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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iii 본 연구는 이러한 사회변동에 따른 고등직업교육기관으로서 전문대 학의 역할 변화와 지원 정책 및 기능 변화를 살펴보고, 새로운 수요와 요구에 대응하기 위한 전략으로 전문대학의 기능 확충 방안을 모색하 였다. 연구의 주요 방법과 절차 첫째, 기존 선행 연구 검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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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IGIL 완벽입문

= Fisher, I. (1930), ``The Theory of Interest,'' Macmillan ,

Transcription:

朝鮮初期 軍役과 農民經營에 관한 硏究 韓 嬉 淑*1) Ⅰ. 序 論 Ⅱ. 軍役負擔者의 確保策 Ⅲ. 軍役運營體系와 農民經營 1. 奉足制와 農民經營 2. 保法制와 農民經營 3. 代立收布制와 農民經營 Ⅳ. 結 論 Ⅰ. 序 論 自然經濟를 재정운영의 기반으로 삼고 있던 조선왕조는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노 동력을 직접 파악하기 위한 방식을 모색하게 되었고, 이러한 지배형태는 국역의 부 과를 통해 이루어지고 있었다. 徭役 職役 軍役으로 이루어진 國役은 중세사회의 특질 을 가장 잘 나타내 주는 것으로 국가에 의해 강제적으로 수행되는 직접적 노동력의 징발체제이다. 이들 국역 가운데 가장 전체적이고 항구적인 것은 군역으로 양인들의 의무이자 권리였다. 양인들은 가장 보편적이고도 대표적인 병종인 侍衛軍 營鎭軍 守 城軍 騎船軍 등 4개의 軍役 중 어느 하나에 입속하게 되어 있었다. 국가에서는 군역의 확보를 위해 良人農民들의 경제적 안정이 필요했기 때문에 양 인을 확대하고 농민의 지위를 어느 정도 보장하면서 역을 부과하여야 했다. 당시 양 인 농민들은 대부분이 영세한 小農民으로 자립도가 낮아 독자적으로 군역을 감당하 기 어려운 경우가 많았다. 또 家戶內의 모든 인정을 군역에 차출하게 될 경우 양인 농민들의 단순 재생산의 기반이 붕괴되어 국가의 수취원이 불안정해짐으로 이를 방 지하기 위한 제도적인 장치가 절실히 요구되었다. 조선 초기의 軍役은 그 戶가 지니 고 있는 男丁의 수와 토지결수와의 일정한 상관관계 하에서 부과되고 있었기 때문에 농민경영에 미친 영향은 지대한 것이었다. 따라서 군역 징발의 기반이 되는 奉足制 와 이에 대한 개선책으로서 保法이 마련되었다. 1)* 淑明女子大學校 韓國史學科 敎授.

- 207 - 지금까지 朝鮮初期 군역에 관한 연구는 많은 성과를 이루어왔다.1) 먼저 이에 대한 연구는 金錫亨으로부터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 연구는 양인에게 군역을 부과하 기 위한 제도적 장치로서의 奉足制 및 軍戶編制에 중심을 두고 있다. 그는 조선초기 의 호는 경제적으로 빈한하며 單寒한 호이기 때문에 戶와 丁의 구별이 필요없다고 하 였다. 또 奉足制는 군역에 대한 국가적 보상을 위해 마련되었고 호수와 봉족간에 경 제적 차등을 두어 호수의 봉족지배를 가능케 하였으며 보법시행 이후 군역부담의 증 가는 군액을 변화시켰다고 하였다. 그는 농장의 발달로 토지 소유가 편중되고 양인이 노비화 함에 따라 토지 노비 准丁에 의한 保法이 실시되기에 이르렀다고 하였다.2) 이 이후 1960년대부터 千寬宇 車文燮 등에 의해 兵種別 군역 연구가 이루어지고3) 李載龒 閔賢九 李泰鎭 李成茂 등에 의해 군역에 대해 본격적인 연구가 이루어졌다. 李載龒은 봉족의 기원과 의의 그리고 봉족의 公定 및 봉족제의 상황을 살피고 세조 때에 군액의 확대정책과 병행하여 이루어진 봉족제의 개편에 의한 給保에 이르는 사 정을 고찰하였다. 그는 봉족제는 태조 때에 군병에 국한하여 실시되다가 태종 때에 국역제도 전반을 뒷받침하는 제도로 확대 실시한 것으로 파악하고 처음에는 소유한 전결규모와 연결하여 지급하던 데서 人丁만을 기준으로 하여 지급하게 된 것이라 하 였다. 또 保法의 실시는 세조의 과단성 있는 결정에 따라 군역 확충을 이루기 위한 목적에서 부호의 군역부담을 증대시키고자 추진되었으나 실제는 빈한한 인정의 수괄 로 귀결되고 유력무인층의 기반을 침해하여 결국 土地 奴子 准丁을 철폐하고 군역을 감축하게 된 것으로 설명하였다. 이 역시 田結의 뒷받침없이 시행하게 된 까닭에 호 수의 보인 침탈이 심각하게 전개된 것으로 이해하였다.4) 그러나 씨는 朝鮮初期 良 人農民의 軍役과 土地所有 에서 自營農의 인정이 3丁 1戶 의 法制戶(軍戶)를 구성 하는 것으로 봄으로써 군역의 경제적 기반을 이루도록 고려되었으나 보법에 이르러 서 이러한 고려가 폐기된 것으로 보고 있다.5) 閔賢九는 李載龒의 논지를 수용하면서 京軍役과 鄕軍役으로 二元的으로 구성되어 진 軍役體系가 일원화하는 과정을 설명하였다. 이 과정에서 군호와 봉족편성에 관한 연구가 이루어졌는데 즉 군역이 차츰 요역의 특수형태로부터 별도의 차원으로 된 반 면 요역에서는 세종 때에 이르러 전결의 다소가 기준이 되기 시작하였다고 했다. 그 리고 봉족제가 혈연관계에 기초한 것임을 강조하였다. 그러나 세종 말엽에 이르는 동안 농장의 발달로 경제관계가 분화됨에 따라 차츰 군역부과에 있어 적극적으로 토 1) 조선초기 軍役 軍制에 대한 연구사 정리로는 閔賢九, 朝鮮初期의 軍事制度와 政治 (韓國硏 究院, 1983) 참고. 2) 金錫亨, 朝鮮初期 國役編成의 基柢 ( 震檀學報 14, 1941). 3) 千寬宇, 近世朝鮮史硏究 (一潮閣, 1979). 車文燮, 朝鮮時代軍制硏究 (檀國大學校 出版部, 1973). 4) 李載龒, 朝鮮初期의 奉足制 ( 朝鮮初期社會構造研究, 일조각, 1984). 5) 李載龒, 朝鮮初期 良人農民의 軍役과 土地所有 ( 東洋學 9, 1979).

- 208 - 지와 奴丁도 고려되기 시작한 것으로 보았다. 이 연구에서 군역의 일원화 과정 및 요역으로부터 군역의 분리과정과 사회경제적 변화가 보법의 실시에 영향을 준 것으 로 본 것은 주목된다.6) 李泰鎭은 經國大典 성립 이후의 군제의 변동을 정리하면서 16세기의 군역은 군역의 요역화, 吏胥層의 代立價 收奪 등의 요인으로 인해 변동하고 있었다고 보았 다. 그 배경으로 16세기 이후 심화된 토지소유의 갈등을 들고 있다.7) 李成茂는 보법에 이르기까지의 군역편제의 변화를 양반과 관련하여 고찰하였다. 이 연구는 봉족제와 보법 실시에서는 주로 李載龒 閔賢九의 연구성과를, 正兵代立 부 분은 李泰鎭의 연구성과를 반영하면서 양반의 군역부담이 일반 양인 농민들과 차별 성 및 특수성이 있었음을 강조하였다.8) 李志宇는 그 동안의 연구를 바탕으로 조선초기 봉족제의 성립요인, 봉족지급규정 의 변천과정과 봉족제의 실황과 폐단을 살피는 한편 보법의 성립요인과 보법의 성 립, 보법의 실황과 폐단 등을 고찰하였다.9) 宮源兎一은 保와 奉足의 기원을 고려 때의 足丁에서 찾는 한편 보법의 실시 목적 을 군역만이 아니라 징세를 위한 광범위한 人頭支配로 보았다. 그는 봉족제 및 보법 의 확립을 세조 때로 보아 그 이전의 봉족제에 대한 구명은 소홀히 하였으며 보의 구조를 해명하지 못하였다.10) 이후 北村明美는 기존의 봉족제 보법연구에서 이용된 자료를 다시 분석하여 자연호의 독립성을 보존하기 위한 목적에서 보법을 실시하였 다고 하였다. 즉 봉족제에서는 혈연성을 기초로 봉족을 편성하는 외에 부득이한 경 우는 隣保관계 등 지연적 유대관계에 의해 봉족이 지급되었는데 이는 이미 田丁을 매개로 하는 혈연적인 유대관계가 옅어진 데다가 집약농법의 전개와 농업생산력의 발전으로 자연호의 내실이 강화된 결과라는 것이다. 이에 따라 1개 자연호가 役戶로 기능할 수 있게 되었으며 이를 반영한 새 편호 방식이 보법이라고 하였다.11) 이 외에 군역과 관련하여 조선초기 戶의 구조와 軍戶의 편성 문제를 다룬 연구로 李樹健 韓榮國 李榮薫 등의 연구가 있다.12) 6) 閔賢九, 朝鮮初期 軍事制度의 政治的 社會的 基盤 (앞의 책). 7) 李泰鎭, 近世朝鮮前期 軍事制度의 變動 ( 韓國軍制史 近世朝鮮前期篇, 1968). 8) 李成茂, 兩班과 軍役 ( 朝鮮初期 兩班硏究, 일조각, 1980). 9) 李志宇, 朝鮮初期 奉足制의 推移와 實態 ( 慶南史學 5, 1991) 및 朝鮮初期 保法의 推 移와 實態 ( 慶大史論 6, 1991). 10) 宮源兎一, 李朝軍役制度 保の成立 ( 朝鮮學報 28, 朝鮮學會, 1963). 11) 北村明美, 李朝初期國役制度 保法の成立について ( 朝鮮史硏究會論文集 30, 1992). 12) 李樹健, 朝鮮初期 戶口硏究 ( 嶺南大學校 論文集 5 인문과학편, 1971). 韓榮國, 朝鮮初期 戶口統計에서의 戶와 口 ( 東洋學 19,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소, 1989). 李榮薫, 朝鮮初期 戶의 構造와 性格 (미발표 프린트, 1992). 특히 이 연구에 많은 도움을 받았음을 밝힌다.

- 209 - 이상과 같이 조선초기 군역은 다양한 측면에서 많은 연구자들의 관심을 이끌어 왔 다. 그러나 대부분이 제도상의 문제와 관련되어 있어 農民經營과의 관계가 적극적으 로 연구되지는 못하였다. 군역과 농민경영과의 관계는 당시의 국가재정과 사회성격, 그리고 농민들의 생활을 밝히기 위해 적극적으로 연구되어야 할 과제라고 생각된다. 본고에서는 기존의 연구에 힘입어 조선초기 국역 가운데 가장 큰 범위를 차지하고 있는 군역에 한정하여 이것을 농민경영의 실태와 연관시켜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것 은 조선초기 국역편성의 원칙 및 농민의 부담 생활상, 나아가 조선초기 사회 성격을 파악하는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먼저 軍役負擔者의 確保策으 로 그 身分과 年齡, 戶口把握 方法 등에 대해 살펴보고, 둘째, 농민의 신분관계를 규 정하고 있는 국가권력에 의한 役制運用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어떻게 전개되고 있 었으며 그것과 관련된 당시의 농민경영은 어떠한 형태를 취하고 있었던가 즉 軍役體 制의 運營과 農民經營 奉足制와 農民經營, 保法과 農民經營, 代立收布制 展開와 農 民經營이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Ⅱ. 軍役負擔者의 確保策 조선초기의 농민은 良人과 賤人으로 구별되어 있었지만 그들을 구별하는 가장 뚜 렷한 기준의 하나는 군역의 유무에 있었다. 賤人들은 국가에 대해 군역의 의무가 없 었지만 양인은 그 의무가 있었다. 양인이 일차적으로 군역부담자로 간주되는 것은 奉公의 제1의적 의무가 국가의 수호이기 때문이며 양인이 봉공의 의무를 수행한다는 것은 爲民政治를 실현하는 국가에 대한 헌신으로 정당화되며 그들이 보유하는 公民 權의 대가라는 형식을 띠고 있었던 것이다13) 軍士助丁皆用良民 14)이라고 한 것에서 도 알 수 있듯이 군사 뿐만 아니라 助丁 즉 奉足 역시 양인으로 충원되었다. 군역은 뒤에 자세히 서술되는 바와 같이 正軍(戶首)과 助戶(奉足, 保)로 편성되어 있었다. 이러한 군역을 지는 양인의 연령은 16세 이상부터 60세 이하의 남자였다. 當役.15) ① 民丁 自十六歲至六十歲 ② 各道戶籍 率居人口 己竝載錄 今後 各戶同居各居勿論 以子壻弟姪族親 年 六十以 下十六以上者 品官馬兵一員奉足四名 定給.16) ③ 諭諸道觀察使曰 我國戶籍不明 軍丁多漏 毎因凶歉姑待豊年 是則成籍無時 置都會 <첨자> </첨자> <첨자> </첨자> 13) 劉承源, 朝鮮初期身分制研究 (을유문화사, 1987) p.60. 14) 세조실록 권2, 원년 9월 병자. 15) 태조실록 권2, 원년 9월 임인. 16) 태조실록 권11, 6년 2월 갑오.

- 210 - 成籍 則非但諸邑吏胥 贏糧往來有弊 姦吏因緣增減 卿其巡行諸邑 面諭守令 二 十歲 錄籍以啓 務要勿致骚擾 予將親覽考其能否.17) 以上 <첨자> </첨자> 위의 자료 ①과 ②에 의하면 民丁은 16세부터 60세까지 역의 의무를 져야 함을 알 수 있다. 16세 이상 60세 이하의 남자는 직업적 武人이거나 아니면 의무병인 侍衛軍 騎船軍 등의 正軍과 奉足(保)이 되거나 예비군의 성격을 띤 雜色軍 중 어느 하나에 해당되어야 했다. 그러나 자료 ③에 의하면 정군은 20세 이상으로 입역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세조는 諸道 觀察使에게 유시하기를 관찰사가 직접 순행하여 수령을 면유 하고 20세 이상은 錄籍하여 바치게 하고 그 요점에 힘써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당 부하였다. 이것으로 볼 때 정군을 돕는 봉족은 16세 이상이 되면 징발되었으나 정군 은 대략 20세부터 징발되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그러나 봉족의 경우는 나이에 불문하고 土豪들에게 모점되는 경우도 있었다. 세종 년간 제주도 찰방 金爲民이 제주도의 公私債年弊事를 알리는 가운데에서, 臣到濟州 告訴者如雲 皆土豪影占良民事也 問之 則皆曰 此地邈在海外 守令紀綱陵夷 稱爲奉足 使之如奴隸 故 良 民之子 年歲八九 己爲所占 而父不得 土豪恣行 自占良民 爲之子 18) <첨자> </첨자> <첨자> </첨자> 라고 하여 제주도의 경우 양민들이 8 9세만 되면 토호들에게 영점되는 상황이고, 이들은 봉족으로 칭해지면서 노예같이 부림을 당한다는 것이다. 이것은 제주도만의 특성이라 할 수도 있겠으나 다른 지역에도 이같은 폐단이 없지 않았을 것으로 생각 된다. 이러한 점은 개간이 확대되거나 地主 佃戶制가 전개되어 가면서 토지가 넓고 인구가 많은 지역에서 양인을 영점하는 부호들에 의해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진다. 그러나 군역을 합법적으로 면제받을 수 있는 자들도 있었다. 면역의 대상은 鄕吏 驛吏 胥吏 등 특수한 身役을 지는 자와 군사로서 연령이 60세에 찬 자, 篤疾 및 癈疾 에 걸린 자, 혹은 70세 이상이 된 父母를 가진 자 가운데 1자와 90세 이상이 된 자 의 모든 아들이었다.19) 이들을 제외한 양정에게 군역은 그 대상자의 신분과 경제적 인 능력에 따라 차별적으로 부과되었다. 그것은 병종에 따라 우열관계로 나타났다. 국방력의 절대적인 비중을 차지하는 侍衛軍과 船軍 및 營鎭軍은 일반 양민들의 의무 병종이었다. 나머지의 중앙군은 군역이라는 테두리 안에서 파악되기 보다는 일종의 직업적 무인층과 같은 존재였고 징집의 형태도 의무적인 역이 아니라 試取에 의한 17) 세조실록 권12, 4년 4월 경신. 18) 세종실록 권36, 9년 6월 정묘. 19) 經國大典 兵典 免役條, 軍士年滿六十者 篤疾 癈疾者竝免役 有篤疾 癈疾 或年七十以上 親者一子 九十以上者諸子免役.

- 211 - 병종 및 양반자제나 功臣의 자제를 위한 특수 병종이 대부분이었다. 그리고 당시 양반의 경우 現職官僚는 별도의 국역을 부담할 필요가 없었다. 그들 의 관직 자체가 신역과 상살되는 것으로 파악되었기 때문이다. 또 관료가 되기 위하 여 학업에 종사하는 과정인 成均館과 鄕校의 生徒도 역이 면제되었고, 그 밖에 2품 이상 전직 관료들도 합법적으로 면제받을 수 있는 자들이었다. 당초 벼슬과 연결된 이들은 일반 양인이 지는 군역과는 다른 차원에서 군역을 부담하는 경우가 많았고 실제로는 이를 피하는 수가 많았다. 한편 왕족 공신 등 양반 계층의 상층부의 경우에 는 군역부과와 관료로의 진출을 동시에 해결할 수 있도록 특수 병종에 의한 관직이 주어졌다.20) 조선초기의 군인은 군복무에 필요한 일체의 비용을 軍戶 자체가 부담해야만 되었 다. 군인이 입역하는데 필요한 피복 식량 무기 등을 자판하기 위해서는 그 경제적 기 반으로서 田結이 가장 큰 문제였다. 軍丁이 피복 식량 무기 등을 스스로 마련했다는 것은 다음 기록을 통해서 알 수 있다. 全羅道都節制使啓 道內諸邑軍丁 竝皆私備軍器衣甲 而甲士及別牌 獨不私備 若上番 則受諸軍器監矣 前日東征對馬島時 諸色軍士 竝皆私賚軍装 乞令甲士別牌私備軍裝 毎於下番時 嚴加點檢 以備不虞 上王從之 仍命諸道 亦依此例 施行.21) 위의 자료에 의하면 군정들이 개인적으로 군기나 갑옷 등을 준비하고 있는 모습을 알 수 있다. 따라서 군역을 재생산하기 위해서는 유역자의 영농조건을 보장하는 軍 戶體制를 강구하지 않으면 안되었던 것이다. 군역의 부과대상자는 모두 유역인이지 만 현역 정군으로서 동원되는 자는 각 병종의 군액 만큼에 지나지 않고 나머지의 인 정은 정군의 경비나 영농활동을 도와주기 위한 奉足 또는 保가 되거나 혹은 率丁이 되도록 하였다. 軍戶는 주로 신분과 경작전결수 등의 차이에 대응해서 편성되어 있 었는데 조선초기의 군호편성의 원리 기준을 한 가지로 직단하기는 매우 곤란하며 또 지방별로도 실질적인 차이가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2) 건국 초기부터 국가는 國役體制의 정비를 위해 군호편성의 근간이 되는 良人確保 政策과 戶口法을 적극 정비해 나갔다. 양인의 호는 조선왕조의 국역체제의 기저로서 의의를 지니고 있었기 때문이다.23) 호는 당시의 직접 생산자인 농민경영의 사회적 존재형태와 밀접한 관련을 맺고 있었다. 조선 초기에 있어서의 호구조사 또는 戶籍 作成은 단순히 전체인구를 알기 위 한 것이라기 보다는 국가가 필요로 하는 군역 등 20) 李成茂, 兩班과 軍役 (앞의 책)참고. 21) 세종실록 권6, 원년 12월 병술. 22) 軍戶의 실질적인 지방별 차이를 밝히는 일은 앞으로의 연구과제라고 생각된다. 23) 金錫亨, 앞의 논문 참고.

- 212 - 각종 역역 부담자의 實數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었기 때문에 항상 男丁 즉 人丁의 조 사에 중점을 두었던 것이다. 따라서 호적을 갖는 것은 국가가 인정하는 공민으로서 의 하나의 권리일 수 있었다. 국가는 국역을 부담할 수 있는 자립적인 양인 농민들 을 파악하여 호적에 올리고 이것을 통해 농민을 지배하고 국역을 부담지웠던 것이 다. 따라서 일찍부터 농민의 거주 이전의 자유가 박탈되었으며 이동은 금지되어 있 었다. 호구대장을 작성한 후 멋대로 옮겨 다니면 가장에게 책임을 물어 가장은 杖刑 1백대에 처하며 이웃에 사는 것을 허락한 자도 처벌하였다. 또 농민의 이동을 허용 할 경우 里正과 守令들이 공동으로 책임을 지고 처벌을 받게 되어 있었다.24) 호적은 이미 태조 2년 이전에 작성되었을 것으로 보이는데25) 태조는 2년 5월에 8 도의 군적을 만들어 올리도록 하였다. 이때에 군적에 오른 8도의 馬兵과 步兵, 騎船 軍의 총수는 200,800여 인, 子弟 및 鄕吏 驛吏 등 諸有役人은 100,500여 인으로 모두 301, 300여 인에 달하였다.26) 이때에는 국가에 대한 모든 有役人이 넓은 의미의 군인 으로 파악되어 點軍成籍 의 대상이 되고 있는데 이것으로 보아 태조조의 호적이나 군적은 아직 철저한 호구파악을 통하여 작성된 것이 아니라 국가의 필요에 따라 일 시적으로 작성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호적 군적의 작성을 위한 더욱 철저한 호구파악은 태종조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실 시되었다. 태종조에는 많은 良丁을 확보하기 위해 고려말부터 실시되어 오던 奴婢辨 定法을 강화하고 隱丁을 索出하는 방법으로 隣保法 戶牌法을 실시하여 호적 군적을 작성하였다. 태종 3년 6월과 4년 4월, 6년 10월 등 3차례에 걸쳐 호구조사가 실시되 었고27) 태종 7년 11월에 隣保法의 시행을 통해 철저한 호구법을 정비해 갔다. 특히 인보법은 正長으로 하여금 매년 인구의 증감, 인물의 良賤, 군민의 强弱單隻, 生產과 物故를 파악하게 하여 遊離 容隱을 막고 부역과 조세를 국가가 파악하겠다는 것이었 다.28) 이러한 인보법은 농민들에게 피해를 주어 군사훈련과 인보제 양전 이 3가지 일 은 모든 사람들이 싫어하는 것이라고 하였다.29) 또 태종 7년에는 戶籍을 3년에 1차 개정하는 式年制가 제정되고30) 태종 8년에는 인보법의 보완을 위해 매호의 구성원의 범위와 조사방법을 규정한 戶口法 이 마련되 고 동시에 지역간인구의 이동상황에 대한 조사와 보고의 체제가 정비되었다.31) 그러 나 감사와 수령 등이 이를 철저히 고찰하지 못하는 것도 문제였지만 빈민들이 역을 24) 태조실록 권4, 2년 11월 기사. 25) 戶籍法에 대해서는 有井智德, 李朝初期の戶籍法について ( 朝鮮學報 39 40, 1966) 참고. 26) 태조실록 권3, 2년 5월 경오. 27) 태종실록 권5, 3년 6월 경오 및 동 권7, 4년 4월 을미 동 권12, 6년 10월 병진. 28) 위의 책 권13, 7년 정월 갑술. 29) 위의 책 권17, 9년 윤4월 을축. 30) 위의 책 권14, 7년 11월 임자. 31) 태종실록 권16, 8년 11월 정묘.

- 213 - 피하여 유이하는 것을 근절시킬 수 있는 뚜렷한 방도가 없고 일단 附籍해 놓는다고 해도 곧 도망하게 되기 때문에 큰 실효를 거둘 수 없었다.32) 流民과 隱丁을 근절시 키지 못하자 태종 13년 8월 이래 16년 6월까지 戶牌法이 시행되었는데 이는 그간에 호구원의 구성범위를 더욱 명확하게 규정한 戶口法 의 개정이었다.33) 호패를 전국의 인정에게 빠짐없이 차도록 한 것은 신분의 귀천과 고하를 정하려는 목적도 있었지만 은정을 철저히 색출하려는 데 더 큰 목적이 있었다. 그러므로 호패법이 실시된 이후 로 인정이 급격히 증가되고 있었던 반면에34) 이로 인한 농민들의 원망도 높아져 실 시한 지 3년만인 태종 16년 6월에는 이 법을 폐지하게 되었다.35) 더불어 새로운 호 구식에 대한 논의가 태종 15년 이래 시작되고 있었으며 세종 10년에 이르러 어느 정 도 마무리 되었다.36) 태종대의 이러한 호구법의 강화로 조선초기 군역제의 기간이 된 奉足制를 시행해 나가게 된 것이다. 호구파악을 위해 작성한 호적에는 戶主를 중심으로 하여 그 子婿弟姪 등의 족친이 모두 한 호적에 등재되어 있었으며, 그 밖에 족친이 아닌 婢夫 雇工 등도 아울러 병 기되어 있었다.37) 조선초기의 농민은 개별 소가족 그 자체가 결코 군역부담의 자립 적 주체로 서기 어려웠던 생산력 발전단계에서 군역을 부담하기 위해 兩側的 率婿的 친족 가족제를 매개로 한 일정범위의 혈연족친이 공동으로 대응하고 있었다. 조선초 기의 親族構造는 고려시대의 兩側的 率婿的인 경향이 그대로 남아 있었기 때문에 호 적에 사위들도 같이 기록되었던 것이고 국역부담에 있어 사위가 아들 못지 않은 중 요한 역할을 했던 것도 큰 특징이라 하겠다. 이러한 호적을 바탕으로 하여 군역부과자를 뽑아 확보하는 군적이 작성되었다. 군 적은 호적을 토대로 6년마다 한번씩 작성되었는데, 한성의 5부와 외방의 절도사가 대장을 만들어 병조에 보내고 觀察使道 主鎭 巨鎭 諸鎭 등에 각각 한벌씩 비치하도록 하였다.38) 태종대 이후 세종대까지의 호구조사의 결과는 世宗實錄地理志 (이하 實志 로 약칭)에 잘 반영되어 있다. 참고로 태종과 세종대의 호구통계를 도표화해 보면 다 음과 같다. 32) 위의 책 권18, 9년 12월 무오 및 동 권23, 12년 2월 무오. 33) 위의 책 권26, 13년 8월 정묘 및 동 권27, 14년 4월 을사 동 권31, 16년 6월 임술. 34) 위의 책 권26, 13년 12월 병오. 35) 위의 책 권31, 16년 6월 임술. 36) 위의 책 권30, 15년 11월 무신 및 동 권30, 15년 12월 갑인. 세종실록 권40, 10년 5월 임자. 37) 經國大典 권3, 禮典 戶口式. 38) 經國大典 兵典 成籍條.

- 214 - 朝鮮初期 戸口 變動表 <표> 태종 4년 戶 153,404 口 322,786 태종 6년 戶 180, 246 口 370,365 </표> 實志 戶 226,390 口 702,870 實志 에 의하면 전국의 戶口數는 226,390戶이고 口數는 702,870口이다. 이것은 태종 6년에 파악된 것과 비교하여 보면 호총이 18만여 호에서 22만여 호로 약1.2배, 인정수는 37만여 구에서 70만여 구로 약1.9배로 증대하고 있다. 호는 태종 4년부터 20여 년간 큰 변동이 보이지 않는데 비해 구는 이 기간 동안 약 2배의 증가 양상을 보여준다. 이것은 인구의 자연적 증가에 의한 것이라기 보다는 태종 중엽 이후 세종 대에 이르기까지의 隣保法과 戸籍法이 정비되고 철저하게 실시된 데서 오는 파악 결 과의 진척에 의한 것이었다.39) 그런데 實志 의 저본이었던 8도지리지 의 일부 인 경상도지리지 의 道內時居條에 道內時居 四萬一千三百二十戶 人丁 十九萬一 千七百十九 라고 한 것을 보면 實志 의 구수가 인정수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조 선초기의 호구조사 또는 호적작성이 무엇보다도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인정수를 파 악하기 위하여 행해지고 있었음을 말해 주는 것이다. 그러나 세종은 호구제도에 대해 비교적 적극적이지 않았던 것 같다. 세종은 토지 관련의 貢法 개정에는 적극적이었지만 호구제도의 개혁에는 소극적이었다. 그의 재 위 32년간 여러 차례에 걸쳐 호패법 시행의 건의가 제기되고 있었지만 그는 한결같 이 부정적인 입장을 보이고 있다.40) 세종년간의 상황에 대해서는 實志 가 편찬될 때 그 편찬자들이 경기도의 호구수를 대상으로 하여 붙인 주석이 참고된다. 本道人口之法不明 錄于籍者 僅十之一二 國家每欲正之 重失民心 因循至今 故各道各 官人口之數止次 他道皆然.41) 人口之法이 불명하여 호적에 기록된 자가 겨우 1 2할에 불과하고 국가도 매번 이 를 고치고자 했지만 민심의 저항으로 거듭 실패했음을 지적하고 있다. 이같은 현상 은 비단 경기도에서 만이 아니라 전국적인 것이었다고 한다. 세종 자신도 당시 국가 가 파악한 호구가 실인구의 1 2할 또는 3 4할에 불과하다고 지적하고 있다.42) 이 것은 아직까지 국가의 인정파악이 국가에서 필요로 하는 노동력의 징발 즉 군정의 39) 閔賢九, 앞의 책 p.85. 40) 세종실록 권12, 3년 5월 임신. 동 권34, 8년 12월 정묘. 동 권72, 18년 6월 기축. 동 권81, 20년 5월 경술. 동 권88, 22년 2월 병진. 동 권114, 28년 10월 임술. 동 권127, 32년 정월 신묘. 41) 實志 京畿道 序頭. 42) 세종실록 권68, 17년 4월 무오 및 동 권88, 22년 2월 병진.

- 215 - 파악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음을 말하는 것이다. 세종이 인정의 수괄에 대해 비교 적 소극적인 정책을 시행했던 것은 결과적으로 농업경제의 발전에 더 주력하고자 한 것이었고, 이것은 농업노동력의 고갈을 막아 농민경영의 발전을 가져온 것이었다. 그러나 경제적인 것은 물론 强兵에 대한 문제는 세조가 즉위하면서 중요한 문제로 제시되었다. 세조는 漏丁 隱丁의 刷出을 통해 군액의 증대를 꾀하고자 하는 일련의 호구책을 시행하게 되는데 이 개혁에 따라 人丁과 戶口의 수는 급격한 증대를 보이 고 있다. 세조년간 호구법의 일대 개혁은 종전과 같은 호의 다양한 구성요소를 제한 하면서 개별 자연호 자체를 호구파악의 대상으로 삼고자 한 것이다.43) 세조 7년의 호구조사로 인해 호구가 급격히 증가하고 있는 것을 알 수 있으며44) 이를 바탕으로 세조 10년에는 保法을 시행할 수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즉 조선초기 군역부담자를 확보하기 위한 호구조사와 생산력의 발전문제는 군역체제를 변화시키는 요인이 되었 던 것이다. Ⅲ. 軍役運營體系와 農民經營 1.奉足制와 農民經營 高麗時代의 足丁에 있어서는 給田과 立役이 본질적인 유대관계를 가지고 있는데 비해 조선초기의 봉족제에 있어서는 軍兵이 소유하는 田地가 給田에 의한 것이 아니 고 그들의 本田의 다소에 입각하고 있었다(隨其本田多少). 조선초기 국방의 주담당자 였던 侍衛軍이나 騎船軍은 대개 양인 농민들로서 그들은 군역과 관련되어 토지를 지 급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 경제적인 처지도 자립도가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국가는 항구적이고 안정적인 군역대상자를 확보하기 위해서는 군역부담자의 경제적 기반을 유지시키고 그들의 유망과 실업을 막는 것이 중요한 과제였다.45) 그러나 일반양인에게 토지를 지급하지 않은 입장에서 군역부과 대상자의 전원을 현역으로 조발하여 군역 또는 직역에 복무시킬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모든 남정을 징 발해 가면 영농을 감당할 여정이 없어지게 되어 경작 노동력이 고갈되고 그 결과 농 민들의 단순 재생산의 기반마저 무너질 우려가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上番立役하는 43) 李榮薰, 조선전기의 토지소유와 농업경영 ( 한국사 7, 한길사, 1994) p.277. 44) 세조실록 권27, 7년 7월 임술. 45) 국가는 私人들의 토지광점을 규제하기 위한 제반 조치들과 양인 농민들의 경작권을 보호하 기 위한 제규정을 정하기도 하였다. 태종실록 권29, 15년 6월 경인, 세종실록 권89, 22년 6월 갑술.

- 216 - 正丁과 집에 머물러 생업에 종사하면서 정정의 입역을 경제적으로 지원하는 奉足 혹 은 率丁으로 나누어 입역단위인 역호를 편성하여 정정만 입역케 하였다. 당시의 군역 을 합리적으로 운용하기 위해서 무엇보다도 정정에 대해 봉족이나 솔정 등을 확보시 켜 주고 동시에 이 양자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안정시키는 일이 중요한 당면과제였다. 국가에서 군역을 위하여 특별히 토지를 급여한 바 없기 때문에 군병이 이전에 각 각 소유하던 토지의 기초 위에 군역의 부담을 젊어지고 그 입역에 있어 국가로부터 경제적 지원으로서 봉족이 편제된 것이다. 봉족제는 단독 입역이 불가능한 단한한 양인농민의 재정적 지원과 농업생산력의 보존을 위해 만들어진 독특한 군역체계 운 용의 방법이다.46) 국가의 재정적 부담이 거의 없는 상황에서 정정의 同居奉足은 입 역자의 상번에 수종하여 입역을 돕기도 하고 혹은 집에 머물러 농사에 종사하였고, 別居奉足은 정정의 상번입역에 필요한 식량 피복 군기 마필 등의 조달을 위한 경비를 지원하는 임무를 졌다. 따라서 정정의 경제력은 소유 전결의 양과 동거솔정의 다과 에 있었기 때문에 국가에서는 건실한 경제력을 가진 자를 정군으로 하고 그렇지 않 은 단한한 농민을 봉족으로 편성하려 하였다. 그 때문에 其饒實勤幹者 定爲戶首 47) 라든가 正軍戶率丁五丁以上不給奉足, 擇壯勇者 定爲正軍 48) 奴子准奉足數者 不給他 丁 49) 등의 규정에서도 알 수 있듯이 다수의 솔정이나 노자를 가지고 있는 정정호에 대해서는 봉족의 급여를 제한하려 하였다. 奉足은 자연가호에 얽혀있는 혈연을 매개로 한 친족집단을 단위로 지급하는 것이 가장 간편한 방법이지만 內外族親이 없는 單丁戶는 하는 수없이 다른 단정호를 2 3家 戶를 합쳐 정군을 하나 내던가 봉족으로 편성되는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단정호를 합 쳐서 만든 호는 자연 단약할 수밖에 없었고 군역부담에 있어 매우 불안정한 호였다. 군역의 운용은 농민들의 군역부담 능력을 일정하게 반영하면서 시행되어 갔다. 아 직 건국 초기였던 태조 3년 8월에 이미 馬兵과 步兵에 대해 봉족을 지급한 사례가 보인다. 이때는 아직 호구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태이기 때문에 봉족의 공정이 제대로 갖추어지지는 않았다. 우선 서울의 경비 및 궁궐의 시위에 필요한 정선된 시 위패를 차출한다는 의미에서 비용이 많이 드는 마병은 5정에서 1명의 정군을 내고 보병은 3정에서 1명의 정군을 내자는 의견이 왕에게 품달되었다.50) 그러나 호수에 대한 봉족의 지급과 관련된 최초의 본격적인 규정은 태조 6년에 이루어졌다. 使司上言 又戶口之數 不可不知也 各道戶籍 率居人口 己竝載錄 各官守令 不顧立法 46) 봉족제에 대해서는 李載龒, 朝鮮初期의 奉足制 (앞의 책) 참고. 47) 續大典 戶典 收税條. 48) 세종실록 권23, 6년 4월 계유. 49) 세조실록 권34, 10년 10월 을미. 50) 태조실록 권6, 3년 8월 기사.

- 217 - 大體 凡遇軍情及徒役事 盡數抄出 使不得農業 以致凋瘁 今後各戶同居各居勿論 以子壻 弟姪族親 年六十以下十六以上者 品官馬兵一員 奉足四名 無職馬兵一名 奉足三名 步兵 一名 奉足二名爲定 戶主名下施行 無內外族親單丁 以一般單丁奉足定給 上從之.51) 이 규정은 당시까지 아직 일반호에 대한 差役式이 정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지방수 령이 수시로 호적에 등록된 모든 인정을 각종 역에 동원함에 따른 폐단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그래서 각 직급의 군역의 호에 대해서는 일정한 수의 인정을 면역 대상 으로 지급할 필요가 있었는데 品官軍兵에게는 봉족 4명, 無職馬兵에게는 봉족 3명, 그리고 보병에게는 봉족 2명을 나누어 주도록 하였다. 여기서 주목되는 점은 봉족지 급 규정이 전결수의 다과가 전혀 고려되어 있지 않고 단지 인정수만 몇 명 지급한다 는 원칙이 적용되고 있을 뿐이다. 각 자연호의 인정의 다수가 군호편성의 기준이 되 고 있다. 그리고 봉족이 子胥弟姪 등의 혈연 족친으로 이루어지고 이들이 호수와의 동거나 各居의 상태를 물론하고 1호로 편제되고 있다. 일정범위의 혈연족친이 군역 을 공동 수행할 목적에서 상호결합하여 하나의 군호를 형성하고 있는 것이다. 군호 는 그것을 구성하는 각 자연호간에 소유전결의 양이나 재생산조건의 차이가 적으면 적을수록 더욱 합리적으로 편성될 수 있었기 때문에 기본적으로 혈연을 중심으로 한 자연호를 기반으로 편성되었다. 이렇게 하면 정군이 봉족에게 인격적 지배와 경제적 착취를 가할 걱정이 없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종이 즉위하면서 計丁 計田을 절충한 법을 공포하여 봉족지급기준도 크 게 달라지게 되었다. 人丁만이 아니라 田結도 봉족지급의 새로운 기준이 되었다. 이 어 태종 2년에는 軍丁의 所耕田의 다소를 참작하여 군적을 만들게 하였다52) 이후 호 내의 일정한 솔정을 봉족 즉 면역인으로 지급하는 의미를 넘어서 호수 봉족제에 대 한 본격적인 규명은 태종 4년에 마련되었다. 태종은 4년에 각도 각관에 명하여 민호 의 빈부강약을 구분하여 助戶를 지급하도록 하고 군병을 비롯하여 모든 국역에 봉족 호를 공정하였는데 그 가운데 군사의 봉족제와 관련된 중요한 내용을 추려보면 아래 와 같다. 命各道各官 分其民戶 貧富强弱 以給助戶 議政府啓 外方民戶富强者 多得助戶 而貧 乏者 反不得助戶 流移失所 軍額日減 願令各道 差等詳定 一 甲士 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一戶 六七結以上不給 一 侍衛軍及完山子弟牌一二結以下 給奉足二戶 三四結以下給奉足一戶 五六結以上不給 一 騎船軍二三結以下 給奉足二戶 四五結以下 給奉足一戶 七八結以上 自立一領 十 五結以上 自立二領 51) 태조실록 권11, 6년 2월 갑오. 52) 태종실록 권4, 2년 8월 임자.

- 218 -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上項奉足定給外 各色有常役者 俱不給奉足(從之)53) 이때 규정된 奉足公定 내용 전체를 도표화해 보면 다음과 같다.54) 太宗 4년 奉足公定表 田結數 田2結 田3結 田4結 田5結 田6結 비고 役種別 以下 以不 甲士 給2戶 給2戶 給1戶 給1戶 不給 侍衛牌 給2戶 給2戶 給1戶 不給 不給 完山子弟牌 騎船軍 給2戶 給2戶 給1戶 給1戶 不給 7結以上 自立1領 鎭屬軍 給1戶 不給 不給 不給 不給 15結以上 自立2領 吹鍊軍 鐵所干 守城軍 不給 不給 不給 日守兩班 隊將 隊副 給1戶 不給 不給 不給 不給 各司吏典 丁吏 皀隸 都府外 守 工軍器監軍 速毛赤 吹羅赤 同 鄕吏 驛吏 同類 不給 不給 不給 不給 公衙丘從 院主 津尺 同 水站干 一戶 上項外有常役者 不給 不給 不給 不給 不給 <표> </표> * 奉足戶는 田 2, 3結 이하 자에 한함. 이때 규정된 봉족제의 특징을 살펴보면 대략 다음과 같다. 첫째, 봉족이 助戶로 불 리고 또 봉족의 지급이 戶 단위로 이루어지고 있듯이 戶首 奉足制가 戶 사이의 관 계로 규정되고 있다. 이것은 태조 6년의 규정이 호내의 率丁을 대상으로 하여 봉족 을 名단위로 지급하고 있음과 대조가 된다. 그러나 실제 면에 있어서 봉족은 名단위 이거나 戶단위로 지급되거나 그것이 실제의 차이를 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조선초기 의 자료 가운데 戶와 口가 자주 혼용되고 있는 바와 같이 당시에 이것은 동일한 실 체의 다른 표현에 불과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둘째, 봉족지급의 기준을 호의 토지소유량, 즉 田結數의 多小로 삼고 있는 것이다. 지금까지 인정 몇 명을 지급한다는 것에서 벗어나 전결수의 다과를 기준으로 봉족을 역종별로 차등 지급하고 있다. 이즈음에 이르기까지 墾田의 다소를 입역의 기준으로 53) 위의 책 권7, 4년 6월 계해. 54) 李載龒, 朝鮮初期의 奉足制 및 閔賢九, 앞의 책 p.72 참고.

- 219 - 삼자는 논란이 계속되고 있었던 것을 보아도 잘 알 수 있다.55) 봉족지급량이 가장 많은 甲士와 騎船軍에 대해서도 6결 이상의 전결보유자에 대해서는 봉족을 지급하지 않고 있다. 즉, 대부분이 양반호인 부유한 군호에게는 봉족을 지급하지 않아도 된다 는 것이다. 셋째, 自然戶틀 단위로 하여 봉족이 지급되고 있는데 이 가운데 2 3결 이하의 토 지 보유자를 봉족호로 삼고 보유 전결이 부유한 호를 정정으로 차정하는 원칙을 세 우고 있다. 양인 농민이 감당하는 가장 보편적인 군역인 侍衛軍이나 騎船軍의 경우 전3결 미만인 자에게 봉족 2호를 지급하도록 하였다. 凡諸奉足戶 皆用二三結以下者 不許用四五結以上者 라고 한 바와 같이 봉족호는 대체로 1, 2결 혹은 2, 3결 이하자로 편성되었으며, 4 5결 이상이면 정군으로 편성되었다. 결국 1군호는 5결 정도의 전지 를 가지고 하나의 입역단위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조선초기의 作丁은 5결로 科税地 파악의 단위가 되고 있는 것과 같이 군호편성에 있어서도 5결이 한 단위로 간주되고 있는 것이다. 넷째, 태종의 봉족공정 규정은 태조대의 그것에 비해 양인 농민호의 빈한한 경제 적 조건을 상당히 많이 반영한 면을 볼 수가 있다. 그러나 기선군은 15결 이상이면 정군 2명을 내게 하였지만 그 외에 田6結 이상인 호에는 봉족을 불급한다고 했을 뿐 그 이상 몇 십결이 되어도 타역을 가정한다든가 하는 규정이 없는 것을 보면 양반들 이 소유하고 있는 많은 토지를 군역편제에 철저히 반영하지 못하는 모순을 내포하고 있다. 또 유역인의 신분과 그들의 소유전지의 다소에 따라 봉족을 많이 주기도 하고 주지 않기도 하는 등 신분적인 차별이 내재해 있었다. 군호의 편성은 혈연적 내지 단한한 군호끼리의 공동책임제 아래 소유전지와 인정의 다과에 따라 구성되고 봉족이 주어졌다. 봉족호는 평균농민보다 낮은 경제적 상태를 지닌 호가 되기 마련이었다. 4, 5결 이상 호는 정군호가 되고 2, 3결호만이 봉족호가 될 수 있도록 했다. 그러나 4, 5결 이상 호가 봉족호는 될 수 없어도 2, 3결 이하 호는 정군호가 될 수 있었기 때문에 소농민들의 군역부담의 경제적 처지는 불안정하였다. 따라서 태종 15년에는 甲士 別牌 侍衛軍 騎船軍에 대한 봉족지급 규정이 正丁의 전 결 이외에 人丁도 참작하는 방안으로 고쳐졌다. 定軍丁奉足之數 六曹擬議啓曰 甲士奉足 以所耕給人多丁少參酌 所耕三四結 人丁二 三名以下者給奉足二戶 五六結四五名以下者給一戶 十餘結七八名以上者不給 三四十結 十名以上者 加定他役 已有敎旨 別牌侍衛牌騎船軍 亦依此例定給 其號牌加現人丁 依敎 旨毋定 軍役戶別有雙丁者 別定軍役何如 從之.56) 55) 태조실록 권15, 7년 12월 갑진 및 태종실록 권4, 2년 8월 임자. 56) 태종실록 권30, 15년 11월 갑진.

- 220 - 이때의 규정이 태종 4년의 봉족 지급규정과 달라진 점은 전결수 뿐만 아니라 인정 수도 지급 기준으로 채택되고 있는 것이다. 즉 토지 3, 4결 인정 2, 3명 이하자에게는 봉족 2호를, 토지 5, 6결 인정 4, 5명 이하자에게는 봉족 1호를 지급하고, 토지 10여 결 인정 7, 8명 이상자에게는 봉족을 지급하지 않으며, 토지 30, 40결 인정 10명 이상 을 가진 자는 他役을 加定한다는 것이다. 甲士 別牌 侍衛軍 騎船軍 등에게 봉족을 정 급하는 데 있어서 종전에는 유역자의 신분과 그들의 소경전지의 다소에 의한 것이었 는데 이제 군호가 거느리는 인정의 다과를 봉족 급여의 또 하나의 표준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 규정의 특징은 인정과 전결을 다같이 군역편제에 반영한 것 이외에 토지 30, 40結 人丁 10명 이상자에게 타역을 가한다는 점과 봉족의 지급 기준을 완화하여 토지 3, 4결 인정 2, 3명 이하자로 한다는 점이다. 이러한 사실은 소농민경영의 경제 적 기반을 안정시켜 항구적인 수취원을 확보한다는 의미도 내포되어 있으며 전지와 인정수가 많은 대호에게 타역을 가정시켜 역의 균형을 지향했던 것이다. 이때에 이르러 이러한 조치를 하게 된 배경은 무엇일까.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이미 호구법과 호패법의 실시로 많은 隱丁이 수괄되었고 量田의 결과 전국의 전결수 도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호구 토지조사를 바탕으로 인정과 전결을 동시에 고려하는 새로운 봉족지급법을 실시하는 한편 대토지소유양반에 대한 加役제도를 강행하게 된 것이다. 그러다가 태종말부터 세종초에 이르면 군역은 인정의 다과로, 요역은 전결의 다소 로 정한다는 규정이 확립되었다. 태종 17년에 인정은 영농에 우선적으로 써야 함으 로 출군 시에도 영농에 필요한 인정을 남겨두기 위해 입역의 기준을 인정의 다소로 정하고 賦斂은 소경의 다소로 기준을 마련하자는 것이 제기되었다.57) 그후 세종 2년 에는 군정을 초출할 때는 인정의 다소로, 잡역은 그해 농작의 답험한 실수로 정하여 肥瘠에 따르는 불균등을 없애자고 하였다.58) 세종대에는 특히 생산력을 높이기 위한 영농에 힘써 군역과 요역의 부과기준이 차이가 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세 종 후반에 이르러 군역과 관련해서는 出軍은 마땅히 소경지수를 기준으로 한다 59)로 그 지향이 집약되고 있었다. 세종의 이러한 지향은 제반 역제를 토지를 중심으로 통 일적으로 건립하고자 한 것으로 군역의 기초가 되는 토지가 임의로 방매되는 것을 제한한 것이나60) 시위군의 번상수도 풍흉의 연분에 따라 조정고자 한 점과 뜻을 같 이하는 것이다.61) 그러나 이같은 과도기적 혼란은 세종 31년에 군액의 加定이 있게 되자 지방의 사정에 따라 所耕之數 를 기준으로 삼는 곳이 있는가 하면 人丁數 만을 57) 태종실록 권33, 17년 윤 5월 계미. 58) 세종실록 권10, 2년 11월 기사, 僉議 簽軍則用人丁多少 雜役則用其年踏驗實數. 59) 위의 책 권112, 28년 4월 을묘. 60) 위의 책 권29, 7년 8월 병신. 61) 위의 책 권114, 28년 11월 갑술.

- 221 - 기준으로 삼는 곳도 있었다.62) 조선초기 군역의 부담자인 농민들이 보유한 실제 평균 토지 면적은 어느 정도였을 까. 이에 대한 자료는 매우 적어 추측할 수밖에 없다. 고려말기 이래 조선초기에 걸 쳐서 농업생산력은 커다란 발전을 해 왔다. 왜구의 침입이 심하였던 후반기에는 내 륙의 하천가를 중신으로 활발하게 진행되다가 14세기 말 이후 다시 하삼도의 연해지 방이 크게 개간되었다. 水田에 있어서 연작농업이 확립되고, 旱田에 있어서 2년 3작 식의 단초적 성립이 이루어졌다.63) 이러한 농업생산력의 발전에 따라 직접적 생산과 정에 있어서 소경영의 존재형태 또한 크게 진전하고 있었다. 實志 에 의하면 전 국 농토에 대하여 전국의 가호가 보유하는 평균 토지 면적은 약 8결 미만인데 여기 에는 대토지 경영의 농장같은 것이 포함되어 있기 때문에 매호당 실제 평균 보유면 적은 이보다 훨씬 적었다고 하겠다. 즉 앞서 본 바와 같이 조선초기 수세 단위였던 5결이 작정의 기본단위가 되었으리라 생각된다.64) 그것은 태조 2년의 한 하교에 의 하면 작정의 단위가 10결 혹은 5결로 조정되고 있으며 세종 중기까지에는 작정의 단 위가 5결로 굳어진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65) 그러나 실제 농민들이 보유한 토지의 결수는 이보다도 적었다. 세종년간에 있어서 일반 자연호의 평균 소경결수의 크기는 다음의 사료를 통해서 알 수 있다. ① 戶曹正郞張脩 回自江華復命啓曰 新置牧場內 移徙民戶一百九十三所 耕水旱田共 六百六十九結.66) ② 京畿監司據陰竹縣監林穆呈啓 縣屬無極驛 越入忠州之地 請將驛里民戶九十六 田 三百十三結九十六卜 與縣附近忠州之地 相換定屬.67) ③ 慶尙道都事權枝辭 引見曰 下三道地窄民稠 耕三結之家 有子三人 若分其田 則一 人只耕一結 民生焉得裕乎.68) 사료 ①은 세종 8년 5월 기사로 강화도 목장으로 이사한 민호 193의 소경전이 669 결이라는 것이다. 호당 평균을 내보면 강화도의 경우는 3.46결이 된다. 사료 ②는 세 종 9년의 기사로, 京畿 陰竹縣 無極驛에 거주하는 민호는 96호이며 전결은 313결 96 62) 위의 책 권120, 31년 8월 을축, 今諸道各色軍 各於元額 加五分之一 其抄定節目 備嘗受敎行 移 今各道 或以京軍士及從仕人本家率居人與奴子 盡數抄定 或不考軍籍付不付 徒以所耕之數 抄定 或一家內勿論正奉足 徒以人丁數 加抄定 騷擾莫甚. 63) 李鎬澈, 朝鮮前期 農業經濟史 (한길사, 1986). 64) 李載龒, 앞의 논문 p.196. 65) 태조실록 권4, 2년 8월 기축 및 세종실록 권74, 18년 9월 갑오. 李榮薰, 앞의 논문 p.37. 66) 세종실록 권32, 8년 5월 병진. 67) 위의 책 권35, 9년 정월 신해. 68) 위의 책 권94, 23년 12월 기유.

- 222 - 부를 가지고 있다. 무극역의 경우는 호당 평균 결수는 3.27결이 된다. 사료 ③은 세 종이 하삼도민에게 평안도로 이사할 것을 권유하는 내용인데 하삼도에서는 인구에 비해 경지가 좁기 때문에 자식이 셋 있는 농가의 경작규모가 고작 3결 정도로 1인이 1결을 경작하는 지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위의 사료를 종합해 보면 조선초 농가의 호당 평균 경작 면적은 논 밭 모두 합하 여 3.3결 정도였다. 이러한 것은 세종 20년에 被災田에 대한 논의가 활발히 전개되었 을 때 黃喜 등이 올린 상계에서 10결 이상을 경작하는 자는 모두 부호한 민호이며 대체로 3 4결을 가진 자도 적다 69)고 한 데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당시 농민들이 소유하거나 보유한 경지는 세종 12년에 貢法의 실시여부를 논의하던 중에 비옥한 땅을 경작하는 자는 1결에서 백석을 거두는데 척박한 땅을 경작한 자는 불과 10석에 지나지 않는다 70)라고 하듯이 땅의 비척에 따라 생산량의 차이가 심하였다. 이 사료 에 나타난 농민들은 하층 농민들이라 할 수 있는데 이들의 땅은 上等田이라기 보다 는 대부분 下等田이었다고 할 수 있다. 당시 作丁의 단위가 5결이었던 것으로 보아 소농민들은 2 3호가 아울러 1정군을 냈던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세종 28년에 集賢殿 直提學 李季甸 등이 貢法에서의 災傷5結 문제를 논의하면 서 소민의 토지는 불과 1, 2결이 많은데, 1, 2결 소경전이 모두 재상을 입었는데도 국가에서 빠짐없이 그 세를 징수하면 그 민호는 무엇으로 부세를 바치며 장차 무엇 으로 부모와 처자를 부양할 것인가 라고 하여 재상 5결의 법을 폐기할 것을 주장하 면서 농민들의 토지 소유량이 1, 2결이 많음을 시사하고 있다.71) 그러나 농민들의 소 유경지의 면적은 지역에 따라 차이가 있어 집약농법이 발달한 선진지역보다 상대적 으로 조방적인 후진지대에서 평균 경작규모가 컸을 것으로 보인다. 일반 농촌에 비 해 한성부 개성부와 같은 대도시의 근교 지역에서는 호당 평균 소경전은 1결의 규모 가 못되었고72) 경지가 부족한 산간지역의 경우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계층별로도 큰 차이가 있어 수십결에 달하는 대호로부터 1결 남짓한 빈호에 이르기까지 커다란 분 화가 있었다. 小民의 토지는 불과 1 2결이 많다 는 기사는 하삼도에서의 하층민의 경제상태를 표현한 것으로 여겨진다. 이것으로 보아 조선초기에는 경지 5결 이상을 보유하는 가호는 많지 않고 호당 평균 경작 면적이 3.3결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농가 가 1 2결 내지 2 3결을 보유하고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호수와 봉족 사이에는 경제적인 관계가 형성되고 있었다. 봉족이 입역에 있어서 경제적인 상조자이지만 점차 사회적으로는 호수와 종속관계를 맺게 된 것으 69) 위의 책 권83, 20년 11월 경지, 生齒日繁 田土則無加於古 故耕十結以上者 皆富戶之民 有田 三四結者 盖亦少矣. 70) 세종실록 권49, 12년 8월 무인. 71) 위의 책 권112, 28년 6월 갑인, 小民之田 不過一二結者 多矣. 72) 李榮薰, 앞의 논문 p.37.

- 223 - 로 생각된다. 이미 태종조에 봉족을 부리기를 자기 노예와 같이 하여 도망하여 흩어 지는 자가 있다고 하였다.73) 그리고 권세있고 부강한 양반들이 울타리를 넓게 치고 그 안에 여러 살림집을 마련하여 많은 인정을 숨기고 있었다.74) 이들 대규모 호는 중앙의 왕족이나 관료의 외방 농장의 호이거나 品官 鄕吏 등과 같은 재지 지배층의 호였다. 이러한 사실은 品官 鄕吏들이 土田을 광점하고 유망민을 초납한다 75)든가 주군의 향리가 農舍를 설치하고 민호를 용익하여 노비처럼 사역한다 76)거나 牙山 戶長 全謹이 田地를 廣占하고 農莊을 많이 설치하여 良民을 영점한다 77)고 하는 등 실록에 빈출하는 기사를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이때 영점되는 사람들은 천인도 있었 지만 良民 즉 양인들이 많았기 때문에 군액의 확보에 문제가 되었던 것이다. 良民影占의 규모는 황해도 봉간의 記官 李峻이 자기 전장에 양민 5호를 영점한 소 규모에서부터78) 효령대군의 家奴 升才와 難奉이 340인의 유망민과 이와 별도의 60호 를 초납했던 대규모에 이르기까지79) 다양하였다. 세종 16년 함길도의 경우에는, 本道(咸吉道) 各官挟戶數多 今入居人家舍土田 仍給繼戶之人 則戶數復實 軍額不減 最是大節 預令各官 禁其豪勢 潛奪土田 破毀家舍 勿計彼我 官給其漏挟三四丁以上 可立軍役 自願繼戶者 若有冒濫爭奪者 糾而罪之 其中或稱族派 或稱本宮之奴 而奪占 者 有服之親 則取旨施行 其疎遠未辨者 及本宮之奴 幷皆科罪80) 라고 한 바와 같이 土豪들의 토전과 가사의 강점으로 挟戶가 대단히 많아 군액이 감 축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함길도의 경우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으로 사민을 장려하고 개간을 권장하는 상황 속에서 토호들은 개간을 통해 농장을 넓히려는 목적 에서 더욱 많은 인정을 영점하고 있었던 것 같다. 이와 같은 여러 토착적인 제관계가 매개되기 때문에 정군과 봉족간의 편제호의 내 부구조나 인정 구성 등에서 일정한 편차가 존재했다. 편제관계가 강한 족적 결합을 전제한 것이라면 강고히 존속할 수 있었으나 그렇지 못하여 비혈연관계로 묶였을 경 우는 心合力同 하기 어려워 그 편제관계는 해체될 위험을 안고 있었다.81) 봉족제의 편제관계가 분해되어 가는 배경에는 사회경제적인 요인이 있었다. 당초 73) 태종실록 권24, 12년 7월 임자, 下番甲士 其奉足使之如已奴 遂致逃散者 亦有之. 74) 세종실록 권88, 22년 2월 병진, 本國風俗 有子壻多者 出贅而結廬於家園之內 苟使守令密 察磨勘 以增減戶口爲等第 則破家還徙 必不得聊生矣. 75) 태종실록 권12, 6년 11월 기묘. 76) 세종실록 권10, 2년 11월 경오. 77) 위의 책 권23, 6년 3월 정해. 78) 위의 책 권116, 29년 5월 기유. 79) 위의 책 권86, 21년 9월 병진. 80) 위의 책 권63, 16년 정월 갑신. 81) 위의 책 권55, 14년 3월 갑술.

- 224 - 의 군호편성에서 군역부담의 지역적 차별성이 토호세력의 존부와 강도 내지는 농업 지대의 선진 후진에 따라 개재될 수 있었다. 아울러 자연재해와 그에 따른 인구이동 이 겹치면서 그 모순이 증폭되고 있다. 소유결수의 다과와 호당 구수의 차이는 군역 부담의 불균으로 이어지고 특히 열악한 농업지역에 자연재해라도 겹치게 되면 대규 모 유망 현상을 유발하게 되었다. 농민들의 유망은 자연재해의 영향으로 자주 지적 되는데 평안 함길 황해 강원 등지가 특히 그러한 지역이었다. 조선초기에는 휴한법을 극복하고 연작법이 보급되며 종래의 조방농업에서 집약농업기술이 발달하여 농업생 산력이 크게 증대하였고, 특히 삼남지방은 수전농업을 중심으로 더욱 발전하였으나 아직도 농업생산력의 상대적 저급성으로 인하여 흉년이 빈번히 들었으며 그때마다 대규모 유이민이 발생하고 있었다.82) 이들 유망하는 농민들은 그 지역의 호부가들에 게 영점되고 있었고 따라서 군정수가 감소하고 있었다. 제주도의 경우이지만 토호들이 자행하여 양민들을 自占하여 봉족이라 칭하면서 마 치 노예와 같이 부렸는데 나이 8 9세만 되면 점유하는 상황이었다.83) 호부가들이 봉족제를 이용하여 양민들을 침점하고 있음은 그들의 확대된 전지의 경작노동력을 확보하기 위한 하나의 수단이 되고 있었다. 따라서 봉족지급의 원칙상 가능하면 富 實한 자는 정군으로, 단약한 자는 봉족으로 삼고자 하는 국가 본래의 의도가 호부가 들의 편익에 따라 잘 운영되지 못하고 있었다. 2. 保法制와 農民經營 봉족제의 운용과정에서 드러난 폐단의 결과는 군호편제의 어려움과 良民 影占에 따른 국역인구의 감소로 나타났다. 군액의 확보에 대한 논의는 국초부터 항존했던 것이지만 그것이 본격화된 것은 세조대부터였다. 세조는 즉위하면서부터 군액이 감 소되는 가장 큰 원인이 바로 豪富家 내에 은점되어 있는 많은 협호 때문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면서 이의 쇄출에 적극적인 관심을 표방하였던 것이다. 또 세조는 3년에 종전 국경과 연해지역에 營 鎭을 두어 방위에 임하였던 방어체제를 내륙에까지 확대 하는 이른바 鎭管體制를 시행하면서84) 군액의 확대를 이루고자 하였다. 당시의 양반호들은 많은 호를 끌어 안고 있었다. 비록 경차관을 파견하더라도 양 반들의 세력에 눌려 제대로 수행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85) 양반들은 직영지의 경우 82) 오종록, 15세기 자연재해의 특성과 대책 ( 역사와 현실 5, 1991). 83) 세종실록 권36, 9년 6월 정묘. 84) 鎭管禮制에 대해서는 閔賢九, 앞의 책 참고. 85) 세조실록 권2, 원년 9월 병자, 軍士助丁 皆用良民 然本國良民 無役者少 不可一充給 雖 遣敬差 勢不能行 徒爲騷擾.

- 225 - 자기 소유의 노비들로 경작하였으나 병작지의 경우에는 노비 뿐만 아니라 몰락한 양 인전호와 국역부담을 피하기 위해 투탁한 양인들을 통해 경작하였다. 양반들은 노동 력의 확보를 위해 몰락 농민들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① 全羅道觀察使李石亨啓 道內海邊遠浦幽谷 多有沃饒閑曠之地 鄕吏驛子 公私賤口 徙邊軍民等流移逃竄者 繼踵來居 萃爲淵藪 其中豪富者 自作魁首 更相誘致 圍匝長 籬 籬內之戶 或至數十餘家 稱爲一戶 隱漏丁口 或奪人妻妾 或濫殺牛馬 恣行無忌 近里之人 畏其豪强 莫敢開口.86) ② 長籬圍設之家 率皆鄕曲豪猾 里正畏其氣勢 莫敢誰何 守令亦視爲餘事 自今觀察使 嚴加糾摘 籬內三戶以上屯居者 當身及里正 坐以隣境人戶隱蔽律 守令罷黜.87) 사료 ①은 세조 원년에 전라도 관찰사가 도내 연해지에 호부자가 유민을 초납하여 설치한 장리 내에 10 여 家가 취거하면서 1호를 칭하고 있는 것을 보고한 것이다. 호 부가들이 울타리를 넓게 치고 그 속에 여러 가호를 만들어 많은 인정을 숨기고 있었 던 것이다. 따라서 세조는 사료 ②에 보이는 바와 같이 이에 대응하여 전라도의 長籬 을 철거하는 작업을 시작하여 편제호에 대해 일대 타격을 가하였다. 세조의 조치는 전라도만을 대상으로 한 것이었으나 이후 세조년간의 일대 호구제 개혁의 기점을 이 루게 되었다. 특히 전라도의 경우 토호의 장리호가 유난히 발달하여 노동력이 부족한 지방의 토호들이 일반적으로 몰락양인인 피역양인들을 농장 내에 招集하여 사역시키 고 있었던 사정을 고려할 때 타도에 비해 전라도의 군역부담이 무거워 보인다. 그러 나 사실은 많은 인정을 가진 부호에게는 상대적으로 가벼운 부담이 되었다. 이때 추 쇄의 규식으로 울타리내 3호 이상의 존재를 부정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이 조치는 자 연호 3호의 결합으로 이루어진 초기 호의 구조를 그대로 공인하는 것이었다. 양인의 군역부담은 지방별로 차이가 있어서 강원 황해 평안도는 1정이 1호가 되고 경기 충청도의 경우는 인정이 크게 누락되지 않았고, 경상 전라 함길도 6진에서는 오 히려 수십인이 1호가 되었으며, 유망자가 많은 강원 황해도의 산군민은 1호가 수호의 역을 감당해야만 하였다. 判書雲觀事梁誠之上書 今本朝戶口之法不明 江原 黃海 平安道 多以一丁爲一戶 慶 尙全羅道及咸吉道六鎭 或有數十人爲一戶 而京畿忠淸道 不至甚濫 江原黄海山郡之民 流亡失業 以一戶供前日數戶之役 日以彫弊 慶尙全羅沿海之郡 豪猾之家 外爲一門 內置 數家 如或刷之 乘船入海.88) 86) 위의 책 권2, 원년 10월 을묘. 87) 세조실록 권5, 2년 9월 정축. 88) 위의 책 권7, 3년 3월 무인.

- 226 - 위의 자료에 나타난 梁誠之의 상소에 의하면 戶口之法 이 불명한 탓으로 호당 인 정수가 도별로 큰 차이가 있기 때문에 국역의 부담이 고르지 않아서 강원 황해도에 서는 유망민이 발생하여 1호가 수호의 역을 져야 하는가 하면 경상 전라도 연해지역 에서는 토호들이 1호 내에 여러 家를 끌어안고 함께 살고 있음을 지적하였다. 호내 의 인정수의 차이가 호수와 군호수의 비례관계 즉 일정규모의 인정수를 전제한 군호 편성에서의 도별차이로 나타나고 있었다. 강원 황해 평안도 등 인구가 허소한 지역과 경상 전라도 같이 인구밀도가 높고 지주들이 다수 존재하며 피역이 많은 지역은 군 역부담에 있어 서로 상당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세조는 이러한 지역적 차별과 신분적 차별을 파괴하기 위해 계속된 개혁을 실시하 였다. 세조는 4년 1월에 漏戶 漏丁의 쇄출을 추진하고 挟丁을 자수하게 하여 호적에 등재시켜 양인 농민을 안정케 하도록 하였고89) 4월에 제도 관찰사에게 유시하기를 관찰사가 직접 순행하여 수령을 면유하고 20세 이상은 錄籍하여 바치게 하고 그 요 점에 힘써 소요가 일어나지 않도록 하라고 당부하였다.90) 또 같은 해 11월에 내린 救弊事宜를 통해 노비수와 전결수를 상고하여 부실한 군사가 助丁을 많이 받고 빈한 한 호는 조정의 지급이 없이 모두 역에 동원되는 폐단을 바로 잡을 것을 명하였 다.91) 이어 세조 5년에는 호패법을 실시하여 많은 은정 누정을 수괄했기 때문에 군액 이 대폭 증가하였고92) 양계의 익군과 시위군을 묶어 정병에 합칭하여 일원화시켰으 며 세조 10년에 영진군과 수성군 방패 화포군 등을 정병에 합속시켰다.93) 그리고 세 조 7년 7월에는 함경도를 제외한 전국 7도에 각기 경차관을 파견하여 신호적과 신군 적을 작성하도록 하였다. 이때에는 양반부호들이 울타리를 넓게 치고 그 속에 여러 가호를 지어 많은 인정을 숨기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호부가와 같이 자신의 가원내에 여러 세대의 살림집을 두고 은정을 은루시키고 있는 거호의 협호를 모두 쇄출하여 별도의 호적을 가지게 하였다. 改正戶籍軍籍 付以事目 一. 諸道戸籍 用號牌案 錄戶首率丁 其廣作長籬 就籬內 別 構家舍 稱爲一家者 刷出作戶 一. 單寒人 無所依托 或爲人雇工 或爲婢夫 寄寓者 拘於 良人 別立戶 則必至逃散 依率丁例.94) 위의 내용은 울타리 내에 별도의 가사를 구축하고 1호를 칭하는 것을 일체 허용치 89) 세조실록 권11, 4년 1월 경자. 90) 위의 책 권12, 4년 4월 경신. 91) 위의 책 권14, 4년 11월 계사. 92) 위의 책 권15, 5년 2월 갑인. 93) 閔賢九, 앞의 책 참고. 94) 세조실록 권25, 7년 7월 임술.

- 227 - 않고 모두 쇄출하여 작호하되 다만 의탁할 데가 없는 고공 비부와 같은 단한인들은 호주의 솔정으로 인정하여 작호의 대상에서 제외한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대 호구제 개혁에 의해 隱丁과 漏戶가 쇄출되고 자연호 자체가 호구파악의 기본단위가 되었다. 이러한 개혁에 의해 전국적 호총이 實志 의 20만여 호에서 70만여 호로 증대하고 있었다. 이와 같은 호구제의 개혁을 통해 세조는 10년 정월에 보법의 실시에 대해 구상하였다. 御書曰 軍籍無策 軍民無定 予亦因仍 此予不德 今詳情理 宜有三家奉一家 二家奉一 家 一家奉一家 定家內丁數 急速改正 以實軍 以安民 令諸將觀之.95) 즉 3가가 있어서 1가를 봉하는 경우와 2가가 있어서 1가를 봉하는 경우와 1가가 있어서 1가를 봉하는 경우의 3가지 군호 형태를 구상하였다. 그후 세조는 결국 2정 으로 결정하였는데 종전의 3가 1호의 군호형성의 원리가 부정된 결과라 하겠다. 이어 세조는 같은 해 5월에는 군액을 늘리고 양반대호에 影占되어 있는 隱丁을 수 괄하기 위하여 호패법을 실시하였다.96) 그 결과 어느 정도 성과를 거두었는 듯 같은 해 8월에 양성지가 올린 상소에 국가가 군호를 추쇄한 결과 경상 충청도의 군호가 2만호에서 11만호로 늘어났고 경상도에는 4만호에서 30만호로 늘어났으니 다른 도에 도 그러할 것이다 97)라고 하였듯이 급격한 호수의 증가를 보이고 있었다. 그리고 10 월에는 下三道에 軍籍使를 파견하여 軍籍作成을 독려하게 하였다. 이때 보법에 관한 내용이 나타나는 데 간략히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1. 2丁을 1保로 한다. 2. 田5結은 1丁에 준하도록 한다. 3. 奴子도 奉足數로 계산한다. 4. 각 兵種別 給保額은 다음과 같이 4등급으로 나눈다. 4保 : 甲士 3保 : 騎正兵 吹螺赤 2保 : 平虜衛 破敵衛 近仗 別軍 步正兵 大平簫 騎船軍 1保 : 烽燧軍 防牌 攝六十 5. 漏丁 漏戶를 엄격히 단속한다. 6. 雇工은 軍籍에 넣지 않는다. 7. 各司 各官의 職役人에게는 3인 이하의 同類族親을 奉足으로 지급한다. 95) 위의 책 권32, 10년 정월 무인. 96) 세조실록 권33, 10년 5월 경신. 97) 위의 책 권34, 10년 8월 임오, 今國家推刷軍戶 忠淸道本二萬戶 今爲十萬戶 慶尚道本四萬戶 今爲三十萬戶 以二道推之 他道皆然.

- 228-8. 먼저 作保하고 다음에 給保한다.98) 위의 내용을 보면 첫째, 보법은 군역편제가 이전에 자연가호를 중심으로 한 3정 1 호제에서 인정을 중심으로 한 2정 1보제로 바뀐 것이라 하겠다. 보법은 二丁爲一保 라는 새로운 급보원칙을 내세워 입역자를 돕는다는 역호제 자체의 본질에는 변화가 없었으나 助戶給與規定은 이전과 달리 유역자의 가족성원 수까지도 포함해서 편성하 게 되었다. 보법은 무조건 2정을 단위로 하여 획일적으로 묶어서 하나의 법제적 호 인 보를 창출함으로써 당시의 강인한 혈연적 유대관계에 구애받지 않고 대호나 소호 를 막론하고 인정수에 따라 그대로 군역을 부과한 것이다. 인정이 많은 대호에서는 몇 개의 보가 만들어질 수 있으며 단정의 빈호는 토지준정의 원칙이 적용되지 않는 한 다른 호와 더불어 작보되며, 여정은 인정되지 않았다. 둘째, 보법개혁에 있어서 가장 큰 특색은 田5結을 1軍丁으로 간주하는 것이다. 이때 에는 아직까지 그 이전의 助戶給與規定과 마찬가지로 田五結准一丁 이라는 규정이 추 가되어 역호를 형성시키는 전결수를 5결 정도에 맞추어 각 역호의 규모를 균등히 하려 고 시도하고 있었다. 이러한 규정은 선초 이래의 논의가 귀결된 결과로써, 인정과 토지 를 군역부과의 기준으로 삼았음을 뜻하는 것이다. 이 전지 5결은 당시의 농민들이 소 유한 실질적인 평균 소유결수라기 보다는 빈부의 차이를 무시하고 국가가 이상으로 생 각하는 매호당 토지 소유면적의 평균치이며 작정의 단위이자 입역 단위를 이를 수 있 는 기준적 토지 소유 규모였기 때문에 많은 폐단이 발생하게 되었던 것이다.99) 셋째, 奴子의 准丁은 兩班富豪의 率丁을 모조리 군정으로 끌어내는 데 공헌하였다. 노자의 준정은 호부가들에게 보다 많은 군역을 부과하여 빈호와의 균형을 이루기 위 한 것이었다. 그 결과 호부가가 거느리고 있는 많은 挟戶나 漏戶를 쇄출하는데 기여 를 하였다. 그러나 호부가들에게 큰 불이익을 가져다 주는 것이기 때문에 이들에 의 한 많은 비판과 반대가 있었으며 수정이 계속 제기되었던 것이다. 넷째, 경제적인 기반이 없는 고공과 비부 등은 제외되었다. 보법의 실시는 그동안 군역이 부과되지 않은 계층의 파악이 목적이었으나 군역의 부담을 감당할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자들을 목적으로 한 것은 아니었다. 이들에게는 군역을 부과해도 이를 감당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결국 유리와 도망만 초래할 뿐이었다. 국가는 자립적 농민에 대한 직접적인 지배를 보다 강인하게 관철시키고자 하면서 생계조차 곤란한 양인에 대해서는 예외적인 처리를 해 주었던 것이다. 다섯째, 보법이 실시됨으로써 각 군정에게 돌아가는 봉족수는 약간 늘어난 셈이었 다. 甲士는 8丁 1戸, 騎正兵은 6丁 1戶, 步正兵은 4丁 1戸, 防牌는 2丁 1戶로 되었으 므로 3정 1호 를 넘지 않던 종래의 봉족수보다는 각 군정이 거느리는 봉족수는 많아 98) 위의 책 권34, 10년 10월 을미. 99) 李載龒, 앞의 논문 p.110.

- 229 - 지게 되었다. 정군에게 봉족을 가급해 준 것은 보법의 실시로 여정을 인정하지 않고 토지와 奴子도 군역부과의 대상으로 하는 대신에 봉족의 수를 약간 늘려줌으로써 정 군의 부담을 어느 정도 덜어 주자는 의도였던 것이다.100) 이러한 세조의 군액확대책에 힘입어 어느 정도 실제의 호구 수를 파악하게 되었다. 세조 10년에 군병에 대한 作保는 군액 확장에 획기적 박차를 가하게 되고 세조 12년 에 이르러서는 국역의 조직으로서 작보가 확대 적용된 결과 군액의 증가를 보였다. 그러면 이러한 보법을 실시하게 된 사회경제적인 배경은 무엇일까. 태종대의 己巳 量田 이후 세종대에 이르면서 양전에 더욱 힘써 課税地를 재편성하는 한편 개간을 장려하여 과세지를 확대해 갔다. 그리하여 과전법 실시 당시에 약 80만결이었던 전 국 토지 면적이 약 반세기를 경과한 때인 實志 에서는 약 168만여 결에 달하게 되었다. 약 2배 이상의 토지가 확보된 셈이다. 그리하여 세조 4년의 기록에 의하면, 我國壤地褊少 無田之民 幾乎十分之三 有田者有故而不能耕種 則隣里族親 幷耕而分 乃民間常事也101) 이라 하여 無田之民이 전체 농민의 3/10이었다고 말하고 있다. 즉 有田之民이 전체의 7/10을 점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들 유전지민 가운데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자들은 소규모 토지를 가진 소농민 경영이었을 것이다. 당시는 농업생산력 향상과 이로 인한 소농민경영의 안정이 진행되고 있었다. 많이 인용되는 자료이지만 세종 18년 강원도에 있어서의 각 농가호의 토지보유량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계층별 大 戶 中 戶 小 戶 殘 戶 殘殘戶 計 규모별 50결 이상 49 20결 19 10결 9 6결 5 0결 朝鲜初期 江原道 農民層의 土地所有實態102) <표> 호수 10호( 0.1) 71호( 0.6) 1,641호( 14.2) 2,043호( 17.7) 7,773호( 67.4) 11,538호(100.0) 총소유결수 800결( 1.5) 2,449결( 4.0) 23,795결( 38.5) 15,322결( 25.0) 19,432결( 31.0) 61,799결(100.0) </표> 호당평균소유결수 80.0결 34.5결 14.5결 7.5결 2.5결 5.4결 당시의 江原道에는 全戶首 11,538호가 모두 호당 평균 5.4결이라는 전결량을 보유 하여 자립할 수 있을 정도의 경지량이 있었다. 즉 세조조의 田五結准一丁 이라는 규 100) 閔賢九, 앞의 책 p.40. 101) 세조실록 권11, 4년 정월 병자. 102) 세종실록 권74, 18년 7월 임인 및 李鎬澈, 앞의 책 p.304 참고.

- 230 - 정을 가지고 보면 강원도의 총경지량에는 약 1만2천여 역호가 설정될 수 있었다. 그 러나 실제로 강원도의 경우 田五結 以上 호는 겨우 3,765호에 지나지 않고 5결 이하 의 잔잔호가 67.4%나 점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각 호간의 보유경지 차는 매우 심한 것이었다. 이와 같은 호등제에 대해 당시 강원도감사는 그것이 현실을 반영하기에 부족한 것이라 보아 3결 미만을 잔잔호로, 3 결 이상 6결 미만을 잔호로, 6결 이상 10결 미만을 소호로, 10결 이상 20결 미만을 중호로 개정할 것을 건의하여 정부의 승인을 받았다.103) 원칙적으로 토지 5결 소유 호에 군역이 부과되던 것에서 이제는 최소 군역을 부담할 수 있는 단위가 3 4결로 축소 조정될 수 있는 여지가 생긴 것 이다. 그 이전에 비해 적은 면적의 토지에서도 군역을 부담할 수 있게 되었음을 보 여주는데 그 원인은 단위 면적당 생산량이 증가한 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앞에서 살펴본 바와 같이 세종대의 농민들의 호당 평균결수가 3.3결 정도였음을 생 각하면 그 단위가 축소되는 이유도 쉽게 알 수 있다. 한편 위의 표에 의하면 농민층간에 상당한 분화가 일어나고 있음도 알 수 있다. 이 것은 한전 농업지대인 강원도의 실태였기 때문에 보다 생산력이 높았던 경상 전라 충 청도 등 남부의 水田 旱田農業地帶에서는 조금 덜 심각한 농민층의 분화가 있었을 것 으로 보인다. 세종 6년 토지매매가 허용된 이후104) 농민분화의 길이 촉진되고 그 결 과 농민들은 적은 결수의 토지를 소유하게 되었다. 즉 세종 중반 이후의 시기는 생산 력의 발달로 소농민의 자립성이 나타나는 반면 군역부과가 가능한 토지규모가 축소되 어 군역에서도 적지 않은 변동이 나타나게 되었다. 따라서 세조대에 이르러서는 경제 적으로 적은 규모의 토지를 소유한 농민들도 正軍으로 편성되게 된 것이다. 농민분화에 의해 생겨난 소농민경영은 곧 양인 자작농이었으며 이들이야말로 기본 적인 조세와 국역의 담당자였던 것이다. 세조의 호구제 개혁과 보법의 창설은 발전 해 오는 자연호적 소경영을 국역체제의 기본단위로 잡고자 했던데 그 의미가 있었 다.105) 보법은 세종대 이래의 농업경제의 발전에 기반한 농민층의 분화 등을 바탕으 로 군역을 토지와 결부시켜 보다 중세적인 형태로 발전시키고자 한 수취체제로, 군 역부과가 표준적인 자연농에게까지 확대가 가능하게 되어 그 이전의 군역담당층보다 경제적으로 영세한 계층들이 참여하기에 어려움이 적어지게 되었다. 보법은 세종 26 년의 貢法의 시행과 27년의 國用田制의 시행에 이은 수취체제의 개혁이었다.106) 그러나 세조조의 호패법과 보법의 실시로 인한 부작용도 적지 않았다. 누정을 수 괄하기 위하여 국가에서 軍籍使를 파견하였으나 혼자서 일을 다 처리할 수 없었기 103) 위와 같음. 104) 세종실록 권23, 6년 3월 을해. 이후 토지의 매매에 따른 공식절차와 소송상의 문제가 徑國大典 戶典 賣買條에 명기되어 있다. 105) 李榮薰, 앞의 논문 p.60. 106) 金泰永, 앞의 책.

- 231 - 때문에 군적사는 從事官에게, 종사관은 수령에게, 수령은 里正에게 책임을 분담시키 지 않을 수 없었다.107) 그러므로 군적은 결국 말단리에 의하여 작성되게 마련이었는 데 이들은 양반의 위세에 눌려 양반부호에게 부과해야 할 요역과 군역을 오히려 빈 민들에게 부과하는 경우가 많았다.108) 양반의 부담이 줄어드는 대신 일반 양인들의 부담은 가중되었다. 관리들은 군액을 늘리는데만 급급하여 여자를 남자라 하고 死者 를 生者라 하고 눈 멀고 병든 자를 군역에 충급하는 등 불법을 자행하였다.109) 그 결과 농민들의 군역 부담은 가중되어 갔고 그럴수록 농민들은 생산량 증대에 힘썼으나 지주제의 전개에 포습되어 전호나 고공 노비로 전락해 들어갔다. 군역을 지 는 대신 농장주의 병작이라는 생산관계에 굳게 예속되어 경제외적 강제를 받게 되었 다. 심지어 빈민들은 승려가 되거나110) 유리사산하여 혹 양반의 노비로 투탁하거 나111) 무릉도나 삼봉도 같은 섬으로 들어가 숨어 버리는 자들이 많아지게 되었다.112) 세조의 의도하는 바는 隱丁 漏戶의 수괄 등 부호를 대상으로 한 것이나 결과적으로 단한인의 수괄 즉 기식자 또는 유망자 등의 수괄이라는 역현상을 나타냈고 여기에는 부호들과 관리들의 농간이 개재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기민이 속출하는 가운데 도 적들의 집단활동도 적극적이 되어 가고 있었다.113) 보법으로의 개편은 중앙집권적인 군호파악을 위한 시책이었으나 양반들에게는 불 리한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보법을 수정하려는 양반관료들의 노력도 집요하였다. 세조가 죽자 그것은 더욱 구체화되었고 그 중에서도 梁誠之의 보법에 대한 비판이 대표적이었다. 工曹判書梁誠之上書曰 前日以人二丁爲一保 以田五結亦爲一保 以此作保 以編軍籍 臣以爲保卽戶也 以三丁爲一保 則一人爲戶首 以之治兵 一人爲率丁 以之治農 一人爲餘 丁 平時則供賦役 行軍則持輜重 此則一保實矣 今以二丁爲一保 則一人治兵 一人治農 又供賦役 此則保不實矣 以四弱戶養一騎兵 不若以三富戶 養一兵也 況平時差役之時 則 以田之多寡 爲役之輕重 以均賦役 安有以東方百萬之衆 而以田五結准一丁 而可乎 乞 罷准田之法 以人三丁爲一保.114) 예종이 즉위하자 梁誠之는 여러 차례의 상소를 올려 2정 1보가 보로서 단약하고 107) 세조실록 권39, 12년 6월 기유. 108) 위의 책 권46, 14년 6월 임인. 109) 위의 책 권46, 14년 6월 임인. 110) 세조실록 권77, 8년 윤2월 신유. 111) 성종실록 권16, 3년 3월 정유. 112) 위의 책 권11, 2년 8월 정사. 동 권19, 3년 6월 정축. 동 권72, 7년 10월 기묘. 동 권115, 11 년 3월 무자. 동 권145, 13년 윤8월 무인. 113) 한희숙, 15세기 도적활동의 사회적 조명 ( 역사와 현실 5, 1991). 114) 예종실록 권6, 원년 6월 신사.

- 232 - 토지 奴子의 准丁이 불합리하며 雇工 才人 白丁 匠人 등의 作保가 현실적으로 어렵다 는 것을 들어 보법의 내용을 수정할 것을 강력히 주장하였다. 특히 그는 2정을 1보 로 하면 1정은 戶首로서 治兵하고 1정은 率丁으로서 治農하면 여정이 없어 군호가 부실해지니 3정 1보로 하여 1정은 호수로서 치병하고 1정은 솔정으로서 치농하고 나 머지 1정은 여정으로서 불시에는 부역하고 난시에는 輜重케 하여 군호를 충실하게 해야 한다고 하였다. 그리고 准田法을 폐지하고 3정을 1보로 하자고 주장하였다. 세 조 이전의 군호제로 되돌아 가고자 하는 것이 목적이었다. 보법은 성장해 오는 소농 민 경영을 바탕으로 하였으나 그 자체 속에 농업노동력의 고갈을 초래하여 자연가호 의 생활기반을 크게 위협하는 내재적인 조건을 잉태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양반부호들의 주장은 받아들여져 성종대에 가서는 보법의 수정이 이루어져 經國大典 兵典 給保條에서 대체로 다음과 같이 규정되었다. 1. 2丁을 1保로 한다. 2. 각 兵種別 給保 수는 다음과 같다. 2保 : 甲士(兩界甲士는 1丁을 加給) 1保 1丁 : 騎正兵 吹螺赤 大平簫 水軍 1保 : 步正兵 壯勇衛 破敵衛 隊卒 彭排 破陣軍 漕卒 烽燧軍 差備軍(雜色軍도 같음) 3. 奴子는 半減 給保한다. 4. 正軍의 호에는 2정에 한하여 率丁을 인정한다. 이 규정을 세조조의 보법과 비교해 보면 2정을 1보로 하는 것은 변함이 없으나 田5結准1丁 의 원칙이 이때에 이르러서 폐지되었음을 알 수 있다. 토지를 군역부과의 기준으로 참작하고자 한 조선초기 제군왕의 입장이 부정되었다. 그리고 奴子准丁도 반으로 줄어들게 되고 각 병종별 급보 수가 감소되는 대신에 정군호에 대해서는 솔 정 2인을 인정해 주었다. 결국 고려사회와는 달리 군역제가 토지와 분리되어 순전한 인정지배의 체제로 귀착되어 호별의 장정수에다 그 초정기준을 두고 가족성원에까지 파고드는 率丁制를 도입하고 있다. 급보규정 중에 가장 특징적인 조항은 동거족친 가운데 몇 사람에게는 타역을 정하지 않는다 라고 한 率丁制의 출현으로 입역에 차 정된 戶의 子 婿 弟 姪 가운데 일정수까지를 無役人으로 만들어 입역호의 영농조건을 한층 구체적으로 보완하려고 한 것이다. 이것은 이미 토지소유관계의 추이가 수조권 보다는 소유권적 토지지배 관계로 이행해 가고 있던 이 시기에 있어 구체적인 인정 을 대상으로 하는 군역부과의 기준을 토지에서만 찾는다는 것은 여러가지 모순이 많 았기 때문이다. 시간이 갈수록 농민층의 토지소유 상태가 田5結 1准丁 의 기준을 적 용시킬 수 없을 정도로 불균형한 상태로 전개되었기 때문이었다. 요컨대 보법이 부정되어 간 추세는 인정구성이 상대적으로 풍부한 상층농의 이해

- 233 - 관계가 군제를 규정해 갔음을 의미한다. 또 전결의 불고려와 노비의 반감 급보 및 보 인 정액의 감액 등은 결과적으로 호부가들에게 상당히 유리하게 수정된 것이다. 이같 은 결과는 강력한 국가의 권력으로도 혈연적 자연적 유대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호부 가들의 경제적 기반을 쉽게 무너뜨릴 수 없었던 것에 기인하였던 것으로 생각된다. 결국 보법의 시행으로 군액은 대폭 확대되었으나 양반층 상층양인 농민은 대거 군 역에서 빠져나가는 한편 소농경영의 비자립적인 하층농민들이 수괄되어 농민부담이 가중되는 결과를 낳았다. 군역의 부담이 가중되자 토지 소유 그 자체에서 배제된 하 층농민과 소농민들은 타인의 경영으로 흡수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들은 솔거노비 나 전호로 전락되어 갈 수밖에 없었다. 3. 代立收布制와 農民經營 토지 또는 경제력에 기반을 두지 않은 채 인정에 기반을 둔 성종대의 보법은 농민 의 부담을 가중시키게 되고 국역부담자들의 피역과 유리도망을 초래하였다. 그리고 정군과 봉족의 관계가 생산관계와 겹쳐지면서 정군의 봉족 수탈이 심화되어 갔다. 保法 실시 이후 正軍과 保人의 관계는 각자의 생활권을 위협당하였고 자신의 생활 권조차 위협을 받게 된 정군은 자기에게 배정된 보인에게 무리한 부담을 요구하였 다. 이미 예종 때에 호수가 보인에 대해 수탈한 면포가 월 8, 9필에 이르는 현상이 나타나기 시작하였다. 예종 원년 3월 병조의 상소에 의하면, 諸色軍士助丁助役價錢 無定數 故毎於番上時 侵奪助丁 綿布人八九匹 因而破產 或至 逃散其弊不貲請自今後番上時 除自願備馬 或隨從者外 近道三日程則人二匹 遠道則四匹 備給 從之115) 라고 하여 諸色軍士 助丁의 助役價가 법적으로 정액되지 않고 있음과 이로 인해 正 丁이 번상할 때마다 조정을 침탈함이 심하여 綿布 8 9필을 징수하기 때문에 조정이 파산 도산하는 폐단이 컸음을 말하고 있다. 호수가 보인으로부터 함부로 면포를 징 수하면 신고하도록 했지만 보인은 호수에 비하여 약자이므로 실제 그렇게 하지 못하 였다. 따라서 이때 조역가를 공정하게 되었는데 그 규정에는 役價의 납부로서 보인 의 임무수행을 원하는 자에 한하여 近道 3일정은 포2필, 遠道는 4필로 하며, 그 이상 보인으로부터 포를 남징하면 보인의 신고에 의해 처벌하도록 하였다.116) 조역가를 공 정하는 목적은 강제 대립으로 인해 정군 호수에 의한 조역가의 남징을 막고 봉족의 115) 예종실록 권4, 원년 3월 갑오. 116) 위와 같음.

- 234 - 과중한 부담을 덜어주어 입역 단위인 역호를 지속적으로 재생산하는데 있었다. 그 후 經國大典 兵典 給保條에서 助役價는 1인당 매월 면포 1필을 초과할 수 없다 라고 개정되었다. 보인으로부터 1인당 매삭에 면포 1필 이상을 거두지 못하도록 한 규정은 보인에게서 수포가 널리 행해지고 있었고 호수가 보인으로부터 잡물을 남 수하는 경향이 있었음을 시사하는 것이다. 이 규정은 예종 때의 규정에 비하여 보인 의 부담이 줄어 들고 있다. 그러나 실제 호수와 보인과의 관계는 수탈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잔잔호 가운데 無田之民을 포함한 전호수가 증가할수록 잔잔호의 정정호에 대한 봉족으로서의 의무나 부담보다도 전호로서 지주에 대한 경제적 의존관계가 더욱 우선적인 것으로 되어 갔기 때문이다. 정정과 봉족의 관계는 이것을 실질적으로 형성 하는 지역에 있어서의 지주 전호관계, 즉 당시의 생산관계를 나타내는 것을 의미한다. 따라서 이 관계에 의해서 전호의 지주에 대한 예속성도 한층 강화되어 가는 것이다. 지주제의 전개와 아울러 15세기 후반 이후의 군역체계는 代立制가 보편화되어 갔 다. 원래 대립은 당번군사의 질병이나 기타 부득이한 경우에만 허용되었지만 15세기 후반부터 변칙적으로 운행되었다. 지배체제가 안정되고 외침에 대한 위험이 상대적 으로 줄어들자 군역자원으로 농민을 징발해야 하는 실질적인 필요가 줄어들어 국가 에서는 양인 농민이 역을 피하거나 몰락하여 농장에 투탁하는 것을 적극적으로 저지 하지 않는 경향을 보였다. 그러나 대립은 단한한 소농민의 자연농적 기반을 해체시 켜 이 시기에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있었던 지주 전호제를 더욱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기도 하였던 것이다. 田5結 1准丁 의 원칙이 무너진 뒤 정군에 배정된 보인은 정군 의 경제적 뒷받침을 감당하지 못하여 보로부터의 이탈을 스스로 행하지 않을 수 없 었는가 하면 때로는 외부로부터 그들의 이탈을 강요하는 예가 곁들여 보법의 붕괴는 한층 촉진되어 갔다. 따라서 경제적인 기반이 취약한 보정들에게도 솔정을 지급하고자 하는 방안이 마 련되기도 하였다. 호부가들은 보인에게도 솔정을 인정할 것과 부자를 다른 군역에 차출하지 말 것을 다시 주장하였다. 그리하여 성종말에는 정군 이외의 보인에게도 솔정 2인씩을 인정하였다.117) 성종 25년 1월 保人率丁 지급여부를 둘러싸고 토의하는 가운데 성종은 보인도 역시 군졸이므로 단신으로 종군하여 집에 솔정이 없으면 실 업 도산하게 되어 정군 역시 단약해져서 군역을 감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大典續 錄 에 따라 보인에게 솔정 2명을 지급한다 고 하였다.118) 정군에 배속된 보인의 가 중한 부담과 그 허약성이 문제가 되어 보인을 돕고자 하는 보인솔정을 지급하게 된 것이다. 이틀 후 보인솔정지급문제를 놓고 논의한 가운데 한 호내에 3부자가 있으나 가난하기 때문에 정군을 내지 못하고 3명이 각각 타인의 보정이 될 때 그 가호는 세 117) 성종실록 권285, 24년 12월 병인. 118) 위의 책 권286, 25년 정월 정유, 第念 保人亦是軍卒 單身從軍 而家無率丁 則將失業逃散 正 軍亦至單弱 不堪其役必矣 依大典續錄 各給率丁二人爲可.

- 235 - 가지 역을 담당하지 못할 것이므로 보인에게 솔정을 지급하는 것이 타당하다고 하였 다.119) 호단위의 부과원칙이 무너짐에 따라 한 자연가호에 수개의 상이한 역이 부과 되기도 하였다. 따라서 부자 형제 사위가 다른 군역에 차출되는 경우에는 사정이 허 락하는 한 完聚시키도록 했다.120) 한 가족이 여러 국역을 담당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 해 솔정을 설정해 준 것이다. 父子完聚는 군호편성을 자연가호를 중심으로 한다는 원칙을 강조한 것이며, 보인 에게도 솔정을 2인씩 지급한다는 것은 가내의 여정을 다시 인정하는 결과였다. 이것 은 여외정병의 설정을 통해 지주제의 전개로 인해 열악해 가는 자연호의 역부담을 제도적으로 안정시키려는 궁여지책이었다. 그러나 소농민경영에 종사하는 양민신분이 몰락하고 상대적으로 노비신분이 증대 하는 것이 15세기 후반의 시대적 상황이었다. 無田之民을 주로 하는 잔잔호의 일부 는 이미 정정호를 포함하는 지주호의 토지를 차경하지 않고서는 정정호의 입역에 협 력할 수가 없는, 즉 당시의 병작제 하에서 전호경영을 행하지 않을 수 없었던 계층 이다. 급보 또는 솔정의 지급과 같은 행정적 집행만으로는 무전지민은 물론 빈호의 재생산조건을 보장하여 군호 안에 편입시키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였다. 군호편제 에 있어서 이미 전호가 되어 있는 빈호나 무전지민을 대상으로 하지 않을 수 없었는 데 이 경우 가령 잔잔호가 정정호의 주역에 협력하는 봉족으로서 정정호의 토지를 차경하고 있는 전호가 되어 있다면 군호의 내부에 있어서는 지주 전호관계라는 사적 지배예속관계가 정정과 봉족 관계와 중복해서 나타나는 셈이 되었다. 한편 성종대에 이르면서 국방의무와 군사적 의무가 해이해지고 군역이 요역화되어 정병이 본역에 종사하는 경우는 드물고 오히려 각종 토목공사에 차출되어 역졸화하는 현상이 보편화되어 갔다.121) 이와 함께 정정의 보인에 대한 군포수취가 이루어지는 그 과정에서 강제대립도 성행해 갔다. 번상정병이 보인으로부터 조역가로 받아 온 면 포를 군역 대행자에게 지급하고 在家力農 을 위해 귀향하던 것이 관행이던 代立은 보 법실시 이후 군역 담당자가 부족한 농업노동력을 위하여 취하거나 혹은 번상하여 군 사활동이 아닌 힘든 토목공사 등 가혹한 노동에서 벗어나고자 하였기 때문에 점차 성 행해 갈 수밖에 없었다.122) 정군대립은 水軍의 경우 이미 세종조에서부터 있어 왔 다.123) 수군은 군역 중에서도 가장 고역인데다가 세종조부터 이미 토목공사 등에 동 원되는 역졸로 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124) 문종 때 선군의 경우에 입번하지 않으면 119) 위의 책 권286, 25년 1월 기해, 一家有三父子 而貧不得已正軍 則必爲他人之保 各當三役則 何以堪 然則保人給率丁 實是良法. 120) 위의 책 권217, 19년 6월 병진. 동 권293, 25년 8월 경신. 121) 李泰鎭, 앞의 논문 참고. 122) 위와 같음. 123) 세종실록 권116, 29년 4월 임인, 議政府據兵曹呈啓 船軍不得代立之策 若有代立者 代 替之人與替身 竝依律論罪 從之.

- 236 - 月令이라 하여 매 1월당 포 3필, 또는 米 9두를 징수하였다.125) 이들은 역졸로서의 고 역을 면하기 위해 사람을 사서 이를 대립시키고자 하였다. 그리고 군역을 지는 것보 다 대립을 해서라도 농가경제에 힘쓰고자 했던 것이다. 그러나 代立價가 점차 상승함 으로써 농민 부담이 증가되고 이로 인해 몰락하는 경우가 오히려 증가하였다. 세조 때에는 군액확장 이후 번상병의 증가에 따라 경중 미곡가격이 등귀하여 번상 병이 일정한 조역가만으로 경중에 오래 머물 수 없었다.126) 외방의 이주민이 경중에 대거 몰려들어 경중인구가 조밀해지자 경중빈민들은 생계를 유지하기 위해 상당수가 군역을 대행하고 그 대가로 일정한 액수의 傭價를 지급받고 있었다. 代立은 군역제도를 무너뜨리는 요인 중의 하나였기 때문에 국법으로 엄격히 금지 되고 있었다.127) 그러나 지방군에게는 일찍이 放軍收布의 현상이 일어나고 있었다. 방군수포는 특히 농토가 많은 삼남지방의 정군들을 중심으로 적극적으로 전개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군역을 대립시킨 정군은 그 대립가를 충당하기 위하여 보인으로부터 부당한 조역가를 강징하게 되었다. 대립가와 수포가가 올라갈수록 자영농민의 몰락 은 불가피해졌다. 대립의 결과 정군은 물론 보인까지도 도산하거나 그 처지가 열악 해져 노비가 되거나 하였다. 족친으로서 주어진 보인보다는 타호의 보인으로 주어지 는 경우에 있어서 수포의 남징현상도 있었으리라 생각된다. 또한 대립은 자의에 의 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아니라 타의에 의해서도 행해졌기 때문에 그 피해는 더욱 심 하였다. 京中各司의 奴子들이 정병의 입역을 다방으로 방해하여 결국은 대립을 하도 록 하였던 것이다.128) 代立價는 풍년 흉년에 따른 곡가의 변동과 면포의 생산량에 따라 유동적이었다. ① 軍保出綿布納戶首者 一年幾至三十匹 而度僧丁錢 不過十五匹 以此終身閑遊 此爲 僧之多也.129) ② 大典軍士保人 毎朔毋過綿一匹 而臣爲海州牧使 番上軍士點考時 有一人 手持綿布 七匹 跪而笑曰 我爲軍士保人 二朔給綿布七匹 戶首猶以爲少而杖之 此專是營繕煩而役 苦 代立者 倍取其直故保人盡賣財產而給之 役民不可不節也.130) 사료 ①은 성종 23년 1월 대사헌 金礪石이 올린 것으로 종신토록 신역이 면제되는 度僧丁錢이 면포 15필인데 비해 수군보인이 호수에 바치는 1년 보포가 30필이라고 124) 위의 책 권64, 16년 4월 무진. 125) 문종실록 권4, 즉위년 10월 경진. 126) 성종실록 권1, 즉위년 12월 계축, 127) 위의 책 권10, 2년 4월 병오. 128) 위의 책 권277, 24년 5월 무자. 129) 위의 책 권261, 23년 1월 신축. 130) 위의 책 권275, 24년 3월 임진.

- 237 - 하였다. 엄청난 부담임을 알 수 있다. 사료 ②는 성종 24년 3월 좌부승지 鄭謹誠이 올린 것으로 군사보인의 2개월 조역가가 면포 7필에 달하여 보인이 재산을 팔아서 지급한다고 했는데 이것은 經國大典 에 규정된 조역가, 즉 1달에 면포 1필을 초 과할 수 없다고 한 규정의 3.5배이다. 代立價는 갈수록 심하여져 번상 정병의 당번 기간 1개월의 대립가가 8필 9필에 해당하였다.131) 따라서 성종 24년에 이르러서는 병조에서 대립절목까지 만들어 정병 대립을 공인하게 하였다. 이때의 정병대립가는 매월 1인당 3필씩으로 經國大典 의 규정에 비해 3배의 인상이었다.132) 그러나 이것은 법조문일 뿐 지방군에 대한 방 군수포는 번상정병의 경우처럼 價布의 공정이 이루어지지 않은 채 불법적으로 행해 졌다. 호수와 봉족과의 유대 관계 하에서 보포가 일반화되어 가자 더욱 放軍收布의 보편화를 촉진시켰다.133) 이와 같이 많아지는 군포를 부담할 능력을 상실한 몰락 농 민들은 역부담을 피하기 위하여 국가가 관여할 수 없는 사역관계, 즉 노비신분으로 전락하여 양반의 농장 등지에 투탁하여 전호가 되었던 것이다. 군역의 대립으로 인 해 代立價와 收布價가 올라갈수록 자영 농민의 몰락은 불가피해졌다. 한편 군역의 대립제 수포제로의 변화는 이 시기 면포생산의 발전과 긴밀한 관련을 지니는 것이었다. 보인이 정군에게 조달하는 경비는 당초에는 양식이었으나 점차 면 포로 바뀌여 갔다. 면포는 식량보다 운반에 편리했고 당시 화폐의 기능을 하고 있었 기 때문이다. 布貨는 고려 이래 마포가 정포로서 사용되다가 15세기 면화재배가 널 리 보급됨에 따라 점차 면포가 마포를 구축하고 성종 초년에 이르면 國弊로서 확고 한 기능을 하고 있었다.134) 또한 15세기 후반부터 지방의 장시가 발달하면서 면포의 화폐적 기능이 더욱 활발해졌던 것도 군역의 포납화를 촉진시키는 계기가 되었을 것 으로 생각된다. 포의 원료가 되는 목면재배는 이미 세종대에 장려되고 그 재배법이 마련되었다. 면화를 보급하려는 노력은 세종대부터 적극적으로 이루어졌다.135) 4군 6진의 개척과 사민정책에 수반하여 북방지역에도 면화의 재배가 적극 권장되었다. 이는 필수적으 로 하삼도 농법의 북방이식을 동반하였고 그것은 영 호남의 선진농법을 담은 농서편 찬으로 표현되었다.136) 이후 세조와 성종의 계속된 사민책과 적극적인 권농책에 의해 北路種綿政策이 실천에 옮겨졌다.137) 131) 위의 책 권277, 24년 5월 병술. 132) 성종실록 권278, 24년 윤5월 신축. 133) 李載龒, 朝鮮初期의 奉足制 p.112. 134) 金丙河, 조선전기의 화폐 유통 포화유통을 중심으로 ( 경희사학 2, 1970) pp.30 31. 135) 조선초기 면화의 재배에 대해서는 閔成基, 四時纂要 種木綿法과 朝鮮綿作法 ( 朝鮮 農業史硏究, 一潮閣, 1988) pp.305 310 참고. 136) 세종실록 권40, 10년 윤4월 갑오. 동 권41, 10년 7월 계사. 137) 성종실록 권54, 6년 4월 기사.

- 238 - 따라서 성종대 이후로 가면서 면포의 생산이 증가하고 경상도에서 이앙법이 거의 전반적으로 채택되어 생산력이 증가하는 것으로 파악된다. 이러한 경제적인 변화와 아울러 양반층의 군역회피가 만연해져 가고 농민층에게 군역이 전가되어 농민부담이 가중되어 갔다. 양인 농민들은 상호간에 광범한 분화상태를 이루었고 그 과반수는 매우 취약한 재생산구조의 하층농민들이었다. 그들 빈농은 과중한 국역부담 때문에 쉽사리 유망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그들 유망민의 국역부담이 저절로 감면된 것은 결코 아니었다. 군역은 고정된 군총에 묶여 집단적으로 강요되었고 이에 유망한 빈 농들의 국역은 언제나 남아 있는 농민들의 추가 부담이 되었다. 이와 같은 부담의 연쇄고리에서 중 상층의 농민들에게는 국역부담은 감당할 수 없는 가혹성으로 다가 와 그들을 파산시키고 있었다. 따라서 국가에서는 이들 양인 자작농들을 형식적이나마 보호하려고 하였다. 經 國大典 戶典 田宅條에 의하면, 無田主 移給他人(有軍役者 死亡移徙則給遞立者 無役人則給田少者 移徙者五年內還 則還給 執耕者元無田則還給三分之二) 라고 하여 주인이 없는 전지는 타인에게 옮겨주는데 병역의 의무가 있는 자가 사망 하거나 이주했을 때는 그 전지를 대신 병역을 지는 자에게 주며 병역의 의무가 없는 자의 전지는 田少者에게 준다고 규정하였다. 군역을 담당하던 양인 자작농이야말로 국가가 소농민경영을 안정시킬 필요를 직접적으로 느끼는 농민층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러한 법조문과 관계없이 15세기 후반에는 토지의 집적에 따라 외방에 양 반들의 농장이 발달해 갔다. 농장은 開墾 賜田 長利 濫奪 奇進 買得 등 여러 방법에 의하여 확대되어 갔는데 이들 농장은 호역 군역 등이 불법적으로 면제되거나 경감되 는 특권적 위치에 있었다. 따라서 이 시기에는 양반토호 등의 대규모적 토지집적에 기초한 농장경영이 전개되고 있었던 것 뿐만 아니라 매우 불안정한 소농민 경영도 병존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국역부담에 시달리는 주변의 소농민들이 이 농장으로 자 주 투탁했으며, 농장주는 그들을 불법적으로 영점하면서 노비처럼 사역시켰다. 그 결 과 노비적 처지로 몰락한 농민들이 급격히 늘어났다. 이러한 사실은, 今者 齊民之中 私賤十居八九 良民僅一二而安富者 摠是私賤 貧困者 摠是公賤 是公 賤與良民 所以然者 凡守令之赴任也 公卿大夫 知與不知 皆持酒肉而餞之 請其奴婢完護 上下成俗 名之曰稱念爲守令 皆亦多出於其門 故不敢不從 凡有公役 皆令公賤良民當之 不及於私賤 良民公賤 不能支 率多逃遁 以傭諸私賤 雖世傳田宅 亦不能保盡 歸諸權 門 138) 138) 성종실록 권91, 9년 4월 기해.

- 239 - 라고 한 사료에서 私賤이 10의 8 9이고 良民은 겨우 1 2에 불과하다 고 한 다소 과 장된 표현에서 잘 알 수 있다. 또 여기에 지방 아전들의 가렴주구나 지방 토호들의 탈세 행위로인해 농민들은 더욱 어려운 상태에 놓이게 되었다. 그 결과 15세기 후반 이후에는 농민경영을 유지하기 위한 한 방책으로 軍役이 收布制로 바뀌게 되어 신역 에 바탕을 둔 군역제도 자체를 붕괴시키는 하나의 단서를 제공하게 되었던 것이다. 요컨대 15세기 후반에 들면서 地主制의 발달과 收取體制의 변화, 즉 物納의 형태 인 代立收布制로 변화하면서 身役制에 기반을 두었던 조선초기의 軍役制는 점차 해 체되어 군포제로 변화되어 갔다. Ⅳ. 結 論 지금까지 조선초기 軍役負擔者의 確保策과 軍役制의 운용이 어떠한 특징을 가지고 있고 농민경영과 어떠한 관계에 놓여 있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앞에서 언급한 바를 차례 대로 정리하면서 결론에 대신하고자 한다. 조선초기 軍役은 양인 신분 가운데 경제적으로 군역을 부담할 어느 정도의 능력을 지닌 自作農 以上層을 중심으로 부과되었다. 연령은 16세 이상이면 의무적으로 군역 에 편성되도록 하였지만 正軍으로 편성되는 주된 부담층은 20세 이상이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奉足의 경우는 부호들의 강점으로 인해 16세 이하의 자들로 편성되 는 경우가 있었다. 조선이 건국된 뒤 국가는 재정확보와 국역체제의 정비를 위해 이의 근간이 되는 양인확보책으로 戶口法을 적극 정비해 갔다. 태조 2년 이전에 이미 戶籍이 작성되었 을 것으로 보이지만, 호적 군적의 작성을 위한 더욱 철저한 호구파악은 태종대의 호 패법과 인보법의 실시를 통해 이루어졌다. 이를 통해 많은 인정을 확보했으며 奉足 制를 실시하게 되었다. 이후 세종실록지리지 에는 태종 6년의 인정수에 비해 두 배에 가까운 수가 파악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국가가 파악한 호구는 국가가 필요 로 하는 인정수만을 대상으로 했기 때문에 실인구의 1 2할 또는 3 4할에 불과하였 고 개간 및 農法의 발달 등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함께 많은 노동력을 필요로 하는 양반 지주들의 양인 奪占 隱漏 등이 많아지면서 군액의 감소를 가져오게 되었다. 이 에 세조는 군액의 확대를 위해 7년에 호구제도에 대한 일대 개혁을 실시하여 인정의 급격한 증가를 보았다. 그리고 이것을 바탕으로 보법을 실시하게 된 것이다. 즉 조선 초기의 호구조사와 생산력의 발전은 군역체제의 변화요인이 되었던 것이다. 조선초기의 군역은 고려시대와 달리 토지의 급여와 같은 반대급부가 없는 순전히

- 240 - 의무적인 것이 되어 군인이 번상기간 동안에 필요한 제반경비는 모두 스스로 부담해 야 했다. 당시 양인 농민들은 대부분이 영세한 소농민으로 이들의 경제적 처지는 자 립도가 낮아 독자적으로 군역을 감당하기 어려웠기 때문에 봉족제가 시행되었다. 즉 上番立役하는 正丁(戶首)과 집에 머물러 농업에 종사하면서 정정의 입역을 경제적으 로 지원하는 奉足(保)으로 편성하였다. 정정의 경제력은 소유전결의 양과 동거솔정의 다과에 있었다. 봉족은 자연가호에 얽혀 있는 혈연을 매개로 한 친족집단과 지연을 단위로 지급하는 것이 가장 간편한 방법이었으나 꼭 그렇지는 못한 형편이었기 때문 에 국가의 힘에 의한 법제적인 軍戶를 편성하기에 이른 것이다. 봉족의 지급은 태조 3년부터 시작되었으나 아직 호구 파악이 제대로 되지 않은 상 태이기 때문에 봉족의 공정이 상당히 막연한 상태였다. 호수에 대한 봉족의 지급과 관 련된 본격적인 규정은 태조 6년에 이루어졌다. 이때에는 전결수의 다과가 전혀 고려되 지 않고 다만 인정 수만을 몇명 지급한다는 원칙이 적용되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計 丁 計田을 절충한 법을 공포하여 人丁만이 아니라 田結도 봉족지급의 새로운 기준으로 하였다. 그리고 태종 2년에는 군정의 소경전의 다소를 참작하여 軍籍을 만들었으며 태 종 4년에는 호수 봉족제에 대한 본격적인 규명이 마련되었다. 이때에는 호수 봉족제가 호간의 관계로 규정되어 봉족지급의 기준을 호의 토지 소유량, 즉 전결수의 다소에 두 고 2 3결 이하의 토지소유자를 봉족호로 삼고 보유전결이 부유한 호를 정정으로 차등 하는 원칙이 세워졌다. 그러나 태종 15년에 이르러 전결 이외에 다시 인정도 참작하는 방안으로 개변되었다. 이때에는 호패법이 실시되어 많은 隱丁이 수괄되었고 量田事業 의 결과 전국의 전결수도 어느 정도 파악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러한 호구 토지조 사를 바탕으로 하는 새로운 봉족지급법을 실시하는 한편 대토지를 소유한 양반에 대한 가역제도를 강행, 양인 농민층의 경제적 조건이 많이 반영되었다. 봉족제는 현실적으로 경작규모의 대소와 농업노동력의 다과가 비례 관계를 이루던 조선초기에 있어 토지의 소유관계나 소농민경영의 존재형태를 고려한 것이었다. 그러나 正丁과 奉足의 관계가 생산관계와 겹쳐지면서 정군의 봉족 수탈이 진행되 어 갔다. 권세있는 豪富家들은 많은 협정을 솔거하고 있으면서도 향리 등과 결탁하 여 군역에서 빠지기가 일쑤였다. 호부가들은 長籬을 설치하여 많은 인정을 차지한 반면 단한한 소농민들은 조정의 지급을 받을 수 없어 자영농의 기반이 흔들리게 되 었다. 이러한 폐단을 혁파하고 군액을 확장하기 위해 세조는 일대 호구개혁을 실시 하여 호부가들이 거느리고 있던 많은 挟戶나 漏戶를 쇄출하여 군액을 확대하였고, 이 호구제 개혁을 바탕으로 보법을 창설하였다. 또한 세종대 이래 농업의 발달과 생산력의 발전은 직접적 생산과정에 있어서 소농 민경영의 형태에 큰 진전을 가져왔고 그 결과 군역편성에 영향을 주어 세조대로 들 면서 보법의 성립을 이루게 하였다. 보법은 당시 발달해 나오는 자연호적 소경영을 국역체제의 기본단위로 잡고자 했던 것이다. 보법을 실시하게 되는 사회경제적인 배

- 241 - 경은 농업생산력의 발달과 소농민의 자립적 성장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2丁 作1 保,, 田五結 推1丁, 奴婢准丁 등의 규정은 호부가들에게 커다란 불이익을 가져다 주 었기 때문에 이들의 비판과 반대가 극심하였다. 결국 보법은 몇 차례 수정을 거치게 되어 經國大典 에 이르러서는 전결에 대한 고려가 완전히 제외되었는데 이것은 고려시대와는 달리 조선초기에는 군역이 여타의 國役과 분리되어 순전한 人丁支配의 체제로 귀착되어 갔음을 말하는 것이다. 기본적인 생산수단인 토지를 급보기준에서 제외한 것은 농민부담의 불균형을 초래하여 많은 토지를 갖는 富農에게는 유리하고 小農에게는 불리하게 작용함으로써 많은 폐단을 낳게 되었다. 양인자작농이 그 핵심 적인 담당자였던 군역은 더욱 가혹해졌으며, 결국 소농민들은 그 부담 때문에 점차 분해되어 노비화 전호화되어 지주제에 흡수되어 갔다. 身役에 바탕을 두었던 軍役은 예종대를 전후하여 점차 收布가 이루어지고 성종대 에 이르러서는 더욱 활발해졌다. 보인에게서 수포를 하는 것은 군역이 전결의 기초 위에 이루어지지 못한 때문이었다. 15세기 말기 이후 지주제의 전개에 따라 소농민 들의 자립적 위치는 불안해졌고 또 군병의 役卒化 현상이 진행되어 감에 따라 군역 은 苦役으로 전개되어 정군들은 이것을 피하기 위하여 대역을 원하는 자가 늘어났 다. 또한 役處의 관원과 吏奴의 강요에 의해 본의 아니게 대립가를 물고 강제 대립 하는 경우도 있었다. 이같은 상황하에서 정군은 점차 보인에 대한 대립가 수탈자로 변신해 가고 한편으로 보인 뿐만 아니라 정군들도 노비로 전락해 갔다. 그러나 군역 이 收布制로 변화해 간 배경에는 면업의 성장에 따른 면포의 생산확대와 장시의 발 달에 따른 상품경제의 진전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간과할 수 없다. 요컨대 조선초기 군역의 운용체제와 농민경영은 밀접한 관계에 놓여 있었다. 즉 국가는 법제호 중심에서 자연호 중심으로 또 농민의 토지 소유량을 고려한 봉족제에 서 人丁만을 대상으로 징발하는 保法으로 운영해 나가는데 이것은 농업생산력의 증 가와 농가경제의 향상을 바탕으로 한 소농민경영의 자립성을 반영한 제도의 변화였 다. 그러나 소농민경영의 불안정성과 운영상의 모순으로 인해 농민들의 군역부담은 항상 과중하게 부여되었고 대토지의 확대에 따른 생산경쟁에서 뒤진 소농민의 몰락 으로 이루어졌다. 결과적으로 양인농민의 피역이 대량 발생하고 이를 농업경영에 끌 어들여 佃戶化하는 地主制를 강화시켜 나갔다. 봉족제의 실시와 보법의 실시는 부유 한 양반 지배층이나 최소한 小農民層의 경제적 능력이 있는 농민들을 기반으로 하여 편성된 것이었으나 농업생산력의 향상과 농업경영의 변화에 의해 지주제가 전개되면 서 소농민층의 분해와 부담가중을 가져오게 되었다. 결국 군역은 쌀 면화의 생산증가 를 바탕으로 대립수포제가 이루어지지만 결과적으로 身役에 바탕을 둔 役制가 收布 에 기반한 物納役으로 전개되어 간 것을 의미하였다. 지금까지의 논증에도 불구하고 본고는 여전히 많은 문제점과 한계를 가지고 있다. 이러한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본고를 마치려고 한다. 첫째, 군역과 요역과의 상관관계

- 242 - 및 요역과 농민경영의 상관관계에 대해 고찰해야 할 것이다. 둘째, 군호의 편성에 관 해 본격적으로 다루지 못하였다. 이 문제는 국역편성의 가장 기초적인 문제이지만 본인의 역량상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은 다음으로 미루고자 한다. 셋째, 군역과 신 분적인 측면에 대한 보완적인 것으로 당시의 친족 가족구조 및 상속형태와 관련하여 면밀히 검토되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점도 이후로 미루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