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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ranscription:

高麗 士大夫와 元 制科 高 惠 玲* 머리말. 高麗 士大夫의 元 制科 應擧. 元 制科에 及第한 高麗 士大夫. 元 制科에 及第한 士大夫의 性向 맺음말 Ⅲ Ⅰ Ⅱ 머리말 14세기 전반의 高麗는 30 여년간의 蒙古와의 항쟁을 끝내고 講和를 이룬 후 元에 의한 각종의 압력, 즉 정치적 位相의 格下, 日本 遠征에의 군사적 지원, 기타 人的 物的 수탈로 시달려왔다. 王室은 元의 附馬가 되어 종속적인 체제가 굳어져 가고 있었고, 元은 世祖 이후 漢化政策을 더욱 적극화하면서 高麗에 대한 정치적 간섭도 더해갔던 시기이다. 고려는 元 帝國의 아시아 지배체제하에서 거의 유일한 獨立國으로 존재하였고 그러면서 도 王室間의 通婚이라는 특수관계를 가져서 정치나 경제면에서 보면 억압과 수탈을 당하 는 측면이 강하면서도 특별한 친밀관계로 文化的으로는 교류가 더욱 활발하였다. 元이 비 록 중국을 정복하였으나 문화적으로는 도리어 漢文化에 압도되는 처지였고 남송의 학자 趙復을 북으로 招置한 이후 漢地출신의 儒者들이 중심이 되어 朱子性理學의 官學化가 촉 진되었다. 元과의 잦은 교류는 고려에 性理學의 수용을 가속화하였는데 당시 고려의 유학 은 前期부터 남송의 유학과 평행을 이룰 수 있는 수준까지 올라있어서 이를 수용할 수 있 는 문화적 기반이 충분히 마련되어 있었음은 이미 알려져 있는 사실이다.1) 元과의 관계가 긴밀해진 고려후기의 정치세력으로 일컬어지는 權門世族2)은 다양한 성 격의 집단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이들에 의한 정치문란, 不法的인 土地奪占 등의 행태 에 反撥하는 새로운 도전세력으로 일컬어지는 것이 新進士大夫이다.3) 고려말의 新進士大 * 國史編纂委員會 敎育硏究士. 1) 尹南漢, 儒學의 性格 한국사 6, 국사편찬위원회, 1975) pp. 247 249 참조. 2) 閔賢九, 高麗後期의 權門世族 한국사 8, 국사편찬위원회, 1974) 참조. 金光哲은 기존의 權門世族 의 용어에 불만을 표시하고 여러대에 걸쳐 고급관인을 배출함으로써 유력한 가문의 위 치에 있던 世族 의 동향을 검토하여 權門 과 世族 을 분리하였다金光哲, 고려후기 世族層과 그 動向에 관한 연구, 東亞大 박사학위 논문, 1987). 3) 士大夫의 개념은 학자적관료 또는 관료적학자로 정의되는데 李佑成敎授의 고려 무신집권기에 등 장한 能文能吏 型의 새로운 官人層이 신진사대부의 기원이 된다는 論文 이후 많은 관심이 집중

- 181 - 夫는 權門世族에 도전하여 改革을 추구하며 나아가 朝鮮建國을 주도한 정치세력으로 이해 되어 왔다. 歷史의 변동주체로서의 신진사대부의 성격이 뚜렷이 드러나는 것은 恭愍王代 이후라 할 수 있겠으나 이들이 정치세력화 하기까지의 신진사대부의 성격을 제대로 이해 하기 위해서는 시기별로 단계를 나누어 고찰하고 그를 類型化하여 실상을 파악하는 것도 하나의 방법일 것이다. 예컨대 能文能吏 형의 무신집권기의 신진사대부, 元과의 특수관계 속에서 朱子性理學 도입단계의 사대부, 그리고 恭愍王代 이후 元明交替의 국제정세의 변 동기에 기존의 정치 사회의 모순이 극도로 심화되어 이에 대한 改革을 요구하며 구세력에 도전하는 세력으로서의 신진사대부 등으로 구분하여 고찰함으로써 이를 통해 고려후기 士 大夫의 性格을 규명해 볼 필요가 있다고 생각된다. 이러한 취지에서 필자는 元 干涉期에 특징적인 士大夫집단으로서 元 科擧에 급제한 사 람들에게 관심을 집중시켜 보았다. 元 制科에 급제하여 官途에서 비약적인 출세를 하게되 는 신진사대부는 그들보다 前 또는 後에 등장하는 士大夫와는 다른 상황에 처해 있었고, 또 이 시기는 性理學이 새로이 수용되는 과정에서 중요한 위치를 담당하게 된다. 이 시기 에 元 制科에 급제한 士大夫들의 생애와 출신배경, 정치성향, 사상동향 등을 분석하여 麗 元의 二重構造속에서의 사대부의 성격을 유형화해 보려는 것이 본고의 목적이다. 그러나 극히 소수의 자료만 남아 있을 뿐이므로 충분히 해명하기에는 어려움이 있다. 그들 중 다 량의 저술을 남긴 李穀에 관하여는 필자가 이미 소개한 바가 있으나 앞으로 기타의 인물 에 관한 개별연구도 계속 진행하여 元 干涉期의 士:fc夫의 실상과 그 성격을 구체화 하고 자 한다. 先學의 叱正을 바란다. Ⅰ. 高麗 士大夫의 元 制科 應擧 元에서의 科擧는 仁宗 皇慶 2년1313)에 鄕試와 三場制에 대한 규정을 下詔하고4) 다 음 해1314)에 처음 실시되었다.5) 元은 이미 種族別 身分制를 확고히 하여 科擧의 科目 되어 士大夫의 실체를 언급한 연구가 다수 축적되어 왔다. 또 그 用語에 있어서도 士類 士族 士 林 등의 다양한 견해가 제시 되어왔다. 본고에서는 과거출신의 儒臣官僚를 지칭하는 의미로 士 大夫 를 사용하였다. 士大夫에 관계되는 論文은 다음과 같다. 李佑成, 고려조의 吏에 대하여 歷史學報 23, 1964). 金潤坤, 신홍사대부의 대두 한국사 8, 1974). 李起男, 忠宣王의 개혁과 詞林院의 設置 歷史學報 52, 1971). 李泰鎭, 고려말 조선초의 사회변화 진단학보 55, 1983). 金塘澤, 忠烈王의 復位과정을 통해 본 賤系 출신관료와 土族 출신관료의 정치갈등 동아연 구 17, 1989). 李成茂, 兩班의 槪念 朝鮮初期兩班硏究, 一潮閣, 1980). 4) 元史 권81, 志31 選擧1 科目.

- 182 - 國史館論叢 第24輯 에서도 蒙古 色目人과 漢人 南人을 구분하였는데 이는 儒學과 무관하던 몽고 색목인을 漢 南人과 같은 기준으로 試取하였을 때 나타날 결과를 상상해 보면 오히려 당연한 것으로 보아도 좋을 것이다. 반면에 전혀 이질적 문화기반을 가진 몽고 색목인에게도 儒學을 관 리등용의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평가해 볼 만 한 일인 것이다. 잠시 원 과 거의 내용을 소개하면,6) 蒙古 色目人은 第 1場에서 經問5條는 大學 論語 孟子 中庸 內에 서 設問하되 朱子 章句集註를 써야하고 第 2場은 時務策 한가지를 보는데 비해, 漢 南人 은 第 1場에서 明經 經疑 2問을 大學 論語 孟子 中庸 內에서 出題하는데 朱子 章句集註를 아울러 쓰고 經義는 詩經 尙書 周易 春秋 禮記 중에 하나를 택한다. 第 2場에서는 古賦 詔 誥 章 表 중에서 한가지로 시험하고 제 3장에서는 策問으로 經 史와 時務에서 출제하였 으니 그 부담의 정도는 蒙古 色目人과는 비할 바가 아니다. 특히 몽고 색목인으로서 漢 南 人의 과목을 시험보기를 원하여 선발된 자는 1등급을 加한다고 하였다. 여기에서 보면 四 書가 科擧의 공통과목이 되어 있고 設問에서는 朱子의 章句集註를 사용하게 하였으며 五 經에서 詩는 朱氏, 尙書는 蔡氏, 周易은 程氏 朱氏를 쓰게하고 3經에 古註疏를 겸용하게 하였으니 이미 朱子의 性理學이 官學으로 정착되었음을 볼 수 있다. 元은 중국에 과거를 실시함과 동시에 고려에도 科擧試行의 詔書를 내렸으니7) 忠肅王부 터 는 기존의 과거 외에 元 制科에 응시하기 위한 征東行省鄕試를 시행하게 되었다. 鄕試 는 元 지배하의 11개 行省과 2개의 宣慰司, 直隷省部路를 4分하여 모두 17개 지역에서 실시하여 合格者 300人을 會試에 赴試하게 하는데 그 중 蒙古 色目 漢人 南人을 나누어 각기 25人을 뽑는다. 향시합격자 300人은 4種族別로 각 75人으로 나뉘고 이들은 다시 지역별로 인원이 배정되었다.8) 이에 따라 고려에서도 征東行省 鄕試를 실시하게 되여 蒙 古 色目 漢人 각 1人이 배정되었다. 고려에서는 충숙왕 元年1314)에 정동행성 향시의 合格者 3人을 應擧하게 한 후 공민 왕 2년1353)까지 12회에 걸쳐서 元 制科에 응거하게 하였다. 그런데 고려에서의 응거인 은 주로 3人이었고 이들 모두가 고려인이었다. 즉 征東行省 鄕試에서는 몽고 색목인도 각 5) 과거제를 시행하는 데에는 당시 元都에 있던 忠宣王의 건의가 큰 역할을 했다고 다음과 같이 기 록되어 있다. 科擧之設 王忠宣)嘗以姚燧之言 白于帝許之 及李孟爲平章政事奏行焉 其源盖自王發也 李齊賢, 益齋亂藁 권9 上, 忠憲王世家). 6) 元史 권81, 志31 選擧1 科目. 仁宗 皇慶 2年 10月 考試程式, 蒙古色目人 第一場經問五條 大學論語孟子中庸內說問 用朱氏章句集註 其義理精明 文辭典雅者爲中選 第二場策一道 以時務出 題限五百字以上 漢人南人第一場 明經經疑二問 大學論語孟子中庸內出題 並用朱氏章句集註 復以 己意結之 限三百宇以上 經義一道 各治一經 詩以朱氏爲主 尙書以蔡氏爲主 周易以程氏朱氏爲主已 上三經兼用古註疏 春秋許用三傳及胡氏傳 禮記用古注疏 限五百字以上 不拘格律 第二場古賦詔誥 章表內科一道 古賦詔誥用古體 章表四六參用古體 第三場策一道 經史時務內出題 不矜浮藻 惟務直 述 限一千字以上成 蒙古色目人 願試漢人南人科目 中選者加一等注授. 7) 高麗史 권74, 選擧2 制科, 忠肅王元年正月 元頒科擧詔 令選合格者三人 貢赴會試. 8) 元史 권81, 志 31 選擧 1 科目.

- 183-1人씩 합격자를 내기로 되어있는데 사실상은 모두 고려인이었고 몽고인이나 색목인이 정 동행성 향시에 참여하였거나 또는 합격하여 元 제과에 응거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 다. 이는 元이 종족별 정원수를 규정해 놓았지만 현실적으로는 적합치 않았거나 지켜질 수 없었을 것으로 짐작할 수 있다.9) 고려의 士大夫는 이제 元 과거에 응거하여 합격함으로써 元의 士大夫와 어깨를 나란히 하여 자기의 실력을 발휘할 수 있고 나아가 元의 관직을 받아 사회신분적 위치를 한단계 도약시키는 기회를 얻게 된다. 이제 당시 儒者로써 最高의 영예인 元의 관직을 받은 급제 자들을 중심으로 그들의 사회 경제적 기반과 정치적 성향, 사상동향 등을 살펴보기 위해 高麗史 增補文獻備考 登科錄 에 수록된 元 制科 급제자를 아래 표 1 과 같 이 정리하였다. 표 1 고려 사대부의 元 제과 급제 <표> </표> 실시연도 충숙 충숙 충숙 충숙 충숙 충숙후 1315 2) 1 1318 5) 2 1321 8) 3 1324 11) 4 1327 14) 5 1333 2) 6?) 7?) 충혜후 충 충 충정 공민 공민 8 1342 3) 9 1345 목 1) 10 1348 목 4) 1351 3) 11 1354 3) 급 자 성적 震 第三甲十 崔 瀣 中 軸 第三甲七 趙 廉 李 穀 第二甲 辛 裔 李承 李仁復 輔 尹 之 제 五名 43名 21名 人 慶 元 授職 遼陽路 盖 判 遼陽路 盖 判 瀋陽路 事 翰林國史院檢閱 臺御史 詹事 大寧路 錦 判 遼陽 照磨 大寧路 判 州 官 州 官 知府 官 南 13 1357 14 6) 名 응거자 仁幹 등 震 軸 崔瀣 李衍 軸 趙廉 崔龍甲 李穀 朴 3人 宗 太子府 李仁復 尹 之 輔 郭珚 尹 之 白彌堅 中美 白彌堅 應奉翰林 字 翰 李穡 仁琯 林院編修 州 官 省 官 朴 李 穡 第二甲二 李天冀 升彦 崔 彪 李 舒 출전 : 史; 고려사 권74, 선거2 制科. 備考; 중보문헌비고 下185, 選擧考2 制科總目. 12 文, 金 출전 史 史 史 史 史. 備考...... 史 史 史 史 史. 備考 金 備考 15 9) 고려에 몽고인들이 다수 거주하고 있었음은 그 시대 사료에서 흔히 나타나는 일이고 그 중 간혹 유교적 소양을 가진 관료도 있다. 그러나 이들 중 征東行省鄕試에 응시했다는 기록은 찾을 수 없다. 특히 鄕試는 本貫을 따르는 것이므로 현실적으로도 불가능하다. 또 몽고 색목인의 정원규 정은 현실과 거리가 먼 원칙뿐의 제도이었고, 특히 4종족에게 공평하게 선발자수를 분정한 것도 전혀 현실적이지 못하다. 따라서 실제로 법대로 시행되었는지의 여부는 알 수 없고, 고려의 例 를 보아서는 형식적인 것이었을 뿐이었다고 생각된다.

- 184 - 國史館論叢 第24輯 표 1 에서 고려사 에는 고려에서 元 과거에 응거자를 보낸 것은 10회로 나타나 는데 이 중 2회는 급제자를 내지 못하였고 8회는 모두 급제자를 내었다. 고려사 외에 문헌비고 에는 급제년도를 밝히지 않은 制科 及制者가 더 수록되어 있는데 辛裔 李承 慶 등이며 이들을 모두 하면 고려후기 원 제과 급제자는 15人에 달한다.10) 원의 과거합격자는 종족별로 25人씩 배분하여 100명을 뽑는다고 하였으나 실상은 많이 달랐던 것 같다. 즉 廷試進士로 뽑힌 사람의 수는 이에 훨씬 못미치고 李穀이 급제하던 1333년에 가서야 크게 인원을 증가하여 100人에 달하였다.11) 이후 잠시 혁파되었다가 재개 되어서는 程式이 조금 변하고 國子生員을 몽고, 색목, 한 남인으로 3 分하여 合 18 표 2 元 과거의 실시와 고려인 급제자 <표> </표> 실시년도 1 1315 2 1318 3 1321 4 1324 5 1327 6 1330 7 1333 * 1335 * 1339 8 1342 9 1345 10 1348 11 1351 12 1354 13 1357 14 1360 15 1363 16 1366 장원 張起岩 霍希賢 宋本 張益 李黼 燁 李齊 罷 復 陳祖仁 張士堅 哲 允中 牛繼志 嗣 魏 楊輗 張棟 계 평균 廷試進士 고려 급 자 子 제 56 50 崔 趙 李 64 86 86 王 文 國 生員 97 100 ) 興) 78 18 78 18 王 宗 78 18 文 83 18 62 18 51 18 35 18 62 18 73 20 1139 164 王 宗 元 禮 震 瀣 軸 廉 穀 李仁復 輔 尹 之 李穡 李天冀 李舒 升彦 崔彪 金 71 10) 고려사 권74의 기록에는 응거 회수가 10회이고 급제한 사람은 8人이 된다. 그러나 增補 文獻備考 에는 趙廉을 비롯하여 7人이 더 수록되어 있다. 이 중 辛裔 李承慶은 급제년도가 밝 혀져 있지 않고 막연히 入元中制科 라 하였으니 이들은 鄕試를 통해 貢赴한 것이 아닐 가능 성도 크다. 또 고려사 의 기록에 누락이 있을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으니 이들을 모두 원 제과급제자의 범주에 넣어도 무방할 것이다. 원에서의 과거는 모두 16회로 1366년 元 멸망직 전까지 지속되었는데 고려는 13회때까지만 응거자를 보낸 것 같다. 특히 마지막 시기에는 고 려인이 2 3인씩 합격하는 좋은 성적을 보이고 있다. 11) 元史 권81, 志31 選擧1 科目.

- 185 - 人을 뽑았다.12) 그러므로 元史 에 나타난 기록으로 평균치를 잡아보면 廷試進士의 수 는 약 71人이고 이는 몽고 색목 한인 남인을 모두 포함하는 수이므로 고려인漢人의 범주 에 들어 감)의 制科及第는 대단한 영예를 의미하는 것이다 표 2 ). 그런데 이상의 元 制科及第者 15人 중 尹之 李天冀에 관한 자료는 극히 미비하고 金 升彥 崔彪에 관해서는 전혀 알 길이 없다. 또 마지막의 李舒는 공민왕대에 급제하여 麗末 에 활동하였으며 조선건국과정에서 李成桂를 도와 開國功臣이 되고 宰相에까지 올랐다. 李穡은 李穀의 아들로 역시 공민왕초에 服中上疏를 올려 시무책을 폈으며 麗末 政界의 巨 木이었고 性理學의 宗主가 된 인물이었다. 특히 李穡에 관하여는 다수의 개별논문이 있고 또 독립된 주제로 다루어야 될만한 人物이므로,13) 본고에서는 그 대상을 元 干涉期의 사 대부를 중심으로 하고 위에서 잘 알 수 없는 4人과 李穡 李舒에 대해서는 간략히 소개하 는데 그치려 한다. Ⅱ. 元 制科에 及第한 高麗 士大夫 1360) 震은 忠宣王 5년1313)에 權漢功 崔誠之가 試取하는 과거에 급제하여14) 藝文檢閱이 되었다. 그리고 忠肅王 4년1317)에는 元 制科에 응거하여 第三甲 十五名에 급제하였는 데 이 때 안진의 나이는 26세였다. 元 制科에는 1315년에 朴仁幹을 비롯한 3人을 보내 응거하게 하였으나 모두 낙방하고 震이 처음으로 급제하여 고려에서는 그에게 藝文應敎 摠部直郎정5품)을 주었다.15) 震에 관한 기록은 高麗史 에 드물게 보이고 東文選 에 그의 작품 일부가 남아 있으며 그와 교유한 儒者들의 文集에서 그의 자취를 더듬을 수 있을 뿐이다. 그의 영달과 제과 급제의 명예에 비하면 후세에 남겨진 자료는 극히 미미하다 하겠다. 震의 世系는 알 수 없으니16) 家勢가 한미하였던 것으로 추측되며 후손도 알려진 바 가 없다. 그는 충숙왕 9년1322)에는 晋陽元으로 나가기도 하였는데,17) 이는 元 制科 及 1) 震1293 12) 元史 권92, 志41下 百官8 選擧附錄. 13) 李穡에 관한 논문은 아래와 같다. 李銀順, 李穡硏究 梨大史苑 4, 1962). 啓賢, 李穡의 佛敎觀 趙明基華甲紀念 佛敎史學論叢, 中央圖書出版社, 1965). 朴 珠, 牧隱 李穡과 그의 政治思想에 關한 硏究 曉星女大論文集 25, 1982). 姜大哲, 李穡의 政治活動에 觀한 一考察 전남대 석사논문, 1983). 14) 高麗史 권73, 志 27 選擧 1. 15) 高麗史 권34, 世家 34 忠肅王 5년 6월 丁巳. 16) 高麗朝의 登科錄 에 그의 이름은 기록되어 있으나 家系에 대한 언급이 없다. 17) 震, 涵碧樓記 東文選 권68). 진양원으로 나간 것은 元 제과 응거 5년후이므로 1322

- 186 - 國史館論叢 第24輯 第라는 영예에 비해 閑職이었다 하겠으며 이후 10여 년간의 행적도 드러나지 않는다. 다 만 충숙왕 복위 3년1335)에는 李穀이 元에서 급제한 것을 축하하고 송별하는 詩를 지은 것으로 그의 존재를 확인할 수 있는데18) 여기에는 崔瀣와 李齊賢 權漢功 軸 등 名儒와 高官들이 참여하고 있다. 震의 朝廷에서의 활동상은 忠惠王대 이후에 보이는데 이때 震은 書筵에 참여하였고,19) 다시 忠穆王 즉위년1344)에는 다시 書筵을 설치하여 여러 유신들로 하여금 更日로 侍讀하게 하였는데 震은 密直副使로서 辛裔 軸 尹之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20) 또 忠穆王 2년1346) 10월에는 王이 下敎하여 李齊賢을 중심으로 閔漬가 찬수한 編年綱目 을 改修하게 하고 忠烈 忠宣 忠肅 세 왕의 실록을 편찬하게 하였는데 여기에도 李齊賢과 軸 李穀 震 그리고 李仁復 등이 참여 하고 있다.21) 이 때 震은 山君으로 被封되었으며 恭愍王 원년1352)에는 政堂文學종2품)에 올랐 다.22) 안진의 나이는 이미 60세로서 元老의 반열에서 높은 學德으로 恭愍王을 보좌하다 가 68세에 卒하였다. 震의 생애를 대략보면 元 科擧에 급제하기까지는 修學期를 거쳐 하급관인으로서 출세 길에 처음 발을 내딛는 과정이었고 元 制科及第 후에는 갑자기 高官의 지위로 뛰어올랐으 나 충숙왕대의 權臣과 측근세력에 의해 권력이 집중되어 있던 정치현실하에서는 政治的으 로 소외되어 있었다. 충혜왕대 이후에는 書筵에 참여함으로써 비로소 그의 학덕을 발휘할 수 있었고 忠穆王代에는 학문적 성향을 같이 하는 儒臣들이 중용되어 史書의 개수와 실록 을 찬수하면서 학적 기반을 더욱 확충할 수 있었을 것이다. 또 恭愍王代에는 관직도 높아 지고 書筵에서의 侍講을 통해 王으로써 갖추어야 할 규범을 가르치는 등 元老로서의 역할 을 다 하였다. 다음으로 그의 교우관계를 보면, 먼저 그가 실록찬수작업에 참여하였을 때 함께한 李齊 賢 軸 李穀 李仁復 등과는 평소에도 친밀한 관계를 갖었던 것 같다. 앞서 본 바와 같이 震은 이제현과 함께 충목왕의 서연에 참여하였고, 이곡의 東還時에 축시를 지었다. 또 軸과는 특별히 친히 지낸 사이였음이 그의 詩에 나타난다.23) 또 이들은 이제현을 제외 한 4人이 모두 元 制科 급제자였고 이제현도 충선왕시기에 고려를 대표하여 중국 학자들 과 교유할 정도의 명망있는 학자였다.24) 이 외에 東文選 을 통해서 그의 교우관계를 보면 崔伯淵 天台宗長老 了圓 辛裔 閔璿 년경이다. 18) 李穀, 稼亭集 附 稼亭雜錄. 19) 高麗史 권107, 列傳 20 元傅 附 松壽, 忠惠王御書筵 震言 臣等備員兩府不可竟日侍讀 宜 擇端士以備願問 遂薦松壽及閔湜 20) 高麗史 권37, 世家 37 忠穆王 즉위년 6월 乙卯. 21) 高麗史 권37, 世家 37 忠穆王 2년 10월과 同 권110, 李齊賢傳. 22) 高麗史 권38, 世家 38 恭愍王 원년 10월 壬寅. 23) 東文選 권14, 七言律詩 賀副學士判書軸 과 권19, 五言律詩 次謹齋題竹院. 24) 鄭玉子, 麗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 震檀學報 51,1981).

- 187 - 鶴林君公 王珣 金成用 등을 들 수가 있는데 이들 중 辛裔는 본고에서 차후 언급될 것이고 閔璿은 春軒 崔文度의 女壻이다.25) 東文選 에 수록되어 있는 11首의 詩를 가지고 그 의 학문과 사상을 추측하기는 어렵지만 명망있는 유신들과의 교유와 역임한 관직을 통해 그의 성향을 대략 짐작할 수 있다. 한편 불교와의 관련은 天台宗長老인 了圓을 통한 天台 宗계통의 사상적 영향도 짐작할 수 있다. 1340) 崔瀣는 崔致遠의 후예임을 자부하는 慶州崔氏가문출신인데 父 崔伯倫은 忠烈王때 장원 으로 급제하여 民部議郞정4품)에까지 올랐고 元에서 高麗王京儒學敎授를 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崔瀣의 가계를 보면 祖父는 檢校軍器監의 勳職을 가졌고 曾祖는 慶州司兵이었으니 아마도 그의 父 崔伯倫때에 장원으로 급제함으로써 중앙에 진출한 가문으로 보아도 좋을 것으로 생각된다.26) 崔瀣는 17세에 登第하여 成均學諭가 되었으나 父 伯倫의 일로 파직당하고 다시 藝文春 秋館에 選任되었다가 上官의 뜻에 어긋나 長沙監務로 貶出되었고 후에 藝文春秋館注簿에 제수되었다. 忠肅王 8년1321) 35세로 軸 李衍宗과 함께 元 制科에 응거하였으나27) 崔瀣만 급제하여 遼陽路盖州判官에 제수되었다. 27) 元의 관직을 받은 것은 고려인으로는 명예로운 일이었으나 변방의 한미한 직책에 만족하지 못한 그는 5개월만에 병을 칭탁하여 사직하고 고려로 돌아왔다. 이때 고려에서는 그를 맞이하기 위하여 三館이 迎賓館에 출영 하였고 관직도 藝文應敎정5品)로 뛰어 올랐다.28) 남다른 학문과 재주를 가진 崔瀣의 官歷은 그의 명성에 비해 그리 순조롭지 못하였다. 일찍부터 자주 관직을 옮긴 것은 上官과 맞지 않아 貶出되었기 때문이었으니 稼亭 李穀은 崔瀣의 墓誌銘에, 2) 崔 瀣1287 <위첨자> </위첨자> 君은 윗사람을 찾아다니면서 문안드리는 일을 잘 하지 않고 방탕하고 과감하게 말하면서 남의 善惡을 말하기를 좋아한 까닭으로 벼슬에 올랐다가는 갑자기 쫓겨나서 마침내 크게 쓰이 지 못하였다29) 25) 益齋亂藁 권7, 有元高麗國匡靖大夫都僉議參理上護軍春軒先生崔良敬公墓誌銘. 26) 崔瀣의 家系 崔秉一編, 慶州崔氏上系世譜 국사편찬위원회 소장, 古書 B10B-4). 27) 高麗史 권35, 世家 35 忠肅王 7년 10월 丁巳. 28) 高麗史 권109, 列傳 22 崔瀣傳.

- 188 - 國史館論叢 第24輯 고 하였으니 남의 비위를 맞추거나 원만하게 어울리지 못하는 성격을 가졌고 이 때문에 자기와 다른 자는 더욱 멀리 배격하였다. 이러한 자신의 성격을 스스로 깨달아 남들이 그를 꺼리는 것을 알고 있었으니 그가 말년에 쓴 自傳的 比喻文인 貌山隱者傳 에서는, 그의 성격이 남의 비위를 잘 맞추지 못하고, 또 술을 좋아하여 두어잔만 마시면 남의 좋은 점 나쁜 점을 얘기하기를 좋아하여 도대체 귀로 들은 것이면 입이 그것을 간직할 줄 몰랐다. 그러므로 남의 아끼며 중히 여김을 받지 못하였고 벼슬을 했다가는 문득 배척을 당하여 쫓겨 나게 되었다. 비록 친구들이 애석히 여겨서 그의 성격을 고쳐주려하여 권하기도 하고 책망도 하였으나 받아들이지 못하였다30) 라 하였으니 李穀은 대개 貌山隱者傳 에서 인용하여 崔瀣의 성격을 묘사한 것 같다. 그는 이러한 자신의 천성때문에 일찍부터 출세길에서 소외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생각하면 大德시절元 成宗代, 1297 1307)에 내 나이 한창 젊었나니 스스로 功名을 사랑하여 시끄러움 좋아하고 고요함을 싫어했다. 분주히 달렸으나 끝내 이름이 없었고 나아가나 물러가나 매양 좋아하지 않았네.31) 위의 시에서 그는 출세의 야망을 가졌으면서도 남들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아 불만스러운 자기의 처지를 한탄하면서 한편으로는 아래 시에서와 같이 스스로 이를 극복하고 초연하 게 지내려는 의지를 보여준다. 사람을 향해 심중의 말을 하니 어찌 다만 楚越과 같을 뿐인가. 이 세상과 너무나 맞지 않으니 가는 곳마다 길이 막혀 우노라. 어찌 권세에 아첨하고 싶지 않으랴만 본 뜻을 끝까지 지키려네.32) 29) 李穀, 稼亭集 권11, 大元故將仕郞遼陽路盖州判官 高麗國正順大夫 檢校成均大司成 藝文館 提學 同知春秋館事崔君墓誌 崔瀣墓誌 로 略稱), 君又不善伺侯 放蕩敢言而喜說人善惡 故 輒擧輒斥卒不大用. 30) 崔瀣, 拙藁千百 권2, 貌山陳者傳, 是其性不善於伺侯而又好酒 數爵而後喜說人善惡 凡 從耳而入者 口不解藏 故不爲人所愛重 輒擧輒斥而去 雖親友惜其欲改 或勸或責 不能納. 31) 崔瀣, 上已益齋席上得盛字 東文選 권4), 憶在大德間 吾年方甚盛 亦自喜功名 愛誼不愛 靜 奔馳竟無成 進退兩交病. 32) 崔瀣, 次韻答鄭載物子厚 東文選 권4), 向人說肝膽 奚啻楚越同 所以與時迃 到處哭途窮

- 189 이렇게 官途에서 성공하지 못한 그는 가난한 살림살이 속에서도 학문만을 굳게 지키는, 자부심에 가득찬 모습을 잃지 않고 있음을 엿볼 수 있으니, 평생에 이미 그릇 儒가 되었으니 이것이 내 몸을 꾀함에 졸하고 서툴렀던 것을, 내 이사할 때에 실을 물건 없음을 이상하다 하지 말라 그래도 성현의 經典만은 수레에 찼느니라33) 라고 읊었다. 평생 가난하게 지내고 官路에서도 뜻을 이루지 못한 崔瀣는 元에서 돌아와 藝文應敎로서 文翰을 맡았다가 충숙 13년1326)에는 檢校成均大司成이라는 勳職을 받게 된다.34) 이와 함께 藝文館提學 同知春秋館事의 겸직도 받은 것 같다. 이 후 그는 관직에 서 물러나 隱居하면서도 儒者들과의 교유는 지속되었다. 최해의 일생은 이렇게 소박하고 경제적으로도 빈한하였다. 또 아들도 없어 死後에는 친우들이 부의를 내어 장례비용을 마 련할 정도였다고 한다. 이 무렵의 그는 元 制科及第者로서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는 李穀 에게 주는 送別詩의 序를 쓰기도 하면서 우리나라의 名文을 모아 東人之文 을 편찬하 는 작업을 시작하였다. 그리고 문집으로는 拙藁千百 을 남겼다.35) 崔瀣의 학문에 관해서는, 君은 책을 읽고 문장을 짓는데에 스승이나 친구의 강습에 힘입지 않고 초연히 의리의 귀추 를 깨달았으며 異端에 미혹되지 않고 俗習에 빠지지 않았으며 古人에 합치되기를 힘썼다. 議 論이 같고 다른 점이 있으면 참으로 그 正道임을 알면 비록 老師 宿儒로 당시의 宗匠이 되는 자라도 힐문하고 꺾으며 자기의 생각을 확고히 하여 변하지 않았으니 君의 배운 바는 이러하 다36) 라고 李穀이 소개하였듯이 스스로의 탐구에 의하여 古人의 학문, 즉 聖賢의 뜻을 터득하 였고 특히 당시에 사대부들에게 일반적이었던 佛敎信奉을 배격하였다. 그의 학문에 대해 서는 그가 남긴 拙藁千百 을 통해서 우리는 그가 교유한 인물들의 성향과 그들에 의한 豈不欲媚寵 素志庶有終. 33) 崔瀣, 遷居 東文選 권20, 七言節句), 平生業已誤爲儒 是處謀身拙且疎 莫恠遷居無物載 聖賢經典尙盈車. 34) 高麗史 권109, 列傳22 崔瀣傳. 檢校職은 勳官으로서 종4品 이상에 주어지는 특전이었다. 고려말에는 檢校職이 濫授되어 조선초에 들어와서는 이의 정비가 큰 문제점이었다韓㳓劤, 勳官 檢校 考 진단학보 29 30, 1966, p. 94). 35) 益齋亂藁 권4, 送金海府使鄭尙書國俓得時字 에 의하면 공민왕 초에 鄭國俓에 의하여 처 음 판각되었다. 36) 稼亭集 권11, 崔瀣墓誌, 君讀書爲文辭 不資師友講習 超然自得於義理之歸 不惑異端 不 溺俗習 而務合於古人 至論同異 苟知其正 雖老師宿儒時所宗者 且詰且折 確持不變 君之所學如是.

- 190 - 國史館論叢 第24輯 최해에 대한 評價를 통해 그의 학문 수준을 엿볼 수 있을 것이다. 비록 官路에서는 上官 의 비위를 맞추지 못하고, 對人關係에서도 자기의 주장이 맞다고 생각하면 상대방을 가리 지 않고 자기의 뜻을 굽히지 않는 강직한 성격을 가졌기 때문에 소외되었으나, 이 점이 도리어 그와 학문세계를 같이 하는 사람들에게서는 높은 평가를 얻고 있었을지도 모르겠 다. 특히 그와 同시기 인물인 李齊賢과의 교유는 대단히 깊은 것이었다. 李齊賢은 고려 후기의 名儒로 누구에게나 잘 알려져 있는 바이지만 그가 평생에 가장 돈독한 學友로 손 꼽은 것이 崔瀣이었음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益齋는 軸과 崔瀣를 젊었을 때부터 깊이 사귀어 온 친우이고37) 특히 최해를 三益友 라 하면서38) 그를 추모하는 시에서 그의 뛰어난 문장력을 높이 평가하였다. 즉, 나는 평생 拙翁을 두려워하는데 세상과는 안 어울려 모두 그를 비웃었네 東人이 남긴 글을 손수 베꼈고 拙藁최해 자신의 글) 또한 기굴하게 써냈는데 한 번 보고는 장독덮개나 하려하니 뭇 아이의 어리석음 가소롭구나39) 하여, 최해의 뛰어난 문장력은 함부로 대할 수 없는 것이고, 그가 편집한 東人之文 과 拙藁千百 을 남긴 것을 높이 평가하였는데 그러면서도 世人의 인정을 못받고 있음을 한탄하였다. 최해도 역시 益齋에 대하여 선비는 헤어진 지 사흘만에 만나도 학문이 놀라 울만큼 진취된다는 말은 내가 益齋에게서 증험하여 알았다 40)하여 그의 학문이 날로 심화 됨을 찬탄하였고 옛날 朱熹가 歐陽修의 한 聯句를 칭송한 대목을 인용하여 以詩言之 是 第一等詩, 以議論言之 是第一等議論 이라 하였으니41) 이를 통해 崔瀣와 李齊賢의 학문적 교유와 최해의 朱子에 대한 접근도를 짐작할 수 있다. 최해가 관직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 도 그들의 교유는 지속되었고42) 益齋는 최해를 위해 그의 死後에 後儒仙歌를 지었다43) 益齋가 가장 친한 친우의 하나로 꼽았던 軸도 崔瀣와 같은 시대를 살았던 儒學者로서 자주 교유가 있었다. 軸과는 元 制科에 함께 응거하였고 詩會에서도 자주 함께 자리하 37) 益齋亂藁 권4, 詩 悼謹齋當之軸, 益齋少日日相從 只有當之與拙翁. 38) 益齋亂藁 권1, 詩 和崔拙翁, 寄語平生三益友 他時刮目更相從. 三益友란 사귀어서 자 기에게 도움이 되는 세 가지 벗이니 곧은 벗, 믿음직한 벗, 견문이 많은 벗이다. 39) 益齋亂藁 권4, 送金海府使鄭尙書國俓得時字, 平生拙翁吾所畏 與世 止+且) 止+ 吾)人共嗤 東人遺文手自錄 又有拙藁皆倔奇 一觀直欲覆醬瓿 攘攘可笑群兒癡. 40) 高麗史 권110, 列傳23 李齊賢傳, 崔瀣嘗歎曰 士別三日刮目相待 吾於益齋見之矣. 41) 拙藁千百 권1, 李益齋後西征錄序. 42) 崔瀣, 上已益齋席上得盛字 東文選 권4, 五言古詩), 年今過半白 敢謂能知命 晚契託高 人 月不負觴詠. 43) 益齋亂藁 권4, 後儒仙歌爲崔拙翁作示及菴.

- 191 - 였으니 崔瀣의 글에서 李齊賢 軸 등과 함께 있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44) 崔瀣는 軸의 父 竹屋 碩을 스승으로 섬겼고 軸의 弟 輯을 위해 글을 지어 주었으며45) 軸의 關東瓦注 의 後題를 썼다.46) 그러나 軸에 대한 글에서는 이제현과 최해가 서 로 깊이 아끼고 인정하는 모습을 보여주던 것과 같은 시문은 찾아 볼 수 없다. 이는 두 사람의 官路 차이에서 온 것일 수도 있으나 뒤에 소개되는 軸이 處心公正 持家勤儉 發 言便便無遁詞 居官屹屹無倦色 이라고 표현되는 인물이니만치 서로 성격상 어울리기 어려 운 사이가 아니었나 생각된다. 崔瀣의 뒤를 이어 制科에 급제한 李穀은 그를 위하여 墓誌 銘을 썼고 竹軒 金倫 彛齋 權溥 등과도 교유가 깊었다. 또 李塡은 李齊賢의 父로서 당대 元老들로 海東後耆老會 를 구성하였는데 崔瀣로 하여금 序를 짓도록 하였으니47) 元 制科 及第者는 명실공히 당대 제일의 문장가요 학사로서의 명예를 얻게 됨을 알 수 있다. 최해 를 특히 따르고 서로 아끼던 人物로 閔思平48)과 鄭誧49)가 있다. 閔思平은 驪興閔氏로 閔 宗儒 閔頔으로 이어지는 權門勢家 출신이다. 정승 金倫의 사위로 충숙조에 登第하였고 成 均大司成 監察大夫에 올랐다. 성품은 溫雅하고 친척간에 화목하며 교유하기를 즐겼고 재 산증식에 힘쓰지 않았다. 益齋는 及菴思平)의 詩法은 스스로 하늘의 뜻을 얻은 것이라 하였다. 及菴集 을 남겼다. 鄭誧의 父 鄭瑎는 忠烈王때 登第하여 征東行省郞中을 지 내고 儒學提擧를 지냈다. 誧도 18세에 登第하여 藝文修撰이 되고 忠肅王의 총애를 받았으 며 左司議大夫가 되어서는 封駁을 많이하여 執政으로부터 미움을 샀다. 37세로 夭節하였 는데 雪谷集 을 남겼다. 이들은 모두 문장이 뛰어나고 자신의 영달을 위하여 權勢家에 게 아부하지 않고 正道를 따르며 의연히 자신의 의지를 굽히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이러 한 교유관계를 통해서도 그의 학문적 성향을 엿볼 수 있다. 최해의 사상동향에서 특히 언급할 것은 佛敎에 대한 적극적 배척론이다. 異端 즉 불교 를 성리학유학)과 다른 것으로 놓고 당시의 士大夫들이 佛敎에 미혹됨을 비난하고, 사람 들이 지나치게 불교를 믿어 佛寺를 많이 짓고 寺院이 權門에 붙어 백성에게 해를 끼치는 폐단을 공격하였다.50) 그는 불교의 功德說을 인정하여 士大夫들이 佛敎에 미혹되는 이유 도 바로 거기에 있다고 지적하고 佛敎도 착한 일하는 것을 좋아하는 점에서는 긍정적으로 인식하면서도, 佛敎하는 자가 苦行을 하여 道를 닦는 일은 제대로 하지 않고 세속적인 욕 심만을 차리고 타락한 현상에 대해 비난한 것이다.51) 이러한 불교비판론은 14세기 후반 44) 拙藁千百 권1, 春軒壺記 와 稼亭集 稼亭雜錄 에 李穀 還送詩를 지음. 春軒 崔文 度는 이제현 안축 최해와 함께 투호를 즐겼는데 그는 程朱學에 조예가 깊은 인물이었다. 45) 拙藁千百 권1, 送梁州序 와 故相竹屋像賛. 46) 위의 책 권1, 當之關東錄後題. 47) 위의 책 권1, 海東後耆老會序. 48) 高麗史 권108, 列傳 21 閔宗儒 附 思平. 49) 高麗史 권106, 列傳 19 鄭瑎 附 誧. 50) 拙藁千百 권1, 頭陁山看藏庵重營記. 51) 위의 책 권1, 送僧禪智遊金剛山序.

- 192 - 國史館論叢 第24輯 排佛論을 先導하고 있다. 이런 점은 동시대인인 李齊賢이나 李穀이 불교에 好意的인 것과 는 대조된다. 崔瀣는 藝文應敎로서 元에 보내는 表文이나 기타 당시 對元關係를 보여주는 글을 다수 지었는데 우리는 그를 통해 그의 對元意識을 엿볼 수 있다. 二重國家的 구조 속에서 元에 올리는 表文에 事大를 극한 文句를 사용하는 것은 논하기에 적절치 못하다고 하겠다. 그 러나 元에 대한 고려인으로서 최해의 의식에는 고려와 元이 別個의 文化傳統을 가진 존재 임을 강조하고 특히 우리의 文化 수준이 그들보다 조금도 못하지 않음을 자부하고 있다. 즉 그런 文化的 자부심이 東人之文 을 편집하게 하였던 것이다.52) 그 序에서, 간혹 東人의 문자를 보기 원하는 자가 있으면 나는 곧장 成書가 있지 않다고 대답하니 물 러나 생각할 수록 부끄러운 일이므로 이에 비로소 類書를 편찬할 뜻을 두고 東으로 돌아와서 10년을 두고 일찍이 잊은 적이 없었다53) 라고, 밝히고 여기에 실린 문장들은 중국의 文士들의 그것에 비해서 조금도 손색없음을 자부하고 있다. 최해가 살던 14세기 전반은 元에 의한 간섭이 가장 강압적으로 시도되어 自主國의 면모를 찾기 어려운 시기였는데 그는 東人之文 에서 元에 臣服한 후로 모든 제도와 用語를 고쳐 사용하고 있지만 이전의 文章을 채록하는 데에는 비록 크게 참월하지 만 改書하지 않고 그대로 두었음을 변명하면서 自主的 文化의식을 당당하게 표현하고 있 음을 볼 수 있다.54) 마지막으로 그의 對民意識은 어떠하였을까? 그의 文章 속에는 民生의 애환을 걱정하 는 士大夫의 모습을 보여주는 글은 그리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관직생활보다는 隱居한 기간이 길었던 그는 농민들이 가뭄에 애타게 비를 기다리고 있을 때에도 草堂에 누워 유 유자적하는 士大夫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55) 당시의 지방의 守令들은 개간을 확대하 고 농업생산량을 늘려 民生의 안정에 가장 역점을 두었음을 알 수 있는데56) 그는 守令을 지냈거나 관직에 있으면서 民의 生活을 염려하는 시는 간혹 보이지만 軸이 民苦를 생생 하게 표현하고 있는 것과는 대조적이다. 그는 士大夫 즉 治者로서의 입장에서 실천궁행을 권장하고는 있으나 몸소 실천하는 모습은 보이지 않는다. 3) 軸1287 1348) 52) 위의 책 권2, 東人文序. 東人之文 은 글의 종류별로 四六, 五七, 千百으로 분류 편집하 였는데 四六은 이미 영인되어 전해오고 있고 五七의 일부7,8,9책)이 최근에 발견되어 학계의 관심을 모으고 있는데 삼성출판사에서 소장하고 있다. 53) 위의 책 東人文序, 間有求東人文字者 予直以未有成書對 退且恥焉 於是有撰類書之志 東歸 十年未嘗忘也. 54) 위의 책 권2, 東人四六序. 55) 崔瀣, 三月二十三日雨 東文選 권4). 56) 拙藁千百 권1, 送梁州序.

- 193 - 福州 興寧縣人으로 字는 當之이고 父親 碩은 縣吏로서 登第하였으나 隱居하여 不仕하 였다고 한다. 그러나 한 때 合浦에 出鎭하였던 적도 있다. 軸의 家系는 始祖 子美로 부터 文成公 裕珦), 于器, 牧으로 이어지는 일파와 碩의 뒤를 이어 軸 輔 輯의 3형제로 이어지는 파로 갈라진다.57) 軸의 3형제가 登科하였고 특히 軸과 輔는 元 制科에 급제하여 이름을 드날리고 이후 중앙에 뿌리를 내리기 시작하였으니 조상대에 戶長 또는 縣吏를 지내다가 과거를 통해 중 앙으로 진출한 신진사대부의 전형적인 성장로를 거쳤다. 軸은 忠烈王 33년1307)에 許有全과 李顗를 知貢擧, 同知貢擧로 하여 급제하였 다.58) 이어 金州司錄으로 시작하여 藝文春秋館檢閱과 修撰을 지내고 충숙왕 7년1320) 에는 丹陽府注簿로서 征東行省 鄕試에 합격하여 崔瀣 李衍宗과 함께 元에 應擧하였으나 이때는 崔瀣만이 급제하였고 다시 3년후 征東行省 鄕試에서 1등으로 뽑히어 司憲糾正을 제수받고 충숙왕 11년1324)에는 元 制科에 第三部甲七名 중에 뽑히었다. 이때 그의 나 이 38세로 본격적인 관직 활동은 이 후부터라 하겠다. 이 무렵 忠肅王이 瀋王 暠의 誣告 로 元에 억류되어 있었는데 軸은 임금의 근심은 신하의 욕이며 임금이 욕을 보면 신하 는 죽어야 한다 고 하면서 王의 무죄를 호소하여 충성된 신하의 모습을 보여 주었다. 이 때문에 충숙왕은 특별히 그에게 成均樂正종4품)을 배하였다. 한편 元에서는 遼陽路 盖州 判官을 받았으나 충숙왕에게 쓰이고 있었으므로 不應하였다.59) 충숙왕이 충혜왕에게 傳位하게되자 그는 좌천되어 江陵存撫使로 강릉지방에 머물게 되 었는데 이 무렵에 지은 여러 詩 文이 유명한 關東瓦注 에 모아졌다. 충숙왕의 복위와 함께 그는 다시 중앙의 직책을 맡게 되었는데 典法判書를 거쳐 監察大夫에 이르렀고 이 동안 항상 館職을 함께 맡아 表箋 詞命이 많이 그의 손에서 나왔다. 그러나 충혜왕 복위 기에는 또 檢校評理로서 尙州牧으로 나갔으니 대개 忠惠王대에는 측근에 康允忠 등 무뢰 배가 포진하고 있어 儒臣의 정치참여가 극도로 견제되었으니 李齊賢도 관직에서 물러나 은거하고 있고 李穀도 元에 머물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忠穆王의 즉위와 함께 革新的인 人事改編으로 儒臣관료가 다수 등용되고 특히 書筵을 설 順 57) 系圖 興氏世 謹齋集 ). 58) 登科錄 忠烈王 33년 丁未榜. 59) 稼亭集 권11, 大元故將仕郞遼陽路盖州判官 高麗國三重大匡興寧府院君 領藝文館事 論文 貞公墓誌銘 軸墓誌銘으로 略稱).

- 194 - 國史館論叢 第24輯 치하여 王의 자질함양에 주력하였다. 안축은 이때 命議賛成事 監春秋館事로서 辛裔 震과 함께 侍讀에 임명되었다. 특히 忠穆王 2년1346)에는 敎에 의하여 李齊賢과 함께 閔漬의 編年綱目 을 증보하고 三朝實錄 을 찬수하게 되었다. 다음 해1347)에는 興寧君에 封하여져 일선에서 물러나고 1348년에는 致仕 후 卒하였으니 諡號는 文貞이다.60) 軸이 평생동안 주로 처한 관직은 館職과 典法관계 직책이었으니 그가 스스로 회고하 기를 吾平生無可稱 四爲士師 凡民之屈抑爲奴者 必理而良之 라 하여 백성의 억울한 사정을 듣고 公正히 처결한 것을 자랑으로 삼고 있다. 이러한 軸에 대해서 李穀은 그의 慕誌銘 에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公은 마음가짐이 公正하고 집을 다스리기를 부지런히 하고 검소하게 하였으며 發言할 때는 명확하게 하여 꾸며대는 말이 없었다. 관직에 있어서는 부지런히 일하고 게으른 기색이 없으 며 착한 일을 보면 칭찬을 그치지 않았기 때문에 칭찬이 많았고, 나쁜 일을 보면 피하며 가까 이하지 않았기 때문에 원망이 적었다.61) 또 益齋 李齊賢은, 侯는 안으로는 강하고 밖으로는 和하며 말은 간략하고 행동은 민첩하다. 강하고 간략하면 사람이 꺼려서 범하지 못하고, 和하고 민첩하면 사람이 즐거워하며 따른다 라 하여, 强과 和를 갖춘 인물이라 하고 또 임금의 깊은 知遇를 입고 사람의 무거운 소망을 지고서 능히 겸손하여 急流에 휩쓸리지 않 고 그칠 줄을 아는 자는 古今에 구해도 대개 千에 十, 百에 一일 정도이다62) 라고, 그의 겸손함과 절제함을 칭송하였다. 謹齋라는 그의 號도 바로 이런 성격에 걸맞는 것이라 생각된다. 軸의 文章은 그가 江陵道存撫使로 있을 때 지은 詩 文을 모은 關東瓦注 와 기타의 글이 수집되어 謹齋集 으로 간행되어 있다. 關東瓦注 는 그의 死後 16년만인 恭愍 王 13년1364)에 그의 사위에 의해 간행되었고 기타의 글은 조선시대 이후에 후손들에 의해 수집된 것이다.63) 60) 高麗史 권109, 列傳 22 軸傳. 61) 稼亭集 권11, 軸墓誌銘, 處心公正 持家勤儉 發言便便無遁詞 居官屹屹無倦色 見善則 稱之不已 故多譽 見惡則避之不近 故寡怨. 62) 益齋亂藁 권5, 送謹齋大天赴尙州牧序, 侯剛於中而和於外 簡於言而敏於行 剛而簡 人 憚而莫犯 和而敏 人悅而易從. 若荷深知於君 負重望於人 而能撝謙 知止於急流之中 求之古 今 盖千百而什一耳.

- 195 - 謹齋集 을 통해 그의 交游관계를 살펴보면 李齊賢 李穀 白文寶 등을 들 수 있다. 이 제현과는 특히 절친한 사이였음을 그가 안축의 죽음을 슬퍼하는 詩를 지은데서 잘 나타나 있다.64) 李穀은 한때 안축에게서 受業한 경력도 있고 그의 동생 輔와 同年及第로서의 친분을 갖기도 하여 안축의 묘지명을 지었다. 비록 영성한 자료이지만 軸은 儒臣으로써 신유학인 性理學 수용에 앞장선 당대 선구적 학자들과 맥을 같이 하였을 것임을 그의 학 문적 자질과 교유관계를 통해 짐작할 수 있다. 또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충목왕대에 이제 현 이곡 이인복 등과 같이 史書 편찬에 참여하고 있는 점에서도 그러한 성향을 보여준다. 軸의 정치적 성격은 忠穆王代에 설치되었던 整治都監에서 그가 判事로 활동한데서 더 욱 드러난다.65) 整治都監은 忠穆王代에 설치된 개혁기구로서 권력을 남용하여 횡포를 자 행하는 무리를 구치하는 과정에서 元의 간섭으로 그 기능을 제대로 수행하지 못하고 중단 되고 말았다. 더구나 附元輩인 奇三萬이 심문 도중에 죽자 整治官들은 元에 의해 問罪되 었는데 이때 軸은 王煦와 함께 聖旨로써 면하였다.66) 軸이 處心公正 持家勤儉 하여 이미 德望있는 인물로 알려진 사실이 이런 결과를 가져오게 한 것이 아닌가 한다. 그의 정치관은 制科에서 지은 그의 制策에서 엿볼 수 있다.67) 策問의 내용을 대략 보 면 唐 開元시에 吐蕃使者가 와서 毛詩와 春秋 禮記 등의 書를 구하자 于休烈은 上疏하여 東平王이 漢의 懿親으로써 太史公書와 諸子書를 청하였을 때 주지 않았는데 항차 토번은 원수 나라로서 그 책을 바탕으로하여 用兵權略을 알아 변조를 일으키면 중국에 害가 된다 고 하여 반대하였다. 이때 裵光庭은 토번은 聾昧하고 頑惡하여 오랫동안 반하였다가 새로 服屬 되었는데 그 請을 들어서 詩 書를 내려주면 아마 점차 도야되고 聖敎로써 교화되어 禮 義 忠 信을 알게 될 것이라고 찬성하였다. 이 두 의론의 시비를 논하라는 것인데 이에 대해 軸은 柔遠人懷諸侯 하자는 裵光庭의 논을 지지하였다. 즉 크게는 元을 중심한 세 계제국 내에서 이민족에 대하여 회유책으로써 교화하여야 할 것을 말하고 있고, 작게는 人民에 대해 詩 春秋 禮記를 통한 교화의 정치를 내세우고 있다. 詩經은 사람을 감화시켜 好善惡惡之心을 일으키고 春秋는 亂臣賊子가 두려움을 갖게 하여 감히 난을 일으키지 못 63) 謹齋集 은 1권 關東瓦注, 2권 補遺, 3권 增補, 4권 附錄으로 구성되어 있다. 2권의 補遺는 玄孫 崇善에 의해 조선 世宗 27년1445)에 謹齋集 으로 간행되었고, 3권의 增補는 숙종 8 년1680)에 이루어진 것이니만큼 謹齋가 평생에 지은 글은 散失된 부분이 많았으리라 여겨진다. 64) 益齋亂藁 권4, 悼謹齋當之軸. 65) 高麗史 권37, 世家 37 忠穆王 3년 2월 己丑. 66) 整治都監에 관하여는 閔賢九敎授의 다음 논문이 참고된다. 整治都監의 設置經緯 國民大論文集 11, 1977) 및 整治都監의 性格 東方學志 23 24, 1980). 민현구교수는 그의 논문에서 整治官은 그 사회적 성격으로 볼 때 權門世族보 다는 科擧출신이 많고, 臺諫이나 法官으로 크게 활약하면서 公正 正直 등의 人物評을 받은 人物들이 많고 유교적 소양을 바탕으로 하는 識見과 소신을 굽히지 않는 기개 그리고 합리주 의적인 公正性을 지닌 사람들이었다고 하였다. 또 이들은 恭愍王代의 反元改革政治와 상당한 연계성을 지닌다는 점을 특징으로 들고 있다. 67) 謹齋集 권3, 制策.

- 196 - 國史館論叢 第24輯 하게하며 禮記는 함부로 凌上慢下하지 못하게 하니 이러한 경전이 행해지면 家庭에는 孝 敬이 세워져 道가 바르게 되며 나라에는 忠信禮義가 일어나고 천하가 평정되며 나아가서 널리 퍼져 夷賊이 교화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軸의 政治觀은 지배자로서의 敎化와 鑑戒 에 의한 治人 중심의 입장이 강하게 느껴진다. 다음으로 軸의 현실에 대한 인식은 지 배층의 수탈로 도탄에 빠져있는 民에 대한 강한 연민으로 드러난다. 그의 紀行詩集인 關東瓦注 는 문학사적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을 뿐 아니라 거기에 실린 詩들은 民의 애 환을 그린 것이 많아 역사적으로도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는데 李齊賢은 이 책의 序에서 바로 이 점을 특징으로 삼았다. 그 작품은 풍속의 得失과 민생의 휴척에 관한 것이 열 중 아홉이다. 그 글을 읽으면 사람 으로 하여금 慘然하게 하니 가히 참으로 그 근본의 모습을 얻었다 하겠다.68) 즉 안축의 관심은 기이한 절경보다는 곳곳의 풍속이나 民生의 실태를 파악하는데 있었 다. 이는 당시 그가 지녔던 직책 즉 存撫使라는 지방위무의 직책과도 관련이 있는 것이라 할 수 있겠으나 그 보다는 그의 현실사회에 대한 관심에서 기인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그의 詩 次襄州公館韻 에서는, 백성의 살림 두루 보니 내 나라일이 딱하구나 임금의 은혜를 저버리니 저 하늘이 부끄럽네 재주가 옹졸하여 利路를 일으키지 못하니 어쩌면 시내 골짝에 金泉을 솟게 하리오69) 라 읊어 좋은 계책을 세우지 못하는 안타까운 마음을 표현하고 이어서 難題를 해결하는 방도를 實學이라고 못박았다. 그는 江陵存撫使의 命을 받아 가는 도중에 밤중에 비가 오 는 驛에서 적은 詩에서 자신의 임무를 생각하며 오직 힘을 다하여 實學 을 행하리라고 다 짐하고 있다.70) 여기서의 실학은 유학 본연의 모습을 의미하는 것일 것이다. 그의 민생의 실태에 대한 구체적인 관심은 鹽戶 에서 잘 드러난다. 강릉지방의 염호를 돌아보고 戶 民들이 소금 만들기 위한 고통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모습과 과중한 賦稅와 탈취로 노인과 어린이까지 혹독하게 시달리고 있는 실태를 실감나게 묘사하였다.71) 68) 위의 책 권1, 關東瓦注, 其作關乎風俗之得失 生民之休戚者 十編而九 讀之使人慘然 云者可 謂 眞得其本形色矣. 69) 東文選 권15, 次襄州公館韻. 70) 위의 책 권15, 天歷三年五月受江陵道存撫使之命 是月三十日發松京宿白嶺驛夜半而作有懹. 71) 謹齋集 권1, 鹽戶, 陋居如楣廬 蓬門不掛席 老翁率子孫 寸刻不休息 冽寒汲滄溟 負重肩

- 197 - 이렇게 軸의 對民인식은 비슷한 시대의 崔瀣나 李穀에 비해 더 강열하고 현실감 넘치 는 것이었다. 이는 위의 두 사람에 비해 軸은 정치현실에 직접 참여하고 있었던 데에서 오는 차이라고도 할 수 있다. 그러나 도탄에 빠진 民生을 구제하는 방책으로서의 대책이 제시되지 못한 것은 그의 한계성이라 하겠다. 도탄에 빠진 民生을 내 어이 구하랴만, 膏肓에 든 나랏병을 생각만 해도 놀라와라72) 라고 표현하였고, 염호의 고통을 읊었지만 그에 대한 구체적인 對案은 제시하지 못하고 다만 迃疏하나마 힘을 다하여 實學을 시행하리라 하여 유학 본연의 학문자세를 지켜나가 는 것으로써 경세의 기준을 삼았다. 다음으로 그의 對元認識은 그의 請同色目表 를 통해 짐작할 수 있는데 이는 元 간섭기 에 士大夫의 一般的인 인식은 現 體制를 인정하면서도 고려가 漢 南人과 같은 부류에 취 급되고 있는 점에 對해 色目人과 같은 대우를 해줄 것을 강력히 요청하고 있다. 그 요청 의 명분은 바로 帝室女의 釐降으로 고려왕이 元의 부마가 되었고 또 후사가 탄생하여 元 의 혈통을 이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는 사실상 自主的 民族意識 같은 것을 찾아보기는 어렵고 다만 元 왕실과의 특수관계를 통해서 元 제국내에서의 고려의 지위향상이라는 측 면에서 자주적 노력을 살필 수 있을 뿐이며 이는 당시 여 원 이중체제속에서의 士大夫의 입장의 한계를 보여주는 것이다. 1343) 趙廉은 淳昌人이며 字는 魯直이다. 忠肅王 2년1318)에 登第하였고 충숙왕 10년 1323)에는 軸 崔龍甲과 함께 元 制科에 응거하였으나 이 때는 軸만이 급제하였 다.74) 趙廉은 3년 후에 다시 응거, 급제하여1327) 遼陽等路摠管知府事를 받았고,75) 고 려에서는 典理佐郞정5품)을 받았다. 그의 世系는 父 文琔, 祖 光肅, 曾祖 仁平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妻父는 陳善略이다. 父 文琔은 明經科 급제자로써 忠烈王代에 監務 겸 勸農使를 지내고 大護軍이 되었으니 社會 的 기반은 한미한 신진 가문이라 할 수 있다.76) 4) 趙 廉1290 73) 背赤 酷熱燒烟煤 熏煮眉目黑 門前十車柴 不能供一夕 日煎百斛水 未能盈一石 若不及期程 毒吏 來怒責 翰官委如山 轉賣爲布帛君王重功臣 賞賜不屯惜 一人身上衣 萬民苦深積. 72) 주 70)과 같음. 73) 登科錄 충숙왕 2년 榜에는 庚子生 癸未卒 이라 하였으니 생존기간이 1300 1343이 되지 만 高麗史 에 의하면 1290년 庚寅生이 된다. 元 制科에 응시할 수 있는 나이는 25세이므로 高麗史 의 기록이 맞는다. 74) 高麗史 권74, 志28 選擧 2 制科條에는 趙廉의 及第기록이 나타나지 않는다. 이 점 辛裔와 李承慶도 그러하다. 75) 高麗史 권109, 열권22 趙廉에는 遼陽으로, 文獻備考 권185, 制科總目에는 瀋陽으로 표기되어 있으나 두 지명은 同一한 곳에 대한 異名이다.

- 198 - 國史館論叢 第24輯 趙廉은 高麗史 에 立傳되어 있으나 자료는 극히 소략하다. 그는 諫官으로 있는 동안 1331) 提學 韓宗愈 등의 取士가 공평치 못함을 論하여 覆試하기를 청하였고, 충혜왕 초 에는 正言을 거쳐 左司議大夫가 되었는데77) 元의 詔使가 왔을 때 충숙왕이 詔勅을 영접 하지 않았다고 무고하여 兩府를 국문하니 모두 다 승복하였는데 조염은 王伯과 더불어 王 을 위하여 상서하기를, 君臣은 일체인지라 禍와 福을 같이 하는 것이요. 또한 臣下가 임금을 위하여 숨기는 것은 아들이 아비를 위하는 것과 같은 것인데 이제 兩府가 자기 목숨을 사사로이하여 君父에게 죄 를 끼치니 청컨대 法과 같이 論하소서78) 하여, 왕이 密直副使를 제배하였으니 司議로써 樞府에 들어가는 것은 일찍이 없던 일이었 다고 하였다.79) 이로써 보면 趙廉은 公正하고 忠誠된 臣下의 모습을 보여 준다. 그는 학 문적으로도 元 制科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자였고 실제로 중국의 사대부와 더불어 經史를 講明하는데에 통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또 그는 昭穆論에도 조예가 깊어 서 忠宣王을 耐祭함에 있어 昭穆의 位次가 古制와 어긋남을 들어 昭와 穆이 父子관계로 대칭되어야 함을 주장하였다.80) 그는 과거출신 관료로서 司議의 職에서 公正되고 忠誠되 며 또한 儀禮에 조예깊은 儒臣이었으나 정치적으로는 瀋王派와 연결되었던 것으로 여겨진 다. 즉 忠肅王이 죽고 忠惠王의 復位가 元으로부터 승인받지 못한 상태에서 승상 趙頔이 亂81)을 일으켰는데 이 亂은 내부적으로 瀋王과 연결된 趙頔이 충혜왕의 비행을 계기로 王의 국인을 빼앗고 瀋王의 지지기반을 만들려 한 것이었다.82) 亂이 실패로 돌아간 후 76) 趙廉 家系 淳昌趙 譜 국립중앙도서관 한 -가 의 氏世, 58 22 35). 77) 高麗史 권109, 列傳 22 趙廉. 78) 高麗史 권109, 列傳 22 趙廉, 君臣一體 禍福共之 且臣爲君隱 猶子爲父 今兩府私軀命遺君 父罪請論如法. 79) 樞密院은 종3품 이상의 관직이므로 이곳에 들어가는 것은 문하부에서 정3품 이상이 된 후에야 들어가는 것이 관례인데 司議는 4품직이다. 80) 高麗史 권61, 志 15 禮3. 고려후기의 昭穆論은 충숙왕때 趙廉이 古制에 의거하여 二昭二 穆을 두는 五廟制를 따르도록 하고 不遷之主는 太祖의 뒤에 夾室에 배치하여야만 격식에 맞다 고 論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는 않았다. 이와 비슷한 시기에 閔漬도 昭穆에 관하여 언급하였고 익재 李齊賢은 閔漬의 소목론에 의문을 제기하고 昭穆의 位次는 일정불변하여 상호간에 바꿀수 없는 것이며, 兄弟는 같은 반열에 두는 것이며 제후의 나라에서는 五廟를 받들어야한다는 입장 을 취하였다. 그러나 형제간에 襲位하였을 때를 소목관계로 본 朱子와는 일치되지 않는 점도 볼 수 있다 李齊賢, 櫟翁稗說 前集1). 81) 高麗史 권130, 列傳44 趙頔.

- 199 - 그에 참여했던 무리들은 治罪되었는데 趙廉에 대한 기록은 없다. 이 난에 가담한 洪彬과 省官들은 용서하였다고 하는데 조염은 省官 王伯과 같은 입장을 취한 사례가 있음을 볼 때 이 사면대상에 들지 않았나 생각된다. 忠惠王은 이 난이 진압된 후에 元에 갔을 때 그 를 侍從한 臣下들에게 論功行賞하였는데 여기에 조적의 난에 참여했던 洪彬도 포함되어 있는 것을 보면 趙廉의 거취에 대해서도 示唆를 받을 수 있다. 趙廉의 交游관계를 알 수 있는 자료로는 동문선 에 閔璿에게 준 詩가 1首 남아 있 을 뿐이다. 閔璿은 震과도 교유가 있었던 인물이었고 元 과거에 응거하였던 人物이기도 하다. 1351) 李穀은 지방 향리의 자제로써 과거를 통해 中央에 진출한 신진사대부이다.83) 그의 父 李自成은 韓山郡吏였다고 하는데 戶長職을 이어 온 가문이다. 한미한 가문출신의 李穀은 충숙왕 7년1320)에 登第하여 福州司錄參軍에 배속되었으나 그 후 거의 10년동안 중앙 으로 발탁되지 못하고 불우하게 보냈다. 그는 政堂文學이나 同年及第한 중앙관리에게 글 을 보내 자신의 처지를 호소하기도 하는 등 노력끝에 藝文檢閱에 발탁되었고 이후 征東行 省 鄕試를 통해 元 制科에 응거하여 좋은 성적으로 급제하였다. 특히 讀卷官이 그의 대책 을 높이 평가하여 재상에게 추천하여 翰林國史院檢閱官으로 발탁하였다. 한미한 가문에서 起身한 李穀은 뛰어난 실력으로 元의 관직을 받고 錦衣還鄕하여 고려에서도 곧 典儀副令 直寶文閣에 제수되어 자신과 가문의 지위를 높여가게 되었다. 이 길은 과거를 통해 중앙 에 진출하여 신분을 상승시켜가는 지방출신 신흥관인의 전형적인 경로라고 하겠다. 이곡은 이후 그의 관직생활의 대부분을 元에서 보내었고 여러차례 려 원간을 왕래하면 서 주로 양국간의 현안문제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였다. 즉 元의 貢女求索에 대 해 고려인의 고통을 간절히 호소하여 이를 중지할 것을 요청하였고84) 元의 법제를 고려 에 적용할 것을 요구하는데 대하여 高麗는 옛날부터 獨立된 전통과 습속을 가져왔고 이는 중국의 것과 달라서 잘못 강제로 적용하였을 경우에는 도리어 역효과가 날 것이라고 답변 하여 獨自的 法制를 유지하여야 함을 설파하였다.85) 李穀이 元에서 받은 관직은 翰林國史院檢閱官으로 시작하여 徽政院管勾兼承發架閣庫, 征東行省員外郞, 中瑞司典簿, 中書差監倉종5품)까지 올랐으니 고려인으로서는 대단한 출 세였다. 그러나 처음 翰林院檢閱을 제외한 기타의 관직은 점차 권력의 핵심부에서 멀어져 5) 李 穀1298 82) 瀋王 暠는 忠宣王의 조카로 忠肅王의 高麗王位를 넘보아 여러 방면으로 책동을 일으켰는데 이 로 인해 고려 朝臣들도 파를 이루어 政權장악의 갈등을 빚어내었다金庠基, 高麗時代史, 1961, 동국문화사, pp. 664 667 참조). 83) 高麗史 권109, 列傳 22 李穀傳. 拙稿, 稼亭 李穀에 대하여 梨花史學硏究 17 18, 1988) pp. 353 375 참조. 84) 稼亭集 권8, 代言官請罷取童女書. 85) 위의 책 권9, 送揭理問書.

- 200 - 國史館論叢 第24輯 가는 직책이었고, 또 중국에서의 낮은 관직보다는 고려에서 중앙의 고관으로 출세하여 經 倫을 펴는 것이 그로서는 더욱 바람직한 일이었음에 틀림없다. 그러기에 그의 마음은 항 상 고려의 정세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충혜왕대의 측근 群少輩 에 의한 失政은 결국 元 의 간섭으로 王이 포박당해 잡혀가는 비극을 가져왔다. 그의 뒤를 이어 忠穆王이 즉위하 면서 구세력의 농간을 일소하고 정치쇄신의 분위기를 이루고자 하였다. 충혜왕대에 정치 일선에서 물러나 있던 李齊賢 등이 다시 정계로 돌아오고 王 측근의 嬖幸들이 제거되면서 儒臣 중심의 관료가 등용되었다. 李穀도 忠惠王代에는 元에서 6년 간이나 머물러 있었는데 이제 고려 內政에 적극 관심 을 보여 用人 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글을 보내어 고려로 돌아가려는 뜻을 밝혔다.86) 충목 왕 원년1344)에 그가 寓本國宰相書 를 보내 정치가 바로 잡히려면 먼저 賢한 인물을 등용해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다음 해에 고려에 돌아와서는 密直副使가 되고 政堂文學에까 지 올랐다. 李穀의 관직생활에서는 忠穆王代가 가장 득의한 시기였다. 李齊賢은 書筵講設의 職을 물러나면서 그 자리에 李穀과 軸을 추천하였다.87) 또 王命에 의해 閔漬가 지은 編年 綱目 을 補修하고, 三朝實錄 을 찬수하는데 震 軸 李仁復 등과 함께 참여하였다. 이어 許伯과 함께 掌試하여 金仁琯 등 33人을 뽑았으나 憲司에서 불공정하다하여 이들을 탄핵하기도 하였다.88) 李齊賢과 李穀의 관계는 일찍이 李齊賢과 朴孝修가 주재하는 과거에서 登科하여 座主 門生관계가 이루어진 후 지속되었고 軸에게도 역시 가르침을 받은 바 있다. 기타 친교 관계를 보면 동년급제한 軸의 弟 輔와 白文寶 등의 유신과 교유가 깊었고 오랜 元에 서의 생활로 元의 士大夫와도 깊은 교유가 있었다.89) 이곡은 이러한 교유를 통해서 학문 적으로는 성리학을 수용하는 과정에서 일정한 역할을 담당하였음은 말할 것도 없고 文筆 로써 그의 능력을 드러낸 명망있는 유신이었다. 충목왕의 뒤를 잇는 충정왕 즉위후에는 이곡은 정치에서 물러나게 되는데 이는 그가 이제현 등과 함께 공민왕의 추대를 적극 지 지하였기 때문이다. 이때 공민왕 지지세력은 이제현 이곡 등을 중심으로한 유신관료로 구 성되었는데 충정왕이 즉위함으로써 이들은 정치일선에서 후퇴하게 되었고 3년후 공민왕 즉위와 함께 다시 참여하게 되었다.90) 그러나 이곡은 공민왕 즉위 직전에 卒하였고 그의 아들 이색이 공민왕 즉위년에 服中上疏를 올려 특별히 발탁되었다. 李穀은 실력으로 중앙의 관리가 되고 자기의 지위와 가문을 높인 신진士大夫의 대표적 86) 위의 책 권8, 寓本國宰相書. 87) 益齋亂藁 권8, 表. 88) 高麗史 권109, 列傳 22 李穀傳. 89) 拙稿, 稼亭 李穀과 元 士大夫와의 交游 民族史의 展開와 그 文化, 碧史 李佑成敎授定 年退職紀念論叢, 1990) pp. 352 395. 90) 閔賢九, 恭愍王의 即位背景 韓㳓劤敎授停年記念史學論叢, 知識產業社, 1981) 참조.

- 201 - 인 경우로서 麗元 이중구조적 체제하에서 성리학 수용의 한 단계를 차지하는 존재라 할 것이나 당시 고려의 정치현실은 非儒臣的 권세가들의 정치농단에 의해 정치의 핵심부에는 들지 못하고 일생을 마쳤다. 1355) 靈山人으로 忠惠王朝에 登第하였다. 高麗史 에는 姦臣傳에 立傳되어 있고 생몰연대 는 분명치 않다.91) 그는 忠惠王때 左正言종6품)이 되고 忠肅王 복위 3년1334)에는 知 申事로서 同知貢擧가 되 어 政堂文學 金稹과 함께 과거를 掌試하였다.92) 충혜왕 復位시 에는 僉議評理종2품)에 올라 권세를 휘둘렀다. 그가 元 制科에 급제한 기록은 高麗史 에서는 확인할 수 없고 增補文獻備考 에서 찾아 지는데 급제년도를 확인할 수 없다. 충목왕 즉위시에는 楡帖都監을 맡았고 征東行省 員外郞이 되어 麗 元間을 왕래하면서 官職생활을 하였다. 忠穆王 2년1346)에는 元의 左 藏庫副使가 되어 金剛山 演福寺에 鐘을 주조하는 일의 책임을 맡고93) 고려에 돌아오기도 하는 등의 활동을 보여준다. 그가 元으로 돌아갈 때는 震 李齊賢 李穀 鄭誧 등 당대의 대표적인 文人들이 詩會를 열어 그를 送別하였다.94) 그러나 그의 정치적 성향은 儒臣으로서 갖추어야 할 忠과 淸廉 또는 治者의 도리와는 거리가 먼 듯하다. 忠惠王 4년1343)에 元使 朶赤 등이 와서 王을 잡아갈 때에 그의 妹 壻인 宦者 高龍普와 합세하여 도왔다. 이에 대해 사람들이 高龍普는 小人이니 말할 바가 없지만 裔는 儒者로서 어찌 이럴 수가 있는가 라고 비난하였다 한다. 忠穆王 원년1345)에는 元에서 命하여 瑜岾都監을 주관하였는데 이때 征東行省員外郞 으로서 王命을 수행하려는 姜居正을 征東行省獄에 가두고 권력을 휘둘렀다.95) 忠穆王代 에는 田叔蒙과 함께 親姻戚과 측근을 要職에 앉히고 아첨에 의해 進用하였으니 辛王 이란 별명까지 붙을 정도였다고 한다. 이 무렵 辛裔는 政房에서 提調官이 되어 銓注權을 장악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외에도 거듭되는 辛裔의 위세는 사실상 元에서 宦官으로 권세를 떨친 高龍普96)의 세력에 의지함이 크다. 6) 辛裔? 91) 高麗史 권125, 列傳38 姦臣 1 辛裔傳. 92) 위의 책 권73, 志27 選擧 1 選場. 93) 稼亭集 권7, 演福寺新鑄鐘銘幷序. 94) 震, 得堂字送辛裔員外朝元 東文選 권9)과 李齊賢, 送辛員外北上序 東文選 권85). 95) 高麗史 권37, 世家 37 忠穆王 원년 정월 乙酉 및 高麗史 권77, 志 31 百官 2 諸司都 監各邑. 楡岾都監은 忠穆王初에 金剛山 楡岾寺를 支應하기 위하여 설치한 永福都監을 말하는 데, 有備倉에서 이때 寺院田을 거두라는 王命을 받아 楡岾田도 그 收拾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楡岾都監에서는 辛裔에게 호소하여 都監으로 還田하게 요구하였으나 姜居正 등이 이를 따르지 않으므로 元帝의 聖旨로 姜居正을 征東省獄에 가두어 버렸다. 姜居正은 李仁復의 妻父가 된다 李穡, 牧隱集 15, 李仁復墓誌銘 ). 96) 高麗史 권122, 列傳35 宦者 高龍普傳. 高龍普는 宦者로 원에 들어가 資政院使가 되고 忠 惠王에게 完山君의 책봉을 받았다. 元에서 王에게 내리는 의복과 술을 가져 왔는데 元使 朶赤

- 202 - 國史館論叢 第24輯 忠穆王 3년1347)에 整治都監이 설치되자 辛裔는 그 究治對象이 된다. 그 내용은 辛裔 의 母가 남의 奴婢를 탈취한 것으로 지목되지만 이는 이미 辛裔에 대한 처벌로 보아도 좋 을 것이다.97) 辛裔는 이렇게 高龍普와의 인척관계를 가지고 科擧出身의 사대부이면서도 오히려 群少輩 라 불리우는 부류와 더욱 가까운 성향을 지녔고 권세를 이용한 不法奪占, 人事의 專横, 노비 탈취 등의 부정적 요소로 가득찬 非道德的 官人의 모습을 드러낸다. 그의 家系는 靈山辛氏族譜 에 의해 살펴보면 4대조인 辛喜가 宋에 들어가서 급제하고 高宗때 侍御史를 지냈고, 祖父는 文科 壯元하고 左賛成事를 지낸 辛革이고 從祖父는 역시 登第하고 政堂文學에까지 오른 辛蕆이다. 이로 보면 辛裔는 13세기 초부터 官人가문으로 성장한 상당히 기반이 갖추어진 가문출신으로 볼 수 있다.98) 辛裔의 처는 李褒의 女로 李兆年의 孫女가 된다. 7) 李承慶? ) 몽고이름은 帖木不花이고 李兆年의 姪로써 父는 千年이다. 李千年은 李兆年의 兄이고 登科하였으며 餘慶 承慶의 二子가 있다.99) 그러므로 李仁復과는 叔姪관계가 된다. 그가 언제 어떤 계기로 元에 들어갔는지는 밝혀지지 않으나 元에서 登科하여 御史 廉訪諸路를 거쳐 遼陽省參政이 되었다.100) 공민왕 6년1357)에 母喪으로 고려에 돌아온 후 다시 元에 가지 않았으며 王은 그에게 과 別失哥 등이 帝命으로 왕을 잡아가매 高龍普가 이를 호응하였다. 97) 閔賢九, 整治都監의 性格 東方學志 23 24, 1980) pp. 102 107. 98) 靈山辛氏族譜 국립중앙도서관, 古 11024). 99) 星州李氏家系 星州李氏派譜 李仁復墓誌銘 牧隱集 15) 참조. 100) 高麗史 권109, 列傳22 李兆年 附 承慶傳.

- 203 - 平章事를 拜하였다. 공민왕 8년1359) 홍건적이 침입해 왔을 때 都元帥 李嵒이 우유부단하여 군사를 제대 로 부리지 못하매 李承慶이 그를 대신하게 하였다. 그러나 장수들이 힘써 홍건적을 격퇴 하지 못하자 憤하여 不食하고 병을 얻어 돌아왔다. 이로 인해 王은 忠勤勁節協謀威遠功臣 號를 주었는데 얼마있다가 卒하였다. 李承慶에 대한 人物評은 決斷을 잘하고 충의로움으로 나타난다. 그는 일찍이 辛旽의 횡 자함을 평하여 亂國家者必此髠也 라 하였고101) 자기의 조카인 李仁復에게도 간사하다 고 비난하였으니 그 이유는 평생에 배운 바를 임금에게 진술하지 않았다는 것이다.102) 고려 말에 신진사대부로써 李仁任을 탄핵하는 疏를 올린 尹紹宗도 공민왕때 홍건적의 난을 당 했을 때 공명을 세운 자로써 李承慶 祐 李芳實 金得培 崔瑩 등을 거론하면서 그의 업적 을 논하였다. 간략한 자료로 그의 면모를 잘 알기는 어려우나, 그는 학자이기보다는 決斷 力 있고 忠義心이 강하여 자신을 돌보지 않는 강직한 기개와 성품을 가진 인물로 보이며 행정이나 군사 등의 實務에 능한 인물이었다고 하겠다. 1374) 李仁復의 字는 克禮이고 星山君 李兆年의 손자이다. 일찍이 이조년은 충열왕때 향공진 사로서 등제하여 충숙 충혜왕代에는 政堂文學에 을랐고 시호는 文烈이며 충혜왕묘에 배향 되었다. 李兆年의 父 李長庚은 京山府吏였는데 향촌에서 恭儉하고 위엄있는 인물로 일컬어졌다 고 하였으니 토착적 기반이 있는 세력가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李兆年의 형제는 百年 千年 萬年 億年 등 5子가 등제하여 가문의 명예를 드날렸으며 이후 星州李氏는 문벌의 반 열에 들게 된다.103) 李兆年의 아들 褒는 檢校職을 가졌고 李仁復은 그의 長子로서 충열왕대에 태어나 충숙 왕 13년1326) 19세에 진사급제하여 福州司錄을 받아 관직생활을 시작하고 22세때에는 校勘典校로서 중앙에 발탁되었고 여러번 옮겨 31세에는 藝文修撰이 되었다. 충혜왕 후2 년1341)에 34세로 征東行省 鄕試에 합격하고 다음 해에 元 制科에 급제하여 大寧路錦州 判官을 받았으니 이에 고려에서는 右獻納정5품)으로 올랐다. 李仁復은 元의 관직을 받았 으나 원에서 벼슬하지는 않고 고려의 관직만 가졌는데 충목왕때는 4번 옮겨 右副代言, 密 直提學을 거쳐 三司左使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元 征東行省都事에 제수되고1349) 공민 왕 초기에는 征東行省員外郞에 올랐다. 李仁復이 王의 신임을 얻고 정치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된 것은 恭愍王때부터이다. 8) 李仁復1308 101) 위의 책 권132, 列傳45 辛旽傳. 102) 위의 책 권112, 列傳25 李仁復傳. 103) 李兆年의 家系에 대해서는 고혜령, 李仁任 政權에 대한 一考察 歷史學報 91, 1981) pp. 2 8. 참조.

- 204 - 國史館論叢 第24輯 공민왕은 즉위초에 趙日新의 亂을 겪게 되었는데 이인복이 王을 위해 자문하여 政堂文學 兼監察大夫가 되었다. 이 후 공민왕 23년에 67세로 卒할 때까지 尙書左僕射, 御史大夫 參知中書政事, 開城府 事, 僉議評理를 거쳐 賛成事정2품)에 올랐으며 端誠佐理功臣號를 받고 興府院君에 封 하여졌다. 이어 判三司事와 檢校侍中 藝文館大提學 知春秋館事의 관직을 받아 최고위에 올랐고 星山侯에 추증되었다. 諡號는 文忠이고 忠定王 廟庭에 배향되었다.104) 李仁復은 3번 知貢擧가 되어 掌試하였으니 恭愍王 6년1357)에 廉興邦을 取하였고 공 민왕 14년1365)에는 同知貢擧 李穡과 함께 尹紹宗 등을 선발하고 이어 공민왕 18년 1369)에 역시 李穡과 함께 柳伯儒 등을 取하였다. 그는 충목왕 2년1346)에는 李齊賢을 중심으로 李穀 軸 震 등이 閔漬의 本朝編 年綱目 을 증수하고 忠烈 忠宣 忠肅王의 實錄을 찬수하였는데에 함께 참여하였다. 여기에 서 볼 때 李仁復은 李齊賢을 중심으로한 일련의 學者 집단, 즉 이곡 안축 안진과 학문적 경향을 같이하는 사람들이었다. 이인복은 문장이 엄하여 뜻이 깊고 성격도 신중하였다. 그의 숙부되는 李承慶이 그를 임금에게 진술하지 않는다고 나무랐는데 대해 그는 내 무능한 사람이 憲臺의 長이 되기 를 두 세번이었으나 일찍이 기강을 진흥하지 못함은 스스로 생각하기를 사소한 것은 임금 에게 번거롭게 아뢸 것이 못되고 큰 일은 또 廟堂의 처리함에 있으니 가히 중간에서 흔들 지 못함 이라 하였다. 또 儒者로서 佛敎行事에 대해 거부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공민왕이 文殊會를 베풀었을 때 이색과 이인복은 여기에 참여하지 않았고, 임종시에 弟 李仁任이 염불하기를 권하니 이를 물리친 점에서 고려 후기 성리학을 수용한 유신들의 배불의식의 일면을 엿볼 수 있 다. 물론 그의 文章 중에는 禪師를 위해 지은 것도 있으나, 불교에 대해 상당한 거리를 두고 있었음을 볼 때 그 보다 앞선 시기의 이곡이나 비슷한 시기의 이색과는 크게 차이가 보인다. 특히 그는 名儒 李兆年의 孫子로서, 또 元 制科에 급제한 자로서의 자부심을 갖 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李仁復은 三朝實錄 과 編年綱目 의 증수 외에 古今錄 金鐘錄 을 찬수하였 으며 益齋 淡庵白文寶 牧隱 李穡 등과 함께 그는 공민왕代를 이끌어간 儒臣으로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인물이다. 1357) 竹溪 즉 順興氏이며 軸의 동생이다. 軸형제는 3人이 登科한 보기드문 가문인데 輔는 19세에 進士科와 秀才科에 모두 급제하였다. 李穀과 同年에 급제하여 廣州司錄을 거쳐 藝文檢閱, 春秋修撰이 되었고 忠穆王 원년1345)에는 44세로 元 制科에 급제하여 9) 輔1302 104) 高麗史 권112, 列傳25 李仁復傳.

- 205 - 遼陽行省照磨 兼 承發架閣庫를 받았다.105) 그러나 이 命을 받고 부임한 후 곧 돌아와 고 려의 관직만 가졌다. 공민왕 원년1352)에는 密直提學兼 監察大夫로써 典選을 提調하였 고 공민왕 4년1355)에 정당문학에 오르고 同知貢擧로서 乙器 등 33人을 試取하였다. 공민왕代에는 이렇게 발탁되어 적극 활동할 수 있게 되었으나 곧 병으로 卒하였다. 시호 는 文敬이다. 輔는 성품이 剛直 廉潔하고 史記와 漢書읽기를 좋아하였다. 그의 문장은 華를 버리고 實을 취하여 事理를 통달할 따름이었다고 평가되며 또 生產을 일삼지 아니하여서 죽음에 미쳐 집에서는 擔石의 저축도 없었다 한다. 그는 儒學者로서 陰陽의 拘忌를 싫어하였다 한다. 그가 고려과거에 급제한 것은 일렀지만 元 制科 급제의 나이는 전체 인물 중 가장 늦 다. 이는 그만큼 고려내에서는 관로의 영달이 늦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고 또 달리는 兄 軸의 制科 及第의 영광을 이어받으려는데 뜻을 두었다고도 볼 수 있겠다. 그리하여 정치에 참여할 수 있게 된 것은 공민왕대 이후에야 가능하였다. 輔와 가장 친밀한 관계 를 지속하여 왔던 것은 李穀이었다. 이곡이 안보를 위해 지은 詩 文이 약간 남아 있고106) 그의 死後 墓誌銘을 지은 것은 李穡이었다.107) 1396) 李穡의 字는 頴叔이고 李穀의 아들이다. 총명하고 隷智가 뛰어나 독서하면 곧 외웠다고 한다. 14세에 成均試에 합격하여 이름을 떨쳤는데 이곡이 元에서 벼슬하여 中瑞司典簿가 되었으므로 朝官의 아들로써 國子監生員이 되었다. 在學한 지 3년에 李穀이 卒하므로 元 에서 奔喪하였다. 恭愍王 元年1352)에 服中上書하여, 境界를 바로 잡을 것과 왜구를 방 어하기 위하여 水陸의 대비책을 제시하고 武科의 설치 필요성을 논하고 國學의 진흥을 강 조하고 불교를 억제할 것을 건의하였다.108) 다음 해에 李齊賢 洪彥博을 知貢擧 副知貢擧 한 과거에 乙科 제 1인으로 급제하여 肅雍府丞이 되고 이어 征東行省 鄕試에 제 1명으로 합격하여 그 해에 書狀官으로써 元에 가서 制科에 응거하였다. 이리하여 최초로 父子가 연이어 元 制科에 급제하는 기록을 세웠다. 이색은 원에서 應奉翰林文字 承仕郞 同知制誥兼 國史院編修官을 勅授하고 귀국하여 典 理正郞兼 藝文應敎를 제수받았고 공민왕 4년1355)에 內書舍人에 陞進하였다. 이듬 해 또 元에 가서 翰林院權經歷에 禮任되고 고려에서는 國子祭酒 右諫議大夫, 樞密院副承宣 翰林學士가 되어 공민왕에게 중히 쓰였다. 공민왕 12년1363)에 元이 征東行中書省儒學 10) 李 穡1328 105) 위의 책 권109, 列傳22 軸 附 輔傳. 106) 稼亭集 권19, 送修撰序. 107) 牧隱集 권19, 鷄林府尹諡文敬公先生墓誌銘. 108) 高麗史 권115, 列傳 李穡傳과 주 13) 참조.

- 206 - 國史館論叢 第24輯 提擧를 除授하고 고려에서는 密直提學同知春秋館事를 제수받고 端誠保理功臣號를 내리니 이로부터 國政에 참여하였다. 恭愍王 16년1367)에는 成均館을 重營하고 李穡을 判開城 府事兼成均大司成을 삼았다. 成均館에는 生員을 더 두고 당시에 신진기예한 사대부인 金 九容 鄭夢周 朴尙衷 朴宜中 李崇仁을 택하여 敎官을 겸하게 하였다. 이로써 成均館이 더욱 중흥되고 朱子學이 적극적으로 보급되었다. 李穡은 부당한 政事를 묵인하지 않고 자신의 신변을 돌보지 않고 直言하였으니 柳濯이 恭愍王의 妃 魯國公主의 馬岩影殿 役事를 諫하다가 王의 노여움을 사서 下獄되어 죽게되 자 李穡은 극구 柳濯을 위하여 변호하다가 도리어 하옥되었다. 이색은 하옥되어서도 자신 의 주장을 굽히지 않으니 결국 공민왕은 스스로 잘못을 깨닫게 되었다. 恭愍王은 李穡을 召見할 때는 左右로 하여금 반드시 酒掃 焚香케 할 정도로 총애가 깊었다. 李穡은 禑王代에는 政堂文學 判三司事를 지내고 推忠保節同德賛化功臣의 號를 받고 禑 王의 師傅가 되었다. 공양왕 원년1389)에 禑王이 강화도로 쫓겨가자 曺民修와 더불어 昌王을 옹립하여 즉위케하고 判門下府使가 되어 明에 직접 使臣으로 갔다. 그 목적은 당 시 실권을 잡고 있는 李成桂一派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해서 였으나 吳思忠의 상소로 長湍 에 유배되었고 이듬 해에는 咸昌으로 옮겨졌다가 尹彛 李初의 獄에 연루되어 淸州獄에 갇 혔다. 1391년에는 咸昌府院君에 封하여졌으나 鄭夢周의 피살과 함께 李成桂의 반대세력 이 제거되면서 더욱 어려운 처지에 빠지게 되었다. 朝鮮建國 후에는 韓山伯에 封하여지고 出仕권유도 받았으나 끝내 고사하였다. 李成桂一派가 李穡을 함부로 제거하지 못한 것은 그가 中國에까지 알려진 巨儒로서의 비중 때문이었던 것이다. 李穡의 정치적 입장은 비록 元 制科 급제자였으나 공민왕을 도와 親明政策을 지지하였 고 온건개혁론을 통해서 麗末의 문란한 정치와 사회를 바로잡으려 하였다. 따라서 趙浚 등의 私田改革論에는 반대입장을 취하였고 고려왕조를 지키기 위해 직접 使臣으로 明에 다녀오기도 하는 등 노력을 기울였다. 또 불교에 대해서도 이미 崔瀣 이후 士大夫들 사이 에서 異端視하는 경향이 일어나고 있었고 鄭道傳이나 鄭夢周 등이 강한 비판을 가하고 있 는 상황에서 그의 排佛論은 온건적인 것이었으니 불교계의 폐단을 지적하였지만 불교자체 는 오히려 종교로서의 역할을 인정하는 입장이었다. 그의 문집에 승려와의 교유를 보여주 는 詩 文이 많음은 그의 불교에 대한 공존적 인식을 보여주는 것이다. 특히 그의 父 李穀 의 유언에 따라 大藏經을 판각한 것은 후대 儒學者의 비난을 사고 있다. 李穡은 여말의 巨儒로서 政界뿐만 아니라 학계에서도 文章으로 이름을 크게 떨친 인물 이었던 것이다. 1410) 洪州人이고 字는 孟陽, 號는 戇翁이다. 恭愍王 6년1357)에 李仁復 金希祖를 知貢擧로 한 과거에 급제하였고 동년에 元 制科에 급제하였다.109) 본관은 洪州이고 高宗때 侍中을 지낸 李延壽의 후손이며 父 起宗은 延慶宮提學을 지냈다. 軍簿佐郞을 지내다가 세상이 어 11) 李 舒1332

- 207 - 지럽고 정치가 문란한 것을 보고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은둔생활을 하였다. 李 穡은 그의 字를 지어주었고 李舒가 지은 글을 가지고 와서 이색에게 고쳐받을 정도로 친 근하고 그를 사랑하였다.110) 恭讓王 2년1390)에는 右司議정4품)로 世子侍學이 되었는데 王이 長湍에 行하려하자 李舒가 諫하여 그만두게 하였다. 이 때문에 좌천되어 光州牧使를 지내고111) 공양왕 4년 1392)에게 左右常侍가 되었다. 李舒는 麗末 趙浚의 私田革罷論에 대해서는 吳思忠 李竴 등과 함께 不可論을 제시하며 반대하였으나112) 李成桂를 옹립하여 조선 건국의 開國功臣三等에 책록되어 平君에 봉 해졌다. 이후 刑曹典書를 거쳐 大司憲이 되고 太宗 즉위후에는 內下侍郞, 賛成事에 이어 右政丞으로 府院君에 進封되었다. 75세에 致仕한 후에도 다시 領議政에 올랐다. 諡號는 文簡이다. 그는 正直方嚴하고 淸儉自守하였으니 평소에도 종일 危坐하였다. 높고 귀하게 된 후에 도 아랫사람에게 謙恭하며 권세를 믿고 남에게 교만하지 않았으며 異端에 미혹되지 않았 다. 임종시에 家人에게 喪禮를 朱子家禮를 따르도록 하였다.113) 12) 기 타 尹之는 忠穆王 즉위년1344)에 書筵을 두고 관료들로 하여금 更日로 侍讀하게 하였 을 때 그들 속에서 이름을 찾을 수 있으니 前僉議評理 辛裔를 비롯하여 密直副使 震 軸, 左正言 尹之 등이 보인다.114) 그 후 충목왕 원년1345)에 軸 郭珚과 함께 元 制科에 응거하였으나 不第하였고 3년후 다시 도전하여 忠定王 元年1348)에 制科에 급제 하여 大寧路判官을 받았다.115) 그에 관한 기타의 사항 즉 생존기간, 출신지, 가문 등은 알려지지 않고 또 제과합격 이후의 상황도 알 길이 없다. 李天冀116)는 충목왕 원년1345)에 典儀令 申諿이 試取하는 生員試에 壯元하였고 10년 후 元 制科에 응거하여 李穡과 함께 급제한 기록이 있다. 金升彥과 崔彪는 1357년 制科에 급제하였다는 기록은 보이지만 기타의 종적은 찾을 길 없다.117) 109) 登科錄 恭愍王 6년 丁酉榜 ; 增補文獻備考 권185, 制科總目. 110) 李穡, 牧隱文藁 권10, 孟陽說. 111) 高麗史 권45, 世家 45 恭讓王 2년 정월 丁亥, 3월 丙子, 閏 4월 庚子. 112) 高麗史 권118, 列傳 31 趙浚傳. 113) 太宗實錄 권20, 太宗 10년 庚寅 9월 癸酉條. 114) 高麗史 권37, 世家 37 忠穆王 즉위년忠惠 5년) 甲申 6월 乙卯. 115) 高麗史 권74, 選擧 2 制科. 116) 등과록 에 의하면 1345년충목왕 元)에 生員試 壯元이 된 李天驥와 同一人인 듯하다. 117) 增補文獻備考 권185, 選擧考 制科總目.

- 208 - 國史館論叢 第24輯 Ⅳ. 元 制科에 及第한 士大夫의 性向 이제까지 元 制科에 급제한 人物들의 프로필을 살펴 보았다. 알려진 전체 인원은 15인 이나 4인尹之 李天冀 金升彦 崔彪)에 관한 자료는 극히 미약하여 분석의 대상에서 거 의 제외되며, 행적을 알 수 있는 11人은 모두 4品이상의 高官에 올라 門閥化할 수 있는 가능성을 갖게 된다. 이들의 人的 사항을 표로 만들어 보기로 하자. 먼저 이들의 출신 가문을 보면 15人 중 世系를 알 수 없는 경우가 5인이고 李穀은 향리 가문에서 당대에 起身한 경우이며 나머지 대부분은 父나 祖父대부터 官人으로 진출하여 중앙에서 기반을 잡아가는 가문이다. 軸과 輔형제는 父가 등제하였으나 隱居하였으므로 표 3 制科 급제자의 가문과 관력 <표> </표> 고려급 인물 생존연대 출신 家門 지 년 나이 震 系未詳 崔 瀣 伯倫 登第 民 議郞 軸 順 碩 登第 趙 廉 淳昌 琔 大護軍 李 穀 韓山 長 自 鄕吏 辛 裔 靈山 取李褒 李承 星山 千年 及第 典客 副 李仁復 星山 褒 檢校門 侍 中 祖 李兆年 輔 順 碩 登第 軸 弟 尹 之 系未詳 李 穡 韓山 穀 制科及第 賛 事 李天冀 系未詳 升彥 崔 彪 李 舒 洪 起 提學 功臣 제 1293 1360 世 1287 1340 慶州 父 ) 131320), 1287 1348 1290 1343 1298? 興 父 父 文 父, 130317) 成均 成均 130721) 金州 成 1351 131829) 成 戶 ) 1355 父 原慶 慶 132023) 女. 父 令 1308 1374 父 下 132619) 1302 1357 興 父 132019) 世 1328 1396 父 135326) 成 世 최고관직 비 고 密直副使 政 學 檢校 大司 僉議賛 事 新進 密直副使 福 司錄參軍 都僉議賛 事 鄕 吏 僉議評 門 侍郞 章事 福 司錄 檢校侍中 廣 司錄 政 學 新進 文 部 고려초직 藝 檢閱 學諭 司錄 堂文 成 官 人 官 人 州 成 理 下 官 人 平 官 人 州 州 蔭 官 人 堂文 政 學 判門 使 堂文 下 官 人 府 1345 金 1332 1410 州 父 宗 135726) 조선 領議政 國 功臣 開 官 人

- 209 - 가문적 배경이 미약한 신진가문이라 하겠다. 崔瀣와 李穡은 父代에 高官에 올랐고 趙廉은 父가 及第者라 하였으나 監務兼勸農使를 지내고 大護軍까지 올랐으니 오히려 軸형제와 비슷한 가문적 배경을 가졌다. 父 또는 祖代에 及第하여 高官의 지위에 오른 경우가 崔 瀣 趙廉 李承慶 李仁復 李穡 등으로 이들은 新進가문에서 점차 문벌화 하는 단계에 있음을 알 수 있다. 가장 문벌적 성격을 갖은 경우가 辛裔와 李舒이다. 이들은 모두 高宗代부터 官人으로 진출한 가문이다. 즉 과거를 통해 官人으로 등장하는 士大夫들은 代를 이어 官 人化하고 있으며 元 制科 及第者들은 문벌의 배경을 가진 2人 외에 대부분이 바로 이런 신진사대부적 성격이 강하다고 할 수 있다. 世系를 알 수 없는 인물일 경우 한미한 가문 일 가능성이 더욱 크며 그렇다면 원 과거에의 급제는 기존의 문벌가문보다는 한미한 배경 을 가졌거나 아직도 신진가문에 속하는 자제들이 이용할 수 있는 확실한 출세경로이었다 고 하겠다. 그러기에 科擧出身의 신진가문의 자제들은 父 兄에 이어 制科에 급제함으로써 가문의 명예를 드높이고 族的 基盤을 더욱 확고하게 다져가고 있었다. 전체 15인 중에서 同一 家族 내에서 父子 또는 兄弟들의 연속진출이 3가문에서 나타나고 있음은 바로 이를 말해 주고 있는 것이다. 표 4 동일가문내의 급제자 <표> </표> 구분 順 급 자 軸 輔 李穀 李穡 李承 李仁復 제 興 氏 韓山李 氏 星山李 氏 慶 관계 兄 弟 父 子 叔 姪 祖 碩 登第 父 父: 祖自 : 長 成 戶 李千年 登第 祖 李兆年 父: : 文烈 다음 이들의 출세과정을 보기로 하자. 과거급제자가 처음 받는 관직 중에는 地方의 司 錄參軍職이 많다. 상당한 기간의 외직근무가 끝나면 중앙으로 옮겨지는데 이때 藝文館의 檢閱정9품)과 같은 文翰職에 배속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렇게 중앙에 발탁되는 것 도 家門的 배경이 있는 경우이고 그렇지 못한 한미한 출신의 과거급제자에게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었다. 예를 들면 李穀은 급제 후에 福州司錄參軍으로 거의 10년이나 지내다가 藝文檢閱로 옮겨지는데 이를 위해 기울인 노력을 보면 그 실제를 짐작할 수 있다. 그는 同年及第한 중앙의 관리나 高官에게 求官을 호소하는 글을 보내 자기의 뜻을 달성하고자 하였다.118) 그러나 李穀의 출세를 보장한 것은 바로 元 制科에의 합격이었다. 元 과거에 응시하기 위해서는 먼저 征東行省鄕試를 거쳐야 하는데 그 자격요건이 분명

- 210 - 國史館論叢 第24輯 히 나타나 있는 바는 없다. 우선 이들이 고려에서 과거 급제한 시기와 元 과거 응거한 시 기를 나이로 비교해 보면 표 5 와 같다.119) 표 5 고려 과거 급제와 元 제과 급제시기 비교 <표> </표> 거 거 소요기 고려 거 거 소요기 인 물 급고려시나이 급 나이 간 년 비고 인 물 급 시 나이 급 나이 간 년 비고 안진 안보 최해 이색 蔭 안축 이천기 년 년 조염 이서 이곡 이인복 평균 과 제 元 과 제 과 20 26 6 17 35 18 21 38 17 29 38 9 23 36 13 19 35 16 ) 元 과 제 제 19 44 26 27 1345 ) 1354 ) 25 1 ) 9 26 26 0 22 34 11 표 5 에 의하면 20세 전후에 고려에서외 과거에 급제한 이들이 元 制科에 응시하는 것은 가장 연소한 경우가 26세이다. 이는 元 제과에 응거할 수 있는 나이는 25세 이상으 로 규정 되어 있고,120)실제로 이 때문에 25세이하인 자는 보내지 않았다.121) 征東行省 鄕試는 元에 보낼 후보로 3인을 뽑는 것이었기에 기왕의 과거보다 더 어려웠음은 물론이 다. 이들은 원 과거에 응거하기 전에 상당히 긴 기간동안 하급관리로서 앞날을 위해 준비 하여야만 했다. 가장 특별한 경우인 李穡은 고려 과거에 급제한 해에 書狀官으로 元에 보 내어져 웅시할 수 있었는데 이는 그의 父 李穀이 元朝 官人이었기에 이미 國子監의 諸生 이 되었던 때문인 듯하다. 이들이 元 制科 응시를 위해 소요했던 기간은 평균 11년이다. 급제시의 평균연령은 고려과거 급제나이가 22세, 원 과거 급제나이가 34세이므로 元 제 과에 응거하는 사람은 적어도 과거 급제후 10여년간 하위직에 머물면서 여기에 만족하지 않고 더욱 학문을 닦아 확실한 출세길에 도전하였던 것이다. 일단 元 制科에 급제만 하면 몇 단계를 뛰어넘어 오랜 不遇함을 단번에 씻을 수 있게 된다. 이렇게해서 制科及第者는 高官의 반열에 들 수 있고 지속적인 승진으로 고위직에 무난히 오르게 된다. 이들의 관직 승진 과정을 표로 만들어 보면 표 6 과 같다. 그러나 이렇게 보장된 듯한 官路도 실제로 그렇게 순탄하지만은 않았다. 崔瀣는 그의 편벽된 성격으로 얼마 안가서 관직에서 은퇴하였고, 李穀은 고려에서 만족할 만한 지위를 얻기 위해서는 忠穆王代까지 거의 10년 이상을 기다려야 하였다. 118) 稼亭集 권8, 與同年趙中書崔獻納書 와 上政堂啓. 119) 급제년도를 알 수 없는 辛裔와 李承慶 등은 표에서 제외시켰고, 李天冀는 나이는 알 수 없어 급제년도만 제시하였다. 120) 元史 권81, 選擧, 科場 毎三歳一次開試 擧人從本貫 官司於諸色戶內推擧年及二十五以上. 121) 元 과거는 아니지만 이보다 좀 늦은 공민왕代에 明의 과거에 응시하려던 李崇仁과 權近이 25 세가 못되어 보내지 않았다는 예도 있다 高麗史 권74, 志28 選擧2 制科).

- 211 - 다음으로 제과 급제자들이 고려에서 차지하는 관직의 성격은 어떤 것이었나를 보도록 하자. 사료상에 나타나는 제한된 관직명에 의해 전체를 조감하는 것은 무리이기는 하나 대략을 보면 과거 급제자는 먼저 地方의 司錄을 경유하여 중앙의 藝文館의 檢閱을 거치게 되는데 대체로 그 과정을 밟아서 制科에 應擧하고 있다. 征東行省 鄕試에 오른 후, 또는 元 制科에 급제한 후에는 藝文應敎3人) 成均樂正, 典理部 등의 5품 전후의 관직에 오르 게 된다. 그리고 門下府의 省郞職이나 司憲府의 臺官을 거쳐 宰相職에 오르는데 宰樞에 올라간 사람이 10인이다. 이는 전체 15인의 67%가 되며 향방이 알려진 11인 중에는 90% 이상이다. 또 이들은 높은 문장력과 학문을 과시하는 사람들이었기에 館職을 겸대하 고 書筵에서 侍讀하거나 하는 경우가 많다. 표 6 제과 급제자의 관직 승진 과정 <표> </표> 고려 거 급 직후 震 藝 檢閱 정 崔 瀣 學諭 종 軸 司錄 趙 廉 李 穀 福 司錄參軍 辛 裔 李承 李仁復 福 司錄 輔 廣 司錄 李 穡 蔭 李 舒 과 文 9) 成均 9) 金州 州 慶 州 제 州 응거시 급 후 藝 檢閲 정 藝 應敎 정 長 庫使 종 藝 應敎 丹陽 注簿 司 樂正 종 憲糾正 종 典 佐郞 정 藝 檢閱 典儀副 종 左正言 종 藝 修撰 정 典 摠郞 정 書狀 典 正郞藝 應敎 정 右獻納 정 元 제과 元 제과 제 文 9) 文 5) 興 5) 文 ) 成均 4) 6) 令 4) 府, 6) 理 文 文 官 6) 8) 理 理 4) 文 5) 5) 최고직 密直副使 政 學 종 檢校 大司 정 僉議賛 事 정 密直副使 종 都僉議賛 事 정 僉議評 종 門 侍郞 章事 정 都僉議賛 事 정 政 學종 判門 使 종 領議政 정, 成均 成 成 3) 理 2) 成 下府 2) 2) 平 堂文 2) 2) 成 下 堂文 2) 2) 2) 1) 1) 지금까지 제과급제자의 분석을 통해서 우리는 신진가문을 배경으로한 과거출신자들은 실력을 더욱 발휘하여 元 제과에 합격함으로써 가문의 기반을 더욱 굳혀가고 있음을 보았 다. 元 制科에의 합격은 신진관인으로 가문배경이 없거나 미약한 자들 모두에게 확실한 미래를 보장하는 첩경이었다. 이들은 고려 문벌사회내에서 실력에 의한 신분상승의 기회 를 얻고 있었고, 특히 이들은 고려 최고의 엘리트임을 자부하는 사람들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5인 중에 재추직에 오른 자가 10인으로 67%에 불과함은 한편으로 귀족사회내 에서의 신분 상승은 실력만으로 쉽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한계성도 내포하고 있는 것이다. 한편 이들 상호 교유관계를 보면 반세기간에 선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급제자간에 강 한 유대관계를 가짐을 볼 수 있다. 元 制科 급제라는 특별한 명예를 공유한 이들은 자부 심도 대단해서 송별회를 가져 詩를 짓거나 또는 先輩의 墓誌銘을 지어 서로 칭송하고 있

- 212 - 國史館論叢 第24輯 다. 특히 震 軸 李穀 李仁復은 忠穆王때 李齊賢과 함께 三朝實錄 을 찬수하고 閔漬 의 編年綱目 을 改修하였다. 이제현은 비록 제과 급제자는 아니었으나 이미 忠宣王을 모시고 元都의 萬卷堂에서 元 士大夫들과 교유하였고122) 李穀 등의 座主로서 친밀한 교 분을 가졌으므로 그의 학문 성향으로 미루어 이들과 같은 맥락에 있다고 할 수 있다. 최 해는 출세과정에서 중간에 좌절된 경우라 할 수 있으나 이제현이나 안축, 이곡 외에 당대 의 문장가로 일컬어지던 崔文度 閔思平 등과 친교가 두터웠다. 안보는 원 제과 급제년도 가 비교적 늦고 나이 또한 44세에 급제하여 관로에서의 출세도 늦어서 공민왕대에 주로 활동하였다. 그러나 李穀과는 자주 교유하여 왔다. 元 制科 급제자로서 이질적인 요소를 갖은 인물로 趙廉과 辛裔 李承慶을 들 수 있다. 趙廉은 諫官으로서 활약하고 昭穆論에 일 가견을 가졌으나 趙頔의 亂1339)에 연루되었고, 辛裔는 과거를 통해 중앙에 진출하였으 며 문벌적 기반을 갖는 가문을 배경으로 한 儒臣으로써 附元輩인 高龍普와 인척관계로 忠 惠王을 元으로 잡아갈 때 한몫하고 함부로 權力을 천단하였다. 李承慶도 父가 등제하였 고, 특히 叔父 李兆年으로 인하여 진출한 신진관인가문 출신인데 일찍부터 元에서 활동하 여서 親元的 性向이 큰 인물이다. 이렇게 3인을 제외하면 나머지 8인은 학문적으로나 인 간적으로나 상호 밀접한 교유를 통해 14세기 중엽의 고려 사대부의 성향을 대변하는 사 람들이었다 하여도 크게 어긋나지 않을 것이다. 맺음말 元 干涉期라는 우리 민족사에서 처음 있었던 非自主的인 시기에 고려는 정치적으로나 사회 경제적으로 많은 시련을 겪었다. 이 시기를 이끌어가는 支配階層으로서 權門世族은 후대인의 눈에 부정적인 존재로 비치고 있으며 그런 가운데서 儒敎的 소양을 갖추고 實力 으로 진출하는 儒臣官僚는 이 시대의 정치문란과 사회모순을 제거하고 민생을 안정시켜 나가야 할 주인공으로 비쳐진다. 또 이들은 이른바 新進士大夫 라는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는 바, 본고에서는 구체적으로 이 시기 최고의 엘리트群이라 할 수 있는 元 制科 及第 者의 동향을 살펴 보면서 그들의 가문, 출세과정, 政治性向 등을 분석하여 元 制科 及第 者들의 性向을 파악해 보았다. 그리하여 필자는 다음과 같이 몇가지 사실로써 정리해 보았다. 첫째, 고려인의 元 과거 급제는 출세의 비약적인 지름길로써 과거에 급제한 후에 8,9品 의 하급직에 머물러 있던 사람이 6品이상 5品까지 招授되는 특전을 얻었음을 보았다. 이 122) 元에서 제과가 실시되기 이전에 이미 충선왕에게 발탁되어 元에서 활약하였다. 鄭玉子, 麗 末 朱子性理學의 導入에 대한 試考 震檀學報 51, 1981).

- 213 - 렇게 비약적 승진을 한 이들은 후에 최고관직에까지 오를 수 있고 또 음서의 혜택을 자손 에게 주게 됨으로써 門閥化의 길을 걷게 된다. 뿐만 아니라 출신이 한미하였더라도 기존 의 문벌가문과 통혼하는 기회를 얻게 되었다. 즉 원 제과에 급제한 儒臣의 家系를 보면 기존 官人의 자제이거나 문벌가문의 배경을 가진 경우가 9인으로 60%이고 한미한 지방 戶長의 자제가 1인 世系를 알 수 없는 경우가 5인이다. 기존관인의 경우 父나 祖父대에 처음으로 官人이 된 新進官人家門이 7인이고 문벌적인 배경을 가진 경우는 2인뿐이다. 또 同一한 가문내에서 연이어 급제자를 내는 경우도 3가문이나 되고 있다. 이로써 보면 元 제과는 가문적 기반이 아직 미약한 신진가문이 그들의 家勢를 더욱 확고하게 다져 나가는 길이기도 하였다. 둘째, 신진의 과거급제자가 元 제과에 응거하여 합격할 때까지의 과정을 살펴 보았다. 문벌 기반이 약한 新進士大夫는 과거에 급제하였다하여 모두 출세가 보장되는 것은 아니 었다. 처음 지방의 司錄으로 보직받거나 좀 나으면 藝文館의 檢閱로 중앙직을 받지만 이 들이 권력의 핵심부에 진출하기는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고려 과거에 급제한 후 元 制 科에 응거할 때까지 그들이 가졌던 관직은 기껏해야 8品정도에 있었고, 그 자리에 오르기 까지 걸린 기간도 평균 11년이라는 계산이 나온다. 앞 장의 표 5 에 의하면 고려 과 거에 급제한 나이가 평균 22세인데 비해 元 과거에 급제한 나이는 평균 34세이니 이들은 과거에 급제한 후 10년 이상이나 8,9품의 하위직에 머물러 있어서 문벌의 배경을 가진 급제자들보다 뒤쳐져 있었으며 이러한 不遇를 씻고 도약을 위해 元 制科에의 급제라는 영 광을 택한 것이다. 그 중에서도 李穡이나 李舒처럼 배경있는 가문출신의 경우는 소요기간 이 거의 없을 정도로 예외도 있으나 이 길을 택하는 사람들이 대체로 관인출신이라 하더 라도 가문배경이 미약하고 출세로에서 뒷전에 있는 사람들이었다는 경향을 보여주는 데는 부족함이 없을 것이다. 셋째, 元 制科 及第者들이 경유한 관직을 보면 門下府의 起居舍人이나 司議大夫를 거쳐 政堂文學, 僉議賛成事에 이르거나 密直司의 代言 提學, 司憲府의 糾正 御史大夫 또는 典 校寺나 典儀寺 등의 벼슬을 가지면서 館職을 겸하는 경우가 많다. 즉 文翰의 직을 맡아 表文이나 敎書등을 작성하여 文才를 발휘하였고 또 知貢擧로서 人才를 試取하는 경우가 많고 나아가 史書의 撰修, 書筵의 進講 등이 이들이 주로 담당하는 일이었다. 물론 이러 한 공통성을 추출해 내기 위해서는 史料가 없는 3인과 李承慶은 제외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므로 이들을 제외한 11인辛裔는 書筵을 맡은 적이 있음)은 충분히 이런 공통적 성 격을 가졌다고 할 수 있고73%) 이들은 학문적으로 李齊賢과 座主 門生관계나 交友관계 를 통해 친밀한 人脈을 형성하고 있는 점도 또 하나의 특징으로 볼 수 있다. 다시 말하면 李齊賢을 中心으로 14세기에 유학 즉 性理學의 受容과 관련하여 학문적 동류집단이 형성 되어 있었다고 보아도 좋을 것이다.123) 이들은 14세기 중엽의 고려 유학의 주축을 이루 는 사람들이었으며 정치적으로는 충숙왕 충혜왕 충목왕 충정왕代에 이르기까지 元의 온갖

- 214 - 國史館論叢 第24輯 간섭과 內的 갈등 속에서 권세가에게 전횡되는 정치현실을 체험하였고 현실의 모순과 개 혁의 필요성을 실감 하면서도 개혁정치를 실현하는 주체가 되지 못한 채 소극적으로 대처 할 수밖에 없었으며 도리어 문벌과 제휴하려는 경향이 더 짙었다. 이들은 다음 세대인 14 세기 후반의 신진사대부에게 조선건국이라는 歷史的 사명을 넘겨준 채 그 기반을 조성해 가는 사람들이었다. 지금까지 元 制科 급제자들을 가문, 관로진출, 정치성향 등을 개괄적으로 살펴 보았다. 본고는 14세기 고려 士大夫의 性格에 대한 연구의 일부를 구성하는 것이다. 그들의 학문 이나 사상동향은 후고를 기약하려 한다. 이를 통해 고려후기 士大夫의 이해에 一助가 되 기를 바랄 뿐이다. 123) 李淑景, 李齊賢勢力의 形成과 그 役割 韓國史硏究 64, 1989) pp. 42 82. 李齊賢勢力이란 用語는 좀 낯선 느낌이 있지만 하나의 학문적 교류를 중심으로 한 집단을 형 성하고 있었다고 보는 데는 무리가 없을 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