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서 09:30~09:40 개회사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09:40~10:10 기조강연친일인명사전발간의역사적의의 이만열전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주제발표사회 박수현민족문제연구소 10:10~10:50 1주제 친일인명사전수록자선정기준과범주 발표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토론

Similar documents
120~151역사지도서3

(012~031)223교과(교)2-1

5 291

allinpdf.com

한국의 양심적 병역거부

152*220


<B3EDB9AEC0DBBCBAB9FD2E687770>

p529~802 Á¦5Àå-¼º¸í,Ç×ÀÇ

¹é¹üȸº¸ 24È£ Ãâ·Â

1. 보고서의 목적과 개요 (1) 연구 목적 1) 남광호(2004), 대통령의 사면권에 관한연구, 성균관대 법학과 박사논문, p.1 2) 경제개혁연대 보도자료, 경제개혁연대, 사면심사위원회 위원 명단 정보공개청구 -2-

2002report hwp

ad hwp

(중등용1)1~27

< C617720BBF3B4E3BBE7B7CAC1FD20C1A632B1C72E687770>

197

단양군지

ps

1. 상고이유 제1점에 대하여 구 도시 및 주거환경정비법( 법률 제9444호로 개정되기 전의 것, 이하 구 도시정비법 이라 한다) 제4조 제1항, 제3항은 시 도지사 또는 대도시의 시장이 정비구 역을 지정하거나 대통령령이 정하는 경미한 사항을 제외한

61..

총서12. 프랜차이즈 분쟁사례 연구

CR hwp

A 목차

2016년 신호등 10월호 내지.indd

뉴스95호

È޴ϵåA4±â¼Û

º»ÀÛ¾÷-1


<C1DF29B1E2BCFAA1A4B0A1C1A420A8E85FB1B3BBE7BFEB20C1F6B5B5BCAD2E706466>

*부평구_길라잡이_내지칼라

감사회보 5월

2002report hwp

<3235B0AD20BCF6BFADC0C720B1D8C7D120C2FC20B0C5C1FE20322E687770>

핵 심 교 양 1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 문학과예술 역사와철학 사회와이념 선택 교양학점계 학년 2 학년 3 학년합계비고 14 (15) 13 (

세미나자료 전국초 중 고성교육담당교사워크숍 일시 ( 목 ) 10:00~17:00 장소 : 한국교원대학교교원문화관

이발간물은국방부산하공익재단법인한국군사문제연구원에서 매월개최되는국방 군사정책포럼에서의논의를참고로작성되었습니다. 일시 장소주관발표토론간사참관 한국군사문제연구원오창환한국군사문제연구원장허남성박사 KIMA 전문연구위원, 국방대명예교수김충남박사 KIMA객원연

1960 년 년 3 월 31 일, 서울신문 조간 4 면,, 30

12 December 소비자의날안전점검의날 (273 차 ) 무역의날 대설 ( 大雪 )

<B3EDB4DC28B1E8BCAEC7F6292E687770>

01정책백서목차(1~18)

저작자표시 - 비영리 - 변경금지 2.0 대한민국 이용자는아래의조건을따르는경우에한하여자유롭게 이저작물을복제, 배포, 전송, 전시, 공연및방송할수있습니다. 다음과같은조건을따라야합니다 : 저작자표시. 귀하는원저작자를표시하여야합니다. 비영리. 귀하는이저작물을영리목적으로이용할

<37322DC0CEB1C7BAB8C8A3BCF6BBE7C1D8C4A2C0C7B0DFC7A5B8ED5B315D2E687770>

041~084 ¹®È�Çö»óÀбâ

ÃѼŁ1-ÃÖÁ¾Ãâ·Â¿ë2

<312E20C0AFC0CFC4B3B5E55F C0FCC0DAB1E2C6C720B1B8B8C5BBE7BEE7BCAD2E687770>

<C7D1C0CFC8B8B4E3B9AEBCADB0F8B0B3C7F6C8B2B0FAB0FAB0C5BBE7C3BBBBEA2E687770>

5월전체 :7 PM 페이지14 NO.3 Acrobat PDFWriter 제 40회 발명의날 기념식 격려사 존경하는 발명인 여러분! 연구개발의 효율성을 높이고 중복투자도 방지할 것입니다. 우리는 지금 거센 도전에 직면해 있습니다. 뿐만 아니라 전국 26

쌍백합23호3

01¸é¼öÁ¤

제4장

....pdf..

제 2 편채권총론 제1장채권의목적 제2장채권의효력 제3장채권의양도와채무인수 제4장채권의소멸 제5장수인의채권자및채무자

년도경상북도지방공무원제 1 회공개경쟁임용시험 - 필기시험합격자및면접시험시행계획공고 ( ) 필기시험합격자 : 491 명 ( 명단붙임 ) 2 필기시험합격자등록및유의사항. : ( ) ~ 7. 6( ) 3 등

210 법학논고제 50 집 ( )

학점배분구조표(표 1-20)

1, 항소이유의 요지 가. 사실오인 및 법리오해 피고인이 피해자와 공사도급계약을 체결할 당시 피고인은 피해자에게 공사대금을 지 급할 의사와 능력이 있었으므로 피고인에게 사기죄의 유죄를 선고한 원심판결에는 사 실을 오인하거나 법리를 오해한 위법이 있어 부당하다. 나. 양

목 차

ok.

목차 < 요약 > Ⅰ. 국내은행 1 1. 대출태도 1 2. 신용위험 3 3. 대출수요 5 Ⅱ. 비은행금융기관 7 1. 대출태도 7 2. 신용위험 8 3. 대출수요 8 < 붙임 > 2015 년 1/4 분기금융기관대출행태서베이실시개요

( 제 20-1 호 ) '15 ( 제 20-2 호 ) ''16 '15 년국제개발협력자체평가결과 ( 안 ) 16 년국제개발협력통합평가계획 ( 안 ) 자체평가결과반영계획이행점검결과 ( 제 20-3 호 ) 자체평가결과 국제개발협력평가소위원회

¼øÃ¢Áö¿ª°úÇÐÀÚ¿ø

173

갈등관리 리더십 연구결과 보고서.hwp

내지-교회에관한교리



82-대한신경학0201

- 2 -

목차 Ⅰ. 기본현황 Ⅱ 년도성과평가및시사점 Ⅲ 년도비전및전략목표 Ⅳ. 전략목표별핵심과제 1. 군정성과확산을통한지역경쟁력강화 2. 지역교육환경개선및평생학습활성화 3. 건전재정및합리적예산운용 4. 청렴한공직문화및앞서가는법무행정구현 5. 참여소통을통한섬

¿©¼ººÎÃÖÁ¾¼öÁ¤(0108).hwp

2002report hwp

CT083001C

현안과과제_8.14 임시공휴일 지정의 경제적 파급 영향_ hwp

Microsoft PowerPoint 산업전망_통장전부_v9.pptx

ë–¼ì‹€ìž’ë£„ì§‚ì‹Ÿì€Ł210x297(77p).pdf

Untitled-1

1. 경영대학

나하나로 5호


<B1B9C8B8C0D4B9FDC1B6BBE7C3B3BAB85F BB0DCBFEFC8A35B315D2E706466>

1.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 이 사건 공소사실의 요지는 피고인 함선주, 김 영은는 삼성에스디아이(SDI)주식회사(이하 삼성SDI'라고 함)의 협력업체인 영 회사 소속 근로자였고, 피고인 강용환는 또 다른 협력업체인 명운전자 주식회사 소 였다. 삼성SDI는 세계 디스플

금강인쇄-내지-세대주의재고찰

1220½É¹Ì¾Èâ27È£º»¹®

3

5권심층-양화1리-1~172

* pb61۲õðÀÚÀ̳ʸ


Transcription: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과거에대한성찰, 미래를위한역사쓰기 ; 친일인명사전의성과와과제 2011 년 11 월 25 일 ( 금 ) 오후 9 시 30 분 ~ 오후 5 시 충무아트홀컨벤션센터

순서 09:30~09:40 개회사 윤경로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위원장 09:40~10:10 기조강연친일인명사전발간의역사적의의 이만열전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주제발표사회 박수현민족문제연구소 10:10~10:50 1주제 친일인명사전수록자선정기준과범주 발표 이용창민족문제연구소 토론 김명구안동대 10:50~11:30 2주제 시민사회의친일청산운동전개와그영향 발표 박한용민족문제연구소 토론 전진성부산교대 11:30~12:10 3주제 한국민족주의와친일인명사전발표 김기협역사학자토론 정해구성공회대 12:10~13:00 점심 13:00~13:40 4주제 친일 문제와일본사회발표 후지나가다케시오사카산업대토론 홍종욱도시샤대 13:40~14:20 5주제 독일과거청산의지속과공직자 -나치시기외교관들의책임문제발표 이동기서울대토론 한정숙서울대 14:20~14:30 휴식 14:30~17:00 종합토론 사회 안병욱가톨릭대 발표자 토론자전원 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기조강연 친일인명사전발간의역사적의의 이만열 전국사편찬위원회위원장 숙명여대명예교수 친일인명사전 이간행된지 2년이지났다. 친일인명사전 이간행되던그해는대한민국 ( 임시정부 ) 이건국된지 90주년이되는해였고, 친일파청산을목적으로조직된반민특위가와해된지 60년이되는해이기도했다. 또한 민족문제연구소가역사정의실현의기치를높이세운지실로 18 년만 에이룩한것이며, 1999 년전국대학교수 1만여명이 친일인명사전편찬지지 를선언한지 10 년만의일이요, 2001 년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가출범한지 8년만의성과이기도했다. 때문에이사실만으로도 친일인명사전 편찬은 역사적사건 이라할수있다. 그러나 3권 2,850 쪽에실려있는 4,000 여명은 친일부역의인물 이라기보다는나라잃은시대, 우리스스로의자화상이기도하다. 온갖음해와복병이진로를막으려고했지만사명감하나만으로초지일관이작업을이룩한것은그동안성장한이나라민주 민중세력과그들의성숙한자기성찰적역사인식에의한것이라고생각된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역사적의의는해방이후그동안미뤄졌던민족사적과제인친일파청산을역사적인방법으로나마이룩한최초의작업이요성과라는것이다. 과거청산이불가피한과제라고한다면 친일인명사전 은 ( 그동안 ) 유보된숙정을가장온건한형태인역사적청산과학문적정리로풀어낸최소한의통과의례 ( 임헌영 ) 인셈이다. 또 친일인명사전 의편찬은우선해방이후친일파를종합적으로정리한결과물이면서우리민족의자존심과명예를북돋워준쾌거이기도했다. 해방이후줄곧우리민족의어깨에메인멍에요선진독립운동가들에게진빚이라할수있는것이친일잔재의청산이었다면, 친일인명사전 의편찬은그과제를역사적으로나마수행될수있게하여, 후손으로서우리역사에떳떳이머리를들수있게해주었기때문이다. 그동안우리는우리내부의친일잔재를청산하지못함으로부끄럽게된것이한두번이아니었다. 가령일본의역사교과서왜곡같은문제에대응하면서도그랬다. 그들이식민주의사관에찌든역사인식을한다고비판하기도했지만정작자기안에도사리고있는친일적요소의청산은먼저제대로하지않는다는힐난을받아왔던터이다. 그런상황에서 친일인명사전 의편찬은그런불명예와자괴감을불식할수 5

있는첫단추가꿰어졌던셈이며, 그런의미에서우선민족적자긍심을회복시켜주었던것이다. 해방독립된민족이가장먼저수행해야할과제중하나는이민족지배하에서이지러졌던민족정기를바로잡는것이다. 이를위해서는이민족지배하의식민지적잔재를청산하는일이다. 식민지적잔재청산의과제는인적청산과함께문화사회적잔재청산에서이뤄져야했다. 그중에서도시급한과제는 반민족행위자에대한숙정 에해당하는인적청산이다. 해방후일제잔재를청산해야한다는국민다수의여론에뒷받침되어제헌국회가 반민법 을제정하고 반민특위 를만들어그인적청산에나섰으나친일파의완강한저항에부딪혀, 그과업이당위적인것임에도불구하고실패하고말았다. 정부수립직후친일잔재청산에실패한것은여러가지이유가있었다. 미군정 3년동안에청산대상이었던친일세력이해방정국의느슨한분위기를악용, 다시제둥지를틀게되었다는점을먼저들수있다. 스스로 점령군 임을자처했던미군은군정을실시하기위해서한국민의역사의식이나정서같은것을고려하지않고군정에필요한경험있는행정요원을필요로했다. 경험있는행정요원들은일제강점하에일제에빌붙어서자신들의식견과능력을식민통치에헌납했던영혼없는친일파군상들이었다. 또미군정기부터해외에서귀국한정치세력들은국내에자기들의토대를제대로구축하지못한상황에서국내에온존했던친일세력과제휴, 자신의세력을확장하려고했다. 이점은이승만의경우가가장심했다. 이런상황에다무엇보다간과할수없는것은해방정국에서남북 좌우의갈등과국토 이념상의분단 대립이친일세력을제대로척결하지못한중요한원인이되었다는점이다. 해방후친일세력은스스로물러나은인자중해야할입장이었지만, 남북 이념의대결은그들에게새로운기회를제공하게되었다. 분단은친일세력에게반공이라는도피처를제공했고, 친일세력은반공세력으로재등장할수있는기회를갖게되었다. 그들은이제자신들의친일행적은감추고새로운반공세력으로재등장할수있었다. 마치오늘날반민주반통일세력이자유민주주의의수호자인양날뛰는한편 종북세력 을타멸하는반공적인극우주의자로등장하는양상과그렇게다르지않다. 해방후친일세력은이렇게자신들을반공세력으로포장하고동일시하게만들어자신들에대한민족진영의친일잔재청산노력을반공세력을청산하는것처럼오도해갔던것이다. 친일세력은다시반공이라는새로운도피처를발견했고, 반공의그늘에숨은이들친일잔재를청산하는것은곧반공주의자로변신한이들에대한탄압처럼보이도록했다. 결국국토의분단과이념적대립은해방후친일잔재를청산하려는역사적과제에걸림돌이되었고, 친일청산을통하여새로운사회를건설해야할한국사회의이상과실천을좌절시켰다. 반민특위 가와해되고 반민법 이폐기되고친일잔재청산이무산된것은당시의사회정의운동을마비시켰고, 해방후그런대로새사회를이룩하려는꿈을꾸었던선량한백성들에게역사허무주의를안겨주었다. 해방후친일파를청산, 단죄하는데는주로법과제도에의한것이었다. 여기에는주로해방공간에서 여러단체가제기했다가시행단계에는이르지못한친일파처리규정과정부수립직후에제정된 반민족 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행위처벌법 이해당된다. 친일파에대한단죄를목표로한이들규정과법령은, 해외각국의과거사청산법령에서나타나듯이, 사형 징역 금고등의신체형과, 재산을몰수하는재산형, 공민권 피선거권등기본권을제한하는것이포함되었다. 해방후 60여년이흐른후에제정된노무현정부때의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은신체형이나재산형으로처벌할수가없었다. 그들의구체적행위에서범법성이나타나더라도반민족행위자대부분이이미사망했기때문이다. 따라서그들의반민족행위는공문서에게재되는등의절차를통해일종의명예형 ( 名譽刑 ) 내지는수치형 ( 羞恥刑 ) 이될수밖에없었다. 그뒤에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의경우도, 일부또는전부의재산을 몰수 하도록규정하고있어서재산형이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자들은처음부터친일파청산의과제를, 앞에서규정한신체형이나재산형및기본권제한등의방법에서찾으려고하지않았다. 친일인명사전 이민간기구에의해편찬된다는것도한이유이기도하지만, 그편찬목적이처음부터친일파를역사적으로제대로정리하자는데에있었다. 따라서 친일인명사전 은 단죄적측면보다는역사적 도의적평가에가까운학술적성격을띠어야한다 ( 조세열 ) 는데로지향하고있었다. 그렇게하자면결국실사구시적실증에바탕하여학문적으로접근할수밖에없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가 일제강점기당시의실정과부합하게선정기준이마련되어야한다는문제의식아래식민통치체제에복무한지위에따른책임과지식인의도덕적책무를강조하는방향으로수록대상의선정기준을강화 한것은이때문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의역사적의의는그편찬과정에서도찾을수있다. 첫째 친일인명사전 은해방이후끊임없이지속된친일파청산운동의결실이면서, 그운동을새로운차원으로이끄는전기를마련했다는것이다. 제헌국회에서제정한 반민법 이폐기된이후친일파청산운동은물건너간듯이보였다. 이승만정권하에서친일파가득세하여우리사회의지배권을확보해갔다. 그러나 4 19 혁명으로민주 민족운동이다시활기를띠면서친일파청산운동은고개를들게되었다. 5 16 군사쿠데타는친일파청산운동과함께민주 민족운동을압살했다. 더구나유신정권에들어서서는민주 민족의식에기반한친일파청산운동은음지에서좀처럼자신을드러낼수없었다. 친일파청산운동이활발하게된것이 1980 년대신군부치하에서이뤄졌다는것은하나의아이러니다. 신군부는유신정권못지않게파쇼적행태를보이며학문의자유를억압하였다. 그러나그런극우세력은오히려자생적인극좌적비판운동을불러왔다. 신군부의극우파쇼에맞서학계, 특히젊은역사학도들은당시금기시되었던연구분야들을질풍노도처럼타파하기시작했다. 일제시대사에대한연구와공산권특히북한에대한연구가활성화되었던것은이때다. 일제시대사에대한연구는친일파연구에도크게자극을주었다. 물론친일파연구는 1960 년대후반부터시작한임종국의활동과연구방법에크게힘입기도했지만, 민족문제연구소가세워지고그중심적인역할을하게된것은 1990 년대에이르러서다. 결국이시기를전후하여 40 여년간지속된독재정권하에서금기의영역으로만여겨졌던친일문제를객관 7

화 공론화할수있는여건을마련 하게되었던것이다. 둘째, 친일인명사전 편찬은학계의실증적인연구와정보화사회의발전에힘입은결과라는역사적의미를갖고있다. 임종국의연구이후친일파연구가온축되어갔다는것은이사전편찬에큰동력이되었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에역사학계를중심으로각분야의교수 학자등전문연구자 150 여명을포함하여 180 여명의한국근대사전공자들이집필위원으로참여하여사전의전문성을높여가게되었던것은이사전편찬이우리학계의성장과관련있다는증거다. 또금기시된자료에대한발굴이활성화하면서그자료들을전산화하는작업또한활발하게전개됨으로데이터베이스화가가능하게되었다는점도지적하지않을수없다. 친일인명사전 에수록된 4천여명의인물을추출해내는데는그몇배에이르는인물을검색하고자료화했기때문에가능했다. 이런과정에서편찬주간연구소인민족문제연구소가들인노력과거둔성과는이루말할수없다. 그들은일제강점기당시의공문서 신문 잡지등문헌자료는물론해방후의신문기사 회고록 증언등도방증자료로채택했다. 민족문제연구소가수집한자료에는 조선총독부관보 직원록 등관찬사료 23종 200여권, 매일신보 경성일보 만선일보 등신문자료 40여종, 삼천리 조광 등친일잡지와기관지 80여종, 조선신사록 조선인사록 등명감류 ( 名鑑類 ) 140 여종, 각도 시 군지등지지류 ( 地誌類 ) 160 여종, 각종연감 사전류 60여종, 공훈록 40여종, 일기 회고록 평전류 1,500 여종등총 3,000 여종의일제강점기원사료와데이터베이스 450 여종등방대한기초자료가있었다. 연구소는이를분석 재정리하여 300만여건에달하는인물정보를구축했으며, 이를토대로 2만 5,000 건에이르는친일혐의자를모집단으로추출했다 ( 조세열 ). 이렇게국내외의제반자료와전문지식인들의참여가있었기때문에이사전의완성도를높였고, 거센비난과항거가사전편찬전후에불어닥쳤지만자료의알찬실증성으로반발을극복할수있었다. 이렇게 친일인명사전 의간행은학계의학문적온축과, 광범한자료의섭렵과데이터베이스화등정보화그리고다음에서언급할자발적으로참여한민주 민족세력의친일파청산의지가삼위일체로어울려져이룩한성과였던것이다. 셋째 친일인명사전 편찬은우리국민의자발적인친일파청산의지와의결합에서이뤄졌다는점에서그역사적의의를발견할수있다. 이점은국가적인차원에서친일파청산이어렵게되어간저간의사정과관련이있다고본다. 다시말하면 친일인명사전 편찬은민간차원의친일파청산운동노력에의한결실이라는점이다. 친일인명사전 편찬은역으로말하면한국의민주주의와민족주의가활성화된산물이요, 친일반민족세력과군부독재세력에대한승리의표징이기도하다는것이다. 그첫결실의의미를 친일인명사전 에서발견할수있다는것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역사적의의이기도하다. 이같은 친일인명사전 편찬의역사적의의는앞으로우리사회의민주적민족적의식형성에지대한영향을미칠것으로기대한다. 친일인명사전 의편찬은우리사회에큰파장을일으키고있다. 이사전의출간으로그동안숨겨져있 던친일행적들이속속드러나고있기때문이다. 심지어어제까지일반학계와정부의공식기구를통해 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독립유공자로인정받은인사들의친일행적이드러나고있는것은매우유감스럽긴하지만, 이 친일인명사전 이갖고있는영향력을여실히보여주는것이다. 여기에해당되는이들로서는, 아직도재판에계류중에있는金性洙 ( 대통령장 ) 를비롯하여, 金鴻亮, 尹益善, 李鍾郁, 張志淵 ( 이상독립장 ), 朴聲行, 李東洛, 李恒發 ( 이상애국장 ), 姜永錫, 金應珣, 金禹鉉, 南天祐, 朴暎熙, 劉載奇, 任龍吉, 車相明, 崔俊模, 崔志化, 許永鎬 ( 애족장 ) 및尹致暎 ( 건국포장 ) 등이다. 이중몇분은이미학계에서도그친일행적을알고있었지만, 대부분은 친일인명사전 에의해그친일행적이밝혀졌다. 이만큼 친일인명사전 이영향력을미치고있다는것이다. 이들중에는지금까지독립운동과관련하여존경받는이들이없지않지만, 친일행적이드러난이상그들에대한존경심과는별도로, 독립유공자로서서훈한데대한문제를제기할수밖에없었던것이다. 정부가재판계류중에있는분을제외하고는독립유공자서훈을취소한것은이때문이다. 여기서도 친일인명사전 의파괴력이얼마나큰것인가를실감할수있다. 친일인명사전 이미치고있는파급효과는여기서그치지않는다. 친일인명사전 이출간되자자칭 국가정상화추진위원회 라는우파단체는 친북인명사전 이란걸만들겠다고했다. 이것은 친북반국가행위자명단을수록하여편찬한사전 이란다. 아마도 친일인명사전 에위협을느낀세력이 친일인명사전 의파장을상쇄하기위해서기획한것이아닌가한다. 그들은 친북 ( 親北 ) 좌파 니 종북 ( 從北 ) 주의자 라는용어를생산하고여기에해당하는이들을가려뽑아 친북인명사전 으로묶겠다고한것이다. 이런시도는, 그것이긍정적이든부정적이든, 친일인명사전 이남긴영향이라고할수있다. 이것은친일극우세력이 친일인명사전 에대해그만큼위협을느끼고있음을의미한다. 친북인명사전 에수록될인사들은그들이 2010 년 3 월초 친북반국가행위자 로발표한바있는 100 명의인사들이며, 이들의면면은대부분남북문제에서진보적인사들이라는점이눈에띤다. 그런의미에서오히려이사전은 친일인명사전 과는상반되는영향력을미치지않을까생각된다. 한편한인터넷사이트는 친북인명사전 을비아냥대면서거기에수록되어야할진짜 이적행위자 들은우리사회의각종요직에포진해있는거물급군면제자들이라고지목한적이있다. 친일인명사전 이의도와는달리 단죄적 인성격을포함하고있기때문일까, 그파급효과에서도그점이확연히나타나고있다. 그중하나가 4 대강사업찬성인명사전 이다. 사실이 사전 이구상된것도 친일인명사전 때문이라고생각된다. 4 대강사업찬성인명사전 은 4대강사업을반대하는인사들이궁여지책으로의견을모은것으로, 이는 4 대강사업의망국적폐해와비리등을파헤 치기위해 4대강사업에찬동한인사들의명단을사전에등재시켜역사에남기겠다는것이다. 그들은 4대강사업이 친일 행위에버금가는 망국적 일것이라고예단하고있는것이다. 이사전에는 4대강사업에찬동한정치인을비롯하여영혼을팔면서안일을추구했던학자 전문가, 공직자및사회인사, 언론인들의 낯뜨거운기록 이담겨질것이며, 그것으로 역사의준엄한심판을받도록 하겠다는것이다. 4대강사업이그들의예단대로조상대대의국토를파괴하는 망국적 인것으로드러나게된다면이 4 대강사업찬성인명사전 은 친일인명사전 에버금가는영향력을가질것으로전망된다. 친일인명사전 의영향력이비단 4 대강사업찬성인명사전 에서그치겠 9

는가, 결코그렇지않을것이다. 끝으로 친일인명사전 이남겨놓은숱한과제라고할수있다. 우선 친일인명사전 을통해친일인맥이드러나고있는만큼그인맥을연구하면해방후한국의정치와사회경제사의중요한흐름을발견할수있을것이다. 한국사회가왜해방 60년이되어서야본격적으로친일인사들을조사하게되었으며그런배경에는해방후친일파들이얼마나우리사회의주류를이끌어왔는가하는것도고찰되어야할것이다. 또하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이민족사적대의에충실하려고했지만우리사회가이를수용할정도로성숙하지못해서일까, 사전출간을계기로사회적갈등이증폭되고있음을외면할수없다는점이다. 사전출간을계기로우리스스로를반성하고아픔을감내하면서더성숙한단계로도약할수있는데도불구하고의도적으로갈등을증폭시키려는세력도없지않다. 이런문제들은 친일인명사전 출간이후에계속풀어가야할과제라고생각한다. 또 친일인명사전 의간행을계기로친일의실상들이어느정도밝혀졌지만그들대부분은이미망자가되어참회나소명의기회를잃어버렸다. 그런상황에서친일의후과가자칫후세나연고자에게연좌제적으로물려지는듯하여불편함과안타까움을더해주고있다. 이런문제들을풀수있는대승적인태도는어떤것일까. 우리사회가우선연좌제적인사고에서벗어나야한다는것을먼저강조하고싶다. 한편후세들도선대가남긴영예와과오를함께짊어지고역사정의실현에동참해야한다는것이다. 무엇보다중요한것은 친일 의과오에대해이제사회전체가이를매도하는데만급급하지말고이수치의역사도민족사의영역으로수용, 승화시켜함께고통분담하는적극적인자세를가져야한다는것이다. 1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발표문 친일인명사전수록자선정기준과범주 이용창 민족문제연구소책임연구원 시작에대신하여 친일인명사전 ( 이하 사전 ) 이발간된지 2주년이되었다. 오랜기간축적된방대한자료와데이터를토대로해방 60여년만에민간단체인민족문제연구소 ( 이하연구소 ) 와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 이하편찬위원회 ) 가 친일파 의이력을낱낱이기록해편찬한 事典 이두번째생일을맞은것이다. 발간첫해인 2010 년은 사전 과관련된데이터와자료를정리하고, 관계인들의소송에대응하면서 친일문제연구총서 의장기적인기획에전념했다. 정작 사전 과직접관련한학계의학술적인검토와비판을받지못한채 2011 년으로미뤄지게된것이다. 사전 편찬의한부분을담당했던실무자이자역사연구를업으로하는연구자로서갖는소회는글이나말로표현할수없는벅찬감정이앞선다. 개인적으로 사전 발간이친일파의실체를밝혔다든지, 금기의영역을극복했다든지, 역사적책임의소재를규정했다든지, 민족정기를바로잡았다든지등의거창한의미보다는, 사전 은한국근현대사를관통하는각분야주요인물들의전생애에걸친행적을날것으로드러낸 문화적자산이자知의축적 1 의토대를마련했다는데더큰의미를부여하고싶다. 친일문제는한국근현대사의과거사전체로보면일부분일수도있다. 그럼에도친일문제는여전히현재의우리가겪는정치사회적일상의갈등을해결하는중요한열쇳말로자리잡고있다. 지금까지간혹거론되었지만외면되었거나, 功過論에덮어졌거나, 전혀알려지지않았던유명인사들의친일행적이 사전 에온전히담겨져있다. 사전 편찬에참여한어느누구도주관적인판단으로인물을집필하지않았다고자부한다. 그렇기에없었던행적을조작했다거나, 가감으로가공한것은더욱아니며, 있는그대로의행적을객관적인자료를분석해실증적으로기록했을뿐이다. 그럼에도전가의보도처럼 1 이표현은 사전 발간이갖는의미를여러측면에서평가한다음의글에서필자가특히공감하는부분을따온것이다 ( 조세열, 친일인명사전 편찬의쟁점과의의 역사비평 91(2010 년여름호 ), 역사비평사, 27 쪽 ). 11

이념적인공세가끊이지않았다. 심지어학문을업으로삼는일부연구자들은깊이있는학술적 비판 이아니라, 사실자체를왜곡하거나 사전 을전혀들여다보지도않은채부정적이고관념적인억측을넘어, 심지어는무지를드러낸 비난 으로일관하고있다. 2 2011 년 4월열린국무회의는국가보훈처서훈취소심사위원회가 2010 년말결정한독립유공자 19명에대한서훈취소안을의결했다. 독립유공자의서훈취소는이전에도있었다. 1996 년 10 월, 김희선 ( 관료 ), 박연서 ( 개신교 ), 서춘 ( 언론 ), 장응진 ( 교육학술 ), 정광조 ( 천도교 ) 등 5명의친일행적이드러나자공식절차를거쳐서훈이취소된것이다. 이번의서훈취소안은보훈처 행정안전부 국무총리실 국무회의의정상적인절차를거쳤다. 서훈이취소된 19명의친일행적은 사전 에낱낱이서술되어있고, 3 이중 4명은반민규명위원회의 보고서 에도포함되어있다. 정부측관련부서가서훈취소를결정한것은 사전 에 19명이수록되었기때문이아니라, 19명의친일행적이객관적인자료를통해명백하게드러난것을재확인했기때문이다. 과거의서훈과정에서확인하지못했던흠결의문제가제기된이상담당부처가심사위원회를구성해자료를검토해결정한것을굳이연구소와편찬위원회, 사전 을들먹이면서이념적으로매도하려는의도는명백한것이다. 4 사전 발간 2주년을맞이해열리는학술회의에서필자가맡은선정기준과범주의주제는, 사전 이담고있는내용을다각도로분석해서이후의연구재료로삼을수있는토대를제공하는것으로대신하고자한다. 따라서서술적인내용보다는 < 표 > 로드러내분석의재료로삼을수있도록중점을두었다. 무엇보다 사전 과관련해첨예하게논의되었으며외부의 공격 을받았던것은선정기준의문제였다. 게다가같은시기에활동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이하반민규명위원회 ) 와편찬위원회가비교되면서, 아울러내용과결과도주목을끌었다. 이러한점을염두에두고 사전 수록자의유형별분류, 각분야별수록자의분포와비율, 각분야별세부선정기준의내용과간략한해설등을정리하였다. 또반민규명위원회가결정한친일반민족행위 ( 자 ) 2 대표적으로다음의글을예로들수있다. 이영훈, 2007 대한민국이야기, 기파랑 ; 박지향, 2010 윤치호의협력일기, 이숲 ; 박효종, 친일 문제를어떻게볼것인가 시대정신 2010 년봄호. 이들의 친일청산비판론에대한답 은김민철, 지연된정의 : 두개의보고서 황해문화 통권 68 호 (2010 가을 ), 새얼문화재단, 105 117 쪽에자세하다. 3 사전 에수록된독립유공자는총 20 명이다. 이중김성수는현재반민규명위원회의소송업무를승계한행정안전부가인촌기념회등이제기한친일반민족행위결정취소소송이진행중이어서일단보류된상태다. 그러나 2011 년 10 월 20 일서울행정법원은김성수의친일행적의대부분을인정하면서도, 일부의행위에대해서는친일반민족행위결정은취소하도록판결했다. 곧흥아보국단의준비위원으로선정된것은맞지만, 일제의내선융화 황민화운동을주도했다는부분은취소하도록한것이다 ( 연합뉴스 2011.10.21 법원, 인촌김성수친일행적인정 일부취소 ). 김성수의서훈취소여부는최종판결의결과를지켜볼일이다. 4 월간조선 (2011 년 5 월호, 이슈추적 : 是日也放聲大哭 張志淵親日논란, 2011 년 10 월호 위암장지연서훈취소의전말 : 확인된보훈처심사위원 6 명中 5 명이민족문제硏 친일人名사전 편찬위원 ) 에두차례장문의글이연재되었지만 왜곡 과 무지 의결정체라고표현할수밖에없다. 위암장지연이쟁점이되었지만, 이기사를작성한기자는과연전말을제대로이해하고있는지궁금할뿐이다 ( 여기에대해서는 역사와책임 제 2 호 (2011.12) 에게재할예정인이용창, 위암장지연의친일행적재론 참조 ). 특히강조하고싶은것은 사전 에수록되었고, 서훈이취소되었다는것자체로 시일야방성대곡 의역사적의미를누구도외면할수없다는것이다. 난파홍영후가 사전 에수록되고친일반민족행위 ( 자 ) 로결정되었다고해서 고향의봄 ( 이원수작사 ) 이 친일노래 로낙인찍히거나노래부르는행위를비난하지않는다는것이다. 이에대해필요이상으로과민하게반응하는것은, 친일문제를진정으로고민하지않고오히려개인의감성을앞세우기때문이아닐까? 이에반해조두남이작곡한 선구자 ( 윤해영작사, 원제목은 룡정의노래 이다 ) 의경우는만들어지게된배경과과정, 원래가사의친일적인내용등이해방후애국과독립운동으로조작 왜곡되었기때문에 친일노래 이면서노래부르는행위자체도문제가될수있는것이다. 1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의내용, 사전 과반민규명위원회 보고서 의비교와한계도간략하게다뤘다. 다만 2장 2절에서다룬분야별세부선정기준의내용에서조사대상자의규모, 곧 모집단 은명확한수치를제시할수없는한계로인해분야별로차이가발생한다. 이유는여러가지가있겠지만, 예컨대 35년간의통치과정에서 ( 고등 ) 경찰에복무한조선인이어느정도인지는자료의부족으로파악할수없다. 또군수의경우도대략 1,200 여명내외라고파악되기는하지만, 직원록 이나 관보 가온전히이를반영하지도않을뿐더러 1940 년이후창씨개명한경우는미처확인하지못한조선인도적지않을것이기때문이다. 1장에서 사전 의편찬 ( 과정 ) 과이의신청및소송의추이를다룬것은다분히필자가의도한것이다. 곧관련소송에서재판부가 사전 이학술적이고전문적이며객관성을담고있다고공히인정했다는것을드러내고자한것이다. 이로써 사전 을둘러싸고제기되었던문제들중대부분이해소되었다는것을알려주고싶었기때문이다. 1. 친일인명사전 편찬과정과이의신청 소송의추이 2009 년 11 월 8일편찬위원회와연구소는친일파 4,389 명의상세행적을기록한 친일인명사전 을발간했다. 2001 년 3월 사전 편찬을위해편찬위원회준비위원회가구성되어, 7월의기획위원회 자료조사위원회, 11 월의지도위원 편찬위원위촉을거쳐, 12월 2일공식출범과함께 1차공청회를개최한지 8년 8개월여만이다. 그동안여러차례의토론회 학술발표회 편찬위원회를개최하여친일파의개념과범주에대한역사적정의부터선정기준의확정에이르기까지세밀한준비와논의를거듭하였다. 5 2005 년 8월경술국치 95주년을맞이해 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 명을발표하고, 2006 년 2월에는연구소총회자료집으로 3,090 명의친일행적을정리한 사전 수록예정자 1차명단자료집 ( 열람용 ) 을발간했다. 이를바탕으로자료보완과검증, 수록예정자 1차명단및자료집에서보류되었던분야, 특히해외 ( 일본 만주 중국관내 러시아 ) 의친일파조사 검증및선정에심의를기울였다. 2008 년 4월에는 사전 수록대상자명단발표기자회견을통해 4,776 명의명단과기초행적 ( 한글명 한자명 창씨명 생년 대표경력 분야 ) 을발표했다. 이와함께최종완료된 사전 을발간하기에앞서수록대상자의후손또는연고자로부터이의신청을받기시작했다. 이의신청을한이해관계자는대다수가직계후손이었으며, 그밖에교단 학교 기업 언론사 기념사업회등도포함되어있었다. 6 민간기구가인터넷을통한공시이외에별다른통보를할수없었음에도, 이의신 5 1990 년대개최한여러차례의학술대회발표를모아발간한 한국근현대사와친일파문제 (2000, 아세아문화사 ) 가대표적이다. 6 사전 관련이의신청과관련해서는조세열, 2010 앞의글, 8 11 쪽참조. 13

청은무려 97건 127 명에이르렀다. 법조계 종교계 교육계 문화예술계가상대적으로많았는데, 이는반민특위의처벌기준과편찬위원회의선정기준이다른데서비롯된것이라할수있다. 이의신청처리는상임위원회가담당했으며심의결과압도적다수인 112 명이기각, 13명이보류되었고, 단 2명만 7 인용결정이내려졌다. 기각된사안이많았던것은신청사유의대부분이독립운동을지원했다거나강압에의한불가피한협력이었다고주장했으나, 이들모두설득있는증거를제시하지못했기때문이었다. 그러나대다수신청인들은편찬사업의취지와위원회의진정성을이해해주어심적부담을덜어주었다. 반면에비난을받아마땅한악명높은친일파후손들이서슴지않고이의신청을하는경우도있었으며, 압박과로비로불명예를벗어나려는시도도없지않았다. 8 편찬위원회와연구소는이의신청사유가다소라도개연성이있어보이면최선을다해확인하고자했다. 설령이의신청이없다하더라도단한명의부당한오명을쓴사람이발생하지않도록검증을거듭하는노력을기울였다. 이렇게하여수록이유보된인원은이의신청을통해보류된 13명을포함하여총 382 명에이른다. 이들은수록기준에는해당하지만정보가지나치게소략해추가조사가필요한경우와조선인으로유력시되지만이를확증할필요가있는해외활동자, 그리고신중을기하는측면에서이의신청을일부수용하여사실확인중인경우등이다. 이의신청과는별도로수록대상자가확정되고출판이임박하자발행또는게재 발행의금지를구하는가처분소송도제기됐다. 9 사전 발간이전에는엄상섭 ( 검사 ), 장우성 ( 화가 ), 장지연 ( 언론 ), 박정희 ( 만주군중위 ) 의후손들이법적판단을구하기위해가처분신청을냈다. 또 사전 이출간된후인 2010 년 8월에는박정희와동서지간으로만주국사무관을지낸홍순일 ( 개명홍순직 ) 의후손이서적복제및배포금지소송을제기했다. 사전 과관련한일련의재판과정에서나타난주요쟁점은, 채권자와채무자양자사이에충돌하는헌법상의기본권, 곧개인의명예보호등인격권과언론 출판등표현의자유를어떻게해석하는가의문제였다. 재판부는 사전 의편찬취지와목적, 수록대상자선정기준, 수록내용등에비추어목적의공공성, 나아가사실관계의객관성과진실성, 명예훼손이나손해의최소화등이인정되므로표현행위의사전금지가허용되어야할실체적요건을갖추고있는경우에해당한다고보기에부족하다고결론을내렸다. 일관 7 만주국이사관을지낸최근우는독립운동단체인건국동맹에참여한 최근우 와동일인으로판명되어수록대상자에서제외되었다. 신현확은일본군수성에서고등관으로복무한경력이있어수록대상자로선정되었으나, 연구소가종전직후의일본공문서까지조사한끝에, 판임관에서고등관으로陞敍되었으나부임하지않았다 는기록을찾아내이의제기를수용했다. 또일본육사 27 기로소위출신인이동훈은이의신청을받은것은아니지만, 3 1 운동때일본경찰에끌려가고초를겪고상하이망명을준비하다사망한사실이확인되어제외했다. 8 사전 에는해방이후자신의친일행위를직접 간접으로반성한내용도정리해서수록하였다 ( 검사엄상섭, 군수이항녕, 고등경찰하판락등 ). 또 사전 발간을전후로수록자의후손들이선대의친일행위를반성하는글을보내기도했다. 특히 2011 년 10 월에는일제강점기조선총독부군수를지낸윤수병 (1876 1953) 의손자가민족문제연구소의누리집에 저는친일파의손자입니다. 역사와민족앞에사죄드립니다. 는글을올렸다. 후손의진솔한고백은각언론을통해알려졌으며, 네티즌들도수천건의댓글을통해, 후손으로선대의친일행위를밝힌용기를높이칭찬했다. 9 사전 관련소송과관련해서는조세열, 법정에선역사정의 - 친일 관련소송의추이와판결분석 내일을여는역사 43(2011 년여름 ), 서해문집, 21 28 쪽참조. 조세열은 사전 뿐만아니라반민규명위원회 ( 해산후행정안전부가소송업무담당 ),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 ( 해산후법무부가소송업무담당 ) 에제기된소송과관련된전반적인내용도분석했다. 1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되게 사전 의공공성과객관성을인정함으로써표현의자유를최대한존중하는자세를유지한것이다. 선정기준도쟁송과정에서가장첨예한논점으로대두되었다. 재판부는일제하에서고등관이상의관리나판사 검사, 일정한직위이상의경찰이나군인, 헌병을부일협력자의범위에포함시키는견해가학문적의견의표명으로서의한계를넘어허용될수없는것이라고보기는어렵다고판시하고, 예외사유를인정하여상당수를수록대상에서제외한것도특정인사를제외하기위해서나다른목적을위해인위적 자의적으로설정한것으로보기는어렵다고연구소의주장을전폭수용했다. 또절차적정당성에대해서는수록대상및분야별세부기준등과관련하여다방면전문가들의참여를통한논의를거친후발행에앞서이의제기와학계의여론수렴을위해명단을미리발표하는등그수록대상자선정에있어비교적신중하고합리적인절차를거친것으로인정했다. 후손들은법리적접근외에 사전 의신뢰도를떨어뜨리기위해다양한방식을동원하였다. 편찬위원회의전문성과대표성을문제삼은것이다. 법에의해국가가수행해야할일을일개민간단체가수행하는것은위험하다는논리였다. 또사회주의자에게는관대하여형평성을잃고있어이념에따른자의적선정이라든지, 부정적인면만강조하는자학사관이라는등의주장을개진하고예의공과론 상황론 희생론등을설파했으나재판부는이를받아들이지않았다. 재판부는편찬위원회의구성이나편찬위원의경향성등자격시비에대해서는아예언급을회피함으로써사실상색깔론을일축했다. 서술의객관성에대해서는전거가제시된사실관계를모두인정하여객관적으로확인된사실만을포함하고있고, 진실에반하지않는다고판시했다. 2011 년 11 월현재까지 사전 과관련된소송은원고패소, 항소 항고기각등편찬위원회와연구소의완전승소로종결된상태다. < 표 1 친일인명사전 관련소송현황 대상자 ( 분야 ) 관할법원사건번호청구일 - 판결일사건명비고 박정희 ( 위관 ) 서울북부지방법원 09 카합 1324 091026-091106 게재금지가처분기각 신현확 ( 고등관 ) 서울북부지방법원 09 카합 659 090605-090709 발행금지가처분화해 / 신청취하 엄상섭 ( 검사 ) 장우성 ( 화가 ) 장지연 ( 언론인 ) 홍순일 ( 고등관 ) 이의신청 (2008.5.1 ) 서울북부지방법원 08 카합 1003 080825-090219 게재금지가처분기각 서울고등법원 09 라 523 090226-091020 게재금지가처분항고기각 서울북부지방법원 08 카합 823 080707-090219 발행및게시금지가처분기각 서울고등법원 09 라 522 090227-091020 발행및게시금지가처분기각 대법원 09 마 1937 091029-100308 발행및게시금지가처분기각 ( 심리불속행 ) 서울북부지방법원 09 카합 1237 091008-091105 발행등금지가처분기각 서울고등법원 09 라 2398 091110-101015 발행등금지가처분기각 서울북부지방법원 10 가합 6769 100810-101124 서적복제, 배포금지등원고패소 서울고등법원 11 나 2106 101220-110923 서적복제, 배포금지등항소기각 97 건 127 명접수기각 112 명, 보류 13 명, 인용 2 명 15

2. 친일인명사전 의유형별 분야별분포와선정기준 1) 유형별적용기준과분야별분포 사전 에수록된친일파의대상과범주는해방이후다양한형태로제기되었던 친일파 민족반역자 부일협력자 친일반민족행위자 등의개념과정의를모두포괄하였다. 10 사전 편찬의목적이해당인물에대한주관적심판에있기보다는이들의행위가어떠했는지에대한객관적사실을규명하는데중점을두었기때문이다. 사전 에서는친일파를 을사조약전후부터 1945 년 8월 15일해방에이르기까지일본제국주의의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적극협력함으로써, 우리민족또는타민족에게신체적물리적정신적으로직접 간접적피해를끼친자 로규정하고있다. 친일파라는말은좁게는매국노 민족반역자에서넓게는부일협력자에이르기까지다양하게불려졌다. 그러나 사전 은민족반역자와부일협력자를통칭하는단어로서친일파를사용했다. 친일파라는말이이미두개의범주를포괄하는의미로서사회에서시민권을얻었기때문이다. 사전 에수록된인물들의유형별분류와적용기준은다음과같다. < 표 2> 유형분류와적용기준 분류 일제의국권침탈에협력한자 일제의식민통치기구에참여한자 항일운동을방해한자 적용기준 1) 을사조약, 한일합병조약등일제의국권침탈에적극협력한자 2) 일제로부터귀족작위를받거나이를계승한자 1) 조선총독부중추원의부의장, 고문, 참의 ( 찬의 부찬의 ) 로활동한자 2) 일본제국의회의귀족원의원또는중의원의원으로활동한자 3) 고등관이상관리로재직한자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공리 4) 경부이상경찰로재직한자와고등경찰로활동한자,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5) 위관급이상장교로재직한자와오장급이상헌병으로활동한자,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군인 6) 판사 검사로재직한자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사법관리 7) 국책경제기관 단체의간부로서경제침탈에적극협력한자 8) 도 부의원등관선 민선의공직자로서친일행위가뚜렷한자 1) 국권수호또는국권회복을위하여일제에저항하여싸우는부대 단체 개인을공격하거나공격을명령 조장한자 10 이용창, 2009 제 1 장 친일파 의개념과범주, 박수현 이용창 허종, 일제의친일파육성과반민족세력 ( 한국독립운동의역사 08), 한국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독립기념관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3 31 쪽. 1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항일운동을방해한자 일제의침략전쟁에협력한자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으로서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한자 기타친일행위자 예외규정 2) 일제식민통치에협력하거나항일운동을방해할목적으로조직된단체에참여하여적극적으로활동한자 3) 일제에협력하여밀정행위로항일운동을방해한자 4) 항일운동에참여한자나그가족을살상 처형 학대 체포또는이를지휘한자 1)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공출 국방헌금등을적극선전 선동하거나강요한자 2) 일본군위안부 의강제동원과관리에적극협력한자 3) 침략전쟁수행을돕기위해다액의금품을헌납한자 4) 군수품제조업체의책임자 5) 침략전쟁을지원하기위한단체에참여하여적극적으로활동한자 1) 종교계지도자로서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 문학 미술 음악 무용 연극 영화등문화예술부문에서창작과공연활동으로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을적극미화찬양하고선전선동한자 3) 교육 학술 언론계인사로서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의논리를적극수용하여확산시킨자 4) 친일 전쟁협력단체의핵심간부로활동한자 5) 기타전문분야에서일제의식민정책과침략전쟁수행에적극협력한자 1) 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하여훈공또는포상을받은자중에서친일행위가뚜렷한자 2) 일제와일본인에의한민족문화의파괴 말살과문화유산의훼손 반출에적극협력한자 3) 항일운동의경력이있으나변절하여일제에적극협력한자 4) 해외에서활동한조선인중에서위의각조항에상당하는자 1) 위의각조항에해당하지않더라도기타뚜렷한친일행위의증거가확인되는자는포함 2) 위의각조항에해당하더라도뒤에뚜렷한반일행적이확인되는자는제외 출처 :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2009 수록기준과해설 : 선정기준해제 친일인명사전 1, 민족문제연구소, 18 22 쪽. < 표 2> 는예외규정을포함한 7개의유형별분류와각분류마다적용할기준을총 30개로구분한것이다. 곧 사전 에수록한인물들의시기별 분야별 형태별친일행위를종합해분류한것이다. 이를토대로분야별세부선정기준을적용해분류한것이아래 < 표 3> 의 분야별분포와통계 이다. 사전 에수록된 4,389 명은, 각분야에따른중복과상관없이각인물의지위와행적에서우선되는대표경력을분야별로선정한총숫자를말한다. 각인물은행적에따라선정기준의여러항목에해당할수있으므로최대 4 5 개의항목이중복되는경우도적지않다. 이것은 20개의법호가중복된반민규명위원회의경우도마찬가지다 (< 표 5> 참조 ). < 표 3> 은 사전 에수록된 4,389 명을 17 개의각분야와, 여기에적용한 35개의세부선정기준을분야별분포와통계로수치화한것이다. 크게국내 (1 13) 와해외 (14 17) 분야로구분되는데, 국내와해외모두 당연범 지위범 과 행위범 에대한기준은동일하게적용되었다. 다만해외의경우 당연범 지위범 일지라도국내와는지위 계급 호칭등이다르기때문에이를세부선정기준에서상세하게밝혔다. 17 개로구분된각분야별세부선정기준에는정도의차이는있지만각각의지위에따른 당연범 항목 17

이적용되었다. 물론예외는있지만국내 (1 6) 나이에준하는해외의경우처럼행위와상관없이지위자체로만으로도수록되는경우도있다. 이외에국내 (7 13) 나해외의단체및해당항목의경우는각인물의친일행위가얼마만큼지속적이고반복적이며적극적이었는가를중요한기준으로삼았다. 분야별분포와통계는다음과같다. < 표 3> 분야별분포와통계 분야 선정기준개요 소계 합계 비율 1. 매국 수작 ( 습작 ) 과국권침탈조약협력, 귀족작위및습작 134 일본제국의회의원제국의회의원 ( 귀족원 중의원 ) 11 145 3 2. 중추원 부의장, 고문, 참의 ( 찬의 부찬의 ) 296 296 7 3. 관공리 도지사 군수등고등관이상, 기타 1,099 1,099 25 4. 사법 판사 검사, 기타 185 185 4 경부이상의경찰간부 309 5. 경찰 고등경찰 462 786 18 검열업무담당 15 6. 군 위관급이상장교및오장급이상헌병, 기타 217 밀정 21 238 5 7. 친일 전쟁협력단체 노골적 주요친일단체및관제동원단체 ( 핵심 ) 간부와대표자, 임원직중복역임 395 395 9 8. 언론 친일및기관지신문 잡지, 경성방송국, 논설 저술 좌담 강연등 41 41 1 식민지배이론합리화및확산, 각급교육기관관련전쟁동원독려, 43 9. 교육 학술고등관이상교육관리, 좌담 강연등 52 1 조선사편수회참여 9 개신교 51 천주교 7 10. 종교 불교 종교를통한각교단차원의협력,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을통한식민통지와침략전쟁미화 선동 54 184 4 천도교 30 유림 42 문학 40 음악 41 11. 문화예술 무용글 공연 창작 비평등과단체활동을통한식민통치와 2 미술침략전쟁협력 23 163 4 연극 27 영화 30 12. 경제 경제침탈정책주도및협력, 국책경제기관, 군수품제조업체,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 25 25 1 13. 전쟁협력자 국방헌납 모금, 애국기 보국기, 국방비금품 1만원이상 48 48 1 관리 만주국천임관이상, 재만일본기관고등관이상, 기타 67 14. 해외 ( 만주 ) 사법 만주국검찰관 ( 검사 ) 및심판관 ( 판사 ) 4 635 15 경찰 만주국경좌이상경찰, 고등경찰, 재만일본기관경부이상, 기타 31 1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군인 간도특설대하사관급이상간부, 기타 229 단체 간도협조회 훈춘정의단 신선대등하사관급이상간부, 주요친일단체의핵심인물등, 기타 304 15. 해외 ( 일본 ) 35 35 1 16. 해외 ( 중국관내 ) 고등관이상관리, 경부이상경찰, 고등경찰, 밀정, 주요친일단체핵심인물, 강연 언론 저술등활동, 기타 57 57 1 17. 해외 ( 러시아 ) 5 5 0 합계 4,389 명 100% 비고 : 1 선정기준개요 는분야에대한이해를돕기위해 사전 의세부선정기준을요약한것이다. 내용중 기타 는분야별친일행위가뚜렷한자를통칭한다. 2 통계는중복을염두에두지않은것으로, 우선적인대표행적을기준으로한것이다. 3 전쟁협력자 는주로지역유력자를말한다. 아래세부선정기준의 (13) 항목참조. 편찬위원회는수록대상자를선정하기위한기준을설정하면서크게개인의직접적인행위와개인의지위 역할두가지를함께고려했다. 11 전자의대표적인행위로는문인들의창작을통한친일행위, 경찰의민족운동가탄압행위등이른바 행위범 에해당하는경우다. 후자에해당하는대표적인예는매국행위를비롯하여수작 ( 습작 ) 자, 중추원의관, 조선총독부관공리중고등관이상에재직한자, 그리고식민지배와침략전쟁에협력할것을목적으로설립된단체의간부로재직한자등특정한지위에있는자와민족운동과사상탄압을주업무로했던고등계형사처럼그임무 ( 역할 ) 가특별히반민족적일수밖에없는이른바 당연범 지위범 의경우다. 개인의직접적인행위를기준으로하거나고등계형사처럼역할자체가반민족적일경우는특별히논란의대상이되지않는다. 그러나고등관처럼특정지위를친일파로규정해선정할경우논쟁이제기될수있다. 곧개인이차지하는사회적비중이나역할이큰데비해, 구체적인행위가드러나지않았음에도조사대상자로삼을수있느냐는문제는줄곧논란이되었다. 다시말해어떤특정한 지위 를가지고있었다는이유만으로친일행위를한것으로간주해, 그에따른책임을물을수있느냐는것이다. 역사적으로볼때죄에대한책임은크게두가지방향에서추궁되어왔다. 첫째는책임문제가완전히개인의행위에서비롯된것으로여기는방식이며, 둘째는반국가적 반인도적범죄행위등을하도록명령을내린특정한사람들의경우, 그들이가진지위와역할로인해죄를지었다고 간주 하고책임을묻는방식이다. 이때특정지위라함은점령 식민세력의지배를시작 유지 강화시키는데작용한기관이나제도, 그리고단체에서그정책을결정 추인 집행하는지위를말한다. 다만특정지위를확정하는문제는과거청산목적에따른청산주체의결단사항에해당하며, 위계질서상의권력과권한에따라그책임이나죄의경중도다르게규정되는것이일반적이다. 지위의기준은한사회가추구하는사회윤리적인기준이나정의의수준, 또는시대적인공통감각 (common sense) 을반영하고있다. 편찬위원회가특정지위를문제삼아책임을추궁할수있다고판단한것은바로이러한인식에서출발하고있기때문이다. 물론 11 여기에대해서는두개의글을참조했다.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앞의글, 18 22 쪽 ; 김민철, 앞의글, 97 104 쪽. 19

특정지위에재직하긴했으나항일운동에가담했거나일본정부기구의관료또는조직의간부로서지위에반한결정이나행위를한사례가확인된경우는당연히수록에서제외했다. 12 책임추궁의한계를결정하는기준은청산의주체와시대적인요구등에따라달라질것이다. 그러나한가지공통된점은기준의근거로서개인의행위이외에일정한지위와역할 ( 기능 ) 을중요하게여겼다는것이다. 일본제국주의의식민지지배와침략전쟁에협력한과거의사실을정리함으로써역사적이나마과거의잘못을추궁한다는점에서 사전 은분명해방이후의기준과는다른기준을가질수밖에없다. 따라서다수의고등관료가반민족행위자가아니라부일협력자의범주에속한다하더라도정치가소멸된관료중심의 식민국가 를유지하고통치하는데핵심적인역할과기능을수행하였다는점에서수록의대상으로한것이다. 다만경찰의경우, 경부가고등관료의직급에해당하지는않지만식민지사회가물리적폭력에기초한경찰국가라는점에서, 그리고경찰의방대한권한에대한일종의견제장치로서직급이한단계낮게책정되어있는식민지경찰행정의특성상수록대상으로하였다. 이것은식민지사회에대해한국역사학계가도달한연구수준이자역사인식을반영한것이라고도할수있다. 그리고문화예술인이나지식인의경우는그들의사회적지위가다소낮다하더라도지식인으로서의사회적역할과책임이라는점에서엄격하게다루었다. 특히 내선일체 와 황국신민화 대동아성전 등일본제국주의의식민지배와침략전쟁을합리화하는주장을선전함으로써조선인을전쟁으로내몬책임이결코가볍지않기때문이다. 2) 분야별세부선정기준의내용 사전 에수록된 17 개분야와 35 개세부선정기준의개략은다음과같다. 13 전체선정기준에서先親日 後抗日, 일시적으로친일행위에가담했더라도이후상당기간은거하거나 일체친일협력활동을하지않아 소극적저항성 이인정되는경우등은모두보류한상태다. (1) 매국 수작 ( 습작 ) 과일본제국의회의원 (145 명 ) 1. 을사조약 한일합병조약등일제의국권침탈에적극협력한자 2. 일제로부터귀족작위를받거나이를계승한자 3. 일본제국의회의귀족원의원또는중의원의원으로활동한자 12 특정지위에대한책임추궁문제는프랑스의최고재판소가비시정권각료등에대해공민권을박탈해공직에서추방한판결, 戰後일본의 공직추방령 공포, 한국에서 1961 년제정된 반민주행위자공민권제한법 등에서확인된다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7 외국의식민지 점령지과거사청산법령 Ⅰ, 256 288 쪽 ; 김민철, 4 월혁명과 반민주행위자조사 심사기록물 에대하여 역사와책임 창간호 (2011.5), 민족문제연구소, 297 326 쪽참조 ). 13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 민족문제연구소, 앞의글, 22 81 쪽. 2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일제의대한제국강점과정에서각종강제조약체결에협력 참여한자, 조선귀족령 에따라작위와은사금을받은자, 이를계승해습작한자등의 매국형친일파, 그리고일본제국의회의원 ( 귀족원 10 명, 중의원 1명 ) 등이수록되었다. 제국의회의원 11 명중수작자 (3), 습작자 (1) 를제외한나머지 7명도이외의선정기준중 1개이상에는모두포함된다. 수작 습작자는 138 명이지만, 4명은제국의회의의원항목에포함시켰다. 또 1940 년대습작여부와일자가추가확인된경우는 보유편 에수록할예정이다. 다만선정기준에해당하더라도작위를거절 반납하거나, 이후 독립운동 에참여한경우는제외했다. (2) 중추원 (296 명 ) 조선총독부중추원의부의장, 고문, 참의 ( 찬의 부찬의 ) 로활동한자 일제가식민지배를정당화하고정책을뒷받침하는식민통치하위파트너이자, 조선총독의통치를자문하는최고어용기구의역할을한것으로판정하고당연범으로선정하였다. 현재까지확인된중추원의관역임자는총 337 명인데, 이중조선귀족이나일본제국의회의원에중복되거나제외 ( 보류 ) 된경우는뺀 296 명을수록하였다. 강제병합후중추원이설립되면서부의장, 고문, 참의 ( 찬의 부찬의 ) 에임명되었지만, 본인의의지와무관하게일방적으로임명되었거나, 1911 년까지의원면직한인물중추후총독부의공직을맡지않은경우는제외하였다. 또실질적인활동이전혀없던상황에서임명직후의원면직한경우 ( 이시영등 ) 도적극적인친일활동의의지가있었다고보기어렵기때문에수록하지않았다. (3) 관공리 (1,099 명 ) 1. 고등관이상관료로재직한자 2.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공리 조선총독부관리 ( 문관 ) 는크게고등관과판임관으로구분된다. 고등관은친임관 칙임관 주임관을말한다. 친임관은총독과정무총감이있으며, 칙임관은조선총독부의각국장 ( 대체로고등관 1등 ) 과도지사 ( 고등관 2등 ) 에한정되었다. 道참여관 ( 고등관 3등 ) 은주임관에해당한다. 주임관은府사무관 ( 조선총독부의각과장과고급과원 ), 道사무관 ( 도의부장급 ), 道이사관 ( 과장급 ) 으로구분된다. 일제강점 35년여동안조선인으로고등문관을지낸경우는군수가가장많았는데, 군수는도이사관바로아래에위치하는주임관의말단에속했다. 이외에도조선총독부직속각국장, 도지사, 도참여관등에도임명되기는했지만, 직급이높아질수록일본인에비해비율이현저하게떨어진다. 고등관이라는지위는본인의주관적의지와관계없이일제의식민지배정책과침략전쟁에서중요한역할을수행하도록권한을부여받았다. 이들은식민지배정책의중추기능을수행하면서지배체제를유지 21

하는데주요한역할을하는기구에자발적으로참여했기때문에그역사적책임을물어당연범으로선정한것이다. 또판임관일지라도현저하게친일행위를한자는수록대상에포함한반면, 고등관이라도기술직은제외했다. 사전 에는수작자와중추원의관등중복자를제외한 1,099 명이관공리로선정되었으며, 도지사 참여관 서기관 사무관 이사관 민정관 사세관 ( 보 ) 군수등이포함되어있다. 다만고등관료를지냈지만강점초기 (1910 1911) 에의원면직한후공직자경력이확인되지않으면제외했다. 반면반일운동에참여했더라도이후다시친일행위가확인되면포함시켰다. (4) 사법 (185 명 ) 1. 판사 검사로재직한자 2. 친일행위가현저한일반사법관리 일제강점기의사법체계는, 일본내삼권분립 ( 입법 사법 행정 ) 독립의원리가제대로적용되지않은불완전한것이었다. 원래사법권은천황의이름으로재판소가행사하는것이었지만, 조선의경우판사 검사를비롯한사법관리가모두조선총독부의관리로서총독의지휘를받았기때문이다. 1912 년 3월 조선총독부재판소령 ( 제령제4호 ) 이공포되면서총독부재판소는총독에직속되어감독을받았으며, 법원의행정사무에대한감독권도총독이가졌다. 그리고법원은고등법원 복심법원 지방법원의 3심3 급제의구조를갖추게되었고, 여기에검사국을병치했다. 고등법원검사국에는검사장을두었는데, 검사장은총독의지휘감독을받으며검사국사무를맡고하급검사국을지휘 감독하였다. 형사절차에서검사가누리는권한은오히려동시기일본의검사가가진권한보다훨씬더막강했다. 사전 에는사법관리중판사와검사는조선총독부의고등관료에해당하기때문에당연범으로포함되었으며, 하급사법관리는친일행위의정도를심의해선정하였다. 다만조선에서사법체계는 1912 년의제령제4 호에이어 조선민사령 ( 제령제7 호 ), 조선형사령 ( 제령제11 호 ) 등이공포되면서완전하게정비되었으므로, 1911 년까지판 검사로재직한자는대상에서제외하였다. 현재까지확인된일제강점기판 검사와고등문관시험합격자는모두 484 명이다. 사전 에는이중여러분야중복자와보류자를제외한 185 명을수록하였다. 사전 발간과정에서누락되었던 14 명은추가행적이확인되어앞으로발간할 보유편 에수록하는것으로확정하였다. 한편 484 명중 사전 에수록하지않고보류된경우는다음과같다. 1 1910 년대이전에판 검사로재직하다가, 다시조선총독부판 검사로임명된자중 1912 년 3월이전에그만둔경우, 2 판 검사로재직하다가변호사로개업해서식민지배체제를부정하는재판의변호를맡은경우로, 판 검사로식민지배에협력한친일행위를상쇄시키지는못하더라도참작사유가된다고판단되어결정을보류하였다. 그러나이외의친일행위가확인되면당연히수록되었다. 2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5) 경찰 (786 명 ) 1. 경부이상의경찰간부로재직한자 2. 고등경찰및검열업무담당자 3.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일제강점기의경찰은식민통치의불법적지배를폭력을통해유지한다는점에서식민지배의본질을상징하는기구이며, 식민행정을지원하는주요수단이었다는점에서행정의식민성을대표하는기구였다. 따라서경찰간부는고등관에해당하는警視이상이해당되지만, 경찰의직능이지닌특수성과조선인경찰간부는한단계아래인警部가그역할을수행했다는점을고려해경부이상의조선인을대상으로하였다. 또식민지경찰의핵심기능으로, 항일세력을탄압하는임무를수행한고등경찰관, 사상검열에관여했던검열업무담당자들은그기능과역할의중대성으로모두수록범주에포함되었다. 고등경찰은직급에관계없이 당연범 으로수록하였다. 고등경찰의경우자료에 순사 로표기된경우가대부분이어서기타자료를추가확인해야하는어려움이있기때문에, 현재자료의한계상다수가누락되었을것으로추정된다. 해방후반민특위활동을전후해출간된간행물이나증언에의하면악질고등경찰이확인되기도하지만, 가능한 1차사료에의거해사실을확인한다는방침에따라보류된경우도적지않다. 특히지역에서널리알려진고등경찰이누락되는한계도있다. 조선의사상검열을총괄하던검열기구는경무총감부고등경찰과도서계 (1910 1919) 경무국고등경찰과도서계 (1920 1925) 경무국도서과 (1926 1943) 로발전하였다. 1910 년대에는검열에종사한조선인은없었으나 3 1 운동이후경무국고등경찰과에서조선인검열자가충원되었다. 1926 년부터는도서과의조선인은 4명으로출발해 1928 년에 6명, 1930 년에는 7명으로늘어났지만, 이후에는대체로 5 6 명이근무했다. 검열업무담당자들은언론 출판 문화 예술등에대한사전검열과통제정책의핵심에있었다는점을중시해해당지위와관계없이민간촉탁일지라도확인가능한모두수록하였다. (6) 군 (238 명 ) 1. 위관급이상장교와오장급이상헌병으로재직한자 2.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군인 식민지조선인이일본제국주의의장교로재직했다는사실은무장한권력으로식민지배체제를지탱하는중추적인역할을수행하고, 침략전쟁에복무함으로써동아시아민중들에게직접 간접으로가해를입혔다는것을의미한다. 특히 1931 1945 년까지 15년간의전시체제동안군위주의사회체제하에서고등문관보다도더많은권력과사회적지위를누렸다. 위관급이상의장교는일본군 만주군등에서보병 포병 항공 軍需 軍醫 特任등각종병과를막론 23

하고지금의准尉또는소위이상의장교를말한다. 수록대상은다음과같다. 1 일본육군사관학교등일본군장교양성학교를거쳐위관으로임관해일본군에복무한자로, 일본육사 11 기해당자부터 58기졸업자들이해당된다. 단, 59 61 기생은재학중에패전을맞았음을감안해일단제외하였다. 이외단기장교양성기관이나일본육군경리학교를거쳐장교로임관한자들도포함하였다. 2 中國東北軍이래장교나하사관으로복무하다가만주국의군관으로근무한자와 1932 년 3월만주국에서위관급이상의軍官으로복무한조선인장교. 특히만주국중앙육군훈련처 ( 일명봉천군관학교 ) 1기 9 기졸업생및정규사관학교인만주국육군군관학교 ( 일명신경군관학교 ) 1기 3 기졸업생으로임관한자는모두해당한다. 단, 신경 4기생 7 기생도재학중에패전을맞이한경우로제외했다. 기타각종병과의장교양성학교 ( 육군군수학교, 육군군의학교등 ) 출신조선인장교와 봉천군관학교 를개편해주로하사관들이단기교육을받고초급장교로임관했던만주국육군훈련학교 1기 7 기졸업자들도포함된다. 3 대한제국시기장교로서 1912 년이후에도參尉 ( 소위급. 1920 년 4월부터일본식계급으로바뀜 ) 이상의장교로재직한자들이다. 4 장교교육과정을거치지않고이른바특임으로일본군또는만주군장교로복무한자, 특히군의등을들수있다. 5 정규장교양성기관출신은아니지만사병또는하사관에서진급해위관급에준하는대우를받은준위도대상으로하였다. 헌병은伍長 ( 분대장급으로지금의하사또는분대장을맡은병장 ) 이상을수록하였다. 헌병은對民통제와항일운동에대한탐문 검거 취조, 그리고밀정 헌병보조원활용, 특무기관을통한각종공작활동을벌였다. 헌병의꽃 이라불린헌병오장은일선실무책임자로서권한도막강했다. 學兵으로끌려가장교가된경우는학병이사실상강제에의한동원 [ 徵兵 ] 이라는점과근무기간이극히짧았다는점을감안해제외하였다. 또각종임관과정을수료했으나장교로복무하지않은경우, 전사한뒤소위이상으로추서되었거나, 소년항공병출신이나특별공격대처럼자살공격대로보내기위해졸속으로소위로임관시킨경우등은대부분보류하였다. 그러나육군사관학교또는항공사관학교를졸업하고장교로임관한후 特功士 나가미카제 ( 神風 ) 특공대 로사망한자는포함하였다. (7) 친일 전쟁협력단체 (395 명 ) 1. 일진회, 국민협회, 대동동지회, 각파유지연맹, 시중회, 대동일진회, 녹기연맹, 대의당등노골적인친일단체서간부로활동한자 2. 대정친목회, 자제단, 유민회, 동광회, 동민회, 대동민우회, 황도학회, 정학회, 대화동맹, 국민동지회, 대일본흥아회조선지부등주요친일단체에서핵심간부로활동한자 3. 국방의회,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국민총력조선연맹, 흥아보국단, 임전대책협의회, 조선임전보국단, 애국금차회, 조선지원병제도제정축하회, 지원병후원회, 조선군사후원연맹, 시국대응전선사상보국연맹, 대화숙, 조선언론보국회, 조선신문회, 대일본부인회조선본부, 조선문인협회, 조선방공협회, 조선국방의회연합회등관제동원단체에서대표자급으로참여한자 4. 전항 (2~3) 의단체에서임원직을중복역임한자 2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일제의강점이본격화되는 1904 년부터해방되는 1945 년까지, 일제의주도에의해또는민간차원에서자발적으로수많은사회단체가조직되었다. 이중조선민중으로하여금일제의식민지지배를받아들이고더나아가일제의침략전쟁에동원되도록하는데앞장선대표적인단체들을친일 전쟁협력단체로규정하였다. 크게친일을목적으로설립된민간단체와관변단체인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처럼조선총독부가주도하는외곽단체두종류로구분하고, 각단체에서일정이상의직책을맡은자를대상으로하였다. 일정이상의직책이라함은각단체의성격이나내용등의구분에따른것이다. 특히 1930 년대중후반이후에는조선총독부의후원과지원을받는이익단체의대부분이관변단체로흡수되고, 민간의자발적목적으로만들어진일반친일단체도조선총독부와일정한관계를갖고있었다. 따라서관변이든민간이든각단체의성격규명을통해상층지위의간부로서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 적극 협력한자를우선으로선정하였다. 간부가아니더라도단체활동을통해적극적인협력행위가확인되면이외의기준을적용해수록하였다. 다만발기인과고문, 명예직등은예외로했다. 특히발기인으로만관여한후, 이사 평의원 간사등의간부직책을맡지않고실제활동에도나서지않은경우는보류하였다. 또조선농회등과같이조선총독부가만든완전한관제단체들은대상에서제외하였다. (8) 언론, (9) 교육 학술, (10) 종교 ( 개신교 천주교 불교 천도교 유림 ), (11) 문화예술 ( 문학 음악 무용 미술 연극 영화 ) 4개분야는전문영역에속하는것이어서하나의기준으로전체를규정할수없는특수성을갖는다. 각특성에따라행위의기준이다르고, 개인의행위가단체를통해규정되는경우도있기때문이다. 또행위자체로친일여부를가늠하기가매우어렵기때문에전체기준안의틀속에서각분야의전문성과특수성을고려하되, 행위의반복성을중심으로글이나작품뿐만아니라단체참여등도중요시했다. 특히이 4개분야는지식인 문화예술인의친일행위를규정하는것인만큼다른분야의규정보다사회적책임을엄중하게할필요가있다. 해방이후제기된친일파처리에대한각규정이나법안에서이들은청산해야할대상에서줄곧면죄부를받아왔다. 그러나이들의행위는관료나군 경찰등의분야보다정신적 문화적인영향력이크고, 전문성을띤것이었기때문에그만큼행위에따른죄과가무겁다는점을확실하게인식할필요가있다. (8) 언론 (41 명 ) 1. 국민신보 시사평론등친일단체기관지의발행인 편집인 2. 매일신보 만선일보등국책기관지의국장급이상과논설부장 논설위원 3. 경성방송국의국 과장이상 4. 친일신문 잡지사의발행인 편집인 주간 ( 주필 ) 5. 논설 저술 좌담 강연등을통해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5

(9) 교육학술 (52 명 ) 1. 교육 학술계에종사하면서일제의식민지배이론을합리화하고이를확산시키는데앞장선자 2. 각급교육기관과각종교육 학술단체의설립자 책임자 운영자로서전쟁동원을독려한자 3. 고등관이상의교육관리 14 4. 조선사편수회 ( 반도사편찬사업 조선사편찬위원회 ) 의편수활동에지속적으로참여한자 5. 좌담 강연등을통해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10) 종교 (184 명 ) 개신교천주교불교천도교유림 1. 일제의종교통제방침에협력하여교회의변질을주도하고교리를왜곡시킨자 2. 변질된혁신교단, 통폐합된일본기독교조선교단, 교파단위의국민정신총동원연맹 국민총력연맹 비행기헌납기성회등친일단체의간부로활동한자 3. 기독교신문등친일성향의기독교계신문 잡지의발행인과주필 주간 4.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을통해식민통치와침략전쟁을미화 선동하는부일협력행위를반복적으로자행한자 개신교계는총 56명으로목회자가 42명, 평신도지도자가 14 명이다. 목회자는장로교 26명, 감리교 13 명, 성결교 1명, 구세군 1명, 조합교회 1명으로, 이들은대부분교단차원의친일행위에대해책임을져야할위치에있었다. 평신도지도자들은교단내의활동보다는교회외부의부일협력행위자로교육이나다른분야와중복된다. 중복을제외한개신교수록자는 51 명이다. 1. 일제의종교통제방침에따라교단차원의친일을주도하여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 국민정신총동원천주교경성교구연맹, 국민총력천주교경성교구연맹등의핵심간부 3.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을통해식민통치와침략전쟁을미화 선동하는부일협력행위를반복적으로자행한자 수록된 7명중 5명은사제, 2명은평신도다. 사제들은연맹이사장이나이사급으로교단의친일행위에대해책임을져야할위치에있었다. 평신도는교단내에서뿐만아니라일반사회에서도친일행적이확인된다. 1. 일제의종교통제방침에협력하여불교계에친일세력을구축하고한국불교의정체성을훼손한자 2. 1937 년중일전쟁이후친일화한불교계의중앙교단 ( 조선불교중앙교무원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 ) 과친일불교단체 ( 조선불교단등 ) 의주요임원 3. 본사주지승려가운데전승기원법회개최, 국방헌납등부일협력행위가뚜렷한자 4. 불교시보등친일성향의불교계신문 잡지의발행인 편집인 주필 편집주임 5.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을통해식민통치와침략전쟁을미화 선동하는부일협력행위를반복적으로자행한자 31본산주지의총인원은 178 명이다. 또 89명이 30본산연합사무소 재단법인조선불교중앙교무원 조선불교조계종총본사태고사종무원등중앙단체의간부를지냈다. 이중 1937 년중일전쟁이후친일화한중앙교단의주요임원과본사주지로서전승기원법회개최, 국방헌납등친일행위가뚜렷한 54 명이수록되었다. 그리고 불교 ( 신 ), 불교시보 등의발행인 편집인 주필 편집주임도포함하였다. 1. 교단ㆍ부문단체의간부로서일제의침략전쟁에적극협력할것을교인들에게지시ㆍ독려한자 2. 시국대처부의부장 총무 간사, 국민정신총동원천도교연맹과국민총력천도교연맹에서이사장 ( 상무 ) 이사 평의원등의직위를중복또는반복하여역임한자 3.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을통해식민통치와침략전쟁을미화 선동하는부일협력행위를반복적으로자행한자 1. 황도유학을제창하는등유림의친일을구조화하고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 경학원대제학 부제학 사성 3. 경학원강사와임직원중친일행위가뚜렷한자 4. 대동학회 공자교회 대동사문회 이문회 조선유도연합회간부중친일행위가뚜렷한자 5.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을통해식민통치와침략전쟁을미화 선동하는부일협력행위를반복적으로자행한자 14 공립중등학교 ( 중학교와고등보통학교 ) 교장과시학관 교학관등을지내면서교육을통해일제의식민지지배를영속화하는데기여한자를말한다. 2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1. 시 소설 수필 평론 아동문학등문필활동으로내선일체 황국신민화 대동아공영권등일제의지배이데올로기를찬양 미화하고파시즘총동원체제를선전 선동함으로써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 조선문인보국회,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 조선문인협회등각종친일단체의간부로반복하여참여한자 (11) 문화예술 (163 명 ) 문학문학 음악무용 미술 연극영화 1937 년중일전쟁전후부터 1945 년해방때까지발표된글을대상으로개인과단체로구분하였다. 1 개인의친일문필활동 : 작품내용의친일성여부는식민주의논리인 내선일체의황국신민화론 과파시즘논리인 대동아공영권의전쟁동원론 의옹호여부를기준으로해서두가지중어느하나에해당될경우선정하였다. 단, 발표매체와사용한언어는참고만하였다. 2 문필활동전반과친일단체간부경력 : 관변문화예술인단체는물론다양한친일단체에서간부급으로활동한경력도작품과병합해선정하였다. 두가지외에중일전쟁이전의문학작품이나문인들의친일활동은별도의논의가필요하기때문에보류하였다. 또만주지역에서활동한작가들은아직규명되지않은부분이많아상당수는일단보류하였다. 1. 작사 작곡 편곡 노래 연주 지휘 안무 공연 심사 평론 음악교육 강연 방송활동 국민개창운동등의분야에서창작과단체활동을통해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문화위원, 조선음악협회이사 (1 2 기 ), 조선연예협회회장, 조선연극문화협회이사등을역임한자 3. 경성음악협회간사, 경성후생실내악단대표 이사장 전무이사, 경성음악연구원대표, 대일본무용연맹이사등을역임한자로서기타부일협력행위가확인되는자 친일음악 무용이란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하는내용의모든음악행위를말한다. 1937 1945 년까지활동한음악가와무용가의창작과이론, 단체활동을포함한모든음악 무용행위를대상으로삼았다. 이분야는당시나지금이나음악의국악 (2 명 ) 양악 (19 명 ) 대중음악 (20 명 ), 무용 (2 명 ) 으로분류되는데, 구성단체나상급소속단체도같은양상을보인다. 음악 무용분야에서친일행위를한인물의유형은 1 외관단체의장또는간부, 2 친일음악단체의간부로서개별적인행위가있는경우, 3 개별적인친일행위가있는경우등으로구분할수있다. 1. 회화 공예 조각 건축 서예 디자인 만화 삽화 평론등의분야에서창작과단체활동을통해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 총후미술전위원 초대작가, 결전미술전심사위원 3. 조선미술가협회발기인 간사 상임위원, 국민총력조선연맹문화부위원, 단광회회원 4. 총후미술전 결전미술전에지속적으로출품하거나입선한자 5. 종군화가개인전을열거나위문 헌납을한자 6. 님의부르심을받들고서 등징병제찬양에가담한자 7. 기타친일작품 비평활동을지속적으로자행한자 1937 1945 년까지활동한미술인중창작과이론및관련사회활동을통해일제의지배정책에협력한미술행위를대상으로하였다. 친일미술이란일제에유리하고조선에불리하게작용한모든미술행위와그결과로서나타난단체 기관활동과창작, 이론활동을의미한다. 특히행위의반복성과능동성은친일미술행위의주요한판단기준이다. 다만 1922 1944 년까지개최한조선미술전람회에참여한행위, 출신학교, 재료나기법에서일본인 ( 색 ) 관련문제등은고려하지않았다. 1. 연극 영화 가극 만담 평론등공연예술의각분야에서창작과단체활동을통해일제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자 2. 친일연극 영화의제작자 ( 극단대표, 영화제작자 ) 와연출 감독 3. 친일희곡 시나리오작가 4. 주연급배우로서친일연극에반복출연하거나이와관련하여수상경력이있는자 5.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사원으로서친일영화에반복출연한배우 6. 친일연극 영화제작에반복하여참여한무대미술가 촬영기사 7. 국책선전영화를기획하거나심의한자 연극분야 : 1905 1945 년까지활동한연극인으로연극행정가, 극단대표, 연극평론가, 극작가, 연출가, 연기자, 무대미술가등공연물의창작및이와관련된평론활동등을포함한모든연극행위를대상으로하였다. 공연활동에는문학 영화 악극등인접문화예술의창작과출연활동도포함된다. 특히친일행위의반복성과능동성, 주요친일관제행사의수상실적등도주요한판단기준으로삼았다 27

영화분야 : 1937 1945 년까지활동한영화인중친일단체활동을하거나친일영화제작에참여했으며, 친일논조의글을투고하거나발표한영화인들이대상이다. 행위의반복성과친일영화제작, 친일단체활동, 친일글의투고등다양한행위가반복되는것을주요한판단기준으로삼았다. 다만영화가종합예술이라는특성을감안해제작자 연출자 시나리오작가 촬영감독 배우등에대해서는각각다른기준을적용했다. 또주연과조연의역할에따른비중문제도고려했다. (12) 경제 (25 명 ) 14 1. 경제인중일제경제침탈정책을입안또는의사결정을주도한자와그수행에적극협력한자 2. 국책경제기관 (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등 ) 과경제단체의간부 3. 군수품제조업체의책임자 4. 기고 광고 좌담 강연등을통해일제의경제침탈을합리화하고, 전쟁물자동원에적극협력한자 1 조선경제를일본자본주의에포섭하고그식민화를목적으로실시한대표적인경제침탈정책 ( 1905 년화폐재정정리사업, 1914 1918 년조선토지조사사업, 1920 1934 년산미증식계획 ) 에협력한조선인실업가, 2 국책회사 ( 동양척식주식회사 조선식산은행 조선토지개량주식회사 조선저축은행 선만척식주식회사 만선척식주식회사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 조선신탁주식회사 조선임업개발주식회사 조선광업진흥주식회사등 ) 설립과경영에주도적으로관여한조선인실업가, 3 군수업체 ( 조선석유주식회사 송도항공기주식회사 일본무연탄제철주식회사 조선비행기공업주식회사 조선항공공업주식회사 조선항공병기회사 금강항공등 ) 경영을통해일제의침략전쟁에협력한조선인실업가이다. 전시에는군수와민수의구분자체가어려우므로군수품 군수업체의범주는논란이될수있다. 따라서 직접군수, 곧병기제조업체와 군수회사법 에의해지정받은조선인경영군수회사로범위를제한했다. (13) 전쟁협력자 (48 명 ) 1. 국방헌납과모금을주도하여일제의전쟁수행에적극협력한자 2. 애국기 보국기등비행기헌납운동에적극참여한자 3. 국방비명목으로금품 1 만원 ( 당시화폐단위 ) 이상을헌납한자 일제의황민화정책과침략전쟁에협력한자를포괄한다. 이를세분하면 1 학병 지원병 징병 징용 공출 국방헌금등을적극선전 선동하거나강요한자, 2 일본군 위안부 의강제동원과관리에적극협 력한자, 3 침략전쟁수행을돕기위해 1 만원이상의금품을헌납한자 15 등이다. 14 15 해방직후민주주의민족전선과남조선과도입법의원, 반민규명위원회의경우전쟁협력을위한헌납 헌금규모를 10 만원이상으로규정했지만, 1940 년을전후한시기는물자통제가전면화되어물가는오른반면화폐가치는떨어져있었다. 따라서편찬위원회가 1 만원이상이라고규정한것은그만큼전시체제기의국방헌금등을통해일제의전쟁수행에협력한자를광범위하게조사함으로써행위자체를중요한판단의근거로삼았기때문이다. 다만 1 만원이상의국방헌금을한차례냈더라도다른친일행적이전혀확인되지않으면보류하였다. 그러나 1 만원이 2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사전 수록의대상과분야를설정하면서어려움을겪은것가운데하나가지역단위에서부일협력을한유력자들에대한규정이었다. 조사범위가넓고학계의연구수준도미흡한상태이지만이분야에대한규명도상당정도진척을본단계이다. 그러나온전한체계를갖추기위해서는자료조사와연구분석에더많은시간이필요한것이현실이다. 사전 에는지역의유력자중황민화정책과침략전쟁을지원하기위한단체에참여하거나도회 부회의원, 촉탁보호사등의뚜렷한행적이확인된경우만포함하였다. 이분야에대한인물선정은충분한자료조사와분석을거쳐 보유편 에추가하기로결정하였다. 해외 (732 명 ) - (14) 만주, (15) 일본, (16) 중국관내, (17) 러시아 1. 만주국의천임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2. 재만일본기관의고등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3. 만주국의경좌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4. 재만일본기관의경부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5. 밀정등첩보활동을통해일제에적극협력한자 6. 군경특무조직 ( 간도협조회 간도특설대 훈춘정의단 신선대등 ) 의하사관급이상간부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대원 7. 만주국의고급관리양성기관인건국대학 대동학원등의천임관이상교원 8. 주요친일단체 ( 협화회 민회 흥아협회등 ) 의핵심인물 9. 기타국내기준에의거친일행위가뚜렷한자 (14) 만주 (635 명 ) (15) 일본 (35 명 ) 만주국 (1932 1945) 조선인관료들가운데薦任官 [ 주임관에해당 ] 이상과주요국공립대학교 대학원에서천임관급으로복무하는교원을대상으로하였다. 만주국에근무한조선인관료는대략 3,000 여명이며, 이중조선인으로서고등관수는 200 명내외로추산된다. 다만만주국고등고시에합격했거나고등관시보를지냈더라도고등관으로역임한사실이자료상불명확하거나추가조사가필요한경우는국내와동일한기준을적용하여보류하였다. 조선인경찰은국내에준하였다. 곧조선총독부경부급에해당하는경좌급이상의지위에복무한자들과, 고등경찰 ( 특무 ) 또는기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들이해당한다. 또관동국소속의조선인경찰, 일본외무성 영사관및산하분관에소속되어만주일대에서활동한조선인경찰과조선총독부에서만주로파견한경찰중경부이상으로근무한자도수록하였다. 만주국이성립되기이전에활동한조선인친일세력들은관료 군 경찰, 그리고민회간부등을비롯해무장토벌대에이르기까지다양한존재로존재했다. 이러한 토벌조직 은항일무장세력체포 살상에앞장섰으며항일운동에막대한피해를끼쳤기때문에해당조직의책임자는물론반장급 ( 분대장급 ) 의일선책임자, 그리고직접적인 토벌 행위에종사한자들까지모두수록하였다. 이외유사한성격의단체소속원에대해서도같은기준을적용하였다. 1920 년대이래재만친일세력의방대한거점으로지역마다조직된조선인민회를비롯해협화회 흥아협회, 그리고이와유사한친일단체는그핵심인물을수록했다. 다만현재까지자료의한계로상당수의간부급인물들은추가조사와보완을위해보류하였다. 1. 고등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2. 경부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3. 밀정등첩보활동을통해일제에적극협력한자 4. 주요친일단체 ( 상애회 대동협회 태양청년회 애국동심회 내선공조융화회 내선동애회 애국청년단등 ) 의핵심인물로서재일조선인들의항일운동과권리향상운동등을교란 탄압하거나전쟁협력에적극앞장선자 5. 강연 언론 저술활동등을통해내선일체 황도주의 전쟁협력등을적극적으로선전하거나고취한자 되지않더라도다른친일행적이현저하게확인되는경우는수록하였다. 29

6. 기타국내기준에의거해친일행위가뚜렷한자 (15) 일본 (35 명 ) (16) 중국관내 (57 명 ) (17) 러시아 (5 명 ) 일제는일본에사는조선인들에게조선보다훨씬강도높은동화정책을펼쳤으며, 조선인들은일상적으로민족차별과감시 통제를받았다. 따라서조선인의민족적특성을말살하고 치안방해 요소를제거하기위한극심한통제로재일조선인들이혹독한상황에처해있었음을고려했다. 1920 년대이후일제의재일조선인정책은 내선융화 시기에서, 1930 년대중반이후협화회로통합되는 내선협화 시기로구분할수있다. 협화회활동만확인되는경우 사전 수록대상으로삼지않고, 대부분 1920 1930 년대에지속적으로친일활동이확인되는자를대상으로하였다. 다만상애회는그해악이매우크기때문에본부와주요지역상애회의대표적인인물들은포함했다. 이밖에융화단체중에서도 1 일본국가주의단체와연계하여활동하거나천황제를밑받침하는행사에적극참가한단체, 2 내선일체와황민화이념전파에앞장선단체, 3 전시통제기에국방헌금이나노무동원에적극협력한단체에서중심적으로활동한인물들은수록대상으로하였다. 기타기준은국내의기준과동일하게적용했다. 1. 왕정위 ( 汪精衛 ) 정부 기동 ( 冀東 ) 정부등일제괴뢰정권의고등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2. 재중일본기관의고등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3. 왕정위정부 기동정부등일제괴뢰정권의경부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4. 재중일본기관의경부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5. 밀정등첩보활동을통해일제에적극협력한자 6. 주요친일단체 ( 협려회 계림회등 ) 의핵심인물 7. 기타국내기준에의거친일행위가뚜렷한자 만주지역을일컫는랴오닝 ( 遼寧 ) 지린 ( 吉林 ) 헤이룽장 ( 黑龍江 ) 의 3개성일대를제외한중국본토에서활동한조선인중친일행적이뚜렷한자들을대상으로하였다. 관료와경찰은국내와동일한기준을적용했는데, 다만그소속이괴뢰정권또는재중일본기관이라는점이다르다. 친일단체는중국관내의일본군점령지역에서조직된각종조선인회 거류민회 협려회 친목회 계림회계열의단체임원중핵심인물을대상자로하였다. 또상당수는일본군위안소운영업자들이포함되었다. 이들은일본군점령지역에서 위안소 운영을통해침략전쟁에적극협력하면서반인권적 반민족적행위를자행했다. 따라서국내기준에의거해친일행위가뚜렷한자에포함시켰다 (< 표 2> 유형분류와적용기준 : 일제의침략전쟁에협력한자중 2) 일본군위안부 의강제동원과관리에적극협력한자 ) 1. 재러일본기관의고등관이상관리와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관리 2. 재러일본기관의경부이상경찰, 고등경찰, 친일행위가뚜렷한일반경찰 3. 밀정등첩보활동을통해일제에적극협력한자 4. 일제의시베리아출병이후조직된단체의임직원으로서일제에적극협력한자 5. 기타국내기준에의거친일행위가뚜렷한자 지역적특수성으로연해주지역에한정되었다. 조선인들의친일활동은한인사회와러시아당국의반일감정등으로상당히제한적이었기때문에주로일본의시베리아출병시기에집중적으로전개되었다. 이러한특수성으로인해실제적용된기준은 3과 4의항목에한정되어밀정 (2 명 ) 과민회 간화회간부를포함해 5명에불과하다. (18) 기타이밖에일제에협력하여훈공또는포상을받은자중에서친일행위가뚜렷한자, 일제와일본인에의한민족문화의파괴 말살과문화유산의훼손 반출에적극협력한자, 위의각분야에포함되지않는자일지라도뚜렷한친일행위가확인되는자도사전에수록대상으로삼았다. 3.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친일반민족행위 ( 자 ) 결정내용 3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반민규명위원회는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 이하 반민규명법 ) 제1 조 ( 목적 ) 에서 이법은일본제국주의의국권침탈이시작된러 일전쟁개전시부터 1945 년 8월 15일까지일본제국주의를위하여행한친일반민족행위의진상을규명하여역사의진실과민족의정통성을확인하고사회정의구현에이바지함을목적으로한다. 라고밝히고, 제2 조 ( 정의 ) 에서규정한 1 20 호에해당하는자를조사대상자로선정해친일반민족행위를결정심의한후이의신청을거쳐최종결정하였다. 16 조사대상자는정치, 통치기구, 경제 사회, 문화, 해외등 5개의부문으로나누어진행하였다. 17 1 정치부문에서는귀족, 중추원분야, 2 통치기구부문에서는관료, 사법, 군인 헌병, 경찰 밀정분야, 3 경제 사회부문에서는경제, 교육, 언론, 종교 ( 기독교 불교 유교 천도교 ), 정치 사회단체분야, 4 문화부문에서는학술, 문예 ( 문학, 연극 영화, 음악 무용 야담, 미술 ) 분야, 5 해외부문에서는중국지역과일본지역등으로나누어조사하였다. 조사대상자선정심의 선정 기각 < 표 4> 조사대상자선정 친일반민족행위결정총계 조사대상자선정에대한이의신청 인용 ( 선정취소 ) 기각 ( 선정유지 ) 친일반민족행위결정심의 결정 기각 친일반민족행위결정에대한이의신청 인용 ( 결정취소 ) 기각 ( 결정유지 ) 1,052 43 9 115 1,007 36 1 73 총 1,095 명에대해조사대상자선정심의를한결과 1,052 명이조사대상자로선정되었다. 조사대상자선정사실을이해관계인에게통지하거나 관보 등에공고한결과모두 124 건의이의신청이접수되었다. 조사대상자선정에대한이의신청심의결과 9건은인용 ( 선정취소 ) 되고, 나머지 115 건은기각 ( 선정유지 ) 되었다. 조사대상자로선정된 1,052 명중이의신청이받아들여져조사대상자선정이취소된 9명을제외한 1,043 명에대해조사를진행하고, 친일반민족행위결정심의를하였다. 그가운데 1,007 명의행위가 반민규명법 제2 조각호에규정된친일반민족행위로결정되었다. 결정된 1,007 명에대해서는유족들에게결정사실을통지또는공고하였다. 모두 74 건의이의신청이접수되었는데, 심의결과 1건은인용되고 ( 미술분야의정현웅 ) 나머지 73건은기각되어, 최종적으로 1,006 명에대한친일반민족행위가확정되었다. 반민규명위원회가최종결정한 1,006 명을각부문 분야별결정자, 그리고이를 반민규명법 제2 조 20 16 명칭에서 반민규명법 은 친일 이생략된채만들어졌지만, 법조문에는 친일 반민족행위 로명시되어있는것이확인된다. 위원회의명칭도 친일 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이다. 현재의반민규명법에 친일 이빠진것은입법과정에서일본측의 친일 문구삭제요구를수용한결과라고한다. 반면반민족행위자의재산을국가로귀속시키기위해만들어진특별법과위원회는각각 친일반민족행위자 를명시하고있어대조된다. 17 대통령소속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친일반민족행위조사 ), 261 쪽. 반민규명위원회는 2009 년 11 월에총 25 권의 보고서 를발간하였다. Ⅰ 은 위원회활동 ( 전 1 권 ), Ⅲ 은 친일반민족행위연구 ( 전 4 권 ), Ⅳ 는 친일반민족행위결정 ( 전 19 권 ) 으로구성되었다. 31

개법호에적용한분포와통계는다음과같다. < 표 5> 친일반민족행위 ( 자 ) 의부문 분야별분포와통계 부문분야주요적용법호 ( 제 2 조 ) 결정소계비율각호 (1 20 호 ) 정치 통치기구 1. 귀족 1,3,4,6,7,8,9,11,1 ( 매국 수작 ) 한일합병의공으로작위를받거나이를계승한행위 65 139 14 3,17,18,19 (6 호 7 호 ) 귀족 ( 습작 ) 74 7,8,9,13,17,19 2. 중추원 3. 관료 4. 사법 5. 군인 6. 헌병 조선총독부중추원부의장 고문또는참의로활동한행위 (9 호 ) 고등문관이상의관리, 헌병또는경찰로서무고한우리민족구성원을감금 고문 학대하는등탄압에적극앞장선행위 (16 호 ) 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하여포상또는훈공을받은자로서일본제국주의에현저히협력한행위 (19 호 ) 판사 검사또는사법관리로서무고한우리민족구성원을감금 고문 학대하는등탄압에적극앞장선행위 (15 호 ) 일본제국주의군대의소위 ( 少尉 ) 이상의장교로서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행위 (10 호 ) 고등문관이상의관리, 헌병또는경찰로서무고한우리민족구성원을감금 고문 학대하는등탄압에적극앞장선행위 (16 호 ) 244 244 24 118 118 12 2,4,8,9,11,13,14, 15,17,18,19 2,3,8,9,11,13, 16,17,18,19 32 32 3 9,15,17,19 34 34 3 1,4,9,10,11,13,17,19 6 6 1 3,19 7. 경찰 ( 위와같음 ) 77 77 8 1,2,3,5,9,11,16,17,18,19 8. 밀정 밀정행위로독립운동이나항일운동을저해한행위 (5 호 ) 5 5 1 3,4,5,9,13,16,19 9. 경제 일본제국주의의전쟁수행을돕기위하여군수품제조업체를운영하거나대통령령이정하는규모이상의금품을헌납한행위 (14 호 ) 동양척식회사또는식산은행등의중앙및지방조직간부로서우리민족의재산을수탈하기위한의사결정을중심적으로수행하거나그집행을주도한행위 (18 호 ) 32 32 3 2,4,6,8,9,11,13, 14,15,17,18,19 경제사회 10. 교육 학병 지원병 징병또는징용을전국적차원에서주도적으로선전 ( 宣傳 ) 또는선동하거나강요한행위 (11 호 ) 사회 문화기관이나단체를통하여일본제국주의의내선융화또는황민화운동을적극주도함으로써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및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행위 (13 호 ) 일본제국주의의통치기구의주요외곽단체의장또는간부로서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및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행위 (17 호 ) 22 22 2 9,11,13,15,17,19 11. 언론 ( 위와같음 ) 33 33 3 2,4,6,9,11,13,14,17 12. 종교 개신교천주교 ( 위와같음 ) 17 48 5 4,5,9,11,13,17 3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문화 해외 12. 종교 13. 정치 사회단체 불교 9 11,13,17,20 유교 ( 위와같음 ) 12 48 5 6,9,11,17,19 천도교 10 9,11,13,17 독립운동을방해할목적으로조직된단체의장또는간부로서그단체의의사결정을중심적으로수행하거나그활동을주도한행위 (4 호 ) 사회 문화기관이나단체를통하여일본제국주의의내선융화또는황민화운동을적극주도함으로써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및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행위 (13 호 ) 51 51 5 2,4,5,6,9,11, 13,17,19,20 14. 학술 ( 위와같음 ) 20 20 2 4,9,11,13,17,19,20 문학 31 11,13,17 미술 4 11,13,17 연극 10 11,13,17 15. 문예 영화 ( 위와같음 ) 7 64 6 11,13,17 음악 10 11,13,17 무용 1 11,13 야담 1 11,13 16. 만주국관리 17. 중국지역경찰 18. 중국지역단체 19. 일본지역 고등문관이상의관리, 헌병또는경찰로서무고한우리민족구성원을감금 고문 학대하는등탄압에적극앞장선행위 (16 호 ) 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하여포상또는훈공을받은자로서일본제국주의에현저히협력한행위 (19 호 ) 고등문관이상의관리, 헌병또는경찰로서무고한우리민족구성원을감금 고문 학대하는등탄압에적극앞장선행위 (16 호 ) 독립운동을방해할목적으로조직된단체의장또는간부로서그단체의의사결정을중심적으로수행하거나그활동을주도한행위 (4 호 ) 사회 문화기관이나단체를통하여일본제국주의의내선융화또는황민화운동을적극주도함으로써일본제국주의의식민통치및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행위 (13 호 ) 일본제국의회의귀족원의원또는중의원으로활동한행위 (8 호 ) 일본군을위안할목적으로주도적으로부녀자를강제동원한행위 (12 호 ) 12 12 1 3,4,9,10,13, 16,17,18,19 10 61 6 3,13,16,17,19 51 1,2,3,4,5,6,9,10, 13,14,17,19 8 8 1 8,11,13,14 합계 1,006 명 100% 출처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친일반민족행위조사 ), 261 278 쪽의 조사현황 의해당항목정리 ; 보도자료 (2009.11). 반민규명위원회가 2009 년 11 월발간한최종보고서에는친일반민족행위 ( 자 ) 1,005 명의결정문만수록 되어있다. 반민규명위원회는최종 1,006 명을결정해결정문을발표할예정이었으나, 이과정에서후손이 행정안전부장관을상대로난파홍영후를친일행위자로규정한처분을취소해달라는소송을제기해, 법 33

원이 본안판단때까지명단에포함하는것을일시중지한다. 고결정했기때문이다. 그러나법원의최종선고를하루앞둔 2010 년 11 월 9일에원고가소송을취하하면서난파홍영후는반민규명위원회가결정한 1,006 명에포함되었다. 18 해방직후마련된각종친일파처리규정 ( 안 ) 이나정부수립직후제정된 반민족행위처벌법 ( 이하 반민법 ) 은친일파에대한단죄를목표로하였다. 기본지향은엄격한법적청산이었으며, 사형 징역형 금고형등의신체형과일부또는전체몰수의재산형, 공민권 피선거권등기본권제한으로가능한방식이모두포함되었다. 19 그러나 반민법 은귀족 중추원참의 고등경찰 헌병 밀정등이른바당연범과달리행정 사법관료와군장교, 문화예술계와교육계등지식인의경우에는처벌대상이되는위계를높이거나 악질적인행위자, 죄적이현저한자 등이라는단서를붙여사실상관용의길을열어놓았다. 때문에 반민법 의시행과정에서악질적인행위가입증되지않는한면죄부가주어졌다. 여기에정치적인외압도크게작용해서반민특위의조사를거치면서상당수가제외된채송치되었고, 또송치자중특별검찰부가실제로기소한것은 50% 에도미치지못했다. 결국이승만정권의와해공작과해체, 6 25 전쟁을거치면서실제로처벌된경우는없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 표 6>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조사 송치및특별검찰부의기소현황 (1949) 반민법조항 해당분야 조사건수 송치 기소 비율 제1조 ( 각종매국조약 ) 제2조 수작자, 제국의회의원 4 2 1 50 제3조 애국자살상자 27 19 17 89 1호 습작자 36 25 6 24 2호중추원 102 86 29 33 3호 칙임관이상관리 32( 도지사 18, 참여관 24) 27 14 51 4호 밀정 29 14 10 71 5호 독립운동방해친일단체 26 15 6 40 제 4 조 6호 군인 경찰 209( 일반경찰 161, 경부이상 34, 헌병 13, 군1) 106 52 49 7호 군수산업 20 17 5 29 8호 도부회의원 63 47 14 29 9호 관공리 50( 군수 23, 면장 12, 기타 15) 37 11 29 10 호 국책단체 89 65 35 53 11호 종교 사회 문화 경제기타분야 42 27 13 48 12호 개인친일 16 11 3 27 18 연합뉴스 2010.11.9. 홍난파친일명단오를듯 후손행정소송취하. 행정안전부는모든소송이종료된후난파홍영후에대한결정문을다시수록하는것으로결정하였다. 19 이용창, 앞의글, 3 31 쪽. 3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제 5 조해방후공직자제한 ( 기술관제외 ) 20 7 6 85 제 6 조 ( 정상참작 ) 제 7 조반민법방해자 21 8 3 37 제 8 조 ( 반민법규정자로단체조직 ) 계 786# 513# 225# 46.50% 출처 :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2009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의성립과활동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Ⅲ-1( 친일반민족행위연구 ), 135 140 쪽 [( 허종, 2003 반민특위의조직과활동-친일파청산그좌절의역사, 도서출판선인 ; 이강수, 2003 반민특위연구, 나남출판 )]. 비고 : 1 조사인원은 688명이나, 이중경력이확인된 547 명을대상으로한것임. 특검으로송치된인원은 599명이나, 이중확인된 401 명을대상으로한것임, 2 #786 명과 #513 명은반민법조항이중복적용된결과임, 3 기소건수는기소자총 293건중확인된 136 명을대상으로한것임. 한편 2004 년 12월에제정된 반민규명법 은구체적행위에대한진상조사를우선으로했지만, 국가가반민족행위자를선정하고이를관보등공문서에게재하는행정절차가수반된다는점에서일종의명예형이다. 또후속법률로제정된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도제한적이기는하지만재산 몰수 를규정하고있고선행법률의반민족행위도원용하고있다는측면에서결과적으로재산형의성격도일부포함하고있다. 20 반민규명법 은 반민법 에서 당연범 으로규정한조선귀족 중추원의관 ( 고등 ) 경찰 헌병 밀정등에대해서도명확한규정없이단서조항으로만간주하는한계를나타냈다. 곧 반민규명법 은처음논의되었던 지위범 이나 당연범 규정을삭제하고해당法條전부를조사대상이되는친일반민족행위로재구성함으로써결과적으로구체적행적을입증하지못하면상당한지위에있었다하더라도친일반민족행위 자 에서제외할수밖에없는근원적결함을갖게된것이다. 21 예컨대조선귀족의습작자나중추원의관과같은뚜렷한친일파라하더라도구체적행위를입증하지못하면제외되거나, 이후행정소송에서부분패소하거나, 위헌소송으로이어진것이다. 논란이된후작이해승의경우 한일합병의공으로작위를받거나이를계승한행위 ( 제7 호 ) 에대해재판부는이해승이후작의작위를받은이후의친일행적은인정하면서도, 이해승이 한일합병의공으로 작위를받았다고볼근거가없다고판단한것이다. 22 특히사법 20 조세열, 2010 앞의글, 11 12 쪽. 21 조세열, 2010 앞의글, 12쪽. 또초안의 친일반민족행위자 규정을조사대상에불과한 친일반민족행위 로대체해범주를대폭축소시킨것도문제가되었다. 22 재산조사위원회가이해승의 친일재산 을국가로귀속하기로결정하자후손이소송을제기해 2 심과대법원에서이와같이판결확정하였다. 이러한판결은이해승의후손이반민규명위원회를상대로한소송에도영향을미쳐, 반민규명위원회는부분승소한 1 심에대해항소심을제기한상태이다. 이해승의 친일재산 과관련해서는또다른소송이진행중인데, 한일합병의공으로 작위를받았는지의여부가판결의중요한근거가될전망이다 ( 이용창, 2010 조선귀족후작이해승과 친일행위 의대가 - 서울고등법원과대법원판결의부당성 -, 법무부국가송무팀용역보고서 ). 다만이해승과관련된후속재판심리과정이진행중이던 2010 년 4 월국회김을동의원의발의로, 문제가된위제 7 호의규정중 한일합병의공으로 라는단서조항을삭제하는개정안이통과됨으로써 작위를받거나이를계승한행위 자체만으로반민족행위자로결정하거나, 이를반영해재산을국가로귀속시킬수있는법적근거가마련된것이므로재판부의현명한판결이기대된다. 그런데이조항의개정은법무부가담당하는국가송무의 특별법 에만적용된상태이며, 정작행정안전부가진행중인 반민규명법 과관련해서는개정되지않은상태다. 35

( 판사 검사 ) 분야는법조항의모호함으로재판부의엇갈린판결을초래했다. 예컨대재판부는일제시대판사를지낸유영과관련한판결에서 우리민족구성원에대한감금 고문 학대등탄압에적극앞장선행위나일본제국주의식민통치의침략전쟁에협력하는등의행위가있어야하는것 ( 제15 호 ) 이라고판시하였다. 배석판사로서기소된사건에법률을적용했을뿐이지감금 고문 학대에참여한적이없다는후손들의논리를인정한것이다. 23 또객관적기준을마련하는데어려운경우도적지않았다. 예컨대제16 호는 고등문관이상의관리, 헌병또는경찰로서무고한우리민족구성원을감금 고문 학대하는등탄압에앞장선행위 라고했지만, 고등문관인도지사 참여관 군수등이장기간재직했더라도감금 고문 학대했다는행위를입증하지못하거나, 물자수탈이나전쟁동원에관여한입증자료가없으면면책되기도했다. 이외각법호에서 적극협력한행위, 적극앞장선행위, 현저한행위, 주도한행위 등의단서규정이있어이에대한기준을설정하지못해심의과정에서논란이제기되어제외되기도했다. 24 이외에도반민규명위원회의조사사업은철저한증거주의원칙에따른다는원칙으로인해자료에의해입증되지못했다는이유로제외되는경우도적지않았다. 객관적인자료에충실을기한다는원칙은 사전 도마찬가지였지만, 오히려사회적관심도가높은인물에대해서는가능한모든자료를확인해행적을밝혔다. 행위의중대성을가리는기준이다르기때문이겠지만, 보고서 는조사대상자를선정한후이의신청을거쳐최종심의하면서법호적용의원칙에혼선을빚어논란이되기도했다. 다만 사전 도 보고서 와마찬가지로경찰등의경우처럼반민특위당시기소되는등정황이나혐의가인정되지만객관적자료에의거해사실이확인되지않으면보류되거나조사대상자로선정되지않은한계가있다. 한시기구로존재했던반민규명위원회의활동은종결되어후속작업은기약할수없지만, 사전 의경우이후조사를통해 보유편 에서충분히반영할기회가있을것이다. 4. 친일인명사전 과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민간조직이 20 여년간축적한방대한데이터와전문성 실천성을토대로발간한 사전 은친일반민족 행위자와적극적인부일협력자 4,389 명의행적을수록하였다. 사전 이발간된 2009 년같은해에국가기 구인반민규명위원회는 4 년 6 개월의한시적인기간동안적지않은예산과전문인력이참여해 1,006 명의 23 유영판결 2 개월후, 역시판사를지낸김세완건에대해담당재판부는 판사가항일독립운동가에대해형사재판을통해사형, 징역형과같은실형을선고하는행위는무고한우리민족구성원에대한탄압과직접적관련성이인정된다 고하여전혀다른판결을내렸다 ( 서울행정법원 09 구합 38787, 2010.12.24). 재판부의엇갈린판단은여론의반향을불러일으켰다. 행위로보아김세완보다유영의친일반민족행위가더컸기때문이다. 이러한때반민규명위원회가제기한유영관련항소심에서서울고등법원은원고 ( 유족측 ) 승소한 1 심을깨고원고패소판결했다 ( 연합뉴스 2011.11.10. 법원 독립운동유죄판결친일반민족행위 ). 24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Ⅱ( 친일반민족행위조사 ), 279 282 쪽. 3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친일반민족행위 ( 자 ) 의주요행적을담은 보고서 를발간했다. 1949 년반민특위가이승만정권의와해공작으로좌절된지 60년만에민간조직과국가기구가같은시기에친일문제를일단락짓는결과물을내놓은것이다. 계기 발단이나과정, 결과는다르지만이민족의지배로부터벗어난후에도왜곡된역사를배우도록강제한과오를반성하고, 미래의화해를위한밑거름을마련한것이다. 앞서 < 표 3> 과 < 표 5> 에서살펴보았던 사전 과 보고서 에수록된각각의전체숫자와비율을분야와합계, 비율로정리하면다음과같다. 분야 ( 사전 ) < 표 7> 사전 과 보고서 의분야별분포와통계 합계 ( 명 ) 비율 (%) 사전보고서사전보고서 분야 ( 보고서 ) 매국 수작 ( 습작 ) 134 139 3 14 귀족 ( 매국 수작 습작 ) 일본제국의회의원 11 0 0 0 ( 일본및기타에포함 ) 중추원 296 244 7 24 중추원 관공리 1,099 118 25 12 관료 사법 185 32 4 3 사법 경찰 786 77 18 8 경찰 군 ( 헌병포함 ) 217 34 3 군인 40 5 4 6 1 헌병 밀정 21 5 0 1 밀정 친일 전쟁협력단체 395 9 443 51 전쟁협력자 48 1 10 5 정치 사회단체 언론 41 33 1 3 언론 교육 학술 52 22 2 교육 42 1 4 20 2 학술 종교 184 48 4 5 종교 문화예술 163 64 4 6 문예 경제 25 32 1 3 경제 해외 만주 [ 관리 사법 경찰 군인 단체 ] 635 12 15 1 만주국관리 일본 35 8 1 1 일본지역 ( 중의원 1명포함 ) 중국관내 57 732 10 81 1 17 1 8 중국지역경찰 51 5 중국지역단체 러시아 5 0 0 0 없음 합계 4,389 1,006 100 100 우선분야를구분하는데에서약간의차이가있다. 사전 은수록대상자를 7 개의유형별로구분하고, 이를 17 개의분야로분류했다. 보고서 는크게 5 개의부문으로구분하고, 이를 19 개의분야로분류해 37

20개의해당법호를적용했다. 전체수록자는각각 4,389 명과 1,006 명으로 사전 이 4배나많은인물을수록했다. 보고서 가행위를중심으로친일반민족행위가명백한자들을대상으로한반면, 사전 은이에더해적극적인부일협력자를포함했기때문이다. 이것은선정기준이다르다는이유도있지만, 반민규명법 제2 조 20개의법호전체가행위를객관적으로증명하지못하면해당법호를적용할수없도록규정했기때문이다. 이에반해 사전 은 당연범 지위범 이나 행위범 모두각각의지위나행위가확인되면분야마다규정된선정기준을적용해대상자를확정했기때문이다. 비율이갖는의미는 사전 과 보고서 를비교하는데있는것이아니라, 각각의총수에서분야가차지하는비중을보려는것이다. 사전 은관공리의대부분이 당연범 지위범 에해당하므로국내외를통틀어 1,099 명 (25%) 으로가장많은숫자와비율을차지한다. 보고서 에는고등관이상의관리에해당하더라도행위를입증해야하기때문에 사전 에비해적다. 그렇지만관료는중추원 (244 명, 24%), 매국 수작 습작 (139 명, 14%) 에이어세번째로많은숫자 (118 명 ) 와비율 (12%) 을차지한다. 곧 사전 과 보고서 는규모와내용에서차이가있기때문에숫자와비율로두가지를비교하는것은큰의미가큰없는것이다. 규모로보면 사전 은국내가 3,657 명 (83%), 해외가 732 명 (17%) 으로, 해외를제외하고 2005 년에발표했던수록예정자 1차명단 3,090 명보다오히려국내수록자가많았다. 보고서 는국내가 925 명 (92%), 해외가 81 명 (8%) 으로큰차이가있다. 해외를제외하더라도 사전 은 보고서 에비해전체수록자의 4배와유사한수치를보인다. 사전 은국내의경우밀정까지가 당연범 지위범 에해당되어 3,657 명중 2,749 명 (62%) 으로다수를차지하고, 이외 908명이친일 전쟁협력단체, 종교, 문화예술, 교육학술, 전쟁협력자, 언론, 경제등 7개의분야에분포되어있다. 보고서 는 19개의분야중 15개가국내에해당하는데, 반민규명법 에명시되어있지는않지만법호의 6 7 8 9 항에해당하는매국을포함한조선귀족, 중추원의관, 해외 ( 일본지역 ) 의일본제국의회중의원이 당연범 으로간주되어 925 명중 384 명 (38%) 이여기에해당된다. 이어서 541 명이관료, 경찰, 문예, 정치사회단체 종교, 사법 언론 경제 군인, 교육, 학술, 헌병등의순으로분포되어있다. 사전 과 보고서 가갖는공통점과차이점을정리하면 < 표 8> 과같다. < 표 8> 사전 과 보고서 공통점 차이점 사전 목적 : 진상규명, 정의실현 1대상 : 반민족행위자와부일협력자일부총 4,389 명 2의미 : 학문적정리와역사적책임추궁 3형식 : 친일인명사전, 친일총서 4주체 : 사회 5서술대상 : 1904 전후 1945.8 보고서 1반민족행위자총 1,006 명 2역사적 법적책임추궁 3조사보고서, 자료집 4국가 51904 1945.8 3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차이점 6 내용 : 행위자중심 7 문제제기형 - 사회적논쟁수행 8 조사방식 : 수록대상자선정 이의신청 사전 6 행위중심 7 과제정리형 8 조사대상자선정 이의신청 대상자결정 이의신청 보고서 출처 : 김민철, 2010 앞의글, 93 쪽. 민간단체와국가가각각의주체로 친일파 및친일반민족행위 ( 자 ) 를선정한목적과역할은크게다르지않다. 물론주체가다르기때문에책임져야할과제의무게는다를수있다. 보고서 의경우제한된기간에주어진과제를정리함으로써임무가완료된것이어서책임소재가없어진반면, 사전 은사회적논쟁을계속이어갈수밖에없는진행형이기때문이다. 또 사전 은편찬위원회가장기적으로기획한 친일문제연구총서 의일부를일단락지은것에지나지않는다. 앞으로총론편, 자료편, 지방및해외의조사등수많은과제가남아있다. 총서 의많은부분이보완되고발간되는과정에이르면 사전 의초판을보완하는보유편과수정증보판의발간도국민들과약속되어있다. 우리사회에서친일문제는대다수의공유와긍정의포용이필요하다. 친일자체의역사성이갖는부정적인측면만이아니라, 행위자체의사실을인정하고공유할수있는책임있고겸허한자세한필요한것이다. 사전 과 보고서 는여러가지측면에서부족한점과한계를내재하고있다. 그럼에도민간단체와국가기구가해방 60여년만에각고의어려움을딛고토대를마련한것인만큼, 진지하고생산적인결실이맺어질수있는시작이되기를기대한다. 39

토론문 토론문 : 친일인명사전수록자선정기준과범주 김명구 안동대강사 1. 친일인명사전편찬사업에서제기되는핵심의제라고한다면, 이사업의역사적정당성문제와객관타당한선정기준의설정문제등이제기될수있다. 이용창선생님의발표문은그만큼중요한주제를다루고있다. 다만, 오늘발표문은 사전 편찬과정에서야기되었던이의신청, 소송등이해소되고,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이하 반민규명위 ) 의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보고서 가발간된상황을염두에두고, 사전 수록자의유형별분류와분포, 비율, 세부선정기준에대해간략한해설을시도 한것이다. 따라서새로운문제제기를시도하는것은아닌듯하며, 또사전편찬과정에서이루어졌던법적다툼을통해서, 대중들의호응을통해서이미선정기준의타당성, 공정성은사회적공감대를이룬것으로보이며, 또한토론자역시기본적으로선정기준에대하여동의하고있기때문에오늘토론은 사전 의 선정기준 에서, 간과했다고보여지거나보완되는것이바람직하다고생각되는몇가지를지적하는것으로그치고자한다. 2. 사전 에서친일파선정작업의출발은친일파의정의에서시작한다. 이에따르면, 친일파는 일본제국주의의국권침탈, 식민통치, 침략전쟁에적극협력한 자들을말한다.(16 쪽 ) 이러한인식을토대로친일파선정은 시기별 분야별 형태별친일행위를종합해, 총 30개의행위를분류하였다.(17 쪽 ) 그리고이과정에서특히중점을두고자한것은고등관 ( 급 ) 으로일제식민통치기구에참여한자들에대하여는 당연범 지위범 기준을적용하고, 지식인 종교문화인등은사회적역할과책임크기때문에엄격한기준을적용하려하였다.(18~19 쪽 ). 이러한기본인식에대하여토론자도공감하는편이나몇가지점에서보완될여지가있다고보여진다. 우선, < 표 2>(16 쪽 ) 의 분류 에보면, 일제의국권침탈에협력한자 라는항목에서, 적용기준 을보면, 국권침탈조약체결에협력 하거나 작위를받은자 만언급이되어있다. 그런데, 국권침탈에협력한자들로서는, 의병전쟁등을탄압하는데협력한경찰, 판 검사, 일진회와같이합병을청원하거나, 침략과합병을지지한지식인등이여기에포함될것이지만, 이와관련된 적용기준 들이모두다른 분류 에흩어져있다. 4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사전 에서시기별특징을중시한다고했기때문에, 국권침탈관련조항들은동일한한 분류 에집중하는 것이바람직하지않을까하는생각이든다. 3. 사전 에서고등관관료, 경찰, 판 검사, 소위이상군인등은 당연범 지위범 으로간주한다고하였는데, 합병초기에는예외규정을둔것같다. 예컨대, 사법의경우, 사법체계가 1912 년 조선민사령, 조선형사령 등의공포로완전히정비되었기에 1911 년까지재직한판검사는대상에서제외한다 (21~24 쪽 ) 고하였고, 관료에대하여도, 강점초기 (1910~1911) 에의원면직한경우제외한다 (22 쪽 ) 고하였고, 군인에대하여도, 대한제국장교로서 1912 년이후에도참위 ( 소위 ) 이상의장교로재직한자 (24 쪽 ) 로한다고하였다. 반면, 경찰의경우에는유사한규정이보이지않는다. 이점은대한제국의주권이조선총독부에의해피탈되는과정에서대한제국관료를원칙적으로자동승계한점이감안된것이아닌가생각되고, 기계적적용을피한사려깊은선정기준이라보여진다. 하지만, 그원칙과기준은타당성이있어야할것이다. 우선경찰에는이러한참작사유가적용되지않은이유는무엇인가? 사법의경우 1912 년을기준한이유가이때 사법제도가완비되어서 라는규정은설득력이없어보인다. 사법권은 정미 7조약 이후일제가지배하고일제의 3심급제도도입되었고, 1909 년 기유각서 에의해통감부소속재판소로변질되었으며, 판 검사들은이시기의병전쟁등탄압의주역으로활동했기에, 이러한점들을감안해야하지않을까. 관료나군인들의경우에도러일전쟁이나의병탄압에협력한경우가많기에이러한점을감안하여적용해야하지않을까. 4. 사전 에서제시된친일행위는, 시기별특징을중시한다하였지만, 전체적으로보아 국권침탈 관련친일형태와 침략전쟁 관련친일형태에대하여는구체적인규정과자세한언급이있으나, 전시체제이전 식민통치 에협력한친일형태에대하여는상대적으로뚜렷한개념이정립되지못한느낌을받는다. 실제, 16 쪽 < 표 2> 에서언급된분류에도보면, 국권침탈, 항일운동탄압, 침략전쟁에협력 등에서는명료하게친일행위가제시되어있으나, 식민통치 와관련하여는독자적인범주가아니라, 지식인 종교인 문화예술인으로서식민통치와침략전쟁에협력한자 에서보는바와같이침략전쟁에묻혀가는느낌이다. 30개항목에서도뚜렷이부각되지못한느낌이다. 1920 년대에서 1930 년대초일제는물리적강압은유지하면서도조선인사회의포섭과회유를목적으로이른바문화통치를구사하여각방면에서친일세력육성과민족분열을노렸다. 그런데, 이러한정책에대해최근에는헤게모니적지배개념으로접근하는경우도많아친일개념정립이필요하다. 토론자의생각으로 20쪽이하 분야별세부선정기준 을보면, 1920 30 년대전반기친일행위형태가다수나온다. 이들행위들을유형화하여, < 표 2> 분류 에 일제의식민통치에협력한자 라는별도항목을설치하면어떨까하는생각이다. 침략전쟁 에협력한구체적행위만큼, 문화통치기를대표하는친일행위유형을구체화, 범주화하는것이필요하지않을까. 41

5. 마지막으로용어상의문제. 사전 에서는 친일 이라는용어를쓰고, 반민규명위나재산조사위의경우 친일반민족행위자 라고하여, 두용어가다른개념인지, 분명히해둘필요가있을것같다. 16 쪽에서, 친일파는민족반역자와부일협력자를통칭한다 고하였다. 그런데 20쪽에는 고등관료가반민족행위자가아니라부일협력자의범주에속한다하더라도 라고하여반민족행위자와부일협력자가별개의의미로비치기도하고, 여기서의 반민족행위자 란민족반역자를뜻하는듯하기도하다. 그런데, 반민규명위나재산조사위에서사용하는 친일반민족행위 라는용어도역시민족반역자와부일협력을모두아우른개념인것으로생각되기에 친일 과 친일반민족 의개념은동일한것이아닌가하는생각이드는데어떻게생각하시는지궁금하다. 4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발표문 시민사회의친일청산운동과그영향 -1990 년대이후를중심으로 박한용 민족문제연구소책임연구원 들어가는말 이글은 1990 년대이후시민사회차원에서전개된다양한친일청산운동의흐름과성격을살펴보고그것이한국사회에끼친영향과이후의전망을살펴보고자한다. 통상친일문제를논하자면, 친일의실상, 반민특위와같은국가차원의친일청산, 특정친일인사의행적논란, 친일관련연구동향, 친일청산을둘러싼찬반론 ( 친일담론 ) 등이제기되어왔다. 정작그러한것들의표상과집대성으로서친일인명사전이본격검토된경우는많지않은듯하다. 또 친일인명사전 을얘기하더라도친일의기준과적절성그리고수록인물들에대해주로논의되지그것이가능케된동력이나사전이끼친 ( 또는끼칠 ) 영향등은제대로얘기된적이없다. 특히친일인명사전은각분야의전문연구자 180 여명이집필에참가했다. 민간규모로는얄궂지만일제의조선사편수회이래최대규모의연구자들이모여이뤄낸친일연구의집대성이자정화라할수있다. 누군가말했듯이독립운동가를제외한 대한민국의유력자사전 이라는평을들을만큼부끄러운우리자화상이기도하다. 숱한논쟁과방해속에서나온결실이기에더욱그의미가깊다하겠다. 그런데 친일인명사전 은단순히학계의집약된노력에의해서만결실을맺은게아니다. 친일인명사전 이거대한배라고한다면이러한배를만들어내고출범시킨더큰바다의역사가있다. 바로아무런대가나공도바람도없이역사의정의와상식을실현시키기위해자신의급여를쪼개어기금또는회비로내고나아가거리에서전단을배포하거나가두전시를통해친일청산의당위성을홍보하고, 필요할경우친일인물기념사업을저지하기위해각종항의집회나직접적인행동 ( 동상철거 ) 그리고소송투쟁, 투옥등을거치면서마침내그바다를이룬이름없는민족문제연구소회원들을위시한시민들의눈물과땀의역사가있다. 친일청산의역사는실로이러한이름없는시민들의염원과역사의식이행동으로표출된것이다. 더구나친일문제는학술적의제이기이전에우리사회의직접적인현안 ( 심지어정치적의미까지포함한 ) 이기에시민차원의친일청산실천운동은친일인명사전편찬의보조로만보아서는곤란하다. 어느역사학자가 역사의기적 이라고말한 친일인명사전 을만드는과정은투쟁과정이었고, 이투쟁의시작과끝 43

을함께한시민들의간고한실천에대해경의를표할필요가있다. 그리고이러한실천을운동사적으로정립함으로써, 시민이만들어간위대한역사의성취를공유하고, 그들의실천이하나의역사로자랑스럽게남을수있도록하는것이사전편찬에직접관여한우리들의의무라고생각한다. 이들의실천이야말로학적의의에운동적의미를보다명확하게했기때문이다. 1. 1990 년대이전의친일청산운동 : 잠복과간헐적문제제기 1990 년대이전의친일청산운동특히시민차원의친일청산운동은전무하다시피했다. 그이유로는다음몇가지를들수있다. 먼저친일청산을제기할수있는 자격 을가진정치세력들이이런저런이유로정치의전면에서이를제기할수없었다. 김구계열의한독당은사실상와해되었고, 조소앙 김규식등민족주의계열이나중간파들의지도자들은 6 25 전쟁중납북되었다. 그리고친일청산을가장강력하게주장한좌파또한사실상정치권에서는소멸되었기때문이다. 좌익과중간파그리고민족주의세력이정치일선에서사라진대신, 제1 공화국에서제3 공화국에이르기까지정치권을대표하는여당과야당의지도적인사들자신이친일행위자이거나정당의친일세력과닿아있었기때문이다. 친일당사자가대부분살아있고, 대한민국정부가수립한후친일청산은무엇보다정치적의제이며국가차원의문제였다. 그것을할책임있는정치세력이없었다는것이문제였다. 그들자신이청산대상일수있었다. 친일청산을누군가가제기하더라도정치적으로보호해줄세력이없었다. 반민특위에서활동한사람들은반민특위가해체된후권력을잡은친일파의눈을피해숨어살아야했다. 경상남도조사요원이었던김철호는 6 25 전쟁때의문의죽음을당했고, 김상덕위원장의비서관이자조사관이었던송지홍은얼토당토않은누명을쓰고감옥을수시로들락거려야했다. 반민특위위원 ( 조사관 ) 출신으로이후공직생활을한사람으로는심윤한사람에지나지않는다. 그리고그후손들또한죄인아닌죄인으로큰숨한번못쉬고살아왔다. 반민특위위원장을지낸임시정부요인김상덕의자제김정륙조차사실상숨어지내다시피했다. 둘째분단과전쟁을통해극단화된반공이데올로기가친일청산론을압도했기때문이다. 친일파의주류는해방후반공 독재에기생했을뿐아니라대한민국의중추를장악했다. 친일과독재가하나의정치덩어리로형성되면서이들은 6 25 전쟁후팽배한반공의식을친일청산을제압하는도구로활용했다. 반공이절대가치를형성함으로써친일청산은정치적주체세력도잃어버렸고, 친일청산을제기하면곧좌익 ( 색깔론 ) 으로몰리는위험을감수해야했다. 친일청산을주창한김구를암살한안두희도그명분이반공이었고, 반민특위법을만드는데앞장섰던중도소장파의원들도 1 2 차남로당국회프락치사건으로의원직을박탈당하고수감되었던사실은일종의친일청산을주장하면용공분자로몰릴수있음을확인시켜주었다. 실제지금도 해방후친일청산은좌익이주도했다. 민족문제연구소도친일청산을주장한다. 따 4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라서지금친일청산을주장하는민족문제연구소는좌익이다. 라는협박이심심치않게나돌았다. 1 세번째친일파의거물들은대부분전문적인지식인출신들이나관료또는부호들이많았다. 이들은해방이후정계, 재계, 관료집단, 문화, 언론, 학술, 교육계등에실력자 원로로자리잡으면서, 금력과권력또는언론및교육분야를장악해자신의친위세력이나방어조직을구축하였다. 2 친일세력과그후계가정치 경제 사회 문화 예술 교육 언론등전분야를장악하고지연 혈연 학연 이권등을매개로재생산되면서막강한힘을발휘했다. 누구라도친일을거론하면실제불이익을당할수밖에없는친일파의천국이대한민국이었다. 특히일본장교출신인박정희가대통령으로집권한상황아래에서친일문제를거론하는것은거의목숨을거는일이기도했다. 특히교육기관인대학에친일인사나그후손들이설립자 ( 또는재단 ) 등의자격으로장악하고있는상황에서친일문제는학술영역에서조차연구가금기시되었다. 친일세력은기득권의재생산에머물지않았다. 친일파는 ( 모두그렇다고할수는없지만 ) 자신들의지위만유지한것이아니라해방후우리사회의반드시청산해야할식민지적정치 경제 사회 문화구조를그대로유지시킴으로써우리사회의건강한발전을가로막아왔다. 그총괄적완성자가바로박정희였다. 박정희가일제파시즘시기에체화한것을자신의권력유지를목적으로체제화한것이바로 총화유신체제 였다. 네번째로분단- 이승만독재 -박정희유신체제 -전두환신군부독재체제로이어지는한국현대사의흐름속에서체제아래서민주화운동 통일운동등이당면한근본적과제로제기되었고친일문제는상대적으로비켜나있었다. 친일문제를거론하는사람들이없었던것은아니지만현실의변혁운동의당면실천과제로는자리잡지못했다. 이러한제약아래서도친일청산의흐름이없었던것은아니다. 3 1949 년반민특위가해체된후친일청산운동은오랜기간잠복기에들어섰다. 단적인냉전풍토에서친일문제를거론하면용공분자로몰아박해를가하는상황아래서친일청산은심연에가라앉아있었다. 4 특이하게 1958 년선거에서친일파청산벽보와삐라가거리에나돌았다. 그러나이는민주당의장면후보의친일전력을문제삼아흠집을내려는자유당의선거술책이었기때문에친일청산과는무관했다. 친일파청산문제가심연의늪을빠져나온것은 4 19 혁명과 6 3 한일회담반대투쟁을전후해서였다. 자유당의폭정주범들은거개가일제시기친일파였다. 4 19 이후이들에대한부정축재환수와공민권제 1 특히반공은친일파들이대한민국에서살아남을수있는전가의보도였다. 분단과좌우대립속에서친일파주류들은재빨리이승만 한민당극우블록에참가해반공투사로변신했다. 이들은대한민국이일제로부터투쟁해서건국한나라가아니라해방후 피어린좌우투쟁 속에서건국되었다고주장한다. 대한민국의정체성또는정통성을항일에서구할경우그들은반민족행위자가되지만, 대한민국의정체성 ( 정통성 ) 을반공의입장에서구할경우반공은건국 애국투쟁이되고자신들은반공애국투사이자건국공로자로대한민국에안착할수있었기때문이다. 이때문에친일세력에게는반공은생존의도구이자자신의존재의의를빛나게해주는요소이다. 그러기에대한민국주류를형성한자들은언제나반공과냉전구도속에서자신의기득권을유지하려고한다. 최근의건국절논쟁이나친일군인들을 6 25 전쟁영웅으로미화하고 6 25 를상기시키는것도자신들을건국영웅에서호국영웅으로진화시키려는시도이다. 2 해방후친일인사들이대한민국의각분야의상층에얼마나포진하고있었는가에대해서는, 세계일보특집기획기사및박수현, 2011, 한국민주화와친일청산문제, 민주화기념사업회한국민주주의연구소, 기억과전망 24 호 (2011 년여름호 ) 참조. 3 이하의내용은다음논문을참조해정리했다. 박한용, 2002, ( 분단이후 ) 친일파청산운동의재개와과제 한국근현대사속의친일의의미와친일파청산운동의필요성, 학술단체협의회 ; 김민철, 2011, 식민지배유산청산운동과한국민주주의 - 친일파청산운동을중심으로 식민지유산, 국가형성그리고한국민주주의, 민주화기념사업회 4 박한용, 2002, ( 분단이후 ) 친일파청산운동의재개와과제 한국근현대사속의친일의의미와친일파청산운동의필요성, 학술단체협의회 45

한논의가불거지면서이들의친일행위는다시한번도마에올랐다. 그러나 5 16 쿠데타는이모든논의를다시잠복시켰다. 선망의대상이었던교사직도팽개친채일제의침략전쟁이무르익자혈서를쓰고만주군관학교에입교했던전직일제장교인박정희의쿠데타와대통령당선은친일문제를직접거론하기불가능한상황을만들었다. 흥미로운점은 5 16 쿠데타직후나제5 대대통령선거당시박정희의전력을야당이문제를삼았으나, 그것은친일전력이아니라남로당전력이었다. 이는여야가친일문제를제기할수있는처지가못되었으며, 여전히반공이지배이데올로기였기때문이다. 그러나굴욕적인한일회담이후일본의한반도재진출이가속화하면서반일내셔널리즘이강화되었고, 특히일본의한반도재진출의기회를열어준장본인이과거일제의하수인들이었다는사실은일부지식인들에게커다란충격과각성을주었다. 사상계가고려대학교강당에서민족주의 -사이비민족주의논쟁을개최하고, 김종필은제2 의이완용으로규탄받았다. 일본 ( 제국주의 ) 에대한규탄에앞서우리내부의친일행위자들에대한비판과자성이절실하다는반성속에서나온첫친일문제연구가바로임종국의 친일문학론 이었다. 당시친일세력이생존하고기득권을장악하고있는마당에잊혀진친일죄악상을문학분야를매개로다시들춰낸그는촉망받는문학도에서재야친일연구가라는고난의길을택했다. 그러나그의책은십수년이지나서야초판이매진될정도로관심영역밖에있었다. 여전히한국사회는 반일 의영역에있었지, 내적반성단계에는도달하지못한것이다. 1970 년대들어서는박정희유신체제를반대하는민주인사들속에서청산되지못한친일문제가간간히거론되었다. 특히유신체제의수많은통치시스템과이데올로기통제등은식민지시기를산지식인들에게일제의전시체제기의통제를연상시켰다. 사실유신체제는 1930 년대일본파시즘의지배원리와 근대화론 을접합시킨 일본파시즘의한국적변형 이었다고할수있다. 유신 ( 維新 ) 이란용어자체가일본의메이지유신, 쇼와유신에서따온것이며, 유신체제를뒷받침하는정신적구조와통치체제의국가주의원리그리고수많은정책들이일본파시즘의그것에역사적뿌리를두고있었다. 박정희는유신체제를통해우리사회를통치자를중심으로일사불란하게움직이는하나의병영국가로재편했다. 박정희는민주주의의기초가되는개인의존엄성과자아의확립대신국가 ( 지도자 ) 에대한충성만을오로지요구했다. 국가와개인, 그리고국가와개인을이어주는명령계통의국가기구와어용단체만존재했을뿐, 국가의간섭으로부터자유로운개인, 시민, 또는단체는아예존재할수없었다. 이런것들이있다면그리고그것이박정희의눈에벗어난다면가차없는박해만따를뿐이었다. 박정희시대에 시민 아닌 재야 라는독특한저항진영이형성된것도이때문이었다. 4`19 이후막피어나던우리의시민사회는태어나기도전에박정희국가주의에의해태아살해된것이다. 친일세력은분단구조아래반공주의와독재를연결시켜주었다. 5 5 박한용, 1999, 한국의민족주의 - 그신화와현실 정신문화연구 1999 년겨울호, 한국정신문화연구원 4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한편장준하는박정희를정면으로반대하면서자신의민주화 통일운동을광복군출신대일본군출신의대결의연장선속에서파악했다. 그러나장준하는긴급조치라는극도의공포체제아래의문의죽임을당했다. 이때문에친일문제는구체적인사람을매개로거론되기보다는역으로해방후민족 민주 통일세력이남한에서배제되고이승만과친일세력의결탁으로반공 독재 외세추종세력이어떻게한국사회의주류를형성하는가를해부하는방향의글이주류를이루었다. 지식사회의일각에서만친일문제 ( 청산이라기보다 ) 가조심스레다루어졌다. 사이비민족주의를들고나온박정희의한국적민주주의, 민족적민주주의에대한문제제기였고한국민족주의의올바른라인업을형성하려는시도 ( 이른바민족주의의재발견 ) 속에서검토되었다. 친일문제그자체를연구하고검토한것은드물었다. 여전히친일문제는우리사회의주요담론으로자리잡지못했다. 6 1980 년대는친일문제에대한학술적연구가조금씩자리잡아가던시대이다. 일본에있던강동진의연구를필두로국내학계에서도친일파문제가간접적으로또는부분적으로연구되기시작했다. 그러나이시기친일연구의가장큰성과는거의임종국개인에의해이루어졌다고해도지나친말이아니다. 아직친일분야가하나의연구분야로정착되지못했음을알수있다. 그러나진보적인소장연구자들과이들에게커다란감화를두었던민중민족주의적분위기의선배학자들이조심스레친일문제의실상을하나씩풀어나가고있었다. 한편 친일문학론 은이시기부터민주투쟁을수감된학생들의옥중필독서의하나로자리잡았다. 이들민주화세대는 1990 년대이후친일문제를지식사회로부터대중사회로연결시키는일정한역할을담당한다. 그러나친일문제는전문영역이어서역사분야의천착이없이는재대로해명되기어렵다. 그러나이때까지도한국역사학계는친일문제를사실상외면하거나문제의식으로삼지않았다. 보기를들어일본의조선사연구회가간행한 ( 신 ) 조선사연구입문 은친일파문제를하나의독자항목으로설정해연구성과를검토하고있다. 그러나한국사학계에서펴낸 한국사연구입문 이나 한국역사입문 등각종연구사정리서에는친일문제가하나의연구영역으로다루어지지않고있다. 아직학계의시민권을취득하지못한셈이다. 7 오히려 1980 년대말에나온 해방전후사의인식 시리즈가널리읽히면서여기에실린임종국등의글이관심을끌었다. 비로소해방정국에서친일세력들이반공과친미그리고독재와유착하면서한국사회의주류를이루었다는사실을구조적으로확인하는단계에이르렀다. 그러나친일미청산이논의되었지친일의역사그자체는여전히해명되고있지않았다. 6 친일문제에대한연구사적검토는다음논문을참조. 김민철 조세열, 2006, 친일 문제의연구경향과과제 사총 63 호 (2006.9.30) 7 문학에서는친일문학론이하나의연구분야로자리잡았다. 그이유는임종국의친일문학론이라는선행업적이있었고, 많은문인들이친일글을남겨상대적으로검토가용이했기때문일것이다. 그러나임헌영 김재용같은연구자를제외하자면친일문학론의계보를잇는학자는 1980 년대에없었다고해도과언이아니다. 47

2. 1990 년대이후친일청산운동 : 친일청산운동의대중화와현재성획득 (1) 1990 년대이후친일청산운동의전체적양상 1990 년대는친일청산운동에서매우중요한시기였다. 친일문제를전문적으로연구하는기관이설립되었고, 학계에서도친일문제에관한연구성과가본격적으로나오기시작했다. 친일문제는먼저 사실 의확인과그의미를파악하는것이중요하기때문에관련전문연구자나연구기관이구축되어야한다. 민족문제연구소는전문연구기관으로서친일관련연구를진작하고특히민족문제연구소가간행한 친일파 99인 ( 전3 권 ), 청산하지못한역사 ( 전3 권 ) 은다양한분야의소장연구자들이공동으로친일문제을인물별로정리함으로써한편으로는연구자가친일문제에관심을갖거나동참하는계기를형성했다. 또이간행물이대중적관심을끌면서이책을읽고친일의실상을알고자발적으로민족문제연구소회원이된분들이많았다고한다. 친일문제의대중화와조직내회원확대를통해대중운동의토대를만든계기가되었다고할수있다. 한편인물별집필형식을취해향후친일인명사전을집필할수있는예비적경험을했다고도할수있다. 역사학계만이아니라역사외분야에서도이제는친일문제를연구하는학자들이생겨났다. 1980 년대이후양산된진보적연구자들상당수가우리현실에눈을돌리면서친일문제를하나의연구영역으로확보하려는노력을기울였다. 이는한국사회의민주화운동속에서획득한현실모순의역사적기원을해명하려는인식의확대를가져왔다. 분단과독재그리고친미와반공의기원의인적구조를친일에서찾는움직임이가시화되기시작한것이다. 더욱주목할일은특히민족문제연구소회원들을중핵으로시민차원의친일청산운동이전개되기시작했다. 특히친일행적자에대한무분별한기념사업이전국에서진행되면서친일문제는과거가아니라현재의문제로등장했다. 여기에는민족문제연구소지부만이아니라지역시민단체들이함께하면서민족운동의특수영역으로치부되던친일영역이지역사회의민주화운동등과결합하고융합되는과정이발생했다. 시민단체들또한지역권력의뿌리가친일과맞닿아있음을확인하고친일청산의현재성을공유해갔다. 오히려시민들의자발적실천이돋보였다. 대구달성공원의박중양송덕비와청주정춘수동상의철거등시민들의다양한실천활동이학계의지원이거의없이이루어졌다. 문제는이들의경우친일청산문제에는강경한입장을보이지만우리역사전체에대한폭넓은조망의기회를갖지못하고있다는점이다. 친일파의죄상을넘어서이들이우리현대사에끼친영향그리고친일청산이이시대의고민들과함께미래지향적으로해결되는방안을도출하는데한계를보이고있다는점이다. 이들의잘못이라기보다이들의실천을의미있게뒷받침할수있는연구성과의미미함과대중화과정의부족그리고연구자의실천풍토의미약함에더큰원인이있다하겠다. 2000 년대는학술분야에서는친일전문연구성과가분야별로나오기시작하고, 친일청산운동이대중 4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적실천국면에들어섰으며, 우리사회의현안으로서시민사회는물론국가차원에서도친일청산이전개된시기였다. 민족문제연구소가주축이되어사회각계각층의참여를모아만든통일시대민족문화재단 (2001 년 12월창립 ) 산하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의출발은학계와시민이동시참여하는친일청산운동의본격적출발이었다. 1999 년의친일인명사전편찬을지지하는교수 1만인서명과재단설립과정에서보여준시민들의참여, 친일인명사전편찬위원회에대한다양한형태의지원과참여는친일청산운동이새로운궤도에들어섰음을보여준다. 한편 1993 년이완용후손이제기한토지반환소송과정에서제기된친일파토지환수서명운동과법정공방 ( 훗날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설립의역사적연원이된다 ), 김활란상제정, 미당문학상제정등을둘러싼치열한대중적논쟁과실천, 박정희기념관건립반대운동과안티조선운동이친일청산운동과공동행동으로나아간사실, 국회의친일파명단발표, 친일문제연구에대한국회의원일부의지지와예산지원과친일청산관련법제정추진, 일본교과서역사왜곡파동을계기로일어난친일문제에대한내부의반성분위기등은전체적으로친일청산운동이대중화국면에접어들었음을충분히확인할수있는요소들이다. 그리고친일문제가우리사회의온갖부정적요소들의청산과불가분의관계에있다는점도뚜렷하게드러났다. 이런성과에기초해각종공공기념사업이나독립유공자서훈에있어서친일행적이하나의공적평가의요소로인정되기시작했다. 친일문제와관련해정치인이의원직을사퇴하는경우도발생했고, 언론에서도뜻있는기자와 PD들의노력으로친일문제가대중적으로알려졌다. 이러한기반위에서민간차원에서는친일인명사전과국가차원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조사위원회와같은특별기구가만들어져법에의한친일청산이병행되었다. 그성과는 친일인명사전 (2009) 과 친일반민족행위자보고 (2009) 간행,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환수, 독립유공자로둔갑한친일파의서훈취소 (2011) 등으로이어졌다. 이와함께친일청산을둘러싼찬반논쟁등친일담론이본격화했으며, 친일청산을찬성하는측과반대하는측이집단화되어대립과갈등을본격적으로빚기시작했으며, 이는학술적인역사논쟁을넘어현실정치의쟁점으로비화했다. 한나라당이나 조중동 으로일컫는수구언론과뉴라이트를포함한수구집단의반격, 그리고수구학자들이결집해친일 -독재를옹호 미화하고적극반격에나서면서친일문제에대한입장이진보와보수를나누는한가늠이되었다. 나아가대한민국의주류이른바메인트렌드가 친일 친미 독재 반공 수구세력 로이어진다는인식이저변화되었다. 친일청산이우리시대의현안으로공인되었다. 그러나이것으로친일청산이일단락된것은아니었다. 친일인명사전이나친일반민족행위자보고서등이모습을드러내고, 독립유공자로서훈된친일인명사전등재자들의서훈이취소되고, 반민족행위자가운데일부의재산이환수되며, 현집권정부와지지세력이친일 친미 독재 반공에기반을둔한국수구세력의본질로지목되면서, 여기에맞선수구세력의총공세가다시시작되고있다는점에서여전히현재진행형이다. 친일군인백선엽의호국영웅만들기, 이승만과박정희동상건립과기념관설립 49

추진, 건국절추진, 역사교과서개악, 대한민국역사관착공등을기반으로다시대한민국정체성과정통성론을들고나오면서역사범죄의재구성을꾀하고있다. 그리고내년총선과대선은그러한올바른역사의기억을둘러싼투쟁이정권의재집권과맞물리면서더욱고조되고있다. 그러면시민차원의친일청산운동을중심으로친일청산운동의제양상과특징을살펴보겠다. (2) 시민차원의친일청산운동 1991 년 2월국내유일의친일문제전문연구기관인인반민족문제연구소 (1995 년민족문제연구소로개칭 ) 가출범했다. 친일청산운동에있어서민족문제연구소와소속회원들의활동은매우중요한의미를갖는다. 먼저민족문제연구소의출현은과거재야의개인 ( 임종국 ) 이고독하게주도하던친일연구를조직적연구와실천으로한단계전진시켰다는의의가있다. 둘째민족문제연구소는전문연구자들이아닌평소임종국선생의뜻을따르던시민들이주도하면서설립되었다는특징이있다. 학계가아니라시민이먼저설립을주도하면서연구자와일반시민의결합, 즉전문연구기관과대중조직, 전문성과대중성, 연구와실천의공고한결합이라는새로운조직원리가나온것이다. 셋째이후민족문제연구소는연구진을중심으로친일문제를연구진작하는한편이를대중화하고, 회원들은직접적인친일청산운동의주역으로 20년동안친일청산운동을전개하고있다. 연구소연구자들이친일문제를전문적으로연구해학술적기반위에서친일문제를제기하고, 회원들은친일청산을위한직접적인친일파기념반대투쟁 친일청산홍보활동 재정확보등헌신적이고다양한활동을통해친일청산의당위성을대중적으로전파하거나친일인물기념사업을반대하는직접행동에뛰어들었다. 즉친일문제를학술의영역에서우리사회의현안으로끌어들이고, 대중적실천을전개하며, 동시에이과정을통해회원스스로친일청산운동을통해친일청산조차금기시하는대한민국의부조리한현실을목도하며한국현대사에대한인식이심화되는과정, 자기자신이역사화되는과정이기도했다. 그러나이러한시민차원의청산운동은민족문제연구소회원들로만전개된것은아니라는점도유의할필요가있다. 조두남음악관과이은상문학관을저지한마산에본부를둔희망연대, 친일인사백선엽동상건립반대파주시민대책위원회 (2010), 친일잔재청산과거제역사바로세우기를위한김백일동상철거범시민대책위원회 (2011) 와같은지역시민단체들의주도적인참여와연대활동이있기에지역에서는더욱큰성과를거둘수있었다. 그러면그간의친일청산운동의성과들을유형별로나누어보면다음과같다. 8 8 20 여년에걸친회원들의방대한친일청산운동은그일지만을정리하는것으로도상당한분량이된다.( 민족문제연구소, 2011, 민족문제연구소창립 20 주년기념자료집 의활동일지참조 ) 이러한실천을종합정리하고분석하는것은본발표회이후발표문을보강하는형식으로정리 5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홍보활동 : 가두홍보전단배포나캠페인 / 지부 ( 지회 ) 별순회전시회 < 주요전시예 > 1995.10 일제침략과저항의역사전 / 1996.08 사진으로보는독립운동사 / 1998.02 친일파 독립운동가사진전 / 1999.06 사진으로보는민족수난사 / 2001.07 일제침략역사왜곡전 / 2001.08 일제침략역사왜곡전 / 2002.02 친일예술인과그들의작품전 / 2003.04 친일음악의진상전 / 일제강제동원피해자명부전시 / 2004.10 식민지조선과전쟁미술전 - 전시체제와민중의삶 / 2006.08 징게맹갱외에밋들 - 조정래의아리랑과식민지조선인의삶 / 2007.03 기氣와예藝로맞선그들 / 2007.07 헤이그특사 100 주년기념특별기획전 / 2007.08 한시대다른삶 - 항일과친일캐리커처전시 / 2008.08 대한민국임시정부 27 년사 / 2009.02 시베리아억류자귀환 60 주년기념자료전 / 2009.11 침략신사, 야스쿠니 / 2010.08 강제병합 100 년특별전 - 거대한감옥, 식민지에살다 * 연월은본부전시일기준이며실제지부별전시는지역별로다르다. 지부가자체적으로전시물을제작해전시한경우도많으나여기서는생략했다. 대중집회와서명운동 독립운동가로서훈된친일인물의서훈취소 국립묘지안장반대및이장요구대표적인것이친일언론인서춘과대전지부가전개한관동군헌병오장김창룡묘이전운동등을들수있다. 친일인명사전편찬모금운동과회비납부 각종친일인물기념시설과기념사업반대투쟁 < 지역 지부별친일파기념사업반대운동 > 9 연도지역 지부내용결과 1996.03 대구지부박중양기념비 ( 일소대 ) 철거요구철거 1996.11 강진윤길중시비건립추진저지수용 1998.04 대구지부대구성악회의현제명동상건립취소요구수용 1998.12 서울김활란상제정저지를위한특별위원회구성부분수용 1999.08 전주 전주를빛낸 9 인의예술인 에서정주선정, 시청내서정주코너철회요구수용 1999.09 하남하남시와하남문화원의모윤숙시비건립계획반대수용 1999.11 마산마산시에이은상기념관건립에대한부적격의견서제출부분수용 1999.12 대구지부 박정희기념사업정부지원을반대하는대구경북지역시민사회단체연석회의서명광고및대구지부연석회의구성 2000.07 서울 중앙여고황신덕흉상제막저지를위한시민연대결성 흉상철거 2000.07 수원지부 홍난파기념사업반대투쟁을위한수원지역모임 2000.1 거창 거창의독립운동사왜곡날조한 거창군사 재발간요구 수용 하겠다. 2010 년 -2011 년의친일청산운동특히백선엽 김백일 이승만 박정희등과관련한내용은박한용, [ 수구세력과이명박정부의역사범죄의재구성역사 - 그들은왜친일과독재를미화찬양하는가 -]( 내일을여는역사 2011 년겨울호 : 미간행 ) 을참조하기바란다. 9 표는김민철, 2011, 식민지배유산청산운동과한국민주주의 - 친일파청산운동을중심으로 식민지유산, 국가형성그리고한국민주주의, 민주화기념사업회. 51

2001.01 대전지부 국립묘지김창룡묘안장이전요구 2001.09 관악동작지부 박흥식동상철거요구 철거 2002.03 관악동작지부 성남고김석원동상철거요구 철거 2002.04 부산지부 밀양박춘금묘현장답사, 박춘금송덕비철거논의 2003.09 전북지부 채만식문학상반대운동 부분수용 2005.03 충북지부 정춘수친일행적안내판설치와과거사법제정촉구홍보 2005.03 충북지부 양수철회원박정희친필의윤봉길의사사당 충의사 현판철거 구속 2005.04 전북지부 김연수 수당문 현판철거 철거 2005.08 전북지부 박기순미화취향정 ( 전주덕진공원내 ) 안내판설치 2006.04 수원 연구소와한국음악협회경기도지회가 새로쓴蘭坡홍영후연보 출간 출처 : 민족문제연구소, 2011, 민족문제연구소창립20 주년기념자료집, 59~96 쪽. 연구소는 1995 년 1월 26일부터지역별로지부조직을건설하기시작해서 2011 년현재 26개지부와 1개지회 ( 도쿄 ), 6천여명의회원을갖고있다. 회원들의친일청산운동은친일파기념사업반대운동을통해서활발하게전개되었다. < 표1> 은지역 지부별로친일파기념사업반대운동을정리한것이다. 지부설립운동이시작된이듬해인 1996 년부터 2005 년까지 10 여년에걸쳐지역 지부차원에서친일인사의기념사업을반대하는운동을활발하게전개했으며, 대부분큰성과를거두었다. 10 지방에서기념사업을두고이처럼치열하게대립이일어난데에는몇가지배경이있었다. 1991 년지방자치제가실시되면서기존에중앙중심의기념사업이지방으로전환되기시작했으며, 이와함께문화관광부가지방을대표할문화인물을선정해서기념하는지방자치단체의사업을적극지원하는정책을세웠다. 그러자지방의문화관광사업육성이라는측면에서도지자체가적극문화예술계의인물에대한기념사업을추진하였고, 이과정에서그동안잠복되어있던친일문제가수면위로떠오르게된것이다. 11 여기서는각기념사업반대투쟁의내용과개별적의의에몇가지예만들기로하고, 기념사업이갖는의미를짚어봄으로서기념사업반대투쟁의전체적의미를살펴보기로한다. 12 주목할친일인물기념사업반대투쟁을몇개살펴보자. 회원들의기념사업반대운동은크게두가지유형으로나눌수있다. 첫째는기존에만들어져있던친일파기념비나기념물을철거하거나대체하는운동이고, 둘째는새로추진되는기념사업을반대하는운동이다. 전자의예로는정춘수동상의철거와안내판설치, 일소대 ( 박중양기념비 ) 철거, 김창룡묘이전, 박 10 지부가조직되지않은지역에서는회원들이지역의시민단체와연대해서기념사업반대운동을전개하였다. 11 박한용, 2003, 친일인물기념사업의현황과문제점, 민주연구단체협의모임, 무엇을 기억 하고 기념 할것인가 - 한국기념사업의현주소 - 참조. 12 친일인물기념사업의현황과반대투쟁의경과그리고그의의에대해서는다음두글을참조하라. 박한용, 2003, 친일인물기념사업의현황과문제점, 민주연구단체협의모임, 무엇을 기억 하고 기념 할것인가 - 한국기념사업의현주소 - ; 김민철, 2011, 식민지배유산청산운동과한국민주주의 - 친일파청산운동을중심으로 식민지유산, 국가형성그리고한국민주주의, 민주화기념사업회 5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흥식동상철거, 김석원동상철거, 박춘금송덕비철거, 충의사현판철거, 수당문 ( 김연수 ) 철거, 취향정 ( 박기순 ) 안내판설치등을들수있다. 후자의예로는윤길중시비건립, 현제명동상건립, 김활란상제정, 미당문학관건립, 이은상문학관건립, 황신덕흉상제막, 홍난파기념사업, 채만식문학상제정등의반대를들수있다. 13 반대운동은대개오랜시간이걸려서야소정의목적을달성할수있었다. 그리고단순히반대만하는운동이아니라좀더발전한형태의기념 기억사업을만들어낸사례도있다. 마산문학관과 새로쓴蘭坡홍영후연보 가대표적인사례이다. 마산문학관의경우, 원래마산시가이은상을따르는문인들의요청을받아이은상문학관을건립하려했으나시민단체와지역회원들이이은상의친일행적시비와이승만의독재에협력한행적등을이유로반대한뒤, 기념관의명칭을마산문학관으로바꾸고기념의대상도확대했으며, 공과과를모두다루는방향으로합의한결과나온것이다. 찬성하는측과반대하는측의사회적합의를통해공동의결과물을만들어냈다는점에서마산문학관은매우의미가크다. 이후추진하는과정에서약속을이행하지않는등문제가발생하긴했으나기념사업을둘러싼최소한의사회적합의는만들어낸것이다. 새로쓴蘭坡홍영후연보 는한국음악협회경도지회와민족문제연구소가 난파연보공동연구위원회 를구성해서만든결과물이다. 견해를달리하는사람들 이모여 민족음악의선구자 와 친일음악의선구자 라는평가가첨예하게대립되는홍난파를두고같은책상에앉아연보작업을한것이다. 결론창출과역사적판단을하기위한 조건을만드는것 에양측이동의하여공동으로작업한흔치않은사례일것이다. 14 그러면친일인물기념사업이지닌전체적인문제점과반대운동의의의를검토해보자. 우리가어떤인물을사회적으로기념한다는것은, 그인물이역사와사회속에일정한가치가있는성취를이룬데대해경의를표하고, 우리자신은기념인물의가치를공유하면서그를우리사회의건강한가치관의한표상으로형성해나가려는긍정적의의가있다. 그런데친일인물기념사업이공공의영역 ( 즉세금등으로진행 ) 되거나공공성이강할경우친일인물을기념하는것은곧그의삶과철학을공적으로기리는행위이다. 이경우친일문제는결코공공의긍정적표상이될수없다. 그럼에도특정인물을공적을표상하는것은기억의공공화와재생산을의미한다. 물론이경우친일행적은감추고그의공로만일면적으로확대해기념사업을하는것이기에역사의은폐와왜곡과과대포장속에서기념사업이진행된다. 더욱이친일문제를공적가치기준에서고의적으로누락시키고있다. 13 이하개별기념사업반대투쟁의분석은다음글을인용했다. 김민철, 2011, 식민지배유산청산운동과한국민주주의 - 친일파청산운동을중심으로 식민지유산, 국가형성그리고한국민주주의, 민주화기념사업회 14 이하개별기념사업반대투쟁의분석은다음글을인용했다. 김민철, 2011, 식민지배유산청산운동과한국민주주의 - 친일파청산운동을중심으로 식민지유산, 국가형성그리고한국민주주의, 민주화기념사업회 53

두번째로기념사업은친일청산을거부할수밖에없는새로운세력을형성한다. 기념관건립과정에투자되는사업과관련해서이해관계가발생한다. 기념관은매년예산을들여각종이벤트를전개하고, 여기에종사하는직업군이생겨나고, 이러한행사를집행하는사람들의이해관계가만들어진다. 해당이벤트를통해상을받는사람들도생기기마련이다. 이들은본래친일이나독재에대해거부감을갖거나무관심했더라도일단자신의이익과직결되게되면더이상비판하지못한다. 요컨대돈과선심성사업에의해새로운지지자가발생하는것이다. 수구세력에빌붙을수밖에없는기생군들이수구의새로운보충대가되는것이며, 이들은자기의이익을위해수구세력척결이나친일 -독재비판에반대하는나팔수로전락할수밖에없다. 어디그뿐인가. 이승만 박정희동상이나기념관이공공예산의지원을받아세워지는한, 다른친일파나독재가담자또한공공기념사업의대상으로다시복권되는명분을제공한다. 그리고이러한기념사업을통해친일파 독재자를사실상복권시킴으로써해방 60년만에이뤄놓은친일인명사전이나친일반민족행위자규정을사실상무력화시켜버린다. 과거에는반민특위를무력으로해체했지만이제는공권력에의지한적극적기념사업과교과서를통한이데올로기세뇌공작을통해건국공로자이자존경받는민족지도자로서화려하게부활하는것이다. 그리고곳곳에있는기념관과동상에대한 성지순례 도활성화될것이다. 15 이런점에서기념사업은또하나의범죄의재구성이될수밖에없다. 친일행적인물기념사업에대한시민들의반대와저항이거세지자, 대다수 기념사업측 은예의친일의과오보다는그들이대한민국에끼친공로가더크다는 공과론 등을들고나와친일인물들을옹호하고있다. 나아가친일파들의양지를향한끝없는카멜레온적변신을두고, 이들의친일행위를문명개화와계몽운동의선구자가겪어야했던 수난 으로돌리고, 해방후이승만독재정권에빌붙은행적에대해서는반공애국투사, 건국의공로자로높이평가했다. 박정희독재정권시기어용으로활약한이들에대해서는 조국근대화의기수 로추켜세움으로서친일세력을대한민국의정통적자로둔갑시키기도한다. 나아가이러한각종기념사업과숭조사업을통해친일파를 21세기민족의지도자상으로치장하고우리후세들을세뇌시키려하고있다. 그러나사실이들의공로란것은일제강점기친일의대가로유지된기득권이해방후친일청산이실패하면서고스란히이어져온것에불과하다. 그리고이러한기념사업의배후에는친일파후손들의 숭조정신 과학연, 지연등을매개로성장한친일파의분신들의알량한 기득권이어받기 가숨어있다. 현재진행되는친일행적인물에대한각종기념사업은친일의대가로확보한기득권을영속화하기위해자행하는또하나의역사왜곡이며, 친일청산이결코과거의것이아닌이유도여기에있다. 한편지역과지부에서전개된활발한친일청산운동은마침내국가차원의기념사업에도큰영향을미 15 박한용, [ 수구세력과이명박정부의역사범죄의재구성역사 - 그들은왜친일과독재를미화찬양하는가 -]( 내일을여는역사 2011 년겨울호 : 미간행 ) 5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쳤다. 근현대인물을기념하거나유관사업을할경우친일행적을문의하는경우가많아졌다는것또한친일청산운동의큰성과이다. 이러한친일청산운동의절정은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법의제정과개정에이어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귀속에관한특별법 ( 이하재산귀속법 ) 이국회를통과해국가차원의친일청산을견인한것이라하겠다. 이를계기로친일청산은본격적인정치공간에서전개되었다. 이특별기구들에대해서는별도의상세한보고서가간행되었으므로생략한다. (3) 친일청산운동의특징과영향 먼저친일청산운동은한국사회개혁의핵심요소이자이를위한비판의무기가되었다. 친일청산운동에대한보수 ( 수구 ) 집권세력과조중동등한국의기득권층의반발을통해역으로친미 `반공 독재의수구세력의뿌리가친일세력에있다는인식이넓어졌다. 특히이승만 박정희등을찬양하는보수정치권의대응을통해친일문제는현실정치개혁과맞물렸다 ( 그첫상징적투쟁이 2002 년박정희기념관반대투쟁이었다 ). 친일문제가수구세력의도덕성과정통성에대한아킬레스건으로작용하면서 2000 년대이후친일문제는정치이슈이자정치인에대한평가의한척도가되었다. 또부친의친일문제로국회의원이사퇴하거나, 16 대총선에서출마자에대해과거친일행적또는父祖의친일행적이문제가되기도했으며, 낙선운동의한기준이되기도했다. 둘째친일문제가공공의가치영역에서본격논의되고근현대인물에대한공공기념사업이전국적으로전개되면서상당수가친일행적자임이드러나자친일행적자를공공의세금으로기념하는것이논란이되었다. 친일인사를공공의영역에서기념하는것이타당하지않다는여론이확산되고, 지역의시민단체들은이러한문제제기와투쟁을통해친일문제의심각성과현재까지친일잔재의심각성을체험하기도했다. 기념사업반대투쟁은지역차원에서대중적현안으로확산되었고, 친일청산운동의전국화에기여했다. 셋째교수 1만인서명운동, 친일인명사전편찬네티즌모금운동은친일청산이지난옛일이라든가소수의문제제기라는수구세력의주장과달리학계와시민들의확고하고광범한지지를확인하는계기가되었다. 넷째친일문제를제기하는것이직접적으로개인의불이익과연결되면서친일의현재성이더욱확인되었다. 예컨대사학비리와설립자등의친일전력이맞물리고이과정에서설립자등의친일전력을문제제기하면해직당하는등실제친일후계세력의탄압이발생하고이에대한투쟁이전개되었다 ( 덕성여대사학과한상권 서울대미대김민수교수 ). 이는친일당사자가대부분죽었지만친일문제를거론하면누구라도 ( 심지어대학교수마저도 ) 불이익을당할수있다는현실의심각성을깨우쳐주었다. 이러한직접적피해자들은친일문제를자신의개인문제와역사를동일시하는계기가되었고여기에시민들의지지동참을통해친일청산운동의지평을넓혔다. 55

다섯째언론민주화의부분적성과위에서시민차원의친일청산운동이이슈화하여언론이이를다루면서확산되었고, 역으로언론매체또한친일문제를이슈화하면서친일청산운동에적지않은기여를했다. 그러나방송의경우간부진이아니라일선기자와 PD들이심층보도기사나특별다큐멘터리등을통해친일문제를안방에까지전달하고자했다. 신문의경우한겨레 경향등진보언론이중심이되었고, 조중동문은오히려친일세력을강력하게옹호하며친일청산을비난했다. 그러나이또한친일문제가우리시대의현안으로인식케하는요인이되었고, 조중동반대운동에서조선 동아는친일지로서규정되어시민운동에서친일 독재 반공 수구의대표적신문으로지목되었다. 여섯째수구세력의반발이나기념사업등의강행을통해역으로친일청산의당위성이확산되었다. 뉴라이트대안교과서의식민지근대화론과친일독재미화나, 한승조 김동길 김완섭 복거일등의친일파옹호글과저작물을통해오히려친일청산의시급성이커졌다. 지식사회에서의친일옹호는경각심을불러일으켰고, 시민사회는오히려이러한수구지식인의망언을통해더욱투쟁의지를갖게했다. 일곱째로무엇보다시민차원의청산운동은친일인명사전편찬이나국가차원의친일청산과서훈취소등가시적인성과가나오는데크게기여했다. 정부도국회도학계도친일청산을외면했을때시민들이스스로나서서 60년전반민특위의좌절을딛고잘못된역사를기필고바로잡았다는성취감또한커다란의미가있다. 마지막으로친일청산운동은시민적차원의자기반성과국가적차원의자기반성두가지로전개되었다. 시민들의친일청산은국가차원의자기반성과책임이행을가능케했다. 그것은시민사회의임의적인청산이공공의것으로확인되는과정이기도했다. 맺음말 흔히시민차원의친일청산운동을민족운동이라고얘기하거나민족주의의발로로만보는경우가많다. 실제친일청산을전개하는시민 ( 특히회원 ) 들의경우그런민족주의의울분같은것이있다. 즉단한번도 민족사적정통성 을지닌세력이주도권을잡지못했다는좌절감과맞물려있다. 분단도문제이거니와초대대통령이승만이외세 ( 특히미국 ) 에의존해분단을기정사실화했고, 반민특위를해체함으로써친일파를한국사회의지배집단으로그대로온존시켰다는인식, 특히이승만이비호한친일파가해방후한국사회의전분야에서권력을장악함으로써분단은물론, 한국정부의외세의존성, 사회곳곳에그대로남아있는일제잔재와비민주적인요소, 온갖사회악과부정부패가이들에의해온존 육성되었다는분노, 그리고이결과 민족정기 마저이들에의해훼손 말살되었다고진단하는경우가많다. 한국민족주의의입장에서보자면이승만은일종의 원죄 를저지른셈이다. 원죄 이후역대정권은 반민족적 정권의연속이었다. 5 16 쿠테타를일으킨후집권한박정희는일본 5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제국주의군인이다시부활한것으로여겨졌다. 특히박정권이추진한한일회담은제2 의을사보호조약으로지탄받았고, 한국민족주의의위기감을고조시켰다. 전두환, 노태우정권은박정희정권의후계정권으로그속성을그대로이어받았으며, 문민정부, 국민의정부또한대일 대미관계에서예속적인태도로일관하고있다고비판한다. 반민족적 세력이대대로권력을잡았다는사실은한국민족주의를좌절감을넘어 민족의한 과같은심리상태로만들었다. 이러한좌절감과한은 진정한 민족정기의화신을권력에서배제된인물을통해표상화하기마련이다. 김구에대한숭앙은그대표적인보기라하겠다. 일제하시종일관전투적민족주의자로서살아왔고, 해방후반민족세력에의해 통일의제단에서쓰러져간 김구의극적인일생는좌절감과한이서린한국민족주의의운명과동일시되었다. 역대정부가민족적정통성을결여하고있다는인식, 권력차원에서대외적으로민족의자주성이훼손당하고있다는울분, 진정한민족의지도자는역사에서소외되고말았다는 한 은한국민족주의를대중적으로살아남게만드는중요한요소이다. 그리고이러한울분과정의에대한갈망이친일문제와만나면서민족정기의확립이나역사정의의실현이라는수사와함께시민사회의친일청산운동이전개되기도한다. 이때문에친일, 민족반역자라는용어와함께민족정기, 역사정의와상식등이수사로동원되면서흔히민족주의담론으로치부된다. 탈민족담론이나좌파진보들의경우친일청산에동조하지않거나틈새의운동으로파악하는경향이있다. 그러나민족주의라는말이중요한게아니라 ( 민족주의의내용과실제가워낙다양하기때문에 ) 그속의그러한언사이면의다양한가치들과지향들을볼필요가있다. 실제민족문제연구소회원들의경우민족주의적성향이강하다고하지만, 그사상적스펙트럼은좌우로다양하게펼쳐져있다. 대체로반일 반미성향이있지만남북의평화공존과협력에의한평화대등통일을지향한다. 한국의베트남참전을비판하며사죄를해야한다는입장이다. 노동자농민의경제적권익과인권이개선될것을강력히요구하고이를위해실천을하는이들도많다. 외국인노동자들에대한인권문제에도관심이높으며무엇보다이승만- 박정희 -전두환 -노태우 -현정부로이어지는지배블럭에대해가장강하게반발하고있다. 상당수의회원은이른바다른시민단체의회원으로활동하고있다. 무엇보다민주주의와평화통일의가치를가장소중하게생각한다. 이점에서민족주의만으로평가하기곤란하다. 16 더구나이러한실천은친일청산이갖는세가지보편적의의와연결해보면민족주의담론으로만얘기하기도곤란하다. 친일청산은일체의민족억압과차별을반대하는것이기에오늘날외국인노동자문제나비대칭적해외동포에대한대칭적시각과처우에대해문제를제기하는것이기도하다. 또친일청산은일 16 또회원들은상당히높은수준의역사의식을갖고있다고생각된다. 수많은긴급현안들이산적한현실에서한국사회의근본문제를친일문제로파악한다는것은사실수준높은역사인식이다. 20 년가까이정직한노동으로번급여의일부를회비로내는것이쉽지않다.. 수재의연금이나북한돕기와달리선뜻내기어려운성질이기때문이다. 더구나직장에서연구소회원임을밝히지못하는경우도있다 ( 대구경북등의회원 ). 57

제파시즘협력자에대한비판의의미를갖고있기때문에친일잔재청산과함께민주주의의가치를신장시키자는지향을갖고있다. 또 1930 년대후반이후친일파는일본의침략전쟁에협력한전쟁협력자들이었다. 우리자신이억압을당하면서일제가다른나라를침략하는전쟁에가담한다는것은더욱나쁜범죄이다. 따라서친일청산은우리내부에도일제의침략전쟁에가담한부끄러운역사가있음을반성하고평화의가치를소중히하자는것이다. 그런점에서한국의베트남참전에대해서도매우비판적일수밖에없다. 친일청산은어떤점에서는하나의역사소재일수있다. 친일의구체적내용과그것이남긴負의유산의내용을직시하고그것을극복하는것이필요하다. 그러기에친일인명사전그자체가운동의끝일수는없다. 친일청산운동이반대투쟁을넘어바람직한한국사회의가치형성 ( 미래지향적대안제시 ) 과연결될필요가있다는것이다. 무엇보다친일청산운동을통해친일청산조차거부되는대한민국의모순된현실에대한자각 ( 사실그러한인식이있기에친일문제까지거슬러갔겠지만 ) 과이러한현실을타파하는노력이필요하다. 특히현정부아래친일과독재미화가 건국절, 대한민국정통성확립, 교과서개악, 대한민국역사관착공, 등구조적이고공세적으로전개되는상황에서친일청산운동은좀더역사의본론으로그리고과거에서현재그리고미래를향한투쟁으로나아갈수밖에없다. 5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토론문 토론문 : 시민사회의친일청산운동과그영향 전진성 부산교대교수 독일철학자니체 (Friedrich Nietzsche) 는역사가현재와관계하는방식을다음의세가지, 즉골동품적, 기념비적, 비판적역사로유형화한바있다. 골동품적역사는과거의잔재라면무조건좋아하는호고적관심, 기념비적역사는현재의정당화를위해과거를미화하는태도, 그리고비판적역사는현재의법정에과거를끌어들여판결을내리는행태를각각지칭했다. 비록니체의역사유형론은역사자체에대한불신에기초해있었지만, 그의특수한철학적지향을제쳐두고본다면, 우리사회의친일청산운동을자리매김하는데유용한틀을제공한다. 우리사회의친일청산운동은 비판적 역사에가깝다. 과거를무조건긍정하거나현재의권력을미화하기보다는현재의도덕적, 윤리적기준에따라과거에날카로운비판의메스를가하는것이다. 비판적역사는나름의함정을갖고있다. 먼저과거를현재의기준에따라재단하는것이과연적절한가의문제와현재의올바른기준을과연누가정할수있는가의문제가충분히논의되지못한다면, 자칫현재의특정세력을정당화하는 기념비적 역사로변질될여지가있다. 1. 과거를현재의기준에따라재단하는것은적절한가? 과거를있는그대로밝히는것, 사실자체가말하게하라 는정언명령은랑케이래의근대역사학의이상 ( 理想 ) 이다. 과거를현재의권력을정당화하는도구로남용하지못하게한다는점에서는일정하게긍정적인측면도있지만, 잘따져보면인식론적인오류일뿐더러, 인식만능주의의오류이기도하다. 과거 (past) 는어차피지나가버린 (past) 것이다. 그것은오로지현재적방식으로기억될뿐이다. 그런데과거를기억하는현재적방식은매우다양하다. 지적인방식으로 인식 할수도있지만, 정치적담론으로활용할수도있고, 감성적으로향수를느낄수도있으며, 또한도덕적으로심판할수도있고, 예술적재현을통해심미적으로향유할수도, 산업적으로소비할수도있다. 이들방식중에우열은없다. 각각의장단점이있을뿐 59

이다. 만약에, 서울대이영훈교수의경우처럼, 내가역사를더많이알고있으니비전문가들은함부로나서지말라 는식으로지적인 인식 만을강조한다면 - 그가정말로더많이알고있는가도물론의심스럽다 -, 과거에대한기억은정말로협소해진다. 니체가지적했듯이, 역사는어차피현재의문제이다. 도덕적인접근은여타의접근과마찬가지로나름의정당성을갖는다. 분명히피해자가있고피해의상흔이현존하는데, 이를 조국근대화 등과같은역사적의미나통계수치로덮어버리는것이과연합당한가? 물론과거를기억하는데도덕적가치만을앞세운다면편협할것이다. 이는지적인인식만이옳다는입장이오류인것과동일한이치이다. 역사속의많은것은도덕적기준만으로는판단하기힘든것이많다. 친일 의경우만보아도 동아시아적근대 라는지구적맥락에서판단해볼필요가있다. 많은친일지식인들의사례는단순히개인의기회주의적 변절 만으로는심판하기힘든역사적요소들이있다. 그렇다면과거에대한도덕적심판은과연그유효범위를어디까지설정해야할까? 비판적 역사의가치는과거를현재의가장높은도덕적기준으로단죄하는것이아니라, 현재우리가사는사회가합의할수있는최소한의윤리적규범을만드는데있다. 일제가지배하는시대에친일을할수도있었겠지만적어도이광수등의경우처럼, 전쟁을호도하고인권을유린한행위는결코용서받을수없다는최소한의합의를이루지않고어찌정당한시민사회를만들수있을것인가? 2. 현재의올바른윤리적기준을누가정할수있는가? 친일 지식인에대한도덕적심판의문제는결국도덕적심판의현재적기준에대한문제를낳는다. 현재의우리사회가합의할수있는최소한의윤리적규범은무엇이며과연이에대한누구의입장이올바른가? 어떻게친일청산운동이보편적정당성을획득할수있을까? 친일청산운동에대한비판적논점중가장주요한것은민족주의에대한경도였다. 지구촌의시대에안맞게 민족정기 운운하고있다는것이다. 이러한비판은이제는그자체가구태의연해졌다. 왜냐하면친일청산운동은시민사회운동의현재와직결되어있기때문이다. 소수자내지는사회적약자의동등한권리와사회정의문제는우리시민사회초미의관심사이고친일청산운동은분명이사안을관통하고있다. 그러나문제는남는다. 친일청산운동이제반시민사회운동과만나려면현재우리사회의불공정및부정의문제와직결되어야할텐데, 친일청산운동은한국사회의모순을자칫일제식민잔재라는 기원 으로소급함으로써일종의뒤집혀진 기념비적 역사를구축하고있다. 모든악이친일세력에로소급되고, 모든윤리적기준이식민지조선의민중의입장으로소급되는기념비적역사! 과연 MB 세력은친일세력 ( 잔재 ) 인가? 물론친일세력을비호한다는면에서는그렇다고볼수도있겠지만, 그럴경우 MB 정권의성격을 6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편협하게규정할수있다. 과연 FTA 를거부해야하는이유는 조선민중 의권리가침해당하기때문인가? 아니면이땅에사는이주노동자들을포함한사회적약자일반의권리가침해당하기때문인가? 친일청 산운동은이러한상황에직면하여과연어떠한현재적인윤리적규범을제시할수있는가? 61

발표문 한국민족주의와친일인명사전 김기협 역사학자 1. 민족은 발명된허구 인가? 이글에서는 민족주의 와 내셔널리즘 을구분해서쓰겠다. 민족주의를둘러싼담론에혼동의여지가많기때문에유럽에서발생한근대적현상으로서의내셔널리즘을민족개념과관련된모든정치현상으로서의민족주의와구분해서표시한다는것이다. 일본에서는이비슷한용어구분이널리행해져왔다. 내셔널리즘은근대세계에서가장큰힘을발휘한정치이념의하나다. 그힘이너무커서일으킨폐단도컸다. 그래서유럽등 선진사회 에서는내셔널리즘에대한반감이크다. 반면근대문명의경험이얕거나안정성이떨어지는사회에서는내셔널리즘의힘이유지되고있고, 오히려더강화되기도한다. 그런데한국사회에는민족주의의힘이강하고, 그민족주의중에는내셔널리즘의성격을띤요소가많다. 한국사회의근대문명경험이얕고안정성이약하기때문일까? 그이유도어느정도작용하는것이사실이지만, 그것만은아니다. 한민족의전통이민족주의를뒷받침하는측면도분명히있기때문이다. 내셔널리즘을비판적으로보는시각중가장큰호응을받는것이베네딕트앤더슨과에릭홉스봄등이제시한 역사주의 (historicism) 다. 내셔널리즘을하나의역사적현상으로보는것으로, 앤더슨의 상상의공동체 (1983) 와홉스봄의 ( 테렌스레인저와함께엮은 ) 전통의발명 (1983) 이가장널리인용되는문헌이다. 홉스봄과레인저는 발명된전통 과 진짜전통 을대비시켰는데, 그관점을받아들이는사람들도과연두가지전통이확연히구분되는것인지의문을많이품는다. 모든전통에는 발명된 측면이있다고하는것인데, 그렇다면모든전통에 진짜 의측면도또한있다는이야기가아닐수없다. 유럽의근대국가가형성될무렵문인과학자, 정치가와교육자들이민족의전설과영웅, 그리고역사를만들어내고키워내는데큰노력을쏟은것은하나의역사적사건이었다. 여기에는 발명된전통 의측면이컸다. 한민족사회에서도이를본받아역사와위인전을서술하는사업이있었지만, 그노력은훨씬적고효과도훨씬적었다. 한민족의전통은오랜기간에걸쳐자연스럽게빚어져온것이므로 진짜전통 의측면이크다. 6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앤더슨이말하는 상상 의대상은민족의범위와민족의주권이다. 한민족과다른민족사이에확실한범위가있으며, 그범위안에서민족이주권을가진다고상상한다는것이다. 여기에도상상의영역과실존의영역이확연히구분되는지의문이따르지않을수없다. 민족의범위도주권도분명하지않던근세초기유럽의상황으로부터 민족국가 를빚어내는과정에서는상상력의역할이크지않을수없었다. 그러나 1천년동안반도안에민족국가를꾸려온한민족은자기범위와자기주권을생각하는데상상력의도움을별로필요로하지않는다. 근대민족국가들이자리잡기전까지 1천년간 기독교인 은보편적이고도강력한유럽인의정체성이었다. 언어, 지역, 혈통등 민족 과관련된요소들은산발적으로부차적인역할을맡을뿐이었다. 근대에접어들며유럽내의지역간경쟁이격화함에따라민족정체성이기독교인, 즉유럽인의정체성을밀어낸것이내셔널리즘이었다. 그렇다고유럽인정체성이아주사라진것은아니다. 근대유럽인의마음에는유럽정체성과민족정체성이함께자리잡고있었다. 유럽내의경쟁에는민족정체성이발동하고, 유럽외부의정복에는유럽인정체성이동력이되었다. 나치의유태인 -집시학살은유럽인정체성이나타난것이지만, 게르만족으로서슬라브족을멸시한민족정체성도그못지않은힘을휘두르며폴란드인과소련인의피해를증폭시켰다. 2차대전이후유럽의탈민족주의에는두가지의미가겹쳐져있다. 하나는모든울타리를없앤다는코스모폴리타니즘지향이고하나는민족울타리를유럽울타리로바꾸는유럽주의지향이다. 궁극적지향은어떻든현실의변화는유럽주의가민족주의를대신하는방향으로진행되어왔다. 한국에도유럽의탈민족주의담론을옮겨와민족주의 척결 을주장하는이들이있다. 그주장을총체적으로반박할만큼세밀히살펴보지는못했지만, 전통의발명 이니 상상의공동체 니그럴싸한용어를무비판적으로받아들이는풍조는정리해야겠다. 전통에발명의측면이있고공동체에상상의측면이있다는것은분명한사실이기때문에그런용어들이그럴싸하게들린다. 그러나그용어를만든사람들도전통과공동체에실체와실존의측면이있다는사실을부정한것이아님을유의해야한다. 홉스봄과앤더슨의관점을 역사주의 라하는것은내셔널리즘을하나의역사적현상으로본것이기때문이다. 근대유럽의역사적현상이란말이다. 민족 의관념을바탕으로한정치현상으로서 민족주의 는근대유럽의내셔널리즘외의다른형태와의미를가질수있다. 그래서한국의민족주의를논할때 내셔널리즘 과구분해서이야기할필요가있는것이다. 2. 근대내셔널리즘만이민족주의가아니다. 근대유럽의내셔널리즘이민족주의의다른형태와구분되는특성이무엇인가? 내셔널리즘도넓은범 위에서긴기간동안나타난현상이기때문에그특성을간단히요약해서말하기힘들다. 구체적인사례 63

를놓고설명하는편이효과적이겠다. 내가이특성을명쾌하게이해하는데큰도움이된것이조관자의논문 민족의힘 을욕망한친일내셔널리스트이광수 였다. 이논문이뉴라이트쪽에서만든 해방전후사의재인식 에실려있다는사실로인해그논조가뉴라이트쪽과맞는것아닌가의심도받는데, 전혀그렇지않다. 그책에는좋은논문도여러편실려있고, 일본의필자한분은책의성격을모르고게재에동의했다가나중에후회했다는이야기를전해듣기도했다. 조관자는이광수의 변절 을부정한다. 내셔널리스트 로서그의자세가 전향 전이나후나일관된것으로보는것이다. 민족의힘 에대한욕망이내셔널리스트의자세였다. 전향이란자신의민족정체성을한민족에서내선일체의대동아민족으로옮긴것이다. 해방전후사의재인식 편집인의하나인이영훈은이논문을 민족주의의모순 을공격하는데이용하려했다. 뉴라이트에대한 반민족주의 비판을희석시키려는의도로보이는데, 문제는그가조관자의논점을오해하거나왜곡했다는사실에있다. 그는 대한민국이야기 104~105 쪽에이렇게썼다. 그가협력자로돌아선것은적어도개인적인영달을위한것은아니었습니다. (...) 그리고그점에서그는정직하였습니다. 조관자교수는그러한정신세계의이광수를 친일내셔널리스트 라고부르고있습니다. 친일을하는민족주의자! 이얼마나모순된표현입니까. 그러나저는그러한모순된표현에서이광수만이아니라식민지기를살았던대다수지식인의정신세계를읽을수있다고생각합니다. 그들에게서협력과저항은신구두문명이격렬히충돌하는고통이었으며, 그속에서문명인으로소생하기위한실존적선택의몸부림이었습니다. 이영훈은 모순 에집착한다. 민족주의가원래모순덩어리인것이기때문에정치적기준으로서가치가없다는인상을주고싶어하는것이다. 민족주의를깊이파고들어가면모순을만날수있다는사실을나는인정한다. 그러나그모순은이영훈처럼얕은차원에서읽을수있는것이아니다. 적어도조관자는이광수에게서 모순 을느끼지않았다. 조관자가말하는 친일내셔널리즘 은아무역설도개재되지않은명쾌한것이다. 내선일체 에대응한 동조동근 의혈통과역사적전통을창출하며, 조선인이제국일본의 주체 = 신민 이되는내셔널리즘의한형태를정립하려했던것이다. 이글에서는그것을 친일내셔널리즘 이라부르고, 최남선과더불어그대표적인이데올로그였던이광수의논설을통해 민족을위한친일 이형성되고파탄되는지점을추적하려고한다.(527 쪽 ) 민족사학에서비판하는것처럼, 이른바민족개량주의의근대화론자들이일제의민족분열정책에이 6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용되었다고볼수만은없다. 그들은근대문명국가를욕망하는 주체 로서스스로를정립하였기때문에일 제와타협하는생존의길을걸은것이다.(530 쪽 ) 조관자도 역설 을이야기하기는한다. 그러나그것은실존차원의역설이아니라파시즘취향의 낭만적 인수사 ( 修辭 ) 일뿐이다. 조선심 을사멸하는것이 일심일체 인상황에서일본의 형제 들에게 조선인의마음 에호소해달라고하는역설. 생존의이익을도모하는친일내셔널리즘의힘에대한욕망을숨기고가상된동포애의집단도취적인희생을찬미하는파시즘의낭만적수사다. 차별과억압을원망하는조선인, 차별과억압의이익을지키고싶은일본인, 길항하는두마음을의식하면서이광수는 깨끗한일본혼 의대사를읊고 천황의적자 를연기한것이다.(547 쪽 ) 힘의욕망에근거를둔내셔널리즘은 친일내셔널리즘 으로부터 친미내셔널리즘 으로도아무모순없 이 전향 할수있다는사실까지조관자는지적했다. 이광수는미군정이친일내셔널리즘을배제하지않고반공주의국가를준비하는것에안도한다. 미국을적대시하던 친일 에서 친미 로돌변한모습을보고그를 변절의천재 인것처럼비난하는것은오히려어리석다. 적어도이광수는거짓말을하지않고자기의신념에충실했다. 강자의문명과패권을욕망하는 친일내셔널리즘 이 민족주의적 인가, 친일적 인가, 친미적 인가하는문제는상황변수에불과하다.(552 쪽 ) 나는 밖에서본한국사 에서한민족역사의중요한원리로 화이부동 ( 和而不同 ) 을제시했다.(51-57, 190-191, 334 쪽 ) 이것은근대유럽내셔널리즘의배타적, 유아독존적특성과대조되는것이다. 화이부동은유교질서의원리이기도한것인데, 근대유럽의원자론적세계관과대비되는유기론적세계관에바탕을둔것이다. 조관자가 힘의욕망 을내셔널리즘의핵심요소로보는것은그폭력적속성을가리키는것이다. 근대유럽의내셔널리즘은급격한기술발달로인해자연에대한인간의힘이폭발적으로늘어나는상황에서빚어져나온것이다. 자원낭비를수반하는맹목적경쟁이허용되는상황에서성립된근대내셔널리즘은자원낭비를억제해야하는정상적상황에서는지속될수없는것이다. 한민족의민족국가가 1천년이나지속할수있었던것은그민족주의가맹목적경쟁아닌균형과조화를추구하는것이었기때문이다. 물론배타적이고투쟁적인면모가전혀없었던것은아니다. 그러나대부분기간에걸쳐대다수한민족은민족정체성을갖고있으면서도우리민족이가장뛰어난민족이어야한다는, 따라서최고의번영을누려야한다는강박은갖고있지않았다. 65

3. 내셔널리즘과글로벌리즘 유럽의근대내셔널리즘은대립을위해만들어진것이었다. 유럽인에게는고래로민족정체성에앞서는유럽인정체성이있었고, 이유럽인정체성은대개기독교인정체성의모습으로나타났다. 십자군운동만이아니라중세의주요전설들도이기독교인정체성의발현이었고, 이것이대항해시대이후이교도를정복대상으로보는관념까지이어졌다. 경제발달에따라유럽인끼리의전쟁이확대- 심화되면서기독교인끼리는미워하면안된다는오랜관념을뛰어넘을필요가생겼고, 그필요에서일어난것이내셔널리즘이었다. 근교원공 ( 近交遠攻 ) 에서원교근공 ( 遠交近攻 ) 의시대로옮겨온것이다. 먼곳에식민지를경영하면서이웃나라랑피터지게싸우는시대가된것이다. 근교원공이니원교근공이니하는말에서바로떠오르는것이중국전국시대진 ( 秦 ) 나라의범수 ( 范睢 ) 다. 귀족계급에게유리한근교원공정책을버리고왕중심의원교근공책을채용함으로써중앙집권을강화했다는이야기가전해진다. 범수의원교근공책이부국강병의효과를거두자다른나라들도이를따라채택해서전국시대후기의대세가되었다. 중국의전국시대와유럽의근대에어떤공통된조건이있었기에국제정책의기조에비슷한변화가일어난것일까? 기술의급속한발달에따른자원공급의급격한팽창이다. 이웃나라끼리의전쟁은소모적인총력전이되기쉽다. 일반적상황에서는물적- 인적자원의고갈때문에원교근공정책이널리오랫동안시행될수없다. 중국의철기혁명과유럽의산업혁명이꽤긴기간에걸친원교근공의시대를가능하게한것이다. 산업혁명에따른자원공급의확대가불러일으킨여러가지 근대적현상 의중요한공통분모가 경쟁 이다. 민주주의와자본주의는개인간의경쟁에, 사회주의와공산주의는계급간의경쟁에, 그리고내셔널리즘은민족국가간의경쟁에바탕을둔것이다. 경쟁주체인개체의존엄성을절대화하는이풍조에는 협력 보다 경쟁 을앞세움으로써자원낭비를부추기는경향이있다. 따라서인간사회의일반적상황에서는이런풍조가크게일어나오래계속되기힘들다. 산업혁명의효과가지속하는범위내에서일어난하나의역사적현상이다. 탈근대 는자원과환경의한계가분명해짐에따라피할수없이일어나는변화이고, 근대적 경쟁지상주의 의퇴조가그중요한한측면이다. 근대적상황속에서부각되었던경쟁의주체중 개인 의존엄성은탈근대의변화에대해가장큰저항력을보일것이다. 어떤상황에서도 개인 은인간존재의가장기본적측면이기때문이다. 계급 은그보다는약해도얼마간의저항력을보일것이다. 사회경제적관계가현대인에게존재의중요한양상이되어있기때문이다. 반면근대유럽식민족국가는인간존재의양식으로서그만큼확고한의미가없다. 그래서내셔널리즘의퇴조가본격적탈근대변화에앞서일어난것이다. 내셔널리즘의퇴조에한몫을한것이 글로벌리즘 (globalism) 이다. 굳이번역하면 세계주의 라할수 6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도있겠지만 세계주의 란말이가리킬수있는넓은의미와별도로 20세기말-21 세기초의 세계화 (globalization) 와관련된하나의역사적현상으로서글로벌리즘을생각할수있다. 넓은의미의민족주의와별도로내셔널리즘을생각하는것처럼. 내셔널리즘의퇴조에따라 국민 으로서사람들의정체성이약화되면다른층위의정체성이확충되는것이자연스러운일이다. 그확충의방향에는넓은쪽의 세계인 과좁은쪽의 개인 이있다. 세계화 란이름은인류의일원인 세계인 으로넓은쪽을가리키는것이다. 그런데현실속의세계화는그반대방향으로움직여왔다. 정치적통합없이경제적통합만이추진되면서인간이권리와의무를규정해주는정치조직없이경제행위의주체인개인으로서만존재하게하는방향이다. 지금의글로벌리즘은실제에있어서진정한세계주의가아니라개인주의의극단화다. 이것은경쟁을억제하고협력을늘리는 탈근대 에역행하는방향으로, 신자유주의에서추동력을얻는것이다. 하나의체제가해소될때해소의원인이된모순이극복되는것이아니라오히려심화되는일시적 반동 현상으로나는본다. 내셔널리즘의퇴조는탈근대시대의큰흐름으로, 인류가순응해야할변화방향이다. 그런데지금은글로벌리즘이란역류가기존의모순을더욱심화시키며개인을더큰위험과고통에노출시키고있다. 인간과자연과의관계도더욱악화시키며인류문명을파탄으로몰아가고있다. 신자유주의에끌려가는글로벌리즘이진정한세계주의로방향을돌리도록주의와노력을기울일필요가있다. 넓은의미의민족주의도길게보면근대내셔널리즘의뒤를따라퇴조할것으로바라볼수있다. 그러나무분별한내셔널리즘포기가사이비세계주의에휩쓸려근대적모순의극단적심화라는파국적결과로이어지는위험을경계하는것이지금의당면과제다. 한민족의민족주의는원래근대내셔널리즘과달리튼튼한뿌리를가진것이기도하거니와, 반동적신자유주의를견제하기위해민족정체성을확실히할필요가또한있는것이다. 4. 한민족의민족주의 여기서한민족의민족주의를이야기하는데통상 민족의식 이라하는것까지포함하겠다. 굳이구분한다면민족의식은민족주의의바탕이되는재료이며민족의식이 정치화 한것을민족주의라하는데, 근대내셔널리즘처럼극단적인정치화가아닐경우그사이를엄밀하게구분하는것이자연스럽지않을수도있다. 중국에서조선족을포함한소수민족에대해서는 민족심 ( 民族心 ) 이란말을쓴다. 정치적민족주의를인정하지않는사회주의국가이기때문에민족주의라는말을피해서이말을쓰는것으로생각되는데, 우리가생각하는민족의식에서민족주의까지자연스럽게포괄하는말로쓰이고있다. 67

한반도라는꽤명확히구분되는지역의모든주민이하나의언어와하나의국가체제안에살아온것이적어도 1천년은된다. 한민족은세계에서가장오래안정된민족국가를운영해온민족이다. 확고한민족의식을키워내지않을수없는조건이다. 하나의국가안에서살았더라도신분차별이있었다면 국민 으로존재한것이아니라고, 민족국가의역사를부정하는이들도있다. 근대내셔널리즘기준의 국민국가 가아니었다는것은물론사실이다. 그러나국민국가가아니더라도민족국가는엄연히존재했다. 개항기외세의위협앞에서외세를환영하는피지배계급의계급적움직임이있었는가? 민족을배신하는행태는굳이따지자면지배계급출신에게서더많이나타났다. 민족의식은타민족의인식을통해일어나는것이다. 이민족간의접촉은근대들어급격히늘어난것이기도하려니와, 근대이전에도한민족에게는오랫동안이민족과의접촉이특히적었다. 1천년간이민족과의대규모전쟁은몇차례되지않았고, 평상시에외국인의방문도조선 ( 및고려 ) 인의국외여행도아주적었다. 정치화 의조건이별로없는상태에서자기정체성의한요소로갖고있을뿐이었다. 앤더슨은공동체의상상에서상상의구체적대상으로공동체의 범위 와 주권 을꼽았다. 전통시대의한민족에게민족의범위란더할수없이자연스러운실체였다. 한편주권에대해서는명확한생각이없었다. 배타적주권을생각할필요가없었기때문이다. 한민족의민족국가는그존재한대부분기간을통해중국의왕조와 사대 ( 事大 ) 관계를맺고있었다. 이관계에서고려와조선의주권은 ( 근대적기준으로 ) 완벽한것이아니었다. 유기론적세계관에입각한 천하 체제에는완벽한배타적주권의개념도없었거니와, 사대관계가한민족의민족의식을근본적으로침해하는것도아니었다. 완벽하지않은만큼유연성을가진관계였기때문에 1천년이라는긴시간을지속할수있었던것이기도하다. 근대내셔널리즘에물든오늘날의우리민족주의자들은혹시고구려가잘하면중국을정복할수는없었을까입맛을다시기도한다. 그러나중국을정복했던주변민족중민족의실체를지금까지우리만큼지키고있는민족이하나라도있는가? 완벽한배타적주권을생각하지않는 화이부동 의원리가오늘의한민족을있게한발판이다. 중국과의관계에도수많은갈등이있기는했다. 이갈등들은민족주권의원리가아니라천하체제의원리에따라처리되었다. 중국쪽의지나친침해가있을경우대등한입장에서따지는것이아니라올바른 사대- 자소 ( 字小 ) 관계의기준을들이댄것이다. 하위의존재임을자인하면서최소한의존중을요구하는이자세로중국과의관계에드는비용을최소화할수있었고, 다른이민족을상대하는데도여유를가질수있었다. 개항기조선에닥친위협의 1차적대상이이천하체제였다. 동아시아에앞서동남아시아에진출한유럽세력에게중국의영향력차단이중요한과제였고, 만국공법체제의강요를통한천하체제해체작업이시작되었다. 중국자체에대한침략이진행됨에따라이작업에더욱힘이들어가는단계에서일본이조 6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선의천하체제이탈을강요하고나섰다. 이강요를일본은조선의 독립 을위한것이라고분식했다. 이로써만국공법체제의형태를갖춘근대내셔널리즘이조선에들어오기시작했고, 1894-95 년청일전쟁으로천하체제가완전히무너질무렵까지는어느정도범위의조선인들이이것을받아들이고있었다. 근대내셔널리즘이이처럼일본침략의도구로사용된곡절로인해조선인의민족주의에균열현상이일어난다. 위정척사파는민족주의의전통적형태를지키려한반면개화파는일본이권하는근대내셔널리즘을받아들이려는자세를취했다. 소위개화파중에는민족의발전을위해진심으로근대내셔널리즘을받아들이려는사람들틈에일본의힘에영합하는기회주의적행태도끼어들었다. 1896-98 년간활동한독립협회에는이런여러가지요소들이혼재해있었다. 장지연 (1864-1921) 의이력이이혼란상을단적으로보여주는것이라생각된다. 1905 년 시일야방성대곡 으로불후의이름을남겼을뿐아니라 1910 년에도황현의절명시를 경남일보 에게재해서핍박받았던그가 1914 년이후의친일행위로얼마전서훈을박탈당했다. 뜻을가진사람도길을찾기힘든시절이었다. 합방무렵까지근대물질문명의힘을발판으로쏟아져들어온유럽근대사상의위세앞에전통적가치관과세계관은힘을잃었다. 조선인의민족주의도새로운방향을찾아야했다. 그러나민족국가가존재하지않는상황에서근대내셔널리즘은명확한진로를잡을수없었다. 식민지시대조선인의민족주의는신채호의저항적태도에서이광수의순응적태도까지넓은스펙트럼을펼치고있었다. 5. 한국인의민족주의 오랜세월동안종주국과의관계조절을통해적당한정도의주권을누려온조선인에게 모아니면도 의절대주권은벅찬과제였다. 대한제국기의 외세줄서기 는예외적인매판자세가아니라 중국눈치보기 에길든지배층의자연스러운반응이었다고도볼수있다. 그런데줄서기나눈치보기로적당히헤쳐나갈수있는상황이아니었다. 완전독립아니면식민지라는양자택일의과제였고, 조선은식민지가되었다. 일단식민지가되면모든면에서지배국의영향을받게되고민족주의도예외가아니다. 조선민족주의는일본을통해배운근대내셔널리즘의틀에맞춰새로빚어지기시작했고, 1919 년경윌슨의민족자결주의에고무되면서근대내셔널리즘이확고히자리잡게되었다. 절대주권이조선민족주의의절대적요소가된것이다. 식민지인에게절대주권의과제는극단적선택을강요했다. 식민지배를부정하든지민족을부정하든지. 독립투사의길과민족반역자의길뿐이었다. 물론후자의경우조관자가본이광수처럼민족정체성의전환으로 내셔널리스트 의위치를지키는길도있었다. 양쪽극단을싫어하는보통사람들에게는어떤길이있었는가. 민족의식은갖고있지만현실을부정할 69

생각은없는보통사람이라면일본의지배를현실로받아들이되미래에희망을걸수밖에없었다. 민족개량주의 라하여오늘의민족주의자들이경멸하거나매도하는자세가보통사람들의그런희망을담은것이었다. 식민지배자들이민족주의의반발을얼버무리기위해민족개량주의를이용하기도했지만, 거기에는식민지배자입장에서도양보와타협의의미가있었다. 이런풍토에서형성된한국인의민족주의는해방후에도남한에서관성을발휘했다. 반미운동이표면화된것은 1980 년대의일이지만그이전의반독재투쟁도실질적으로신식민지체제에대한저항의의미를가진것이었다. 한편권력은 ( 재력포함 ) 식민지시대와마찬가지로민족의식을등진세력의손에쥐어져있다. 그리고수많은보통사람들은미래의희망으로현실의불만을달래며신식민지체제속에자기자리를지키고있다. 신식민지체제 라면통상독립후에도원래의지배국이실질적지배력을유지하는경우를말하는것인데, 남한의경우미국이일본의지배권을거의그대로넘겨받았기때문에기본개념이적용되는것으로본다. 신식민지의개념은식민지처럼명확한것이아니기때문이 1945 년이후해방후의남한에신식민지체제관점을적용하는데는당연히논란의여지가있다. 그러나남한민족주의가식민지시대민족주의의틀을그대로지킨것은신식민지체제관점의적용을뒷받침해주는사실이다. 안재홍은식민지시대민족주의의틀을벗어날필요를분명하게제기했다. 해방한달후발표한 신민족주의와신민주주의 에서 신민족주의 의모색을제창했는데, 급하게작성한탓인지 신 민족주의다운새로운내용을많이담지는못했다. 그러나지향하는방향은모두에서명확하게제시했다. 민족과민족의식은그유래매우오랜것이니, 근대자본주의시대의산물이아니다. 대통일을요하는원심적인민족연합국가, 이를테면 19세기이전의독일인의제국가와같은데있어서의지방적애국주의는지양청산을요하였음과같이, 근대에있어국제적협동관련성을무시하는고립배타적인민족주의혹은국가주의는배격되어야하겠지만, 민족자존의생존협동체로서의주도이념인민족주의는거룩하다. 이에특히신민족주의가제창되는이유이다. ( 민세안재홍선집 2 16 쪽 ) 안재홍은 1931 년조선일보사장으로있을때여순감옥에갇혀있던신채호의글을백여회에걸쳐연재하는등 ( 조선상고사 원고 ) 신채호의민족주의를세상에알리는데큰역할을맡았고, 일제말전쟁기에는스스로역사연구에몰두한사람이다. 그는근대내셔널리즘이민족주의의절대적형태가아님을간파하고고립배타적인민족주의를벗어나국제적협동관련성을추구하는신민족주의를제창했다. 두개측면에서시의에맞는주장이었다고나는본다. 외부적으로는투쟁적내셔널리즘이극복되는세계적추세에맞는것이고, 내부적으로는식민지시대의피해의식에얽매여권리만을주장하던민족주의에서이제독립민족으로서책임도생각하는민족주의로나아갈필요를말한것이다. 신채호를존경하고존중하면서도역사를 我와非我의투쟁 으로만보는관점에묶여있어서는안될때가왔음을인식한것 7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이다. 그런데이후남한에서는민족주의담론이반공독재체제에의해봉쇄되고말았다. 시대의요구에맞추는담론의발전이막힌상태에서한국민족주의는껍데기만남게되었다. 이껍데기는권력자의필요에따라이용당하기만할뿐 ( 민주주의를억압하는핑계로쓰이거나독점기업의이익을보호해주는데 ), 정치적기능을능동적으로발휘하지못했다. 아직도민족주의는한국에서정치이념으로서정상적인역할을수행하지못하고있다. 정치이념이라면다른이념과어울려정책형성과정에작용해야하는데, 충신아니면역적 의 2분법적인식차원에머물러있어서다른이념과의절충이어려운것이다. 6. 21 세기한국민족주의의전망 다른사회에비해한국사회에서앞으로민족주의의역할이클것을두가지근거에서바라볼수있다. 그하나는긴민족국가의역사에서오는전통의무게이고또하나는민족분단상황이다. 자연스러운통합성이억지로막혀있는상태는강물이댐으로막혀있는것처럼큰잠재에너지를품고있다. 언제어떻게방출되느냐에따라이에너지가한국사회에화가될수도있고복이될수도있다. 어떤결과를가져올지결정할중요한요인하나가민족주의다. 교통과통신의발달을비롯한여러가지조건으로인해민족정체성은시간이지남에따라흐려지는추세에놓여있다. 따라서궁극적으로는정치이념으로서민족주의의역할이사라질것을내다볼수도있다. 그러나유럽에서내셔널리즘이퇴조한다해서한국의민족주의가덩달아사라지기에는전통의무게가너무크다. 게다가민족분단의상황이민족주의를섣불리무시할수없게하고있다. 적어도지금살고있는한국인들이살아있는동안에는민족주의를정치적판단의중요한한요소로고려하지않으면안될것이다. 지금한국사회에서민족주의에대한믿음을가진사람들은민족주의가약한것이문제이므로강화하기만하면된다는생각을흔히갖고있다. 나는이것으로부족하다고생각한다. 내용을정비하고확충하는질적변화가필요하다는것이다. 내용을제대로갖추지못한채목청만높여서는권력자들에게이용당하기만좋다. 한국민족주의의상징적이슈의하나인독도문제를보자. 일본이독도를집적거리는데분노하는한국인가운데, 일본이영유권을주장할조그만근거라도있다는사실을파악하고그것도감안해서종합적판단을내리려는사람은거의없다. 상대방의주장은완전히무시하고내주장만하는것이보통이다. 그래서실질적근거를따지는길을스스로틀어막고그저 1 대 1의대립으로만제3 자가파악하게만드는우를범할수있다. 71

이런일방적태도가문제를더어렵게만든상황을정병준의 독도 1947 762-763 쪽에서볼수있다. 1951 년샌프란시스코회담때의일이다. 한국정부가최초로독도를거론한제2 차답신서 (1951. 7. 19) 에는독도의명칭만이거론되었을뿐독도 - 파랑도에대한어떠한근거 -관련자료도제시되지않았다. 한국정부는조약초안에거론된, 일본이방기할도서인제주도 -거문도 -울릉도뒤에단지독도 -파랑도를첨부했을뿐이다. 추가적인설명은전무했다. 또한위치와존재가확인되지않던파랑도와함께독도가한국의영토로주장됨으로써독도자체의실존감이나신뢰도를저감시켰다. 나아가한미협의의맥락에서보자면대마도반환요청이기각된다음에독도반환을주장했고, 그것도가공의섬인파랑도와함께요청함으로써, 독도가한국측영유권의중요성에서후순위를차지하는것으로해석될수밖에없었다. 한미협의 (1951. 7. 19) 시점에한표욱 1등서기관은독도와파랑도가 대체적으로울릉도인근에위치 한다고발언함으로써지리적 -역사적 -문헌적정보가부정확하고미비했음을드러냈다. 또한한국정부는정치적주장이었던대마도반환요청이기각된이후영토문제를중시하지않는다는인상이강했다. 파랑도를주장한데서드러나듯이정부스스로명확한확증근거를갖지못한지역을한번주장해보자는정도의결의를갖고있었다고할수있다. 한국영토인독도의불가침성에대한진지한대응과는거리가있었다. 민족주의자를자처하는이들중에 간도는우리땅 을외치는사람들이있다. 민족주의를양적으로확장하려는노력이절도를잃으면질적인충실성을손상시킬수있다. 확고한근거없이무조건 우리땅! 만외치는한국인이라면그들이외치는 독도는우리땅 까지근거를의심받을수있다. 60년전에 파랑도는우리땅 이웃음거리가된것처럼. 지금도독도문제를놓고 지금은곤란하다. 고하여일본쪽주장의빌미를조금이라도더만들어주고있는사람들이있다. 영유권의타당성을국가원수에게까지납득시키지못하고있는것은한국사회의문제다. 그한사람만의문제가아니다. 민족주의는강화되어야한다고나는생각한다. 그러나껍데기만더딱딱하게만드는경화가아니라내용을잘갖춰서스스로자라나는힘을북돋워주어야한다. 어떤방법과기준에따라한국민족주의의내용을갖추고다듬을것인가? 기존민족주의의약점과함께시대의요구를살펴야한다. (1) 경직성을탈피해야한다. 민족의식이강한이들중에중국조선족을가깝게대하려다가극단적인반감으로돌아서는일이많다. 문화감각이한국인과동일할것을기대하다가실망할때, 또는중국인으로서국가정체성을포기하지않는것을볼때흔히일어나는일이다. 민족의식을많이공유하고있는데도내경직된기준에얽매여거리를가지는것이다. 7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북한주민들의문화감각은조선족보다도한국인들로부터더멀어진것으로보인다. 분단문제극복을위해서는유연하고신축성있는민족정체성의식이필요하다. 이런의식변화를위해서는분단문제극복의목표를가리키는데도 통일 보다 통합 같은더유연한표현이좋겠다는생각을한다. 근대내셔널리즘의엄격한 범위 관념에매이지말아야한다. (2) 권리와함께책임도생각해야한다. 식민지인의민족주의는피해의식을바탕으로빼앗긴권리의회복에매달리는것이었다. 독립민족의민족주의는세계질서와평화에공헌까지는아니라도손상은끼치지않는기준을지켜야한다. 타민족의복리를직접침해하지않을뿐아니라다른모든민족이우리같은태도를취하더라도인류사회에파탄을일으키지않을만한기준을스스로세워야한다. 현실의변화를원하는식민지인은지속가능성을생각하지않더라도독립민족은생각해야한다. 권리와책임의균형감각은중국의존재를생각할때더욱절실한것이다. 중국의국가주의는큰가변성을갖고있다. 한국은미국, 일본과함께많은중국인들에게모델로의식되고있는나라의하나다. 한국의민족주의전개양상이중국의국가주의발전방향에큰영향을끼칠가능성이있다. (3) 대립보다협력을바라보는민족주의라야한다. 대립위주의근대내셔널리즘의성행은자원공급에한계를느끼지않는특수한상황덕분이었다. 이로부터비롯된부국강병의무한경쟁이아직까지경제성장에대한집착으로이어지고있다. 그러나자원과환경의한계가드러난 21세기상황에서민족주의도경쟁완화를통해자원낭비를막고인간과자연의관계개선에공헌하는역할을찾지않는다면순조로운발전을바라볼수없다. 근년진행되어온 세계화 는인류공영을향한진정한세계주의가아니라개인주의를극단화하는글로벌리즘으로향한것이다. 이것이권력을쥔소수의이익을위한반동적현상이라는사실은지금벌어지고있는 99% 의항의 로밝혀지고있다. 정치적세계화를외면하고경제적세계화만추진해온데문제가있다. 인류구성원모두의권리와책임을조직하는정치적세계화를통해탈근대시대의새로운질서를빚어내지않으면닥쳐올파국은더욱심각해질것이다. 민족주의도대립보다협력을중시함으로써정치적세계화에공헌해야한다. 7. 민족주의관념성극복의과제 한국정치에서민족주의는아직도의제로채택되지못하고있다. 어용민족주의의조작외에는민족주 의의발전과표현을일체가로막고있던기나긴반공독재시기의유제 ( 遺制 ) 속에한국인들은아직도살 고있는것이다. 사안이있을때마다한차례씩냄비처럼끓어오를뿐, 민족주의가치가다른가치들과지 73

속적인관계를맺지못하고있다. 같은민족을뿔달린괴물로보라는정권의요구에대해순응과거부의양자택일을해야하던반공독재시절에민족주의의관념화는어쩔수없는일이었다. 민족을아끼는사람은민족의가치를절대화해야했고, 자기보다민족을 덜 아끼는사람들과대화의길을찾기힘들었다. 식민지인의방어적 -피해망상적민족주의와같은틀이다. 해방후 40년이상한국상황을나는이점에서 신식민지체제 로본다. 관념화 -절대화된민족주의는정치외부에서정치를간헐적으로뒤흔들기만할뿐, 정치내부에들어가지속적의제의역할을맡지못한다. yes-no 질문에만대답할뿐, why 질문에대답하지못하기때문이다. 민족의번영 을위한경제성장주장에대해관념적민족주의자는현실적판단을하기힘들다. 경제성장에따르는여러가지현실적득실을 민족의번영 이란가치와비교할수없기때문이다. 관념화와그로부터이어지는흑백론, 진영논리의문제는한국사회에서민족주의만의것이아니다. 관념화는온전한책임과권리를갖지못한식민지 -신식민지사회의일반적풍조이고, 모든정치적의제가관념화되어다른의제들의현실화를서로서로가로막는경색상태를이룬것이한국사회의구조적문제다. 이경색구조를해소하는작업이 1987 년이후진행되어왔는데, 이작업에큰잠재적역할을갖고있으면서아직역할을제대로맡지못하고있는것이민족주의라고나는본다. 민족주의가현실상황에맞는자세를갖출때, 다른여러가지의제의논의에서도중요한좌표계역할을제공할수있으리라고보는것이다. 남북관계는말할것도없고, 한미 FTA, 빈부양극화, 과도한개발정책등현안문제들에대해민족주의가가진잠재적함의와현실적작용사이에는현격한차이가있다. 이사회를해치는많은행위들이널리자행되고있는데, 현실적민족주의가존재한다면이를억제하는데일반적도덕기준보다큰힘을발휘할수있을것이다. 일제시대의친일파보다더심한 민족반역죄 를일상적으로저지르는개인, 집단, 계층이이사회에널려있다. 민족반역죄만단속해도현존하는사회악의대부분을억누를수있을것이다. 그런데이사회가과거의민족반역죄는성토하면서현재의민족반역죄는방치하는까닭이민족주의의관념화에있다. 8. 민족주의의관념성극복을위한 친일인명사전 의역할 친일인명사전 에는한국민족주의의현실화를위한인프라작업으로서의의미가있다. KBS 의백선엽드라마에대한항의사태를생각해보자. 친일했으니까나쁜놈 이란관념적비판도없지않았겠지만, 민족주의를그리중요시하지않던사람들도이사전을조금훑어보면 친일파라고다나쁜건아니라도, 이사람은좀너무하잖아? 상식적이고현실적인생각을일으킬수있다. 민족주의의외연이확장되는것이다. 한편이비판을받아들이는쪽입장을생각해보자. 친일파건뭐건권력자의환심만사면되지. 하는사람들이야 친일인명사전 있으나마나겠지만, 그래도양심을아주버리지않은사람이라면사전을들 7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여다보고 어이쿠, 이사람은좀심했군. 반성할수있다. 이사전이없다면그런사람들도 에이, 민족주의타령이또나오네. 귀를닫아버리기쉽다. 민족주의의힘이확대되는것이다. 앞서제4절에서언급한위암장지연의경우를보자. 그의서훈이몇달전취소된일을나는유감스럽게생각한다. 그가말년의몇해동안친일행위를한것은사실이고사전에수록된것은마땅한일이다. 그러나 1914~18 년의암담한시기의시세를거부하지못한문필활동이 시일야방성대곡 의가치를훼손한것은아니라고생각한다. 개인적인의견이다. 그의서훈취소가마땅하다고여기는의견이꼭틀린것이라고우길생각은없다. 그러나사전수록을곧단죄로보는시각을불식하기위해서는각별한노력이필요하다고보기때문에유감스러운것이다. 서훈취소는보훈처의요청으로국무회의에서결정한것이다. 박승춘보훈처장은 독립운동을했더라도일제에협력한사실이확인되면독립유공자에서는제외돼야한다는입장 이라고밝혔으며 ( 뉴시스 2011. 6. 8), 김황식총리는 친일행적과별도로독립운동을위한공도인정되는만큼그부분을별도로생각하는것은필요하지만, 종합적으로볼때서훈이취소되는것이마땅하다 고했다.( 한겨레신문 2011. 4. 5) 나는 친일인명사전 편찬의의미를학술활동으로본다. 어려운조건을무릅쓰고사업을추진하고지원해온이들의마음속에는 단죄 라는정치적목적의식이있었다하더라도사전편찬자체는학술작업이었다. 학술작업의엄밀한기준에따라이뤄진것이기때문에정치적목적의식을넘어서는보편적가치를가질수있는것이다. 장지연의서훈취소에있어서 친일인명사전 은보훈처와국무회의의결정에 참고자료 의역할을한것만으로보는것이학술업적으로서사전의가치를잘지키는관점이다. 사전의관계자나지지자입장에서사전의역할을그보다더크게내세우려하는것은사전의진정한가치를스스로위협할수있는일이다. 장지연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을서훈취소의필요충분조건처럼인식하는많은논설이나왔다. 그중에는사전을폄훼하려는의도로작성된것도있겠지만, 그보다중요한것은그의서훈취소가이사회의종래통념으로의외의일이었다는사실이다. 사전을폄훼하려는자들은이통념에의지해서공격을펼친것이다. 당시사전관계자의논설로조세열의 시일야반성대곡 ( 한겨레신문 2011 년 4월 30일자 ) 과이용창의 위암장지연의친일행적재론 을봤다. 조세열의글에서 보훈처는설령독립운동의공적이있더라도흠결이조금이라도있으면서훈대상에서일단제외또는보류하는신중한자세를일관되게유지해왔기때문 에서훈취소가마땅한일이었다고한데나는생각을달리한다. 흠결이있으면서훈에서제외한다는보훈처의방침은위에인용한보훈처장박승춘의말에서도확인되는것인데나는그것이바람직한원칙이라고생각하지않는다. 조그만흠결이있어도서훈에서제외한다는원칙은서훈자의공과를주체적으로판단할국가의책임을외면하는형식적기준이며, 실제로보훈처의서훈사업에서편의적으로적용되어온것이다. 친일 의 75

의미를제대로검토할의지가정부에게없기때문에그런형식적이고편의적인기준에매달려온것이다. 친일인명사전 이나와있는 2011 년시점에서는이편의적 원칙 이척결되어야한다고나는생각한다. 이용창의글에도반민규명위원회조사범위와 친일인명사전 수록범위가다르다는사실이밝혀져있는것처럼, 국가기관과민간연구단체의활동범위와방식은서로다른것이다. 보훈처는이사전을활용해서서훈심사대상자의공과를전보다훨씬엄밀하게파악할수있으므로지나치게형식적인기준을벗어날수있다. 보훈처와국무회의는자기네결정의이유를 친일인명사전 에미뤄서는안된다. 장지연의서훈취소를아쉬워하는사람들과민족문제연구소사이의이간질이될수있다. 논란이일어났을때나는사전관계자쪽에서수록의타당성은확인하되정부의조치와는거리를두는논설이나오기바랐다. 내가본두분의글은이점에서아쉽다. 장지연의서훈취소를아쉬워하는까닭을설명하겠다. 1914 년에서 1918 년까지, 문제가되는시기의성격을생각하는것이다. 제4절에서장지연얘기를하며 뜻을가진사람도길을찾기힘든시절 이라고했다. 일제강점기의어두운세월중에도 1910~1918 년의기간이특히캄캄한시절, 아무리눈밝은사람도발길을제대로딛기어려운때였다. 1차대전이끝나면서막연하게나마 대안 이떠오르기시작했다. 기껏대한제국의복벽이나생각하던시절에 그형편없는대한제국으로돌아가느니차라리이민족지배를당분간겪으면서라도미래를향한확실한길을찾아야겠다 는생각을누구든할수있었을것같다. 그러나내가정말중요하게생각하는것은장지연에대한내의견을빚어낸것또한 친일인명사전 덕분이란사실이다. 이사전의도움없이는엇갈리는두측면사이의의혹에서벗어날길을찾기힘들었을것이다. 친일의측면에어떤것이있는지살펴보고김황식말대로 종합적판단 을내릴수있었다. 종합적판단을나와다른쪽으로내린현정부국무위원들이 도덕적으로완벽 한사람들인지는알수없지만. 장지연만이아니라식민지시대 친일 의실제모습을전체적으로파악할수있었던것이이사전덕분이다. 항일은좋은것, 친일은나쁜것 의관념을뛰어넘어인간적현상과사회적현상으로친일의현실을이해하게된것이다. 이이해를바탕으로지금벌어지고있는일들도민족주의관점을통해개인의도덕적문제보다사회의구조적문제로이해할수있다. 1945 년이후이땅에서펼쳐져온친미행위중에는악질친일파못지않게범죄적이고민족반역적인것들이있다. 친일행위반성은친미행위통제의기준으로적용될수있는것이다. 내이웃, 내가족, 나자신의생활방식자체에민족주체성을몰각하는문제가없는지살피는자세로선인들의행위도살펴야한다. 형벌이적절하지않으면백성이손발놀릴데가없다 ( 刑罰不中民無所操手足 ) 는공자말씀대로, 지나치지않고모자라지않은기준을현실의이해위에세우도록노력해야한다. 이름이발라야말이순하다 ( 名正言順 ) 는것은적절한형벌을세우기위한기반조건이다. 나는 < 친일인명사전 > 의가치가적절한형벌보다바른이름을세우는데있으며, 그렇기때문에식민지시대못지않게오늘의상황에도힘있게적용될수있는것이라고본다. 7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토론문 토론문 : 한국민족주의와친일인명사전 정해구 성공회대교수 1. 필자는이글에서근대유럽의내셔널리즘을중앙집권, 부국강병, 경쟁등과연결시키고있다. 나아가이러한맥락에서필자는조관자가 민족의힘 을욕망한친일내셔널리스트이광수를분석하고있다고보고있다. 이와관련하여토론자는다음과같은두문제를제기하고싶다. 첫째는근대유럽의내셔널리즘을 민족적힘 의추구로만볼수있는가하는질문이다. 토론자가보기에근대유럽의내셔널리즘은그초기에자유주의와결합하여절대주의구체제로부터의 해방적 측면을지녔던반면, 그후기에들어서는제국주의, 파시즘과등과결합하면서 국가주의적 측면이있었다고생각한다. 다시말해, 근대유럽의민족주의는 해방적 측면과 국가주의적 측면을같이지니고있다고생각한다. 둘째는근대유럽의내셔널리즘을 민족의힘 의측면, 즉 국가주의적 측면과연결시키다보니내셔널리즘의개념이제국주의또는국가주의와혼동되는측면이있다. 그렇다면유럽근대의내셔널리즘을제국주의또는국가주의로해석할수있나? 이와관련하여조관자는일본제국의힘에의존하여민족의힘을기르고자했던 (?) 이광수를 친일내셔널리즘 로분석하고있는데, 이경우이광수는정확히말해일본제국주의에편승하고자했던국가주의자라할수있지않나? 2. 필자는한민족의민족주의와한국인의민족주의를다루면서, 한민족이 1천년이상자기정체성을가진사실상의민족주의를유지해왔으며, 그핵심은화이부동 ( 和而不同 ) 이라주장하고있다. 그러나일제침략에의해완전독립아니면식민지라는양자택일의상황에서한국인의민족주의는근대내셔널리즘의성격으로바뀌지않을수없었다고주장하고있다. 이에대해토론자는한민족의민족주의에는동의하는편이다. 유럽과는달리오랫동안소중화 ( 小中華 ) 적국제질서하에서하나의정치체제단위를이루어왔던한민족에게는 원형적민족주의 같은것이존재해왔다고생각하기때문이다. 그러나일제하한국인의저항적민족주의의성격이유럽근대내셔널리즘인요소를지닌것인지는의문이다. 오히려그것은과거의화이부동적성격에서반일적저항민족주의로 77

바뀌었던것이아닌가하며, 여기에서그저항민족주의는유럽의제국주의적이고국가주의적인것이아닌, 또다른형태의민족해방적민족주의가아닌가한다. 한편이같은저항적민족주의의포괄범위와관련하여온건한민족주의도포함할수있다고생각한다. 그러나장지연에대해서는어떻게평가해야하나? 이에대해필자는그누구도길을찾기힘들었던 1914-1918 년의암담한시기 (?) 의상황논리를들어장지연의친일행위에대해보다신중한판단을할것을제안하고있다. 그러나당시길을찾기어려웠다는상황논리가장지연의친일행위를다시재고해보아야하는근거가될수있는지는의문이다. 3. 근래에들어탈민족주의경향이상당정도제기되고있는데, 그것은다음과같은이유들때문이라생각한다. 1자유주의, 신자유주의의확산에따른개인주의화 2국제화, 세계화의현실 3포스트모더니즘의해체주의경향 4신사회운동과미시정치학의대두그러나그럼에도불구하고한국에서탈민족주의의주장들은민족주의의폐해를과장하고있다고생각한다. 토론자가보기에는한국근현대의역사에서민족주의는유럽의내셔날리즘과는달리상당정도 해방적 역할을수행했다고할수있다. 물론민족주의가갖는부정적집단주의적요소가없는것은아니다. 그렇지만탈민족주의를위해근현대역사과정에서우리민족주의가수행했던 해방적 역할을과소평가해서는안된다고생각한다. 1일제당시저항적민족주의 2해방후분단반대민족주의 3한일회담반대투쟁시의반일민족주의 4광주이후반미민족주의 5남북평화통일지향의민족주의 4. 21세기민족주의전망과관련하여필자는전통의무게와민족분단상황을들어여전히민족주의의유효성을주장하고있다. 물론한국민족주의가갖는문제점을개선한다는전제하에서그렇다. 토론자역시이에동의한다. 단지여기에다음과같은내용을보완하고싶다. 1 민족주의와민중적인것과의결합. 이를테면신자유주의적세계화의상황에서민중의삶을보호할수있는민중주의적민족주의의역할 2 민족주의와민주주의와의결합. 이를테면외세와결합한독재또는특권층지배에저항하는민주주의적민족주의 3 남북평화와통일을지향하는민족주의 4 지구적차원의민중주의와민주주의와양립할수있는개방된민족주의등이다. 7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발표문 친일 문제와일본사회 후지나가다케시藤永壯 오사카산업대교수 들어가며 친일인명사전 발간 2주년을기념해개최되는심포지엄에서내게주어진과제는 친일 청산문제를둘러싼일본사회의인식과반응에대해검토, 분석하는것이다. 그런데유감스럽게도검토할만한자료가그리많지않다는점을먼저지적하지않을수없다. 친일 문제는일본사회에서심도있게논의되기어려운주제중의하나다. 원래대부분의일본인은한국에대한일본의침략과식민지지배의역사에대해, 자세히알지못할뿐더러관심이높다고도할수없다. 특히 친일 이라는말은물론, 원래 일본에호의를가진다 는의미이며, 일본에서도보통그러한의미로사용되고있다. 따라서한국에서이말이가지는독특한뉘앙스, 그리고그뉘앙스가만들어진역사적인맥락을모르는많은일본인들은 친일 청산의참된의미를이해하기어렵다. 그리고이러한일본인의무지와무관심은후술하듯이 친일 청산에대한왜곡된이해마저낳고있다. 한편, 일본의한국침략정책에비판적인일본인에게도 친일 문제를논의하는것은망설여지는주제다. 친일파 의매국행위, 부일 ( 附日 ) 행위는일본이강요한것이기에, 가해자측에있는일본인이피해자인한국인의 친일 행위를따질입장이아닌것이다. 상식적인윤리관을가진일본인이라면통상이같이생각할것이다. 일본의한국사연구분야에서도 친일 문제를정면에서다룬연구는그리많다고는할수없는상황이다. 이렇듯애초부터검토할자료가적다는점이야말로 친일 문제에대한일본사회의최대의문제점이라고하겠다. 그러나노무현정권에의해진행된 친일 청산에대해서는일본에도그때마다보도되어적어도한국에서 친일 을둘러싼 문제 가존재한다는것을일본인들도어느정도인식하게되지않았나한다. 그러한의미에서여기서 친일 청산문제에대한일본사회의반응을정리해소개하는것도의미있는일이라고생각한다. 79

본발표에서는먼저노무현정권기이전의일본에서의 친일파 의연구동향을간략하게정리하고, 주로 노무현정권기에진행된 친일 청산에대해일본매스컴과연구자들이어떠한반응을보였는지에대해소 개하고자한다. 아울러한국 합방 100 주년을맞이한작년의동향도보충해서살펴보겠다. 1. 노무현정권기이전의일본에서의 친일파 연구 일본의한국사연구분야에서지금까지 친일파 에대한학술적인검토와분석이전혀이루어지지않았던것은아니다. 가령, 1970 년대초부터일본에체재했던강동진은 1979 년에간행한저서에서 1920 년대일본이 문화정치 라는이름아래실시한민족분열정책으로인해민족주의우파일부가민족운동에서이탈해식민지권력에협력해가는과정을그려냈다. 1 또한 1980 년대에미야타세츠코 ( 宮田節子 ) 는그의저서에서전시체제하에서일본이제창한 내선일체 ( 內鮮一體 ) 라는허구적인동화론에 친일파 지식인이호응한이유에대해, 민족차별로괴로워하고있던그들이 일본인이상의일본인 이됨으로써 차별에서탈출하는것 을지향했기때문이라고주장했다. 2 그밖에한국 합방 전의대표적인 친일 단체인일진회나그지도자인이용구에대해서도 1970 년대경부터연구성과가축적되어왔다. 한국에서 친일파 연구의개척자인임종국의저서도 1976 년에 친일문학론 이일본어로번역출판되었고, 실록친일파 는 1992 년에일본어로번역출판되었다. 3 그리고 1980 년대후반에이르면해방직후의 친일파 문제를다룬연구도나왔다. 가령, 해방직후의 친일 작가의작품세계를검증한사에구사도시카츠 ( 三枝壽勝 ) 의연구 4 나 친일파 문제를둘러싼해방직후의정치상황을그린이경민의연구 5 등이있다. 다만이러한연구성과에기초한 친일파 에대한인식이한국사연구이외의분야나논단, 매스컴등에폭넓게공유되었다고는하기어렵다. 오히려최근에일본의학계에서주목을받은것은, 일제강점기조선민중의행동을단순하게 친일 과 저항 으로이분하는것이아니라, 끊임없이동요하면서협력하고저항 한 회색지대 의설정을제기한윤해동의논의다 ( 논문 식민지인식의회색지대 가 2002 년에일본어로번역되었다 ). 6 일본에서는한국인의역사인식이란민족주의에뿌리를둔경직된것이라는고정관념이유통되고있었기에, 윤해동의논의는 친일 이냐 저항 이냐는이분법적인민족주의사관을극복하는견해로서 1 姜東鎭 (1979), 日本の朝鮮支配政策史硏究 : 1920 年代を中心として, 東京大學出版會 ( 한국어판, 日帝의韓國侵略政策史 : 1920 년대를中心으로, 한길사, 1980). 2 宮田節子 (1985), 朝鮮民衆と 皇民化 政策, 未來社 ( 한국어판, 李熒娘옮김, 朝鮮民衆과 皇民化 政策, 一潮閣, 1997). 3 林鍾國지음, 大村益夫옮김 (1976), 親日文學論, 高麗書林 ( 한국어판, 平和出版社, 1966); 林鍾國지음, 反民族問題硏究所엮음, コリア硏究所옮김 (1992), 親日派 : 李朝末から今日に至る賣國賣族者たちの正體, 御茶の水書房 ( 한국어판, 실록친일파, 돌베개, 1991). 4 三枝壽勝 (1986), 八 一五以後における親日派問題 : 解放後の朝鮮文學, 朝鮮學報 118. 5 李景珉 (1989), 解放朝鮮の政局と親日派問題, 思想 786; 李景珉 (1996), 朝鮮現代史の岐路 : 八 一五から何處へ, 平凡社. 6 尹海東지음, 藤井たけし옮김 (2002), 植民地認識の グレーゾーン : 日帝下の 公共性 と規律權力, 現代思想 30-6 ( 한국어판, 식민지인시의회색지대 : 일제하공공성과규율권력, 당대비평 13, 2000). 8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일본인지식인들에게는신선하게비쳤을것이다. 그배경으로일본의소위진보적지식인사이에과거의침략전쟁에대한반성과, 포스트모던의국민국가비판에대한친근감에서민족주의일반에대해강한경계심을가지고있던것을지적할수있다. 또일본에서는 1990 년대중반부터 새로운역사교과서를만드는모임 등으로대표되는역사수정주의의주장이널리알려지게되었다. 거기서는일본의한국침략을정당화하는근거로서일진회가한일 합방 을주창했던점을부각시키는등 친일파 의존재를강조하는구태의연한담론이되살아나기시작했다. 2002 년에는일진회를 조선유신 을지향한혁명단체로평가하고일본의식민지통치를긍정적으로평가한김완섭의 친일파를위한변명 이번역, 출판되어일부매스컴에서화제가된적이있다. 7 일본사회가전체적으로는 친일파 문제에대해무관심하거나혹은소극적으로태도를 보류 하는가운데, 일부지식인들은한국에서의 친일파 비판을민족주의와묶어해석했고, 우파세력은 친일파 의존재를일본의과거를미화하기위한수단으로정치적으로이용하려했다. 노무현정권이 친일 청산에임하기시작했을당시의일본사회의 친일파 에대한인식은대개이러한것이었다고하겠다. 2. 친일 청산에대한일본사회의반응 1) 일본매스컴의반응 친일 문제에대한관심이일본에서높아지게된계기는노무현정권에서 친일 행위의진상규명을추진하게되면서부터이다. 2004 년 3월의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성립에자극된일본의매스컴은당황하면서도같은해 12월개정법의성립 ( 친일 을삭제해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이란명칭으로성립 ), 2005 년 5월진상규명위원회의활동개시, 그리고같은해 12월 친일반민족행위자재산의국가귀속에관한특별법 의성립등의일련의움직임을보도했다. 일본의주요신문의논조는정도의차이는있지만, 우선 친일 청산의의미를노무현정권의민족주의적입장에서찾는다는점에서일치했다. 이는당시일본의고이즈미준이치로 ( 小泉純一郞 ) 수상이야스쿠니신사를거듭해서참배하고, 시마네현 ( 島根縣 ) 에서 타케시마 ( 독도 ) 의날 을제정한일 (2005 년 3월 ) 로인해한국에서 반일 감정이높아져있던점 ( 일본에서는이같이인식되었다 ), 그리고노무현정권이일관되게북한과의관계개선에노력을기울여왔다는점과궤를같이한다고해석되었기때문이다. 또한 2004 년 12월의진상규명법개정으로박정희전대통령이조사대상에포함된일로장녀인박근혜가당시대표 7 金完燮지음, 荒木和博 荒木信子옮김 (2002), 親日派のための弁明, 草思社. 81

를맡고있던야당한나라당에타격을주려는의도라는견해가반복해서보도되었다. 이렇게해서일본의전국지에는노무현정권이 친일 청산에집착하고있다고보고, 그좌파민족주의입장에선완고한태도가정치세력간의권력투쟁을심화시키고있다는비판적인논조가주류를이루게되었다. 노무현정권에대한공격을가장노골적으로전개한것은우파전국지인산케이 ( 産經 ) 신문이다. 이신문은주지하듯이이전에는 새로운역사교과서를만드는모임 에대해, 그리고현재는거기서떨어져나온 일본교육재생기구 의선전미디어역할을담당해온신문으로, 일본의한국통치를미화하기위해해방후에한국의경제성장과근대화의요인을식민지지배의유산의계승에서찾는주장을반복해왔다. 산케이신문에서는 친일 청산을추진하는세력은 친북 이며, 그목적은보수세력에대한정치적타격이라며, 집요하게반복적으로공격을펼쳤다. 다음은그사례들이다. 한국현대사는당시정권이일본통치시대의유산을계승해국력발전을도모해왔다. 그로인해좌파나민족파로부터 친일파의역사적청산을게을리해왔다 는비판을받아왔으며, 그 반성 이반일감정을증폭시켰다. ( 중략 ) 친일파 는박정희정권등을지지한보수층이며재벌등의기득권층이포함되어있기때문에진보개혁진영은특히 반일법 에열심이다. 북한은 친일파를청산했다 고하며, 반일법 지지층에는친북경향이강하다. 8 문제의출발점인 일한병합 ( 倂合 ) 은역사적으로한국의입장에서는하나의 선택 이었다고해도좋다. 그결과, 병합하에서나중에비난을받는이른바 친일행위 를한사람이있더라도그책임은병합을선택한지도자들에게있다고해야할것이다. ( 중략 ) 그런데도병합조약을조인한당시의지도자뿐아니라, 비난규탄의대상을확대하려는것은무슨이유에서인가. ( 중략 ) 노무현정권하의한국의정치, 사회상은 친일 = 보수 우파 = 가진자 = 반북 = 반민족 이라는도식으로첨예한좌우대립상황에놓여있다. 그래서 친일파 비난은좌파, 혁신계, 친북세력의보수 우파세력에대한공격이된다. 한국에서는이렇듯역사는언제나현실정치에이용된다. 9 원래의법률명칭인 일제강점하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을 반일법 이라고약칭한것은그야말로억지로사실을왜곡한것이라고해도좋을것이다. 또한 일한병합 은분명히일본이강제한결과인데, 그것을 한국의입장에서하나의 선택 이었다고생각하는한국인은, 산케이신문이옹호하려는 보수 우파세력 중에도전무에가깝지않을까. 한국에서는이렇듯역사는언제나현실정치에이용된다 는대목은구체적으로무엇을가리키는지분명하지않지만, 만약역사교과서문제를둘러싸고전개 8 韓國 反日法 の範圍擴大與黨議員ら改正案提出故朴元大統領も對象, 産經新聞 2004 년 7 월 15 일조간. 9 親日派への考え方, 敎えます, 産經新聞 2005 년 9 월 14 일조간. 8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된일본에대한비판을포함하고있다면, 그책임의한부분은산케이신문에있음을상기할필요가있다. 산케이신문이전개하는편견과왜곡으로가득찬논의는물론용인할수없다. 그러나더심각한것은이렇게까지노골적이지는않더라도 친일 청산문제에관해서다른전국지의논조도기본적으로같다는점이다. 다음의인용문은발행부수가일본최다로보수계를대표하는요미우리 ( 讀賣 ) 신문의논설이다. 왜노무현정권은과거역사의추급에열을올리는가. 하나는인기침체에허덕이는노무현정권의정권부양을건도박이다. 과거의 친일 과독립후의 독재 를재판함으로써정권이내건 개혁 을호소해야당인한나라당의 보수 체질을밝히려는정치전술이다. ( 중략 ) 더구체적인정치적요인은야당한나라당을이끄는박근혜대표를무너뜨리는데에있다고한다. ( 중략 ) 역사는당당하게흐르는것이므로평가는언젠가는정해진다고보는일본인의상식적인역사관은한국에서는통용되지않는다. 거기에는역사를정치가재판해평가하는, 역대위정자들의끊임없는의사가있다. 10 요미우리신문도노무현정권에의한과거청산은결국반대세력에대한 정치전술 에지나지않는다는등의냉담한견해로일관했다. 또한나는일본인역사연구자중의한사람이지만, 역사는당당하게흐르는것이므로평가는언젠가는정해진다 라는인식이 일본인의상식적인역사관 이라는견해는처음들었다. 그리고이같은해석에대해한국에서는 역사를정치가재판해평가하는, 역대위정자들의끊임없는의사가있다 고하며, 의미도확실하지않고근거도불분명한단정을대비시키고있는것이다. 비교적진보적이라는아사히 ( 朝日 ) 신문의논조도노무현정권에대한편견으로가득찬입장이라는점에서는다른신문들과별로차이가없다. 새로운나라를발전시키려면한때의 일제협력자 의수완이나경험에도의지하지않을수없는것이현실이었다. ( 중략 ) 그런데왜지금새삼스럽게 규명 인가. ( 중략 ) 그것은노무현정권이목표로하는나라만들기와밀접히관련된다. 기존질서나권위를부수려고한다. 민족주의를존중해새로운한국의정체성을수립하고자한다. 그러니까 지금부터라도반성해야할것은반성해야한다 고노대통령은말한다. ( 중략 ) 걱정스러운것은이러한움직임이한국민사이에분열이나갈등을불러일으켜사회를불필요하게긴장시키지않을까하는점이다. 정쟁을쓸모없이부추기는도구로서쓰지않을까하는위구심도든다. 11 걸리는점은모두한국의독자적인논리가선행하고있다는점이다. 결과적으로 북한적인것 에훨 10 韓國 親日 糾明盧大統領, 人氣浮揚への賭け, 讀賣新聞 2004 년 9 월 24 일조간. 11 心の淸算 への懸念親日糾明, 朝日新聞 2004 년 9 월 12 일조간. 83

씬접근하고이질적인것은밖으로내쫓아타국의시점을배려할여유가없어졌다. 12 새로운나라를발전시키려면한때의 일제협력자 의수완이나경험에도의지하지않을수없는것이현실이었다 는주장은한국의보수파 우파가 친일파 를옹호하는첫번째근거인데, 아사히신문은이입장을무비판적으로받아들이고있다. 과거청산을진행시킴으로써 북한적인것 에훨씬접근하고이질적인것은밖으로내쫓아타국의시점을배려할여유가없어졌다 는것도, 요점은노무현정권이경직된민족주의적입장에집착하고있으며, 그것이 한국민들사이에분열이나갈등을불러일으키고 있다고비판하려는것이다. 그러나머리말에서언급했듯이, 식민지지배아래한국인에게 친일 행위를강요하고 친일파 를육성한것은바로일본의통치권력이다. 이점은일본인으로서 친일파 문제를생각할때무엇보다가장먼저염두에두지않으면안되는사실이다. 따라서 친일파 문제를둘러싸고만일 한국민사이에분열이나갈등 이생긴다면, 그 분열이나갈등 의원인을만들어낸것은일본의식민지통치라는것이된다. 그런데일본의주요신문은이러한역사적시점을완전히결여한채, 극히피상적이고독선적인한국정치의관찰에근거해한국에서의과거청산의의의를깎아내렸던것이다. 이같이노무현정권의 친일 청산의움직임을전하는일본의주요신문의보도자세는대부분이민족주의 = 반일 = 친북 으로묶어서비판하거나, 정치세력간의권력투쟁의틀속에서해석하는피상적이고냉담한것이었다. 이것은 조중동 이라불리는노무현정권과대립하고있던한국의보수계일간지의논조와도일치한다. 친일파 와그계보를계승한정치세력이일제강점기의민족반역행위나부일행위는물론, 해방후에도권위주의정권의핵심에있었으며, 민중에대한폭력과인권유린의주체였다는과거청산사업의역사인식은아주뒤로밀려난감이있다. 또종합잡지등에서도 친일 청산문제에대해심도있게검토분석하려는움직임은전반적으로저조했다. 눈에띄었던것은 제군 ( 諸君 ), 정론 ( 正論 ) 과같은우파종합잡지에의한 친일 청산작업에대한공격이었다. 재일한국인연구자나언론인들이 친일 청산의의의를전하고이를지지하는논설도발표했지만, 유감스럽게도일본사회에미친영향력은극히한정적이었다고생각된다. 2) 연구자들의반응 한편, 수적으로는결코많지않지만일본에거주하는연구자들이한국에서의 친일 청산의의미를학 문적으로 한국현대사의흐름속에서, 혹은지금까지의 친일파 연구의상황을토대로검토하려는움 12 過去との格鬪, 行き先はどこ, 朝日新聞 2004 년 9 월 19 일조간. 8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직임도나타났다. 가령, 이타가키류타 ( 板垣龍太 ) 는 식민지지배책임 이라는새로운개념의정립을주장하면서 친일파 문제를검토한바있다. 13 식민지지배책임 이란말은이타가키가만든것인데, 이는 전쟁책임이라는말로는반드시환원될수없는, 식민지지배라는거대한구조속에서발생한, 폭력에의한 피해 에대한책임을의미한다. 14 이타가키는노무현정권하의 친일 청산작업을적극적으로평가하면서, 일본의매스컴등이이러한한국의움직임에냉담했던점을우선비판한다. 친일파 중에도 대일협력자 중에도 일본인 이포함되지않았던 점이 일본인 이자신과는상관없다는듯한얼굴을할수있는착각을불러왔다 는것이다. 그렇지만일본인은식민지지배에대한책임의주체라는관점에서 다시금 친일파 를둘러싼역사적인과정을해명해나가는작업이필요하다 는것이, 이타가키의문제제기다. 15 이타가키는남조선과도입법의원의 민족반역자부일협력자간상배에대한특별조례 나대한민국수립후의 반민족행위처벌법 등에서나타난 친일파 의정의가 반드시민족의 내부 에한정할수만은없는규정임 을지적하고, 거기서 식민지지배책임을정립해나가는데필요한하나의방향성 을찾아내고자했다. 16 즉 친일파 를정의할때나타나는다양한 친일 행위중에는그대로 일본인 이 식민지지배책임 으로서받아들여야하는내용도포함되어있다는것이다. 일본인이 친일 문제를논의할때의어려움은앞서말한대로지만, 이타가키의주장은 식민지지배책임 이라는개념을매개시킴으로써, 한국의과거청산의움직임에대해일본국가와사회측이응답할방도를제시하고자한것이라고하겠다. 이타가키와마찬가지로 친일 청산의의미를오늘날일본의상황에까지확대해고찰하려는문제의식에입각한주장으로는, 조경희의논문이시사하는바가크다. 17 조경희는한국의논단이나학계에서전개되는민족주의비판이나이에근거하는 친일 청산에대한비판의움직임을염두에두면서, 민족주의가식민지주의와함께생성해왔다는최근의연구성과를언급하며다음과같이말한다. 일본의식민지지배아래서학살과고문, 인권유린과인종차별, 그리고성폭력도포함된 인류에대한죄 가, 조선 조선인 이라는민족의이름아래서자행되었다. 반대로말하면, 식민지주의란이러한특수성에 의거한중층적인폭력을보편화, 정당화하는체제이기때문에, 보편성의언어로말하는한그폭력의기원 13 板垣龍太 (2005), 植民地支配責任を定立するために, 岩崎稔ほか編著, 繼續する植民地主義 : ジェンダー / 民族 / 人種 / 階級, 靑弓社. 그런데최근일본의역사학계에서는아프리카사연구자의나가하라요코 ( 永原陽子 ) 등에의해 식민지책임 이라는개념이제창되고있다 ( 永原陽子엮음, 植民地責任 論 : 脫植民地化の比較史, 靑木書店, 2009). 이타가키가말하는 식민지지배책임 과의차이에대해나가하라는 식민지지배책임 론의문제의식을공유하지만 주로구미의노예무역, 노예제와식민지지배의역사를다루는데에는보다넓은사정 ( 射程 ) 을가진개념이필요 하다고생각해 식민지책임 이라는말을쓰겠다고설명한다 ( 永原, 앞책, p.28). 14 위의논문, p.296. 15 위의논문, pp.299-300. 16 위의논문, p.307. 17 趙慶喜 (2007), 歷史の過少 の克服にむけて : 韓國 親日淸算論 の批判的檢討, Quadrante 9( 이하, 논문 1); 趙慶喜 (2007), 脫植民地主義の契機としての親日淸算 : 韓國 過去事 論爭から日本を考える, 季刊前夜 11( 이하, 논문 2). 85

을물을길이없다. 18 이렇듯민족이라는개념이야말로식민지주의비판의근거로서유효하다고파악하는조경희의견해는, 이타가키의 식민지지배책임 론이지향하는바와궤를같이한다고하겠다. 그리고조경희는 한국사회에서지배이데올로기가된민족주의는 반공세력만이 민족 의구성원으로인정되는 반공민족주의 이며, 민족주의의내실이독재와분단인지, 혹은민주화와통일인지하는결정적차이를구분하지않고단지민족주의의이데올로기성만을지적하는것은한국사회에대한내재적인비판이될수없다 고주장한다. 19 이러한한국민족주의의특수성을강조하는듯한논의는그야말로민족주의적이라는비판을받을것같은데, 조경희의의도는 친일 청산의의의를 민족사적인일탈의관점에서본래있어야할 민족정기 를지향한다기보다, 식민지주의에의해규정된민족의해방, 민족으로부터의해방을목표로하는것, 즉 탈식민지주의의계기 에있다고봐야할것이다. 20 친일 청산에의해나타나야할탈식민지화로의길이민족주의비판에근거한 친일 청산비판으로인해막혀버리는것, 그것이조경희에게는문제인것이다. 이타가키나조경희는 친일 청산문제를직접적인관심의대상으로삼아, 청산의의미를식민지체제, 식민지주의극복이라는점에서찾아내려고했다. 이는두사람이일본에서태어나계속일본사회에서생활하고있는것과관련된것인지도모르겠다. 이렇게말하는것은다음에소개하는, 한국에서태어나일본에서활동하는 ( 혹은활동했던 ) 두명의연구자의관심은오히려 친일 그자체를향하고있으며, 나아가 친일 연구의배경에있는한국민족주의에내재된문제점을밝혀내려는경향이강하게보이기때문이다. 조관자는노무현정권기의과거청산을둘러싼논쟁과정치동향을소개하면서, 저항의민족주의 를확산시키려는좌파도 성장의민족주의 를주창하는우파도다들민족주의나국익을무기로대중의지지를획득하려고하 는데, 이미민족주의가민주적, 보편적가치를옹호하는궁극적인힘이되지못한다는것이입증되었다 고보고있다. 물론 대중의민족감정은아직도열풍을일으키는원천이되 지만, 탈민족주의의통로도널리열려있다 며한국의탈민족주의적상황을강조했다. 21 한국의탈민족주의적상황에대해조금낙관적으로보이는이러한전망은민족주의에비판적인조관자의입장을반영한것일까. 조관자는 식민지권력에협력해민족의생존과이익을도모하려했던민족운동의존재 를인정하고, 이를 일본내셔널리즘의폭력적인전개에의해전도된식민지내셔널리즘의한형태 였다며, 친일내셔널리즘 이라고명명했다. 22 이논쟁을불러일으킬만한말에는 민족사 가부정되는 18 조경희, 앞논문1, p.433 19 위의논문, p.434. 20 조경희, 앞논문2, p.113. 21 趙寛子 (2006), 韓國の 過去淸算 と 過去史論爭, アリーナ 3, p.68. 22 趙寛子 (2007), 親日ナショナリズム の形成 破綻 反復, 植民地朝鮮 / 帝國日本の文化連環 : ナショナリズムと反復する植民地主義, 有 8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공간에서는친일협력도반일저항도똑같이자기의의지를표명하는언어를억누르고생존이최우선의목적 이었다는전제아래, 자타의민족을넘어사람들의생존을유린한권력그자체를문제시해야한다 는문제의식이담겨져있다. 23 조경희가 민주화와통일 을목표로하는한국민족주의의입장에서식민지주의를비판한것에대해, 조관자는탈민족주의의입장에서식민지주의비판을지향한것이다. 이러한조관자의입장에서는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의발간사업에대해서도회의적인것같다. 조관자는이사업을 민족정기을회복해사회정의를실현하기위한민족민주운동 이라고파악하고, 민족정기 가최고의도덕이되어사람들의삶을평가하는궁극적기준이되는상황이진정으로 정기 의실현이라고할수있느냐 는의문을던진다. 24 조경희와조관자의 친일 청산에대한견해는대조적이지만, 민족정기 에근거하는 친일파 단죄에대해서는둘다부정적이다. 또조관자가비판하려는것은 민족주의의이데올로기성 일반이아니라, 바야흐로 민주화와통일 을목표로하는오늘의한국민족주의안에잠복해있는내재적문제점일것이다. 다만조관자의 친일 청산의근거를 민족정기 에환원하는듯한논리전개에는의문을가지지않을수없다. 일본인인나는, 실은 민족정기 라는개념이의미하는바를정확히이해할수없다. 그러나조관자자신도언급했듯이, 탈민족주의적인상황이진행되는한국에서경직된민족자존의식만으로 친일 청산이추진되고있다고는믿기어렵다. 25 홍종욱이종래 친일 연구를비판하는관점도조관자의견해와일맥상통하는면이있다. 홍종욱은임종국이나민족문제연구소의일련의연구에대해 식민지기의다양한민족차별이나전쟁협력의실태를밝혀냈다 고평가하면서도, 전시기에지식인의실천이안고있던정치성혹은사상성을부인해, 복잡한측면을가지는 친일 을단지민족적정체성을끝까지지킬수없었던행위라고보는문제점을드러냈다 고비판했다. 나아가 친일 연구의 보다근본적문제 는 민족을주어진것으로파악하는점 이라고지적한다. 그때문에 친일 연구는 민족적주체를강조하지만, 그주체는이미주어져있다는점에서역설적이게도완전히몰주체적이며, 자칫하면 민족 혹은 국가 의이름으로대중을동원하는표어로변질될우려가있다 ( 방점은원문 ) 고비판했다. 26 다만, 홍종욱은실제진행된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등의활동에대해서는 과거의문제를끊임없이현실의문제로환기시키려는노력은높게평가해야한다 는입장을취하고있다. 또연구면의문제 志舍, pp.71-72. 이논문의초고는한국어로번역되었다.( 민족의힘 을욕망한 친일내셔널리스트 이광수, 기억과역사의투쟁 ( 당대비평특별호 ), 선인, 2002). 23 위의논문, pp.72-73. 24 위의논문, pp.70-71. 25 물론, 개정된 일제강점하반민족행위진상규명에관한특별법 제 1 조는 민족의정통성을확인, 진실 화해를위한과거사정리기본법 (2005. 5.31 제정, 2005.12.1 시행 ) 제 1 조는 민족의정통성을확립 등이법률의목적으로들어있어 민족정기 와상통하는관념이이들과거청산관련법률안에보함되어있는것은부정할수없다. 단법률의조문은각정치세력간의타협의산물이라는측면이있으며, 민족의정통성 이란말로과거청산의모든의미를설명할수는없을것이다. 26 洪宗郁 (2011), 戰時期朝鮮の轉向者たち : 帝國 / 植民地の統合と龜裂, 有志舍, pp.8-9. 87

점을지적한민족문제연구소의실천활동에대해서는 역사문제와관련된시민운동의거점으로서지속적으로활약했다 며호의적으로평가하고있으며, 친일인명사전 에대해서도 민주화로열린지평위에서다양한시민운동과연대해겨우세상에나올수있었다 며간행의의의를인정하고있다. 27 그러나한편으로홍종욱은 저항이냐협력이냐는잣대를가지고과거를재단해현실을도식화하기보다, 반대로우리가자유롭지않다고느끼는현실의복잡함을과거에도공평하게적용해, 거기서부터내재적비판의가능성을열어가는, 그러한과거와현재와의소통이요구되는것이아닐까 라고도말하고있다. 28 조금이해하기어려운표현이지만, 현재와같이과거에도 자유롭지않은 상황이존재했었다는역사적상상력을가지고 친일 을평가해야한다는것이리라. 그리고거기서홍종욱이중시하는것은역시 친일 에대한 내재적비판 이었다. 여기서소개한 4명은모두 30대후반에서 40대에걸친중견연구자이며, 각견해에는첨예한대립점이포함되어있기는하지만, 각자나름대로의문제의식에근거한날카로운지적은앞으로이분야의연구를진전시키는데에귀중한제언이될것이다. 한국에서 친일 청산이새로운단계에접어든지금, 이러한 친일 청산을둘러싼논의위에서일본의연구자들도구체적인 친일 행위나지식인의 친일 논리를규명하는작업에임할필요가있겠다. 3. 한일 합방 100 주년을맞이해 한편, 특별법제정후에도한국정부의 친일 청산사업에대한경과는일본에그때마다보도되었는데, 노무현대통령이퇴임한뒤에는대개사실을간단하게소개하는내용에그쳤다. 2009 년 11 월의 친일인명사전 의간행과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조사보고서간행은 친일 청산문제의큰고비였음에도일본에는그내용이상세하게전해졌다고는할수없다. 일본에전해진정보량자체가적었기때문인지는모르겠으나 친일 청산에대한비판도거의찾아볼수없게되었다. 일본매스컴의 친일 청산비판은노무현정권에대한비판의일환으로서전개된듯하다. 그런데한국 합방 100 주년을맞이한 2010 년에는일본의매스컴들도 친일 문제에무관심한채로있을수만은없었던것같다. 매스컴에서 친일파 를주제로특집을편성하는움직임이몇개나타났다. 가령, 아사히신문은 백년의내일, 일본과코리아 라는시리즈기획에서 친일파 라는제목의특집기사를 2010 년 4 월 28일부터 30일까지 3회에걸쳐실었다. 29 거기서다루어진주제는극히다양하다. 조선인특공대원추 27 위의논문, p.9. 28 洪宗郁 (2011), 親日人名事典 の編纂過程とその爭点, 朝鮮史硏究會會報 182, pp.3-4. 29 홍종욱, 앞책, p.9. 8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도비의철거, 한국인전일본군병사의회상, 홍난파에대한평가, 친일파 소유지의몰수, 징병과징용자의피해인정과보상, 임종국과민족문제연구소의활동, 친일파 를둘러싼정치갈등, 친북인명사전 의편찬같은보수파의반격움직임등이다. 그논조는좋게말하면객관적으로균형있게다양한견해를소개하려했다고할수있지만, 나쁘게말하면시점이불명확하고단지사실을나열했을뿐으로심도있게파고들지못했다는불만이있다. 기사내용에서배울점이있기도하지만, 마지막에 이전의 제국주의 일본에대한거리와현대의 주적 인북한과의틈. 한국사회에있는갈등은앞으로도계속된다 고맺고있어, 30 친일 이냐 친북 이냐가한국사회의갈등요소인듯한맺음말에는위화감이들었다. 또 NHK 에서는한일 합방 100 주년에맞춰제작한다큐멘터리프로그램 시리즈일본과조선반도 의제 2회분에서이광수와최남선등 친일파 지식인의궤적을더듬는특집방송을내보냈다. 31 여기에는 3 1 운동의전개에중요한역할을한이광수와최남선등이실력양성론을주창하고, 3 1 운동후 친일파 를육성할목적으로조선총독부가그들을포섭하려고접근해가는모습이그려져있다. 일본의 TV프로그램에서 친일파 를정면에서다룬사례는아마처음이어서그점은평가할수있겠지만, 이광수나최남선이왜 친일 의길을걷게되었는지에대해서는자세한설명도없이끝나버렸다. 단지한국에서의 친일 청산의대처에대해서는일본의주요매스컴가운데가장호의적인입장에서평가하는듯했다. 한편, 아사히신문이특집기사로다룬조선인특공대원에대한위령문제에대해서는최근에일본에서그의미를검토하는논문이발표되었다. 32 특히야마구치다카시 ( 山口隆 ) 는최근출판한한국인특공대원을주제로한저서에서사망한특공대원은 2~4 계급특진을받아장교가되었고, 또학도병출신의특공대원도명목상은장교였기때문에, 진상규명법이정하는 반민족행위자 의형식적기준에해당한다는점에의문을표했다. 그들은형식적으로는 지원 이었지만실제로는강제로특공대원에떠밀려들어가죽음을당한경우가대부분이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한국사회에는특공대원을 반민족행위자 로보는견해가뿌리깊게남아있으며, 진상규명법이그근거를제공했다고해석될가능성이있는것에대해문제를제기한것이다. 33 나오며 친일인명사전 의간행과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의활동등으로 친일 행위의실태는많이밝 30 百年の明日ニッポンとコリア 親日派 : 下まさか 父も協力者, 朝日新聞 2010 년 4 월 30 일조간. 31 NHK スペシャルシリーズ日本と朝鮮半島第 2 回三 一獨立運動と 親日派, 2010 년 5 월 16 일방송. 32 裵姈美 酒井裕美 野木香里 (2006), 朝鮮人特攻隊員に關する一考察, 森村敏己編 視覺表象と集合的記憶 : 歷史 現在 戰爭, 旬報社 ; 裵姈美 野木香里 (2007), 特攻隊員とされた朝鮮人, 季刊戰爭責任硏究 56. 33 山口隆 (2010), 他者の特攻 : 朝鮮人特攻兵の記憶 言說 實像, 社會評論社. 89

혀졌다. 그러나그행위가스스로의주체적인의지에의한것인지강제에의한것인지, 개개의사례를판단하는것은극히곤란하다. 도대체식민지통치하에서 주체적인의지 를가지고행동하는것이어디까지가능한일일까. 조경희가지적했듯이, 처음부터자발적인가강제적인가하는물음그자체가행위의책임을개인에게만귀착시키는발상에근거한것이며, 강제성에근거한식민지상황이라는대전제를처음부터배제하는것 이아닌가. 34 친일 행위의판정은 행위 의내용그자체를기준으로삼을수밖에없다. 그러나 친일 적인 행위 의책임을묻는경우에도그 행위 에이른경위나상황이분명하지않는한, 그인물의인간성까지즉각적으로전부부정하는듯한평가는생산적이라고할수는없다. 중요한것은개개인에게 친일파 의딱지를붙이는것이아니라, 친일파 를매개로해서폭력의기술과반공사상이이어졌고그로인한정치적, 사회적갈등의확대가분단의내적요인이되었다는, 그 과거사 의연쇄를포괄적으로다루는것, 35 또 친일파 를낳고해방후에도그들을지배층으로군림시킨식민지주의적 권위주의적정치체제와이데올로기를어떻게극복하느냐하는데에있기때문이다. 그리고그것은한국의과제임과동시에, 무엇보다도일본의과제이기도하다. 34 조경희, 앞논문 1, p.426. 35 조경희, 앞논문 2, p.113. 9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토론문 토론문 : 친일문제와일본사회 홍종욱 도시샤대교수 일본에서지내고있는한국인연구자로서더욱이식민지기조선인의 친일 이나 전향 문제를연구주제로삼고있는입장에서, 필자역시 친일인명사전 ( 이하 사전 ) 의준비과정과발간후의한국사회의동향에대해관심을갖지않을수없었다. 먼저필자는 2010 년 6월에朝鮮史硏究會關西例會에서 친일인명사전 의서평을하였고, 1 같은해 10 월에는현재몸담고있는同志社大學에서열린시민강좌에서 한국의 ' 친일파청산 ' 과 친일인명사전 이라는제목으로강연을행한바있다. 이하에서는이러한과정을통해서느낀점에이번후지나가선생님의발표문을읽으면서새로이깨닫게된점을더해, 필자의생각을두가지정도로정리함으로써토론문에대신하고자한다. 먼저, 우리가비판해야할것은 일본 인가 친일 인가라는문제이다. 재일조선인연구자趙慶喜는 2007 년의글에서 친일청산에반대하는측이일본의책임을추궁하고역으로추진하는측이국내에시점을집중하고자하는조금역설적인전개가보인다 고지적한바있다. 실제로 2009 년 12월동아일보의최정호칼럼은 겁탈당한피해자에게반항을했느냐안했느냐, 또는강도에게 10 만원을주었느냐 100 만원을주었느냐하는 진상규명 에만엄청난예산과시간을쏟고, 막상겁탈한강도와그죄상은추궁도않고남의일처럼불문에부치고있다 2 면서 사전 의발간을비판하였고, 이와같은비판에대해같은해 11 월이만열은경향신문칼럼을통해 민족적약점을스스로고백할수있었기때문에이사전은역설적으로이웃에한국사의정당한이해를요구하는힘이될수있다 3 는의견을제시하고있다. 그렇다면일본의한국연구자들은어떠한입장을취하고있는가. 근대사연구자인나미키마사히토 ( 並木真人 ) 는 1993 년의글에서 적어도우리일본인연구자가일본제국주의비판을제쳐놓고경솔하게 친 1 拙稿, 書評 : 親日人名事典 の編纂過程とその争点 ( 親日人名事典編纂委員会編, 親日人名事典, 民族問題研究所, 2009 년 11 월 ) ( 朝鮮史硏究会会報 182, 2011 년 ). 2 최정호, 과거사바로세우기 를바로세우기 ( 동아일보 2009 년 12 월 1 일 ). 3 이만열, 친일인명사전, 상생의계기로 ( 경향신문 2009 년 11 월 10 일 ). 91

일파 지탄등을행할수는없다 4 고밝힌바있다. 후지나가선생님역시이번발표문을통해 친일파 의매국행위, 부일 ( 附日 ) 행위는일본이강요한것이기에, 가해자측에있는일본인이피해자인한국인의 친일 행위를따질입장이아닌것 이라고밝히고있다. 그대신비판의방향은 ' 일본 ' 에맞춰지고있다. 이타가키류타 ( 板垣竜太 ) 는후지나가선생님발표문에서소개하고있듯이, 식민지지배책임 이라는개념을매개시킴으로써한국의과거청산의움직임에대해일본국가와사회측이응답할방도를제시하고자하였다. 또한위에서언급한조경희도 피해자는폭력의고리를끊을가능성을, 출발점을제공하는데지나지않으며결코최종적인해결이맡겨질주체가아니다. 식민지주의의기원과원인은어디까지나식민자측에있다 5 고주장하였다. 일본의연구자들이한국의 친일청산 움직임을일본사회비판으로專有하고자하는모습을위에서살핀최정호칼럼의주장과상통하는것으로이해한다면이는어불성설이다. 역으로일본인과달리한국인은피해자이므로 친일 도 일본 도마음놓고비판할수있다는생각또한개운치않다. 일본인혹은재일조선인연구자들의태도로부터필자는사회에대한비판적개입은모름지기현실의권력에대한비판이어야하며동시에엄격한자기비판이기도해야한다는점을배우고자한다. 친일청산 은행여나 민족정기 라는숭고한가치로부터주변을내려다보며손가락질하는태도를띠어서는안된다. 그것은우리안에침윤된식민지주의즉민족차별과전쟁협력의상흔을인정하고그로부터출발하는겸허함을동반해야하며, 무엇보다우리사회라는공동체의건전성유지, 넓게보아인권의확립이라는차원에서자리매김되어야한다. 그러할때비로소일본사회의 식민지지배책임 에대한반성과한국사회의 친일청산 움직임은한길에서만날수있을것이다. 요컨대끊임없이물어져야할것은 일본 도 친일 도아닌식민지주의즉민족차별과전쟁협력의역사및현재가아닐까생각한다. 다음은 친일청산 을민주화운동의흐름속에자리매김하는문제이다. 일본시민들을대상으로한강연에서가장많이나온질문은해방된지 60년이지났는데아직도 친일청산 이냐는것이었다. 즉해묵은주제를정치적으로이용하기위해다시꺼내든것아니냐는의심에찬눈빛이었다. 물론이같은비판은한국사회에도많다. 그러나조금만생각해보면금방알수있는것이지만, 친일청산 의움직임이지금과같이본격화된것은냉전이붕괴혹은변용되고국내적으로민주화가진전된이후의일이다. 1993 년 8월당시반민족문제연구소가주최한 친일파청산 관련심포지엄에서사회를맡은박찬승은 이러한성격의토론회는처음이아닌가생각합니다. ( 중략 ) 몇년전만해도군사독재정권하에서이런문제를거론하는것조차어려웠고남의눈치를보지않으면안되는분위기였습니다 6 라고말하고있다. 따지고보면 친일청산 뿐만아니라영토문제, 역사교과서문제, 그리고야스쿠니신사문제까지도실은동아시아 4 並木真人, 植民地朝鮮人の政治参加について 解放後史との関連において ( 朝鮮史研究会論文集 31, 1993 년 10 월 ), 34 쪽. 5 趙慶喜, 脱植民地主義の契機としての親日清算 韓国 過去事 論争から日本を考える ( 前夜 제 1 기제 11 호, 2007 년 ), 116 쪽. 6 8 15 기념학술토론회 : 한국현대사와친일파청산문제 ( 계간반민족문제연구 1993 년겨울호 ), 4 쪽. 9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에서냉전체제가흔들리고각지역에서 민주화 가움트면서본격화되었다. 즉 친일청산 을설명하기위해서는 아직도 가아니라 비로소 라는말이어울릴것이다. 이와같은역사성을놓쳐버리면, 일본의언론들처럼기껏해야한국사회를 反日 대 反北 의구도로설명하는데그칠수밖에없다. 그리고이는그러한역사성을누구보다잘알면서도애써 친일청산 을 친북 과연결지으려는한국의보수언론의태도와상통한다. 이를놓고후지나가선생님의발표문에서는 과거청산사업의역사인식은아주뒤로밀려난감이있다 고설명했다. 역시문제는민주화이다. 최근식민지연구에있어 식민지주의 와 민족주의 의이항대립을넘어서기위해 근대 ( 성 ) 이라는또하나의축을상정할필요가제기된바있다. 이틀을원용한다면, 현재의한국사회를 반일 과 반북 의이항대립으로보는일본언론의구도를비판하기위해서는, 그안에 근대 ( 성 ) 의해방후버전이라할민주화의진전이라는역사적흐름을집어넣어야할것이다. 구체적으로 사전 의편찬과민주화와의상관관계는설립이후줄곧역사문제관련시민운동의한복판에서온민족문제연구소의발자취가이를증명한다고할수있겠다. 요컨대 친일청산 은 반일 도 친북 도아닌민주화의문제였고또앞으로도그래야만할것이다. 한편 근대 ( 성 ) 의또하나의지표라할 산업화 의강조는종종 친일청산 을비판하는논리로서작용하곤해왔다. 허나최근의한미 FTA 를둘러싼논쟁에서알수있듯이냉전의붕괴와뒤를이은글로벌화의진전은, 민주화와산업화를두바퀴로삼는공동체의발전모델자체에변용을강요하고있다. 자주와종속의문제가最終審級으로서민주화와산업화를규정해온한국의근현대사를생각한다면, 이글로벌화한세계에서민주화운동으로서의 친일청산 의射程은우리가생각하는것보다더넓은것일지도모르겠다. 즉결코과거의이야기로서가아니라우리를둘러싼다양한해체의압력에맞서어떻게사회를지켜갈것인가의문제로서말이다. 93

발표문 독일과거청산의지속과공직자 : 나치외무부와외교관들의책임문제 이동기 서울대통일평화연구원연구교수 1. 머리말 과거청산도여타정치적, 시민사회적과제와마찬가지로새로운역사적현실의도전을받을수밖에없다. 다문화사회구성, 가해자와피해자세대소멸, 공적역사 ( 의식 ) 와사적기억의괴리, 트랜스내셔널역사 (transnational history) 에대한관심등은국제과거청산논의를새로운차원으로이끌고있다. 그것은더욱다양한관점과문제제기를필요로하고이론과방법론적숙고및새로운사료내지연관관계에대한관심과접근을요구한다. 이모든논의들을앞서이끌고있으며심지어자국이나자문화권만이아니라외국의여러과거청산문제를포괄하고자지속적인노력을벌이고있는곳은단연독일이다. 그런데약 1년전부터독일역사학계와정치권및공론장은오히려가장전통적인과거청산주제인 나치범죄와독일인들의관계 문제를놓고다시금격렬한논쟁을벌이고있다. 나치시기외무부와외교관들이나치독일의 국가범죄 ( 내지정치폭력 ) 에어떻게그리고얼마나연루되어있었는지, 그리고 1945 년이후새로건설된연방공화국에서어떤역할을수행했는지가주제이다. 사실나치범죄와관련해서라면, 독일에서는이미홀로코스트와전쟁및강제노동의희생 ( 자들 ) 과피해 ( 자들 ) 에대한진실규명, 배상과추모및기억과관련된여러 과거사정리 (Aufarbeitung der Vergangenheit) 작업및공론장과시민사회차원의비판적 역사문화 (Geschichtskultur) 가확장, 심화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가해자내지책임당사자들에대한역사적규명과정치문화적청산은여전히쉽지않다. 독일의경우에도결국, 희생자를매개로한과거청산과가해자문제를통한과거청산사이의비동시적발전과불균형은매우인상적이다. 특히범죄국가의최고정치지도부나소수의엘리트세력을제외하고실제국가범죄를집행했던다양한역사적가해행위주체들의역사적평가는여전히쉽지않은문제로남아있다. 이미 1945 년이후독일 ( 서독 ) 사회의거의모든영역에서는오랫동안다양한신화적자기정당화가존재했다. 대학, 군, 경찰, 사법부, 행정부, 기업가들등은나름의근거와맥락을들이밀며자신들은히틀러에저항했으며, 어쩔수없는상황에서수동적으로나치범죄에휩쓸려들어갔고, 그렇더라도그들나름으로 9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는조국과민족을위해최선을다했다는것이다. 흥미롭게도이와같은자기변호적 신화 는최근까지도존속내지재생산되고있다. 2010 년 10 월에발간된 외무부와과거. 제3 제국과연방공화국의독일외교관 은그중바로외무부와그공직자들의나치범죄에의연루및연방공화국시기그들의연속적직무수행의과정을다루었다. 이글은이과거청산작업의발생과내용및그것을둘러싼논쟁을다루면서그와같은작업의함의를성찰한다. 아울러이와같은종류의학문적과거청산작업이지니는의미를다루며한국의 친일인명사전 작업에대한평가를보조하고자한다. 2. 역사가위원회 와연구성과 2.1 발단 : 추도사사건 애초발단은 2003 년한전직독일외교관의사망직후외부부의공적추도문의발표였다. 1 1909 년카셀에서태어난프란츠뉘쓸라인 (Franz Nüßlein) 은법학박사학위를받은후검사로활동했다. 1942 년에는나치독일이점령한체코프라하의검찰부총장이되었고곧검찰총장으로올라갔다. 그는이미 1937 년나치당, 즉민족사회주의노동당 (NSDAP) 의당원이되었으며상부로부터 제국의적들 에대해 단호한투쟁 이 필요 하다는것을잘알고있는인물로평가받았다. 체코에서뉘쓸라인은대략 900명의사형선고에가담했고, 숱한감형청원을거부하며사형집행을지시했다. 2 1947 년미군정은독일에서그를체포해체코로넘겼다. 1948 년그는전범으로 20년구금형을선고받고체코에억류되어있다가, 1955 년서독으로이송되었다. 같은해서독에서뉘쓸라인은곧외무부관리로채용되어다양한직책과직위 ( 사무관, 과장, 국장 ) 를맡아활동하다 1962 년부터 1974 년에는바르셀로나주재독일영사가되었다. 2003 년 2월그가사망한후외무부부내직원신문 인테른 AA(InternAA) 는뉘쓸라인을추모하는부고문을실었다. 이는물론외무부의관례에속했다. 그렇지만프라하에서뉘쓸라인이한일을잘알던퇴직통역자인마르가헨젤러 (Marga Henseler) 는이추도문을비난하는내용의서한을외무부장관요쉬카피셔 (Joschka Fischer) 에게보냈다. 3 이서한은피셔에게전달되지못했고외무부로부터헨젤러는 아무문제없다 는형 1 추도사사건 (Nachruf-Affäre) 과프란츠뉘쓸라인 (Franz Nüßlein) 의생애에대해서는 Eckart Conze, Norbert Frei, Peter Hayes und Moshe Zimmermann: Das Amt und die Vergangenheit. Deutsche Diplomaten im Dritten Reich und in der Bundesrepublik (München 2010), p. 10, pp. 706-709; Norbert Podewin (Hrsg.): Braunbuch. Kriegs- und Naziverbrecher in der Bundesrepublik und in West-Berlin. Staat, Wirtschaft, Verwaltung, Armee, Justiz, Wissenschaft (Berlin 2002), (Reprint der 3. Auflage von 1968), p. 254, p. 271; www.forumjusitzgeschichte.de/zur_nachruf-aff.208.0html; Gisela Diewald-Kerkmann: Rezension zu; Eckhart Conze, Norbert Frei, Peter Hayes, Moshe Zimmermann: Das Amt und die Vergangenheit. Deutsche Diplomaten im Dritten Reich und in der Bundesrepublik, München 2010, in: H-Soz-u-Kult, 15.02.2011. 2 물론이에대해서는여전히논란이있다. Rainer Blasius, Der Generalkonsul und das Auswärtige Amt, FAZ, 26.10.2010. 3 Späte Aufarbeitung der Nazi-Vergangenheit, Der Tagesspiegel, 25.10.2010; Marga Henseler und das Auswärtige Amt, FAZ, 29.10.2010; Eckart Conze, Norbert Frei, Peter Hayes und Moshe Zimmermann: Das Amt und die Vergangenheit, p. 707. 95

식적인대답을듣고분노했다. 헨젤러는곧당시수상게르하르트쉬뢰더 (Gerhard Schröder) 에게이상황을비판하는글을보냈다. 뒤늦게수상을통해이사실을알게된피셔는서둘러추도사와관련된내부규정을바꿔나치당원의경력이있는모든외무부전관리들에대한추모관행을바꾸라고지시했다. 향후에는외무부부내직원신문에그들에대한어떤추도문도실지않기로결정했다. 이에대해독일외무부역사상처음으로외무부퇴직직원과재직직원들이저항하는초유의일이발생했다. 피셔장관은굴복하지않고이일이나치과거청산의정치적사회적과제와직결된것임을강조하며외무부의나치범죄가담의역사및나치시기와연방공화국시기외무부공직자들의인적연속성을다룰 역사가위원회 를위촉할것을결정했다. 2.2 외무부와과거 의전제 연방외무부장관피셔의지시로 2005년 7월 11일 독립역사가위원회 -외무부 (Unabhängige Historikerkommission - Auswärtiges Amt) ( 이하 역사가위원회 ) 가구성되었다. 위원으로위촉된인물은독일마부르크대학의에카르트콘쩨 (Eckhard Conze) 교수, 예나대학의노베르트프라이 (Norbert Frei) 교수, 본대학의클라우스힐데브란트 (Klaus Hildebrand, 2008 년사망 ), 미국노스웨스턴대학의피터헤이즈 (Peter Hayes) 교수그리고이스라엘히브류대학의모세찜머만 (Moshe Zimmermann) 교수였다. 그외에 12명의역사가들또한공동연구와저술에참여했다. 약 5년간의작업끝에 2010 년 10 월 28일 역사가위원회 는최종보고서를현외무부장관인귀도베스터벨러 (Guido Westerwelle) 에게제출했고, 이를다시 200개이상의각주가달린 880 쪽의단행본으로출간했다. 외무부와과거. 제3 제국과연방공화국의독일외교관 ( 이하 외무부와과거 ) 이란제목의이책은최근까지도베스트셀러의목록에놓여있고격렬한토론공방의대상이되었다. 역사가위원회 의위원들이기본적으로목표로삼은것은외무부와여론사회에강력하게남아있는 신화 를혁파하는일이었다. 나치범죄와외무부관료들의연루관계문제에대해서는이미이전에도몇가지연구서들이이미잘밝혔다. 그렇지만그것은주로역사학계일부에서만토론되었을뿐이다. 4 그렇기에그와같은선구적연구성과의내용과공론장및시민사회, 특히독일외무부의전현직관료들의역사인식사이는차이가심했다. 전후초기나치청산과정에대한외무부공직자들의인지는항상양면적이었다. 먼저뉘른베르크재판에서나치시기두명의외무부장관이핵심전범으로몰려단죄되었다. 즉콘스탄틴폰노이라트 4 선행연구로는 Christopher R. Browning: The Final Solution and the German Foreign Office. A Study of Referat D III of Abteilung Deutschland 1940-1943 (New York, 1978); Hans-Jürgen Döscher: Das Auswärtige Amt im Dritten Reich. Diplomatie im Schatten der Endlösung(Berlin, 1987) 등이있다. 9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Konstantin von Neurath) 는 15 년형, 요아힘폰립벤트로프 (Joachim von Ribbentrop) 는교수형을선고받았다. 이에대해애초나치시기외무부공직자들은무심했거나오히려그것을환영했다. 그러나그뒤재판과정에서일부외무부고위공직자들이피고로법정에서게되자외무부출신의구관료들은순식간에저항에나섰고비판의목소리를높였다. 에른스트폰바이체커 (Ernst von Weitzsäcker) 재판이대표적이었다. 바이체커는외무부관리들에게국가와민족에충성을다바친공복의화신이었기때문이다. 다시말해외무부관료엘리트들이보기에바이체커는이데올로기적신념에찬가해범죄자도아니고맹목적복종의전형도아니고국가에헌신하며책임을지는모범적공직자의예였다. 5 그런데이미 169 차례의심리를거쳐 1949 년 4월종결된뉘른베르크 빌헬름거리재판 은외무부의전쟁범죄가담사실을확증했다. 하지만미국판사들의그판결은독일에서오랫동안거부와비판의대상이었다. 이미판결에서확증된역사상과는다른외무부에대한평가가지배해왔던것이다. 나치범죄에대해가담했거나책임있는독일인들에대한비판은곧그당사자들이그것에대한반대여론과대립적인상을정력적으로설파함으로써상대화되거나약화되었는데외무부공직자들의자아상또한바로그러했다. 그들은외무부는나치지배를비판하는저항세력의교두보였고외교관들은히틀러의범죄에직접연루되지않았다고주장했다. 비록역사학적연구에서는그와는전혀다른사실들과그연관관계들이잘밝혀졌음에도불구하고구외교관들내지연방외무부공직자들의주관적자기인식은최근까지도지속되었다. 물론 1990 년대외무부의공식적인주장은조금후퇴했다. 1995 년독일연방외무부는부서창립 125 주년을맞이해출간한책자에서나치시대의부서역할에대해다음과같이평가했다. 적극적인히틀러반대자가많지않았다는것은외무부가전체적으로보아 저항의아성 이아니었다는것을보여준다. 하지만마찬가지로외무부를친위대의하수인으로볼수도없다. 진실은그중간쯤어딘가에있다. 그러나 외무부와과거 가주장하는것은 진실은그중간쯤어딘가에있는 것이아니라나치시기외무부는 저항의아성 이아니었을뿐만아니라일종의 범죄조직 이었고적극적으로나치의절멸전쟁과반유대주의정책에동조했고, 심지어부분적으로주도했다는것이다. 3. 외무부와과거 의핵심내용 사실 외무부와과거 의주장은명료하다. 먼저저자들이 1 부에서밝힌것은나치시기외무부는지 배에대한저항의근거지가아니었으며 최종해결 의길을앞서닦은이들이었고, 유대인의수송과절멸 5 Christopher R. Browning: Historikerstudie Das Amt. Das Ende aller Vertuschung, in: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10. Dezember 2010 97

의지지자이자보조자였다는사실이다. 역사가위원회 의그보고서는특히 1939 년이전까지의나치체제의정치적숙정과범죄에대한외무부의가담을집중적으로다루었다. 유대인들의권리박탈과억압및살해에외무부공직자들은대부분능동적으로참여했다. 그들은 1935 년뉘른베르크법령으로귀결된여러반유대적법, 행정적조치들의도입을옹호하고보조했다. 특히유대인들이독일밖으로망명을하려고할경우외무부와접촉을할수밖에없었는데이때외무부공직자들은다양한방법으로유대인들의재산을강탈하거나권리를박탈했다. 그리고바로이과정에서외무부는제국안전부 (Reichsicherheitshauptamt) 와긴밀히협력하며유대인문제에대해공조했다. 6 또외무부는 1933 년외부로부터의압력이없었음에도불구하고 자기숙청 을단행했고 7 나치당이나다른행정부처와의단순한협력을넘어적극적으로주도권을쥐고개입했다. 외무부관료들은나치의비밀경찰에수시로자신들의정보를제공해주었으며, 유대인의수송과살해에의식적으로참여했던것이다. 요컨대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이시종강조한것은외무부관료들이이미전쟁발발전부터나치독일의유대인정책에직접개입했고때로그것을적극적으로주도하기도했다는사실이다. 8 아울러 1939 년전쟁발발직후외무부는유럽점령지유대인을프랑스의아프리카식민지인마다가스카르로실어나르는내용의 마다가스카르 -계획 (Madagaskar-Plan) 입안등유대인절멸의구체적방안구상에개입하기도했다. 한편, 저자들에따르면, 1941 년 9월 17 일히틀러는립벤트로프와회합을가졌는데여기서유대인의운명이사실상결정되었다. 이어 1942 년 1월 20일 유대인문제 에대해 최종해결 을결정한반제회의 (Wansee-Konferenz) 에외무부는마틴루터 (Martin Luther) 국장을파견해그결정에능동적으로기여했다. 9 그런데외무부공직자들이이미 1930 년대부터이미나치의반유대주의정책과절멸전쟁을적극옹호하고나선데에는다음의몇가지배경이결정적이었다, 먼저외무부는나치집권후에적극적으로외국에서나치의정책을방어할필요가있었기때문이다. 또여타정부기구들의공직자와비교해특히외무부관료들은이미바이마르공화국시절부터민족보수적인정서에깊이물들어있었기때문에나치정치지도부의반유대주의와순민족적 (völkisch) 이데올로기를아무문제없이자기화할수있었다. 단지극히일부의외교관들만이이억압적조치와범죄행위들에반대했다. 외무부와과거 는외무부내의이체제비판가들에대해적절한지면을할애했다. 외무부내중급관리들인아담폰트로트쭈숄츠 (Adam von Trott zu Solz), 한스베른트폰해프텐 (Hans Bernd von Haeften), 루돌프폰셸리하 (Rudolf von Scheliha) 등은나치범죄를알아가면서비판의식을강화했고곧저항조직과의연결되어활동을전 6 Eckart Conze, Norbert Frei, Peter Hayes und Moshe Zimmermann: Das Amt und die Vergangenheit, pp. 174-175 7 Ibid., pp. 64-73. 8 Ibid., pp. 174 9 Ibid., pp. 185-188. 9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개했다. 10 그렇지만그수는극히미미했고주변적이었다는것을보임으로써저자들은 1945 년이후외무부관료들사이에퍼진 신화 가얼마나황당한것인지를증명했다. 이미 1937 년을전후해나치당원들은외무부로대규모로들어왔고, 이데올로기적신념과출세이기주의, 체념적순응주의등이결합해이들은나치의절멸정책과구현에적극나서게되었다. 물론외무부소속의공직자들은나치의폭압, 전쟁수행, 인종살해책임이있다고했을때그것은단지 1930 년중반이후새롭게충원된친위대나나치당소속의외무부공직자들만을지시하는것이아니다. 이미그전부터외무부에서근무하던대다수직원들또한결코 깨끗하 지못했다.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은전현직외무부관료들과여론사회일부에서아직도강력하게유지되고있는나치시기외무차관에른스트폰바이체커에대한신화를부수는데특히적지않은지면을할애했다. 바이체커는이미 1949 년이른바 빌헬름거리재판 에서프랑스유태인 6천명의수송에대해동의한죄로 7년의금고형을선고받은적이있다. 그런데당시에도그랬고그후계속그의행위는 더험한일이일어나기를방지하기위한 불가피한조치였다고인식되며동정론이넘쳐났다. 그리고그는항상나치범죄에직접연루되지않은흠잡을데없는외교관으로간주되었고심지어히틀러체제에대한저항을내면화한인물로간주되었다. 그런데 외무부와과거 저자들은바로그바이체커야말로 1933 년나치권력장악후부터시종반유대주의적선전과반민주적조치들을장려하고추진한공직자임을실증했다. 이를테면 1936 년 5월의한서한에서드러나듯, 바이체커는체제비판작가인토마스만 (Thomas Mann) 의시민권박탈을요구하고추진했다. 1938 년바이체커는이미파리에서스위스외교관에게 유대인은독일을떠나야만하고 --- 그렇지않을경우당장이든나중이든완전히절멸될것이다 고말했다. 11 이어 외무부와과거 는 2부에서그와같은역사적죄와책임문제를전후연방외무부가제기하지못했고오히려저항의경력이있는이들을외무부의새로운공직자대열에서배제했다는사실을밝혔다. 이에대해서는이미 외무부와과거 의앞부분에나오는외무부공직자두명의서로다른이력과생애사적발전이중요한예다. 프란츠크라프 (Franz Krapf) 와프리츠콜베 (Fritz Kolbe). 콜베는 1925 년외무부관리가되었는데, 1933 년나치당원이되기를거부했고, 나치독일의범죄적억압에충격을받고곧저항운동조직과연결을가졌다. 그는이미 1938/39 년케이프스타트영사관에서일할때나치에탄압받는사람들을위해여권을위조해주었으며, 1943 년부터그는위험을무릎쓰고미국정보부에나치에대한정보를제공했고, 12 전후뉘른베르크재판의준비를도왔다. 이에반해크라프는 1933 년나치의친위대에가입했고 1936 년에는나치당원이된뒤 1938 년외무부에들어왔다. 2차세계대전시에그는일본도쿄의독일대사관직원이자친위대의안보요원으로일했다. 크라프는 1951 년독일로돌아온뒤다시서독연방외 10 Ibid., pp. 296-309. 11 Ibid., p. 173. 12 Ibid., p. 9, pp. 309-312. 99

무부에서일할수있었고나중에는일본에서독대사로파견되었으며나토 (NATO) 의서독대표부대표로일하다퇴직했다. 그러나나치체제에저항했던콜베는숱한노력에도불구하고전후서독외무부에다시취직하는것이허락되지않았다. 외무부의고위관료들에게 배신자 로낙인찍혔던것이그실질적이유였다. 그의반나치저항활동은 2004 년에야비로소공식적으로인정되었다. 한편 외무부와과거 는 1950 년서독연방외무부의창립준비시충원된상급직원 137 명중 58명이나치당원전력자였고 (42,3%), 1954 년까지이숫자는 329 명으로증대했다고밝혔다. 물론당시상급직원수는 900명남짓되었기에비율은줄어들었다. 그럼에도이는무시할수없는숫자였고전후서독외무부의자기정체성과역사적연속성을확증하는데중요했다. 과거전력자 들은그들나름의연계망을통해관계를유지했고정보를수시로교환했으며재판시에는협력했다. 그들은나치범죄의가해자나연루자로서가아니라스스로피해자로자기증명을시도하거나단지 의무를이행했을뿐 이라며역사적책임을회피하고과거청산의과제를외면했다. 물론이와같은비판이곧장그 전력자들 이신생연방공화국의민주주의적정치발전을방해하거나교란했다는것이아니다. 그들은대부분전후서독의정체와국제질서를받아들였다. 이나치전력자들로인해연방외무부가초대아데나워수상의서방통합정책과 1970 년대사민당소속빌리브란트의동방정책추진에걸림돌이되는일은발생하지않았다. 외무부또한전후독일의안정적이고성공적인민주주의발전과평화적국제관계발전의일부로자리잡았다. 그러나 외무부와과거 저자들은그나치전력자들이결국에는민주주의적정치의식에기초해연방공화국의정치적안정화와외교적발전에큰공헌을했다는결론에동의하지않는다. 또전후외무부에재취업된 전력자 들이전문적식견과경험으로연방공화국의외교정책과활동에기여한 공헌 으로나치시기범죄연루를상대화하려는시도또한받아들일수없는일이다. 나치전력이있는연방공화국외무부의관리들은시종 자체용서 의기제에의거했고, 관헌적이거나엘리트주의적태도를유지했다. 심지어 1966 년빌리브란트가외무부장관이되었을때조차도대다수외무부공직자들은사민당과의협력을단지위기시의일시적목적공동체로인식하며새로운변화에저항했다는것이다. 13 아울러일부 전력자들 은최근까지도자신들의과거를감추고나치시대외부부의역할을왜곡하는 퇴각전 을벌였다. 바로여기에종지부를찍을필요가있었던것이다. 4. 비판과논쟁 전체적으로보면 역사가위원회 의활동과그결과물에대해서긍정적반응이다수였다. 정치권과여론 13 Ibid., p. 658. 10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사회의호의적반응은그연구의결과가앞으로도독일정치와시민사회의공유된인식과역사의식의기반으로자리잡을수있음을보여주었다. 그러나역사가들내에서는엇갈린평가가나타났다. 이는부분적으로는정치적인배경때문이지만학문적관점과인식의차이에서기인하기도하다. 먼저미국의대표적홀로코스트연구자인크리스토프브라우닝은 역사가위원회 의작업으로이제이와관련된모든역사왜곡에종지부를찍게되었다고그공적을높이평가했다. 14 특히그는외무부에서나치지배와홀로코스트수행에대한저항이극히일부였음을실증적으로잘드러내그동안의 신화 를혁파한것에큰연구사적의미를부여했다. 이스라엘의대표적홀로코스트연구자인자울프리들랜더 (Saul Friedländer) 또한같은맥락에서이저작이여러파편적인사실과그연관관계들을잘종합했고, 나치시기만이아니라그뒤시기도같이다룸으로써나치범죄연루공직자들의전후생애사적발전을잘밝힌것을치하했다. 그렇지만비판은거셌다. 외무부와과거 에대한가장격렬하고저급한반응은단연 현재적기준으로과거를재단한다 라든지, 당시의조건과맥락을고려하지않은후세대의횡포 라는비판이었다. 당시의외무부공직자들이어떤구조적제약과압박하에놓여있는지를이해하지않은채현재적관점에서도덕적으로평가한다는비난이었다. 15 가해자들의상황에대한인간적이해를요청하며가해자들을오히려구조적상황의피해자로전환시키는논법이다. 이논리를내세우는이들은당연히옛공직자들이었지만일부지식인과역사가들또한그궤변에동조하고있다. 다만대부분의독일역사가들은이와관련해서 1945 년이후나치전력자들의기괴한여러변호론을경험했기에, 그와같은대응이결국모든사람들을최종적으로는피해자로만들어어떤과거사정리도불가능하게만드는것이라는사실잘알고있었다. 16 그런데이논리에따르면 외무부와과거 는 화해 에도움이되지않고오히려갈등과불화를유발할뿐이다. 그러나역사연구, 특히과거사정리와관련된역사학적작업은일차적으로진실규명이그과제이다. 어쨌든기묘하게도독일과거사정리의역사에서는이미극복되었다고여겨졌던, 여러논리와주장들, 즉 역사화 나 맥락화 개념를이용해가해의주변화나변호론으로전락하거나 화해 를내세워역사적진실규명의의의를뭉개는논의들이등장한것은매우새로운현상이다. 한편전문역사가들의비판은구체적이면서관점의문제와도연관되었다. 일부독일현대사가들은그저작이오류투성이고학문적수준이저열하다고입을모았다. 이를테면마인츠대학의현대사가인쇤케나이쩰 (Sönke Neitzel) 는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이외무부를범죄조직이라고규정한것을보고 역사포르노 라고비난했다. 17 저자들은대중의호기심과관심을유발시키는것만을목적으로삼고있다는질 14 Christopher R. Browning: Historikerstudie Das Amt. Das Ende aller Vertuschung, in: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10. Dezember 2010. 15 Bernhard Schlink, Die Kultur des Denunziatorischen, in; Merkur, Nr. 745, Juni 2011. 16 Am End nur noch Opfer, Interview mit Ulrich Herbert, NS-Beteiligung Auswärtiges Amt, taz, 08.12.2010. 17 Klaus Wiegrefe: Unkenntnis und Ignoranz, in: Spiegel Online, 06.12.2010. 101

타였다. 그외에도 표피적 이라든지, 사료상황에대한무지와무시, 일면성, 엉터리 등등의비난이거셌다. 먼저가장흔한비판은이저작이새로운연구성과들을담고있지못했다는것이다. 그러나 이미알려진것들을 짜깁기한것이라며그의의를축소했다. 하지만애초부터그책은기왕에알려지지않은새로운사실들을발굴하며연구의수준을드높이겠다고자임하지도않았고피셔장관이그와같은작업을요구하지도않았다. 그렇기에 역사가위원회 의위원들그리고그들과함께작업한역사가들은철저히애초의정치적과제에초점을맞추었다. 그것은외무부의전현직공직자들이나치시기외무부가정치적으로중립적이었고오히려 저항의근거지 였다고인식하고그것을선전하는왜곡된현실을학문적으로비판하는것이며그와같은오랜신화를극복할수있는학문적근거를제공하는것이었다. 그렇기에이저작에 새로운것이거의없 다는식의비판은이저작의중심주장을부정하지못하면서그것을폄훼하려는의도로밖에보이지않는다. 바로이런점에서프라이부르크대학의현대사담당교수인울리히헤르베르트 (Ulrich Herbert) 는그와같은음험한의도적비방으로부터이저작을옹호하며 외무부가나치독재의한기관이었으며체제의범죄에어느정도가담했는지를기존인식에의거해하나씩차례로보여준것에이책의공헌이있다 고평가했다. 18 간단치않은문제는단연한스몸젠 (Hans Mommsen) 의비판이었다. 19 나치즘연구사에서몸젠이지닌위상과무게때문이기도하지만그의근본적비판이역사인식의오랜논쟁문제와직접관련된것이기때문이다. 먼저몸젠은이연구가유대인탄압과절멸에만시야를고정함으로써나치폭력지배의다른차원들, 이를테면전쟁포로와강제노동을강요당한노동자들에대한대우, 지체장애인살해등을다루지못한것을비판했다. 그러나더중요한비판의대상은 외무부와과거 가홀로코스트집행이 점진적으로이루어진과정의결과 라는사실을제대로고려하지못했다는점이다. 홀로코스트발생에대한기능주의적분석에의거하는몸젠이보기에외무부가 1930 년후반유대인이송에가담한것을두고유대인절멸에가담한것으로간주하는것은타당하지않는것이었다. 왜냐하면당시는아직나치상층부에서유대인절멸이라는 해결 책을최종적으로확정짓지않았기때문이다. 몸젠에따르면 최종해결 은나치체제의점진적급진화의결과였고 -처음부터명확히의도된것이아니라 -1941 년말에나최종적으로결정이이루어졌다. 그렇기에 1941 년이전에외무부고위공직자들이절멸정책의확정에중요한역할을한것으로서술한이책의핵심주장은받아들여질수없다는것이다. 하지만이책의저자들과여타역사가들은몸젠의과도한 기능주의적해석 에동의하지않는다. 그들은 유대인문제 에대한나치의최종해결은이미오래전에내려졌지만단지그실행이점진적, 연속적으 18 Am End nur noch Opfer, Interview mit Ulrich Herbert, NS-Beteiligung Auswärtiges Amt, taz, 08.12.2010. 19 Hans Mommsen: Das ganze Ausmaß der Verstrickung, in: Frankfurter Rundschau, 16. November 2010; 같은저자 : Vergebene Chancen. Das Amt hat methodische Mängel, in: Süddeutsche Zeitung, 27. Dezember 2010. 102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로이루어졌다고반박했다. 물론 1939 년에이미나치최고지도부가유태인절멸을정말로집행할수있으리라고상상할수는없었지만당시에도어쨌든그것에대한수많은언급과선전들이생겨났다는것이다. 나치지도부가언제부터유대인절멸을실제로의도했는지, 그리고외무부고위공직자들이언제부터이를알고지지했는지의문제는여전히명료하지않다.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이내세운주장, 즉 1939 년초에이미독일외무부외교관들은유대인절멸정책이수행될것이라고내다보고그것을준비했다는것은아직사료의뒷받침을받지못한전제일뿐으로보인다. 이부분에대해서는아직도역사학계의연구와토론이더필요해보인다. 한편, 몸젠의비판은나치지도부의최종해결결정과정에대한외무부의역할로이어진다. 외무부와과거 는최종결정이 1941 년 9월 17 일히틀러와립벤트로프사이의회합직후이루어졌다고주장하며최종결정과정에서의외무부의결정적역할을들었다. 몸젠은이를지나친억측이라고비판했다. 아울러몸젠은비록외무부가저항의거점이아니었던것은맞지만외무부공직자들중에나치저항운동가담자들이상대적으로 ( 비율상으로 ) 다른부처보다더많은사실을인정해야한다고주장했다. 그렇기에몸젠은외부부와그공직자들을싸잡아서평가하는것을경계했다. 이점에서는요하네스휘르터 (Johannes Hürter) 또한같은의견이었다. 20 전쟁이처음부터절멸전쟁으로진행된것도아니고외무부가나치의절멸정책을가능하도록만들어주었다는것도잘못된분석이라는것이다. 휘르터는특히몸젠과마찬가지로외무부공직자들을한꺼번에싸잡아서비판하는것을특히비판했다. 그러나휘르터는몸젠보다한걸음더나아가며논의를혼란시켰다. 그는신념에찬나치당원들이지배하고있던일부부처와지역의공직자들은나치의절멸정책에가담하고연루되었다는것을부인할수없다고인정했다. 그러나그것으로전체외무부공직자들을단죄할수없다는것이그가제기한비판의요체이다. 이를테면그는폴란드와소련지역의경우나치당원출신의외무부직원들은별영향을발휘하지못했고이지역들의유대인절멸에외무부는어떤주도적역할을수행하지도못했다고지적했다. 그렇기에그는나치독일의소련침공이후외무부가유대인문제의해결을위해주도적인노력을했고 최종해결 의결정에직접참여했다는 외무부와과거 의주장은전적으로틀렸다고주장했다. 결국휘르터가보기에 외무부와과거 는확증된사실들, 논란이있는사실들, 완전히틀린사실들사이를왔다갔다하는저급한학문적수준의저작이라고단정했다. 이에대해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은그런류의인식태도야말로이미오랫동안반복된나치범죄에대한외무부의가담에대한상대화수법이라고되받았다. 다른한편외무부공직자들의구체적인활동과관련해서도논쟁이그치지않는다. 비판가들이보기에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은일부외무부공직자들의나치범죄에대한구체적인연루와책임문제에대 20 Johannes Hürter: Das Auswärtige Amt, die NS-Diktatur und der Holocaust. Kritische Bemerkungen zu einem Kommissionsbericht, in: Vierteljahreshefte für Zeitgeschichte 59, Heft 2 (2011), S. 167 192. 103

해서도명료하게보여주지못했다. 이를테면프란츠크라프의경우나치당원이고친위대대원이기도한그가 1940 년부터도쿄에서외교관으로근무한것은맞지만그가구체적으로어떤역할을수행했는지가분명하지않다는것이다. 21 대신 외무부와과거 에서는단지극동에배치된외교관들도홀로코스트와관련된일을수행했다고만나와있다. 그렇기에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이나치외교관들의구체적인행위양식과생애사적발전을세부적으로구분하지않고뭉뚱그려다룬것은비판받지않을수없다. 22 결국논쟁이진행되는가운데한편으로그저작의중요한공헌을인정하는한편, 다른한편으로는몇몇결함들이부정할수없는것으로드러났다. 뒷부분부터말한다면이미나온연구성과들을충분히반영하지못한측면들이라든지, 나치의유대인절멸정책완성과그집행에서외무부공직자들이수행한역할을과도하게평가한문제등이그것이다. 영국의나치시대전문역사가리처드에번스 (Richard J. Evans) 교수와나치외교정책전문가인프랑크푸르트대학의마리에 -루이제레커 (Marie-Luise Recker) 교수는학문적인엄밀함에비추면이저작이충분한질적수준을갖추지못했다고논평했다. 23 그렇지만그저작이나치즘의반유대주의이데올로기와절멸정책에외무부공직자들이능동적으로가담한양상들을잘드러냈고, 앞으로의더욱심층적인연구에중요한자극을주었다는점은인정되었다. 특히 1945 년을전후한공직자들의인적연속성문제같은것에대한연구성과는높이평가받았다. 아울러전문역사학계를뛰어넘어넓은독자층과여론사회및언론의주목을받게된것도아주의미있는일이라는데이견이없다. 5. 맺음말 1) 의의와전망 나치시기외교관들의책임문제가제기된발단은우연적이었지만 역사가위원회 의연구결과에대한논쟁은매우격렬했다. 외무부와과거 가학계및여론사회와대중들의큰관심을끌게된데에는여러배경요인들이있다. 보수신문인 FAZ 같은일부언론의과도한개입과평가절하로의방향몰이도그하나다. 하지만그와같은대중과여론사회의큰관심은오랫동안진행되었던독일과거청산의한성과로보 21 Klaus Wiegrefe, Unkenntnis und Ignoranz, Der Spiegel, 06.12.2010. 22 Christopher R. Browning: Historikerstudie Das Amt. Das Ende aller Vertuschung, in: Frankfurter Allgemeine Zeitung, 10. Dezember 2010. 23 Richard J. Evans: The German Foreign Office and the Nazi Past. Rezension zu: Das Amt. in: Neue Politische Literatur 56 (2011), pp. 165-183; Marie-Luise Recker: Das Auswärtige Amt und seine Vergangenheit. Über Karrieren, Komplizenschaften und Netzwerke. Besprechung von Das Amt und die Vergangenheit, in: Historische Zeitschrift. Bd. 293, H. 1 (August 2011), pp. 125-136. 104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는것이더타당해보인다. 특히나치의핵심지도층이나친위대등만이아니라전통적인지배층이나다양한부문의엘리트들의나치범죄에의참여내지협력이최근들어새롭게환기되었기때문에상대적으로 깨끗하다 고여겨졌던외무부공직자들의나치범죄에대한연루문제도큰반향을일으킬수있었다. 역사가위원회 의작업과그연구결과물인 외무부와과거 를둘러싼독일의최근논쟁은억압적정권과파괴적범죄의청산작업이얼마나다차원적이고지속적인과제인지를잘보여주었다. 그러나추상적이고익명적인 지배체제 내지소수의 악마적 지도자들을넘어서다양한정치, 행정분야의범죄적정책과파괴적조치들의구체적수행자들내지보조자들인정부공직자들에대한역사비판적평가작업은인식과연구의고유한문제점들과대결하지않을수없다. 먼저독일에서도또한 역사가위원회 의작업과정과그결과물에대해전통적인가해자변호론인 과거에대한현재의폭력 내지 과거의구조적제약을무시한현재의도덕적재단 이라는식의주장들이등장했다. 하지만그와같은변호론이토론과정에서주변적인목소리에불과했던것은독일과거청산역사의오랜성과를반영하는것이다. 또한그것은 외무부와과거 가무엇보다나치시기외무부공직자들이얼마나능동적으로상황에개입했고스스로의 행위여지 와기회들을확대해갔는지를잘보여주었기때문이다. 그결과토론은격렬했지만대부분의경우구체적인쟁점들에집중했고, 인식지평의확대에기여했다. 둘째, 논쟁은단순히정치적전선 ( 보수 / 진보내지좌 / 우파의구분 ) 에갇히지않았고, 역사가들은지금까지의자신의연구와관점에기초해풍부한쟁점들을만들어냈다. 몸젠과에번스같은비판적역사가들이 외무부와과거 에대해냉혹하게평가한것은많은이들에게놀라운일로받아들여진다. 하지만, 오히려그와같은학문내적 -( 당파 ) 정치적이아니라 - 비판들로인해대중들과여론사회의관심은더욱고조되었고, 향후의학문적과제와방향을둘러싸고의미있는논의로발전했다. 과거청산과관련된역사학적연구의결과가전문역사가집단을넘어대중적관심과결합한흔치않은예를보여주기도하면서. 셋째, 외무부와과거 의저자들이제시한역사적사실들과연관관계및의미와해석에대해서는여전히합의되지않는논쟁점들이있지만외무부와그공직자들이이미 1941 년전부터능동적이고주체적으로나치이데올로기와반유대정책을자기화하는과정을이제부정할수없다. 나치의외무부공직자들은억압적체제및파괴적소수지도자들의지시와명령에수동적으로따른것이아니라다양한제안과실천을통해전쟁과인종살해를준비하고보조했음이전면적으로드러난것이다. 역사가위원회 의위원이었던노베르트프라이는이를 제3 제국시기의외무부는바로제3 제국의외무부였다 24 는말로요약했다. 물론여러쟁점들, 이를테면 1939 년과 1941 년사이에이루어진 유대인문제 에대한 최종해결 결정에외무부가어느정도결정적인역할을수행했는지등은여전히앞으로의연구와토론의과제로남아있 24 Nazi-Diktatur, Das Ende der Weizsäcker-Legende, Die Zeit, 28.10.2010 105

다. 그렇지만극히일부를제외하면, 나치시기외무부공직자들이 1933 년부터줄곧 단지상황에유연하고재빠르게적응한것만이아니라충성에대한그들나름의이해에따라그새로운권력자에제대로따라갔 음을확인한것은정치폭력내지국가범죄와공직자의역할의관계를이해하는데하나의중요한역사적예이자비교사적연구의자료로활용될수있을것이다. 마지막으로 외무부와과거 는최초로한국가기관을중심으로나치시기와전후의인적연속성을체계적으로다룬연구서이다. 정치, 행정, 사법, 대학, 문화등사회각부분에서 2차세계대전전의나치당원들내지전쟁과홀로코스트의연루자들이전후서독의각영역에서어떻게결집했고어떤정체성과집단기억으로새로운시대에등장했는지, 그리고나치과거청산과제에어떻게임했는지등은앞으로의지속적인연구과제이다. 외무부와과거 는이와같은향후작업에중요한자극을제공했다. 다만이 외무부와과거 의내용이전후서독외무부공직자들의내적구성과재편문제에만갇혀좀더풍부한논의들로이어지지못한측면, 이를테면좀더다채롭고분석적인생애사내지사회사적연구를보여주지못한점과동독외무부와의비교연구를수행하지못한점등은한계로남는다. 그런점에서이 외무부와과거 를둘러싼격렬한논쟁은독일의나치과거청산작업및그것과연관된비판적역사학연구에다시한번발전과전환의계기를제공할수도있을것이다. 2) 친일인명사전 평가및향후과제와관련하여 맥락과차원, 배경과과정이많이달라, 독일의나치시기외무부에대한역사학적정리작업을한국 친일인명사전 작업과비교해그의의를논하기는쉽지않다. 조심스럽지만두가지함의는무시할수없을것이다. 먼저, 학문적논의의심화필요성이다. 정부지원사업이지닌온갖이점을고려하더라도 800 쪽이넘는, 이해하기쉽지않은내용의전문학술서인 외무부와과거 가지난 1년동안경험하고있는폭발적인반응은놀랍다. 그런데더중요한것은이미앞에서강조했듯이 ( 국제 ) 역사학계내부의격렬한토론이다. 친일인명사전 이지닌역사적무게를존중하고 운동 사적함의를인정하면서도그것이좀더학술적인연구로이어질수있는조건과계기들이마련될필요가있다. ( 극 ) 우파 반민족 세력의역사공세가만만치않아쉽지는않겠지만, 외무부와과거 가서로크게다르지않은 ( 역사 ) 정치적지향을갖고있는비판적역사학자들내부에서다양한해석과논쟁을불러온것처럼, 친일인명사전 또한더진전된역사연구와서술의계기로작용할수있어야할것이다. 그러기위해서는먼저 친일인명사전 을비판적역사인식의성역으로만들어서는안되리라생각한다. 민족운동적 비장감과정치적엄숙주의를드러내는것보다학술적토론과지적논쟁에더개방적인것이 길이빛나서국민의사랑을받 는길이될것이다. 그러려면한국의 친일인명사전 발간이갖고있는특별한의미를과잉해석하는것에서벗어나과거청산의학문적작업에서 인명사전 류가지닌보편적한계와근본적인문제점들을더분명히밝히고한정할필요가있다. 106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둘째, 친일인명사전 은 가해자연구 의맥락에서나온것일테지만그자체로는다만가해자내지연루책임자들에대한인식의보조작업에불과하다. 그렇기에더진전된 가해자연구 가필요하고, 친일인명사전 이그촉매가될필요가있다. 그런데폭력체제와국가범죄및그것에대한연루와가담이단순히구조나관계그리고그것의담지나압박이아니라항상역사행위자들의능동적 사회적실천 임을더욱강조할필요가있다. 그렇기에, 이미 친일인명사전 의선정기준원칙에서언급된것처럼, 직위 는여전히중요하다. 특정가해내지책임추궁대상의행위의주체들은역사적구조와관계에구속받지만그들나름으로상황을인지하고해석하며스스로선택하는이들이다. 그런데 인명사전 류의작업은역사행위자들이이인지와행위과정에서이루어내는다양한선택과결정의맥락을제대로보여줄수없다. 그렇기에향후 친일문제연구 는 - 외무부와과거 가제한적으로나마보여준것처럼 - 특정한 사회적실천 의장을매개로집단적인, 또는개인적인연루와참여의동기와의도, 목적과지향, 정서와성향 ( 의변화 ) 등을구체적이고복합적으로밝혀내는것을주요과제로삼을필요가있어보인다. 이때사회사적관점의집단전기내지특히생애사적연구작업이중요한것은특정 사회적실천 의담지자로서의 반민족행위자 내지 부일협력자 는결국특정역사과정에서 스스로형성 되는것이기때문이다. 107

토론문 토론문 : 독일과거청산의지속과공직자 한정숙 서울대교수 지난 20세기후반부터오늘에이르기까지과거청산 (Vergangenheitsbewältigung) 이라는말이사람들귀에익숙하게된것은독일에서이루어진자국현대사, 특히나치시대역사정리작업덕분이라고해도무리가아니다. 즉 2차세계대전이후나치의역사를어떻게대면하고어떻게넘어설것인가하는독일인들의고민과이에대한정면대결이과거청산이라고하는새로운학문적, 현실적의제의성립을가능케하였다. 한개인이인격적통합성을유지하기위해자신의행동에대한반성과이에대한성숙한평가가필요하듯이, 한사회또한공동체로서건강한통합력을가지기위해서는사회정의와관련된가장민감한윤리적문제에대해스스로성찰하고스스로과오를인정하여정리함으로써정화되는과정을거쳐야한다고보는것이과거청산혹은과거정리의개략적인의미일것이다. 제2 차세계대전후독일의나치과거청산노력은빌리브란트전총리가바르샤바를방문했을때유대인희생자추모비앞에서무릎꿇고참회한극적인장면을찍은사진으로상징되면서다른나라들의모범이될만한예로서널리받아들여져왔다. 그러나독일의과거청산도 자동적으로 이루어진것은아니며, 아무저항없이이루어진것도아니다. 독일의나치과거청산은뉘른베르크전범재판후에는일단락된것으로받아들여졌다. 동독에서는나치전력자가발붙일여지가없었지만서독정부초기에는나치전력자들도상당수공직에진출했고이들이여전히사회적영향력을가지고자했던것이사실이다. 다만, 정치권은콘라트아데나워처럼나치와관련이없었던인물을수상으로선출하는것으로최소한의체면은지키고자했던것이다. 이러한정치권및관료사회의동향에대해역사학계와시민사회가반발하고나치전력자들의문제를추적하면서학문적, 현실적문제제기를끊임없이수행한결과사회의다른부문들도이에점차호응하면서동조하는반응을보이게되었다. 특히베아테클라르스펠트와그녀의남편세르게클라르스펠트처럼, 68혁명전후한시기에일반시민들사이에서출현한용감한나치추적자들은역사학계에도큰자극제가되었고시민적노력과역사학계의노력이서로영향을주고받으면서과거청산이진행되었다고할수있다. 역사학계내에서도나치체제의과오를상대화시키고어느면에서는희석하기까지하려는노력도없지 108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

는않았음은 1980 년대에불붙었던역사가논쟁 (Historikerstreit) 의사례에서도잘알수있다. 이런고비들을넘겨가면서독일사회가그래도극우적경향을웬만큼누르고과거청산의면에서아직까지는불명예스럽지않은모습을보일수있는것은역사학자들의노력에도어느정도기인한다고보아야할것이다. 이동기박사님의발표는독일에서계속되고있는과거청산노력이나치시대외무관료, 외교관들의나치전력을둘러싸고는어떤쟁점을불러일으켰는지를살펴보고있다. 나치독일의군부가운데일부인물들은반히틀러저항세력과일정한연계를가지면서히틀러제거를모의했고 1944 년 7월 20일실제로이를시도했었다. 비록실패로끝나는바람에거사참여자들의죽음이라는결과로귀결되기는했지만, 이는반히틀러저항운동가운데가장규모가크고가장높은현실성을가진사건이기도했었다. 당시반히틀러모의에참여한사람들은보수적프로이센귀족을주축으로하고있었으며, 2차대전이후저항영웅들로추모되고있다. 이에반해외무부쪽고위인사들은그러한적극적저항에참여한예를찾아볼수없다. 독소불가침조약의당사자였던외무장관리벤트로프는뉘른베르크재판에서사형을선고받고처형되었지만그아래외교관리들은서독외교부에다시등용이되기도했다. 2010 년에논쟁의중심에서게되었던 외무부와과거 라는책은외무관리들, 외교관들의행적과관련하여과거청산이다시이루어질수밖에없었음을알게해주는책이다. 독일에서이책을둘러싼쟁점은 1) 기본적문제의식에대한것, 2) 학문적엄밀성에대한것등으로나누어볼수있는듯하다. 그가운데 1), 즉이책의기본적문제의식에대한비판자들의태도는 진실은그중간에있다 라는모호한말로대변되는듯하다. 포스트모더니즘쪽에서자주이야기되는진실불가지론을반영하는것이기도하다. 한국사회일각에서내세우는 영혼없는공무원 론이 영혼없는, 단순한명령수행자로서의나치외무관료, 외교관 론과도일맥상통하는것이아닌가하는생각이든다. 단순한명령수행자로서의공직자론에대해최근독일에서진행되고있는논의가혹시있는지말씀해주시면참고가될것같다. 이와는별개로때로는일상사에대한지나친집착이역사상의모든문제를다자잘한것, 다양성이라는바다속에던져넣을수있는무수한등가물들 로만들어버리는경향이있는것은혹시아닐까, 그래서인륜과민주주의같은큰주제들을모두말아먹는일이생기는것은혹시아닐까하는생각도잠시든다. 역사학의방향이라는문제와관련하여다시고민할수밖에없는일이라생각한다. 2) 학문적엄밀성의문제는좀다른차원에서생각해보아야할것이다. 아무리과거청산이급한과제라고하더라도학문적엄밀성이결여되어서는안될것이다. 이책은학문적엄밀성부족이라는지적을받았다고하는데, 구체적으로어떤점에서그러한것인지발표자께서좀더설명을해주시기바란다. 이발표에서언급된에른스트폰바이츠재커는현대독일정치의명문가출신으로리하르트폰바이츠재커전서독대통령의아버지이다. 리하르트폰바이츠재커자신도 10 대후반의나이에나치군대병사로복무한적이있는데, 자신은 나이어린소년병에불과했다 고변명을한적이있다. 사실 10 대소년 109

에대해서는그렇게이야기하는것도충분히이해할수있다. 반면에른스트폰바이츠재커는저항세력과약간의관련을가지기도했지만이관련은그후끊어졌던모양인데어쨌건그가나치정권의고위인사로서나치의대외정책에협조하였던것은사실이다. 바이츠재커전대통령이부친의나치경력에대해어떤태도를밝혔는지소개해주셨으면좋겠다. 나치시대외교관의상반된태도와그후의상반된운명에대한비교는상당히흥미로웠고, 남의나라일같지가않았다. 콜베가정의로웠음에도독일외무관료들이그를배신자취급하는것은어쩔수없는민족주의의한계일수도있지만일종의 ( 나치와의 ) 공범의식의발로일수도있다고생각한다. 나치에격렬하게반대한끝에미국으로건너가미군위문순회공연을다녔던여배우마를레네디트리히도독일인들에게서비슷한대우를받았던것같다. 빌리브란트도노르웨이군장교로서나치독일군에맞서싸웠다는이유로조국의배신자라는비난을받기도했었다. 역사학계에서는이문제를어떻게다루고있는지여쭤보고자한다. 110 친일인명사전발간 2 주년기념국제학술회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