 정전협정의 규정을 무시하고 일방적으로 취한 조치를 말한다. 북한은 중립국 감시위원단 구성 국가인 체코, 폴란드 대표단의 철수 요구, 정전위원회 북측 대표단 철수, 비무장지대 불인정 및 정전협정 파기 선언 등의 조치를 취하였다. 배경 냉전체제 붕괴와 사회주의권의 몰락, 우리 정부의 북방정책 효과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해 소련 등 오랜 동맹의 군사적 보장을 잃어버리게 된 북한은 대외관계는 물론 군사적인 측면에서도 남한에 전략적 열세에 서게 되었다. 북한은 식량난, 경제난 등 내부 위기를 수습함과 동시에 대외적으로 이 와 같은 전략적 열세를 극복하고자 하는 새로운 전략을 추구하였다. 즉 정전협정 체제를 평화협정 체제로 바꾸어 미국을 한반도에서 중립화시키는 한편, 미국과의 관계를 정상화 하고 한 동맹관계 를 약화시키려고 시도하게 된 것이다. 그 출발점으로 북한은 1990년대 들어와 정전협정을 무력화하 는 조치를 적극적이고 구체적으로 취하기 시작했다. 주요 내용 및 경과 정전협정을 무력화시키려는 북한의 기도는 1990년대 초반부터 일관되게, 그리고 정기적으로 시 도되었다. 1991년 3월 군사정전위원회 유엔사 측 수석대표에 한국군 황원탁 소장이 임명되자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회담을 거부하기 시작했다. 또한 정전체제의 중요한 축을 담당해 온 중국 측 대표단 과 중립국 감시위원단 구성 국가 대표단들도 철수할 것을 종용했다. 이에 따라 1993년 4월 체코 대표 단이 철수하고, 1994년 12월 중국이 대표단을 소환하였으며, 1995년 2월 폴란드 대표단도 철수하였 다. 1994년 4월에는 외교부(지금의 외무성) 성명을 통해 정전협정의 실제 당사자인 미 북 사이에 평 화협정 체결을 위한 협상을 시작하자고 제의했다. 북한은 이어서 1994년 5월, 군사정전위원회 북측 대표단을 철수시키고 새로운 협상기구로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를 개설했다고 일방적으로 통보 했다. 1년 뒤인 1995년 5월에는 판문점 중립국 감시위원단 사무실과 공동경비구역 북한 측 지역을 일방 적으로 폐쇄했으며, 이듬해 4월에는 판문점대표부 담화를 통해 비무장지대를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 언했다. 이 때 북한은 자위적 조치로서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의 유지관리 임무를 포기하고 판문 점 공동경비구역과 비무장지대에 출입하는 북측 인원과 차량에 제정된 모든 식별표지를 착용하지 않을 것 이라고 밝혔다. 이로써 군사정전위원회는 정상적인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되었고 정전협정 체계는 사실상 무력화되었다. 북한은 또 1996년 2월 22일 한반도에서의 무장충돌과 전쟁을 막기 위해 최소한의 제도적 장치라 도 시급히 마련해야 하며, 평화협정 체결 이전이라도 새로운 평화보장 체계를 수립해야 한다면서 군 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하는 조 군사기구 를 조직하자고 제안했다

256 2000년대에도 북한은 판문점대표부 대변인 담화를 통해 우리 측의 군사훈련과 대량살상무기 확 산방지구상(PSI) 가입 등을 비난하면서 정전협정 무력화를 계속 주장하였다. 그리고 2013년 3월에는 북한군 최고사령부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북한의 3차 핵실험에 대한 국제사회의 제재와 한미연합군사 훈련에 반발하면서 정전협정 파기를 선언하였다. 평가 북한은 정전협정을 평화협정으로 전환하자고 주장하면서도, 정전협정을 무력화하는 조치들을 취 해 한반도의 평화를 위협하는 표리부동한 모습을 보이고 있다. 그러나 북한의 일방적인 주장만으로 정전협정이 무효화되는 것은 아니며, 정전협정은 6 25전쟁 이후 지금까지 한반도의 분단 상황을 관 리해 온 법적 제도적 장치이다. 따라서 한반도에 진정한 평화체제가 구축되기 위해서는 우선 정전협 정 준수를 통해 남북 간에 군사적 긴장을 완화시키고 신뢰를 쌓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관련 검색어 _ 조선인문군 판문점대표부

257 정치범수용소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의 공식적인 명칭은 아니다. 북한주민들은 통제구역, 특별독재대상구역, 이주구역, 정치범 집단수용소, 유배소, 종파굴 등으로 다양하게 부르며, 현재 반당 반혁명분자 등 체제위해분자 약 20여만 명을 재판절차 없이 집단 수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배경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시원은 1947년경에 운영 중이었던 것으로 알려진 특별 노무자수용소 라고 볼 수 있다. 이후 1956년 이전까지는 주로 악질지주, 친일파, 종교인, 6 25전쟁 당시 치안대 가담자 등 사회주의 체제에 위협이 된다고 판단되는 사람들과 그 가족들을 집단으로 강제 격리수용하는 정 책을 추진하였으며, 탄압의 강도는 비교적 약했다. 그러나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처형을 면한 김일성 반대세력을 대대적으로 숙청하고 격리수용함으로써 지금까지 체제 위협요인을 철저히 제거 하는 목적으로 운영되고 있다. 기능 및 현황 북한 정치범수용소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반혁명 및 반체제 활동을 했거나 잠재적인 체제 위협세 력으로 판단된 간부 및 주민들을 제거 및 격리 수용하는 것이다. 북한의 정치범수용소는 해방 이후 시기별로 수감대상과 탄압 정도에는 차이가 있었지만, 점차적으로 체제 위험세력 제거 및 격리수용 기능을 확대 강화하여 왔다. 정치범수용소는 수용인들의 탈주 소요방지를 위해 철저한 감시 통제체계를 갖춰 운영하며, 외곽 경계선에는 3~4m 높이의 4~6중 철책 울타리가 설치돼 있다. 그뿐만 아니라 탈주가 용이한 곳에는 전기철조망, 지뢰밭, 함정 등을 설치하고 외곽의 울타리를 감시 망루를 통해 감시하고 있다. 일단 수 용소에 수감되면 주민으로서의 권리는 물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 권리도 일체 박탈당한 채 생산력을 제공하는 도구로서 존재하게 된다. 입소 즉시 공민증을 박탈당하고 선거권과 교육받을 권리 등도 제약받는다. 또한 식량 생필품 배 급은 물론 결혼 출산 등도 금지시키고 있으며 면회 및 서신연락 금지 등 외부와 연락을 일체 차단당 한다. 주식은 강냉이와 감자, 밀, 보리로 수확기에 각 1회 배급하며 최근에는 식량사정 이유로 100~200g 정도 배급된다. 따라서 수용자들은 식량의 절대적인 부족으로 풀뿌리까지도 취식하는 형편 이며 판자나 거적으로 만든 집의 나무껍질 바닥에서 생활하고 있다. 이로 인해 수용자 대다수가 영양 실조 및 각종 질병에 시달리고 있는 실정이다. 수용소는 함경남북도와 평안남북도, 자강도 등 모두 지형과 산세가 험한 지역에 자리 잡고 있으 며 지역별로 보면 함남의 요덕 단천 덕성, 함북의 화성 청진 회령, 평남 개천 북창, 평북 천마, 자강도 동신 등 10여 개로 파악되고 있다. 수용소는 수용자들의 죄상에 따라 완전통제구역과 혁명화구역으로 나뉘어져 있으며 완전통제구 역은 북한이 주장하는 이른바 반당 반혁명 종파분자나 해외로 도주하려다 잡힌 정치범들이 종신 수 용된다. 혁명화구역은 상대적으로 죄질이 경미한 정치범들이 수용되며 3~10년이 지나 체제에 충성할

258 만큼 사상개조가 되었다고 판단되면 심사를 거쳐 내보내기도 한다. 이러한 수용소의 관리는 현재 이 분화되어 있는데, 총괄조정과 통제는 국가안전보위부 수용소관리국에서 담당하되 경비는 인민보안 부 산하 인민경비대에서 맡고 있다. 국제인권단체인 국제사면위원회에서 발행한 2012 연례보고서 에 따르면, 김정은 체제로의 권력 이양 과정에서 200여 명이 넘는 북한 관료들이 불법 구금된 것으로 나타났다. 그리고 요덕수용소를 포함해 규모가 확대되고 있는 정치범수용소 6곳에 최대 20만 명이 구금되어 있다고 한다. 아울러 구 금된 사람들 중 상당수가 강제노동, 식량부족, 구타, 비위생적인 환경 등으로 인해 구금 중에 사망하 거나 석방 직후 사망했다고 진단했다. 평가 정치범수용소는 북한체제에 의한 반인륜적 인권유린의 실상을 대표적으로 보여주는 실체라고 할 수 있다. 북한은 정치사상범의 개념과 범위를 반혁명분자, 불건전한 사상을 가진 자, 적대분자 등 으로 모호하게 표현하여 정치적으로 숙청할 필요가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언제든지 죄목을 붙여 제거 및 수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북한은 정치적 반대세력과 체제 위협세력을 제거함으로써 새로운 반대세력 및 저항세력의 형성 을 봉쇄하는데 정치범수용소를 활용하고 있다. 또한 각계각층의 주민들의 불평불만을 잠재우고 정치 적 행위를 억제하는 데도 활용되고 있으며, 강제착취를 통한 생산력 증대 효과도 꾀하고 있다. 1980년대 이후 탈북자들의 증언과 인권단체의 강력한 문제제기로 정치범수용소의 실태가 외부에 알려지면서, 국제사회의 정치범수용소 해체 압력이 커졌다. 그러나 북한은 이를 자신들의 존엄과 체 제에 대한 정면도전이라고 주장하면서 강력히 반발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259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 세계청년학생축전 은 반제자주와 반전평화의 기치를 내걸고 사회주의 국가와 비동맹국가 등 제3세계 국가의 청년 학생들이 함께 모여 개최하는 행사이다. 북한은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을 평양에서 개최하였다. 연원 제2차 세계대전 직후인 1945년 10월 런던에서 63개국의 청년대표들이 참여하는 세계청년대회가 개최되었다. 이 대회에서 세계민주청년연맹 이 결성되었으며, 이듬해 파리에서 열린 세계민주청년 연맹 이사회에서 국제청년축전의 개최를 결정하였다. 그에 따라 1947년 7월 제1회 세계청년학생축전 이 체코의 수도 프라하에서 개최되었다. 제7회 대회까지는 2년마다 개최되었으며, 제8~11회 대회는 5년 또는 6년마다, 제12회 모스크바대회는 7년 만에 개최되었다. 주요 내용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1989년 7월 1일에서 7월 8일까지 8일 동안 평양에서 개최되었다. 줄 여서 평양축전( 平 壤 祝 典 )이라고도 한다.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반제 연대성 및 평화와 친선 이라는 구호 아래 177개 국가에서 22,000명이 참가하였다. 특히 북한은 그 전 해인 1988년 대한 민국 서울에서 열린 올림픽에 자극받아 이 대회를 국가적인 역점 사업으로 추진하였다. 5.1경기장에서 열린 개막식에 이어, 7월 2일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된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은 정치 문화예술 체육행사 등으로 나뉘어 진행되었다. 이 가운데 정치행사 프로그램이 83%, 문화행사 가 17% 정도를 차지했다고 한다. 평양축전을 위해 대규모 경기장, 공연장, 호텔 등을 건설하였는데 대표적인 건물은 5.1경기장, 평 양국제영화회관, 동평양대극장, 평양교예극장, 양각도축구경기장, 평양국제통신센터, 만경대소년학 생궁전 등이다. 평가 1989년 제13차 세계청년학생축전이 열리던 시점은 북한이 대내외적으로 상당히 어려운 때였다. 대내 경제가 매우 악화되어 있었고 소련의 개혁 개방과 동유럽의 체제전환 등으로 대내외적으로 궁 지에 처해 있었던 시점이다. 더욱이 한국이 88서울올림픽을 치르는 등 상당히 발전하고 있는 것과 대조적으로 북한은 매우 어려운 상황에서 무리하게 평양축전 준비를 하였다. 남북 간의 체제경쟁과 대내 통치권력의 무리한 행사로 인한 후유증이 1995~1997년 고난의 행군 이라는 최악의 경제상황을 맞이하는데 한 원인이 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고난의 행군, 만경대소년학생궁전

260 제2경제위원회 북한에는 크게 인민경제라고 부르는 일반경제와 제2경제라고 부르는 군수경제가 있다. 형식적으 로 내각이 경제계획과 관리 전반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지만 실제 북한에서 내각의 권한이 미치는 범위는 제1경제(제2경제의 상대적 반대말) 즉 인민경제에 국한되어 있다. 제2경제위원회는 북한의 군수경제를 총괄하는 기관으로, 모든 군수제품의 계획 생산 분배 및 대외무역을 관장하고 있다. 북한의 군수산업이 명실공히 북한의 제2경제로 자리 잡기 시작한 것은 1966년 10월 제2차 당대표 자회에서였다. 이 회의에서 김일성은 경제건설과 국방건설을 병진시켜 나갈 것을 재천명하면서 군사 전략상 중요한 지대를 확고히 하며, 군수공업을 발전시키고 군수공업에 필요한 물자예비를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 군수공업의 강조와 확장에 따라 1960년대 말 내각에 군수공업만 전담하는 제2기 계공업부를 따로 신설하였고, 당중앙위원회에 군수공업 담당 비서를 두어 군수산업 전반을 총괄하게 하였다. 그 후 군수생산이 더욱 방대해짐에 따라 1970년대 초에 제2경제위원회를 창설하였다. 본래 제2경제위원회는 중앙인민위원회(내각 전신) 소속이었으나, 1993년 국방위원회 소속으로 변 경되었다. 이후 내각(일반경제)과는 상관없이 독자적 조직체계 및 생산활동을 전개하였다. 제2경제 위원회는 8개의 총국으로 구성되어 있고, 연구개발을 위한 제2자연과학원과 자재공급을 위한 자재상 사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리고 무기생산에 필요한 물자를 수입하고 생산품의 해외 판매를 담당하는 무역회사와 은행 등 많은 회사도 거느리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제2경제위원회는 제2의 정무원이라는 김일성의 교시에 의하여 내각과 상관없이 인민경제에 우선 하여 계획, 재정, 생산, 공급을 독자적으로 추진하고 있다. 산하의 경제기관뿐만 아니라 내각의 일반 생산기관까지 일용분공장, 일용직장 등의 명칭하에 군수생산시설을 갖추어 놓고 군수생산을 확대 하고 있다. 민수생산 기업소들에 일용분공장(직장) 을 차려놓고 군수품을 생산하게 하는 북한의 목적은 제2 경제위원회가 단독으로 모든 무기를 생산할 수 없는 것과 관련이 있다. 또한 민수생산 기업소들에 일찍부터 군수생산시설들을 갖추어 놓고 생산경험을 쌓게 함으로써 만약 전쟁이 발발했을 경우 신속 하게 군수경제로 전환시키려는 정책 때문이다. 무기생산과 관련이 있는 모든 공장에 일용분공장 또 는 일용직장 이 들어있으며, 설비가동률이 30%에도 못 미치는 현재와 같은 악조건 속에서도 군수공 업의 정상가동을 보장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 군사 경제 병진 노선

261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이하 조국전선)은 북한 내 정당 사회단체의 연합체로 구성되어, 주로 남북문제와 관련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는 노동당의 외곽단체이다. 노동당의 노선과 정책을 옹호 관철하는 당의 전위기구로서 각종 대남 제의 및 성명을 발표하였다. 연원 1949년 5월 14일 남에서 활동하고 있던 남로당, 근로인민당, 천도교청우당, 사회민주당, 남조선여 맹 등 8개 정당 사회단체는 남북한의 두 전선조직을 통합하여 조국전선을 결성할 것을 제안하였다. 남측에서 제안했지만 실질적으로는 북측과 사전에 연계되어 있었고, 6월 28일 평양에서 남북한의 71 개 정당 사회단체 대표 704명이 모여서 조국전선을 결성하였다. 기능 및 역할 당시 북한은 조국전선의 성격을 노동계급이 영도하는 노농동맹에 기초하여 조국통일을 지향하는 우리나라의 모든 애국적 민주주의 역량을 묶어세운 강력한 정치적 조직체 로 규정하고, 임무에 대해 서는 북반부의 사회주의 역량과 남반부의 애국 역량을 단합시키므로 조국통일과 조선혁명의 전국 적 승리를 위한 투쟁 을 전개할 것을 밝히고 있다. 이와 같이 조국전선은 북한의 주도로 남북의 정치 세력을 총결집하여 남쪽의 대한민국 정부를 타도한다는 목표를 전면에 내세운 것이다. 조국전선은 결성선언에서 미국과 국제연합의 간섭이 없는 자주적 통일을 표방한 후, 구체적인 통 일방안을 내놓기도 했다. 1단계로 남북의 애국적 정당 사회단체 대표 협의회를 통해 평화통일 계획 을 토의하고, 2단계로 전국적 선거지도위원회를 구성하여 1949년 9월에 총선거를 실시하자고 제안하 였다. 약 1년 후 6 25전쟁 직전인 1950년 6월에 또다시 이전에 제의한 총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 방안을 주장하였다. 이 방안 또한 남한 정부와 지도자를 배제하고 있어 출발부터 실현 가능성이 없는 것이었다. 조국전선의 평화통일방안이 실현될 가능성이 멀어지자 북한은 무력통일방안을 대안으로 검토하 고 소련 중국의 동의까지 얻어내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막후 공작 움직임이 1950년 6월 25일에 일어 난 동족상잔 비극의 전조였다. 조국전선은 6 25전쟁 후에도 1950~1960년대를 거치면서 주요 계기시마다 성명 담화 기자회견 등 을 통해 우리 측을 비난하거나 대민족회의, 전민족대회 소집 등 군중대회를 요구하는 선전활동과 함 께 대남 공세를 벌여왔다. 4 19나 5 16 후 남한의 정국혼란 시기를 겨냥하여 평화통일방안 ( )을 제안한 것을 비롯하여 정당 사회단체와 해외교포단체가 참여하는 대민족회의 소집 요구(1973년), 비방방송 중지, 휴전선상에서의 군사활동 중지, 전민족대회 소집 요구(1979년), 고 려연방제안 관련 대남서신 발송 공세(1980년), 주한미군 철수 논의를 위한 남북한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 소집을 제의(1983년)하였다. 또한 1990년에는 광주민주화운동 10주년을 맞아 남조선 인민 들에게 보내는 호소문 을 발표하였으며, 2010년에는 6 2지방선거를 앞두고 남조선 인민들에게 보내 는 공개편지 를 통해 대남 비방 선동을 하였다

262 조국전선은 조선노동당을 포함하여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농업근로자동맹 같은 노동당의 외 곽조직, 조선기자동맹 같은 직능단체, 지역친선단체, 조선그리스도교연맹 같은 종교단체 등 24개의 정당 및 사회단체로 구성되어 있다. 이들 대표로 조직된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의장단과 상무위원 회 서기국을 두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대민족회의, 전민족대회, 통일전선부

263 조국통일 3대 헌장 조국통일 3대 헌장은 1972년 7 4 남북공동성명 에서 제시된 조국통일 3대 원칙, 1980년 10월 제6차 당대회에서 제시된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 안,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제시된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을 일컫는다. 연원 북한은 조국통일 3대 헌장 이란 표현을 1997년부터 공식적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북한은 이 표 현에 대해 1996년 11월 24일 김정일이 판문점을 방문했을 때 처음으로 사용했다고 주장하고 있으며, 공식적으로는 1997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3대 헌장, 3대 기둥 이라는 용어로 처음 사용했다. 북한은 조국통일 3대 헌장을 민족공동의 통일강령 이라고 규정하고 주요 계기시마다 이를 대내 외에 선전하고 있으며, 2001년 8월 평양 낙랑구역 통일거리에 2명의 여성이 한반도 지도를 마주 들고 있는 모습의 높이 30m, 폭 61.5m 규모의 조국통일 3대 헌장 기념탑 을 건립하였다. 주요 내용 북한은 1997년의 당보(노동신문), 군보(조선인민군), 청년보(노동청년) 신년 공동사설에서 통일문 제를 민족적인 문제인 동시에 유관국들도 협력해야 할 국제적 문제 라고 언급하면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동지께서 제시하신 조국통일 3대 원칙과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은 우리 민족이 그 어떤 경우에도 변함없이 고수하고 견지해야 할 조국통일 3대 기둥, 3대 헌장 이다. 라고 주장했다. 3대 헌장 중 조국통일 3대 원칙 은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발표된 7 4 공동성명 에서 천명된 자주, 평화, 민족대단결 세 가지 통일원칙을 말한다. 7 4 공동성명 에서 합의된 구체적 내용은 1 통일은 외세에 의존하거나 외세의 간섭을 받음이 없이 자주적으로 해결하여야 한다. 2 통일은 서로 상대방을 반대하는 무력행사에 의거하지 않고 평화적 방법으로 실현하여야 한다. 3 사 상과 이념 제도의 차이를 초월하여 우선 하나의 민족으로서 민족적 대단결을 도모하여야 한다는 것 으로 되어 있다. 북한은 이 3대 원칙 에 대해 북과 남이 통일정책을 작성하고 진행해 나가는데 있어 서 반드시 견지해야 할 기본지침이며 민족공동의 항구적인 통일강령 이라고 말하고 있다.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은 1980년 10월 노동당 제6차 대회에서 김일성 보고를 통해 제시 된 북한의 통일방안으로, 그 이후 남북관계와 주변정세 변화에 따라 북한은 그 성격과 내용을 수정해 왔다. 북한은 1960년 처음 고려연방제를 제시할 때는 통일의 완결형태 라고 밝혔으나, 1973년 6월 조국통일 5대 강령 을 통해서는 통일까지의 과도기적 조치로 고려연방공화국 이라는 단일국호에 의한 연방제 실시를 주장했다. 그 후 북한은 1990년 독일 통일 이후 1991년 김일성 신년사를 통해 연방제 통일의 점차적 완성 을 주장했다. 김일성은 지역적 자치정부에 더 많은 권한을 부여하며 장차로는 중앙정부의 기능을 더욱 높여 나가는 방향에서 연방제 통일을 점차적으로 완성시켜 나가는 문제를 협의할 용의가 있다. 고 밝히고, 통일은 누가 누구를 먹거나 먹히지 않는 원칙에서 하나의 민족, 하나의 국가, 두 개 제도,

264 두 개 정부에 기초한 연방제 방식으로 실현해야 한다. 고 하면서 느슨한 연방제 방안을 제시했다. 북한은 연방제 실시의 전제조건으로 남한의 국가보안법 철폐, 모든 정당 단체 합법화 및 정치활 동 보장, 남한 사회의 민주화, 주한미군 철수 등을 내세웠다. 전민족대단결 10대 강령 은 1993년 4월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5차 회의에서 당시 강성산 총리의 보고를 통해 제시된 통일강령이다. 10대 강령 의 주요 내용을 보면 전민족대단결로 자주 평화 중 립적 통일국가창립, 공존 공영 공리를 도모하고 통일위업에 모든 것을 복종시키는 원칙에서 단결, 동족 간 분열 대결을 조장시키는 일체의 정쟁 중지, 개인과 단체가 소유한 물질적 정신적 재산을 보호하여야 하며 민족대단결 도모에 이롭게 사용, 민족대단결과 통일 위업에 공헌한 사람 높이 평 가할 것 등으로 되어 있다. 북한은 이 강령을 제의하면서 외세의존정책 포기, 주한미군 철수의지 표명, 외국군과의 합동 군사연습 중지, 미국의 핵우산 탈피 등 4개 항의 요구사항을 제시했다. 평가 조국통일 3대 헌장은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에 의한 조국통일 이라는 그들의 전략을 그대로 유지 하는 가운데, 남북관계와 주변정세의 변화에 맞춰 통일전선 전술을 지속적으로 추진해 나가는 한편 남북교류협력을 통해 우리 측으로부터 지원을 확보하려는 의도를 내포하고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 이와 함께 대내적으로는 통일 이념을 강조함으로써 경제난과 식량난, 국제적 고립이 심화되는 상황 속에서 북한주민들에 대한 통제 기반을 유지하려는 의도도 깔려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북한의 연방제, 전민족 대단결 10대 강령

265 조국통일 5개 방침 조국통일 5개 방침은 김일성이 1990년 5월 24일 최고인민회의 제9기 제1차 회 의에서 시정연설을 통해 발표한 통일 방침을 말한다. 주요 내용은 한반도의 긴 장상태 완화 및 평화적 환경 조성, 남북 간 자유왕래와 전면 개방, 평화통일에 유리한 국제환경 조성, 조국통일을 위한 대화의 발전, 전민족적 통일전선 형성 등이다. 배경 1980년대 말 북한은 상당히 어려운 국면을 맞고 있었다. 소련을 비롯한 공산권의 개방과 개혁으 로의 노선 전환과 세계적인 탈냉전의 물결 속에서 북한은 대외시장을 잃었으며, 동맹국들의 현물성 지원도 사라졌고 내부 경제는 투자재원 부족으로 파탄상태에 이르렀다. 이에 따라 북한은 체제생존 이 급선무였으며, 남북관계에서도 수세적이고 방어적인 입장에 서게 되었다. 북한은 이러한 상황에서 내부 정비의 시간을 벌기 위해 두 가지 방향에서 대처를 하고자 했다. 하나는 우리 정부로부터 체제공존과 불가침을 제도적으로 보장받는 것이었다. 이를 위해 북한은 우 리 당국과 고위급회담을 진전시켜 불가침선언을 확보하려고 했으며, 이를 통해 미국 일본에 접근하 고자 했다. 또 하나는 우리 내부의 국론분열의 공간을 넓혀 공세적인 도전력을 흐트러뜨리는 것이었 다. 이를 위해 북한은 우리 내부의 민주화에 편승하여 남북학생회담을 선동하고 범민족대회를 추진 하는 한편, 남북연석회의를 제시하고 우리 측의 일부 인사들을 방북케 하였다. 이로 인해 1989년 문 익환, 문규현, 황석영, 서경원 등 인사들이 불법 방북하는 사건들이 잇따랐으며, 이를 둘러싸고 사회 적 분란을 빚어내기도 했다. 북한은 이를 통해 남북 간의 자유 왕래와 전면개방을 막고 있는 것은 북한이 아니라 남한이라는 허구적 사실을 부각시키고 북한주민으로 하여금 통일실현의 구심점이 북한에 있다는 자부심을 심어 주어 사상적 이완을 막고자 했다. 주요 내용 및 경과 조국통일 5개 방침의 주요 내용은 1 한반도에서의 긴장상태 완화 및 평화적 환경 조성, 2 남북 간 자유왕래 전면개방, 3 평화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마련하는 원칙에서 대외관계 발전, 4 조국통일을 위한 각계각층이 참가하는 전민족적 대화, 5 전민족적 통일전선 형성 등이다. 첫째, 한반도에서 긴장상태를 완화하고 통일을 위한 평화적 환경을 보장하기 위한 방안으로 남북 간의 불가침선언 채택, 북 미 간의 평화협정 체결, 남북 무력의 감축, 남한에서의 핵무기 외국군대 철수 등을 제시하였다. 둘째, 분단의 장벽을 제거하고 남북 간의 자유왕래 및 전면개방을 실현하는 문제와 관련해서는 남한주민과 각계 인사들의 북한방문 환영 및 신변안전 보장, 북한주민들의 남한방문 적극 보장, 콘크 리트 장벽 제거, 접촉과 상봉에 장애가 되는 악법 폐지 등의 조치들을 취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셋째, 자주적 평화통일에 유리한 국제적 환경을 마련한다는 원칙에서 국제무대에서의 대결과 경 쟁 지양, 단일의석에 의한 유엔 공동가입을 제안하였다

266 넷째, 통일을 위한 대화 추진과 관련해서는 통일문제를 실질적으로 해결하기 위한 남북대화를 촉 구하면서 모든 정당 사회단체들과 각계각층의 의사를 민주주의적으로 반영하는 전민족적인 대화를 촉구하였다. 다섯째, 통일을 위한 전민족적인 통일전선 형성과 관련해서는 통일을 위해 투쟁하는 모든 단체와 조직들은 서로 협력하고 연합을 실현하는 방향으로 나아갈 것과 남북한, 해외의 모든 정당 사회단체 와 여러 조직들, 각계각층 인사들을 망라하는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형성할 것을 방침으로 설정하였 다. 김일성은 남북 간에 전면 개방을 하자면서도 콘크리트 장벽이나 국가보안법 때문에 안 되고 있다 고 우리 측에 책임을 전가하고 여전히 전민족적 통일전선을 주장하였지만 그 자체가 이미 방어적 입장을 보인 것이었다. 그 해 7월에도 북한은 범민족대회를 하기 위해 각계각층 사람들의 평양 방문 을 환영하며 판문점을 개방하겠다고 주장했지만, 우리 측이 기간을 정해 누구나 남북한 전 지역을 자유로이 방문할 수 있게 전면적인 개방을 하자며 민족대교류 실시를 제안하자 수세로 돌아섰다. 북한은 조국통일 5개 방침이 제시된 이후 한 정상회담이 이루어지자 중단시켰던 고위급회담 예비회담을 재개하여 고위급회담을 성사시켰으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와 세계청소년축구선수권대 회에 단일팀으로 참가하는데 호응해 나왔다. 평가 조국통일 5개 방침은 주한미군 철수, 국가보안법 폐지 등 기존의 대남노선을 되풀이하면서, 사회 주의권의 체제 전환이라는 변화된 정세를 반영하여 제시한 것이다. 이는 남북관계에 어떤 변화가 온 다 하더라도 조국통일 5개 방침을 실현하기 위한 것이고, 조국통일 5개 방침의 틀 안에서 북한의 주 도로 이루어지는 것임을 주지시켜 북한주민의 불안감을 제거하려는 목적도 갖고 있었다고 볼 수 있 다. 관련 검색어 _ 조국통일 3대 헌장, 조국통일 5대 강령

267 조국통일 5대 강령 조국통일 5대 강령은 김일성이 1973년 6월 23일 체코 공산당 제1서기 후사크 를 환영하는 평양시 군중대회에서의 연설을 통해 발표한 통일 강령을 말한다. 주요 내용은 남북 간 군사적 대치상태 해소와 긴장 완화, 남북 간 다방면의 합 작과 교류 실현, 대민족회의 소집, 고려연방공화국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연방제 실시, 고려연방공화국 단일국호로 유엔 가입 등이다. 배경 북한은 1970년대 세계적 데탕트 분위기가 조성되자 유엔에서의 활동을 본격적으로 펼쳐 나갔다. 그동안의 외교정책을 바꾸어 스웨덴, 핀란드 등 북유럽 5개국과 수교하였고, 각종 유엔 산하기구와 WHO 등 전문기구에 가입하기 시작한 것이다. 또한 베트남 전쟁이 종결단계로 접어들고 미국이 대 아시아 개입정책으로부터 전환을 추진하는데 따라 한반도 문제를 민족내부 문제화하여 주한미군 철 수를 얻어내고 남조선 혁명 의 여건을 성숙시킬 절호의 기회로 삼으려고 했다. 이와 함께 내부적으 로는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확립하고 김정일 후계체제를 구축하는데 전력을 기울이던 시기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북한은 무력경쟁 중지와 군대 감축 등 평화공세를 펴면서 한 이간과 주한미군 철수를 겨냥하는 한편, 한국이 유엔에 가입하는 것을 막고자 했다. 이와 관련하여 북한은 그 이전까 지 통일방안으로 제시하였던 과도적 연방제 를 수정하여 국호를 고려연방공화국 하나로 하고 이 단 일국호로 유엔에 가입하자는 새로운 입장을 내놓을 필요가 있었다. 우리 측에서 6 23 선언 을 통해 대공산권 문호를 개방하고 남북한이 동시에 유엔에 가입하자는 제안을 하자 북한은 즉각적으로 이 조국통일 5대 강령을 내놓고 대응하면서 6 23 선언 에 대한 국제 사회의 지지를 차단하고자 했다. 주요 내용 및 경과 조국통일 5대 강령의 주요 내용은 1 남북 간 군사적 대치상태의 해소와 긴장상태 완화, 2 남북 간 다방면적인 합작과 교류의 실현, 3 남과 북의 각계각층 사람들과 정당 사회단체 대표들로 구성되 는 대민족회의 소집, 4 고려연방공화국의 단일국호에 의한 남북연방제 실시, 5 단독 유엔가입 반대 및 고려연방공화국 단일국호에 의한 유엔가입 등이다. 특히 1항과 관련하여 이를 실현시키기 위한 구체적 조치로 무력증강과 군비경쟁의 중지, 모든 외국군대의 철거, 군대와 군비의 축소, 외국으로부터의 무기 반입 중지, 서로 무력을 행사하지 않을 것을 보장하는 평화협정 체결을 제시하였다. 이 내용은 남북조절위원회에서 북한 측이 주장하던 내 용과 동일하다. 여기에서 주목되는 점은 두 가지이다. 하나는 이때까지도 북한은 평화협정을 남북 간에 체결하는 것을 염두에 두고 있었다는 점이다. 북한이 미국과의 평화협정 체결을 추구하고 평화문제는 북미 간에, 통일문제는 남북 간에 협의를 해야 한다는 입장으로 선회한 것은 1974년에 들어와서이다. 또 하나는 1960년대와 내용이 달라진 연방제를 내놓고 있다는 점이다. 우선 남북한 정부대표로 구성되는 최고민족위원회 라는 기구가 없어지고 그 대신 군중집회 형태의 대민족회의

268 를 전면에 부각시킴으로써 대한민국 정부의 정통성과 권위를 인정하지 않으려는 태도를 보였다. 또 한 국호만 제시되어 있지 연방정부와 지역정부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언급치 않았는데, 단일국호로 대외활동을 하자는 것으로 비추어 볼 때 지역정부의 독자적 활동은 인정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이후 우리 측의 6 23 선언 이 2개 조선 을 획책하는 분열주의 노선이라고 맹비난을 하였 다. 그러면서 6 23 선언 을 빌미로 남측이 7 4 남북공동선언 을 완전히 뒤집어엎었다고 주장하고 남 북조절위원회 회의와 남북적십자회담 등 남북 간의 대화를 중단시켜 버렸다. 북한은 1970년대 내내 대민족회의 개최 등 조국통일 5대 강령에 입각한 조치들을 남북대화를 재 개시키는 조건으로 내걸거나 대남 제의를 해오는 것으로 일관하였다. 이와 함께 북한은 1970년대 중 반 이후 8 15 경축식장 대통령저격사건, 대남침투용 땅굴 굴착, 판문점 도끼 만행사건 등 다시 대남 도발을 지속함으로써 남북관계는 긴장상태를 벗어나지 못했다. 평가 1970년대에 들어오면서 북한은 동서 긴장완화 등 국제정세의 변화에 따라 우리측의 남북대화 제 의에 호응해 오는 한편, 남조선 혁명 투쟁을 지속하는 양면전략을 추구하기 시작하였다. 조국통일 5대 강령은 평화공세의 일환으로 남북 간의 실질적인 화해 협력을 실현하기 위한 제의가 아니었다. 즉 조국통일 5대 강령은 남한의 유엔 동시가입 주장을 비난하고, 연방제 통일 등을 주장하면서 북한이 통일지향적인 것처럼 대외적으로 선전하고자 하는 의도를 가지고 있었다. 또한 주한미군 철 수, 대민족회의 소집 등을 주장하며 남한에서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전략을 구현하기 위한 수 단으로 삼으려 한 것이었다. 관련 검색어 _ 고려민주연방공화국 창립방안, 대민족회의,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269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는 1961년 5월 13일 부수상 홍명희를 위원장으로 하여 북한의 각 정 당 사회단체를 대표하는 33명의 준비위원들이 모여 노동당 외곽단체의 하나로 조직하였다. 북한이 이 조직을 결성한 배경은 4 19 혁명 직후 우리 내부에서 학생 재야 등을 중심으로 남북협상 및 통일 논의 열기가 고조되자 이를 대남 혁명전략에 활용하기 위해서였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결성 이후 노동당의 통일문제 및 남북대화와 관련한 입장을 대변 또는 옹 호해왔으며, 우리 내부의 각계각층 인사 및 해외인사들을 대상으로 연방제 통일 실현투쟁을 고취하 고 있다. 또한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우리 측에서 주요 사건이 있거나 새로운 정책이 제시될 때마다 서기국 보도 를 발표하는 등 북한 측의 반응과 입장을 대변해 왔으며, 성명과 제의는 물론 고발장 공 개질문장 백서 비망록 등을 통해 대남 비방과 규탄 등의 선전 선동 활동을 벌여 왔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는 명목상으로는 조국통일을 위한 각계각층의 연대기구이지만 실제로는 노 동당 통일전선부의 외곽단체로서, 국내인사 및 해외동포를 대상으로 통일전선 형성, 남한 내 국론분 열 및 친북여론 조성을 위한 선전공세 등을 주요 임무로 하고 있으며, 기관지 조국통일 을 발행한다.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조직은 위원장과 부위원장이 포함된 중앙위원회를 중심으로 상무위원회 와 서기국을 두고 있으며, 중앙위원회 산하에 조직부 선전부 회담부 조사연구부 총무부와 자료종합 실 등을 두고 있다. 남북회담 시 북측 회담대표들은 이 조국평화통일위원회의 이름을 갖고 나오는 사례가 많았다. 관련 검색어 _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통일전선부

270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그리스도교연맹(조그련)은 기독교 단체로서 1946년 11월 28일 창립된 북조선기독교연맹 을 모체로 하고 있다. 이 단체는 창립 후 활동이 드러나지 않다가 1974년 조선기독교연맹 으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후 1999년에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이라는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북한에서는 이미 해방 전에 기독교, 천주교 등이 남한지역보다 먼저 전파되어 전통 종교인 불교, 천도교 등과 함께 주민생활 속에 깊숙이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그러나 분단 후 북한당국은 김일성 유일사상체계를 유지하는데 종교가 걸림돌이 된다고 판단하여 내면적으로는 반종교정책을 강력히 추진하였다. 즉 북한에서의 종교는 종교 본연의 의미를 갖지 못한 채 유일사상체계라는 테두리 속에 서 한정적으로만 인정되었다. 그 결과 분단 후 10년 쯤 흐른 1955년경에는 북한에서 모든 종교단체와 종교의식이 사라졌거나 지하화 되었고, 1960년대에 이르러 종교 자체가 모습을 감추게 되었다. 그러 던 중 1970년대 이후 남북대화가 시작되면서 북한 내에도 종교 활동의 자유가 있는 것처럼 보이기 위해 그간 유명무실한 단체에 불과했던 이른바 조선그리스도교연맹, 조선불교도연맹, 조선천도교 회 중앙지도위원회 등의 활동을 재개시켰다. 이 단체는 현재 중앙위원회에 위원장과 부위원장, 서기장 직책을 두고 있다. 그 산하 부서로서 국제부, 조직부 등이 조직되어 있다. 1988년 장충성당과 봉수교회를 건립하였고, 1992년에는 칠골교 회를 신축하였으며 2006년에는 러시아정교회 정백사원을 완공하였다고 알려지고 있다. 종교인 양성을 위한 교육과정도 실시하고 있는데 1989년 김일성종합대학에 종교학부를 개설했으 며, 1995년에 중단되었던 평양신학원을 2000년 9월 개원하고 목회자 양성교육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북한에는 앞서 언급한 2개의 교회와 500여 개의 가정교회, 교역자 300여 명과 신도 1만 3천여 명이 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세부내역은 정확하지 않다. 한국 기독교계와 북한 그리스도교연맹 간에는 1990년대 이후부터 접촉이 비교적 활발한 편이다. 특히 대북 구호지원을 계기로 양측 단체 간 접촉이 빈번해지면서 남북한 공동예배, 공동기도문 교환 등의 방법으로 교류활동을 전개해 오고 있다. 남측 기독교계로서는 교파 간 접촉과 북한선교 목적에 서 대북교류를 추진하고 있지만, 북측에서는 대외 정치선전과 지원 획득의 동기에서 출발하고 있어 진정한 교류 접점을 찾지 못하는 실정이다. 관련 검색어 _ 조선불교도연맹

271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이하 농근맹)은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청년동맹), 조선직업총동맹(직총), 조선민주여성동맹(여맹)과 함께 북한의 4대 근로단체의 하나로 북한 농민들을 대상으로 조직된 사회 단체이다. 농근맹의 연혁을 보면 조금 복잡하다. 북한은 해방 직후인 1946년 1월 31일 전국농민조합총연 맹 (1945년 12월 8일 결성된 전국 농민조직)의 분맹으로 북조선농민동맹 을 조직하였고, 6 25전쟁 중 이던 1951년 2월 11일 북조선농민동맹 을 남측의 농민조합총연맹 과 통합해 조선농민동맹 으로 승격 시킨 바 있다. 이 동맹 조직은 1950년대 말 토지 개혁 및 농업 협동화와 관련하여 해체되었고, 이후 1964년 6월 당중앙위원회 제4기 제9차 전원회의에서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1964년 2월 발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으로 개편키로 결정되었다. 이로부터 9개월 동안 각 도와 군 조직 구성을 마치고 1965년 3월 25일 창립대회를 열고 공식 재출범하였다. 북한은 농근맹 결성일을 북조선농민동맹이 조직된 날인 1946년 1월 31일로 삼고 있다. 농근맹의 성격은 동맹의 규약에서 당과 우리나라 농업 부문의 근로대중을 연결하는 인전대 로 규정되고 있어 농민층에 대한 당노선과 사상교양을 규율 통제하는 역할을 충실히 하도록 요구받고 있다. 이에 따른 농근맹의 주요 임무로는 사회주의 농촌 건설 촉진, 농촌에서 사상 기술 문화 3 대 혁명 적극 추진, 도시와 농촌 간의 차이, 노동 계급과 농민 간의 계급적 차이를 점차 없애기 위한 투쟁, 비당원 사상교양사업 등을 수행하도록 되어 있다. 농근맹은 1965년 재출범 때부터 1971년 중앙위원회 제14차 전원회의까지 당의 지도하에 활동하 는 가운데 천리마작업반운동과 사회주의경쟁운동에 있어서 주된 도구로서 활동하였다. 한편 1972년 농근맹 제2차 대회에서부터 중앙위원회 제18차 전원회의까지 여타 외곽단체와 마찬가지로 김정일 후계준비와 관련하여 대를 이은 혁명사업 계승과 완성을 중시하는 가운데 농업자원 형성을 위한 당 의 도구로서 활동하였다. 1990년대 중반 고난의 행군 시기에도 사상교양사업 등 당이 부과하는 농촌사업에 대한 정치적 선전사업을 지속하였다. 7.1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에는 농장 수입 증대 등 실리 위주의 방식을 시도 하는 등의 부분적인 변화를 보이기도 하였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농근맹 역시 농민층의 이익단체로 서의 역할보다는 당의 정책적 목표에 따라 좌우되는 외곽단체로서의 방조자 역할이 더 강했던 것으 로 보인다. 농근맹은 농 축산 근로자, 농업기관의 사무원 등 기존 회원이었던 협동농장원뿐만 아니라 국영 목장과 농촌 경리에서 직접 복무하는 기관 기업소(공장)의 노동자 및 사무원 중에서 노동당원이 아 닌 만 30세 이상이 포함된다. 이 분야의 종사자라도 노동당원이면 농근맹 소속이 아니다. 농근맹에 가입된 인원은 130여만 명으로 추정된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272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조선문학예술총동맹(이하 문예총)은 북한에서 문학 예술을 총괄하는 단체이자 직업 문학 예술인 들을 총망라한 조직이다. 문예총 은 이른바 혁명문학예술의 전통을 계승하고 노동당의 문예정책 관 철을 위해 투쟁할 것을 설립목적으로 하고 있다. 문예총은 1946년 3월 25일 북조선예술총연맹 으로 발족되었다가 1951년 3월 10일 월북한 남한 예술인들을 흡수하여 조선문학예술동맹 으로 개편되었다. 이후 1953년 9월 남로당계 숙청과 함께 해체시켰다가, 1961년 3월 현재의 조선문학예술총동맹 으로 재조직되었다. 북한에서는 가장 창의적이고 자유스러워야 할 문학과 예술의 영역도 목적주의적 문예관에 기초 하여 당성 노동계급성 인민성의 조건을 따라야 한다. 문화예술 분야에서도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따 르는 주체문예이론만을 신봉해야 하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에서 유일 기준과 입장을 집단적으로 구 현하자면 획일적인 조직체계가 필요하다. 문예총은 당 교시와 노선을 침투시키는데 강력하고 효율적 인 체계를 구축하고 있다. 문예총에 소속된 예술단체로는 조선작가동맹, 조선미술가동맹, 조선음악가동맹, 조선영화인동맹, 조선연극인동맹, 조선무용가동맹, 조선사진가동맹 등 7개 동맹 단체가 있다. 각 동맹의 산하에는 분 과위원회가 구성되어 있으며, 각 시 도에 문예총 시 도 위원회와 부문별 동맹 시 도 위원회가 조직되 어 있다. 문예총 조직의 규약에 나타난 주요 임무와 기능을 보면, 당의 노선과 정책 관철을 위한 문학예 술의 결정 및 지도, 작가, 예술인들에 대한 교양사업 실시, 문학 예술의 대중적 발전, 작가, 예 술인들에 대한 창작사업 지도, 작가, 예술인들의 등용 및 탈퇴 결정 등이 제시되어 있다. 북한의 모든 작가, 예술인들은 의무적으로 문예총과 그 산하 동맹에 가입하고 있다. 문예총은 모 든 작가, 예술인들을 망라하는 북한을 대표하는 문화예술조직이지만 실제 활동에서는 막강한 권한을 갖고 있지는 않다. 문예총은 중앙조직이 원로들로 구성돼 대외활동이나 문예 부문 행사 등에서 역할 을 하고 있을 뿐 하부조직의 활동은 미미하다고 할 수 있다. 모든 작가, 예술인들은 소속 창작단과 예술단 당조직의 지휘와 통제를 받아 활동하고 있기 때문이다. 주체사상의 확립에 따른 주체문예이 론이 대두하면서 각 문예 분야의 창작단을 통해 김일성 김정일의 영도성을 찬양하는 집체창작이 활 발하였다. 문학 분야의 4.15문학창작단, 공연예술 분야의 피바다가극단, 만수대예술단, 미술 분야의 만수대창작사 등이 대표적인 창작단 또는 예술단이라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만수대창작사, 주체문예이론

273 조선민주여성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이하 여맹)은 노동당의 외곽단체로서 주로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전업주부들 을 가입 대상으로 삼고 있다. 북한은 여타 사회주의 국가에 비하여 매우 조직적이고 체계적으로 사회 단체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 특징이다. 모든 사회 구성원을 계층과 대상에 따라 해당 사회단체 속에 의무적으로 묶고 책임을 부여하고 있다. 연령별, 직업별, 성별에 따라 사회적 조직체가 존재하고 있 어 일생을 조직에 매여 있게 된다. 각각의 사회 근로단체들은 당의 지도하에 소속 구성원을 조직화 의식화함으로써 수령과 당의 노선 및 정책을 관철시키는 공통된 목적을 가지고 있다 여맹은 1945년 11월 18일 북조선민주여성동맹 으로 창립돼 1951년 1월 20일 남북의 여성동맹이 통합되면서 현재의 명칭으로 개칭되었다. 이 단체는 북한정권이 해방 후 인구의 절반을 차지하고 있 는 여성들의 사상을 공산주의적으로 계몽 개조하고 그들을 근로전선에 동원하기 위한 필요성에 따 라 여성해방이라는 명분하에 만들어 졌다. 북한 노동당의 여성전위조직으로 활약하는 여맹이 수행하는 기능은 크게 사상교양단체로서의 사 업과 조직동원 사업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여맹은 여성들을 철저한 공산주의 어머니로 만들며 사회 주의 건설에 여성들을 조직 동원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이는 초급단체와 인민반 단위에서 강연회, 예술소조활동, 영화관람, 선동모임 등을 통해 이루어진다. 한편 여맹은 건설 및 생산 현장과 군대를 지원하기 위해 동원사업을 벌이기도 한다. 여맹의 가입 대상 범위에는 창립 이후 시기별로 변화가 있었다. 여맹의 구성원은 당초 18세 이상 의 모든 여성이었지만, 1983년 여맹 제5차 대회 이후로는 비당원이자 직장생활을 하지 않는 30세 이 상의 전업주부들을 동맹원으로 한다. 조직체계는 노동당의 근로단체부 지도를 받는 여맹 중앙위원회 가 있고 산하에 도 시(구역), 군 위원회와 리(동) 위원회, 그리고 인민반별로 초급단체가 구성되어 있다. 여맹의 전원회의는 1년에 2회 개최하도록 규정되어 있는데 기관지로 <조선여성>을 발행하고 있다. 여맹은 특히 1976년부터 여성의 결혼연령을 종전의 23~26세에서 28세로 높이고 어린이교육보 양법 을 제정(1976.4)한 것을 계기로 여성노동력을 생산노동으로 전환시키는데 주도적 역할을 담당 하고 있다. 그러나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이른바 고난의 행군 시기를 거치면서 북한 경제난의 지속과 배급제의 붕괴, 정치 사상적 이완과 조직 이탈 등의 사회변화를 겪으면서 여맹의 위상도 영향을 받게 되었다. 2012년 들어 북한은 11월 16일을 어 머니날 로 지정하고 제4차 어머니대회를 개최한 바, 이는 김정은 체제에서도 여맹의 역할을 상기시키 는데 의도가 있는 것으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인민반

274 조선불교도연맹 조선불교도연맹은 1946년 12월 26일 결성된 북조선불교도연맹 을 모체로 한 불교단체이다 년까지 활동이 거의 없다가 남북대화가 시작되는 시기인 1972년 현 명칭인 조선불교도연맹 으로 모 습을 드러냈다. 북한은 1980년대 들어 해외교포 종교인들을 초청하여 이들과 종교인 회담 및 반한 종교인 집회를 갖는 등 통일전선전략에 치중하였고 북한 내에 조선종교인협의회 등 대외용의 종교인 단체를 결성하기도 하였다. 조선불교도연맹도 조선종교인협 의회의 가입단체이자 대남 기구인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구성 단체이다. 조선불교도연맹은 남북 불교접촉 교류의 창구 역할을 하기 위한 대외선전용 성격이 강하다. 1988년 5월 최초로 묘향산 보현사에서 석탄절 기념법회를 개최한 이후 매년 불교의 3대 기념일인 열반절(음력 2월 15일), 성도절(음력 12월 8일), 석탄절(음력 4월 8일)에 각 사찰에서 기념법회를 열 고 있다. 조선불교도연맹은 중앙위원회와 지역 사찰조직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1989년 승려양성을 위한 불교학원을 설립했다. 주요 사찰로는 묘향산의 보현사, 평양대성산의 광법사, 금강산의 표훈사 등이 있다. 북한지역에는 사찰 60여 개, 승려(대처승) 300여 명, 신도 1만여 명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 나, 북한 측이 정확한 통계를 제시한 바는 없다. 불교 분야에서도 남북 간 교류지원사업이 추진되어 왔는데, 조계종의 금강산 신계사 복원, 천태종 의 개성 영통사 복원 등이 대표적이다. 각급 불교단체에서 식량구호 등 인도적 지원사업도 전개하고 있다. 최근에 와서도 남북 불교계가 접촉해 불교교류 활성화 방안을 협의하는 등 교류를 진행 하고 있다. 2012년 10월 대한불교 조계종(민족공동체추진본부)은 중국 선양에서 조선불교도연맹 측과 접 촉을 갖고 평양의 불교유적 발굴 복원, 불교회관 건립 등을 협의한 것으로 알려 졌다. 또 같은 해 10월 13일에는 조계종과 조선불교도연맹 양측이 금강산 신계사에서 신계사 복원 5주년 기념 합동법 회를 봉행한 바 있다. 관련 검색어 _ 조선그리스도교연맹

275 조선사회민주당 북한이 복수정당 제도를 인정하고 있는 것처럼 선전하기 위해 명목상 내세우고 있는 정당으로는 조선천도교청우당 외에 조선사회민주당이 있다. 조선사회민주당은 1945년 11월 3일 평양에서 창립된 조선민주당(초대 당수 조만식)을 모체로 하고 있고 천도교청우당과 함께 노동 당의 우당 역할을 하고 있다. 1950년대 말 군당 이하 조직이 해산돼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가 1981년 1월 제6차 당대회를 계기로 당명을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바꾸고, 사회주의적 민주주의 를 이념으로 하는 당 강령과 규약도 새로 채택하는 등 조직을 정비했다. 1960년대까지는 주로 대남문제와 관련된 성명을 발표하고 각종 대남 집회에 참석하는 등 한 미 비난활동에 역점을 두어왔다. 조선사회민주당으로 명칭을 바꾼 1980년대 이후에는 서구 사회주의 세 력 및 제3세계권 민족주의 세력 등과 연대를 꾀하는 한편, 한국 내 통일전선 구축을 위한 활동에 주 력하였다. 이후 1990년대에는 노동당의 대내외 정책을 지지하는 대남 선전선동활동을 주로 해오고 있다. 북한이 대외 선전 목적으로 명목상 내세우고 있는 조선사회민주당과 조선천도교청우당은 대남 비난성명이나 통일문제 등과 관련한 담화 성명 등을 발표할 때 그 모습을 나타내는 이름뿐인 외곽 정당이라 할 수 있다. 조직은 당대회(당의 최고지도기관)와 중앙위원회(전반적 당사업 조직지도) 당중앙검사위원회(재 정 경리 감사) 정치위원회(중앙위원회 권한 대행) 통제위원회 등으로 구성되어 있다. 관련 검색어 _ 민족화해협의회, 조선천도교청우당

276 조선신보 조선신보는 일본에 근거지를 둔 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이하 조총련)의 기관지이다. 1945년 10월 10일 창간된 <민중신문>을 모태로 해서, 1946년 <해방신문>으로, 1961년 <조선신보>로 이름을 바 꾸었다. 조총련 조직원들과 조총련 계열 동포들에 대한 사상교육과 북한의 정책 홍보를 주요 임무로 삼아왔다. 최근에는 평양에 특파원을 두고 제한적으로나마 북한 내부사정을 외부에 알리는 창구 역 할도 하고 있다. 예컨대 2002년 7월 경제관리개선조치 이후 북한의 공장 기업소들을 탐방하여, 이 조치가 북한 경제에 어떻게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보도하기도 했다. 북한으로서는 대외접촉 매체가 많지 않은 사정으로 북한의 대외정책 조치가 취해질 때 북한당국 의 의도와 배경을 설명하는 채널로 조선신보를 활용하고 있다. 북한은 때로는 핵무기 보유나 핵실험, 장거리 미사일 발사, 미 북관계나 남북관계 같은 대외적으로 중요한 사안에 대해 대외적으로 어떤 반응을 보일지 조선신보를 통해 슬쩍 흘려 떠보기도 한다. 처음에는 격주간, 주간으로 발행되었다가 1961년 9월부터는 일간으로 발행되었다. 이후 1999년 10월부터 주 3회, 8면으로 발행되고 있다. 조선신보사에서는 영문지인 <인민조선(The People s Korea)>과 잡지 <조국>, 일본어 잡지 <이어>도 발행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노동신문, 민주조선, 조총련

277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북한은 아시아, 태평양 지역 미수교 국가들과 정치 경제 문화교류를 확대 강화하기 위해 1994년 5월 조선노동당 통일전선부 산하에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이하 아태 )를 설치했다. 아태 는 형식상 민간기구의 성격을 띠고 있는 대외정책 기구로서, 1994년 7월 김용순(대남담당 비서 겸 아태 위원장)이 방북중인 일본의 국제문제연구소 소장 나카마루 가오루와 만난 사실을 전하 면서 조선중앙방송이 김용순을 아태 위원장으로 호칭하면서 대외적으로 알려졌다. 아태 는 설립된 후 남북 간의 각종 민간교류와 경협업무의 집행기관으로서의 역할을 수행하기 도 했지만 최근에는 금강산관광사업, 남북정상회담 등 남북관계에서 큰 정치적 비중을 갖고 있는 사 업을 주로 담당하고 있다. 아태 의 대표적인 활동으로는 1995년 4월 평양에서 개최된 평양국제체육문화축전 행사의 주관, 1997년 7월 북송 일본인 처의 일본방문을 허가하는 담화 발표, 리틀엔젤스 평양 공연(1998년 5월) 실현, 현대그룹의 협상 파트너로 나서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의 방북(1998년 6월) 초청 및 금강산관광 사업 등을 주관하였다. 또한 개성공단 개발사업도 2000년 현대그룹과 아태 간에관련 합의서를 체결 함으로써 추진되기 시작하였다. 특히 이 기관 소속 인물들이2000년, 2007년 남북정상회담 성사를 위 해 막후에서 활동한 바 있다. 아태 는 미국 일본 등과의 관계개선을 위한 창구역할과 함께 유력 외국인사에 대한 방북초청과 해외 학술회의 참가 등을 통해 북한에 대한 이미지를 개선하는 활동을 하면서 당국이 직접 나서서 하기 어려운 일들을 민간기구의 외피를 쓰고 추진하고 있다. 이와 함께 남북 간의 중요한 경제협력 사업에도 간여하고 있다. 조직체계는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이 있으며 그 밑에 정치, 경제, 문화, 관광, 종교 등 부문별 부서들과 연구소들로 구성되어 있다. 관련 검색어 _ 대외문화연락위원회, 조국평화통일위원회, 통일전선부

278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 조선인민군 판문점대표부는 북한이 1994년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해 설치한 기관이다. 군사정전 위원회는 1953년 7월 27일에 체결된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 에 의거하여 정전협정의 준수를 감독하고 그 위반사건을 협의 처리하기 위해 판문점에 설치된 기구로서 유엔군과 공산군 측 대표 각 5명으로 구성됐다. 북한이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한 직접적인 이유는 정전협정을 평화협정 으로 전환하기 위한 압박조치와 함께 유엔군 측 수석대표에 한국군 장성이 임명된 것에 대한 대응이 었다. 북한은 정전협정 체결 당사자가 아닌 한국군이 유엔군을 대표할 수 없다는 논리를 내세우며 군사정전위원회 폐지를 일방적으로 선포하고 대신 인민군 판문점대표부를 설치한 것이다. 북한은 1994년 5월 24일 외교부(현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정전체제를 평화체제로 전환할 것을 요구하면서 기존의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해 판문점대표부를 개성에 설치한다고 통보했으며, 닷새 뒤인 29일 군사정전위원회를 일방적으로 폐쇄했다. 북한은 군사정전위원회 폐쇄 통보 당시 군 사정전위원회가 정전( 停 戰 )감시라는 본래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됐다며 새로운 평화보장 체제 수립 을 위해 군사정전위원회를 대신할 협상기구로 판문점대표부를 개설한다고 밝혔다. 북한은 1994년 4월 한국군 장성이었던 황원탁 소장이 1991년 3월 군사정전위원회 유엔군 측 수석 대표로 임명된 것과 관련해 정전기구가 자기의 기능을 수행할 수 없게 만들었다. 며 군사정전위원 회를 철수시켰다. 북한은 1994년 6월에는 정전협정이 빈 종이장이 되고 군정위가 유명무실해진 현 실태를 타개하기 위한 것 이라고 판문점 대표부 설치의 이유를 밝혔다. 같은 해 9월에는 조선반도에서 공고한 평화보장 체계를 수립하기 위 한 현실적 조건을 조성하기 위한 것 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북한은 남북 간 군사문제나 비무장지대(DMZ)에서 문제가 발생할 때 판문점대표부를 통해 해결 하고 있으며, 유엔군사령부와 연락 및 협의 업무도 이 기구를 통해 처리하고 있다. 이와 함께 한 미연 합군사훈련을 비난하고 유엔군사령부 해체를 주장하는 등 한반도 군사 대치 상황에서 발생하는 문제 와 현안에 대한 북한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정전협정 무력화 조치

279 조선직업총동맹 북한의 사회단체에는 당원이 아닌 북한주민을 연령별, 직업별, 성별에 따라 의무적으로 조직하는 4대 근로단체, 즉 조선직업총동맹, 김일성사회주의청년연맹, 조선농업근로자동맹, 조선민주여성동맹 이 있으며, 이 외에 고유영역별로 활동하는 단체조직이 존재한다. 다른 사회주의 국가에 비해 북한의 근로단체는 훨씬 강도 높은 조직규율과 당의 통제를 받고 있다. 조선직업총동맹(이하 직총)도 노동 당의 외곽단체로서 끊임없이 교양과 통제 임무를 수행하는 직업별 총괄단체이다. 직총의 성립은 1945년 11월 30일 북한 최초의 노동조합인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 북조선 총국 이 결성된 것을 모체로 하고 있으며, 1946년 5월 25일에 북조선직업총동맹으로 개편되었다. 북한은 직총의 임무를 크게 산업의 복구와 증산 운동에의 참가, 노동 규율의 엄수와 생산 능률의 제고, 노동자 권익 옹호와 노동 조건의 감독, 노동자들에 대한 정치 문화 교양과 같은 당정책 교양에 두었다. 그러나 1956년 8월 종파사건 이후 노동자의 권익 보호를 강조하던 기존 직맹 간부들이 모두 숙 청되고, 1950년 후반 이후의 공장과 기업소의 국영화와 1960년대 초의 대안의 사업체계 가 도입되면 서 당의 외곽단체로서만 기능하게 되었다. 결국 직총은 노동자의 권익보다는 사상 기술 문화의 3대 혁명을 실현하는 데에 집중하게 되면서 사상교양을 통한 사회주의 정권 유지와 생산과 건설 동원을 주로 담당하는 역할을 수행해 오고 있다. 직총은 노동당 당원이 아닌 30세 이상의 모든 직장의 노동자와 기술자, 그리고 사무원들이 해당 되며, 맹원수가 약 160만 명 규모에 이르는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단체는 산하에 도 직할시 및 시 군 직맹위원회 등 하부조직과 금속화학공업, 전기석탄공업, 경공업 및 상업, 기계공업, 수산, 교통, 체신, 교육, 문화, 보건 등 산업별 직맹 조직을 두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대안의 사업체계, 3대혁명소조운동

280 조선천도교청우당 조선천도교청우당은 민족종교인 천도교를 토대로 한 정파로서 북한 노동당의 우당 역할을 하고 있다. 해방 후 1946년 2월 1일 소련 군정의 인가를 받은 천도교북조선종무원 이 북한지역에 세워졌는데, 소련 군정 측에서 당시 천도교 고위 간부인 김달현을 내세워 1946년 2월 8일 북조선천도교청우당 을 창당하였다. 북조선청우당은 1950년 월북한 남조선청우당 세력을 흡수해 조선천도교청우당 을 발족하고 위원 장은 김달현, 부위원장은 남조선청우당 김병청을 비롯해 박윤길, 리용규 등이 맡았다. 6 25전쟁 내내 청우당은 조선민주당과 같이 고위당직자는 노동당 당원이었으나 일반신도들은 반공대열에 참가했 다. 이에 북한정권의 박해가 심화되었고, 김달현도 1959년 말 조국전선 간첩사건 으로 숙청되었다. 1959년 시 군 이하 조직이 모두 해체되며, 1960년 도 당조직까 지 해체됨으로써 완전히 몰락했다. 그러다 북한당국은 1970년대 초 남북대화가 시작되자 전술적 필요에 따라 천도교청우당을 내세 웠다. 1972년 8월 남북적십자회담 본회의에 북한 측 자문위원으로 참석한 당시 천도교청우당 부위원 장 강장수는 실제로 노동당원이었다고 한다. 특히 북한으로 망명한 최덕신이 1989년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으로 임명되어, 연방제 지지, 주한미군 철수 등 대남비난 선전에 이용당하는 대외 간판 역할을 하였다. 2000년 제1차 이산가족 방문단 교환 때 당시 천도교청우당 위원장이었던 류미영은 북측 단 장으로 서울을 다녀가는 등 남북공동행사시 북한의 대표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관련 검색어 _ 조선사회민주당

281 조직지도부 조직지도부는 노동당의 전문부서 중에서 핵심부서로 당조직을 통제하고 당조직들을 통해 국가기 관의 전 행정과정을 지도독한다. 강력한 영향력을 가진 조직지도부는 최고지도자의 직속부서로서 다른 전문부서와 다르게 지도 라는 명목으로 중앙당 안의 당기관(본부당위원회)을 두어 당중앙위원회 내 모든 부서들을 직간접적 으로 통제 감독하는 최상의 권력기능까지 수행한다. 특히 조직지도부는 핵심기관의 간부당원에 대한 간부인사권과 관련된 주민등록문건을 보관하고 이들에 대한 검열통제기능을 가지고 있는 모든 공안 기관들에 대한 당조직 생활을 감독 및 통제한다. 이처럼 조직지도부가 북한에 존재하는 모든 핵심권 력기관들을 통제하는 구조와 기능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최고지도자는 바로 조직지도부를 통하여 북한의 모든 당 군 정 고위간부들을 비롯하여 그들의 지시를 받는 하위 경제부문 간부(당원)들까지 확고하게 장악하고 있다. 북한은 조직지도부의 중요한 임무를 간부들과 당원들의 당 생활 지도라고 규정하고, 수요강연 회, 토요학습, 경영학학습, 금요노동, 2일 및 주 당생활총화, 매일 2시간 자체학습을 정규화 습성화하 며 모든 당조직 생활에서 무조건 참가하는 혁명적인 기풍을 세우는 일 에 조직지도부가 나서야 함을 강조하고 있다. 1973년 31세의 나이에 조직지도부장의 자리에 오른 김정일은 조직지도부의 기본 기능인 당원들 과 근로자들의 조직생활에 대한 지도를 강화하고 조직지도부의 당조직체계를 직접 지도하기 위해 조직지도부를 체계적으로 확대 개편하였다. 또한 조직지도부에 검열과를 신설하고 사회 각 분야에서 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지도체제 확립 현황을 검열할 수 있는 전권을 부여하였다. 그리고 1978년부 터는 당정치국 후보위원과 당 비서, 부장들에 대한 독자적인 추천권을 행사하였다. 그리고 1990년대 전반까지 거의 모든 중요 회의들에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이 참석하여 결정에 참여하였다. 한편 2010년부터 발생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들의 죽음으로 인해 김정은 체제 출범에 대한 권력 다툼 의혹이 제기되기도 하였다. 리용철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심장마비로 사망(2010년 4월)했고, 리제강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이 교통사고로 사망(2010년 6월)했으며, 박정순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 이 폐암으로 사망(2011년 1월)하였다. 관련 검색어 _ 선전선동부

282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 조총련(재일본조선인총연합회)은 북한에 강한 소속감을 갖는 재일본 공민단체이다. 연원 조총련은 일본 공산당의 지도하에 활동하고 있던 공산계 재일 동포들의 조직인 재일조선통일민 주전선 을 모체로 하여 1955년 5월 25일 결성되었다. 북한은 조총련에 대해 경제적으로 적극적인 지원을 하고 있다고 선전하면서 1957년부터 2003년 4월 15일까지 교육원조비와 장학금 명목으로 149차에 걸쳐 총 451억 616만 3,000엔을 송금했다고 밝 히고 있다(조선중앙방송, ). 그러나 북한이 조총련으로부터 갖가지 명목으로 거액의 자금과 물품을 헌납 받고 있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또한 조총련계 실업인들과의 합영을 통해서도 적지 않게 도움을 받고 있는 실정이다. 한편 북한은 조총련을 통해 1959년 12월 14일부터 1984년까지 187차에 걸쳐 총 93,342명의 조총 련계 재일동포를 북송시켰다(조선중앙연감, 1985). 그런가하면 1967년 제4기 최고인민회의부터는 조 총련 대표를 대의원으로 선출하고 있다. 주요 활동 조총련은 1998년 5월 22일 제18차 전체대회를 열어 한덕수 의장-서만술 제1부의장-허종만 책임 부의장 체제를 정립하고, 10여 명으로 구성되어 있던 부의장단을 4명으로 줄이는 등 조직정비를 단 행함으로써 업무의 효율화를 모색하였다. 또한 1999년 4월 서만술 제1부의장 방북 시 조총련을 일본 실정에 맞게 개혁하라 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동년 9월 중앙위원회 확대회의를 열어 일부 조직을 개편하고, 동포생활과 권익옹호를 최우선시하는 사업방침을 확정하는 등 변화를 모색하였다. 2001년에 취임한 서만술 의장은 그해 7월 일본 각지에서 열린 각 지부별 정기대회에 참석하여, 조총련의 기층조직인 지부와 분회 활동을 적극 강화해 나갈 것을 촉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모든 조총련의 애국사업 은 앞으로 동포밀착, 동포복무, 동포주인형으로 혁신될 것이다. 라면서 동포 중 심의 조총련 활동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장기간에 걸친 일본의 경기침체 등 여러 요인에 의해 조총련의 돈줄인 조은( 朝 銀 )신용조 합들의 파산이 잇따르고, 2001년 11월에는 조총련 중앙본부에 대한 일본경찰의 압수수색이 이루어지 는 등 악재가 겹치면서 조직이 약화되고 있다. 특히 일본이 1972년부터 외교기관에 준해 면제해주던 세금을 2003년부터 부과하기 시작하면서 상황은 더욱 열악해졌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학교에서의 학습조 폐지 등 조총련의 조직과 교육을 개혁하는 조치를 취한 바 있다. 이와 같이 북한과 정치 사상 경제적으로 깊은 연계를 맺고 있는 조총련은 북한의 대외선전기구 및 대남혁명을 위한 전진기지역할 을 수행하던 기능에서 일부 벗어나 동포권익옹호 단체로의 탈바꿈을 시도하는 등 현실 적응을 위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 조총련에서는 기관지인 <조선신보>를 발행하고 있다. 이 신문은 1945년 10월에 창간되었는데,

283 처음에 이름은 <민중신문>이라고 불렸다. 그 후 <해방신문>으로 이름을 바꿨다가 1960년대에 들어 서 <조선신보>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다. 한편, 조총련에서는 조선학교 로 불리는 교육기관들을 운영하고 있는데, 초등교육기관인 초급학 교, 중 고등교육기관인 중급학교 와 고급학교, 대학교 를 갖추고 있다. 이 학교들은 대부분 지방에 펼쳐져 있고, 대학교로는 조선대학교가 있다. 관련 검색어 _ 조선신보

284 종자론 북한에서 말하는 종자 란 쉽게 말해서 작품 창작이든, 어떤 일을 하든, 중심이 되어야 할 사안, 즉 핵심이라고 할 수 있다. 종자론은 문화예술 부문에서 시작 되었지만 내면적으로는 수령체계 및 김정일의 후계체제와 연계되어 사상적 뿌 리의 유일성을 강조하는 의미로 사용되고 있다. 배경 종자론은 김정일의 <영화예술론>(1973.4)에서 처음 제시된 이론으로서 사업에서 근본을 이루는 핵을 틀어쥐고 근원적 문제부터 혁명적으로 풀어 사업전반에서 변혁을 이룩해 나간다. 는 종자중시 사상이다. <영화예술론>에 따르면 문학작품에서의 종자란 작품의 핵 이며 작가가 말하려는 기본 주 제가 있고 형상의 요소들이 뿌리내릴 바탕이 있는 생활의 사상적 알맹이 로 규정되고 있다. 문학예술 작품에서의 종자론은 이후 북한 사회 전 분야로 확대돼, 모든 활동에서 종자를 틀어쥐고 일할 것을 요구했다. 종자론이 등장한 시기는 북한에서 유일사상체계가 세워지면서 주체사상의 이론적 실천적 틀이 잡혀가고, 김정일이 후계자로서 입지를 강화하는 시기였다. 이런 의미에서 문화예술 부문에서 종자 를 잘 심어야 한다는 것은 북한 사회의 이념과 가치체계, 즉 수령과 그 후계자를 중심으로 사회주의 사상이 전일적으로 관철되어야 함을 의미한 것이다. 주요 내용 종자론의 바탕을 이루는 두 요소는 사상성과 이를 형상화하는 예술성이다. 사상성이란 당의 정책 을 정확히 반영하고, 당의 노선과 정책에 철저하게 의거하여 시대가 제기하는 사회 정치적 과제에 올바른 사상적 해답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예술성이란 예술적 형상화를 잘 이루는 것을 의미하는 데 이는 작품의 사상성과 예술성을 결합시키며, 작품의 철학적 깊이를 보장하고, 창작자의 예술적 환상을 불러일으키는 원천이며, 창작자를 속도전으로 추동하는 요인 이라고 북한은 설명하고 있다. 한편 북한에서는 종자론을 특정 분야만이 아니라 혁명과 건설의 모든 부문 분야에서 추진해나가 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 종자론에는 예술적 형상의 비결, 종자혁명의 방도, 대중을 조직 동원하는 영도예술, 군사적 지략도 있다는 것이다. 종자론을 튼튼히 틀어쥐고 나가자 (노동신문, )를 보면, 종자론을 김정일의 사상이론 이라고 정의함으로써 김정일 시대의 통치이론적 지위를 부여하였 다. 근본적 변혁의 방법을 구체적으로 열거한 한 것으로 볼 때, 신사고론 의 실천방법으로 제시한 것 으로 보인다. 특히 최단 기간 내 양적, 질적 성과보장, 대담한 변혁, 철저한 실리보장, 21세기에 상응 한 실력 배양 등을 강조하고 있다. 평가 종자론은 주체문예이론과 함께 북한의 문학예술정책의 핵심적인 두 기둥에 해당된다. 주체문예 이론이 김일성에 의해 주창된 것으로 선전되는 미학의 원리라고 한다면, 종자론은 주체문예이론에 입각하여 예술창작에 임하도록 요구하는 일종의 실천강령이라고 할 수 있다. 결국 종자론에 의거한

285 북한의 문학예술 작품은 지도자의 교시와 당의 정책을 구현하는 수단으로서 의미를 지니게 된다. 또 한 2000년대에 들어서는 열악한 경제상황 속에서 경제 사회 문제를 풀어나가기 위한 통치이념으로 활용되었다. 관련 검색어 _ 신사고, 주체문예이론

286 주석 북한의 주석은 김일성 시대의 국가수반으로서 국가를 대표하는 명실상부한 최고 직위였다. 1972년 12월 최고인민회의 제5기 제1차 회의에서 사회주의헌법을 채택하면서 주석직이 신설되었다. 그리고 김일성 사망 후에 주석직을 공석으로 유지하고 있다가 1998년 9월 5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10기 제1차 회의에서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를 폐지했다. 연원 북한은 1972년 혁명과 건설에서 이룩된 성과를 공고히 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건설을 보다 강 력히 추동할 수 있는 무기로서의 사회주의헌법을 새로 제정할 것 이라고 하면서 인민민주주의헌법 을 사회주의헌법 으로 개정하고 국가기관체계도 재편했다. 사회주의헌법에서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주석을 정점으로 한 권력독점구조 가 제도화되었다는 점이다. 인민민주주의헌법 하의 최고인민회의 및 내각의 권한이 신설된 주석과 주석의 지도를 받는 중앙인민위원회에 배분되었고, 내각은 단순히 행정적 집행기관 인 정무원으로 개편되어 중앙인민위 원회의 지도를 받게 되었다. 이에 북한에서는 사회주의헌법에 의하여 제정된 국가기관체계는 국가기관들의 조직과 활동에 서, 전반적인 혁명투쟁과 건설사업에서 수령님의 유일적 영도를 확고히 보장할 수 있게 하는 국가정 치지도체계 라고 주장하였고, 또한 사회주의헌법은 주석제를 기본으로 하는 강력한 국가기구체계 가 마련됨으로써 우리 인민은 국가사업과 국가활동전반에 대한 위대한 수령님의 유일적 영도를 가장 철저히 보장하는 기구적 담보를 가질 수 있게 되었다. 고 주장했다. 권한과 역할 북한은 김일성 유일지배체제의 제도적 장치를 마련하고, 정책의 효율적인 통제와 집행을 위해 주 석직을 신설하였다. 주석은 종래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의 권한과 내각 수상의 권한 중 중요한 권한 대부분을 이관 받았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에게서는 특사권, 신임장 및 소환장 접수권, 조 약 비준 및 폐기권 등을 이관 받고, 내각 수상에게는 군통수권, 행정적 집행기관(정무원)의 지도권 등을 이관 받고, 더구나 신설된 국가주권의 최고지도기관 인 중앙인민위원회까지 직접 지도하게 되 었다. 이에 수령의 유일적 영도 를 보장하는 주석직에 의해 주석은 명실상부한 국가수반이며 국가주 권의 대표자로 자리매김하게 되었다. 당시 북한의 주석은 당연직으로 국방위원장직을 겸직했으나 김일성은 1991년 12월 24일 김정일 에게 인민군 최고사령관직을 이양하면서 군에 대한 김정일의 안정적인 권력기반을 구축하기 위하여 1992년 헌법 개정을 통해 국방위원장직을 독립시켜 군통수권을 분리시켰다. 이로써 주석의 군에 대 한 모든 권한은 국방위원회와 국방위원장에게 이관되었다. 1998년 헌법 개정을 통해 주석제가 폐지됨에 따라 외국에 대한 국가대표권은 최고인민회의 상임 위원장이, 정부대표권은 내각 총리가 분담하게 되었다. 북한의 주석제는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는데 기여했으며, 김일성 사후에는 그를 영원한 주석 으로 추대하였다

287 중앙인민위원회 주석을 수위로 하고 부주석, 중앙인민위원회 서기장, 위원들로 구성된 중앙인민위원회는 북한만의 독특한 기구였다. 여타 사회주의 나라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이 기구는 최고인민회의 휴회 중의 국가주권의 상설적인 최고지도기관으로서 모든 국가기관들과 국가사업에 대하여 주권적인 지도와 감독 을 하는데, 종래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많은 권한을 이관받았다. 이것은 국방 및 국가정치보위 사업 지도, 대사와 공사 임명 및 소환, 군사간부 임명 및 해임, 대사 실시, 훈장 명예칭호 수여, 정무원 지도 등이었다. 북한에서는 이러한 임무와 권한은 수령님의 교시와 그 구현인 당의 노선과 정책을 국가사업의 모든 분야에서 정확히 관철하며 공화국 주석의 유일적 영도밑에 모든 국가기관들이 한몸과 같이 움직이도록 그들의 전투적 기능을 높일 수 있게 하는 확고한 담보 라고 주장하였다. 더구나 중앙인민위원회 구성원을 보면 정치국원들이 대부분이고 나머지가 당중앙위원들인 것으로 보아, 중앙인민위원회가 당정협의체적 성격 을 기본으로 하여 국가기관체계를 통해 당의 정책과 노선을 집행한다는 북한의 주장을 뒷받침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국방위원회, 북한 헌법

288 주체농법 북한에서 정의하는 주체농법이란 기후풍토와 농작물의 생물학적 특성에 맞게 농사를 과학기술적으로 짓는 과학농법이며, 현대과학기술에 기초하여 농업생 산을 고도로 집약화하는 집약농법이다. 화학비료에 의한 밀식재배를 그 특성 으로 한다. 배경 북한은 1970년대 초반부터 기후 조건을 극복하면서 농업생산을 높일 수 있는 새로운 농법을 모색 하였다. 그러한 과정에서 탄생한 것이 바로 주체농법 이다. 김일성은 1973년 1월 17일과 22~24일 황해남도 평양시 평안남북도 농업일꾼협의회에서 농업생 산에서 일대 전환을 일으키자 라는 제목의 연설을 하였다. 그는 연설에서 최근 몇 년 동안 농사가 잘되지 못한 기본 원인이 농촌의 노동력 부족이나 기후 악화에 있는 것이 아니라 각급 당조직들이 농촌에서 사상교양사업을 잘하지 못하였고, 국가는 농업생산에 필요한 물질 기술적 조건을 제대로 보장해주지 않았으며, 간부들이 농촌경리 사업을 관료주의 주관주의 형식주의적으로 지도한 데 있다 고 비판하였다. 여기에서 그치지 않고 김일성은 1년 동안 전국 각지의 협동농장들을 현지지도 하면서 토양 관리 부터 품종 배치, 파종, 모판 관리, 모내기, 영양단지에 의한 강냉이 재배, 물 관리, 비료주기 등 모든 영농공정에 직접 관여하였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주체농법이 탄생되었고 체계화되었다. 주요 내용 주체농법이 추구하는 것은 단위면적당 수확률을 높임으로써 농업생산에서 증산을 이루는 것이다. 부족한 경작지와 농사에 불리한 기후 조건을 극복하고 식량의 자급자족을 이루어내기 위해서는 다수 확 알곡작물의 품종을 끊임없이 개량하여 단위면적당 수확량을 극대화시키는 것이 바로 주체농법이 지향하는 집약농법의 핵심이다. 또 주체농법은 토지를 가장 효과적이고 집약적으로 이용하여 단위당 수확고를 최대한 높이기 위 한 방도로서 토양의 물리화학적 성질을 포전별로 세밀히 분석하고, 모든 논밭에 많은 유기질 비료, 다량원소비료, 미량원소비료를 투하할 것을 강조한다. 이를 일컬어 자연 그 자체가 줄 수 없는 새로 운 비옥도를 높여주는 방법이라 칭한다. 그러나 주체농법에 의해 북한의 농업 생산구조는 기존의 다각적 영농에서 다수확 작물인 강냉이 와 벼 중심의 단작 영농 형태로 점차 고착화되었다. 그리고 적지적작의 원칙 역시 점차 작물에서 품 종으로 초점이 옮겨갔다. 또한 품종 배치가 전국적 범위에서 중앙집권적으로 이루어졌다. 주요 작물 의 품종은 내각과 농업위원회의 결정과 명령에 의해 지대별 도별에 따라 일률적으로 배치되었다. 이 러한 단작 영농 구조는 1990년대 중반까지 계속되었다. 평가 주체농법에 의해 다각적 영농에서 쌀과 옥수수 중심의 단작 영농 형태의 농업 생산구조로 바뀌

289 고, 이러한 방식의 영농이 지속됨에 따라 북한주민의 식생활의 불균형을 야기할 뿐만 아니라 화학비 료의 대량 투입으로 인해 지력( 地 力 ) 약화와 심각한 토지의 산성화를 초래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은 1990년대 들어서서 급격한 농업생산력의 저하에 직면하게 되었으며, 이는 북한이 만성적인 식량부족 현상을 겪게 되는 요인이 되기도 하였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협동농장

290 주체문예이론 주체문예이론의 핵심은 사실주의 원칙을 적용하되 모든 문제를 주체사상에 입각하여 풀고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그 주체의 중심에 수령을 두고 예술적으로 형상화하는 것이 주체문예이론의 창작방법이다. 배경 북한은 1967년 이후 당의 유일사상체계를 더욱 철저히 세우고 주체사상을 유일사상으로 하는 사 상적 일체화를 추진해 나갔다. 문예 분야에서도 주체사실주의 를 유일한 창작방법으로 인정하게 되 면서, 이러한 주체사실주의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개념이 바로 주체문예이론이다. 1970년대 이후 이 이론은 북한에서 사회주의적 사실주의의 창작방법보다 우위의 창작이론으로 자리 잡게 되었다. 주체 문예이론이 공식화된 것은 1980년 12월 김정일이 전국선전일꾼대회 에 보낸 서한에서 문학예술사 업에 대한 수령의 유일적 영도를 철저히 실현하고 창작가, 예술인들을 당의 유일사상으로 철저히 무 장시키며 그에 기초한 혁명적 문학예술을 창작할 것 을 제창한 이후이다. 주요 내용 주체문예이론은 문학예술에서 주체 확립의 본질적 내용을 과학적으로 밝히고 시대의 현실적 조 건과 문학예술 자체 발전의 요구에 맞게 창조 발전되어야 한다는 목표를 가진다. 주체문예이론에서는 민족적인 정서와 감정을 중시하는 문학예술의 형식을 추구한다. 그러므로 예술적 형상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민족적인 문예형식을 현대적인 느낌으로 완성시키는 것이 필요하 다. 그러나 주체문예이론은 이러한 예술성만을 중요시 하지 않고 노동계급의 혁명사상을 구현하고 사회주의적 이념을 뚜렷하게 표현해야만 그 의미가 있음을 주장한다. 즉 민족적인 형식을 바탕으로 삼고 거기에 사회주의적 내용을 지녀야 한다는 것이다. 여기서 말하는 민족적인 형식이란 김일성에 의해 일제 강점기에 지도 창작됐다는 혁명적 문예형 식 을 의미한다. <피바다>, <꽃파는 처녀> 등이 모두 혁명적 문예형식의 대표적 작품들이다. 민족적 인 형식과 마찬가지로 사회주의적 내용이라는 요건도 사실상 김일성의 혁명사상으로 귀결되고 있다. 즉 주체문예이론은 김일성의 문예사상과 김정일의 문예방침을 모든 문학예술 창작활동의 지침으 로 삼고 이를 통해 북한 사회의 주체사상화를 실현하는 것을 기본사명으로 하고 있다. 모든 문예작품 과 이론에 김일성과 김정일의 주장이나 모습을 어떤 형태로든지 다루어야 하는 것이다. 평가 주체문예이론은 문학예술을 통해 김일성의 교시와 당정책을 관철하고자 하는 목적을 가진다. 주 체가 되는 인물의 전형으로 수령을 중심에 두며, 사회주의적 내용을 기반으로 창작되어진다. 북한에 서는 이러한 기본이론을 바탕으로 하여 매 시기마다 필요한 새로운 정책을 내세우고 이를 예술작품 에 반영하도록 문학예술인들을 추동하고 있다. 이와 같이 주체문예이론은 인민대중을 사상적으로 무 장시키고 김일성 유일사상을 확립하는데 기여하는 수단으로서의 문예관 을 잘 드러내는 이론이라

291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주의적 사실주의, 수령론, 종자론

292 주체사상 주체사상은 북한의 통치이념으로 김일성이 창시하고 김정일이 이론적으로 심 화시켰다고 주장하는 김일성의 공산혁명사상이다. 북한은 주체사상체계 전반 을 김일성주의 라고 한다. 이러한 주체사상은 북한의 정치 경제 사회 문화 외 교 군사 등 사회 모든 분야를 규정 지배하고 있다. 배경 북한에서 주체성 논의가 활발해지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중반부터이다. 당시 주체 는 하나의 사상이나 철학으로 제시되었다기보다는 제국주의 사상과 문화의 침투에 대한 민족주의적 대응의 성 격이 강하였다. 제국주의 사상과 문화의 침투란 스탈린 사망(1953.3) 이후 흐루시초프의 등장에 따른 스탈린 격하운동과 평화공존노선 채택, 공산권 내부에서 사회주의 체제로의 다양한 길 인정, 마오쩌 둥의 영향력 증대에 따른 국제 공산주의 운동 내 또 하나의 중심축인 중국의 등장 등을 의미한다. 정치적 측면에서는 김일성의 1인 지배체제를 구축하기 위한 명문논리로 제시되었다. 대내적으로 는 소련파 연안파 등 김일성의 반대세력을 숙청하기 위한 논리로서 이용되었다. 대외적으로는 스탈 린 사후 소련에서 개인숭배에 대한 비판이 제기되는 상황에서 김일성의 지도력이 도전받게 되는 것 을 차단하고, 중 소 간 이념분쟁이 가열되는 상황에서 중립적 위치를 고수하려는 외교전략적 대응으 로 표출된 측면도 있었다. 북한에서 주체 라는 말이 처음 등장한 것은 1955년 12월 28일 김일성이 노동당 선전 선동 일꾼들 앞에서 행한 연설 사상사업에서 교조주의와 형식주의를 퇴치하고 주체를 확립할 데 대하여 에서이 다. 그러나 북한은 주체사상의 기원에 대하여 김일성이 1930년 6월 중국 지린성 창춘현 카룬에서 열 린 공청 및 반제청년동맹 지도간부회의 에서 주체사상의 원리를 처음 천명했으며 조선혁명의 주체 적 노선을 밝혔다고 주장하고 있다. 변천 북한은 1955년 사상에서의 주체 를 시작으로, 1956년 경제에서의 자립, 1957년 정치(내정)에서 의 자주, 1962년 국방에서의 자위 그리고 1966년 정치(외교)에서의 자주 를 표명하면서 주체사상의 이론적 체계화를 시도하였다. 주체 가 주체사상 으로 된 것은 김일성의 1인 지배권력의 강화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다. 주체 사상이라는 명칭이 정립되기 시작한 것은 1967년 12월 6일 개최된 최고인민회의 제4기 제1차 회의에 서 김일성의 국가의 모든 활동분야에서 자주, 독립, 자위의 노선을 철저히 구현하자 라는 연설에서 이다. 이 연설에서 김일성은 우리 당의 주체사상은 우리의 혁명과 건설을 성과적으로 수행하기 위 한 가장 정확한 맑스-레닌주의적 지도사상이며 공화국 정부의 모든 정책과 활동의 확고부동한 지침 이라고 밝혔다. 1970년대에 들어서자 주체사상은 당의 유일한 이념으로서 혁명과 건설의 지도적 지침으로 표방 되기 시작하였다. 1970년 제5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을 당의 공식이념으로 채택하였고, 1972년에 제 정된 사회주의헌법은 주체사상을 공식 통치이데올로기로 규정하였다

293 그리고 1980년 제6차 당대회에서 주체사상은 맑스-레닌주의를 떨쳐내고 독자적 통치이념으로 자 리 잡게 되었다. 1980년대에 접어들면서 주체사상은 김일성의 공식 후계자로 등장한 김정일을 우상 화하기 위해 수령에 대한 지속적 충성심을 강조하는 작업이 더해졌다. 대를 이어가며 주체의 위업이 달성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1982년 김정일의 <주체사상에 대하여>는 주체사상을 체계화, 이론화하 여 김일성주의 로 정식화하였고, 1986년 <주체사상 교양에서 제기되는 몇 가지 문제에 대하여>를 통해 혁명적 수령관과 사회정치적 생명체를 정식화하고 주체사상체계를 완성하였다. 1980년대 후반 이후 동유럽 사회주의권과 소련이 붕괴하자 체제위협을 느낀 북한은 우리식 사회 주의 라는이름으로 주체사상을 재해석하여 북한식 사회주의를 동유럽 사회주의권과 차별화하는 데 주력하였다. 1994년 김일성 사망과 1990년 중반 이후 심각한 경제난을 겪으면서 주체사상의 영향력은 약화되 기 시작하였고,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선군정치가 북한정치의 전면에 부상함에 따라 주체사상의 사 회적 구속력이 저하되는 현상이 나타났다. 특히 김정은이 후계자로 등장한 이후 개정된(2012.4) 노동 당 규약 전문에서는 당의 유일한 지도사상으로 주체사상 대신 김일성 김정일주의 를 표방하고 있다. 평가 주체사상은 사실상 개인의 권력 독점을 통한 1인 지배체제의 강화와 우상화를 위한 정략적 도구 로 활용되어 왔다. 혁명적 수령관 이나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등을 동시에 내세워 수령과 인민대중의 관계를 사실상의 주종관계로 규정함에 따라, 인민대중을 수령의 지도에 절대적으로 의존하고 복종해 야 하는 수동적 객체로 전락케 하였다. 즉 수령의 절대화 또는 인민대중의 비주체화 비자주화를 합리 화하는 논리적 도구로 활용되었다. 또한 1990년대 중반 이후 지속되는 심각한 경제난 속에서 주체사상은 최고 지도이념이라는 공식 적 위상과 달리 실질적 정책지침으로서의 실효성이 약화되었고, 이에 따라 사회적 영향력도 저하되 었다고 볼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수령론, 우리식 사회주의, 주체의 사회역사관

294 주체연호 주체연호는 김일성의 출생연도인 1912년을 원년으로 하는 북한의 연도 표기 방식을 말한다. 북한 은 김일성의 사망 3주기를 기해 종래 사용해 오던 연도표기 방식인 서기 를 대신해 그의 출생 연도인 1912년을 원년 으로 하는 주체연호 를 사용하기로 했다. 1997년 7월 8일 당중앙위원회, 당중앙군사위원회, 국방위원회, 중앙인민위원회, 정무원(현 내각) 5개 기관은 공동결정서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의 혁명생애와 불멸의 업적을 길이 빛내일데 대하 여 를 통해 주체연호와 태양절(4월 15일)을 제정하기로 하였다. 공동결정서에서는 주체연호와 태양 절의 제정 목적이 김일성의 혁명업적을 기리며, 당중앙(김정일 지칭)의 영도에 따라 김일성의 혁명위 업을 계승하고 완성하려는데 있다고 밝히고 있다. 북한은 8월 25일 중앙인민위원회 명의로 주체연호 사용규정 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정권 수립일 인 9월 9일부터 주체연호 사용을 위한 기본 원칙과 방법을 밝혔다. 이에 따르면 북한주민들은 서신거 래와 언어생활을 비롯한 일상생활에서 연도표기와 표현에서 주체연호와 연도만을 사용해야 한다. 사 적인지 공적인지 불문하고 각종 출판물과 문서, 건축물 등에는 연호와 연도를 표시할 때 원칙적으로 주체연호에 의거해야 하기 때문이다. 사용상 편의를 위해 서기는 주체연호 뒤에 괄호를 넣어 표기한 다. 북한이 이처럼 주체연호를제정한 것은 김일성의 신격화 영속화를 통해 김일성의 카리스마를 김 정일에게로 이어감으로써 정권의 안정성을 유지하고 강화하려는 목적에서 비롯된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광명성, 명절

295 주체의 사회역사관 북한의 주체의 사회역사관(이하 주체사관) 은 맑스-레닌의 유물사관에 기초하고 노동당의 유일 사상인 주체사상으로부터 파생된 역사관이다. 주체사관에 의하면, 역사는 합법칙성을 가지고 발전하 며, 역사를 주체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인민대중 이다. 그리고 인류역사는 역사의 주체인 인민이 스스로의 자주성을 실현하기 위한 투쟁의 역사라고 규정한다. 따라서 역사, 즉 혁명의 과정에서 사람의 자주적인 사상의식이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고 주장한다. 김일성과 김정일의 지시에 근거한 북한의 역사 연구대상은 혁명투쟁의 역사이다. 이러한 역사연구의 방향은 일정한 과정과 단계를 거쳤다. 먼저 해방 이후에는 유물사관에 기초하여 생산력 발전에 의한 사회구성체와 계급투쟁, 당 계급성의 원칙과 역사주의의 원칙을 핵심으로 보았 다. 1958년 이후 소련의 영향에서 벗어나려는 노력과 함께 주체를 세우는 방향으로 <김일성선집>에 대한 개작이 이루어졌다. 역사 연구 분야에서 혁명 역사 분야 가 분화된 과정은 김정일이 실권을 장악해간 과정과 일치한 다. 1966년 김정일은 수령의 유일사상체계와 유일영도체계를 세우는 사업을 당사업의 기본으로 설정 하고 추진하였다. 1973년 김정일이 조직상비서로 발탁되면서 역사학의 방향도 본격적으로 변화하 여, 1974년 김일성주의 를 선언하고 온 사회의 김일성주의화 를 관철시켜나갔다. 이 과정에서 역사학 은 주체사상에 복무하는 사회과학, 주체과학 으로 재정립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 북한의 지도이념 은 여전히 맑스-레닌주의 안에 있었다. 1980년대 들어서며 지도이념을 주체사상 만으로 한정시켰고 이후의 역사학의 성과는 주체사관에 의한 것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주체사관은 인민대중의 투쟁에서 최고핵심은 지도의 중요성 이라고 강조하였다. 그렇지만 투쟁 의 성공은 영명한 지도자의 존재에 달려있다고 하면서 지도자를 수령 또는 최고지도자에 한정시켰 다. 결국 주체사관은 김일성 일가의 지도성을 부각시키는 것이며 유일사상체계, 즉 김일성 김정일 체제의 정통성 마련을 위한 근거를 제공하였다. 관련 검색어 _ 유일사상체계, 주체사상

296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 자립적 민족경제를 경제건설의 기본노선으로 채택하고 있는 북한이 자립경제 의 토대가 중공업에 있다고 보고 산업 간 발전의 우선순위를 중공업 부문에 놓 고, 이 부문에 대한 우선적 자원배분, 우선적 발전보장을 원칙적 요구로 채택하 고 있는 것이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이다. 배경 북한은 사회주의 계획경제 체제 수립 이후 자립적 민족경제를 전면적으로 구현하기 위한 수단으 로 중공업 우선발전에 기초한 불균형 성장전략을 채택해 왔다. 즉 사회주의 공업화의 중심은 중공 업의 선차적 발전에 있다. 기계제작공업을 핵심으로 하는 강력한 중공업을 창설하여야 자립적 공업 체계를 확립하며 인민경제의 전면적 기술개건도 실현할 수 있다. 라고 주장하면서 중공업 우선발전 을 이른바 자립적 민족경제 구축의 핵심으로 삼아왔다. 북한이 산업화의 초기단계에서부터 막대한 자본과 생산설비 및 기술 인력이 필요한 중화학공업 을 건설하려 했던 것은 중화학공업의 우선적인 성장을 통하여 산업발전에 필요한 생산재와 자본재를 자급자족할 수 있는 기반을 조성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즉 중공업의 우선적인 발전을 통하여 생산기 반을 구축할 때에만 경공업과 농업도 계속적인 발전이 가능하다는 논리에 의거한 것이었다. 주요 내용 북한에서 정의하는 중공업은 생산수단을 주로 생산하는 공업 부문들의 총체 이며, 중공업 부문에 는 전력공업, 석탄공업, 광업, 금속공업, 기계제작공업, 화학공업, 건재공업 등의 기간공업 부문들과 임업이 포함된다. 북한의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은 한정된 재원을 중공업 부문에 집중투자하게 함으 로써 경공업과 농업의 발전이 심각하게 위축되는 산업불균형 현상을 초래하였다. 북한은 중공업 우선정책이 가져온 불균형과 왜곡을 시정하고자 일시적으로나마 중공업을 위한 중공업이 아니라 경공업의 발전을 효과적으로 뒷받침할 수 있는 중공업의 발전에 주력할 것을 강조 한 시기도 있었다. 북한이 1989년에 경공업발전 3개년 계획 (1989~1991년)을 발표하고 1989년도를 경공업의 해 로 설정한 것이나 제3차 7개년 계획의 완충기(1994~1996년) 중점과업으로서 농업제일 주의, 경공업제일주의, 무역제일주의 등 3대 제일주의 방침을 제시한 것이 대표적 사례이다. 그러나 북한은 1998년부터 선군( 先 軍 )정치를 앞세우면서 중공업 우선발전의 기본노선은 크게 변 화하지 않았다. 매년 전력, 석탄, 금속, 철도운수 등 경제의 선행부문 을 끊임없이 강조하는 것에 잘 나타난다. 이는 구조적인 경제침체로 심대한 타격을 입은 전력, 석탄, 금속 등 이른바 선행부문 을 정상화시키기 위한 노력의 일환으로 볼 수 있다. 이렇게 볼 때 북한은 여전히 기본적으로 중공업 부 문의 산업비중이 압도적으로 높으며 정책적인 관심도 경공업 부문보다 중공업 부문에 치중하고 있 다. 평가 중공업 우선정책의 무리한 추진으로 인하여 북한 경제는 산업부문 간의 구조적 불균형에 시달리

297 고 있다. 경공업은 물론이고 농업과 사회간접자본 시설이 매우 낙후되어 있으며 이 때문에 부문 간 유기성을 상실, 효율적인 경제발전이 어려운 국면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무엇보다 중공업 우선정책은 1966년 북한이 4대 군사노선을 표방하고 군사 경제 병진 노선을 채 택함에 따라 국방력을 키운다는 명목으로 더욱더 중공업에 매달리게 됨으로써 인민경제생활의 희생 을 요구하게 되었다. 즉 중공업 우선정책은 농업과 경공업의 이익이 중공업으로 넘어가며, 재투자를 받지 못한 농업과 경공업의 생산성은 지속적으로 하락하여 어느 순간 만성적인 식량 및 소비재 부족 현상을 초래하게 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은 장기적으로 산업부문 간 불균형과 경제의 왜곡을 초래하여 북한의 경제가 저효율과 저성장의 늪에 빠지는데 가장 중요한 원인이 되었다. 관련 검색어 _ 국방공업 우선발전 노선, 군사 경제 병진 노선, 3대 제일주의, 자립적 민족경제건설 노선

298 직통생 직통생은 중학교(우리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진학해 공부하는 학생을 가리키 는 말이다. 사전적으로 다른 데 들르지 않고 곧바로 간다는 직통 이란 의미와 학생 을 결합한 용어 다. 그러나 직통생 은 사전에 등재되어 있는 공식 용어가 아니라 대학 등 교육계를 중심으로 주민들 의 일상생활에서 많이 사용되는 대중용어다. 중학교 졸업 후 대학에 입학한 학생을 북한에서 대학생이라는 통칭 외에 직통생이라고 부르는 것은 대학생의 인적구성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 북한 대학생은 크게 세 부류, 즉 중학교를 졸업하고 곧바로 대학에 진학한 학생, 군 복무 후 대학에 입학한 학생, 직장생활을 하다 대학에 들어간 경우로 나뉜다. 군 복무의 경우 군 만기복무를 마치고 대학에 들어간 학생을 제대군인 출신 으로, 2~5년 정도의 군 복무를 한 뒤 대학에서 공부하고 졸업 후 다시 군에 가는 의탁교육 학생 을 현역 으로 각각 부르 고 있다. 사회에서 직장생활을 하다 대학에 진학한 학생에 대해서는 사회출신 으로 부른다. 직통생이란 군 복무나 사회생활을 하다 대학에 진학한 학생과 구별하는 의미에서 생긴 용어이다. 직통생은 예비시험에서 전체 중학교 졸업생의 약 20%가 추천되고, 각 대학의 본시험을 통해 절반 정도가 선발된다고 한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종합대학

299 집단주의 북한의 곳곳에서 하나는 전체를 위하여, 전체는 하나를 위하여! 라는 구호를 볼 수 있다. 이 구호 는 북한에서 1950년대 말 생산증산을 위한 대중운동인 천리마작업반운동 을 전개하면서 처음 나온 뒤 현재까지도 중요한 통치수단으로 이용되고 있다. 모든 주민들이 조직과 집단을 위해 자신을 희생 하고 복종해야하며 개개인보다 사회와 집단이 더 중요하고 우선해야 한다는 생활이념을 강조함으로 써 체제 결속의 수단으로 매우 애용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에서 사람은 개인으로서가 아니라 사회와 집단의 한 성원으로서 살아간다고 보고 사회와 집 단을 위해 얼마나 헌신하는가 하는 것이 가치 척도이자 활동 원칙으로 되어 있다. 개인주의는 철저히 배척되고 집단주의적 인생관만이 공산주의자들이 지녀야 할 참다운 신조라고 역설하고 있다. 또한 북한은 집단주의적 인생관을 이른바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과 연결시키면서 개인의 육체적 생명보다 집단의 사회정치적 생명이 더 귀중하다고 주민들을 의식화해 오고 있다. 이에 따라 북한의 모든 정치 사회제도는 집단주의에 기초하고 있으며 개인 및 사회생활의 구석구 석에 집단방식이 적용되고 있다. 북한주민들은 하루 일과 후 생활총화가 이루어지는데, 이 생활총화 가 집단주의 생활방식의 하나이다. 협동농장을 통한 농업의 집단화, 노력경쟁운동, 군중집회 등도 집 단주의에 의한 대표적인 현상들이다. 학습활동에서도 집체학습 과 집체토의 방식으로 이루어지며, 전체가 참가하는 집체적 지도 를 강조한다. 북한은 집체적 지도를 당 위원회의 활동에서 개인의 주관과 독단을 없앨 수 있게 하는 가장 과학 적인 지도방법 이라고 주장한다. 문학예술 창작에서도 집체작 이라는 방식으로 집단주의가 반영된 다. 우상화 문예물인 수령형상작품 이 1960년대 이후 양산되기 시작하며 여러 종류의 집체작이 제작 되고 있다. 수령의 위대성을 어느 한 개인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창작할 수 없으므로 여러 창작가들의 힘과 재능을 모아야 한다는 논리로 정당화 되고 있다. 4.15문학창작단, 백두산창작단, 만수대창작 사 등이 집체작 창작을 위한 분야별 전문 창작단이며, 각각 문학작품, 영화, 미술작품을 맡아 창작하 고 있다. 북한의 집단주의는 이렇듯 사회구조와 주민의식 속에 뿌리박혀 체제유지의 기제로 작동되어 왔 다. 그러나 북한 사회도 북한 스스로 말한 바와 같은 하나의 생명체이듯이 세월이 흐르면서 변하고 있고 그에 따라 집단주의 원리도 침식되어가고 있다. 지속적인 경제난으로 국가배급 체계가 사라지 고 주민 개개인이 장마당 경제를 통해 의식주를 스스로 해결해야 하는 사적 경제활동이 더 증가하고 있다. 여기에 외부 정보의 유입 등으로 북한주민의 개인주의 의식은 더 확산되고 있어 기존의 사상중 심주의와 집단주의 의식이 약화되는 경향을 보이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정치적 생명체론, 생활총화, 협동농장

300 천리마운동 천리마운동이란 하루에 천 리를 달리는 천리마를 탄 기세로 사회주의 건설에서 생산성을 획기적으로 높이자는 의미로 사용되는 사회주의 노력경쟁운동의 하나이다. 처음에는 사회주의 생산경쟁운동 형태로 시작된 천리마운동은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에 북한에서 사회주의 건설과 혁명을 촉진하는 강력한 추동력, 사회주의 건설의 총노선 이 되었다. 배경 북한에서 천리마운동이 처음 제기된 것은 1956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였다. 당시 북 한은 전후 복구건설 시기를 막 벗어나 사회주의 경제 건설에 매진할 때였으나, 1950년대 말부터 소련 을 비롯한 사회주의 국가들의 경제원조가 줄어들어 경제 건설의 재원조달에 어려움을 겪고 있었다. 또한 경제 건설노선을 둘러싸고 소련의 간섭이 계속되었다. 소련은 1955년 김일성의 소련 방문 당시 경제 건설 방향을 중공업 우선정책에서 경공업과 소비재 생산 중심으로 전환할 것을 요구했다. 내부 적으로도 여전히 전쟁 전 수준을 회복하지 못했고 소비재 부족과 인민생활 향상이라는 과제가 제기 되었다. 1956년 당시 김일성은 전원회의를 통해 당 일꾼들은 군중 속에 깊이 들어가 대중의 창발성을 최대한 발동시켜 사회주의 경제 건설을 기한 내에 완수하자. 고 제기했으며, 직접 강선제강소에 현지 지도를 나가 노동자들에게 혁명적 열의를 강조하였다. 그 결과 강선제강소 노동자들은 당초 6만 톤 의 생산계획을 생산경쟁운동을 통해 12만 톤으로 초과달성하게 되고, 이것이 모태가 되어 천리마운 동이 전국 각지로 확산되었다. 전개과정 1956년 12월 전원회의 이후 강선제강소에서 시작된 천리마운동은 평남청년탄광돌격대, 강계청년 발전소돌격대, 청년철도건설돌격대 등 노력동원과 속도경쟁을 통한 대중적 운동으로 확대 발전되었 다. 특히 이들 돌격대의 노동강화운동을 모범으로 삼아 발달된 이 운동은 1958년 9월 평양에서 열린 전국생산혁신자대회 를 계기로 북한 전체근로자의 노력경쟁운동으로 본격화되었다. 북한은 천리마운동을 단순한 증산운동으로서가 아니라 새로운 공산주의 인간형의 창조를 목표로 한 사상개조운동으로 활용하였다. 공장 기업소 협동조합 등 좁은 의미의 생산현장에 국한시키지 않 고 사회의 모든 분야를 포괄하는 사회주의 건설에 있어 당의 총노선으로까지 격상시켰으며, 개인 간 의 경쟁이 아닌 작업반 직장 공장단위의 집단적 경쟁과 혁신운동으로 발전시켜 이후 천리마작업반 운동으로 연결시켰다. 이 운동의 전개로 제1차 5개년 계획(1957~1961년)은 전 부문에 걸쳐 예정보다 1년 빠른 4년 만에 목표를 달성하였고, 목표를 초과 달성한 사람에게는 천리마기수, 성과를 낸 집단이나 조직에는 천 리마작업반 이라는 명칭을 부여했으며 뛰어난 성과를 낸 사람들에게는 영웅 칭호가 주어졌다. 천리 마운동 과정에서 천리마작업반 뿐만 아니라 천리마학교, 천리마직장 도 생겨났다. 천리마체조, 천 리마조선 같은 조어들도 탄생했다. 천리마처럼 앞을 향해 달려 나가는 듯한 느낌의 글자체 천리마

301 체 까지 만들어졌다. 한마디로 천리마는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 전체를 관통하는 북한 사회의 모든 것이 되었다. 그러나 1970년대에 들어서면서 운동의 한계성에 따라 천리마운동이 퇴색하는 기미가 나타나기 시작하자, 1976년부터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이라는 이름의 경쟁운동으로 전환되었고, 이후 80년대 속도, 90년대 속도 등의 구호가 내걸리기도 했으며 1999년부터는 제2의 천리마대진군 의 구호로도 변형되어 이어오고 있다. 평가 천리마운동은 기본적으로 대중의 혁명적 열의와 높은 창의성, 그리고 자기희생의 헌신성을 끌어 내는 운동이다. 이런 대중적 열정을 유발하기 위해서 제일 역점을 둔 것은 도덕적 자극이었다. 즉 유인동기를 물질적 보상보다는 노동자의 명예심과 도덕적 양심을 끌어내는 방법으로 삼았다. 결국 이것은 천리마운동이 사람의 의식을 교양 개조하는 사상교양사업을 중심으로 진행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부단한 정치사상교양만으로 노동생산성을 끊임없이 추동하는 방법은 한계를 가질 수밖에 없다. 자본투자와 기술혁신이 제때에 이루어지지 않은 채 노력동원과 속도경쟁에 기초한 경제 건설 방식은 초기에는 비약적 성장을 가져올 수 있지만, 점차 피로도 증가와 한계생산체감의 법칙에 의해 성장이 한계에 직면하게 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강계정신,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속도전, 속도창조 운동, 청산리정신 방법

302 청년돌격대 청년돌격대란 북한의 유일한 청년대중조직인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옛 사로청) 산하에 조직된 상설적 경제건설 조직을 말한다. 배경 청년돌격대는 해방직후 북한이 추진한 대자연개조사업 과 보통강개수공사 에 민청청년돌격대 라는 이름으로 처음 등장했다. 이후 시대적 상황에 따라 명칭이 변해왔다. 1950년 6 25전쟁 때에는 전선지원청년돌격대, 1954년에는 수도청년건설대, 1958년에는 기술혁신청년돌격대, 1968년에는 수 도건설청년돌격대 수도건설전국청년지원돌격대, 1970년에는 전국청년돌격대, 1973년에는 4.25청 년돌격대, 1975년에는 속도전청년돌격대 로 이름이 변경되어 왔다. 이처럼 북한은 청년들에 대한 사상교양과 노동력 확보차원에서 청년돌격대를 조직해 건설현장에 투입하는데 이 중 가장 규모가 큰 조직이 속도전청년돌격대이다. 속도전청년돌격대는 1974년 3월말 사회주의노동청년동맹(현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전원회의에서 김정일이 지시한 속도전운동에 청년들이 앞장설 것을 결의함에 따라 1975년 2월 16일에 조직되었다. 이후 청년돌격대는 도로, 발전 소, 철도, 아파트 등 중요 시설들의 건설을 도맡아왔다. 조직 구성 청년돌격대는 대학에 가기 어렵고 가정형편이 좋지 않은 학생들이 대다수 자원입대한다. 또 입당 에 관심이 높은 학생들이 지원하기도 한다. 1990년대 초까지는 노동당원이 간부등용의 제1 조건이었 기 때문에 중학교(우리의 중 고등학교)를 졸업하는 학생이면 누구나 노동당원이 되어보겠다는 꿈을 가진다. 그러나 사회에서는 입당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군대나 청년돌격대, 대학 졸업 이후 3대 혁명소조활동 과정을 거치면서 입당을 하게 된다. 특히 남성에 비해 여성은 군대모집 인원이 적기 때문에 청년돌격대에서 입당하는 경우가 많다. 청년돌격대의 조직체계는 군대와 같은 체제로 편성되어 있다. 속도전청년돌격대는 10여 개의 여 단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청년동맹 직속기관인 속도전청년돌격대 지도국이 있다. 각 여단은 군사조 직과 같이 대대와중대로 세분화되어 있다. 지휘부에는 대열, 재정, 시공, 안전, 후방(후생), 자재, 운수 분서와 참모 등이 있으며 기동예술선전대와 군의소도 있다. 정규군은 아니지만 군사조직이기 때문에 항상 제복을 입도록 규정하고 있으며 제복 왼쪽 앞가슴 김일성 배지 아래 직급표식을 달아야 한다. 1990년부터는 김정일의 지시에 따라 현역 중좌 1명을 각 여단에 군사지도원으로 배치함에 따라 대원 들은 1개월에 10일씩 사격술, 총검술, 100리 행군 등 정규군 못지않은 군사훈련을 받고 있다. 이는 이들이 전시에는 언제든지 최전방에 투입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 대원들은 사기진작을 목적으로 김정일의 이름을 넣어 만든 신분증을 소지하고 있다. 주요 활동 청년돌격대는 보통 대규모 건설공사 현장이나 진지 강화 등에 동원되어 단기적 건설사업을 진행

303 한다. 청년돌격대는 창립 이후 중요 기념비적 창조물과 중요 대상건설을 완공했다. 경제난이 심화된 1990년대 하반기 5년 동안에는 12만여 개의 청년돌격대가 조직되어 경제 각 부문에 투입됐다. 이들 청년돌격대는 평양 만경대학생소년궁전, 창광거리와 광복거리 등에 세워진 아파트, 원산-금강산 철 도공사 등을 비롯해 2000년 10월 완공된 평양-남포 고속도로, 평남 개천-태성호 수로공사 등을 진행 하였다. 2009년 150일 전투 기간에도 청년돌격대는 양강도 백두산선군청년발전소와 황해북도 예성강발전 소, 미루벌 물길공사 등 굵직굵직한 공사 현장에서 일해 왔다. 또 최근 평양 10만호 주택건설 현장에 도 청년돌격대가 동원되어 주택의 내부 마감을 담당하였다. 관련 검색어 _ 김일성사회주의청년동맹, 속도전, 청년영웅도로

304 청년영웅도로 청년영웅도로는 평양시와 남포시를 잇는 고속도로이다. 구간 46.3km, 왕복 12차선이며, 기존 일 반도로 구간을 개건 확장하였다. 공사 중에는 평양-남포 고속도로였다가 완공 후에 명칭이 변경되었 다. 청년영웅도로는 1998년 11월 김정일의 지시로 시작해 북한의 청년동맹 산하 조직인 속도전청년 돌격대 에 의해 건설됐다. 전국의 2백여 개의 시, 군에서 동원된 10만여 명의 건설자들은 40여km의 고속도로를 1년 11개월 만에 완성했다. 노동당 창당 55주년을 기념하여 2000년 10월에 완공되었다. 같은 날 북한은 정령을 통해 도로의 이름을 청년영웅도로 로 명명했다. 청년영웅도로는 평양시 광복거리 만경대 갈림길을 기점으로 남포시 천리마구역 남포시 강서구 역 남포시 용강군을 거쳐 남포시 청년다리를 종점으로 한다. 이 도로 주변에는 공공건물들과 아파 트 등이 들어섰으며 풍치림이 조성되어 있다. 북한은 청년영웅도로를 강성대국 건설의 대통로 라고 부르고 있다. 이는 이 도로가 남포시 강서구 역 청산리와 천리마구역 고창리의 주요 협동농장과 남포시 천리마구역 강선동의 천리마제강연합기 업소, 천리마트랙터공장 등의 주요 공장, 그리고 주변의 경공업지대를 통과하는 만큼 물류운반을 위 한 산업도로의 역할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김정일은 1990년대 중반 식량난 등 체제유지의 불안감이 높아짐에 따라, 청년을 군과 함께 북한 체제의 유지 기반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설비 자재가 부족한 현실에서 경제건설을 주로 인력에 의 존하고 있는 북한은 특히 건설 현장에 청년과 군인을 대거 동원하였다. 무리한 공사 진행으로 청년영 웅도로 건설 중 인명 피해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북한은 오히려 이를 중장비 없이 청년과 군인들의 힘으로 기적을 이루었다고 선전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서해갑문, 청년돌격대

305 청산리정신 방법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은 김일성이 1959년 12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생산관계의 사회 주의적 개조가 완성된 새 환경에 맞게 사업체계와 사업방법을 개선 하도록 지시를 내리고, 이듬해인 1960년 2월 평안남도 강서군(현 남포시 강서구역) 청산협동농장을 현지지도하면서 이를 일반화하도 록 지시한 데서 비롯됐다. 즉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 이라는 명칭은 청산리에서 처음으로 구체화됐 다 하여 붙여졌다. 청산리정신은 사상적 측면을 강조한 것이며 청산리방법은 구체적 실천방법에 초 점을 맞춘 것으로서 통상 개별적으로보다는 한데 붙여서 사용한다. 이처럼 청산리정신, 청산리방법 은 당초 농업 분야에서 출발됐으나 이후 모든 경제 분야의 기본적 지도방법으로 통용되었다. 북한은 청산리정신의 기본 내용으로 1 나라의 모든 살림살이와 인민의 생활에 대해 완전히 책임 지는 원칙에서 당적 국가적 지도를 실현하는 것, 2 사회의 모든 성원들을 교양 개조하여 당의 둘레 에 묶어 세워 공산주의 사회까지 이끌어나가는 원칙에서 당적 국가적 지도를 실현하는 것, 3 혁명과 건설에 대한 지도에서 모든 사업을 인민대중 자신의 사업으로 확고히 전환시키는 원칙을 견지하는 것 등을 들고 있다. 청산리방법의 내용에 대해서는 1 상급기관이 하급기관을 도와주고 윗사람이 아랫사람을 도와서 서로 합심하여 당의 노선과 정책을 관철해 나가는 것, 2 늘 현지에 내려가 실정을 깊이 알아보고 문제 해결의 옳은 방도를 세우는 것, 3 모든 사업에서 정치사업, 사람과의 사업을 앞세우고 대중의 자각적 열성과 창의성을 동원하여 혁명과업을 수행하도록 하는 것, 4 일반적 지도와 개별적 지도를 옳게 결합하는 것, 5 사업에서 선후를 가려 중심고리에 힘을 집중하여 문제를 풀어나가는 것, 6 모든 사업을 계획화하여 힘 있게 밀고 나가는 것 등을 들고 있다. 이처럼 북한은 일선간부들이 범하기 쉬운 관료주의 형식주의 명령주의의 오류를 퇴치하고 당과 대중을 긴밀하게 연결시켜 간부들의 실무지도능력을 높이기 위한 대중 지도방법으로 청산리방법을 제시하고 있는데, 그 이면에는 당의 지도권한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이 깔려 있는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천리마운동

306 총대가정론 북한에서 말하는 총대가정이란 집안의 형제나 남매, 또는 부자가 모두 군에 입대해 복무하고 있 는 군인가정을 의미한다. 총대가정을 혁명적 군인가정 으로 부르기도 한다. 북한은 군사중시 정책에 호응한 가정을 상징적으로 내세워 전국적으로 군사중시, 총대중시 분위 기를 만들기 위해 총대가정을 발굴하기 시작했다. 북한은 총대를 과거부터 계속 강조했다. 특히 총대 가정은 1998년 9월 28일 제2차 전국어머니대회 를 전후로 해서 북한 언론매체를 통해 적극 선전된 것으로 보인다. 북한은 총대가정을 선군시대의 북한 가정들의 전형 이며, 혁명의 수뇌부결사옹위 정신의 발현이며 총대로 개척한 조선혁명을 총대로 끝까지 완성하려는 신 념과 의지의 시위 라고 설명한다. 북한은 이러한 총대가정의 시원을 백두산 3대장군, 곧 김일성, 김정숙, 김정일의 혁명적 가정 에 서 찾고 있다. 북한은 김정일의 집안을 총대집안 이라고 부르고 있다. 김일성의 경우 젊은 시절 항일 무장투쟁과 제국주의 침략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으며, 김정숙의 경우는 항일무장투쟁에서 수뇌부 옹위 에 한 몸 바쳤고, 김정일은 김일성, 김정숙의 아들로 태어나 인민군대를 강군으로 만들고 선군 혁명영도로 국가를 이끌었기 때문이라고 설명한다. 북한의 총대가정은 총대철학 을 배경으로 하고 있기 때문에, 총대가정을 강조하는 것은 주민들이 군대에 복무하는 것을 자랑으로 여기게 하고 군사중시 분위기를 전국적으로 확산시켜 선군정치의 토대 강화에 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총대가정을 강조하는 것은 국가에 헌신하는 분위기를 조성하고 최고지도자에 대해 충성을 약속하는 도덕적 가치의 강화를 목적으로 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선군정치

307 총정치국 북한은 노동당이 국가의 모든 것을 지배하는 당-국가체제 라는 측면에서 인민 군도 노동당의 통제를 받는다. 북한은 군대를 통제하기 위한 노동당 기관을 당 과 군대에 모두 두고 있다. 노동당에는 당중앙군사위원회를, 군대에는 총정치국 을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인민군 총정치국은 북한에서 노동당의 군 통제를 실질 적으로 집행하는 군대 내의 기관인 것이다. 연혁 북한은 6 25전쟁이 한창이던 1950년 10월 당중앙위원회 결정에 따라 군대 내에 당조직을 만들기 시작하였다. 이후 1956년 4월부터 1961년 9월까지 군대 내 정치기관과 당조직을 재정비해 당적 지도 를 강화하기 시작했고, 1958년에는 인민군 당위원회를 정식으로 구성한 뒤 1961년 제4차 당대회에서 군대 내 당조직과 관련한 규정을 당 규약에 명시하였다. 인민군 당위원회는 당중앙위원회 직속으로 그 지도 밑에 대대급 이상에는 당위원회를, 중대 소대 급 단위에는 당세포를 조직하여 군대 내 사상교육 등 정치사업과 관련한 주요정책 및 집행방향 등을 토의 결정하는 회의체 기구이다. 기능과 역할 인민군 당위원회의 집행부서인 총정치국은 대대급까지 정치부를 두고 연대급 이상은 정치위원을, 대대급 이하는 정치지도원을 파견하여 각급 군사지휘관의 사업을 당적으로 조정 통제하면서 그 사 업결과를 당중앙위원회에 보고한다. 특히 1969년부터 도입된 인민군 내의 정치위원 제도는 교육계 획, 명령서 등에 군사지휘관과 함께 서명을 해야만 효력이 발생하도록 하는 등 그 권한이 막강하여 군 내에서 정치장교와 군사지휘관 간에 갈등을 야기하는 원인이 되기도 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총정치국장은 주요 군 간부에 대한 실질적 인사권을 쥐고 있다. 총정치국의 업무는 전군의 주체 사상 무장, 군대 내 당의 유일사상 확립, 군대 간부 당원들의 당생활 조직 지도, 공산주의교양 실시, 군대 내 당 및 청년동맹조직 사상교양을 위한 선전선동사업, 3대혁명붉은기쟁취운동 등 각종 운동 및 군 사기대책 수립과 추진, 장교 보직 보충 이동 승급 제대 등이다. 이 같은 업무수행 결과는 정기 적으로 당중앙위원회에 보고된다. 또한 군대 지휘관이 당정책에 어긋나는 명령을 내릴 경우 이를 저 지하고 시정시킬 권한도 갖고 있다. 김일성 시대부터 총정치국은 군 간부들에 대한 정치사상적 통제 및 종파주의 제거를 위한 핵심역 량으로 역할을 해왔다. 이러한 총정치국의 역할은 김정일 시대에서도 정치교양사업으로 군대를 사회 주의 사상으로 무장해 왔으며, 그 역할은 지속적으로 확대 강화되어 왔다. 김정은 시대에도 이러한 총정치국의 군대 내 핵심적 위상은 변함없이 유지될 것으로 보인다.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인민무력부, 총참모부

308 총참모부 북한의 총참모부는 당의 철저한 지도 아래 북한 무력의 전반을 총지휘하는 군 최고집행기관으로 육 해 공군의 군사작전 종합계획을 지휘 관리 통솔한다. 북한군에 대한 군령권을 갖고 있어 우리의 합동참모본부에 해당된다고 볼 수 있다. 북한의 군제는 통합군제와 유사하다. 연혁 총참모부는 1948년 2월 8일 조선인민집단군 총사령부 에서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로 개칭되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하더라도 당시 민족보위성(현 인민무력부)과 총참모부의 구분이 뚜렷하지 않았 으나, 편제상으로는 민족보위상 예하에 총참모부가 있었다. 그러나 1970년 초반 이후부터 김일성은 최고사령관의 직책으로 인민무력부를 거치지 않고 총참모부를 통해 군을 직접 지휘 통제하였다. 이 러한 군에 대한 지휘는 김정일 시기에도 이어져 김정일 역시 최고사령관으로서 인민무력부를 거치지 않고 총참모부를 통해 군을 직접 통제하였다. 이러한 총참모부에 대한 지휘관계는 김정은으로 바뀐 지금도 최고사령관에서 총참모장으로 연결되는 직접 지휘 통제 방식에는 변화가 없어 총참모부는 인민무력부와의 관계에 있어서 지휘체계상 상하 관계라 할 수 없다. 기능과 역할 북한의 총참모부는 최고사령관의 군령권을 실제적으로 집행하는 최고 군사집행기관으로서, 인민 군의 각 군종 병종 사령부의 군사전략 및 군사작전의 종합계획을 수립하고 이들을 지휘 통솔하고 있 다. 인민군 무력은 인민무력부장이 아닌 총참모장 예하에 각 군종 병종별 부대가 편제된 통합군 체제 로서 인민군의 모든 정치 군사 제대 및 부서들은 군사적으로는 총참모부의 명령과 지시에 복종하도 록 되어 있다. 그러나 당 정치사업, 보위사업, 간부사업 등에 대해서만은 총참모부라 할지라도 전혀 간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어 총정치국과 보위사령부 등 해당 전담기구에서 관련 사업을 독점적으로 시행한다. 총참모부 산하에는 9개의 정규 군단, 2개의 기계화 군단, 평양방어사령부, 국경경비총국, 11군단, 전략로케트사령부, 기갑 사단, 기보 사단, 포병 사단, 고사포 사단, 해군사령부, 공군사령부 등이 속해 있다. 또 각급 부대와 훈련소, 해 공군사령부의 전 평시 작전 및 훈련계획을 수립해 집행하고 있으며 매년 발령되는 최고사령관 명령 작성에 참여하는 등의 방법으로 북한군을 지휘 통솔한다. 총참모부는 최고사령관 명령으로 움직이는 실제적인 군령기관이며, 산하에 군사작전을 총괄하는 작전국 등 군령권과 관련된 여러 부서들로 편성되어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노동당 중앙군사위원회, 인민무력부, 총정치국

309 최고인민회의 최고인민회의는 북한 헌법상 국가의 최고주권기관으로서 행정부 사법부 등 모든 국가기관을 조 직하는 권한을 갖고 있고, 국가기관들은 최고인민회의에 대하여 책임을 지게 되어 있다. 즉 최고인민 회의는 국방위원회 위원장,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 내각 총리, 최고재판소 소장을 선거 또 는 소환하는 권한을 갖고 있다. 이밖에 최고인민회의는 헌법 수정, 국가의 대내외 정책의 기본원칙 수립, 국가의 인민경제발전계획과 그 실행정형에 대한 심의 승인, 국가예산과 그 집행정형에 대한 심의 승인, 조약 비준 등의 권한을 갖고 있다. 북한의 최고인민회의가 흔히 우리의 국회와 비교되기도 하지만 실제의 역할에서는 많은 차이가 있다. 헌법에 규정된 광범위한 권한과는 달리 실제로 최고인민회의는 당의 결정을 추인하는 형식적 거수기에 불과하다. 최고인민회의는 1년에 1~2회 개최되는 정기회의와 대의원 3분의 1 이상의 요청 이나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가 필요하다고 인정할 때 소집되는 임시회의가 있다. 회의는 대의원 3분의 2 이상이 참석하여야 성립된다. 그러나 실제로 1998년 제10기 최고인민회의 출범 이후 최고인 민회의는 1년에 거의 한 차례 열리며 회기도 단 하루에 그치는 경우도 많은 상황이기 때문에 실질적 인 심의가 이루어지기를 기대하기란 불가능한 일이다. 또한 최고인민회의 산하에 법제위원회와 예산 위원회와 같은 부문별 위원회를 두고 있으나, 실질적인 국정 심의기관으로서 기능하지 못하고 있다. 최고인민회의는 임기 5년의 대의원으로 구성된다.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은 당, 사회단체, 내각, 군 등에서 직책을 겸임하고 있으며, 이들은 대의원의 직책보다는 자신들의 원래 직책을 수행하는 것이 주 임무로 되어 있다. 2003년 8월의 선거로 선출된 최고인민회의 제11기 대의원의 수는 제9기, 제10 기의 경우와 같이 687명이다. 최고인민회의 제12기 대의원 선거는 제11기 최고인민회의 임기 개시 이후 5년 7개월이 경과한 2009년 3월 8일 실시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휴회 중에 최고 주권기관으로서 위원장, 부위원장, 서 기장, 위원들로 구성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임기는 5년이며,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가운데 서 오랜 기간 국가건설 사업에 참가하여 특출한 기여를 한 약간 명을 명예부위원장으로 둘 수 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최고인민회의 소집, 헌법과 현행부문법 규정 해석 등의 임무와 권한을 가진다. 1998년의 헌법 개정에서는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이 국가를 대표한다는 내용이 새롭게 보충되었다. 헌법상으로 볼 때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결국 국방 이외의 국가적인 사업 을 다 맡고 국가를 대표하여 활동하게 된다. 이처럼 헌법 개정을 통하여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의 지위가 높아졌으며 종래 최고인민회의 상설회의, 중앙인민위원회, 주석이 갖고 있던 권한의 대부분 을 물려받게 되었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위원장은 상임위원회 사업을 조직 지도하고, 국가를 대표하며 다른 나 라 외교사절의 신임장과 소환장을 접수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위원 전원으로 구성되는 전 원회의와 위원장, 부위원장, 서기장 등으로 구성되는 상무회의를 가지는데, 전원회의는 상임위원회 의 임무와 권한을 실현하는 것과 관련된 중요한 문제들을 토의 결정하며, 상무회의는 전원회의에서 위임한 문제들을 토의 결정한다.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는 정령과 결정, 지시를 내며 자기사업을 돕는 부문위원회를 둘 수 있고 자기사업에 대하여 최고인민회의 앞에 책임을 진다

310 관련 검색어 _ 만수대의사당, 민주조선, 북한 헌법

311 7.1 경제관리개선조치 7.1 경제관리개선조치(이하 7.1 조치)란 북한이 2002년 7월 1일 발표한 가격 및 임금현실화, 공장 기업소의 경영자율성 확대, 근로자에 대한 물질적 인센티브 강화 등의 조치를 의미한다. 이 조치는 기존의 계획경제 틀 내에서 시장경제 기 능을 일부 도입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배경 북한은 1990년대 들어 외화 및 원유 원자재 부족으로 공장가동률이 떨어지고, 식량부족과 연이은 자연재해 등으로 심각한 위기에 봉착하게 되었다. 이에 외부로부터 지원을 얻기 위하여 미국 일본과 의 관계개선을 시도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식량난과 생필품 부족현상이 심화되고 암시장이 번성하여 공식경제체제를 위협할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기존의 계획과 공급 시스템에 기반을 둔 북한의 사회주의 가격제정원칙과 국정가격으로는 치솟 는 인플레를 감당할 수 없었고, 더 이상 국가의 재정적 통제와 자원배분 기능이 제 역할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2001년 10월 3일 김정일은 당 경제기관 일꾼들과의 담화를 통해 변화하는 현실에 맞 게 경제관리방법을 개선할 것을 지시하였다. 김정일의 지시를 계기로 북한은 2002년 7월 1일자로 가 격과 임금 인상안 등을 발표하였는데, 이것이 7.1 조치이다. 주요 내용 7.1 조치의 주요내용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첫째, 물가 인상이다. 북한은 계획가격제 에 의해 중앙에서 인위적으로 낮은 수준에서 물가를 책정한다. 그러나 경제위기 상황에서 원 부자재 의 수입가격, 제품 생산가격이 높아짐에도 불구하고 낮은 가격을 고정시켜 놓았기 때문에 갈수록 국 가의 재정 부담이 커질 수밖에 없다. 반면 공장 기업소는 국정가격으로 판매되는 제품판매방식을 거 부하고, 시장에서 높은 가격으로 판매하길 희망함에 따라 시장은 활성화되고, 국정가격과 암시장 가 격의 높은 격차, 즉 인플레가 발생하게 된다. 북한당국은 이 같은 문제를 해결하고자 식량, 공산품, 집세, 전력 등 전반적 물가를 수십 배에서 수백 배 올렸다. 그리고 이에 맞추어 임금도 평균 18~25배 올림과 동시에 임금지급방식도 노동생산성과 공장기업소의 수익 등에 따라 차등지급하는 방식으로 바꾸었다. 둘째, 독립채산제 강화와 공장 기업소의 자율성 확대이다. 북한은 물가와 임금을 인상한 만큼 공 급(생산)증대를 위해 공장 기업소의 평가체계를 변화하고, 자율성을 확대하였다. 공장 기업소는 이전 의 계획목표량 달성방식이 아니라 수익성이 기준인 번수입지표(공장기업소 총수입-원가(생활비 제 외)=국가기업이득금+기업소 자체 충당금+생활비(임금))에 따라 평가하는 체계를 도입하였다. 또한 독립채산제 강화방침에 따라 이전에는 공장 기업소에서 초과달성한 이윤을 국가에 납부하는 방식에 서 기업 자체로 재투자 재원이나 종업원 복지기금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재량권을 주고, 자재공급을 원활하게 하기 위한 기업 간 원자재 거래를 허용하였다. 또한 공장 기업소 내 당위원회의 역할을 축 소하고 지배인 책임제를 강화하였다. 더불어 공장 기업소는 시장경제체제와 같이 이윤을 많이 남기 는 경영을 위주로 하고, 생산성 향상에 따라 각종 물질적 보상을 제공하는 체제를 도입하였다

312 셋째, 사회보장체계 및 배급제의 개편이다. 북한은 과거 식량, 소비재, 주택 등을 거의 무상이나 다를 바 없을 정도로 낮은 국정가격으로 공급해왔으나, 전반적 물가 인상과 함께 식량, 소비재, 주택 등도 제값을 지불하도록 조치하였다. 물론 북한은 무상교육, 무상치료, 사회보험 등 이른바 사회주의 의 우월성 을 보여주는 사회보장제도는 공식적으로 유지하였다. 평가 절대적으로 공급이 부족한 상황에서 이를 해결하지 않고는 물가를 안정시킬 수 없다. 생산 증대 를 통한 물자 공급을 위해서는 공장 기업소와 협동농장에 보다 많은 자율성을 부여하고, 노동의욕 고취를 위한 다양한 인센티브 제도를 도입하는 등 과감한 개혁 조치를 취해야 한다. 그러나 7.1 조치 는 북한이 기존의 정치이념과 체제를 개혁하지 않은 채 일부 경제 부분에서만 실리를 추구하는 시장 경제 기능을 도입한 조치였다. 즉 시장경제 요소의 허용은 어디까지나 집단주의 경제와 계획경제의 기본 틀 내에서 시행하겠다는 의도로 추진된 조치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7.1 조치는 공급부족이라 는 근본적 한계를 드러내었고 물가가 급속히 상승하여 주민들의 생활이 더욱 어려워지고 말았다. 7.1 조치의 주요 내용 구분 2002년 7.1 조치 추가 보완조치 계획 측면 기업 관리 농업 관리 유통 부문 가격 부문 당 역할 축소, 내각 권한 확대 중앙계획대상 축소 세부계획의 위임 기업경영지표: 생산량 번수입 전환 번수입의 자체 사용 허용 독립채산제 전기업으로 확대 계획외 생산품 30% 시장판매 허용 물자교류시장 내 원자재 거래 허용 가격결정권한 일부 이양 유일임금제 폐지 분조관리제 확대: 분조 규모 축소 이중곡가제 폐지, 배급제 구입제 전환 초과생산물 자율처분 허용 작물선택권 확대 세부계획지표권한 물자교류시장 개설 국영상점 임대 국정가격의 현실화 변동 국정가격제 도입 현물지표 축소, 현금지표 확대 기업 자체의 계획지표 확대 번수입 사용권한 확대; 임금상한선 폐지 국가납부금 정액제로 전환 경제단위의 현금보유 한도 확대 국가재산판매 납부금, 부동산이용료 등 조세 확대 가격의 자율적 결정 권한 확대 물자교류시장 내 현금 거래 허용 상금, 장려금 지불승인제 폐지 인력운용 권한 부여 포전담당제 시범실시: 분조 2-5가구편성 협동농장에 분조규모 축소권한 부여 개인경작지 30평에서 400평 확대 국가납부량 축소 분조단위 분배권한 확대 현물분배에서 현금분배로 전환 6개월 농사(부업밭) 허용 종합시장 개설 물자교류시장 내 현금 거래 허용 수입물자교류시장 개설 시장가격, 국가지도가격, 합의제가격 등 가격 제정방식 다양화 2005년 이후 제한 내용 번수입지표 사회순소 득 지표 변경 포전담당제 폐지 2005년 10월 식량전매제 도입 2006년 이후 개인영농, 6개월 농사 통제 2006년 이후 종합시장 통제 관련 검색어 _ 독립채산제, 배급제, 신사고, 실리사회주의, 장마당, 포전담당제

313 타도제국주의동맹(ㅌ ㄷ 동맹) 타도제국주의동맹은 김일성이 1926년 10월 17일 만주 화전현에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결성했 다는 혁명조직이며, <ㅌ ㄷ>라는 약칭으로도 쓰인다.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김일성은 1926년 화전현의 화성의숙에 입학하였고, 당시 민족주의자들의 독립운동과 투쟁방법에 회의를 느껴 맑스-레닌주의를 독학하였다고 한다. 또한 김일성은 이 과정에 서 맑스-레닌주의만이 조선을 해방시킬 수 있는 진정한 길이라는 것을 깨달았으며, 그 뒤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하려는 청년들과 학생들을 결집하여 1926년 가을에 반일민족해방투쟁을 목적으로 하는 비합법적 혁명조직(전위조직)인 타도제국주의동맹을 결성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타도제국주의동맹의 목적을 장차 조선에 사회주의, 공산주의를 건설하기 위하여 투쟁하 며 당면하게는 일본제국주의를 타도하고 조선의 해방과 독립을 이루는 것 이라고 하였으며, 특히 노 동당은 영광스러운 <ㅌ ㄷ>의 발전을 계승한 주체형의 혁명적 당 으로 규정하였다. 이렇듯 북한은 노동당과 주체사상의 시원을 타도제국주의동맹에서 찾고 있다. 하지만 김일성 전 기는 해방 직후인 1946년부터 나오기 시작했는데, 해를 거듭하면서 새로운 전기가 나올 때마다 이전 의 책에는 나오지 않은 내용들이 추가 혹은 변조되어 있다. 타도제국주의동맹 사항은 1968년 출판된 <민족의 태양 김일성 장군>에 비로소 등장하는데, 점점 내용이 부풀려지면서 10여 년이 지난 시점 의 <조선전사>에는 한민족의 현대사 기점으로까지 승격화 되어 있다. 이 전집은 현대사의 기점을 1926년으로 잡았는데 그 근거로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을 제시한다. 하지만 이러한 신화는 1968년 이전에 나온 현대사 책들에는 전혀 언급이 없었다는 점으로 미루어 상당 부분 조작된 것임을 알 수 있다. 유일한 역사적 사실은 1930년 전후, 만주의 장춘 서쪽과 회덕 현, 이통현 일대의 한인 농촌 마을이 이종락의 길흑농민동맹 지배하에 있었는데, 이 동맹의 목적이 반제운동이었고, 이를 ㅌ ㄷ(타도제국주의동맹) 이라고 불렀다는 것이다. 하지만 북한은 이를 마치 김일성의 업적인양, 그것도 매우 과장하여 선전하고 있는 것이다. 2012년 10월 9일자 노동신문은 타도제국주의동맹의 결성은 우리나라에서 노동계급의 새 형의 당, 주체형의 혁명적 당 창건을 위한 투쟁의 출발점으로 되었으며 그때로부터 우리 당의 영광스러운 뿌리가 내리기 시작했다. 라고 다시금 강조했다. 이는 북한의 역사에서 타도제국주의동맹이 김일성 의 우상화뿐 아니라 후계 체제의 정당성 확보에도 활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붉은기사상, 주체사상

314 토지정리사업 토지정리는 올망졸망한 논밭을 규격화해 바둑판처럼 펼쳐 정리하는 경지정리의 북한식 표현이다. 토지정리사업은 1998년 5월 김정일이 최전방 시찰을 위해 강원도 창도군을 지나던 중 거미줄 같 은 뙈기밭을 보고 현지에서 관계부문 일꾼 협의회 를 조직하여 강원도 토지정리를 지시한 것이 시발 점이 되어 이후 전역으로 확대된 사업이다. 토지정리사업은 당초 감자농사, 종자 개량, 이모작 확대 와 함께 먹는 문제 해결을 위한 대책의 하나로 제시됐다. 등고선처럼 늘어선 논두렁과 밭둑, 뙈기밭과 같은 자투리땅을 정리함으로써 농지를 확대하고 곡물생산을 늘리는 것이 1차적인 목적이자 가장 현실적 인 이유였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은 강원도에서 토지정리가 끝난 후 첫해 농사에서 종전보다 2.5배의 증산효과 를 거두게 되자 토지정리사업에 의미를 부여하고, 이 사업을 전국적으로 확대 실시하였다. 따라서 토지정리사업은 처음부터 체계적으로 구상된 것이 아니라 강원도에서 시작하여 평안북도를 거쳐, 황 해남도로 이어지는 점진적 사업으로 수년간 꾸준히 지속되었다. 토지정리사업은 강원도에서 1998년 10월에 처음 시작하여 1999년 4월까지 3만 정보의 토지정리 사업이 마무리된 후 2차로 평안북도 지역에서 1999년 10월부터 2000년 5월까지 5만 1천 5백 정보의 토지정리를 마쳤다. 이후 3차로 황해남도 지역에서 2000년 10월부터 2002년 3월까지 10만 정보의 토지정리를 마쳤다. 북한은 또한 토지정리를 위해 각 도( 道 ) 단위로 돌격대를 조직해 1개 군( 郡 )씩 맡겼고, 기계화군 단 으로 불리는 불도저 굴착기 등 각종 중장비를 집중 투입했다. 또한 공병부대와 인근지역 군부대에 서 군인들을 동원하기도 했다. 조선컴퓨터센터도 토지정리와 계획작성 프로그램인 천지개벽 을 개 발하여 토지정리를 측면에서 거들었다. 한 마디로 국가적인 지원 아래 토지정리가 추진되었다. 그러나 토지정리사업의 대상이었던 뙈기밭은 여기서 생산된 잉여농산물이 장마당을 활성화시키 고, 주민들의 사상 이완의 요인이 되고 있다고 판단하여 토지정리를 명분으로 협동농장에 합병한 것 이다. 북한 농민들도 북한당국이 토지정리사업을 핑계로 협동농장 주변 2~3채 규모의 살림집을 헐고 문화주택 구역을 조성하고 있지만 농민들은 이를 살림집 부근의 소토지들을 뺏기 위한 조치라고 여 긴다. 관련 검색어 _ 국토환경보호사업, 뙈기밭, 협동농장

315 통일전선부 통일전선부는 1978년 설치된 이래 북한 노동당의 대남 사업 중심기관이다. 대남전략전술 업무를 실질적으로 총괄 조정 통제하는 역할을 하고있으며, 남북회담, 경제협력, 해외교포 외국인 공작사업, 대남심리전 및 통일전선 공작사업 등의 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통일전선부는 부장을 책임자로 하여 정책 교류 회담 연고자 총련 조직 담당 부부장들이 있으며 약 3,000여 명이 남북회담 정책수립, 해외 반한 교포단체 지도육성, 대남심리전, 대남자료 분석 등의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들은 대부분 장기간 같은 업무에 종사하고 있는 점이 특징이다. 통일전선부 요원들은 사실상 조국평화통일위원회(조평통),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아 태평화위),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조국전선), 반제민족민주전선(민민전) 등 통일전선부 외곽단 체의 일정 직책을 겸직하고 있고, 다수의 부서들이 대외적으로 위장명칭을 사용하고 있는 것으로 알 려지고 있다. 2000년대에 들어서는 남북한 정계, 사회계, 문화계, 종교계 등 각 단체인사들로 구성된 민족화해협의회(민화협)라는 통일전선단체를 구성하여 민간부문에 대한 통일전선을 추진하고 있다. 통일전선부는 남한 관련 각종 정보및 자료를 분석 연구하는 조국통일연구원 을 운영하고 있다. 1954년 4월 제3차 당대회 결정에 따라 1959년 남조선연구소 가 설립됐으며, 1978년 1월경 노동당 대 남사업 담당부서로 통일전선부가 생기면서 이 부서의 산하단체로 흡수된 후 1990년경 현재의 명칭으 로 바뀌었다. 연구원에는 원장과 부원장 아래 종합정세연구실을 비롯해 인물자료, 군사정책, 종합편 집실 등을 두고 있으며 500~600명이 종사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주요 임무는 남한의 정 치 경제 사회 군사 등 정세연구를 통한 대남정책 자료작성, 남한 주요 인사 정보분석 및 평가, 미 국 일본 등 한반도 주변국가 정책수집과 연구 등이다 관련 검색어 _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 조국평화통일위원회, 조선 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통일전선전술

316 통일전선전술 통일전선은 소수파에 놓여있는 공산주의자들이 자기편의 세력을 결집하고 상대편의 세력을 약화 또는 고립시키기 위해, 이해관계가 같은 계층 또는 정당 사회단체와 더불어 정치적으로 협동하는 공 산당의 전통적인 전술이다. 북한은 전조선혁명을 위해 해방 직후부터 통일전선의 중요성을 강조하면서, 이를 대남사업 부문 에 지속적으로 사용해 오고 있다. 김일성은 1945년 10월 13일 각 도당 책임일꾼들을 대상으로 행한 새조선 건설과 민족통일전선에 대하여 라는 연설을 통해 광범위한 대중을 쟁취하고 적의 세력을 약화시키려면 공산당 대열을 강화하고 민족통일전선을 결성해야 한다. 고 강조한 바 있다. 이후 김일 성은 남조선 혁명에서 통일전선사업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를 체계화시켰고, 현재까지도 북한은 당 규약을 통하여 꾸준히 그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북한은 통일전선을 주적(공동원수) 타도를 위한 노동계급의 당(공산당)과 제정치세력의 정치적 연합으로 보고 있다. 또한 북한은 이를 보조역량의 편성문제로 성격지우고 있지만, 궁극적으로는 보 조역량의 강화를 통해 주력군을 보호하는 것이라고 밝히고 있다. 즉 통일전선운동을 통해 남한혁명 의 동력인 주력군과 보조역량을 강화하자는 것이다. 실제로 북한은 남한 혁명인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을 성사시키기 위해 광범한 각계각층 군 중과의 통일전선을 이룩하는 것은 혁명승리의 필수적인 담보가 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곧 미제를 축출하고 현 정권을 타도하는데 남한 내에 존재하는 공산(좌익)세력의 힘만 가지고서는 부족한 현실 을 고려하여, 비록 공산세력이 아닐지라도 미국과 현 정권을 반대하는 모든 단체나 세력을 규합하여 이들의 힘으로 현 정권을 타도하고 그들의 정권을 수립하는 데 유용한 전술로 활용하려는 것이다. 북한의 대남 통일전선 공작방침은 1 하층 통일전선을 위주로 하되 상층 통일전선을 유기적으로 결합, 2 낮은 형태의 공동투쟁에서 높은 형태의 공동투쟁으로, 부분적인 연합으로부터 전반적인 연 합 실현, 3 전략적 동맹대상과 전술적 동맹대상을 엄격히 구별하여 양자를 적절히 연합, 4 통일전 선 대상이 보잘것없이 영세한 역량이라 할지라도 무시하지 않고 한사람이라도 더 쟁취, 5 정세변화 에 따라 조성된 여건에 맞게 신축성 있게 적응, 6 반미파쇼 민주화운동에 적극적인 사람은 과거를 불문하고 포섭, 7 지하당 사업과 통일전선 사업을 엄격히 분리하여 공작하는 것 등이다. 통일전선전술은 이렇듯 정권 초기부터 북한 정권의 정당성과 더불어 언제나 제일 먼저 추진해야 할 과업으로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다. 특히 북한은 현 시기의 남한 혁명에서의 통일전선은 민족민주 주의전선(민민전) 이 되어야 한다고 밝히고 있다. 이는 북한이 이전에 내세웠던 반미구국전선, 반파 쇼민주전선, 전민족통일전선을 모두 포함한 것이다. 북한은 민족민주주의전선의 기본 구호로 민족 자주, 민주주의, 민족화해 를 들고 있는데, 이는 자주, 민주, 통일 이라는 기본강령을 구체화한 것이 다. 또한 2000년대 들어서 인터넷의 발전에 따른 친북세력과의 연계공간 확보 및 자생적 친북좌익세 력 확산 등 제반환경의 변화로 북한은 전통적 방식에서 사이버상으로 통일전선전술을 변경하는 모습 을 보이기 시작했다. 반제민족민주전선 이 운용하는 구국전선 을 주된 사이버자료로 분석한 결과 북 한의 대남투쟁지침에 의해 구국전선 을 비롯한 해외 친북인터넷 사이트에 게시된 선전투쟁 내용은 국내 친북 인터넷사이트에 그대로 게시되고 있다. 북한은 이를 통해 혁명적 전략과업을 달성할 수

317 있다고 보고 사이버상의 통일전선전술을 적극 전개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민족해방 인민민주주의혁명, 통일전선부

318 8.3 인민소비품 8.3 인민소비품은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와 가내작업반, 부업반 등에서 유휴자재와 폐기물, 폐설물, 부산물을 이용하여 만든 생활소비품으로 국가계획상에는 없는 제품을 뜻한다. 이는 8.3 인민소비품창조운동 이라는 대중운동 방식으로 전개되어 오늘날까지도 북한의 부족한 소비품 공급을 담당하고 있다. 배경 1984년 8월 3일에 김정일은 평양시 경공업제품 전시장 시찰을 하며 폐자재 및 부산물을 이용한 인민소비품 생산운동을 전군중적으로 확대 실시하라는 지시를 하였다. 당시 김정일은 도시 내 구역 군에서는 전문공장들에서 생산하는 제품을 만들지 말고 주민들의 생활에 절실히 필요한 세소상품 (자질구레한 여러 가지 일용상품)들을 많이 만들도록 지시하였다. 김정일이 8월 3일에 지시하였다는 것을 계기로 8.3 인민소비품이라는 칭호가 붙여졌다. 이 같은 김정일의 지시는 곧바로 8.3 인민소비 품창조운동 이란 군중운동으로 발기되어 북한 전역에 확대되었고, 북한주민들이 필요로 하는 일상 소비품은 8.3 인민소비품 생산단위들이 책임지게 되었다. 주요 내용 북한이 승인하고 장려한 8.3 인민소비품은 연로자, 가정주부가 생산주체가 되어 자체의 생산조직 을 만들고, 부산물, 폐기폐설물 등 자체의 원료와 생산설비를 이용하여 만든 사적 생산제품이다. 북 한은 중공업 우선발전 노선에 따라 부족한 인민소비품 공급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공장 기업소 안에 생활필수품 직장과 작업반을 조직하고, 도시와 노동자구, 협동농장들에 가내작업반과 부업반을 조직 하여 일용잡화를 비롯한 생활필수품과 식료품 생산을 담당하도록 했다. 또한 이들 생산 제품은 도시 곳곳에 8.3 인민소비품 직매점 을 설치하여 판매할 수 있도록 하였다. 이것은 북한이 주민들에게 충 분한 생필품 및 소비품을 공급하지 못하게 됨에 따라 합법적으로 국가계획 밖의 사적 생산단위를 승인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는다. 8.3 인민소비품 생산주체가 되고자하는 사람들은 소속에 관계없이 읍 노동자구 동 리 사무소에 등록하도록 하였다. 등록 후에는 허가증을 받아야 하며, 허가증을 받은 이들은 해당 공장 기업소 협 동농장에서 증명서를 발급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1980년대 말에 이르면 8.3 인민소비품 생산단위들 이 증가하면서 등록하지 않고 집안에서 소규모로 생산하여 판매하는 개인 수공업으로 변화하기 시작 한다. 공장 기업소의 원부자재를 빼돌려 개인적으로 생산판매하거나, 8.3 인민소비품 직매점에서 다 량으로 물건을 구입하여 농촌에 나가 2~3배의 높은 가격으로 팔아 중간이익을 취하는 등 불법적인 상행위와 연계를 맺는다. 이른바 경제난이 심각했던 고난의 행군 시기에 8.3 노동자로 등록한 후 장사를 다니는 사람들이 증가하였다. 8.3 노동자란 직장에 매월 얼마간 돈을 내고 장사하러 다니는 사람들이다. 현재 북한 공 장 기업소의 배급 사정은 한 달에 최대 15일치, 최소 3일치까지 밖에 보장되지 않는 실정이다. 따라 서 노동자들은 임금만으로는 생계를 꾸릴 수 없기 때문에 장사에 나서기 위해 8.3 노동자로 등록한

319 다. 이들은 부족하고 필요한 경공업 제품을 집안에서 생산하고 시장에 판매하면서 북한 내 상업과 시장 활동의 기반을 이루게 된다. 평가 북한이 사회주의 부족경제의한계를 보완하기 위해 도입한 8.3 인민소비품 생산방식은 1980년대 말 일시적으로 북한주민들의 생활필수품 공급에 긍정적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질 낮은 소비품 공급 과 함께 만성적인 공급부족 문제를 해결하지는 못했다. 더욱이 경제난이 심화될수록 8.3 인민소비품 단위들은 개인 단위들로 변화하며 북한의 자생적 시장형성의 토대가 되었다. 결국 북한 공식경제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관련 검색어 _ 노동자구, 장마당

320 8월 종파사건 종파사건 이란 1956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개최를 계기로 김일성을 당 에서 축출하고자 하였으나, 사전에 누설되어 주도자들이 체포된 사건을 말한 다. 김일성은 이 사건을 주동하였던 연안파와 소련파를 대대적으로 숙청하였 고, 당권을 완전히 장악하여 1인 지배의 독재권력 기반을 공고히 하였다. 배경 1950년대 북한은 내부적으로 가장 치열한 권력투쟁을 벌였다. 북한 지도부 내의 권력투쟁은 전후 복구건설 노선과 사회주의적 개조 문제를 둘러싼 논쟁이 전개되면서 표출되기 시작하였다. 김일성 중심의 핵심지도부는 중공업 우선의 경공업, 농업의 동시발전 과 농업협동화를 제시하였고, 최창익, 박창옥 등을 중심으로 하는 세력들은 김일성파의 주장에 반기를 드는 양상으로 전개되었다. 당시 반대파는 연안파와 소련파 계열이었으며 권력의 핵심에서 소외되어 가고 있었다. 처음에 연 안파와 소련파의 반대 움직임은 북한 경제재건의 발전방향을 둘러싸고 김일성의 노선에 이의를 제기 하는 정도였다. 시간이 흐르면서 점차 김일성의 권력독점과 개인숭배 등을 비판하였으며 점차 전면 적인 반김일성운동의 성격을 띠기 시작하였다. 특히, 반김일성운동이 본격화될 수 있었던 것은 1956년 2월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에서 스탈린 개인숭배가 비판되었기 때문이다. 당시 반대파인 연안파와 소련파에게는 소련과 중국이라는 외세의 지원이 있었음에도 김일성과 그 추종 세력을 꺾기란 역부족이었다. 오히려 김일성은 반대세력을 소 련의 지도노선을 추종하는 교조주의적 오류를 범하고 있는 것으로 강하게 비판하면서 본인의 세력을 확대하고 반대파의 힘을 약화시켰다. 전개과정 당시 반대파의 핵심은 연안파의 실세였던 최창익이었다. 당중앙위원회 상무위원이자 내각부수상 이었던 그는 당내에서 교조주의자로 낙인찍혀 있던 소련파 박창옥 부수상 등을 끌어들였다. 이들은 집체영도의 강조와 개인숭배 반대 라는 대의 를 내세우며 은밀하게 반대운동을 전개하였다. 그리고 김일성이 정부대표단을 이끌고 소련을 비롯한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들을 방문한 1956년 6월 1일부터 7월 19일 사이에 반김일성운동을 본격화하였다. 1956년 8월 30일 김일성에 대한 반대파의 공개적인 도전이 평양예술극장서 열린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이루어졌다. 원래 이 회의의 주요 의제는 사회주의국가들을 방문하고 돌아온 정부대표 단의 보고를 청취하고 인민보건사업의 개선방안을 토론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회의 첫날 김일성의 사회주의 국가 방문보고가 끝난 뒤 토론에서 상업상 윤공흠은 첫 토론자로 나서서 의제와는 관계없 이 김일성 지도부를 공격하였다. 그렇지만 반대파가 승리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대부분의 중앙위원 들은 김일성을 옹호하였고 반대파의 행위를 반당적 행위로 규정하고 나섰으며, 윤공흠은 곧장 단상 에서 끌어내려졌다. 이후 8월 전원회의는 반대파의 움직임을 반당종파행위 로 규정하고 최창익, 윤공흠, 서휘, 리필

321 규, 박창옥 등 동무들의 종파적 음모에 대하여 라는 결정을 채택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 윤공흠과 서휘, 리필규를 출당시켰으며 최창익과 박창옥의 당직과 내각부수상직, 정부직위를 박탈하였다. 이 렇게 해서 반대파의 움직임은 좌절되었다. 반대파의 소요는 무마되었으나 사태는 마무리된 것이 아 니었다. 이 사건이 모스크바와 베이징에 알려졌고 소련은 부수상 미코얀을, 중국은 국방부장 팽더화이를 급히 평양으로 파견해서 김일성으로 하여금 8월 전원회의의 결정을 번복하도록 종용하였다. 당시 소 련과 중국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약속받고 있던 김일성으로서는 이들의 요구를 수용할 수밖에 없었 다. 결국 김일성과 지도부는 외세의 압력에 굴복하여 1956년 9월 23일 9월 전원회의를 열어 8월 전원 회의의 결정을 번복하였다. 이에 따라 최창익, 박창옥은 당 중앙위원으로 복귀하였으며, 윤공흠, 서 휘, 리필규의 당적도 원상회복되었다. 이 일련의 사건은 훗날 8월 종파사건 이라고 이름 붙여졌다. 평가 종파사건이 북한 권력구조의 재편에 미친 영향은 매우 컸다. 당시 소련과 중국의 간섭으로 김일 성 세력은 일시적으로 어려움에 처하기도 했으나, 곧이어 대다수의 반대파들을 종파분자 로 낙인찍 어 권력의 핵심에서 축출하였다. 이후 당은 종파 여독을 청산한다는 명분 아래 종파에 반대한다는 이른바 반종파투쟁 을 대대적으로 전개했고, 주요회의마다 해당 종파인사 또는 김일성을 비판하는 세 력들을 숙청해왔다. 결국 종파사건을 계기로 폭발한 반종파투쟁은 북한 사회에서 김일성 비판세력을 거의 완전하게 소멸시키면서 명실상부한 김일성 중심의 단일지도체계를 확립시켰다. 관련 검색어 _ 수령론, 유일사상체계

322 평양국제상품전람회 평양국제상품전람회는 북한 최대 규모의 무역박람회로 매년 봄과 가을에 개최되고 있다. 봄철 전 람회는 1996년에, 가을철 전람회는 2005년에 각각 시작됐다. 행사에는 중국과 유럽, 동남아 국가 등 의 기업들이 공작기계, 전기 및 전자 설비, 운수기재(차량 등), 석유화학제품, 의약품, 일용품, 식료품 등을 출품하였다. 북한은 내부의 부족한 상품수급을 보충하기 위해 대외경제협력 강화를 도모하고 있다. 평양국제 상품전람회는 이의 한 과정으로 2000년 이후 확대되고 있는 추세이다. 북한은 2001년 제4차 평양국 제상품전람회를 개최하며 향후 매년 정기적으로 이 전람회를 개최할 예정이며 아시아와 유럽을 연결 하는 새로운 시장 으로 개척해 나갈 방침임을 밝혔다. 이에 따라 대내용으로 진행되었던 상품전람회는 아시아와 오세아니아, 유럽을 연결하는 새로운 시장을 목표로 하여 2005년부터는 봄, 가을 2회씩 확대 개최하고 있다. 특히 무역 부문 등 일부 전문 가들을 위한 자리였던 전람회는 2005년 이후 종전과 달리 일반 주민들에게도 큰 인기를 끌고 있다. 2002년 7.1 조치 이후 공장 기업소의 기술개건조치가 시행되고 있기 때문에 북한의 일반 공장 기업 소 관계자들과 일반 주민들도 전람회장을 찾아 외국회사의 제품을 살펴보고 무역 거래 가능성을 살 피고 있다. 북한은 전람회라는 형식을 통해 내부 기술을 수출시장에 전시하고, 판매를 적극 유도하고 있으며, 해외의 선진기술 도입을 통한 경제발전을 도모하고 있다. 물론 북한이 대내외적으로 강조하며 출품 하고 있는 일련의 기술과 산업제품들은 그들도 인정하듯이 선진기술 과는 상당히 뒤떨어져 있다. 그 럼에도 불구하고 2000년 이후 꾸준히 양적, 질적으로 규모를 확대해 진행하는 것은 여전히 어려운 북한 경제 상황을 극복해보려는 노력의 일환이라고 볼 수 있다. 통상 북한이 개최하는 국제상품전람회의 주요 참가대상은 중국 기업이다. 그 예로 2007년 평양 가을철 국제상품전람회는 참가 외국 기업 가운데 중국 기업이 절반 이상을 차지한 것으로 나타났다. 중국과의 연계를 통한 기술협력과 상품전시회의 공동 참여 등도 빈번해 지고 있다. 중국과는 2005년 중국 국제특허기술 및 제품교역회 를 독자적으로 개최해 환경, 건강, 의료, 기계, 화학 등 다양한 분야 에서 북한이 자체 개발에 성공한 제품들을 선보였다. 이를 통해 중국과의 기술협력 가능성을 더욱 높이고 있다. 나아가 2011년에는 나선특별시에서도 국제상품전시회를 개최했다. 북한은 중국과 공동 개발하는 나선경제특구에 중국뿐 아니라 러시아, 호주, 이탈리아 등 외국 기업의 투자를 본격적으로 유치하고자 하였다. 유럽연합(EU) 기업들의 참가도 점점 증가하고 있다. EU 기업들은 2007년 가을철 전람회에 8개, 2008년 봄철 전람회에 17개, 동년 10월 22일부터 25일까지 열린 가을철 전람회엔 23개로 늘어나는 등의 증가 추세를 보이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기술개건사업, 나진 선봉 경제특구

323 포전담당제 포전( 圃 田, 구획을 나눠놓은 경작지)담당제란 협동농장의 말단 단위인 분조( 分 組 )의 구성원을 기 존의 7~8명보다 더 작은 인원으로 축소한 것으로 가족 단위 개인영농방식을 뜻한다. 가족영농제는 가족 단위, 혹은 몇 가족이 농토를 협동농장에서 대여 받아 농사를 짓는 것을 말하며, 이렇게 수확한 농작물 가운데 일정한 양을 협동농장에 내고 나머지는 가족이 자유롭게 처분할 수 있는 권리를 갖는 것이다. 즉 인센티브를 제공해 근로의욕을 북돋우고 생산증대를 꾀하는 제도라고 할 수 있다. 포전담당제 시범도입은 2002년 7.1 조치 의 영향을 크게 받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7.1 조치는 기존에 국가가 갖고 있던 권한의 많은 부분을 하부 단위에 위임하는 내용을 담고 있고, 하부 단위들 은 권한을 부여받은 만큼 위에서 분배받던 자재 등도 스스로 해결하지 않으면 안 될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협동농장도 이와 같은 상황에서 예외는 아니었고, 점차 최소 노력에 최대 효과 라는 생산성 과 이윤 창출에 힘을 쏟게 되었다. 이에 2004년 북한의 일부 지역에서 분조가 영농방식 및 초과생산 분에 대한 자율을 갖는 포전담당제 를 시범실시하게 되었다. 특히 북한은 2003~2007년 당시 2배의 증산을 목표로 하는 800만 톤 식량증산 5개년 계획 을 추진 했기 때문에 당국은 농민의 노동의욕 향상이 목표 달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고 판단하고 포전담당 제도 이러한 배경에서 도입된 것으로 보인다. 당시 북한의 김용술 무역성 부상은 포전담당제를 설명 하면서 같은 노동력으로 같은 땅에서 더 많은 알곡을 생산하는 것이 바로 실리주의 라고 강조하며 북한이 실리주의 원칙에서 곡물 증산을 여러 방면에서 시험 하고 있다는 것을 시사했다. 시범적 조치로 실행되었던 포전담당제는 뚜렷한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2005년 10월 양곡전매 제 실시와 배급제 정상화 조치로 중단되었다. 더불어 농업관리개선조치는 유명무실화되었다. 이후 포전담당제 운영 여부는 정확하게 알려지지 않고 있으나, 개인경작지를 강제 수매하고 사적 경작을 엄격히 단속하는 한편 허용된 뙈기밭에서도 고율의 세금을 부과하는 등 개혁에 역행하는 조치를 보 여 준 바 있다. 포전담당제는 집단영농제에서 개별영농제로 전환하는 과정에서 나타나는 과도기적인 영농 형태 로서 중국도 개혁 과정에서 이와 유사한 과정을 경험한 바 있다. 사회주의 체제의 농업개혁이 농업생 산과 분배의 규모가 작으면 작을수록, 개인화되면 될수록 탈( 脫 )사회주의화 되는 것이라고 할 때, 포 전담당제 및 개인영농의 실시 여부는 향후 북한의 농업개혁을 진단할 수 있는 주요한 시금석이 된다. 관련 검색어 _ 분조관리제, 7.1 경제관리개선조치

324 프롤레타리아 독재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자본주의 사회의 하층 노동자계급(프롤레타리아트)이 배타적으로 권력을 장악하는 것을 의미한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간단히 말해서 부르주아 정치권력을 무너뜨리고 수립하는 정치적 지배권력 이라 할 수 있으며, 북한은 이를 노동계급이 국가기구를 통하여 반혁명요소를 진압하고 사회주의, 공산주의 사회를 건설하기 위하여 실시하는 사회에 대한 정치적 지배 라고 규정하고 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론은 본래 맑스주의에 기반하고 있으며, 레닌이 러시아에서 혁명에 성공한 이 후 세계적으로 사회주의가 급속히 전파되면서 함께 대두된 개념이다. 초기 사회주의 국가건설에서는 소련을 중심으로 한 단일한 혁명사상과 혁명이론이 적용되었으나, 사회주의 각국의 상황과 조건의 차이로 인해 이론의 현실적 적용 간에서 그 차이를 드러내게 되었다. 이러한 차이로 인한 갈등은 결 국 소련과 중국 간의 이념적 논쟁으로 이어지게 되었으며, 당시 중 소의 이념 대립과 갈등 상황에서 북한은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이라는 독특한 혁명이론을 내놓게 되었다. 북한은 김일성이 1967년 5월에 발표한 자본주의로부터 사회주의에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문제에 대하여 와 1968년 9월에 발표한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은 우리 인민의 자유와 독립의 기치이며 사회주의 공산주의건설의 강력한 무기이다 라는 글을 통해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문 제와 관련된 북한 자체의 독자적 이론을 정립했다. 이는 중 소의 이념 대립 속에서 북한 스스로 독자 적인 혁명과 건설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해서였다. 북한에서 과도기는 노동계급이 정권을 쥔 다음 정치, 경제, 사상, 문화 등의 모든 분야에서 자본 주의를 완전히 타승하고 사회주의의 전면적 승리를 이룩해 나가는 역사적 시기 이다. 즉 과도기는 노동계급이 프롤레타리아 독재정권을 세울 때부터 무계급사회를 실현하는 혁명적 전환의 시기인 것 이다. 북한은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기간에 대해서 과도기와 동일하게 규정하는 다른 나라와는 달리, 프 롤레타리아 독재는 과도기의 모든 기간 동안 실시되어야 할 뿐만 아니라 지구상의 모든 제국주의가 완전히 소멸되어 사회주의의 종국적 승리가 이뤄질 때까지 지속되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 이유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가 이뤄진다고 할지라도 생산력 수준이 생산에 의한 분배의 수준까지 이르지 못하고, 세계혁명이 완수되지 않으면 남아있던 제국주의세력이 사회주의 국가를 위협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북한의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은 두 가지 특징을 지니고 있다. 첫째, 북한의 과도 기론은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의 기간과 과제를 포함하고 있다. 둘째, 북한은 과도기의 기간과 프롤 레타리아 독재의 기간을 다르게 설정하고 있으며 과도기에 대해서는 일국적 또는 지역적인 차원에서 설정하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서는 제국주의의 멸망과 연관시키고 있다. 즉 과도기의 과제는 사회주의의 완전한 승리를 통해서 이루어지고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과제는 사회주의의 종국적 승리를 통하여 이루어진다는 것이다. 과도기와 프롤레타리아 독재론 에 나타나 는 이러한 특징은 북한이 생산력이 낮은 단계에서 혁명을 시작했고, 혁명의 건설과정에서 미국의 위 협과 남한과의 대립에 의해서 정치적 동요의 가능성이 항상 존재하는 것에 기인하는 것이라 분석할 수 있다. 1992년 북한은 헌법 개정을 통해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인민민주주의 독재로 다시 바꾸었다. 인민

325 민주주의란 공산당이 주도하는 광범위한 통일전선에 의해 반제 반봉건 민주주의 혁명을 수행함으로 써 공산당 독재를 이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인민민주주의 독재는 본질적으로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하위개념이라 볼 수도 있지만, 사회경제적 차원에서 자본주의적 행태가 없어지지 않고 남아있는 차 이점이 있다. 북한이 국제사회주의가 급격하게 몰락한 시기인 1992년에 인민민주주의로 환원한 것은 노동계급만이 아니라 다양한 계급계층의 주민들을 우리식 사회주의, 북한식 사회주의 건설의 주체 로 내세우기 위한 것으로 분석된다. 관련 검색어 _ 우리식 사회주의

326 핵 불능화 중단 북한은 2008년 8월 26일 외무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6자회담에서 채택한 10 3합의 에 따라 진행되던 핵 불능화 조치를 중단하겠다고 선언하였다. 이후 북한은 2009년과 2013년에 두 차례의 핵실험을 실시하는 등 핵개발을 지속하고 있다. 연혁 2 13합의 에 따른 9 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초기조치가 완료됨에 따라, 6자회담 참가국들은 2007년 9월 27일~29일간 베이징에서 제6차 6자회담을 개최하여 9 19공동성명 이행을 위한 제2단계 조치를 담은 10 3합의 를 채택하였다. 10 3합의 는 비핵화를 위한 조치로서 북한이 영변 5MWe 실험 용 원자로, 재처리시설 및 핵연료봉 제조시설의 불능화를 2007년 12월 31일까지 완료하는 내용을 담 고 있었다. 이와 함께 6자회담 참가국들은 10 3합의 에서 모든 핵프로그램의 완전하고 정확한 신고 와 핵물질 기술 노하우 비확산 공약을 재확인하면서 이에 상응해서 북한에 경제 에너지 지원을 제공 하며, 미 북 및 일 북 관계 정상화 노력을 지속하기로 합의하였다. 경과 기본적으로 특정 시설을 불능화 시킨다는 것은 복구시키는데 상당시간과 비용이 들도록 하여 재 가동을 어렵게 만드는 조치를 의미한다. 기술적으로는 핵심부품을 분리하거나 일부 핵심요소의 파 손을 통해 시설이나 장비의 정상가동을 어렵게 만드는 것 등 다양한 방법을 적용할 수 있다. 이러한 점에서 핵시설의 재가동 자체를 완전히 불가능하게 하는 폐기 와는 구분되며, 일반적으로 폐기의 전 단계 조치로 볼 수 있다. 10 3합의 에 기초한 불능화는 영변에 있는 5MWe 원자로, 재처리시설, 핵연료봉 제조시설을 대 상으로 했다. 10 3합의 에 따른 북한의 핵시설 불능화 조치는 초반에 순조롭게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우라늄농축프로그램(UEP: Uranium Enrichment Program) 추진 및 시리아와의 핵확산 의혹 이 제기되면서 북한의 핵프로그램 신고와 불능화 조치가 10 3합의 에서 정한 12월 31일을 넘기게 되었다. 미국과 북한은 2008년 3월 31일 제네바, 4월 8일 싱가포르에서 연쇄 협의를 가진 후, 6월 26 일 북한의 신고서 제출과 미국의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지정 해제 의회 통보 및 적성국 교역법 적용 종료 조치가 취해지고, 6월 27일 북한이 영변 5MWe 원자로의 냉각탑을 폭파하면서 불능화 작 업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그러나 북한의 핵 불능화 조치는 북한의 신고서와 정확성에 대한 검증 문제로 다시 한 번 중단과 재개라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북한이 철저한 검증을 거부하는 완강한 태도 를 고수하자 미국은 대북 테러지원국 지정해제 발효를 보류하였고, 이에 대해 북한은 8월 26일 외무 성 대변인 성명을 통해 불능화 조치 중단을 선언하고, 사용 후 연료봉 인출을 중단하는 한편 불능화 조치가 진행 중이던 영변 핵시설을 복구하는 작업을 개시하는 등 위기상황을 조성하였다. 이러한 가운에 미 북 양측은 지속적인 협의를 통해 검증 관련 잠정합의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미국은 10월 11일 북한에 대한 테러지원국 해제 조치를 발효시켰으며, 다음날 북한은 불능화 조치 재개 의사 표명과 함께 사용 후 연료봉 인출 등 불능화 작업을 재개하였다. 그 후 검증문제를

327 공식적으로 매듭짓고 불능화 등 2단계를 마무리하기 위한 6자회담 수석대표 회의가 12월 8~11일간 개최되었으나, 북한이 시료 채취 등 검증 핵심요소에 대한 거부 의사를 고수함에 따라 합의에 도달하 지 못하였다. 북한은 2009년 4월 5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했으며, 이에 대해 4월 13일 유엔 안보리가 의장성명 을 채택하자, 북한은 이에 반발하여 6자회담 불참과 합의사항 불이행을 선언했다. 또한 4월 14일 북 한은 불능화 작업 중단조치의 일환으로 영변 핵시설에서 나온 폐연료봉들을 재처리할 것 이라고 주장하고, IAEA 모니터 요원을 추방했다. 4월 24일에는 폐연료봉 재처리 작업 및 핵연료를 자체적 으로 생산 보장하기 위한 기술개발을 지체 없이 시작할 것 이라고 발표했다. 이러한 북한의 일방적 조치로 인해 2008년 6월 시작된 북한 핵시설의 불능화 조치는 10여 개월 만에 다시 중단되는 상황으 로 빠져들게 되었다. 6자회담 주요 합의 내용 구 분 9 19 공동성명 ( ) 2 13 합의 ( ) 10 3 합의 ( ) 주요 내용 북핵 폐기 및 미국의 북한에 대한 공격 침공 의사 부재 확인 적절한 시기에 경수로 제공 문제 논의 미 북, 일 북 관계정상화 조치 북한에 대한 국제사회의 에너지 전력 지원 용의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개최 및 동북아 안보협력 증진 방안 모색 공약 대 공약, 행동 대 행동 원칙에 입각하여 단계적으로 이행 북한 핵시설 폐쇄 및 봉인, IAEA 사찰관 복귀 모든 핵프로그램의 신고 목록 작성 협의 미 북, 일 북 관계정상화 대화 개시 미국은 테러지원국 해제 및 적성국 교역법 종료 과정 개시 중유 5만 톤 상당 에너지 지원 햇프로그램의 완전한 신고 및 핵시설 불능화 기간 중 중유 95만 톤 지원 한반도 비핵화, 미 북 관계정상화, 일 북 관계정상화, 경제 에너지 협력, 동북아 평화 안보체제 등 5개 실무그룹 구성 초기단계 완료 이후 6자 장관급회담 개최 한반도 평화체제 협상 모든 북한 핵시설 연말까지 불능화 모든 북한 핵프로그램 연말까지 신고 북한 핵 물질 기술 노하우 이전 금지 미 북, 일 북 관계정상화 노력 중유 100만 톤 상당 경제 에너지 인도적 지원 관련 검색어 _ 영변 5MWe 원자로, 북한의 핵실험, 핵연료봉 제조 공장, 핵 재처리시설

328 핵비확산조약(NPT) 탈퇴 선언 북한은 1985년에 핵비확산조약(NPT)에 가입하였으나 국제원자력기구(IAEA)의 특별사찰에 반발하여 1993년 3월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이후 국제사회의 노력을 통해 북한은 탈퇴를 유보하였으나, 2차 북핵위기가 발생하자 2003년 1월 다시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배경 핵비확산조약(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은 핵 비보유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핵 보유국이 비보유국에게 핵무기를 양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이다. NPT에 가입해 있던 북 한은 국제사회가 북한의 핵문제를 제기하고 이를 해결하기 위해 핵사찰을 요구하는 등 국제적 압력 이 거세지자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북한이 NPT 탈퇴를 선언한 것은 NPT 체제에 남아 IAEA의 사찰 등을 수용할 경우 핵개발 상황이 노출되어 핵개발을 계속할 수 없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경과 북한은 1980년대 초반에 핵발전소 추가 건설 계획을 세우고 그동안 핵 연구를 지원한 소련으로부 터 원자로를 도입키로 하였다. 북한의 핵 연구 활동과 시설 확충에 의구심을 가 졌던 소련은 1985년 북한에게 NPT 가입을 전제조건으로 경 수로 4기를 공급키로 하였다. 이 합의에 따라 북한은 1985년 12월 12일 NPT에 가입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IAEA의 핵안전 조치협정 체결 문제를 둘러싸고 계속 대립하다가 1992년 1월 30일에서야 핵안전조치협정에 서명하였다. 1985년 NPT 조약에 가입한 후 6년 만에 서명한 것이다. 북한은 IAEA와 핵안전조치협정을 체결하고 임시 및 일반 사찰을 수용하겠다고 밝혔다. 이에 따 라 IAEA는 북한을 상 대로 첫 핵사찰을 실시하였고, 사찰 결과 북한의 플루토늄 추출량이 신고한 내용과 불일치하고 영변 핵시설의 핵폐기물 처리장 두 곳에 대해 의심스럽다는 점을 표시하면서, 1993년 2 월 9일 북한에 특별사찰을 요구하였으나 북한은 IAEA의 특 별사찰을 거부했다. IAEA의 특별사찰을 둘러싸고 마찰이 계 속되자 북한은 1993년 3월 12일에 NPT 탈퇴를 선언함으로써 1차 북핵 위기 가 발생했다. 그러자 유엔 안보리 등 국제사회 가 북한의 NPT 탈퇴를 비난하며 탈퇴 철회 를 촉구했고, 미 국은 북한과 4차례에 걸친 고위급 접촉을 벌여 북한의 NPT 탈퇴 선언 발효 하루 전인 그해 6월 10일 NPT 탈퇴를 유보한 다는 북한의 발표를 이끌어냈다. 그러나 북한의 핵사찰 비협조와 이에 따른 미국의 경수로 공사 지연 등으로 미 북 간 갈등을 빚다 가 2002년 10월 북한 의 고농축우라늄 개발 의혹이 불거짐에 따라 2차 북핵위기 가 발생했다. 미국은 대북 중유공급을 중단하였고, 북한은 고농축우라늄 프로그램을 공식 부인하였다. 그리고 미국 부시 정부의 핵태세보고서가 북한을 핵선제공격대상으로 규정함에 따라 북한은 미국이 NPT정신을 위배 했다고 강력히 반발하였다. 결국 북한은 핵동결을 해제하고 핵시설 재가동을 선언하였으며, 곧이어 북한은 2003년 1월 10일 정부성명을 통해 다시 NPT 탈퇴를 선언하였다. 지금까지 북한은 NPT를 탈퇴한 상황에서 핵개발을 지속 추진하고 있는 것이다. 북한은 2005년 2월 10일 외무성 성명을 통해 6자회담 참가의 무기한 중단과 함께 핵무기 보유를 선언했다. 이후 북

329 한은 2006년 10월 9일, 2009년 5월 25일, 2013년 2월 12일 3차례에 걸쳐 핵실험을 감행했다. 북한의 NPT 탈퇴 선언은 1970년에 NPT가 발효된 이래 유례가 없는 것으로 세계적인 핵확산 방지 체제에 대한 중대한 도전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대해 미국을 비롯한 NPT 가입국들은 NPT 체제가 북한의 도전으로 유명무실하게 되는 것을 방관할 수 없다는 강한 입장이다. 핵비확산조약(NPT: Nuclear Non-proliferation Treaty) NPT는 핵 비보유국이 핵무기를 보유하거나 핵 보유국이 비보유국에게 핵무 기를 양여하는 것을 금지하는 국제조약이다. 이 국제조약은 1970년 3월 발 효되었으며, 그 시효는 25년이었다. 하지만 1995년 개최된 NPT 검토회의에 서 조약의 당사국들은 조약의 시효를 무기한, 그리고 무조건 연장하기로 결 정하였다. 우리나라는 1975년에 가입하였고, 북한은 1985년에 가입하였다. NPT 체제하에서 핵 보유국은 어떠한 경우라도 핵 장비나 물질을 비보유국 에 수출할 수 없으며, 비보유국 역시 핵폭약을 제조하거나 반입할 수 없다. 그리고 비보유국은 이러한 의무를 제대로 지키고 있는지를 확인받기 위해 핵사찰을 비롯한 IAEA의 안전조치를 준수해야하는 의무가 있다. 관련 검색어 _ 영변 5MWe 원자로, 북한의 핵실험

330 핵연료봉 제조공장 핵연료봉이란 원자로에서 에너지를 얻기 위해 사용하는 연료봉을 말하는 것으로, 핵연료봉을 성 형 가공하는 곳을 핵연료봉 제조공장이라고 한다. 핵연료봉은 보통 농축 우라늄을 사용하여 만들지 만 북한 영변의 5MWe 원자로와 같은 중수로 원자로는 천연 우라늄을 사용하여 만든 연료봉을 사용 한다. 북한은 방사화학연구소에서 핵연료에 대한 연구를 시작한 이후 파이롯 플랜트 단계를 거쳐 영변 핵연료봉 제조공장을 건설하여 핵연료봉을 자체적으로 제조할 수 있는 능력을 보유하고 있다. 이 공 장은 이산화우라늄(UO2), 사불화우라늄(UF4) 생산 및 저장 빌딩과 함께 있으며, 1987년 전반기에 운전을 개시하였다. 1992년 당시 영변 1호기 핵연료의 1/3을 제조 중이었으며, 설비 및 공정을 건설 중인 영변 2호기와 태천 1호기의 핵연료 생산용으로 개조하고 있었다. 이 공장의 생산품목은 이산화 우라늄(UO2), 우라늄 금속연료, 사불화우라늄(UF4) 등으로서 산처리, 식순정제, 야금, 가공, 열처리 공정을 거쳐 금속우라늄을 만들고 여기에 표피를 씌운 이후 완성공정을 거쳐 핵연료봉을 만드는 것 으로 알려졌다. 종합적으로 북한 핵연료봉 제조공장의 생산능력은 핵시설 불능화 조치 이전까지 가동하였던 영 변 5MWe 원자로와 핵동결 당시 건설 중이던 50MWe 및 200MWe 원자로 등 모든 원자로에 핵연료 를 공급하기에 충분한 연간 200톤(봉 8,800개) 생산규모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핵연료봉 제조공장은 2007년 6자회담에서 체결된 2 13합의 에 따라 폐쇄 봉인 되었으며, 10 3합의 내용인 영변의 3개 핵시설(5MWe 원자로, 재처리시설, 핵연료봉 제조공장) 연내 불능화 완료 조치의 일환으로 내부 관련 설비를 해체하는 작업을 하였다. 그러나 검증에 대해 북한이 시료 채취 등 검증 핵심요소에 대한 거부 의사를 굽히지 않는 완강한 태도를 고수하였다. 그러한 가운데 상황이 지속되면서 북한이 2009년 4월 5일 장거리 미사일을 발사한 데 이어 5월 25일 제2차 지하 핵실험을 강행했다. 이로 인해 유엔의 대북제재조치가 강화되고 6자회담 재개가 계속 미루어짐으로 써 10 3합의 의 이행을 통한 북한의 핵불능화가 완료되지 못하고, 불능화 조치가 진행 중이던 영변 핵시설 복구 작업을 개시하여 핵연료봉 제조공장도 재가동이 가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관련 검색어 _ 영변 5MWe 원자로, 북한의 핵실험, 핵 불능화 중단, 핵 재처리시설

331 핵 재처리시설 핵 재처리는 핵분열로 사용이 끝난 핵연료에서 다시 사용할 수 있는 우라늄과 플루토늄을 분리하 여 꺼내는 기술을 말한다. 핵 발전연료로 역할을 수행한 후 원자로에서 끄집어낸 사용 후 연료 에는 연료로 다시 쓸 수 있는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가 남아 있다. 사용이 끝난 연료봉은 약 2~3년간 수조에 저장하였다가 우라늄과 플루토늄으로 재처리하는 과정을 거친다. 재처리의 목적은 핵연료 중에 함유된 우라늄235와 플루토늄239를 분리, 회수하여 재사용하는 상 업용 재처리와 핵연료 중에 함유된 미량의 고순도 플루토늄239를 회수하여 핵무기 제조에 사용하기 위한 군사용 재처리로 구분할 수 있다. 핵연료를 재처리하여 얻을 수 있는 플루토늄의 품질은 핵폭탄 용으로 부적합하지만, 이를 농축한다면 핵무기를 만드는 데 사용할 수 있으므로 우리나라와 같은 비 핵보유국은 이 재처리시설을 엄격하게 규제받고 있다. 북한은 1960년대 재처리 능력의 개발을 결정했으며, 그 이후 지속적으로 기술개발을 시도하여 왔 다. 1975년 핵 재처리시설로 의심받던 동위원소가공실험실에서 우라늄과 플루토늄에 대한 화학실험 과 건설 중이던 방사화학실험실에서 영변 1호기의 손상된 핵연료를 가지고 재처리 실험을 수행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 시설은 1985년 착공하여 1995년에 완공 예정이었으나, 1994년 10월 미 북 제네바 합의에 따라 동결될 당시 70% 공정이 완료된 상태였다. 그러나 현재 북한의 영변에는 핵 재처리시설이 완공되어 일부는 가동 중인 것으로 알려져 있으 며, 몇 차례 재처리를 통해 플루토늄을 추출하여 핵실험에 사용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 시설은 2007년 6자회담에서 체결된 2 13합의 에 따라 폐쇄 봉인 되었으며, 10 3합의 내용인 영 변의 3개 핵시설(5MWe 원자로, 재처리시설, 핵연료봉 제조공장) 연내 불능화 완료 조치의 일환으로 일부시설이 해체되기도 하였다. 그러나 북한은 2009년 4월 5일 장거리 미사일 발사에 따른 유엔 안보 리의 제재조치 결정에 반발하여 재처리시설의 불능화 원상복구 및 폐연료봉 재처리를 시작한다고 공식발표한 바 있다. 관련 검색어 _ 영변 5MWe 원자로, 북한의 핵실험, 핵 불능화 중단, 핵연료봉 제조공장

332 혁명가극 혁명가극은 음악, 무용, 연극 등을 종합해서 항일 및 계급투쟁을 주제로 하여 만든 북한의 예술 형태를 말한다. 배경 북한의 주체예술은 1970년대에 전성기를 맞게 된다. 이 시기에 항일혁명투쟁시기의 작품들을 영 화, 가극, 소설과 연극 등에 옮기는 사업을 진행했다. <피바다>, <한 자위단원의 운명>, <꽃 파는 처녀> 등이 영화와 가극 예술의 특성에 맞게 작품화 되어 나왔다. 김정일은 후계체제 구축 과정에서 김일성의 항일투쟁을 미화한 문예작품을 대대적으로 만들어냈 다. 김정일은 후계자로 내정된 이후에도 혁명가극 창작 전반을 지휘했다. 특히 5대 혁명가극은 김정 일이 직접 현지에서 가극 창작 전반을 감독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김정일의 예술적 취향과 정치 적 야심이 만들어낸 결과물인 셈이다. 북한의 혁명가극은 가극 <피바다>에 그 뿌리를 두고 있다. 북한 사회에서 가극은 1960년대 중후 반 이후 가극 <피바다>가 만들어지고, 이것이 혁명가극 <피바다>라는 이름으로 불리면서 이 작품 의 양식이 피바다식 가극 으로 확립되었다. 피바다식 가극은 혁명가극이라는 수식어를 가지게 되며 다른 가극들로 확산된다. 이른바 혁명적 내용을 가지면서 형식을 혁명적으로 개혁한 것을 일컬어 불 리게 된 것이다. 그에 따라 피바다식 혁명가극은 여러 작품으로 탄생되었다. 주요 내용 대표적인 작품으로 5대 혁명가극이 있으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피바다>(피바다가극단, 1971)는 김일성이 1936년 8월 만주에서 만들었다는 <혈해>를 바탕으로 만들어졌으며, 북한에서는 주체사상을 구현한 명작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꽃 파는 처녀>(피바다가극단, 1972)는 1920년대 말~1930년대 초를 시대적 배경으로 꽃분이 일가가 겪는 고난을 반일, 반봉건의 계급투쟁으로 연결시 키고 김일성의 항일혁명투쟁을 미화했다. <당의 참된 딸>(조선인민군협주단, 1971)은 6 25전쟁 당시 북한군 간호원인 강연옥이 목숨을 걸고 중환자들을 후송하는 임무를 완수하고 희생되기 직전에 당증 과 당비를 바친다는 내용이다. <금강산의 노래>(평양예술단, 1973)는 일제 때 가난 때문에 생이별했 던 황석민 일가가 북한체제하에서 다시 만난다는 것을 줄거리로 하는 체제 찬양물이다. <밀림아 이 야기하라>(평양예술단, 1972)는 겉으로는 일제의 앞잡이인 마을구장을 하지만 실제는 김일성의 항 일빨치산과 연계해 활동하는 주인공 최병훈의 항일투쟁을 줄거리로 하고 있다. 혁명가극은 음악, 무용, 연극 등이종합됐다는 점에서 우리의 악극이나 서양의 오페라와 비슷하지 만 사상계몽과 선전, 선동을 위해 예술성보다는 규모와 무대를 중시하는 특징을 갖고 있다. 따라서 한 작품에 200명 이상의 배우들이 등장해서 군중음악과 군중무용을 통해 주체사상에 의식화된 주민 들이 혁명을 일으킨다는 내용을 서사시 형식으로 전개한다. 평가

333 북한의 혁명가극 작품들은 북한이 내세우는 혁명사상을 고취하는 것에 목적을 두고 있으며, 지도 자의 우상화와 체제유지를 위한 선전수단의 목적으로 창작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관련 검색어 _ 군중예술론, 수령형상문학

334 혁명열사릉/애국열사릉 북한에는 우리의 국립묘지에 해당하는 중앙급 국립묘지로 대성산 혁명열사릉( 革 命 烈 士 陵 )과 신 미리 애국열사릉( 愛 國 烈 士 陵 )이 있다. 혁명열사릉은 주로 해방 이전 이른바 혁명원로들인 항일빨치 산 출신들을 대상으로 한 묘지이고, 애국열사릉은 해방 이후 북한의 유공자들을 대상으로 한 묘지라 할 수 있다. 혁명열사릉은 평양시 대성구역 대성산에 위치하고 있으며, 주로 항일열사들을 추모하기 위해 조 성되었다. 1973년 8월에 착공하여 1975년 10월 13일에 준공되었다. 1985년 9월 현재의 규모로 확장됐 다. 혁명열사릉은 중심축을 따라 능 대문까지 입구구역, 기념문주까지 중심계단구역, 조각군상구역, 교양마당구역, 반신상구역 등의 구획으로 설치되었다. 입구는 둥근 기둥위에 합각지붕으로 만들어졌 다. 입구에서 계단을 따라 오르면 정면에 대형 공화국영웅메달 이 있고, 왼쪽에는 김일성의 친필비 가, 오른쪽에는 헌시비가 있다. 묘비 앞에는 반신상과 분묘 및 비석이, 각 개인 앞에 하나씩 놓여있고 이 반신상과 비석에는 묻힌 사람의 이름과 생년월일, 그리고 약력이 새겨져 있다. 혁명열사릉에는 현재 약 100여 명의 항일빨치산 출신들이 묻혀 있는데 전 인민무력부장 오진우와 최광 등이 대표적 인 인물이다. 김일성의 가족인 김정숙, 김철주, 김형권 등의 묘역도 이곳에 조성돼 있다. 애국열사릉은 평양시 형제산구역 신미동에 위치하고 있으며, 1986년 9월 17일에 건립되었다. 신 미동의 지명이 종전 신미리여서 일명 신미리 애국열사릉으로도 불리는데 여기에는 당 및 국가, 군대 의 간부들과 과학, 교육, 보건, 문학 예술, 출판보도 부문 등 여러 부문의 공로자들의 유해가 안치되 어 있다. 묘비구역 안에는 추모비가 있는데, 조국의 해방과 사회주의 건설, 나라의 통일위업을 위하 여 투쟁하다가 희생된 애국열사들의 위훈은 조국청사에 길이 빛날 것이다. 라는 글발이 부각되어 있 다. 묘비구역 안에는 개인별로 묘비를 세웠으며 묘비에는 돌사진을 새겨 붙였다. 한편 북한은 2008년 말부터 열사릉을 평양 중심에서 벗어나 각 도 소재지(도 행정중심지)로 확산 하고 있다. 북한은 2008년 12월 평안남도 평성열사릉 준공을 시작으로 2009년 8월 함경남도 함흥, 12월 황해남도 해주와 황해북도 사리원, 2010년 6월 양강도 혜산, 7월 강원도 원산, 8월 자강도 강계 와 함경북도 청진, 2011년 4월 평안북도 신의주에 잇달아 완공했다. 또 2010년 7월 평양시 낙랑구역 장교리에 평양열사릉을 별도로 조성해 현재 10여 곳에 열사릉이 조성돼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이 각 도 행정중심지에 열사릉을 준공한 것은 북한 체제에 기여한 사람들을 전부 중앙의 신 미리 애국열사릉에 안장하는데 한계가 있다는 판단에 따른 것으로 보인다. 아울러 지역별 열사릉 조 성을 통해 각 지역에서 체제를 위해 헌신했던 간부와 모범 주민들을 이곳에 안장하고 이들을 통해 전 주민의 충성심을 이끌어내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북한은 김일성 김정일과 정권에 헌신한 간부들 을 애국열사릉에 안장하고 명절이나 특별한 행사가 있을 때마다 단위별로 이곳을 찾아 헌화하고 묵 념하도록 하는 등 애국열사릉을 주민들에게 충성심을 고취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북한 훈장

335 현지지도 북한에서 현지지도라는 것은 김일성과 김정일이 군대, 공장, 기업소, 협동농장, 기관, 학교 등의 현장에 직접 찾아가 행하는 특유의 정책지도 활동으로서의 통치방식을 뜻한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 정은으로 이어지는 북한의 세습 지도자들은 현지지도라는 독특한 통치방식을 통해 유일지배체제를 공고히 하고 체제안정과 경제발전의 동력으로 활용했다. 북한 지도자들이 현지지도를 행하는 목적은 생산현장의 근로자들과 직접 만나 격려함으로써 그 들의 근로의욕을 고취시킬 수 있고, 아울러 자상하고 세심한 인민적 지도자 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김일성의 현지지도와 관련해서 널리 알려지고 있는 것은 천리마 운동, 청산리방법, 대안의 사업체계 이다. 현지지도 라는 용어는 당초 김일성의 공개적인 정책지도 활동에 국한된 표현이었으나, 1980년대 말에 접어들면서 김정일의 활동에도 조심스럽게 쓰이기 시작 했다. 김정일의 현지지도는 그가 후계자 시절 실무지도 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는데, 김일성의 현지지도 와 차별화하기 위한 조치로 평가된다. 이는 북한이 김일성 생전에 그의 리더십을 유일영도체계 로, 김정일의 리더십을 유일지도체제 로 구분했던 것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김정일이 실무지도를 시작한 것은 그가 후계자로 공인된( 제6차 당대회) 이후인 1981년 경부터로 알려져 있다. 일례로 1984년 8월 3일 평양경공업제품전시장을 둘러보고 8.3인민소비품생 산운동 을 제창한 것은 이즈음의 김정일의 대표적 실무지도로 꼽히고 있다. 북한에서 김정일에 대해 실무지도라는 말 대신 현지지도라는 표현을 쓴 것은 1988년 4월부터이 다. 1980년대 말 들어 부쩍 강화된 그의 정치적 위상을 반영한 것이라는 게 일반적인 관측이다. 북한 이 김정일에 대해 현지지도라는 표현을 보편적으로 쓰기 시작한 것은 김정일에 의한 북한 통치가 사실상 시작된 1990년대 들어서이다. 1990년 1월 7일 노동신문에서 김정일에 대해서도 현지지도라는 표현을 쓴 이후부터 모든 선전매체에서 김일성과 똑같이 현지지도라는 표현을 사용하였다. 김정은의 경우에는 2011년 김정일의 급작스런 사망으로 2012년 초 최고지도자로 공식 등극하면서 곧바로 현 지지도라는 표현을 쓰고 있다. 북한은 현지지도를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정책지도 활동에 한정하여 지칭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최고지도자에 대한 우상화를 심화시켜 1인 지배체제를 강화하는데 적극 이용하고 있다. 김일성, 김정일이 행한 현지지도 사적을 대를 이어 영원히 전한다는 이유로 북한 전역에 세운 현지지도 사적 비 가 이의 구체적 사례이다. 현지지도가 끝난 후에는 현지에서 내린 지시나 방침에 대한 관철을 다 짐하는 충성결의 모임 을 진행하며, 현지지도 사적비 와 현지지도 말씀판 등을 건립해 혁명 사적지 로 조성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대안의 사업체계, 천리마운동, 청산리정신 방법

336 협동농장 협동농장은 토지를 비롯한 그 밖의 생산수단들을 통합하고 농장원들의 공동노 동에 기초하여 농업생산을 진행하는 사회주의적 농업기업소를 뜻한다. 연혁 북한은 1953년 8월 당중앙위원회 제6차 전원회의에서 농업협동화 방침을 채택하고 농민들을 자 연부락 단위의 협동조합에 강제 편입시키기 시작하여, 1958년 8월에 이르러 사회주의적 소유 형태 인 농업협동조합체계를 갖추게 되었다. 그 뒤 자연부락 단위의 농업협동조합이 1962년에 협동농장으 로 개칭되었다. 1962년 협동농장은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해 농업협동조합을 말단 행정단위인 리( 里 ) 단위로 통합하여 그 규모를 크게 하였다. 이에 따라 북한의 농업생산체계는 토지 및 생산수단의 협동 적 소유 에 바탕을 둔 협동농장과, 국유에 바탕을 둔 국영 농 목장으로 이원화되었다. 북한은 1964년에 채택한 농촌테제 와 1980년 제6차 당대회를 통해 협동농장의 협동적 소유 를 전 인민적 소유 로 전환할 것에 대한 방침을 제시하는 등 농업 단위의 국유화 방침을 기본입장으로 하였 다. 그러나 1990년대 경제난 이후 농업생산력 증대를 위해 협동농장의 운영방식은 점차 생산 분배단 위의 축소, 농업생산의 자율적 권한 강화 등 개인영농방식의 변화를 요구받고 있다. 운영방식 협동농장의 규모는 보통 농가호수 80호 내지 300호까지, 경지면적 130정보 내지 500정보로 조직 되어 있다. 협동농장은 내각의 농업성, 도 농촌경리위원회, 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 체계로 이어진 농 업지도관리체계의 지도에 따라 운영된다. 협동농장의 실질적 경영권을 갖고 있는 군 협동농장경영위 원회는 기술적 지도를 기본으로 하면서 모든 농업 경영활동을 계획화 조직화하며, 협동농장 내 작업 반 우대제, 분조관리제를 밀접히 결합시키도록 하고 있다. 협동농장의 관리운영은 농장원 총회(또는 대표자회)에서 1년을 임기로 하는 농장관리위원회가 담당한다. 협동농장관리위원장은 리( 里 ) 인민위원장이 겸하고 있다. 협동농장은 또 농기계작업소, 관 개관리소를 비롯한 농촌경리에 복무하는 국가기업소들의 지원을 받는다. 협동농장들은 국가로부터 농기계와 생산설비, 영농자재를 공급받고 있으며 농장 내 모든 기본건설과 농촌문화주택건설, 무상 치료, 무상교육, 정 휴양을 비롯한 국가적 혜택을 받게 되어 있다. 협동농장에서의 노동은 등급별 작업정량에 의하여 수행된 작업 실적에 대한 노력일로 평가 계산 된다. 그리고 농장원에 대한 노동지분은 연말 결산분배에서 최종적으로 확정된다. 즉 각 농장원은 농장가동률과 작업능률에 따라 노력일이 확정되고, 이 노력일을 기준으로 연말에 개최되는 협동농장 총회에서 현물 및 현금으로 분배받는다. 농장에서의 결산분배는 보통 수확 후인 11~12월에 진행한다. 이때 각 협동농장에서는 생산결산서 및 노력결산서를 작성하여 군 협동농장경영위원회에 제출하 게 되며, 결산분배에서 농민에게 분배되는 몫은 협동농장에서 생산된 총 수확고에서 국가납부와 생 산적 지출을 공제한 나머지를 가지고 분배한다

337 평가 사회주의 농촌의 협동화 방식은 집단경영이 크면 클수록 좋다는 이론 아래 대단위로 조직되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경영 기술상의 필연성이 없는 대규모 농장은 농민의 정치적 통제를 목적으로 한 것이었으며, 경영효율을 극대화하는데 제약조건으로 작용하게 되었다. 북한 역시 협동농장 운영의 1차적 목적은 적절한 행정구역 단위 편재를 통해 농민들을 관리하고, 사상 문화적 측면에서 농업 지도를 실시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주체사상, 주체농법 등 협동농장 운 영에서 중앙-도-군으로 연결되는 관료적 통제는 경영효율성이 정체되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무엇보 다 북한이 농업도 공업 부문과 같이 기업적 운영방식을 도입함에 따라 토지 비옥도, 농장 위치, 작물 종류 등 농업적 특성을 무시하고 공업생산방식과 같은 기계적 노동을 계획함에 따라 농업생산성의 정체와 저하를 초래하였다. 관련 검색어 _ 사회주의 농촌문제에 관한 테제, 사회주의적 소유, 주체 농법, 집단주의

338 호위사령부 호위사령부는 북한 최고지도자에 대한 경호업무와 반체제 쿠데타 및 폭동 등을 진압하기 위한 부대이다. 1945년 10월 소련에서 귀국한 김일성은 소련군의 지시에 따라 빨치산 출신 김좌혁 등을 중심으로 소규모 경호담당 기관인 호위국을 창설하였으나, 김일성에 대한 암살음모가 수차례나 발각되는 등 테러가 빈번해지자 호위국을 확대하고 경호기능을 강화하였다. 1958년 김일성은 연안파와 일부 소련 파 등을 제거하고 자신을 중심으로 당 중앙을 철저히 보위한다는 명목으로 호위국을 확대하고 항일 빨치산 출신인 오백룡을 호위국장에 임명하였다. 1983년 4월에는 빨치산 출신인 전문섭을 호위국장 에 임명하면서 호위총국으로 확대 개편하였고, 인원도 5만여 명으로 증강하였다. 1980년대 말 동유 럽 사회주의권의 붕괴는 김일성에게 호위조직 강화의 필요성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계기가 되었다. 이에 따라 호위총국 병력은 10만여 명으로 늘어났고 기갑, 포병, 공병, 기계화 부대 및 해 공군 병력 까지 포함시키며 최첨단 무기로 무장시켰다. 이후 호위총국을 호위사령부로 격상시켰다. 호위사령부는 반체제 쿠데타 진압 및 최고지도자에 대한 신변보호는 물론 그 일가에 대한 안전 확보, 숙소경계와 관리, 전용농장 목장 과수원 운용, 반출되는 각종 물품에 대한 검색 등의 임무를 수행한다. 또 최고지도자와 관련해 의심스러운 인물들에 대한 뒷조사도 하고 있다. 특히 호위사령부 는 정권 위해 요소들을 사전 제거한다는 명분으로 정권 보위조직인 국가안전보위부 인민보안부 등 핵심기관에 군부 엘리트들을 배치해 조직의 동태뿐만 아니라 권력기관들이 최고지도자의 지침대로 업무를 수행하는지 업무 내용까지도 감시하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보위사령부

339 화폐개혁 북한은 해방 이후 1947년, 1959년, 1979년, 1992년, 2009년에 걸쳐 5차례의 화 폐개혁을 단행하였다. 2009년 이전의 화폐개혁 년 1차 화폐개혁 1차 화폐개혁은 북조선인민위원회 법령 30호에 의해 1947년 12월 6일부터 12일까지 실시되었다. 화폐개혁의 목적은 일제강점기 화폐제도를 철폐하고 사회주의 경제체제의 화폐제도를 확립하는 것 이었다. 북한은 보조화폐를 제외한 100원, 10원, 5원, 1원 등 4종의 신권을 발행하고 1:1의 비율로 교 환해주었다. 교환 한도는 계층 계급별로 차별을 두었는데, 한도초과금액은 예금으로 동결하였다. 1949년 5월에는 50전, 20전, 15전 등 보조화폐를 발행하여, 1949년 8월 15일부터 기존 화폐의 유통을 전면 중지시켰다 년 2차화폐개혁 2차 화폐개혁은 내각결정 11호에 의해 1959년 2월 13일부터 17일까지 실시되었다. 화폐개혁의 목 적은 6 25전쟁으로 인한 인플레이션의 누증을 방지하고, 새로운 재정금융 토대 구축 및 새로운 경제 계획 실시에 따른 투자재원을 확보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100원, 50원, 10원, 5원, 1원, 50전 등 6종의 지폐와 10전, 5전, 1전 등 3종의 주화를 발행하고, 100:1의 비율로 교환해주었다. 교환 한도는 없었으 며, 기관 기업소들은 보유중인 구화폐를 반드시 은행에 전액 입금하도록 했다 년 3차 화폐개혁 3차 화폐개혁은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의해 1979년 4월 7일부터 12일까지 실시되었다. 화폐개혁 의 목적은 개인은 물론, 기관이나 단체 등에서 보유하고 있는 유휴 화폐를 회수하여 급격한 물가 인 상을 방지하고 정부의 부족한 재원을 충당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100원, 50원, 10원, 5원, 1원 등 5종 의 지폐와 유통과 계산의 편의를 위해 50전짜리 주화를 새로 발행하여 1:1의 비율로 교환해주었다. 교환 한도는 없었으며, 기관 기업소 사회협동단체는 4월 8일까지 은행에 입금시킨 다음 필요한 만큼 새 돈을 지불받았다. 10전, 5전, 1전 등 소액 주화는 교환하지 않고 이미 발행한 것을 그대로 유통시 켰다. 액면가가 가장 높은 100원권에는 김일성의 초상이 들어갔으며, 김일성 생가 등을 소재로 활용 하여 김일성의 우상화에 활용하였다 년 4차 화폐개혁 4차 화폐개혁은 중앙인민위원회 정령에 의해 1992년 7월 15일부터 20일까지 실시되었다. 화폐개 혁의 목적은 시장화 현상 확산에 따른 부작용 차단과 재정 확충이었다. 북한은 100원, 50원, 10원, 5원, 1원 등 5종의 지폐를 발행하고, 1:1의 비율로 교환해주었다. 1가구당 399원이라는 한도를 두고 한도초과금액은 예금하도록 하였으며, 30,000원 이상은 예금으로도 받지 않았다

340 2009년 5차 화폐개혁 5차 화폐개혁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과 그 집행을 위한 내각결정에 의해 2009년 11월 30일부터 12월 6일까지 실시되었다. 화폐개혁의 목적은 인플레이션 억제, 재정 확충, 시장 활동 억제 를 통해 계획경제를 복원하여 북한당국의 사회적 통제력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북한은 5000원, 2000원, 1000원, 500원, 200원, 100원, 50원, 10원, 5원 등 9종의 지폐와 1원, 50전, 10전, 5전, 1전 등 5종의 주화를 발행하였다. 교환비율은 현금의 경우 100:1, 은행에 저금한 몫의 경우 10:1이었다. 교환 한도는 최초 1가구당 10만원으로 알려졌으나 이후 북한주민의 극심한 반발 등 부작 용으로 인해 1인당 5만원, 1가구당 20만원으로 한도를 완화했다. 화폐교환 후 전반적인 가격수준은 2002년 7월 1일 수준으로 조정하였다. 공장 기업소에서 받는 임금은 종전의 금액수준을 새 화폐로 보장했다. 화폐개혁 조치는 7.1 조치 이후 화폐가치가 크게 하락하면서 발생한 인플레이션을 해소하고 암거 래 시장에서 유통되는 지하자금을 끌어내는 한편, 시장과 시장세력을 통제하고 계획경제를 강화하기 위한 것이었다. 화폐개혁은 시행되자마자 북한 경제를 심각한 혼란에 빠뜨리고 북한당국이 추진해오던 경제정책 들에 많은 차질과 타격을 주게 되었다. 우선 무엇보다 북한 원화가치가 추락하고 북한 경제의 위안 화, 달러화 현상을 가속화시켰다. 북한주민들은 화폐개혁 이후 장마당, 종합시장에서 북한 원화보다 는 위안화를 선호하게 되었다. 이처럼 북한 원화가치 하락은 가치저장 수단으로서의 북한 화폐기능 을 현저히 떨어뜨린 것이다. 화폐개혁 이후 북한의 시장 물가는 2010년 이후 현재에 이르기까지 마치 주가변동 곡선처럼 심하 게 변동하고 급속한 물가상승이 야기되었다. 북한 시장 물가는 화폐개혁 1년이 되는 2010년 11월말 에 이미 화폐개혁 이전 수준으로 복원되었고, 그 이후 계속 상승세를 보이고 있다. 따라서 화폐개혁은 단기적으로 북한당국의 재정능력을 확충시켜 주었을지 모르지만 결국 장마당 경제의 침체와 그럭저럭 작동되고 있었던 국영기업소와 계획경제 부문마저 경제활동의 위기를 초래 함으로써 재정에도 부정적 영향을 주게 되었다. 북한의 화폐개혁 현황 1947년 12월 1959년 2월 1979년 4월 1992년 7월 2009년 11월 일시 관련법령 주요내용 인민위원회 법령 제30호 내각결정 11호 중앙인민위원회 정령 중앙인민위원회 정령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회 정령, 내각결정 일제시대 발행 통용되던 화폐 중 보조 화폐를 제외한 전화폐를 1:1 비율로 교환 이후 새 보조화폐 발행 이후 조선중앙은행 발행 화폐만 통용 6 25전쟁으로 인한 인플레 방지, 새로운 재정금융 토대 구축 새 경제계획 실시에 따른 투자재원 확보 목적 구 화폐 100원 : 신 화폐 1원 비율로 교환 금액의 제한 없이 1:1 비율로 교환 기관, 기업소, 협동단체는 보유화폐를 은행에 입금시킨 후 필요한 만큼 새 돈을 지불받음. 화폐제도의 공고화, 화폐유통의 원활화 목적 신 구권 교환 비율은 1:1 시장경제 통제 강화, 인플레 해소, 재정능력 회복 목적 교환비율 100:1, 교환한도 최초 1가구당 10만원 화폐교환 후 가격수준은 2002년 7.1조치 수준

341 관련 검색어 _ 장마당, 7.1 경제관리개선조치

342 황색바람 황색바람이란 북한에서 저속하고 퇴폐적인 풍조를 일컫는 말로 보통 자본주의 황색바람 이란 표 현으로 등장한다. 북한 언론매체들은 제국주의 사상문화, 자본주의 문화 침투에 대한 경각심을 촉구 할 때 이 용어를 자주 쓴다. 북한은 1990년대의 경제난 이후 북한주민들의 시장 활동이 확대됨에 따라 유입된 자본주의 문화 생활양식을 비사회주의적 현상 이라 규정하며 경계하고 있다. 북한이 경계하는 비사회주의적 요소 로는 1 복장 불량, 미신을 믿는 행위, 불륜 등 집단적 사회주의 규범의식과 가치관에 반하는 일탈행 위, 2 불법 경작, 뇌물수수 등 경제난으로 인한 위법행위, 3 밀수, 도박, 마약 등 범죄행위, 4 남한 영상물 시청 등 반체제 반사회주의적 행위 등이 있다. 북한은 황색바람이 인민들의 계급의식을 마비 시키고, 민족 고유의 전통과 풍습을 저해 하며, 퇴폐적인 행위를 물들인다. 고 주장하며 통제를 강화하고 있다. 북한이 비사회주의적 요소에 대한 검열을 강화하는 것은 비사회주의적 현상의 확산이 북한체제를 위협하고, 사회균열을 야기하는 주민 의식의 변화를 초래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다. 북한은 동유럽 사회주의 국가가 붕괴된 것은 자본주 의 문화의 침투를 막지 못했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사회주의를 건설하는 나라들에 있어서 원자탄보 다 더 위험한 것이 제국주의자들이 퍼뜨리는 황색바람 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북한은 이러한 황색바람을 단속하고 차단하기 위해 비사회주의 그루빠 를 조직해 주기적인 검열 과 조사를 실시하고 있으며, 사안의 경중에 따라 각종 처벌을 내리고 있다. 관련 검색어 _ 비사회주의 그루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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