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10 민주항쟁 수업자료 개발교재
목차 목차 ⅰ 개요 ⅳ Ⅰ 사건 1 1. 신군부의집권과제5공화국의출범 1 2. 6월민주항쟁의전조 7 3. 6월민주항쟁의전개 15 4. 87노동자대투쟁 24 5. 헌법개정과제13대대통령선거 26 6. 6월민주항쟁을전후한사회운동에대한평가 30 Ⅱ 장소 31 1. 향린교회 31 2. 성공회대성당 32 3. 명동성당 33 4. 한국은행일대 34
Ⅲ 단체 35 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 35 2. 민주화추진협의회 36 3.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37 4. 박종철군국민추도준비위원회 38 5.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와서학협 39 6.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40 Ⅳ 주요발표자료 41 1. 전두환대통령특별담화 (4. 13.) 41 2. 6 ㆍ 10 국민대회행동요강 42 3. 해외언론에보도된 6 월민주항쟁 44 Ⅴ 문화, 예술 45 1. 음악 45 2. 사진 48 3. 영상 51 4. 무용 52 5. 문학 53 6. 증언 63
Ⅵ 지역 65 1. 경기지역 65 2. 강원지역 67 3. 영남지역 68 4. 충정지역 74 5. 호남지역 77 6. 제주지역 81 Ⅶ 관련시설과행사 82 1. 관련시설 82 2. 기념행사 87 참고문헌 88 항생일지 91
개 요 목적과배경 2017 년 6월민주항쟁제30 주년을기념하고, 항쟁의내용과의미를후대에전승 - 앞세대들의헌신과희생으로일군민주화와민주주의를충실히이해하고, 현실참여의중요성과가치를정립하기위한제도적인방안과절차가요구됨 - 이를위한방법으로하나로공교육영역에서이루어지는계기수업, 체험학습, 수업자료로활용이가능한교재의개발이중요하게고려됨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 2016년 11월서울특별시교육청으로부터추천을받은서울 경기도에재직하고있는초 중 고등학교교사들과민주화운동전문연구자들이참여하는기획팀을구성하고, 그방안에관한회의와논의를 10여차례진행했음 - 이과정에서계기수업교재개발을위해서는 6월민주항쟁에관해일관된서술이필요하며, 각종 1차자료들을종합적으로정리하고체계화한데이터베이스가필수적으로갖추어져야한다는데의견을모았음 목적과대상 6월민주항쟁을이해하고공감할수있도록사건사를정리하고, 관련자료를제시 6월민주항쟁관련장소, 인물, 단체를정리하고, 관련자료를제시 6월민주항쟁관련자료와문화, 예술등을정리하고, 관련자료를제시 지역에서의 6월민주항쟁, 관련시설과행사를정리하고, 관련자료를제시
용어정리 1987 년 6월전국에서발생한민주화운동은다양하게호명되었음 - 시민사회에서가장많이사용한명칭은 6월항쟁 또는 6월민주항쟁 이었음 - 2007 년국가기념일을지정하면서기존의기념일지정형식에맞추어 6 10민주항쟁 으로명명했음 - 이보고서에서는시민사회가보편적으로사용하고있는 6월민주항쟁 을기본용어로선택함. 단, 자료의특성과사건전개의특성이드러나야할경우에는기사용된명칭을그대로기술함 1987 년 7월에서 9월까지전개된노동자대투쟁도여러가지명칭으로호명되었음 - 일반적으로 7 8월노동자대투쟁, 7 9월노동자대투쟁, 7,8월노동자투쟁, 7,8월노동자파업, 7 8 9 노동자대투쟁, 1987 년노동자대투쟁 등으로명명되었음 - 이보고서에서는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가 2010 년에발간한 한국민주화운동사 3 에적용한선례를따라 87노동자대투쟁 으로기술함
Ⅰ 사건 1 신군부의집권과제 5 공화국의출범 1-1. 박정희시대의종결과 12 12 군사반란그리고서울의봄 1979 년 10월은한국현대사에서 18년동안계속되었던통치권력이급격하게개편되었던격변의시기였다. 부마민주항쟁이발발한원인을진정으로파악하지않고, 군대를동원해진압했던박정희정부는일주일만에막을내렸다. 10월 26일박정희의죽음으로민주화시대가도래할것같았지만, 12 12군사반란이일어났다. 하나회가중심이된신군부가혼란스러운정국에실체를드러내고있었으나, 서울의봄 을제어할정당성과근거를확보하지못했다. 이시기한국사회의최고관심사는 유신헌법 을폐기하고, 새로운헌법을만드는것이었다. 대부분의사람들은개헌이민주화의반석을놓는첫번째작업이라고생각했다. 유신헌법 에의거해대통령이된최규하는헌법개정기간을 1년여로제시하고 헌법개정심의위원회 를구성했다. 국회내에도 헌법개정심의특별위원회 가설치되었다. 정부와국회가입장을달리한가운데추진되었던개헌작업은 1980년 4월에들어서면서부터는진전하지못했다. 야권에서는김영삼을중심으로하는신민당과재야를기반으로하는김대중의갈등이심화되고있었다. 한편대학가에서는학원민주화등의의제를매개로학생회가재구성되고있었고, 자율화와자치활동의부활이추진되었다. 노동운동도점차활성화되었으며, 노동쟁의가전국으로확산되었다. 박정희시해사건을발표하는전두환소장 (1979. 11. 6.) 서울의봄 (1980. 5. 15. 서울역일대 ) Ⅰ. 사건 1
1-2. 5 18 민주화운동과전두환대통령만들기 전두환 노태우를필두로한신군부는 5월 17일자정을기해제주도를제외한전국일원에비상계엄령을확대선포했다. 대기중이던군대는계엄군이되어주요대학과기관에출동했다. 광주 전남지역에서는공수부대를주축으로한계엄군에맞서 5월 18일부터 27일까지시민과학생의항쟁이전개되었다. 그러나탱크와헬기로중무장한군대를시민이상대하기란애초에어불성설이었다. 명예회복과피해배상을위한법률이집행된결과에의하면, 5 18민주화운동에서 154명이사망했고 75명이행방불명되는등민간인피해가막심했다. 신군부는 5 18민주화운동이종결된직후인 5월 31일 국가보위비상대책위원회 ( 국보위 ) 를설치했다. 국보위는대통령을의장으로각료 8명과장성 14명등 26명의위원으로구성되었는데, 산하상임위원회위원장이전두환이었다. 신군부는국보위를완벽히통제했으며, 사회전반에걸쳐대대적인숙정과정화에들어갔다. 이과정에서시민의인권과권리가유린되었다. 삼청교육대 는이러한실상을가장잘보여주는사례였다. 최규하대통령은 8월 16일신군부의압박을견디지못하고하야했다. 이는우연이아닌신군부가준비한시나리오가작동한결과였다. 8월 18일열린통일주체국민회의대의원안보보고회는전두환을대통령에추대하는자리였고, 전두환은 21일열린전군주요지휘관회의에서국가원수로추대되었다. 유신헌법에의해 8월 27일개최된통일주체국민회의는전두환을제11 대대통령으로선출했다. 총투표자 2,525 명가운데단 1명만기권하고 2,524 명이찬성하는실소를자아내게하는선거였다. 5 ㆍ 18 민주화운동 : 민주수호범시민궐기대회 (1980. 5. 광주시전남도청앞분수대 ) 통일주체국민회의의제 11 대대통령선거 (1980. 8. 27. 서울장충체육관 ) 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1-3. 헌법개정과제 5 공화국 신군부도유신헌법개정요구를묵과할수없었다. 비록무력으로권력을장악하고대통령에선출되었으나, 박정희유신체제와동일한방식으로통치를계속할수는없었다. 최규하대통령집권기에도개헌논의가진행되고있었으므로, 헌법개정은돌이킬수없는일이었다. 그래서 9월 1일제11대대통령에취임한전두환은곧바로헌법을개정하도록지시했다. 이미발족되었던 헌법개정심의위원회 가가동되고있어서 9월 9일에헌법개정안이확정되었다. 헌법개정안은대통령의국회해산권과비상조치권을제한하고, 사생활비밀보호, 환경권, 행복추구권, 적정임금보장등의국민기본권을강화했다. 그렇지만새로운헌법은유신헌법을근간으로한것이었다. 대통령선출방식을간선제로한것, 임기를단임제 7년으로한것, 새로운헌법에따라국회가개원되기까지국가보위입법회의가국회의역할을대신하도록한것등이단적으로보여주었다. 개정된헌법은 10월 22일국민투표를통해 27일공포되었다. 헌법개정에따라대통령선거국면이시작되었고, 정당창당이이루어졌다. 그리하여 1981 년 1월에민주정의당 ( 민정당 ), 민주한국당 ( 민한당 ), 한국국민당 ( 국민당 ), 민주사회당이창당되었다. 창당과정에는청와대를비롯해정보기관들이개입했다. 정당이생겨나고있던사이에대통령선거준비도이루어졌다. 그래서 2월 11일 5,278 명의선거인단이구성되었고, 이들은 2월 25일잠실체육관에서전두환을제12 대대통령으로선출했다. 유효투표총수의 90.2% 가전두환을지지했다. 헌법개정투표 (1980. 10. 22.) 제 12 대전두환대통령취임 (1981. 3. 3.) Ⅰ. 사건 3
1-4. 유화국면의형성과 1985 년 2 12 총선거 제12 대대통령선거가실시된지정확하게한달이되던날인 3월 25일제11 대국회의원총선거가실시되었다. 이선거에서민정당은 151석, 민한당은 81석, 국민당은 25석을차지했다. 사실상여당만있는정국이만들어진것이다. 제11대국회가개원할때까지국가보위입법회의는사회전반에걸친각종규제법률들을제정했다. 정당성이결여된신군부는국정지표를발표하여정권의안정을도모하고, 양심수에대한대규모사면 복권 감형조치를단행했다. 미국과일본도전두환정권의안정화에일조한혐의가있다. 1983 년이되자, 신병치료차미국에간김대중이정치활동을재개하고, 김영삼은단식투쟁을하며, 민주화운동청년연합 ( 민청련 ) 이결성되는등점차민주화운동이활성화되었다. 권력장악에성공했음을확신한전두환정권은 1983년말부터유화국면을조성했다. 제12대국회의원선거는비상사태를해제한상태에서치러야했고, 아시안게임 (1986) 과올림픽 (1988) 에대비해야했다. 1984년 5월교황요한바오로 2세의한국방문도이변화의중대전환점이되었다. 1985 년 2월 12일국회의원총선거는급속히창당한 신한민주당 ( 신민당 ) 이돌풍을일으켰다. 이는그동안억압되었던사회구성원의마음과바람이반영된결과에다름이없었다. 교황요한바오로 2 세의한국방문 (1984. 5. 연합신문, 시사인, 2014. 8. 14.) 제 12 대국회의원총선거 (1985. 2. 12. - 신민당상황실 ) 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1-5. 대통령직선제개헌 1,000 만명서명운동 (1986. 2. 12.) 1985 년 2월 12일국회의원선거에서 신한민주당 ( 신민당 ) 은유권자들의폭발적인지지를받아제1야당이되었다. 신민당은신군부가창립했던 민주정의당 과보조를맞추던 민한당 을흡수하여외연을넓혔고, 시민들로부터큰지지를받았다. 신민당은민주화를위해서는유신헌법의유산이깊이배어있는제6공화국헌법개정이필수적이라고파악했다. 그래서그첫걸음으로 12월에국회내 개헌특별위원회 를설치하려했으나, 여당의반대로무산되었다. 신민당과재야그리고민주화운동진영은이를해결하기위해 1986 년 2월 12일부터 1,000 만명개헌서명운동 에들어갔다. 서명운동이시민들의지지를받고있다는점은 3월부터서울, 부산, 광주, 대구, 대전, 청주등의거점도시들에서열린 개헌현판식 에수많은사람들이참여했다는점에서확인되었다. 개헌요구가거세어지자, 전두환대통령은 4월 30일에여야가개헌에합의하여건의하면, 수용할의사가있다고밝혔다. 대통령직선제개헌 1,000 만명서명운동을봉쇄하는경찰에항의 (1986. 2. 16. 신한민주당당사앞 ) 국회개헌합의, 정부수용의사표방 (1986. 4. 30. 경향신문 1 면 ) Ⅰ. 사건 5
1-6.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발족, 시민사회에대한탄압과야당의내분 (1986. 6. 24, 7. 30 ~ 12. 말 ) 개헌정국은 1986년중반부터본격화되었다. 그런데인천5 3항쟁에대한정부의탄압과국회헌법개정특별위원회에김영삼 김대중이참여의사를밝히면서야당과시민사회의입장차이가커져갔다. 여야는 6월 24일국회에 헌법개정특별위원회 를구성하기로의결했다. 7월에들어알려지기시작한 권인숙양부천서성고문사건 이말해주듯이, 전두환정부의인권수준은최악이었다. 권력장악과지속에집착한정권은 1986 년 10월 5일아시안게임이마무리되자, 곧바로민주화를주장하는세력에대한탄압의고삐를당겼다. 이를잘보여주는사건들은국회의원유성환의구속과대학생 1,525명이연행되었던건국대사건등이다. 신민당은 11월 29일 대통령직선제개헌쟁취및영구집권음모분쇄범국민대회 를개최하려했으나, 32,000 여명의경찰이대회장을봉쇄했다. 새로운헌법에대한신민당과시민사회의입장은 대통령직선제 였으나, 전두환정부와여당의입장은 내각제 로집권의기반을탄탄하게하는것이었다. 신민당이민우총재는 12월말 7개항의선결조건을받아들이면민정당의내각제안을수용하겠다는, 이른바 이민우구상 을밝혀야당내의갈등의골이깊어졌다. 국회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구성의결 (1986. 6. 24. 경향신문 1 면 ) 대통령직선제개헌쟁취및영구집권음모분쇄범국민대회를봉쇄한경찰 (1986. 11. 29. 옛서울고앞 ) 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2 6 월민주항쟁의전조 2-1. 박종철고문치사 (1987. 1. 14.) 와진상폭로 1987년 1월 14일한대학생이하숙집에서악명을날리던서울시갈월동소재이른바 남영동치안본부대공분실 로연행되었다. 이시기는개헌의방향을두고갈등이고조되고있었다. 전두환정부는정국을주도하기위해입장이다른세력에대한탄압을강화했다. 경찰은실적과승진그리고포상에혈안이되어 1월 14일이학생에게물고문을자행했고, 끝내목숨을빼앗았다. 고문으로사망한학생은서울대언어학과에재학중이던박종철이었다. 경찰은고문치사를축소은폐하기위해입체적이고치밀하게모의하고작전을펼쳤다. 하지만이정보는우연히 중앙일보 기자에게탐지되었고, 사건이신문에보도되면서세상에모습을드러냈다. 당시경찰의최고수장이었던치안본부장은 탁하고치니억하고죽었다 라고언론에거짓된발표를하고, 사건의확산을무마하기에급급했다. 그러나언론들은 1월 17일박종철고문치사를부인할수없는근거들을보도했다. 결국 19일관련자들이구속되었고, 20일내무부장관과치안본부장이경질되었다. 새로임명된내무부장관은신군부의핵심인물이었던정호용이었는데, 그는노태우와친밀했다. 더욱놀라운일은이것도진상의전모가아니라는사실이었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관련기자회견하는강민창치안본부장 : 이발표는사건의전모가아니었음이추후판명되었고, 강민창은 20 일경질되었다. (1987. 1. 19.) 박종철고문치사현장 (1988. 7. 26. 국회의원현장방문 ) Ⅰ. 사건 7
2-2. 고박종철군국민추도회 (1987. 2. 7.) 박종철의유해는 1987년 1월 16일사실상경찰에의해화장되었고, 임진강에뿌려졌다. 아버지박정기는 종철아! 잘가그래이 아부지는아무할말이없대이 라고깊은한을표현했다. 대학생들은 17일부터 24일까지 박종철군추모제 를지내고, 그의무참한죽음을위로하며진상규명을요구했다. 종교계와사회단체도사람이고문으로유명을달리하는시국을개탄하며, 다양하게항의했다. 그럼에도경찰은박종철의시신을검안한의사를협박하는등은폐작업을중지하지않았다. 시민사회의들끓는여론을결집하여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 ( 고문공대위 ) 가추모행사를개최하기로했다. 고문공대위는 민주화청년연합 의장김근태가박종철이사망한건물에서혹독한고문을당했던사실을폭로한것을계기로 1985년 11월결성되었다. 그런데고문공대위의역량은충분하지않았다. 따라서사회단체와재야그리고야당등이참여하는준비위원회가결성되었고, 2월 7일명동성당에서 고박종철군국민추도회 를열기로했다. 경찰은국민추도회를원천봉쇄하기위해명동성당일대는물론학생과시민이모일만한장소들에서검문 검색을했다. 철통봉쇄를했지만, 명동성당에서는 800여명이모여추도회를열었다. 이날부산, 광주, 대구, 인천등전국의주요도시들에서도크고작은추모행사가개최되었다. 고박종철군국민추도회 (1987. 2. 7. 명동성당 ) 고박종철군국민추도회 (1987. 2. 7. 명동성당 ) 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2-3. 고문추방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 (1987. 3. 3.) 1987 년 3월 3일은박종철이사망한지 49일째되던날이었다. 49재는불교계에서매우중요시되는추모의례였는데, 그의부모님은불교신자였다. 이러한인연으로불교계단체들이 고박종철영가 49재봉행준비위원회 를결성했다. 준비위원회는 3월 3일조계사에서재를지내고, 고박종철군국민추도회 는파고다공원에서 고문추방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 을개최하기로했다. 하지만경찰은두행사모두를불법집회로규정했다. 경찰은행사장소들을봉쇄하고폭력적으로해산작전을펼쳤다. 시민들은경찰이쏜최루탄가스로고통을호소했고, 도심은혼란스러웠다. 시민들은행사참가자들을강제로해산시키고체포하는경찰에게항의하고야유했다. 이러한상황은전국곳곳에서동시에펼쳐졌다. 전국 46개대학의학생들은공권력의부당한행위를규탄하는집회와시위를벌였다. 공권력의통제로부산사리암에서만고박종철군 49재가거행되었다. 고문추방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 (1987. 3. 3. 서울도심 ) 고문추방민주화국민평화대행진에배포된유인물 (1987. 3. 3. 대전 ) Ⅰ. 사건 9
2-4. 통일민주당 창당과 4 13 호헌조치 (1987. 4. 13.) 한국현대사에서 1987 년 4월 13일은여러사건들이동시에일어난특별한날이다. 서울지방법원재판부는국회본회의에서 국시는반공이아니라통일 이라고발언한유성환의원에게국가보안법위반을적용해유죄를판결했다. 국회의원은면책특권이보장된신분임에도여지가없었다. 이사건은 1992년대법원에서공소기각판결을받았다. 이는정권의탄압논리가사실상초법적이었음을입증해준다. 민추협사무실에서는김영삼을중심으로한 통일민주당창당발기인대회 가열렸다. 이민우구상 에반대한신민당소속의국회의원들이탈당하여 직선제개헌 등을추진하는정당을만들것임을공식화한것이다. 이날발생했던보다중대한사건은전두환대통령이이른바 호헌 ( 護憲 ) 조치 를발표한것이었다. 호헌조치는개헌을둘러싼그동안의논의를물거품으로만들었고, 간접선거로체육관에서대통령을선출하겠다는주장으로받아들여졌다. 이는전두환정권이야당과시민사회의결집력이높지않다고파악하고, 현재의통치체제를지속하겠다는의지를표출한것으로해석되었다. 호헌조치로민주화가답보또는퇴보할수밖에없음이명백했지만, 4월 14일부터호헌조치를지지환영하는성명들이발표되었다. 성명을발표한주체들의대부분은경제계의유력단체와관변단체였다. 통일민주당 창당발기인대회 (1987. 4. 13. 경향신문 1 면 ) 전두환대통령의호헌조치발표 (1987. 4. 13. 경향신문 1 면 ) 1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2-5. 호헌반대운동과 4 19 혁명기념식 (1987. 4. 19.) 전두환대통령의호헌조치가발표되자, 야당과재야그리고사회단체와학생은앞다투어비판성명을발표했다. 특히대학가에서는호헌조치를규탄하는집회와시위가범람했는데, 시기적으로 4 19혁명기념일에인접해있었다. 4 19혁명의발발배경과정신그리고의의라는관점에서보면, 호헌조치는지탄을받지않을수없는중대한사안이었다. 경찰은 4월 16일호헌조치를비판하는여론과활동을통제하기위해 18일부터전국에 갑호비상령 을발동한다고공표했다. 정부의통제조치에도불구하고, 4월 19일수유리소재 4 19공원묘지 에서는민통련비롯해 26개의재야및사회단체그리고대학생이참가한가운데제27 주기기념식이열렸다. 이들은지난 3 3평화대행진 이후처음으로가두시위를벌였다. 경찰은수천명을동원하여집회와시위를해산시켰으며, 358명을연행했다. 4 13 호헌조치철회촉구성명서 (1987. 4. 14. 민주 통일민중운동연합 ) 4 19 혁명기념식과호헌반대시위 (1987. 4. 19. 수유리, 동아일보 ) Ⅰ. 사건 11
2-6. 호헌반대운동 (1987. 4. 21. ~ ) 4월후반기에접어들었으나, 호헌반대운동의열기는수그러들지않았다. 호헌반대운동은종교계와전문직을필두로각계각층으로퍼져나갔다. 천주교계에서는각교구별로사제가중심이되어단식농성에들어갔으며, 호헌철폐와민주제개헌지지 를주장하는서명운동을전개했다. 기독교계에서는목회자들이단식기도를벌였고, 불교계도철야농성에들어갔다. 재야인사들도단식농성에동참했으며, 교수들은대학별로시국성명을발표했다. 광범위한대학들에서교수들이집단으로개헌과민주화를주장하는의사를표명하는것은매우이례적인일로, 시국이그만큼엄중함을의미했다. 사회단체와직능단체들의반대운동도성명서발표등으로표출되었다. 정치권에서는 5월 1일통일민주당이창당했는데, 지구당창당행사에정권의사주를받은폭력배가출현하여난동을부렸다. 대학가에서는 1986년 10월에발생한 건국대사건 의피해의식을극복하고, 재기하기위해분주했다. 이러한활동의일환으로 5월 8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서대협 ) 가발족했다. 종교계의호헌반대운동 (1987. 5.) 교수들의호헌반대시국성명 (1987. 5. 9. 경향신문 11 면 ) 1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2-7. 5 18 민주화운동제 7 주기기념행사와당국의박종철고문치사은폐 축소 조작폭로 (1987. 5. 18.) 1980년 5 18민주화운동제7주기를기념하는행사들이 5월에들어전국곳곳에서펼쳐졌다. 특히 5월 18일을전후해서는 5 18민주화운동의진상규명과책임자처벌그리고명예회복과희생자의넋을기리는집회와시위로분위기가격앙되었다. 이들행사들에서는 호헌조치를철회하고, 민주주의를쟁취하자 는취지를담은구호들이자연스럽게쏟아졌다. 이는 5 18민주화운동에대한대중적인식이널리확산되었고, 시국과맞물려민주화에대한바람이고조되었기때문이었다. 이가운데 5월 18일예상하지못했던새로운중대사건이발표되었다. 김승훈신부가명동성당에서열린 광주민중항쟁제7주기미사 에서 박종철군고문치사사건의진실이조작되었다 고한것이다. 그는이미구속된경찰관들이외에도이사건의은폐와축소조작에가담한간부직경찰관들이더있다고했다. 언론과방송은사법부수장들이이사실들을오래전에파악하고있었으나모른척했다고보도했다. 대학가의규탄운동은갈수록확산되었고, 통일민주당은내각총사퇴를요구했다. 결국 5월 26일열린임시국무회의에서국무총리이하내각이일괄사표를내고, 대규모개각이이루어졌다. 호헌조치철회와민주화요구가주된쟁점이된 5 18 민주화운동제 7 주기행사 (1987. 5. 17. 명동성당 ) 김승훈신부의박종철군고문치사조작사건진실폭로 (1987. 5. 19. 동아일보 7 면 ) Ⅰ. 사건 13
2-8. 6 ㆍ 10 규탄대회총궐기를위한실천대회 (1987. 6. 9.) 와이한열최루탄피격 1987 년 5월을경과하면서재야와사회운동진영에서는호헌조치철회와민주화운동을보다조직적이고체계적으로추진해야한다는공감대가확산되었다. 그리하여 5월 20일 호헌철폐및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를결성하기로합의했고, 5월 27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국민운동본부 ) 의설립을위한첫걸음을내딛었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전국에서 고문살인은폐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 (6 10대회 ) 를개최할것임을선언했다. 6 10대회분위기를조성하기위해 6월 9일전국의대학들에서 6 10규탄대회총궐기를위한실천대회 가열렸다. 연세대에서는 구출학우환영및 6 10 대회출정을위한연세인총궐기대회 를마친학생들이교문앞에서시위를벌였다. 갑호비상령이내린가운데전개된경찰의진압은무자비했다. 결국사용지침을무시하고발사한최루탄이이한열의머리에맞음으로서우려되었던일이현실로나타났다. 이한열은사건현장에인접한세브란스병원으로후송되어치료를받았으나의식을회복하지못했다. 최루탄에피격당한이한열 (1987. 6. 9. 연세대교문앞, 뉴욕타임스 1 면 ) 이한열피격사건관련검찰조사를받고나오는김수길전서대문경찰서장 (1987. 7. 18.) 1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 6 월민주항쟁의전개 3-1. 민정당대통령후보지명대회 와 고문살인은폐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 (1987. 6. 10.) 1987년 6월 10일은 6월민주항쟁이본격화되는날이었다. 호헌철폐, 독재타도 를주장하는집회와시위는 6월 10일전부터개최되었으나, 이날을주목하는것은시민항쟁이라는새로운단계에진입했기때문이다. 6월 10일은성격이서로상반되는두개의대규모행사가개최되었던점에서특별했다. 오전 10시잠실체육관에서는 민정당제4차전당대회및대통령후보지명대회 가열렸다. 전두환은노태우가민정당의대통령후보임을공식화했다. 노태우는후보수락연설에서 4 13호헌조치와같은내용을반복했다. 같은시각통일민주당과민추협은무교동에서 영구집권음모규탄대회 를열었다. 그리고 6 10국민대회 대회장이었던성공회성당에서는노태우의대통령후보선출을무효라고선언했다. 경찰은모든행사장을봉쇄했고, 무교동에서는참석자일부를연행했다. 각단체와장소별로집회를가진시민과학생은퇴근무렵에도심으로이동했다. 경찰이행사장을봉쇄해서시민들은도심의주요장소들을중심으로시위를벌였다. 성공회대성당앞뜰에서는 40여명이참석한가운데국민대회가개최되었다. 성당의확성기에서는애국가가울려퍼졌고, 종루에서는 42번의타종이이루어졌다. 밤늦도록서울도심곳곳에서시위가발생했는데, 전국의주요도시들에서도비슷한상황들이전개되었다. 민정당대통령후보지명대회 (1987. 6. 10. 잠실체육관, 경향신문 1 면 ) 고문살인은폐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장소인성공회대성당을봉쇄한경찰 (1987. 6. 10. 서울특별시의회앞 ) Ⅰ. 사건 15
3-2. 명동성당농성 (1987. 6. 10 15.) 6월 10일서울도심곳곳에서 고문살인은폐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 가열렸다. 시위대는경찰의진압을피해이곳저곳으로흩어졌다. 시위대가경찰의무장을해제시키기도했으나, 진압작전을중단시킬수는없었다. 을지로와명동입구일대의시위대는경찰을피해명동성당으로들어갔다. 시간이흐르면서명동성당의시위대는 800여명으로늘어났다. 시위대는 11일오전에명동성당에서빠져나가려했으나, 경찰의봉쇄와연행작전으로겨우일부만성공했다. 명동성당에잔류한 760여명의시위대는계획과준비없이예기치않은농성에들어갔다. 이들은사실상고립되어있었으며, 국민운동본부로부터배척받기도했다. 정부와경찰은농성자들을연행할것이라고수시로겁박했다. 경찰이명동성당으로진입을시도하거나최루탄을투척하는바람에이일대는아수라장이었다. 명동성당인근에서근무하던수천명의회사원과사무원은경찰의시위진압을규탄했다. 계성여고학생들은도시락을모아농성자들에게전달하는미담을남겼다. 안기부와경찰의최고위급간부들이김수환추기경을찾아와압박을가하고프락치를침투시켜정보를수집했으나, 천주교계와농성자들은굳건히맞섰다. 6월 14일농성자는 350여명으로줄어들었다. 정부는다음날까지해산하는것을조건으로농성자에대한사법적처벌을유예할것임을통보했다. 6월 15일농성자들은 2차례에걸친투표를통해농성을해제하기로결정했다. 이들은 명동투쟁민주시민, 학생일동 명의의유인물을배포하고, 2만여명의시민들에게둘러싸여농성장을떠났다. 명동성당의농성자들 (1987. 6. 10 15.) 명동성당일대의시위에참가한회사원에게최루탄투척 (1987. 6. 12.) 1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3. 최루탄추방결의대회와정부의군대동원진압고려 (1987. 6. 18 19.) 최루가스의고통도견디기어려웠지만, 전시처럼최루탄과그파편이사람을직접가격하여신체의훼손을넘어생명까지위협하기에이르렀다는것은정말심각한문제였다. 한국현대사에서최루탄에의한대표적인피해사례는 1960 년 3월 15일경상남도마산시에발생한김주열의최루탄피격사망과 1987 년 6월 9일연세대교문앞에서발생한이한열의최루탄피격사망을들수있다. 시민과학생은 6월민주항쟁기간내내경찰의최루탄남용을규탄하고, 더이상피해자가발생하지않도록해야한다고호소했다. 최루탄의피해는이루헤아리기어려울정도였다. 그리하여 6월 11일 최루탄희생자대책위원회 가결성되었다. 국민운동본부와여성단체는 6월 18일연동교회에서 최루탄추방공청회 를개최했고, 이날을 최루탄추방국민결의의날 로정했다. 여기에는최루탄피해자의건강회복을기원하는뜻이담겼다. 한편, 18일에계엄령이선포될것이라는소문이돌았다. 진압작전에계엄군이투입되면더많은인명이살상될것이명백했다. 상황이예사롭지않게전개되어우려와긴장감이고조되었다. 최루탄추방결의대회 는전국 16개도시 247개소에서이루어졌다. 이후에도 20일비상조치가내려질것이라는소문이유포되었는데, 군대의이동도목격되었다. 최루탄추방결의대회에배포된유인물 (1987. 6. 18. 국민운동본부 ) 최루탄추방공청회 : 경찰의봉쇄와연행 (1987. 6. 18. 연동교회 ) Ⅰ. 사건 17
3-4. 호헌철폐와독재종식을위한서울지역청년학도결의대회 (1987. 6. 23.) 국민운동본부는 6월 22~28 일을 민주화실천기간 으로선포했다. 6월민주항쟁이전개되던 20여일동안크고작은집회와시위가매일일어났지만, 실천기간을선정했던것은정치권의동향이예사롭지않았고국민운동본부내부에이견이발생하여집중할필요가있었기때문이었다. 6월민주항쟁에서대학생은여러모로중요한역할을했다. 대다수의대학들은 22일부터여름방학에들어갔으나, 학생들은집회와시위를계속했다. 특히 6월 23일시위의규모가컸다. 6월 23일은국민평화대행진이예정되어있었으나, 영수회담을앞둔김영삼의요청으로 26일로연기되었다. 23일서울지역대학생들은연세대에서 호헌철폐와독재종식을위한서울지역청년학도결의대회 를열었다. 이들은 26일로예정된국민평화대행진에적극참여하기로결의했고, 비상조치가내려지면학교별로등교한후오후 6시경명동에집결하기로했다. 이날각지역에서도대학생들이집회와시위를전개했으며, 여느날과마찬가지로도심에서시위가벌어졌다. 우리의입장 우리청년학도는민주화실천기간을선포함에있어서우리의요구사항을명확히함과동시에앞으로의정세의변화추이에관심을갖고대처할것이다. 이에각세력에대한우리의입장을밝힘으로써이후조국의민주화를향한노력에있어서의연대를더욱공고히하고현정권의퇴진에박차를가하고자한다. 1. 현정권에경고한다. 2. 미국에경고한다. 3. 민주당과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에바란다. 4. 애국시민여러분께, 애국적군인경찰여러분께 분단조국 42 년 6 월 23 일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내용생략 ) 호헌철폐와독재종식을위한서울지역청년학도결의대회 (1987. 6. 23. 연세대 ) 청년학도결의대회에서대학생들이배포한 우리의입장 (1987. 6. 23. 연세대 ) 1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5. 전두환과김영삼의영수회담 (1987. 6. 24.) 6월 22일에언론은전두환대통령과김영삼통일민주당총재가개헌문제등정치현안을쟁점으로조만간만날것이라고보도했다. 이는노태우민정당대표가청와대회의에서대통령에게건의한것이영수회담으로실현되었다고할수있다. 김영삼은국민운동본부상임공동대표들과김수환추기경등을만나협의했다. 국민운동본부는김영삼의요구를받아들여국민평화대행진을 23일에서 26일로연기했다. 영수회담은 24일정오까지청와대에서열렸다. 김영삼은 4 13호헌조치철회, 선택적국민투표실시, 언론자유보장, 구속자석방과사면 복권, 김대중가택연금해제등을요구했다. 전두환은책임있게답변하지않고, 노태우민정당대표와상의하라고미루었다. 김영삼은영수회담이성과를거두지못했다고발표하고, 강경투쟁할것을선언했다. 당일김대중의가택연금이해제되었듯이아무런의미가없는회담은아니었으나, 가장중요한쟁점이었던개헌과관련해서는달라진것이없었다. 연금에서풀려난김대중은다음날거국내각구성과선택적국민투표즉각실시를요구했다. 또한국민평화대행진은비폭력을원칙으로해야하며, 과격한주장을해서는안된다는내용의성명서를발표했다. 그런데김대중은 6월 26일다시연금되었다. 개헌을비롯한정치현안에관한영수회담 (1987. 6. 24. 경향신문 1 면 ) 김영삼의영수회담결과발표와김대중가택연금해제 (1987. 6. 25. 경향신문 1 면 ) Ⅰ. 사건 19
3-6. 민주헌법쟁취를위한국민평화대행진 (1987. 6. 26.) 6월민주항쟁의마지막대규모집단항거는 6월 26일에이루어졌다. 전두환은 민주헌법쟁취를위한국민평화대행진 을중단시킬목적으로종교계인사들과시국수습에관한간담회를개최했지만, 항거를중단시킬수는없었다. 대규모경찰병력이동원되어집회예정지나주요관공서를경비하고검문검색을했으며, 대학학생회와동아리등을수색했다. 그외에도대통령과당국은국민평화대행진이실행되지못하도록갖은수단과방법을동원했는데, 항거는서울을비롯해전국의시와군에서전개되었다. 공권력이주목한곳은최종집결지로예정되었던파고다공원과명동성당일대였다. 1차집결지들에서도경찰과시위대의공방이치열하게펼쳐졌으며, 시민과학생은여기저기로이동하면서 호헌철폐 와 독재타도 그리고 직선제쟁취 와 한열이를살려내라 등의구호를외쳤다. 고등학생들도다수가시위를벌였고, 밤이되자노동자와직장인도시위에동참했다. 국민평화대행진의전개는지역에따라다소편차를보였으나, 자정을넘겨서까지진행된지역들도있었다. 모든국민은태극기또는손수건을흔들면서집결장소에모입시다. 오후 6시국가하강식과동시에애국가를제창하며전국의교회와사찰은타종하고모든차량은경적을울립시다. 서울의경우 - 마포구 강서구주민은광화문으로 - 도봉구 성북구 동대문구 성동구 강동구주민은동대문으로 - 용산구 동작구 관악구주민은시청으로 - 은평구 서대문구 종로구주민은안국동으로 - 중구 강남구주민은신세계앞으로 - 영등포구 구로구주민은영등포시장으로집결합시다. 파고다공원에도착하면 호헌철폐, 독재퇴진 외치고만세삼창을합시다. 민주헌법쟁취를위한국민평화대행진 개최장소봉쇄 (1987. 6. 26. 파고다공원 ) 민주헌법쟁취국민평화대행진에즈음하여국민에게드리는말씀 일부 (1987. 6. 26.) 2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7. 노태우민정당대표의 6 29 선언 발표 (1987. 6. 29.) 개헌과민주화를주장하는시민과학생의집회와시위가계속되고, 전국적항쟁을무력으로진압하는것이여의치않게되자, 정부와여당은난국을돌파할새로운방안을강구했다. 6 29선언 이바로그것이었다. 6 29선언 은전두환대통령과사전협의하에노태우민정당대표가중앙집행위원회에서대통령에게건의하는방식으로발표되었다. 6 29선언 은 8개항으로구성되었는데, 주요내용은 1 조속한시일내대통령직선제개헌실시, 2 대통령선거법개정, 3 김대중사면 복권과시국사범석방, 4 국민의기본적인권신장, 5 언론기본법개정과언론의자율성최대보장, 6 사회각부문의자치와자율보장, 7 정당의자유로운활동보장, 8 과감한사회정화조치로정리된다. 1 5 항은야당과민주화세력이계속요구하던사항이었다. 그러나나머지항들은오래전부터주장되었지만, 실현되지않은것이거나구체성이없거나독재권력이흔히주장하는것이었다. 국민대화합특별선언 이라는이름으로발표된 6 29선언 에대해국민운동본부와김영삼 김대중등은환영의의사를밝혔다. 전두환대통령은 7월 1일텔레비전과라디오방송을통해 6 29선언 을지지하며, 후임대통령에게평화적으로정권을이양할것임을천명했다. 이에국민운동본부는다음과같은내용의성명서를발표했다. 성명서 노태우민정당대표위원이제의한대통령직선제개헌등시국수습 6개항의발표를보고, 우리국민운동본부는정부, 여당이때늦은감은있으나이제라도국민의뜻을겸허하게받아들이기로결정한것을환영하는바이다. 이는오로지민주화를위하여온몸으로싸워온전국민의위대한승리로서, 민족사에길이빛날새로운지평을열었다고생각한다. 이제정부, 여당은시국수습 6개항의제안을말로써만이아니라즉각실천에옮김으로써국민에게진실성을보여주어야할것이다. 특히구속자석방, 수배자해제등실천가능한사항은지체함이없이즉시실행되어야한다. 우리국민운동본부는이와같은정부, 여당의시국수습방안의구체적실천을온국민과함께예의주시할것이다. 이제민주장정의첫걸음이시작되었으며, 국민운동본부는위대한민주승리의그날까지국민과함께전진할것이다. 1987. 6. 29.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Ⅰ. 사건 21
노태우민정당대표의 6 29 선언 (1987. 6. 29. 경향신문 1 면 ) 6 월민주항쟁승리기쁨무료차값 (1987. 6. 29. 서울 ) 2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8. 이한열사망과장례 (1987. 7. 5 9.) 6월 9일연세대정문앞에서경찰이쏜최루탄에머리를맞아세브란스병원에서사경을헤매던이한열은끝내회복하지못하고 7월 5일사망했다. 이한열의최초사인은뇌손상, 중간선행사인은폐렴, 직접사인은심폐기능정지였다. 이소식을들은연세대학생들은영안실로집결했고, 영안실외부에는 30개중대의경찰병력이배치되었다. 곧이어열린대책회의는장례의성격과방법그리고절차와장지등을논의했다. 이후몇차례의회의를걸쳐장지는광주시소재망월묘지 ( 구 5 18묘지 ) 로결정되었고, 교정에는추모탑을세우기로했다. 장례명칭은 애국학생고이한열열사민주국민장 으로합의되었다. 장례식은연세대총학생회가주관하며, 7월 9일에개최하기로했다. 연세대본관앞에서거행되었던영결식에는김영삼, 김대중, 문익환, 김승훈, 지선, 백기완, 송건호등이참석했다. 장례행렬은신촌로터리에서 1차노제를지내고, 서울시청앞광장에서 2차노제를지냈다. 그리고광주시로내려와이한열이졸업했던진흥고에서 3차노제를, 전남도청앞금남로에서추도식을지낸후망월묘지에안장되었다. 장례식에참석하기위해몰려든수많은시민과학생으로인해일정이크게지연되어그의유해가안장된것은한밤중이었다. 한젊은이가공권력의극단적인진압으로목숨을잃었던이일이진정교훈이되었다면, 인명경시 ( 人命輕視 ) 가더이상발생하지않았을터이지만, 이후에도많은사람들이민주화운동과정에서부당한공권력의집행으로목숨을잃는안타까운일이반복되었다. 애국학생고이한열열사민주국민장 (1987. 7. 9. 서울시청앞노제 ) 고이한열노제 (1987. 7. 9. 광주전남도청앞 ) Ⅰ. 사건 23
4 87 노동자대투쟁 4-1. 6 월민주항쟁이산업현장에미친영향 6월민주항쟁은길게보면 6개월, 짧게보면한달여에걸쳐전개되었으며, 특정하게의미를부여하여행사를개최한날에는대규모집회와시위가발생했다. 국민운동본부는시민이항쟁에쉽게참여할수있는여건을조성하기위해오후또는저녁무렵에집회를열었다. 항쟁이지속되면서시민의참여는점점증가했는데, 후반기에접어들수록노동자의참여가눈에띠게늘어났다. 명동성당농성투쟁기간동안에는장소의특성상 넥타이부대 라고명명되었던금융 사무직종사자들이함께했다. 밤늦게까지시위가계속되는상황에서는산업노동자와기층민의참여도가높았다. 노동자들은 6월민주항쟁을경험하면서저임금, 장시간노동, 병영적노동통제가이루어지는현실을개탄하고, 이를극복할실천방안을찾아야한다는데공감했다. 하지만 6 29 선언 은대통령직선제등정치적민주화만어느정도보장했을뿐노동자 농민문제의해결책은제시하지않았다. 이에노동자들은 6 29선언 으로폭압적인통제가여의치않게된상황을이용하여노동부문민주화를위한투쟁을전개해나갔다. 따라서 87노동자대투쟁은 6월민주항쟁의연속이며, 6월민주항쟁의산업현장버전이라고할수있다. 구로공단 6 24 연대투쟁계승실천대회 (1987. 7. 5. 성문밖교회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의노동운동지지성명서 (1987. 7. 8. 광주 ) 2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4-2. 산업현장에서노동자집단행동의전개양상 87노동자대투쟁은 7월에시작되어 10월초에일단락되었다. 6월민주항쟁이 87노동자대투쟁에큰영향을미쳤다는것은두말할나위가없다. 노동자들은개별적으로때로는집단적으로 6월민주항쟁에참여했는데, 항쟁이마무리되고일상으로돌아온작업장의현실은달라진것이없었다. 노동조합이조직되어있던사업장은드물었고, 그나마사용자와결탁되어있거나지시를받았다. 임금협상은형식적이었고, 사용자가제시한수준이하에서결정되는경우가다반사였다. 근무시간은무시되기일쑤였으며, 부당한노동이만연했다. 87노동자대투쟁기간발생한노동쟁의는총 3,255 건에, 1,218,000 여명의노동자가참여했던것으로집계되었다. 1986년에발생한노동쟁의 276건과비교하면, 이는폭발적으로늘어난수치이다. 노동자의주된요구는노동기본권준수와노동조합활동보장등이었다. 임금인상과근로조건개선이노사협상의주요쟁점이기는했으나, 보다우선되었던점은노동자의생존권과노동권보장이었다. 이것은한국의거의모든산업현장에서요구되는문제였다. 그래서사업장의규모와직종, 지역과성별을가리지않고전국에서요구가분출했다. 노동자들은자신의요구가관철될수있는믿음직한대표를원했다. 이는 현장민주화 로표출되었다. 아울러민주적노사관계에대한요구가급증했으며, 각종차별을철폐하는것도주요쟁점이었다. 87노동자대투쟁은중화학공업지역에서시작되어경공업지역등으로확산되는양상을띠었다. 따라서노동쟁의의주체와산업그리고성별과지역이이전과크게차이를보였다. 경공업중소기업에서중화학공업대기업으로, 분산혹은소규모작업장에서대규모공단지대로, 여성노동자에서남성노동자로달라졌다. 이것은향후한국노동운동의변화를예고했다. 한편 87노동자대투쟁과정에서거제도대우조선에서근무하던한노동자가사망했다. 8월 22일경찰이김우중회장을면담하기위해집결한노동자들에게최루탄을난사했는데, 이석규가파편에맞아숨을거둔것이다. 87 노동자대투쟁 : 노동기본권쟁취대회 (1987. 7. 19. 서울흥사단앞 ) 87 노동자대투쟁 : 울산 (1987. 8. 19. 현대계열사노동조합거리시위 ) Ⅰ. 사건 25
5 헌법개정과제 13 대대통령선거 5-1. 시민의참여와감시를벗어난제도정치권의헌법개정 6월민주항쟁의최대쟁점은유신헌법에근간을두고있던제5공화국헌법의개정이었다. 헌법을개정하지않고는민주화가요원할수밖에없었고, 견고한아성을구축한독재체제를해체하는것은불가능했다. 정치권에서는개정헌법의내용을두고갈등했다. 그런데헌법개정은여야정치권이알아서추진하는일로간주되고있었다. 6월민주항쟁의실질적인주역이었던재야와사회단체그리고학생과노동자는배제되었다. 제도정치권은거리에서집회와시위가전개되는것을더이상달가워하지않았고, 평화로운해결에장애가되는것으로파악했다. 6월민주항쟁의구심이었던국민운동본부등은 87노동자대투쟁과헌법개정에크게관심이없었다. 제도정치권은 12월에치르기로예정한대통령선거에몰입했고, 집권의유불리를따지며권력의재생산및분배에만집중했다. 이는 6월민주항쟁을가능하게했던민주화연합을약화시키는것이었다. 그리고민중의관심과생존권그리고정치참여보장등은뒷전으로밀렸다가슬며시사라졌다. 결국헌법은정치권력구조를재구성하고기본권을일정하게보장하는수준에서개정하기로합의되었다. 이는민주화의불확실한제도화로귀결되었다. 제도정치권의타협으로만들어진헌법은 10월 12일국회를통과했고, 10월 27일국민투표에서 93.1% 의찬성을받아 29일최종적으로공포되었다. 역사상첫여야합의헌법개정안국민투표 (1987. 10. 27.) 헌법개정안국민투표결과개표 (1987. 10. 27. 강남구 ) 2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 표 > 신 구헌법대조 분야항목신헌법구헌법 상해임시정부법통명시없음 전문 저항권 불의에항거한 4 19 로 규정, 그취지를반영 없음 총강군의정치개입금지 정치적중립은준수된다 로 반영 없음 공무원의노동 3 권법률로규정법률로정한자만인정 기본권 단체행동권의제한 범위 법률이정하는주요 방위산업체 국가 지방자치단체 국공영기관 방위업체 공익사업체 최저임금제신설없음 국회 국정감사원 조사권 국정감사권신설, 조사권조치, 절차는법률로정함, 수사재판 중인사건간섭금지삭제 국정조사권만부여, 수사재판 중인사건간섭금지명시 대통령선거방법직선간선 대통령 정부 대통령임기, 중임제한 5년단임 7년단임 비상조치권 비상조치권폐지, 긴급재정경제처분및명령권부여 비상조치권부여 관장기관헌법재판소헌법위원회 헌재 관장사항 위헌법률심사 탄핵 해산 기관간의쟁의 헌법소원 위헌법률심사 탄핵 정당해산 경제 경제에대한규제 조정 경제력남용방지와경제주체간의조화를통한산업민주화를위해규제 조정인정 사회정의실현, 국민경제의균형발전과독과점폐단방지를위해규제 조정인정 출처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10), 한국민주화운동사 3, 돌베개, 386 쪽. Ⅰ. 사건 27
5-2. 공정선거감시운동 (1987. 11. 12.) 6월민주항쟁은 6 29선언 을기점으로새로운국면에접어들었다. 이제대통령직선제등을포함한개헌과대통령선거법개정은번복할수없는국가적과제가되었다. 여당은개정한법률들에의거하여노태우민정당대통령후보를당선시키기위해전략과전술을재편했다. 야당과재야세력에서도유력한대통령후보자들을구심으로합종연횡하며분주하게움직였다. 87노동자대투쟁이전개되고있었으나, 대통령선거에대한정치 사회적관심이점점더커져갔다. 시민들은대통령선거가진정공정하게치러질것인가를의심했다. 대통령선거의공정성에대한불신은해방이후실시되었던무수한선거들에서반복되었던경험들을바탕에두고있었다. 그래서국민운동본부는 8월 4일개최한제1회전국총회에서세가지실천과제들의하나로 깨끗한선거, 선거감시운동 을제안했다. 현체제에서의 선거혁명론 을비판하는주장들도있었으나, 개헌과대통령선거를중단시킬만큼호응을얻지는못했다. 9월말에들어서는전국을순회하는선거운동이본격화되었다. 국민운동본부는 10월에들어거국중립내각수립과선거감시운동을주요주장으로내세웠고, 야당후보단일화는점점멀어지고있었다. 6월민주항쟁에도불구하고공안당국의기세는여전했으며, 신문과방송은야당의선거운동과재야및학생운동을폭력적이라고평가했다. 국민운동본부는 11월말부터대통령선거에조직적으로대응하기위해각종기구, 지역, 대학별로 공정선거감시단 을발족시켰다. 민주정의당은공정선거감시단을폭력적인선거운동이라고비난했으며, 당국은각종이유를들어탄압했다. 공정선거감시단활동의정점은 12월 16일선거날이었다. 공정선거감시단은전국의투표소에배치되었는데, 이러한활동과정에서서울시구로구청부정투표함에항의하는점거농성이발생했다. 이때봉인되었던투표함은 2016년 7월 21일개봉되었고, 10월 23일최종조사결과가발표되었다. 공정선거감시전국본부발대식 (1987. 11. 20. 서울기독교회관 ) 공정선거감시전국본부발대식선언문 (1987. 11. 20. 서울기독교회관 ) 2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3. 16 년만에실시된대통령직선제 (1987. 12. 16.) 헌법이개정되기오래전부터제13대대통령선거운동이전개되고있었다. 민주정의당대통령후보는 6월 10일에이미노태우로결정된상태였다. 그는 6 29선언 으로지명도를더욱높였으며, 미국과일본을방문하며국제적인위상을제고했다. 반면야당과민주화운동세력들은후보단일화를두고갈등했다. 군부는오랜기간집권하여기반을구축한반면, 야당은다소자유로운활동을한지얼마안되어기반이취약함에도불구하고분열하고끝내통합을이루지못했다. 대통령후보들은세를과시하기위해대중을동원했고, 아무렇지않게지역주의를활용하여사회적갈등의골을깊게했다. 투표를하루앞둔 12월 15일에는 대한항공 858여객기폭파사건 의폭파범으로지목된마유미 ( 한국명김현희 ) 가체포되어한국으로압송되었다. 학생과시민은학업과생계를밀쳐두고, 공정선거운동을전개하여 16년만에이루어진시민에의한대통령직접선거가부정과모략으로얼룩지지않도록감시했다. 공정선거감시활동이공권력과가장첨예하게충돌했던곳은구로구청이었다. 공권력은 12월 16일부터 2박 3일동안전개된 부정선거항의농성 을강제해산시키면서 1,050 명을연행하고 105명을구속시켰다. 이과정에서하반신마비등다수의피해자가발생했다. 많은사람들이노력에도불구하고, 우려했던것처럼신군부의일원이었던노태우가제13대대통령으로선출되었다. 6월민주항쟁의성과가모래성처럼와해되었던것이다. 노태우정부의집권은민주화운동의성과가위축되고, 지연되는것을의미했다. 역사상첫여야합의헌법개정안국민투표 (1988. 2. 25. 국회의사당본관 ) 6 월항쟁계승및노태우정권퇴진을위한제 5 차국민대회 (1991. 6. 8. 서울 ) Ⅰ. 사건 29
6 6 월민주항쟁을전후한사회운동에대한평가 1987년 6월민주항쟁은 1980년 5월, 아니어쩌면 1960년 4월부터잉태되고있었다고할수있다. 권위주의군부가학생과시민의항쟁으로성취한민주주의를짓밟고찬탈하는것을차단하지못했던일은민주화를수십년간역행시켰고사회구성원의무수한희생으로귀결되었다. 6월민주항쟁에서가장많이불렸던구호는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쟁취 였다. 6월민주항쟁의주장은전반적으로정치적민주화에국한된측면이지배적이었음을부인하기어렵다. 그러나이는당시사회구성원절대다수가관심을갖는공통분모였고, 이문제를해결하지않고서는사회전반을장악한독재의기반을해체하는것이가능하지않았다. 여기에는한국근현대사 80여년의고통과울분그리고바람과희망이압축되어있었다. 권위주의적법률과제도에의거해혹은이마저무시하고자의적으로통치하고군림하는체제를보다근본적으로제어하고규제할헌법의개정이절실했던것이다. 6월민주항쟁은 3 1운동이래가장많은사회구성원이전국에서지속적으로통치체제에항거했던일대사건이었다. 비록항쟁의의미와의의를충분히살리고계승하지못했다는점은아쉽고비판받아야하지만, 시민과학생의헌신과노력으로한국사회의중대한전환점이만들었다는점은값지게고려되어야한다. 또한이때만들어진헌법이대한민국의헌정사상가장오랫동안유지되었으며, 이에의거하여민주주의이행이이루어졌고, 자유 평등 인권 정의 통일 참여 자율 공공성등의가치들이성장하게되었다는점도간과해서는안된다. 오늘날한국에서민주주의가후퇴하고, 6월민주항쟁정신이폄훼되고훼손되었다는지적은분명일리가있으며변명할여지가없다. 그러나 6월민주항쟁의유산과기억이새로운항쟁과민주주의를복원하는밑거름이되었다는사실그자체만으로도충분한의미를갖는다고할것이다. 3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Ⅱ 장소 1 향린교회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결성식 개최장소 향린교회는 1953년 5월 17일안병무와홍창의등개혁적성향을가지고있던 12명의평신도가새로운신앙공동체운동을전개하면서 향기나는이웃 이되겠다는의미로설립했다. 1987년 5월 27일이곳에서는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이하국민운동본부 ) 발기인대회와결성식이라는역사에길이남을집회가개최되었다. 결성식은매우은밀하게준비되었다. 아침 8시에행사가개최된다는것만공지되었고, 행사장소는비밀에부쳐졌던것이다. 결성식참석자들은당일새벽 6시각단체별로서울종로통근처에집결했다. 결성식을개최할수있는건물과장소에경찰이배치된점을파악한주최자들은 향린교회 라고쓴쪽지를전달하는방법으로행사장소를안내했다. 경찰이이를파악하고향린교회에모여들었을때는 1시간에걸쳐신속하게결성식을마친뒤였다. 이날을기념하여 6월민주항쟁 20주년이었던 2007 년 6월 3일향린교회출입문기둥에 6월민주항쟁기념비 가설치되었다. 국민운동본부결성식개최 ( 향린교회 ) (1987. 5. 27. 경향신문 11 면 ) 향린교회의 6 월민주항쟁기념비 (2007. 6. 3. 건립 ) Ⅱ. 장소 31
2 성공회대성당 - 6 10 국민대회장소 성공회대성당으로명명되는대한성공회서울주교좌성당은서울세종로에인접해있으며, 1926년에공사에들어가 1996년에완성되었다. 1987년 6월 10일이곳에서 고문살인은폐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 가열렸다. 경찰의봉쇄를피해일찍이성공회대성당에들어온 70여명은오후 5시경국민운동본부오충일상임집행위원장의사회로국민대회를개최했다. 그리고오후 6시경해방 42년이된것을상징하여 42회타종했다. 성공회대성당밖에서는김영삼민추협공동의장일행이경찰의저지를받고몸싸움을벌였으며, 도심곳곳에서는수백명또는수천명단위의학생과시민이집회와시위를전개했다. 6 10국민대회는전국주요도시들에서도개최되었다. 이날을기념하여 6 10민주항쟁 10주년이었던 1997년 6월 10일성공회대성당뒤편화단에 유월민주항쟁진원지 표지석이설치되었다. 고문살인은폐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 (1987. 6. 10. 성공회대성당 ) 성공회대성당 6 월민주항쟁기념물 (1997. 6. 10. 건립 ) 3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 명동성당 6월민주항쟁과천주교명동성당은떼려야뗄수없는관계이다. 박종철의고문치사사건이발생한지며칠후인 1월 18일김수환추기경은명동성당주일정오미사에서인권을유린한고문행위에의로운분노를느껴야한다고강론했다. 1월 26일에는명동성당에서김수환추기경의집전으로 고박종철군추도미사 가열렸다. 2월 7일 고박종철군국민추도대회 가열린곳도명동성당이었다. 뿐만아니라 5월 18일명동성당에서열린 광주민중항쟁제7주기미사 에서는김승훈신부가박종철고문사망사건이축소 조작됐음을폭로했다. 김승훈신부의발언이미친영향은실로컸다. 이일이계기가되어 5월 26일국무총리를비롯해내각전반에대한개각이단행되었다. 6월 10일열린 고문살인은폐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 에서경찰에쫒긴시민과학생이명동성당으로도피했던것도천주교계의역할및상징성과관련이깊다. 명동성당으로들어온시위대는 6월 15일농성을해산했다. 6일동안의명동성당농성은 6월민주항쟁에서매우의미가깊은일로기록되고있다. 명동성당은노태우의 6 29선언 이있기까지중요한항전지가되었다. 6월민주항쟁이후에도명동성당은한국민주화와인권신장에크게기여한장소였다. 광주민중항쟁제 7 주기미사 에서강론하는김승훈신부 (1987. 5. 18. 명동성당 ) 명동성당농성투쟁 (1987. 6. 10 15.) Ⅱ. 장소 33
4 한국은행일대 6월민주항쟁은대학가와도심곳곳에서전개되었다. 항쟁이전개되는동안, 도심에서는매일크고작은집회와시위가열렸는데, 특별히선호되었던장소들이있었다. 일반적으로사람이많이모일수있는곳이나시위를벌이기에용이한곳, 주요한항거대상이위치한곳, 상징적의미가부여되어있거나사전에약속된곳등이여기에해당되었다. 서울을중심으로살펴보면, 남대문, 동대문, 서대문권역이주요한항쟁지였다. 이들가운데에서도 6월민주항쟁이가장빈번하게그리고격렬하게전개된곳은중구남대문로 39에위치한한국은행일대였다. 한국은행앞은교차로로넓은광장을이루며, 다른장소로이동하기좋은입지를갖고있었다. 그리고 6월민주항쟁을기술한자료나책에서주요하게언급되는장소들인신세계백화점, 남대문시장, 서울중앙우체국등도사실상한국은행일대에포함된다고할수있으며, 서울역, 서울광장, 청계천, 남산등이근거리에위치했다. 6월민주항쟁의상징적거점이었던명동성당이인접해있다는점도이곳으로사람들이집결하는유인요소로작용했다. 이러한이유들로 2월 7일명동성당에서열리기로한 고박종철추도대회 가봉쇄되자한국은행일대에서시위가전개되었고, 6월민주항쟁이펼쳐지던기간동안에도이일대에서는경찰과시위대의대치와치열한공방이계속되었다. 경찰에쫒기는한국은행앞시위대 (1987. 6.) 신세계백화점앞에서연좌시위를벌이는학생들 (1987. 6. 14.) 3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Ⅲ 단체 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 민청련, 1983. 9. 30.),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 ( 고문공대위, 1985. 11.) 민주화운동청년연합 ( 민청련 ) 은 1970 년대학생운동참여자들가운데청년층에해당되는사람들에의해 1983년 9월 30일창립되었다. 민청련창립시기는유화국면으로전환되는초입이어서정치 사회적으로주목을받기에충분했다. 민청련은종로구인사동소재파고다빌딩에사무실을두었다. 민청련은 두꺼비 를상징이미지로삼았으며, 기관지 민주화의길 과 민중신문 을발행하여민주화운동의현황과방향을제시했다. 민청련창립에크게의미가부여된것은전두환정부시기에민주화를공개적으로주장하며활동한첫단체였기때문이다. 민청련이창립된이후부문별로다양한연합체적성격의사회단체들이속속결성되었다. 민청련탄압은 1985년에절정을이루었다. 당국은민청련을 민주화추진위원회사건 의배후로지목하고, 9월에관련자들을대거검거했다. 민청련의장이던김근태도이때구속되었는데, 살인적인고문을당한사실이 10월에폭로되었다. 김근태에대한고문진상을규명하기위해 10월 17일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 ( 고문공대위 ) 가결성되었다. 신민당, 민주화추진협의회,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등의사회단체를비롯해개신교와가톨릭등종교계가고문공대위에참여했다. 고문공대위는이어서발생한 부천서권양성고문사건 등에대응하면서반독재반인권연합전선의초창기형태를갖추었다. 민청련은 6월민주항쟁이전개될무렵에도활동하다가 1992년 2월 23일 한국민주청년단체협의회 가출범하면서해산했다. 고문공대위는 4 13호헌조치에대한사회단체의구심으로기능하다가국민운동본부가출범하면서역할을이양했다. 민주화운동청년연합 회원들의농성 (1985. 10.)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 (1985. 10. 17. 결성 ) Ⅲ. 단체 35
2 민주화추진협의회 ( 민추협, 1984. 5. 18.) 민주화추진협의회 ( 민추협 ) 는가택연금상태에있던김영삼이 5 18민주화운동제3주기인 1983 년 5월 18일부터 6월 9일까지단식투쟁을벌였던것에서발단이되었다. 김영삼은단식투쟁에들어가면서언론통제의전면해제, 정치범석방, 해직인사들의복직, 정치활동규제의해제, 대통령직선제를통한개헌등을주장했다. 1982년 12월 16일형집행정지로청주교도소에서출소한뒤미국으로갔던김대중도전두환정부를규탄하며김영삼의단식투쟁을지지하는시위를벌였다. 김영삼의단식투쟁이예사롭지않다고파악한정부는가택연금을해제했다. 이와같은일련의과정에서김영삼을지지하는모임인 민주산악회 가활성화되었다. 김대중을지지하던정치인들과민주산악회가결합하여 1984 년 5월 18일민추협을결성했다. 민추협에는민주화세력들이참여했고, 12월에는정치활동금지에서해제된인사들도합류했다. 민추협은사무실을마련하는것이매우어려웠다. 그리하여창립초기에는관철동에사무실을두었다가, 1986 년하반기에는종로구관훈동소재근학빌딩 ( 현동덕빌딩 ) 에어렵게사무실을마련했다. 민추협은 1985 년국회의원선거를위해급박하게결성되었던신한민주당 ( 신민당 ) 창당에중추적인역할을했다. 민추협은신민당과동반자적관계를유지했으나, 김영삼이신민당에입당하면서영향력이축소되었다. 민추협은개헌정국에서야당 ( 통일민주당 ) 과사회단체를연계했으며, 박종철고문치사사건의진상규명운동과 6 10민주항쟁에서도일익을담당했다. 이를테면 2월 1일민추협사무실에서김영삼, 김대중, 계훈제, 조남기, 송건호, 박영숙등이참석한가운데 고박종철군국민추도회준비위원회 가발족했다. 6월 26일개최된 국민평화대행진 에서는민추협사무실건물주변에 2,000 여명의당원과시민이집결했다. 김영삼일행은민추협사무실에서출정식을마치고시위를시작했다가경찰미니버스로강제연행되었다. 민추협은 1987 년대통령선거운동국면에서양김을지지하는계파들로분열되었고, 기반이약화되어 12월해산했다. 그러나민추협을기념하기위한모임이계속되었고, 2002년에는사단법인으로부활했다. 민주화추진협의회현판식 (1984. 7. 1. 관철동사무실 ) 민주화추진협의회의국민평화대행진 (1987. 6. 26. 사무실앞 ) 3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 민통련, 1985. 3. 29.) 1983 년 9월 30일 민주화운동청년연합 ( 민청련 ) 결성이후다양한합법성을갖는사회단체들이결성되었다. 이들단체는전반적으로부문운동의성격을지녔는데, 다양한운동부분들의협의체적성격을갖는단체도등장했다. 1984년 6월 29일결성되었던 민중민주운동협의회 ( 민민협 ) 가대표적이라고할수있다. 민민협은청년, 노동자, 농민, 재야, 종교계등의합법운동영역에축적된역량을바탕으로결성되었다. 한편이와별개로재야명망가들이중심이된 민주 통일국민회의 가 10월 16일에결성되었다. 1985 년 2월 12일국회의원선거를치르면서민주화세력의통합이필요하다는공감대가형성되었다. 그리하여두단체가통합하여 3월 29일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 민통련 ) 을출범시켰다. 민통련은서울장충동소재분도회관 ( 현분도빌딩 ) 에사무실을두었는데, 이는민통련에종교계인사들이다수포함되어있었기때문이다. 민통련은재야운동의구심점이었다. 이로인해 1986년 11월 12일당국에의해사무실이강제폐쇄되기도했다. 민통련은 6월민주항쟁에서국민운동본부를구성하는데중요한역할을했으며, 항쟁이후에는종로 3가에사무실을열었다. 1987 년대통령선거에서역할을다하지못한민통련은그위상이약화되었다. 1989년 1월 12일 전국민족민주운동연합 결성에기여한후해산했다. 민주헌법쟁취를위한제 1 차실천대회 가열린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사무실 (1985. 12. 1.)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사무실에대한경찰의수색 (1986. 11. 11.) Ⅲ. 단체 37
4 박종철군국민추도준비위원회 (1987. 1. 24.) 야당과재야그리고사회단체는고문에의한박종철의사망과불분명한사인에대해본격적인대응을하기로결의했다. 이를처음주도한단체는김근태에대한고문사건과부천서권양성고문사건에대처하기위해결성했던 고문및용공조작저지공동대책위원회 ( 고문공대위 ) 였다. 고문공대위는 1987년 1월 17일 고문폭로대회 를열기로하고, 1월 20일부터 29일이전에국민대회를개최하기로했다. 그리고 20일부터 26일까지 박종철추모기간 으로설정하고, 분향소를설치하며추모예배를갖기로했다. 그런데이계획은잘이행되지않았다. 그래서박종철고문치사를조명하고, 죽음을추모하기위한단체를결성하기로했다. 이를위해 1월 24일 박종철군국민추도대회준비위원회 가결성되었다. 고문공대위가실무를담당했는데, 준비위원회의참여자와규모는김재준, 함석헌, 김영삼, 김대중, 지학순, 문익환등 26명으로대거확대되었다. 준비위원회는 1월 26일기독교회관에서발족식을열계획이었으나, 경찰의봉쇄로좌절되었다. 다음날준비위원회는민추협사무실에서발족식을갖고, 2월 7일을 고박종철군의국민추도일 로선포했다. 준비위원회는각계대표 9,782 명을준비위원으로위촉했으며, 참가요령을발표했다. 당국은사전에 2 7추도대회 가개최되지못하도록방해또는통제했으나, 준비위원은 2월 6일 72,674 명으로급증했다. 경찰은추도대회예정일이틀전부터서울도심에서검문 검색을시작했으며, 2월 6일부터는명동성당일대로의이동을차단했다. 경찰의봉쇄에도불구하고, 명동성당에서는 80여명의사제와 800여명의시민과학생등이추도대회를개최했다. 행사장에들어오지못한시민과학생은도심곳곳에서시위를벌였다. 부산에서도추도대회가열렸는데, 경찰이행사장인대각사를봉쇄했다. 다른방법을찾지못한박종철의어머니와누나는부산사리암에서직접타종을하며박종철의넋을기렸다. 고박종철군국민추도대회 (1987. 2. 7. 명동성당 ) 사리암박종철추도타종 (1987. 2. 7. 부산괴정동사리암 ) 3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서대협, 1987. 5. 8.) 와호헌철폐와민주개헌쟁취를위한서울지역학생협의회 ( 서학협, 1987. 5. 29.) 6월민주항쟁은범시민적이고, 전국적인항쟁이었다. 그렇지만항쟁에가장집단적으로참여했던이들은대학생이었다. 비록 1986 년 10월건국대사건으로학생운동이위축되었던것은사실이지만, 1987년박종철고문치사사건과부천서성고문사건의대상자가대학생이라는점에서공분을샀다. 대학가에서는 1987 년 4 19혁명기념일을전후하여학생회조직을정비하고, 강화하는데힘을기울였다. 서울지역에서는 4월말경동부, 서부, 남부, 북부지역으로구분하여대학간조직화방안을모색했다. 그리하여 연합 보다한단계낮은수준의 협의회 를결성하기로했다. 이를바탕으로 5월 8일연세대에서 2,000 여명의학생이참여한가운데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 서대협 ) 가결성되었다. 18개대학생대표들이참석한결성식에서의장에고려대총학생회장을, 부의장에서울대총학생회장을선출했다. 서대협은출범한지얼마되지않았으나, 제7주기 5 18민주화운동기념일투쟁에서중심적인역할을했다. 서대협은 5월 29일 호헌철폐운동 을전담할상설투쟁조직으로 호헌철폐와민주개헌쟁취를위한서울지역학생협의회 ( 서학협 ) 를결성했다. 이와유사한학생연대조직은각지역별로추진되었고, 8월 19일충남대에서 전국대학생대표자협의회 가출범하는기반이되었다. 연세대에서 서울지역대학생대표자협의회 발족 (1987. 5. 8. 동아일보, 5. 9. 6 면 ) 6 월민주항쟁에참여한대학생들 (1987. 6. 서울도심 ) Ⅲ. 단체 39
6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국민운동본부, 1987. 5. 27.) 1985 년후반기부터민주화운동세력은개헌운동을중심으로활동을전개했다. 야당이었던신한민주당은정치사회내부의타협을도모하다가시민사회와점차유리되었다. 이틈을노려전두환정권은 1986년 1월에 1989년까지개헌논의를유보하겠다고발표했다. 이에대해민주화세력과야당은직선제개헌을요구하는서명운동을전개했고, 갈등적협조관계를이루었다. 당국은완강한입장을굽히지않았고, 인천5 3항쟁을기점으로 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 민통련 ) 을탄압하여활동이불가능할상태가되도록만들었다. 그래서민통련을비롯한재야단체들과신한민주당그리고 민주화추진협의회 를망라하는반독재연합전선이필요하다는공감대가형성되었다. 이들은토론과협의를거쳐 1987 년 5월 27일향린교회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 국민운동본부 ) 를결성했다. 국민운동본부는 4 13호헌조치철회와직선제개헌공동쟁취선언 을발표했는데, 지금까지고립분산적으로표시되어오던호헌반대민주화운동을하나의큰물결로결집시키고국민속으로확산시켜나가야한다는데뜻을모았다 고밝혔다. 국민운동본부는 6월 10일부터 6 29선언 이발표될때까지 6월민주항쟁을주도적으로이끌었다. 창립대회사진은없는것으로사료됨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 (1987. 8. 4. 제 1 차전국총회 )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를발기하면서 (1987. 5. 27) 4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Ⅳ 주요발표자료 1 전두환대통령특별담화 (1987. 4. 13.) 전두환대통령은 4월 13일특별담화문을발표했다. 담화문의주된내용은 현행헌법따라연내대통령선거 를실시한다는것인데, 이는지금껏이루어진개헌논의를중단시키는것과다름이없었다. 따라서재야와사회단체, 학생그리고야당의반발을사기에충분했다. 특별담화는 6월민주항쟁이정치 사회전반에서본격화되었던결정적인원인으로작용했다. 특별담화의주요발언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임기중개헌이불가능하다고판단하고현행헌법에따라내년 2월 25일본인의임기만료와더불어후임자에게정부를이양할것을천명한다. 이와함께평화적인정부이양과서울올림픽이라는양대국가대사를성공적으로치르기위해서국론을분열시키고국력을낭비하는소모적인개헌논의를지양할것을선언한다. 얼마남지않은촉박한임기와현재의국가적상황을종합적으로판단하여중대한결단을내리지않으면안되게되었다. 두가지의국가대사를완수한후에충분한시간을두고개헌문제를다시생각한다면나라의백년대계를위한좋은방안이발견될수있을것으로확신한다. 대통령선거인단선거와대통령선거는금년내에공정한선거관리를통해자유경선의분위기가보장되는가운데차질없이실시되도록모든노력을다할것. 민정당의대통령후보는조속한시일내에국민의지지를받을수있는인물중에서당헌절차와민주방식에따라전당대회에서선출되도록할것. 앞으로남은임기동안민주발전의기반을더욱넓히고사회안정과국민화합을다지기위한조치들을더욱과감하게추진해나가고자한다. 그러한노력의하나로국민의정치참여를확대하기위한지방자치제를단계적으로실시해나갈계획이다. 이결단의참뜻은파국을막고정상적인헌정절차에따라명예로운퇴임을매듭짓고자하는데있다. 그럼에도부질없는개헌파쟁에만골몰하여사회혼란을조성하는일이있다면국민생활의안정과사회질서의유지를위하여헌법이대통령에게부여하고있는모든권한에따라단호하게대처할것. Ⅳ. 주요발표자료 41
2 6 10 국민대회행동요강 국민운동본부는 1987년 6월 5일에 6 10국민대회에즈음하여국민에게드리는말씀 과 6 10국민대회행동요강 을발표했다. 집회의행동요강을발표하는것은매우이례적인일이었다. 행동요강은 6월 10일의국민대회에서중요한기준으로작용했다. 수많은사람들이오후 6시에맞추어약속한행동을동시에했던것은오늘날에도종종회자될정도로인상적이었으며, 다른집회와시위에서도유사하게재연되었다. 서학협도이에맞추어 6 10대회에임하는자세, 행동원칙, 슬로건 을미리발표했으며, 6월 9일에는각대학별로 6 10 국민대회참가결의대회를개최하여분위기를고조시켰다. q 6 10국민대회행동요강 1. 당일 10시이후각부문별, 종파별로고문살인조작규탄및호헌철폐국민대회를개최한후오후 6시를기하여성공회대성당에집결, 국민운동본부가주관하는국민대회를개최한다. 2. 1 오후 6시국기하강식을기하여전국민은있는자리에서애국가를제창하고, 2 애국가가끝난후자동차는경적을울리고, 3 전국사찰, 성당, 교회는타종을하고, 4 국민들은형편에따라만세삼창 ( 민주헌법쟁취만세, 민주주의만세, 대한민국만세 ) 을하든지그자리에서 1분간묵념을함으로써민주쟁취의결의를다진다. 5 국민대회는우천불구진행한다. 3. 경찰이폭력으로대회진행을막는경우, 1 전국민은비폭력으로이에저항하며, 2 연행을거부하고, 3 연행된경우에도일체의묵비권을행사한다. 4. 전국민은오후 9시부터 9시 10분까지 10분간소등하고 KBS MBC 뉴스시청을거부함으로써국민적합의를깬민정당의 6 10전당대회에항의하고민주쟁취의지를표시할수있는기도, 묵상, 독경등의행동을한다. 5. 대회가만에하나경찰의폭력에의해무산되는경우부분별 단체별로교회, 성당, 사찰, 기타편리한장소에서익일아침 6시까지단식농성한다. 6. 8, 9일양일간전국민은 6 10국민대회참여를권유하고상호격려하는 전국민전화걸기운동 을전개해주기바란다. 4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7. 또한번부탁하거니와 6 10국민대회는철저하게평화적으로참여해주시기를바라며폭력을사용하거나기물손괴등을자행하는사람은국민대회를오도하려는외부세력으로규정한다. 8. 하오 6시부터성공회대성당에서진행될국민대회식순은추후발표한다. 9. 각도시지방에서도위와같은행동요강으로국민대회를진행하되시간과장소는지역의편의에따라할것이며각계각층이총망라하여준비위원회를구성하여국민대회를가져주기바란다. 6 10 국민대회결의문 (1987. 6. 10. 국민운동본부 ) 6 10 국민대회행동요강 (1987. 6. 5. 국민운동본부 ) Ⅳ. 주요발표자료 43
3 해외언론에보도된 6 월민주항쟁 해외언론들도 6월민주항쟁에관한소식을여러가지주제들로다루었다. 주요한내용은서울도심에서학생과시민의반정부집회와시위가발생했다는사실정보를전달한것이었다. 그렇지만지방도시와전국으로시위가확산되고있으며, 중산층이시위에참여하고있음을주목하는등분석적으로다룬기사도실렸다. 전반적으로보면, 해외언론은 6월민주항쟁이전개되는동안에나타난여러가지사건들을중심으로기사화했다. 한편신문에수록된사진이표상하는이미지는다양했다. 최루탄에흩어지는시위대모습, 명동성당수녀들의침묵시위, 불타는성조기, 진압복을입고휴식을취하는전투경찰, 최루탄을쏘지말라고경찰에게꽃을꽃아주는여성, 승려들의시위, 경찰차로연행되는시민의모습을촬영한사진등다양한현상과관점에서 6월민주항쟁을기사화했다. 4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Ⅴ 문화, 예술 1 음악 1-1. 집회와시위에서불린노래들 유화국면의초반인 1984 년에들어서면서반합법적협의체의성격을갖는문화예술단체들이속속결성되었다. 그러나이들의활동영역은크게한정되어있었다. 사회운동에관한음악과노래는제한된범위에서생산, 유통그리고소비되었다. 대학캠퍼스에서는학생운동또는사회운동을주제로하는노래들이불렸지만, 시민에게는거의전파되지않은상태였다. 1980년 5 18민주화운동이후 1987년 6월민주항쟁이발발하기까지대규모도심집회와시위가거의열리지못했고, 시민의참여도높지않아서이러한종류의음악과노래가대중성을갖기어려웠다. 따라서 6월민주항쟁에서는사람들에게익숙한노래들이선호되었다. 즉 < 애국가 >, < 우리의소원은통일 >, < 선구자 >, < 님을위한행진곡 >, < 광주출정가 >, < 투사의노래 >, < 아리랑 >, < 흔들리지않게 >, < 아침이슬 > 등이애창되었다. 때로는원곡그대로불리지않고, 가사를개사하여불리기도했다. 이를테면, < 우리의소원은통일 > 의경우에는 통일 대신 민주 로바꾸어불렀으며, < 투사의노래 > 는 < 늙은군인의노래 > 를개사한것이었다. 종종집회현장에서는학생들이시민에게노래를가르쳤는데, < 농민가 > 와 < 훌라송 > 등이대표적이었다. < 농민가 > 는 해방춤 을추기위해부르는노래였고, 따라부르기가좋아인기가많았다. 이른바 민중가요 는 87노동자대투쟁을경과하면서더욱널리확산되었다. 한편 9월 5일에는 500여곡의방송금지곡들이해금되었다. 이로인해 < 아침이슬 >, < 솔아솔아푸르른솔아 >, < 파업가 >, < 진짜노동자 > 등이금지곡에서풀렸고, 집회와시위현장에서더빈번하게불리었다. 1-2. 6 월민주항쟁을주제로한노래들 대부분의역사적사건들이그러하듯이, 6월민주항쟁당시에는이를주제로한노래들이만들어지지않았다. 상황이급박하게전개되는국면에서음악가가새로운노래를창작할여유가없었을것이고, 사건이아직마무리되지않은상태에서항쟁을노래로담아내는것은쉽지않았을것이다. 6월민주항쟁에직접다룬노래로는 < 유월의노래 >( 노래모임새벽곡 ), Ⅴ. 문화, 예술 45
< 사랑하는동지에게 >( 윤민석작 ), < 마른잎다시살아나 >( 안치환작사, 작곡 ) 를예시할수있다. 그가운데 < 마른잎다시살아나 > 는이한열추모곡으로명명되었고, 문익환목사가방북하여불러화제를모았다. 안치환이작사 작곡한 이한열열사추모가 도있는데, 상대적으로널리알려져있지않다. 한편박종철의추모곡은 < 친구 2> 이다. 이노래도안치환의작품이다. 박종철의장례식에서는그가애창했던 < 꽃상여타고 >( 작사양성우, 작곡박윤우, 편곡안치환 ) 가합창되었다. 우리들은일어섰다오직맨주먹피눈물로동지를불렀다. 독재타도민주쟁취하나된소리민주와해방의나라이뤘다. 아우리들의수난우리들의투쟁우리들의사랑우리의나라이세상의주인은너와나손맞잡은우리전진하는우리이세상의주인은너와나투쟁하는우리사랑하는우리아해방통일의우리되살아오는유월에아해방통일의우리되살아오는유월에물고문. 성고문. 최루탄. 시민. 노동자. 도시빈민. 학생. 농민. 시청앞. 명동. 종로. 신촌. 권인숙. 박종철. 이한열. 광주. 전주. 부산. 대전. 서울. 호헌철폐. 독재타도. 민주. 통일. 민중. 평화. 해방. 유월의거리는. 해방의거리. 아우리들의수난우리들의투쟁우리들의사랑우리의나라이세상의주인은너와나손맞잡은우리전진하는우리이세상의주인은너와나투쟁하는우리사랑하는우리아해방통일의우리되살아오는유월에아해방통일의우리되살아오는유월에 동지여슬퍼마소서우리는승리하리니지금비록힘들고외로울지나동지여슬퍼마소서그길에하나되리니눈을들어그날을바라보소서우리의가는길에새벽이살아숨쉬고우리의가슴엔반도의청맥이꿈틀거리오가자동지여투쟁의화살되어해방그함성으로되돌아오자 < 사랑하는동지에게 > 서럽다뉘말하는가. 흐르는강물을꿈이라뉘말하는가. 되살아오는세월을가슴에맺힌한들이일어나하늘을보네. 빛나는그눈속에순결한눈물흐르네. 가네가네서러운넋들이가네가네가네한많은세월이가네마른잎다시살아나푸르른하늘을보네. 마른잎다시살아나이강산은푸르러가네가네서러운넋들이가네. 가네가네한많은세월이가네. 마른잎다시살아나푸르른하늘을보네. 마른잎다시살아나이강산은푸르리. < 유월의노래 > < 마른잎다시살아나 > 4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꽃상여타고, 그대잘가라세상의모진꿈만꾸다가는그대이여름불타는버드나무숲사이로그대잘가라꽃상여타고가슴에돋는칼로슬픔을자르고어이어이큰눈물땅에뿌리고그대잘가라꽃상여타고 어두운죽음의시대내친구는붉은눈물붉은피흘리네역사가부른다. 멀고험한길을북소리울리면사라져간다. 친구는멀리갔어도없다해도그눈동자별빛속에빛나네내맘속에영혼도살아살아이어둠을살르리살르리 역사가부른다멀고험한길을북소리울리면사라져간다. 친구는멀리갔어도없다해도그눈동자별빛속에빛나네내맘속에영혼도살아살아이어둠을살르리살르리 살아살아 이장벽을부수리부수리 < 꽃상여타고 > < 친구 2> Ⅴ. 문화, 예술 47
2 사진 2-1. 6 월항쟁 - 사진모음집 ( 부산지역 6 월항쟁자료발간위원회, 1995) 이책은 부산지역 6월항쟁자료발간위원회 가부산지역에서전개되었던 6월민주항쟁에관한사진들을수집 선별하여 1995년에사진모음집으로발간한것이다. 아마도 6월민주항쟁을주제로한첫사진첩으로판단된다. 자료발간위원회는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로발전했으며, 1997 년에 6월항쟁문학작품집 - 유월의노래 와 6월항쟁연구논문집 - 한국민주주의와부산의 6월항쟁 을간행했다. 2-2. 광주는말한다 - 어느사진작가가본 5 18 민중항쟁과 6 월항쟁 ( 신복진, 2006, 눈빛 ) 신복진은 1995년까지 광주일보, 전남매일, 전남일보 등에서사진기자로근무하며, 다양한사건들에관한사진을생산했다. 이책은 5 18민주화운동제26주기를맞아두가지사건, 즉 1980년 5 18민주화운동과 1987년광주에서전개된 6월민주항쟁에관한사진 160여컷을선별하여수록한것이다. 이책에수록된사진의절대다수는 5 18민주화운동에관한것이고, 6월민주항쟁에관한사진은 17컷이다. 6월민주항쟁의사진대부분은 6월 26일금남로를배경으로전개되었던국민평화대행진을촬영한것이다. 그리고 6월 23일택시기사의시위와 7월 9일이한열의장례행렬을촬영한사진이각각한컷씩수록되어있다. 광주는말한다 - 어느사진작가가본 5 18 민중항쟁과 6 월항쟁 ( 신복진, 2006, 눈빛 ) 4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2-3. 80 년 5 월에서 87 년 6 월로 (( 사 )6 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이책은 6월민주항쟁제20주년을기념하여 1980년 서울의봄 부터 6월민주항쟁에관한사진들을선별하여수록한사진모음집이다. 사진모음집의서두에김영삼, 김대중, 박용길, 함세웅의기념사를수록하여정치 사회적으로크게주목을받았다. 수록된사진은 경향신문 사진기자들과고명진 김녕만 나경택 윤석봉 황종건등이촬영한것이다. 서울뿐만아니라여러지역들에서전개된다양한사건과항쟁에관한사진들도수록했는데, 1980 년대초중반의정세가얼마나격정적이었는가를잘보여준다. 또한미국과독일등해외에서이루어진집회와시위사진들도포함하고있어 6월민주항쟁이세계여러곳에서도발생했음을알수있다. 80 년 5 월에서 87 년 6 월로 (( 사 )6 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2007) Ⅴ. 문화, 예술 49
2-4. 198769757922 - 이한열기념비기록집 (( 사 ) 이한열기념사업회, 2015) 2015년 6월 9일연세대에이한열동산이새롭게조성되었고, 기존의추모비를대체하여기념비가신설되었다. 이책은이한열의생전모습, 1987 년 6월최루탄에쓰러진일과장례, 1988년추모비건립, 이한열을추모하는행사, 그리고 2015년새롭게기념비가건립되는과정에관한기록들을모아만든것이다. 책에수록된주된기록물은사진들이지만, 관련자들의소회와견해를담은글들도여럿수록되어있다. 198769757922 - 이한열기념비기록집 (( 사 ) 이한열기념사업회, 2015) 5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 영상 3-1. 6 월민주항쟁을주제로한다큐멘터리 6월민주항쟁에관한첫영상물은 1989 년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주제로한 MBC방송국의다큐멘터리프로그램이었다. 이후다양한형태의영상물이제작되어 6월민주항쟁기념주간에방송혹은발표되었는데, 영상의주제와내용은대체로유사했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도성인용 ( 약 4분 ), 청소년용 ( 약 17분 ), 어린이용 ( 약 12분 ) 6월민주항쟁영상물을각각제작했다. 어린이대상으로만든영상물은 잘못을바로잡는힘 이라는제목으로제작한만화이다.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홈페이지 자료마당 -자료실 -동영상자료실 에 6월민주항쟁에관한영상물을시청할수있도록모아놓았다. 3-2. 2017 년에방송된 6 10 민주항쟁관련프로그램 2017 년은박종철고문치사사건이발발한지 30 년이되는해이다. 이를기념하여방송국 들이영상물을제작하여방송했다. 대표적인사례를예시하면, 다음과같다. < 중앙일보 > 2017. 1. 11. 조작과은폐에맞선사람들, 박종철열사 ( 사업회홈피, 5 분 6 초 ) (http://tv.naver.com/v/1366089) < 팩트 TV> 2017. 1. 13. 박종철열사 30 주기추모영상 ( 사업회홈피, 5 분 9 초 ) (https://www.youtube.com/watch?v=snh0j8ckm8c) Ⅴ. 문화, 예술 51
4 무용 4-1. 이애주교수의 바람맞이 춤과 한풀이 춤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를위한국민평화대행진 을앞두고, 서울대학생과대학원생의사전집회가개최되던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낯선광경이펼쳐졌다. 한여성이집회가본격적으로시작되기에앞서 바람맞이 춤을춘것이다. 소복을입고등장한이여성은광목천을가르며박종철의고문과죽음을애통해하고, 부활과해방을상징적으로표현했다. 이모습은집회에참석또는지켜보던수많은학생과교수등대학구성원에게신선한인상을심어주었으며, 새로운집회문화가널리확산되는계기가되었다. 이춤의주인공은서울대체육교육과에재직중인이애주교수였다. 당시대학교수가집회에서춤을춘다는것은좀처럼상상하기어려운일이었다. 이애주의춤은 7월 9일연세대에서열린고이한열의장례식에서다시등장했다. 연세대학생회관앞에서장례식을마친행렬이교문앞에도달했을때, 이애주는이한열이최루탄에맞아쓰러진자리에서삼베치마저고리차림으로 한풀이 춤을추었다. 억울하게이승을떠나는망자의한을달래듯이, 이애주가아스팔트바닥에쓰러져일어나지않자이한열의어머니가울부짖었고, 어느할머니가이애주를일으켜세우면서춤은계속되었다. 이후장례행렬은수백개의만장과수백개의플래카드를앞세우고신촌로터리로향했다. 이애주교수의 바람맞이 춤공연 (1987. 6. 26. 서울대아크로폴리스광장 ) 이애주교수의 한풀이 춤 (1987. 7. 9. 연세대정문앞 ) 5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 문학 5-1. 박종철추도시 ( 장지희작, 우리는결코너를빼앗길수없다 ) 이시는 1987 년 1 월 20 일서울대학생회관 2 층에서개최된 박종철군추모제 에서언어 학과학생들이바친추모시이다. 이추모시는마석모란공원의박종철묘비뒷면과서울대 교정의추모비에새겨져있다. 1987. 1. 20. 서울대학생회관에서거행된박종철군추모제에서낭독된추모시 ( 박종철기념사업회홈페이지 ) Ⅴ. 문화, 예술 53
5-2. 박종철조시 ( 정호승작, 김광석곡, 부치지않은편지 ) 이시는정호승시인이박종철의죽음을추모하며지은조시이다. 김광석은이시에곡을붙였다. 그런데김광석은이노래를녹음하고, 음원을공개하지않은상태에서사망했다. 1996 년김광석의추모앨범 가객 이발표되었는데, 여기에 부치지않은편지 가수록되었다. 오늘날이노래는박종철뿐만아니라, 민주화운동과노동운동등의과정에서유명을달리한이들의넋을달래는추모곡으로두루애창되고있다. 한편박종철 2주기추모식에서는신경림시인이 십만백만천만의횃불이되어 - 박종철군 2주기에 라는추모시를낭독했다. < 부치지않은편지 > 풀잎은쓰러져도하늘을보고꽃피기는쉬워도아름답긴어려워라시대의새벽길을홀로걷다가사랑과죽음이자유를만나언강바람속으로무덤도없이세찬눈보라속으로노래도없이꽃잎처럼흘러흘러그대잘가라그대눈물이제곧강물되리니그대사랑이제곧노래되리니산을입에물고나는눈물의작은새여뒤돌아보지말고그대잘가라시대의새벽길홀로걷다가사랑과죽음이자유를만나언강바람속으로무덤도없이세찬눈보라속으로노래도없이꽃잎처럼흘러흘러그대잘가라그대눈물이제곧강물되리니그대사랑이제곧노래되리리산을입에물고나는눈물의작은새여뒤돌아보지말고그대잘가라그대잘가라 5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3. 이한열열사를기리며 - 2 주기에부쳐 ( 고은 ) 장례식과추모행사에서이한열을추모하는다양한시와글이발표되거나낭송되었다. 이시는 2 주기를맞아고은시인이추모의뜻을담아만든것이다. < 이한열열사를기리며 > 언제까지싸워야하나언제까지죽어가야하나언제까지언제까지죽어다시태어나싸워야하나오늘산자여기모여짓밟히고갇히고끊임없이쓰러지며산자여기모여머리띠질끈동여매고오열사여오열사여당신을임이라불러임을가슴마다품고이땅덩어리이몸뚱어리산마루턱으로산골창으로저가없는들판으로떨치고일어섰나니일어서모였나니이한열열사여 이하생략 Ⅴ. 문화, 예술 55
5-4. 이한열, 유월하늘의함성이여 ( 이한열추모사업회, 1989, 학민사 ) 이책은이한열기념사업회가사건이발생한지 2주기되던해 11월에발간한추모문집이다. 이책은총 5부로구성되어있는데, 이한열이남긴글과장례실황녹취록, 각종기록등이수록되어있다. 1부는이한열열사의삶과죽음. 2부는애국학생고이한열열사민주국민장, 3부는이한열열사가남긴글, 4부는친구는멀리갔어도, 5부는자료 : 남은흔적들이다. 이한열, 유월하늘의함성이여 ( 이한열추모사업회, 1989, 학민사 ) 5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5. 박종철 ( 김윤영, 2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이한열 ( 서성란, 2005, 민주화 운동기념사업회 ),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는민주화운동과정에서유명을달리한분들의삶과활동그리고죽음의의미를되새기고자 시대의불꽃 시리즈발간사업을추진했다. 이사업의일환으로 2004년에 박종철, 2005년에 이한열 이간행되었다. 박종철 은 박종철, 죽음뒤의이야기, 박종철, 살아서의이야기, 그리고그뒷이야기 로구성되어있으며, 이한열 은 4월의진달래, 그자리위에, 피로얼룩진땅, 별이되러가는구나 로구성되어있다. 각책에는이력과사진그리고열사들이남긴기록과자료들이수록되어있다. 박종철 ( 김윤영, 2004,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이한열 ( 서성란, 2005,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 Ⅴ. 문화, 예술 57
5-6. 유월, 그것은우리운명의시작이었다 - 6 월민주항쟁 20 주년기념 66 인시집 ( 고은외, 2007, 화남출판사 ) 6월민주항쟁제20 주년을기념하여 한국문학평화포럼 이한국시단을대표하는시인 66명의시를모았다. 이시들이만들어진시기는 6월민주항쟁이전개되던당시에쓴것, 항쟁직후또는제20주년맞아새로쓴것등으로다양하다. 시인들은 6월민주항쟁에관한생생한자기체험과감동을시적으로형성화했다. 시집은총 3부로구성되었다. 제1부는그곳에서우리는민주주의의바리케이트를쳤다, 제2부는그대하늘이되었구나, 제3부는나도꽃병으로날아가고싶었지이다. 시집을대표한시인은고은이다. 그는 6 10대회 라는작품을수록했다. 그외에도김규동, 민영, 이기형등의원로시인과양성우, 강은교, 정양, 김준태, 김명수, 홍일선, 김정환, 이영진, 곽재구, 김진경등중진시인, 이은봉, 이재무, 이승철, 박남준, 김용락, 김경미, 나희덕, 정철훈, 박철, 박두교등중견, 그리고전기철, 박후기, 송경동, 조용숙, 손태연, 조성국등신진시인이두루참여했다. 유월, 그것은우리운명의시작이었다 ( 고은외, 2010, 화남출판사 ) 5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7. 100 : 뜨거운기억, 6 월민주항쟁 ( 최규석, 2009, 창비 ) 6월민주항쟁 20주년이었던 2007년, ( 사 )6월민주항쟁계승사업회는만화작가최규석에게 1987년을소재로하는작품을만들어보라고제안했다. 최규석은경남진주에서출생하여상명대만화학과를졸업했으며, 2008년에대한민국만화대상우수상을수상했다. 최규석은여러가지로고민하다어렵사리이일을수락했다. 작품의주요대상은중고등학생이었는데, 이들이끝까지책을읽을수있도록드라마틱하게구성하는데역점을두었다. 또한현대사수업의보충교재로사용될수있게사건들을두루다루었다. 이렇게만든작품은 2008년 1월인터넷과전국학교에 CD로배포되었다. 이때는책으로제작되지않았는데, 작가는자신의의도와다른용도로만화가활용되는것을보고, 수정과보완작업을하여 2009년 6월에 100 라는제목의책을출간했다. 이책은프롤로그와에필로그를포함하여총 12장과부록으로이루어져있다. 목차를살펴보면, 프롤로그반공소년, 1장신입생, 2장웃으면서, 3장빨갱이, 4장각성, 5장지는싸움, 6장열사람의한걸음, 7장벽, 8장진동, 9장카운트다운, 10장 100, 에필로그축제, 그리고부록그래서어쩌자고이다. 주인공은권영호와그가족이며, 다루고있는내용은보도연맹사건, 민주화운동가족협의회, 노동조합결성과탄압, 양성평등, 박종철, 이한열, 6월민주항쟁등이다. 책의주요내용은이한열의장례까지이고, 부록은시민교육센터이한이만든 청소년을위한민주주의강의교안 을바탕으로각색하고재구성한것이다. 100 : 뜨거운기억, 6 월민주항쟁 ( 최규석, 2009, 창비 ) Ⅴ. 문화, 예술 59
5-8. who? 박종철 이한열 ( 카툰박스글, 이종원그림, 2014, 다산어린이 ) 이책은 다산어린이 에서출간한시리즈 Who? 의제3권이다. 글은카툰박스가, 그림은이종원이, 감수는경기초등사회과교육연구회가담당했다. who? 시리즈는전세계인류에영향을미친현대의대표인물들총 50명으로이루어져있다. 이들책은다양한분야에서한국사회에커다란영향을주었던이들의삶과사상을전달하는데초점이있다. Who? 는교양만화로제작되었는데, 주요고객은어린이이지만성인이읽기에도충분하다. 다산어린이 가이책을기획한목적은어린이들이구체적인삶의목표를설정하고희망에찬미래의전망을세울수있도록돕기위한것이다. 이책은제1장종철, 귀여운막내아들, 제2장한열, 책임감이강한아이, 제3장종철, 민주화운동에뛰어들다, 제4장한열, 부당한현실과만나다, 제5장종철, 남영동에지는법, 제6장한열, 최루탄가스로가려진푸른하늘로구성되어있으며, 부록에는 스스로꿈을키우는생각마당, 연표, 교과연계표, 찾아보기 가수록되어있다. 중간에 인물백과 라는코너를두어두사람뿐만아니라관련인물들에대한약전, 사진그리고시설들을소개하고있으며, 시대에대한이해를돕기위한설명문들이포함되어있다. who? 박종철 이한열 ( 카툰박스글, 이종원그림, 2014, 다산어린이 ) 6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9. 유월의아버지 ( 송기역, 2015, 후마니타스 ) 박정기는 1987년 1월 14일남영동대공분실에서경찰의고문을받아사망한박종철의아버지이다. 1928년 10월에출생한박정기는이사건이발생할당시부산시수도국청학양수장에서근무했다. 꿈에서도생각하지못했던아들의불행한죽음, 화장, 임진강에산골이후아버지의삶은완전히달라졌다. 당국의감시와통제에도불구하고, 박정기는민주화운동과유족회활동의최선두를지켰다. 이책은송기역이박정기의구술을받아옮겨적은것으로, 2011년 12월부터 2012년 4월까지 한겨레 신문에연재되었던원고를바탕으로구성되었다. 3인칭시점이대부분이지만, 제3장은 1인칭시점으로서술되었다. 이책은총 7개의장과후기로구성되었다. 본문은제1장예순해의기록, 제2장 1987 년 1월 14일, 제3장 23년, 제4장 6월항쟁, 제5장늙은아비의노래, 제6장한울삶, 제7장산자여따르라이다. 이책이외에도박종철과박정기를주제로한책은여럿이있다. 예를들어보면, 다음과같다. 박정기지음, 박래군정리 (1997), 철아, 이아부지는아무할말이없대이, 개마서원. 김윤영 (2004), 박종철,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1989), 그대온몸깃발되어, 소나무. 전국민족민주유가족협의회 (1997), 누가이들을죽게했는가, 진원. 유월의아버지 ( 송기역, 2015, 후마니타스 ) Ⅴ. 문화, 예술 61
5-10. L 의운동화 ( 김숨, 2016, 민음사 ) 6월민주항쟁이후 28년이되던 2015 년, 이한열기념관에전시되어있던그의운동화가망가졌다. 이운동화는이한열이최루탄에맞던그때신었던것으로, 세월의흐름을견디지못하고부스러진것이다. 이한열이병원으로후송되면서운동화가벗겨졌는데, 당시연세대 4학년이정희가한짝을가족들에게전달했다. 그러나다른한짝은소실되었다. 운동화의훼손을안타까워하던중에미술품복원전문가인김겸박사가 3개월에걸친작업을통해원형의모습을찾게되었다. 작가김숨은이한열운동화의복원과정을소설 L의운동화 로구성했다. 이작품은개인의유품이시대적이고역사적유물로의미를갖게되는과정, 운동화의복원과정전반에관한이야기, 그리고이한열의생존시이야기, 친구들과부모님의이야기등을담았다. L 의운동화 ( 김숨, 2016, 민음사 ) 6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6 증언 6-1. 6 월민주항쟁증언록 (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공원, 2007) 6월민주항쟁제20주년을기념하여부산지역의항쟁에참여했던사람들의증언을모아단행본으로출간했다. 부산지역에서전개된증언이주류를이루고있는데, 당시에관한생생한경험을간접체험할수있는자료라고할수있다. 증언자들은항쟁지도부, 일반시민, 전투경찰등으로다양하다. 6 월민주항쟁증언록 ( 부산민주항쟁기념사업회, 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 민주공원, 2007) Ⅴ. 문화, 예술 63
6-2. 항쟁의시대와그기록 증언록과자료집 (6 월민주항쟁 20 주년기념경남추진위원회, 2008) 경남지역에서전개된 6월민주항쟁에관한증언과자료모음이 2008년에두권의책으로발간되었다. 본래이사업은 6월민주항쟁제20주년기념사업의일환으로추진되었으나, 여러가지어려움으로인해다음해에마무리되었다. 제1권증언자들은항쟁을주도적으로이끌었던사람들과시민등 72명의증언을모은것이다. 제2권자료집은 20여명이자료를제공했는데, 당시수집된각종기록물과 경남도민일보 가 26회에걸쳐보도한기획기사그리고항쟁에관한논문과발제문등이수록되었다. 6 월민주항쟁증언록 1, 2 (6 월민주항쟁 20 주년기념경남추진위원회, 2008) 6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Ⅵ 지역 1 경기지역 1-1. 성남성남에서는 1987년전반기부터호헌반대운동이시작되었다. 주민교회이해학목사와신도들이 4 13호헌조치를규탄하는항거를전개했으며, 3월 17일 성남지역민주사회발전연구회 에서개편된 성남민주화연합 등이투쟁의중심을형성했다. 그래서성남에서는경찰의진압에도불구하고수만명이참가한가운데시청일대에서 6 10국민대회가개최될수있었다. 성남에서는 6월 17~20 일에다시항쟁이일어났는데, 학생들이대거참여했다. 또한수만명의시민이동참했으며, 야간에는노동자가시위에합류했다. 주민교회여성신도들은전투경찰에게카네이션을달아주며, 최루탄을쏘지마라 고호소했다. 그러나야간이되자사복경찰은시민을무차별적으로구타하고연행했다. 성남에서의항쟁은 26일부터 27일새벽까지중앙시장일대에서수만명이참가하여평화대행진을전개하면서일단락되었다. 성남의항쟁은기층민의참여가두드러진것이특징이었다. 이러한투쟁을기반으로 7월 13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성남지역본부 가결성되었다. 1-2. 인천인천에서는 6월 10일부터 26일까지거의매일집회와시위가발생했다. 대학내집회만열린경우는드물었고, 대부분이도심시위로이어졌다. 인천은사실상서울과하나의도시나마찬가지여서정보전달과소통이신속하게이루어졌다. 대학과공단이지역여러곳에분포되어있어순식간에항쟁참여자가증가하는양상을보였으며, 중 고등학생의참여도높았다. 인천에서의항쟁은 민주헌법쟁취인천지역공동대책위원회 가주관했는데, 가톨릭회관, 부평역일대, 맥마장입구, 동인천역일대, 석바위 5거리등이주요항쟁지였다. 인천에서는경찰이극단적인진압을하는양상을보였고, 이에맞선항거도격렬해서많은피해자가발생했다. 6월 17일석바위일대에서중년여성들이최루탄을쏘지말라는의미로전투경찰에게꽃을꽂아주었으나, 다연발최루탄으로화답했다. 6월 26일평화대행진에서 인천지역민주노동자연맹 ( 인노련 ) 의창립보고대회가열렸는데, 이는다른지역에서는볼수없는현상이었다. 이날의시위는자정무렵까지계속되었다. 또한인천에서의 6월민주항쟁은국민운동본부가결성되지않은채, 각계인사들이연대해서항쟁을이끌었다는것이특징이었다. Ⅵ. 지역 65
1-3. 수원 수원에서는수원지역인권위원회와수원EYC 가중심이되어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비롯해지역의민주화와반인권사건들에대한항거를주도했다. 기독교계와천주교계그리고성공회계등의종교단체와수원지역학생공동대책위원회를비롯해 13개단체가 6월 3일 고문살인은폐조작규탄및호헌철폐경기지구평화대행진준비위원회 를결성하여 6월민주항쟁을이끌었다. 수원에서는 6월 10 11 일, 14 17 일, 18일, 22일, 26일에크고작은집회와시위가있었다. 주요항쟁지는수원역일대와남문근처였다. 수원에서도다수의시민들이시위에동참했으나, 상인이시장으로도망친학생들을경찰에넘겨주는경우도빈번했다. 준비위원회는 26일 경기도민주헌법쟁취협의회 로개칭했으며, 항쟁이후지역사회의사회운동을대중화하는데기여했다. 1-4. 안양 다른지역에비해안양에서는일찍이노학연대가활발하게이루어졌으며, 노동운동단체들이당국의탄압을받았다. 1987년에들어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규탄하는활동이시작되었으나, 활동가의상당수가서울의행사들에참여하여안양의집회와시위는활성화되지못했다. 그래서안양에서는국민운동본부가결성되지않았다. 6월 19일, 23일, 26일에대규모도심집회가열렸는데, 19일과 26일은노동운동단체들이, 23일은수원지역대학생들이주관하여개최했다. 항쟁초기에지역에서시위가발생하지않자, 경찰력을서울에투입했던것이대규모도심집회가가능했던환경으로작용한측면이있다. 항쟁은안양 1번가대로변을중심으로전개되었는데, 학생이주관한집회는비폭력을지향했고, 노동자가주관한집회는상대적으로격렬했다. 6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2 강원지역 2-1. 춘천 원주 춘천과원주에서는 1987 년초부터기독교계와천주교계그리고대학가를중심으로민주화운동이전개되었으나, 시민과의결합수준은낮았다. 두도시에서대규모도시시위가발생한것은 6월 18 20 일이었다. 이어서춘천에서는 24일에, 원주에서는 22 24 일에크고작은집회와시위가일어났고, 6월 26일에는두도시모두에서대규모시위가발생했다. 이들도시의항쟁도학생과시민이중심이되었으나, 주요행사에는인근의농민들이참여했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강원본부 는 6월 4일에결성되었고, 뒤이어춘천지부가결성되었다. 춘천은중앙로터리, 운교로터리, 도청앞광장등이, 원주는원동성당과가톨릭센터, 원주역앞, 시청로터리등이주요항거장소였다. 2-2. 태백 태백에서는 6 월 21 일노동자, 기독교신자, 목사등 70 여명이처음으로가두시위를벌였다. 이를계기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태백시지부 가결성되었으며, 26 일에는황지 교회에집결하여평화대행진을벌였다. 2-3. 강릉 강릉에서는 6 월 10 일과 28 일천주교계를중심으로임당동성당에서기도회를열고촛불 시위를시도했는데, 경찰의제지로무산되었다. 2-4. 정선 정선에서는 6 월 29 일 민주개헌강원도민운동정선지부 가결성되었다. 사북성당에집결 하여거리행진을하려했으나, 경찰의탄압으로해산했다. Ⅵ. 지역 67
3 영남지역 3-1. 부산 박종철은부산에서태어났고, 대학에진학할때까지부산에서생활했다. 따라서박종철의죽음은서울만큼부산에도크게영향을미칠수밖에없었다. 이로인해 6월민주항쟁이본격화되기이전에이루어진박종철죽음과관련된모든행사는서울과대등한수준으로부산에서전개되었다. 부산에서의민주화운동은 1985년 5월에결성되었던 부산민주시민협의회 ( 부민협 ) 의역할이컸다. 부민협은 1987년 5월 20일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부산본부 가결성될때까지항쟁을주도했다. 4 13호헌조치가발표되자, 5월부터부산각계에서시국선언이잇달았다. 그러던가운데 5월 17일에분신한노동자황보영국이 27일에사망하면서분위기가격양되었다. 6월 5~13 일에는 5 18광주민중항쟁영령추도사진전 이부산가톨릭센터에서열려매일수백명이관람했다. 대학가에서도 4 19혁명과 5 18 민주화운동에관한기념행사그리고학원민주화운동등이전개되면서반독재열기가뜨거웠다. 이러한정세로인해부산의 6월민주항쟁은 6월 10일부터 28일까지일과처럼전개되었다. 부산에서도서울과유사한형태의농성이펼쳐졌다. 6월 16일남포동에집결한 1만여명의시위대가경찰의저지선에서연좌를하자, 경찰이최루탄을투척했다. 흩어진시위대일부가부산가톨릭센터앞으로도망쳤고, 경찰의진압이다시이루어지면서농성에들어갔다. 자연스럽게이일대는부산 6월민주항쟁의중심지로변모했다. 이농성은 6월 22일해산했는데, 경찰이귀가하는사람들이탑승한버스에최루탄을투척하고폭행을가했다. 이것이불씨가되어 28일까지항쟁이계속되었다. 6월 18일에는서면의시위에참여한회사원이태춘이최루탄을피해좌천동고가도로에서추락하여사망하는사건이발생했다. 부산은도시의공간적특성상대체로서면로터리, 범냇골로터리, 부산역, 시청앞, 남포동, 대청동으로이어지는중심축을따라항쟁이전개되었고, 사상공단일대에서도학생과노동자가연대한시위가수차례발생했다. 부산의항쟁은불과 8년전에발생했던부마민주항쟁의경험과기억이영향을미쳤으며, 대학생과시민이광범위하게결합하여지속적으로항쟁을전개했다. 동아대에는항쟁제20주기였던 2007년 6월에 6월민주항쟁기념비 가건립되었다. 6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부산에서전개된 6 월민주항쟁 (1987. 6.) 부산에서전개된 6 월민주항쟁 (1987. 6.) 부산에서전개된 6 월민주항쟁 (1987. 6.) 6 월민주항쟁기념비 (2007. 6. 건립, 부산동아대교정 ) Ⅵ. 지역 69
3-2. 마산 창원 2010 년에마산시, 구창원시, 진해시가통합하여창원시가되었다. 구창원시는 1989 년에인구가 30만명을넘어서며급격히성장했지만, 마산시를능가하지는못했다. 마산과구창원은인접하여사람의이동이많았는데, 6월민주항쟁이주로발생한곳은마산이었다. 마산 창원의항쟁은 2월부터 5월까지주요사건과행사를매개로전개되었다. 3 15의거, 4 19혁명, 그리고부마민주항쟁의배경이전개되었던마산에서는경남대를비롯해서성동에위치한 3 15의거기념탑, 마산역, 6호광장일대를중심으로, 창원에서는창원대를중심으로항쟁이펼쳐졌다. 마산에서는 6월 3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경남본부 결성을위한준비모임이열렸고, 6월민주항쟁을계기로공식화했다. 이단체를중심으로 6월 29일까지집회와시위가전개되었다. 특히 6월 26일열린 민주헌법쟁취를위한국민평화대행진 은자정이한참지난시간까지도심곳곳에서격렬히펼쳐졌다. 마산의항쟁은후반으로갈수록시민의주도성이두드러졌고, 경찰에대한항거가거세어졌다. 마산에서전개된 6 월민주항쟁 (1987. 6. 마산양덕파출소전두환사진 ) 마산에서전개된 6 월민주항쟁 (1987. 6. 경남대에서불탄안기부차 ) 7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3. 진주 진주의 6월민주항쟁은대학가의박종철고문치사규탄과학원민주화를쟁점으로촉발되었다. 6월 10일항쟁의주력이마산의집회에참석한가운데, 진주에남은학생과시민을중심으로경상대에서국민대회가열렸다. 대학가는당국의탄압과회유로충분한역량을갖추지못했으나, 6월 15일부터적극적으로대응하기시작했다. 학생들은시청앞으로진출하여집회를열었고, 시민과고등학생등이동참하면서 3,000 4,000 명의시위대가형성되었다. 16 17 일에는경찰의연행과과잉진압에항의하는집회를열다가남해고속도로를점거했는데, 이로인한피해가상당했다. 이후진주의항쟁은소강상태를보이다가 6월 26일에고조되어진주역광장에 1만여명이집결했다. 진주의항쟁은학생이촉발시키고, 시민과노동자, 농민이동참했으며, 고속도로점거가이루어졌던것이특징이었다. 3-4. 거창 경남시와군에서도항쟁이전개되었다. 몇몇지역들을중심으로살펴보면다음과같다. 거창은거창성당이항쟁의중심지였다. 2월 7일에는이곳에서 고박종철군추모기도회 가열렸고, 매일은아니지만전국적으로동시에행사가개최되면거창에서도집회가열렸다. 거창의항쟁은민주당지구당앞에집결하여읍내행진을하고돌아오는방식이었다. 3-5. 김해 김해에서는 6 월 26 일개최한 민주헌법쟁취를위한토론회 가경찰의봉쇄로무산되자, 거리로진출하여시위를벌였다. 3-6. 진해 진해에서는 6 월 26 일민주당당원이주도하여시위를벌였고, 시민들이동참했다. 3-7. 대구 1980 년대중반, 대구의민주화운동은 1985 년에결성된 경북민주통일민중운동연합 ( 경북민통련 ) 이구심점을이루었다. 1987 년초무렵, 박종철고문치사사건에대한항거는경 북민통련과신민당대구경북지부가연대하여추진했으며, 영남대학생 5 명이경북도경대 Ⅵ. 지역 71
공분실에서자행된구타와물고문을공개하며진상규명을요구하기도했다. 5월에는교수와사회단체들이 4 13호헌조치를규탄하는내용의시국성명을발표했고, 이열기를모아 5월 21일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범국민운동대구경북본부 가결성되었다. 대구에는경북대, 계명대, 대구대, 영남대등의학생들이연대하여도심집회와시위를주도했다. 대구의항쟁은 6월 10일개시되었고, 크고작은집회와시위가 6월 15일부터 26일까지대학캠퍼스와도심에서계속펼쳐졌다. 대구지역항쟁의주요장소는중앙공원, 대구백화점일대, 유신학원네거리에서반월당네거리, 명덕로터리, 수도산사이의간선도로등이었다. 3-8. 안동 안동에서의 6월민주항쟁은천주교회의역할이컸다. 박종철고문치사사건부터 6 월민주항쟁이종료될때까지학생과시민그리고종교계가연대하여집회와시위를벌였다. 4 13호헌조치가발표되자, 천주교신부들은단식기도회에들어갔고, 관련단체들은여러종류의성명서를발표했다. 안동의항쟁은 6월 10일국민대회, 21 26 일목성동성당에서의농성과가두시위, 6월 26일평화대행진이주요했다. 한편 6월 25일에는기독교회가주관하는촛불집회가개최되었다. 안동의항쟁에는가톨릭농민회의주도성이두드러졌고, 안동, 상주, 점촌, 봉화, 영덕, 청송, 영양등에서국민운동본부지역조직이결성되었다. 3-9. 포항 포항에서는 6월민주항쟁이전개되면서처음으로대규모가두집회가열렸다. 포항의항쟁은 포항민주화운동연합 ( 포민련 ) 이주도했는데, 6월 10일국민대회와 26일평화대행진이주요행사였다. 도심집회장소는죽도시장일대, 대흥백화점일대, 국민은행네거리등이었다. 도심집회와시위가발생하면, 학생과시민은물론다수의노동자가참여했는데, 이들의경험이 87노동자대투쟁에서중요하게작용했다. 3-10. 의성, 상주 경북지역에서는의성, 상주등에서박종철죽음의진상규명과헌법개정을요구하는항거 가이루어졌다. 이들지역의항쟁은천주교회와밀접하게관련을갖고있었다. 의성에서는 26 일에도집회가열렸다. 7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3-11. 영주 영주에서는불교계와연대하여박종철추모제례가열렸다. 3-12. 기타경북지역의항쟁 6 월 26 일김천, 영천시에서집회가열렸다. 군위, 청송, 금릉, 상주, 선산의지역민이참여 했다. Ⅵ. 지역 73
4 충청지역 4-1. 대전 1986년 4월 19일개최된신민당대전시개헌현판식은대규모가두시위로변화했다. 이러한분위기는 1987 년박종철고문치사에대한항거로이어졌다. 충남지역민주화운동은청년단체들의역할이컸으며, 종교계에서도성명서발표등으로힘을더했다. 충남지역에서는서울에서각종단체들이결성되는것에맞추어지부들이결성되었다. 이들이중심이되어도심집회와시위가전개되었고, 4 13호헌조치와 5 18민주화운동기념주간등이연속되면서 6월까지크고작은행사들이줄을이었다. 그리하여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충남도민운동본부 가 6월민주항쟁직전에결성되었고, 이를중심으로 28일까지거의매일집회와시위가발발했다. 대전에서의항쟁은중앙로를중심으로성심당제과, 대전극장, 중앙시장, 중앙데파트, 대전역, 대전제일감리교회인근, 선병원, 동양백화점앞, 선화동등에서주로전개되었다. 항쟁은초반엔평화적으로이루어지다가 15일이후부터는격렬한방식으로전개되었다. 서울및다른지역들과마찬가지로, 16일과 26일시위의규모가특히컸다. 대전에서는 19일시위에서한시위자가경찰버스를탈취하여저지선을뚫다가경찰을사망하게한사건이일어나면서항쟁이다소주춤하는양상을보였다. 4-2. 천안 천안에서는 6월 10일오룡동성당에서경찰의방해에도불구하고시민대회가열렸다. 대학생들은고속터미널과한일쇼핑센터, 미도백화점앞, 천안역등에서집회와시위를벌였다. 잠시소강상태를보이던항쟁은 15일에다시고조되어 17일까지는대학캠퍼스를근거지로재개되었다. 항쟁은다시소강상태를맞아 21일까지간헐적으로전개되다가 26일평화대행진을계기로다시분출했다. 천안에서의항쟁은인근지역에서모여든농민들의참여가눈에띄었다. 4-3. 그외충남지역의항쟁 공주와부여등중소도시와군에서도 6 월민주항쟁이준비되었으나, 경찰의봉쇄로성사 되지못했다. 7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4-4. 청주 충북지역에서는 1970 년대부터종교계와재야가밀접하게관련을맺고민주화운동과인권신장을위한활동을전개해왔다. 이러한흐름은 1980 년대에도계속되었고, 1985 년 4월 15일에는 충북민주운동협의회 가결성되었다. 청주에서는 1986년신민당개헌현판식을통해지역운동이성장했으며, 1987년박종철고문치사진상규명투쟁과민주헌법쟁취를위한운동이적극적으로전개될수있었던터전이되었다. 그리하여 5월 15일 충북지역장기집권 호헌책동분쇄투쟁위원회 가결성되었는데, 이는 6월 5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충북본부 로개칭되었다. 청주에서의항쟁은충북본부를중심으로하여조직적으로전개되었다. 청주에서의항쟁은 6 10국민대회이후잠시주춤하다가 15일부터대학생들을중심으로재개되었는데, 19일부터 21일까지는도심에서대규모집회와시위가전개되었고, 26일부터다시고조되어 28일까지이어졌다. 청주에서는상업은행앞, 국민은행앞, 도청과상당공원, 수아사, 우체국, 남궁병원앞, 시외버스터미널, 육거리등이주요항쟁지였다. 도심집회와시위는격렬했다. 시위대가경찰의진압장비등을빼앗거나소각시켰으며, 파출소등공공기관과언론를공격하기도했다. 7월 9일에는국민운동본부가이한열추모대회를열었고, 도심행진을벌였다. 청주에서의항쟁을기념하여 2007 년 6월성안동국민은행과남궁병원육거리에각각표지석이건립되었다. 87 년 6 월민주항쟁역사의자리 (2007. 6. 10. 건립, 충북청주시성안동 ) Ⅵ. 지역 75
4-5. 충주 충주에서는 6 월 19 일에촛불행진이있었고, 28 일부터 29 일새벽까지중앙로터리일대에서 격렬하게시위가전개되었다. 4-6. 제천 제천에서는 6 월 25 일중앙성결교회앞에서경찰과대치하는집회가열렸으며, 이날을 전후해서크고작은시위가있었다. 7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 호남지역 5-1. 광주 5 18민주화운동의주요현장이었던광주는한편으로는아픔과피해를수습하고, 다른한편으로는민주화운동의새로운전기를마련하는데열정을다했다. 그리하여 1980 년대중반에민주화운동을추진할역량이거의복원되었다. 5 18민주화운동관련단체들도속속창립되어중요한역할을담당했으며, 민주화운동관련구속자가족모임도결성되어활발히활동했다. 1984년말에는 전남민주주의청년연합 ( 전청련 ) 이결성되는것을비롯해여러단체들이등장했고, 1986년 3월 30일에는 개헌추진위전남도지부 결성대회가열렸다. 노동자, 농민, 종교계, 교육등의부분에서도단체들이속속결성혹은복원되었다. 이처럼 5 18민주화운동의후유증을어느정도극복한상태에서 1987년을맞았던바, 박종철고문치사와 4 13호헌조치등에적극적으로대응할수있었고, 5 18민주화운동계승주간의열기는단절이없이고스란히 6월민주항쟁으로이어졌다. 5월 18일망월묘역에서열린추모식에서 4 13호헌조치반대및민주헌법쟁취범도민운동본부 가발족했다. 서울에서국민운동본부가발족한것보다 10여일앞서개헌운동을주도할지역조직이결성된것이다. 광주의 6월민주항쟁은이와같은기반에서 28일까지매일계속되었는데, 밤을지새우기일쑤였다. 광주에서의항쟁은금남로, 충장로, 중앙로가주된항쟁지였고, 시외버스공용터미널과금남로 5가등에서도시위가발생했다. 광주에서는 5 18민주화운동당시의경험이바탕이되어매우격렬하게전개되었다. 항쟁참여자는순식간에수만명으로늘어났으며, 고등학생을비롯해노동자와여성이조직적으로참여했다. 민주헌법쟁취전남농민위원회 도결성되었던바, 광주인근지역의농민들이광주로이동하여시위에참여했다. 광주에서전개된 6 10 민주항쟁 (1987. 6. 전남일보, 2013. 6. 7.) 제 2 차전남대민주학생비상총회 (1987. 6. 전남대 5 18 광장, 전남일보, 2013. 6. 7.) Ⅵ. 지역 77
5-2. 목포 목포에서는 6월 10일에 5 18민주화운동이후가장많은사람들이모였다. 시위대는시민회관과목포역등을중심으로항쟁을벌였는데, 만여명이훌쩍넘었다. 목포에서는목포대학생과청년단체, 사회단체, 종교계등이긴밀히관계를맺고항쟁을이끌었다. 목포의항쟁은 17일, 19~21 일, 26~28 일에주로이루어졌다. 5 18민주화운동이가장마지막까지전개되었던도시가목포라는점이말해주듯이, 목포의항쟁은격렬했으며, 새벽까지시위가이어졌다. 6 월민주항쟁기념물 청춘 (1997. 6. 건립, 목포대교정 ) 5-3. 순천 순천과여수는전남지역이지만 5 18민주화운동이발발하지않은지역이다. 혹자는이를 1948 년 10월에발생한 여순사건 이미친영향이라고말한다. 하지만 6월민주항쟁은이러한굴레에서벗어나는계기였다. 6월 10일에는순천대학생들이주도한가운데전날의약속대로순천의료원일대에서대규모시위가발생했다. 순천에서다시항쟁이시작된것은 18일부터였는데, 이후 21일까지도심시위가있었고, 26일에는 5만여명이참석한국민평화대행진이개최되었다. 한때순천에는경찰력이광주로이동하여시위를진압할수없는상태였지만, 후반에는상당수가귀대해있었다. 경찰은이를바탕으로 26일밤제일교회에서농성을하던 100여명의학생과시민을폭력적으로진압하여지역민의원성과분노를샀다. 78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5-4. 여수 여수는상대적으로늦게항쟁이시작되었다. 6월 23일 전남민주회복국민협의회여수 여천지부 와 전청련여수위원회 가교동 5거리에서주도한궐기대회에수만명이참석하여도심은사람들로가득했다. 광주에동원되었던여수경찰이복귀하여극단적으로진압하자항쟁은격렬해졌다. 이후 24일부터 27일까지는새벽까지대규모행진과시위가전개되었다. 5-5. 무안 무안에서는오랫동안다져진농민운동을기반으로박종철고문치사사건을비롯해 4 13 호헌조치등을규탄하는집회가시위가지속적으로이루어졌다. 이러한역량이바탕이되어 6월 26일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무안군지부 가결성되었고, 이날평화대행진행사를개최했다. 무안은목포와인접하여상당수의지역민이목포의항쟁에참여했다. 5-6. 그외전남지역의항쟁 해남, 담양, 완도, 장흥, 강진, 함평, 구례, 광양, 화순, 장성등에서도 6월민주항쟁이전에또는항쟁기간동안다양한집회와시위가있었다. 이들지역에서는농민회의역할이매우컸으며, 지역의종교계와연대하여항쟁을이끌었다. 이러한연유로헌법개정을비롯해농민들의생존권에관한내용들이쟁점으로부각되었다. 5-7. 전주 5 18민주화운동은전북지역에도많은영향을미쳤다. 5 18민주화운동에서발생한첫희생자가광주가아닌전주에서발생했다는점을주목할필요가있다. 1982년에는 오송회 사건으로많은사람들이억울하게희생되었다. 전주에서는 1984년 10월 11일 전북민주화운동협의회 ( 전민협 ) 가창립되었다. 전민협은정부의집중적인탄압을받았으나, 6월민주항쟁이본격화될때까지지역운동의구심이었다. 전주는개헌을요구하는열기로뜨거웠고, 1987년에는박종철추모행사들과학원민주화운동이전개되었다. 5월 21일에는 호헌반대민주헌법쟁취전북위원회 (5월 27일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가결성된뒤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전북본부 로개칭 ) 가결성되었고, 6월초에는 전북지역학생협의회 ( 전학협 ) 의출범이준비되고있었다. 6월 8일에는현직교사 17명이시국선언을하여주목을받았다. 전주의 6월민주항쟁은덕진성당에서시작되었다. 이들은도심으로진출하여행진을벌였고, Ⅵ. 지역 79
여러곳에서형성된시위대와합류하여경찰과충돌했다. 이후전주의항쟁은소강상태를보이다가 19일부터 26일까지도심에서매일시위가전개되었다. 시위가확산되자, 20일이후에는국민운동전북본부와전민협그리고대학생등이구성한비상대책위원회가항쟁을이끌었는데, 많은고등학생이참여했다. 특히도민평화대행진이열린 6월 26일에는 10만여명으로추산되는대규모인파가시위에참가했는데, 군부독재장례식을열고횃불시위를전개했다. 27~28일에도소규모시위가일어났다. 5-8. 익산 익산에서는원광대총학생회와민주화발전추진위원회가항쟁을주도했다. 6월 10일학교에서집회를가진학생들은익산역으로진출했으며, 여러대열로산개하여미도백화점, 이리경찰서, 상업은행, 중앙시장, 창인동성당등에서시위를벌였다. 모현로터리에모인시위대의규모는 1만명이넘었다. 익산에서의항쟁에는노동자의참여가많았다는점과종교계에서다양한나름의방식으로항쟁을벌였다는점이특징이다. 이와같은익산에서의항쟁은 27 일까지다양한규모로계속되었다. 후반에이르면, 항쟁이더욱격렬한양상으로전환되어관공서에대한항거가쇄도했다. 5-8. 군산 군산과옥구에서는기독교계와천주교계성직자들이항쟁을주도했으며,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본부군산 옥구지부 가결성되었다. 군산에서는군산역에집결했다가여러경로로도심행진과시위를벌이는양상으로항쟁이전개되었다. 군산에서는 15일과 18일에도시위가발생했는데, 15일은원광대학생들이주도한것이었다. 주춤하던군산에서의항쟁은 26일에 2만여명이참석하여대규모로전개되었다. 이열기는 29일까지이어졌으며, 경찰과격렬히충돌했다. 전반적으로 29일에는시위가발생하지않거나소규모로이루어졌는데, 군산에서는연행자석방을요구하며 30일까지시위가계속되었다. 5-7. 그외전북지역의항쟁 김제, 남원, 정읍, 부안, 고창등에서는지역농민회와청년이중심이되어간헐적으로집회와 시위를벌였다. 이들지역에서의항쟁은운집이용이한시청이나군청일대에서개최되었는데, 6 월 26 일에정점을이루었다. 80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6 제주지역 제주는대한민국정부수립이후수십년동안 4 3사건의후유증을앓았다. 그로인해 1980년대전반기에이르러서야비로소학생과청년을중심으로민주화운동의맹아들이형성되었다. 제주의민주화운동은제주대학생들이중심이되었는데, 1985 년을전후하여차츰대중화되어갔다. 1986년 3월에는 제주대민주헌법쟁취투쟁위원회 가결성되었고, 5 18 민주화운동기념주간에축적된역량을바탕으로하반기내내민주화운동이전개되었다. 1987년에는 4 13호헌조치발표를계기로민주화의요구가고양되었고, 4 19혁명과 5 18민주화운동기념주간을경과하면서역량이성장했다. 그렇지만의견차이로인한갈등으로주춤하기도했다. 6월 10일에는제주대에서범도민시국대토론회가열린후시위가있었다. 이후제주에서 6월민주항쟁이다시분출한것은 21일부터 26일까지였다. 학생과시민은중앙로를중심으로집회와시위를이어갔고, 중앙성당에서는농성과더불어활발한토론이벌어졌다. 서귀포에서는 6월 26일천주교복자교회앞에서시위가시작되어평화행진이펼쳐졌는데, 이는한반도의가장남단에서전개된 6월민주항쟁이었다. 6월민주항쟁을기념하여 2011년 6월 25일 서귀포 6월민주항쟁기념비 가건립되었다. 제주지역에서의 6 원민주항쟁 (1987. 6. 서귀포. 헤드라인제주, 2012. 6. 1) 서귀포 6 월민주항쟁기념비 (2011. 6. 25. 건립, 제주도서귀포시 ) Ⅵ. 지역 81
Ⅶ 관련시설과행사 1 관련시설 1-1. 고박종철관련시설 경찰의고문으로사망한박종철시신은화장되었고, 그의유해는임진강에뿌려졌다. 이를애석해하던사람들이 1989년 3월 3일마석모란공원에묘지를만들었다. 안장에앞서치르지못한장례식이서울대아크로폴리스광장에서열렸다. 관에는그의유해가뿌려졌던임진강의흙한움큼을넣었다. 지인과선후배는그를추모하는시설들을설치했다. 1991 년 10월 24일서울대중앙도서관오른편에식재한추모나무와알림석이가장처음이라고할수있다. 이일은 종철이를추모하는벗들 이주관했다. 알림석에는 우리는결코너를빼앗길수없다 라는글귀가새겨져있다. 이어서 고박종철추모조형물과흉상 이건립되었다.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 가제10 주기 (1997.) 에건립한이조형물은홍성담화백이설계구성을맡았다. 흉상기단부에는박종철의죽음이 6월민주항쟁의촉발제가되었다고명시했다. 모교인부산혜광고에는 2004년에 박종철쉼터 와 박종철추모비 가들어섰다. 제20주기였던 2007년에는경찰청인권보호센터에 박종철기념관 건립이시작되었고, 2008년 6월 10일에개관했다. 그가숨을거두었던 509호는당시처럼재현되었으며, 4층에는전시실이만들어졌다. ( 사 ) 민주열사박종철기념사업회는 오늘을사는우리시민, 학생들이열사가죽음과맞바꿔가면서지키려고했던참된민주주의가무엇인가? 또한열사가그토록갈망했던인간다운평등세상이무엇인가를배우고실천하는살아있는역사의산실입니다 라고밝혔다. 82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고박종철묘지 (1989. 3. 3. 조성, 마석모란공원 ) 고박종철추모조형물과흉상 (1997. 6. 건립, 서울대 ) 박종철쉼터와박종철추모비 (2004. 6. 건립, 부산혜광고 ) 박종철기념관 (2007. 6. 10. 건립, 경찰청인권보호센터 ) Ⅶ. 관련시설과행사 83
1-2. 고이한열관련시설 1987년 7월 5일사망한이한열을추모하기위한사업은비교적빨리시작되었다. 그의가족들은 1990년 12월에국가배상금으로서울마포구창천동에가옥을구입해 이한열기념관 을만들었다. 그런데이곳이재개발지역으로편입되면서 1996년에노고산동으로이전해야했다. 동문들은 2003 년 이한열기념관 을신축하기로의견을모았고, 2005 년 6월에지하 1층, 지상 4층건물을기념관으로개관했다. 이곳에는이한열의유품과삶의궤적, 그리고 6월민주항쟁이전시되어있다. 한편연세대교정에는 한열공원 이있다. 그의장례방법과장지등을의논하는과정에서교내에추모탑을세우기로한것이발단이었다. 그리하여 1988년 9월연세대학생회관왼편언덕을 한열공원 으로명명하고, 추모비를건립했다. 2015 년 6월에는 백양로재창조 공사로인해기존추모비를대체하는 이한열기념비 가신설되었고, 2016 년에는이한열이피격당한연세대교문의바닥에 기념동판 이설치되었다. 한편이한열이사망한지 20주년이되던 2007년에는그의모교인광주진흥고교정에 민주열사이한열상 이건립되었다. 이한열기념관 (2005. 6. 건립, 서울마포구노고산동 ) 한열공원 과추모비 (1988. 9. 14. 건립, 연세대 ) 새로조성된 한열공원 과추모비 (2015. 6. 건립, 연세대 ) 민주열사이한열상 (2007. 7. 5 건립, 광주진흥고교정 ) 84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1-3. 고이태춘관련시설 회사원이태춘은 6월 18일부산시서면에서열린 6월민주항쟁에참여했다. 이날부산에서는 6월민주항쟁기간동안가장큰시위가발생했다. 밤 10시무렵, 경찰이시위대를향해다량의최루탄을발사했다. 최루탄가스를피해시민과학생은흩어졌고, 이과정에서이태춘이좌천동고가도로아래로추락했다. 그는인근에위치한재해병원으로이송되어치료를받았으나, 혼수상태에서깨어나지못한채 6월 24일사망했다. 다음날장례를치른이태춘의유해는양산천주교공원묘지에안장되었다. 6월민주항쟁 20주년이되는 2007 년 6월 9일 6 월민주항쟁 20주년부산사업추진위원회 가사고가발생한현장에추모비를세우려했다. 그렇지만부산시와협의가결렬되면서추모비건립이무산되었다. 이에부산사업추진위원회는부산민주공원내넋기림마당에 6월민주항쟁 20주년기념민주열사추모비 를설치했다. 6 월민주항쟁 20 년기념민주열사추모비 (2007. 6. 24. 부산민주공원 ) 6 월민주항쟁부조와제단 ( 부산민주공원 ) Ⅶ. 관련시설과행사 85
1-4. 헌법재판소 6월민주항쟁의핵심쟁점은헌법개정이었다. 국회에서는개헌의내용을두고정부의입장과같은 민정당안 과 민주당안 이대립했다. 여야는 8인정치회담 를구성하고, 7월 31일부터 9월 16일까지약 100개항에이르는쟁점사항들에대해협상을했다. 이합의에따라 9월 17일 헌법개정특별위원회 가전문과본문 10장 130조그리고부칙 6조로이루어진개헌안을국회에제출했다. 개헌안은 10월 12일여야합의로국회를통과했고, 10월 27일국민투표에서 93.1% 의찬성을받아 29일에최종공포되었다. 제6공화국헌법은여야타협의산물로문제점이많은것이사실이나, 이전헌법에비하면크게달라진것이었다. 특히주목할점은 헌법재판소 신설이다. 헌법재판소는제2공화국헌법하에서인정되다가제3공화국헌법에서폐지되었다. 헌법재판소는입법부, 행정부, 사법부와별개인독립적기관으로권력의견제와균형을유지하게하고, 헌법질서를수호하여국민의기본권을보장하며, 민주정치이념을실현하는것으로목적으로했다. 헌법재판소의권한은위헌법률심판권, 탄핵심판권, 위헌정당해산심판권, 국가기관상호간의권한쟁의심판권, 헌법소원심판권이었다. 헌법재판소는 국민의기본권을신속하게보호하고, 사회적약자와소수자의목소리를반영하고, 사회적갈등을조화롭게해결하여국가와사회를통합하려는헌법의정신을구현하는것 을지향한다고천명했다. 헌법재판소는 9인의재판관으로구성되는데, 3인은대통령이임명하고, 3인은대법원장이, 3인은국회가선출한다. 헌법재판소의권한과권위는실로지대하여 1988 년 8월 5일법률제4408 호에의거하여설치된이래한국사회에큰영향과변화를주는중대한사건들을판결했다. 헌법재판소 (1988. 8. 5. 설치, 종로구재동소재 ) 86 6 10 민주항쟁수업자료개발교재
2 기념행사 6월민주항쟁은일정하게성과를거둔사회운동으로평가된다. 그래서이를기념하고계승하기위한행사들이해마다다양하게개최되고있다. 이들행사는 20여년동안은시민사회의주관하에사회운동의성격을갖는집회혹은의례로열렸다. 이과정에서국가차원에서기념하는행사로제도화해야한다는주장이지속적으로제기되었다. 6월민주항쟁이한국사회에끼친영향과의미의측면에서보면, 국가적기념행사에대한요구는바람직했다. 그렇지만대통령선거에서야권분열과반목이신군부가계속해서집권하는중요한원인이된점이국가적기념행사의개최에걸림돌로작용했다. 국가기념일지정요구는김영삼정부가출범한 1993년부터본격적으로분출했지만, 실현되었던것은노무현정부시기인 2007년 4월이었다. 국가기념일의명칭은 6 10민주항쟁기념일 로명명되었다. 기념식은정부 ( 행정자치부 ) 와민주화운동기념사업회의주관하에열린다. 그렇다고시민사회가주관하는기념행사가사라진것은아니었다. 국가기념식과별도로시민사회가주관하는기념식이대한성공회서울대성당에서열린다. 또한각지역별로여건에따라기념식, 학술행사, 전시회, 공연등이개최되고있다. 정부주관 6 10 민주항쟁기념식 (2016. 6. 10. 한국프레스센터 ) 시민사회단체주관 6 월민주항쟁기념식 (2016. 6. 10. 성공회대성당 ) Ⅶ. 관련시설과행사 8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