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後期의 田丁連立에 대하여 田丁制의 해체 과정과 그 대책을 중심으로 朴 京 安* Ⅰ. 머 리 말 Ⅱ. 田丁制의 해체과정과 役制운영 1. 農莊의 확대와 田丁制 2. 役制운영의 마비 : 田無役主 현상 Ⅲ. 田民辨正事業의 추진과 田丁連立 1. 田民辨正事業의 추진 2. 麗末 田丁連立制의 운영과 그 한계 Ⅳ. 맺 음 말 Ⅰ. 머 리 말 麗末 田制改革은 이른바 私田의 革罷 에서 출발하였다. 그러나 이는 결국 收租權의 再 分配를 위한 私田의 公收를 의미하였다. 그만큼 이 시기 私田은 토지제도를 둘러싼 제모 순의 핵심을 이루고 있었다. 따라서 私田 문제를 정확히 이해함으로써 전제개혁의 본질 도 해명이 될 수 있게 된다. 私田의 실체에 대한 이해는 연구자의 관점에 따라서 사뭇 다른 모습을 보여왔다. 흔히 農莊문제와 결부되어 크게 두 경향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면 이 시기 私田은 사실상 私 有地化된 것으로 보고 農莊은 이러한 사유지의 集積으로 보는 견해1)가 있는가 하면, 어 디까지나 收租地로서의 성격을 갖는 것이며 문제가 되고 있던 농장은 이러한 收租地의 集積을 통한 토지지배형태라는 것2)이다. 전자의 경우에는 이른바 權力型 農莊論이 그것 * 서을市立大學校 講師. 1) 姜晋哲, 高麗의 權力型 農莊에 대하여 ( 韓國中世土地所有硏究, 1989). 그는 소위 권력형은 농장 주의 정치적 권력이 전제가 되어 존립했다는 의미에서 매우 미숙하고 불안정한 것이었다고 하였다.
- 79 - 이며 地代收取의 경영형태로 설명하고 있다. 반면 후자의 경우에 私田은 收租權이 강화 된 결과 祖業田化된 토지라는 것이며 따라서 농장의 경영형태는 어디까지나 收租權의 행사에 머무르게 된다. 私田이 혁파의 대상이 되었다는 사실은 그 성격이 어떻든 법적으로는, 분명히 수조권 분급지로서의 외형을 갖추고 있었던 것을 말해준다.3) 그 중에서도 특히 世傳土地인 전 시과 계열의 수조지는 永業田으로도 불리어졌으며, 무신정권 이후 대몽항쟁 기간을 거치 면서 사실상 붕괴된 것으로 생각해왔다. 그리고 그 양태는 위에서 말한 바의 私有地化된 혹은 家產化된 토지라는 것이다. 그러나 제도로서의 운영과 같은 구체적 실태에 대해서 는 農莊문제에 가려 제대로 파악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바로 이 점이 私田 나아가 農 莊에 대한 상이한 견해를 초래하게 한 근원이 아닌가 생각된다. 지금까지 여말 私田에 대해서는 적지않은 연구가 있었다. 그리고 그 실체는 私田의 量 的 팽창과 함께 質的 변화로서 이해되어 왔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私田制 度 그 자체만의 검토로서는 납득하기 어려운 한계가 있지 않나 생각된다. 왜냐하면 公田 과 私田은 전혀 독립적으로 존재했던 것은 아니고 상호관련성을 내포하고 있었기 때문 이다. 따라서 田租의 수취 및 분배문제는 아울러 검토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로 이러 한 점에서 田丁制를 통한 구조적 분석의 필요성이 제기된다고 하겠다. 田柴科제도는 여초의 사회적 현실을 반영한 경제제도였다. 그 바탕을 이룬 田丁制는 일찍이 신라시기에 그 연원을 둔 것으로서, 당시의 신분제적 질서를 바탕으로 田制와 役 制(土地와 諸職役)와의 결합을 통해 재구성된 것이었다.4) 이를 통해서 田租의 수취와 더 불어 분배(收租權 分給)가 가능하였던 것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 고려후기의 私田 문제와 그에 대한 해석은 田制釐正策 등 封建的 수취기구에 대한 재정비 과정5)이 있었 음을 감안하지 않으면 아니될 것으로 생각된다. 사실 몽고간섭기라는 제약은 있었지만 당시에 작성된 甲寅柱案은 양전을 통해서 작성된 2차적 장부로서, 이를 통해서 보면 어 떠한 형식으로든지 조세 수취와 더불어 收租權 分給에 관련된 일정한 정비과정이 있었 을 듯하다. 비록 불완전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당시의 상황으로 보아, 그러한 과정마저 없었더라면 14세기 이후의 고려왕조는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6) 따라서 本稿는 役과 土地의 분리가 진행되는 전후의 시점으로부터 甲寅量田 및 그 이 2) 浜中昇, 高麗末期の田制改革について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13, 1976). 李景植, 朝鮮前期土地制度硏究 (一潮閣, 1986). 3) 그런 점에서 사유지의 집적에 의한 권력형 농장론은 설득력이 약하다. 4) 拙稿, 高麗時期 田丁連立의 構造와 存在形態 ( 韓國史硏究 75, 1991). 5) 拙稿, 甲寅柱案考 忠宣王代의 田制釐正을 중심으로 ( 東方學志 66, 1990)., 14 世紀 甲寅柱案의 運營에 대하여 이재룡박사 환력기념 논문집, 1990). 6) 浜中昇에 의하면 고려말기에 전국 토지의 대부분이 농장에 흡수되었다거나 혹은 농민의 대부분이 농장의 소작인이 되었다는 견해는 근거가 박약한 것이라고 한다. 私田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군현 제를 중심으로 지방지배체제는 기복이 있었다고 해도 고려말까지 유지되었다는 것이다(浜中昇, 앞 의 논문 P.51).
- 80 - 후의 田丁連立의 운영 등 田制釐正策에 대한 고찰을 통해, 결국 私田문제에 대한 구조적 분석에 목표를 두고자 한다. 선행작업으로서 요청되는 麗初이래의 田丁制의 내용과 그 운영원리로서의 田丁連立構造에 대해서는 이미 언급한 바가 있으므로, 여기서는 이를 토 대로 田丁連立의 붕괴과정과 그 배경을 검토한 후 이에 대한 국가의 대책에 대해서 검 토하게 될 것이다. 다만 田丁制 및 田丁連立에 대해서는 아직 확립된 정설이 없는 만큼, 본고 역시 그에 따른 일정한 부담과 한계를 갖지 않을 수 없음을 미리 지적하고자 한다. Ⅱ. 田丁制의 해체 과정과 役制운영 고려왕조는 흔히 말하듯이 처음 호족연합정권에서 출발했다. 출발이 그러하였으므로 당초부터 강력한 왕권을 발휘할 수 있는 형편은 아니었다. 어느 면에서는 호족세력에 의 존함으로써 통치구조가 완결될 수 있었던 그런 상황이었다. 고려의 경제체제는 그와 같 은 조건하에서 성립되었다. 국가는, 처음 수취제도를 중심으로, 과거 호족세력이 갖고 있던 지배기구를 그대로 새 로운 통치기구의 하부구조로서 이용하고자 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방식은 국가 성립 초기에 토착세력의 반발을 최소화하는 한편 행정능률을 기할 수 있었다. 또다른 면 에서 보면, 국가는 收租權 分給의 형식을 통해 기득권 세력을 예우함과 동시에 이들을 지속적으로 장악하려는 의도를 갖고 있었다. 여기에 仕者世祿으로서의 의미를 가졌으면 서도, 특히 초기에 가까울수록, 순수한 관료서열보다는 인물을 중시하는 등 범관인층을 대상으로 운영되어야 했던 사정이 있었다. 이러한 사정과 관련하여 국가는 田制와 役制를 유기적으로 연결시키는 체계로서의 田 丁制 그리고 이를 토대로 한 田丁連立과 같은 구조를 생각하게 된 것이 아닌가 한다. 田 丁連立이란 관의 파악하에 收租地가 世傳 遞受됨을 뜻하였다. 그러나 田丁連立은 그 토 대로서의 田丁制가 제대로 기능을 발휘할 경우에만 의미가 있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점 에서 볼 때에 田丁制의 변화와 收租權 分給制7)의 상호연관을 살펴보는 것은 대단히 중 7) 收租權은 원래 王土思想에 입각하여 民田에 부과되는 地稅를 의미한다. 收租權 分給제도는 국가가 행사해야 할 收租權을 귀족관료들에게 위임하고 반대급부로서 국가에 대한 충성을 기대할 수 있었 다(王土思想은 비록 擬制的이긴 하였으나 이 점에서는 현실적 의미를 갖고 있었다). 이는 한편으로 는 국가재정의 축소를 가져온다는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나, 다른 한편으로 보면 미약한 왕권의 입 지를 강화시켜 주는 효과가 있었다. 新羅의 祿邑制에서 田柴科제도 그리고 科田法에 이르기까지 그 큰 흐름은 변화가 없었다. 世傳性이 강조된 田柴科는 바로 여초이래의 정치적 현실을' 반영한 것이며, 이른바 崔承老가 지향했던 바와 같은 귀족관료제적 특성이 드러나 있는 제도였다. 다만 국 가는 收租權 授受에 일정한 제한을 가함으로써 일찍이 祿邑田에서 보여주었던 것과 같은 土地와 民에 대한 이중적 지배를 방지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그리고 다만 신분에 따라 收租權을
- 81 - 요하다고 할 수 있다. 1. 農莊의 확대와 田丁制 최근 金琪燮씨는 田丁制를 本貫制와 함께 고려사회구조를 파악하는 핵심적 요소로 파 악하고자 하였다.8) 물론 田丁制의 연원과 구조 나아가 그 기능 등 중요한 부분에 대해 서는 이론의 여지가 있으나 이제 이를 부정하고서는 문제의 핵심에 접근할 수가 없지 않은가 한다. 本貫制에 관해 蔡雄錫씨는 新羅下代 個別家戶에 의한 농업경영을 통해 공동체원간의 분해가 심화된 조건하에서, 골품제 붕괴 이후 성립한 새로운 사회운영원리로 파악하였 다.9) 그의 견해에 의하면, 本貫制는 성종 14년 경에 이르러 완성된 것으로서, 羅末 豪富 層을 중심으로 재편된 공동체가 고려 왕조의 집권화 경향과 타협 재조정되면서 籍의 작 성을 통해서 지배질서로 제도화된 것이었다.10) 특히 이 과정에서 量田과 籍의 작성이 이 루어지고, 그 바탕 위에서 각 공동체의 영역을 확정하고 영역내 규제가 이루어지게 되었 다. 丁戶數와 田丁數를 고정시키며 나아가 영역내의 호부층을 포함한 제계층의 토지소유 와 경영형태를 국가의 제도 아래 정치적으로 총괄하고, 그 현상을 지속적으로 고정 유지 시키는 기능을 담당하는 것이었다.11) 구체적으로는 전정의 영역내 제한과 아울러 田丁의 分割禁止 足丁과 半丁을 상호간에 교류할 수 없도록 하는 제한 그리고 직역을 매개로 한 田丁의 소유 및 연립규정 등은 丁의 설정을 통해 재편된 공동체의 토지관계를 고정 유 지하려는 조처들이었다. 이처럼 사회사적 시각에서 설정된 本貫制의 개념은 그 핵심적 요소가 경제적 규제와 관련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보면 本貫制의 경제적 표 현이 바로 田丁制로 설명될 수도 있을 것이다. 고려정부는 田丁制를 통해서 재지사회를 통제하는 한편, 중앙관료체제를 연결하는 중 요 매개체 역할을 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말하자면 田丁制는 고려사회를 통해서 일 관해온 총액제수취방식의 중요한 고리였으며, 役制의 운영을 통해서 職役종사자에게 지 급되는 收租權 分給의 중요단위로도 기능하였다. 따라서 田丁制의 약화 혹은 붕괴는 그 와 같은 연결고리의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收租權 分給制가 문제화되는 시점은 대체로 무신정권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시기 에 이르러 本貫制的 지배구조도 역시 점차 이완되는 양상을 보이게 된다.12) 그러나 경제 차별적으로 연립할 수 있도록 한 것이 田丁連立이었을 것이다. 8) 金琪燮, 高麗前期 田丁制 硏究 (부산대 박사학위논문, 1993). 9) 蔡雄錫, 高麗前期 社會構造와 本貫制 ( 高麗史의 諸問題, 三英社, 1986). 10) 蔡雄錫, 위의 논문. 11) 蔡雄錫, 위의 논문 p.379. 12) 部曲制 지역의 저항, 豪族人과 雜族人의 대립을 비롯한 領域內 제계층간의 갈등, 在京 在地人間의
- 82 - 적 관점에서 볼 때에 당시 사회구조에 결정적 타격을 준 것은 무엇보다도 이 시기 점차 확대되고 있었던 奪占 兼倂에 의한 農莊의 확대라고 하겠다. 고려왕조의 난숙기로 알려져 있는 예종 인종대는 그 문화적 융성에도 불구하고 사회 경제적인 모순도 배태되어 있었다. 이자겸에 의한 토지탈점 등도 그러한 한 例에 속하지 만 이러한 모순점은 무신집권을 계기로 보다 심층적으로 드리워지게 되었던 것으로 보 인다. 예컨대 富强兩班 으로 불리는 세력들에 의한 古來丁田의 탈점 겸병 등 民有地를 비롯한 土地兼倂이 바로 그것이었다. 明宗十八年 三月 下制 各處富强兩班 以貧弱百姓賖貸未還 劫奪古來丁田 因此失業益貧 勿使富戶兼幷侵割 其丁田各還本主( 高麗史 권79, 食貨2 借貸條). 위에서 明宗은 下制를 통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즉 各處에 있는 富强兩班이 부 채를 빌미로 貧弱한 百姓의 古來 丁田을 劫奪함으로써 이들이 失業하여 더욱 가난해진 다는 점과 나아가 이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富戶로 하여금 兼倂하여 侵割하지 못하도록 하고 丁田은 本主에게 되돌려 주라는 것이다. 백성층은 원래 향촌사회내 유력계층으로서 田丁制 편성의 상층부에 편성되어 丁戶로서의 직역을 담당해야할 계층이었다. 이들이 경 제적으로 몰락해가는 과정에서 토지겸병이 중요한 매개가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국가 가 우려했던 것은 이로 인해 백성들이 失業하여 몰락하는 사태였다. 이에 대하여 還本 主 의 조처를 내리고 있다. 토지겸병의 계기가 된 賖貸未還 의 배경에 대해서는 정확한 내용을 알 수가 없다. 그 러나 이 시기 농민 내부의 계층분화현상이 심화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제도적 측면 의 경우 役의 不均으로 인한 과중한 부담이 貢戶民의 逃流로 이어지고 있었음도 유의할 필요가 있다.13) 한편 같은 시기에 京人 혹은 道門僧人 에 의한 불법 행위도 비슷한 현상이었다. 明宗十八年 三月 制曰 京人於鄕邑盛排農場作弊者 破取農場以法還京 道門僧人 諸處農 舍 冒認貢戶良人以使之 又以麤惡紙布强與貧民 以取其利 悉皆禁止( 高麗史 권85, 刑 法 2 禁令). 이른바 京人들은 鄕邑에 農莊을 盛排하여 작폐를 일삼고 있었으며, 道門僧人 은 諸處 갈등, 領域間의 갈등이 그것이었다(蔡雄錫, 위의 논문 p.384 주 156). 13) 高麗史 권78, 食貨1 貢賦條, 睿宗三年二月判 京畿州縣 常貢外徭役煩重 百姓苦之 日漸逃流 主 管所司 下問界首官 其貢役多少 酌定施行. 高麗史 권78, 食貨1 貢賦條, 明宗十八年三月下制 諸州 府 郡 縣百姓 各有貢役 邇來守土員僚 斜屬使令 徵取役價 其貢賦經年除免 掾吏之徒 政遵此式 役之不均 貢戶之民 因此逃流 各道使者 巡 行按問 如此官以罪奏聞 其餘掾吏 依刑黜職 令均貢役.
- 83 - 에 農舍를 설치하고 불법적으로 貢戶良人 즉 국가에 부세납부의 의무를 지닌 公民을 노동력으로 삼아 부리는가 하면 물건을 강매하여 이식을 취하고 있었다. 국가는 법으로 써 농장을 破取하고 京人을 還京시키는 한편 위법 행위를 금지시키는 등의 조처로 대응 하였다. 富强兩班 과 京人 은 대체로 같은 세력으로 보아도 틀림이 없을 것으로 생각된다.14) 이러한 내용들은 이 시기 民有地를 위요한 土地兼倂을 통해 農莊이 확대되고 있었으며 노동력은 貢戶良人으로 구성되는 人戶의 集中을 통해 충당되고 있었음을 드러내고 있다. 古來丁田 혹은 貢戶良人의 奪占은 농민을 토지에 긴박시켜 이를 기반으로 운영되어 오 던 田丁制的 편성의 약화를 초래할 수밖에 없었다. 국가는 이에 대해 農莊의 해체로써 대처하고 있었으며 그것은 法에 의한 제재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15) 이처럼 貢戶良人을 통한 농장은 田丁制에 기초하여 편성된 수취구조를 와해시키고 있 었다. 그것은 또한 경영면에서 종래 田丁制의 틀내에서 존재하였을 民田型 農莊이라든가 혹은 奴婢를 통해 운영되어 온 直營制 農莊과도 구별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이와 관련하 여 아래의 기록을 검토해 보기로 한다. (金俊)列置農莊 以家臣文成柱管全羅 池濬管忠淸 二人爭事聚斂 給民稻種一斗 例收米一 碩 諸子效之 競聚無賴 怙勢恣橫 侵奪人田 怨讟甚多( 高麗史 권130, 金俊 傳). 武人政權 執政者인 金俊은 家臣 2人을 내세워 全羅 및 忠淸 지역의 농장을 관리하고 있었다. 給民稻種一斗 例收米一碩 諸子效之 했다는 내용과 특히 諸子 效之 하였다는 기록에 유의할 필요가 있다. 이러한 점을 통해 이 시기 農莊이 地主佃戶制的 경영을 통 해 운영되었으며 동시에 이러한 방식의 농업경영이 광범위한 지역으로 크게 확대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위의 農莊은 그 내용으로 보아 水田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 던 것으로 생각하는 바, 당시 농장의 확대는 地主制 농업경영과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을 것이다. 民有地의 탈점에 의한 겸병은 토지의 사적 소유권을 토대로 하고 있는 이 시기 토지 관행상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다. 부세수탈 혹은 고리대 등으로 인해 所耕農民의 몰락 과정이 선행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데 토지탈점은 公田에서 뿐만이 아니라 이에 그치지 않고 京外의 兩班田 및 軍人 14) 그러나 토지겸병의 주체가 반드시 중앙의 권력층이였는지에 대해서는 검토의 여지가 있다. 나중 의 일이지만 在地勢力에 의해서도 겸병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다만 그럴 경우 국가에 의해 크게 제약되기 마련이었다(주 17 참조). 農莊의 유형 가운데 權力型 農莊은 私田의 集積과 관련이 있으며, 在鄕地主型 農莊의 경우에는 民田型 農莊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성에 있어서 반드시 차이가 나는 것은 아니었을 것으로 보인다. 경우에 따라서는 다만 권력의 주체가 중앙권력과 재지권력의 차이 정도였다. 보다 중요한 것은 이들 모두 田丁制를 파괴하는 것으로서 土地奪占 및 壓良爲賤 등을 통한 불법적인 것이었으나, 在鄕地主의 경우에는 상대적으로 국가에 의해 크게 제약되어 있었다는 점이다. 15) 法이라는 것은 본관제와 관련된 전정제적 규제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 84 - 田 등 私田에 있어서의 收租地 탈점으로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전정제 편성 에 있어서 公田의 농민은 貢戶良人으로 표현되었으나, 私田에서는 이른바 佃客으로 존재 하였다.16) 후자의 경우 私人의 수조지라는 특징을 갖고 있었으나 소유권의 측면에서 民 田이라는 공통점이 있었다. 明宗十八年三月下制 凡州縣各有京外兩班軍人家田永業田 乃有姦詰吏民欲托權要 妄稱閑 地 記付其家 有權勢者又稱我家田 要取公牒 即遣使喚 通書屬托 其州員僚不避干請 差人徵 取 一田之徵 乃至二三 民不堪苦 赴訴無處 案忿衝天 災疹間作 禍源在此 捕此使喚 枷械申 京 記付吏民 窮極推罪( 高麗史 권78, 食貨1 田柴科條). 위에서는 州縣에 있어서 京外의 兩班 및 軍人의 家田 뿐만이 아니라 永業田이 탈점되 고 있는 사실을 보여 주고 있다. 이는 소위 權要에 의해 저질러지는 일이었으나 在地吏 民을 매개로 하는 특징을 나타내고 있었다. 그 수법은 우선 閑地로 妄稱하고 權勢者도 또한 我家田이라 稱하는가 하면 반드시 公牒을 취하여 使喚을 보내 通書屬托함으로써 其州의 員僚도 干請을 避하지 못하여 差人徵取 한다는 것이다. 그리 하여 一田之徵이 二三次에 이르게 되니 民不堪苦하게 된다는 것이다. 收租權을 침탈하는 주체는 權要로 불리워지는 세력이었으며 피침탈의 대상은 京外의 兩班과 軍人으로 나타나고 있다.17) 그것은 永業田에 대한 收租權 침탈의 경우를 뜻하는 것이며, 이 과정에서 같은 私田에 田主가 二三人으로 늘어날 수도 있음을 뜻하는 것이 다. 원래 收租權은 一田一主가 원칙이었으며 이는 또한 官의 파악하에 행사되어야 했다. 그리고 그러한 원칙위에 전정제는 편성되고 있었다. 그러나 權要는 吏民을 통해 公牒을 만들어 기왕의 田主와 대항하고 있다.18) 따라서 이제 그러한 원칙이 무너지는 가운데 수 조권의 탈점이 공공연하게 진행되고 있었던 것이다. 이른바 수조권의 兼倂문제였으나 법 적 절차를 벗어나 수조권이 私授되는 경우도 있었다.19) 16) 이 시기 佃客은 佃戶라는 명칭으로도 불리어졌던 것 같다. 17) 탈점의 주체는 경우에 따라서 在地세력인 경우도 있었던 것 같다. 高麗史 권85, 刑法2 禁令 恭愍王 7 년 4월條, 都評議使司上言 比來按廉守令紀綱不立 諸道鄕 吏縱逞其欲 點兵則不及富戶 收租則私作大斗 匿京丁爲其田 聚良人爲其隷 誅求於民靡有紀極宜令御 史臺 及諸道按廉使 究其元惡者 車裂 輕者杖流 從之. 위에서처럼 諸道의 향리들은 경군의 수조지를 자기 것으로 삼기도 하였다. 그러나 여기서 聚良人 爲其隷 라는 부분을 보건대 단순한 수조지 탈점만이 아니고 소유권마저 빼앗은 것처럼 보인다. 이 보다 앞선 시기 (忠穆王代)에 逃人陳荒田에서의 計年徵收가 문제되고 있었던 사실과 무관하지는 않은 것 같다. 18) 公牒을 위조하는 경우 진짜와 가짜는 구별하기가 매우 곤란하게 된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李 穡도 그 판별의 어려움을 지적하고 있다. 19) 이 시기에 이르러 수조지는 官의 파악을 뒤로 한채 私的으로 授受되기도 하였다. 高麗史 권102, 權守平傅, (權守平[? 高宗 37년 : 1250]) 安東人 (중략) 嘗爲隊正 貧居 有郞中 卜章漢 以非罪見痕 守平遞食其田 有年 及章漢遇赦還 守平素不相識 且其田租已漕于江 守平袖租簿
- 85 - 이상은 閑地를 妄稱하여 私田의 收租權을 탈점하는 경우였으나 아래에서 나타나는 바 와 같이, 陳田化된 內外兩班 軍 閑人田은 地主制 經營을 통해 農莊으로 운영되는 경우도 있었다. 이 경우는 公田으로서의 民田의 탈점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당시에는 公 私田을 막론하고 흔희 陳田開墾은 탈점의 수단으로 이용되고 있었다.20) 庶子崔坑 亦傳繼爲 (중략) 內外兩班 軍 閑人等矣 父祖傳持田丁乙 侵奪爲称 色掌員 別 定爲責役 各別爲在 外民乙用良 耕作令是 置自利爲 先齊 荒年及 遠年陳田杳出乙 豊年例 同亦 高重 捧上爲沙餘良 (중략) 別將金仁俊直子一名乙良 東西班勿論 參職超授 直子 無 在如亦中 內外孫 甥姪 女壻 東西班勿論 七品爲等如差備敎矣 田丁乙良 田杳幷 一百結 奴 婢乙良 各十口 賜給敎是齊(高宗 45 1258, 尙書都官貼 ). 위에서 崔坑은 직접 色掌員을 別定하여 責役할 뿐만 아니라 外民 을 사용하여 田租를 직접 거두어 들이고 있었다. 여기에서의 外民 은 무토지 농민으로서 아마도 몰락한 貢戶 農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원래 위의 內外兩班 軍 閑人 등의 父祖傳持田丁 즉 永業田 에는 佃客이 있었을 것이다. 外民 을 동원하고 있음은 토착농민의 所有權까지 침탈하였 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崔沆은 自利을 우선으로 함으로써 荒年 및 遠年의 陳田畓의 소출 을 豊年의 例와 똑같이 높고 무거웠음을 또한 보여주고 있다. 이를 통해서 볼 때에 陳田 開墾을 매개로 한 收租權의 침탈은 所有權의 침탈과 전혀 별개의 사항이 아님을 알 수 있다. 이렇게 될 경우 원래의 농민은 토지를 잃고 몰락함으로써 田丁制的 구조로부터 떨 어져 나가기 마련이었다. 이 시기 개간정책은 긍정적 측면이 있었으나 그에 못지 않은 많은 문제점을 야기시키 고 있었다. 개간의 확대는 田丁制를 이완시킬 가능성이 내포된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는 이를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당시 국가는 勸農策을 통해 생산력의 증대를 제도적으로 흡수하고자 노력하였으나 성공한 것 같지는 않다. 流亡이라든가 兼倂의 확대 로 인해 貢戶良人이 公的收取의 대상에서 빠져나가고 있는 현상이 이를 말해 준다. 다만 新田開墾에 비해 상대적으로 陳田開墾에 주목함으로써 현상유지에 더욱 고심하였던 것 으로 보인다.21) 이는 田丁制의 유지노력과 무관한 것이 아니었다. 이상의 例를 통해서 보았듯이 地主佃戶制 농장은 公田의 경우에서 私田으로 확대 전 개되고 있었다. 특히 陳田開墾을 매개로 토지가 겸병되고 人戶의 집중에 의한 貢戶良人 就與之 章漢曰 當吾竄謫 君雖不食 豈無他人 君今哀我 還其田足矣 何用租爲 守平曰 乘人之災 食其 田 猶恐不義 今旣還 尙忍食耶 遂投其簿 章漢不受 閉門而入 守平竟以簿繫石 擲之而去 父老歎曰 今 爭奪成風 不圈獲見若人. 20) 拙稿, 高麗後期의 陳田開墾과 賜田 ( 學林 7, 연세대 史學科, 1985). 21) 蔡雄錫씨에 의하면, 비록 향촌지배질서가 유지되고 있다고 하더라도 진전이 발생하면서 한편으로 는 새로운 경지가 개발되는 것은 부세수취나 수조권적 지배에 대립적인 측면이 있기 때문에, 지 배층의 입장에서는 산전개간보다 진전개간을 중시하였다고 하였다(蔡雄錫, 12, 13세기 향촌사회 의 변동과 민 의 대응 : 역사와 현실 3, 역사비평사, 1990, pp.32 33).
- 86 - 이 私的 지배의 대상으로 편입되고 있었다. 국가적 수취와 연결시키려는勸農策은오히려 地主佃戶制 農莊의 확대를 통해 田丁制的 수취기반을 약화시키고 있었다. 나아가 京外의 兩班 軍人田 등이 奪占의 대상이 됨으로써, 田丁制에 토대를 둔 役制운영을 어렵게 하고 있었다. 결국 職役과 土地의 결합으로서의 田丁制를 통해 운영되어온 高麗의 經濟體制는 수취 및 분배의 양측면에서 그 기반이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2. 役制운영의 마비 : 田無役主 현상 內外 즉 京畿와 外方에 있는 足 半의 丁을 통해 고려왕조는 조세를 수취함과 동시에 職役을 부과하였다.22) 役과 土地의 결합에 기초한 田丁制는 양자의 결합관계가 끊어지게 될 경우 수취기능은 물론 田丁連立의 기능도 상실되기 마련이다. 실제로 그러한 가능성 은 진작부터 있어왔다. 睿宗代에 들어와 十室九空 의 流亡사태에 직면한 정부는 監務를 파견하는 등 安撫策을 펴서 이를 수습하기도 하였으며,23) 앞에서 본 바와 같이 明宗代에 서 丁田의 겸병문제에 還本主 를 통해 田丁制의 안정적 운영을 추구하기도 하였다. 그러 나 무신정권 이후 대몽항쟁기간을 거치면서 전정제의 틀은 급속히 해체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祿俸의 부족이라든가 收租權 分給기능의 상실 등은 왕조체제의 유지를 위해서도 시급히 수습해야될 현실적 문제로 다가오고 있었다. 戶口파악 및 田民辨正을위시하여 원 종 11년 이후에 나타나는 일련의 대책들은 이러한 문제와 직결되고 있었다.24) 忠烈王代에 이르러 中贊 洪子藩은 上書를 통해 당면문제에 관한 몇가지 항목(便民十 八事)을 열거하는 가운데 세번째 부분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忠烈王)二十二年 六月 中贊洪子藩上書 (중략) 三曰 田無役主 亡丁多矣 民無恒心 逃戶 衆矣 凡有貢賦 仍令遺民當之 此所以日益彫弊也 宜令賜給田 隨其多少納其貢賦( 高麗 史 권78, 食貨1 田制貢賦條). 22) 최근 田丁制에 관한 논문을 발표한 金琪燮씨는 田丁의 기능을 필자와는 달리 보았다. 즉 그는 전 정의 收稅와 職役差定의 단위로서의 기능 중에서 전자의 경우는 田制와 役制와의 결합관계가 분 리되는 고려후기 이후의 시점에서야 가능하다는 견해를 피력하였다(金琪燮, 앞의 논문 p.119). 그 러나 李齊賢도 지적하는 바와 같이 고려의 田制는 前期이래로 크게 변화한 것이 없었다. 23) 高麗史節要 권7, 肅宗10년, (睿宗) 敎曰 (생략) 今諸道州郡司牧 淸廉憂恤者 十無一二 募利釣 名 有傷大體 好賄營私 殘害生民 流亡相繼 十室九空. 高麗史節要 권7, 睿宗 원년, 詔曰 頃以西海道儒州 安岳 長淵等縣 人物流亡 始差監務官 使之 安撫 遂致流民漸還 產業日盛 今牛峰 兎山等二十四縣 人物 亦漸流亡 宜準儒州例 置監務 招撫. 24) 당시 국가는 무엇보다도 量田上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으나 우선 시급히 해결해야 될 사항은 戶口調査를 통해 임시적이나마 수취기능을 수습하지 않으면 안되었으며 王政의 회복에 따 른 관료기구의 정비를 위한 收租權 分給制의 정비가 요구되었다. 祿科田制의 실시는 이런 점에서 볼 때에 收租權制의 전반적 회복이 어려운 상황하에서 현실적으로 가능한 임시 변통적 성격이 강 한 조처였다고 하겠다.
- 87 그는 두 가지 측면에서 문제점을 파악하고 있었는데, 먼저 田無役主 亡丁多矣 하다는 것과 다음에 民無恒心 逃戶衆矣 하다는 것이었다. 田에 役主가 없고 亡丁이 많다는 것은 이 시기 土地와의 결합하에 운영되고 있었던 役 體系에 문제가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말하자면 丁戶가 비는 경우가 많다는 것은 土地와 役의 분리라는 상황과 무관한 것이 아니라고 할 수 있다. 田丁制에 의해 이루어지는 계층 은 丁戶와 白丁으로 이중구성을 이루고 있었다. 이렇게 볼 때에 丁戶는 위로는 兩班官僚 에서 아래로는 軍人과 鄕吏層을 위시한 諸職役계층을 포함하게 된다. 이 시기 避役과 관 련하여 군인 및 향리의 유망이 사회문제화하고 있었다. 위에서 특히 문제가 되고 있는 役 主란 아마도 이와 같은 계층을 가리키는 것이 아닌가 한다. 그렇다면 그것은 이미 田丁制 的 役制의 운영이 아래에서부터 파탄이 초래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라고 하겠다. 洪子藩은 逃戶발생의 원인을 民無恒心 에 두고 있다.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으나 이 는 亡丁의 발생 배경과 더불어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문제가 아닌가 하며, 그런 점에서 보면 토지겸병으로 인한 농민의 몰락과도 관계가 있을 것이다.25) 그는 民無恒心 逃戶衆 矣 라고 하면서 그 결과 무릇 貢賦가 遺民에게 전가되어 부담됨으로써 날로 (遺民이) 彫 弊된다고 하였다. 이는 총액제적 수취하에서 田丁 본래의 부담이 변동되지 않는 가운데 逃戶가 발생한 사실에 기인하는 것이다. 기본적으로 田丁制的 수취기반이 위협받고 있음 을 설명한 것이다. 한편 (遺民의) 彫弊와 관련하여 賜給田도 마땅히 그 크기에 따라 貢賦를 납부하라고 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彫弊의 원인은 賜給田의 확대와도 밀접한 관련이 있음을 짐작하 게 된다. 이는 田丁制의 붕괴가 賜給田의 확대와 불가분의 관계가 있음을 보여준다. 이 시기 賜給田은 陳田開墾을 명목으로 收租權을 획득함과 더불어 地主佃戶制 경영을 통해 農莊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위에서 賜給田은 사실상 貢賦를 내지 않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며 이 점은 賜給田의 운영이 田丁制的 수취대상에서 벗어나 있음을 뜻하는 것이 다.26) 賜給田 자체는 원래 개간을 전제로 無主陳田에 收租權이 분급된 私田이었으므로 당연한 것이기는 하였으나 문제는 有主의 冒受賜牌田이었다. 이는 農莊의 확대가 田丁制 的 수취기반을 잠식하는 가운데 이루어지고 있음을 드러낸 것이며, 특히 賜給田의 운영이 그러하였음을 보여준다. 뿐만 아니라 총액제적 수취로 인해 逃戶가 맡아야 할 貢賦의 몫 은 遺民에게 전가됨으로써 彫弊의 원인이 된다는 것이다. 요컨대 賜給田과 같은 脫田丁制 的 토지로 인해 농장이 확대되고 나아가 또다른 逃戶가 출현하게 됨을 암시하고 있다. 25) 孟子 梁惠王上에 無恒產 而有恒心者 惟士爲能 若民 則無恒產 因無恒心 라고 하였다. 이는 일 반 백성의 경우에 일정한 生業을 갖고 있지 않으면 一定不變의 道德心도 이룰 수 없다는 점을 지 적한 것이다( 大漢和辭典 ). 농민몰락으로 인해 民이 恒心을 갖지 못하게 되고 이는 逃戶의 형 태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뜻한 것이 아닌가 한다. 26) 이 점과 관련하여 과거에 賜給田을 田丁制와 관련시켜 설명한 것(졸고, 甲寅柱案考 東方學 志 66, 1990)은 잘못이었으므로 이 기회에 바로 잡는다.
- 88 - 逃戶발생과 관련하여 이 시기 吏民의 避役 현상은 매우 심각한 상황에 이르고 있었다. 그것은 總額制로 상징되는 貢納의무의 이행과 관련한 것이었다. 이러한 불안한 상황은 기왕의 行政使役人으로 전락한 鄕吏들의 위치를 더욱 불안하게 하였다. (忠烈王)十一年 三月 下旨 外方人吏等 以所耕田 賂諸權勢 干請別常 謀避其役者 有之 ( 高麗史 권85, 刑法2 禁令條). 外方人吏들이 所耕田을 權勢家에게 뇌물로 주고 別常을 간청하여 役을 謀避하고자 하 였다. 所耕田이 증여의 대상이 되고 있다는 사실로 보아 忠烈王代 外方人吏의 避役시도 가 심상치 않았음을 보여준다. 田丁制的 수취구조하에서는 이들의 역할이 대단히 중요하 였다. 麗初 국가는 기존의 재편된 공동체를 국가질서 속으로 편제할 때 職役을 매개로 공동체 내부에 중층적인 구조를 설정하고 그 중 지방유력계층을 관인화함으로써 직역을 매개로 공동체의 내부에 침투하고자 하였다.27) 물론 수취체제와의 관련이 가장 중요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村典의 역할 중 損實踏驗이 年代記에서 유일하게 남은 것은 그 기능이 가장 강조되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28) 이처럼 田無役主 현상은 本貫制에 의해 규제되 어 오던 在地 향촌사회 내부의 질서를 근본적으로 위협하고 있었다. 그러나 田無役主 현상은 향리의 피역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었다. 이는 여기서 그치 지 않고 土地兼倂과 밀접한 관계를 갖고 갖가지 문제를 발생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현상 을 두고 麗末 李行은 軍人田이 그 출발을 이룬 것으로 보았다. 즉 選軍之法이 붕괴된 이 후 兼倂이 뒤따라 일어나게 되었다는 것이다. 한편 趙仁沃도 府田亡而府兵亦亡 29)이라고 하여 軍人田체제의 崩壞가 이 시기 軍役체계의 몰락을 초래한 것으로 파악하였다. 그렇다면 軍人田체제가 무너진 이유는 무엇인가? 이 시기 軍人田을 둘러싸고 나타나 는 사료의 특징은 대체로 軍人의 避役 현상과 軍人田의 奪占관계 기사이다. 이는 무엇을 말하는가? 軍人계층의 신분적 차이와 관련하여 軍人田은 크게 두 종류로 구분된다고 함 은 이미 지적한 바가 있다.30) 이를테면 田柴科 계열의 科田을 기반으로 한 軍人田(職田) 과 內外 足 半의 丁田을 기반으로 하는 軍人田이 바로 그것이다. 신분상으로 보면 전자 의 경우에는 兩班이라든가 閑人출신의 武官으로 구성되어 正職과 鄕職을 통해 收租地가 加給될 수 있었으나 후자의 경우에는 대체적으로 일반 百姓출신으로서 鄕職만으로 구성 되어 있었다.31) 27) 蔡雄錫, 앞의 책 (1986) pp.357 361. 28) 蔡雄錫, 위의 책 (1986) p.373 과 주 118). 씨에 의하면, 영역간의 계서적 지배구조가 가능하기 위 한 조건으로서 당연히 영역규제가 실시되어야 했으며 각 영역을 단위로 국가에 대한 수취부담의 양과 질이 결정되었으며 나아가 전정과 호구의 존재가 각 본관의 영역내로 규제되도록 추구되었 던 것으로 보인다(p.378). 29) 高麗史 권78,食貨1 田制 祿科田條. 30) 졸고, 高麗時期 田丁連立의 構造와 存在形態 를 참조.
- 89 - 전자의 경우에는 六品 以下의 兩班이 田丁連立을 통해 토지를 지급받을 수가 있었 다.32) 그리고 이들이 받는 永業田은 그 관리를 選軍에서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렇게 됨으로써 選軍은 功蔭田과 蔭敍혜택을 받는 5품 이상의 永業田을 제외한 六品 以下의 永 業田에 대한 전반적 관리 감독을 하도록 되어 있는 셈이었다.33) 그런데 六品 以下 七品 以上의 경우에는, 役重과 관련하여 서로 기피하게 된 결과, 사실상 제외되어 있었다. 軍人은 戰費를 스스로 마련34)해야 했기 때문에 其人과 마찬가지로 하나의 苦役으로 간주되었다. 軍人의 선발은 이 점을 감안하여 경제적 여력을 갖춘 계층을 중심으로 편성 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軍役의 役重과 관련하여 軍人에 대한 일반적 천시 경향을 가 져오게 되었던 것이다. 특히 番上軍의 경우에 있어서는 丁田을 토대로 하였으므로 실제 로는 足丁을 채우지 못하는 경우가 일반적이었을 것이다. 그러한 이유로 하여 軍役에 대 한 避役 현상은 두드러졌으며 托勢以免 35) 하는 양상과 결부되어 더욱 심각한 양상을 보이게 된 것으로 생각된다. 다만 軍人田을 지급받기 위한 편법으로 軍役이 이용되기도 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職田으로서의 軍人田을 지급받는 계층은 주로 八品 以下의 兩班이 담당하도록 되어 있었으며 그 결과 品이 낮은 下級兩班이 주요 대상으로 될 수밖에 없었다. 이 시기 31) 그러나 이와 같은 내부적 중층구조는 처음부터 존재했던 것은 아닌 것으로 생각된다. 이른바 軍班 氏族의 존재는 당초에 軍人의 출신신분과 그 역할을 짐작하게 하는 것이지만 集權化정책의 추진과 전쟁 등으로 인한 다양한 출신성분의 군인차출로 인하여 점차 二元化과정을 밟게 되었을 것이다. 32) 五品 以上의 田丁連立은 蔭敍제도 및 功蔭田 지급을 통해 자동으로 세습될 수가 있었다. 33) 選軍의 일은 모든 給田업무를 포괄하는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 말하자면 選軍의 給田업무는 제한 적 범위내에서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점이다. 요컨대 公田의 加給과 같은 일은 소관사항이 아니었 다. 그것은 아무래도 직접적으로는 給田都監 혹은 戶部의 관장사항이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戶部 와 選軍과의 직접적 관계는 없었을 것이다. 給田都監은 주로 百官의 給田을 담당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 경우의 給田업무는 늘 이루어질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왜냐하면 그것은 國 家收租地의 확보문제와 결부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給田都監의 역할은 국초 이후의 田柴科 制度 성립시기 혹은 祿科田과 같은 새로운 토지의 給田이 이루어질 경우에만 한정될 수밖에 없었 다. 그에 비하면 田柴科制度의 運營에 관한 업무는 거의 常時的으로 수행되어야만 했다. 그 중에 서도 田丁連立에 관한 제반업무는 가장 중요한 것이 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田柴科系列 土地 에 있어서의 田丁連立은 兩班 軍 閑人 등에 걸쳐 이루어지게 되어 있었지만 五品 以上의 兩班의 경우에는 蔭敍 등을 통해 거의 자동적으로 田丁이 連立되었으므로 상대적으로 六品 以下의 官人 層의 田丁連立에 관한 업무가 주요 업무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되며 특히 이들은 대체로 軍役의 대상으로 되어 있었던 만큼 그 업무의 대부분은 選軍에서 관장하게 되지 않았을까 한다. 34) 高麗史 권78, 食貨1 田制 禑王 14년 7월 趙浚上書, 其衣 糧 器械 皆從田出 故國無養兵之費 祖宗之法 即三代藏兵於農之遺意也. 麗末 趙浚은 軍人田에 대하여 위와 같이 인식하였다. 이를 통해서 國初에는 軍人의 自辨을 통해 모든 軍須가 충당되고 있었음을 주장하고 있다. 麗末의 상황은 國家의 軍須費用이 戰亂과도 관련 하여 급속히 증가하여 이른바 三稅의 한 항목으로 구성되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말하자면 趙浚은 軍須비용이 증가하게 되고 그 결과 국가재정이 어려워지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 원인은 바로 祖宗 軍人田制의 붕괴에 있는 것으로 보고 있었던 것이다. 35) 高麗史 권81, 兵1 兵制, (文宗)二十五年 六月 制曰 近聞諸衛軍人亡命者甚多 是由執事不公 富 强者托勢以免 貧窮者獨受其勞 衣食乏絕而略無休息.
- 90 - 軍人田이 탈점의 대상이 되고 있었던 것은 이들이 지위가 낮은 兩班層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 아닌가 한다. 永業田의 탈점 기사에 자주 등장하는 이른바 兩班 軍 閑人이란 바 로 이들 계층을 가리키는 것으로 생각된다. 公田의 加給, 養戶의 배정,36) 本貫雜役의 면제37)라든가 領內十將 六十에 대한 丁人의 遷轉錄用과 中禁 都知 白甲別差의 丁人當差 그리고 丁人戶에 대한 津貼의 분급38) 등의 조처는 避役행위에 대한 국가의 대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조처만으로는 현 실적 대안이 될 수 없었던 것이며 그 결과 鄕役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避役현상이 만 연하는 가운데 더구나 軍人田의 침탈은 이 른바 田無役主 의 상태로 나타나게 되었을 것이다. 이상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農莊의 확대는 田丁制的 수취기반을 약화시키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役制운영을 마비시켜 가면서 田無役主 의 상태로 몰아가고 있었다. 鄕吏계 층을 비롯하여 軍人계층의 避役 현상이 일반화하였다. 나아가 특히 兩班 軍 閑人으로 일 컬어지는 八品 以下의 軍役 담당계층은 낮은 지위로 인해 자신의 永業田이 침탈의 대상 이 되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로 인해 收租權 분급질서가 흔들리는 가운데 결국 永 業田 전체의 田丁連立 기능도 점차 마비되어 간 것으로 생각된다. Ⅲ. 田民辨正事業의 추진과 田丁連立 田丁制가 해체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자, 왕조의 수취 및 분배체계는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할 수가 없었다. 국가재정은 극도로 악화되어 祿俸지급은 사실상 중단될 수밖에 없 었다. 이러한 위기적 상황에 대한 지배층내의 인식은 극히 다급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무신정권 이후의 정치 상황이 불안하였을 뿐만 아니라 몽고간섭기 이후 왕권 자 체가 취약하여 과감한 개혁은 거의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이처럼 여러 현실적 제약이 존 재하고 있었으나 그러한 가운데에서나마 일정한 조처가 취해지고 있었다. 元宗 10년의 田民辨正사업이라든가 11년과 12년에 각각 실시된 임시변통적 성격의 戶口調査 및 새로 운 토지 분급제로서의 祿科田制의 실시가 그것이었다. 戶口調査는 현실적으로 田丁制的 수취가 어려운 상황과 관련이 있었다. 국가적으로 위 급한 재정확보를 위해 편의상 戶口만을 대상으로 課戶를 결정하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 서 人頭稅的 경향이 강하여 貢戶良人을 隱占한 채 외형상 私民의 형태로 지배하고 있는 36) 高麗史 권81, 兵1 兵制, (文宗)二十七年 三月 命 州鎭入居軍人例給本貫養戶二人. 37) 高麗史 권81, 兵1 兵制, (仁宗)二十二年 判 西京東西州鎭入居軍人 蠲本貫雜役 若有侵擾者罪 其色記官. 38) 앞서의 靖宗 11년 揭榜記事의 내용을 참조.
- 91 - 농장의 경우에는 유리한 반면, 영세한 농민층의 몰락을 가속화시킬 소지가 있는 조치였 다. 그만큼 다급하였던 것이며 편의주의적 성격이 강하였다. 祿科田制의 실시는 田柴科 계열 토지가 제대로 그 기능을 발휘하지 못하는 현실적 조건하에서 특히 하급관료들의 생계를 위하여 지급된 것으로서 祿俸을 보완하는 것이었다. 현직관료를 중심으로 하였기 때문에 世傳性을 어느 정도 배제한 職田的 성격의 토지였다. 그런 점에서 집권적 관료체 제의 정비방향과 그 궤를 같이하는 발전적 특징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처음 祿科田制를 실시함에 있어서 적지않은 문제점과 한계를 안고 있었다.39) 어디까지나 田柴科계열의 토 지를 대신할 형편은 되지 못하였다. 田民辨正사업은 이와 같은 현실적 조건하에서 추진 되고 있었다. 1.田民辨正事業의 추진 기록상 辨整都監에 관한 사실이 처음 확인되는 것은 아래의 사료에 보이는 바와 같이 元宗 10년의 일이다. 都監의 성격상 상설기관은 아니었으며 使와 副使가 있었던 임시기 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40) 元宗 14년에 다음과 같은 분부가 내려졌다. 下制曰 今展兵糧之田 元是諸宮寺院所屬 及兩班 軍 閑人世傳 而權臣 所取者也 己巳年 辨整都監 推辨不究 或有給非其主 由是怨者頗多 其兵糧都監 詳考兩造文案 公正以決( 高 麗史 권27, 世家 元宗 14년 12월). 위에서 元宗은 兵糧之田에 대하여 원래 諸宮 寺院에 所屬되어 있었거나 兩班 軍 閑人 이 世傳해오던 것을 權臣이 빼앗아 취한 것이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에 앞서 己巳年(元 宗 10)41)에 辨整都監이 推辨한 바가 있었으나 실제로는 主人에게 돌아가지 않은 경우가 많았으며 그로 인해 원성이 높다는 점을 지적하였다. 이에 元宗은 兵糧都監으로 하여금 39) 졸고, 13 14세기 收租權 分給制의 運營 ( 東方學志 77 78 79 합, 1993). 40) 高麗史 권77, 百官2 諸司都監各色條에 의하면 원래 변정도감은 원종 10년(기사년)에 처음으로 설치되어 충렬왕 14년, 27년과 공민왕 원년 그리고 우왕 7년, 14년에 설치된 임시기관이었으며 使 와 副使가 있었다. 그런데 姜順吉씨에 의하면 원종대부터 공양왕대에 이르기까지 모두 16차례 걸쳐 전민변정기구가 설치된 것으로 보았다. 이에 따르면 田民辨整(正)都監 田民辨正司 火者據執田民推考都監 察理辨違 都監 整治都監 田民推整(辨)都監 人物推考(辨)都監 등은 모두 비슷한 기능을 가진 기구로 보았다. 그리고 이러한 기구의 설치는 충정왕대를 제외한 고려후기 모든 왕대에 공통된 현상이라고 하였 다(姜順吉, 忠肅王代의 察理辨違都監에 대하여 湖南文化硏究, 1985, pp.17 19). 41) 고종 46년 州縣의 守令에게 出陸耕種을 허용한 이래 원종 9년 金俊이 族誅됨으로써 무신정권이 급격히 쇠퇴하고 있었다.
- 92 - 양쪽에서 만든 文案을 상세히 살펴 公正하게 처리하라고 하였다. 여기에서 辨整都監은 諸宮과 寺院所屬의 토지를 비롯하여 특히 兩班 軍 閑人의 世傳土 地로서 權臣에 의해 탈점되었던 것을 되돌려 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과거 무신정권 하에서 많은 收租地가 불법적으로 탈점된 바가 있었던 것이며 왕권의 회복과 함께 그러 한 토지를 다시금 원래의 收租地 형태로 환원시킬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諸宮과 寺院 所屬의 토지는 확실치 않지만 兩班 軍 閑人의 世傳土地는 收租地였다. 또한 兵糧都監의 설치목적은 비록 다른 데에 있었을 것으로 보이지만, 위의 경우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경우에 따라서는 辨正에 관한 일도 했음을 알 수 있다. 무신정권 이후 특히 高宗朝에 이르러 收租權의 私的授受가 이루어지고 있었으며 收租 地의 쟁탈은 성풍을 이루고 있었다.42) 田民辨正사업은 바로 이와 같은 문제점을 해결하 기 위한 대책의 일환이었다. 이 경우에 흔히 靜訟문제와 결부되기 마련이었다. 辨整都監 의 기능은 推辨을 통해 田主를 가리는 일이었다. 위에서 辨整都監은 田主를 가리기 위해 兩班 軍 閑人이 世傳하여 오다 權臣이 빼앗은 토지를 推辨하였으나 공정치 못한 바가 많 았던 것 같다. 그 결과 3년 뒤인 원종 14년에 이르러 兵糧都監으로 하여금 양쪽에서 만 든 文案을 詳考하여 공정하게 처리하도록 하였다. 문안이 두 가지 종류나 될 수 있었던 것은 사대부들이 自成契券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世傳토지에는 합법적인 田主가 있었다. 여기에서 문제가 되고 있는 것은 文案 을 조작함으로써 收租權을 둘러싸고 갈등이 빚어졌기 때문이었다. 말하자면 世傳 그 자 체가 불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국가는 田丁連立 규정에 의한 收租地의 世傳을 법적으로 보장하고 있었다. 다만 무신정권 이래로 토지겸병이 성행하였던 까닭에 田丁連立 기능은 크게 와해되고 있었다. 비록 한계가 있는 것이지만 전후 왕권의 회복과 함께 관료체제를 다시금 정비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며 따라서 田民辨正사업도 그와 같은 일련의 조 처로 이해하는 것이 순리라고 본다.43) 따라서 위에서 말하는 其主 라는 것은 법적으로 田丁連立 규정을 통해 확인된 田主를 의미한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과거 무신정권하에서 탈점된 수조지의 환원을 의미하였다. 그러나 그 작업이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었음은 42) 高麗史 권102, 權守平傳, (權守平[? 高宗 37년 ; 1250]) 安東人 (중략) 嘗爲隊正 貧居 有郞 中卜章漢 以非罪見竄 守平遞食其田 有年 及章漢遇赦還 守平素不相識 且其田租已漕于江 守平袖租 簿 就與之 章漢曰 當吾竄謫 君雖不食 豈無他人 君今哀我 還其田足矣 何用租爲 守平曰 乘人之災 食其田 猶恐不義 今旣還 尙忍食耶 遂投其簿 章漢不受 閉門而入 守平竟以簿繫石 揮之而去 父老歎 曰 今爭奪成風 不圖獲見若人. 43) 이경식교수는 고려후기의 私田문제를 私田의 家產化에 두고 이를 이른바 祖業田化 현상으로 이해 하였다. 이교수가 말하는 私田의 家產化란 永業田이 국가권력의 규제를 벗어나 수조권이 강화되 어 사유지로서의 성향을 갖게 된 것을 지칭한다. 씨는 원종 당시 이미 개인수조지는 조업전으로 간주되어 있었고 국가는 이를 기정사실로 긍정하고 있었으며 이는 그 후에도 마찬가지였다고 하 였다(李景植, 앞의 논문, 1986, pp.7 16). 그러나 이렇게 이해할 경우에 田主를 확인하는 일은 법 적으로 거의 불가능한 것이라고 하겠다. 요컨대 전민변정의 기준은 지극히 자의적이고 애매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수조지 분쟁에 대한 법률적 처리(이경식, 앞의 논문, 1986, p.63)는 처음부터 기 대할 수 없는 일이라고 하겠다.
- 93 - 詳考兩造文案 公正以決 이라는 표현에서도 드러난다. 무신정권이 붕괴되었다고는 하나 그 세력이 하루아침에 무력화된 것은 아니며, 몽고간섭기라고 하는 특수상황은 왕권회복 의 의지를 무력화시키곤 하였던 것이다. 그런데 辨整都監의 일은 收租地에만 국한된 것은 아니었다. 기록을 통해서 보건대 辨 整都監의 일은 公私의 田民을 推刷하여 本主에게 되돌려 주는 데에 주목적을 두고 있었 다.44) 말하자면 辨正사업의 방향은 公私의 田民에 대한 還主 혹은 還本에 두고 있었다. 그것은 公的 지배의 대상으로서의 民과 土地를 국가적 파악하에 두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런 점에서 田民辨正事業은 멀리 예종대 이래의 流亡對策과 연원이 같은 것이었 다. 그리고 그것은 여초이래의 本貫制下에서의 田丁制的 틀속에 田民을 묶어 두려는 것 이었다고 생각된다. 이에 따라 대몽항쟁 이후 田民辨正의 방향은 일차적으로 특히 이완 된 수취체제의 재건과 관료체제의 구축을 위한 收租權 分給制의 안정에 초점이 두어져 있었다. 이처럼 수취체제 및 役制운영의 마비와 관련하여 田民辨正사업이 추진되었다. 그러나 이는 元宗朝 이후 流亡 등 本貫制的 규제가 이완된 상태하에서 田丁制가 그 기능을 발 휘할 수 없는 현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이 시기 辨正사업은 公私田民의 還本 및 括 戶를 통해 田民의 推刷에 목표를 두고 있었으며 그것은 또한 農莊의 혁파문제와도 이어 질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국가재정적 필요 및 관인층의 물질적 기반의 확보라는 차 원에서 임시변통적 차원에서 시작되고 있었다. 따라서 그 효과는 극히 제한적일 수밖에 44) 辨整都監의 성격을 추출해 볼 수 있는 몇가지 경우를 보면 다음과 같다. 高麗史 권32, 世家 史烈王 28년 정월條, 戊申 命田民辨正都監 籍闊里吉思所斷奴婢爲良者 歸 之本主. 高麗史 권78, 食貨1 經理條, 恭愍王二年 十一月 分遣田民別監于楊廣 全羅 慶尙道 義成 德泉 有備倉田 及諸賜給田 標內濫執公私田 推刷 悉還本主. 高麗史 권 132, 辛旽 傳, 旽 請置田民辨正都監 自爲判事 榜諭中外曰 比來 紀綱大壞 貪墨成風 宗廟 學校 倉庫 寺社 祿轉 軍須田 及國人世業田民 豪强之家 奪占幾盡 或已決仍執 或認民爲隷 州縣 驛吏 官奴 百姓之逃役者 悉皆漏隱 大置農莊 病民療國 感召水旱 擴疫不息 今設都監 俾之推整 京中 限十五日 諸道 四十日 其知非自改者 勿問 過限事覽者 糾治 妄訴者 反坐 令出 權豪 多以所奪田民 還其主 中外析忻. 高麗史 권126, 林堅味 傳, 置田民辨正都監 考覈堅味等所奪占田民. 위에서 忠烈王 28년의 경우 闊里吉思가 판정한 良人이 다시 奴婢로서 本主에게 귀속하는 조처가 이루어지고 있다. 또한 恭愍王 2년에는 公 私田이 推刷되어 還本主되도록 하였으며, 辛旽 傳에서 는 逃役者(州縣驛吏 官奴 百姓之逃役者)의 還本과 奪占田民의 還主에 이어 끝으로 林堅味 傳에서 도 奪占田民의 考覈에 주안점이 두어지고 있다. 특히 辛旽 傳의 경우를 보면 田民辨正都監 설치의 배경을 잘 설명해 준다. 이에 의하면 豪强之家 가 公 私田을 탈점하였고, 良民을 노예로 삼는 한편 驛吏 官奴 百姓 등 有役者를 漏隱시킴으로써 부정을 저질렀으며 이 田 民 양자가 종합되어 農莊의 형태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閔賢 九씨에 의하면, 田民을 推整한다는 것은 곧 農莊을 해체시키는 것을 뜻하였다(閔賢九, 辛旽의 執權과 그 政治的 性格(下) 歷史學報 40, 1968, p.64). 요컨대 변정의 대상은 公田과 私田 그 리고 公民과 私民이 모두 포함되어 있었다. 그리고 변정의 대체적 원칙은 양인의 還本 및 토지와 노비의 還主에 있었다.
- 94 - 없었다. 원종 10년 辨整都監이 처음 설치된 이래 忠烈王 27년에는 田民辨正司가 두어 졌으며 이는 忠宣王代로 이어지고 있었다.45) 그러나 忠烈王代에 이르기까지, 田主가 제대로 가 려지지 못하고 그로 인해 원성이 파다할 정도로 별반 효과를 보지 못했다. 바로 그 때문 에 兵糧都監으로 하여금 재검토하게끔 되었던 것이다. 流亡民의 還本이 제대로 이루어지 지 않은 상태하에서 사실상 田丁制的 토대가 와해되어 있었던 것이며, 무엇보다도 田民 의 겸병을 통한 소위 권력형 농장이 여전하였던 점과 관련하여 볼 때, 辨正사업의 성과 도 크게 기대될 수 없는 상황이었다.46) 이와 같은 조건하에서 括戶정책도 추진되었으나 避役 등 投托요인이 현실적으로 상존하는 가운데 歷良爲賤 추세는 해소될 수가 없었다. 忠宣王代에 이르러 6道에 걸친 田民計點에 이어 量田이 진행되는 가운데 田制釐正사 업이 추진됨으로써 田民辨正은 새로운 轉機를 맞이하게 되었다. 忠宣王 復位와 함께 시작된 田制釐正사업은 그가 처음 즉위하였을 때에 이미 하나의 정책적 과제로 대두되어 있었다. (忠烈王) 二十四年 正月 忠宣王即位下敎曰 (중략) 一. 凡州府郡縣 先王因丁田多少 以等差之 近來兩班 內外鄕貫 無時加號 甚乖古制 有司論罷( 高麗史 권84, 刑法1, 職 制條). 위의 하교를 보면, 州 府 郡 縣은 원래 先王이래로 丁田의 多少로서 等差가 지어졌다 는 점과 이것이 근래에 兩班의 內外鄕貫에 無時로 加號하니 이는 심히 古制와 동떨어진 것이므로 有司에서 논하여 이를 罷하라는 내용이다. 丁田多少 라는 것은 다시 말해서 高 麗의 독특한 田丁制的 수취구조를 뜻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이러한 州 府 郡 縣을 단위로 하여 總額制로 수취가 이루어지는 제도였음을 생각할 때에 內外의 勢力계층에 의한 고 의적 加號가 기존의 수취질서에 미칠 부정적 측면을 고려한 때문이었을 것이다. 田丁制의 속성상 수취 및 분배구조로서의 수조권 문제와는 불가분의 관계에 있었다. 即位下敎에는 개혁과 관련된 많은 내용이 있지만 關係條項 中 經濟문제 특히 土地部分 만 발췌하면 다음과 같다. 45) 高麗史 권106, 尹諧 傅, 忠宣受禪 有薦諧者 即召爲田民辨正都監使. 高麗史 권32, 世家 忠烈王 27년 6월條, 置田民辨正司. 高麗史 권32, 世家 忠烈王 28년 정월條, 戊申 命田民辨正都監 籍闊里吉思所斷奴婢爲良者 歸 之本主. 46) 이른바 處干이라고 칭하면서 3稅를 포탈하는 현상이 이 시기 權貴들에 의해 자행되고 있었다 ( 高麗史 권28, 世家 忠烈王 4년 7월條). 이는 地主制 경영이 일반화되고 있었던 사실을 기화 로 하여 民田 所有主로서의 貢戶良人을 處干으로 사칭함으로써 田租를 포탈하고자 했던 것이며 權貴와 관련된 권력형 농장의 경우에 흔히 있을 수 있는 사례로 생각된다.
- 95 ① 一. 先王制定內外田丁 各隨職役平均分給 以資民生又支國用 邇來豪猜之徒 托稱遠陳 標以山川 冒受賜牌爲己之有不納公租 田野雖關國貢歲減 又其甚者托以房庫宗室之田 其於 租稅一分納公二分歸 己或有全不納者 玆弊莫大 宜令諸道按廉及守令 窮詰還主 如無主者 其給內外軍 閑人立戶 充役( 高麗史 권78, 食貨1 田制 經理條). ② 一. 功臣之田 子孫微劣 孫外人占取者 勿論年限 依孫還給 同宗中 若一戶合執者 辨其 足丁 半丁均給( 高麗史 권78, 食貨1 田制 功蔭田柴條). ③ 一. 民無恒心 因無恒產 憚於賦役彼此流移 凡有勢力招集以爲農莊 按廉使與所在官推 刷還本 具錄以聞( 高麗史 권84, 刑法1 職制條). ④ 一. 寺院及齋醮 諸處 所據執兩班田地 冒受賜牌 以爲農莊 今後 有司窺治各還其主 ( 高麗史 권84, 刑法1 職制條). ① 및 ②에서 나타나듯이 忠宣王은 그가 처음 즉위한 忠烈王 24년에 무엇보다도 田丁 制와 그 운영에 지대한 관심을 갖고 있었다. 먼저 ①에서 주목되는 구절은 先王이 制定 한 內外田丁은 각각 職役에 따라 평균하여 分給함으로써 民生의 資로 삼을 뿐만 아니라 國用을 뒷받침하도록 하였다 는 내용이다. 先王이 제정한 내외의 전정은 직역에 따라 균 급한 것이었다. 그것은 田制와 役制와의 결합에 기초하여 토지제도가 성립되었음을 표현 한 것이다. 따라서 內外田丁을 制定했다는 말은 田丁과 이를 매개로 하는 田丁連立까지 도 포괄하는 내용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公田의) 冒受賜牌로 인해 國貢이 해마다 감소되고 있음을 지적한 것은 재정의 확보문 제였다.47) 그러나 개혁의 목표가 비단 재정에만 국한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房庫宗室之 田 까지도 겸병하고 있음을 지적하면서, 마땅히 諸道의 按廉과 守令은 끝까지 다스려 (빼 앗긴 田丁의 收租權을) 還主하도록 하고 (수조권의) 主人이 없는 冒受賜牌田은 內外의 軍 人과 閑人에게 立戶充役토록 하였다는 점이다. 立戶充役의 대상이 된 토지는 冒受賜牌된 私田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立戶充役의 대가로 토지의 소유권을 지급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는 田丁制와 이를 매개로 하는 田丁連立을 복구하 도록 하여 고려국가의 役制를 회복하고자 하는 의도가 내재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와 같은 의도가 깃들여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새로이 마련되었던 녹과전과 같은 토지의 폐기를 생각한 것은 아니었다. 祿棒조차 제대로 지급할 수 없을 만큼 수취 기구가 제기능을 발휘할 수 없는 현실적 조건하에서 이러한 토지를 무시할 형편이 되지 는 못하였다. 오히려 가능한 한도내에서 보완하지 않으면 안되었다. 江華田을 별도로 均 分하도록 지급하도록 조처한 것은 그 때문이었다.48) 47) 이 시기 문제화되고 있었던 冒受賜牌田 은 爲己之有 不納公租 함으로써 田丁制的 수취기반을 붕 괴시키는 것이었으며 위정자들은 이의 심각성을 모를 리 없었을 것이다. 48) 高麗史 권78, 食貨1 田制 經理條, 一. 京畿八縣田元有主 國家近因多故 以兩班祿捧之薄 初給 墾地 其餘荒地頸頤多 自利爲先者 乘閒受賜 不許其主 不納官租 專收其利 甚者又幷 兩班折給之田
- 96 - ②는 功臣田으로서 자손이 微劣하여 孫外人이 빼앗은 경우는 연한을 가리지 말고 후 손에게 환급하라는 내용이다. 본 항목을 功蔭田柴 條로 분류한 것을 보면 대체로 功蔭 田柴科 로 지급된 토지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한다. 따라서 麗末 기록에 나타나는 功臣 賜田과는 다른 지목으로 보아야 할 듯하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還給을 시행하 는 데 있어서 同宗中 若一戶合執者 에게 足丁 半丁을 가려 均給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이는 功蔭田이 田丁連立의 일반규정과는 다른 세습규정을 따르고 있다는 점에서 구별되 어야 하겠으나, 分給의 단위는 여전히 田丁制에 따른 편성을 따르고 있음을 의미한다.49) 이 시기 州縣의 總額制的 收取下에 있어서, 수취과다로 인한 避役은 그 영향이 지역내 의 다른 家戶에게 미치게 된다. 이러한 현상을 단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바로 ③이 아닌 가 생각된다. 이 당시 避役民은 有勢力招集以爲農莊 이라는 표현에서도 나타나는 바와 같이 勢力者들에 의해 招集되어 農莊에 使役되고 있었다. 이러한 사태에 직면하여 국가 는 所在官으로 하여금 推刷還本하되 具錄以聞케 하고 있음에 주목하게 된다. 還本 하도 록 한다는 것은 본래의 거주지역에 되돌린다는 뜻이며, 이 경우 원래의 田丁을 되찾게 함으로써 수취체제를 정상화하고자 하는 국가적 의도가 깃들여 있는 것을 간취할수 있 을 것이다.50) 이 시기 農莊의 발전은 이러한 田丁制 기반위에 선 수취구조의 내부적 연결고리를 끊 는 것이었다. 그러나 또한 반대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서 이 시기 農莊은 발전하고 있었 다. 특히 ①에서 드러나듯이 冒受賜牌田의 폐해가 가장 심각하였다. 이에 따라 원종대 이래 임시변통으로 처리해 오던 거주지통제정책을 원칙론에 입각해서 다시금 확인한 것 이었다.51) ④에서는 兩班田地가 寺院이라든지 齋醮와 같은 諸處에 의해서 冒受賜牌되어 農莊으 로 전환되고 있음을 보여 주고 있다. 여기에서도 국가는 有司窺治各還其主 하도록 조처 하고 있다. 冒受賜牌된 兩班收租地가 국가의 강제력을 통해서 원래의 田主에게 환원조처 使不得隨職遞受者多矣 令有司更爲審驗 和會折給 江華田亦令均分. 49) 말하자면 役分田이라는 명칭에서도 유래되듯이 職田으로서의 의미, 예컨대 身沒後에는 국가에 반 납하는 兩班田이라든가 閑人田 혹은 일정한 職役부담에 대한 대가로서의 軍人田 따위와는 달리 세습적 의미가 강하였다. 따라서 連立 혹은 立戶充役과 같은 경우와는 구별되어야 할 것이다. 그 러나 그 토지 자체는 收租地인 이상 收取단위로서의 田丁制를 토대로 하고 있음에는 차이가 없다 고 하겠다. 따라서 본문에서의 足丁 혹은 半丁은 이를 뜻하는 것이며 田丁制 기초위에 功蔭田을 정비하고자 하는 의도가 엿보인다고 하겠다. 또한 범죄자는 永業田을 받을 수 없다는 田丁連立 규정과는 달리 功蔭田은 謀危社稷 謀叛 大逆 延坐 및 雜犯으로 公私에 罪를 지어 除名을 당한 이외에는 비록 그 아들이 죄가 있다고 하더라도 손자가 무죄일 경우에는 功蔭田을 지급하되 다만 三分之一로 감축하였다. 이 경우에 功蔭田의 최 하 지급결수인 5品의 田 15結 柴 5結은 5 7結 정도에 불과하게 된다. 그것은 기껏해야 半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러나 永業田의 경우에는 足丁을 지급함으로써 田丁은 즉 足丁의 의미가 강했던 것이다. 50) 그런데 필자와는 다른 견해도 있다. 蔡雄錫씨는 元宗 11년을 기점으로 本貫을 통한 거주지통제정 책이 변화한 것으로 보았다(蔡雄錫, 앞의 논문, 1990, p.68). 51) 그러한 원칙은 이미 洪子藩의 便民十八事 나아가 李瑱의 상소에서 출발된 것으로 생각된다.
- 97 -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忠宣王은 즉위와 함께 田制의 釐正을 추진하고 있었는데 그 방향은 田丁制로 요약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러나 물론 그것이 기본적으로 원종대 이래의 정책방향과 다 른 것은 아니었다. 세전토지의 환주가 바로 그러한 조처였다. 그러나 한발 더 나아가 모 수사패전을 혁파함으로써 지금까지 탈점의 주대상이었던 軍 閑人 계층에 대한 立戶充役 조처로 이어지고 있었다. 田丁制的 役制가 軍人 등 하급관인층의 토지를 중심으로 무너 지고 있었던 바를 고려할 때 그 의미는 큰 것이었다. 요컨대 이 시기 田制釐正策의 방향 은 田丁制의 재건을 통한 수취 및 분배구조의 복구라고 하겠다. 그러나 田丁制와 이를 토대로 하는 役制의 회복으로 집약되는 개혁의 방향이 순탄했 던 것은 아니었던 것 같다. (忠烈王) 三十三年 十二月 丙申 (중략) 前王 欲依上國之制 定軍民 崔有渰駿之 乃止 ( 高麗史 권 32, 世家). 時忠宣欲遵元法別軍民 有渰諫止之 忠烈薨 忠宣自元還國 ( 高麗史 崔有渰 傳). 忠宣王이 復位할 즈음에 이르러 왕은 元法을 받아들여 軍과 民을 구별하고자 했던 것 이다. 그러나 결국은 崔有渰52)이 이를 극력 만류함으로써 포기하기에 이르렀다.53) 役制 52) 崔有渰은 유명한 文憲公 沖의 후손이며 滋의 아들이다. 그는 과거 闊里吉思의 奴婢法을 거부하였 을 뿐만 아니라 忠肅王代에도 行省을 설치하고 世祿과 奴婢法을 개혁하고자 압력을 元 中書省에 力請하여 중지하게 함으로써 三韓을 지킨 이로 평가받았던 만큼, 高麗의 주체성을 지키고자 노력 했던 인물로 생각된다. 53) 忠宣王이 하고자 했던 遵元法 別軍民 이 구체적으로 무엇을 뜻하는지 그리고 崔有渰은 왜 이를 막았는지도 구체적으로는 알 수가 없다. 다만 蒙古軍은 원래 家有男子 十五以上 七十以下 無衆寡盡簽爲兵 하였으나 中原을 차지한 이후 에는 發民爲卒 하여 이른바 漢軍으로 삼았는데 貧富라든가 男丁 혹은 戶 등을 기준으로 삼았다 ( 元史 권98, 兵志 序). 그리하여 元에 있어서는 治者階級에 있어서와 마찬가지로 民衆間에 있 어서도 國家에 대한 奉仕가 身分的으로 또한 世襲的으로 요구되었다. 소위 諸色戶計의 決定이 그 것으로서 軍戶 匠戶 站戶 民戶와 같은 各 種別이 萬人에게 輕重의 부담을 항구적으로 결정하기 때문이다. 위로는 官僚로부터 아래로는 庶民에 이르기까지 일관되게 고정된 國家關係야말로 바로 身分制度의 本領이었다( 아시아歷史事典 3, p.138 참조). 이러한 사실로 볼 때에 忠宣王이 元制를 따라서 軍과 民을 구별하고자 시도했던 것은 위에서 말 한 諸色戶計에 의한 신분제를 뜻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런데 이와 관련하여 元宗 15년 東 征軍 支援과 관련하여 高麗가 元에 보낸 上書文에 의하면, 小邦은 원래 軍民이 無別하여 함께 赴 役케 하고 있으니 혹시 旬月을 늦추어 끌게 한다면 그 농사를 어떻게 할 것인지 ( 高麗史 권 27, 世家 元宗 15년 2월 甲子)라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高麗의 병제는 軍民無別로 인식되어 있음 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한 금일의 해석은 논자에 따라 상반된 견해차이를 보이고 있으나 우선은 사료의 충실에 기할 수밖에 없으므로 이를 염두에 둔다면 高麗의 兵制는 軍班氏族制가 허물어진 이후 番上에 의한 軍役체제가 중심이 된 상황을 지칭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따라서 元制에 의한 개편은 高麗의 전통적 軍役체제와는 다른 것으로 생각된다. 이미 闊里吉思 등에 의해 高麗式 신분제의 개편노력이 있었으나 일단 좌절된 바가 있으나 당시에 있어서도 여전 히 비슷한 압력이 작용한 결과 忠宣王으로 하여금 이러한 생각을 낳게 한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 98 - 와 土地가 밀접하게 결부되어 있는 高麗의 수취구조를 염두에 둔다면 이는 결국 기존의 체제를 전면적으로 달리하는 것을 의미하였다. 결국 이 과정을 통해서 忠宣王의 개혁추 진에 있어서 儒者層의 견해가 결정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음을 단적으로 드러낸 것이라 하겠다. 그렇다면 忠宣王이 復位한 이후 실제 田制發正과정에서 田丁制는 어떻게 처리되고 있 었을까? 먼저 田丁制는 田制釐正사업과 관련하여 그 기능의 일부가 잠시 중단되지 않았 나 생각된다. 忠宣王 2년 11월에는 田民計點사업이 일단 끝난 후 2단계 조처로 田結制 논의가 시작되는데 選軍의 독자적 기관이 일시 소멸(이는 새로운 田民計點이 끝날 때까 지 과도기적으로 給田을 제외한 형식적 업무만을 통합된 기관에서 관장하였을 것이다)된 것은 計點사업이 시작되던 해였다. 이로써 보면 選軍은 計點사업의 시작을 계기로 일단 중단된 후 사업이 끝나고 나서 재개된 것으로 이해된다.54) 忠宣王 復位年 10월에 開京의 五部에 대한 點戶를 시작으로 田民計點사업이 시행되었 다. 이와 관련하여 그 이후에 나온 여러 조처를 분석해 보기로 한다. ① 大赦 敎曰 (중략) 庸是擇差使人 點數民田 均租定賦 遞追前式 此蓋一爲國用周備 一 爲捧祿贍給 一爲民產豊足 況司牧之 初宣加異澤( 高麗史節要 권23, 忠烈王 34년 11월 條). ② 忠烈王 三十四年 忠宣王復位下敎曰 (중략) 一. 權勢之家 奸猾之類 造作文契 奪人奴 碑田丁 其主告官 官司畏勢 因循不決 使告者積怨 宜令官司速決無滯 詐僞者罪之( 高麗 史 권84, 刑法1 職制條 ). ③ 忠宣王復位 敎曰 宰臣直子許一名初授七品 顯官致仕三品 各許一子職事 無子者甥姪 女壻一名 許蒙文武四五品 顯官解官 各許一子蔭職( 高麗史 권75, 選擧3 蔭敍條). ④ 又下旨于典農司 (중략) 一. 豪勢之家 始以賜給 占籍土田 因稱祖業者 及其足丁 剩於 本數者 令各道務農使 盡行打量 納租本司( 高麗史 권33, 世家, 忠烈王 34년 ; 忠宣王 即位年). ①에서 忠宣王은 點數民田 에 있어서 3가지 원칙을 제시하고 있는데, 첫째는 국용을 두루 갖추는 것이며 둘째로는 俸祿을 넉넉히 지급하고자 함이며 마지막으로 民產을 풍 족하게 함이라고 하였다. 이는 국가재정의 충실을 기하면서도 관료들의 경제적 처우문제 에 무엇보다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앞서 忠宣王의 即位敎書에 54) 그러나 選軍업무가 완전히 중단된 것은 아닌 듯하다. 張東翼氏에 의하면, 忠宣王 34년 選軍都監 이 일시 폐지되어 부활되기 직전 權溥가 7品 이하의 武選을 맡게 된 것은 폐지 이전의 選軍都監 의 기능을 특정개인에게 위임한 것으로 볼 수 있겠다. 武班職 7品 이하는 別將(正 七品), 散員(正 八品), 校尉, 隊正 등이 있는데, 校尉와 隊正이 일반군인의 직역에 비해 커다란 차이가 나지 않았 던 점을 고려하면, 이들이 選軍都監에 의해 선발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하겠다 라고 하였다( 高 麗前期의 選軍 京軍 構成의 이해를 위한 一試論 高麗史의 諸問題, 1986, p.457).
- 99 - 서 내세웠던 田丁制的 釐正방향과 서로 통하는 것이었다. ②의 下敎에서 王은 文契의 조작을 통한 田丁의 탈점이 權勢之家에 의하여 자행되어 왔으나 官司에서는 그 세력을 두려워하여 감히 시정치 못한 결과 원한이 쌓이게 된다고 하였다. 이에 忠宣王은 官司로 하여금 速決하여 지체치 않도록 하고 詐僞者는 처벌할 것 을 명하였다. 이와 같은 내용도 역시 즉위 교서에서 보여준 바와 크게 차이가 나지 않는 다. 起主 즉 田主가 官司에 고발하고 있는 사실은 收租權 分給의 운영원리, 요컨대 田丁 連立의 원칙이 법제상으로 존속되고 있음을 뜻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도 실제에 있어서 이를 거역하고 있는 權戶가 여전히 군림하고 있었다. 田民辨正의 추진에도 불구하고 그 효과가 별로 기대될 수 없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때문이었다. 忠宣王 復位에 즈음한 왕 권의 신장은 비록 한계가 있었으나 과거와는 다른 좀 더 과감한 조처가 가능하였던 것 이다. 蔭敍는 田丁連立을 보완해 주는 기능을 갖고 있었음을 고려하면, ③에서 蔭敍관계 규 정을 언급한 것은 이 시기 田丁制의 維持를 전제로 했음을 보여주는 사항이 아닌가 생 각된다. ④에서 祖業 을 稱한다는 것은 스스로 永業田을 사칭한다는 의미가 아닐가? 사실 賜 田은 전시과계열의 토지가 아니었다. 따라서 其足丁 이 갖는 의미는 확실하지 않으나 그 것이 賜田을 가리키는 것은 아닌 듯하다. 오히려 田柴科계열의 토지로서 足丁을 넘는 경 우에 대한 課稅조처가 아닌가 한다. 이처럼 복위후의 정책의 방향도 역시 즉위교서에서 드러난 田制釐正策과 일치되는 것 이었으며 이에 따라 田丁制的 수취 및 분배체제의 구축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러나 사실상 本貫制가 상당부분 붕괴되어 있는 상태에서, 여초와 같은 방식의 田丁制 운영을 기대하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실정이었다. 오히려 忠宣王代의 일련의 정책적 시행은 田丁 制의 해체와 그에 대한 대책이라는 측면을 생각해 볼 수가 있다. 이미 元宗 11년 국가는 流民의 還本조처를 취하였으나 우선적으로 鄕吏의 刷還에 주력할 수밖에 없었다. 따라서 일반 백성들은 여전히 本貫을 떠나 遊離된 채 살아가는 경우가 많았던 것이다. 이러한 정세로 인하여 忠烈王 11년에는 土着安業한 경우에는 현실을 참작하여 형편에 맞도록 하는 등 종래의 還本政策上에 약간의 전환이 있었다. 下旨 一. 流移鄕吏 不拘年限 已曾還本 今百姓之流移者 亦宜刷還 然流移已久 安心土着 若皆還本 則彼此遷徙 必失農業 依前庚午年(元宗 11) 以上例 已訖還本人外 竝皆不動 使 之安業( 高麗史 권30, 世家 忠烈王 11년 辛卯條). 刷還정책의 전환은 무엇보다도 강제로 이주시킬 경우에 예상되는 失農의 우려에서였 다. 위와 같은 조처는 지금까지 本貫制의 틀을 벗어나 국가적 파악에서 제외되었던 민과 토지를 다시금 국가적 관리의 대상으로 삼기 위한 예비적 단계로 간주된다. 바로 이러한
- 100 - 조건하에서 忠宣王代의 田民計點과 量田사업이 이루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甲寅柱案은 그 성과였다. 그것은 睿宗朝 이래로 진행되어온 民의 流亡사태를 일단 마무리 한다는 의 미도 갖고 있었다. 동시에 붕괴되다시피한 田丁制를 상황변화에 맞춰 운영해 나감으로써 토지와 민에 대한 국가적 파악을 가능하도록 한 것이었다. 예컨대 流移鄕吏에 대해서는 年限에 관계없이 還本하도록 조처를 내린 것은 이를 말해주는 것이다. 田丁制의 운영에 있어서 이들의 역할은 거의 절대적이며 이들이 없이는 사실상 불가능한 것이었다. 그러 나 종래의 전정제가 그대로 적용되는 데에는 적지않은 문제점이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무엇보다도 國外流亡民의 경우 刷還이 쉽지 않았으며 이미 流亡을 통해서 여초의 本貫 制的 질서가 유지될 수도 없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忠宣王代에 들어와 田制釐正策이 적극적으로 추진됨에 따라서 元宗朝 이래 의 한계를 극복하는 방향에서 辨正사업은 새로운 전환점을 맞이하게 되었다고 하겠다. 즉 과거와는 달리 本貫制的 규제가 사실상 어려웠을 뿐만 아니라, 개간사업이 어느 정도 진척됨으로써 종래의 田丁制로서는 그 의미가 없었다. 이러한 배경하에서 見在의 田口를 바탕으로 田民計點 및 量田사업이 수행되었다. 이 시기 釐正의 방향은 여초이래의 古制 의 회복에 두고 있었으나 그 요체는 사회경제적 변화에 따른 田丁制의 현실적 적용이었 다. 나아가 이를 통한 국가재정의 확보와 役制의 운영에 釐正의 목표를 두고 있었다. 이 른바 甲寅柱案은 이와 같은 과정을 통해 작성되었다. 그것은 租稅의 수취와 收租權의 분 배에 관한 作丁臺帳의 의미를 갖고 있었다. 忠宣王代의 田制釐正은 이와 같은 변화된 시점에서 진행되었으므로 토지와 민에 대한 파악방식도 또한 달라질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에서 살핀 忠宣王 의 즉위교서에서 나타나는 바와 같이 田丁制의 틀은 바뀐 것이 아니었다.55) 다만 田制釐 正의 과정을 생각해 볼 때에 지금까지 在地鄕吏세력을 매개로 운영되어 오던 田丁制는 이제 국가에 의한 직접적 파악이 강화된 모습으로 상당부분 바뀌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2. 麗末 田丁連立制의 운영과 그 한계 전제개혁론자들은 여말 사회경제적 모순의 핵심을 私田문제에 두고 있었다. 이 시기 봉건지배층의 두 물적기반이었던 地主佃戶制와 田主佃客制 중의 하나였다는 점에서 특 히 주목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당시 탈점으로 인해 전국의 토지와 양인이 대부분 농장에 흡수되어 버린 것처럼 다소 과장된 표현56)이 나오기도 했던 것은 그 중요성을 55) 李齊賢은 策問에서 祖宗의 垂統守成한 것이 四百年이나 되었으나 經國之謨라든가 取民之制는 대 체로 옛과 다름이 없다고 하였다(拙稿, 14世紀 甲寅柱案의 운영에 대하여 p.252). 56) 高麗史 권131, 辛旽 傳, 比來 紀綱大壞 貪墨成風 宗廟 學校 倉庫 寺社 祿轉 軍須田及國人世業 田民 豪强之家 奪占幾盡 或已決仍執 或認民爲隷.
- 101 -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그러나 私田의 확대에도 불구하고 여말에 이르기까지 郡縣制에 입 각한 고려의 지방지배체제는 여전히 유지되고 있었다.57) 田丁制의 골격이 유지된 것은 물론이다. 따라서 여말 전국의 토지가 대부분 농장에 편입되었다는 견해58)는 받아들이기 어렵다. 그런데 이러한 견해와는 달리 사전에 있어서 祖業田 현상 과 함께 그 폐해가 지적되 기도 한다. 이에 의하면 祖業田 은 永業田이 국가권력의 규제를 벗어나 수조권이 강화됨 으로써 사유지로서의 성향 즉 家產化된 토지를 지칭한다.59) 그러나 이와 같은 입장은 永 業田 자체가 갖는 의미를 생각하게 될 경우 약간의 문제점을 안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원래 永業田 이란 고려전기부터 官의 파악하에 전정연립을 통해 수조지가 世傳 遞受 되는 토지였다.60) 말하자면 永業田은 당초부터 공권력을 매개로 하여 職役을 가진 자손 에게 연립시킬 수가 있었다. 그것은 하등 법에 저촉되는 것이 아니었으며 오히려 고려사 회의 특성을 반영하는 것이었다.61) 그런 점에서 보면 永業田을 世業田이라고도 표현한 것은 그러한 이유가 아닌가 한다.62) 前朝 世業之田 乃世祿之遺意 亦可謂仁厚矣 及僞朝之季 乃革世業以爲科田 ( 太宗實 錄 권25, 太宗 13년 4월 壬申). 여기서 前朝의 世業之田은 世祿의 뜻이 남아 있으니 가히 어질고 후덕한 바가 있었으 나 혁파하여 科田이 되었다고 하였다. 말하자면 世業之田이란 용어 자체는 世傳 遞受될 수 있다는 의미에서 쓰였던 것이다. 世業田을 혁파하여 科田을 만들었다고 표현한 것은 그 차이점을 부각한 것으로 생각된다. 바로 이 점에서 같은 중세의 수조권 분급제도이면 서도 田柴科와 科田法은 차이가 있었던 것이다.63) 57) 浜中昇, 앞의 논문(1976) p.51. 58) 姜晋哲, 앞의 논문(1989). 59) 李景植, 앞의 논문(1986). 祖業田과 관련하여 李佑成씨는 永業田이 곧 祖業田이라고 한 바가 있다. 또한 姜晋哲씨는 여말의 기록에 흔희 보이는 父祖田 祖業田은 世業田과 同義異語라고 생각된다고 하였으며, 父祖로부터 계승받아 자손에게 遺傳하는 토지가 世業田이라고 하였다. 이러한 성질을 갖춘 토지를 고려시대의 토지종목에서 구하여 보면 사유지로서의 民田과 功蔭田, 그리고 국왕이 공신에게 내린 功臣田 내지는 賜給田 같은 것이 이에 해당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이 정 당한 합법적 世業田이라고 하였다(姜晋哲, 高麗의 權力型 農莊에 대하여 韓國中世土地所有 硏究, 1989, p.183). 한편 浜中昇씨는 고려전기의 永業田은 후기에 국가적 규제가 약화되어 조업 전으로 불리어지게 되고 祿科田 창설을 계기로 口分田으로 되었다고 하였다. 즉 祿科田 折給에서 제외된 것은 양반의 祖業田과 軍人 閑人의 祖業田 가운데 足丁이고 이는 이때부터 口分田으로 되 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이때부터 祖業田은 특정의 地目으로부터 단순한 수식어로 변해버렸다고 하였다(浜中昇, 앞의 논문 pp.34 35). 60) 李景植, 앞의 책(1986) pp.12 13참조. 61) 永業田을 보완하는 기능을 가진 口分田의 존재가 또한 그러하였다. 62) 周藤吉之는 世業田을 여말의 私田과 같은 것으로 보았다(周藤吉之, 高麗朝より朝鮮初期に至る 田制の改革 東亞學 3, 1940, p.134).
- 102 - 이러한 관점에서 볼 때에 祖業田의 의미도 달라질 수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禑王 14년 7월) 大司憲趙浚等上書(1차 上疏) 曰 (중략) 至於近年 兼幷尤甚 奸兇之黨 跨州包郡山川爲標 皆指爲祖業之田 相攘相奪 一敏之主 過於五六 一年之租 收至八九( 高 麗史 권78, 食貨1 祿科田條). 위의 兼倂에 관한 사료에서, 趙浚은 수조지를 둘러싸고 兼倂이 尤甚해진 결과 모두가 서로 祖業之田 이라고 하면서 相攘相奪하였다는 것이다. 兼倂之家는 祖業之田 을 내세워 자신의 행위를 변호하고 있다. 만약에 이것이 家產化된 收租地를 의미했다면 대외적으로 변명할 여지가 없게 된다. 결국 祖業之田이라고 한 것은 자신의 收租地임을 주장하고 이 를 정당화하기 위한 대외적 표현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는 당시에 收租地에 대한 관 념이 으레 祖業之田 으로 인식되고 있었으며 그것이 또한 떳떳한 것이었음을 반증한다 고 하겠다. 말하자면 祖業田이란 官의 개입없이 私的으로 授受되어 世傳되고 있는 토지 가 아니었다. 오히려 官에 의해 世傳이 공인된 收租地를 의미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祖 業之田 이라는 용어는 世業之田 이라는 용어와 크게 달라 보이지 않는다. 문제의 핵심은 祖業之田 그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이와 같이 내세우면서 국가의 감독을 벗어나 私 的으로 世傳 遞受 혹은 授受되는 데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永業田에 있어서의 田丁連立 기능이 이미 유명무실화하고 있음을 강조한 표현이었다. 이와 관련하여 여말에 이르러 趙浚은 私田의 문제점을 들어 祖宗의 授田收田之法이 무너졌다고 하였다. 그는 私授兼倂의 폐해64)로서 이를 요약하고 개혁의 불가피성을 역설 하였다. 私授兼倂의 폐해란 收租權의 私的授受와 收租地의 兼倂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를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已仕已嫁者가 여전히 閑人田을 차지하고 있다고 하였다. 이 말에는 已仕已嫁者 는 閑人田을 가질 수 없다는 뜻이 내포되어 있다. 즉 벼슬을 하여 入仕하였거나 出嫁한 경우에는 閑人田을 내놓아야 된다는 의미이다. 閑人田을 받는 閑人의 자격은 未仕者(六 品 以下官의 男子)는 父의 死歿을 前提로 하고 未嫁女(六品 以下官의 女子)는 父母皆 死 無男 을 前提로 한다.65) 그러나 해당자는 누구에게나 지급되는 것은 아니고 이미 高 宗朝에도 시험을 통해 선발할 정도로 田丁은 부족하였다. 閑人田은 入仕하거나 出嫁한 경우에는 국가에 반납하여야 했으며, 전자의 경우에는 새로운 지목의 토지, 예컨대 역 분전을 지급받게 되었을 것이다. 여기에서는 이와 같은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가리킨 것이다. 63) 이 점에 관하여 李成茂씨는 중앙집권체제의 강화에 따라 世祿的 성격이 축소된 것으로 이해하였 다(李成茂, 兩班과 土地 所有 朝鮮初期 兩班硏究, 일조각, 1980). 64) 高麗史 권78, 食貨1 祿科田條, (禑王十四年 七月) 大司憲趙浚等上書(1차 上疏)曰 (중략) 臣等 願遵聖祖至公分授之法 革後人私授兼幷之弊. 65) 姜晋哲, 앞의 책(1980) p.95.
- 103 - 둘째, 不踐行伍者가 軍田을 冒受한다고 하였다. 이는 토지만 지급받은 채 役을 지지않 고 있음을 지적한 것이다. 이 시기에는 토지만 지급받고 군역을 기피하는 경우가 많았으 며 그 결과 실제 군역을 담당하고 있는 자는 토지를 받지 못하고 있었다. 셋째로 父匿挾而私授其子 子隱盜而不還於公 는 永業田이 私的으로 遺傳되고 있음을 뜻 한 것이다. 田柴科 토지는 원래 世傳이 될 수 있었으나 대체적으로 身歿 후에는 納公을 전제로 하고 있었으며 이 경우 신분에 따라서 조건의 차이가 있었다. 그러나 여기서는 納公 즉 田丁連立의 원칙이 지켜지지 않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리하여 이미 役分田 을 받은 사람이 또한 閑人田을 차지하고 나아가 軍田까지도 먹 게 되더라도 授受之官은 그것을 묻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見任在官한 사람이 마땅히 役分田을 먹는지, 未仕未嫁한 사람이 마땅히 閑人田을 먹는 것인지 그리고 과연 府兵인 지 그 아버지는 과연 鎭邊에 入戍하였는지 그 조상이 과연 異國에서 來投王化하였는지 되물었다. 결국 祖宗의 授田收田之法이 무너지자, 兼倂의 문이 한꺼번에 열리게 되었다 고 하였다. 趙浚이 지적하는 私授兼倂의 폐해 가운데, 후자의 경우에는 軍人田이라든가 閑人田 등 下位 職役者의 收租地 兼倂과 밀접한 관련이 있었다. 役分田을 지급받은 사람이 閑人 田을 차지하거나 나아가 軍田까지도 먹게 되더라도 授受之官은 묻지 않는다는 사실이 바로 그것이다. 이처럼 田丁連立은 그 하부조직으로부터 붕괴하고 있었다. 收租權을 둘 러싼 지배층 내부의 경쟁이 치열해지는 가운데, 權力의 優劣에 의해 兼倂이 좌우되는 것 을 뜻한다. 이는 收租地의 私授에 있어서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따라서 이를 일반화하여 收租權의 强化로만 설명하는 것은 부적절하다고 하겠다. 한편, 이러한 조건하에서, 忠宣王代 이후 여말에 이르는 시기의 辨正사업은 甲寅柱案 을 토대로 전개되고 있었다. 忠穆王代의 整治都監이나 恭愍王代의 田民辨正都監의 설치 를 위시한 여러 辨正사업이 바로 그 경우였다. 이 시기의 경제구조는 여전히 田丁制를 바탕으로 한 수취 및 분배형태를 유지하고 있었다. 사실 田丁制는 여초의 사회적 정세를 반영한 경제구조였다. 그러나 고려후기 농장의 발달은 지주적 생산 관계의 발전과 불가 분의 관계에 있었으며 시대적 추세였다. 이에 따라 本貫制的 규제가 상당한 정도로 무너 져 이에 토대를 둔 종래의 수취 및 분배제도는 구조적 취약성을 안고 있었다. 그런 점에 서 忠宣王代의 田制釐正은 근복적 해결책이 되지 못하였다. 더군다나 몽고간섭기하의 정 치적 불안정과 뒤이은 전란 등으로 문제의 해결이 더욱 어려워지고 있었다. 여말에 이르 기까지 辨正사업의 필요성이 끊임없이 지속적으로 제기되었던 것은 그 때문이었다. 따라서 임시적 성격의 田民辨正사업은 내부적으로 한계를 안고 있었다. 특히 辨正사업 때마다 등장하는 문서의 복잡성은 이를 증폭시키고 있었다. 비록 법적으로 世傳이 보장되 고 있었다고 해도 실제로 이를 확인하는 일은 文件에 대한 엄밀한 분석과 검증을 요하는 것이었다. 이른바 田柴科계열의 世傳토지에 대한 田民辨正式 해결방안이었다. 여말 전제 개혁론이 대두되었을 때 李行은 그와 같은 방식을 반대하면서 다음과 같이 말하였다.
- 104 - 或曰今權豪之徒 伏辜殆盡 宜委辨正都監考察訟人高 曾契券 其有年代久遠派系明白者 各 還其主 則寃枉銷而國家無事 臣等以爲不然( 高麗史 권78, 食貨1 祿科田條). 즉, 혹은 말하기를 지금 權豪의 무리들은 거의 모두 伏罪하였으니 마당히 辨正都監에 위탁하여 訴訟하는 사람의 高祖 曾祖의 契券을 고찰하여 그것을 가진 年代의 久遠과 派 系가 명백한 것은 각각 그 주인에게 돌려주면 寃枉이 없어지고 國家가 無事하게 된다고 하오나 臣等은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여기에서 알 수 있는 바와 같이, 辨正都監이 살펴보는 것은 契券(文案)을 갖게 된 지 즉, 世傳 된지 얼마나 오래되었는가 그리고 派系가 과연 명백한가 하는 따위였다. 그것 은 다시 말해서 世傳 즉 田丁連立 원칙의 확인을 뜻하는 것이었다. 이처럼 여말에 이르기까지 田民辨正式 해결방안에 의한 田制釐正策은 변함이 없었다. 田丁制에 의한 수취 및 분배 그리고 이를 바탕으로 토지와 직역과의 결합에 의해 운영 되어 온 전정연립의 골격은 근본적으로 바뀌지 않고 있었다. 그러나 여초이래의 상황과 는 다른 사회경제적 여건의 변화에 따라 이와 같은 골격은 더이상 유지하기가 어려웠다. 더구나 몽고간섭기 이후 외적 모순이 겹치는 가운데 여말 계속되는 전란과 관련하여 국 가 재정은 급속히 악화되고 있었다. 여말 전제개혁론은 이러한 현실적 배경을 갖고 있었 으며 구체적으로는 田民辨正式 해결방안이 갖는 한계를 둘러싸고 전개되고 있었다. Ⅳ. 맺 음 말 지금까지의 검토결과를 요약하여 정리함으로써 맺음말에 대신하고자 한다. 무신정권 이후 사회변화와 함께 이 시기 생산관계의 발전은 地主佃戶制에 의한 農莊 의 발전으로 나타나고 있었다. 특히 富强雨班 京人 등으로 불리워지는 세력들은 古來 丁 田 이라든가 貢戶良人을 奪占함으로써 農莊을 확대하고 있었다. 이처럼 田民의 奪占이라 든가 혹은 流亡이 급증하는 가운데 貢戶良人이 公的 收取의 대상에서 빠져나감으로써 田丁制는 그 기반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한 이유로 해서 이 시기 開墾정책은 新田보다 는오히려 陳田에 주목하였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民有地의 탈점과 그 양상은 陳田開塑을 매개로 하여 內外의 兩班 및 軍人의 永業田과 같은 收租地의 탈점으로까지 광범위하게 확산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 지금까지 고려사회를 통해서 일관해온 총액제 수취방식의 중요 고리였으며, 役制의 운영을 통해서 職役 從事者에게 지급되는 收租權 분급방식의 고리이기도 하였던 田丁制는 수취 및 분배의 양측면에서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다.
- 105 - 무신정권 이후 몽고간섭기에 들어서 田丁制의 틀은 급속히 해체경향을 보이고 있었다. 洪子藩의 便民十八事 와 같은 개혁상소는 바로 이러한 문제와 관련된 것이었다. 이 시기 賜給田과 같은 脫田丁制的 토지는 農莊의 확대 및 逃戶의 출현을 조장하고 있었으며, 그 결과 貢納 의무와 관련한 鄕吏의 避役 행위가 늘어나고 있었다. 뿐만 아니라 軍人의 경 우 役重으로 인한 避役 행위가 늘어나고 반면 지위가 낮은 이들의 토지는 탈점의 대상 이 되고 있었다. 그리하여 특히 하위 職役 종사자들의 永業田에 대한 탈점이 성행하는 가운데 役과 土地의 分離 현상이 나타남으로써, 職役에 따른 田丁連立이라는 收租權 분 급의 원칙이 무너지고 있었다. 이에 따라 祿俸의 부족 또는 收租權 分給기능의 상실 문제 등은 왕조체제를 유지하기 위해서도 시급히 해결해야 될 과제가 되고 있었다. 戶口調査라든가 祿科田制의 실시 그 리고 田民辨正사업은 이와 관련이 있었다. 元宗 10년에 田民辨正都監이 설치된 것은 高 宗 45년 武臣政權으로부터 왕권이 회복되기 시작한 지 11년만의 일이었다. 辨正사업은 奪占된 公 私의 田 民을 本主에게 되돌려 줌으로써, 公的支配에서 이탈된 토지와 민을 변정하여 수취 및 분배기능을 정상화하는 데에 주안점이 있었다. 이에 따라서 후자의 경 우에는 田丁連立된 永業田(世業田 혹은 祖業田)의 本主(본래의 田主)를 찾아 되돌려 주 도록 되어 있었다. 따라서 辨正사업은 農莊의 解體문제와 직결되고 있었다. 기왕의 토지 지배관계를 그대로 허용하고 있는 것은 결코 아니었다. 새로운 토지분급제의 시행과는 별도로 世傳土地에 대한 대책 즉 爭訟문제의 해결 나아가 田制釐正策의 일환으로 시행 되고 있었다. 그러한 대책은 元宗朝 이래로 여말에 이르기까지 지속되었다. 農莊문제는 고려후기 생 산관계의 발전이라는 측면과 더불어 무신정권 이후 몽고간섭기에 이르는 정치적 상황이 결부된 채 쉽게 해결될 수 없는 난제를 이루고 있었다. 정부는 辨正사업과 함께 주민의 括戶 및 還本정책도 병행하고 있었다. 그러나 戰亂 혹은 避役으로 인한 流亡戶의 本貫地 로의 복귀는 失農우려 등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다. 말하자면 이 시기에 있어서의 田 丁制는 유망 등 요인에 의해 그 토대가 크게 흔들리고 있었다. 그 결과 제한된 범위내에 서의 田丁制的 규제로 전환되고 있었다. 이에 따라서 田丁制的 수취의 일선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었던 鄕吏계층에 대해서만이라도 연한에 불구하고 환본토록하되, 流移가 오 래되어 安心土着하고 있는 백성들에 대해서는 이미 환본한 사람 이외에는 그대로 安業 하도록 하는 조처를 취하였다. 이에 따라서 田丁制的 규제의 회복에 바탕을 둔 辨正사업 은 당연히 그 한계가 노출될 수밖에 없었다. 忠宣王代에 있어서의 田民辨正사업은 지금까지의 辨正사업이 안고 있는 한계를 극복하 고자 하는 방향에서 추진되었다. 見在의 田口를 토대로 한 田民計點사업이라든가 量田사 업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는 지금까지 田丁制의 수습이 현실적으로 한계를 안고 있었던 만큼, 현거주지역을 토대로 토지와 민을 파악함으로써 국가재정을 확보하고 봉록을 넉넉 히 지급하고 나아가 民產을 풍부히 하는 데에 목표를 두고 있었다. 그것은 본관제의 와해
- 106 - 등 사회적 변화에 따른 田丁制의 현실적 수용이었다. 사실 忠宣王代의 田制釐正을 통해 나타난 정책방향과 이념 그리고 그 성과는 여말에 이르기까지 그대로 적용되고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의 변정사업이 결코 田丁制的 규제를 완전히 탈피한 가운데 진행된 것 은 아니었다. 경제적 측면에서 足 半丁에 의한 租稅收取라든가 田丁連立 등 전정제에 의 한 규제가 여전히 존재하고 있었다. 반면에 農莊문제가 개선되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그것은 田制釐正과정을 통해서 일관되고 있는 田民辨正式의 해결방안이 안고 있는 한계 와도 관련된 문제였다. 그 결과 여말의 전제개혁론은 이와 같은 한계를 둘러싸고 世傳토 지에 대한 대책을 중심으로 전개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