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하였다. 그러나애석하게도단명하여미처포부를다펴지못하였으므로조야 ( 朝野 ) 가안타깝게여겼다. 정부인 ( 貞夫人 ) 은참찬 ( 參贊 ) 을지낸이간공 ( 夷簡公 ) 신영 ( 申瑛 ) 의딸로, 고려조 ( 高麗朝 ) 에서태사 ( 太師 ) 를지낸장절공 ( 壯節公 ) 숭겸 ( 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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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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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논문은제 1 저자의진주교육대학교교육대학원초등특수교육전공석사학위논문임. ** 주저자 : 진주장재초등학교교사 *** 교신저자 : 진주교육대학교교수

완벽한개념정립 _ 행렬의참, 거짓 수학전문가 NAMU 선생 1. 행렬의참, 거짓개념정리 1. 교환법칙과관련한내용, 는항상성립하지만 는항상성립하지는않는다. < 참인명제 > (1),, (2) ( ) 인경우에는 가성립한다.,,, (3) 다음과같은관계식을만족하는두행렬 A,B에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CONTENTS 2011 SPRG V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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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송자대전제 208 권행장 ( 行狀 ) 사계 ( 沙溪 ) 김선생 ( 金先生 ) 행장 본관 ( 本貫 ) 은전라도광주평장동 ( 平章洞 ) 이다. 고조 ( 高祖 ) 휘 ( 諱 ) 극뉵 ( 克忸 ) 은사간원대사간 ( 大司諫 ) 을지냈고예조참판 ( 禮曹參判 ) 에추증되고광원군 ( 光原君 ) 에봉해졌으며, 비 ( 妣 ) 함양박씨 ( 咸陽朴氏 ) 는정부인 ( 貞夫人 ) 에추증되었다. 증조 ( 曾祖 ) 휘종윤 ( 宗胤 ) 은진산군수 ( 珍山郡守 ) 를지내고병조참의 ( 兵曹參議 ) 에추증되었으며, 비는영산신씨 ( 靈山辛氏 ) 로서숙부인 ( 淑夫人 ) 에추증되었다. 조 ( 祖 ) 휘호 ( 鎬 ) 는지례현감 ( 知禮縣監 ) 을지내고의정부좌찬성 ( 議政府左贊成 ) 에추증되었으며, 비는전의이씨 ( 全義李氏 ) 로서정경부인 ( 貞敬夫人 ) 에추증되었다. 고 ( 考 ) 휘계휘 ( 繼輝 ) 는사헌부대사헌 ( 司憲府大司憲 ) 을지내고이조판서 ( 吏曹判書 ) 에추증되었으며비는평산신씨 ( 平山申氏 ) 로서정부인 ( 貞夫人 ) 이다. 선생의휘는장생 ( 長生 ) 이요. 자 ( 字 ) 는희원 ( 希元 ) 이니, 그선대 ( 先代 ) 는신라 ( 新羅 ) 에서나왔다. 왕자 ( 王子 ) 흥광 ( 興光 ) 이나라가어지러워질것을알고광주 ( 光州 ) 로은둔하여서민이되었으므로자손들이이곳으로본관 ( 本貫 ) 을삼았다. 고려 ( 高麗 ) 에이르러더욱창성 ( 彰盛 ) 하여 8대 ( 代 ) 를잇달아평장사 ( 平章事 ) 가되었으니, 고을이름을평장동 ( 平章洞 ) 이라한것은김씨 ( 金氏 ) 로부터시작된것이다. 조선조 ( 朝鮮朝 ) 에들어와서는대대로현달 ( 顯達 ) 한분을배출하였으니좌의정 ( 左議政 ) 휘국광 ( 國光 ) 은두번이나훈맹 ( 勳盟 ) 에참록 ( 參錄 ) 되어부원군 ( 府院君 ) 이되니바로광원공 ( 光原公 ) 의고 ( 考 ) 이다. 대헌공 ( 大憲公 ) 의자 ( 字 ) 는중회 ( 重晦 ) 요호는황강 ( 黃岡 ) 으로성품이총명하고빼어나경사 ( 經史 ) 에관통 ( 貫通 ) 하여우뚝히큰인물이되니, 당대 ( 當代 ) 의명현인사암 ( 思菴 ) 박순 ( 朴淳 ) 과고봉 ( 高峯 ) 기대승 ( 奇大升 ) 이모두공을추중 ( 推重 ) 하였고, 율곡 ( 栗谷 ) 이이 ( 李珥 ) 는항상재상 ( 宰相 ) 이될만한인물이라고칭

송하였다. 그러나애석하게도단명하여미처포부를다펴지못하였으므로조야 ( 朝野 ) 가안타깝게여겼다. 정부인 ( 貞夫人 ) 은참찬 ( 參贊 ) 을지낸이간공 ( 夷簡公 ) 신영 ( 申瑛 ) 의딸로, 고려조 ( 高麗朝 ) 에서태사 ( 太師 ) 를지낸장절공 ( 壯節公 ) 숭겸 ( 崇謙 ) 의후예이다. 선생은가정 ( 嘉靖명세종 ( 明世宗 ) 의연호 ) 무신년 (1548, 명종3) 7월 8일신시 ( 申時오후 3시에서 5시사이 ) 에한양 ( 漢陽 ) 정릉동 ( 貞陵洞 ) 에있는사제 ( 私第 ) 에서태어났다. 어려서부터품행이장중 ( 莊重 ) 하여언소 ( 言笑 ) 를함부로하거나희압 ( 戱狎 ) 하지않으니식자 ( 識者 ) 들이이미공의덕량 ( 德量 ) 과기국 ( 器局 ) 의됨됨이를알아보았다. 11세 (1558, 명종13) 에모친신부인 ( 申夫人 ) 이서거하고부친인대헌공 ( 大憲公 ) 이지방으로병축 ( 迸逐 ) 됨에따라조부찬성공 ( 贊成公 ) 이부양하였다. 처음에는공이어린것을안쓰럽게여겨항상슬하에만두고스승을찾아수학하는것을허락하지않았는데조금자라매능히스스로분발하여성현 ( 聖賢 ) 의학문에뜻을두고세속의영리에는일체관심이없었다. 처음으로구봉 ( 龜峯 ) 송익필 ( 宋翼弼 ) 에게서사자서 ( 四子書 논어 맹자 대학 중용 즉사서 ( 四書 ) 의별칭 ) 와 근사록( 近思錄 ) 등의책을배웠는데, 탐구에온힘을다하여조금도게으름없이부지런히하니, 이때부터학문이날로진보하였다. 이에부친대헌공 ( 大憲公 ) 이기뻐하며말하기를 우리아이가이러하니나는근심이없다. 하였다. 장성해서는율곡 ( 栗谷 ) 선생을사사 ( 師事 ) 하여, 성학 ( 聖學 ) 의심오함을두루듣고는마음을가라앉히고힘써실행하여자임 ( 自任 ) 하기를매우중 ( 重 ) 하게하니선생의기대와허여 ( 許與 ) 가매우깊었다. 을해년 (1575, 선조8) 에부친대헌공이평안감사 ( 平安監司 ) 로나갔는데, 평안도는본래번화한곳으로서사람들이성색 ( 聲色 ) 을즐겼으나선생은매양성근 ( 省覲 ) 하는여가에는정신을가다듬어사람들이좋아하는것에는뜻을두지않으니, 모두들칭송하여따르지못할사람이라하였다. 만력 ( 萬曆 ) 무인년 (1578, 선조11) 에조정에서유일 ( 遺逸 ) 을찾을때에 성경 ( 聖經 ) 에침잠 ( 沈潛 ) 하고고훈 ( 古訓 ) 을독신 ( 篤信 ) 하였다. 고하여창릉참봉 ( 昌陵參奉 ) 에천수 ( 薦授 ) 되었다. 신사년 (1581, 선조14) 에대헌공 ( 大憲公 ) 이명 ( 明 ) 나라에사신으로갈때선생이수행하게되자이조 ( 吏曹 ) 에서 사관 ( 祠官 ) 의자리는오래비워둘수없다. 하여바꾸어돈녕

부참봉 ( 敦寧府參奉 ) 에제수하였다. 수행하여만여리를왕복하는동안에성심으로부양 ( 扶養 ) 하여지극한효성으로반시 ( 飯匙 ) 의수까지도옆에서헤아리며안부를살피었다. 임오년 (1582, 선조15) 에는다시 재행 ( 才行 ) 이뛰어나다. 하여승서 ( 陞敍 ) 하는명이있었다. 이해에부친대헌공이서거하였다. 여묘 ( 廬墓 ) 하여 3 년을마치고복 ( 服 ) 을벗자순릉참봉 ( 順陵參奉 ) 에임명되어사체 ( 辭遞 ) 하였으나다시전명 ( 前命 ) 으로평시서봉사 ( 平市署奉事 ) 에승배 ( 陞拜 ) 되었다가얼마후에물러났다. 이어서활인서 ( 活人署 ) 사포서( 司圃署 ) 의별제 ( 別提 ) 와사옹원봉사 ( 司饔院奉事 ) 에연거푸임명되었으나모두신병 ( 身病 ) 을이유로사퇴하였다. 무자년 (1588, 선조21) 에는동몽교관 ( 童蒙敎官 ) 에임명되었고, 경인년 (1590, 선조23) 에는통례원인의 ( 通禮院引儀 ) 로예승 ( 例陞 ) 되었다. 신묘년 (1591, 선조24) 에정산현감 ( 定山縣監 ) 으로나가서는폐정 ( 弊政 ) 을시정하되충서 ( 忠恕 ) 로써하였다. 임진년 (1592, 선조25) 에왜노 ( 倭奴 ) 가침입하여군사 ( 軍事 ) 가번잡하고민가가조폐 ( 凋弊 ) 하여도선생이책응 ( 策應 ) 하고위무 ( 慰撫 ) 하여모두편의 ( 便宜 ) 하게처리하였고, 피난하여온사부가 ( 士夫家 ) 들도또한정성을다하여도와주었으므로이민 ( 吏民 ) 이편안하고나그네들도유리 ( 流離 ) 하는괴로움을잊었다. 그리하여방백 ( 方伯 ) 이 모든일을성심으로하여행정 ( 行政 ) 에번거로움이없다. 고포계 ( 褒啓 ) 하였다. 병신년 (1596, 선조29) 에임기가만료되어연산 ( 連山 ) 의집으로돌아왔는데, 얼마안되어다시호조정랑 ( 戶曹正郞 ) 에임명되었다. 이때명 ( 明 ) 나라군사가남하 ( 南下 ) 하자선생이호남 ( 湖南 ) 에서군량을조달하는일을맡았다. 이일을마치고복명하였다. 그후얼마안되어무슨일로인해서면직되자, 해서 ( 海西 ) 의황주 ( 黃州 ) 봉산( 鳳山 ) 사이에우거 ( 寓居 ) 하였다. 이때는새로난 ( 亂 ) 을치르고난뒤라서사학 ( 士學 ) 이폐이 ( 廢弛 ) 되었으므로선생이문인자제 ( 門人子弟 ) 들과밤낮으로강송 ( 講誦 ) 하며연구를게을리하지않았다. 얼마후다시단양군수 ( 丹陽郡守 ) 에제수되었다. 무술년 (1598, 선조31) 여름에는군자감첨정 ( 軍資監僉正 ) 과호조정랑 ( 戶曹正郞 ) 에제수 ( 除授 ) 되었으나모두부임하지않았다. 가을에남양부사 ( 南陽府使 ) 에제수되자언관 ( 言官 ) 이취승 ( 驟陞급작스럽게벼슬이오르는것

을말함 ) 이라고논 ( 論 ) 하여체직 ( 遞職 ) 되었다. 기해년 (1599, 선조32) 봄에는양근군수 ( 楊根郡守 ) 와익위사익위 ( 翊衛司翊衛 ) 에연이어제수되었으나모두사체 ( 辭遞 ) 했다. 얼마후다시군자감첨정에제수되니은명 ( 恩命 ) 을누차사양함이미안하다하여출사 ( 出謝 ) 하였다. 가을에안성군수 ( 安城郡守 ) 에제수되었다. 경기도일원 ( 一圓 ) 이난리를겪은지오래지않아백성이조췌 ( 凋瘁 ) 하므로선생이마음을다해무마하니몇해안가서복구되었다. 신축년 (1601, 선조34) 에조정에서설국 ( 設局 ) 하고 주역구결( 周易口訣 ) 을교정할때에선생이특별히부름을받고나아가종친부전부 ( 宗親府典簿 ) 로서국사 ( 局事 ) 를겸임하였으나신병으로공직 ( 供職 ) 하지못하였다. 임인년 (1602, 선조35) 봄에적신 ( 賊臣 ) 인홍 ( 仁弘 ) 이용사 ( 用事 ) 하여무함을크게조성해서선비들을금고 ( 禁錮 ) 시키자선생은서울에머무르고싶지않아서드디어귀향하고말았다. 계묘년 (1603, 선조36) 여름익산군수 ( 益山郡守 ) 가되었다가을사년 (1605, 선조38) 겨울에그만두고돌아왔다. 광해군 ( 光每君 ) 기유년 (1609, 광해1) 에익위사익위 ( 翊衛司翊衛 ) 에임명되었으나출사 ( 出仕 ) 하지않자곧이어회양부사 ( 淮陽府使 ) 에임명하고이내철원부사 ( 鐵原府使 ) 로바꿔임명하였다. 계축년 (1613, 광해군5) 에이이첨 ( 李爾膽 ) 이광해 ( 光海 ) 의뜻에맞추기위하여영창대군의 ( 永昌大君玉義 ) 를모살 ( 謀殺 ) 하고, 모후 ( 母后 ) 까지해치려고하였다. 마침무뢰배박응서 ( 朴應犀 ) 등이행상 ( 行商 ) 을살해약탈한일이발각되어체포되니이이첨 ( 李爾瞻 ) 이박응서등을달래고협박하여영창 ( 永昌 ) 을걸어큰옥사를일으켰다. 이때선생의서제 ( 庶弟 ) 인경손 ( 慶孫 ) 평손( 平孫 ) 등이모두연루되어고문을받다죽자곧육시 ( 戮屍 ) 하고역률 ( 逆律 ) 로논하니, 대개이이첨의무리가선생까지해치려고해서였다. 선생의온집안이연좌될것이라하여친구중에화를줄일방도를찾아보려는자가있었으나, 선생은태연한자세로마음을쓰지않았다. 다만, 죽고사는것은명 ( 命 ) 이니어찌인력이미칠수있는것이겠는가. 하였다. 마침유사 ( 有司 ) 가말하기를, 법에연좌되지않는다.

하였고, 또대신의건의가있어서일이무사히해결되었다. 경손 ( 慶孫 ) 이피고가되었을때, 광해가박응서 ( 朴應犀 ) 에게묻기를, 김모 ( 金某 ) 도이에관여하여알고있는가. 하니, 박응서가, 김모 ( 金某 ) 는어진사람입니다. 우리들이처음모의를할때에그가알까두려워하였습니다. 하였고, 정협 ( 鄭浹 ) 이무복 ( 誣服 ) 하자같은말을되물었으나대답이또한이와같았다. 이로부터전려 ( 田廬 ) 에물러나살며문을닫아걸고외인 ( 外人 ) 을만나지않고, 오직좌우에경서 ( 經書 ) 를놓고침잠 ( 沈潛 ) 완색( 玩索 ) 하며세월을보냈다. 천계 ( 명희종 ( 明熹宗 ) 의연호 ) 계해년 (1623, 인조1) 에인조대왕 ( 仁祖大王 ) 이반정 ( 反正 ) 하고즉시하교 ( 下敎 ) 하기를, 김모 ( 金某 ) 는내가잠저 ( 潛邸 ) 에있을때부터익히그이름을들었노라, 하고드디어사헌부장령 ( 司憲府掌令 ) 으로징소 ( 徵召 ) 하였는데, 선생이상소하여노병 ( 老病 ) 을이유로사직하고이어서공신 ( 功臣 ) 들에게권려 ( 勸勵 ) 하는내용의글을보냈다. 거기에는대략, 뜻밖에하늘을떠받든큰공훈 ( 功勳 ) 이제공 ( 諸公 ) 들에게서나와서실추 ( 失墜 ) 된이륜 ( 彛倫 ) 을바로잡고망해가는국가의운명을일으켜세웠으니, 이는진실로보기드문의거 ( 義擧 ) 입니다. 다만생각건대시작하기는쉬우나끝맺음을잘하기가어려운것이니, 뒤처리를잘못하여백성들의원망을듣게되면말하는자들이반드시 당초의의거 ( 義擧 ) 는종사 ( 宗社 ) 를위한것이아니고자기들의부귀공명을위한것이다. 고할것이니, 어찌매우두렵지않겠습니까. 서경( 書經 ) 에이르기를 무한히아름다운일인동시에또한무한히근심되는일이다. 하였으니, 나는제공 ( 諸公 ) 들을위해이점을걱정합니다. 임금이즉위한초기에는오직보도 ( 輔導 ) 를어떻게하느냐에달려있는

것인데, 우리새주상 ( 主上 ) 께서는춘추가한창때이고타고난성품이어려서부터드러나신분이니, 이는바로밝고깊게되실징조입니다. 의당날마다격언 ( 格言 ) 과지론 ( 至論 ) 을올려덕성 ( 德性 ) 을길러서성덕 ( 聖德 ) 을성취하여삼대 ( 三代하 ( 夏 ) 은( 殷 ) 주( 周 ) 를이름 ) 이전성군 ( 聖君 ) 의경지에이르게한후에야당대에해야할일을다했다고할수있을것입니다. 라는내용이있었고, 또, 오늘의백성들은마치거꾸로매달려있다가풀려서기갈 ( 飢渴 ) 이심한나머지먹고마시게하기쉬운경우와같으니, 맹자 ( 孟子 ) 가이른바 일은여느때의반만해도공은배나된다. 고한것이바로지금과같은때입니다. 만일그대로두고서둘러구제하지않는다면무슨수로저들의기대하는마음을위로하겠습니까. 난후 ( 亂後 ) 의백성을병들게하는행정과과외 ( 科外 ) 의세금을모두견면 ( 蠲免 ) 하고공안 ( 貢案 ) 을개정하여, 수입을계산하여지출하고방납 ( 防納 ) 을막고시탈 ( 施奪 ) 의폐단을영원히근절시켜야할것입니다. 이러한일들은마땅히불속에나물속에빠진사람을건지듯이서두를것이요, 조금도늦춰서는안될일입니다. 하였다. 또이르기를, 적신 ( 賊臣 ) 이국사 ( 國事 ) 를맡아다스리며그의무리가불어나서모후 ( 母后 ) 를유폐 ( 幽廢 ) 하고천륜 ( 天倫 ) 을끊었으니그죄는더할수없이크지만옥사 ( 獄事 ) 를다스리는체통상차등이없어서는안되는것입니다. 오형 ( 五刑 ) 1) 과오류 ( 五流 ) 2) 는경중이다르니저울질을하듯이힘써중정 ( 中正 ) 을취하고기분에따라서도에넘치는실수가없게하는것이옳을것입니다. 더러오왕 ( 五王 ) 3) 의유화 ( 遺禍 ) 를들어경계를삼으나이는군자가할말 1) 오형 ( 五刑 ) 다섯 가지 형벌로 묵형 ( 墨刑 ) 의형( 劓刑 ) 비형( 剕刑 ) 궁형( 宮刑 ) 대벽( 大 辟 ) 을가리킨다. 2) 오류 ( 五流 ) 차마형벌을줄수없어유배 ( 流配 ) 시켜야할대상에게정도에따라 5등으로 나누어유배시키는벌을가리킨다. 3) 오왕 ( 五王 ) 당 ( 唐 ) 나라무후 ( 武后 ) 때의경훈 ( 敬暉 ) 환언범( 桓彦範 ) 장간지( 張柬之 ) 원서기 ( 袁恕己 ) 최현위( 崔玄暐 ) 를가리킨다.

이아닙니다. 왕이법을다스릴때에는오직정죄 ( 情罪사정과죄상 ) 가어 떠한가만을볼뿐이니어찌그사이에사의 ( 私意 ) 를용납하겠습니까. 하였고, 또, 지금시행한계책으로는편계 ( 偏係 ) 를따지는것을근절하고, 공도 ( 公道 ) 를열어서피차 ( 彼此 ) 를가리지말고오직어진이를등용하고, 단장 ( 短長 ) 을비교하여오직적재 ( 適材 ) 를골라서백관 ( 百官 ) 이화협하게하는것이제일이니, 이리하여지치 ( 至治 ) 를기약할수있다면또한아름다운일이아니겠습니까. 하였으며, 또, 지난날에이익을탐하던일은말할만한것이많지만, 그중에서도특히전선 ( 銓選 ) 과거( 科擧 ) 형옥( 刑獄 ) 에관한일들이대부분뇌물의수수에의하여이루어져서조정의탁란 ( 濁亂 ) 과민생의피폐가다이로인해생겼습니다. 그러니반정 ( 反正 ) 의초기인지금에는마땅히교화의근원을맑게하고고질적인폐단을개혁하는일로날마다주상 ( 主上 ) 을인도해야합니다. 그리고제공 ( 諸公 ) 들도마땅히청렴과신중한행동으로몸을단속하여조정의백관을격려함으로써정국 ( 靖國 ) 삼대장 ( 三大將 ) 4) 의전철을밟지않게한다면공사간에더할수없는다행이겠습니다. 하니, 제공 ( 諸公 ) 이서찰을받고탄복하여드디어주상께올리자, 주상이매우칭찬하고지론 ( 至論 ) 이라하였다. 이때의소비 ( 疏批상소에대한답 ) 에, 속히상경 ( 上京 ) 하여그대를간절히기다리는나의기대에부응하라. 하는대목이있었다. 이에선생이입경 ( 入京 ) 하여다시상소하여사직하였으나허락하지않았다. 상이장차사묘 ( 私廟 ) 5) 에친제 ( 親祭 ) 하려하자정신 ( 廷臣 ) 들이축사 ( 祝辭 ) 를의논하였는데, 예조판서 ( 禮曹判書 ) 이정귀 ( 李廷龜 ) 공과부제학 ( 副提學 ) 정경세 ( 鄭經世 ) 공이여러대신들과함께말하기를, 4) 정국 ( 靖國 ) 삼대장 ( 三大將 ) 중종반정 ( 中宗反正 ) 때의세대장인박원종 ( 朴元宗 ) 성희안 ( 成希顔 ) 유순정 ( 柳順汀 ) 을가리킨다. 5) 사묘 ( 私廟 ) 여기서사묘는인조 ( 仁祖 ) 의생부 ( 生父 ) 인원종 ( 元宗 ) 의묘 ( 廟 ) 를가리킨다.

주상 ( 主上 ) 이친손 ( 親孫 ) 으로선묘 ( 宣廟 ) 의대통을이어서방지 ( 旁支 ) 인자가입후 ( 入後 ) 한것과는다르고, 이미선묘 ( 宣廟 ) 를고 ( 考 ) 로칭하지않았으니만큼사친 ( 私親 ) 을고 ( 考 ) 라하더라도고가둘이되는혐의는없으니마땅히고로칭하고자 ( 子 ) 로자칭해야합니다. 하자, 선생은옳지않다하여상소하기를, 제왕의법통 ( 法統 ) 은비록형이아우의뒤를잇고숙부가조카의뒤를 이었다할지라도모두부자 ( 父子 ) 의법도가있는것이니 춘추 ( 春秋 ) 에 희공 ( 僖公 ) 을높인것이다.[ 躋僖公 ] 고한데에서공자의미의 ( 微意 ) 를 알수있고사전 ( 四傳 ) 6) 의뜻도모두가희공 ( 僖公 ) 을민공 ( 閔公 ) 의부친으 로친것입니다. 이는대개서로뒤를이었다고해서부자의관계로본것 입니다. 한선제 ( 漢宣帝 ) 가자기의생부를높여서황고 ( 皇考 ) 라고한데대 하여범씨 ( 范氏 ) 는 선제는소제 ( 昭帝 ) 의손자가되므로소제의아들인자 기아버지를황고 ( 皇考 ) 라고한것은옳은일이다. 하였는데, 의논하는 자들이끝내 그르다 고한것은소종 ( 小宗 ) 으로대종 ( 大宗 ) 의계통과합 하여따졌다고해서입니다. 이에대하여정자 ( 程子 ) 도또한말하기를 이 는윤기 ( 倫紀 ) 를어지럽히고체통을실추시킴이심한것이다. 선제 ( 宣帝 ) 가 손자항렬로서들어가대통 ( 大統 ) 을이어소제 ( 昭帝 ) 의뒤를이었으니자기 의생친 ( 生親 ) 을높여서자기의조부에게이을수없다는것은분명한일 이다. 하였습니다. 이제주상 ( 主上 ) 께서선조 ( 宣祖 ) 의대통 ( 大統 ) 을계승하셨는데, 또다시생 친 ( 生親 ) 을높여서자기의조부를잇게하시면이는바로이른바 소종 ( 小 宗 ) 으로대종 ( 大宗 ) 과합하는것 인동시에 윤기 ( 倫紀 ) 를어지럽히고체 통을실추시킨다. 는것에해당하는것입니다. 또이미고 ( 考 ) 라고칭하면반드시삼년상을입어야할것이니어찌들어 가대통 ( 大統 ) 을계승하고서자기의사친 ( 私親 ) 을위하여삼년상을입을수 가있겠습니까. 의논하는자들이 선제 ( 宣帝 ) 가사황손 ( 史皇孫 ) 을고 ( 考 ) 라칭하고다시그위에황 ( 皇 ) 자를보태어명위 ( 名位 ) 가너무도융숭하므 로정자 ( 程子 ) 가 윤기를어지럽히고체통을실추시켰다. 고말한것이지 6) 사전 ( 四傳 ) 춘추 의주석서인 좌씨전 ( 左氏傳 ) 공양전 ( 公羊傳 ) 곡량전 ( 穀粱傳 ) 을가리킨다.

고 ( 考 ) 로칭한것을그르다고해서한말은아니다. 고하나, 그황 ( 皇 ) 자는크다 [ 大 ] 또는높다 [ 顯 ] 는뜻의글자로서이는허자 ( 虛字 ) 이니, 정자의뜻은다만사친 ( 私親 ) 에게고 ( 考 ) 자를쓸수없으므로이렇게말한것입니다. 의논하는자들이또 고위 ( 考位아버지의위차 ) 가빠진것 을문제로삼으나제왕가 ( 帝王家 ) 에서는대통 ( 大統 ) 의계승을중시하므로비록숙부가조카의뒤를계승하거나형이아우의뒤를계승하더라도이들사이에는부자 ( 父子 ) 의도 ( 道 ) 가있는것이니어찌고위 ( 考位 ) 가빠졌다고하겠습니까. 의논하는자들이이점을잘살피지못하고잘못생각한것이아닌가생각됩니다. 이제마땅히정자 ( 程子 ) 의말을따라 사친 ( 私親 ) 을숙부로칭하고자신을조카로칭하는것이명의 ( 名義 ) 상분명한전거가있어서의심할것이없을듯합니다. 하였다. 후일신생이입시 ( 入待 ) 하자상 ( 上 ) 이, 잠저 ( 潛邸 ) 에있을때부터학업이고명하고덕 ( 德 ) 이훌륭하다는말을듣고항상한번만나보고싶었다. 상경한후에마침사사 ( 祀事 ) 가있어즉시상견 ( 相見 ) 하지못하였으니당초의지성 ( 至誠 ) 으로기대하던뜻이아니다. 이제늦게라도만나보니참으로다행스러운일이다. 하고매우극진히위유 ( 慰諭 ) 하였다. 이에선생이배사 ( 拜謝 ) 하고곧아뢰기를, 사묘 ( 私廟 ) 에대한칭호는감히경솔하게의론할바가아니나신이당시헌직 ( 憲職 ) 에있었던터라감히논하지않을수없었습니다. 지금은다행히주상을가까이모시고도정신이쇠락 ( 衰落 ) 하고말이졸눌 ( 拙訥 ) 하여아뢸때에소회 ( 所懷 ) 를다펴지못할듯하여감히소차 ( 小箚 ) 에갖추어기록하여올립니다. 하고, 품속에서꺼내어올렸다. 차자에는대략, 제왕이정치하는요체는학문보다앞설것이없는데학문의도 ( 道 ) 는 다름이아니라성현 ( 聖賢 ) 의말씀을토론 ( 討論 ) 하고정밀하게그의리를찾

아내어반드시몸으로체득 ( 體得 ) 하고일에증험해보는것입니다. 그리하여일이없을때는이마음이혼연 ( 渾然 ) 하여어둡지않고담담하여마치고요히흐르지않는물과같다가염려할일이있게되면공사의리 ( 公私義利 ) 의갈림을살펴서사 ( 私 ) 를누르되되도록맹렬하게하고선 ( 善 ) 을확장시키되온힘을다해확장시키면나날의언행 ( 言行 ) 사이에저절로천리 ( 天理 ) 의정도 ( 正道 ) 를터득하게될것입니다. 이것이바로요순 ( 堯舜 ) 이말한 오직정밀하고전일 ( 專一 ) 해야한다.[ 惟精惟一 ] 는것이고, 공자 ( 孔子 ) 가말한 극기 ( 克己 ) 하여예 ( 禮 ) 에돌아간다.[ 克己復禮 ] 는것이며, 자사 ( 子思 ) 가말한 계구근독 ( 戒懼謹獨 ) 이며맹자 ( 孟子 ) 가말한 방심 ( 放心 ) 을거두고사단 ( 四端 ) 을넓힌다. 는것이니, 예부터성현 ( 聖賢 ) 들이서로전하는학문의지결 ( 旨訣 ) 이이에불과한것입니다. 하물며인군 ( 人君 ) 의생각하나에국가의치란과흥쇠 ( 興衰 ) 가달려있으니두렵지않겠습니까. 하니, 상 ( 上 ) 이가납 ( 嘉納 ) 하고, 이르기를, 지난번의상소는매우좋은내용이었으나조의 ( 朝議 ) 가이미결정되었으므로따를수가없었으니미안하다. 하였다. 얼마후채직 ( 遞職 ) 되어사재감첨정 ( 司宰監僉正 ) 이되었다. 6월에연신 ( 筵臣 ) 의건의에의하여성균관 ( 成均館 ) 에특별히사업 ( 司業 ) 의직 ( 職 ) 을신설하고선생을여기에임명하여선비들을가르치는한편원자 ( 元子 ) 를보양 ( 輔養 ) 하도록하였는데, 선생이간절히사양하였으나허락되지않았다. 당시에사부 ( 師傅 ) 의직을맡은사람들은모두당대에엄선된인물이었다. 선생이노성숙망 ( 老成宿望 ) 으로서연 ( 書筵 ) 에서글을강론하는이외에도일을따라규권 ( 規勸 ) 하니원자 ( 元子 ) 가매우존경하였다. 얼마후경연에입시 ( 入侍 ) 하였을때노병 ( 老病 ) 때문에종사 ( 從仕 ) 할수없다는뜻으로아뢰기를, 비상한임무는반드시비상한사람이라야감당할수있는것이니신은 결코적임자가아닙니다. 하자, 상 ( 上 ) 이이르기를,

사유 ( 師儒 ) 의직책은반드시덕망이있는자라야선비들이보고감동하여흥기 ( 與起 ) 되는것인데, 근자에와서사습 ( 士習 ) 이이전과달라지고있으므로그대를이직에임명하여수고롭히는것이다. 하였다. 8월에다시경연에서아뢰기를, 신은나이가많고귀까지어두우면서도선뜻물러날것을결단치못한것을늘스스로부끄럽게여겼습니다. 이제물러나고향에서죽을수있도록허락해주십시오. 하니, 상이위로하고머물러있으라하였다. 얼마후선영 ( 先塋 ) 에귀소 ( 歸掃 ) 를청하자상이이르기를, 오래머무르지말고잘다녀오라. 하고, 특별히궐내에서술을내리며위로한후본도 ( 本道 ) 에명하여제수 ( 祭需 ) 를준비하여보내도록하였다. 원자 ( 元子 ) 도또한만나서간곡하게말하기를, 오래머무르지말라. 하였다. 선생이돌아와성묘 ( 省墓 ) 하고곧상소하여사직하면서겸하여연로 ( 沿路 ) 의흉년이든상황과민간의고통을조목조목열거하여올리니, 상이또한우납 ( 優納 ) 하고, 이어서하교 ( 下敎 ) 하기를, 속히상경하여나의기대에부응하라. 하였다. 선생이은혜는비록감격스러우나늙은나이로길을떠날수없 다하여곧상소하여사직하면서잠규 ( 箴規 ) 를붙여이르기를, 신은들으니, 장자 ( 張子 ) 는 자기의마음을엄한스승으로삼는다. 하였고, 사마광 ( 司馬光 ) 은 나는평생에한일을남에게말하지못할것이 없다. 하였으니엎드려바라옵건대, 성상 ( 聖上 ) 께서는이런말에마음을

쓰시어하나의정사와하나의호령이라도모두마음 [ 天君 ] 에되물어서그옳고그름을자세히살펴서행하시고, 깊은밤이나홀로계실때에도대제 ( 大祭 ) 를받들듯하여신명 ( 神明 ) 에부끄러움이없게하신다면성학 ( 聖學 ) 의성취를어찌이루다헤아릴수있겠습니까. 하니, 상 ( 上 ) 이매우칭찬하였다. 갑자년 (1624, 인조2) 2월에이괄 ( 李适 ) 이난을일으켜대가 ( 大駕 ) 가남천 ( 南遷 ) 하자선생이공주 ( 公州 ) 에서맞았다. 난이평정되고상이환도 ( 還都 ) 할때에하교 ( 下敎 ) 하기를, 이제나를따라상경하여원자 ( 元子 ) 교도 ( 敎導 ) 의임무를맡는것이좋겠다. 하자, 선생이감히사양하지못하고상경하니곧상의원정 ( 尙衣院正 ) 과사헌부집의 ( 司憲府執義 ) 에임명되었다. 세번사양하였으나허락되지않았으로이내말미를받아귀향 ( 歸鄕 ) 하였다. 6월에만언소 ( 萬言疏 ) 를올려소회 ( 所懷 ) 를다진술하였는데, 그대략은다음과같다. 신이매우두터운은혜를받고도조금의도움도되지못하였습니다. 이제시골에있으면서보답하고싶은성의만간절하여삼가 13조를올려서상의앞에서아뢰는것을대신하고자합니다. 즉대본 ( 大本 ) 을세우고, 구업 ( 舊業 ) 을넓히고, 홍범 ( 洪範 ) 을좇으며, 소학( 小學 ) 을강 ( 講 ) 하고, 성효 ( 聖孝 ) 를다하고, 사전 ( 祀典 ) 을공경히받들어, 구족 ( 九族 ) 과친하며, 군신 ( 群臣 ) 을잘접납 ( 接納 ) 하고, 몸소청정 ( 聽政 ) 하며, 민폐를개혁하고, 대동법 ( 大同法 ) 을혁파하고, 군정 ( 軍政 ) 을닦고, 금위 ( 禁衛 ) 를엄히하셔야합니다. 하니, 상이비답하기를, 이번에조진 ( 條陳 ) 한것을보니참으로수신 ( 修身 ) 과폐단을바로잡는계책이다. 어찌마음에간직하고힘써행하지않겠는가. 하였다. 9월에특명 ( 特命 ) 으로공조참의 ( 工曹參議 ) 에승진되었다. 이때헌부에서

는, 세력을믿고방자한짓을한내노 ( 內奴내수사의노비임 ) 를가두고심문하는중이었다. 그러나이일이자전 ( 慈殿 ) 과관계가있었으므로상 ( 上 ) 이엄한전지 ( 傳旨 ) 를내려헌부를준절히꾸짖었다. 정원 ( 政院 ) 이이전지를하달하지않고되돌리자, 상은더욱노하여정원을추문하고꾸짖었다. 선생은사직소 ( 辭職疏 ) 를올리면서이일에대해다음과같이언급했다. 폐조 ( 廢朝광해군 ( 光海君 )) 가인심을잃은일을한것은이루다기록할수없습니다만, 내노 ( 內奴 ) 의폐단이태반이었습니다. 그러나그때의법관 ( 法官 ) 들이내노를추문하여다스렸다는말을들어보셨습니까. 지금은위에성명 ( 聖明 ) 한임금님이계시기때문에아랫사람이법을잘집행할수가있습니다. 그런데도리어전하께서는준절한견책을가하십니다. 이것이진실로자전의뜻을받드는데서연유한것이긴합니다만, 정원 헌부를추힐 ( 推詰 ) 해서는안됩니다. 정원이상의뜻대로만봉행할뿐의견을아뢰는일이없다면, 사알 ( 司謁 ) 1명이면됩니다. 굳이정원을설치할필요가뭐있겠습니까. 대간도단지묵묵히입다물고규정 ( 糾正 ) 하는일이없다면, 일개장마 ( 仗馬 ) 일뿐입니다. 이런대간 ( 臺諫 ) 을어디다쓰겠습니까. 이것이조그만잘못이기는하지만그병근 ( 病根 ) 을따져보면오로지사의 ( 私意 ) 때문인것입니다. 이것을작은일이라하여소홀히여긴다면, 끝내는 마음에서싹터정령 ( 政令 ) 에나타나고드디어일을해치게된다. 는결과를가져오게됩니다. 삼가바라건대병근의소재를정밀하게살피셔서조금이라도미진한점이있으면, 통렬히징계하여끊어버림으로써그조짐이자라지못하게해야합니다. 이에대해상이우답 ( 優答 ) 하였다. 그리고간절한말로불렀으므로 10월에달려가서사례 ( 謝禮 ) 하였다. 경연 ( 經筵 ) 신 ( 臣 ) 이아뢰기를, 김모 ( 金某 ) 는기구 ( 耆耈 ) 신 ( 臣 ) 으로이미상경하였으니, 의당경악 ( 經幄 ) 에출입시켜야합니다. 그리고원자 ( 元子 ) 를보도 ( 輔導 ) 하게하면도움받는바가반드시클것입니다. 하니, 상이일렀다.

지금품계를올렸으니, 따로칭호를만들어서원자를가르치게하라. 나또한수시로접견하고자한다. 드디어호칭을고쳐강학관 ( 講學官 ) 이라고하였다. 을축년 (1625, 인조3) 8월에원자 ( 元子 ) 를세자 ( 世子 ) 로책봉하였다. 선생은특별히가선대부 ( 嘉善大夫 ) 에승진되었다. 선생이훈도 ( 訓導 ) 한노고를치하하는뜻이었다. 동지중추부사 ( 同知中樞府事 ) 에제수되고나서말미를얻어고향에돌아갔다. 떠날때소 ( 疏 ) 를올렸는데, 그대략은다음과같다. 신 ( 臣 ) 은한번서울을떠나면영영어전 ( 御前 ) 에나오지못할것입니다. 삼가바라건대, 전하께서는더욱성학 ( 聖學 ) 을힘써성덕 ( 聖德 ) 을진취시키소서. 그리하여정대 ( 正大 ) 한마음을지녀치우친사의 ( 私意 ) 를끊어버리시고명쾌한결단력으로일을처리하시어우유부단하는잘못을경계하소서. 사람을임용 ( 任用 ) 할때는실적을살펴볼일이요허위에현혹됨이없이하고, 아랫사람을접견할때는힘써성실을다할일이요겉치레만을일삼지마소서. 귀에거슬리는말을싫어하지마시고도 ( 道 ) 를지키는선비를경시하지마시며, 여러사람의의견을널리받아들이시어엄밀히검토하여채택하소서. 선입견만내세워여러사람의의견을막지마시고, 상규 ( 常規 ) 에얽매여사기 ( 事機 ) 를잃지마소서. 그리하여큰뜻을분발, 지치 ( 至治 ) 에이르게된다면, 신은초야에서말라죽어도다시여한이없겠습니다. 상이아름답게여겨받아들이고, 이어전교하었다. 내마음에무척서운하다. 아주안오겠다는생각을버리고소분 ( 掃墳조상의무덤에배알함 ) 한다음즉시올라오라. 선생은고향에돌아가서여러번소 ( 疏 ) 를올려체직 ( 遞職 ) 시켜주기를청했다. 병인년 (1626, 인조4) 봄에상 ( 上 ) 이계운궁 ( 啓運宮원종 ( 元宗 ) 의비 ( 妃 ) 인헌왕후 ( 仁獻王后 )) 의상 ( 喪 ) 을당했다. 선생은대궐로달려가진위 ( 進慰 ) 한다음 10일간머물다가, 곧바로돌아가겠다고아뢰었다. 정원 ( 政院 ) 이아뢰었다.

김모 ( 金某 ) 가내려가려하고있습니다. 현재숙덕 ( 宿德 ) 으로는이사람보다훌륭한이가없습니다. 산림 ( 山林 ) 에있더라도으레불러올려야할사람인데, 이제올라왔다가바로내려가려합니다. 성상께서덕있는어진이를좋아하는성심에있어그의마음대로오가게해서는안될것같습니다. 그런데떠나는것도모르고계십니다. 상 ( 上 ) 이머물라고명하였으나선생은이미떠난뒤였다. 선생이소를올려사사 ( 辭謝 ) 하면서아뢰었다. 지극한정을억누르고모든일을상제 ( 喪制 ) 에맞게하기위해자주신료 ( 臣僚 ) 들을접견, 변례 ( 變禮 ) 를강구하셨습니다. 신도논거 ( 論擧 ) 하고싶었으나, 처음의소장 ( 疏章 ) 에대략진달하였기에감히다시애통중에계시는전하를번거롭게하지않겠습니다. 이때사친 ( 私親 ) 의복제 ( 服制 ) 에대해삼년을입어야한다는사람도있고, 재최장기 ( 齊衰杖期 ) 로해야한다는사람도있고, 부장기 ( 不杖期 ) 로해야한다는사람도있어의논이분분했지만, 끝내장기 ( 杖期 ) 로귀결되었다. 선생은이를옳지않게여겼기때문에소 ( 疏 ) 에서언급하였다. 이에앞서영월군수 ( 寧越郡守 ) 박지계 ( 朴知誡 ) 가소를올려, 사친 ( 私親 ) 을예묘 ( 禰廟 ) 로삼고삼년상을입을것이며, 백관 ( 百官 ) 도따라서복을입도록청하였다. 또그의추종자이의길 ( 李義吉 ) 이잇달아소를올려추숭 ( 追崇 ) 할것을극력주장하였다. 그러나선생은, 이렇게하는것은고금 ( 古今 ) 의변례 ( 變禮 ) 로한번잘못되면뉘우쳐도소용없다고여기고, 경전 ( 經傳 ) 을조사하고고금의전거를살펴글을지어조정의지구 ( 知舊 ) 들에게주었다. 그대략은다음과같다. 박지계는그의소에서 의례( 儀禮 ) 를인용하여오늘날의일에대한증거로제시했습니다. 그러나 의례 와도식 ( 圖式 ) 의뜻을조사해보건대정통으로대를이은아들이일찍죽거나, 혹폐질 ( 廢疾 ) 때문에즉위하지못할경우엔, 그아들이할아버지를계승하기도하고증조 ( 曾祖 ) 를계승하기도하는데, 계승한사람은아버지나할아버지를위해참최복 ( 斬衰服 ) 을입어야한다고했습니다. 때문에정원 ( 鄭元 ) 의주 ( 註 ) 에도 의당사위 ( 嗣位 ) 이어야한다. 한것입니다. 그소 ( 疏 ) 에는 할아버지나아버지가계

승해야하지만모두폐질 ( 廢疾 ) 이있어계승할수없기때문에자신이계승하여증조에게나라를전수받은경우다. 했습니다. 대저지손 ( 支孫 ) 으로서들어와대통 ( 大統 ) 을이은것은정통의경우와다른것입니다. 지금의대원군 ( 大院君정원군 ( 定遠君 )) 은대를이을수있는사위 ( 嗣位 ) 라고할수가없고, 주상 ( 主上 ) 께서도자신이계승하여증조에게나라를전수받을수있다는경우와는다릅니다. 그런데이제이를인용하여증거로삼았으니, 경전 ( 經傳 ) 의본의와매우어긋납니다. 박지계의상소에 아들은아버지의귀천 ( 貴賤 ) 때문에취사 ( 取舍 ) 할수는없다. 하였습니다. 대저지손으로서들어와대통을이은것은사체 ( 事體 ) 가지극히준엄한것이므로스스로사친 ( 私親 ) 을돌아볼수없는것이지, 취사하는것이아닙니다. 박지계의상소에또천자는나라를세우고제후는지손 ( 支孫 ) 이적손 ( 嫡孫 ) 행세를할수있다는설 ( 說 ) 을가지고증거를댔습니다. 대저지손이적손행세를할수있다는것은한 ( 漢 ) 나라때의소하 ( 蕭何 ) 와조참 ( 曹參 ) 처럼처음제후가되었을경우를말하는것입니다. 이들은지자 ( 支子 ) 이지만, 장자 ( 長子 ) 의종통 ( 宗統 ) 을빼앗아자기에게옮기고봉해진나라에다묘당 ( 廟堂 ) 을세울수있는것입니다. 때문에한나라사람들은 지자가적자노릇하는사람은아버지는사서인인데아들이제후가된경우이다. 이경우에는당연히적통을빼앗아제사를주관할수있다. 했습니다. 이것이, 임금이사친 ( 私親 ) 을위해묘당을세운다는뜻이될수있습니까. 가령선묘 ( 宣廟선조 ( 宣祖 )) 가살아계실적에주상 ( 主上 ) 을세손 ( 世孫 ) 에책봉했다면, 선묘의후사가되겠습니까, 아니면대원군 ( 大院君 ) 의후사가되겠습니까. 박지계의소에또, 위 ( 衛 ) 나라의출공첩 ( 出公輒 ) 이아버지괴외 ( 蒯聵 ) 의입국 ( 入國 ) 을막고자신이직접할아버지의뒤를계승하여조묘 ( 祖廟 ) 를예묘 ( 禰廟 ) 로삼았다는설 ( 說 ) 을인용하였습니다. 대저공자 ( 孔子 ) 가출공첩을탓한실제의뜻은자기의아버지를아버지로여기지않았다는데있는것이요, 아버지를젖히고할아버지를계승하여조묘를예묘로삼은것을일률적으로그르다고한것은아닙니다. 탕 ( 湯 ) 임금의손자태갑 ( 太甲 ) 과평왕 ( 平王 ) 의손자환왕 ( 桓王 ) 은모두할아버지를이어즉위했지만자기아버지를추숭 ( 追崇 ) 했다는말은못들

었고, 한선제 ( 漢宣帝 ) 는소제 ( 昭帝 ) 의종손 ( 從孫 ) 이었지만역시자기아버지사황손 ( 史皇孫 ) 을입묘 ( 入廟 ) 시키지않은채황고 ( 皇考 ) 라고만불렀습니다. 이런데도정자 ( 程子 ) 범씨( 范氏범중엄 ( 范仲淹 )) 호씨( 胡氏호안국 ( 胡安國 )) 는이것이예 ( 禮 ) 에도어긋나고인륜 ( 人倫 ) 에도어긋난다는것으로척론 ( 斥論 ) 하였고, 주자 ( 朱子 ) 는 자치통감강목( 資治通鑑綱目 ) 에이사실을기재 ( 記載 ) 했습니다. 박지계의소 ( 疏 ) 대로한다면, 한선제가소제를예묘 ( 禰廟 ) 로삼은것이위나라출공첩의경우와같은것이되고, 따라서정자와주자의척론도잘못이되는게아닙니까. 진간공 ( 晉簡公 ) 은종조 ( 從祖 ) 로서종손 ( 從孫 ) 의뒤를이었고, 제울림왕 ( 齊鬱林王 ) 과위문성제 ( 魏文成帝 ) 는손자로서할아버지를계승하고나서자기아버지를추존 ( 追尊 ) 은하였지만역시입묘 ( 入廟 ) 시키지는않았습니다. 당선종 ( 唐宣宗 ) 은숙부 ( 叔父 ) 로서조카를계승했고, 명건문제 ( 明建文帝 ) 는적손 ( 嫡孫 ) 으로서태조 ( 太祖 ) 를계승한뒤아버지의문태자 ( 懿文太子 ) 를추존하고입묘시켰습니다. 의례 에의거헤아려보건대, 적손이자기의할아버지와아버지를위하여참최복 ( 斬衰服 ) 을입는다는것은그래도증거할데가있습니다. 상 ( 商 ) 주( 周 ) 이후로손자가할아버지를계승한경우는많았습니다. 심지어는할아버지가손자를계승하기도하고숙부가조카를계승하기도하여소목 ( 昭穆 ) 의순서가전도되었습니다. 그러나계통을이은것으로순서를정한것은제왕 ( 帝王 ) 은사서인 ( 土庶人 ) 과다르기때문인것입니다. 부자간의윤리가중하기는하나입계 ( 入繼 ) 한의 ( 義 ) 는지극히준엄한것입니다. 다른사람의양자로들어가는것과대통을입계하는것이그일은다르지만, 사친 ( 私親 ) 을돌볼수없다는것은같습니다. 우의 ( 愚意 ) 에는당연히예가 ( 禮家 ) 의 다른사람의양자로들어간사람은본부모 ( 本父母 ) 를위해서기년복 ( 期年服 ) 을입는다. 는주장을반드시근거로삼고싶습니다. 완성군 ( 完城君 ) 최명길 ( 崔鳴吉 ) 이선생 ( 先生 ) 에게수만언 ( 數萬言 ) 의편지를보내왔다. 그대의 ( 大意 ) 는, 금상 ( 今上 ) 께서는남의후사 ( 後嗣 ) 가된사람과는입장이다르니, 의당본친 ( 本親친부모 ) 을위하여삼년복 ( 三年服 ) 을입어야한다는내용이었다. 그러자선생은이렇게답하였다.

정 ( 鄭정경세 ( 鄭經世 ) 를가리킴 ) 이( 李이귀 ( 李貴 ) 를가리킴 ) 양공 ( 兩公 ) 은다만칭고 ( 稱考 ) 에대한의논만을주장하고삼년설 ( 三年說 ) 은오히려배척하였으니, 이는오히려처음에는잘못되었지만뒤에는옳게된것입니다. 그런데이제공 ( 公 ) 의경우는일층설 ( 一層說 ) 을만들어반드시삼년 ( 三年 ) 으로하려고하니, 이는자신을너무지나치게믿고고금 ( 古今 ) 의정의 ( 正義 ) 를무시하는게아니겠습니까. 영감 ( 令監 ) 의차자 ( 箚子 ) 에서 정경세 ( 鄭經世 ) 가칭고 ( 稱考 ) 를극언 ( 極言 ) 한것은옳다고하겠으나, 남의후사가되어본친 ( 本親 ) 에게칭고한사례가어느경문 ( 經文 ) 에나타나있으며, 이미칭고하면서삼년복을강등시킨사례는또한어느경문에나타나있습니까. 지난날칭고한것이옳다면오늘날에강복 ( 降服 ) 시킨것은잘못이요, 오늘날에강복시킨것이옳다면지난날에칭고한것이또한잘못이니, 이두가지중에반드시한가지는잘못된것이다 하였으니, 이말은참으로옳습니다. 그러나이말을가지고정 ( 鄭 ) 이( 李 ) 양공 ( 兩公 ) 을책망한다면옳거니와, 이를가지고나를힐책한다면이어찌깊이생각하지못한소치가아니겠습니까. 제왕 ( 帝王 ) 은, 숙 ( 叔 ) 이나조 ( 祖 ) 를질 ( 姪 ) 이나손 ( 孫 ) 이계승한경우가매우많은데, 만일영감의뜻대로하자면, 계승한임금을의당 황종손 ( 皇從孫 ) 또는 황질 ( 皇姪 ) 이라고일컬어야할것이며, 스스로는일컫기를의당 효조부 ( 孝祖父 ) 또는 효숙부 ( 孝叔父 ) 라해야하지않겠습니까. 하지만나의생각에는, 의당 통전( 通典 ) 에의거하여, 자신을일컬을때는 사황아무 [ 嗣皇某 ] 라하고, 선군 ( 先君 ) 에대해서는또한의당별도로칭호 ( 稱號 ) 를두어야하겠으나, 선유 ( 先儒 ) 의정론 ( 定論 ) 이없으니, 감히말을지어내지는못하겠습니다. 그런데예관 ( 禮官 ) 이이른바 부자 ( 父子 ) 의의리는있지만부자의명분은없다. 고한것이바로이것입니다. 조상우 ( 趙相禹 ) 의소 ( 疏 ) 같은경우는, 그설 ( 說 ) 이비록호씨 ( 胡氏 ) 에게근본하였으나, 또한온당한것이아닙니다. 왜냐하면, 조 ( 祖 ) 나숙 ( 叔 ) 의존항 ( 尊行 ) 으로서질항 ( 姪行 ) 이나손항 ( 孫行 ) 에게자 ( 子 ) 라고칭하게되니, 이런이치는없을듯합니다. 의례( 儀禮 ) 에 적손 ( 嫡孫 ) 이조 ( 祖 ) 나증조 ( 曾祖 ) 를계승하였을경우, 조 ( 祖 ) 와부 ( 父 ) 를위해참최복 ( 斬衰服 ) 을입

는다. 고한것은, 조와부가의당사위 ( 嗣位 ) 할것을자신이계승하였기때문입니다. 그렇다면중손 ( 衆孫 ) 으로서왕통 ( 王統 ) 을계승한사람은사친 ( 私親 ) 을위하여참최복을입을수없는것이분명합니다. 의논하건대, 중손 ( 衆孫 ) 으로서는참최복을입을수없는줄을알기에곧장 주상 ( 主上 ) 은순서에따라계립 ( 繼立 ) 한임금과다를것이없다. 고하였으나, 이또한적손 ( 嫡孫 ) 인데어찌다르지않겠습니까. 영감의뜻은, 반드시상 ( 上 ) 께서삼년복을입고또상주 ( 喪主 ) 가되어조석 ( 朝夕 ) 의궤전 ( 饋奠 ) 을주관하도록하려고하면서, 위군 ( 衛君 ) 이계씨 ( 季氏 ) 를조문 ( 弔問 ) 할때에노군 ( 魯君 ) 이주 ( 主 ) 가되었던것으로증거를삼았습니다. 그러나이는옛날노 ( 魯 ) 나라에서계환자 ( 季桓子 ) 의상 ( 喪 ) 을당했을때, 위군 ( 衛君 ) 이조문할것을청하자애공 ( 哀公 ) 이차마사양하지못하고공이직접주 ( 主 ) 가되었습니다. 이는대체로계환자는위군 ( 衛君 ) 과빈주 ( 賓主 ) 가될수없기때문에애공이주가된것이니, 이는계환자의상 ( 喪 ) 을주관한것이아니라바로위군을위하여주가된것인데, 어찌이일을가지고오늘날의일에다견강부회 ( 牽强傅會 ) 할수있겠습니까. 영감의차자 ( 箚子 ) 에이른바, 친제 ( 親祭 ) 에있어서는축호 ( 祝號 ) 하기가어렵다는말은, 나의생각도그러합니다. 대체로능원대군 ( 綾原大君원종 ( 元宗 ) 의아들이며인조 ( 仁祖 ) 의아우 ) 이이미 효자 ( 孝子 ) 라고칭하고있는데, 전하 ( 殿下 ) 께서 자 ( 子 ) 라고칭한다면명분 ( 名分 ) 이문란해질것입니다. 그리고 고 ( 考 ) 라고칭하지않으면일마다순 ( 順 ) 하게되지만, 이미고라고칭하였으면일마다처리하기가어려울것이다. 하였으니, 이는참으로옳은말입니다. 박씨 ( 朴氏 ) 의소 ( 疏 ) 에 임해군 ( 臨海君 ) 은자식이없고, 광해군 ( 光海君 ) 은죄 ( 罪 ) 에걸려폐위 ( 廢位 ) 되었으니, 대원군 ( 大院君원종 ( 元宗 ) 을가리킴 ) 이선조 ( 宣祖 ) 의셋째아들이고보면주상 ( 主上 ) 이의당적통 ( 嫡統 ) 이되어야한다. 하였으니, 애석하게도실언 ( 失言 ) 이너무지나쳤습니다. 여러왕자 ( 王子 ) 가운데의안군 ( 義安君 ) 이큰아들이고, 신성군 ( 信城君 ) 이그다음이며, 대원군 ( 大院君 ) 은다섯째아들인바, 의안군은능원군 ( 綾原君 ) 을후사 ( 後嗣 ) 로삼았는데, 이른바 주상 ( 主上 ) 이적통 ( 嫡統 ) 이되어야한다. 는말이과연옳겠습니까. 주상은지손 ( 支孫 ) 으로서모후 ( 母后 ) 의명 ( 命 ) 을받들어대통 ( 大統 ) 을이었으니, 명분과의리가매우바른데, 어찌하여이런

구차하게끌어맞추는논의를만들어천하후세 ( 天下後世 ) 를그리도심하게속인단말입니까. 또그의말에 대원군이생존해계시면주상께서는반드시양위 ( 讓位 ) 를해야하니, 이제유명 ( 幽明 ) 을가지고간격을두어서는안된다. 하였습니다. 그러나대체로공자 ( 孔子 ) 가자리 [ 位 ] 를얻지못한것은운명입니다. 그러기에후세에서공자를매우존경하면서도감히요순 ( 堯舜 ) 의위치에올려놓지못하는것은분수 ( 分數 ) 가정해진때문입니다. 주공 ( 周公 ) 은대성 ( 大聖 ) 으로서섭정 ( 攝政 ) 하는자리에있었던바, 성인 ( 聖人공자를가리킴 ) 이노 ( 魯 ) 나라에서천자 ( 天子 ) 의예악 ( 禮樂 ) 을사용한것을참람하다고한것은어째서입니까. 그명분과자리는거짓으로만들수없기때문입니다. 이의길 ( 李義吉 ) 의소 ( 疏 ) 에 대원군 ( 大院君 ) 이생존해계시면의당양위 ( 讓位 ) 를해야할것이니, 사생 ( 死生 ) 을가지고달리보아서는안된다. 종묘 ( 宗廟 ) 에서향사 ( 享祀 ) 할일을무어의심할게있겠는가, 하였습니다. 이는바로사친 ( 私親 ) 을추숭 ( 追崇 ) 하여종묘에향사하자는공공연한논의인데, 대체로사친을추숭하는것은후세의일입니다. 공사 ( 公私 ) 의득실 ( 得失 ) 에대해어찌많은변론이필요하겠습니까. 병인년가을에연평부원군 ( 延平府院君 ) 이귀 ( 李貴 ) 가선생을찾아뵙고사친 ( 私親 ) 의전례 ( 典禮 ) 에대해언급하여논변 ( 論辨 ) 한것이매우많았다. 그런데그가환조 ( 還朝 ) 하여서는차자 ( 箚子 ) 를올려거짓으로일컫기를, 선생도예전견해를바꾸었다고하고선생의가설적 ( 假設的 ) 인말을인용하여그설 ( 說 ) 의증거로삼았다. 그러자선생은소장 ( 疏章 ) 을올려그것에대해이렇게변명하였다. 신 ( 臣 ) 의소견과이귀 ( 李貴 ) 의소견은본디부터서로맞지않았습니다. 그런데이귀가일전에신을방문하였기에신이대략논변을하였으나이귀는잘들으려하지않았습니다. 이제그의차사 ( 箚辭 ) 를보건대신의말가운데서수미 ( 首尾 ) 는잘라버리고자기의의사와서로비슷한중간의한구절만을인용하였으니, 참으로가소로운일입니다. 신이이일에관하여갑자기예전견해를바꾸지못하는것은감히혼모 ( 昏耗늙어서정신이흐림 ) 하다하여전후 ( 前後 ) 로말을달리할수없기때문입니다. 정묘년 (1627, 인조5) 봄에서로 ( 西虜 ) 가입구 ( 入寇 ) 하자상 ( 上 ) 께서는강

도 ( 江都 ) 로파천 ( 播遷 ) 하고세자 ( 世子 ) 의분조 ( 分朝 ) 는남하 ( 南下 ) 하였다. 이때교지 ( 敎旨 ) 를내려선생에게양호 ( 兩湖 ) 의호소사 ( 號召使 ) 를임명하자, 선생은명을받들어즉시근경 ( 近境 ) 에나가군사 ( 軍士 ) 와군량 ( 軍糧 ) 을소모 ( 召募 ) 하여행조 ( 行朝 ) 에공급하고, 몸소분조 ( 分朝 ) 에나아가면대 ( 面對 ) 하였다. 이는대체로인심 ( 人心 ) 을모아서삼남 ( 三南충청남북도 전라남북도 경상남북도 ) 을진정 ( 鎭定 ) 시키려는것이었다. 그런데갑자기, 적 ( 賊 ) 이이미임진강 ( 臨津江 ) 을건넜다는유언비어가떠돌므로써, 분조 ( 分朝 ) 의여러재신 ( 宰臣 ) 들이몹시당황하여세자 ( 世子 ) 를받들고영남 ( 嶺南 ) 의외진구석으로이주 ( 移駐 ) 하려하였다. 그리하여인심 ( 人心 ) 이매우소란해져와해 ( 瓦解 ) 될형세가뚜렷하여졌다. 그러자선생이, 영남으로이주하는것은계책이아님을역설 ( 力說 ) 하고, 또세자뵙기를청하여이해 ( 利害 ) 에관한사실을갖추어진술하니, 세자가 나의뜻도그러하다. 며수긍하였다. 이윽고유언비어도저절로진정되었다. 3월에문인 ( 門人 ) 과함께강도 ( 江都 ) 에가니, 이때는화약 ( 和約 ) 이이미이루어져서적이곧물러가게되었다. 상 ( 上 ) 은즉시선생을인견 ( 引見 ) 하고위유 ( 慰諭 ) 하기를, 경 ( 卿 ) 은노병 ( 老病 ) 에도불구하고국사 ( 國事 ) 에정성을다하였으니내가매우가상히여기오. 하였다. 선생은인하여, 적세 ( 賊勢 ) 가조금이라도완화되거든직명 ( 職名 ) 을거두어서고향에돌아갈수있도록해주기를청하자, 상이말하기를, 적병 ( 賊兵 ) 이아직도경상 ( 境上 ) 에있으니, 그대로직명 ( 職名 ) 을띠고있는것이무방할것이오. 만약에또급한사태가일어나면반드시끝까지마음을다해야하오. 하였다. 선생이말하기를, 오늘날의강화 ( 講和 ) 는진실로어쩔수없는상황에서나온것입니다. 그러나척화 ( 斥和 ) 의논의는반드시우장 ( 優獎후하게칭찬함 ) 하여야합니다. 하니, 상이말하기를,

경 ( 卿 ) 의말이진실로옳다. 그러나, 혹자들은우활한말로덧붙이니 이는매우잘못된것이오. 하므로, 선생이이렇게말하였다. 말한자가비록지나쳤다할지라도그를꺾어버려서는안됩니다. 이제진언 ( 進言 ) 했다가견책 ( 譴責 ) 을받은자가서로잇달으니, 뒷날에그누가감히할말을다하겠습니까. 선생이고향에돌아와서는, 즉시군사와군량을변통하여조달하고는직책에서벗어나한가히지냈다. 숭정 ( 崇禎 ) 무진년 (1628, 인조6) 가을, 형조참판 ( 刑曹參判 ) 에임명되었으나재차사양하고부임하지않았다. 기사년 (1629, 인조7) 여름에상이연신 ( 筵臣 ) 에게이르기를, 김모 ( 金某 ) 는덕행 ( 德行 ) 높은노유 ( 老儒 ) 로서서울에오려하지않을뿐더러, 오더라도즉시돌아가곤하는데, 이는나의성의가부족하고예우 ( 禮遇 ) 가소홀한때문이다. 어떻게하면그가서울에와서오래도록머물게할수있겠는가. 하니, 우상 ( 右相 ) 이정귀 ( 李廷龜 ) 가이렇게말하였다. 김모는서울에서생장 ( 生長 ) 하여, 세상을은둔한선비가아니니, 나이는비록많지만상께서성례 ( 誠禮 ) 를극진히하여상규 ( 常規 ) 를떠나서특별히대우한다면오게할수있을것입니다. 상은즉시온후 ( 溫厚 ) 한교지 ( 敎旨 ) 를내려고또가교 ( 駕轎 ) 에태워서모셔오도록명하였으나, 선생은소 ( 疏 ) 를올려굳이사양하였다. 그러자상이손수비답 ( 批答 ) 하기를, 경은이나라의대로 ( 大老 ) 로서덕행 ( 德行 ) 이뛰어나니, 이제만일서울에와서있어준다면사대부 ( 士大夫 ) 의본보기가될뿐아니라, 반드시임금을계도 ( 啓導 ) 하는이익이있을것이기때문에내가이제초조하게기다리는바이오.

하며, 소명 ( 召命 ) 이거듭되면서말이더더욱간절하였다. 그러나선생은스스로, 나이가많아져서정력 ( 精力 ) 이이미쇠해졌으므로, 은권 ( 恩眷임금의특별한대우 ) 을탐하여거취 ( 去就 ) 를흐리게할수없다고생각한나머지, 누차에걸쳐소장 ( 疏章 ) 을올려끝내는사면 ( 辭免 ) 을얻고야말았다. 경오년 (1630, 인조8) 에우로 ( 優老 ) 의전례 ( 典禮 ) 에의거하여가의대부 ( 嘉義大夫 ) 에승품되었다. 신미년 (1631, 인조9) 5월에갑자기약간의병세 ( 病勢 ) 가있으므로, 가인 ( 家人 ) 이, 손님을거절하고조용히수양할것을권하였다. 그러나선생은그말을듣지않고날마다문인들과함께강론 ( 講論 ) 을끊이지않았으며, 기거 ( 起居 ) 와흥침 ( 興寢 ) 이평소와다름없었다. 8월에이르러병이갑자기위독해져서 3일 ( 갑진 ) 유시 ( 酉時 ) 에정침 ( 正寢 ) 에서작고하였다. 아, 애통하다. 이때둘째아들판서공 ( 判書公 ) 이곁에서모시고있었는데, 상을당하자문인들과함께일체선생이평소에정해놓은상례 ( 喪禮 ) 를사용하였으니, 대체로이상례는 가례( 家禮 ) 를주로하면서 의례( 儀禮 ) 를참작하여사용한것이었다. 막내아들참판공 ( 參判公 ) 은조정 ( 朝廷 ) 에관무 ( 官務 ) 로매여있다가병세가위독하다는소식을듣고급히달려왔으나, 미처뵙지못하고빈소 ( 殯所 ) 를차린뒤에야도착하였다. 부음 ( 訃音 ) 이전해지자상이몹시슬퍼하고, 예관 ( 禮官 ) 을보내어사제 ( 賜祭 ) 하고부의 ( 賻儀 ) 도성대하게하였다. 세자 ( 世子 ) 는강 ( 講 ) 을중지하고소식 ( 素食 ) 을하면서궁료 ( 宮僚 ) 에게이르기를, 내가옛날어려서공부할적에어긋난것이매우많았는데, 실로김공 ( 金公 ) 때문에계발 ( 啓發 ) 되었으니, 그은혜를어찌잊을수있겠는가. 하고, 역시궁관 ( 宮官 ) 을보내어치제 ( 致祭 ) 하였다. 이때에선비들은시골에서서로조문하고, 벼슬아치들은조정에서서로조문하였다. 문인들은, 황면재 ( 黃勉齋황간 ( 黃榦 )) 가회암 ( 晦菴주희 ) 에게입었던복 ( 服 ) 의의식 ( 儀式 ) 에의거하여백포건 ( 白布巾 ) 에다수질 ( 首絰 ) 을더하고, 소대 ( 素帶흰띠 ) 를띠고상 ( 喪 ) 을치렀다. 연신 ( 筵臣 ) 이아뢰기를,

김모 ( 金某 ) 는덕행높은선비로사문 ( 斯文 ) 에공 ( 功 ) 이있으니, 의당추서 ( 追敍 ) 하는전례가있어야할것이며, 또장사 ( 葬事 ) 도도와주어야할것입니다. 하니, 상이본도 ( 本道 ) 에명하여호상 ( 護喪 ) 은물론, 묘 ( 墓 ) 자리까지마련하도록하였다. 이해 10월 19일, 진잠현 ( 鎭岑縣 ) 성북리 ( 城北里 ) 에장사지냈다. 경자년 (1660, 현종1) 에건의 ( 建議 ) 를채택하여선생에게특별히자헌대부 ( 資憲大夫 ) 에이조판서 ( 吏曹判書 ) 를증직하였다. 얼마후묘자리가좋지않아서신사년 (1641, 인조19) 1월 9일, 연산현 ( 連山縣 ) 고정산 ( 高井山 ) 우수리 ( 牛首里 ) 에있는선조비 ( 先祖妣 ) 허씨 ( 許氏 ) 의산소뒤편곤좌 ( 坤坐 ) 에이장 ( 移葬 ) 하였는데, 서북쪽으로대헌공 ( 大憲公대사헌을지낸김계휘 ( 金繼輝 ) 를가리킴 ) 의산소와의거리는겨우 1리 ( 里 ) 쯤된다. 비지 ( 碑誌 ) 와묘표 ( 墓表 ) 가갖추어져있다. 선생은타고난성품이인정이많고후하며기풍과모습이온화하고순수하여겸충 ( 謙沖겸손하고곧음 ) 하고낙이 ( 樂易너그러움 ) 한자질과방정 ( 方正 ) 하고확실 ( 確實 ) 한지조는자연적으로도 ( 道 ) 에가까웠다. 선생은일찍이가훈 ( 家訓부조 ( 父祖 ) 의가르침 ) 을이어받아이미학문의뜻을알게되었다. 그런데사우 ( 師友 ) 의사이에종사 ( 從事 ) 하면서부터는개연히구도 ( 求道 ) 에뜻을두더니마침내성리학 ( 性理學 ) 에뜻을오로지하였다. 선생은, 학자 ( 學者 ) 는반드시글을읽고이치를연구하는것으로선무 ( 先務 ) 를삼고, 본연의마음을되찾아힘써실천하는것으로주본 ( 主本 ) 을삼아야한다고생각했기때문에글을읽을때는반드시의관 ( 衣冠 ) 을단정히갖춘다음공수 ( 拱手 ) 를하고무릎꿇고앉아서전심치지 ( 專心致志 ) 하여온종일마음을글속에깊이가라앉히어, 글자에서는그훈 ( 訓글자의뜻 ) 을찾고, 글귀에서는그의 ( 義글귀의뜻 ) 를탐구하되조금이라도의심스러운곳이있으면머리를들어깊히생각하고머리를숙여익히읽어서반드시그뜻을꿰뚫어지게알고난다음에야그만두었다. 그리고낮과밤을지새면서잠도잊고먹기도잊은채반드시잠잠히기억하고마음으로융해 ( 融解 ) 해서정밀히생각하고확실히터득하는것으로당무 ( 當務 ) 를삼았는데, 이와같이하기를시종여일하루같이하였다. 그중에도 소학( 小學 ) 으로학자의기본 ( 基本 ) 을삼았고, 높이믿고힘써실천하는것을종신 ( 終身 ) 의준칙 ( 準則 ) 으로삼아서밤마다 중용( 中

庸 ) 대학( 大學 ) 심경( 心經 ) 근사록( 近思錄 ) 등의책을외우되, 순환하면서익숙하게읽어서자기의말을외우듯이하였기때문에선생이처음에는스스로재질이노둔하여성취하기어렵다고생각하였으나, 이와같이힘쓰기를꾸준히함에미쳐서는이치가환하게풀려서, 글을보고이치를분석함에있어칼날로해체한듯이막히거나뭉친곳이있지않기에이르렀던것이다. 선생은, 궁행 ( 躬行 ) 하는데있어서는반드시거경 ( 居敬 ) 을위주 ( 爲主 ) 로하였으므로일찍이말하기를, 성인 ( 聖人 ) 의마음은명경 ( 明鏡거울 ) 지수( 止水흐르지않고고여있는물 ) 와같아서늘맑고고요하므로외물 ( 外物 ) 이침범하여어지럽힐수없지만, 중인 ( 衆人 ) 들에이르러서는거의가흔들려서, 마음이움직일때는많고고요할때는적으므로, 반드시마음을공경 [ 敬 ] 으로써곧게한다음에배워야비로소자리잡을곳 [ 湊泊處 ] 이있게된다. 하였다. 그러므로비록시끄럽고소란스러운때에처하거나, 아무도없어자기가마음대로할수있는한적한곳에있을지라도반드시엄숙하여마음이흐트러지지않았고, 환하여어두워지지않았다. 이와같이하였기때문에조존 ( 操存마음이외물에유도되지않도록잡아둠 ) 이날로굳어지고함양 ( 涵養도리가마음속에차차길러짐 ) 이날로익어져서큰근본이이미세워졌고모든일과모든물건이각각조리 ( 條理 ) 가있어서문란하지않았다. 그러므로선생의일상생활에서볼수있는것을열거해보면걸음거리가편안하여척도 ( 尺度 ) 를잃지않았고, 앉아계실때는공손히하고삼가서조금도방심해지나치는일이없었다. 그리하여장중하면서도여유가있고위엄이있으면서도마음이너그럽고깊어서, 엄연 ( 儼然 ) 한기품에사람이바라보면무섭게여겨졌으나, 가까이그안모 ( 顔貌얼굴빛 ) 를만나보고그사기 ( 辭氣말소리 ) 를들어보면자연히온화한기운이훈훈히사람에게스며듦을느낄수있었다. 그러므로귀천 ( 貴賤 ) 과노소 ( 老少 ) 를따질것없이모두사모하고기뻐해서감화되어복종하였던것이다. 선생이집에계실때는매일일찍일어나서세수하고머리빗고예복을갖추고가묘 ( 家廟 ) 에참배하고는물러와서서실 ( 書室 ) 에들어앉아조용히책

상을대하였고, 절대로사물에마음쓰지않았다. 그리고집안 [ 閨庭 ] 에는엄연히차서가있어서어버이가계실때는정성을다하여봉양하되반드시그힘을다하였고, 비속 ( 卑屬 ) 과어린이들을보살피되사랑으로두루흡족하게하였다. 사상 ( 死喪 ) 의의식에있어서는인정과예문 ( 禮文 ) 을지극히갖추었고, 제사 ( 祭祀 ) 의예절에있어서는정성과공경두가지를다하였다. 그러므로기사년 (1569, 선조2), 찬성부인 ( 贊成夫人 ) 의초상시에선생이마침해서 ( 海西황해도 ) 에있었는바갑자기슬픈마음이들어눈물을금치못했었는데그런뒤로며칠이못되어부음이왔었고, 임진년 (1592, 선조 25) 에는장자 ( 長子 ) 은 ( 檃 ) 이다른곳에있다가왜적을만나해를입었는데선생이문득온종일슬픔을느꼈으니, 이것은모두성의가순독한데서그런것임을알수있다. 제부 ( 諸父 ) 를섬기기를아버지섬기듯하였으며, 아우와누이들에대한우애는늙을수록더욱두터웠다. 그래서재물에있어서는좋지못한것은자신이갖고, 좋은것은모두동생들에게주었다. 경손 ( 慶孫 ) 등이비명 ( 非命 ) 에죽자추념하기를하루같이하여절통하고슬픈나머지, 울음소리가자기도모르게터져나와사람들이그때문에감동되었으니, 대개그은의 ( 恩義 ) 를독실히하고윤리 ( 倫理 ) 를올바로하는데있어서진선진미 ( 盡善盡美 ) 했다고할만하다. 그리고선생이벼슬한행적에서볼수있었던것은관수 ( 官守 ) 의크고작음을가리지않고마음을다해직무를봉행하였으며, 중년에는많이주현 ( 州縣 ) 에체류하여있었으니사람을사랑하고물건을이롭게하는마음이지성 ( 至誠 ) 스러운마음에서나옴을볼수있었다. 계해년 (1623, 인조1) 반정이후로는조정 ( 朝廷 ) 에있을날이또한많지않았으므로마침내속에온축한뜻을다펼수가없었다. 그러나아는것은말하지않은것이없고, 말을하면반드시이치에들어맞았다. 뿐만아니라일에따라바로잡고구제하여보익 ( 補益 ) 됨이매우많았으니, 선생이임금을사랑하고나라를걱정하는정성은벼슬을버리고물러가있다하여조금도끊어진때가없었던것이다. 그리고치도 ( 治道 ) 를의논할때는반드시천리 ( 天理 ) 를밝혀서왕도 ( 王道 ) 를행하고, 인심 ( 人心 ) 을바루어투속 ( 偸俗나쁜풍속 ) 을바로잡으며, 기강 ( 紀綱 ) 을진작시켜서폐단을개혁하는것으로써선무 ( 先務 ) 를삼았는데, 본말 ( 本末 ) 이구비 ( 具備 ) 되어있어서모두시행할수있는것들이었고, 공언

( 空言 ) 에그칠뿐이아니었다. 선생은스승과벗들사이에도은의 ( 恩義 ) 가모두지극해서송구봉 ( 宋龜峯 ) 이가문 ( 家門 ) 의화 ( 禍 ) 를만나궁곤하여기탁할곳이없게되자, 선생이마음을다하여주선해서집안에모셔다봉양하며그여생을마치도록하였고, 인조 ( 仁祖 ) 가즉위 ( 卽位 ) 하여서는선생이동문 ( 同門 ) 들을거느리고상소 ( 上疏 ) 로구봉선생의원통한사실을드러내어말하였으며그유가족에게대우하기를동기간 ( 同氣間 ) 과다름없이하였다. 그리고송강 ( 松江 ) 정철 ( 鄭澈 ) 이유감을품은자의무함에걸려들었는데, 그들은정철을간인 ( 姦人 ) 의괴수 ( 魁首 ) 로지목하고인하여죄에빠뜨릴큰함정을만들어놓았으며, 평일 ( 平日 ) 에정철과알고지내던사람까지도혹때를타서돌을던지고시론 ( 時論 ) 에붙는가하면조정에서정철의성명 ( 姓名 ) 을말하기도꺼려한지가 30여년이었다. 그러나선생은그의충직 ( 忠直 ) 한행실을사모하여항상그의심적 ( 心跡 ) 을변명하되비록헐뜯는말이사방에서일어나도돌아다보지않았다. 그리하여계해년 (1623, 인조1) 인조반정때에등대 ( 登對 ) 하여무함에걸려든진상을모조리진술하고관작 ( 官爵 ) 의복원 ( 復元 ) 을청원하였다. 또한율곡 ( 栗谷 ) 선생을섬기되어버이섬기는것과똑같이하였는데, 갑신년 (1584, 선조17) 율곡이세상을떴을때는선생이바야흐로상중 ( 喪中 ) 에있었을때였으나, 사복 ( 師服 ) 을지어입고먼거리에서달려가임상 ( 臨喪 ) 했고, 초하루보름에는그복 ( 服 ) 을입고곡하였으며기일 ( 忌日제삿날 ) 에는재계하는등평생토록폐하지않았는데구봉에게도그렇게하였다. 이뒤로부터사우 ( 師友 ) 의의 ( 義 ) 가세상에다시밝혀지게되었다. 선생이후진 ( 後進 ) 을인도함에있어서는비록어리고천한자일지라도반드시마음을열어성의를보여서반복하여이끌어나아가되자세하게가르치기를게을리하지않았으며, 글을읽히되반드시구두 ( 句讀 ) 를분변하여분명하게하고의리 ( 義理 ) 를탐색 ( 探索 ) 하게해서그들이스스로터득하여그뜻을마음으로체득하고일로징험하기를기다렸으니, 그대요 ( 大要 ) 로말하면반드시입지 ( 立志 ) 를먼저로삼고궁행 ( 躬行 ) 을실천으로삼아서그재품 ( 材品 ) 에따라다방면으로개도 ( 開導 ) 한것이었다. 그리하여그들의몸을위하고실천에힘쓰는것을보면마음으로기뻐하고안색에나타나도록기뻐하여자기에있는것처럼여겼고, 혹부범 ( 浮泛 )

한것을보면조용하고자상하게경계하였다. 선생이글을가르치던차서는처음에는 소학( 小學 ) 가례( 家禮 ) 를가르쳤고, 다음에는 심경( 心經 ) 근사록( 近思錄 ) 을가르쳐서그들의학문의본근 ( 本根 ) 을배양 ( 培養 ) 하고학문의문로 ( 門路 ) 를열어준다음에사서 ( 四書 ) 와오경 ( 五經 ) 을가르쳤는데, 순순 ( 循循 ) 히차서가있어서계급이매우엄격하였고, 시문 ( 時文과거문 ) 과화조 ( 華藻문장 ) 의말단적학문에대해서는일찍이말과의논에언급하지않았다. 일찍이학자 ( 學者 ) 들에게다음과같이말했다. 이 ( 理 ) 와기 ( 氣 ) 는한덩어리인것으로본디부터서로떨어져있지않은것이다. 그런데양촌 ( 陽村 ) 권근 ( 權近 ) 은 양쪽에서발출된다. 했고, 퇴계 ( 退溪 ) 이황 ( 李滉 ) 은 호발 ( 互發 ) 한다. 하였다. 이는견해가불분명하여달라진이론이다. 율곡 ( 栗谷 ) 선생은 발 ( 發 ) 하는것은기 ( 氣 ) 고발하게하는원인은이 ( 理 ) 다. 했는데, 이는태극 ( 太極 ) 이고기는음양 ( 陰陽 ) 이다. 이제태극과음양이호동 ( 互動 ) 한다고한다면, 이는말이되지않는얘기다. 태극과음양이호동할수없는것이라면, 이와기가호발한다는것은잘못이아닐수있겠는가. 이말은성인 ( 聖人 ) 이다시난다해도바꿀수없는정론이다. 또 대학( 大學 ) 의물격 ( 物格 ) 과지지 ( 知至 ) 에대해다음과같이논하였다. 주자 ( 朱子 ) 가이른바 물리 ( 物理 ) 의극처 ( 極處 ) 에까지도달하지않음이없다. 한것은물 ( 物 ) 의이 ( 理 ) 에대해그극처까지나아갔으므로다시더나아갈데가없다는것을말한것이다. 그런데세상에서는나의지 ( 知 ) 가극처에까지이르는것이라고여기고있다. 그렇다면이것은지지 ( 知至 ) 이지물격 ( 物格 ) 이아닌것이다. 물리 ( 物理 ) 로말한다면물격이고내마음으로말한다면지지인것이다. 이것이같은일이긴하지만말은각기해당되는데가있으니, 명백히분변하지않을수없다. 우복 ( 愚伏 ) 정경세 ( 鄭經世 ) 는또 도달하지않음이없다는말은물리 ( 物理 ) 가내마음에내도 ( 來到 ) 하는것으로, 객 ( 客 ) 을청하여객이온것과같다. 했다. 이는주부자 ( 朱夫子 ) 의뜻과크게어긋난논리이다. 사람이물 ( 物 ) 의이 ( 理 ) 를궁구하여물에있는이에대해서그극처 ( 極處 ) 에도달하고나면, 내게있는지 ( 知 ) 도따라나아가게되어미진함이없게된다.

정자 ( 程子 ) 가이른바 이것을명백히알게되면바로저것을깨닫게된다. 고한말은바로이것을가리킨것이다. 물리 ( 物理 ) 는본디내마음에갖추어져있는것인데, 어떻게내마음의이 ( 理 ) 로올수가있겠는가. 또 중용( 中庸 ) 의계구 ( 戒懼 ) 근독 ( 謹獨 ) 에대해다음과같이논하였다. 계구는동 ( 動 ) 과정 ( 靜 ) 을겸해서말한것이고, 근독은단지동처 ( 動處 ) 에대해서만말한것이다. 계구의집주 ( 集註 ) 에 늘경외심 ( 敬畏心 ) 을지닌다. 한것은동과정의구분없이항상계구해야된다는뜻이다. 또 보고듣는이가없어도감히경홀히하지않는다. 한것은보고듣는이가없을때에도감히계구를잊지않는다는뜻이다. 근독 ( 謹獨 ) 에대해서 늘계구한다. 한것은상문 ( 上文 ) 에서이른바계구를거듭말한것으로, 이는동과정을겸해서한말이다. 여기에더욱삼가야한다. 는것은동의단서가시작될때더욱삼가라는것이다. 주자가호계수 ( 胡季隨호대시 ( 胡大時 )) 에게답한글에서계구를정에붙이고근독을동에붙였다. 이는주자의초년 ( 初年 ) 의견해이다. 인심 ( 人心 ) 과도심 ( 道心 ) 을논함에는나씨 ( 羅氏나흠순 ( 羅欽順 )) 의성정설 ( 性情說 ) 을배척했고, 심성 ( 心性 ) 과정의 ( 情意 ) 를논함에는호씨 ( 胡氏호굉 ( 胡宏 )) 의미혹된이기론 ( 二岐論 ) 을분변하였는데, 한결같이주자의주훈 ( 註訓 ) 을주로하였다. 이는백세 ( 百世 ) 가가도의혹되지않는정론이다. 또다음과같은말을했다. 사마공 ( 司馬公사마광 ( 司馬光 )) 이 평생동안한일에대해남에게말하지못할것이없었다. 고하였는데, 나도늘이경계를지켜감히어기지않고있다. 또동방도학 ( 道學 ) 의계통을논함에있어서는, 포은 ( 圃隱 ) 정몽주 ( 鄭夢周 ) 가끊어진도학을고려말기에일으켰고, 한훤 ( 寒暄 ) 김굉필 ( 金宏弼 ) 이끊어진계통을우리조선조에이었으나은미한뜻은밝혀내지못하였고, 지극한도는창달시키지못했는데, 정암 ( 靜菴 ) 조광조 ( 趙光祖 ) 선생이성명 ( 誠明 ) 의학 ( 學 ) 으로서임금을바로보필하고백성을인도하는책임을맡아, 조정에서실시함이대단히훌륭하여그유풍

과여운이족히백세 ( 百世 ) 에미칠만하였다. 이로부터그뒤에틈틈히한둘의유현 ( 儒賢 ) 이뛰어나세상에알려졌지만탁월하게도통을전한자는없었는데, 퇴계선생이뭇현인들이죽음을당한뒤를이어사문 ( 斯文 ) 을일으키는것으로써자기의책임으로삼고경전 ( 經傳 ) 을깊이연구하고의리 ( 義理 ) 를규명하여한몸의겸손한덕을지킴으로써내세 ( 來世 ) 의후학들의길을열어놓으셨으니. 그공이크다고할만하다. 그러나명백하고순수하며밝게통하여부족함이없고참으로실천함을알아서성인의근본뜻을얻어말과행동을살펴보아도잘못됨이없고, 하는일이때에맞아행하고그치는것을정 ( 正 ) 으로써하고나아감과물러남을의 ( 義 ) 로써하여지난성인의도를다시잇고후학을여는큰책임을자기소임으로여기고도통의맥을무궁토록함에이르러서는, 다만우리율곡선생한분뿐이다. 고하였으니, 그도학의연원을논하고선철 ( 先哲 ) 의본 ( 本 ) 과말 ( 末 ) 을분별하는데에있어서취사 ( 取舍 ) 함의자세함이이와같았다. 선생께서는평생토록저술에힘쓰지않으셨으나, 매양글을읽으실때에의심난바가있으면그때마다기록하였으니 경서변의( 經書辨疑 ) 8권, 근사록석의( 近思錄釋疑 ) 1권, 의례문해( 疑禮門解 ) 8권, 서소잡록 ( 書疏雜錄 ) 몇권이있어집에소장되어있고, 또산정 ( 刪定 ) 하신신의경 ( 申義慶 ) 이엮은 가례집람( 家禮輯覽 ) 3권과 상례비요( 喪禮備要 ) 1 권이있으니 비요( 備要 ) 는간행된지가이미오래되어비록먼지방시골까지도이를따르지않는이가없으나, 이글의산정 ( 刪定 ) 이다끝나기도전에미리유포 ( 流布 ) 되어서선생께서좋지않게여기셨으므로그로인하여다시수정하여선생께서돌아가신뒤에또간행하였기때문에전본 ( 前本 ) 과후본 ( 後本 ) 이있으니, 대저선생이힘쓴것이가장예학 ( 禮學 ) 에많았음을알수있는것이다. 선생은창녕조씨 ( 昌寧曺氏 ) 에게장가들었는데정부인 ( 貞夫人 ) 으로추봉 ( 追封 ) 되었다. 돈녕부 ( 敦寧府 ) 의판사 ( 判事 ) 인창양군 ( 昌陽君 ) 광원 ( 光遠 ) 의손녀며중추부 ( 中樞府 ) 의첨지사 ( 僉知事 ) 인대건 ( 大乾 ) 의딸이다. 정숙하고유순하여매우부덕 ( 婦德 ) 이있었는데, 36세에죽었다. 처음에는연산현 ( 連山縣 ) 의거정리 ( 居正里 ) 에장사했다가임신년 ( 壬申年 ) 에진잠 ( 鎭岑 ) 으로옮겨장사하고신사년 ( 辛巳年 ) 에또우수리 ( 牛首里 ) 로옮겨서부장 ( 附葬 ) 하였

다. 아들은셋인데큰아들은 ( 檃 ) 은임진년에왜적에게해를당했다. 둘째아들집 ( 集 ) 은이조판서 ( 吏曹判書 ) 로가훈을이어받고업 ( 業 ) 을전수하여한시대의유종 ( 儒宗 ) 이되었고, 셋째아들반 ( 槃 ) 은이조참판 ( 吏曹參判 ) 이다. 딸은셋인데사위는감찰사 ( 監察使 ) 인서경휼 ( 徐景霱 ) 과목사 ( 牧使 ) 인한덕급 ( 韓德及 ) 이며하나는어려서죽었다. 측실 ( 側室 ) 에서는아들여섯을두었는데영 ( 榮 ) 은생원 ( 生員 ) 이되었고경 ( 檠 ) 과고 ( 杲 ) 와구 ( 榘 ) 와규 ( 槼 ) 와비 ( 棐 ) 는모두진사 ( 進士 ) 가되었다. 또딸이둘인데사위는이유 ( 李楢 ) 와이명진 ( 李名鎭 ) 이다. 판서 ( 判書둘째아들집 ( 集 )) 는측실 ( 側室 ) 에서아들둘을두었는데, 익형 ( 益炯 ) 과익련 ( 益煉 ) 이니생원 ( 生員 ) 이되었고, 딸이둘인데사위는생원 ( 生員 ) 인김태립 ( 金泰立 ) 과정광원 ( 鄭廣源 ) 이다. 참판 ( 參判셋째아들반 ( 槃 )) 은아들이여섯인데익렬 ( 益烈 ) 은군수 ( 郡守 ) 이고익희 ( 益熙 ) 는부제학 ( 副堤學 ) 이고익겸 ( 益兼 ) 은어려서사마시 ( 司馬試 ) 에장원하여오랑캐의변란에절사 ( 節死 ) 하니지평 ( 持平 ) 을추증받았고, 익훈 ( 益勳 ) 은주부 ( 主簿 ) 이고, 익후 ( 益煦 ) 는정자 ( 正字 ) 였으나일찍죽고, 익경 ( 益炅 ) 은진사가되었다. 또딸이다섯인데사위는부사 ( 府使 ) 인이정 ( 李淀 ) 과판서 ( 判書 ) 인이후언 ( 李厚源 ) 과수찬 ( 修撰 ) 인장차주 ( 張次周 ) 와생원 ( 生員 ) 인이해관 ( 李海寬 ) 과심약제 ( 沈若濟 ) 이다. 큰사위인서경휼 ( 徐景霱 ) 은딸이둘인데사위는현감 ( 縣監 ) 인신경 ( 愼暻 ) 과성수 ( 成璹 ) 이고, 둘째사위인한덕급 ( 韓德及 ) 은아들이셋인데군수 ( 郡守 ) 인수원 ( 壽遠 ) 과선전관 ( 宣傳官 ) 인지원 ( 智遠 ) 과지원 ( 志遠 ) 이며, 딸이셋인데사위는이여홍 ( 李汝洪 ) 과김민성 ( 金敏成 ) 과이시정 ( 李時挺 ) 이다. 측실 ( 側室 ) 에서난큰아들영 ( 榮 ) 은세아들을두었는데익황 ( 益熀 ) 익정 ( 益炡 ) 익견( 益熞 ) 이고, 둘째인경 ( 檠 ) 은두아들을두었는데익수 ( 益燧 ) 와익훤 ( 益烜 ) 이고, 셋째인고 ( 杲 ) 는아들하나를두었는데익문 ( 益炆 ) 이고딸이둘인데사위는송유진 ( 宋有鎭 ) 과이숙 ( 李俶 ) 이고, 넷째인구 ( 榘 ) 는아들하나인데익돈 ( 益燉 ) 이고, 딸이셋이며, 다섯째인규 ( 槼 ) 는아들하나인데익륜 ( 益火侖 ) 이며딸이하나인데사위는유재 ( 柳宰 ) 이고, 여섯째인비 ( 棐 ) 는딸이다섯인데모두어리다. 내 ( 內 ) 외( 外 ) 로증손과현손이모두 2백여명이나된다.

아, 선생의도덕과학술의아름다움은후생의말학 ( 末學 ) 으로서엿보아헤아릴바아니며더구나나는가장만진 ( 晩進 ) 이니더욱감히무어라말할바못된다. 그러나일찍이틈틈이생각하여그시 ( 始 ) 와종 ( 終 ) 을나름대로구하여평소에말씀하시고행동하신대강을미루어기록하면, 대개대헌공 ( 大憲公 ) 이큰재주깊은학문으로써그명성을크게떨치었고, 선생은어려서부터서업 ( 緖業 ) 을이어문헌공의전통을얻었다. 율곡 ( 栗谷 ) 선생은뛰어난자품 ( 資稟 ) 으로문운 ( 文運 ) 을타서스승을거치지아니하고도학 ( 道學 ) 의오묘함을터득하여사문 ( 斯文 ) 의중책을맡고서성인의학문을이세상에일으켰으니, 진실로우리동방의회옹 ( 晦翁주자 ) 의적통 ( 嫡統 ) 이라할수있다. 선생께서이미그학문을이어받아위대한도학의요결을얻고드디어한뜻으로중책을담당하여조금씩학문을쌓아나갔으니어려서부터노경에이르기까지혹한과혹서, 또는어떠한경우에처해서도일찍이한순간의중단도없었다. 이리하여마침내도학의눈이밝아지고진지하며순수하고전일하여접하는곳마다통달하기에이르렀다. 밝은마음으로은미한곳을살펴봄에있어서는태극 ( 太極 ) 음양( 陰陽 ) 만사( 萬事 ) 만물( 萬物 ) 의이치를하나로꿰뚫어남김이없었고, 강인한의지로그중책을맡음에있어서는고금성현의지극한덕이며아름다운행실의미를한몸에구비하여빠뜨리지않았다. 확고하게사용하는힘은사건이얽히고설켜도앗아가지못하고독실하게스스로를지켜서생사가왔다갔다하여도옮기지아니하였다. 품위와거동의법도는쇠약한노경에도오히려삼가하였고, 경계하고살피는공부는으슥한곳과남모르는가운데더욱엄격하여공부가날로새롭고상달 ( 上達 ) 을마지아니하였다. 만년 ( 晩年 ) 에이르러도덕이높고성대해지자그경지가원만하고완벽하며높고깊고넓어서윤곽을잡을수없었다. 다만온화한기운이온몸에흐르고화락하고단아한뜻이말씀과웃음에넘치며, 정신은차분하였지만모습은엄숙하고얼굴빛은온화하지만말씀은엄격하였다. 움직일때, 가만히있을때또는말씀할때, 침묵할때에여유가있고태평하며자상하고완만하여자연스러운가운데분명하게법도를이루었으며, 사생활에있어서도매우평온하였으며성품이화락하고간이하여그대로보아넘기는일이많았으나사건을처리할때의리로써결단하는문제에있어서는단호히처리하였다. 이상은고루하고우매 ( 愚昧 ) 한내가알수있고볼수있는것들이었다.

아, 선생께서는학문이이미고명한경지에이르고서도미처보지못한듯노력하였고도덕이이미순수하고성대한경지에이르고서도얻은것이없는듯겸손하여나이가 80이넘은이후에도사색하는노력을날로더하여한가로이늙어가는줄을알지못하였다. 외형적으로본다면그정도면완성되었다고말할수있지만그내면을헤아려본다면아마도남은미처모르고있는데자신만이그자취하였음을깨닫고있는그무엇이존재하고있었을터이니학문이이루어지고행실이높아지며도덕이순수하여지고구비되어성대히일세의유종 ( 儒宗유림의으뜸 ) 이되기에당연하다. 중용( 中庸 ) 에, 배우지않을지언정그것을배우면능해지지않고는그대로두지않으며, 묻지않을지언정그것을물으면알지않고는그대로두지않으며, 생각하지않을지언정그것을생각하면터득하지않고는그대로두지않으며, 분변하지않을지언정분별할바엔그것을밝히지않고서는그만두지아니하며, 행하지아니할지언정행할바엔독실해지지않고서는그만두지아니하며, 남이한가지를능하거든자신은백가지를능하며, 남이열가지를능하거든자기는천가지를능할일이다. 과감히이도에능한다면비록어리석다하더라도반드시밝아질것이며, 비록유약한이라도반드시강해질것이다. 하였는데, 고금을두고낱낱이가려볼때능히이와같이힘써서완성한단계에이르기를선생과같이했던사람은대체로몇명이없다. 이것은필시하늘이사문 ( 斯文 ) 을도우사선생을탄생시켜학문을하는표준으로만들어서, 자질이영민한자는감히뛰어넘고소홀히하여부질없고요원한곳으로달리지못하게하고, 자질이노둔한자는선뜻스스로중단하지아니하고용기를내서분발하고부끄러운줄을알아힘껏실행하여반드시완성하기를바라도록하였으니선생의공이어찌적으랴. 공자께서, 도를따라서가다가힘이부족하여중도에서그치더라도고개를숙이고, 날마다노력하여죽은다음에나그만둘일이요, 햇수가부족함을의식하지말라. 하였고, 정자 ( 程子 ) 는, 젊어서학문을좋아하는일은진정사랑스럽고늙어서학문좋아하는

일은더욱사랑스럽다. 고말하였다. 후세에나이와힘이쇠퇴하여학문을이루기어려운점을두려워하고힘쓰기를게을리하는자로하여금선생의풍도를듣도록한다면또한필시감동하여분발하는사람이있을것이다. 대체로하늘이율곡 ( 栗谷 ) 을앞시대에탄생시켜고명 ( 高明 ) 하고절등한자질로서빗장을뽑고열쇠를풀어도학의근원을활짝열어서천지간에빛나게하였고, 또다시선생을훗날에탄생시켜후세에모범이되게하였으니하늘이우리두선생을탄생시켜우리동방도학의계통을열어놓은까닭이어찌우연한것이었겠는가. 주역( 周易 ) 에, 슬기는높고예의는낮으니, 높은것은하늘을본받고낮은것은땅을본받는다. 하였는데, 진정두선생의기상이며조예가각기서로비슷한점이있다고하겠다. 주자가말한, 이정 ( 二程송의정호 ( 程顥 ) 정이( 程頤 ) 형제를말함 ) 부자 ( 夫子 ) 는마치문왕 ( 文王 ) 은기 ( 岐 ) 를다스리고주공 ( 周公 ) 은예법을제작하듯같지않음과같다. 한경우와또한가깝다고하겠다. 후세에인물을알아보는사람이혹시상고하는일이있다면또한이말이거짓이아님을알것이다. 숭정 ( 崇禎 ) 기원 ( 紀元 ) 후경인 ( 庚寅 1650, 효종 1) 사월모일에문인통훈 대부 ( 通訓大夫 ) 행사헌부집의 ( 行司憲府執義 ) 송시열 ( 宋時烈 ) 은삼가쓴 다. 한국고전번역원 정태현 ( 역 ) 198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