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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식지수정본-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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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기획논문 항도부산 제 33 호, 2017. 2, 71~103 http://dx.doi.org/10.19169/hd.2017.2.33.71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이정은 * 1) 목차 Ⅰ. 머리말 Ⅱ. 사행이전활동 Ⅲ. 사행당시남긴이기룡관련기록 Ⅳ. 사행이후행적및활동 Ⅴ. 맺음말 국문초록 화원이기룡 ( 李起龍, 1600~?) 은계미사행 ( 癸未使行, 1643) 의수행화원 ( 隨行畵員 ) 이다. 계미사행은조선화또는수행화원의그림에대한일본측의요구가폭증하면서수행화원의역할과입지에도변화가나타난사행이었다. 사실계미사행부터는통신사의성격이정치 군사적면보다는문화사절단으로서의측면이강화되었고, 이에따라수행화원의활동역시본격화되었다. 조 일간문화교류사의측면에서조선통신사를연구한다고할때, 수행화원의역할과활약을고찰하는것은매우중요한의미를지니는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기룡의사행기록은물론이고국내활동에대한기록도소략하여그의연구는입체적으로이뤄지지 * 범어사성보박물관 / ciraz@hanmil.net.

72 항도부산 33 못하였다. 이에본고는이기룡의계미사행활동을중심으로전후활동을고찰해보았다. 병자사행에이어이기룡이파견된계미사행당시일본화단은선화가일대유행이었다. 선화로인해병자사행에이어방일한김명국과는달리그의선화는알려진작품이없다. 선화를그려남긴김명국과는달리선화한점을전하지않는다는것은파견된두명의화원의역할과활동에서차이가있었음을짐작하게하는점이다. 수행화원으로서일본측구청에응하는그림을그려남긴김명국은그의활동이력이고스란히기록물을통해전하는반면이기룡의활동은찾기가어렵다. 이러한이유는정묘호란 ( 인조 5) 과병자호란 ( 인조 14) 을겪은조선이대외활동에서상대국의군사정보를그림으로기록하고자했던바를이기룡이비밀리에수행했던바에서비롯된것으로사료된다. 이런추측은이기룡이, 이홍규를이은화원가문인점과사행이전 1638년 인조장렬후가례반차도 를제작하는데인조가아꼈던이징 ( 李澄, 1581?) 과함께참여한점등에서미뤄볼수있다. 그의현존하는일본사행작품은말그림으로당시긴박했던사행과는동떨어지면서도, 국내의궤활동에서볼수있는세밀한묘사가두드러진것을미뤄보아서사행이전의작품으로추정된다. 즉해당작품은일본측의요청으로사전제작해서, 일본으로가지고간것으로무게를두었다. 단독으로참여한 1631년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의사신도와비교하면정교한필치와안정적인구도를기본으로하고있는점등을들수있다. 이기룡은다른회차에파견된수행화원들과마찬가지로사행이후에활발한국내활동을이어간화원으로볼수있으며이역시부친과가문의영향이컸다고본다. 그런데이기룡의아들이형정의공적ㆍ사적활동기록이전무한점과 1661년의궤참여를마지막으로공적활동이없는점등은이후가문의세력이축소되었음을알수있었다. 그는한개인의화가로서보다조선을대표하는화원이라는공적입장에있었고, 그의활약도그런범주내에서평가되어왔다. 개인작품이현존하지않는수행화원이기룡의행적범주를좀더확산시켜그의가문적배경과도화서내에서의활약까지두루조망해봄으로써수행화원이전과이후의내 외연적활동을고찰하였다. 주제어 : 이기룡, 계미사행, 조선통신사, 수행화원, 도화서, 의궤, 이홍규, 김명국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73 Ⅰ. 머리말 화원이기룡 ( 李起龍, 1600~?) 은계미사행 ( 癸未使行, 1643) 의수행화원 ( 隨行畵員 ) 이다. 계미사행은조선화또는수행화원의그림에대한일본측의요구가폭증하면서수행화원의역할과입지에도변화가나타난사행이었다. 사실계미사행부터는통신사의성격이정치 군사적면보다는문화사절단으로서의측면이강화되었고, 이에따라수행화원의활동역시본격적으로중시되었다. 즉전반적으로외교 군사적측면이강조되었던초기조선통신사행부터문화사절단으로의성격이강화되었던후기통신사행에이르기까지수행화원은자기역할을충실히담당해왔다. 그러므로조 일간문화교류사의측면에서조선통신사를연구한다고할때, 수행화원의역할과활약을고찰하는것은매우중요한의미를지니는것이다. 그럼에도불구하고그일원 ( 一員 ) 이었던이기룡의경우, 사행기록은물론이고국내활동에대한기록도소략하여해당연구가입체적으로이뤄지지못하였다. 이에본고는이기룡의계미사행활동을중심으로전후활동을고찰해보고자한다. 그간진행되어온통신사수행화원의역할과활동에대한연구는대체로교류사분야에집중되어왔다. 홍선표ㆍ서윤정ㆍ유근형ㆍ정은주등이이에해당된다. 수행화원인물자체에초점을맞춘연구는정미사행 ( 丁未使行,1607) 이홍규 ( 李泓虯, 1568~?) 병자 계미사행 ( 癸未使行, 1636 1643) 김명국 ( 金明國,?~?) ㆍ을미사행 ( 乙未使行, 1655) 한시각 ( 韓時覺,1621~?) ㆍ이성린 ( 李聖麟, 1718 1777) ㆍ무진사행 ( 戊辰使行, 1748) 김유성 ( 金有聲, 1725~1775 이후 ) ㆍ신미사행 ( 辛未使行, 1811) 이의양 ( 李義養, 1768?) 등이진행되었을뿐, 초기사행의화원에는해당되지않는다. 1) 1) 이태호, 韓時覺의北塞宣恩圖와北關實景圖 ; 정선眞景山水의先例로서 17세

74 항도부산 33 초기수행화원연구는이후수행화원연구와연결선상에있다. 정미사행수행화원이홍규와계미사행 (1643) 의이기룡이그시작점에있다할것이다. 이미진행된이홍규의연구에이어입체적시각을위해우선그의아들이기룡은연구가필요한화원이다. 이기룡은계미사행의또다른수행화원김명국과비교해사행록에기록된자료가소략하다. 소략한자료를보완키위해화원의공적인행사참여기록인의궤에나타난활동으로이기룡을연구코자한다. 의궤기록은사행이전과이후모두나타나지만, 이중사행이후의활동을중심으로이기룡의행적과활약을역추적하여사행이그의화원활동에미친영향을중심으로살펴보고자한다. 기의實景圖 精神文化硏究 34, 韓國精神文化硏究院, 1988. 이건상, 北塞宣恩圖 와 北關實景圖 : 雪灘韓時覺의實景山水畵, 國立中央博物館, 1993. 홍선표, 조선후기通信使隨行畵員의파견과역할 미술사학연구 205, 한국미술사학회, 1995; 조선후기통신사수행화원의회화활동, 미술사논단 6, 한국미술연구소, 1998. 권혜은, 朝鮮後期 槎路勝區圖畫集 의作者와畵風에관한硏究, 弘益大學校碩士學位論文, 2005. 서윤정, 1764 년通信使의繪畵活動과그交流, 서울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5. 유근형, 朝鮮時代南畵가近代美術에미친영향에대한硏究, 경기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05. 이경화, 北塞宣恩圖연구 미술사학연구 254, 한국미술사학회, 2007. 이현주, 한류의시초 : 朝鮮通信使隨行畵員李聖麟의사로승구도 한국예술문화단체총연합회부산광역시연합회, 2008. 황은영, 1811 년신말통신사수행화원이의양에대하여 강원사학 22 23, 2008. 이정은, 朝鮮通信使隨行畵員硏究, 경성대학교박사학위논문, 2009. 김나영, 서암김유성의회화연구, 동국대학교석사학위논문, 2011. 이정은, 金明國의丙子 癸未通信使行활동작품분석, 인문논총 27, 2011; 乙末通信使行隨行畵員韓時覺의行蹟및活動, 조선통신사연구 12, 2011. 정은주, 계미 (1763) 통신사행의화원활동연구 정신문화연구 34 권 2 호통권 123 호, 2011. 위순선, 다니분쵸 [ 谷文晁 ](1763~1840) 를倣한이의양의산수화 조선통신사연구 19, 2015. 이정은, 정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홍규의행적및활동 문물연구 28, 2015. 정은주, 1811 년쓰시마통신사행의서화교류 동아시아문화연구 60, 2015; 19 世紀初對淸使行과燕行圖 : 李信園寫生帖 을중심으로, 명청사연구 43, 2015.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75 Ⅱ. 사행이전활동 본장에서는통신사수행화원이기룡의생애와국내에서의활동을고찰하고자한다. 기록이나그림등전하는자료가워낙부족해서그의삶을조망하는것이거의수월치않다. 그러나부분이라도현전자료를통해가계중심으로추적해보고자한다. 또한사행참여전후의행적을중심으로살피되, 특히도화서화원으로서의궤제작에참여한부분에관해서는 Ⅳ장에서별도로거론하기로하겠다. 화원에게있어통신사행참여는매우힘든일이었지만, 새로운경험을할수있는좋은기회이자자신의이름을국외에떨칠수있는방편이되기도했다. 따라서대부분의화원들은수행화원으로선발될수있기를희망하곤했고그런만큼수행화원에선발되는것은쉬운일이아니었다. 도화서의여러화원들가운데통신사수행화원을선발하는일은앞에서밝힌품계나연령외에다른요인들도포함되었을것으로여겨진다. 곧그들의집안배경이묵시적으로개입된것으로짐작된다. 가문의형성은 16세기부터서서히나타나는현상이었지만, 화원가문이본격적으로형성된것은숙종시대이후도화서확장과더불어화원을대거선발하면서부터이다. 2) 이기룡또한화원가문을형성한부친이홍규의영향으로가업을이어도화서화원이되었다. 이기룡이도화서화원으로서의궤제작에참여한시기는이홍규가수행화원으로다녀온이후인것으로포착된다. 3) 이기룡이도화서화원이되고, 또의궤제작에본격적으로참여할수있었던것은부친과가문의영향이컸다고본다. 2) 안휘준, 朝鮮時代의畵員 韓國文化 9, 1989, 156 쪽. 3) 이정은, 앞의논문, 2015, 87 쪽.

76 항도부산 33 정미사행파견 40년전, 이홍규는 1568년화원이수형 ( 李壽亨 ) 의아들로태어났다. 그의집안은조선중기를대표하는경주 ( 慶州 ) 李氏화원가문으로화원가의형성은증조부인이명수 ( 李明修, 1490?) 로부터시작됐다. 이명수는두아들이정근 ( 李正根, 1532?) 과이정식 ( 李正植,??) 을비롯하여화원유징 ( 柳澄,??) 과사돈을맺어화원가문을확장했다. 이명수의아들이정근은부친에이어본인과후손까지화원가문으로대를이어갔다. 정미사행의수행화원이홍규는이정근의손자이다. 이정근은화원가문이중심인본인집안에서장남이수원보다차남이수형을중심에두었을것으로짐작된다. 그런데정작이수형의화원활동은알려진바가없고, 이정근의동생이자이수형의숙부인이정식과숙부의아들이성복 ( 李成福,?~?) 의화원활동은기록으로남아전하고있다. 이러한점으로미뤄보아이수형은본인혈족으로화원가문을잇기위해노력했을가능성을유추해볼수있다. 아들이홍규의성장을도왔을것이며, 이를위해본인의희생을마다하지않았을것이다. 이러한노력은결국이홍규를정미사행의수행화원으로발탁하게된이유를마련했을것이다. 4) 이기룡은 1600년경자 ( 更子 ) 생으로자 ( 字 ) 는군서 ( 君瑞 ), 호 ( 號 ) 는궤은 ( 几隱 ) 동비야인 ( 東鄙野人 ) 을사용하였다. 이기룡은동지중추부사를지낸정미사행 (1607) 수행화원이홍규의아들로명기 ( 明記 ) 되어있다. 정미사행이홍규가계에서잠시살폈던가계를이기룡을중심으로간략히살펴보자. < 표 1> 를보면이기룡은고조부이명수를시초로하여이기룡의아들이형정 ( 李衡精 ) 까지무려 6대를이어온화원가문이다. 이기룡은임란이후재개된정미사행의수행화원이홍규의아들이다. 그의부친은사행이후가장돋보이는활동을했던화원이고이러한이홍규의입지 4) 이정은, 위의논문, 2015, 76 쪽.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77 가다음의통신사행에유성업을참여시키는데영향력을행사했을것이며, 이후이기룡이다시통신사행에참여하게되는배경으로작용했을것이분명하다. 그러나이기룡이후이들가문의향방은아직확인할수없다. < 표 1> 畵員李起龍의가계도 5) 李明修 ( 畵員 ) 柳澄 ( 畵員 ) 李正根 ( 畵員 ) 李正植 ( 畵員 ) 女 + 柳成業 : 丁巳使行 (1617) 李壽元 ( 計士 ) 李壽亨 ( 畵員 ) 李梅虯 ( 計士 ) 李弘虯 : 丁未使行 (1607) 李起龍 : 癸未使行 (1643) 李衡精 ( 畵員 ) 李以楨 ( 種 ) 李受坤 ( 計士 ) 현재국내에전하는이기룡의작품은 < 남지기로회도 ( 南池耆老會圖 )>( 보물제866호 ) 가알려져있다. 5) 이정은, 앞의논문, 2009, 51 쪽 < 표 11>. 안휘준, 韓國繪畵史硏究, 시공사, 2000, 754 쪽 < 표 5> 를참조하여吳世昌, 槿域書畵徵, 시공사, 1998, 543 쪽. 중앙일보사, 한국의미 - 山水畵 ( 上 ), 중앙일보사, 1985, 198 쪽참조.

78 항도부산 33 < 그림 1-1> 참석명단 < 그림 1> 이기룡, 1629, < 남지기로회도 >, 비단에채색, 116.6 72.4 cm, 서울대학교박물관소장 < 그림 1-2> 장유의시 이그림은 1629년음력 6월 5일숭례문앞에서 70세이상의고령의관료들이사모임을가진뒤, 이를기념하여그린것이다. 상단에회화식전서로 남지기로회도 라고쓰고그림아래로장유 ( 張維 ) 의기문 ( 記文 ) 이있다. 6) 좌우로는비단에덧대어쓴이경직 ( 李景稷 ) 의서문이있으며, 서문과기문아래에는이경석 ( 李景奭 ) 이기록한계원들의관직, 성명, 자 ( 字 ), 호 ( 號 ), 생년월일, 본관과함께참석한자제들의관직, 성명등이 6) 장유의시는다음과같다.: 흰수염에붉은얼굴날렵한거동 / 열한분의연세팔백년을이루었네 / 낙사의하삭음어찌셀수있으랴만 / 곡강지의연꽃모임또다른뜻이있지 / 연꽃향기솔솔룡연인듯애애하고 / 코끼리코기울여술을잔뜩따르누나 / 표거타고학상선으로하늘에서놀기보단 / 영원히지행선으로사는게더좋으리 / 숭정기사년여름길일, 덕수장유가삼가쓰다.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79 기록된좌목 ( 座目 ) 으로구성되어있고관작 ( 官爵 ) 보다연치 ( 年齒 ) 를우선하였다. 이에송계 ( 松溪 ) 이인기 ( 李麟奇 ) 옹이 81세로가장나이가많아상석에앉았고, 다음파흥군 ( 坡興君 ) 윤동로 ( 尹東老 ) ㆍ첨지 ( 僉知 ) 이유간 ( 李惟侃 ) 은모두 80세이고, 다음연릉군 ( 延陵君 ) 이호민 ( 李好閔 ) 은 77세이고, 다음정랑 ( 正郞 ) 이권 ( 李勸 ) ㆍ동지 ( 同知 ) 홍사효 ( 洪思斅 ) ㆍ우윤 ( 右尹 ) 강인 ( 姜絪 ) 은모두 75세이고, 다음연평군 ( 延平君 ) 이귀 ( 李貴 ) 는 73세이고, 다음참찬 ( 參贊 ) 서성 ( 徐渻 ) 은 72세이고, 다음첨지 ( 僉知 ) 강담 ( 姜紞 ) ㆍ좌윤 ( 左尹 ) 유순익 ( 柳舜翼 ) 은모두 71세이다. 청평 ( 靑平 ) 심논 ( 沈惀 ) 은 68세로가장나이가어려제공들사이에낄수없었는데도모임에참여하였으니, 당송 ( 唐宋 ) 시대백거이 ( 白居易 ) 의구로회 ( 九老會 ) 를모방한고사 ( 故事 ) 가있기때문이다. 7) 제목과장유의시사이에는모임의장소와구성을한눈에볼수있는이기룡의그림이있다. 그림을살펴보면, 연회가열리고있는장소를비롯해서남지, 숭례문, 도성을기록적으로그려넣었다. 8) 중심주제는세가지로변화를주어묘사하였다. 먼저사실적인표현의버드나무, 상반되는연꽃패턴의구성, 그리고민화적으로표현된구름에떠있는집의단면이눈에들어온다. 기록화에충실한전개형과주제중심을그림의틀로삼고는세가지표현방법이적용되었다. 첫째, 입체적묘사이다. 두그루씩짝을지은버드나무의가는가지와무겁게자리한풍성한잎은실제물가에자리한버드나무의특징을보여준다. 이소재는아래에 7) 在會十二公自七十一世至八十一歲唯靑平沈公少七十 - 者二歲用狄兼暮故事與焉今年六月五日積雨乍晴諸公聯鑣並輿來會于崇禮門外洪僉樞第共賞官池荷花座間序年不序官鶴髮童顔飛觴擧白觀者稱艶若神仙焉旣而諸公命工摹以粉繪列錄各位年紀屬維識之維窃念壽貴皆殊福也鮮能 _ 兼備今觀會中諸公旣極眉壽之尊而高者銘彛鼎主詞盟下亦不減省署星郞皇何其盛也殆是聖朝龐鴻之化仁壽之應而諸公其亦各得造物之所偏厚者乎玆會雖小不可以無傳也敬綴以小詩白髮紅顔共聯翩十セ二人來九百年洛社幾拚河朔飮官池自有曲江蓮香風入座龍涎暖淥酒傾筒衆鼻偏鶴背飆輪太寥廓不如長作地行仙崇禎己巳季夏之吉德水張維謹題. 8) 송희경, 조선후기아회도, 다할미디어, 2008, 285 쪽.

80 항도부산 33 서언급할이기룡의사행당시작품 < 야마도 >( 일본, 쇼코쿠지지쇼인 ( 相國寺慈照院 ) 소장 ) 에서도등장하는것으로미뤄보아이기룡이버드나무그림에는자신이있었던것으로보인다. 그의버드나무는청초의 개자원화보 ( 芥子園畵譜 ) 에실려있는버드나무와상당부분흡사하다. 그런데그림이그려진 1629년에는 개자원화보 가제작되지않았고 1603년제작된명대의 고씨화보( 顧氏畵譜 ) 편에무게가실린다. 9) 그러나버드나무는한국, 중국, 일본등에서서식하는나무로 3국의그림에서손쉽게만나게되는수종 ( 樹種 ) 으로직접사생했을가능성도배제할수없다. 둘째, 도식적이고평면적인표현이다. 이는그림의중앙을차지하는연꽃밭에서두드러진다. 연꽃밭으로이름붙이기에는다소빈약한푸른점과같은연잎과그뒤로살며시보이는연분홍연꽃들이모두이다. 연꽃이반쯤가려진표현은상단에위치한인물들중심의시각에서그려진것으로보인다. 셋째, 연기인지구름인지꿈속인지모를건물의외각선과과감히생략한가옥의형태이다. 집의단면을통해참석자와참석자의자리배치를보여주고방석이놓은빈자리를통해모임의진행사항을다양하게유추할수있게그려놓았다. 그림은팔작지붕아래측면 3칸과양쪽의 2칸을적용해서정면5 칸을알려주고있다. 팔작지붕은측면을정면화하였고그아래의내부는다시전개형으로펼쳤다. 가옥에서실제연꽃을감상할수있는곳은팔작지붕이정면으로보이는측면의대청마루인것으로짐작할수있다. 1629년에제작된이기룡의기록화는 19세기에유행한민화구운몽의가옥표현을넘어선획기적인구성이며, 20세기큐비즘의대가피카소도놀랄 17세기조선의그림이다. 이기룡의사행이전국내활동을 < 남지기로회도 > 단한작품으로는논하기에는어려움이있다. 다만당시로는화원가문에서수학한화원의 9) 개자원화보대전, 수보 ( 樹譜 ), 통문관, 1970, 97~98, 101 쪽의버드나무.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81 작품으로미뤄보기에는인상적인작품이다. 19세기유럽사진기의등장과함께이젤, 튜브물감이가져온혁명적인시기를겪은인상주의화가들처럼 17세기조선인이기룡의작품은보는이에게많은생각을주는작품이기도하다. 그러나뒤에서언급할 1631년참여한의궤 <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 의사신도를보면 2년사이이기룡작품세계에큰변화가있었음을감지하게된다. 선대의그림을답습하는의궤의특성이있어의궤를통해작품세계를논하기는어렵지만이기룡이단독으로참여하여제작한그림 4점은을볼수있고보편적인화원의그림을만나게된다. 이후계미사행 5년전인 1638년은 <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 에서 1방과 3방에모두소속되어왕성한활동을한이력이남아있다. 틀에박힌그림양식을벗어난이기룡의사행이전그림은현대에서재평가가필요한부분이다. 더불어당시국가를대표하여사행에선발된과정에서적극적인그의가문의영향력이발휘되었을것가능성이농후해보인다. 일본의요청에의한것이긴하지만, 이례적으로김명국과함께 2명의공식화원이파견된점등은이기룡의사적 ( 私的 ) 작품활동과도연관성이있다고판단된다. Ⅲ. 사행당시남긴이기룡관련기록 이기룡의사행관련기록은 해행총재 외에도 춘관지 ( 春官志 ) 에서확인된다. 인조 21년 (1643) 사행때에는일본의요청에의하여인조 14 년 (1636) 에파견된김명국이이기용과함께파견되었다. 10) 는기록이다. 그런데이내용외에는이기룡의수행화원으로서의역할에대한상 10) 春官志 卷 2 通信三使及一行員役 通信使謄錄第 1 冊癸未 2 月

82 항도부산 33 세한기록물이없어구체적인활약상을알수는없다. 다만함께선발된김명국의활동과는다른행보를짐작해볼수있다. 김명국은병자사행의활약을계기로일본측에서는조선화또는수행화원의그림에대한요구가폭증되었던인물이며이로인해수행화원의역할과입지에도변화가나타났다. 사실이후사행부터는통신사의성격이정치 군사적면보다는문화사절단으로서의측면이강화되었고, 이에따라수행화원의활동역시본격화되었다. 이기룡은김명국과함께수행화원으로차출된화원으로그의나이만43세에사행활동을다녀왔다. 문화사절로그의미가짙어진 1643년계미사행이후는 40대화원이사행에선발된비율이높아졌다. 11) 이는대물림으로이어진화원가문의영향력도배제할수없겠다. 이기룡역시부친이홍규에이어사행을다녀온인물으로먼저그의유작을살펴보겠다. 그의대표적작품은말두필과버드나무를그린 < 야마도 > 이다. 이작품은쇼코쿠지지쇼인소장으로괘폭형태로보관되어있다. 쇼코쿠지지쇼인에는다수의조선통신사의작품이소장되어있고 2008년에는 ( 사 )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도록시리즈Ⅳ 로출간하기도했다. 12) 소장작품은괴원 ( 槐園 ) 변지한 ( 卞持漢,?~?) 의그림 < 화지 ( 花枝 )>, < 강상귀범 ( 江上歸帆 )>, < 은거도 ( 隱居圖 )> 등을비롯해선면화 ( 扇面畵 ) 도여럿소장되어있고명당 ( 明堂 ) 의 < 묵죽도 >, 노포 ( 老圃 ) 의 < 새우도 > 등이다. 이들은조선시대활동이력은물론이고생몰년또한미상의인물들이다. 그나마알려진화가의작품으로는조선후기동래부에서활동한무임이자지방화사송암이시눌의 < 죽호도 > 와 < 매 > 가전부이다. 11) 이정은, 앞의논문, 2009, 9 쪽, < 표 2> 隨行畵員의使行時年齡참조. 12) ( 사 )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교코쿠지지쇼인소장조선통신사유물도록 ( 도록시리즈 Ⅵ), 2008.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83 이와는달리이기룡의작품은유독정성스럽게제작되어사전제작을의심하게한다. 말은사람에게친숙한동물로서일찍이그림의주제로등장했다. 서양그림의시초라고할수있는라스코동굴벽화 ( 구석기 ) 에표현된동물역시말을소재로한그림이들소나사슴에비해가장많이그려졌다. 13) 한국의경우도고구려고분벽화풍속계에서빈번히등장하는소재였다. 특히황해남도재령강유력유설리에위치한 < 그림 2> 이기룡, < 야마도 >, 52.3 34.7cm, 안악3 호분의회랑동벽과북지본묵서, 일본, 쇼코쿠지지쇼인 ( 相國寺벽은말과사람으로가득하다. 慈照院 ) 소장일렬주차하듯이정렬된모습과투구, 마갑을완벽히갖춘말의모습은물론이고여물먹는말의그림은사실적인생활상을보여주는생생한그림이다. 이와더불어평안남도대안시무학산에위치한덕흥리고분전실동서남북의벽에서모두말그림이확인된다. 동벽 ( 東壁 ) 은넓은가로줄무늬와가는세로줄무늬로표현된마갑을두른말이정적으로자리하고있다. 현실 ( 玄室 ) 서벽 ( 西壁 ) 은 1655년사행의수행화원인한시각의 < 북새선은도 ( 北塞宣恩圖 )> (1664) 의화재 ( 畫材 ) 인함경도무과실기시험과같이마상궁술 ( 馬上弓術 ) 을보여주고있다. 13) 홍선표, 고대동아시아의말그림 ( 마문화연구총서 Ⅳ), 시공사, 2001, 18 쪽.

84 항도부산 33 북벽 ( 北壁 ) 은신라천마총출토천마도 ( 天馬圖, 국보207호 ) 와같이하늘을날고있고한걸음더나아가서는신마 ( 神馬 ) 의날개를장착하고있다. 14) 덕흥리고분은세련되지않고다듬어지지않은거친형태를지닌그림으로, 프랑스화가장드뷔페 (Jean Dubuffet, 1901~1985) 가표현한바, 다듬지않고날것그대로를표현한아르브뤼 (Art Brut : 原生美術 ) 와같은모습으로그려졌다. 15) 조선의말그림은태조이성계가조선을건국하면서탄여덟필의준마 < 팔준도 ( 八駿圖 ): 태평시대를이루길기원 > 를시작으로윤두서 ( 尹斗緖, 1668 1715) 부자의그림이잘알려져있다. 16) 윤두서의말그림은아들윤덕희 ( 尹德熙, 1685 1776) 가 1719년화첩으로꾸민 해남윤씨가전고화첩 ( 海南尹氏家傳古畵帖 ) 내의 < 유하백마도 ( 柳下白馬圖 )>( 해남윤영선소장, 보물제481호 ) 이유명하고아들덕희의말그림은수묵담채로담담히그려낸 < 어자조마 ( 馭者調馬 )>( 간송미술관소장 ) 가있다. 윤두서의 < 유하백마도 > 는이기룡의말그림처럼소나무아래호랑이, 일명 송하호도 의구도를그대로지니고있다. 소나무아래호랑이그림은김홍도 ( 金弘道, 1745~?) 가대표적으로유명하고조선통신사수행원변박 (1763) 과마지막수행화원이의양 (1811) 의작품이있으며이후이성린 (1748) 의손자이수민 ( 李壽民, 1783 1839) 과유숙 ( 劉淑, 1827 1873) 등의작품을통해알려져있는작품구도이다. 이러한현상은 19세기이후민화로이어졌고소나무와호랑이에이어까치까지가세하여그려졌다. 그런데이구도는소나무에만적용되지않고대나무에도동일한양식으로그려졌다. 조선통신사를통해일 14) 홍선표, 위의책, 2001, 199 243 쪽. 15) 정금희, 프랑스화가장뒤뷔페회화에있어서아동미술의한양상 한국프랑스학논집 58, 2007, 3 쪽, 11~13 쪽. 16) < 팔준도 > 에관한본격적연구로는정병모, 국립주앙박물관소장 < 팔준도 > 미술사학연구 ( 구고고미술 ), 1991, 3~26 쪽이있다.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85 본으로유입된그림으로인해일본측의수요가상승하자조선의그림이수출용으로제작되었고소나무아래호랑이와동일한구도로대나무아래호랑이가다수수출되었다. 대표적인작가는작품속간략한호 ( 號 ) 만남긴해옹 ( 海翁 ), 석산 ( 石山 ) 등이있다. 호랑이보다친숙한말은소나무가아닌버드나무가소재로등장한다. 그러나마도는호도가본격적으로유행한 18~19세기보다앞선 17~18세기의양식이다. 소나무아래호랑이를인지하는구도는버드나무아래말그림에서그출발점을찾아야할것이다. 버드나무아래말, 즉유하마도는윤두서가태어나기전인 1643년이기룡의 < 야마도 > 에서먼저나타난다. 조선통신사와관련하여조성된말그림은이기룡외에도변박을들수있다. 다카마쓰시 ( 高松市 ) 호넨지 ( 法然寺 ) 소장변박의 < 유마도 ( 柳馬圖 )> 는사행이후 1779년 ( 정조3) 여름동래부에서제작하여일본으로유입된작품이다. 이그림은소장처에서보관중인오동나무상자위기록된 < 유마도 > 가아닌 < 유하마도 ( 柳下馬圖 )> 로알려져있다. 17) 사행이후일본측의요청에의해그려진그림으로화면에는 세기해초하 ( 歲己亥初夏 ) 동화술재사 ( 東華述齋寫 ) 와 술재 ( 述齋 ) 라는글자와도장이찍혀있다. 변박의작품이현존하지만수행화원에의해제작되어사행시일본에남은작품은이기룡의 < 야마도 > 가유일하다. 이그림는조선중기의천문학자로알려진박안기 ( 朴安期, 1608~?) 의화제가쓰여있다. 그가쓴거친화제는 한마리는울고, 한마리는달리려한다. 향기로운풀밭위요, 버드나무강변이라. 어찌말에올라멀리변방으로달려갈거나, 월지국을정벌코자금빛안장을얹어본다. 18) 박안기는 1643년조선통신사일행 462명가운데네번째고위 17) 조선통신사유네스코기록유산한국추진위원회학술위원강남주위원장과의인터뷰 (2017.1.31). 18) 경성대학교한문학과김철범교수님번역.

86 항도부산 33 직인독축관 ( 讀祝官 ) 으로일본에간인물이다. 사행활동시일본천문학자에게 칠정산 ( 七政算 ) 을가르쳐주었고, 이후일본인에의한일본최초의천문계산법이만들어졌다. 19) 박안기의화제는버드나무와두필의말을연결짓는배치가감각적이다. 그런데평온한그림위로쓰인화제로는날선느낌이다. 국내에서의활동은아직연구되어있지않은박안기의연구가필요한대목이다. 다시그림을살펴보면, 화면위를가득메운버드나무와화면아래의말두필로대칭된다. 버드나무잎은사뿐히걷는말의긴목을타고내려온갈기를닮아있고버드나무양쪽가지역시백마와움츠린흑마를형상화했다. 백마는자신을닮은버드나무가반가운것인지달려가던길을잠시멈추고머리를젖혀버드나무잎을올려다보고있고잔가지가많은버드나무아래의점무늬흑마는엄마품을이제떠나는어린아이마냥슬픔에젖어있는모습이다. 화제의내용과는다르게그림속풍경은부드러워보인다. 말그림에대한일본의인식은우리나라를비롯한중국과도별반다르지않았다. 우리나라와중국은단순한말의형상을그림에옮겨놓은것이아닌말과관련된사람의권위나인격등을나타내거나혹은하늘을나는신마의의미를지니고 20) 일본또한신격화된말그림을회마전 ( 繪馬殿 ), 즉 에마 라칭하며말의화상을그려서신사또는불당에봉납하여액자로보관을했다. 일종의말을모시는신사로볼수있는데조선통신사의마상재가일본사행에서가장인기있었던것도이와무관하지않을것이다. 마상재가일본에처음간것은인조 13년 (1635) 이다. 이이후로통신사행에는마상재가반드시끼어모두 8회에걸쳐파견되었는데, 통신사와관계없이 2회, 통신사수행으로 6회파견되었다. 이기룡의또다른유작으로채색화로제작된 < 누각 19) 羅山林先生文集, 平安考古學會, 1921 20) 정병모, 앞의논문, 1991, 3~5 쪽.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87 인물도 ( 樓閣人物圖 )> 가있다. 이처럼이기룡의작품은선화 ( 線畫 ) 를그려남긴김명국과는달리선화한점을전하지않는다. 이점은두명의화원의역할과활동에서차이가있었음을짐작하게하는점이다. 더불어수행화원으로서일본측구청 ( 求請 ) 에응하는그림을그려남긴김명국은그의활동이력이고스란히 해행총재 를비롯한기록물에전하는반면, 이기룡의활동은찾기가어렵다. 이러한이유는정묘호란 ( 인조 5) 과병자호란 ( 인조 14) 을겪은조선이대외활동에서상대국의군사정보를그림으로기록하고자했던바를이기룡이비밀리에수행했던바에서비롯된것으로사료된다. 이런추측은이기룡이, 이홍규를이은화원가문인점과사행이전 1638년 인조장렬후가례반차도 를제작하는데인조가아꼈던이징 ( 李澄, 1581?) 과함께참여한점등에서미뤄볼수있다. 이부분은추후깊게연구해보겠다. Ⅳ. 사행이후행적및활동 이기룡은물론이고통신사의수행화원으로서중대한임무와역할을완수했던화원이기룡은귀국후그에상응하는포상을받았던것으로보인다. 그러나도화서내부에서나화원으로서그의입지는포상의차원에머물렀다고보지는않는다. 본래그의실력도당대최고의수준이었지만, 수행화원으로서의활동은많은화원들의선망의대상이되었다. 이장에서는사행이후수행화원이기룡의활동과입지를살펴보고자한다. 대체로사행이후이기룡의국내활동은크게두가지측면에서포착되는데, 하나는의궤제작을중심으로한도화서내부에서의활동이고, 다른하나는그를중심으로화원가문의결속이강화되고있는

88 항도부산 33 현상이다. 이것은통신사수행화원으로서의활약이후확고해진자신들의위상과관련되는것으로본다. 먼저이기룡의공적국내활동인의궤참여기록은다음과같다. < 표 2> 이기룡의공적국내활동 - 의궤참여기록 년도의궤명목차 1 목차 2 내용 1631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同日山陵都監儀軌事目 1608 년 ( 광해군즉위 ) 에동구릉 ( 東九陵 ) 의건원릉 ( 健元陵 ) 서쪽언덕에매장했던선조 ( 宣祖, 1552~1608, 재위 1567~ 1608) 의목릉 ( 穆陵 ) 을 1630 년 ( 인조 8) 에건원릉제 2 강 ( 第二岡 ) 으로옮긴것을기록한의궤. 1638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三房玉冊色 十一月二十日 一房鋪陳色實入秩 1638 년 ( 인조 16) 10 월부터 12 월까지조선제 16 대왕인인조 ( 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와계비 ( 繼妃 ) 인장렬왕후조씨 ( 莊烈王后趙氏, 1624~1688) 의가례 ( 嘉禮 ) 과정을기록한의궤. 昭顯世子禮葬都監儀軌 禮葬都監一房儀軌 工匠秩 1645 년 ( 인조 23) 4 월 26 일부터 6 월 23 일까지거행되었던소현세자 ( 昭顯世子, 1612~1645) 의예장 ( 禮葬 ) 에관한기록. 1645 昭顯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 魂宮造成所 [ 工匠秩 ] 1645 년 ( 인조 23) 4 월 26 일부터 7 월 27 일까지소현세자 ( 昭顯世子, 1612~1645) 장례 ( 葬禮 ) 때의빈궁 ( 殯宮 ) 및혼궁 ( 魂宮 ) 의마련에관한기록. 1659 孝宗殯殿都監儀軌 魂殿二房 諸色工匠秩 1659 년 ( 현종즉위 ) 효종 ( 孝宗, 1619~ 1659, 재위 1649~1659) 이승하함에따라시신을봉안하는빈전 ( 殯殿 ) 과신주를봉안하는혼전 ( 魂殿 ) 을설치하고운영하였던일을기록한의궤.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89 년도의궤명목차 1 목차 2 내용 莊烈王后仁宣王后尊崇都監儀軌 來關秩 諸色工匠秩 1661 년 ( 현종 2) 인조 ( 仁祖 ) 의계비장렬왕후조씨 ( 莊烈王后趙氏, 1624~1688) 에게둘째존호 ( 尊號 ) 를, 효종 ( 孝宗 ) 의비인선왕후장씨 ( 仁宣王后張氏, 1618 ~1674) 에게존호를올린과정과절차를기록한책. 1661 孝宗祔廟都監儀軌 一房儀軌 諸色匠人秩 1661 년 ( 현종 2) 효종 ( 孝宗, 1619~1659, 재위 1649~1659) 의국상을마치고신주를종묘에모시는과정을기록한의궤. 明聖王后冊禮都監儀軌 一房儀軌 諸色工匠秩 1661 년 ( 현종 2) 명성왕후김씨 ( 明聖王后金氏, 1642~1683) 를세자빈 ( 世子嬪 ) 에서현종 ( 顯宗 ) 의비 ( 妃 ) 로책봉하는과정을기록한의궤. 別三房儀軌 [ 工匠秩 ] 工匠秩 1661 년 ( 현종 2) 명성왕후김씨 ( 明聖王后金氏, 1642~1683) 를세자빈 ( 世子嬪 ) 에서현종 ( 顯宗 ) 의비로책봉할때별삼방 ( 別三房 ) 의업무를기록한의궤. 위의 < 표 2> 와같이이기룡의의궤제작참여는총 10회로모두어람용의궤에서그의이름이확인된다. 사행이전확인되는의궤활동은 2회로그의나이 32세에처음확인된다. 동급의다른화원에비해다소늦은감이있는 1631년의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 제작에참여한것을시발 ( 始發 ) 로, 7년뒤인 1638년참여한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에서는일방과삼방에소속되어활동했다. 작품을살필수있는대표적인의궤몇점을살펴보겠다. 1608년 ( 광해군즉위 ) 에동구릉 ( 東九陵 ) 의건원릉 ( 健元陵 ) 서쪽언덕에매장했던선조 ( 宣祖, 1552~1608, 재위 1567~1608) 의목릉 ( 穆陵 ) 을

90 항도부산 33 < 그림 3> 어람용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 필사본 1책 239장, 1631년 ( 인조9), 초주지, 도설채색, 52.0 36.0 6.5cm. 3-1 표지 3-2 3-3 3-4 3-5 3-6 1630년 ( 인조 8) 에건원릉제2강 ( 第二岡 ) 으로옮긴것을기록한의궤이다. 이의궤는표지부분에낙서가있고그위에 목릉천장의 ( 穆陵遷葬儀 ) 라는서명이쓰여져있고, 본문앞쪽에는채색한옹가도 ( 甕家圖 ) 와찬궁 ( 欑宮 ) 에붙이는사신도 ( 四神圖 ) 가있다. 현존하는유작이드문이기룡의작품은 1631년 선조목릉천장산릉도감의궤 에서여실히보인다. 특히 < 청룡 >, < 백호 >, < 주작 >, < 현무 > 4 면의그림들은오롯이이기룡의작품으로이의궤에기록된화원은 1명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91 으로그의이름이전부이다. 기존의관례에따라정형화된사신도의툴에맞춰그려졌지만표현된사신도는섬세하고안정적인필력과공간감활용이뛰어난그림이다. 청룡과함께하늘을승천할것같은백호의동세와눈빛그리고치밀한뱀가죽과거북이의등질감을치밀하게묘사하였다. 4면의그림은도설로반차도는아니지만반차도이상의기운을지닌그림으로그려내었다. < 그림 4> 어람용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필사본 1책 193장, 1638년 ( 인조16), 초주지, 47.2 31.9 5.7cm. 4-1 표지 4-2 이기록 4-3 반차도 1 4-3 반차도 2 4-3 반차도 3 4-3 반차도 4

92 항도부산 33 4-3 반차도 5 4-3 반차도 6 4-3 반차도 7 4-3 반차도 8 1638년 ( 인조 16) 10월부터 12월까지조선제16대왕인인조 ( 仁祖, 1595~1649, 재위 1623~1649) 와계비 ( 繼妃 ) 인장렬왕후조씨 ( 莊烈王后趙氏, 1624~1688) 의가례 ( 嘉禮 ) 과정을기록한의궤이다. 이의궤는권수구분없이 1책으로, 표지를포함해총 396면이다. 이중도설 ( 圖說 ) 이 9면 ( 채색 ), 반차도 ( 班次圖 ) 가 8면 ( 채색 ) 이다. 앞뒷면에약간불에그을린흔적은있으나, 대체로양호하다.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93 < 그림 5> 어람용 昭顯世子禮葬都監儀軌 필사본 1책 270장, 1645년 ( 인조23), 초주지, 46.2 32.3 7.5cm. 5-1 5-2 이기룡 5-3 반차도 1 5-3 반차도 2 5-3 반차도 3 5-3 반차도 4 5-3 반차도 5 5-3 반차도 6 5-3 반차도 7

94 항도부산 33 5-2 반차도 8 5-3 반차도 9 5-3 반차도 10 3 반차도 11 5-3 반차도 12 5-3 반차도 13 5-3 반차도 14 5-3 반차도 15 5-3 반차도 16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95 5-3 반차도 17 5-3 반차도 18 5-3 반차도 19 5-3 반차도 20 5-3 반차도 21 5-3 반차도 22 이기룡이사행이후참여한첫번째의궤는 소현세자예장도감의궤 이다. 이의궤는 1645년 4월 26일부터 6월 23일까지거행되었던소현세자의예장 ( 禮葬 ) 에관한기록을담은의궤이며, 이기룡이그의부친이홍규와함께참여한유일한의궤이기도하다. 78세고령의나이임에도활동한부친이홍규는삼방소속으로아들이기룡은일방소속으로나란히이름을올렸다. 같은해인 1645년 소현세자빈궁혼궁도감의궤 ( 昭顯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 ) 에도참여하였다. 그림의면모를살필수있는의궤는 1645년이후에는나타나지않는

96 항도부산 33 다. 그러나 1659년 효종빈전도감의궤 ( 孝宗殯殿都監儀軌 ), 1661년 장렬왕후인선왕후존숭도감의궤 ( 莊烈王后仁宣王后尊崇都監儀軌 ), 효종부묘도감의궤 ( 孝宗祔廟都監儀軌 ), 명성왕후책례도감의궤 ( 明聖王后冊禮都監儀軌 ), 별삼방의궤 ( 別三房儀軌 ) 에도이름을올렸다. 특히그의나이 62세때인 1661년에는무려 4회나의궤제작에참여했다. 이러한점으로미뤄보아 44세에다녀온계미사행은왕성한활동을짐작하게한다. 이기룡과같이사행이전보다사행이후활동이활발한경우는 1682년통신사행수행화원함제건을제외하고는모두에해당된다. 21) 이런현상은화원을세습한화원가문의특성이반영된것으로볼수있다. Ⅴ. 맺음말 이상으로임진년전쟁이후조 일간교류를위해파견된조선통신사, 그중에서도문화적교류의중심에있었던계미사행의화원이기룡 21) 수행화원의사행전후의궤제작참여기록횟수 畵員名 사행전횟수 사행후횟수 李弘虯 : 丁未使行 (1607) 1 10 柳成業 : 丁巳使行 (1617) 1 6 李彦弘 : 甲子使行 (1624) 4 4 金明國 : 癸未使行 (1643) 3 12 李起龍 : 癸未使行 (1643) 5 6 韓時覺 : 乙未使行 (1655) 5 16 咸梯健 : 壬戌使行 (1682) 11 1 朴東普 : 辛卯使行 (1711) 1 2 咸世輝 : 己亥使行 (1719) 2 16 李聖麟 : 戊辰使行 (1748) 1 3 金有聲 : 癸未使行 (1763) 0 0 李義養 : 辛未使行 (1811) 2 4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97 에관해살펴보았다. 조선사회의성격상화원에대한기록자료가매우부족한형편이지만, 현전하는자료를토대로이기룡의행적을재구성해보았다. 즉그의행적가운데통신사의수행화원으로활약한것을핵심으로두고, 사행이전의행적과사행이후의행적을함께살펴본것이다. 사행때남긴 < 야마도 > 는사전제작하여파견당시가지고간것으로보이지만, 동 ( 同 ) 사행때선화를그려남긴김명국과는달리선화한점이전하지않는다. 한편, 야마도는버드나무아래말두필이그려진그림으로구도는조선중기말그림의대표적인물윤두서보다도이른시기에제작되었다. < 야마도 > 가지닌구도는말에서호랑이로버드나무에서소나무로이어졌고조선후기유행한소나무아래호랑이구도로유연하게변형되었다. 이기룡의 < 야마도 > 와더불어조선통신사를통해일본에유입된호랑이는 < 야마도 > 와같은대나무아래구성되는방식으로변형되었다. 근래 2012년일본아이치현나고야중심부에있는에도막부의성, 나고야성 ( 名古屋城 ) 박물관에서나고야성개관 400주년기념으로특별전 < 무인가문의장벽화, 호도 ( 武家と玄関虎の美術 )> 를개최했다. 조선통신사를통해유입된호랑이그림은문과벽을장식하는장벽화로탄생했고화려한금박과대나무아래호랑이그림이인상적인전시였다. 이외에도최근조선통신사의유네스코세계기록유산의한ㆍ일공동등재를앞두고일본과한국에서다양한전시가기획되었다. 2013년일본고려미술관에서개최한 < 조선통신사와교토 ( 朝鮮通信使と京都 )> 에이어 2015년국립고궁박물관의 < 그림으로본조선통신사 > 의작은전시, 2015년부산박물관에서개최한기획전 < 조선시대조선통신사와부산 >, 그리고 2016년국립해양박물관기획전 <[ 유네스코서계기록유산등재추진기념 ] 조선통신사, 세계인의품으로 > 등이다. 소나무혹은대나무아래호랑이를그린호도그림은

98 항도부산 33 부산박물관특별전에서해옹의작품을대표적으로공개했고동일구도의버드나무아래말을그린이기룡의 < 야마도 > 는고려미술관전시에서선보인바있다. 22) 이는나무아래동물, < 야마도 > 의선구자적인구도와측면과정면을혼용한 < 남지기로회도 > 의구성미는화가이기룡의재발견으로볼수있다. 국내외작품조차소략한이기룡은 < 남지기로회도 > 와 < 야마도 > 외국내의공적인자료로남아있는의궤를중심으로그의활동을살펴보았다. 이점은두명의화원의역할과활동에서차이가있었음을짐작하게하는점이다. 수행화원으로서일본측구청에응하는그림을그려남긴김명국은그의활동이력이고스란히 해행총재 를비롯한기록물에전하는반면이기룡의활동은찾기가어렵다. 이러한이유는정묘호란 ( 인조 5) 과병자호란 ( 인조 14) 을겪은조선이대외활동에서상대국의군사정보를그림으로기록하고자했던바를이기룡이비밀리에수행했던바에서비롯된것으로사료된다. 이런추측은이기룡이, 이홍규를이은화원가문인점과사행이전 1638년 인조장렬후가례반차도 를제작하는데인조가아꼈던이징 ( 李澄, 1581?) 과함께참여한점등에서미뤄볼수있다. 사행이후활동이사행이전보다활발하게나타난다. 의궤는국가행사의중요한기록이므로, 의궤제작에는도화서내의실력을인정받은인물들이차출되었다. 이기룡의사행이전과사행이후의의궤제작참여를도표로정리하고, 특히사행이전과이후의수치비교를통해사행활동이이들화원의활약에미친영향관계를살펴보았다. 더불어사행활동을통해화원으로서의역량을키운화원들은자신의가문을더욱큰화원가문으로확장하는데중추적역할을했다고본다. 화원 22) 名護屋城개관 400 周年紀念特別展 < 武家と玄関虎の美術 >, 2012. 高麗美術館特別展 < 朝鮮通信使と京都 >, 2013. 국립고궁박물관, < 그림으로본조선통신사 >, 2015. 부산박물관기획전 < 조선시대조선통신사와부산 >, 2015. 국립해양박물관기획전 < 유네스코서계기록유산등재추진기념조선통신사, 세계인의품으로 >, 2016.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99 가문의형성되는것은 15세기이전부터나타나지만, 본격적으로활성화되는것은 17세기이후에비롯된다고보는데, 이시기는대체로통신사행이본격화되는시점이다. 통신사수행화원가운데화원집안의인맥과혈족으로선발파견된것으로보이는수도 7명정도된다. 이처럼화원가문의확장과성장에는통신사행의화원으로활동한것이중요한계기가되었다고하겠다. 이는아직개인적이력이전혀밝혀지지않은화원들의생애를고찰하는계기가될것으로기대한다. 참고문헌 1. 자료 宣祖穆陵遷葬山陵都監儀軌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仁祖莊烈王后嘉禮都監儀軌 昭顯世子禮葬都監儀軌 昭顯世子殯宮魂宮都監儀軌 孝宗殯殿都監儀軌 莊烈王后仁宣王后尊崇都監儀軌 孝宗祔廟都監儀軌 明聖王后冊禮都監儀軌 別三房儀軌 春官志 卷 2 趙曮, 海槎日記 丁若鏞, 茶山詩文集 2 卷. 羅山林先生文集, 平安考古學會, 1921. 吳世昌, 槿域書畵徵, 시공사, 1998. 芥子園畵譜 海南尹氏家傳古畵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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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101 정병모, 국립주앙박물관소장 < 팔준도 > 미술사학연구 ( 구고고미술 ), 한국미술사학회, 1991. 정은주, 계미(1763) 통신사행의화원활동연구 정신문화연구 34권 2호통권123 호, 2011., 19 世紀初對淸使行과燕行圖 : 李信園寫生帖 을중심으로 명청사연구 43, 명청사학회, 2015., 1811년쓰시마통신사행의서화교류 동아시아문화연구 60, 한양대학교동아시아문화연구소, 2015. 홍선표, 조선후기通信使隨行畵員의파견과역할, 미술사학연구 205, 한국미술사학회, 1995., 조선후기통신사수행화원의회화활동 미술사논단 6, 한국미술연구소, 1998. 황은영, 1811년신말통신사수행화원이의양에대하여 강원사학 22 23, 2008. 4. 도록국립중앙박물관, 朝鮮時代通信使, 삼화출판사, 1986. ( 사 ) 조선통신사문화사업회, 교코쿠지지쇼인소장조선통신사유물도록 도록시리즈Ⅵ, 2008. 중앙일보사, 한국의미- 山水畵 ( 上 ), 1985. 국립고궁박물관, 그림으로본조선통신사, 2015. 부산박물관기획전, 조선시대조선통신사와부산, 2015. 국립해양박물관기획전, [ 유네스코서계기록유산등재추진기념 ] 조선통신사, 세계인의품으로, 2016. 名護屋城開館 400 周年紀念特別展, 武家と玄関虎の美術, 2012. 高麗美術館特別展, 朝鮮通信使と京都, 2013. 투고일 : 2016.10.17. 심사완료일 : 2016.11.22. 게재확정일 : 2016.12.07.

102 항도부산 33 Abstract Behavior and Activities of Painter Lee Gi-ryong before and after Gyemisahaeng Lee, Jeong-Eun Painter Lee Gi-ryong ( 李起龍, 1600~ ) is an entourage painter of Gyemisahaeng ( 癸未使行, 1643). Gyemisahaeng was a journey in which there was a change in the role and position of the entourage painters as Japan's demand for Joseon paintings or paintings of entourage painters increased. In fact, since Gyemisahaeng, the nature of the envoys was strengthened as a cultural delegation rather than a political and military aspect. When studying Joseon Envoys in terms of cultural exchanges between Joseon and Japan, it is very important to examine the role and performance of the entourage painters. Nonetheless, Lee Gi-ryong's journey records as well as the record of his domestic activities were negligent and studies on him were not fully conducted. In this paper, this study reviewed pre- and post-activities of Gyemisahaeng focusing on Lee Gi-ryong's Gyemisahaeng activities. When Lee Gi-ryong was dispatched to Gyemisahaeng following the Byeongja journey, line drawing was an art trend in Japanese painting circles. Due to line drawing, unlike Kim Myeong-guk who joined Gyemisahaeng following Byeongja journey, there are no known works of Lee Gi-ryong line drawing. Unlike Kim Myeong-guk, who left a line drawing, Lee Gi-ryong did not leave a piece of a line drawing, which suggests that there was a difference in the roles and activities of the two painters dispatched. As an entourage painter, Kim Myeong-guk, who had

1643 년계미사행을전후한화원이기룡의행적및활동 103 drawn pictures to respond to the request of the Japanese side, conveyed his activity history through the records while it is difficult to find Lee Gi-ryong s activities. It is thought that Joseon undergoing Jeongmyohoran (Injo 5) and Byeongjahoran (Injo 14) was supposed to try to record the military information of the other country in the diplomatic activities and this mission may have been given to Lee Gi-ryong. He was a painter who represented Joseon in a public position rather than as an individual painter, and his performance has been evaluated within such a category. As an entourage painter, Lee Gi-ryong whose personal works do not exist, was studied by extending the category of Painter Lee Gi-ryong's activities further, to examine his inner and outer activities before and after the entourage painter by looking into his family background and his activities in Dohwaseo. Keywords: Lee Gi-ryong, Gyemisahaeng, Joseon Envoys, entourage painter, Dohwaseo, Uigwe, Lee Hong-gyu, Kim Myeong-gu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