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9 州 12 牧과의연결성을중심으로 윤경진 1. 머리말 2. 신라및고려초기의 9 州 1) 신라 9주의기능 2) 고려초기의영역관념과 9주 3. 12 牧의연원과운영 1) 12목의연원과구성 2) 12목의운영과刺史六條 4. 맺음말 1. 머리말 고려지방제도에서界首官은主縣 - 屬縣體系와함께중요한특징으로꼽히고있다. 초기연구에서는외관이파견되지않은군현이많았다는점을지적하고, 그것을보완하는제도적장치로서계수관에주목하였다. 1) 1) 이를통해道制가자리를잡기전까지광역의중간기구로기능한것으로이해되었다. 근래에는군현단위, 혹은주현-속현단위의운영에대한연구가진척되면서광역단위의운영체계로서계수관의설정원리나기능에관심이 2) 모아졌다. 2) 그러나계수관의기능이나그것이지방제도상에서점하는위치에대해서는 1) 尹武炳, 1962 高麗時代州府郡縣의領屬關係와界首官 歷史學報 17 18 합. 邊太燮, 1968 高麗前期의外官制 韓國史硏究 2 (1977 高麗政治制度史硏究 一潮閣재수록 ). 2) 구산우, 2002 고려시기계수관의지방행정기능과위상 역사와현실 43. 尹京鎭, 2003 고려전기界首官의설정원리와구성변화 - 고려사 지리지계수관연혁의補正을겸하여 - 震檀學報 96. 尹京鎭, 2004 고려전기界首官의운영체계와기능 東方學志 126. 박종진, 2005 고려시기계수관의기능과위상 역사와현실 56.
58 韓國文化 36 연구자간에시각과의견의차이가있다. 일반적으로계수관은외관이파견된主縣과관할屬縣으로구성되는중간운영단위를토대로그보다광역의운영단위를설정한것으로파악되고있다. 계수관자체가하나의주현이면서동시에 界 로설정된광역권을대상으로일정한기능을수행하였다. 또한계수관의기능에대해서는이견이있지만, 대략외관의상급운영체계로서광역의군사운영, 도량형관리, 사법의상급심기능등을담당하는측면과 界 로설정된영역의대표로서上表陳賀, 행사주관, 사신접대등을담당하는측면으로대별될수있으며, 여기에지역중심지로서의위상을지적하기도한다. 그런데기존의연구를살펴보면, 계수관을고려지방제도의특성이라는테두리안에서만이해함으로써대부분구성과기능을중심으로논의가이루어졌고, 제도적연원이나성립과정에대해서는충분히검토하지않고있다는점이지적된다. 그러나계수관에서발견되는설정원리나기능은계수관에선행하였던신라의 9주나성종 2년에설치된 12목에서도발견된다. 신라의 9주는郡과군이관할하는몇개의縣으로구성된중간운영단위를토대로그보다광역의운영단위를설정한것이다. 州자체가하나의郡으로서몇개의현을관할하는위치에있으면서동시에다수의군-영현단위를포괄하는범위의운영을담당한것이다. 3) 3) 이러한원리는계수관과동일하다. 특히 고려사 지리지에서신라의군-영현체계와고려의주현-속현체계가같은원리로인식되고있다는점 4) 도 4) 신라의 9주와고려의계수관을같은층위에서이해할수있는발판이된다. 다만고려에서는중심군현 ( 계수관 ) 에 界 라는명칭을부여하여광역권을표시하는반면, 신라에서는광역단위가중심군현 ( 州 ) 과동일한명칭을사용한다는점에차이가있을뿐이다. 또한 12목은 9주와마찬가지로 尙書 에토대를두고있어이념적으로연결되고있다는점과牧이계수관을구성하는중심명칭이라는점에서이것이 9주와계수관을연결하는위치에있음을짐작할수있다. 12목은고려지방제 3) 신라 9 주의기능에대해서는姜鳳龍, 1994 新羅地方統治體制硏究 서울대박사학위논문참조. 4) 尹京鎭, 1999 高麗史 地理志의연혁정리방식에대한비판적검토 - 高麗初 의연기비정과관련하여 - 奎章閣 22.
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59 도에서처음으로이루어진체계적인외관파견으로, 거점지배를통한지방통치의실현이라는의미를가지고있었다. 근래에는유교적통치이념의측면에서 12목이지향한운영체계에도관심을보였으나, 5) 5) 9주및계수관과연결되는측면에대해서는특별히주목하지않았다. 사실중간운영단위에서신라의군-영현체계는고려초기에도준용되면서주현-속현체계가수립되는토대가되었음은이미지적된바있지만, 6) 6) 광역운영단위로서계수관또한같은원리에서접근함으로써그실체와역사적의미를보다명확하게이해할수있을것으로생각된다. 그리고이과정에서양자를연결하는위치에있는 12목에대해서도좀더구체적인이해가가능할것으로본다. 본고는이러한관점에기초하여고려계수관제의연원과성립과정이라는맥락에서 9주와 12목에대해검토하려는것이다. 7) 7) 이를위해 1장에서는신라및고려초기의 9주에대해살펴볼것이다. 먼저신라 9주의기능을검토하여그것이고려계수관의기능과유사함을밝히고, 이어고려초기에도 9주의영역관념이유지되고있음을확인함으로써 9주가계수관의연원이되고있음을제시할것이다. 2장에서는 12목의설치와기능에대해살펴볼것이다. 먼저 12목의설정원리를 상서 등에나타난 9주와의관계를통해이해하고, 이어 12목구성이기존에알려진바와달리파악해야함을논할것이다. 그리고성종대 12목의운영과정과刺史六條의도입을통해 12목의기능을정리하고, 이를통해 12 목이기능적으로도 9주에서계수관으로이어지는과도적위치에있음을확인할것이다. 5) 김아네스, 1996 高麗初期地方統治體制硏究 서강대박사학위논문. 6) 윤경진, 1996 고려태조대군현제개편의성격 - 신라군현제와의상관성을중심으로 - 역사와현실 22. 尹京鎭, 2002 고려성종 11 년의읍호개정에대한연구 - 고려초기군현제의구성과관련하여 - 역사와현실 45. 7) 계수관의제도적성립과정을이해하려면牧과함께계수관을구성하는京및都護에대한검토도필요하다. 이들의성립에대해서는각각의특성을고려해야하는만큼, 각기따로검토할기회를가지기로한다.
60 韓國文化 36 2. 신라및고려초기의 9 州 1) 신라 9 주의기능 신라통일기의지방제도는太守가파견된郡과縣令 少守가파견된縣으로구성되고, 군은각기 3-4 개정도의현을관할하면서하나의중간운영단위를구성하였다. 이때 9주의기능은군-영현체계에대한상급체계라는측면과광역권의대표라는측면으로나누어접근할수있다. 우선외관의상급체계로서기능하는측면을살펴보자. 이것은군-영현단위에대해州가상급의행정및군사기능을수행하는것을말하며, 주의장관인都督의기능을통해구현된다. 통일기신라에서군사 역역동원의기본단위는郡이었다. 都督과太守에게명하여도적을잡도록한것이나永川靑堤碑의修治에서退火郡과切火郡이동원대상으로명기된것은그반영이다. 8) 8) 이는고려에서주현-속현단위로軍事道가설정되는것과같은원리이다. 그런데이와함께郡보다광역의동원이필요한경우州를단위로한운영체계를설정할수있다. 주장관으로서도독의지위를감안할때그기능은관내各郡의군사운영을관할하는데있었을것이다. 州助 長史등도독아래에있는직책은바로이러한광역권운영을보좌하기위한것으로해석된다. 이러한양상은 9주성립이전이지만통일전쟁기의군사운영에서그원형을찾을수있다. 上州摠管品日이一牟山郡大守大幢, 沙戶山郡大守哲川등과병사를이끌고雨述城을공격하여 1천급을斬首하였다. 9) 9) 위의기록은上州의摠官이一牟山郡 沙戶山郡등두군의태수와함께 8) 姜鳳龍, 1994, 앞의논문, 225 면. 9) 三國史記 권 6, 文武王원년 9 월 25 일 上州摠管品日與一牟山郡大守大幢沙戶山郡大守哲川等率兵攻雨述城斬首一千級
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61 군사작전을벌이는양상을보여준다. 두태수의참여는각기해당군의군사를이끌고있는상황, 곧군단위군사운영을반영하는것이고, 총관의지휘는군단위를넘어주단위로편성되는대단위군사운영을반영하는것이다. 주장관으로서총관이도독으로연결된다고할때 10) 10) 9주의도독또한동일한원리의운영체계를구성할것임은어렵지않게이해할수있다. 9주의성립이후에도도독을중심으로설정되는광역의군사 역역운영을찾아볼수있다. 1 漢山州都督管內의諸城을쌓았다. 11) 11) 2 河瑟羅道의丁夫 2천명을징발하여北境에長成을쌓았다. 12) 12) 1은성덕왕 17년 (718) 의조치인데, 漢山州의諸城이 都督管內 로표현된점이특징적이다. 城이군사운영의거점이라는점을감안하면이는실제도독과제성사이의관할체계, 곧 9주를단위로한광역의군사운영체계를반영하는것으로볼수있다. 다음은그러한기능의구체적인사례이다. 憲昌의아들梵文이高達山賊壽神등 100여인과함께謨叛하였다. 平壤에도읍을세우고자하여北漢山州를공격했는데, 都督聰明이병사를이끌고잡아서죽였다. 13) 13) 위의기사는헌덕왕 17년 (825) 梵文의난을설명한것이다. 이기사에서는平壤을楊州로비정하고있는데, 이곳은위기사에언급된北漢山州 ( 漢陽郡 ) 10) 三國史記 권 40, 集志職官下外官 都督九人智證王六年以異斯夫爲悉直州軍主文武王元年改爲摠官元聖王元年稱都督 軍主와摠官, 都督이직제상단선적으로연결된다고보기는어렵지만, 이들이신라의지방통치에서州단위운영체계와밀접히연관되어있다고생각된다. 이에대해서는통일기 9 주의성립과관련하여구체적으로검토할기회를가질것이다. 11) 三國史記 권 8 聖德王 17 년 10 월 築漢山州都督管內諸城 12) 三國史記 권 8 聖德王 20 년 7 월 發河瑟羅道丁夫二千築長成於北境 13) 三國史記 권 10, 憲德王 17 년정월 憲昌子梵文與高達山賊壽神等百餘人同謨叛欲立都於平壤攻北漢山州都督聰明率兵捕殺之
62 韓 國 文 化 36 이다. 곧 범문은 평양의 도읍을 위해 해당 지역인 북한산주를 공격한 것이다. 이 때 범문을 공격한 도독 聰明은 漢山州(漢州: 廣州)의 도독이다. 그는 도 독으로서 관내인 북한산주14)에서 발생한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직접 군대를 14) 이끌고 나간 것이다. 여기에는 관내 제군의 병력도 함께 동원되었을 것인데, 이는 위에 인용한 상주총관과 일모산군 사시산군 태수의 관계와 같은 맥락 에서 이해할 수 있다. ②는 성덕왕 20년(721)의 기록으로서 河瑟羅道는 하슬라, 곧 명주를 중심으 로 설정된 운영단위로 파악된다. 그런데 신라 때 군-영현 단위로 도를 설정한 예를 찾기 어렵고, 주 단위 군사 운영의 거점으로 停이 있었음을 감안하면, 하 슬라도가 명주와 직할 영현만으로 구성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따라서 이 도 는 9주의 하나인 명주에 상응하는 것으로 판단된다. 여기서 주를 단위로 광역 의 역역 징발과 운영이 이루어지는 양상을 확인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의 9주는 광역의 군사 역역 운영단위로도 기능하였다. 熊川州 都督 金憲昌의 반란이나 도독으로 추정되는 漢州 伊湌 金蕘의 반란15) 등은 15) 이러한 기반에서 나온 것이라 이해된다. 이는 고려의 軍事道가 대개 주현-속 현 단위로 설정되었으면서도 한편으로 대규모 동원이 필요한 실제 운영에서 는 계수관을 단위로 界軍 을 편성 운영한 것과 유사한 형태이다.16) 16) 다음에 9주의 영역대표 기능으로서 눈길을 끄는 것은 상서물 진상이다.17) 17) 삼국사기 기록을 보면 白馬, 白鷹, 白鵲, 白雉, 赤烏, 瑞芝, 金芝, 嘉禾 등 상 서물의 진상에 관한 기사가 자주 발견되는데, 그 주체가 대부분 9주로 되어 있다. 지방에서 상서물을 진상하는 사례는 문무왕 이후 28개 사례를 찾을 수 있 다. 이 중 浿江鎭 1개, 小京이 2개, 郡이 1개(屈弗郡) 현령이 1개(冷井縣令)이 14) 헌덕왕 시기 북한산주의 행정적 위치는 州가 아니라 郡이었다. 앞서 진흥왕 때 州가 설치되었던 사적으로 인해 州로 지칭된 것으로 생각된다. 15) 三國史記 권11, 定康王 2년 정월. 金義는 관등 앞에 漢州라는 지명을 기재한 것으로 보아 외관으로 나가 있었다고 생각된다. 당시 신라의 외관 중에 伊湌의 관등을 보유할 수 있는 것은 都督 뿐 이다. 16) 윤경진, 2004, 앞의 논문, 35-41면. 17) 강봉룡, 1994, 앞의 논문, 227-229면.
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63 고, 나머지 23개사례가모두주에서진상하는것으로되어있다. 이러한수치로볼때이들주가개별군현, 혹은영현을관할하는군의위치에서진상한것으로보기는어려우며, 9주를단위로상서물진상이이루어졌다고보는것이타당할것이다. 다음기록에보이는도독의기능또한같은원리에서이해할수있다. 牛頭州都督이사신을보내보고하기를, 소처럼생긴이상한짐승이있는데, 몸이길고높으며꼬리길이는 3척정도이고털이없고코가길었습니다. 峴城川에서나와烏食壤을향해서갔습니다 라고하였다. 18) 18) 위에서牛頭州 ( 朔州 ) 의도독은관내에기이한짐승의출현에대해사신을보내上奏하고있다. 峴城川이나烏食壤의현재위치를알수없으므로판단하기어렵지만, 도독이사신을보내上奏하는양상은상서물진상처럼관내의이상현상에대해보고하는것으로州단위의기능으로이해된다. 이외에관내효자에대한보고역시州의기능이었다. 19)19) 이상의검토를통해신라의 9주가광역의군사단위로서관내군을통할하는위치에있었다는것과상서물진상등의주체로기능하였음을알수있다. 이러한두측면의기능은고려계수관의기능이중간운영단위 ( 외관 ) 에대한상급체계와영역대표라는두측면으로구성되는것에상응한다. 이를통해기능적측면에서신라의 9주와고려의계수관이연결된다고이해할수있다. 이점에서고려의계수관은신라 9주로부터연원하여고려에서정비된제도로이해하는것이타당할것이다. 2) 고려초기의영역관념과 9 주 신라의州는전국을구획한광역단위라는의미를가지고있었다. 행정적인측면에서縣은소속郡을冠稱하여그체계를나타냈지만, 영역의귀속을나 18) 三國史記 권 10, 昭聖王원년 4 월 牛頭州都督遣使奏言有異獸若牛身長且高尾長三尺許無毛長鼻自峴城川向烏食壤去 19) 강봉룡, 1994, 앞의논문, 227-229 면.
64 韓國文化 36 타낼때에는군을매개하지않고州를바로관칭하기도하였다. 이러한지명표기는광역권으로서 9주의속성을가장직접적으로보여주는것이다. 삼국사기 에서몇개의예를찾아인용하면다음과같다.( 괄호안은고려시기의지명 ) 1 牛頭州 (= 春州 ) 蘭山縣 ( 미상 ) 20) 20) 2 熊川州 (= 公州 ) 蘇大縣 (= 泰安縣 ) 21) 21) 3 漢山州 (= 廣州 ) 唐恩縣 (= 唐城縣 ) 22) 22) 4 武珍州 (= 光州, 海陽縣 ) 馬彌知縣 (= 遂寧縣 ) 23) 23) 위에서蘭山縣은朔庭郡 (= 登州 ) 영현이고, 蘇大縣은富城郡영현이다. 唐恩縣은 삼국사기 지리지에서唐恩郡으로되어있으며, 馬彌知縣은寶城郡의영현이다. 따라서앞에표시된주는군-영현관계를나타내는것이아니라광역권으로서주단위소속을밝힌것이다. 이러한양상은고려계수관의경우에도나타나는데, 몇가지예를들면다음과같다. 1 廣州牧管內水州人 ( 崔士威墓誌銘, 문종 29) 2 淸州管內大興郡人 ( 韓惟忠墓誌銘, 의종 1) 3 羅州光陽縣人 ( 金義元墓誌銘, 의종 6) 1에서水州는외관이설치된군현이다. 따라서이것은계수관을매개로출신지를표현한예이다. 24) 24) 2에서대흥군은知州事인洪州의속현이며, 3에서광양현은知郡事인昇平郡의속현이다. 청주와나주는각각이들을관할하는계수관이다. 20) 三國史記 권 10, 哀壯王 5 년 7 월. 21) 三國史記 권 10, 哀壯王 5 년 7 월. 22) 三國史記 권 10, 憲德王 8 년 1 월. 23) 三國史記 권 10, 憲德王 17 년 3 월. 24) 고려사 지리지에서水州는南京留守官관내로되어있으나이것은楊州에남경이설치되어계수관으로승격된데따른개편의결과이다. 이사례는수주가남경설치전에는광주목관내였음을보여준다.
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65 출신지 표기에서 主縣을 매개하지 않고 계수관을 바로 관칭하는 것은 계수 관이 영역적 귀속을 나타내는 매개로 사용됨을 보여준다. 이를 통해 신라의 9 주와 고려의 계수관의 연결성을 짐작할 수 있다. 9주와 계수관의 연결성은 9주의 영역 관념을 界 로 표시한 사례를 통해서 도 드러난다. 저 또한 鄕人(신라 사람: 필자 주)으로 집이 溟州界 翼嶺縣의 德耆坊에 있습 25 니다. )25) 위의 기록은 唐 太和 연간(827-836), 곧 신라 興德王 때 당나라에 유학했던 崛山祖師 梵日이 明州 開國寺에서 만난 신라 출신 沙彌僧이 한 말을 인용한 일부이다. 여기서 溟州界 翼嶺縣 이라는 구절이 주목된다. 신라 하대에 익령 현은 守城郡(杆城縣)의 영현이었다. 따라서 명주계 는 9주의 하나인 명주 관 할임을 표현한 것이다. 계 라는 표현이 신라 때 사용된 것인지, 혹은 고려시대 의 관념에 의해 덧붙여진 것인지는 단정하기 어렵지만, 적어도 신라의 9주가 고려의 界 와 같은 층위에서 인식되고 있었음은 분명하다. 또한 후삼국 시기를 전하는 자료에서도 유사한 표현 양태를 찾을 수 있다. 天復 3년(903) 癸亥 3월에 舟師를 이끌고 西海로부터 光州界에 이르러 錦城郡 을 공격하여 함락하고 10여 郡縣을 탈취하였다. 이어 錦城을 羅州로 고치고 군대 26) 를 나누어 지키게 한 뒤 돌아왔다. 26) 위의 기록은 태조 왕건이 궁예 휘하에 있던 시절인 903년의 나주 경략을 전하고 있다. 왕건의 군대가 錦城郡을 공략한 내용이 기재된 것에서 光州界가 당시 광주 관할로 인식되던 범위를 상정하는 것이며, 금성군이 그 소속임을 알 수 있다. 이 때 광주는 신라의 武州로서 나말려초에 명칭이 개정된 것이지 만 9주의 관념이 유지되고 있었던 것이다. 한편 후백제의 경우에도 9주의 체계가 유지되고 있었다. 25) 三國遺事 권2 洛山二大聖 吾亦鄕人也 家在溟州界翼嶺縣德耆坊 26) 高麗史 권1 태조 즉위전 天復三年癸亥三月 率舟師 自西海 抵光州界 攻錦城郡 拔之 擊取十餘郡縣 仍改錦城 爲羅州 分軍戍之而還
66 韓 國 文 化 36 27)27) 당시 良劍은 康州都督이었고 龍劍은 武州都督이었다. 위에서 후백제도 신라와 같이 州와 都督의 제도를 채용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무엇보다 거점 지배를 통해 지방 군사력을 장악하려는 의도로 해석되는데, 앞서 서술한 바와 같이 주가 광역의 군사 운영체계로 기능한 데 근거한 것이다. 후삼국 시기에 9주가 소멸되지 않고 영역을 표시할 때 사용되었던 사례 몇 가지를 금석문에서 찾아보면 다음과 같다. ① 天祐六年(909) 七月 達于武州之昇平 (菩提寺 大鏡大師碑) ② 天祐十八年(921) 夏 達全州臨陂郡 (玉龍寺 洞眞大師碑) ③ 後唐同光二年(924)七月 迴歸達于全州喜安縣 (鳳巖寺 靜眞大師碑) 위의 기록들은 후삼국 분열 후 사실상 신라의 지배권에서 벗어난 지역에 대해 9주의 관념을 통해 지명을 표기한 사례들이다. 昇平과 臨陂는 郡이었고, 喜安縣은 古阜郡 소속이었다. 따라서 위의 武州와 全州는 9주 관념의 연장으 로 이해할 수 있다. 이처럼 신라의 지방통치가 무너진 뒤에도 종래의 9주는 영역을 표시하는 관념으로서 여전히 유효하였고, 부분적으로는 군사 운영단위로서의 속성도 잔 존하고 있었다. 고려는 통일 후 신라 군현제를 준용하여 지방통치를 구현하였 기 때문에 광역의 운영단위로서 9주 또한 영역 관념으로 유지될 여지가 높았 다. 이는 고려 초기의 지명 표기 사례를 통해 확인할 수 있다. 다음은 고려 통일 후 성종 이전에 건립된 禪師 비문의 題號 중에 비의 소 재 지명으로 9주 명칭, 혹은 그에 해당하는 영역관념을 반영한 사례를 지역별 28)28) 로 정리한 것이다. 27) 三國史記 권50 列傳10, 甄萱 時 良劍爲康州都督 龍劍爲武州都督 28) 한편 이들 외에 비문 제호에서 소재지 명칭으로 나오는 것으로는 海州(廣照寺 眞澈大師碑, 태조 20), 溟州(地藏禪院 朗圓大師碑, 태조 23), 原州(興法寺 眞空大 師碑, 태조 23), 中原府(淨土寺 法鏡大師碑, 태조 26), 槐州(覺淵寺 通一大師碑, 광종 9-11) 등이 있다. 그런데 이들은 모두 해당 군현에 소재하고 있기 때문에 영역관념을 추출하기 어렵다. 각연사의 경우 延豊縣에 있었으나 연풍현은 고려 에 들어와 신설된 군현으로 지리적 관계로 볼 때 당초 괴주의 영역에 속해 있었
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67 (1) 武州(光州) ① 有唐高麗國 武州 故桐裏山 大安寺 敎諡廣慈大師碑銘 幷序 (大安寺 廣慈大 師碑, 광종 1) ② 高麗國 光州 晞陽縣 故白雞山 玉龍寺 (玉龍寺 洞眞大師碑, 광종 9) ①의 大安寺는 谷城에 있는데, 곡성은 신라에서는 郡이었으며, 고려 현종 9 년에는 羅州의 속현이 되었다. ②의 曦陽縣(光陽縣)은 신라 때 昇平郡의 영현 이었고 고려에서도 역시 승평군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 따라서 여기서 무 주 광주는 모두 신라 9주의 관념을 반영한 것이다. (2) 尙州 ① 高麗國 尙州 鳴鳳山 境淸禪院 (境淸禪院 慈寂禪師碑, 태조 24) ② 高麗國 尙州 曦陽山 鳳巖寺 (鳳巖寺 靜眞大師碑, 광종 16) ①의 境淸禪院은 赤牙縣(殷豊縣)에 있었다. 적아현은 醴泉郡(甫州)의 영현 으로서 고려에서는 安東府의 속현으로 편성되었다. 따라서 상주는 9주의 관념 에 의해 광역권을 표시한 것이다. ②의 봉암사는 加恩縣에 있었다. 가은현은 古寧郡(聞慶郡)의 영현이었고 고 려에서는 尙州의 속현으로 편성되었다. 그런데 가은현은 현종 9년에 상주에 來屬하는 것으로 되어 있고, ①의 사례에 비추어 여기의 상주 또한 주현을 나 타내는 것이 아니라 광역권의 관념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것이다. (3) 康州(晉州) 高麗國 康州 智谷寺 (智谷寺 眞觀禪師碑, 경종 6) 智谷寺는 山陰縣에 소재하고 있었다. 산음현은 신라에서 江城郡의 영현이었 고, 고려에서는 陜州의 속현으로 개편되었다. 康州는 고려의 晉州로서 산음현 던 것으로 이해된다. 비문 사례 중 군이나 현명을 단독으로 사용한 예가 없다는 점에 근거해서 추정해 본다면, 해당 군현 명칭이 州나 府를 사용하는 경우 곧바 로 이것을 쓰지만, 군이나 현인 경우에는 관할 州의 명칭을 사용한 것으로 이해 할 수 있다. 현명만 직접 사용한 예는 靈巖寺 寂然國師碑(현종 14, 加壽縣)가 처 음이다.
68 韓 國 文 化 36 과는 직접적인 군-영현 관계나 주현-속현 관계가 성립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 서 이 강주는 광역의 관념을 표시하는 것이다. 또한 강주는 무주와 마찬가지 로 신라 9주의 명칭이 고려 초기까지 유지된 사례이다. 특히 경종 5년은 12목 이 설치되기 직전이라는 점에서 이 당시까지 9주의 관념이 비교적 뚜렷하게 유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4) 漢州(廣州) 高麗國 廣州 慧目山 高達院 (高達院 元宗大師碑, 광종 26) 위에서 高達院은 黃驪縣에 소재하고 있다. 황려현은 신라 때 沂川郡(利川 郡)의 영현이었고, 고려에서는 原州의 속현으로 편제되었다. 따라서 이를 廣州 에 소재한 것으로 설명한 것은 9주의 관념에 따른 것으로 판단된다. 또한 원 주는 고려의 계수관 단위로 본다면 忠州牧 관내이기 때문에 이를 계수관 편 성의 결과로 볼 수 없다. 위의 사례는 고려에 들어와 개정된 명칭을 사용하면 서도 영역상으로는 신라 9주의 구성을 그대로 채용한 사례로서 주목된다. 이처럼 고려 초기까지 9주의 영역관념이 유지되고 있었지만, 한편에서는 통 일 전쟁 과정에 광역 단위의 지역 편제 내지 관념이 변화하는 양상도 찾을 29)29) 수 있다. 羅州와 運州가 그 예이다. 우선 羅州는 王建의 경략에 의해 설치되었으며, 이후 종래 武州를 중심으로 인식되던 것이 羅州 중심으로 바뀌었다. 무주(광주)는 용검이 도독으로 있었 고 태봉(고려)에 저항하던 거점이었다. 금성군을 정복한 후 羅州로 개칭한 것 은 이 지역의 운영 거점으로 삼은 것이며, 그 결과로 이 지역은 무주 대신 羅 州의 界 로 인식되었다. 다음 자료는 그러한 변화를 보여준다. ① 迺於天祐二年(905) 六月 退定武州之會津 (無爲寺 先覺大師碑) ② 迺於天祐五年(908) 七月 達于武州之會津 (五龍寺 法鏡大師碑) 29) 김아네스는 羅州와 運州의 사례를 포함하여 界首邑 의 범주를 설정하고, 대체로 태조 23년의 군현제 개편의 결과라고 이해하였다(김아네스, 1996, 앞의 논문, 994-103면). 그러나 이들 사례는 이미 태봉 때부터 그 모습이 드러나는 점을 감 안할 때 9주의 연장에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69 ③ 迺於天祐八年(911) 乘査巨寖 達于羅州之會津 (光照寺 眞澈大師碑) 위의 기록에 보이는 會津縣은 중국에 유학한 선승들이 돌아오는 길목이어 서 나말려초 선사 비문에 종종 등장하고 있다. 그런데 회진현의 소속에 대해 천우 5년, 곧 908년까지는 무주 관내로 표현되어 있다. 또한 菩提寺 大鏡大師 碑 에는 天祐六年七月 達于武州之昇平 이라 하여 909년까지도 이 지역의 영 역관념이 여전히 무주를 준거로 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런데 911년의 기록에서는 회진의 소속이 羅州로 바뀌어 있다. 물론 회진 현이 나주의 전신인 금성군의 영현이었으므로 이를 기준으로 표현한 것이라 할 수 있지만, 여타 기록이 모두 9주에 연칭하여 표시했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 30)30) 때의 나주는 종래 무주를 대체한 광역권의 표시로 이해하는 것이 타당하다. 이러한 변화는 다음 기록에서도 엿볼 수 있다. 처음에 羅州 管內의 諸郡이 우리와 떨어져 있어 敵兵이 차단하고 길을 끊어 서 로 應援할 수 없었다. (중략) 太祖가 戰艦을 수리하고 군량을 준비하여 羅州에 머 31) 물며 지키고자 하였다, 31) 위에서 羅州 管內의 諸郡은 종래 무주 관할에 있었다. 이들이 나주 경략 후 에는 나주의 관할을 받게 된 것인데, 이 때의 나주는 종래 무주를 대체하는 거점으로 기능하고 있었다. 한편 運州의 경우에도 界 로서 다수의 군현을 관할하는 양태로 나오고 있다. 32)32) 運州界 30여 郡縣이 太祖에게 항복하였다. 30) 고려사 기록에 따르면 나주 경략은 903년으로 되어 있어 위의 무주 기록보다 앞선다. 그런데 같은 내용을 전하는 삼국사기 弓裔傳에 따르면, 왕건의 나주 경략은 乾化 元年, 곧 911년으로 되어 있다. 궁예전의 기록을 따르면 앞서 살펴 본 금석문 기록과 정확히 일치한다. 다시 말해 911년의 나주 경략으로 인해 이 지역의 영역관념이 무주 중심에서 나주 중심으로 바뀐 것이다. 31) 高麗史 권1 태조 즉위전 初 羅州管內諸郡 與我阻隔 敵兵遮絶 莫相應援 (중략) 太祖 修戰艦 備糧餉 欲留戍羅州 32) 三國史記 권12, 敬順王 8년 9월 運州界 三十餘郡縣 降於太祖
70 韓國文化 36 위의기록은 934 년의것으로서당시고려와후백제의접경지대였던운주가실제 30여군현을행정적으로통할하는위치에있었다고보기는어렵다. 그보다는고려쪽에서이들지역을운주중심으로인식한것에가까울것이다. 종래이지역을인식하던준거인公州대신에運州가설정된것인데, 이는무주를대신해서羅州가설정되는것과같은맥락이다. 그런데고려초기의기록에서나주와운주는그위상에차이가보인다. 위에서보았듯이통일후에설립된비의소재지는나주가아니라무주를준거로설명하고있다. 반면운주는계속 9주에상응하는광역권으로서나타나고있었다. 高麗國運州迦耶山普願寺 ( 普願寺法印國師碑, 경종 3) 위에서보원사는富城郡에소재하고있다. 따라서이사찰의소재지는郡보다상급의범위를설정하는것으로서운주는 9주에준하는광역의개념으로이해하는것이타당할것이다. 33)33) 이상의내용을통해신라의 9주는 界 로도인식되었고, 후삼국시기에이어고려초기에도광역의영역관념으로 9주가유지되고있었음을알수있다. 이것은 9주가동일한원리를담고있는고려의계수관으로연결됨을의미하는것이다. 그매개고리가바로 12목으로, 다음장에서는이에대해검토하기로한다. 3. 12 牧의연원과운영 1) 12 목의연원과구성 성종 2년의 12목설치는고려건국후처음으로남도지역에상주외관을파견한것이었다. 기존연구에서도이점에주목하여지방통치의진전, 또는 33) 한편현종 9 년의재편과정에서나주는牧으로계수관이되는반면, 운주는知州事로계수관에서제외되는반대의변화를보이게된다.
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71 지방제도의정비라는차원에서이해하였다. 그러나지방제도의이해에서보다중요한것은 12목의설치가어떤형식의운영체계를지향했는가하는점이다. 12목이지향한운영체계의구조를이해하기위해서는먼저 12목이도입되는제도적연원을살펴볼필요가있다. 주지하듯이 12목은三代의이념을토대로한것이었다. 성종이 12목설치에임하여반포한詔書에서는 이에方伯의功에의지하고閭閻의바람에부응하고자虞書의 12목을본받아周나라왕업 800년을연장하고자한다. 34) 34) 라고하여그이념적연원이 尙書 虞書에있음을밝혔다. 그런데앞선신라의 9주또한같은이념적연원을가지고있었다. 9주와 12( 주 ) 목은모두 尙書 의기록에근거한것인데, 이에대한내용을찾아보면다음과같다. 1 肇十有二州封十有二山濬川 ( 尙書 夏書舜典 ) 2 禹別九州隨山濬川任土作貢 ( 尙書 夏書禹貢 ) 위에서 12주는舜때천하를구획한것이며, 9주는禹가홍수를다스리고설정한구획임을알수있다. 이 9주는이후중국의영역관념의근간이되어天下를상징하게되었다. 35)35) 이때 9주에대응하여 12목이가지는의미는두가지로제시될수있는데, 그하나는천하의가장원형적인모습인 9주에서천하가확대되었다는것이다. 상서 에서말한천하관념으로서 9주와 12주는후대사서에도계승되었다. 일례로 漢書 지리지에서는 天下를分絶하여 12 州를만들고禹로하여금다스리게하였다. 水土가평탄해진뒤다시 9 州를제정하고 5 服을배열하며土에따라貢을정하였다. 36) 36) 34) 高麗史 권 3, 성종 2 년 2 월 詔曰 ( 중략 ) 爰憑方伯之功允協閭閻之望效虞書之十二牧延周祚之八百年 35) 선진시대九州의개념에대해서는金漢奎, 1982 古代中國的世界秩序硏究 一潮閣, 33-40 면참조.
72 韓 國 文 化 36 라고 설명하고 있다. 그런데 이중 12주에 대한 師古의 주에서는 9州의 밖에 幷州 幽州 營州가 있어 12주가 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37) 37) 12주를 9주와 외방 3주로 나누어 인식한 것은 곧 12주 이전에 9주가 있었 음을 시사한다. 三國史記 新羅本紀의 善德王에 대한 論에는 9주의 연원과 관련하여 다음과 같은 내용이 보인다. 臣이 듣건대 옛날 女媧氏가 바로 天子는 아니나 伏羲를 도와 九州를 다스렸다 38) 고 합니다. 38) 위의 지적대로 9주가 복희 때부터 상정된다면 舜의 12주 획정에 앞서 堯 때 이미 9주가 자리하고 있었다고 판단할 수 있다. 尙書 堯典에는 9州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은 없으나 9주의 존재를 암시하 는 내용을 찾을 수 있다. ① 予決九川 距四海 ( 尙書 虞書 益稷) ② 九州攸同 四隩旣宅 九山刊旅 九川滌源 九澤旣陂 四海會同 ( 尙書 夏書 禹 貢) ②에 따르면 9주는 9山, 9川, 9澤과 개념적으로 상통하며 천하를 뜻하는 四 海로 귀결된다. 그런데 ①에 따르면 9川은 바로 堯가 뚫어 四海로 연결한 것 이었다. 따라서 堯 때 9천에 조응하여 9주를 상정할 수 있다. 결국 堯 때 천하로서 9주가 성립되어 있었고, 舜 때 여기에 외방 3주가 추 가되어 12주가 되었으나 대홍수를 겪은 뒤 우가 다시 기존 9주를 획정한 것이 라 해석된다. 한편 9주가 공간적인 구획으로서 천하를 상징한다면, 12주는 그 장관인 牧 과 연결되어 천자의 통치라는 관점에서 천하를 상징하고 있다. 12목은 州牧이 라 통칭하기도 했으며, 州伯 方伯으로 부르기도 하였다.39) 이들은 지방 통치 39) 36) 漢書 권28上, 地理志 8上 天下分絶 爲十二州 使禹治之 水土旣平 更制九州 列 五服 任土作貢 37) 漢書 권28上, 地理志 8上 九州之外 有幷州幽州營州 故曰十二 38) 三國史記 권5, 善德王 論 臣聞之 古有女媧氏 非正是天子 佐伏羲理九州耳
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73 를 담당하는 존재로서 六官, 四嶽과 함께 황제를 보필하는 22인을 구성하였다. 이러한 개념에서 12목은 9주와 공존할 수 있었는데, 이는 다음 기록에 잘 나타나 있다. 12牧이 다니니 9州가 감히 辟違하지 못했다.40) 40) 위에서 9주는 천자의 통치를 받는 천하를 상징하고 있고, 12목은 천자의 명 을 받아 지방을 다스리는 존재를 나타내는 복합 구조가 나타나고 있다. 신라가 통일 후 9주를 둔 것은 새 영토의 확보에 따라 천하를 새로 획정했 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이에 대해 성종 2년의 12목 파견은 고려 초기까지 유 지되던 9주의 관념과 대비하여 천하가 확대되었다는 의식을 담고 있으며, 한 편으로 왕명을 받아 천하를 다스리는 운영체계의 수립이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이러한 제도적 연원과 함께 확인할 사항은 12목의 구성이다. 12목이 설치된 지역이 어느 곳인지 파악하는 것은 이를 통해 수립되는 운영체계의 성격을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기존의 연구에서 12목은 楊州, 廣州, 淸州, 忠州, 公州, 晉州, 尙州, 全州, 羅州, 昇州, 海州, 黃州로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런데 고려사 지리지에서 12목의 하나로 설명된 것은 廣州, 淸州, 忠州, 公 州, 晉州, 尙州, 海州, 黃州 등 8개이다. 나머지 4개는 뒤에 12州 節度使가 설 치되는 지역에서 역으로 추정한 것이다. 12목으로 확인되는 8개 주가 모두 12 주 절도사에 포함되었기 때문에 이러한 추정은 별 이견 없이 받아들여지고 있다. 그러나 고려사 지리지에서 성종 14년 10도 편성에 대한 기록을 추출해 보면, 이와는 다른 이해의 가능성이 제기된다. ① 楊州 廣州等 州縣 屬關內道 / 以黃州 海州等州縣 屬關內道 39) 이 중 중심 9주의 牧을 가리켜 九牧으로 칭하기도 하였다. 漢書 권25上 郊祀志 5上 黃帝作寶鼎三 象天地人 禹收九牧之金 鑄九鼎 象九州 이 九牧에 대해 師古의 주에서는 九州之牧 으로 설명하고 있다. 40) 史記 五帝本紀 十二牧行 而九州莫敢辟違
74 韓國文化 36 2 忠州 淸州等州縣爲忠原道 3 公州 運州等州縣爲河南道 4 以尙州所管爲嶺南道 5 慶州 金州所管爲嶺東道 6 晉州所管爲山南道 7 以全州 瀛州 淳州 馬州等州縣爲江南道 8 羅州 光州 靜州 昇州 貝州 潭州 朗州等州縣爲海陽道 9 以春州等郡縣屬朔方道 / 以和州 溟州等郡縣爲朔方道 10 以西京所管爲浿西道 위에서 10도를편성하는내역은두가지유형으로표현되어있다. 하나는소속군현을일부나열하여 等州縣 ( 또는郡縣 ) 으로표기한것이고, 다른하나는 所管 으로하여관할체계를표현한것이다. 후자의표현은西京을제외하면경상도지역에서만나타나는데, 관할주체로열거된것은慶州, 金州, 尙州, 晉州등네곳이다. 이때 所管 으로표현된것은 10도개편이전에이들을거점으로한관할체계가있었다는것을의미한다. 41) 41) 이는선행한 12목으로보아야할 42) 것인데, 42) 네곳중진주와상주는 12목으로확인된다. 이를통해慶州와金州역시 12 목에포함되었다고이해할수있다. 한편다음기록들도 12목구성의일단을보여준다. 1 全州求禮縣民孫順興 43) 2 慶州延日縣民鄭康俊女字伊 43) 위의기록은성종 9년효자 열녀등을포상하는기록에열거된대상자중일부이다. 1에서求禮縣은신라때谷城郡의領縣이었으며, 고려에서는南原府의屬縣으로편성되었다. 당시가 12목이설치운영되던시기임을감안할때구례현이전주관할로표현된것은전주가 12목의하나였음을의미한다. 2에서延日縣은신라때義倉郡영현으로현종 9년에경주로來屬하였다. 따라서 41) 이것을 10 도제하에서의관할체계로이해할수도있으나慶州 ( 東京 ) 는 10 도와구분되는운영체계를보이고있으므로합리적이지않다. 42) 서경은 12 목의관할지역에포함되지않으므로논외로한다. 43) 高麗史 권 3, 성종 9 년 9 월丙子.
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75 이경우도 12목의하나인경주의관할을표시하는것으로이해할수있다. 이사례들을통해全州와慶州가각각 12목의하나였음을확인할수있다. 또한다음기록에서羅州도 12목의하나임이확인된다. 大學助敎宋承演과南海道羅州牧經學博士全輔仁은사람을가르치는데태만하지않으니포상과발탁을더해주어야할것이다. 44) 44) 위의기록은성종 8년교육에공이있는나주목의경학박사를포상하는기록이다. 경학박사는앞서 12목에파견된관원이며, 인용문뒤에도 12목의경학박사를권면하는내용이나온다. 여기서羅州가 12목의하나임이확인된다. 결국지리지에서확인되는 8개외에 12목으로파악되는곳은경주와금주, 전주와나주로규정할수있다. 45) 45) 따라서기존에 12목의하나로보았던昇州와楊州는제외되어야한다. 다음에이들을 9주와대비해보자. 먼저 12목으로확인되는廣州, 公州, 晉州, 尙州, 全州등 5개는기존의 9주와일치한다. 나머지의변화는후삼국통일과북방개척에따른영역의확대와광역권분할의중심이되는王京의위치가바뀌는것과관련되어있다. 우선慶州는신라왕경이지방도시로개편되는데따라그위상을확보하는조치라할것이다. 海州와黃州는 9주설정당시에는포함되지않았던신개척지이다. 이들은영역확대의의미를담고있다. 나머지네곳은왕경의변화와관련되어있다. 개성을기준으로볼때경상도동남부지역은내륙쪽인良州보다는해상교통로와연결되는金州가보다주요한중심지로인식되었을것이다. 羅州는앞서武州를대신하는광역권의중심지로설정된적이있지만, 이때다시무주를대신해서 12목이되는것은역시해상교통로에서우위에있었기때문이라고판단된다. 46)46) 44) 高麗史 권 74, 選擧 2 學校성종 8 년 4 월 大學助敎宋承演南海道羅州牧經學博士全輔仁誨人不倦宜加獎擢 45) 金州의경우淳化 2 년, 곧성종 10 년당시金海府量田使의용례가있으나 ( 三國遺事 권 2, 駕洛國記 ), 이는태조 23 년에제정된명칭을관행적으로사용한것으로볼수있는만큼金州牧의존재를부정하는근거가되지않는다고생각한다. 46) 고려초에 界 의거점으로운영되었던運州가 12 목에포함되지않고대신公州가
76 韓國文化 36 한편, 溟州와朔州는경주에서출발하는남북방향의종적인교통로와연결되어있다. 그러나이들은개성을중심으로보면동서방향의횡단로상에있게되어왕경과지방을연결하는거점으로서의미가반감되고있다. 이에대해忠州와淸州는신라의小京지역으로과거경주에서소백산맥을넘어선길목에위치하고있는데, 이는개성에서내려오는교통로에서도동일한의미를가질수있어 12목으로선택된것으로이해된다. 이렇게보면 12목의설정은기존 9주를계승하면서경주에서개성으로중심이바뀜에따라일부거점을조정하고여기에새로외곽에 3주를추가한것으로이해할수있다. 이는 상서 의 9주와 12목관계를충실하게반영하고있는것으로, 성종 2년의 12목이신라이래의 9주를계승하는것임을재차확인할수있다. 47)47) 2) 12 목의운영과刺史六條 9주는고려초기에도그관념을유지하고있었지만, 실제광역운영단위로서기능하는모습은뚜렷하지않다. 군-영현으로이루어진중간운영단위는在地官班을매개로운영될수있었으나 9주단위의광역운영은별도의장치없이토착의재지관반이담당하기는곤란한것이었다. 행정운영에문제를야기할수있을뿐더러이를기반으로중앙정부를위협할수있는세력이대두할수있었기때문이다. 이때문에고려정부의지방운영체계수립은광역단위의가동을모색하는데서시작되었는데그산물이바로 12목의설치이다. 12목설치가의도한기능은우선그계기가된前年의崔承老상서에서찾을수있다. 선택되는것도공주가운주보다교통로에서우선적인의미를가졌기때문일것으로생각된다. 47) 12 목이되는지역의연원은 9 주외에신라王京과小京, 그리고나말려초에새로등장한羅州등도포함되므로설치지역으로만보면 12 목의연원을 9 주로국한할수는없다. 그러나여기서주목하는것은 12 목의운영체계가 9 주의원리를계승확대한것이라는사실이다. 설치지역의조정은왕경변화에따라이루어진것으로 9 주의원리를충실히재현하는차원으로이해할수있다.
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77 지금 보건대 鄕豪가 매번 公務를 빙자하여 百姓을 侵暴하니 백성이 살기 어렵 습니다. 청컨대 外官을 두십시오. 비록 한번에 다 파견할 수는 없지만, 먼저 十數 48) 개의 州縣에 아울러 하나의 官을 두고 官마다 2-3員을 두어 撫字를 맡기십시오. 48) 위의 내용을 통해 12목 설치와 관련된 몇 가지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우 선 당시 鄕豪들이 公務를 담당하고 있었으며, 최승로가 건의한 외관의 기능은 撫字 로 설명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외관의 기능이 향호의 공무를 대체하 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공무수행을 전제로 이들의 침탈 행위를 막고 백성을 慰撫하는 것임을 의미한다. 이는 외관 파견의 내용을 보아도 드러난다. 최승로는 10여 주현에 官을 並 置 하고, 각 官에 2-3명의 관원을 두도록 건의하였는데, 이 정도 관원으로 각 급 군현에 대해 직접적인 공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이는 향호들의 공무수행을 기반으로 그에 대한 감찰을 행하는 방식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다음에는 성종 전반기 자료를 통해 12목의 기능을 살펴보자. 12목의 지방통 치 기능으로 우선 勸農과 法令 시행을 찾을 수 있다. ① 너희 十二牧과 諸州鎭使는 지금부터 가을까지 雜務를 停罷하고 오로지 勸農 에만 힘써라. 내가 장차 사신을 보내어 審檢하고 田野의 荒闢과 牧守의 勤怠 49) 를 살펴서 褒貶할 것이다. 49) ③ 마땅히 兩京 百司 및 十二牧 知州縣鎭使 등에게 반포하여 모두 각 조목의 50) 제도를 잘 익히고 힘써 행하도록 하라. 50) 51)51) ①은 12목에게 勸農을 당부하는 내용이다. ②는 儒敎的 儀禮의 시행을 건 48) 高麗史 권93, 列傳6 崔承老 今竊見 鄕豪 每假公務 侵暴百姓 民不堪命 請置外 官 雖不得一時盡遣 先於十數州縣 幷置一官 官各設兩三員 以委撫字 49) 高麗史 권79, 食貨2 農桑 성종 5년 5월 咨爾十二牧 諸州鎭使 自今至秋 並宜停 罷雜務 專事勸農 予將遣使審檢 驗以田野之荒闢 牧守之勤怠 爲之褒貶焉 50) 高麗史 권3, 성종 7년 2월 壬子 宜頒兩京百司 及十二牧 知州縣鎭使等 咸使知 委勉行條制 51) 성종 초 기록에 12목(牧宰 牧守)과 병칭되는 諸州鎭使(知州縣官 知州縣鎭使) 등의 관원은 양계의 관원으로 판단되므로 여기서는 논외로 한다. 이에 대해서는 양계 지배체계의 성립과 관련하여 따로 분석할 것이다.
78 韓 國 文 化 36 의한 李陽의 封事에 대한 답변으로서 해당 조항들을 12목 등으로 하여금 잘 익혀서 실행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이것은 유교적 의례에 관한 것이지만, 이를 통해 12목이 法制와 政令의 전달에서 매개가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권 농이나 법령 시행은 지방통치에서 모든 외관에게 부여되는 보편적인 기능에 속한다. 이에 대해 12목의 설치 배경과 관련하여 주목되는 기능이 교육과 薦擧이다. 12목의 제도적 전범이 된 漢 武帝의 刺史 설치에서 의도한 것은 바로 지방의 인재를 발탁하는 것이었다.52) 성종 역시 12목을 설치 운영하면서 인재 발탁에 52) 무게를 두었다. 성종은 여러 州郡縣의 子弟를 선발하여 서울에 와서 학업을 익히도록 하였 다.53) 이 때 자제를 선발하여 올린 주체는 諸州 로 되어 있는데,54) 선발 대상 53) 54) 이 州郡縣의 자제라는 것과 대비해 볼 때 諸州는 12목을 가리키는 것으로 이 해된다. 선발된 사람들은 대개 長吏의 子弟들로, 장리가 薦擧의 주체가 될 수 는 없으므로 12목이 選上을 담당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조치는 얼마 후 다수의 자제들이 고향으로 돌아감으로써 소기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에 성종은 12목을 매개로 한 지방 교육을 도모하였다. 前年에 귀환을 허락한 學生들을 가르칠 스승이 없으니 경전에 통달한 사람을 선발하여 經學 및 醫學博士로 삼아 12목에 각 1명씩 파견하여 敎諭를 돈독히 실행 하도록 하였다. 그 여러 州郡縣의 長吏百姓으로 가르칠 만한 아이가 있으면 아울 러 訓戒토록 하고, 만약 明經에 굳은 의지가 있거나 孝弟로 소문이 있는 자, 醫方 을 쓸만한 자는 牧宰와 知州縣官으로 하여금 漢家故事에 의거하여 具錄하여 京師 55) 에 천거해 보내도록 하는 것을 恒式으로 삼았다. 55) 52) 漢書 권6, 武帝紀 元封 5년 初置刺史部十三州 名臣文武欲盡 詔曰 蓋有非常之 功 必待非常之人 故馬或奔踶而致千里 士或有負俗之累而立功名 夫泛駕之馬 跅弛 之士 亦在御之而已 其令州郡察吏民有茂材異等 可爲將相及士絶國者 53) 高麗史 권74, 選擧2 學校 成宗朝 令諸州郡縣 選子弟 詣京習業 54) 高麗史 권74, 選擧2 學校 성종 5년 7월 今諸州所上學士 慮有思鄕之人 55) 高麗史 권74, 選擧2 學校 성종 6년 8월 以前年許還學生 無師敎授 敎 選通經閱 籍者 爲經學 醫學博士 於十二牧 各遣一人 敦行敎諭 其諸州郡縣長吏百姓 有兒可 敎學者 幷令訓戒 若有勵志明經 孝弟有聞 醫方足用者 令牧宰 知州縣官 依漢家故 事 具錄薦貢京師 以爲恒式
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79 위의 기사는 고향으로 돌아간 자제들의 교육을 위해 12목에 經學博士와 醫 學博士를 두도록 한 조치와 이를 토대로 인재를 중앙으로 천거해 올리도록 한 조치를 담고 있다. 성종 8년에는 12목의 경학박사 중에서 시험에 나아간 56)56) 門生이 없는 사람은 임기가 차도 유임시키는 조치가 이어졌는데, 이 또한 12목의 교육과 천거 기능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지방지배의 본령인 수취와 직접 관련된 기능은 뚜렷하지 않다. 다만 다음 기록은 수취와 관련된 12목의 역할을 반영하고 있다. 簪纓의 인재를 발탁하여 牧宰의 員僚로 임명하며, 賦稅를 균평히 하여 사람을 교화하며 廉平을 숭상하여 풍속을 이루도록 하라. (중략) 너희 牧民의 관리들은 獄訟을 정체시키지 말며, 倉廩을 충실히 하며, 窮民을 진휼하며, 農桑을 勸課하며 57) 徭賦를 가볍게 하며, 일을 公平하게 처리하라. 57) 위의 기사에는 牧宰, 곧 12목 관원의 기능으로 均賦稅 가 지적되고 있다. 또한 후반부에 열거된 牧民官의 업무에 輕徭薄賦 가 포함되어 있다. 이를 통 해 12목이 수취와 관련하여 일정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임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均賦稅 는 化人 이라는 목적을 가진 것이며 尙廉平 과 대응하고 있 다. 내용상 12목이 직접적인 수취 업무를 담당했다기보다는 수취 담당자인 장 리들이 민생을 침탈하는 것을 막는 데 그 본령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이는 최승로 상서가 밝힌 외관 설치 목적과도 상통한다. 기사 후반부에서 정 리한 각종 업무도 구체적인 기능과 고과조건을 나타낸 것이 아니라 化人成俗 을 위한 均賦稅 尙廉平의 내용을 이념적으로 설명한 것으로 보는 것이 적절 할 것이다.58) 58) 이상에서 살펴본 12목의 기능은 9주와 대비해 볼 때 같은 원리를 담고 있 으면서도 다소 차이를 보인다. 군-영현 단위의 운영을 토대로 광역의 운영을 56) 高麗史 권74, 選擧2 學校 성종 8년 4월 其十二牧 經學博士 無一箇門生赴試者 雖在考滿 復令留任 57) 高麗史 권3, 성종 5년 9월 己丑 擢簪纓之彦 差牧宰之員 均賦稅以化人 尙廉平 而成俗 (중략) 凡爾牧民之官 無滯獄訟 懋實倉廩 賑恤窮民 勸課農桑 輕徭薄賦 處 事公平 58) 계수관의 수취 관련 기능이 정보 관리와 감독의 기능을 중심으로 하고 있었다는 점에서 12목의 기능과 연결된다(윤경진, 2004, 앞의 논문, 44-49면).
80 韓國文化 36 담당한다는점에서는상통하지만기능내용에서는 12목이더제한적이다. 무엇보다州단위기능의핵심사안이라고할광역단위의군사운영이나타나지않는다. 이는중간운영단위가국가적인재편을충분히거치지않고여전히在地官班 ( 長吏 ) 을통해운영되는상황에서그것을전제로상급체계의기능을구현하는데에는한계가있었음을보여준다. 대신광역권을토대로한영역대표와감찰의기능은중간운영단위를매개하지않고직접구현될수있는것이었다. 12목의기능은바로이부분에초점이있었던것이다. 한편성종 9년에는 12목의운영을위한규범으로漢의刺史六條가도입되었다. 漢은秦의군현제를계승하여천하를郡 - 縣으로편성하였으며, 武帝는元封 5년 (B.C. 106) 에처음자사를두고 13 州를관할케하였다. 59) 59) 이중하나는京師지역을담당하므로실제지방은 12주로설정되는것이었다. 60) 60) 한의자사는 6개의條目에따라소관구역을순행하며郡國을감찰하였다. 61)61) 성종 9년 7월金審言은봉사 2조를올렸는데, 이중漢代刺史六條를열거하고이를六正六邪文과함께관청에게시하여지침으로삼을것을청한내용이들어있다. 성종은이를內史門下에내려그가奏請한대로내외관청에頒示하고시행케하였다. 이자사육조는당시외관인 12목을대상으로한것이었다. 이는김심언의봉사에대한성종의언급에서확인된다. 朕이洪圖에臨御한뒤로盛業을이루고자생각하여안으로百寮를두고밖으로牧守를나누었는데, 分憂의직임을비우지않고利俗의방안을베풀려 62) 하였다. 62) 여기서牧守는곧 12목을가리키는것으로서성종의언급은김심언의자사육조가 12목에적용되는것임을보여준다. 자사육조를게시하도록한지방관 59) 漢書 권 5, 武帝紀 初置刺史部十三州 60) 後漢書 권 28, 百官 5 州郡 外十二州每州刺史一人 61) 자사는이후지위를높이면서州牧으로개칭되기도하였다. 이는파견구역이 12 주라는것과함께자사가三代의 12 州牧에서연원한것임을보여준다. 62) 高麗史 권 93, 列傳 6 金審言. 朕自御洪圖思臻盛業內設百寮外分牧守無曠分憂之任欲施利俗之方
고려 界首官의 제도적 연원과 성립과정 63)63) 청을 十二道州縣官廳으로 지칭하고 있는데, 81 이 十二道는 12목을 중심으로 64)64) 그 관할구역을 나타내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런데 주목되는 것은 김심언이 건의한 자사육조의 내용이 宋書 에 인용 65)65) 된 漢의 刺史六條와 내용이 다르다는 사실이다. 두 자사육조의 내용을 대비 하여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1> 漢의 刺史六條와 金審言의 刺史六條 漢의 刺史六條 ( 宋書 수록) 金審言의 刺史六條 ① 强宗豪右田宅踰制 以强凌弱 以衆暴寡 ① 察民庶疾苦失職者 ② 二千石不奉詔書 遵承典制 倍公向私 旁詔守利 侵漁 ② 察墨綬長吏以上居官政者 百姓 聚斂爲姦 ③ 察盜賊民之害及大奸猾 ③ 二千石不卹疑獄 風厲殺人 怒則任刑 喜則淫賞 煩擾 ④ 察田犯律四時禁者 苛暴 剝戮黎元 爲百姓所疾 山崩石裂 祅祥訛言 ⑤ 察民有孝悌廉潔行修正茂才 ④ 二千石選署不平 苟阿所愛 蔽賢寵頑 異者 ⑤ 二千石子弟恃怙榮勢 請託所監 ⑥ 二千石違公下此 阿附豪强 通行貨賂 割損政令 ⑥ 察吏不簿入錢穀故散者 * 전거 : 宋書 百官志 및 高麗史 金審言傳 한의 자사육조는 2천 石 이상의 관리, 곧 長吏들의 활동을 직접 감찰하고 토호의 발호를 억제하는 데 주안점을 두고 있다. 당초 자사 설치의 주된 목적 이었던 천거 기능이 자사육조에는 빠져 있는 것도 활동의 초점이 장리 감찰 에 놓인 결과로 이해된다. 이에 대해 김심언이 제시한 자사육조는 군현 운영 전반에 대한 감찰을 규 정하고 있으며, 천거 기능도 포함되어 있다. 이는 김심언이 한의 자사육조라는 제도적 틀을 빌려오면서도 내용은 다른 기준에 의해 재구성했음을 보여준다. 이 기준은 두 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하나는 당시 정치제도 정비의 모델이 된 唐制에서 감찰 단위의 운영과 관련된 규범을 채용하는 것이다. 한의 자사 63) 高麗史 권93, 列傳6 金審言 請將六正六邪文 及刺史六條 俾委攸司於二京六官諸 署局 及十二道州縣官廳堂壁 各寫其文 出入省覽 以備龜鑑 64) 김아네스, 1996, 앞의 논문, 141면. 65) 宋書 권40, 志30, 百官下.
82 韓 國 文 化 36 육조는 후대 광역 단위의 감찰 구역을 운영함에 있어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 며, 이에 따라 지방 순찰을 수행하는 관직에 六條의 규범이 제시되는 것을 볼 수 있다. 우선 隋 煬帝의 관제 중에 司隸臺에는 畿外를 순찰하는 刺史가 속해 있었 는데, 이들이 순찰할 때 관장하는 업무가 6개조로 제시되었다.66) 또한 唐代 御 66) 史臺 소속 監察御史에게는 十道巡按을 위한 6개조의 규정이 있었다.67) 각각의 67) 구체적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표 2> 隋代 刺史의 所掌 六條와 唐代 監察御史의 十道巡按 규정 隋代 刺史의 所掌 六條 ① 察品官以上理政能 唐代 監察御史의 十道巡按 규정 ① 察官人善惡 ② 察官人貪殘害政 ② 察戶口流散 籍帳隱沒 賦役不均 ③ 察豪强姦猾侵害下人 及田宅踰制 官司不能 ③ 察農桑不勤 倉庫減耗 禁止者 ④ 察妖猾盜賊 不事生業 爲私蠹害 ④ 察水旱蟲災 不以實言 枉徵賦役 及無災妄蠲 ⑤ 察德行孝悌 茂才異等 藏器晦跡 應 免者 時用者 ⑤ 察部內賊盜 不能窮逐 隱而不申者 ⑥ 察黠吏豪宗兼幷縱暴 貧弱寃不能自 ⑥ 察德行孝悌 茂才異行 隱不貢者 申者 * 전거 : 隋書 百官志 및 新唐書 百官志 수당대의 刺史(監察御史)는 그 명칭이나 6개조 규정 등을 통해 기능적으로 한의 자사육조를 계승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6조의 표현이나 내용은 한의 자사육조와는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는 물론 사회 변화에 따른 제도 변 천의 결과로서 자사의 역할이 관리에 대한 직접적인 감찰에서 군현 운영 전 반에 대한 감찰로 나아갔음을 반영하는 것이라 이해된다. 김심언의 자사육조도 이들과 같은 선상에 있다고 생각된다. 김심언의 자사 육조를 전술한 수당의 육조 규정과 대비해 보면, 우선 공통적으로 각 조항이 察 로 시작한다는 점을 발견할 수 있다. 또한 각 조항의 내용도 서로 비슷한 데, 특히 천거를 규정한 부분은 표현에서도 매우 유사하다. 이를 통해 김심언 66) 隋書 권28, 志23 百官下 隋煬帝官制 司隸臺. 67) 新唐書 권48, 志38 百官2 御史臺.
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83 이수당의육조규정을참작했음을짐작할수있다. 한편김심언의자사육조는이미운영되고있던 12목의운영을위한규범으로도입된것이다. 따라서당시 12목의기능을반영하였을것이라는점도지적할수있다. 앞서인용한성종 6년기록에따르면 12목의천거기능은 恒式 으로입법화되어있었다. 김심언이자사육조를정리하면서천거를넣은것은이미恒式으로수립된 12목의천거기능을고려한결과로도해석할수있다. 또한자사육조는토호의발호에대한억제규정이뚜렷하지않은대신, 吏 ( 長吏 ) 의제정운영을적시하고있다는점에서수당의육조와다소차이를보인다. 이차이는군현운영을중앙에서파견된관인이담당했던수당과달리고려에서는재지세력인장리 ( 향리 ) 들이담당했던사정과무관하지않다고생각된다. 이러한맥락에서김심언의자사육조는당시지방통치의양상과隋唐의육조규정을참고하여 12목운영을위한규범으로재정리한것이라이해할수있다. 이규정은현종 9년에제정되는諸州府員의奉行六條로계승되어고려지방통치의규범으로정착하게된다. 봉행육조는選擧志에 新定 으로표현되어있으나실제로는김심언이제시한자사육조의내용을그대로축약한것이다. 다음은봉행육조의내용이다. 1 察民庶疾苦 2 察黑綬長吏能否 3 察盜賊姦猾 4 察民犯禁 5 察民孝弟廉潔 6 察吏錢穀散失 위에서봉행육조의순서가자사육조와동일하며, 구문도간략하게줄여표현한것임이드러난다. 통상봉행육조는고려외관의일반적인규범으로이해되고있으나그초점은광역단위로서界首官에있었던것으로판단된다. 봉행의주체로 諸州府員 을제시하고있는데, 州府 로지칭하는대상은대개州牧과都護府, 곧계수관을상정하고있다. 飯僧의단위가대개州府로나타나는것은그 68) 예이다. 68) 이처럼계수관에초점을맞춘봉행육조가 12목운영의규범으로도입된자사육조를그대로축약하고있다는것은곧고려의계수관이 12목을계승하는 68) 윤경진, 2004, 앞의논문, 55-56면.
84 韓國文化 36 위치에있음을보여준다. 12목이군-영현의중간운영단위에대해감찰과천거를중심으로광역의운영단위를설정한것이라면, 계수관은주현-속현체계의수립에따라그에대한상급체계로서설정된것이다. 설정원리에서상통할뿐만아니라그기능과관련된규범도계승하고있었다. 다만계수관은지방통치의정착과함께군사운영을비롯하여광역단위로서기능의확대된다는점에서그단계적차이를지적할수있다. 69) 4. 맺음말 이상에서는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을 9주및 12목을통해살펴보았다. 검토된내용을정리하면다음과같다. 9주의기능은군-영현체계에대한상급체계라는측면과광역권의대표라는측면으로나누어진다. 전자의대표적인사례는군사 역역운영으로서州는郡단위운영에대한상급체계로서광역단위의운영을담당하였다. 곧주의都督이군의太守들을지휘하며군사운영에임한것이다. 후자의사례로는상서물진상과이상현상및효행자보고를찾아볼수있다. 이러한기능은계수관이주현-속현체게에대한상급체계로서기능하는측면과영역대표로서기능하는측면을공유한것과상통하는것으로, 이를통해고려계수관이신라 9주로부터연원했다는이해가가능하다. 한편신라의州는전국을구획한광역의단위로서縣의귀속을직접표현하였다. 이러한 9주의영역관념은 界 로도표현되었으며, 道 로표시되는사례도발견된다. 그런데이러한표현은후삼국시기및고려초기에도지속되고있었는데, 이는당시에작성된금석문을통해확인할수있다. 선사비문의題號에서비의소재지를밝힐때 9주의관념을사용하는사례를다수찾을수있다. 특히이중에는신라이래의명칭을그대로사용하는경우도있고, 고려에서변경된명칭을사용하면서 9주의영역관념을적용하는경우도있다. 이러한사례들은고려초기까지 9주의영역관념이강하게유지되고있음을 69) 12 목과계수관사이에는 10 道와 12 州節度使라는또하나의단계가있다. 이에대해서는별고에서검토할것이다.
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85 보여준다. 이는통일후고려가신라의군현제를준용하여군-영현체계를통해지방사회를운영했다는사실과표리를이룬다. 성종 2년의 12목설치는상주외관의파견이라는의미외에광역의운영단위를새로편성한것이라는점에중요한의의가있다. 12목은 9주와연관성을가지는것으로, 三代에천하가 9주에서 12주로확대되었다는관념과함께왕명을받아천하를다스리는운영체계의수립이라는의미를가지고있었다또한 12목의구성은개별연혁과 12주절도사를통해기존에楊州, 廣州, 淸州, 忠州, 公州, 晉州, 尙州, 全州, 羅州, 昇州, 海州, 黃州로이해하였으나이중楊州와昇州는제외해야하며대신慶州와金州가포함된다. 12목의설치지역은 9주를대부분계승하면서한편으로王京이경주에서개성으로바뀐데따라일부교체하고새로확보된영역에추가로설치한것으로 9주 12 주의이념을충실하게반영하고있었다. 12목이다음시기에계수관의근간이된다는점에서 9주 12목 계수관으로이어지는연결성을확인할수있다. 그러나고려초기에중간운영단위를국가주도로재편하지못한상황에서 9주나 12목이광역운영단위로기능하는데에는한계가있었다. 고려초기의 9주는영역관념외에행정적기능의모습은찾기어렵다. 12목또한감찰과천거를중심으로한기능이보일뿐, 군사운영과같은강력한기능은확인되지않는다. 12목의규범으로도입된刺史六條또한감찰과천거를중심으로한것이다. 이자사육조는실제漢의자사육조와는내용이다른데, 당시隋唐의지방감찰규정을참작하고 12목의기능을반영하여재정리한결과로파악된다. 현종 9년의지방제도개편에맞추어마련된諸州府員의奉行六條는이자사육조를그대로축약한것으로서 12목과계수관이기능상으로도연결되는관계임을보여준다. ( 필자 : 경상대학교인문학부사학전공교수 ) 주제어 : 9 州, 12 牧, 界首官, 刺史六條 투고일 (2005.10.27), 심사시작일 (2005.11.14), 심사종료일 (2005.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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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界首官의제도적연원과성립과정 87 <Abstract> The Origin and the Development Process of the Goryeo Dynasty's Gyaesu-gwan( 界首官 ) Headquarters in Administrative Terms : Examination of its Relationship with the 9 Ju Units and the 12 Mok Units 70) Yoon, Kyeong-Jin * The function of the 9 Ju units mainly exhibited two major aspects. One was represented by the Ju units' superiority to the Gun and Yeong-hyeon local units. Another was represented by the Ju units' status as representatives of extremely wide regions. These functions were similar to those of the Gyaesu-gwan headquarters. And this means that the Gyaesu-gwan headquarters of the Goryeo dynasty actually originated from the 9 Ju units of the Shilla dynasty. The notion of the 9 Ju units prevailed during the early days of the Goryeo dynasty period, and this is confirmed by the epitaph materials created during that period. The Goyreo dynasty government decided to rule and manage the local areas with the Gun/Hyeon-jae policy inherited from the Shilla dynasty even after Goryeo unified the Korean peninsula. Then in the second year of King Seongjong's reign, 12 Mok units were * Assistant Professor, Gyeongsang National University
88 韓國文化 36 established. This implementation of a new local system was demonstrating that the people was actually thinking that the world of the Goryeo dynasty had been enlarged, and the implementation also meant that the ruling system of the world based upon the King's ruling authority was being finally established. The 12 Mok units were literally the descendants of the old 9 Ju units, and their implementation was signalling that the capital was going through some changes at the time, and the territory of the dynasty was expanding as well. The 12 Mok units were only able to function in a partial manner as the government was not yet able to fully control the local areas. The Mok units mainly functioned only in terms of inspections and personnel recommendations, as dictated in the 'Six Directives for the Jasa officials( 刺史六條 )' which served as the principles for the personnel involved in 12 Mok units' administration. Jasa officials' Six Directives were later transformed into the 'Six Directives that should be Upheld by officials( 奉行六條 )'. Key Words : 9 Ju( 州 ) units, 12 Mok( 牧 ) units, Gyaesu-gwan( 界首官 ) Headquarters, Six Directives for the Jasa officials( 刺史六條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