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물의 생명의 법칙은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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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임 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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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위치전쟁 아담은 사람이 신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사람의 위치( 人 格 )를 이탈하여 사탄에게 패하였으나 예수 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에게 승리하 시고 아담이 잃어버렸던 인격을 회복하였다. 사람-예수가 신-사탄을 이긴 것이다. 그러므로 복음이란 진정한 인간 승리이자 하나님의 승리를 전하는 것이다. 박성완 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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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 10:2)
4 이 글을 쓰면서... 예수님은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한테 죽은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열심으 로 사랑하는 사람들한테 죽으셨다.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처형한 죄목은 안 식일을 범한 죄와 신성모독 죄였는데 사실 이 죄는 아담이 먼저 범한 것이 었다. 곧 우리 인생의 근원적인 죄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 에 매우 좋다고 하시면서 안식하셨다.(창1:31~창2:2) 그러나 아담은 신들 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였다.(창3:5~6) 이것이 바로 성경이 말하는 아담의 근원적 인 죄다. 그런데 아담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제기한 것임으로 창조주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 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그리하여 죄 없으신 예수님은 아담, 곧 나를 대신하여 이 두 가지 죄목으로 십자가에서 처형되신 것이다. 우리는 통상 예수님이 나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다고 말한다. 그러나 막연히 예수님이 내 죄를 위해 죽으셨다고 알아서는 부족하다. 판사 앞에서 피고인이 자신 의 죄명이 무엇인지를 알아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그러면 유대인들은 왜 죄 없으신 예수님을 이 죄목으로 처형하였는가? 바 울은 그 이유를 이렇게 말한다. 내가 그들에 대하여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 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 (롬10:2) 라고 한다. 그들은 성경을 거의 다 암송하다시피 한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여기 서 말하는 지식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아는 지식이 아니다. 하나님은 영이 시기에 그분의 목표는 항상 영에 있고 영이 살리는 것이고 생명이다.(요 6:63) 고린도후서에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 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 (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이 의미는 구약- 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을 가장 잘 대별해 주는 말씀이다. 유대인들은 성 경 말씀을 거의 다 암송하는 사람들이었음에도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드 - I -
5 려 예수님을 죽였다. 예수님이 안식일의 완성자 임에도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니까 안식일을 어긴 죄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임에도 그들이 생각하 는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로 알고 있었기에 신성을 모독한다고 사람-예수님 을 죽인 것이다. 기록된 글자에는 인격이 없다. 그래서 글자의 사역으로 인 해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진 성경이 역설적으로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다는 것이다. 이 처럼 기독교 역사에도 하나님을 섬긴다고 하는 사람들이 성경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처형하였다. 참으로 때가 이르면 너희를 죽이는 자마다 자기가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 각하리라. (요16:2) 마태복음에 보면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십자가에서 고난을 당하고 죽으신 다음 부활 하실 것을 말씀하시자 베드로가 주님을 붙잡고 꾸짖기 시작하 여 이르되, 주여 그럴 수 없나이다 (마16:22) 하였다. 그러자 예수님께서 베드로에게 사탄아 너는 내 뒤로 물러가라 (마16:21) 하셨다. 베드로는 좋 은 의도에서 말했지만 사탄의 일에 동참한 것이다. 이것이 모두 하늘의 일, 곧 영의 일을 모르고 글자대로 표면적으로 알아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대한 개념없는 열심은 사람을 죽일 수 있고 자신도 의도하지 않 게 사탄의 일에 참여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늘도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두 가지 원칙은 동일하다. 첫 번째는 사탄이 아담을 속인 이것을 먹는 날에 사람이 죽지 않는 신들 과 같이 될 것이다 (창3:5) 라는 말이고, 두 번째는 성경을 읽되 문자적으 로 받아 들여 유대인들과 같이 생명이 없는 종교인이 되라는 것이다.(롬 10:2) 즉 영의 사역자가 아닌 글자의 사역자가 되라는 것이다. 성경의 서신 서는 교회 내에서 은사주의, 율법(문자)주의, 영지주의를 경고하고 있는데 사실 이에 대한 근원은 다 하나에서 기원한다. 모든 인간의 문제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것에 기원하였듯이 이 또한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깊은 함정에 기인하는 것이다. 성경 말씀은 하나님의 - II -
6 마음, 곧 생명의 본질을 기록한 책이다. 그래서 표면을 보면 안되고 이면 을 보아야 한다. 예수님은 오셔서 글자의 사역이 아니라 살리는 영의 사역 을 하셨다. 공자나 석가의 말은 심오하지만 일반적으로 다 이해하고 수긍 을 한다. 왜냐하면 우리와 같은 세계에 있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말씀은 공자나 석가의 말같이 어렵지도 않은데 알쏭달쏭하고 이 해하기 힘들다. 다른 세계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계시에 의하면 사람은 본래 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 지만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이것은 물 고기가 물속을 이탈하면 사망이듯이 사람에게도 위치를 이탈한 것이 죄고 사망이다. 그리하여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위해 누군가 와서 원래의 위치로 회복, 곧 구속이 필요하였다. 이것을 예수님이 하셨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골1:14) 그러므로 죄와 사 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했던 인류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원래의 세계, 곧 생명세계로 원 위치하였다.(롬8:2)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 이라. (롬8:2) 이제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구출되어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는 영의 사역자다. 그럼에도 불구하 고 선악의 지식세계에서 오랜 기간 길들여진 그리스도인들은 선과 악의 이 분법적 관념 하에 여전히 표면적으로 성경을 보고 있다. 그러나 생명의 세 계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제3의 세계다. 성경은 바로 제3의 세계를 말 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세계, 지식이 아닌 태어나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교리를 주기 위해서 도 아니고, 가르치기 위해서도 아니고 오직 생명을 주러 오셨다.(요3:16) 예 수님은 오셔서 하나님의 왕국, 곧 생명의 세계를 전파하자 선과 악의 이분법 세계에 있던 유대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 III -
7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이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롬1:20) 특수계시만이 성경이 아니고 자연계시도 성경이라 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목표는 오직 생명에 있다. 만물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어떠함과 그분 의 일하시는 원리를 알 수 있다.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연결되어 태어나는 것이다. 또한 죽음을 통해서만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연결되 는 것이다. 쉽게 말해서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의 음식헌물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 음식헌물로 드려짐으로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해야 하는 것이다.(레위기 2장) 사람들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 되신 것만 알고 생명이 되기 위해 헌물 되심은 잘 알 지 못한다.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어떻게든지 죽지 않고 하나님께로 가려고 한다. 그러나 희생물만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 니라 헌물도 죽음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타락한 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정한 이러한 생명의 경륜을 거부하였다는 것이다.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 (계13:7) 이라는 말씀이 있다. 물론 영 안에 서 보면 하나님은 시간의 제약이 없는 분이기에 창세로부터 죽임당했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보면 그분은 분명히 2천년 전에 죽 으셨다. 사람의 육신은 영생하게 되어 있는데 죄 때문에 육신의 죽음이 왔 고 오직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고 아는 사람들에게 는 이 말씀은 이해하기 힘들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창세로부터 사람을 죄 인으로 창조하지 않았음에도 예수님이 우리의 죄로 인해 죽임당했다는 의 미이기 때문이다. 만일 육신이 단지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면 하나님께 서 사람을 창세로부터 죄인으로 만들었고 이로 인해 어린양이 죽임 당했다 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사람은 본디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져야 하며 생명의 연결자인 예수님을 영접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근원 적으로 영원한 생명이 없었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영원한 생명을 단지 죽 - IV -
8 지 않는 것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죽지 않는 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 고 하나님 자신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 지만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만 드는 것이라면 하나님께서 또 다른 하나님을 만든다는 모순이 생기는 것이 다. 영원한 생명이란 거룩하고 시작도 끝도 없으며 피조되지 않은 생명으 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렇다면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피조되지 않은 영 원한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바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결되어 참여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듯 이 하나님과 별도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하나님과의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지식으로는 단 한 마리의 모기도 만들 수 없듯이 생명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생명은 반드시 죽음을 통해 연 결되어야 한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는 것 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그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함이라. (고후5:4) 하였다. 영 인 하나님과 육인 사람의 간격은 하늘들과 땅의 차이 보다 크다. 물과 기 름도 저절로 섞이지 않는데 하물며 하나님과 사람의 차이는 얼마나 크겠는 가? 사람이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은 하나님과 연합이 된다는 것이다. 곧 하나가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만든다고 종교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연합을 통해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연합은 반드시 상호 죽음 안에서 연합된다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상호 죽음 안에서 하나가 된다. 사람들은 죄가 없다면 하나님을 만나도 죽지 않 을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영이시고 소멸시키는 불이시다.(히 12:29) 하나님을 만나서 타지 않을 피조물은 죄가 있든 없든 아무것도 없 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하나 - V -
9 님과 사람이 만나는 장소는 근원적으로 번제단에서 만나는 것이다.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는 단순히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을 위해서 영-하나님, 곧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 헌물이 되어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 자신의 생명의 원리다. 십자가의 전면 은 죽음이지만 뒷면은 생명이듯이 하나님께서 우리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 시기 위한 깊은 생명의 원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육으로 만들어진 사람 은 죽음 없이는 영생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 니요, 입고자 함이니 (고후5:4a) 하였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죄된 육신 때문에 육신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이것을 벗어나 신들과 같이 되려고 생 각하나 바울은 우리가 육신으로 지어진 것은 그런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새로운 영적인 몸을 입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라는 것을 말하 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몸이 없으신 영이신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자신 의 배필로서 몸을 가진 사람이 필요하시기 때문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근 원적으로 육으로 지어진 다음은 영적인 몸을 입을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 것을 성경은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 (고 전15:46) 고 하는 것이다. 우리가 본성에 속하게 된 것은 죄 때문에 본성 에 속한 것이 아니라 죄가 있기 전에도 본성에 속한 몸이었다. 근원적으 로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5:50)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사람은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 야 하지만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어차피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법리적 대속뿐만 아니라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도 예수님을 믿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원래부터 죄가 없더라도 예수님을 생명의 연결자로 영접해야 한다. 만물은 다 이런 원리로 구성되어 있다. 원자의 구조는 양성자와 음전자가 있고 중간에 이를 연결하는 중성자로 구 성되어 있다. 물과 기름도 저절로 섞이지 않고 반드시 중화제가 있어야 한 - VI -
10 다. 그래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는 반드시 연결자가 있어야 한다.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 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 (딤전2:5) 죄라는 종교적 관념에 박혀 있는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히 죄 때문에 예 수님의 중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영원한 생명에 연결되기 위해서는 중재자가 필요한 것이다. 아담은 본디 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3:22) 아담은 오실자의 모형이 지 실재가 아니었다.(롬5:10) 모형은 그릇이라는 의미지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재의 집이 지어지면 없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모형-육적인 몸에서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실재-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도록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창조되었다는 것 이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율법적이고 표면적인 관념에서 빨리 탈피해야 생명의 세계, 곧 하나님의 나라가 보인다.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재단하지 말고 생명의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생명 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신들과 같이 된다는 사탄의 말에 속아 선 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러므로 성경의 영적전쟁은 위 치전쟁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다. 사람은 바로 씨- 하나님 앞에 흙-여자의 위치다. 사람은 본래 영생을 가진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께서 씨를 주시면 그 씨를 발아시킬 토대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바울은 어떤 이들이 어떻게 죽은 자들이 일으켜 세워지 느냐? 그들이 어떤 몸으로 오느냐? (고전15:35) 라는 질문에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고전15:37) 하였 다. 왜 부활을 묻는 이들에게 어리석은 자여 라고 하는가? 타락한 아담의 기본적인 속성은 어떻게 하면 육신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사는 것을 소망한 다. 그래서 현대의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들과 같이 죄의 삯은 사망 (롬 - VII -
11 6:23)이라는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여 죄 때문에 육신이 죽고 죄가 없으 면 육신이 죽지 않는다는 문자적인 이분법적 생각을 하고 있기 때문에 어 리석은 자여 라고 하는 것 같다. 이어서 바울은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 (고전15:50) 하였다. 바울은 여기서 왜 이것을 말하노니 라고 하는가? 바로 고린도교회 성도 들에게 당신들이 지금까지 잘 못 알고 있는 내용을 바로잡아 주겠다는 것 이다. 즉, 우리가 살과 피로 지어진 것은 죄 때문에 살과 피가 된 것이 아 니고 죄 이전에도 살과 피로 지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어차피 육신을 가지 고는 죄가 있든 없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 로 죄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향해 나아가는데 사탄이 설치해 놓은 하 나의 장애물에 불과 한 것이지 죄 문제만 해결되면 다 되는 것이 아니다. 부활생명이란 말 그대로 죄가 있는 없든 육신이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씨를 뿌려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다는 것이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이미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 그래서 바울은 여기서 죄된 육신을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똑 같은 대자연의 생명 원 리에 의해서 자기 인격의 씨를 뿌리고 영적인 몸을 열매로 거둔다는 것이 다. 사탄의 자식들은 불의한 자들의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들은 의로운 자 들로 부활한다는 것이다.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리라는 것이다. (행24:15) 그러므로 바울은 죄가 있기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이분법적 세계를 말하 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것 이다. 만일 죄를 대속 받은 그리스도인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한 다면 예수님의 완전한 대속 사역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 된다. 우리는 전 존재적으로 구속을 받았고 전 존재적으로 거듭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 과 혼만 구원을 받았고 몸은 구원받지 못하고 죄 때문에 죽는다면 이는 예 - VIII -
12 수 그리스도의 완전한 구원을 심각히 훼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단순한 육신의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 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살아있다는 이름을 가지고 있으나 하나 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죽은 것이고 육신은 죽었으나 하나님과의 관 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산 것이다.(계3:1)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자 하나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물으셨다. 이 질문은 아담 안에 있는 인류에 대한 하나님 의 영원한 질문이다. 만일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무엇을 하였느냐 라고 물 으셨다면 인생은 참으로 절망이지만 행위를 묻지 않고 위치를 물으신 것이 은혜다. 그런데 당시에 아담이 하나님의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나무 뒤에 숨었듯이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이 질문에 답을 하지 않고 종교의 나 무, 명예의 나무, 도덕의 나무, 심지어 기도의 나무, 의의 나무 뒤에 숨어 서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 아이러니 하게도 위치를 이탈한 인류의 대표자 인 빌라도는 정 위치에 계신 예수님을 향하여 네가 어디서 왔느냐? (요 19:9) 고 물었다. 빌라도의 눈에도 예수님은 세상에 있는 사람과는 다르게 보였다는 것이다. 눈이 둘이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 눈이 하나 있는 사람들 의 세계에 가면 이상한 사람 취급을 받는 거와 같은 이치다. 아담은 선악 과를 먹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정상적인 위치를 이탈한 자다. 그 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비정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님을 보고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발견하고 원래의 사람의 위치로 돌아가 는 것이 다름 아닌 구원이다. 당신은 지금 어디에 있는가?(창3:9) 이글은 이러한 영적인 위치전쟁의 관점에서, 그리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하고 노력하였다. 부족한 이 글을 읽는 이들 이 마음의 문을 열고 이글을 읽는다면 분명 하늘로부터 오는 빛이 임할 것 이라 확신한다. * 본서의 인용된 성경구절은 킹제임스 흠정역(그리스도 예수안에 刊 )임. - IX -
13 순 서 1. 요 약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하나님과 사람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의 위치 죄란 무엇인가?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 희생물과 헌물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예수님의 침례 십자가의 도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이기는 자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거짓 Vs 진실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네가 어디 있느냐? 반론에 답하여 맺음말
14 그러나 무엇이나 되는 것 같이 보이는 이 사람들에 관 하여는 (그들이 어떤 사람이든지 내게는 상관이 없으며 하나님은 사람을 외모로 취하지 아니하시느니라) 무엇 이나 되는 것 같이 보이는 그들이 회의에서 내게 아무 것도 더해 주지 아니하였느니라.(갈2:6)
15 1. 요 약 1. 요 약 인류의 문제는 무엇인가? 속이는 자 아래 있다는 것이다. 속이는 자 아 래 있으면서도 너무 깊게 오래 동안 속아 있기 때문에 무엇에 속아 있는 지 모른다. 더 큰 문제는 소위 기독교인들조차 이러한 문제의식 자체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는 무엇에 속아 있는가? 인간이 신( 神 )이 될 수 있 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있다. 사탄은 이브에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 이 아시느니라. (창3:5) 하였다. 이 한 문장 안에 인간의 근원적 문제가 모두 들어 있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들의 소망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예나 지금이나 여전히 사탄이 사람을 속이는 방법은 동일하다. 타락한 인류의 소망은 종교 안에서 신이 되고 정치 안 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지금도 수많은 종교 안에 있는 교주들의 공통점 은 자기 종파 안에서 죽지 않는 신으로 추앙받고 있다. 더욱이 소위 그 리스도인이라는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되 참사람이신 예수님은 모르 고 신이신 예수님만 알고 있다. 그래서 예수님의 죽으심 마저도 믿을 수 없기에 예수님은 죄가 없어서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해서 죽었다는 황당한 논리를 편다. 그러나 신은 사람의 구속자가 될 수 없다. 오직 사람의 구속자는 사람이어야 한다. 예수님이 우리의 주님이라는 말은 그분이 우리의 조상이라는 의미다. 종교는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신을 열심히 숭배하게 한다. 그러나 생명은 연합하게 한다. 우 리의 구원은 아담-신과 같은 사람에서 예수-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 이다. 아담은 신과 같은 사람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므로 신과 같 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유사 이래 아담 이 소망하는 신과 같은 사람으로 사셨으나 역설적으로 예수님은 아담-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고 죽으심을 통해 인간은 결코 신이 - 1 -
16 1. 요 약 될 수 없다는 것을 확증하셨다. 만일 그분이 신이었다면 십자가에서 죽 을 수 없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인간의 정체성이 폭로된 자리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물위로 걸어가도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 드러난 자리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로 가기 전까 지의 행적을 보면 사람이 신이 될 수 있다는 아담의 소망이 이루어지는 듯 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너무도 평범하게 죽으셨다. 아담 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죽지 않았다면 사탄의 말이 맞 는 것이다. 그러나 흙은 흙이지 결코 씨가 될 수 없다. 십자가란 하나 님께서 사탄에게 속은 아담에게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지니라 (창 3:19) 하신 말씀이 완전하게 확증된 자리다. 그래서 이 자리는 신이 되 고 싶은 아담의 소망이 끝난 자리다. 예수님과 같은 사람도 죽었기 때문 에 그 누구도 죽지 않을 사람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요한복음에 6장 54절에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 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라고 말씀하신다. 우리의 영생의 근 거가 예수님의 살과 피 라는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살과 피 가 없는 예수님을 추구하지만 분명히 예수님은 살과 피를 가지신 분이고 우리의 영생의 양식은 예수님의 살과 피 에 있다는 것이다. 살과 피 라는 의미는 그분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서 스스 로를 칭할 때 줄곧 사람의 아들 이라고 하셨다. 이것은 자신은 사람이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신들이 되고 싶은 사람 들의 속성은 신적인 예수님만을 알려고 한다. 살과 피가 없는 예수님만 을 믿으려고 한다. 예수님이 신이라면 예수님은 살과 피도 없고 십자가 에서 죽을 수도 없고 우리를 구속할 수도 없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 54 절에서 우리의 영생의 근거는 사람의 아들의 살과 피 에 있다고 말한다. 곧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왜 십자 가에서 죽으셨는가? 죄가 없어서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이 허락 - 2 -
17 1. 요 약 하셔서 죽으신 것이 아니고 살과 피 가 있기 때문에 죽으신 것이다. 살 과 피가 없다면 죽으실 수 없다. 그래서 요한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 수님의 참사람 되심을 증거하기 위해 로마 병정들이 예수님의 옆구리를 창으로 찌르자 피와 물이 나오더라 (요6:34) 라고 기록하고 있는 것이 다. 또 요한은 서신서에서도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는 영마다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이것이 적그리 스도의 영이니라. (요일4:3)라고 했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우리의 영생의 근거는 예수님의 신 되심에 있지 않고 그분의 살과 피, 사람이신 예수님께 있다는 것이다. 아담은 이 살과 피를 피해 신이 되려고 하였다. 영생의 근거가 살과 피 에 있음에도 이것을 거부하고 사람이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살과 피 를 무시한 영과 생명은 근거가 없다. 종교의 허다한 문제들이 여기서 일 어났고 그 결과는 언제나 황당한 것이었다. 근거 없는 영은 영생 안으로 이끌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여전히 소위 그리스도인들 조차도 너무도 깊게 사탄에게 속아 있기 때문에 사람의 육신은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에 죽음이 왔다고 단순하게 믿는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육신의 죽음과 삶에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임에도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사실 사탄이 아담을 유혹한 말과 같이 죽지 않는 신들 이 되고 싶은 아담의 깊은 속성에 기원한다.(창3:5) 성경은 우리의 육신 이 살아도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있으면 사망이고(엡2:1) 하나님과 의 관계가 연결되어 있으면 육신이 죽어도 산 것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 어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 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요11:25) 이 말씀에서 처 럼 당시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들은 안죽었는가? 모두 죽었다. 또 예수님 은 자신을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라고 하면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 3 -
18 1. 요 약 죽지 아니하리라. (요6:50) 하셨다. 그러면 지금 우리 믿는 이들은 육신 이 죽지 않는가? 다 죽는다. 그러므로 우리 육신이 죽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을 인식해야 한다. 예를 들어 죄의 삯 은 사망 (롬6:23) 이란 말씀의 의미를 죄 용서를 받은 그리스도인 마저 도 죄로 인해 육신이 죽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너무도 큰 모순이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죄 문제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고 예수님의 구 속은 완성이 안 된 것이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남편과 아내라는 생명의 세계를 목표로 생 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우리는 타락하여 선악의 지식세계 에 와 있다. 지식이란 영적인 것인 아닌 표면적인 것이다. 그래서 성경 을 단순하게 문자적으로 표면적으로 이해하면 율법이 되어버린다. 예수 님 당시에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이해하지 못했는가? 그들은 율법이라 는 선악의 지식의 세계에 있었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세계에 계셨기 때문 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유대인들이 예수님에게 적용한 죄목은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였다. 통상 예수님이 인류의 죄를 대속했다고 한 다. 그렇다면 아담의 죄를 대속했다는 것인데 역으로 아담의 타락이 어 떻게 안식일을 어긴 것이고 신성모독 죄인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 람을 창조하고 보시기에 매우 좋았더라. (창1:31) 하시면서 안식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이라는 작품을 만들고 매우 만족 하시고 안식하셨 는데 아담은 자기 자신에게 불만을 품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했다.(창3:5)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창조자를 모독한 것이다. 하나님은 좋다고 하는데 피조물에 불과한 사람이 하나님 께 나를 왜 이렇게 밖에 만들지 못했습니까? 라고 항의하고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하나님의 창조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고 하나님을 모독한 것이다. 그래서 구약 성경을 보면 안 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의 죄 값은 동일하게 사형에 처하도록 규 정되어 있는 것이다.(출31:14, 레24:6) 그러므로 성경에 안식일을 거룩 - 4 -
19 1. 요 약 히 지키라는 말의 영적 의미는 피조물로서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된 한 목표를 가지고 기록되어 있는데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 에 영이 생명이고 하나님의 목표는 영에 있다. 그래서 살리는 것은 영 이며 육은 아무것도 유익하게 하지 못하게 하며 (요6:63) 라고 한다. 성 경은 하나님의 마음을 기록한 책으로 성경 말씀은 표면과 이면(영)이 있 다. 그런데 표면은 시대에 따라 변하지만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지키라는 말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 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영원한 것이다. 그러나 유대인들은 말씀의 표면 만 알고 이면을 알지 못했다. 예수님이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자 유대인 들은 성경말씀을 어긴 예수님을 보고 참지 못했던 것이다. 또 예수님이 자신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사람이 어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느냐고 하면서 하나님을 모독한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본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런데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위치 를 이탈해서 너무 오랜기간이 지나자 그들에게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이라는 개념이 없었고 유대인들의 개념 안에는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 었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버지와의 관계 속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는 생 명의 세계에 계신 분이다. 그러나 성경을 문자적으로 이해하는 율법의 세계에 있는 유대인들로서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들에 게 당시 율법은 조선시대의 유교이념과 같은 것이고 북한의 주체사상과 같은 것이고 종교 경전과 같은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 당시 이스 라엘을 지배하는 질서인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했으므로 예수님께서 그 당시에 죽음으로 내 몰리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고린도후서에 보면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 되 영은 생명을 주느니라. (고후3:6) 라는 말씀이 있다. 이 의미는 구약 - 5 -
20 1. 요 약 -옛 언약과 신약-새 언약을 가장 잘 대별해 주는 말씀이다.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었던 옛 언약, 즉 율법은 완벽하지만 생명이 없는 글자 의 표면만 있었기 때문에 사람을 죽이는 결과를 초래했다는 것이다. 아 이러니하게도 사람을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던 성경이 본질을 벗어나 오히려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는 역효과를 냈다는 의미다. 성 경은 주제는 예수 그리스도다. 예수님도 성경에 대해 그것들이 바로 나 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요5:39) 하였다. 구약성경에 나오는 생명나무의 열매, 어린양, 만나, 성전, 제물들, 절기들, 반석 등 여러 주제는 모두 예 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 하고 유대인들은 표면적인 글자의 사역으로 인해 성경이 예수님을 말하 고 있는데도 예수님을 몰라보고 죽였다. 어떤 이들은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 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인 말씀만 지킨다면 이것은 율법과 같이 글자의 사역으로 죽이는 사역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기독교 역사에서 도 하나님 말씀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많은 사람들을 죽이는 사례가 있었 다. 예수님은 오셔서 유대인들과는 반대로 글자의 사역이 아닌 살리는 영의 사역을 하셨다. 예를 들어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 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이 빵을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 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요 6:51) 하자 이 말을 표면적으로 받아드린 유대인들은 자기들끼리 다투 며 이르되,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 냐? (요6:52) 하였고 제자들도 마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 을 들을 수 있으리요? 하였던 것이다. 또한 예수님은 간음한 여자를 유대인들이 돌로 치려고 하자 너희 중에 죄 없는 자는 먼저 그녀에게 돌을 던지라. (요8:7)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양심의 가책을 받아 모 두 돌아갔다. 예수님은 그녀를 향하여 나도 너를 정죄하지 아니하노니 가서 다시는 죄를 짓지 말라. (요8:11) 하시면서 글자의 사역이 아닌 영 - 6 -
21 1. 요 약 의 사역을 통해 그녀를 살리셨다. 율법대로 하면 간음한 자는 죽여야 한 다.(레20:10) 그러나 성경의 본질은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것이지 죽이라고 주어진 것이 아니다. 성경보다는 사람이 우선이다. 지금도 어 떤 종교에서는 자기들의 경전을 지킨다는 명목으로 사람을 죽이고 있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라도 생명이 없는 글자대로 하면 죽이 는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다.(롬3:20) 왜냐하면 율법은 기계적 이기 때문에 인격적인 사람에게는 적용하면 그 누구도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마저도 안식일을 어긴 죄와 신성모독 죄로 정죄를 당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생명을 줄 수 없는 결정적 흠이 있는 것이다. 만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 법으로 말미암아 있었으리라. (갈3:21) 이와 같이 당시 유대인들은 겉으로는 말씀을 기계적으로 잘 지켰지만 속 마음은 그렇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에 행위 이전에 마음 의 동기를 먼저 보시는 분이다. 그래서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음욕을 품 어도 간음한 자라고 하시는 것이다.(마5;28)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하 나님 말씀과 한 덩어리, 곧 말씀이 인격이 되어 하나님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이었으나 유대인들은 말씀과 사람이 분리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에게 위선자들아 너희에게 화가 있을 지어다! (마23:29) 하신 것이다. 이것이 종교다. 종교의 가장 큰 문제는 무엇인가?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영을 알지 못하고 표면적으로 받아 드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메시 아로 오신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죽였던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 약의 대언자의 사역을 글자사역으로 죽이는 사역이라고 하였고 정죄의 직무라고 한 것이다.(고후3:6, 9) 그러나 신약의 사역은 영의 사역으로 살리는 사역이다. 신약 경륜은 글자를 섬기지 아니하고 영의 새로운 것 안에 있는 것이다
22 1. 요 약 우리를 붙들던 것 안에서 죽었으므로 이제 우리가 율법에서 구출되었나 니 이것은 우리가 영의 새로운 것 안에서 섬기고 글자의 낡은 것 안에서 섬기지 않게 하려 함이라. (롬7:6)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 살은 참으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이니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먹고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 안에 거하느니라 (요6:55~56) 하시면서 영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러나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드린 제자들은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 (요6:60) 하였고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에게 주어 먹게하겠느냐?(요6:52) 하였다. 제자들과 유대인들 은 예수님의 말씀을 율법과도 같이 표면적이고 기계적으로 받아드렸던 것이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컴퓨터에는 어떤 숫자를 입력하여 출력 하면 그대로 입력한 대로 출력이 된다. 그러나 사람은 인격적인 존재이 기 때문에 어떤 말씀을 내가 받아드린다고 해서 그대로 내가 표현하는 것이 아니다. 내가 그 말씀을 소화해서 내 나름대로 표현하는 것이다. 제자들이 예수님의 말씀이 어렵다고 하면서 수군거리자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요6:61) 하시고 이어서 제자들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요6:63) 라고 하였다. 실족한 사 람이 생겼기 때문에 이 말씀이 나온 것이다. 즉 살과 피는 영이요 생명 이다 이렇게 말씀하셨는데 이는 살과 피가 기반이 되어서 주님의 영과 생명이 있게 된다는 것이다. 살과 피 속에 물질적으로가 아닌 영적으로 내재하고 있는 것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의 살과 피는 예 수님의 영과 생명을 상징하고 있는 것이다. 영과 생명으로 이끌기 위해 서 살과 피를 말씀하신 것인데 이는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어야 영생에 이른다는 것이다. 또한 성경말씀은 계시의 말씀이다. 우리의 생각과 하 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목표는 문자적 인 표면에 있지 않고 영-생명에 있다. 성경 말씀은 표면적인 것이 아니 고 하나님의 영-마음을 알아야 생명이 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 8 -
23 1. 요 약 말씀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니까 말씀을 문자적으로 믿는 것이 영이요 생 명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그렇게되면 그것은 또 다시 글자의 사역이고 죽 이는 사역이 되는 것이다. 예수님은 다른 세계에 계신 분이다. 소위 세상의 위인들이라고 하는 공 자나 석가, 소크라테스의 말을 들어보면 심오하지만 다 이해가 간다. 왜 냐하면 우리와 같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 래서 공자나 석가나 소크라테스의 제자들 중에서 한 두 명은 그들을 떠 날 수 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죽을 때까지 자기 스승과 함께 했다. 그런 데 예수님의 말씀은 무슨 선문답 같기도 하고 어려운 말도 아닌데 아리 송하다. 또한 예수님의 제자들은 한 사람도 예외없이 예수님을 따르다가 다 떠나갔다. 이것은 예수님의 세계와 아담의 세계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을 반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의 상식과 통념에 서 완전히 벗어난 세계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 (사55:8~9) 하 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는 크다는 것이다. 개는 사람을 알래야 알 수가 없다. 우리도 하나님을 안다고 하지만 실상 은 모르는 것이다. 내 상식을 완전히 버려야 하나님의 세계가 보이는 것 이다. 생명의 세계를 지식의 세계로는 볼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 수님은 당시에 유대인들에게 너희가 듣기는 들어도 깨닫지 못하며 보기 는 보아도 알지 못하리라 (마13:14) 하신 것이다. 지금도 마찬가지다. 우 리도 여전히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생명의 세계를 들여다 본다면 유대 인들이 겪었던 똑 같은 과정을 반복하게 될 것이다. 사탄에게 속은 인류는 생명의 세계에서 지식의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자 들이다. 그래서 사탄에게 속아 있는 인류는 깊은 소원이 있는데 그것은 - 9 -
24 1. 요 약 항상 죽지 않는 신( 神 )이 되고 싶은 것이다. 제한을 가진 사람이 제한이 없는 신이 되고 싶은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인간이 죽는 것을 불완전 하다고 생각하면서 늘 육신적으로 죽지 않는 것을 소망하고 있다. 일반 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본래 사람은 하나님께서 죽지 않도록 창조했는데 아담이 죄를 지어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하나님이 창조하실 때 죽도록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완전하게 창조했지 불완 전하게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불완전한 창조물은 없다. 피 조물은 각각의 창조 목적 안에서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독수리는 날아 다니고 뱀은 기어 다닌다. 그렇다고 뱀이 불완전한가? 천사는 죽지 않 고 사람은 죽는다고 해서 사람이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각각의 피조물 은 그 창조목적 안에서 모두 완전하다. 사람은 사람 그 자체로서 완전하 고, 하루살이는 하루살이로서 완전하다. 모든 피조물은 그 창조 목적 안에 서 완전하게 지어졌다.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우 리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한 필수적인 과정임도 불 구하고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이 인류의 문제다. 사실 이것이 성경 전체의 내면에 흐르는 핵심 키워드다. 하나님이 정해준 운명을 인정 하느냐, 인정하지 않느냐가 하나님의 경륜을 푸는 중심요소다. 그래서 이 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성경의 대부분의 계시는 드러나지 않게 된다. 예수님을 따라가던 제자들도 예수님에게서 어떤 신적인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이스라엘 나라를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던 것이다. 그 리고 이 분을 하나님이 보낸 메시아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믿었 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그만 그들의 생각 밖에서 죽으시고 말 았다. 아마도 제자들은 마지막까지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있었을 것이 다. 그런데 그만 죽으시고 말았다. 큰 소리를 지르시고 운명하셨다. 나 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하고 운명하셨다. 누구와 다를 바 없는 사람으로 죽으셨다. 그러 자 모든 제자들이 떠나갔다. 죽는 데도 같이 가고 옥에도 같이 가겠다고
25 1. 요 약 했던 사람들이다. 만일 그 자리에서 예수님이 신으로 나타났다면 죽어도 같이 갔을 것이다. 그런데 모든 것이 다 끝나버렸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고기 잡으러 갔던 것이다. 성경을 살펴보면 사탄은 아담에게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였다. 그래서 지금 도 타락한 인류의 소망은 무엇인가? 신이 되는 것이다.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다 같은 말이다. 근원은 하나 다. 지금도 여전히 사탄은 같은 말로 사람을 유혹하고 있다. 우리의 구원 은 무엇인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인생의 진실을 알고 이 거짓 아래서 빠져나오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 하는 것이다. 피조물이란 시작이 있고 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늘에 속한 피조물이 있고 땅에 속한 피조물이 있다. 하늘에 속한 피조물은 영이 기 때문에 시작은 있지만 죽지 않는다. 그러나 땅에 속한 피조물은 물질이 기 때문에 끝이 있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부여한 본질적인 임무가 있는데 그 것은 동산을 가꾸고 지키라 는 것이다.(창2:15) 그러면 동산이란 무엇인 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소유주가 하나님이시다. 이 동 산은 성막-성전-예수-교회-천년왕국-새 예루살렘으로 발전된다. 이 동 산은 교회의 원형이다. 사람들은 이 동산을 물질적인 곳으로 생각하여 지 금도 찾아 헤매는 사람들이 있지만 교회가 물질적인 곳이 아닌 영적이고 인격적이 듯이 동산도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항상 영-인격에 있다. 이에 대한 것은 뒤에 자세히 살 펴보기로 한다. 하나님은 영시기에 사람 안에, 곧 인격 안에 거하신다. 하 나님은 교회 안에 거하시듯이 동산이 하나님의 거처다. 이 동산은 오늘날 의 교회인 동시에 곧 나 자신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이 곧 동산인 것이다. 사람의 본질적인 임무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다. 이 인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것을 이탈하면 사망이
26 1. 요 약 다. 그러므로 영적전쟁의 핵심은 사탄과 사람간의 인격 쟁탈 전쟁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사람의 위치, 곧 인격의 본질은 흙이라는 것이다.(창 2:7) 하나님은 씨-생명이고 사람은 흙-육신이며 육신은 연약하고 생명이 없다. 씨의 절대적 소망은 밭에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앞에 절대적으로 흙이라는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 람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다. 형상이란 실제, 곧 생명이 아니라는 의미다. 전기와 전등의 관계에서 전등 자체로는 빛이 없다. 전등에는 보이 지 아니하는 전기가 연결될 때 전기의 빛이 발하게 된다. 그래서 전등은 보이지 아니하는 전기의 형상이다. 형상이란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고 무엇을 받아서 표현하는 존재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자체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라 하나님과 연결됨으로서 형상으로서의 역할을 다 하는 것이다. 그러면 기독교인들이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은 영원히 살게 되 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서 죽게 된 것이 아니고 어차피 사람은 한 번은 죽게 되어있다는 의미인가? 그렇다. 이것은 진리다. 사람들은 십자가라는 죽음이 왜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고전1:24) 인지 왜 승리인지, 왜 우주의 중심점인지 잘 모른다. 단지 부정적인 것으로만 생각하고 단지 예수님께서 나를 대신해서 죽으셨다는 법리적인 혜택 정도로만 생각한다. 레위기에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말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속하기 위해 드리는 제물이고 헌물이란 하나님과의 생명의 교통을 위한 제물이다. 희생물이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 것이다. 즉 헌물이란 죄와 관계없이 드리는 제물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 라도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성경이 주는 계시는 희생물만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도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진다. 모든 헌물은 살 아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이 없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 생물과 헌물은 동일시 되었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27 1. 요 약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 (레 1:17) 단지 희생물이 죄를 속하기 위한 것이라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질 필요가 없다. 제단 주 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17:11) 이것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아니 고 법리적인 죄의 대가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왜 희생물을 하나님의 불 로 태우고 이것을 헌물과 동일시하고 있는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그런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생물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된 것이다. 그래서 항상 태우는 희생물은 헌물과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비록 아담이 죄를 지어 희생물이 필요했지만 어차피 사람 은 헌물로 지어져 죽음을 통해 하나님과의 생명이 연합이 필요했는데 이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희생물로서 피 흘림의 죽음과 헌물로서의 죽음, 두 번 죽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희생물과 헌물의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을 포함시 켜 놓으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는 것이 다.(고전1:24)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는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다.(레1:9, 17) 또 희생 물과 헌물은 우리 자신이다. 인생은 죄로 인해 희생물로서도 피 흘림의 죽 음이 필요했지만 죄 이전에도 근원적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 제헌물, 곧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 (히12:29) 하나님을 만나서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모든 헌물은 모 두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모든 만물은 불에 태워짐으로 다른 물질 로 바뀌어진다. 우리도 불에 태워짐으로 육신에서 영적인 몸으로 바뀌어지 는 것이다. 그래서 헌물의 총체와 기초는 번제헌물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 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다른 4가지 헌물 -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 물, 범법헌물 - 은 번제헌물의 발전이고 번제헌물을 다르게 표현한 것이 다. 헌물이 불에 태워지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표현하는 것이 다. 그러므로 희생물이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우리
28 1. 요 약 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때 레위기에 나오는 제물들의 명칭은 우리의 죄로 인해 희생물 이라고 부르는 것이 맞다.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희생물이라 하지 않고 헌물 이라는 명칭을 사용하신다. 왜 명칭이 희생물이 아니고 헌물인지를 곰곰이 생각해 보라.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 제헌물, 곧 흙으로 창조되었다. 흙이란 생명을 받을 위치지 자체로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은 시작이 있고 끝 이 있다. 사람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다. 사람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 은 오만이다. 만일 그렇게 되면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피조물이다. 창세기 1,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의 원계시다. 바로 그 원계시 도 이 진리를 증거한다. 창세기 2장에서 하나님은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 게 하시고 갈비뼈를 뽑아서 이브를 만들었다. 여기서 아담은 그리스도를 예표하고, 이브는 부활생명-교회를 예표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 곧 교회다. 이것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일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거듭나야 했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이것은 너무도 당연한 진리다. 여기서 아담은 인류와 그리스도 둘을 모두 예표한다.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을 의미한다. 죽지 않 으면 이브라는 부활생명을 산출할 수 없다. 또 예수님도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를 죽지 않고 잔다 (마9:24) 라고 표현하고 있다. 성경은 그리스 도 안에서 죽은 자를 잔다 라고 표현함으로써 아담 안에서 죽은 자와 분 명히 구분해서 말하고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 니었다. 그리고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듯이 생명의 길 안에서의 부활과 사망의 길 안에서 의 부활은 본질적으로 다른 것이다.(행24:15) 그런데 사람들은 이상하다. 생명의 길 안에서 부활과 사망의 길 안에서 부활은 다르다는 것을 인정하 면서도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는 다름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무조건 육체적 죽음은 부정적인 것으로 보면서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실 리 없 다는 것이다. 이렇게 아는 것을 아주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간주할 수도
29 1. 요 약 있지만 조금 더 들어 가보면 이것 때문에 하나님의 풍성한 계시는 닫혀 있 는 것이다. 왜냐하면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기 때문이다. 나의 기점, 출 발점이 어디 있느냐에 따라 열매가 달라진다. 내가 영생을 가지고 있었다 고 믿는 것과 그렇지 않다고 믿은 것은 엄청난 차이가 있는 것이다. 사실 모든 이방종교의 근원은 여기서 출발한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서 영원한 생명이 없었다. 영-씨로 지어졌다 면 죽지 않지만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생명이 없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당연히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그 생명은 그 왕국이기 때문이다. 우주의 생명원리는 만물이 똑 같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짐으로 높은 생명에 연결된다.(고후5:4)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왕국이다. 하나님은 왜 이 우주를 창조했는가? 생명의 왕국 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자연계시는 무엇을 계시하는가? 하나님 자신을 계시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생명이시고 만물은 바로 그 생명을 계 시하고 있다. 그러므로 우리는 만물을 통해 하나님 자신을 알 수 있다. 생 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라는 생명의 원리를 알 수 있다. 특수계시든 자연계시든 하나님의 모든 목표는 하나님-생명에 초점이 맞추 어져 있다. 사람만이 이 생명의 원리에서 벗어 날 수 없다.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하실 수 있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무 기물이 저절로 유기물이 되는 방법은 없다. 돌이 풀이 되려면 풀뿌리가 흙 속에 있는 돌을 뚫고 그 영양분을 취해 풀이 된다.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은 소에 먹혀야 되고,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취하려면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고후5:4) 이렇듯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짐으로 그 생명에 연 합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란 하나님 자신으로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생명이다. 피조 되지 않은 생명이다. 만약에 영원한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예수님은 육
30 1. 요 약 신을 입고 오실 필요가 없었다. 처음부터 하나님께서 사람을 영생을 가진 자로 만들면 되는 것 아니겠는가? 또한 영원한 생명을 만드는 것이라면 또 다른 하나님이 생기는 것이고 피조된 것이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이란 말 자체에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래서 천사는 죽지 않지만 피조된 생명이 기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는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의 첫 열매로서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이다. 아 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으로 오신 것이다. 하 나님께서 생명이 없는 것은 금 나와라 뚝딱 하는 식으로 만드실 수 있을지 모르지만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왜냐하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을 만들 수 없다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전 능성에 손상을 입히는가? 그렇지 않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만드는 것 이 아니고 낳음을 통해 아들을 생산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장 5절에 그 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 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 라는 말씀이 있다. 우리가 생각하기에 창 세기 6장과 욥기에서 천사들을 향해서도 하나님의 아들들 이라는 말이 나 오니까 천사들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여기서는 하나님께서 천사들을 향해 내가 언제 너희들을 아들이라고 했느냐, 언제 내가 너희들을 낳았느냐? 반문하시면서 천사인 너희들은 내 아들이 아니 고 내가 낳은 사람이 내 아들이다, 라고 말씀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 니까 천사는 단지 하나님에 의해 만들어진 형상-아들이지 생명을 이어받 은 아들이 아니고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은 아들이라는 것이다. 창세기 3장의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었지만(눅3:38) 만들어진 아들이었 지 낳음 받은 아들이 아니었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했던 것이다. 창세기 1장에 보면 낮과 밤이 있다. 성경에서 밤은 죽음을 예표하고 아침
31 1. 요 약 에 일어나는 것은 부활을 예표한다. 그러나 죽음이 없는 새 예루살렘에는 밤이 없다. 창세기 1장의 밤과 낮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사람은 죄가 없더 라도 거듭나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또 창세기 1장 10절에 보면 하나님께서 마른 육지를 땅이라 부르시고 물들이 함께 모인 것을 바다들이라 부르시니라. 하나님께서 보시기에 좋 았더라. (창1:10) 예표적으로 땅은 생명을 예표하고 바다는 사망을 예표한다. 그래서 새 예루살렘에 가면 바다는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지 고 바다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더라. (계21:1) 창세기 1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신이 한 번 은 죽어야 된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죄 이전에도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 다. 자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모든 피조물에게는 하나님께서 정한 생명의 길이 있다. 정해 놓은 생명의 과정이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씨는 땅에 뿌려져서 죽어야 싹을 낸다. 흙도 마찬가지다. 생흙은 씨를 발아 할 수 없고 죽은 흙이라야 그 씨를 발 아 할 수 있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흙이다. 이 원리는 사탄에게도 그대 로 적용된다. 사탄도 영이기 때문에 씨다. 그래서 사탄도 흙-사람과 연합 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동일한 과정을 격어야 한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 정하는 것이다. 어떤 씨도 자신의 열매를 산출하려면 동일한 과정을 겪어 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에서 말하는 생명이란 생명의 길 안에 있는 것이고, 사망이란 사망의 길 안에 있다는 것이다. 열매를 맺으려면 그 과정이 있다 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의 열매를 맺느냐? 사탄의 자식으로 서 사탄의 열매를 맺느냐? 이 차이다. 어떤 씨도 흙을 만나서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32 1. 요 약 예수님은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 (고전15:20) 가 되셨다. 이 말은 예수님은 새로운 인류의 씨로서 새 인류의 조상이 되 셨다는 의미다. 우리는 같은 열매(씨)를 소유한 자들이다. 그들뿐만 아니 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원을 받 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 (롬8:23~24) 또 우리는 예수님과 같은 씨를 가진 자로서 같은 열매 종류가 될 것이다. 그분께서 자신의 뜻에 따라 진리의 말씀으로 우리를 낳으셨으니 이것은 우리가 자신의 피조물 가운데 첫 열매 종류가 되게 하려 하심이라. (약 1:18) 하나님의 씨를 가진 자는 하나님의 열매가 되고 마귀의 씨를 가지면 마귀 의 열매를 맺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씨-생명이다. 핵심은 영 -씨가 생명이라는 것이다. 씨와 열매, 생명은 한 개념이다. 사람은 흙-육 으로서 씨-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육적인 몸은 생명이 아니 라 영이 씨-생명이기 때문에 영적인 몸이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 리가 첫 열매 종류가 된다는 것은 영적인 몸으로 영생을 가진다는 의미다. 하나님은 원래 사람을 지옥으로 가도록 창조하지 않았다. 지옥은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해 예비된 곳이다.(마25:41) 그런데 왜 사람이 그곳으로 가는가? 사람은 단지 흙으로서 그 씨를 받아들여 그 열매를 맺는 피조물이 다. 그래서 자연스럽게 그 씨의 왕국으로 가는 것이다. 그 생명은 그 나라 다. 우리가 흔히 동물의 왕국, 식물의 왕국 하는데 그 왕국에 들어가려면 그 생명이 되어야 한다. 우리가 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의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생명의 왕국에 들어 갈수 없기 때문이다. 그 생명이라야 그 왕국이 될 수 있다. 개의 생명을 가지면 자동적으로 개의 왕국이 되고, 소의 생명을 가지면 소의 왕국이 일원이 되는 것이다. 예수
33 1. 요 약 님께서도...하나님의 왕국은 볼 수 있게 임하지 아니하며 또 그들이 이 르기를 여기를 보라, 혹은 저기를 보라! 하지도 못하리니 보라, 하나님 의 왕국은 너희 안에 있느니라.(눅17:20b~21) 하셨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고 그 왕국을 결정하는 것이다. 모든 피조물의 생 명의 과정은 동일하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성경은 사람이든 동물이든 식물이든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원리는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 고 있다. 성경은 곳곳에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고 있고, 부활을 밀과 보리 에 비유하고 있으며, 예수님의 부활과 우리의 부활도 식물의 열매 (고전 15:23, 약1:18)로 비유하고 있다. 동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 의 왕국이다. 또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는 것을 땅에 식물이 심기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으심과 같은 모양으로 심겼으면(planted) 또 그 분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 (롬6:5)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시다.(고전3:9) 그러니까 사람이 죽는 것은 하나님께서 씨를 심는 것이고 부활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린 다음 최 종적으로 열매를 수확하는 것이다. 우리가 무덤에 묻히는 것은 부활의 열 매가 되기 위해 심겨지는 것이다. 또 성경은 거듭난 사람을 살아 있는 돌(벧전1:5)이라고 한다. 그러나 돌은 영원하지 않다. 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보석이 되어야 영원하다. (계21:11) 우리의 변화과정은 흙-돌-보석 순인데 이 말씀은 우리의 변화 과정을 물리적으로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의 생명의 과정이 동일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 농사의 정상적인 과정은 흙-사람 안에 하나님께 서 씨를 뿌리면 이 사람은 영적으로 거듭나게 된다. 영적인 거듭남이란 하 나님의 입장에서 씨를 뿌리고 새로운 생명이 싹이 튼 것이다. 그러나 이 사람은 거듭났다 하더라도 부활한 영적인 몸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최
34 1. 요 약 종 목표로 하는 열매는 아니다. 그래서 육신적 몸이 영광스런 부활의 열매 (몸)이 되려면 이 사람은 인생으로서 최종적인 인격의 열매(씨)를 땅에 뿌 려 심겨져야 한다. 이것이 죽음이다. 이를 통해 실제적이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더 좋은 열매를 거두신 것이다. 육종 사업을 통해 좋은 씨를 얻으려면 여러 번의 씨 뿌리는 과정을 통해 좋은 씨를 얻 는 거와 같은 것이다. 우리가 땅에 뿌려져 부활의 열매가 된다는 것은 처 음에 사람은 흙이었지만 씨가 된다는 것이다. 열매 안에는 씨가 있기 때문 에 씨와 열매는 하나이다. 아버지와 아들이 하나다. 씨란 생명이고 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생명은 이렇게 씨 뿌리는 과정을 통해 생명이 연결되고 또 생명이 더욱 강 화된다. 이 원리는 우주 만물이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이다. 부정적인 면으로 보면 우리의 죄 를 대속하기 위해 죽으셨지만 긍정적인 면으로 보면 죽으심을 통해 예수님 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살려주는 영(고전15:45)-씨가 되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육체로 계시면 예수님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실 수 없다. 영-씨가 되셔야만 생명을 주실 수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의 죽음 을 단순히 대속이라는 법리적인 면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단순히 법리적 인 면만이 아니라 유기적인 면이 더 중요하다. 아담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단순히 법리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어겼다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유기적 으로 선악과를 먹었다는데 문제가 더 있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을 어겼다는 것은 외부적인 것이다. 법리적 것은 외부적인 것 이기 때문에 그것의 해결은 단순히 용서해주면 해결된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유기적으로 사탄의 씨가 아담의 육신 안에 심어져 사망의 열매를 맺는 길로 갔다는데 문제가 더 있는 것이다. 사람은 밭이다. 그 밭 에는 원래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 한다. 그런데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다 는 것이 죄다. 그런데 이 사람이 아직 살아 있다면 식물로 치면 아직 열매
35 1. 요 약 를 맺기 전이다. 그래서 열매를 맺기 전에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심으면 된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육체를 가지고 있는 사람은 예수님을 영접하여 내 안에 성령-씨가 있더라 도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완전한 열매가 아니다.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부 활이 열매다. 왜냐하면 씨의 소망은 열매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밭에는 생 명이 없다. 밭은 씨를 받아드려 열매를 생산하는 것이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농부는 밭에서 열매를 거두지 밭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밭 이란 여자와 같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할 운명이다. 스스로 씨가 있는 존재가 아니다. 우리 가 현재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였지만(롬8:23) 몸 자체가 열매가 된 것 이 아니라는 것이다. 최종적으로 몸도 부활을 통해 영적으로 변화되어야만 완전한 열매가 되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현재 성령의 첫 열매를 소유하였다 하더라도 육신은 죽어서 땅에 뿌려져야 열매를 맺을 수 있다. 흙-몸이 영-몸으로의 전환, 곧 부활 의 열매로 변화되는 과정이 필요하다. 열매-씨는 한번 결정되면 고칠 수 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도 아담 안에서 죽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 는 것이다. 이미 사탄의 열매를 맺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열매를 맺기 전 에 밭을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면 된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 는 밭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렇게 갈아엎어진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 새로운 밭이 예수님이다. 또 이 새로운 밭의 씨가 누구인가? 예수님이 다. 예수님은 밭인 동시에 씨로 오신 분이다. 예수님이 육체로만 있으면 우리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다. 육체는 흙이지 씨가 아니기 때문이다. 영 이 생명으로 씨다. 그래서 예수님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 15:45) 그러므로 기록된바,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 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36 1. 요 약 예수님은 대속을 위해서 희생물로서의 죽음도 필요했지만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도 헌물로서의 죽음도 필요했다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다는 것이 복이다. 만일 천사처럼 영-씨로 지어졌다면 거듭남이 없 다. 사람은 흙이기 때문에 타락했을 지라도 다시 부수고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비록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갈아엎고 새로운 씨를 뿌리면 되는 것이다. 일반 기독교인들이 단순하게 생각하는 것처럼 사람만 특별하다면 예수님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하늘에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죄를 사해 주면 되지 무엇 하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겠 는가?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만을 위해 죽으시지 않았다. 예수님이 우리의 죄만을 위해서 죽으셨다고 생각하는 것은 낮은 수준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왕국의 씨-생명이 되시기 위해 오셨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에게 하나님 자신-생명을 주시려고 한다. 그 런데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이 육 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신 것이다. 마태복음 1장 1절에 예수님을 아브라함의 자손이시요, 다윗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 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이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여러 과정을 거쳐 오셨다는 것이다. 이 의 미는 무엇인가?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라는 것이다. 보통 기 독교인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처음 인간을 창조할 때 영원한 생 명으로 창조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태 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굳이 왜 아브라함을 부르고 여러 세대를 거쳐 예수님이라는 한 씨가 태어나게 하셨는가? 이것은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 이고 여러과정을 거쳐 강화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육 종사업과 같은 것이다. 아브라함이라는 한 씨를 불러 여러 세대를 거쳐 예 수님 때에 이르러 하나님 나라에 딱 맞는 한 씨를 산출하신 것이다. 우리
37 1. 요 약 의 거듭난 생명-부활생명도 그렇다. 아담은 1차적으로 만들어진 아들이다. 만들어진 아들(흙)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났다 하더라도 여전 히 연약하다. 그래서 죽음의 과정을 거쳐 보석-부활의 열매로 다시 태어 나야 한다. 로마서 8장 16절에 보면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 나님의 자녀 인 것을 증언하나니 라고 한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순간 성령께서 우리의 영안에 들어와 우리의 영과 연합된다. 이것이 거듭남이다. 그러나 육체는 아직 거듭나지 않았다. 영적인 몸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다. 성경은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리라. (고전15:50) 라고 한다. 살과 피라는 말은 육체라는 말이다. 우리는 죄가 있기 때문에 육체가 아니라 죄가 없을 때도 육체로 지음 받았다.(창2:24) 사람이 육체라는 것은 죄가 있으나 없 으나 육체이다. 우리가 천사처럼 영-씨로 지음 받았다면 죽지 않는다. 그 러나 사람은 육체-흙으로 지음 받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세계다. 영적인 세계는 그 세계에 합당한 영적인 몸을 입어야 한다. 그래 서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 왕국에 살려 면 그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한다. 그런데 썩을 육체가 썩지 않는 영적인 몸으로 변화하려면 죽음을 통과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이 죄가 있기 때 문에도 희생물로도 죽어야 하지만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헌물로서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육체는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요6:63)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어차피 육이 다. 육에서 난 것은 어차피 육이다.(요3:6)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려면, 즉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려면 어떤 공통지점이 있어야 한다. 그런데 하나님과 사람의 간격은 하늘과 땅의 간 격보다 크다. 결국 하나님이 사람의 수준으로 내려와야 한다. 그래서 그 분이 육신으로 오셨다. 그럼에도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우리는 예수님의
38 1. 요 약 수준에 맞출 수가 없다. 예수님을 우리가 먹을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병 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시고 물위를 걸어가신 예수님과 내 가 어떻게 하나 될 수 있는가? 하나 될 수 없다. 그분은 우리에게 너무 멀 리 있는 분이다. 그런데 그분의 죽으심을 보니까 우리와 똑 같은 사람이라 는 것이다. 거기서 우리는 연합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셔서 사람에게 생명을 직접 줄 수가 없다. 육체로 오 셨기에 육체에게 생명을 줄 수가 없는 것이다. 육은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죽으심을 통해 살려주는 영이 되신 것이다.(고전15:45) 예수님이 영-씨가 되어야만 흙-육인 사람에게 생명 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다는 것은 없어지는 것이므로 영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모두 큰 것을 좋아한다. 그러나 큰 것은 아 무리 커도 제한이 있다. 태양은 아무리 커도 제한이 있다. 그러나 공기는 제한이 없다. 내가 죽는다는 것은 공기와 같고 영과 같이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제한이 없다. 여기에 영생의 원리가 있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하 나님의 생명을 실질적으로 이식받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생명이다. 부활생 명의 예표인 이브는 아담의 죽음을 통해 산출되었다. 죽음을 통해서만 생 명이 산출되는 것을 예표하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에 만들어 존재이기에 사탄이 훼방할 수 있었다. 그래서 1차적 인 흙-육신에서 더 이상 사탄이 훼방할 수 없는 2차적인 생명의 출생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이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이다. 물질세계 인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 있는 모든 피조물은 영-씨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흙에게는 씨가 없다. 그래서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은 반드시 한번은 죽게 되어 있다. 피조물에게 이것 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탈하면 사망이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성경은 생 명의 책이다.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에 의해 기록된 책이 아니다. 사망도 우리가 생각하는
39 1. 요 약 육체적 죽음과 삶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생명의 길이 있고 사 망은 사망의 길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죄가 들어오기 전에 사람에게 정하신 생명의 길은 1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아들로 거듭남 - 2 육체적 죽음(잠듦, 천국) 3 의로운 자의 부활- 4 새 예루살렘으로 최종 완성된다. 그러나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의 길은 1 선악과를 먹고 사탄 의 자식으로 거듭남 - 2 육체적 죽음(지옥) - 3 불의한 자의 부활 4 둘째사망(불 호수) 이다. 위 과정은 열차의 정류장과 같은 것이다. 생명노선이건 사망노선이건 표면 적으로 보면 똑 같은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 노선 안에서는 반드시 거쳐 야 할 과정으로 그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은 왜 사람이 한 번은 죽도록 만들었을까? 상세한 내용은 뒤에서 살펴보기로 하고 하나 님께서 정한 우주만물의 생명의 원리가 그렇다는 것을 만물을 통해 알 수 있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한다. 또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한다. 이 두 가지는 만고불변의 법칙이다. 이것은 생명노선 뿐만 아니라 사망노선도 마찬가지다. 사탄도 영으로서 일 종의 생명이기 때문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성경은 사망노선 안에 있는 사망, 곧 영적인 사망, 첫 번째 사망, 둘째 사망이라는 세 가지 사망에 대해 용어를 구분해서 사용하지 않고 있다. 다만 예수님은 생명노선에 있는 자들의 육체적 죽음에 대해서는 죽지 않았고 잔다 (마:9:24, 막5:39, 눅8:52) 라고 하시면서 사망노선 안에 있는 자들의 죽 음과 구별하고 있다. 그리고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잠 잔다 로 구별해서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구약성도들에게도 동일하게 적용 하고 있다. 마태복음 27장에서 52절에서 예수님의 부활에 동참한 구약성도 들의 죽음을 잠든 성도들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
40 1. 요 약 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마27:52) 또한 구약에서도 이스라엘 왕들의 죽음을 조상들과 함께 잠들다 로 표현하 고 있다. 이처럼 다윗이 자기 조상들과 함께 잠들어 다윗의 도시에 잠들었더라. (왕상2:10) 생명의 노선 안에서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 아니다. 주의 성도들의 죽음은 그분의 눈 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이것은 대단히 큰 차이다. 그러면 왜 사망노선 안에서는 육체적 죽음을 다 부정적으로 말하고 있는가? 어차피 사망노선 안에서는 어떤 과정에 있든지 하나님과 관계가 분리되어 있으며, 종착역이 불 호수이기 때문이다.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자들이 그리스도라는 열차를 타고 있다면 사망노선 안에 있는 자들은 사탄이라는 열차를 타고 있는 것이다. 노선이 다르다는 것이 다. 그래서 영적으로 죽었건, 첫 번째 육체적 사망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 이건, 둘째 사망이건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그 노선 안에 있으면 어차피 과정만 다를 뿐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된 사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굳 이 구별할 필요가 없는 것이다. 위 과정은 그 노선 안에서는 반드시 거쳐야 할 정류장과 같은 것이라는 것이다. 단 사망노선 안에서는 첫 번째 정류장 에서만 생명노선으로 가는 열차를 갈아 탈 수 있고 한 번 출발하면 돌아 올 수 없는 길이다. 우리는 아담으로 인하여 모두 사망 열차를 타고 있었 다. 그런데 사망 열차가 출발하기 전에 그리스도라는 생명열차로 갈아 탄 것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 하나님은 아담에게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in the day, 그 날 안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하셨다. 그러나 아담 의 육신은 그날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았다. 그러니까 이것은 분명히 육 신의 죽음을 두고 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
41 1. 요 약 은 단순히 육체적 사망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창세기 2장 17절은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 안에 네가 하나님으로부터 관계가 끊어지리라 라는 말과 같다. 그러나 아담 안에서 육신이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 들은 여전히 창세기 2장 17절의 말씀을 단순하게 육체적 죽음에 초점을 맞 추어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 생존과 죽음에 있지 않다. 어떤 종류의 씨건 땅에 뿌려져 열매를 맺 는 과정은 동일하다. 그래서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던지, 사탄 의 씨가 뿌려지던지 표면적으로는 육체적 죽음과 부활이라는 동일한 과정 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이란 생명의 과정과 사망의 과정이란 개념으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그러면 어떤 이 는 구원 받는 데는 일반적으로 알고 있는 것처럼 알아도 문제가 없지 않느 냐? 이렇게 반문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아담이 타락한 근원 의 문제다. 예를 들어 의사가 환자에게 처방을 한다고 했을 때 병의 근원을 모르고 처방하면 어떻게 될까? 단지 현상만 보고 처방을 한다면 그 병이 온전히 치료될 수 있을까? 하는 것이다.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기점이 없으면 뿌리 없는 나무와 같은 것이다. 모든 종교가 인간이 어디선가 문제가 생겼다는 것에는 다 동의한다. 그러나 어디서 문제가 생겼는지는 정확히 말하지 못하고 있다. 기독교 또한 아담의 타락 원인에 대해 분명하게 제시하시 못하고 있다. 더구나 인간은 원래 영 생하도록 육체가 창조되었는데 타락함으로서 육체가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진리 같지만 실상은 사람 안에는 불성-영생이 있다고 하는 불교의 가르침과 같은 맥락이다. 그래서 현상만을 놓고 본다면 불교의 가르 침이 더 타당할 수 있다. 기독교 지도자들 중에 왜 변절하여 종교통합에 참 여하는 사람들이 있는가? 거기에 참여하는 모두가 근원이 같기 때문에 그 런 것이다. 우리는 아담이 왜 타락했는지를 정확히 알아야 한다. 사고가 났 으면 사고원인을 알아야 대책을 세울 것 아니겠는가? 사고 원인을 모르고
42 1. 요 약 대책을 세우면 그 대책이 정확한 대책이 될 수가 없다. 현상도 중요하지만 근원은 더 중요하다. 근원이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이 미 예수 그리스도의 통하여 전 존재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선언한다. 그런 데 구원받은 우리가 죄 때문에 육체가 죽는다면 이것은 너무도 큰 모순이 다. 만일 그렇다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완성이 안된 것이다. 구원받은 우 리 인생의 육체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향하여 죽는 희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한 다.(롬21:1) 구원받은 우리가 죽는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헌물 로 죽는 것이다.(딤후4:6)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 렀도다.(딤후4:6) 이를 통해 흙-육신이 하나님-생명에 삼켜져 영적인 몸으로 전환되기 때문 이다.(고후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 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예수님이 우리의 주 라는 말은 조상이라는 말이다. 사람의 조상은 사람이 어야지 신은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예수님은 육체로 계실 때도 줄곧 자신을 지칭할 때 사람의 아들, 곧 사람이라고 하셨고 다시 오실 때도 사 람의 아들로 오신다고 하였다.(마26:64) 사람의 구속자는 사람이어야 한다. 아담은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패하여 사망의 길로 같지만 예수님은 사탄 과의 위치전쟁에서 죽기까지 참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이 정해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이를 통해 새 인류-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 되었다. 그런데 희생물만 죽음으로 드려지는 것이 아니라 헌물도 반드시 죽음을 통해 드려지는 것이다. 아담의 죄란 바로 이런 사람의 운명을 거부 한 것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의 음식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도
43 1. 요 약 반드시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고후5:4) 이것이 생명의 연결의 원리이다. 죄는 용서받아야 할 장애물이지만 영생을 위해서는 우리는 반드시 하나님께 물리적이고 가시적으로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대속을 위해서 피 흘림의 죽음도 필요했지만 우리 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도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것을 인정하지 않으면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과가 따른다. 첫째, 성경이 말하는 인간의 근원적인 죄가 무엇인지 모호해진다. 특히 예 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승리를 이해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첫 단추가 안 풀리니 성경을 전체적으로 조망하기 곤란하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계시하는 죄가 무엇인지, 구속이 무 엇인지, 회개가 무엇인지, 생명이 무엇인지, 승리가 무엇인지 분명하게 알 수 없게 된다. 둘째,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으로 밖에 이해하지 못한다. 그래서 생명의 세계를 기록한 성경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바라봄으 로 생명의 세계에 대한 풍성한 계시는 닫혀있게 된다. 예를 들어 성경에서 포도주는 부활생명을 예표한다.(행2:13) 포도즙이 저절로 포도주가 되는 것이 아니고 외부의 공기 중의 효소와 결합하여 발효가 되어 새로운 물질 인 포도주가 된다. 우리가 얻은 새 생명 또한 우리에게 원래 있던 것이 아 니고 외부로부터 들어온 것이다. 포도주에 취하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되듯 이 새 생명은 우리를 다른 사람으로 전환시키기 때문이다. 이러한 원리에 의해 포도즙이 포도주가 되는 것은 부활생명을 예표한다. 그런데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모르니 흠정역에서는 wine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무조건 포 도즙으로 번역하였다.(요2장, 행2:13 등) 물론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 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다.(갈3:24) 그러나 율법의 세계는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는 필요할 모르지만 이것은 생명의 세계에 비하면 초등원리다. (갈4:3, 9) 아들은 종을 다스려야 할 자다. 아들이 되면 종의 세계를 알지
44 1. 요 약 만 종은 아들의 세계를 알지 못한다. 고등학생이 되면 초등학교 과정은 자 동적으로 다 알게 되는 것이다. 신약경륜, 곧 생명의 세계는 하나님께서 정한 최종과정이다. 더 이상의 대책은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생명의 세 계를 계시한 성경을 초등원리인 율법적인 관점에 바라봄으로 무궁무진한 생명의 세계에 대한 계시는 닫혀있게 된다. 63빌딩에 가서 입구가 있는 1 층 라운지만 보고 그 위 층에 있는 것은 누리지 못하는 거와 같은 형국이 다. 그래서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임에도 불구하고(요17:3) 늘 내가 무 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까 (막10:17, 눅10:25, 행16:30) 라는 행위적 관 점에서 접근하게 된다. 우리는 신약경륜 하에 있음에도 여전히 구약적 경륜 으로 접근한다는 것이다. 셋째, 생명이 근원에 관한 것이라면 율법은 현상에 대한 것이다. 그래서 전하는 복음을 단순히 대속이라는 율법적 관점에서 전하다 보니 근원에 대 한 치료가 못되고 현상에 대한 처방이 될 수 밖에 없다. 그래서 대속이 거 듭남이 아님에도 대속을 거듭남처럼 이야기 하므로 불명확한 복음이 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넷째, 일반적으로 기독교에서 사람이 본래 영생이 있었다는 주장은 불교를 비롯한 이방종교의 주장과 같다. 그래서 언젠가는 종교통합의 길로 갈 가 능성이 상존한다. 왜냐하면 근원이 같기 때문이다. 사탄은 오늘도 여전히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 이라는 말로 사람을 속이고 있다.(창3:5)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되고 싶은 사람의 결과는 율법(문자)주 의, 은사주의, 영지주의를 추구한다. 율법아래 있던 유대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지만 올바른 영적 지식에 따른 것이 아니었듯이 말씀을 표면적으로 알고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영-마음을 알지 못하므로 바로 그들에게 주어졌던 하나님의 말씀이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듯이 오늘 날도 이 원칙은 동일하다.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 아니라 열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롬 10:2) 아담 안에 있는 자가 가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진짜 사람이다. 그
45 1. 요 약 래서 예수님은 참 되신이라 불린다.(계19:11) 또 내가 하늘이 열린 것을 보니 보라, 흰말이라. 그 위에 타신 이는 신실 하신 이, 참되신 이라 불리더니 그분께서 의로 심판하며 전쟁을 하시더 라. (계19:11) 그분은 위대한 분도 아니고 놀라운 분도 아니고 진실하신 분이다.(요일 5:20)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렸던 사람의 원형, 사람의 진실 을 발견하고 거기로 돌아가는 것이 다름 아닌 회개고 구속이다. 예수님이 우리 인생을 구속한 지점은 물위로 걸어간 지점도 아니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 한 지점도 아니고 오직 십자가다. 십자가의 위치가 사람의 원형이 고 사람의 진실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씨-하나님께 대하여 흙이라는 것이 다. 이것을 인식하고 인정하는 것이 구원이다.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육신이 죽을래야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전능하신 하나님이 특별히 허락해서 죽었다는 말은 합당하지 않다. 만일 예수님이 그렇게 해서 죽으셨다면 그 분은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도 없고 새 인류의 주-조상도 될 수 없다
46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세상에서도 구멍가게를 해도 목표가 있다.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 아무런 목적도 없이 창조하신 것이 아니고 어떤 목적을 가 지고 창조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목적을 모르면 나는 좋은데 하나님은 안 좋아하실 수가 있다. 직장이나 군대에서도 지휘관 의도를 모르면 열심 히 하지만 인정을 받지 못하고 괜히 힘만 쓰게 된다. 하나님 나라도 똑 같 다. 열심히만 하면 되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목적을 알아야 그 분의 목적에 합당하게 갈 수 있다. 우리는 흔히 구원받고 하늘에만 가면 다 되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사람들은 하늘에 가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땅으로 오셨다. 사람들은 신-하나님이 되려고 하지만 하나님은 사람이 되셨다. 하나님의 최종목표 인 새 예루살렘도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온다.(계21:3) 어떤 이는 새 예루 살렘이 하늘에서 내려올 때 땅 이라는 말이 없기 때문에 땅이 아니라고 하 지만 땅으로 내려오는 것은 너무도 당연하기 때문에 기록되지 않은 것이 다. 성경의 핵심 주제는 하늘-하나님과 땅-사람이다. 이외에 다른 세계는 없다. 하늘에서 내려오면 당연히 땅으로 내려오는 것이지 공중으로 내려오 겠는가? 하나님이 내려오시면 사람한테 오시지 어디로 가시겠는가? 계시록 21장에서 요한은 지금 땅에서 서서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는 새 예루살렘 을 보고 있는 것이다. 당연히 새 예루살렘은 땅으로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자신을 표현할 형상을 가지시는 것이다. 씨의 소망은 열매다. 쉬운 말로하 면 몸이 없으신 하나님은 자신을 표현할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교회를 그 리스도의 몸이라고 하는 것도 그 이유다. 그런데 자신을 완전하게 표현하 려면 자신의 생명을 가져한다. 남이 내 마음을 어떻게 알아서 표현해 주겠 는가? 내 생명, 곧 내 마음과 똑 같은 사람이 있다면 나를 대신해서 나를 표현해 줄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 곧 자기 자신을 사람에
47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게 분배해서 그 사람이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도록 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신격은 인격의 내용이 되고 인격은 신격의 표현 이 되는 것이다.(골2:9) 이것을 성경은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본성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함이니라.(벧후1:4b) 라고 표현했다. 경륜이라는 말을 영어로 dispensation(분배)라고 하는데 결국 하나님의 생명의 분배 를 말하는 것이다. 이 생명의 분배의 과정은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하나님 과 사람사이에는 예수님이 중보자다. 예수님이 생명의 중보자, 연결자라는 것이다. 그러면 사람의 임무는 무엇인가? 예수님이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중보자라면 사람은 하나님과 만유 사이의 중보자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생 명을 분배받은 사람은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할 책임을 위임 받았 기 때문이다. 창세기 1장 28절에서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시고 만유를 정복하고 지배하라 는 말씀이 있는데 이것은 세상적인 통치가 아니라 바 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라는 의미다. 로마서 8장 19절에 피 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는 것 이니라. 라는 말이 바로 이 말이다. 피조물들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나타나 서 자신들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기를 간절히 소망하고 있다는 것이 다. 그런데 사람이 이렇게 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바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생명은 창조될 수 없는 것이다. 다른 모든 것은 다 창조할 수 있다. 천사도 창조할 수 있고 우주 만물도 다 창조할 수 있지만 하나님께서 하나님 자신을 창조할 수 없지는 않은가? 내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내 아들한테 밖에는 없다. 그래서 창조된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시기 위해 예수 그리스도가 육신으로 오 신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절대적으로 몸을 필요로 하신다. 영이란 마음은 있는데 몸이 없는 거와 같다. 만일 내가 손으로 무엇을 잡고 싶은데 손이
48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없다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지금 하나님께서 그렇다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 무슨 불경스러운 태도인가 할 수 있는데 사실이다. 성경 전체에 흐르는 하나님의 갈망은 육신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원하신다는 것이 다. 이것 때문에 예수님이 육신으로 오신 것이다. 성막 안에 보면 증거판 과 증거궤가 있다. 증거판을 위해서 증거궤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하 나님은 궤짝이 반드시 필요한데 사람들은 필요 없다고 하는 것이 우리의 관념이다. 모든 것이 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하는 것이 일반적인 사람들 의 생각이다. 그래서 어떻게 하면 육신을 벗어나보고자 하는 것이 종교다. 하나님은 인간의 육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한데 정작 사람은 육신을 벗어버 리고 신이 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동양의 신선사상, 종교 안에서 육신 을 학대하는 사상은 모두 육신이 죽지 않고 신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과 관계가 있다. 모든 종교와 세상의 목표는 무엇인가? 죽지 않는 신 이 되는 것이다. 근원은 하나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남자가 홀 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창2:18) 라는 말씀은 하나님께서 자신을 빗 대어 하신 말씀이다. 여기서 아담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이브는 사람을 예 표한다. 하나님은 완전하시다. 그러나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배필로서 사람 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의 배필이 되는 이것이 하나님의 경 륜의 목표다. 배필은 한 몸이다.(창2:24) 그러니까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 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그런데 이러한 경륜의 목표를 이 루기 위한 하나님의 방법은 생명의 연합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 곧 결혼을 통해 배필이 되고 한 몸이 되는 것이다. 결국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이 한 몸이 되어 같이 살자는 것이다. 그런데 같이 살려면 생명이 같아야 함께 살지 생명이 틀리면 같이 살 수 없다. 인간세계에서도 남자와 여자가 이질적이지만 같은 생명이기 때문에 사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사람이 하나님의 배필이 되려면 같은 생 명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생명은 무엇인가? 이브로 예표된 부활생명 이다.(창2:21~22) 이 부활생명은 어떻게 얻어지는가? 부활생명이란 말 그
49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대로 거듭난 생명이고 하나님의 생명이다. 죽고 다시 산 생명이다. 죽지 않으면 거듭난 생명이 없다. 창세기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이다. 성경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사람은 거듭나야 한다고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왜 우리는 거듭나야 하는가? 우리는 피조된 생명을 가지고 있었지 영원한 생 명을 소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이나 타락한 후에도 여전히 거듭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이 가야 할 운명이다. 우리는 흙으로 지어졌기 때문에 어차피 바꾸어져야할 운명이 라는 것이다.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이지 육이 영이 아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요3:6) 하나님의 경륜의 목 표는 육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영이 생명이기 때문이다. 육신은 하나님 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그래서 우리는 근원적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부활생명으로 이루어진 하나님의 왕국이다. 이것 은 예수님이라는 씨로 이루어진 나라다. 사실 그 생명은 그 나라다. 예를 들어 동물의 왕국은 동물의 생명을 가져야 되고, 식물의 왕국은 식물의 생 명을 가져야한다. 사람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려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 생명이 그 왕국을 결정한다. 죄가 없더라도 사람의 생래 적 생명으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 우리는 흔히 죄가 있기 때 문에 거듭나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사람은 창조될 때부터 하나님의 생 명이 없었다. 그래서 이것을 창세기 2장에서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 의 경륜의 목표는 연합에 있다. 그러므로 남자가 자기 아버지와 어머니를 떠나 자기 아내와 연합하여 그 들이 한 육체가 될지니라.(창2:24) 위 말씀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연합을 통해 이루어지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신격이 인격의 내용이 되고 인격 은 신격의 표현이 되는 것이 다.(골2:9) 이러한 하나님의 경륜의 완성은 영원한 하나님의 왕국-새 예루살렘에서 달성된다. 이때 하늘과 땅도 연합
50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되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는 것이다. 우리의 육적인 몸도 하나님의 생명 과 연합됨으로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하고 하늘과 땅 도 불-하나님께 태워짐으로 영원한 환경이 될 것이다. 이 연합이 성경의 최종완성이다. 그러면 한마디로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목표는 무엇인가, 쉽게 말하면 하나 님은 왜 사람을 창조하셨는가?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종교적으로 경배받기 위해 창조하셨는가? 아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하나님이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곧 하나님과 사람이 완전한 한 몸, 곧 사람이 하나님의 아내가 되어 같이 사는 것이다. 그래서 교회를 그리스도의 신부라고 하고(엡5:32) 교회의 최종완성인 새 예루살렘을 신부 곧 어린양의 아내라고 말한다.(계21:2, 계21:9) 하나님은 사람을 자신의 사랑의 대상인 아내로 삼기위하여 창조하였다. 그래서 하나 님의 생명으로 태어난다고 할 때는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고 하셨고(요 1:12) 아들-생명이 자라서 결혼할 때가 이르면 신부가 되고 결혼을 하면 아내가 되는 것이다. 부부사이는 사랑의 관계다. 두려워하고 경배하는 사 이가 아니다. 물론 우리가 죄인 되었을 때에 하나님을 알고 하나님께 나아 가기 위해서는 처음에 두려워할 줄도 알고 경배할 줄도 알아야 한다. 그러 나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목표는 거기에 있지 않다. 그래서 계시록 21장 8 절에 보면 두려워하는 자들 도 둘째 사망에 들어간다는 말이 있다. 두려워하는 자들과 믿지 않는 자들과 살인자들과 음행을 일삼는 자들과 마법사들과 우상 숭배자들과 거짓말하는 자들은 불과 유황으로 타는 호수 에서 자기 몫을 받으리니 이것이 둘째 사망이니라. (계21:8) 여기서 다른 것들은 다 이해가 간다. 그런데 어떻게 두려워하는 자들도 둘 째 사망에 처해지는가?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을 두려워하 라 고 한다. 그런데 성경의 결론에 가서는 왜 두려워하지 말라 고 하는
51 2.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가? 이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남편과 아내의 부부관계에 있기 때문이 다. 부부란 육체적 정신적으로 한 몸이 되는 완전한 사랑의 관계다. 남편은 아내를 사랑하고 아내는 남편을 사랑하는 것이 부부다. 사람을 창조한 목적 은 이 이상도 없고 이 이하도 없다. 그런데 만일 아내가 매일 남편을 두려 워하고 경배만 하고 있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그것은 부부가 아니다. 하나 님은 생명이신 동시에 사랑이시다.(요일4:8) 생명도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 니고 사랑도 우리에게 속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생명을 받은 자 만이 사 랑할 수 있다. 사랑하는 자들아, 우리가 함께 서로 사랑하자, 사랑은 하나님께 속한 것인 즉 사랑하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나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지 아니하 는 자는 하나님을 알지 못하나니 이는 하나님이 사랑이시기 때문이라.(요 일4:7~8) 그러므로 삶은 사랑하는 것이다. 사랑할 수 있을 때 사랑하자. 주님을 찬양 할 수 있을 때 찬양하자. 아멘
52 3. 하나님과 사람 3. 하나님과 사람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근원을 모르면 여러 가지 설이 난무한다. 출 발이 잘 못되면 목적지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우주의 대표는 하나님과 사 람이다. 하나님은 창조주이시고 사람은 피조물의 머리다.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근원적 관계를 아는 것이 핵심이다. 사람들은 하나님과 사람의 근 원적 관계를 모르고 맹목적으로 하나님을 숭배한다. 하나님은 사람과 결혼 을 해서 같이 살자고 하는데 열심히 숭배만 하고 있다. 가정에서도 남편은 부부가 함께 행복한 삶을 살기 원하는데 부인은 남편을 숭배만 한다면 어 떻게 되겠는가? 종교는 신과 사람을 분리시켜 신을 숭배하게 하지만 생명 은 연합하여 함께 살게 한다. 하늘과 땅 - 씨와 땅 하늘과 땅은 하나님과 사람, 그리스도와 교회를 예표 한다. 하늘은 무한하 기 때문에 복수로 표현되었고 땅은 유한하기 때문에 단수로 표현되었다. 이 하늘은 무한한 영의 세계이고 땅은 유한한 물질의 세계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영이 생명-씨다.(요6:63) 그래서 영이 아닌 것은 생명이 없고 유한하다. 영-씨는 하나님이고 육-땅은 사람이다. 모든 씨는 하나님-생 명을 예표한다. 그래서 씨앗은 외부적인 충격이 없다면 상하지 않는다. 수 천 년 전의 씨앗을 현대에 와서 발견하여 심어도 싹이 난다. 또 씨는 보통 자신보다 20만배나 더 무거운 흙의 무게를 뚫고 나와 싹을 낸다고 한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다. 물질세계인 이 땅의 모든 살아 있는 피조물의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사 람은 피조물의 머리로서 사람이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은 다른 모든 피조 물도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나 하늘은 영적세계이기 때 문에 하늘에 존재하는 피조물인 천사들은 영으로 창조되었다. 영이란 씨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씨로 창조되었다. 이것을 분명히 구분
53 3. 하나님과 사람 할 줄 알아야 한다. 하늘과 땅은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각각 의 세계에 적합하도록 피조물에게 고유한 몸을 주셨다.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고전15:40) 하나님은 영이시고 생명의 근원이기 때문에 영은 모든 피조물의 생명을 대 표한다. 그렇다고 피조물의 영이 하나님의 영은 아니다. 피조물의 영은 피 조된 영이고 하나님의 영은 피조된 영이 아니다. 천사는 영적세계에 살도 록 영-씨로 창조되었기에 죽지 않는다. 그렇다고 천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사람은 육체-흙으로 창조되었기에 영원한 생명이 없다. 성경의 주제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에 대한 이야기다. 땅은 변개할 수 없 는 인격을 예표한다. 그런데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인격을 잃어버렸다. 그래서 씨-하나님이 땅-사람을 회복하고 회복한 땅-사람에게 씨를 심어 열매를 추수하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땅 을 잃어버리자 하나님은 씨를 뿌릴 땅이 없어졌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 라함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셨다.(창13:15~16) 이 약속은 예수 그리스도에 게서 성취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씨-하나님과 땅-사람으로 오신 분이 다.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아담이 잃어버린 땅-인격을 회복하셨고, 부 활하심으로 영-씨가 되셨다.(고전15:45, 갈3:16) 씨 - 영원한 생명이란 무엇인가? 다른 종교는 사람을 어떻게 개선해 보겠다든지 가르친다든지 하는 거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주겠다는 것이다. 이것은 다른 데는 없는 것이다. 여기에 근본적 차이가 있다. 그런데 이 씨란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한 생 명이란 피조되지 않은 생명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그러므로 영원한 생명이 란 1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2 시작도 없고 끝도 없으며, 3 신성하고
54 3. 하나님과 사람 거룩한 생명이고, 4 하나님의 생명이자 삶이고, 5 하나님의 영으로 하나 님 자신이다. 이 조건에 하나라도 위배되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성경에 서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말씀은 딱 한번 나온다.(엡4:18) 하나님과 생명이 분리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속성을 표현하는 말은 여러 가지가 있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고 의롭고 빛이시고 무소부재하시고 등등이 있다. 그렇다고 모든 속성이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지는 않는다. 예를 들어 사랑 은 하나님이다 라고 할 수 없다. 빛은 하나님이다 라고 할 수 없다. 그런데 유일하게 같은 단어는 영원한 생명이다. 하나님은 영원한 생명이시고 영원 한 생명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자신이 영원한 생명이시다.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 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시요, 영원한 생명 이니라.(요일 5:20) 신약에서는 하나님의 생명을 말할 때 헬라어로 조에(ZOE)라는 단어를 사 용한다. 반드시 하나님께만 사용되고 피조물의 생명을 말할 때는 사용되지 않는다. 그러면 시작이 있고 끝이 있는 피조물인 사람이 어떻게 영원한 생 명을 얻는가?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합(연결)됨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피조물의 입장에서 6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과 의 관계적 생명이다. 우리는 흔히 사람의 입장에서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 도로 존재한다고 생각하는데 영원한 생명 덩어리가 별도로 있는 것이 아니 다. 우리가 보통 영생을 얻었다, 너희 안에 영생이 있다 라는 말은 우리가 그리스도라는 중보자 곧 연결자에 의해 하나님과 내가 연결되어 있다 라는 의미다. 전등은 전기의 형상이다. 그런데 전등은 전기와 연결되지 않으면 형상으로서 역할을 하지 못한다. 전등에 전기가 연결되어야만 보이지 아 니하는 전기를 표현한다. 형상이란 이런 개념이다
55 3. 하나님과 사람 사람의 생명이라는 것도 보이지 않고 어디에 있는지 잘 모르지만 그 생명 에 몸의 세포가 연결되어 있어 육신이 사는 것이다.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 면 살고 연결되어 있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예를 들어 내 손가락의 어느 부분이 잘라지던지 연결되지 못하게 끈으로 묶어 놓으면 연결이 단절되기 때문에 그 부분은 죽은 것이다.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이란 별도의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우리 안에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의 원천이신 하나 님께 내가 연결됨으로서 형상인 사람이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한 다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 공급을 받고 살도록 지음 받은 것이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그래서 영원한 생명을 관계 적 생명 이라고 하는 것이다. 실재( 實 在 )와 형상( 形 狀 )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실재와 형상의 관계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하 나님은 영-생명으로서 실재( 實 在 )고 사람은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 상( 形 狀 )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과 사람사이에 늘 괴리가 발생한다.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안보이시고 사람은 보이는 존재이기 때문에 보이 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실재와 형상이라는 의미는 하나님이 참, 진리, 본체이고 사람은 단지 형상 으로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실재와 형상이 하나가 되는 나라 를 목표로 우주를 창조하셨기 때문에 만물이 다 하나님의 이런 의도를 표 현하고 있다. 나무의 실재는 씨-뿌리이고 지상으로 드러난 나무는 그 씨 의 형상이라는 것이다. 보이지 않는 것이 실재고 보이는 것은 형상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서도 마찬가지다. 내가 무엇을 행한다고 하면 그것 의 실재는 내 마음이라는 것이다. 내 마음이 먼저 있고 마음에서 명령을
56 3. 하나님과 사람 내리면 형상인 내 몸이 실행을 하는 것이다. 사람은 영, 혼, 몸으로 구성되 어 있다. 그런데 영과 혼은 보이지 않고 육체만 보인다. 영과 혼이 실재라 면 몸은 형상이다. 만물은 다 하나님을 상징하는 실재와 피조물을 상징하 는 형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보이지 않는 것과 보이는 것으로 구성되어 있 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보이지 않고 보이는 것은 형상뿐이니 하나님의 어 떠하심은 형상인 피조물에 의해 규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우주를 창조하실 때 바로 실재와 형상이 하나 되는 나라를 목표로 창조하 셨기 때문에 만물을 보면 하나님의 경륜의 의도를 알 수 있다. 하나님은 영으로서 씨다. 씨의 소망은 무엇인가? 열매다. 그런데 열매 안에는 씨가 있다. 이것이 바로 씨와 열매가 하나 되는 것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최종적 인 모습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TV와 라디오도 마찬가지다. TV에서 영상이 나오면 영상은 실재가 아니고 형상이다. 실재는 영상이 나오도록 전해주는 전파라는 것이다. 라디오도 소리는 형상이고 실재는 전파다. 내가 말을 하는 것도 내 마음이 실재고 목소리는 형상이다. 만물의 원리를 자세히 살펴보면 모두 이런 원리로 되 어 있다. 그래서 히브리서 11장 1절에서 이제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 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 라는 말씀도 여기서 근거하는 것이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이 실재고 보이는 것은 단지 형상이기 때문에 이런 말이 나온 것이다. 고린도후서 4장 18절 말씀도 마찬가지다. 우리는 보이는 것들을 바라보지 아니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을 바라 보나니 보이는 것들은 잠깐 있을 뿐이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은 영원하 니라.(고후4:18) 그래서 우리가 실재를 보지 못하고 형상을 섬기면 그것도 우상숭배라는 것 이다. 성경은 우상과 형상이라는 단어를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다. 십계명 의 첫 번째 항목을 우리는 흔히 우상을 숭배하지 말라 고 알고 있으나 성 경은 너는 나를 위하여 어떤 새긴 형상도 만들지 말고 또 위로 하늘에
57 3. 하나님과 사람 있는 것들이나 아래로 땅에 있는 것이나 땅 아래 물속에 있는 것의 어떤 모습이든지 만들지 말며 (출20:4a) 라고 하면서 우상이라는 말대신 형상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또 레위기나 신명기에서는 우상과 형상을 동일한 의미에서 사용하고 있다. 너희는 너희를 위해 우상들이나 새긴 형상을 만들지 말고 서 있는 형상 을 세우지 말며 너희를 위해 너희 땅에 돌로 된 형상을 세우고 그것에 절하지 말라. 나는 주 너희 하나님이니라. (레26:1) 너희가 스스로 부패하여 너희를 위해 새긴 우상, 곧 어떤 형상의 모습 이든지, 남자나 여자의 모습이든지 땅 위의 어떤 짐승의 모습이든지,... 어떤 물고기의 모습이든지 만들까 염려하노라. (신4:16~18) 이 의미는 우리가 실재이신 하나님을 섬기지 아니하고 형상을 섬기면 안된 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실재는 어떤 의미인가? 하나님은 영으로 영이 실재 고 생명이므로 우리가 알아야 되는 것은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 이다. 하나님의 마음이 생명이고 실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 음, 곧 인격을 섬기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예수님의 겉모습을 섬긴다면 그것은 실재가 아니기 때문에 우상 숭배가 되는 것이다. 지금도 카톨릭과 같이 예수님의 인격이 아닌 어떤 형 상을 추구하는 것은 우상숭배라는 것이다. 유대인들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 예수님을 왜 핍박했는가? 실재를 몰랐기 때문이다. 지금도 예수님의 재림 을 기다리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도 실재를 모르고 형상만을 추구한다면 예수님이 오셔도 모르는 것이다. 자기들이 기대하는 예수님이 아니기 때문 이다. 또 어떤 이들은 예수님의 마음을 알려하지 않고 오직 예수님이 행하 신 외적인 일만을 가지고 그것이 예수님의 전부인양 말하는 사람들이 있 다. 외적인 일이 예수님 자신, 곧 생명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 외적인 일은 오늘은 할 수 있지만 내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오늘 했다고 내일 도 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을 알되 그분의 마음,
58 3. 하나님과 사람 곧 생명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어떤 인격적인 존재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능력적인 면과 내부적인 인격적인 면이다. 예를 들어 가수 가 노래를 잘한다고 해서 그 노래가 그 사람 자신은 아니다. 그 사람 자신 은 그 사람 마음이다. 성경은 실재이신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하였다.(요17:3) 성경에 서 안다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그분의 마음을 알고 그분 과 연합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십자가에 피 흘 려 죽으신 것도 그분의 외양을 볼 것이 아니라 그 내면을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 생명의 연합이 될 것 아닌가? 성경기록도 마찬가지다 기록된 말씀을 표면적이고 문자적으로 알 것이 아 니고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고전2:16) 하나님의 목표는 형상에 있지 않고 영-생명에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본성-혼에 속한 사람이 아니라 영에 속한 사람이다.(고전2:15) 좌우간 사람은 처음 창조될 때 실재-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래서 영 생이 없었다. 물론 차후에 우리가 실재와 형상, 곧 하나님과 사람이 실제 적이고 가시적으로 연합되는 세계,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로 흡수 통일되 는 세계가 와야만 이 사람은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고후5:4)
59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흙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사람을 천사처럼 씨-영으로 만들어서 죽지 않게 만들지 흙 -육신으로 만들어서 죽게 만들었는가? 하는 의문점을 가질 수 있다. 사람은 왜 흙-육신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는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을 창조하고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분배하 여 그들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신격은 인격의 내용이 되는 것이 고 인격은 신격의 표현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표다. 이것이 예수님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골로새서 2장 9절에서 그분 안에는 하나님의 신격의 모 든 충만이 몸으로 거하고 라는 말씀이 이 말이다. 곧 말씀이 육신이 되셨 고 (요1:14) 하나님께서 육체 안에 나타나신 것이다. (딤전3:16) 그런데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하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 다. 그래서 다른 창조물은 모두 1차적 창조로 끝나지만 사람만은 2차적 창 조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다. 씨-하나 님께서 자신의 씨를 뿌리려면 그 재료는 반드시 흙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씨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으로 창조되었다. 영원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 니다. 흙-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여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창조물은 영원한 생명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모두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된다. 천사도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명은 아니기에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고 거듭남이 없다. 씨는 잘 못되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 다시 사용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천사는 비록 영원한 생명은 아니지만 죽지 않기에 타락하더라도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사람에게는 왜 사형선고 를 내리는가? 육신이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천 사에게는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타락한 마귀와 그의 천사들이 가는 곳은
60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지옥이고 최종적으로 불호수다. 죽지 않는 영적 피조물에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없다. 그런데 사람의 육신 은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사람이 영생을 가졌다 면 어떻게 사형선고를 내리는가? 영원한 생명이 어떻게 죽는가? 영원한 생 명은 하나님 자신이다. 영원한 생명은 말 그대로 영원한 것이지 영원한 생 명이 어떻게 가다가 단절되는가? 그렇다면 지금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보 장이란 말도 의미가 없다. 기독교인들은 항상 논리가 부족하면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는 논리를 가지고 나온다.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은 비생명적 인 것은 창조하실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 자신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 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왜 사람을 처음부터 영생을 가진 존재로 만들지 않았 는가? 그럴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한 것이다. 즉 씨는 절대적으로 흙 이 필요한 것이다. 씨를 공중에 뿌릴 수는 없지 않은가? 그래서 사람은 흙 -육신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 이전에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반드시 거듭나야 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시는 죄 이전에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 해 흙-육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고전15:50)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 썩는 것은 썩지 않는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 (고전15:50)
61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이 육신으로 만들어 진 것은 죄와 관계없다. 본질적으로 사람은 흙- 육신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것이다. 육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영이 하나님의 목표이기 때문이다. 육이 열매가 아니고 영이 열매다. 그래 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2장 21절이 주는 계시도 분명히 사람은 죄 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녀를 남자에게 데려오시 니 여기서 아담이 깊이 잠들었다는 말은 죽었다는 말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다. 아담의 거듭남을 통해 산출된 부활생명, 곧 이브- 교회가 하나님의 최종 목표다. 사람이 거듭나야 되는 것은 죄 이전에 흙- 육신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 님 나라에 합당하지 않기 때문이다. 요한복음 3장에서 예수님은 이 진리를 확증하신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을 볼 수 없느니라.(요3:3) 하셨다. 이것 을 보통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죄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는데 그렇 지 않다. 예수님은 이어서 사람이 물에서 나고 또 성령에게서 태어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느니라.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요3:5~6) 하셨다. 예수님은 사람이 다시 태어 나는 것에 대해서 사람은 1차적으로 물-육신으로 태어난 다음 2차적으로 성령으로 태어나는 것이 거듭나는 것 이라고 정의해 주고 계시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요, 성령에게서 난 것은 영이니 (요3:6) 라는 의미는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흙은 무엇을 해도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흙에 씨 가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고 영에
62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서 난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죄인이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는 말씀 이 없다. 우리가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육 신으로 만들어진 것이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육신으로 만들어진 것이 아 니다. 거듭난다는 것은 죽고 다시 산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한번은 죽고 다시 태어나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요한복음 3장 전반부에서 예수님은 이와 같이 인생의 본질적인 목적을 언 급하신 다음 요한복음 3장에서 14절에 와서 사람의 죄 문제를 언급하신다.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사람의 아들도 반드시 들려야 하리니 (요3:14) 그러니까 사람은 본질적으로 흙-육신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 륜과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하는데 먼저 죄 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것이 다. 죄로 인해 심판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에는 두 종류가 있다. 창세기 2장까지는 무죄한 육신이었고, 타락한 창세기 3장 이후로는 죄된 육신이 된 것이다. 무죄한 육신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즉 씨-하나님이 흙-사람에게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라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육은 육이지 영이 아니 다. 그래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고 죄가 들 어옴으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헌물과 희생물의 공통점은 죽음이 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고 헌물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서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헌물을 포함 시켜 놓은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바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고전1:24) 라는 말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한 번은 죽을 밖에 없는 흙-육신으로 만들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신성과 능력이 훼손되는가? 아니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향한 경
63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륜의 목적이 다른 피조물과는 다르다는 것이다. 여기에 사람의 탁월성이 있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영생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 났지만 사람만은 1차적 창조에서 2차적인 생명의 전환-거듭남이 필요하다 는 것이다. 아담은 흙으로 창조된 살아 있는 혼이지 생명이 아니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더라,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 려 주는 영이 되셨느니라.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 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고전15:45~46)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이라는 것이다. 이 말은 아담은 흙-육체이고 부활하신 예수님은 영적인 몸-생명이라는 것이 다. 육체는 흙으로서 씨가 없고 영이 씨-생명이다. 아담은 살아 있는 혼, 육체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해야할 존재라는 것이다. 처음부터 아담은 영 -생명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첫 번째 사람 아담은 생명이 없는 존재고 마 지막 아담은 생명이라는 것이다. 너무도 분명하게 나와 있다. 하나님의 씨 가 본성에 속한 흙-사람에게 먼저 뿌려져 그 뒤에 영에 속한 사람으로 거 듭나야 된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위 말씀은 하나님의 입장에서 한 사람 안에 두 사람이 있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과 마지막 아담이다. 우리는 첫 사람 아담-살아 있는 혼으로 창조되어 마지막 아담 영적인 몸 으로 거듭나야 될 운명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이어서 고린 도 전서 15장 48절, 4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한다.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니라.(고전 15:48~49) 이 말씀도 분명히 아담과 부활하신 예수님을 대별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우리가 땅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땅
64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에 속한 형상을 지니고 있는 것이 아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땅에 속 한 형상을 지니고 있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 되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땅-사람에게 씨를 뿌려 사람에게서 부활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이 경륜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 로 첫 사람 아담에게서 처음부터 씨-생명이 없었다는 것은 명확하다. 로마서 5장 14절에서... 아담은 오셔야 할 분의 모형이니라 했다. 이 말은 아담은 예수 그리스도의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아담이 실재라면 생명이라는 의미다. 그런데 모형이란 생명이 아니고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이라는 의미다. 아담이 죄를 져서 모형이 된 것이 아니고 처 음부터 모형이라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제적인 집이 완성되면 없어지 는 것이다. 모델하우스는 실재를 위해 잠시 지어진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도 만들 수 있는 것이고 언제든지 행위에 의해 훼손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음 받은 자다. 만들어진 것은 사탄이 훼손할 수 있지만 낳음 받은 영원한 생명은 그 어떤 피조물이라도 훼손할 수 없기에 우리의 구원 이 영원한 것이다.(롬8:38~39) 여기서 구원의 영원한 보장이란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런데 사람이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아담이 죄를 져서 죽게 되었다면 현재 우리의 구원도 언제든지 훼손될 수 있는 것이다. 다른 모든 피조물은 영원한 생명이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완성되지만 사람만은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단지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 아니라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하는 것 이다.(창2:21~23) 아담은 창조 시에 원래 죄가 없었다. 그렇다고 영생이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존재였다.(창 3:22)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일반적으로 기독교인들은 무죄를 영생으로 생각하는데 무죄는 단지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일 뿐이다. 죄인 을 다시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사람의 위치로의 회복, 이것을 구
65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속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골 1:15) 우리가 흔히 구속 이라는 말을 많이 하는데 구속은 죄들의 용서를 받은 사 람의 위치로서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구속이 거듭남이 아니다. 죄 란 쉽게 말해서 사람은 하나님이 씨를 뿌려야 할 밭으로 창조되었는데 거 기에 사탄의 씨가 뿌려진 것이다. 그래서 구속이란 사탄의 밭이었던 사람 을 갈아엎으시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시키신 것이다. 그러므로 구속이 거듭남이 아니다. 거듭남은 생명의 문제다. 사탄 이 씨를 뿌려놓은 밭을 갈아엎은 다음 그 밭에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야 거 듭남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이 구속이고, 부활이 거듭남이라는 것이다. 흔히들 말하는 예수님을 믿고 과거, 현재, 미래의 죄 를 용서 받았다고 해서 구원-거듭남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씨를 뿌 릴 수 있는 위치지 거듭남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창조된 사람-흙에게 자신의 생명-씨를 심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이들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래서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1, 2장의 원 계시에 의하면 처음에 사람은 생 명이 없었기 때문에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창2:21~23) 그런데 사탄이 이 경륜을 방 해했다. 그렇다고 하나님의 경륜이 방해를 받는가? 결코 그렇게 될 수 없 다. 하나님의 지혜를 어찌 피조물이 따라 올 수 있는가? 하나님은 농부시고 우리는 하나님의 농사다.(고전3:9) 하나님은 무엇을 하 시는 분인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인격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런데 그 열매의 완성은 육체가 아니고 영적인 몸-부활생명이다
66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 농부는 밭에 씨를 뿌려 흙을 거두는 것이 아니고 열매를 거둔다. 하나님도 똑 같다. 씨-하나님도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육체를 거두는 것이 아니라 씨-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이 하나님께는 열매 가 되는 것이다. 열매와 씨, 영은 하나로 생명이다. 육체가 생명이 있는 것 이 아니고 영적인 몸이 부활의 열매로 생명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입장에 서는 영이 생명이기 때문에 하나님-씨가 사람-흙에게 뿌려졌을 때 사람- 흙은 영적으로 거듭난다. 그리고 거듭난 사람의 육체는 죽음을 통해 땅에 뿌려지면 장차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 부활생명의 열매가 되는 것이다. 이것을 고린도전서 15장 35절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또 네가 뿌리는 것으로 말하건데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 고 밀이든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로 그것에게 고유의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을 주시느니라.(고전 15:36~38) 여기서 보면 사람이 죽는 것을 씨 뿌리는 것으로 비유하고 있다. 우리는 처음에 흙으로 지음 받아서 우리 안에는 씨가 없었다. 하지만 사람은 하나 님의 씨든 사탄의 씨든 둘 중에 하나는 무조건 사람 안에 들어와 있다. 그 래서 그 씨가 열매를 맺으려면 땅에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육체 적 죽음이다. 육체-흙이란 씨가 들어와 발아할 때까지 그 씨가 발아 할 수 있도록 유지시켜 주는 토대이지 자체 생명이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 나님께 대하여 여자로서 자기 스스로 아들-생명을 낳을 수 있는 존재가 아 니다. 이 과정을 설명하고 있는 것이다. 씨를 뿌리고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로, 사탄의 씨가 들어 있는 사람은 사 탄의 아들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67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하나님께서 아담이 죄를 범한 후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3:19) 하셨다. 이 말씀은 사람이 영생하게 되었는데 저주로 인해 흙으 로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사람의 본질이 흙임에도 불구하고 신 (영)-씨가 되려고 한 아담에게 사람은 결코 신-씨가 될 수 없고 결국 흙 으로 돌아간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흙으 로 돌아가지 않으려고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국 흙으로 돌아갈 수 밖에 없 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어차피 죽는다는 것이다. 죽음이 없으면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거듭남, 부활은 창조 안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을 위해 정해진 것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님 말씀은 아담에 대한 저주가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저주마저도 하나님 께서 주신 것이 아니고 아담이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해서 다른 길로 갔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산물이었다. 주 내용은 죄를 범한 인간을 다시 회복시켜 하나님의 목적 안으로 돌이키시겠다는 하나님 의 대책이 주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지금 구원받은 우리도 하나님의 아들 이라 불리우지만 최종적으로 죽음과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열매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 자신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 그분께서는 육체로 는 다윗의 씨에서 나셨고 거룩한 영으로는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하심으 로써 하나님의 아들로 권능있게 밝히 드러나셨느니라.(롬1:3~4) 여기서 보면 예수님이 부활을 통해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고 한 다. 그러면 예수님은 부활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는가? 이 말씀 은 예수님이 부활이전에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었다는 의미가 아니라 농 부이신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육적인 몸이 최종완성이 아니라 영적인 몸이 열매로서 최종완성이라는 말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경륜 의 목표는 영에 있다. 사람 농사를 지으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 의 육적인 몸이 열매가 아니라 부활한 영적인 몸이 열매다. 육적인 몸에서
68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영적인 몸으로 전환은 다른 생명으로의 거듭남이다. 거듭남이란 죽고 다시 사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 창조될 때 육체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체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므로 사람은 죄와 관계없이 거듭나야 했다. 육체는 열매가 아니고 단지 밭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밭인 사람에게 사 탄이 자기 씨를 뿌렸지만 하나님은 그 밭을 갈아엎고 다시 씨를 뿌리면 되 는 것이다. 갈아엎는 것이 십자가 사건이다. 이렇게 사탄이 방해하면 할수 록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더 강화되는 것이다. 흙은 그대로 있는 것보다 많은 과정을 겪어야 더 좋은 열매를 거둘 수 있다. 우리 사람도 마찬가지 다. 그래서 사탄의 방해로 흙-사람은 많은 시련을 겪었지만 그 시련이 많 을수록 더 좋은 열매를 거두는 것이다. 사탄은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했지 만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사탄이 방해하면 할수록 더 좋은 강화된 열 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하나님의 은혜가 더 넘치게 된 것이다. 아담이 죄가 없 더라도 하나님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셔야 했지만 이제 죄가 들어왔음에도 불구하고 그 죄를 해결해 주시고 하나님의 경륜을 바꾸지 않으니 얼마나 더 은혜가 넘치겠는가? 그래서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는 것이다. (롬5:20) 사탄이 방해했지만 하나님께서 더 강화된 생명을 주신 것이다. 온 우주 안에 피조물들이 가지고 있는 생명은 피조된 생명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영원한 생명은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무엇인가? 창조된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만들어진 사람에게 자 신의 씨를 심어서 사람에게서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만물은 무엇을 계시하는가? 로마서 1장 20절을 살펴보자.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
69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 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 (롬1:20) 이 말씀은 단순히 만물을 보고 창조주 하나님은 계시는 구나 라는 것을 아 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을 알 수 있다고 하 였다. 이것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만물은 생명으로 구성되어 있 고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생명에 있다. 생명이 아닌 것은 다 거짓이다. 그 러므로 우리는 이 만물을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만물은 하나님 자신-생명을 계시하고 있다. 특수계시만이 성경이 아니고 일반계시도 성경이다. 그러나 이제 짐승들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너를 가르치리라. 공중의 날짐 승들에게 물어보라. 그것들이 네게 일러 주리라. 혹은 땅에게 말하라. 땅이 너를 가르치리라. 바다의 물고기들이 네게 밝히 알려 주리라.(욥 12:7~8) 하나님의 모든 관심의 초점은 생명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라는 것을 만물 통해 계시해 주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처음에 는 만들어졌지만 다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 성경 의 일관된 진리다. 죄가 있기 때문에도 거듭나야 하지만 죄가 없더라도 거 듭나야 되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아는 것은 크게 외적인면과 내적인 면으로 나눌 수 있는데 외적인면은 그분이 하신 일과 일하시는 원리를 아 는 것이고 내적인 것은 개인적으로 그분의 마음을 아는 것이라 할 수 있 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원리란 생명의 원리를 말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 는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생명의 원리를 모르고 아담이 처음 창조될 때 영생이 있었다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기독교인들은 말이 안 되면 무 조건 하나님의 전능성을 말하면서 하나님은 뭐든지 다할 수 있다고 말한
70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다. 또 그것을 믿는 것을 대단히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다른 모든 것은 다 창조할 수 있어도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 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지식으로 생명이 아닌 모든 것은 다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현대 에 와서도 모기 한 마리도 지식을 통해 만들 수 없다. 너무도 간단한 진 리를 사람들은 믿지 않으려고 한다. 아담 이래 너무 오랫동안 지식의 세계 에 빠져 있는 결과이다. 사람은 원래 생명의 세계에 있어야 하는데 사탄 으로 인해 지식의 세계에 와 있는 것이다. 사탄은 속이는 자로서 지식으로 생명을 모조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세상을 거짓 아래 있다고 하는 것이 다. 지식으로 생명을 대체하고 생명을 지식으로 만들 수 있다고 믿는 것이 세상과 종교다. 선악의 지식나무 열매를 먹은 세상과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은 하나님 나라의 차이는 무엇인가? 지식 대 생명의 차이다. 세상은 지 식으로 세워진 세계라면 교회는 생명으로 세워진 세계다. 지식은 분열을 가져오고 생명은 한 덩어리로서 연합된다. 그러므로 세상은 지식의 세계로 서 발전하면 발전할수록 끝없이 분열한다. 사탄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 가? 지식으로 생명의 세계를 모조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이 이렇게 흘러 가고 있다. 소위 말하는 유전공학, 생명공학이 다 이런 거다. 사탄은 속이 는 자다. 지금은 인터넷을 통해 지식으로 생명의 연합을 모조하고, 장차에 는 사람의 몸속에 어떤 장치를 넣어 생명의 연합을 모조할 것이다.(계 13:16~19) 다시 한 번 말하면 생명은 지식을 통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 다. 그래서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고 은혜라는 것이다. 지식은 행위로서 실재-생명이 아니고 형상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 님이 처음부터 사람을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었다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 는 창세기 2장에서 완성되어야 한다. 또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피조물인 사탄이 영원한 생명을 훼손할 수 있는가? 한번 영원하면 끝까지 영원해야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이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중간에
71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끊어지는가? 하나님이 사람에게 선악과를 먹으면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 라 한 것은 그날에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 는 의미다. 또한 사람은 처음부터 영생이 없었고 죽을 수 있기 때문에 죽는다고 하는 것이다. 천사 는 비록 영원한 생명은 아니지만 죽지 않기 때문에 사형선고를 안 내린다. 죽을 수 있는 존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죽지 않는 존재에게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었는데 사탄으로 인하여 영원한 생 명을 잃었다면 오히려 이것이 하나님의 능력을 훼손하는 것이다. 사람은 단지 흙으로 만들어진 존재였다. 그래서 사탄이 훼손할 수 있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은 훼손할 수 있지만 낳음 받음 것은 생명이기 때문에 훼손할 수 없다. 또 사람이 원래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하나님께서 죽으리라 했기 때문에 죽었다면 지금 소위 우리가 말하는 영원한 생명도 늘 불안한 것이다. 언제든지 하나님께서 거두어 가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것은 영원한 생명이 아니고 유한한 생명이다. 사람은 살아 있는 혼으로 창조되었다. 살아 있는 혼은 피조된 사람의 생명 이지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사람의 만들어진 재료는 흙이다. 그래서 살아있는 혼이란 흙과 같다. 타락했기 때문에 흙이 아니고 본질이 흙이다. 흙에게는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 그런데 씨와 땅은 절대적으로 상호 필요 한 관계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들 여 아들을 생산할 여자의 운명이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자체 씨가 있다고 하는 것은 불교나 이방종교의 주장과 같다. 불교의 주장이 무 엇인가? 사람 안에 불성이 있는데 깨닫지 못해서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 다. 그래서 깨달아서 찾겠다는 것이 불교다. 사람 안에 영생이 있었다면 내가 예수님을 믿을 필요가 없다. 나도 깨달아서 잃어버린 것을 찾으면 되 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72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각각의 세계에는 거기 맞는 몸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했다. 하늘에 속한 몸이 있고 땅에 속한 몸이 있는데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땅에 속한 몸은 영-씨가 아니다. 하늘에 속한 몸은 영으로 씨다. 하늘은 생명이신 하나님을 예표하 기 때문에 그곳에 있는 피조물은 소멸되지 않는다. 영이란 하나님을 대표 하고 생명을 대표하기 때문에 영적인 것은 피조 되었다 하더라도 소멸되지 않는다. 그래서 사람의 영과 혼도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영적 세계에서는 모든 것이 소멸되지 않는다. 사람의 구성체인 영, 혼, 몸 중에 영과 혼은 눈에 보이지 않는 영적 구성체이다. 그래서 비록 창조되었지만 소멸되지 않는 것이다. 육체는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천사는 몸 자체가 영으로 창조되었다. 천사가 영으로 창조되었다고 해서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것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될 수 있는 것이고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사탄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의 씨로서 흙 -사람과 연합하여 자기의 열매를 거둘 수 있다. 흙-사람과 연합하여 마귀의 자식을 낳을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마귀는 씨로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 (요8:44a) 이로써 하나님의 자녀들과 마귀의 자녀들이 드러나리니... (요일3:10) 하나님도 마찬가지다. 그분의 씨를 흙-사람에게 뿌려 하나님의 자녀를 생 산하는 것이다. 마태복음 13장에서 예수님은 씨 뿌리는 자의 비유를 말씀 하고 있다. 거기서 사람을 길가의 땅, 돌밭의 땅, 가시나무 사이의 땅, 좋은 땅 등 네 종류의 땅으로 구분하여 설명하고 계신다.(마13:18~23) 사람은 땅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좋은 열매를 맺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또 예수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시되, 좋은 씨를 뿌리는 자는 사람의 아들이요, 밭은 세상이요, 좋은 씨는 왕국의 자녀들이로되, 가라지는 저 사악한 자의
73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자녀들이니라. 가라지를 뿌린 원수는 마귀요,... (마13:38~39a) 밭은 세상이라는 말은 밭이 사람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밭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그 아들을 생산해야 할 운명이다. 이것을 거듭남이라고 하는 것 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본질이 흙이다. 자동차의 본질은 쇠다. 쇠를 가지고 어떤 기능이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 뀌는 것은 아니다. 나무를 가지고 어떤 기능이 있는 제품을 만들었다고 해 서 나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탄은 영으로 만들어졌다. 타락 했다고 영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하나님께서 흙이라는 재료를 가지고 살아 있는 혼-지( 知 ), 정( 情 ), 의( 意 ) 기능을 가진 사람을 만들었다고 해서 그 본질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뿌리 는 대로 거둔다는 말도 진리고 신토불이( 身 土 不 二 ) 라는 말도 진리다. 어 떤 존재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위치적인 면과 기능적인 면이다. 자동차 의 주인이 바뀌는 것은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동차의 기능 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바뀌었다고 해서 기능이 바뀐 것이 아니다. 위치가 바뀌었다고 기능까지 바 뀐다면 우리의 거듭남도 없는 것이다. 비록 우리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위치가 바뀌었지만 말씀을 받아드리는 기능이 바뀌지 않았기 때문 에 하나님 말씀을 먹고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사람은 단지 흙이고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밭에 사 탄의 씨가 뿌려지면 사탄의 자녀가 태어나고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하나 님의 자녀가 태어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그래서 씨를 뿌리고 열매를 수확하는 원리가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을 이루어 나가시는 대원칙이다. 하나님의 씨를 받은 사람은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를 받은 사람은 불의한 자의 부활로 다시 태어난다는 것이다. 또 그들도 스스로 인정하는 바 하나님을 향한 소망을 내가 가졌나니 곧 죽은 자들의 부활 즉 의로운 자들의 부활과 불의한 자들의 부활이 있으
74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리라는 것이니이다.(행24:15) 씨의 소망은 열매다. 영과 씨와 열매는 생명으로서 하나다. 사람은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변화해야 영생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 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을 열매라고 하시는 것이다.(고전15:20) 성경 은 또 사람을 그릇으로 표현하고 있다.(롬9:21~24) 고린도후서에서는 우리 가 질그릇 안에 그리스도를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우리가 이 보배를 질그릇 안에 가지고 있나니... (고후 4:7) 성막 안에는 증거판을 보관하는 증거궤가 있었다. 여기서 증거판은 하나님 을 예표하고 증거궤는 육신을 예표한다. 사람은 무엇을 담는 궤짝이라는 것 이다. 사람은 타락하기 전부터 흙이고 그릇이다. 사람은 흙과 같고 그릇과 같이 무엇을 받아드릴 자였다. 본래부터 하나님의 씨를 받을 자였지 하나님 의 씨를 가진 자가 아니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로 창조되었다. 여자는 씨가 없는 그릇이다. 우리는 이 관념이 명확해야 한다. 죄가 들어왔 기 때문에 여자가 아니다. 죄가 들어오기 전부터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여자다. 하나님의 목표는 아담이 아니고 이브다. 그래서 아담은 죽음을 통 해 이브를 산출해야 했다.(창2:21~23) 이브는 부활생명의 예표인 교회로서 하나님의 최종 목표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어떤 피조물도 영-씨로 창조되 지 않았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물은 육체-흙으로 창조되었다. 살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전15:50) 사람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얻은 자가 아 니었다.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시고 (창3:22) 위 성경구절에 의하면 분명히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았으며 생 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 일부 주장처럼 아담이 생명나 무의 열매를 먹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사람은 영원한 생명을 받아 들여 거듭날 자였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었다. 그리스도인은 흔히들
75 4. 사람은 왜 거듭나야 하는가? 사람이 거듭나야 되는 이유를 죄가 있기 때문에 거듭나야 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사람의 죄는 용서받아야 되는 것이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을 위해 본질적으로 거듭나야 된다고 말하고 있다. 내가 죄 용서를 받았다 고 해서 하나님의 최종목적 안에 있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무죄하였지만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다. 무죄는 단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죄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나아가는데 하 나의 장애물이지 죄를 용서받는 것이 최종목적이 아니다. 인생은 살과 피 로 지음 받았고 근원적으로 거듭나야할 존재다. 사람은 창조 시에 없었던 새로운 생명으로 거듭나는 것이지 원래 있었는데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원래 가지고 있었던 것이었 다면 우리가 되찾으면 되는 것이지 우리에게 생명이신 예수님은 무엇 때문 에 필요한가? 우리는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생명이 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전15:45) 장막과 성전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이 장막 집이 해체되면 하나님의 건물 곧 손으로 지은 집이 아니요, 하늘들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우리가 아느니라.(고후5:1) 위 말씀에서 바울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한 후 광야의 장막과 가나 안 땅의 성전을 비유하여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광야의 장막은 일시적인 것으로 현재의 육체를 예표하며 가나안에 있는 돌로된 성 전은 부활된 육체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근원적으로 장막- 육체에 있는 것이 아니고 성전-부활생명에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 다. 장막과 성전 모두 하나님의 전이다. 광야의 장막은 죄가 있기 때문에 없어진 것이 아니고 단지 하나님의 경륜의 과정 속에 필요했던 것이다
76 5. 사람의 위치 5. 사람의 위치( 格 ) 사람의 위치는 무엇인가? 곧 격이란 무엇인가? 피조물의 위치이고 기점이 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리게 되고 어디로 갈지 모른다. 처음 하나 님께서 하늘과 땅을 창조하시느니라. (창1:1) 라는 말씀은 우주 안에서 우 리의 기본적 위치가 피조물이란 사실을 알게 해 준다. 그러나 이것만을 인 식하는 것으로는 부족하다. 창조자는 피조물에게 각자의 위치-격( 格 )을 부여한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피조물에게는 창조목적 안에 있는 것이 고 생명의 길이다. 성경에서 위치 곧 '자리(seat)'는 히브리어 베텐(beten)에서 기원한 태 (womb)라는 의미라고 한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자리, 곧 위치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이 고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식물도 마찬가지다. 땅에 뿌리를 박고 있어야 할 나무가 뿌리가 뽑혀 위치를 떠나면 사망이다. 물고기도 물속을 떠나 자 기 위치를 이탈하면 사망이다. 그러나 사람의 위치는 이런 장소적인 것이 아니고 인격적이고 영적인 것이 다.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는 것이 아니고 영-실재에 있기 때문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첫 번째로 피조물로서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두 번째로 하나님의 씨로 태어난다는 의미에서 아들의 위치에 있고, 세 번 째로 이 아들이 자라서 결혼할 위치에 오면 신부가 되고 아내가 되는 위치 에 있다. 두 번째와 세 번째의 실제적 위치는 우리가 부활한 후 미래에 일 어날 일이다. 공통적으로 사람은 흙으로서 씨가 아니고 씨를 받을 자로 창 조되었다는 것이다. 첫 번째 위치에 있는 아담은 만들어졌다. 태어난 것이 아니다. 아담은 만 들어진 위치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날 위치에 있는 것이다. 만 들어진 것은 사탄이 훼방할 수 있으나 거듭난 생명은 사탄이 훼방할 수 없 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므로 어떤 피조물이라도 훼방할
77 5. 사람의 위치 수가 없는 것이다.(롬8:38~39) 그러므로 일부 주장처럼 사람이 처음에 영 원한 생명을 가졌었는데 죄로 인해 영생을 잃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 다. 사람은 흙-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 그래서 태생적으 로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하는 존재로 지음받았다. 그러나 영으로 지음받은 천사는 제한을 받지 않는 존재다. 타락도 사람이 먼저가 아니고 사탄과 그 의 천사가 먼저고, 사람의 타락도 사람 스스로가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넘 어간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사람의 죄를 보는 관점은 사람에게 문제 가 있는 것이 아니라 사탄 때문이라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타락했다면 우 리는 구원자가 필요 없다. 우리 스스로 헤치고 나오면 된다. 그런데 하나 님의 관점은 원수가 이렇게 하였구나 (마13:28) 라고 말씀하신다. 여기에 우리의 희망이 있다. 그래서 구원자가 있는 것이다. 사람은 천사처럼 영이라는 제한을 갖지 않은 존재로 창조되지 않았고 흙- 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 천사보다 낮게 창조되었다.(히2:9) 흙-육 신은 영원한 생명이 있는 존재가 아니고 씨-영원한 생명이 뿌려져야할 위 치다. 이 위치는 사람이 절대적으로 지켜할 위치다. 왜냐하면 씨의 절대적 소망은 흙에게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 람의 위치( 人 格 )는 사람이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것으 로 고정된 것이고 변개할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인격( 人 格 )으로 창조되었다. 세상이 말하는 인격과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다르다. 세상은 거짓아래 있다. 타락한 사람은 신도 아니면서 신처 럼 부풀려져 있다. 하나님이 처음 정해주신 격대로 있어야 하는데 부풀려 져 있다는 것이다. 무교병으로 있어야 하는데 유교병으로 있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바로 이것이 죄다.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거짓아래 있다는 것이다. 무교병으로 지음 받았는데 유교병처럼 과대 포장하여 있다 는 것이다.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신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타락한 세상이 말하는 인격은 도덕, 명예, 학식 등 사람 자신이 쌓은 것으
78 5. 사람의 위치 로 부풀려져 있지만 성경이 말하는 인격은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창조할 때에 정해 주신 것으로 변개할 수 없는 위치를 말한다. 하나님께서 정해주 신 것이고 고정된 것이다.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복-생명 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오직 이 위치에 있는 사람만을 찾으 신다. 우리는 무엇을 하던지 내 위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이 이 우 주 안에서 나의 기점이 되기 때문이다. 특별히 우주 안에서 하나님과 인생 의 관계에서 인생의 위치를 알아야 흔들리지 않는다. 기점이 없는 인생은 늘 흔들리게 된다. 지금 세상에서의 모든 문제의 근원은 무엇인가? 각자에 게 주어진 위치를 지키지 않기 때문에 일어나는 것이다. 성경이 계시하는 인생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로병사가 문제가 아니고 하 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존재적 위치를 잃어버렸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에덴에 동산을 창설하시고 아담에게 그것을 가꾸고 지키라.(창 2:15) 하 셨다. 동산이란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하는 영역이다. 하나님이 인생을 창 조한 궁극적인 목적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는 동산 성막 성전 교회 천년왕국 - 새 예루살렘 이렇게 발전이 된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현재의 교회다. 어떤 사람들은 지금도 이것을 물질적 곳으로 생 각해서 찾아 헤매고 다닌다. 그런데 이 동산은 하나님의 동산으로 소유주 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며 그분은 사람 안에 거하시는 분이다. 인격 안에 거하시는 분이지 물질 안에 거하시는 분이 아니다. 아담이 타락 하자 하나님은 에덴의 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지키게 하셨다.(창3:24) 동산에 이르는 길을 하나님이 막고 계시는데 어찌 인간이 찾을 수 있는가? 불타는 칼은 번제 단, 곧 십자가를 상징하고 그룹들은 하나님과 사람사이를 가로 막았던 휘 장을 예표한다.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시자 그룹들이 그려져 있는 성전 휘장이 위에서 아래로 찢어졌다.(마27:51) 창세기 3장에 서 아담의 타락으로 인해 동산을 막았던 그룹들과 사방으로 도는 불타는 칼이 제거된 것이다.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가로 막았던 장애물이 없어진
79 5. 사람의 위치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형상에 있지 않고 영-생명에 있기 때문에 성경 기록도 표면적이 것이 아니라 그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에 중점을 두 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동산은 물질적인 곳이 아닌 영적이고 인격적인 것으로 결국 우리 자신이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정해주신 인격을 말하는 것이다. 하나 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임무는 인격을 가꾸고 지키라는 것이다.(창2:15) 그런데 아담은 이것을 잃어버린 것이다. 동산은 인간의 존재적 위치, 인격 을 상징한다. 아담은 동산-인격을 이탈했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동산-인 격을 지켰다.(요18:1, 19:41) 그래서 하나님은 위치를 이탈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하 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의 일상은 어느 때는 신을, 어느 때는 짐승의 위치를 왔다 갔다 한다. 정위치를 잃은 인간의 당연한 결과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의 궁극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신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과거 왕들은 자칭 타칭 신이라 불렀다. 중국의 천자, 일본의 천황, 로마시대의 황제들도 신으로 추앙받았다. 그런데 하나 님은 이런 자들을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짐승이라 불렀다. 또한 성경은 그리스도 밖에 있는 자들을 향해 바산의 황소, 돼지들, 개들, 여우, 독사들, 짐승들이라고 말하고 있다. 지금 현세상의 문화는 무엇인가? 바로 이 신과 짐승 사이를 왔다 갔다 하는 갈등 구조이다. 문학도 그렇고 영화도 그렇다. 이 갈등 구조를 교묘히 이용하면 인기가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탄과의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전쟁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흙-인생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씨를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흙-인생의 위치를 지킨 자에게만 씨를 심을 수 있다. 위치를 이 탈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사망의 길로 가고 있는 것 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바로 이 차이다. 정상적인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공통점은 무엇인가? 숭배할 신을
80 5. 사람의 위치 찾던지 조롱할 사람을 찾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신과 같 은 기적을 행하자 많은 사람이 추종했지만 정상적인 사람으로서 십자가 앞 에서 서시자 모든 사람이 외면하고 조롱했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는 가? 아담이 사람의 위치에서 신의 위치로 이탈했기 때문에 신과 같은 사람 은 심판받아야 된다는 것이다. 대부분 기독교인들은 이런 문제의식이 없다.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민 21:9)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키고,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를 걸어가도 결국 사 람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매달으니 꼼짝 못하는 흙-사람이라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거기서 뛰어내렸다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다. 아마 제자들도 그런 예수님을 기대하며 십자가까지 따라갔을 것이다. 자기들도 언젠가는 그런 능력을 가진 자가 된다는 것을 소망하면서 따라갔을 수도 있다. 제자들은 예수님의 능력 정도면 그분은 거기서 분명히 어떤 신적인 능력을 통해 십자가에서 내려 올 것이라고 기대했을 것이다. 만일 예수님 이 그 당시 그랬다면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숭배했을 것이고 지금도 예 수님은 엄청난 종교적 숭배를 받았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그들의 기 대와 소망을 모두 저버린 채 일반 사람들과 똑 같이 죽으시고 말았다. 그 러자 제자들은 3년 동안 예수님을 따라 다녔음에도 아무 일도 없었던 것 처럼 모두 자기 일터로 돌아갔다. 아마도 제자들은 자기들이 지금까지 따 랐던 예수님을 사람은 참 좋은 사람인데 자기들이 소망했던 이스라엘 왕 국을 회복할 그 사람은 아니구나, 우리가 사람을 잘 못 보았구나! 이렇게 생각했었을 것이다. 그러니 예수님이 죽으시자마자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이 모두 흩어져 자신의 일터로 돌아간 것 아니겠는가? 그러면 십자가가란 무엇인가? 바로 인생의 정체성이 드러난 자리다. 인생 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육신으 로 계실 때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서 신이라 칭함을 받았다. 그럼에도
81 5. 사람의 위치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으니 꼼짝 못하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이라는 정체성이 드러난 자리다. 숨이 코에 붙은 인생이라는 것이다. 인생은 누구 든지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실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 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모든 신과 같은 능력은 다 사라지고 오직 하나님 이 정해주신 존재적 위치만 남았다.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격만 남았다는 것이다. 여기서 신이 되고 싶은 인생이 끝난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 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인생은 흙이고 코에 숨이 붙은 것이 인생이며, 바로 십자가의 그 자리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 곧 구속의 자리라는 것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십자가에 매달리신 예수님을 의롭다고 하셨다. 십자가에 있는 인생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 데 내가 만일 죽을 수 없는 존재라면 나는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 있 는 것이 아니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는데 예수님께서 십자가 에서 이 위치-인격을 회복하신 것이다. 인간적으로 생각하면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만큼 한이 많고 억울한 인 생도 없다. 그런데 그분은 거기서 인생으로서 아무런 불평도 하지 않고 죽으셨다. 오히려 성경은 그것을...죽기까지 순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의 죽음이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도 그분을 높이 올리시고 모든 이름 위에 있는 이름을 그분에게 주사 (빌2:7~8) 라고 한다. 또 요한 복음에서는 십 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가 왔도다. (요12:23) 하셨다. 십자가의 죽음에 대 하여 영광이라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흔히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대속사역을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라고 아주 단순하게 기계적으로 생 각한다. 왜 이것을 죽기까지 순종이라고 하는가? 바로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해 주신 격은 피조물의 처지와 관계없이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그 위치 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씨의 절대적 소 망은 열매를 얻는 것이다. 그런데 씨가 열매를 얻으려면 흙과 연합되어야 한다.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될 수 있기 때문이다
82 5. 사람의 위치 이런 상황에서는 피조물의 목적과 창조자의 목적이 부딪친다. 예수님도 십 자가의 죽음을 앞두고 오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 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26:39) 하셨다. 이 의미는 피조물은 창조자의 더 큰 목적에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자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에만 복을 주실 수 있고 이를 통 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 의 절대적 갈망은 무엇인가?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곧 사람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과 연합하여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 이라는 것이다. 이것보다 더 큰 목적은 없고 이것보다 더 큰 하나님의 갈 망은 없다. 그런데 우리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니 내가 죽지 않 는 신이 되겠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우리의 목적만을 생각하는데 피조물이란 의미는 자기 목적이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을 모르니 어디로 가는지 모르는 것이다. 목표와 방향을 모르니 대부분 구원받고 기 화묘초 만발한 하늘에 가는 것을 목표로 한다. 이것은 하나님의 목적이 아 니다. 이러한 것은 이방종교에도 다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한 인 격에 있다. 환경이 아니다. 이 인격의 완성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의 생명으로 태어나는 것이다. 그 씨가 뿌려지려면 사람은 하나님께서 정 해 주신 흙-사람이라는 위치를 지켜야한다. 그러므로 피조물은 하나님의 목적아래 자신의 처지와 관계없이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목적 안에 있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바로 이 차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을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하 나님의 목적 안에 계셨던 것이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수 많은 사람이 십자가에서 죽었는데 왜 유독 예수님만 부활하셨는가? 이 런 질문을 한다면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전능하시
83 5. 사람의 위치 고 죄가 없기 때문에 부활하셨다. 또 예수님은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 님께서 특별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허락해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이렇게 기계적으로 대답한다. 그런데 만약 예수님이 그래서 부활했다면 우리에게는 절망이다. 우리 같은 보통 인간에는 적용될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예수님은 완전한 사람으로 오셨고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걸을 수 있는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그렇 기 때문에 이것이 인류 모두에게 복음인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수님의 죽음만을 인정하셨는가? 성경은 예수님 스 스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그러 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하나님이 저주하 는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죽은 자 들은 생명의 길 안에서 죽은 자로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생명노선 안에 있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정한 인생의 격을 무시하는 것은 창조자를 무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창조를 끝내 신 다음 자신이 만든 모든 것을 보시니 보라, 매우 좋았더라 (창1:31) 하시고 안식하셨다.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자기의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방해했다는 것이다. 창조자이신 하나님 은 좋다고 하는데 자기는 싫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창조를 무시한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범한 자를 사형에 처하라고 한 것이다. 핑계없는 무덤이 라는 말이 있듯이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은 모두 하나님께서 정한 죽음이 라는 인생의 격을 무시하고 부끄러워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자를 무시 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길을 벗어난 자들 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하신일은 무엇인가? 십자가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정상적인 사람 의 위치를 찾아주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구속이다. 인격( 人 格 ), 곧 하나님 께 대하여 사람의 위치( 人 格 )는 피조물, 아들, 아내의 위치에 있다. 하나님 은 씨-생명이고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사람은
84 5. 사람의 위치 자체 씨가 있는 피조물이 아니다. 사람은 타락했기 때문에 흙이 아니고 타 락하기 전부터 흙이다. 사람은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다. 외부의 생명 공급을 통해 살아가는 존재다. 살아 있는 혼이란 흙으로서 혼적 기능을 가 진 존재라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그 씨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 영어를 받아 드리면 영어를 하고 한국어를 받아 드리면 한국말을 한다. 여자는 백 인과 결혼하면 백인을 낳고, 다시 이혼하고 흑인과 결혼하면 흑인을 낳는 다. 그래서 하나님의 씨를 받으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마귀의 씨 를 받아드리면 마귀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요일3:10) 예수님께서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서 났으므로... (요8:44) 하는 말씀도 그와 같은 이유다. 어떤 존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위치적인 면과 내부적 인 기능적인 면이다. 흙의 위치에 있지만 흙의 기능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 다. 위치는 변동될 수 있지만 기능은 바뀌지 않는다. 자동차의 예를 들어 보자, 자동차의 주인이 바뀌면 자동차의 위치는 바뀌지만 기능은 변화가 없다. 사람도 이와 같다. 내가 위치를 이탈하여 마귀의 자식이 되었더라도 기능은 그대로 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는 씨와 땅의 관계이다. 씨는 땅을 필요로 하고 땅 은 씨를 필요로 한다. 이것은 사람의 운명이라고도 말할 수 있다. 특히 인 격의 속성은 천사에 비해 연약하고, 능력이 없고, 육체적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한 자세한 내용은 다음 장에서 살펴보기로 한다. 하나 님은 이 위치에 있는 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이 운명적 위치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한다. 씨 뿌리는 자의 비유에서와 같이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 좋은 열매를 생산해야할 밭이 되어야할 운명이지 스스 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다. 어떻게 흙이 자체 씨가 있는가? 사람이 이 위 치를 벗어나 다른 씨가 심겨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 다. 그리고 이 인격에서 누릴 수 있는 사람의 권리를 인권이라고 한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인격을 원하신다. 그래야만 그분의 경륜과 목적이 달 성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성경의 핵심 내용은 사탄과 사람의 위치전
85 5. 사람의 위치 쟁이다. 또 이 전쟁은 사탄에게 속느냐, 속지 않느냐의 싸움이고, 사탄의 거짓 대 사람의 진실의 싸움이다. 무교병 대 유교병의 싸움이다. 하나님은 절대적으로 정격 인격에만 복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위치를 이 탈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인생은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위치를 이탈한 인생은 자신이 없는 것을 가지고 사탄을 이 기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하나님께서 원래 주신 것을 가 지고 승리하길 원하신다. 이 길은 너무도 쉽고 가벼운 길이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 (마11:30)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거부하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지만 예수님은 십자가에 매달면 죽을 수 밖에 없 는 인생의 위치를 원망하지 않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죽기까지 지킴 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이것이 곧 생명의 길이다
86 6. 죄란 무엇인가? 6. 죄란 무엇인가? 죄 위치( 格 ) 이탈 성경이 말하는 근원적인 죄는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 다. 죄란 어원적으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다, 또는 그 위치를 이탈 하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각각의 피조물마다 목적을 두고 창조하셨다. 사람은 사람으로서 그 목적 안에 있어야 하고 천사는 천사로서 그 목적 안 에 있을 때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달성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정하신 피 조물에 대한 목적은 그 피조물의 격이라 할 수 있고, 운명이라고 할 수 있 다. 개는 개로 있어야 하고 소는 소로 있어야 되고 나무는 나무대로 자신 의 위치를 지켜야 된다는 것이다. 각각의 피조물은 자신의 격을 지키는 것 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그 격에서 이 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다른 말로 하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 한 것이 다. 이것이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사망이다. 왜냐하면 창조물이 그 목적에 이탈하면 하나님의 창조세계는 혼란이 생기기 때문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바벨의 세계를 성경은 혼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탄은 자 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했고, 일부 천사들 중에서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여 죄를 범한 천사들이 있다.(유6) 또 자기들의 처음 신분을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들의 거처를 떠난 천사들 을 큰 날의 심판 때까지 영존하는 사슬로 묶어 어둠 밑에 예비해 두셨으 니(유:6) 이 둘의 공통점은 모두 남의 떡이 커 보임으로 자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 다. 아담의 타락도 마찬가지다.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 는 사탄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였다.(창3:5) 즉 사람의 관심 이 하나님으로부터 천사로 옮겨 간 것이다.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in the day)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87 6. 죄란 무엇인가?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창3:5) 그러나 아담은 그 날 안에(in the day) 신이 되지 못했다. 사람이 신이 된 다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은 것이다. 아담은 흙-사람이면서 영-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신이 되지 않고 사탄의 아들이 된 것이다. 하나님 의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이 된 것이다. 사탄이라는 이탈자가 또 다른 이탈자를 만든 것이다. 신-천사란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이 다. 그러므로 아담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 탈한 것이다. 하나님과의 관계가 틀어진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생명의 관계고 사랑의 관계다. 그러나 주인과 종의 관계는 율법의 관계다. 아담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결과 하나님은 자신의 씨를 뿌릴 흙-사람이 필요한데 이미 마귀의 씨가 뿌려진 흙-사람만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신의 위치로 이탈해 버렸으니 하나님이 보실 때 이 땅에는 자신의 씨-생명을 줄 흙-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문제고 사람의 문제다. 위치를 이탈한 사람의 결과 사람이 하나님이 정해놓은 위치를 이탈한 것을 죄(sin, 단수)라고 하고 위 치를 이탈한 사람의 외부적인 행위를 죄들(sins, 복수)이라고 한다. 예를 들어 군인이 자기 위치를 이탈하여 탈영했다고 하면 그것이 죄고 그 군인 이 하는 행위는 자동적으로 죄들이 되는 것이다. 그는 자신의 위치에서 군 인으로서 합당한 일을 해야 적법한 것인데 탈영을 하면 자신이 하는 모든 행위는 불법이 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인류의 문제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은 인류의 역사를 보면 왕들은 스 스로를 신이라고 칭하였으나 성경은 그들을 짐승이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왜 사람들이 신들이 되고 싶어 하고 사람이 죽 는 것을 불완전하다고 생각하는지를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세상의 문제점
88 6. 죄란 무엇인가? 은 무엇인가? 사탄에게 속아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깊게 속아 있기 때문 에 무엇에 속아 있는지 모르고 산다는 것이다. 무엇에 속아있는가? 사람 이 신이 될 수 있다는 거짓말에 속아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람 이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신 과 같은 사람으로서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될 수 없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다. 그런데 흙에 다른 씨가 뿌려져 있으면 하나님께서 어떻게 씨를 뿌릴 수 있겠는가? 하나님께서 씨 를 뿌릴 곳이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다른 씨가 뿌려져 있는 밭-사람은 갈아 엎어져 심판을 받아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바로 아담 안에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갈아 엎어져 심 판을 받았다. 우리는 단지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을 은혜로, 우리에 대한 혜택 정도로만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게 아는 것은 너무 낮은 수준이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이라고 하였다(고전1:24) 그리스도의 죽음 은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 모든 부정적인 것과 긍 정적인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악도 죽어 야 하지만 선도 죽어야 한다. 선과 악은 한 뿌리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니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로. 가정과 같은 곳 이다. 왜 이혼을 하는가? 선악과 때문이다. 왜 싸우는가? 선악과 때문이다. 인류의 역사는 선과 악의 대결이다. 예수님은 이 세계를 종결하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열어 놓으셨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새로운 세계를 여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서 정해 놓은 죽음을 통한 경륜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비밀한 경륜이 여기에 들어 있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위치로 창조되었고, 천사는 종의 위치로 창조 되었기 때문에 죄란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을 말 한다. 그래서 하나님은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왜 타락한
89 6. 죄란 무엇인가? 아담에게 이 질문을 하시는가? 이 말씀에서 우리는 강한 빛을 받아야한다. 이 질문에 대한 영적인 조명을 받아드리지 못하면 문제가 심각해진다. 왜 냐하면 이것이 인류의 문제를 해결하는 근원이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 그리스도인들은 가련하게도 하나님의 이 질문에 아무런 빛을 받지 못하고 있다. 그러니 죄가 무엇인지, 인류의 문제가 무엇인지 모른다. 어쩌면 이 질문을 이해하지 못하면 우리의 믿음은 뿌리가 없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 는 뿌리 없는 믿음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죄를 말하지만 죄가 무엇인지, 구속을 말하지만 구속이 무엇인지 모른다. 이 질문은 하나님께서 타락한 인생에게 하시는 영원한 질문이다. 하나님은 우리의 위치, 곧 격을 묻고 계시는 것이다. 격을 이탈한 인생, 곧 아버지 와 아들의 노선에서 종의 노선으로 이탈한 인생들의 속성은 항상 내가 무 엇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상속 받으리이까? (마19:16, 막10:17, 눅 18:18, 행16:30) 하면서 행위적 관점에서 하나님께 접근한다. 선악과를 먹은 인생의 속성은 종의 근성, 노예 근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즉 하 나님의 아들로 거듭나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로 거듭났다는 것이다. 종의 아들이 된 것이다. 그래서 갈라디아서에서는 노예 여자에게서 난 자와 자 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갈4:22) 이 말은 선악의 지식 세계와 생명의 세계를 대별하고 있다. 생명의 세계와 선악의 지식세 계, 곧 율법의 세계는 서로 차원이 다른 세계다.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늘 모든 문제를 옳으냐, 그르냐, 또는 선하냐, 악하 냐의 관점에서 접근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는 선한 것도 아니 고 악한 것도 아니다. 다른 차원의 세계다. 독수리와 물고기가 있다면 둘 중에 어느 쪽이 더 능력이 있고 더 우월한 이런 차원이 아니라 독수리의 세계와 물고기의 세계는 다르다는 것이다. 처음 창조된 흙-사람은 악한 것도 선한 것도 아니었다. 무엇을 심으면 심는 대로 그것을 발아하여 열매 를 맺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흙-사람이 생명나 무의 열매를 먹고 거듭나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는 생명의 세계를
90 6. 죄란 무엇인가? 목표로 이 세상을 창조했는데 세상은 사탄으로 말미암아 흙-사람은 선악 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세상이 선악 의 지식의 세계라면 교회는 생명의 세계다.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 다. 예수님은 여자가 낳은 자 가운데 침례자 요한보다 더 큰 자가 없다고 하셨다. 그런데 하나님의 왕국에서는 가장 작은 자가 침례자 요한보다 크 다 (눅7:28) 라고 말씀하셨다. 그러니까 이것은 선악의 문제가 아니라 차원 이 다른 세계라는 것이다. 아담이 가인과 아벨을 낳았다 라는 말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 악의 대표인 가인과 선의 대표인 아벨을 낳았다는 의미다. 가인 따로 아벨 따로가 아니 고 한 뿌리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가인과 아벨의 대 결의 역사이다. 어떤 때는 아벨이 승리하고 어떤 때는 가인이 승리하지만 결국 한 뿌리이기 때문에 결판이 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아담의 세계, 즉 가인과 아벨의 선악의 세계가 완전히 없어져야 하는데 그렇게 될 수 없다 는 것이 세상의 문제다. 왜냐하면 선이 악을 이기더라도 세상의 문제가 해 결되려면 선도 없어져야 하는데 어느 한 쪽은 계속 살아 있기 때문에 해결 의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현 세상은 희망이 없다는 것이다. 지금 여당과 야당도 타락한 아담 의 대표들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런 세계로는 하나님의 나 라가 안 되기 때문에 이러한 세계를 종결하고 새로운 생명의 세계를 여시 려고 오신 것이다. 차원이 다른 것이다. 곧 위치가 다르다는 것이다. 그러 므로 죄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하나님 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면 구원이란 무엇인가? 하나님이 정 해주신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천당 가는 것을 구원이라고 생각하는데 구원의 정확한 개념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 하나 님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다. 장소적 개념이 아니다. 창조자의 목적 안으로 들어 온 것이 구원이다. 우리는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 이
91 6. 죄란 무엇인가? 렇게 단순하게 생각하지만 성경의 관점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목적과 관계없이 믿으면 구원이 아닌 것이다. 지금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명의 나라인 하나님 나라를 선악의 관 점에서 보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성경은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고 생명 노선 안에 있는 사람들에 대한 기록이다. 생 명의 관계에서는 선악과, 곧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다. 그런데 문제는 이런 생명의 세계를 율법적인 관점에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고 구원을 받았고 새로운 생명을 받았다고 하는데 결국은 나를 얽어매는 법은 율법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성경은 우리가 율법보다 상위법인 생명의 성령 의 법 아래 있다는 것이다.(롬8:2) 우리는 다른 세계, 곧 생명의 세계에 와 있다.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서는 다섯 여자가 나온다. 이 여자들은 율 법의 관점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할 대상이다. 그런데 생명의 관점에서는 전 혀 문제가 없다. 그렇다고 악을 행하라고 하는 것이 문제가 없다는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더 중요한 생명의 세계가 있다는 것 이다
92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사람의 근본은 먹어야 사는 존재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은 외부의 공급 없이 살 수가 없 다.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이것이 생명의 세계에서 살고 있는 피조물의 근본이다. 지구 위에 있는 모든 피조물은 스스로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사람도 육적이든 영적이든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다. 또 안 먹어도 죽지만 먹지 말아야할 것을 먹어도 죽는다. 지구상에 존 재하는 생물은 다 이렇게 되어 있다. 사람의 양식은 육신적 생명을 위한 양식과 영적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 구 분되어 있다.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마4:4) 라는 말씀도 사람에게 는 육적인 양식과 영적인 양식이 있으며 사람은 육적이든 영적이든 외부의 공급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스스로 자가 발전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육적으로는 빵을 먹어야 살고 영적으로는 하나님 말씀을 먹어야 산다는 것이다. 영생하는 존재라면 먹을 필요가 없 다.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창조되었을 때 영생하는 존재 로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우선 육신적 양식을 주신 다음 영적 양식을 주셨다. 사 람은 육신으로 창조되었다.(창2:24) 그래서 성경의 원칙은 항상 육이 먼저 고 영이 나중이다. 그러나 영에 속한 것이 첫 번째가 아니요, 본성에 속한 것이 첫 번째며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라. (고전15:45) 사람은 먼저 육에 속한 몸을 입은 다음 영에 속한 몸을 입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어 차피 사람은 한 번은 바뀌어져야 할 존재라는 것이다.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육이 먼저고 그 뒤에 영에 속한 것이 오는 것이 아니라 죄와 관계
93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없이 육적인 몸에서 영적인 몸으로 바꾸어지도록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 다. 흙에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도록 운명 지어졌다는 것이다. 흙이란 육 에 속한 것이고 나중에 육이 죽고 부활하면 이것이 하나님의 열매로 영에 속한 것이 된다. 그러면 왜 사람을 처음부터 천사처럼 영으로 창조하시지 않고 흙-육신으 로 창조하셨는가?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사람 안에 하나님 자신 곧 생명 을 넣어주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그런데 생명 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에 사람은 흙으로 먼저 만들 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단순히 죽지 않는 것이라면 하 나님께서 사람도 죽지 않는 천사처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한 생명이란 단순히 죽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지 않고 오직 하나님의 생명만을 영원한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먼저 흙으로 만들어질 수밖 에 없는 이유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간절히 원하신다. 흙-사람이 있어야만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가 달성되기 때문이다. 사람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그래 서 하나님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이미 창세기 1장 29절에서 육신의 양식 을 정해 주셨다. 씨 맺는 모든 채소와 속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를 가진 모든 나무를 너희에게 주었노니 그것이 너희에게 먹을 것이 되리라. (창 1:29) 이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육신의 생존을 위해 먹어야 사는 존재라 는 것을 증명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원히 살도록 창조되었 다면 왜 하나님께서 육신의 생존을 위한 양식을 주시겠는가? 또 일부 사람 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사람이 처음에 영생하게 되어 있는데 죄가 들어온 후 육신적 죽음이 왔다면 처음부터 육신의 양식을 주실 필요가 없을 것이 다. 죄가 들어 온 이후에 육신의 생명의 연장을 위해 육신적 양식을 주시 지 왜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육신의 양식을 주시겠는가?
94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그리고 영적생명의 양식으로는 창세기 2장에서 선악과를 제외한 모든 나 무의 열매와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셨다. 이 양식은 분명히 영적인 생명을 위한 양식이다. 왜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 제시하는 생명나무의 열매가 육 신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라면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생명나 무의 열매를 먹지 못하도록 막을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비록 선악과를 먹 어 육신적 죽음이 왔더라도 육신적 생명의 연장을 위해서는 생명나무의 열 매를 먹어야 하는 것 아니겠는가? 그런데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타락한 후 에도 여전히 육신적 생명의 양식을 위해서 창세기 1장 29절과 동일하게 채소를 먹으라고 하셨다.(창3:18) 그러므로 창세기 2장에서 제시하는 생명 나무의 열매는 영적생명을 위한 양식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선악과를 먹 은 것과 육신적 죽음과는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이다. 만일 선악과를 먹어 육신적 죽음이 왔다면 성경말씀대로 아담은 선악과를 먹은 바로 그 날 안 에(in the day) 죽어야 했다. 그런데 육신은 죽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 것은 육신적 생명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너무도 단순하게 알 수 있다. 분명히 창세기 2장 17절에서 그 날 안에(in the day) 라고 하나 님께 분명히 말씀하셨음에도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그 날로 부터 육신적 죽음이 왔다고 해석하는 것은 너무도 단순하고 쉬운 하나님의 말씀을 작위 적으로 왜곡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선악과를 먹고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은 아담의 깊은 속성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의미다. 아담이 선악 과를 먹은 그날에 육체의 생명이 죽은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 어졌다는 의미다. 지구위에 모든 생물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 이다. 내가 어떤 음식을 먹으면 그 음식과 나는 연합되는 것이다. 이 육적인 생명의 원칙은 영적인 생명의 원리에도 동일하게 적용된다. 예 수님을 믿는다 할 때도 예수님을 종교적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다. 그래 서 예수님을 믿는다 할 때도 성경은 believe in him, 또는 believe on
95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him 이라 하면서 예수님을 목적격 사용하지 않고 그분 앞에 전치사 in 또 는 on을 사용하면서 연합을 나타내고 있다. 생명의 원칙은 먹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 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 (요6:54) 하신 것이다. 우리 는 통상 예수님을 믿으라고 하니까 예수님을 종교적 대상으로 믿는 것으로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종교적 대상으로 믿는 것이 아니고 먹는 것이다. 창세기 2장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라고 했고, 이스라엘 민족은 출 애굽 당시에 예수님의 예표인 유월절 어린양을 먹었고(출12:11) 광야에서 는 예수님의 예표인 만나와 반석의 물을 먹었다. 율법의 제사의식에서도 제물은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제사장과 드린 자가 함께 먹었다. 즉 하나님과 사람이 함께 예수 그리스도를 먹었다는 의미다. 사람은 육적이든 영적이든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또 먹지 말아야 할 것을 먹어 도 죽는다. 지구상에 있는 모든 생물은 먹어야 사는 존재지 스스로 존재하 는 자가 아니다. 이것은 대자연의 진리다. 하나님은 만물을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과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만이 이 대자연 의 생명의 원리에 벗어나 원래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선악과를 먹어 육 체의 죽음이 왔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은 씨를 땅에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이 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 사망은 우리가 단순하게 생각하는 육체적 생명과 사 망이 아니다. 생명이란 씨와 사망이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만물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 다.(롬1:20) 하나님의 생명의 법칙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개념이 다. 즉 씨-하나님이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둔다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사탄도 영이기 때문에 씨다. 그래서 자
96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신의 열매를 거두기 위해서 자신의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둔다. 씨를 뿌리 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원칙은 만유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식물이나 동물이나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원칙이 하나님 과 사람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사탄과 사람 사이에도 동일하게 적용 된다. 하나님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추수하는 과정 안에 있으면 생명 노선 안에 있는 것이고 사탄이 씨를 뿌리고 열매를 추수하는 과정 안에 있으면 사망 노선 안에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 히 육신이 살고 죽는 것에 있지 아니하고 생명의 과정과 사망의 과정이라 는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 두 과정 안에서 일부 과정을 생명이다, 사망이 다, 라고 정의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생명 노선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생명이고 사망 노선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사망이다. 예를 들어 생명 노선 안에서는 육신이 죽더라도 생명이고 사망 노선 안에서는 부활하더라도 사 망이다. 사망 노선 안에서는 어차피 모든 과정이 하나님과 분리되어 있는 것이다. 이것을 분명히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부활도 의로운 자의 부활 이 있고 불의한 자의 부활이 있듯이 육체적 죽음도 의로운 자의 죽음과 불 의한 자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마가복음 4장 26~29절에서 예수님은 하 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과 같다고 말씀하신다.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 같 으니 그가 밤낮으로 자고 깨고 할 때에 그 씨가 돋아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 니 처음에는 잎사귀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뒤에는 이삭 안의 알찬 곡식 이라. 그러나 열매가 맺히면 그가 즉시 낫을 대나니 이는 수확할 때가 이 르렀기 때문이라.(막4:26~29) 곧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씨가 뿌려질 토양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자신을 씨에 비유하고 사람을 흙-밭으로 비유한 것은 우리가 잘 아는 씨 뿌리는 자의 비유(마13:1~9, 막4:1~9, 눅8:4~8) 등에서도 예수님이 말씀하셨다
97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성경은 일관되게 하나님의 왕국을 씨와 땅, 열매의 개념으로 비유하고 있 다. 여기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씨란 땅속에 들어가 썩어져야 생명 을 발아한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 연결되는 것이다. 이것이 씨-생명의 신 비다. 죽음이 없으면 열매-부활이 없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들 은 죽음을 부정적으로 생각하고 죄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씨는 흙속에 들어가서 썩어져야 생명이 태어난다는 것이 다. 모든 생물은 죽으면 썩어서 한줌의 재로 돌아가지만 유독 씨만은 썩을 지라도 그 안에서 새로운 생명이 나온다. 오히려 썩은 한 알의 씨앗은 더 욱더 많은 열매를 맺게 된다.(요12:24) 이것이 씨가 가지는 특성이며 하나 님의 왕국의 비밀이다. 예수님께서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 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이 말씀은 단지 예수님이 우리의 대속을 위해 죽으셨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예수님의 죽음에는 두 가지 면이 있다. 대속을 위한 희생물과 생명의 연합 을 위한 헌물이라는 부분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 (히10:5) 라는 말씀은 예수님 의 죽음의 의미를 잘 나타내고 있는 말씀이다. 구약에서 희생물과 헌물은 예수님의 죽으심의 모형이다. 신약에 와서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이신 예수 님이 오셨기에 더 이상 필요치 않다는 것이다. 다음 장에서 자세히 살펴보겠지만 사람은 원래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 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이 법리적인 것이라면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해 유기적인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헌물로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 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에 태워지는 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이 없이는 영원한 생명-부활이 없는 것이다. 단지 예 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면 제단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외부적인 것이고 법리적인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
98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로 창조되었는데 죄로 인해 장애물이 나타난 것이다. 이 장애물 제거를 위 해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 수학적으로 두 번의 죽음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이 문제를 하나님께서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희생물과 헌물의 공통 점은 죽음이다. 희생물은 피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고(레17:11) 헌물은 하나 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내놓으신 대책이 죽음 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킨 것이다. 희생물로만 드려진다면 불로 태울 필요가 없지만 헌물이 되기 위해서는 희생물도 태워 져져야 한다. 그래서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 새를 내는 헌물 (레1:9) 이라고 하면서 항상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그러므로 예수님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죽으신 것 이 아니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로도 죽으셨다는 것을 알아 야 한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 근원적으로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이것 을 거부하고 사탄에게 속아 신들과 같이 되려고 했다. 흙이 씨가 되려고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흙은 결코 씨가 될 수 없다는 것이다. 이것을 보여 준 것이 십자가다. 인생의 진실이 드러난 자리가 십자가다. 예수님은 거기 서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이 사람을 보고 흙-인생 은 결코 씨-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그 사람이 진실한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참사람이 들어난 자리다. 거기에는 불 교도 없고 기독교도 없다. 오직 흙-참 사람만 남은 자리다. 이 자리가 하 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정확한 자리다. 선악과를 먹고 신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속성은 본능적으로 이 자리를 거부한다. 그러나 이 자리가 하나 님께서 영관과 존귀로 관을 씌운 자리다.(시8:1) 예수를 믿는다함은 바로 이 자리가 영광스럽게 보여졌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어서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께서 특별히 허락해서 죽으셨다는 말도 안되는
99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논리는 무엇이냐는 것이다. 십자가란 사탄의 밭이었던 아담이 하나님의 밭이 되도록 갈아엎어진 것이 다.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도록 원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어차피 인생은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가 심겨질 수 있도록 갈아엎어져야 한다. 살 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 15:50). 하나님의 목표는 육이 아니고 영이다. 영이 생명이고 열매이기 때 문이다. 인생은 흙으로 지어졌기에 죄가 없어도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경륜 과 목적을 위해 거듭나야 되는 것이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 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아담은 무죄하였지 만 사탄에게 속아 사탄의 밭이 되었다. 고린전서 15장 36절에서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겠고 이 말은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는 말이 아니다. 죄 문제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되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뿌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인생은 자연과 하나다. 자연도 피조물이고 사람도 피조물이다. 생명의 원리는 똑 같다. 근원적으로 인생은 죽지 아니하면 부활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현재 예수님을 믿고 거듭난 것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온 것이다. 우리가 사탄의 밭에서 하나님의 밭으로 갈아엎어졌기 때문 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난 것이다. 우리가 죄가 있다면 어떻게 하나 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날 수 있는가? 우리가 거듭났음에도 불구하고 우리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는 생각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관점이 아니 다. 누가 무슨 일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자들을 고소하리요? 의롭다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신 분은 그리스도시오, 참으로 다시 일어나신 분도 그리스도시니 그분께서는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또한 우리를 위해 중보하시느니라.(롬8:33~34)
100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흙-육신 안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 듭났다. 흙은 자체는 생명이 없지만 씨가 들어와 한 몸이 된다. 이것이 흙 의 신비다. 그런데 흙-육신 안에 들어온 씨는 열매가 아니기 때문에 열매 를 거두기 위해서는 뿌려져야 한다. 너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또 네가 뿌리는 것을 말하건데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밀 이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뻐하시는 대 로 그것에게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을 주시느니 라.(고전15:36~38) 여기서 보면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씨를 뿌린다고 되어 있다. 씨를 뿌려야 만 열매를 거둘 수 있기 때문이다. 우리 몸은 뿌려보았자 씨가 아니기 때 문에 열매가 없다. 그러면 우리 몸은 씨가 아닌데 씨를 뿌린다는 말이 무 슨 의미인가? 거듭난 사람 안에는 하나님의 씨가 들어 있다는 것이다. 이 씨를 뿌린다는 것이다. 우리 안에 있는 것은 씨지 열매가 아니다. 그래서 이 씨를 뿌리면 하나님께서 그 씨에 맞는 영적인 부활의 몸-열매를 주신 다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 몸은 안 뿌리는가? 아니다. 결국 우리 몸도 뿌 려져야 한다. 왜냐하면 흙과 씨는 한 몸이기 때문이다. 흙-육신도 씨와 한 몸이 되어 땅에 실질적으로 심겨져야 하는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분의 죽음과 같은 모양으로 심겼으면(planted) 또한 그분 의 부활과 같은 모양으로 되리라.(롬6:5) 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근원적으로 죄가 없더라도 땅에 심겨져야한다. 땅에 심겨지지 않으면 부활이 없다. 육신이 영생하게 되어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죽게 된 것이 아니고 육신은 어차피 씨와 한 몸이 되서 열매를 산 출하기 위해 심겨져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아담이 타락하자 맨 먼저 창 세기 3장 15절에서 여자의 씨, 곧 하나님의 씨를 약속하셨고 하나님 씨가
101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사탄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것이라고 하셨다. 그러므로 인생의 근원적 문 제는 씨 문제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씨를 받아야할 자가 사탄의 씨를 받았 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땅이지만 땅의 위치를 잃어버린 것이 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씨와 땅을 약속하셨고 이 씨와 땅은 예 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되었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땅으로 오셔서 씨- 하나님 앞에 땅위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시고 부활하심으로 영-씨가 되신 것이다.(고전 15:45) 예수님은 우리의 잃어버린 위치-땅을 찾아 주셨고 그리고 씨-생명을 주셨다. 우리 인생이 한 것은 아무것도 없다. 씨의 상징 은 한편에서는 죽음을 한편에서는 생명을 상징한다. 씨는 반드시 땅속에 들어가서 죽어야만 생명-열매를 맺을 수 있다. 그래서 흙-육신으로 창조 된 사람은 스스로는 생명이 없고 반드시 씨와 함께 한 몸이 되서 죽고 씨 와 함께 한 몸이 되서 살아나야 한다.(롬6:8) 만일 이제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죽었으면 또한 그분과 함께 살 줄을 믿 노니(롬6:8) 모든 생명은 상호 죽음을 통해 연합된다. 육체적 죽음이 죄 때문에 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부활에 대해서는 의로 운 자의 부활과 불의한 자의 부활은 구분하면서 사람의 육체적 죽음에 대 해서는 구분하지 않고 무조건 육체적 죽음은 죄 때문에 왔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모든 생명의 연합은 상호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인생에게 육체적 죽음이 없다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도 없는 것이다. 인생은 하나님 앞 에 헌물로서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죽음을 통한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을 거부하고 죽지 않는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은 것이다. 왜 생명의 연합은 죽음을 통해 연결되는가? 생물과 생물간의 생명의 연합
102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은 다른 한 생물이 일방에게 먹힘으로 이루어진다. 예를 들어 소와 사람은 어떻게 생명의 연합이 되는가? 소가 사람에게 먹힘으로 생명의 연합이 되 는 것이다. 먹힌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영생을 얻는가? 우리도 하나님께 먹혀야 되는 것이다.(고후5:4) 그래서 죽음이 필요한 것 이다. 단지 죄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필요한 것이 아니고 근원적으로 우리 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성경은 이것을 하나님의 불에 의해 제물이 태워지는 것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번제헌물과 희생물들을 태워버렸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 (대하7:1)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생명의 연합이 되 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그리스도인 들은 죄 문제만 해결되면 영생을 얻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죄라는 것은 법리적인 문제지만 생명은 유기적인 문제다. 무죄가 영생은 아니다. 무죄는 단지 씨-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 는 흙-사람의 위치다. 이것을 시청각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 율법아래 서의 제사 의식이다.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법리적으로 피 흘림의 희 생물이 필요했지만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사람은 하나님께 헌물 이 되어야 했다. 그런데 모든 헌물은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인 희생물인 동시에 유기적인 헌물이 된 것이다. 만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단지 우리 인생들의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물에만 국한되고 하나님 앞에 헌물이 될 수 없었다면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은 없는 것이다. 즉 부활은 없는 것이다. 단지 무죄 상태는 하 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런데 법리 적인 희생물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인 헌물이 될 수 있 는 것은 죽음이라는 공통분모가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희생 물과 헌물을 동일시하여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 운 냄새를 내는 헌물 (레1:9)이라고 하면서 희생물이 나올 때 마다 헌물이
103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따라다닌다.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하나님의 생명과 연합이 되는 것이다. 이것을 향해 고린도전서에는 십자가를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고전 1:24)라고 하는 것이다. 죄를 용서받기 위해서는 제단주위에 희생물의 피 뿌림이 필요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헌물은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졌다. 사람은 성전 바깥뜰에서 들어와 번제단으로 가고 하나님은 지성소로부터 나와 번제단에서 사람을 만난다. 상호 생명의 연합이 번제단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 가의 죽음이 단지 인생의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생각한다 면 이것은 반 만 아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은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모든 생명의 연합은 상호 죽음을 통해서 연결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죄 이 전에 하나님 앞에 근원적으로 헌물로 창조된 것이다. 레위기의 제사의식에 서 죄와 관계없이 드리는 유일한 헌물이 음식헌물이다.(레2:1~16) 사람은 죄 이전에도 하나님께 대하여 음식헌물로 창조된 것을 알 수 있다.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사람이 하나님의 음식으로 드 려지려면 먼저 죽어서 요리가 되어야 한다. 우리의 인격이 고운가루로 갈 아져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음식으로 표현하고 있 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먹힘으로 영원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고 후5:4) 생명노선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그 래서 예수님은 생명 노선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죽지 않았고 잔다 (마:9:24, 막5:39, 눅8:52) 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요14:6) 예수님은 자신이 생명의 길이라고 말씀하신다. 그러면 어떻게 예수님이 걸 어가신 길이 생명의 길인가? 하는 문제이다. 쉽게 말하면 예수님 자신이
104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십자가에 죽으시고 살으신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단순히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생명이다 이렇게 알면 종교가 되는 것 이다. 또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지 않을 분인데 우리의 죄를 위해 단순히 죽으셨다 이렇게 알아도 안 된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육신을 입고 계셨지만 죄 없으신 분이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 각하는 도덕적인 죄의 관념을 가지고 죄라는 의미를 생각한다. 그러나 성 경이 말하는 죄는 우리가 생각하는 죄의 관념과 다르다. 죄라는 것은 하나 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차이다. 그러니까 예수님 과 아담의 차이는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 이란 끝까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있는 것이고 사망의 길이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사람이고 예수님은 하 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심어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 다시 태어나는 것 이다. 그런데 이를 위해 흙-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 보았지만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사람은 성전 바깥뜰에서 번제 단으로 가서 하나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하고 하나님도 지성소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서 사람과 연합되어야 한다. 번제단은 태워지는 곳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 사람도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도 죽음을 통해 사람을 만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사람인 예수님에게서 증명된 것이다. 예 수님은 사람으로서 성전 바깥뜰에서 번제단으로 가서 죄를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로서 드려지셨으며, 하나님으로서 지 성소로부터 나와 번제단으로 오셨다. 바로 번제단, 곧 십자가에서 생명의 연합이 이루어진 것이다. 단지 예수님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만이 되신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사람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 곧
105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재-흙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흙은 생명이 없다. 헌물은 죽음으 로서 드려지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위치다. 이 위치에 있 는 자에게만 하나님은 씨를 주실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어떠한 상황에 처하던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신성한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창3:6) 즉 사람이 천사가 되고 싶었던 것이고 아들이 종 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선악과를 먹은 후 두려워 나무 뒤에 숨자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하시면서 인간의 근본적 위치 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과 생명의 관계를 가진 아들이 되어야 할 자 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사람에게는 사망의 길이다. 사망이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창세 기 3장 19절에서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라는 말씀도 사 람이 저주를 받아 육체적 죽음 이 온 것이 아니라 너는 흙이면서 어찌하 여 흙의 위치를 이탈하려고 하느냐, 네가 아무리 흙의 위치를 이탈하려고 하지만 결국 네 본질은 흙이다 라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 사람이 사탄의 자식을 생산하는 자로 전락한 것이다. 그 렇다고 사람이 흙이라는 본질이 변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결국 흙은 흙 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이란 하나님께서 피조물에게 정해주신 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그 길을 이탈하면 사망의 길이다. 육은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다.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라는 육신으로 창조되었지 영적존재로 창조되지 않았 다. 우리의 몸은 육신적 몸이지 천사처럼 영적인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늘에 속한 몸이 아니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40절에 하늘에 있 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의 영광과 땅
106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 했다. 하늘에 속한 몸이 있고 땅 에 속한 몸이 있다. 사람은 1차적으로 땅에 속한 몸을 입고 2차적으로 천 사와 같이 하늘에 속한 몸을 입어야 할 존재다.(눅20:36) 살과 피는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육은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이다. 그래서 육은 반드시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하나 님의 목표는 육-땅에서 속한 것에 있지 않고 영-하늘에 속한 것이다. 그 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첫째 것을 폐하고 둘째 것을 세우는 것이 다.(히10:9) 첫째 것은 아무리 좋아도 육이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담 은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기 때문이다.(롬5:14) 하나님의 목표는 옛 언약에 있지 않고 새언약에 있다. 첫째 것은 육에 속한 것이고 둘째 것은 영에 속 한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이 목표가 아니고 예수 가 그리스도가 되는 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다. 성경은 하나님께서 십자가 에 못 박은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다고 말한다(행2:26) 예수님 은 물론 영원 전부터 주와 그리스도다. 그러나 역사 안에서 명실상부하게 그분은 죽으심과 살으심을 통해서 주와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육에서 난 것은 어차피 육이고 성령에게 난 것이 영이요 생명이기 때문이다.(요 3:6) 우리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기 때 문이다. 생명은 연결(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사람이 썩어 없어질 육신에서 영-생명 이 되는 것이다. 이를 위해 사람-육은 하나님-영 안으로 삼켜져야 한다. (고후5:4) 즉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영이시 고 사람은 육신이다. 이 차이는 기름과 물의 차이보다 크고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 그래서 중간 연결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영원한 생명이 란 관계적 생명이다. 생명 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107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생명은 연합, 곧 연결을 통해 이어진다는 것이다. 만물이 다 이렇게 되어있다. 식물은 땅에 뿌리를 박고 거기서 주는 영양공 급을 받고 살아간다. 그런데 그 영양공급이 바로 그 식물의 생명이 되지 않는다. 뿌리를 통해 들어가서 여러 가지 과정을 거쳐 그 식물의 생명이 되는 것이다. 동물과 사람도 마찬가지다. 밥이 바로 내 생명이 되지 않는 다. 내가 밥을 먹어 소화기관이라는 중간과정을 거쳐 내 피가 되고 살이 된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은 어디에 있는지 보이지 않는다. 우리가 살아있 다는 것도 우리의 보이지 않는 생명에 세포가 연결되어 있으면 사는 것이 고 끊어지면 죽는 것이다. 어떤 화학적 물리적 작용도 가만히 있는데 일어 나지 않고 중간 연결체가 있어야 반응이 일어나는 것이다. 원자는 양성자 와 중성자, 음전자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양성자와 음전자는 스스로 결 합되어 있는 것이 아니고 중성자를 통해 양성자와 음전자가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이렇듯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결자 이분이 예수 그리스도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이지 아니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느니라.(롬1:20) 하셨다.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은 무엇인가? 바로 생명이다. 하나님의 권능과 신격을 안다는 것은 생명을 안다는 것이다. 생명을 안다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안다는 것 이고 그분의 경륜을 안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만물을 통해 우리에게 궁극적으로 알리고자 하는 것은 그분의 경륜의 원리와 목표이다. 그분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바로 생명이다. 그분 자신 곧 생명을 알라는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피조물들에게 자신 의 어떠함을 알리시는 수단은 단지 성경이라는 특수계시만이 계시가 아니 다. 만물을 통한 자연계시도 하나님의 계시다. 자연이 봄, 여름, 가을, 겨울 이 있듯이 사람에게도 똑 같다. 사람만이 특별하다고 생각하는 것은 오만 이다. 사람이 특별하다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있다는 것이고 그 말씀을
108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받아들여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성육신의 가능성이 있는 피조물이라는 것이 다. 기독교인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생 각한다. 그러나 다른 것은 몰라도 생명은 그렇게 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구별해야 한다. 왜냐하면 생 명은 그분 자신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생명으로 오신 것이고 새 인류의 씨-조상으로 오신 것이다.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 다. 그러므로 그분 자신이 일하시는 원리 곧 생명의 원리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만물 안에 있는 생명의 원리를 통해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리고자 하는 것이다. 그래서 만물을 통해 하나님의 신격과 권능을 알라는 것이다. 그저 만물을 통해 하나님은 존재하고 하나님은 단지 종교적으로 전능하시 다는 것을 알리시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우주 만물은 이러한 하나님의 작 품으로 생명이신 하나님의 어떠함을 표현하고 있고 하나님과 연결되어 있 다. 만일 사람만이 이 대자연의 원리에서 벗어나 있다면 사람은 하나님이 창조하지 않은 피조물이며 하나님과 관계없는 피조물이 된다. 하나님의 나 라는 생명의 나라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 자신-곧 생명을 사 람에 주시고자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간은 하나님께서 알려주시는 계시 를 통해 생명의 원리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이 전능하시다고 해서 금 나와 라 뚝딱하는 식으로 생명을 주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이면 무엇하러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시겠는가? 전능하신 능력으로 죄를 사해 주면 되지 않겠는가? 지금 불신자들이 말하는 왜 하나님은 전능하시 다면서 아담이 죄를 짓게 만들었느냐 하는 논리와 같다. 그러나 생명은 만 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받을 피조 물로서 흙으로 만들어 진 것이다. 성경은 하나님-생명의 책이고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나라다. 생명은 지 식을 통해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은 우주 불변의 법칙
109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이다. 생명이 만드는 것이라면 우리의 구원도 행위 구원이 된다. 사탄의 마지막 궤계는 무엇인가? 지식을 통해 생명을 모조하는 것이다. 지금 세상 이 그렇게 가고 있다. 아담은 처음에 만들어진 존재지 낳음 받은 존재가 아니다. 아담은 생명나 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존재였지 처음부터 영생이 있던 존재가 아 니었다.(창3:22) 그래서 만들어진 사람은 자가 발전하는 것이 아니고 먹 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흙은 자체로는 생명이 없지만 씨가 들어와 흙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된다. 이것이 흙-사람의 신비다. 흙은 생명이 없지 만 생명과 연합하여 한 몸이 될 수 있는 유일한 물질이다. 여기에 사람의 탁월성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흙-사람은 무엇을 받아드리는 존재다. 받 아들여 생명을 산출하는 존재지 스스로 자가 발전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믿으라 는 말은 거의 없고 먹으라 는 말이 주를 이 루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구약에서 음식의 형태로 계시되고 있다. 구약 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 생명의 만나, 반석의 물, 제물 등으로 계시되었 고, 신약에 와서는 생명의 빵, 생명수로 계시되고 있다. 이것은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 못 박히신 한 인격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 인격만을 하나님께서 접수하신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인격에게만 하나님의 씨-생명을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아 담은 땅이지 씨가 아니다. 그런데 아담이 단지 땅이라면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사람이기 때문에 씨와 땅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창세기 1, 2장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하나님의 원 계시이다. 여기 서도 사람은 분명 한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예표되어 있다. 이것이 명확한 진리다. 창세기 2장 21절에서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이 잠들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에서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110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채우시며 주 하나님께서 남자에게 취한 그 갈비뼈로 여자를 만드시고 그 녀를 남자에게 데려오시니 라는 말씀이 있다. 아담은 여기서 인류의 대표 로서 부활생명의 예표인 이브를 죽음을 통해 산출하고 있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하나님의 창조의 목표는 누구인가? 이브 로 곧 교회다. 이것이 보여 주는 것은 사람은 한번은 죽고 부활생명을 산출해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첫 번째 창조로 완성되는 것이 아니라 두 번째 것으로 완성하신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 자신을 사람에게 주시려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기 때문에 한 번에 완성이 안 되는 것이다. 아담은 만들어진 위치에서 낳음 받은 위치로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다. 천사는 영적인 몸으로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피조물이 아니 다. 천사들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졌다면 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된다는 것이다. 물론 구약에서 그들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다.(창6:2, 욥1:6) 또 아담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렸다.(눅3:38) 그런데 우리는 성경이 말 하는 아들에 대해서 잠시 살펴 볼 필요가 있다. 예수님은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에게 천둥의 아들들 이라는 별명을 붙여 주셨다.(막3:17) 이것은 야고보가 진짜로 천둥의 아들이라는 의미가 아니고 그의 목소리가 천둥을 표현한다고 해서 붙여준 이름이다. 어둠의 아들, 빛의 아들 할 때도 그 것의 표현이라는 의미다. 그러니까 아들 이라는 말은 ~의 표현 이라는 의 미이다. 그러므로 구약에서 천사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는 것은 천사는 하나님의 생명으로 낳아진 아들이 아니라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표현 이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모든 만물은 사실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표 현, 형상이라고 할 수 있다. 히브리서 1장에 보면 그분께서 어느 때에 천사들 가운데 누구에게 너는 내 아들이라, 이 날 내가 너를 낳았도다, 하셨느냐? 또 다시 나는 그에 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냐?(히1:5) 했다
111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구약에서는 분명히 천사들을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했는데 여기서는 천사들 을 향해 하나님께서 너는 내가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천사는 낳은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으로 낳은 아들이 참 아 들이지 만들어진 아들은 참 아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단지 천사는 하나님 의 능력을 표현하는 피조물이라는 것이다. 만들어진 것에는 영생, 곧 하나님 의 생명이 없다. 하나님께서 낳은 아들만이 참 아들이라는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을 가진 피조물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창 조하실 수 있는 것이다. 아담은 만들어진 아들의 위치에서 낳음 받은 아들 의 위치로의 전환이 필요하다. 이를 위해서 죽음은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경 륜이다. 왜냐하면 옛 것을 끝내지 않고는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이 되지 않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잠자는 것이다. 성경은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에 대해 잠 잔다 로 표현하고 있다.(마 9:24, 마27:52, 막5:39, 눅8:52, 요11:11, 고전11:30, 15:18, 20, 살전 4:13, 14, 15, 5:7) 창세기 2장 21절에서의 아담은 인류와 그리스도 모두 를 예표한다. 이브가 예표하는 부활생명은 영원한 생명이다. 아담은 부활 생명을 산출하기 위해 죽음이 필요했다. 이것은 사람은 그리스도와 연합하 여 한번은 죽고 부활생명을 산출해야 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그리스도 안에서 한번은 죽고 거듭나야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은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 였지 영원한 생명이 없었다. 죄가 있을 때는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지만 죄가 없을 때는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왜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생명과 사람의 생명이 연합하려면 너무도 차이가 크기 때문에 죽 음이라는 공통지점에서 만나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 생명이 연합된 다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접촉점이 십자가라는 것이다. 하나
112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님은 지성소에 나와 번제단으로 나아가고 사람도 세상에서 번제단으로 가 야한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은 사람의 죄 문제 뿐만 아니라 죽 음의 문제도 해결하신 것이다. 성경 전체를 조망해 볼 때 하나님의 정하신 생명의 길은 다음과 같다. 생명노선은 1 죄가 들어오기 전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씨를 뿌리면 사람은 영적으로 다시 태어 남 죄가 들어 온 후 사탄의 씨가 뿌려진 흙-사람은 갈아엎어진 다음 하나님의 씨가 다시 뿌려져야 함, 즉, 예수님과 함께 죽고 함께 삶으로 영적으로 다시 태 어남(롬6:5) 2 육체적 죽음, 흙-육신은 흙으로 돌아감, 이것을 예수님은 죽지 않고 잔다 로 표현하심, 사람의 영과 혼이 육신으로부터 분리되어 혼이 천국 으로 감 3 하나님께서 열매를 거두심, 이것을 의로운 자의 부활이라고 함, 사람 의 육신은 영적인 몸으로 변화됨, 흙-육신이 아니고 영적인 몸-생명 으로 변화됨 4 최종적으로 새 예루살렘으로 가서 영원히 삶 사망노선은 1 씨-사탄이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림, 마귀의 자식으로 거듭남 2 육체적 죽음, 흙-육신은 흙으로 돌아감, 영은 하나님께로 가고 혼은 지 옥으로 감
113 7. 생명의 길 vs 사망의 길 3 사탄이 열매를 거둠, 이것을 불의한 자의 부활이라고 함, 이 몸도 영적 인 몸으로 죽을 수 없는 것임 4 최종적으로 둘째사망(불호수)으로 감 하나님의 씨를 받아 드리면 생명의 길로 가는 것이고 사탄의 씨를 받아 드 리면 사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떤 씨도 흙과 만나 발아하려면 그 씨는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한다. 죽음 안에서 생명의 접촉이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생명노선 안에서도 육체적 죽 음이 있는 것이고 사망노선 안에서도 육체적 죽음이 있는 것이다. 또 농부 이신 하나님은 씨를 흙에 뿌려 열매를 거두지 흙을 거두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성경에서 사망이란 말을 단순히 사망 노선 안에 있는 어떤 특정 지 점을 한정해서생각해서는 안된다. 물론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최종적으로 둘째 사망을 말하지만 사망열차를 타고 둘째사망이라는 종착역으로 향하 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영적사망, 첫째 사망, 둘째 사망이란 말을 구분 해서 사용하고 있지 않은 것이다. 그 열차를 타고 있으면 영적사망, 첫째 사망, 불의한의 자의 부활이라는 정거장을 거쳐 자동적으로 둘째 사망이라 는 종착역으로 가기 때문이다
114 8. 희생물과 헌물 8. 희생물과 헌물 희생물과 헌물은 동일시 됨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은 크게 희생물(sacrifice)과 헌물(offering)로 구분된다. 희생물은 죄에 대한 값을 치루기 위한 제물 이고 헌물은 하나님과 교통을 위한 제물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라 면 헌물은 생명의 교통을 위한 것으로 유기적인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 앞에 죄인으로서 희생물이고 그분과 사귐을 가져야 할 자로서 헌물이다. 그래서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말이 꼭 같이 따라다니고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 그러니까 인생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께 헌물로 지음 받았으나 죄로 인해 희생물이 추가된 것이다. 희생물은 반드시 피를 제 단의 주위에 뿌렸다. 이것은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 다. 성경을 살펴보면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 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니라.(레1:17) 하면서 한 가지 제물을 향해 희 생물인 동시에 헌물이라고 표현하고 있다. 이 말씀은 인생은 원래 죄 이 전에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되었으나 죄가 들어옴으로 희생물이 필요 했다는 것이다. 이 희생물과 헌물은 하나의 모형이고 실재는 예수 그리 스도다. 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시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셨나이다. (히10:5) 라는 말씀은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인 예 수 그리스도가 오심으로 모형은 필요 없다는 의미다. 인생의 근본적 위치는 번제헌물임 우리의 상식과 통념으로는 인생은 죄인이기 때문에 맨 먼저 죄로 인한 희 생물을 드리는 것이 우선인 것처럼 생각된다. 그런데 성경은 번제헌물이 맨 먼저 나오고 그 다음이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 헌물, 범법헌물 순이
115 8. 희생물과 헌물 다. 이 순서가 하나님께 헌물을 드리는 순서다. 하나님의 생각과 인생의 생각은 다르다. 인생은 늘 죄인이라 관념 때문에 인생은 희생물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다섯 가지 제물의 명칭이 ~헌물 이 아니고 ~희생물 이 되어야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인생이 죄를 지었다 하 더라도 인생의 근본은 헌물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원래 희생물로 창조하지 않고 헌물로 창조하셨다. 그런데 이 다섯 가지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모두 태워졌다. 헌물의 종류는 다섯 종류지만 모두 번제의 형태 로 드려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다섯 가지 헌물 중 번제헌물이 모든 헌 물의 기본이고 총체이다. 다른 네 가지 헌물은 이 번제헌물의 발전이고 다 른 각도에서 설명한 헌물이다. 레위기에 나오는 모든 헌물은 그리스도를 예표하는데 곧 이 헌물은 곧 나 자신을 의미한다. 이 헌물의 대표는 번제 헌물이다. 결국 인생의 근본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재, 곧 흙이다. 이것은 인생은 흙이라는 것을 예표하고, 생명이 없다는 것을 예표한다. 왜 모든 제물은 불로 태워졌나? 성경에서 태양은 하나님을 예표한다.(말4:2) 화덕같이 불태우는 날 (말 4:1), 불 호수(계21:14) 와 같이 큰 불은 심판을 상징하고 번제단과 같 이 작은 불은 생명을 예표한다. 결국 불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모든 희 생물과 헌물은 결국 불로 태워져 재가 되었다.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 다. 창세기 3장 24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타락하자 불 타는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셨다. 레위기에서는 모세와 아론이 성막에서 번제헌물을 드리자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 헌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와 갔다가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매 주 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고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헌물 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대고 엎
116 8. 희생물과 헌물 드렸더라. (레9:23~24) 열왕기상 18장에서도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희생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 온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 (왕상18:38~39) 하나님의 불이 핥아갔다는 것은 결국 그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는 뜻 이다. 소멸할 뿐만 아니라 삼켜 버렸는데, 그 삼켜버렸다는 말은 먹었다는 의미로 연합이 됐다는 뜻이다. 불로 삼켜져 버렸다는 것은 또한 받아졌다 는 의미다.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로 삼을 지니라 (레1:17) 한 것은 받아졌다. 는 말이다. 받아졌다 는 말은, 히브리어로 재가 된다 는 말 이 그 어원이다. 그리고 이 말의 어원이 기름으로 받는다 는 뜻이다. 기 름으로 받는다는 말은 향기롭다는 뜻이다. 하나님께 기름을 드린다는 것은 향기로운 냄새를 드리기 위한 것이다. 내가 헌물로서 재가 되고 향기로운 냄새가 되면 하나님께서 열납하신 것인데 이것은 결국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 을 나타낸다는 것이다. 받아졌다 하는 것이 단지 누구한테 물건을 주었더니 받았다 하는 뜻이면 아주 피상적인 것인데, 하나님이 사람을 받아드렸다, 그 제물을 받아드렸 다. 하는 뜻은 재가 된다는 뜻이다. 결국 사람의 근본적 위치는 하나님 앞 에 번제헌물로서 재가 되어야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된다는 그림을 보여 주고 있는 것이다. 또 솔로몬이 성전건축을 마치고 하나님께 번제헌물과 희생물을 드릴 때 하늘에서 불이 내려와 제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다.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부터 내려와 그 번제헌물과 희생물들을 태워버렸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 (대하7:1)
117 8. 희생물과 헌물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신4:24, 히12:29) 그래서 성경은 성령을 불의 혀 같다 (행2:3) 라고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하나님을 만나 는 것은 육과 영의 연합, 곧 흙-사람이 불-하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이것 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인생이 태워져야 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인생 은 하나님 앞에 재, 번제헌물이 되어야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사람 들은 통상 죄로 인한 희생물만 생각하고 죄 이전에 근원적으로 인생이 하 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은 생각하지 않는다. 그래서 단지 죄 때문에 인생에게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 람은 흙-사람으로서 불-하나님께 태워져 재가 됨으로서 영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연합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죄 이전에도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하셨다. 자고로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헌물로 드려지지 않았고 죽음으로서 드려진다. 아담은 왜 죄를 지었는가? 바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위 치, 곧 번제헌물의 위치를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라는 희생물을 통해 죄 문제를 해결하시고 그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켜 놓으신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24) 만약에 예수님이 단지 희생물에만 그친다면 우리에게 영생이 없다. 희생물은 단지 죄에 대한 심판이기 때문이 다. 또 단지 죄 문제만을 해결하기 위한 희생물이라면 불에 의해 태워질 필 요가 없다.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죄들의 용서, 곧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이 라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희생물은 다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 워져 재가 됨으로서 하나님께서 열납하시는 향기로운 헌물이 되어야만 하 는 것이다. 희생물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이 한 몸이 된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항상 불로 태우는 희생물, 곧 불로 예 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 (레1:9)이라고 하면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118 8. 희생물과 헌물 희생물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헌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께 삼켜지는 것이다. 풀은 소가 되기 위해 소에게 삼켜져야 한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짐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 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죄 이전에도 하나 님 앞에 헌물로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가 되어야만 영생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흙-육신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하나 님께 번제헌물로 드려짐으로 영생을 얻을 자였다. 우리가 영생을 얻으려면, 곧 우리가 하늘로 올라가려면 스스로 뛰어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 의 불에 태워져 연기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39) 하나님은 인생이 죄가 있기 때 문에 소멸시키시는 불이 아니라 죄가 있기 전에도 소멸시키는 불이다. 불 -하나님과 만나서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불-하나님은 용광로와 같다. 용광로 안에서는 쓸모 있는 쇠든 쓸모 없는 쇠든 모두 재창조되기 위해 녹여져야한다. 번제헌물 없이 우리는 하나님과 완전한 연합이 불가능 하다. 세상에서 보통 결혼이란 사람과 사람끼리 만나고 상대적 만남이므로 번제헌물 없이도 그냥 서로 적당하게 어느 선까지 서로 이해하고 양보해서 결혼이 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과 내가 결혼하려면, 서로가 이해하고 양보하고 이래서는 안 된다. 절대적인 관계이기 때문에 하나님이 좀 양보 하고 내가 좀 양보하고, 이래서 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나 사이는 절 대적인 관계이다. 내가 이기든가, 그분이 이기든가 둘 중에 하나이다. 그렇 지 않으면 평화가 오지 않는다. 그러므로 하나님과 우리와의 연합, 그것은 먹고 먹힘의 관계이다.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했다. 신약에서 와서도 예수님은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표현하셨고, 자신을 먹으라고 하셨다. 결국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 음을 통해 희생물이 되심으로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고 헌물이 되심으로 하 나님에게도 먹히시고 우리에게도 먹히심으로서 우리의 생명이 되신 것이 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께 연합되려면 먹히는 과정, 곧 번제헌물로서
119 8. 희생물과 헌물 반드시 하나님의 불에 반드시 태워지는 과정이 필요한 것이다. 완전한 죽 음이 우리에게 꼭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근본적으로 죄 이전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 다. 그런데 죄로 인하여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 이 두 제물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희생물도 죽어야 하고 헌물도 죽어야 한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여 받으시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십자가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예수님이 단순히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물이라면 이것은 법리적인 것에 그치고 유기 적인 생명의 연합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이 되셨 기에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십자가 사건으로 본 희생물과 헌물 십자가에서 희생물로 드려짐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막15:34) 예수님께서 큰 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마27:50, 막16:37) 성전의 제단에서 하나님께 드려진 제물이 희생물과 헌물이었듯이 십자가에 서 예수님의 죽으심이 어떻게 희생물과 헌물이 되었는가를 살펴보자. 사 복음서는 예수님을 각각 다른 관점에서 기록하고 있다. 마태는 왕으로서의 예수님, 마가는 의로운 종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리고 누가는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구속할 구속자이신 예수님을, 요한은 구속된 인류에게 생명 을 주시는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아담은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이 되고 싶었다. 신들이 되고 싶다는 것은 세상의 왕이 되고 싶다는 것이다. 그런데 신들이란 천사로서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종이다. 아담은 사람-아들의 위치에서 신-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아담은 아 들의 위치에서 왕이 되어야 하는데 종의 위치에서 왕이 되고자 했던 것이
120 8. 희생물과 헌물 다. 이 씨를 뿌린 결과의 열매가 창세기 6장에서 말하는 옛적의 강력한 자 곧 명성 있는 자들 (창6:4) 이고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말하는 세상 왕들이다. 그러나 아담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종은 결코 왕이 될 수 없기 때문이 다. 현재 세상에 있는 왕들은 하나님이 인정하지 않는 왕들이다. 그러므로 아담의 죄를 대속하려면 사악한 종의 신분인 가짜 왕은 심판받아야 한다. 왕과 종에게 적용되는 통치체계는 율법이다. 그러므로 가짜 왕을 대속하기 위해서는 진짜 왕이 율법에 의해 희생물로 심판받아야 했다. 예수님의 공 식적인 죄목은 유대인들의 왕이라는 것이었다.(마27:37, 막15:26, 눅 23:38) 그분의 죄명을 적은 글은 유대인들의 왕이라 기록되었더라.(막15:26) 마태와 마가가 본 예수님은 참된 왕과 의로운 종으로 오신 예수님이 사악한 종-가짜 왕을 대신해서 심판받으신 대속물(ransom)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 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대속물(ransom)이란 단어가 총 2번 나오는데 오직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 각각 1번씩 나온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 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마 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막10:45) 그래서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을 호칭할 때에 십자가 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아버지 라고 불렀지만 십자가에서 하나님을 아버지 라 부르지 못하고 하나님 이라고 불렀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마
121 8. 희생물과 헌물 27:46, 막15:34)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 예수님은 늘 하나님을 호칭할 때 아버지라고 불 렀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만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은 하 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모든 피조물은 자기 알든 모르든 하나님과 창조 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이 관계는 심판자와 심판받는 자라는 의미로 두렵 고 무서운 관계다. 그러나 하나님이 아버지가 된다면 율법이 작용되지 않 는 친밀한 사랑의 부자관계다. 그러므로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심판을 받으시게 되자 예수님은 창조주 앞에 피조물의 입장에 서신 것이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지만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희생물로서 심판받으셨다는 것이다. 즉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 하나님 앞에 서신 것이고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에서는 율법이 작용하면 그 누구도 율법의 심판에서 벗어날 자가 없다 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창조주 앞에 피조물로서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이 율법시스템은 아담의 죄로 인해 들어 온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이 율법을 끝내야 한다. 율법으로 의롭게 될 육체가 없기 때문이다.(롬 3:20) 그래서 율법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이 역설적으로 죄인들을 위해 율 법의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희생물로 인해 죄가 용서되었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표는 무죄가 아니다. 거듭나려면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될 수 있는 위 치로 구속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밭이다. 타락이란 하나님 의 밭이 되어야 할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었다는 것이고 심판이란 하나님 의 밭에 심겨진 가라지가 뽑혀진 것이다. 가라지가 뽑혀나간 것은 심판이 지 영생이 아니다. 가라지가 뽑혀진 밭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려면 가라 지는 모아서 불태워야 하고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도록 밭이 다시 정 비되어야 한다. 이게 구속이다. 음식헌물의 규례와 같이 곱게 갈아서 태워
122 8. 희생물과 헌물 져야 한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씨-생명을 뿌릴 수가 있다. 음식헌물도 일종의 번제헌물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먼저 구속이 되어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번제헌물이 사람의 본래 위치다. 십자가에서 번제헌물로 드려짐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고 이렇게 말씀하신 뒤에 숨을 거두니라.(눅23:46) 여기서 대반전이 일어난다. 나의 하나님이여 하시던 분이 갑자기 아버지 여 하시는 것이다. 율법에 의해 심판 받으실 때는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 습니까? 했지만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면서 다시 친밀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회복된다. 여러 가지 말이 있을 수 있지만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말은 내가 번제헌물이 된다는 말이다. 희생 물이 불에 타서 재가 돼서 번제헌물이 되었듯이 희생물로 드려졌던 예수님 이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었다는 의미다. 영이 된다는 말은 태워져서 재가 된다는 말이다. 사람은 본디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했다. 그 래서 이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번제헌물이 사람의 원래의 위치다. 그러 므로 마태와 마가에서는 대속물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고 누가는 구속자 로서의 예수님을 본 것이다. 사복음서 중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대속 물 이란 단어가 기록되어 있듯이 구속 이란 단어는 누가복음에만 기록되 어 있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 하시고 (눅 1:68) 마침 그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8)
123 8. 희생물과 헌물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위를 보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 속이 가까이 오고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21;28)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눅 24:21) 그러므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대속을 위해서는 희생물이 필요하고 구속 을 위해서는 헌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요한은 구속된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본 것이다. 그러니까 복음서의 결론은 요한복음이 다. 요한복음을 제외하고 공관복음서에는 예수님께서 영원한 생명을 주러 왔다고 구체적으로 기록된 곳이 없다. 오직 요한복음에만 예수님께서 자신 이 생명이고 생명을 주러 오셨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것들을 기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함이라.(요 20:31) 그러므로 우리는 대속, 곧 죄 사함이 영생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아담도 무죄하였으나 영생이 없었고 영생을 얻을 자였다.(창3:22) 그러므 로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창조, 타락, 대속, 구속, 부활생명이다. 이 경륜 의 순서는 개인에게도 적용되지만 시대적으로도 창조(창세기 1, 2장), 타 락(창세기 3장), 대속(교회시대), 구속(천년왕국), 부활생명(새 예루살렘) 순이다. 대속이 영생이 아니다. 구속 곧 원래의 위치로 돌아온 자에게만 하나님은 영생을 주실 수 있다. 대속은 단지 심판이다. 심판받았다고 해서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생명의 과정이 있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희생물이 불에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희생물과 번제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 신약에 와서도
124 8. 희생물과 헌물 예수님의 대속과 구속이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대속과 구속이 죄용서 라는 차원에서 동일하지만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구속이 되어 야 한다. 대속은 단지 법리적으로 죄 용서를 받은 위치지만 구속은 하나님과 유기적 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위치인 것이다. 대속은 단지 심판으로 피흘림의 죽 음이 필요하다. 피흘렸다고 거듭나는게 아니다. 피흘려 죽은 제물이 하나 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재, 곧 영이 되어야만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있 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하나님이여 왜 나를 버리셨나이 까? 하시면서 희생물로서 죄인들을 위해 먼저 심판을 받으셨고, 희생물로 서 예수님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 이다. 하신 것이다. 그래야만 생명의 연합이 있기 때문이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표현한 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 편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졌다. 전반부는 심판에 대한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으나(시22:1~21) 후반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있다.(시22:22~31) 예수님은 십자가상에서도 시편22편 1절의 말씀과 같 이 전반부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습니 까? 하였지만 후반부는 아버지여 하면서 친밀한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로 돌아서는 것을 보게된다. 인생은 원래 하나님 앞에 생명의 연합을 위해 잠 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한 번제헌물이었다.(창2:21) 그런데 아담은 이 길 을 이탈한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심판이 끝나자 하나님 께서 본래 인생에게 정하신 헌물의 위치로 돌아가기 위해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하시면서 아버지를 부르고 계시는 것이다. 희생물 되심 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완성되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 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딤후 4:6)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죽는 희생물이 아니라 살아있는 희생물이 되 라고 한다.(롬12:1)
125 8. 희생물과 헌물 출애굽기를 통해 본 사람의 희생물과 헌물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세상에 있을 때 예수님의 희생물 되심을 믿고 거듭난 후 교회 안으로 들어와서 살다가 실제적인 육체의 죽음, 곧 하나님께 헌물 로 드려진 후 하늘의 왕국(heavenly kingdom)으로 들어간다. 이스라엘 민족은 출애굽을 할 때 홍해와 요르단 강을 건넜다. 성경에서 물 을 건너는 것은 죽음을 예표한다. 이스라엘 민족은 세상을 예표하는 이집 트에서 예수님을 예표하는 어린양의 대속을 통해 홍해를 건너 광야교회로 들어 온 후 광야에서 하나님의 왕국을 예표하는 가나안 땅으로 들어갈 때 또 한 번의 죽음을 예표하는 요르단 강을 건넜다. 우리 통상 홍해의 기적 만을 말하는데 사실 요르단 강에서도 홍해와 같은 기적이 일어났다. 너희 하나님께서 우리가 지나갈 때 홍해를 우리 앞에서 마르게 하신 것 같 이 주 너희 하나님께서 너희가 건널 때 까지 요르단의 물들을 너희 앞에서 마르게 하셨나니(수4:23) 이스라엘 민족이 홍해를 건넌 것은 어린양의 피의 대속을 통해 죽음을 통 과하는 예표이다. 죄 문제는 홍해를 통과함으로 해결되었다. 죄의 결과 육 체의 사망이 왔다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단 한번 홍해만을 건너야 한다. 그 런데 왜 죄 사함을 받은 이스라엘 민족이 또 요르단 강을 건너야 하는가? 이는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께서 헌물로 드려져야 함을 보여주고 있 는 것이다. 대속( 代 贖 ), 구속( 九 屬 )과 회개( 悔 改 ), 의( 義 ) 대속이란 법리적인 것으로 예수님이 대신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 갚았다는 말이다.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켜야 하는데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벗어난 것을 죄라고 하는데, 이 죄에 대한
126 8. 희생물과 헌물 법리적 희생 대가를 대속(ransom)이라 한다. 그러나 법리적 대가를 치렀다 고 해서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위치 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 의 목표는 무죄한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이식하여 사람이 영생을 얻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인생의 원래 위치, 곧 하 나님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원 위치로 사람을 다시 회복 시키는 것을 구속(redemption)이라 하고, 사람의 입장에서 하나님께서 창조 시에 정해주신 사람의 격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발견하고 돌아가는 것을 회개(repent)라고 한다. 의( 義 )란 무엇인가? 의( 義 )의 어원은 하나님과의 관 계에서 올바른 위치에 있다 라는 의미다. 하나님은 피조물을 창조시에 피 조물의 바른 위치를 정해 주셨다.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에 있는 사람의 위치를 의( 義 )라고 한다. 구속이 되면 의가 되는 것이다. 우리의 구속이 십자가에서 이루어졌기 때문에 사람의 올바른 위치는 십자가(죽음, 흙, 재) 라는 것이다. 신약에 보면 예수님을 우리의 죄를 대속하신 대속물(ransom)이라고 표현 하고 있다.(마20:28, 막10:45, 딤전2:6) 이것은 구약의 희생물과 같은 말 이다. 그러나 단순히 대속하셨다면 우리의 생명의 연합은 없다. 대속은 법 리적인 것으로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구속(redemption) 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다. 구속이란 인생의 원위치란 의미다. 이 위치 가 유기적으로 하나님과 생명이 연합될 수 있는 위치다. 인생의 원래의 위 치는 흙, 번제헌물이다. 씨가 뿌려질 수 있는 위치다. 그러니까 예수님은 십자가의 대속을 통해 사람을 구속, 곧 인생의 원래의 위치를 찾아 주셨다 는 것이다. 구약에서 희생물과 헌물이 죽음이란 공통분모 아래 동일시 되 었듯이 신약에서도 대속과 구속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하여 구속,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골1:14) 이 말씀의 의미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리심이 법리적인 대속(희생물)일 뿐만 아니라 하나님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가능한 인생의 원래의 위치, 곧 인생은 하나님 앞에 헌물이라는 위치로 구속해 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127 8. 희생물과 헌물 죽으심이 대속의 의미도 있지만 구속, 곧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것이다. 어떻게 죽음이 인생의 원래의 위치인가? 이해하기 힘들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신들이 살아 있는 혼이니까 살아 있는 것처럼 생각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영생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는 사람은 단지 흙으로 지어진 피조물로서 생명이 없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혼은 생명이 없는 흙으로서 십자가의 위치 곧 흙, 재의 위치, 번제헌물의 위치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보 실 때는 살아 있는 혼이나, 십자가 못 박혀 있는 사람이나 생명이 없는 것 은 매 한가지라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거부하고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 를 먹었는데 예수님이 오셔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키심 으로 다시 인생의 위치를 찾아 주셨다는 것이다.(골1:14)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을 하나님은 오직 찾으신다.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연합이 가 능하기 때문이다. 인생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 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헌물이 하나님의 불에 태워짐으로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있었듯이 예수 님께서 십자가의 죽음을 통해 재가 됨으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법리적인 대 속이 유기적인 구속을 이룬 것이다. 이것은 앞서 말한 희생물이 헌물이 되 었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구약의 희생물은 신약의 대속물이고 구약의 헌물 은 신약의 구속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안에서 희생물과 헌물이 하나이 듯이 대속과 구속이 하나이다.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이 하나이다. 그 러므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해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만을 바라볼 것이 아니라 근원적인 인생의 원래의 위치, 헌물을 통한 생명의 연 합도 알아야 한다. 이것은 모두 죽음이라는 공통분모를 가지고 있다. 그러 니까 인생의 원래 위치는 생명이 없는 번제헌물로서 흙, 재의 위치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
128 8. 희생물과 헌물 담은 이 위치를 이탈하여 신이 되고자 하였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순종하 심으로 인생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흙 돌 보석으로의 변화 사람은 흙이고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흙-사람과 불 -하나님이 연합되면 흙-사람은 살아 있는 돌이 된다.(벧전2:5) 그러나 돌 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돌도 불을 가하면 다른 차원의 물질로 변한다. 오 직 보석만이 외부환경에 영향을 받지 않는다. 그래서 보석은 영생이신 성 령 하나님을 상징한다. 살아 있는 돌-사람은 불-하나님에 의해 태워져 보 석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목표는 흙 -사람이 돌이 되는 것이 아니라 보석-사람이 되는 것이다.(고전3:11, 계 21:11) 이것이 생명의 연합의 실제적인 과정이다. 흙에 불을 가하면 흙은 돌이 된다. 다시 돌에 불을 가하면 돌은 보석이 된다. 이 원리가 똑 같이 적용된다. 육이 영 안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그래서 죽음이 반드시 필요하 다. 흙-사람이 불-하나님께 태워져 보석이라는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지 보석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그러나 영 적 피조물인 사탄의 모습은 보석이 그를 덮고 있다. 네가 하나님의 동산 에덴에 있더니 모든 보석과 홍보석과 황옥과 다이아 몬드와 녹주석과 줄마노와 벽옥과 사파이어와 에메랄드와 석류석과 금이 너를 덮었으며 네가 창조되던 날에 네 안에서 네 작은북과 네 피리의 작 품이 예비되었도다. (겔28:13) 이 말씀은 사람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고 사탄은 보석-영으로 창조되 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래서 보석이 영원하듯이 영적인 피조물은 죽지 않는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인생이 하나님 앞에 흙이라 는 위치는 씨-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위치다. 그래야만 씨-하나님 께서 영생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였다
129 8. 희생물과 헌물 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지 않고 씨-영으로 창조되었다는 모순이 생긴 다. 사람이 처음 창조될 때 영생이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기본적인 창조 원리를 모르기 때문에 하는 말이다.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끝까지 영생해야지 가다가 어떻게 영생이 끊어질 수 있는가? 영생이란 어떤 조 건과 환경에서도 보석과 같이 본질이 변함이 없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 님과 관계없이 독립적으로 영생하는 존재였다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탄은 영이기 때문에 하나님과 관계없이 죽지 않는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에게는 사형을 선고하지 않고 마지막에 불 호수에 가두는 것 이다.(계21:10) 타락한 현 세상은 율법이 작용하는 세계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생 명의 법이 작용하는 세계다. 우리는 율법이 작용하는 죄와 사망의 법에 서 생명의 성령의 법이 작용하는 하나님의 왕국으로 옮겨왔다.(롬8:2) 종의 세계에서 아들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이다. 노예여자에게서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난 자로 옮겨 온 것이다.(갈4:22) 그럼에도 여전히 복음을 생명의 유기적 관점보다는 단순히 법리적 관점에서만 봄으로서 예수님 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셨다. 그러니 믿어야 한다. 이렇게 단순하게 말한 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러나 예를 들어 화가가 설악산을 갔다 와 서 그 화가가 설악산을 그린다면 그 화가와 설악산의 만남은 그 작품 속에서 만난다. 그 화가가 설악산을 작품으로 그리고자 한다면 설악산을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겉만 보고서는 작품세계를 그릴 수 없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예수님을 만나고 예수님의 인격을 만나는 것은 우리 의 삶속에서 만나는 것이다. 그렇게 하려면 그분의 인격을 속속들이 알 아야 한다.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요 17:3) 그러므로 단순히 법리적인 희생물로서의 예수님을 아는 것도 중 요하지만 유기적인 헌물로서의 인격적인 예수님을 알아야 한다
130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창세기 2장에 보면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 를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지금까지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의 비밀 은 감추어져 왔고 여러 이단들이 자의적으로 성경을 해석하여 문제를 일 으켜 왔기 때문에 기독교계에서는 이곳을 건드리는 것을 금기시하고 있 다. 아마도 이것도 사탄의 작전일 것이다. 그래야만 자신의 정체가 드 러나지 않기 때문이다. 모든 것은 근원이 중요하다. 근원이 잘 못되면 열매가 잘 못되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기록되지 않았고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그래 서 관점을 달리하여 성경을 보면 쉬운 말일 수 있다. 성경은 선악의 지식노선과 생명노선이라는 두 줄기가 있다는 것을 계시 해 주고 있다. 우주 안에서는 어디를 가도 이 두 노선이 존재한다. 교 회와 가정은 생명노선이지만 세상과 직장은 선악의 지식노선이다. 생명 노선은 아들의 노선이고 지식 노선은 종의 노선이다. 회사 안에서도 사 장과 종업원은 종의 노선이지만 사장과 사장의 아들은 생명노선 안에 있 다. 즉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모든 법을 뛰어 넘는 생명 관계다. 원 래 하나님은 사람을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 관계를 목표로 창조하였는데 사람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 인류의 문제다. 성경은 이것을 죄라고 한다. 성경이 말하는 죄와 세상에서 말하는 죄의 의미는 차이가 있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선하냐, 악하냐 이런 문제가 아니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 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문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사람을 보실 때의 기준도 사람이 선하냐 악하냐, 위대하냐 위대하지 않느냐? 이 런 문제가 아니라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했느냐, 이탈하지 않았느냐?의 기준으로 보신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담이 타락한 후 하나 님은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131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 다. 타락한 현 세상은 선악의 지식 노선, 즉 선악이라는 도덕과 지식이라는 능력이 가치 기준이 되는 사회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세상은 율법이 중 심이 되는 세계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생명의 세계에서 선악의 지식 세계로 위치를 이탈한 인류에게 율법을 주신 것도 그 씨를 뿌린 필연의 결과물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을 피조물의 머리로 창 조하시고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생명의 세계에서 인격 중심의 우주를 경영하시겠다는 것이 하나님의 의도다. 그래서 성경은 대부분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인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되 어 있기 때문에 세상의 선악의 지식의 관점으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다. 예를 들어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들 중에는 다섯 여 자들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율법이라는 세상 기준으로 보았을 때 지탄받 아 마땅할 여자들이었지만 이들은 생명노선에 있던 여자들이었다. 이들 다섯 여자들은 인류를 대표한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세 가지 위치 하에 있다. 첫 번째는 피조물, 그리고 아들의 위치와 더불어 하나님의 아내가 될 위치에 있다.(계21:9) 이 위치를 벗어나면 사망의 길이고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러니까 어떠한 상황 하에도 이 운 명을 벗어나면 안 된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내 로서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에서 가장 의구심이 있는 단어가 나무 라는 단어인데 성경에서 나무 는 종종 인격적인 상징으로 표현되고 있다. 예 를 들어 예수님은 자신을 포도나무라고 하셨고, 구약에서는 포도나무는 이스라엘의 영적 특권을, 올리브나무는 종교적 특권을, 무화과나무는 민 족적 특권을 상징한다. 마태복음 13장 32절에서는 나무가 마귀를 상징 하고, 에스겔서 31장에서는 적그리스도를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다. 에스겔서 31장 8절은 하나님의 동산에 있는 어떤 나무도 아름다움에
132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그와 같지 못하였도다. 하였고 에스겔서 31장 18절은 이처럼 영광과 위대함에서 네가 에덴의 나무들 중에 누구와 같으냐?... 이것은 파라오 (적그리스도 상징)와 그의 모든 무리니라. 하면서 나무를 적그리스도에 비유하고 있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사람을 나무에 비유하여 말하고 있 다. 그분께서 그 눈먼 사람의 손을 잡고 그를 마을 밖으로 데리고 나아가사 그의 눈에 침을 뱉으시며 그에게 안수하시고 그가 무엇을 보는지 그에게 물으시니 그가 쳐다보고 이르되, 사람들이 나무처럼 걷는 것을 내가 보 나이다. 하거늘(막8:23~24) 사악한 자가 큰 권능을 가진 것을 내가 본즉 스스로 푸른 월계수같이 뻗 어 나갔으되(시37:35) 그들이 짓되 다른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심되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니 내 백성의 날수는 나무의 날수와 같으며 나의 선택된 자는 자기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리리라.(사65:22) 그들이 푸른 나무 안에서 이런 일을 행할진대 마른 것 안에서는 무슨 일 을 행하리요? 하시니라(눅23:31) 그리고 다니엘서 4장에서는 느부갓네살 왕이 나무에 대한 꿈을 꾸었는 데 한 가운데 있는 나무가 바로 느부갓네살 왕이라고 다니엘이 해석을 하였다. 왕이 보신 나무는 자라서 강하게 되어 그것의 높이가 하늘에까지 닿아 그 것의 모습이 온 땅에 이르렀으며... 오 왕이여 그것 즉 자라서 강하게 된 것은 왕이시니 왕의 크신 위엄은 자라나서 하늘에까지 닿으며 왕의 통 지는 땅 끝까지 이르나이다.(단4:20~21) 사람과 나무는 여러 공통점이 있다. 세포가 있고, 순환기가 있고, 숨을 쉬고, 손뼉을 치고, 노래를 한다.(사44:23, 55:12) 모든 생물은 실재와 형상, 즉 씨와 형상의 구조로 되어 있다. 그러므로 나무는 그 나무의 뿌 리, 곧 생명-씨의 표현-형상이다. 그리고 그 나무의 열매는 사람이 먹
133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을 수 있는 양식이다.(창1:29) 예를 들어 감나무는 땅속에 있는 감 씨- 생명의 표현이고, 감나무의 최종 산물은 감이라는 열매다. 사람은 나무 를 먹지 않고 열매를 양식으로 취한다. 이 원리는 하나님이 창조한 모든 세계에 동일하게 적용된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씨이시고 피조물 은 그분의 어떠함을 표현하는 형상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주를 아버 지와 아들, 곧 씨와 열매, 실재와 형상의 관계로 창조하셨다. 하나님도 씨를 뿌려 사람 농사를 지으시고 인격이라는 열매를 거두신다. 그래서 만물 안에는 하나님의 경륜을 알 수 있도록 그분의 권능과 신격이 보인 다는 것이다.(롬1:20). 선악의 지식나무 먼저 선악의 지식나무에 대한 성경의 정보를 살펴보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하니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 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창 3:5-6a) 여기서 창세기 3장 5절의 신들 이란 성경에 의하면 타락한 천사를 말한 다. 사무엘하 14장 17절에 보면 내 주왕께서 하나님의 천사와 같으사 좋은 것과 나쁜 것을 분간하시기 때문이니이다. 라는 말씀이 있듯이 분 명히 선악을 분간하는 것은 천사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에 스겔서 28장 12절에 사탄을 묘사하는 말이 있는데 너는 지혜가 충만하 며 아름다움이 완전하여 모든 것을 봉인하는 자로다. 라는 말씀이 있다. 여기서 핵심 키워드가 지혜 와 아름다움 인데 창세기 3장 6절에서도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표현하는 핵심 키워드가 지혜 와 아름다움 으로 동일하다. 그런데 사탄은 이 충만한 지혜 와 완전한 아름다움 으로 인해 타락했다
134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네 아름다움으로 인하여 네 마음이 높아졌으며 네 광채로 인하여 네가 네 지혜를 부패시켰은즉 내가 너를 땅에 던지고 왕들 앞에 두어 그들이 너를 바라보게 하리라.(겔28:17) 아담과 이브는 바로 사탄의 이런 면을 부러워하여 타락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여자가 본즉 그 나무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창 3:5-6a) 이 말을 요한일서 2장 16절에서는 육신의 정욕(먹기에 좋고), 안목의 정욕(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인생의 자랑(사람을 지혜롭게함) 으로 표현하고 있다.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은 곧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인생의 자랑이 아버지에게서 나지 아니하고 세상에서 나느니라.(요일2:16) 이것은 다시 육신의 정욕-빵, 안목의 정욕-종교, 인생의 자랑-정치라 고 표현할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빵과 종교와 정치로 구성되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이 고린도전서 1장 22절에서 종 교를 대표하는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이방인-그리스 인은 지혜를 구한다는 말이 여기서 유래된 것이다. 결국 근원은 다 하나 다. 계시록 20장 3절에 옛 뱀은 창세기 3장에서 뱀으로 표현되었던 사 탄이다. 그러니까 사탄이 에덴동산에 있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까 지 성경이 계시하는 정보를 종합해 보면 선악의 지식나무는 사탄을 표현 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생명나무 생명나무는 성경에서 창세기, 잠언, 계시록에 등장한다. 많이 나온다고 해서 중요하고 덜 나온다고 해서 중요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근 원에 관한 것이기 때문에 가장 중요한 말씀이다
135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그 나무는 그 씨-생명의 표현이다. 그 생명이 그 나무로 표현된 것이다. 나무의 생명은 어디 있는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그것이 살아 있기 때문에 생명이 있다고 한다. 생명은 보이지 않는다. 다만 그 결과만 볼 수 있다. 이와 같이 하나님은 어디 계신지, 어떻게 생겼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나무를 보면 그 생명을 본 것이다(요14:9). 생명나 무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표현이다. 생명나무에 관하여는 창세기에 나타났으나 아담이 버리고 간 이후 일체 나타나지 않다가 계시록 2장 7절에서 이기는 자에게 약속 되었고 22장 2절에 생명수의 강과 함께 다시 나타난다. 그동안 이 나무는 하나님의 낙 원에 있었던 것(계2:7)으로 표현 된 것을 보면 없어졌던 것이 아니라 감 추어져 있다가 나타날 때가 되어 다시 나타난 것이다. 감추어졌던 것은 그 나무와 관계된 인간이 없었기 때문이고 다시 나타난 것은 받을 사람이 생겼기 때문이다. 생명나무는 세상을 위해서 필요한 것이 아니라 동산 안에 있는 사람에게 필요해서 주신 것이다. 하나님과 함께하는 동산에 있으려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하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살펴본바와 같이 나무 란 어떤 인격적 존재를 말하고, 보이지 아니하는 그 나무의 씨-생명의 표현이므로 생명나무란 생명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표현하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다고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예수님 스스로도 자신을 포도나무(요15:1)로 비유하였고, 요한복음 14장 6절에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를 통하지 않고는 아무 도 아버지께 오지 못하느니라. (요 14:6) 아들이 있는 자에게는 생명이 있고 하나님의 아들이 없는 자에게는 생명이 없느니라. (요일 5:12) 라 고 말씀하셨듯이 하나님의 생명은 아들이신 예수님만 가지고 있기 때문 이다. 만약에 생명나무가 하나님과는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나무라 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인데 그러면 하나님이 두 분이 되는 모순이 생기 고, 하나님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만을 통해서 생명을 얻을 수 있 다고 하는 성경 말씀과도 배치되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오셔서 성경이
136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말씀하셨다(요5:39) 구약성경에 나오는 대부 분의 긍정적인 모든 것은 예수님을 예표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구약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예표지만 신약은 예표되었던 그리스도가 실재로 오신 것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창세기 2장에서의 생명나무는 죄가 들어오 기 전의 상황이므로 실재라고 할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나무는 예수 그리스도를 표현한 것이지 불교나 이방종교 의 설화에서 나오는 천도복숭아와 같은 개념으로 하나님과는 별도로 독 립적으로 존재하는 나무가 아니라는 것이다. 생명은 낳는 것이지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이 관념을 분명히 가져야 한 다. 우리의 구원도 우리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 는 것이다. 여기에 다른 종교와 차이가 있다. 기독교인들이 논리가 부족 하면 무조건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하실 수 있다고 말한다. 이런 말을 하니까 믿지 않는 자들이 하나님이 전능하시다면서 왜 사람이 죄인이 되게 했느냐, 전능자라면서 무엇하러 예수 그리스도가 오느냐, 전능하신 능력으로 하늘에서 죄를 사해주면 되는 것 아니냐, 이렇게 말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마음대로 축구공에 바람 넣듯이 생명을 넣어 주는 것이 아니 라, 하나님과 사람을 연결하는 다리, 곧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만 물이 다 이런 원리로 어떤 작용이 일어난다. 교선질작( 交 宣 迭 作 )은 우주 안의 진리다. 서로 베풀어지며 교차되어 만물을 만들어낸다. 가만히 있 는데 어떤 작용이 일어나는 것이 없다. 중재자를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이다. 이것은 창조자가 그러하기 때문에 그 인식하에서 만물의 작용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사람만이 특별하지 않다. 사람이 밥을 먹어 이 밥 이 사람의 생명이 되는 것도 밥이 바로 생명이 되지 않고 소화기관이라 는 중재자를 거쳐 피와 살이 되서 생명이 되는 것이다. 이 원리가 적용 되지 않는 피조물은 없다. 그러므로 생명은 연합, 연결되는 것이지 독립 적으로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의 예표인 아담을 창조하
137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시고 사람의 예표인 이브와 더불어 연합하여 한 육체가 되라고 했지 이 브 혼자 독립적으로 있으라고 하지 않았다. 생명의 연합, 연결을 보여주 고 있는 예표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했고, 그 사람 안에 생명을 넣어주는 책 임은 하나님의 생명을 유일하게 가진 아들에게 있다는 것이다. 생명나무 란 생명이신 하나님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며, 사람은 바로 나무 를 먹을 수 없기에 그 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 명나무의 열매란 곧 예수님의 인생에서 최종산물로 십자가의 죽으심과 부활이다. 그리스도께서 이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 다(고전 15:20) 사람의 근본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 있고, 무엇을 먹느냐 가 그 사람을 결정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음식의 한 형태로서 에 덴동산에서는 생명나무와 열매로, 출애굽을 한 후 광야에서는 생명의 만 나로, 신약에 와서는 예수님 스스로 자신을 생명의 빵으로 계시하고 있 다. 즉, 예수님은 구약시대 초반에도 주의 천사로(사63:9) 나타나서 하 나님 아버지를 계시하고 사역을 수행하였다고 성경은 말씀하고 있다. 사탄을 상징하는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는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창3:6) 모습이었지만, 생 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의 모습은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 으며 우리가 그를 볼 때에 그를 흠모할 만한 아름다움이 없도다. (사 53:2)라고 말하고 있다. 즉 타락한 천사인 사탄은 예수님과 비교했을 때 아담이 좋아하는 모든 것을 다 가지고 있었다. 죽지도 않고, 돌을 빵으로 만들 수 있고(마 4:3) 날아다닐 수 있는 능력 있었다.(계 8:13) 그래서 아담은 사탄의 유 혹에 넘어간 것이다. 사탄은 천사와 같은 동류로서 하나님의 능력을 대
138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표하는 피조물이고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물인데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 합당하게 인격(예수님)을 선택하지 않고 능력(사탄)을 선택하였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결국 성경은 종의 노선에 있는 능 력 대 아들의 노선에 있는 인격의 싸움이다. 아담이 타락한 것은 결국 인격을 선택하지 않고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 인 타락한 천사 사탄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전락했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성경에 의하면 천사는 하 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종으로 창조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래서 성경은 곳곳에서 천사숭배를 금지하고 있고, 사람이 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 다. 아무도 꾸며낸 겸손과 천사숭배로 너희를 속여 너희 보상을 빼앗지 못하 게 하라.(골 2:18a)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하물며 이 세상 삶에 속한 일들은 얼마나 더 많이 판단하겠느냐?(고전 6:3) 그분께서 천사들보다 훨씬 더 뛰어나게 되신 것은 상속을 통해 그들보다 더욱 뛰어난 이름을 얻으셨기 때문이라(히 1:5)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 시키지 아니하셨느니라.(히 2:5) 좌우간 사람은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하며 이 문제가 인류의 유일한 해결과제이다. 능력과 인격 어떤 존재에게는 항상 두 가지 면이 있다. 외부적인 능력적인 면과 내부 적인 인격적인 면이다. 예를 들어 어떤 가수가 있다고 하자. 그 가수가 노래를 잘 부른다고 해서 그 노래가 그 자신은 아니다. 가수가 노래를 잘 하는 것은 그 사람의 능력이지만 인격은 아니다. 세상에서도 이름난
139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연예인들이나 운동선수들이 있는데 결혼을 하면 못 살겠다고 이혼하는 사례가 있지 않은가? 하나님께도 두 가지 면이 있다. 능력적인 면과 인 격적인 면이다. 천사는 성경에 보면 날아다닐 수 있고, 죽지도 않고 하 나님과 방불한 능력을 가지고 있다. 천사는 하나님의 능력을 대표하는 피조물이지만 하나님과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도록 창조 된 피조물이다.(히1:14) 반면에 사람은 하나님의 성품을 대표하는 피조 물이라는 것이다.(벧전1:4) 곧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을 피조물 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자신을 사람에게 주시겠다는 것이다. 경륜이라 는 말이 영어로 dispensation 이라고 하는데 바로 이 의미에는 하나님께 서 자신의 생명을 사람에게 분배하겠다는 뜻이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국에서 사람은 세자의 운명으로 창조되었고, 천사들은 왕좌 들, 통치들, 정사들, 권능들이라는 신하들로 창조되었다.(골1:16) 선악과는 왜 만들었는가?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선악과라는 양식은 천사의 양식이라 할 수 있다. 천사들은 하나님의 나라에서 섬기는 자들로서 일군이다. 신하들은 일을 하려면 선악의 지식이 있어야 한다. 회사에서도 종업원들은 선악의 지식이 있어야 일을 잘 할 수 있는 거와 똑 같다. 사람들은 종종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서 아담이 범죄하게 만들고 다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죄를 사해 주시는가? 이것 은 병 주고 약 주는 것 아닌가? 이렇게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좋고 나 쁨의 차원이 아니라 피조물들이 먹어야할 양식이 따로 정해져 있다는 것 이다. 자동차도 어떤 차는 휘발유를 넣어야 하고 어떤 차는 디젤을 넣어 야 한다. 그에 맞지 않는 기름을 넣으면 자동차는 고장난다. 휘발유를 넣어야할 차가 디젤을 넣으면 사망이다. 이것은 디젤이 나빠서가 아니 다. 그 차에 합당한 기름을 넣어야 한다는 것이다. 선악과와 생명과도
140 9. 선악의 지식나무 vs 생명나무 마찬가지다. 선악과는 나쁘고 생명과는 좋은 것이다. 이런 차원이 아니 다. 그 피조물에 합당한 양식이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사람은 생명과를 먹어야하고 천사는 선악과를 먹 어야 한다는 것이다. 천사들은 섬기는 자들로서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잘 판단해야 한다. 신하들이 마땅히 가져할 조건이다. 그러나 사람은 그 렇지 않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인 사람이 선악의 지식을 가지면 사 람은 하나님 마저도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게 된다. 하나님 나라 는 생명의 나라로 가정과 같은 곳이다. 그러나 아무리 가정과 같다하더 라도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누가 옳으니 그르니 하면 늘 분란이 일어나 게 된다. 이것은 가정도 그렇고 교회도 그렇다는 것에서 입증된다. 가정 에서도 부부가 왜 이혼을 하는가? 선악의 지식을 가지고 판단하기 때문 이다. 가정과 교회는 선악의 지식이 작용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다. 생명 의 세계와 율법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이다. 중력이 작용되는 세 계와 무중력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인생은 선악의 지식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에서 살도록 운명 지어졌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생명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생명의 노선이다. 우리 인생은 원래 하나님의 생명의 법 아래서 살도록 지음 받았다. 그런 데 선악과를 먹고 율법의 세계로 간 것이다. 이것은 인간에게 죄와 사망 의 법이다. 땅에 살도록 되어 있는 피조물이 물속으로 들어가면 사망이 다. 같은 말이다. 그러나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의 성령의 법 안으로 옮겨 온 것이다.(롬 8:2) 그 러므로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는 근원에 관한 문제다. 선악의 지식 나무의 열매가 씨를 뿌려 큰 바벨론으로 열매를 맺고,(계17, 18장) 생명 나무의 열매가 씨를 뿌려 새 예루살렘이라는 열매를 맺는 것이 성경이 주는 계시다.(계21, 22장)
141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10. 우주 안의 3대 위치 전쟁 성경은 우리의 삶을 사탄과 전쟁으로 묘사하고 있다. 그래서 우리는 사 탄과의 전쟁에서 사탄에게 승리하는 무기가 무엇인지 아는 것이 중요하 다. 세상 전쟁은 여러 가지가 있다. 경제전쟁, 지식전쟁, 군사전쟁 등이 있다. 세상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임으로 능력 대 능력의 전쟁이다. 능력 이 큰 진영이 승리한다. 그러면 영적전쟁의 무기는 무엇인가? 우리는 흔 히 말씀을 인용함으로, 또는 기도로 승리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탄 보다 더 큰 능력을 달라고 기도한다. 그러나 사탄은 하나님의 능력을 대 표하는 피조물이다. 사탄은 하나님과 방불한 능력 때문에 교만하여 타락 했다. 그러므로 우리는 결코 사탄을 능력으로 이길 수 없다. 여기에서 우리는 지금 다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가 너무도 쉽게 사탄을 이길 수 있도록 우리를 창조하셨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없는 것 으로 승리하길 원치 않으시고 우리에게 있는 것으로 승리할 수 있도록 이미 창조하셨다. 우주 안에는 사람의 운명을 가르는 사탄과의 3번의 영적전쟁이 있었다. 이 전쟁의 핵심은 지금까지 살펴 본바와 같이 위치( 格 ) 전쟁이다. 이 위 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사람 은 하나님께 대하여 피조물로서 흙-여자의 위치에 있다. 바로 이 사람 에게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하나님도 영-씨지만 사탄도 영으로서 씨다. 그래서 사탄은 사람을 두고 하나님과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심어 자신의 아들들을 생산하여 이 땅을 사탄중심으로 경영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사람에게 자신의 생명을 주어 인격중심으로 우주를 경영하시겠다는 의도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두 길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생명의 길은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고 사망의 길은 신들과 같은 비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인생은 어찌하든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정상적
142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인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인생의 근본적 임무는 동산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라는 것을 살펴보 았다.(창2:15) 그런데 이 동산은 물질적인 것이 아니고 영적인 것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 생 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사람이 되어야지 신과 같이 되어서는 사 망이라는 것이다. 지극히 상식적이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런데 아담은 인생의 길을 벗어나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사망의 길로 갔다.(창 3:5~6) 그러므로 영적 전쟁의 핵심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 곧 인격 을 지키는 것이다. 이러한 사탄과의 영적 전쟁은 사사로운 것이 아니고 인류 역사의 결정적 전환점이 되는 전쟁이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사 람에게는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다. 만물은 하나 님의 정한 각자의 생명의 길이 있다. 우리는 너무도 단순하게 죄 사함 받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쉽게 생각한다. 그러나 무죄는 하나님이 쓰 실 수 있는 위치지 그것이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 는 무엇인가?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에서 이탈한 것이고 예수님은 그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이 차이다. 생명의 길이 란 무엇인가?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께 서 생명을 주실 수 있고 이를 통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 문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시니까 부활하셨 다고 말한다. 물론 맞는 말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고 죄가 없으시다. 그 러나 단지 그분이 그렇다고 해서 부활하셨다고 하면 우리에게는 절망이 다. 우리는 그렇게 될 수 없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그분에게만 특수하게 적용되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일반적으로 적용될 수 없기 때문 이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이 스스로 부활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일관
143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되게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걸으신 그 길이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길이 복음인 것은 사람이면 누구나 걸을 수 있는 길이기 때문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놓은 죽음이라는 길이 너무 싫어서 신들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서 하나님 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아무리 억울해도 십자가에 매달으 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운명을 담담히 받아드렸다. 자신의 처지인 인생을 원망하지 않았다. 그러나 아담은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인생의 위치를 이탈함으로서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으로서 운명을 원망했다. 나를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나를 왜 이렇게 약하게 만들었습니까? 만드신 이의 깊은 뜻을 모르고 이렇게 원망한 것이다. 피조물이 자기 자 신을 원망하는 것은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시기에 인생 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다 하는데 자기는 보기에 좋지 않다는 것이 다. 그러니 사망이다. 십계명을 보면 다른 계명은 어느 정도 이해가 되는데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는 말씀이 있다. 일반적으로 생각하면 너무 과하지 않은가? 라는 생각이 든다. 왜 그랬을까? 여기에는 깊은 뜻이 있다. 하나님은 피 조물을 모두 창조하시고 보라, 매우 좋았더라 (창1:29)하셨고, 상쾌하 다 (출31:16)고 하셨다. 만족하셨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좋다고 하시면 우리는 우리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무조건 좋다고 해야 한다. 그런데 피 조물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신의 위치를 이탈하는 것은 자신을 원망하 는 것이고 만드신 이를 원망하는 것이다. 창조자를 업신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죽이라고 한 것이다. 우리는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불완전한 피조물은 없다. 각각의 피조물 은 그 목적 안에서 완전하다. 우리가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 다. 컵은 컵대로 그 목적 안에서 완전하다. 수저는 수저대로 그 목적 안
144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에서 완전하다. 수저가 포크레인처럼 흙을 많이 담을 수 없다고 해서 불 완전한 것이 아니다. 천사는 죽지 않는데 사람이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 한 것이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완전하게 지음받았다. 사 람은 연약하지만 하나님의 영광을 표현하도록 완전하게 지음 받았다. 성경에 의하면 세상은 종교와 정치로 구성되어 있는데 이 종교와 정치의 근원도 아담의 타락으로 기인한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위임 하신 3중 직분이 있다. 존재적 생존을 위해서는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을 먹어야하는 대언자의 직분이 있고 이 말씀을 먹고 외부적으로는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이라는 직분과 세상을 다스리는 왕이라는 직분이 주어졌다. 이 직분은 모두 영적인 직분이다. 성경은 항상 하나님은 영이 시고 영이 근원이고 생명이기 때문에 궁극적인 생명은 영적인 것에 있 다. 그런데 위치를 이탈한 아담의 세계는 대언자의 직분을 포기함으로서 하 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말씀 대신 육신적 양식에 몰두하였고, 제사장과 왕이라는 직분이 오도되어 세상의 종교와 정치가 되었다. 세상은 한마디 로 빵과 종교와 정치라 할 수 있고 타락한 현 세상은 종교권력과 정치 권력이 양분하게 된 것이다.(계17,18장) 그래서 현 세상은 종교권력과 정치권력이 통합되면 무소불위가 된다. 창세기 11장의 바벨론과 고대 국 가는 거의 모두가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로서 절대권력을 가지고 있 었다. 중세에는 로마 카톨릭이 그랬고 현대에 와서는 중동의 일부국가와 북한이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상은 간단하다. 종교와 정치이다. 성경에 의하면 아담 이 타락한 후 맨 먼저 종교를 만들었고, 그 이후 도시를 만들었는데 이 는 사회로서 정치이다
145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1차 위치 전쟁 (에덴동산) : 아담이 인격(생명의 길)을 이탈함 첫 번째 전쟁에서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길을 부끄러워하 여 사탄에게 패배하므로 사람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하게 되었다. 첫 번째로 사탄이 유혹한 말은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 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창3:5) 했는데 신들과 같이 되어 라는 말의 의미에는 천사들의 능력 을 추구 한다는 말이고, 선악을 안다 는 것은 지혜를 말한다. 이것은 종교-신과 정치-지혜를 대표하는 말이다.(고전1:22) 즉, 종교 안에서 하나님의 아 들이 되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된다 라는 의미이다. 성경에 의하면 신들 은 천사들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불리고 있다.(창6:2, 욥1:6) 또 창세 기 3장 22절에 보면 주 하나님께서 이르시되, 보라, 남자가 우리 가운 데 하나 같이 되어 선악을 알게 되었도다. 이렇게 말씀하고 있다. 선악을 아는데서 하나님과 같이 되었다는 의미는 하나님은 재판장으로서 만왕의 왕이므로 아담도 이제 지혜를 추구하는 정치 안에서 왕이 되었다 는 의미이다. 원래 사람은 사람의 위치에서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되어야할 존재인데 종인 천사의 위치에서도 하나님의 아들이 되고 왕이 될 수 있다고 사탄이 유혹한 것이다. 사람의 위치에서가 아닌 천사의 위 치에서도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아담을 속인 것이다. 그래 서 선악과를 먹은 결과 사람의 목표는 종교 안에서 신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인데 이는 표현만 다를 뿐 둘 다 같은 의미이 다. 종교와 정치가 통합된 국가에서 왕이 곧 신이었듯이 선악과를 먹은 사람의 목표는 신-왕이 되는 것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바벨(세상)이라고 하는데 종교 안에서는 신이 되는 것 이고 정치 안에서는 왕이 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꿈이다. 모두 위대한 사람이 되는 것이 타락한 인류의 소망이다. 그러나 하나님이 보실 때 선 악과를 먹고 신이 되기 위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세상에는 사람이 없
146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다고 보신다. 그러므로 세상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기 때문에 궤도 를 이탈한 기차가 빨리 달리면 달릴수록 혼동이듯이 세상을 바벨, 곧 혼 동이라고 하는 것이다. 다니엘서와 계시록에서 세상 왕들은 스스로를 신이라고 지칭하고 있으나 하나님은 이들을 향해 짐승이라고 부르고 있다. 왜냐하면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사람 이상인 신이 되고자 했으나 결코 사람은 신이 될 수 없고 사람이하인 짐승으로 전락해 버렸다는 것이다. 지금도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개인적인 목표는 사람 이상인 신이 되고자 하던지 사람 이하인 짐승이 되고자 한다는 것 이 성경의 계시이다. 또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속성은 숭배할 신( 神 )을 찾던지 조롱할 사람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참사람인 예수님이 나타나자 어떤 이는 신으로 숭배했고, 또 어떤 이는 조롱했던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참사람인 예수님을 믿 어야지, 신인 예수님을 믿고 그분과 같이 되고자 한다면 헛된 믿음이다.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세상은 예수님을 믿되 참사람으로서의 예 수를 믿는 것이 아니라 능력의 신인 예수님만을 숭배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도 빗나간 것이다. 속이는 자들이 세상에 많이 들어왔나니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육체 안에 오신 것을 시인하지 아니하느니라. 이런 자가 속이는 자요 적 그리 스도니라(요이 : 7)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사람 되는 것이지 신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러 므로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도 인격적인 예수님을 추구해야 한다는 것 이다. 예수님의 어떤 면을 추구해야 하는가? 우리는 사람의 원형을 잃어 버렸다.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인지 알 수 없게 되었다. 그래서 예수님에 게서 정상적인 사람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147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2차 위치 전쟁(광야) : 예수님의 인격회복(구속)의 전초전 사람의 위치를 잃은 사람에게 우주 안에서 가장 큰 비밀이 있다면 사람 이 누구인가? 라는 것이다. 사람이 자기의 위치를 잃어버렸기 때문에 사 람의 원형이 무엇인지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예수님에 게서 잃어버린 사람의 원형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큰 과제이다. 영적전 쟁의 핵심은 위치( 格 ) 전쟁이다. 우주 안의 두 번째 전쟁에서 사람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의 위치를 당당히 지켜 사탄과의 최초 전쟁에 서 승리하는 장면이 나온다. 우리는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갔는지 잘 몰랐다. 그런데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을 보고 알게 된다. 창세기 3장과 마태복음 4장, 누가복음 4장의 내용이 다른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속은 것이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은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 격을 되찾기 위해 아군의 장수로서 적장인 사탄과 마주하게 되었다. 본 디 사람과 땅은 하나이기에 인격을 되찾으면 땅도 되찾는 것이다. 이 전 쟁은 하나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전쟁과 같은 것 이다. 최초진지를 돌파해서 교두보를 확보해야 이를 발판으로 계속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전쟁에서 예수님은 사탄에게 빼앗긴 인간의 영광을 되찾아 와야 하는 중차대한 임무가 부여된 것이다. 1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느냐? 하나님 말씀으로 사느냐? 그 시험하는 자가 그분께 나아와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 든 명령하여 이 돌들이 빵이 되게하라, 하거늘 그분께서 응답하여 이르 시되, 기록된바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 는 모든 말씀으로 살 것이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마4:3~4) 첫 번째로 돌로 빵을 만들어 먹을 것인가? 아니면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 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전쟁이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는 것은 능력
148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이다. 돌로 빵을 만들어 먹는 능력은 사람에게는 없다. 무기물이 유기물 되는 법은 아직도 없다. 그런데 성경은 왜 이 비유를 들어 계시를 하고 있을까? 이것은 사람 속에는 돌로 빵을 만들겠다는 생각이 끊임없이 계 속 있다는 것이다. 처음에 아담이 사탄에게 유혹 받을 때, 이 능력 때 문에 유혹 받았다. 돌로 빵을 만든다는 것은 능력이다. 능력으로 살 것 인가? 하나님의 입으로 나오는 말씀으로 살 것인가? 이 문제이다. 이 문 제에서 아담은 실패했고 예수님은 이 문제에서 승리했다. 예수님은 이렇게 답하고 있다. 인격은 하나님 말씀을 먹고 하나님과 연 합해서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인격이다. 인격은 돌로 빵을 만들어 먹 을 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인격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하나님을 표현하는 그것이 인격이다.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을 먹고 사는 것이다. 라고 사람의 위치를 보여주고 계신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위임하신 대언자로서의 직분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2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 하느냐? 마귀가 그분을 데리고 심히 높은 산으로 올라가 순식간에 세상의 모든 왕국들을 그분께 보여주며 마귀가 그분께 이르되, 이 모든 권능과 그 왕 국들의 영광을 내가 네게 주리라. 그것이 내게 넘겨졌으므로 누구든지 원하는 자에게 그것을 주리라. 그러므로 네가 만일 내게 경배하면 네 것이 되리라, 하매 예수님께서 그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탄아, 너 는 내 뒤로 물러가라. 기록된바, 너는 주 네 하나님께 경배하고 오직 그 분만을 섬길지니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눅 4: 5-8) 두 번째, 사탄은 세상왕국의 영광을 보이고 이르되 내게 절하라. 이것은 내게 넘겨준 것이므로 내가 원하는 자들에게 주겠노라고 했다. 세상의
149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영광이냐? 하나님께 경배하느냐? 이것이다. 세상의 영광이 인생의 몫인 가? 아니면 하나님을 경배하는 것이 인생의 몫이냐? 그것이다. 세상의 영광을 가졌다고 해서 사람이 되는 것인가?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이 되는 것은 하나님을 경배하는 그것이 바로 사람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하게 사람이다. 사탄은 항상 사람이신 예수님을 유혹할 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 이라고 말했다.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말 은 신이라는 말이다. 네가 신이라면 돌로 빵을 만들어보라는 말이다. 네가 하나님이라면 내게 절해봐라. 그러면 세상 영광을 내가 주겠다. 이 렇게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세상 영광을 받을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께 경배할 것인가? 이 문제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입장을 취했다. 나는 사람이 되겠다. 나는 사람으 로 살겠다. 이렇게 답했다. 세상의 영광이냐? 하나님의 영광이냐? 이 두 가지를 놓고 예수님은 하나님의 영광을 택하자 마귀가 물러갔다. 예수님 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신인 마귀에게 승리한 것이다. 이것은 사 람으로서 하나님께서 위임하신 제사장의 직분을 지키신 것이다. 3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하나님께 순종할 것이냐? 그가 또 그분을 데리고 예루살렘으로 가서 성전 꼭대기에 그분을 세우 고 그분께 이르되,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여기서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자신의 천사들에게 너에 대한 책무를 주사 너를 지 키게 하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하매 예수님께서 응답하여 이 르시되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였느니라, 하시더라. (눅 4: 9-12) 세 번째 시험은 하나님을 시험할 것이냐? 아니면 하나님에게 순종할 것 이냐? 이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보라. 네가
150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천사들이 너를 보호해줄 것이다. 네가 사람이라면 이라고 말하지 않고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그럴 것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마귀는 사람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향하여 나는 영적존재이니 여기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다. 너는 육신을 가진 약한 존재이니 뛰어내 려보라 고 조롱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여기에서도 하나님이 주신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죽는 존재니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고 하신 것이다. 우리가 생각하면 내가 성전 꼭대기에서 던져지더라도 내가 하나님만 표 현 한다면 천사들이 와서 받아줄 것이라고 생각할 것이다. 그러나 절대 로 그런 일은 없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십자가에 달렸다. 그 래도 받아주지 않았다. 우리가 하나님만 표현하면 천사들이 항상 보호해 줄 것이라는 생각은 잘못된 생각이다. 예수님은 주 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였다. 하나님을 시험치 말라는 것이다.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서 떨어지면 죽게 만들어 놓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인생은 자기가 받은 대로 살고 명령대로 순종하는 그것이 인생이다. 나를 인생 으로 지어놓았으면 그대로 살아야 되고, 내가 떨어져 죽게 만들어 놓았 으니 그대로 순종해야 되는 것이다. 그것이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세 가지 시험에서 중요한 것은 사람이라는 것이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렇게 질문했는데, 나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나는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이것이 부끄러워서 아담은 사탄에게 졌는데, 예 수님은 이것을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고 사람이라는 것을 당연하게 내놓 고 승리했다. 예수님은 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사람(인격)으로서 신인 마귀를 이겼다. 이 위치전쟁에서 예수님의 승리로 아담이 잃었던 인격을 회복하자 마귀는 물러갔고 천사들이 와서 섬겼다.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마4:11)
151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이것은 무엇인가? 우주 안에서 사람의 위치가 회복되었다는 것이다. 만 물의 머리로 창조된 사람이 제 위치를 찾으면 우주질서가 제 위치를 찾 는 것이다. 본래 천사는 사람을 섬기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이 제 위치를 찾자 천사가 와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섬기게 된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 은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셨다. 사람은 돌로 빵을 만들 수 없는 것이 사 람이며,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죽는 것이 사람이며, 사람은 하나 님만을 경배해야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인생의 격이다. 이 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에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마귀가 질문한 핵심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 이것이 결국 에덴동산에서 아담에게 했던 질문이라는 것이다. 사탄이 이 돌들로 빵 을 만들어 봐라. 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 봐라. 이것은 사탄인 나 는 능력이 있어서 돌로 빵을 만들 수 있고,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안 죽는데, 사람인 너는 할 수 없지 않느냐, 사람인 너는 신인 내가 부 럽지 않느냐? 하면서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사람이신 예수님을 유 혹하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이 될 것이다 라는 창세 기 3장 5절의 사탄의 유혹과 같은 말이다. 또 내게 경배하면 이 세상영 광을 주겠다. 이 말은 이 세상 왕을 시켜주겠다. 이런 의미이다. 그러므 로 창세기 3장의 사탄의 유혹이나, 마태복은 4장의 사탄의 유혹이나 같 은 말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부여한 3중 대위 직분은 대언자, 제사장, 왕의 직 분이다. 아담은 하나님을 말씀을 먹고 사는 대언자 직분, 하나님을 시험 하지 않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 직분, 세상영광을 위해 살지 않고 하 나님이 주신 영광으로 만유에게 하나님의 성품을 분배하는 왕의 직분을 위임 받았다. 사탄은 이 3중 직분을 버리도록 아담을 유혹해서 성공했 지만 예수님은 이 3중 직분을 끝까지 지킨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의 목 적에서 이탈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끝까지 계신 것이다
152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아담은 인생에게 주어진 하나님의 말씀을 먹고 살아야 할 대언자의 직분 을 빵을 먹고 살아야 하는 인생의 약점을 파고든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육신의 정욕과 바꾸었고,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의 직분을 성전 꼭대 기에 뛰어내리면 죽지 않는 사탄의 능력이 부러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함 으로써 종교적인 능력인 안목의 정욕과 바꾸었고, 하나님만을 경배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살아야 할 왕의 직분을 사탄이 제시하는 세상영광 이 부러워 그 유혹에 넘어감으로써 정치적인 인생의 자랑으로 바꾸어 놓 았다. 창세기 3장 6절에서도 선악의 지식나무를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라고 한다. 이 말씀이 결국은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사탄이 예수님을 유혹할 때 한 말과 같은 말이다. 먹기에 좋다는 말은 빵의 문제로 생존 의 문제이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다는 말은 능력의 종교의 문제다. 지 혜롭다는 말은 세상 사람들은 세상의 모든 문제가 지혜가 없기 때문이라 고 한다, 그래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요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고전1:22) 지혜만 있다면 세 상영광을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기서 사탄이 유혹하는 이 말은 인간의 생존을 위한 빵, 능력의 종교, 세상영광의 정치를 가지 고 유혹한 것이다. 결국 아담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주신 3중 직분인 대언자, 제사장, 왕의 직분을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 인생의 자랑으 로 바꾸었다.(요일2:16) 그러므로 사탄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사람의 3 중 직분을 회복하는 것이 인생의 문제이고 하나님의 문제이다. 일반적으로 기독교계에서는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과 마귀와의 전쟁에서 예수님이 승리한 이유를 예수님이 말씀 을 암송(인 용)해서 이겼다고 한다. 그렇다면 사탄과의 전쟁 무기가 말씀이라면 예 수님은 십자가에서 돌아가실 필요 없이 말씀이라는 무기를 이용해 승리
153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하면 되지 않았겠는가? 또 우리가 마귀에게 승리하려면 성경을 다 외워 야 하는가? 만약에 우리가 성경 말씀을 외워야 사탄에게 승리할 수 있 다면 그것은 몇몇 사람들에게만 가능한 일이고 그것은 보편적인 사람에 게는 복음이 아니고 저주이다. 예를 들어 구약성경이 없이 예수님이 이 땅 오셔서 마태복음 4장과 같 이 마귀와의 전쟁에서 승리했다고 성경에 기록되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때도 말씀을 인용해서 마귀에게 이겼다고 하겠는가? 만약에 지금처럼 말 씀을 인용해서 이겼다고 한다면 그것은 이방종교의 부적과 같고 주문과 개념이다. 그렇다고 말씀이 필요 없다는 말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만들어주신 존재 자체로 마귀에게 승리하기를 원한다. 말씀이 란 우리에게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곧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지라고 주신 것이다. 내가 아무리 그 말씀을 암 송하고 인용했더라도 그 말씀이 내 생명이 되지 않았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는 것이다. 말씀은 어떤 원리가 아니다. 컴퓨터에 입력하면 기계적으 로 그것이 똑 같이 반응하는 것과 같은 원리가 아니다. 예를 들어 내가 콩을 먹었다고 하자, 그런데 그것이 소화가 안 되어 그대로 똥으로 나왔 다고 하면 그것은 내 생명이 안 된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안 된 것이 다. 말씀이란 우리가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쉽게 이야기 하면 하 나님의 목표는 예수님이 말씀과 한 덩어리, 곧 말씀이 육신이 되었듯이, 말씀이 생명이 되었듯이 우리도 그렇게 되라는 것이다. 기계적인 것이 아닌 인격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다. 기계는 어떤 상황에서도 똑 같은 반 응을 한다. 그러나 인격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말씀 을 인용해서 마귀를 이겼으니 우리도 우리의 어떠함에 관계없이 말씀을 인용하여 마귀와 전쟁하면 마귀가 물러가지 않는다는 것이다. 곧 말씀 따로 그 사람 따로 있으면 소용없다는 것이다. 그 말씀을 소화해서 내 생명이 되면, 내가 그 인격이 되면 자동적으로 마귀를 이기게 된다는 것 이다
154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성경말씀은 어떤 기계적 원리가 아니다. 잘 못 오해하면 기록된 말씀은 변개할 수 없기 때문에 어찌 보면 율법과도 같을 수 있다. 예를 들어 성 경에 거짓말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고 해서 어떤 상황 하에서도 자기 자녀에게 아주 정직한 부모가 된다고 하면 그 부모는 아주 무서운 부모 가 되는 것이다. 또 그런 자녀가 된다면 무서운 자녀가 되는 것이다. 인 격은 그렇게 칼로 무 자르듯이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공의의 하나 님이다. 그러나 인격적인 분이다. 성경은 어떤 곳에는 결혼하라고 되어 있고, 어떤 곳에는 결혼하지 말라고 기록되어 있다. 어떤 곳에는 하나님 은 사람을 시험하지 않는다고 하였고 어떤 곳에는 시험한다고 기록되어 있다. 성경은 곳곳에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들을 보고 한탄하시고 다 시는 백성을 보시지 않겠다고 하시지만 또 다시 긍휼과 은혜를 베푸신 다. 사사기에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우상을 섬기자 하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나를 버리고 다른 신들을 섬겼으니 그러므로 내가 다시는 너희를 건져내지 아니하리라. (삿10:13) 하셨다. 그런데 이스라엘 자손이 우상을 제거하고 하나님께 기도하자 그분의 혼 이 이스라엘의 고통으로 인하여 괴로워 하니라 (삿10:16)라는 말씀이 나 온다. 하나님께서 이후에 이스라엘 민족을 다른 민족으로부터 건져내시 지 않았는가? 건져내셨다. 구약성경은 이런 과정의 반복이다. 성경은 우 리가 이것을 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지 이것 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말씀과 사람이 분리되어 말씀을 주문처럼 사용하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인격적인 분이다. 우리도 말씀을 기계적으로 인용하면 안된다. 성경에 이렇게 기도해서 응답받았 으니 우리도 이렇게 하면 응답받는다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기계는 입력한데로 출력되지만 인격은 상황에 따라 다르다. 우리도 다르지 않은 가? 자녀들이 요구한다고 다 주는가? 요구해도 안 줄 때가 있고 요구하 지 않아도 줄 때가 있는 것이다
155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영적전쟁의 핵심은 위치전쟁이다. 예수님은 말씀이라는 수단으로 승리한 것이 아니고 말씀이 인격이 된 존재 자체로 승리한 것이다. 하나님은 우 리에게 없는 것으로 마귀에게 승리하길 원치 않는다. 우리가 가지고 있 는 것으로 우리에게 주신 것으로 승리하길 원하신다. 우리 존재 자체로 쉽게 승리할 수 있는 여건을 다 주셨다. 하나님은 자신의 아들인 사람을 그렇게 어렵게 살도록 만들지 않았다. 쉽게, 땀나지 않고 살 수 있도록 창조하셨다. 3차 위치 전쟁(십자가) : 예수님이 인격회복(구속)을 완성하심 마태복음 4장의 위치전쟁은 사탄이 장악하고 있는 이 땅을 정복해서 하 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한 교두보 확보 전쟁이었다면 이제 최종적으로 사탄을 멸하고 이 땅에서 사탄을 멸할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이 전쟁 이 십자가에서의 최종 위치전쟁이다. 이 전쟁은 다른 말로 하면 진실 vs. 거짓의 싸움이다. 왜냐하면 마귀는 거짓의 아비이고 예수님은 진실이시 기 때문이다. 위치전쟁에서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자 거짓의 아비 마귀가 물러갔다. 마귀는 우리가 소리 지른다고 물러가는 것이 아니라 본래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사람의 진실을 보여주면 물러가 는 것이다. 거짓은 진실 앞에 연기처럼 사라지는 것이다. 마태복음 4장과 누가복음 4장에서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했 다고 사탄과 예수님의 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다. 물론 이 전쟁에서 예수 님이 승리했지만 아직 인격을 완전히 회복(구속)하지 못했다. 원래 하나 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아담에게 정해 준 인격은 천사와 비교했을 때 사람의 운명은 능력 없음과 육신의 연약함, 그리고 죽음이었다. 마태복 음 4장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의 일부분인 사람의 능력 없음과 육신 의 연약함이라는 인생의 위치-운명은 회복하였지만 인생이라면 모두 맞
156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이하는 죽음이라는 위치-운명은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므로 예수님과 마귀와의 최초전쟁은 교두보 확보 전쟁과 같은 개념 이다. 예를 들어 6.25 전쟁 시에 북한군은 남침을 개시하여 낙동강 방어 선까지 쳐들어 왔다. 이때 유엔군은 빼앗긴 땅을 수복하기 위해 인천에 상륙작전을 감행하여 교두보를 확보한 후 빼앗긴 나머지 땅을 회복하였 듯이 예수님도 최초전쟁에서 승리를 통해 교두보를 확보해야만 하나님의 왕국을 선포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디 사람과 땅은 하나다.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이 회복되면 땅이 회복되는 것이다. 그래서 마태복음 4장 18 절에 보면 예수님이 마귀와의 최초전쟁에서 승리한 후 이 땅에 오셔서 처음으로 하늘 왕국을 선포하는 장면이 나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 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 4:18) 누가복음 4장 13절에 보면 마귀가 모든 시험을 마치고 한동안 그분을 떠나니라. 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우리의 대적 마귀가 멸망하지 않고 잠 시 물러간 것이다. 최초진지에서 패하여 다음 방어선으로 후퇴한 것이 다. 이것은 우리의 대장이신 예수님과 적장인 사탄과의 전쟁이 완전히 끝나지 않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위치전쟁에서 아담이 잃어버린 인 격 중 인간의 최종적인 운명인 죽음을 회복(구속)하지 않았다. 아담은 최종적으로 자신에 주어진 운명인 죽음 을 두려워하여 마귀와 전쟁에서 패하였던 것이다.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은 인생의 최종적 운명(인격)을 완전히 회복(구속) 하기 위해 죽음의 권능을 가지고 사람을 송사하는 자 마귀와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놓고 일전을 벌일 필요가 있게 된 것이다. 이것이 십자가 전쟁이다. 십자가 앞에서 예수님은 인류 가운데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 인과 정치를 대표하는 빌라도 앞에서 심사를 받았다
157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이에 그들이 다 이르되, 그러면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하매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가 그라고 너희가 말하느니라, 하시니 그들이 이 르되, 우리가 직접 그의 입에서 들었은즉 어찌 우리에게 증인이 더 필요 하리요? 하더라(눅22:70-71) 그러므로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그러면 네가 왕이냐? 하니 예수님께 서 대답하시되, 내가 왕이라고 네가 말하는 도다. 내가 이런 목적으로 태어났으며 이런 까닭으로 세상에 왔나니 곧 나는 진리에 대하여 증언하 려 하노라. 진리에 속한 자마다 내 음성을 듣느니라. 하시매 빌라도가 그분께 이르되, 진리가 무엇이냐? 하더라. 그가 이 말을 하고 다시 유대 인들에게로 나가 그들에게 이르되, 나는 그에게서 아무 잘못도 찾지 못 하노라. 하더라.(요18:37-38) 여기서 보면 핵심 질문은 3가지이다. 예수님을 앞에 두고 세상 종교의 대표자인 유대인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냐? 이렇게 물었고, 세상 정치 를 대표하는 빌라도는 네가 왕이냐? 그리고 진리가 무엇이냐? 이렇게 물었다. 이 질문은 아담 안에 있는 우리 모두의 질문이다. 앞서도 말씀 드렸지만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사람들의 목표는 종교 안에서는 신(하나 님의 아들)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는 왕이 되는 것인데 이것은 같 은 의미다. 그러니까 이 질문은 에덴동산에서 사탄이 아담에게 했던 질 문과 같은 맥락이라고 할 수 있다. 또 사람의 진실-위치를 잃어버린 인류의 궁극적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 라는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아담이 잃어버린 인생의 최종 운명인 죽음을 되찾아 오시기 위해 십자가 앞에 섰다. 이 전쟁이 결국 인류역사의 전환점이 되는 최종 전쟁이다. 여기서도 사탄은 여전히 유대인과 빌라도를 이용해 자신이 에덴동산과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에게 했던 질문을 또 다시 하면서 사람이신 예 수님에게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마태 복음 27장 40절에서는 마귀를 대신하여 지나가던 자들이 다음과 같이 조롱하고 있다
158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 27:40) 즉 지나가던 자들이 마귀를 대신하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이 말은 네가 신이거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십자가에서 내려오라고 조롱 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이 조롱을 못 견디고 인간의 위치를 이탈했던 것이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길을 벗어나 다 자기 길로 갔기 때문에 단 한 사람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를 수 없게 된 것이다. 이것은 기록된바,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사람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으며 그들이 다 길에서 벗어나 함께 무익하 게 되고...(롬 3:10~12) 이제 십자가 앞에 선 예수님은 유대인과 빌라도, 그리고 조롱하는 자들 의 얼굴에서 사람을 조롱하는 마귀의 얼굴을 보았을 것이다. 그럴수록 예수님은 인류를 하나님이 처음 창조할 때의 정해주신 격으로 회복-구 속시켜 처음 하나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실 때의 목적대로 사람을 통해 하 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야 되겠다는 결심을 하셨을 것이다. 오직 사람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에서만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낼 수 있 고 그 격에만 하나님은 복을 주실 수 있는데 이는 사람은 흙이고 벌거숭 이고, 빈 그릇으로 창조되어 그 격에서만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빗나간 인생에게 씨-생명을 뿌리고 싶지만 다른 씨 가 뿌려져 있기에 씨를 뿌릴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께서 처음 만들어 주신 격으로 돌아와야 될 절대 적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것은 몸이 없는 영이신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 이고 온 인류의 소망이다. 그러므로 인류가 하나님이 처음 만들어 주신 격으로 돌아오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공동목표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에 만족하지 못하고 위치를 이탈하여 사탄의 밭이 되었으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에 만족하시
159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고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빌2:8) 인생의 격을 지켜 마귀와의 최종 위치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아담이 빼앗긴 사람의 격( 人 格 )을 되찾아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아담이 빼앗긴 사람의 위치를 다 찾아오셨기에 즉 구속의 범위를 다 이루었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다 이루었다 (요 19:30)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러므로 이것이 완전한 승리이다. 예수 님의 승리는 사람이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자신의 운명적 위치를 가지고 승리한 것이기에 인류 보편적 승리이다. 그래서 그분은 전 인류의 구원 자가 될 수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의 위치전쟁 신약만이 위치전쟁인가? 아니다 구약도 위치전쟁이란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아담은 위치를 잃어버리자 땅도 잃어 버렸다. 성경에서 땅과 사람 은 하나다. 사람이 없으면 땅도 필요 없다. 땅은 변개할 수 없는 인격을 예표 한다. 그래서 인격은 변개할 수 없는 하나님의 소유이듯이 성경은 땅은 영원히 팔수 없고 하나님의 것이라고 한다.(레 25:23) 땅을 영원히 팔 수 없나니 땅은 내 것이니라. 너희는 나그네요, 나와 함께 머무는 자 니라.(레25:23) 잠언에서도 땅의 위치를 옮기지 말라고 한다. 네 조상 들이 세워 놓은 옛 지계표(landmark)를 옮기지 말라.(잠22:28) 구약은 실재가 아니고 모형이고 그림자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을 불러 가 나안 땅이라는 위치를 정해주셨다. 가나안 땅은 무엇인가? 우리가 변개 할 수 인생의 위치를 예표한다. 이 위치를 떠났을 때 이스라엘 민족은 항상 환난을 당했다. 아브라함은 기근으로 인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이 집트로 내려갔을 때 자기 아내 사라가 파라오의 집으로 데려감을 당하 는 수모를 당하였다.(창12:15) 이와 같은 일은 또 다시 반복된다. 창세 기 20장에서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 그랄에 머물 때 블레셋 왕 아비 멜렉 앞으로 아내 사라가 불려가는 수모를 당한다.(창20:1) 또 창세기
160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26장에서 이삭은 가나안에 기근이 들자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때와 같 이 가나안 남방 그랄로 내려갔다. 거기서 하나님의 도우심이 없었다면 아비멜렉에 의해 이삭의 아내 리브가도 사라와 같은 처지를 당할 뻔하였 다. 하나님은 이 세 번의 위기에서 사라와 리브가가 더렵혀지지 않도록 모두 구해주셨다. 이것은 무엇인가? 여기서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예표하 고, 이삭은 예수님을 예표하고 두 여인들은 교회의 예표이자 인류를 예 표한다. 곧 인격을 예표한다. 사람의 위치는 하나님께 대하여 아들의 위 치와 궁극적으로 아내의 위치다. 사람은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씨 만을 받아 하나님의 아들을 생산해야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 님은 사라와 리브가의 위치를 섭리적으로 지켜주신 것이다. 마태복음 1 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 다섯 여자들의 위치도 하나님의 아내로서 인 류를 예표한다. 이 여인들의 행위는 선악과를 먹은 도덕적인 관점을 가 진 세상에서는 지탄받아 마땅할 여인들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 여인들의 운명은 자신들의 어떠한 처지에 관계없이 하나님의 경륜과 목 적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아내로서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아 아들을 생산해야 한다는 운명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창세기 46 장에서 야곱의 일가 일흔 명은 기근이 들자 가나안을 떠나 이집트로 내 려갔다. 결국 거기서 큰 민족을 이루었지만 노예가 되었다. 이것은 이미 창세기 15장 13절에서 하나님께서 경고한 말씀이었다. 그분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확실히 알지니 네 씨가 자기들의 소유가 아닌 땅에서 나그네 되어 그들을 섬기겠고 그들이 사백년 동안 네 씨를 괴롭히리라.(창15:13) 이스라엘은 이 위치를 떠나면 항상 환란이 왔다. 결국 구약의 역사는 무 엇인가? 이 위치를 회복하기 위한 하나님의 전쟁이다. 하나님은 이집트 의 노예된 백성에게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그 위치를 찾아주시기 위해 모 세를 내세워 출애굽을 통해 가나안 땅으로 인도하셨다. 가나안 수복전쟁 에서 우리는 도덕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수많은 전쟁이 있었다. 그러니
161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까 성경은 세상의 도덕적인 관점이 아닌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한 생명의 관점에서 보아야 이해가 된다. 하나님과 인생의 세계는 율법의 세계가 아닌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이기 때문이다. 생명의 세계는 선악의 율법이 작용하지 않는 다른 차원의 세계라는 것이다. 우리는 어 떠한 상황 하에서도 내 목적을 버리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어야 한다 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그 정해 주신 인격 안에만 생 명을 줄 수 있기 때문이다. 이스라엘 민족은 왜 그토록 자기들의 영토회 복을 위해 노력해왔는가? 여기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이 있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집트를 탈출 한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에게 원래 정해주신 위치, 곧 가나안 땅으로 복귀시키고 다윗을 통해 이스라 엘 왕국을 세우셨다. 그러나 세월이 흘러 이스라엘 왕국은 당시 세계 최강국이던 바벨론에게 정복 당하고 3차례에 걸쳐 바벨론 포로로 잡혀 가는 일이 일어났다. 표면적으로는 이스라엘 민족이 하나님을 배역함으 로 하나님께서 주변 강국을 통해 징벌하신 것이지만 이것은 결국 이스라 엘 민족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위치를 이탈한 결과 였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바벨론을 정복한 고레스의 마음을 움직여 이스라엘 민족을 다시 가나안 땅으로 3차에 걸쳐 귀환시키심으로서 하 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인격을 회복하는 계기가 되었다. 고레스는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다. (사45:1) 고레스가 사탄의 왕국의 예표인 느부갓네 살의 바벨론을 정복하고 포로되었던 이스라엘 민족을 구속한 것이다. 현 대에 와서도 이스라엘 민족이 2천년 동안 잃어버렸던 자신의 영토, 곧 위치를 회복하는 역사를 보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정해주신 인격은 절 대적으로 변개할 수 없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이 인격은 땅과 같다. 땅은 씨가 아니다. 땅은 씨가 필요하고 씨는 땅이 필 요하다. 이것이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다. 예수님 당시에도 유대인들이 성전보다 성전에 있는 재물을 귀중히 여기자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162 10. 우주 안의 3대 위치전쟁 너희 어리석고 눈먼 자들아 어느 것이 더 크냐, 예물이냐 예물을 거룩 히 구별하는 성전이냐? (마23:17) 위 말씀의 의미는 위치적 거룩함에 대한 말씀이다. 성전이란 예수 그리 스도의 인격, 곧 사람의 위치를 예표한다. 하나님이 정해 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거룩히 구별되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의 행위를 통해 서 거룩해 지려고 하지만 하나님의 입장은 다르다. 사람은 하나님께서 본래 정해주신 위치를 지키는 것이 구별되는 것이고 의롭게 되는 것이 다. 내가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 안으로 위치를 옮기면 거룩해 지는 것이 다. 이스라엘을 제외한 세상의 다른 모든 나라는 고대로부터 자신들의 영토 를 변동 없이 그대로 가지고 있는 나라는 단 한 나라도 없다. 그런데 왜 이스라엘만은 변동이 없는가? 이것은 그들의 땅의 위치가 변개할 수 없 는 사람의 위치, 곧 인격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절대적으로 흙-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인격은 변개 할 수 없는 것이고 어떠한 상황과 조건 하에서도 인생으로 지켜할 위치 라는 것이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하나님의 절대적 갈 망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자신을 뜻을 접으시고 하나님의 뜻에 순응하신 것이다. 아버지여, 만일 아버지의 뜻이거든 이 잔을 내게서 옮기 시옵소서, 그러 나 내 뜻이 아니옵고 아버지의 뜻이 이루어지기를 원하나이다.(눅 22:42)
163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이 침례를 받는 장면이 나온다.(마3:13-17) 우리 는 통상 침례는 죄인에게 행하는 십자가의 심판을 상징하는 의식으로 알 고 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왜 이 땅에 오셔서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까? 여기에 대한 해석이 없다. 있더라 하더라도 예수님 은 죄인이 아닌데 죄인의 모습으로, 곧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기에 침례 를 받았다고 해석한다. 성경은 예수님이 요한에게 침례를 받자 하나님께 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마 3:13) 하셨다. 그분이 침례를 받자 왜 하나님께서 기뻐하셨는가? 지금 까지 살펴 본 바와 같이 첫 번째 죽음은 창조 안에서 사람에게 정해준 운명이고 하나님의 목적과 경륜을 위한 필수 과정이라는 것이다. 아담은 이것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다. 예수님이 오 시기 전까지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신들과 같이 되어 인생의 죽음을 인 정하지 않았다. 아담은 인생은 근원적으로 육신이기 때문에 하나님의 경 륜과 목적을 위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하나님의 경륜을 부정한 것이다. 그런데 참 사람이신 예수님이 나타나서 인생에게 하나님이 정해 놓은 죽음의 경륜을 인정하셨다. 하나님 앞에서 인생이라는 진실을 인 정하신 것이다. 피조물이라는 것을 인정하신 것이다.(골1:15) 피조물의 모습으로 오셔서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주신 운명을 인정하신 것이다 (시39:4)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4) 그러자 하나님께서 기뻐하신 것이다. 하나님은 죽음을 선포한 자를 기뻐 하신 것이다. 하나님께서 창세 이래로 그토록 고대하던 사람이 나타나신 것이다. 예수님은 침례를 받으시기 전에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성취하
164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는 것이 우리에게 합당하니라. (마3:15) 하셨다. 사람들은 의를 만들려고 노력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렇게 하여 모든 의를 이루고자 하였다. 이 렇게 란 인생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다. 의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란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정해주신 바른 인 생의 위치(인격)이다. 모든 것이 그러하듯이 의도 나타나는 것이다. 의 가 있다면 의가 나타나는 것이며 의가 없다면 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태 양은 있기 때문에 매일 나타난다. 달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생명은 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다. 의는 만드는 것이 아니다. 의는 나타나는 것이다. 의는 생명이기 때문이다. 의가 있는 사람은 의가 나타 나고 불의가 있는 사람은 불의가 나타난다. 아담은 의를 만들려고 노력 한다. 그러나 그에게서 나타나는 것은 불의뿐이다. 소나무에는 송진이 있다. 그러므로 찌르면 송진이 나온다. 소나무에는 향기가 있다. 그러므 로 건드리면 소나무 향기가 나는 것이다. 만드는 것은 모두 가짜다. 나 타나는 것만이 진실이며 진짜다. 죄를 씻기 위하여 많은 사람들이 요단강에 모여들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의를 나타내려고 요단강에 나왔다. 죄를 씻어도 의는 나타나지 않는다. 의가 있는 자만이 의가 드러나는 것이다. 죄는 사람에게 묻어 있는 다른 무엇이 아니다. 그 사람 자체인 것이다. 그러므로 죄는 씻어지지 않는다. 씻을수록 더욱 죄가 드러날 뿐이다. 돌을 씻으면 돌이 더욱 드러날 뿐이 다. 사람은 씻을수록 오히려 독사의 자식들이라는 것만 드러났을 뿐이 다. 예수님은 자기의 죽음을 표현하면서 의를 이루고 있다. 하나님 앞에 서 사람은 흙이며, 숨이 코에 붙어 있는 것이 인생이다. 우리 인생은 죄 와 관계없이 한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 다. 이것만이 영원한 진실이다. 천지는 변해도 이것은 변하지 않는다. 이 것을 부인하는 모든 것은 거짓이며 이것을 숨기는 모든 것이 불의다. 죄 가 없다고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질 않을 피조물은 없다. 사탄은 선
165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악을 아는 지식을 줌으로써 이 불변의 진실을 은폐시켜 사람으로 교만에 빠지게 하였다. 이것이 불의다. 주 예수님은 이것을 폭로하였다. 죽음만 이 진실이라는 것을 발표하였다. 하나님 앞에 인생은 번제헌물이라는 것 을 발표하였다. 이것이 예수님의 의다. 예수님은 단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바른 위치, 곧 의를 발표했을 뿐이다. 우리도 우리의 진실을 발표하면 의가 나타날 것이다. 소나무가 소나무를 발표하면 향기가 나는 것은 당연하지 않는가? 주 예수님 안에 서 고치지 말고 만들려고 하지 말고 진실하게 발표하는 것이 하나님 앞 에 있는 우리의 의다. 아담은 가짜이고 속은 자이기 때문에 아담 안에 서 발표한 것은 가짜다. 그는 자기를 발표할수록 불의해지기 때문에 은 폐하고 씻고 고치며 만들려고 한다. 그러나 그럴수록 불의가 드러날 뿐 이다. 주 예수님 안에서 숨이 코에 붙은 인생임을, 피조물임을, 번제헌물 임을 발표하면 그 위치가 하나님 앞에서 인생의 의다. 요단강에 나온 모든 사람은 씻고 고치고 만들려고 나왔다. 오늘날도 마 찬가지다. 씻고 고치고 만들어 보려고 교회에 가고 절에 간다. 그러나 그럴수록 그러려고 하는 마음만 드러날 것이며 아무것도 달라질 것은 없 다. 그러려는 마음이 불의를 증거한다. 우리에게는 의가 없다. 그러므로 죽음을 발표해야 한다. 예수님은 우리 모두를 이끌고 요단강에 나와서 십자가의 심판 이전에 죽음을 발표하셨다. 이것은 우리 모두를 대표한 것이다. 무엇이 묻은 줄 알고, 무엇이 좀 잘못된 줄 알고 씻고 고치려고 나온 사람들에게 주 예수님은 죽음을 발표하셨다. 이 얼마나 놀라운 일 인가, 예수님은 유대인의 선생이며 공회원인 니고데모에게 사람이 거듭나지 않으면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 고 하셨다. 니고데모는 무엇을 좀 더하려고 예수님께로 왔던 사람이다. 그러나 무엇을 더할 것이 아니 라 다시 태어나야 된다는 것이다. 거듭나는 것은 우리의 죄 때문이 아
166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니라 우리의 생명으로는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거듭난다는 것은 옛사람은 죽는다는 것이다. 피조물인 인생이 죽는 것은 죄 이전에 창조자이신 하나님의 경 륜과 목적을 위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죽음을 통해서만 생명의 연합 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과 우리는 절대적인 관계다. 내가 죽지 않 고는 그분 안으로 연합될 수 없다. 아담은 여기서 속았다. 죽지 않고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이룰 수 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속은 것이다. 예수님 안에 있는 우리는 죽음을 발표해야 한다. 우리는 예수님 안에서 우리의 잃어버린 위치를 찾아야 한다. 의는 위치의 문제며 생명의 문제 다. 죽음은 우리에게 있으며 생명은 하나님에게 있다. 우리는 죽음을 발 표하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한다. 우리가 죽음을 발표하면 그것이 의이 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한다. 주 예수님은 우리를 대표하여 죽음을 발 표했고 하나님은 생명을 발표하는 표시로 비둘기를 보냈다.(마3:16) 아 담은 하나님의 깊고 높은 죽음의 경륜을 거부하고 사탄에게 속아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의 근원적 위치 를 선포하고 계신다. 이 위치가 하나님과 사람의 바른 관계다. 하나님은 이것을 의롭다고 하시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생명은 사람-흙을 찾아 간다. 죽음을 발표한 자는 의롭고 생명을 발표한 자는 은혜롭다. 발표된 죽음 앞에 하나님은 은혜를 주신다. 진노의 하나님은 비둘기 하나님이 되어 아들 위에 임하셨다. 지금도 그러하고 전에도 그러했고 장차도 그 러하실 하나님은 참되시다.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인류를 대표한 죽음을 발표한 후에 하나님으로부터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마3:17) 라는 인정을 받았다. 그 후 성령에 이끌리어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 야로 가셨다. 사람은 하나님에게 아들로 인정되어야 하고 사탄에게 이겨 서 만유를 다스리고 지배할 하나님의 대리자로 높임을 받아야 한다. 아
167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담이 이 지위와 권세를 빼앗겼기 때문에 누군가가 이 우주적 회복의 선 두에 서야 했다. 예수님은 우리의 선두주자이신 주님이시다.(히6:20) 그 때에 (마4:1) 란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죽음을 발표한 침례로서 의를 이루고 하나님의 영이 비둘기같이 그 위에 임하심을 보면서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 이란 말씀을 들었을 때다. 주님께서 의를 이루심으 로 진노의 하나님은 비둘기 같은 영으로, 사랑하시는 아버지로 드러나셨 다. 죽음을 통하여 하나님은 아들로 살리시고 아버지가 되신다. 이것이 우리 존재의 회복이다. 주 예수님은 침례로 사람의 존재를 회복시키셨다. 그 리고 승리로 권위를 회복시키시기 위하여 마귀에게 시험을 받으러 광야 로 나가셨다. 사람은 하나님을 대신하여 만유를 다스리고 지배해야 한 다. 아담은 존재적 위치를 상실했기 때문에 권위도 상실했다. 그러므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멸망 - 존재와 권위의 상실에 이르렀다. 아담 은 사탄에게 실패하므로 온 인류를 천사의 수하에 들어가게 했다. 인류 는 천사의 수하에서 하나님을 경배했고 도처에서 종교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실패를 만회하고 새 인류의 머리가 되기 위하여 아담을 속였던 이 시험하는 자와 정면으로 대결하였다. 하나님은 이 우 주적 대결을 위하여 그 아들을 광야로 이끌어 내셨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시험을 받으러 광야로 나갔다. 첫 사람 아담은 이 시험에 실패했 다. 그러나 마지막 사람 아담은 이 시험에서 이겼다. 이 시험에 이기는 자가 마지막 사람 아담이 되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에 불과했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었다(고전15:45). 첫 사람 아담은 사망을 주었지만 마지막 사람 아담은 생명을 주었다. 이는 그분이 이 시험에서 승리했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이 전쟁에서 인생은 한 번 죽는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고 창조 안에서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을 철저히 인정하셨다. 그러자 마귀가 물러가고 천사가 와서 예수님을
168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수종 들었다. 사람이신 예수님이 신인 마귀를 이긴 것이다. 우리는 신-천사들과 같은 자가 될 자가 아니고 사람의 아들로서 하나님 을 계승해야 하고 육체로서 아버지를 나타내야 할 자다. 하나님께 육체 를 가지시게 해야 할 자다. 그것을 위하여 우리의 육신을 살아있는 희생 물로 드려야 한다. 뒤집혀진 우주의 질서를 바꾸어 천사들로 하여금 사 람에게 수종들게 해야 한다. 이것은 우리의 진실에 달려 있다. 주 예수 님 안에서 우리도 죽음을 확인하고 발표하자! 이것만이 진실이다. 우리 가 이것을 감추어 두고 다른 진실을 추구한다면 그것은 곧 가증한 종교 다. 교리나 조직이나 무슨 행위나 실행으로 구원에 이르려고 하지 말아 야 한다. 그것은 하나님 앞에 가증한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은 희생물과 헌물이 아닌 상한 영이라고 했다. 죽음이 아닌 모든 것들은 희 생물과 헌물이다. 주 예수님은 희생물과 헌물로 나아가지 않으셨다. 교 리나 조직이나 무슨 지식으로 나아가지 않으셨다. 갈릴리로부터 요단강 에 이르러 요한에게 침례를 받으셨을 뿐이다. 그분은 자신의 죽음을 발 표했다. 사실상 모든 헌물은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다. 산 채로 하나님께 드려진 것은 아무 것도 없다. 그러한 헌물 대신에 어떤 교리나 지식도 하나님께 드려질 수 없다. 헌물을 드리기 위하여 기록된 율법이 있고 또 옳을지라 도 결국 드려지는 것은 헌물뿐이다. 성경에 기록된 모든 율법과 교리와 교훈은 참된 헌물을 드리기 위한 것이며 이 헌물은 우리 자신이며 합당 한 우리 자신은 죽음을 발표한 자인 것이다. 지금까지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이 죄 때문에 첫 번째 죽음이 왔다고 알고 있다. 그러나 죄의 결과 사망은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진 것으로 최종 종착역은 두 번째 사망이다.(계20:14) 첫 번째 죽음은 모든 인류에게 정 해진 것이다. 이 첫 번째 죽음이 없으면 사람은 하나님의 생명을 이식받 을 수 없다. 아담은 이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그래서 선악과를 먹은 것
169 11. 예수님이 침례를 받으심 이다. 첫 번째 죽음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것은 내가 피조물임을 인정하 지 않는 것이고 사람임을 인정하지 않는 것이다. 더 나아가 창조주 하나 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어떻 게 보면 죄와 관계없이 내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념상 생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 죽음을 발표하는 것이 내가 하나님 앞에 피조 물로서, 사람으로서 합당한 위치를 인정하는 것이다.(시39:4) 주여 나로 하여금 내 종말과 내 날들의 한계가 어떠한 것인지 알게 하사 내가 얼마나 연약한 존재인지 알게 하소서(시39:4) 이것이 우리의 진실을 가지고 거짓의 아비인 사탄을 이기는 것이고 하 나님과 사람의 합당한 관계로서 의를 이루는 것이다. 우리는 죽음을 발 표하고 의를 이루어야 한다. 그런 연후에 하나님의 영으로 충만된 우리 의 영은 사탄의 모든 계교를 능히 물리치고 우주의 질서를 회복하고 나 라와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것이다. 정통적 교리나 이단적 교 리나 죽음이 없는 것은 모두 무효다. 우리가 무엇을 믿든지 죽음이 발표 되지 않는다면 모두 무효로 돌아간다. 그리고 이 우주적 회복에 참예할 수 없다. 우리 주 예수님은 요단강에서 죽음을 발표하고 광야에서 사탄 과 싸우셨다. 사탄의 시험을 통과하고 난 후에 천사들에게 수종을 받으 셨다. 죽음만이 사탄을 정복하고 인권을 회복하며 나라와 권세를 아버지 하나님께 바치는 유일한 길이다. 아멘
170 12. 십자가의 도 12. 십자가의 도 십자가 - 마귀에 대한 승리 예수님이 십자가에 죽었다는 것은 세상 상식으로 보면 완전한 패배고 허 무한 죽음이다. 그런데 이것이 어떻게 마귀에 대한 승리인가? 성경에 쓰 여 있으니까 승리인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으라는 것은 곤란하 다. 십자가의 승리는 사람에게 정해진 죽음이란 위치를 가지고 설명하지 않으면 해석이 되지 않는다. 죄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천사는 천사대로 그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켜야 하고, 사람은 사람대로 자신의 위치를 지 켜야 한다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필요에 의해 각각의 피조물을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하여 자신이 하나 님같이 되려고 했고,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했다. 그러므로 죄가 하나 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라면 구원이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 다. 쉽게 말하면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하나님 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십자가에서 순종하셨다고 했다.(빌2:8) 왜 순종해야 하는가? 하나님은 몸이 없는 영이시기 때문 에 몸을 가진 사람을 절대적으로 필요로 한다. 하나님은 우리를 사람으 로 창조했지 천사로 창조하지 않았다. 하나님은 사람만을 필요로 하신 다. 사람은 사탄이 와서 아무리 유혹해도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이라 는 위치를 이탈해서는 안된다. 인생이 그 위치를 이탈해버리면 하나님의 창조 목적은 수포로 돌아가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영적전쟁은 사람이라는 위치를 지키는 전쟁이다. 이것 을 순종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기에 예수님은 십자가
171 12. 십자가의 도 에서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내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느냐, 아니면 신도 아니면서 신들과 같이 되고 싶 어 하나님의 목적 밖으로 이탈하느냐, 이 싸움이다. 이 위치전쟁에서 아담 은 사탄에게 패했지만 예수님은 승리하신 것이다. 전쟁에서의 승리는 대 가가 필요하다. 그래서 예수님이 피 흘리신 것이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참사람으로 인정하고 하나님이 창세로부터 사람을 창조하시고 예 정하신 코스대로 살리신 것이다. 사람에게 정해 놓으신 생명의 노선 안에 서 살리신 것이다. 십자가- 생명의 접촉점(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우리에 죄에 대한 보상만이 아니다. 죽음을 통 해서만이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이식된다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우 리는 헌물로서 하나님의 불로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 하나님께 향기로 운 냄새를 내는 헌물이 되어야 한다.(레1:9, 17) 죄가 있으나 없으나 불 -하나님을 만나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번제단에서 사람은 하 나님을 만나는 것이다. 번제단에서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죄가 있 기 때문에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는 것이 아니다. 단지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희생물로서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 17:11) 그러나 하나님과 우리는 절대적 관계다. 절대적 관계는 적당한 선 에서 타협되는 것이 아니다. 죽음을 통해 연합되는 것이다. 인간의 세계에 서도 어떤 이에게 내가 순종하려면 나를 완전히 내놓아야 한다. 하물며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떠하겠는가? 예수님은 하나님-사람으로 오셨다. 예수님은 하나님으로서 지성소로부 터 나와 번제단으로 가셨고 사람으로서는 바깥뜰에서 번제단으로 가신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은 상호 죽음 안에서 만나는 것이다. 십자가란 심 판의 의미도 있지만 씨-하나님과 흙-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예수님은
172 12. 십자가의 도 물론 씨-생명이시지만 육신으로 오셨다는 것은 겉모습은 흙-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그분이 하나님의 씨를 받아 부활생명, 곧 하나님의 아들로 명실상부하게 태어나려면 번제단에서 불-하나님께 태워져야 한다. 그래 서 하나님과 사람이 상호 만나 곳이 번제단-십자가다. 그러니까 십자가 는 단지 죄에 대한 심판만이 아니라 생명의 접촉점이다. 예수님은 죽음 을 통해 하나님의 씨를 받아 부활생명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 셨다.(롬1:4) 그러므로 예수님은 지성소로부터 번제단으로 나왔다면 우 리는 세상으로부터 번제단으로 가야한다. 그곳에서 우리는 하나님을 만 나는 것이다. 십자가 인류의 죄에 대한 심판 이제 심판에 대한 의미를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 필요가 있다. 아담은 사 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러므 로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예수님이 곧 신 과 같은 사람으로 심판을 받았다는 것이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예수님 은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많은 기적을 행하셨다. 죽은 자를 살리고 오병이어의 기적과 심지어 물위로 걸어가고 바람과 바다를 잠잠케하는 기적을 행하셨다. 그때 사람들은 이 사람이 과연 누구인데 이런 일을 행 하는가? 하면서 경외심을 가지고 바라보았다. 참으로 선악과를 먹고 신 들과 같이 되고 싶었던 모든 사람의 로망이었다. 그래서 많은 사람이 따 라 다녔다. 그분이 십자가로 끌려갈 때도 제자들은 예수님이 허무하게 십자가에 죽을 것이라고는 별로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예 수님의 능력 정도면 충분히 십자가에서 탈출하여 이스라엘 나라를 로마 의 식민지로부터 구원할 것이라고 믿었을 것이다. 성경에도 마지막 때에 모세와 같은 대언자가 나온다고 기록되어 있으니 당연히 그들은 모세와 같은 메시아를 믿었던 것이다.(신18:15, 행3:22) 그러나 그들의 예상은
173 12. 십자가의 도 완전히 빗나갔다. 이는 모세가 이스라엘이라는 민족적 구원자라면 예수 님은 전 인류의 구원자였던 것이다. 인류가 이렇게 된 것은 근원적으로 사탄에게 속았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모세가 이스라엘을 구원했으나 인 류의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예수님이 또 다시 이스라엘을 구원해보았 자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류의 근원적인 문제를 해결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은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다. 이 신들과 같은 사람이 심판받아야만 인류의 문제가 해결되고 하나님 나라가 오는 것이다. 지금 소위 예수 믿는 사람들에게 신들과 같이 된 사람이 심판받아야 한 다는 이런 문제 의식 자체가 없다. 그래서 근원이 없기 때문에 공중에 떠 있는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언제 무너질지 모른다. 예 수님은 바로 이런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이제 십자가에 달려 있는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그분 자체의 존재 밖에 남은 것 이 없었다. 흙과 같고 재와 같은 사람이다. 이 사람을 하나님은 의( 義 ) 로 여겼다. 십자가에 매달려 있는 사람이 하나님과 바른 관계 하에 있는 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사람 안에만 하나님은 씨-생명을 심으실 수 있다. 세상 사람과 그리스도인은 구별이 간단하다. 세상 사람은 신들과 같은 사람이고 그리스도인이란 하나님이 정해주신 위치에 있는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바울은 자신이 하나님에게서 난 의를 소유한 채 그분 안에서 발견되기를 원한다고 하였다.(빌3:9) 그러니까 이것은 자신의 정체성이 십자가에서 발견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무엇을 발견 해야 하는가? 우리 인간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하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리는 등 수많은 기적을 행하셨음에도 불구하고 십자가에 매달리니 죽더라는 것이다. 그분이 죽지 않았다면 그분은 신이다. 그분은 거기서 완전한 사 람으로 죽으셨다. 어떠한 사람도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174 12. 십자가의 도 것이다. 이것을 보라는 것이다.(민20:8)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 아담은 속았다는 것이다. 육신을 가진 인간은 다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 고 있는 것이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되 신적인 예수님만을 믿고 그런 것들 만을 추구한다. 이것이 바로 죽기 싫어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 고 싶은 사람의 기본적인 속성이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믿으면 구 원을 얻는다고 한다. 틀린 말은 아니지만 성경의 이 말씀은 하나님의 목 적 안에서의 믿음을 말하는 것이다. 내가 아무리 예수님을 믿는다 하더 라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벗어난 믿음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아니고 천사 숭배라는 것이다.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지만 도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는 것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남성이고 사람은 여성이다. 남 성과 여성이 결혼하지 남성과 남성이 결혼하지 않는다. 이러한 믿음은 동성애자와 같은 것이다. 신격은 인격을 원한다. 예수님은 이런 사람들을 향해 내가 너희를 결코 알지 못하였노라. 불법 을 행하는 자들아, 너희는 내게서 떠나라. (마7:23) 말씀하고 있다. 이러 한 사람은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는 철저하게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하지 천사가 되길 원하지 않는다. 천사 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로서 상속자다.(히1:5)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문할 것이다. 그분은 하나님이시지 않느냐?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우리 피조물인 인생이 하나님을 안다고 하 지만 사실상 모르는 것이다. 우리가 따르고 추구할 것은 사람이신 예수 님이라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인간 타락의 근원을 모르니 여전히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 지만 결국은 천사숭배를 하고 있는 것이다. 전능하신 하나님으로의 예수 님, 신적 능력을 가진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다. 위대하고 강하신 예수만을 강조하고 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그래서 열심히 숭배하
175 12. 십자가의 도 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숭배를 하면 하면 할수록 그분과 우리는 멀어진 다. 종교란 신을 숭배케 하여 신과 사람을 분리시킨다. 그런데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정체성을 보니 그분 안에서 내가 발견 된다.(빌3:9) 그분과 내가 한 운명이다. 숭배하지 않지만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된다. 그분도 거기서 흙이고 나도 흙이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님을 보니 옛적에 강력하고 명성있는 크고 위대한 모든 것이 다 없어졌 다. 선악과를 먹고 신들 같았던 아담은 죽고 연약한 어린양의 인격만 남 았다. 그런데 이 자리에 있는 사람을 하나님은 의롭다고 여기셨다. 참사 람이라고 인정하시고 살리셨다. 거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이 말씀하신 대 로 내가 너희 안에 너희가 내안에 있게 된다.(요14:20) 그분이 오신 것은 종교적인 경배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고 생명을 주 려고 오셨다. 생명이란 그분 자신이다. 우리가 그분 자신을 살라고 하는 것이다.(갈2:20) 정상적인 사람이 어떤 사람이라는 것을 샘플로 보여 주 시고 또 그분 자신이 우리의 씨가 되고 우리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우 리가 사람으로서 사람답게 살고, 사람으로서 자신의 근원이신 하나님을 섬기는 삶을 보여 주신 것이다. 그 자리가 어디인가, 십자가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은 단순히 심판만의 의미가 있는 것이 아니라 마 귀에 대한 승리와 하나님의 생명이 사람에게 이식되는 생명의 접촉점이 다. 그래서 만유를 포함한 그리스도의 죽음인 것이다. 이것이 그리스도 죽음 안에 있는 경륜의 비밀이다. 죽음이 없으면 영생(거듭남, 부활생 명)이 없다. 이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과정이다. 십자가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 마귀는 예수님을 십자가로 이끌고 가서 예수님에게 생명의 길, 곧 사람 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 킴으로서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격을 지킴으로 생
176 12. 십자가의 도 명의 길을 걸으신 것이다. 그래서 부활하신 것이다.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자 그 안에 있는 씨가 열매를 맺은 것이다.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 문에 부활하신 것이 아니다. 성경은 그분 스스로 일어났다고 말하지 않 고 하나님께서 일으키셨다고 말한다. 씨가 땅에 뿌려지면 생명이 발아하 여 열매를 맺듯이 씨-하나님과 흙-사람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했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다. 이를 통해 예수님은 마귀에게 빼앗긴 사람의 위치(인격)를 되찾아 오셨다. 이것이 구속이다. 사람의 빼앗긴 위치가 원위치 된 것이다. 원 위치된 사람, 곧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 에게는 죄가 없다. 이것이 구속, 죄 사함을 받은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 은 이 한 가지 십자가 사건을 통해 구속과 마귀에 대한 승리와 아담이 부끄럽게 여기던 사람의 육신에 대한 죽음을 부활생명으로 바꾼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다.(고전1:24) 주의 성도들의 죽 음은 그분의 눈 앞에서 귀중하도다.(시 116:15), 이제부터 주 안에서 죽 은 자들은 복이 있도다.(계14:13) 그리스도인이란 신들과 같은 사람이 아니고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정상적인 사람은 한 번은 죽어야 한 다는 것이다. 여기에 하나님의 신성한 경륜이 있다.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심판의 의미로만 생각지 말라, 단순 히 우리 인생들만을 위한 혜택으로도 생각지 말라.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다(고전1:24) 우주 안에 모든 비밀이 거기에 다 들어 있다. 어떻게 그것이 심판이고, 어떻게 그것이 승리고, 어떻게 그것이 생명인 가? 어떻게 그것이 우주적인 대 전환점인가? 인생의 죽음은 창조 안에 정해진 것이고 이 과정이 없으면 영생이 없었 다. 이게 싫어서 아담은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아담의 재료는 흙이 다. 부서지기 쉽다는 것이다. 연약하다는 것이다. 아담은 천사보다 낮게 지음 받았다.(시8:5) 그래서 본디 사람은 하나님께 의존해야 되고 순종 하도록 지음 받았다. 거역하는 존재로 지음 받지 않았다. 우리가 처음부 터 죽지 않는 존재라면 하나님께 의존할 필요가 없다. 사탄은 그래서 처
177 12. 십자가의 도 음부터 반역한 것이다. 아담은 스스로 반역한 것이 아니고 사탄에게 속 았다는 것이다. 우리 스스로 반역한 것이 아니기에 하나님은 그 책임을 1차적으로 사탄에 묻고 있다. 원수가 이렇게 하였다는 것이다.(마13:28) 그래서 인간에게는 희망이 있다. 유혹자가 있기 때문에 구원자가 있다는 것이다. 아담이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은 자신의 연약함을 천사와 비 교한 것이다. 천사는 죽지 않는데 나는 왜 죽는가? 여기에 불만이 있었 다. 만약에 사람이 죽지 않는 천사를 보지 않았다면 사람은 자신이 죽는 것에 대해 당연하게 생각하였을 것이다. 사람의 인식이란 자신이 본 것 의 범위를 벗어 날 수 없다. 예를 들어 아프리카 오지에 문명과 차단된 사람들에게 스마트폰을 보여주어 봤자 그 사람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 른다. 사람들이 왜 육신의 죽음에 대해서 그렇게 부정적이고 죽지 않으 려고 노력하는가? 죽지 않는 어떤 존재를 보았기 때문이다. 사람이 그런 존재를 보지 않았다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여겼을 것이다. 그래서 아담 은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창세기 6장에서 천사들과 결합한 옛적에 강력한자, 명성있는 자들은 선악과를 먹은 결과 천사들을 부러워하여 나온 최종산물의 예표이다. 지금도 사람들이 추구하는 모든 것은 사실 근원을 살펴보면 모두 천사를 사모하는 것이다. 사람에게 부 족한 것이 있다면 천사적 요소인 능력과 죽지 아니함이다. 그러나 하나 님 나라는 그러한 능력으로 구성된 나라가 아니라 어린양의 인격으로 구 성된 나라다. 사람들은 크고 위대한 것을 좋아하지만 성경은 크고 위대한 것에 대해 부정적이다. 위대한 것은 바벨로 간다. 또 큰 것일수록 제한이 있다. 바 위덩어리는 크지만 제한이 있다. 태양도 아무리 크지만 제한이 있다. 그 러나 공기는 아주 작은 보이지 않은 입자들로 구성되어 있지만 무한하 다. 영생의 비밀이 여기에 있다. 죽음이란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런데 거 기에 영생이 있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이 단지 우리의 죄에 대한 심판과 혜택으로만 생각했는데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과 지혜
178 12. 십자가의 도 로 인간이 그토록 부정적으로 생각하는 육신의 죽음에 대한 문제를 해결 하시고 우리의 대적인 사탄을 물리치신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권능과 지혜로 죽음과 심판이라는 부정적인 상황을 생명과 승리의 긍정인 상황 으로 바꾸셨다
179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그렇다면 예수님이 십자가의 위치전쟁을 통해 마귀로부터 획득한 전리품 에는 어떤 것이 있을까? 마귀는 최종적으로 아담이 생각하는 인생 최대 의 약점인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가지고 송사를 했다. 그러나 예수 님은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가지고 승리했기에 더 이상 마귀의 송사 가 있을 수 없는 것이고, 마귀와 전쟁에서 완전 승리했으므로 마귀를 멸 하신 것이다. 사탄은 근본적으로 속이는 자로서 잔머리를 굴려 아담을 속이는데 성공했으나 이제는 예수님이 사람의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그의 머리를 상하게 한 것이다. 사탄의 속임수를 사람의 진실로서 승리 하신 것이다. 더 이상 사탄의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 길을 열어 놓으신 것이다.... 여자의 씨(예수님)가 네(사탄) 머리를 상하게 할 것이요(창 3:15) 이것에 대한 예표가 다윗이 돌 한 개로 골리앗의 이마를 쳐서 죽이는 장 면이다. 손을 자루에 넣어 거기서 돌을 꺼내어 돌팔매기구로 던져 불레셋 사람 (골리앗)의 이마를 치매 그 돌이 그의 이마에 박혀 그가 얼굴을 땅에 대 고 쓰러지니라(삼상 17:49) 돌은 성경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한다.(단 2:45, 벧전 2:4) 이것은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의 상징인 골리앗에게 승리한다는 것을 예표적으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어린양이 호랑이를 이겼다는 것 이다. 상식적으로 어떻게 어린 다윗이 전사 골리앗을 이길 수 있는가? 그런데 이것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자 그러면 구체적으로 예수님이 십 자가의 위치전쟁으로 사탄으로부터 빼앗은 전리품을 살펴보자. 1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마귀를 멸하기 위함(히 2:14)
180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마귀가 인간과 비교했을 때 최대의 강점은 무엇인가? 죽지 않는다는 것 이다. 그래서 사람의 최대 약점인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집요하게 파고 드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게 하여 나한테 경배하면 나와 같이 죽지 않는 신이 된다 고 하면서 사람을 속여 둘째 사망으로 인도하는 권능을 가졌다는 것이다. 아담은 마귀의 유혹에 넘어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고귀한 인격의 자리를 이탈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마귀가 인간의 최대 약점으로 여기던 첫 번째 사망, 곧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사람의 운 명인 육신의 죽음을 가지고 마귀와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했다. 그래서 더 이상 마귀의 속임수가 사람에게 통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 길을 사람 이신 예수님이 열어 놓으신 것이다. 첫 번째 주자로 예수님이 길을 열어 놓으셨기에 우리도 이제 승리에 참여할 수 있는 것이다. 적장인 마귀는 십자가의 위치전쟁에서 예수님에게 패배 당했으므로 멸망을 선고 받은 것이다.... 이것은 그분께서 죽음을 통해 죽음의 권능을 가진 자 곧 마귀를 멸하 시려고(might destroy 미래)(히 2:14) 마귀를 멸한다는 말은 그를 없앤다는 말이 아니다. 마귀는 영적인 존재 로 죽지 않는다. 마귀는 본질적으로 속이는 자다. 요한일서 3장 8절에 서 ~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나신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 한다. 마귀의 일들을 멸하므로 우리를 마귀 의 속임수로부터 해방시켰다는 의미다. 마귀의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멸 망은 미래에 일어날 일이다. 또 그들을 속인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 20:10) 그러므로 지금도 사람이 예수 그리스도 밖에 있으면 여전히 마귀의 자식 으로 사는 것이다.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므로...(요 8:44) 피조물의 타락은 기본적으로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
181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다. 사탄은 원래 천사의 수장으로서 하나님과 종의 관계를 유지해야 했 다. 그런데 사탄은 하나님과 같이 되려고 자기의 위치를 이탈했는데 이 것이 이미 사탄에게는 사망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아담이 창조되기 전에 이미 사탄이 타락하자 사형선고를 내렸고 종말에 불 호수에 들어갈 것을 예정하고 있는 것이다.... 마귀와 그의 천사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존하는 불에 들어가라(마 25:41) 마귀와 그 졸개들의 운명은 정해져 있지만 세상을 점령하고 있는 그들을 사람이 이길 때까지 마귀와 그의 졸개들에 대한 형 집행은 연기되어 있 는 것이다. 지금은 사탄의 자식들로 세상이 채워져 있지만 장차 하나님 의 아들로 세상이 채워지면 그들은 설 곳이 없기에 밀리고 밀려서 불 호 수에 들어가는 것이다. 2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을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심(히 2:15) 아담 안에 있던 사람들은 하나님이 주신 인생의 운명인 죽음을 두려워하 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여 있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생은 한번은 죽 는 것이 당연하고(히9:27) 그 뒤에는 부활이 있다는 것을 보여주심으로 서 사람을 죽음의 두려움으로부터 건져내셨다. 사실 이것은 아담이 맨 먼저 맛보고 후손들에게 물려주어야 할 운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 셔서 이것을 보여주신 것이다.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가 영광과 존귀로 관을 쓰신 것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 을 맛보려 하심이라.(히 2:9) 또 죽음을 두려워하여 평생토록 속박에 얽매인 자들을 건져내려 하심이 라.(히2:15) 물론 예수님도 육신을 가진 인생으로 오셔서 당연히 죽음에 대한 두려움
182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이 있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기 전날 밤 겟세마네 동산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 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마26:39) 그리고 십자가 상에서는 이렇게 부르짖으셨다.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막15:34) 이 기도에 대해 복음서에는 하나님의 응답이 없었다. 그런데 응답이 없 었다면 복음이 아니다. 그래서 히브리서에서 이렇게 답하고 있다. 그분 께서 친히 육체로 거하는 동안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 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5:7) 하나님께서 당시 예수님의 기도와 간구를 들으시고 그분을 죽음의 두려 움으로부터 해방시키신 것이다. 이제 예수님은 하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으시고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하셨고, 마지막으 로 하나님께서 주신 구속 사역을 다 이루었다. (요19:30)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그러자 하나님은 예수님을 부활시킴으로서 아담이래 평생을 죽음의 두려움에 있던 인류를 죽음의 속박으로부터 건져내신 것이다. 3 십자가에서 율법을 폐하시고 정사들과 권능들을 이기심(골 2:14-15) 원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율법의 관계가 아닌 생명관계이 다. 그러나 아담이 아들의 위치를 이탈해서 종의 위치로 갔기 때문에 율 법이 주어지고 계약관계가 된 것이다. 그러니까 율법은 아들에게 주어지 는 것이 아니고 종인 천사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은 무엇 을 위한 것이냐? 그것은 약속을 받은 씨(예수 그리스도)가 오실 때까지 범죄들로 인해 더해진 것이요. 한 중재자의 손에서 천사들에 의해 정해
183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진 것이라.(갈 3:19) 그러므로 이제 예수님으로 인해 사람이 종의 위치에서 아들의 위치를 회 복했으므로 아들에게는 더 이상 율법이 작용할 수 없고 폐기된 것이다. (엡2:15, 골2:14) 원수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셨 으니(엡2:15a) 우리를 대적하고 우리를 반대하던 규례들을 손으로 기록한 것을 지우시 고 그것을 길에서 치우사 그분의 십자가에서 못 박으시며(골2:14) 또 아담이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갔을 때는 사람이 천사도 아니 면서 천사의 옷을 입고 있었다고 할 수 있었는데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 자 몸에 맞지도 않은 천사(정사들과 권능들)의 옷을 벗은 것이다. 정사들과 권능들을 벗기사 십자가 안에서 그들을 이기시고 드러내어 구 경거리로 삼으셨느니라.(골 2:15)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기 전까지 마귀의 졸개인 타 락한 천사들은 사람을 조롱하고 있었다. 세자가 될 자가 종의 위치로 갔 으니 웃음거리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제 아들의 위치를 회복하므로서 우주질서가 회복되었고, 그동안 조롱하던 종(천사)들을 십자가에서 구경 거리로 삼으신 것이다. 4 구속 : 사람의 인격과 인권을 회복함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이루신 일의 결정체는 아담이 잃어버린 인격과 인권을 회복했다는 것이다.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부끄러워 하여 타락한 천사인 신격을 선택함으로서 인격을 통해 누릴 수 있는 영 광, 곧 인권을 잃어버렸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 신 인격에 만족하시고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격을 회복함으로서 사 람의 인권을 누릴 수 있게 되었다
184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골1:14) 구속이란 빗나간 사람의 위치(인격)을 원래의 위치로 회복한 것을 말한 다. 5 죄(Sin)의 제거와 죄들(Sins)이 용서됨 요한복음 1장 29절에서는 예수님을 가리켜 세상 죄를 제거하시는 하나님 의 어린양 이라고 말씀하고 있다. 성경에서 죄란 피조물이 하나님의 목적 에서 이탈한 것을 죄라고 한다. 그러므로 위치를 이탈한 자가 원래의 위 치로 돌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여기서 원래의 위치로 돌아오다 란 성 경의 용어는 구속(redemption)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 죄(단수)란 근원적인 뿌리이고 죄들(복수)이란 외부적인 것으로 죄의 열 매를 말한다. 그러니까 내부적인 죄의 뿌리는 제거되어야 하고, 죄의 결 과 외부적인 행위인 죄들은 용서를 받아야 한다.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자신을 희생물로 드려 죄(Sin)를 제거하셨느니 라.(히9:26b)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Sins)의 용서를 받 았도다(골1:14) 성경에서 피란 생명을 의미하지만 피 흘림이란 죽음을 의미한다. 예수님 이 죽음을 통해 인격을 회복함으로서 하나님과 사람이 바른 관계(위치) 에 있으니 죄가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이 말하는 의( 義 )는 하나님 과 바른 관계에 있다 라는 의미이다. 세상이 말하는 의인( 義 人 )과 성경 이 말하는 의인( 義 人 )은 다른 의미이다. 하나님께서 사람을 의롭다고 보시는 위치는 십자가이다. 이 위치는 나는 피조물이고, 아들이며 최종적으로 흙이라는 위치( 格 )다. 이것만이 진실
185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이고 나머지는 사람이 꾸민 거짓이다. 원래의 위치로 회복하다. 곧 구속 ( 救 贖, redemption)이라는 용어는 하나님의 입장에서 빗나간 인생을 원 위치로 회복시킨다는 의미고, 사람의 입장에서는 인생의 원위치를 깨닫 고 원래의 자리로 되돌아간다는 의미로 회개( 悔 改, repent)라는 말을 사 용한다. 이 위치에 있는 자를 하나님은 의( 義 )롭다고 보신다. 안타깝게 도 이 용어를 정확히 아는 그리스도인은 그리 많지 않다. 요한복음 16장 10절에 주님께서 의( 義 )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라는 말씀이 있다. 아들로서 당연히 아버지께로 가는 것이 의( 義 )라는 것이 다. 아들이 마땅히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하에 있는 것이 의( 義 )라는 것 인데 이 위치가 십자가라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류역사에 세상의 많은 성인군자들은 아버지가 누군지 알려져 있지 않지만 예수님만은 아버지가 있고 아버지의 뜻을 수행하였다. 6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심(행 2:36) 그런즉 이스라엘 온 집이 확실히 알지니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은 그 동 일한 예수님을 하나님께서 주와 그리스도로 삼으셨느니라. 하니라(행 2:36) 물론 예수님은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주와 그리스도였다. 그러나 예수 님께서 이 땅에 오시어 주와 그리스도가 되시려면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그분은 어떤 공적도 없이 낙하산 인사가 되어 주와 그리스 도가 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런 종교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야 한다.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로 이 땅에 오셨지만 한편으로 그분은 수많은 인류 중에 한 사람으로서 사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나님께 인정받는 합당한 명분이 있어야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는 것이다.(롬1:4) 아무런 명분도 없이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소리친다면 누가 알아 주
186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겠는가? 고대 전쟁에서는 왕자들 중에서 전쟁에 나가서 승리한 자가 세 자로 책봉되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 서 승리하심으로서 하나님 아들의 명분을 확보하셨고 새로운 인류의 주 - 조상과 그리스도가 되신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란 하나님의 위임을 받은 자란 의미이다. 대리자란 뜻이다. 7 예수님께서 구원자가 되시고, 사망을 폐하고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드 러냄(딤후 1:10) 십자가에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함으로서 사탄에게 포로로 잡혀 있던 인류를 구출하는 구원자가 되셨고(엡 4:8), 그분께서 높은 곳으로 올라가실 때에 포로로 사로잡힌 자들을 사로잡아 이 끄시고(엡 4:8a)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망 안에 있던 인류를 예수 님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키심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노선 으로 이끄셨다. 곧 예수님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시고 인류를 생명(거 듭남, 부활생명)으로 인도하셨다. 그러므로 그분은 사탄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을 폐하신 분이고 부활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드러내셨다.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 사망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과 죽지 아니함을 밝히 드러 내셨느니라.(딤후 1:10) 8 새 사람이 되심(엡2:15, 4:24, 골3:10) 원수되게 하는 것 곧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 애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 이렇 게 화평을 이루게 하시고(엡2:15)
187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부활된 몸은 아담과는 근원적으로 다른 새 사람이다. 아담이 흙이라면 부활한 몸은 보석과 같이 영원한 영적인 몸이다. 예수님은 부활을 통해 새 사람으로 생명이 전환되었다. 우리 또한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피 조물로서 새 사람-새로운 인류가 되었다. 그런즉 누구든지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 것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고후5:17)...너희는 옛 사람과 그의 행위를 벗어버리고 새 사람을 입었으니 이 새 사 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서 새로워진 자니라.(골 3:9-10) 우리가 실제적이고 가시적인 새 사람이 되는 것은 예수님이 다시 나타나 실 때 될 것이다.(요일 3:2) 사랑하는 자들아... 그분께서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분과 같게 될 줄 아 노니(요일 3:2) 9 예수님께서 새로운 인류의 첫 열매 - 맏아들, 조상이 되심.(고전15:20, 롬 8:29, 골1:15) 골로새서 1장 15절에 예수님을 모든 피조물의 처음난 자 라고 말하고 있다. 이 말씀은 예수님을 향하여 피조물이니 피조물이 아니니 이런 것 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다. 여기서 처음난 자 란 첫 열매 맏아들 이라 는 의미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아담을 창조하고 아담이 처음 만들 어진 그 상태로 머무는 것이 아니라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한 번은 죽 고 부활된 몸 피조물의 첫 열매가 것이 목표였다. 곧 아담은 만들어진 자에서 하나님의 생명으로 태어난 맏아들로서 새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만 했다. 그런데 아담은 이 길을 빗나갔고 예수님이 오셔서 피조물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골1:15) 그러므로 모든 피조물의 처음 난 자 (골
188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1:15) 라는 것은 잠든 자들의 첫 열매 (고전15:20) 라는 의미다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고전 15:20) 그분께서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예정하사 자신의 아들의 형상과 같은 모 습이 되게 하셨나니 이것은 그분께서 많은 형제들 가운데서 처음 난 자가 되게 하려하심이니라.(롬8:29) 10 우주질서를 정상적으로 회복하심 (골1:20) 그분의 십자가의 피를 통해 화평을 이루사 그분으로 말미암아 모든 것들 이 즉 내가 말하노니 그분으로 말미암아 땅에 있는 것들이나 하늘에 있 는 것들이 자신과 화해하게 하셨느니라.(골1:20)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을 만물의 머리로 창조하셨으므로 인격 중 심의 우주를 경영하시겠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이 하나님께 먼저 반역 하였고 사람이 동조하므로 하나님의 우주경영에 차질을 가져왔고 하나님 께서 의도하시는 우주질서는 파괴되었다. 그러므로 우주질서 회복을 위 해 하늘에 있는 천사와 땅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과의 화해가 필요하게 되었다. 원수되었던 하나님과 화해하기 위해서는 의로운 화해헌물이 필요하다. (롬3:25) 죄인을 구원하기 위해서는 죄없는 사람이 필요하고 물에 빠진 자를 구원하기 위해서는 물에 빠지지 않는 자가 필요하다. 그분을 하나님께서 그분의 피를 믿는 믿음을 통한 화해헌물로 제시하셨 으니...(롬3;25) 그렇다면 어떻게 예수님의 죽음이 하나님과 온 우주의 피조물을 화해시 킬 수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으실 때 죄는
189 13. 예수님의 승리로 얻은 전리품 없으시지만 죄인의 모습으로 심판받으셨다.(고후5:21) 즉 그분은 아담을 대신해서 심판받으셨다. 아담은 우주 가운데 피조물의 머리다. 대장이 심판 받으면 그 이하는 자동 심판이다. 전쟁에서 왕이 항복하면 모든 백 성은 다 항복한 것이다. 그러므로 아담이 심판받았다는 것은 온 우주가 심판받은 것이다.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그러나 법리적인 심판만으로는 부족하다. 유기적인 심판이 필요하다. 아 담은 선악과를 먹고 사탄의 자식이 되었으므로(요8:44) 아담 안에는 사 탄이 있는 것이다. 법리적이고 외형적으로는 아담-사람이 심판받았기 때문에 아담만이 심판받은 것 같지만 아담은 결국 사탄의 자식이었기 때 문에 사탄이 심판받은 것이다. 유기적으로도 사탄은 심판을 받은 것이 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가 화해헌물이 되셨다는 것은 단순히 사람만 을 위한 화해헌물이 아니다. 하나님과 사람, 하나님과 천사가 화해하였다는 것은 우주질서가 회복되 었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 아버지의 아들로서, 천사는 하나님 아버 지와 아들의 종으로서 관계가 회복된 것이다. 그래서 이를 예표하는 것이 마태복음 4장에서 예수님께서 1차 우주적 위치 전쟁에서 사탄에게 승리 하시자 천사가 와서 사람이신 예수님을 섬기는 장면이 나오는 것이다. 이에 마귀가 그분을 떠나고, 보라, 천사들이 와서 그분을 섬기니라.(마 4:11) 사람이 천사를 숭배하는 것은 우주질서를 역행하는 것이고 종인 천사가 사람을 섬기는 것이 정상적인 우주질서다. 구원받은 사람들은 이러한 새 로운 질서에 들어온 사람들이다. 이 질서를 알고 천사를 숭배하는 종교 에서 벗어나 정상적인 사람이 되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 고 구원이다
190 14. 이기는 자 14. 이기는 자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 (계2:7)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을 얻는 것은 지금도 여전히 유효하다. 이것 은 창세기 2장에서 국한된 것이 아니고 성경 전체에 흐르는 일관된 진리 다. 우리는 앞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의 길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또 예수 그리스 도께서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리 하셨음을 살펴보았다. 사탄과 사람의 전쟁에서 전쟁의 수단은 총, 포가 아 니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지키는 것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 이다. 사탄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하나님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고, 일부 천사들 중에도 자신의 격을 이탈하여 사람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 다. 아담도 사탄의 유혹에 속아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하다가 타락했다. 그 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알아야 한다. 사탄과의 전쟁에서 이기는 길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 자신의 격을 지키는 것이고 이 격 을 지켜 생명의 길을 걸으신 예수님을 보고 우리도 그분 안에서 생명의 길 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다. 곧 인격의 승리,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승리고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이사야 25장 8절과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 사망이 승리 가운 데서 삼켜지리라 는 말이 이 의미다. 성경이 말하는 승리는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이 말씀의 의미는 첫 번째로 사망노선에 있던 인류를 예수 님의 인격의 승리를 통해 생명노선으로 인도하신 것을 말하는 것이다. 그 러나 또 하나는 어차피 우리 인생은 한번은 죽을 몸이었다. 그래서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어야하는 것이다. (고전15:53) 그런데 아담
191 14. 이기는 자 은 육신의 죽음을 두려워하여 생명노선을 이탈하여 사망노선으로 갔다. 그 러나 예수님은 자신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켜 육신이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생명노선으로 가신 것이다. 죽을 몸(육신-사람)이 승리(생명-하나님) 가 운데 삼킴을 당한 것이다. 흙-육신이 영-하나님께 삼킴을 당함으로서 부 활의 몸이 되도록 하나님이 정한 생명노선으로 가신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 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함이라. (고후5:4) 우리가 그리스도인들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죄 문제는 예수님께서 다 해결하셨다. 그런데도 우리는 왜 육신이 죽는가? 우리는 하 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을 육체가 죽지 않을 생명에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죽을 육체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죽지 않을 육체가 되 는 것이다. 우주는 지금 죽을 것이 생명 안에 삼켜져 있다. 영-생명을 예 표하는 공기 안에 지구를 비롯한 해와 달, 별들이 삼켜져 있지 않은가? 죽 을 것이 생명 안에 삼켜져 있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영원 한 세계가 오면 하늘과 땅이 하나가 된다. 유한한 땅-사람이 무한한 하늘 -하나님께 삼켜져 영원한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이 세계를 성경은 새 예루살렘이라고 한다. 이것을 고린도서전서 15장 54절과 고린도후서 5장 4절에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세계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삼켜 진다는 말은 죽는다는 것이고 생명의 연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도 동식물을 우리의 목구멍으로 삼켜서 생명의 연합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런데 삼킴을 당하는 생물은 죽지 않을 것이 없다. 또 삼킴을 당하기 전 에 죽여서 먹지 살아있는 채로 먹는 것이 아니다. 우리도 하나님과의 생명 의 연합을 위해 하나님께 삼킴을 당해야 하는데 그 이전에 우리도 하나님 께 제단 위에서 죽음으로 드려져야 하나님께서 삼키시는 것이다. 우리 인 생은 근본적으로 음식헌물로서 요리되어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헌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192 14. 이기는 자 그런데도 지금도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생명의 노선 안에서 십자가를 바라 보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법리적인 대속의 은혜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고 있 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을 희생물에만 국한 시키고 헌물의 의미 를 바라보지 못한다는 것이다. 희생물은 법리적이지만 헌물은 유기적인 것 이다. 그래서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에 대해서는 잘 알지 못하는 것이다. 특히 십자가를 법리적인 대속 의 의미로만 받아 들여 예수님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어떻게 승리했는지에 대한 계시가 가려져 있다. 모든 만물에는 생명의 과정이 있다.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땅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 두신다. 이것은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만물에 그대로 적용된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그리스도인들은 사람에게만 이 법칙이 예외라고 생각한다. 하나 님은 만물을 통해서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하나님의 나 라는 생명의 나라다. 우주 만물의 생명의 원리는 생명이신 하나님의 생명 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라 태어나는 것 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제외한 모든 만물은 거듭남이 없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천사도 씨-영으로 창조되어 죽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다. 그래서 1차적 창조로 끝난다. 사람만은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 다. 그래서 사람은 씨-하나님으로부터 씨를 받아 다시 태어나야하기 때문 에 흙-사람으로 창조된 것이다. 흙-사람의 위치, 이 위치에 있는 자를 하 나님은 절대적으로 필요로 하시고 이 위치에 있는 자만이 생명의 길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인가?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 사람의 위치를 지키었다면 아담은 이 길을 이탈했다는 것이다. 씨-하나님 께서 절대적으로 필요한 흙-사람의 위치를 버렸다는 것이다. 이것이 창조 자를 원망하는 것이고 창조자의 안식을 방해한 것이고 사망의 길이다. 우리는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늘 흙-사람의 위치를 부끄러워하고 원망 했다. 항상 흙-육신 때문에 안 된다고 했고, 어떻게 하면 이 육신을 벗어 나고자 애썼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흙-육신이 이렇게 고귀하다는 것 을 알게 하셨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인생이 하나님께 절대적으로 필요한
193 14. 이기는 자 존재고 인생의 영광을 알게 되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잃어버린 인격을 찾은 것이다. 예수님은 아담이 버린 그 인격을 죽기까지 지킴으로 생명의 길 안에서 부활하시고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오르셨다. 우리는 이것을 보아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고 승리의 길이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 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도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인격을 지킴으로 이기 는 자가 되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영광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분의 인 생의 최종열매, 곧 죽으심과 살으심이 생명나무의 열매다. 이 열매를 먹으 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은 성경에 흐르는 일관된 진리다. 우리는 물 위로 걸어가신 예수님도 먹을 수 없고,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예수님 도 먹을 수 없고 병자를 고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신 예수님을 먹을 수가 없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니 그분은 우리가 먹을 수 있 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같기 때문이다. 사람 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십자가에 매달리면 누구든지 죽을 수 밖에 없는 자리에서 우리는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가 있는 것이다. 그 자리를 벗어난 예수님의 다른 것은 우리가 먹을 수 없다.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 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27:40)는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 지 인격을 지킴으로서 승리하셨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이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의 인격의 승리를 먹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사람으 로 만드셨지 씨-신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 신 예수님은 신인 사탄에게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성경은 이기는 자에 대해서 요한일서와 계시록에서 말하고 있는데 이 승리는 바로 사람이신 예수님의 사탄에 대한 인격의 승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는 자가 아니면 누가 세상을 이기는 자냐?(요일 5:5)
194 14. 이기는 자...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가운데 있는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을 주어 먹게 하리라.(계2:7) 귀 있는 자는 성령께서 교회들에 말씀하시는 것을 들을 지어다. 이기 는 자는 둘째 사망의 해를 입지 아니하리라. (계2:11) 이기는 자는 모든 것을 상속받으리니 나는 그의 하나님이 되고 그는 나 의 아들이 되리라.(계21:17) 성경에서의 승리, 곧 이기는 자란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다. 하나 님의 목적은 무엇인가?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 하여 아무것도 아니다. 단지 흙이다. 그런데 씨의 소망은 무엇인가? 열매 다. 씨가 열매를 얻으려면 절대적으로 흙이 필요하다. 그래서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원하고 있다. 흙이란 생명이 없다. 사람이 흙의 위치를 지켜야 만 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사 람들은 너무도 당연한 이 진리를 외면하고 어려운 길을 가고 있다. 예수님 을 믿더라고 근원이 불분명하니 열매가 없고 가다가 언젠가는 다른 길로 갈 가능성이 있다. 사실 기독교인들 중에 종교통합의 길로 가는 사람들을 보면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한 것도 한 원인이다. 믿음의 근원이 불분명하 니 타종교와도 연합할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성경만이 사람의 근원이 흙이 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타종교는 대부분 자기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는 데 사람이 어리석어 잃어버렸다고 한다. 만일 사람이 원래 영생이 있었는 데 아담의 타락으로 영생을 잃어버렸다고 한다면 이것은 불교의 주장과 같 은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하시고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자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을 조롱하면서 생명이신 예수 님을 찬양하고 있는 것이다.(고전15:55~57)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십자가의 의미 에는 표면적으로는 아담 안에 있는 사람에 대한 심판인데 내용적으로 보면
195 14. 이기는 자 사탄에 대한 승리라는 것이다. 즉 이것은 사탄에 대한 심판인 동시에 인격 의 승리라는 것이다. 아담은 인격을 이탈하여 신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기까지 인격을 지켰다. 죽음이라는 심판을 통해 생명의 길을 택하신 것이다. 겉모습은 아담으로 죽으셨지만 내용은 아담이 아니다. 아담이 인격을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격을 지키신 것이다. 인격을 이탈하면 사망이고 인격을 지키면 생명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망 이나 내용적으로 보면 생명이다. 그런데 아담은 원래 영생하도록 지음 받 았다는 사람들의 주장처럼 단순히 예수 그리스도가 아담의 죄만을 대속하 여 죽으셨다면 어떻게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승리가 되고, 어떻게 대속 이 생명이 되는가? 하는 문제이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믿으라는 말 밖에 할 수 없는 것이다. 대속으로 인한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 치지 무죄가 영생이 아니다. 대속은 죄의 용서지 생명의 거듭남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의 대속을 위한 희생물로 드려진 동시에 인생의 원래 의 위치인 헌물로 드려진 것이다.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지는 제물은 없다. 인생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것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반드시 필요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다. 이것을 거 부하면 하나님이 주시는 풍성한 계시가 닫힐 수 밖에 없는 것이다
196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기독교인들은 일반적으로 예수님이 죄가 없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혹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다시 살아나셨다. 이렇게 단순하게 생각한다. 물론 맞는 말이지만 이 문제를 한번 다른 각도에서 살펴볼까 한다. 성경 에서 보리와 밀은 부활을 상징한다.(마6:13) 보리와 밀은 가을에 뿌려져 겨울을 지나 다음해 여름에 수확하기 때문이다. 이렇듯 피조물은 하나님 이 정해 놓은 생명노선이 있다. 고린도전서 15장에서 바울이 부활에 관 해 말할 때 이 우주적 원리를 이용해 부활에 관해 말하고 있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고 전 15:36)라고 말한다. 또 요한복음에서 예수님은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 라. (요12:24) 하셨다. 보리와 밀의 입장에서는 이 길이 생명의 길이다. 피조물이란 입장에서 사 람은 만물과 동일하다. 사람에게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고 우주에도 봄, 여름, 가을, 겨울이 있다. 그래서 이 우주적 원리가 죄와 관계없이 동 일하게 사람에게도 적용된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다. 사람에게도 동일하게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생명의 길이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죄와 관계없이 정해진 것이다. 예수님은 이 생명의 길을 걸어가셨다 는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이 정해놓은 운명대로 부활해서 새 인류의 조상 이 되신 것이다. 살아있는 혼으로 창조된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육신적인 몸이 죽음을 통해 영화로운 몸으로 거듭나는 것이 정상적인 순서 였다. 사람은 원래부터 영원한 생명을 얻을 자였지, 영원한 생명을 가진 자로 창조되지 않았다. 만일 아담이 에덴동산에서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 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받아들였더라도 육신적인 몸이 영생을 가진 영화로 운 몸으로 변화되지 않고 육신은 죽었을 것이다. 아담은 죽음을 통해 이브
197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를 산출했다.(창2:21~23) 옛 것을 끝내지 않고는 새로운 세계에 들어 갈 수 없기 때문이다. 새로운 생명으로의 전환은 변화되는 것이 아니라 옛 생 명은 죽고 다른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는 것이다. 즉, 사람의 생명인 살아있는 혼에서 하나님의 생명인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화로운 몸으로 전환하려면 옛 것은 죽음을 통해 끝내야 한다는 것 이다. 모든 만물이 그렇지 않은가? 가을에 열매를 맺었던 식물이 다음 해 에 부활하려면 가을에 죽어 땅에 뿌려져야 한다. 춘생추살( 春 生 秋 殺 )은 만 고불면의 진리다. 바울은 고린전서 15장에서 부활에 관해 말할 때 이 우주 적 원리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어리석은 자여, 네가 뿌리는 것이 죽지 아니하면 살아나지 못하고 또 네 가 뿌리는 것으로 말하건데 네가 앞으로 있을 그 몸을 뿌리지 아니하고 밀이든 보리든 다른 곡식이든 다만 알갱이를 뿌리되 하나님께서 친히 기 뻐하시는 데로 그것에게 몸을 주시며 또 모든 씨에게 그것의 고유의 몸 을 주시니느리라.(고전 15:36~38) 위 말을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은 아담이 죄를 지은 후, 사람의 육신에 죽 음이 왔고 이후 예수님을 믿은 자의 부활에 대해서 말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피조물이란 관점에서 모든 피조물의 생명의 법칙 은 똑 같다는 것을 바울은 말하고 있다. 성경을 자세히 살펴보면 예수님만 을 믿고 구원받은 사람만 부활하는 것이 아니고 믿지 않는 사람도 부활한 다. 한 부류는 생명의 부활로, 한 부류는 멸망의 부활로 마지막 때에 부활 한다. 이것을 바울은 하나님께서 모든 씨에게는 고유의 몸이 있고, 죽어서 몸의 씨가 뿌려지면 봄에 다시 새 싹이 나듯이 사람도 그러하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진 몸은 생명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뿌려진 몸은 사망의 부활로 나타는 것이다. 또 우리가 장차 부활할 때의 몸은 그 씨에 따라 하나님께서 고유의 몸을 주시는 것이기 때문에 지금의 나와 같 은 몸은 아니라는 것이다. 뿌려진 씨에 따라 그 몸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198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이 우주에도 하나님께서 인격을 수확하는 가을이 있고 가을에 씨가 뿌려져 겨울을 지나 그 씨에 따라 새롭게 태어나는 부활의 봄이 있다는 것인데,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이 생명 노선을 이탈하여 육신이 죽지 않고도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다는 사탄의 속임수에 넘어간 것이다. 선악과를 먹고 사망노선을 가느냐, 생명과를 먹고 생명노선으로 가느냐 이 문제였다. 죽음과 생명은 동전의 양면과도 같은 것이다. 십자가 앞은 죽음이었지만 뒤는 부활이 있었다. 성경에서 피 는 생명을 의미하지만 피 흘림은 죽음을 의미한다. 물 도 생명과 죽음을 동시에 의미한다. 이렇듯이 죽음은 생명으 로 연결되는 다리이다. 죽음을 통하지 않고는 영생이 없다. 생명의 원리가 그렇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큰 것을 좋아하지만 큰 것은 제한이 있다. 태양이 아 무리 크더라도 그 크기는 제한이 있고 영구하지 않다. 그러나 작을수록 제 한이 없다. 공기는 수많은 원소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런데 공기는 태양보 다 무한히 크고 영원하다. 그러므로 죽음 이란 공기와 같이 모든 것이 다 소멸되는 것이다. 그래서 영원한 것이다. 사람들은 육신은 원래부터 영생 이 있었다고 말하지만 육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생명이 아니고 영이 생명 이다. 영이 되어야만 영생이 있는 것이다. 여기에 영생의 원리가 있다. 우 리가 죽어서 없어졌는데 영원하신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다. 아담은 육 체적 죽음 뒤에 있는 생명에 대한 약속을 저버리고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 과의 관계가 단절되어 사망노선으로 갔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거와 같다고 말씀 하셨다.(막4:26) 사람만이 특별한 것이 아니고 만유의 생명의 원리는 똑 같다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지 씨가 아니다. 씨-하나님은 흙-사람만을 원 하신다. 그러므로 사람은 흙-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씨를 받아드리 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들은 또 무죄가 영생인 것으로 착각한다. 무 죄는 영생이 아니고 흙-사람에게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상태를 말
199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죄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밭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끝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하나님 의 씨를 받아들여 부활-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고전15:20) 예수님을 믿 음의 선두주자라고 한다.(히6:20) 왜 선두주자인가? 생명의 길을 걸어가신 첫 번째 분이기 때문이다. 앞장에서 생명나무의 열매는 예수님의 인격의 최종열매인 죽으심과 부활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씨와 흙은 상호 죽음이 없이는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이것은 우주 안의 진리다. 우리는 예수 그리 스도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 추상적이고 종교적으로 알면 안된다. 예수님 은 하나님이기 때문에 죄가 없으시고 그렇기 때문에 부활했다고 알면 우리 와는 상관없는 것이고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런 것이 아니 고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체질을 가진 분인데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길 을 걸으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위치를 이탈하지 않았기 때문 에 죄가 없으신 것이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시는 분 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시되 죄는 없으신 분이시 니라.(히5:15)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은 씨를 땅에 뿌리면 싹이 나서 열매를 맺는 거와 같 이 씨-하나님 앞에서 흙-인생의 위치를 지키었기 때문에 부활의 첫 열매 가 되신 것이다.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 다.(고전15:20) 우리는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가신 것, 죽은 자를 살리신 것 등은 먹을 수 가 없다. 우리가 먹을 수 있는 것은 나무가 아니고 나무의 열매를 먹을 수 있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은 그분의 인격의 최종열매로 우리도 먹을 수 있는 거다. 그분의 죽으심 안에서 우리는 운명적으로 예수님과 하나가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예수님은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아들로서 생명나
200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무의 열매이시지만 표면적으로는 아담의 모습으로 오셨다. 그러므로 예수 님도 결국 아담과 같이 선악과와 생명과 중 어느 하나를 선택하셔야 했던 것인데 예수님은 생명과를 잡수셨기에 처음 인간을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의 운명대로 육체적 인간에서 영광스런 부활체로 살아나신 것이다. 즉 아담은 하나님의 정해주신 인생이라는 위치, 곧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 으나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이라는 위치를 지킴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었다는 것이다. 이것을 성경은 예수님이 죽기까지 순종하심으로 하나님 께서 그분을 높이 올리셨다고 말씀하고 있다.(빌2:8~9) 그렇다면 지금까 지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한 두 사람이 아니고 많은 사람이 죽었다. 그러 면 그들은 왜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었고 영화롭게 부활하지 못했을까? 이는 그들은 사탄이 빼앗아간 인생의 위치를 회복시키지 못했고 여전히 선 악과를 먹고 죽음으로서 하나님과의 관계가 단절되었기 때문이다. 물론 그 들도 장차 사탄의 열매로 부활하여 불 호수에 들어 갈 것이다.(계 21:12~14)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거듭나는 것은 여전히 유효하고 이것은 성경전체 를 관통하는 진리다. 이기는 자에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게 하겠다는 하 나님의 말씀은 여전히 진리다.(계2:7) 아담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 것 을 거부했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사탄을 이기시고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셨다. 생명나무의 열매란 하나님이 우리 인생에게 주신 격이고 운명이다. 열매의 내용은 무엇인가, 인생은 하나님의 말씀만 먹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고, 하나님만을 섬겨야 한다는 것이고, 흙으로 만 들어진 인생을 있는 그대로 받아드리고 감사해야 한다는 것이다. 흙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연약하고 한번은 육신이 죽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창조 안에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이다. 이것을 피할 자가 없다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람에게 흙이라는 운명을 주었을까? 흙에만 하나님은 씨를 뿌리실 수 있기 때문이다.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고 하면 그것은 흙이 돌 이 되겠다는 것으로 씨를 뿌릴 수 없다. 그러면 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수포
201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로 돌아간다. 그래서 예수님은 인생에게 정해주신 격에 순응하셨다. 아담 은 이것이 싫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 명을 담담히 받아드리셨다. 마귀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성전꼭대기 에 뛰어 내리라고 했을 때 사람은 뛰어 내리면 죽는 것이 당연한 것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하고 하셨다. 십자가에서도 마귀가 네가 하나 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뛰어내리라고 유혹했지만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운명을 자신의 영달을 위해 피하기 보다는 하나님의 경륜 과 목적을 위해 끝까지 순응하셨다. 그동안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격은 늘 원망의 대상이었고 불만의 대상 이었다. 왜 우리 육신을 이렇게 약하고 능력 없고 죽도록 만들어 놓았나? 늘 이놈의 육신 때문에 안된다 라고 하면서 창조자를 원망하였다. 이것 은 사실 사탄의 속임수다. 그런데 예수님이 오셔서 인격을 지키심으로 인 격의 고귀함과 영광을 보았다. 우리는 이 육신을 벗어나서 어떻게 하면 신 들과 같이 되려고 했는데 예수님은 오셔서 이 연약하고 능력 없는 육신을 가지고 마귀에 승리하시고 생명의 부활을 통해 인생의 존귀와 영광을 드 러내셨다. 인생이 영광스러우니 하나님도 영광스러워진 것이다. 지금도 기 독교 안에는 늘 육신 때문에 안된다는 패배주의에 사로잡혀 있다. 그러나 하나님은 육신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안된다는 것은 우리 생각이다. 성 막 안에는 말씀과 말씀을 넣어두는 증거궤가 있었다. 예표적으로 보면 말 씀은 하나님이고 증거궤는 사람이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은 궤짝이 필요한 데 사람들은 궤짝 때문에 안된다고 하면 말씀을 보관할 장소가 없는 것이 다. 하나님이 거하 실 곳이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격 안에만 거하신다. 그래서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의 승리자가 되길 원하신 다. 인격을 지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생명나무의 열매 를 먹는 것이다. 세상적으로 보면 예수님만큼 억울하고 한 많은 죽음도 없다. 그렇다고 하 나님은 예수님이 불쌍해서 살렸는가? 그렇지 않다. 왜 살렸는가? 그분은
202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이다. 인생이 한번 죽는 것은 하나님의 경 륜과 목적을 위해서 정해진 것이다. 아담은 이게 싫어서 선악과를 먹었지 만 예수님은 내가 아무리 의인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을 위해 그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께서 인생을 창조하 신 목적이 달성되기 때문이다. 우리는 피조물이다. 피조물은 자신의 목적 이 없고 만드신 이의 목적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예수님은 신실하신 피 조물의 모습으로 창조자의 목적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그 위치에 있는 자 에게만 하나님은 씨-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목적을 이탈해서 죽지 않는 신과 같이 된다면 하나님의 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하나님은 신과 같은 자에게는 생명을 넣어 줄 수 없다. 돌 위에는 씨를 뿌릴 수 없다. 흙에만 씨를 뿌릴 수 있다. 그래서 예 수님은 그 자리에서 어떤 불만도 없었다. 내가 아무리 의인으로 살았다 하 더라도 인생이 십자가에 매달면 죽도록 만들어 놨기 때문에 그 운명을 담 담히 받아드린 것이다. 나는 의롭게 살았는데 죽는 것이 억울하다 이러면 서 죽은 것이 아니고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요23:46) 하 시고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마지막을 하나님께 의지하면서 숨을 거두신 것 이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나의 어떠한 상황과 관계없이 죽기까지 지키신 것이다. 내 목적보다 더 크신 이의 목적을 위해 죽으신 것이다. 즉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자리를 끝까지 지켰다는 것이다. 죽음은 더 좋은 생명으로 바꾸는 것이라는 것과 하나님은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생명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을 아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와 늘 하 나였기 때문에 이 자리에서 하나님의 소원이 예수님의 소원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어떤 상황 하에서도 이 인생의 위치를 지켜야만 하나님의 씨를 받아 새인류의 조상이 될 수 있고, 또 인류에게 그 씨를 분배하여 하나님 께서 처음 창조하실 때의 목적대로 인생이 생육하고 번성해서 만유에게 하 나님의 성품을 분배함으로서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할 수 있기 때 문이었다. 그래서 그분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켜 순종하심으로 하
203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나님의 씨로 새로 태어나 새 인류의 첫 열매(조상, 씨)가 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창조 안에서 정해진 죽음이라는 인생의 운명을 인정해야 한다. 이것이 생명나무의 열매의 핵심 내용물이다. 대부분 사람들은 예수 를 믿되 생명나무의 열매의 내용물을 먹지 않고 껍데기만 먹고 있다. 껍데 기는 사람 안에 들어와 생명이 되지 않는다. 열매의 내용물을 먹어야만 피 가 되고 살이 되고 생명이 된다.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고 첫 열매다.(골1:15) 첫 열매가 거친 과정을 후속 열매들이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추수에 이른다. 우리는 종교적이고 구름위에 떠다니는 실체가 없는 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 사람은 영생하게 되었는데 죄가 들어와 육신이 죽게 되었다고 아는 것은 생명의 원리를 모 르는데서 오는 오해다. 그러면 죄를 용서받은 우리는 왜 죽는가? 구원받은 우리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헛것이 된다. 우리 가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우리의 죄를 위한 희생물은 예수님이 대속하셨다. 우리가 죽는 것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예수님은 철저히 생명의 노선을 걸으셨다. 하나님이 정하신 씨를 뿌리면 열매를 맺는 생명 노선을 걸으셨기에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인생 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 이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철저히 생명노선 을 걸으셨다. 우리의 입장에서는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하여 법리적인 희생 물이 되셨지만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법리적인 길을 걸으신 것이 아니고 유 기적인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예수님이 단순히 법리적으로 우리의 죄만을 위해 죽으셨다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희 생물로서 제단주위에 피를 뿌리셨다. 우리가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우 리도 예수님과 같이 희생물로서 피를 뿌려 죽어야 한다는 논리가 생긴다.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는 희생물의 자격
204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도 안되고 그럴 필요도 없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를 살아 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한다.(롬12:1) 그럼에도 우리는 헌물로서 죽어야 한다.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죽음이 필요하다. 생명노선 안에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드려져야 한다.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십자가가 보여주는 것은 아무리 사람이 수많은 기적을 행하고 신과 같은 삶은 살고 완전한 인간으로 살았다 하더라도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신 주 신 운명(격)은 피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인생에게 창조 안에서 육신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라는 것을 알라는 것이다.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어떠한 상황 하에서도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격을 지켜야만 한다 는 것이다. 이것이 피조물의 운명이고 인생의 운명이라는 것이다. 예수님 은 마귀와의 위치전쟁을 통해 인생에게 정해준 죽음이라는 운명(인격)을 철저히 인정하시고 지키셨다. 그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인생에게 창조 안에 정해진 죽음이라는 진 실을 거부하면 자신이 알건 모르건 도로 선악과를 먹고 신들이 되고 싶은 상태로 돌아가는 형국이 된다. 그러므로 마귀와의 전쟁은 진실 대 거짓의 싸움이다. 죽도록 창조된 것이 인생의 진실임에도 불구하고 아담 안에 있는 자들은 마귀에게 속아 죽지 않는 신처럼 산다는 것이다. 거짓으로 옷을 입고 있다는 것이다. 흙-육신 으로 지어졌음에도 씨-영으로 지어진 것처럼 행세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 러면 어떤 이는 그럴 것이다. 아니 사람들 중에 누가 자신이 영원토록 산 다고 하는 사람이 있느냐? 지금까지 사람들은 다 죽었지 않느냐고 반문할 것이다. 그런데 그들을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창조 안에 인생에게 정해 놓 은 죽음이란 운명-위치 안에서 죽었다고 보지 않는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핑계 없는 무덤은 없다 라는 말이 있듯이 그들은 모두가 핑계를 가지고 있 다는 것이다. 예수님처럼 자신이 처한 상황에 관계없이 하나님이 정해주 신 인생의 운명에 순응하고 감사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좀 더 살았으면 하 고 한을 가지고 죽었다는 것이다. 결국 천사를 사모하고 죽었다는 것인데
205 15. 왜 많은 사람 중에 예수님만 부활하셨을까? 이는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은 자가 되어 아담 안에서 죽었다는 것이다. 자살을 하는 것도 죽음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다. 아담도 인생이라는 위치 를 원망해서 선악과를 먹은 거와 같이 자살이란 인생을 원망하는 것이다. 피조물인 내가 자기 자신을 원망하는 것은 창조자를 원망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것은 하나님이 창조 안에서 정해 놓은 인생이라는 위치 안에서 죽은 것이 아니다. 그래서 부활하지 않은 것이다. 그러나 이제 우리는 예 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해 놓은 인생의 진실-죽음이 라는 운명을 보았다. 그분은 무고한 죽음 앞에서도 인생을 원망하지 않았 다. 지금까지 아담 안에서 죽은 자들과 같이 어떤 핑계도 대지 않았다. 능 력의 대표자이자 죽지 않는 자 사탄 앞에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 치를 부끄러워하지 않고 그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세상으로부터는 버림 받았지만 하나님으로부터 인정받아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정해 놓은 생명 의 코스대로 영화로운 몸으로 다시 살리신 것이다. 씨-하나님 앞에서 흙- 사람의 위치를 지키신 것이다. 아담은 자신을 원망함으로 하나님을 원망했 지만 예수님은 그 위치를 당당히 지킴으로 하나님을 인정하고 영광을 드러 낸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이 그분을 다시 살릴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아담 은 죽지 않는 천사가 부러워 사람의 위치를 버렸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천사보다 더 좋은 부활을 얻음으로 인생의 존귀와 영광을 회복함으로 하나님의 목적을 성취하게 된 것이다. 아멘!
206 16. 거짓 vs 진실 16. 거짓 vs. 진실 세상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 성경이 말하는 거짓과 진실은 개념에 차이가 있다. 세상은 지금 속이는 자 아래 있다고 성경은 말하고 있다. 세상은 전체가 거짓체계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도 오래 동안 깊 게 속아 있기 때문에 내가 속은 자리에 있으면서도 속은 줄 모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럼 먼저 진리, 곧 진실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는 사탄과의 영적전쟁이 거짓 대 진실의 싸움이라는 것을 명심해야 한다. 빛이 오면 어둠이 물러가듯이 진실이 오면 거짓은 사라는 지는 것이다. 예수님이 침묵한 한 가지 질문이 있다. 로마 총독 빌라도가 예수님에게 진리가 무엇이냐? (요18:38) 라고 물었다. 이 중대한 질문에 예수님은 침묵하셨다. 이 질문은 인간이 가진 궁극적인 물음이다. 우리는 진리라는 말을 쓸 때 참(true)과 거짓(false)이라는 헬라적 사고에 익숙해 있다. 성 경이 말하는 진리는 실재( 實 在 )과 형상( 形 狀 )에서 실재라는 뜻이다. 하나 님은 실재고 사람은 형상이라는 의미다. 실재가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미다. 그렇다고 형상이 거짓이라는 의미가 아니다. 형상은 생명이 아니라는 의미 다. 그런데 예수님은 하나님-사람으로 오셨다. 아담이 단지 형상이라면 예 수님은 실재와 형상, 곧 씨와 땅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예 수님을 생명이라고도 하고(요 14:6) 하나님의 형상이라고도 하는 것이다. (고후 4:4)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생명이 없었다. 아담에게 영생이 있었다고 한다면 아담과 예수님은 본질에 있어서 동등하다는 말이 된다. 아담은 오실 자의 모형이지 실재-생명이 아니었다.(롬5:14) 아담이 하나님의 형상으로 만들어졌다는 말은 그릇으로 만들어졌다는 의미다. 우리는 앞에서 동산은 우리 자신, 곧 인격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동산이 라는 자리는 하나님께서 인생에게 정해주신 위치로 생명의 근원이라는 의 미다. 인생의 근원적 임무는 동산, 곧 인격을 가꾸고 지키는 것이다.(창
207 16. 거짓 vs 진실 2:15) 씨-하나님은 흙-인격 안에만 생명을 주실 수 있기 때문에 인생의 입장에서는 이 인격을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고 진실이다. 예수님은 실 재인 동시에 형상으로 오셨지만 아담의 모습으로 오셔서 정상적인 사람으 로서 위치를 지키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과정을 통해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인생이 결코 씨-실재가 될 수 없음에도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진실을 벗어나 비정상적인 사람이 된 것이 다. 씨도 아니면서 씨 인척하는 것이다. 이것이 거짓이고 사망이다. 사람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형상의 위치를 벗어나 실재처럼 된 것이 거짓이 고 사망이다. 예수님은 정상적인 사람으로 오셨다. 그러나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자는 정 상적인 사람의 위치에서 이탈했다. 하나님의 목적,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진실의 자리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위치를 이탈한 인간의 궁극적인 질문은 진리가 무엇이냐? 는 것이다. 결국 이 질문은 진실한 인격이 누구 냐는 것이다. 정상적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 인격을 만들 려고 한다. 그러나 인격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태초에 정해주신 인생의 격이다. 아담은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격을 이탈했다. (창3:5~6) 사탄에게 속은 사람은 신도 아니면서 신 인척 가장하고 있다는 것이다. 사람이 신처럼 되어 있는 상태가 거짓이다. 하나님은 사람을 무교 병으로 만들었는데 거짓으로 부풀려져 유교병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래서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자신이 가짜인데도 가짜인지 모르고 살고 있는 것이 인생의 문제다. 죄란 바로 무교병이라는 진실의 위치에 있어야 할 사람이 부풀려져 유교병의 위치에 있는 것이다. 진실의 위치를 잃어버린 인생은 너무 오래 전에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을 잃어 버렸기에 진실이 무엇인지 알 수 없었다. 그런데 예수님 오셔서 볼품없는 무교병으로 참사람의 위치 를 보여주셨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우리가 잃어버린 인생의 진실-원 인
208 16. 거짓 vs 진실 격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인생의 진실을 보여주셨다. 인생 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흙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신이 될 것이라는 사탄의 말이 거짓으로 드러난 것이다. 진실이 오니 자동적으 로 거짓이 드러난 것이다. 빛이 오면 어둠이 사라지듯이 진실로서 거짓을 이긴 것이다. 이렇듯 사탄과의 전쟁은 거짓 대 진실의 싸움이다. 사람은 흙으로 만들어졌지 씨로 만들어지지 않았다. 사람은 육이지 영이 아니다. 지금도 사람들은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유교병이 되려고 한 다. 사람이면서 죽지 않는 신이 되겠다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고 무교병으 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진리고 진실이다. 그 외의 것은 거짓이다. 씨-하나 님은 흙-인격에게만 씨를 뿌릴 수 있다. 무교병인 사람에게만 복을 주실 수 있다. 예수님은 인생이라는 하나님이 정해주신 자리를 부끄러워하지 아 니하고 그 진실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키심으로 사탄과의 위치전쟁에서 승 리하셨다. 우리의 싸움은 거짓 대 진실의 싸움이다. 곧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격의 진실을 지키는 것이 생명이고 이탈하면 사망이다. 사탄에 속은 사람들은 인생이 대단한 위치에 있는 줄 안다. 기독교인들은 인생은 원래 영생이 있었다고 믿고 불교인들은 인간 안에 불성이 있는데 어리석어 찾지 못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은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증명하였다. 흙은 흙이지 씨가 아니 라는 것이다. 인생은 씨가 아니고 흙이고 벌거숭이라고 드러난 자리가 십 자가다. 인간의 정체성과 진실이 만천하에 드러난 자리다. 우리 주님은 진 실로서 거짓의 아비인 마귀에게 승리하셨다. 진실로서 거짓을 이기신 것이 다. 사람들은 예수님만 믿으면 구원받는다고 말한다. 그러면 무엇을 믿느 냐는 것이다. 물론 예수님의 대속을 믿으면 구원 받는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 그런데 신약성경에 와서 대속이라는 말은 3번 밖에 안 나오고 전부 구속이라는 말을 쓴다. 구속이란 무엇인가? 인생의 원래의 위치라는 의미 다. 아담은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어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런데 하
209 16. 거짓 vs 진실 나님은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의롭다고 하셨다. 의롭다고 하니까 이것을 세상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성경에서 의롭다고 하는 것은 하 나님과의 바른 관계 하에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 의 위치가 하나님과의 바른 관계에 있는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 앞에 서 인생의 위치는 흙이고 번제헌물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이 진실을 인정하는 것이 구속이다. 죄란 무엇인가? 사람이 신과 같이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받아야 하고,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 생의 위치가 흙이라는 것을 인정하면 구속받은 것이다. 그분의 피를 통하 여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 (엡 1:7, 골1:14) 신과 같은 사람이 원 래의 위치로 돌아오면 하나님과 바른 관계가 되기 때문에 죄용서가 되는 것이다. 아버지의 아들이었던 자가 가출하면 아버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 계가 깨지는 것이다. 그런데 회개하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오면 다시 아버 지와 아들의 정상적인 관계가 회복되는 것이다. 아담 안에서 우리는 모두 신과 같은 사람을 소망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신과 같은 사람 은 정상적인 사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린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라는 것 이 드러났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과 나를 동일시 여기면 내가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은 것이다. 위치를 이탈했던 자가 원래의 위치 로 돌아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던 자가 목적 안 으로 들어오면 죄가 없는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죽지 않는 신들과 같 은 사람이 참사람인 줄 알았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사건으 로 인해 거짓이 만천하에 폭로된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하나님이 인 정하는 참사람이 아니고 십자가에 달려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이 인정하는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는 거짓이 폭로되고 진실이 드러난 자리다. 예수님은 인생의 진실로서 거짓을 이기신 분이다. 또 하나님이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210 16. 거짓 vs 진실 알게 하셨음 우리가 알며 또 우리가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 리스도 안에 있음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 라.(요일5:20)
211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오늘날 기독교계에서는 예수님을 대단히 위대한 분으로 생각한다. 그래서 통상 예수님을 하나님이라 하면서 범접할 수 없는 분으로 숭배를 한다. 물 론 예수님은 하나님께서 육체로 나타나신 분이다.(딤전3:16) 그런데 예수 님은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고 했지 숭배를 받으러 오셨다 고 하지 않았다.(요10:10)...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려함이 라.(요10:10) 예수님이 오신 핵심 목적은 인생들에게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셨다는 것이 다. 이를 위해 먼저 예수님은 희생물로서 인생의 죄 문제를 해결하고 인류 를 구속해야 했다. 그리고 그분은 구속받은 인생들의 생명이 되기 위해서 는 새 인류의 조상이 되어야 했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라면 예수님은 새 인류의 조상이다. 예수님은 새 사람, 곧 새 인류다. 원수 되게 하는 것 즉 규례들에 수록된 명령들의 율법을 자기 육체로 없애 셨으니 이것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듦으로써 화평 을 이루려 하심이요,(엡2:15) 또 너희가 하나님을 따라 의와 참된 거룩함으로 창조된 새 사람을 입을 것 을 가르침을 받았으니 (엡4:24) 새 사람을 입었는데 이 새 사람은 그를 창조하신 분의 형상을 따라 지식에 서 새로워진 자니라. (골3:10) 새 사람이란 옛 사람 아담과는 겉모습은 같지만 생명이 틀리다는 것이다. 아담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그러나 새 사람이신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 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켜 져서 새 인류의 첫 열매
212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조상이 되신 것이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 셨도다.(고전15:20) 하나님은 아담을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만드셨는데 이는 단지 그 상태 에서 완성된 것이 아니고 그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분배받아서 예수 그 리스도와 같은 사람이 되는 것을 목표로 창조하셨다. 첫 사람 아담에게는 생명이 없었다. 단지 하나님의 생명을 담을 수 있는 그릇-형상으로 창조 되었다. 그 형상 안에 하나님의 생명이 들어와야 하나님의 그리스도-위임 받은 자가 되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그러므로 예수님 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러 오셨지 경배를 받으러 오신 것이 아니다. 경배는 하나님 한 분으로 족하다. 아들은 아버 지를 경배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과 한 생명으로 태어났 고 그래서 예수님은 우리를 형제라 부르기를 부끄러워 하지 않으신다.(히 2:11)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을 경배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으로 살기 를 원하신다.(갈2:20) 성경 어디에도 제자들이 예수님을 경배했다는 말은 없다. 하나님은 경배해야 하고 예수님을 기뻐해야 한다. 영으로 하나님께 경배하고 그리스도 예수님을 기뻐하며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자니라.(빌3:3) 물론 우리는 주님의 구속과 구원을 찬양하고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단지 예수님을 하나님으로 경배만 한다면 그것은 종교가 된다. 모든 종교는 신 과 사람을 분리시켜 사람으로 하여금 신을 경배하게 한다. 그러나 복음은 우리로 하여금 예수님을 경배하라고 하지 않고 같은 생명으로서 살라고 한 다. 예수님과 한 생명이 된 우리는 아들로서 아버지를 표현하는 것이다. 이것이 경배다. 씨의 소망은 열매다. 우리가 아들이 되면 참 경배가 되는 것이다. 요한복음 4장에서 사마리아 여인은 예수님께 다음과 같이 질문하
213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였다. 우리 조상들은 이 산에서 경배하였는데 당신들은 이르기를, 사람들이 마땅 히 경배해야 할 곳이 예루살렘에 있다, 하나이다, 하매 (요4:20) 이 말의 요지는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해야 할 장소가 어디냐고 묻는 것 이다. 이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하나님께 경배해 할 장소가 교회당이냐, 성 당이냐, 라고 묻는 거와 똑 같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답은 다음과 같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여자여, 내 말을 믿으라. 너희가 이 산에서 도 아버지께 경배하지 아니하고 예루살렘에서도 경배하지 아니할 때가 이 르느니라. (요4:21) 정작 예수님의 대답은 하나님께 경배하는 것은 여기도 아니고 저기도 아니 라는 것이다. 경배란 장소적 개념도 아니고 어떤 의식적인 것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예수님은 계속해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그러나 참되게 경배하는 자들이 영과 진리로 아버지께 경배할 때가 오나니 곧 지금이라. 이는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그렇게 경배하는 자들을 찾으시기 때문이니라. 하나님은 영이시니 그분께 경배하는 자들이 반드시 영과 진리 로 그분께 경배할지니라, 하시니라. (요4:23~24) 하나님은 영시기 때문에 어떤 장소와 형식에 매여 있는 분이 아니라는 것 이다. 영-씨의 절대적 소망은 열매-아들이다.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사 람이다. 아버지의 절대적 갈망은 아들이다. 여기서 진리란 예수님이고 곧 아들이다. 영과 진리로 경배한다는 의미는 내가 아들이 되면 그것이 참된 경배라는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아들이 없었다. 그래서 성전이 라는 모형을 통해서 경배를 했다. 성전과 성전 안에서의 모든 기구들과 의 식과 제물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모형이었다. 그러나 성전의 실재이 신 예수님이 오셨음으로 이제는 어떤 장소와 의식이 필요 없어졌다는 것이
214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다. 실재가 있는데 그림을 가지고 있을 필요가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과 그림과 실재 사과가 있다면 실재 사과를 먹을 수 있지 그림을 먹을 수 없는 것이다. 씨의 소망은 열매이듯이 아버지의 소망은 아들이다. 아들 이 되면 참된 경배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제 누가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 문제가 된다. 예수님이 오 시기 전까지 하나님의 아들은 천사들이었다.(창6:2, 욥1:6) 그런데 예수님 이 오신 이후 하나님의 아들은 사람이라는 것이다.(히1:5) 그러면 어떤 사 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다. 여기에 우리는 깊은 빛을 받아야 한다. 오늘 날 우리는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님을 당연히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은 아무런 능력도 없고 인간의 존재만 남 은 자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위 대한 능력의 신으로서 숭배한다. 아무런 생각도 없이 종교적으로 믿는다. 그래서 결국은 사탄이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 (창3:5) 라는 유혹의 말로 아담을 속였듯이 오늘 날도 여전히 사람들은 자신은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를 믿는다고 하나 물 위로 걸어가신 예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신과 같은 예수를 믿는다. 신과 같은 예수를 믿고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한다. 도로 아담으로 가는 것 이다. 여기에 사탄의 깊은 함정이 있다. 지금까지 얼마나 많은 경건한 자 와 굳센 믿음을 가진 소위 빛을 남긴 사람들이 이 유혹에 넘어갔는지 모른 다. 불가능을 가능하게 하는 굳센 믿음의 소유자들일수록 이 속임수에 넘 어간다. 우리 조상 아담이 맨 먼저 이 유혹에 속았고 기독교 역사에 수많 은 명성 있는 영적 거인들이 속아 넘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우리가 신들 과 같은 위대한 영적 거인들이 되는 것을 원하지 않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 길 원하신다. 오늘날 우리는 십자가 못 박히신 예수님을 너무도 당연히 너무도 쉽게 하 나님의 아들이라고 믿고 있지만 당시에는 그러지 못하였다. 어떻게 십자가
215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에 못 박힌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이냐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고린도교 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십자가는 유대인들에게는 걸려 넘어지게 하는 것이 요, 그리스인들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로되 (고전1:23) 라고 하는 것이다. 그 러면 왜 유대인들에게는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 는 것이 받아들여지지 않았느냐는 것이다. 그 이유는 첫 번째로 유대인들 의 관념에는 메시아 곧 하나님의 아들은 최소한 모세와 같은 지도자였다. 모세가 이집트의 노예된 상태에서 이스라엘 민족을 구출했듯이 그들이 대 망하는 메시아는 로마의 압제로부터 구원할 메시아였다. 특히 신명기 18장 18절에서 하나님께서 마지막 날에 모세와 같은 대언자를 일으키겠다고 약 속했으니 더욱 그러했을 것이다. 내가 그들의 형제들 가운데서 너와 같은 대언자 하나를 그들을 위하여 일 으키고 내 말들을 그의 입에 두리니 내가 그에게 명령할 모든 것을 그가 그들에게 말하리라.(신18:18) 또 나무에 달린 자는 하나님께 저주 받은 자 (신21:23) 라고 하였으니 그 들이 생각하는 메시아가 아닌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그러면 어떤 이들은 이사야 53장에 기록된 메시아의 고난에 대한 예언이 있지 않느냐? 라고 반문하겠지만 그들은 이사야 53장에 나타난 메시아의 고난을 로마의 압제 하에 있는 자기들의 고난으로 해석하였다. 더구나 예수님은 유대민족 의 근본이념인 율법을 정면으로 위반하였으니 그들이 예수님을 메시아로서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또한 우리는 예수님이 오셔서 기적과 능력을 행하신 것이 대단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지만 유대인 들의 관념상 예수님이 행하신 능력은 모세의 기적과 비교해서 그렇게 대단 한 것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러한 관념을 가지고 있는 유대인들 때문에 바 울은 히브리 그리스도인들에게 보내는 편지에서 모세보다 예수님이 뛰어나 신 분이라는 것을 설명해 주고 있다.(히3:1~6) 모세가 이스라엘의 구원자 라면 예수님은 인류의 구원자라는 것이다. 이러한 이유로 당시에 유대인이
216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라면 누구라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받아들이는 것은 너무도 어려운 것이었 다. 특히 예수님은 조선시대로 말하면 유교와 같은 유대인의 국가질서 규 범인 율법에 정면으로 도전하였고, 구약적 관념에서는 사람이 하나님의 아 들이 되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것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사람이 되어 자신 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으니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것은 너무 도 당연한 것이었다. 간혹 우리는 당시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핍박하는 장면을 기록한 성경 말 씀을 보고 그들을 비난 하지만 과연 우리가 그들을 비난할 자격이 있는지 모르겠다. 유대인들은 인류의 대표다. 유대인들이 그러했다는 것은 모든 인류가 그러했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는 유대인들이 부분적으로 눈멀게 됨 과 하나님의 은혜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로 알게 된 것이다.(롬11:25) 바울은 또 이렇게 말한다.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리라.(고전 2:8)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 그 누구도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예수님도 십자가에서 이렇게 기도하셨다. 그때에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아버지여, 저들을 용서하여 주옵소서. 저들은 자기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 하시더라. (눅23:34) 그러니까 당시에 유대인들의 정상적인 관념으로는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 박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결과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하는 일을 가지고 저들이 알지 못해서 하는 일이라고 하면서 저들을 용서 해 달라고 기도하신 것이다. 이 기도는 조만간 응답될 것이다. 지금 서서 히 그들이 주님께로 돌아오고 있다
217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그리고 이방인을 대표하는 그리스인에게는 왜 십자가에 못 박힌 예수님이 어리석은 것인가? 하는 것이다.(고전1:23) 당시에 그리스인들의 관념으로 는 세상의 모든 문제는 지혜가 없기 때문에 일어난다고 여겼고 지혜만 있 다면 모든 문제는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러므로 지혜를 추구하는 이방인들 의 입장에서 보면 십자가는 어리석은 것이라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장 22 절에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 한다는 말이 있다.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의 입장에서 하나님의 아들은 신과 같은 능력을 가진 자로서 십자가에서 죽을 수 없는 것이고 정치를 대표하는 이 방인인 그리스인의 입장에서는 지혜로운 자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 다. 창세기 3장 6절에서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보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나무이므로 했는데 눈으 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는 말은 종교적 능력을 말하는 것이고 지혜롭게 할 만큼 이라는 것이 세상 지혜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서 종교를 대표하는 유대인들은 표적을 구하고 정치를 대표하는 그리스인들은 지혜를 추구한다 는 말이 나온 것이다. 그러니까 선악과를 먹은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의 입장에서 보면 눈으로 보기에 아름답고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러운 천사와 같은 신적인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아들은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그에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사람 이라는 것이다.(사53:2) 여기서 우리는 강한 빛을 받아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님을 구원 자로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신적인 예수님을 믿고 신들과 같이 된다면 도로 아담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예수를 믿으면 능치 못할 일 없다고 하면 서 신적인 능력을 쫓아가는 것은 속은 것이다. 나를 강하게 하시는 그리 스도를 통해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빌4:13) 라는 의미는 인격 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지 능력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 아니다
218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세상의 모든 종교를 보라, 저들은 모두 신을 숭배하고 있다. 신은 숭배할 수는 있지만 우리와 하나가 될 수 없다. 예수님이 주님이라는 말은 조상이 라는 말이다. 사람의 조상은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이신 예 수님을 믿어야 한다.(딤전2:5) 한 하나님이 계시고 하나님과 사람들 사이에 한 중재자가 계시니 곧 사람 이신 그리스도 예수님이시라.(딤전2:5) 인격적인 예수님을 믿는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예수님을 신으로만 숭배만 하고 있다면 빗나간 것이다. 이것도 결국 신들과 같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인 것을 모르고 속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 들이 되고 싶은 타락한 아담의 속성은 무엇인가? 신과 같은 사람을 숭배하 고 정상적인 사람을 조롱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십자가에 못 박힌 정상적인 사람이신 예수님을 의로 여겼 다. 십자가에 못 박으면 죽지 않는 자는 참 사람이 아니고 죽을 수 밖에 없는 사람이 참사람이라는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자리가 인생의 정 위치라는 것이다. 우리는 철저히 사람이신 예수님을 추구해야 한다. 물론 그분은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피조물인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고 하나 사람 으로서 하나님은 우리가 모르는 것이다. 사람이 사람을 알지 사람이 어떻 게 신을 알겠는가? 우리가 추구할 것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라는 것이다. 왜 냐하면 하나님은 사람을 원하시기 때문이다. 우리는 신들이 될 필요가 없 다. 신들-천사들은 하늘에 이미 하나님이 원하는 만큼 다 있다. 우리가 신 들과 같이 되는 것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러므로 신과 같 은 예수님을 믿고 신들과 같이 될 것인가? 아니면 십자가에 못 박힌 정상 적인 사람이신 예수님을 믿고 정상적인 사람이 될 것인가? 이 갈림길에 있 다. 지금도 사탄은 이 두 길을 가지고 우리를 유혹하고 있다. 그러므로 죄는 무엇이고 구원은 무엇인가? 아담은 돌을 가지고 빵을 만들
219 17. 우리는 어떤 예수를 믿는가? 수 있고 성전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지 않는 능력을 가진 천사가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져 서 그 열매를 먹고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였다. 이것이 죄고 멸망이다. 그러므로 구원이란 거꾸로 연한 초목같이 마른 땅에서 나온 뿌리같이 그에 게는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으며 흠모할만한 아름다움이 없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 사람이 먹기에 좋고 눈으로 보기에 아름다우며 사람을 지혜롭 게 할 만큼 탐스럽게 보여져서 그 열매를 먹어야 한다. 그분의 죽으심과 부활을 먹는 것이다
220 18.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 18.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 하나님의 왕국도 세상 나라들과 같이 통치체계가 있다. 세상의 통치체계도 사실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를 모방한 것이다. 통치체계라는 말은 군대 용어로는 지휘체계라 할 수 있고 회사용어로는 지배구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이 이 체계를 모르니 그저 상식과 종교적인 수준에서 성경을 보고 있다.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의 왕국의 정상적인 통치체계와 아담이 타락한 후 비정상적인 통치체계도는 아래 그림과 같다. 정상적인 통치체계 하나님(왕, 아버지) 통치 사람 (아들) 생명의 세계 통치 천사 (종) 선악의 지식세계 비정상적인 통치체계 하나님(왕, 아버지) 통치 천사 (종) 선악의 지식세계 통치 사람 (아들) 생명의 세계 원래 사람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하나님께서 아버지가 되고 사람은 아들 이 되는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고 천사는 아버지와 아들을 섬기는 종으로 창조되었다. 모든 천사들은 구원의 상속자가 될 자들을 위해 섬기도록 보내어진 섬기는 영들이 아니냐?(히1:14) 나 요한이 이것들을 보고 들었노라. 내가 듣고 본 뒤에 이것들을 내게 보
221 18.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 여준 천사의 발 앞에 경배하려고 엎드리매 그때에 그가 내게 이르기를 나 는 네 동료 종이요... 너는 그리하지 말고 하나님께 경배하라.(계22:8~9) 하나님의 왕국의 정상적인 통치체계는 사람-아들이 천사-종을 지배하는 구조가 정상적인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중심의 우주경영을 하시겠다는 의 도로 우주를 창조하신 것이다. 그런데 천사-사탄이 하나님께 반란을 일으 킨 것이다. 곧 사탄은 천사중심의 우주를 경영하겠다는 의도를 가지고 반 란을 일으킨 것이다. 여기에 아담이 동조함으로서 하나님은 어쩔 수 없이 현재 천사중심의 우주를 경영하고 계신다. 이것은 아래 말씀에서 확증된다. 그분께서는 다가오는 세상 곧 우리가 말하는 그 세상을 천사들에게 복종시 키지 아니하였느니라.(히2:5) 위 말씀에 따르면 현세상은 천사중심의 우주경영을 하시고 계시지만 다가 오는 세상은 하나님께서 원래의 질서를 회복해서 사람중심의 정상적인 우 주경영을 하시겠다는 것이다. 적용되는 법은 사람은 아들로서 생명의 법이, 천사는 종으로서 선악의 지식의 법이 적용되도록 창조되었다.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생명의 법 아래에서는 아버지와 아들의 은혜와 사랑의 관계이며 선악의 지식 법 아래에서는 율법, 곧 계약관계이다. 현 세상은 아담의 위치이탈로 인해 선악의 지식, 곧 율법이 중심이 되는 세계다. 그런데 육체를 가진 인간은 율법으로는 의롭게 될 수가 없다.(롬 3:20)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위치를 이탈한 인류를 구속-원위치로 회복 시켜주심으로 우주질서를 정상적으로 회복시키셨다. 참사람으로 오신 예수 님은 천사의 종노릇하던 사람의 원위치를 회복함으로서 우주질서를 회복하 자 천사가 사람이신 예수님께 복종하게 된 것이다. 그분께서 하늘로 들어가사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천사들과 권위들과 권능들이 그분께 복종하느니라.(벧전3:22) 우리 또한 예수님의 승리로 인해 천사들을 통치하게 되는 것이다
222 18. 하나님의 왕국의 통치체계 우리가 천사들을 판단할 것을 알지 못하느냐?(고전6:3) 그러므로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아야 한다. 사람은 생명의 법이 적용되 는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고 아울러 종인 천사들에게 적용되는 선악의 지 식 세계를 통제하는 위치라는 것이다. 사람들은 아담이 사탄에게 속아 너 무도 오랜 기간 선악의 지식 세계에 살다보니 선과 악의 이분법적 논리에 익숙해져 있다. 그래서 이러한 말을 하면 사람들은 그러면 사람은 율법을 안지켜도 되느냐? 고 반문한다. 그런 개념이 아니고 선악의 지식의 법, 곧 율법은 선하지만 그렇다고 사람이 율법의 통제를 받으면 안되고 율법의 세 계를 통제하는 상위 위치라는 것이다. 생명은 근원적인 것이다. 율법은 현 상을 치료하는 것이라면 생명은 근원을 치료한다는 개념이다. 근원이 치료 되면 현상은 자동적으로 치유되는 것이다. 현상은 아무리 치료해보았자 시 간이 지나면 다시 발병한다.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으로 인해 죄와 사망의 법에서 해방되어 생명 의 성령 법이 작용하는 세계로 위치를 옮겨왔다.(롬8:2) 이것은 중력의 세 계에서 무중력의 세계로 옮겨온 거와 같은 개념이다
223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19. 선악의 지식 세계 vs. 생명의 세계 우주 안에는 두 개의 세계가 있다. 선악의 지식의 세계와 생명의 세계다. 하나님과 종의 관계에 있는 천사들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에 있다. 그러나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에 있는 사람은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 었다. 그런데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선악의 지식의 세계로 위치 를 이탈한 것이다.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한 것이다. 선악의 지 식의 세계란 선악이라는 도덕과 지식이라는 능력이 가치기준이 되는 현 세 상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율법의 세계와 같다.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 의 열매를 먹고 위치를 이탈했을 때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신은 것은 필연 적인 결과였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기 때문이다. 다니엘서 12장 4절 에 보면 마지막 때에 지식이 증가하리라 라는 말씀이 있다. 결국 지식이 증가한다는 말은 결국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열매를 맺어 큰 바빌론으로 간다는 말이다.(계17, 18장) 그러나 사람은 원래 선악의 지식의 세계가 아닌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 조되었다. 그래서 선악의 지식의 세계는 사람에게는 죄와 사망의 세계다. 그런데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와 사망의 법에서 생명의 성령 의 법이 작용하는 세계로 원위치 한 것이다.(롬8:2) 이 두 세계에 대한 관 념이 명확하지 않으면 혼란이 온다. 성경이 제시하는 하나님의 나라는 생 명의 세계임에도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바라보기 때문이다. 은혜로 구원받 았다고 하면서도 여전히 율법의 세계에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무중력의 세계를 중력의 세계로 바라보는 거와 같은 것이다. 구약경륜과 신약경륜 의 차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현상의 세계 vs. 근원의 세계 생명이란 근원적인 것이고 현상이란 근원에 대한 결과이다. 하나님과 사람
224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의 관계도 하나님은 근원으로 실재고 사람은 근원에 대한 현상으로 형상이 다. 그러니까 보이지 않은 영이 생명이고 실재다. 보이는 것은 실재가 아 니고 단지 형상이라는 의미다. 하나님의 목표는 형상에 있지 않고 실재에 있다. 영은 근원이며 생명이고 인격적인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영, 곧 인격에 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있 는 것이다. 사람은 물질적인 존재라서 천국하면 계시록 21장과 22장에 나 와 있는 보석들로 이루어진 어떤 환경을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 는 그런 유치한 곳에 있지 않다. 그런 환경은 선악의 지식의 세계의 관점 에 있는 사람의 필요지 하나님께서 무슨 그런 환경이 필요하시겠는가? 하 나님은 그런 환경이 필요한 것이 아니라 실재 곧 인격이 필요하신 것이다. 사람이 아내가 되어 같이 살 수 있는 인격이 필요한 것이다. 그래서 새 예 루살렘을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하늘에서 하나님께 로부터 내려오더라 (계21:2)라고 하는 것이다. 곧 새 예루살렘이란 하나님 이 목표로 하는 인격적인 세계의 최종완성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 이다. 구약은 영-실재에 대한 그림자로 구약의 복은 물질적인 것이었지만 신약의 복은 영적인 복이다.(엡1:3) 그분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의 처소들에 있는 모든 영적인 복으로 우리 에게 복을 주셨으니(엡1:3)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표는 영, 곧 인격에 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실재 를 보려고 해야 한다. 율법은 왜 실패했는가? 율법 안에 내재 되어 있는 실재, 곧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성경기록도 마찬 가지다. 성경은 하나님 마음을 기록한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것을 문자적인 현상에만 치중한다면 이것은 도로 율법의 세계로 돌아가는 것이 다. 근원을 모르고 현상에만 치중하고 있는 것이다. 현상만을 가지고 말한 다면 어느 종교나 비슷하다. 어쩌면 불교의 진단과 대책이 더 심오할 수 있고 더 매력적일 수 있다
225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그러면 현재 우리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생명의 세계를 선악의 지식세계의 관점으로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세계와 생명의 세계가 혼재 되어 혼란을 일으키고 있는 것이다. 또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모르니 설 교를 하더라도 어떤 구절을 들어 우리들의 생활에만 적용하는 생활설교만 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목표가 있고 사람이 하나님의 목 표에 동역하기를 원하고 있다. 그런데 사람들은 하나님의 목표를 모르니 자신들의 목표만 말하고 있는 가련한 수준이다. 성경은 법리적인 관점이 아닌 영-인격적인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성경 은 생명의 본질에 대한 기록이기 때문에 표면적으로 보면 많은 오해가 생 긴다. 성경은 영생은 내가 무엇을 해서 얻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 영생이라고 말한다.(요17:3) 성경은 한 목표를 위해 기록되어 있다. 한 생명, 곧 예수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목표로 기록되어 있는 것이 다.(요5:39) 그럼에도 우리가 아는 예수님은 얼마나 빈약한 수준인가? 우 리가 아는 예수님의 수준은 그분이 우리를 위해 죽으시고 묻히셨다가 부활 하셨으니 믿어야 한다는 수준이다. 이것은 생명-인격을 아는 것이 아니고 지식의 관점에서 아는 것이다. 그렇다보니 표면적인 것만 아는 것이다. 예수님이 생명나무 열매라면 우리는 껍질만 먹고 있는 것이다. 우주보다 크신 그분의 인격을 우리는 몰라도 너무 모르니 그분이 보실 때 얼마나 안 타까우시겠는가? 지식의 세계는 분열하나 생명세계는 연합한다. 그래서 지 식의 세계는 성경을 많이 알면 알수록 분열한다. 우리는 왕가의 제사장들이다. 신분이 왕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이 총사령관 이시라면 우리는 지역 사령관들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한 자들 로서 그 수준에 맞는 사고와 행동을 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적을 알고 그 목적을 어떻게 하면 달성할 것인가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신 분에 합당하게 우리의 수준은 우주적이고 전략인 수준이어야 한다. 하나님 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수준을 우주적인 크기의 수준에서 알기
226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를 원하신다.(엡3:18) 그런데 하나님의 목적으로 모르고 내 목적을 위한 생활설교에 치중하다보 니 이것은 사령관의 수준이 아니라 분대장 수준에서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 하고 있는 것이다. 아! 얼마나 가련한 수준인가? 이 또한 근원 곧 하나님 의 마음과 목적을 모르고 현상에만 치중하는 결과이다. 이것은 생명이 없 는 지식으로 사탄에게 속고 있는 것이다. 다니엘서의 지식이 증가한다는 말도 결국 세상은 점점 갈수록 지식은 증가하나 영-인격의 세계는 피폐해 진다는 것이다. 두 세계가 공존하여 발전할 수는 없다. 한 쪽이 증가하면 한 쪽은 감소하는 것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 vs. 육신에 속한 사람, 영에 속한 사람 고린도전서 2장 12절에서 3장 3절까지 말씀을 살펴보자. 이제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하나님으로부터 난 영을 받았으니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값없이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함이 라. 또한 우리가 그것들을 말하되 사람의 지혜가 가르치는 말로 하지 아니 하고 성령님께서 가르치시는 말로 하나니 곧 영적인 것들은 영적인 것으로 비교하느니라. 그러나 본성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의 것들을 받아들이 지 아니하나니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은 것이니라. 또 그가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이는 그것들이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니라.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 하느니라. 누가 주의 생각을 알아서 그를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가 그 리스도의 생각을 가졌느니라. 형제들아 내가 영에 속한 자에게 말하는 것 같이 너희에게 할 수 없어서 육신에 속한 자 곧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 아이들에게 말하는 것 같이 하노라. 내가 너희를 젖으로 먹이고 음식으로 하지 아니하였나니 이는 지금까지 너희가 그것을 능히 감당하지 못하였으
227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며 지금도 못하기 때문이라. 너희가 아직도 육신에 속하였도다. 너희 가운 데 시기와 다툼과 분열이 있나니 너희가 육신에 속하여 사람들처럼 걷지 아니하였느냐?(고전2:12~3:3) 본성에 속한 사람, 육적인 사람, 영에 속한 사람, 이렇게 세 종류의 사람이 고린도전서 2장과 3장에 나와 있다. 세상은 크게 세 종류의 사람이라는 것 이다. 하나님께서 처음 사람을 만들 때의 본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사람 과 예수님을 영접하였으되 그리스도 안에서 갓난아이인 육적인 사람과 그 리스도 안에서 성숙한 영에 속한 사람이다. 본성에 속한 사람이란 하나님께서 사람을 흙으로 만든 다음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넣으시니 살아있는 혼이 된 사람과 같이 혼적인 사람이다. 혼적 인 사람은 자신의 생각과 지식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이런 사람에게는 십 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가 어리석게 보일 수밖에 없다. 예수님이 십자가 에 못 박히심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밝히 드러나셨다(롬1:4)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원래부터 하나님 아들이었다는 것은 혹시 모르지만 그렇 게 함으로써 하나님 아들로 밝히 드러나 확정되셨다, 인정되셨다는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교황이나 황제, 유명한 성자를 보고 그렇게 말한 다면 이해가 될 수 있는 일이지만 십자가에 죽은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 아 들이 되느냐는 것이다. 혼적인 사람은 한마디로 정의하면 정신적인 인간이다. 그 안에는 지식과 지혜를 갖추기 위한 지성이라는 것과 희노애락( 喜 怒 哀 樂 )이라는 것을 느끼 는 감정이라는 것이 있다. 또 결정하고 실행하는 의지라는 것이 있다. 우 리가 이것을 지정의( 知 情 意 )라고 말한다. 이것이 우리의 혼-정신 구조이 다. 물고기는 밖의 세계를 모른다. 알 수 있는 기능이 없는 것이다. 그가 물 밖의 세계를 경험하는 것은 죽음의 순간뿐이다. 이와 같이 혼적인 인간 은 다른 세계에 있기 때문에 영적인 일을 알 수 없다
228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바울은 육신에 속한 자를 그리스도 안에 있는 갓난아이라고 했다.(고전 3:1) 아이들은 인간으로서의 생명을 가지고 있지만 아직 성숙하지 않기 때 문에 넓고 깊은 것들에 대해서는 아직 알지 못한다. 그냥 근시안적이고 가 까운데 밖에는 모른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께 대한 열심과 충성이 있다. 그런데 어린아이와 같이 소아적이고 표면적이기 때문에 영적인 것을 알지 못해서 교조적이고 교리적이고 표면적이고 문자적이고 기계적이다. 그래서 성경 한 구절을 가르쳐주면 그것을 문자대로 그대로 믿어버린다. 잘 믿는 것 같은데 깊이를 모른다. 믿기는 잘 믿는데 속-영을 모른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이고, 가장 깊은 본질을 말하고 있음에도 표면만 안 다. 성경은 표면과 이면이 있다. 표면은 영원하지 않고 이면은 영원하다. 예를 들어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 는 말의 이면은 이방인과 함께 하지 말라는 의 미다. 그러나 현대에 와서는 돼지고기를 먹지 말라는 표면적인 말은 유효 하지 않지만 이방인과 함께 하지 말라는 이면은 영원하다. 또 안식일을 거 룩히 지키라 는 의미는 피조물은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의미다. 아담 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은 하나 님의 창조에 불만을 가진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긴 자는 죽이라고 한 것이다.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는 것은 표면이고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 라는 것은 이면이다. 안식일을 지키라고 한 표면은 현대에 와서 지키지 않 아도 되지만 하나님의 창조에 만족하라는 이면은 오늘 날에도 영원한 것이 다. 안식일 날 일하지 말라 하는 것은 문자적으로 있는 말씀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표면적으로만 알고 예수님께서 안식일 날 일하시니 까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안식일을 범하니까 예수는 안식일을 범한 자다 고 해서 죽인 것이다. 이면이 중요하다고 하니까 자기 마음대로 해석하라는 것이 아니다. 성경의 주제는 그리스도이고 하나님의 목표는 그리스도의 인격에 있다. 거기에 목표를 두고 기록된 말씀의 이면 을 해석해야 한다는 것이다
229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또 계시록에 14장에 가면 구속받은 십사만 사천 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것을 문자적으로 해석하여 정확히 사람의 수를 십사만 사천 명 이라고 정 통이든 이단이든 서로 해석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숫자는 항상 어떤 것을 상징한다. 삼은 하나님의 수, 사는 피조물의 수다. 삼 더하기 사는 칠로서 옛 창조의 수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더하기에 있지 않고 곱하기에 있 다. 더한 것은 불완전하지만 곱한 것은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며 갈라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열두 지파, 신약에 와서는 열두 사도가 나오고 하나님의 최종완성인 새 예루살렘은 열두 문, 열두 기초석으로 구 성되어 있는 것이다. 열둘은 하나님의 생명의 연합을 상징하는 숫자다. 열 둘 곱하기 열둘은 백사십사이고 백사십사에 만을 곱하면 십사만 사천이다. 성경에서 열은 더 이상의 수가 없다 라는 의미로 만수다. 열에 열을 곱하 면 백, 백에 백을 곱하면 만이다. 더 이상의 수가 없다는 의미다. 그러니까 십사만 사천은 우리가 셀 수 없는 많은 사람의 수를 가리킨다. 그런데 이 것을 문자적으로 십사만 사천이라고 해석하니 얼마나 우스운 일인가? 지금 대부분 소위 근본주의 진영에서 이렇게 해석하고 있다. 그러다 보니 인격 적 인간이 아니라 기계적 인간이 되고 있다. 말로는 은혜로 구원받았다고 하는데 도로 율법주의로 돌아가고 있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도 단 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육체적 죽음에 한정시켜 버린다. 그러니까 문자적인 사람들은 참 아니라고 할 수도 없고 맞다고 할 수도 없 고 맞기는 맞는데 속을 모르는 사람들이니까 답답한 사람들이다. 그 사람 들은 말마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 중심! 이라고 한다. 성경을 열심히 읽지 만 표면만 읽기 때문에 문자주의적이고 열심히 봉사하고 있지만 육적이기 때문에 편당을 만들고 분란을 일으킨다. 하나님의 말씀은 생명에 관한 것 이고, 가장 깊은 본질을 말하고 있기 때문에 우리는 그 말을 표면적으로 알아서는 안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하나님의 나라다. 하나님의 나 라는 물질적인 나라가 아닌 예수라는 인격의 연합체다. 하나님의 관심은 오직 예수라는 인격에 있다
230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동산-성막-성전-예수-교회-천년왕국- 새 예루살렘으로 발전된다. 성막, 성전은 예수라는 인격을 건축물로 묘사 한 것이다. 지금의 교회를 건축물의 형태로 묘사하고 있는 것이다. 마찬가 지 동산, 천년왕국, 새 예루살렘도 예수라는 인격을 동산으로, 천년왕국으 로, 새 예루살렘으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영에 있지 물질에 있지 않다. 하나님 나라의 주인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은 영이시 기에 하나님의 거처는 물질이 아니고 인격 안에 거하신다. 어떤 사람 안에 거하는가? 예수라는 인격 안에 거하신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것을 모르니 천국이 무슨 순금 덩어리로 이루어진 물질적인 곳이라고 생각하고 예수의 인격과는 거리가 먼 이기적인 생각을 하고 있다.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다 보니 그러한 것을 중요하게 생각할 수 있으나 영이신 하나님은 그런 물질 들이 필요하지도 않으며 중요하지도 않다. 오직 하나님의 관심은 예수라는 인격에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의 관심은 하늘이 아니라 지금 땅위의 교회 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성경기록이 자신에 대하여 증언한다고 하였다. (요5:39) 그러니까 구약에 기록된 모든 긍정적인 것은 예수라는 인격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생명나무, 어린양, 만나, 반석, 제물, 성막, 성전, 제사장 등은 모두 예수님의 인격을 다른 형태로 표현하고 있 는 것이다. 또 문자주의적이고 표면적인 사람들은 교리를 진리라고 생각하고 교리를 지키는 것이 진리를 따르는 것이라 생각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영-인격 적인 것에 있는데 말씀을 기계적으로 받아드리기 때문에 기계적 인간이 됨 으로서 분쟁을 일으키면서 정의를 수호한다고 생각한다. 자기가 아니면 교 회가 잘 못 된다고 생각한다.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이 영에 속한 자가 되는 것이다. 영적인 사람이라고 하니까 무슨 신령한 사람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영적인 사람은 그리스도 와 함께 죽고 그와 함께 다시 난 사람이다. 땅에 있지만 시민권이 하늘에
231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있는 사람들이고 혼과 육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성령을 따라 사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여기서 헷갈리게 된다. 죽고 다시 나지 않으면 무엇 을 해도 어떻게 해도 모두 육이고 혼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육신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어야 한다.(고후5:4) 쉽게 말하면 하나님께 먹힘으로 하나님의 생명 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는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음식헌물로 창조 되었다. 내가 하나님의 음식이 됨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죽는 것을 음식에 비유하여 맛본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마16:28, 막9:1, 눅9:27, 요8:52, 히2:9) 내가 하나님의 음식-제물이 되 려면 나는 그리스도와 함께 죽고 함께 살아야 한다. 그리스도의 영-인격 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성령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의 영이며 하 나님께로부터 오는 새로운 영이다. 인간은 창조될 때 이미 영을 받았다는 사람들이 있지만 그 영은 사람의 영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창조된 영 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물고기는 물 밖의 일을 알 수 있는 기능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본성 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이 없기 때문에 하늘의 일을 모르는 것이다. 영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영을 받은 사람으로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난 사람이다. 쉽게 말해서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진 사람이다.(고전2:16) 오직 영에 속한 사람은 모든 것을 판단하나 그 자신은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누가 주의 마음을 알아서 가르치겠느냐? 그러나 우리 가 그리스도의 마음을 가졌느니라.(고전2:16) 기록된 말씀을 문자적으로 아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 이면에 있는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다. 영 곧 마 음이 생명이다.(잠4:23) 하나님의 목표는 물질에 있지 않고 영-인격에 있 다. 그럼에도 이 목표를 모르니 천국이 무슨 기화묘초 만발한 곳이라든지, 또는 보석으로 둘러싸인 곳이라는 유치한 생각을 하고 있다. 이것은 하나
232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님의 경륜의 목표와 아무 상관도 없다.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사람이 영에 속한 사람이다. 거듭난 사람만이 영에 속한 세계를 볼 수 있다. 영적인 사 람은 신과 같은 성분이 있다고 착각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그런 거와는 상관이 없고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사람으로 하나님의 목적 안에 있 는 지극히 정상적인 사람이다. 그리스도의 영을 받은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구속해 준 생명 안에 그리스도의 숨을 받은 것이다. 숨은 영이요 생명이다. 숨이 떨어지면 죽는 것같이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다(롬8:9). 아담은 하나님께 받은 숨으로 살아 있는 혼이 되었고,(창2:7) 우리는 예수님께 받 은 숨으로 영적인 사람이 되었다.(요21:22) 돌 판의 세계 vs. 마음 판의 세계 하나님께서 인간에게 두 개의 편지를 보내셨다. 하나는 모세를 통해서 돌 판에 써 주신 것으로 구약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온 육체의 마음 판에 새겨진 것이다. 이것을 신약이라고 한다. 너희는 우리의 사역을 통하여 분명히 드러난 그리스도의 서신이니 이것은 잉크로 쓴 것이 아니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영으로 쓴 것이며 또 돌 판에 쓴 것이 아니요, 육체의 마음 판에 쓴 것이라.(고후3:3)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지고 보이지 않는 하나 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즉 사람이 하나님을 대신하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 은 왜 실패했는가? 그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고 싶지 않아서 아니라 그 말씀을 지킬 생명이 없었다는 것이다.(갈3:21) 원숭이를 아무리 훈련시켜 서 사람을 만들겠다고 해보았자 사람이 안되는 것이다. 이것이 구약이다. 그래서 하나님은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셔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 신약경륜이다
233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예레미아 31장 31절에서 이것을 약속하신다.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들이 이르리니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리라. (렘 31:31) 구체적인 방법은 이렇다.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 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 들의 마음 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 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31:33) 한 마디로 옛 사람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할 수 없기에 사람 안에 하나님께서 자신의 생명을 넣어주어서 새로운 사람을 통해서 하나님 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옛 언약과 새 언약의 차 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떤 이들은 구약과 신약이 똑 같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 약속의 말씀이 누구에게 와서 성취되었는가? 바로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와서 성취되었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니(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니 아 버지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요1:14) 구약의 결정적 흠은 말씀과 사람이 분리됨으로서 사람 따로 말씀 따로가 되어 겉으로는 말씀을 잘 지키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 속 중심에는 그 마음 이 없어 외식하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 가장 큰 문제였다. 그러나 신약은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의 세계라는 것이다. 물론 어떤 이들은 자신을 쳐 다보고 내가 어떻게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되었는가? 하고 의아해 할 것이다. 그러나 신약경륜의 성취를 분명하게 바울을 히브리서에서 두 번이 나 말하고 있다.(히8:7~10, 히10:16~17) 만일 그 첫 언약이 흠이 없었더라면 둘째 것을 구할 여지가 없었으려니와 그들에게서 흠을 발견하시고 그분께서 이르시되, 주가 말하노라. 보라, 날 들이 이르리니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약을 맺으
234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리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 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 노라. (히 8:7~10) 물론 우리를 쳐다보면 우리는 한 없이 부족하다. 말씀이 육신이 되는 세계, 이 세계를 오늘 날 교회는 현재는 이루어 질 수 없고 죽은 후에나 가능한 세계라고 믿고 있다. 그러나 우리 자신으로는 할 수 없지만 하나님께 하실 수 있다고 하니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을 믿어야 한다. 만약에 그렇게 되지 않으면 성경은 거짓말이 된다.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능히 하지 못하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나니 곧 자신의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시고 또 죄로 인 하여 그 육신 안에서 죄를 정죄하셨느니라. 이것은 육신을 따라 걷지 아니 하고 성령을 따라 걷는 우리 안에서 율법의 의가 성취되게 하려 하심이 라.(롬8:3~4) 모세는 문서가 따로 있었지만 예수님은 문서가 따로 없고 예수님의 인격 자체가 편지였다는 것이다. 이것이 신약과 구약의 차이다. 구약은 문서에 있는 것을 말한다. 내 안이 아닌 내 밖에 있는 것을 말한다. 신약은 생명 안에 있는 것, 예수라는 사람 안에 있는 것, 그래서 또 우리 안에도 들어 올 수 있는 것, 사람과 분리된 언약이 아니고 사람과 함께하는 그런 언약 이다. 그래서 차원이 아주 다르다. 성경은 뭔가? 성경은 종이에 쓴 것이므로 원리상으로 돌 판에 쓴 것이나 같다. 성경은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다. 성경은 늘 내 밖에 있다. 나하고 분리되어 있다. 그런데 그렇게만 있으면 안 된다. 성경이 내 속에 있으면 모르지만 내 속에 있지 않고 내 밖에 있으면 편리할 때는 가져다 쓰고 편 리하지 않고 귀찮으면 버리거나 감춰놓으면 된다. 내 자신이 아니니까 내
235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만일 성경이 내 속에 있다면 내가 성 경이라면 성경을 버릴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개는 개의 생명을 가지 고 있기 때문에 누구를 만나더라도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면 짖는다. 개의 생명 자체가 그렇다. 우리도 우리 안에 하나님을 찬양하는 생명이 있다면 어디를 가도 하나님을 찬양할 것이 아니냐는 것이다. 그런데 구약은 그것 이 아니고 돌 판에 찬양을 하라고 써 있기 때문에 찬양을 하는 것이다. 그 것은 내가 원하지 않아도 할 수 있고 원해도 할 수 있고 그렇다. 내 속에 있는 것이 아니고 내 밖에 있는 것이라서 그렇다. 구약과 신약은 그렇게 차이가 있다. 구약은 돌 판에 새겨졌기 때문에 모세가 세상을 떠난 후에도 이스라엘 사 람들은 그 돌 판를 보고 그것을 읽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그 돌 판에 따라 서 하나님의 뜻을 따르고 하나님을 섬길 수 있었다. 그런데 신약경륜 하에 있음에도 어떤 이들은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 그렇다고 말씀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 아니다. 신약경륜은 방향성에 있어서 말씀이 인격이 된 세계지 말씀 따로 육신 따로 된 세계가 아니다. 더 높은 차원의 세계라는 것이다. 돌 판은 십계명이고 십계명은 모든 율법의 핵심이다. 모세가 없어도 문제 가 없었다. 돌 판만 있으면 되었다. 그래서 성막 안에 지성소에는 돌 판이 보관 되어 있었다. 보관되어 있는 상자를 법궤라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거기에 있다는 뜻이다. 그래서 이스라엘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면 언제든지 그 돌 판만 보면 되었다. 그 돌 판을 확대해 놓은 것이 율법서다. 그 율법서에 있는 대로 내가 보고 그대로 살면 되었다. 하나님 을 경배하는 것도 내 생각과 관계없이 하라는 대로 하면 된다. 돌 판에 새 겨져 있으니모세가 세상을 떠났어도 상관없는 것이다. 돌 판만 있으면 된 다. 지금 우리도 마찬가지다. 성경이 있으니까 예수가 없어도 상관없다. 성경에 있는 대로 잘 지키면 된다. 이런 것을 종교라고 한다
236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그런데 신약은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왔다는 것이다. 이것이 문제다 그래 서 그분이 없으면 언약도 없어진다. 그분 자신이 언약으로 왔으니까 그분 이 있을 때는 언약이 와 있는 것이지만 그가 없으면 언약이 없어지는 것이 다. 그러나 주님과 함께 하면 생명 안에서 능숙해진다. 이것은 생명 안에 서 명백해지는 것이지 외부적으로, 가령 주일은 5리만 걸으라고 했으니까 5리만 걸으면 된다는 이런 게 아닌 것이다. 율법의 세계 vs 은혜세계 이는 율법은 모세를 통해 주셨으되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왔기 때문이라.(요1:17) 율법이 옛 언약이라면 은혜와 진리는 새 언약이다. 그런데 영원 안에서 는 사실은 원래부터가 새 언약이었다. 옛 언약이라는 것은 영원 안에는 없었는데, 우리가 타락했기 때문에 옛 언약이 생긴 것이다. 시간적으로 는 옛 언약이 먼저이고 새 언약이 다음이지만 영원 안에서는 새 언약뿐 이다. 우리는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의 세계에서 은혜의 세계로 위치 를 옮겼다. 율법이 계약이라면 은혜는 생명이다. 그래서 율법은 돌 판에 새긴 것이라면 은혜는 마음 판에 새긴 것이다.(고후3:3) 즉 율법은 외부 적인 교육훈련을 통해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고 은혜는 사람 내부에 생 명을 주어서 사람을 만들겠다는 것이다. 원숭이를 아무리 교육훈련 시킨 다고 해서 사람이 되지 않는다. 원숭이를 사람으로 만들려면 창조적인 은혜가 필요하다. 원숭이가 죽어서 흙으로 돌아간 다음 하나님께서 그 재료를 가지고 다시 재창조해야 사람이 된다. 지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새 언약은 이런 개념이다. 내가 내법을 그들 마음속에 두고 그들의 생각 속에 그것들을 기록하리라. (히:10:16) 새로운 생명을 주시겠다는 것 이다. 그러면 왜 하나님은 옛 언약 대신에 새 언약을 제시하게 되었는 가? 옛 언약-율법의 한계 때문이다. 율법으로는 생명을 줄 수 없었기
237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때문이다.(갈3:21) 율법은 문자적이고 표면적이다. 그래서 인격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마저 율법에 의해 정죄를 받으 신 것이다. 만일 그 첫 언약이 흠이 없었더라면 둘째 것을 구할 여지가 없으려니와 그들에게서 흠을 발견하시고 그분께서 이르시되, 주가 말하노 라. 보라. 나들이 이르리니 그때에 내가 이스라엘 집과 유다의 집과 새 언 약을 맺으리라. (히8:7~8) 성경에서 모세는 율법을 예표한다. 그래서 출애굽기에 보면 예수 그리스도의 예표인 반석이 모세에 의해 심판을 받는다. 주께서 모세에게 이르시되, 백성 앞을 지나고 이스라엘의 장로들을 데리고 가라. 네가 강을 칠 때 쓰던 네 막대기를 네 손에 잡고 가라. 보라, 내가 거기서 호렙에 있는 반석 위에서 네 앞에 서리니 너는 그 반석을 치라. 그 반석에서 물이 나오리니 백성이 마시리라, 하시매 모세가 이스라엘의 장로 들 눈앞에서 그대로 행하니라.(출17:5~6) 예수 그리스도는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고 인류의 생명이 되셨다. 반석 의 물은 생명을 산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예수 그리스도는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려주는 영이 되셨다.(고전15:45) 그리고 또 한 번의 반석이 나온다. 첫 번째 반석은 이스라엘 민족이 출애굽을 한 후에 신 광야의 호렙에 있는 반석으로 모세는 그곳을 맛사(시험)와 므리바 (다툼)이라고 하였다.(출17:8) 두 번째는 가데스 반석이다. 두 번째 반 석의 물도 하나님께서 므리바의 물이라고 하셨다.(민17:13) 사람들은 일 반적으로 두 반석이 있는 곳이 같은 곳이라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다른 곳이다. 하나님은 첫 번째 호렙에 있는 반석에서는 모세에게 너는 그 반 석을 치라 (출17:6) 하셨고 가데스에 있는 두 번째 반석에서는 모세와 아 론에게 너희는 그들의 눈 앞에서 반석에게 말하라. (민20:8) 라고 하셨다. 첫 번째 반석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을 그대로 행하였지만 두 번째 반석에서 모세는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두 번 반석을 쳤다. 혹자는 모
238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세가 한번 쳐야 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어기고 두 번 쳤다고 하는데 그 렇지 않다. 그냥 반석에게 말하라고 하셨을 뿐이다. 그런데 신약에 와서 는 두 반석을 별도로 구분하지 않고 반석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 또한 형제들아, 나는 이것을 너희가 모르기를 원치 아니하노니 곧 우리 조 상들이 다 구름 아래에 있고 모두 바다를 지나가며 모두가 구름과 바다 속 에서 모세에게로 침례를 받고 모두가 같은 영적 음식을 먹으며 모두가 같 은 영적 음료를 마셨느니라. 그들이 자기들을 따라가던 영적 반석으로부터 마셨는데 그 반석은 그리스도였느니라.(고전10:1~4) 그러므로 두 개의 반석 모두 예수 그리스도다. 첫 번째 반석은 육체로 오셔서 율법에 의해 심판받으신 그리스도라고 할 수 있다. 율법의 예표 인 모세로부터 예수 그리스도가 심판을 받으신 것이다. 그리고 두 번째 반석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다. 이는 우리가 그리스도의 보혈의 공로 로 구원을 받았다 하더라도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가 주는 영적음료를 마시고 살아야 한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모세는 이 복 음의 의미를 모르고 막대기로 두 번 친 것이다. 이는 심판받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또 한 번 십자가에 못 박은 거와 같은 것이다. 그래서 모세 는 가나안 땅에 들어가지 못 한 것이다. 모세는 율법의 예표이고 가나안 땅은 하나님의 왕국이자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한다. 인간적으로 보면 구 약에서 모세만한 인물은 없다. 그럼에도 모세는 율법의 예표다. 율법으 로는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출 애굽을 한 후 가나안 땅에 들어간 성인 남자는 단 두 사람, 하나님의 말 씀을 믿고 믿음으로 들어간 여호수아와 갈렙 뿐이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열 두 명의 정탐군의 일원으로 가나안을 정탐하고 온 후에 담대히 그 땅 을 차지하자고 하였고 나머지 열 명은 백성을 낙담시키는 말을 했다. 그 결과 이스라엘 성인 남자 중에 나머지는 모두 광야에서 죽고 여호수아와 갈렙만이 가나안 땅에 들어갈 수 있었다
239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이것은 모세가 훌륭하지 못해서 가나안 땅을 들어가지 못한 것이 아니라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롬3:20) 오직 사람은 율법의 행위와 상관없이 믿음으로 의롭게 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롬3:28) 그러므로 구원은 믿음을 통해 위치를 옮기는 것이다. 죄와 사망이라는 율법의 위치에서 성령의 생명의 법이 지배하는 세계로 위치를 옮기는 것 이 구원이다.(롬8:2) 이것은 전적으로 행위와 관계없이 하나님의 은혜의 문제이고 출생의 문제이다. 지식의 세계 vs. 생명의 세계 창세기 2장에 보면 두 기원이 있다.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다. 그러니까 지 금 세계는 지식의 세계 대 생명의 세계의 대립이다. 세상은 지식의 세계고 하나님의 나라는 생명의 세계다. 지식으로는 어떤 생명도 만들 수 없다. 현대의 지식으로도 모기 한 마리도 창조할 수 없다. 지식이란 무엇인가? 이론이다. 예를 들어 물고기에 관한 논문을 수 백권 쓴다 해도 물고기는 만들 수 없는 것이다. 교리는 생명이 아니고 지식이고 이론이다. 예수님은 교리를 주러 오시지 않았고 생명을 주러 오셨다.(요3:16, 요10:10) 사탄의 계략은 무엇인가? 지식으로 생명을 모조하는 것이다. 지금 대부분 종교 안 에서 이것에 속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교리를 아는 것이 생명이라고 착각 한다. 그렇다면 생명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생명의 근원은 영이다. 생명 은 하나님 자신이다. 그분 자신을 우리에게 주겠다는 것이다. 그분의 인격 이 우리의 마음 판에 새겨지는 것이다. 물론 지식도 필요하고 모르는 것 보다는 아는 것이 낫다. 그러나 지식은 사람을 교만하게 하고 분열하게 한다. 예를 들어 사회과학을 하는 사람들 은 연합이 안된다. 왜냐하면 각기 자기 나름대로의 주장과 지식이 있기 때 문이다. 그러나 생명은 한 덩어리이기 때문에 연합이 된다. 같은 마음을
240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가지고 있으니 연합이 안될 수가 없는 것이다. 글자의 사역자(minister of the letter) vs. 영의 사역자(minister of the spirit) 그분께서 또한 우리를 새 상속 언약의 유능한 사역자로 삼으시되 글자의 사역자가 아닌 영의 사역자로 삼으셨나니 글자는 죽이되 영은 생명을 주느 니라.(고후3:6) 옛 언약은 글자의 사역이라면 새 언약은 영의 사역이다. 물론 율법의 본질 은 하나님의 마음을 표현한 것이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인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내가 그들에 대해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대한 열심은 있었으나 지식 에 따른 것이 아니니라.(롬10:2) 하나님은 율법, 곧 말씀을 사람에게 왜 주었는가? 말씀과 사람이 분리된 사람이 아니라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하나님이 원하는 사람이 되라고 주신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의 궁극적인 목적은 사람을 살리기 위한 것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율법 조항을 문자 적으로 지키는 기계적 인간이 되었다는 것이다. 외형적으로 어떤 선한 행 위를 하더라도 그 행위와 마음이 분리됨으로 외식하는 자가 되었다는 것이 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그분의 목표는 항상 영-속 중심에 있다. 하 나님은 행위 이전에 속 중심 곧 그 마음의 동기를 먼저 보신다. 그래서 예 수님은 오셔서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누구든지 여자를 보고 그녀에게 음 욕을 품는 자는 이미 마음속으로 그녀와 간음하였느니라.(마5:28) 하시는 것이다. 그런데 당시의 유대인들은 말씀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 고 문자 그대로 지키려 하다 보니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에 병자를 고치 자 안식일을 어겼다고 율법의 완성자인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글자에는 인격이 없다. 글자대로 하면 안식일을 어긴 자는 살릴 수가 없다. 그래서
241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글자의 사역은 죽이는 사역이고 정죄의 사역이라는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해 주어진 말씀이 죽이는 말씀이 된 것이다. 성경은 완전하지만 성경 대로, 글자대로 하면 죽이는 사역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말씀이 인격이 된 예수님은 율법에는 간음한 자는 돌로 쳐 죽이라고 기록되어 있었지만 사람을 살리고자 하는 하나님의 마음이 있었음으로 간음하다 현장에서 붙잡힌 여인을 살리신 것이다.(요8:1~12) 예수님은 오셔서 글자의 사역을 하지 않고 영의 사역을 하셨다. 그런데 유대인들의 관념은 문자적 사역에 길들여져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영 의 사역을 이해하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은 것이다. 예수님은 나는 하늘로부터 내려온 살아 있는 빵이니 사람이 먹으면 영원히 살리라. 내가 주고자 하는 빵은 곧 세상의 생명을 위해 내가 주고자 하는 내 살이로다. (요6:51) 하셨다. 그러자 유대인들은 이 사람이 어찌 능히 자기 살을 우리 에게 주어 먹게 하겠느냐? (요6:52) 하면서 문자적으로 이해하였던 것이 다. 이어서 예수님은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요6:54) 하시자 제자들마저도 이 말씀은 어렵도다. 누가 그것을 들을 수 있으리요? (요6:60) 라고 하였던 것이다. 글자의 사 역을 하던 유대인들은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자 예수님 은 이것이 너희를 실족하게 하느냐? (요6:61) 하시면서 내가 너희에게 이 르는 말들은 곧 영이요 생명이니라. (요6:63) 하신 것이다. 예수님의 말씀 은 이렇게 어려운 말도 아닌데 알쏭달쏭하다. 왜냐하면 영의 말씀이기 때 문이다. 그러므로 지금도 우리는 신약경륜 하에 있으면서도 예수님의 말씀 이 영이요 생명이라고 하니까 이것을 오해하여 글자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글자대로 한다면 구약경륜 하에 있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또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내 말을 지키 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 (요8:51) 라고 영적인 말씀을 하셨다. 그 러자 유대인들은 이것을 또 문자적으로 받아들여 이에 유대인들이 그분께 이르되, 이제는 네가 마귀 들린 줄을 우리가 아노라, 아브라함과 대언자들
242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도 죽었거늘 너는 말하기를 사람이 내 말을 지키면 켤코 죽음을 맛보지 아 니하리라, 하니 네가 이미 죽은 우리 아버지 아브라함보다 더 크냐? 또 대 언자들도 죽었거늘 너는 네 자신을 누구로 만드느냐?(요8:52~53) 하였던 것이다. 성경은 불교경전처럼 어려운 용어를 쓴 책도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이해하지 못하는 것은 생명의 본질을 기록한 영적인 말씀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표면보다는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 영이요 생명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지금도 사람들이 성경 에 있는 말씀을 문자 그대로 단순하게 받아들여 하나님의 말씀을 오해하 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 드시 죽으리라 (창2:17) 라는 말씀도 육체의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님 에도 육체의 죽음으로 받아들이고, 선악의 지식나무와 생명나무도 문자 그대로의 실제의 나무로 받아들임으로서 성경의 근원에 대한 것을 오해 하여 성경 전체의 계시가 가려지게 되는 것이다. 실제이신 예수님이 오 심으로 우리의 마음을 덮고 있던 베일이 벗겨졌음에도 만일 우리가 여전 히 글자의 사역에 있다면 베일이 우리 마음을 덮고 있는 구약경륜 하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가려졌으니 이는 이 날까지도 옛 상속 언약의 말씀 을 읽을 때에 바로 그 베일이 벗겨지지 아니한 채 남아 있기 때문이라. 그 베일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졌으나 이 날까지도 모세의 글을 읽을 때 에 그 베일이 그들의 마음을 덮고 있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마음 이 주께로 돌아서면 그 베일이 벗겨지리라.(고후3:14~15) 신약경륜 하에 있는 우리는 죽이는 글자의 사역이 아니라 살리는 영의 사역자다. 영의 사역자란 주님과 한 마음, 한 생명으로 그 생명을 증거 하는 사역이다. 옛 언약은 하나님 말씀을 지킴으로 살게 하려는 것이었 으나 인간의 완악함으로 인하여 오히려 그 완악함만 표출 되었고 이로
243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인하여 하나님의 진노만을 더하게 하였던 것이다. 하나님 백성으로 살게 하려던 율법은 오히려 정죄하고 죽이는 계명이 되었음으로 그 사역자들 은 죽이는 사역을 하고 말았던 것이다. 그러나 새 언약은 예수님의 죽으시 고 다시 사심 안에 모든 사람을 포함하여 새 생명으로 행하게 하려는 것으 로서 죽은 자들 안에서 다시 살게 한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꾼 된 사람 들은 살리는 직분을 받은 것이다. 새 언약을 전하면 죽은 자들이 살아난다. 그러므로 새 언약의 일군들은 생명으로 함께 해야 한다. 예수님과 생명 으로 함께 해야지 문서를 많이 안다고 새 언약의 일군이 될 수는 없다. 문서를 많이 아는 것은 옛 언약의 의식이다. 비록 신약 성경을 가르친다 고 하더라도 옛 언약의 일군이다. 신약을 공부한다고 하더라도, 신약을 전한다 하더라도 신약 자체가 아니라 신약 성경을 공부하고 전하는 것이 면 이것은 구약이나 마찬가지다. 옛 언약의 일군이 하는 방식이기 때문 이다. 옛 언약은 옛 언약의 일군이 하는 것이다. 새 언약은 옛 언약의 일군처럼 할 수가 없다. 자기 안에 생명을 증거하는 것이다. 지금도 성 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예수님이 없어도 상관없다. 성경만 있으면 된다. 이 것이 종교다. 물론 성경은 중요하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예수님이 오셨을 때 하나님께로 인도하기 위해 주어졌던 바로 그 성경이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께로 가는 길을 막았다. 교회에서 주로 성경의 중요성을 위해 암송되는 구절 가운데 아래 구절이 있다. 성경기록을 탐구하라. 너희가 그것들 안에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줄로 생 각하나니 그것들이 바로 나에 대하여 증언하느니라. (요5:39) 그런데 이 어서 그러나 너희는 생명을 얻기 위해서 내게 오기를 원치 아니하는 도 다. (요5:40) 라는 말씀을 잘 강조하지 않는다. 글자의 사역은 인격이 없 기 때문에 죽이는 사역이 된 것이다. 사람을 살리기 위한 성경 말씀이라 도 글자의 사역을 하게 되면 사람을 정죄하게 되고 사람을 죽이는 사역 이 된다. 그래서 성경은 구약의 대언자의 직무를 정죄의 직무라고 하는
244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것이다.(고후3:9) 만약 오늘날에도 구약과 동일한 글자의 사역을 한다면 정죄의 사역을 하게 되는 것이다. 초등원리 vs. 고등원리 이와 같이 우리도 아이였을 때에 세상의 초등원리 밑에서 종노릇 하였느니 라.(갈4:3) 그러나 이제 너희가 하나님을 안 뒤에 혹은 하나님께 알려진 뒤에 어찌하 여 다시 약하고 천한 초등원리로 돌아가 다시 그것에 종노릇 하려 하느 냐?(갈4:9) 옛 언약은 초등원리라면 새 언약은 고등원리다. 우리가 신약경륜 안에 있음에도 글자의 사역을 하고 있다면 이것은 초등원리다. 물론 율법은 초등원리로서 사람으로 하여금 죄를 알게 하여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다. 그러므로 율법으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하느니라.(롬3:20) 그런즉 율법은 우리를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훈육선생이었으니 이것은 우 리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게 하려함이라.(갈3:24) 그러므로 율법은 초등학교와 같은 것이다.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데 까 지는 율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이것은 다시 초등원리로 돌아가는 것이다. 원리상 성경말씀을 지키는 것이나 율법을 지키는 것이나 같은 것이기 때문이다. 곧 글자의 사역이다. 이런 말은 하면 어떤 이는 그러 면 성경말씀을 지키지 말라는 것이냐고 반문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그런 차원의 말을 하는 것이 아니다. 신약경륜의 방향성을 말하는 것이다. 구 약시대에 수많은 대언자가 나와서 말씀을 지키라고 했지만 결국 실패했 다는 것이다. 왜 실패했는가? 글자의 사역으로는 생명을 줄 수 없기 때
245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문이었다. 당시 사람들이 하나님 말씀을 지키려고 하는 마음이 없어서가 아니라 사람 속에 그 말씀을 지킬 생명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만 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 아 있었으리라.(갈3:21) 아무리 글자의 사역을 하더라도 율법으로는 생명을 줄 수 없기 때문에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셔야만 했던 것이다. 율법을 지킬 생명이 있다면 당연히 너무도 쉽게 율법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벌은 배우지 않았는데 너무도 쉽게 정교한 벌집을 짓는다. 원숭이도 배우지 않았는데 너무도 쉽게 나무를 탄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그 생명이 있다면 너무도 쉽게 말씀을 지킬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이제 우리는 율법이라는 초등학교의 훈육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신약경륜, 곧 최종적인 학부과정에 있는 것이다. 그러나 믿음이 온 뒤에는 우리가 더 이상 훈육선생 아래 있지 아니하도다. 너희가 다 그리스도 예수님을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자녀들이 되었나니(갈3:25~26)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글자의 사역을 하고 있다면 세상의 초등원리 밑 에서 종노릇하고 있는 것이다. 분명히 하나님은 우리에게 그것을 지킬 새로운 도구, 곧 생명을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여전히 옛 언약 의 관습에 젖어 있는 것이다. 나이키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짚 세기를 신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육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안되고 죽 고 난 후에나 가능하다는 패배주의적 사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 런데 이것이 안된다면 성경은 거짓말이 된다. 성경은 육신이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께서는 하셨다고 하였다.(롬8:3) 우리를 자신을 쳐다보면 부족하고 할 수 없을 것 같지만 하나님께서는 가능하시다고 말 씀하시니 우리는 이것을 믿고 따라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죽이는 글
246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자의 사역자가 아니라 살리는 영의 사역자가 되어야 한다. 구약경륜 vs. 신약경륜 하나님의 구약경륜과 신약경륜의 차이는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그 럼에도 어떤 이들은 구약경륜과 신약경륜의 차이를 모르고 똑 같다고 말 하는 사람들이 있다. 심지어 구원의 방법에 있어서도 구약은 오실 예수 님을 바라보고 구원받았고 신약은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만일 구약시대에 있는 사람들이 예수님을 알았다 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도 없었고 오셔서 죽으실 이유도 없었다. 성경은 이 렇게 말한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 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 리라.(고후2:7~8) 여기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 지혜는 세상이 생기기전에 미리 정 하신 것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 다. 만일 통치자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이 알지 못했다는 것은 인류 전체 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육신 으로 계실 때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 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실망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예전의 자기들의 일터로 돌아갔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 완 전히 인식하게 된 것은 부활 이후 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 아래 있던 인류를 향하여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롬3:10) 그리고 율법으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 앞에
247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롬3:20) 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구약시대에 단 한사람이라도 의인 있었다면 예수님은 오실 필요가 없었고 예수님의 구속은 소용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 한 사 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 있 는 자들은 선악과를 먹은 사람이라면 예수님은 생명과를 먹은 사람이다. 그래서 생명이 다른 인류는 예수님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아담 안에 있는 자는 모두 위치를 이탈하였기에 누군가 와서 사탄에게 승리하고 사탄에 게 빼앗긴 인격을 되찾아 와야 한다. 이것이 구속이다. 인생은 원래 생 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지만 아담이 위치를 이탈하여 율법의 세계 로 옮겨 온 것이다. 물고기가 위치를 이탈하여 물 밖으로 나오면 사망이 듯이 사람이 생명의 세계를 이탈하여 율법의 세계로 위치를 옮기면 사망 이다. 그래서 예수님의 구속으로 말미암아 우리는 죄와 사망의 세계에서 생명의 세계로 원위치하였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나를 해방시켰기 때문이라.(롬8:2) 예수님이 오신 목적은 단 한가지다. 우리를 구속하시고 생명을 주시기에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를 가르치기 위해 오신 것도 아니고 교리를 주시기에 오신 것도 아니고 오직 생명을 주시기 위해 오신 것이다. 내가 온 것은 양들이 생명을 얻게 하고 생명을 더욱 풍성히 얻게 하려 함 이라.(요10:10) 지금 많은 사람들은 생명에 대한 개념이 없다. 소위 법리적으로 죄 용서 를 받는 것이 거듭남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법리적 죄용서는 대속이지 거듭남이 아니다. 구약과 신약경륜은 같은 것이 아니다. 사람은 본디 생 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런데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세계 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러므로 율법 아래 있던 인류는 원위치, 곧 구 속이 필요하다
248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해 저주가 되사 율법의 저주에서 우리를 구속하셨 으니 기록된바, 나무에 달리는 모든 자는 저주 받았느니라.(갈3:13) 이것은 율법 아래 있는 자들을 구속하시고 또 우리가 아들로 입양되게 하 려 하심이라.(갈4:5) 하나님의 목표는 사람 안에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 주시는 것이다. 그러나 돌 판에 기록된 글자의 사역으로는 생명을 줄 수 없었다.(갈3:21) 그러면 율법이 하나님의 약속들에 위배되느냐? 결코 그럴수 없느니라. 만 일 생명을 줄 수 있는 율법이 주어졌더라면 진실로 의가 율법으로 말미암 아 있었으리라.(갈3:21) 그러므로 구약경륜과 신약경륜이 똑 같다고 주장하는 것은 말도 안되는 소 리다. 이런 관념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많은 설교자들이 신약경륜 하에 있 음에도 여전히 구약경륜 하에 글자의 사역을 하고 있는 것이다. 왜 성경은 율법 아래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정죄 아래 있다고 하는가? 이는 율법, 곧 글자의 사역은 비인격적이기 때문에 융통성이 없어 글자대로 사람을 정죄 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래서 율법아래에서는 단 한 사람도 의인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구약의 대언자들을 향하여 비록 그들이 하나님의 일군이었 지만 죽이는 사역을 하였고 정죄의 직무를 하였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고후3:6, 9) 법리적 율법의 세계 vs. 유기적 생명의 세계 구약은 법리적 율법의 세계라 할 수 있고 신약은 유기적 생명-인격의 세계라 할 수 있다. 사람들은 왜 하나님께서 율법을 주셨는지 잘 모른 다. 그냥 하나님의 경륜 안에서 하나님의 독단적인 섭리로 주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법칙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다. 원인이 있기 때문에 결과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예언도 점쟁
249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이가 뭘 맞추듯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필연이다. 씨를 뿌리면 봄에 싹이 나고 여름이 되면 잎이 무성해질 것이고 가을이 되면 열매를 맺을 것을 아는 것은 우리가 점쟁이라서 아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필연을 알 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고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었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율법이 주어진 것 이다. 아들이 될 자가 종의 위치로 이탈했기 때문에 거기에 합당한 법이 주어진 것이다. 처음에 이스라엘 민족은 이 법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주자 주께서 하신 모든 말씀을 우리가 행하리이다. (출24:3) 하면서 자신 있게 하나님께 다짐하였다. 그러나 이 법은 원래 사람을 위한 법이 아니었 다. 갈라디아서 4장 21절에서 23절에 따르면 율법은 종들에게 주어진 법 이다. 아들은 종을 다스려야 할 자다. 율법은 생명의 법의 통제를 받아야 할 법이지 율법이 생명의 법을 통제해서는 안된다. 그러므로 율법은 아 들에게는 죄와 사망의 법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구약의 법리적 세계를 끝내시기 위해 마지막 아담-종으로 오셔서 십자가에서 희생물로서 법리 적 심판을 받으시고 죽으셨다. 그런데 그분께 단순히 법리적 심판만을 받았다면 부활이 없는 것이다. 유기적 헌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지신 것이 다. 번제헌물이 되셨기에 하나님께서 살리신 것이다. 법리적 선악의 지 식세계를 종결하고 유기적 생명의 세계를 여신 것이다. 영원 안에서 사 람에게는 율법의 세계는 없었다. 율법은 범죄들로 인하여 더하여 진 것 이다.(갈3:19) 그러므로 사람에게는 생명의 세계 살도록 정해진 것이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원 상태로 회복 된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소위 근본주의 진영은 헬라적 합리주의, 지식주의 영향으로 인해 근원을 알지 못하고 현상만을 말한다. 법리적인 면만 강조하다 보니 우주보다 크신 그분의 생명의 인격의 세계를 간과하고 있고 성경 또한 표 면만을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구약은 법리적인 세계로서 현상이라면 신 약은 생명의 근원에 대한 것이다. 우리는 선악과를 먹고 선악의 지식세계 에 너무도 오랜 기간 있었기 때문에 선이 악을 이겨 선이 지배하는 세계가
250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하나님의 나라라고 착각하기 쉽다. 그러나 선이라는 것은 나는 좋지만 하 나님은 안좋으실 수가 있다. 하나님의 목표는 선악의 지식세계가 아니라 생명의 세계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성경에 흐르고 있는 생명의 세계를 선 악의 지식의 관점에 바라보고 있다는 것이다. 너무도 오랫동안 선악의 지 식세계에 있다 보니 생명의 세계에 대한 관념이 없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노아가 포도주에 취해 하체를 들어내고 자고 있는 것을 아들 함이 보는 사건이 있었다.(창9:21) 이것을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선악의 관점에 노아가 술을 먹음으로 하체를 드러냈으니 술을 먹으면 안된다고 말하기도 한다. 성경에서 하체를 드러낸 사건은 이외에도 몇 군데 더 나 온다. 창세기 2장 25절에 보면 그 남자와 그의 아내가 둘 다 벌거벗었으 나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더라. 라는 말이 나온다. 선악의 지식세계에서는 벌거벗은 것은 부끄러운 것이다. 그러나 부부간에는 생명의 세계에 있기 때문에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보면 술 에 취에 하체를 드러낸 노아는 마땅히 비난 받아야 된다. 그런데 노아에 대한 책망은 성경에 없다. 단지 아버지의 하체를 본 함의 아들 가나안에 대한 저주만이 기록되어 있다. 그것도 잘못을 저지른 함도 아니고 함의 아들 가나안에게 저주가 돌아 온 것이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가나안은 너무 억울하다. 자기가 저지른 것도 아니고 아버지 함이 저지 른 것인데 자기가 뒤집어 쓴 격이다. 율법의 원칙에도 위배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것도 생명의 관점에 보아야 해석이 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부활의 세계, 곧 생명의 세계에 있다. 성경에서 포도주는 생명을 예표한다. 노아가 포도주 취해 누워있다는 것은 노아는 홍수-죽음을 통 과해 하나님이 목표로 하는 부활생명의 세계를 누리고 있는 것이다. 그 런데 노아의 아들 함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아버지를 판단하고 있는 것이다. 아버지와 아들은 생명의 관계다. 아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아버 지를 판단하면 안된다. 사람과 하나님과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그러므로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의 세계를 무시하는 것이고 하나님
251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을 업신 여기는 것이다. 그래서 저주를 받은 것이다. 선악과를 먹은 자 가 생명과를 먹은 자를 조롱한 것이다. 선악과를 먹으면 종을 생산하고 생명과를 먹으면 아들을 생산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그래서 함이 선악과를 먹자 그의 아들 가나 안은 필연적으로 그 형제들의 종이 된 것이다.(창9:26) 우리도 직접 선 악과를 먹지 않았고 아담이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담의 자손인 우리는 종으로 태어난 것이다. 가나안은 선악과를 먹은 자의 열매를 예 표하고 있는 것이다. 갈라디아서 4장에 보면 아브라함의 두 아들 이스마엘과 이삭에 대한 이 야기가 나온다. 이스마엘은 노예 여자에게서 육체를 따라 태어났으며 이 삭은 자유로운 여자에게서 약속-영을 따라 태어 난 자라고 말하고 있 다.(갈4:23) 이삭은 죽고 다시 태어난 부활생명을 가진 자를 예표하고 이스마엘은 육신을 따라 태어난 자를 예표한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마엘이 혈통적으로 적자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육 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지 영-생명이 아니다.(요 3:6) 그래서 사람은 흙-육신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다시 태어나야 한 다.(요3:5) 이스마엘은 선악과를 먹고 종으로 태어난 자고 이삭은 생명과 를 먹고 아들로 태어난 자라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 다. 그런데 이스마엘이 이삭을 희롱했다는 말이 나온다.(창21:9) 즉 종이 아들을 희롱한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부활생명을 업신여 긴 것이고 하나님을 업신여긴 것이다.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하다는 생각 이 들지만 이 일로 인해 이스마엘과 하갈은 아브라함의 집, 곧 하나님의 집 에서 쫓겨난다. 또 사무엘하 6장에 보면 다윗이 예루살렘으로 법궤가 돌아올 때 기뻐서 아마 에봇을 입고 춤을 추었다. 춤을 추니까 몸이 다 보였는지 사울의 딸 이었던 다윗의 아내 미갈이 그것을 보고 왕을 업신여겼다고 했다. 다윗이
252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돌아오자 오늘 이스라엘 왕이 어찌나 영화로우시던지 오늘 자기 신하들의 계집종들 눈에 마치 하잘 것 없는 자들 가운데 하나가 염치없이 몸을 드러 낸 것처럼 드러내셨도다. (삼하6:20) 하면서 조롱했다. 다윗은 나는 주 앞 에서 한 것이라. (삼하6:21) 고 대답했다. 성경은 왕이 체통을 지키지 않 고 몸이 드러날 정도로 춤을 춘 것이 전혀 문제라고 하지 않고, 오히려 미갈이 죽는 날까지 자식이 없었다고 기록하고 있다.(삼하6:23) 미갈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인 생명의 세계를 조롱한 것이다. 이에 따라 미갈 은 저주를 받고 자식-생명을 생산하지 못했다. 마태복음 1장에 나오는 예수님의 조상 다섯 여자들도 마찬가지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그들은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러나 성경은 그들이 잘 못했다고 비난하지 않는다. 피조물이란 창조자의 목적 안에 있는 것 이 생명의 길이다. 이렇듯 우리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모르면 선악 의 지식을 가지고 생명의 세계를 조롱할 수가 있다. 또한 구약에서 보면 이스라엘 민족이 가나안에 들어가기까지 수많은 이방민족을 무자비하게 살육하고 가나안 땅으로 들어간다. 이것도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러나 가나안 땅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생명의 세계를 예표한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선악의 지식세계에 있지 않고 가나안 땅-생명의 세계에 있다. 하나님의 절대적 갈망은 흙-육신이 하나 님의 씨를 받아 거듭나는 것이다.(요3:5) 행위에 있지 않고 생명에 있다. 선악과를 먹은 아담에게 하나님은 남자가 우리 가운데 하나같이 되어 선 악을 알게 되었도다. (창3:22) 하였다. 선악과를 먹으면 우리가 하나님같 이 되어 하나님마저도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 안에서 보 면 생명 안에 있는 것이 업신여겨 보이고 판단이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 은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지 말라고 하신 것이다. 지식의 세계에서 보면 성경은 완전하다. 그래서 어쩌면 디지털처럼 완전 하게 꼭 들어 맞을 수 도 있다. 그러나 영-인격의 세계는 수학이 아니
253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다. 이럴 수도 있고 저럴 수도 있는 것이다. 기록된 말씀도 표면만 본다면 그것은 법리적인 세계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표면이 아닌 이면인 영 -마음에 있다. 우리가 예수님을 안다고 하는데 과연 그분의 인격을 아는 것이냐는 것이다. 겨우 안다는 복음이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위해 대신 죽 으시고 살아나셨다. 이것을 다 안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법리적이고 교리 적으로 아는 것이다. 생명나무 열매의 알맹이를 먹어야 하는데 껍데기만 먹고 있는 것이다. 여전히 구약적 경륜 안에서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신약경륜의 핵심은 성육신이다. 예레미아 31장 33절에서 34절에서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 을 그들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 마음 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 각 자기 이웃과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하노라. (렘31:33-34) 구약경륜은 하나님께서 대언자들을 통해서 대리로 말씀하신 것이고 신약 경륜은 말씀이 육신이 된 것이다. 하나님 말씀이 하늘에 있거나 대리자 에게 있지 않고 말씀이 육신이 되신 것이다. 말씀이 사람과 분리되지 않 고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것이다. 구약은 하나님의 법이 돌 판 에 새겨진 것이라면 신약은 심비에 새겨진 것이다. 이것이 신약경륜의 핵심이다. 생명의 성령의 법이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기 독교는 이것을 잃어 버렸다. 예수님 한분에게만 한정시키기 때문에 사실 은 없어져 버린 것이다. 육신은 죄 때문에 안되고 또 죄로 인해 죽어야 하고 죽은 후에나 가능하다고 말한다. 그런데 그렇게 된다면 성경은 거짓 말이 된다. 우리의 죄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으로 다 해결되었다. 그래
254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서 성경은 우리를 죽은 희생물이 아닌 살아있는 희생물이 되라고 한다. (롬12:1) 우리가 죽는 것은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바울도 이것을 디모 데후서 4장 6절에서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이제 내가 내 자신을 헌물로 드릴 준비가 되었고 나의 떠날 때가 가까이 이르 렀도다.(딤후4:6) 그럼에도 우리 육신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예수님의 구속사역은 해결이 안된 것이다.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구속을 받았기 때문에 전 인격적으로 구원받은 것이다. 사도들을 보면 분명히 말씀이 육신이 된 사람들이다. 그들은 말씀과 한 덩어리가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쓴 편지가 성경이 된 것이다. 구약의 대언자들은 단지 하나님의 말씀의 전달자였기 때문에 항 상 서두에 주가 말하노라 라는 말씀을 앞에 붙였지만 신약은 사도들 자 신이 말씀이 육신이 되었기 때문에 그들이 쓴 편지가 하나님 말씀이 되었 던 것이다. 사람의 말이 하나님 말씀이 된 것이다. 그들 속에 하나님의 법 이 새겨져 있었기 때문이다. 종종 설교자들이 말씀을 선포하기 전에 자신은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전 달자로 하나님께서 자신을 통제하여 자신의 말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 만 전하게 해달고 기도를 하곤 한다. 일견 믿음이 좋은 사람으로 비쳐지 기도 하지만 이것은 구약 경륜 안에서 기도이다. 이렇게 되면 자신은 아 무 책임도 없는 사람이 된다. 구약에서 대언자는 단순히 하나님 말씀의 전달자였다. 그러나 신약은 말씀과 육신이 한 덩어리가 된 성육신의 개 념이다. 결국 신약 경륜 안에서는 자기 자신이 말씀이 육신이 된 만큼 하나님 말씀을 하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을 먹고 내 생명이 된 만큼 말 씀을 선포할 수 있는 것이다. 구원받은 우리가 육신의 죄 때문에 죽는다 면 내 육신 안에 죄가 있는데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이 육신이 될 수 있 는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죄가 있는 곳에는 있을 수 없다. 만일 어떤 사람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면 그 사람은 구원받은
255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사람이 아니다. 우리 육신의 죽음 문제도 그렇다.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 서 보면 그것은 심판으로 부정적인 것으로 보인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었는가? 선악의 지식의 관점에서 육신의 죽음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생명의 관점에 보면 육신의 죽음은 영생을 위해서 필연적이라는 것이다. 육신-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져야 하기 때문이다.(고후5:4) 율법의 세계에 있는 사람들은 생명의 세계를 말하면 그러면 말씀을 안 지켜도 되느냐고 이분법적으로 접근한다. 율법의 세계가 초등원리라면 생명의 세계는 고등원리다.(갈4:3) 6학년이 되면 1학년 과제는 자동적으 로 해결되는 것이다. 생명-근원을 치료하면 현상은 자동적으로 치료되는 것이다. 아들은 종을 지배할 위치지 종이 아들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다. 독수리는 땅을 내려다보면서 공중을 날아다닌다. 그러나 들짐승은 땅에만 살아야 한다. 들짐승은 공중의 세계를 알지 못하지만 독수리는 땅을 지배 하면서 공중의 세계를 누린다. 우리는 하늘에 속한 자로서 땅을 지배해야 한다.(창1:28) 각각의 피조물은 그 세계 살도록 정해진 법이 있다. 사람은 영적으로 생명의 세계에 살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율법의 세계에서는 어떤 육체도 의롭게 될 수 없다.(롬3:20) 여 기에는 예수님도 육신으로 오셨기에 포함된다. 그렇다고 예수님이 율법 을 어겼다는 말이 아니다.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임에도 표면적인 율법 에 의해 심판을 받았기 때문이다. 율법은 이렇듯 결정적 흠이 있었다. 구약시대 유대인들은 열심으로 하나님을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롬 10:2) 그럼에도 그들은 말씀을 표면적으로 받아들였기 때문에 예수님이 오셔서 안식일을 어기자 안식일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자로 정죄했다. 또 율법의 세계에서는 천사가 하나님의 아들이었다. 그 런데 생명의 세계에 계신 예수님이 오셔서 자신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자 어떻게 사람이 되어 하나님이 아들이라고 하면서 신성모독 죄로 예 수님을 정죄한 것이다.(마26:65, 막14:61~64, 요5:18, 요10:33) 지금도
256 19. 선악의 지식세계 vs 생명의 세계 상황은 똑 같다. 현시대에도 예수님이 오셔도 율법의 관념 하에 있는 사 람들은 예수님마저도 판단하고 마음에 안들어 할 것이다. 다 자기 나름 대로 판단과 기준이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종종 예수님을 처형한 당시 의 유대인들을 비난한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보다는 몇 십 배는 더 하나 님을 사랑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율법의 세계에서 말씀의 표면만 알았 기에 생명의 세계에 있는 예수님을 정죄한 것은 너무도 당연한 것이었다. 두 세계의 비교 선악의 지식세계 현상의 세계 돌 판의 세계 글자의 사역 정죄의 직무 사망의 직무 초등원리 본성에 속한 사람 땅에 속한 세계 만들어진 세계 종의 세계 천사의 세계 율법의 세계 구약경륜 생명의 세계 근원의 세계 마음 판의 세계 영의 사역 의의 직무 생명의 직무 고등원리 영에 속한 사람 하늘에 속한 세계 태어나는 세계 아들의 세계 사람의 세계 은혜의 세계 신약경륜
257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그러나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마 16:15) 우리는 예수 그분이 과연 누구인지 알고 있는가? 그분에 대해서 말하라고 하면 그저 종교적으로 나의 죄를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살아 나셨다, 이렇게 알고 있지는 않은가? 그분은 왜 이 땅에 오셨으며 무엇 때문에 핍 박받으시고 죽으셨는지 알고 있는가? 사실 우리가 지금까지 예수님을 추구한다고 하지만 예수님에 대해서 그분 이 어떤 분인지 말하라고 하면 별로 할 말이 없다. 단지 성경에 이렇게 기 록되어 있으니 이런 일을 행하신 분이다, 라고 피상적인 말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이것은 그분의 외형을 아는 것이지 그분을 아는 것이 아니다. 하 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는 영-마음에 있다. 영이 생명이다. 그래서 성경말씀도 피상적으로 기록된 표면을 알 것이 아니라 이면에 기록 된 그분의 마음을 알아야 한다. 사람에게는 두 가지 면이 있다. 기능적인 면과 성품적인 면이다. 즉 외형 과 내면이다. 가수가 있다고 하면 그 가수가 노래를 잘 한다고 해서 그 노 래가 그 가수 자신은 아니다. 운동선수가 운동을 잘한다고 해서 그 운동이 그 자신은 아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도 이 땅에 오셔서 여러 가지 일을 하셨지만 그 행위가 그분 자신은 아니다. 행위란 오늘은 할 수 있어도 내 일은 하지 않을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것은 그분의 마음, 곧 생명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분이 하신 외형적인 일이 어 떤 것인지에만 치중하고 있다. 복음은 그분 자신이지 그분의 행위도 아니 고 교리도 아니다
258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이 복음은 그분께서 자신의 대언자들을 통하여 거룩한 성경 기록들에 미리 약속하신 것으로 자신 아들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에 관한 것이라.(롬 1:2~3) 그분 자신이 우리의 생명이지 그분의 외부적인 일이 우리의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다. 예를 들어 그분이 십자가에서 우리의 죄를 위해 죽으셨다.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이것을 믿는다고 해서 구원이 있는 것이 아니다. 법리적으로 죄를 용서 받았을지언정 구원은 아니다. 예수님과 내가 연합되 어 죽고 연합되어 다시 살아야 구원이 있는 것이다.(롬6:5) 외형적이고 법 리적인 혜택뿐만 아니라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외 부적이고 법리적인 것도 중요하지만 내부적이고 유기적인 것이 더 중요하 다. 이를 위해 그분을 인격적으로 알아야 연합되는 것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 必 生 卽 死 必 死 卽 生 )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남거니와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자기 생명을 사랑 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라.(요12:24~25)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하나님의 목표는 영-생명에 있다. 그러므로 우 리가 말씀을 아는 것도 표면에 있지 않고 이면에 있어야 한다. 그럼에도 안타까운 것은 대부분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표면적으로 이해하기 때 문에 하나님의 계시는 닫혀 있다. 하나님의 생각은 하늘들이 땅보다 높은 것 같이 사람의 생각과는 다르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사55:8~9)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는 것과는 반대라고 생각하면 된다. 생명은 위로부터 태어나야 하고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먹힘으로 높은 생명에 참여하게 된다. 음식이 되어 먹히려면 죽어야 한다. 살아 있는 채 로 먹히는 것은 없다. 사람은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다. 헌물이란 하나
259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님께 드리는 음식이다. 음식이란 어떤 생물이건 죽인 다음 불로 요리하듯 이 하나님께 드리는 모든 헌물은 불로 태워졌다. 먹고 먹히는 관계가 생명 의 연합의 과정이다. 이것은 우주 가운데 만고불변의 진리며 하나님과 사 람의 관계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하나님께 먹힘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참여 하는 것이다. 죽을 육체가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 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tality)이 생명에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 (고후 5:4) 즉 사람은 처음에 죽을 운명(mortality)인 육체로 창조된 다음 하나님의 생명에 삼켜짐으로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인 영적인 몸으로 바뀐다 는 것이다. 이것이 부활이다. 그런데 기독교인들은 아담이 죄가 없었다면 육신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그것은 사람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 가 아니다. 예수님은 자기 생명을 사랑하는 자는 그것을 잃을 것이요, 이 세상에서 자기 생명을 미워하는 자는 영생에 이르도록 그것을 간직하리 라. (요12:25) 하셨다. 쉽게 말하면 필생즉사 필사즉생 ( 必 生 卽 死 必 死 卽 生 ) 이라고 하신 것이다. 이 말씀 어디에도 예수님이 죄를 위해 죽으신다 는 말이 없다. 그럼에도 사람들은 이 말씀을 단순하게 예수님이 인류의 죄 를 대속하기 위한 죽음을 말씀하시는 것이라고 억지로 해석을 한다. 그러면 왜 예수님은 이 말씀을 하셨는가?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흙-사람의 위치를 지켜야 했다. 즉 하나님께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이 위치를 이탈해서 신과 같이 되려 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창3:5) 그래서 예수님은 죄 이전에 인생 의 근원적인 문제를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곧 하나님이 정하신 생명의 길 은 필사즉생 ( 必 死 卽 生 )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서 필생즉사( 必
260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生 卽 死 )의 길을 간 것이다. 필생즉사 필사즉생 ( 必 生 卽 死 必 死 卽 生 ) 이 진 리는 하나님 나라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하나님이 인생에게 정해주신 위치를 어떻게 지켰는가? 즉 죽음을 앞두신 예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인생의 위 치 를 대하는 참사람이신 예수님의 마음을 살펴보도록 하자.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위해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을 가시고자 하심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이 말씀은 예수님이 죽지 않을 몸인데 인류의 죄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 을 것이라고 하시는 말씀이 아니다. 사람은 반드시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이르도록 정해져 있다.(고후5:4) 이것은 하나님의 절대적인 갈망 이다. 사람은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만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 안에 포함되고 하나님의 경륜이 달성이 된다. 그런데 아담이 이 길을 이 탈함으로서 하나님의 우주 경영에 차질을 가져 왔다. 예수님은 이것을 아시고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을 가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은 인생으로서 천사보다 조금 낮게 지음 받은 것을 부끄러 워하였지만 예수님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인생으로서 하나님께 감 사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그 길을 가시겠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십자가로 가시기 전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함
261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이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혼이 심히 슬퍼 죽을 지경이니 너희 는 여기서 머물러 나와 함께 깨어 있으라. 하시고 조금 멀리 나아가사 얼 굴을 대고 엎드려 기도하여 이르시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 대로 하옵소서,(마26:38~39) 사람들은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고 죽지 않을 분인데 죽으셨다고 말한다. 죽 을 수 없는 분인데 어떻게 죽는가? 말도 안되는 소리다. 이들은 말이 안되 면 하나님의 전능성을 들고 나온다.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의 전능하 신 능력으로 죽게 하였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죽으실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한 비정상적 사람이다. 그러므로 우리의 구원은 비정상적인 위치에서 정상적인 위치로 옮겨오는 것이 구원이다. 이러한 비상식적이고 종교적인 믿음에서 빨리 탈출해야 하 나님의 계시가 보인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인생으로서 고뇌를 하셨다.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라고 하셨다. 얼마나 인간적인가? 참 사람의 고뇌다. 사람이라면 누구든지 육신의 죽음을 앞두고 번민과 고뇌가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우 리도 할 수 있지 않은가? 만일 예수님을 신으로만 아는 사람들이라면 이 말을 받아 드릴 수 없다. 오병이어의 기적과 죽은 자를 살리고 물위로 걸 어가신 분이 어떻게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하실 수 있는가? 어떻게 하 나님이 이런 말씀을 하실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은 이 말씀을 단지 인성을 가진 예수님의 고뇌 정도로 아무런 생각 없이 종교적이고 기 계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나 내 자신이 한 번 예수님의 입장으로 돌아가 보자, 예수님은 당시에 사람들로부터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 의 아들이시니이다. (마16:16, 요11:27) 라는 소리를 들으신 분이다. 이런 말을 들으신 분이 과연 죽음을 앞두고 이런 말을 하고 싶었겠는가?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의 아들이라면 이런 말은 하지 말아야 한다. 또 요한복음
262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다. 지금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 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그러나 내가 이런 까닭으로 왔나이다. (요12:27) 예수님은 여기서 죽고 싶지 않다고 말씀하셨다. 어찌 보면 예수님께서 죽 음을 앞두고 하신 말씀은 세상에 있는 우리도 할 수 있는 말이다. 안중근 의사는 유언으로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뼈를 하얼빈 공원 곁에 묻어 두었 다가 나라가 독립되거든 고국으로 반장( 返 葬 )해다오 대한독립의 소리 가 천국에 들려오면 나는 마땅히 춤을 추며 만세를 부를 것이다. 하였다. 또 안중근의 어머니는 나라를 위해 딴 맘먹지 말고 죽으라. 옳은 일을 하 고 받은 형이니 비겁하게 삶을 구하지 말고 대의( 大 義 )에 죽는 것이 어미 에 대한 효도다. 라고 아들에게 편지를 보냈다고 한다. 그래서 안중근 의 사는 아주 당당하게 죽었다. 세상적으로 보면 안중근 의사가 예수님보다 훨씬 당당하지 않은가? 더 살 려 달라고도 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었다. 그런데 죽음의 가치로 보면 예수 님은 온 인류를 위한 죽음이라면 안중근 의사 죽음은 단지 한 나라인 대한 제국을 위한 죽음이라고 할 수 있다. 대의적 명분으로 보면 예수님의 죽음 과 안중근 의사의 죽음을 비교할 수가 없다. 이순신 장군조차 죽음 앞에서 내 죽음을 적에게 알리지 말라 하면서 너무도 당당하고 초연했다. 예수님 도 잡히시기 전 날 저녁에는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하면서 이것은 죄들 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언약 의 피니라. (마26:28) 라고 하셨다. 우리 생각으로는 여기까지만 하셨다면 참으로 이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만큼 죽음 앞에서 당당하셨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무엇을 발견해야 하는가? 우리가 잃어버린 인생의 위 치를 발견해야 한다. 참사람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 인류역사 가운데 이
263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순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게 죽은 자들이 비단 이 둘 뿐이겠는가? 무수히 많다. 그러나 그들이 위대할지는 몰라도 참사람 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고 하는 인간의 원형은 아니라는 것이다.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아담이 잃어버 린 인간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 아담 안에서 신-왕이 되고 싶은 사람들의 속성은 죽음 앞에서 이순신 장 군이나 안중근 의사와 같은 사람들을 선호한다. 비록 예수님은 죄가 없으 시지만 온 인류를 구원하기 위한 죽음이었다. 우리 생각으로는 이 정도의 명분 있는 죽음이라면 너무도 당당히 의롭게 죽을 수 있어야 된다고 생각 된다. 그런데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시기 전날 밤에 내 혼이 괴로우니 내가 무슨 말을 하리요? 아버지여, 이때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요 12:27) 하였다. 우리가 생각하는 위대한 자가 죽음을 앞두고 하는 말이 아 니다. 재차 말하지만 우리는 위대한 자를 찾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창조 하신 인간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둔 상황에서 피조물과 창조주, 아들과 아버지의 뜻이 충돌하는 상황에 부딪혔다. 피조물은 본능적으로 육신이 죽지 않고 더 살 고 싶어 한다. 그러나 창조주는 피조물의 생각보다 더 큰 뜻이 있어 피조 물에게 죽음의 경륜을 허락한 것이다. 인생에게 죽음이 없다면 거듭남, 곧 부활, 영생이 없기 때문이다. 사람들은 강을 건너가고 싶어 하지 않는다. 그러나 강을 건너야만 생명이 있는 것이다. 이스라엘 민족도 죽음의 홍해 를 건너 생명의 광야에 도착한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 으신 생명의 과정을 거부하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날 저녁에는 이것은 죄들의 사면을 얻게 하려고 많 은 사람을 위하여 흘린 나의 피 곧 새 상속언약의 피니라. (마26:28) 하시 면서 기꺼이 죽으시겠다고 하셨다. 그런데 그날 밤이 깊어지자 죽고 싶지 않다고 하셨다.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마26:38) 하셨고 오 내 아
264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마26:39) 라 고 하셨다. 예수님을 신으로만 아는 사람은 이 말을 듣고 싶지 않을 것이 다. 온 인류를 위한 죽음인데 당당하게 죽으셔야 된다고 생각한다. 이순 신 장군이나 안중근 의사처럼 당당하게 죽으시는 예수님의 모습을 기대할 것이다. 조선시대 신하들은 왕이 사약을 내려도 왕이 있는 곳을 향해 사배 하고 사약을 마시고 초연하게 죽었다고 한다. 이에 비하면 예수님의 죽음 은 너무도 평범하다. 그런데 우리는 여기서 참 사람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 다. 위대한 자의 죽음을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인간 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이다. 참사람으로서 예수님은 죽음 앞에서 너무도 당연한 말씀을 하셨다. 우리도 죽음을 앞둔다면 예수님처럼 기도할 수 있지 않은가?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나도 할 수 있지 않은가? 지금까지 우리는 너무도 먼 예수님과 하나가 되려고 했 다. 위대하신 예수님, 옛적에 강력한 자 곧 명성 있는 예수님과 하나가 되 려고 했다. 그래서 불가능을 가능케 하는 예수님, 전능자로서의 예수님을 추구해 왔다. 찬송가마저도 위대하고 강하신 예수님을 추구한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승리는 인격의 승리, 곧 사람의 위치를 죽 기까지 지키는 것이 승리라고 말한다. 우리는 인격을 이탈한 아담 안에서 정상적인 사람, 곧 참사람이 누구인가를 알려고 하는 게 아니라 여전히 신 과 같은 사람으로서 예수님을 알려고 하였다. 그러나 이것은 여전히 속고 있는 것이다. 만약에 예수님이 죽음 앞에서 내 혼이 슬퍼 죽을 지경이니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라는 말씀을 예수님이 하지 않았다면 예수님은 우리게 너무도 먼 분이다. 또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없다. 우리의 구속자는 사람이어야 한다. 신은 우리의 구속자가 될 수 없다. 아담이 옛 인류의 조상이듯이 구 속자란 새 인류의 조상이란 의미다. 신은 사람의 조상이 될 수 없다. 또
265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구속자는 우리의 가장 가까운 친척이라야 구속자가 될 수 있다.(레 25:23~25) 성경에서 땅은 인격을 상징한다. 형제가 가난하게 되어 땅을 팔았는데 그의 친족이 와서 그 땅을 되사겠다고 하면 땅을 샀던 사람은 그 친족에게 되팔아야 되는 것이 이스라엘의 법규다. 예수님은 어디서 우리를 구속하셨는가? 십자가에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물 위로 걸어간 지점이나 오병이어의 기적을 일으킨 지점에서 우리를 구속하 신 것이 아니다. 거기서 우리는 그분과 하나가 될 수 없다. 전능자는 우리 와 하나가 될 수 없고 구속자가 될 수도 없다. 그런데 죽음 앞에서 나를 구원하여 주옵소서 이 말은 나도 할 수 있는 말이지 않는가? 여기서 우리 는 예수님과 내가 하나가 된다. 여기서 예수님은 온 인류의 구속자가 되실 수 있다는 것이다. 그 이후에 예수님은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 서, (마26:39) 라는 기도를 하셨다. 여기서 예수님은 자신의 뜻이 있지만 아들과 아버지의 뜻이 부딪히면 당연히 아들은 아버지의 뜻에 순응하는 것 이 아들이고 참 사람이라는 것을 보여주셨다. 예수님은 죽음을 앞두시고 죽음을 두려워하여 아버지께 간절히 기도했다. (히5:7) 그러자 하늘로부터 한 천사가 그분께 나타나 그분을 강건하게 하니라.(눅22:43) 고 기록되어 있지만 이것도 하나님께로부터 직접적인 응 답을 받으신 것이 아니다. 응답을 받으셨다면 이어서 간절히 기도할 필요 가 없으셨을 것이다. 그런데 응답이 없자 예수님은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 히 기도하였다. 그분께서 고뇌에 차서 더욱 간절히 기도하시니 그분의 땀이 큰 핏방울같 이 되어 땅에 떨어지더라. (눅22:44) 실제 사람은 애가 타면 눈이 충혈되고 피 땀이 난다고 한다. 예수님이 죽 음을 앞두고 얼마나 고뇌하셨는가를 알 수 있다. 우리가 한 번 그분의 입
266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장으로 돌아가 보자. 얼마나 애가 타겠는가? 우리는 예수님에게서 참 사람 의 모습을 발견해야 한다. 참 사람이 누구냐는 것이다. 세상에서 위대한 사람들이 위대하지 않다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들이 참 사람은아니라는 것 이다. 지금까지 우리는 죽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들을 하나님의 아들로 생 각했다. 죽음 앞에서도 당당하고 의로운 사람들이 우리가 선망하는 하나님 의 아들로 생각해 왔다. 그러나 죽음 앞에서 당당한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 이 아니라 죽음을 두려하여 눈물로 기도하되 자기 뜻을 접고 아버지의 뜻 에 순응하는 사람이 참 사람이고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볼 수 있다. 여기서는 우리는 예수님과 우리가 하나가 된다. 다른데서는 하나가 될 수 없다. 여기서 예수님은 내가 할 수 있는 말을 하시고 계시는 것이다. 십자가에서 피조물의 입장에서 창조주께 기도함 그리고 예수님은 다음 날 십자가에 달리셨다. 십자가상에서 예수님이 하신 말씀을 살펴보면 마태와 마가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막15:34) 하고 예수님께서 큰소리로 외치시고 숨을 거두시니라. (마27:51, 막15:37) 라고 기록하고 있다. 너무 도 간단하고 평범하게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깊은 뜻이 있다. 우리 모두는 창조주 앞에 피조물이다. 창 조주란 심판자를 의미한다. 내가 하나님을 단지 창조주로 안다는 것은 심 판자와 심판받는 자의 관계로서 하나님은 무서운 분이 된다. 판사와 죄인 의 관계가 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나의 아버지가 된다면 생명의 관계, 곧 심판이 통하지 않는 사랑의 관계가 된다. 하나님은 자신의 나라를 자신 의 사랑하는 아들의 왕국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골1:13) 하나님을 단지 창조주로 아는 것과 하나님을 아버지로 아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 보다 크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을 아버지로 안다는 것은 놀라운 축복이다
267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예수님은 잡히시기 전 날까지 기도하실 때 항상 아들로서 아버지여 하시 면서 기도하셨다. 기도하실 때마다 응답받으셨고 심지어 하늘로부터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라, 내가 그를 매우 기뻐하노라 (마3:17, 마17:5) 는 말 씀을 직접 두 번씩이나 들으신 분이다. 그런데 인생의 마지막 순간에 아들 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였지만 확실한 응답을 받지 못하셨다. 우리 생각에도 다른 것은 응답받지 못하더라도 이러한 절대 절명의 순간에는 응답받아야 된다고 생각한다. 다른데서 응답받으면 뭐하는가? 결정인 순간에는 응답받 아야 되는 거 아닌가? 또한 하나님은 전능하시지 않은가? 그래서 예수님도 아바 아버지여 아버지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오니 이 잔을 내게서 옮기시 옵소서 (막14:36) 라고 기도하였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응답이 없으셨다. 예수님은 아버지가 사랑하시는 아들 로서 모든 것을 완전하게 수행하신 분이었다. 그럼에도 예수님은 아들로서 아버지께 기도하였지만 응답이 없자 이제 죽음의 극한 상황 앞에서 피조물 로서 창조주 앞에 서신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까지는 아버 지여 라고 기도하셨지만 이제는 나의 하나님이여 라고 기도하고 계시는 것이다. 인생은 물에 빠지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는 말이 있다. 인생의 마 지막 순간에 아들로서 아버지를 불렀지만 응답이 없자 최종적으로 피조물 의 입장에서 창조주 앞에 서신 것이다. 그렇다면 왜 아버지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몰았냐는 것이다. 어떻게 아버 지가 사랑하는 아들을 죽음으로 내 몰 수 밖에 없느냐는 것이다. 우리는 이것을 종교적이고 기계적으로 생각하지 말자. 그러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셔서 죽으실 밖에 없는 이유를 살펴보자. 첫째, 아담이 지은 죄를 누군가 와서 대속해야 한다. 대속물로서 곧 희생 물로서 죽어야 한다. 죄인을 구원하려면 죄 없는 자가 구원해야 한다. 물 에 빠진 자를 구원하려면 물에 빠지지 않은 자가 구원해야 한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하여 하나님과의 관계가 비뚤어져 있기 때문에 누군가 와서 이
268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관계를 회복해야 한다. 아담은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아는데서 하나님 과 같이 되었다.(창3:22) 피조물이 창조주가 되려고 한 것이므로 신성모독 을 한 것이다. 또한 사람이 신이 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 다. 사람은 피조물로서 창조자의 최종 작품이다. 우리가 보기에 사람은 부 족한 것 같지만 하나님은 사람을 창조하시고 보라, 매우 좋았더라 (창 1:31) 하시고 안식하시며 상쾌해 하셨다. 우리도 어떤 작품을 만들고 그 작품이 완성되면 안식하고 상쾌해 하지 않는가? 하나님도 그렇게 하셨다는 것이다. 안식일은 나와 이스라엘 자손들 사이에 있을 영원한 표적이니 이는 주가 엿새 동안에 하늘과 땅을 만들고 일곱째 날에 안식하며 상쾌하게 되었기 때문이라.(출31:17) 그런데 사람이 위치를 이탈하여 신들과 같이 되려고 한 것은 하나님의 작 품인 사람이 하나님의 창조에 불만을 가진 것이므로 피조물이 창조자를 모 독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어떤 대가( 大 家 )의 걸작품에 문외한이 그 위에 덧칠하려고 하는 거와 같은 것이다. 피 조물은 지어진 그대로 감사해야 하는데 그 위치를 이탈한다는 것은 창조에 불만을 가진 것이기 때문에 창조자를 모독하는 것이고 창조자의 안식을 깬 것이다. 그래서 신성모독과 안식일을 어긴 죄는 항상 같이 붙어 다니며 죄 에 대한 결과도 동일하게 사형이다. 주의 이름을 모독하는 자는 반드시 죽일지니 온 회중이 반드시 돌로 그를 칠지니라. 타국인이든지 그 땅에서 태어난 자든지 주의 이름을 모독하면 그를 죽일지니라.(레24:16) 엿새 동안은 일하되 일곱째 날은 너희에게 거룩한 날이요, 주께 안식하는 안식일이니 누구든지 그 날에 일하는 자는 죽일지니라.(출35:2)
269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아담의 죄는 하나님께 대하여 신성모독을 한 것이고 하나님의 안식을 깬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반드시 죽어야 한다.(창2:17) 그래서 예수님의 죄 목은 반드시 이 두 가지여야 한다. 예수님은 공식적으로 어떤 죄목으로 처 형을 당하셨나? 예수님의 죄목은 사람이 되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 신 성모독과 안식일에 병자를 고침으로 안식일 어긴 죄이다. 그분께서 잠잠하시고 아무것도 대답하지 아니하시거늘 대제사장이 다시 그 분께 물으며 그분께 이르되, 네가 찬송 받으실 이의 아들 그리스도냐? 하 매 예수님께서 이르시되, 내가 그니라. 사람의 아들이 권능의 오른편에 앉아 있는 것과 하늘의 구름들 가운데서 오는 것을 너희가 보리라, 하시니 이에 대제사장이 자기 옷을 찢으며 이르되, 어찌 우리에게 증인이 더 필요 하리요? 신성모독하는 말을 너희가 들었도다. 너희 생각은 어떠하냐? 하매 그들이 다 그분을 죽을 죄를 지은 자로 정죄하고(막14:61~64) 유대인들이 이런 이유로 더욱더 그분을 죽이려 하니라. 이는 그분께서 안 식일을 어길 뿐 아니라 하나님이 자기 아버지라고 말하여 자기를 하나님과 동등하게 만드셨기 때문이더라.(요5:18) 그런데 이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 심판 받았 다는 것은 역설적으로 하나님께 심판 받았다는 것이 된다. 율법은 인격적 인 것이 아니고 외형적인 돌판에 쓰여져 있기 때문에 율법을 어기면 아들 이라도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물론 율법의 본질은 외형에 있지 아니하고 그 이면에 있다. 그런데 이것을 수행하는 사람들이 이 말씀을 마음 판에, 곧 인격 안에 새겨 넣어야 하는데 돌판에 새겨진 그대로 표면적인 것만을 가지고 지켰다. 그러니까 율법의 한계는 기계적 인간, 문자적 인간으로 만 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안식일을 거룩히 지키라 한 것은 하나님의 창 조에 만족하라는 것인데 이것을 기계적이고 표면적으로 받아드려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로 처형한 것이다. 그래서 이 율법으로는 하나님의 경륜 과 목적을 달성할 수 없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270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신과 같은 사람들로서 신성모독한 사람들이고 하 나님의 안식을 방해한 사람들이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신과 같은 사람들이 오히려 참 사람이신 예수님을 신성 모독했다는 이유로, 안식일을 어긴 자 들이 오히려 안식일의 완성자이신 예수님을 안식일을 어긴 죄로 죽인 것이 다. 이것이 외형적인 율법의 한계다. 이러한 율법의 세계에서는 아무리 사 랑하는 아들이라도 살릴 수가 없는 것이다. 율법은 완전하지만 융통성이 전혀 없는 비인격적인 것이기 때문에 자신의 사랑하는 아들마저도 율법에 의해 처형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일은 옛날 왕조시대에도 있었다. 왕은 아버지로서 왕자를 죽일 마음이 없음에도 정해놓은 국법 때문에 할 수 없이 왕자라도 법을 어기면 목을 쳐야하는 거와 같다. 이러한 한계 때 문에 돌 판에 기록된 율법의 시대는 끝나야 하며 하나님의 법이 마음 판에 기록된 생명의 세계로 넘어와야 하는 것이다.(렘31:31~34) 이스라엘 민족이 외형적으로는 율법을 잘 지켰지만 그 율법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몰랐기 때문에 예수님은 바리새인들을 향하여 외식하는 자라고 하신 것이다. 그러니까 바리새인들은 컴퓨터와 같이 어떤 글자를 입력하면 글자 그대로 출력하는 기계적 인간이 된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 의 목표는 사람들이 하나님과 한 마음이 되어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께서 보실 때 유대인들은 외형적으로는 율법 을 잘 지키지만 그들 속에 하나님의 마음이 없었다는 것이다. 오늘날 예수 님을 믿는다고 하는 우리도 마찬가지다. 하나님의 경륜이 바뀌었음에도 여 전히 말씀 이면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모르고 표면적인 말씀을 지키는 것이 예수님을 믿는 것이라고 한다면 그것은 다시 구약으로 돌아가는 것이 다. 몸을 불사르게 내어 줄 지라도 사랑이 없으면 그것이 아무 유익을 주 지 못한다는 말이 그 말이다.(고전13:3) 좌우간 하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 새로운 대책이 필 요하게 되었다. 바로 율법을 끝내고 사람 속에 하나님 자신 생명을 넣어줘
271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서 그 사람들이 하나님의 생명, 곧 하나님의 마음을 가지고 하나님을 표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구약경륜을 끝내고 새로운 시대 의 경륜을 열어야 한다. 이것을 예언한 말씀이 예레미아 31장의 말씀이다. 주가 말하노라.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 을 기록하여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 다시는 그들이 각각 자기 이웃과 각각 자기 형제를 가르쳐 말하 기를, 주를 알라, 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의 가장 작은 자로부터 그들 의 가장 큰 자에 이르기까지 그들이 다 나를 알 것이기 때문이라. 내가 그 들의 불법을 용서하고 다시는 그들의 죄를 기억하지 아니하리라. 주가 말 하노라. (렘31:31~34) 그래서 바울이 예수님에 의해 시작된 이 신약경륜에 관한 예언의 말씀을 히브리서에서 두 번 인용하고 있다.(히8:8~11, 10:16~17) 바로 이 말씀 은 예수님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오심으로 성취되었다. 즉 외부적 교육훈 련을 통해서는 하나님께서 요망하는 사람이 안되기 때문에 사람의 내부적 인 생명을 바꾸어서 하나님의 경륜을 실현하시겠다는 것이다. 이 경륜을 실현하기 위해서는 누군가 와서 율법을 끝내야 한다. 율법이 끝 나려면 율법의 완성자가 율법에 의해 심판받아야 한다. 그래야만 율법이 더 이상 인류에게 희망이 없다는 것이 증명되기 때문이다. 율법에 의해서 누군가가 의롭게 된다면 다른 사람도 될 가능성이 있기 때문에 율법은 계 속 유효하게 된다. 그러나 이제 예수님이 율법에 의해 심판 받았다는 것은 그 누구도 율법으로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 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롬3:19) 그래서 하나님과 인류에게는 율법 밖에 있는 한 의( 義 )가 필요하게 되었
272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다. 그러나 이제는 율법 밖에 있는 하나님의 의 곧 율법과 대언자들이 증언한 한 의가 드러났느니라.(롬3:21) 그래서 예수님은 율법에 의해 심판받으셨고, 율법 안에 있는 사람으로서 죽으심으로 율법의 마침이 되신 것이다.(롬10:14) 그분 자신이 율법의 완 성이시지만 그분이 율법에 의해 죽으심으로 율법이 끝난 것이다. 율법으로 는 더 이상 하나님의 합격기준에 도달할 자가 없고 율법으로 더 이상 하나 님의 경륜을 실현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믿는 자에게 의가 되시기 위해 율법의 마침이 되시느 니라.(롬10;14) 예수님은 율법의 완성자이심에도 불구하고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셨다. 그래서 그분이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분은 죄가 없음에도 율법의 효용 성을 끝내기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을 통해 이제 그 누구도 율법에 의해 의롭게 될 자가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100점짜 리인 예수님도 율법에 의해 심판을 받으셨다는 것은 1점부터 99점까지는 시험장에 갈 필요도 없는 것이다. 더 이상 율법으로는 인류가 하나님의 합 격기준에 도달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된 것이다. 두 번째,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번제헌물로 죽으셔야 한다는 것이 다. 율법은 왜 실패했는가? 완전하지만 사람 안에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생명 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사람이 그 법을 지키지 않고 싶어서 지키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 법을 지킬 수 있는 힘이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하 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는 법리적 관계로는 안되고 사람 속 에 하나님의 법을 넣어 주어서 하나님과 생명의 유기적 관계가 되어야만 하나님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는 것이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야만 하나
273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님의 경륜이 실현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신약경륜이다.(렘31:32)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의 집과 맺을 언약은 이것이니 곧 그 날들 이후에 내 가 내 법을 그들의 속 중심부에 두고 그들의 마음속에 그것을 기록하여 나 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고 그들은 내 백성이 되리라. 주가 말하노라.(렘 31:32) 율법은 완전하지만 외율적인 것이기 때문에 한계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새로운 세계로의 전환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예수님을 십자 가에 내 버려둘 수밖에 없었다. 율법이 끝나고 생명의 성령의 세계로 경륜 이 전환되어야 하기 때문이다.(롬8:2) 피조물이란 자신의 목적이 없다는 의미다. 피조물은 창조자를 위해서 존재하는 것이다. 영이신 하나님의 절 대적 갈망은 몸을 가지시는 것이다. 이 몸의 역할은 사람이 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 하나님은 자기 자신-생명을 사람에 주어서 사람이 하나님의 생 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그래서 흙-사람은 반드시 한 번은 죽고 거듭나도 록 정해져 있다.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사람은 죄가 있으나 없 으나 육신이 죽은 다음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즉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사탄에 속아 하나님의 몸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몸이 되 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즉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종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종의 세계를 끝내고 아들의 세계를 열어야 한다. 종 이 아들이 되는 방법은 죽고 다시 태어나는 방법 외에는 없다. 종의 세계 는 율법에 의한 심판의 세계다. 그래서 이 세계를 끝내려면 누군가 율법으 로 심판받은 다음 율법을 종결하고 율법이 작동하지 않는 생명의 세계로 넘어와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유대인들에 의해 표면적으로는 율법의해 심판을 당하시고 죽으셨지만 그분은 내적으로는 죄가 없으시기 때문에 율법이 작동하지 않
274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는 생명의 세계에서 부활하셔서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표면적으로 는 심판을 받으셨지만 내면적으로는 하나님이 정한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는 것이다. 이것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도 죽으심이 필요한 것 이다. 십자가-죽음이란 인생라면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누구든지 거쳐할 과정이다. 그러므로 이 운명 앞에서 누구도 피해 갈 수 없는 것이다. 하나 님의 아들마저도 십자가에 매달리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하나님도 어찌할 수 없는 자리라는 것이다. 이르되, 내가 내 어머니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은즉 또한 벌거벗은 채 그리 로 돌아가리라.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가신 분도 주시니 주의 이름이 찬송 을 받을지어다(욥1;21) 우리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어머니의 태에서 벌거벗고 나왔고 또한 벌거벗 은 채로 돌아가야 한다. 우리는 이것을 분명히 알고 허황되고 황당한 믿음 에서 탈출해야 한다. 예수님은 법리적으로는 율법에 의해 희생물로서도 심 판을 받으셨지만 유기적으로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 도 죽으신 것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 되었다. 번제헌물이 되어야만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있기 때문이다. 단 순히 희생물로 죽었다고 영생이 있는 것이 아니다. 흙-사람은 불-하나님 께 태워져야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다. 헌물이란 하나님의 음식이다. 우 리가 하나님 앞에 음식으로 드려져야 영생이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채 로 먹는 음식은 없다. 요리가 돼서 상에 올라가려면 죽어서 요리가 되어야 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 영이란 내가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 재가 되고 연기 가 된다는 말이다. 번제헌물로 드렸다는 말이다
275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이라는 말이 있다.(계13:8) 사람들은 이것을 예수님이 인류의 죄 때문에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라고 단순하게 생각한다. 그러나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서, 창세로부터 죽임 당 한 어린양으로 드려져야 영생이 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영생 이 있는 것이다.(고후5:4)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 이보다 크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헌물로 창조되었고 모든 헌물은 불에 태워졌다. 이 헌물은 우리 자신이다. 레위기에 보면 음식헌물이 나오는데 음식헌물은 죄와 관계없이 피흘림이 필요 없는 식물성 헌물이다. 음식헌물 은 그리스도의 인격을 상징하는데 이것은 사실 아담이 드려야 할 인격이었 다. 그러니까 사람은 창조되기를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그런데 음식헌물도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불에 태워진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용광로에 들어 가서 녹지 않을 쇠는 없다. 좋은 쇠든 나쁜 쇠는 어떤 쇠도 용광로에 들어 가면 다 녹는다. 하나님께서 본래 사람에게 허락한 음식은 식물이었다.(창 1:29) 사람은 먹는 대로 몸이 조성된다. 음식과 사람은 하나다. 성경에서 사람의 인격을 상징하는 대표적 동물이 어린양이다. 양은 식물만 먹지 동 물은 먹지 않는다. 그래서 동물들 중에서 하나님께 헌물로 드려지는 양, 소, 염소, 비둘기 등 모든 헌물들은 모두 식물성 음식을 먹는 동물들이다. 그런데 사탄을 상징하는 동물들인 사자, 표범, 곰 등은 동물을 먹고 산다. 즉 피를 먹고 산다는 것이다. 사람은 본디 어린양의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하나님은 어린양의 인격만 받 으시고 하나님 나라는 어린양의 인격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어린양은 식물 만 먹고 산다. 그러니까 사람의 몸은 육신이지만 식물에 의해 조성된 육신 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람은 식물성 육신을 가진 자로 죄가 없더라도 피 흘림이 필요 없는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하다는 것을 계시하고 있는 것이다.(창2:21)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이에 대한 심판으로 피흘림이 필 요하게 되었고 이에 따라 동물성 음식이 사람에게 허락된 것이다.(창9:3)
276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다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돌아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막15:34) 하고 숨을 거두셨다. 마태와 마가의 기 록은 여기서 끝난다. 왜 버렸습니까? 하는 말은 인간이 하나님에게 묻는 말이라고 할 수 있고, 탄원하는 말일 수도 있다. 어떻게 보면 원망하는 말일 수도 있고 불평하는 말일 수도 있다. 왜 버렸습니까! 나를 왜 버렸습니까! 내가 버림받을 일을 하지 않았는데 왜 나를 버렸습니까! 하는 말이다. 그러니까 원망도 되고 탄원도 되고 갈망도 되는 여러 가지 인간의 복잡함에 대하여 우리가 대답 을 들어야 할 자리에서 못 듣는 한( 恨 )을 폭발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인간의 최종적이고 최후적인 비탄이라고 할 수 있다. 구약성경의 전체의 흐름은 하나님은 의인은 절대로 버림받지 않는다는 것 이다. 그런데 왜 나를 버렸습니까! 하는 말은 예수님 같은 사람은 당연히 버림받지 않아야 하는데 왜 저를 버립니까? 하는 뜻이다. 어찌 보면 이 말씀은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는 말씀이다.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 아 버지께 100% 충성하신 분인데 나를 왜 버리십니까? 하는 절규와 비탄 등 이 담겨 있는 것이다. 물론 우리도 어떤 때 할 수 있는 말이다. 내가 이렇 게 하나님을 믿는 사람인데 내게 왜 이런 일이 일어납니까? 라고 할 수 있 지 않은가? 그런데 마태와 마가의 기록에 보면 이 말씀을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기 록하고 있다. 너무도 평범하게 죽으신 것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예수님의 이 기도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이 없다. 그런데 그 이후에 누가복음에는 내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하고 요한복음에 보면 다 이 루었다 (요19:30) 고 하셨다.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는데 뒤이
277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어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겠습니다. 그리고 다 이루었다 하면 말이 안된다. 하나님께 대한 호칭도 하나님 하다가 아버지 로 바뀐다. 하나님 이라 부르는 것은 창조주와 피조물의 관계다. 이것은 심판자와 심판받는 자와 관계로서 무서운 관계다. 그런데 아버지라고 부르는 것은 아들로서 아버지라고 부르니까 더없이 친근한 사랑의 관계다. 대반전이 일어난 것이 다. 여기에 대한 답이 분명히 있어야 복음이다. 그런데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답이 없었는데 히브리서에 보니까 이 기도에 대한 응답이 기록되어 있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5:7) 주님은 죽음을 앞두고 참 인생으로서 죽음을 두려워 하셨고 이로부터 구원 해달고 눈물과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다는 것이다. 잡히시기 전날에는 가능 하면 이 잔을 옮겨달라고 땀이 핏방울같이 되도록 기도하셨고(눅22:44), 십자가상에서는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 나이까? (마27:46, 막15:34) 라고 기도하셨다. 복음서에는 이에 대한 응답 이 없지만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 나오는 말씀을 비추어 볼 때 하나님의 응답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누가복음에는 내 영을 아버지의 손 에 맡기나이다 (눅23:46) 하시고 숨을 거두셨다고 기록하고 있고 요한복음 에는 다 이루었다 (요19:30) 하시면서 대반전을 이루고 숨을 거두었다고 기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예수님께서 죽으시기 전에 하신 말씀은 순서대로 정리해보면 1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막15:34) 2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3 다 이 루었다 (요19:30) 이다. 그런데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 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27:46, 막15:34) 하다가 갑자기 내 영을 아
278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하면 무언가 이상하다. 갑자기 피조물 로서 창조주 앞에 절규와 비탄을 하다가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 다 (눅23:46) 하면서 아들과 아버지의 관계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러므 로 나의 하나님이여, 나의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마 27:46, 막15:34) 뒤에는 분명히 무언가 하나님의 응답이 있기 때문에 피 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다시 아버지와 아들의 친밀한 사랑의 관계로 회 복되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에 대한 응답이 복음서에는 없었는데 히 브리서에 나와 있는 것이다. 주님의 모든 기도가 응답되고 있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 (히5:7) 주님께서 나를 왜 버렸습니까? 하니까 하나님께서 들으셨다는 것이다. 여 기서 하나님께 들으셨다 고 하는데 들으시고 구체적으로 어떤 말씀을 예 수님께 하셨는지는 성경에 나오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의 대답은 오직 하나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필요로 한다. 아담은 위치를 이탈했으니 정상적인 위치에 있는 사람이 필요하다. 즉 의인이 필요하다. 그래야만 온 인류가 구속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나는 의인이 필요하다 고 대답하셨 던 것 같다. 의인( 義 人 )이라는 말은 하나님과 바르고 완전한 관계를 가진 사람을 보고 의인이라고 한다. 세상에서 말하는 의인이라는 말은 정의 개념이다. 도덕 적이고 사회적 개념이기도 하다. 북한의 정의와 남한의 정의의 개념이 다 르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의( 義 )는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과 바르고 완전한 관계를 의라고 말한다. 예수님은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내 아 버지께 가니... (요16:10) 라고 하였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가 의 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관계가 없으면 의 라는 말 자체가 없다. 세상의 의와 하 나님 나라의 의의 개념은 전혀 다른 개념이다. 그런데 사람으로 온 인류를
279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구속한다는 말은 다른 말로 하면 의인이 되게 한다는 뜻이다. 구속이란 우 리를 원위치로 돌아가게 해서 참 인간이 되게 한다는 의미로 의인이 되게 한다는 말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절규에 하나님은 나는 의인이 필요하다. 이렇게 대답 하셨다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다 이루었다 라는 말을 한 것을 보면 앞 뒤가 안 맞는다.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해 놓고 마태는 큰 소리를 외치 시고 숨을 거두셨다 (마27:50) 라고 했는데 요한은 전혀 그런 말이 없다. 큰 소리를 외쳤다 는 말도 없고, 왜 버리셨습니까 라는 말도 없고, 그냥 다 이루었다 했다. 분명히 마태, 마가, 누가, 요한 이렇게 지나올 때 시간 적으로 봐도 그렇고 영적으로 봐도 그렇고 어떤 결론에 이르러 한 말이기 때문이다. 절규에서 찬양으로의 전환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예수님은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절규하자 하나님으로 부터 응답을 받으셨 다.(히5:7) 그렇지 않고는 피조물과 창조주의 관계에서 다시 아버지와 아 들의 관계로 전환될 수 없는 것이다.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 했는데 그 이 후에 내 영을 아버지의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하셨다. 여기서 손이라 는 것은 권능이고 전권을 상징하는 것이다. 그러면 영은 무엇인가? 영이라 는 것은 생명의 내용이다. 자기 생명의 내용을 내 놓았다는 말이다. 사람 들은 죽어도 영만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는 피조물이다. 내 것이 하나도 없다. 영 마저도 하나님의 것이다. 주신 분도 주시요 가져 가신 분도 주시다.(욥1:21) 마가는 하나님의 종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래서 마가복음을 종의 복음
280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이라고 한다. 마태는 유대인의 왕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유대인의 왕이 란 의미는 유대인은 전 인류를 대표하므로 인류의 왕이란 의미다. 그런데 아담은 세상의 왕으로 하나님이 인정하는 왕이 아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이 인정하는 왕이다. 예수님은 네가 유대인의 왕이냐 는 빌라도의 질문에 그 렇다고 인정하셨다.(마27:11) 마가는 하나님의 의로운 종(사53:11)으로서 의 예수님을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아담은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이탈한 사악한 종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위로는 왕에서 부터 아래로는 종까지 전 인류를 포함하여 대속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예수님의 공식 적인 죄목이 유대인의 왕이라는 것이었다.(막15:26) 왜 종으로는 기록이 안되었을까? 왕이란 그 나라의 대표다. 왕이 심판받으면 종까지 포함하여 온 백성이 심판받은 것이다. 그래서 유대인의 왕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당하 신 것이다.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서 대속물로서의 예수님을 보고 있는 것 이다. 복음서에는 대속물(ransom)이란 단어가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각각 한 번씩 기록되어 있다. 이와 같이 사람의 아들도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 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마 20:28)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으러 오지 아니하고 도리어 섬기며 자기 생명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ransom)로 주려고 왔느니라, 하시니라.(막10:45) 사람들은 대속과 구속을 동일하다고 생각하지만 엄연히 다르다. 대속은 단 지 법리적인 심판에 대한 죄 용서지만 구속은 하나님이 씨-생명을 넣어 줄 수 있는 유기적인 인생의 위치를 말한다. 대속을 위해서는 법리적인 희 생물이 필요하지만 구속을 위해서는 유기적인 헌물이 되어야 한다. 그러면 누가는 예수님을 어떤 관점에서 보았는가 하면 우리를 구속 해 줄 수 있는 적합한 인간으로서 예수님을 보았다. 그래서 누가복음을 사람의
281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복음, 인간의 복음이라고 한다. 그러나 그냥 인간이 아니었다. 구속에 적합 한 인간이었다. 우리가 제물을 드리려면 제물에 적합한 짐승이 있다. 그래 서 양이나 송아지나 비둘기나 이런 것들이 선택된 것이다. 누가는 이것을 본 것이다. 구속이라는 말은 원 위치라는 뜻이다. 원 위치된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자신의 생명을 줄 수가 있다.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에서 창조하 시고 보시고 좋았더라 하는 그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생명을 넣어 줄 수가 있다. 그래서 누가는 구속에 적합한 인간으로서 예수를 전한 것이다. 그냥 사람이 아니다. 왜 그런가 하면 하나님의 구속은 인간을 제자리로 돌리는 것이지, 인간을 천당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인간을 변호하는 것이지 인간을 영으로 바꾸어서 천당으로 보내는 것이 아니다. 구속은 천당에 가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그래서 누가가 전하는 이 복음 이 구속의 입장에서 의미가 있는 것이다. 사복음서에 보면 대속이라는 말 이 마태복음과 마가복음에만 기록되어 있듯이 구속이라는 말은 누가복음에 만 네 차례 나오고 다른 복음서에는 나오지 않는다. 주 이스라엘의 하나님을 찬송하리로다. 그분께서 자신의 백성을 돌아보사 구속 하시고 (눅 1:68) 마침 그때에 그녀가 나아와 마찬가지로 주께 감사를 드리고 예루살렘에서 구속을 기다리던 모든 사람에게 이 아이에 대하여 말하니라.(눅 2:38) 이런 일들이 일어나기 시작하거든 위를 보고 너희 머리를 들라. 너희의 구 속이 가까이 오고 있느니라, 하시니라.(눅 21;28) 그러나 우리는 그분께서 이스라엘을 구속할 분이시라고 믿었노라. 이 모든 것 외에도 오늘은 이런 일들이 이루어진 지 사흘째 되는 날이요,(눅 24:21) 레위기에 의하면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 죄를 속하기 위해 대속물, 곧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우리
282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는 죄인라는 관념 때문에 하나님께 드리는 제물을 ~희생물 이라고 불러 야 될 것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 인생의 근원을 보기 때문에 희생물의 관점에서 보시는 것이 아니라 헌물의 관점에서 우리를 보신다. 그런데 죄라는 장애물이 들어왔기 때문에 헌물을 받으시기 전에 희생물로 서의 피를 먼저 요구하시고 희생물이 피를 흘리면 그 희생물이 죄없는 헌 물이 되는 것이다. 희생물이나 헌물의 공통점은 죽는다는 것이다. 희생물 이 피가 뿌려지고 나면 죄없는 헌물이 된다. 희생물 곧 헌물이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되려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 다. 태워진다는 것이 하나님께서 삼키셨다는 것이다. 헌물이 하나님의 불 에 의해 태워짐으로 번제헌물이 되어 하나님의 음식이 되어 생명의 연합이 되었다는 의미다. 즉 사람은 하나님의 음식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왜 냐하면 낮은 생명은 높음 생명에 먹힘으로 높은 생명에 연합되기 때문이 다. 그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진다는 말이 그 말이다.(고후5:4) 그러므로 마태나 마가는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대속물로서의 예수님 을 기록하고 있다면 누가는 우리 인간을 구속하는 헌물의 입장에서 예수 님을 기록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누가가 전하는 복음에서 구속을 위해 그 영마저 아버지의 전권 앞에 내 놓는 헌물로서 한 인간을 본다. 헌물이 되려면 완전하게 드려야 한다. 완전히 불살라서 재만 남게 된다. 거기에 다른 것이 남으면 안 된다. 주님께서 우리를 구속하시기 위 해서 재만 남았다.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긴다는 말은 재가 된다는 말이 다. 번제 헌물이 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인류의 대속을 위해서 마태가 본대로 왕을 보냈고 마가가 전하는 대로 종을 보냈다. 그렇지만 이 사람들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 대속을 이룰 수는 있지만 구속을 이룰 수는 없다는 것이다. 구약시대에도 종도 많았고 왕도 많았다. 하지만 종이나 왕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임으로써 인류가 구 속되지는 않는다. 국가가 번영하기 위해서는 왕도 필요하고, 종도 필요하
283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지만 사람을 제자리로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구속자가 필요하다. 구속이 란 원위치로 돌아오게 한다는 의미다. 사람을 돌아오게 하기 위해서는 왕 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하나님께서 원래 창조하신 참 사람이 필요하다. 그래서 구속은 영을 아버지 앞에 내놓는 한 인간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 이다. 왕을 통해서나 종을 통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다. 그 사람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섬기려고 온 사람들이고, 대속하려고 온 사람들이지만 구 속자로서 예수님은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왔다. 우리를 원래 인간으로 되돌리기 위해서 왔다. 그래서 복음은 다양하다. 개인적으로 말하면 인간 을 되돌리는 것이고, 그 되돌려진 사람을 통해서 나라를 이루는 것이므로 아무 것도 빼놓을 수 없는 것이지만 구속의 면에서 볼 때는 영까지 아버지 앞에 내 놓는 한 인간이 필요하다. 사람은 결국 영까지 구원되지 않으면 안 된다. 생각만 바꾸자는 사람은 많 다. 수양하자는 것은 생각을 바꾸자는 것이다. 지혜를 얻자는 사람은 다 생각을 바꾸자는 사람이다. 공부를 하자는 사람도 모두 생각을 바꾸자는 사람이다. 그것만 해도 상당히 훌륭해 보인다. 훌륭해 보이는데 속에 보면 다른 게 또 들어 있다. 아주 위대해 보이고 도를 통한 것 같고 굉장해 보 이고 저런 사람 같으면 하나님도 부럽지 않겠다는 사람도 속에 다른 게 또 있다. 사람을 믿을 수 없다는 게 그 말이다. 인간은 자기를 다 내놓았을 때 주님의 손을 경험할 수가 있다. 아브라함은 이삭을 내놓았을 때 이삭은 자기의 전부였고 삶의 전부였고 어쩌면 생명의 전부였는데 내놓고 부활의 하나님을 경험했다. 야곱도 모세도 다윗도 다 그런 사람들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을 지속적으로 경험하려면 생각만 내려놓아서 안 되고 더 깊이 자기 삶의 내용을 내놓아야 한다. 사람들은 참 이상한 것이 자기는 죽어도 영은 내놓지 않고 죽으려고 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애국자 이렇게 말을 하면 분명히 옥에도 가고 죽기도 하 는데 영은 갖고 간다. 그래서 애국자의 영이 있어서 길이 남아 있는 것이
284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다. 이순신 장군의 영이 지금 길이길이 역사에 남아있다. 사람들이 그것을 남겨놓으려고 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 앞에는 안 내놓으려고 한다. 그렇지만 영은 원래 내 것이 아니다. 히브리서 12장 9절에 보니까 영들의 아버지라고 되어 있다. 그래서 영은 아버지가 있다는 뜻이다. 그 말은 근 원( 根 源 )이 있다는 말이다. 그냥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고 근원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우리에게 있던 우리 육체의 아버지들이 우리를 바로잡아도 우리가 그들을 공경하였거늘 하물며 영들의 아버지께 우리가 더욱 복종하고 이로 써 살아야 하지 아니하겠느냐? 그런데 그 영은 내가 붙들고 있으면 사탄이 이용하고 아버지 손에 맡기면 아버지가 사용한다. 누구에게 맡기냐에 따라서 사용하는 것이 달라진다. 아담은 사탄에게 맡겼기 때문에 사탄이 사용한다. 아버지 손에 있으면 아 버지께서 사용한다. 그러니까 이것은 내 총을 맡기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군인이 내 총을 적군에게 맡기는 거와 같다. 그러므로 내 영은 항상 아버 지 손에 있어야지 내 영이 되면 안 된다. 천당에 가려는 사람도 그 영이 천당에 가려고 한다. 알고 보면 얍삽한 생 각이다. 왜냐하면 영은 내 것이 아닌데 그것을 꼭 가지고 천당에 가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천당은 아버지 집이지 내 집이 아니다. 그 러니까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다. 왜 예수님을 믿느냐고 질문하면 상 당히 많은 사람들이 천당에 가려고 믿는다고 대답한다. 아주 당연하게 대 답한다. 우리가 한 예를 들어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시는 주님을 보자. 가능 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라고 처음에 하셨다. 나중 에는 내 뜻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뜻대로 하옵소서! 이렇게 하셨다. 전반 부와 후반부가 다르다
285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 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라는 말은 영 을 내려 놓았다는 말이 아니고 생각을 내려놓았다는 말이다. 그리고 마지 막 십자가( 十 字 架 )에서 그 영을 아버지 손에 내려놓았다. 예수님도 겟세마 네에서는 생각을 내려놓고 십자가에서는 영을 내려놓았다고 말할 수 있다. 왜 그렇게 했냐하면 생각을 구속할 뿐 아니라 영까지 구속해야 하기 때문 이다. 만일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구속이 이루어졌다면 예수님은 우리 생각 은 구속할 수 있어도 영은 구속할 수 없다는 말이 나온다. 내가 구속이 된다는 것은 어떤 모델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그러니까 예수 님이 겟세마네에서 우리를 구속했다면 우리는 생각을 내려놓으신 분께로 돌아가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늘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사람에게로 돌아가게 된다. 지금 많은 기독교인들 이 이렇게 하고 있다.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이렇 게 기도하고 있다. 처음에는 우리 아들이 뭐가 되게 해주세요! 합격하게 해주세요! 기도하다가 마지막에 가면 조금 미안하니까 내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 원대로 하옵소서! 라고 한다. 그러면 만일에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 리의 구속이 이루어졌다면 이 정도에서 끝났을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영을 내려놓았기 때문에 지금은 그 수준이 아니라 내 전체가 드려지는 수준으로 바꿔졌다. 예수님은 겟세마네 까지만 가고 마치신 것이 아니고 십자가까지 가야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 있는 것 이다.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신 다음에 열두군단이 되는 천사를 불러 잡으러 온 사람들을 쳐부셨다면 기독교 왕국은 건설되었을지 모른다. 그리고 그 안에서도 종교생활은 가능할 것이다. 오 내 아버지여, 가능하시거든 이 잔 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시옵소서. 그러나 내 뜻대로 하지 마옵시고 아버지 의 뜻대로 하옵소서 하는 이 상태는 종교이다. 경건한 신자들이다. 날라리
286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가 아니고 아주 경건한 신자들이 하는 생활이다. 그런데 왜 십자가까지 갔는가? 그것은 우리 구속이 더 필요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오면 생각을 구속하는 수준만은 아니다. 석가 모니 앞에 가면 생각을 구원 받을 수 있다. 왜냐하면 지혜를 찾는 것이 불 교인데 결국 생각을 잘 묶는 것이 지혜이다. 그것을 흔들리지 않게 하려고 계속해서 수양을 하는 것이다. 거기가면 그 사람들이 다른 생각을 많이 한다. 직관력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예민하기 때문에 사람들 앞에서 적절한 말을 해준다. 그래서 스승의 얘기를 듣는다. 예수님은 거기서 머문 것이 아니고 인간의 내면 속에 들어있는 사탄에게 사로잡힌 그것을 지금 해방시 켜야 했다. 그래서 십자가까지 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누가는 이 자리에서 아버지 손앞에 영을 내어 놓으신 분을 봤다.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부탁 하나이다!' 하는 분을 봤고, 요한은 '다 이루었습니다!' 하는 주님을 봤다. 누가복음이 먼저 써지고 요한복음은 뒤에 써졌다. 그러 니까 요한은 벌써 누가복음을 읽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아! 주님께서 자기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시고 돌아가셨구나! 하고 알았다. 그래서 '다 이루었 다'는 말이 나왔다. 그러면 예수님이 어떤 사람인지 마지막을 보면 단지 구속을 위해서 죽은 어린양이었다. 고 이렇게 결론지을 수 있다. 예수는 누구이며 어떤 사람인 가? 지혜가 있는 사람이기도하고 능력이 있는 사람이기도하고 여러 가지가 있지만 최후를 보면 이 사람은 우리의 구속을 위한 사람이었다. 예수는 우 리의 구속을 위한 어린양이고 우리의 영원한 모델이며 우리가 돌아갈 고향 이다. 시편 22편은 예수님의 십자가의 고난을 표현한 시라고 한다. 그런데 이 시 편도 전반부와 후반부로 나뉘어졌다. 전반부는 심판에 대한 극심한 고통을 표현하고 있으나(시22:1~21) 후반부는 하나님께 대한 찬양으로 구성되어
287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있다.(시22:22~31) 그런데 시편 22편에서는 전환의 이유를 직접 말하지 않았다. 왜 그런지 말하지 않았다. 뒤에 보면 큰 회중 가운데서 드릴 나의 찬양은 주로부터 나오리이다. (시22:25)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내가 지금 찬 송을 하는 것은 주님으로부터 온 것이라는 것이다.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 습니까? 부르짖었는데 하나님의 응답이 없는 줄 알았는데 주님으로부터 응답이 와서 찬양을 드린다는 것이다. 그분께서는 친히 육체로 거하던 때에 자기를 사망으로부터 능히 구원하실 분에게 강렬한 부르짖음과 눈물로 기도와 간구를 드리셨고 또 친히 두려워 하셨으므로 하나님께서 들으셨느니라.(히5:7) 이렇게 응답을 받으셨다. 구체적으로 어떤 응답을 받으셨는지 모르지만 하 나님으로부터 응답을 받았고 찬양을 드린다는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라는 기도를 하고 계시는 것이다. 이것을 보면 누가복음을 거쳐서 요한복음에 이르러 다 이루었다. 하신 말 씀을 이해할 수가 있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가진 것이란 없는 것이다. 포 기할 것도 없고 버릴 것도 없다. 제자들이 우리가 모든 것을 버리고 주를 쫓았습니다. 했지만 객관적으로 보면 바닷가에서 고기 잡던 것 조금 버리 고 온 것이다. 별것 없다. 영은 내 것이 아니다. 인생 자체가 내 것이 아닌데 어떻게 영만 내 것일 수가 있겠는가? 단지 영의 아버지 앞에 생명의 근본이요, 내용이요, 모든 것의 모든 것인 영을 제출해야 되는 것이다. 그런 연후에 창조적인 전환의 세계에서 그의 이름을 찬송 할 수 있는 것이다. 시편에도 중간에 말은 없 지만 예수님에게도 그런 사건이 발생했을 것이다. 자기 영을 내놓는 그런 사건을 통해서 찬송이 나왔기 때문에 큰 회중 가운데서 드릴 나의 찬양은 주로부터 나오리이다. (시22:25) 라고 말하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만큼 크다. 우리 인간은
288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어떻게 하면 이 육신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 영생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아담도 인생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우리 인생은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고후5:4) 이것이 하나님의 최종목표다. 하나님은 우 리 인생을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셨다. 우리 인생은 흙으로 만 들어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드리기에 딱 안성맞춤으로 창조되었 다. 하나님의 입장에서 사람은 보시기에 매우 좋은 것이다. 만일 우리가 천사처럼 영이라면 우리는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드릴 수 없 다. 주님께서 아버지여 내 영을 아버지 손에 맡기나이다 (눅23:46) 이 말 은 하나님께서 씨를 뿌리기에 좋은 흙의 위치로 돌아간다는 말이다. 씨는 흙에 뿌려져서 씨와 흙이 한 몸이 된다. 흙-사람은 씨-하나님과 연합되어 실질적인 한 몸이 된다는 것이다. 아무것도 아닌 인생이 하나님과 한 몸이 되는 것보다 더 영광스러운 일이 있는가? 그래서 죄로 인해 대속물로 들려 질 때는 비탄과 탄원이 나왔지만 이제 헌물로 드려짐으로 하나님과 한 몸 이 되니 찬송이 나오는 것이다. 구속을 완성하심 - 다 이루었다.(요 19:30) 누가는 구속자로서의 예수님을 보았다. 그러나 구속이 하나님의 최종목표 가 아니다. 구속된 사람에게만 하나님은 생명을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요 한은 하나님의 생명을 넣어주기 위해 구속이 완료된 한 사람을 보았다. 요 한은 구속을 완성하기 위하여 어린양으로서 죽임 당하신 아들 예수를 본 것이다. 그래서 '아 다 이루어 졌구나!' 그렇게 본 것이다. 제물이 다 준비 됐으니까 제물이 다 준비 되면 불만 때면 되지 않는가! 불만 때면 재가 나 온다. 재가 나오는 것을 보고 '제사가 다 됐구나!' 이렇게 아는 것이다. 피 는 소반에 받아서 지성소로 들어가고 고기는 다 불태워서 동편 재버리는 곳에 버리고 그렇게 하면 제사가 다 됐다는 것이다. 요한은 그것을 본 사 람이다. 완전하게 제사가 된 한사람을 보았다. 그래서 요한은 하나님께 주
289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신 임무를 '다 완료하였습니다.(It is finished)' 라는 사람을 본 것이다. 그러나 구속의 완성이 하나님의 목표가 아니다. 구속이 완료된 사람은 하 나님의 생명으로 거듭나야 한다. 하나님은 흙-사람에게만 씨 생명을 넣어 주실 수 있다. 그래서 요한복음은 생명의 복음이다.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 기는 것에 대한 예표로 가득 차 있다. 가나의 혼인 잔치에서 물이 포도주 로 변하는 것, 죽은 자가 살아나는 것, 거듭남의 표적 등이 있고, 예수님 자신이 직접 나는 생명의 빵 (요6:35)이라 하셨고 나는 길이요 진리요 생 명이니 (요14:6) 라고 하셨다. 또 요한복음이 기록의 목적을 이것들을 기 록함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너희가 믿게 하려함이 요, 또 믿고 그분의 이름을 통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요20:31) 하였다. 그러므로 요한은 구속이 완성된 자에게 생명을 주시는 예수님을 본 것이다. 예수님은 하나님을 섬김에 있어서 왕이고 종이었다. 그리고 구속에 있어서 헌물로서 아들이었다. 우리의 구원을 위해서는 인류를 대표하는 왕과 종으 로서 대속물도 필요하고 구속의 헌물로서 아들도 필요하다. 아들이 아니면 헌물이 될 수 없었다. 예수님은 우리 구속이시며 완성자시다. 그러므로 유 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그리스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한다.(고전1:22,23)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혀서 자기 영을 아버지 앞에 드리고 구속을 완성하신 그리스도를 우리가 전하는 것이다. 구속자는 법적으로 친족 중에 가장 가까운 자라야 된다. 가장 가까운 자가 대를 잇던지 재산을 소유하든지 팔았던 땅-인격을 다시 살 수 있다. 이와 같이 예수님은 우리에게 가장 가까우신 분으로서 자신의 영을 아버지 손에 내놓으심으로서 우리를 위한 온전한 대속의 제물이 되셨다. 민수기 27장이 나 룻기 3장에 보면 룻이 시집갈 때 그 말이 나온다. 가까운 친척 중에서 상속 무를 자를 찾는다는 말이 나온다. 이것은 가까운 자라야만 나를 구속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양 보다 더 가까운 것이 사람이다. 사람보다
290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더 가까운 분이 누구인가? 이것은 십자가에서 영까지 다 바쳐 놓은 그 사 람이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분이다. 먼 사람이 아니고 가장 가까운 사람이 다. 왜냐하면 우리와 다 똑같은 사람이기 때문이다. 예수님도 다른 데서는 다 다르고 거리가 있다. 예수님이 물위로 걸어갈 때 도 거리가 생기고, 오병이어로 오천 명을 먹일 때도 거리가 생기고 심지어 는 겟세마네 동산에서 기도하신 모습을 봐도 우리와 거리가 생긴다. 가까 운 친척이 아니고 아주 멀다. 염화시중의 미소를 띠고 있는 석가모니를 보 면 너무 멀다. 그런데 십자가에 못박혀있는 예수님을 보면 우리와 너무 가 까운 친척이다. 예수님은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라.(마11:30) 하셨다. 그런데 기독교가 이상하게 이방세계에 들어오면서 예수님을 위대한 인물로 만들어 놓았다. 그래서 너무 먼 사람이 되고 말았다. 우리가 도저히 따라 갈 수 없는 위대한 사람처럼 만들어 버렸다. 옛적에 강력한 자 곧 명성있는 자로 만들어 버렸다. 그러나 하나님 나라는 위대한 자의 나라도 아니고 황제의 나라도 아니다. 단지 연한 초목같고 모양도 없고 우아함도 없고 흠모할 만 한 것이 없는 사람의 나라다. 사자나 호랑이의 나라가 아니고 어린양의 나라다. 그러므로 먼 친척은 나를 구속할 수 없다. 단지 내가 숭배하고 경 배할 수는 있지만, 내가 그로 말미암아서 구속은 받을 수는 없다. 나를 구속하실 분은 나와 가장 가까운 분이다. 자신의 영까지라도 자기가 가질 수 없어서 아버지 손에 내놓은 그 사람이라야 나를 구속할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친척이다. 위대한 사람이 나의 친척 이 아니고 알고 보면 아주 지극히 가난한 사람이 나의 친척이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이 나의 친척이다. 영까지라도 가지고 천당에 가겠다고 한 사람 은 나의 친척이 아니다. 영을 가지고 천당에 가겠다는 사람은 나와 가깝지 않다. 죽었는데도 영은 안 죽고 가지고 간다니 얼마나 놀라운 사람인가?
291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가까운 사람은 누구인가? 십자가에서 자기 영을 내놓는 그 사람이 나에게 가장 가까운 사람이다. 세상에서도 보면 위대한 사람이 나와 가까운 사람 인 줄 알지만 위대할수록 나와 멀어지고, 높을수록 나와 점점 멀어진다. 우리는 가까운 것을 찾아야 된다. 가장 가까운 것이 우리 모든 인간의 공 통점이다. 자존심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이 많다. 그러나 그 영도 자기 영 이 아닌 줄 알고 있는 그 사람이 나에게 가까운 사람이다. 이 사람이 내 이웃이고 내 친척이다. 그 분이 다 이루신 것을 우리는 누린다. 헌물이 완성됐을 때 제사가 된다. 한 사람의 죽음이 모든 사람을 구원하게 되었다하는 말이 그 말이다. 한 사람이 완전하게 헌물이 되어서 그 영까지 하나님 앞에 완전하게 불살라진 그 사람이 내 구속이 된 것이다. 이제 내가 돌아 갈 곳이 생겼다. 내가 어 디로 갈지 모르던 사람인데 저 히말라야산으로 갈지 백두산으로 갈지 한라 산으로 갈지 모르던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 산은 내가 올라가기에 너무 너 무 어려운 산이다. 그 산에 올라갈 수 있는 사람은 인류 중에 손가락 안에 꼽힌다. 그러나 우리의 구속자, 우리 표적은 누구냐 하면 더 이상 내려 갈 수도 없 고 더 이상 올라 갈 수도 없는 자리에 있는 분이다. 그분이 우리를 인간 본연의 자리로 구속했기 때문이다. 이것이 안식이고 안정이다. 이러면 요 동하지 않는다. 다 이루었다 (요19:30) 하시는 이가 있다. 다 이루었다 하시는 이 안에서 우리는 확고하게 뿌리를 박아야 한다. 거기에 내 인생의 뿌리를 박아야 어떤 일이 생겨도 안 흔들린다. 아무리 전봇대를 많이 박고 콘크리트로 해놓아도 바람이 불면 부러지고 다 날아가 버린다. 바나나 나무 같은 것은 나무도 아니고 풀도 아닌데 아무리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지 않는 다. 야자나무도 휘청휘청하는데 절대로 안 부러진다. 뿌리가 든든하고 기본 이 확실하면 흔들려도 상관이 전혀 없다. 지금 서양에서는 불교를 비롯한 동양 종교가 굉장히 인기를 끌고 있다. 심
292 20. 참사람으로서 죽음 앞에 서신 예수 그리스도 지어 기독교 목사들까지도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도 있다. 왜 그런가? 근원 이 없기 때문이다. 죄가 무엇인지, 의가 무엇인지, 심판이 무엇인지 모르고 근원이 없기 때문이다. 또 무죄가 영생이 아님에도 무죄가 영생인 줄 착각 하고 있다. 인생의 근원을 모르고 죄의 근원을 모르다 보니 전하는 복음도 근원을 모르고 현상만을 보고 처방을 하고 있다. 현상에 대한 처방만을 놓고 본다면 불교가 훨씬 심오하고 그럴듯하다. 그러니 소위 명성있는 목 회자들도 이상한 길로 빠지는 것이다. 열매는 씨의 결과다. 근원-씨가 없 는데 무슨 열매가 있겠는가? 그러므로 우리가 조금은 늦더라도 근원이 얼 마나 중요한가를 알아야 한다. 주님은 우리를 온전하게 구속하기 위해서 내 영을 아버지께 부탁하나이 다. 하셨다. 우리도 내 영은 꼭 기어코 붙잡고 있어야 되겠다는 생각은 버 려야 한다. 우리의 근원은 흙-먼지, 재로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 되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에 태워짐으로 하나님과 생명의 연합이 있는 것이다. 내가 흙임을 인정하는 것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임을 인정하는 것이다. 씨는 흙에만 씨를 뿌릴 수 있다. 사람이 본래 죽지 않을 영-씨라 고 한다면 씨-하나님은 절대로 생명을 줄 수 없다
293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다름 사람들은 늘 육신이 죽는다는 것에 대해 불만을 가지고 있다. 인간의 궁극 적 소원이 있다면 육신이 죽지 않고 사는 것이다. 그래서 인간사의 모든 분야를 조금만 더 깊게 들어가 보면 근원은 천사 숭배다. 종교 안에서 신 이 되는 것이고 정치 안에서 왕이 되는 것이다. 기독교 안에서도 표면은 예수님을 따른다고 하나 천사 숭배가 주를 이룬다. 이것은 사탄이 아담에 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창3:5) 라는 말에 아담이 속았듯이 아 담 안에 있는 인간의 최종소원이 죽지 않는 신이 되고 싶다는 것을 계시해 주고 있다. 사탄이 지금도 사람들을 속이는 방법은 똑 같다. 이것을 먹는 날에 너희는 죽지 않는 신들이 될 수 있다. 고 속이는 것이다. 이 근원을 모르니 아담이 속았듯이 지금도 여전히 사람들이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러 나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과 땅만큼 차이가 크다.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과 같지 아니하며 내 길들은 너희 길들과 같지 아 니하니라. 주가 말하노라.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들은 너희 길들 보다 높으며 내 생각들은 너희 생각들보다 높으니라. (사55:8~9) 세상은 선악과를 먹고 율법이라는 선과 악의 이분법적 세계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담 안에 있던 우리들은 사망이라는 개념도 단순히 육체적 죽음과 삶이라는 이분법적 관점에서 보기 쉽다. 그러나 하나님의 왕국은 선도 아 니고 악도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생명의 세계다. 성경은 선악의 이분법 적 세계를 기록한 책이 아니고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생명의 세계를 기 록한 책이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을 기록한 책이다.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제3의 세계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을 때 선악
294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의 법리적 세계가 아닌 생명의 유기적 세계의 관점에서 바라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소멸시키는 불이심 우리는 영이신 하나님의 근원적 속성을 알아야 한다. 우리 인생들은 죄가 있기 때문에 사람이 하나님 앞에 죽음으로 드려진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영-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신4:24, 히12:29) 우리 하나님은 소 멸시키는 불이시니라. (히12:29) 만유는 삼위 하나님의 형상을 표현하도록 창조되었다. 그래서 모든 만물의 생명의 근원은 영인데 영은 불-기름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성령을 불 과 기름으로 표현한다. 불은 생명의 근원을 예표한다. 이것은 생물이나 기 계나 마찬가지다. 만유는 양과 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하나님과 사람을 예표하고 생명과 형상을 예표하는 것이다. 양은 하나님을 예표하고 생명의 근원으로 만유는 생명의 공급을 통해 움직이는 것이다. 자가 발전하는 것 은 아무것도 없다. 만유가 다 똑 같은 원리에 의해 움직인다. 양과 음이 존재한다고 해서 스스로 양과 음이 연합되는 것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 를 예표하는 중간 연결자가 있어야 된다. 창조자이신 하나님이 3위 일체이 기 때문에 만유가 다 이런 원리에 의해 연결되고 움직인다. 이런 생명의 법칙을 뛰어넘어 스스로 자가 발전하는 것은 없다. 지구는 크게 핵과 맨틀과 지표면이라는 3중 구조로 이루어져 있는데 내부 에 핵이라는 용암이 지구를 움직이는 생명의 근원이다. 지구도 하나의 기 계라는 것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모든 물질적 존재의 에너지의 근원은 불이다. 이것은 우주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생명의 근원임을 예표한다. 스 스로 움직이는 것은 없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 사람들은 죄가 없으면 하나님을 만나서
295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죽지 않을 것으로 생각하지만 하나님을 만나서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용광로에 철이 들어가면 좋은 쇠는 나쁜 쇠든 들어가면 다 녹아버린다. 같 은 개념이다. 우리 인생은 흙-육신으로 만들어졌다.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어차피 육이지 영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인생이 흙-육신으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불-하나님께 태워져 영적인 몸으로 전환되는 것이 다. 사람은 흙으로서 불에 태워져 돌이 되고(벧전2:5) 결국에는 보석이 되 는 것이다.(계21:11)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됨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offering)로 창조되었다. 헌물 (offering)이란 죄와 관계없이 하나님과 생명의 교통을 위한 것으로 인생 이 하나님께 드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떤 헌물도 살아 있는 채로 드려 지는 것은 없다. 쉽게 말하면 하나님의 음식으로 창조되었다. 음식이란 식 탁에 올려지기 전에 죽임을 당해서 먹기 좋게 요리되어야 한다. 이것을 표 현하고 있는 것이 음식헌물이다.(레위기 2장) 아담 안 있는 인생들은 육신 이 살고 싶은 욕망이 강해서 하나님께 나아갈 때도 어떻게 하면 죽지 않고 나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고 있다. 그러나 하나님과 사람은 절대적 관계다.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에서처럼 어느 일방이 조금씩 양보하고 해서 되는 관 계가 아니다. 세상에서도 사람간의 관계에서 내가 어떤 사람과 완전한 관 계가 되려면 내가 완전히 죽어야만 그 사람에게 복종하게 되고 그 사람과 하나가 된다. 옛날 내시들이 왕을 모시기 위해 왕궁에 들어갈 때 생명을 거세 하였다. 이것은 내가 죽고 오직 나는 왕을 위해 산다는 것을 보여주 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죄를 해결하기 위해서 희생물이 추가된 것이고 하나님과 생명의 연 합을 위해서 사람은 근원적으로 헌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296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생명의 연합의 원리 우리 인생은 흙-육신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단순히 사 람이 흙-육신에 머무는 것이 아니고 흙-육신이 하나님의 생명으로 거듭 나야 한다는 것이다.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어차피 육이지 육은 생명이 아 니다. 육에서 난 것은 육이고 성령에게서 난 것이 영-생명이다.(요3:6) 육 은 무엇을 해도 육이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우리가 사람의 생명을 가지고 그대로 머무르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 나야 하는 것이다. 사람의 본성적 생명에 하나님의 생명이 이식되어야 하 는 것이다. 이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대해서는 클라렌스 라킨 의 글을 인 용해 보자. 자연적으로 생명이 출생하는 것은 없다. 모든 생명은 앞서 존재한 생명으 로부터 나와야 한다. 죽은 돌은 스스로 무기적 상태에서 유기적 상태로 전 환될 수 없다. 두 세계 사이에는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유기적 상태 쪽으 로 열려 있다. 돌은 스스로 문을 열수 없는 반면 식물은 그 문을 열 수 있 다. 식물은 그 뿌리를 흙 속으로 밀어 넣어 돌을 부술 수 있으며 돌의 화 학적 요소들을 취하여 식물의 생명으로 전환되게 한다. 이와 같이 식물의 세계와 동물의 세계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동물의 세계 쪽으로 열려 있다. 식물은 스스로 육이 될 수 없으나 동물은 식물을 먹음으로 식 물적 생명을 동물적 생명으로 전환시킬 수 있다. 이와 같이 육의 세계와 영의 세계에도 문이 하나 열려 있는데 이 문은 육 쪽에서 열 수가 없다. 영의 세계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 즉,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이 되려면 높은 생명 쪽으로 문이 열려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낮은 생명은 죽음을 통해 높은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것이 진리다. 만일 사람만이 특별한 존재라서 창조 시에 죽지 않는 영생을 가진 존재로 창조되었다면 사람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존재가 된다. 하나님께서 그분의 보이지 아니
297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하는 것들 곧 그분의 영원하신 권능과 신격은 창세로부터 분명히 보이며 만들어진 것들을 통해 깨달아 알 수 있나니 그러므로 그들이 변명할 수 없 느니라. (롬1:20) 라는 말씀이 이 말이다. 단지 만물을 보고 아 하나님은 계시네 이것을 알라는 것이 아니다.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알라는 것이 다. 육은 육이지 영-생명이 아니다.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연합되려면 반드시 죽음을 통해 연합되는 것이다. 식물이 동물에게 삼켜져 동물이 되 듯이 육-사람은 헌물로서 영-하나님께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그래서 바 울은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이 승리 가운데서 삼 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15:54)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 이라. (고후5:4)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위 말씀도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이분법적으로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고린도전서 15장 54절에서 육신에 대하여 죽을 것(mortal) 으로 번역한 영어 mortal 은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죽 을 운명(mortal) 이라는 것이다. 사망이 승리 가운데 삼켜진다 (고전 15:54) 라는 말씀은 죽을 운명(mortality)인 육신이 하나님- 생명에 삼 켜진다 (고전후5:4) 는 의미다.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 조되었다는 것이다. 근원적으로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죽게 만들었다고 해서 사망이 아니고 하나님과 관계가 끊어진 것이 사망이다. 하나님의 경 륜의 목표는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는 것이다. (고후5:4) 그런데 여기에 죄가 들어왔다. 그래서 어차피 한 번 죽을 운명(mortality) 이었던 몸이 사망(death)의 몸이 된 것이다. 그런데 생명의 조상인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조상인 사탄에게 십자가에서 인격으로 승리하였다. 그
298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래서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게 함이라 (고후5:4)는 말을 사망이 승리가 운데 삼켜지리라 (고전15:54) 라고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낮은 생명이 높은 생명에 참여하려면 반드시 죽어야 한다. 사람 은 물론 죄에 대한 심판으로 죽음이 필요하지만 본래 죽지 않을 몸인데 죄 가 들어왔기 때문에 인생이 죽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 해 사람은 어차피 하나님께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항상 동 물로 헌물을 드리기 전에 희생물이 드려졌다. 이것은 사람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헌물로 창조되었는데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우선 죄 문제를 해결 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의 음식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식물만 주어졌다.(창1:29) 그런데 노아 의 홍수 이후에 동물성 음식이 추가로 허락되었다.(창9:3) 이로 보건데 사 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피흘림이 필요없는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 되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창2:21, 레2:1~16) 생명의 원리에 따르면 먹는 것과 사람은 하나가 된다. 사람은 육이지만 식물을 먹고 살아야 할 식물성 육신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사람은 식물적 인간 에서 동물적 인간으로 변화된 것이다. 즉 피흘림이 필요한 헌물로 변화된 것이다. 영적으로 사람의 음식과 하나님의 음식은 같다. 율법의 제사의식에서 드리 는 사람과 받는 사람-제사장이 드려진 헌물을 함께 먹었다. 그러므로 예 표적으로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 잠자는 정도의 죽음-피흘림이 필요 없는 식물성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다고 볼 수 있다.(창2:21) 그런데 죄가 들어와 피흘림이 필요하게 되자 동물성 희생물이 추가 된 것이다. 이 모든 희생물과 헌물의 총체는 어린양이다. 어린양은 동물이지만 식물만 먹고 산 다. 그러므로 어린양으로 예표되는 인격은 본래 식물성 음식헌물이라는 것이다
299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희생물은 법리적인 것이지 유기적인 것이 아니다. 희생물로서 피가 뿌려졌 다고 생명의 연합이 된 것이 아니다. 그래서 반드시 헌물이 불-하나님께 태워짐으로 생명의 연합이 필요한 것이다. 단순히 죄 문제를 해결하려면 피만 제단 주위에 뿌리면 된다.(레17:11) 그러나 죄 문제가 해결되었다고 거듭난 것이 아니다. 거듭남은 자연적으로 일어날 수 없는 것이다. 반드시 높은 생명으로부터 이식받아야 하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 희생물은 제단 위에서 불-하나님께 태워짐으로서 번제헌물이 되어 하나님께 삼켜지 는 것이다. 모세와 아론이 회중의 성막에 들어와 갔다가 나와서 백성을 축복하매 주 의 영광이 온 백성에게 나타나고 불이 주 앞에서 나와 제단위의 번제헌물 과 기름을 사르매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 소리를 지르며 얼굴을 대고 엎 드렸더라. (레9:23~24) 열왕기상 18장에서도 하나님의 불이 내려와 희생물을 태우는 장면이 나온 다. 이에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엎드려 이르되,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 (왕상18:38~39) 하나님의 불이 핥아갔다는 것은 결국 그 불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는 뜻 이다. 삼켜버렸다는 말은 먹었다는 의미로 연합이 됐다는 뜻이다. 그러므 로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을 거부하면 더 이상 답이 없다. 모든 생물은 잉태할 때 머리가 먼저 생기고 머리로부터 지체들이 나와 완 전한 성체로 자란다. 머리로부터 곧 위로부터 태어나는 것이다. 자연적인 출생은 없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가 이렇게 되어 있다. 그러면 낮은 생명
300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인 사람이 높은 생명인 하나님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려면 어떻게 하여야 하는가? 내가 스스로 어떻게 변화되서 새로운 생명이 되는 것이 아니고 나 는 완전히 죽고 없어진 상태에서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야 하는 것이다. 낮 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완전히 삼켜짐으로 높은 생명으로부터 다시 태어나 는 것이다. 내가 완전히 태워져 번제헌물이 됨으로서 나는 하나님께 삼켜 지게 되고 다시 하나님으로부터 태어나야 한다. 이렇게 될 때 나는 하나님 과 한 생명이 된다. 하나님과 한 생명이 될 때 그리스도와 결혼이 가능한 것이다. 생명이 틀리 면 같이 살 수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아담을 창조하시고 홀로 있는 것 이 좋지 못함으로 합당한 배필을 가축과 짐승들 중에서 찾으셨으나 찾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창2:18~20) 이것은 짐승들은 아담과 생명이 다 르기 때문이다. 남자가 왜 여자와 결혼이 가능한가? 이질적이지만 생명이 같기 때문이다. 세상 사람들이 왜 그리스도와 결혼이 불가능한가? 생명이 다르기 때문이다. 그들은 하나님이 보실 때 가축이고 짐승이다.(창2:20) 생명의 연합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결혼이다. 곧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몸이 되는 것이다. 교회 는 그분의 머리되심 아래서 한 몸이다. 생명의 연합, 이것은 큰 신비다. 우리 인간의 생각으로는 이해가 힘들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 (엡 5:32) 왜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는가? (레17:11, 히9:22)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하필이면 피흘림을 통해서만 죄를 사해 주시 는가? 전능하시다면 하늘에서 금 나와라 뚝딱하는 식으로 죄를 사해주시면
301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안되는가? 이런 생각을 해 본 적이 있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 기록되어 있으니 있는 그대로 믿는 것도 훌륭하지만 왜 그 런 말이 나왔는가를 알아야 믿음이 흔들리지 않는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 표는 영-생명에 있다. 영은 표면이 아니고 이면이다. 말씀도 표면을 아는 것도 보다 이면을 아는 것이 중요하다. 무조건 믿으라하면 처음에는 잘 믿 는 것 같지만 어느 순간에 가면 그 신념이 흔들리게 되고 피흘림이 필요 없는 곳으로 갈 수도 있다. 나는 절대로 흔들리지 않는다고 확신하는 것 은 교만한 것이다. 우리는 지금까지 사람이 죄가 없더라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서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는 것을 살펴보았다. 그런데 위치 이탈-죄라는 장 애물이 생긴 것이다. 그러니까 성경이 주는 가르침은 사람은 헌물로서 하 나님께 삼켜져 새로 태어나야 하는데 죄라는 방해물이 생긴 것이다. 창세 기 2장 17절에서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 라. 라는 말씀은 우리가 앞에서 살펴 본 바와 같이 그 날에 육신이 죽는 다는 말이 아니다. 생명의 노선에서 사망의 노선으로 위치가 옮겨져 하나 님과의 관계가 끊어진다는 의미다. 왜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졌다는 말인가? 사람은 밭으로서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 할 위치였다. 이 상태가 사람의 원래의 위치, 곧 구속의 위치다. 그 런데 문제는 하나님의 씨가 심겨져야 하는데 사탄의 씨가 심겨진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되어야 할 자가 사탄의 아들이 되어 있다는 것이다. 이것 을 성경은 식물의 알곡과 가라지에 비유하고 있다.(마13:24~25) 우리는 알곡이 심겨져야 할 밭인데 가라지가 심겨져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 가 라지 밭을 알곡 밭으로 바꾸는 것이 하나님의 구원이다. 세상에서 가라지 를 알곡으로 바꾸는 방법은 없다. 기적적인 능력으로도 안되고 지혜로도 안된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하나님은 전능하시니까 무엇이든지 마음대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302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그러나 가라지를 알곡으로 바꾸려면 죽고 다시 태어나는 방법 밖에는 없 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은 사람에게 생명을 주시는 것인데 생명은 하나 님 자신이다. 그래서 죽고 다시 사는 방법 외에는 없다. 그런데 세상의 종 교에서는 이것을 기적적인 능력으로 바꿀 수 있다고 하고, 철학에서는 지 혜를 통해 바꿀 수 있다고 하는 것이다.(고전1:22) 그러나 성경이 주는 계 시는 죽고 다시 사는 방법 외에는 없다. 즉 가라지 밭을 갈아 엎고 거기 에 알곡을 심는 방법 외에는 없다는 것이다.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도 다른 것은 다 만들 수 있다. 그러나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태어나게 해야 한다. 사탄의 자식이었던 사람들을 모두 십자가에서 종결하고 새롭게 태어나게 해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씨-생명의 문제이기 때문에 사탄의 씨를 제거하고 하나님의 씨를 다시 심는 방법밖에는 없다. 사탄의 자녀들은 모두 죽고 다시 태어나야 한 다. 그래서 가라지가 심겨 있는 밭을 갈아 엎은 것이 심판-십자가 사건이다. 물론 예수님은 죄가 없기에 갈아 엎어질 이유가 없었다. 그분은 알곡 밭이 었지만 가라지 밭의 모습으로 갈아 엎어진 것이다. 가라지 밭이 갈아 엎 어져 가라지가 뽑혀진 것이 피 흘림의 심판이다. 이것이 희생물로서 피를 뿌린 것이고 예수님의 대속이다. 그렇다고 갈아 엎어진 밭에 알곡을 뿌릴 수는 없는 것이다. 갈아 엎어진 밭이 다시 알곡이 뿌려 질 수 있도록 가라 지를 모아 불태우고 곱게 정비되는 것이 구속-원위치 된 것이다. 하나님 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헌물이 된 것이다. 그리고 원 상태로 회복 된 밭에 알곡이 뿌려져 새싹이 나면 거듭나는 것이다. 이것이 정확한 생명 의 연합의 과정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속과 구속을 같은 것으로 생 각하지만 다른 것은 같은 것이 아니다. 대속은 법리적인 희생물이라면 구 속은 유기적인 헌물이다. 그리고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을 과정을 동물 을 통해 정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자원하는 헌물
303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로 창조되었다.(딤후4:6) 어떤 헌물도 살아있는 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그런데 아담이 이 운명을 거부하였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강제적으로 죽임을 당해 하나님의 상위로 올라와야 한다. 그 래서 피흘림이 필요 없는 자발적인 헌물의 위치에서 강제적인 피흘림이 필 요한 희생물의 위치가 추가된 것이다. 피흘림이 없은즉 사면이 없느니라 (히9:22) 라는 말씀의 내면적 의미는 법 리적인 것으로 강제적인 희생물의 필요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의 피로는 죄 사함이 없기 때문에 결국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을 통한 희생 물-대속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대속만으로는 하나님의 경륜의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목표는 사 람이 희생물로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헌물-구속이 되어야만 하나님께서 생명을 주실 수 있다. 즉 그분 안에서 우리가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 (골1:14) 라는 말씀은 유기적인 헌물의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림의 죽음을 통해 죄 용서라는 측면 에서 대속과 구속은 동일하지만 대속은 법리적인 것이라면 구속은 하나님 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인 위치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도 희생물이 태워짐으로 헌물이 되었고 이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레1:9, 17) 신약에 와서 도 예수 그리스도의 피흘림의 죽음 안에서 대속-희생물과 구속-헌물이 동일시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대속과 구속은 동일한 것이 아니다. 죄 용서라는 측면에서는 동일한 것이지만 대속은 법리적인 것이라면 구속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인 위치를 말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생명은 우리에게 없던 것이다. 사람이 원래부터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면 우리에게 예수님은 필요 없다. 잃어버렸 던 것이기 때문에 내가 다시 찾으면 되기 때문이다. 생명의 전환은 죽고 다시 나는 방법 밖에 없다. 사람은 사람의 생명에서 한 번은 죽고 하나님
304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의 생명으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 이것이 하나님이 사람에게 정한 운명이 다. 이를 위해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헌물로 창조되었다. 헌물은 자원하 여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이 이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이 운명을 거부한 것은 하나님의 경륜을 거부한 것이다. 사람이 영광스런 하나님의 음식헌물로 창조되었는데 이것을 거부하니 하나님께서 자신의 목적을 위 해 강제적으로 이 헌물을 하나님의 상위로 올린 것이다. 그래서 피 흘 림이 필요 없던 헌물에 피 흘림의 희생물이 추가 된 것이다.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계13:8) 계시록 13장 8절에 창세로부터 죽임 당한 어린양 이라는 말씀이 있다. 우 리는 이 말씀을 잘 이해할 수 없다. 어떻게 예수님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했느냐는 것이다. 사람들은 우리 인생의 죽음을 오직 죄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기 때문에 이런 현상이 일어나는 것이다. 예수님은 역사적으로 보면 분명히 2천년 전에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래서 이것을 궁여지책으로 내 놓은 해석이 예수님은 하나님이시기 때문에 과거 현재 미래가 없는 분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만일 예수님이 우리의 죄만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 셨다면 하나님께서 창세로부터 사람을 죄인으로 만들고 이를 대속하기 위해 예수님이 죽으셨다는 모순이 생긴다. 또 어떤 이들은 이 구절을 들어 구약 시대 사람들도 오실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았고 신약시대 사람들은 오신 예수님을 바라보고 구원을 받는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히브리서에 보면 또 그분께서 대제사장이 해마다 다른 것들의 피를 가지고 거룩한 곳에 들어가는 것 같이 자주 자신을 드려야 할 필요가 없으 시니 그랬더라면 그분께서 반드시 창세 이래로 자주 고난을 당하셨어야 할 것이라. 그러나 이제 세상 끝에 그분께서 단 한 번 나타나사 자신을 희생물 로 드려 죄를 제거하셨느니라. (히9:26) 라고 한다. 예수님은 단 한번 죽으 셨다는 것이다
305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글자의 사역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도저히 이 말씀은 이해하기 어려울 것이 다. 그러나 사람은 본디 하나님의 헌물로 창조되었다. 희생물만 죽음으로 드 려지는 것이 아니라 헌물도 죽음으로 드려진다. 사람은 하나님과 생명의 연 합을 위해서는 반드시 죽음으로 드려져야 한다. 사실 어린양의 인격은 곧 우리 자신이다. 사람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하나님께 번제헌 물로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성경은 영 안에서 보아야 할 것이 있고 역사 안에서 보아야 할 것이 있다. 영이란 시제가 없지만 역사는 시제가 있다. 예를 들어 영 안에서 예수 그리 스도는 영원 전부터 계신 분이지만 역사 안에서는 2000년 전에 오신 분이 다. 영안에서 기록된 말씀과 역사 안에서 기록된 말씀을 혼재하면 안되는 것이다. 영이란 무엇인가? 예를 들어 우리의 마음-생각은 영과 같다고 할 수 있다. 우리는 생각 안에서 과거 현재 미래를 자유롭게 왔다 갔다 할 수 있다. 그러나 현실 안에서는 현재밖에 없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 에 시제가 없으시지만 우리 인생은 물질이기 때문에 역사 안에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우리 인생들을 위한 생명나무의 열매로서 영 안에서 창세전에 죽 임당한 어린양 (계13:8) 이시지만 역사 안에서는 이 세상의 끝에 때 단 한번 나타나사 희생물로 드려지신 분이라는 것이다.(히9:26) 그러므로 영 안에서 기록된 말씀을 역사 안에서 기록된 말씀과 동일하게 해 석하여 구약시대 사람들도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았다고 오해하는 것은 글자 의 사역의 결과다. 분명히 성경은 당시에 예수 그리스도를 어떤 사람도 알 지 못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만 우리는 신비 속에 있는 하나님의 지혜 곧 감추어진 지혜를 말하노니 이 지혜는 하나님께서 우리의 영광을 위하여 세상이 생기기 전에 미리 정 하신 것이라. 이 지혜는 이 세상 통치자들 중에서 아무도 알지 못하였으니 만일 그들이 그것을 알았더라면 영광의 주를 십자가에 못 박지 아니하였으 리라.(고후2:7~8)
306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여기서 지혜는 예수 그리스도다. 이 지혜는 세상이 생기기전에 미리 정하 신 것이었기 때문에 이 세상 통치자들은 아무도 알지 못하였다는 것이다. 만일 통치자들 중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사람이 있었다면 그는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다. 이 세상 통치자들이 알지 못했다는 것은 인류 전체가 알지 못했다는 것이다. 심지어 예수님의 제자들마저도 예수님이 육신으로 계실 때 예수님을 메시아요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을 했지만 예수님이 십자가에 못 박히자 한 사람도 남김없이 실망하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예전의 자 기들의 일터로 돌아갔었다. 그들이 예수님을 구세주 완전히 인식하게 된 것은 부활이후였다. 그래서 성경은 율법 아래 있던 인류를 향하여 의로운 자는 없나니 단 한 사람도 없으며 (롬3:10) 그리고 율법으로는 어떤 육체도 그분의 눈 앞에 서 의롭게 될 수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알게 되느니라. (롬3:20) 라고 말하고 있다. 만일 구약시대에 단 한사람이라도 의인이 있었다면 예수님은 세상에 오실 필요가 없었고 예수님의 구속은 소용없게 된다. 왜냐하면 그 한 사람으로 인하여 다른 사람도 의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 (계13:8) 말씀도 우리 인생이 근원 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이라는 관점에서 본다면 이해가 될 것이다. 우리 는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헌물로 창조되었다 는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고후5:4) 창세로부터 죽임당한 어린양 이라는 말씀은 인격이신 예수님의 관점에서 기록되어 있다. 그분이 신이라면 죽임을 당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어린양은 사실 우리 자신의 인격을 상징한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님을 보고 내가 동일시 여겨야 하듯이 아담은 에덴동산에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 적을 위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 을 보고 그 인격을 먹어야 했 던 것이다. 그래야 그는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었다. 내가 죄가 있어야만 죽는 것이 아니고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창세로부터 하나님 앞에 죽임을 당한 어린양-헌물로 창조되었다.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지는 것이 하나님
307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의 궁극적인 목표다.(고후5:4)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은 육신이 죽는 것을 이분법적 사고에 의해 부정적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우 리는 앞서 살펴 본 대로 이것도 사탄에게 속은 것이다. 우리의 생각과 하 나님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다르니라 (사55:8) 하늘들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9) 만약에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들의 생각이 같았다면 예수님은 이 땅에 오셔 서 죽임을 당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담이 왜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 를 먹었는가? 바로 이것 때문이다. 우리 인생이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헌물로 창조된 것에 불만이 있었던 것이다.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님은 창세로부터 죽임을 당한 어린양이었다. 그 길이 생명의 길이라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께 삼켜짐으로, 하나님 앞에 음식헌물로 삼 켜짐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이 길이 얼마나 영광스런 길인지 아 담은 몰랐던 것이다. 그런데 사람으로 오신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을 앞 두고 이 길을 영광에 참여한다고 하셨다. 그러나 이것은 그분께서 자기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더라. 예수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아니하셨으므로 아직 성령님께서 주 어지지 아니하였더라. (요7:39)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응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의 아들이 영광을 받을 때 가 왔도다. (요12 23.) 예수님은 십자가의 죽음에 대해서 영광이라고 하셨다. 선악과를 먹고 육신 이 영생하기를 바라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이해하기 힘들다. 여기서 위 말씀의 의미는 죄를 속하기 위한 희생물로 드려 진 후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로 드려져야지만 하나님의 씨-성령을 받고 부활할 수 있다는 것 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생각과 우리의 생각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308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것이다. 만일 아담이 타락하지 않고 인류가 생육하고 번성하였다고 해도 이 깊고도 넓은 하나님의 경륜을 이해할 수 있을까? 아마도 이해할 수 없 었을 것이다. 그러니 아담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생명의 길-인격을 이탈하 여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아담이 죄가 없었음에도 불구 하고 생명과를 먹지 않고 선악과를 먹었다는 것은 인생은 죄가 없더라도 그 누구도 생명과를 먹을 인생이 없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불평한다.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사탄의 개입을 허락했느 냐는 것이다. 그때 하나님께서 나타나셔서 사탄의 훼방을 처리했으면 지금 과 같은 인생들의 불행은 없지 않았겠냐고 항변한다. 그러나 사탄의 훼방 이 없었다면 인생은 더욱 더 생명의 주님으로부터 멀리 떠나갔을 것이다. 갈급함이 없기 때문이다. 소위 등 따뜻하고 배부른 상태에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지 않는다는 것이다. 자신이 하나님께 번제헌물이 되겠다고 할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천년왕국에서 증명이 된다. 천년왕국에 육 신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분명히 죄가 말소된 사람들이다.(행3:19)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 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 (행3:19) 천년왕국 시대 육신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죄가 말소된 상태에서 수명은 나무의 날 수와 같다(사65:22) 그리고 사탄이 바닥없는 구덩이에 갇혀 있 기 때문에 창세기 2장의 아담의 환경보다 더 좋은 상태이다. 즉 무죄한 상 태에서 사탄의 방해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다의 모래와 같은 수의 사람들이 예수님을 생명으로 영접하지 않고 있다가 천년왕국 마지막 때에 사탄이 무저갱에서 잠시 풀려나자 사탄에 동조하여 주님께 반역을 한다. (계21:7) 그래서 하나님은 창세전에 이것을 미리 아시고 인생을 하나님의 경륜에 더 많이 참여시키기 위해 사탄의 개입을 의도적으로 허락하여 인생들로 하여 금 절망 가운데 있게 하여 생명의 구원자의 필요성을 극명하게 인식하게
309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하신 것 같다. 사탄에게 비록 하나님의 경륜을 방해하도록 허락하였으나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어린양으로 죽임을 당하심으로서 하나님의 의도를 분명하게 인생들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인생들에게 명확하게 죄인임을 인식시켜 회개토록 하여 하나님의 경륜에 참여 하게 한 것이다. 왜냐하면 죄가 넘치는 곳에 은혜가 넘치기 때문이다.(롬5:20) 우 리는 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판단할 수 없다. 우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너무도 다르기 때문이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롬11:33) 사망(Death) vs. 죽을 운명(mortality) 우리는 지금까지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단순히 육신의 죽음이 아니고 사 망의 과정이고, 생명이란 단순히 육신의 삶이 아니고 생명의 과정임을 살 펴보았다. 씨-하나님은 흙-사람에게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일련의 과정이 생명이고 사탄도 마찬가지로 영-씨로서 표면적으로 보면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사람에게서 사탄의 열매를 추수한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망의 노선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사망이고 생명의 노선 안에 있으면 육 신이 죽더라도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있다는 것이다. 이것이 성경의 일관 된 진리다. 그래서 성경을 살펴보니 문맥상 육신이 죽는 것이 확실하다면 육신의 죽음과 사망노선을 구분하지 않고 사망이라는 영어 단어 Death, dead나 die를 사용하였으나 문맥상 사망 노선 안에서 육신의 죽음과 생명 노선 안에서의 육신의 죽음을 구별할 필요가 있을 때는 죽을 운명 이라는 mortal, 또는 mortality라는 단어를 사용하였다. 여기서 운명 이란 단어를 살펴보기로 하자. 운명 이란 누구도 바꿀 수 없 는 것이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개를 만들었는데 개가 사람이 될 수 있
310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는가? 없다. 운명이란 이런 개념이다. 운명이란 창조자가 그렇게 만들었기 때문에 창조자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개가 사람이 되려면 개가 죽어서 사람에게 먹혀야 한다. 풀이 소가 될 수 있는가? 없다. 풀이 소가 되려면 풀은 소에게 먹혀야 한다. 또 한 가지 예를 들어 자동차 공장에서 소형차 를 만들었다고 하자, 이 소형차가 갑자기 중형차로 바뀔 수 있는가? 없다. 중형차가 되려면 용광로에 들어가서 해체된 다음 재창조되어야 한다. 똑 같은 원리다. 그런데 이것이 기적과 지혜로 가능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종교와 철학이다. 그러나 그런 일은 절대 없다.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람이 영생하는 존재가 되려면 재창조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영 생을 위해 재창조되어야 한다. 죄가 있기 때문에도 거듭나야 하지만 인생 은 근원적으로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재창조-거듭나야 한다. 그런즉 어떤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그는 새로운 피조물이라. 옛것 들은 지나갔으니 보라, 모든 것이 새롭게 되었도다. (고후5:17) 즉 사람의 몸은 옛 창조 안에서 죽을 운명(mortality) 으로 창조되었고 새 창조 안에서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 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운 명이란 근원적인 것으로 중간에 바뀌는 것이 아니다. 운명이 전환되려면 창조적 전환, 곧 죽고 다시 재창조 되어야 한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죽지 않을 운명(immortality) 이란 단어는 하나님께만 사용하고 사람에게 사용 할 때는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리켜 사용한다. 오직 그분께만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이 있고 그분은 아무도 접근 하지 못할 빛에 거하시며 아무도 그분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도 없나 니 그분께 존귀와 영존하는 권능이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 (딤전6:16) 이제 영원하신 왕 곧 죽지 아니하시고(immortal) 보이지 아니하시고 홀로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존귀와 영광이 영원무궁토록 있기를 원하노 라. 아멘. (딤전 1:17)
311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 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Death)이 승 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15:54)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death)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life)과 죽지 아 니함(immortality)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딤후1:10) 참고 꾸준히 잘 행함으로 영광과 존귀와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구하는 자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으로 갚으시고 (롬2:7) 그럼에도 일반적인 기독교인들은 사람이 죽지 않을 운명 이었는데 죽을 운명 으로 바뀌었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나 죽지 않을 운명 이 죽을 운명 으로 바뀐다는 논리는 말이 안되는 논리다. 운명이 어떻게 바뀌는가? 운명은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육신에 대하여 죽을 운명 이라 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아담이 왜 타락했는가? 이 운명을 거부한 것이다. 그러나 이 운명은 바뀌 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타락한 아담에게 이는 네가 땅에 취 하여 졌기 때문이라.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3:19) 하신 것이다. 백번 양보해서 만일 사람의 육신이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서 육신이 죽게 되었다면 사람의 몸에 대하여 죽을 운명(mortality) 이라는 단어를 사용할 필요가 없이 무조건 death, dead 또는 die 라는 단 어를 사용해야 한다. 그런데 성경은 생명 노선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죽 을 운명(mortality) 이란 단어를 사용하여 구분하여 사용하고 있다. 다음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몸이 근원적으로 죽을 운명 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이다. 죽을 수밖에 없는 사람(mortal man)이 하나님보다 더 의롭겠느냐? 사 람이 자기를 만드신 분보다 더 깨끗하겠느냐? (욥4:17)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mortal body) 안에서 군림하지
312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롬6:12) 그러나 만일 예수님을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의 영께서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를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키신 분께서 너희 안에 거하 시는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의 죽을 몸(mortal bodies)도 살리시리 라. (롬8:11) 살아 있는 우리가 예수님으로 인하여 항상 죽음(death)에 넘겨짐은 예수 님의 생명(life) 또한 우리의 죽을 육체(mortal flesh) 안에 나타나게 하려 함이라. (고후4:11)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 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mortality)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 (고후5:4) 위 구절 중에 로마서 6장 12절을 잠시 살펴보자.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의 죽을 몸(mortal body) 안에서 군림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정욕 안에서 죄에게 순종하지 말고 (롬6:12) 위 구절을 보면 우리 몸이 죽지 않을 운명(immortal body) 이었는데 죄 가 들어와 죽을 운명(mortal body) 이 되었다고 말하지 않는다. 어차피 몸은 근원적으로 죽을 운명(mortal body) 이었는데 그 몸이 죄에게 종 노 릇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이다. 분명하지 않은가? 어떤 이들은 성경 어디에 사람의 몸이 죄와 관계없이 원래부터 죽게 되어있느냐고 묻는다. 여기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그런 것을 성경에 분명하게 기록하지 않은 것은 사 람이 죽는 것은 너무도 상식적이고 당연하기 때문에 기록을 하지 않고 있 는 것이다. 사람은 먹어야 살고, 배설을 해야 살고, 숨을 쉬어야 산다. 성 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도 죽게 되어 있다.(마4:6)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면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하나님의 도움을 구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 험하는 것이다.(마4:7) 다음 성경 구절들은 사람의 몸이 근원적으로 죽을 운명 에서 부활을 통해
313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죽지 않을 운명 으로 전환되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반드 시 죽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으리로다. (고전15:53) 그리하여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mortal)이 죽 지 아니함(immortality)을 입을 때에는 기록된바, 사망(Death)이 승 리 가운데서 삼켜졌도다, 하신 말씀이 성취되리라. (고전15:54)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death)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life)과 죽지 아 니함(immortality)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딤후1:10) 사람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성경에 대한 깊은 이해가 없이 무조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말한다. 또 로마서 8장 10 절에서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the body is dead) 성령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 라는 구절을 이분 법적으로 단순하게 생각하여 죄로 인해 몸이 죽는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 것은 말씀에 대한 오해이다. 로마서 8장 10절에서 그리스도인은 현재적 (is)으로 죽어 있는 상태다. 실제로 그러면 우리 몸이 죄로 인해 죽었나? 죽지 않았다. 이것은 영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죽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더구나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안에 있으면 몸이 죄로 인해 죽는다고 한다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몸이 안죽 는다는 말인가? 이 말씀을 가지고 죄로 인해 육신이 죽는다고 하는 해석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내 몸이 죄로 인해 죽어야 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은 완성이 안된 것 이고 더욱이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의 은혜를 훼손하는 것이다. 그 러므로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를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해석하 는 것은 말씀에 대한 이해 부족이다. 하나님의 생각과 사람의 생각은 하늘 과 땅의 차이보다 크다. 생명과 사망이라는 말이 세상 사람들이 생각하는 개념이라면 왜 예수님이 세상에 오셔서 모든 인류에게 배반당하고 죽으셨
314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겠는가? 아무도 그분이 가시는 생명의 길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위에 제시된 성경구절들은 생명노선 안에서 육신의 죽음과 부활을 말하고 있다. 죽을 운명(mortality) 이었던 육신이 부활을 통해 죽지 않을 운명 (immortality) 으로 전환되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중에서 마지막 구절인 디모데후서 1장 10절을 살펴보자. 이제 우리의 구원자 예수 그리스도의 나타나심으로 분명히 드러났으니 그분께서는 사망(death)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life)과 죽지 아 니함(immortality)을 밝히 드러내셨느니라. (딤후1:10) 디모데후서 1장 10절 말씀을 보면 우리 생각으로는 사망을 폐하였으니 대 비되는 후속 구절은 생명 이라는 한 단어만 쓰면 족하다고 생각된다. 그런 데 성경은 생명(life) 과 죽지 아니함(immortality) 이라는 두 단어를 기록하고 있다. 모든 성경 기록은 단 한 글자도 의미 없이 기록된 것이 없 다. 생명(life) 과 죽지 아니함(immortality) 은 다소 차이가 있다. 여기서 사망이란 사망노선이다. 즉 예수님은 사탄에게 승리함으로서 사망 노선을 폐하시고 복음을 통해 생명노선을 열어 놓으셨다. 그 생명노선 안 에서도 특히 몸이 죽을 운명(mortal) 이었던 사람들에게 부활을 통해 죽지 아니하는 운명(immortality) 으로 바꾸었다는 것을 말씀하고 있 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울은 여기서 아담이 사람의 몸이 죽을 운명 (mortal) 이라는 것 때문에 선악과를 먹고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고 모든 사람의 소망이 육체가 영생하는 것을 소망하고 있기 때문에 육신의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신 예수님의 은혜를 특별히 기록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과 죽지 아니함 라고 하면서 생명노선 안에서의 몸의 부활을 강조하 고 있는 것이다. 인생이 한 번 죽는 것은 정한 이치다. 대부분의 이단종파의 가르침을 보면 그 종파의 교주들이 신으로서 행세를 한다. 자칭 타칭 자신이 재림예수라 고 하면서 자신의 육신은 죽지 않고 영생한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십자가
315 21. 사람의 육체는 왜 죽어야 하는가? 에 못 박히신 예수님은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계 시는 것이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성이 폭로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이 근원을 모르고 여전히 사탄의 거짓 아래 놓여 있다. 사탄은 지금도 이것을 먹는 날에 죽지 않는 신들이 될 것이란 말로 사람들을 속이 고 있다.(창3:5) 그럼에도 사람들은 사람은 신이 아니고 사람이 되라는 하 나님 말씀을 알지 못하고 여전히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고 있다
316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타락한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유일한 질문 하나님께서는 아담이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위치를 이탈하자 네 가 무엇을 했느냐? 라고 행위를 물으시지 않고 네가 어디 있느냐? (창 3:9) 하시면서 인간의 근원적 위치를 물으셨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은 이 질문에 답을 해야 한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사람들은 아담이 그러했듯이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나무 뒤에 숨어서 자기를 드러내지 않고 숨는다. (창3:10) 그가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 두려워 숨었나이다.(창 3:10) 어떤 이는 종교라는 나무 뒤에, 어떤 이는 도덕이라는 나무 뒤에, 심지어 어떤 이는 의의 나무라는 나무 뒤에 자신을 숨긴다. 그리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위치를 인정하지 않고 자신이 쌓아 올린 종교, 도덕, 명예, 의를 내어 놓으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출제하신 시험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사탄에 속은 인간은 출제자의 의도와 관계없는 답만을 하고 있다. 출제자 의 의도와 관계없는 모든 답은 소용이 없는 것이다. 사람은 인격( 人 格 )으로 창조됨 창조주는 만물에게 각자의 격을 부여하였다. 사람은 인격으로 창조되었다. 인격은 무엇인가? 사람에게 정해진 위치다. 개에게 정해진 위치는 개격이 고, 소에게 정해진 위치는 소격이다. 모든 만물에는 정해진 격이 있다. 그 것은 고유한 것이다. 절대로 변화될 수 없고 변치 못한다. 누구도 빼앗아 갈 수 없고 바꿀 수도 없고 교환할 수도 없다. 이것은 정해진 것이다. 개 를 가지고 염소를 만들 수 없다. 아무리 훈련을 시켜도 염소가 될 수 없다. 염소를 가지고 개를 만들 수도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은 사람이지 신이 될 수 없다. 어떤 것도 자기의 격을 바꿀 수가 없다. 이것이 격이다
317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사람은 등 뒤에 누가 있는지 안 보인다. 그런데 만일 등 뒤에 누가 앉아 있는지 알 수 있는 사람이 된다고 하자. 그러면 사람들은 아마 그를 보고 대단하다고 할 것이다. 사람이 사람 이상의 어떤 것을 하면 영웅처럼 생 각하고 신처럼 생각한다. 그러나 신처럼 된 것도 괴물이고 동물처럼 된 것 도 괴물이고 다 괴물이다. 사람은 사람처럼 된 것이 사람이다. 사람에게는 정해진 위치가 있다. 이것을 절대로 넘어서지도 못하고 내려가 지도 못한다. 사람은 사람이지 사람 이상이 될 수가 없다. 그러나 신들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사람들은 사람 이상이 되려고 애를 쓰는 것 이다. 신선이 되어서 몇 백 년을 산다든가, 아니면 하늘을 통달해서 뭔가 되어 살려고 애를 쓴다. 하나님은 만물을 창조하셨으나 그 중에서 자신의 목적을 이룰 수 있는 존 재가 없었기 때문에 사람을 지으신 것이다. 남자가 홀로 있는 것이 좋지 못하니 내가 그를 위하여 합당한 협력자를 만들리라. (창2:18) 하였는데 먼저 창조된 가축들과 짐승들 중에서는 아담을 위해서는 합당한 협력자를 찾지 못하였더라.(창2:20) 하였다. 그래서 아담의 갈빗대를 빼서 이브를 지 은 것이다. 여기서 아담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하나님께서는 여섯 째 날까 지 동물을 다 지으시고 왜 또 사람을 지으셨는가? 이는 아무리 봐도 동물 들은 하나님의 배필이 안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배필이 될 수 있는 사람 을 지으신 것인데 그 사람의 중심 모양은 인격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그를 대신할 위치와 존재를 가지고 태어났다. 사람은 다른 것을 다 못해도 이것은 할 수 있도록 창조된 것이다. 도를 닦 는 것도 능력이 있어야 하고, 천당을 가는 것도 열심이 있어야 간다. 게으 른 사람은 천당에도 못 간다. 심지어 구원을 받는 것도 열심이 있어야 받 는다. 이러한 능력위주의 세상에서는 어떤 사람은 구원을 받고 어떤 사람 은 구원을 못 받도록 되어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입장에서 본다면 만민이 다 자기 백성이고 자기가 창조한 피조물인데 우리 인간들처
318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럼 50%는 합격시키고 50%는 탈락시키겠는가? 내가 아버지라면 내 자녀 들이 10명인데 그 중에 50%는 탈락시키고 50%는 합격시키고 하겠는가? 아버지 같으면 어떤 방법을 쓰더라도 합격시키려고 할 것이다. 시험문제를 내서 불합격되면 문제의 난이도를 더 낮출게 아니겠는가? 어차피 10명이 다 합격해야 하기 때문이다. 선생님은 못하지만 아버지는 한다는 말이다. 하나님은 모든 사람이 구원을 받고 진리에 이르기를 원하신다.(딤전2:4) 그래서 만민이 다 구원을 받도록 만들어 놓았다. 왜냐하면 사람에게 인격 을 주었기 때문이다. 이 인격은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신할 위치와 존재를 가지고 있다. 사람은 다른 것은 다 못해도 이것은 할 수 있다. 기도도 참 열심히 해야 된다. 기도하는 일은 보통 일이 아니다. 뭔가 좀 신령하다는 사람, 조금 괜찮아 보이는 사람은 그냥 된 게 아니다. 다 열심히 해서 된 것이다. 그러므로 어디 가도 그런 사람이 아니고서는 안 된다. 보통 사람 은 다 불합격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격만 찾으신다. 인격만이 하나님께 는 합격이다.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창2:17) vs.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창3:5) 똑 같은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이것을 먹는 그날에 반드시 죽으리라. (창 2:17) 하였고, 사탄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다. (창3:5) 하였다. 네가 이것 을 먹으면 반드시 죽으리라 라는 말은 영원한 생명에서 단절된다는 말이 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임으로 하나님의 생명에서 단절될 것이라는 말이다. 무엇이 하나님 생명에서 단절 되었는가? 인격이 단절된다는 말이 다. 한 편은 죽을 것이라 했고 또 다른 편은 신들과 같이 될 것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날 안에 반드시 죽으리라. (창 2:17) 했다. 무엇이 죽는 것인가? 인격이 죽는다는 말이다. 어떤 사람들은 이것을 육신이라고 생각한다. 그래서 사람은 원래 안 죽도록 만들었는데
319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죄를 지었기 때문에 죽게 되었다고 전파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다. 모든 만 물은 한 번 낳았다가 죽도록 만들어져있다. 사람만 안 죽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아니다. 그 사람이 속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사탄은 이것을 먹는 날에 신들과 같이 되리라. (창3:5) 고 속였다. 사람은 절대로 신이 될 수 없음에도 불구하고 지금도 여전히 사탄은 동일 한 말로 사람들을 속이고 있다. 사람은 원래 신들과 같이 죽지 않는 존재 다. 그러니 열심히만 하면 너도 신들과 같이 될 수 있다 라고 속이고 있 다. 사탄은 또 말하기를 지금도 사람이 멀쩡하지 않냐, 잘 살고 있지 않 냐, 훌륭한 일을 하고 있지 않냐, 놀라운 사람이 많지 않냐, 행복한 사람 많지 않냐, 너도 이 사람들과 같이 살고 싶지 않느냐? 이렇게 말하고 있다. 그러나 이 사람들로는 다른 모든 것은 할 수 있어도 하나님 나라가 안된 다. 하나님은 이 사람들을 향해 네가 살아 있다는 이름은 가지고 있으나 죽었도다. (계3:1) 고 한다. 사람도 사람의 위치에 있어야 산 것인데 사람의 위치를 벗어난 것은 죽은 것이다. 다들 잘 살고 있다고 한다. 멀쩡하게 잘 살고 있다고 한다. 그런데 반드시 죽으리라 했던 그 사람이다. 하나님 말씀이 만약에 잘 살고 있는 사람을 보고 반드시 죽으리라 했다면 얼마나 잘못된 것인가? 하나님은 성 토를 받아야 한다. 그런데 그렇지 않고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죽은 것이다. 그러니까 기능만 살아 있는 것이다. 자기를 지으신 이를 위해 꼭 필요한 것은 다 죽어버렸다. 마이크는 소리를 확산하려고 만든 것인데 마이크 안 에는 울림판이라는 것이 있다. 그게 울려서 소리가 나는 것이다. 다른 것 은 다 완전한 데 그것이 없다면 그것을 보고 죽었다고 한다. 그것은 금으 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고 은으로 만들어도 소용이 없으며 다이아몬드로 만 들어도 소용이 없다. 소리가 나면 산 것이고 소리가 안나면 죽은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같이 되었으면 성공한 것인가? 그것은 산 것이 아니고 죽은 것이다. 기능이 죽어 버린 것이다. 자기 고유의 기능이 죽었다. 사람이 정
320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해진 위치를 버린 것이다. 자신의 격이 없어져 버린 것이다. 그것을 보고 인간이라고 할 수도 없고, 소라고 할 수도 없고, 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사람이 신 같다면 그것은 굉장히 놀라운 사람인 것 같지만 놀라운 사람이 아니고 그것은 사람도 아니고 신도 아니라 괴물이다. 그런데 인간들은 그 런 것을 추구한다. 신 같아지기를 좋아한다. 사람은 살아 있는 혼으로 만들어짐 사람은 흙으로 지어졌고 코에 생명의 숨이 불어 넣어져서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고 한다. 살아 있는 혼이라는 것은 우리가 얼른 알기 쉽게 지, 정, 의 같은 기능들을 말한다. 이 기능들은 누구에 의해서 쓰이는 것이지 그 기능 자체가 살아 있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혼이라는 것은 살아 있기 는 살아 있지만 누구에 의해서 쓰여 질 때 살아 있다고 하는 것이다. 이 기능들은 보고 듣고 만지고 인지해서 무슨 형상으로 표현하는 그런 기능이 다. 사람은 그것이 다른 동물들과 다른 점이다. 무엇을 보면 보는 것으로 끝 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자기 안에서 새겨서 다시 만들어 낸다. 이것이 사 람이 가지고 있는 고유한 기능이다. 그림이라는 것은 물건을 보고 그림을 그리는 것이다. 그림은 사진과는 아 주 다르다. 사진을 찍어 놓으면 똑 같다. 그런데 그림은 똑 같지 않다. 똑 같은 것은 잘 그린 그림이 아니란 말이다. 그림을 잘 그려 놓은 것은 똑 같이 그린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면서 느껴지는 자기의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그것을 잘 표현한 것이 잘 그린 그림이지 사진과 똑 같이 그린 그 림이 잘 그린 그림이 아니란 말이다. 사람은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피 카소의 그림을 잘 보라. 자세히 보면 눈알 하나도 제대로 그려 놓은 게 없다. 이상하게 그려 놓았는데 그것을 보면 생각하게 만든다. 그냥 눈을 그려 놓으면 생각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 사람은 이것을 생각이 몇 바퀴 를 돌아서 그린 것이다
321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사람만 그런 기능을 가지고 있다. 보고 듣고 만진 것을 인식해서 그것으로 내가 다른 것을 만들어 낼 수도 있다. 그러니까 참 특이한 동물이다. 무슨 형상으로 표현한다. 그래서 만물은 사람에 의해서 다시 표현된다고 봐야 한다. 만물은 자기대로 있는데 사람이 와서 보기에 따라 다 다르게 표현된 다. 이 사람은 이렇게 표현하고, 저 사람은 저렇게 표현하고, 똑 같은 꽃을 보고 왔는데 한 사람은 이렇게 그리고 한 사람은 저렇게 그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사람에 의해서 다시 표현되는 데 어떤 사람에 의해서 표 현되면 별게 아닌데도 굉장히 좋게 표현되고, 어떤 사람에 의해서 표현되 면 아주 좋은 데도 엉망이 되어 버리고 만다. 성경도 마찬가지이다. 성경도 보는 사람에 따라서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성경에 써 있어서 성경이 나에게 말을 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을 보고 인지 하는 사람이 그 사람대로 또 다른 말을 하는 것이다. 그래서 평생을 들어 도 지루하지 않다. 그러나 세상 책은 여러 번 읽지 않는다. 그런데 이 성 경은 평생을 읽는다. 볼 때마다 다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만물은 사람에 의해서 다시 표현된다. 성경도 어떤 사람이 보면 약이 되고 어떤 사람이 보면 독이 된다. 사람을 죽일 때도 성경으로 죽였 고 사람을 살릴 때도 성경으로 살린 것이다. 많은 사람을 죽이면서 성경대 로 한다고 하면서 성경을 빙자해서 죽였다. 유대인들도 성경대로 한다고 하면서 예수님을 죽인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은 묘한 책이다. 이렇게 보면 이렇게 되고 저렇게 보면 저렇게 되도록 쓴 책이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죽이면서도 이것이 하나님을 섬긴다고 생각하였다. (요16:2) 왜냐하면 하나님을 참람하게 하는 사람을 그냥 두면 내가 불의한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을 참람하게 여기는 자는 죽여야 되고 그것이 하나님께 대한 충성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참 특이한 동물이다. 하나님이 지 어놓은 만물을 다시 인식해서 무엇인가 다른 것으로 만들어 내는 기능이 있 다. 이것이 살아 있는 혼의 기능이다
322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기능이 하나님에게 필요한 것이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표현하고 대 신할 수 있는 이 기능이 하나님에게 필요하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보이지 않음으로 누군가가 자기를 알고 표현해 줘야 한다. 사람은 무엇인가를 알 면 표현을 할 수 있다. 그것을 그림으로 그려낼 수도 있고 음악으로 표현 할 수도 있고 여러 가지로 만들어 낼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람은 자신이 본 것을 다른 사람이 그것을 보고 느끼도록 표현 할 수 있는 기능을 가지고 있다. 이것이 살아있는 혼이다. 그런데 이 기능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려면 인격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이런 놀라운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것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려면 인격이 제 위치에 있어야 한다. 사람은 묘한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이런 기능이 정상적으로 사용되면 굉장히 좋은 것이다. 그런데 비정상적으로 사용되니 까 문제가 생기는 것이다. 남에게 해를 준다든지 그렇게 되는 것이다. 인 격이 정상적으로 돌아오면 재주가 있을수록 잘 쓰여질 수 있다. 그런데 만 일 인격이 정상적으로 되지 않고 삐뚤어져 있으면 재주가 많으면 많을수록 문제가 된다. 좀도둑이 대도가 된다. 그러므로 인격은 정상적인 위치에 있 어야 하나님을 표현할 수 있게 된다. 마귀가 인격을 이탈하도록 속임 마귀는 사람의 위치, 즉 인격을 흔들어 혼란시켜 버렸다. 이 위치를 버리 면 신들과 같이 될 수 있다고 속인 것이다. 참으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 길 너희는 동산의 모든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지 말라, 하시더냐? (창3:1) 하면서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 너희 눈이 열리고 신들과 같이 되어 선 악을 알 줄을 하나님이 아시느니라. (창3:5) 라면서 아담을 속인 것이다. 이것은 사탄이 사람에게 너는 숨이 코에 붙었는데 그래 가지고 되겠느냐? 네 위치를 버리면 너도 나와 같이 죽지 않고 능력있는 존재가 될 수 있다 고 속인 것이다. 그러나 아담은 속은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
323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다. 흙은 흙이지 흙이 씨가 될 수 없다. 이 위치를 이탈한 인간은 하나님 나라가 아닌 바벨을 건설했다. 어차피 사람은 건축하는 존재다. 사람은 하나님 나라를 건축하라는 사명을 띠고 이 땅에 태어났다. 그런데 사람이 위치를 이탈해서 건축을 했는데 무엇을 건축했는가 하면 바벨론을 건축했다. 하나님 나라를 건설하기 위해서 만들 어놓은 기능을 가지고 바벨론을 건설하는데 썼다는 것이다. 북쪽을 향해 쏠 대포를 가지고 방향을 거꾸로 돌렸더니 남쪽으로 쏜거와 마찬가지다. 위치가 이탈되면 다른 데로 가버린다. 비슷한 것 같은데 전혀 아닌 것을 만들어버린다. 하나님 나라를 방해하고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은 어떻게 되었는가? 지식은 하나님 같이 되었지만 하나님께 대해서는 죽어 버렸다. 지식에는 하나님 같이 되었다고 할 수 있는데 하나님 나라에 대해서는 죽은 자가 된 것이다. 그러면 인간들이 지금 하고 있는 행위는 무엇이냐? 그것은 죽은 자의 행위이다. 죽음을 실행하고 있는 것이다. 살 아 있다는 이름을 가졌으나 죽은 자다.(계3:1) 하나님을 돕는 천사와 거역하는 천사는 모양은 비슷하나 위치가 다르다. 위치가 다르면 다른 일을 하는 것이다. 아담과 그리스도는 모양이 비슷하 지만 위치가 다르다. 그래서 아담은 대적하는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위하여 죽기까지 복종하시고 부활하신 것이다. 성경이 예수님을 향 하여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분의 영광을 보 니 아버지의 독생하신 분의 영광이요. (요1:14) 라고 하니까 사람들은 굉 장한 어떤 사람으로 생각을 하지만 생각해보라. 갈릴리 바닷가에서 고기를 잡던 사람들이 따라온 그 사람이다. 서른 살 남짓한 청년으로 조금도 우리 와 다를 것이 없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해서 생기기를 우리와 좀 다르게 생겼으면 안 버렸을 것이다. 눈이 세 개라든지 그러면 누구든지 하나님 아들이구나, 하고 알 것인데 똑같으니까 아니라고 버린 것이다. 그래서 아담은 대적하는 자가 되었고 그리스도는 그 나라를 위하여 죽기까
324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지 복종하고 부활하신 사람이 된 것이다. 예수님은 모양은 우리와 같지만 위치가 다르다. 모양이 다른 것이 아니고 위치가 다른 것이다. 하나님 나라는 인격회복으로 시작됨 하나님 나라는 인격의 위치가 회복되어야 한다. 이탈한 인격으로는 하나님 나라를 세울 수가 없다. 그것은 바벨론밖에는 건설할 수가 없다. 인격을 회복하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구속이 필요하다. 원위치로 회복이 필요하다. 구속이란 원래의 위치로 회복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위치를 이탈한 사람은 아담이 나무 뒤에 숨었듯이 자기 위치를 감추고 양심이나 도덕이나 종교 같은 것으로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위치를 감추려고 하는 사람일수록 더욱 그렇다. 양심을 강조하고 도덕을 강조하고 종교를 강조하고 이런 것 을 모두 강조한다. 왜냐하면 그것을 강조하는 뒤에는 자기가 숨어있다. 무 엇을 주장하는 사람은 무엇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주장을 앞세우고 자기 는 숨어있는 사람이다. 사람들은 어떤 주장을 하면 자기가 그 사람이 되는 줄로 생각을 한다. 그래서 사람은 양심을 주장하는 사람, 도덕을 주장하는 사람, 종교를 주장하는 사람, 이런 특이한 사람들이 있다. 아담 안에 있는 우리에게는 그런 것이 조금씩은 다 있다. 그래서 어떤 것 을 주장하여 자신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것을 듣는 것 이 아니다. 단지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이렇게 물으신다. 인격, 그 위 치를 지금 찾는 것이다. 넌 지금 어디가 있느냐? 어느 위치에 네가 있느 냐? 네가 개의 위치에 있냐? 소의 위치에 있냐? 사람의 위치에 있느냐? 이 말이다. 그런데 아담은 나무 뒤에 숨었다고 했다. 선악의 지식나무 뒤 에 숨은 것이다. 이 선악의 지식나무는 여러 나무들로 표현된다. 양심나무! 도덕나무! 종교나무! 많은 나무들이 있다. 능력나무도 있고 의의나무도 있 다. 가인과 아벨은 자신들의 노력의 소출을 가지고 와서 자기들 소출 뒤에 숨
325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었다. 양을 가지고 오고 곡식을 가지고 왔다는 말은 자기들이 농사를 지은 것이기 때문에 자기들이 양을 키운 것이기 때문에 가지고 온 것이다. 그것 들이 자기들을 대표했다. 그러므로 자기들 소출 뒤에 숨은 것이다. 내가 만들어 놓은 것 뒤에 숨었다는 말이다. 그 다음 사람들은 천사들과 결합해서 큰 능력 뒤에 숨은 것이다. 옛적에 강력한 자들 즉 명성있는 자들이 되었다고 했다.(창6:4) 바로 거기 숨었 다는 것이다. 요즘 사회에 나오면 다 그렇게 된다. 사람들이 다 거인들이 되려고 한다. 천사와 결합해서 거인이 되려고 한다. 왜 거인이 되려고 하 는가? 그 뒤에 숨기 위해서다. 마지막으로 큰 도시 바벨론! 바벨탑을 건설했다.(창11장) 왜냐하면 거기서 오르면 자기가 완전히 감춰진 사람이 되고 놀라운 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도시를 건설한 것이다. 나무 뒤에 숨은 인간의 모습이다. 오늘날 인간은 모두 이 선악의 지식 나무 뒤에 숨어 있다. 곧 율법의 세계 아래서 자기 업적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그래서 이 나무는 어떤 경 우에는 돈일 수도 있고, 명예일 수도 있고, 여러 가지 있는데 그런 것 뒤 에 인간이 숨어 있다. 자기는 안 보여준다. 그래도 하나님은 아신다. 양심 뒤에 숨어도 알고, 도덕 뒤에 숨어도 알고, 종교 뒤에 숨어도 알고 하나님 이 다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인간의 업적에 대해서는 관심 없고 오 직 아담아!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물으신다. 씨는 오직 벌거벗은 밭이 필 요하다. 덧 씌어진 밭은 필요 없다. 하나님은 위치를 이탈한 인간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고 묻지만 인간은 이 질문에 답하지 않고 행위로 대답하려고 함 인간은 아담 이후 지금까지 네가 어디 있느냐? 는 질문에는 답하지 않고 항상 행위로 대답을 하려고 한다. 어디 있느냐? 고 묻는데 양을 길러서 왔습니다. 곡식 가지고 왔습니다. 하면서 자기 자신을 내 놓으려고 하지
326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않는다. 왜 자기를 안 내 놓으려고 하는가? 자기가 하나님 같이 되었기 때 문에 못 내 놓는다. 나쁜 일을 해서 못 내 놓는 것이 아니고 자기가 하나 님 같이 되었기 때문에 못 내 놓는 것이다. 행위로 대답하려고 한다. 그래 서 인간은 행위를 내세우려니까 피곤한 것이다. 행위는 쉽게 하는 것이 아 니다. 노력을 얼마나 많이 해야 되고, 해도 해도 끝이 없는 것이 행위인데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가려고 한다. 끝까지 자기 위치를 감추고 있는 것이다. 나무 뒤에 숨어 있던 아담은 여 전히 지금도 여러 가지 나무 뒤에 숨어있는 것이다. 누가 특별히 그렇다는 것보다도 우리 모두가 그렇다. 종교, 능력, 양심, 도덕, 정치 등등으로 자기 를 가리고 뒤에 숨어 있는 것이다. 그 사람 자체를 볼 수가 없다. 다 가려 놓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거창한 사람일수록 보기가 더 어렵다. 왜냐하 면 가리 막이 더 크니까 안 보인다. 사탄은 나무 뒤에 숨어있는 아담을 두둔한다. 그리고 자기 종이 되게 하는 것이다. 숨어 있으니까 종을 만들기가 쉽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담을 구원 하기 위해서 네가 어디에 있느냐? 고 찾고 있다. 왜냐하면 네가 무엇을 했느냐? 고 물으면 진짜 그렇게 물으면 사람은 하나님 앞에 설 수 없다. 어떻게 불꽃같은 하나님 앞에서 내 행위를 가지고 내가 여기 있습니다 하 겠는가! 하나님이 진짜 행위를 물어 버리면 모든 사람이 멸망이 된다. 위 치를 묻는 것이 축복이다. 이 위치를 물을 때 내가 대답을 하면 복이 된다. 행위를 물을 때까지 기다리면 저주가 된다. 율법을 주신 것은 율법을 주어 서 우리의 행위를 묻는 것이다. 그런데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를 몰랐는데 율법이 오니까 나의 죄가 드러난다.(롬3:20) 율법으로는 어떤 육체도 하나 님의 눈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없다는 것이 증명되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는 율법으로 자신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할 수 없기 때문에 율법 밖에 있는 한 의( 義 )가 필요하게 되었다. 그것이 예수님의 구속이다.(롬3:24) 위치를 이탈한 인간을 원 위치시키신 것이다
327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우리를 구속하기 위해서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냐? 고 위치를 물으시지만 선악과를 먹은 인간은 변명만 계속 하니까 우리의 구속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신 것이다. 진짜 행위를 물으면 멸망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위치를 물은 것이 축복이고 은혜다. 인간은 위치를 이탈하여 자신을 변명하고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면 사탄에 게 끌려 다니게 되어 있다. 왜냐하면 내가 내 위치를 내 놓으면 쉬운데 내 위치를 감추려고 계속 변명을 하면 내가 행위를 가지고 자꾸 변명하게 된 다. 행위를 가지고 변명을 하다 보면 인간은 불완전하다 이렇게 나온다. 언제나 불완전하기 때문에 거기 끌려 다닌다. 그래서 오 나는 비참한 사 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롬7:24) 이렇게 된다. 왜냐하면 내가 행위를 내 놓으려고 하면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하나님 앞 에 설 수가 없다. 설 수가 없으니까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이렇게 된다. 사탄은 무엇을 원하는가? 사탄은 우리가 무용지물이 되기를 원한다. 하나님께 쓰이지 못하게 되기를 원한다. 오 나는 비참한 사람이로다. 하고 있는 한 하나님께 쓰일 수가 없다. 끌고 다니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을 해결하고 하나님 나라를 전파하기 위해서 광 야로 나가서 마귀와 접전을 하신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시험을 받는 것과 는 다르다. 성경을 자세히 읽어보면 예수님께서 40일 금식하고 주리신 상 태에서 광야로 나가셨다 육신을 가진 인간으로 최악의 상황에서 사탄과 접 전하신 것이다. 사탄에 비해 연약한 인간의 위치, 이 위치를 회복하기 위 해서 일부러 마귀의 시험을 받은 것이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이것 이 마귀의 말이었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이렇게 해봐라. 네가 하나님 아들이거든...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렇다면 돌로 빵을 만들어봐라. 네 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렇다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려봐라. 이렇게 시 험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하나님 아들이 무엇인지 알고 사탄이 하는 말이다. 사람들은 도덕이든지 종교든지 뭐든지 완전무결한 자를 하나 님 아들로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사탄은 네가 하나님 아들이야? 그러면
328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돌로 빵을 한번 만들어 봐라, 하고 시험을 한 것이다. 그러니 행위 안에 있는 사람들은 아무도 그 시험에 대답할 수가 없다. 아 무리 똑똑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네가 하나님 아들이라면 이러면 자라 모 가지가 들어가듯 쏙 들어가 버린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것이 마귀의 우롱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대답이 나는 사람이다. 라 는 것이었다. 그 세 가지 대답의 요점이 나는 사람이다. 라는 것이다. 나 는 사람이다. 나는 하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사람이다. 네가 말하는 그 하 나님의 아들이 아니고 나는 사람이다. 어떻게 사람이 돌로 빵을 만들어 먹 느냐? 어떻게 사람이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 내리냐? 나는 사람이다 는 말 에 마귀가 물러나더라는 것이다. 그러니 이 싸움이 묘한 싸움이다. 이 간단한 말을 가지고 전쟁을 한 것이 다.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그러면 나는 인간이다. 이러면 끝나는 전쟁 이다. 이렇게 하면 끝나는 전쟁을 변명하고 또 변명을 하다 보니 수 천 년 을 내려오고 내려올수록 변명은 더 많아지고 짐은 더 많아져서 끝이 없는 것이다. 이 끝없는 전쟁에 수많은 책들이 나오고 수많은 작품들이 나왔다. 인간이 인간으로서의 자기 위치를 가져야 이런 변명이 없어지게 된다. 알 고 보면 간단한 문제다. 나는 인간이다. 너 돈이 있으면 이것 좀 해봐라 할 때 돈이 없는 사람이 있는 척 하려면 어렵다. 없으면 없다고 하는 것이 쉽다. 없는 사람이 있는 척 하려면 어렵고 있는 사람이 또 없는 척 하는 것도 어렵다. 사람이 사람으로 있으면 아주 쉽다. 숨이 코에 붙었으니 숨이 코에 붙은 인간으로서의 자기를 인정하면 쉽다. 내가 누구를 판단할 자격이 있는가, 내가 누구를 심사할 자격이 있는가, 아무 자격도 없다. 그러니 나는 아무 런 자격도 없다 하면 쉽지만 뭔가 있는 걸로 생각하면 어렵다. 자기가 판 단한 그것으로 또 자기가 판단을 받는다. 내가 다른 사람의 이러저러한 점 을 판단을 했다면 다른 사람이 나를 또 그것으로 판단을 한다. 그러니 끝
329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이 없게 된다. 예수님께서는 이 전쟁에서 승리하시고 난후에 그때부터 복 음을 선포하셨다. 그때부터 예수님께서 선포하기 시작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하늘의 왕국 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마4:17) 여기서 승리하지 못하면 복음이 안 된다.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는다. 그 러니 교회가 아무리 있어도 하나님 나라가 안 되는 이유가 바로 이것 때문 이다. 하나님 나라가 되려면 인간이 자기 위치를 알아야 된다. 나는 영적 이니 안하니 이런 것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되지 않는다. 아무리 해도 오합 지졸일 뿐이다. 나는 인간이다. 이것을 알아야 한다. 하나님 나라의 구성체 는 정상적 인간들이 모인 연합체다. 예수님은 하나님 아들인 체하다가 송사하는 사탄에게 속아서 자신의 위치 를 부인하고 변명하는 인간을 구속하기 위해 하나님이 지으신 인간임을 선 포하심으로서 승리하셨다.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고 하다가 속아서 종이 되었으나 예수님은 사람의 진실한 위치, 즉 인격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드러내어 승리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 복음을 선포하셨다. 이것이 인간 승리다. 아담은 하나님 같이 되려 하다가 속아서 종이 되었지만 예수님은 사람의 진실한 위치에서 그 인격을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오히려 드러내어 승리 하셨다. 왜 아담이 그렇게 했는가? 인격을 부끄러워 한 것이다. 자기 인 생의 본질을 생각해 보니 한줌의 흙에 불과하고, 언제 죽을지 모르겠고 그 래서 너무 초라했던 것이다. 그래서 이것을 벗어나 하나님처럼 되어 팔자 고치려고 선악과를 먹은 것이다. 다른 것이 아니다. 사람이라는 것이 참 자랑스럽고 사람이라는 것이 너무 영광스럽게 보였다면 왜 그것을 먹었겠 는가? 하나님이 먹지 말라 한 것을 왜 먹었겠는가? 사람의 위치가 천사에 비해 너무 초라하다는 것이다. 얼마나 초라하냐?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그 사람처럼 초라하다는 것이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믿었던 그 사람이 지
330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금 나무에 매달려 꼼짝 못하고 죽었다. 그것을 아담이 본 것이다. 그냥 먹 었겠는가 생각해 보라 그 인격을 부끄러워하면 우리는 속아 넘어간다. 그 자리를 부끄러워하면 예수 믿으나 안 믿으나 마찬가지다. 이 자리를 부끄 러워하면 넘어가 버린다. 신앙이 좋고 안 좋고 이것도 아무 소용없다. 이 위치를 부끄러워하면 나는 속아 넘어가 버리고 만다. 지금 모든 이단들은 보라. 사람들을 어떻게 유혹하는가? 모두 이것을 가지고 유혹하고 있다. 그런데 예수님은 오히려 이것을 드러내고 승리 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왕국 복음을 선포했다. 이것이 인간 승리다. 복음 선포는 어떤 의미에서는 인간선포를 의미한다. 인간승리를 선포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승리이기도 하지만 또한 인간승리이기도 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죽기까지 인간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지 키셨다. 이를 통해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을 죽음으로 확증한 것이 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사람들은 열심히만 하면 언젠가 자신들도 죽 지 않는 신이 될 수 있다는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살았다. 사람들은 드디 어 예수님에게 와서 그것이 이루어지는 주는 알았다. 그런데 그만 예수님 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말았다. 모든 아담의 기대와 소망이 끝나버린 것 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이 사람을 하나님이 참사람으로 인정하셨다. 그래서 하나님이 주신 새 생명으로 부활한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살았다고 하는 것은 죽은 것 이고 하나님이 인정해 주신 인격만 살았다는 것이다. 인격의 승리, 죽었는 데 승리다. 이 승리를 인정하면 이것이 우리가 거듭나는 것이다.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크다는 말이 있다. 기대를 안했더라면 실망도 없을 텐데 기대 를 잔뜩 했다가 실망이 컸다. 하나님같이 될 것이라는 기대가 컸으니 사망 이 온 것이다. 그런데 인격이 승리하면 사망이 없어진다. 사망이 승리에 삼킨바 될 것이다. 사망은 인격의 승리 앞에 무능해 질 것이다.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에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 (창2:17) 하였
331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으나 아담은 숨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을 것이 다. 그런데 율법이 와서 죄를 깨닫게 하면 사망에 빠지는 것이다. 자기는 종교와 율법과 양심으로 다 변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만 정작 율법이 오 면, 시험지가 오면 죄를 깨닫게 된다. 공부를 못한 것이 언제 불거지는가? 시험지가 올 때다. 율법은 시험지나 마찬가지다. 율법이 오기 전에는 죄가 있어도 죄가 죄인 줄 몰랐다. 죄라고 규정이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율법이 오더니 죄가 죄로 다 드러났다. 행위를 자랑하려고 하면 결 국 마지막은 사망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 아담에게 네가 어디에 있느 냐? (창3:9) 이 말이 얼마나 은혜로운가!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라 했다.(고전15:56) 사망을 쏘는 것은 침이다. 죄가 찌르는 것이다. 죄의 힘은 무엇인가? 율법이다. 율법이 법률적으로 뒷받침하여 사망이 오게 된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 로 말미암아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한다. 우리가 누구로 인해서 이 겼는가? 예수님으로 인해서 이긴다. 예수님의 승리를 우리가 확실히 아는 것이 너무 중요하다. 내가 지금 이기느냐, 지느냐가 중요하지 않다. 예수님 이 승리한 것이 중요하다. 예수님께서 승리하면 그 안에서 내가 승리한 것 이다. 내가 승리할 수 없도록 승리하는 것이 아니라 나도 승리할 수 있도록 승리하신 것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에게 훈련을 받아서 예수님처럼 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공자님에게 훈련받으면 공자님이 되겠는가? 석가모니에게 훈련받 으면 석가모니가 되겠는가? 안 된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에게 훈련받아서 인간이 되려면 되겠는가? 안 된다. 그런데 예수님의 승리는 그렇게 승리하 신 것이 아니고 나도 승리하게끔 승리하신 것이다. 인격만 있으면 누구나 승리하도록 만들어놓았다. 이것이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이다. 인격으로 승 리하신 것, 이것은 누구나 승리하도록 만들어 놓았다. 누구나 다 인격이라 는 자리가 있다. 인격밖에 없는 인간들의 대표자가 승리하신 것이다
332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아무 것도 없다. 물위를 걸어간 것도 없어졌고, 오병 이어로 5천명을 먹이신 것도 없어지고 다 없어졌다. 인격밖에 없다. 사람 이 저런 것이구나 하는 인격밖에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그 자리에서 사탄 이 물러갔다. 사탄이 할 말이 없어졌다. 인격밖에 없는 대표자로 승리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이 다 승리한다. 동그라미만 치고 나오면 다 100점이 되 도록 문제를 내놓았다면 이 세상에 있는 어떤 누구도 다 합격할 것이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승리하신 것은 우리의 모두의 승리를 대표하신 것이 다. 인격의 승리를 대표한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의 승리를 내가 확실히 아는 것이 중요하지 나를 점검해보고 있으면 안 된다. 예수님은 십자가에 서 인격밖에 없는 인간의 대표자로서 승리하셨다. 인격이 승리하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인간의 모든 문제는 이것 때문 에 온 것이다. 사람이 왜 불안한가? 사람이 왜 부끄러운가? 사람이 왜 못 난 짓을 하는가? 사람이 왜 그런가? 생로병사가 왜 왔는가? 왜 인생은 이 모양인가? 이 모든 문제가, 이 모든 불만이 어디서 오는가? 인격이 죽어서 다. 인격이 승리하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아무것도 부족한 것이 없어진 다. 정말로 부족한 것이 없어진다. 물론 돈은 필요하다. 돈 제외하고, 인격 이 승리하면 인생문제는 다 없어진다. 생명은 하나가 완전해지면 모든 것이 제 자리로 돌아온다. 인간의 문제는 인격을 잃어버린 데서 온 것이다. 사탄은 이것을 손상시킨 것이다. 술집을 만들어라, 빠찡코를 만들라고 한 것이 아니고 인격을 흔들어버렸다. 인간 의 근원적 문제를 건드린 것이다. 인간이 많은 문제가 있는 것 같지만 문 제는 단 하나다.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이다.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활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인생의 정상적 위치를 지킴으로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하셨다.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신 것이다.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인생의 진실을 지킴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이것이 바로 인격의 승리고 신실하신 이와 참
333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되신 이가 승리한 것이다.(계19:11) 주님의 일이란 인격의 승리는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는 굳게 서서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을 넘치게 하라. (고전15:58) 라는 말씀은 주님이 이루어 놓 으신 인격의 승리를 전하는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는 의미다. 예수님은 죽은 자 가운데서 인격으로 부활하셨다. 어떤 죽은 사람인가? 공 동묘지에 있는 사람인가? 그것이 아니다.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날 에 반드시 죽으리라 (창2:17) 고 했던 그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나신 분이 다. 사탄에게 유린되었던 그 인격이 부활한 것이다. 그분의 승리는 인격의 승리다. 주님의 일은 무엇인가? 인격을 제 위치로 되돌리는 것이 주님의 일이다. 고린도전서 15장은 부활장이다. 사도 바울은 부활에 관해 여러 가지 말을 하다가 갑자기 15장 맨 마지막 절에 그러므로...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 을 넘치게 하라.(고전15:58) 라고 말하고 있다. 무엇에 흔들리지 말라는 것인가? 물론 사도바울은 우리가 부활할 것이니 현재의 고난에 흔들리지 말고 소망을 가지고 살라는 의도도 될 수 있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 보다는 우리가 무슨 모양으로 부활을 할 것인가, 어떻게 될 것인가, 저 사람이 부 활하면 나는 부활하지 않을 것인가, 이런 식으로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그리고 언제 부활할 것인가, 지구는 언제 종말이 올 것인가, 이런 헛생각 을 하지 말라는 것이다. 또 그것뿐이겠는가. 그 외에도 인생의 여러 가지 헛된 것을 생각하지 말라는 것이다. 인격이 승리하면 다 승리하는 것이다. 그것이 주의 일이다. 예수님이 오신 것은 이것을 회복시키기 위해서 오셨다. 흔들리지 말고 주의 일에 더욱 힘 쓰는 자들이 되어야 한다. 숨기면 지는 것이다. 두려워하지 않고 다 내놓으면 승리한다. 예수님은 사 탄 앞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면 죽을 수 밖에 없는 인생의 위치를 부끄러워 하시지 아니하시고. 고난을 받으시고 하나님 왕좌 우편으로 올라가셨다
334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그분께서는 자기 앞에 놓인 기쁨으로 인해 십자가를 견디사 그 수치를 멸 시하더니 이제 하나님의 왕좌 오른편에 앉으셨느니라. (히12:2) 고난 받는 것이 육신의 고통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 던 사람을 향하여 네가 하나님 아들이냐, 인간도 제대로 안 된 놈이 무슨 하나님 아들이냐? 고 조롱받는 것이 더 괴로운 일이다. 죽는 것은 어차피 죽을지라도 심지어는 제자들마저도 고개를 돌리고 가버렸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볼 때 베드로가 고개가 쑥 빠져서 간다, 요한이 고개가 축 늘 어져서 간다, 그것이 얼마나 괴롭겠는가!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 주신 인생의 위치를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신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 앞에 자기 모습을 드러내어서 우리를 구속하셨다. 그것을 우리가 영광스럽게 생각하고 진실로 생각해야 내 인생이 진실해진다. 그것 을 모르면 내 인생이 아무리 진실하려고 해도 진실해질 수가 없다. 무엇 이 진실인 줄 모르는데 어떻게 진실해지겠는가! 주님의 일은 우리 인격을 되찾아준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이 인격 의 세계를 확장시켜야 된다. 기능 위주, 능력 위주로 가고 있는 세상에서 우리가 할 일은 인격을 선포하는 일이다. 이것을 멸시하는 인간들에게 이 것을 멸시하면 안 된다는 것을 알려주어야 한다. 피조물은 각자의 근원이 있는데, 근원을 이탈해 있으면 아무리 해도 안 된다. 다독여도 안 되고 쓰 다듬어도 안 된다. 그 문제를 해결해준다고 되겠는가? 안 된다. 그리고 또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다. 그런데 이 한 가지 문제만 해결하 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 인간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유일한 마스터키가 이것이다. 인격을 잃어버려서 문제가 생겼는데 다른 것을 아무리 한다고 해서 되겠는 가? 옛날에 비하면 우리가 얼마나 잘 살고 있는가. 얼마나 부유하고 편안 한가? 그런데 인생문제가 더 많다. 옛날에 시골에 살 때는 인생문제가 별 로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너무너무 인간문제가 복잡하다
335 22.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우리가 모든 조건을 가질수록 문제는 더 많아진다. 왜? 인격이 점점 감 추어지기 때문이다. 자꾸자꾸 인격은 속으로 들어가고 다른 것을 가지고 인생을 해석하려고 하니까 더욱 더 복잡해진다. 아무것도 없는 사람 같 으면 계산하고 이사 가기 쉬운데 뭐가 많으면 이사 가기도 어렵다. 똑같 다. 이건희 회장 같은 사람은 죽음을 정리하려고 하면 너무너무 어렵다. 엄청난 기업이다 보니 회계사 등을 다 동원하여 인수인계하려고 해도 너 무 너무 어렵다. 인간 문제는 조건을 더 만들면 더 쉬워지는 것이 아니고 점점 더 어려워진 다. 왜냐하면 문제는 단순한 것인데, 이 단순한 문제를 복잡한 것으로 해 결하려고 하기 때문이다. 인간의 문제는 간단하다. 위치를 이탈했다는 것 이다. 주님이 하신 일은 무엇인가? 위치를 이탈했던 인류를 원 위치시키셨 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께서 이루어 놓으신 인격의 승리를 전하는 것 이 복음이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지금도 네가 어디 있느냐?(창3:9) 고 묻 고 계신다
336 23. 반론에 답하여 23. 반론에 답하여 (사람의 몸이 영생하도록 창조되었으나 죄로 인해 죽음이 왔다는 주장에 대하여) 1. 하나님은 사람을 완전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에 사람의 본질은 창 세기 2장까지 완전성과 불멸성이다. 성경에서 완전이라는 의미는 세상에서 말하는 완전이라는 의미와 다르다. 또 완전한 것이 불멸성을 말하지 않는다. 각각의 피조물은 창조자의 목적 안에서 다 완전하게 창조되었다. 불완전한 피조물은 없다.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성경은 우리와는 다른 생명을 가진 사람들이 쓴 글 이다. 그래서 성경을 우리의 일반적 상식으로 이해하면 안된다. 거룩이란 개념이 세상의 관념과 다르듯이 완전이라는 개념도 다르다. 특히 성경에서 완전이라는 용어도 기본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말 한다. 그러니까 성경에서의 완전이라는 의미는 완성의 의미가 있다. 씨- 하나님도 완전하시지만 흙-사람과 연합을 통해 완전해 지신다고 할 수 있 다. 세상의 모든 살아있는 것은 연합을 통해 살아간다. 어떤 존재도 독야 청청 혼자 완성되는 것은 없다. 예를 들어 어떤 물질도 단독으로 반응하지 않고 서로 연합을 통해 작용하고 반응 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경륜 의 대원칙인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결혼이라는 연합의 원리가 하 나님께서 자신의 경륜을 이루어 가시는 방법이다. 이것을 성경은 완전으 로 표현하고 있다. 창세기 6장 9절에서 노아는 의인이요, 그의 세대들 가 운데서 완전한 자더니 라는 말씀이 있다. 이것은 당시에 노아를 제외한 다 른 사람들은 하나님과 연합하지 않았고 관계가 끊어졌다는 것이다. 신약에 와서 보면 신약성도를 향해 완전한 자로 표현하고 있다
337 23. 반론에 답하여 이것은 성도들을 완전하게 하고 섬기는 일을 하게 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 하려하심이라. 마침내 우리가 다 믿음과 하나님의 아들을 아는 것 에서 하나가 되어 완전한 사람에 이르고 그리스도의 충만하심의 장성한 분량에 이르기까지 이르리니(엡4:12~13) 그러므로 우리 완전한 자들은 다 이같이 생각할 지니 만일 어떤 일에서 너희가 달리 생각하면 하나님께서 바로 이것을 너희에게 드러내시리라. (빌3:15) 우리가 그분을 선포하며 각 사람에게 경고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완전한 자로 드리고자 함이니라.(골1:28) 이외에도 골로새서 4장 12절, 디모데후서 3장 17절, 히브리서 13장 21절 등이 있다. 신들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아담의 기준으로 보면 사람은 누구나 흠이 있고 불완전하다. 땅에 존재하는 살아있는 모든 피조물은 연 합을 통해서 완전해지지만 영계에 있는 신들(천사들)은 연합하지 않는다. 스스로 존재한다. 사람들은 죽지 않는 신이 되어야 완전하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신약성경은 육신이 죽는데도 불구하고 분명히 신약성도들을 완전하 다고 말하고 있다. 육신이 죽는다고 해서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완전한 것이다. 신들의 세계와 사람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다. 물고기의 세계와 독수리의 세계는 비교대상이 아니다. 아담은 여기에서 사 탄의 유혹에 넘어갔다. 그러나 하나님은 신적인 사람을 완전하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과 연 합된 사람을 완전하다고 보신다. 불완전한 피조물은 없다. 개는 개대로, 하 루살이는 하루살이대로 완전하다. 죽는다고 불완전한 것이 아니다. 아담이 왜 선악과를 먹고 신들과 같이 되고 싶었는가? 죽지 않는 신을 보았다는 것이다. 사람의 불행은 항상 남과 나를 비교하는데 있다. 사람의 인식은 보지 않은 것은 인식할 수 없다. 예를 들어 스마트폰을 문명과 격리된 오
338 23. 반론에 답하여 지의 사람들에게 갖다 주어보았자 그들은 그것이 무엇인지 모른다. 지금껏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는 것을 불완전하게 생각하는 것은 죽지 않는 무언가를 보았다는 것이다. 만약에 죽지 않는 천사를 보지 못했다면 죽는 것을 당연하게 생각했을 것이다. 생명 노선 안에서의 육신의 죽음을 주님은 부정적으로 보지 않고 죽지 않았고 잔다 (마:9:24, 막5:39, 눅 8:52, 요11:11) 라고 하셨다. 왜냐하면 생명의 열매를 맺는 과정이기 때 문이다. 그러나 아담이 타락한 후 사망의 노선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종국 적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기 때문에 이 죽음이 부정적인 것으로 변하게 된 것이다. 시편 8편 5절에 보면 주께서 그를 천사보다 조금 낮게 만드시고 라는 말씀이 있다. 이 말씀은 죄가 들어오기 전의 아담을 향한 말씀이라는 것에 대부분 동의한다. 낮게 창조된 것이 무엇인가? 시편에는 답이 없다. 그런 데 그 답이 히브리서 2장 9절에 기록되어 있다. 다만 예수님을 보노니 그분께서 죽음의 고난을 당하시려고 천사들보다 조금 낮게 되셨다 가... (히2:9)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다는 말은 천사는 영으로 창조되어 죽 지 않지만 사람은 육신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한번은 죽는다는 것이다. 즉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씨를 발아하려면 선악과든 생명과든 먹으면 한번은 죽도록 되어 있다. 2. 사람의 영이 천사나 사탄, 하나님의 영과 같이 영원함으로 사람 의 육신은 영생을 가졌다
339 23. 반론에 답하여 피조물의 영과 하나님의 영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아주 잘 못된 것이다. 이것은 영원한 생명에 대한 오해에서 불거진 것이다. 영원한 생명의 조건은 1 피조되지 않은 생명이고, 2시작도 없고 끝도 없 으며, 3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이고 4 하나님의 생명이자 삶이고 5 하나 님의 영으로 하나님 자신이다. 6 피조물의 입장에서는 관계적 생명이다. 피조물의 영은 피조된 영이지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사람들은 영생이 어떤 독립적으로 있는 생명 덩어리로 생각한다. 그러나 영생은 어떤 덩어리가 아니다. 피조물이 영생을 얻는다는 것은 영생이신 하나님과 연결된다는 것이다. 만일 영원한 생명이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 이라면 하나님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사형선고는 죽을 수 있으니까 사형 선고를 내리는 것이지 어떻게 영원한 생명을 가졌는데 사형선고를 내리는 가? 비록 천사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고 있지 않지만 영적 존재이기에 죽지 않는다. 그래서 천사한테는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사람은 육체가 죽 을 수 있으니까 사형선고를 내릴 수 있는 것이다. 우리도 하나님의 형상으로서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께 연합되어 하나님을 표현하는 것이 영생이라는 것이다. 사람도 자신의 생명은 보이지 않지만 내 육신은 내 생명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나무를 보더라도 보이지 않 는 뿌리가 실재고 지상으로 보이는 나무는 그것의 형상이다. 지금 우주 만 물이 다 이런 개념이다. 만물은 모두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하나님의 어떠함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실재와 형상, 씨와 열매, 아버지 와 아들의 나라를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의 영이 천사나 사탄의 영과 같이 소멸되지 않는다고 해서 영원한 생 명을 가졌다면 이것은 큰 모순이다. 어떻게 사탄이 하나님의 생명을 가질 수 있는가? 소멸되지 않는 영과 영원한 생명은 다르다. 소멸되지 않는다 고 해서 영원한 생명이 아니다. 천사의 영이나 사람의 영은 피조된 영으로
340 23. 반론에 답하여 만들어진 시점이 있으나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이기에 시작이 없다. 또 사탄의 영은 신성하고 거룩한 생명이 아니다. 사탄의 영과 하나님의 영 을 동일시 하는 것은 사탄을 하나님과 동일시 하는 오류가 발생한다. 하나님은 사람을 흙으로 빚으시고 생명의 숨 을 불어넣어 사람을 완성하셨 다. 생명의 숨도 하나님의 영이 아니다. 하나님의 영은 피조된 영이 아니 다. 생명의 숨이라는 말은 모든 피조물에게 다 사용된다. 생명의 숨이 영 원한 생명이라면 모든 피조물이 다 영생이 있다는 것이 된다. 노아의 홍수 때 콧구멍에 생명의 숨이 있는 모든 피조물은 방주 안에 있는 것을 제외 하곤 다 죽었다. 마른 육지 위에 있던 모든 것 중에 콧구멍에 생명의 숨이 있던 모든 것이 죽 었더라.(창7:22) 사람은 죄를 지어서 콧구멍에 생명의 숨이 있는 것이 아니고 다른 피조물 과 같이 창조 때부터 숨이 코에 있는 것이 인생이다.(창2:7, 사2:22) 생명 의 숨이란 단지 육신을 가진 피조물이 살아 있느냐 죽어 있느냐를 판가름 하는 기준이다. 지구상에 존재하는 생물의 영은 그 생물의 생명이지 영원 한 생명은 아니다. 생명의 숨 이란 그 생물의 영이라는 의미다. 우리가 숨을 쉬는 것은 우리 안에 영이 있기 때문에 숨을 쉬는 것이다. 영과 숨은 하나로 연결되어 있고 영이 없는 육체는 숨을 안 쉰다. 각 피조물의 영은 그 피조물의 생명을 대표한다. 그래서 지구상에 있는 육체를 가진 피조물 의 생명도 영-숨이 좌우한다. 영이 없는 몸은 죽은 것이다.(약2:26) 사람 의 영과 하나님의 영은 다른 것이다. 아래 말씀에서도 사람의 영과 하나님 의 영을 분명하게 구분하고 있다. 너희는 다시 두려움에 이르는 속박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양자 삼으시는 영을 받았느니라. 그분을 힘입어 우리가 아바, 아버지, 하고 부르짖느니라. 성령께서 친히 우리의 영과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언하느
341 23. 반론에 답하여 니라.(롬8:15~16)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위 말씀은 우리의 영 안에 하나님의 영이 들어와 있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가 받은 성령은 원래 우리에게 없던 것이었 고 외부로터 새롭게 받은 것이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이고 우리의 영은 우리 자신이다. 그런데 이것을 동일하게 보는 것은 하나님의 영과 피 조물의 영에 대한 오해이다. 성경이 말하는 세계는 크게 두 개의 세계로 나누어진다. 하늘과 땅이다. 하늘은 영에 속한 세계고 땅은 육에 속한 세계다. 두 세계는 차원이 다른 세계다. 그 세계에 살려면 그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한다. 영의 세계에서 는 영적인 몸을, 육에 속한 세계에서는 육에 속한 몸을 입어야 한다. 지상 에서도 물속에서 사는 물고기의 세계와 공중에 날아다니는 독수리의 세계 는 다르다. 그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거기에 살 수 있는 것이다. 천사와 사람을 비교하는 것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비교대상이 아니다. 아담이 왜 타락했는가? 비교대상이 아닌 것을 비교했기 때문에 타락한 것이다. 천 사는 하늘에 살도록 되어 있고 사람은 땅에 살도록 되어 있다. 천사는 영 의 세계에 살기 때문에 자신을 대표하는 몸이 영적인 몸이고 사람은 땅에 살기 때문에 육신적 몸을 입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최종적인 목표는 무엇인가? 영과 육의 세계가 연합되는 것이다.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되는 것이다. 이런 까닭에 남자가 자기 아 내와 결합하여 그들이 둘이 한 육체가 될지니 이것은 큰 신비라, 그러나 내가 그리스도와 교회에 대하여 말하노라.(엡5:31~32) 바울은 아담과 이브 의 연합에 대해 그리스도와 교회의 연합이라고 말하고 있다. 즉, 아담과 이브가 연합하는 것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을 예표하고 있다. 그 런데 이 연합은 어떻게 완성되는가? 죽을 것이 생명에 삼켜짐으로 실제적 으로 연합되는 것이다.(고후5:4) 이런 과정을 통해 사람뿐만 아니라 모든 창조물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간다
342 23. 반론에 답하여 이는 피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 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롬8:21) 사람도l 헌물로서 불-하나님께 태워져 영생을 얻듯이 모든 창조물도 불- 하나님께 태워져 영원한 세계로 전환되는 것이다. 사람도 죄 이전에 하나 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불-하나님께 태워져야 하듯이 다른 피조물도 죄 이전에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불-하나님께 태워져 썩지 않을 영원 한 세계로 재창조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날이 오기를 기다리고 서두르라. 그 날에 하늘들이 불이 붙어 해 체되고 원소들도 뜨거운 열로 녹으려니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분 의 약속에 따라 의가 거하는 새 하늘과 새 땅을 기다리는도다.(벧후 3:12~13) 보라, 내가 새 하늘들과 새 땅을 창조하리니 이전 것은 기억나지 아니하고 생각나지 아니하리라.(사65:17)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고 하늘과 땅이 하나로 통일되는 세계가 하나님의 최종완성이다. 그것이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완성된 곳이 새 하늘과 새 땅에서의 새 예루살렘이다. 또 내가 새하늘과 새 땅을 보았으니 처음 하늘과 처음 땅은 사라졌고 바다 도 다시는 있지 아니하더라. 나 요한이 보매 거룩한 도시 새 예루살렘이 신부가 자기 남편을 위하여 단장한 것 같이 예비한 채 하늘에서 하나님께 로부터 내려오더라.(계21:1~2) 피조물은 원래 영원한 생명-하나님의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하나님의 영은 하나님 자신으로 창조되는 것이 아니다
343 23. 반론에 답하여 3. 살아 있는 혼(living soul)이 살아계신 하나님(Living God)과 동 일한 Living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불멸이기 때문에 사람의 육신 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다. 사람은 영, 혼, 몸으로 구성되어 있다. 사람은 살아있는 혼이라는 것은 사 람의 주체가 혼이라는 것이지 영원한 생명은 아니다. 육신은 장막과 같은 것이고 그 안에서 주관하는 것은 혼이라는 것이다. 사람에게 있어 혼이란 사람을 주관하는 기능이다. 물론 사람의 영과 혼은 불멸하지만 그 영과 혼 이 사람의 육신을 영생하게 하는 것은 아니다. 사람의 영은 사람의 생명의 근원이다. 영은 혼을 살게 하고 육신을 살게 하는 것이다. 피조물의 영은 그 피조물의 생명이고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을 예표한다. 그렇다고 그 영이 하나님의 영은 아니다. 또 혼 단독으로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예 를 들어 자동차에는 어떤 기능들이 있다. 그러나 그 기능은 기름이 들어오 지 않으면 죽은 거와 같다. 기름은 영과 같고 그 자동차의 생명의 근원이 다. 만물이 다 이런 식으로 작동된다. 어떤 기능이 있는데 생명의 공급 없 이 혼자 움직이는 것은 없다. 또 사람만이 혼을 가지고 있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물은 다 혼을 가지고 있다. 모든 생물의 혼과 모든 인간의 호흡이 그분의 손에 있느니라.(욥12:10) 혼은 살아 있는 피조물의 생각과 감정과 의지를 주관하는 기능이다. 그래 서 자아라고 하는데 사람만 생각하는 것이 아니고 동물들도 어느 정도 생 각한다. 그런데 사람만의 특별한 점은 무엇인가? 말씀이 육신이 될 가능성 이 있다는 데 있다. 곧 하나님의 생명을 받아 드릴 가능성이 있다는 것이 다. 동물들의 언어는 창조 안에서 정해져 있다. 같은 동물들은 지구상에서 서로 다른 곳에서 태어나도 언어가 소통된다. 그러나 사람은 그렇지 않고 그 말씀을 받아드리는 대로 말을 한다는 것이다. 여기에 인간의 가능성이
344 23. 반론에 답하여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사탄의 말을 받아 드리다가도 하나님의 말씀 을 받아드릴 수 있다는 것이다. 살아 있는 혼이란 흙과 같고 여자와 같은 빈 그릇이라는 것이다. 위치적으로는 혼은 영과 육신 사이에 있다. 그래 서 육신은 단지 혼을 감싸고 있는 옷과 같고, 장막과 같고 집과 같은 것이 다. 우리가 이 장막에서 신음하며 하늘로부터 오는 우리의 집으로 옷 입기를 간절히 원하오니(고후 5:2) 성경에서 살아 있는(living) 이라는 단어는 창세기 1장 21절, 24절, 창 세기 2장 19절, 창세기 9장 10절, 12절, 15절 등에 모든 살아있는 피조 물(every living creature) 할 때 살아 있는(living)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 이외에도 많이 있는데 이는 단지 무생물과 생물, 또는 육 신적 죽음과 생존을 대별해서 사용하고 있을 뿐이지 살아 있는 (living) 라는 단어가 피조물에 적용한다고 해서 영생의 의미가 포함되 어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면 모든 살아있는 피조물 이 영생이 있다는 논 리가 생긴다. 그러므로 살아있는 혼(living soul) 이 영원한 생명이라 는 의미는 아니다. 살아 있는 혼(living soul) 이라는 의미는 하나님께서 사람을 먼저 흙 으로 혼적 기능이 있는 인간을 만드시고 코에 생명의 숨을 불어 넣으니까 그 혼의 기능이 작동되었다는 것이다. 자동차를 만들고 기름을 넣어 작동 시키는 거와 똑 같다. 혼이 단독으로 작동되는 것이 아니다. 모든 존재에 게는 외부적인 위치적인 면과 내부적인 기능적인 면이 있다. 위치는 변화 될 수 있지만 기능은 변화되지 않는다. 자동차의 예를 들어보자, 주인이 바뀌는 것은 위치가 바뀌는 것이다. 그렇다고 그 기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 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아들의 위치에서 종의 위치로 바뀌었다고 해서 기 능이 바뀌는 것은 아니다. 살아 있는 혼은 우리의 내부적인 기능을 말하는 것이지 그것이 영생은 아
345 23. 반론에 답하여 니다. 영생은 오직 하나님의 생명이자 하나님 자신이다. 살아 있는 혼인 사람에게 영원한 생명은 없었다. 영원한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기 때문에 태어나는 것이지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천사도 죽지 않지만 영원한 생 명이 아니기 때문에 창조된 것이다. 그러나 사람만은 거듭남으로 영생을 얻는 것이다. 천사는 왜 거듭남이 없고 1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는가? 그것은 천사는 죽 지 않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아니기 때문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또 천사 는 씨로 창조되었기에 한번 타락하면 그것으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다. 씨 는 잘 못되면 버려야지 다시 고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은 흙이기 때문에 잘못되었다 하더라도 다시 부시고 그 재료를 가지고 다시 만들 수 있다는 것이다. 4.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죽을 운명으로 창조하셨다면 무덤은 조 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 (고전 15:55~57)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 느냐? 사망의 쏘는 것은 죄요, 죄의 힘은 율법이니라. 그러나 우리 주 예 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고전 15:55~57)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구별 하지 못한 오해이다. 인생은 흙- 육체이기 때문에 죄가 없더라도 원래부 터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한 번 죽도록 창조되었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한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로 사탄의 씨가
346 23. 반론에 답하여 들어가면 사탄의 아들이 되는 것이다. 어떤 씨도 흙에 들어가면 열매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로 부활의 열매가 되는 과정은 철저히 유기적인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어떤 법리적 요소도 들어 있지 않 다. 씨와 흙이 만나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하는 유기적인 생명 의 길을 철저히 걸으셨다. 이 길을 통해 부활의 열매가 되신 것이다. 예수 님은 철저히 하나님이 정해 놓은 씨를 뿌리면 열매를 거두는 유기적 생명 의 길을 걸으셨지만 우리 인생의 입장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이 우리에게 는 법리적 대속이 된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피 흘릴 수도 없고 피 흘려 죽어보았자 대속물이 안되기 때문이다.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57절까지 말하는 예수님의 승리란 사탄이 뿌린 가라지 밭에서 하나님의 알곡이 가라지들을 이기고 첫 열매를 맺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가라지-사망을 이기고 알곡-생명이 나온 것이다. 예수님 은 사망의 노선을 가고 있던 인류에게 생명의 노선을 개척하시고 첫 열매 -선두 주자가 되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음과 부활이라는 생명의 과정을 통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죽음 없이 어떻게 부활의 열매가 될 수 있는가? 부활이란 반드시 죽음이 있어야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55절에서 57절은 사망이나 무덤은 같은 의미로 사탄으로 인해 들어온 사망노선을 말하는 것이다. 사탄이 아무리 자기 씨 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맺으려고 노력해도 하나님의 씨를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의 씨가 사탄의 씨를 이기고 열매를 맺는다는 것이다. 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오 무덤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 냐? (고전15:55) 에서 사망과 무덤은 의인화되어 있다. 사탄이 주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고린도전서 15장 55~57절 말씀은 이렇게 해석할 수 있 을 것이다. 사탄(사망)아 네가 뿌린 씨가 어디 있느냐? 오 사탄(무덤)아 너의 열매 (승리)가 어디 있느냐? 너는 결코 생명-하나님을 이길 수 없다. 비록 사 탄(사망)아 네가 아담에게 씨를 뿌려 네 자식을 만들었고 또 율법을 통해
347 23. 반론에 답하여 죄인을 만들었지만 이제는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셨다. 그래서 나는 생명을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라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율법이라는 죄와 사망의 법에서 은혜라는 생명의 성 령의 법 안으로 옮겨왔다는 것이다. 사람이 한 번 죽는 것은 생명의 연합 을 위한 필 수 과정이다. 그러므로 위 질문에서처럼 하나님께서 사람의 몸 을 죽을 운명으로 창조하셨다면 무덤은 조롱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주장 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대한 오해에서 불거진 주장이 다. 법리적 차원에서만 예수님의 죽음을 이해하였기 때문이다. 죽음과 생명은 종이 한 장 차이다. 모든 생명은 죽음을 통해 태어난다. 씨를 땅에 심으면 씨가 죽어야하고 땅도 죽어야 한다. 상호 죽음을 통해 생명이 발아된다. 왜 전능하신 하나님께 하필 사람의 죄를 죽음을 통해서만 용서하시고 새로 운 생명을 주시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그저 단순하게 죄가 없어야 영원 한 생명을 가질 수 있다는 차원이 아니다. 무죄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아담의 육신이 만들어진 재료는 영-씨가 아니고 흙이다. 흙은 생명이 없 고 씨와 연합하여 열매를 산출해야 할 운명이다. 그래서 아담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거듭나야 했다.(창2:21~23) 아 담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생명나무의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거 듭나야 했다는 것이다. 죄가 들어오기 전의 창세기 2장 21절의 거듭남의 예표는 사람의 육체는 반드시 한 번은 헌물로 드려져야 된다는 것을 보여 주고 있다.(딤후4:6) 왜냐하면 육신은 영이 아니기 때문이다. 살과 피가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 받지 못하는 것은 죄로 인한 타락으로도 상속받을 수 없지만 죄가 없더라도 원래부터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다.(고전15:50) 육신은 영원한 것이 아니고 어차피 썩어 없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육신의 세계와 영의 세계는 차원이 다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왕국은 영의 세계,
348 23. 반론에 답하여 곧 영원한 왕국이다. 우리 몸이 영적으로 변화하지 않으면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잔다 라고 표 현하고 있는 것이다. 육신이 한 번 죽는 것은 생명의 길 안에서나 사망이 길 안에서 마찬가지 다. 그러나 이 두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서로 다르다. 육체 를 떠난 한 혼은 천국으로 한 혼은 지옥으로 가기 때문이다. 생명의 길 안 에서 우리 육신은 죽음과 부활을 통해 영적인 몸으로 변화되어야 되어야 한다. 즉 우리 육신은 죽음을 통해 하나님의 영안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고후5:4) 피조물인 사람이 영원한 생명이신 영-하나님께 연합됨으로서 영생에 참여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처음에는 흙으로 창조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영적으로 거듭난 성도를 살아 있는 돌(벧전2:5)이라 고 말하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완성인 새 예루살렘에 가면 변화된 성도들의 모습을 보석으로 표현하고 있다.(계21:18~20)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길 안에서 사람의 변화과정은 흙-돌-보석이다. 그래서 처음 창조된 사람은 흙으로서 부서지기 쉽고 연약한 사람이지만 예 수님을 영접하여 거듭나면 돌이 되서 사탄이 훼방할 수 없다. 흙으로 지어 진 사람은 불-성령의 작용으로 2차적으로 영적인 돌이 된다. 그렇다고 흙 이라는 성분이 돌이 되었다고 흙이라는 본질이 바뀐 것이 아니다. 돌도 본 질은 흙이고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러나 보석은 어떤 물리적, 화학적 작 용이 일어나도 본질이 바뀌지 않는다. 돌이 보석이 되려면 어떤 과정을 거 쳐야 하는가? 더 강한 불을 통해 전혀 다른 새로운 성분인 보석으로 거듭 나야 한다. 보석이란 외부의 영향에도 성분이 변화되지 않는 물질로서 부 활을 통해 영원한 생명을 소유한 성도를 예표한다. 이것이 성경이 계시하 는 생명의 길 안에서의 사람의 물리적 변화과정이다. 살아 있는 돌인 성도 들이 영이신 하나님께 흡수되면 최종적으로 영원한 보석으로 변화되는 것 이다. 성경은 곳곳에서 영-하나님을 불로 비유하고 있다.(출24:17, 대하 7:3, 사4:4))
349 23. 반론에 답하여 이때에 주께서 심판하시는 영과 불태우는 영으로 시온의 딸들의 더러움 을 씻어 내시며 예루살렘의 한가운데로부터 그것의 피를 깨끗이 씻어 내 리라.(사4:4) 하나님께 드리는 헌물이 불로 태워졌는데 이 불은 하나님의 불이다. 불은 성경에서 성령의 변화를 상징한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 이시다. 이 불에 의해 살아 남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죽음을 통해 생명으로 삼켜지는 것이다. 우리 육신이 영적인 몸으로 변화된다는 것은 하나님의 생명인 성 령-불로 삼켜지는 것이다. 성령-불의 작용으로 새로운 생명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다. 우리의 죄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께서 희생물로서 대속했다. 우리는 희생물이 될 수도 없고 희생물로서 죽을 필요도 없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더 이상의 희생물이 필요 없다.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육신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딤후4:6) 우리가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하면 우리의 죄는 여전히 해결 안 된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길 안에서도 육신은 죽어 없어져야 한다. 육신은 흙이지 열매가 아 니다. 영이 열매다. 사탄도 일종의 영이기 때문에 사망의 길 안에 있는 육 신도 사탄의 영 안으로 삼킴을 당해 불의한 자의 부활로 나타나게 된다. 성경에서 말하는 승리는 이 인격의 승리를 말하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의 인격의 승리를 믿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흙-사람으 로 만드셨지 씨-신으로 만들지 않았다. 하나님은 우리가 사람이 되길 원 하신다. 그래서 우리는 사람의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사람이 신 예수님은 신인 사탄에게 죽기까지 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 승리하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승리, 이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래서 바울은 비록 아담이 자신의 위치를 지키지 못하고 사망의 길로 들어갔지만 예수 그리스
350 23. 반론에 답하여 도께서 오셔서 흙-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승리하시고 생명의 길을 회복 하시자 사망의 권능을 가진 자 사탄을 조롱하면서 생명이신 예수님을 찬양 하고 있는 것이다. 5.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 씀을 따르는 것이 생명이고 따르지 않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 본 바에 의하면 생명나무는 보이지 아니하는 하나님-생명 의 표현으로 예수 그리스도이고 생명나무의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의 열매로서 죽으심과 부활이다. 예수님은 자신을 음식에 비유하여 생명의 빵이라고 하셨다.(요6:48) 사람의 근본은 먹는 것에 있기 때문에 구약에서 도 예수님은 생명의 만나, 반석의 물, 헌물 등 음식의 형태로 비유되어 계 시되고 있다. 사람의 근본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게 되어있다. 그 래서 창세기 1장에서도 하나님께서 창조가 끝난 다음 맨 처음으로 사람이 먹을 음식으로 씨 맺는 채소와 속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를 음식으로 주셨 다.(창1:29) 아담이 사망의 길로 들어선 이유는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이 있다. 하 나님 말씀만을 단순히 어겼다면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고 외부적인 것이다. 그러나 선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는데 더 문제가 있다. 이것은 유 기적인 것이고 내부적인 것이다. 그래서 몸에 죄가 들어와서 유기적인 죄 의 몸이 되었다는 것이다.(롬7:16) 단순히 아담의 몸에 죄가 영향을 끼치지 않았다면 하나님께서 죄를 용서하시면 된다. 문제는 아담이 선악과를 먹고 몸이 죄의 몸, 곧 사탄의 자식이 되었다는데 더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러 나 창세기 3장의 아담의 사건을 보면 단순히 법리적인 외부적인 면과 유기 적인 내부적인 면을 분리할 수가 없다. 예를 들어 하나님께서 아담에게 어
351 23. 반론에 답하여 느 곳에 가지 말라고 명령하셨다면 이것은 단순히 외부적이고 법리적인 문 제만 발생한다. 그러나 선악과를 먹지 말라 고 하신 하나님의 명령은 먹는 문제이기 때문에 법리적인 동시에 유기적인 문제가 동시에 발생한 것이다. 사람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또 먹는 데로 그 몸이 형성된다. 술을 먹으면 술과 한 몸이 되고, 사탄의 말을 먹으면 사탄과 한 몸이 되고, 하나님의 말씀을 먹으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하나님과 한 몸이 된다. 그래 서 구약을 보면 믿으라는 말은 거의 없고 전부 먹는 것으로 되어 있다. 우 리가 예수님을 영접한다. 먹는다, 믿는다 는 말은 사실 다 한 개념으로 연합의 의미가 있다. 예수님을 영접한다, 믿는다는 의미는 구약적 표현으 로 한다면 먹는다 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에서 예수님을 믿는다(believe) 할 때 예수님을 목적격으로 사용하지 않고 항상 believe in Jesus, 또는 believe on Jesus로 표현하고 있다. 신약의 사복음서에 와서 믿으라 는 말씀이 주를 이루다가 복음서의 결론인 요한복음에 와서 예수님을 먹으라 는 말씀이 나오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나니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일으켜 세우리라. (요6:54) 성경이 이렇게 표현하고 있는 것은 구약에서 음식의 형태로 표현된 예수님 이 신약에 와서는 실재로 오셨는데 처음부터 예수님을 먹으라하면 사람들 은 이해를 못하기 때문에 믿으라 영접하라 먹으라, 라고 하나님의 계 시가 발전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는다는 말은 어떤 대상을 종교적으로 믿는다는 말이 아니다. 이집트의 노예로 있던 이스라엘 민족도 어린양의 피로 구속을 받고 집안에 서 그 날 밤에 어린양을 급하게 먹었다.(출12:10~11) 우리는 통상 어린양 의 피를 통한 법리적인 대속만을 강조하고 그 뒤에 어린양을 먹었다는 유 기적 생명의 연합에 대한 진리를 잘 말하지 않는다. 구약의 제사예법도 보 면 헌물을 드리는 자와 받는 자가 함께 먹었다. 이 헌물은 생명이신 그리
352 23. 반론에 답하여 스도를 예표한다. 그러므로 이 제사 예법을 우리 입장에서 굳이 법리적인 면과 유기적인 면을 구별한다면 피 흘림을 통한 대속은 예수 그리스도가 대신 해주신 것임으로 법리적인 것이고 먹는 것은 유기적인 면으로 생명의 연합을 예표한다. 그러므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생명을 얻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따르는 것이 생명이고 따르지 않는 것은 생명을 잃는 것이다 라는 주장은 완전한 주장이 아니다. 사람의 근본은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 는 것이다. 그래서 지금도 예수님의 여러 행적이 있지만 그분의 인격의 최 종열매인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을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 다. 다른 외부적인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가 어겨도 용서 받을 수 있고 회 생의 기회가 있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으심과 살으심이라는 그분의 인격의 최종열매를 먹지 않으면 죽는 것이다. 창세기 3장 21절에서 하나님은 이제 그가 자기 손을 들어 생명나무에서 나는 것도 따서 먹고 영원히 살까 염려하노라 하셨다.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영생한다고 분명하게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또 계시록 2장 7절 에서 하나님께서는 이기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의 낙원 한 가운데 있 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주어 먹게 하리라 라고 말씀하신다. 또 계시록 22 장 2절을 보면 하나님의 경륜의 최종 완성인 새 예루살렘에서도 사람들은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는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주시는 생명의 양식은 생명 나무의 열매라는 것을 알 수 있다. 이것은 결국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사탄 과의 위치전쟁에서 이기는 자만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 영생에 이른다 는 것이다. 또 그 당시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더라도 아담의 육 신이 영생하는 것이 아니라 한번은 헌물로서 죽어야 했다. 성경을 잘 살 펴보면 아담은 이게 싫어서 사탄의 유혹에 넘어간 것이다. 육신이 하나님 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은 것은 죄 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합당하지 않은 것이다. 또 어떤 이들의 주장처럼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 먹었다는 주 장은 합당하지 않다.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었다면 이기는 자이기
353 23. 반론에 답하여 때문이다.(계2:7) 그러나 아담은 사탄에게 이긴 자가 아니고 패한 자이 다. 6.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3:19)의 말씀과 같이 아담이 타락으로 인해 육체적 사망이 왔다.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창세기 3장 19절의 후반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 갈 것이니라 라는 말씀의 의미는 사람은 원래 영생하도록 지어졌는데 아담 이 범죄한 결과에 대한 저주이며 이것으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해석 한다. 일견 그럴듯하게 보이나 이것은 문맥 전체와 아담의 타락 원인에 대 한 오해에서 불거진 일이다. 창세기 3장 17절부터 19절까지를 살펴보면...땅은 너로 인하여 저주를 받고 너는 평생토록 고통 중에 땅의 소산 을 먹으리라. 또한 땅이 네게 가시덤불과 엉겅퀴를 내리라, 네가 들의 채소를 먹으며 땅으로 돌아가기까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 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 이는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 아갈 것이니라, 하시니라.(창3:17~19) 여기서 문맥을 잘 보면 창세기 3장 17절과 19절 전반부까지 아담에 대한 저주와 형벌을 말하고 있다. 19절 전반부를 살펴보면 땅으로 돌아가기까 지 네 얼굴에 땀을 흘려야 빵을 먹으리니 이는 네가 땅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이라.(창3:19a) 여기서는 아담이 죄를 지어서 흙으로 돌아간다는 의 미보다 사람은 원래 흙으로 돌아가게 되어 있는데 흙으로 돌아가기까지 하 나님이 정해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하였기 때문에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산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다. 핵심은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 을 이탈했기 때문에 땅으로 돌아가기 까지 땀을 흘려야 먹고 산다는 것 이다. 아담이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죄를 지었기 때문에 땅으로
354 23. 반론에 답하여 돌아간다는 말이 아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아담은 사람-흙임에 불구하고 죽지 않는 신- 영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렇게 말씀하시는 것 이다. 아담아 너는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지만 결코 너는 신이 될 수 없다. 사람(흙)은 결국 사람(흙)이지 사람이 죽지 않는 신이 될 수 없 다. 너는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했기 때문에 이마에 땀을 흘려야하고 결국 원래대로 너는 흙에서 취하여졌기 때문에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 라 고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흙으로 돌아간다 는 말에서 생명노선 안에서의 육체적 죽 음과 사망노선 안에 있는 육체적 죽음은 본질적으로 다르다. 그러나 육 체가 죽는다는 면에서는 표면적으로 두 과정이 동일하다. 성경은 생명노 선 안에 있는 육체적 죽음은 잔다 라고 표현함으로써 사망노선 안에 있 는 육체적 죽음과 구별하고 있다. 표면적으로 어떤 노선 안에 있든지 육 체는 한 번은 죽어야 한다. 예를 들어 자동차가 있다고 하자. 그 자동차 가 가야할 전용도로가 있다면 그 자동차는 평탄한 길을 갈 것이고 원하 는 목적지에 도달할 것이다. 그러나 그 자동차가 전용도로가 아닌 다른 도로로 간다면 그 자동차는 많은 시련을 겪어야 하고 원하는 목적지가 아닌 다른 곳에 도달할 것이다. 그렇다고 그 자동차의 본질이 바뀌는 것 이 아니다. 같은 이치다. 사람이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타락했다고 해 서 흙이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7. 하나님께서 사람을 죽도록 만드셨다면 사망은 원수가 될 수 없 다.(고전15:26) 멸망을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 (고전 15:26)
355 23. 반론에 답하여 이것도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성경은 단 순하게 육신의 죽음과 삶을 사망과 생명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성경은 생 명을 누구라고 하는가? 우리의 육신이 살아 있는 것을 생명이라 하지 않고 예수님 자신을 가리켜 '생명'이라고 한다.(요14:6) 또 성경은 곳곳에서 사 망을 의인화시켜서 말하고 있다.(고전15:55) 여기서도 사망은 의인화 되어 있다. 곧 사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은 사망의 근원-씨고 예수님은 생명의 근원-씨다. 그래서 사탄도 씨이기 때문에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자신의 아들을 얻는 방법은 동일하다. 그래서 고린도 전서 15장 26절이 말하는 '멸망을 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 망이니라' 고 하는 것은 사탄을 두고 하는 말이다. 그러면 언제 사탄이 멸 망받는가?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마귀와 전쟁에서 승리하셨다. 그렇지만 마 귀가 멸망당하지 않았다. 단지 마귀의 사역을 파괴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아들이 나타난 목적은 이것이니 곧 그분께서 마귀의 일들을 멸하시려는 것이라.'(요일3:8) 그렇다면 마귀는 언제 멸망당하는가? '또 그들을 속인 자 마귀가 불과 유황 호수에 곧 그 짐승과 거짓 대언자 가 있는 곳에 던져져서 영원무궁토록 밤낮으로 고통을 받으리라.'(계 20:10) '사망과 지옥도 불 호수에 던져지니 이것은 둘째 사망이라.'(계20:14) 하나님 나라는 예수님의 생명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왕 국은 예수님-생명과 새 예루살렘 이라고 할 수 있고 사탄의 왕국은 사탄 -사망과 지옥 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이 사탄의 왕국이 통째로 계시록 에 가면 불 호수에 던져지는 것이다. 지금 일반적인 사람들이 사망을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라고 오해하는 것은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의 본질 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인 동시에 단지 사망을 육체적 죽음으로 해석한 결
356 23. 반론에 답하여 과이다. 또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정해주신 위치에 대한 오해이고 하나님의 목적 안에서 승리-이기는 자에 대한 이해의 부족이다. 다른 노 선에 있는 유사한 과정을 표면적인 것만 보고 동일하게 판단한 결과이다. 성경은 분명하게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사망 이라고 하지 않고 잔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주 하나님께서 아담을 깊은 잠에 빠지게 하시니 그가 잠들매 그분께서 그의 갈비뼈 중의 하나를 취하시고 그것 대신 살로 채우시며(창2:21) 그들에게 이르시되, 물러가라.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그들 이 그분을 비웃더라. (마9:24) 무덤들이 열리니 잠든 성도들의 많은 몸이 일어나 (마27:52) 들어가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하여 이렇게 떠들며 슬피 우느 냐?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막5 :39) 모든 사람이 슬피 울며 소녀로 인하여 가슴 아파하였으나 그분께서 이르 시되, 울지 말라. 그 소녀는 죽지 않았고 잔다, 하시니 (눅8:52) 이것들을 말씀하시고 그 뒤에 그분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우리 친구 나사로가 잠자는 도다. 그러나 내가 그를 잠에서 깨우러 가노라, 하시니 (요11:11) 이는 다윗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자기 세대를 섬기다가 잠들고 묻혀서 자기 조상들에게 이르러 썩음을 보았으나(행13:36) 이런 까닭에 너희 가운데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많도다. (고전11 :30) 그 뒤에 그분께서 오백여 형제에게 한 번에 보이셨는데 그중의 대다수는 지금 이때까지 남아 있고 어떤 사람들은 잠들었느니라. (고전15:6) 따라서 그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 (고전15:18)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 매가 되셨도다. (고전15:20) 그러나 형제들아, 잠자는 자들에 관하여 너희가 모르기를 내가 원치 아
357 23. 반론에 답하여 니하노니 이것은 너희가 아무 소망 없는 다른 사람들 같이 슬퍼하지 아 니하게 하려 함이라. 우리가 예수님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일어나셨음을 믿을진대 그와 같이 예수님 안에서 잠자는 자들도 하나님께서 그분과 함 께 데려오시리라. 우리가 주의 말씀으로 너희에게 이것을 말하노니 곧 주께서 오실 때까지 살아서 남아 있는 우리가 결코 잠자는 자들보다 앞 서지 못하리라. (살전4:13~15) 고린전서 15장 26절에서 멸망받을 마지막 원수는 사망이니라 라는 의 미도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사탄을 두고 하는 말인 동시에 사탄이 아담에게 씨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거두는 사망의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사망의 길 안에서는 어느 과정에 있 건 그것은 사망이다. 첫 번째 사망도 사망이고 불의한 자의 부활도 사망이 고 둘째 사망도 사망이다. 어차피 사망열차를 타고 둘째 사망의 종착역인 불호수로 가고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사망은 생명의 길 안에서 육 체적 죽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성경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잔다 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사탄 안에 있으면 어느 과 정에 있건 사망이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생명이다. 왜 성경의 결론인 계시록에서 사망을 둘째사망이라고 정의하는지 곰곰이 생각해 보라.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사람에게 있어 첫째 사망은 창 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기 때문에 성경이 말하는 사망은 둘째 사망이라고 성경의 결론인 계시록에서 정의해 주고 있는 것이다. 8. 그 나무에서 나는 것을 먹는 그 날에(in the day) 네가 반드시 죽으리라.(창2:17)의 the day의 용법과 네가 나가서 기드론 시 내를 건너는 그 날에는(the day) 정녕 죽임을 당하리니 (왕상 2:37)의 the day의 용법이 같다
358 23. 반론에 답하여 반대론자들은 열왕기상 2장 37절에서 다윗 왕이 반역하는 시므이에게 그 날에 죽을 것이라고 경고했지만 시므이는 그날에 죽지 않았고 후일 죽었다 고 하면서 창세기 2장 17절의 the day의 말씀은 바로 그 날이 아니라 미 래적 표현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작위적 해석이다. 창세기 2장 17절에서의 말씀은 하나님이 하신 말씀이고 열왕기상 2장 27절은 다윗이 한 말이다. 어떻게 하나님의 말씀과 다윗의 말의 무게가 같을 수 있는가? 물론 성경은 하나님의 섭리에 따라 모든 말씀이 기록되어 있지만 그 안에는 사탄이 한 말도 있고 여러 부류의 사람들이 내 뱉은 말이 이야기 형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성경에는 사탄이 아담을 유혹할 때 말한 거짓말도 기록되어 있다. 창세기 3장 5절에 보면 사탄이 아담을 유혹할 때 너희가 그것을 먹는 날에(in the day) 너희 눈이 열리고 너희가 신들과 같이 되어 선악을 알줄을 하나님이 아 시느니라. 했다. 그렇다고 그 날에 아담이 신이 되었는가? 아담은 신이 되지 않았다. 속았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을 한 자가 누구인지에 따라 그 말의 무게는 다르다. 하나님은 결코 거짓말 하실 수 없는 분이다....참으로 하나님은 신실하시되 사람은 다 거짓말쟁이라 할지어다.(롬 3:4a) 그러므로 창세기 2장 17절의 the day 와 왕상 2장 37절의 the day 를 비 교하는 것은 합당하지 않다. 또 최대한 양보해서 왕상 2장 37절에 있는 the day가 미래를 표현한다고 해도 창세기 2장 17절의 in the day 는 분 명히 다르다.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논란을 없애기 위해 확실히 the day 라 고 하지 않고 in the day(그날 안에) 라고 말씀하셨다. 먹는 그날 안으로 죽는다는 것이다. 우리는 성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어린아이처럼 순수 하게 받아드리면 된다. 그날 안으로(in the day) 죽을 것이다 했는데 그날
359 23. 반론에 답하여 에 아담의 육체는 죽지 않고 930살까지 살다 죽었다. 그러니까 이 사망은 육신에 대한 것이 아니고 아담이 하나님과의 관계가 끊어져 사망이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다. 하나님도 영-씨고 사탄도 영-씨다. 씨는 흙에 씨를 뿌려 열매를 맺는 것이 최대 소망이고 어떤 씨도 흙에 뿌려져 열매를 맺는 과정은 동일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외부의 공급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다. 사람은 두 가지 생명을 위한 생명양식이 있다. 하나님께서 육신의 생명을 위한 양식으로는 하나님께서 창세기 1장 29절에서는 씨 맺는 채소와 속 에 씨 맺는 나무의 열매 를 먹으라하셨고 창세기 2장에서는 영의 양식을 위해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으라 라고 하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사람이 빵으로만 살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씀으 로 살 것이라, (마4:4) 하신 것이다. 예수님도 분명히 사람은 독존하는 존 재가 아니고 육적이든 영적이든 먹어야 사는 존재라는 것을 말씀하고 계신 다. 사람은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먹어야 사는 존재가 아니다. 죄가 들어 오기 전에 하나님께서는 이미 사람에게 양식을 주셨기 때문이다. 만일 사 람이 독존하는 존재라면 하나님께서 처음부터 사람에게 양식을 주실 이유 가 없다. 창세기 2장에 나오는 선악과와 생명과가 육신의 생존을 위해 관계된 양식 이라면 왜 하나님께서 굳이 창세기 1장에서 육신을 위한 양식으로 열매를 먹으라고 하셨겠는가? 그러므로 창세기 1장의 열매는 육신의 생존을 위한 양식이고 창세기 2장의 생명나무의 열매는 영적 생존을 위한 양식이다. 사 람은 스스로 독존하는 존재가 아니다. 그래서 먹어야 사는 존재다. 먹으면 살고 먹지 않으면 죽는다. 사람은 천사처럼 영으로 지음 받지 않았고 흙으 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육신의 생존을 위해서는 육신의 양식을 먹어야 사 는 존재고, 영생을 위해서는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어야 하는 존재다. 사람 이 천사처럼 처음부터 죽지 않는 존재로 지음 받았다면 육신의 생존을 위 한 양식도 필요 없는 것이다
360 23. 반론에 답하여 9. 육신으로 오신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는 분이시 나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여 예수 님이 십자가에 죽으셨다. 반대론자들의 일반적 주장은 사람의 육신이 영원히 살게 되어 있는데 선 악과를 먹어 죄가 들어와 육신에 죽음이 왔다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반대론자의 논리라면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십자가에서 죽지 말아야 한다. 그래서 이들의 주장은 전능하 신 하나님이 죄가 없으신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셔서 십자가에서 죽게 하 셨다는 것이다.(고후5:21) 하나님께서 죄를 알지 못한 그분을 우리를 위하여 죄가 되게 하신 것은 우리가 그분 안에서 하나님의 의가 되게 하려함이라. (고후 5:21)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의 모습, 곧 죄인의 모습으로 오신 것이지 본질은 죄 인은 아니다. 우리에게 계신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의 감정을 몸소 느끼지 못하는 분이 아니요 모든 점에서 우리와 똑 같이 시험을 받으셨으되 죄는 없으 신 분이시니라. (히4:15)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예수님이 본질적으로 죄인은 아니지만 죄인의 모습 이기 때문에 예수님이 죽으셨다면 이것은 큰 모순이다. 예를 들어 그런 논 리라면 예수님의 신분이 왕자인데 거지의 옷을 입었기 때문에 예수님의 신 분이 바뀌었다는 논리다. 본질이 죽을 수 없으면 죽지 말아야지 본질과 관 계없는 옷을 갈아입었다고 어떻게 본질이 바뀌어 죽을 수 있겠는가? 이것 은 말도 안되는 소리다. 또 반대론자들은 말이 막히면 무조건 하나님의 전 능성을 들고 나와 하나님께서 하셨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것을 믿는 것 이 대단히 큰 믿음으로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는데 이것은 성경도 모르고 하나님의 권능도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마22:29) 분명히 예수
361 23. 반론에 답하여 님도 사람은 부활을 통해 천사와 같은 영적인 몸이 되었을 때 더 이상 죽 을 수도 없다고 하셨다.(눅20:36) 사람은 흙-육신으로 지음 받았지 씨- 영으로 지음 받지 않았다. 이 말씀은 육신은 죽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육신의 죽음이 없으면 부활도 없는 것이다. 하나님의 목표는 우리의 육신 이 아니고 부활한 영적인 몸이다. 부활한 영적인 몸이 열매이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단순히 우리의 죄만을 대속하기 위해 죽으신 것이 아니다. 육신에서 영화로운 몸을 얻기 위해 죽으신 것이다. 새로운 생명을 얻기 위해서도 죽으신 것이다.(요 10:17)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반대론자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이 무엇 하러 육신을 입고 사람으로 오셨겠 는가?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사람의 죄를 용서하고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달성하면 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이 아니고 앞서도 밝혔듯이 생명은 하나님 자신이고 생명은 죽음을 통해서만 이식되기 때문에 예수님 이 육신을 입고 오신 것이다. 기록된 특별계시인 성경말씀만이 성경이 아 니고 자연계시도 성경이다. 만물은 생명이신 하나님 자신을 계시하고 있다. 우리가 외형적으로 하나님을 아는 것은 첫 번째로 그분이 하신 일을 아는 것이고 두 번째로 그분이 하시는 일의 원리를 아는 것이다. 즉 창조된 만 물을 통해 사람을 만드신 하나님을 알고 또 만물의 생명의 원리를 통해 생 명이신 하나님께서 사람에게 생명을 주는 원리를 알 수 있다는 것이다.(롬 1:20) 그럼에도 이것을 무시하는 것은 성경기록도 알지 못하고 생명이신 하나님의 권능도 알지 못하는 것이다. 또 반대론자들의 주장은 죄가 없으신 예수님은 십자가로 가기 전까지 유 대인들이 죽이려고 해도 예수님은 죄가 없기 때문에 죽을 수 없다는 것이 다. 그들의 논리라면 예수님은 피곤하지도 않아야 하고 늙지도 않아야 하 고 먹지 않아도 죽지 않기 때문에 시장하지도 않아야 한다. 또 십자가로 가기 전까지 유대인들의 생명에 대한 위협에도 피하실 필요가 전혀 없는
362 23. 반론에 답하여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육신으로 오셔서 사시는 동안 우리와 동일하게 피곤하셔서 주무셨고, 목마르셨고, 시장해 하셨고, 다른 사람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셨다.(요8:57) 또 유대인들이 예수님을 해하려고 하자 그 자리를 피하시는 모습이 나온다. 회당에 있던 모든 사람들이 이 말을 듣고 진노가 가득하여 일어나서 그분 을 도시 밖으로 밀어내어 자기들의 도시가 세워진 산의 낭떠러지까지 끌고 가서 거꾸로 떨어뜨리려 하되 그분께서는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자기 길로 가시니라.(눅4:28-30) 그때에 그들이 돌을 들어 그분을 치려 하거늘 예수님께서 자신을 숨기시고 성전에서 나가시되 그들의 한가운데를 지나서 그렇게 나가시니라.(요8:59) 예수님도 유대인들이 그분을 해하려고 하니까 육체적 생명인 몸을 보호하 기기 위해 자리를 피하신 것이다. 죄 없으신 그분도 우리와 같은 육신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돌로 치면 죽을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단지 십자 가에서 하나님께서 인생들의 죄를 처리하기 위해 그 순간에만 예수님에게 죽음을 허락하셨고 그 이전에는 어떠한 상황에서도 그분은 죄 없으신 몸이 었기에 죽으실 수 없었다면 십자가에서 돌아가시기 전까지 시장하지도 피 곤하지도 늙지도 않아야 하는 것이고 유대인들의 생명의 위협에 자리를 피 할 필요도 없다. 그러나 우리 육신은 원래 한번은 죽고 영광스런 몸으로 부활하도록 창조되었던 것이다.(고후5:4) 흙-육신은 씨-생명이 아니다. 흙-육신이 씨-생명과 연합하여 열매를 산출하려면 한번은 죽도록 하나님 의 경륜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우리는 성경에서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 다고 하니까 육체적 죽음에 대해 부정적으로 생각하지만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죽지 않고 잔다 라고 표현하셨다.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차원이 다른 것 이다. 만일 예수님은 죽으실 수 없는 분인데 예외적으로 하나님께서 특별하게 허
363 23. 반론에 답하여 락하셔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면 우리 인생들은 절망이다. 그것은 어느 특 별한 한 사람에게만 적용되는 것이지 일반적인 사람들에게는 적용될 수 없 는 보편적 구원이 될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그분이 전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있는 것은 우리와 그분이 육신이 한 번은 죽을 수 밖에 없는 똑 같 은 운명 안에서 그분이 죽으시고 부활했기 때문에 그분에게 적용되었던 부 활이 우리에게도 적용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가 소망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그분의 운명과 우리의 운명이 다르다면 우리는 절망 이다. 그것은 예수님에게만 적용될 수 있는 것이지 우리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십자가에 달린 이 사람을 보라는 것이다.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누구든지 십자가에 매달면 죽는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인생은 흙이지 영이 아니라는 것이다. 너무도 당연하고 너무도 쉬 운 진리를 사람들은 외면하고 어려운 것을 믿고 있는 것이다. 선악의 지식 나무의 열매를 먹고 타락한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은 자기 지식을 통해 쉬 운 것보다는 어려운 길을 택하고 있다. 그래서 은혜를 통해 얻는 구원보다 는 행위를 통한 종교를, 창조론보다는 진화론을 택하고, 생명은 만드는 것 이 아니고 태어나는 것임에도 지식을 통해 생명을 만들려 하고 있다. 10. 하나님은 전능하시기 때문에 사람이 영생하더라도 지구상의 인 구조절은 가능할 것이라는 주장에 대하여 하나님의 의도는 사람이 신이 되지 말고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즉 상식이 통하는 정상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우리 인생에 게 합리적인 생각을 할 수 있는 사고력을 주었다. 또 하나님은 만유를 통 해 하나님께서 일하시는 원리를 계시하신다. 자연법칙도 하나의 진리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시다고 해서 자연법칙을 무시하시고 마음대로 하시는 것
364 23. 반론에 답하여 이 아니다. 자연법칙도 하나님의 행정의 영역에 속한 것이다. 하나님께서 행정을 무시하시고 아무렇게나 일을 하시지 않는다. 예를 들어 어떤 공장 에서 기계를 만들었다고 하자. 그러면 그 기계는 처음 만든 원리에 의해 그대로 작동되는 것이다. 다른 원리에 의해 작동되려면 다시 만들어야 하 는 것이다. 우주 만물도 똑 같다. 우주는 사계절이 있고, 낮과 밤이 있도록 창조하셨고 번식하는 생물들은 죽도록 만드셨다. 이것은 진리다. 만일 번 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는 생물들로 넘쳐서 발 디딜 틈도 없 을 것이다. 너무도 당연한 것이다. 물론 하나님은 전능하시다. 여호수아서 나오는 것처럼 일시적으로 해를 멈 추게 하는 기적적인 일을 행하실 수 있다.(수10:13) 그러나 그러한 일은 하 나님 말씀을 확증하거나 하나님의 경륜이 전환되는 시기에만 일시적으로 기 적을 행하셨다. 이러한 기적이 일어난 기간은 성경 전체 역사에 걸쳐서 5%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자연법칙을 통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진 리를 충분히 알 수 있다. 아울러 인생의 존재적 위치를 알 수 있도록 하셨다. 마태복음 4장에서도 사탄은 예수님을 성전 꼭대기에 세우고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뛰어내리라, 기록된바 그분께서 천사들에게 너의 관 한 책무를 주시리니 그들이 자기 손으로 너를 받들어 언제라도 네 발이 돌 에 부딪히지 아니하게 하리로다, 하였느니라. (마4:6) 하였다. 그러자 예수 님은 너는 주 네 하나님을 시험하지 말라, 하셨다. 이 말씀은 무슨 의미 인가? 사람은 상식적으로 성전 꼭대기에 떨어지면 죽는다는 것이다. 죽을 줄 뻔히 알면서 하나님께 도와달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라 는 것이다. 생육하고 번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상에 이러한 생물들로 넘쳐 날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나님께서 그렇게 창조 하셨고 자연법칙으로서 진리다. 너무도 당연한 것을 가지고 하나님은 전능 하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합당한 논리가 아니고 하나님을 시험하는 것이다. 만일 현재의 자연법칙을 어기려면 새롭게 창조해야 한 다.(사65:17) 그러한 곳은 새 하늘과 새 땅으로 영원한 세계다.(계21,
365 23. 반론에 답하여 장) 우리는 만유를 통해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 알고 또 그분이 어떻게 일하시 는지를 알 수 있다.(롬1:20) 사람은 성전 꼭대기에 뛰어내리면 죽도록 만 들어졌으며, 번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지구는 생물들로 넘쳐서 발 디딜 곳이 없을 것이란 사실은 너무도 당연한 이야기다. 하나님이 원하시 는 세계는 사람이 신이 되는 것이 아니고 사람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 땅을 육신의 제한을 뛰어넘는 신들의 세계가 아니라 육신의 제한을 가진 사람들이 사는 세계를 목표로 창조하셨다. 그래서 예수님도 육신의 제한을 가진 분으로 오신 것이다. 사람은 육신이라는 제한을 가진 존재로서 땅이라는 제한된 영역에서 살도록 창조된 것이다. 만일 반대론자들이 말하는 하나님의 전능성 의 논리라면 믿지 않는 자들의 비아냥거림처럼 하나님은 전능하시다면서 왜 선악과를 만들어 사람을 죄 인되게 했느냐? 는 물음과도 같은 것이다. 또 누차 말하지만 그런 논리라면 예수님이 육신을 입고 오실 필요가 없다. 하나님께서 전능하신 방법으로 하늘에서 직접 죄를 사해주시면 되는 것이다. 남편 사별 후 일곱 번 결혼한 어떤 여인이 부활 후 하나님의 왕국에서 누구 의 아내가 되는가에 대한 논리로 예수님을 시험하던 사두개인들에게 예수 님은 다음과 같이 말씀하셨다. 예수님께서 대답하여 그들에게 이르시되, 이 세상의 자녀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도 가되 저 세상과 죽은 자들로부터 부활을 얻기에 합당한 것으로 여 겨질 자들은 장가도 가지 아니하고 시집도 가지 아니하고 더 이상 죽을 수 도 없나니 이는 그들이 천사들과 동등하며 부활의 자녀들로서 하나님의 자 녀들이기 때문이라.(눅20:24~36) 위 말씀을 보면 분명히 이 세상의 사람들은 장가도 가고 시집을 간다. 즉 결혼을 통해 번식을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부활 후에는 천사들과 동등하
366 23. 반론에 답하여 며 더 이상 죽을 수도 없고 번식을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즉 번식하는 육 신은 죽을 수 밖에 없고 천사와 같은 몸이 되어야 더 이상 죽을 수도 없고 번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육신을 가진 사람과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의 차이를 명확히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들 어오기 전에도 번식해야 했고 육신을 가진 제한이 있는 존재다.(창1:28) 지구상에 모든 육신을 가진 생물은 홀로 존재하는 것이 없다. 모두 연합을 통해 자신의 육신의 생명을 이어간다. 홀로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다. 만들 어질 때 홀로 영생하는 존재로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 즉 결혼은 궁극적으로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우 리가 하나님과 연합하는 것은 육이 영에 연합되는 것이다. 육이 영 안으로 삼켜져 영으로 전환되는 것이다. 우리의 몸이 영적인 몸이 되어야 영생하 는 것이지 육은 생명이 아니다. 흙-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생명이 아 니다. 흙-육신은 씨와 연합하여 어차피 한 번은 바뀌어져할 대상이지 홀 로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가 영생하는 존재라면 하나님이 내게 필요하지 않다. 나 홀로 존재하면 되는 것이다. 사람은 천국에 가서 도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운명은 하나님과의 연합을 통해 육 이 영으로 전환됨으로서 영생을 얻도록 운명 지어졌다. 지구상에 번식하는 생물들이 죽지 않는다면 큰 문제가 생긴다. 나무 한 그 루만 있어도 온 세상을 덮을 것이다. 사람은 살아야 할 땅이 필요하고 먹 어야 할 양식이 필요한 제한을 가진 존재다. 우리가 영으로 지음 받았다면 우리는 제한을 가질 필요가 없다. 그러나 흙-육신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 에 스스로 존재하는 자가 아니고 연합을 통해 생명을 이어가고 거주할 공 간이 필요하고 먹어야 사는 존재다.(창1:29) 육에서 난 것은 어차피 육이 고 성령에게서 난 것이 영-생명이다.(요3:6)
367 23. 반론에 답하여 11. 죄와 상관없이 육체가 죽을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면 예수님의 성육신은 의미없게 된다. 만약에 아담이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그가 죄를 지었을 때 육체는 아무 영향이 없었고 다만 영혼만 죽은 것이라면 왜 예수님의 성육신이 필요한가? 이것도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 을 이해하지 못한 결과이다. 그리고 성경이 말하는 죄가 무엇인지 정확히 모르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생명의 길이든 사 망의 길이든 씨는 흙에 뿌려져 열매를 맺으려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 어야 한다. 죽음은 생명을 연결하는 접촉점이다. 또 성경이 말하는 죄란 각각의 피조물이 창조목적에 이탈한 것을 말한다. 모든 피조물의 죄는 자 신의 위치를 이탈한 것을 말한다. 아담의 죄도 하나님이 정해주신 사람의 위치( 人 格 )를 이탈한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하 나님과의 관계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도 타락한 아담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하시면서 위치를 묻고 계시는 것이다. 사람의 위치는 흙-육신으로 생명이 없다. 만일 사람이 영생이 있었다고 하면 이 것은 큰 오류이다. 하나님이 씨인데 사람도 씨가 되겠다고 하는 것이니까 동성애자가 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아담이 죄를 지었을 때 육체는 아무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다. 아담이 죄를 지었다는 것은 흙-사람에게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하는데 사탄의 씨가 들어와 사탄의 밭이 되었다는 것이다. 그 러므로 그 밭은 갈아엎어져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밭이 되어야 한 다. 이것이 십자가의 구속이다. 육체가 아무런 영향이 없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는데 사탄의 씨가 들어왔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 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오면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나고 사탄의 씨가 들어 오면 사탄의 자식이 되는 것이다.(요일3:10) 이것을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어 위치가 바뀌었다고 해서
368 23. 반론에 답하여 흙-사람의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여전히 흙이기 때문에 주인이 누 구냐에 따라 흙-밭의 운명이 바뀌는 것이다. 비록 어제는 사탄이 그 밭의 주인이더라도 오늘 하나님께서 그 밭의 주인이 되시면 그 밭의 운명은 바 뀌는 것이다. 밭에는 어떤 씨가 뿌려졌더라도 열매를 맺기 전에 갈아엎고 다른 씨를 뿌리면 다른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타락한 사람의 상황이 이렇다는 것이다. 그래서 사람이 흙으로 지음 받았다는 것이 복이 되는 것이다. 만약 사람이 씨로 지음 받았다면 희망이 없다. 씨는 고장나 면 버려야 되는 것이지 다시 쓸 수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질문에서와 같이 영혼이 죽는다는 말은 성경에 없다. 정확히 말하 면 영적인 죽음도 없다. 아담이 생명의 길로 가야하는데 사망의 길로 들어 갔다는 것이다. 이것을 영적으로 죽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예 수님의 십자가의 죽음을 법리적인 수준에서 단순히 인류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혜택 정도로 생각한다. 물론 혜택도 있지만 새로운 생명의 전환을 위 해 필수 과정이라는 것은 잘 모른다. 구속의 위치, 곧 무죄가 영생이 아니 다.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무죄했던 아담 은 흙으로서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고 영생을 얻을 자였지 거기서 그냥 끝 나는 자리가 아니다. 어차피 아담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야 되는 운명이 었다.(창2:21~23) 십자가는 분명히 고통의 자리고 부정적인 자리다. 그런데 거기에는 긍정적 인 부분도 있다. 사탄에 대한 승리와 생명의 접촉점이라는 것이다. 옛 시 대를 끝내고 새로운 시대를 연 것이다.(고후5:17) 그래서 십자가를 하나님 의 권능과 지혜라고 하는 것이다.(고전 1:24) 하나님께서 최악의 부정적인 상황을 최상의 긍정적인 상황으로 바꾼 것이다. 레위기에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란 말이 나온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고 헌물은 하나 님과의 교통을 위한 것이다. 만약 사람이 죄가 없었다면 헌물만 드렸다는 것이다. 성경은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 즉 예수님은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인 것이다. 희생물은 불에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었다. 헌물도
369 23. 반론에 답하여 죽음으로서 드려지는 것이다. 여기서 불은 하나님의 불을 의미하고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예표한다. 단순히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만 죽으셨다고 이해하면 낮은 수준이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시기 위해서 도 불살라졌다. 십자가는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부정적인과 것과 긍정 적인 모든 것이 들어있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 안에는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서의 의미와 생명의 연합을 위 한 헌물로서의 이중적 의미가 있는 것이다. (히10:5) 그렇다면 왜 예수님의 성육신이 필요한가? 첫 번째, 사람이 죄를 지었기 때문에 사람이 이 죄를 갚아야 하는 것이다. 다른 피조물은 죄를 대신 갚을 수가 엎다. 자기가 지은 죄는 자신이 갚아 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한 사람을 창조했지 두 사람을 창조하지 않았 다. 모든 물고기가 물고기이듯이 모든 사람을 한 사람으로 보신다. 그러므 로 아담의 죄는 아담이 해결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마지막 아담으로 오셔서 대속물이 되신 것이다. 두 번째,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함으로서 하나님이 쓰셔야 할 흙- 사람의 위치( 人 格 )를 사탄에게 빼앗겼다. 그래서 누군가 와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여 인격을 되찾아 와야 한다. 이것은 사람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 천사도 할 수 없고 하나님께서도 직접 하실 수 없는 것이다. 왜냐 하면 승리자 자신이 씨-하나님의 밭이 되어야하기 때문이다. 씨-하나님은 자신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절대적으로 흙-사람이 필요다. 아담은 흙-사 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므로 누군가 와서 흙-사람의 위치를 되찾아 와야 한다. 그래야만 씨-하나님께서 그에게 씨를 뿌릴 수 있기 때문이다. 사탄과의 전쟁은 바로 인생의 위치를 놓고 벌이는 전쟁이다. 씨-하나님의 밭이 될 것인가? 아니면 씨-사탄의 밭이 될 것인가? 하는 전쟁이다. 아담 은 속아서 사탄의 밭이 되었다. 그러나 예수님은 흙-육신으로 오셔서 이
370 23. 반론에 답하여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하나님의 밭이 되셨고 하나님의 씨-생명을 받아 죽은 자들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열매-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세 번째, 새인류의 조상이 되시기 위해 사람으로 오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이 땅에 하나님의 왕국을 건설하는 것이다. 하나 님의 왕국의 구성원은 영이 아니고 육신을 가신 사람이다. 그러므로 누군 가 사람으로 와서 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그런데 왜 아담은 실패했나? 씨가 잘 못됐기 때문이다. 아담이라는 밭에 사탄의 씨가 뿌려졌 기 때문이다. 흙-아담은 사탄의 씨와 연합되어 마귀의 자식이 되어 사탄 의 왕국의 조상이 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사탄이 점령하고 있 는 이 땅에 와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고 하나님의 아들로서 새인류- 하나님의 왕국의 조상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이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으로서 오신 것이다. 아담이 실패한 옛인류의 조상이라면 새인류 의 조상은 사람이신 예수님이다. 그래서 성육신하신 것이다. 예수님은 단 순히 대속물로서만 오신 것이 아니고 새인류의 조상으로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육체로는 땅으로 오셔서 죽기까지 위치를 지킴으로 사탄에게 빼 앗긴 인격을 되찾아 왔고 부활하심으로 첫 열매가 되셨다.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는 살려주는 영이 되심으로 새인류의 조상-씨가 되신 것이다.(고 전15:45) 12. 또 몸의 죽음은 인간의 죄와 상관없고 창조의 산물이라면 왜 죄인들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의 피로 씻겨져야 할까? (히10:19, 22)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은 죄인들의 악한 마음 에도 뿌려졌고 죄로 더러워진 몸에도 뿌려진 것이다.(히10:22)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힘입어 새롭고 살아 있는
371 23. 반론에 답하여 길로 지성소에 들어갈 담대함으로 얻었나니(히10:19) 우리 마음에 뿌림을 받아 악한 양심으로부터 벗어났고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우리가 믿음의 충만한 확신 속에서 진실한 마음으로 가까이 다가가자.(히10:22) 모든 것이 근원에 대한 인식이 바르지 않기 때문에 이러한 질문이 나오는 것이다. 예수님의 몸의 죽음이 우리의 죄와 상관없는 것이 아니다. 당연히 예수 그리스도의 피 흘리심을 통한 죽음은 우리의 죄에 대한 법리적 대가 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죄 용서가 아니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사람은 죄 이전에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헌물로 창조 되었고 어떤 헌물도 산채로 드려지는 것은 없다.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과 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하나님의 불에 태워져야 했다. 하나님께 삼켜 짐으로 하나님의 생명에 연합되는 것이다. 죄로 인해 수학적으로 희생물로 서 한 번, 헌물로서 한번 두 번 죽어야 했다. 그러나 희생물과 헌물이 죽 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 하고 있는 것이다. 피 흘림을 통한 희생물이 법리적이고 외부적인 것이라면 헌물로 인한 생명 의 연합은 유기적인 것이다. 유기적으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사람은 하나 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법리적인 희생물에만 국한해서 생각하기 때문에 일어나는 현상이다. 그리고 위 질문처럼 죄인들의 몸이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씻겨 진다는 말 은 성경 어디에 없다. 죄인의 몸은 죽어야 하는 것이지 씻겨 지는 것이 아 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피는 죄들의 용서, 즉 구속이 중심적 요소다.(골 1:14) 히브리서 10장 19절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신자의 몸을 씻 는다는 것이 아니라 믿는 자가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을 통해 거듭나서 새롭고도 살아있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거듭남
372 23. 반론에 답하여 을 말하는 것이다. 히브리서 10장 22절에서도 몸에 피를 뿌린다는 말은 없다. 히브리서 10장 22절의 마음에 뿌림을 받아 에서 마음은 영적인 것 이지 육신이 아니다. 또 마음은 생명의 근원이다. 즉 이 말씀의 의미는 생 명의 연합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 우리 몸은 순수한 물로 씻겼으니 할 때도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피를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이미 예수 그리스 도의 피의 공로로 구원은 받은 믿는 자가 말씀을 통해 성화되는 과정을 말 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신자들이 감사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자신의 죽음으로 인정함으로서 점점 더 성화되어 가는 과정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우리의 죄 된 육신의 몸을 씻는다면 이것은 큰 오류다. 왜냐하면 돌은 아무리 씻어도 돌인 것과 같이 죄인이란 본질 자체가 죄인이기 때문에 아무리 씻어도 죄인이기 때문이다. 죄들(sins)은 내 몸을 떠나 외부적으로 이미 행하여 진 것이므로 씻는 것이 아니고 피 값으로 용서 받아야 하고 죄(sin)된 육신은 본질자체가 죄이기 때문에 씻는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죽음을 통해 제거되어야 하는 것이다. 몸은 무죄한 몸이 있고 죄 된 몸이 있다. 처음 아담은 무죄한 육체였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무죄한 육체는 영생이 아니고 하나님께서 쓰실 수 있 는 위치다. 즉 아무것도 뿌려지지 않은 밭이어야만 씨-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것이다. 죄 된 육체란 무엇인가? 밭인 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잡초가 무성한 밭에 씨를 뿌리려면 갈아엎 어야 한다. 이것이 십자가고 구속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예수님의 공로다. 나는 사탄의 밭이 된 자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갈아엎어져야 할 밭이라 고 인정하면 전적으로 나는 구속받은 것이다.(골1:14) 구속이란 씨-하나 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구원이 아니다. 구속받아 죄가 없더라도 씨와 흙이 연합하여 열매를 맺으려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한다. 생명은 죽음을 통해 연결되는 것이다. 구속받은 위치는 창세기 2장 7절의
373 23. 반론에 답하여 아담의 위치다. 그 당시 아담은 죄가 없었다. 그러나 죄가 없더라도 하나 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죽고 다시 태어나야 했다.(창2:21~23) 아담은 완성품이 아니라는 것이다. 만일 아담이 영생이 있었다고 하면 그는 완성 품이다. 그러나 사람이 만들어진 재료는 흙으로서 생명이 아니다. 죄가 있 으나 없으나 본질은 흙으로서 똑 같다. 살과 피는 영적인 나라에 갈 수 없 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하나님의 아들로 태어 난 자들이나 사탄의 씨가 들어와 사탄의 자식이 된 자들이나 모두 육신은 죽어야 한다. 하나님의 씨가 들어 온자는 의로운 자의 부활로, 사탄의 씨 가 들어온 자는 불의한 자의 부활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것을 생명의 길, 사망의 길이라고 하는 것이다. 생명의 원리를 보면 흙에 씨가 뿌려지면 흙은 씨와 한 몸이 된다. 이것은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흙은 자체로 생명이 없고 씨와 연합하여 한 몸이 됨으로서 생명을 가지는 것이다. 그러면 흙에 씨를 뿌린 농부는 무엇을 거두는가? 열매를 거두지 흙을 거두지 않는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을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고전15:20)육신은 씨가 아니고 흙임으로 흙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것이다.(창3:19) 흙-육신은 죄가 있으 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갈 수 없는 것이다.(고전15:50) 이것이 생 명이신 하나님께서 만유를 통해 계시하는 우주적 진리다. 너무도 당연하고 쉬운 진리를 거부하면 성경의 계시는 영원히 닫혀 있는 것이다. 씨-하나님께서 흙-사람에게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시는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바뀌지 않았다. 비록 사탄이 들어와 흙-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 려 자신의 열매를 거두려 하였지만 어찌 감히 한 낱 피조물인 사탄이 하나 님의 지혜와 권능을 당할 수 있겠는가?(고전1:24) 사람이 만들어진 재료 는 흙이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부시고 다시 만들 수 있는 것이다. 사람이 천사처럼 씨로 창조되었다면 거듭남이 없다. 그러나 흙으로 창조되었기에 잘못되었더라도 다시 재창조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로 사람을 재창조하신 것이다. 이것은 전적으로 그리스도의 구속
374 23. 반론에 답하여 을 믿음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재창조되어 내 안에 하나님의 씨가 들어와 거듭났다 하더라도 육은 죄가 있건 없건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육은 땅에 속한 몸이지 하늘에 속한 몸이 아니다. 각각의 세계에 맞는 몸을 입어야 그 세 계에 들어 갈 수 있는 것이다. 땅에 속한 자들은 또한 땅에 속한 그 사람과 같고 하늘에 속한 자들은 또 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과 같으니 우리가 땅에 속한 그 사람의 형상을 지닌 것 같이 또한 하늘에 속하신 그분의 형상을 지니게 되니라. (고전 15:48~49) 우리가 땅에 속한 몸을 지닌 것은 죄 때문에 땅에 속한 몸을 가진 것이 아 니다. 죄 이전에 땅에 속한 몸을 가졌다. 땅에 속한 몸으로는 죄가 있건 없건 하늘에 갈 수가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거듭난 것은 영안에서 이루어 졌다. 그런데 우리의 육신까지 실제적이고 가시적으로 하늘에 속한 영적인 몸으로 거듭나려면 우리의 육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늘은 씨-하나님을 예표하고 땅은 사람을 예표한다. 하늘은 공기와 같고 무한하다. 그래서 하늘은 하늘들로 복수이고 땅은 단수이다. 이 의미는 하 늘 안에 땅이 삼켜져 있다는 것이다. 현재 땅은 공기와 같은 영안에 삼켜 져 있는 것이다. 이것은 하늘과 땅, 곧 하나님과 사람의 연합을 예표하고 있는 것이다. 땅은 영원한 것이 아니다. 그래서 제한이 있다. 그러면 제한 을 가진 땅이 영원한 세계로 들어가려면 어떻게 되어야 하는가? 영원한 영 의 세계 안으로 삼켜져야 하는 것이다. 삼켜진다는 것은 삼킴을 당한 대상 이 없어지는 것이고 죽는다는 것이다. 육의 세계가 영의 세계 안으로 흡수 통일 되는 것이다. 구약의 제사의식에서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 있다. 희생물은 죄에 대한 심 판을 의미하고 헌물은 하나님과 교통을 의미한다. 사람이 죄가 없을 때는 하나님과의 교통을 위해 헌물만 드리면 된다. 그러나 죄로 인해 희생물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가 들어온 이후 사람은 하나님께 대하여 희생
375 23. 반론에 답하여 물과 헌물이 동시에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래서 레위기를 보면 번제헌물, 음식헌물, 화평헌물, 죄헌물, 범법헌물 이 다섯 가지 헌물의 명칭이 모두 헌물로 끝나지만 그 안의 내용을 보면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용어를 동시에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은 하나라는 것이다. 또 이 희생물 과 헌물은 결국 그리스도의 한 인격을 예표한다. 다섯 가지 헌물은 결국 그리스도라는 인격을 여러 방향에서 표현한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신약 에 오면 이 희생물과 헌물은 그리스도라는 한 인격 안으로 통일되었다. 구 약에서 모형으로 나타난 것이 신약에 와서 실재로 나타난 것이다....희생물과 헌물은 주께서 원치 아니하고 오직 나를 위하여 한 몸을 예비하 셨도다.(히10:5) 이 말은 희생물과 헌물은 실재가 아니고 모형이기 때문에 실재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니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그리스도로 예표되었던 희 생물과 헌물은 결국 우리 자신이다. 우리 자신이 그리스도라는 인격으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 희생물과 헌물은 모두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졌 다. 이것은 생명의 연합을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번제헌물만이 태워진 것 이 아니라 모든 헌물은 번제단에 향기로운 헌물이 되기 위해 불에 의해 재 로 태워졌다.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제사의식에서 제 물은 나 자신을 의미하고 불은 하나님을 예표한다. 이제 주의 불이 내려와서 태우는 희생물과 나무와 돌들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으므로 온 백성이 그것을 보고는 얼굴을 대고 이르되 주 그 분은 하나님이시로다. 주 그분은 하나님이시로다, 하니라(왕상 18:38~39) 이제 솔로몬이 기도를 마치매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희생물들을 태워버렸 고 주의 영광이 그 집에 가득하였더라.(대하 7:1) 이 불은 영원히 없어지지 않기 때문에 영원한 불이다. 그리고 이 불로 제 물을 핥아간다고 하였다. 우리가 영원한 생명을 가지려면 하나님께로 삼켜
376 23. 반론에 답하여 져야 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죄 있는 희생물만 태워진 것이 아 니라 죄 없는 헌물도 태워졌다. 모두 하나님의 불에 삼켜져야 영원한 생명 에 참여하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사람들은 죽지 않고 살아서 어떻 게 하면 하늘에 올라가려 한다. 그러나 아무리 혼자 제자리에서 뛰어봤자 몇 미터 못 올라간다. 우리가 하나님의 불로 태워져 재가 되고 연기가 되서 향기로운 냄새가 될 때 하나님께서 흠향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의 불로 태워진 헌물을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 이라고 하는 것이다. 짐승을 태운 냄새가 뭐가 그리 향기롭겠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불로 태운 짐승이 재가 돼서 연 기되어 올라가는 것을 향기로운 냄새라고 하는 것이다. 이것은 인생은 흙 이고 피조물이라는 위치를 지켜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이 위치에 있을 때만 하나님과의 생명이 연합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너무도 명확한 그림이다. 흙-사람은 하나님께 죽음으로 삼켜져야 내가 영원한 생명에 참 여한다는 것이다. 낮은 생명은 높은 생명에 삼켜져서 높은 생명에 참여하 는 것이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육신은 죄가 있건 없건 태워져서 재가 되고 향기로운 냄새가 되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13. 하나님 아버지께서 아들 예수 그리스도께 요구하신 것은 육체의 죽음이다. 하나님께서 아담을 처음부터 죽을 운명으로 창조하셨 다면 예수님께서 몸을 내어 놓으신 육체의 죽음은 아무 의미없는 일일 될 것이다. 이것도 생명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의 육체적 죽 음을 같은 것으로 보는 오해에서 불거진 일이다. 죄가 없더라도 인생은 영 원한 생명이신 하나님께 동참하려면 하나님께 삼켜져야 한다. 예를 들어 내가 어떤 사람과 같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는가? 내가 그 사람에게 삼
377 23. 반론에 답하여 켜져야 한다. 같은 이치다. 예수님은 죄가 없음에도 왜 침례를 받았는가?(마3:16) 인생은 죄가 없더 라도 헌물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하고 죄가 없더라도 죽음을 발표해야 한 다는 것이다. 인생은 씨가 아니라 흙이고 인생은 하나님 앞에 피조물임을 선포하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께서 정해 주신 이러한 인생의 위 치를 이탈했다. 아담 이래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이 고귀한 인생의 위치를 지킨 자가 아무도 없었다. 인생은 흙임에 불구하고 씨처럼 살았다. 그러므 로 씨-하나님은 씨를 뿌릴 밭이 없었으니 얼마나 곤고 하셨겠는가? 하나 님은 인생을 창조하신 이래 수천 년 동안 자신의 복을 주시기 위해 참 인 생을 기다려왔다. 그런데 죄가 없으신 예수님도 죽음을 선포하셨다. 이것 은 드디어 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사람이 나타나신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 께서 얼마나 기쁘시겠는가? 보라, 하늘로부터 한 음성이 있어 이르시되, 이 사람은 내 사랑하는 아들 이라, 내가 그들 매우 기뻐하노라, 하시니라.(마3:17) 하나님은 예수님께 왜 육체의 죽음을 요구하셨는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 신 생명의 길이기 때문이다. 아담 안에 있는 모든 사람은 이 길을 피해갔 다. 아담 안에 있는 사람들도 죽었지만 그 사람들의 죽음은 생명의 길 안 에서 죽음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정하는 죽음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들도 모두 죽었지만 그들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인생의 운명을 원망 하며 죽었다. 핑계 없는 무덤이 없다는 말이 있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 자를 원망한다는 의미다. 왜 나를 천사처럼 죽지 않게 만들지 왜 이렇게 만들었습니까? 라고 하면서 창조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다. 창조주 하 나님은 큰 뜻이 있어서 이렇게 만들었는데 피조물이 이 뜻을 모르고 창조 주 하나님을 원망한 것이다. 창조주 하나님은 창조 사역을 끝마친 후 안식하시고 기뻐하셨다. 그런데 피조물이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는 것은 창조자의 창조사역을 원망하는 것 이고 안식을 방해하는 것이다. 그래서 안식일을 어기는 자는 죽이라는 의
378 23. 반론에 답하여 미가 여기에 있는 것이다. 피조물이란 자신의 목적이 없고 창조자의 목적 만 있다는 의미다. 창조자가 만들어 준 운명대로 살아야 된다는 것이다. 그런데 아담은 하나님이 만들어 주신 자신의 운명을 원망하고 주어진 위치 를 이탈했다. 아담이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이탈한 것은 창조 주 하나님을 원망하는 것이고 안식일을 어긴 것이다. 그러므로 사망의 길 로 간 것이다. 십자가는 부정적인 면과 긍정적인 이중적 의미를 내포하고 있다. 단순히 심판만이 있는 것이 아니고 승리가 있고, 죽음만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생명 도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죽음이다. 단지 심판만 을 생각하는 것은 너무 단순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인류를 대표하여 심판받았지만 성경은 또 사탄도 심판받았다고 한다. 표면적으로 보면 사탄 의 함정에 의하여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으셨는데 이것이 어떻게 사탄에 대한 심판이고 승리인가? 라는 것이다. 아담은 사탄의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하나님이 정해 주신 흙-사람의 위 치, 곧 생명의 길을 이탈해서 신이 되려고 했다. 그런데 예수님은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27:40)는 사탄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키시고 죽으셨다. 죽기까지 하나님 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이것이 사탄과의 전쟁에서 예수님의 승리고 사 탄에 대한 심판인 것이다. 사탄은 잔머리를 굴려 아담을 유혹했고 아담은 인생의 위치를 이탈함으로 이 전쟁에서 패했다. 그런데 여자의 씨이신 예 수님이 오셔서 죽기까지 흙-사람의 위치를 지켜 하나님께 순종하심으로 (빌2:8) 하나님의 보좌 오른편에 오르신 것이다. 이제 여자의 씨-예수님 으로 인해 사람은 결코 신이 될 수 없음에도 신이 될 수 있다고 속인 사 탄의 속임수가 더 이상 통하지 않으니 그의 머리가 상하게 된 것이다.(창 3:15)
379 23. 반론에 답하여 14. 만일 아담의 죄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혼만의 죽음이라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 죽으실 수 없고 또 죽으셔도 안된다. 이것도 기본적인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 대한 오해와 죄에 대한 오해이 다. 성경이 말하는 사망이란 사망의 노선 안으로 들어갔다는 의미지 단순 하게 육체적 죽음만을 가리키는 것이 아니다. 생명의 길이건 사망의 길이 건 표면적으로 똑 같은 과정을 겪는다. 어떤 씨든 땅에 뿌려지면 똑 같은 과정을 겪는 것이다. 육체가 한 번 죽는 것은 정해진 것이고 그 이후에 부활이 있는 것이다. 만 일 죄로 인해 육체적 죽음이 오는 것이라면 죄인들은 왜 부활하는가? 죄인 들의 몸은 부활하지 않고 불호수로 직행해야 한다. 예를 들어 고린도전서 15장 17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였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라고 하고 있다. 이 말씀 대로라면 죄인들의 몸은 부활하지 말고 여전히 땅속에 있어야 한다. 그러 나 성경은 죽은 자들은 의로운 자의 부활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이건 모두 부활한다고 말한다.(행24:15)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의 노선 안에 있는 의 로운 자의 부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생명의 길에 있건 사망의 길에 있건 표면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는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도덕적인 죄가 아니다. 하나님이 정해주신 피조물의 위치 이탈, 곧 하나님의 창조목적에서 이탈한 것을 말한다. 아담과 예수님 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신이 된다고 하는 사탄의 거짓말에 속아 흙- 사람의 위치를 이탈하여 사망 노선으로 간 것이고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 -사람의 위치를 지킴으로 생명의 노선 안에 계신 것이다. 흙-사람은 생명 이 아니다. 영생을 얻을 자였지 영생을 가진 자가 아니었다. 우리는 흔히 예수님의 죽음을 부정적인 것만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하나님 의 지혜의 지식의 부요하심을 우리가 어찌 따라갈 수 있겠는가? 예수님의
380 23. 반론에 답하여 죽음이 단순히 대속적 죽음에 그친다면 그것이 어떻게 하나님의 권능과 지 혜라고 할 수 있는가? 그것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최악의 부정적 상황을 최상의 긍정적 상황으로 바꾸셨다는데 하 나님의 지혜와 권능이 있다는 것이다. 즉 십자가에는 표면적으로 심판이라 는 부정적인 내용이 있지만 그 이면에는 생명이 있다는 것이다. 희생물의 의미도 있지만 헌물의 의미도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대속, 곧 죄가 없으면 영생이라는 생각을 하는데 무죄는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 치지 영생이 아니다. 단순히 법리적으로 죄만 사하면 영생이라고 아는 것 은 낮은 수준이다. 영생은 법리적인 문제가 아니라 유기적인 문제다. 하나 님은 씨를 뿌려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시다. 예수님은 처음에 흙-육신으로 오셨고 부활을 통해 씨가 되셨다. 하나님의 왕국의 씨-조상이 되셨다는 것이다. 첫 사람 아담은 살아 있는 혼이 되었다 함과 같이 마지막 아담은 살려주는 영이 되셨느니라.(고전15:45) 살려주는 영은 씨라는 의미다. 영- 씨가 되려면 육신은 죽고 영적인 몸으로 부활해야 한다. 흙-사람으로는 흙 -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없다. 영-씨가 되어야만 흙-사람에게 생명을 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수님은 흙으로 오신 동시에 씨로 오신 것이다. 예수님의 죽음이 단순히 부정적인 것이라면 사탄이 왜 예수님께서 십자가 로 가는 것을 방해 했겠는가? 사탄은 예수님을 십자가의 죽음이라는 극한 의 상황으로 유도한 후에 갑자기 십자가를 회피하도록 유혹했다. 사탄은 예수님에게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거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마27:40) 하면서 하나님이 정해주신 인생의 위치를 이탈하도록 유혹했다. 물론 예 수님도 그 상황에서 자신을 구원해달고 기도하셨지만 끝까지 사람의 위치 를 지키면서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셨다. 즉 흙-사람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만일 거기서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훨훨 날아 내려오셨다면 그분은 사람이 아니고 신이다. 그것은 신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은 아담으로 돌 아가는 것이다. 그렇게 되면 씨-하나님의 창조계획은 수포로 돌아간다. 씨 를 뿌릴 흙-사람이 없기 때문이다
381 23. 반론에 답하여 예수님 이전까지 아담 안에서 있던 사람들은 열심히만 하면 신이 될 수 있 다는 가능성을 가지고 살았다. 마음 깊은 내면에는 늘 죽지 않는 천사를 부러워하면서 열등감을 가지고 살았다. 아담도 사실 이 열등감 때문에 흙 -사람의 위치를 버리고 신이 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흙-사 람을 창조하신 후에 보시기에 좋았더라 하시면서 만족하시고 안식하셨다. 성경도 사람이 천사보다 조금 낮게 창조되었으나 위치적으로는 천사보다 낫다고 말하고 있다.(히1:14) 그러나 사람들은 지금도 늘 죽지 않는 천사 를 부러워하면서 한 번 죽는 것을 불완전하고 생각한다. 사람은 사람으로 서 창조 목적이 있는 것이고 천사는 천사로서의 창조 목적이 있음에도 사 람들은 늘 천사와 비교한다. 그래서 원래는 죽지 않을 존재인데 죄 때문에 육체적 죽음이 왔다고 말한다. 아담은 사탄에게 속아 하나님께서 주신 인 생의 위치를 원망하며 그 위치를 이탈했다. 이것은 피조물이 창조자 하나 님을 원망한 것이고 안식을 방해한 것이다. 이것이 아담에게는 사망이다. 그러나 예수님은 아담이 버린 인생의 위치를 십자가 앞에서 담담히 받아 드렸다. 거기서 인생의 위치를 원망하지 않고 십자가에 매달면 모든 사람 이 죽을 수 밖에 없다는 진실을 담담히 받아드리고 자신을 하나님께 맡기 신 것이다. 또 구약의 역사를 보면 의인들은 절대로 하나님의 심판받지 않는다는 사상 을 가지고 있다. 소돔과 고모라에서 아브라함과 롯이 구원을 받았고, 다니 엘의 세 친구는 용광로에서 구원을 받았다. 구약의 관념으로는 예수님은 최소한 그 상황에서 하나님으로부터 구원을 받는게 당연하였다. 제자들도 그런 일말의 기대를 가지고 따라 다녔다. 그런데 예수님은 일반적인 사람 들과 다름없이 죽었다. 그분도 십자가에서는 꼼짝 못하고 죽더라는 것이다. 우리는 십자가에서 매달린 그 사람을 보고 무엇을 알아야 하는가? 인간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진리를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인간의 정체성이 폭로된 것이다. 우리는 이 사람을 보고 인간의 원형을 발견해야 한다는 것 이다. 사람은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382 23. 반론에 답하여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우리의 상식으로는 너무도 허무하게 죽었는데 이 사 람을 하나님께서 하나님 왕좌 오른편에 앉히셨다는 것이다. 우리의 상식과 기대 밖에서 죽었는데 그분을 하나님이 인정하셨다는 것이다. 교리적으로 그분은 하나님의 아들이기 때문에 살아났다, 하나님이기 때문에 살아났 다, 이렇게 알면 이것은 나에게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분과 내가 똑 같은데 그분이 살아나야 나도 살 수 있는 것이지 그분과 내가 다르다면 그 분을 경배는 할 수 있지만 그분과 내가 하나가 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분 과 우리가 똑 같은데 그분이 살아나야 인류에게 보편적으로 적용될 수 있 는 것이지 그분만이 특별하다면 그분은 인류의 구원자가 될 수 없는 것이 다. 그분의 십자가의 죽으심이 보여주는 것은 사람은 흙이지 씨가 아니라 는 것이다. 절대적으로 씨-하나님은 흙-사람을 기다려왔는데 바로 이 사 람을 기다려 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부정적인 것이고 이 안에는 인류의 죄에 대한 심 판의 의미도 있지만 이 죽음 안에는 하나님께서 아담을 창조하시고 깊이 잠들게 하신 후 거듭나야하는 생명의 연합이라는 긍정적인 부분도 들어 있 다는 것이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표면적으로는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셨 다.(고후5:21) 그러나 이면적으로 그분은 죄인이 아니다.(히4:15) 표면적 으로는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처리하기 위해 죽으셨지만 그 이면에는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 위한 과정도 들어 있다는 것이다. 그래서 바울은 말한다. 오 깊도다,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의 부요함이여! 그분의 판단은 헤아릴 수 없으며 그분의 길들은 찾지 못할 것이로다! (롬 11:33) 하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하나님의 불을 만나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그래서 십자가의 죽음은 용광로와 같은 것이다. 그 안에는 부정적인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포함되어 있다. 용광로 안에는 폐품도 들어가지만 좋은 것도 들어간다. 그렇지만 그 안에서 용해되는 것은 매 한 가지다. 오직 새로운 창조를 위해 불에 의해 녹여지는 것이다. 희생물과
383 23. 반론에 답하여 헌물은 한 불에 의해 태워져 재가 되고 하나님이 흠향하는 향기로운 냄새 가 되었다. 그것은 태우는 희생물이요, 불로 예비하여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 이니라. (레1:17) 흙-사람은 씨-하나님과 연합하여 살아있는 돌이 되고(벧전2:5) 하나님 의 불에 의해 태워져 보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흙이 돌이 되고 돌이 보 석이 되는 것이 생명의 연합을 통해 흙-사람이 변화되는 정상적인 생명의 길이다. 15. 사람은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수많은 성경 가 르침을 훼손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고귀한 교리인 주님의 대속과 속죄의 진리를 파괴한다. 예수님은 죄를 짓지도 아니하시고 죄와 상관없는 분이다. 다만 죄인들을 위해 대신 죽으신 것이다.(고후 5:21) 만약 아담의 죄가 육체적 죽음이 아닌 영적인 죽음이라면 죄가 없으신 예수님께서는 죽으실 수도 없고 또 죽으셔도 안된다. 사람이 본래 죽을 존재로 창조되었다는 것이 결코 성경의 대속과 속죄의 진리를 파괴하지 않고 더 풍성하게 한다. 이 진리가 가려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의 구속을 단순히 법리적인 측면에서만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 나 하나님의 생명의 세계는 유기적인 것이지 법리적인 것이 아니다. 사람이 죽을 수 있으니까 사형선고를 내리는 것이다. 죽지 않는 천사에게 는 사형선고를 내리지 않는다. 사람은 죄가 없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 적을 위해 육체적 죽음을 통해 거듭나야 하는 것이 성경의 진리다.(창 2:21~23) 이것은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필연적 과정이다. 그래서 흙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죄가 없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다
384 23. 반론에 답하여 그러나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대가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 것 이다. 아담의 죄로 인해 단순히 영적인 죽음이 들어왔다는 것은 맞지 않다. 성경 어디에도 영적인 죽음이라는 말은 없다. 아담으로 인해 사망이 들어 왔다는 것은 사람은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를 받아 들여 열매를 맺어야 할 운명인데 사탄의 씨를 받아들여 사탄의 열매를 맺는 길로 들어섰다는 것이 다. 그러니까 흙-사람이 사탄의 씨를 받아들여 육체가 죽고 불의한 자의 부활로 나타나고 최종적으로 둘째 사망이라는 불호수로 가게 되어있는데 이 과정 전체를 사망이라고 하는 것이다. 단지 육체가 죽는 어느 특정 과 정만이 사망이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오해는 여기서 오는 것이다. 아담으 로 말미암아 사망이 들어왔다는 것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이 아니라 사망의 세계가 들어왔다는 것이다. 이러한 과정은 흙-사람이 씨-하나님을 만나도 표면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겪어야 하는 것이다. 흙은 어떤 씨를 만나도 열매를 맺으려면 동일한 과정 을 겪는 거와 마찬가지다. 사람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반 드시 필요한 것이다. 죄가 없었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 죄 로 인해 피 흘림의 육체적 죽음으로 발전한 것이다. 죄가 있건 없건 죽음 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필요한 과정이다. 하 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12:29) 하나님의 불을 만나면 죄가 있건 없건 타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예수님도 우리의 대속만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을 다시 취하기 위해 죽으신다고 하셨다.(요 10:17) 이러므로 내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시나니 이는 내가 내 생명을 다시 취 하려고 그것을 버리기 때문이라.(요10:17) 그러면 왜 죄로 인해 피 흘림의 육체적 죽음이 필요한가? 사탄과의 전쟁이라는 관점에서 보면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패하고 하 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이탈하여 사망의 길로 갔다. 그러나 예수님 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인생의 위치를 끝까지 지킴으로 하나님이 정해 놓은
385 23. 반론에 답하여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 흙-사람의 위치를 죽기까지 지킴으로서 씨-하나님 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일으키신 것이다. 흙과 씨가 연합되어 하나님이 최 종 목적인 부활의 첫열매가 되신 것이다.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죄는 세상이 말하는 율법적인 죄가 아니다. 여기서 죄란 하 나님의 씨가 뿌려져야할 흙-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씨가 다시 뿌려지려면 그 밭은 갈아 엎어져한다. 이게 십자가의 심판이다. 이것은 법리적인 것이다. 단순히 밭이 갈아엎어졌다 고 생명의 연합이 되는 것이 아니다. 갈아엎어진 밭에 씨가 들어와 유기적 인 생명의 연합을 통해 씨가 발아하는 것이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육신은 어차피 한 번 바꿔져야할 대상이다. 우리 육신은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위해 어차피 죽음을 통해 영적인 몸으로 바꿔져야 할 대상이었다. (창2:21~23, 요10:17) 그런데 이 과정이 싫어 아담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 그러나 결국 사탄에게 속아 사탄에게 사람의 인 격과 인권을 빼앗기고 사탄의 밭이 돼서 사탄의 열매를 맺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빼앗긴 인격과 인권을 되찾아오려면 희생이 따른다. 그래서 피 흘림이 있는 것이다. 아담과 예수님의 차이는 무엇인가? 아담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죽기까지 인생의 위치를 지킴으로서 하나님 의 목적 안에 계신 것이다. 당연히 예수님은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신 분 이기에 죄와 상관없는 분이다. 이것을 내부적으로 들여다보면 사탄과의 전 쟁이다. 전쟁에서 피 흘림 없이 승리는 없다. 아담이 사탄에게 빼앗긴 인 격과 인권을 예수님의 피 흘리심을 통해 되찾아 오신 것이다. 그래서 예수 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이 필요한 것이다. 이것을 교리적이고 법리적으로 대속이라고 하는 것이고 우리의 죄가 되셨 다고 하는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은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다. 단순히 예수님이 법리적인면 때문에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이 아
386 23. 반론에 답하여 니다. 생명은 태어나는 것이지 교리적이고 법리적인 아니다. 씨를 뿌리지 않으면 열매를 맺을 수 없는 것이다. 예수님은 이 땅에 흙-육체로 오셨다. 이 위치를 피 흘려 죽기까지 지키자 씨-하나님께서 씨를 뿌려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기독교인들은 예수님의 구속을 대속, 곧 대신으로 많이 이해한다. 물론 대 속이라는 의미도 있다. 그러나 만일 대신이라면 믿지 않는 자들의 죄도 다 용서 받고 인류 전체가 구원받아야한다. 그런데 왜 믿는 자들만 구원받는 가? 성경은 대신 이라는 말 대신 함께 라는 말을 주로 사용하고 있다. 생 명은 대신 할 수 없다. 열매는 뿌린 대로 거두는 것이다. 성경의 일관된 진리는 함께 죽고 함께 사는 것이다. 예수님이 걸어가신 생명의 길 을 보 고 그분 안에서 함께 죽은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라는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심판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은 신과 같이 되고 싶어 선악과를 먹었고 예수님은 신과 같은 사람으로서 심판을 받았다. 예수님은 십자가에서 신과 같은 능력은 모두 사라지고 인생의 존재적 위치만 남았다. 인생은 무교병이고 흙이라는 것이 다. 인생은 흙이지 씨가 아니라는 것이다. 여기서 인생의 정체성이 폭로된 것이다. 신과 같은 사람은 거짓이라는 것이다. 십자가란 거짓이 폭로되고 진실이 드러난 자리다. 아담 안에서 신이 되고 싶은 모든 인류의 소망이 끝난 자리다. 십자가란 무엇인가? 하나님은 인생들에게 너희들의 주제를 알라는 것이다. 인생은 결코 신이 될 수 없고 흙이고 벌거숭이라는 것이다. 이것만이 진실이고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씨-하나님께서 복을 주실 수 있다는 것이다. 각각의 피조물에게는 생명의 과정이 있다. 예를 들어 땅은 씨를 받아들여 싹을 내고 열매를 산출한다. 바로 이 정상적인 과정을 예수님이 최초로 걸 어가신 것이다. 예수님이 오시기 전까지 인류는 사망의 길 안에 있었고. 가만히 있으면 자동적으로 사망의 열매를 맺는다. 이런 인생에게 예수님께 서 생명의 열매를 맺는 생명의 길을 열어 놓으셨다
387 23. 반론에 답하여 그러면 사망 아래 있는 인생은 생명의 길을 가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 가? 나는 흙으로서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야 할 밭인데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다는 것을 인식하고 예수님과 함께 갈아 엎어져야한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그리고 근원적으로 인생은 씨가 될 수 없고 본질적으로 흙이라는 것 을 알아야 한다. 십자가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희생물과 헌물이라는 이중적 의미를 내포한다. 우리는 단순히 희생물이라는 부정적인 상황만 주로 인식하고 헌 물이라는 긍정적 상황은 간과하고 있다. 희생물은 법리적이나 헌물은 생명 의 교통을 위한 유기적인 것이다. 내가 흙이 되지 않으면 씨-하나님이 복 을 주실 수 없기 때문이다. 이것은 예수님의 십자가를 보고 그 자리가 인 생의 원래의 위치임을 발견하고 그 자리로 가는 것이다. 이것이 회개다. 십자가에 못 박힌 사람이 바로 나라는 것을 시인하면 나는 예수님과 동일 시된다. 내가 십자가에 못 박히지 않았지만 흙이라는 인생의 정체성을 발 견하고 그것을 믿으면 나는 십자가에서 예수님과 연합되어 죽은 자이고 예 수님이 살아나심 안에서 나도 살아난 자이다.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서 헌물로 창조되어 육체가 한번 죽도록 되 어 있다는 것은 진리다.(딤후4:6) 이 진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희생물 되심 을 전혀 훼손하지 않는다. 오히려 사람의 육체가 영생하도록 창조되었는데 죄 때문에 죽음이 왔다고 하는 잘못된 교리가 성경 전체에서 계시하고 있 는 풍성한 은혜를 가리고 있다. 사람이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라는 위치 는 변개할 수 없는 위치다. 사람은 흙이고 재라는 것이다. 이 위치에 있는 자에게만 씨-생명이 뿌려질 수 있다
388 23. 반론에 답하여 16.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로부터 일으켜졌으므로 다시는(no more) 죽지 아니하시고 사망이 다시는(no more) 그분을 지배하지 못하는 줄 우리가 아노라. 그분께서는 죽는 것을 통해 친히 죄에 대하여 단 한번 죽으셨으나 살아계심을 통해 하나님께 대하여 살아 계시나니 이 와 같이 너희도 너희 자신을 죄에 대하여는 참으로 죽은 자요, 하나님 께 대하여는 예수 그리스도 우리 주를 위하여 산 자로 여길 지어다. (롬6:9~11) 위 말씀에서 사망이 다시는 그리스도를 지배하지 못하게 한다고 했 는데 사망 이 그리스도를 한 번 죽게 한 것은 그분의 몸이다. 죄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죽은 것 같이 우리도 죄 때문에 우리의 몸이 죽은 것이다.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죽을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몸은 죄의 삯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성경은 몸이 죽는 이유가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고 선언한다. 이 말씀도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 을 구별하지 못한 오해이다. 몸이 죄 때문에 죽는 것이라면 왜 죄인들도 부활하는가? 죄인들은 영원히 부활하지 말고 무덤 안에 있어야 하는 것이 다. 예수님은 생명의 길 안에서 죽음을 죽지 않고 잔다 라고 표현하셨고 성경은 일관되게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을 잔다 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의 육체적 죽음을 부정적으로 표현하지 않는다. 생명의 길이건 사망의 길이건 동일한 과정을 겪는다. 표면적으로 보면 동 일한 육체적 죽음이지만 이면적으로 보면 이것은 천당과 지옥의 차이다. 육체가 죽는다고 해서 동일하게 보면 안되는 것이다. 물론 예수 그리스도 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성경의 계시는 아 담은 죄가 없더라도 거듭나기 위해서는 피흘림이 없는 헌물로서 죽음이 필 요했다.(창2:21~23) 죄가 들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희생물로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은 죄를 대속하기 위한 법리적인 것이
389 23. 반론에 답하여 고 헌물은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유기적인 것이다. 수학적으로 보면 희생물 과 헌물로서 두 번 죽음이 필요하다. 그런데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으로 죽 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태우는 태우는 희생물 곧 주께 향기로운 냄새를 내는 헌물(레1:9) 이라고 하면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다.(레 1:9) 단순히 죄를 대속하기 위한 것이라면 희생물로서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 단지 예수님이 희생물로만 죽으셨다면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 이 없기 때문에 부활이 없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물로서 제단 위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법리적인 희생물 안에 유기적인 헌물이 포함되 어 있는 것이다. 그래서 늘 희생물과 헌물은 같이 따라 다닌다. 물론 예수 님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물로서 단 한번 죽으셨다. 그런데 단순히 법리 적인 죄의 대가로서 예수님이 죽었다면 예수님이 어떻게 부활할 수 있는 가?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기 때문이다. 부활 할 수 없는 것이다. 그런데 예수님은 대속을 위한 희생물인 동시에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 하나님께 드려졌기에 부활하신 것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원칙은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흙-사람에 게 하나님의 씨가 들어가면 하나님의 아들로 열매를 맺고, 사탄의 씨가 들 어가면 사탄의 아들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예수님과 아담의 차이는 무엇 인가? 예수님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걸으셨다면 아담은 생명 의 길을 이탈하여 사망의 길로 갔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생 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신의 삶과 죽음에 있는 것이 아니고 생명의 길 안에 서는 모든 과정이 생명이고, 사망의 길 안에서는 모든 과정이 사망이라는 것이다. 사망노선 안에서는 육체가 살아 있으나 죽은 것이고 부활해도 사 망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생명의 노선 안에서는 육체가 죽어도 생명이고 모든 과정이 생명이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예수님은 죽기까지 흙-인생이라는 위치를 죽기까지
390 23. 반론에 답하여 지킴으로서 생명의 노선 안에서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아담이 빼앗긴 생명노선을 되찾아 오신 것이다. 전쟁에서 승리는 공짜가 없다. 그래서 피 흘림의 대가가 필요한 것이다. 예수님은 피 흘림 을 통해 사탄에게 승리하고 생명노선을 찾아오신 것이다. 예수님은 죽기까 지 생명노선, 곧 하나님의 목적 안에 계심으로서 죽으시고 다시 살아나신 것이다. 하나님의 씨를 통해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 전적으로 예수님은 유기적인 생명 노선 안에서 하나님의 씨를 통해 부활의 첫 열매가 되신 것 이다. 이 과정 안에서 단지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을 법리적이고 교리 적으로 표현한 것이 대속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은 단지 우리의 죄를 대신 한 희생물만이 아니다. 그분은 하나님과의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한 번제헌물이 되셨다. 또 죽기까지 생명노선을 지킴으로서 사탄에게 승리하 셨다. 십자가는 만유를 포함한 사건이다. 부정적인 모든 것과 긍정적인 모 든 것이 포함되어 있는 우주의 중심점이다. 예수님은 죄인이 아닌데 어떻게 죽으실 수 있는가?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죄를 속하기 위해 특별히 하나님께서 죽음을 허락했다는 말은 진실이 아니 다. 물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속하기 위해 죽으셨다. 자연 사가 아니고 고난을 받고 죽으셨다. 그런데 그분이 죽을 수 없는 분인데 죽으신 것이 아니다. 죽을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만일 그분이 그런 식으로 죽으셨다면 우리와 그분은 상관없는 분이다. 나와는 너무도 거리가 먼 분이고 나에게는 적용될 수 없는 것이다. 그분에게 적용되었던 것이 나 에게도 동일하게 적용되어야 복음이지 만일 예수님이 죽을 수 없는 분인데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특별하게 죽으셨다면 우리에게는 절망이고 복 음이 아니다. 1. 죄 때문에 예수님의 몸이 죽은 것 같이 우리도 죄 때문에 우리 의 몸이 죽는 것이다. 라는 것에 대하여
391 23. 반론에 답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신 것이지 그분이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분은 죄가 없음에도 죽으셨다. 그런데 왜 죽으셨는가? 죄 가 없음에도 죽을 수 있으니까 죽으신 것이다. 예수님이 죄가 없음에도 죽 을 수 있는 몸이니까 죽으신 것이지 하나님께서 특별히 전능하신 방법으로 그분에게 죽음을 허락한 것이 아니다. 이런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관념에서 탈피해야 한다. 죄란 개념을 명확히 이해할 필요할 있다.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 곧 위치 이탈을 죄라고 한다. 인격에서 이탈하면 죄고 인 격을 지키면 생명이다. 아담은 흙-사람의 위치를 이탈했다면 예수님은 흙 -사람의 위치를 지켰다는 것이다. 그분이 살아나신 것은 생명의 길을 걸으 셨기 때문에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 의로운 자의 첫 부활이 되신 것이다. 예수님이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를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지 그분 자신 이 죄가 있어서, 죄 때문에 죽으신 것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몸이 죽으셨다면 이것은 큰 오류다. 그분은 죄가 없으시지만 인류의 죄를 위해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분의 몸은 죄가 있어서 죽으신 것이 아니다. 그 분이 죄인이 아님에도 죄인의 모습으로 죽으신 것이지 몸 자체가 죄인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예수님은 죄인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죽으신 것이다. 죄가 없으면 육신이 안 죽다는 논리는 말도 안 되는 논리다. 흙- 육신은 원래부터 생명이 없다. 그런데 위 질문에서처럼 죄 사함을 받은 우리가 또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 다면 우리는 여전히 죄 가운데 있는 것이다. 죄가 해결이 안되어 지옥으로 가야한다. 구원받은 신자가 죄가 있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는 것은 우리의 생각이지 하나님의 입장이 아니다. 예수님이 죄 때문에 죽으셨기 때문에 우리도 죄 때문에 죽어야 한다면 우리도 예수님과 똑 같이 피를 흘려 죽어 야 한다는 말과 같다. 그래야만 죄 용서를 받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논 리는 맞지 않다. 우리의 죄에 대한 희생물은 예수 그리스도 한 분으로 족 하다. 더욱이 우리 몸은 죄를 위한 희생물이 될 수 도 없다. 우리는 그리 스도의 피를 통하여 구속받았다. 구속이란 원래의 위치를 말한다. 우리의
392 23. 반론에 답하여 원래의 위치는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이 죽는 것 은 죄로 인한 희생물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고린도전서 15장 17~18절에 또 그리스도께서 일으켜지지 아니하셨으면 너희의 믿음이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너희 죄들 가운데 있으며 따라서 그 리스도 안에서 잠든 자들도 멸망하였느니라.(고전15:17~18) 말씀이 있다. 이 말씀대로라면 의로운 자의 부활이건 불의한 자의 부활이건 부활한 모 든 사람은 죄 가운데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이 말씀은 그런 의미가 아니라는 것은 모두 알 것이다. 이 말씀은 의로운 자의 죽음과 부활, 곧 생명노선 안에 있는 자의 죽음과 부활에 대해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러므로 의로운 자의 부활과 불의한 자의 부활이 있듯이 의로운 자의 죽 음과 불의한 자의 죽음이 있다는 것이다. 인생은 원래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수학적으로 두 번 죽어야 하지만 하나님 의 권능과 지혜로 법리적인 희생물이라는 단 한 번의 죽음 안에 유기적인 헌물도 포함시킴으로서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하는 것이다.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되고 있는 것이다. 죄로 인한 희생물은 그리스도의 단 한 번의 죽음으로 끝났다. 그런데 우리 몸이 죄로 인해 또 죽어야 한다 면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은 완성이 안 된 것이다. 그러므로 구원받은 우리 몸이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 아니고 죄 와 관계없이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되기 위해 죽는 것이다. 2. 죄를 짓기 전에 이미 죽을 몸으로 창조되었다면 예수 그리스도 의 몸의 죽음은 죄의 삯과 관련이 없는 것이다. 라는 주장에 대 하여 이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의 대속을 법리적 관점에서만 바라보기 때문
393 23. 반론에 답하여 에 오는 오해이다. 그리고 사람의 몸이 원래부터 죽게 되었다고 해서 죄에 따른 대가가 필요 없는 것이 아니다. 죄에는 당연히 심판이 필요한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밭으로 창조되었다. 그런데 사탄의 밭이 된 것이다. 그러 므로 하나님의 밭이 되려면 사탄의 밭은 갈아엎어져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밭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이게 십자가의 구속이다. 하나님이 창조 한 원래의 위치로 회복되어야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것이다. 그리 고 이 밭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열매를 맺는 것이 부활이다. 그러나 흙 은 본질적으로 생명이 없다. 단지 씨와 연합하여 열매를 맺을 수 있는 것 이다. 이 밭에 씨가 들어가면 씨도 죽어야 하고 흙도 죽어야 생명을 발아 할 수 있다. 흙이 하나님의 최종목표가 아니다.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태 워져 흙에서 돌로, 최종적으로 돌에서 보석으로 변화되어야 한다. 흙은 영 원한 것이 아니고 보석으로 바꾸어져야 영원하다. 이것을 표현한 것이 번제단이다. 번제단에서 헌물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진다. 사람과 하나님의 생명의 연합의 과정을 표현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다. 그래서 사람은 근원적 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죄가 있기 때문에 번제헌물로 창조된 것이 아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희생물이 필요하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이 필요하다. 성경이 주는 계시는 사람이 죄 가 없다면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다.(창 2:21~23) 그런데 죄가 들 어옴으로서 이에 대한 대가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레 17:11) 사람이 죄가 없다면 희생물이 필요 없다. 그런데 죄가 들어옴으로 서 희생물이 추가 된 것이다. 그런데 희생물이나 헌물이나 죽음으로 드려 지는 것은 매 한 가지다. 그래서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을 태움으 로서 번제헌물이 되게 한 것이다. 희생물 안에 헌물이 포함되어 있는 것이 다.(레1:9, 17) 이 희생물과 헌물의 실재는 예수 그리스도다.(히10:5) 번제단 곧 십자가는 용광로와 같은 곳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을 피조물은 없기 때문이다. 용광로에는 좋은 쇠든 버려질 쇠
394 23. 반론에 답하여 든 어떠한 쇠도 한 목표를 위해 녹여진다. 십자가라는 불랙홀 안에서 부 정적인 것이든 긍정적인 것이든 한 목표를 위해 녹여지는 것이다. 희생 물은 부정적인 것이고 헌물은 긍정적인 것이지만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 를 위해서 번제단에서 희생물도 태워져야 하고, 헌물도 태워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래야만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를 위해 재창조되기 때문이다. 인생은 흙으로 창조되었지만 하나님의 씨를 받아 열매가 되어야할 존재 이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헌물이 되는 것은 하나의 과정이이지 최종목 표가 아니다. 그러므로 헌물도 새로운 피조물이 되기 위해 녹여져 재창 조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은 우리가 흙으로 창조되었고, 하나님의 씨가 들어오면 살아 있는 돌이 되고(벧전2:5)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최종적으로 보석이 된다 고 한다.(계21:11) 이러한 물리적 변화의 과정이 바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를 위한 우리의 생명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모든 만물은 하나님 자신, 곧 생명과 생명의 원리를 계시하고 있다. 우리는 이러한 생명의 원리를 보고 하나님께서 어떻게 일하시는가를 알아야 한다. 하나 님께서는 일반적인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종교적이고 신비적인 방법 으로 일하시지 않는다는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법리적인 혜택정도로만 생각하지 말라.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만유를 포함한 죽 음이다. 부정적인 모든 것과 긍정적인 모든 것이 다 포함되어 있다. 하 나님은 소멸시키시는 불이시다.(히 12:9) 하나님과 우리는 번제단에서 만난다. 우리가 죄가 있기 때문에 번제단에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아 니다. 죄를 속하기 위해서는 제단 주위에 피만 뿌리면 된다.(레17:11) 그런데 우리는 죄가 없더라도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헌물로서 번제단 에서 하나님을 만나야 한다.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소멸되지 않 을 피조물은 없다. 우리가 죄가 없다고 불이신 하나님을 만나면 소멸되지 않는가? 아니다. 모든 피조물은 다 소멸된다. 죄 때문에 죽음이 왔고, 죄 가 없으면 영생이라는 생각은 우리의 구원을 단지 법리적인 이분법적 사
395 23. 반론에 답하여 고에서 나온 발상이다. 그러나 누차 말하지만 무죄는 영생이 아니다. 하나 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일 뿐이다. 성경은 그 어디에도 육신이 죄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기록된 곳이 없 고 죄로 인해 사망이 왔다고 기록한다. 사망이란 우리가 생각하는 단순 한 육체적 죽음을 두고 하는 말이 아니고 사탄이 지배하는 체계를 말한 다. 즉 사망이란 사탄이 사람에게 자신의 씨를 뿌려 자신의 열매를 추수 하는 과정 안에 있는 세계를 말한다. 지금 세상은 사탄이 지배하는 세상 으로 사망 아래 놓여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살아 있으나 죽은 것 이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님을 믿고 구원받으면 생명의 세계로 옮겨 온 것이다. 육체가 죽더라도 산 것이다.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적 죽음은 사 망이 아니고 생명의 길 안에서 당연한 과정이다. 씨를 땅에 뿌리면 씨도 죽어야 하고 땅도 죽어야 하는 당연한 과정을 말하는 것이다. 한 알의 밀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 (요12:24) 아담은 만물에게 적용되는 이 우주적 생명의 원리를 거부하고 신이 되려 고 했다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신이라면 죽을 필요가 없다. 그런데 사람은 영으로 창조되지 않고 흙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이다. 흙은 완성품 이 아니다. 최종 완성품인 영적인 몸으로 가는 과정이라는 것이다. 흙은 자체에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씨와 한 몸이 돼서 열매를 맺어야 할 운 명이다. 이것이 사람의 운명이다. 이 연합은 죽음을 통해 연결된다. 그런 데 아담은 하나님이 정해주신 흙-사람이라는 인격을 이탈하여 하나님 의 씨와 연합되지 않고 사탄의 씨와 연합되었다. 그런데 예수님은 사탄 의 유혹에도 불구하고 피 흘려 죽기까지 인격을 지킴으로서 농부이신 하 나님의 첫 열매가 되셨다. 새인류의 조상이 되신 것이다. 이것이 사탄에 대한 승리이고 생명의 길이다. 이 과정을 보면 어떤 법리적인 요소도 없 다
396 23. 반론에 답하여 그런데 이 생명의 과정 안에서 예수님의 피 흘리심의 죽음을 우리의 죄 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라고 하는 것이다. 그래서 십자가는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라는 것이다.(고전1:24) 그러면 어떻게 이것을 믿으면 구원을 받는가? 하는 것이다. 내가 한 것 이 아니고 예수님이 한 것인데 어떻게 나에게 구원이 되는가? 하는 문제 이다. 하나님의 영이고 우리는 형상이다. 영이 실재라는 것이다. 물질적 인 것이 실재가 아니고 영이 실재라는 것이다. 우리의 관념으로는 예수 님이 대신한 것이지만 영으로 내가 예수님과 동일시하면 나도 십자가에 서 예수님과 함께 죽고 다시 산 것이라는 것이다. 17. 로마서 6장 6절은 우리의 몸이 죽는 이유는 죄 때문이라고 선언 한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 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롬 6:6) 앞서도 살펴보았지만 생명의 길과 사망의 길에서 육체적 죽음은 정해져 있 는 것이다. 위 말씀은 죄 때문에 몸이 죽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물 론 죄 된 몸은 심판 받아야 한다. 그렇다고 우리 몸이 원래 영생하게 되어 있는데 죽음이 온 것이 아니다. 어떻게 영생하는 몸이 가다가 끊어 질 수 있는가? 성경이 보여주는 진리는 죄로 인한 대가로 희생물이 필요하고 죄 이전에 사람은 헌물로서 곧 죽음으로서 하나님께 드려져야 했다. 성경의 계시에 의하면 사람은 흙으로 창조되었기 때문에 생명이 없고 거듭나야 했 다. 또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거듭나기 위해 잠자는 죽음이 필요했다.(창
397 23. 반론에 답하여 2:21~23) 그러나 죄가 들어왔기 때문에 그에 대한 심판으로 피 흘림의 죽 음이 필요한 것이다.(레17:11) 왜 죄로 인해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한가? 아담은 사탄과의 영적전쟁에서 패함으로 사망의 길로 갔다. 그런데 누군가 와서 다시 사탄과의 전쟁에서 승리하려면 피 흘림이 필요한 것이다. 피 흘림 없이는 전쟁에서 승리가 없 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이유는 하나님은 농부시고 사람은 하나님의 씨를 받아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 할 운명이다. 그런데 사탄이 먼저 와서 자신의 씨를 뿌렸다. 그렇기 때문에 그 밭이 원래의 주인에게로 돌아가서 주인의 씨가 심겨지려면 그 밭은 갈아엎어져 주인이 쓸 수 있는 밭이 되어 한다. 이것이 십자가의 고난이다. 그런데 밭은 어떤 씨가 심겨져도 흙이지 흙이 라는 본질이 바뀌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흙인 아담이 씨가 되 고 싶어 타락했지만 하나님은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갈 것이니라 (창 3:19) 하신 것이다. 로마서 6장 6절 말씀은 영적으로 그리스도와 이미 십자가에 못 박힌 후 (과거) 거듭난 성도의 영적생활(미래)에 주안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알거니와 우리의 옛 사람이 그분과 함께 십자가에 못 박힌 것은 죄의 몸을 멸하여 이제부터는 우리가 죄를 섬기지 아니하게 하려 함이니 (롬6:6) 또한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다. 하나님 따로 영생 따로 있는 것이 아니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생을 가졌다면 하나님의 경륜과 목표는 달성된 것이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인데 어떻게 사탄이 와서 유혹한다고 영생이 끊어 질 수 있는가? 사람은 처음부터 흙으로 창조되었지 영으로 창조되지 않았다. 이 말씀은 이미 과거의 일이다. 이미 우리 몸은 십자가에 못 박혀 죄의 몸 이 멸하여졌다는 것이다. 예수님과 함께 이미 영안에서 이루어진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몸이 죄로 인해 죽을 것이란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 죽는 것은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딤후4:6) 우리 는 앞에서 영과 형상, 곧 실재와 형상의 개념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하나
398 23. 반론에 답하여 님은 영이시고 우리는 형상이다. 이 말은 하나님이 실재고 만물은 형상이 라는 의미다. 그러므로 보이지 않는 영적인 것이 실재-생명이고 보이는 것은 단지 보이지 않는 것의 형상이라는 의미다. 로마서 6장 6절 말씀은 우리는 이미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영안에서, 곧 실재 안에서 죽었다는 것 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거듭날 수 있는 것이다. 만일 죄 때문에 우리 몸이 또 심판 받아 죽는다면 여전히 죄 문제가 해결 이 안된 것이다. 성경은 이미 우리가 그리스도와 함께 심판을 받았고 거듭 났다고 선언한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구속을 통해 죄들의 용서를 받았다. (골1:14) 그런데도 또 죄로 인해 몸이 죽는다면 그리스도의 구속은 의미 가 없다. 성경은 우리가 완전한 자고 의인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는 죄를 지을 수 있다. 그렇다고 우리가 죄인인가? 우리가 죄인이라면 우리는 거듭 날 수 없다. 우리가 사탄의 밭이었는데 갈아엎어져 하나님의 씨가 뿌려져 하나님의 밭이 되어 있는 상태다. 그런데 죄 때문에 죽는다면 또 갈아엎어 져야 하는 것이다. 한 번 갈아엎어져 하나님의 밭이 되었기 때문에 두 번 다시 갈아엎어질 필요가 없는 것이다. 우리 육신이 죽는 것은 열매를 맺는 과정이다. 흙은 자체로 씨가 있는 것이 아니고 씨와 연합되어 한 몸이 됨 으로서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우리가 영생을 얻는 것도 같은 개념이다. 영생이라는 생명덩어리가 하나님과 관계없이 별도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 다. 영생은 하나님 자신이다. 단지 흙은 씨와 연합되어 생명에 참여하는 것이다. 흙은 씨를 받아 열매를 산출하는 것이 그 임무다. 농부는 열매를 거두지 흙을 거두지 않는다. 흙-육신은 농부이신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가 지 못한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으시고 육신을 추수하는게 아니라 인 격의 열매를 거두신다. 열매란 흙이 아니고 씨-생명이다. 씨-생명은 영이 다. 그래서 부활한 영적인 몸을 열매라고 하는 것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 사를 지으시고 인격의 열매로 영적인 몸을 가진 사람을 추수하는 것이다. 흙-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본질적으로 하나님의 왕국에 들어 갈 수 없다.(고전15:50) 사탄의 왕국도 영적인 왕국이다. 그래서 사탄도 흙-사
399 23. 반론에 답하여 람에게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자신의 아들들을 추수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몸이 영생하게 되어 있었는데 죄가 들어와 죽는 것이 아니 고 사람의 죽음은 원래부터 창조 안에서 정해진 것이다. 생명의 길에서의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에서의 육체적 죽음은 차원이 다른 것이다. 만약 우리가 그리스도의 대속으로 말미암아 구원받았음에도 불구하고 죄 때문에 육체가 죽는 것이라면 우리의 죄는 여전히 해결이 안 된 것이다. 그리스도가 죽으신 것은 우리의 죄로 인한 대속물이 되시기 위해 죽으셨 다. 그분은 표면적으로 아담이지만 본질은 죄가 없으셨다. 그렇기 때문에 죄로 인한 희생물이 되신 것이다. 그런데 죄로 인해 육신이 죽는다면 본질 적으로 죄가 없으신 예수님이 어떻게 죽으실 있는가? 하나님은 예수님을 죄가 되게 하신 것이지 본질이 죄인은 아니다. 왕자가 거지의 옷을 입었다 고 왕자가 아닌가? 죄인이라면 그분은 우리의 대속물이 될 수 없다. 그러 므로 사람이 죽는 것은 죄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원래 죽을 수 있으니 까 죽는 것이다. 18.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 (is dead) 성 령은 의로 인해 살리라. (롬8:10) 라는 말씀과 같 이 몸은 죄로 인해 죽는 것이다. 이 말씀도 성경이 말하는 사망과 생명에 대한 오해이다. 로마서 8장 10절 에서 몸은 현재적(is)으로 죽어 있는 상태다. 실제로 그러면 우리 몸이 죄 로 인해 현재 죽었나? 죽지 않았다. 이것은 영 안에서 예수님과 함께 육 신은 죽었으니 성령을 따라 살라는 말씀이다. 이 말씀의 결론은 로마서 8 장 13절로서 너희가 육신을 따라 살면 죽을 것이로되 성령을 통해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라. 라는 의미다. 이런 영적 의미로 기록된 성경 구절 은 성경에 수도 없이 많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께 속한 사람들은 애착들 과 정욕들과 함께 육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갈5:24) 이 말씀도 문
400 23. 반론에 답하여 자 그대로라면 우리 육신이 현재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야 한다. 또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갈 2:20a) 이 말씀도 문자 그대로라면 우리가 현재 십자가에 못 박혀 있어야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노라 라고 말하고 있다. 이것을 문자적 으로 어떻게 해석하나? 문자 그대로 고지식하게 해석하면 말이 안되는 것 이다. 유대인들이 왜 예수님을 알아보지 못하고 십자가에 못 박았는가? 율 법 뒤에 있는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말씀을 표면적으로 알았기 때 문이다. 요한복음 11장에서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 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라.(요11:25~26) 이 말씀도 문자 그대로라면 믿는 우리는 몸이 죽지 않고 영원히 살아 있어야 한다. 그러므로 성경 말씀을 단순하게 문자 그대로 이분법적으로 해석하면 안된다. 하나님은 영이시기 때문에 목표는 영에 있지 표면에 있지 않다. 백번양보해서 이 말씀을 문자 그대로 해석해서 우리가 그리스도로 안에 있으면 몸이 죄로 인해 죽는다면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들은 몸이 의로 인해 안죽는다 는 말인가? 말도 안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이 말씀을 가지고 죄로 인해 문자 그대로 육신이 죽는다고 하는 해석은 말도 안되는 것이다. 성경은 단순하게 이분법적 세계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세계를 말하고 있는 책이다. 생명이란 생명의 과정이고 사 망이란 사망의 과정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표면적으로 보면 두 과정이 동 일하다
401 23. 반론에 답하여 19. 예수님께서 자신의 죄 없는 몸을 우리에 주신 것은 우리의 영혼 뿐만 아니라 몸의 구속을 위한 것이었다.(롬8:23 우리 몸의 구속 을 기다림은) 구속 곧 대속은 대신 갚는 것을 말한다. 무엇을 대 신 갚는 것인가? 죄의 삯을 대신 갚는 것이다. 몸의 죽음은 창조 의 결과가 아니라 첫 사람의 의도적인 범죄의 결과이기 때문에 몸의 대속이 반드시 필요한 것이다. 만약 몸이 원래 죽도록 창조 되었다면 죄로 인해 죽게 된 몸의 구속은 필요없게 될 것이고 죄 인들을 대신해서 성육하신 주님께서 주님의 몸으로 십자가에서 피 흘려 돌아가신 고난과 희생은 한 낱 우스꽝스러운 이야기로 전락할 것이다. 이 주장 또한 하나님과 사람의 관계, 사람의 타락의 근원에 대한 오해에 서 불거진 주장이다. 성경의 좀 더 살펴보면 하나님은 우리 인생이 신들 과 같이 되려하지 말고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알 고 사람을 사람으로 알라는 것이다. 즉 사람은 상식적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종교적이고 비상식적인 신과 같은 사람이 아니라 지극히 상식적 인 사람이 되라는 것이다. 사람은 본래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 었다. 그런데 죄가 들어와서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희생물은 죄 로 인한 법리적 대가이고 번제헌물은 하나님과 사람의 생명의 유기적 연 합을 위한 사람의 근본적 위치다. 사람이 원래 한번 죽도록 창조되었다 고 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한 낱 우스꽝스러운 희극이 될 수 없 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생명의 연합을 원리를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이다. 그들뿐만 아니라 우리 자신 곧 성령의 첫열매를 소유한 우리까지도 속으로 신음하며 양자 삼으심 즉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우리가 소망으로 구
402 23. 반론에 답하여 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그러나 보이는 소망은 소망이 아니니 어찌하여 사 람이 보는 것을 여전히 바라리요?(롬8:23~24) 앞서 살펴보았지만 대속과 구속은 무죄라는 차원에서 같지만 동일한 의 미는 아니다. 대속은 법리적인 것이고 구속은 유기적인 것이다. 그리고 구속, 곧 죄 없는 것이 영생이 아니다. 무죄는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영생이 아니다. 아담은 창세기 2장 7절에서 무죄하게 지음 받았 다. 그렇다고 아담이 영생하는 몸이 아니다. 아담은 왜 거듭나야 하는 가? 흙으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거듭나야 하는 것이다. 왜 하나님은 사 람을 흙으로 지었는가? 자신의 생명을 주시기 위해 흙으로 창조하신 것 이다. 하나님의 생명은 만드는 것이 아니고 낳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 서 하나님의 창조는 생명이 없는 다른 피조물들은 모두 1차적 창조로 끝난다. 그런데 사람만이 하나님의 생명을 이어받을 자이기 때문에 씨- 하나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기 위해 흙-사람으로 창조되어 2차적 창조로 완성이 되는 것이다.(고후5:17) 구속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위치지 구속이 영생이 아니다. 무죄가 육 체의 영생이 아니라는 것이다. 육체의 영생은 부활한 영적인 몸이 되어 야 한다.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다.(고전15:50) 살 리는 것은 영이고 육은 죄가 있든 없든 살리는 것이 아니다.(요6:63) 이 것은 하나님의 왕국은 영적인 왕국이기 때문에 육신으로 창조된 사람은 영적인 몸을 입어야 된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은 단순히 죄 때문에 하 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근원적으로 육신이기 때문 에 상속받을 수 없는 것이다. 사람은 처음부처 육신으로 창조되었다.(창 2:24) 그러니까 사람은 죄 이전에도 육신은 한 번은 바꾸어져할 존재지 처음부터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는 말을 단순하게 이
403 23. 반론에 답하여 해하면 우리 몸은 아직 구속이 안 된 것처럼 받아들일 수 있다. 그래서 몸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오해할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께서 씨 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는 생명의 노선을 잘 이해하지 못하는데서 오는 결과이다. 하나님의 생명의 원칙상 구속이 먼저고 거듭남이 나중이다. 죄란 쉽게 말하면 흙-사람에게 사탄의 씨가 뿌려진 상태다. 그래서 이 것을 갈아엎는 것이 대속이고 갈아엎어진 밭을 하나님께서 씨를 뿌릴 수 있는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 구속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대속 과 구속을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만 엄밀한 의미에서는 차이가 있는 것이다. 이미 앞에서 설명한 바와 같이 대속(ransom)이란 희생물이고 구속(redemption)은 헌물이다. 대속을 위해서는 단순하게 피흘림의 죽음 이 필요했다. 이것은 법리적 심판이다. 그러나 법리적 심판을 받았다고 해서 이 위치가 유기적 생명의 연합을 위한 위치가 아니다. 유기적 생 명의 연합을 위해서 희생물이 헌물이 되어야 한다. 곧 처음 무죄한 상태 로 원상복귀 되어야 하는 것이다. 대속이 법리적이고 강제적인 심판의 위치라면 구속은 유기적이고 자발적인 위치다. 그런데 이 둘의 공통점은 죽음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과 헌물이 동일시 되었듯이 대속과 구속은 동일시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관되게 예수 그리 스도의 피를 통해 우리가 이미 구속을 받았다고 말한다.(엡1:7, 골1:14, 갈3:13, 벧1:18) 그분 안에 그분의 피를 통해 구속, 곧 죄들의 용서를 받았도다.(골1:14) 구속이 없이는 생명의 거듭남이 없는 것이다. 신약에서는 일반적으로 구 속과 구원을 구분해서 사용하고 있지만 구약에서는 구속과 구원을 거의 같은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왜냐하면 구속은 위치적인 문제이고 구원은 생명의 문제인데 구약에는 예수라는 생명의 씨가 없기 때문이다. 구속은 하나님이 쓰실 수 있는 무죄상태로의 회복이고 이 구속된 몸에 생명을 넣어주어 거듭난 것이 구원이다. 성경은 일관되게 우리가 이미
404 23. 반론에 답하여 전인격적으로 구속을 받았고 그리고 전인격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 고 있다. 우리는 자꾸 환경적인 면을 생각해서 우리가 세상에 살고 있는 데 무슨 완전한 구원을 받았느냐고 생각하지만 성경은 우리가 비록 세상 에 살지만 우리는 이미 세상으로부터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우 리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다르다. 우리는 물질적인 존재이기 때문에 늘 환경적인 것을 생각하지만 영이신 하나님의 관점에서는 물질적인 것 이 문제가 되는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왜 로마서 8장 23절에서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고 하 면서 우리 몸이 아직 구속을 받지 않은 것처럼 말하고 있느냐는 것이다. 사람의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믿는 사람들은 로마서 8장 23절의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는 말씀과 베드로전서 1장 9절의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 의 말씀을 들어 사람의 몸은 영생하게 되어 있었으나 죄 때문에 몸이 죽는 것이고 우리 몸은 아직 구속을 받지 못했고 혼만 구원받은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성경은 그리스도의 구속과 구원을 말할 때 사람의 구성체인 영, 혼, 몸을 구분해서 말하지 않고 일관되게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구속을 받았고 전인격적으로 구원을 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 구속 에 대해 예외적으로 기록하고 있는 구절은 로마서 8장 23절 한 구절이 다. 그리고 구원에 대한 성경 기록도 일관되게 우리가 전인격적으로 구 원을 받았다고 하며 단지 두 구절에서만 예외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 자를 사탄에게 넘겨주어 육체를 멸하도록 판단하였으니 이것은 영이 주 예수님의 날에 구원을 받게 하려 함이라.(고전 5:5) 이는 너희가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벧전1:9) 모든 성경 구절이 그렇듯이 어느 특정 구절만을 가지고 해석하면 오류에 빠질 가능성이 있다. 고린도전서 5장 5절은 영이 주님의 날에 구원받는
405 23. 반론에 답하여 다고 기록하였으나 문맥으로 보았을 때 영만 따로 구원받는 것이 아니고 주님의 날에 전인격적으로 구원받는 것을 말한다. 베드전서 1장 9절 말 씀은 물론 우리의 육체가 죽으면 믿지 않는 자들과 비교해서 믿지 않는 자들의 혼은 지옥으로 가고 믿는 자들의 혼이 구원받는다는 말씀도 되겠 지만 여기서 혼은 사람의 대표로서 전인격적인 구원을 말하는 것이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처럼 몸은 죄 때문에 죽고 혼만 구원받 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앞서도 살펴 보았지만 구원받은 자의 몸이 죽는 것은 죄 때문이 아니라 생명의 노선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죽 는 것이다. 즉 신자들은 희생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헌물로서 죽는 것 이다. 만일 구원받은 우리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구속사역은 완성된 것이 아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를 대신한 희생물 로 죽으시고 우리를 구속하셨다. 만일 로마서 8장 23절의 말씀을 문자적으로 받아 드린다면 구속된 우리 몸은 창세기 2장 7절의 아담과 같이 범죄하기 전의 무죄한 육체가 되는 것이지 부활한 영적인 몸이 되는 것이 아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목표는 우 리가 구속된 몸을 갖는 것이 아니라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갖는 것이다. 그 러므로 이것은 고린도전서 5장 5절의 주님의 날에 영이 구원받는다 는 말씀과 같이 문자적으로 받아 드린다면 모순이 생기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께서 로마서 8장 23절에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을까? 라는 것이다. 우선 로마서 8장 23절이 말하는 구속 의 시기를 살펴보자.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는 개인적으로 창조-타락-대속-구속-부활 순이고 우주적으로도 창조-타락-대속-구 속(천년왕국)-부활(새 예루살렘) 순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단순 히 창조에 있지 않고 창조한 사람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불어넣어 부활생 명을 갖는 것에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창조된 사람이 타락했기 때문에 대속과 구속이 필요한 것이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3절이 말하고 있는
406 23. 반론에 답하여 구속 의 시기는 천년왕국 시대로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돌아간다 는 것이다. 또 앞의 문맥인 피조물이 간절히 기대하며 기다리는 바는 하 나님의 아들이 나타나는 것이니라... 피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 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 (롬8:20) 라는 구절에서와 같이 이 시기는 분명히 천년왕국을 말하는 것이다. 지금 도 우리도 분명히 하나님의 아들들이지만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개 인을 두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경륜상 어떤 시기에 중점을 두 고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즉 천년왕국 이라는 다가올 미래의 시기에 중 점을 두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성경에서 구속 이란 단어를 개인 에 적용하지 않고 하나님의 경륜의 시대에 중점을 두고 쓴 구절은 로마 서 8장 23절과 에베소서 4장 30절 두 구절이다. 하나님의 거룩한 영을 슬프게 하지 말라. 그분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구속의 날까지 봉인되었느 니라. (엡4:30) 나머지 구속 이란 단어는 모두 개인적 경륜에 중점을 두 고 기록되었다. 즉 구속 은 개인적인 구속과 시대적인 구속이 있다는 것 이다. 그래서 천년왕국 안에는 비록 부활한 몸을 가진 사람과 육신을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온 구속받은 사람이 혼재해 있지만 천년왕국을 하나님의 경륜의 순서상 구속 의 시기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은 이 시기를 다시 나 게 하는 때 (마 19:28),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때 (행 3:21)라고 말하고 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다시 나 게 하는 때 곧 사람의 아들이 자기의 영광의 왕좌에 앉을 때에 나를 따른 너희들도 열두 왕좌에 앉아 이스라엘의 열두 지파를 심판하리라(마 19:28) 하나님께서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자신의 모든 거룩한 대언자들의 입을 통 하여 말씀하신 때 곧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때까지는 하늘이 반드시 그분 을 받아들여야 하리라.(행3;21)
407 23. 반론에 답하여 이 시기를 현재와 비교해서 어떤 변화가 있는지 살펴보면 1 영존하는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슬픔과 탄식이 사라진다.(사 35:10) 2 질병이 없고 환경이 회복된다.(사 35:5~6) 그때에 눈먼 자의 눈이 열리고 귀먹은 자의 귀가 열리며 그때에 다리 저는 자는 사슴같이 뛰고 말 못하는 자의 혀는 노래하리니 광야에서 물들이 터 져 나오고 사막에서 시내가 흐르며 또 바싹 마른 땅이 연못이 되고 메마른 땅이 물들의 샘이 되며 용들이 각각 누워 거하던 곳에 풀과 갈대와 골풀이 함께 자라리라.(사 35:5~7) 3 전쟁이 없다.(미 4:31)...그들이 다시는 전쟁을 배우지 아니하고(미 4:3) 4 창조질서가 회복된다(롬8:21) 이는 피조물 자신도 썩음의 속박에서 해방되어 하나님의 자녀들의 영광스 런 자유에 이를 것이기 때문이라.(롬8:21) 5 사람의 수명이 회복된다.(사 65:22) 그러나 죽는다. 그들이 짓되 다른 사람이 거주하지 아니하며 그들이 심되 다른 사람이 먹지 아니하리니 내 백성의 날 수는 나무의 날 수와 같으며 나의 선택한 자는 가지 손으로 일한 것을 길이 누리리라.(사 65: 22) 6 사탄은 바닥없는 구덩이에 갇히게 된다.(계 20:3) 7 사자와 같은 육식 동물의 음식이 채식으로 전환된다.(사 65:25) 땅위에 있는 모든 짐승은 원래 채소를 먹도록 되어 있었다.(창1:30) 그 러므로 원래대로 회복된 것이다. 8 주님께서 직접 친히 세상을 다스릴 것이다.(사 11:1~12, 미4:1~4, 슥8:3~6) 결론적으로 천년왕국 시기는 만물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된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의 상태로 구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사도행전 3장 21절
408 23. 반론에 답하여 에서 모든 것을 회복하시는 때 라고 정의하고 있는 것이다. 특히 사람의 수명도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된다.(사 65:22) 천년왕국의 구성원은 크게 두 부류로 분류된다. 부활한 몸을 가진 사람과 대환란을 통과하여 천년왕국에 들어온 부활하지 않은 몸을 가진 사람이다. 부활한 몸은 영 적인 몸을 가진 사람이고 부활하지 않은 몸은 육적인 몸을 가진 사람이 다. 부활한 몸은 죽지 않지만 부활하지 않은 몸은 육신이기에 죽는다. 육신을 가진 부활하지 않은 몸도 천년왕국으로 넘어왔기에 만물이 회복 되는 거와 같이 이들의 몸도 회복되어 수명이 나무의 날수와 같지만 결 국 죽는다.(사 65:22) 또 이들도 부활한 영적인 몸을 얻으려면 생명이신 예수님을 믿고 죽은 다음 다시 부활해야 한다. 이것은 창세기 2장에서 아담이 비록 범죄하지 않았더라도 영생하려면 생명나무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먹고 거듭나 야 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러므로 로마서 8장 23절에서 말하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은 이란 의미는 이미 구속을 받고 몸의 부활을 기다리는 사람들의 입장에서는 우 리 몸의 부활을 기다림은 말이 더 맞을 것이다. 그러나 성령께서는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고 이렇게 쓰신 이유가 있다는 것이다. 로마서 8장 23절에서 주고자 하는 의미는 만물이 구속되는 날, 즉 천년왕국의 시대에 중점을 두고 기록이 되었다는 것이다. 또 몸(body)이라는 단어는 헬라어 소마(so-mah)로 우리 사람의 몸이라는 뜻도 있지만 행성과 별 의 몸이라는 뜻도 있다. 즉 하나님의 피조세계의 의미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보이지 않는 영이시고 피조세계는 보이는 몸이라는 것이다. 교 회를 그리스도의 몸이라 한 것도 다 그런 이유다. 광의적 의미로 보았을 때 몸이라는 것은 하나님이 창조하신 피조세계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여 기서 문자 그대로 우리 몸의 구속이라고 받아 드리면 교리적으로 모순이 있다. 우리는 장차 부활할 몸이어야지 구속받아야 할 몸은 아니기 때문
409 23. 반론에 답하여 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성경이 여기서 구속이라는 단어를 사용한 것은 천년왕국이라는 구속의 시대 에 중점을 두고 기록했기 때문이다. 그 시기에는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자들과 육체를 가지고 구속받아 천 년왕국에 들어온 자들이 있지만 성경이 표현하는 천년왕국의 핵심 단어는 구속이다. 그래서 우리 몸의 구속을 기다림 이라는 말을 쓴 것이다. 또 구 속된 자 안에는 부활한 영적인 몸을 가진 자들과 육체를 가지고 구속된 자 들이 모두 포함되기 때문이다. 구속이란 죄 없는 상태를 말하지만 구원, 즉 거듭남이 아니다. 분명히 천년왕국의 모든 환경은 창세기 2장의 상태로 구속-환원된 것이다.(마 19: 28, 행 3:21) 어쩌면 창세기 2장의 상황보다 더 좋은 상황이다. 왜 냐하면 창세기 2장에서 사탄은 마음대로 활동했지만 천년왕국에서는 사 탄은 무저갱에 결박당해 있기 때문이다. 육신을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 온 사람과 그들의 자손은 창세기 2장의 무죄한 아담의 상태로 회복된 것이다. 그럼에도 그들은 죽는다. 이것은 죄가 없더라도 아담은 죽을 수 밖에 없는 운명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러므 로 창세기 2장의 아담이 영생하는 존재였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렇게 반박할 것이다. 육신을 가지고 천년왕국에 들어온 사람들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을 가지고 들어왔기 때문에 죄가 있고 죽는다고 반박할 것이다. 그러나 천년왕국은 예수님이 분명히 죄를 제거한 때이다.(행 3:19) 그런즉 너희는 회개하고 회심하라. 그리하면 새롭게 하는 때가 주의 앞으 로부터 이를 때에 너희 죄들이 말소될 것이요. 또 그분께서 예수 그리스도 곧 너희에게 미리 선포된 분을 보내시리라.(행 3:19~20) 천년왕국은 하나님의 구속이 완성된 시기다. 그러니까 창세기 2장의 환 경으로 환원된 시기다. 그러나 하나님의 목표는 구속이 아니다. 하나님
410 23. 반론에 답하여 의 목표는 창세기 2장이 아니라 계시록 21, 22장의 새 예루살렘으로 영 원한 시대다. 흙이었던 사람이 하나님의 불과 연합되어 영원한 보석이 되는 시기다. 성경은 천년왕국은 아담의 죄가 말소되고 모든 환경이 아담이 타락하기 전의 상태로 회복하는 때라고 말한다. 사자와 같은 육식 동물도 창세기 1장 30절에서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주신 양식인 풀을 먹는다.(사65:25) 모든 만물이 새롭게 되는 때 이므로 분명히 아담이 지은 죄가 말소된 상태이고 심지어 예수님이 직접 통치하는 시대이다. 만약에 이 시기에 아담이 지은 죄가 사람 안에 존재한다면 예수님의 구속 사역은 완성되지 않은 것이다. 그러므로 천년왕국의 구속은 타락한 아담의 본성이 완전히 제거된 상태이다. 그럼에 불구하고 육신을 가진 사람들은 죽는다는 것이다. 창세기 2장과 천년왕국의 구성원을 비교해 보면 창세기 2장에서 에덴동 산에는 사람이 있었고, 그리고 옛뱀, 곧 사탄이 있었고, 생명나무이신 예 수님이 계셨다. 그러나 천년왕국에서는 사람과 예수님이 계시고, 사탄은 무저갱에 결박당해 있다. 그러므로 천년왕국 시기가 창세기 2장의 상태 보다 더 나은 상황이다. 그런데 어떻게 다시 사람이 죄를 짓는가? 하는 문제이다. 이에 대한 필자 의 생각은 다음과 같다. 천년왕국에 육신을 가지고 들어온 사람은 부활체 가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창세기 3장에서 아담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 같이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사탄 때문에 죄를 짓는다고 생각하지만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 죄다. 사탄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면 죄라는 것이다. 사탄이 처음에 스스로 하나님 의 목적에서 이탈하여 타락했듯이 사람도 사탄이 없더라도 하나님의 목적 에서 이탈하면 죄라는 것이다. 스스로 이탈한 자에게는 구원이 없다. 아담 의 타락은 스스로 타락한 것이 아니고 사탄의 유혹에 의해 타락했다. 그래 서 유혹자가 있으면 구원자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사탄은 스스로 타락
411 23. 반론에 답하여 했기에 구원자가 없듯이 천년왕국에서 죄인들은 스스로 타락했기에 구원 이 없고 예수님으로부터 철장으로 다스림을 당한다.(계2:27, 12:4)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무엇인가? 무죄한 아담이 생명나무의 열매를 먹 고 거듭나야 하듯이 천년왕국에서 육신을 가지고 들어온 무죄한 사람도 생명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아담의 죄가 없음에도 여전히 예수님을 믿고 거듭나야 한다는 것이다. 구원이란 하나 님의 목적 안에 있는 것이고 죄란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하는 것이다. 우리 인생은 흙으로서 생명이 없는 존재다. 그래서 하나님의 경륜과 목 적을 위해 죄가 없더라도 예수 그리스도를 생명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천년왕국에서 육신을 가진 사람과 그의 후손들은 무죄한 상태지 만 여전히 예수님을 생명의 주로 영접해야 한다. 그러므로 사탄이 결박 당해 있더라도 하나님의 경륜과 목적을 이탈하면 죄가 되는 것이다. 예 수님도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이 죄라고 말씀하셨다.(요 16:9) 죄에 대하여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하기 때문이요. (요 16:9) 아담은 창세기 3장에서 비록 사탄으로 인하여 죄를 지었지만 사탄의 유 혹이 없는 천년왕국에서도 예수님을 영접하지 않으면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고 죄라는 것이다. 우리는 통상 예수님을 믿어야 하는 이유를 단지 그분이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분이기 때문에 믿 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신 희 생물인 동시에 근원적으로 우리의 생명이라는 것이다. 만일 반대론자들의 주장처럼 사람이 죄가 있기 때문에 육신이 죽는다고 하면 천년왕국 시기에 왜 죄가 말소된 하나님의 백성들이 죽느냐는 것이 다. 살리는 것은 영이지 육이 아니다.(요6:63) 육은 죄가 있든 없든 하 나님의 왕국에 합당하지 않다.(고전15:50) 그러므로 아담이 처음 영생하 도록 창조되었다는 주장은 합당하지 않다. 영생한다는 말은 자존한다는
412 23. 반론에 답하여 의미다. 이것을 깊이 들어가 보면 이 주장은 사탄이 한 말이고 거짓이라 는 것이다. 이 거짓에 지금 사람들은 속고 있는 것이다. 자존하시는 분 은 오직 하나님 한 분이다. 20.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본래 몸이 죽도록 만드셨다면 자연적으 로 죽게 될 몸을 굳이 예수님께서 죄 값을 치르고 몸을 대속하여 다시 부활시키는 것은 필요가 없는 일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하 나님께서 사람의 몸을 원래 죽을 존재로 만드셨다면 몸이 죄의 삯인 사망을 이기고 일어나는 부활은 희극이 될 것이다. 이것도 결국 생명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과 사망의 길 안에서 육체적 죽음을 동일하게 보는데서 오는 오해와 아울러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을 단지 법리적인 희생물에 국한시키고 유기적인 헌물의 의미를 모르기 때 문에 오는 현상이다. 또 사망이라는 말을 너무도 단순하게 육체적 죽음에 국한시켜 보고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아담 안에 있는 자를 죄와 범법들 가운데 죽었다고 한 다.(엡2:1) 이것이 육체적 사망인가? 육체적 사망이 아니다. 성경은 영 적 사망이든 육체적 사망이든 불의한 자의 부활이든 둘째 사망이든 다 사망으로 보고 있다. 사망의 노선 안에 있기 때문에 사망이라는 것이다. 생명노선 안에 있으면 모든 과정이 생명이다. 내 육신이 죽더라도 하나님 께 대하여 살아 있는 것이다. 예수님은 사망을 이기시고 부활하셨다는 말은 아담으로 인해 인류가 사 망노선으로 갔는데 생명노선을 회복시키셨다는 것이다. 사망 열차를 타 고 있던 인류에게 생명 열차로 갈아 탈 수 있는 은혜를 주셨다는 것이 다. 예수님이 아니었다면 인류는 사망열차를 타고 육체적 죽음과 불의한
413 23. 반론에 답하여 자의 부활이라는 사망노선을 가다가 불호수라는 최종역으로 가야 할 운 명이었다. 그런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새로운 노선이 개척된 것이다. 생 명열차를 타고 잠자는 죽음과 의로운 자의 부활이라는 정거장을 거쳐 새 예루살렘이라는 최종역에 도착하는 노선이다. 원래 사람은 생명노선 안에서 생명의 연합을 위해 육신이 한 번은 잠자 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 아담이 이 길을 이탈했다. 사탄과의 전쟁 에서 패한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사탄과의 전쟁에서 잃어버린 생명노선 을 회복하려면 피 흘림이 필요한 것이다. 피 흘림 없는 전쟁의 승리는 없다. 예수님은 사탄과의 전쟁에서 죽기까지 생명노선을 지키시고 부활 하신 것이다. 이것이 인류가 생명노선을 이탈한 대가이다. 대가 없는 승 리는 없다. 예수님이 원래 하나님이기 때문에 부활하신 것이라고 알면 이것은 종교 적이고 나와는 상관없는 것이다. 성경은 예수님의 부활을 하나님이 일으 키셨다고 했지 스스로 부활하셨다고 말하지 않는다. 아담은 생명노선을 이탈한 자라면 예수님은 생명노선을 지키신 분이다. 예수님은 우리와 똑 같은 조건하에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인생의 위치를 지키었기 에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분은 인류의 보편적 구원자가 되신 것이고 우리도 그분과 같이 생명노선 안에서 부활할 수 있는 것이다. 예수님의 인격의 승리, 이것은 피 흘림을 통한 대가이다. 이것은 전적으 로 은혜이고 법리적인 대가이기 때문에 내가 구원을 받기 위해 피 흘릴 필요는 없다. 이것을 구약적 표현으로 하면 예수님이 우리를 대신한 희 생물이 된 것이다. 그러나 예수님의 죽음이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 에만 그친다면 우리의 구원이 없는 것이다. 무죄가 영생이 아니기 때문 이다. 그래서 희생물이신 예수님은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헌 물이 되어야 한다. 희생물로서 단순히 대속만 한다면 제단 주위에 피만
414 23. 반론에 답하여 뿌리면 된다. 그러나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희생물이 헌물이 돼서 하 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야 한다.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는 번제헌물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도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사람이 번제헌물이 되지 않고는 하나님을 만날 수 없기 때문이다. 번제헌물이 되어야 생명의 연합을 통해 유기적 인 구원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하고 대 속과 구속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법리적 인 희생물과 유기적인 헌물을 동일시하고 있는 것이다. 죄가 없더라도 사람은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위해 번제헌물로 창조되었지만 죄가 들 어옴으로 피 흘림의 희생물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권 능과 지혜로 죽음이라는 공통분모 아래 희생물 안에 헌물을 포함시키신 것이다. 번제단은 하나님과 사람이 만나는 곳이다. 우리는 통상 사람이 죄만 없 으면 하나님을 만나 연합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렇지 않다. 하나님 은 소멸시키는 불이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서 살 사람은 아무도 없다. 죄가 있으나 없으나 사람은 육이다. 육은 불을 만나면 다 태워진다. 죽 지 않을 육신 없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영이시고 사람은 육이라는 것은 하늘과 땅의 차이보다 큰 이질적인 관계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과 육은 있는 그대로 연합될 수 없다. 육이 영이신 하나님께 완전히 삼켜짐으로 하나님께 연합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의 불에 의해 완전히 태워져 삼켜짐으로서 연합되는 것이다. 사람들은 통상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을 법리적인 대속의 혜택 정도로만 생각하는데 하나님의 구원의 방법은 철저히 생명의 연합의 원리에 따라 유기적인 방법으로 구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짓는 분이시다.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시는 분이시다. 즉 예수님이 부활했다는 것은 사탄의 씨가 뿌려져 있는 밭을 하나님께서 갈아엎고 하나님께서 씨를 뿌
415 23. 반론에 답하여 려 첫 열매를 거두셨다는 것이다. 예수님이 죽은 자들로부터 일어나사 잠든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전15:20)는 말은 사탄이 뿌려놓은 가 라지 가득한 밭에서 하나님의 첫 알곡이 이것을 이기고 나왔다는 것이 다. 이것이 승리고 부활이다. 우리의 육신은 생명의 길이든 사망의 길이든 한번은 죽고 부활하게 되어 있다. 씨를 땅에 뿌리면 어떤 씨도 똑 같은 과정을 거쳐 열매를 맺는 것 이다. 나에게 하나님의 씨가 뿌려지면 생명의 부활로, 사탄의 씨가 뿌려 지면 멸망의 부활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흙은 자체 씨가 없고 씨와 한 몸으로 연합되어 뿌려짐으로 열매를 맺는 것이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 정하는 것이다. 예수님의 대속이란 하나님이 정해 놓은 생명의 길을 죽 기까지 지키심으로 아담이 잃어버린 생명의 길을 회복하시고 인류를 다 시 생명의 길로 인도했다는 것이다. 사람의 육신이 한번 죽는 것은 생 명의 연합을 위해 필수적인 과정이다. 하나님은 사람 농사를 지어 최종 적으로 부활의 열매를 거두시는 것이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다. 육신은 죄가 있으나 없으나 열매가 아니다. 열매는 부활한 영적인 몸이다. 우리 육신은 어차피 한번은 바꾸어져야할 몸이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 었다. 그런데 하나님의 열매가 되어야 할 육신이 사탄의 열매가 되었다 는데 문제가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예수님이 오셔서 인류 가운데 처음으 로 하나님의 열매, 곧 생명의 첫 열매가 되신 것이다.(고전15:20) 첫 열 매가 되셨다는 것은 새인류의 조상되셨다는 것이고, 새인류의 씨가 되셨 다는 것이다. 생명의 길을 걸어가진 첫 번째 주자가 되신 것이다.(히 6:20) 이제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을 믿는 우리도 그분과 동일시되어 새 인류의 첫 열매 종류가 된 것이다.(약1:18) 우리도 예수님과 같은 씨를 가진 자로 하나님의 열매가 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생명 의 연합을 위해 사람의 육신을 원래 한번 죽도록 창조하였다고 해서 예 수님의 대속의 죽음이 결코 희극이 될 수 없다. 이것은 죽음 안에 있는
416 23. 반론에 답하여 하나님에 경륜에 대한 오해이다. 21. 만약 하나님께서 사람을 태초부터 죽게 만들었다면 하나님께서 는 죄인들의 몸에 죄의 삯 곧 사망을 요구할 실 수 없다. 영혼만 죄의 삯으로 죽게 되고 몸은 죄와 상관없이 죽게 되게 되기 때문 에 아무리 사람이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공의의 하나님께서 몸의 죄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1. 우리는 앞에서 하나님의 생명의 원리는 밭에 씨를 뿌리고 열매를 거두 는 개념이라는 것을 살펴보았다. 여기서 씨는 죽어야 많은 열매를 맺는다. 이것이 생명의 신비다. 예수님께서도 마가복음 4장 26~29절에서 다음과 같이 말씀하신다. 또 그분께서 이르시되,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것 같으니 그가 밤낮으로 자고 깨고 할 때에 그 씨가 돋아나서 자라되 어떻게 그리 되는지 그가 알지 못하느니라. 이는 땅이 스스로 열매를 맺기 때문이 니 처음에는 잎사귀요 다음에는 이삭이요 그 뒤에는 이삭 안의 알찬 곡식 이라. 그러나 열매가 맺히면 그가 즉시 낫을 대나니 이는 수확할 때가 이 르렀기 때문이라.(막4:26~29)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사람의 육체가 죽는 것을 죄가 들어와서 죽는다고 말 한다. 여기서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왕국에 대해 씨와 땅의 관계를 비유로 하여 말씀하고 있다. 그러나 씨가 땅에 뿌려지면 열매를 맺는 자연의 원리 에는 죄가 끼어들 틈이 없다. 하나님은 씨고 사람은 땅이다. 씨를 땅에 뿌리면 씨가 땅과 연합되어 썩지만 그 씨는 생명을 발아한다. 한 알의 밀 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홀로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는 것은 진리다(요12:24) 이것을 예수님이 우리 사람의 죄를 사하기 위해 죽 으신 것에만 초점을 맞추는데 이것은 하나만 알고 둘은 모르는 것이다
417 23. 반론에 답하여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사람은 흙-육신으로 생명이 없다. 그래서 영생을 얻기 위해서는 사람은 헌물로서 번제단에서 하나님의 불에 의해 태워져 번 제헌물이 됨으로서 하나님과의 유기적 생명의 연합이 되어야 한다. 근원적 으로 사람은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이 위치를 지키는 것이 생명의 길이다. 그런데 죄가 들어왔다. 성경이 계시하는 진리는 사람은 죄 를 속하기 위해서 법리적인 피 흘림의 희생물이 필요하고 생명의 연합을 위해서 유기적인 헌물이 되어야 한다. 그래서 인생은 근원적으로 하나님 앞에 번제헌물이 되어야 하지만 죄로 인해 희생물이 요구된 것이다. 그런 데 하나님의 권능과 지혜로 희생물을 태움으로서 희생물과 헌물을 동일시 하여 법리적인 죄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유기적인 생명의 연합을 통해 부활생명을 주시는 것이다. 사람을 태초부터 죽게 만들었다면 하나님께서 죄인들의 몸에 죄의 삵을 요 구하실 수 없다는 주장은 예수님의 죽음을 희생물인 동시에 헌물인 것을 알지 못하고 희생물에만 국한시켜 보기 때문에 오는 오해이다. 2. 사람이 태초부터 죽도록 창조되었다면 영혼만 죄의 삯으로 죽게 되고 몸은 죄와 상관없이 죽게 되게 되기 때문에 아무리 사람이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공의의 하나님께서 몸의 죄를 다스릴 수 없게 된다. 사람의 육신의 죽음을 단순히 법리적인 죄의 대가로만 보는 데서 오는 오 해이다. 단순히 법리적으로 용서받았다고 해서 영생이 있는가? 무죄는 영 생이 아니다. 무죄란 하나님이 씨를 뿌릴 수 있는 위치지 무죄가 영생은 아니다. 성경이 말하는 생명과 사망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과 삶이 아니다. 하나님의 왕국은 마치 사람이 씨를 땅에 심는 거와 같은 것이다.(막4:26) 씨를 땅에 뿌려 열매를 맺는 과정은 그리 단순한 것이 아니다. 흑백논리가 아니다. 생명의 노선이건 사망의 노선이건 표면적인 과정은 똑 같다. 씨 가 땅에 뿌려지면 열매를 맺는 과정과 같은 것이다. 사탄도 자기 씨를 뿌
418 23. 반론에 답하여 리면 똑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 씨가 그 열매를 결정하는 것이다. 어느 노선이건 육체적 죽음은 필연적인 것이다. 죄가 있기 때문에 몸이 죽는다 는 논리는 씨를 뿌리고 열매를 맺는 생명의 과정을 모르는데서 오는 오해 이다. 죄라는 것은 하나님의 밭이 되어야할 사람이 사탄의 밭이 되어 있다는 것 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목적에서 이탈한 것이다. 그래서 다시 하나님의 목 적 안으로 들어오려면 사탄의 밭이었던 사람이 갈아엎어져서 하나님이 쓰 실 수 있는 위치로 전환되어야 한다. 원래 영원히 갈아엎어질 수 없는 몸 (밭)인데 사탄의 씨(죄)가 들어와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갈아엎은 것이 아니라 갈아엎어 질 수 있으니까 갈아엎어 지는 것이다. 갈아엎어 져서 하나님의 씨가 뿌려질 수 있는 밭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사탄의 씨가 들어왔던 밭이 강제적으로 갈아엎어진 것이 하나님의 입장에서 심 판이고 예수님의 입장에서는 대속-희생물이다. 그리고 단순히 갈아엎었 다고 씨를 뿌릴 수 는 없다. 그래서 갈아엎은 밭을 씨가 뿌려질 수 있도 록 원래의 상태로 정리해야 해야 한다. 이것이 구속이다. 대속은 법리적 인 것이고 구속은 원위치라는 의미로 유기적인 것이다. 하나님께서 권능 과 지혜로 희생물이 헌물이 되었듯이 대속이 구속이 된 것이다. 그러므로 위 질문에서처럼 사람이 태초부터 죽게 되었다면 영혼만 죄의 삯으로 죽게 된다는 말은 생명의 원리에 대한 오해이다. 또 영혼이 죽는 다는 말은 성경 어디에도 없다. 죄로 인해 사망이 들어왔다는 말은 사망 노선으로 들어왔다는 말이다. 사망노선 안에 있으면 어느 과정에 있건 사망이다. 육신이 살아 있어도 사망이고 육체가 죽어도 사망이고, 부활 해도 사망인 것이다. 어느 특정 과정만을 선택해서 사망이라고 할 수 없 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아담 안에 있는 자를 죽은 자라고 하는 것이다. 사망열차를 타고 종착역으로 향해 가기 때문이다. 예수님이라는 생명열차 도 표면적으로 죽음과 부활이라는 같은 과정을 거친다. 그러나 어느 과정
419 23. 반론에 답하여 에 있건 생명이다. 육체가 살아도 생명이고 죽어도 생명인 것이다. 예수님께서 그녀에게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누구든지 살아서 나를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이것을 네가 믿느냐?(요 11:25~26) 여기서 이 말씀을 어떻게 해석할 것인가? 예수님을 믿는 자는 죽어도 산 다는 말은 장차 부활로 해석할 수 있다. 그러면 누구든지 살아서 믿는 자는 결코 죽지 않는다고 하셨다. 그런데 살아서 믿는 자의 육신이 죽지 않는가? 육신이 죽는다. 그러므로 이 말씀의 의미는 생명노선 안에 있으 면 어느 과정에 있건 생명이라는 것이다. 육신이 죽어도 산 것이고 살아 도 산 것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영생을 관계적 생명이라고 하는 것이다. 또 아래 말씀도 마찬가지다. 이것은 하늘로부터 내려오는 빵이므로 사람이 그것을 먹으면 죽지 아니하 리라.(요6:50) 진실로 진실로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사람이 만일 내말을 지키면 결코 죽음을 보지 아니하리라.(요8:51) 위 말씀대로라면 예수님을 믿는 자는 육신이 결코 죽지 않아야 한다. 그 럼에도 육신이 죽지 않는가? 그러므로 육신은 원래 영생하도록 창조되었 는데 단순하게 죄 때문에 육신에 죽음이 왔다고 하는 것은 씨와 땅의 생 명의 원리에 대한 이해부족에서 오는 오해이다. 하나님의 씨건 사탄의 씨건 흙-사람에게 들어오면 똑 같은 과정을 거쳐 부활하는 것이다. 죄로 인해 육신에 죽음이 왔다는 이분법적 논리라면 예수님을 믿는 사람 들은 육신이 죽지 않아야 한다. 죄로 인해 육체적 사망이 왔으나 예수님 으로 인해 죄 문제가 해결되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믿는 자들 이 죽지 않는가? 그러므로 원래 죽지 않을 육체가 죄로 인해 죽는다는 논 리는 맞지 않다
420 23. 반론에 답하여 예수님은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희생물로서 육신이 죽으셨다. 그런데 우리가 죄 때문에 정죄 받아 육신이 또 죽는다면 믿는 우리도 예수 님과 똑 같이 피 흘림을 통한 희생물로서 죽어야 된다는 논리가 생긴다. 또 예수님의 대속사역이 완성이 안 된 것이다. 그러나 우리는 희생물이 될 자격도 없고 희생물로서 죽을 수도 없다. 우리의 죄로 인한 희생물은 예 수님이 대신하셨다. 희생물이란 원칙적으로 죽음이 필요하다. 그래서 성 경은 우리를 보고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이 되라고 하지 않고 살아 있는 희생물 이 되라고 한다.(롬12:1) 우리의 죄에 대한 법리적 대가는 예수님이 다 치렀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가 죽는 것은 죄로 인한 희생 물로서 죽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과의 생명의 연합을 위한 헌물로서 죽는 것이다. 우리는 헌물로서 불-하나님께 태워져 번제헌물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성경이 주는 정확한 진리는 사람은 원래 죄가 없더라도 잠자는 정도의 죽음이 필요했지만(창2:21) 죄가 들어옴으로 피 흘림의 죽음이 필요하게 된 것이다.(레17:11) 인생은 하나님 앞에 근원적으로 번제헌물로 창조되었다. 그러나 인생이 원래 영생하는 자였다면 이것은 여러 가지 문제가 생긴다. 왜 유명 기독 교 목사들 중에 나중에 변절자가 생기고, 또 신자들 중에도 처음에 잘 믿는 것 같은데 나중에 변절하는 사람들이 생기는가? 근원이 불분명하기 때문이다. 내가 영생이 있다고 하면 불교신자와 출발점이 같은 것이다. 타 종교와의 구분이 불명확하고 내 인생의 출발점, 곧 기점이 모호한 것이다. 사람이 처음부터 영생을 가진 존재라면 말 그대로 영원해야지 어떻게 가다 가 끊어지는가? 영생이라는 단어 자체에 모순이 있는 것이다. 영생이란 자 존한다는 말이다. 자존하시는 분은 하나님 한 분이다. 오히려 죽음 안에 있는 하나님의 경륜의 진리가 닫히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의 죽 으심을 통해 계시된 풍성한 진리가 닫히게 된다. 단순하게 예수님이 법리 적으로만 우리의 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죽으셨다고 하면 십자가가 어떻 게 사탄에 대한 승리인지, 우리에 대한 생명인지 알 수도 없고 왜 십자가
421 23. 반론에 답하여 가 하나님의 지혜와 권능인지 설명할 수가 없는 것이다. 22. 에녹과 엘리야는 죽음을 보지 않고 육신을 가지고 그대로 하늘 로 올라갔다. 이로 보건데 사람은 죄가 들어오기 전에는 죽지 않 도록 지음받았다. 이러한 생각도 죽지 않고 싶은 아담의 깊은 속성에 기인한다. 에녹과 엘 리야도 기본적으로 아담의 자손으로 죄인이다. 에녹과 엘리야는 단지 죄 용서를 받고 구원받은 성도로서 마지막 날 공중으로 들림받는 부활성도 를 예표한다. 성경에 의하면 피조물은 그 세계에 살려면 그 세계에 합당 한 몸을 입어야 한다. 또한 하늘에 있는 몸들도 있고 땅에 있는 몸들도 있으나 하늘에 있는 것들 의 영광과 땅에 있는 것들의 영광이 서로 다르니라.(고전15:40) 그러므로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이 육신을 가지고 죽지 않고 영원 히 사는 것이 아니다. 육신은 어차피 죄가 있으나 없으나 하나님의 왕국 에 합당하지 않다. 형제들아, 내가 이것을 말하노니 살과 피는 하나님의 왕국을 상속받을 수 없으며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않을 것을 상속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이 원칙은 사람이라면 예외없이 적용되어야 한다. 그래서 예수님도 사람 으로 오셔서 하나님께서 정해 놓은 사람의 운명을 거치셨다. 그런데 에 녹과 엘리야가 이 운명을 거치지 않았다면 그들은 하나님과 관계없는 사 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들도 반드시 이 과정을 거쳐야한다. 그러면 에녹 과 엘리야가 하늘로 올라가는 과정을 살펴보자. 에녹의 전 생애는 삼백육십오 년이더라. 에녹이 하나님과 함께 걷더니 하 나님께서 그를 데려가시므로 그가 더 이상 있지 아니하더라.(창5:23~24)
422 23. 반론에 답하여 그들이 여전히 가면서 이야기하는데, 보라, 불 수레와 불 말들이 나타나 그들 두 사람을 갈라놓으매 엘리야는 회오리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더 라. 엘리야가 그것을 보고 큰 소리로 외치되, 내 아버지여, 내 아버지여, 이스라엘의 병거와 그것의 기병들이여, 하더라. 그가 다시는 그를 보지 못 하더라. 엘리야가 자기 옷을 잡아 두 조각으로 찢고 또 엘리야의 몸에서 떨어진 그의 겉옷을 주워 가지고 돌아와 요르단의 둑에 서서 (왕하 2:11~13) 위 말씀에서 보면 에녹이 어떻게 하늘로 올라갔는지 묘사되고 있지 않지 만 엘리야에 대해서 좀 더 자세하게 묘사되고 있다. 엘리야는 어느 찬송 가에서 말하듯이 병거타고 하늘로 올라가지 않고 회오리 바람을 타고 올 라갔고 겉옷이 땅으로 떨어졌다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엘리야 가 하늘로 올라갈 때 겉옷이 땅으로 떨어진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에녹과 엘리야가 육신을 가지고 그대로 하늘로 올 라간 것으로 알고 있지만 그렇지 않다. 성경은 분명히 하늘에 살려면 그 세계에 합당한 몸을 입어야 하므로 우리가 휴거될 때 몸이 부활체로 변 화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한 가지 신비를 알리노니 우리가 다 잠자지 아니하고 마지막 나팔 소리가 날 때에 눈 깜짝할 사이에 순식간에 다 변화되리라. (고전15:51) 그러므로 지금까지의 말씀을 유추해 볼 때 엘리야의 육신이 그대로 하늘 로 올라갔다면 겉옷이 땅으로 떨어질리 없다는 것을 쉽게 알 수 있다. 또 엘리야를 통해 에녹도 같은 과정을 통해 하늘로 올라갔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일 에녹과 엘리야가 우리 현재 입고 있는 육신을 그대로 가 지고 하늘로 올라갔다면 성경은 모순이 있는 것이고 하늘에도 화장실을 만들어야 되는 것이다. 에녹과 엘리야도 육신을 가지고 그대로 하늘에 간 것이 아니고 부활체, 곧 하늘에 속한 몸을 입고 하늘로 올라 간 것이 다. 그러므로 에녹과 엘리야가 육신이 부활체로 전환되었다는 것은 현재
423 23. 반론에 답하여 의 썩을 육신을 벗고 썩지 않을 새로운 몸을 입는 것이므로 자신이 느끼 건 느끼지 못하건 육신은 죽었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의 운명은 죄 가 있든 없든 반드시 한번은 죽고 부활하도록 정해진 것이다. 이 장막에 있는 우리가 짐을 진채 신음하는 것은 벗고자 함이 아니요, 입 고자 함이니 이것은 죽을 것이 생명에게 삼켜지게 하려 함이라.(고후5:4) 물론 성경은 에녹은 죽음을 보지 아니하고 옮겨졌다고 말하고 있다.(히 11:5) 그러나 우리는 앞서 성경이 말하는 사망과 생명은 단순히 육체적 죽음과 생명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사망의 과정, 생명의 과정으로 표면 적으로 동일한 과정을 거쳐야 되는 것을 살펴보았다. 에녹은 분명히 하 늘로 올라갈 때 육신은 죽고 부활체로 변환된 것이다. 그러므로 히브리 서 11장 5절의 말씀은 에녹의 육체적으로 죽지 않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고 사망노선을 가지 아니하고 생명노선을 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구약은 신약의 모형이지 실재가 아니다. 성경은 분명히 잠자는 자 의 첫 열매는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하고 있다.(고전15:20) 에녹과 엘리 야는 모형이지 실재, 곧 첫 열매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 는 하나님의 농사로서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죽고 이어서 많은 부활의 열매들로 수확되어야 할 운명이라는 것이다. 여기에는 에녹 과 엘리야도 예외가 없다. 그래서 계시록에 보면 두 증인이 나오는데 일 반적으로 두 증인은 에녹과 엘리야로 보고 있다.(계11:3) 그래서 이들도 예외없이 죽은 다음 사흘 반이 지난 뒤에 부활하여 하늘로 올라가는 장 면이 나온다.(계11:11~12) 비록 에녹과 엘리야는 구약시대에 하나님의 선택을 받고 신약성도의 예표로서 하늘로 올라갔지만 이것은 실재-열매 가 아니기 때문에 사람 농사를 지으시는 농부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첫 열매이신 예수 그리스도에 이어서 에녹과 엘리야도 생명 농사의 과정을 똑 같이 거쳐서 추수기에 열매로 수확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에녹과 엘
424 23. 반론에 답하여 리야는 단지 신약의 모형으로서 실험용으로 만든 열매였다. 그래서 그들 도 시장에 가져다 팔려면 곧 실제적인 열매가 되려면 정상적인 과정을 거쳐야 한다는 것이다. 23.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 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요일1:8) 와 같이 우리가 구원받았다 하더라고 육신에는 죄가 있기 때문에 죽는 것이다. 항상 말씀은 어떤 특정 말씀만 찍어서 문자대로 해석하면 안된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이 있는 사람이 정상적인 사람이다. 하나님의 경륜의 목표는 사람이 몸은 없고 영과 혼만 있는 사람이 목표가 아니다. 성경도 사람은 영과 혼과 몸이 있는 존재가 사람이라고 말한다. 하나님의 궁극적인 목적 은 몸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 사람은 영과 혼과 몸으로 구성되어 있고 그 구성체 중 사람의 주체는 혼이다.(창2:7) 왜냐하면 사람이 생각하고 느 끼고 결심하는 지정의( 知 情 意 ) 기능이 혼이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혼 을 감싸는 것은 단지 몸(body)이다. 그래서 성경은 사람을 지칭할 때 혼이 라고 한다. 이집트에서 요셉에게 태어난 아들들은 두 혼이었으며 야곱의 집의 모든 혼 곧 이집트에 이른 혼은 일흔 혼이었더라.(창46:27) 사람의 작동순서는 혼의 명령을 받아서 몸이 움직이는 것이다. 그래서 만 일 죄를 짓는다면 혼이 우선적으로 죄를 짓는 것이라고 말한다. 만일 어떤 혼이 알지 못하여 죄를 지으면 그는 일 년 된 암염소를 죄 헌물 로 드릴 것이요(민15:27) 결국 사람은 혼과 몸이 하나다. 혼은 죄를 안 짓고 몸만 죄를 짓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혼이 용서받아야 하는 것이고 혼이 구원받아야 하는 것
425 23. 반론에 답하여 이다. 이는 육체의 생명이 피에 있기 때문이니라. 내가 이 피를 너희에게 주어 제단 위에 뿌려 너희 혼을 위해 속죄하게 하였나니 피가 혼을 위해 속죄하 느니라.(레17:11) 이는 너희가 너희 믿음의 결말 곧 너희 혼의 구원을 받았기 때문이라.(벧 1:9) 성경을 살펴보면 우리가 장차 혼이 구원을 받을 것이라고 하지 않고 이 미 구원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육신 또한 장차 죽을 것이라 말하지 않고 이미 죽었다고 말하든지 현재적으로 죽어 있는 상태라고 말한다.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해 죽었으나(the body is dead) 성령은 의로 인해 생명이 되시느니라.(롬8:10) 그러므로 우리가 혼이 구원을 받았다는 것은 육신은 구원을 안받고 혼만 구원을 받았다는 것이 아니다. 사람의 구성체는 영, 혼, 몸으로 이루어졌 고 그 주체는 혼이듯이 사람이 혼이 구원받았다는 것은 영과 혼과 몸이 전 인격적으로 구원받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성경은 일부 구절을 제외하 고는 영, 혼, 몸을 구분하지 않고 그냥 구원받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 런데 혼은 구원을 받고 몸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하면 이것은 심각한 오 류가 생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대속은 전 인격적인 대속이지 영과 혼만 대속하고 몸은 대속하지 않는다면 예수님의 대속을 심각히 훼 손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왜 요한일서 1장 8절에서는 우리에게 죄가 있다고 하는가? 하 는 것이다. 성경을 볼 때 항상 두 가지 관점으로 보아야 한다. 하나님의 관점과 사람의 관점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대속으로 죄 용서를 받았다. 왜냐하면 우리가 죄가 조금이라도 남아 있다면 우리 는 구원이 안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의 관점에서 나를 쳐다보면 비
426 23. 반론에 답하여 록 예수님의 피로 대속을 받았지만 여전히 우리 안에는 죄의 속성이 남 아있고 그 옛 본성으로 인해 언제든지 죄를 지을 수 있기 때문이다. 실 제적으로 내가 죽은 것이 아니고 예수님이 죽으신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인들이 모두 경험했듯이 구원은 받았지만 죄를 짓는다면 그 양 심의 가책으로 인해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지게 마련이다. 즉 하나 님과의 교통이 안된다. 우리도 이런 경험을 하지 않았는가? 하나님은 단 지 사람을 구원해 놓고 그대로 살라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아 버지가 되고 우리는 그분의 아들로서 친밀한 교통을 원하신다. 요한이 여기서 그리스도인들이 죄가 있다고 하는 것은 몸이 죄 때문에 죽는다고 쓰고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리스도인들이 하나님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 속에서 남아 있는 옛 본성으로 인해 죄를 짓고 하나님과의 관계가 소원해 질 때 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대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요한이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이 빛 가운데서의 하나님과의 교제 를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 요한일서 1장 7절에서 9절을 말씀을 살펴보자. 그러나 그분께서 빛 가운데 계신 것 같이 만일 우리가 빛 가운데 걸으면 우리가 서로 교제하고 또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피가 모든 죄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느니라. 만일 우리에게 죄가 없다고 우리가 말하면 우 리가 우리 자신을 속이며 또 진리가 우리 속에 있지 아니하니라. 만일 우 리가 우리의 죄들을 자백하면 그분께서는 신실하시고 의로우사 우리의 죄 들을 용서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하시느니라.(요일1:7~9) 그래서 요한일서 1장 7절에서는 빛 가운데서의 하나님과의 교제를 말하 다가 갑자기 요한일서 1장 8절에서는 죄 문제를 들고 나왔는데 이것은 비록 그리스도인이 죄를 짓더라도 죄들을 자백하면 우리의 죄들을 용서 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회복시 킨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다 실족한 그리 스도인들에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한 대책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427 23. 반론에 답하여 그래서 요한은 이어서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 죄들이 그분의 이름 으로 인해 용서되었기 때문이라.(요일2:12) 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관점에서 우리는 죄가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이기 때문이 다. 그리스도의 몸이 어떻게 죄가 있을 수 있는가? 하나님은 우리를 보 실 때 항상 우리 개인을 보지 않고 그리스도와 연합된 한 몸을 보신다. 그리스도와 우리는 한 몸이다. 남편과 아내는 한 몸으로 남편의 수준이 아내의 수준이고 남편의 위치가 아내의 위치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으 로 죄가 없다. 우리가 우리 자신을 볼 때는 죄가 있지만 하나님 보실 때 는 죄가 없다. 바로 아래 말씀이 하나님께서 교회를 보는 관점이다. 그분께서는 야곱의 불법을 보지 아니하시며 이스라엘 안에서 잘못을 보지 아니하셨도다. (민23:21a) 또 그것을 점이나 주름이나 그런 것이 없는 영광스런 교회로 자기를 위해 제시하려 하심이며 교회가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려 하심이라.(엡5:27)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우리의 육신이 혼만 구원을 받고 육신은 죄 때문에 죽는다고 한다면 실제 죄의 주체인 혼은 빠지고 그 하수인인 몸만 심판받는 격이다. 그러나 우리는 전 인격적으로 대속을 받았고 전 인격적으로 구원을 받았다. 우리 육신은 영생하는 존재가 아니었다. 우 리 육신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을 위해 반드시 거쳐야 하는 과정이다. 그러나 아담은 이것을 거부했다. 그렇기 때문에 이에 대한 심판으로 예 수님은 강제적으로 희생물로서 십자가에서 죽으셔야 했던 것이다
428 24. 맺는 말 24. 맺는 말 오늘날 그리스도인의 문제점은 무엇인가? 방향과 목표가 없다는 것이다. 일반적인 그리스도인뿐만 아니라 기독교 지도자들마저 하나님의 영원한 목적과 계획을 모르니 향방 없이 허공에 주먹을 치는 거와 같은 형국이 다.(고전9:26) 그래서 이것도 해야 되고 저것도 해야 되는 줄 안다. 그 저 열심히만 하면 되는 줄 안다. 군대의 작전계획은 지휘관 의도를 구체 화 시킨 것이라면 성경은 하나님의 의도를 구체화 시킨 책이다. 그렇다 면 하나님의 의도는 무엇인가? 하나님은 사람을 왜 하나님의 형상과 모 양으로 창조하셨는가? 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인생을 개인적으로는 그리 스도라는 인격과 단체적으로 교회라는 사회를 목표로 창조하셨다는 것이 다. 결국 교회도 그리스도라는 인격의 연합체다. 그렇다면 우리의 모든 관심도 그리스도라는 인격에 관심을 집중해야 한다. 하나님의 목표가 거 기에 있기 때문이다. 예수님 당시에도 사람들은 늘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원한 생명을 얻으리이까? (마19:16, 막10:17, 눅10:25, 눅18:18, 행16:30) 라고 하면서 자신의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하였다. 그러나 예수님은 영생은 이것이니 곧 그들이 유일하신 참 하나님인 아버지와 아버지께서 보내신 자 예수 그 리스도를 아는 것 (요17:3) 이라고 말씀하신다. 아담은 원래 하나님의 아들로서 하나님과 생명관계에 있었다. 그러나 선 악의 지식나무의 열매를 먹고 하나님과 종의 관계로 위치를 이탈하였다. 그래서 사람의 본성은 늘 종이라는 행위적 관점에서 접근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가 어디 있느냐? (창3:9) 하시면서 존재적 위치를 물으신다. 여기에는 행위가 끼어들 틈이 없다. 예수님으로 인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원래 정해주신 아들이라는 존재적 위치를 회복했다. 우리는 이제 전전긍긍하면서 내가 무엇을 해야 구원을
429 24. 맺는 말 받을 수 있을까 하면서 걱정하고 있는 존재가 아니다. 성경은 아버지와 아들, 또는 남편과 아내의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이다. 그럼에도 오 늘날 여전히 우리의 관심은 내가 무엇을 하오리까? 하면서 행위적 관점 에서 접근한다. 생명의 관점에서 기록된 책을 율법적인 관점에서 해석하 고 있다. 예수님이 어떤 분인가를 알기보다 내가 예수님을 위해 무엇을 할까에 중점을 둔다. 물론 그런 것도 필요하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을 더 깊이 알기를 원한다. 예수님을 아는 것이 그분과의 연합이고 영생이 기 때문이다. 지금 대부분의 설교의 내용은 예수님이 우리의 죄를 대신해서 죽으셨으 니 믿어라, 이렇게 단순하게 말한다. 그리고는 이것을 위해 사람의 입장 에서 우리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에 초점을 맞추어 설교를 한다. 다 좋은 이야기다. 그러나 그것은 예수님에 대한 이야기 아니고 우리들에 대한 이야기다. 그러니 설교를 듣고 나오는 동시에 다 잊어 먹는다. 하 나님의 영원한 계획과 목적을 모르니 생활설교만 하는 것이다. 자신들은 예수님을 안다고 하나 예수님에 대해 몰라도 한참 모른다. 그것은 아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예수님을 믿는 것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거와 같 다. 우리가 은행에 돈을 맡기는 것은 나의 어떠함과 관계가 없다. 그 은 행을 신뢰하기 때문에 돈을 맡기는 것이다. 우리가 그 은행을 신뢰하려 면 그 은행에 대해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성경은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 가라 말한다.(히6:1) 성경이 말하는 그리스도의 기초 원리는 무엇인가? 그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의 교리의 기초 원리들을 떠나 완전함으로 나아 가서 죽은 행위로부터의 회개와 하나님을 향한 믿음과 침례들에 관한 교리 와 안수와 죽은 자들의 부활과 영원한 심판에 대한 기초를 다시 놓지 말지 니라.(히6:1)
430 24. 맺는 말 이러한 기초 원리는 입문에 필요한 것이고 젖을 먹는 갓난아이 수준이라 고 말한다.(히5:13)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하기에 이러한 것을 아는 것이 대단한 수준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데 그것이 아니고 갓난아이 수준이다. 예수님은 단순히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한 희생물로만 오신 것이 아니 다. 그분은 우리의 생명이 되기 위해 오셨다. 생명은 그분 자신이고 인 격이다.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과 같은 인격을 가진 사람들이 되길 원하 신다. 그러려면 그분을 우리는 속속들이 알아야 한다. 내가 그분을 알아 야 그분을 살아낼 것 아니겠는가?(갈2:20) 예수님은 우리의 죄들만을 위 해 죽으신 단순한 분이 아니다. 바울은 에베소서에서 이렇게 기도한다. 이런 까닭에 내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 곧 하늘과 땅에 있는 온 가족에게 이름을 주신 분께 무릎을 꿇고 비노니 그분께서 자신의 영광 의 풍성함을 따라 자신의 영을 통해 너희 속사람을 능력으로 강건하게 하 시며 믿음을 통해 그리스도께서 너희 마음속에 거하게 하시고 또 너희가 사랑 안에서 뿌리를 내리고 터를 잡아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너비와 길이 와 깊이와 높이가 어떠함을 깨닫고 지식을 뛰어 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심으로 충만하게 되기를 구하노라.(엡3:14~19) 여기서 바울은 우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 이가 어떠한지를 깨달으라고 말한다. 여기에 우주라는 말은 없지만 바 울의 기도는 하늘과 땅을 포함하는 전 우주적 기도다. 그러므로 그리스 도의 인격의 크기를 우주에 비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가 생각 할 수 있는 가장 큰 것은 우주이기 때문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우주 다. 우리는 우주의 크기를 알 수 없다. 오직 주님만이 아신다. 그분의 인 격의 크기는 우주적이다. 우리에게 예수님을 아는 것이 영생임에도 불구 하고 오늘날 우리가 예수님을 아는 수준은 얼마나 왜소하고 가련한 상황 에 있는가?
431 24. 맺는 말 하나님은 우리가 예수님의 인격의 너비와 길이와 깊이와 높이를 입체적 으로 알기를 원하신다. 단지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을 단순한 한 점( 點 ), 또는 한 선( 線 )만으로 알기 원하시지 않고 입체적으로 알고 그리스도의 인격의 충만을 누리기를 원하신다.(엡3:19)
432
433 또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우리에게 깨달음을 주사 우리가 진실하신 분을 알게 하셨음을 우리가 알며 또 진실하신 분 곧 그분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음 을 아노니 이분은 참 하나님이시요 영원한 생명이시니 라.(요일5:20)
내지-교회에관한교리
내지-교회에관한교리 2011.10.27 7:34 PM 페이지429 100 2400DPI 175LPI C M Y K 제 31 거룩한 여인 32 다시 태어났습니까? 33 교회에 관한 교리 목 저자 면수 가격 James W. Knox 60 1000 H.E.M. 32 1000 James W. Knox 432 15000 가격이 1000원인 도서는 사육판 사이즈이며 무료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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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v v vi vii viii ix x xi 61 62 63 64 에 피 소 드 2 시도 임금은 곧 신하들을 불러모아 나라 일을 맡기고 이집트로 갔습니다. 하 산을 만난 임금은 그 동안 있었던 일을 말했어요. 원하시는 대로 일곱 번째 다이아몬드 아가씨를
할렐루야10월호.ps, page 1-12 @ Normalize ( 할 437호 )
www.hcc.or.kr [email protected] Hallelujah News PHOTO NEWS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 제437호 2007년 10월 7일 (주일) 화요청년찬양부흥회 날짜: 10월 16일, 11월 6일, 11월 20일 12월 4일, 12월 18일 (매달 1 3주 화요일) 장소: 할렐루야교회
152*220
152*220 2011.2.16 5:53 PM ` 3 여는 글 교육주체들을 위한 교육 교양지 신경림 잠시 휴간했던 우리교육 을 비록 계간으로이지만 다시 내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니 우 선 반갑다. 하지만 월간으로 계속할 수 없다는 현실이 못내 아쉽다. 솔직히 나는 우리교 육 의 부지런한 독자는 못 되었다. 하지만 비록 어깨너머로 읽으면서도 이런 잡지는 우 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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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입대하기 전까지만 해도 왜 그렇게까지 군대를 가려고하냐, 미친 것 아니냐는 소리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나는 지금 그 때의 선택을 후회하지 않는다. 내가 선택한 길이기에 후회는 없다. 그런 말을 하던 사람들조차 지금의 내 모습을 보고 엄지 손가락을 치켜세운다. 군대는 하루하루를 소종하게 생각 할 수 있게 만들어 주었고, 점점 변해가는 내 모습을 보며
조사 심판: 미래를 위한 당신의 희망! Print
조사 심판: 미래를 위한 당신의 희망! 성스러운 성경은 위로의 약속과 엄숙한 경고로 끝을 맺는다: 보라, 내가 속히 오리니 내가 줄 보상이 내게 있어 각 사람에게 그의 행위에 따라 주리라. (요한계 시록 22:12, 킹제임스 흠정역 1 ) 거의 2,000년 동안 모든 곳에 있는 크리스챤들은 곧 오신다는 구주의 재 림의 약속을 고수해왔습니다. 셀 수 없는 순교자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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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 10 DVD CHOICE dvd dvd?!!!! [1] [2] DVD NO. 1898 [3] Days of Being Wild 지금도 장국영을 추억하는 이는 많다. 그는 홍콩 영화의 중심에 선 배우였고, 수많은 작품에 출연했다. 거짓말 같던 그의 죽음은 장국 영을 더욱 애잔하고, 신비로운 존재로 만들었다. 하지만 많은 이들 이 장국영을 추억하고, 그리워하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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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승님이 스승님이 스승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말씀하시기를 알라는 위대하다! 위대하다! 알라는 알라는 위대하다! 특집 특집 기사 특집 기사 세계 세계 평화와 행복한 새해 경축 세계 평화와 평화와 행복한 행복한 새해 새해 경축 경축 특별 보도 특별 특별 보도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도가니! 스승님과의 스승님과의 선이-축복의 도가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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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안전한 나날을 그리다 01 16 22 28 32 36 40 44 50 54 58 02 62 68 90 94 72 98 76 80 102 84 03 04 106 142 110 114 118 122 126 130 134 148 154 160 166 170 174 138 05 178 182 186 190 194 200 204 208 2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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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사람을 위한 생활 문화 매거진 235 Cover Story ISSN 2005-2820!!2 3! 3 201002 002 !!4 5! 201002 !!6 44 7! 201002 !!8 February 2010 VOLUME 35 Publisher Editor-in-Chief Editor Planning & Advertising Advertising Desig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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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ntents ㅣ반딧불이ㅣ뒤엉켜 버린 삶, 세월이 흘러도 풀 수 없는.. 실타래 벌써 3년째 시간은 흘러가고 있네요. 저는 서울에서 엄마의 갑작스런 죽음 때문에 가족들과 제주로 내려오게 되었답 니다. 몸과 마음이 지쳐있었고 우울증에 시달리며, 엄마의 죽음을 잊으려고 하였습 니다. 그러다 여기서 고향 분들을 만나게 되었고 그 분들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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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주제 의식의 원칙 논문은 주제 의식이 잘 드러나야 한다. 주제 의식은 논문을 쓰는 사람의 의도나 글의 목적 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2) 협력의 원칙 독자는 필자를 이해하려고 마음먹은 사람이다. 따라서 필자는 독자가 이해할 수 있는 말이 나 표현을 사용하여 독자의 노력에 협력해야 한다는 것이다. (3) 논리적 엄격성의 원칙 감정이나 독단적인 선언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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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10 spring Contents 4 COVER STORY 6 8 11 14 16 18 20 22 23 24 26 28 30 32 16 28 20-11 042-622-9991 www.jungbu.or.kr 30 49 34 37 38 40 42 44 46 48 51 52 54 Culture 58 60 62 63 4 w i t h w i t h 5 6 w
2015년9월도서관웹용
www.nl.go.kr 국립중앙도서관 후회의 문장들 사라져 버릴 마음의 잔해 지난해와 마찬가지로 이번 해에도 배추농사에서 큰돈을 남은 평생 머릿속에서 맴돌게 될 그 말을 다시 떠올려보 만졌다 하더라도 지난 여름 어느 날 갑자기 들기 시작한 았다. 맺지 못한 채 끝나버린 에이드리언의 문장도 함께. 그 생각만은 변함없을 것 같았다. 같은 나이의 다른 아이 그래서
Drucker Innovation_CEO과정
! 피터드러커의 혁신과 기업가정신 허연 경희대학교 경영대학원 Doing Better Problem Solving Doing Different Opportunity ! Drucker, Management Challenges for the 21st Century, 1999! Drucker, Management: Tasks, Responsibilit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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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울처럼 이렇게 살지 마세요! 제 1부 사무엘상 15:20-30 우리가 하나님께서 원하시지 않는 방향으로 가기로 고집하면,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그곳으로 가는 것을 억지로 막으시지 않으십니다. 이것이 우리가 사무엘상 8장에서 볼 수 있는 사실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은혜로 우리가 가야할 방향을 말씀해 주십니다. 그러나 우리가 그 방향의 반대방향으로 가기로 고집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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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8 60 1 1 200 2 6 4 7 29 1975 30 2 78 35 1 4 2001 2009 79 2 9 2 200 3 1 6 1 600 13 6 2 8 21 6 7 1 9 1 7 4 1 2 2 80 4 300 2 200 8 22 200 2140 2 195 3 1 2 1 2 52 3 7 400 60 81 80 80 12 34 4 4 7 12 80 50
제 1 과 제자로 부르시니 1. 주님을 따라오라는 말씀에 무엇인가를 버려두고 즉시 순종하였다. 그들이 버린 것은 배와 그물이었는 데, 그것은 곧 생업을 포기한 것이다. 2.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고. 전도나 선교를 의미한다. 1. 따르다 는 제자도의 핵심 동사이
이야기식 소그룹 성경공부 4163087(Leader Guide) 마가복음 : 마가가 전한 예수 제 1 과 제자로 부르시니 1. 주님을 따라오라는 말씀에 무엇인가를 버려두고 즉시 순종하였다. 그들이 버린 것은 배와 그물이었는 데, 그것은 곧 생업을 포기한 것이다. 2.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려고. 전도나 선교를 의미한다. 1. 따르다 는 제자도의 핵심 동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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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4 October 2005 현 대는 이미지의 시대다. 영국의 미술비평가 존 버거는 이미지를 새롭 게 만들어진, 또는 재생산된 시각 으로 정의한 바 있다. 이 정의에 따르 면, 이미지는 사물 그 자체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미지는 보는 사람의, 혹은 이미지를 창조하는 사람의 믿음이나 지식에 제한을 받는다. 이미지는 언어, 혹은 문자에 선행한다. 그래서 혹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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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 - 2 - - - - 4 - - 5 - - 6 - - 7 - - 8 - 4) 민원담당공무원 대상 설문조사의 결과와 함의 국민신문고가 업무와 통합된 지식경영시스템으로 실제 운영되고 있는지, 국민신문 고의 효율 알 성 제고 등 성과향상에 기여한다고 평가할 수 있는지를 치 메 국민신문고를 접해본 중앙부처 및 지방자 였 조사를 시행하 였 해 진행하 월 다.
가해하는 것은 좋지 않은 행동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불쌍해서이다 가해하고 나면 오히려 스트레스를 더 받을 것 같아서이다 보복이 두려워서이다 어떻게 그렇게 할 수 있는지 화가 나고 나쁜 아이라고 본다 그럴 수도 있다고 생각한다 아무런 생각이나 느낌이 없다 따돌리는 친구들을 경계해야겠다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중학생 고등학생 남 여
연구노트
#2. 종이 질 - 일단은 OK. 하지만 만년필은 조금 비침. 종이질은 일단 합격점. 앞으로 종이질은 선택옵션으로 둘 수 있으리라 믿는다. 종이가 너무 두꺼우면, 뒤에 비치지 는 않지만, 무겁고 유연성이 떨어진다. 하지만 두꺼우면 고의적 망실의 위험도 적고 적당한 심리적 부담도 줄 것이 다. 이점은 호불호가 있을 것으로 생각되지만, 일단은 괜찮아 보인다. 필자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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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anhak Foundation News VOL. 150 * 2011. 12. 30 논단 이슈별 CSR 활동이 기업 충성도에 미치는 영향 : 국가별 및 산업별 비교분석 최 지 호 전남대 경영학부 교수 Ⅰ. 서론 Ⅰ. 서론 Ⅱ. 문헌 고찰 및 가설 개발 2. 1. 호혜성의 원리에 기초한 기업의 사회적 투자에 대한 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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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5 6 7 여행 스테인드글라스 을 노래했던 하느님의 영원한 충만성을 상징하는 불꽃이다. 작품 마르코 수사(떼제공동체) 사진 유백영 가브리엘(가톨릭 사진가회) 빛은 하나의 불꽃으로 형상화하였다. 천사들과 뽑힌 이들이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거룩하시다. 하며 세 겹의 거룩하심 가 있을 것이다. 빛이 생겨라. 유리화라는 조그만 공간에 표현된 우주적 사건인 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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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면 2012.7.25 6:14 PM 페이지1 2012년 8월 1일 수요일 16 종합 고려대장경 석판본 판각작업장 세계 최초 석판본 고려대장경 성보관 건립 박차 관계기관 허가 신청 1차공사 전격시동 성보관 2동 대웅전 요사채 일주문 건립 3백여 예산 투입 국내 최대 대작불사 그 동안 재단은 석판본 조성과 성보관 건립에 대해서 4년여 동안 여러 측면에 서 다각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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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3 04 06 08 10 12 13 14 16 한겨울의 매서운 추위도 지나가고 어느덧 봄이 성큼 다가왔습니다. 소현이가 이 곳 태화해뜨는샘에 다닌 지도 벌써 1년이 지났네요. 해샘에 처음 다닐 때는 대중교통 이용하는 것도 남을 의식해 힘들어하고, 사무실내에서 사람들과 지내는 것도 신경 쓰여 어려워했었습니다. 그러던 우리 소현이가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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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구책임자 가나다 순 머 리 말 2006년 12월 한국교육학술정보원 원장 - i - - ii - - iii - 평가 영역 1. 교육계획 2. 수업 3. 인적자원 4. 물적자원 5. 경영과 행정 6. 교육성과 평가 부문 부문 배점 비율(%) 점수(점) 영역 배점 1.1 교육목표 3 15 45점 1.2 교육과정 6 30 (9%) 2.1 수업설계 6 30 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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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ocus Group 2006 AUTUMN Volume. 02 Focus Group 2006 AUTUMN 노랗게 물든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습니다. 나는 두 길 모두를 가볼 수 없어 아쉬운 마음으로 그 곳에 서서 한쪽 길이 덤불 속으로 감돌아간 끝까지 한참을 그렇게 바라보았습니다. 그리고 나는 다른 쪽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무성하고, 사람이
왕께찬양합니다-R.Vader_&_J.Rouse._Arr.C._Kirkland)
왕께찬양합니다 Rady Vader & Jay Ruse 곡/Camp Kirlad a ff f f (G Gely =60) l l l l 4 a ff f f 4 4 l l l l b f f f f4 4 l l l l b f f f f4 l l l l 4 a ff f f 4 z f mp b f f f f4 4 z s z f 편곡 5 a ff f f m mp s 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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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vol.126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 vol.126 www.fsb.or.kr 20163 + 4 Contents 20163 + 4 vol.126 www.fsb.or.kr 26 02 08 30 SB Theme Talk 002 004 006 SB Issue 008 012 014
예수교와 바울교 by John, Lee Dong Ho 1판 1쇄 인쇄일 2009. 12. 15 1판 1쇄 발행일 2009. 12. 17 지은이 John, Lee Dong Ho 발행처 초대기독교연구소 주 소 서울시 관악구 삼성동 395-53 연락처 070-7531-7702 / 010-5793-7708 ISBN 978-89-963323-0-503230 책 값 뒤표지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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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mail protected] 750 1,500 35 Contents Part 1. Part 2. 1. 2. 3. , 1.,, 2. skip 1 ( ) : 2 ( ) : 10~40 (, PC, ) 1 : 70 2 : 560 1 : 2015. 8. 25~26 2 : 2015. 9. 1 4 10~40 (, PC, ) 500 50.0 50.0 14.3 28.6
2 Verse 2C E 전능 하신나의주하나님은?? j r j 2 0 r. fij fi j R = E2G 능치 Fm9 Cm M9 2C 못하실일전혀없네우리?? r. o R
전능하신나의주하나님 (Full Score) 편곡차유진 Vocal Intro E Cm Fm Piano?.. j > Strings.. 6 KeyBoard j j Horn? Bass() X 2 0 2 0 3 2 0 2 2 1 rums o o fi j j R R 2 Verse 2C E 전능 하신나의주하나님은?? j r j 2 0 r. fij fi j R = E2G
어린이 비만예방 동화 연극놀이 글 김은재 그림 이 석
캥거루는 껑충껑충 뛰지를 못하고, 여우는 신경질이 많아졌어요. 동물 친구들이 모두 모두 이상해졌어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난 걸까요? 멧돼지네 가게와 무슨 관계가 있는 걸까요? 염소 의사 선생님은 상수리나무 숲으로 가면 병을 고칠 수 있다고 했답니다. 상수리나무 숲에는 어떤 비법이 숨겨져 있는 지 우리 함께 숲으로 가볼까요? 이 동화책은 보건복지부의 국민건강증진기금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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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orea Shipping Association 조합 뉴비전 선포 다음은 뉴비전 세부추진계획에 대한 설명이다. 우리 조합은 올해로 창립 46주년을 맞았습니다. 조합은 2004년 이전까 지는 조합운영지침을 마련하여 목표 를 세우고 전략적으로 추진해왔습니 다만 지난 2005년부터 조합원을 행복하게 하는 가치창출로 해운의 미래를 열어 가자 라는 미션아래 BE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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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1 융합 과학 2011년도 1학기 중간고사 대비 다음 글을 읽고 물음에 답하시오. 1 빅뱅 우주론에서 수소와 헬륨 의 형성에 대한 설명으로 옳은 것을 보기에서 모두 고른 것은? 4 서술형 다음 그림은 수소와 헬륨의 동위 원 소의 을 모형으로 나타낸 것이. 우주에서 생성된 수소와 헬륨 의 질량비 는 약 3:1 이. (+)전하를 띠는 양성자와 전기적 중성인 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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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0 획기적 시대들과 경륜들, 신의 계획의 진전을 표시 -하나님의 계획은 고정되고 체계적 -세계 역사의 3 대 획기적 시대들 -그 대 획기적 시대들의 특이한 면모들 - 땅은 영원히 지속 된다 - 장차 오는 세상, 새 하늘과 새 땅 -이 대 획기적 시대들의 분할 -하나님의 계획의 중요한 면모들이 이렇게 드러남 -알아낸 순서는 조화를 드러냄 -진리의 말씀을 옳게
0.筌≪럩??袁ⓓ?紐껋젾001-011-3筌
3 4 5 6 7 8 9 10 11 Chapter 1 13 14 1 2 15 1 2 1 2 3 16 1 2 3 17 1 2 3 4 18 2 3 1 19 20 1 2 21 크리에이터 인터뷰 놀이 투어 놀이 투어 민혜영(1기, 직장인) 내가 살고 있는 사회에 가치가 있는 일을 해 보고 싶 어 다니던 직장을 나왔다. 사회적인 문제를 좀 더 깊숙이 고민하고, 해결책도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01 02 8 9 32 33 1 10 11 34 35 가족 구조의 변화 가족은 가족 구성원의 원만한 생활과 사회의 유지 발전을 위해 다양한 기능 사회화 개인이 자신이 속한 사회의 행동 가구 가족 규모의 축소와 가족 세대 구성의 단순화는 현대 사회에서 가장 뚜렷하게 나 1인 또는 1인 이상의 사람이 모여 주거 및 생계를 같이 하는 사람의 집단 타나는 가족 구조의
2 국도복음 설교특집
1 국도복음 설교특집 전능하신 하나님 교회 출판 2 국도복음 설교특집 목 차 1 목 차 1 예수님이 재림하신다는 예언은 어떻게 응한 것인가?...1 2 하나님의 두 번째 도성육신은 여성일 수 없는가?...12 3 주님이 재림하실 때 이름이 또 예수로 불리겠는가?...27 4 형상이 바뀌어 거룩한 몸이 된다는 것은 어떻게 달하는가?...42 5 주님이 돌아오시면
2014학년도 수시 면접 문항
안 경 광 학 과 세부내용 - 남을 도와 준 경험과 보람에 대해 말해 보세요. - 공부 외에 다른 일을 정성을 다해 꾸준하게 해본 경험이 있다면 말해 주세요. - 남과 다른 자신의 장점과 단점은 무엇인지 말해 주세요. - 지금까지 가장 고민스러웠던 또는 어려웠던 일과 이를 어떻게 해결하였는지? - 자신의 멘토(조언자) 또는 좌우명이 있다면 소개해 주시길 바랍니다.
우리 옆에 계신분과 인사하겠습니다
전도자의 상급 (마10:40~42) 이장희 목사(서울렘넌트교회 담임목사) 본문말씀 40절 너희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영접하는 것이요 나를 영접하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영접하는 것이니라 41절 선지자의 이름으로 선지자를 영접하는 자는 선지자의 상을 받을 것이요 의인의 이름으로 의인을 영접하는 자는 의인의 상을 받을 것이요 42절 또 누 구든지 제자의 이름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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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이 책에서는 단순히 가난한 관리들의 이야기보다는 국가와 백성을 위하여 사심 없이 헌신한 옛 공직자들의 사례들을 발굴하여 수록하였습니다. 공과 사를 엄정히 구분하고, 외부의 압력에 흔들리지 않고 소신껏 공무를 처리한 사례, 역사 속에서 찾은 청렴 이야기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관아의 오동나무는 나라의 것이다 최부, 송흠
41호-소비자문제연구(최종추가수정0507).hwp
소비자문제연구 제41호 2012년 4월 해외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이용약관의 약관규제법에 의한19)내용통제 가능성* : Facebook 게시물이용약관의 유효성을 중심으로 이병준 업 요약 업 규 규 논 업 쟁 때 셜 네트워 F b k 물 규 았 7 계 건 됨 규 규 업 객 계 규 므 받 객 드 객 규 7 말 계 률 업 두 않 트 접속 록 트 른징 볼 규 업 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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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2288-5854 Print ISSN 2289-0009 online DIGITAL POST KOREA POST MAGAZINE 2016. APRIL VOL. 687 04 DIGITAL POST 2016. 4 AprilVOL. 687 04 08 04 08 10 13 13 14 16 16 28 34 46 22 28 34 38 42 46 50 54 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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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vol.124 Cover Story Seed Money Bank Savings Banks + vol.124 www.fsb.or.kr 201511 + 12 201511 + 12 Contentsvol.124 www.fsb.or.kr 002 026 034 002 004 006 008 012 014 016 018
학부모신문203호@@
02 05 06 08 11 12 2 203 2008.07.05 2008.07.05 203 3 4 203 2008.07.05 2008.07.05 203 5 6 203 2008.07.05 2008.07.05 203 7 8 지부 지회 이렇게 했어요 203호 2008.07.05 미친소 미친교육 촛불은 여전히 건재하다! 우리 학부모들은 근 2달여를 촛불 들고 거리로
We are thankful to the Lord for the opportunity to produce this material for the sake of the Kingdom. He makes all things possible. Thanks to those wh
WORLD VIDEO BIBLE SCHOOL JOHN MOORE 著 BCC 譯 We are thankful to the Lord for the opportunity to produce this material for the sake of the Kingdom. He makes all things possible. Thanks to those who financi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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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말씀 Scripture reading 고전 15:1-11 1 Cor. 15:1-11 고전 15:1-11 1 Cor. 15:1-11 1 형제자매여러분, 내가여러분에게전한복음을일깨워드립니다. 여러분은그복음을전해받았으며, 또한그안에서있습니다. 1 Now, brothers, I want to remind you of the gospel I preached to
What is the judgement like
영어로복음전하기제 73 강 "The Image of Christ" By Revd. Billy Graham 태초에말씀이계셨고, 그말씀은하나님과함께계셨느니라. 고성경은말합니다. 시간이시작되기전에, 그분은존재하셨습니다. 그분은말씀하셨습니다, 아브라함이있기전에내가있느니라. 나는영원한존재안에있느니라. 그분은서서말씀하셨습니다, 나는하나님이니라 그러했습니까? 그분은그분이주장하셨던바로그어떤분이셨습니까?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창세기와 요한계시록 창세기는 요한계시록을 지향( 指 向 )한다. 그러므로 창세기는 요한계시록의 관점에서 해석( 解 釋 )하는 것이 옳다. 또 내가 새 하늘과 새 땅을 보니 (계 4:10) 이십사 장로들이 보좌에 앉으신 이 앞에 엎드려 세세토록 살 아 계시는 이에게 경배하고 자기의 관을 보좌 앞에 드리며 이르되 (계 4:11) 우리 주 하나님이여 영광 과 존귀와
4 7 7 9 3 3 4 4 Ô 57 5 3 6 4 7 Ô 5 8 9 Ô 0 3 4 Ô 5 6 7 8 3 4 9 Ô 56 Ô 5 3 6 4 7 0 Ô 8 9 0 Ô 3 4 5 지역 대표를 뽑는 선거. 선거의 의미와 필요성 ① 선거의 의미`: 우리들을 대표하여 일할 사람을 뽑는 것을 말합니다. ② 선거의 필요성`: 모든 사람이 한자리에 모여 지역의 일을 의논하고
세계 비지니스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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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IL 완벽입문
누구나 만드는 전자책 SIGIL 을 이용해 전자책을 만들기 EPUB 전자책이 가지는 단점 EPUB이라는 포맷과 제일 많이 비교되는 포맷은 PDF라는 포맷 입니다. EPUB이 나오기 전까지 전 세계에서 가장 많이 사용되던 전자책 포맷이고, 아직도 많이 사 용되기 때문이기도 한며, 또한 PDF는 종이책 출력을 위해서도 사용되기 때문에 종이책 VS
Gwangju Jungang Girls High School 이상야릇하게 지어져 이승이 아닌 타승에 온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모텔에 여장을 풀고 먹 기 위해 태어났다는 이념 아래 게걸스럽게 식사를 했다. 피곤하니 빨리 자라는 선생님의 말 씀은 뒷전에 미룬 채 불을 끄고 밤늦게까지 속닥거리며 놀았다. 몇 시간 눈을 붙이는 둥 마 는 둥 다음날 이른 아침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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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7년 1월 13일-Grace Series(VII) 하나님의 은혜 VII. 선물을 주시는 은혜 말씀: 롬8:32 요절: 롬8:32 사람들은 누구나 선물 을 좋아합니다. 선물을 싫어하는 이는 거의 없습니다. 선물과 뇌물은 완전히 다릅 니다. 흔히 구약을 율법의 시대, 신약을 은혜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은혜의 핵심은 선물- 은사 입니다. 은 혜는 그에 따른
질문 21: 하나님께서는남자와여자에게다른기능들을주셨는데, 그기능들은무엇인가? ( 창 2:20-24) 설명 : 하나님은사람을하나님의형상대로지으셨다. 하나님의형상대로지음을받았다는것은하나님의모습을따라지어졌다는것이다. 그럼어떤하나님의모습을말하는것인가? 하나님은영이라고성경을말했
문 10: 하나님께서사람을어떻게지으셨는가? 답 10: 하나님께서사람을남녀로지으시되자기의형상대로지식과공의와거룩함이있게지으사모든생물을주관하시게하셨다. 성경적근거 : 창세기 1:26-28, 31; 골로새서 3:10; 에베소서 4:24 질문 1: 하나님께서는사람을하나님의무엇을따라지으셨나? 질문 2: 하나님은사람의무엇을구별하여지으셨나? 질문 3: 하나님의형상대로지었다는것은무엇을의미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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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Journal of the Korea America Friendship Society (KAFS) LASTING FRIENDS
WHY GRACE CHANGES EVERYTHING by Chuck Smith 2007 The Word For Today Published by The Word For Today Translated by permission of The Word For Today TWF
WHY GRACE CHANGES EVERYTHING 척 스미스의 은혜 하나님의 복의 문을 여는 열쇠 척 스미스 목사 지음 갈보리채플 극동선교회 THE WORD FOR TODAY KOREA WHY GRACE CHANGES EVERYTHING by Chuck Smith 2007 The Word For Today Published by The Word For Today
1 사탄의 시험 우리는 교만해진 루시퍼가 하나님의 지위를 탐내어 반역했던 태초의 사건을 기억한다. 이제 완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의 영광과 위엄을 떠나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는, 사탄이 보기에 한번 상대해 볼 만한 존재로 보였을
11장 1 사탄의 시험 2 능력과 명성 3 다시 태어나라 4 음모와 배척 5 생명의 양식 1 사탄의 시험 우리는 교만해진 루시퍼가 하나님의 지위를 탐내어 반역했던 태초의 사건을 기억한다. 이제 완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아들께서 하늘의 영광과 위엄을 떠나 사람으로 이 세상에 오셨다. 그러나 사람이신 예수는, 사탄이 보기에 한번 상대해 볼 만한 존재로 보였을
2003report250-12.hwp
지상파 방송의 여성인력 현황 및 전문화 방안 연구 한국여성개발원 발간사 Ⅰ....,.,....... .. Ⅱ. :...... Ⅲ.,,. ..,.,.... 9 1 1.. /.,. PD,,,,, / 7.93%. 1%... 5.28% 10.08%. 3.79%(KBS MBC), 2.38 %(KBS MBC) 1%...,. 10. 15. ( ) ( ), ( ) ( )..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
발행일 : 2013년 7월 25일 안 산 시 보 차 례 훈 령 안산시 훈령 제 485 호 [안산시 구 사무 전결처리 규정 일부개정 규정]------------------------------------------------- 2 안산시 훈령 제 486 호 [안산시 동 주민센터 전결사항 규정 일부개정 규정]--------------------------------------------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2 목차 편집자의 말 ------------------------------------------------------------------------------------- 3 한국의 * 상1 개괄 한국의 병역거부운동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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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12 BELIEVER S BIBLE COMMENTARY 1,2,3 JOHN, JUDE, REVELATION 윌리암 맥도날드 신자 성경주석 요한서신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윌리암 맥도날드 신자 성경주석 요한서신서, 유다서 요한계시록 정병은, 유지훈 옮김 BELIEVER S BIBLE COMMENTARY BY WILLIAM MACDONALD 그리스도의 복음과
농촌과목회 66호-최종.hwp
새로운복음 도마복음 읽기(6) 한 석 진(목사, 원주 진리와자유교회) [제41장] 예수께서 말씀하시기를, (손에) 무엇이라도 가진 자는 더 받게 될 것이며, 그리고 아무것도 지니지 못한 자는 그가 가진 조그만 것조차 빼앗길 것이다. 이 말씀은 경제나 물질의 분배에 관한 가르침이 아니다. 이 말씀을 부익 부 빈익빈(富益富 貧益貧, 가진 자가 더욱 부자가 되고
2. 4. 1. 업무에 활용 가능한 플러그인 QGIS의 큰 들을 찾 아서 특징 설치 마 폰 은 스 트 그 8 하 이 업무에 필요한 기능 메뉴 TM f K 플러그인 호출 와 TM f K < 림 > TM f K 종항 그 중에서 그 설치 듯 할 수 있는 플러그인이 많이 제공된다는 것이다. < 림 > 다. 에서 어플을 다운받아 S or 8, 9 의 S or OREA
5:1-5:21 하나님의사랑으로구원받는다 구조상아래와같이연결을하여읽는것이도움이됩니다. *3:21-3:31 와 5:1-5:11 과 6-8 장들은각개인의구원에관한원리 *4:1-4:25 과 5:12-21 과 9-11 장들은인류전체에대한구원의원리 5:1-5:11. 우리각사람이
5:1-5:21 하나님의사랑으로구원받는다 구조상아래와같이연결을하여읽는것이도움이됩니다. *3:21-3:31 와 5:1-5:11 과 6-8 장들은각개인의구원에관한원리 *4:1-4:25 과 5:12-21 과 9-11 장들은인류전체에대한구원의원리 5:1-5:11. 우리각사람이하나님의사랑으로구원을받음 5:1. 그러므로우리가믿음으로의롭다하심을받았으니 우리주예수그리스도로말미암아하나님과화평을누리자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 1 - - 2 - 하나님의 구원 이렇게 받는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저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요 3:16-17]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내 말을 듣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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Why Grace Changes Everything 은혜의 비밀 척 스미스 목사 지음 하나님과의 사랑의 관계 하나님이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라는 간단한 말의 의미를 깊이 생각해 본 적이 있습니까? 이 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진리를 내포하고 있는데, 그것은 하나님께서 우리와 사랑의 관계를 가지시기 위해 우리를 부르셨다는 사실입니다. 우리 쪽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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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8140242-000001-08 2013-927 2013 182 2013 182 Contents 02 16 08 10 12 18 53 25 32 63 Summer 2 0 1 3 68 40 51 57 65 72 81 90 97 103 109 94 116 123 130 140 144 148 118 154 158 163 1 2 3 4 5 8 SUMMER
본문2(91-182)
III. 신앙요리문답 서장인생의목적 93 제1장하나님의신앙과성경 93 제2장창조와세계 96 제3장인간과죄 97 제4장예수그리스도와속량 99 제5장성령과삶 102 제6장교회와선교 103 제7장역사와종말 106 제8장율법과실천 107 제9장기도와생활 111 서장 : 인생의목적 문 1 : 사람의첫째목적은무엇입니까? 답 : 하나님을바르게알고삶전체를바쳐그분을영화롭게하며,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성찬경 a ff 4 4 l l k k k k k k k k k k k k a ff 4 l l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k k k k k k k k k k k k b f f 4 b f f 4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l l l l l l l l a f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성찬경 a ff 4 4 l l a ff 4 l l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b f f 4 b f f 4 오랫동안모든죄가운데빠져 l l l l l l l l a ff 4 4 G =72 m e f 5 b f f 4 4 a ff l 더럽기가한량없던우리들 a ff l 더럽기가한량없던우리들 b f f l l 아무공로없이 b f f l l a ff
설교노트 1-18-15 묵시-19 : 계 20:11-15 : 순례하는 왕들의 전진 I. 문맥과 구조 context and structure 1. 문맥 : 3번째 와 4번째 환상의 가교 17:3 성령으로 21:10 성령으로 바벨론 멸망 어린양혼인잔치 새예루살렘 환상 17
천년왕국설의 비교 천년왕국 복음전파 천 년 왕 국 지지자 신조 교회 영 향 장 점 단 점 후 천년설 Postmillennialism 원칙적 무천년설 그리스도의 왕권으로 하나님의 나라가 자라 완성때 그리스도의 재림 복음의 성공적 전파와 재림 이전에 모든 민족의 회개 사 45:22-25, 호 2:23 시 47,72,110 지상의 평화기 무 천년설 Amillenni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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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 - 사람의생활 기도의사람 첫번째하나님-사람이신그리스도는 신성하고비밀한영역안에서 비밀하신하나님께기도하는 기도의사람이셨다. 우리는주님의멍에 하나님의뜻 를메고 그분의모형을따라 하나님의경륜을위하여수고함으로 우리의영안에서주님을복사해야한다. 우리는반드시개인적으로기도하는체험을가져은밀한중에우리의하늘의아버지를접촉하고아버지를은밀히누리기를체험하며그분으로부터은밀한응답을받아야한다.
바울성서아카데미 예수님을믿는믿음 롬 03:22 예수그리스도를믿는믿음 예수그리스도를믿는믿음은무엇을믿는것인가에대해공부를하십시다. 로마서 3 : 22 곧예수그리스도를믿음으로말미암아모든믿는자에게 미치는하나님의의니차별이없느니라이구절에서예수그
예수그리스도를믿는믿음 예수그리스도를믿는믿음은무엇을믿는것인가에대해공부를하십시다. 로마서 3 : 22 곧예수그리스도를믿음으로말미암아모든믿는자에게 미치는하나님의의니차별이없느니라이구절에서예수그리스도를믿는다는말은무엇입니까? 또요한사도는요한복음 3 : 16 하나님이세상을이처럼사랑하사독생자를주셨으니이는저를믿는자마다멸망치않고영생을얻게하려하심이니라요한복음 3 : 18 저를믿는자는심판을받지아니하는것이요믿지아니하는자는하나님의독생자의이름을믿지아니하므로벌써심판을받은것이니라
나하나로 5호
Vol 3, No. 1, June, 2009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 Korean Association of CardioPulmonary Resuscitation(KACPR) Newsletter 01 02 03 04 05 2 3 4 대한심폐소생협회 소식 교육위원회 소식 일반인(초등학생/가족)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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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 48.6% 남 51.4% 40대 10.7% 50대 이 상 6.0% 10대 0.9% 20대 34.5% 30대 47.9% 초등졸 이하 대학원생 이 0.6% 중졸 이하 상 0.7% 2.7% 고졸 이하 34.2% 대졸 이하 61.9% 직장 1.9% e-mail 주소 2.8% 핸드폰 번호 8.2% 전화번호 4.5% 학교 0.9% 주소 2.0% 기타 0.4% 이름
82-대한신경학0201
www.neuro.or.kr 2010 1 Vol. 82 www.neuro.or.kr 01 5 January 2010 2007 Newsletter of THE KOREAN NEUROLOGICAL ASSOCIATION 2010 NO.82 2010.JANUARY C o n t e n t s 04 05 06 10 13 17 18 20 22 25 28 32 33 36
- i - - ii - - i - - ii - - i - - ii - - iii - - iv - - v - - vi - - vii - - viii - - ix - - x - - xi - - 1 - - 2 - - 3 - - 4 - - 5 - - 6 - - 7 -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CONTENTS.HWP
i ii iii iv v vi vii viii ix x xi - 1 - - 2 - - 3 - - 4 - - 5 - - 6 - - 7 - - 8 - - 9 - - 10 - - 11 - - 12 - - 13 - - 14 - - 15 - - 16 - - 17 - - 18 - - 19 - - 20 - - 21 - - 22 - - 23 - - 24 - - 2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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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 iii iv v vi vii viii ix x xi 1 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43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33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문 * 웅 입주자격소득초과 34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송 * 호 입주자격소득초과 35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나 * 하 입주자격소득초과 36 래미안신반포팰리스 59 최 * 재 입주자격소득초
1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주 830516 입주자격소득초과 2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김 * 연 711202 입주자격소득초과 3 장지지구4단지 ( 임대 ) 59A1 이 * 훈 740309 입주자격소득초과 4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이 * 희 780604 입주자격소득초과 5 발산지구4단지 ( 임대 ) 59A 안 * 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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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약 8 BELIEVER S BIBLE COMMENTARY GALATIANS, EPHESIANS, PHILIPPIANS 윌리암 맥도날드 신자 성경주석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윌리암 맥도날드 신자 성경주석 갈라디아서 에베소서, 빌립보서 정 병 은 옮김 BELIEVER S BIBLE COMMENTARY BY WILLIAM MACDONALD 그리스도의 복음과
#7단원 1(252~269)교
7 01 02 254 7 255 01 256 7 257 5 10 15 258 5 7 10 15 20 25 259 2. 어휘의 양상 수업 도우미 참고 자료 국어의 6대 방언권 국어 어휘의 양상- 시디(CD) 수록 - 감광해, 국어 어휘론 개설, 집문당, 2004년 동북 방언 서북 방언 중부 방언 서남 방언 동남 방언 제주 방언 어휘를 단어들의 집합이라고 할 때,
(민)1308 목신_특집_유승원.indd
특집 바른 기도, 건강한 목회 자주 반복하면 더 좋은, 주기도문의 이해와 적용 b 유 승 원 디트로이트한인연합장로교회 담임목사. 듀크대학교(Ph.D.,신약학). 저서로 책 한 권의 사람 : 복 있는 삶을 위한 행복한 성경 읽기, 성경에 이런 일이 등이 있다. 그러므로 의 배경 이렇게 시작했다. 그러므로 우리가 암기해 활용하는 예전( 禮 典 ) 형태의 주기도문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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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의나무시리즈 Chapter.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모세의 십 계명 하나님사랑, 곧 이웃사랑입니다. 2 의의나무시리즈 1 9.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 사단이 아주 오랫동안 하나님의 백성들을 속여 왔던 것이 예배와 삶 의 불일치입니다. 파트타임으로 하나님을 바라보게 하는 그릇된 모습을 향해 자유 할 지어다! 하고 예수님의 이름으로 선포하시는, 뒤로 한 발자국도
병원이왜내지최종본1
아토피 건선 습진 무좀 탈모 등 피부병은 물론 비만 당뇨 변비 고혈압 생리통 관절염 류머티즘 설사 등 속병도 스스로 간단히 치료하는 비법 100평 아파트도 건강을 잃으면 월세방만 못하다. 자녀를 사랑하면 이책을 반드시 읽게 하라 지은사람 99세까지 88하게 살기운동본부 펴낸곳 청 인 저자 회춘 모습 병원검진 생체나이 40대 초반 Contents 4 5 6
4-Ç×°ø¿ìÁÖÀ̾߱â¨ç(30-39)
항공우주 이야기 항공기에 숨어 있는 과학 및 비밀장치 항공기에는 비행 중에 발생하는 현상을 효율적으로 이용하기 위해 과 학이 스며들어 있다. 특별히 관심을 갖고 관찰하지 않으면 쉽게 발견할 수 없지만, 유심히 살펴보면 객실 창문에 아주 작은 구멍이 있고, 주 날 개를 보면 뒷전(trailing edge) 부분이 꺾어져 있다. 또 비행기 전체 형 상을 보면 수직꼬리날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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잊어버려야 할 것과 잊지 말아야 할 것 새로운 한 해가 밝았다. 한 해가 시작되는 이 시간에 새로운 출발을 하기 위해서는 잊어버려야 할 것은 잊어버리고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잊지 말아야 한다. 먼저 잊어버려야 할 것에 대해서 생각해 보면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 (빌 3:13)라고 한다. 잊어버려야 할 뒤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사 람마다 잊어버려야 할 것이
Korean: Holiness Required for Heaven
거룩함은 천국의 필수 조건이다 - by Adelaida De Carrillo www.divinerevelations.info/korean 아델라이다 드 카릴로 볼리비아에 사는 자매인, 아델라이다는 예수님께서 천국과 지옥으로 데려 가셨습니다. 그녀에게 주님이 보여 주신 것은 하나님 나라에 들어 가기 위해 거룩함이 요구되며, 어떤 죄가 교회 다니는 사람들을 지옥으로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_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21 여 ö Ç J ö Ç Ç ö úç úç ú Ç 사랑으로채우 - - 여? J J J J J #ú Ç úç 사랑으로채우 - 여 L? ú ä F ä A ä # _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ú q = 100 가난함을 ( 남성 부 ) 임석수작사임석수작곡 3 Dm úç ö Ç Gm ú ÇF Ç Ç ö ö ú ÇA ö Ç Dm Ç ö ö Ç ö Ç 1 úç ú? 3 # _ 9 ú Ç Ç úç ö J J J 여에 - 게가난함을옵 -? L? Dm ä ä Gm ä ä ä F Dm ä? ú_ ú_ ú
(초등용1)1~29
3 01 6 7 02 8 9 01 12 13 14 15 16 02 17 18 19 20 21 22 23 24 03 25 26 27 28 29 01 33 34 35 36 37 38 39 02 40 41 42 43 44 45 03 46 47 48 49 04 50 51 52 53 54 05 55 56 57 58 59 60 61 01 63 64 65
Korean_Chronological_Bible_Study
제 1과 - 성경 성경은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쓰신 하나님의 편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 자신, 우리 인간들, 그리고 하나님과 우리와의 관계에 대하여 말씀하기를 원하십니다. 성경역사를 창세기로부터 연대기적으로 공부해갈 때, 우리는 하나님에 대하여 더 많이 배우고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성경의 저자는 하나님 자신이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선지자들에게 말씀과 비전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