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문화연구제 46 집 2013 년 5 월 31 일 35~64 쪽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염복규 * 차 례 Ⅰ. 머리말 - 근대도시계획과 교외 Ⅱ. 京城市街地計劃과돈암지구주택지형성 Ⅲ. 식민지형 전원도시 / 근린주구로서돈암지구 Ⅳ. 맺음말 1) Ⅰ. 머리말 - 근대도시계획과 교외 2009년간행된서울시의한정책보고서는현재 25개인자치구를생활권별로 9개로재편할것을제안하고있다. 1) 보고서는지나치게세분된자치구를통폐합하여행정의원활을기할것을제안하고있는데, 이런점은논외로하더라도보고서가그리는 9개의생활권은현재서울시각권역의거주자의생활감각을어느정도적절하게반영한것으로보인다. 그런데이재편안은 20세기서울의 역사적형성 과정을보여준다는점에서도흥미롭다. 먼저도심생활권은조선시대서울도성에강제병합전후일본군기지가들어선용산을더하여 1914 년조선총독부의행정정리로구획된京城의행정구역과대략일치한다. 다음으로동북1 * 국사편찬위원회편사연구사 1) 김찬동, 서울시자치구행정구역개편방안,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9 참고.
36 46 생활권, 동북 2생활권, 서북생활권, 서남2생활권의일부는 1936 년행정구역확장으로경성에포함된지역이다. 해방후에는 1949 년그외곽지 그림 1 서울시자치구행정구역개편방안역이서울시에 * 출전 : 김찬동, 서울시자치구행정구역개편방안, 서울시정개발연구원, 편입되었으며, 2009. 1963년에는영등포일대를제외한강남생활권의거의전역이비로소서울시가되었다. 이상과같은과정에서이글은 20세기근대도시서울의 확장과개발 이라는측면에서첫단계라고할수있는 1936년행정구역확장때새롭게편입된지역에초점을맞추고자한다. 이지역은요컨대중세성곽도시漢城府가오늘날메트로폴리스서울로변화해가는과정에서처음탄생한근대적 郊外 (the suburbs) 의의미를가지는지역이기때문이다. 그렇다면교외란무엇인가? 서구에서교외는근대산업도시에도심부의인구와주택이과밀화하고, 공장과상점이무질서하게밀집함에따라악화된주거환경의대안으로출현했다. 보다나은주거환경의추구라는점에서교외가주목을받으면서많은도시계획가들은교외의새로운주거지건설의이론을내놓았다. 대표적인것으로는 19 세기말영국의에벤에저하워드 (E. Howard, 1850-1920) 의 田園都市 (garden city) 論 을들수있다. 하워드의이론은도시계획론이었을뿐만아니라자본주의적도시개발의폐해에대응하여기존도시외곽에 비자본주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37 의적 사회주의적 이상공동체를건설한다는취지의급진적이고비판적인사회이론의측면을내포한것이었다. 2) 그런데하워드의전원도시론은시간이흐르면서, 특히미국에수용되면서본래의취지에서벗어난길을걸었다. 미국에서전원도시론은단지주거환경이악화된도심부에서떨어진외곽지역의 ( 중산층을위한 ) 뉴타운 베드타운건설론으로굴절되었다. 3) 이렇게굴절된전원도시론은 19세기말-20 세기초미국에서자동차문화의발달에기반한중산층의탈도심부현상과상호영향을주고받으며더욱정교화되었다. 4) 그리고이런미국적전원도시론은일본을거쳐, 식민지조선에도도입되었다. 5) 한편전원도시론이쾌적한교외주택지건설론으로변형된결과 20세기초미국에서정립된이론이이른바 近隣住區 (neighborhood) 이론 이다. 이이론의창시자인클레어런스페리 (C. A. Perry, 1872-1949) 에의하면근린주구란 어린이가자동차도로 ( 간선도로 ) 를건너지않고학교에통학할수있는규모의물리적주거단위 로서하나의근린주구는학교, 공원과운동장, 일상생필품을파는상점, 보행자의안전을보장할수있는도로체계등의요소를가지고있어야했다. 이런조건이충족되었을때비로소근린주구의거주자는하나의커뮤니티의속해있다는공감대를가지게된다는것이다. 6) 근린주구란요컨대필요한 2) 조재성 권원용옮김, 내일의전원도시, 한울아카데미, 2006(E. Howard, Garden Cities of To-Morrow, 1902) 참고. 3) 박진빈, 백색도시환타지 - 미국의도시계획과정원도시운동, 백색국가만들기, 엘피, 2006, 86-97 쪽. 4) 미국의도시사가루이스멈포드에의하면 하워드는도시혼잡을구제하려면도시의침대지역을확장해서는안되고도시의모든기능을분산시켜야한다고생각 했으나, 실제의교외화는그와반대로진행되었던셈이다 ( 김영기옮김, 歷史속의都市, 명보문화사, 1990[L. Mumford, The City in history, 1961], 566 쪽 ). 5) 일본내무성지방국이이미 1910 년하워드의이론을소개한 田園都市 를간행한데에서이시기전원도시론이일본에수용되었음을알수있다. 그리고이무렵재계의실력자시부자와 ( 澁澤榮一 ) 부자가설립한田園都市株式會社가도쿄교외의고급주택지田園調布 ( 텐엔조후 ) 를개발한데에서당시일본에서전원도시가무엇을의미했는지잘알수있다. 한편전원도시론은늦어도 1920 년대초에는조선에도도입되었다 ( 齋藤音作 現代都市計劃의理想 (3), 每日申報, 1921.9.12; 河野誠, 田園都市に就て, 朝鮮と建築, 1922.9). 6) 조재성, 현대근린주구이론의개척자페리 스타인 라이트, 국토 176, 1996 참고.
38 46 생활기반시설을갖춘 ( 일정한규모이상의경제력을가진유산층의 ) 자족적주거커뮤니티로서, 간단히말하자면급진적이상이소거된전원도시라고할수있다. 이글에서는 1936년경성에편입된외곽지역중에서도 1930-40년대京城市街地計劃土地區劃整理事業 7) 에의해주택지개발이완성된동북지역敦岩地區의형성과정과주택지로서특징을살펴보고자한다. 아래에서다시언급하겠지만돈암지구는시가지계획의구획정리지구가운데영등포지구와더불어가장먼저사업이시작되어 1945년해방이전까지물리적개발이일단락을본지구로서식민지시기도시계획의시작과끝을확인할수있는드문지구이다. 8) 또전형적인공업지역인영등포와달리전형적인주거지역으로서식민지시기근대적교외형성의실제와의미를살피기에적절한지역이기때문이다. 이글의문제의식과관련하여주요한선행연구로는일제하조선도시계획전반의연구에서선편을잡은손정목의저서 9) 외에돈암지구구획정리사업과도시한옥지대를분석한일련의연구및경성전차노선의확대과정을분석한연구등이있다. 10) 한편경성시가지계획에서근린주구이론의적용여부를검토한일련 7) 19 세기초프로이센에서경지정리의개념을도시개량에도입하여비롯된토지구획정리는減步, 換地등의방법을통해일정한지구 ( 구획정리지구 ) 내의각필토지의불규칙한구획을정리하고필요한공공시설물을축조하여토지의효용성을증진시키는사업을뜻한다. 減步 란미비한공공시설물축조를위한용지를일정한비율 ( 減步率 ) 에따라토지소유자들에게기부받는것으로, 그의미는사업에따른지가상승분의일부를사업비로환수하는것이다. 換地 란구획정리가끝난후원소유자에게토지를재교부하는것이다. 구획정리가시작되면지구내의토지경계를일단말소한후도로공사등을하게되며토지소유자들은공사가끝난후새롭게설정된필지를원래의소유비율에따라교부받게된다. 이과정에서각토지소유자별로환지의불공평이발생할수있는데이는금전 ( 淸算金 ) 으로교부하여정산하게된다. 구획정리사업의특징은토지수용에비해초기용지비가들지않고사업이끝난후토지소유자가교체되지않는다는점이다 ( 대한국토 도시계획학회편, 도시계획론, 보성각, 2003, 532-540 쪽 ). 8) 영등포지구와돈암지구는중일전쟁발발 (1937.8) 이전인 1937 년 3 월사업이개시되어起債를통한공사비조달이비교적용이한편으로서, 사업의진척도상대적으로원활했다. 그에비해다른지구들은모두전쟁발발로총독부가이른바불요불급한사업에대한기채를제한한상황에서사업을시작할수밖에없었기때문에공사비조달에서크게어려움을겪었다. 따라서사업의진척속도도영등포, 돈암지구와는크게차이를보였다 ( 염복규, 日帝下京城도시계획의구상과시행,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9, 166-167 쪽 ). 9) 손정목, 日帝强占期都市計劃硏究, 一志社, 1990.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39 의연구도구획정리에의해새롭게형성된주택지의의미를조망하는데도움이된다. 11) 이글은이상의성과에기반하되, 선행연구에서오류가있었던측면을보완하고당대식민지도시경성에서근대적 교외 형성의특수-역사적의미를재고해보고자한다. Ⅱ. 京城市街地計劃과돈암지구주택지형성 식민지시기도시계획은 1934년최초의도시계획법령인朝鮮市街地計劃令이제정되면서비로소가능하게되었다. 1920년대까지京城都市計劃硏究會를비롯한민간일본인들의요구에도불구하고도시계획법령제정에큰관심이없던총독부가시가지계획령을제정하게된것은 1931년滿洲事變으로촉발된대륙침략의거점조성의필요성때문이었다. 즉 1930년대조선의도시계획법령제정은대륙침략이라는 국책적의제 와의관련하에서가능한것이었으며, 당시총독부에조선의도시화와그에대한대응이라는거시적인정책구상이있었던것은아니었다. 그러나일본도시계획법을모법으로하여가로망부설, 구획정리사업, 地域地區制등을규정한시가지계획령의제정은이시기경성와같은대도시의 자연발생적 도시화와관련한다양한도시개발논의를 현실화 시키고 추동 하는결정적인계기가되었다. 12) 경성시가지계획에서도각각의세부계획사업을결정 10) 송인호, 都市型韓屋의類型硏究,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0; 김영수, 돈암지구도시한옥주거지의도시조직, 서울학연구 22, 2004; 동대문밖돈암지구주거지의형성과변천, 서울학연구 37, 2009; 최인영, 동대문밖전차의도입과역할, 서울학연구 37, 2009; 일제시기京城의도시공간을통해본전차노선의변화, 서울학연구 41, 2010. 11) 김주야 石田潤一郞, 경성부토지구획정리사업에있어서식민도시성에관한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 계획계 25-4, 2009; 정인하, 일제강점기시가지계획결정이유서에나타난 市街割標準圖 에관한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 계획계 25-12, 2010; 권용찬 전봉희, 근린주구론이일제강점기서울의주거지계획에영향을준시점, 대한건축학회논문집 - 계획계 27-12, 2011.
40 46 하는데작용한중요한요소는당대경성의도시문제, 더정확하게말하면식민지권력의입장에서우선해결하고자하는도시문제가될수밖에없었다. 먼저공식계획안을통해경성시가지계획의기본구상을살펴보자. 그림 2 경성시가지계획기본구상도 * 출전 : 朝鮮總督府, 都市計劃槪要, 1938 중 京城市街地計劃街路網圖 * 비고 : 토지용도의설명은 京城市街地計劃決定理由書 ( 朝鮮總督府, 1937) 에의거해필자가가필함. 그림 2 에서볼수있듯이, 경성시가지계획의초점은기존도심부외곽의새로운공업지역과주거지역의개발이었다. 13) 그런데이는총 25개년 (1937-62년) 12) 조선시가지계획령제정의배경과과정에대해서는염복규, 2009, 앞의글, 94-106 쪽. 13) 이런교외지역개발의구상은 경성의내일은교외에잇다. 숨이막힐지경까지팽창포화된도시경성으로서엇지내일을염려하지아니할것이냐 는제창에서볼수있듯이당시경성시가지계획을둘러싼공리였다고할수있다 ( 자라나는明日의京城大都市計劃과그理想 (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41 으로예정된시가지계획전체의구상으로서이것만으로는시가지계획사업의우선순위를알수없다. 따라서시가지계획의우선순위를알아보기위해해방이전까지지정된경성시가지계획의 10개구획정리지구를살펴보자. 그림 3 경성시가지계획구획정리총괄도 * 출전 : 김영수, 돈암지구도시한옥주거지의도시조직, 서울학연구 22, 2004, 174쪽 ( 저본은서울특별시, 서울土地區劃整理沿革, 1991) 그림 3 은 1937-45년지정된경성시가지계획의구획정리지구로서여기에서우선적으로개발이시작된지역이어디인지를알수있다. 이중영등포지구는전형적인공업지역이며, 번대지구는영등포의배후주거지역이라고할수있다. 그리고대현, 공덕, 한남지구는도성서쪽의주거지역이며, 돈암, 청량리, 용두, 사근, 신당등은동쪽의주거지역이었다. 그런데이그림에서도알수있듯이 六 ), 每日申報, 1934.3.30).
42 46 이미 1920년대부터공업지역화되어있던영등포와같은예외를제외하면한강이남을거의염두에두지않는당시의감각에서도성의서쪽은강으로가로막혀확장성에분명한한계가있었다. 즉강남이라는변수를머리에떠올리기어려운 1930년대로돌아가보면, 경성의교외화의유력한가능성은자연스럽게동쪽에서찾아질것이었다. 14) 그리고동쪽지역중에서도철도가지나가는다른지구 ( 청량리, 용두, 사근 ) 는 그림 2 에서볼수있듯이, 철도역 ( 청량리역, 왕십리역 ) 과연계하여주거및일부공업지역으로예정된데반해동북의돈암지구는순주거지역으로계획되었다. 돈암지구를포함한동부교외지역은병합이후오랫동안미개발지로남아있었다. 예컨대조선시대한성부에서壇廟가많이위치한지역은東郊와南郊였는데, 식민지시기에들어와서남교의단묘는일찍부터사라진반면동교의단묘는상당수가남아있었다. 이는남교의경우용산의일본군기지입지와관련하여이른시기부터도시화가진전된반면동교는 1930년대까지도대규모 개발 의손길이닿지않았기때문이었다. 15) 동교중에서도돈암지구에속하는지역은한성부의部 坊체계에서는崇信坊에속했으며, 1914년행정정리로고양군숭인면돈암리와안암리에포함되었다가, 1936년행정구역확장으로돈암정, 안암정, 신설정의일부가되었다. 16) 이지역은서울성곽과인접한지역으로청계천의 14) 병합이후사회적증가가거의없던경성의인구가확연한증가세로돌아선 1920 년대초부터경성의확장방향은결국동쪽이라는견해가지속적으로제기되고있었다 ( 京城郊外의將來住宅地東南으로發展中, 東亞日報, 1922.11.14; 市街東部發展策, 朝鮮日報, 1923.8.15; 京城東部住宅地計劃, 朝鮮と建築, 1927.2). 또한 1929 년초경성을방문한전전도쿄帝都復興局장관나오키 ( 直木倫太郞 ) 도앞으로경성의발달은 시구개수의근저를타파하고경성의동부, 남부에신도시를건설해야 한다고역설했다 ( 直木倫太郞, 將來の京城, 朝鮮と建築, 1929.2). 15) 장지연, 권력관계의변화에따른東郊의壇廟의의미변화, 서울학연구 36, 2009, 41-55 쪽 ; 전통시대도성의외곽지역은 郊 라고불렸다. 郊는도성밖 100 리이내를뜻하는데 50 리이내를近郊, 100 리이내를遠郊라고했다. 도성의외곽을교로편성하고각각의방위를붙혀동교, 서교, 남교, 북교로불렀다. 고대중국에서교지역은단지도성의외곽에그치는것이아니라별자리의중심인도성에대응하여하늘과땅에제사를지내는장소이기도했다. 16) 현재성북구돈암동, 동선동, 동소문동, 안암동, 삼선동, 보문동일부를포함한다.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43 지천인안암천 ( 성북천 ) 을중심으로양쪽으로낮은구릉이형성되어있었으며, 시가지계획이전까지는주로경성에채소와과일을공급하는경작지로기능했다. 17) 그렇다면시가지계획의실무자들은돈암지구를어떤주택지로개발하려고했을까? 당시시가지계획실무자들이상정한구획정리지구주택지의형상은 한발바깥으로나가면도로에면하고집안으로들어서면본래산이지닌모습을정원을통하여만끽할수있고, 밖을바라보면이웃들은녹지에둘러싸여있고거주자가안주할수있는지역 이었다. 18) 다소막연하나마이런표현이가리키는바는도심부와연결하는교통망이정비되어있으면서도주변에는녹지가확보되어도심부의혼잡과는격절되어있는전형적인중산층의교외주택지, 즉 문명의고질적인결함을극복할수있으면서한편으로는도시사회의특권과이익을마음대로누릴수있는은신처 였다고할수있다. 19) 그렇다면돈암지구는이런교외주택지의형상에얼마나가까운것이었을까? 아래에묘사된돈암지구의형상은도심부와의적절한거리, 지구안팎의간선도로통과, 주위의산지등교외주택지의전형적인그것임을알수있다. 敦岩地區는경성부의도심부로부터동북 4km인동소문밖을흐르는성북천양안의지대로지구의북쪽은경성-원산 1등도로가통과하며남쪽은신설정의춘천가도에연하고동서쪽은산악으로경계한약 220정보의산간지대이다. 이지구는사위가산지로공기가맑아주택지대로가장양호한지위에있어장래이상적주택지로발전이기대되며장래지구의중앙을관통할간선도로의양측지대는상점가로발전할것이예상된다. 20) 17) 김영수, 2009, 앞의글, 1-9 쪽. 18) 椎名實, 京城土地區劃整理事業の體驗, 區劃整理, 1938.10. 19) 김영기옮김, 1990, 앞의책, 541 쪽. 20) 1937.3.31, 京城府第一土地整理事業費充當起債認可ノ件申請, 京城府尹 朝鮮總督 京城府一般經濟關係書綴 (CJA0003255) 의첨부문서인 土地區劃整理事業說明
44 46 경성부는 1937년시가지계획사업의개시와더불어가장먼저돈암, 영등포양지구의구획정리에착수했다. 21) 4월들어지구내토지소유자와의상담회를개최하는한편부족한측량기술자를충원하기위해경성부도시계획계장이직접도쿄까지출장한끝에 100여명의인원을투입하여측량과설계를서둔결과 8월에는대략측량을완료하고토지소유자의부담율결정을위한토지평가를진행했으며, 구획정리사무소도개소했다. 공사설계가완료되어실시계획이인가된것은 11월경이었다. 돈암지구공사설계의주요내용을보면총면적 68만 3천평에주요공공시설로는학교 2개소, 공원 10여개소등이계획되었다. 공사는 2개공구로나누어진행하는데, 이지구는주거지역이므로대부분택지개발을예정하되지구를관통하는간선도로의연도는상업지역으로발전하도록유의할예정이었다. 이상과같은공사실시계획에따라경성부는 12월초토지소유자들에게假換地명령과 1천여호의건물이전을통지하고, 1938년부터본격적인공사에들어갔다. 총독부의자금통제와금융경색으로가로망부설등의진척이어려운시점이었음에도불구하고돈암지구공사는그런대로순조롭게진행되어 2월에는토지 건물평가위원회가개최되었다. 이것이가능했던이유는앞에서언급했듯이중일전쟁발발이전에초기사업비의기채인가를받았기때문이었다. 따라서다른지구의사업이 支那事變의影響으로모두頓挫되어버릴지도모르는 상황에서도돈암지구공사는진척이가능했던것이다. 22) 경성부는돈암지구의공사가상당히진척된 1939년 4월토지소유자들로하여금토지분양조합을조직하게하고, 조합과주택지수요자를연결하기위해도시계획과안에토지상담소를설치하는등일단整地가완료된토지의매각을위한준비를시작했다. 23) 또경성부는거래분위기를조성하기위해 4월 22-26 일미츠코시 ( 三越 ) 백화점갤러리에서도시계획전람회를개최하고당시일본도시계획의소장권위자였던都市計劃東京地方委員會기사이시카와 ( 石川榮耀 ) 를초빙하 21) 이하돈암지구의구획정리공사과정은염복규, 2009, 앞의글, 158-167 쪽. 22) 東部京城繁榮記 (3), 朝鮮日報, 1938.5.5. 23) 府廳土地相談開店, 東亞日報, 1939.4.11.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45 그림 4 돈암지구토지구획정리계획팜플렛 * 출전 : 1939.4.27, 京城府永登浦及敦岩土地區劃整理費起債ノ件 昭和十三年度京城府一般經濟關係書類 ( 其ノ二 )(CJA0003366) 여강연회도개최하는한편 24), 구획정리지구의평면도와사업내용을담은팜플렛을제작하기도했다 ( 그림 4 ). 돈암지구의주택지분양조합은조성이완료된지구내주택지 15만평을경성부와협의한가격에매각하기시작했다. 거래를활성화하기위한경성부의종용으로당분간은협의한공정가격보다도 2할 5분저렴하게매각할예정이었다. 25) 이런영향도있었겠지만, 돈암지구의주택지는 인기 가많았던것으로보인다. 4 월한달동안경성부토지상담소를통해매각된주택지가 5만평을넘을정도였다. 26) 1939년 8월현재동대문경찰서건축계에매일접수되는주택신축원이 24) 二十二日부터五日間都市計劃展覽會, 朝鮮日報, 1939.4.12. 25) 公定된土地價로十五萬坪을分讓, 朝鮮日報, 1939.4.11.
46 46 40여건이나되었다는것으로보아매각된토지에는주택건축도비교적순조롭게이루어진것으로보인다. 27) 이같은 호황 은적어도 1940년말까지는유지된것으로보인다. 1941년중반의조사에따르면돈암지구구획정리이후신축된주택수는 2천여호정도였다. 28) 말그대로경성동북교외에 신도시 가형성된것이었다. Ⅲ. 식민지형 전원도시 / 근린주구로서돈암지구 이상과같이비교적성공적으로공사를완료하고식민지도시경성의동북교외로탄생한돈암지구는어떤주택지였을까? 머리말에서교외주택지설계의이론으로서근린주구이론의경성시가지계획적용가능성을탐문한선행연구를언급한바있다. 이연구들은공통적으로미국식근린주구이론을응용한총독부기사야마오카 ( 山岡敬介 ) 의글 都市構成의單位區劃 에주목했다. 29) 1938 년에발표한이글에서야마오카는하나의구획정리지구가자족적주택지로온전하게기능할수있도록생활기반시설을배치하는방식을논하고있는데, 이것은근린주구의단위를분할하고유기적으로구성하는데집중한것은아니었지만단위주택지내에학교, 시장, 공원등과같은생활기반시설을적절하게배치하는방식을논구한점에서근린주구이론과상통하는것이었다. 30) 그런데야마오카 26) 土地熱旺盛을反影, 每日申報, 1939.5.14. 27) 東部京城住宅地, 東亞日報, 1939.8.27; 이무렵경성에서목수일을한신서우옹도돈암지구에서주택건축이활발하게이루어졌다고회고했다 ( 김현태, 開港以後서울傳統住宅의變遷에관한硏究, 고려대석사학위논문, 1990, 102-109 쪽 고잔리신서우옹인터뷰 ). 28) 全弘鎭, 土地와住宅價의前途, 春秋, 1941.2. 29) 山岡敬介, 都市構成と區劃單位, 都市計劃の基本問題 下, 1938. 30) 권용찬 전봉희, 2010, 앞의글, 199 쪽 ; 또이글은이때에돌출한것이아니었다. 야마오카는이미 1936 년의강연회에서도거의비슷한주장을한바있었다 ( 김주야 石田潤一郞, 2009, 앞의글, 173 쪽 ).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47 한사람의언급에주목해야하는이유는무엇일까? 당시야마오카는경성뿐아니라조선내거의모든도시의시가지계획안작성에관여할만큼이분야에서막강한영향력을행사하고있었다. 31) 따라서야마오카의이론이라면구획정리지구의실제설계에중요하게참조내지는반영되었을것이라고추정할수있다. 그렇다면돈암지구는이런논의에얼마나近似하게계획된것이었을까? 혹은 식민지형근린주구 로서돈암지구에보이는독특함은없었을까? 먼저돈암지구의주택지과신축된주택의유형을살펴보자. 당시일본식가옥과조선식가옥의주택지유형이달랐던상황에서주택지의설계유형은구획정리의주체가의도한거주자의구성까지도보여준다고하겠다. 우선주목되는바는처음경성부가구획정리지구에서 內鮮人混住 를유도하도록주택지설계를하겠다는원칙을천명한점이다. 32) 이는물론실제공사를시작하기전에발표한일반론에불과했지만, 식민지권력의입장에서이미주거이동의여지가별로없는구도심부가아닌신개발지에서이른바 내지인 과 조선인 의주거분리를완화하는것은당대식민통치의최고강령인 內鮮融和, 內鮮一體 와도부합하는중요한지점이었다고할수있다. 33) 그런데선행연구에의하면돈암지구의주택지설계는기본적으로長方形의일본식주거에맞추어져있었다. 34) 이렇게본다면돈암지구는일본인의유입을의식적으로유도하는가운데내선혼주를궁극적으로의도한것이었다고할수있겠다. 35) 31) 1922 년도쿄제대공대를졸업하고총독부에부임한야마오카는이후줄곧조선에근무하면서 1930 년대중반이후내무국, 경무국기사, 총독부시가지계획위원회간사를겸임하며도시계획의실제를주도했다 (db.history.go.kr 직원록자료 ). 시가지계획위원회회의록을검토해보면기술적인내용에대해서는거의야마오카한사람의발언이이어지는모습을확인할수있다 ( 염복규, 2009, 앞의글, 271 쪽 ). 32) 梶山淺次郞, 土地區劃整理に就て, 京城彙報, 1937.1. 33) 기본적으로단위주택지내의공동체적친밀감을강조하는근린주구이론의사회적배경중하나는다양한배경을가진이민자의사회적통합을중요시한점이다 ( 대한국토 도시계획학회편, 2004, 앞의책, 389 쪽 ). 이는물론미국적특수성이지만, 1930 년대후반식민지조선의도시계획에서도 內鮮一體 라는 시대적과제 의추구를위한 혼주 의중요성이대두했을가능성은충분하다고할수있다. 34) 김영수, 2004, 앞의글, 176-179 쪽.
48 46 그런데돈암지구에실제로신축된주택은이런주택지의유형과는어긋나는것이었다. 돈암지구에는당시 집장사 라고불린주택회사에서건축한 都市韓屋 지대가형성되었다. 36) 도시한옥 은 1930-60년대도시지역에건축된일련의중소규모한옥을일컫는개념으로대략전통한옥의구조와재료를도시생활에맞게개량 ( 단순화 ) 한주택으로서일정한수준의경제력을가진도시거주조선인 ( 한국인 ) 의대표적인주거유형중하나였다. 이렇게돈암지구는내선혼주를목표로일본식주택지유형으로설계되었지만, 실제로는조선식가옥이신축되었고그에따라유입된거주자도대부분조선인이었다. 1942년 7월현재인구조사결과를보면돈암지구에속하는돈암정, 안암정, 신설정의조선인과일본인인구합계는 68,903명 (98.57%) 과 1,001명 (1.43%) 으로조선인비율이압도적이었다. 이시기경성전체의조선인 : 일본인인구비율 (84.8%:15.2%) 과비교해보아도돈암지구는거의완전한조선인獨居地였다고판단할수있다. 37) 한편돈암지구에형성된도시한옥지대는도심부의가회동, 봉익동, 와룡동, 누상동등의도시한옥지대와는필지와도로유형등에근본적인차이가있었다. 도심부가無定型의필지와막힌골목을특징으로하는반면돈암지구는方型의필지와격자형의진입로로구성되어있었다. 이점은돈암지구가자연발생적으로주택지가형성된도심부와는달리구획정리에의해인위적, 계획적으로형성된주택지였던것의당연한귀결이었다. 이는 그림 5 에서잘볼수있다. 다음으로교통문제를살펴보자. 교외주택지는무엇보다교통망이정비되어야비로소 완성 된다고할수있다. 돈암지구인근도경성의다른외곽지역과마찬가지로 1930년대전반까지는교통망이거의갖추어져있지않은상태였다. 행 35) 이와직접관련이있는것은아니지만, 1929 년전제도부흥국장관나오키는교외주택지를개발하여도심부거주자의자연스러운이주를유도해야한다고주장하는데, 이때나오키가염두에둔도심부거주자는주로일본인이었다 ( 直木倫太郞, 1929, 京城の土地區劃整理, 京城彙報, 1929.2). 36) 돈암지구에신축된도시한옥은장방형의주택지에맞추어야했으므로도시한옥의일반적유형과는다른특징을가지게되었다. 이에대해서는김영수, 2004, 앞의글참고. 37) 京城府, 京城府人口統計, 1942, 7 쪽.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49 그림 5 도시한옥 주택지유형비교 * 출전 : 위쪽 - 서울시정개발연구원ㆍ서울학연구소편, 서울, 20 세기, 2000, 104-105 쪽 ; 아래쪽 - 송인호, 都市型韓屋의類型硏究,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0, 68 81 쪽 정구역확장직전의답사기를보면이지역의최대문제점은 崇仁公普앞과숭인면사무소를지나종암리를거쳐서안암리까지달리는동안역시느껴지는것은첫째에도로문제둘째도도로문제 였던것이다. 38) 먼저도심부와의연결을보면 38) 四月一日부터大京城될新區域打診巡禮 ( 二 ), 朝鮮中央日報, 1936.3.10.
50 46 시가지계획가로망부설 1기사업 (1937-41) 으로창경원- 돈암정노선의도로가개수되었다. 1기사업은중일전쟁발발이후물가앙등과기채제한으로전반적으로지연되었지만이도로는 1938년봄부터매일 200여명의인부를투입하여공사를진행, 이듬해봄까지는거의완공되었다. 39) 또돈암지구의북단에서출발하여지구내부를관통, 왕십리쪽으로빠져나가는간선도로 ( 현재보문로 ) 공사도진행되어 1940년봄완공할예정이었다. 40) 이와더불어경성부는당시버스가운행중이던창경원-돈암정구간에전차노선을부설할것을京城電氣와합의했다. 41) 전차가무엇보다대중적인교통수단이었던당시의상황에서교통망은단지도로의개수가아니라전차노선의부설로완성될것이었다. 42) 전차노선은두단계에걸쳐부설되었다. 먼저 1939년 4월창경원-혜화정 ( 혜화로터리 ) 노선이개통했다. 경성전기가이노선을돈암정까지연장부설하기로결정한것은 1941년초였다. 43) 실제공사는 5월에시작되어, 39) 昌慶園, 東小門間의新幹線道路敷設, 朝鮮日報, 1938.2.8; 道路工事는어떠한가?, 東亞日報, 1939.1.9. 40) 東西連結의環狀道路明年에完成할豫定, 每日新報, 1939.8.27; 그런데이와같이간선도로가지구를관통하는것은통과교통의방해를받지말아야한다는근린주구이론의원칙과는맞지않는다 ( 권용찬 전봉희, 2010, 앞의글, 199 쪽 ). 이점은돈암지구구획정리가단독사업이아니라시가지계획전체의가로망부설에종속된측면에서비롯된것이라고할수있다. 41) 경성부가버스를부영으로운영하던 1920 년대후반창경원 - 혜화문구간의버스가개통되었으며, 1933 년버스사업이경성전기로이관된후돈암리까지노선이연장되었다 ( 최인영, 2010, 앞의글, 49-50 쪽 ). 42) 敦岩町區整理工事明年부터着手, 每日申報, 1937.11.19; 원래미국에서근린주구이론은자동차교통의발달과깊은관계가있는것이었으며, 당시조선의시가지계획의가로망계획도장래도래할자동차의시대를고려한측면이있었다 ( 정인하, 2009, 앞의글, 253 쪽 ). 그러나미국등서구에서도초창기교외의발달은철도, 전차등에의존한이른바 전차교외 (streetcar suburbs) 의성립이었으며 ( 김영기옮김, 1990, 앞의책, 556 쪽 ), 1930 년대경성에서는더더욱교외주택지의성패는전차노선에달려있었다고할수있다. 43) 惠化町線을延長, 京電의新年度設計, 每日新報, 1941.2.6; 이미창경원 - 혜화정노선이개통한직후부터이를연장해야한다는여론은지속적으로제기되고있었다. 그러나경성전기는영업수지가맞지않는다는이유로이를거부했다 ( 東小門敦岩町間, 西小門大峴町間의新線, 東亞日報, 1939.9.23; 京電問題의懇談會內容, 每日新報, 1939.12.14). 그런경성전기가노선연장을결정했다는것은 1941 년무렵돈암지구주택지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51 두달여만에완공되었다. 이것으로 주택가로서동북쪽으로눈부신발전을거듭하고있는동방면은한층더약진이기대 될것이었다. 44) 이와더불어경성전기는돈암지구내남북간선도로에는버스를운행했다. 이것으로돈암지구는도심부와의연결은전차, 내부교통은버스라는방식으로교통망이완성되었던것이다. 45) 주택지와교통망에이어이번에는학교, 시장, 공원등생활기반시설의배치를살펴보자. 학교의경우 그림 6 에의하면돈암지구에는두개의학교설립이계획되었다. 그하나는초등학교였다. 경성부가초등교육단기확장안에의하여삼청, 돈암, 북아현등세곳에소학교를신설하겠다고발표한것은 1939년초였다. 46) 같은해가을에는신설학교의위치도결정되었는데, 돈암소학교의위치는돈암정버스정류장부근이었다 ( 그림 6 학교A, 현재돈암초등학교 ). 공사착수는연말로예정되었는데, 착공직후부터자재난 자금난에대한이야기가나오는것으로보아학교의신축과개교는원래계획보다상당히지연되었던것으로보인다. 47) 한편초등학교보다주목되는것은중등학교의신설이었다. 1940년들어경기도학무과는 4월개교를앞둔신설旭丘중학교의위치를돈암정으로결정했다 ( 그림 6 학교B, 현재경동고등학교 ). 48) 그런데이는단지한개학교의입지를의미하는것이아니었다. 당시경성내남자공립중학교가네곳 ( 경기, 경복, 경성, 용산 ) 에불과한상황에서다섯번째중학교의위치를결정하는일이었 의개발이전차노선을부설해도손해를보지않을정도에이르렀음을의미하는것이라고하겠다. 44) 敦岩町電車線路工事에着手, 每日新報, 1941.5.5; 東京城의新動脈敦岩町線來月開通, 每日新報, 1941.6.15; 惠化, 敦岩町間電車十二日開通, 每日新報, 1941.7.8. 45) 김영수, 2009, 앞의글, 21 쪽. 46) 三淸, 敦岩, 北阿峴新設校는確定, 東亞日報, 1939.1.9. 47) 校舍新, 增築費 92 萬圓, 四小學校年末에起工, 東亞日報, 1939.9.2; 京畿道에만四小學新設, 每日新報, 1940.1.7; 현재돈암초등학교홈페이지 (www.donam.es.kr) 에의하면돈암국민학교는 1944 년 9 월에개교한것으로되어있다. 48) 新設男女中學基地遂決定, 每日新報, 1940.3.12.
52 46 * 출전 : 그림 4 와같음. ( 필자가가필함.) 그림 6 돈암지구의생활기반시설배치 기때문이다. 그것이돈암정이결정되었다는사실은요컨대이지역의 발전, 그리고앞으로의발전전망을상징하는것이었다고할수있다. 또당시의교육상황에서욱구중학교는특별한의미를가지는학교였다. 그것은다름아니라욱구중학교가경성에서최초의이른바 內鮮共學 의중학교였다는점이다. 49) 국책의 49) 1936 년부임한총독미나미 ( 南次郞 ) 는 內鮮一體 정책의한방편으로내선공학설립을추진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53 근본정신인內鮮一體의정신아래內鮮共學이된 50) 욱구중학교의위치를돈암지구로결정한것은이지구를내선혼주의지역으로조성하려고한것과맞물려식민지권력이교외의새롭게개발한주택지에어떤의미를부여하려고했는지를방증해준다. 그림 7 돈암지구의시장 * 출전 : 그림 4 와같음. ( 필자가가필함 ) 시장의경우도역시 그림 6 에서볼수있듯이, 최소한두곳의설치를계 했다. 이는 1938 년 3 월 朝鮮敎育令 개정으로법제적뒷받침을받게되었다. 욱구중학교는미나미부임직후인 1936 년가을시범적인내선공학으로개교한馬山중학교에이어조선에서두번째내선공학중학교였다 ( 허재영편, 조선교육령과교육정책변화자료, 경진, 2011, 157 쪽 ). 50) 半島人이絶對多數, 旭丘中學八對一, 每日新報, 1940.3.23; 이같은상징성이있는학교였으므로총독부는욱구중학교의개교에서조선인, 일본인학생비율이정확하게 5:5 가되도록엄격하게관리하는한편 ( 學級增設學校에도內鮮人共學制嚴守하라, 每日新報, 1940.4.3; 제 2 회까지입학한 1941 년현재욱구중학교에는조선인 203 명, 일본인 221 명이재학중이었다 ( 京畿道, ( 京畿道 ) 敎育と宗敎要覽, 1941, 42 쪽 ), 개교이후에도내선공학의 모범 으로서운영의원활을기하기위해이미내선공학운영의경험이있는마산중학교교장사카다 ( 坂田政次郞 ) 를교장으로초빙하고, 교사도모두이른바일본舊制고교의교원면허를가진우수한자원으로충원했으며, 각반별조 일학생비율도 5:5 가되도록지시했다 ( 교장사카다, 영어교사오오니시 ( 大西淸一 ), 기타 1, 2 회졸업생들의회고 ; 京東高等學校總同窓會편, 京東五十年史, 1990, 31-67 쪽 ).
54 46 획했음을알수있다. 선행연구에서는돈암지구에시장설치계획은없었다고보았으나 51), 이는 그림 6 을부분확대한 그림 7 을보면사실과다름을명확하게알수있다. 다른자료가없어서정확하게는알수없지만시장의위치로보건대전차 버스정류장부근에위치한시장 ( 그림 6 시장A) 이더규모가컸을것으로짐작된다. 그렇다면돈암지구의시장은실제언제설치되었을까? 1941년말개최된한좌담회에서동부지역전체에공설시장은櫻丘町시장한곳뿐으로시급히시장을설치해달라는요망이나오는것으로보아아직그때까지돈암지구의시장은설치되지않았음을알수있다. 52) 돈암지구시장설치의계획이수립된것은 1942년말이었다. 원래경성부의계획은 1943년중시장을개소하려는것이었으나, 실제로는 1944년 5월개소되었다. 53) 이때개소한시장은시장A였던것으로여겨진다. 54) 마지막으로공원의경우를살펴보자. 그림 6 에서볼수있듯이, 돈암지구에는여러곳의대, 소공원이계획되었다. 그런데돈암지구의공원은돈암지구만의독자적인것이아니라경성시가지계획의전체공원계획의일부였다. 시가지계획공원계획에대한논의는대략 1938 년초부터보이기시작한다. 총독부는공원은대, 중, 소의세가지로나누어건설하되특히 어린이의유희장 인소공원은소학교와짝을지어배치하겠다는원칙을발표했다. 그림 8 에의하면대공원을기준으로그와일정한거리를두고중공원, 소공원을차례로배치하는방 51) 권용찬 전봉희, 2011, 앞의글, 197 쪽 ; 이런오류가발생한이유는 ( 권용찬 전봉희논문을포함한 ) 대부분의선행연구에서돈암지구의계획도로서손정목이가필한경성부촉탁오카다 ( 岡田貢 ) 의글에나오는그림을인용했기때문이다 ( 岡田貢, 敦岩町新區劃整理地と其の今昔, 京城土木建築業協會報, 1937.10; 손정목, 1990, 앞의책, 288 쪽 ). 그러나실제개소여부는논외로하더라도본고에서이용한국가기록원소장공문서의돈암지구계획도에는시장의위치가명확하게표시되어있다. 52) 東部京城發展企圖座談會 5 - 公設市場을곳곳에設置住民便宜를圖하라, 每日新報, 1941.11.30. 53) 新府域을中心으로五個公設市場을新設, 每日新報, 1942.11.13; 三公設市場たつ京城の惠化, 敦岩, 北阿峴に, 每日新報, 1944.5.8. 54) 현재지도를보면시장 A 의위치에돈암재래시장, 돈암제일시장등이위치해있음을알수있다. 시장 B 는실제개소여부를알수없다.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55 식으로공원계획의원론적구상을수립했음을알수있다. 55) 이런구상을바탕으로총독부는대공원 (2만평 ) 6개, 근린공원 (1만평) 24개, 아동공원 (1,500평) 76개, 운동장 4개, 자연공원 5개, 공원도로 25개등합계 140개, 450만평규모의공원계획을수립하여이를이듬해 7월제4회시가지계획위원회에상정했다. 56) 시가지계획위원회의결정을거친경성시가지계 그림 8 경성부공원배치구상도획공원계획이최종적으로 * 출전 : 每日新報, 1938.5.23. 고시된것은 1940 년 3월이었다. 57) 돈암지구의경우공원면적은전체지구면적의약 4% 정도였으며 58), 그림 6 과 1940년 3월 12일朝鮮總督府告示에의거해보면근린공원 2개, 아동공원 9개, 합계 11개정도의공원이계획되었음을알수있다. 이상과같이돈암지구는주택지의형상과환경, 교통망의확충, 학교 시장 공원의입지등여러측면에서한편으로는도심부와격절되어있으면서다른한편으로는연결되어있는신흥교외주택지, 말하자면 전원도시 내지는 근린주구 의면모를갖추어갔다. 59) 한회고에따르면 1940년대초이지역은 전차길 55) 兒童遊戱場을本位로, 每日新報, 1938.2.28; 大京城淨化工作에沒頭, 每日新報, 1938.5.23. 56) 살기조흔서울 의設計圖, 朝鮮日報, 1939.5.10; 大小公園百四十處, 每日新報, 1939.5.27. 57) 朝鮮總督府告示제 208 호, 京城市街地計劃公園決定, 朝鮮總督府官報, 1940.3.12. 58) 권용찬 전봉희, 2011, 앞의글, 197 쪽. 59) 물론도시계획의원론적이론이나실제에비추어볼때, 돈암지구에형성된주택지는전원도시혹은근린주구의 이상 에미치지못하는것이사실이다. 그러나이글에서는돈암지구개발의
56 46 이돈암동까지연장되면서큰길이생기면서완전히번화가가 되었던것이다. 60) 이런돈암지구의모습은아래의광고와묘사를통해서도확인할수있다. 안암장주택賣切近迫 / 배후에綠陰이오南傾斜日光과공기淸凉하며경성부구획정리주택지임으로도로와하수가완바하여잇스며부근은소학교, 중학교, 전문학교등이잇서서자제교육상최우량지입니다. 제1-당사가자랑할점은 7척4방 1칸을존중하고실생활과건축미를恒常利心하여지은집입니다. 제2-경성부구획정리주택지역임으로도로하수완비하였습니다. 고급주택犧牲적廉價, 교통-돈암정정류장서 5분, 경마장입구서 10분경성부돈암구획정리지구내요도심종로에서 30분, 수도- 時局下물자난을극복하고각호에완비하였습니다. 電線 (?) 도물론완비하였습니다. 61) 문안의혼잡과불건강은찾을래야찾을수없는한적하고공기맑은곳이다. 지금우리가것고있는고개넘어로사러진새로닦거논이아스팔트큰길, 우리집대문앞으로다거슨드믄드믄소나무만이서있어야외기는했으나올라가놀기좋은낮으막한산, 그산밑, 우리집에서몇걸음가지않어소사오르는샘물이곱게맑은우ㅅ물, 살기도좋으려니와것기에더좋은곳이다. 길의흙까지도깨끗한힌모래, 동네전체가햇빛을담북이안어언제나밝은곳이다. 62) 위의 1940년 6월朝鮮工營株式會社의안암정주택분양광고는돈암지구가 구획정리주택지임으로 각종시설이잘갖추어져있으며, 도심부와의교통도원활하다고선전하고있다. 그럼에도불구하고이지역은돈암정에신혼살림을차린영화감독박기채의묘사처럼도심부의 혼잡과불건강은찾을래야찾을수없는 교 기저에이런도시계획의취지가나름대로작동하고있었다는점, 즉근대도시계획의발원지인서구와당대아시아의변방이라고할수있는식민지조선사이에도발견되는 동시대성 에주목하고자했다. 60) 서울학연구소편, 신현경할머니의생애사, 주민생애사를통해본 20 세기서울현대사, 2000, 209 쪽. 61) 김영수, 2009, 앞의글, 18 쪽. 62) 朴基采, 新郞新婦新婚日記, 三千里, 1941.3.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57 외 였던것이다. 한편식민지권력은주택지유형이나, 내선공학의입지등으로보건대돈암지구를구도심부에서는불가능한내선일체정신의물리적구현체로조성하고자했다. 그러나돈암지구에는일본식가옥에맞춰진주택지유형을거슬러도시한옥이신축되었으며, 앞에서보았듯이오히려다른지역보다도조선인독거지의성격이강했다. 식민지권력의 이상 은현실에배반당했던셈이다. 그렇다면 조선인 이라는점에더하여돈암지구로유입된인구의성격은어떤것이었을까? 이를계량적으로파악할수있는방법은없으며, 다만방증자료를통해추정할수있을뿐이다. 예컨대구획정리공사초기인 1939년 4월경성부는도시계획전람회에서구획정리지구의주택지를선전하기위해종이인형극을상연했다. 그줄거리는같은회사의동료인두쌍의신혼부부중한쌍은교외구획정리지구로이사하여쾌적한생활을하는반면, 다른한쌍은도심부에서셋방살이를하다가부인은병들고남편은주정뱅이가된다는것이었다. 63) 여기에서다소막연하지만경성부가구획정리지구주택지분양의대상으로어떤계층을염두에두고있었는지짐작할수있다. 1943년안암정의풍경을묘사한다음글은단편적이지만, 돈암지구로이주한계층의성격을더구체적으로보여준다. 내가現在살고있는이安岩町은모조리집장사들이새재목을드려다우직근뚝딱지어논것으로이르고본다면그야말로전통이없는개척촌과같이만보일수밖에없다. 서울살림이자꼬불어만가기로작정이니까하는수없이혹은당연한추세로예까지살림이분가한것인데그래서그런지여기서사는사람도대개는식구도단촐한단가사리, 아들로치면둘째셋째의살림난지차치들 ( 중략 ) 놀라운것은청사진두서너장의설계로지은집단주택이한번지안에 60호가까히나된다. 사방에서몰려와서일제히너는 40호나는 20호로아파-트방차지하듯일제히이사온집 ( 중략 )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각기그럴듯한직업을가진젊은아버지들은혹전차안에서라도만나면정다웁게인사를하면서 ( 후략 ) 64) 63) 손정목, 1990, 앞의책, 285 쪽. 64) 八甫, 서울雜記帳, 朝光, 1943.1.
58 46 새롭게주택지로조성된안암정에새집을지어이사온위글의필자는아마도원래도심부의유서깊은동네에살았던것으로짐작된다. 그리하여그의눈에는특색없는이격자 / 방형의새동네가 전통이없는개척촌 처럼보인것이다. 또위글에서는필자八甫를포함하여이지역에이사온사람들을 청사진두서너장의설계로지은집단주택 에 일제히이사온 둘째셋째의살림난지차치들 이라고묘사했다. 바꾸어말하면이들은같은넓이의택지에같은형태로지어진집을같은시기에구입한, 즉연령대나경제력이비슷한분가한핵가족인것이다. 65) 이들 교원, 회사원, 음악가, 화가, 각기그럴듯한직업을가진젊은아버지 들은전차를타고시내로출퇴근을한다. 이들은이미 1930년대전반부터이야기되던 아츰밥만먹으면시내로일을하러드러왓다가오후 4, 5시가지나야비로소잠자리를찾아돌아가게 66) 되는도시인, 더정확하게말하자면식민지시기성장한새로운세대의근대적도시중산층이었던것이다. 이상과같이돈암지구는분명근대자본주의적도시화의산물인전원도시혹은근린주구의성격을가지고있었다. 그러나한편돈암지구의설계에는 내선일체 와같은식민통치의이념이伏在해있기도했다. 그런의미에서돈암지구는잠정적으로 식민지형 전원도시 / 근린주구라고부를수있을것이다. Ⅳ. 맺음말 이글에서는 1930-40년대경성시가지계획토지구획정리사업으로개발된돈암지구를대상으로식민지도시경성에서교외지역의형성과의미를살펴보았다. 돈암지구는실질적으로는일개의구획정리지구에그치지만당시경성의필연적 65) 분가여부는알수없으나, 앞에서언급한신현경할머니 (1928 년생 ) 의가족도일정한경제력을가진개화한핵가족 ( 부친 - 보성전문학교출신의한의사, 모친 - 태화여자실업학교졸업, 본인 - 경기고녀재학 ) 이었다 ( 서울학연구소편, 2000, 앞의책, 190-191 쪽 ). 66) 자라나는明日의京城大都市計劃과그理想 ( 六 ), 每日申報, 1934.3.30.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59 인확장방향인동북외곽지역이라는점에서, 그리고구획정리의개시뿐아니라그결과까지어느정도확인할수있는지역이라는점에서일개구획정리지구이상의의미를갖는다. 식민지권력은돈암지구를조선인과일본인이융화하는모범적인교외주택지로개발하고자했다. 이를위해돈암지구에는일본식주택지유형이설계되었으며, 내선공학의학교가입지했다. 또도심부에서연장되어내부를통과하는교통망이체계적으로정비되었으며, 지구내곳곳에시장과공원이계획되었다. 그러나식민지권력의의도와는달리돈암지구에는조선식주택인도시한옥이들어섰으며, 전형적인조선인주거지로형성되었다. 도시계획주체의구상과실제의결과의이런엇갈림은서구에서발원하여일본을거쳐도입된근대자본주의도시계획의원론적구상과전시동원체제하의식민지도시라는역사-특수적국면의복합적구현체로서일제말기돈암지구개발의독특함을잘드러내준다. 한편돈암지구의거주자는조선인이었지만, 그들은이미과거의조선인이아니었다. 그들은식민지근대화과정에서성장한새로운세대, 현대한국의 1세대도시인이었다고하겠다. 물리적환경의연구를넘어서이들도시생활자의내밀한일상과심성에접근하는것은식민지도시사연구가앞으로추구해야할중요한과제라고하겠다. 추후이런측면의진전된연구를기하고자한다.
60 46 참고문헌 東亞日報 每日申報 朝鮮日報 朝鮮中央日報 朝鮮總督府官報 京城彙報 區劃整理 三千里 朝光 朝鮮と建築 春秋 京畿道, ( 京畿道 ) 敎育と宗敎要覽, 1941 京東高等學校總同窓會편, 京東五十年史, 1990 京城府, 京城府人口統計, 1942 全國都市問題會議편, 都市計劃の基本問題 下, 1938 朝鮮總督府, 京城市街地計劃決定理由書, 1937 朝鮮總督府, 都市計劃槪要, 1938 京城府一般經濟關係書綴(CJA0003255) 昭和十三年度京城府一般經濟關係書類( 其ノ二 )(CJA0003366) 서울학연구소편, 주민생애사를통해본 20세기서울현대사, 2000 서울시정개발연구원ㆍ서울학연구소편, 서울, 20세기, 2000 김영기옮김, 歷史속의都市, 명보문화사, 1990(L. Mumford, The City in history, 1961) 김찬동, 서울시자치구행정구역개편방안, 서울시정개발연구원, 2009 대한국토 도시계획학회편, 도시계획론, 보성각, 2003 박진빈, 백색국가만들기, 엘피, 2006, 손정목, 日帝强占期都市計劃硏究, 一志社, 1990 송인호, 都市型韓屋의類型硏究, 서울대박사학위논문, 1990 염복규, 日帝下京城도시계획의구상과시행, 서울대박사학위논문, 2009 조재성 권원용옮김, 내일의전원도시, 한울아카데미, 2006(E. Howard, Garden Cities of To-Morrow, 1902) 허재영편, 조선교육령과교육정책변화자료, 경진, 2011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61 권용찬 전봉희, 근린주구론이일제강점기서울의주거지계획에영향을준시점, 대한건축학회논문집 - 계획계 27-12, 2011. 김영수, 돈암지구도시한옥주거지의도시조직, 서울학연구 22, 2004, 동대문밖돈암지구주거지의형성과변천, 서울학연구 37, 2009 김주야 石田潤一郞, 경성부토지구획정리사업에있어서식민도시성에관한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 계획계 25-4, 2009 김현태, 開港以後서울傳統住宅의變遷에관한硏究, 고려대석사학위논문, 1990 장지연, 권력관계의변화에따른東郊의壇廟의의미변화, 서울학연구 36, 2009 조재성, 현대근린주구이론의개척자페리 스타인 라이트, 국토 176, 1996 정인하, 일제강점기시가지계획결정이유서에나타난 市街割標準圖 에관한연구, 대한건축학회논문집 - 계획계 25-12, 2010 최인영, 동대문밖전차의도입과역할, 서울학연구 37, 2009, 일제시기京城의도시공간을통해본전차노선의변화, 서울학연구 41, 2010
62 46 < 국문요약 >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경성돈암지구개발의사례 - 염복규 이논문은 1930-40년대경성시가지계획의일부로개발된敦岩地區를대상으로식민지도시경성에서근대적교외지역의형성과정과특징을살펴본것이다. 식민지권력은돈암지구를조선인과일본인이융화하는모범적인교외주택지로개발하고자했다. 이를위해돈암지구에는일본식주택지유형이설계되었으며, 內鮮共學의학교가입지했다. 또교통망이체계적으로정비되었으며, 시장과공원등도계획되었다. 그러나식민지권력의의도와는달리돈암지구는전형적인조선인주거지로형성되었다. 도시계획주체의구상과실제의결과의이런엇갈림은근대자본주의도시계획의전원도시, 근린주구구상이식민지도시에서구현되는과정의독특함을잘드러내준다. 주제어 : 근대적교외, 전원도시, 근린주구, 敦岩地區, 京城市街地計劃
식민지도시계획과 교외 의형성 - 1930-40 년대京城敦岩地區개발의사례 - 63 <Abstract> Colonial Urban Plan and Formation of 'Suburbs': Through an Example of the Development of Don-am District in Colonial Seoul, during the 1930's-40's Yum, Bok-kyu This article analyzes the process of formation of suburbs in colonial Seoul and its characteristics through an example of the development of Don-am( 敦岩 ) district in the colonial capital as a part of the Kyeong-Seong( 京城 ) urban plan, during the 1930's-40's. The colonial government aimed to develop the district as a model suburb, where colonial Koreans and Japanese settlers could live together harmoniously. To this aim, they designed housing sites in Japanese style and established a high school, which opened to both ethnicities. Also, the road networks of the district were improved and marketplace and public parks were planned accordingly. However, despite the intension of the colonial officials, Don-am district emerged as a typical neighborhood of colonial Korean residents. This disparity itself between the aim of colonial city planners and the actual result of their plan betrays the characteristics of the process, through which the modern capitalist city planners's idea for garden city and neighborhoods were materialized in a colonial city.
67) 64 46 Keywords: modern suburbs, garden city, neighborhood, Don-Am( 敦岩 ) district, Kyeong-Seong( 京城 ) urban plan 투고일 : 2013 년 4. 27 / 심사일 : 2013 년 4. 27 ~ 5. 16 / 게재확정일 : 2013 년 5. 21 필자소개 : 염복규 - 서울대국사학과에서박사학위를취득했으며, 현재국사편찬위원회편사연구사로재직하고있다. 식민지시기도시사, 정치사, 관료제등에대한연구를진행하고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