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말기 (1937 1940) 를중심으로 * ** 1) ( 상지대학교방송영상문화학과교수 ) 일제는중일전쟁발발이후내선일체론에근거한황민화정책을실시하고, 병참기지론에기반하는전쟁동원체제의구축을서둘렀다. 중일전쟁을위해서는조선인을동원할필요가있었고, 그러기위해서는조선인의황민화가이루어져야만했기때문이다. 또한일제는황민화와전쟁동원을위해전쟁의성격과목적을정당화하는시도를해야만했다. 본연구는이런일제의지배정책을다룬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의사설을분석한것이다. 먼저전쟁의성격과목적에관한사설에서두신문은중일전쟁발발직후한동안일본은부득이하게동양의평화를위해전쟁에나섰다고주장했고, 일본군의승전소식이있을때마다이를대대적으로선전했다. 1938 년말이후두신문은중일전쟁은동양을서구로부터해방시키기위한전쟁이고, 일본은그해방자라고주장했다. 다음으로황민화정책과관련해두신문은초기에는주로신사참배나궁성요배를정당화하고권유하는논조를보였을뿐이다. 이후두신문모두지원병제도에대해서는 완전한국민 이될수있는기회를얻었다고절대적인찬성입장을보였던반면에 3 차조선교육령에대해서는조선어교육의폐지를염려하며소극적이나마반대의사를표명했다. 1939 년에들어서서두신문모두 일본정신 을강조하며내선일체를적극적으로주장하기시작했다. 마지막으로전쟁동원정책에관한사설에서두신문은전쟁직후한동안자중을요구하는논조만을보이다가, 곧여기에서벗어나적극적으로전쟁협력을촉구하는논조를보이기시작했다. 1939 년에들어서서 일본정신 을기반으로하여적극적으로전쟁에협력해야한다는주장들이사설에서나타났고, 1940 년에가서는이제국가주의적이고전체주의적인동원체제를강력히주장하기에이르렀다. 이같은논조는일제의강력한언론통제와신문사내경영진및언론인의의식전환이모두작용한결과였고, 결국두신문이일제의지배방식에순응해독자들에게내선일체와전쟁협력을강요했다는역사적평가를듣게만들었다. 키워드 : 중일전쟁, 동아일보, 조선일보, 언론통제, 친일 * 이논문은 2001 년도상지대학교교내연구비지원에의한것임. ** ygpark@sangji.ac.kr
1. 일제하의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에대한기존연구들은대체로세가지경향을보여주고있다 ( 김민환, 1994). 첫째는, 일제하의두신문을 민족지 로보고민족운동을위해중요한역할을했다고평가하는관점이고, 둘째는두신문을비판적으로바라보며친일적성향까지보였다고평가하는입장이며, 셋째는, 두신문이당시의상황때문에한편으로타협적이면서다른한편으로는민족주의적이었던양면성을보여주었다고평가하는입장이다. 이렇듯일제하의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에대한기존연구들은상당히큰관점의차이를보여주고있다. 이러한일제하의두신문에대한기존연구들은대부분이신문의논조에대한체계적인분석을결여하고있거나, 또는그연구대상시기를 1920년대로한정하고있다. 즉, 1930년대신문의논조에대해체계적인분석을시도한논문은거의없었다. 더욱이 1990년대이후에는일제하의두신문에대한연구가거의이루어지지않다시피했다. 1) 최근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의일제하의활동에대한역사적평가가논란이되고있지만, 체계적인연구성과의부재로인해논의가크게진전되지못하고있다. 일제는식민지지배기간동안줄곧언론을통제하고이용하려는정책을실시했다. 다만시기에따라지배방식이부분적으로바뀐것과마찬가지로언론통제방식도다소의변화를보여주었을뿐이다. 일제는 1920년대에는문화정치를표방하며표면적으로나마어느정도언론자유를허용하는듯했지만, 1930년대에들어서서는매우강력한언론통제를가하기시작했다. 특히일제는 1937년에중일전쟁이발발하면서전시동원체제구축의일환으로서언론통제를더욱강화했고, 이로인해신문들의논조도더욱변질되어갔을것이다. 따라서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의일제하의활동에대해 1) 1930 년대신문의논조에대해어느정도언급을한것들로는최민지 (1978), 김민환 (1994), 최영태 (2004) 의연구가있고, 일제말기의언론에대한연구로는박용규 (2001) 를들수있다.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올바른역사적평가를하기위해서는 1930년대의논조를체계적으로분석하는것이반드시필요하다고할수있다. 일제말기의신문에대해연구가제대로이루어지지않은것은일차적으로는언론사연구의전반적인부진때문이다. 그나마몇안되는기존연구들이일제말기의시기를본격적으로다루지않은것은바로맞닥뜨리게되는 친일의상흔 을다루지않으려고했기때문일것이다. 2) 물론일제말기의시기를구체적으로다루지않았다는한계가비단언론사분야만의문제는아니었다. 다른분야의역사연구에서도일제말기의시기는대체로사각지대로남아있었다고해야할것이다. 그러나 1990년대들어서서일부분야에서이런한계를넘어서고자하는움직임이활발해졌다. 우선 1990년대중반이후역사학분야에서일제말기의지배정책에대한연구들이본격화되었다 ( 최유리, 1997; 변은진, 1998). 이런연구들은일제말기황국신민화 (, 이하황민화로약칭 ) 정책의성격과내용을밝혀내는데크게기여했다. 또한 2000년대이후문학사분야에서일제말기의작가나작품에대한괄목할만한연구성과들이나왔다 ( 김재용, 2002a; 하정일, 2003). 이런연구들은주로친일문학의성격과친일담론의내적논리를밝혀내려는시도들을했다. 이런연구들을통해단순히친일여부를따지는수준을넘어서서친일문제에대해더욱구체적인부분들을논의하는것이가능해졌다. 본논문에서는위와같은황민화정책과친일문학에대한기존연구들에힘입어 1937년이후부터폐간까지의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두신문의논조에대한분석을시도하려고한다. 특히본논문에서는두신문의일제말기의사설을세가지영역으로나누어그내용과그안에담긴내적논리를구체적으로살펴보려고한다. 이렇듯본논문은 1937년이후두신문의사설에대한구체적인분석을통해일제말기 동아일보 와 2) 미야다는일제말기의시기에관한연구가 긴공백의기간을가져야했던것은그상흔의깊음, 이문제의무거움과무관하지않다 고주장했다 ( 미야다세츠코, 1985, 1997, 158 쪽 ).
조선일보 의논조의특성과그배경을밝히고, 나아가이를토대로두신문의일제하의활동에대한역사적평가작업을진전시키는것을목적으로한다. 2. 1) 친일의논리와과정에대한기존연구 중일전쟁발발직전인 1936년 8월총독으로부임했던미나미지로 ( ) 는조선지배정책의기본이념으로 내선일체 ( ) 를내세웠는데, 이것은전쟁수행을위하여조선전체를 대륙전진병참기지 로만드는데있어서조선내부로부터분출될수있는저항을뿌리째뽑아버리기위한 정신적인면에서의정지작업 이었다. 즉, 내선일체론은대륙전진병참기지라는군사적경제적요구에입각한현실론적명제 였다 ( 최유리, 1997, 9 34쪽 ). 일제는신사참배, 궁성요배, 황국신민의서사제창등은물론 1938년의 3차조선교육령개정, 육군특별지원병제도의실시, 국민정신총동원운동, 1939년에조선민사령일부를개정해 1940년 2월부터시행한창씨개명등각종황민화정책을실시하며내선일체라는미명하에조선인을전쟁에동원하려고했다. 이러한일제말기의황민화정책과그것이조선인에게미친영향을집중적으로분석하기시작했던연구자로는우선미야다세츠코 ( ) 를들수있다. 미야다 (1985, 1997) 는중일전쟁이후조선에대한식민지지배의기본방침으로표방된내선일체가 조선사람을더욱완전한일본사람으로만들려는지배자의황민화요구의극한화 ( ) 와조선사람의황민화정도사이의모순괴리속에탄생 했으며, 동시에 그것은한국병합이래일본이조선지배의기본방침으로일관되게채용해온동화정책의필연적귀결 이라고주장했다. 또한미야다는내선일체론은일본인이주장한 동화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의논리로서의내선일체론과조선인이주장한차별로부터의탈출이라는논리의내선일체론이라는완전히이율배반적인논리를포섭하고 있었다고밝혔다. 미야다는일부조선지식인이전쟁을통해 압도적으로보였던일본의국위 앞에독립에의전망을잃어버리고, 차별로부터의탈출 을위해내선일체에나섰던 조선사람의복잡하고도굴절된황민화되는방법 을구체적으로연구할필요를제기했다. 미야다의이런문제제기는이후여러연구자들에게큰영향을주었다. 일제말기의황민화정책에대한연구는크게황민화정책의내용및그안에담긴내선일체의논리를밝히는연구와그런황민화정책이조선인에게어떤영향을주었는가를밝히는연구로나눌수있다. 최유리 (1997) 는징병제와참정권등에관한연구를통해 차별로부터의탈출논리로내선일체론을추종하던많은친일적인조선인들이등장하게되었고, 이들은다시일제에의해교묘하게포장된차별을내선일체라는이름아래다시유포시키고있었다 는점을지적했다. 변은진 (1998) 은일제말기조선민중의현실인식을살펴보며 내선일체논리에입각한황민화정책의일환으로제시 된 시국인식 의내용이조선민중에게전반적으로큰영향을주었다고보기는어렵지만, 일부지식인, 관료자본가지주 등이이런인식을갖게되면서친일에나섰을것이라는점을지적했다. 이런연구들을통해일부지식인들이내선일체론을자신의신념으로내면화해친일에나서게된과정을어느정도이해할수있다. 2000년대에들어서서본격적으로나타난친일문학에대한새로운연구들은위에서제기된문제들을더욱구체적으로살펴보고있다. 이런연구들은친일문학의성격을어떻게규정할것인가, 또한친일문학으로나아가게된과정은무엇인가하는문제로부터출발했다. 즉, 이런연구들은친일문학에대한기존의소박한이해를넘어서서친일문학의계기와논리를밝히는데주력했다. 이런변화는친일문학연구가 민족주의라는이데올로기적자장에서벗어나기시작 했고, 친일문제를순응이냐저항이냐는이분법으로단순화한과거연구의한계를극복하기위해식민주의를나름의내적논리
와체계를갖춘헤게모니담론으로새롭게규정 하기시작했다는것을의미했다 ( 하정일, 2003, 19쪽 ). 김재용은이런연구가시작되는데중요한역할을했다. 김재용 (2002a) 은우선친일문학을올바로규정하기위해서는일본어작품의집필, 친일적사회단체참여, 창씨개명등을기준으로삼는친일문학에대한소박한이해를넘어서야한다고주장했다. 그는 대동아공영권의전쟁동원과내선일체의황국신민화라는두가지입장을글에담아내면서선전한문학이바로친일문학 이라고규정했다. 나아가김재용 (2002b) 은친일문학은 자발적 이어야하며, 내적논리 를갖고있어야한다고주장했다. 또한그는앞서의논리를더욱구체화해친일문학의내적논리를 내선일체의황민화 와 대동아공영론의전쟁동원 이라고정리하고, 전자는중일전쟁에서일제가무한 3진을함락시켰던 1938년 10월이후에나타나기시작했고, 후자는태평양전쟁발발직전인 1941년 9월무렵부터나타나기시작했다고주장했다. 류보선 (2003) 은친일문학에대한연구가활발해지면서도정작친일문학에대해정확한정의가이루어지지않고있다는점을지적했다. 그는친일문학론은크게세단계로나누어전개된다고주장했는데, 그첫단계로 서구중심의근대성에비판과동양에의관심, 둘째 동양의중심으로서의일본의제시, 셋째 조선민족의일본국민으로의발전적해소 를들었다. 그는두번째, 세번째단계의논의는 반역사적인동시에반민족적이므로 친일문학이라고부를수있다고주장했다. 특히류보선은내선일체와전쟁동원을앞서서주장했던것이세번째단계라고규정했다. 세번째단계에해당하는경우를크게 철저일체론 과 평행제휴론 으로나눌수있다는주장도있다 ( 장용경, 2003, 238 245쪽 ). 즉, 차별로부터의탈출을위한일본인화 를주장하는경우와내선일체론에따른 조선인에대한차별철폐를 주장하는입장으로나눌수있다는것이다. 3) 3) 미야다는내선일체를제창한조선인사이에서가장논점이갈라지는부분이 조선고유의것 을어떻게하며내선일체에나설것이냐하는문제였다고지적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친일의과정과논리에대한기존연구들을검토해보면, 친일을단순히순응이냐또는저항이냐하는구도로만볼수없다는것을알수있다. 일부조선인들이중일전쟁의전개과정에서일본의압도적인군사적힘을보며독립에의희망을상실하고, 차라리차별로부터벗어나기위해내선일체를위해나서야겠다고판단한것이친일의내적논리였던것이다. 또한친일의내적논리는구체적으로서구중심의근대성에대한비판과동양에의관심, 동양의중심으로서의일본의제시, 조선민족의일본국민으로의발전적해소등의단계로나타난다는점도알수있다. 결국이런기존연구들을통해단순히친일여부를따지는것을넘어서서친일의과정과논리를밝힐수있는토대를마련할수있을것이다. 2) 연구문제와연구시각 본연구는중일전쟁발발이후신문들이일제의지배정책에대해어떤논조를보였는가를사설에대한분석을통해밝히려고하는것이다. 본논문은아래와같은연구문제에대해답하고자하는것이다. 연구문제 1: 중일전쟁발발이후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는사설을통해중일전쟁의성격과목적을어떻게규정했는가? 연구문제 2: 중일전쟁발발이후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는사설을통해황민화정책에대해어떻게평가했는가? 연구문제 3: 중일전쟁발발이후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는사설을통해전쟁동원정책에관해무엇을주장했는가? < 연구문제 1> 은중일전쟁의성격과목적을다룬사설에대한분석을 했다 ( 미야다세츠코, 1985, 1997, 172 173쪽 ). 식민지지배정책의이념적기반을제공하던녹기연맹은 1939년에 평행제후론 과 동화일체론 이모두일정한한계를지니고있다고비판했다 ( 박성진, 2003, 290 292쪽 ).
통해전쟁을어떻게정당화하고일본중심주의를주장했는가를살펴보려고하는것이다. < 연구문제 2> 와 < 연구문제 3> 은일제말기의지배정책, 즉내선일체론을내세우며황민화를강행하고, 병참기지론에입각해전쟁협력을강요하던정책에대해두신문이어떤논조를보였는가를살펴보기위한것이다. 중일전쟁의성격과목적을어떻게파악했는가하는문제는황민화정책이나전쟁동원정책에대한인식과긴밀한관련이있다. 따라서세가지의연구문제를살펴봄으로써일제말기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의논조의특성과그안에내재된논리를밝힐수있을것이다. 본논문은중일전쟁이발발한 1937년 7월 7일부터폐간된 1940년 8월 10일까지의두신문의사설을연구대상으로할것이다. 사설을분석함으로써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두신문의입장을가장잘파악할수있다고판단했기때문이다. 본논문은연구대상시기의전체신문사설중각연구문제와관련된사설들을선택해이를대상으로분석할것이다. 본논문에서는이런분석을위해친일의계기와논리에대해좀더살펴보고자한다. 먼저친일의계기와관련해서는 저항 과 협력 에대한결정이단순히강제성에의해서만이루어지지는않았을것이라는점을감안해야할것이다. 적어도강제와유인이어느정도결합된형태로저항과협력의문제를결정했을것이다. 특히 유인된자발성 이많은지식인들이친일의길로들어서는가장유력한경로였다고보아야한다 ( 김승환, 2004, 434 435쪽 ). 다만유인이 동의에근거 한것인지또는 무의식적으로포섭된 것인지에대해서는논란의여지가있을수있다 ( 하정일, 2003, 25 29쪽 ). 결국폭력을이용한강제와자발적인식전환이친일로들어서는계기였다고할수있고, 여기에때로는 권력욕 이작용하기도했다. 4) 조선인들을친일로유인했던대표적논리는 서구의근대를모방한일본 4) 권력욕 은 자신이속한분야단체의지도부 가되고자하는것으로, 주로종교문예단체에서나타났다 ( 이중연, 2003, 51 80 쪽 ). 물론 권력욕 과마찬가지로여러분야에서나타났을, 자신들의이익을보장받고자했던욕구들도때로는친일의계기로작용했을것이다.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의근대를다시닮고자염원 했던내선일체의이념이었다 ( 노영무, 2002, 455쪽 ). 물론식민주의의근대화계획이일차적으로조선인을유인하는데기여했던것만은분명하다 (Shin & Robinson, 1998). 일제말기에많은조선인들이 동양주의 에매료되어반서구, 인종주의적투쟁을정당화하는관점을드러내기도했지만, 이와같은입장도결국은 변형화된근대화론 이었다고볼수있다 ( 한도현김재용, 2003, 36 48쪽 ). 이들에게중일전쟁은 봉건에대한근대의승리 이며동시에 동양의서구에대한승리 이기도했다. 즉, 근대이든근대의초극으로서의동양주의이든일본중심주의의자장안에있어야만했다. 그래서조선인들은일제가만들어낸 질서지어지는위계를전제로하는동일화의수사학 에넘어갈수있었던것이다 ( 김성경, 2004, 127 128쪽 ). 한개인이생산하는문학담론과관련된저항과협력에관한논리를미디어담론에대입하기위해서는몇가지고려가필요하다. 미디어담론은 미디어와수용자를연결하는사회담론 의하나이기때문이다 (Bell & Garrett, 1998, 2004, 27 83). 즉, 미디어담론은사회적압력과요구, 미디어조직, 언론인의개인적인차원모두를아울러해석해야만한다는것이다. 우선일제말기의신문들은더욱강력해진일제의언론통제와조선인독자들의민족적욕구사이에서고민이없지않았을것이다. 5) 그럼에도불구하고두신문이친일논조를보였던것이전적으로강제의결과였다고볼수만은없다. 신문사의조직적의사결정의산물이며곧언론인들스스로의의식전환이영향을준결과라고보아야하기때문이다. 본논문에서는이런점을감안하며신문사설에나타난친일논조의내적논리를밝히고, 그것이지닌언론사적의미를살펴보고자한다. 5) 이와같은상황은실제로중일전쟁발발직후 조선일보 내부에서친일적인논조의전환이독자들의감소를가져오지않을까하는논의가있었다는것을통해서도잘알수있다 (, 1938, 9 10 쪽 ).
3. 1) 전쟁의성격과목적 중일전쟁발발직후한동안국민들의자중을요구하는논조만보이던신문들은곧전쟁의성격을왜곡하는데나섰다. 동아일보 는 황군은드디어화평해결의희망을방기하고전단 ( ) 을개시했다. 동아의평화는국민일체로희구하는바이지마는지나의태도가저러한한어디까지저를각성시키는것은국가적신념 이라고주장했다 (1937. 8. 20). 조선일보 도 지나의영토에대하여는척십 ( ) 도제국의욕 ( ) 하는바가아니다. 요는피 ( ) 의반성을구하는데있다 고주장했다 (1937. 8. 23). 전쟁의성격을처음으로언급한두신문의사설의내용은전쟁의일차적인책임은중국에있고, 일본은동아의평화를위해부득이하게전쟁에나서게되었다는것이었다. 이같은논조는일제의선전정책을그대로따른것으로서, 6) 이후에도사설에서지속적으로나타났다. 또한두신문은일본의승전소식을알리는데적극적으로나서기시작했다. 북방전선의황군은문자그대로승리에승리, 또전진의도를가하고있는지라이로써미루어생각하면중지 ( ) 전선에있어서의승리의쾌보도멀지아니하여접하게될것이니이어찌전일본국민을환희시키지않을수있으리오. 기뻐할것을기뻐하고축하할것을축하할줄아는것은사람의상정인지라오늘날까지침묵했다는것이오히려기이 ( ) 의감을줄정도이다 ( 동아일보, 6) 일제는 1937 년 7 월 17 일 지나사변에대한선전방책 을결정했는데 ( 변은진, 1998, 35 36 쪽 ), 그내용은이후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의중일전쟁보도에그대로영향을주었다. 위의선전방책에나와있고두신문의사설에그대로반영된, 중일전쟁이 동아의평화 를위한것이라는주장은 일본이중국을침략한역사적사실을애써합리화시키는일에지나지않았던것 이다 ( 김재용, 2002b, 61 쪽 ). 이렇듯일제는전쟁발발후보도내용에대한규제를더욱강화하는것은물론나아가이제는언론을적극적으로이용하려는정책도실시했던것이다.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1937 년 10 월 17 일자 ). 뒤이어 동아일보 는황군이 간난과모험과희생을두려워하지않고 전진해상해를점령했으며 (1937. 10. 30), 용맹과감한진격으로말미암아 남경이함락되었다고표현했다 (1937. 12. 12). 조선일보 도남경점령에대해 충용한황군장병 덕택으로 세계전사상에희유 ( ) 한 성과를거두었다고평가했다 (1937. 12. 12). 중국의수도였던남경함락에관해 동아일보 는 3번, 조선일보 는 2번씩이나사설로다루었다. 이후두신문은승전소식이있을때마다사설로다루며그의의를대대적으로선전하는논조를보였다. 7) 중일전쟁발발직후한동안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의사설은위와같이중일전쟁에대해두가지경향을보였다. 하나는중일전쟁이일본으로서는동양의평화를위해불가피한선택이었다는것이고, 또하나는일본은전쟁에서우월한군사력으로압승을거두고있다는것이다. 이와같은논조는황민화정책을효율적으로수행하며, 전쟁에대한조선인의협력을끌어내기위해반드시필요한것이었다. 1938년에들어서서는중일전쟁에대해 동아평화를확립하려는성전 ( ) 이라는표현까지나오기시작했다 ( 동아일보, 1938년 4월 26일자 ). 전쟁이장기화되면서두신문은중국을지원하는나라들을비판하는사설들을게재하기시작했다. 동아일보 는 금번사변은대일항전의실력이없는장정권만을상대로하는것이아니고그배후에있는제3국, 영불소 ( ) 등과싸우고있는것 이라고주장했다 (1938. 6. 25). 조선일보 도 지나라는곳은소련의공산주의와영국의자유주의적자본주의의경쟁장 이며 단호퇴치하여야할대사명하에성전 을시작했다고주장했다 7) 1938 년이후승전소식을다룬사설로는 동아일보 의 서주함락 (1938. 5. 21), 광동시입성 (1938. 10. 23), 한구함락 (1938. 10. 27), 해남도공략 (1939. 2. 12), 조선일보 의 서주점령 (1938. 5. 20), 광동함락 (1938. 10. 23), 무한돌입 (1938. 10. 27), 무한 3 진완전함락 (1938. 10. 29), 해남도점거의의미 (1939. 2. 13) 등을들수있다.
(1938. 10. 2). 이같은경향은 동양의마드리드 라고불리던무한 3진의함락후더욱강화되었다. 8) 조선일보 는무한 3진함락의의의를 첫째구미의존지나인에게동양인의위력을보여줄것이며, 둘째는그결과동아를동양인의세력권내로환원코자하는제국의이상이점차현실의단계에오르는것 이라고요약했다 (1938. 10. 19). 동아일보 도 외국의원장 ( ) 정책에도어떤중대한변화가없지 않을것이라고하며영불소의정책변화를예상했다 (1938. 10. 27). 조선일보 는이제전쟁의목적을동아의 정치적, 경제적, 문화적신질서를건설 하려는것이라고표현하기시작했고 (1938. 11. 4), 이미 1937 년 11월에독일, 이탈리아와방공 ( ) 협정을맺었던일본이 방공의두맹방과힘을합하여대업의유시유종을위하여일층분발치않아서는안된다 고주장하기도했다 (1938. 12. 22). 무한 3진함락이후 동아일보 에비해 조선일보 는훨씬적극적인논조를보이기시작했다. 9) 조선일보 는나아가 독일, 우 ( ) 는이태리, 일본의취해온온갖행동은모두합리화되고실재화했으니세계는정 ( ) 히신질서건설의과정에있다 고주장하기도했다 (1939. 3. 18). 이렇듯방공협정을맺었던일본, 독일, 이탈리아와중국정부를돕던영국, 미국, 프랑스, 소련과의대립이불가피하다 8) 김재용은 1938년 10월의무한 3진함락이조선의지식인들을친일로들어서게만드는중요한계기였다고주장했다. 상해, 남경에이어무한 3진마저일본에게무너지고중국국민당이중경으로이동하자, 일본에항거하는중국의노력은더이상불가능하고이제동아시아의질서는일본이주도할수밖에없다고판단했다는것이다 (2002b, 58 61쪽 ). 또한 1938년의 동우회사건 과 흥업구락부사건 도조선의지식인들이친일로돌아서는데영향을주었을것이다 ( 이중연, 2003, 56 62쪽 ). 이런요인들이언론인들에도영향을주어논조의변화로나타났다고볼수있다. 또한 1938년 4월에공포되어 5월부터는한국에서도시행되고있던국가총동원법도이미언론의논조변화에큰영향을주었다 (, 2002, 388 391쪽 ). 9) 총독부는황민화정책등에대해 동아일보 는 조선일보 에비해소극적으로다루었고, 미국이세계의경시총감격 이라고언급하기도했다고하면서불만을드러냈다 (, 1941, 7 16쪽 ). 실제로 동아일보 는사설에서미국을 세계민주주의지도국 이라고표현한적이있었다 (1938. 11. 19).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는주장이이후에도사설에서자주나타났다. 1939년에두신문모두천황생일인천장절을사설에서다루었는데, 10) 동아일보 는 전세계로하여금경이케하는전과는천황폐하의어능위 ( ) 의소연 ( ) 이라고표현했고 (1939. 4. 29), 조선일보 도 제일선의혁혁한무훈과현양되는국위도다이어능위의소사 ( ) 라고주장했다 (1939. 4. 29). 이런사설들은중일전쟁의전과를천황의덕택이라고하며, 천황제이데올로기의유포를의도하는것이었다 ( 변은진, 1998, 236 238쪽 ). 조선일보 는이제중일전쟁을서구의식민지로부터벗어나기위한성전으로주장하기에이르렀다. 금번사변의목적은정부의성명에명시된바와같이지나로부터항일용공을일삼는장개석정권을완전히타도하고지나로하여금영불미의반식민지적박반 ( ) 으로부터벗어나게하여동아신질서를건설함으로써일지양국민의정신적, 정치적, 경제적결합을완전히하여동양의영구적평화를확립하려는데있는바로금번성전의진목적은파괴에있지않고그반대인건설에있다 ( 조선일보, 1939년 7월 7일자 ). 이제중일전쟁은동양의평화를확립하기위해서구로부터동양을해방시키기위한전쟁이고, 일본은그해방자라고주장했던것이다. 1940년에들어서서 동아일보 는 황국일본은실로이탈취된아세아의천지를그들의질곡으로부터해방하여전아세아를문화의성지가되게 해야한다고주장했고 (1940. 2. 11), 조선일보 는 장개석정권의뒤에숨어지나를지배하고동양을백인의철제 ( ) 하에 두려는 백인제국주의 와맞서싸워동아의신질서를건설해야한다고주장했다 (1940. 3. 10). 이제 10) 1938 년에는 조선일보 만천장절을사설에서다루었지만, 1939 년과 1940 년에는두신문모두천장절을사설로다루었다. 1938 년에 조선일보 는천장절을사설에서다루면서천황부부의사진을함께게재했었다. 1939 년에 조선일보 는사진없이간단히다루었지만, 오히려 동아일보 는 1938 년의 조선일보 처럼천황부부의사진을함께실었다.
인종주의적대립을내세우는주장까지신문에서찾아볼수있게된것이다. 11) 1940년 3월에국민당정부로부터이탈한왕정위를내세워신남경정부가수립된이후이런논조는더욱빈번하게나타났다. 12) 조선일보 는신남경정부의수립에대해 전동아민족이백색제국주의의박반 ( ) 에서해방되는여명은왔다 고표현했고 (1940. 3. 30), 동양에서도몬로주의를실행하려면미국이든지또는어떤국가에서도그주의에대하여왈가왈부를하지못하게할실행력을가져야할것 이라고주장하기도했다 (1940. 7. 12). 동아일보 도 동아의맹주 로서일본이 동아의천지를아등의수 ( ) 로서수호하지않으면아니된다 고주장했다 (1940. 7. 3). 한편두신문은일본이서구로부터동양을해방시켜동양의새로운질서를만들어내는일이얼마나어려운가를강조하기도했다. 동아일보 는영불은물론이고미소까지중국정부를지원하기때문에 극동의자주원칙, 즉동아신질서건설운동의전도가얼마나용이치않은가는상상키에불난 ( ) 한바 라고하며그어려움을강조했다 (1940. 7. 7). 조선일보 도 제국이동아의맹주로서세기적위업인그신질서건설을위하여 전쟁을시작한지 3년이된날을맞아 국민은이중대시기에처하여금후더욱더긴장일억일심으로서유종의미를거두도록노력 해야한다고주장했다 (1940. 7. 7). 두신문은서구에맞서동양을해방시키려는일본의노력이큰성과를거두고있다고하면서도, 전쟁이쉽게끝나지않을것이라는전망을제시하며조선인들을계속전쟁에협력하도록만들려는논조를보였던것이다. 11) 전쟁직후이미 조선일보 는 만약극동에서대전이발발하면전쟁결과여하에따라서는황인종의정치적지반의전멸에의하여전동양의식민지또는반식민지화될수있으므로백인종의세계적지배는확호불발 ( ) 하게될것 라고주장한적이있었다 (1937. 7. 26). 12) 김재용은친일파시즘문학의두계기로무한 3진함락과신남경정부수립을들었다. 그는당시지식인들이신남경정부수립을 국민당의핵심인물이일본중심의새로운동북아질서를기꺼이받아들이려고 했던것으로인식하고영향을받았다고주장했다 (2003, 398 399쪽 ).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2) 황민화정책의실시 일제는조선인을전쟁에동원하기위해내선일체론에근거한황민화정책을실시했다. 신사참배는이미만주사변직후부터강요되어왔던일로서, 중일전쟁이발발한이후에더욱강력하게실시되었다. 13) 전쟁발발 2달뒤쯤 동아일보 는조선신궁에서개최된기원제행사를사설로다루었고 (1937. 9. 4), 애국일 제정을맞아조선신궁을참배하고학교에서는동방요배식을거행한것을들어 실로애국일에맞는성대하고의의있는 일이라고주장했다 (1937. 9. 7). 1937년 11월에 동아일보 는 국민정신작흥 주간을다룬사설에서그행사중하나인신사참배나동방요배를일상화할것을요구하기도했다 (1937. 11. 7). 조선일보 는신사참배강요에반대해폐교가결정된기독교계학교에대해어차피 폐교의운명에있는학교들 이라고하며일제의조치가불가피하다는입장을보였다 (1937. 9. 14). 또한뒤에도 조선일보 는다시 원래당국에서는신사참배를종교적신앙으로는보지않는다. 이것은어느국민이나어느민족을막론하고모두위하는조상숭배요위인숭배로본다. 그러므로총독부에서사무를취급할때에도종교에관한사무는사회교육과에서취급하고신사에관한사무는지방과에서취급하고있다 고주장하여신사참배강요를정당화하기도했다 (1938. 6. 5). 1937년말부터일제는조선교육령개정과지원병제도의도입을계획했다. 3차조선교육령의주요내용은내선일체를내세우며학제를통일한다는것이었지만, 실제로는황민화교육을실시하고조선어를폐지하는데그목적이있었다. 교육령개정안을내놓기전에이미일제는일본어한자와조선어한자를모두배우는것이이중부담이라는이유로조선어한자교육의 13) 만주사변이발발한 1931 년이후기독교학교들에대해서도신사참배강요가이루어졌다. 이런일제의기독교학교에대한신사참배강요로여러곳에서갈등이빚어지다가, 결국중일전쟁발발이후에는기독교학교의폐교로까지이어졌던것이다 ( 김승태, 2000).
폐지를발표했다. 이에대해두신문은조선어한자를배우지않는다면조선어를제대로사용할수없게된다고하며반대의견을표명했지만, 조선어한자폐지는그대로시행되었다. 14) 3차조선교육령논의과정에서조선어과폐지가거론되는것으로알려지자신문들은이에대해반대입장을밝혔다. 동아일보 는 내용에있어서교육과목의통일쇄신은원칙적으로는물론좋은일이나이원칙의적용이공학에있어서의조선어과의폐지와같은일을혹시결과하게된다면이점만은오인의크게반대하는바 라고주장했다 (1937. 10. 24). 조선일보 도 초등, 중등교공학설에는절대로반대하거니와조선어학대는절대로하지않는다고언명한당국이니만치공학설은전연무근한풍설일것을믿고의심치않는다 라고했다 (1937. 10. 24). 얼마뒤조선어를수의 ( 선택 ) 과목으로바꾸려고하는것이알려지자 동아일보 는 조선어과의폐지운운은이미논급한일이있는바같이조선의지역적특수성을무시하는것으로그불가함은재언을요치않는다 고재차반대의사를밝혔다 (1937. 11. 10). 조선일보 도조선어선택이줄어들면 조선어에대한조선인의지식이점점더얕아지고따라서조선문화의향상에도지장이되지않을까 우려된다는입장을밝혔다 (1937. 11. 11). 소학교를제외하고는조선어교육을선택과목으로전환하는것이확정되어가자 동아일보 는다시 당국자가통일과획일을혼동하지않는다면적어도조선어과를조선인학생에게나일본내지인학생에게일률적으로교수치않는일은없을줄로믿 는다는입장을보였다 (1938. 2. 27). 조선일보 도 조선인을내지인과같은수준으로교육시키고자함에있어서는만강 ( ) 의사의를표하지만그렇다고하여조선인이배울특수적교과목과조선인이누릴시설을없이한다는것은불가 하다고주장했다 (1938. 2. 24). 조선일보 는 1938년 3월 3일 3차조선교육령공포된이 14) 이와관련된사설로는 동아일보 의 조선식한문의폐지 (1937. 9. 1), 조선일보 의 조선어한문과폐지 (1937. 8. 31) 와 한문과폐지와그선후책 (1937. 10. 6) 을들수있다.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후에도다시 당국의국어보급정책상국어를치중하는점이나교육제도를획일화하려하는점 은이해한다고하면서도, 가정이나사회생활상잠시라도불가결한상용어에대한교육을등한시 해서는안된다고주장했다 (1938. 3. 5). 두신문은일본어가널리보급되어있지않은조선의현실을감안해조선어교육을폐지해서는안된다고주장했지만, 일제는바로일본어해독자가크게늘어나지않는그런현실을타개하기위해조선어교육의폐지를추진했던것이다. 조선일보 는일부소학교에서도조선어를선택과목으로돌리려고하는움직임이생기자, 조선어과의수의과문제는자칫하면민족의식문제나또는그유사문제로곡해되기 쉽기때문에거론하기어렵다고하면서, 자신들은단지 현실조선의특수사정을참작 해소학교만이라도조선어를필수과목으로두어야한다는입장일뿐이라고밝혔다 (1938. 10. 3). 또한 조선일보 는 조선인이전부국어를말하고서 ( ) 하기까지는상당한시일을요할지니그이전에교과서를통일한다면국어에서투른조선아동은자연양호한성적을나타낼수가없을 것이라고주장하기도했다 (1938. 12. 4). 그러나두신문은모두조선어교육폐지의중요한이유가되었던지원병제도에대해서는적극적인찬성의입장을보였다. 15) 원래문명된국민에겐세가지의무, 즉조세, 병역, 교육의의무가있다는것은여기서노노 ( ) 할필요도없는것이다. 그러므로위정당국자는이세가지의무를국민에게요구하는동시에국민이이의무를완전히수행함으로써줄바의권리를줄것이오그리하여완전한국민이되도록지도하지않으면아니될것이며또한국민으로말할지라도그국민적자격을완성하기위하여그받아야할권리를주장하는동시에그의무수행을각오할바이다 ( 동아일보, 1938년 1월 19일자 ). 15) 일제로서는조선인을병력자원화하기위해일본어해독능력의확대가절실했고, 그런이유도작용한결과로조선어교육의폐지를추진하게되었던것이다 ( 최유리, 1997, 158 159 쪽 ).
동아일보 의논조는의무를수행함으로써 완전한국민 이되도록노력해야한다는것으로서, 차별로부터의탈출 이라는논리로서내선일체론을주장한것이었다. 조선일보 도 이제조선인에게도지원병제도를실시한다는것은획시기적중대문제로내선일체의일현현 ( ) 이라볼수있다 고주장했다 (1938. 1. 18). 다시두신문은지원병제도를 조선민중도나서중대임무 를지게된것이며 ( 동아일보, 1938년 4월 3일자 ), 국민으로서의자격을취득하게된것 이라고주장했다 ( 조선일보, 1938년 4 월 3일자 ). 훈련소개소식을앞두고지원병제도에대해다시 동아일보 는 조선통치수뇌부의영단 ( ) 의소산 이라고표현했고 (1938. 6. 15), 조선일보 는 황국신민된사람으로서그누가감격치아니하랴 고주장하기도했다 (1938. 6. 15). 이렇듯조선인을전쟁에동원하기위한지원병제도에는적극적으로찬성하면서도조선어교육폐지에는반대했던것을감안하면, 두신문이민족의식때문에조선어교육폐지를반대했다고보기는어렵다. 일차적으로는조선어신문으로서의자신의전망에대한불안감이작용했을것이고, 16) 또한이른바 문화적민족주의 의희미한흔적이남아있기때문이었을것이다. 17) 어쨌든뒤에도 조선은찬란한수천년의문화를가졌다 거나 ( 동아일보, 1938년 6월 12일자 ), 오늘날조선에있어서는한편조선어의보급이일대필요사가되어있어정확한조선어의지식에대한요구가일층커 지고있다는주장이나온바도있었다 ( 동아일보, 1938년 7월 13일자 ). 또한 조선은장구한문화를말하고또오백여년의역사를가지게되는세계무비 ( ) 의조선문자를자랑 한다는주장이나오기도했다 ( 조선일 16) 일제는일본어해독인구의증가가조선인발행신문의미래에어떤영향을줄지에대해상반된견해가있다고밝혔다 (, 1940, 28 30 쪽 ). 그러나제한된독자를대상으로하는신문판매시장에서일본어해독인구가늘어난다는것은장기적으로는곧조선어신문의독자감소로이어질것이라고보는것이타당할것이다. 17) 문화적민족주의 의개념에대해서는로빈슨 (Robinson, 1988, 1990) 에잘정리되어있다.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보, 1938년 7월 13일자 ). 무한 3진함락이후인 1939년에들어서서조선어교육폐지에대한반대주장이사라진것은물론이고 18) 이제 일본정신 을강조하며내선일체를적극적으로내세우는사설들이나타나기시작했다. 동아일보 는 신무천황의어 ( ) 창업을추봉하여팔굉일우 ( ) 의정신천명을중심으로국체의존엄, 이상, 일본문화, 내선일체의정신발양에노력 해야한다고주장했다 (1939. 2. 8). 조선일보 도마찬가지로 일본제국의존엄한국체, 굉원 ( ) 한제국의이상, 일본문화의발양에노력 해야한다고주장했다 (1939. 2. 8). 이러한사설들에는먼저 일본고유의민족정신 을극찬하는장황한설명이앞세워졌다. 무릇일본정신은저물질중심의자본주의, 개인주의와도다르고전체가있은후개체가있다는파씨즘과도다르다. 일본정신은일본독특한국민성, 국민기질에의한것으로서타의모방우 ( ) 는추수를불허하는바니내선일체, 일만지 ( ) 협조등은다서양류의식민지사상과다르다. 학제개혁, 지원병제도의실시는그표현의일례라할것이다 ( 조선일보, 1939년 2월 11일자 ). 조선일보 는뒤이어 학제의통일, 지원병제도의실시등은아직시험기에지나지못하나내선일체, 상언 ( ) 하면조선의내지화를전제로하는것으로서종래의내지연장주의와는다르다 고주장하며적극적으로내선일체의필요성을주장했다 (1939. 5. 8). 동아일보 도 내선일체의구현으로서사변목적달성에비위 ( ) 가없기를바란다 고하며내선일체의중요성을강조했다 (1939. 7. 7). 그러나이렇듯내선일체의필요성을강조했던 19) 두신문은창씨개명을 18) 1939 년이후조선어교육문제를직접거론한경우는없고, 단지 조선일보 가경성제대의조선문학강좌존폐가논란이되자, 조선문학이나조선어의필요를말함으로써민족적편견으로보는사람도없지않은것같다 고전제하면서, 그러나이미조선어와일본어의어원연구를통해내선동근, 내선일체의학적근거가확립되어있는현실에서 편견과오해에괘념할바 가없다고하며조선문학강좌의존속을주장한사설정도가있을뿐이다 (1939. 2. 9).
포함하고있던조선민사령개정에대해서는거의언급하지않았다. 조선일보 만이조선민사령이 내선일체의진운에박차를가하기위함 이라고하더라도 당국의자문기관으로항상당국의시정에찬의를표하는중추원회의에서조차이신제도를반대한것은주목할현상이아니었던가 라고하며우회적으로반대입장을내비쳤고 (1939. 11. 10), 동아일보 는사설에서아예조선민사령을다루지않았다. 20) 이것은조선인들의반발이매우크고아직강제성이덜하던초기단계에서굳이나설필요가없다고판단했기때문이었을것이다. 1940년에두신문은모두기원절과천장절을사설에서다루면서이른바 일본정신 을기리고천황을찬양하는논조를보였는데, 이같은논조는내선일체를정당화시키기위한것이었다. 다만두신문은교육이나참정권문제와관련해차별철폐를주장하기도했다. 동아일보 는 오늘조선의민도가아무리저열하다한들저명치유신때보다못하다는것을말한다면그어찌정곡을얻었다하랴 라고하며차별철폐차원에서의무교육을서둘러실시할것을요구했다 (1940. 3. 20). 조선일보 도 인구가내지의 3분의 1에해당한조선에그학교수의 10분의 1인 2백7십교쯤만이라도급속히설립하라하는것이내선일체가진행되는금일어찌과분한요구랴 라고하며학교증설을요구하기도했다 (1940. 2. 17). 또 조선일보 는 민도의낮은것을이유로장차실시할것을언명 한참정권의확대가 단시일내에실현되기를바라는바 라고주장하기도했다 (1940. 2. 26). 이제두신문은철저히내선일체의실현에앞장서며, 아주간혹소극적으로차별철폐를주장하는논조를보이기도했다. 19) 경무국도서과는 1939 년 6 월에지시한 편집에관한희망및주의사항 에서내선일체에관한기사를 성의를가지고 다루고양도늘릴것을요구했다 ( 최준, 1993, 281 283 쪽 ). 20) 일제도두신문이창씨개명에대해 당초에는게재를기피하고싫어 했다고평가했다 (, 1941, 7 16 쪽 ). 경무국보안과촉탁으로활동하던조선인이 1939 년 11 월 18 일에창씨개명에관한 민심동향 을조사해보고한자료에도두신문의이런태도로인해 용이하게소기의효과를거둘수없 다고지적하고있다 ( 정주수, 2003, 96 98 쪽 ).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3) 전쟁동원체제의구축 두신문이모두중일전쟁을사설에서처음으로언급한것은 1937 년 7 월 16일이었다. 동아일보 는 때는바야흐로비상시인지라이런시국이면시국일수록우리의행동이자중스럽지않으면아니될것 이라고하며유언비어유포를경계했다 (1937. 7. 16). 조선일보 도 비상시에제하여가장무서운것은유언비어다. 그일사회에끼치는해독은대개막대한바가있다 고유언비어단속의필요성을강조했다 (1937. 7. 16). 이후에도 7월과 8월사이에 동아일보 는 4번, 조선일보 는 3번이나더유언비어를경계할것을강조하는사설을게재했다. 21) 실제로중일전쟁발발직후각종유언비어가유포되었고, 일제는이를단속하기에혈안이되었었다고한다 ( 미야다세츠코, 1985, 1997, 5 8쪽 ). 자중을요구하던수준에서벗어나이제두신문은적극적으로전쟁협력을촉구하는사설들을싣기시작했다. 먼저 조선일보 는 총후 ( ) 에선일반국민의정신, 물질양방면 의후원이필요하고 (1937. 8. 2), 견인지구 ( ) 의정신과거국일치의관념을가지고제반사업의진전을도 ( ) 하여 야만한다고주장했다 (1937. 8. 23). 동아일보 도 총후후원에성의를다하여써거국일치의실적을유루 ( ) 없이내지않으면아니 되고 (1937. 8. 20), 또한 거국일치적성의로당국을지지 해야한다고주장했다 (1937. 8. 22). 거국일치하고견인지구하여정신적, 물질적으로전쟁에협력해야한다는이런내용은이후에도매우자주나타났다. 또한 조선일보 는 국가의대사에적극적으로협력치아니하는자는이것을비국민으로, 즉차를환언하면적으로간주하게되는것 이라고하며전쟁에대한절대적인협조를강요하기도했고, 22) 동아일보 는아래와같이일본에 21) 동아일보 의경우 비상시국과일상생활 (1937. 7. 22), 유언비어의사회적영향 (1937. 7. 27), 전시체제하우리의태도 (1937. 7. 31), 말을삼가라 (1937. 8. 8) 등 4 번, 조선일보 의경우 시국과그인식 (1937. 7. 22), 전시체제들어서의각오 (1937. 7. 30), 유언비어의엄중취체 (1937. 8. 9) 등 3 번이다. 22) 현대전의특징 (1937. 8. 14) 이라는제목의이사설은서춘이쓴것이라고한
대한애국심까지요구했다. 어느나라를막론하고그나라의흥망성쇠의기본조건은국민의애국심일것이다. 국민의애국심이언제나발로되고있으면그나라는언제나흥하고성하는것이며일시라도마비되고있으면그때의그나라는쇠하고망하는것이다. 남녀노소할것없이직업을구별할것없이전조선적으로타오르는애국의열정은이국가중대의추 ( ) 에당연한발로라하겠지마는그래도보고듣는이로하여금감격하지않을수없게하는바이다 ( 동아일보, 1937년 9월 7일자 ). 두신문은곧전쟁으로인한경제적어려움을감내할것을요구하는논조를보이기시작했다. 조선일보 는전쟁으로인한증세를 요컨대본세 ( ) 는세제에투입된거국일치의표현 이라고했고 (1937. 8. 13), 동아일보 도 이비상시국에있어서국민생활은최저수준까지인내할각오가있지않으면아니될것 이라고주장했다 (1937. 9. 10). 특히총독의유고 ( ) 에서이른바 생업보국 이라는용어가사용되자신문들도곧이를다루어, 완전한거국일치적견지하에서국가가이용할수있는인적물적, 유형무형등의일절역량이동원 되어야하고 ( 동아일보, 1937년 9월 23 일자 ), 농어산민으로이중대시국에제하여황국에보답하는방도는무엇이냐하면그것은오직생산보국의네자의실행에있다 고주장하기도했다 ( 조선일보, 1937년 9월 23일자 ). 중일전쟁이발발하면서조선의병참기지로서의역할이강화된것을보여주는것이었다. 이후두신문은 1937년 10월 13일부터일주일동안있었던 국민정신총동원운동 부터시작해전쟁협력을촉구하는행사가있을때마다이를그대로사설로다루었다. 지원병제의실시에관한사설은두신문의전쟁협력에대한입장이가장잘드러난예중하나였다. 동아일보 는 이제도를더욱확충시키고발전시킴으로써장래에일반징병제에까지미치도록 해야한다고주장했다 다 (, 1938, 22쪽 ). 이문서에따르면서춘은중일전쟁초기 조선일보 의친일논조를주도하다사내의반발로 10월에퇴사한것으로되어있다.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1938. 1. 19). 조선일보 는 장래국가의간성 ( ) 으로황국에대하여갈충진성 ( ) 을하지않으면안된다. 그리하여서국방상완전히신민 ( ) 의의무를다하여야할것이다 라고주장했다 (1938. 6. 15). 이렇듯두신문은징병제실시를요구하고, 국방상완전한신민의의무를다하라고주장할정도로적극적으로전쟁협력을촉구했던것이다. 일제는 1938년에들어서서소비절약, 저축장려, 생활쇄신등을강조하며 4월에는 총후보국강조주간 을실시했고, 6월에는 물자동원계획 을발표했고, 8월에는 경제전강조주간 을실시했다. 그때마다두신문은관련내용을사설로다루어국민들의협력을요구했다. 23) 동아일보 는 경제전을강화함에는정부의힘으로만되는것이아니오오직국민전반의생활을통하여서실천하여야할것이므로이경제전에참가하고또이경제전에선전하여야할것은오늘의전시하에처한과제가되고의무가된다 고주장했다 (1938. 8. 21). 조선일보 도 일반국민이철저히각오치아니하여서는안될것은장기전에있어서최후승리를용이하게하기위하여경제력의충실을도 ( ) 할뿐만아니라장래에있어서의일본제국의비약적발전을위하여서도더욱더욱경제력의축적이절대로필요하다는것이다 라는입장을밝혔다 (1938. 8. 22). 지나사변의발발이래로총후국민의적성은여러가지형식으로나타났다고할수가있다. 혹은국방헌금으로혹은비행기의헌납으로혹은위문품과위문사절의파송으로혹은백의용사들의위안으로혹은출정장사가족의부호 ( ) 와위안으로혹은전몰장사영령의조의로혹은신사불전에기원으로각양각색으로다이적성의표현이아님이없다. 그러나아직도시국에대한인식이철저치못하고따라서성심성의가 12분실천과궁행으로표현되지못한감도 23) 동아일보 의경우 총후보국의강조 (1938. 4. 26), 재경정책의대전환 (1938. 6. 24), 경제전강조주간실시 (1938. 8. 21) 등이관련사설들이고, 조선일보 의경우 총후보국강조주간 (1938. 4. 26), 물자동원계획 (1938. 6. 25), 경제전강조주간에임하여 (1938. 8. 22) 등이관련사설들이다. 이런사설들의게재는언론기관을적극적으로선전도구화하고자했던일제의언론통제가작용한결과였다 (, 2002, 390 391 쪽 ).
없지않다 ( 조선일보, 1938 년 10 월 6 일자 ). 위의주장처럼조선인의전쟁협력이다양한방식으로이루어졌음에도불구하고 조선일보 는여전히더욱적극적인협력을요구했다. 무한 3진함락이후에도이를 일계기로하여종래의군사행동은소모장기전에대비하여경제전으로의신등장을보게된것 이라고했을정도로 ( 동아일보, 1938년 10월 30일자 ) 경제전 의필요성이높아졌기때문이었을것이다. 1939년에들어서서전쟁협력에대한요구는더욱적극성을띠게된다. 특히 일본정신 을기반으로하여적극적으로전쟁에협력해야한다는주장들이사설에담겨있었다. 24) 그예로서 조선일보 는 일본정신의발양 이필요하다고전제하며 모름지기일본국민은이기회에일단의정신진작으로써동아신질서건설에매진할각오를굳게하지않으면안될것 이라고주장했다 (1939. 2. 8). 동아일보 도 국민은정신을총휘 ( ) 하고국가의총력을겸발 ( ) 하여서일의매진 ( ), 사변목적달성을필기 ( ) 하여야할것 이라고주장했다 (1939. 4. 29). 나아가 조선일보 는 사상전의중대성 을강조하고 학교에있어서의스파르타교육도일종의사상전의연장으로서의사상교육 인만큼학생들을상대로하는사상적통제를실시할필요가있다는입장을보여주기도했다 (1939. 6. 24). 1939년여름에가뭄이극심해식량문제가대두되는등경제적어려움이가중되자일제는연말에 경제전강조월간 을실시했다. 이와관련해 동아일보 는 현대전의특질이경제전에있고, 이경제전을수행함에는물자동원이철저 하여야한다고하며, 사변목적달성 을위해 물자절약, 물자활용, 절미절약, 생활쇄신, 저축장려등에주력 해야한다고주장했다 (1939. 12. 2). 조선일보 도 현대의전쟁에있어서병력전보다못지않게중요한역할을하는것은경제전 이라고하고, 국가경제를위해서뿐만아니라 24) 이런사설로는 동아일보 의경우 정신발양주간 (1939. 2. 8), 육군기념일 (1939. 3. 10), 봉축천장가절 (1939. 4. 29), 조선일보 의경우 일본정신발양주간실시 (1939. 2. 8), 기원절 (1939. 2. 11), 육군기념일에제하여 (1939. 3. 10), 봉축천장절 (1939. 4. 29) 등을들수있다.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가정경제를위해서도지극히긴요한항목 들이니만큼 국민이항상각기실행 해야한다고주장했다 (1939. 12. 1). 나아가 조선일보 는 시난 ( ) 극복의의식하에그릇된관념은청산하고경제전사로서승리를기 ( ) 코국책에협력 해야한다고주장하기도했다 (1939. 12. 30). 두신문은조선인들의반발을고려했기때문인지 경제전 을위해요구하는항목들이단순히국가의필요때문만이아니고개인들에게도유익하다는점을빼놓지않고언급했다. 1940년에들어서서 조선일보 는 흥아성업 ( ) 이중도에있는것을명기하여불퇴전, 불요절의굳은결심으로용성매진치아니하면안될것 이라고주장했다 (1940. 2. 11) 또한 동아일보 도 현하동아신질서운동은제국미증유의대업으로그달성을위하여는전국민의이상한결의와국가총력의전면적지구적발양이절대필요 하다고주장했다 (1940. 3. 10). 3차고노에내각이출범한직후 조선일보 는더욱적극적으로전쟁협력을촉구하며 민주주의, 개인주의를청산하고국가주의, 전체주의의정신을주입 해야한다는입장을보였고 (1940. 7. 25), 또다시 강력주의, 집단주의이것이전체주의요, 국가주의요현대의세계를지배하는세력이다. 조선청년들도시대적사조에눈을떠야할것이다 라고주장하기도했다 (1940. 8. 10). 전쟁에대한협력을촉구하던것에서더나아가이제는국가주의, 전체주의를노골적으로내세우는논조로까지나아가고말았던것이다. 4. 일제는중일전쟁발발이후내선일체론에근거한황민화정책을실시하고, 병참기지론에기반하는전쟁동원체제의구축을서둘렀다. 중일전쟁을위해서는조선인을동원할필요가있었고, 그러기위해서는조선인의황민화가이루어져야만했기때문이다. 또한일제는황민화와전쟁동원을위해
서는끊임없이전쟁의성격과목적을정당화하는시도를해야만했다. 이런일제의지배정책에대해두신문은거의그대로순응하는논조를보였고, 지극히일부분에대해서만소극적인반대또는침묵을보였을뿐이었다. 우선전쟁의성격과목적에관한사설의내용을보면, 중일전쟁발발직후한동안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는전쟁의책임을중국에게전가하고일본은부득이하게동양의평화를위해전쟁에나섰다고주장했다. 중국을침략해놓고는동양의평화를내세워야했던일제의입장을반영한것이었다. 또한두신문은일본군의승전소식이있을때마다이를사설로크게다루었다. 조선인으로하여금전쟁의승리를확신시키고나아가일본의국위에압도되도록하기위한것이었다. 무한 3진이함락된 1938년말이후두신문은중일전쟁은서구로부터동양을해방시켜동양의평화를확립하기위한전쟁이고, 일본은그해방자라고주장하기시작했다. 특히 1940년에들어서면 조선일보 는중일전쟁이 백인제국주의 로부터의해방을쟁취하기위한전쟁이라는표현까지사용했다. 이제일본중심주의를기반으로하는동양주의가논조에서확실하게나타나게된것이다. 다음으로황민화정책에관한사설을보면,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는초기에는주로신사참배나궁성요배에대해이를권유하거나정당화하는논조를보였다. 두신문모두 1938년 3월에공포된 3차조선교육령과육군특별지원병제도에대해서는엇갈리는논조를보였다. 두신문은모두지원병제도에대해서는 완전한국민 이될수있는기회를얻었다고하며절대적인찬성입장을보였던반면에 3차조선교육령에대해서는조선어교육의폐지를염려하며소극적이나마반대의사를표명했다. 조선어교육폐지가지원병제도실시와긴밀히연관되어있었음에도불구하고두신문이반대할수밖에없었던것은무엇보다도조선어신문으로서의불안한미래가염려되었기때문이었을것이다. 무한 3진함락이후인 1939년에들어서서조선어교육폐지에대한반대주장이사라진것은물론이고이제 일본정신 을강조하며내선일체를적극적으로내세우는사설들이나타나기시작했다. 다만창씨개명에대해두신문모두소극적이었던것은조선인들의반발이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크고아직강제성이덜하던초기단계에굳이나설필요가없다고판단했기때문이었을것이다. 마지막으로전쟁동원에관한사설에서 동아일보 와 조선일보 는한동안자중을요구하는논조만을보이다가, 곧여기에서벗어나적극적으로전쟁협력을촉구하는논조를보이기시작했다. 특히두신문은거국일치하고견인지구하여정신적, 물질적으로전쟁에협력해야한다는내용을매우자주주장했다. 1939년에들어서서전쟁협력에대한요구는더욱적극성을띠게된다. 특히일본정신을기반으로하여적극적으로전쟁에협력해야한다는주장들이사설에담겨있었다. 특히경제전에이어서사상전의중요성을강조하며전쟁동원을위한사상교육의필요성을강조하기도했다. 1940년에가서 조선일보 는이제국가주의적이고전체주의적인동원체제를주장하기에이르렀던것이다. 일제말기두신문이이렇듯중일전쟁의성격과목적을왜곡하고, 황민화정책실시와전쟁동원체제구축에앞장설수밖에없었던데는분명일제의강력한언론탄압이작용했다. 일제의언론통제가과거에비해훨씬강화되었을뿐만아니라이제는언론을적극적으로선전도구화하려는단계로까지나아갔기때문이다. 그러나이런외부적요인만으로두신문의논조의변화를설명할수는없다. 폭력을통한강제 뿐만아니라언론인들의 자발적의식전환 이나경영진의현실적인이익을고려한판단등내부적요인도동시에작용했을것이다. 먼저동우회사건이나흥업구락부사건을통해위축되어있던가운데일제가무한 3진까지함락시키자언론인들의의식에큰변화가나타났다는점을지적할수있다. 25) 또한경영진이이미전체적으로민족운동이괴멸되다시피한상황에서독자들의민족의식도이전과는 25) 중일전쟁발발직후 조선일보 에서친일적논조를강화해야한다고주장하던주필서춘에반대했다고하는 ( 경성종로경찰서, 1938) 편집국장김형원이 1938 년 4 월에독립된회사로새로이출범하던총독부기관지 매일신보 의편집국장으로옮겨갔다는사실은매우큰상징적의미를지닌다. 무한 3 진이함락된이후인 1938 년말부터는문인이기도했던많은언론인들의친일단체참여나친일적글쓰기가본격적으로나타났다.
달리상당히변화되었을것이라고판단한점도작용했을것이다. 26) 두신문은전쟁발발초기부터전쟁의성격을왜곡하며황민화정책과전쟁동원정책을적극적으로지지하는논조를보였다. 특히 1938년말부터는동양주의를앞세우고그중심으로서의일본을강조하는논조를일관되게보였다. 또한그런변화와함께일본정신의수용을통해철저히황민화할것을요구하며, 적극적으로전쟁동원에나설것을촉구하여총독부기관지인 매일신보 와별다른차이가없다는평가를듣기도했다. 외부적, 내부적요인이결합된결과로나타난이런논조는조선인들에게황민화와전쟁동원을강요했다는점에서반민족일뿐만아니라반역사적인것이었다. 다만두신문이조선어교육폐지와창씨개명에대해소극적이나마반대를했거나아니면침묵한것은 평행제휴론 적인내선일체론의입장에서적어도완전한 민족말살정책 에대해서는적극적으로동조하지않았던것으로볼수있다. 결국두신문이일제말기에보여준논조를구체적으로살펴보면이것이단순히강요의산물이었다기보다는나름대로시대추세를읽고대응한것이었다는점을잘알수있다. 따라서두신문의일제말기의논조에대해서는단순히친일여부에대한논의를넘어서서친일의계기와논리에대해더욱구체적인분석을시도할필요가있다. 이제는언론사분야에서도항일과친일의단순한대립구도를넘어서서저항과협력의복잡한역사적과정을구체적으로파악하려는시도들이이루어져야한다. 물론이런연구과정에서 민족주의에의해악의적으로억압된부분 이있다면그것은당연히극복되어야하지만 ( 박수연, 2003, 58 60쪽 ), 저항과협력의복합적과정과그의미를구체적으로밝히기위해서도 민족주의적 문제의식은여전히유용하 26) 일제말기조선인들의민족의식에대해구체적으로밝히기는어렵다. 변은진 (1998) 은조선인들이일제의선전을그대로믿고따랐던것은아니지만, 일부지식인자본가관료등의경우변화된현실속에일제의선전을상당부분내면화했을가능성이있다고지적했다. 일제하의독자들이높은경제교육수준을지닌사람들이었다는점에서, 바로독자들의민족의식에상당한변화가있었을것이라고짐작해볼수있다 ( 김영희, 2001).
일제의지배정책에대한신문들의논조변화 다. 저항과협력의복합적과정을파악한다는것이, 항일과친일의단순구도를넘어서서좀더구체적인분석을시도하자는것이지결코친일에대해면죄부를주자는것은아니기때문이다. 김민환 (1994). 일제시대민족지의사회사상. 언론과사회, 제4호, 6 26. 김성경 (2004). 인종적타자의식의그늘. 민족문학사연구, 124호, 126 158. 김승환 (2004). 친일문학의자발성에대하여. 실천문학, 74권, 420 436. 김영희 (2001). 일제지배시기한국인의신문접촉경향. 한국언론학보, 46 권 1호, 39 71. 김재용 (2002a). 친일문학의성격규명을위한시론. 실천문학, 65권, 16 0 185. (2002b). 전도된오리엔탈리즘으로서의친일문학. 실천문학, 66권, 51 76. (2003). 멸사봉공으로서의친일파시즘문학. 실천문학, 69권, 394 412. 노용무 (2002). 친일시와식민담론. 국어교육, 109호, 445 469. 류보선 (2003). 친밀문학의역사철학적맥락. 한국근대문학연구, 7호, 8 40. 박성진 (2003). 사회진화론과식민지사회사상. 서울 : 선인. 박수연 (2003). 내재성부재의주체와문학적종착지. 친일문학의내적논리. 서울 : 역락, 51 83. 박용규 (2002). 일제말기 (1937 1945) 의언론통제정책과언론구조변동. 한국언론학보, 46권 1호, 194 228. 변은진 (1998). 일제전시파시즘기 (1937 1945) 조선민중의현실인식과저항. 고려대학교사학과박사학위논문. 이중연 (2003). 황국신민의시대. 서울 : 혜안. 장용경 (2003). 일제식민지기인정식의전향론. 한국사론, 49집, 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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