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박사학위논문 高句麗王都硏究 년 월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奇庚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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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박사학위논문 高句麗王都硏究 년 월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奇庚良

高句麗王都硏究 지도교수송기호 이논문을문학박사학위논문으로제출함 년 월 서울대학교대학원 국사학과 奇庚良 奇庚良의박사학위논문을인준함 년 월 위원장 ( 인 ) 부위원장 ( 인 ) 위 원 ( 인 ) 위 원 ( 인 ) 위 원 ( 인 )

국문초록 高句麗王都硏究 王都는왕이거주하며국무를주관하는지역이다. 이와유사한용어로 都城 이있다. 학계에서는일반적으로 도성 이라는용어가많이사용되고있지만, 삼국사기 를살펴보면고대삼국에서 도성 이라는용어가사용된예는매우드물다. 고대삼국에서國都를의미하는용어로일반적으로사용된것은 왕도 였다고판단된다. 고구려의첫왕도는卒本이다. 졸본시기고구려인들은산성인흘승골성 ( 오녀산성 ) 을시조주몽의건국지이자왕궁이소재한왕성으로인식하였고, 국가의례의중심장소로활용하였다. 또유리왕대기록에따르면평지에는여러곳에離宮이설치되어있었다. 졸본시기고구려인들에게왕도의중심장소로인식되었던것은오히려산성이었으며, 평지에조성된이궁들은산성에비해정치적중요성과상징성이결여되어있었다. 고구려왕도가졸본에서국내지역으로옮겨간시기신대왕시기로짐작된다. 국내지역에서처음왕성의역할을하였던곳은산성이었던丸都城이었다. 환도성은국가의례장소와왕의거소가결합된공간이었다. 환도성은 38년간고구려의왕성으로기능하였으나동천왕대인 247년관구검의침입을받아파괴되었다. 기록에따르면동천왕은새로평양성을쌓고백성과종묘사직을옮겼다. 이시기는낙랑군이건재한시기이므로동천왕이쌓은평양성이지금의평양지역이라고보기는어렵다. 동천왕이쌓은평양성이란集安의평지성을가리키는것으로이해된다. 왕성이산성에서평지로내려간것이다. 집안평지성은한동안평양성이라고불리다가고국원왕대부터국내성이라고불리게되었다. 고구려는장수왕대에한반도북부의평양지역으로왕도를옮긴다. 장수왕이평양지역으로왕도를옮긴 427년부터다시장안성으로이도한 586년까지의기간을전기평양성시기로명명할수있다. 이시기고구려왕도의중심지는대성산성일대였다. 그간학계에서는평지성-산성통설에따라비상시활용되는산성의역할을한것이대성산성이라고보는한편이와짝을이루는평지성이어디인지찾는작업이진행되었다.

주목받은평지성의후보지로는안학궁터와청암동토성이있다. 그러나안학궁터에서출토되는와당의편년을보면그시기가상당히늦다. 또한고구려중기의석실분을파괴하고그위에궁을세운흔적도확인되었다. 때문에안학궁이조영된시기에대해서는고구려후기, 혹은고려시대까지내려보는경우도있다. 또다른후보지인청암동토성에서는그간몇차례발굴조사가있었지만왕궁이아닌사찰의유적만확인되었을뿐이다. 왕궁이소재한왕성으로볼수있을만한결정적인근거는확인되지않았다. 周書 의기록을보면전기평양시기에평지성이존재하였다는언급은없다. 治所인평양성을산성으로묘사하는한편왕은그옆에따로집 [ 宅 ] 을지어놓았다는기록이있을뿐이다. 이는이시기고구려의왕성이산성이었음을의미한다. 고구려의왕은치소인평양성 ( 대성산성 ) 에머물되대성산남쪽평지에마련된별궁을오가며거주하였다고여겨진다. 長安城은 552년 ( 양원왕 8) 에축조를시작하여 586년 ( 평원왕 28) 에이도가이루어진후기평양성이다. 장안성축조에대한문헌기록은매우소략하지만축성당시새긴刻字城石이여러개출토되어이를보완해준다. 그간장안성연구를주도하였던것은현장에대한직접적인조사가가능한북한학자들이었다. 타국학자들은평양을방문하는것이어려웠기때문에북한학계에서제출한연구결과물에대해충분한검증을수행할수없었다. 그러나최근에는구글어스와같은지리정보소프트웨어를통해남한학자들도해당지역에대한관찰과분석이어느정도가능해졌다. 본연구에서는구글어스의이미지오버레이 (image overlay) 기능을이용하여장안성성벽이많이남아있었던근대초의지도를프로그램상으로불러와현재의위성사진과중첩하였다. 이를통해장안성성벽의정확한형태를복원하고, 성의둘레와거리등을컴퓨터상에서자유롭게측정할수있게되었다. 각자성석에새겨진축성거리에대해서도검증이가능해졌다. 장안성축성에는 35.6cm인고구려척이사용되었고, 1리 =1,000척의尺里法이이용되었음이확인되었다. 이는과거북한학자최희림에의해

이미주장된바있으나, 동북아시아에서일반적으로사용하였던 1리 =1,800척의척리법과는다른형태였기때문에의구심이남아있는상황이었다. 그러나구글어스를통해검증하여보니 23cm의漢尺과 35.6cm의高句麗尺을기준으로 1리 =1,800척의척리법을적용할경우각자성석에새겨져있는장안성성벽의축성거리는성립되지않는다는점이분명해졌다. 1리 =1,000척의척리법을적용할경우에만실제성벽의길이와부합하였던것이다. 그동안논란이분분하였던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1석의발견위치에대해서도새로운안을제시하였다. 해동금석원 에전하는김정희의글과 삼한금석록 의오경석이전하는바에따르면오탄에서각자성석이출토되었다고한다. 그러나제2석과제3석은外城남쪽의한사정에서출토된것이분명하다. 따라서오탄에서출토되었다는각자성석은제1석으로볼수있다. 제1석이발견된곳이오탄부근이틀림없다면, 제1석에새겨진내용은中城남쪽성벽에대한것이라할수있다. 중성남쪽성벽의축조시기에대해서는그간고구려당대축성설과고려시대축성설이팽팽하게대치하고있는상황이었다. 중성과외성에는격자형구획이조성되어있는데, 중성남벽을경계로양자간에 5도가량의각도차이가존재한다. 이는중성남벽이만들어진이후에격자형구획이이루어진증거로볼수있다. 중성과외성내부의격자형구획이고구려때의것이분명하다면중성남쪽성벽역시고구려때만들어진것으로보아야한다. 외성내격자형구획은장안성연구에서가장주목받고있는특성이다. 구획의기본형태에대해서는그간직사각형으로보는견해, 정사각형으로보는견해, 정양문과함구문사이만직사각형이고나머지는정사각형으로구성되었다고보는절충적견해가제시된바있다. 이중가장나중에제시된직사각형과정사각형이섞여있다는견해가최근까지수용되고있었으나, 본연구에서의검증을통해이연구에오류가있었음이확인되었다. 외성격자형구획을직사각형으로본연구들은잘못된가정을바탕으로연구를진행하거나, 정양문과함구문의정확한위치를파악하지못한상태에서현재의도로형태를기반으로실측을수행하였던것이었다.

외성의격자형구획은전영역이일관되게정사각형의모습을띠고있었다. 1929년작성된지도를바탕으로분석한결과한변의길이는 177.08m였던것으로확인되었다. 이를고구려척으로환산하면약 497.38척이다. 오차범위를감안하면한변 500척길이를기본으로하는정사각형의田자형구획들이만들어졌던것으로이해할수있고, 그내부는다시한변 88.54m(250척추정 ) 길이를가진정사각형의소구역 4개로구분되었던것으로파악된다. 장안성에서격자형구획이확인되는것은중성의일부구역과외성구역뿐이다. 왕궁의소재지로서장안성의핵심부라할수있는내성에서는정작격자형구획의흔적이확인되지않는다. 이는장안성내성과중성 외성의축조시기와목적에차이가있기때문이다. 각자성석분석에따르면내성이축조된시기는 566년 ( 평원왕 8) 이고중성과외성이축조된시기는 589년 ( 평원왕 31) 이다. 양자사이에 23년의시간적간극이확인된다. 기존에는장안성축조가내성과중성 외성을모두포함한거대한프로젝트의결과물이라보는경향이강하였다. 그러나실상은내성은왕실의별궁개념으로축조되었던것이고, 중성 외성의축조는 589년隋의중국대륙통일이라는미증유의사건과맞물려외부로부터의군사적위협에대응하는차원에서새롭게기획된것으로보아야한다. 내성과중성 외성의축성목적이달랐던것이다. 이때대성산성아래살고있던평양주민들을대거장안성으로이주시키며왕도의중심공간을옮기게되었으므로평양권역내에서의가까운이동이었음에도 移都 라는인식을가질수있었다. 주요어 : 王都, 都城, 平壤城, 長安城, 高句麗尺, 刻字城石, 격자형구획, 移都 학번 : 2010-30028

목 차 序論 (p.1) 一. 한국고대사에서의王都와都城 (p.22) 1. 왕도 도성관련용어의용례분석 (p.22) 2. 왕도와도성 왕경개념의설정과적용 (p.32) 二. 고구려전기왕도 (p.40) 1. 첫왕도졸본과초기왕도의경관 (p.40) 1) 졸본의위치탐구 (p.40) 2) 聖所졸본과고구려인들의왕도관 (p.54) 2. 환도 국내지역으로의왕도이전 (p.64) 1) 유리왕대천도설과해명태자설화 (p.64) 2) 3대왕대기록의신뢰성과산상왕대천도설 (p.73) 3) 更作新國과移都의의미 (p.81) 3. 환도성과국내성의기능과왕도의범위 (p.93) 1) 왕성및제의공간으로서의환도성 (p.93) 2) 국내성의성립과성내공간구조 (p.101) 3) 국내지역왕도의경계와범위 (p.114)

三. 고구려후기왕도 (p.128) 1. 새로운왕도평양과전기평양성 (p.128) 1) 平壤東黃城 의위치와성격 (p.128) 2) 왕성이자산성으로서의평양성 (p.137) 2. 후기평양성長安城의조영 (p.156) 1) 평양성출토刻字城石의판독과해석 (p.156) 2) 각자성석의위치추적 (p.176) 3) 장안성중성남벽의축조시기 (p.186) 4) 각자성석공사구간의추정 (p.193) 3. 장안성의공간구조와이도의성격 (p.208) 1) 외성내격자형구획에대한기존의논의 (p.208) 2) 외성내격자형구획의형태와단위 (p.216) 3) 중성 내성의구조와활용 (p.231) 4) 장안성축조의斷續性과이도의배경 (p.243) 結論 (p.253) 參考文獻 (p.261) Abstract (p.281)

표목차 표 1) 삼국사기 본기와잡지의국도관련용어사용빈도 (p.26) 표 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중국도관련용어의사례 (p.27) 표 3) 고려사 의국도관련용어 (p.29) 표 4) 삼국사기 삼국지 후한서 의내용비교 (p.77) 표 5) 집안지역출토권운문명문와당의시기적분류와판독문일람 (p.110) 표 6) 집안지역왕릉급고분피장자비정 (p.120) 표 7) 평양성각자성석의내용 (p.195) 표 8) 1929년석표도에서의석표간거리실측수치 (p.227) 표 9) 1929년석표도수치를이용한도로의폭산출 (p.228) 표 10) 장안성의도로와격자형구획수치에대한여러견해 (p.230) 그림목차 그림 1) 망강루출토耳飾 ( 좌 ) 과老河深 56호묘출토耳飾 ( 우 ) (p.43) 그림 2) 오녀산전경과평면도 (p.45) 그림 3) 기존에제기된환인지역의졸본위치추정지 (p.47) 그림 4) 하고성자성의평면도와남쪽성벽절개면 (p.49) 그림 5) 수몰전고력묘자촌일대의항공사진 (1964년 9월촬영 ) 과지형도 (p.56) 그림 6) 환인댐건설이전의오녀산및그동쪽계곡의위성사진 (1965년 5월 26일촬영 ) (p.60) 그림 7) 졸본의경관과주요지명 (p.61) 그림 8) 환도성및환도성내궁전지의평면도 (p.97) 그림 9) 고구려사찰유적의팔각형건물지사례 (p.99) 그림 10) 국내성평면도 (2003년기준 ) (p.106) 그림 11) 국내성남벽 (Tr.4) 단면도 (p.109) 그림 12) 국내성내권운문와당출토현황 (p.113)

그림 13) 집안지역의고구려건물지유적및주거유적 (p.115) 그림 14) 이수원자남유적출토유물 (p.116) 그림 15) 동대자유적평면도 (p.117) 그림 16) 집안지역의고구려왕릉분포 (p.119) 그림 17) 국내지역과국동대혈 (p.124) 그림 18) 국내지역주요물길의형태 (p.126) 그림 19) 동여도 에보이는목멱산과황성 (p.133) 그림 20) 평양지역왕도관련유적분포 (p.140) 그림 21) 청암동토성의형태 (p.141) 그림 22) 약수리벽화무덤의성곽도와안학궁터의도면 (p.143) 그림 23) 田中俊明이제시한주궁터와안학궁터 (p.145) 그림 24) 대성산성장수봉일대의집자리 (p.150) 그림 25) 대성산성및그남쪽의고구려고분군과안학궁터 (p.151) 그림 26) 안학궁터부근의도로망분포도 (p.153) 그림 27) 전기평양성시기왕도의범위추정 (p.154) 그림 28)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2석의탁본 (p.160) 그림 29)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4석사진 (p.169) 그림 30)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4석의출토당시모습 (p.170) 그림 31)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5석의탁본 (p.173) 그림 32) 평양성각자성석제4석과제5석의발견지점 (p.177) 그림 33) 평양성각자성석발견지점에대한기존연구자들의표시 (p.179) 그림 34) 오탄과한사정의위치 (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도-19세기 ) (p.182) 그림 35) 정양문부근에서출토된고구려초석위치 (p.189) 그림 36) 정양문지출토초석과부벽루고구려초석 (p.190) 그림 37) 평양성근대지도및항공사진과디지털복원도 (p.194) 그림 38) 제2석 한사정동쪽 12리 의척도별검증결과 (p.197) 그림 39) 35리에대한한척과고구려척거리환산 (p.198)

그림 40) 제3석 서쪽 12리 의거리측정 (p.199) 그림 41) 평양성각자성석제1석출토지에대한제견해 (p.201) 그림 42) 제1석 서쪽 11리 구간의계측과 중성미발견석 의축성구간 (p.202) 그림 43) 제5석의축성구간과제4석및 내성미발견석 의축성구간추정 (p.205) 그림 44) 제1석 ~ 제5석의위치와축성구간 (p.206) 그림 45) 한백겸의 箕田圖 (p.210) 그림 46) 한백겸의정양문-함구문사이구간기전개념도 (p.211) 그림 47) 리화선의 고구려평양성외성안리방복원도 (p.213) 그림 48) 한인호 리호의 평양성외성안의고구려리방복원도 (p.214) 그림 49) 평양성외성격자형구획복원도 (p.216) 그림 50) 운하물길이성벽의수문을통하여외성으로들어오는모습 (p.217) 그림 51) 고리문과육로문의위치 (p.218) 그림 52) 정양문과기자궁-기자정의위치상관도 (p.221) 그림 53) 한인호 리호의정양문과함구문사이거리측정에대한검증 (p.224) 그림 54) 1894년평양전투도에묘사된외성의격자형구획 (p.225) 그림 55)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성병풍도의중성격자형구획묘사 (p.231) 그림 56) 중성격자형구획과외성격자형구획의각도차이 (p.232) 그림 57) 내성과중성의성문과도로 (p.234) 그림 58) 평양중성서쪽지역에서의석전모습 (p.237) 그림 59) 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성도의주작문과함구문 (p.238) 그림 60) 만수대일대유적발굴지점 (p.239) 그림 61) 장안성의전체복원도 (p.242) 그림 62) 장안성축조및이도관련기록들의시차 (p.245)

序論 1. 문제제기와연구목적王都는왕이거주하며政治 軍事 外交 祭儀등國務를주관하는지역이다. 1) 이곳에서발현된국가권력의의지는나라곳곳에전파되어실체화되었다. 왕도는王權이발현되는상징적장소이자국가라는거대한사회적유기체의움직임을통제하는中樞로기능하였다. 고구려에서는수차례왕도의이전이이루어졌고, 그때마다새로운형태의왕도가조성되었다. 이는국가 사회의발전및변화와밀접하게연동된사건이었다. 고구려왕도를연구하는것이고구려사전개의중요한매듭을분석하는행위이자, 국가성격의변화를추적하는작업이기도한이유가여기에있다. 최근의고구려왕도연구는단순한위치비정등의단계를넘어고대의도시적공간으로서의왕도의존재형태및성격에대한탐구로구체화하고있다. 2) 역사연구에서소홀히다루어져왔던공간적요소에주목하며, 고대도시공간에서의인간의삶과관계망에주목해야한다는주장이한예이다. 3) 제한된문헌자료와고고학성과를통해연구를진행해야한다는점에서어려움이산적해있기는하지만이러한기조는매우유효하고연구자들간공감대를형성할수있는부분이라여겨진다. 역사연구에서공간의지위를복원하려는시도와함께눈에띄는또하나의경향은동아시아전체를시야에둔비교사적접근이다. 이는중국과일본등주변국의 都城史 연구와연계하여한국사에속하는고대국가의왕도성격을동아시아의보편적속성으로정리하려는작업이다. 1) 일반적으로 도성, 도성사 라는용어를많이사용하고있는데, 본연구에서는우리나라고대국가의국도를나타내는보편적용법으로는 왕도 라는용어가보다적절하다고보고있다. 이러한용어와개념문제에대해서는제 1 장에서자세히다루도록하겠다. 2) 도시 에대한정의는그자체로커다란연구주제가될수있을것이다. 도시의정의와기원에대해서는여러학설이존재하고있으나이글에서는편의상농업생산과자급의의무로부터벗어난고대의인구밀집지를 고대도시 의의미로사용하고자한다. 3) 余昊奎, 2007 三國時期都城史硏究의현황과전개 역사문화연구 26, p.144. - 1 -

고구려의경우는후기평양성이라할수있는 長安城 이주된비교대 상이된다. 4) 장안성外城에서北魏의洛陽城이래중국에서도성조영 의핵심요소로정형화된격자형구획이확인되기때문이다. 이같이정 연한주거지구역분할은한반도를거쳐 7 세기후반이후일본에서도수 용되어藤原京이나平城京등의조영에구현되었고, 동아시아고대도성 이지니는특성으로지목되었다. 그런데이러한비교사연구에는주의해야할요소들이있다. 우선용 어와개념에있어불안정한측면이있다는점이다. 중국과일본은물론 한국역사학계에서도널리통용되고있는 都城 이라는용어가대표적인 데, 이용어는발상지인중국에서는전통적인 都城觀 에따라, 그리고 일본에서는자국연구사내에서의특수한맥락에서사용되고있다. 하지 만한국학자들사이에서 도성 의개념이충분히합의가된상태라고 보기는어렵다. 학자들에따라서로다른개념을적용하는가하면유사 한용어인王都 王城등과구분되지않고혼용하고있기도하다. 보다精 緻한연구를위하여이들용어의개념에대해세밀한검토작업이선행 되어야할것이다. 주변국과의비교에집중하느라정작고구려왕도의고유한특성과변 화과정을구명하는데소홀한측면이있다는점도주의할필요가있다. 고구려왕도와주변국의그것을비교하여상호교류와영향의흔적을추 적하는것은분명유효하고필요한작업이다. 그러나고구려왕도의변 화발전이애초부터동아시아적공통성의획득이라는목적성을가지고 전개되었던것은아니다. 외부적요소와의결합이나주변국간상호영 향에주의를기울이더라도결국은고구려왕도자체의변화모습을추적 하는작업이중심적위치에있어야한다. 본연구의목적은다음과같다. 첫째, 고구려왕도가왕이평상시거 주하는평지성과비상시들어가농성하는산성의세트로이루어졌다는 기존통설의경직성을극복하는것이다. 이는 1914 년일본학자關野貞 에의해제시되어, 100 년이상일본뿐아니라한국과중국과학계에서 4) 김희선, 2010 동아시아도성제와고구려장안성 : 6~8 세기도성의가로구획방식을중심으로, 지식산업사. - 2 -

도통용되는鐵案으로자리하고있다. 평지성-산성세트설이지금까지통설적지위를점하고있는것은이견해가고구려왕도의모습과상당부분부합하는면이있고, 따라서설득력을확보하고있기때문이다. 그러나통설이도식화되어연구에선입견을주고있는것은문제이다. 예컨대과거고구려왕도지역에서산성이확인되었으니부근에는당연히여기에대응하는평지성이있을것이라전제한다든지, 고구려왕도에서평지성을중심적공간으로보고산성은철저히보조적인기능을가진부속시설로간주한다든지하는접근법이그러하다. 이러한선입견은고구려왕도의실체를파악하는데자칫장애물로작용할수있다. 이에본연구는통설에의존한도식적접근을지양하고문헌과고고학자료를보다충실하게해석하여고구려왕도의실상에접근하고자한다. 본연구의두번째목적은우리나라학계의고구려왕도연구에서가장큰장애물이라할수있는연구대상에대한접근성의난점을극복하는것이다. 고구려왕도유적은모두중국과북한영역에위치하고있다. 그나마중국의유적은방문자체는가능한반면북한에소재한고구려유적은연구자의實見이사실상불가능한실정이다. 지금까지는중국과북한에서출간된보고서와논저를최대한섭렵하는방식으로한계를극복해왔다. 그리고이러한방식이어느정도성과를내온것도사실이다. 하지만우리학계가계속이같은방식만을고수한다면연구의수동성을탈피할수없을것이다. 특히평양지역의왕도연구에있어서는북한학계의연구성과물을그대로옮겨소개하는수준에서벗어나기힘들다. 실제고구려후기평양성인장안성의구조에대한현재우리학계의이해수준은 1990년대북한이제시한틀에서거의벗어나지못하고있다. 이러한학문적停滯상태를돌파하기위해서는보다능동적으로연구를주도할수있는새로운도구의활용이필요하다. 이에본연구에서는 GIS(Geographic Information System) 와위성사진에기반한 google earth 프로그램을적극적으로활용하여, 기존연구들이가지고있던한계를극복하고보다진전된고구려왕도의상을제시하고자한다. - 3 -

2. 기존연구성과검토 1) 졸본 환도성 국내성연구사고구려왕도에대한연구는위치비정이라는역사지리의영역에서시작되었다. 고구려멸망후신라의공간적시야범위안에있던평양을제외한고구려옛왕도들은망각속에묻히게되었다. 이에후대인들이관심을가지고옛왕도의위치에대해推考하였던것이고구려왕도사연구의시작이다. 고려때역사서인 三國史記 에서는고구려의초기왕도였던紇升骨城과卒本의위치를漢이설치한玄菟郡의경계이자, 과거遼國의東京 ( 지금의요양 ) 보다서쪽에있었을것이라추정하였고, 國內城은金의경내에있었을것이나어디인지알수없다고하였다. 5) 三國遺事 에서는졸본을和州나成州로보는기존견해들을소개하는한편이를잘못이라논하고요동지역에있었다는주장을펼쳤다. 6) 이를통해고려시대부터이미고구려왕도의위치에대한여러의견들이형성되었음을알수있다. 조선초에편찬된 고려사 에서는 삼국유사 와달리성주를비류왕송양의옛도읍이라고하였고, 7) 동국여지승람 에서도성천도호부의건치연혁에서이곳이본래비류와송양의옛도읍으로紇骨山이나沸流江등의지명이남아있다고소개하였다. 8) 고려때부터존재하였던 졸본 = 성주 ( 성천 ) 설 이조선시대에이르러보편적으로수용된것이다. 국내성에대해서는압록강하류일대로비정하는시각이형성되었다. 9) 고려사 柳韶열전에따르면유소가처음북쪽국경에관방을설치하였다고하는데, 그위치는 서쪽해변의옛국내성계로부터압록강이바다로들어가는곳 이라고하였다. 동국여지승람 에서는이를더욱구체화하여의주목고적조에국내성항목을넣어국내성 = 의주설을 5) 三國史記 卷 37, 雜誌 6 地理 4. 6) 三國遺事 卷 1, 紀異 1, 高句麗. 7) 高麗史 卷 58, 志 12, 地理 3, 北界, 安北大都護府寧州, 成州. 8)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54, 平安道, 成川都護府. 9) 高麗史 卷 94, 列傳 7, 諸臣, 柳韶, 二年韶始置北境關防起自西海濱古國內城界鴨江入海處.. - 4 -

제시하였고, 10) 朴趾源의 熱河日記 에따르면의주건너편에있는금 나라때유적인九連城을국내성지로보는인식도확인된다. 11) 하지만 이러한견해들은조선후기에활동한역사지리를전문적으로연구한학 자들로부터비판의대상이된다. 安鼎福은 東史綱目 에서조선시대에널리퍼진 졸본 = 성천설 에 대해 후인들이다시상고해보지않고그대로잘못을전하니매우탄식 할일이다. 라고강하게비판하였다. 그는치밀한문헌고증을통하여 졸본이위치한곳이지금의興京지역이라고추정하는한편, 尉那巖城은 고려사 공민왕 19 년조에나오는 兀剌山城 ( 지금의오녀산성 ) 과같 은곳이라논증하였다. 또한환도는강계 이산등의강북쪽지역에있었 다고하였다. 12) 韓鎭書역시 海東繹史續 에서졸본은폐치된閭延郡의강건너편이 라고하였고, 국내성은滿浦鎭강건너편지역, 환도는楚山府강바깥 쪽이라하였다. 13) 丁若鏞은졸본을흘승골성으로보아지금의흥경경내 에있다고하고, 국내성은楚山府의북쪽강건너땅, 환도는滿浦堡의 북쪽압록강건너땅의높은산위에있다고보았다. 14) 이같은조선후 기학자들의연구는현지조사가결여되었다는점에서일정한한계를가 지고있었다. 하지만문헌만을이용한제한된연구만으로도고구려옛 왕도의위치를실제와상당히가깝게비정해냈다는점에서당시문헌 고증학의수준이상당히높았음을인정할수있다. 근대에들어서며고구려초기왕도연구는일본학자들이주도하게되 었다. 15) 가장이른시기이문제를다룬那珂通世는졸본을興京경내의 玄菟故城동남쪽에있을것이라보고, 국내성은압록강상류北岸인통 구 ( 지금의집안 ) 지방에있었다고하였다. 환도는졸본과국내성의중간 10)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53, 平安道, 義州牧. 11) 熱河日記, 渡江錄, 6 月 24 日辛未. 12) 東史綱目 附卷下, 卒本考 ; 國內尉那巖城考 ; 丸都考. 13) 海東繹史續 卷 6, 地理考, 高句麗. 14) 我邦疆域考 卷 8, 卒本考 ; 國內考 ; 丸都考. 15) 일제강점기일본학자들의고구려유적조사에대한내용은양시은이상세히정리해놓은바있다 ( 양시은, 2009 일본의고구려 발해유적조사에대한검토 -1945 년이전까지 일제시기만주사 조선사인식, 동북아역사재단.). - 5 -

지역으로서초산부의對岸부근을지목하였다. 16) 이는조선후기학자들의연구성과에서벗어나지못한것이었으나, 곧이어만주지역에대한현지조사가진행되면서연구는새로운국면에접어들게되었다. 만주의고구려왕도유적을처음방문하여조사를진행한연구자는鳥居龍藏이었다. 그는 1895년부터여러차례에걸쳐만주지역을답사하였는데, 특히 1905년에는집안지역을방문한후그내용을보고서로남겼다. 17) 곧이어 1906년에는집안지역板石嶺 ( 지금의판차령 ) 에서毋丘儉紀功碑의殘片이발견되었다. 이는환도성의위치를비정하는데있어핵심적인역할을하는물적증거의확보로여겨졌다. 18) 1914년에는東京帝大史學會에서발행하는 史學雜誌 지면상에서일본학자들간에연구사적으로중요한논쟁이전개되었다. 19) 1912 년 ~1914년초각각현지조사를진행한鳥居龍藏과關野貞는일본으로의복귀후강연회를통해그결과를진술하였다. 이에白鳥庫吉이논문을통해이들의주장에대해반론을제기하고, 鳥居龍藏과關野貞역시논문을통해자신의입장을재정리해발표하는방식으로논쟁이진행되었다. 鳥居龍藏은 1912년 9월 ~1913년 3월까지함경남북도와東間島를조사한데이어, 1913년 10월부터 1914년 3월까지만주와조선평안북도의일부에대한조사를수행하였다. 그는이러한실지조사를바탕으로관구검기공비잔편이발견된소판석령이환도산이라는松井等의견해를인정하였다. 동시에이곳에서성의흔적은확인되지않는다는점을들어환도성은환도산이아니라그동쪽의山城子라는곳에있었다고주장하였다. 산성자에남아있는성벽과내부의건물터흔적, 오래된기와등고고학적자료가그근거였다. 일명통구성이라불리는평지의石城에대해서는환도성의別城이라하였다. 16) 那珂通世, 1894 高句麗考 史學雜誌 5 9( 那珂通世, 1915 那珂通世遺書, 故那珂博士功績紀念會, pp.103-104.). 17) 鳥居龍藏, 1910 南滿洲調査報告, 三友社. 18) 松井等, 1911 國內城の位置につきて 東洋學報 1 2, p.76. 19) 이논쟁의전개과정에대해서는권순홍, 2016 고구려 도성제 론의궤적과함의 역사와현실 102, pp.192-199. 에서상세히소개하고있다. - 6 -

鳥居龍藏의연구는산성자산성을환도성으로지목한첫사례라는점 에서중요한의미를갖는다. 그의견해에서또한가지특기할만한점은 국내성의위치를집안지역이아니라회인현 ( 지금의환인 ) 의올라산성으 로비정한점이다. 그는 삼국사기 유리왕대기록에등장하는 국내 위나암 이곧 국내성 이라고보았고, 여기에위나암성 = 올라산성이라는 안정복의견해를수용하여 국내성 = 위나암성 = 올라산성 이라는결론을이 끌어냈다. 20) 關野貞은 1913 년 9 월에서 12 월까지한반도북부와집안일대의고구 려유적을조사하였다. 그는광개토왕비를비롯해고분등수많은고구 려유적이존재하는통구일대를국내성으로보는것이타당하다고주장 하였다. 평지의통구성과산성자산성을하나의구역으로보아넓은의 미에서국내성이라하되, 산성자산성만을지칭할때는특별히위나암성 이라불렀다는것이다. 關野貞의연구에서주목할점을과거평양지역의고구려유적을조사 하였던경험을바탕으로고구려도성이평지성과산성의조합으로이루 어졌다는인식을집안지역에도적용한것이다. 통구성은왕이평상시에 거주하였던평지성이고산성자산성은비상시에활용하는곳이라해석하 여, 이를고구려 도성 의특징으로개념화하였다. 환도성의위치에대해 서는鳥居龍藏과달리통구에서서남방향水路로약 16~17 리떨어진 楡樹林子口와약 20 리떨어진外察溝門의두곳을후보지로지목하였 다. 21) 다만그가지목한환도성위치는유적이나유물등의자료를근거 로한것도아니고실지조사를거친것도아닌, 지도를보고적당한입 지를찾은데불과하다는점에서뚜렷한약점을지닌것이었다. 白鳥庫吉은국내성을올라산성으로비정한鳥居龍藏을비판하며환도 는故國에대응하는新國이며, 고국에해당하는졸본내지홀본은비류 수인동가강 ( 지금의혼강 ) 유역에있었다고하였다. 그는기록에나오는 고구려건국지인흘승골성이곧올라산성이라하였다. 환도성은鳥居龍 藏의의견을수용해통구지역으로비정하였지만, 동시에關野貞이국내 20) 鳥居龍藏, 1914 丸都城及び國內城の位置た就きて 史學雜誌 25 7. 21) 關野貞, 1914 國內城及丸都城の位置 史學雜誌 25 11. - 7 -

성을통구지역으로비정한것도옳다고보았다. 환도성과국내성이동 일지역에대한이칭일뿐이라고인식하였던것이다. 이는환도성과국 내성을완전히별개의지역으로인식하여각각다른곳으로비정해왔던 기존의인식틀을깼다는점에서상당히의미가있는것이었다. 22) 3 인의일본학자들사이에서펼쳐진논쟁은과거에비해한층구체성 을갖춘진전된내용을담고있었고, 이후연구에도커다란영향을주었 다. 鳥居龍藏이산성자산성을환도성으로지목한점, 白鳥庫吉이환도 성과국내성을동일처 ( 집안지역 ) 로이해한점, 關野貞이고구려 도성 은평지성과산성의조합으로이루어졌다고분석한점은최근까지도연 구자들사이에서널리수용되고있다. 문헌고증및현지조사라는형태로진행되었던고구려초기왕도연 구는고고학조사를통해심화되었다. 20 세기전반기에는일본학자들에 의한조사와보고가이어졌지만, 23) 제 2 차세계대전이종전된이후에는 중국학자들이이를주도하게되었다. 1956~1958 년東北博物館文物工作隊와桓仁縣人民委員會文敎科가환 인현의혼강중류와부이강하류일대에대한고고조사를실시하였다. 이때오녀산성과그부근에존재하는高力墓子村의무덤군의관련성이 주목되었고, 무덤의연대는출토된유물들을통해漢代에서남북조시대 초기의것으로파악되었다. 24) 집안지역역시 1958 년에조사가이루어 져건축유적및수습된유물들에대한정리가이루어졌다. 25) 중국학계는 1970 년대후반까지이루어진고고조사내용을바탕으로 1980 년대에는고구려왕도의구조에대해나름대로정리된견해를제시 할수있게되었다. 우선오녀산성을흘승골성으로보는시각이통설화 되었다. 26) 여기에더해關野貞이제시한 평지성 - 산성 의조합이라는관 22)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 4 5. 23)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 1; 朝鮮總督府, 1919 大正七年度古蹟調査成績 朝鮮彙報 8 月號 ; 池內宏 梅原末治, 1938 通溝 上, 日滿文化協會 ; 池內宏 梅原末治, 1940 通溝 下, 日滿文化協會. 24) 陳大爲, 1960 桓仁縣考古調查發掘簡報 考古 1960 1, p.10. 25) 吉林省博物館, 1961 吉林集安高句麗建築遺址的淸理 考古 1961 1(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 26) 王承禮, 1984 吉林遼寧的高句麗遺蹟 考古與文物 1984 6; 魏存成, 1985-8 -

점을수용하여환인지역에서는하고성자성과오녀산성, 집안지역에서 는집안현성과산성자산성을세트로보는시각이확립되었다. 환인지 역의평지성인하고성자성은토성으로서원래漢代의城址였다가고구려 가이어서사용한것으로이해하였으며, 석성인집안현성역시시굴조 사결과하부에한대토성의흔적이있다고파악하고현도군에속한고 구려현이나서개마현의치소였을것이라추정하였다. 27) 위나암성에대해 서는新開河와渾江이합류하는지점부근에있는覇王朝山城으로비정 하는경우도있으나, 28) 위나암성 = 환도성이라는이해하에산성자산성 으로보는것이일반적이다. 중국은 1990 년대후반 ~2000 년대초고구려유적을세계유산에등록 시키기위해대규모정비사업을벌였다. 그과정에서고구려초기왕도 유적에대한집중적인발굴조사가이루어졌고그결과물은 2004 년에 보고서로발간되었다. 29) 이들보고서를통해오녀산정상부의건축유적 이기원전후한시기에조성되어사용되었음이재확인되었고, 1980 년대 이래국내성성벽아래에존재한다고여겨왔던漢代토성이사실은토 성이아니라고구려당시의성구조물의일부인것으로밝혀져기존연 구와는다른방향성이제시되었다. 북한학계의고구려초기왕도연구는활발하지않은편이다. 아무래 도자국내에유적이존재하는평양시기왕도에관심이집중되어있기 때문으로여겨진다. 초기왕도에대해서는환도성을흑구산성으로비정 하는돌출적인주장도존재하지만, 30) 대체로중국학계의통설을수용하 고있는분위기이다. 예컨대고구려가졸본도읍시기부터산성과평지 高句丽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 2; 李殿福 孫玉良, 1990 高句麗的都城 博物館硏究 1990 1. 27)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 2, pp.29-32. 28) 孫進己 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 黑龍江人民出版社, pp.411-412. 29)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編, 2004 五女山城 : 1996-1999, 2003 年桓仁五女山城調查發掘報告. 文物出版社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丸都山城 : 2001-2003 年集安丸都山城調查試掘報告, 文物出版社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囯內城 : 2000-2003 年集安囯內城與民主遺址試掘報告, 文物出版社. 30) 손영종, 1989 고구려남도 북도와환도성의위치에대하여 (2) 력사과학 1989 4, p.35. - 9 -

성의 고유한수도형식 을가지고있었고, 이것이 국내도읍시기 와 안학도읍시기 까지이어져발전완성되었다는시각이그러하다. 31) 졸 본에서국내지역으로의천도를유리왕대로보는한편정치 경제 군사적 측면에서천도의이유를설명하려는모습도확인된다. 32) 남한학계의고구려초기왕도연구는 1990 년대초까지그다지활발 하지않은편이었다. 초기중심지의위치나천도시기등에대하여제한 적으로언급한연구가있었을뿐이다. 33) 이는장기간지속된냉전체제 하에서중국및북한과의학술교류는물론현지조사의기회도제약을 받는상황이었기때문이다. 그러나 1992 년한중수교이후현지조사의 기회가대폭늘어나면서현장에대한접근성의난점은어느정도해소되 었다. 이에 1990 년대초중국학계에서이루어놓은성과물에대해정 리및소개하는단계를거쳐점차독자적인연구성과를축적할수있게 되었다. 남한학계의연구동향은크게두가지로구분할수있다. 첫번째는 왕도의위치에대한역사지리적탐구와졸본에서국내지역으로의천도 시기및성격구명에대한문제이다. 34) 이러한유형의연구는상호충돌 31) 김경삼, 1998 고구려초기의수도형식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 2, p.23; 김경삼, 2005 고구려도성의특징과력사적지위 고조선 고구려 발해발표논문집, 고구려연구재단, pp.168-172. 32) 리영식, 1995 고구려의국내성천도목적에대하여 력사과학 1995 4. 33) 李丙燾, 1956 高句麗國號考 서울大論文集 - 人文社會科學編 3(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 金哲埈, 1956 高句麗 新羅의官階組織의成立過程 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一潮閣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金映遂, 1958 高句麗國都考 全北大學校論文集 2; 徐永大, 1981 高句麗平壤遷都의動機 - 王權및中央集權的支配體制의强化과정과관련하여 - 韓國文化 3,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34) 姜仙, 1995 高句麗國都移動에關한一考察 - 建國初부터故國原王代까지 - 韓國學硏究 4; 노태돈, 1999 고구려의기원과국내성천도 한반도와중국동북 3 성의역사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 김종은, 2003 고구려초기천도기사로살펴본왕실교체 숙명한국사론 3; 琴京淑, 2004 高句麗國內城遷都의歷史的意味 高句麗硏究 15;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조법종, 2007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성연구 白山學報 77; 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의천도에관한약간의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권순홍, 2015 고구려초기의都城과改都 韓國古代史硏究 78; 임기환, 2015 고구려國內都城의형성과공간구성 - 문헌검토를중심으로 - 韓 - 10 -

하는문헌기록들에대한합리적인해석을추구하며, 인접학문인고고학을주요논거로활용하고있다. 고구려초기정치사와연동하여연구를진행하는경향도강하다. 두번째는고구려 도성 의구조에대한탐구이다. 35) 도성사 는 2000 년대들어크게부각된연구주제이다. 국내에서는신라의왕도였던경주, 백제의왕도였던서울한강유역, 공주 부여등에서발굴조사가이어지며성과물이빠르게축적되었다. 이것이고대삼국중하나인고구려 도성 에대한연구욕구를자극하였을것으로생각된다. 이웃나라인일본학계에서도동아시아사적인관점에서도성제가상당히주목되는연구주제인바, 이러한국제적인학술흐름에부합하는측면도있다고여겨진다. 36) 도성구조에대한연구는졸본이나환도 국내성기의왕도만을 國史學報 59; 李道學, 2015 三國史記 의高句麗王城記事檢證 韓國古代史硏究 79. 35) 車勇杰, 1993 高句麗前期의都城 國史館論叢 48; 임기환, 2003 고구려都城制의변천 한국의도성 - 都城造營의傳統 -, 서울시립대학교부설서울학연구소 ; 심광주, 2005 高句麗國家形成期의城郭硏究 고구려의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 ; 임기환, 2005 國內城시기고구려都城의구조 고조선 고구려 발해발표논문집, 고구려연구재단 ; 김희선, 2010 고구려국내성연구 白山學報 87;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여호규, 2013 고구려도성의의례공간과왕권의위상 韓國古代史硏究 71; 여호규, 2013 고구려도성제의구조 - 성격과백제도성제와의비교 - 백제도성제와주변국도성제의비교연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양시은, 2014 고구려도성연구의현황과과제 高句麗渤海硏究 50; 여호규, 2014 高句麗國內都城의구성요소와수공업생산체계 역사문화연구 52, 한국외국어대학교역사문화연구소 ; 여호규, 2014 고구려도성의구조와경관의변화 삼국시대고고학개론 Ⅰ, 진인진 ; 강현숙, 2015 고구려초기도성에대한몇가지고고학적추론 역사문화연구 56; 李道學, 2015 三國史記 의高句麗王城記事檢證 韓國古代史硏究 79. 36) 일본학계에서는중국의도성제와그영향을받은일본의도성제, 그리고그사이에서중개지로서의역할을수행했다고여겨지는한국의도성제에대해연구들이진행되고있다. 따라서주된관심은고구려평양시기이고졸본이나환도 국내시기에대한연구는많지않다. 일본학계에서평양시기이전왕도에대한주요연구는다음과같은것들이있다. 武田幸男, 1989 丸都 國內城の史的位置 - 所在論から歷史論への試み -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 田中俊明, 1995 前期 中期の王都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 田中俊明, 1998 高句麗の前期王都卒本の構造 高麗美術館研究紀要 2; 千田剛道, 2013 集安山城子山城と高句麗中期都城 文学 芸術 文化 : 近畿大学文芸学部論集 24-2. - 11 -

독립된연구대상으로여기기보다평양시기의그것과연계하여종합적 으로흐름과변화를살펴보려는경향이강하다. 2) 평양시기왕도연구사 평양지역은과거고조선의중심지이자낙랑군이설치되었던곳으로, 고구려후기의왕도이기도하다. 고구려멸망이후크게쇠락하기는하 였으나지리적으로통일신라의북변에해당하였기때문에졸본이나환 도 국내처럼위치에대한기억을망실하는일이발생하지는않았다. 더구 나고구려계승을표방한고려시기에이르면西京으로서의위상을부여 받으며다시크게번성하였다. 고려사 지리지서경유수관평양부의연혁을보면이곳에옛성터 가 2 곳있다고하면서하나는箕子가쌓고내부에井田制로구획을한 곳이고, 하나는고려성종때쌓은곳이라구분하고있다. 37) 이는고구 려후기장안성의흔적을말하는것이다. 동국여지승람 에서도평양 성외성에있는격자형구획을기자정전의흔적으로설명하였다. 이와 더불어대성산 동북쪽 에있는둘레 5,161 척, 높이 19 척의토성을장안 성이라지칭하며성안에安鶴宮옛터가있다고하였다. 38) 이는지금의 안학궁터를의미하는것인데, 실제로안학궁터는대성산의남쪽에자리 하고있으므로 동북쪽 이라는위치설명은오류이다. 여하튼조선시대 에는이안학궁터를고구려평원왕 28 년에옮긴장안성으로잘못이해 하고있었는데, 이러한오해가발생한이유는평양성외성을기자의정 전지로파악하며역사적연원이더오래된곳으로인식하였기때문으로 짐작된다. 조선중기의인물韓百謙은평양외성의격자형구획을상세히조사하 여 箕田圖 를그려남기고이에대해논하는 箕田說 을서술하였다. 하지만평양외성의격자형구획은 井 의형태가아니라 田 의형태였 기때문에이것을과연孟子가이야기한井田制와같은것으로볼수있 을지에대해학자들간에논의가분분하였다. 39) 이에정약용은이유적 37) 高麗史 卷 58, 志 12, 地理 3, 北界, 西京留守官平壤府. 38)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51, 平安道, 平壤府. - 12 -

은기자의정전이아니라고구려가멸망한후이곳에주둔하였던唐軍이 屯田을설치한흔적이라고주장하였다. 정약용이제시한둔전설도실상 과는거리가있는것이었으나, 명확한근거없이평양외성의유적을기 자의정전지로간주하고보는행태에대해 옛것을좋아하는어리석음 이라한것은당시학자들의태도를아프게꼬집은것이라할수있 다. 40) 평양지역의고구려왕도에대한근대적연구를주도한연구자는關野 貞이다. 그는 1902 년에이미조선의석조물과건축유적에대해조사를 수행한바있었으나, 이는한반도중남부에국한된것으로평양의고구 려유적을다루지는않았다. 41) 그는 1909~1915 년통감부및조선총독 부산하에서조사단을꾸려한반도전역과남만주일대를조사하였는데, 이시기평양지역에대한조사도수행되었다. 關野貞조사단의활동을 바탕으로출간된것이 朝鮮古蹟圖譜 인데, 평양지역고구려유적에 대한자료는 1915 년출간된제 2 권에실려있다. 42) 다만여기실린자료 의대다수는고분과관련한것이어서평양지역유적에대한관심이왕 도 왕성보다는고분에쏠려있었음을알수있다. 이시기평양지역에서는새로운고구려금석문이발견되었다. 1913 년평양경제리에서도로를건설하는과정에서대동강에면한내성의동 벽을허물다가각자성석이출토된것이다. 43) 이는통상평양성각자성석 제 4 석으로불리는것으로, 小兄文達이서북쪽방향의축성을맡는다는 내용을담고있다. 고구려왕도와왕성에대한연구가본격화된것은 1920 년대후반즈 음부터이다. 關野貞은그간평양지역에서이루어진조사내용을바탕으 로종합적인연구결과를내놓았다. 44) 그는고구려의 도성 구조는산 39) 韓百謙, 箕田說 ; 星湖僿說 12 卷, 人事門, 箕子田 ; 東史綱目 附卷上, 考異, 平壤井田 ; 練藜室記述 別集, 11 卷, 政敎典故, 田制. 40) 丁若鏞, 跋箕子井田圖, 其謂之井田者好古之愚也.. 41) 關野貞, 1904 韓國建築調査報告 ( 東京帝國大學工科大學學術報告 6 號 ), 東京帝國大學工科大學. 42)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 2. 43) 淺見倫太郞 1914 大同江岸發見の高句麗故城石刻 朝鮮及滿洲 83. 44)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13 -

성-평지성의조합으로이루어져있다는기존의견해를재확인하는한편장수왕대평양으로천도한이후에는산성에해당하는대성산성과평지성에해당하는청암리토성을중심으로도성이운영되었다고하였다. 대성산성남쪽기슭에자리하고있는안학궁은고구려후기의별궁이라고보았다. 關野貞의연구와발맞추어 1929~1930년에는조선총독부에서 1919년부터순차적으로출간하고있던 古蹟調査特別報告 의제5책-상 하권에서고구려시대의유적을주제로다루었다. 청암리토성 대성산성 안학궁토성 평양외성에대한각종사진과도면자료들을실어소개한것이다. 45) 1930년대에는민간의기부를받아운영되었던朝鮮古蹟硏究會를중심으로조사가진행되었다. 이들이왕도연구와관련해거둔대표적인성과는 1935~1936년에평양성내성의만수대일대에서이루어진발굴이다. 46) 이곳은關野貞이고구려왕궁의후보지로꼽았던곳중하나로, 조선시대에는평안도관찰사가머무는감영이자리하고있던곳부근이다. 이일대에서는고구려시기門址와대형건물지가확인되었다. 보고자는이건물지가고구려시기에조성되었으며, 멸망이후황폐해졌다가고려시기에이르러다시중수되어사용되었을것이라추정하였다. 1938년에도중요한발굴성과가있었다. 關野貞이장수왕대의평지성이자왕궁지로지목하였던청암리토성에대한발굴조사가진행되었던것이다. 47) 발굴과정에서상당히큰규모의건물지가확인되었는데, 중심부에팔각형의건물지가있고그주위를여러건물이둘러싸고있는모습을갖추고있었다. 보고자는이지역에살고있는노인의증언을통해이지역이옛날부터金剛寺터라는전승이있음을확인하고, 주변에도金剛灘이나塔峴이라는지명이남아있음을소개하였다. 이곳에있었 45)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之遺蹟 圖版上冊 ( 古蹟調査特別報告第 5 冊 ); 朝鮮總督府, 1930 高句麗時代之遺蹟 圖版下冊 ( 古蹟調査特別報告第 5 冊 ). 46) 小泉顯夫, 1938 平壤萬壽臺及其附近の建築物址 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47) 小泉顯夫, 1940 平壤淸岩里廢寺址の調査 昭和十三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 14 -

던것은關野貞의추측과달리왕궁이아니라사찰이었던것이다. 1945년광복이후에는북한이평양지역고구려왕도에대한연구를주도하게된다. 북한에서평양지역왕도연구를대표하는연구자는채희국과최희림이다. 채희국은평양지역고구려왕도연구를선도한인물로, 1957년논문에서안학궁터를후대의것으로보는關野貞의의견에반대하며대성산성과긴밀하게연관된곳이자왕이일상적으로거주하는곳이라주장하였다. 청암동토성에대해서는평양천도이후부터장안성으로옮길때까지정치 종교시설의중심지로서, 대성산성 안학궁터와함께고구려수도의중요한부분이었을것이라하였다. 48) 그는이후에도대성산성과안학궁일대에대한굵직한발굴조사를주도하였다. 49) 채희국이대성산성과안학궁을중심으로연구를진행하였다면장안성연구를주도한인물은최희림이다. 그는 1964년평양성내성에서새로운각자성석을발견한장본인이기도하다. 이각자성석은제5석으로, 평양성의외성뿐아니라내성부분도고구려시기에축조된것임을실증해주는획기적인자료이다. 최희림은장안성에대한연구성과를연이어내놓았는데, 50) 그의견해는각자성석을발견한당사자라는점에서상당한권위를가지게된것으로보인다. 예컨대채희국은본래평양성중성의남벽이고려시기에축조된것이라는關野貞의의견을따르고있었으나, 51) 최희림이고구려당시에쌓은성벽이라는의견을제시한이후이 48) 채희국, 1957 평양부근에있는고구려시기의유적 - 고구려평양천도 1500 주년에제하여 문화유산 1957-5, pp.8-10. 49) 채희국, 1963 대성산 - 평양성, 조선로동당출판사 ; 채희국, 1964 대성산일대의고구려유적에관한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대성산성일대의유적에대한또하나의중요한조사보고서로김일성종합대학에서나온것이있다 ( 김일성종합대학고고학민속학강좌, 1973 대성산의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부.). 채희국은김일성종합대학의교수였으므로이보고서역시그가주도하였다고생각된다. 50) 최희림, 1967 평양성을쌓은년대와규모 고고민속 1967 2; 최희림, 1967 고구려평양성 ( 장안성 ) 의성벽축조형식과시설물의배치상태 고고민속 1967-3;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 백과사전출판사. 51) 채희국, 1965 평양성 ( 장안성 ) 의축성과정에대하여 고고민속 1965-3, p.23. - 15 -

를수용한모습을보인다. 52) 장안성에대한최희림의견해가북한에서통설화된것이다. 1980년대들어북한학계의관심은안학궁과평양성외성에보이는도시리방제도에집중되었다. 53) 이시기주목되는것은한인호의연구인데그는안학궁부근에도평양성외성에있는것과같은격자형구획이있다고하며, 고구려가안학궁을왕궁으로쓰던시기에도리방제를운용하였다고하였다. 그러나이러한주장을뒷받침할고고자료가충분히제시되지않아선뜻수용하기에는의문이남는상황이다. 1990년대들어서면북한학계의관심이고구려보다고조선쪽으로옮겨가는경향이보인다. 이는 1993년단군릉발굴과관련된것으로짐작된다. 고구려왕도에대한연구가다소활력을잃은듯보이는가운데평양성성벽일부와청암동토성에서몇차례의조사와연구가진행되었다. 54) 그러나기존통설에영향을미칠만한획기적인연구는없었으며, 고구려유적보다그아래존재하는고조선유적을찾는데관심을두고있다는느낌이없지않다. 남한학계에서는평양지역천도에대한연구가하나의중요한흐름을형성하고있고, 55) 앞서와마찬가지로고구려 도성 의구조에대한탐구 52) 채희국, 1982 고구려력사연구 - 평양천도와고구려의강성,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pp.157-158. 53) 리화선, 1980 안학궁의터자리복원을위한몇가지문제 력사과학 80 1; 전제헌 손량구, 1985 고구려력사연구 - 안학궁유적과일본에있는고구려관계유적, 유물,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 한인호, 1987 우리나라중세도시리방제도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87 2; 리화선, 1989 고구려평양성외성안의리방의형태와규모그전개에대하여 력사과학 1989-1; 한인호 리호, 1991 안학궁터부근의고구려리방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 4; 한인호 리호, 1993 평양성외성안의고구려도시리방과관련한몇가지문제 조선고고연구 1993-1; 한인호, 1998 안학궁부근의고구려수도도시면모에대한복원 조선고고연구 1998 2; 남일룡, 2006 고구려안학궁성건축의특징에대한몇가지고찰 조선고고연구 2006 2. 54) 남일룡 김경찬, 1998 청암동토성에대하여 (1) 조선고고연구 1998 2; 최승택, 1998 새로발굴된평양성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4; 남일룡 김경찬, 2000 청암동토성에대하여 (2) 조선고고연구 2000 1; 손수호 최응선, 2002 평양성, 고구려돌칸흙무덤발굴보고, 사회과학출판사 ; 리광희, 2004 청암동토성에서새로발견된수기와의연대 조선고고연구 2004 1. 55) 李丙燾, 1956 高句麗東黃城考 東國史學 4(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 - 16 -

가또하나의흐름을형성하고있다. 천도문제는대체로정치적동기와연동되어다루어지는경향이강하며, 삼국사기 에보이는동천왕대의평양천도기사와고국원왕대의평양동황성천도기사의사실성문제에대해연구자별시각차가크게나타나고있다. 평양지역도성구조에관한연구는 1980~1990년대민덕식이평양성성곽의형태와평양성각자성석에대한연구를꾸준히진행하며주도적인역할을하였다. 56) 그러다가 2000년대들어서며동아시아도성제와도시형태에대한연구가각광을받으며연구가양적으로크게증가하였다. 57) 고구려전기왕도연구와비교하여도월등히많은데, 이는장안성 社.); 徐永大, 1981 高句麗平壤遷都의動機 - 王權및中央集權的支配體制의强化과정과관련하여 - 韓國文化 3, 서울대학교한국문화연구소 ; 閔德植, 1989 故國原王代平壤城의位置에관한試考 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신서원 ; 강선, 1996 4~5 세기高句麗의영토확장과平壤遷都 淑明韓國史論 2; 김병남, 1997 高句麗平壤遷都의原因에대하여 全北史學 19 20; 張傚晶, 2000 고구려왕의平壤移居와왕권강화 龜泉元裕漢敎授定年紀念論叢 ( 上 ), 혜안 ; 장효정, 2002 三國史記 高句麗本紀東川王 21 년조기사검토 高句麗硏究 13; 孔錫龜, 2004 고구려의영역과평양천도문제 韓國古代史硏究 33; 김희선, 2005 長安城의築城過程과遷都의背景 역사문화연구 22, 한국외국어대역사문화연구소 ; 문은순, 2007 高句麗의平壤遷都硏究, 한국학중앙연구원한국학대학원박사학위논문 ; 장종진, 2011 5 세기전후국제정세와고구려평양천도의배경 韓國古代史硏究 61; 김병곤, 2011 고구려의평양천도기획시점과남진 고구려발해연구 39; 김지희, 2016 高句麗故國原王의平壤移居와南進 韓國史論 62, 서울대학교국사학과. 56) 閔德植, 1989 高句麗의中期都城 韓國史論 19, 국사편찬위원회 ; 閔德植, 1989 高句麗의後期都城 韓國史論 19, 국사편찬위원회 ; 閔德植, 1992 高句麗의平壤城의築城過程에관한硏究 國史館論叢 39; 閔德植, 1993 高句麗의平壤城刻字城石에관한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57) 閔德植, 2003 高句麗平壤城의都市形態와設計 高句麗硏究 15; 임기환, 2003 고구려都城制의변천 한국의도성 - 都城造營의傳統 -, 서울시립대학교부설서울학연구소 ; 김희선, 2005 高句麗長安城의築城過程과遷都의背景 역사문화연구 22, 한국외국어대역사문화연구소 ; 閔德植, 2006 高句麗平壤城과新羅王京의區域分割制比較 白山學報 75; 梁正錫, 2006 高麗宮闕正殿廓의構造와意味 - 安鶴宮南宮正殿廓과의比較를중심으로 - 釜大史學 10; 김희선, 2006 6~7 세기동아시아도성제와고구려長安城 - 도성의가로구획방식을중심으로 - 韓國古代史硏究 43; 김창석, 2006 長安城축성의배경과공간구성 고고자료에서찾은고구려인의삶과문화, 고구려연구재단 ; 임기환, 2007 고구려평양도성의정치적성격 韓國史硏究 137; 姜賢淑, 2008 高句麗都城과新羅王京의比較 新羅文化祭學術論文集 29; 김희선, 2008 北魏 隋唐代都城과高句麗長安城 白山學報 81; 김희선, 2008 高句 - 17 -

의경우성곽의형태와내부의격자형구획등그면모가보다구체적으로밝혀졌기때문일것이다. 백제 신라는물론중국 일본의도성제를시야에넣은비교사연구가많다는점도눈에띄는점이다. 연구대상에대한접근상의어려움을보완하기위한작업들도있었다. 위성사진을비롯한 도성 유적사진과관련도면들을모은자료집이다수출간되었고, 제한적이기는하지만남북학술교류차원에서평양에서공동조사도이루어진바있다. 58) 3. 연구방법및논문구성본연구는지리소프트웨어인구글어스를적극적으로활용하여선행연구들과의차별화를시도하였다. 다만전반부에해당하는환인과집안에소재하였던고구려전기왕도와후반부의앞부분에해당하는대성산성을중심으로한전기평양성시기는문헌고증과고고학자료활용에무게중심을두어연구를진행하였다. 이시기왕도연구의쟁점을해결하는데있어구글어스프로그램의역할은매우제한되어있기때문이 麗長安城과新羅王京 - 街路區劃방식의연관성을중심으로 - 동북아역사논총 21; 양정석, 2008 高句麗安鶴宮南宮正殿廓의宮闕構造 韓國古代正殿의系譜와都城制, 서경문화사 ; 梁正錫, 2008 高句麗安鶴宮中央建築群에대한考察 - 前殿古代建築刑制의채용을중심으로 - 中國史硏究 56; 閔德植, 2010 都城의築造過程에대한檢討 - 高句麗平壤城 ( 長安城 ) 과漢陽都城의축조를중심으로 - 향토서울 75; 김희선, 2010 동아시아도성제와고구려장안성 : 6~8 세기도성의가로구획방식을중심으로, 지식산업사 ; 정원철, 2010 고구려장안성의성벽축조과정에대한재검토 동북아연구 25; 여호규, 2013 고구려도성의의례공간과왕권의위상 韓國古代史硏究 71; 여호규, 2013 고구려도성제의구조 - 성격과백제도성제와의비교 - 백제도성제와주변국도성제의비교연구,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 여호규, 2014 고구려도성의구조와경관의변화 삼국시대고고학개론 Ⅰ, 진인진 ; 양시은, 2014 고구려도성연구의현황과과제 高句麗渤海硏究 50; 김희선, 2015 고대동아시아의천도와도성 - 계획천도와좌북조남식도성구조를중심으로 - 동아시아문화연구 63. 58) 고구려연구재단편, 2005 위성사진으로보는고구려도성 ; 고구려연구재단, 2005 평양일대고구려유적 ; 고구려연구재단, 2006 고구려안학궁조사보고서 2006 남북공동학술조사보고서 ; 서울대학교박물관 동북아역사재단, 2008 하늘에서본고구려와발해 ; 기획편집위원회편, 2009 고구려유적의어제와오늘 1- 도성과성곽, 동북아역사재단 ; 동북아역사재단, 2013 평양지역고구려도성유적 ; 국립중앙박물관, 2014 유리건판으로보는고구려의도성. - 18 -

다. 장안성연구에있어서가장큰난점은유적에대한타국연구자들의 방문과접근이제한되어있다는점, 그리고장안성의성벽과도시유적 이근대이후도시화에따라이미대부분훼손되었다는점이다. 하지만 위성사진과 GIS 정보를기반으로만들어진구글어스의이용을통하여 이러한어려움을상당부분극복할수있다. 장안성연구에서구글어스의기능중가장유용하게활용된것이 이 미지오버레이 (image overlay) 기능이다. 앞서언급하였듯이장안성성 벽은평양지역의도시화로인하여현재는거의대부분사라진상태이 다. 그러나 이미지오버레이 기능을이용하면성벽대부분이남아있던 근대초의지도를구글어스프로그램으로불러와현재의위성사진과중 첩시킬수있다. 이를통해과거성벽의위치와형태를구글어스프로 그램상에재현하는것은물론이고, 주요지점들간의거리나성벽둘 레, 면적등을손쉽게측정할수있다. 평양의유적을직접방문하여조 사하지않더라도연구대상에대한필요한정보를충분히획득할수있 는것이다. 물론이를위해서는정확한옛지도의존재가중요하다. 이 에근대초에제작된다양한평양지역지도들을확보하여연구에활용 하였고, 필요에따라근현대에촬영한항공사진도참조하였다. 59) 장안성연구에사용된또다른자료는조선시대제작된고지도및평 양성병풍도이다. 조선후기에는평양성병풍도가많이제작되었다. 이 를회화식지도로분류하는것도가능할것이다. 병풍도는매우세밀하 게당시의평양모습을묘사하고있기때문에이역시과거장안성의모 습을복원하는데큰도움이된다. 이처럼구글어스프로그램, 위성사 진, 항공사진, 근대지도, 전근대고지도등공간정보를담은시각자 59) 본연구에서는활용되지않았지만고고학분야에서는옛항공사진을이용하여고지형분석을하는방법이제시된바있다 ( 이홍종, 2015 한성백제기도성권의지형경관 고고학 14-1, 중부고고학회.). 이는주로유적의존재가능지점을찾아내는방법으로이용되고있는데, 이번연구는기확인된유적에대한분석과검토에초점을맞추고있으므로고지형분석을염두에두지는않았다. 하지만해당기술은차후평양지역에서미발견된고구려유적을탐색하는데활용될여지가있으므로주목할필요가있을것이다. - 19 -

료들을활용하여연구대상에실증성과구체성을확보하였다. 본연구의구성은다음과같다. 본문은 3개의장으로구성되었으며, 제1장에서는 삼국사기 에실려있는용례들을중심으로한국고대사에서사용된 왕도 도성 등의용어에대한검토를하였다. 일반적으로많이사용되고있는 도성 이라는용어가가지고있는개념의범주와적절한사용방식을짚어보고, 고대삼국에서보편적으로사용되었던 왕도 라는용어의사용을제안하였다. 제2장에서는고구려전기왕도를다루었다. 건국초기에해당하는졸본시기와국가성장기인환도성 국내성시기가이에해당한다. 우선논란이분분한졸본의위치를탐구하고, 聖所로서의졸본의성격과고구려인들의왕도관을살펴보았다. 그다음졸본에서환도 국내지역으로왕도가옮겨간시기와경위에대하여문헌고증을중심으로검토하였다. 更作新國 으로대표되는문헌기록간의모순과충돌에대하여합리적인해석을모색하였다. 마지막으로산성인환도성과평지성인국내성의형태와기능을살펴보는한편이시기왕도의공간적범주에대하여서술하였다. 제3장에서는고구려후기왕도를다루었다. 후기왕도를구분하는기준점은 427년 ( 장수왕 15) 의평양천도이다. 고구려후기왕도는다시 전기평양성시기 와 후기평양성 ( 장안성 ) 시기 로구분할수있다. 전기평양성과관련해가장논란이분분한 평양동황성 에대하여검토하였다. 삼국사기 의 평양동황성 기록이만들어진시점에주목하여, 고려 ~ 조선시대기록에서확인되는 평양동황성 의위치를비정하였다. 또한 주서 의기록을중심으로핵심사료들을검토하여전기평양성시기왕성으로기능한곳이대성산성임을확인하였고, 논란이분분한안학궁터와청암동토성의기능과조성연대에대해서도검토하였다. 후기평양성시기는 586년 ( 평원왕 28) 의장안성이도를기점으로한다. 우선장안성축조단계에서새겨진각자성석에대한판독과이에대한분석을수행하였다. 각자성석이야말로장안성연구의기본이되는문자자료이기때문이다. 각자성석의내용과문헌기록의종합적인이해를 - 20 -

바탕으로각자성석의출토위치를추적하는한편, 성벽의축조시기와공사구간을추정하였다. 최종적으로는장안성연구자들의관심이가장집중되어있는격자형구획에대한연구를진행하였다. 그간북한학계의연구결과를그대로수용하는측면이강하였으나, 구글어스를이용해격자형구획의형태와단위등의실제를검증하였고, 이를통해기존연구의문제점을다수확인하였다. 이를바탕으로장안성의중성과내성의구조를파악하고, 성내부가고구려당시어떻게활용되었는지에대해추정하였다. 장안성축조기록에서확인되는시각적격차와축성의단속적측면을검토하는한편, 장안성으로의이도배경과목적을제시하였다. - 21 -

一. 한국고대사에서의王都와都城 1. 왕도 도성관련용어의용례분석한국학계에서는都城 都城史라는용어가많이사용되고있다. 그외에王都와王城 王京같은용어들도병용되고있다. 하지만이들용어의개념이학자들간명확하게합의가된상태라고보기는어렵다. 보다적확하고효율적인용어사용을위하여고대삼국에서실제로사용되었던용어가무엇인지에대한문헌검토작업이필요하며, 한국학계는물론중국학계와일본학계에서이들용어가사용되는맥락에대한이해를통해개념의정리가이루어질필요가있다. 중국의 漢語大詞典 에서는 都城 이라는용어에대하여 城邑의城垣 과 國都 라는두가지의미로설명하고있다. 1) 중국에서國都는일반적으로성의존재를전제하고있으므로, 결국城垣으로둘러싸인국도의개념과이미지를떠올릴수있다. 그런데先秦時代중국에서國과都는원래구분되는존재였다. 2) 國은왕이나제후가거주하는도시를의미하였으며都는國보다낮은위계의도시로서종실이나卿 大夫의采邑을의미하였다. 3) 다만都는종묘와先君의위패를갖추었다는점에서일반읍과는구분되었다. 4) 春秋左氏傳 에따르면 都는城이 100 雉를넘으면國에해가된다. 선왕의제도에서큰都는國의 1/3을넘지않고, 중간것은 1/5, 작은것은 1/9이다. 5) 라고한다. 이를통해都가방어시설인城을갖춘존재임을알수있다. 이를감안하면都城이란원래지방에있는낮은위계의도시인都의방어시설을가리키거나, 혹은그러한방어시설이갖추어져있는都자체를의미하는용어였다고이해할수있다. 1) 漢語大詞典編輯委員會 漢語大詞典編纂處, 1990 漢語大詞典, 漢語大詞典出版社. 2) 周禮 冬官考工記 6, 匠人營國 門阿之制, 以為都城之制 宮隅之制, 以為諸侯之城制 環涂以為諸侯經涂, 野涂以為都經涂. 3) 菫鑒泓等編, 成周鐸譯註, 1993 中國都城發達史, 學硏文化社, p.44. 4) 春秋左氏傳 莊公 28 年冬, 有宗廟先君之主曰都無曰邑邑曰築都曰城. 5) 春秋左氏傳 隱公元年, 都城過百雉國之害也先王之制大都不過參國之一中五之一小九之一. - 22 -

禮制등급원칙에따라엄격하게적용되었던周代의國 都구분은시 간의흐름에따라변화하였다. 戰國時代문헌인 管子 에따르면國과 都의구분은이제관할하는자의신분적구별이아니라도시의크기나 주민의多寡를기준으로바뀌게되었다. 6) 史記 에는 秦에게망한 山南과山北, 河外와河內의大縣이수십이고, 이름난都가수백 7) 이라 는표현이등장하는데여기서도전국시대에都가大縣보다규모가작은 아래등급의도시를가리키는의미로사용되었음을확인할수있다. 都의의미가격상되는것은秦始皇사후項羽를비롯해각지의제후 왕들이일어나며각자머무는곳을都라고하였던데기인한것으로보 인다. 8) 이에따라漢代부터는중요한지방의대도시를가리키는용어 로서都가사용되기도하고, 9) 낙양을東都, 장안을西都라고부르기도 하였다. 10) 都혹은都城이라는용어가국가의중심지라는의미를획득하 게된것이다. 한편일본에서도성이라는용어가등장하는것은 7 세기후반天武天 皇代이다. 11) 683 년天武天皇이難波를都로삼겠다고선언하며 都城宮 室 이라는표현을처음으로사용한것이다. 그러나도성이라는용어는 이후더이상 日本書紀 에등장하지않으므로, 고대일본에서일반적 으로사용되었던용어는아니었다고여겨진다. 일본사에서도성이라는 용어보다눈에띄는것은 宮, 혹은 京 이라는표현이다. 고대 일본에서大王이나天皇의거처이자국가권력의소재지로서의역할을 하였던것은 宮 이었다. 일본에서는대왕이나천황이새로즉위할때마 다遷宮이이루어질정도로그이동이빈번하였다. 宮은정권의중추였 6) 菫鑒泓等編, 成周鐸譯註, 1993 中國都城發達史, 學硏文化社, p.56. 7) 史記 卷 44, 魏世家 40, 安釐王 19 年, 所亡於秦者山南山北河外河內大縣數十名都數百. 8) 顧炎武, 日知錄 卷 22, 都條. 9) 漢書 卷 24, 食貨志 4 下, 莽乃下詔 遂於長安及五都立五均官.. 여기서 5 都는洛陽 邯鄲 臨甾 宛 成都를말한다. 長安은都에포함되지않았으나, 5 都가수도인장안에준하는존재로설정되었다는점은주목할만하다. 10) 漢書 卷 99, 王莽傳 4 年夏, 昔周二後受命故有東都西都之居予之受命蓋亦如之其以洛陽爲新室東都常安爲新室西都.. 常安 은王莽代長安의이름이다. 11) 日本書紀 巻 29, 天武天皇下 12 年 12 月, 又詔曰凡都城宮室非一處必造兩參故先欲都難波是以百寮者各往之請家地.. - 23 -

을뿐아니라권력자의정체성을형성하는통치의상징이었다. 이에일본사에서는 宮室 都城 혹은 宮殿 都城 의약어로서 宮都 라는용어가널리사용되고있으며, 12) 宮京 이라는용어도제안된바있다. 13) 일본사에서도성개념의적용은대체로唐의도성제를수용하여정연한격자형구획이포함된계획도시로조영한藤原京이후를가리킨다. 도성제성립을 7세기후반율령국가로의전환과연동시키고있는것이며, 그렇기에藤原京을 최초의도성 이라고명명하는것이다. 14) 그런데일본의 도성 에서는중국도성에서필수적인요소라할수있는외곽성이보이지않는다. 일본에서는 城 의의미를실제성벽이아니라 경계를가지는일정한구역 으로해석하기도하는데, 15) 이에따르면일본도성에서는격자형구획이펼쳐진공간의외연이곧京域의경계를설정하는성벽역할을대신한다고할수있다. 일본도성에서실제외곽성 ( 나성 ) 은설치되지않았지만, 2005년발굴조사에따르면平城京구역남쪽끝에해당하는위치, 주작대로를중심으로동서로 1 坊씩해당하는자리에제한적으로 羅城 과 羅城門 이설치되었던흔적이확인되었다고한다. 이는平城宮의前面과동일한폭이다. 平安京에서도平城京과유사한형식의 나성 이설치되었던것이문헌상확인된다. 이는실질적인방어시설이아니라중국의도성제를모방한상징적인구조물이었던것으로이해된다. 16) 일본에서중국 도성 의핵심적요소인외곽성이존재하지않는이유는무엇일까. 정확한해답을제시하기는어렵지만, 아마도일본특유의遷宮전통이중요한이유로작용한것이아닐까싶다. 외곽성을쌓는다는것은해당장소에정주하여영구적인국가통치의거점으로삼겠다는 12) 岸俊男, 1981 日本の古代宮都, 日本放送出版協會, pp.8-9. 13) 송완범, 2013 고대일본의都市와移動의문제 - 천궁 ( 遷宮 ) 과천경 ( 遷京 )- 東아시아古代學 31, p.171. 14) 小澤毅, 2002 都城の誕生 - 藤原京 日本の時代史 3- 倭國から日本へ, 吉川弘文館, pp.235-237. 15) 布野修司, 2015 大元都市 - 中國都城の理念と空間構造, 京都大學學術出版會, p.16. 16) 山中章, 2011 日本古代宮都の羅城をめぐる諸問題 東アジア都城の比較硏究, 京都大學學術出版會, pp.78-84.). - 24 -

권력의의지를담은것이라이해할수있다. 그러나일본에서宮都는대 왕이나천황의교체에따라언제든지옮길수있는것으로인식되었다. 따라서많은수고와노동력을투입하여도시외곽을둘러싼거대한성벽 을축조하는것은실용적인차원에서불필요한행위로여겨졌을가능성 이있다. 여하튼명칭이 都城 임에도성벽이존재하지않는다는점은실제와 용어사이의괴리라하지않을수없다. 따라서일본학계에서도성이라 는용어를사용하는것은 도성제에의해만들어진계획도시 라는개념 적측면에방점을둔것으로파악해야한다. 중국으로부터수입된唐風 의도시형태라는개념이강하게내재되어있는것이다. 반면한국학계에서는도성이라는용어가 國都 나 首都 의의미를가 진古式의표현정도로인식되며매우보편적으로사용되고있다. 이는 익숙한어휘이기때문으로생각된다. 조선왕조실록 에는 都城 의용 례가 1,366 건확인되는데, 이를통해조선시대부터 도성 이당시국도 인한성을가리키는용어로흔히쓰였음을알수있다. 17) 그렇다면고대 삼국도그러하였을까. 표 1) 의집계를참조하면 삼국사기 의용례는 京都 와 王都 가대 다수를차지하고있음을알수있다. 都城 이라는용어는백제본기에 2 건, 신라본기에 2 건확인될뿐이다. 18) 그런데이자료의해석에있어서 는주의가필요하다. 신라본기에등장하는 도성 용례중 1 건과백제 본기에등장하는 도성 의용례중 1 건은나당연합군의사비성을함락 하고福信등이이끄는부흥운동에대처하는기록에등장한다. 가리키 는대상도모두백제사비성을의미한다. 이기록은대개중국측기록을바탕으로구성된것으로이해된다. 예 컨대일부용례는 新唐書 蘇定方열전에나오는문장을그대로옮긴 것이다. 그렇다면이시기에등장하는 도성 용례는신라나백제의것이 17) 국사편찬위원회조선왕조실록데이터베이스의검색기능을이용하였다 (http://sillok.history.go.kr/main/main.do). 기준은본문중에해당용어가사용된경우이며, 국역은제외하고원문만을검색대상으로하였다. 18) 실제사용된횟수는 8 건이지만동일사건에서여러차례반복되어사용된경우들은묶어서 1 건으로처리된것이다. - 25 -

라기보다唐의것으로이해하는것이옳을것이다. 표 1) 삼국사기 본기와잡지의국도관련용어사용빈도 19) 단위 : 개 구분 京城 京都 京師 王城 王都 王京 都邑 王畿 京畿 都城 신라 7 55 4 1 7 2 1 2 고구려 8 4 6 1 백제 3 1 12 1 2 잡지 3 1 2 3 8 2 1 2 합 10 64 13 5 33 4 3 2 1 4 * 비고 : 金鎬詳, 2001 新羅王京硏究(Ⅰ)-" 三國史記에표현된三國의王京名稱考察 慶州史學 20, pp.144-145. 의표를참조하여재구성. 일부수치는필자가조정하였으 며굵은글씨로구분. 신라와백제의독자적인 도성 용례로인정할수있는것은다음의 2 건뿐이라할수있다. A-1. 19년봄정월, 도성寅方 [ 동쪽 ] 에서북치는것과같은소리가들렸다. 사람들이말하기를귀신의북소리라하였다 ( 十九年, 春正月, 都城寅方有聲, 如伐皷, 衆人謂之鬼皷.). 삼국사기 신라본기 9, 경덕왕 19년 (760) 봄 1월 A-2. 40 년여름 4 월에황새가도성문위에둥지를틀었다 ( 四十年, 夏四月, 鸛巢于都城門上.). 삼국사기 백제본기 1, 기루왕 40 년 (116) 여름 4 월 19) 金鎬詳, 2001 新羅王京硏究 (Ⅰ)-" 三國史記에표현된三國의王京名稱考察 慶州史學 20. 에서는 삼국사기 에나타나는 王京 관련호칭 10 개를대상으로빈도를조사하여표로제공하고있어참고가된다. 다만이논문에서의수치들은다소정량적으로집계한것이라이용에주의가필요하다. 예컨대해당논문의표에서는고구려에 京師 라는용어의사례가 4 건있다고제시하고있으나이를이해하는데는주의가필요하다. 4 건모두중국사서의내용을 삼국사기 에轉載한것에불과하며, 내용상으로도고구려의국도를의미하는것이아니라왕망이세운新의수도인장안과당의수도인장안을가리키는용례들이기때문이다. 따라서이러한사례들은실제분석에서제외시켜야한다. - 26 -

더구나고구려의경우는그나마 都城 의용례가 1 건도나타나지않는 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국도의의미로사용된용어들의사례 를선별하여정리하면표와같다. 20) 표 2)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중국도관련용어의사례 연도 왕대 내용 구분 3년 유리왕 22년겨울 12월 陜父諌曰王新移都邑民不安堵 都邑 1건 19년 대무신왕 2년봄 1월 京都震大赦. 41년 대무신왕 24년봄 3월 京都雨雹. 46년 민중왕 3년겨울 12월 京都無雪. 59년 태조대왕 7년가을 7월 京都大水漂沒民屋. 京都 72년 태조대왕 20년여름 4월 京都旱. 8건 77년 태조대왕 25년겨울 11월 京都雪三尺. 124년 태조대왕 72년겨울 11월 京都地震. 190년 고국천왕 12년가을 9월 京都雪六尺. 191년 고국천왕 13년여름 4월 聚衆攻王都. 414년 장수왕 3년겨울 12월 王都雪五尺. 546년 양원왕 2년봄 2월 王都梨樹連理. 王都 555년 양원왕 11년겨울 10월 虎入王都擒之. 6건 648년 보장왕 7년가을 7월 王都女産子一身兩頭. 656년 보장왕 15년여름 5월 王都雨鐡. 都邑 과 京都 와 王都 의세가지용례가확인되는데, 이중 도읍 은 1 건뿐이고, 경도 와 왕도 가대부분을차지하고있다. 경도 의사용이 초기기록에몰려있고, 왕도 는뒷시기기록에몰려있어시기별로완 전히갈라진다는점도이채로운점이다. 이러한현상에대해 경도 와 왕도 라는용어를포함한기사의사료적계통성차이를지적하는견해 도제시된바있다. 21) 20) 이작업의목적이타당성을가진보통명사를추출하는데있으므로, 환도 나 국내, 평양 등의고유명사는모두제외하였다. 21) 임기환, 2015 고구려國內都城의형성과공간구성 - 문헌검토를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59, p. 11. 임기환은또한이들용어가주로자연재이와관련된내용이라는점에서災異기사를중심으로구성된모종의자료에서근거했을가능 - 27 -

그런데두용어중 경도 의경우는과연고구려초기에실제로사용하였던용어라고볼수있을지의문스러운면이있다. 왕도보다오히려후대적인느낌을주는용어인데다고구려본기앞부분에만집중적으로출현한다는점에서그출현형태가부자연스럽기때문이다. 해당용례들은하나같이천재지변과관련된것이므로, 고구려인들이남겼던원기록에서는장소가생략한채내용만기재되어있었을가능성이있다. 실제로 삼국사기 재이기록의상당수는장소가생략된형태의것이다. 예를들어중천왕 7년 7월기록에는 秋七月地震. 이라고만표기될뿐이며, 9년 12월에는 十二月無雪大疫., 15년 11월에는 冬十一月雷地震. 같은식으로표기되고있다. 고국천왕을계선으로그이후부터고구려말기까지 王都 라는장소가표기된사례들을제외하면대개의재이기록이이런식으로장소에대한정보가없는형태로표기되고있다. 그렇다면 삼국사기 의편찬과정, 혹은그모본이되었던 舊三國史 등과같은역사서의편찬과정에서고구려본기앞부분의정리를담당한누군가에의해장소명이부재한재이기록전체에京都라는표현이일괄삽입되었을가능성이높다고여겨진다. 이것이극명하게드러나는것이고국천왕대기록이다. 고국천왕 12년기록에는 경도 라는표현을사용하였는데, 불과 1년뒤인 13년에는다시 왕도 라는표현을사용하고있다. 해당시기에두용어가병용되었다고볼수도있겠으나, 12년기사는단순히 눈이 6척내렸다 는내용이어서장소를나타내는 경도 가생략되어도무방하지만, 13년기사는 무리를모아왕도를공격하였다 는내용이므로, 문장구조상 왕도 가목적어자리에반드시있어야만한다는점이주목된다. 555년양원왕대의기사나 648년보장왕대의기사도마찬가지이다. 호랑이가왕도에들어와서잡은것 이고, 왕도의여인 이두머리를가진아이를낳은것이다. 왕도 용어의사례들을보면대개문장구성요소로서의입지가분명하다. 따라서생략되어도무방한 경도 용어의사례들과달리고구려인들이남긴원사료에있던표현이라고짐작된다. 성이높다고하였다. - 28 -

표 3) 고려사 의국도관련용어 22) 단위 : 개, % 京城 京都 京師 王城 王都 王京 都邑 王畿 京畿 都城 합 221 72 209 3 4 45 4 1 66 34 659 33.5 10.9 31.7 0.5 0.6 6.8 0.6 0.2 10.0 5.2 100 京都 용어의後代性을확인하기위해 고려사 에서의용례를참조 해보자. 고려사 에기록된국도관련용어의용례를정리해보면, 京城 京都 京師등 京 이포함된용어가많이사용되었음을알수있다. 반면 왕도 라는용어는겨우 4 건에불과하여사용빈도가 0.6% 에불과 하다. 고려시기에는 왕도 가 京 보다훨씬사용빈도가떨어지는용 어였던것이다. 이는 삼국사기 에다수기재되어있는 왕도 라는용 어가후대에삽입된것이아니라고대삼국의용례가그대로남은것이 라는추측을뒷받침한다. 또한가지눈여겨보아야할것은 삼국사기 雜誌기록에서도 경 도 의사례가거의보이지않는대신 왕도 의사례가훨씬많이등장한 다는점이다. 잡지에실린고대의제도와관련된용어들은當代작성되 었던문서들의내용이그대로옮겨졌을가능성이높다. 예컨대잡지武 官條의軍師幢主항목을보면 軍師幢主는법흥왕 11 년에설치하였다. 王都 1 인無衿이다. 大幢 1 인, 上州停 1 인, 漢山停 1 인 23) 같은식 22) 이표는金鎬詳 (2001) 논문에서 삼국사기 를조사할때썼던 10 개의키워드를이용하여본인이검색하여작성한것이다. 국사편찬위원회의고려시대사료데이터베이스 (http://db.history.go.kr/korea/) 에서검색어를입력하여결과물을정리하는방식을취하였다. 이는검색결과의변수를정밀하게통제하지않은것이기때문에정확한수치라고할수는없다. 예컨대 王城 과 王都 의단순검색결과는본래각각 5 건과 8 건이었다. 하지만이중왕성 2 건은 王城江 이라는지명이포함된것이고, 왕도 4 건은 興王都監 같은용어가합산된결과였다. 따라서원래검색의의도에부합하는사례만추려 왕성 은 3 건, 왕도 는 4 건으로정리하였다. 다만나머지용례들은특별히교정을가하지않고단순검색의결과수치를그대로옮겼다. 전체적인용어사용의빈도차를나타내는데는이것만으로도충분하다고여겨지기때문이다. 23) 三國史記 卷 40, 雜志第 9 武官, 軍師幢王法興王十一年置王都一人無衿大幢一人上州停一人漢山停一人. - 29 -

으로서술되어있다. 이러한기록은신라당대에작성된텍스트가거의그대로轉載된것이라보아도무방할것이다. 신라사연구자들사이에서는 도성 대신 王京 이라는표현도많이사용되고있다. 하지만 삼국사기 를보면 王京 의용례는신라본기에겨우 2건이있을뿐이며사용시기도中代이후로한정되어서그수가매우적다. 다만해당용어가문헌상존재하는것이사실이고, 신라당대에만들어진자료등을통해 金京 이나 大京 이라는호칭도사용되었음이확인된다. 24) 게다가신라에서는지방에 小京制 가실시되기도했던만큼적어도통일기즈음의신라인들이 京 이라는표현에익숙하였고, 이에따라 王京 이라는용어도사용하였을수있다는점은인정할수있다. 신라사연구에서는 왕경 과 왕도 의개념을구분하여이해하는일련의연구흐름도있어유의된다. 이종욱이신라의왕경을왕과중앙지배세력이거주하는왕도와그외곽지역인王畿 ( 京畿 ) 로구분한이래, 25) 이와유사한시각의견해들이여럿제시되었다. 26) 왕도가왕경내에서의특정공간을가리키는하부개념으로사용된것이다. 그러나왕도와왕경을그처럼구분하여개념화할만한실증적근거가제시되었던것은아니다. 전덕재가지적하였듯이 927년견훤이신라왕도를습격한동일사건을전하는신라본기의기록과견훤열전의기록이 왕경에쳐들어갔다, 왕도에쳐들어갔다 로각각표현되고있는것을보면신라인들에게왕경과왕도는지역적으로구분되는공간이아니라치환될수있는동격의의미로사용되었다고이해하는것이타당해보인다. 27) 24) 경주동남쪽관문성석각에 金京 이라는글자가새겨져있으며, 755 년작성된新羅白紙墨書大方廣佛華嚴經寫經跋文에는 大京 이라는표현이나온다 ( 朴方龍, 2013 新羅都城, 학연문화사, p.20.). 25) 李鍾旭, 1981 地方統治組織의編成 新羅國家形成史硏究, 一潮閣, pp.240. 26) 이에대한연구사는전덕재, 2009 왕경 ( 王京 ) 과왕도 ( 王都 ) 의성격 신라왕경의역사. 새문사, pp.29-38. 에상세하게정리되어있다. 27) 전덕재, 2009 왕경 ( 王京 ) 과왕도 ( 王都 ) 의성격 신라왕경의역사. 새문사, pp.43-45. - 30 -

한국고대삼국에대한내용이많이실려있는 日本書紀 의경우고구려 백제 신라의도읍을가리키는의미로서왕경 왕도 도성등이사용된용례는확인되지않는다. 다만雄略天皇 20년겨울기사에실린 百濟記 인용을보면백제개로왕때고구려에의해 大城 을 7일밤낮공격당하였고, 결국 王城 이함락되었다고전하고있을뿐이다. 28) 대성 = 왕성의의미로사용되고있는것이다. 그외에도백제멸망기에백제측의기록을인용하는형태로 我王城 등의용례가확인되는정도이다. 29) 이러한기록을통해백제인들이자신들의왕성을 대성 이라고도지칭하였음을알수있지만, 왕성은왕도내에존재하는특정한방어시설을의미하므로, 국도를의미하는 왕경 왕도 도성 과같은용어들과동렬에놓고논의할수는없다. 이상의검토를통해확인된내용을간략히정리해보자면다음과같다. 고대삼국에서국도를의미하는보통명사로서당대에두루사용하였던용어는 왕도 였다. 현전하는자료에서 도성 의용례는매우드물며, 특히고구려에서는용례가전혀확인되지않는다. 신라에서는왕도외에도그빈도가적기는하지만 왕경 을비롯한 京 계열의호칭이혼용되는모습이보이며, 고려시대에들어서면 京城 京都 京師 등京계열의호칭으로완전히전환되는모습이확인된다. 이를통해삼국시대후반부에는본래사용되던 왕도 라는호칭외에京계열의호칭이병용되었던것으로짐작된다. 고려시대에들어서왕도라는호칭의용례가사실상소멸하고, 京계열의호칭으로대체되는모습을보면京계열의호칭이왕도라는호칭보다세련되고격이높은표현이라는인식이자리잡았음을짐작할수있다. 28) 日本書紀 巻 14, 大泊瀬幼武天皇雄略天皇 20 年冬 百濟記云蓋鹵王乙卯年冬狛大軍來攻大城七日七夜王城降陷遂失尉禮國王及大后王子等皆沒敵手.. 29) 日本書紀 巻 26, 天豐財重日足姬天皇齊明天皇 6 年 9 月己亥朔癸卯, 或本云今年七月十日大唐蘇定方率船師軍于尾資之津新羅王春秋智率兵馬軍于怒受利之山夾擊百濟相戰三日陷我王城.. - 31 -

2. 왕도와도성 왕경개념의설정과적용문헌기록에따르면고대삼국에서사용된국도관련용어중활용빈도면에서가장우위에있는것은 왕도 이다. 여기에고구려와백제에서는신라와달리 왕경 의용례가직접적으로확인되지않는다는점을감안하면, 고대삼국의국도를가리키는보편적인용어로는세나라에서공히사용하였던 왕도 가가장적합하다는결론을내릴수있다. 필자는고대삼국의국도를가리키는일반용어로 왕도 를사용하기를제안하고자한다. 다만이는기존에흔히사용하던용어인 도성 을 왕도 로대체하고도성이라는용어를폐기하자는의미는아니다. 그보다는 도성 이라는용어가가지고있는역사적맥락과특성을감안하여보다정제된형태로개념화하여사용하는편이바람직하다는것이본의이다. 도성용어에대한본격적인검토에앞서연관용어들의개념을간략히정리해보자면다음과같다. 왕궁 은왕이정무를보거나일상을영위하는제한된건축적공간을의미한다. 왕궁에도보호시설은존재하지만이는성벽과같이대규모의것은아니며牆과같은형태로일정공간을둘러싸궁의안과밖을구분하는시설이다. 왕성 은왕궁을비롯하여관청, 제의시설등주요시설이밀집된중심지를대규모적의공격으로부터보호하기위하여본격적인방어시설을갖춘경우를가리킨다. 방어시설은자연지형및돌과흙, 벽돌등을이용하였다. 왕도가왕이소재한도시그자체를의미한다면, 왕궁과왕성은왕도내에설치된특수한시설을의미하는것이다. 그렇다면도성은무엇일까. 한국학계에서 도성 용어는편의에따라굉장히다양한범주에서사용되고있다. 도성 은왕도전체를가리키는개념으로사용되는가하면, 왕이거처하는왕궁내지왕성을가리키는좁은의미로사용되기도한다. 심지어하나의글에서이러한개념이혼재되어있는경우도있으며, 초기도성 중기도성 후기도성 과같이초시대적인개념으로활용되기도한다. - 32 -

도성 은중국에서형성된특정한유형의도시개념이다. 그리고이개념에서매우중요한부분은 城 의존재이다. 중국에서는都市라는말대신城市라는말을사용할정도로, 도시개념에서성이지니는의미가크다. 30) 중국의옛문헌인 管子 에서는 안에는城을만들고, 성바깥에는廓을만든다 31) 고하였고, 吳越春秋 에서는 군주를지키기위해城을쌓고, 백성을지키기위해郭을만들었다. 이것이城郭의시작이다 32) 라고기록하고있다. 이에따르면城은본래군주와그의관속을보호하기위해만든제한된규모의방어시설이고, 郭은民까지보호하기위해만든넓은범위의방어시설이다. 그런데도시구조에경제기능이강조됨에따라점차성은얇아지고곽이두터워지게되면서마침내는곽이성의의미를띠게되었다고한다. 33) 그렇다면중국사에서都城의 城 은비교적이른시기부터이미 郭 의의미를포괄하게되었다고할수있다. 외곽성은도시 읍락의방어시설로서의의미뿐아니라민을보호하고통제하는권력의표상으로서작용하였다. 따라서도성이라는개념에는군주의거처를중심으로형성된일정규모의인구밀집지, 그리고민의거주지를보호대상으로포함하는방어시설로서의외곽성의존재가중요한요소로작용한다고볼수있다. 실제로도성에대하여 首都 를둘러싸고있는외곽의 城郭 이나 시가지를에워싼나성이축조된왕도가곧도성 이라고개념화하는시도가있었다. 34) 도성의성립여부를판단하는가장명료한기준은민리지역을보호하는외곽성의존재라고볼수있는것이다. 다만이렇게만정의할경우외곽성이존재하지않는일본의도성들에 30) 朴漢濟, 2002 中國古代의都市 - 漢 ~ 唐의都城構造를중심으로 강좌한국고대사 7- 촌락과도시,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p.261-262. 31) 管子 度之, 內爲之城城外爲之廓郭外為之士閬. 32) 初學記 卷 24, 居處部引 吳越春秋 逸文, 築城以衛君造郭以守民此城郭之始也. 33) 朴漢濟, 2002 中國古代의都市 - 漢 ~ 唐의都城構造를중심으로 강좌한국고대사 7- 촌락과도시,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262. 34) 申熙權, 2002 百濟漢城期都城制에대한考古學的考察 백제도성의변천과연구상의문제점,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pp.15-16; 서정석, 2007 웅진기의도성제 백제의건축과토목, 충청남도역사문화연구원, p.80. - 33 -

대해 도성이아니다 라는선언을해야한다는곤란함이발생한다. 설사일본의도성들이외곽성이라는요소를결여하고있다하더라도그동안일본학계는나름의규정에따라이를도성이라불러왔다. 학계에서오랫동안활용되어온개념을간단히부정하는것은연구에혼선을줄수있으므로주의할필요가있다. 더나아가외곽성의존재여부만으로개념을결정하는것이지나치게형식주의로흐를우려도있다는점도감안해야한다. 따라서도시를둘러싼넓은범위의외곽성이존재하는왕권소재의도시를도성의기본적인개념으로규정하되, 일본의경우처럼외곽성이존재하지않더라도후대중국에서성립된 도성제 를수용하여건설된도시역시 도성 의범주에포함하는것이타당하다고생각된다. 중국에서출현하여전파된도성제의수용을판별할수있는가장대표적인지표는격자형의가로구획, 그리고전체도시구조내에서권력의존재를공간적으로표상화한궁의배치등을꼽을수있을것이다. 이와같이도성의개념을정의한다면우리나라고대사에서국가초기단계의도읍까지소급하여 도성 이라명명하는것은적절하지않다. 물론이를 도성 이되기전의맹아로상정한다면 초기도성 이라명명할수도있다는견해도있을수있다. 그러나모든도읍 도시의최종발달형태가외곽성을두른모습이라는법칙은존재하지않는다. 도시의형태는역사적경험과자연적 인문적요건들의결합, 그리고그곳에거주하는구성원들의선택과지향이장기누적되며나타난독립된결과물일뿐이다. 외곽성을두른 도성 으로의변화가도시가품고있는수많은가능성중하나일뿐이라는점을감안한다면, 초기도읍에일괄적으로 도성 이라는표지를붙여호명하는것은부당한전제가될수있다. 일본학계에서의 도성 은 7세기후반부터조영된唐風의계획도시를의미하는반면, 중국학계에서는초시대적으로국가수도를도성이라부르는경향이있다. 그런데엄밀히따지면중국사내에서都의지위가격상되는것은漢代부터이므로, 그이전시기각국의수도까지몰아서 도성 이라칭하는것은어폐가있다. 先秦시대의 도성 은엄연히지방에 - 34 -

소재한낮은위계의도시를의미하는용어였기때문이다. 도성 도성제라는용어는중국의경우최소한漢代부터, 일본의경우는藤原京부터라는시간적범위를염두에두고사용하는것이바람직할것이다. 상술한도성의개념에더하여왕도와병용되었던 왕경 의개념에대해서도재차생각해볼필요가있다. 앞서고대삼국의국도를가리키는보편적용어로 왕경 보다는 왕도 가널리쓰이기는하였으나, 신라의경우시간이흐르며점차 京 계열의용어사용이나타나게되었음을확인한바있다. 왕경 의용례가직접적으로확인되는것은신라뿐이지만, 고구려에서도중국측기록에다음과같은내용이확인된다. B-1. 그밖에國內城과漢城이있으니또한別都이다. 35) 주서 권 49, 열전 41, 이역상, 고려 B-2. 또國內城과漢城이있는데모두都會의지역이다. 그나라에서는三 京이라부른다 36) (). 수서 권 81, 열전 46, 동이, 고려 B-3. 그밖에다시國內城및漢城이있으니또한別都이다. 그나라에서는 三京이라부른다. 37) (). 북사 권 94, 열전 82, 고구려 고구려에서는후기왕도였던평양성외에국내성과한성이있어, 別都혹은三京이라불렀다고한다. 여기서고구려인들스스로 三京 이라불렀다는점이주목된다. 고구려후기에는신라처럼 왕도 외에 京 이라는호칭이사용되었을가능성을시사하기때문이다. 특히주목되는점은 隋書 에서삼경을 都會의지역 으로설명하고있는부분이다. 都會 35) 周書 卷 49, 列傳 41, 異域上, 高麗, 其外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 36) 隋書 卷 81, 列傳 46, 東夷, 高麗, 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其國中呼爲三京.. 37) 北史 卷 94, 列傳 82, 高句麗, 其外復有國內城及漢城亦別都也其國中呼爲三京.. - 35 -

란사람과물자가모이는곳을의미하므로, 38) 京 이라는용어에는 都會 의지역 이라는의미가강하게내재되어있는것으로생각해볼수있을 것이다. 주지하다시피신라의경우는小京이설치되어운용되었다. 514 년 ( 지증 왕 15) 에阿尸小京을설치한것을시작으로지방의주요거점에小京들 이설치되었고, 삼국통일이후에는 5 소경제가실시되었다. 흥미로운점 은이들소경이대부분소속된주의중심부가아니라경계부로치우친 곳에위치하고있다는점이다. 예컨대한산주에설치된소경인중원경은 지금의충주지역으로한산주영역의최남단에해당한다. 소경들의이런 입지는각주의주치가대개주영역의중심부에위치한것과대조된다. 때문에소경이각주의물자들을왕경으로이동시키는중간거점으로서 의역할을담당하고있었을가능성이제기되기도하였다. 39) 京 이라는용어에서엿보이는인간과물자의집적이라는 도회 적성 격을감한다면 왕경 이란고도화된도시성격을지닌왕도의의미로이 해할수도있다. 왕도 가전근대국가의권력이소재한곳을나타내는 일반적개념이라면, 왕경 은왕도의발달한도시화수준까지가미된개 념으로이해할수도있는것이다. 이제앞서살펴본도성의개념을한국사의각시대별로적용하여그 타당성을점검해보도록하자. 조선의국도인漢城과고려의국도인開 京의경우는 도성 개념을적용하는데무리가없다. 개경의경우內城 과皇城으로이중삼중의내부방어시설을갖춘데반해한성은내성이 존재하지않는다는차이점이있지만, 두도시모두군주의거처인왕궁 과그주위의인구밀집지역을보호하기위한대규모외곽성을갖추었 기때문이다. 하지만고대삼국의경우는이처럼간단하지않다. 백제는풍납토성과몽촌토성의예에서볼수있듯이漢城시기왕도 중심부에거대한규모의방어시설을건설하였다. 다만이성을외곽성 38) 이와관련해 史記 卷 129, 貨殖列傳 69, 然邯鄲亦漳河之閒一都會也. 나 舊唐書 卷 49, 志 29, 食貨下, 倉廩, 贊於是條奏諸道津要都會之所皆置吏閱商人財貨. 와같은용례를참고할수있다. 39) 여호규, 2002 한국고대의지방도시-신라 5 小京을중심으로 강좌한국고대사 7,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pp.148-152. - 36 -

이라고단정하기는어렵다. 애초에백제왕이상주하던왕성이풍납토성 인지몽촌토성인지도학계의의견이나뉘어있는상황이다. 40) 풍납토성 내에서는아직왕궁지가확인되지않았으나현재까지의발굴내역만으로 도제의공간등중요한시설물들이갖추어져있었음이인정된다. 만약 풍납토성내에왕궁과주요관서들이위치하였다면, 전체둘레약 3.5km 라는성의규모를감안했을때일반민의거주지가차지하는공간 은제한적이었으리라짐작된다. 41) 한성시기백제왕도의인구수가적었 다면풍납토성의규모만으로도민리공간을충분히수용하였으리라생각 하는것이가능하다. 하지만한성의인구가많지않았다는전제는동시 에이시기한성의도시발달정도가미숙하였음을나타내는근거가될 수도있다. 만약풍납토성내에백제왕이상주하는왕궁이존재하였다면이성의 성격은왕성으로이해하는것이더적절할것같다. 반면왕궁이풍납토 성내에존재하지않고몽촌토성에따로존재하였다면, 풍납토성은오로 지도시와백성의안전을위한목적에서만든구조물이되기때문에곽 으로서의성격을인정할수있다. 42) 일본서기 에보이는 왕성, 대 40) 박순발은몽촌토성을백제왕이상주하는왕성으로보는반면, 여호규는왕이상주하는왕성은풍납토성이고몽촌토성은군사방어성이라고보고있다 ( 박순발, 2001 漢城百濟의誕生, 서경문화사, p.186; 余昊奎, 2002 漢城時期百濟의都城制와防禦體系 百濟硏究 36, p.9.). 또한박순발은중국의도성유형을 7 가지형식으로분류하면서풍납토성을 3 유형에서 6 유형으로전환되는형태이거나, 4 유형인것으로설명한바있다 ( 朴淳發, 2014 동아시아고대도성民里의형성과전개 역사문화연구 52, p.26.). 이는풍납토성의 곽 으로서의성격을인정하는것이다. 그러나여호규는 왕성 과 도성 의관계를발전단계로파악하고풍납토성단계는아직인구밀집이도성에는이르지못한왕성단계에있다고이해하였다 ( 余昊奎, 2007 三國時期都城史硏究의현황과전개 역사문화연구 26, p.151.). 41) 물론일반적으로외곽성을갖추었다고평가되는중국의도성들조차모든민리공간을보호대상으로삼지는못한다. 도시발달과인구증가로인해성바깥으로민의공간이확산되며도시외연이넓어지는현상이발생하기때문이다. 더구나前漢의장안성처럼민리구역이차지하는비율이극히낮고, 성내면적대부분을宮이차지하고있는경우도있다. 성과곽의개념은얼핏명료한것같지만, 내성과외곽성을모두갖춘전형적인형태가아니라면구분이모호한측면이있다. 어쩌면이러한모호함이야말로성과곽이라는개별개념이성이라는하나의용어로수렴된근본원인일수있을것이다. 42) 왕을비롯해왕도의중심공간을보호하는성과민리의공간을보호하는곽이 - 37 -

성 등의표현을감안한다면 도성 보다는 왕성 으로개념화하는것이타 당해보이지만, 앞으로도지속적으로발굴이이루어질예정인만큼여러 가지가능성을열어둘필요는있다. 백제는 475 년고구려장수왕의침 공으로인해한성이함락되자웅진으로천도를하고, 어느정도체제를 정비한후다시사비로천도한다. 사비시기의백제왕도는외곽성을조 성하며명실상부한도성의형태를갖추게되었다고평가할수있다. 신라의경우는존속시기내내왕도에외곽성이존재하지않는다. 왕 성인月城을중심으로격자형구획로이루어진시가지를형성하고, 주변 에山城을축조하여방어체계를갖추었으나민리를감싸는나성을만들 지는않았다. 1 건뿐이기는하지만 삼국사기 에 760 년 ( 경덕왕 19) 도성寅方 [ 동쪽 ] 에서북치는것과같은소리가들렸다. 사람들이말하 기를귀신의북소리라하였다. 는기록이있기때문에 8 세기경신라인 들이왕도를가리키는표현으로 도성 이라는용어를사용했을수도있 다. 43) 여하튼이시기신라왕도는도시내격자구획에서볼수있듯이 중국으로부터 도성제 의영향을받았다. 따라서일본의경우와마찬가지 로외곽성은존재하지않지만도성은성립되었다고인정할수있다. 고구려왕도에서도성으로서의특징이명확히확인되는것은 552 년 ( 양원왕 8) 에축조를시작하여 586 년 ( 평원왕 28) 에移都하였다고하는 長安城부터이다. 장안성성벽의전체길이는약 23km 에달한다. 성내 부는북성 내성 중성 외성으로구분되는데, 이중외성전체와중성내일 부지역에서는정연한격자형구획이확인되었다. 학계에서는일반적으 로중국도성사에있어서중요한분기로평가받는북위낙양성의영향을 받은것으로이해하거나, 수의대흥성으로부터영향을받은것으로보고 있다. 현재로서는장안성건설이전단계의고구려왕도에서도성으로서 의구성요소가딱히확인되지않기때문에장안성을고구려최초의도 성으로이해할수있다. 완전히분리되어있는형태는중국전국시대趙의수도인邯鄲의사례가전형적이며, 齊의수도臨淄역시왕성과일반백성들의거주하는大城이분리되어있는형태이다. 43) 단여기서의 도성 은왕성인월성을의미하는용법으로사용된것일수도있다. - 38 -

이상의내용을정리하자면다음과같다. 도성은일반적으로민리의거주지를포함한넓은지역을보호하는외곽시설이갖추어진군주가소재한도시를의미한다. 다만외곽성이존재하지않더라도도성제의요소를수용하여건설된도시라면도성개념의범주에포함시키는것이가능하다. 왕경은사실상왕도와같은의미를가지고있다고할수있으나, 조금더의미를부여한다면 고도화된도시로서의면모를갖춘왕도 의성격을가진다고볼수도있다. 따라서도시발달이초기단계에있는왕도를지칭할때도성이나왕경이라는표현을사용하는것은가급적피하는편이좋다고여겨진다. 도성제의수용은결국중국식제도와문화가주변으로확산된결과로이해할수있다. 따라서중국적요소가수용되지않은초기의왕도까지도성이라지칭하고, 도성제의틀속에넣어이해하는것에는주의가필요하다. 한국고대사에서국도를의미하는보편적용어로는당대에실제로널리사용되었던 왕도 를사용하되, 도성이라는용어는도성제의특징이명확히포착되는뒷시기의왕도를지칭할경우로제한하여사용하는것이바람직할것이다. - 39 -

왕위를이었다. 3) 삼국사기 권 23, 백제본기제 1, 온조왕 1 년 (B.C.18) 二. 고구려전기왕도 1. 첫왕도졸본과초기왕도의경관 1) 졸본의위치탐구고구려의건국지는지금의遼寧省桓仁市지역으로, 기록에는卒本혹은忽本이라고전하고있다. 고구려는이곳에서건국하여후일지금의吉林省集安市지역으로왕도를이동하였다. 졸본에대한내용을전하는주요사료는다음과같다. C-1. 옛날시조鄒牟王이 ( 중략 ) 沸流谷忽本서쪽산위에성을쌓고도읍을세웠다. ( 중략 ) 王이忽本동쪽언덕에서龍의머리를밟고하늘로올라갔다. 1) 광개토왕비 C-2. 卒本川에이르러, 그토양이기름지고좋으며山河가험하고견고한것을보고마침내도읍하고자하였다. 그런데궁실을지을겨를이없어다만오두막을짓고沸流水가에살았다. 국호를고구려라하였다. 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1, 동명성왕 1년 (B.C.37) C-3. 朱蒙이北扶餘로부터난을피해卒本扶餘에이르렀다. 부여왕에게아 들은없고단지딸만셋이있었는데, 주몽을보고는非常人임을알고 둘째딸을그에게시집보냈다. 얼마안되어부여왕이죽자주몽이 1) 廣開土王碑, 惟昔始祖鄒牟王 於沸流谷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王於忽本東 履龍頁昇天 2) 三國史記 卷 13, 高句麗本紀第 1, 東明聖王 1 年, 至卒夲川觀其土壤肥羙山河險固遂欲都焉而未遑作宫室伹結廬於沸流水上居之國號髙句麗因以髙爲氏. 3) 三國史記 卷 23, 百濟本紀第 1, 溫祚王 1 年, 其父鄒牟或云朱蒙自北扶餘逃難至卒本扶餘扶餘王無子只有三女子見朱蒙知非常人以弟二女妻之未幾扶餘王薨朱蒙嗣位. - 40 -

C-4. 주몽이紇升骨城에이르러마침내자리를잡았다. 국호를고구려라 하였다. 4) 위서 권 100, 열전제 88, 고구려 이중가장오래된사료는 5세기초에고구려인들의손으로작성된광개토왕비문이며, 이에따르면추모왕이비류곡의홀본서쪽산위에성을쌓고도읍을세웠다고한다. 홀본 은후대문헌에등장하는 졸본 과상통하는표기이다. 5) 광개토왕비의내용으로볼때주몽이졸본이라는곳에서건국을하였다는것은고구려당대에도널리인정되고있었던것으로여겨진다. 다만광개토왕비에서는산위에성을쌓았다고밝힌데반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는비류수가에오두막을짓고살았다고하여建都하였던곳의구체적인지형묘사에있어서차이가확인된다. 6) 삼국사기 백제본기에서는 졸본부여 라는정치체의이름이등장하여주목된다. 7) 주몽의建都地에는그가도착하기전부터이미졸본부여라는정치체가존재하고있었다는것이다. 주몽의건국설화를어디까지역사적사실로이해할지논란이될수있겠지만, 일각에서는졸본부여를실체를가진존재로보기도한다. 8) 그러나주몽이졸본지역에도착하 4) 魏書 卷 100, 列傳第 88, 高句麗 朱蒙至紇升骨城遂居焉號曰高句麗. 5)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 5, p.26. 홀본 이더이른시기기록에나오는표기이지만, 일반적으로 졸본 이라는표기가더널리쓰이는점을감안하여여기서는편의상 졸본 이라는표기를기준으로사용하겠다. 6) 광개토왕비에서는 忽本西城山上而建都焉 이라하였는데, 上 은용법상 ~ 가, ~ 앞 이라고해석되는경우도있기때문에반드시 위 라고해석할필요는없다. 문장상으로만본다면 산기슭에성을쌓고건도하였다 는해석도불가능한것은아니다. 다만문제의산으로지목되는오녀산기슭에는성터가발견된바없는반면, 산위에는실제고구려성벽과건축유적이존재하는만큼여기서는 산위 로해석하는것이타당하다. 7) 졸본부여의존재는 삼국유사 에서도확인된다. 삼국유사 에서는 고구려가곧졸본부여이다 ( 髙句麗即卒夲扶餘也 ) 라고도하고, 졸본부여는북부여의별개도읍 ( 此卒夲扶餘亦是北扶餘之别都 ) 이라고도서술하고있다. 8) 金映遂, 1958 高句麗國都考 全北大學校論文集 2, p.17; 박노석, 2003 졸본부여와고구려의관계에대한고찰 全北史學 26, p.13; 김미경, 2005 高句麗琉璃王代政治勢力의再編과對外政策 북방사논총 4, pp.222-223; 조법종, 2007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성연구 白山學報 77, p.135. - 41 -

기전에이지역에자리잡고있었던정치체이름이실제로 졸본부여 였을지는의문이다. 건국설화에따르면주몽이나라를세우는과정에서세력대결하였던집단은松讓國이나沸流國으로소개되는데, 이는고구려의 5부중하나인消奴部 ( 沸流那部 ) 를의미한다. 하지만소노부가 졸본부여 라는국호를사용하고있었다고는생각하기어렵다. 9) 졸본부여 라는호칭은실제의역사적사실을반영한것이아니라후대에윤색되어덧붙여진것으로생각된다. 10) 특히 졸본부여 라는명칭이고구려본기에는보이지않고백제본기쪽에만등장한다는점은주목할필요가있다. 주지하다시피백제왕실은스스로부여계임을주장하였다. 이에독자적으로東明王사당을만들어제사하였고, 11) 王姓또한扶餘氏를사용하였다. 그런데고구려건국설화와긴밀하게연결되어있는현전백제건국설화는백제인들입장에서자연스럽게받아들일수있는성격의것은아니다. 백제의시조온조가주몽의아들이라는설정은백제왕실이고구려왕실의방계라는이야기에다름아니며, 이는백제의국격이고구려만못하다는인식으로흐를수있기때문이다. 삼국사기 에는다른계통의백제건국설화가추가적으로소개되어있는데, 여기서는시조沸流의아버지가주몽이아닌북부여왕解夫婁의庶孫인優台라고서술되어있다. 이건국설화에서는고구려나주몽의존재를배제하고백제왕실의혈통을북부여와직접연결시키려는의도가엿보인다. 그렇다면주몽의남하이전에이미존재하고있었다는 졸본부여 라는정치체역시백제와부여의계통을직접연결시키려는목적에서백제인들에의해설정된가상의존재가아닐까짐작된다. 12) 9) 주몽이졸본지역에도착했을때졸본부여와비류국이라는두개의선주정치체가각각거점을형성한채존재하였다고보는경우도있다 ( 조법종, 2007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성연구 白山學報 77, p.135.). 10) 이도학, 2006 高句麗와夫餘關係에對한再檢討 고구려광개토왕릉비문연구, 서경문화사, p.31-32. 11) 三國史記 卷 23, 百濟本紀第 1, 溫祚王 1 年夏 5 月, 立東明王廟.. 12) 임기환은백제인들이북부여 - 남부여 ( 백제 ) 와구분되는또다른부여로서고구려를개념화한것이 졸본부여 라고설명하였다. 또한이를부여의정통성을북부여에서남부여 ( 백제 ) 로잇는역사계승의식의형성물로보았다 ( 임기환, 2008 高 - 42 -

환인지역의고고학출토양상을보아도이지역과부여와의직접적인연관성은찾기어렵다. 부여가자리하고있었던곳으로추정되는遼寧省西岔溝유적이나吉林省老河深大坡유적에서는土壙墓나木棺墓가주요묘제로확인되는데, 환인지역을포함한혼강일대에는적석총이주요묘제로사용되고있어양자간문화적차별성이보이기때문이다. 13) 그림 1) 망강루출토耳飾 ( 좌 ) 과老河深 56 호묘출토耳飾 ( 우 ) 출처 :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p.52. 비고 : 원그림에서우측모사도의상하를뒤집어편집함. 환인시혼강유역에있는望江樓고분에서부여계의것으로확인되는 귀걸이유물이발견되어고구려건국초부여계집단의유입과관련된 것으로주목하기도하였지만, 14) 망강루고분의묘제가이지역토착묘 句麗初期建國說話관련자료의계통과성격 - 卒本扶餘를중심으로 - 졸본시기의고구려역사연구 (2008 년한중고구려역사연구학술회의 ), 동북아역사재단, p.11.). 하지만백제본기에보이는졸본부여는 또다른부여로서의고구려 라기보다는고구려와구분되는별개의선주정치집단으로설정되어있으며, 백제는그러한졸본부여를계승하고있음을드러내고있다. 따라서 졸본부여 = 고구려 라는인식은백제인들의본래의도로보기어렵고, 일연등후대인들의 해석 으로파악하는것이옳다고생각된다. 13) 田村晃一, 2001 高句麗の積石冢 樂浪と高句麗の考古学, 同成社, p.349. 14) 梁志龍 王俊輝, 1994 遼寧桓仁出土靑銅遺物墓葬及相關問題 博物館硏究 1994-2(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pp175-176); 李新全, 2005 五女山山城及其周圍的高句麗早期遺跡 고구려문화의역사적의의, - 43 -

제인적석총이라는점을감안하면해당유물만으로무덤주인이외래계 일것이라단정하기는어렵다. 위세품은지배층간교류를통한선물이 나교역을통해서도충분히입수될수있는만큼이를졸본부여의존재 를증명하는직접적인근거로판단하는것에는주의가필요하다. 6 세기중엽에편찬된 위서 의기록은 紇升骨城 이라는이름이등 장한다는점에서다른기록들과차별성을가진다. 紇升骨城 을 升紇骨 의잘못이라고보고升紇骨 = 卒忽 ( 솔골 )= 卒本으로파악한경우가있는 데, 15) 이는지나치게자의적인해석이어서따르기어렵다. 그밖에 紇升 骨城 을 紇本骨城 의誤寫로보는경우도있다. 16) 글을전사하는과정에 서 本 이 升 으로잘못베껴질가능성은충분히있고, 紇本 은 忽本 이 라는광개토왕비의표현과도음운적으로상통하기때문에이는무척설 득력이있는견해이다. 이경우 紇本骨城 은결국 홀본의골성 의의미 로이해할수있을것이다. 하지만 周書 에서 紇斗骨城 이라고표기 한사례를제외하면, 대부분의사서에서모두 紇升骨城 이라고전하고 있기때문에판본상으로좀더명확한근거가확인되기전까지는일단 紇升骨城 이라고표기하는것이맞겠다. 흘승골성은지금의오녀산성으로보는견해가지배적이다. 白鳥庫吉이 처음의견을제시한이래대다수의학자들이이러한견해를따르고있 다. 17) 다만오녀산성이지나치게험지라는점에서여러가지지형적불 리함을가지고있고, 위서 의기록에서도흘승골성이산성이라는기 술은없다는점을들어평지에있는하고성자성을흘승골성으로비정하 는견해도있다. 18) 고구려연구재단, p.106; 여호규, 2014 고구려초기정치사연구, 신서원, p.67. 15) 李丙燾, 1976 高句麗國號考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pp.367-368. 16)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 5, p.25. 17)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 5, p.28; 王承禮, 1984 吉林遼寧的高句麗遺蹟 考古與文物 1984-6, p.31; 魏存成, 1985 高句丽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2, p.28; 李殿福 孫玉良, 1990 高句麗的都城 博物館硏究 1990-1(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p.545); 王綿厚, 2002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p.44. 그외에대다수의학자들. 18) 耿鐵華, 2001 高句麗紇升骨城新考 北方民族 2001-2(2004 高句麗考古硏究, 吉林文史出版社, pp.102-106.). 魏存成의경우는본래오녀산성을흘승골 - 44 -

오녀산은환인일대에서가장강렬한시각적이미지를가지고있는장소이므로, 지배자의위상을나타내는상징공간으로부족함이없는곳이다. 해발 820m 높이에서쪽 남쪽 북쪽이삼면이깎아지른듯한절벽으로이루어져있어뷰트 (butte) 지형과같은산지로서, 정상은남북 1,000m, 동서 300m, 총둘레 2,440m에이르는넓은평탄지로이루어져있다. 산위에서는환인일대를한눈에조망할수있다. 동쪽과동남쪽산허리에는자연지세를이용하여쌓은고구려때의성벽이남아있고, 산정상부에서는여러개의건물유지와저수시설등이확인되는데, 이역시고구려때의것으로확인되었다. 그림 2) 오녀산전경과평면도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 동북아역사재단, 2008 하늘에서본고구려와발해, p.17;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編, 2004 五女山城-1996~1999, 2003 年桓仁五女山城調查發掘報告, 文物出版社, p.14. 과거에는오녀산성을고구려초기의것으로볼수있는지에대해회의 성이라고보았으나이후의저작물에서는下古城子城이흘승골성일가능성이있음을언급하였다 ( 魏存成, 1994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 辛勇旻譯, 1996 高句麗考古, 호암미술관, p.51.)). - 45 -

적인시각도있었다. 19) 하지만이는몇차례에걸친고고학조사를통해 해소되었다. 우선 1986 년송신탑건설과관련해발굴조사를하는과정 에서前漢시대의半兩錢과五銖錢및王莽이발행하였던大泉五十錢이 발견되었다. 1996~1999 년과 2003 년에도상세한조사가이루어졌는데, 이때오녀산성에는총 5 期의문화층이확인되었다. 제 1 기는신석기시 대말 ~ 청동기시대초, 제 2 기는철기시대이전, 제 3 기는기원전 1 세 기 ~ 기원후 1 세기전반, 제 4 기는 4 세기말 ~5 세기초, 제 5 기는金代에 해당한다. 이중제 3 기에해당하는 1 호대형건물지에서다시오수전과대 천오십전이출토되어고구려초기에해당하는유적임이확인된것이 다. 20) 삼국사기 에는동명왕대에 황룡이鶻嶺에나타났다 21) 는기록과 鶻嶺남쪽에경사스러운구름이나타났는데, 그색이푸른색과붉은색 이었다 22) 는기록이확인된다. 이규보의 東明王篇 에소개된 舊三 國史 인용에서는 7 월에검은구름이鶻嶺에일어나서사람들이그산 을볼수없었다 7 일만에운무가저절로걷혔는데성곽과궁실 누대가저절로만들어졌다. 23) 는내용이확인된다. 骨 과 鶻 은상통하 는글자이므로이들기록에등장하는 골령 은자연히 흘승골성 와연결 시켜이해할수있다. 앞서서술한내용들을감안하면역시오녀산은 골령, 오녀산성은 흘승골성 이라보는것이타당하다. 광개토왕비에등 장하는 홀본서쪽산 역시이곳으로이해할수있다. 다만오녀산성은매우험준한곳에자리하고있기때문에이곳이평상 시왕이머무는거처로적합한가에대한의문이제기된다. 고구려왕도 의구조에대해서평양지역과국내성지역의예를보아평상시에사용 하는평지성과전란이발생했을때사용하는산성의조합으로이루어졌 19) 王健群, 1987 玄菟郡的西遷和高句麗的發展 社會科學戰線 1987-2. p.200. 20)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編, 2004 五女山城 -1996~1999, 2003 年桓仁五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 pp.284-290. 21) 三國史記 卷第 13, 高句麗本紀第 1, 東明聖王, 3 년봄 3 월, 黄龍見於鶻嶺. 22) 三國史記 卷第 13, 高句麗本紀第 1, 東明聖王, 3 년가을 7 월, 慶雲見鶻嶺南其色青赤. 23) 東明王篇, 七月玄雲起鶻嶺人不見其山 七日雲霧自散城郭宮臺自然成. - 46 -

다는의견이제시된바있는데, 24) 이는현재대부분의학자들이수용하 고있는견해이기도하다. 따라서졸본시기왕이평상시에머물렀던거 점을찾아내는것이오랫동안학자들의주요관심사가되었다. 그림 3) 기존에제기된환인지역의졸본위치추정지 환인지역에서는 1980년대오녀산성에서서쪽으로약 8.5km 가량떨어진下古城子城이확인된바있다. 25) 이를바탕으로졸본지역의산성은오녀산성, 평지성은하고성자성이라는해석이제시되었다. 26) 졸본의위치에대해서는그밖에도오녀산에서동쪽으로직선거리상약 17km 가량떨어져있는喇哈城일대가지목된바있으며, 27) 현재수몰되어있 24) 關野貞, 1914 國內城及丸都城の位置 史學雜誌 25-11, 史學會, p.11-12. 25) 많은중국측논문에서하고성자성과오녀산성의거리를약 10km 라고소개하고있는데, 필자가구글어스로측정한결과약 8.5km 가나왔기에이를기준으로서술한다. 26) 蘇長淸, 1985 高句麗早期平原城 - 下古城子 遼寧省丹東, 本溪地區考古會議文集, p.8; 魏存成, 1994 高句麗考古, 吉林大學出版社 ( 辛勇旻譯, 1996 高句麗考古, 호암미술관, p.48); 王綿厚, 2002 高句麗古城硏究, 文物出版社, pp.48-49; 張福有 孫仁杰 遲勇, 2006 朱蒙所葬之 龍山 及太王陵銅鈴 崚 字考 東北史地 2006-1, p.21;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p.49. 27) 東潮 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 박천수 이근우역, 2008 고구려의역사와유적, 동북아역사재단, pp.129-130.); 田中俊明, 1998 高句麗の前期王都卒本の構造 高麗美術館研究紀要 2, pp.29-30; 노태돈, 1999 고구려의기원과국내성천도 한반도와중국동북 3 성의역사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pp.338-339; 王從安 紀飛, 2004 卒本城何在 東北史地 2004-2, pp.44-45; 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의천도에관한약간의논의 한국고대사연구 68, pp.29-30; 권순홍, 2015 고구려초기의都城과改都 한국고대사연구 78, p.199; 李道學, 2015 三國史記 의高句麗王城記事 - 47 -

는高力墓子村일대를주목하는경우도있다. 28) 이러한졸본지역후보지들을순서대로검토해보도록하자. 하고성자성은혼강서쪽대안에위치한평지토성이다. 1998년의조사에의하면평면형태의장방형으로, 동쪽벽은유실되어있는상태이다. 현재남아있는성벽의둘레는 618m이고, 원래의둘레길이는 800m 전후로추정된다. 29) 북쪽인근에는上古城子고분군이있고, 남쪽으로는망강루고분군이자리하고있어주변고분유적들과의상관성도큰것으로여겨진다. 檢證 韓國古代史硏究 79, p.144. 한편이와달리나합성을비류국성으로비정하는견해도있다 ( 조법종, 2007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성연구 白山學報 77, p.161.). 28) 劉素雲, 2005 高句麗政權早期所在地初探 長春教育學院學報 2005-1, p.11;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pp.59-60; 조법종, 2007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성연구 白山學報 77, p.150; 梁志龍, 2008 關于高句麗建國初期王都的探討 - 以卒本和紇升骨城爲中心 - 졸본시기의고구려역사연구 (2008 년한 중고구려역사연구학술회의 ), 동북아역사재단, pp.55-58; 양시은, 2013 桓仁및集安都邑期高句麗城과防禦體系硏究 嶺南學 24, p.51. 29)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編, 2004 五女山城 : 1996-1999, 2003 年桓仁五女山城調查發掘報告. 文物出版社, pp.306-307. - 48 -

출처 : 그림 4) 하고성자성의평면도와남쪽성벽절개면 遼寧省文物考古硏究所編, 2004 五女山城 -1996~1999, 2003 年桓仁五 女山城調査發掘報告, 文物出版, pp.305-306. 성내에서발견된유물은청동기시대의石器들을비롯해고구려시기 의토기, 철촉, 金代의도자기편등이다. 성내에서궁전으로볼만한유적 은확인되지않으며, 수습된유물대부분은서북쪽과동남쪽모서리에 집중되어있다고한다. 또한서남쪽모서리에서는저장시설도확인되었 다. 30) 하고성자성이방형의토성이라는점을감안하여이를현도군에속해 있던縣城으로파악하고, 이후에고구려가활용하였다고보는견해가일 찍부터제시되었다. 31) 반면축성의주체를고구려인으로보는경우도있 다. 중국의문화와접촉하였던초기고구려인들이중국식토성건축방 법을배워스스로토성을만들었다는것이다. 32) 성내출토품중중국군 현과연관되는것이없을뿐아니라주변에중국군현성과관련된분묘 군이없는것으로보아축조주체가고구려건국세력일것이라고이해 하는경우도있다. 33) 그러나고구려에직접적으로영향을미쳤던제 1 현도군의존속기간은매우짧으므로, 34) 이성이본래현도군과관련된 30) 蘇長淸, 1985 高句麗早期平原城 - 下古城子 遼寧省丹東, 本溪地區考古會議文集, p.9. 31)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2, p.29. 32) 李新全 梁志龍 王俊輝, 2004 关于高句丽两座土城的一点思考 东北史地 2004-3, p.34. 33)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p.49. 34) 현도군은 B.C. 107 에처음설치되었고, B.C.75 년무렵에는지금의신빈현영릉 - 49 -

것이었다하더라도漢계통의유물은극히드물게남았을수있다. 漢人들이물러간이후고구려인들이보축하여수백년간이용하였다면더욱그러하다. 하고성자성의축성주체에대해서는성의입지를통해서도추측해볼수있다. 하고성자성은혼강의서쪽에연접하여있는데, 그서북쪽으로는六道河가동남쪽으로흘러혼강과합류한다. 이육도하길은老城에위치한제2현도군과연결되는교통로이다. 고구려인들이축성주체라면서북쪽으로부터접근해올중국세력으로부터의공격을염두에두고혼강을방어선으로삼아그동쪽에성을만드는편이자연스럽다. 하지만하고성자성은혼강서쪽에자리하고있으며, 오히려혼강을동벽의해자로삼고있는모습이다. 이같은입지상의조건을염두에둔다면하고성자성의축성주체는漢人으로보는것이더자연스럽게느껴진다. 다만하고성자성의축조시기를고구려건국시점보다늦게보는경우도있어주의가필요하다. 양시은은하고성자의토성하단부수혈 (H1) 에서고구려전기로편년되는종위대상파수와심발형토기등이출토되었다는점과하고성자성부근에자리하고있는상고성자고분군의축조연대가 3-4세기로비정되기도하는등다소늦다는점을들어하고성자성이고구려초기보다다소늦은기단식적석총단계에조성되었을가능성이크다고하였다. 35) 하고성자성남쪽에는고구려초기의것이분명한망강루고분군도있기때문에상고성자고분군의존재를하고성자성의축조시기를가늠할수있는결정적인논거라고할수는없다. 하지만토성하단의수혈에서출토된고구려토기의존재는성의축조시기를판단할수있는중요한자료이므로주목할필요가있다. 이수혈에서출토된토기및하고성자 진부근으로옮겨갔다. 노태돈은이때현도군에속해있던고구려현이나서개마현등도교치되었을것으로보았는데, 교치되기이전의고구려현은하고성자성, 서개마현은지금의집안현성자리로비정하였다 ( 노태돈, 1999 고구려의기원과국내성천도 한반도와중국동북 3 성의역사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p.330.). 35) 양시은, 2013 桓仁및集安都邑期高句麗城과防禦體系硏究 嶺南學 24, pp.50-51. - 50 -

성지표에서수습된토기는오녀산성의 3기층에서출토된고구려토기와비슷하므로하고성자성의이용시기는최소한기원전후한시기까지올려보는것이가능하다. 다만축조시기가제1현도군존속시기의하한인 B.C.75년이전까지올라갈수있는지는다소의문부호가붙는상황이라고할수있다. 이를명확하게판별하기위해서는고구려초기토기의세밀한편년이뒷받침되어야할것이다. 그러나서기 200년이전에해당하는고구려초기토기편년은아직자료의영성함으로획기를세분하기어렵다는지적이있다. 36) 추가적인시굴조사나전면적인발굴을통해더많은자료의확보가필요하다고여겨진다. 앞서언급하였듯이하고성자성을졸본으로보는견해들이있으나이는광개토왕비에새겨져있는 홀본서쪽산위에성을쌓고도읍을세웠다 는서술과부합하지않는다는점에서큰약점을가지고있다. 하고성자성이졸본이라는의견을부정하고그대안으로나합성이나고력묘자촌일대를제시하는것은이러한방위상의문제를해결하기위함이다. 나합성은오녀산성의동쪽에자리하고있어방위상으로광개토왕비문의기술과부합한다. 입지한곳이교통의요지라는점도눈여겨볼만한점이다. 나합성지의서북쪽으로富尒江을따라가면신빈지역과통하고, 동북쪽혼강상류로거슬러올라가면통구지역과이어지며, 동남쪽의신개하길을따라가면집안지역과연결된다. 나합성은한변이약 200m 정도인방형의석축성으로알려졌으나, 환인댐수몰지역에포함되어있기때문에갈수기가아니면수중에잠겨있어접근및조사가어렵다. 田中俊明은나합성또한본래한의현성이었을것이라추정하고, 부이강과혼강의합류점인이곳이졸본이었을것이라고지목한바있다. 37) 노태돈은 三國史記 에보이는주몽설화에서주몽이졸본에자리를잡은뒤비류수상류로거슬러올라가沸流國의송양왕과만나신통술 36) 최종택, 2015 고구려토기의형성과변천과정연구 삼국시대국가의성장과물질문화 2,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p.229. 37) 東潮 田中俊明저, 박천수 이근우역, 2008 고구려의역사와유적, 동북아역사재단, pp.129-130.). - 51 -

경쟁을벌였다는설화에주목하였다. 혼강을비류수라보고, 부이강은 비류수상류 라고해석하여졸본은부이강과혼강이합류하는지점에있었다고추정하였다. 38) 三國史記 의주몽건국기사에서졸본천과비류수가함께등장한데주목한경우도있다. 주몽이 졸본천 에이르고, 비류수 가에초막을짓고살았다는서술을근거로졸본천에해당하는것이부이강이고, 비류수에해당하는것이혼강이라고보아두물줄기가합류하는지점을주몽의정착지로본것이다. 39) 그러나나합성은오녀산성과지나치게거리가멀다는문제점을가지고있다. 나합성과오녀산성의직선거리는약 17km에이르며, 길이구불구불사행하는혼강을따라형성되어있어실제이동거리는이보다도훨씬길다. 40) 또한나합성과오녀산성사이는여러개의산줄기로가로막혀있어, 같은권역이라고판단하기곤란하다. 광개토왕비에는주몽이나라를세운 홀본서쪽산위 와함께주몽이용을타고하늘로올라갔다고하는 홀본동쪽언덕 ( 忽本東 ) 이함께등장한다. 또한 동명왕편 의 구삼국사 인용에서는주몽의마지막과관련해 가을 9월에왕이하늘에오르고내려오지않으니이때나이 40이었다. 태자가왕이남긴옥채찍을대신龍山에장사하였다고전한다 41) 고기록하고있다. 주몽이승천하였다는 홀본동쪽언덕 은곧 용산 이라고할수있다. 이러한전승은서쪽에위치한 山 과동쪽에위치한 이마주보며졸본지역을감싸는경관을묘사하는데, 나합성이있는곳은이러한조건을충족시킨다고보기어렵다. 고고학적측면에서의문제점도있다. 본격적인발굴조사가이루어지 38) 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의천도에관한약간의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p.29. 39) 권순홍, 2015 고구려초기의都城과改都 韓國古代史硏究 78, pp.193~194. 40) 조법종은오녀산성의나합성의거리가직선거리로 13km, 실제거리 36km 라고하였다 ( 조법종, 2008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연구 초기고구려역사연구, 동북아역사재단, p. 316.). 그러나필자가구글어스로측정해본결과양자의직선거리는약 17km 였고, 사행하는계곡을따라이동하는실제거리는약 35km 로측정되었다. 41) 東明王篇, 秋九月王升天不下時年四十太子以所遺玉鞭葬於龍山云云 - 52 -

지않은상태이기는하지만, 나합성이고구려초기에만들어진것임을입증할고고학적자료가아직확인된바없다는점이다. 42) 중국학자인梁志龍은나합성을수차례방문하여조사한결과고구려초기유적으로보기는힘들다고하였다. 노출된석벽이좁고작아서성벽으로는보이지않으며, 그동안채집된유물도모두중화민국시기에해당한다는것이다. 43) 나합성주변에주목할만한초기고분군이확인되지않는다는점도문제이다. 환인지역에서고구려초기고분이가장밀집되어있는곳은오녀산성동쪽수몰지구인고력묘자촌일대인데, 나합성부근에서는이에비견될정도규모의초기고분군이확인되지않는다. 이처럼문헌기록과지형, 고고학적양상을종합해보면나합성을졸본으로보기에는여러가지난점이존재한다. 마지막으로고력묘자촌일대를살펴보자. 고력묘자촌은오녀산성동쪽산기슭의혼강건너편에자리하고있다. 지금은수몰되어있는상태이지만, 1956년댐건설과관련하여 240기의고구려무덤을조사하였다고한다. 44) 1994년에도발굴조사가실시되었는데, 이에따르면이일대무덤들의연대상한선은漢晉시기이며, 규모면에서도환인지역에서가장크다고평가되었다. 45) 대규모고분군의존재는당시그일대가주목할만한인구밀집지라는것을시사하므로졸본의위치를추정함에있어서중요한근거가된다. 고력묘자촌일대는경관적인측면에서도광개토왕비의기록과잘부합 42) 2003 년봄에환인현문물관리소에서나합성을시굴조사한적이있는데이때요 금 명 청시기의도자기편이수습되었다. 그밖에고구려시기보다이른것으로보이는그릇손잡이 [ 柱狀耳 ] 등이나왔다고하는데, 정작고구려시기의것은확인되지않았다 ( 王從安 紀飛, 2004 卒本城何在 東北史地 2004-2, p.46.). 43) 梁志龍, 2008 고구려건국초기왕도에대한연구 - 졸본과홀승골성을중심으로 - 졸본시기의고구려역사연구 (2008 년한중고구려역사연구학술회의 ), 동북아역사재단, p.55. 44) 遼寧省文物考古研究所 本溪市博物館 桓仁縣文物管理所, 1998 遼寧桓仁縣高麗墓子高句麗積石墓 考古 1998-3, p.17. 45) 梁志龍, 2008 關于高句麗建國初期王都的探討 - 以卒本和紇升骨城爲中心 - 졸본시기의고구려역사연구 (2008 년한 중고구려역사연구학술회의, 동북아역사재단, p.55. - 53 -

한다. 고력묘자촌의서쪽은혼강물줄기를사이에두고오녀산이솟아있고, 동쪽은경사가진산지이다. 따라서서쪽으로는 골령 이자 흘승골성, 동쪽으로는 동쪽언덕 이자 용산 이존재하는경관이성립한다고볼수있다. 이처럼문헌기록과고고학적자료, 현재의지형을종합적으로판단하였을때현재수몰되어있는고력묘자촌일대를졸본으로보는것이가장설득력있어보인다. 하지만더검토해야할부분이있다. 이곳이졸본이맞다면그졸본은어떤성격의장소인가하는점이다. 2) 聖所졸본과고구려인들의왕도관고구려초기왕도의평지거점의위치에대하여 1980년대하고성자성설이제기되었고, 1990년대나합성설이제기되어한동안양자가대립하는구도를형성하였다. 그러다가 2000년대들어서면서환인댐수몰지구인고력묘자촌일대를주목하는경향이강한흐름을형성하고있다. 문제가되는것은고력묘자촌일대에서平地城의존재가확인되지않는다는점이다. 물론현재수몰되어있는상태이기때문에조사를수행하기어렵다는점도감안해야한다. 하지만수몰이전에이루어졌던수차례의조사에서도대규모고분군의존재만이확인되었을뿐평지성으로볼만한유적은확인되지않았다. 이에대해梁志龍은 1950년대발굴조사시성지를발견하지못한것에대해시대적소홀이큰유감을남겼다고표현하기도하였다. 46) 초기졸본의평지성이고구려당대에이미사라진상태였을것이라추정하는경우도있다. 강현숙은초기적석총에서보이는미숙한석재가공기술력을고려할때고구려초기평지성은석성이아니라토축의평지성이었을것이고, 시간의흐름에따라성벽이원형을유지하지못하게되어광개토왕비건립당시에이미남아있지않게되어비문에서도언급되지않았던것이라하였다. 47) 그러나조사의소홀함으로평지성을발 46) 梁志龍, 2008 關于高句麗建國初期王都的探討 - 以卒本和紇升骨城爲中心 - 졸본시기의고구려역사연구 (2008 년한 중고구려역사연구학술회의, 동북아역사재단, p.63. - 54 -

견하지못하였을가능성이나유적이사라졌을가능성을논하기에앞서 애초에평지성자체가존재하지않았을가능성또한생각해보아야한 다. 48) 여호규는고구려건국설화에산상의성곽만나오고평지성이등장하지 않는점에주목할필요가있다고하면서, 졸본시기에는평상시거점에 성곽을축조하지않았을가능성이있다고지적하였다. 또한졸본에서는 산상의군사방어성이평상시거점보다중시되었을가능성이높다고하였 다. 49) 이는매우중요한지적이다. 졸본시기고구려의평지성을찾으려 하였던그간의시도가처음부터잘못된전제에서출발하였을가능성을 시사하기때문이다. 다만 고구려초기에는평지성이존재하지않았을 것이다 라는해석만으로모든의문이해소되는것은아니다. 고력묘자촌일대를평시거점이라고파악할경우생기는의문은과연 이곳이왕이거처하는거점으로적합한곳인가하는점이다. 고력묘자촌 은혼강을따라길쭉하게형성된좁고깊숙한골짜기안에자리하고있 다. 왕의평상시거처이자국가의중심역할을하는장소가굳이이렇게 협소한곳에위치할이유가있을까. 광개토왕비문에나오는 山上 이라는표현과 삼국사기 에나오는 水上 이라는표현에주목하여전자는군사요충지로서의면모를보이는 것이고, 후자는평상시경제활동중심지로서의모습을반영한것으로 해석하기도한다. 50) 하지만고력묘자촌이자리한곳은입지상이일대 47) 강현숙, 2015 고구려초기도성에대한몇가지고고학적추론 역사문화연구 56, p.22-24. 48) 梁志龍은고력묘자무덤발굴조사보고서에는 환인현주요유지및무덤분포도 가수록되어있는데, 그중고력묘자무덤떼와약 3km 가량떨어진북쪽에遺址가표시되어있어, 이곳이졸본일가능성이매우높다고하였다 ( 梁志龍, 2008 關于高句麗建國初期王都的探討 - 以卒本和紇升骨城爲中心 - 졸본시기의고구려역사연구 (2008 년한 중고구려역사연구학술회의, 동북아역사재단, p.58.). 그러나陳大爲가작성한보고서의분포도그림을보면, 梁志龍이지적한지점에는 新石器時代遺址 라고표기되어있다 ( 陳大爲, 1960 桓仁縣考古調查發掘簡報 考古 1960-1, p.5.). 따라서이를고구려의평지성유지라고보기는어렵다. 49) 여호규, 2015 삼국초기도성의형성과정과입지상의특징 삼국시대국가의성장과물질문화 1,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pp.308-309. 50)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p.59. - 55 -

경제활동의중심지 로보기어렵다. 그림 5) 수몰전고력묘자촌일대의항공사진 (1964년 9월촬영 ) 과지형도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 동북아역사재단, 2008 하늘에서본고구려와발해, p.13; 梁志龍, 2008 앞의글, p.57. 환인지역에는고력묘자촌이자리한골짜기보다평상시거점으로적합해보이는장소가얼마든지있다. 예컨대지금의환인현시가지가자리한곳은이일대에서가장넓은충적지가펼쳐져있는곳이며, 그강건너편에자리하고있는하고성자성일대만하더라도육도하를따라길게펼쳐진곡저평야와연결되어있는교통상의요지이다. 여기서혼강하류로조금내려가면大雅河가혼강과합류하는雅河村일대에도넓은평지가펼쳐져있다. 오녀산과의근접성이문제라고한다면오녀산서쪽산기슭과연접한哈達河일대도좋은위치이다. 이처럼주변에개방적이며우월한평지공간이충분히있음에도굳이협소한계곡안을왕의일상거주지이자국가통치의중심지로삼았다는것은쉽게이해하기어렵다. - 56 -

이와관련해졸본시기고구려왕의평지거주에대해시사점을주는 사료를살펴보도록하자. D-1. 鶻川에離宮을지었다. 51)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제 1, 유리명왕 3 년 (B.C.17) 가을 7 월 D-2. 왕비송씨가죽었다. 왕이두여자를취하여후실로삼았는데, 한명은禾姬이고鶻川사람의딸이다. 한명은雉姬인데漢人의딸이다 왕이涼谷에동 서 2궁을만들어각기두었다. 5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1, 유리명왕 3년 (B.C.17) 겨울 10월 D-3. 豆谷에離宮을지었다. 53)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제 1, 유리명왕 29 년 (10) 가을 7 월 D-4. ( 왕이 ) 豆谷離宮에서죽으니, 두곡동쪽들에장사지내고유리명왕이 라이름하였다. 54)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제 1, 유리명왕 37 년 (18) 가을 겨울 10 월 이들기록에따르면유리왕은여러곳에離宮을조성하였고, 생의마 지막도豆谷의이궁에서맞이하였다. 유리왕대조영된여러이궁의존재 는졸본시기왕의거주공간이고정되지않은여러곳일가능성을시사 한다. 55) 그렇다면졸본시기고구려에서建都地이자왕성으로서의상징 성을부여받은곳은山上에자리한흘승골성인것이고, 평지에자리한 왕의일상거주지는그만한권위를부여받지못하였던것으로볼수있 51) 三國史記 卷 13, 髙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3 年秋 7 月, 作離宫於鶻川.. 52) 三國史記 卷 13, 髙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3 年冬 10 月, 王妃松氏薨王更娶二女以繼室一曰禾姬鶻川人之女也一曰雉姬漢人之女也 王於涼谷造東西二宮各置之.. 53) 三國史記 卷 13, 髙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29 年秋 7 月, 作離宮於豆谷.. 54) 三國史記 卷 13, 髙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37 年秋冬 10 月, 薨於豆谷離宫葬於豆谷東原號爲琉璃明王.. 55) 임기환은이러한현상에대하여정치적중심지로서도성의위상이정착되지않은상황을반영한것으로해석하였다 ( 임기환, 2015 고구려國內都城의형성과공간구성 - 문헌검토를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59, pp.21-13.). - 57 -

다. 56) 그이유는무엇일까. 유리왕대遷宮이매우잦았다는점에서고대일본의사례와비교해볼수있을것이다. 일본에서는역대대왕 ( 천황 ) 들이재위시한번이상은새로운궁으로옮기는모습을보였다. 이에대해 1궁전건축의내구연한때문이라는설, 2부자별거의관습에서유래하였다는설, 3전대대왕 ( 천황 ) 의사망으로궁실이非淸淨지역이되어이를피하기위해옮겼다는설, 4새로운천황의즉위와함께宮地를정하는의식의일환이라는설등이제시된바있다. 57) 고구려의경우는유리왕 1대에만여러개의이궁이확인되므로, 2 3 4의설명은해당되지않는다. 굳이따진다면 1의경우를적용할수있을것이다. 다만이궁이라는것은동시에여러개가만들어져사용될수도있는만큼고구려초에는왕의일상적거주공간에대한정치적의미부여가그리크지않았다고이해하는편이더타당하다고여겨진다. 동명왕편 의 구삼국사 인용에따르면鶻嶺에 7일간운무가나타났다가걷히고나서 성곽과궁실누대 가만들어졌다고하였다. 이를통해고구려인들은산상에자리한 왕성 인흘승골성안에 왕궁 도있다고인식하고있었음을알수있다. 고구려인들은평지곳곳에마련된이궁과대비되는正宮이오녀산성에있는것으로인식하였던것이다. 골령 ( 흘승골성 ) 은 동명왕편 에서매우신비스러운장소로묘사되고있다. 이에오녀산성이지닌성소로서의성격을주목한경우들이있다. 노태돈은오녀산성을會盟이나卽位式및그밖의주요의식을행하는성소로서, 그리고위급한때일시피난처로서주로이용되었을것으로보았고, 58) 오강원은오녀산이탁자모양으로융기되어있는독특한외관으로인하여오랫동안이일대주민들로부터신앙행위의대상이되어왔다고지적한바있다. 59) 56) 고대일본에서천궁이잦았던이유에대하여당시건축술의한계로인한건축내구성문제로보는견해도있는데, 고구려초많은이궁이보이는것도이와관련해참고할여지가있다. 57) 岸俊男, 1981 日本の古代宮都, 日本放送出版協會, pp.14-15. 58) 노태돈, 1999 고구려의기원과국내성천도 한반도와중국동북 3 성의역사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pp.336-337 - 58 -

삼국사기 기록을보면환도 국내성시기의고구려왕들과평양시기의고구려왕들이즉위후시조묘제사를위해졸본을방문한기록들이다수등장한다. 이에조법종과양시은은고력묘자촌일대를졸본의중심지이자시조묘가건립된장소로추정하였다. 60) 주몽이용의머리를밟고승천하였다고하는東岡이자龍山이고력묘자고분군동쪽의산으로이해되는만큼타당성이있는추정이다. 하지만신성성이부여된강렬한존재감을가진오녀산의위상을감안한다면, 실제시조묘제사행위는오녀산정상에서주몽이승천하였다는동쪽의용산을바라보며이루어졌다고보는것이자연스럽다고생각된다. 오녀산위에서제사를지내는주체의시야에들어왔을광경을상상해보면, 그자신이서있는골령을포함하여주몽이승천하였다고하는용산까지의공간적범위전체가聖所로서인식되는경관이형성되었을것이다. 고구려어에서 졸 = 홀 = 골 = 고을 이 나라 를의미한다면여기에근원과뿌리를나타내는 本 이덧붙여진 졸본 = 건국지 라는의미가된다. 그렇다면다음과같은짐작이가능하다. 졸본이라는지명은본래고구려시조인주몽의행적이전설화된좁은공간, 建國地와昇天地가결합한성소를가리키는명칭이었다. 이것이인근에형성되어있는취락지까지포함하는지역명으로의미가확장된것이다. 즉고구려에는협의의졸본과광의의졸본이있는데전자는골령과용산으로둘러싸인건국지이자성소를가리키는것이고, 후자는성소뿐아니라취락지를포함한이일대전체를의미하는지역명으로이해할수있는것이다. 그렇다면굳이협의의졸본에해당하는고력묘자촌일대로한정하여왕의평상시거점내지정치적중심지를찾고자할필요는없을것이다. 59) 오강원, 2005 오녀산과환인지역의청동기문화와사회 북방사논총 3, pp.39-41. 60) 조법종, 2007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성연구 白山學報 77, pp. 151-152; 양시은, 2014 고구려도성연구의현황과과제 高句麗渤海硏究 50, p.47. 이중조법종은 廟 의의미가墓위에세워진寢의의미라고설명하고, 고구려능묘는계단식구조상층에廟의기능을갖는구조물이조성되어있었다고하였다. 하지만고구려적석총이계단식구조를갖추는것은후대의일이므로고구려시조묘가반드시무덤위에세워진건축물의형태였다고보기는어려울듯하다. - 59 -

고력묘자촌일대는고구려당대에시조왕의전승을품은성소이자사자 들의영혼이집주하는묘역으로기능하였을뿐이기때문이다. 그림 6) 환인댐건설이전의오녀산및그동쪽계곡의위성사진 (1965년 5월 26일촬영 ) 출처 : 고구려연구재단, 2005 위성사진으로보는고구려도성, p.15. 비고 : 지명삽입등필자편집. 오녀산에서동쪽으로형성된지형을보면, 혼강 ( 비류수 ) 이험준한산사이로사행하며독특한형상의계곡을형성하고있다. 이곳이곧광개토왕비문에등장하는비류곡일것이다. 성소로서의졸본은이비류곡의서쪽끄트머리에자리잡고있는특정공간이다. 이곳에는 골령에황룡이나타났다 는 삼국사기 의기록이나 추모왕이용의머리를밟고승천하였다 는광개토왕비문의기록등용과관련한전승이많이남아있다. 이는고구려인들이비류곡의구불구불한지형을용이꿈틀거리는모습으로이미지화했기때문으로생각된다. 졸본은바로그용의머리에해당하는곳에자리하고있으며, 고구려 - 60 -

초기부터많은무덤이조성되었다. 고력묘자촌일대의무덤군이그것이다. 무덤군이유독이곳에밀집한것은이지역이가지고있는성소로서의특별한장소성때문일것이다. 뒤집어서보면산기슭에펼쳐진거대한무덤군의경관이고구려인들에게이지역이가지고있는성소로서의이미지를더욱강화시켜주는시각적소재가되기도하였을것이다. 그림 7) 졸본의경관과주요지명 그렇다면고구려초왕이머물렀던세속의공간은어디였을까. 유리왕대이궁이지어진장소로는鶻川 涼谷 豆谷등의지명이전해지고있다. 그러나내용이소략하여정확한위치를추정하는것은쉽지않다. 골천은이름으로보아 鶻嶺 에인접한하천변이라생각할수있다. 삼국사기 에서는주몽이졸본천에이르러도읍하고자하였다고한다. 졸 은 홀 과통하고다시 골 과도통하므로, 졸본천 은곧 골천 과같은것임을짐작할수있다. 비류수인혼강은매우긴하천이므로, 졸본천혹은골천은비류수중에서왕도지역을흐르는특정구간을가리키는이칭이라볼수도있다. 이와관련해하고성자성을골천의이궁으로파악하는견해도제시된바있다. 61) 하고성자성이고구려의이궁이든아니든, 골 61) 李殿福 孫玉良, 1990 高句麗的都城 博物館硏究 1990-1(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p.546.); 김경삼, 1998 고구려초기의수도형식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2, p.22; 조법종, 2007 고구려초기도읍과비류국성연구 白山學報 77, p.154; 梁志龍, 2008 고구려건국초기왕도에대한연구 - 졸본과홀승골성을중심으로 - 졸본시기의고구려역사연구 (2008 년 - 61 -

령 ( 오녀산 ) 부근어느곳에 골천이궁 이있었던것은분명해보인다. 두곡은그동쪽에들 [ 原 ] 이있는지형이고, 유리왕의무덤이조영된곳이다. 환인지역에서이러한조건에맞는곳을찾아보면망강루고분군서쪽에자리한계곡입구의대지를주목해볼수있다. 62) 이곳은지대가높아환인현시가지를포함한주변일대가한눈에내려다보이고, 강건너편으로는멀리오녀산이정면으로바라보이는좋은입지조건을가지고있다. 망강루고분군도환인지역에소재한초기유력자의무덤이분명하므로유리왕의장지로보는데부족함이없다. 63) 涼谷은유명한황조가설화에등장하는지명이다. 설화에는골천사람의딸禾姬와漢人의딸雉姬가등장하며, 두사람의사이가좋지않아왕이양곡에동 서 2궁을지어각기두었다고하였다. 이러한내용만으로는구체적인위치를추정하기곤란하다. 다만치희가한인이라는점을고려해볼수있겠다. 당시고구려와교류하던한인이라면興京지역에있던현도군과관련된사람이라고보아야할것이다. 고구려와현도군은환인서북쪽으로형성되어있는육도하길을이용하여교류를하였을것이므로, 양곡은육도하주변의어느장소일가능성이있다. 이처럼고구려초왕의일상거처는고정된것이아니라환인지역곳곳에마련되어있었고신성한공간으로여겨졌던골령의흘승골성과달리종교적 정치적상징성이결여되어있었다. 통설에따르면고구려왕도는평소거주하는평지성과적이공격해왔을때들어가수비하는산성의세트로이루어졌다고한다. 이는왕도의중심공간을평지성으로보고, 산성은비상시에한시적으로이용하는특수목적의부속시설로이해하는것이다. 그러나졸본시기고구려왕도에서왕의권위를뒷받침하는상징적존재는오히려산성이었고, 평지의 한중고구려역사연구학술회의 ), 동북아역사재단, p.70. 62) 유리왕대천도설을따를경우그의장지인두곡을졸본 ( 환인 ) 이아닌국내성 ( 집안 ) 지역에서찾아야하겠지만필자는이를따르지않는다. 유리왕대천도설의사실성문제는별도로다룰것이다. 63) 망강루고분군의무덤이실제유리왕의것인가는확인할수있는근거가없다. 하지만이무덤이실제유리왕의것인가와는별개로후대의고구려인들이그렇게생각하였을만한입지상의조건은잘갖추어졌다고볼수있다. - 62 -

거처는어디까지나임시로머무는이궁이자보조적존재로인식되었다. 산성은단순히군사방어를위해존재하는보조적시설이아니라오히려왕의권위와신성성을드러내는장소로기능하였다. 산성이곧고구려의왕성이었던것이다. 64) 64) 방어적으로유리한산위에지배자가거주하는왕성이자리한경우는동서고금에많은사례를찾을수있다. 우즈베키스탄호레즘의아야즈칼라 (Ayaz-Kala) 같은성유적이대표적이다. 칼라 는요새를의미하는현지어로, 아야즈칼라는사막가운데우뚝솟은산위에조영된토성이다. 그형상은흡사오녀산성을연상케한다. 세개의구조물로구성되어있는데, 가장오래된것은시기적으로 1~2 세기에해당한다고한다. - 63 -

2. 환도 국내지역으로의왕도이전 1) 유리왕대천도설과해명태자설화고구려건국초의왕도가지금의환인지역인졸본이었으나어느시점부터는지금의집안지역인국내로옮겨가게되었다는것은모든이들이동의하는바이다. 문제는그시점이언제인가하는점이다. 이에대해서는그간많은연구자들이의견을제시한바있으며, 아직까지딱히정설이확립되어있지않다. 단순한왕도의이전문제라기보다 삼국사기 초기기록에대한이해문제, 정치사문제등이복잡하게얽혀있기때문이다. 여기서는편의상정치사적측면의분석은차후의과제로미루고, 왕도의이전문제자체에집중하여논의를진행하고자한다. 고구려는어느시점엔가졸본지역에서환도 국내 ( 지금의집안 ) 지역으로왕도를옮겼다. 그시기에대해서는크게네가지설이존재하는데, 1유리왕대 (B.C. 19~A.D. 18) 천도설, 65) 2태조왕대 (53~146) 천도설, 66) 3신대왕대 (165~179) 천도설, 67) 4산상왕대 (197~227) 천도설 68) 65) 李丙燾, 1956 高句麗國號考 서울大論文集 - 人文社會科學編 3(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p.362.); 金哲埈, 1956 高句麗 新羅의官階組織의成立過程 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一潮閣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智識産業社, p.124.); 리지린 강인숙, 1976 고구려사, 사회과학출판, p.42; 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 - 고구려건국과삼국통일을위한투쟁, 성곽,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pp.49-53;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2, pp.30-31; 徐永大, 1981 高句麗平壤遷都의動機 - 王權및中央集權的支配體制의强化과정과관련하여 - 韓國文化 2, p.86; 李殿福, 1982 高句麗丸都山城 文物 1982 6; 魏存成, 1985 高句丽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 2, pp.30-31; 손영종, 1990 고구려사 1, 과학백과사전종합출판사, pp.83-84; 李殿福 孫玉良, 1990 高句麗的都城 博物館硏究 1990-1(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pp.546-547.); 리영식, 1995 고구려의국내성천도목적에대하여 력사과학 1995 4, p.56; 김경삼, 1998 고구려초기의수도형식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8-2, p.23; 琴京淑, 2004 高句麗國內城遷都의歷史的意味 高句麗硏究 15, p.20; 김미경, 2005 高句麗琉璃王代政治勢力의再編과對外政策 북방사논총 4, p.238. 66) 김종은, 2003 고구려초기천도기사로살펴본왕실교체 숙명한국사론 3, p.41; 여호규, 2005 高句麗國內遷都의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p.69. 67) 임기환, 2015 고구려國內都城의형성과공간구성 - 문헌검토를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59, p.27. 68) 白鳥庫吉, 1914 丸都城及國內城考 史學雜誌 25-4 5, p.29; 鳥居龍藏 - 64 -

이그것이다. 남한학계다수의연구자들과중국및북한학계연구자들은대체로유리왕대천도설을취신하고있으며, 일본학계에서는산상왕대천도설이통설의위치를점하고있다. 태조왕대천도설과신대왕대천도설은남한학계에서비교적근래에제기된신설이다. 이를검토해보며타당성을살펴보도록하자. 69) 유리왕대천도설이근거로삼고있는주요사료는다음과같다. E-1. 교제에쓸돼지가달아나서, 왕이掌牲薛支에게명하여뒤쫓게하였다. 國內尉那巖에이르러찾아내어국내지방사람의집에가두어기르게하고는돌아와왕을뵙고아뢰었다. 신이돼지를쫓아국내위나암에이르렀는데, 그산수가깊고험하며땅이오곡을키우기에알맞고, 또고라니, 사슴, 물고기, 자라가많이나는것을보았습니다. 왕께서만약수도를옮기시면백성의이익이끝없을뿐만아니라전쟁의걱정도면할수있을것입니다. 70)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1, 유리명왕 21년봄 3월 E-2. 왕은국내로천도하고위나암성을쌓았다. 71) 1914 丸都城及び國內城考の位置に就きて 史學雜誌 25-7, p.47; 池內宏, 1927 曹魏の東方經略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12, p.253; 三品彰英, 1951 高句麗王都考 三国史記高句麗本紀の批判を中心として 朝鮮学報 1, p.39; 武田幸男, 1989 丸都 國內城の史的位置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p.416; 東潮 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 박천수 이근우역, 2008 고구려의역사와유적, 동북아역사재단, pp.49-50); 김희선, 2010 고구려국내성연구 白山學報 87, pp.150-151; 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의천도에관한약간의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p.19. 69) 필자는과거발표한기경량, 2010 高句麗國內城시기의왕릉과守墓制 韓國史論 56의 1장에서졸본에서국내지역으로의천도시기문제를다룬바있다. 그런데그간의연구를통해견해가보완되거나바뀐부분이적지않다. 편의상이를일일이적시하지는않겠으나, 이주제에대한필자의최종적인의견은이번글을기준으로한다는점을밝혀둔다. 70) 三國史記 卷第 13, 高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21 年春 3 月, 郊豕逸王命掌牲薛支逐之至國內尉那巖得之拘於國內人家養之返見王曰臣逐豕至國內尉那巖見其山水深險地宜五穀又多麋鹿魚鼈之産王若移都則不唯民利之無窮又可免兵革之患也.. 71) 三國史記 卷第 13, 高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22 年冬 10 月, 王遷都於國內築尉那巖城.. - 65 -

삼국사기 권 13, 고구려본기제 1, 유리명왕 22 년겨울 10 월 E-3. 한나라의遼東太守가군사를거느리고쳐들어왔다 위나암성으로들어가수십일동안굳게지켰다. 한나라군사들이포위하여풀어주지않았다 한나라사람들은우리땅이돌로되어서샘이없다고말합니다. 그때문에오래포위하고우리가곤핍해지기를기다리는것입니다. 72)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2, 대무신왕 11년가을 7월 E-1과 E-2에따르면유리왕 22년 (3) 10월에국도를國內로옮기고尉那巖城을쌓았다고한다. 그러나위나암이라는곳이정확히어디인지는확실하지않다. 위나암이라는지명은유리왕의아들인대무신왕대에도재차등장하지만이후기록에서사라진다. 전시에들어가농성을하였다는점과지형을묘사하는내용으로볼때산성이라고여겨지는데, 일반적으로국내지역으로이해되는집안에서이러한역할을담당했던곳은丸都城으로도비정되는지금의山城子山城이다. 73) 환도성이라는지명은山上王 2년 (198) 조에처음등장한이래외적의침입과관련한기사들에서수차례언급되는데그기능이 E-3 대무신왕조에등장하였던위나암성과유사하다. 74) 때문에유리왕이천도를하였다는위나암성이곧환도성이고, 어느시점엔가위나암성의명칭이환도 72) 三國史記 卷第 14, 高句麗本紀第 2, 大武神王, 11 年秋 7 月, 漢遼東太守將兵來伐 入尉那巖城固守數旬漢兵圍不解 漢人謂我巖石之地無水泉是以長圍以待吾人之困.. 73) 대부분의중국학자들은위나암성을산성자산성으로비정하고있다. 소수설로는위나암성을지금의覇王朝山城으로비정하는견해가있다 ( 孫進己 馮永謙, 1989 東北歷史地理 1, 黑龍江人民出版社, pp.411-412.). 패왕조산성의지형이문헌기록에서의묘사와합치될뿐아니라, 돼지를쫓아가다가국내위나암에이르렀다는기록을보아도집안의산성자산성은졸본에서너무멀다는것이다. 그러나지형이비슷하다는것은지극히주관적인판단이며, 거리문제에있어서도설화적요소에지나치게의미를부여한측면이있다. 무엇보다패왕조산성일대가고구려의도읍으로기능하였다고볼수있는고고학적근거가전혀보이지않기때문에성립하기어려운주장이다. 74) 환도성은산상왕대처음등장하지만, 丸都 는 142 년 ( 태조왕 90) 에지진이났다는기사에서확인된다. - 66 -

성으로바뀌었다는해석이나온것이다. 75) 그런데이러한설명은어디까지나정황에기댄것으로, 어떤과정을거쳐성의이름이위나암성에서환도성으로바뀌게되었는지는구체적으로알수없다. 더구나유리왕대고구려가국내지역으로천도를한기록이사실이라는것을전제로하였을때설득력을가질수있을뿐, 만약유리왕대천도기록이불확실한것이라면위나암성을환도성과동일한것이라판단할근거또한사라지게된다. 이와관련해다음사료들이참고가된다. F-1. 왕자如津이물에빠져죽었다. 왕이애통해하며사람을시켜시체를건지려하였으나찾지못하였다. 후에비류사람祭須가찾아서알리니, 마침내예로써王骨嶺에장사지내고 76)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1, 유리명왕 37년 (18) 여름 4월 F-2. 왕이骨句川에서사냥하다가신비로운말을얻어駏䮫라고이름하였 다. 77)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제 2, 대무신왕 3 년 (20) 가을 9 월 F-3. 왕이군대를내어부여를정벌하였다. 沸流水가에행차하여물가를바 라보니 78) 삼국사기 권 14, 고구려본기제 2, 대무신왕 4 년 (21) 겨울 12 月 F-1 에따르면국내위나암으로천도를한유리왕 22 년으로부터 15 년 후인유리왕 37 년에유리왕의왕자如津이물에빠져죽은사고가발생 하였는데, 여진의시신을발견한이는비류사람제수라고했다. 이를 75) 李殿福, 1982 高句麗丸都山城 文物 1982 6, p.85;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2, p. 31. 76) 三國史記 卷第 13, 高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37 年夏 4 月, 王子如津溺水死王哀慟使人求屍不得後沸流人祭須得之以聞遂以禮葬於王骨嶺 77) 三國史記 卷第 14, 高句麗本紀第 2, 大武神王, 3 年秋 9 月, 王田骨句川得神馬名駏䮫 78) 三國史記 卷第 14, 高句麗本紀第 2, 大武神王, 4 年冬 12 月, 王出師伐扶餘次沸流水上望見水涯 - 67 -

통해여진이빠져죽은곳이졸본지역의비류수라는사실을알수있 다. 또여진의시신을왕골령에장사지냈다고하였는데, 골령또한졸본 지역이다. 79) 뒤를이은대무신왕대의기록 F-2 와 F-3 에서도 골구천 과 비류수 등졸본지역의지명이계속등장한다. 위나암으로의천도기사 이후에도여전히국내가아닌졸본지역이기록의주요배경으로등장하 고있다는점이주목된다. 앞에서살펴본대무신왕대기록을보면위나암성은외부에서보았을 때 땅이巖石으로되어있어물이부족해보이는 지형이라고했다. 집 안에위치한산성자산성의지형을보면성문지바깥쪽으로계곡물이흐 르는모습이한눈에들어오므로이러한조건과는부합하지않는다. 오히 려사면이깎아지른듯한바위절벽으로둘러싸인환인지역의五女山城 이이러한묘사에부합한다. 80) 오녀산성의옛명칭은 五老山城 亏羅山城 혹은 兀刺山城 으로 위나 암 과의음운적유사성또한생각해볼수있다. 81) 尉 의독음으로는 위 와 울 2 가지가있다. 이중후자를취한다면 울나암 이되는셈이며, 이는 올라, 오로, 우라 등오녀산성의이칭과정확하게부합한다. 82) 이를종합해보면유리왕대에보이는 위나암 은집안에위치한산성자 산성이아니라환인지역의오녀산성을가리키는것으로보는게타당하 79) 김종은, 2003 고구려초기천도기사로살펴본왕실교체 숙명한국사론 3, p.37. 80) 노태돈, 1999 고구려의기원과국내성천도 한반도와중국동북 3 성의역사문화, 서울대학교출판부, pp.358-359. 81) 高麗史 高麗史節要 東國輿地勝覽 龍飛御天歌 등에는조선태조이성계가고려공민왕때동북면원수가되어동녕부를공격할때兀剌山城에서전투를치렀다는기록이남아있다. 鴨綠과婆猪두강사이의넓은들에있으며사면이벽처럼높이솟아있다고묘사되었는데, 이에安鼎福은 東史綱目 國內尉那巖城考 에서위나암성이곧兀剌山城이라는설을제시하였다. 근대에들어와서는鳥居龍藏이이지역에대한답사를바탕으로, 오녀산성을국내위나암성으로추정하였다. 그는조선에서 兀剌山城 이라불렀던이산이현지인들로부터는 五龍山城, 五女山城, 五牛山 등으로불리고있음을지적하며 尉那 와같은발음이라설명하였다 ( 鳥居龍藏, 1914 丸都城及び國內城の位置た就きて 史學雜誌 25-7, pp.45-47.). 82) 따라서필자는 위나암 보다는 울나암 으로읽는것이옳을수있다고여기나, 위나암 이라는독음이보편적으로사용되고있는것을감안하여여기서는 위나암 으로표기한다. - 68 -

다. 자연히유리왕대국내 ( 집안 ) 지역으로의천도기록에는어떤착오가 있다고판단하지않을수없다. 그렇다면유리왕대천도기사는어떻게나타나게된것일까. 김종은은 三國史記 에기록된초기고구려왕들의수렵지를분석한결과태조 왕대의수렵지와유리왕대의수렵지가겹치는점을들어태조왕대의기 사들이유리왕대로분식되었다고보았고, 같은맥락에서유리왕대국내 위나암으로의천도기사또한태조왕대에있었던일이유리왕대로소급 서술된것으로판단하였다. 83) 하지만태조왕대기록이하필이면유리왕 대로분식된이유를설명하기어렵다. 84) 예컨대태조왕대의기록을앞 시기로분식한다면, 유리왕보다는같은고씨성을가지고있으며국조의 이미지를가지고있다는점에서공통점을보이는동명왕대로분식이되 는편이훨씬자연스러울것이다. 소급분식된것으로지목된유리왕대箕山에서의전렵기사 2 건중 하나는유리왕이기산으로 7 일간전렵을떠난사이禾姬와雉姬사이에 다툼이생겨치희가떠나갔다는黃鳥歌관련전승이고, 85) 다른하나는 유리왕이기산에서전렵을하다가겨드랑이에깃이달린異人을만나羽 氏성을주었다는귀족가계전승이다. 86) 전자의경우내용상태조왕대의 기사가소급되었다고보기는어렵다. 후자의경우후대사서를정리하는 과정에서유력귀족의가계전승을삽입한경우로보이는데, 羽氏의등 장이반드시태조왕대에해당되는내용이었을것이라고볼근거는없다. 무엇보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유리왕대의기록을면밀히살펴 보았을때후대에있었던사실을단순분식하였다고보이지않는다. 전 83) 김종은, 2003 고구려초기천도기사로살펴본왕실교체 숙명한국사론 3, pp.40-41. 84) 태조왕대기사를유리왕대에분식할이유가분명치않고, 태조왕대보다오히려유리왕대의기사가더풍부하다는지적도있다 ( 김미경, 2005 高句麗琉璃王代政治勢力의再編과對外政策 북방사논총 4, p.236.). 85) 三國史記 卷第 13, 高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三年 王田於箕山七日不返二女爭鬪禾姬罵雉姬曰汝漢家婢妾何無禮之甚乎雉姬慙恨亡歸王聞之策馬追之雉姬怒不還王嘗息樹下見黃鳥飛集乃感而歌曰翩翩黃鳥雌雄相依念我之獨誰其與歸 86) 三國史記 卷第 13, 高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二十四年秋九月王田于箕山之野得異人兩腋有羽登之朝賜姓羽氏俾尙王女 - 69 -

체적인이야기흐름이분명유리왕대 천도 가있었다는것을전제한상 태로진행되고있기때문이다. 이와관련된기록을살펴보도록하자. G-1. 왕태자解明이옛도읍에있었는데, 힘이있고매우용감하였다. 黃龍國의왕이이를듣고사신을보내강한활을선물하였다. 해명이그사신을마주하여그것을당겨부러뜨리고말하기를 내가힘센것이아니라활이굳세지못할뿐이다. 하였다. 황룡국왕이부끄럽게여겼다. 87)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1, 유리명왕 27년 (8) 봄 1월 G-2. 왕이사람을보내해명에게일러말하기를 내가천도를한것은백성을편안하게하여나라일을굳게하려는것이었다. 네가나를따르지않고힘센것을자부하여이웃나라와원한을맺으니, 자식의도리됨이어찌이러한가? 하였다. 이에칼을주어스스로목숨을끊게하였다. 마침내礪津의동쪽들판으로가서창을땅에꽂고말을타고달려찔려죽었다. 이때나이가 21세였다. 태자의예로써동쪽들판에장사지내고사당을세우고그땅을일컬어槍原이라하였다. 88) 삼국사기 권13, 고구려본기제1, 유리명왕 28년 (9) 봄 3월 이기록은천도이후유리왕과해명태자와의갈등을담고있으며설 화적성격이매우강하다. 해명태자의죽음이후그의사당이세워진 지역을槍原이라고부르게되었다는설명이덧붙은점에서지명유래전 설의측면이크다고여겨진다. 창원의위치는 礪津의동쪽들판 이라고 설명되고있다. 환인지역의지형을감안하면나루동쪽에들판이형성 되어있다고판단할수있는곳은두곳이다. 혼강동편에자리한지금 의환인현중심시가지가형성되어있는지역과오녀산의서남쪽평지에 87) 三國史記 卷 13, 髙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27 年春 1 月, 王大子解明在古都有力而好勇黃龍國王聞之遣使以強弓爲贈解明對其使者挽而折之曰非予有力弓自不勁耳黃龍王慙.. 88) 三國史記 卷 13, 髙句麗本紀第 1, 琉璃明王, 28 年春 3 月, 王遣人謂解明曰吾遷都欲安民以固邦業汝不我隨而恃剛力結怨於鄰國爲子之道其若是乎乃賜劒使自裁 乃往礪津東原以槍揷地走馬觸之而死時年二十一歳以太子禮葬於東原立廟號其地爲槍原.. - 70 -

자리한泡子沿村일대이다. 또한가지더염두에두어야할것은礪津이라는지명이다. 유리왕 37 년에왕자如津이물에빠져죽자그시신을건져왕골령에장사지냈 다고하였다. 물에빠져죽은왕자의이름과지명의음이일치한다는점 은간과하기어려운점이다. 따라서이역시지명유래전설일가능성이 있다. 고구려인들이생각하였던여진왕자의장지는오녀산동쪽의고력묘자 고분군일수도있겠고, 오녀산서쪽의哈達河유역어느곳일수도있을 것이다. 礪津이라는지명이여진왕자의시신을건진곳이라는데서비 롯된것인지, 아니면장지에서비롯된것인지는불명확하지만왕골령이 언급되었다는점에서礪津및그동쪽들판인창원은泡子沿村일대에서 찾는것이조금더타당성이있어보인다. 해명태자관련기록에서가장주목되는것은고구려초에실존했던 나라로보기에는이질적인국명을가진 황룡국 의존재이다. 이를고구 려초에실존하였던이웃나라로보기는어렵다. 사실황룡국은 407 년 慕容雲 ( 高雲 ) 과馮跋이후연의왕이었던慕容熙를살해한후세운北燕 의별칭이다. 宋書 기록에따르면북연의도읍이황룡성이었기때문 에북연을황룡국이라고도불렀다고한다. 89) 그렇다면해명태자설화 역시 5 세기초이후에야지금의모습으로완성되었다고이해할수있을 것이다. 설화는오랜기간구전되는과정에서차츰내용이덧붙여지고변형되 는속성을가지고있다. 황룡국이라는이웃나라이름은고구려인들사이 에서전승되던해명태자설화에덧붙여진후대적요소라고파악된다. 황룡국 의예에서볼수있듯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유리왕대기 록에는후대인의인식이가필되어있다고보아야한다. 유리왕대에 국 내로천도하였다 는기록역시이러한관점에서바라보아야할것이다. 해명태자설화의원형이구체적으로어느시기에형성되었는지는정 확히알수없다. 하지만이설화에서가장중요한요소는왕과떨어져 89) 宋書 卷 97, 列傳 57, 夷蠻, 東夷, 高句驪國, 義熙初寶弟熙爲其下馮跋所殺跋自立爲主自號燕王以其治黃龍城故謂之黃龍國.. - 71 -

옛도읍에머물던태자가독단적으로이웃나라와외교적문제를일으켜부자간에갈등이발생하였다는것이다. 이로미루어보면유리왕대국내천도의내용을전하는 E-1과 E-2의기사역시독립적인기록이라기보다원래해명태자설화의일부분이었던것으로여겨진다. 제사용돼지가도망쳐그것을쫓다가새로운도읍지를발견하게되었다는내용자체가지극히설화적이며, 유리왕이해명태자를나무라는내용에서도자신이천도한뜻을태자가거스르고있음을직접거론하고있어, 천도기사와해명태자설화가긴밀하게연결됨을알수있다. 유리왕대천도기사가해명태자설화에기반한것이라면이를역사적범주에서다루는데는상당한주의가요구된다. 설화에는역사적사실이녹아있는경우도있으나허구적요소또한섞여있을수있기때문이다. 유리왕대 국내위나암에이르렀다, 국내로천도하고위나암성을쌓았다 는기록과관련하여 國內 라는명칭이집안지역을가리키는것이아니라수도를가리키는일반명사로사용된것이라해석하는견해도제시된바있다. 90) 하지만 國內 라는표현이유리왕천도기사에서등장한이후 340년간보이지않다가 342년고국원왕대에이르러서야비로소다시등장한다는점을감안해야한다. 91) 이러한단절성을감안하면 국내 가고구려초부터수도를가리키는일반명사로널리쓰였다고보는것은주저되는면이있다. 여기서의 국내 는역시집안지역을가리키는 국내 로이해하는것이옳을것같다. 다만 황룡국 의사례처럼후대적요소로볼수있을것이다. 앞서살펴보았듯이위나암성은오녀산성으로보는것이자연스럽다. 졸본지역에는본래 E-3과같이대무신왕대에漢軍의공격에맞서농성을하였다는 위나암성 관련설화가별도로존재하였던것으로보인다. 하지만천도가이루어진상황을이야기의배경으로삼고있는해명태자설화의최종형태가성립됨에따라그보다시간적으로뒷시기에해당하 90) 노태돈, 1999 앞논문, pp.358-359; 마크바이잉턴, 2004 고구려 1 차천도에관한문제들 고구려의역사와문화유산, 서경문화사, pp.558-559. 91)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p.51. - 72 -

는대무신왕대기록의위나암성역시자연히천도이후의지명으로처리될수밖에없었을것이다. 국내 + 위나암 이라는연칭형태의독특한지명표기가나타난이유도이때문으로짐작된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실려있는유리왕대 국내위나암 천도기사는고구려에서전승되어오던여러계통의설화들을결합하는과정에서이야기의내적일관성을부여하다가발생한혼선으로이해할수있다. 유리왕대의천도는실제로있었던역사적사건이아니라해명태자설화의극적인전개를위하여후대고구려인들이덧붙인설정으로짐작된다. 2) 3대왕대기록의신뢰성과산상왕대천도설산상왕대천도설은고구려초기기록및왕실계보의신뢰성문제와도긴밀하게연계된주장으로, 특히일본학계에서널리통용되는시각이다. 이는다음사료들을근거로하고있다. H-1. 伯固가죽고두아들이있었는데, 장자는拔奇이고, 작은아들은伊夷模이다. 발기가불초하여국인들이함께편의로이이모를왕으로세웠다. 백고때부터자주요동을노략질하였고, a또流亡해온胡族 500 여가를받아들였다. 건안연간에公孫康이군대를보내공격하여그國을깨뜨리고읍락을불태웠다. 발기가형이면서왕이되지못한것을원망하여涓奴加와각각下戶 3만여구를이끌고항복한뒤비류수로돌아가머물렀다. b항복했던胡族또한이이모를배반했다. c이이모가다시새로운國을만들었는데, 지금소재한곳이그곳이다. 발기는마침내요동으로건너갔고그자식은고구려에남았는데지금의고추가駮位居가그사람이다. 92) 삼국지 권30, 위서동이고구려 H-2. 丸都城을쌓았다. 93) 92) 三國志 卷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13, 高句麗, 伯固死有二子長子拔奇小子伊夷模拔奇不肖國人便共立伊夷模為王自伯固時數寇遼東又受亡胡五百餘家建安中公孫康出軍擊之破其國焚燒邑落拔奇怨為兄而不得立與涓奴加各將下戶三萬餘口詣康降還住沸流水降胡亦叛伊夷模伊夷模更作新國今日所在是也拔奇遂往遼東有子留句麗國今古雛加駮位居是也.. - 73 -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제 4, 산상왕 2 년 (198) 봄 2 月 H-3. 왕이환도로移都하였다. 94)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제 4, 산상왕 13 년 (209) 겨울 10 月 산상왕대천도설에따르면신대왕의아들인발기와이이모의왕위계승싸움의와중에요동에웅거하고있던공손강의공격으로졸본지역에있던고구려의국도가파괴되었고, 이에이이모가지금의집안지역으로물러가更作新國, 즉새로운도읍을만들었으므로, 이것이바로국내지역으로의천도를말하는것이라고한다. 하지만이는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의다음기록들과상충된다. I-1. 가을 9 월에왕이卒本에가서始祖廟에제사하였다. 10 월에왕이졸본 에서돌아왔다. 95)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제 4, 신대왕 3 년 (167) I-2. 왕이돌아가니故國谷에장사하고호를新大王이라하였다. 96)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제 4, 신대왕 15 년 (179) 겨울 12 월 I-3. 왕이돌아가니故國川原에장사하고호를故國川王이라하였다. 97)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제 4, 고국천왕 19 년 (197) 여름 5 월 I-1 에따르면신대왕은즉위 3 년 (167) 에시조묘에제사를지내기위 해졸본으로이동했다가한달후돌아왔다고한다. 이는고구려왕이행 한최초의시조묘제사기록이자, 졸본이아닌지역이고구려의국도로 93) 三國史記 卷 16, 高句麗本紀第 4, 山上王 2 年春 2 月, 築丸都城.. 94) 三國史記 卷 16, 高句麗本紀第 4, 山上王 13 年冬 10 月, 王移都於丸都.. 95) 三國史記 卷 16, 高句麗本紀第 4, 新大王 3 年秋 9 月, 王始卒本祀始祖廟冬十月王至自卒本.. 96) 三國史記 卷 16, 高句麗本紀第 4, 新大王 15 年冬 12 月, 王薨葬於故國谷號爲新大王.. 97) 三國史記 卷 16, 高句麗本紀第 4, 故國川王 19 年夏 5 月, 王薨葬于故國川原號爲故國川王.. - 74 -

기능하고있음을명확하게보여주는최초의기록이기도하다. 이기록에따르면산상왕보다앞선신대왕시기에이미고구려의국도가졸본이아닌지역, 즉환도 국내지역임이확인된다. 신대왕대국내지역이고구려의국도로기능하였다는것을알려주는또다른기록은장지명이다. 삼국사기 에따르면신대왕이묻힌곳은故國谷, 그아들인고국천왕이묻힌곳이故國川原이다. ( 故 ) 國 라는형식의장지명은국내의모지역임을말하는것으로, 故國原에묻힌故國原王과故國壤에묻힌故國壤王, 그리고國岡上에묻힌廣開土王등의다른사례가있다. 고국천왕의무덤이국내지역에있는이유에대해서는그의사후발생한왕위계승분쟁과정에서산상왕이정통성확보를위해선왕의시신을새로운도읍지에장사지냈기때문이라는의견도제기된바있다. 98) 이는확실히고국천왕의장지가국내지역에있는이유에대한설명이될수있다. 하지만신대왕이시조묘제사를위해졸본으로행차하였다가돌아왔다는기록과그의장지가故國谷이라는기록에대해서까지해명하지는못한다. 산상왕대천도설의입장에서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신대왕대기록의신뢰성을부정하는수밖에없다. 실제로산상왕대천도설을통설화고있는일본학계에서는산상왕대이전기록의사실성에대해불신하는입장이강하다. 일본학계는연구초기부터 삼국사기 에등장하는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의소위 3대왕기록의신뢰성에의문을제기하였고, 99) 여기에고국천왕까지더해그실재성을의심한다. 100) 이시기고구려왕계는수명및재위기간이지나치게길다는점, 삼국사기 기록이같은시기중국측기록과내용이상충된다는점등여러측면에서문제가있는것이 98) 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의천도에관한약간의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pp.21-22. 99) 津田左右吉, 1922 三國史記高句麗紀の批判 滿鮮地理歷史硏究報告 9, 東京帝國大學文學部 (1962 津田左右吉全集 12, 岩波書店, pp.409-411.). 100) 池內宏, 1940 高句麗王家の上世の世系について 東亞學 3(1960, 滿鮮史硏究 - 上世, 吉川弘文館, pp.228-234); 武田幸男, 1989 高句麗史と東アジア, 岩波書店, pp.300-308. - 75 -

사실이다. 하지만이시기왕계를전적으로상상의산물로치부하는태도는지나치다고할수있다. 예컨대중국측기록에등장하지않는다는점을들어고국천왕을허구적존재로단정하는것보다는, 차대왕수성의존재를누락시킨바있는 삼국지 의전력을감안하여고구려자체전승의존재및중국측기록의누락가능성에주목하는것이보다합리적인태도일것이다. 101) 일본학자들다수는고구려인들이중국측사서를통해궁 수성 백고등의존재를인지한이후태조왕 차대왕 신대왕등의왕계를창출해냈다고이해하였으나, 삼국사기 에기록된태조왕의몰년및차대왕의즉위년등을보면중국측사서내용과연대가크게어긋난다. 중국사서의내용을베껴서왕계를창출하였다면굳이연대를다르게할필요는없었을것이다. 이는중국기록과는다른고구려자체전승이존재하였음을시사한다. 중국사서에서太祖王에해당하는宮의존재가처음등장하는것은後漢和帝元興원년 (105) 의요동 6현침입기사이다. 삼국사기 에서는기원 53년에태조왕이이미즉위한것으로기록되어있지만, 삼국사기 의태조왕재위기간을그대로인정할경우재위기간이무려 94년에달하기때문에이를그대로믿기는어렵다. 따라서태조왕궁을 1세기중반부터활동한인물로보기는어렵고, 중국측기록에구체적인활동상이남아있는 2세기초무렵에등장한인물로보는것이타당하다. 그런데 후한서 에따르면安帝建光 1년 (121) 에궁이사망하고그아들인遂成이뒤를이었다고한다. 이역시 146년까지태조왕이생존해있는것으로기록된 삼국사기 와큰차이를보이는데, 후한서 에는궁의사망소식을접한漢조정이어떻게대처할것인지논의했던과정이구체적으로묘사되고있어기록의신뢰성을확보하고있다. 따라서궁의沒年은 후한서 를근거로 121년으로확정할수있다. 101) 三品彰英, 1951 高句麗王都考 三国史記高句麗本紀の批判を中心として 朝鮮学報 1, p.40. - 76 -

표 4) 삼국사기 삼국지 후한서 의내용비교 문제는이후 삼국지 와 후한서 의서술내용이엇갈리는데있다. 삼국지 에서는궁이죽고그아들인伯固가왕이되었다고서술되어있으나 후한서 에는궁이죽고아들인遂成이뒤를이었다고기록하고있다. 양사서의사건서술방식을비교해보면 삼국지 는발생시기를대부분 某某年間 으로두루뭉실하게처리하고있는반면, - 77 -

후한서 는거의매번사건이발생한기년을제시하고있어구체적이고명료하다. 논의가되는부분에서도 삼국지 는기년을적시하지않은채간략하게 궁이죽고아들백고가왕이되었다 고기술하고있을뿐이지만, 후한서 는해당연도가建光元年이라는점을밝히고있고, 궁이죽은이듬해수성이漢의포로를송환하고玄菟에항복했다는내용과이와관련해漢조정이내린詔書까지싣고있다. 따라서궁의사후수성이뒤를이었다는 후한서 의기록또한그사실성이인정된다. 후한서 가 삼국지 보다늦은시기에만들어진책이므로, 삼국지 에서의누락을 후한서 가보완한것으로볼수있다. 이는고구려에대한정보를단속적으로파악할수밖에없는중국측기록의한계를보여주는것이다. 수성에대한기록은 삼국지 에서는전무하고, 후한서 에서도극히간략히처리되어있어그가어떤활동을하였고, 언제죽었는지에대해서는정확히알수없다. 수성의몰년을알수없기때문에자연히그뒤를이은백고의등장시기또한불분명하다. 삼국사기 에따르면백고인신대왕이 165년에즉위하는데, 이는 후한서 의다음기사를통해부정되기도한다. J-1. a다음해 102) 遂成이漢의포로를송환하고玄菟에항복하였다. 詔書를내려 수성등이포악무도하므로목을베어젓을담가백성에게보임이마땅하나 지금이후로현관들과싸우지말것이며, 스스로귀순하여포로를돌려보내면모두贖錢을지불하되, 한사람당비단 40 匹을주고아이는그반을주겠다 고하였다. b수성이죽고아들인백고가왕이되었다. c그뒤로예맥이복속하니동쪽변방에사건이줄었다. d 順帝陽嘉元年에현도군에屯田 6 部를설치하였다. e 質帝 桓帝시대에다시遼東의西安平을침범하여 103) 102) 궁의몰년이자수성의즉위년 (121) 의다음해인 122 년. 103) 後漢書 卷 85, 東夷列傳句驪, 明年遂成還漢生口詣玄菟降詔曰遂成等桀逆無狀當斬斷葅醢以示百姓 自今已後不與縣官戰鬬而自以親附送生口者皆與贖直縑人四十匹小口半之遂成死子伯固立其後濊貊率服東垂少事順帝陽嘉元 - 78 -

후한서 권 85, 동이열전구려 이에따르면백고가왕이된것은적어도현도군에둔전 6부를설치한順帝陽嘉元年 (132) 이전이되어야된다는것이다. 그런데해당기사의전체적인맥락을보았을때 수성이죽고아들인백고가왕이되었다 는내용을전하는 b의문장은상당한위화감이느껴진다. 본래궁의잦은침입때문에골머리를앓던漢조정은그가죽자바로출병을하여고구려를치고자하였으나尙書陳忠의건의를받아들여온건책을쓰게된다. 궁의뒤를이은수성또한이러한漢조정의온건책에부응하여즉위다음해에포로를송환하였고, 漢조정은재차조서를내려차후포로송환시속전을지불할것을제시하였다. 고구려의복속과양국간평화적분위기의조성을알리는 c의서술은이같은漢조정과수성의온건책에의해만들어진분위기를서술한것으로볼수있다. 다시말해 b를제외하고 a와 c의문장이바로이어지는쪽이서술흐름상훨씬자연스럽다. 만약 b를 c의원인으로, 즉백고가왕위에올랐기때문에중국동쪽변방에사건이줄어들었다는의미로해석한다면, 백고의요동침략내용을담고있는 e의내용과모순이발생하고만다. 이러한모순은 백고때부터자주요동을노략질하였다 고하는 삼국지 의기록 H-1을통해서도더욱확연하게드러난다. 또 궁의몰년및수성의즉위년 이구체적으로적시된것과대조적으로수성의죽음과백고의즉위를전하고있는문장b는구체적인기년과맥락을전혀제공하지않은채막연하게삽입되어있다. 대부분의기사가구체적기년을동반하고있는 후한서 의서술방식을감안했을때이는 후한서 찬자가수성의몰년과백고의즉위년에대한정확한정보를확보하지못했기때문이라고판단할수있다. 즉 遂成死子伯固立 라는문장 b는해당사건의정확한기년에대한확신없이임의로삽입된것으로이해된다. 현도군에둔전 6부를설치했다는기사의경우백고의활동과는무관 年置玄菟郡屯田六部質桓之閒復犯遼東西安平.. - 79 -

하게漢조정이현도군에취한정책을건조하게기술한것이므로, 결국 후한서 에서백고의구체적인활동상이처음기록된것은質帝 桓帝 연간의서안평침범사건부터라고보아야한다. 삼국지 는백고가順 帝 桓帝연간에요동지역을침입했다고전하고있고, 후한서 에서는 質帝 桓帝연간에침입하였다고서술하고있다. 양사서에기록된이사 건은백고가서안평을침범해대방현령을죽이고, 낙랑태수의처자를취 한사건에대한동일한기록이다. 이중 후한서 의기록이보다범위 를좁혀서술하고있다. 질제의재위기간은 1 년반정도에불과하였으 므로결국이사건은환제연간에발생한것으로볼수있는데, 환제연 간은곧 146~167 년이다. 삼국지 와 후한서 에서는앞의백고의서안평침범기록에바로 이어靈帝建寧 2 년 (169) 현도태수耿臨이백고를공격해복속시킨기 록을남기고있다. 이는환제연간에있었던백고의서안평공격으로양 국에긴장이발생한데대한응징의성격을지닌것으로볼수있다. 두 사건의연속적성격을보았을때백고의서안평공격은영제가즉위하기 직전인환제말기에발생했던일로여겨진다. 그런데앞서살펴보았듯이 삼국사기 에서백고인신대왕의즉위년은 165 년으로, 중국측사서 에백고의구체적활동상이처음등장하는시기와일치한다. 더구나 후한서 교현전에는환제말선비 남흉노와고구려嗣子백 고가침입하자교현이度遼將軍으로임명되어이들을격파하였다는기록 이남아있으며, 104) 교현의휘하에서일을하였던蔡翁의 黃鉞銘 에 도같은표현이나온다. 105) 여기서백고를수식하는 嗣子 라는표현에 주목할필요가있다. 106) 이는백고의즉위년이 165 년무렵이라는것을 의미하기때문이다. 104) 後漢書 卷 51, 李陳龐陳橋列傳 41, 橋玄, 桓帝末鮮卑南匈奴及高句驪嗣子伯固並畔為寇鈔四府舉玄為度遼將軍假黃鉞玄至鎮休兵養士然後督諸將守討擊胡虜及伯固等皆破散退走.. 105) 蔡中郎集 黃鉞銘, 孝桓之季年鮮卑入塞鈔盜起匈奴左部梁州叛羌逼迫兵誅淫衍東夷高句驪嗣子伯固逆謀竝發三垂騷然為國憂念四府表橋公.. 季年 은말년을의미한다. 106) 노태돈, 1999 주몽설화와고구려초기의왕계 고구려사연구, 사계절, pp.70-73. - 80 -

후한서 교현전과채옹의 黃鉞銘 의내용은백고의즉위년정보에있어서고구려자체전승에기반하고있는 삼국사기 의기록이 연간 으로처리하고있는 삼국지 와 후한서 동이전의그것보다한층구체적이고정확성을가지고있음을보여준다. 그렇다면졸본이아닌국내지역이왕도역할을하고있음을보여주는 삼국사기 신대왕대기록들의신뢰성역시긍정적으로바라볼수있을것이다. 전술하였듯이산상왕대천도설은 3대왕대 기록에대한강한불신을기반으로성립된것이다. 실제로태조왕과차대왕대의기록은연대에있어서신뢰하기힘든면이많다. 하지만왕계자체가날조되었다고보는것은지나치며, 연대가불안정한형태의고구려자체전승이있었을것으로여겨진다. 게다가신대왕대의기록은앞의두왕과달리연대의정확성에있어서도상당한신뢰성을확보하고있다. 이에따라신대왕이즉위초에졸본으로시조묘제사를갔다는기록과신대왕의사후장지가고국곡에조성되었다는기록등은충분한사료적가치가있다고여겨진다. 신대왕대환도 국내지역이고구려의왕도로기능하고있었음을인정한다면산상왕대천도설은자연히성립할수없게된다. 그렇다면산상왕대천도설의가장중요한근거인 삼국지 의기록, 이이모가다시새로운國을만들었는데, 지금소재한곳이그곳이다. 라는구절은어떻게이해하여야할까. 3) 更作新國과移都의의미 삼국지 동이전에따르면백고 ( 신대왕 ) 의사후그아들인발기와이이모사이에권력다툼이발생하였고, 공손강이고구려의 國 을공격해읍락을불태우자발기가소노가와하호 3만여구를이끌고항복하여비류수에머물렀다고한다. 산상왕대천도설을취하는이들은공손강에의해파괴된 國 이당시고구려의왕도였던졸본이고, 이이모 ( 산상왕 ) 가새롭게만든 新國 은환도 국내지역을가리킨다고보고있다. 이에대해산상왕대에있었던 更作新國 은다른지역에새로운도읍 - 81 -

을만들었다는의미가아니라, 국내지역내에서의이동을의미한다는 해석도제시되었다. 107) 이는산상왕대이전인유리왕대, 혹은태조왕대 부터이미집안지역이고구려의왕도로서기능하고있었다는인식에기 반한설명이다. 유리왕대천도설의문제점은이미앞에서살펴보았으므 로, 여기서는태조왕대천도설을중심으로타당성여부를살펴보도록하 자. 태조왕대천도설의한축은高氏성을가지고있는태조왕과解씨성 을가지고있는그앞의왕들사이에보이는왕실계보상의단층에주 목한견해이다. 태조왕의등장을소노부에서계루부로의주도권교체로 파악한견해는이른시기부터나타났는데, 108) 여기에더해소노부는환 인지역을기반으로한집단, 계루부는집안지역을기반으로한집단으 로파악하여왕실교체와천도를연결시킨견해가제시되었다. 109) 이와 달리소노부에서계루부로의왕실교체가일어난것은동명왕대로보면 서도태조왕대기록들에대한검토를통해태조왕대에천도가있었다고 이해하기도한다. 110) 여호규는태조왕대기사에나오는東海와南海등의방위관념에변화 가있었음을지적하고, 태조왕대초중반의어느시기에환인에서집안 麻線溝일대로의천도가있었을것으로보았다. 111) 그러나태조왕대에 107)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 2, p.32; 李殿福 孫玉良, 1990 高句麗的都城 博物館硏究 1990 1(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p.550); 車勇杰, 1993 高句麗前期의都城. 國史館論叢 48, p.93;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p.51. 108) 金哲埈, 1956 高句麗 新羅의官階組織의成立過程 李丙燾博士華甲記念論叢, 一潮閣 (1975 韓國古代社會硏究, 知識産業社, p.124.); 金龍善, 1980 高句麗琉璃王考 歷史學報 87, p.61. 김철준은계루부가환인지역에서집안지역으로이동한것이유리왕대라고보았으나, 계루부의장이연맹장으로서의주도권을잡게된것은그보다후대인태조왕대라고이해하였다. 김용선은유리왕대부터모본왕까지의해씨왕계와태조왕대부터의고씨왕계를구분하여전자를연노부 ( 소노부 ), 후자를계루부왕실로파악하였다. 109) 김종은, 2003 고구려초기천도기사로살펴본왕실교체 숙명한국사론 3; 권순홍, 2015 고구려초기의都城과改都 韓國古代史硏究 78. 이중권순홍은중심세력의교체로인해국가중심지가바뀌었다는점에주목해 천도 개념에문제제기를하며 改都 라는표현을사용하였다. 110)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 82 -

나타난다는방위관념의변화라는요소는천도설의유력한증거로활용하기엔주저되는부분이있다. 三國史記 고구려본기에서전하는태조왕의비정상적인수명과재위기간등이시기의기년및기록의신빙성문제가해결되지않은상태에서해당기록들을활용해당대인들의방위개념의변화나천도시기등을추정하는것에는적지않은부담이따르기때문이다. 환인지역에서집안지역으로의이동만으로동쪽과남쪽에대한방위관념이그렇게크게바뀔수있는것인지의문이며, 국내지역의초기중심지이자공손강에게파괴된 國 이있었을것으로지목된집안마선구일대에서왕도의중심지로볼수있는중심취락유적이나성지가발견된적이없다는점도문제이다. 112) 태조왕대천도설을주장하는경우는물론이고유리왕대천도설을지지하고있는중국다수의학자들다수는산상왕 13년 (209) 의환도성移都기사에대해외부로부터의군사적위협에따른평지성에서산성으로의임시적이거의성격을가진사건으로설명한다. 113) 이때의평지성이마선구일대인가집안시내에있는국내성지인가하는점에서차이가있을뿐, 공손강의침입으로평지에있던거점이파괴되자산성으로옮기게되었다는것이다. 하지만과연건안연간 (196~219년) 에공손강의군대가집안지역까지진입하여 國을파괴 하는군사활동을펼쳤다고볼수있을지에대해서는검토가필요하다. 공손강의침공은正始 5년 (244) 에있었던毋丘儉의고구려원정과는크게다른모습을보인다. 관구검은고구려의왕도인환도성을공격하기위하여고구려영내를진군하다가비류수유역에방어선을형성한고구려군과큰싸움을벌인다. 여기서승리한이후다시䚂峴이라는곳에이 111)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pp.63-69. 112) 마선구일대를 國 의소재지로보기어렵다는점에대해서는이미여러연구자들이지적을한바있다 ( 김희선, 2010 고구려국내성연구 白山學報 87, p.149; 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의천도에관한약간의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p.21; 임기환, 2015 고구려國內都城의형성과공간구성 - 문헌검토를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59, p.25.). 113) 필자역시과거이러한견해를따랐으나 ( 기경량, 2010 앞논문 ), 지금은다르게이해하고있다. - 83 -

르러 縣車束馬 하는고생을겪은끝에비로소환도산에오를수있었다. 114) 그러나공손강의군사활동에는관구검의원정기록에서보이는길고험한여정이전혀보이지않는다. 이는 삼국지 동이전의기록이소략하다는점을감안하여도의문스러운점이다. 공손강의침공시발기가소노가와하호 3만여구를이끌고항복하여비류수에머물렀다고한점을보면, 공손강이깨뜨렸다는고구려의 國 은역시소노부의본거지이자비류수유역인졸본이었다고파악하는것이자연스럽다고여겨진다. 그러나앞서살펴보았듯이산상왕보다앞선신대왕과고국천왕대에이미고구려왕들이집안지역을거점으로삼고있음을말해주는기록들도존재하기때문에사료의내용간충돌이발생한다. 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고구려의 國 에대한당시중국인들의인식에대하여생각해볼필요가있다. K-1. 왕이졸본에가서시조묘에제사를지냈다. 115)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 4, 신대왕 3 년 (167) 가을 9 월 K-2. 왕이졸본에가서시조묘에제사를지냈다. 116) 삼국사기 권 16, 고구려본기 4, 고국천왕 2 년 (180) 가을 9 월 K-3. 왕이졸본에가서시조묘에제사를지내고크게사면하였다. 117) 삼국사기 권 17, 고구려본기 5, 동천왕 2 년 (228) 봄 2 월 K-4. 왕이졸본에가서시조묘에제사를지냈다. 118) 삼국사기 권 17, 고구려본기 5, 중천왕 13 년 (260) 가을 9 월 114) 北史 卷 94, 列傳 82, 高句麗, 五年幽州刺史毋丘儉將萬人出玄菟討位宮大戰於沸流敗走儉追至䚂峴懸車束馬登丸都山屠其所都.. 115) 三國史記 卷 16, 髙句麗本紀 4, 新大王 3 年秋 9 月, 王如卒本祀始祖廟.. 116) 三國史記 卷 16, 髙句麗本紀 4, 故國川王 2 年秋 9 月, 王如卒本祀始祖廟.. 117)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 5, 東川王 2 年春 2 月, 王如卒本祀始祖廟大赦.. 118)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 5, 中川王 13 年秋 9 月, 王如卒本祀始祖廟.. - 84 -

K-5. 왕이졸본에가서시조묘에제사를지냈다. 백성들을살펴방문하고 늙고병든자들을구휼하였다. 119)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 6, 고국원왕 2 년 (332) 봄 2 월 삼국사기 에따르면평양으로천도하기이전에 5건의시조묘제사기록이확인된다. 가장이른것이신대왕대의것이며, 가장후대의것이고국원왕대의것이다. 시조묘를방문하여제사를올린시기는중천왕대를제외하면모두즉위초이다. 즉위 2년차에시조묘제사를올린사례가 3건으로가장많으며, 5건모두 2월이나 9월에제사를하였다. 흥미로운것은산상왕의경우는시조묘제사기록이존재하지않는다는점이다. 산상왕을기준으로앞의 2왕인신대왕과고국천왕, 뒤의 2왕인동천왕과중천왕은빠짐없이졸본을방문하여시조묘에제사를지냈다. 그러니산상왕대에만시조묘제사기록이없는것을단순누락으로보기보다는모종의이유가있는것으로보는것이합당할것이다. 눈여겨보아야할점은다른왕들이졸본을방문하여시조묘에제사를올렸던재위 2년차의봄 2월에산상왕은시조묘제사대신환도성을쌓는행위를하였다는사실이다. 산상왕은두달뒤인 4월나라에사면령을내리는데, 120) 이는동천왕이시조묘제사직후대사령을내린것, 고국원왕이시조묘제사직후백성들을살피고구휼한기록과겹쳐보이는점이다. 공손강의침입은건안연간 (196~219년) 에있었던일로기록되어있다. 이는산상왕과왕위계승다툼이있었던발기의항복과연동되는사건이었던만큼산상왕이즉위한 197년즈음에있었던일로볼수있다. 공손강이공손탁으로부터位를물려받은것이建安 9년인 204년이므로, 공손강이고구려의국을깨뜨린시점도 204년이후로보아야한다고생각할수도있다. 그러나 197년공손탁의지시에따라아들인공손강이 119) 三國史記 卷 18, 髙句麗本紀 6, 故國原王 2 年春 2 月, 王如卒本祀始祖廟廵問百姓老病賑給.. 120) 三國史記 卷 16, 髙句麗本紀 4, 山上王 2 年夏 4 月, 赦國内二罪已下.. - 85 -

고구려원정을수행하였을수도있기때문에이는큰문제가되지않는 다. 실제로 삼국지 공손탁열전을보면 동쪽으로고구려를정벌하 고서쪽으로는오환을쳐위세가해외까지이르렀다. 고서술하고있어 그의생시고구려정벌이있었음을시사하고있다. 121) 여하튼이때소노 부는공손강에게항복을하였으므로시조묘가있던졸본지방은고구려 의통제에서이탈하여공손씨의지원을받는발기의휘하에있는상태였 다. 자연히산상왕은졸본을방문하여시조묘에제사를지내는것이불 가능한처지일수밖에없었던것이다. 이시기고구려의왕은이미지금의집안지역을통치의거점으로삼 고있었으나, 소노부의거점이자시조주몽의사적이남아있던졸본지 역은여전히고구려인전체의신앙적중심지이자성소로서의역할을하 고있었던것으로보인다. 기록상에는왕들이즉위직후졸본을방문하 여시조묘에제사를지낸내용만남아있을뿐이지만, 실제로는다른先 君들에대한제사를비롯하여여러가지국가의례가졸본의흘승골성을 무대로이루어졌을것으로여겨진다. 하지만졸본이또다른왕위계승권자이자산상왕과적대적관계에있 는발기의통제하에있는상황에서왕의주요한권능인국가의례의주 관은불가능하였다. 이에산상왕입장에서는집안지역에새로운국가 의례장소를만들어이당시고구려왕들이즉위초수행하였던시조묘 제사를대체할필요성을느끼게되었을것이다. 집안지역에서흘승골성 을대체할만한의례공간의입지로가장적합한곳은바로환도산, 지금 의산성자산이었다. 丸都라는이름을통해서도알수있듯이이곳의지 형은높은산봉우리로둘러싸인형태로서, 졸본의골령과는다른면에서 사람들의시선을끄는특별한경관적요소를갖추고있었기때문이다. 삼국지 에따르면고구려는 환도아래를도읍으로삼았고, 그 습속이음식은아껴먹으나궁실을만드는것을좋아한다. 거처의좌우 에큰집을지어귀신에게제사지낸다. 또靈星 社稷에제사한다. 고하 였다. 122) 이는환도성에있는궁실좌우에제사와국가의례시설들이 121) 三國志 卷 30, 魏書 8, 二公孫陶四張傳 8, 公孫度, 東伐高句驪西擊烏丸威行海外.. - 86 -

갖추어져있음을묘사한것으로볼수있다. 산상왕은 198년 ( 산상왕 2) 환도성을쌓은데이어 209년 ( 산상왕 13) 이곳을왕의거소로삼으며국가의례장소와왕의거소를결합한특별한공간으로만들었다. 이것을 삼국사기 에기록된 移都 로볼수있는것이다. 國과都는본래종묘와先君의위패를갖추고있는왕이나제후의거주지를의미한다. 당시중국인들의시각에서보면졸본지역은고구려의시조묘가존재하고국가의의례공간으로기능하고있으며, 왕위계승권을가진적장자이자공손씨의지원을받는발기가머무는지역이었다. 따라서이곳을고구려의 國 으로인식하는것이자연스럽다. 동시에산상왕이이모가축성을통해새로운국가의례공간을창출하고더나아가왕의거소로삼은환도성에대해서는 新國을만들었다 고표현할수있는것이다. 삼국지 에따르면고구려에서 涓奴部는본래國主였으므로지금은왕이되지못하지만그적통대인은고추가의칭호를얻는다. 또한종묘를세울수있고영성과사직에제사를지낸다. 하였다. 123) 종묘를세우는것은그렇다치더라도영성과사직에따로제사를지낸다는것은연노부 (= 소노부 ) 의근거지가본래고구려의국가의례가이루어졌던곳이었기에가능한遺制라할수있다. 이상의설명은비류수유역인환인지역을소노부의근거지로보고, 압록강유역인집안지역은계루부의근거지로보는것을전제로하고있다. 이점에있어서는연구자들간시각이엇갈리고있는데, 이는고구려왕실의계통에대한이해와도관련이있다.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따르면시조인동명성왕주몽은高氏성을가지고있다. 하지만그아들로설정되어있는제2대유리왕을비롯해제5대모본왕까지 4명의왕은성이解氏인것으로확인된다. 제6대태조왕대부터는성씨가생략되어있다. 중국측사서에따르면고구려의왕성은고씨로알려져 122) 三國志 卷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13, 高句麗, 都於丸都之下 其俗節食好治宮室於所居之左右立大屋祭鬼神又祀靈星社稷.. 123) 三國志 卷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13, 高句麗, 涓奴部本國主今雖不爲王適統大人得稱古雛加亦得立宗廟祠靈星社稷.. - 87 -

있기때문에태조왕대이후고구려왕의성씨는고씨로이해하는것이일반적이다. 삼국지 는고구려에서왕실의교체가있었던것으로전하고있으므로이러한왕성의변화를소노부 ( 연노부 ) 에서계루부로의왕실교체와연관시켜파악하기도한다. 124) 반면왕실교체가주몽대에있었던일로보는경우도있다. 이는주몽의건국초에있었다고전하고있는주몽과송양왕의갈등과싸움, 복속의서사에주목한경우이다. 즉주몽이래고구려왕실은모두계루부소속이며, 왕계에서해씨와고씨로의전환은계루부내친족집단에서의분화로이해하는것이다. 125) 고구려초기의단위정치체였던각部의이름은 奴, 혹은 那 를어미로하는경우가일반적인데이는이들정치체가일반적으로계곡하천변에자리잡은취락지를중심으로형성되었기때문으로이해된다. 특히소노부의이칭으로는沸流部혹은沸流那部라는명칭이전한다. 비류수는지금의혼강으로보는것이일반적이다. 혼강은이지역을대표하는하천으로, 白山동북쪽으로부터발원하여서남향으로흘러백산 통화를거쳐환인에이르러남쪽으로방향을틀어사행하다가압록강과합류하는매우긴물길이다. 혼강의지류인부이강을비류수로비정하는경우도있지만, 이일대에서가장크고중요한강이혼강이라는점을감안하면문헌기록에초기고구려의중심하천으로지속적으로등장하는비류수는역시혼강으로이해하는것이타당하다. 만약계루부의근거지가비류수유역에존재하였다면다른부를비류부나비류나부라는호칭으로타자화하여부르기는어려웠을것이다. 결국계루부는비류수가아닌다른지역을근거지로하는집단이었다고여겨지는것이다. 고구려에서는모본왕-태조왕-차대왕-신대왕시기에왕의시해와정변, 王姓의교체등이이어지며심각한정치변동이발생하였다. 이를소노부에서계루부로정치권력이이동하는과도기적혼란으로이해할수있다. 이과정에서소노부의근거지이자한때고구려의왕도였던졸본 124) 金哲埈, 1977 部族聯盟勢力의擡頭 한국사 2, 國史編纂委員會, p.136; 金龍善, 1980 高句麗琉璃王考 歷史學報 87, pp.59-62. 125) 盧泰敦, 1988 고구려의성립과변천 韓國古代史論, 한길사, pp.33-36. - 88 -

지역은새롭게권력을획득한계루부의근거지인환도 국내지역으로정 치중심지로서의위상을넘겨주게되었다. 그러나졸본지역에는고구려 시조인주몽의신성한사적이존재하였으므로, 고구려인전체의신앙적 구심지로서의역할및국가의례공간으로서의기능은한동안유지할수 있었다. 공손강은이러한시기에고구려를침공하였고, 이미정치적주 도권을어느정도상실한소노부의중심지를고구려의 國 으로인식하 였다. 이상의내용으로판단해보면 2 세기초 ( 태조왕대 )~3 세기초 ( 산상왕대 ) 의기간에 있었던고구려왕도의변화를 천도 라는개념으로설명하기 는곤란한측면이있다. 천도는유력자나정치세력이인위적으로통치 의중심지를바꾸어이동하는행위이다. 그러나상기한시기고구려에서 발생한현상은각기다른근거지를가진집단간의권력이동을통해정 치중심지가자연스럽게바뀐것이므로일반적인 천도 와는다소결이 다르다. 이와관련해이미제시된바있는 개도 라는개념을참고할수 있을것이다. 126) 다만 개도 라는용어의타당성에대해서는보다시간을 둔검증이필요하므로, 여기서는편의상 천도 라는용어를사용하도록 하겠다. 고구려왕도가환인지역에서집안지역으로옮겨가게된구체적시기 로는신대왕대를주목하고싶다. 필자는과거신대왕의졸본시조묘제 사기록의중요성과차대왕세력과신대왕세력사이에놓인단층과차 별성에대해언급한바있다. 127) 이에최근제기된신대왕대천도설 128) 에주목하고있다. 삼국사기 에서는태조왕 차대왕 신대왕을형제관 계로제시하고있으나실제로는그렇게보기어렵다. 세왕의정치적갈 등양상을보면권력을획득하기위하여경쟁하였던각기다른정치집 단으로여겨진다. 이중신대왕은그장지가고국곡으로, 집안 ( 국내 ) 지역 을세력기반으로하고있음이확인되는최초의왕이라는점에서눈여겨 126) 권순홍, 2015 고구려초기의都城과改都 韓國古代史硏究 78, p.220. 127) 기경량, 2010 高句麗國內城시기의왕릉과守墓制 韓國史論 56, pp.15-24. 128) 임기환, 2015 고구려國內都城의형성과공간구성 - 문헌검토를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59, p.27. - 89 -

볼필요가있다. 삼국사기 에서는신대왕을계선으로하여이전에는那部名만등장하다가이후부터는나부명과方位部名이함께등장하게된다. 그리고봉상왕대에이르면방위부명만나타나는현상이확인된다. 129) 이는신대왕대이후환도 국내지역이새로운정치중심지이자왕도로서의위상을갖춤에따라이지역을기준으로방위부가성립되어나갔음을시사한다. 고구려가공손강에게항복하였던소노부를다시포섭하고졸본지역을회복하는데어느정도기간이걸렸는지는확실하지않다. 228년동천왕이시조묘에제사를지낸기록이있으므로그렇게긴기간이소요되지는않았을것이다. 아마도소노부세력의저항으로인하여공손씨세력을등에업고있던발기가더이상졸본지역에머무르지못하고요동지역으로망명하게되며, 자연스럽게문제가해소되었을것이다. 이와관련해소노부의근거지를가리키는 多勿都 라는호칭에대해서도재음미해볼필요가있다.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동명성왕 2년조에등장하는용어이다. 주몽과대립하던송양왕이항복하자그땅을다물도로삼고송양을그주인으로삼았다는것이다. 130) 고구려어에서옛땅을회복한것을 多勿 이라한다고했는데, 이뒤에다시 都 가붙은것이의미심장하다. 혹산상왕대공손강의침입을받아일시이탈하였던졸본지역을되찾게된후 다물도 로호칭하였는데, 후대동명왕대의일로바뀌어전승되었던것은아닌가하는생각도든다. 고구려가졸본지역을되찾은이후에는다시이곳에서시조묘제사를지내게되었을것이다. 그러나그외의국가의례들은이제새롭게의례공간이갖추어진환도성에서이루어졌을것이고, 자신의근거지에정치적중심지로서뿐만아니라국가의례공간의위상까지갖추게된계루부의권력과영향력도과거에비해한층공고해졌을것이다. 산상왕이환도성으로옮기기전집안지역내에서왕의거소가어디였 129) 임기환, 2008 고구려초기 5 부의형성과변천, 초기고구려역사연구, 동북아역사재단, p.65. 130) 三國史記 卷 13, 高句麗本紀第 1, 東明聖王 2 年夏 6 月, 松讓以國来降以其地為多勿都封松讓為主麗語謂復舊土為多勿故以名焉.. - 90 -

는지는구체적으로지목하기어렵다. 가장유력한것은역시지금의집안시가지중심부에자리한집안평지성일대이다. 집안지역에서가장이른시기에조영된적석총군은우산하일대와칠성산일대에분포되어있다고한다. 131) 취락지는당연히그부근일것인데, 우산하고분군의초기무덤떼와칠성산고분군의초기무덤떼의중간지점이바로집안평지성일대이다. 다만최근발굴성과에따르면집안평지성자체는 3 세기이전에축성되었을가능성이희박하며, 132) 3세기중반이후에나조성되었다고보기도한다. 133) 따라서이시기왕의거소가성벽으로둘러싸인형태였다고볼수는없다. 어쩌면이시기고구려왕이머무는궁은여전히유리왕대기록에나타난것처럼고정되어있지않은채집안지역내곳곳에복수로마련되어있었을수있다. 산상왕대집안지역내에서왕이거소를이동한정도의일을두고과연 移都 라든지 更作新國 같은거창한표현을사용하였을까하는의문도제기될수있다. 134) 실제로집안평지성북쪽성벽에서산성자산성입구까지의직선거리는약 3km에불과하다. 135) 하지만고구려후기평양지역에서도대성산성에서불과 6km 가량떨어진장안성으로의이동을 이도 라고표현한사례가존재하므로용어자체는큰문제가되지않는다고생각된다. 게다가환도성축조및이도는기존에졸본지역이담당하고있던神聖處로서의국가의례공간기능을집안지역으로옮겨온것을의미한다는점에서충분히이도라는표현이가능하다고여겨진다. 그보다주목해야할것은이시기고구려왕도에서통설적인 평지성- 131) 최종택, 2015 집안통구분지고구려고분군의조영과정연구 삼국시대국가의성장과물질문화 1,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pp.110-112. 132) 심광주, 2005 高句麗國家形成期의城郭硏究 고구려의국가형성, 고구려연구재단, p.181. 133)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p.69. 134) 노태돈, 2012 고구려초기의천도에관한약간의논의 韓國古代史硏究 68, p.20. 135) 구글어스로측정하였다. 이는직선거리이고실제이동거리는강의굴곡을따라이루어졌을것이므로약간더늘어났을것이다. - 91 -

산성 의체제가존재하지않았음이확인된다는점이다. 평지성과산성이하나의세트로구성되어있었다면왕이산성에가머무는것을굳이 이도 라고표현하지는않았을것이다. 무엇보다산상왕시기집안지역에는아직 평지성 자체가존재하지않았다는것이중요하다. 이시기집안지역에존재하였던것으로확인되는성곽은환도성뿐이며이는평지성이아닌산성이다. 산상왕대고구려왕도는졸본지역에서와마찬가지로산성을왕도의상징이자핵심공간으로삼았던것이다. 환도성은의례공간으로서의성격이보다강하였던졸본의오녀산성과달리의례공간뿐만아니라왕의일상거소로도이용되었다. 산성이가지는왕성으로서의위상이더욱강화되었다고볼수있다. - 92 -

3. 환도성과국내성의기능과왕도의범위 1) 왕성및제의공간으로서의환도성환도성은 삼국사기 뿐아니라중국의문헌에도여러차례등장하는고구려의왕성이다. 그위치에대해서는한때여러설이제시되어논란이되었으나, 지금은집안지역에있는산성자산성으로보는것이일반적이다. 산성자산성은포곡식산성으로동쪽 북쪽 서쪽은높은봉우리들로둘러싸여있어이를이용해성벽을쌓았다. 성벽의총길이는 6,947m 이며, 성문은서쪽에 1개, 동쪽 남쪽 북쪽에는각각 2개씩총 7개가확인된다. 136) 남쪽에나있는산성정문앞으로는동북쪽에서흘러내려온통구하가돌아꺾여서동남쪽으로흘러내려간다. 이물길은환도성의해자역할을하는한편집안평지성의서쪽성벽앞을지나압록강과합류한다. 환도성의성격과기능에대해서는비상시사용하는군사방어성으로여기는것이대세를이룬다. 집안평지성을국내지역의중추로보고환도성을특수한용도의부속시설로간주하는것이다. 그러나환도성축조의과정과배경을보면그렇게이해하는것은곤란하다. 이와관련해환도성이실제전란을겪었던기록을살펴보도록하자. L-1. 正始 3 년 (242) 궁이서안평을노략질하였다. 그 5 년 (244) 에는유주자 사毋丘儉에게격파되었다. 137) 삼국지 권 30, 위서 30, 오환선비동이전 13, 고구려 L-2. 正始중에, 관구검은고구려가자주침략을하자보병과기병만명을 이끌고현도를출발하여여러길로토벌하였다. 구려의왕궁은보기 2 만인을거느리고비류수가에진군하고梁口에서크게싸웠는데, 궁이 연이어져서달아났다. 관구검이이윽고말을묶고수레를메달아가며 환도에오르니구려의도읍을도륙하여, 베고사로잡은포로의수가천 136)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丸都山城 : 2001-2003 年集安丸都山城調查試掘報告, 文物出版社. 137) 三國志 卷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13, 高句麗, 正始三年宮寇西安平其五年爲幽州刺史毋丘儉所破.. - 93 -

도의산에 不耐之城 이라새겼다. 138) 삼국지 권 28, 위서 28, 관구검전 을헤아렸다. 궁은홀로처자를데리고달아났다. 관구검은군대를이끌고돌아왔다. 6년에다시정벌하였다. 궁은이윽고買溝로달아났다. 관구검은현도태수王頎에게그를쫓게하였다. 옥저를지나천여리를가숙신씨의남쪽경계에이르니공을기록하여돌에새겼다. 환 L-3. 魏가유주자사毌丘儉을보내어 1 만인을거느리고현도로부터침략해 왔다. 왕이 1 천여기의기병으로압록원으로달아났다. 139) 삼국사기 권 17, 고구려본기 5, 동천왕 20 년 (246) 가을 8 월 L-4. 왕이환도성이난을겪어다시도읍으로삼을수없다고하여, 平壤城 을쌓고백성과종묘사직을옮겼다. 140) 삼국사기 권 17, 고구려본기 5, 동천왕 21 년 (247) 봄 2 월 L-5. ( 모용 ) 황이스스로강한병력 4만을거느리고남도로나아갔다. 여러군이승세를타고추격하여비로소丸都에들어갔다. 釗 ( 고국원왕 ) 는단기로달아나고輕車將軍慕輿埿가추격하여그어머니인周氏와처를잡아돌아왔다. 쇠의아버지인乙弗利의묘를파그시신을싣고, 창고에있던누대의보물을거두고, 남녀 5만여구를사로잡고, 그궁실을불태우고, 환도성은헐어버린다음돌아갔다. 141) 자치통감 권97, 진기19 현종성황제하, 함강 8 年 (342) 겨울 11 月 138) 三國志 卷 28, 魏書 28 毋丘儉傳 正始中儉以高句驪數侵叛督諸軍步騎萬人出玄菟從諸道討之句驪王宮將步騎二萬人進軍沸流水上大戰梁口宮連破走儉遂束馬縣車以登丸都屠句驪所都斬獲首虜以千數 宮單將妻子逃竄儉引軍還六年復征之宮遂奔買溝儉遣玄菟太守王頎追之過沃沮千有餘里至肅愼氏南界刻石紀功刊丸都之山銘不耐之城.. 139)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 5, 東川王 20 年秋 8 月, 魏遣幽州刺史毋丘儉, 將萬人, 出玄菟來侵. 王以一千餘騎, 奔鴨渌原.. 140)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 5, 東川王 21 年春 2 月,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 141) 資治通鑑 卷 97, 晉紀 19 顯宗成皇帝下, 咸康 8 年冬 10 月冬十一月, 皝自將勁兵四萬出南道 諸軍乘勝追之遂入丸都釗單騎走輕車將軍慕輿埿追獲其母周氏及妻而還 發釗父乙弗利墓載其尸收其府庫累世之寶虜男女五萬餘口燒其宮室毁丸都城而還.. - 94 -

삼국지 에따르면正始 5 년인 244 년에관구검의고구려침공이있 었다고한다. 삼국사기 에서는이를 246 년의일로전하고있다. 1906 년집안소판차령에서발견된관구검기공비의잔편에따르면정시 5 년 (244) 에침공을시작하여 6 년 (245) 에개선한것으로되어있어, 일 단 244~245 년관구검의침공을받아환도성이함락되었던것은틀림없 어보인다. 142) 이때동천왕은환도성에들어가농성을하지않고소수병력을이끌고 압록원으로도주하였다. 같은양상이약 100 년뒤에도되풀이된다. 342 년선비모용씨의前燕이고구려를침공하여환도성이함락되었는데 고국원왕역시환도성에서농성을하지않고처음부터다른곳으로도주 하였다. 이는고구려왕이평상시에는평지성에거주하다가전쟁이발생 하면산성에들어가농성을한다는일반적인식과는다른모습이다. 물 론전쟁의양상이라는것이꼭매뉴얼대로만진행될수는없는것이겠으 나, 실제발생하였던전쟁에서 통설의모델 이현실화하지않았다는것 은눈여겨볼일이다. 동천왕은환도성이관구검에의해파괴되자 247 년 새로 평양성 을쌓고백성과종묘사직을옮겼다고한다. 이기록은환도 성이비상시에만잠시활용되었던곳이아니라, 관구검과의전쟁으로함 락되기전까지고구려왕이평소거주하는왕성으로기능하고있었음을 보여준다. 산상왕대의환도성이도는공손씨의침공에대비하기위해이루어진 것이고, 이후대내외정세로인해평상시거점으로환거하지못한채 244 년관구검의침공때까지 38 년간임시왕성으로기능하였다는견해 도제시된바있다. 143) 환도성이동천왕대까지왕의거소로이용된것은 142) 자치통감 에는 246 년의일로기록되어있기때문에 자치통감 의내용을참조하였던 삼국사기 도이를따른것으로여겨진다. 그러나 삼국지 권 28, 毋丘儉傳과 삼국지 권 30, 위서고구려전과 梁書 권 54, 고구려전과 北史 권 94, 고려전등에서는正始 5~6 년 (244-245) 의일로기록되어있다. 이에대하여魏의침공은 2 차에걸쳐있었고, 이것이최종적으로마무리된것이 246 년이었으므로 삼국사기 의연대를단순한오류로보아서는안된다는견해도있다 ( 이승호, 2015 毌丘儉紀功碑의해석과高句麗 魏전쟁의재구성 목간과문자 15, pp.33-36). - 95 -

어디까지나 임시적 이었다는것이다. 하지만 38년은한세대가넘는매우긴기간이다. 이정도기간의거주를 임시 라고인식하는것이과연타당할까. 더구나이지역주거중심지인집안평지성과환도성과의거리는불과 3km에불과하다. 도보로 1시간도걸리지않는거리인만큼평소에는평지의거소에거주하다가적이국경을넘었다는첩보를듣고나서산성으로피신하여도대응에문제는없을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고구려는 38년간이나환도성을왕의평상시거소로사용하였다. 이는결국환도성이 38년간 임시 라는수식이필요없는명실상부한왕성으로기능하였기때문이라고이해된다. 환도성은산성으로분류되기는하지만, 오녀산성과같이고지대에성벽을구축한형태가아니다. 산봉우리가계곡주위를둘러싼지형을이용하여쌓은포곡식산성이다. 산성임에도실거주에딱히장애가있지않다는점을염두에둘필요가있다. 환도성내부구조에대해서는 2001~2003년기간에고고학조사가진행된바있다. 144) 성내부의전면적인발굴조사는아니었지만, 성벽의전반적인상황이파악되었고특히 궁전지 라불리는건축지에대한상세한조사가이루어졌다. 궁전지는성의동북쪽사면에자리하고있으며남북 95.5m, 동서 86.5m의규모이다. 이곳에조성되어있는 3단의대지위에 4열 11기의건물이있었음이확인되었다. 궁전지유적의층위는 5개이며, 이중제3 층과제4층이고구려문화층이다. 제3층은재와숯이섞여나오고궁전지전체에걸쳐기와편과와당등이풍부하게출토된흑색토층이다. 제 4층은두번째건축열에서 4번째건축열사이에주로분포하고있는황갈색토층으로, 기와편과귀면문와당, 쇠못과불탄나무기둥등이출토되었다. 제5층은유물이출토되지않았으나인공적으로다진흔적이확인되어궁전지에건축을하기위해조성한토층으로파악된다. 143) 余昊奎, 2005 高句麗國內遷都시기와배경 韓國古代史硏究 38, p.49. 144)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丸都山城 : 2001-2003 年集安丸都山城調查試掘報告, 文物出版社. - 96 -

그림 8) 환도성및환도성내궁전지의평면도출처 : 고구려연구재단, 2005 고구려문명기행, 고구려연구재단 ; p.127;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丸都山城: 2001-2003 年集安丸都山城調查試掘報告, 文物出版社. 궁전지의조성연대를추정하는데도움이되는유물은비교적편년이잘되어있는와당이다. 귀면문와당 연화문와당 인동문와당이출토되었고, 이중귀면문와당이가장다수를차지한다. 그런데이러한와당들은연대가상당히늦은편이다. 고구려에서는 4세기초부터권운문와당이크게유행을하고 4세기후반부터는연화문와당이이를대체하게된다. 연화문와당중에서도구획선이있는것이이른시기의것이고, 후대로가면구획선이없는연화문와당이출현하게되는데그시기는대략 5세기중반에서후반으로여겨진다. 145) 환도성궁전지에서출토된연화문와당은내부에구획선이없는후기의것이다. 귀면문와당과인 145) 金希燦, 2005 고구려연화문와당에반영된연화의형태적특성 白山學報 73, pp.65-66. 한편여호규는환도성의연화문와당출토양상으로보아해당유적은평양천도이후인 6 세기경에조영되었으리라추정하기도하였다 (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p.79.). - 97 -

동문와당도늦은시기의것들이므로, 이를감안하면환도성궁전지의조성연대는빨라도 5세기대이전으로보기어렵다. 고고학조사결과에따르면궁전지의조성연대는상당히후대로여겨지지만, 그렇다고해서이연대가곧환도성이활용되기시작한연대라고볼수는없다. 환도성이적어도 3세기중반이전부터고구려왕성역할을하고있었음은 삼국사기 뿐아니라 삼국지 등중국의문헌을통해서도교차검증이되기때문이다. 환도성내에서더이른시기의유물이나유적이확인되지않은것은여러차례전란을겪으며유적이파괴되고개축을거듭하였기때문이거나, 2000년대초시행된발굴조사가제한적인구역내에서이루어진데기인한다고여겨진다. 146) 2003년조사에따르면환도성내에서는 38개의무덤이확인되었다. 그중 36개가적석총이었고, 2개가봉토분이었다. 또한 丸都山城 보고서에서는이궁전지가 342년전연의환도성함락과함께소실되며폐기되었다고추정하였다. 147) 그렇다면성내에조성된무덤들을 4세기중반이후환도성의폐기와관련되어만들어진것으로생각해볼수있을것이다. 그러나그렇게보기곤란한것은다음의문헌기록때문이다. 삼국사기 에따르면 548년환도에서嘉禾를진상하였다는기록과 557년환도성干朱理가반역을일으켰다는기록이남아있다. 148) 이는고구려왕도가평양지역으로옮겨가고한참의시간이흐른때이다. 6세기중반까지 환도, 혹은 환도성 이라는명칭이사용되고있다는것은이때까지도환도성이일정한기능을하고있었음을의미한다. 다만전연과의전쟁과정에서파괴된이후에는왕성으로서의위상과기능이크게위축되었다고보아야할것이다. 성내에서확인되는무덤들을환도성폐기의결과물로보기보다는위상하락과관련된것으로이해하는것이타당해보인다. 146) 양시은, 2013 桓仁및集安都邑期高句麗城과防禦體系硏究 嶺南學 24, pp.58-59. 147)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馆, 2004 丸都山城 : 2001-2003 年集安丸都山城调查试掘报告, 文物出版社, pp.169-172. 148) 三國史記 卷 19, 髙句麗本紀 7, 陽原王 4 年秋 9 月, 丸都進嘉禾. ; 三國史記 卷 19, 髙句麗本紀 7, 陽原王 13 年冬 10 月, 丸都城于朱理叛, 伏誅.. - 98 -

기록에따르면동천왕은 247년환도성에서 평양성 으로옮기게되는데, 이때옮겨진대상으로종묘사직 [ 廟社 ] 이있다. 수사적표현일수도있겠으나, 산상왕이처음환도성을축조할때의목적이국가의례공간의창출이었다는점을감안하면쉽게넘길수없는정보이다. 아마도관구검의침입당시환도성내의국가제의시설도크게파괴되었던것으로여겨진다. 환도성은전란을겪으며왕성으로서의기능을상실하게되었지만, 의례공간으로의기능은다시회복한것으로보인다. 이를짐작해볼수있는것이환도성궁전지에서확인되는팔각형건물지이다. 환도성궁전지의두번째건축열동남쪽에는팔각형건물지두개가확인된다. 팔각형건물지의길이는 12m, 너비는 11.2m 가량이며팔각의각면길이는 3.2m 가량이다. 또안쪽중심부에는사각형모양으로 4개의기초석이 3.1m 간격으로다시자리하고있다. 첫번째건축열과두번째건축열사이에는공간이마련되어있는데, 보고자들은이를광장이라고표현하고있다. 이를통해두번째건축열의건물들이이궁전지에서가장위계가높은중심건물이라는점을알수있다. 팔각형건물지야말로이궁전지의핵심이자주인공인셈이다. 청암동절터의탑지 정릉사의탑지 그림 9) 고구려사찰유적의팔각형건물지사례출처 : 小泉顯夫, 1940 平壤淸岩里廢寺址の調査 昭和十三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圖版第 9; 전제헌, 1994 정릉사행궁건물의평면복원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4 4, p.26. - 99 -

팔각형건물지는사찰에서많이발견되는형태로보통탑이자리한곳이다. 149) 일반적으로탑지는전체유적의중심에자리하고있으며그주위를다른건물들이둘러싸는형태이다. 그러나환도성궁전지의그것은전체유적에서한쪽벽면으로치우쳐있고또두개가나란히존재하기때문에탑지로보기는어렵다. 대신그에비견될만한중요한공간으로서의위상을추측해볼수있다. 150) 환도성팔각형건물지의성격에대해서는기왕에社稷일가능성이제시된바있고, 151) 고구려의두시조를모시는사당으로보는견해도있다. 152) 현재로서는그실체를명확히단정하기어렵지만건물지의형상으로보아제의적건축공간이라는점은분명해보인다. 이는환도성의성격과기능을보여주는중요한근거자료가된다. 환도성궁전지의조성연대는비교적후대이므로, 그일부인팔각형건물지역시이른시기의것으로보기는어렵다. 하지만조성연대가다소늦더라도아무런맥락없이이같은시설이만들어졌다고볼수는없을것이다. 환도성은산상왕대만들어지며고구려의의례공간이자왕이머물며정사를보는왕성으로기능하였다. 시간의흐름과함께후자의기능은크게축소되었지만, 의례공간으로서위상만큼은지속적으로유지하였다고이해되는것이다. 149) 평양지역의청암동절터, 상오리절터, 원오리절터, 정릉사절터를비롯해봉산의토성리절터등에서팔각형목탑지가확인된바있다. 이러한팔각건물은고구려건축의독창적인면으로평가된다. 신라에서도영묘사절터에서팔각형목탑지가쌍으로확인된바있다 ( 이강근, 2005 高句麗八角形建物址에대한연구 先史와古代 23, pp.5-6.). 150) 이성산성, 설봉산성등지에서도탑지가아닌팔각형건물지가발견되었다고한다. 이에대한소개는최광식, 2007 한 중 일고대의제사제도비교연구 - 팔각건물지를중심으로 - 先史와古代 27, pp.265-267. 와서영대, 2005 고구려의社稷과靈星에대하여 고구려의사상과문화, 고구려연구재단, p.33. 의내용이참고가된다. 151) 서영대, 2005 고구려의社稷과靈星에대하여 고구려의사상과문화, 고구려연구재단, pp.34-35. 152) 최광식, 2007 한 중 일고대의제사제도비교연구 - 팔각건물지를중심으로 - 先史와古代 27, p.262. - 100 -

2) 국내성의성립과성내공간구조집안평지성은통상국내성이라고불린다. 집안분지에다른평지성은존재하지않기때문에이성을국내성을비정하는데이견은존재하지않는다. 문제는집안평지성이언제부터존재하였는가하는점이다. 이와관련된사료들은다음과같다. M-1. 왕이환도성이난을겪어다시도읍으로삼을수없다고하여, 平壤城 을쌓고백성과종묘사직을옮겼다. 153) 삼국사기 권 17, 고구려본기 5, 동천왕 21 년 (247) 봄 2 월 M-2. 왕이병력 3 만을거느리고현도군을침략하여 8,000 인을포로로잡아 이들을평양으로옮겼다. 154) 삼국사기 권 17, 고구려본기, 미천왕 3 년 (302) 가을 9 월 M-3. 평양성을증축하였다. 155)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4 년 (334) 가을 8 월 M-4. 환도성을보수하고, 또국내성을쌓았다. 156)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 년 (342) 봄 2 월 M-5. 가을 8 월에환도성으로이거하였다. 157)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 고국원왕 12 년 (342) 가을 8 월 문헌상 국내성 이라는이름이처음등장하는것은 342 년 ( 고국원왕 12) 이다. 환도성보수와국내성축성기록이함께등장하는데, 이기록 153)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 5, 東川王 21 年春 2 月, 王以丸都城經亂不可復都築平壤城移民及廟社.. 154)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 5, 美川王 3 年秋 9 月, 王率兵三萬, 侵玄菟郡, 虜獲八千人, 移之平壤.. 155) 三國史記 卷 18, 髙句麗本紀 6 故國原王 4 年秋 8 月, 増築平壤城.. 156) 三國史記 卷 18, 髙句麗本紀 6 故國原王 12 年春 2 月, 修葺丸都城又築國内城.. 157) 三國史記 卷 18, 髙句麗本紀 6 故國原王 12 年秋 8 月, 移居丸都城.. - 101 -

만을본다면국내성은고국원왕대에처음쌓은것처럼보인다. 하지만이를문자그대로수용하는것은곤란하다. 그이전시기인 247( 동천왕 21) 의평양성축성기사와 334년 ( 고국원왕 4) 의평양성증축기사를어떻게이해하는가의문제가남아있기때문이다. 동천왕대의평양성축성및移民기록에대해서는그간많은견해가제시된바있지만이를모두밝히는것은너무번거로운일이될것이므로, 각설의대표적연구들만소개하면다음과같다. 첫째, 鳥居龍藏이제시한집안평지성설이다. 158) 이문제에대해가장이른언급이다. 둘째, 이병도의강계설이다. 그는이시기평양은낙랑군의통치하에있었으므로그곳으로천도한다는것은믿기어렵다고지적하고고국원왕대의평양동황성과결부시켜지금의강계지방으로비정하였다. 159) 셋째, 채희국이제시한현평양설이다. 그는동천왕대의평양성증축기사의사실성을그대로인정하여지금의평양성북성을동천왕대증축한평양성이자고국원왕대이거하였다는평양동황성이라설명하였다. 160) 북한학계에서는동천왕이쌓은평양성의구체적위치가어디인지에대해학자들간이견이있지만그곳이현평양지역이었다는점만큼은기정사실화하는경향을보인다. 161) 넷째, 조법종이제시한환인나합성설이다. 조법종은동천왕이쌓은평양성이환도성에서멀지않고방어기능도염두에둔지역이라고생각된다면서송양이 仙人之後 를표방하며단군왕검의사당을모셨을환인지역나합성지를그후보지로제시하였다. 162) 다섯째, 張福有의良民古城說이다. 집안평지성에서동북쪽으로약 45km 가량떨어진良民수몰지구에길이 350여m, 너비 300m, 둘레 1,300여m의성이있었음을밝히며이곳이바로동천왕대의 158) 鳥居龍藏, 1914 丸都城及び國內城の位置た就きて 史學雜誌 25 7, pp.49-50. 159) 李丙燾, 1956 高句麗東黃城考 東國史學 4(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pp.370-373.). 160) 채희국, 1965 평양성 ( 장안성 ) 의축성과정에대하여 고고민속 1965 3, pp. 25-26. 161) 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제문제, 사회과학원 (2000, 신서원, p.330.). 162) 조법종, 2001 고구려사회의檀君認識과종교문화적특징 - 蘇塗文化와의관련성을중심으로 - 韓國古代史硏究 21, pp.192-194. - 102 -

평양성이라고하였다. 163) 강계설은고국원왕대평양동황성설과연동되어제시된의견이다. 강 계가집안지역에서가까운지리적요충지인것은분명하지만이곳을고 구려인들이평양이라고부르거나인식하였다고볼수있는문헌적 고고 학적근거가확보된것은아니다. 현재로서는지리적인정황론에기댄 비정이라고볼수밖에없다. 현평양설은당시평양지역에낙랑군이건 재하고있었음을감안하면수용하기어려우며, 환인나합성설은 삼국 사기 찬자가동천왕대평양성축성기사뒤에부연한 평양은본래선 인왕검의땅 운운하는내용에지나치게의미부여를한것으로생각된 다. 양민고성설은張福有가소개한성의축성연대에대한보다정밀한 조사와연구가필요하다. 이성이발해나요 금시기에만들어진성일가 능성도있으며, 고구려당대의성이맞더라도후기의것일수있기때문 이다. 또한강계와마찬가지로고구려인들이이곳을 평양 이라고부르거 나인식하였다고볼수있을만한근거는확인된바없다. 張福有는양 민고성을 압록원 이자 新城 으로파악하는한편백제근초고왕이공격 하였다는 평양성 으로설명하기도하는데이는지나친비약이어서받아 들이기어렵다. 임기환은광개토왕비의채석지가양민일대일가능성과 광개토왕비부근에동천왕릉으로비정되는임강총이존재하는것에주목 하였다. 그러나 3 세기중반에조영된무덤과 5 세기초에세워진비사이 에긴밀한연관성을부여할수있을지는의문이다. 결국상기한제설중鳥居龍藏이제시한집안평지성설이가장무리가 없는설명이라고여겨진다. 본래고구려의왕성이었던환도성이산성이 었다는점을감안하면, 압록강과통구하가만나는지점의평지일대를 平壤 이라하고, 이곳에지어진성을 평양성 이라고부르는것은충분히 개연성이있는일이다. 더구나고구려인들은집안분지내의공간을國 163) 張福有, 2004 高句麗第一個平壤城在集安良民即國之東北大鎮 - 新城 東北史地 2004 4, pp.14-15; 張福有저, 尹鉉哲역, 2005 고구려의平壤, 新城과黃城 고구려역사문제연구논문집, 고구려연구재단, pp.215-222. 최근에는이를수용한견해도나왔다 ( 임기환, 2014 광개토왕비의건립과정및비문구성에대한재검토 한국고대사연구의자료와해석, 사계절, pp.252-253.). - 103 -

壤 東壤 中壤 西壤 好壤으로구분하여지칭한바있다. 164) 집안지역의특 정공간을 壤 이라고지칭하였던사례가존재하는것이다. 동천왕대에쌓았다는평양성의명칭과관련하여, 이를 국내성 의誤記 라고보는견해도있다. 165) 과연어떨까. 이에시사점을주는것이 302 년 ( 미천왕 3) 현도군포로의평양이치기사와 334 년 ( 고국원왕 4) 평양 성증축기사이다. 고구려가낙랑군을최종적으로복속시킨것은 313 년의일로여겨지고 있다. 이시기고구려가이미평양지역까지영역화하였다는견해들도 있으나, 166) 낙랑토성에서 291~299 년에해당하는 大晉元康 명문의와 당이출토된것을보아도, 167) 낙랑세력은 4 세기초까지평양지역에세 력을유지하고있었다고여겨진다. 따라서 302 년현도군을공격한후 획득한포로를현평양지역으로보냈다고생각하기는어렵다. 더구나 이시기에는현평양지역을 낙랑 이나 낙랑군 으로지칭하였을것이기 때문에 평양으로옮겼다 ( 移之平壤 ). 는표현자체에어색함이있다고 할수있다. 그렇다면미천왕대기록에등장하는평양은동천왕이성을 쌓고백성들을옮겼다는곳, 즉집안의평지지역일가능성이높다. 고국원왕대의평양성증축기사는고구려가이미낙랑군을복속시키고 현재의평양지역을영역으로확보한이후에있었던사건이다. 따라서 164) 이는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의분주계왕호들에근거한장지명이다. 동천왕의경우는즉위년조에 東襄 이라고표기되고있지만, 고국천왕의또다른왕호인 國襄 이동천왕 8 년기사에서는 國壤 이라고표기되는것을보면본래 東壤 이었던것을후대誤寫하였거나고구려인들이 襄 을 壤 과상통하는글자로사용하였을수있다. 165) 魏存成은 313 년이전기록에보이는평양성명칭에대해誤記일가능성에무게를두면서도실제로평양성이라고불렀을가능성역시언급하고있다 (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 2, pp.32-33.). 166) 金元龍은 247 년동천왕이지금의평양지역에성을쌓았고, 302 년에현도군을쳐서얻은포로를이곳으로옮겼다고보았고 ( 金元龍, 1976 樂浪文化의歷史的位置 韓國文化의起源, 探求堂, p.167), 김미경은고구려가 3 세기초에이미대동강이북까지영역을확장한상태였고, 미천왕대에낙랑과대방이군지역을복속하기위한작업의일환으로현도군에서취한民을이곳으로사민하여인적 물적기반으로삼았으리라추정하였다 ( 김미경, 1996 高句麗의樂浪 帶方地域進出과그支配形態 學林 17, 연세대학교사학연구회, p.29.). 167) 양시은, 2013 桓仁및集安都邑期高句麗城과防禦體系硏究 嶺南學 24, p.58. - 104 -

증축이되었다는평양성이현평양지역에있는성을의미할가능성은충분히있다. 삼국사기 에는지방의주요거점성들에대한축조나증축기사들이여러건확인되고있으므로이를특별히이상하거나돌출적인기록이라고볼수는없을것이다. 하지만앞서등장한동천왕대의 평양성 축성및이민기사와미천왕대의 평양 을염두에둔다면, 고국원왕대등장하는평양성증축기사역시집안평지성의증축을가리키는것일가능성을배제하기힘들다. 그렇다면 342년 ( 고국원왕 12) 국내성을쌓았다는기록역시성의초축을의미하는것이아니라기존평지성을증축하였다는의미로이해하는것이가능할것이다. 더나아가 평양 이나 평양성 이라는명칭이이즈음부터 국내 내지 국내성 으로바뀌었다고보는것도충분히개연성이있는해석일것이다. 고국원왕이 342년 ( 고국원왕 12) 2월에환도성과국내성을보수 증축하고같은해 8월에는환도성으로移居를하였다는기록역시눈여겨볼필요가있다. 이거는왕의거처를옮긴것을의미하기때문에遷都나移都와는성격이다르다. 기록상에많이등장하지는않지만어쩌면이러한이거는특별한행위가아니고고구려왕들에게몇달이나몇년단위로자주일어나는거소의이동이었을수도있다. 고국원왕의환도성이거기록은이시기까지도환도성에왕성으로서의기능이남아있었음을보여주는것이라여겨진다. 국내성지에대한가장주목할만한발굴성과는 2000~2003년에이루어진조사이다. 성내 19곳을발굴한조사내용은 2004년보고서로출간되었다. 168) 2008년에도국내성지내의 2곳이추가발굴되었고, 169) 1980년대말까지이루어진 9곳의발굴사례까지포함하면국내성에서는총 29곳에대한발굴이이루어졌다. 170) 168)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囯內城 : 2000-2003 年集安囯內城與民主遺址試掘報告, 文物出版社. 169)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文物局, 2009 2008년集安市國內城社區辦公樓地點高句麗居住址的發掘 北方文物 2009-3;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9 集安市實驗小學校發掘地點考古發掘簡報 北方文物 2009-4. 170)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 - 105 -

그림 10) 국내성평면도 (2003 년기준 ) 출처 :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囯內城 : 2000-2003 年集安 囯內城與民主遺址試掘報告, 文物出版社, p.10. 국내성의규모는 1980년측정에따르면동벽 554.7m, 서벽 664.6m, 남벽 751.5m, 북벽 715.2m로전체둘레는 2,686m라고하였다. 171) 그러나 2003년조사에서는유실된동벽과남벽을제외하고, 서벽은 702m, 북벽은 730m로측정되어수치에다소차이를보이고있다. 172) 성벽의모서리가정확히직각으로꺾이는형태가아니기때문에기준을어떻게잡느냐에따라수치가달라질수있겠지만, 필자가구글어스로측정해본결과 2003년조사의것이더정확하다고판단된다. 그러나큰차이는아니기때문에전체둘레를대략 2.7km 정도로파악하는데 代史硏究 66, p.46. 171) 集安县文物保管所, 1984 集安高句丽国内城址的调查与试掘 文物 1984 1, p17. 172)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集安市博物館, 2004 囯內城 : 2000-2003 年集安囯內城與民主遺址試掘報告, 文物出版社, p.11. - 106 -

는문제가없다. 성문은 2003년조사에서동문과남문은각각 2개씩, 북문은 4개, 서문은 1개가있었던것으로보고되었다. 그런데 1914년關野貞의조사와 1984년집안현문물보관소의조사에서는모두서문이 2개였던것으로보고되었기때문에의문이남는다. 시간의흐름에따라더자세한조사가이루어지며새롭게문지가발견되는경우는있을수있지만, 서쪽성벽의경우는조사가거듭되며오히려 1개가줄어든것이다. 더구나국내성서벽은지금도성벽이잘남아있는편이기때문에이해하기힘든측면이있다. 국내성내부도로의형태를보면서쪽성벽에도문이 2개있는것이자연스러워보이며, 남문도 3개인것이자연스러워보인다. 만약그렇다면북쪽에 4개, 남쪽에 3개, 동 서쪽에각각 2개씩총 11개의성문이있었던셈이다. 단국내성서쪽성벽은통구하와연접해있기때문에이쪽방향으로의통행량은딱히많지않았을것으로생각된다. 문이 1개만존재하였다고하여도납득은가는상황인것이다. 이는남벽의서남쪽문도마찬가지이다. 그렇다면역시 2003년조사에서제시한대로총 9개의성문이있었을가능성도배제할수없다. 현재국내성내부는도로에의하여크게 4행 3열로 12개구역이나뉘어진다. 그중에서주목되는것이중앙에위치한제6구역과제7구역이다. 이곳은위치상으로도성내에서중요한위계를점하는곳이라짐작되는데, 실제로도주목되는발굴결과가나왔다. 173) 제6구역의체육장유적은총 5개의층위로이루어졌는데, 이중제3층 ~ 제5층에서고구려유적과유물이확인되었다. 제3층과제4층에서는각종토기와施釉陶器, 기와, 연화문 인동문 귀면문와당, 龍紋 繩文벽돌등이출토되었고, 제5층에서는토기, 시유도기, 盤口靑瓷壺片, 권운문와당, 기와편등이출토되었다. 체육장유적에서는제4층을파괴하며조영된 回 자형의대형건물 173) 국내성발굴의전체내용은 囯內城 (2004) 보고서에상세히실려있지만, 그내용을일목요연하게파악하는데는여호규가정리해놓은표가큰도움이된다 (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pp.49-51.). - 107 -

지와灰坑도확인이되었다. 가장아래인제5층에서 4세기유행한권운문와당이출토되고, 회갱내에서 4세기전반으로편년되는東晋制청자가다량매납된것이확인되어적어도 4세기전반부터건축물이조영되었다고파악된다. 174) 이처럼성의중심부에는중요한시설이있었던것으로확인되는데, 현재제6구역과제7구역사이를남북으로나누는도로가일직선으로연결되지않는것을보면원래는이두구역이하나의구역일가능성이있다는지적도있다. 175) 그렇다면제6구역과제7구역에걸쳐고구려왕궁및왕실의부속건물들이자리하고있었다는추정이가능하다. 도로에의해나뉘는국내성내부구획을통해방위부로서의고구려 5 부의위치를설정하기도한다. 임기환은방위명부가처음등장하는고국천왕대에왕궁과관청이국내성전체를차지하고있었다고보기는어렵기때문에귀족세력들의거주지도국내성안에있었다고보는것이타당하다고하였다. 중심구역이중부가되고, 그주위의구획들이각각동부 서부 남부 북부가된다는것이다. 176) 그런데최근연구에따르면국내성지의상한은 3세기중반을상회하기어렵다고한다. 177) 과거에는국내성의축성시기가매우이르다고파악하기도하였다. 이는 1975~1977년실시된발굴조사의결과에근거한것이다. 이조사에서는지금의석축성벽아래漢代고구려현의것으로추정되는토성이있다고하였다. 178) 자연히기원전 1세기무렵에는이미성벽이조성되었던것으로볼수있었던것이다. 그러나 2004년재조사 174)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pp.66-67. 175) 임기환, 2003 고구려都城制의변천 한국의도성 - 都城造營의傳統 -, 서울시립대학교부설서울학연구소, p.11. 176) 임기환, 2003 고구려都城制의변천 한국의도성 - 都城造營의傳統 -, 서울시립대학교부설서울학연구소, pp.11-12. 여호규역시비슷한형태로국내성내부에서방위부편성을시도한바있다 (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pp.71-72.). 177)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pp.68. 178) 集安縣文物保管所, 1984 集安高句麗國內城址的調查與試掘 文物 1984 1, p.54. - 108 -

이후출간된보고서에따르면국내성석축아래에서는토성의흔적은확인되지않았으며, 1970년대조사에서한대토성으로보았던것은성벽축조를위해조성한성토층을오인한것일가능성이높다고한다. 179) 양시은에따르면국내성북쪽석축성벽내부의토축부에서회전대로제작한니질태토의고구려토기편이출토된것으로보아이는국내성성벽이고구려중기에축조되었음을시사한다고한다. 그는축성기사가보이는 342년 ( 고국원왕 12) 무렵에국내성이완공되었을것이라고추정하였다. 그림 11) 국내성남벽 (Tr.4) 단면도 출처 : 양시은, 2014 고구려도성연구의현황과과제 高句麗渤海硏究 50, p.51. 다만국내성의축조시기를 4 세기중반으로까지늦추어보는것은다 소지나친것이아닌가여겨진다. 여호규가지적한바있듯이국내성내 부에서는 4 세기초에유행하였던권운문명문와당이집중적으로출토 되고있기때문이다. 180) 179) 양시은, 2013 桓仁및集安都邑期高句麗城과防禦體系硏究 嶺南學 24, p.60. 180)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國古代史硏究 66, pp.68. - 109 -

표 5) 집안지역출토권운문명문와당의시기적분류와판독문일람 갑술년 (314) 미천왕 15 년 제 2 소학교출토 甲戌 명와당 大吉 / 大歲甲戌九月 造作 A-1 申년 ( 壬申年 )-312? ( 甲申年 )-324? 남문리출토 大 吉 명와당 大吉 / 大 [ 歲 ] 申四 月造作? 대중목욕탕출토 月造記 명와당 月造記 대중목욕탕출토 太寧四年大歲 閏 B 태령 4 년 (326) 미천왕 27 년 太寧四年 명와당영화관출토 [ 寧 ] 四年大歲 月六日己巳造吉保子宜孫 [ 寧 ] 四年大歲 명와당 A-1 무자년 (328) 미천왕 29 년 서대묘출토 戊 子 명와당 大歲戊子年 牟造 기축년 서대묘출토 己丑 명와당 己丑年于利巴 領作 A-2 (329) 미천왕 30 년 승리촌 소방대 출토 領作 명와 領作 당 - 110 -

마선중학교부근 출토 巴 명와 巴 당 우산하 992 호 무덤출토 丑 명 丑 와당 梨樹園子南출토 泰歲 [ 戊 ] 戌年造瓦故 [ 戊 ] 戌 명와당 記 A-3 무술년 (338) 고국원왕 8 년 우산하 992호무덤출토 무술 명와당 泰歲戊戌年造瓦故記 체육장출토 泰 명와당 泰歲 年造瓦故記 을묘년 국내성건축유지출토 乙卯 명와당 (JGJY-1998) 乙卯年 / C (355) 고국원왕 25 년 우산하 3319호출토 乙卯 명와당 (97JYM3319:31 乙卯年 / ) 梨樹園子南출토? 十谷民造 명와 十谷民造 / 夫一 당? 우산하 3319호출토 十谷民造 十谷民造 / 夫 - 111 -

명와당 D 정사년 (357) 고국원왕 27 년 우산하 3319호출토 丁巳 명와당 太 [ 歲 ] 在丁巳五月卄日 中郞 夫人造盖墓瓦又作民四 [ 千 ]...... [ 四 ] 時興詣... 萬世 비고 : 명문의배열형식과내용에따라형식분류를하였음. 출처 : 기경량, 2016 집안지역출토고구려권운문와당명문의판독과유 형 고구려발해연구 56, pp.77-78. 기존에는국내성대중목욕탕과영화관부근에서출토된태령 4년명와당에주목하여 326년을가장이른권운문와당으로보아왔으나, 그보다 12년빠른 314년에제작된제2소학교출토 갑술 명와당의존재가확인된다. 181) 남문리에서출토된 大吉 명와당은제작연대가 申年 으로파악되는데갑술명와당과거의유사한형식과문장구조를감안했을때 312년인壬申年일가능성이있다. 182) 삼국사기 기록에따르면 298년 ( 봉상왕 7) 봉상왕이궁실을늘려서지었는데극히사치스럽고화려하였다고한다. 183) 고구려에서와당의사용이실물자료를통 181) 갑술 명와당이출토된곳은국내성내부에서남쪽중앙지역에해당하는제 11 구역이다. 182) 남문리출토 大吉 명와당은그동안 태령 4 년명와당 의다른형태로알려져있었는데, 이는잘못된판독에기인한것이다. 기존에통용되던판독인 太寧 年 의올바른판독안은 大 [ 歲 ] 申 이다. 제 2 소학고출토갑술명와당과남문리출토대길명와당은모두당심의글자를읽은후 1 시방향에서시계방향으로 4 글자를읽고, 다시 11 시방향부터시계반대방향으로 4 글자를읽는방식으로글자가배열되어있다. 183)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 5, 烽上王 7 年冬 10 月, 王増營宫室頗極侈麗民饑且困羣臣驟諫不從.. - 112 -

해확인되는것이이와가까운시기이므로, 사치스럽고화려하였다 는 것은와당을사용한왕궁의축조를가리키는것으로생각되기도한다. 그림 12) 국내성내권운문와당출토현황 출처 : 여호규, 2012 고구려國內城지역의건물유적과都城의공간구조 韓 國古代史硏究 66, p.65. 국내성안쪽에서 4세기초에제작된와당이집중적으로출토되었다는것은성벽의존재를통해안과밖의공간이분리되고그안쪽공간에위계가높은주요건물들이집중적으로조성되었음을방증한다. 여기에 247년동천왕이평양성을쌓았다는문헌기록까지염두에둔다면집안평지성의축조연대는 3세기중반으로볼수있다고생각된다. 집안평지성의축성시기가 3세기중반이라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서방위명부가처음출현하는때 (191년, 고국천왕 13) 와는약간의시차가존재한다. 184) 그렇다면초기방위명부의공간구획이반드시국 184) 三國史記 卷 16, 髙句麗本紀 4, 故國川王 13 年夏 4 月, 今汝四部各舉賢良在下者於是四部共舉東部晏留.. - 113 -

내성내에서이루어졌다고보기는어려울것같다. 물론성벽이존재하지않는도시내에서도도로에따른방위공간구획은존재할수있다. 하지만성벽이부재한상황에서도도시의도로형태가지금과같은모습이었다고는확신하기어려우며, 각방위명부구역의외곽라인도설정하기곤란하다. 집안평지성이존재하지않았을환도 국내시기의초기에는방위명부를관칭하는귀족들의거주지가왕궁을중심으로한좁은공간이아닌집안분지내의비교적넓은공간에분산되어존재하였을가능성도염두에두어야한다. 3) 국내지역왕도의경계와범위집안평지성이조영된이후그중심공간에는왕궁이존재하였으리라여겨지며, 그주위에는관청과같은주요국가시설들과일부고위귀족들의저택이자리하고있었을것으로추정된다. 공간상의문제로인하여성내民里의공간은매우제한적이었을것이다. 이러한특성을감안한다면국내성의성격은전형적인왕성으로서의성격을가지고있다고볼수있다. 일반민은성벽바깥의주변지역에거주하였을것이다. 그렇다면그범위는어느정도였을까. 국내성성벽바로바깥쪽의동쪽 남쪽 북쪽에서모두주거유적이확인되었다. 마선구쪽의건강유적을제외하면거의모든건물지 주거유적이국내성성벽바로근처, 혹은그동쪽의우산하일대의평원에자리하고있음이확인된다. 아마이정도가왕도중심취락지의공간범위였다고여겨진다. 건물지 주거유적중에서도특히주목되는것이국내성북쪽에자리하고있는梨樹園子南유적이다. 이일대에배나무과수원이있었기때문에붙은이름으로, 果樹園子南이라고도하고, 1937년일본인들이집안지역의유적을조사할때兵舍가설치되어있었기때문에과거엔兵舍遺址라고불리기도하였다. 이수원자남유적은동서 150m, 남북 80m 범위에거쳐조성되었는데, 유적서쪽에서는화강암초석이다량으로확인되었고, 그외에상당량의와당 기와가출토되었다. 1958년조사에서는 - 114 -

白玉耳杯와같은漢代宮中에서사용하였던고급용기를비롯하여도금 된화살촉 20 매와도금된그릇뚜껑등도출토되었다. 185) 그림 13) 집안지역의고구려건물지유적및주거유적비고 : 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북방지역고구려발해유적지도집( 지도편 ) 과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集安市博物館 吉林省博物院編, 2010 集安出土高句麗文物集粹, 科學出版社의集安市高句麗遺蹟分布圖내용을참조하여필자가작성. 실선은건물지유적, 점선은주거유적. 14. 연화지건축유적 은제방시설로추정. 때문에이수원자남유적은고구려때의주요官署나왕실귀족의거주지였을것으로추정되며, 왕실의별궁으로보기도한다. 186) 집안지역의다른건물지 주거유적들은출토유물의연대가비교적늦은편이라이른시기부터조성되었음을확인할수있는근거가확보되지않는다. 하지만이수원자남유적에서는 338년 ( 고국원왕 8) 에해당하는무술명와당이출토되었기때문에비교적이른시기에유적이형성되었음을알수있다. 185)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集安縣文物志, pp.45-46. 186) 임기환, 2003 고구려都城制의변천 한국의도성 - 都城造營의傳統 -, 서울시립대학교부설서울학연구소, p.7. - 115 -

백옥이배 도금화살촉 그림 14) 이수원자남유적출토유물 출처 : 吉林省文物考古研究所 集安市博物館 吉林省博物院編, 2010 集安出土高句 麗文物集粹, 科學出版社. 이수원자남유적은국내시기도시확장이어떠한형태로이루어졌는지단서를제공한다. 아마도초기에는국내성에서북쪽방향으로도시확장이이루어졌던것으로보인다. 국내성북쪽이중심시가지였다는것은성문의숫자를통해서도짐작할수있다. 국내성북벽에는성문이 4 개확인되는데, 이는동벽의 2개, 남벽의 2~3개, 서벽의 1~2개에비해그수가많다. 북벽에더많은성문이만들어졌다는것은사람과물자의이동이국내성북쪽에서많이이루어졌다는의미로해석할수있다. 이러한현상이발생한요인으로는역시환도성의존재를염두에두지않을수없다. 환도성은한때왕성으로기능하였고왕의중심거소가국내성으로옮겨온이후에도별궁내지제의공간으로서활용되었다. 따라서환도성과국내성을잇는선은국내시기고구려왕도에서가장중요한도시중심축이었을것이다. 북쪽으로의도시확장이어느정도진행되고나서는동쪽으로의확장이진행되었으리라여겨진다. 국내성동쪽의유적중에서중요한것은東臺子유적이다. 1910년대조사에따르면당시집안평지성에서동대자유적사이에는붉은기와편이다수흩어져있었다고한다. 이때동대자유적에서십수개의건물초석과다수의귀면문 인동문와당이확인 - 116 -

되었다. 187) 1958 년에는 4 채의건물지를발굴하였고구획선없는연화문 와당을비롯하여건축재료, 도기등이확인되었다. 188) 그림 15) 동대자유적평면도 출처 : 강현숙, 2010 中國吉林省集安東台子遺蹟再考 한국고고학보 75, p.176. 동대자유적이주목을받은것은발굴된건물지중 Ⅰ실의독특한모습때문이다. Ⅰ실은동서 15m 남북 11m 규모의회랑과같은형태의건물로한쪽에는쪽구들이설치되어있다. 건물중앙에는길이 0.8m, 폭 0.6m, 높이 1m 정도의가공하지않은장방형돌이있는데, 그주위에는지면을파고냇돌을채워넣었다. 보고서에서는이돌을石座라고하였다. 이에따라동대자유적을제사유적으로보아고구려의國社, 사직 187) 關野貞, 1914 滿洲輯安縣及び平壤附近に於ける高句麗時代の遺跡 (1 2) 考古學雜誌 5 3 4(1941, 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p.278.). 188) 吉林省博物館, 1961 吉林集安高句麗建築遺址的淸理 考古 1961 1(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pp.147-151.). - 117 -

으로보는견해가제시되었다. 189) 그러나사직의경우나라가망한경우가아니라면건물내에있지않는다는점을들어이건물을고구려의사직으로보기는어렵다는지적이나왔고, 190) 더나아가건물중앙의돌도社主가아니라건물의하중을지탱하기위한초석에불과할수있다는견해가제시되었다. 191) 동대자유적의축조연대역시출토된와당의연대로보아 5세기말이전으로올려보기는어렵다고판단된다. 192) 이처럼동대자유적이제사시설이맞는지에대해서는최근회의적인시각이강하지만, 다소연대가늦더라도고구려시기에만들어진건축물이라는것만큼은틀림이없다고여겨진다. 동대자유적의위치는일반적으로국내성동쪽이라고는언급되고있는데그보다는동북쪽이라는표현이더정확하며앞서살펴본이수원자남유적과도인접해있다. 그렇다면이역시국내성의도시확장을보여주는유적정도로이해할수있을듯하다. 국내성과동대자유적사이에붉은기와편이다수흩어져있었다는것역시그사이공간이중요한주거지역이었음을시사한다. 국내시기고구려왕도의경관과관련한또하나의중요한요소는왕릉이다. 집안지역의왕릉급고분들에대한조사는 1990년대부터 2000 년대초반에걸쳐집중적으로진행되었고그결과물은 2004년에보고서로간행되었다. 193) 필자는국내시기고구려왕릉과피장자에대하여이미비정을시도한바있는데, 194) 그내용은그림및표와같다. 189) 方起東, 1982 集安東臺子高句麗建築遺址的性質和年代 東北考古與歷史 1982 1(1997, 高句麗渤海硏究集成 2, 哈爾濱出版社, pp.156-157.). 190) 서영대, 2005 고구려의社稷과靈星에대하여 고구려의사상과문화, 고구려연구재단, p.43. 191) 강현숙, 2010 中國吉林省集安東台子遺蹟再考 한국고고학보 75, p.176. 192) 강현숙, 2010 中國吉林省集安東台子遺蹟再考 한국고고학보 75, p.194. 193) 吉林省文物考古硏究所, 2004 集安高句麗王陵 -1990~2003 年集安高句麗王陵調査報告, 文物出版社. 194) 기경량, 2010 高句麗國內城시기의왕릉과守墓制 韓國史論 56, 서울대학교국사학과. - 118 -

그림 16) 집안지역의고구려왕릉분포 왕릉의분포범위는건물지 주거유적의분포범위와사뭇다르다. 이는왕릉의조영이왕도의중심취락을벗어난외곽지역에서이루어졌음을의미한다. 대체로통구하서쪽지역을더선호하는경향이있는데, 형식상가장초기의무덤인마선구 626호, 마선구 2378호, 칠성산 871 호가모두통구하서쪽에자리하고있다. 195) 통구하서쪽이왕릉조영지로선호되었던이유는이곳이국내지역과졸본지역을오가는간선교통로에해당하기때문이다. 왕릉은독보적인입지에넓은공간을확보하고장대하게조영되어국가권력의권위를과시하여야했으므로, 중심취락지에서벗어난외곽지역에조영되어야했다. 하지만동시에많은이들에게보여져야하는면도있었으므로왕도에서가장중요한간선교통로상에조영되었던것이다. 195) 이세무덤은집안지역의왕릉급무덤중가장이른시기에조영된것은분명하지만, 무덤의주인을확정할수있는명확한근거는사실상존재하지않는다. 필자역시장지명을근거로비정을하였지만, 정확하게부합한다고생각하지는않는다. 어디까지나임의적인것임을밝혀둔다. - 119 -

표 6) 집안지역왕릉급고분피장자비정 구분구조기년문자자료와당피장자비정근거 산성하전창36호 계장석광 非王陵 마선구 626호마선구 2378호칠성산 871호 Ⅰ 신대왕? (165~179) 고국천왕? (179~197) 산상왕? (197~227) 장지명 임강총 계단광실 동천왕 (227~248) 장지명 우산하 2110호 중천왕 (248~270) 장지명 칠성산 211호 서천왕 (270~292) 장지명 서대묘 戊子年 (328) Ⅱ 己丑年 (329) 1 선구획선 권운문 미천왕 (300~331) 기년명, 와당 형식 우산하 992 호 [ 己 ] 丑 (329) 戊戌年 (338) 1 선구획선 권운문 미천왕 2 차릉 (343?) 기년명, 와당형식 마선구 2100 호 3 선구획선 권운문 고국원왕 (331~371) 와당형식 천추총 계단 석실 [ 樂 ] 浪趙將軍夫任永樂 (391~412?) 3선구획선권운문, 6판연화문 소수림왕 (371~384) 석실, 기년명, 와당형식 태왕릉 Ⅲ 辛卯年好太王 [ 敎 ] 造鈴九十六 (391) 6판연화문, 8판연화문 고국양왕 (384~391) 석실, 기년명, 와당형식 장군총 8 판연화문 광개토왕 (391~412) 석실, 기년명, 와당형식 비고 : 기경량, 2010 高句麗國內城시기의왕릉과守墓制 韓國史論 56, 서 울대학교국사학과, pp.30-31. 의표를수정보완. - 120 -

그러다가갑자기통구하서쪽의왕릉조영지에서멀리떨어진우산하일대에왕릉이조영되는현상이나타나게된다. 바로동천왕의무덤으로비정되는임강총이다. 그다음왕인중천왕의무덤 ( 우산하 2110호 ) 역시우산하일대에조영되었다. 이는관구검의침입으로환도성이함락되고마선구일대조영되었던무덤들이도굴되는참상을겪은데따른현상이다. 왕릉의보호를위해왕도의동쪽지역으로조영지를옮긴것이다. 왕릉조영지가다시통구하서쪽으로옮겨온것은魏와의군사갈등이해소된서천왕의무덤 ( 칠성산211호 ) 부터이다. 이후통구하서쪽일대에왕릉이조영되는기조는소수림왕의무덤으로비정되는천추총단계까지꾸준히이어진다. 단이시기에도예외적으로우산하일대에서조영된왕릉이하나확인되는데, 이는미천왕의 2 차릉으로추정되는우산하 992호이다. 원래미천왕의무덤은마선구에있는서대묘였으나, 342년 ( 고국원왕 12) 전연의침공으로환도성이함락되고미천왕릉이도굴되어시신이탈취되는사건이발생하였다. 시신은다음해인 343년에되돌아왔다. 이에무덤의보호를중시하여동천왕 중천왕무덤의예에따라우산하지역에미천왕 2차릉을조영한것이다. 정작고국원왕의경우는사망이전에전연이멸망하였으므로, 전통적관념에따라통구하서쪽에왕릉 ( 마선구 2100호 ) 을조영할수있었다. 196) 우산하 992호를고국원왕릉을보는견해들도많다. 고국원왕의무덤이 국원 혹은 국강 이라는장지명에따라광개토왕무덤가까운곳에있어야한다는점과우산하992호에서출토된 기축명 와당 (329년) 과 무술명 와당 (338년) 의기년이고국원왕의재위연도 (331~371) 가겹치기때문이다. 그러나이러한비정에는문제가있다. 무술명와당의제작 196) 이기간중봉상왕의무덤만큼은집안지역에조영되지않았다고보았다. 사냥을위하여왕도를떠난사이정변으로목숨을잃은왕이기때문이다. 봉상왕의분주계왕호는 雉葛王 인데, 장지에기반하여왕호를만드는당시고구려의전통에따르면그가묻힌곳의지명이 치갈 인것으로이해할수있다. 이는국내지역의지명은아니라고여겨진다 ( 기경량, 2010 高句麗國內城시기의왕릉과守墓制 韓國史論 56, 서울대학교국사학과, p.48.). - 121 -

시기와고국원왕의몰년인 371년사이에 33년이나되는간극이존재하기때문이다. 권운문와당편년에따르면 4세기후반은권운문와당중에서도내부가 3선구획선으로구분되고명문이없는유형의와당이사용되던때이며, 연화문와당으로유행이넘어가려는과도기이다. 반면 1 선구획선이있고명문이존재하는기축명와당이나무술명와당은 4세기초반의것이다. 따라서우산하 992호를왕릉으로본다면출토와당의기년과시기적으로부합하는미천왕 2차릉으로이해하는것이합당한것이다. 고국원왕릉은 4세기후반에사용된 3선구획권운문와당이출토되는마선구 2100호로보아야왕의몰년과연대가부합한다. 이처럼왕릉을비정하는데있어서중요한근거로사용되는것중하나가와당인데, 한가지주의해야할점이있다. 바로무덤에서출토된와당의기년을곧무덤의축조연대와동일시하려는시각이다. 고구려무덤에서출토된기축명와당이나무술명와당은무덤뿐아니라국내성및인근주거유적들에서도출토되었다. 예컨대서대묘에서주로출토되고우산하 992호에서도일부출토된기축명와당은마선중학교부근과국내성동쪽의승리촌소방대에서도출토되었다. 우산하 992호에서주로출토된무술명와당은국내성중심지인체육장유적과성밖북쪽이수원자남유적에서도출토되었다. 이는이와당들의제작목적이오로지왕릉축조에만있는것이아님을보여준다. 왕릉의축조를위해특별히와당을제작하는경우도있기는하였겠으나상당수와당의제작은왕릉축조와는별개로이루어진것이며, 왕릉조영당시이미제작되어유통되던와당들을가져다사용한데불과하다. 미천왕의몰년인 331년과미천왕릉으로비정되는서대묘에서출토된무자년 (328) 와당, 기축년 (329) 와당의기년에약간의시차가확인되는것도이때문이다. 와당의기년을해당무덤이축조된바로그해라고이해할것이아니라近似한시기정도로이해하는것이타당한것이다. 우산하일대가다시왕릉조영지로부상하게된것은고국양왕의무덤 ( 태왕릉 ) 과광개토왕의무덤 ( 장군총 ) 조영시기이다. 통구하서쪽지역에 - 122 -

서왕릉의조영이장기간이루어짐에따라, 점차왕릉간거리가좁혀지고우월한입지를찾기도어려워졌다. 이에넓은공간이확보되어있는우산하일대로왕릉조영지를옮기게된것이다. 최종단계에서왕릉의조영지가동쪽으로이동하게된데는공간확보라는측면도있겠지만, 국내동쪽지역에대한위상이과거보다상승한것도중요한원인이되었으리라생각된다. 고구려는 313년 ( 미천왕 14) 낙랑군을무너뜨리고현평양지역을영역화하게된다. 이후고구려왕들은평양경영에지속적인관심을쏟게되는데, 자연히국내지역과평양지역과의인적 물적교류가크게늘어났을것이다. 그런데국내지역에서평양지역에이르는육로상의간선교통로는지금의집안하해방지역에서압록강너머만포를거쳐강계에이르고, 거기서다시서남쪽으로이동하여청천강길을따라가는루트이다. 즉한반도북부의평양을영역화함으로인하여집안분지동쪽지역의도로는간선교통로로서의위상과가치가크게상승하였다고볼수있다. 왕도의경관을형성하는데는거대한왕릉뿐아니라그보다규모가작은귀족들의무덤, 일반민들의무덤역시중요한역할을하였다. 왕릉이배타적입지에거대하게축조되어경외의대상이되었다면일반민의무덤은엄청난수의밀집을통해그존재감을과시한다. 집안분지전역에무덤군이존재하는데그입지는대개산의경사면이나산기슭이다. 이러한무덤들은무질서하게조영된것이아니라 3~5기단위로열상배치되는성향을보이고있어친족집단단위로묘역이형성되었던것으로파악되고있다. 197) 그렇다면고구려왕도의공간적범위는어떻게설정할수있을까. 이와관련해참고가되는것이국동대혈이다. 삼국지 에따르면 그國동쪽에큰굴이있는데隧穴이라부른다. 10월國中에크게모여隧神을맞이하고國동쪽 [ 물 ] 위에돌아가제사를지내는데, 木隧는神座에안치한다. 고하였다. 198) 일반적으로이隧神은水神이자穀神, 지모신적 197) 최종택, 2015 집안통구분지고구려고분군의조영과정연구 삼국시대국가의성장과물질문화 1,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p.102. 198) 三國志 卷 30, 魏書 30, 烏丸鮮卑東夷傳 13, 高句麗, 國東有大穴名隧穴 - 123 -

존재로이해하고있으며, 주몽의어머니인유화를의미하는것으로보는 경우가많다. 199) 국동대혈의위치는국내성에서동쪽으로약 14km 떨 어진곳에위치한通天洞동굴로비정되고있다. 200) 그림 17) 국내지역과국동대혈 비고 : 국동대혈의위치는국립문화재연구소, 2014 북방지역고구려발해유적지도집 ( 지도 편 ) 를참조하여필자가표시. 그런데 國東大穴 은國동쪽의큰동굴이라는의미이다. 여기서의國은國都, 즉왕도를의미한다고여겨진다. 고구려인들이생각하였던 國 의동쪽경계는어디까지였을까. 이와관련해기존에이루어졌던왕도의공간구획에대한논의를살펴볼필요가있다. 고구려왕명에붙은장지명을연구하는과정에서왕도내에존재하였던東川 中川 西川 美川 國川이각각어디인가에대한논란이발생하였다. 十月國中大會迎隧神還于國東 [ 水 ] 上祭之置木隧于神坐.. [ 水 ] 는원문에없으나 翰苑 의내용을참조하여보입. 199) 수신의성격에대한기존의논의는여호규, 2013 고구려도성의의례공간과왕권의위상 韓國古代史硏究 71, pp.61-66. 에자세히정리되어있다. 200) 吉林省文物志編委會, 1984 集安縣文物志, p.52. 통천동동굴은 1983 년발견되었다고하며, 그형상의특이함으로인하여 국동대혈 로비정되었다. 集安縣文物志 에서는국내성으로부터 17km 거리라고하였는데, 필자가구글어스로측정한결과직선거리로는약 14km, 굴곡이있는도로를기준으로측정할경우에는약 15.5km 인것으로확인되었다. - 124 -

처음임기환은통구하를중천으로파악하고, 201) 동천은태왕향일대의임강총과태왕릉사이의물길, 서천은마선하로비정하였다. 국천은압록강으로비정하는한편미천은하천이아닌국내지역의일정구역을의미하는개념이라보았다. 202) 이도학은통구하를국천 = 중천으로보고, 동천은태왕향의소하천, 서천을마선하로비정하였다. 미천은집안일대에비정할곳이없으므로, 전연으로부터시신을돌려받고새로조영한미천왕릉곁을흐르는하천일것이라하였다. 203) 통구하를중천으로비정하였던이러한연구들은문헌에서확인되는물길의숫자와실제집안지역에서확인되는물길의숫자가부합하지않는다는문제점이있었다. 이에정호섭은집안지역에대한현지답사및최근제작된집안지역지도상에서의표기를근거로하여우산하에서국내성남쪽으로흐르는소하천의존재를확인하고, 이를중천이라고비정하였다. 이경우국천은압록강, 동천은태왕향앞소하천, 서천은통구하, 미천은마선하가된다. 204) 조법종은전통시대의고지도와근대이후의지도들을종합하여집안지역의지형을살펴보는과정에서정호섭이언급한물길을재차확인하였다. 205) 그러자임기환은과거의견해를수정하여마선구일대를美川과연관된美壤 ( 好壤 ) 으로보는한편, 앞서확인된물줄기를기준으로집안분지를東壤 中壤 西壤으로구분하고, 國壤은도성지역전체를가리키는 國 의개념으로사용하였다고정리하였다. 206) 필자역시이러한시각에동의하는바이다. 201) 임기환, 2003 고구려都城制의변천 한국의도성 - 都城造營의傳統 -, 서울시립대학교부설서울학연구소, p.10. 202) 임기환, 2009 고구려의장지명왕호와왕릉비정 고구려왕릉연구, 동북아역사재단, pp.26-28. 203) 李道學, 2008 集安地域高句麗王陵에관한新考察 高句麗渤海硏究 30, pp.90-92. 204) 정호섭, 2011 고구려고분의조영과제의, 서경문화사, pp.86-88. 205) 조법종, 2013 고구려국내성의공간과광개토왕릉 광개토왕비의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p.71. 206) 임기환, 2015 고구려國內都城의형성과공간구성 - 문헌검토를중심으로 - 韓國史學報 59, pp.32-33. - 125 -

그림 18) 국내지역주요물길의형태 출처 :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 1, 集安縣高句麗時代遺蹟圖. 비고 : 숫자는필자가기입. 과거연구자들이하천의존재를확인하는데어려움을겪었던이유는 1967년운봉댐의건설로인해압록강의수위가변화하여집안지역의물길형태가크게달라지고, 결국현재의물길지형이고구려당시의그것과크게달라져버린데기인한것이라할수있다. 207) 이에과거집안지역의물길형태를파악하는데크게도움이되는것이 1915년간행된 朝鮮古蹟圖譜 에실린지도이다. 이지도에따르면우산하일대를서남향으로가로질러흐르다가국내성남쪽에서동남쪽으로방향을틀어압록강으로유입되는하천2의존재가주목된다. 이것이과거에는분명하게존재하였지만지금은흔적이희미해진하천이다. 207) 조법종, 2013 고구려국내성의공간과광개토왕릉 광개토왕비의재조명, 동북아역사재단, p.77. - 126 -

위지도상에보이는하천의존재를통해비정을해보면역시 1은동천, 2는중천, 3은서천, 4는미천으로비정하는것이타당하다. 실제로 1 옆에는동천왕릉 ( 임강총 ), 2 옆에는중천왕릉 ( 우산하 2110), 3 옆에는서천왕릉 ( 칠성산 211), 4 옆에는미천왕릉 ( 서대묘 ) 이존재하고있어왕릉비정과도정확하게맞아떨어진다. 이경우국천이문제가되는데, 이지역에서가장큰물길인 5압록강을국천으로볼수도있겠지만, 고구려의왕성이었던환도성과국내성사이를흐르고있는통구하 ( 서천 ) 의이칭으로서국천이라는하천명이병용되었을수도있다. 208) 하지만임기환이지적한바와같이이문제를접근함에있어하천보다는하천의존재로인하여자연스럽게구분되었던왕도의공간구획에초점을맞추어접근하는편이좀더유용한관점을제시할수있으리라여겨진다. 상기한각왕들의본래이름이東襄 [ 讓 ] 王 中壤王 西壤王 好壤王이었다는점을감안한다면, 고구려인들은 1-2 사이의공간을東壤, 2-3 사이의공간을中壤, 3-4 사이의공간을西壤, 4 서쪽공간을好壤이라고불렀을것으로짐작된다. 동양 중양 서양 호양의네지역을모두합쳐서國의공간으로인식하였을것이므로, 이공간전체를國壤이라고부를수도있다고생각다. 이에따르면國의동쪽경계선은 1의하천이되는것이고, 서쪽경계선은호양의서쪽을가로막고있는산지가되는셈이다. 이를국내시기고구려인들이생각하였던國, 왕도의경계이자범위로이해할수있다. 208) 국천의비정과함께가장문제가될수있는것이고국천왕의장지, 고국양왕의장지문제이다. 양자는사실상같은이름인데, 고국천왕의무덤은정확한비정이힘들지만통구하서쪽지역에조성된대형적석총일것으로여겨지며, 고국양왕의무덤은태왕릉임이거의확실시되어위치에차이가있다. 더큰문제는태왕릉이자리한곳을 國川 이나 國讓 으로인식할수있을것인가하는점이다. 사실태왕릉은동천왕릉으로비정되는임강총과도가까운거리에있다. 이일대를東川이나東讓으로보아야한다면 國川 이나 國讓 은어떻게설정이가능한것일까. 결국 國川 이나 國讓 은다른방위명장지명과는다른성격의것으로이해해야한다는결론이나온다. 필자는 國 라는식의장지명이특정지역을가리킨다기보다왕도범위전체를國으로인식하였던비교적느슨한개념의산물이라생각한다. 즉왕도, 國의공간범위안에만존재한다면 國 라는식의장지명은어디나가능하다는것이다. - 127 -

三. 고구려후기왕도 1. 새로운왕도평양과전기평양성 1) 平壤東黃城 의위치와성격고구려는 313년 ( 미천왕 14) 낙랑군을군사적으로공격하여영역화하였다. 삼국사기 에는미천왕이낙랑군을침공하여남녀 2,000여구를사로잡았다고서술하고있을뿐이지만, 1) 자치통감 에는당시낙랑 대방을통할하고있던張統이乙弗利 ( 미천왕 ) 와몇년간공방을주고받다가백성 1,000여가를이끌고모용외에게귀부한후그곳에새로낙랑군을설치하였다는내용을전하고있다. 2) 그이듬해인 314년미천왕이남쪽의대방군을침공하였다는기록도확인되므로, 3) 313년고구려가지금의평양일대를판도에넣은것은분명해보인다. 평양지역은본래고조선의수도인왕험성이있던곳으로이른시기부터정치 문화적중심지로기능하였던곳이다. 기원전 108년낙랑군설치된이후에는중국의선진문물이한반도로유입되는창구의역할을하기도하였다. 따라서고구려영역으로편제된이후왕실의지대한관심을받으며관리되었던것으로여겨진다. 이와관련하여고국원왕대이곳으로왕이移居하여통치거점으로삼았다는견해도존재한다. 이는다음의기록을근거로한다. N-1. 평양동쪽黄城으로이거하였다. 성은지금의서경동쪽목멱산중에 있다. 晉에사신을보내어조공하였다. 4)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제 6, 고국원왕 13 년 (343) 가을 7 月. 1)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第 5, 美川王 14 年冬 10 月, 侵樂悢郡虜獲男女二千餘口.. 2) 資治通鑑 卷 88, 晋紀 10, 孝愍皇帝下建興元年 4 月, 遼東張統據樂浪帶方二郡與高句麗王乙弗利相攻連年不解樂浪王遵說統帥其民千餘家歸廆廆爲之置樂浪郡以統爲太守遵參軍事.. 3) 三國史記 卷 17, 髙句麗本紀第 5, 美川王 15 年秋 9 月, 南侵帶方郡.. 4) 三國史記 卷 18, 髙句麗本紀第 6, 故國原王 13 年 (343) 秋 7 月, 移居平壤東黄城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遣使如晉朝貢.. - 128 -

지아닌지알수없다.). 6) 삼국사기 권 37, 잡지제 6, 지리 4 고구려. N-2. 왕이黃城의동쪽에서사냥을하였다. 5) 삼국사기 권 19, 고구려본기제 7, 안장왕 11 년 (529) 봄 3 월. N-3. 國內로도읍하여 425년이지나장수왕 15년에평양으로도읍을옮겼다. 156년이지나평원왕 28년에장안성으로도읍을옮겼으며, 83년이지나보장왕 27년에멸망하였다 ([ 細注 ] 옛사람들의기록에시조주몽왕으로부터보장왕에이르기까지의역년은틀림이없고상세한것이이와같다. 그러나혹은이르기를 고국원왕 13년에평양동쪽황성으로이거하였는데, 성은지금서경의동쪽목멱산중에있다 하니, 그러한 N-4. 목멱산 : 부의동쪽 4리에있다. 黃城의옛터가있는데일명絅城이라고도한다. 세상에서전하기를, 고구려고국원왕이환도성에있다가모용황에게패하여이리로옮겨와살았다. 고한다. 7) 신증동국여지승람 권51, 평안도, 평양부, 산천. 채희국은동천왕 21년 (247) 의평양성축성기록을근거로현평양지역에대한고구려의개척이 3세기중엽에시작되었다고하였고, 고국원왕 13년 (343) 의이거기사역시사실로보았다. 8) 또한 삼국사기 에보이는 평양동황성 은고려시기의평양내성을기준으로그동쪽을의미한다고하여고국원왕대이거한황성은모란봉부근의장안성북성을가리키는것이라하였다. 9) 반면정찬영은 평양동황성 은고국원왕 5) 三國史記 卷 19, 髙句麗本紀第 7, 安藏王 11 年春 3 月, 王畋於黄城之東.. 6) 三國史記 卷 37, 雜志第 6, 地理 4 高句麗, 都國内歴四百二十五年長壽王十五年移都平壤歴一百五十六年平原王二十八年移都長安城歴八十三年寳臧王二十七年而滅 ([ 細注 ] 古人記録自始祖朱蒙王寳臧王歴年丁寧纎悉若此而或云故國原王十三年移居平壤東黄城城在今西京東木覔山中不可知其然否 ).. 7)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51, 平安道, 平壤府, 山川, 木覓山在府東四里有黃城古址一名絅城世傳高句麗故國原王居丸都城爲慕容皝所敗移居于此.. 8) 채희국, 1957 평양부근에있는고구려시기의유적 - 고구려평양천도 1530 주년에제하여 - 문화유산 1957 5, pp.17-18. 9) 채희국, 1965 평양성 ( 장안성 ) 의축성과정에대하여 고고민속 1965 3, p.26. - 129 -

13년당시의평양이었던대성산성과청암동토성을기준으로그동쪽에위치해야한다고지적하며고방산위에있는용당산성을지목하였다. 10) 손영종역시비슷한시각에서 343년당시평양성은청암동토성이었을것이므로그동쪽 4리지점인고방산성과청호동토성이 평양동황성 일것으로보았다. 11) 민덕식은고국원왕때의 평양동황성 은청암동토성이가장유력하다고하며, 평지성인청암동토성과산성인장안성북성이한조를이루었을것이라하였다. 12) 그외에구체적으로위치를비정하지는않았으나고국원왕대이거한 평양동황성 이지금의평양지역을의미한다고보는연구자들이다수있다. 13) 이와달리 평양동황성 을지금의평양지역이아닌다른곳에서찾는경우도있다. 이병도는동천왕대는아직낙랑군이건재하던시기이므로평양지역으로의천도는믿기어려우며, 고국원왕대의 평양동황성 기사역시고국원왕이하그후대왕들의칭호에서볼수있듯이능침의소재가모두국내지역이라는점을들어그대로믿을수없다고하였다. 평양동황성 은평양에있는동황성이라는의미로서, 고구려에서수도를가리키는황성의동쪽에위치한데서나온호칭으로보고, 집안지역의동쪽對岸인강계지역이라고하였다. 14) 10) 정찬영, 1966 평양성에대하여 고고민속 1966 2, pp.16-18. 11) 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제문제, 사회과학원 (2000, 신서원, pp.333-335.). 12) 閔德植, 1989 故國原王代平讓城의位置에관한試考 龍巖車文燮敎授華甲紀念史學論叢, 신서원, pp.126-127. 이밖에장효정과김지희도청암동토성을 평양동황성 으로이해하고있다 ( 張傚晶, 2000 고구려왕의平壤移居와왕권강화 龜泉元裕漢敎授定年紀念論叢 ( 上 ), 혜안, pp.1442-143; 김지희, 2016 高句麗故國原王의平壤移居와南進 韓國史論 62, pp.26-39.). 13) 申東河, 1988 高句麗의寺院造成과그意味 韓國史論 19, pp. 19-20; 車勇杰, 1993 高句麗前期의都城 國史館論叢 48, pp.15-16; 林起煥, 1995 4 세기고구려의樂浪 帶方地域경영 : 안악 3 호분 덕흥리고분의墨書銘검토를중심으로 歷史學報 147, p.17; 김미경, 1996 고구려의낙랑 대방지역진출과그지배형태 學林 17, 延世大學校史學硏究會, pp.29-30. 14) 李丙燾, 1956 高句麗東黃城考 東國史學 4(1976, 韓國古代史硏究, 博英社, pp.370-373.). 이설을수용하고있는연구자는다음과같다 ( 徐永大, 1981 高句麗平壤遷都의動機 - 王權및中央集權的支配體制의强化과정과관련하여 - 韓國文化 2, pp.90-91; 孔錫龜, 1991 高句麗의領域擴張에대한硏究 - 四世紀를中心으로 - 韓國上古史學報 6, pp.239-241; 余昊奎, 2009 4 세기高句麗의樂浪 帶方경영과中國系亡命人의정체성인식 韓國古代史硏究 - 130 -

그밖에魏存成은 평양동황성 의위치에대하여여러가지가능성을언급하면서도집안평지성에서동쪽으로약 500m 떨어진동대자유적을새로운후보지로제시하였고, 15) 張福有는동천왕대의평양성축성기사를집안양민고성으로이해하는한편, 고국원왕대이거하였다는 평양동황성 역시그동쪽에서찾아臨江市六道溝鎭樺皮甸子村의古城을지목하였다. 16) 하지만魏存成이제시한동대자유적은건축유적이지城이아니며, 張福有는양민지역과화피전자촌이가까운거리라고서술하였지만, 양자간거리는약 100km에이르기때문에이역시 평양과그동쪽의황성 의관계로보기는어렵다. 이처럼 평양동황성 에대해서는다양한의견들이제시되었고, 연구자간견해의차도상당히큰편이다. 하지만 평양동황성 이어디인지를따지기에앞서과연 평양동황성 에대한내용을담고있는이기록이과연어떤성격을가지고있는사료인지에대한분석이선행될필요가있다. 고구려본기고국원왕 13년조는 삼국사기 에서매우이례적인형태의기록이다. 왕이 평양동황성 으로이거하였다는정보를전하는데그치지않고, 곧바로 성은지금의서경동쪽목멱산중에있다 고찬자가적극적으로개입하여부기하고있기때문이다. 여기서의 지금 은물론 삼국사기 편찬당시를의미한다. 삼국사기 에서찬자가단순정보에이처럼개입하여의견을제시하는것은흔치않은일이다. 이는 평양동황성 이거기록이고구려본기의다른기록들과는다른계통성을가진정보일가능성을보여준다. 즉 삼국사기 의모본역할을하였던자료에는해당내용이존재하지않았는데, 고국원왕이 평양동황성 에이거하였다는별도의전승을입수한찬자가새롭게삽입한것이아닌가여겨지는것이다. 53, pp. 163-164.). 다만여호규는 강계 라고적시하지는않고이병도설을 압록강유역설 로소개하며, 247 년과 343 년의평양성이모두압록강유역에위치했을가능성이높다고서술하였다. 15) 魏存成, 1985 高句麗初, 中期的都城 北方文物 1985 2, p.33. 16) 張福有저, 尹鉉哲역, 2005 고구려의平壤, 新城과黃城 고구려역사문제연구논문집, 고구려연구재단, pp.236-245. - 131 -

이러한추정을뒷받침해주는것이 삼국사기 잡지의서술형태이 다. 여기서는고구려왕도의이동을순차적으로설명한후다시細注를 통해 그러나혹은이르기를 고국원왕 13 년에평양동황성으로이거하 였는데, 성은지금서경의동쪽목멱산중에있다 하니, 그러한지아닌 지알수없다. 고부기하고있다. 이는 或云 뒤에인용된문장전체가 삼국사기 의모본과는다른계통의정보임을시사한다. 만약모본에 도 평양동황성 이거내용이실려있었다면 或云 이라고하지않았을 것이고, 그러한지아닌지알수없다 는의견이굳이따라붙을이유도 없었을것이다. 찬자입장에서정보의신빙성에불안한요소가있기때 문에이와같은서술이나타난것으로이해할수있다. 그렇다면황성이있었다고하는목멱산은과연어디일까. 앞서여러 연구자들에의해제시된다양한설을소개하였지만, 대부분정황에따른 비정에머물고있다. 이러한비정에앞서우선평양일대에실제로 황 성 이라는지명이존재하는지찾아보는것이순서일것이다. 조선초에 편찬된 동국여지승람 을보면평양부동쪽 4 리지점에목멱산이있 고, 여기에황성의옛터가있다고하였다. 이는고려때부터이어져내 려오는지리정보일것으로생각된다. 또한조선후기김정호가제작한 동여도 를보면평양성의동쪽대안에있는의암부근에목멱산과문 수산이이어져있고, 목멱산에는황성의유지가표시되어있다. 이를통 해조선시대에황성의위치에대한구체적인인식이있었음을확인할 수있다. 동여도 에서황성이그려진지점의현재지명은대동강구 역의암동과문수동이다. 조선시대사람들이생각하였던황성유지가 이곳이라면, 고려시대에도마찬가지였을것이다. 흥미로운것은목멱산이라는지명이다. 목멱산은서울에있는남산의 이름이기도하다. 남산의옛이름이곧목멱산인데, 이는 마뫼 의변형 이다. 마뫼는남산, 혹은앞산을의미한다. 옛말에 마 가 남쪽 이나 앞 을의미하기때문이다. 이와비교하여참고할만한용어로남쪽에서불어 오는바람을의미하는 마파람 이있다. 17) 고려시기서경의중심지는 17) 마파람은뱃사람들의은어로 남풍 이나 앞바람 을의미한다 ( 국립국어원, 표준국어대사전.). - 132 -

지금의평양성내성일대였는데, 이를기준으로하면의암동은동쪽에해당하므로이곳에있는산을목멱산, 즉 남산 이나 앞산 으로인식하였다고보기는어렵다. 의암동일대를남쪽으로인식하였다는것은그기준이대동강북쪽대안이라는의미인데, 여기에해당하는지역은지금의임흥동 ( 과거上五里 ) 일대이다. 그림 19) 동여도 에보이는목멱산과황성 - 133 -

출처 : 동여도 ;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 1, 地圖 1- 平壤附近樂浪 郡及高句麗遺蹟圖. 1918년제작된 朝鮮全圖 를보면의암리와상오리사이를흐르는대동강중간에依岩渡라는표시가확인된다. 두지역을이어주는나루가존재하였다는것이다. 강을사이에두었지만두지역간긴밀한교통이있었음을보여준다고할수있다. 지리적위치로보았을때대성산성남쪽에자리하고있던전기평양의중심주거지에서대동강남안의낙랑토성쪽으로이동할때는의암동일대를거쳐갔을것으로짐작된다. 그렇다면 남산 을의미하는목멱산이라는지명의유래는대동강북쪽의임흥동일대가왕도의중심주거지로활용되었던고구려전기평양시기까지올라갈가능성이높다. 북한학자손영종에따르면과거의암산남쪽강변에목멱신의사당이있었다고한다. 다만이곳은평양중심부에서 10여리나떨어진곳이라 4리라는기록과는맞지않으며, 지세와위치로볼때큰성이들어앉을자리도없고큰건축지도없다고하여황성일가능성을부정하였다. 18) 그러나평양중심부와의암동사이에는대동강이존재하기때문에대동강의강폭을제외하고측정한다면옥류동에서의암동까지의거리는약 2.8km로 4리라는기록과큰차이가있다고보기어렵다. 그리고애초에의암동일대에목멱신사가존재하였다면그것만으로도의암산을목멱산으로볼수있는결정적인근거가되므로, 약간의거리차이정도는큰문제가된다고볼수없다. 따라서평양의목멱산중에있다고하는황성은의암동일대에서찾는것이합당하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는 529년 ( 안장왕 11) 안장왕이황성동쪽에서사냥을하였다는기록이남아있다. 이기록을통하여고구려당대평양일대에황성이라는지명이실재하였다는것은그사실성을인정할수있다. 다만이황성을왕이거주하는왕성으로이해하는것은곤란하다. 왕이사냥을하는곳은대개교외지역이거나, 왕도에서여러날이 18) 손영종, 2000 고구려사의제문제, 사회과학원 (2000, 신서원, pp.334-335.). - 134 -

동해야갈수있는사냥터이다. 왕성은왕도중심부에자리하고있을것이므로, 왕성동쪽 에서사냥을한다는표현은아무래도어색한표현인것이다. 따라서황성은왕도의중심부에서어느정도떨어진곳에자리한지명으로이해할수있다. 삼국사기 온달전에따르면고구려는매년봄 3월 3일에낙랑언덕에모여사냥을하였다고하였다. 19) 이는평양시기고구려의주요사냥터가과거낙랑군이소재하였던대동강남안이었음을시사한다. 이역시의암동일대에서고구려의사냥터와가까웠던황성의존재를찾을수있는단서가될수있다. 동국여지승람 에따르면황성의옛터를일명絅城이라고도하였다고한다. 이는아마도炯城의誤寫일가능성이높다. 황 과 형 은음이비슷하므로, 고려시기부터황성으로불리던곳의지명이조선초즈음에 형성 으로변형되었을수있다. 이일대의성유적으로는 1942년간행된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에서소개하고있는 대동강변의암리성지 의존재가주목된다. 당시의암리에는論洞부락의동쪽 100 間지점에토성이남아있었는데, 성의둘레는약 145 間, 높이는약 3 尺, 바닥부분폭은약 5 尺정도라고하였다. 20) 해당자료집에서는이곳이 동국여지승람 에기재된황성일가능성이있다고언급하였는데, 상당히타당한추정이다. 이상의내용을종합해보면 1940년대초까지의암동에서그존재가확인되고있는이토성이야말로 삼국사기 에등장하는 목멱산중에있는성 이자, 동국여지승람 에서도확인되는 목멱산황성옛터 인것으로이해된다. 529년안장왕의사냥기록에등장하는황성역시이곳으로볼수있다. 다만고국원왕이의암동토성, 즉황성으로이거하였다는기록이사실성을가지고있는가하는것은또다른문제이다. 앞서살펴보았듯이 평양동황성 이거기록은다른본기기록과는매우다른형태이기때문이다. 이를 삼국사기 편찬자료의다양성이라는측면으로이해한다면고국원왕이실제로의암동토성 ( 황성 ) 으로이거하였다고볼수도있 19) 三國史記 卷 45, 列傳第 5, 溫達, 髙句麗常以春三月三日㑹獵樂浪之丘以所獲猪鹿祭天及山川神.. 20) 朝鮮總督府, 1942 朝鮮寶物古蹟調査資料, p.416. - 135 -

겠지만, 필자는이를고구려당대의정보가아닌후대생성된정보의삽입으로보는쪽으로무게를두고싶다. 평양동쪽의황성 이라는표현자체가고려시기서경을기준으로한것이라판단되기때문이다. 의암동의황성은대동강남쪽강변에만들어진작은규모의토성이다. 입지적인면에서토성동에위치한낙랑군치소성과유사한면이있다. 따라서본래낙랑군에속해있던하부행정단위의흔적이거나, 渡江위치에설치된방어시설일가능성이높다. 아마도낙랑군시기부터존재하였던의암동토성, 즉황성유지에점차고국원왕의이거라는전설이생겨나게되었고, 이것이고려시대에채록되어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삽입되었던것이아닌가여겨진다. 황성유지에하필이면고국원왕의이거와관련한전설이생겨나게된까닭은그가평양에서전투를지휘하던중목숨을잃은왕이기때문일것이다. 국왕의전사라는극적요소로인하여평양지역에남아있는버려진옛성터와관련된전설의주인공이될수있었던것이다. 그렇다면고국원왕이백제군과맞서싸우다실제로전사한평양성은어디일까. 이시기평양지역의치소는역시지금의토성리에자리하고있는낙랑토성일대였다고보아야할것이다. 낙랑군이고구려에복속된이후굳이이지역통치의중심지를바꿀이유는없기때문이다. 따라서이시기사용되었던평양성이라는지명역시낙랑토성을가리키는것일가능성이높다. 고국원왕은평양성에서백제군을맞아싸우다가流矢에맞아사망하였다. 이전투에서고구려군이대동강북쪽, 백제군이대동강남쪽에각각지휘소를두고대치하였다면강자체의폭이무척넓기때문에고구려의왕이유시에맞아사망하는일은발생하기는어려웠을것이다. 즉평양성이대동강남안에위치한성이었기때문에이곳에서전투를지휘하던고국원왕이사망하는일이발생하였던것으로생각된다. 광개토왕비에따르면영락 9년광개토왕이평양으로행차하여신라의사신을맞이하는내용이확인되며, 수묘인연호목록에서도평양성이등장한다. 여기서의평양 평양성역시낙랑군토성을의미하는것으로생각 - 136 -

된다. 낙랑군토성의바로동쪽지역에서는이른시기의고구려연화문와당이다수출토된바있다. 21) 이를통해서도낙랑토성일대가낙랑군복속이후고구려의통치기관이설치된행정의중심부이자, 평양성이었음을짐작할수있는바이다. 2) 왕성이자산성으로서의평양성고구려는 427년국내지역에서평양지역으로왕도를옮겼다. 586년에는다시장안성으로이도하였는데, 이는평양지역내에서의이전이었다. 평양에서장안성으로의이도기록의실제성에대하여회의적인견해가제기된적도있으나, 22) 현재는대부분의연구자들이장안성으로의이도를인정하고있다. 고구려인들은장안성으로의이도이후에도평양성이라는명칭을병용하였다. 이에혼란을피하기위하여장수왕이이도를한 427년부터장안성으로옮겨간 586년까지의왕성을 전기평양성 이라지칭하고, 장안성시기는 후기평양성 이라고지칭하여양자를구분하도록하겠다. 전기평양성과관련한주요사료는다음과같다. O-1. 평양으로이도하였다. 23) 삼국사기 권 18, 고구려본기 6, 장수왕 15 년 (427) O-2. 내가번사 [ 고구려사신 ] 에게물어보니말하기를, 성은패수의북쪽에있으며, 그물은서쪽으로흘러옛낙랑조선현을지나니곧낙랑군치이며한무제때설치한것이다.. 24) 수경주 권14, 패수 21)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 pp.28-29 ; 谷豊信, 1990 平壤土城里發見の古式の高句麗瓦當について 東洋文化硏究所紀要 112, pp.50-68. 22) 三品彰英, 1951 高句麗王都考 三国史記高句麗本紀の批判を中心として 朝鮮學報 1, pp. 42-44. 23) 三國史記 卷 18, 髙句麗本紀 6, 長壽王 15 年, 移都平壤.. 24) 水經注 卷 14, 浿水, 余訪蕃使言城在浿水之陽其水西流逕故樂浪朝鮮縣即樂浪郡治漢武帝置.. - 137 -

O-3. 치소는평양성이다. 그성은동서로 6리이고, 남쪽으로는패수에임해있다. 성안에는오직창고를채우고무기를쌓아방비하니, 적이이르는날에는모두들어가굳게지킨다. 왕은그곁에따로집을지어놓아서항상거기머무르지는않는다. 25) 주서 권49, 열전41, 이역상, 고려 O-4. 국도는평양성으로장안성이라고도한다. 동서 6 리이며산을따라굴 곡이있고남쪽은패수에임한다. 26) 수서 권 81, 열전 46, 동이, 고려 삼국사기 의기록은매우소략하여단지평양으로왕도를옮겼다는내용이전부이다. 보다구체적인서술은중국측자료에등장한다. 북위때사람酈道元이쓴 水經注 를보면고구려사신을만나패수의흐름을물어본내용이나온다. 이때는전기평양성시기인데, 고구려사신이말하기를성 [ 평양성 ] 은패수북쪽에있고그서쪽으로물이흘러간곳에과거낙랑군의치소가있다고하였다. 이를통해전기평양성이낙랑군치소근처를흐르는대동강의상류에있으며또강북쪽에있었음을알수있다. 그다음은전기평양성과관련하여가장중요한사료인 주서 의기록이다. 평지성-산성으로이루어진고구려왕도의구조및기능에대한통설이여기에근거하고있으므로, 주서 의기록이고구려왕도연구에미친영향은그야말로지대하다고할수있다. 주서 에따르면전기평양성은동서로 6리의크기이고, 패수 ( 대동강 ) 에임해있다고한다. 현재평양지역에서이러한조건을충족하는성은 2곳으로, 청암동토성과대성산성이다. 남쪽으로대동강에임해있다고하는묘사는청암동토성과더잘어울리지만평양성과패수와의상대적방위를나타내기위한느슨한표현이라고본다면대성산성의경우도딱히어긋나는것은 25) 周書 卷 49, 列傳 41, 異域上高麗, 治平壤城其城東西六里南臨浿水城內唯積倉儲器備寇賊至日方入固守王則別爲宅於其側不常居之.. 26) 隋書 卷 81, 列傳 46, 東夷, 高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 - 138 -

아니다. 평양성의크기는동서 6리라하였다. 동위와북주에서의 1척은대략 28~30cm 길이인데, 1리 =1,800척을기준으로하여계산해보면 6리는약 3~3.2km 정도를의미한다고볼수있다. 구글어스를이용해청암동토성과대성산성의동서길이를측정해보면청암동토성은약 2.25km로확인된다. 대성산성도순수하게성벽사이의거리만재면청암동토성과큰차이가없는약 2.3km로측정된다. 단대성산성이산성이라는점을감안하여대성산의서쪽능선에서동쪽봉우리까지산전체의동서폭을측정해보면약 3km가나온다. 따라서성의크기면에서는대성산성쪽이좀더 주서 에서의묘사와부합한다고할수있다. 27) 수서 의기록은시기상으로장안성으로의천도이후에해당한다. 그내용을보면전기평양성에대한 주서 의정보를답습하고나서 장안성이라고도한다 며새로입수한정보를덧붙인형태라고이해된다. 평양성이동서 6리크기라는 주서 에서의묘사가 수서 에그대로옮겨졌기때문이다. 주목되는것은평양성이 산을따라굴곡이있다 는새로운정보이다. 장안성은북쪽일부지역을제외한대부분의성벽이대동강과보통강을해자로삼아평지에조성되어있는성이기때문에이역시장안성보다는전기평양성에대한묘사로파악된다. 이러한정보들을종합한다면전기평양성은역시산성인대성산성으로이해하는것이합당하다. 28) 27) 주서 에서의평양성묘사를장안성에대한것으로보는견해도있다 ( 임기환, 2007 고구려평양도성의정치적성격 韓國史硏究 137, p.15.). 주서 가편찬되었을시점에는이미장안성이축조되었을것이라는점때문이다. 하지만그렇다면 주서 에서는왜평양성의다른이름이장안성이라는중요한내용이생략되었는지의문이생긴다. 상기한이유로필자는 주서 의내용은북주가존속하던시기에입수하였던정보를그대로실은것으로이해하고있다. 28) 新唐書 단계에서도장안성을묘사하며 산의굴곡을따라外城을두르고, 남쪽끝은패수이다. 라고하였으나, 이역시 주서 나 수서 에서의전기평양성묘사를단순히답습한것으로보아야할것이다. 장안성의외성은거의전영역이평지에조성되었기때문이다. - 139 -

그림 20) 평양지역왕도관련유적분포 전기평양성의한축이대성산성이라는것은연구자들간이견이없다고보아도무방하다. 다만전기평양성시기산성인대성산성과조합을이루는평지성이어디인지가오랫동안논쟁의대상이되어왔다. 이에대해가장먼저견해를표명한關野貞은본래대성산성-안학궁터의조합을상정하였으나, 29) 나중에는대성산성-청암동토성의조합으로견해를수정하였다. 30) 안학궁터에서출토되는기와의연대가후대의것이라는판단하에고구려말기의별궁으로여긴것이다. 반면대성산성과청암동토성에서는공히 5세기초국내성시기에도제작되었던연화문와당이출토되어서이두성이비교적이른시기부터사용되었다는것이고고학적으로확인되었다. 이에일본학계에서는현재까지도대성산성과청암동토성이전기평양성시기세트를이루었다는견해가주된흐름을 29) 關野貞, 1914 國內城及丸都城の位置 史學雜誌 25 11, p.11. 30)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 p.28. - 140 -

형성하고 있다.31) 하지만 대성산성-청암동 토성 조합설의 약점은 정작 청암동 토성에서 왕궁으로 볼만한 유적이 확인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이 약점 역시 일제 강점기 일본 학자의 손에 의해 제시되었다. 1938년 關野貞이 전기 평양 성 시기의 평지성이자 왕궁터로 지목한 청암동 토성에 대한 발굴 조사가 시행되었는데, 왕궁 유적이 있으리라 생각하였던 곳에서는 뜻밖에 사찰 의 존재가 확인되었다.32) 당시 확인된 유적은 중심부에 탑지에 해당하는 팔각형의 건물지가 자리하고 그 주위를 여러 건물이 둘러싸고 있는 모습 을 갖추고 있어 절터였음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림 21) 청암동 토성의 형태 출처: 小泉顯夫, 1940 平壤淸岩里廢寺址の調査 昭和十三年度古蹟調査報 告, 朝鮮古蹟硏究會, 圖版 第2. 31) 田村晃一, 1988 高句麗の城郭について 百濟硏究 19, pp.155-156; 田中俊 明, 2004 高句麗の平壌遷都 朝鮮學報 190, pp.51-52; 千田剛道, 2012 高 句麗の前期平壌城と清岩里土城 文学 芸術 文化: 近畿大学文芸学部論集 23, pp.32 33. 32) 小泉顯夫, 1940 平壤淸岩里廢寺址の調査 昭和十三年度古蹟調査報告, 朝 鮮古蹟硏究會. - 141 -

발굴당시지역주민들의증언에따르면이곳에는金剛寺터라는전승 이있었고, 주변에도金剛灘이나塔峴이라는지명이남아있었다. 금강 사는 498( 문자왕 7) 에창건되었다는기록이확인되는사찰이다. 33) 평양 지역금강사의존재는 고려사 에서도확인이된다. 1087 년 ( 선종 4) 에宣宗이서경의금강사에행차하였다는기록과 1102 년 ( 숙종 7) 에肅 宗이금강사에행차하여飯僧하고옛탑이있던자리를보았다는기록이 다. 34) 이유적이금강사임을직접적으로증명할수있는명문자료가출 현하기전까지확정은어렵겠지만, 고려때의금강사관련기록이꽤시 기가이른것이고, 고려당대에도 옛탑이있던자리 운운하였던것을 보면이곳이고구려때금강사가있던곳이라는추정자체는눈여겨볼 필요가있다고여겨진다. 여하튼청암동토성에서가장좋은입지여서왕궁지로추정되었던곳 이사실은사찰유적이었음이확인됨에따라청암동토성이고구려왕성 이었다는주장은큰타격을입게되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곳을고 구려의왕성으로보는견해가지금까지생명력을잃지않고있는것은 또다른평지성후보인안학궁터의문제점때문이다. 북한학계에서는안학궁이대성산성과같은시기에조성되었다고보는 것이통설이다. 예컨대남포시강서구역에있는약수리벽화무덤에는 성곽도가그려져있는데, 이는북쪽대성산에서안학궁을내려다본모습 이라는것이다. 35) 약수리벽화무덤은대부분연구자들이 4 세기말에서 5 세기초에조영된무덤으로편년하고있으므로, 이그림이안학궁을그 린것이분명하다면안학궁은 5 세기초에이미존재하였다고볼수있 을것이다. 하지만약수리벽화무덤의그림이안학궁을그린것인지에대해서는 단정하기어렵다. 양자의관련성에주목하는이들은안학궁의성벽이마 33) 三國史記 卷 19, 髙句麗本紀 7, 文咨王 7 年秋 7 月, 創金剛寺.. 34) 高麗史 世家卷 10, 宣宗 4 年 10 月乙未, 幸興福金剛二寺. ; 高麗史 世家卷 11, 肅宗 7 年 9 月辛丑, 幸金剛寺飯僧遂觀舊塔遺址.. 35) 전제헌 손량구, 1985 고구려력사연구 - 안학궁유적과일본에있는고구려관계유적, 유물,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98, 백산자료원영인, p.87.). - 142 -

름모꼴의모습인데, 약수리벽화무덤의성곽도역시마름모꼴로묘사되어있다는점을근거로한다. 하지만양자를비교해보면기울어진방향이반대라는사실을알수있다. 더구나약수리벽화무덤의성곽도가정말마름모꼴의성벽을묘사하려한것인지도불분명하다. 정방형의성벽이라하더라도바라보는각도에따라얼마든지기울어진형태로묘사할수있기때문이다. 그림 22) 약수리벽화무덤의성곽도와안학궁터의도면출처 : 채희국, 1964 대성산일대의고구려유적에관한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p.75; 사회과학원고고학연구소, 2009 고구려의건축 ( 조선고고학전서28-중세편5), 진인진, p.48. 또한성곽도의위쪽성벽에그려진건물그림을모두門樓라고본다면안학궁남쪽성벽에문이세개라는점과부합한다고할수도있겠지만이역시성곽도의건물그림이모두문루를의미하는것인지확정할수없다. 위, 아래, 오른쪽대문그림의세로선은모두성벽을나타내는가로선과교차하는형태로묘사되고있으나, 위쪽문그림의좌우건물은그러한식으로묘사되고있지않기때문이다. 이는성벽위의망루를묘사한것일수도있고, 성벽바깥의건물을묘사한것일수도있다. 남한이나일본학계에서는북한학계와달리안학궁을고구려후기의것으로보거나아예고려시기까지시대를내려보는견해가많다. 가장큰이유는역시안학궁터에서古式의와당이확인되지않는다는점때문 - 143 -

이다. 안학궁터에서출토된일부와당은고구려후기의것으로보이기도하지만, 상당수는통일신라내지고려때의것으로파악되고있다. 36) 특히문제가되는것은다른고구려유적에서는전혀확인되지않는암막새의존재이다. 또다른문제는안학궁이 5~6세기대의것으로보이는고구려석실묘를파괴하고축조된점이다. 안학궁 2호석실묘에서출토된회청색경질토기호를고려때의것으로추정하며, 이를근거로안학궁을고려때의유적으로추정한경우도있다. 37) 안학궁터를고려때유적으로보는견해중특히눈에띄는것은田中俊明이제시한西京左宮說이다. 이는 고려사 에보이는다음기록을근거로한다. P-1. 制書를내리기를, 서경의궁궐은오래되어서훼손된것이많으니, 마땅히장인들을모집하여수리하도록하라. 또서경에서동서로각각 10 여리떨어진지역에다시땅을택하여좌우궁궐을지어서, 지방을순회할때머무는장소로삼도록하라. 하였다. 38) 고려사 세가권9, 문종 35년 (1081) 8 月신유 田中俊明은 고려사 문종 35년기록에보이는좌궁과우궁중서경의서쪽 10리에조영된우궁에해당하는것이珠宮址이고, 동쪽 10리에조영된좌궁에해당하는곳이안학궁터라고보았다. 39) 이는안학궁터에서확인되는고고학적양상은물론이고, 문헌적으로도유적의성격을이해할수있는근거를확보하였다는점에서무척주목할만한견해이다. 36) 양시은, 2014 고구려도성연구의현황과과제 高句麗渤海硏究 50, pp.58-59. 37)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p.72. 38) 高麗史 世家卷 9, 文宗 35 年 8 月辛酉, 制西京宮闕年久頹毁頗多宜募工修葺且去京東西各十餘里更卜地構左右宮闕以爲省方巡御之所.. 39) 田中俊明, 2004 高句麗の平壌遷都 朝鮮學報 190, pp.49-50. - 144 -

그림 23) 田中俊明이제시한주궁터와안학궁터 출처 : 田中俊明, 2004 高句麗の平壌遷都 朝鮮學報 190, p.50. 여러가지정황으로보아안학궁의조성연대가고구려가아닌고려시기일가능성을완전히배제하기어렵다. 이곳에서일부고구려와당이나왔다하더라도그조차연대가매우늦기때문에적어도장수왕이천도했을당시의왕궁지라고볼수있을지계속의문이남는다. 이러한정황으로인하여청암동토성이대성산성과짝을이루는평지성이었다는견해가더욱힘을얻고있는실정인것이다. 40) 하지만앞서살펴보았듯이청암동토성에서가장유력한왕궁후보지에서는사찰유적이확인되었다. 청암동토성에서왕궁이있을법한두곳, 즉동문지의남쪽과서문지의동쪽일대를모두조사하였으나왕궁건축으로볼만한구체적인유적은확인되지않았다. 동문지남쪽유적은탑지와그주위를둘러싼건축군이확인되어전형적인사찰유적으로확인될뿐이며, 서문지동쪽유적에서는 1990년대채색벽화편과금가루가입혀진벽화편등이확인되어, 41) 이역시사찰유적으로추정된다. 40) 임기환, 2007 고구려평양도성의정치적성격 韓國史硏究 137, p.17;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p.73-74; 여호규, 2014 고구려도성의구조와경관의변화 삼국시대고고학개론 1, 진인진, p.93. 41) 남일룡 김경찬, 2000 청암동토성에대하여 (2) 조선고고연구 2000 1, - 145 -

때문에토성내의다른곳을왕궁지로지목한경우가있다. 예컨대千田剛道는아직조사가이루어지지않은청암동토성의중앙부에왕궁지가있었을것으로추정하였다. 42) 하지만이곳은지형상성내의다른곳보다왕궁이자리할만한입지로적절하다고보기어렵고, 지표조사에서도다른구역과달리기와조각이확인되지않았다. 千田剛道는이러한이유로이시기고구려왕궁건축에서기와를사용하지않았을가능성을제시하기도하였으나, 이는사찰에서도사용하고있는기와를정작왕궁건축에서는사용하지않았다는이야기가되므로받아들이기어렵다. 토성내의중앙부에서기와가발견되지않는다면그곳에왕궁건축이존재했을가능성이낮다고보는것이순리이지, 왕궁에기와를사용하지않았으리라상정하는것은본말이전도된것이다. 토성내에왕궁과사찰이함께존재하였다는견해가성립하기위해서는일단성내에서어떠한형태로든왕궁유적이확인되어야한다. 하지만청암동토성내에서가장넓고우월한입지를확보하고있는것은소위금강사터라고불리는곳이다. 왕궁이왕성내에서가장좋은입지를사찰에내주고그보다열등한입지에존재하였다고는생각하기어렵다. 이와관련해청암동토성이고국원왕이 334년에축조하였다는평양성이고, 장수왕대에궁성으로사용하였다가 498년문자왕이안학궁을새롭게왕궁으로조영하게되면서청암동토성내왕궁은왕실사찰인금강사로전환되었다는추정도제시된바있다. 43) 익산왕궁리유적처럼원래왕궁으로조성되었던건축물이사찰로용도가변경된사례가존재하므로청암동토성에서도비슷한용도변경이있었을가능성은있다. p.13; 남일룡 김경찬, 2001 청암동토성에대하여 (3) 조선고고연구 2001 2, pp.6-9. 남일룡 김경찬은청암동토성서부에서확인된벽화건물이절터는아닐것이라하였다. 성동쪽에 금강사터 가있는만큼성내에서로다른사찰이두개존재할리는없다는이유에서이다. 하지만금분이많이칠해진벽화조각이다수확인되었다는점을감안하면역시사찰건물이었을가능성이높다고여겨진다. 42) 千田剛道, 2012 高句麗の前期平壌城と清岩里土城 文学 芸術 文化 : 近畿大学文芸学部論集 23, pp.32-33. 43) 임기환, 2007 고구려평양도성의정치적성격 韓國史硏究 137, pp.17-18. - 146 -

그러나이경우에도현재확인되는사찰건물터가그이전에는어떻게왕궁건축으로서기능하였을지에대해보다구체적설명이제시될필요가있다. 청암동토성에서확인되는고식의와당은연화문와당으로, 그편년은 4세기말에서 5세기초이다. 와당만으로본다면이성이고국원왕대인 4세기초부터사용되었다고볼수있을만한구체적인근거는확인되지않는다. 와당과시기가부합하는문헌기록은오히려 4세기후반광개토왕대의것이다. 삼국사기 에따르면 392년 ( 광개토왕 2) 에광개토왕이평양에 9개의절을창건하였다. 44) 평양 9사의창건기록은백제의남쪽변경침범기사와함께등장한다. 따라서평양 9사의창건을호국적성격을띤것으로이해하기도한다. 45) 그렇다면 4세기말 ~5세기초제작된와당이확인되는청암동토성내의사찰은광개토왕대의평양 9사창건과관련된것으로생각해볼수있을것이다. 평양 9사의창건에군사적성격이내재되어있었다면사찰의입지가성안이라는것은충분히이해할수있다. 청암동토성성벽의초축시기에대해서는고조선시대로까지올려보는경우도있지만, 46) 이에대한판단은보다구체적이고정밀한발굴조사결과가제시될때까지기다릴필요가있어보인다. 청암동토성을주목하는최근의연구경향에서짚어보아야할점이있다. 청암동토성을고구려전기왕성으로보는이유는안학궁터를대성산성과동시기에사용된평지성으로보기는어렵기때문에결국남아있는후보지인청암동토성을왕성으로볼수밖에없다고보는측면이강하다. 그러나더근본적인질문의제기가필요하다. 과연고구려왕도에서평지의성이필수적인요소인가하는점이다. 어떻게든산성인대 44) 三國史記 卷 18, 高句麗本紀第 6, 廣開土王 2 年, 秋 8 月, 百濟侵南邉, 命将拒之. 創九寺於平壤.. 45) 申東河, 1988 高句麗의寺院造成과그意味 韓國史論 19, pp.21-22. 46) 남일룡 김경찬, 1998 청암동토성에대하여 (1) 조선고고연구 1998 2, pp.14-15. 남일룡 김경찬은청암동토성에서돌도끼, 돌창끝, 돌단검, 팽이그릇아구리쪼각, 별도끼조각등이출토된점을들어이성이단군조선시기에축성된것이며왕검성으로볼수도있다고하였다. - 147 -

성산성과짝을이루는평지성을찾아서대응시켜야한다는사고자체가고구려의왕성이평지성-산성의세트로구성되어있다는關野貞이래의선입견, 강박일수있기때문이다. 이문제를해결하기위하여다시 주서 와 수서 의내용으로돌아가보자. 주서 에서는고구려의치소가평양성이라고하였다. 그리고 수서 의내용을참조하면이평양성은산성을가리키는것임을알수있다. 정작이들사서의내용어디에서도평지성에대한언급은보이지않는다. 다만왕이평양성옆에따로 집 [ 宅 ] 을지어놓았다고만하였을뿐이다. 이는왕의평지거소가성의형태가아니었음을보여주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 城 이아니라 宮 의개념으로보아야하는것이다. 일반적으로 주서 에나와있는 不常居之 라는표현을 평소에는거기머물지않는다 로해석하고있지만, 이는고구려의치소가평양성 ( 대성산성 ) 이라고한앞에서의서술과모순이된다는점에서재고할필요가있다. 성이항상비어있는상태였다면그곳을치소라고표현하지는않았을것이다. 따라서해당문장은 항상거기에머무르지는않는다 로해석하는편이더나을듯하다. 고구려왕은치소인평양성 ( 대성산성 ) 에머물기도하였지만늘그곳에머무르는것이아니라그곁평지에마련된별궁에머물기도하였던것이다. 주서 의내용은고구려를방문한북주의사신이남긴정보를바탕으로정리된것으로생각된다. 어쩌면북주의사신이평양지역을방문하였을때고구려왕은평지의별궁에머물며사신을맞았을수도있다. 대성산성의남쪽기슭에는대규모고구려고분군이존재한다. 고분이밀집한장지가존재한다는것은전기평양성시기대성산성남쪽일대가고구려인들의중심취락지였음을의미한다. 고구려왕의별궁인 宅 역시대성산성남쪽에존재하였던왕도의중심취락지어딘가에존재하였다고보는것이자연스럽다. 그렇다면고구려는어째서기존에평양성이었던낙랑토성이아닌대동강북쪽의대성산성을왕성으로삼고새로평양성으로명명하였던것 - 148 -

일까. 이는비교적늦은시기에고구려에편입된평양지역에대한고구려주류층의미묘한입장에서비롯된것이아닐까짐작된다. 고구려가평양으로천도하기 19년전인 408년 ( 광개토왕 18) 에나라동쪽에禿山등 6개의성을쌓고평양의민호를이주시키는사건이있었다. 47) 이는평양지역의토착세력을자기기반에서유리시켜이일대에대한고구려중앙의지배력을강화하는데목적이있었다고여겨진다. 48) 낙랑군을영역화한 313년이후거의 100년에가까운세월이흘렀음에도고구려중앙세력에게있어서평양지역의토착세력은여전히통제의대상이자견제의대상으로인식되었던것이다. 더구나대동강남안의낙랑토성은과거고국원왕이전투를지휘하다가전사하였던곳이었다. 남쪽에서부터올라오는백제의침공을염두에둔다면대동강남안에위치한낙랑토성은방어적측면에서그다지좋은선택으로여겨지지않았을것이다. 이에대동강북쪽에국내지역으로부터이주해온백성들이정착할새로운왕도를건설하는한편, 왕이머무는왕성의위치또한군사방어적측면을제1순위로고려하여대성산성으로결정한것으로생각이된다. 이는산성을왕성으로사용하였던과거환도성시기의경험을바탕으로한복고적행위였다고평가할수있다. 대성산성내부는 1973년김일성종합대학에의해조사가이루어진바있다. 이에따르면산성내에서집터가상당수확인되었고, 20여개의기와집터도확인되었다. 다만보존상태가그리좋지못하여발굴조사가이루어진것은거의없다고한다. 그나마장수봉서남쪽골짜기의집터가상당히규모가있어서북한학계는이곳을고구려왕의행궁이있던자리라고추정하고있다. 그주위에길게조성한臺地를여러단으로만들었는데, 이처럼많은집터들이밀집되어있는것을보면, 장수봉일대가대성산성내에서도중심적인공간일가능성이높아보인다. 그밖에 47) 三國史記 卷 18, 高句麗本紀第 6, 廣開土王 18 年, 秋 7 月, 築國東秃山等六城, 移平壤民户.. 48) 徐永大, 1981 高句麗平壤遷都의動機 - 王權및中央集權的支配體制의强化과정과관련하여 - 韓國文化 2, p.98. - 149 -

지금의혁명열사묘역이조성되어있는곳일대에서대규모곡식창고 유적이확인되었는데, 이일대역시입지상으로주목할필요가있다고 여겨진다. 49) 그림 24) 대성산성장수봉일대의집자리 출처 : 김일성종합대학고고학민속학강좌, 1973 대성산의고구려유적, 김일 성종합대학출판부, p.46. 시간이흘러새로운왕도가안정화된이후에는왕이평지에조성된宅 에머무는경우가많아졌다고생각된다. 평지에소재하였을고구려왕의 宅은대성산성과멀지않은곳이었으리라생각되는데, 이에부합하는곳 으로얼른생각할수있는곳은역시안학궁이다. 다만기록에등장하는 宅을곧바로안학궁으로연결시키는것에는신중할필요가있다. 앞서 살펴본안학궁출토유물들의후대적요소들도문제이지만안학궁의위 치가대성산성남록에조성된대규모묘역을파괴하며조성되었다는느 49) 이상대성산성내부의조사내용에대해서는김일성종합대학고고학민속학강좌, 1973 대성산의고구려유적, 김일성종합대학출판부, pp.4-44. - 150 -

낌을주기때문이다. 안학궁터와대성산남쪽기슭고분군의배치형태는 1929년조선총독부가출간한古蹟調査特別報告第 5 冊 高句麗時代之遺蹟 에실린지도에상세히묘사되어있다. 안학궁터를중심으로그좌우에고분이밀집해있는데, 死者의공간을딱히기피하지않는고구려인들이라하더라도과연왕이거주하는왕궁의담장바로바깥까지무덤군을조성하였을까하는의문이든다. 그림 25) 대성산성및그남쪽의고구려고분군과안학궁터 출처 :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之遺蹟 圖版上冊 ( 古蹟調査特別報告第 5 冊 ). 대성산남쪽기슭의무덤군이오히려안학궁터를피하여조성되었다고 이해하는경우도있다. 50) 하지만안학궁내에서도 3 기의석실분이확인 - 151 -

되었다는점을주목할필요가있다. 원래는안학궁이자리한곳에더많은고분이존재하였을것이나궁조성과정에서그상당수가흔적도남기지못한채제거되었다고볼수있을것이다. 51) 대성산남쪽기슭이이시기고구려인들의주요장지로이용되고있었음을감안하면, 전기평양성시기왕의거소인 宅 이그보다남쪽인고산동 임흥동 청호동일대에있었을가능성을생각해볼수있다. 이일대에전기평양성시기에해당하는시가지가형성되어있었으리라는점은고산동에서발견된고구려우물과청호동-휴암동사이에놓인고구려나무다리를통해짐작할수있다. 고산동우물의깊이는 7.5m로확인되는데, 보고자는본래 9m 이상이었을것으로추정하였다. 우물벽은대성산일대에서흔한사암질돌로쌓았는데, 가장아랫단에는암반위에통나무로네모지게귀틀을짜서 170cm 높이로벽을쌓고, 그위에 265cm 구간을 8각으로쌓은다음다시원통형으로쌓았다. 우물에서는질그릇 마구류 기와 벽돌 숫돌을비롯하여철제품 조개껍질 사슴뿔 썩은돌배 복숭아씨 바가지조각등이나왔다. 이는우물제사의흔적일수도있다. 여기서나온기와와그릇은대성산성에서출토된것과공통성을가진다고한다. 52) 고구려나무다리는 1981년대동강기슭에서발견되었다. 다리는대동강북쪽의청호동일대와대동강남쪽의휴암동일대를연결해주는형태였다. 총길이는 375m, 너비는 9m나되는규모였으며, 다리유적이확인된문화층에는질그릇조각과기와조각이나왔는데, 모두고구려시기의것이라한다. 53) 보고내용이정확하다면나무다리유적의북쪽이 50) 임기환, 2007 고구려평양도성의정치적성격 韓國史硏究 137, pp.13-14. 51) 물론기존에존재하던고분들을제거하고그위에건축물을세우는것은고려뿐아니라고구려시기에도있을수있는일이다. 안학궁이고구려당대에조성되었을가능성, 그보다훨신후대인고려때조성되었을가능성, 혹은고구려때조성된건축유적을고려가다시활용하였을가능성등을모두열어둘필요는있다. 이문제를해결하기위해차후안학궁터에대한보다정밀한발굴조사가이루어지기를기대해본다. 52) 김사봉, 1986 고산동의고구려우물 조선고고연구 1986 1. 53) 안병찬, 1982 새로발굴한고구려의나무다리 력사과학 82 3. - 152 -

전기평양시기의인구밀집지였고, 그만큼사람과물자의이동이많았기때문에대동강을건너기위하여큰규모의다리를건설한것으로생각해볼수있다. 이일대에고구려가격자형구획으로이루어진도시를건설하였다는주장도있다. 보고에따르면청호동과임흥동, 안학궁서쪽에서그흔적이확인되었는데, 진흙위에강자갈이깔려있는도로유적이라고한다. 특히안학궁남문터와고구려나무다리사이의대지에서비교적규모가있게드러났다고하며, 도로들의거리는대략 140m, 280m, 420m이고, 임흥동에서도田자형태의구획이확인되었다고하였다. 안학궁서쪽구획은안학궁서쪽성벽에서약 600m 떨어진지점으로이역시크기나형성방식이청호동이나임흥동의것과같다고한다. 54) 그림 26) 안학궁터부근의도로망분포도출처 : 한인호, 1998 안학궁부근의고구려수도도시면모에대한복원 조선고고연구 1998 2, pp.18-19; 朝鮮土地調査局, 朝鮮全圖 (1918) 평양지역도. 54) 한인호 리호, 1991 안학궁터부근의고구려리방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 4, pp.29-30; 한인호, 1998 안학궁부근의고구려수도도시면모에대한복원 조선고고연구 1998 2, p.17. - 153 -

하지만이러한보고에서유적의사진이나상세한도면은전혀제시되지않았기때문에여러모로의구심을남긴다. 한인호는 1910년대의지도에서임흥동일대에바둑판형태의도로망의흔적이확인된다고하였는데, 필자가확보한 1918년지도의평양지역부분도의모습을보면안학궁터부근에서딱히격자형의도로형태를확인하기는어렵다. 물론이일대에고구려당시에조성된도로유적이부분적으로존재할가능성은있다. 하지만대성산남쪽전체가격자형으로구획된도시였다고단정하기에는근거가충분하지않다. 이를증명하기위해서는도로유적의형태를정확히파악할수있도록유적의사진과도면등보다구체적이고명확한자료제시가필요하다. 그림 27) 전기평양성시기왕도의범위추정 - 154 -

그렇다면전기평양성시기고구려왕도의공간적범위와경계는어떠하였을까. 험한산과하천으로둘러싸여있어지형에따라지역구분이비교적분명하게이루어졌던국내지역과달리평양지역은자연지형만으로왕도의범위와경계를파악하기곤란하다. 참고할수있는문헌자료또한없다. 지금으로서는주거지가밀집되어있었던대동강북쪽평지공간의주변에형성되어있는산과강등의지형과방어시설들을바탕으로대략적으로추정해볼수밖에없다. 전기평양시기왕도의중심공간은북쪽으로는대성산성, 서쪽으로는합장강, 동쪽으로는고방산, 남쪽으로는대동강을경계로한일대였을것으로추정된다. 주변이강과산, 여러城으로둘러싸여있다는점에서군사방어적측면에상당히주의를기울인형태의왕도였음을알수있다. 한편이시기고구려왕릉의입지를보면환도 국내시기와는확연하게다른경향성이확인된다. 치소성및중심거주지와연접하여조성되었던일반민의묘역과달리왕릉은이곳으로부터 10~20km 떨어진곳에독립적으로조영되었던것이다. 예컨대장수왕의무덤으로추정되는전동명왕릉의경우대성산성에서남쪽으로약 22km나떨어진곳에위치해있다. 이러한양상에대하여西漢長安城의그것과매우흡사한모습이라지적하고, 더나아가왕릉의배치범위가漢代의京畿지구의郊와거의같다고주장하는연구도있다. 55) 이것만으로전기평양시기고구려에서京畿, 혹은王畿의개념이존재하였는지는확언하기어렵지만, 가능성을염두에두고차후연구를진행할필요가있다. 55) 朴淳發, 2012 高句麗의都城과墓域 韓國古代史探究 12, pp.83-84. - 155 -

2. 후기평양성長安城의조영 1) 평양성출토刻字城石의판독과해석 (1)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 1 석 長安城은 552 년 ( 양원왕 8) 에축조를시작하여 586 년 ( 평원왕 28) 에이 도가이루어진후기평양성이다. 고대의계획도시건설이라는측면에서 특히주목을받고있다. 장안성에대한문헌기록은매우소략하지만평 양시내에서성을축조하던당시새긴刻字城石이여러개발견되어부 족한문헌기록을보완해주고있다. 따라서이에대한정확한판독과 분석은장안성연구를위한기초작업이된다. 현재까지확인된장안성의각자성석은모두 5 개이며, 실물이전하는 것은 3 개이다. 尹游의 平壤續誌 에의하면조선시대에평양북성에서 本城四十二年畢役 이라고새겨진돌이나왔다고하는데, 56) 이것까지포 함하면평양에서는모두 6 개의각자성석이나온셈이다. 여기서는일반 적으로통용되는바와같이발견순서에따라각자성석들을제 1 석 ~ 제 5 석으로구분하되, 평양속지 에소개된것은편의상 평양속지각석 이 라지칭하겠다. 현재실물과탁본이존재하는각자성석은제 2 석 제 4 석 제 5 석이다. 제 2 석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소장되어있고, 제 4 석은평양의중앙역사 박물관에, 제 5 석은평양인민대학습당북서쪽귀퉁이성벽에자리하고 있다. 평양속지각석 을비롯해제 1 석과제 3 석은문헌상으로내용이전 할뿐실물이나탁본을확인할수없다. 이들각자성석은장안성건설의 실상을보여주는중요한자료이므로상세하게살펴볼필요가있다. 제 1 석의존재는淸의고증학자인劉喜海가輯錄하고劉承幹이重校한 海東金石苑 에소개되어있다. 劉喜海는김정희와교류하며이자료 를입수한것으로여겨지는데, 여기실려있는김정희의글에따르면제 1 석은 1766 년 ( 丙戌年 ) 에발견된것으로, 64 년이지난 1829 년당시에는 이미사라져찾을수없는상태였다고한다. 57) 또한이각자성석의높이 56) 平壤續志 卷 1, 城池, 舊城底有石刻曰本城四十二年畢役古人之不計功力而以堅築爲事者可見矣.. 57) 海東金石苑 卷 1, 高句麗古城石刻, 此刻出於丙戌今六十四年不可復覓.. - 156 -

는 9 寸, 너비는 4 尺 3 寸이며행마다 2 자씩 12 행이隸書로새겨져있었 다고설명하였다. 김정희가제시한독문은다음과같다. 1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1석판독문 12 11 10 9 8 7 6 5 4 3 2 1 造 侔 夫 兄 里 十 西 始 八 月 年 己 1 作 利 若 相 小 一 向 役 日 卄 五 丑 [ 酉 ] 2 판독 : 己丑 [ 酉 ] 年五月卄八日始役西向十一里小兄相夫若侔利造作 해석 : 기축 [ 유 ] 년 5월 28일役事를시작한다. 서쪽방향으로 11리는小 兄 58) 相夫와若侔利가짓는다. 해동금석원 평양지 59) 삼한금석록 등에서는각자성석의시작부분에등장하는간지를 기축년 이라고판독하고이성석을장수왕이평양으로천도했던시기에만들어진것으로보았다. 하지만이각자성석은장수왕대의평양성이아니라후대에축조를시작한장안성과관련된것이다. 田中俊明은제2석과제3석의사례를통해제1석의 1-2 丑 을 酉 의오독으로추정하였다. 60) 또한민덕식은제2석과제3석의사례를보았을때제1석의 2-2 역시 五 가아니라 三 의오독일가능성이있다고하였다. 61) 이처럼 기축년 을기유년으로고쳐읽는것은타당하지만, 5 월 이아니라 3월 일것이라보는것은신중할필요가있다. 조선시대 58) 小兄 : 고구려의관등으로 周書 에따르면 13 관등중네번째로언급되며, 翰苑 所引 高麗記 에따르면 14 관등중 10 등에해당하는것으로일명 失支 라고한다. 59) 평양지 는 1590 년윤두수가만든것이있고, 1837 년과 1855 년에기존 평양지 를증보하여간행한작자미상의 평양지 가있는데, 이 평양지 는후자이다. 60)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史學硏究會, p.119. 61) 閔德植, 1993 高句麗의平壤城刻字城石에관한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p.96. - 157 -

에제1 2 3석공히간지를 기축년 으로읽은것은제2석과제3석이발견된해가마침기축년이었기때문에이를각자성석명문내용과연결하여神異한일로사람들사이에회자되었기때문이다. 하지만월과일은사정이다르다. 실제로제1석의날짜는 28일 이다. 제2석 제3석의 21일 과차이가있다. 따라서제1석의 5월을굳이 3월로고쳐파악할이유는없어보인다. 물론가능성은염두에둘필요가있겠다. 相夫若侔利 는한사람의이름으로보기도하고, 상부 를따로분리하여직명으로파악하기도한다. 相夫 를 上部 로해석하는경우도있지만, 62) 上部 를굳이 相夫 로표기할이유는없어보인다. 당시의인명표기방식이대개 부명 + 관등 + 인명 의순서로이루어진것을감안하면관등인小兄다음에위치한 相夫 는인명으로보는것이자연스럽다. 다만한사람의이름으로볼것인가 상부 와 약모리 두사람의이름으로볼것인가하는문제가남는다. 마침고구려의인명중에는 상부 의사례가있는데, 고구려의제14대왕인봉상왕의이름이바로 相夫 이다. 또한봉상왕때國相이었던 倉助利 나 魏書 梁書 資治通鑑 등에등장하는미천왕의이름인 乙弗利 의예에서볼수있듯이고구려인명에서는끝에 利 라는어미가붙는경우가흔하였다. 고구려인명은 2자나 3자인경우가많기때문에 상부 와 약모리 두사람의이름으로보는것이자연스럽다. 민덕식은실물이나탁본이전해지는다른각자성석의행수가 5~8행인것에비해이각자성석의행수만 12행이라는점을지적하고, 혹시김정희가橅本을만들때 1행에 2자씩일정하게배치하여임의로글자를배열한것이아닌지의문을표하였다. 63) 해동금석원 에는돌의높이와너비에대한정보가실려있는데, 함께실려있는제2석은높이 7 寸, 너비 1 尺 1 寸 4 分 64) 라고표기되어있다. 이에따르면높이 9 寸, 너비 4 尺 62) 閔德植, 1993 高句麗의平壤城刻字城石에관한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p.106. 63) 閔德植, 1993 高句麗의平壤城刻字城石에관한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p.96. 64) 조선시대사용된주척을참고하여 1 척 = 약 20.8cm 로계산해보면제 1 석은세로 18.72cm, 가로 89.44cm 가되고, 제 2 석은세로 14.56cm, 가로 23.71cm 가 - 158 -

3 寸인제1석은가로가지나치게길어형태가부자연스러운것이사실이다. 독문을제공한김정희자신조차도실물이이미사라졌다고밝힌상황이므로, 모본을만드는과정에서오류가있었을가능성이높다고여겨진다. (2)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2석제2석은 해동금석원 과 평양지 삼한금석록 에기록이전하는데, 해동금석원 은발견장소가평양외성의烏灘아래라고하였고, 65) 평양지 와 삼한금석록 은九疊城이라고전하고있다. 66) 구첩성은기자가성을 9겹으로만들어홍수를막았다는전승에서비롯된평양외성의별명이다. 평양지 에따르면발견시기는 1829년 ( 순조 29) 으로, 홍수로성벽이무너지면서 2개의각자성석이모습을드러냈다고한다. 이것이곧제2석과제3석이다. 삼한금석록 에는 1855년 ( 咸豊乙卯年 ) 오경석이북경에가다가평양에들러각자성석의실물을확인했다는내용이실려있다. 67) 제2석은이후어느때인가오경석이소유하게되었고, 아들오세창에게전해졌으나어떤이유에서인지파손되었다. 일부조각은분실되고나머지 11개조각은석고로고정시킨형태로 1965년이후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이소장하고있다. 사라진부분은 2행전체인데, 마지막글자인 日 의왼쪽하단자획만약간남아있을뿐이다. 된다. 제 2 석은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에소장되어있는데, 박물관홈페이지에서제공하는이유물의크기는세로 19.5cm, 가로 36.0cm 이다. 단이유물은조각이난상태로상자안에석고로고정되어있는형태로보관되고있기때문에박물관에서제공하는수치는성돌의본래크기가아니라성돌을보관하는상자의크기를나타내는것일수있다. 여하튼제 2 석의경우세로와가로의비율이약 2:3 정도이고, 실물이확보되어있는제 4 석과제 5 석도여기서크게벗어나지않은데반해제 1 석은세로와가로의비율이 1:5 에이르기때문에 해동금석원 의수치가정상적이지않은것은분명하다. 65) 海東金石苑 卷 1, 高句麗古城石刻, 又得一石於外城烏灘下 66) 三韓金石錄, 純廟己丑大漲九疊城潰決而出二誌石 67) 三韓金石錄, 此刻今在平壤府治西十里烏灘江涯余於咸豊乙卯作燕臺之行路出箕城謁殷師墓歷覽井田故址因沿江而至閑似亭訪得此刻于故城潰決處蓋高句麗築城時所刻也 - 159 -

그림 28)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 2 석의탁본 출처 :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 韓國書蹟,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p.9. 하지만다행히도 2행을포함한원형상태에서뜬탁본이남아있기때문에원래의자형을확인할수있다. 원형탁본을자세히보면성석에조각이난흔적들이확인되므로, 해당탁본을뜰당시제2석은이미파손된상태였다고이해된다. 파손이되는과정에서 2행에해당하는조각이사라진것이아니라, 이미파손되어조각이난상태에서보관을하다가해당부분을분실하였던것이다.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2석은편편한자연석에글자를새겼고석재는수성암이다. 이화여자대학교박물관의도록에서는서체가전반적으로北朝楷書의분위기가강하다고설명하고있는데, 68) 실제로북위때금석문과글씨가유사하다. 2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 2 석판독문 68)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1992 韓國書蹟, 梨花女子大學校博物館, p.9. - 160 -

7 6 5 4 3 2 1 作 俳 物 東 自 [ 三 ] 己 1 節 湏 苟 十 此 月 酉 2 百 小 二 下 卄 年 3 矣 頭 兄 里 向 一 4 日 5 판독 : 己酉 69) 年 [ 三 ] 月廿一日自此下向東十二里物苟小兄俳湏百頭作節矣해석 : 기유년 70) [3월] 21일여기서부터동쪽방향 12리는物苟 71) 의소형俳湏와百頭 72) 가만드는것을통제한다. 73) 1-2: 酉 1-2 이화여자대 학교박물관 소장탁본 北魏于景 墓誌 隋 國墓塼 高昌 69) 丑 ( 해동금석원, 삼한금석록 ), 酉 ( 正上秀雄, 최순희, 田中俊明, 鬼頭淸明, 민덕식 ) 70) 기유년 : 해동금석원 평양지 삼한금석록 등에서는이를 기축년 이라고판독하고이성석을장수왕이평양으로천도했던시기의것으로보았다. 하지만이성석은장수왕대의평양성이아니라양원왕대에축조를시작한후기평양성인장안성과관련된것이다. 따라서기유년은평원왕 31 년인 589 년으로볼수있다. 71) 物苟 : 小兄 이라는관등앞에나오므로지역명이나소속집단명으로보는것이타당할것이다. 72) 百頭 : 인명의일부로보기도하지만역을수행하는집단의우두머리를나타내는직명으로보는경우가많다. 이에대한자세한분석은뒤의제 3 석의해석부분을참조할것. 73) 만드는것을맡는다 : 作節 이라는표현은신라남산신성비에도나타난다. 그런데남산신성비에서는 작절 이문장의앞부분에나와 지을적에 정도로해석이되는데, 여기서는문장끝에나오기때문에그렇게해석하기곤란하다. 節 은 감독하다, 통제하다 정도로해석해야하므로남산신성비의그것과같은용어라하더라도용법은다르다. - 161 -

해동금석원 이나 삼한금석록 등에서는 丑 으로읽었으나, 井上秀雄이 酉 로읽은이래다른대부분의판독에서도모두 酉 로읽고있다. 실제로자형상 酉 가분명하다. 해동금석원 이나 삼한금석록 에서는제1석 제2석 제3석의간지를공히 己丑年 으로소개하고있는데, 실물을확인할수있는제2석의간지가 己酉年 이분명하므로, 실물이현전하지않는제1석과제3석역시간지가 己酉年 일것이라는추정이나오게되었다. 2-1: [ 三 ] 2-1 三 五 이화여자대 北魏 北齊 北齊 唐顏真卿 학교박물관 元懷墓志 泰山經石峪 泰山經石峪 多寶塔碑 소장탁본 2행의 1 글자의경우 해동금석원 에서는원래 五 로보았다가 三 으로수정하였고, 평양지 삼한금석록 등이후판독자들은대체로 三 으로보고있다. 조각이분실된부분이라탁본에의지하여판독을할수밖에없는데글자가뭉개져판단이어렵다. 그런데 五 로볼경우두번째획으로볼수있는세로획이매우가늘고희미하므로이는자흔이아니라흠집일가능성이높아보인다. 또한제2석과함께발견된제3석의경우해당부분이 3월 21일로판독되었는데, 두각자성석은문장구조와역사를시작한날짜까지동일하기때문에제2석역시해당글자를 三 으로판독하는것이타당하다고여겨진다. - 162 -

5-2: 苟 5-2 이화여자대 학교박물관 소장탁본 苟 東晉 王 羲之 東 方朔畵贊 唐顔眞卿 爭坐位稿 省 東晉王羲之喪亂得示二謝帖 隋智永真草千字文 5-2의경우 해동금석원 에서는 省 으로판독하였으나, 평양지 삼한금석록 에서는 苟 로판독하였다. 이후대부분의판독자들이 苟 로판독하고있다. 해동금석원 에서 省 으로판독했던것은초서로쓴 省 의자형을염두에두었던것으로짐작된다. 하지만 句 부분의오른쪽으로돌아내려오는자획이명확히보이기때문에 省 은성립하기어렵다. 苟 로판독하는것이타당하다. 해동금석원 에서이글자를 省 으로판독한것에근거하여 物省 이라는관청의이름을상정한견해도제시된바있다. 74) 하지만잘못된판독에근거한것이므로성립할수없다. 6-1: 俳 徘 6-1 이화여자대 학교박물관 소장탁본 北魏 珍墓誌 元 北魏元徽 墓誌 隋智永眞 草千字文 唐顔眞卿東方朔畵贊碑 6-1 은 평양지 에서 徘 로판독하고, 그외에는모두 俳 로판독 하고있다. 하지만두글자는상통하는같은자이다. 형태만으로보자면 탁본상으로는 彳 처럼보이기도하지만, 이는좌상변에난흠집때문이 74) 鮎貝房之進, 1934 高句麗城壁石刻文 雜攷 6 上編, p.372. - 163 -

다. 俳 로보는것이타당하다. 6-2: 湏 6-2 이화여자대 학교박물관 소장탁본 北魏孫遼浮圖銘記 飛鳥船首 王後墓誌 唐歐陽詢皇甫誕碑 頭 6-4 6-2는 해동금석원 에서미상자로보았으나, 평양지 삼한금석록 에서는 湏 로판독하였다. 이후 朝鮮金石總覽 에서는 須 로판독하였는데, 두글자는상통하는같은자이다. 일반적으로 須 를 湏 의형태로쓰는경우가많다. 대체로글자가뭉개져있지만좌변의경우하단에서오른쪽으로꺾이는형태가명확하게보여 氵 으로파악할수있으며, 우변은 6-4 頭 의우변을참고하여 頁 로파악할수있다. 이때하단의 八 형태중왼쪽의획이잘안보이는데, 이곳은돌이마멸된부분이므로획이지워진것으로이해할수있다. 7-1: 作 7-1 이화여자대 학교박물관 소장탁본 北魏 元彦墓誌 東晋 王羲之 蘭亭敍 唐杜牧 張好好詩 卷 7-1 은 해동금석원 에서미상자로보았는데, 평양지 에서는 腓, 삼한금석록 에서는 作 으로판독하였다. 자형상 作 으로보는것이 타당하다. 뒤의글자인 節 과함께 作節 이라는단어를형성한다는점도 - 164 -

作 으로판독할수있는근거가된다. (3)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3석제3석은 평양지 와 삼한금석록 에서 1829년에제2석과함께발견되었다고전한다. 그러나현재는소재를알수없으며판독문만전하고있을뿐이다. 삼한금석록 에서는 높이 1 尺 5 寸, 너비 1 尺 7 寸 이며 6행으로정서되어있다고하였으며, 글자크기는 1 寸 3 分許 라고하였다. 3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3석판독문 6 5 4 3 2 1 節 位 內 向 卄 己 1 矣 使 中 [ 卩 ] [ 西 ] 一 丑 [ 酉 ] 2 尒 百 下 [ 十 ] 日 年 3 丈 頭 二 自 三 4 作 上 里 此 月 5 下 6 판독 : 己丑 [ 酉 ] 年三月廿一日自此下向 [ 西 ] 下 [ 十 ] 二里內中 [ 卩 ] 百頭上位使 尒丈作節矣 해석 : 기축 [ 유 ] 년 75) 3월 21일여기서부터 [ 서쪽 ] 76) 방향으로 下 2 리 [12리] 는 內中 [ 內卩 ] 의百頭와上位使尒丈이만드는것을통제 한다. 제 3 석은제 2 석과함께출토되었고문장구조도거의동일하다. 이를 통해제 2 석과제 3 석이기능상상호밀접한연관성을가지고있음을짐 작할수있다. 새겨져있는날짜역시 3 월 21 일로제 2 석과동일하므로 제 3 석의간지역시 기축년 이아니라 기유년 일것으로여겨진다. 75) 기축년 : 제 1 석 제 2 석과마찬가지로평원왕 31 년인 589 년기유년으로보아야한다. 76) [ 서쪽 ] : 이글자에대해 평양지 에서는 東 으로소개하였고, 삼한금석록 에서는 口 로소개하였다. 제 3 석은제 2 석과문장형식이거의동일하고같은자리에서출토되었다고하므로, 제 2 석의방향과반대인 西 로보는것이합당하다. - 165 -

판독되지않은 3-2 글자에대해제2석의경우해당위치의글자가 東 이므로제3석의경우는반대방향인 西 일것으로추정하는경우가일반적이다. 77) 또그다음에 下二里 라고하였는데, 다른각자성석들의내용을참고했을때 十二里 일가능성이있다고지적되었다. 78) 제2 석과제3석은같은위치에나란히배치되었던것으로여겨지며, 이를기준으로각각동서방향으로진행되는축성작업의시작점이었던것으로생각이된다. 한편제2석과제3석에등장하는 自此下向 十二里 라는구절을 自此下向 十二里 으로끊어읽는해석도존재한다. 예컨대제2석의 自此下向東十二里 의경우 이곳으로부터아래로내려가는동쪽 12리 로해석하고, 제3석의 自此下向 [ 西 ] 下 [ 十 ] 二里 의경우 이곳으로부터아래로내려가는서쪽 12리 로해석하는것이다. 이에제2석과제3석이출토된곳은외성통과선에서가장높은분기점에있었을것이라추정하기도하였다. 79) 그러나각자성석이발견된한사정부근은이일대에서딱히높은지대라볼수없기때문에이러한해석은성립하기어렵다. 自此下 는그냥 여기 ( 이아래 ) 서부터 의의미로보는것이가장자연스럽다. 內中 은제4석의 下後卩 의예를통해볼수있듯이, 部 의약자로널리쓰였던 卩 를 中 으로잘못판독했을가능성이높다. 80) 上位使 는 翰苑 에소개된고구려관등중 9등인上位使者를의미한다. 이는다른각석들에서축성을담당한이들의관등이 10등인小兄인점과다른점이다. 제3석에서도제2석과마찬가지로百頭가등장하는데문제는문장에서의위치이다. 제 2 석 : 소속?+ 관등 + 인명 + 百頭 ( 物苟 + 小兄 + 俳湏 + 百頭 ) 제 3 석 : 부명 + 百頭 + 관등 + 인명 ( 內中 [ 內卩 ]+ 百頭 + 上位使 + 尒丈 ) 77)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124. 78) 閔德植, 1993 高句麗의平壤城刻字城石에관한硏究 韓國上古史學報 13, p.99. 79)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建造時期에대한問題點 Ⅰ Ⅱ 북방사논총 6, p.376. 80)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124. - 166 -

백두는제2석에서는인명뒤에자리하였는데, 제3석에서는소속부와관등사이에자리하고있어위치에일관성이없다. 제3석의백두를인명으로본다면관등이없는인명이되며, 제2석에등장하는백두와동일인으로보아야하는가하는문제가발생한다. 제2석과제3석은담당하는공사구간이달랐고, 각공사구간의길이도매우길었다. 백두라는한인물이두공사구간을중복하여담당했다고보기는어려우므로, 백두를인명으로보는것은무리이다. 그렇다면직명으로보아야할것인데, 제2석과제3석에서백두의위치가일관성없이다른위치에삽입되었다는것은이것이정식관직은아니라는점을시사한다. 정식관직이라면정해져있는인명표기방식을따랐을것이기때문이다. 고대문헌기록이나금석문에서백두의또다른용례를찾기는어렵다. 다만조선시대에 10 戶에統主 1인, 50호에頭目 1인, 100호에摠牌 1인을두어남녀노소를호적에올리고민을통제하였던대민통제방식이있어참고가된다. 앞서언급한두목과총패는조선초도성수축과관련한기록에많이등장한다. Q-1. 도성수축도감이계하기를, 여러도의軍丁속에서갑사별패 시위패 수군 진군 수성군 익정군 첨발 봉족및잡색군을제외하고서성을쌓게되는데, 각도의관찰사가도내의수륙방어의긴급하고긴급하지않은것을작량하고호구의많고적은것을점검하여뽑아보내되, 40 일안에축성을마치면바로돌려보내줄것이나, 단단하게쌓지아니한경우는감독과제조와수령및총패와두목에모두중죄를더하고, 만일고쳐쌓은뒤에기울어무너지면처음에쌓는것을맡았던이들을시켜다시쌓도록하소서. 81) 세종실록 13권, 세종 3년 (1421) 10월 29일무오 6번째기사 81) 世宗實錄 13 卷, 世宗 3 年 10 月 29 日戊午, 都城修築都監啓諸道軍丁內除甲士別牌侍衛牌水軍鎭軍守城軍翼正軍簽發奉足及雜色軍以築之 諸道觀察使酌道內水陸防禦緊慢戶口多寡點送四十日內畢築者隨卽放遣其有不堅築者監督提調守令及摠牌頭目竝加重罪若改築後傾頹則令初築各官築之.. - 167 -

Q-2. 도성을수축하는역사에총패와두목이관하의군사를거느리고도망해돌아간자가있으므로, 태상왕이병조와승정원에이르기를, 도망한군사는장 1백대를친다는것은이미명령이내렸다. 그러나그두목과총패가그군인을거느리고도망한것은보통군사의예로써논죄할수는없다. 가령적이임박하여대응할적에두목과총패가또한오늘과같이무리를거느리고도망한다면, 국가의안위가달려있는것이다. 이무리들은마땅히군법으로바로잡아뒷사람들에게징계해야한다. 82) 세종실록 15권, 세종 4년 (1422) 2월 30일정사 3번째기사 Q-3. 성문도감이계하기를, " 함길도북청부에서쌓은도성 ( 성벽 ) 이무너져내렸으니, 청컨대당초의북청감역관과두목 총패에게명령하여기한안에서울에와서수축하게하소서." 하였다. 83) 세종실록 25권, 세종 6년 (1424) 8월 5일정미 3번째기사 이를보면도성축조및사후관리에있어서감역관뿐아니라총패와두목이책임자로서언급되고있다. 이들은조선시대역역동원단위를이끄는책임자역할을수행하였으나그렇다고정식으로관직을받은자들은아니었다. 평양성각자성석에등장하는백두가조선시대축성기사에보이는 총패 두목 과완전히동일한존재였다고단정할수는없지만, 비슷한역할을수행한존재가아니었을까여겨진다. 백두는그의미로보았을때 100명단위의인력을관리하는자들이었으리라짐작된다. 84) 12리에걸친긴공사구간을 100명만으로축성하였다고는생각할수없으므로백두는여러명이었을것이다. 그렇다면제2 석은 物苟의소형俳湏 가감역관이되어그지역 백두들 과축성을맡 82) 世宗實錄 15 卷, 世宗 4 年 2 月 30 日丁巳, 築城之役摠牌頭目有率管下逃還者太上王謂兵曹承政院曰逃軍決杖一百已下旨矣然其頭目摠牌率其軍人而逃者不可以凡軍例論假使臨敵應變而頭目摠牌又如今日之率逃則國家安危係矣此輩宜正軍法以懲後來.. 83) 世宗實錄 25 卷, 世宗 6 年 8 月 5 日丁未, 城門都監啓咸吉道北靑府所築都城頹落請令當初北靑監役官及頭目摠牌及時來京修築.. 84) 鬼頭淸明, 1984 高句麗の國家形成と東アジア 朝鮮史硏究會論文集 21, pp.36-37. - 168 -

았다는의미이고, 제3석은 內部의백두들 과감역관인 상위사자尒丈 이축성을맡았다는의미로해석할수있을것이다. 內部는고구려왕도에속한지역이므로이를감안하여내부의백두들을통제하였던감역관은다른지역에서올라온백두들을감독하였던제10등소형보다한단계높은제9등상위사자를배정하였을수도있다. (4)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4석제4석은 1913년당시평양경제리에서도로를건설하는과정에서대동강에면한내성의동벽을허무는과정에서발견되었다. 현재평양의중앙역사박물관에소장되어있고, 명문이비교적선명한편이라판독에는큰어려움이없다. 그림 29)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 4 석사진 출처 : 국립중앙박물관, 2006 북녘의문화유산, p.80. 4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4석판독문 8 7 6 5 4 3 2 1 [ 徏 ] 西 節 兄 後 漢 二 丙 1 之 北 自 文 卩 城 月 戌 2 行 此 達 小 下 中 3 판독 : 丙戌二月中漢城下後卩小兄文達節自此西北行 [ 徏 ] 之 - 169 -

해석: 병술년 2월 중에 한성에 있는 후부의 小兄 文達이 통제하여 여기 서부터 서북쪽으로 진행하여 [오른]다. 7-③: 行 行 서울대학교 7-③ 규장각 소장 탁본 北齊 隋 智永 泰山經石峪 真草千字文 7-③ 글자의 경우 대부분의 판독자들이 行 으로 판독하고는 있으나, 글자의 형태를 보면 우변 하단의 세로획이 두 개여서 마치 元 과 비슷 한 자형이라는 점에서 의문을 주기도 한다. 이처럼 이상한 획이 보이는 이유는 해당 지점이 파손된 부분이기 때문이다. 그림 30)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의 출토 당시 모습 출처: 朝鮮總督府, 1915 朝鮮古蹟圖譜 2, p.110. 1915년 간행된 朝鮮古蹟圖譜 에는 평양성 출토 각자성석 제4석의 - 170 -

출토직후의것으로보이는사진이실려있다. 그런데이사진의좌상단 을보면글자가있어야할부분이크게깨져나간상태이다. 성벽을허 무는공사중출토된만큼그과정에서파손된것으로여겨진다. 현재 평양중앙역사박물관에소장되어있는각자성석은해당부분이복원된 상태인데, 두사진을비교해보면깨져나간부분의경계선부분에 行 이 위치하고있음을알수있다. 1915 년사진상으로는 行 의아랫부분에 해당하는세로획 2 개가간신히확인된다. 그렇다면해당글자에사선으 로나있는자국은글자의획이아니라돌이깨진부분을맞추어붙이는 과정에서형성된흠집이라볼수있다. 또한많은판독문에서 1-3 의위치에 十 이있는것으로판독하고있 다. 해당부분은돌이깨져나가자획이전혀보이지않는상태이다. 이 각자성석은전반적으로 1 행 3 자의형태로구성되어있고, 2 행의첫자 가 二 이기때문에 1 행의세번째자리에 十 이있어서 12 월 이라는 문구가만들어진다는추정은가능하다. 하지만 12 월은한겨울이라공사기간으로는적합하지않은면이있다. 얼어붙은강을이용해석재를수월하게옮길수있다는장점도있겠으 나, 역시추위가문제이다. 다른각자성석에새겨진축성시기가 3 월이 라는점을감안하면이명문역시 12 월보다는 2 월에새긴것으로보는 것이자연스럽다. 이와관련해고구려의축성관계기록은봄과가을에 집중되어있으며, 그중에서도특히 2 월이두드러지게많다는점을지적 한연구도있었다. 85) 이각자성석이 1 행 3 자를기본형태로취했다고는하지만, 마지막 7 행의경우는 2 자이기때문에, 1 행역시반드시 3 행일것이라단정할수 는없다. 각행마지막글자의위치가오른쪽에서왼쪽으로이동하며사 선으로내려오는형태로맞추어지고있다는점도제 1 행이원래 2 글자였 을가능성을시사한다. 주목되는것은 漢城下後部이다. 隋書 에서는고구려의三京으로 평양성 국내성 한성이언급되고있는데, 86) 이각자성석에등장하는한성 85) 채희국, 1985 고구려력사연구 - 고구려건국과삼국통일을위한투쟁, 성곽, 김일성종합대학출판사 (1991, 백산자료원, p.210.). - 171 -

을말하는것으로여겨진다. 북한학계에서는한성의위치를황해도신원군아양리일대로비정하기도한다. 87) 장수산성아래위치한아양리일대에는상당한규모의도시구획흔적이확인되기때문이다. 해석상 한성의하후부, 혹은 한성아래의후부 로볼수있겠는데, 下後部 를하나의행정구역단위로보기는어색하므로 한성아래의후부, 즉 한성에있는후부 로해석하는편이자연스럽다. 8-1: [ 徏 ] 8-1 서울대학 교규장각 소장탁본 漢後行 3-1 4-1 7-3 8-1은淺見倫太郞가 涉 으로판독한이래대부분의판독자가이를따르고있지만, 글자의상단이깨져나간상태이므로확실한판독은어렵다. 유축하단의 少 형태는분명해보이지만, 좌변의 氵 은단정할수없다. 3-1 漢 의자형을통해볼수있듯이이각자성석의글자에서는 氵 이아래로내려왔다가오른쪽위로꺾이는형태로표현되지만, 이글자의좌변은그러한모습이아니다. 그보다는 彳 의하단부형태에더가깝다. 그렇다면 徏 일가능성을배제할수없다. 徏 은 陟 과같은자이다. 마침해당구간은내성의북쪽이자북성의남벽에해당하는곳으로지형상산지이기때문에 오른다 는의미와부합한다. 초기에해당글자를 涉 으로판독하는과정에서淺見倫太郞등은小兄文達이대동강을건너오면서글을새겼다고해석하기도하였다. 이는 86) 隋書 東夷列傳, 高句麗 都於平壤城亦曰長安城東西六里隨山屈曲南臨浿水復有國內城漢城並其都會之所其國中呼爲三京 87) 최승택, 1991 장수산성의축조년대에대하여 조선고고연구 1991-3, pp.14-18. - 172 -

물론받아들이기힘든의견이다. 보다합리성을갖춘해석은田中俊明이제시한 간섭하다 의의미이다. 88) 그러나 간섭하다 는의미는자신의일이아닌타인의일에참견한다는뉘앙스가강하여책임의소재를분명히밝히고있는각자성석의성격과맞지않는다. 더구나 6-1의 節 이라는글자가앞에존재하므로소형문달이이공역의감독을 통제한다 는내용은이미드러난상태이다. 다시 간섭하다 는의미를넣어서술어를중복할필요는없어보인다. 이러한점들을감안하여 [ 徏 ] 으로판독한다. (5)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5석제5석은 1964년평양시중구역남문동의정해문이있던자리의남쪽 150m 지점에서내성의서남쪽모서리의밑에서 3번째단에박혀있는것이발견되었다. 지금은원래자리에서약간이동하여 1984년에개관한인민대학습당북서쪽성벽에자리하고있다고한다. 전반적으로명문이새겨진돌의요철이상당히심한편이다. 그림 31)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 5 석의탁본 출처 : 고려대학교박물관, 2005 한국고대의 Global Pride 고구려, 통천문화사, p.289. 88)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133. - 173 -

5 평양성출토각자성석제5석판독문 5 4 3 2 1 尺 [ 六 ] 此 兄 卦 1 治 里 東 加 婁 2 群 盖 3 四 廻 自 切 4 [ 百 ] 上 小 5 판독 : 卦婁盖切小兄加群自此東廻上 [ 六 ] 里四 [ 百 ] 尺治 해석 : 卦婁盖切의小兄加群은여기서부터동쪽으로돌아위로 [6] 里 4 [ 백 ] 尺을맡는다. 제5석은다른각자성석들과달리간지가존재하지않아성벽의축조시점에대한정보를제공하지않는다는점에서특이성을가지고있다. 처음등장하는 卦婁 를계루부와연결시키는견해가있지만 日本書紀 天武天皇 11년조 (683년) 에 下部助有卦婁毛切 이라는고구려인물이등장하는바, 인명에서도卦婁의사례가보이기때문에신중해야한다는지적이있다. 89) 그런데卦婁가인명으로쓰인사례가있다고하더라도이각자성석에서는小兄加群이라는 관등 + 인명 의조합이확인되므로, 관등이보이지않는 卦婁盖切 을인명으로이해하기는어렵다. 小兄加群의출신지나소속집단정도로보는것이무난한해석이라고할수있다. 물론고구려후기에조성된명문에서이미소멸된 계루부 와같은단위정치체로서의부명이사용되었다고보기는어렵다. 廻上 里 의경우里앞에글자가있다고보는이와없다고보는이로나뉜다. 문맥상으로는숫자가들어가있어야할자리가맞지만, 탁본이나사진상으로는글자의흔적이확인되지않는다. 문맥상으로는어떤글자가들어가야만하는자리인것만큼은틀림없다. 이에최희림은 里 앞의글자가 六 일것이라추정하였다. 이는제5 석과제4석의발견지점거리를고구려척으로환산한것이다. 그는두 89) 徐永大, 1992 平壤城石刻 譯註韓國古代金石文 1, 駕洛國史蹟開發硏究院, pp.115-116. - 174 -

각자성석사이의거리를약 2.1km로측정하고고구려의 1자길이인약 35cm를적용하여고구려척도로 6리 4자가두성석의거리라고파악하였다. 90) 반면田中俊明은보이지않는글자를억지로넣을필요는없다고하며 里四尺 을 1리 4척 의의미로볼수있다고하였다. 이경우제3석에서보이는 2리 와비슷한축성거리가된다는것이다. 91) 그러나이는지나치게짧은거리이기때문에수용하기곤란하다. 최희림식계산법에따르면고구려의 1리거리는약 350m이며, 이를따르지않고일반적인 23cm 漢尺을기준으로 1리 (1,800척) 를계산하더라도약 414m에불과하다. 이각자성석에서는 동쪽으로돌아위로 향한다는내용이있으므로최소한성벽이내성의동남쪽모서리를지난부분까지를축성구역으로삼았음을알수있는데, 제5석발견지점에서내성의동남쪽모서리인대동강변까지의축성구간은 1km 가량이다. 이에비하면 1리 는지나치게짧은거리인것이다. 게다가제3석의축성구역길이역시 2리가아니라 12리로파악해야한다. 이러한이유로里앞에는원래글자가있었던것으로추측하는것이합리적이다. 4척 이라는판독에도생각해볼부분이있다. 거대한축성을기획하면서굳이 4척이라는작은단위로구간을나눈다는것은이해하기어렵다. 제5석의명문은 1행이 5자이고, 2행과 3행은 4자씩으로이루어져있다. 반면 4행과 5행은각각 2자씩인데, 5행은마지막행이니글자수가 2자인것을이해할수도있지만 4행이 里四 두글자뿐이라는것은전체배열상으로보아도어색하다. 글자의위치를보아도里의앞과四의뒤에각각글자가들어갈수있는공간이존재한다. 따라서 4행은본래 [ 六 ] 里四 [ 百 ] 의 4글자가아니었을까추독하여본다. 제5석에서제4석까지의실제거리를고구려척으로환산해보면이정도수치가나오기때문이다. 92) 90)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p.19-20. 91)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126. 92) 이추독에대한구체적인분석은별도로자세히다룰것이다. - 175 -

2) 각자성석의위치추적실물이나석문이남아있는 6개의각자성석중 평양속지각석 의경우는북성에서출토되었다는전승외에딱히다른정보가없으며, 석문내용을보아도고구려때의인명이나관등과같은요소가전혀확인되지않는다. 고구려때의것이맞는지불확실한것은물론, 실물이존재하였는지여부에대해서도다소의심스러운면이있다. 제1석 ~ 제5석은모두성벽축조를시작한날짜를제시하고있으나, 평양속지각석 은성의축조가완료된후전체공사기간을제시하고있다는점에서도다른각석들과이질적이다. 성을만드는데 42년이걸렸다는내용으로보아장안성전체의공사기간을나타낸것으로이해해야한다는의견이제시된바있고, 93) 대체로이를수용하고있는분위기이지만, 성격이불분명한자료를연구에활용하는데는보다신중할필요가있다. 반면제1석과제3석의경우는실물은남아있지않지만, 명문내용이고구려당대의것으로인정될수있는만큼활용에문제가없다. 상기한각자성석중근대에들어와발견된제4석과제5석은출토지점에대한정보가비교적상세하게확보되어있다. 제4석은 1913년당시평양경제리에서발견되었다고하는데, 1929년지도에그정확한위치가표시되어있어이해에도움이된다. 바로지금의옥류교북쪽에위치한옥류관부근이다. 제5석은 1964년내성의서남모서리에서최희림에의해발견되었는데, 그의보고에따르면발견지점은정해문이있던자리에서남쪽 150m 떨어진곳이라하였다. 94) 지금은원래발견위치에서옮겨져동쪽으로 150m 떨어진인민대학습당서북쪽광장의귀퉁이에신축한성벽에있다고한다. 95) 93) 정찬영, 1966 평양성에대하여 고고민속 1966-2, p.14;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 4, p.128. 94)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p.15-16. 95) 閔德植, 1992 高句麗의平壤城의築城過程에관한硏究 國史館論叢 39, p.35. 의田中俊明의서신재인용. 현재평양성각자성석제 5 석은시멘트틀에유리로막아보호하고있다 ( 여호규, 2005 평양성 증보판평양일대고구려유 - 176 -

그림 32) 평양성각자성석제 4 석과제 5 석의발견지점 출처 :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之遺蹟圖版上冊 ( 古蹟調査特別報告第 5 冊 ), 地圖第 5 의부분 ; 구글위성지도, 평양 (2016). 적, 고구려연구재단, p.71.). - 177 -

그런데최근까지각자성석의위치를표기한각연구자들의지도를보면 5석의위치표기에오류가있는것으로확인된다. 내성의서남쪽모서리는 ㄴ 형태로두번꺾이는형태인데, 제5석이발견된정해문남쪽 150m 지점은그중첫번째 ㄴ 모서리에해당한다. 여기서다시 150m 동쪽으로이동한곳이현재제5석이옮겨져전시되고있는곳으로, 인민대학습당의서북쪽이다. 그러나기존에연구자들이제시한지도에서는예외없이두번째 ㄴ 모서리를제5석의발견지점으로표시하고있다. 이곳의실제위치는인민대학습당의남쪽 90~100m 지점이므로각자성석의위치에대한서술과는맞지않는다. 1978년출간된최희림의 고구려평양성 에실린지도에서의오류를최근까지검증없이답습하고있는것으로보이므로주의를요한다. 최희림제시 (1978) 田中俊明제시 (1985) - 178 -

심정보제시 (2005) 민덕식제시 (2010) 그림 33) 평양성각자성석발견지점에대한기존연구자들의표시 96) 출처 :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 15;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128;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建造時期에대한問題點 Ⅰ Ⅱ 북방사논총 6, p.374; 閔德植, 2010 都城의築造過程에대한檢討 - 高句麗平壤城 ( 長安城 ) 과漢陽都城의축조를중심으로- 향토서울 75, p.8. 발견위치가불분명한것은제 1 석 ~ 제 3 석인데이중제 2 석과제 3 석은 해동금석원 과 삼한금석록 에원래위치를짐작할수있는내용이 실려있어참고가된다. R-1. 돌하나를외성오탄아래에서구하였다. 97) 해동금석원 96) 최희림이제시한지도에는각자성석이 1~4 석까지만표기되어있다. 어떤이유에서인지는북한학자들은제 3 석의존재를누락시키고있다. 때문에북한에서는제 4 석을제 3 석이라표기하고, 제 5 석을제 4 석이라표기한다. 97) 海東金石苑 卷 1, 高句麗古城石刻, 得一石於外城烏灘下.. - 179 -

R-2. 이석각은지금평양부치소서쪽 10리오탄강변에있다. 내가함풍을묘년에연행길을가게되었다. 箕城 [ 평양성 ] 으로나가殷師 [ 기자 ] 의묘에배알하고井田의옛터를두루다니며구경하였다. 강가를따라한사정에이르렀는데, 이석각을옛성의무너진곳에서찾아보았다. 대략고구려가성을쌓을때새긴것이다. 98) 삼한금석록 해동금석원 에서전하는김정희의말에따르면각자성석이발견된곳은 외성의오탄 이다. 삼한금석록 에서는 오탄 외에 한사정 이라는또다른정보가추가된다. 기존의연구들을보면대개오경석이실물을확인했다고한 한사정 을근거로제2석과제3석을외성가장남쪽에자리하고있는한사정부근에있었던것으로판단하고있다. 한사정은외성의남문인거피문바로동쪽에자리하고있었으며지금의행정구역상으로는평천구역해운2동에해당한다. 99) 문제의오탄은한사정으로부터약 3km 가량대동강을거슬러올라간지점에있다. 오탄은대동강의양각도위쪽에형성된여울을말한다. 이곳에는임진왜란때의전승이남아있다. 일본군이낮썰물때까마귀들이이곳을걸어다니는것을보고평양성을공격하려고밤에몰래건너오다가세찬밀물로몰살을당하였다는것이다. 때문에까마귀가왜적을유인해전멸시킨곳이라하여까마귀여울, 즉오탄이라고부르게되었고오탄과접하고있는이일대외성지역의지명을오탄동이라하였다고한다. 100) 현재의평양시지도를확인해보면이일대행정구역명은중구역오탄동으로, 강변에형성된길에는오탄강안거리라는이름이붙어있다. 한사정과오탄은매우거리가떨어져있으므로같은장소로보기어렵다. 최희림은오탄의위치를찾기위하여정약용이저술한 大東水經 98) 三韓金石錄, 此刻今在平壤府治西十里烏灘江涯余於咸豊乙卯作燕臺之行路出箕城謁殷師墓歷覽井田故址因沿江而至閑似亭訪得此刻于故城潰決處蓋高句麗築城時所刻也.. 99) 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향토대백과, 한사정터. 100) 평화문제연구소, 2005 조선향토대백과, 까마귀여울. - 180 -

패수조에실려있는 이암아래양각도가있다 101) 는구절을이용하였다. 그는이암은양각도가운데있는큰바위로지금까지위치에변함이없다고하고, 제2석은양각도위쪽여울인오탄에서도아래쪽인외성성벽유지에서발견된것이라하였다. 그위치는구체적으로지금의철교아래약 1km 떨어진지점부근이라지목하였다. 102) 이러한논증과정은의도가불분명하여얼른이해가가지않는측면이있다. 아마도오탄의위치를소양각도를기준으로상정하고자하였던것같다. 과거양각도는지금과달리두개의섬이었고, 상류에있는것을대양각도, 하류의것을소양각도라고하였다. 103) 이암은본래두양각도사이를가르는물위에있던바위이름이다. 따라서 이암아래양각도가있다 는말은소양각도에부합하는서술이다. 지금은두섬이합쳐져하나의섬이되었고, 이암은물위가아니라섬가운데에놓인바위가되었다. 최희림은양각도가본래두개였다는점에착안하여 1오탄은양각도위의여울이라고한다-2( 소 ) 양각도는이암아래에있다-3따라서각석이발견되었다는오탄은이암부근이다 의논리를펼치고싶었던것으로짐작된다. 그러나이러한논증은성립할수없다. 오탄의위치가대양각도위쪽이라는것은조선시대부터있던오탄이라는지명을계승한현재의행정구역명으로도알수있으며, 조선후기제작된평양성병풍도등에서도명확하게확인이되기때문이다. 104) 최희림이다소무리를해가며위와같은논증을시도하였던것은결국각자성석이발견되었다고하는한사정과오탄이라는두장소의불일치성문제에기인한것이다. 101) 大東水經 其 3, 浿水 3, 淵之傍有貍巖下有羊角嶼.. 102) 최희림, 1967 평양성을쌓은년대와규모 고고민속 1967 2, pp.30-31. 103) 朝鮮總督府, 1929 앞의책의지도에서는소양각도를이암도라고표기하고있어서소양각도는이암도라고도불렸음을알수있다. 104) 서울대학교소장평양병풍도를이용해양각도, 오탄, 이암등의위치를정확히확인할수있는데, 조선시대평양도를이용한지적은田中俊明에의해이미이루어진바있다 (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120.). - 181 -

그림 34) 오탄과한사정의위치 (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도 -19 세기 ) 오경석의글을보면기자묘참배후정전의옛터를두루다니며구경하고, 강가를따라한사정으로갔다고한다. 조선후기평양지역의유람내용을담고있는다른문헌들을보면유사한내용이있어당시오경석의동선을이해하는데도움이된다. S-1. 이윽고주작과함구두문으로나섰다. 대략성은내성과외성이있는데각한성에한문씩이다. 외성나가는길에井田의옛터를찾았다. 밭가에箕子宮의옛터가있다. 九疇壇에서다시 10리를앞으로나아가면들이끝나고강물이돌아가는데, 車門으로나갔다. 이곳은井田이있을때수레가다니는길이었기에길입구에문을세우고車門이라고하였다. 정자하나가있어초연히강에임하여있다. 편액을閒似亭이라하였다. 105) 105) 薊山紀程 1 卷出城, 癸亥年 11 月 1 日, 遂由朱雀含毬兩門出, 蓋城有內外, 而各一城一門也, 路出外城, 訪井田舊址, 田畔有箕子宮舊基, 自九疇壇又前進十里, 野盡而江廻, 從車門出, 此井田時, 車道所由, 立門於路口, 號曰車門, 有一亭超然臨江, 扁曰閒似亭.. - 182 -

계산기정 1 권출성, 계해년 (1803) 11 월 1 일 S-2. 맑음. 평양에머물렀다. 기자묘에가서참배하고, 東門으로해서井田의옛자리를관람하고이어한사정으로갔다. 정자는외성남쪽에있는데, 바로마을秀才들이업을익히는곳이었다. 106) 부연일기 왕환일기, 무자년 (1828) 4월 23일임진. 오경석은당시일반적이었던箕子井田관람루트를밟아마지막코스 인한사정에이르게되었고, 이부근의성벽이무너진곳에서각자성석 을실견하였던것이다. 대부분의연구자들이제 2 석과제 3 석이같은곳에 나란히있었을것이라보고있는데, 타당한추정이다. 제 2 석과제 3 석의 명문은날짜가동일하고문장구성도거의같아, 하나의세트로제작되 었음을알수있다. 제 2 석은동쪽으로 12 리를쌓는다하였는데, 제 3 석은 쪽으로 下 2 里 를쌓는다고하였다. 제 3 석의판독문은앞선판독에서도언급하였듯이 서쪽 12 리 로파악하는것이타당하다. 그렇다면한사정부근의어느 지점인가를중심으로동서양쪽으로각각 12 리씩, 총 24 리의성벽구간 이존재해야한다. 이는굉장히긴구간이기때문에평양성전구간에서 도한사정부근외에이를만족시키는장소는찾기어렵다. 이에田中俊 明은제 2 석에서 동쪽으로 12 리 라는구절이등장하는이상, 남북으로 성벽이펼쳐져있는오탄부근에서이들각자성석이발견되었다고보기 는힘들다고지적하고, 이를바탕으로실제각자성석이출토된것은한 사정부근이라지목하였던것이다. 107) 각자성석제 2 석과제 3 석이출토된곳이한사정부근이틀림없다면, 오 탄에서각석이출토되었다는내용은어떻게이해하여야할까. 단순한오 류라고보기에는매우명확하게지명이제시되었다는점을간과할수없 다. 김정희나오경석이아무런이유없이오탄이라는출토지정보를언 106) 赴燕日記 往還日記, 戊子年 4 月 23 日壬辰, 晴, 留平壤, 往箕子庙瞻拜, 由東門觀井田舊跡, 仍往閑似亭, 亭在外城南, 卽村秀肄業之所也.. 107)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p.120-121. - 183 -

급하였을것같지는않기때문이다. 田中俊明역시이문제점을인식하였다. 이에조선시대사람들은양각도를기준으로양쪽으로갈라지는대동강의물줄기중외성쪽을 오탄강 이라고불렀고, 그하류인한사정부근을가리켜 外城烏灘下 나 烏灘江涯 같은표현을썼던것은아닐까하는추측을제시하였다. 108) 그러나이는어디까지나추측에불과할뿐조선사람들이 오탄강 이라는명칭을사용하였다는것을입증할수있는용례는확인되지않는다. 그렇다면오탄을제2석과제3석이아닌다른각자성석의출토지로보면어떨까. 이에주목되는것이제1석이다. 해동금석원 에실린제1 석에대한김정희의기록은이각자성석이 64년전인병술년 (1766년) 에출토되었고, 지금은사라져찾아볼수없다는것뿐이다. 오탄에서발견되었다고한또다른각자성석 ( 제2석 ) 과는구분을하고있다. 그러나정상적이지않은제1석의형태에대한묘사등을보았을때김정희본인도제1석의실물이나탁본을보지는못했던것으로여겨진다. 김정희도누군가의말이나글을통해이각자성석의존재를파악한것으로이해되는데, 그전달과정에서복수로존재하는각자성석의출토지에대한정보가뒤섞이는일이발생하였을수있다. 김정희가 해동금석원 에실린발문을쓴시기는 1829년기축년으로, 제2석과제3석이함께출토된바로그해이다. 그럼에도그는제1석과더불어 又得一石 운운하며제2석만을언급하고있을뿐, 함께출토된제3석의존재에대해서는인지하지못한모습을보인다. 반면오경석은 삼한금석록 에서 高句麗故城刻字二種 이라는항목아래제2석과제3석만을언급하고있어, 제1석을누락시키고있다. 실제로당시는 3개의각자성석이출토되어있는상황이었으나, 김정희와오경석모두각자성석이 2개인것으로오인한상태에서각각다른조합으로소개하고다루었다. 이를보면당시각자성석에대한정보의착종이있었음을짐작할수있다. 특히오경석은그자신이직접한사정부근에서각자성석을실견하였 108) 田中俊明, 1985 高句麗長安城城壁石刻の基礎的硏究 史林 68-4, p.121. - 184 -

음에도 이석각은지금평양부치소서쪽 10 리오탄강변에있다. 고 서술하였다. 이는평양지역의지리에밝지못한그가각자성석출토지 에대한다른계열의정보 ( 실제로는제 1 석에대한 ) 를접하고별생각없 이제 2 석과제 3 석에대한정보와결합하였기때문으로이해된다. 서울 출신인오경석이평양지리에어두웠다는것은 서쪽 10 리 라는표현을 통해서도짐작할수있다. 한사정이든오탄이든평양부치소에서는모두 남쪽에해당하기때문이다. 심지어오탄은평양부치소에서동남쪽에자 리하고있다. 당시평양을소재로만들어진병풍그림이나지도를보면 평양지역을좌우로길게눕혀오른쪽은북쪽, 왼쪽은남쪽이되도록그 린경우가많다. 이러한병풍그림이나지도를통해평양지역을인식하 였다면한사정이있는평양의남쪽끝을서쪽이라고오인할가능성이있 다. 제 1 석의내용을보면 서쪽으로 11 리 구간을축성하는것으로되어 있다. 오탄부근에서이러한내용에부합하는성벽은동서방향으로곧 게뻗어있는중성의남벽뿐이다. 그렇다면제 1 석의구체적인출토지는 중성남벽의동쪽끝이외성의동벽과만나는부분이라고짐작할수있 다. 다만평양성의중성을쌓은시기에대해서는연구자들사이에이견이 있다. 고구려때로보는견해 109) 와고려초로보는견해로양분되어있 는데, 110) 1928 년關野貞이중성남벽을고려때쌓은것이라고의견을 제시한이래많은학자들이이를염두에두고있는상황이다. 111) 제 1 석 이중성남벽의축조와관련된것이라는앞에서의추정이설득력을가지 109) 최희림, 1967 평양성을쌓은년대와규모 고고민속 1967 2, pp.31-33;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26-35; 110)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 p.25; 채희국, 1965 평양성 ( 장안성 ) 의축성과정에대하여 고고민속 1965 3, p.23; 東潮 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 박천수 이근우역, 2008 고구려의역사와유적, 동북아역사재단, p. 335; 정원철, 2010 고구려장안성의성벽축조과정에대한재검토 동북아연구 25, p.41. 111) 김창석은중성의설치시기를고려초라고언급하지는않았으나이방구역위에성벽이축조된것으로이해하여평원왕대이후에추가로건설된것으로본다고하였다 ( 김창석, 2006 長安城축성의배경과공간구성 고고자료에서찾은고구려인의삶과문화, 고구려연구재단, pp.192-193.). - 185 -

려면우선이문제를검토해야할것이다. 3) 장안성중성남벽의축조시기關野貞이중성남벽을고려때의것으로본이유는성벽아래에서고구려때의초석이발견되었기때문이다. 그는이초석이형태상고구려시대의것임이분명하다며, 그위에성벽이만들어진이상중성의성벽은후대의것이라하였다. 고구려평양성은규모가너무컸기때문에고려태조가중성을쌓아성의규모를줄였고, 중성남쪽의외성지역은이후城外지역이되어경작지로활용되었을것이라추정하였다. 112) 실제로고려초에는평양지역에축성을한기록이여러건확인된다. 113) T-1. 겨울 10 월평양에성을쌓았다. 114) 고려사 권 1, 세가권 1, 태조 2 년 (919) 10 월 T-2. ( 왕이 ) 서경에행차하여새로관부와관리를두었으며재성을쌓기시 작하였다. 115) 고려사 권 1, 세가권 1, 태조 5 년 (922) 11 월 T-3. 서경에재성을쌓았는데, 6 년이걸려완성되었다. 116) 고려사절요 권 1, 태조신성대왕, 태조 5 년 (922) T-4. 서경에나성을쌓았다. 117) 고려사 권 2, 세가권 2, 태조 21 년 (938) 7 월 T-5. 봄에서경에왕성을쌓았다. 118) 112)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 p.25. 113) 이기록대부분이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에서중복되므로 고려사 의것만제시하였다. 다만태조 5 년기록의경우는 고려사절요 에성을쌓은기간이추가적으로제시되어있으므로함께제시하였다. 114) 高麗史 卷 1, 世家卷 1, 太祖 2 年 10 月, 冬十月城平壤.. 115) 高麗史 卷 1, 世家卷 1, 太祖 5 年 11 月, 幸西京新置官府員吏始築在城.. 116) 高麗史節要 卷 1, 太祖神聖大王, 太祖 5 年 (922), 築西京在城, 凡六年而成.. 117) 高麗史 卷 2, 世家卷 2, 太祖 21 年 7 月, 築西京羅城.. - 186 -

고려사 권 2, 세가권 2, 정종 2 년 (947) T-6. 송악성을증수하고, 서경에황성을쌓았다. 119) 고려사 권 4, 세가권 4, 현종 2 년 (1011) 8 月 고려태조는즉위초부터서경경영에대한의지를강하게보이며평양지역으로의사민정책을실시하고, 성을쌓기시작하였다. 이러한축성과정에서공력을아끼기위하여기존에존재하던고구려의장안성성벽을십분이용하였으리라는점은충분히짐작할수있다. 919년의축성은평양을大都護로삼고사촌동생인王式廉을보낸이듬해인만큼평양경영의거점이되는곳을만든것으로여겨진다. 아직사민이충분히이루어지지않은평양경영의초기였으므로그리큰규모의성은아니었을것이다. 주목되는것은 922년에축조가시작된재성이다. 고려사절요 에서는재성을쌓는데 6년이걸렸다고하므로대규모역사였다고생각이된다. 동국여지승람 에서는이 재성 이외성을가리키는것이라추정하였다. 120) 그러나 16년뒤인 938년에쌓았다는나성의존재를감안하면그렇게보기는어렵다. 나성은가장바깥쪽에있는성벽일것이므로재성은그안에있는성으로보아야한다. 재성이라는용례는신라에서도확인이된다. 삼국사기 잡지에따르면파사왕 22년에금성동남쪽에성을쌓았는데, 이를월성혹은재성이라불렀고, 둘레가 1,023보였다고한다. 121) 실제로지금의경주월성에서는 在城 이라는명문이새겨진수막새와암키와편이출토된바있다. 재성은곧왕성을가리키는것이다. 물론고려의왕성은개경에있었지 118) 高麗史 卷 2, 世家卷 2, 定宗 2 年, 春築西京王城.. 119) 高麗史 卷 4, 世家卷 4, 顯宗 2 年 8 月, 增修松嶽城, 築西京皇城.. 120) 新增東國輿地勝覽 卷 51, 平安道, 平壤府, 城郭, 外城 世傳此城乃箕子時所築然年代絶遠未知是否高麗太祖五年始築西都在城凡六年而畢疑卽此城周官六翼在者方言畎也.. 121) 三國史記 雜誌 3, 地理 1, 新羅, 婆娑王二十二年, 於金城東南築城, 號月城, 或號在城, 周一千二十三歩.. - 187 -

만, 고려사 기록에서서경의재성축조가이지역에관부와관리를 새로두는것과함께이루어지고있음을유의할필요가있다. 재성의기 능이권력의핵심공간을보호하는데있다고본다면, 922 년에쌓았다 고하는재성은평양성의내성을가리키는것이라볼수있다. 122) 關野貞은고려태조대에세워진중성남벽을경계로그밖은성외지 역이되었을것이라설명하였으므로, 938 년 ( 태조 21) 에쌓았다는나성 으로보고있는것같다. 그렇지만이를뒷받침할만한충분한문헌고증 과논리가제시되었던것은아니다. 그의주장을뒷받침하는유일한근 거는중성남쪽성벽아래에서고구려시대초석이나왔다는것뿐이다. 중성남벽이고구려때만들어진것이라는입장을가진북한의학자 최희림은다음 4 가지이유를들어關野貞의견해를반박하였다. 1 중성 벽에있는정양문과함구문은고구려때외성에만들어진 9 묘대로에맞 추어져만들어졌으므로이는고려가기존의성벽을수축하여이용했음을 의미한다는것, 2 일제강점기정양문지에서발견된대형초석은이곳 이고구려때의성문유지였음을말해준다는것, 3 고구려때외성밖 양명포나루터에서중성의정양문까지운하가나있어물자와재물이통 치관료들이사는중성안으로직접들어왔다는것, 4 중성의축성형식 을보아도내성이나외성과동일하다는것이그것이다. 123) 이에대해서는田中俊明이적극적으로재반론을펼친바있다. 124) 그 는 1 과 3 은논리자체가성립하기어려움을지적하는한편, 4 에대해 서는현존하는성벽들의연대를비교하는것은절대연대가자명하지않 아의의를갖기어렵다고하였다. 이러한田中俊明의반론내용은전반 적으로타당하다고여겨진다. 4 의경우는충분한발굴조사를통해정 보가축적되면활용의가능성이있다고생각되지만, 아직까지는성벽의 122) 신라의재성이었던경주월성의둘레는약 1.8km 이므로규모가그리큰편은아니다. 평양성내성의둘레는약 6.7km 에달하기때문에신라의재성에비하면지나치게크다고볼수있다. 그러나고려때의재성축조는완전히새로운성을쌓는것이아니라이미존재하는고구려때의성벽을보축하는성격이강하였다는점을감안하여야할것이다. 123) 최희림, 1967 평양성을쌓은년대와규모 고고민속 1967 2, pp.32-33. 124) 田中俊明, 2005 高句麗長安城의規模와特徵 - 條坊制를中心으로 - 白山學報 72, pp.333-336. - 188 -

축조형태를연대확정의결정적근거로활용하기에한계가있어보인다. 남아있는것은 2이다. 關野貞은고구려시대초석을근거로중성남벽이후대에축조된것이라하였으나, 최희림은동일한자료를가지고정반대의결론을이끌어냈기때문에특이한형태의논쟁이라할수있다. 田中俊明은關野貞이말한초석이발견된장소는 성벽아래 혹은 정양문지부근 이라고하였음에도최희림은 정양문지 라고고쳐이용하고있음을지적하고, 이초석을성문의초석으로보는근거에대해서도설명이부재하다고하였다. 초석의위치가문제인셈인데, 이는 1929년조선총독부고적조사특별보고에실린지도의도움을받을수있다. 그림 35) 정양문부근에서출토된고구려초석위치 출처 :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之遺蹟圖版上冊 ( 古蹟調査特別報告第 5 冊 ), 地圖第 5 의부분. - 189 -

이 지도상에서 초석 출토지는 정양문에서 동쪽으로 약 40~50m 떨어 진 장소로 표시되어 있다. 단, 이 지도의 정양문 자리 표시에는 오류가 있다. 실제 정양문의 자리는 이보다 약 180m 가량 서쪽에 위치하였다. 지도를 작성할 당시 이미 사라져 없어진 정양문의 위치에 대해 착오를 일으켰던 것으로 보인다.125) 반면 초석의 위치는 실물이 확인된 상태였 으므로 위치 표기에 오류가 있었을 가능성은 높지 않다. 평양 중성 정양문지 부근 출토 초석 평양 중성 정양문지 부근 출토 초석 1 2 평양 부벽루 고구려 초석들 평양 부벽루 고구려 초석 1 그림 36) 정양문지 출토 초석과 부벽루 고구려 초석 출처: 朝鮮總督府, 1929 高句麗時代之遺蹟 圖版上冊(古蹟調査特別報告 第5冊), pp.10-14. 여하튼 초석이 정양문터에서 떨어진 장소에서 출토되었다면 그 거리차 가 40~50m든 약 220m든 당연히 성문의 초석으로는 보기 어렵다. 정확 125) 이에 대해서는 3. 장안성의 공간 구조와 이도의 성격- 2) 외성내 격자형 구획의 형태와 단위 에서 상세히 다루었으므로 참고하기 바란다. - 190 -

히는알수없지만어떤건축물의초석으로이해하는것이맞을것이다. 그렇다면關野貞의말대로이초석이고구려때의것은맞는것일까. 필자에게초석의연대를독자적으로판명할수있는고고학적지견은없지만, 고구려때의것으로알려져있는부벽루하단의초석과비교하면형태가비슷하다는사실을알수있다. 집안지역동대자유적에서출토된초석도이와유사한형태의것이확인된다. 田中俊明은關野貞의견해를지지하면서중성의남벽이후대의것임을증명하는근거를하나더추가하였다. 일반적으로외성에펼쳐져있다고알려져있는고구려때의 조방 의흔적 ( 격자형구획 ) 이성벽을가로질러중성구역으로까지펼쳐져있다는점이다. 126) 실제로대동강과면하고있는중성의동쪽구역, 내성의남벽과외성의북벽사이공간에는외성과마찬가지로격자형구획의흔적이뚜렷하게확인된다. 127) 중성의남벽은이 조방 의라인을파괴하면서축성되었기때문에고구려때의장안성축조와는무관하다는것이다. 그렇지만상기한두가지가중성남벽이고구려때의것이아니라는것을증명하는결정적인근거가될수는없다. 일단장안성건설이완전히비어있는空地위에서이루어졌다고단정할수없기때문이다. 장안성외성에서대동강을건넌남쪽대안에는낙랑군치소가있었다. 이일대가수백년간낙랑군의중심지로기능하였던점을감안하면, 지금의외성지역에도이른시기부터상당한취락지가형성되어있었으리라는점을짐작할수있다. 關野貞에따르면평양지역에서가장오래된古式의고구려기와는낙랑군치가있던토성동쪽에서많이발견되었고, 같은성격의기와가대동강대안이자외성지역인평천리부근에서도출토 126) 東潮 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 박천수 이근우역, 2008 고구려의역사와유적, 동북아역사재단, p. 335.) 127) 심정보는외성과중성사이에가로로걸쳐있는안산, 창광산, 해방산으로인해田中俊明이이야기한조방제가사실상불가능하며, 한백겸이그린 조방도 도외성에국한하고있다고하였다 (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築造時期에대한問題點 Ⅰ Ⅱ 동북아역사논총 6, p.378.). 그러나田中俊明역시중성구역전역에조방제가실시되었다고주장한것은아니다. 근대초의지도들과조선시대평양병풍도등을보면중성의일부구역에정연한격자형구획이존재하였던것만큼은틀림이없다. - 191 -

되었다고한다. 128) 關野貞이말한평천리는지금의평천구역해운1동 해운2동일대이다. 정양문터와는다소거리가있기는하지만, 이지역에서상급건축물에서나사용하는고식의기와가출토되었다는것은외성구역에이른시기부터고구려인들의거주가있었음을의미한다. 1932년평양역구내철로사이에서발견된永和 9년명전실묘역시 353년무렵평양외성구역이활용되고있었음을보여주는자료이다. 129) 그렇다면고구려후기에성벽을축조하는과정에서기존에존재하던고구려건축유지위에다시공사가이루어지는것은얼마든지있을수있는일이다. 정양문터부근에서발견된초석의연대를아예고려시대의것으로내려본다면모를까, 이를고구려시대의초석이라고인정한다면논리상 고려시대중성축조설 의근거가될수는없다. 그보다關野貞이빈약한근거에도불구하고중성남벽이고려시기에축조되었다고강하게주장한동기에대해따져볼필요가있다. 이는그가고구려왕궁지의유력한장소로창광산일대를지목하였기때문으로짐작이된다. 그는장안성일대에서고구려왕궁지로세곳의장소를지목하였는데, 그첫번째가당시여단병영이있었던창광산아래였고, 두번째가만수대일대였으며, 세번째가북성의영명사부근이었다. 130) 그의추정대로창광산아래병영자리가고구려왕궁이었다면중성남벽이존재할경우왕궁의前面을곧바로성벽이틀어막는비정상적인형태가만들어진다. 關野貞입장에서는창광산아래를고구려왕궁터로비정한자신의견해가성립하기위해서라도중성의남쪽성벽이고구려시기에존재해서는안되었던것이다. 중성과외성모두에격자형구획이있다는것역시충분한근거가되기에부족하다. 격자형구획이라는점만으로양자를동일성격의것으로간주할수는없기때문이다. 필자가확인한바에따르면중성의격자형 128)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 p.7. 129) 이곳에서는 永和九年三月十日遼東韓玄菟太守領佟利造 라는명문전이발견되었다. 130)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 p.26. - 192 -

구획과외성의격자형구획사이에는분명한이질성이있다. 이러한이질성은중성남벽이만들어진이후에중성과외성의구획분할이이루어졌기때문으로여겨진다. 이문제는장안성의격자형구획을분석한부분에서구체적으로다룰테지만, 분명한점은격자형구획이외성구역과중성구역에걸쳐있다는것만으로는고려시대중성축조설의충분한근거가될수없다는것이다. 4) 각자성석공사구간의추정중성남벽의성격문제를해결하기위해서는다시각자성석문제로돌아갈필요가있다. 평양에서발견된 5개의각자성석에는축성시기와공사방향, 공사구간의거리등중요한정보가다수들어있다. 이를적극적으로이용하여분석한다면장안성축조의실상을더구체적으로파악할수있을것이고, 중성남벽의성격을이해하는데도도움이될것이다. 이를위하여 3종의도면을핵심도구로활용하고자한다. 첫번째는 구한말한반도지형도 의평양부분도이다. 이지도는일본이 1911 년에발행한군사용지도이다. 목측으로제작하였다는한계는있지만, 근대적도법으로작성한한반도지도로는가장이른시기의것에해당한다. 지도에측도연대가기재되어있지않은데, 대략 1894~1906년의기간에측량된것으로보고있다. 131) 이지도의평양부분도에서는외성구역에철도역이부설된모습이확인되는데, 경의선의평양-신의주구간이완공된것이 1905년이라고하므로대략 1905~1906년의모습을담은것으로짐작된다. 이지도에는평양의성곽모습이잘나타나있다. 특히내성의윤곽은현존하는지도중가장세밀하게묘사된편에속한다. 두번째는 1929년조선총독부에서출간한 高句麗時代之遺蹟 - 圖版上冊에실려있는 平壤城址及遺存石標圖 ( 이하 1929년석표도 ) 이다. 이지도에는당시까지진행된평양지역에서의고고조사정보가충실히 131) 남영우편, 1996 舊韓末韓半島地形圖, 成地文化社. - 193 -

반영되어있고, 평양성성벽의윤곽도명료하게표시되어있어연구에 큰도움을준다. 본연구에서가장많이활용한지도이기도하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 (1911) 1929 년석표도 1951 년항공사진디지털평양성복원도 그림 37) 평양성근대지도및항공사진과디지털복원도 세번째는국토지리정보원에서제공하는 1951 년평양지역항공사진 - 194 -

이다. 흑백사진이기는하지만지금의위성사진에서는확인할수없는평양성성벽의윤곽이선명하게확인된다. 지도와달리그림으로옮겨진형태가아닌실제모습을확인할수있다는점에서의미가크며, 앞의지도들과대조하여평양성의형태를복원하는작업에사용하였다. 132) 상기한자료중 구한말한반도지형도 는목측지도인만큼축척의정확성이다소떨어져주로내성의모습을복원하는데참고하였고, 나머지두자료는구글어스의이미지오버레이기능을이용하여현재의위성사진과연동시켜거리나면적등을잴수있도록조작하였다. 이를통해평양성의성곽형태를근대초의상태에최대한가깝게복원하는한편, 각자성석에새겨진축성구간의거리등을현재의미터법으로변환하여비교검토할수있도록하였다. 133) 편의상이를디지털평양성복원도라고부르도록하겠다. 표 7) 평양성각자성석의내용 구분 날짜 축성방향 공사구간 축성담당자 제1석 기축 [ 유 ] 년 (589년) 5월 28일 서쪽 11리 小兄相夫와若侔利 제2석 기유년 (589년) 3월 21일 동쪽 12리 物苟의小兄俳湏과百頭 제3석 기축 [ 유 ] 년 (589년) 下 2리 [ 서쪽 ) 3월 21일 [12리] 內中 [ 內卩 ] 百頭와上位使尒丈 제4석 병술년 (566년) 2월 서북쪽 - 漢城後部의小兄文達 제5석 - 동쪽을돌 [ 6 ] 리아위로 4[ 백 ] 尺 卦婁盖切의小兄加群 132) 그외에참고할수있는지도로 1918년조선토지측량국에서만든 조선전도 의평양지역도가있다. 구한말한반도지형도 에비하면약간시기가늦지만지도적완성도가더높고그간진행된도시의변화를반영하고있다. 다만이지도에서는평양성중성과외성의형태는충실하게표현된반면내성의윤곽은알아보기어렵다는단점이있다. 133) 정원철도구글어스를이용해평양성성벽의길이를계측하고각자성석의위치를검증하는연구를진행한바있다 ( 정원철, 2010 고구려장안성의성벽축조과정에대한재검토 동북아연구 25.). 그러나정원철은근대초의지도나항공사진, 이미지오버레이기능등을활용하지않았기때문에평양성성벽의형태를정확하게복원할수없었고, 계측의정확성역시확보하지못하였다. - 195 -

연구를진행하기앞서평양성각자성석의판독결과를정리하자면표와같다. 만약각자성석에새겨진공사구간의거리를현재의미터법으로환산할수있다면, 각자성석간의관계와성벽축조의실상을보다명확하게파악할수있을것이다. 다만고구려인들이사용하였던尺里法이실상이정확히알려져있지않다는점이문제이다. 그런데고대일본의기록인 令集解 에는 高麗尺 이라는이름으로단편적인기록이남아있다. 영집해 에서는 고려 5척은지금의척으로대6척상당에준한다. 고하였다. 134) 여기서의대6척은唐大尺을말한다. 일본에서당대척의길이는약 29.7cm로파악되므로, 이보다 1.2배컸던고구려척은일반적으로약 35.6cm였던것으로파악되고있다. 135) 고구려에서의 1척을 35.6cm로상정할수있다면이를바탕으로 1리의길이도추정할수있다. 동아시아에서사용한일반적인길이단위는分 寸 尺 丈 引의 5도법이고, 모두십진법으로승강된다. 136) 즉척을기준으로하였을때 1푼 =0.01척, 1촌 =0.1척, 1장 =10척, 1인 =100척이된다. 다만거리를나타낼때사용하는步와里는계산법이보다복잡한데, 일반적으로 1보 =6척, 1리 =300보로계산되어 1리 =1,800척이성립한다. 唐代에이르면이러한방식이 1보 =5척으로바뀌지만동시에 1리 =360보로전환되어결과적으로 1리 =1,800척인것은변함이없다. 137) 문제는고구려가이러한척리법을그대로따랐을것인가하는점이다. 고구려는 35.6cm에달하는대척을사용하는등중국과는사뭇다른척도를사용하였기때문에 1리 =1,800척의공식을그대로사용하지않았을가능성도있다. 이와관련해서는최희림의연구가주목된다. 최희림은각자성석제2석에기록된 12리라는정보와고구려척의길이가약 35cm라는점을이용하여한사정에서내성동남쪽모서리까지의실제거리를비교하는작업을수행하였다. 그의계측에의하면해당구 134) 令集解 卷 12, 田部, 卽以高麗五尺准今尺大六尺相當.. 135) 兪泰勇, 2001 高句麗尺에대한文獻史料와考古學的遺物의再檢討 高句麗硏究 11, p.89. 136) 漢書 卷 21 上, 律曆志上, 審度, 度者分寸尺丈引也所以度長短也. 十分爲寸十寸爲尺十尺爲丈十丈爲引而五度審矣.. 137) 李宇泰, 1984 韓國古代의尺度 泰東古典硏究 1, pp.20-21. - 196 -

간의실제거리는약 4.2km인데, 고구려때의 1리는 1,000자라고하였고이는오늘의 350m에해당한다고하였다. 이계산대로라면 12리는정확히 4.2km가되므로, 완수가성립되는셈이다. 138) 다만그는이과정에서동아시아에일반적으로통용되었던 1리 =1,800척의공식이적용될수있는지여부는검토하지않았다. 그가제시한계산법이다른방식에비해타당성이있는지를확인하기위해서는이에대한검토와상호비교가전제되어야한다. 1 漢尺 1 리 =1,800 척기준 12 리 (4,968m) 2 고구려척 1 리 =1,800 척 기준 12 리 (7,680m) 3 고구려척 1 리 =1,000 척 기준 12 리 (4,200m)- 실제 4,270m 그림 38) 제 2 석 한사정동쪽 12 리 의척도별검증결과 비고 : 1 한척은 1 척 =23cm, 23 의고구려척은 1 척 =35.6cm 를기준으로계산. 디지털평양성복원도를이용해한사정의위치를기준으로그동쪽으 로 12 리에해당하는세가지경우를확인해보았다. 1 은漢尺 (23cm) 을 기준으로 1 리 =1,800 척으로환산하여거리를잰것이고, 2 는고구려척 (35.6cm) 을기준으로 1 리 =1,800 척을적용한것이다. 3 은고구려척 (35.6cm) 을기준으로환산하되최희림이했던것처럼 1 리 =1,000 척으로 138)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26. 단, 그보다일찍발표한최희림, 1967 평양성을쌓은년대와규모 고고민속 1967 2, p.31. 에서는해당구간의길이를약 4.4km 로밝히고있어약간의차이를보인다. 여기서는보완된계측치로판단되는 1978 년연구내용을따른다. - 197 -

계산하여거리를쟀다. 한사정에서내성동남쪽모서리까지의기대거리는 4,200m였는데, 구글어스를이용해잰실제거리도 4,270m로측정이되어최희림이제시한것과거의같은결과가나왔다. 반면 1은내성의동남쪽모서리에서 698m를초과하였고, 2는이보다훨씬심하여 3,410m를초과하여내성의북쪽을밀대지역을지나는데까지이르렀다. 내성의동벽에서발견된제4석의내용을보면병술년 (566년) 에성을쌓았다고한다. 이에따르면내성은기유년 (589년) 에축성을시작한외성보다최소한 23년전에만들어졌음을알수있다. 따라서외성동쪽성벽의길이는결코내성의동남쪽모서리를초과해서는안된다. 하지만 1과 2는이를크게초과하고말았다. 결국 3의경우만유의미한결과가나온셈인데, 이를통해최희림의추정이일리가있음을확인할수있었다. 1리 =1,000척으로계산하는방식이일반적이라고할수는없을것이다. 하지만동아시아에서 10진법에따른分 寸 尺 丈 引의 5도법이널리사용되었음을감안하면引 (100척) 의 10배수인 1,000척을里로설정하는사고자체가납득하지못할성격의것은아니다. 그림 39) 35 리에대한한척과고구려척거리환산 그보다일반적인 1 리 =1,800 척의계산법으로는한척이든고구려척이든 장안성성벽축조상황에적용할수없다는것을명확하게확인하였다는 점이중요하다. 고구려장안성은내성부분을제외하고외성부분에서만 - 198 -

최소한 35리 ( 제1석 11리 + 제2석 12리 + 제3석 12리 ) 의축성구간이있었던것으로확인되는데, 이수치를한척과고구려척으로환산하여외곽성벽 ( 중성 + 외성 ) 의실제길이와비교해제시하면그림과같다. 고구려척을 1리 =1,000척으로상정할경우에만비교가능한수준이될뿐 1리 =1,800척의방식으로는한척과고구려척모두비교가무의미한수준의거리차가발생한다. 고구려척은중국의척도에비해무척큰대척이기때문에, 일반적인 1리 =1,800척의계산법을따를경우 2에서볼수있듯이주변국에서사용하는里단위와터무니없을정도로큰차이가발생하여불편함이예상된다. 이에고구려에서는계산하기편리한 10진법을응용하여독자적인척리법을사용하였을가능성이있다. 앞서살펴보았듯이제2석에실린축성구간정보는 1리 =1,000척을기준으로한고구려척도를사용할때가장잘들어맞는모습을보였다. 그렇다면그옆에나란히있었던것으로짐작되는제3석의경우는어떠할까. 4 고구려척 1리 1000척기준동12리 + 서12리 (8,540m) 5 중성서남쪽모서리까지 부족한거리 326m 6 내성동남쪽모서리 ~ 중성서남쪽모서리 (8,866m) 그림 40) 제 3 석 서쪽 12 리 의거리측정 한사정 ~ 내성동남모서리의거리가 4,270m 로측정되었기때문에이 - 199 -

번에는한사정을기준하여서쪽으로동일한거리를재보았다. 그결과유의미한결절점으로여겨지는중성서남모서리에약간미치지못하는거리가측정되었다. 그러나그차이가크지않기때문에오차범위로생각해볼수있다. 평양성외성의서쪽성벽은완만하게형성된동쪽성벽과달리굴곡이무척많은형태이므로상대적으로오차가발생할여지가있다. 게다가고대에사용된자들은어느정도편차를가지고있기도하다. 예컨대약 23cm로알려져있는후한척의경우실물자료들을확인해보면 21.25~24.08cm의편차를보이며, 약 30cm로알려져있는당대척의경우는 28.0~31.35cm의편차를보이고있다. 139) 이러한편차범위를감안한다면 35.6cm으로알려져있는고구려척의수치에지나치게얽매이지않고장안성을축조할때사용되었던고구려척의실제길이를추정해보는것도가능하다. 예를들어장안성외성성벽의동쪽결절점은내성의동남쪽모서리라할수있고, 외성의서쪽결절점은중성의서남쪽모서리라할수있다. 두지점사이의실제성벽길이를구하여 24리라는수치로나누면 1리의값이구해진다. 그값의 1,000분의 1이곧 1척의길이가되는것이다. 실제로두결절점사이의외성성벽의실제길이는 8,866m로측정되는데, 이를 24로나누면 1리 =369m가되어, 1척 =36.9cm라는값이나온다. 일반적으로고구려척의길이로알려진 35.6cm와는 1.3cm의차이를보이는데, 이정도라면편차범위내에있다고할수있다. 그다음으로확인해볼것은 서쪽 11리 라는공사구간정보가새겨져있는제1석이다. 제1석의위치에대해서는학자별로크게다섯가지안이나온바있다. 첫째, 최희림이제시한한사정부근의외성동남쪽이다. 그러나이는제3석의존재를누락시킨채제1석을제2석과함께출토되었다고오인한데서비롯한잘못된추정이다. 둘째, 田中俊明이제시한한사정서쪽 2리지점이다. 그는제3석의명문에보이는공사구 139) 兪泰勇, 2001 高句麗尺에대한文獻史料와考古學的遺物의再檢討 高句麗硏究 11, pp.92-95. 에는商代부터淸代까지실물이확보된중국자들의재원을표로정리하여제시하고있어참고가된다. - 200 -

간을서쪽 2리로파악하여제3석의공사구간이끝나는지점에제1석이있었을가능성을제시하였다. 140) 그러나앞서살펴보았듯제3석의명문은 서쪽 12리 로파악해야하는만큼이역시성립하기어렵다. 셋째, 민덕식이제안한외성겹성부근이다. 141) 이역시제1석 ( 서쪽 11리 ) 과제3석 ( 서쪽 12리 ) 의구간이거의전영역겹치게되므로성립이불가능하다. 그림 41) 평양성각자성석제 1 석출토지에대한제견해 140) 다만田中俊明이제시한지도상에는물음표와함께표시되어있으므로확정을하였다고볼수는없다. 141) 민덕식은제 1 석의출토위치에대해 출토위치는각자성석 3 과의관련을참고하여외성의겹성남쪽이아닌지모르겠다 라고서술하였으나, 본인이제시한지도상에서는외성겹성의북쪽에발견지점을표시하였다 ( 閔德植, 2010 都城의築造過程에대한檢討 - 高句麗平壤城 ( 長安城 ) 과漢陽都城의축조를중심으로 - 향토서울 75, p.8.). 여기서는일단지도상의표시를따른다. - 201 -

넷째, 정원철이제시한내성의서북쪽, 혹은내성의서남쪽지점이다. 142) 정원철은필자와비슷하게구글어스를이용하여성벽의길이를계측하는작업을수행하였으나, 평양성의형태를부정확하게인식한상태에서측정을시도하였다는문제점이있다. 게다가내성과 외성 [ 실제로는중성의서벽 ] 에반씩걸친형태의축성구간을상정하여각자성석명문상에보이는내성과외성간성벽축조연대의시간차를고려하지않았으므로수용하기어렵다. 다섯째, 손수호가제안한내성의서쪽모서리에서중성의서벽이시작되는부분이다. 143) 이는어느정도타당성을가지고있다. 다만북쪽에서서남쪽으로내려가는제1석의 서쪽 11리 구간과외성가장남쪽한사정에서서북쪽으로올라가는제3석의 서쪽 12리 구간이겹치지않는지가관건이다. 1척 =35.6cm, 1리 =1,000척기준으로 11리에해당하는길이는 3,916m이다. 이에상기한제1석출토지추정안중손수호의안과필자의안을시뮬레이션해본결과는그림과같다. 7 손수호안에따른서쪽 11 리 (3,916m) 8 기경량안에따른서쪽 11 리 (3,916m) 9 중성미발견석 축성 구간 2,222m(6 리 241 척?) 그림 42) 제 1 석 서쪽 11 리 구간의계측과 중성미발견석 의축성구간 142) 정원철, 2010 고구려장안성의성벽축조과정에대한재검토 동북아연구 25, p.41. 143) 손수호 최응선, 2002 평양성, 고구려돌칸흙무덤발굴보고, 사회과학출판사 (2003, 백산자료원, p.77.); 심정보도이안을따르고있다 ( 심정보, 2005 高句麗長安城築造時期에대한問題點 Ⅰ Ⅱ 북방사논총 6, p.374.). - 202 -

손수호의안을따른다면성벽이제1석의위치에서서남쪽방향으로전개되기때문에 서쪽 이라는명문기록과는차이가있다고볼수도있다. 그러나제2석도 동쪽 이라는표현을썼음에도실제성벽은동북쪽으로축조되었고, 제3석도 서쪽 이라는표현을사용하였음에도실제성벽은서북쪽으로전개되었으므로크게문제가될일은아니다. 정작문제는서쪽 11리의거리가중성서벽구간을넘어서외성서벽구간으로까지진행된다는점에있다. 중성서벽의전체길이는 3,220m이므로 (7짙은색선 ), 이구간을초과하여외성서벽과겹치는구간의길이는 696m가된다 (7옅은색선 ). 다만앞서살펴보았듯이한사정에서외성서벽구간 12리를계측한결과중성서남쪽모서리까지 326m 부족하였던점을감안할수는있다. 이경우중성서벽과외성서벽이실제로중복되는구간의길이는 370m로줄어든다. 고구려의리단위로환산하면 1리를약간넘는정도의오차가존재하는셈이다. 손수호안 (7) 을따를경우 1리정도의오차가발생하기는하지만중성남벽을제외한 3개구간으로이루어진 35리 ( 제1석 11리 + 제2석 12 리 + 제3석 12리 ) 의외성성벽이완성이된다. 이구간의실제길이는 12,086m이므로이를 35리로나누면, 1리 = 약 345.3m, 1척 = 약 34.5cm 의척도를이용하여축성이이루어졌다는추정도가능하다. 이는일반적으로알려진고구려척 =35.6cm보다약간작지만크게벗어나지않는수치이기도하다. 다만이경우에는김정희와오경석이오탄에서각자성석이출토되었다고언급한것을해석할방법이없다는것이문제이다. 오탄이라는출토지정보를중시한다면제1석은중성남벽과관련된것이라이해할수있다. 필자의안 (8) 에따라중성남벽의동쪽이외성동벽과만나는지점을제1석의출토지라상정할경우성벽은일단직선에가까운형태로서쪽으로진행된다. 외성서벽과만나는지점에서안산의지세를따라동북쪽으로방향을꺾어오르다다시평지로내려온지점까지를축성구간으로한다. 이경우중성의서벽구간이 2,222m 남기때문에이구간에해당하는발견되지않은각자성석이추가로존재 - 203 -

한다는결론에이르게된다. 결실된이구간의길이를고구려식으로환산하면 6리가량이다. 제1석 ~ 제3석의공사구간길이가각각 11리 ~12 리라는점을감안한다면남은구간의길이가그반절정도에불과하다는점에서의문이들수있다. 하지만 6리라는길이는오히려내성에서의축성구간단위와연결지어생각해볼수있다. 내성의성벽에서발견된제4석과제5석의경우는축성구간의길이가구체적이지않다. 제4석은 여기서부터서북쪽으로진행하여 [ 오른 ] 다. 고되어있고, 제5석은 여기서부터동쪽으로돌아위로 里 4 尺 이라고새겨져있을뿐이다. 다만거리의구체성이떨어지는대신축성방향에대한묘사는오히려구체적이어서분석에도움이된다. 최희림은제5석의축성구간이제4석이있는곳까지라고보고두각자성석의거리가약 2.1km라는점을감안하여고구려의단위로 6리 4 척 이라추정하였고내성은 3개의공사구간으로나뉘어축성되었다고하였다. 144) 정원철도이거리의측정을시도한바있는데, 약 2.5km로최희림의그것보다 400m 가량길게측정하였다. 145) 필자의측정에따르면두각자성석의거리는 2,387m이다. 이를고구려식단위로바꾸면 6리 530척이된다. 최희림이두각자성석의거리를 약 2.1km 라고표현한것은다분히 6리 4척 이라는제5석명문내용을의식한것으로보인다. 2,100m를최희림이고구려척의길이로활용한 0.35m로나누면 6,000척 (6리) 으로딱떨어지는숫자가나오기때문이다. 하지만거대한성벽을축조하면서굳이 6,004척 (6리 4척 ) 이라는식으로한자리수단위로구간을끊었다는것은의아한부분이다. 제4석의경우축성거리에대해서는정보가전혀없지만, 성벽이서북쪽으로이어진다는정보를담고있으므로그끝이내성의서북쪽성벽어딘가일것이라추정할수있다. 거리는제5석구간과크게다르지않을것이다. 필자의측정에따르면내성전체의둘레는 6,896m에이른 144)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20. 145) 정원철, 2010 고구려장안성의성벽축조과정에대한재검토 동북아연구 25, p.38. - 204 -

다. 여기서제 5 석의축성구간인 2,387m 를뺀나머지를 2 로나눈결과 약 2,254m 정도의축성구역 2 개가존재하였음이추정되었다. 그모습 은그림과같다. 10 제 5 석축성구간 2,387m (6 리 530 척?) 11 제 4 석축성구간추정 2,254m (6 리 331 척?) 12 내성미발견석 축성 구간추정 2,254m (6 리 331 척?) 그림 43) 제 5 석의축성구간과제 4 석및 내성미발견석 의축성구간추정 제5석의공사구간이다른두구간에비해 200척가량긴셈인데, 전체축성구간을거의비슷하게나누었음을감안하면굳이한구간만길이가달랐다고보는것은어색하므로, 이번에는전체구간 6,896m를균등하게 3으로나누어보았다. 그길이는 2,298.6m이다. 이를다시리로환산해보면 6,456척, 즉 6리 456척이된다. 아마계획단계에서는이단위로공사구간을 3등분하였으나, 실제축성이이루어지는과정에서약간의조정이나오차가발생하였을수도있다. 제5석의명문을보면기존에는공사구간의정보를담고있는 4행과 5 행의글자를 里四 / 尺治 라고만판독하여그의미를파악하기힘들었다. 하지만실제축성구간의거리를확인한결과해당각자성석의명문은본래 6리 400척 을나타냈던것으로짐작되는바이다. 4행에서뚜렷하게판독되는 里四 의앞에는 六, 뒤에는 百 이들어가 六里四百 이라는 4글자로행을완성할수있는것이다. 이는 1행당 4~5글자로명문을새긴제5석의전체글자배열과도부합한다. - 205 -

상술한바와같이내성은약 6리길이로이루어진 3개구역으로나뉘어축성이이루어졌다고파악된다. 중성의축조역시기본단위가 5 리 ~6리인 3개구역으로축성관할구간이나뉘어졌으리라여겨지는데, 제1석의명문내용은그중 5리와 6리의 2개구간을합쳐서 11리로표기한것으로보인다. 제1석 11리구간의경우축성책임자를 소형상부와약모리 의 2명으로해석할수있기때문에결국중성전체성벽의축성은 상부 + 약모리 + 미상의누군가 까지 3명의소형급책임자가 1인당 5~6리단위로 3등분하여통제하였다고볼수있다. 아마도성벽의양끝단인내성서쪽모서리부터서남쪽으로 6리, 중성남벽의동쪽끝으로부터서쪽으로 6리, 그리고그사이의 ㄴ 형태로꺾이는구간 5리로구분하였을가능성이높다. 비고 : 제 4 석의축성구간은추정치 그림 44) 제 1 석 ~ 제 5 석의위치와축성구간 - 206 -

외성의경우동벽과서벽이각각 12리의축성구간을가지고있어내성및중성과차이를보이지만, 이경우에도 12리가 6의배수라는점이주목된다. 외성성벽을만들때완수로떨어지는 10리가아니라굳이 12리를축성구간의단위로삼은것은역시장안성축성관리의기본단위가 6리가량이기때문일것이다. 북성의경우는전체구간의길이가워낙짧기때문에각자성석을따로새기지않았을가능성이높다고생각된다. 이상의내용을종합하면장안성축조시총 7개의각자성석이만들어졌을것으로짐작된다. 이중 5개는발견되었지만 2개는행방이확인되지않은상태이다. 발견되지않은 2개각자성석의공사구간길이는각각 6리정도일것으로추정되며, 그위치는칠성문북쪽 200~300m 지점, 내성서쪽모서리의경창문부근, 중성서벽구간에서지금의동성동과보통문동의경계부근이후보지가될수있는데, 앞의 2곳일가능성이더높다. 마지막으로한가지짚고싶은것은상술한축성구간의측정작업을통해제1석의간지가 기축년 (569) 이아니라 기유년 (589) 이라는것이더욱분명해졌다는점이다. 출토지가어디든간에제1석의축성구간은제2석과제3석의성벽을전제하지않으면성립할수가없다. 손수호안을따를경우는두말할것도없고, 필자의안을따르더라도제2석의성벽이존재하지않는상황이라면, 내성의동남쪽모서리와제1석사이 466m 공간이성벽없이비어버리는상황이발생하기때문이다. 제2석과제3석의성벽이기유년에축성된것이분명한이상제1석의성벽역시같은시기에축성되어야만도시를둘러싼성곽으로서의완결성을가지게된다. 20년의시간차를두고일부성벽만존재하는것은애초에의미가없는것이다. - 207 -

3. 장안성의공간구조와이도의성격 1) 외성내격자형구획에대한기존의논의고구려장안성의가장큰특징이자주목받는요소는바로외성에남아있는격자형구획이다. 146) 조선시대에는이를기자가남긴井田制의흔적이라보아각별한관심을가졌고, 기자를존숭하는마음으로각별한보호의대상으로삼았다. 예를들어윤두수가편찬한 평양지 에서는기자가구획한경계가옛모습을잃게되자 1585년 ( 萬曆乙酉年, 선조 18) 에庶尹金敏善이수리하였다고하며, 정약용의 대동수경 에따르면건륭시기 (1736~1795) 에도유적의경계가흐트러지자어떤사람이고쳐복원하였다고한다. 147) 평양외성의격자형구획에대해체계적조사를수행한최초의인물은조선중기의학자인韓百謙이다. 그는 1607년평안도관찰사가된동생을방문하기위해평양에갔다가유적을보고 箕田遺制說 이라는글을쓰고 箕田圖 를그려남겼다. U-1. 정미년 (1607, 선조 40) 가을동생柳川公이관서 ( 평안도 ) 의관찰사가되어내가부모님을모시고평양에이르렀다. 처음기자정전의남아있는제도를보았는데, 밭사이의길이모두남아있고정연하여어지러움이없었다. 그중함구문과정양문의사이구획이가장분명하였다. 그제도는모두田자형태였으며, 田은 4개의區로되어있고, 區는모두 70 畝의크기이다. 대로의안쪽을가로방향으로보면 4 田 146) 중국과일본의경우바둑판과같은격자형구획을坊制 里坊制 條坊制등으로부르고있다. 이러한구역분할이일종의행정구역으로기능하였기때문인데, 고구려장안성에는어떠한형식의행정단위명을사용하였는지확인되지않기때문에중국과일본에서사용하는용어를그대로적용하는것은곤란하다. 이에민덕식의경우는 구역분할제 라는용어를사용하고있고, 김희선은 가로구획 이라는표현을사용하고있다. 그런데 구역분할 이라는표현은분할단위가방형이라는특성이보이지않고, 가로구획 이라는말은도로를중심에놓은개념처럼보이기때문에공간을분할하였다는본질이드러나지않는면이있다. 이에여기서는 격자형구획 이라는표현을사용하도록하겠다. 147) 平壤志, 箕子經界猶存而或因兼並或阡陌割裂幾失舊址萬曆乙酉庶尹金敏善修之. ; 與猶堂全書 大東水經 浿水 2, 乾隆時洪趾海爲平安道觀察使以溝洫之間陳廢可惜遂漫其經界近有一人按舊跡而修復之.. - 208 -

8 區였고, 세로방향으로보아도역시 4 田 8 區였다. 4 田은四象의모습이고, 8 區는팔괘의모습이다. 8과 8은 64이니반듯반듯하다. 비록尺寸의어긋남이없음을보장하기는어렵지만, 그대략은 1무의길로區의경계를짓고 3무의길로田의경계를지었다. 그세개의가장자리에는 9무의큰길이있는데, 성문에서詠歸亭의나루머리까지이른다. 이는왕래하는길이지, 田사이의밭길을위해만든시설은아닌듯하다. 그러나분명 16개의田, 64개의區로써 1 甸을구획하였으니, 또한경계를지어한정하는뜻이없지는않다. 이외의田을경계짓는길은혹은경작지가되어옛모습을잃은곳이있으니, 후대사람이제도를만든본래뜻을알지못한것이다. 반드시 3무를기준으로삼아그것을고쳤으니, 大와中의구분이다시는없게되었다. 비록다시찾을수없게되었으나, 70무로써 1 區로삼고, 4 區를 1 田으로삼아짝을지어서로나란히나아가는것은온들판이모두같다. 148) 구암유고 기전유제설 비록유적의실상에대한잘못된이해에기반한작업이었으나, 한백겸의기전도는후대학자들에게매우중요한정보를제공하고있다. 한백겸은구획의기본단위를 田 형태로보았고, 이는다시 4개의 區 로나뉘어졌다고파악하였다. 또한가로방향의 4 田과세로방향의 4 田으로이루어진영역, 즉 16개의田이다시 1 甸이라는하나의단위를구성하였다고보았는데, 1 田은 4개의區로이루어져있기때문에 1 甸은곧 64 개의區로이루어진것이기도하였다. 區단위는 1무로라고표현한좁은길로, 田단위는 3무로라고표현한중간크기길로, 그리고甸은 9무로 148) 久菴遺稿 箕田遺制說, 丁未秋舍弟柳川公觀察關西余奉晨昏到平壤始得見箕田遺制阡陌皆存整然不亂. 其中含毬, 正陽兩門之間區畫最爲分明其制皆爲田字形田有四區區皆七十畝大路之內橫而見之有四田八區豎而見之亦有四田八區四田四象之象耶八區八卦之象耶八八六十四正正方方. 雖難保其不差尺寸而其大略界區以一畝之路界田以三畝之路其三旁九畝大路由城門達之詠歸亭津頭似是往來通衢而非專爲田間阡陌而設然其必以十六田六十四區畫爲一甸則亦不無界限之意自此以外田界之路或有侵耕失古處則後人未知制作本意必以三畝爲准而正之無復有大中之分八卦法象雖不可尋而其以七十畝爲一區四區爲一田兩兩相並而去則盡一野皆同矣.. - 209 -

라고 표현한 큰 길로 구분이 된다고 하였다. 그림 45) 한백겸의 箕田圖 출처 : 久菴遺稿 (1640년 초간본) 하지만 이러한 한백겸의 인식에는 문제가 있었다. 그는 정양문과 함구 문 사이 구간을 9무로 폭의 길로 둘러싸인 1甸라고 설명하였으나, 그 외 의 지역에서는 이러한 식의 구획 형태가 전혀 발견되지 않는다. 한백겸 은 이에 대해 후대인들이 정전의 본래 형태를 몰라서 9무로를 마음대로 3무로로 고친 탓이라 여겼으나, 실상은 그가 인식하였던 1甸의 설정이 다분히 주관적이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비판은 조선 시대에도 이미 존재 하였다. 이익은 평양성 외성의 다른 지역에서는 한백겸이 설정한 구획의 모습이 전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을 이유로, 두 성문 사이에 가로 4田, 세로 4田이 있는 것은 땅의 형세에 따라 우연히 그리 된 것에 불과할 뿐이라고 지적한 바 있다.149) 149) 星湖僿說 書韓久庵箕田圖說. - 210 -

그림 46) 한백겸의정양문 - 함구문사이구간기전개념도 장안성외성의격자형구획에대한근대적조사는關野貞에의해이루어졌다. 關野貞은그간기자의정전지로여겨져왔던평양성외성의유적이사실은고구려도시유적임을밝혀내연구에중요한전환점을마련하였다. 그는외성안도로귀퉁이에세워진석표들의간격을실측하였는데, 150) 그중에서도오래된것으로보이는柳町에서확인된 4개석표 ( 외성구획복원도의 A 지점 ) 의종횡간격을실측한결과일본의곡척으로약 45척이라하였고, 한사정도로양측에있는석표의거리역시약 45척이었다고하였다. 이와달리폭이좁은도로의경우는약 17척정도가측정되었다고한다. 151) 150) 평양속지 고적조에따르면이석표들은法樹라불리는것들로, 조선숙종대 (1691 년, 崇禎辛未年 ) 에기자정전을보존하기위해기존에세워져있던木標를대신해세운것들이다. 길과길이만나는교차점에세워졌으며, 근대초까지만해도평양성외성에상당히많은수의법수가남아있었다. 151) 關野貞, 1928 高句麗の平壤城と長安城に就いて 史學雜誌 39 1, pp.23-24. 1928 년에는약 46 척이라하였으나, 1941 년글에서는석표간거리를각각 45 척 7 촌, 44 척 5 촌등으로소개하며대체로 45 척전후라고실측내용을구체화해보완하였다 ( 關野貞, 1941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 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p.363.). - 211 -

關野貞은고구려척을東魏尺과연결시키는한편그길이가일본곡척대비 1척 1촌 7푼 6리의길이라하고, 석표의거리를고려척으로환산하면폭이넓은도로의것은 40척, 좁은도로의것은 15척이라하였다. 또거주지구획의단위는 600척인데, 양쪽도로폭을제외하고생각하면 500척이된다고하였다. 152) 고구려척의 1척은약 35.6cm이므로, 關野貞은넓은도로의경우약 14.24m, 좁은도로의경우약 5.34m, 격자형구획의한변길이는약 213.6m, 도로폭을제외한격자형구획의한변길이는약 178m로파악한셈이다. 뒤에서살펴보겠지만이러한關野貞의분석은대체로타당성을가지고있다. 북한의최희림은關野貞과전혀다른방식으로격자형구획을이해하였다. 그는 1954년김책공업대학청사기초공사장에서드러난외성동서대로의폭이 12.6~12.8m라고밝히고, 그좌우측으로약 60~70cm 폭의검은색감탕흙층은도랑이있던자리라파악하였다. 즉순수한길의폭에좌우의도랑너비까지포함하면전체도로폭은 13.8~14m라고하였다. 그는이러한실측치를바탕으로한백겸의 기전도 를이용하여 9무로 =12.6~12.8m, 3무로 =4.2m, 1무로 =1.4m라는추정치를제시하였다. 고구려척으로 9무로는 36척, 3무로는 12척, 1무로는 4척이라는것이다. 그다음주거구역의분할에대해서는 기전도 에서田의형태가가로가긴직사각형으로그려져있다는점, 1 區의크기를 70무라고했던점을들어田의가로세로비율이 10:7이라고추정하였다. 구획단위를정방이아닌가로가긴편방으로인식한것이다. 그는중성의남벽에서동서대로까지의거리를약 695~700m라고하고, 이범위안에 4 田 (=8 區 ) 이있고, 3무로가 3개 1무로가 4개있다는것을이용하여전체길의너비합을 22.4m로상정한후중성남벽과동서대로까지의거리에서도로의너비를뺀수치를 8로나누어 1구의길이를구하였다. 153) 그결과 1구의세로길이는 84m가산출되었고, 가로세로비율 10:7을적용하 152) 關野貞, 1941 高句麗の平壤城及び長安城に就いて 朝鮮の建築と藝術, 岩波書店, p.363 153) 공식은다음과같다. 695-22.4=672.6, 673 8=84-212 -

여 1 구의가로길이는약 120m 로추정하였다. 고구려척으로환산하면 세로 240 척, 가로약 340 척의구획을단위로하여도시가설계되었다는 것이다. 154) 그림 47) 리화선의 고구려평양성외성안리방복원도 출처 : 리화선, 1989 고구려평양성외성안의리방의형태와규모, 그전개에 대하여 력사과학 1989 1, p.29. 이와다른견해도존재한다. 리화선은 1879년에간행된 기자지 에실린 정전도 에서는외성의구획이정방형이라는점, 근대에만들어진측량도인 평양시가도 에서도구획이정방형으로그려져있다는점을들어 기전도 의그림만참작하여구획이장방형이었다고볼수는없다고주장하였다. 그는한백겸의개념인 區 田 甸 을각각 작은방 방 리 로치환하고 1930년대측량도를근거로작은방의한변길이는 85m 가량, 방의한변길이는 170m 가량이라고하였다. 고구려척으로환산하면작은방은 250척, 방은 500척, 리는 2,000척이며, 도로폭은 1953~1954년실측치를고구려척으로환산하여대로는 40척, 중로는 13.5척, 소로는 4.5척이라고하였다. 정방형을이루지못한여전들을제 154)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p.104-105. - 213 -

외하면외성안에는약 150개의방이전개되었다고보았다. 155) 한인호 리호는최희림과리화선의견해를절충한안을제시하였다. 지리적측량자료에따르면함구문과정양문의중심간거리는약 980m이고, 이구간의남북거리는약 700m인데, 여기에는동서 120m, 남북 84m의장방형구획을전개해야실측치와맞는다고하였다. 반면정양문서쪽구간에서는오히려한변 84m인정방형구획을전개해야실측치와들어맞는다고하였다. 장방형과정방형의리방구획들이조화를이루어함께존재하였다는것이다. 대로의너비는 14m이고양쪽의도랑너비 1.4m를빼면실제길의너비는 12.6m(36자 ) 라고보았다. 중도로는그 1/3인 4.2m(12자 ), 소도로는다시그 1/3인 1.4m(4자 ) 라하였다. 156) 그림 48) 한인호 리호의 평양성외성안의고구려리방복원도 출처 : 한인호 리호, 1993 평양성외성안의고구려도시리방과관련한몇가지 문제 조선고고연구 1993 1, p.16. 龜田博은 1916 년의 1 만분의 1 平壤 지도와 1930 년출간된 高句 麗時代之遺蹟 - 圖版上冊의부도를이용하여평천리일대의토지구획 155) 리화선, 1989 고구려평양성외성안의리방의형태와규모, 그전개에대하여 력사과학 1989 1. 156) 한인호 리호, 1993 평양성외성안의고구려도시리방과관련한몇가지문제 조선고고연구 1993 1, pp.15-18. - 214 -

등을계측하여동서 182m, 남북 181.5m의정방형구획을추출하였다. 함구문에서남쪽으로뻗은대로와거피문에서북으로뻗은대로의동서간격이약 1,820m인데이사이에는 10개의田자형구획이존재하므로, 도로를포함한한구획당폭은평균 182m라고하였다. 전체동서간격에서도로의폭 68m( 중로5 8=40, 대로14 2=28) 를빼면약 1,752m가되므로, 한구획은한변약 175m가된다. 도로의폭은대로는약 14m, 중로는약 5m, 소로는 1m로파악하였다. 157) 田中俊明은상기한연구들을소개하는한편북한학자들이정양문과함구문사이의동서구간을 기전도 에의거하여 4개구역으로보고있는것에대해 20세기초지도에서는정양문과함구문사이가로구간이 3개구역으로나타나고있다는점을들어의구심을표하였다. 158) 김희선은한인호 리호의견해를따라고구려장안성외성의격자식구획은장방형과정방형이적절하게배합된것으로보는것이가장타당해보인다고평가하였고, 159) 한국의다른연구자들도대체로이러한견해를수용하고있다. 160) 이상과같이외성의격자형도시구획과관련하여여러논의가진행된바있는데, 특히혼선이발생하고있는점은두가지이다. 첫째, 정양문과함구문사이의동서구간이 3개구역인가 4개구역인가하는점이다. 둘째, 장안성외성의격자식구획이정방형인가가로가긴편방형인가하는문제이다. 현지조사를통해유적을실측하는것이힘든상황이라는것이큰난점이지만, 이는조선시대평양지역을그린고지도와근대초제작된지도와의대조, 그리고앞서이용하였던구글어스에기반한디지털평양성복원도등을활용하여해결할수있다. 157) 龜田博, 2000 日韓古代宮都の研究, 學生社, pp.162-167. 158) 田中俊明, 2003 東아시아都城制에서高句麗長安城 白山學報 67, p.516. 159) 김희선, 2006 6~7 세기동아시아도성제와고구려長安城 - 도성의가로구획방식을중심으로 韓國古代史硏究 43, p.44. 160) 임기환, 2007 고구려평양도성의정치적성격 韓國史硏究 137, p.19; 여호규, 2015 삼국후기도성경관의변화와그특성 삼국시대국가의성장과물질문화 2. 한국학중앙연구원출판부, p.341. - 215 -

2) 외성내격자형구획의형태와단위논의의효율적인전개를위하여 1929년석표도를베이스로필자가작성한장안성외성의격자형구획복원도를제시한다. 1929년석표도에는격자형구획의흔적이잘남아있고, 당시조사하였던법수간의거리수치와위치도모두표기되어있어연구에큰도움이된다. 특히외성남쪽지역에는이당시까지만하여도법수가굉장히많이남아있었고도로의흔적도뚜렷하다. 외성동부쪽은이미상당한도시화가진행되어과거의흔적이많이사라졌지만, 그럼에도이시기까지남아있는도로구획흔적을연장선으로연결하면충분히복원이가능하다. 그림 49) 평양성외성격자형구획복원도 비고 : 1929 년석표도를베이스로외성의격자형구획을복원. 다경문에서부터 이어지는푸른색선은외성내에존재하였던운하의흔적을표현한것. 편의상함구문에서남쪽으로뻗은길을함구문대로, 정양문에서 B 지 점까지의길을정양문대로, C 지점에서동쪽으로뻗은대로를동서대로, - 216 -

거피문에서 C지점을연결하는길을남북대로라지칭하겠다. 이는모두한백겸이 9무로라고분류하였던대로들이다. 기존연구들에서는대개동서대로를서쪽으로더연장하여외성성벽까지이어지는것으로상정하고있다. 그러나 D지점에위치한법수의간격을보면일본곡척으로 16.4척 ( 약 4.96m) 으로측정되어여기서부터는대로가아니라중로 (3무로) 임이확인된다. 따라서동서대로는 C지점까지만형성되었던것으로이해된다. 이는 1640년간행된 구암유고 초간본의 기전도 에서도확인되는바이다. 161) 또한대부분의연구자들이동서대로의서쪽연장선끝에다경문이있는것으로이해하였는데동서대로가외성서벽으로까지연장되지않는다는것이확인된이상이는재고되어야한다. 기존에다경문의위치로상정한곳에는겹성이존재하기때문에대로가연결되는문이라고보기에는어색한면이있다. 동국여지승람 평양부의내용을보면多景樓는 부서쪽 9리양명포위對岸에있다. 돌을걸쳐서쌓고그위에누각을올렸는데, 아래쪽으로는배가노를저어통과할수있다. 지금도遺址가남아있다. 고하였고, 長興池가 多景門북쪽에있다 고하였다. 162) 그림 50) 운하물길이성벽의수문을통하여외성으로들어오는모습 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병풍도 ; 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성도. 161) 한백겸의 기전도 는매우유명하였기때문에여러사람들이필사및판각을통해공유하였다. 여러차례옮겨그려지는과정에서미묘하게그림간차이가발생하기도하였는데, 한백겸의본래의도를정확히파악하기위해서는가장이른시기에만들어진것를이용할필요가있다. 본문에서활용한 기전도 는 1640 년한백겸의아들韓興一이간행한 구암유고 초간본에실린것이다. 162) 新增東國輿地勝覽 平壤府, 古蹟, 多景樓俱在府西九里揚命浦上對岸築石架樓其上樓下可通舟楫今遺址存焉. ; 山川, 張興池在多景門北.. - 217 -

다경루는다경문의문루인데그아래로배가다녔다는것이다. 장흥지는외성의서쪽겹성내에있는연못으로파악되는데, 다경문은그보다남쪽에있었다고한다. 따라서다경문의위치는운하의물길이외성서벽을통하여들어오는수문지점이라고보아야한다. 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성도에서는해당지점에 水德門 이라고표기되어있는데, 이는뒷시기에붙은새로운이름일것이다. 그림에서이것외에다경문으로비정할만한다른문의존재는전혀확인되지않는다. 육군박물관소장기성도에서는그밖에다른문의위치또한확인할수있다. 古里門과陸路門의존재가그것이다. 그간고리문은외성의동문, 육로문은중성의동문으로알려져있었고, 특히고리문의경우는동서대로의동쪽끝지점에위치하였을것으로추정되었다. 외성동서대로를동쪽의고리문과서쪽의다경문을연결하는대로로상정하였던것이다. 그러나앞서살펴보았듯이다경문은위치상동서대로와는무관한문이었다. 고리문역시마찬가지이다. 고리문의실제위치는중성의동남쪽모서리로서, 외성의동문이라기보다는중성의동남문이라고보는것이보다정확하다. 그림에서는바로부근에오탄이라는지명도확인된다. 각자성석제1석이출토된위치가바로이고리문근처였을것이다. 출처 : 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성도. 그림 51) 고리문과육로문의위치 - 218 -

육로문은내성의동남쪽모서리와중성의동벽끝이연결되는지점에 있었던작은문이다. 이문의이름이육로문인이유는바로옆에수문이 함께나있었기때문으로짐작된다. 다시외성격자형구획문제로돌아오자면, 남북대로상에는표석이 상당히많이남아있었지만, 정작 C 지점북쪽부터는도로간격을잴수 있는 2 개이상의표석이남아있지않아어디까지대로가뻗어있었는 지확인하기곤란하다. 이는 기전도 를참고할수밖에없는데이에 따르면이구역의도로폭은중로였다고파악된다. 이상의내용을종합하면외성의동서대로와남북대로는 형태로 형성되었음을알수있다. 어째서 十 형태가아니라 형태로대로 를만든것인지의문이생길수밖에없는데, 이는혹운하때문이아닐 까한다. C 지점에서북쪽으로한구역가량, 서쪽으로두구역가량떨 어진위치에는운하의물길이대각으로지나고있다. 이운하는조선시 대평양지역을그린병풍도에서도그존재가뚜렷이확인되며, 보통강 에서부터중성의정양문부근까지연결되어있다. 163) 외성대로의형태 가 형태인것이운하를의식한것이라면운하역시고구려당시부 터존재하였던것으로볼수있다. 외성격자형구획과관련하여한가지더눈여겨보아야할점은남북 대로의남단에위치한거피문이한사정바로옆이라는점이다. 164) 한사 정부근은다름아닌평양성각자성석제 2 석과제 3 석이출토된곳이다. 163) 평양속지 에따르면과거蘆船들이운하를이용하여화물을운반하였고, 이때문에정양문을일명蘆門이라하고, 양명포를일명蘆門浦라고불렀다한다. 노선은갈대로지붕을이어집을세운배를말한다고한다 (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p.107-108).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도병풍의그림을보면운하는정양문에서서쪽으로한구역떨어진위치에있는수문을통과하여중성안으로까지이어졌음을확인할수있다. 복원도상에서는물길이정양문대로를침범한것처럼되어있지만, 평양도병풍의그림을참고하면원래물길은그북쪽으로갈라진길을따라형성되어있었던것으로보인다. 164) 1929 년석표도에서는남북대로남단에한사정을위치시키고그보다한구역서쪽에 거문 이있는것으로표시하였으나, 남북대로가성문과연결되지않는다는것은어색하다. 서울대학교박물관과육군박물관소장평양성병풍도를참고하면한사정은거피문바로옆에만들어진누정이었던것으로묘사되고있다. 따라서거피문과한사정은동일장소에나란히있는것으로보는것이타당하다. - 219 -

각자성석명문의내용을통해한사정을기준으로동쪽 12리와서쪽 12 리구간의성벽을축조하였음이확인되는데, 남북대로의축선이성벽공사구간을나누는기준선과일치하는만큼외성성벽의축조와격자형구획의획정은밀접한상관성을가지고있다고이해할수있다. 아마도성벽축조와격자형구획이동시에기획되어공사를시작하였거나, 시간차가있더라도크지는않았을것이다. 또한장안성외성의대로는남북대로를기준으로그동쪽에만추가적으로존재한다. 그렇다면장안성설계당시외성동쪽은인구가밀집된시가지, 서쪽은상대적으로인구밀집도가떨어지는외곽지역으로기획되었을가능성도있다. 기전도 에서는 A지점동쪽도중로인것처럼묘사하고있는데, A지점에서확인된법수의간격을보면종횡모두일본곡척으로 45.7척 ( 약 13.84m) 이다. 따라서 A지점에서그동쪽으로뻗어외성동벽에이르는구간역시대로였음을알수있다. A지점에서남쪽으로뻗어외성성벽에이르는도로역시같은이유로대로임을알수있다. B지점부터남쪽으로뻗어외성성벽에이르는도로역시대로일가능성이있으나, 이일대는철도부설로인해격자형구획유적이일찌감치훼손되어도로의폭을판단할수있는근거가부족하다. 다만 기전도 의그림을참고하면한백겸은이구간의도로를중로로인식하였음을알수있다. 지금으로서는이이상의자료는확인되지않으므로한백겸의조사를신뢰하는수밖에없다. 이제문제가되는정양문의위치문제를검토해보자. 한백겸의 기전도 에따르면정양문과함구문사이에는가로로 4개의田구간이존재한다. 북한학계에서는모두이에따라외성격자형구획을복원하고있다. 하지만 1929년석표도에따르면정양문과함구문사이에는가로로 3개의구간만이확인될뿐이다. 따라서연구자들사이에서혼선이발생하였다. 결론부터말하자면이는 1929년석표도의오류이다. 동국여지승람 을비롯한조선시대의여러기록을보면정양문바깥에기자궁유적이있다고전한다. 기자궁은평양의기자정전유지를관람하는사람들이거의반드시방문할정도로중요한장소로인식되었 - 220 -

기때문에평양병풍도에도그모습이그려져있다. 이에따르면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병풍도와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성도모두정양문을기준으로남쪽으로뻗은대로의우측에기자궁기자정이확인된다. 1929년석표도에도기자궁과기자정유적의위치가표시되어있다. 다만이지도에서는정양문남쪽대로의좌측에기자궁과기자정이있는것으로되어있다. 그림 52) 정양문과기자궁-기자정의위치상관도출처 :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성병풍도 ; 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전도 ; 1929년석표도. 비고 : 평양성병풍도는원래형태에서반시계방향으로 90도회전시킴. 이처럼조선시대그림에서기자궁의위치가일관되게정양문대로의 동쪽에있는것으로묘사되고있는것으로보았을때 1929 년석표도의 정양문위치표기는오류라고판단하는것이합당하다. 입지상으로보 - 221 -

더라도 1929년석표도가지목한정양문자리는대로가통과하는문이있을만한곳으로보기어렵다. 문을지나자마자북쪽이서기산 ( 해방산 ) 으로가로막히기때문이다. 반면그보다서쪽으로한구역떨어진실제정양문터는문을지난후창광산과서기산으로둘러싸인넓은분지지형으로나오게되어있어대로가지나는문이있을만한자리로적합하다. 결국한백겸이그린 기전도 의그림이정확하였던것이다. 그다음으로살펴볼것은장안성외성의격자식구획이정방형인가가로가긴편방형인가하는문제이다. 정양문과함구문의위치를비롯하여동서대로의위치도정확하게확보된상태이므로, 이는충분히검증이가능하다. 처음으로외성구획의형태를편방형이라주장한사람은최희림이며, 한인호 리호는이를절충하여정양문-함구문사이구간만부분적으로편방형이라고하였다. 외국학자들의유적에대한접근이제한적인상황에서현지학계에서도출한연구결과이기때문에외부에서함부로논하기곤란한면이있었고, 따라서남한의연구자대부분은별다른문제제기없이이를수용하고있는실정이다. 하지만외성격자식구획을편방형으로보는것은전체적이든부분적이든성립할수없다. 그이유는다음과같다. 첫째, 기전도 의그림을근거로區의가로세로비율을 10:7로상정한최희림의시도가지나치게자의적이기때문이다. 1640년간행된 구암유고 초간본에실린 기전도 를보면, 田의형태와크기가균일하지않고들쭉날쭉하다. 기전도 자체가구획의비율이나크기를엄격하게따져그린그림이라고보기어려운것이다. 165) 게다가한백겸글에서는區나田의모습이가로가긴편방형이라는내용이일절확인되지않는다. 이처럼중요한사안을언급조차하지않았다고생각하기는어렵다. 그보다한백겸이이일대구획형태에대하여시종일관 165) 한백겸의 기전도 는매우유명하였기때문에여러사람들이필사및판각을통해공유하였다. 여러차례옮겨그려지는과정에서미묘하게그림간차이가발생하기도하였는데, 한백겸의본래의도를정확히파악하기위해서는가장이른시기에만들어진 기전도 를이용할필요가있을것이다. 본문에서활용한 기전도 는 1640 년한백겸의아들韓興一이간행한 구암유고 초간본에실린것이다. - 222 -

4 4=16이나 8 8=64 같은수치를강조하고있음을감안하면종횡의길이가동일한정방형으로인식하였다고보는것이더합리적이다. 둘째, 처음격자형구획편방설을주장한최희림은중성의남벽에서동서대로까지의거리가약 695~700m라는것을대전제로하여모든계산을전개하였다. 하지만이기준수치가유동적이라는것이문제이다. 중성남벽은도로의구획선과평행하지않고사선으로전개된다 ( 필자복원도참조 ). 중성남벽에서동서대로까지의거리는어느지점을기준으로하느냐에따라얼마든지수치가바뀔수있다는이야기이다. 필자가구글어스를이용해측정한바에따르면함구문에서 A지점까지의거리는약 889m, 정양문에서 B지점까지의거리는약 748m로확인되었다. 중성남벽과동서대로간의거리가최희림이설정한 695m가되기위해서는정양문에서 1.5구역정도더서쪽으로이동한곳에서측정을하여야한다. 이처럼기준수치가불안정한상태에서진행된모든계산은당연히의미를갖기어렵다. 셋째, 한인호 리호는정양문과함구문의중심간거리가약 980m이고, 이구간의남북거리는약 700m라고하였다. 따라서이구역에서는동서 120m, 남북 84m의장방형구획을전개해야실측치와맞는다는것이다. 하지만필자가측정한바에따르면정양문과함구문간의실제거리는약 740m이고, 두문에서각각동서대로와직교하는연장선의사이거리, 즉 A지점에서 B지점사이의거리는약 730m 가량이다. 한인호 리호가제시한정양문과함구문간거리실측치에오류가있다고밖에볼수없는상황인데, 이를더구체적으로검증해보면다음과같다. 한인호 리호는정양문의위치는 창광네거리지점 이라고하였고, 함구문의위치를 나라길시작점 이라고하였다. 평양시내의상세한도로명지도를확보하기어려운상황이지만, 980m라는길이를바탕으로그위치를추정해보면그림과같다. 창광산아래에는사거리가하나확인되는데, 이곳이창광사거리로추정된다. 구글어스를이용하여측정하면여기서동쪽으로약 980m 떨어진위치에다시사거리가확인된다. 이곳이 나라길시작점 일것이다. - 223 -

두사거리사이에다른사거리는존재하지않는다. 그림 53) 한인호 리호의정양문과함구문사이거리측정에대한검증 두사거리의위치를 1929년지도와비교해보면한인호 리호의정양문 함구문위치파악에오류가있음이확인된다. 이들이정양문의위치라고하였던창광사거리의경우실제로는정양문이있던곳에서서쪽으로한구간정도더떨어진곳으로, 일제강점기여단병영의서쪽에나있는길에해당한다. 나라길시작점 역시실제함구문이있던자리에서동쪽으로 0.5 구간정도떨어진위치이다. 이곳은조선시대부터있던도로와상관없이근대에들어서새로뚫은전차길이다. 한인호 리호는논문에서정양문과함구문위치를실측하였다고하였지만, 사실은과거두문이있던정확한위치를파악하지못한상태에서 - 224 -

현재의도로형태에의존하여연구를진행하였고, 이로인하여오류가발생하였던것이다. 이처럼오류가확인된이상잘못된실측치에근거한장안성외성의편방형구획설역시인정할수없다. 정확한측정을기반으로한다면이구간의공간구획은정방형의모습을띠고있는것이분명하다. 그림 54) 1894 년평양전투도에묘사된외성의격자형구획 출처 :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 2012 지도 20 세기동아시아역사를말하다, p.88. 넷째, 외성의격자형구획이정방형이었다는것은근대초에작성된것으로추정되는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소장의 평양전투도 를통해서도추정해볼수있다. 이지도는 1894년 9월 15일청일전쟁당시평양지역에서의군부대배치를나타내고있는지도이다. 정확한제작시기는미상이지만평양외성에철도시설이들어서기전의모습을묘사하고있다. 166) 필자가확보한 1911년발행 구한말한반도지형도 나 166) 서울시립대학교박물관에문의한결과현재로서는지도의정확한출처를알수없다고한다. 지도상단에는 平壤戰鬪圖 ( 其三 ) 이라는제목이붙어있고다 - 225 -

1918년발행 조선전도 의평양부분도와대조해보아도대조군보다이른시기의평양시가지모습을담고있는것은분명해보인다. 평양전투도 의정확한출처는더추적해보아야하겠지만, 이지도에서외성의모든구획이예외없이정방형으로묘사되고있는점은주목할필요가있다. 이상의네가지사안을감안하면고구려장안성의도시구획은전지역이일관되게정방형의모습을띠고있었다고볼수있다. 리화선처럼평양성외성의격자형구획을 작은방 방 리 와같이 3개의단위로파악하려는시도가있다. 이는한백겸이제시한 區 田 甸 개념의연장선에있다고볼수있다. 그러나현재로서는가장큰 리 나 甸 단위의실체는파악하기어렵다. 적어도공간구획및도로의형태와배치를통해서는 리 나 甸 의존재를읽어낼수없는상황이다. 따라서한백겸이 田 이라표현한중로로구분되는공간범위를토지구획의기준단위로보고, 그아래다시 4개의소구역이있는 2단계구획으로이해하는것이타당하다. 그렇다면하나의기준구역은어느정도크기였을까. 이를정확히파악할수있는가장좋은방법은발굴조사를통한실측이겠으나, 이미도시개발이이루어진현재로서는어려운일이다. 그렇다면계산을통해간접적으로파악하는수밖에없다. 다행히 20세기초일본학자들이실측을한자료가남아있어활용이가능하다. 우선도로의폭을확인해보아야하겠는데, 이는 1929년석표도에표기된수치들을이용하여평균값을내는방식으로처리할수있다. 이지도상에는대로에해당하는석표간거리수치와중로에해당하는석표간거리수치가다수표시되어있다. 關野貞은그중일부수치를선별하여이용하였지만, 기왕실측조사를통해확보한데이터가존재한다면평균값을구해사용하는편이자의적선별보다안정적일것이다. 이에지도에표시된수치들을표로정리해옮겼다. 시그아래작은글씨로 明治二十七年九月十五日午後九時頃ノ位置 라고적혀있다. 우측상단에는 附圖第九 라고표시되어있고, 하단에는 二萬分一之尺 이라축척을밝히고있는데, 평양지역의모습을매우정교하게그린지도위에붉은색과푸른색의도형으로청군과일본군의배치를묘사하고있는군사지도이다. - 226 -

표 8) 1929 년석표도에서의석표간거리실측수치 단위 : 척 ( 일본곡척 ) 번호 위치 거리 구분 번호 위치 거리 구분 1 가로0 세로6-1 44.5 대로 35 가로3 세로9-3 15.8 중로 2 가로1 세로6-1 47.4 대로 36 가로3 세로9-4 16.4 중로 3 가로1 세로6-3 47 대로 37 가로4 세로5-2 15.2 중로 4 가로2 세로6-1 45.45 대로 38 가로4 세로5-3 16 중로 5 가로4 세로6-1 48.2 대로 39 가로4 세로6-2 17 중로 6 가로4 세로6-3 46.6 대로 40 가로4 세로6-4 16.4 중로 7 가로5 세로6-1 47.9 대로 41 가로4 세로7-1 15.1 중로 8 가로6 세로6-3 48.2 대로 42 가로4 세로7-2 16 중로 9 가로8 세로6-1 47.4 대로 43 가로4 세로7-3 15.1 중로 10 가로9 세로16-1 45.4 대로 44 가로4 세로7-4 16.2 중로 11 가로9 세로16-2 45.05 대로 45 가로4 세로9-2 14.9 중로 12 가로9 세로16-3 45.7 대로 46 가로4 세로9-3 15.9 중로 13 가로9 세로16-4 45.7 대로 47 가로5 세로11-3 14.5 중로 14 가로1 세로5-1 15.9 중로 48 가로5 세로3-3 16.05 중로 15 가로1 세로5-2 17.1 중로 49 가로5 세로4-2 16 중로 16 가로1 세로5-3 16.4 중로 50 가로5 세로4-3 16.4 중로 17 가로1 세로5-4 16 중로 51 가로5 세로6-2 15 중로 18 가로1 세로6-2 15.9 중로 52 가로5 세로6-4 18.3 중로 19 가로1 세로6-4 15.3 중로 53 가로5 세로7-2 16.8 중로 20 가로1 세로7-3 15.6 중로 54 가로5 세로7-3 15.7 중로 21 가로1 세로7-4 16 중로 55 가로5 세로8-1 16.7 중로 22 가로1 세로8-3 15.5 중로 56 가로6 세로4-3 16 중로 23 가로1 세로8-4 15.4 중로 57 가로6 세로7-3 15.2 중로 24 가로2 세로5-1 16.4 중로 58 가로6 세로7-4 16.4 중로 25 가로2 세로5-2 15.9 중로 59 가로7 세로4-1 17 중로 26 가로2 세로5-3 15.1 중로 60 가로7 세로5-3 16.3 중로 27 가로2 세로5-4 15 중로 61 가로8 세로5-2 16.4 중로 28 가로2 세로6-4 15.8 중로 62 가로8 세로5-3 16.7 중로 29 가로2 세로8-4 16.2 중로 63 가로8 세로9-3 16.5 중로 30 가로3 세로3-2 15.7 중로 64 가로9 세로5-1 16.2 중로 31 가로3 세로4-3 16.4 중로 65 가로9 세로5-2 15.4 중로 32 가로3 세로8-4 15.4 중로 66 가로10 세로17-1 15.3 중로 33 가로3 세로9-1 15.9 중로 67 가로10 세로17-2 14.1 중로 34 가로3 세로9-2 16 중로 총 67건 : 대로 13건, 중로 54건 - 227 -

확인결과대각선형태로만석표가남은경우를제외하고대로의석표간거리가측정된것은총 13건이확인되었고, 중로석표간거리가측정된것은총 54건이었다. 대로석표간거리는가장짧은것은일본곡척으로 44.5척, 가장긴것은 48.2척이었고, 13건의평균값은 46.5척이었다. 중로석표간거리는가장짧은것이일본곡척으로 14.1척, 가장긴것은 18.3척이었고, 54건의평균값은 15.923척이었다. 표 9) 1929 년석표도수치를이용한도로의폭산출 구분 대로석표간거리중로석표간거리 (13건) (54건) 가장짧은경우 ( 일본곡척 ) 44.5척 14.1척 가장긴경우 ( 일본곡척 ) 48.2척 18.3척 평균값 ( 일본곡척 ) 46.5척 15.923척 미터법환산 ( 곡척 0.303m) 14.089m 4.824m 고구려척환산 ( 미터 0.356척 ) 39.575척 13.550척 비고 : 소수점세자리미만은버림. 대로석표간거리와중로석표간거리모두일본곡척으로약 4척가량, 즉 1.2m 가량의오차범위가확인되었는데, 이는세월의장구함으로인해도로유적폭이흐트러졌기때문이라여겨진다. 평균값에서많이벗어난사례도몇건있지만, 대개의경우는평균값과비슷한수치를보이고있다. 이를미터와고구려척의수치로환산해보았다. 대로석표간거리의경우미터법으로는보면 14.089m이고, 고구려척으로환산하면 39.575척이다. 중로석표간거리는미터법으로는약 4.824m, 고구려척으로는 13.550척이다. 오차범위를감안하면고구려인들이도로를만들때대로는 39척, 중로는그 1/3인 13척의폭을의도하였을가능성이높다고여겨진다. 그다음구획단위별크기를확인해보자. 현재까지사용된방법중가장타당성이있고합리적인것은龜田博의방식이라할수있다. 필자 - 228 -

또한이를응용하여각구간의크기를추정하고자한다. 필자가사용하려는방식은석표가확인된지점들을기준으로구글어스를이용하여전체길이를측정하고, 그사이에존재하는구역의숫자만큼을나누어평균치를내는것이다. 가능하면더많은샘플을이용하는것이신뢰성을확보할수있으리라여겨지므로, 1 그림 49) 의 A지점과 C지점사이거리를측정한값을 10개구간으로나눈수치와 2C지점에서 E지점사이거리를측정한값을 8개구간으로나눈수치를각각구하여다시평균내는방식을취하겠다. 오차범위를줄이고계산을편리하게하기위하여지도상에서가장바깥쪽에위치한도로는측정에서제외한다. 그결과는다음과같다. 1 a: A지점과 C지점사이거리 (10구간) : 약 1,816m b: 1구간의평균길이 : 181.6m c: 구간내전체도로폭 : 9 4.82( 중로 )=43.38m d: 도로폭제외한거리 : a-c=1,772.62m e: 도로폭제외한 1구간의평균길이 : d 10=177.26m 2 f: C지점과 E지점사이거리 (8구간) : 약 1,449m g: 1구간의평균길이 : 181.1m h: 구간내전체도로폭 : 7 4.82( 중로 )=33.74m i: 도로폭제외한거리 : f-h=1,415.26m j: 도로폭제외한 1구간의평균길이 : i 8=176.90m 도로를포함할경우한변약 181m 가량의구역이하나의단위로성립됨을알수있다. 도로폭을제외하면 A지점과 C지점사이는한변길이가 177.26m, C지점과 E지점사이는한변길이가 176.90m인정방형으로정리된다. 이를평균내면한변길이가 177.08m인정방형이도출된다. 이는關野貞이추정한한변길이약 178m와크게차이가나지않는수치이다. 다만임의적인수치대입에따른추정이아니라 1929년 - 229 -

당시조사된석표들간거리수치를모두더해평균값을내고, 구글어스라는도구를이용한거리측정으로결과를도출하였다는데나름의의미가있다. 177.08m를 1척 =35.6cm인고구려척으로환산하면약 497.38척이도출되는데, 오차범위를감안하면고구려당시한변 500척길이를기본으로하는정방형의田자형구획들이만들어졌던것으로이해할수있다. 그리고그내부는다시한변 88.54m(250척추정 ) 길이의정방형소구역 4개로구분되었던것으로보인다. 표 10) 장안성의도로와격자형구획수치에대한여러견해 단위 : 척 ( 고구려척 ) 구분대로폭중로폭소로폭대구역중구역소구역 關野貞 40 척 15 척 - - 500 척 - 112.6-12.8m 4.2m 1.4m 최희림 213.8-14m - 36척 12척 4척리화선 40척 13.5척 4.5척 (680m) 2000척 (240m 168m) (680 480척) 170m 500척 120m 84m 340 240척 85m 250척 한인호 리호 12.6m 36 척 4.2m 12 척 1.4m 4 척 - 3 240m 168m 4 168m 168m 3 120m 84m 4 84m 84m 5 182m 龜田博 14m 5m 1m - - 6 175m 5 181.35m 5 88.54m 214.089m 4.824m 기경량? 6 177.08m 39.575 39척 13.550 13척 497.38 500척 248.70 250척비고 : A최희림과기경량안의 1은도랑폭을제외한너비, 2는도랑폭을합한너비. B한인호 리호안의 3은정양문과함구문사이구간, 4는정양문서쪽과함구문동쪽구간. C 龜田博과기경량안의 5는도로폭포함, 6은도로폭제외. D( ) 는추산. - 230 -

3) 중성 내성의구조와활용격자형구획은평양성외성에서볼수있는모습으로잘알려져있으나, 중성에도격자형구획이존재하였다. 다만중성의영역전체에걸쳐있는것이아니라대동강연안의외성의격자형구획과연결되는평지공간에만제한적으로확인된다. 중성격자형구획의존재는한인호 리호가언급한바있고, 167) 田中俊明은중성남쪽성벽이중성과외성의격자형구획을가르며뻗어있다는점을들어이성벽이고려시대에축조되었다는주장의근거로사용하기도하였다. 168) 그러나중성격자형구획의존재는주목을받지못하였을뿐, 이미조선시대부터알려져있었다. 평양성병풍도등조선시대의지도들을보면외성뿐만아니라중성에도격자형구획을그려놓고있기때문이다. 그림 55)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성병풍도의중성격자형구획묘사 중성에서격자형구획이있는지역은서기산의동쪽지역, 평양시가 지의중심부인내성의남문과연접한곳이다. 이일대는조선시대부터 167) 한인호 리호, 1993 평양성외성안의고구려도시리방과관련한몇가지문제 조선고고연구 1993 1, p.18. 168) 東潮, 田中俊明, 1995 高句麗の歷史と遺跡, 中央公論社 ( 박천수 이근우역, 2008 고구려의역사와유적, 동북아역사재단, p.335.). - 231 -

이미내성성벽가까운곳부터시가지화되었고근대에들어서도이른시기에도시화단계를밟았다. 다만근대적시가지형성과정에서도기존에있던격자형구획을활용하였기때문에지도상에는도로와구역분할의형상이뚜렷하게확인된다. 흥미로운점은중성의격자형구획과외성의격자형구획사이에이질성이존재한다는점이다. 중성의남벽을기준으로그북쪽의격자형구획은외성의그것에비해기준축이약 5도가량시계방향으로기울어져있다. 이점은중성도로의라인을외성으로연장하여가상의선을그어보면명확히알수있다. 외성구역에서중성의도로와각도가일치하는도로는일제강점기때本町通이라불리던넓은길뿐이다 ( 그림 56에서 형태로꺾이는큰도로 ). 하지만이는근대에들어와기존의가로구획을무시하고새로뚫은전차길이다. 중성의도로를직선으로연장하여외성구역의본래가로구획형태를파괴하며연결한것이다. 이길을제외하면중성과외성의도로및공간구획은일관되게약 5도의각도차이를보이고있다. 그림 56) 중성격자형구획과외성격자형구획의각도차이 - 232 -

이러한현상이발생한이유는무엇일까. 두말할것도없이성벽이두지역을차단하고있었기때문이다. 이는중성과외성의격자형구획이중성남쪽성벽이만들어진이후에조성되었음을시사한다. 만약중성남쪽성벽이이미형성되어있었을격자형구획위를가로지르며후대에조영되었다면, 중성구역과외성구역에서격자형구획에각도의차이가나타는현상은발생할수없다. 중성남쪽성벽이고구려당대에이미존재하였음을보여주는유력한근거인셈이다. 중성구획에서보이는각도의틀어짐이고구려당대의것이아니라근대에들어와서시가지가형성되며발생한현상이라추정할수도있을것이다. 그러나근대시가지형성과정에서중성지역만일괄적으로각도가 5도기울어지는형태로기존공간구획을변형해야할특별한이유를찾기는어렵다. 외성의사례에서볼수있듯이철도의부설이나전차로의개설처럼기존의공간을파괴하고새로운공간을창출하는경우가아니라면, 근대의시가지형성은기존의도로와공간구획위에서이루어지는경우가많다. 중성의격자형구획은조선시대에그려진평양성그림들에서도확인되는만큼원래부터각도가 5도가량기울어진형태로존재하였고, 근대의시가지도그공간구획위에서형성되었다고보는것이자연스럽다. 중성의구조와관련하여또한가지흥미로운점이있다. 중성격자형구획의세로선과같은각도로정양문에서북쪽으로연장선 ( 녹색선 ) 을그어보면이를중심으로그좌우에보통문과경창문이거의같은간격으로자리하고있다는점이다. 물론이는실재하는도로선이아니다. 중성의남벽바로북쪽은서기산 창광산 안산의 3산이있어지형상일직선의도로가만들어질수없다. 조선시대지도와근대초의지도를확인해보아도이곳에는직선로가아닌부정형의도로가확인될뿐이다. 정양문에서북쪽으로이은가상선과보통문 경창문과의관계는단지우연의산물일수도있다. - 233 -

그림 57) 내성과중성의성문과도로 비고 : 1929 년석표도를베이스로하되내성내부의길은 1894 년의모습을반 영하고있는평양전투도를참고하여필자가표시. 그럼에도불구하고이러한배치가장안성축조당시존재하였던어떤 기획의반영일가능성은더탐구해볼필요가있다고여겨진다. 예컨대 내성에서시작하여서쪽으로뻗어중성구역과통하는도로가 2 개가있 는데, 169) 마침이들도로는정양문에서북쪽으로이어지는가상의선과 169) 두도로중아래쪽의동서대로는정해문을통과하는도로이지만위쪽의도로가성벽을통과하는지점에딱히문의이름이없다. 평양성병풍도를참고하면 上水口 라고불리는작은문이있었던것으로확인된다. 정해문과상수구사이에는 下水口 라는또다른작은문이존재하였다. 상수구로 는근대들어서민가의침범으로사라진듯하나, 조선시대그림을보면대로가아닐뿐길자체는존재하였던것으로확인된다. - 234 -

거의직교하는형태이다. 또정양문과함구문의중간지점에서같은각도로가상의선을북쪽으로이으면정해문과만나게되며, 함구문에서동쪽으로 1 구역떨어진지점에서같은각도로북쪽으로선을그으면주작문과만나게된다. 평양성내성과중성의도시구조에대하여아직까지충분히알려진바가없는만큼다양한가능성들을열어두고연구를진행할필요가있는것이다. 중성의서부에서는이렇다할고구려시대의도시유적지가발견된바없어서기존연구에서는딱히관심의대상이되지못하였다. 그런데이공간은원래부터비어있는공간이었을수있다. 성문만하더라도중성서벽에설치된보통문과경창문은북쪽에치우쳐있으며, 그서남쪽으로는상당히긴성벽이존재함에도다른큰성문이존재하지않는다. 舌池門이있기는하지만, 문루가설치되지않은매우작은문이다. 이곳에舌池라는연못이있었던점을감안하면본래水口門이었을가능성이높다. 이러한점을감안하면중성의서쪽지역은많은주민들이거주하는집거지가아니었으리라짐작되는것이다. 장안성이라는거대한성벽을축조한중요한목적은도시에대한방어능력을강화하기위함이다. 전쟁을수행하기위해서는수비측에서도대규모병력의운용이필요하고병사들이훈련을할수있는공간도있어야한다. 장안성의동쪽과남쪽은넓은강폭의대동강이흐르고있어서방어에크게유리하다. 또북쪽은높은산으로가로막혀있다. 반면서쪽에흐르는보통강은대동강에비해강폭이좁아적의도하및공격이상대적으로쉽다. 지형상서쪽이가장방어에취약한것이다. 따라서성내서쪽공간에대규모병력을집결시켜운용할수있는넓은개활지를마련하였다고짐작해볼수있다. 삼국사기 연개소문열전에는연개소문이部兵을모아군대를사열할것처럼꾸미고, 성남쪽에술과안주를차려여러대신을부른후이들이당도하자모두살해하였다는쿠데타내용이기록되어있다. 170) 여 170) 三國史記 卷 49, 列傳 9, 蓋蘇文諸大人與王密議欲誅事洩蘇文悉集部兵若将校閱者并盛陳酒饌於城南召諸大臣共臨視賔至盡殺之凡百餘人馳入宫弑王斷爲數段弃之溝中.. - 235 -

기서부병은장안성내에살고있는 5부의城民으로이루어진병력일것이다. 이들을사열한장소가성의남쪽이라고하였다. 대동강남쪽이라고생각할수도있겠지만, 연개소문이대신들을죽인후 달려서궁에들어가 ( 馳入宫 ) 영류왕을시해하였다고한점이주목된다. 대동강남쪽에서사열을하였다면왕궁에이르기위하여배를타고건너와야했을것이므로이기록의묘사와는어울리지않으며, 애초에열병식을위하여부병들이모두대동강을건너도록했다는것도어색한일이다. 그렇다면여기서의성남쪽이란내성의남쪽을말하는것으로볼수있다. 장안성내에서가장남쪽에위치한외성지역은주거지역이기때문에군대가열병을할만한장소라고하기어렵다. 반면중성에는대규모병력이열병을할수있는넓은공간과이를관람하기에적합한장소가모두존재한다. 안산이나창광산, 혹은서기산의높은지대에올라깃발등을이용해중성서부의개활지에서이루어지는군대의열병을지휘하고살펴볼수있는것이다. 이들 3산은 내성의남쪽 에해당되는곳이므로, 사료의내용과도부합한다. 연개소문은이곳어딘가에서사열을하다가대신 100여명을살해하고곧바로병력을이끈채말을몰아 - 아마도정해문을이용하여 - 성내로진입하였고, 남북대로를따라왕궁에이른다음영류왕을시해한것으로짐작된다. 171) 중성서쪽일대는군대의練兵이나열병외에도축제라든지넓은공간을필요로하는여러행사가열리는곳이었으리라짐작된다.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평양성병풍도를보면지역주민들이중성서쪽공간에운집한것이묘사되어있는데, 어떤행사를벌이고있는모습이다. 그형상을보면패를갈라石戰놀이를하고있는것으로보인다. 석전놀이는 隋書 에서도확인이되는고구려때부터존재하던평양지역의유명한놀이이자전쟁연습이기도하였다. 172) 고구려때와마찬가지로조선시대에도이일대는성민들의대규모행사가열리는공간으로활용되 171) 연개소문이사열을하기위해술과안주를장만하였다는장소는위치상안산 창광산 서기산중창광산일대가가장유력하다고여겨진다. 172) 隋書 每年初聚戲於浿水之上王乘腰輿列羽儀以觀之事畢王以衣服入水分左右爲二部以水石相濺擲諠呼馳逐再三而止.. - 236 -

었던것이다. 그림 58) 평양중성서쪽지역에서의석전모습 이제내성을살펴보자. 내성내의도로형태는중성이나외성의격자형구획에서느껴지는계획성이거의느껴지지않는다. 내성에서곧은형태로뻗은중심도로는남북대로 1개와동서대로 2개정도가확인된다. 하나덧붙인다면대동문에서남북대로와이어지는짧은도로정도를추가할수있다. 173) 그외에는취락지사이에형성된부정형의좁은길들이있을뿐이다. 내성에는성문이 6개있는것으로확인된다. 이중동서남북의대문역할을하는것은동쪽의대동문, 서쪽의정해문, 남쪽의주작문, 북쪽의칠성문이다. 북쪽끝에위치한암문은내성에서북성과통하는숨겨진문이며, 장경문도보조적인역할을하였던문으로여겨진다. 다만내성 173) 편의상남북대로는 주작문로, 북쪽의동서대로는 감영로, 남쪽의동서대로는 정해문로, 대동문과연결되는도로는 대동문로 라고지칭하겠다. - 237 -

에존재하는문들이고구려당시부터존재하였는지가문제가될수있다. 최희림에따르면대동문 정해문자리에서고구려때의주춧돌과다수의고구려기와조각들을확인하였다고하며, 칠성문의옹벽도고구려의성돌이라고한다. 남문인주작문만이른시기에사라져근거가될만한물질자료가없으나함구문과의관계나교통조건의편리함으로보았을때고구려때도내성남문의위치는이곳이가장적합한곳이라하였다. 174) 이러한진술은대체로인정할수있다고여겨진다. 그렇다면 4대문은고구려당시부터존재하였다고볼수있다. 다만내성의남문인주작문의위치에대해서는확인작업이필요하다. 그림 59) 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성도의주작문과함구문 최희림을비롯하여기존연구들은주작문이함구문과일직선으로연결된다고인식하였으나, 조선시대그림들을참고하면두문사이는직선으로연결되지않았던것으로확인된다. 육군박물관소장기성도에따르면함구문을통과한도로는주작문으로이어지지않는다. 주작문은그보다동쪽에위치한도로와이어진다. 이는평양전투도에서도확인되는바 174)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p.79-83. - 238 -

이다. 주작문의정확한위치는근대에만들어진전차길에서동쪽으로약 50m가량떨어진지점이다. 그북쪽으로남북대로가거의정북에가까운방향으로올라가다가동북쪽으로꺾이는데, 바로근대에형성된전차길이본래의남북대로와합류하는곳이다. 자료에근거하지않은선입견이나후대만들어진도로로인해혼선이발생하지않도록주작문의위치에대하여정확하게재인식할필요가있다. 그림 60) 만수대일대유적발굴지점 비고 : 小泉顯夫, 1938 平壤萬壽臺及其附近の建築物址 昭和十二年度古蹟調 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圖版第 69 를참조하여필자가표시. 그렇다면평양성내성의공간활용은구체적으로어떠하였을까. 왕궁부터살펴보자. 고구려왕궁이있던곳으로가장유력하게여겨지는곳은만수대일대이다. 조선시대에는이곳에평안도감영이자리하고있었다. 만수대일대에서는 1935~1936년에발굴조사가이루어져고구려유적이확인된바있다. 1935년 3월에는평양신사남쪽의의參道를개축하다가그동쪽경사지에서고구려시대기와층과함께門趾가확인되었다. 규모는남북 7m, 동서 4.8m의장방형으로바닥에화강암판석을 - 239 -

깔았고, 문지방석에는 1.45m 간격으로폭 28cm의홈 2개가있어수레바퀴가통과할수있도록한형태였다. 175) 최희림은이를궁전뒤에세운별궁터의문으로추정하였다. 176) 1935년 8월에는만수대대지에평안남도청사를짓다가건물터를발견하였다. 건물터는남북으로폭 4m, 길이는 36m인대규모회랑이었고불에탄흔적이있었다. 상층에서는고려시기의기와가출토되었지만, 하층에서는고구려시기기와가출토되어고구려시기에만들어지고고려시기에다시활용되었던것으로추정되었다. 177) 만수대지역은지대가높고전망이좋아서평양성내에서도매우우월한입지라고평가할수있다. 이에일찍부터유력한고구려왕궁지로지목받았고, 실제로여러고구려유적들이확인되었다. 178) 필자역시만수대와지역을고구려왕궁터로보는데무리는없다고생각한다. 다만왕궁의위치와관련하여 신당서 에다음과같은기록이참고가된다. 그임금이사는곳은평양성인데, 또한장안성이라고도부르며漢代의낙랑군이다. 경사에서 5천리가넘는거리이다. 산의굴곡을따라外城을두르고, 남쪽끝은패수이다. 왕은그좌측에궁을지었다.. 179) 매우소략한기록이기는하지만왜성의좌측에궁을지었다고하였는지궁금한지점이다. 좌측이라고한다면역시동쪽을의미한다고여겨진다. 그렇다면왕궁의중심공간은내성북쪽에서도대동강쪽과연접한동쪽, 즉경상동일대였을수도있지않을까. 만수대일대는매우좋은입지이기는하지만서북쪽성벽과너무붙어있어서유사시왕궁의안전 175) 小泉顯夫, 1938 平壤萬壽臺及其附近の建築物址 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pp.78-79; 小泉顯夫, 1986 朝鮮古代遺跡の遍歷 - 發掘調査三十年の回想 -, 六興出版, pp.326-328. 176)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111. 177) 小泉顯夫, 1938 平壤萬壽臺及其附近の建築物址 昭和十二年度古蹟調査報告, 朝鮮古蹟硏究會, pp.74-76. 178) 최희림은내성동북쪽의을밀대를배경으로한경상골일대를 비원 ( 공궐안의정원 ) 으로설정하였다. 경상골에있는연못자리와그주변에서고구려기와조각이많이발견되었는데이는비원에세운누정터로보인다고하였다 (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112.). 179) 新唐書 卷 220, 列傳 145, 東夷, 高麗, 其君居平壤城亦謂長安城漢樂浪郡也去京師五千里而贏隨山屈繚爲郛南涯浿水王築宮其左.. - 240 -

과보호의측면에서우려되는면이있다. 경상동일대는그북쪽에북성과통하는암문이있고, 동쪽성벽에장경문이있다는점, 그리고내성에서가장중요한남북대로역시동쪽으로약간치우친곳에형성되어있다는점에서주목된다. 육군박물관소장평양기성도의모습을참고하면, 조선시대에는각종창고들이밀집해있던곳으로여겨지는데, 경상동일대의연못부근에서도고구려기와가많이출토되었다고하므로, 왕궁유적의존재를적극적으로검토해볼필요가있다. 한가지더짚고싶은점은고구려왕궁의정확한위치가만수대일대이든혹은경상동일대이든, 그입지가북쪽모란봉으로부터내려오는산줄기와이어져있다는점이다. 이는왕이거주하는공간으로서산을중시하였던고구려인들의왕도관이장안성단계에서도여전히작동하고있음을보여주는근거라할수있다. 평양성내성은남북으로길쭉한형상을가지고있다. 하지만 4대문중에서동문 서문 남문은모두남쪽으로치우친곳에자리하고있어서전체적으로균형이맞지않는다. 여기에는나름의이유가있을것이다. 내성의중심도로형태를보면북쪽의동서대로인감영로를기준으로내성의공간이남북으로양분된다는사실을알수있다. 그북쪽은앞에서도살펴보았듯왕궁터로추정되는곳이다. 자연히그남쪽은주요관청및핵심귀족들의주거지가있었던공간으로이해된다. 내성전체가아닌감영로이남의공간만을염두에둔다면동문 서문 남문간의거리와위치는거의등간격으로, 오히려매우균형잡힌형태로배치되어있음을알수있다. 일반적으로내성은왕궁, 중성은귀족, 외성은일반민이거주하는공간이었다고설명하는경우가많지만내성전체가왕궁이었다고보기보다는북쪽구역과남쪽구역으로분화된기능을띠고있었다고보는것이타당할듯하다. 평양성전체의대문역할을하는것이대동문이라는점을감안하면, 대문을들어서자마자바로왕궁내부로들어선다는개념은역시어색하다. 왕궁은그보다한단계더내밀한공간에자리하고있다고보는것이자연스럽다. - 241 -

그림 61) 장안성의 전체 복원도 감영로 북쪽이 모두 왕실 공간으로 설정되었다면 왕실 사람 외에는 내 성의 북문인 칠성문을 이용하는 것이 불가능하였을 것이다. 이를 위한 대안이 중성 서벽의 경창문이다.180) 중성에 마련되어 있는 보통문과 경 - 242 -

창문은서로너무가까운곳에자리하고있어그기능이중복되지않는가하는의구심이들수있다. 하지만보통문은평양성의서쪽으로빠져나가보통강건너편으로가기위한문, 경창문은성의북쪽길로이어지는문이라생각하면납득이간다. 경창문의존재는고구려시기에내성북쪽지역전체가일반의출입이불가능한공간으로설정되어있어칠성문이내성북문으로서의기능을온전히하지못하였다는것을보여주는좋은증거인셈이다. 4) 장안성축조의斷續性과이도의배경앞서살펴보았듯이장안성의내성과중성 외성간에는뚜렷한공간구획의차이성이확인된다. 이는왕궁과주요관청, 상위귀족들의주거지가소재하였을내성과일반민이주로거주하였을외성과의성격차이로상정할수있을것이다. 그러나이는충분한설명이라고할수없다. 첫째, 과연장안성에서신분에따른거주지구별이그렇게철저하였을까하는문제가있다. 내성에서왕궁의영역을제외한지역은상당히제한적이기때문에고구려왕도의모든귀족들이내성에거주하기에는공간적으로부족함이있었을것으로여겨진다. 따라서귀족들의거주지는내성뿐아니라중성의격자형구획지역도포함하였으리라짐작되며, 외성지역에서일반민과혼거하였을수도있다. 신분에따라내성 중성 외성으로거주구역이나뉜다고보는것은정황론일뿐자료에근거한이해는아니다. 오히려장안성내부의행정구역이 5부로나뉘어져있었으리라는점을감안하면, 귀족들의거주지가외성에널리퍼져있었다보는것이더자연스럽다. 181) 180)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79. 181) 신라의왕도인경주에서의발굴성과를보면坊내부에서택지가대로에면한것이소로에면한것보다규모가크다고한다. 대문역시도로의네변을택지로하는가옥은직접대로쪽으로낸반면, 택지중앙부의가옥은골목길에해당하는작은도로쪽으로문을설치하였다고한다. 신분에따라같은방내에서의택지분급에차별이있었던것이다 ( 國立慶州文化財硏究所, 2002 新羅王京 - 發掘調査報告書 1, p.556.). 김희선은신라왕경의사례를참고하여고구려장안성에서도신분이높은귀족거주지는외성안의대로를중심으로배치되었을가능성이높다고하였다 ( 김희선, 2015 고대동아시아의천도와도성 - 계획천도와좌북조 - 243 -

둘째, 내성의위상이외성에비해높다는점을감안하면왕의권위와통치력을과시하기위한의도를가진공간구획이외성과비슷하거나그이상으로치밀하게구현되었어야할것인데, 실제로는그렇지않다는점이다. 예컨대唐의장안성은궁성정면으로넓은주작대로를마련하고도성내공간을격자형으로일사분란하게구획하여황제의권력을도시전체에시각적으로드러내과시하였다. 그러나고구려장안성에서격자형구획이전개된곳은외성과중성일부공간일뿐이며, 내성에서는그러한흔적이전혀보이지않는다. 장안성이초축단계부터외성까지의구축을염두에두었다고보는견해도있으나, 182) 내성과중성 외성의공간구획에서보이는이러한이질성을보면역시양자는전혀다른의도에서축조되었다고이해할수밖에없다. 이에대한이해를심화하기위해문헌과각자성석명문을통해확인되는장안성축조및이도와관련된기록들을정리해제시하면그림과같다. 이들기록에서가장눈에띄는것은유별나게긴축성기간이다. 문헌에따르면 552년에축성을시작하였는데, 각자성석에서는 589년에외성과중성의성벽을쌓기시작하였음을알리고있어적어도 37년이상의시간을들여축성을하였음을알수있다. 이는매우비정상적인상황이다. 각자성석간에도 566년의내성축조와 589년의외성축조사이에 23년의간극이확인된다. 이들자료를통해확인할수있는것은장안성축조의斷續性이다. 내성과중성 외성간공간구획에다른양상이발생한핵심요인은결국축성이이루어진시기의차이때문이라고이해할수있는것이다. 남식도성구조를중심으로 - 동아시아문화연구 63, p.118.). 182) 임기환, 2003 고구려都城制의변천 한국의도성 - 都城造營의傳統 -, 서울시립대학교부설서울학연구소, p.23. - 244 -

그림 62) 장안성축조및이도관련기록들의시차 장안성축성의배경에대해서는몇가지의견이제시된바있다. 채희국은장안성을고구려도성의효시라고규정하는한편, 장안성축성을우리나라사회생산력의발전결과라고평가하였다. 183) 또최희림은 5~6세기고구려의경제 문화발전과함께새로운침략세력인돌궐등외래침략자들을방어하기위하여보다강한방어력을가진수도성건설이요구되었다고하였다. 184) 이러한설명들은발전론적시각에서장안성의출현을설명한것인데, 축성의직접적인원인이나배경을논한것이라보기에는일반론적인서술이다. 좀더구체적으로외부로부터의군사적위협을강조한설명도있다. 183) 채희국, 1964 대성산일대의고구려유적에관한연구, 사회과학원출판사 (1989, 북한고고학술총서 13- 유적발굴보고 9, 民族文化, p.84.). 184) 최희림, 1978 고구려평양성, 과학백과사전출판사, pp.8-9. - 2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