高麗 初期의 三國史 編撰에 대한 一考 鄭 求 福* Ⅰ. 머리말 Ⅱ. 三國史記 와 三國史 의 關係 Ⅲ. 三國遺事 에 인용된 國史와 三國史 Ⅳ. 三國史 의 編撰體裁와 敍述方式 Ⅴ. 三國史 의 編撰時期 Ⅵ. 맺 음 말 Ⅰ. 머리말 학계에서 통칭되는 구삼국사의 정식명칭은 三國史 였다. 大覺國師文集 에는 海 東三國史로, 李奎報(1168 1241)의 東明王篇에는 舊三國史로, 三國遺事 에는 前三國史 로 전하고 있어 책명이 三國史로 일치하고 있다. 삼국사 앞에 舊 나 前 자를 붙이는 것 은 삼국사기 도 삼국사라고 보기 때문인데 요즈음에는 삼국사기 를 삼국사로 칭 하는 사람은 없으므로 三國史라고 칭하여도 삼국사기 와 혼동될 염려가 없다. 그러나 삼국유사 에 인용된 三國史와 세종실록 地理志 등에서 삼국사기 를 삼국사로 칭한 것이1) 있는 것도 또한 사실이다. 비록 이 책은 현전하지 않지만 사학사에 있어서 차지하는 비중은 대단히 크다. 이 책 은 金富軾(1075 1151)이 三國史記 를 편찬함에 있어서 선구적 업적으로써 크게 이용 되었고, 一然(1206 1289)이 三國遣事 를 편찬함에도 중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여겨진 다. 이 책의 편찬시기, 편찬목적, 사서의 성격 등은 사학사연구에 있어서 반드시 검토되 어야 할 내용이다. 이에 대한 지금까지의 연구성과를 먼저 살펴보고, 三國遺事 에 三國史 의 내용 이 전하고 있다는 견해와 전하고 있지 않다는 견해를 검토하고자 한다. 그런데 지금까지 의 연구에서는 이 책이 삼국사기 의 편찬에 많이 이용되었다는 점을 간과하여 왔다. 이는 김부식이 쓴 서문격인 進三國史表 에서 이 책을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가 이용한 대부분의 국내자료는 이 책을 이용하였다고 생각한다. 현 전하지 않는 역사책에 대하여 사학사적으로 고찰하자니 때로는 많은 추측을 가할 수밖 에 없다. 그렇다고 앞으로 이 책이 나오기를 마냥 기다리고 있을 수만도 없다. 그러므로 * 韓國精神文化硏究院 敎授. 1) 그 한 두 예를 들면 世宗實錄 권149, 公州牧 名山 鷄龍조 및 권150, 地理志 蔚山郡의 별호에 대 한 註 등 여러 곳에서 三國史記 를 三國史로 쓴 경우도 있으며, 朴在馨이 1882년에 편찬한 (海 東續小學 의 인용서목에 보이는 三國史도 삼국사기 를 이렇게 표기한 예 등을 찾을 수 있다.
- 164 - 선학들의 연구업적을 종합하면서 아직 해결되지 못한 몇 가지 문제를 풀어 보겠다. 三國史 에 대한 최초의 연구는 末松保和에 의하여 시도되었다.2) 그는 淺見倫太郞 이 李奎報의 東國李相國集 권3의 東明王篇 서문을 통하여 舊三國史라는 책이 三 國史記 이전에 있었음을 지적한3) 위에 大覺國師文集 권17에서 海東三國史라는 기 록과 三國遺事 권5, 避隱8 信忠掛冠 條에서 前三國史 라는 기록을 발견하고, 大覺 國師文集 의 이 기록은 삼국사기 편찬보다 50년 이전이고 東明王篇은 삼국사 기 편찬보다 48년 후에 보이는 기록이며, 삼국유사 는 삼국사기 보다 120 130 년 후의 기록이지만 이들에 보이는 三國史 라는 세 책은 하나의 같은 책일 것으로 추정 하였다. 그리고 구삼국사의 편찬년대는 거란병이 침략하여 개성 궁궐에 소장한 자료를 불태운 이후의 고려사 기록과 이전의 기록이 현저한 차이를 보여줌을 근거로 하여 1010 년 이전일 것이라는 하한선을 지적하였다. 또한 그는 동명왕편의 分註의 기록을 이용하 여 三國史 에서 즉위년 年代 표기와 干支가 사용된 것을 지적하였다. 그리고 三國 史 는 본기만을 갖추고 사론은 쓰지 않은 사서이고, 高句麗第一主義의 입장에서 편찬되 었다고 이해하였다. 이어서 田中俊明은 이에 대한 연구를 보다 심화시켰다.4) 三國史 의 유일한 현존 기록인 東明王篇 의 자료와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관련 기록과를 비교하여 삼 국사기 의 동명왕 기록은 魏收(505 572)가 편찬한 魏書 의 기록을 기본으로 하면서 도 三國史 의 東明王本紀의 자료를 이용하였음을 밝히고,5) 삼국사기 지리지4의 三國有名未詳地名에서 보이는 本國古記 를 삼국사 로 추정 하였다.6) 또한 三國史 記 職官志에 本國古記를 인용한 것도 舊三國史의 기록으로 파악하였다. 특히 고구려 지명의 검토를 통하여, 舊三國史에는 676 680년간에 이루어진 後漢書 에 붙인 李賢 의 註를 인용하였음을 실증하였다.7) 그리고 삼국유사 에 인용된 삼국사와 국사의 내 용을 삼국사기 의 당해기록과 비교 검토하여 이를 三國史 의 인용으로 파악하여 三國史 는 본기와 열전을 갖춘 기전체의 역사서로 추정하였다. 북한의 김석형은 그 책의 원명칭이 삼국사 라는 것을 밝혔으나 구분을 위하여 구 삼국사 로 표기하였고, 三國史記 권11, 眞聖王 원년조의 註와 권41, 金庾信傳에 언 급된 본기는 三國史 의 본기를 지칭한다고 주장하였다.8) 또한 그는 삼국유사 의 2) 末松保和, 舊三國史と三國史記 ( 靑丘史草 2, 1966) pp. 1 2. 3) 淺見倫太郞, 三國史記 解題 ( 三國史記, 朝鮮古書刊行會 刊, 1909). 4) 田中俊明, 三國史記撰進と舊三國史 ( 朝鮮學報 83, 1977) pp. 1 58. 5) 三國史記 의 주몽신화를 서술한 내용 중에 魏書 에는 없으나 동명왕편에서만 확인되는 金蛙 의 설화가 보이는 점 등을 들고 있다. 위의 논문 pp. 6 7. 6) 田中俊明, 위의 논문 p. 16. 7) 미상지명의 淹淲水(或云蓋斯水)와 동명왕편의 淹滞水一名蓋斯水를 李賢이 붙인 註에서 인용하였다 고 논증하였다. 위의 논문 p. 11. 8) 김석형, 구삼국사 와 삼국사기 ( 력사과학 1981년 4호) pp. 56 57.
- 165 - 삼국사 기록을 검토하여 그 내용이 삼국사기 의 내용과 다름을 밝히었고, 三國史 는 本紀와 列傳, 表와 志도 갖춘 史書로 추론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 에 인용된 국사 와 삼국사를 동일시하여 이 책들이 별개일 가능성에 대하여는 전혀 의심을 갖지 못했다. 또한 삼국사 와 삼국사기 는 상당히 내용이 비슷한 중찬이라는 사실을 강조하였다. 이어서 강인숙은 김석형의 연구를 한 걸음 더 진전시켰다.9) 그는 帝王韻紀 에 보 이는 檀君本紀를 들어 이는 삼국사 에 실렸었다고 주장하여 삼국사 에서는 단군 이래의 역사가 서술되었다고 파악하였다. 그리고 그는 삼국유사 에 나오는 국사의 내 용이 삼국사로부터 인용된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삼국유사 에 인용된 국사의 내용은 구 삼국사 원문 그대로는 아니고 그 기본내용이었다고 주를 달아 밝혔다. 국 사의 내용을 삼국사기 와 비교하여 삼국사기 의 서술과 다른 점을 밝혀 이 국사 가 구 삼국사 임을 논증하고, 이 구 삼국사 에는 주석이 있었음과 또한 저자의 평론 체 서술이 있었다 하여 사론이 쓰여졌음을 주장하였다. 그도 역시 삼국유사 에 인용 된 삼국사가 구 삼국사 라는 단정하에 입론하였고 구 삼국사 에 志가 세워졌었음을 삼국사기 지의 서술을 통하여 반증하였다. 洪潤植은 삼국사 에 대한 전반적인 문제를 다루었다.10) 이 연구는 위에 언급한 국 외의 논문을 소개 인용하지 않은 점으로 보아 독자적인 연구인 듯하나 인용된 자료와 해석은 위의 연구업적과 크게 다른 바가 없다. 단 국사와 삼국사로 인용된 자료를 삼 국사기 와 비교하여 그 차이점을 실증적으로 밝힌 점이 특색이라 할 수 있다. 이런 연구경향에 대하여 삼국사기 와 삼국유사 에 인용된 古記를 실증적으로 연구하여 오면서 삼국사기 에 인용된 구 삼국사 론을 부정하여 온11) 李康來는 지 금까지 모든 연구결과에서 삼국유사 에 인용된 삼국사 또는 국사 는 삼국사기 를 지칭한다고 파악하였다.12) 즉 그는 삼국유사 에 국사와 삼국사로 인용된 내용을 삼 국사기 와 일일이 검토하여 비록 삼국사기 의 기록과 다른 내용이 있지만 이는 일 연이 다른 자료를 통하여 보완하였다고 이해하였다. Ⅱ. 三國史記 와 三國史 의 關係 인종 23년(1145)13) 金富軾은 前監修國史의 자격으로 자기 집에서 8명의 조수인 參考 9) 강인숙, 구삼국사의 본기와 지 ( 력사과학 1984년 4호) pp. 22 25. 이 논문은 앞에 언급한 김석형의 논문과 마찬가지로 선행 연구자들의 업적을 밝히지 않고 있는 점에서 논문으로서 갖추 어야 할 기본적인 태도를 취하지 못하였다. 10) 洪潤植, 三國遺事에 있어 舊三國史의 諸問題 ( 韓國思想史學 1, 1987). 11) 李康來, 三國史記 分註의 性格-新羅本紀를 중심으로 ( 全南史學 3, 1989)., 三國史記와 古記 ( 龍鳳論叢 17 18합, 전남대 인문과학연구소, 1989)., 三國遺事와 古記 ( 書誌學報 7, 1992). 12) 李康來, 三國遺事에 있어서 舊三國史論에 대한 批判的 檢討 ( 東方學志 66, 1990) pp. 51 93.
- 166 - 들의 도움을 받아 50권의 삼국사기 를 편찬하여 왕에게 바쳤다. 그는 이를 인종에게 바칠 때에 進三國史表 를 써 올렸다. 이 글에서 그는 三國史 에 대한 언급을 직접 하 지 않고 古記라고 汎稱하였다. 신라 고구려 백제는 개국 후 세 나라가 대치하여 능히 중국에 예로 통하였으므로 漢 書 唐書등에 열전이 있으나 이에는 자기들 국내기록을 상세히 싣고 국외 기록은 소략하 게 실어 기록하지 않은 것이 많고 또 古記는 文字가 蕪拙하고 기록이 빠진 것이 많아 임금의 선악, 신하의 忠邪, 국가의 安危, 인민의 治亂을 드러내어 교훈을 주기에 적합하 지 못하다. 그가 비록 삼국사 에 대하여 직접적으로 언급하지 않았으나 우리나라의 역사를 총 체적으로 말한 古記 는 三國史 를 염두에 두고 쓴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이를 古記 라고 칭하고 三國史 를 언급하지 않았다고 하여 그가 三國史 를 이용하지 않고 삼국사기 를 편찬하였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삼국사기 는 삼국사 를 기초자료로 삼아 이에 보완 수정하였다고 판단된다. 김부식이 삼국사기 를 편찬한 기 간이 짧을 뿐만 아니라 사료의 수집에 많은 노력을 들인 근거를 찾을 수 없는 점14)을 고려한다면 이렇게 이해함에 큰 무리가 없다고 생각한다. 현전하는 유일한 三國史 의 자료인 李奎報의 東國李相國集 에 전하는 東明王篇 의 기록과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의 동명성왕 신화를 대조하여 보면 삼국사기 에 서는 魏收의 魏書 를 주로 인용하고 부분적으로 약간의 기록을 첨가하고 몇 지명을 삼국사 에서 뽑아 보충하였다.15) 그러나 그는 중국의 사서에 전하지 않는 餘他의 국 내의 사건 자료는 주로 삼국사 를 전재하면서 생략을 하거나 표현을 달리 하였다고 판단된다. 따라서 비록 三國史 는 현재 전하고 있지 않지만 삼국사기 를 통하여 그 대부분의 내용이 전하고 있다고 생각한다.16) 그러므로 삼국사기 에서 삼국사 를 이용한 자료는 두 사서가 일치할 수밖에 없다. 그러면 삼국사기 에서 삼국사 의 자료 이외에 새로이 보완한 자료로서 확실히 입증할 수 있는 것들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3) 김부식이 三國史記 를 찬진한 것은 高麗 인종 23년 12월 壬戌(22일)이므로 이를 정확하게 양 력 으로 환산하면 1146년 2월 4일이 된다. 그러나 당시에는 양력을 사용하지 않았으므로 인종 23 년을 서기로 환산하여 1145년으로 적는다. 14) 이에 대하여 김부식이 전존자료를 광범하게 수집하였다는 다른 설도 있다. 李康來, 三國史 記 分註의 性格 p. 1 참조. 15) 田中俊明, 앞의 논문 pp. 4 7 참조. 16) 三國史 가 삼국사기 의 원전으로 이용된 구체적인 파악은 백제본기의 멸망 이전까지의 기 사와 고구려 본기 중 陽原王 이후의 기사로 보고, 신라사의 경우 전시기에 걸쳐 이용되었으나 국 사나 실록류 등을 보완하였다고 파악한 견해도 있다. 高寬敏, 三國史記の國內原典について ( 朝鮮學報 139, 1991) pp. 55 56.
- 167 - 첫째, 司馬光이 편찬한 資治通鑑 의 자료를 새로이 이용하였다. 資治通鑑 이 삼국사 가 나온 이후에 편찬된 책이므로 三國史 에서는 참고할 수 없고 삼국사 기 에서만 이용되었다. 그러나 삼국사기 에서 자치통감 을 인용한 자료는 주로 우리 나라 기록과 다르게 기록된 자료가 있을 경우에 한하여 이를 附註하고 자치통 감 또는 통감 의 기록이 잘못이라는 주를 붙이고 있다. 그러므로 資治通鑑 을 통하여 직접적으로 자료를 취하여 보완한 것은 그리 많지 않다. 둘째, 삼국사기 열전 중 張保臯 鄭年 傳은 당나라 杜牧(803 852)의 문집인 樊 川集 의 張保臯 鄭年 傳17)을 그대로 轉載하였다. 또한 이에 붙인 사론은 樊川集 의 내용과 新唐書 의 사론을 합쳐 놓은 것으로 찬자가 직접 쓴 것은 한 글자도 없다. 신당서 는 1060년에 편찬되었으므로 三國史 에서는 이용할 수 없는 사서이다. 그 러므로 이 전기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를 편찬할 때에 새로이 실었음이 확실하다. 김 부식 등은 그 전기의 말미에 주로서 다음과 같이 기록을 남기고 있다. 이 전기는 신라 의 전기와 자못 다르다. 杜牧이 전기를 세웠으므로 두 가지를 다 남겨둔다. 18) 여기서 말한 신라전기의 기록을 남겨둔다는 것은 신라본기에 이용한 것을 뜻한다고 생각한다. 新唐書 를 근거로 서술한 黑齒常之 傳19)도 김부식이 삼국사기 를 편찬할 때에 새 로이 보충한 열전이다. 그리고 연개소문 전에 붙인 그 아들 남생에 대 한 서술과 그 손 자 獻誠에 대한 서술도 신당서 20)를 근거로 기술하였으므로 이도 김부식이 편찬시에 보충하였다고 판단된다. 또한 金生의 열전기록 중 崇寧中學士洪灌隨進奉使入宋 이 하21)도 金富軾이 보충하여 넣은 기록이다. 왜냐하면 崇寧은 1102년에서 1106년까지 사용 된 송나라 徽宗의 연호이고, 洪灌(? 1126)은 예종 인종 대의 유명한 학자이고, 명필가이 었기 때문이다. 또한 崔致遠 傳과 薛聰 傳에서도 김부식이 보충한 내용을 찾을 수 있다. 즉 그들 전기 의 마지막 부분에 高麗 顯宗 14년에 최치원에게 內史令을 贈職하고 文昌侯로 諡號를 내 린 기사22)와 현종 13년에 薛聰의 諡號를 弘儒侯로 내렸다는 기사를 들 수 있다.23) 그리 17) 樊川集 권3(文淵閣 四庫全書 集部20 별집류) 참조. 18) 三國史記 권44, 張保臯 鄭年 傳, 此與新羅傳記頗異 以杜牧立傳故 兩存之. 19) 黑齒常之傳은 舊唐書 (권109)와 新唐書 (권110)에 모두 실려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그 의 전에 나오는 風達郡將이란 기록은 신당서 에만 나오고 있을 뿐만 아니라, 기타 문장도 신 당서 를 근거로 서술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몇 가지 구체적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舊唐書 新唐書 三國史記 驍勇有謀略 驍毅有謀略 驍毅有謀略 旬日 不旬日 不旬日 率所部隨列降款 以所部降 以所部降 20) 新唐書 권110, 諸夷蕃將 泉男生傳 및 獻誠傳. 21) 三國史記 권48, 金生 傳 참조. 22) 三國史記 권46, 崔致遠 傳, 顯宗在位 爲致遠密贊祖業 功不可忘 下敎贈內史令 至十四歲太平二 年壬戌五月贈諡文昌侯. 여기서 太平二年은 三年, 壬戌五月은 癸亥二月의 잘못이다. 李丙燾校監, 三國史記 p. 431.
- 168 - 고 薛聰傳 중에서 但今南地或有聰所製碑銘 文字缺落不可讀 竟不知其何如也 라는 구절도 김부식이 보충해 넣은 기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설총이 지은 비문은 경주 주위에 있 었음이 틀림없고 이에 관한 정보는 김부식이 제일 잘 알았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셋째, 현재 삼국사기 에 전거를 대어 註의 형식으로 붙인 것은 삼국사기 편찬 시에 붙였다고 생각한다. 이런 실례는 위에 들은 자치통감, 또는 통감 을 인용하 거나 다른 중국 사서를 들어 붙인 註와 장보고 전기 말기의 부주를 들 수 있고, 연표 서 문에서 삼국의 傳世 王代數와 歷年數를 말한 다음의 말미에 붙인 註를 들 수 있다. 즉 唐나라 賈言忠이 말한 高麗24)는 漢나라 때부터 나라를 유지함이 지금까지 900년이 되었 다고 한 것은 잘못이다 25)이라 한 서술도 金富軾이 써 넣었음이 분명하다. 넷째, 志의 서문 중 김부식이 써 넣은 흔적이 분명히 보이고 있다. 雜志2의 色服 조 서문 중 臣三奉使上國26) 一行衣冠與宋人無異 의 글이 있는 바 여기서의 臣은 김부 식 자신을 가리킴이 분명하다. 그리고 志의 내용 중 册俯元龜 를 인용한 祭祀 조의 백제기록27)과 高句麗 樂 조의 기록,28) 職官志 고구려조 등 김부식이 보충한 자료를 들 수 있다. 册俯元龜 는 1000권으로 1005년(목종 8)에 편찬된 책이며, 이 책이 고려에 입수된 때는 그보다 훨씬 후이므로29) 金富試이 보충한 내용임에 틀림없다. 또한 이런 구 체적인 근거 이외에도 雜志1의 고구려 백제의 제사 자료의 기록,30) 色服 조의 고구려 백 제기록,31) 職官志의 고구려 백제 職官에 대한 기술내용32) 전부가 金富軾이 보충한 것이 다. 또한 新羅樂에 대한 서술에서도 최치원 문집에서 인용한 鄕樂雜詠 5수는 김부식이 보충하였다고 여겨진다.33) 23) 三國史記 권46, 薛聰 傳, 至我顯宗在位十三歳天禧五年辛酉追贈爲弘儒侯. 여기서의 天禧五年 辛酉는 乾興元年壬戌로 정정되어야 옳다. 위의 책 p. 432. 24) 이는 고구려의 후기 국호이다. 이에 관하여는 鄭求福,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三國 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 荷西鄭起燉敎授 停年紀念論叢 湖西史學 11 12, 1992) 참조. 25) 唐賈言忠云 高麗自漢有國今九百年 誤也, 三國史記 권29, 年表上. 그리고 이 표현은 三國 史記 권22, 고구려 본기 보장왕 27년 조에 侍御史 賈言忠이 황제와의 대화에서 高句麗秘記를 인용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그러나 김부식이 이를 연표의 서문에서 언급한 것은 다른 뜻이 있었 던 듯하다. 이에 대하여는 후술하겠다. 26) 여기의 三자는 二자의 오각으로 보인다. 정구복, 高麗時代史學史硏究 (박사학위논문, 1985) p. 84 주 15) 참조 27) 三國史記 권32, 雜志1 祭祀 條 백제기록 참조. 28) 위의 책 권32, 雜志1 樂 條. 29) 고려조에 이 책이 들어왔는지에 대하여는 정확한 기록이 없다. 고려사에 처음 보이는 기록은 의 종 5년(1151)으로 이때에 출판하면서 교정을 보았다는 것으로 고려에 이 책이 들어온 것은 예종 인종년간으로 이해 된다. 30) 강인숙, 논문 p. 25 참조. 三國史記 권32, 高句麗百濟 祀禮不明 但考古記及中國史書所載者 以 記云爾 라고 쓰고 있다. 31) 강인숙, 위의 논문. 三國史記 권33에 高句麗 百濟 衣服之制 不可得而考 今但記見 於中國歷代 史書者 로 쓴 이하의 자료. 32) 강인숙, 위의 논문. 三國史記 권40의 高句麗 百濟職官 年代久遠 文墨晦昧 是故不得詳悉今但 以其著於古記及中國史書者 爲之志 라고 쓴 이하.
- 169 - 다섯째, 사론의 대부분은 김부식이 썼다고 할 수 있다. 그 중 몇편은 뚜렷한 근거를 낼 수 있다. 즉 신라멸망 사론 중에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 任輔行 이라는 표현34)과 고구려 보장왕 8년의 사론 말미에 而新舊唐書及司馬公通鑑不 言者 豈非爲國諱之者乎 에서 자치통감 이 언급된 점, 백제멸망 기사에 붙여 쓴 사론 에서 新羅古事云天降金樻 故姓金氏 其言可怪而不可信 臣修史以其傳之舊 不得删落其 辭 35)라 한 점을 통하여 이를 확인할 수 있다. 그 뿐만 아니라 대부분 다른 사론도 古文 體36) 문장으로 쓰여졌으므로 김부식이 직접 썼다고 판단된다.37) 여섯째, 본기 중 신라 경덕왕 15년 2월 조의 王聞玄宗在蜀 遣使入唐 條의 말미에 宣和中 入朝使臣金富儀 將刻本入汴京 38)라는 기사에서 宣和는 1119년에서 1125년 까지 사용된 宋 徽宗의 年號이며 金富儀는 김부식의 동생이므로 그 아래의 내용도 김부 식이 보충하였다. 그리고 그 앞에 인용한 현종이 경덕왕에게 내려 주었다고 하는 5言 10 韻詩의 인용도 김부식이 보충하였다고 여겨진다. 일곱째, 이 밖에 기록 중 이때에 비롯된 것 이라는 표현은 김부식이 써 넣었다고 판단 된다. 그 예를 들면 다음과 같다. ① 始製兜率歌 此歌樂之始也( 삼국사기 권1, 유리니사금 5년조). ② 國人立味鄒 此金氏有國之始也(위의 책 권1, 미추니사금조). ③ 軍主之名 始於此(위의 책 권2, 伐休尼師今 2년조). ④ 軍主之名 始於此(위의 책 권2, 지증왕 6년조). ⑤ 新羅諡法 始於此(위의 책 권4, 지증왕 15년조 말미). ⑥ 始行中國正朔(위의 책 권31, 연표하 眞德王 4년조). ⑦ 5년 春正月朔 王御朝元殿 受百官賀正 賀正之禮 始於此(위의 책 권5, 진덕왕 5년). ⑧ 改左右輔爲國相 始於此(위의 책 권16, 新大王 2년조). ⑨ 此海東佛法之始(위의 책 권18, 소수림왕 5년조). ⑩ 佛法始於此(위의 책 권24, 침류왕 원년 9월조). 이들 기록이 삼국사기 를 편찬할 때에 써 넣었다고 보는 이유는 다음과 같다. 즉 金富軾은 進三國史表 에서 인종의 말이라 하여 쓰고 있는 삼국사기 의 편찬동기 중 의 하나가 우리나라 學士大夫들이 중국의 五經 諸子의 글과 秦漢 역대의 역사에 대하여 33) 三國史記 권32, 崔致遠詩有鄕樂雜詠五首 今錄于此 라고 쓴 점에서 알 수 있다. 34) 三國史記 권12, 경순왕 9년조 論曰 참조. 35) 위의 책 권28, 의자왕 20년조 사론. 36) 古文體는 고려 중기부터 이전의 변려문체로부터 고문체로 바꾸려는 金黄元 李軌 金富軾 등의 노 력이 있었다. 이에 관하여는 정구복, 高麗時代史學史硏究 p. 83 참조. 37) 高柄翊, 三國史記에 있어서의 歴史叙述 ( 金載元博士回甲紀念論叢, 1969 ; 韓國의 歷史認 識, 創作과 批評社 刊 재수록, 1976) p. 37 참조. 38) 三國史記 권9.
- 170 - 는 해박한 지식을 가지고 있으나 우리나라 역사에 대하여는 그 始末을 전혀 모른다 고 한 점이다. 仁宗의 講經에서 중국의 역사 이야기가 나올 때에 우리나라에서는 그 사건이 언제 시작되었느냐고 왕이 물었을 가능성이 높다. 삼국사기 에서 역사상 이 사건이 시초 라고 기록한 것은 이처럼 과거 역사에 대한 현재적 관심이 고조된 분위기의 반영이 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런 의식이 삼국사기 에서만 나타났다고 할 수는 없다. 그 구체적인 예로 특 히 ⑨와 ⑩의 기록은 삼국사기 에서 처음으로 서술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⑨는 고구 려 佛法이 이때에 시작되었다고 기록된 자료를 김부식이 海東의 佛法으로 바꾸었으며, ⑩ 은 백제의 불법이라는 국명이 들어가야 함에도 불구하고 국명을 뺐다.39) 이 두 가지는 三國史 에도 기록되었다. 따라서 이와 같이 우리나라의 사건으로 최초의 것이라는 서술 은 三國史 에서 이미 시작되었으나 삼국사기 에서 더욱 확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위에서 살핀 바는 삼국사기 를 三國史 와 대조하지 않고서도 김부식 등이 삼 국사기 를 편찬할 때에 추가하여 써 넣었다고 판단되는 자료들이다. 그러나 이것만이 三國史 와 삼국사기 와의 자료상 모든 차이점이라는 말은 아니다. 즉 이 밖에 얼 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를 구체적으로 밝힐 수 없지만 삼국사에 이용되지 않은 원전을 이용한 자료도 다수 있을 것으로 여겨진다. 삼국사 에서 자료를 그대로 轉載하였다고 판단되는 자료를 二國史 가 전하지 않는 현재의 상황에서 이를 일일이 대조하여 밝 힐 수는 없으므로 김부식이 더 보충한 자료를 정확하게 찾아낸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 다. 그러나 삼국사기 의 중요한 원전은 三國史 였다고 할 수 있다. 이렇게 보는 중요한 이유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를 편찬하기 위하여 자료를 널리 구한 노력이 보 이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문하시중에서 물러난 후 3 4년 사이에 삼국사 기 의 편찬이 완료되었기 때문에 사료를 새로이 발굴해 내는 일은 비록 있다고 하더라 도 별로 많지 않았다고 판단된다. 田中俊明은 三國史記 권37, 三國有名未詳地名을 동명왕편의 지명,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동명왕조의 지명과 비교하여 미상지명은 本國古記로부터 인용되었다고 이해 하였다. 삼국사기 고구려본기에 보이지 않는 橫川, 白水山, 東牟河 등이 미상지명에 보이고 있어 이는 本國古記로부터 뽑았다고 보고, 그 본국고기를 바로 三國史 로 이 해한 점은 설득력이 있다고 생각한다. 김석형이 제기한 삼국사기 내에 本紀라고 기록된 것 중 三國史 로 파악한 두 가지 예를 검토하여 보자. 그 중 하나는 김유신 열전(권41)에 註로 이것은 本記 진평왕 12년조에 쓴 것과는 같은 사건이지만 조금 다르다 고 한 부분의 본기이다.40) 그의 설명 은 李康來가 비판한 것처럼 이를 삼국사 로 단정함에 있어서 설명이 부족함은 인정 39) 三國遺事 에서는 高麗本紀를 인용한 말미에 此高麗佛法之始 로 기록되어 있고, 백제에서는 枕流王 2년인 乙酉 조에 此百濟佛法之始 라고 기록되어 있다. 40) 김석형, 앞의 논문 p. 57 참조.
- 171 - 한다.41) 그러나 그 내용이 삼국사기 의 본기로부터 인용되었으나 선덕왕 11년을 진평 왕 12년으로 誤記, 또는 誤刻된 것으로 파악한 이강래의 설은 수긍하기 어렵다. 이에 필 자의 생각을 덧붙여 말한다면 이는 오히려 三國史 의 본기를 지칭하였을 가능성이 더 높다. 그 보충근거는 다음과 같다. 첫째, 본기를 本紀 로 쓰지않고 本記 42)로 쓴 것은 삼국유사 의 표현과 같다. 김부식은 다른 본기의 경우에 모두 本紀로 표현하고 있으 며, 本記로 기록한 것도 가능한 한 本紀로 고쳐 쓰려 하였다고 여겨지나 이는 미처 고치 지 못한 자료로 생각된다. 이처럼 삼국사기 에서 용어의 수정에는 철두철미 하지 못 한 사례를 많이 발견할 수 있다. 그 구체적인 예로 고구려 후기 국호인 高麗 를 高句麗 로 고쳐 썼지만 몇 군데서는 이를 못 고치고 그대로 남겨 둔 곳을 발견할 수 있음을 들 수 있다.43) 둘째 근거는 삼국사기 편자가 삼국 사기 의 본기와 대조하였다면 善 德王 11년 기사를 眞平王 12년 기사로 誤記하였을 가능성은 희박하고 삼국사 에서 오기된 것을 비판하지 못한 채 그대로 轉載함으로써 결과된 실수로 이해함이 보다 합리 적인 해석으로 생각한다. 다른 하나는 眞聖王 즉위년조의 註에서 언급된 본기이다. 삼국사기 의 이 기록에는 崔致遠의 謝追贈表 및 納旌節表 를 인용하고 본기의 기록과 다른 점을 지적하고 있다. 이 문제를 李康來가 상세하게 검토하고 결론적으로 註에서의 本紀는 三國史 의 本紀 를 지칭함이 아니라 삼국사기 의 본기를 지칭한다고 단정 하였다.44) 이들 기록의 사 실성에 대한 검토는 여기서는 생략하고 문제점만을 검토하겠다. 이 주는 다음과 같다. 崔致遠文集第二卷 謝追贈表云 臣坦言伏奉制旨 追贈亡父臣凝爲太師 亡兄臣晸爲太傳 又 納旌節表云臣長兄國王晸 以去光啓三(二)年七月五日 奄御聖代 臣姪男嶢 生未周晬(卒) 臣 仲兄晃權統蕃垣 又未經朞月 遠謝明時 以此言之 景文王諱凝本紀則云膺廉 1) 眞聖王諱坦 本紀則云曼 2) 又定康王晃 以光啓三年薨 本紀謂二年薨 3) 皆不知孰是 (위의 인용문 중 ( ) 속의 글자는 誤刻된 것을 필자가 바르게 잡은 것이고 1) 2) 3)은 필자가 설명에 편의 를 위하여 넣은 것임). 그런데 이강래는 헌강왕의 죽음을 光啓 3년으로 기록한 納旌節表의 기록에 더 중요한 문제가 있음을 논하면서 이는 실제 여러 가지 자료로 보아 현재 삼국사기 의 기록대 로 광계 2년(丙午 886)이 옳다고 파악하고 보다 근원적인 이 문제를 삼국사기 편자 가 문제로 제기하지 않았음을 지적하고 있다.45) 따라서 오히려 이를 문제로 삼지 않은 점을 통하여 三 자는 二 자의 오각으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씨는 삼국사 41) 이강래, 三國史記 分註의 性格 p. 45. 42) 이강래, 위의 논문 p. 30 참조. 43) 정구복,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 -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참조. 44) 이강래, 앞의 논문 pp. 46 53 참조. 45) 위와 같음.
- 172 - 기 본기의 편찬자와 주를 붙인 자가 다르고 시간적으로 선후의 차이가 있다고 추정하 였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의 3)에서 2년은 光啓 2년으로 볼 수 없고 定康王 즉위 2년으 로 보아야 한다는 설을 제기하였다. 그러나 몇가지 해결되지 못한 점이 있다. 첫째, 註를 낸 사람과 본기를 쓴 사람이 설 령 다르고 시간적으로 약간의 선후가 있다고 하더라도 삼국사기 본기에서 왕의 이 름을 기록함에 근거한 자료와 최치원이 쓴 내용과는 차이가 있다는 점을 삼국사기 편자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위의 인용문의 세 글에서 本紀는 설령 삼국사기 의 본기 를 가리킨다고 하더라도 근본적인 뜻은 본기를 쓴 자료와 최치원의 기록과의 차이를 말 하여 준다. 그런데 본기를 기술하면서 바로 같은 줄에 있는 기사 또는 한 장 안에 있는 기록을 언급하면서 본기라고 인용하여 썼다면 어딘가 상식에 맞지 않는다고 판단되므로 이 자료의 분주에서 본기 는 삼국사기 의 본기의 근거자료이었던 三國史 의 본기 를 지칭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둘째 문제는 3)의 本紀에서 定康王이 2년에 薨하였다는 것을 즉위 2년(丁未 887, 光啓 3년)을 지칭한다면46) 전혀 차이가 없으므로 주를 낼 근거가 없어지고 만다. 이 뿐만 아 니라 한문 문장으로 보아서도 뒤의 二年은 光啓가 생략된 것으로 봄이 합리적이고 상식 적인 이해이다. 따라서 이 분주에서의 본기는 삼국사 의 본기를 지칭하고 그 본기에 연대가 잘못 기록된 것을 의미한다고 판단함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한다. 삼국사기 편 찬자는 어느 것이 옳은지 알 수 없다고 하면서도 삼국사기 의 본기에서는 정강왕의 죽은 해는 광계 3년(즉위 2년)으로 기록하였다. 그러면서도 삼국사기 편찬자가 어느 쪽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한 註의 내용에는 정강왕이 죽은 해만이 아니라 1)과 2)에서처 럼 왕의 이름이 다른 점도 포함되었으므로 크게 논리적 모순이라 할 수는 없다. 위에서 살펴보았듯이 진성왕 즉위년조에 붙인 주에서 本紀 라는 표현은 三國史 의 본기를 지칭하였다고 이해된다. 이 추정이 타당하다면 삼국사기 편찬에서 삼국 사 의 실체를 노출시키지 않으려 한 방침에도 불구하고 이를 이용하였음을 실수로 노 출시킨 또 하나의 실례라 할 수 있다. Ⅲ. 三國遺事 에 인용된 國史와 三國史 현재까지 三國遺事 에 三國史 를 참조하였느냐 참조하지 못하였느냐의 문제로 46) 이 추정이 옳다면 물론 이 註를 낸 자가 어느 것이 옳은지 모르겠다고 하면서도 삼국사기 본 기에서는 光啓 3년에 定康王이 죽은 기록을 택한 것으로 보아 약간의 무리가 있다. 반대로 주를 낸 사람이 최치원의 글을 통하여 정강왕이 광계 3년에 즉위하여 3년에 죽었으므로 즉위한 해에 죽 었다고 파악하고 즉위 2년으로 한 것과의 차이를 말한 것으로 합리화한다면 헌강왕이 광계 3년에 죽은 기록이 본기의 기록과 다름을 논하지 못한 잘못이 있게 된다. 어떤 설을 택하더라도 이 자료 는 모순을 가지고 있다. 그러므로 以去光啓三年 에서 二年으로 고치면 모순의 문제가 해결된다.
- 173 - 두 가지 대립된 설이 있음은 이미 지적하였다. 대체로 史書를 구체적으로 검토한 학자들 중 이강래씨를 제외하고는 모두 전자를 주장하였고, 일반 역사학자들은 대체로 후자 쪽 에 동의하고 있다. 실제로 삼국유사 에 삼국사로 인용된 내용은 약간씩 표현이 달리 된 것도 있고 조금 다른 내용도 있지만 그 내용이 현재의 삼국사기 에서 거의 확인 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삼국유사 에 국사나 삼국사로 인용된 내용이 단편적이고 삼국사기 의 내용과 크게 다르지 않다고 하여 三國史 가 이용된 점을 무시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위에서 여러 차례 서술한 바와 같이 삼국사기 의 거의 대부분의 내용은 삼국사 로부터 전재된 것이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삼국유사 에 국사 로부터 인용된 사료가 있다. 국사라는 말은 중국에서 각 왕의 실 록이 편찬되고 그 왕조가 멸망하면 다음 왕조에서 실록과 기타 자료를 모아 前 왕조의 역사를 편찬하는 것을 보통 국사라고 칭하였다. 우리나라에서 고려후기에는 이런 용어가 사용되었다.47) 또한 고려후기에 國史라고 쓰인 용어는 당왕조의 역사기록 즉 사관에 보 관된 자료를 의미로 사용되었으나 이런 의미는 삼국사와는 직접 관련이 없다. 그리고 국 사라는 용어에는 나라의 역사라는 일반적인 뜻이 있으며48) 이와 비슷한 개념으로 나라 에서 편찬한 역사를 서명으로 붙인 국사도 있었다49) 삼국사나 삼국사기 를 국사로 칭한 것은 나라에서 편찬한 역사라는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50) 삼국유사 에 인용된 국사는 일반적 개념의 뜻인가 아니면 구체적 책의 이름인가를 검토하여 보자. 三國遺事 에 國史 가 19번,51) 삼국사 가 10번, 삼국사기 가 한번, 三國本史 가1 번 인용되어 있다. 洪潤植과 田中俊明 및 강인숙은 삼국유사 에 國史로 인용된 기사 의 내용을 삼국사기 와 비교하여 다른 점을 밝혀 이는 三國史 를 지칭한 것으로 해석하였다. 그러나 李康來는 비록 다른 내용이 전하지만 이것은 일연이 다른 자료로부 터 보충하였다고 보고, 이는 삼국사기 를 지칭한 것으로 파악하였다.52) 이처럼 국사 가 삼국사기 나 삼국사 를 지칭한다면 이들 서명을 구체적으로 들어 인용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를 밝혀야 하는데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은 이를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三國遺事 에 三國史記 가 이용되었다는 근거로 김부식이 쓴 사론이 인용되었음 을 흔히 들고 있다. 그런데 이 사론이 三國史記 로부터 직접 인용된 것인가를 검토하 기 위하여 구체적으로 살펴보자. 三國遺事 에 사론이 인용된 것은 4번으로 그 중 한 47) 鄭求福, 高觀時代의 史官과 實錄編撰 ( 第三回 國際學術大會論文集, 한국정신문화연구원간, 1984) pp. 147 148 주 29) 참조. 48) 이런 용례는 진흥왕 때에 이사부가 건의한 말 중의 國史 를 들 수 있다. 49) 忠烈王 12년(1286)에 원나라에 바치기 위하여 直史館 吳良遇로 하여금 國史를 편찬케 하였는 바 이는 고려왕조의 역사가 서술되었다고 추정된 바 있다. 鄭求福, 高麗朝의 編纂文化 ( 韓國史 論 국사편찬위원회, 1978) p. 187 50) 李奎報는 동명왕편 서문에서 金公富軾이 國史를 重撰하였는데 라고 쓰고 있는 예를 들 수 있다. 51) 田中俊明, 앞의 논문 pp. 20 21 표 5 참조. 52) 李康來, 三國遺事에 있어서 舊三國史論에 대한 批判的 檢討 참조.
- 174 - 번은 국사 史臣曰 로,53) 세 번은 인용서목도 없이 단지 史論曰 로 인용되어 있다.54) 史 論曰 으로 인용된 사론 중 金傅大王 조에 실린 사론과 甄萱 조에 실린 사론은 몇 자를 뺀 것과 몇 자의 다름이 보이지만 이들 사론은 삼국사기 에서 論曰 로 시작된 사론 과 일치하고 남해왕조의 사론은 약간 차이를 보이고 있다. 이들 사론 중 삼국유사 권5의 仙桃聖母隨喜佛事 조에 인용된 사론을 검토하여 보자. 이를 위하여 三國遺事 에 인용된 사론과 三國史記 의 당해 사론을 인용하면 다음과 같다. 三國遺事 인용문 : 又國史 史臣曰 軾政和中 嘗奉使入宋 詣佑神館 有一堂設女仙像 館伴學士王黼曰 此是貴國之神 公知之乎 遂言曰 古有中國帝室之女 泛海抵辰韓 生子爲海 東始祖 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又大宋國使王襄到我朝 祭東神聖母女 有娠賢肇邦 奉佛爲含生 開香火作津梁 豈徒學長生而囿於溟濛者哉 贊曰 ( 三國遺 之句 今能施金 事 권5, 仙桃聖母隨喜佛事 條). 三國史記 원문 : 論曰 政和中 我朝遣尙書李資諒 入宋朝貢 臣富軾以文翰之任輔 行 詣佑神館見一堂設女仙像 館伴學士王黼曰 此貴國之神 公等知之乎 遂言曰古有帝室之女 不夫而孕 爲人所疑 乃泛海抵辰韓 生子爲海東始主 帝女爲地仙 長在仙桃山 此其像也 臣又 見大宋國信使王襄祭東神聖母文 有娠賢肇邦之句 乃知東神則仙桃山神聖者也 然而不知 其 子王於何時( 三國史記 권12, 敬順王 9년 조). 위의 三國遺事 에 인용된 국사의 史論을 三國史記 원문과 대조하여 보면 三 國遺事 의 인용문에서는 國史 를 인용하여 論曰을 史臣曰로 쓰였으며,55) 그 내용도 그 대로 옮기지 않았고 내용을 줄여 전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원문을 그대로 전재하 지 않았다. 즉 삼국유사 에 인용된 위의 사론에서는 大宋의 國使 王襄56)이 고려에 와 서 東神聖母에게 제사를 지냈음을 명확하게 서술하고 있어 이는 삼국사기 사론만을 보고 베꼈다고 생각하기 어려울 정도로 고쳐 썼다. 삼국유사 에 인용된 사론을 좀 더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보자. 贊曰 이하는 일연이 지은 글이다. 서두에 史臣曰 과 軾과의 관계를 문맥으로만 본다면 사신은 바로 김부식이 라고 할 수 있다. 그 이유는 이름을 생략하여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軾 자 앞에 富 자가 삼국유사 를 판각할 때에 빠졌다고 본다면 이는 사론을 쓴 자와 부식은 다른 사람이 53) 三國遺事 권5, 感通7 仙桃聖母隨喜佛事 條. 54) 하나는 紀異篇 南解王 조에 실은 신라의 고유한 왕호에 대한 사론이고, 다른 하나는 紀異篇 金傅 大王 조에 실려 있고, 남은 다른 하나는 紀異篇 後百濟 甄萱 조에 실려 있다. 55) 史臣曰 은 관찬사서에 실렸던 이전의 사론을 지칭할 경우에 사용된 예를 高麗史節要 에서 발 견할 수 있다. 高麗史節要 에서 史臣曰 로 표기 된 사론은 高麗國史에 실렸던 鄭道傳 등이 쓴 사론을 뜻한다(정구복, 앞의 학위 논문 p. 12 참조). 李承休의 帝王韻紀 에서는 자신의 사 론을 史臣曰 로 쓰고 있는 예를 찾을 수 있다. 그러므로 여기서는 국사를 편찬한 자들이 쓴 사 론을 이렇게 표현하였다고 생각한다. 56) 王襄은 兵部尙書로서 睿宗 5년 6월에 고려에 사신으로 왔었다( 高麗史節要 권7 참조).
- 175 - 라고 하여도 별 문제가 없다. 그리고 이 사론의 끝을 어디까지로 보아야 할 것 인가가 고려되어야 한다. 三國史記 에 실린 김부식의 사론을 염두에 두고 보면 분명히 인용 된 부분은 有娠賢肇邦之句 까지임이 분명하지만 문체로 보아서나 문맥으로 보아서는 사 론은 방점을 찍은 부분의 끝까지로 볼 수밖에 없다. 이와 같은 검토에서 삼국사기 의 사론과 삼국유사 에 실린 위의 사론과의 관계를 추정한다면 두 가지 결론을 유추하 여 낼 수 있다. 하나는 김부식이 삼국사기 의 사론과는 다른 사론을 삼국사기 편 찬 전에 썼다가 이를 수정하여 삼국사기 에 실었다고 볼 수 있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이 김부식의 사론을 인용하여 여기에 국사 편찬자가 자신의 견해를 약간 덧붙여 사론을 다시 쓴 것으로 볼 수 있다. 이 두 가지 결론 중 어느 쪽이 보다 타당한 것인지 는 이 사론만으로는 단정을 내릴 수 없다. 단지 전자의 가능성이 희박할 뿐만 아니라, 삼국유사 에 국사로 인용된 다른 자료와 연관하여 고려 할 때에 이 사론은 후자의 결론이 타당하다고 생각한다. 삼국유사 에는 國史가 19곳에 인용되어 있는 바 이는 맨 뒤에 붙인 표와 같다.57) 이에 인용된 국사가 삼국사기 인가를 검토하기 위하여는 구체적인 기사 내용의 차이 를 확인하는 것도 한 방법이고, 삼국사기 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별한 성격을 국사 로 인용된 기사에서 찾는 것도 또한 한 방법이라 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연구자들은 전 자의 방법을 사용하였으므로 필자는 후자의 방법을 사용하여 보겠다. 그런데 결론부터 말한다면 국사로 인용된 사서에는 삼국사기 에서는 도저히 찾을 수 없는 다음과 같 은 성격의 기사가 보이고 있다. 즉 그 한 가지는 고구려의 국호를 고려로 칭한 점이다. 고구려 장수왕 이후에는 고구 려의 국호가 사용되지 않고 高麗 로 개칭되어 사용되었으나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에서는 이들 용어를 모두 고구려로 고쳐 놓았다.58) 그러나 삼국유사 에는 왕력 조에 서 고구려라는 국명을 아예 고려로 표기하였다.59) 삼국유사 에는 高句麗, 句麗, 高麗 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고구려라는 용어는 7회, 구려는 12회, 고려라는 용어는 68회 가 사용되어 있다.60) 句麗라는 용어는 신라나 백제와의 관련기사에서 약칭으로 칭해진 것으로 사용되었으며, 고려가 이처럼 압도적으로 많이 사용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삼 국사기 를 이용하면서 일연이 의도적으로 고려로 바꾸었다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다. 더구나 국사라는 책에서는 高麗本記61)로 기록되어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62) 高麗 57) 김용옥 편, 三國遺事引得 (1992)을 이용하였다. 58) 정구복, 高句麗의 高麗 國號에 대한 一考 -三國史記의 기록과 관련하여- pp. 19 20. 59) 金相鉉의 고증적인 연구에 의하여 王暦은 一然이 직접 편찬한 것이 아님이 밝혀졌다( 三國遺事 王曆篇의 檢討-王曆撰者에 대한 存問 ( 東洋學 15, 1985). 이에서는 본편의 내용과 왕력의 내용이 달리 기록된 것을 밝혀 놓았다. 그러나 광력이 삼국유사 와 직접 관련이 없다고는 생 각되지 않는다. 60) 김용옥 편, 三國遺事引得 을 이용하였다. 그런데 고려라는 국호는 69회가 나오고 있으나 1회는 궁예의 국호를 말한 것이므로 제외하였다. 61) 本紀는 三國史記 에는 本紀로 표현되어 있는데 三國遺事 에서는 단 한군데에 本紀로 썼을
- 176 - 本記는 삼국유사 에 3번 나오고 있는데 한번은 國史 高麗本記, 두번은 高麗本記로 인 용되고 있는 바 이도 國史의 高麗本記라고 생각된다. 후자는 고구려 佛法의 시작을 언급 하고 있는 곳과 또 다른 한번은 寶藏奉老 普德移庵 조에서 인용되고 있다. 그런데 高句 麗 佛敎의 시작을 三國史記 에서는 海東 佛法의 시작이라고 표현하였고, 三國遺 事 에 인용된 국사에서는 高麗 佛法의 시작으로 기록한 차이를 보이고 있다.63) 고구려 를 高麗 로 쓴 것은 國史 를 인용함에 연유한다고 생각한다. 삼국유사 에서 국사로 인용된 내용 중 삼국사기 에서 인용된 자료에서 찾을 수 없는 성격의 다른 하나는 동명왕을 東明帝로 표현하고 있는 점이다. 三國遺事 에는 네 번이나 東明帝로 표현하고 있다.64) 그런데 이는 고구려 조에서 國史 高麗本記를 인용 한 문장 속에 始祖 東明聖帝로 표현되고 있음을 통하여 이 자료는 국사라는 책으로부터 인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고려에서 東明聖王을 東明聖帝로 칭한 기록은 高麗史 肅 宗 10년 기사에 처음으로 보이고 있으며65) 이후 민간에서는 계속 東明聖帝로 불렀음을 알 수 있다.66) 이처럼 高麗本記를 국사 라는 책으로부터 인용하였다면 그냥 百濟本記, 新羅本記로 인 용된 것도 국사라는 책에서 인용하였다고 여겨진다. 이런 추측을 보강하여 주는 자료로 다음 자료가 주목된다. ① 百濟本記云 第十五(僧傳云十四誤) 枕流王即位 甲申(東晋孝武帝大元 9年) 胡僧摩羅 難陀至自晋 迎置宮中禮敬(興法3 難陀闢濟 조) 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而 ② 彌勒寺 ( 國史云 此傳之獨女之子未詳) (紀異2 武王 조) ③ 國史云 眞興王大淸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舍利若干粒 善德王代貞觀十七年癸卯 慈藏法 師所將佛頭骨佛牙 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 分爲三 一分在皇龍塔 一分在大和塔 一分并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 壇有二級 (塔像4 前後所將 舍利 조) ①의 자료는 그 내용이 삼국사기 에 전하고 있지만 연대를 표기한 방식이 삼국 사기 의 왕의 연대 표기 방식과 현저히 다르다. 더구나 그 註에서 僧傳에서 枕流王을 14대로 표기한 것은 잘못이라는 일연의 지적을 통하여 제15대 왕이라는 표현이 백제본 뿐 고려본기 신라본기 백제본기 등에서는 모두 本記로 표현하고 있다. 62) 三國遺事 권1, 高句麗條, 國史高麗本記云 으로 인용되어 있다. 63) 이는 이미 홍윤식교수가 지적한 바 있다. 앞의 논문 p. 94. 64) 말갈 발해 조, 북부여 조, 및 고구려 조 및 그 조의 주림전을 인용한 주에서 東明帝, 또는 東明聖 帝로 표현되어 있다. 65) 高麗史 권63, 志17 禮5 雜祀 條, 肅宗十年 八月 甲申 遣使 祭東明聖帝祠 默衣幣. 66) 高麗史 권58, 志12 地理3, 西京 條, 東明王墓 在府東南中和境 又仁里坊有祠宇 高麗 以時. 降御押行祭 朔望亦令其官行祭 邑人至今有事輒禱 世傳東明聖帝祠
- 177 - 기의 표기임을 확증시켜 준다. 왕의 代數를 적고 연대에 간지를 쓰고 있다.67) 이러한 표 기방식은 삼국사기 와 다른 점으로 百濟本記가 三國史記 의 百濟本紀가 아님을 분명히 보여준다. 그렇다면 이는 국사의 百濟本記일 가능성을 시사하여 준다. 이처럼 몇 대 무슨왕 즉위 몇년 무슨 간지 로 표기하고 있는 방식을 삼국유사 에서는 32곳에서 사용하고 있다. 이런 표현방식은 국사의 서술에서 연대 표기 방식이었음을 보여주는 것 이다. 이를 일연이 삼국사기 를 보고 일일이 고쳐 썼다고 볼 수는 없다. ②의 자료에서 국사 에서 인용한 내용은 삼국사기 에는 보이지 않는 자료이다. 國 史를 인용하고 바로 이어서 三國史를 인용한 점은 국사와 삼국사의 두 책이 같은 책이 아니고 서로 다른 책임을 반증해 준다. ③의 자료는 국사를 인용하면서도 연대 표기에서 왕의 대수를 밝히고 있지 않는 점이 ①의 자료와 다르다. 이 점은 ①의 자료에 의거하여 앞에서 해석한 필자의 주장에 어긋 나는 것이다. 그러나 진흥왕과 선덕왕은 삼국유사 앞부분의 기록에서 이미 두 번씩 이나 24대 및 27대 라는 것을 밝혔으므로 이를 생략한 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중국 연호 를 적은 것은 혹 국사의 연대 표기에서 細註로 당해년의 중국 연호를 기록한 부분을 본 문처럼 판각한 잘못이 아닐까 한다. 그러나 李康來가 이 자료에서 황룡사탑 등이 貞觀 17년(643, 善德壬 2년) 이후에 완공 되었다고 하여 이 기록은 삼국사기 의 기록에다가 일연이 보족한 다른 자료라고 이 해하였다.68) 통도사 계단에 대한 설명 부분은 일연이 직접 견문하고 이를 기술한 듯하 다. 자장이 사리 100개 등을 가져왔다는 내용과 이를 나누어 안치했다는 기사까지를 자 장이 귀국한 연대에 있었던 일이 아니고 후에 있은 일이라는 이유를 들어 국사에서 인 용된 내용이 아니라고 본 점은 무리가 있다. 왜냐하면 이 기록은 당시의 기술이 아니라 후대에 서술하였으므로 비록 한해의 기사가 아니라고 하더라도 관련 기사를 하나의 편 년에 쓸 수 있기 때문이다. 이상에서 살펴본 것처럼 三國遺事 에는 국사 를 이용하여 쓴 기사의 내용이 비록 단편적이지만 三國史記 와 다를 뿐만 아니라 1) 고구려를 고려로 표기한 점, 2) 동명 성왕을 동명제 내지 동명성제로 표기한 점, 3) 연대를 제 몇대왕 즉위 몇년, 간지로 표기 한 점 등은 이 책의 특성이다. 이런 점은 삼국사기 에서는 찾을 수 없는 완전히 이질 적인 내용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연구자들은 국사의 내용이 삼국사기 와 다르다는 점만을 주장하 고 이를 무조건 三國史 로 보려는 경향이 지배적이었다. 그러나 국사 라는 책은 분명 히 三國史 와는 별개의 책이었고,69) 이에는 삼국사기 의 김부식이 직접 쓴 사론을 67) 삼국사기 에 인용된 古記나 海東古記 등에서는 왕년과 함께 간지가 쓰였음을 밝힌 연구도 있 다. 김영경,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보이는 고기에 대하여 ( 력사과학 1984년 2호) pp. 28 29 참조. 68) 이강래, 三國遺事에 있어서 舊三國史論에 대한 批判的 檢討 pp. 64 65.
- 178 - 인용하여 쓴 사론이 실려 있으면서도 또 위에서 지적한 바와 같은 삼국사기 에서는 찾을 수 없는 특성을 가지고 있다. 또한 삼국사 에서는 주몽을 東明王 으로,70) 삼 국사기 에서는 東明聖王 으로 기술된 것을 국사에서 인용된 자료에서는 東明聖帝 로 기 록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국사의 편찬시기는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쓰여진 사서라 고 판단된다. 동명성제라는 표현은 삼국사 가 편찬된 이후 그리고 숙종 이전에 민간 에서 깊이 숭앙됨으로써 동명성제로 칭한 것을 국사에서는 반영하였다고 생각한다. 王 이 帝 로 칭하여 진 때는 숙종대의 기록으로 보아 삼국사 편찬 이후 숙종 이전이라 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위에서 논한 몇 가지 성격을 모두 만족시킬려면 三國史記 가 편찬된 이후 에 이 책과 이전의 삼국사 계통의 책을 합쳐 쓴 별개의 역사서로 보지 않으면 안된다. 그리고 이 책은 기전체로 편찬되었으므로 삼국의 역사를 다룬 지금까지 알려지지 않았 던 책으로 여겨진다. 현재는 단순한 추정이지만 아마도 무신집권기 이후 일연이 삼국 유사 를 편찬하기 전 어느 시기에 삼국사와 삼국사기 를 종합하여 편찬된 책이 아 닐까 한다. 국사에 보이는 이러한 성격은 삼국사기 로부터의 영향이 아니므로 삼국 사의 영향을 강하게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國史가 혹 충렬왕 12년(1286)에 直史館 吳 良遇(? 1319) 등이 원나라에 바치기 위하여 편찬한 국사가 아닐런지 추정하여 본다.71) 이 국사는 단군 개국초로부터 고려조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었다고 추정되지만 일연이 이 용한 책이 과연 이 책인가에 대한 검토는 후일 별고로 다루겠다. 이 책이 편찬된 해를 현재로서는 알 수 없으나 편찬 명을 내린 해는 일연이 죽기 전 4년 전이고 이승휴의 제왕운기 가 편찬되기 1년 전이다. 일연의 삼국유사 편찬이 말년의 편찬임은 주 지의 사실이나 이는 앞으로 정밀히 검토되어야 할 문제이다. 다음으로 삼국유사 에 인용된 삼국사에 대하여 살펴보자. 삼국유사 에 前三國史 라는 표현이 있음72)은 앞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이미 일본인 학자들에 의하여 지적되어 왔다.73) 이는 이들 견해처럼 전삼국사가 이규보의 동명왕편에서 언급된 구삼국사와 대 각국사문집 에 보이는 해동삼국사와 같은 책이라는 견해에 이의가 없다. 그러나 여기서 유의하여야 할 것은 일연이 비록 삼국사를 보았다고 하더라도 全帙이 갖추어진 完帙本 을 보지 못한 듯하다는 점이다. 만약 일연이 완질본의 三國史 를 보았다면 고구려 시 조에 대한 신화를 삼국사 의 것을 싣지 않고 삼국사기 의 것을 전재한 國史 내용 69) 이를 더욱 확실히 입증하는 자료는 앞에 인용한 三國遺事 武王 조의 國史와 三國史가 연이어 함께 인용된 것을 들 수 있다. 70) 東國李相國集 권3, 동명왕편에서는 주몽을 서문에서는 東明王, 詩의 표현에서는 東明, 註에 서는 王 또는 朱蒙으로 표기하였다. 71) 고려사 권30, 세가 충렬왕 12년 11월조 및 고려사절요 권22, 동년 동월 조, 丁丑 命直史 館吳良遇等撰國史 將以進于元也 라고 보이고 있다. 정구복, 編纂文化 ( 韓國史論 高麗篇, 1977) p. 187. 72) 三國遺事 권5, 避隱8 信忠掛冠 조 別記云 이하 與前三國史所載不同 兩存之厥疑. 73) 末松保和, 舊三國史と三國史記 pp. 2 3 및 田中俊明, 앞의 논문 p. 18.
- 179 - 을 인용할 리가 없기 때문이다. 紀異篇의 내용으로서 三國史 에 전하는 동명성왕의 신화내용은 紀異篇의 내용에 가장 적합한 소재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三國遺事 에 서 三國史 의 신화를 인용하여 싣지 않고 삼국사기 와 비슷한 國史의 내용을 싣 고 있는 이유는 일연이 三國史 의 이 부분을 직접 보지 못하였기 때문으로 생각한다. 그런데 일연이 前三國史를 보았다면 삼국사라고 인용된 것이 모두 前三國史일 것인가 를 검토하여야 할 문제가 제기된다. 삼국사가 인용된 자료는 10항목이 보이고 있는 바 이에 대하여는 이미 선학들이 삼국사기 와의 다른 내용을 지적하였고,74) 또한 이는 三國史記 로부터 인용되었다는 설이 제기된 바 있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들 자료를 구체적으로 검토하여 三國史 가 어떤 사서인가를 밝혀 보고자 한다. 이를 열기하면 다음과 같다. 三國遺事 에 三國史 로 인용된 내용 ① 武王 國史云王興寺眞平王遣百工助之 三國史云 是法王之子 (紀異2 武王 條) 云 溟州古穢國 野人耕田得穢王印獻之 又春州古牛 ② 四夷 九夷 九韓 濊貊 三國史 首州 古貊國又或云今朔州 是貊國 或平壤城爲貊國(紀異1 馬韓 條) 云 儀鳳三年高宗戊寅 高麗殘孼類聚 北依太伯山下 國號渤海 開元二 ③ 渤海 三國史 十年間 明皇遣將討之 又聖德王三十二年 玄宗 甲戌 渤海 靺鞨 越海侵唐之登州 玄宗 討之(紀異1 靺鞨 渤海) 云 百濟末年 渤海 靺鞨 新羅分百濟地(위와 같음) ④ 又 三國史 云 明年辛酉來) 師將理策東還(義解5 圓光西學 條) ⑤ 眞平王二十二年庚申( 三國史 云 賢士貴山者 沙梁部人也 與同里箒項爲友 時聞圓光法師入隋回 ⑥ 又 三國史列傳 寓止嘉瑟岬(위와 같음) 云 新羅稱王 曰居西干 辰言王也 因以名之 史論曰 新羅稱居西干次次雄 ⑦ 按 三國史 者 一 具存方言亦宜矣 羅人凡追封者 稱葛文王 未詳 又天鳳五年戊寅高麗之裨 屬七國來投(紀異2 南解王 條) 仇衡 以梁中大通四年壬子 納土投羅(紀異2 駕洛國記 末尾) ⑧ 按 三國史 所載不同(避隱8 信忠掛冠 條) ⑨ 與 前三國史 本姓李 後以甄爲氏 父阿慈个 以 ⑩ 三國史本傳云 甄萱尙州加恩縣人也 咸通八年丁亥生 皆知名於世 萱號傑出 多智略 (紀異2 農自活 光啓中據沙弗城(今尙州) 自稱將軍 有四子 後百濟 甄萱 條) ①의 자료는 한 문장 내에 두 책을 함께 병렬적으로 인용한 점에서 국사와 삼국사는 서로 다른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다. ②의 자료는 이 기록이 모두 삼국사기 에 기록 되어 있다고 하여 삼국사기 로 본 견해가 있으나75) 일연이 삼국사기 의 本紀와 74) 田中俊明, 강인숙, 洪潤植 등의 앞의 논문 참조.
- 180 - 地理志의 기록을 모아 재구성하였다는 결론은 납득하기 어렵다. 이 보다는 오히려 삼 국사기 에서 삼국사의 이 자료를 분류하여 다시 서술하였다고 봄이 보다 순리적인 해 석이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삼국사기 에 기록된 내용이 국초에 편찬된 三國史 에 모두 빠져 있다거나 삼국사기 의 기록과 완전히 다르다고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③ 자료에서는 高麗 라는 표현에서 고구려 후기의 국호가 그대로 표현되었음과 더불 어 고구려 본기도 高麗本紀로 표현했을 가능성을 생각할 수 있다. 이 자료도 일연이 주 를 붙이면서까지 이를 최치원문집 과 삼국사기 성덕왕 32년조의 기사에서 모아 편집한 것이라면 굳이 고구려로 기록된 것76)을 일연이 고려로 고쳐썼음을 어떻게 설명 할 것인가? ⑤의 자료는 附註로 圓光이 隋나라에서 돌아온 연대에 붙인 것이다. 삼국 사기 의 기록을 취하면서 1년의 차이를 보이고 있는 三國史 의 자료를 인용하였다. ⑥의 자료는 그 내용 중 嘉瑟岬이 삼국사기 신라본기에는 加悉寺로 기록되어 있 어77) 그 차이가 이미 지적된 바 있고 그 위에 원문의 시작이 賢士 貴山으로 되어 있어 이는 삼국사기 로부터 인용된 것이 아님을 확인할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삼국사 에 열전이 세워져 있었음을 알려주는 자료이다. ⑦번 자료는 강인숙이 三國史 에 사론이 쓰여졌음을 밝힌 근거이다.78) 사론이 일 부 실린 것을 李康來는 삼국사기 에서 줄여서 썼다고 하였으나 오히려 이는 김부식 이 三國史 에 쓰여진 사론에 한 두 마디를 덧붙여 쓴 것79)이라고 생각한다. 이와 유 사한 경향의 사론은 張保臯 鄭年 傳에 붙인 사론을 들 수 있다. 즉 김부식은 杜牧의 樊川集 과 新唐書 의 글을 합치고 자신의 글은 한 자도 추가하지 않은 예를 들 수 있으며, 비록 후대의 것이지만 權近이 東國史略 을 편찬하면서 신라멸망에 대한 김부식의 사론을 약간 줄여 쓴 예도 있다.80) 따라서 이는 삼국사기 사론을 삼국유 사 에서 인용하였다고 해석할 수도 있으나 거꾸로 삼국사 에 쓰여진 사론을 삼국 사기 찬자가 약간 첨가하여 썼다고 해석할 수도 있다. 또한 이 자료의 말미기사 즉 고 구려에 예속된 7국이 신라에 투항하였다는 기록도 이를 삼국사 가 아닌 다른 자료에 서 인용하여 補足하였다는 해석81)은 그 근거가 박약하다. ⑧의 자료는 물론 삼국사기 에도 그대로 쓰여 있다. 그렇다고 하여 중국 연호와 간 지로 기록한 점으로 보아 이를 삼국사기 에서 인용되었다고 해석할 수는 없다. ⑨의 자료에서는 前三國史 내용이 무엇인지를 직접 표현하고 있지 않다. 그러나 문맥으로 보 75) 이강래, 三國遺事에 있어서 舊三國史論에 대한 批判的 檢討 p. 70. 76) 三國史記 권46, 崔致遠 傳, 至儀鳳三年 徙其人於河南隴右 高句麗殘孼類聚 北依太白山下 國號 爲渤海. 77) 田中俊明, 앞의 논문 p. 22 참조. 78) 강인숙, 앞의 논문 p. 24 참조. 79) 金富軾이 추가한 부분은 曰左 漢 中國史書也 猶存楚語穀於莬 匃奴語撑犂孤塗等 이다. 80) 정구복, 東國史略에 대한 史學史的 考察 ( 歷史學報 68, 1975) pp. 22 24 참조. 81) 이강래, 三國遺事에 있어서 舊三國史論에 대한 批判的 檢討 pp. 70 71.
- 181 - 아 삼국사에서 인용된 내용을 살필 수 있다. 즉 별기의 내용과 달리 斷俗寺는 直長 李純 이 창건한 것이 아니라 信忠이 출가하여 孝成王을 위하여 창건하였다는 내용을 전삼국 사에서 인용하였다고 파악할 수 있다. ⑩의 자료는 이미 선학들이 삼국사기 와 다른 내용을 전하고 있음을 전하고 있는 바 견훤의 출생년대82)와 형제가 넷이었다는 방점 찍은 부분이 삼국사기 의 내용과 다른 부분이다. 그런데 圓光西學 조에서는 삼국사 열전이라 하였는데 유독 여기서는 本 傳이라 한 것은 무슨 뜻일가? 지금까지 이에 대하여는 전혀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이 말은 본인의 열전 즉 견훤의 열전이라는 뜻으로 해석할 수도 있고,83) 본기에 적힌 傳記 라고도 해석할 수 있다. 앞의 해석이 일반적인 것이지만 이미 앞에서 설명하였듯이 三 國史 에서 견훤을 열전으로 다루지 않고 백제본기의 말미에 다루었을 가능성도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뒤의 해석도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이에 대하여는 다음절을 참고하기 바란다. 삼국유사 에는 삼국사기 도 이용되었다고 생각되나 실제로 서명을 들어 인용한 것은 단 한 군데 뿐이다. 즉 紀異2 南扶餘 前百濟 조에 다음과 같이 인용되어 있다. ① 扶餘郡者 或稱所夫里郡 按三國史記 百濟聖王二十六年戊午春 移都於泗沘 國號南 泗沘 今之古省津也 所夫里者 扶餘之別號也 以上注( 三國 扶餘 注曰 其地名所夫里 遺事 ) 國號南扶餘 ( 三國史記 권26, 百濟本紀) ② 聖王 十六年春移都於泗沘 一名所夫里 그런데 이 기사를 검토하여 보면 ①의 삼국유사 인용문 중 聖王 二十六年戊午에 서 二十六年은 十六年의 誤刻이다. 여기에 쓰여진 주는 앞에 인용된 사서의 註인가 아니 면 일연이 붙인 주인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古省津은 15세기 초 地理書에 부여의 大川 名으로 전하고 있고,84) 또 15세기 말의 지리서에는 古省津은 곧 泗泚河이고 扶蘇山 아래 에 있다고 하였다.85) 이 古省津의 위치는 현재 구두레나루라고 불리는 곳이다. 삼국유 사 에 인용된 문장형식과 판각으로 보면 이는 삼국사기 에 붙여진 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삼국사기 의 註 내용은 위의 ②와 같이 이와 다르다. 이렇게 추정한다면 이 는 삼국사기 로부터 인용되었으나 오각으로 인하여 記 자가 첨가된 것이 아닐까 한 다. 즉 이 자료는 삼국사기 로부터 인용되었다고 하였으나 삼국사의 인용이라고 할 82) 三國遺事 에서 견훤의 출생년도는 일연이 태조보다 10살 위라는 고려조의 기록으로부터 역산 하여 일연이 註記한 것이라는 견해가 있으나 이는 삼국사 가 三國史記 라는 전제하에서 나온 잘못된 해석이다. 申虎澈, 後百濟 甄萱政權 硏究 (충북대 박사학위논문, 1988) p. 14 주 14)에서 위와 같은 견해를 피력하였다. 83) 田中俊明은 三國史記撰進と舊三國史 에서는 이를 견훤의 전기로 이해하였다. 84) 世宗實錄 권149, 지리지 부여현 조, p. 633에 自熊津西流達于林川 으로 설명되어 있다. 85) 위의 책 권18, 扶餘縣 山川 조.
- 182 - 수 있다. 그러나 일연이 붙인 주라고 한다면 그가 부여를 방문하였을 때86)에 사비와 소 부리라는 지명이 부여군 중에서도 고성진이라는 곳의 옛이름이라는 것을 듣고 이를 써 넣었다고 해석할 수 있다. 필자는 주의 내용을 보아 후자의 해석이 타당하다고 생각한 다. 만약 만에 하나라도 전자의 해석이 옳다면 사비와 소부리 즉 부여를 고성진으로 칭 한 것은 고려 초일 가능성이 있을 듯하다. Ⅳ. 三國史 의 編撰體裁와 敍述方式 고려 초에 편찬된 三國史 는 紀傳體로 편찬된 최초의 사서임은 이미 학계의 정설 이 되었다. 본기가 설정되었음은 동명왕으로부터 확인되며, 열전이 설정되었음은 貴山 열전을 통하여 확인되었다.87) 그리고 志가 설정되었음은 강인숙의 논문에서 제기되었 다.88) 이는 삼국사기 의 志 중의 설명으로부터 연역한 결론으로 타당한 견해라고 본 다. 그러므로 서술체재에 대한 설명은 더 이상 필요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 를 좀더 진전시켜 그 서술방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三國史 에는 단군본기가 설정되었다는 견해가 있으나89) 이는 수긍할 수 없다. 그 주장의 근거는 다음과 같다. 제왕운기 의 단군 서술 부분의 註에 本紀, 檀君本紀가 인용되었음을 들고 있다, 이는 紀傳體로 쓰여진 사서에 전한다고 보았다. 기전체로 쓰여 진 사서는 三國史 와 삼국사기 밖에 없다. 그런데 삼국사기 에는 단군본기가 실리지 않았으므로 三國史 에 실렸을 것이라는 추정이었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삼국사 와는 다른 國史 라는 紀傳體로 쓰인 책 이 삼국사기 이후에 나왔음을 확인할 수 있고, 단군기는 國史로 인용된 고구려 주몽 의 서술에 보이고 있다.90) 이 단군기는 帝王韻紀 에 보이는 단군조에 보이는 本紀, 檀君本紀와 같은 자료임을 확인할 수 있다. 즉 檀君與西河河伯之女 婚而生男名扶婁 라 는 제왕운기 의 기록과 삼국유사 의 기록이 대체로 일치하고 있다.91) 고려초기에 단군에 대한 기록이 있었다면 이후 고려에서 이에 대하여 제사를 지낸 기록이 있었을 것이나 그런 기록을 찾을 수 없기 때문이다.92) 또한 삼국사에서 우리나라 개국시조로 단 86) 정구복, 三國遺事에 대한 史學史的 考察 ( 三國遺事의 綜合的 考察, 한국정신문화연구원간, 1985) pp. 9 10. 87) 앞의 三國遺事 에 인용된 내용 중 ⑥ 자료 및 그 해설 참조. 88) 강인숙, 앞의 논문 pp. 24 25. 예를 들면 三國史記 권32의 祭祀志에서 高句麗百濟 祀禮不明 但古記及中國史書所載者以記云爾 라 한 것을 삼국사에 신라의 제사기록이 갖추어 있던 것으로 파악한 것이다. 89) 강인숙, 앞의 논문. 90) 三國遺事 의 고구려 조에 國史 高麗本記를 인용한 부분의 서술에서 檀君記가 두번 보이고 있다. 91) 三國遺事 紀異篇 高句麗 조에 인용된 檀君記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君與西河河伯之女耍親有 產子名曰扶婁 표현이 약간 다르게 표현되었으나 같은 계통의 자료에서 인용된 것으로 판단된다. 92) 단군에 대한 최초의 기록으로 보이는 것은 삼국사기 이나 이 기록은 삼국사의 기록으로 보아
- 183 - 군이 본기로 서술되었다면 삼국사기 에서 이를 간단히 한 줄로 처리하기는 어려웠다 고 여겨진다.93) 따라서 三國史 는 삼국의 개국으로부터 서술하여 신라가 고려에 통합 될 때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었다고 판단된다. 三國史 는 삼국의 본기 중 高句麗 本紀94)를 제일 앞에 서술하였다고 생각한다. 그 리고 그 명칭은 후기의 국호에 따라 高麗本紀로 기술하였다고 생각한다.95) 고려본기가 三國史 의 제일 앞에 서술되었다고 추정함은 국초에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이 며 보다 정확히 말하면 고구려 부흥국가라는 의식이 팽배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책 에서도 고구려의 개국년대를 삼국사기 의 기록과 일치하게 썼음이 동명왕편을 통하 여 확인된다.96) 또한 신라의 개국년대도 삼국사기 와 일치하게 기술되었다고 판단된 다. 신라 건국년대를 소급하여 끌어 올린 것은 김부식보다는 통일후의 신라사람들에 의 하여 이루어졌다고 생각함이 합리적이기 때문이다.97) 따라서 삼국사 에서 고구려 역사를 제일 앞에 쓰기 위하여서는 그 이유에 대한 설 명이 필요하였을 것이다. 아마도 당나라 賈忠言이 고구려가 멸망할 때 까지 900년이 되 었다 고 말한 것을 서두에 실었을 가능성이 있다. 왜냐하면 삼국사기 의 편자가 연표 의 서문에서 삼국이 몇왕 몇년에 망하였다고 쓴 다음에 주를 붙여 唐賈忠言云 高麗自 漢有國 九百年 誤也 라고 써서 賈忠言의 이 말을 대단히 중시하였다는 점을 통하여 유 추할 수 있다.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이는 연표의 서문에 붙일 주가 아니라 고구려 본기 의 당해 기록98)에서 註로 언급하여도 좋고, 아니면 이는 참언이므로 굳이 부주할 성질의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표 서문에서 賈忠言의 說이 잘못되었다고 무리가 없을 듯하다. 또한 조선이라는 기록이 국내 문헌에 처음 나온 것은 왕건의 아버지가 궁예 에게 송도로 천도하자고 권유한 말 중에 나오나 이 조선이 단군의 조선인지 기자의 조선인자를 알 수가 없다( 고려사 권1, 세가1 太祖1, 1면 B 참조). 강만길은 고려에서 단군의 치제기록을 문화 현구월산에서 삼성단이 생겼고 그 致祭의 기원을 목종 9년(1006)으로 설명하였으나 이는 사료를 잘못 해석한 것이다. 그가 인용한 기록은 祈雨龍壇에서의 치제를 말한 것이지 三聖壇에서의 致祭 의 설명이 아니다. 姜萬吉, 李朝時代의 檀君崇拜 ( 李弘稙博士回甲紀念韓國史學論叢, 1973). 93) 三國史記 에 단군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 東川王 21년 조에 평양에 축성을 하고 백성과 廟社를 옮겼다는 기록 다음에 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 或云 王之都王險 으로 기록하고 있다. 94) 三國史 에서 本紀 로 표기되었는지 本記 로 표기되었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러나 이를 직접 인 용하는 글이 아니므로 本紀로 기술하겠다. 95) 본 논문 Ⅲ. 三國遺事 에 인용된 國史와 三國史의 기록에 高句麗를 高麗로 표현하고 있음이 그 증거이다. 96) 동명왕편에서 부주한 내용에서 건국년대를 정확히 언급하고 있지 않으나 동명왕이 죽은 연대와 재위년수를 계산하면 B.C. 37년에 건국하였음을 알 수 있다. 97) 김부식이 신라의 개국년대를 고쳐 올려 잡았다는 일인들의 설명은 부당하고 이는 통일신라후에 역사편찬을 하면서 올려 잡았을 가능성이 높다는 견해가 타당하다고 생각한다(金光洙, 新羅 上 古世系의 再構成試圖 東洋學 3, 1973, pp. 365 367). 그리고 김부식이 정치적으로 어려운 처 지에 있으면서 이를 날조하여 썼다면 바로 보복을 당할 것이라는 것을 김부식은 잘 알고 있었을 것이기 때문에 당시의 정황을 이해하면 그의 날조설은 전혀 믿을 수 없다. 98) 三國史記 권22, 고구려본기 寶藏王 27년 2월조에서는 賈言忠이 高句麗秘記를 인용하면서 이 를 언급하고 있다.
- 184 - 주를 달아 굳이 밝히고 있음을 통하여 이를 유추할 수 있다. 高麗 태조 왕건은 장수왕년간에 고쳐진 고구려의 후기 국호를 그대로 계승하여 썼고, 원래 고구려의 영토에서 발흥한 나라이며, 태조 이래 고구려의 수도였던 西京에 대하여 지대한 관심을 쏟았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왕조라는 의식은 후삼 국을 통일할 때까지 강하였고, 이는 지배층만이 아니라 황해도, 경기도, 평안도 지역에 살 았던 인민들의 의식이었다. 물론 통일을 완성한 후에는 고구려의 계승국가라는 의식보다 는 원 삼국을 통일한 국가라는 의식이 강하였다.99) 즉 삼국사 에서는 고려 태조의 통 일의 위업을 강조하는 의식이 크게 작용하였다고 본다. 고구려 역사를 고려본기로 기록한 것은 고구려 후기 국호를 사용한 점에서 보면 당연한 것이었지만 이는 고려인들에게는 자신들의 왕조에 대한 역사적 자긍의식을 가질 수 있었던 의미가 있었다고 이해된다. 고구려본기 다음에 신라본기를 실었을까, 아니면 백제본기를 실었을까는 정확히 알 수 없다. 그러나 후대 사서에서 고구려 역사를 먼저 쓰는 경우에 백제사를 쓰고 신라사를 맨 나중에 쓴 경우100)와는 달리 신라본기를 백제본기 앞에 썼을 가능성이 높다. 그 이유 는 고려 초에 후백제는 적대세력으로 전쟁으로 격파시켰으며, 또한 이에 대한 감정이 좋 지 않았던 데에 반하여 신라는 고려태조가 친선책을 썼고, 또 나라를 귀부 받은 점으로 미루어 신라에 대한 감정은 적대적이 아니라 우호친선적이었다는 점을 고려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뿐만이 아니라 건국년대 순으로 서술하는 원칙에 따랐다고 보아도 백제보 다는 신라가 앞에 서술되었을 가능성은 크기 때문이다. 三國史 의 본기에서 삼국사기 의 본기와 다른 점은 궁예와 견훤을 열전으로 다 루지 않고 백제본기의 말미와 고려본기의 말미에 서술하였을 가능성이 높다는 점이다. 왜 냐하면 견훤과 궁예를 반역자로 쓴 김부식의 서술태도와 三國史 편찬자들의 관점은 분명히 달랐다고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리고 고려가 고구려를 계승한 나라라는 의식에서, 궁예를 반역자로 다루게 되면 고려 태조는 반역자의 신하가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후삼 국을 삼국의 부활 내지는 연장으로 보는 관점이 고려초기의 일반적인 역사의식이었기 때 문이다. 태조를 중심으로 후삼국의 역사를 정리하려 한 삼국사 에는 고려의 통일과정 을 미화하려는 정치적 목적과 광종의 왕권강화를 위한 목적도 있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삼국사 의 서술에서 古地名에 대하여는 주를 붙이기도 하였고, 표현을 달리 전하는 자료에는 주를 붙여 썼다. 또한 인용된 사서의 명칭도 부기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리고 본기의 연대표기는 왕의 즉위 몇년과 그 해의 간지, 중국 연호로 몇년을 썼다. 이런 방식으로 서술한 점으로 미루어 보아 연표의 작성은 없었다고 생각한다. 삼국유 99) 태조는 三韓을 통일하였다는 말을 많이 썼는데 이는 원 삼한이 아니라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 을 지칭한 용어로 사용된 것이다. 100) 중세사학사에서 이를 처음으로 시도한 사람은 柳希齡(1480 1552)으로 그는 편년체의 標題音 注東國史略 에서 이렇게 서술하였다. 鄭求福, 16세기의 私撰史書에 대하여 ( 全北史學 1, 1977) pp. 68 69.
- 185 - 사 에서 연대표기에 간지를 쓴 것은 이 책의 영향으로 생각한다. 삼국사 에서는 우리나라의 자료 이외에 중국측 자료를 이용하였음은 동명왕기록에 후한서 의 李賢 註가 이용되었음을 통하여 확인되었다.101) 또한 삼국사기 지리지 에 전하는 三國有名未詳地名에 대한 연구를 통하여 고구려와 백제 멸망 당시의 상세한 기록은 구당서 로부터 인용하여 썼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102) 그리고 이 책에는 수적 으로 그리 많지는 않았다고 생각되나 사론도 써 넣었다고 여겨진다. 그 사론은 아직 유 교적 관점이 크게 반영되지 않았고, 주로 사실 고증에 대한 것이었다고 생각한다. 위의 삼국사기 에서 인용한 삼국사 의 내용을 검토하여 보면 일연이 이용한 부 분은 신라사와 백제사에 한하였고, 고구려의 기록을 인용한 자료는 보이지 않는다. 이는 앞에서 언급한 바 있듯이 일연이 이용한 三國史 가 완질본이 아님을 입증한다. 이런 결과는 그 인용된 내용이 삼국사기 의 기록과 큰 차이를 보여주지 않는 주된 이유라 고 생각한다. V. 三國史 의 編撰時期 삼국사 의 편찬 관련 기사는 고려사 나 고려사절요 등에 전하지 않는다. 그 러므로 삼국사 가 편찬된 하한을 고려사 의 기록을 검토하여 末松保和는 거란의 침입으로 개경의 궁궐이 불타고 史館에 보관되어 있던 사료가 불타버린 1010년 이전으 로 파악하였다. 이는 일단 올바른 추정으로 판단된다.103) 그런데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를 좀 더 면밀히 검토하고 다른 자료를 보충하여 그 편찬시기를 추정하여 보고자 한다. 고려사 와 고려사절요 의 主 原資料는 高麗 朝의 실록이었고 고려조의 실록이 변란으로 인하여 고려 말에 7대 실록이 전하여졌는지 는 확증할 수 없지만104) 현재의 高麗史 世家의 내용으로 보아서는 이에 근거하였거 101) 田中俊明, 앞의 논문 pp. 11 12. 102) 이에 나오는 지명 중 三國史記 에 보이지 않는 지명이 있음을 발견하고 이는 三國史記 에 서 인용한 원전자료에 있었으나 삼국사기 에서 이 지명과 관련된 기사를 삭제하였기 때문으 로 보고 이를 삼국사기 의 원전자료로 이용한 첫 연구는 井上秀雄이었다( 三國史記の原典を もとあて 新羅史基礎硏究 1974). 그리고 이를 더 진전시켜 삼국사기 의 원전을 밝힌 高 寬敏의 다음의 논문이 있다( 三國史記の國內原典について 및 三國史記高句麗本紀の國內原 典 朝鮮學報 146, 1993). 三國史 에서 고구려와 백제 멸망기의 상세한 자료가 구당 서 로부터 취하여졌다는 것은 앞의 高寬敏의 三國史記の國內原典について p. 41 참조. 103) 김석형은 이 설을 간접적으로 소개하였으나 이를 수용하지 않고 더 내려 의천이 전주 고대산의 경복사를 방문한 1091년설이 안전한 하한선이라고 하였다. 김석형, 앞의 논문 p. 56. 104) 金成俊氏는 고려초기의 자료가 영성한 이유로 高麗史 권34, 忠肅王世家 元年 正月 乙巳條의 다 음 기사를 들어 태조이래의 실록이 소실된 것은 아닐가 하는 추측을 한 바 있다. 命政丞致仕閔漬贊 成事權溥 略撰太祖以來實錄 ( 高麗 7대 實錄編纂과 史官 民族文化論叢 1, 嶺南大 民族文化硏 究所刊, 1981, pp. 79 80 참조). 그러나 이 문장은 실록자체를 편찬케 한 기록으로 해석하는 것보다 는 역대의 실록을 줄여서 편찬케 하였다고 해석함이 올바를 듯하다. 이는 일반인이 실록을 볼 수 없
- 186 - 나 아니면 적어도 이를 근거로 쓰여진 간접 자료에 의하였다고 여겨진다. 그리고 조선초기 고려사 를 편찬하는 과정에서 이 기사를 의도적으로 삭제하여 싣 지 않았을 가능성은 거의 없다고 믿어도 좋다. 이렇게 볼 때에 고려사 기록에 이 책 의 편찬관계 기사가 누락된 것은 그 원자료에 관련기사가 누락되었기 때문으로 생각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고려초기의 실록은 현종 4년(1013)으로부터 착수되어 덕종 3년(1034) 경에 7 代事跡 이라는 이름으로 태조로부터 7대 穆宗 때까지의 실록이 政堂文學 修國史이었던 黃周亮 등에 의하여 36권으로 편찬되었다.105) 이는 태조로부터 목종 대까지 즉 912년으 로부터 1008년까지의 역사였다. 이를 편찬하기 전에 현종 2년(1011) 정월 초하루날 거란 이 침략하여 개경이 함락되고 화재로 인하여 종묘, 궁궐과 민가가 크게 불탔다.106) 이 사건과 관련된 기록이 黃周亮 전 말미에는 다음과 같이 서술되어 있다. 初 契丹兵陷京城 燒宮闕 書籍盡爲煨燼 周亮奉詔訪問採掇 撰集太祖至穆宗 七代事跡 共 三十六卷 以進.107) 이 자료에서 궁궐이 불타 서적이 모두 재가 되었다는 표현에서 서적은 광종 때에 설 치된 史館108)에 史官들이 기록하여 두었던 자료가 불탔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는 다른 일반 전적류도 물론 포함되었겠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7대왕의 정치에 대한 기록의 소 실이었다. 그리하여 황주량은 왕명을 받고 古老를 방문하여 사실을 보완하고 자료를 모 아 7대사적 즉 7대실록을 편찬하였다. 7대실록이 36권이었다는 점으로 보아 비교적 상세한 실록이었을 것으로 생각할 수 있 으나 현전하는 이 시기의 고려사 자료는 零星하기 그지 없다. 특히 혜종, 경종, 광종, 경 종의 역사는 사건을 기록함이 소략할 뿐만 아니라 기록된 경우에도 겨우 년월만 적고 날 짜를 기록하지 못하고 있다. 이는 매일 매일 기록한 사관의 기록이 없이 후에 모은 자료 에 의거한 것임을 확인할 수 있다. 특히 광종(재위 950 975)의 기록이 더욱 부실하다. 성종 이후의 기록은 사건마다 년월일을 기록하고 있음과 커다란 차이를 보이고 있다.109) 따라서 삼국사 편찬 기록이 빠질 가능성은 성종 대보다 그 이전인 경종 이전일 가능 성이 높다. 三國史 편찬만이 아니라 광종 대에 설치된 史館에 대한 기록도 적지 못하 으므로 마치 조선조에 國朝寶鑑 을 편찬한 것처럼 간략하게 줄여 편찬케 한 것이라 생각한다. 105) 이에 대하여는 김성준, 앞의 논문 pp. 74 78 참조. 그리고 7대사적을 실록으로 보지 않는 周藤 吉之씨의 견해를 씨가 반박한 것도 타당한 지적이라고 본다. 106) 高麗史 권4, 世家4, 顯宗 2년 春正月 乙亥朔 條. 107) 위의 책 권95, 열전8 黃周亮 傳. 108) 이에 대하여는 鄭求福, 高麗時代史館과 實錄編纂 pp. 144 145 참조. 109) 광종 26년간의 역사가 겨우 세가의 경우 년월일을 갖추어 기록한 기사가 3건, 년월만 적고 기사 를 기록한 것이 20건, 년만 적고 기사를 기록한 것이 27건, 전혀 한줄도 없는 해가 1년으로 소 략하기가 역대왕 중에서 가장 극심한 편이다.
- 187 - 고 있으니 史館에서 편찬된 역사편찬의 기록이 빠진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더구나 광종대의 정치에 대하여 그 전제성으로 인하여 이에 대하여 반감을 가진 신하 가 많았으므로 그 자료를 수집하는 데에도 문제가 있었고, 전제정치에 참여하여 개혁을 주도한 세력은 급격히 몰락하였다고 생각된다. 이는 광종을 도와 정치를 주도한 인물로 高麗史 列傳에 기록된 사람이 한 사람도 없음이 이를 반증해 주고 있다. 이런 정황 은 당시에 三國史 가 전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를 노인들에게 물어 기록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데 반하여 성종대 이후의 고려사 기사가 년월일을 갖추 어 기록되었음을 보면 거란병이 침입하였을 때에 당한 화재의 소실에서 성종 이후의 자 료는 건졌거나 아니면 사관들이 기록한 家藏史草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한다. 따라서 만약 성종 이후에 三國史 가 편찬되었다면 그 편찬 기록이 고려사 등에 전할 가능성이 높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광종은 과거제도를 설치하고 史館을 설치하였으며 중국 귀화인을 등용하여 많 은 정치적 혁신을 기도하였음은 주지의 사실이다. 연호를 칭하고 왕권을 강화시키려고 여러 가지 시책을 강구하였다. 이런 개혁정치를 실시한 광종 때의 인물로 현존하는 금석 문 자료를 통하여 史館의 監修國史를 지낸 金廷彥을 찾을 수 있다. 그는 광종 9년(958) 에 翰林學士를 맡아110) 왕의 조칙 등을 지었음을 확인할 수 있고, 한림학사 직은 경종 3 년까지 계속 수행하였던 것 같다.111) 그런데 그는 광종 26년경 亞相의 직을 맡고 있었으 니 光祿大夫太丞翰林學士 內奉令112)을 지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이전의 관직은 禮部使 參知政事監修國史를 맡고 있었다.113) 金廷彥이 監修國史직을 맡은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이는 광종 26년 이전이었으 며 이는 광종 대에 史館이 설치되었다는 것을 알 수 있게 하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경종 3년에 한림학사로서 왕명을 받아 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를 지었는 바 이 글 중에 다음과 같은 왕의 말이 전하고 있다. 임금께서 이에 廷彥에게 명하기를 너는 일찍이 國史가 되어 몸소 기록을 살펴보았고 110) 그는 광종 9년에 왕명을 받들어 玉龍寺洞眞大師寶雲塔碑를 찬하였는바 이에 그의 관직은 通直 郞正衞翰林學士賜丹金魚袋 로 기록하고 있다. 許興植 編, 韓國金石全文 중세 上, p. 367. 111) 그가 광종 26년에 지은 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 및 경종 3년에 지은 普願寺法印國師寶乘塔碑에 翰林學士의 직을 쓰고 있다 ( 韓國金石全文 p. 391,411 참조). 112) 위의 금석문 高達院元宗大師慧眞塔碑 참조. 태조때에는 광평성의 장이 수상이었으며, 광종 때에는 호족의 연합세력이 주도하던 광평성이 격하되고 내사성의 장관이 수상의 직이었다. 그러나 광종 16년에 태자(후일 경종)가 內史令에 책봉되고 11살에 內史諸軍事內議令에 임명되었다(李泰鎭, 高 麗宰府의 成立 歷史學報 56, 1972, pp. 12 16 참조). 그러나 이 자료는 高麗史 와 高麗 史節要 의 기록에 일치하고 있으며 어느 자료에서도 이를 수정한 실례를 찾을 수는 없지만 문맥 으로 보아 內史를 內外로 고쳐 읽어야 옳지 않을까 추측해본다. 즉 중앙과 지방의 모든 군사를 통 합하게 하고 내의령으로 삼았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어떻든 내봉성령을 받고 있던 김정언은 내의 령 다음 서열로 6부의 상서도성을 관장하는 장관으로 행정을 총괄하는 임무를 가진 사람이었다. 113) 위의 비문 참조. 이에서 현직을 기록한 다음에 前禮部使 參知政事 監修國史로 기록하고 있다.
- 188 천자의 글을 맡아 온 정성을 쏟아 충성을 바쳤다. 선왕이 학사를 가하여 대우하였음을 생각하여 네가 國師의 銘을 지어 보답하라. 이는 김정언이 감수국사와 한림원 학사가 되어 학식과 문장이 비명을 짓기에 적임자 라고 표현한 말로 단순하게 풀이 할 수 있지만 乃嘗爲國史 는 혹 네가 일찍이 국사를 만들어 로 해석할 수 있는 소지도 있을 듯하다. 이 문장을 가지고 그가 삼국사 를 편 찬하였다는 명확한 자료로 삼기에는 문제가 있으나 이런 문장력을 갖춘 사람이 감수국 사에 임명되었으며, 더구나 광종의 시기는 전 왕조의 역사를 정리할 수 있는 국초이며, 정치적 경제적 안정이 이루어진 시기임으로 三國史 는 광종 때에 편찬되었을 가능성 이 가장 크며, 이런 가정이 옳다면 그 책임자는 金廷彥이었다고 생 한다. 이 무렵에 삼국사 가 편찬되었을 가능성을 시사하여 주는 보조 사료로 성종 9년 (990) 12월에 西京에 修書院을 설치한 교서 중에 신라 말 혼란한 때에 많은 문서자료가 소실되었다고 쓰고, 累朝 以來 잃어 버린 책들을 계속하여 베꼈다고 쓰고 있다.114) Ⅵ. 맺 음 말 이상에서 검토한 바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삼국사기 는 고려 초에 편찬된 三國史 를 기초로 하여 중국 문헌을 보다 많이 보완하여 직관지, 제사, 악, 색복 등을 고구려와 백제 자료를 갖추는 노력을 하였으 나 그 근본자료는 삼국사 였다고 생각한다. 삼국사기 편찬 시에 보충하여 넣은 확실한 부분을 찾아 보았다. 김부식 등이 보충한 이런 명확한 부분 이외의 국내측 자료 중 상당 부분은 삼국사 를 기본 자료로 이용하였다고 판단된다. 그러므로 삼국사 기 에 각종의 고기류를 주로 든 것을 모두 삼국사기 에서 새로이 이용한 자료라고 단정할 수 없다. 이는 三國史 로 부터 그대로 전재한 것이 많았다고 본다. 둘째, 삼국유사 에 인용된 국사와 삼국사를 기존연구에서는 동일한 삼국사 로 파악하였다. 그러나 인용된 내용을 면밀히 검토, 분석한 결과 이들은 다른 별개의 사서 임을 밝혔다. 즉 國史는 삼국사기 의 편자인 김부식이 쓴 사론을 이용한 사론이 보이 고 있으며, 三國史 에서는 東明王으로, 三國史記 에서는 東明聖王으로 표현된 것 이 國史에서는 東明聖帝로 표현된 점, 삼국사기 에서는 거의 찾을 수 없는 고구려 국 호를 후기 국호대로 高麗로 칭한 점 등에서 삼국사기 편찬 이후에 삼국사 와 삼국사기 를 절충하여 편찬된 사서로 보았다. 國史 는 원나라에 바칠 목적으로 충 렬왕 12년에 直史館 吳良遇에 의하여 편찬된 책이 아닌가 추정하였다. 또한 三國遺 114) 고려사 권3, 세가3 성종 9년 12월조 p. 76. 김영경,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보이는 고기에 대하여 p. 29에서 사서의 편찬도 이전에 있었을 것으로 설명하고 있다.
- 189 - 事 에 인용된 三國史 의 내용이 三國史記 와 크게 다른 것이 없지만 이는 일연 이 이용한 삼국사 는 고구려 본기가 빠진 신라와 백제의 자료만을 참조한 데에 기인 하며 이는 일연이 완질본의 三國史 를 참조하지 못하였다고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삼국유사 의 연대의 표기 등에서 삼국사기 와 현저히 다른 점은 三國史 와 국사 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으로 파악하였다. 더구나 高句麗의 국호를 高麗로 칭한 것은 三國史 로부터 비롯되었고 이를 국사에서도 계승하였다. 셋째, 三國史 는 紀傳體의 역사서로서 삼국시대부터 고려 태조에 의하여 후삼국이 통일될 때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었으며, 志도 설정되었으나 신라측 자료가 상세한 반면 고구려와 백제측 자료가 부족하여 삼국의 균형된 서술에까지는 이르지 못하였다. 그러나 맨 앞에 高麗本紀라 하여 고구려의 역사를 서술하고 신라사를 다음에 서술하였다고 이 해된다. 三國史 에서 연대표기를 몇대 어느왕 몇년을 적고 그 해의 간지를 적은 것으 로 판단됨으로 연표는 작성되지 않은 듯하다. 이에는 중국측 자료도 이미 이용하였으며, 주도 붙이고, 사론도 쓰여졌다고 생각된다. 그러나 그 사론은 유교적 교훈을 주려는 것 보다는 사실적인 사론일 가능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넷째, 三國史 의 편찬은 광종년간 사관이 설치된 시기에 이루어진 것으로 유추하였다. 三國史 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덧붙인다면 학계에서 이를 설화중심의 역사서나 神 異 중심적 사서로 파악한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이다. 현존하는 동명성왕의 신화 기록만을 대조하거나 유교의 합리적 사고가 김부식 때보다 확고히 정립되지 않았던 시 기라는 점에서는 타당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김부식의 역사학이 신이적인 것을 완전 배제하지 못하였고, 동명성왕의 신화는 魏書 를 기본 자료로 취하고 三國史 에서 약간 취하여 서술함에서 神異 부분이 빠진 것이라고 이해하여야 올바른 평가라고 생각한다. 이는 김부식의 합리성보다는 고구려 역사를 서술한 기본 입장이 더 근원적인 문제였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는 본고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문제임으로 이에 대하여는 다음 기회에 稿를 달리하여 견해를 밝히겠다. 어떻든 三國史 전체의 성격을 이렇게 규정할 수 있을가의 문제는 재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三國史 에서 이미 기록을 중시하는 관점에서 역사를 기록한 점이라든지 역사를 국가의 정치사 중심으로 서술한 점, 기전체로 서술한 점에서 중세 사학의 출발이 이에서 시작되었다고 할 수 있다. 三國史 에서 고구려본기는 留記를 원전으로 이용하여 편찬하였고, 삼국사기 의 고구려 본기는 新集을 이용하였으며, 留記를 이용한 三國史 자료를 일부 이용하였다 는 연구가 있다.115) 이는 왕의 諱와 陵, 諡號 등을 통하여 실증적으로 연구하였다. 이에 시사하는 바는 많으나 그 결론의 타당성은 앞으로 좀더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留記자체를 이용하였는지가 불명확하기 때문이다. 115) 高寬敏, 三國史記高句麗本紀の國內原典. 이 논문은 본 논문이 완성된 후에 얻어 보아 언급하 였으나 본격적인 검토는 이에 반영시키지 못하였다.
- 190 - 부록 三國遺事 에 인용된 國史 ① 01-02-06-01116) 國史云 赫居世三十年 樂浪人來投 又第三弩禮王四年 高麗第三無恤 王伐樂浪滅之其國人與帶方投于羅 又無恤王二十七年光虎帝 遺使伐樂浪取其地爲郡縣 薩水已南屬漢 ② 01-02-14-01 國史高麗本記云 始祖東明聖帝 姓高氏 諱朱蒙 이하의 朱蒙 神話 ③ 02-02-37-04 四天王寺 國史云大改創在調露元年己卯 ④ 02-02-57-04 國史云 王興寺 眞平王遣百工助之 至今存其寺 三國史云是法王之子 ⑤ 03-03-04-07 國史與鄕傳 實法興王十四年丁未始開 二十一年乙卯大伐天鏡林 始興工 梁棟之材 皆於其林中取足 而階礎石龕皆有之 至眞興王五年甲子寺成 故云甲子 ⑥ 03-03-04-11 國史云 建福 三十一年 永興寺塑像自壤 未幾 眞興王妃比丘尼卒 ⑦ 03-03-06-02 今景福寺有飛來方丈是也云云 已上國史 ⑧ 03-03-06-04 國史 榮留王名建武 或云 建成 ⑨ 03-03-06-05 國史云武德八年乙酉 遣使入唐求佛老 唐帝許之 ⑩ 03-03-06-06 寶藏王庶子率四千餘家 投于新羅 與國史少殊 ⑪ 03-03-06-07 祐世僧統倒孤大山景福寺 具如國史 ⑫ 03-04-01-01 按國史眞興王即位十四年開國三年癸酉二月 築新宮於月城東 (迦葉佛 蓮座石 조) ⑬ 03-04-06-06 又按國史及寺中古記眞興王癸酉創寺後 善德王代貞觀十九年乙巳塔初成 三十二孝昭王即位七年聖曆元年戊戌六月霹靂 又 高宗十六年戊戌冬月 西山兵火 塔 寺 丈六 殿宇皆災(皇龍寺九層塔 조) ⑭ 03-04-15-01 國史云眞興王大淸三年己巳 梁使沈湖送舍利若干粒 善德王代 貞觀十七 年癸卯 慈藏法師所將頭骨佛牙佛舍利百粒 佛所著緋羅金點袈裟一領 其舍利 分爲三 一 分在皇龍塔 一分在大和塔 一分并袈裟在通度寺戒壇 其餘未詳所在(前後所將舍利 조) ⑮ 03-04-16-04 國史 眞智王大建八年丙申 始奉花郞 ⑯ 03-04-21-04 按國史 新羅無淨神寶川孝明三父子明文 ⑰ 03-04-21-07 國史無文 ⑱ 04-05-06-05 鄕傳云 藏入唐 太宗迎至武乾殿 請講華嚴 天降甘露 開爲國師云者 妄矣 唐傳與國史皆無文 ⑲ 05-07-01-04 又國史 史臣曰 軾政和中 者哉(仙桃聖母隨喜佛事 조) 116) 이 번호는 김용옥의 三國遺事引得 에서 표시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