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
127
128
129
130
131 1) 반대의논점
132
133 2) 대응논리와 기장제복 의극복
134
135
136
137
138
139
140 3) 효문제의관계
141
142
143
144
145
146
147
148
149
150
체 그 성격 (金容天) 北魏 孝文帝 三年喪 의 실 와 151 뜻한다. 즉 縞冠素紕 는 관과 권의 몸체 부분은 모두 누이지 않은 흰색 비단을 사용하면서 다만 그 가선을 흰색의 누인 비단으로 둘러서 문식을 가한 것이다. 대상제를 지낼 때에 단지 縞冠 을 쓴 것에 비 하면 조금 더 吉로 나아간 것인데, 제사 후에도 여전히 호관을 쓰는 것은 아직 슬픈 마음이 남아있어 약간 흉한 복장을 하는 것이다. 深衣는 吉凶에 통용되는 옷인데, 15升의 베를 누이고 잿물로 씻어낸 후 채색으로 단을 달아서 만든다. 다만 상례에서는 순수하게 베로 만들고 채색의 가선장식을 하지 않는데, 이 때문에 麻衣 라고도 칭하 며 大祥祭를 지낸 후 禫祭를 지낼 때까지 입는다. 이렇게 본다면 효문제가 제사를 지낼 때 縞冠 朝服 革帶 黑屨를 착용하고, 이튿날 縞冠素紕에 深衣와 麻繩履를 착용한 것은 이른바 古禮에 따라 大祥祭 를 지낸 것임을 알 수 있다. 太和 15년(491) 4월 己卯(17)에 明堂을 처음 건설하고 太廟를 改修 하기 시작하였는데, 그것이 10월에 완성되었다. 太尉 拓跋丕는 태묘 가 이미 완성되었고 명당의 공사도 끝났으므로 제사를 지내고 신주를 옮겨 태묘에 봉안할 것을 상주하였다. 이에 효문제는 시간은 빠르 게 흘러 어느덧 縞制의 시기도 끝나게 되었으니, 다시는 明堂에서 哀 哭을 하여 효를 다할 수 없게 되었다. 이후에는 친히 태후의 산릉에서 拜奠을 하여 哀慕의 마음을 씻어내야 할 것이다 라고 하고, 태위 탁발 비에게 신주를 태묘로 옮겨 봉안하는 일을 전담하도록 하였다. 을 99) 100) 101) 102) 103) 104) 集說 喪服小記, 陳澔의 注, 素, 熟絹也. 紕,, 冠兩邊及卷下畔之縁也. 縞冠素紕, 謂冠與卷身皆用縞, 但以素縁之耳. 100) 禮記 深衣, 鄭玄의 注, 深衣者, 用十五升布, 锻濯灰治, 純之以采. 善衣, 朝祭之服也. 自士以上, 深衣为之次, 庶人吉服深衣而已. 101) 禮記 間傳, 又期而大祥, 素縞麻衣., 鄭玄의 注, 麻衣十五升布, 亦深衣 也. 謂之 麻 者, 純用布, 無采飾也. 102) 魏書 권7하, 高祖紀 제7하, p,168, (十五年夏四月) 己卯, 經始明堂, 改營 太廟. (冬十月) 是月, 明堂 太廟成. 103) 魏書 권108-3, 禮志 4-3, p.2789, 太尉丕奏曰, 竊聞太廟已就, 明堂功畢, 然享祀之禮, 不可久曠. 至於移廟之日, 須得國之大姓, 遷主安廟. 104) 魏書 권108-3, 禮志 4-3, p.2789, 時運流速, 奄及縞制, 復不得哀哭於明 99) 禮記
中國史硏究 第86輯 (2013.10) 152 縞制 즉 縞冠을 쓰는 大祥의 제사도 끝났으므로 풍태후의 신주를 태묘로 옮겨 遷廟를 하고, 이후에는 忌日에 墓祭를 지내겠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달 11월 丁卯에 새로 개수된 태묘에 7廟의 신주를 옮기는 遷廟를 하였다. 遷廟는 죽은 자의 신주를 祖廟로 옮기는 것을 말한다. 의례 에는 졸곡제를 지낸 다음날에 班祔한다고 하였는데, 鄭玄은 祔 는 제사 의 명칭으로 죽은 자의 신주를 昭穆의 차례에 따라 선조의 곁에 덧붙 여 세워 제사를 지내고, 제사를 마치면 신주를 正寢으로 되돌려 놓았 다가 練祭를 지낸 후에 遷廟하는 것이라고 하였다. 7 이처럼 정현에 게 있어 졸곡제 후의 班祔는 새로 죽은 자의 신위를 조묘에 세워 조상 들에게 인사를 올리는 것이고 천묘 개념은 연제를 지낸 후에 정식으 로 조묘로 신주를 옮겨 합사하는 것으로 구분한 듯하다. 의례 에는 遷廟의 절차를 별도로 언급하지 않은 바에서 생각한다 면, 그 원의는 아마도 졸곡제를 마친 후 遷廟를 하여 祔祭를 지내는 것으로 결국 遷廟와 祔祭는 연속되는 것이었던 듯한다. 그런데 정현이 부제와 천묘의 시기를 구분한 것은 흉례인 喪中에 신주를 조묘에 모셔 두는 것은 吉凶이 뒤섞이는 혐의가 있으므로, 凶이 줄어들고 吉이 조 금씩 들어오기 시작되는 小祥(練祭)을 기점으로 천묘를 해야 한다고 생각한 듯하다. 그런데 좌전 에 군주가 죽으면 졸곡제를 지낸 후 부제를 지내고, 부제를 지낸 후에 신주를 만들어서 그 신주에만 단독으로 제사를 지내 고, 烝 嘗 禘의 제사는 廟에서 지낸다 고 한 것에 대해 杜預는 105) 106) 10 ) 108) 堂 當親拜山陵 寫泄哀慕 書 권7 高祖紀 7 和十 神主 新廟 旣夕 虞 哭 明日 以 班祔 同 班祔 7 虞 鄭玄 注 班 次也 祔 也 祭昭穆 次而屬 凡祔已 復 寢 既祫 主 左傳 僖 凡 薨 哭而祔 祔而作主 廟, 後,. 105) 魏 하, 제 하, p,168, (太 五年), 於. 106) 儀禮 禮, 三, 卒,, 其. ;, 士 禮 記,, 其. 10 ) 儀禮 士 禮 記, 의,,., 卒 之.. 之 之, 於. 如, 反其, 後. 108) 公 33년 조, 君, 卒,, 於, 於. 十有一月丁卯 遷七廟 虞 明日 以 哭 明日祭名 祔 猶屬 廟 練而 遷廟 特祀 主 烝 嘗 禘
체 그 성격 (金容天) 北魏 孝文帝 三年喪 의 실 와 153 졸곡 후에 새로 죽은 자의 신주를 만들어서 정침에서 단독으로 제사를 지내고, 삼년상을 마친 후에 조묘로 신주를 옮겨 吉祭로 合祀하는 것 으로 해석하였다. 이렇게 보면 遷廟의 시기는 처음 祔祭에서, 鄭玄의 시점에서는 練祭 로, 다시 杜預의 시점에서는 삼년상을 마친 후로 점차적으로 늦추어졌 음을 알 수 있다. 효문제가 大祥祭를 마친 후에 遷廟를 했던 것은 이러한 시대적 흐름의 연장선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효문제는 遷廟를 한 다음달 12월 己酉에 東郊에서 봄을 맞이하는 제사를 올렸고, 이틀 후 辛亥에는 조서를 내려 樂官을 선발하였다. 이 듬해 태화 16년 정월 초하루 戊午에 群臣들을 太華殿으로 불러 연회를 베풀고, 처음으로 악기를 걸어두었는데 연주는 하지 않았다. 즉 천묘를 한 후 달을 넘겨 吉祭 즉 四時의 常祭를 지내고, 또 그 다음달에 作樂을 한 것이다. 鄭玄에 따르면 大祥祭를 지내고 한 달을 건너뛰어 禫祭를 지내며, 담제를 지낸 다음 달에 음악을 연주할 수 있 다고 하였다. 즉 정현의 설에 따르면 사후 25개월에 대상제, 27개월 109) 110) 111) 112) 113) 左傳 僖 杜預 注 以新死 神祔 祖 尸柩已遠 思 慕 故造木主立几筵焉 特用 祭祀 寢 不同 宗廟 新主既立 特祀 寢 宗廟四時常祀 舊也 畢 又 禘 乃皆同 吉 谷田 古 の基礎的 風間書房 7 唐開元 哭祭 小祥祭 祥祭 禫祭 祔廟 祔祭 순 어 어 禫祭를 낸 후 祔廟 祔祭 것 화 哭 후 小祥 祥 禫祭 사 남 그 중 祖 廟 合祀 것 吉凶 섞여 안 념 어긋나 니 祖廟 正寢 祖廟 를 속 옮겨야 불편함 때 禫祭를 마친 후 괄 遷廟를 여 祔祭를 게 것 생 書 권7 高祖紀 7 和 十有二月 己酉 車駕 迎春 東郊 辛亥 詔簡選樂官 十有六 春正月戊午朔 饗群 于 華殿 始 興 縣而不樂 효 악 를 걸어 를 않았 것 노나 禫祭를 낸 후 악 를 걸어만 않 것 공 칭찬 것 위 보 檀弓 禫 縣而不樂 比御而不入 曰 加 一等矣 虞 又 而 祥 月而禫 鄭玄 注 猶 109) 公 33년조, 의, 者之 之於,, 孝子,, 喪禮 於, 之於, 於, 則 自如. 三年禮, 大, 於. 110) 孝之, 中國 代喪服 硏究 (, 19 0), p.49. 111) 大 禮 에는 卒 大 ( )의 으로 되 있 지 에 ( )하는 으로 제도 된다. 이는 卒 이 에도, 大, 등의 喪禮의 제 가 아 있는데 와 에 에서 하는 도 이 서는 된다는 관 에 거 와 로 신주 계 하는 도 있기 문에 지내 고 상을 에 일 적으로 하 지내 된 으로 각된 다. 112) 魏 하, 제 하, pp,168 169, (太 16년 ), 於.,. 年, 臣 太. 帝 爲 王公,. 문제가 기 두고 연주 하지 다는 은 춘 추시대 라의 孟獻子가 지 에도 기 두고 연주하지 은 을 자 한 에 대한 의식적인 행 로 인다. 禮記 上, 孟獻子,,. 夫子, 獻子 於人. 113) 儀禮 士 禮 記, 期 大 中 에 대한 의, 中
154 中國史硏究 第86輯 (2013.10) 담제를 지내고, 28개월 음악을 연주할 수 있게 된다. 효문제의 경우 태화 15년(491) 9월에 대상제, 11월에 遷廟, 12월에 吉祭, 태화 16년(492) 1월에 作樂의 절차를 거쳤다. 효문제가 12월 길 제를 지내기 전에 禫祭를 지냈을 가능성도 있지만, 魏書 의 高祖紀 나 禮志 어디에도 그러한 사실은 발견되지 않는다. 사관의 기록 누락인지, 아니면 南朝 시대에 心喪으로 거상을 할 때 禫祭를 지내지 않았던 여파 때문인지는 명확하지 않다. 이상에서 살펴본바 효문제는 장례 후 虞祭 卒哭 練祭(小祥) 大祥 遷廟(祔廟) 吉祭 作樂 등으로 이어지는 변제과정에서의 거처, 관, 의상, 식사 등을 의례 예기 등 이른바 古禮의 규정을 비교적 충 실하게 준행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한 위시대의 旣葬除服 은 물 론 남조시대에 國制로 확립되었던 公除 후 心喪 3년의 거상방식과도 전혀 다른 것이었다. 陳戌國은 효문제의 풍태후 복상은 북위에서 삼년상을 실행한 유일 한 사례이지만, 엄격한 의미의 삼년상이 아니며 태화 15년(491) 10월 이후 終喪까지는 단지 心喪일 뿐이며 따라서 한 위의 고사에 의거하 여 旣葬公除한 것에 불과하다고 하였다. 陳戌國은 풍태후 사후 1주기가 되는 太和 15년(491) 9월 丙戌에 有 에 114) 115) 116) 閒也. 禫, 祭名也. 與大祥閒一月. 自喪至此, 凡二十七月. ; 禮記 檀弓上, 祥而縞. 是月禫, 徙月樂 에 대한 鄭玄의 注, 言禫明月可以用樂. 陳澔는 담제 를 지낸 후 같은 달에 吉祭를 지내야 하는 날이 있으면 담제를 지낸 달에 지 내고, 담제를 지내는 달에 길제를 지내야 하는 날이 들어있지 않으면 담제를 지내고 달을 넘겨서 길제를 지낸다고 하였다( 禮記集說 喪大記 의 注). 그러 나 길제는 四時의 常祭로 정해진 때가 있으므로 반드시 이렇게 특정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114) 王肅은 25개월 大祥祭, 대상제를 지낸 달에 禫祭, 26개월에 作樂을 하는 것 으로 본다. 115) 南宋의 胡寅은 효문제가 기년에 祥祭를 지내고 달을 바꾸어 禫祭를 지냈다 고 하였는데, 명확한 근거는 없다. 讀禮通考 권19, 喪期19, 國恤2, 天子服母 后, 而羣臣狃於漢制, 雜以國俗, 使其君不得自由. 其初守禮違衆, 欲行通喪甚力, 其終也, 不能三年, 於是期而祥, 改月而禫. 116) 中國禮制史: 魏晋南北朝卷 (湖南敎育出版社, 2002), p.420.
체 그 성격 (金容天) 北魏 孝文帝 三年喪 의 실 와 155 司들이 祥日의 날짜를 점칠 것을 청한 것에 대해 이 祥 을 小祥 이라 고 해석하였다. 이렇게 해석한 이유는 3년상에서 소상제는 1주기(13개 월)에 지낸다는 고정관념 때문일 것이다. 하지만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이때 효문제는 縞冠 朝服 革帶 黑屨를 착용하고 大祥祭를 지냈던 것이다. 小祥 즉 練祭는 이미 太和 15년(491) 4월 초하루에 올렸다. 또 魏書 孝文廢皇后馮氏傳 의 太和十七年, 高祖旣終喪 의 기록을 근거로 풍태후가 죽은 太和 14년(491) 9월에서 태화 17년(493)까지 3년 상의 거상을 하였으며, 소상제를 지낸 태화 15년 10월 이후 태화 17년 의 終喪까지는 단지 心喪이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나 위의 사료 高祖 旣終喪 의 문맥은 고조(효문제)가 태화 17년에 終喪을 하였다는 의미가 아니라, 이미 종상을 한 태화 17년의 시점에서 太尉 拓跋丕가 馮淸을 황후로 세워야 한다고 상주를 한 것 으로 해석해야 할 것이다. 7 효문제가 탁발비의 상주를 받아들여 풍청을 황후로 책립한 것이 태 화 17년 4월이므로 이때 종상을 하였다면, 효문제의 거상기간은 무려 31개월이 된다. 효문제는 太和 15년(491) 9월에 大祥祭를 지냈으며, 12 월에 吉祭(時祭)를 지냈으므로, 길제를 지내기 이전 즉 태화 15년(491) 12월 이전에 종상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풍태후가 죽은 지 2주 기가 되는 太和 16(492)년 9월 辛未에 풍태후의 陵墓에서 拜哭하였는 데, 이는 忌日祭로서 吉祭이지 喪祭가 아니다. 禮制의 기본정신은 稱情立文 즉 인간의 마음속 감정을 문식을 통하 여 겉으로 표현함으로써 內와 外가 相稱하도록 하는 데에 있다. 喪禮 에서 그것은 복상자의 슬픔의 감정을 상복을 통해 드러내는데, 시간의 흐름에 따라 그 슬픔의 감정도 줄어들고 그에 따라 복 역시도 무거운 복에서 가벼운 복으로 바뀌어 가는 것이다. 이것이 喪服의 變除이다. 11 ) 118) 7 書 권 皇 列傳 廢皇 氏 廢皇 氏 師熙 也 和十七 高祖既終 尉元丕等表以 秋未建 六宮無主 請正 內位 高祖從 立 皇 書 권7 高祖紀 7 7 辛未 以 明 皇 再周忌日 哭 于陵左 絕膳二日 哭不輟聲 11 ) 魏 13, 后 제1, 孝文 后馮, p.332, 孝文 后馮, 太 之女. 太 年, 喪, 太 長,,. 之, 后爲 后. 118) 魏 하, 제 하, p.1 0,, 帝 文 太 太后,,,.
中國史硏究 第86輯 (2013.10) 156 를 거행한 후, 본래 대상제를 지낸 후에 착용하는 素冠과 深衣 로 3년의 상기를 채우게 하는 杜預의 心喪에 대해 효문제는 상복을 벗 은 채로 喪期만을 채우는 것은 부모를 애도하고 그리워하는 군주와 의려에서 거상하는 상주에게는 모두 거짓된 것 이라고 하면서, 상례는 형식에만 치우칠 바에는 차라리 슬퍼하는 마음이 낫다 고 한 공자의 말을 인용하였다. 이는 두예의 거상방식이 內外가 相稱하지 못한 것이라는 효문제의 강력한 비판이라 하겠다. 효문제는 삼년상의 상기를 기년으로 줄이기는 하였지만, 태화 14년 (490) 9월 풍태후의 初喪에서 15년(491) 9월에 大祥祭를 지낸 후 縞冠 素紕에 深衣로 갈아입을 때까지 고례에 규정된 變除의 절차를 비교적 충실히 준행하였다고 할 수 있다. 그 이후 11월의 遷廟(祔祭), 12월의 吉祭, 태화 16년(492) 1월의 作樂의 절차를 거쳤는데, 이를 心喪이라 규정할 수는 없다. 삼년상의 상기는 縗服을 벗는 대상제에서 실질적으 로 끝난다. 고례에서 이후 禫祭를 지내고 吉祭와 作樂 시기 등을 규정 한 것은 흉례에서 일상생활로 복귀하는 과정에서 슬픔의 마음을 수습 할 시간적 여유가 필요했기 때문으로, 이를 가지고 心喪이라고 하지는 않는다. 효문제의 풍태후 복상의 핵심은 3년간의 상기를 채웠는가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남조시대의 心喪 3년의 형식적 거상방식에서 벗어 나 變除과정을 통해 古禮에 좀 더 접근했던 점에 있다 할 것이다. 장례 119) Ⅳ. 맺음말 래 남조시대에 이르기까지 황제 복상은 기본적으로는 短喪 制가 관철되었다. 장례를 마치고 36일의 복상 후 除服하는 漢 文帝의 權制, 장례를 마친 후 상복을 벗음으로써 喪期를 마치는 曹魏의 旣葬 除服, 은나라 高宗의 諒闇三年不言 을 새롭게 해석하여 장례를 치른 한대 이 書 권108-3, 禮志 4-3, p.2782. 119) 魏
체 그 성격 (金容天) 北魏 孝文帝 三年喪 의 실 와 157 후에 상복을 벗고 心喪으로 3년의 상기를 마치도록 하는 杜預의 諒闇 心喪說 이 등장하였고, 이것이 서진에서 남조에 이르기까지 國制로서 정착하였다. 이처럼 시대마다 약간의 차이는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旣葬除服 이 전제되고 있었다. 馮太后 사후, 효문제가 삼년 복상에 대한 강한 의지를 보이자, 이에 신하들이 반대하고 나서면서 양측 사이에 치열한 복상논의가 벌어졌 다. 신하들이 삼년상을 반대하는 논점은 위 진의 기장제복 고사와 풍태후의 유훈이라는 두 가지 점으로 집약된다. 논의는 풍태후의 遺訓 과 효문제의 情理를 절충하여, 삼년상을 기년으로 줄이되 상복을 입은 채로 복상하는 것으로 최종 결론이 내려졌다. 이리하여 한 위 이래 旣葬除服 또는 旣葬除服後心喪 의 전통이 극복되었다. 결과적으로 효문제는 삼년복상이라는 본래의 의도를 관철시키지는 못하였다. 하지만 풍태후가 붕어한 太和 14년(490) 9월에서 태화 15년 (491) 9월까지 효문제는 葬禮 虞祭 卒哭 練祭(小祥) 大祥 에 이르는 變除 과정을 거쳤으며, 이때의 거처, 관, 의상, 식사 등은 대 체로 의례 예기 등에 규정된 이른바 古禮를 비교적 충실하게 준 행하였다. 杜預의 心喪說에 기초한 南朝의 國制는 3년이라는 喪期를 채움으로써 삼년상의 형식만을 갖춘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에 반해 효문제의 복상은 비록 상기는 기년으로 줄었지만 삼년상의 變除절차를 세밀하게 수행함으로써 삼년상의 실질적 내용을 그 안에 담았다는 점 에서 古禮에 보다 더 접근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풍태후에 대한 효문제의 복상이 단순히 효심의 발로만으로 설 명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풍태후 사후에도 대신들은 여전히 그녀의 정치적 영향권 하에 놓여 있었으며, 따라서 효문제 스스로 자신의 정 치세력 확립이라는 필요성에서 복상논의를 정치적으로 활용한 측면도 있었을 것이다. 나아가서는 古禮에 대한 문제의식을 환기시킴으로써 이후 본격화되는 한화정책 추진의 정치적 포석도 담겨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158 中國史硏究 第86輯 (2013.10) <참고문헌> 사료 1. 禮記 儀禮 禮記 禮 考 左傳 漢書 晉書 魏書 通典 大唐開元禮 白虎通疏證 集說 讀 通 2. 저서 및 논문 谷田孝之, 中國古代喪服の基礎的硏究 (風間書房, 1970) 金子修一, 古代中國と皇帝祭祀 (汲古書院, 2001) 梁滿倉, 魏晋南北朝五禮制度考論 (社會科學文獻出版社, 2009) 陳戌國, 中國禮制史 : 魏晋南北朝卷 (湖南敎育出版社, 2002) 川本芳昭, 中國の歷史 魏晋南北朝 (講談社, 2005), 金正植, 唐 前期 官人 父母喪의 확립과 그 성격 -心喪 解官을 중심으로- ( 중 국고중세사연구 28, 2012) 金羨民, 魏晉南朝의 喪服禮와 公除제도 ( 中國史硏究 84, 2013) 金羨民, 兩漢 이후 皇帝短喪制의 확립과 官人三年服喪의 入律 ( 東洋史學硏究 98, 2007) 洪承賢, 後漢末은 舊君 개념의 재등장과 魏晉時期 喪服禮 - 禮學의 효용성을 중심으로 ( 東洋史學硏究 94, 2006), 高二旺, 喪禮改革視野下的北魏孝文帝漢化政策 ( 中南民族大學學報 29-3, 2009)
체 그 성격 (金容天) 北魏 孝文帝 三年喪 의 실 와 159 提要) (中文 丧 的实体与其性质 北魏孝文帝 三年 金容天 本文针对北魏孝文帝对冯太后的 三年丧 考察其实体与性质. 从汉 代一直到南朝时代, 皇帝的服丧基本上贯彻短丧之制. 汉文帝的权宜 之制在举行葬礼之后, 经过36天, 行除服之礼 ; 曹魏的 既葬除服 在 举行葬礼以后, 脱去丧服, 以终丧期之礼 ; 杜预的 谅闇心丧说 通过 对商高宗的 谅闇三年不言 的新解释, 在举行葬礼之后, 就脱去丧服, 以心丧终三年之丧期. 这是从西晋到南朝成为国制的. 如此, 虽然每 个时代都有些不同之处, 但是 既葬除服 基本上是一个前提. 作为文帝的皇后与孝文帝的祖母的冯太后, 在北魏孝文帝太和十 四年(490)九月, 殂于太和殿, 享年49岁. 此时, 孝文帝坚持要贯彻行 三年丧期之礼, 但一批臣下极力反对, 两者之间发生激烈的争论. 这 批臣下反对三年丧期的论点收敛于魏晋的 既葬除服 故事与冯太后 的遗训两个论点. 通过冯太后的遗训与孝文帝的情理之间的折冲方 案, 争论平息, 其最终结论为把三年的丧期减为期年, 但在丧期期间 戴孝着行服丧之礼. 随之, 汉魏以来的 既葬除服 或 既葬除服后心 丧 的传统在此被克服. 孝文帝未能成功贯彻三年服丧的本意.但从冯太后驾崩的太和十四 年(490)九月到太和十五年(491)九月, 孝文帝经过葬礼 虞祭 卒哭 练祭(小祥) 大祥的变除过程, 在居处 冠 衣裳 食事等方面大
160 中國史硏究 第86輯 (2013.10) 体遵行 仪礼 礼记 等规定的古礼, 笃实行服丧之礼. 就基于杜预的 心丧说的南朝国制而言, 可以说它徒具三年丧的形式, 只以三年丧期 期满为准则. 与此相反, 孝文帝的服丧虽然丧期减少为期年, 但是笃 实遵行三年丧的变除程序, 落实三年丧的实际内更接近于古礼. 주제어 : 효문제 삼년상 기장제복 고례 상복변제 關鍵詞 : 孝文帝 三年喪 旣葬除服 古禮 喪服變除 Keywords : Xiaowendi Sanniansang Jizangchufu Guli Sangfubianchu (원고접수: 2013년 8월 30일, 심사완료 및 심사결과 통보: 2013년 10월 4일, 수정 원고 접수: 10월 10일, 게재 확정: 10월 25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