朝鮮後期 薦擧制와 山林의 政界進出 鄭 求 先* Ⅰ. 머리말 Ⅱ. 薦擧制의 整備 1. 鄕薦法의 整備 2. 別薦法의 整備 Ⅲ. 山林의 薦擧와 政界進出 1. 山林의 政界進出 2. 山林의 成分과 官歷 Ⅳ. 實學者의 薦擧制論 1. 薦擧制論 擡頭의 背景 2. 崔漢綺의 科薦併用論 3. 丁若鋪의 南行制論 V. 맺 음 말 I. 머 리 말 中國 漢代의 鄕擧里選制에서 비롯된 薦擧制는 우리나라의 三國時代부터 이미 시행 된 바 있으며, 高麗時代에도 계속 시행되어 중요한 入仕路의 구실을 하였다. 朝鮮王 朝에서는 高麗의 제도를 이어받아 개국 직후에 國代典 과 濟六典 등의 法典 에 薦擧規定을 명문화 함으로써 이를 法制化하였다. 遺逸薦擧制 孝行薦擧制 成均館公 薦制 保擧制 등의 朝鮮時代의 薦擧制는 현직관리의 陞進 轉補路로서의 역할 뿐만 아 니라, 未入仕者를 위한 初入仕路의 역할도 수행하였다.1) 初入仕路로서의 薦擧制의 시행은 조선초기에는 부진하였으나, 中宗初期에 趙光祖 * 東國大學校 講師. 1) 졸고, 朝鮮時代의 薦擧制 ( 東國史學 23, 1989) 참조.
- 50 - 國史館論叢 第43輯 등의 士林派가 自派勢力의 강화를 위한 방편으로 활용함에 따라 본격화 되었으며,2) 士林派가 政界의 주도권을 장악하게 되는 明宗 宣祖代에는 크게 활성화 될 수 있었 다.3) 이러한 薦擧 制는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前期에 나타난 문제점을 보완하고, 관 직에의 탄력성과 참신성을 부여하기 위하여 鄕薦法과 別薦法이 새롭게 정비됨으로써 지방에 은거하고 있던 山林이 대거 진출할 수 있는 발판이 되었다. 山林이 薦擧를 통하여 政界에 진출한 것은 조선전기부터였으나, 본격적으로 진출 하여 활발한 활동을 전개하게 되는 것은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 이처럼 後 期에 山林의 진출이 활발해진 이유는 혼탁한 정치상황과 科擧의 문란 등으로 인하여 仕宦에의 매력을 상실하고 학문에만 전념하는 山林이 증가하였고, 조정에서는 이들 을 회유 포섭하여 민심수습과 정권안정을 기하려 했던 데에 있었다. 한편 조선후기에는 과거제의 모순과 폐단이 심화됨에 따라 이를 바로 잡기 위한 改革案이 여러 實學者들에 의하여 제기되었다. 그런 개혁안 가운데는 과거제를 완전 히 폐지하고 薦擧制만을 쓰자는 주장과, 과거제의 폐단을 고쳐 薦擧制와 함께 쓰자 는 이른바 科薦合一論 또는 科薦併用論이 주류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조선후기의 薦擧制를 다룬 논문은 별로 눈에 띄지 않고 있으나,4) 山林 이나5) 관리등용제도 개혁안6)에 대해서는 다수의 연구업적이 발표된 바 있다. 그러나 이 방면에는 아직도 밝혀져야 할 부분이 많이 남아 있다고 생각된다. 本稿에서는 지금까지 다루어지지 못한 朝鮮後期 薦擧制의 整備過程과 山林의 政界 進出 상황 및 丁若鑛과 崔漢綺의 官吏登用制度 改革案에 대하여 살펴보고자 한다.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조선후기의 官吏登用制度는 물론, 당시의 정치 사회상을좀더 깊이 있게 이해하는데 작은 도움이라도 된다면 다행이라 하겠다. Ⅱ. 薦擧制의 整備 2) 졸고, 中宗朝 薦擧制의 施行과 士林派의 成長 ( 東國史學 24, 1990) 참조. 3) 졸고, 朝鮮明宗 宣祖代의 遺逸薦擧制 ( 金昌沫敎授華甲紀念論叢, 1992) 참조. 4) 졸고, 朝鮮後期의 薦擧制 (((慶州史學 10, 1991). 5) 朝鮮後期 山林에 대하여 검토한 주요 논문은 다음과 같은 것들이 있다. 李佑成, 李朝 儒敎政治와 山林의 存在 ( 韓國의 國史像, 創作과 批評社, 1982). 禹仁秀, 17세기 山林외 進出과 機能 ( 歷史敎育論集 5, 1983). 유봉학, 18,9세기 老論學界와 山林 ( 한신 논문집 3, 1986). 川島藤也, 李南姬 譯, 朝鮮中期 山林의 傳記-朴弼周 年譜를 중심으로- ( 淸溪史學 7, 1990). 6) 朝鮮後期 官吏登用制度 改革案을 다룬 주요 논문을 들면 다음과 같다. 韓祐劤, 星湖 李興硏究의 一端 -그의 科擧制 是非를 중심으로- ( 歷史學報 7, 1954). 李供烈, 科弊의 末期的 樣相과 그 對備策 -특히 茶山의 科制案에 대한 檢討- ( 史叢 15 16合, 1971). 趙湲來, 實學者의 官吏登用法改革論 硏究 ( 白山學報 23, 1977).
- 51-1. 鄕薦法의 整備 조선전기에 다소 무원칙하게 시행되었던 遺逸薦擧制는 朝鮮後期에 접어들어서 鄕 薦法으로 새롭게 정비되었다. 鄕薦은 鄕里之薦의 준말로서 鄕擧里選이나 鄕擧라고도 불리워졌으며, 鄕薦法은 鄕薦保擧法이라고도 일컬어졌다. 鄕薦法의 정비는 孝宗 즉위년 (1649) 11월 備邊司의 건의에서 비롯되었는데, 이때 에 건의된 鄕薦法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나라를 다스리는 道理는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데 있고, 백성을 편안하게 하는 근 본은 사람을 얻는데 달려 있으니, 鄕薦法을 마땅히 申明하여야 합니다. 멀리 떨어진 시골에서 재주를 지니고도 헛되이 늙어가는 자들이 참으로 애석합니다. 各邑의 守令으로 하여금 境內에서 모든 사람이 다같이 칭찬하는 자를 嚴選토록 하 되, 行實이 있거나 재주가 있는 자는 나이에 구애받지 말고, 朝官 生進 을 불문 하고 각기 年初에 薦擧하여 巡營으로 보내도록 하십시오. 마땅한 자가 없으면 구차 하게 薦擧할 필요는 없으며, 있으면 숫자를 정하지 말고 監司가 대상자를 상세하게 살펴서 禮遇하여 보내게 하십시오. 그들이 서울에 도착하면 吏曹에서 身 言 書 判의 법으로 시험하여 政府로 올리고, 政府는그 가운데에서 뛰어난 자를 가려 吏曹에 啓下하여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결 원에 따라 官職을 주게 하십시오. 행실이 매우 높고 재주가 뛰어난 자는 參上職을 除授하고, 私情에 따라 잘못 薦擧한 자는 守令을 처벌토록 하십시오. 武士 가운데 특출하여 將帥가 될만 하거나 조금 못하여 邊將이 될만한 자는 文士와 마찬가지로 薦擧토록 하여, 兵曹로 하여금 武藝와 兵書로 시험하여 재능에 따라 職 任을 주도록 하십시오.7) 위의 건의는 孝宗의 재가를 받아 시행될 수 있게 되었는데, 이에 의하면 薦擧를 받을 수 있는 신분은 朝官者는 물론, 生員 進士 등의 유생으로 명확히 규정되었 으며, 이들 가운데 行證가 매우 높고 재주가 뛰어나 才行을 兼備한 자들을 연령과 인원에 제한을 두지 않고 薦擧토록 하였다. 薦擧의 절차는 守令 監司 吏曹 議政 府의 단계를 거치게 되어 있었으며, 특히 吏曹에서는 被薦者들을 身 言 書 判으로 시 7) 孝宗實錄 권2, 즉위년 11월 丁丑, 備邊司啓曰 爲國之道 在於安民 而安民之本 在於得人 鄕 薦之法 今當申明矣 退方鄕曲 抱才虛老者 誠可惜也 令各邑守令 極擇境內之公共稱道者 有行有 才 不拘年齒 勿論朝官生進 各於歲首薦擧 送于巡營 無則不必苟擧 有則不必定數 監司詳察 可者 禮以送之 至于京中 吏曹以身言書判之法試之 進于政府 政府擇其拔萃者 啓下吏曹 懸簿錄 之 隨窠授職 行誼甚高才器超出者 或除參上職 有謬擧循私者 罪其守令 武士之中 高可爲閫帥 下可爲邊將者 與文士一體薦進 令兵曹試武藝兵書 隨才授任.
- 52 - 國史館論叢 第43輯 험하게 되어 있었다. 身言書判의 法은 前期에 실시되었던 四書 五의 儒敎典에 의 한 시험방법에 비하면 새로운 시험 방법으로서 피천자의 才 行을 아울러 파악하는데 적합한 방법이었다. 吏曹에서는 피천자들의 성명을 장부에 기록해 두었다가 빈자리 가 생길 경우 임용토록 하였는데, 才行이 뛰어난 자들에게는 參上職을 제수하도록 규정하였다. 그 밖에 薦擧의 公正性을 확보하기 위하여 私情에 따라 잘못 薦擧할 경 우 守令을 처벌하는 擧主緣坐制도 포함되었다. 또한 鄕薦法에서는 文士 외에 武士도 함께 薦擧하도록 규정하고 있었다. 즉 武才 가 뛰어나 將帥 등이 될만한 자들을 薦擧하여 兵曹에서 武藝와 兵書로 시험한 뒤 그 재주에 따라 임용토록 하였던 것이다. 이처럼 孝宗 초기에 마련된 鄕薦法에는 지방 에 묻혀 있는 文士와 武士의 薦擧規定이 구체적으로 명시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위와 같은 鄕薦法은 그 시행에 있어서 많은 문제점이 노출되어 부분적인 改定아 불가피하게 되었다. 문제의 핵심은 피천자의 수와 연령에 일정한 제한이 없 다는 점이었다. 즉 피천자의 연령과 인원에 제한이 없는 것을 기화로 심지어는 한 명의 守令이 일시에 8명까지 薦擧하는 경우도 발생하였고, 연령이 70세에 가까운 자 를 武藝가 뛰어나다는 명목으로. 薦擧하는 일도 나타났다.8) 이러한 사태에 대하여 承 政院에서는 한 고을에 才行이 뛰어난 자가 어찌 이렇게 많을 수 있으며, 나이가 70 세에 가까와 氣力이 쇠약한 자를 장차 어떻게 쓸수 있겠는가라고 우려하면서 鄕薦에 관한 규정을 재검토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던 것이다.9) 또한 피천자가 매우 많아 雜亂의 폐단이 있으므로 한 道에 매년 2,3명으로 피천자를 제한하자는 주장이 제기 되기도 하였다.10) 이러한 문제점의 발생과 그 개선방안의 제시에도 불구하고 孝宗代에는 끝내 개정 이 이루어지지 않다가, 顯宗代에 접어들어서야 비로소 개정이 실현되기에 이르렀다. 즉 顯宗 3년(1662) 7월 吏曹에서 鄕薦法의 규정이 일정치 않아 撞雜이 우려되므로 式年마다 三南지방(忠淸道 全羅道 慶尙道)은 각기 3명씩, 그 밖의 5 道는 각기 2명씩 薦擧토록 해야 한다는 건의가 채택됨으로써 비로소 피천자의 인원이 뚜렷하게 명시 되게 되었다.11) 이에 따라 3년마다 전국적으로 19명 이내의 인원만을 薦擧할 수 있 도록 피천자의 수가 대폭 축소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여기에서 三南지방의 薦擧인원 을 그 밖의 다른 지방에 비하여 늘려잡은 것은 이 지방이 이른바 人才의 府庫로 인 식되고 있었던 데에 기인하였던 것으로 보인다.12) 이러한 인원규정은 그 후 續大 8) 위의 책 권4, 원년 5월 辛未, 政院啓曰 今見慶尙監司鄕薦單子 或一守令所薦 多至八人 或年迫 七十而被薦於武藝. 9) 위와 같은 조. 10) 위의 책 권4, 원년 7월 甲戌, 司直趙復陽上疏曰 鄕擧之制 非不周詳 而人數旣多 徒有雜亂之 弊 若令監司 訪求茂才異等 歲貢二三人 則掄揀必精 方可合於實用矣. 11) 顯宗實錄 권5, 3년 7월 丙戌, 吏曹啓 以鄕薦保擧之法 自前不一其揆 人心漸巧 濫雜可慮 三南各限三人 五道各限二人 毎於式年 道臣精抄啓聞 上允之.
- 53 - 典 에 그대로 명시되었다. 그리고 피천자의 연령은 朝鮮前期에는 제한이 없었으나, 朝鮮後期에 접어들면서 차차 제한이 가해지기 시작하여 生員 進士의 경우에는 30세 이상으로, 은 40세 이상으로 하는 연령의 下限規定이 肅宗代 이후에 확정되어 續大典 에 그대로 등재 되었다. 이렇게 피천자의 연령을 제한한 것은 年少者들이 마구 薦擧되는 것을 방지 함과 아울러 奔競의 폐단을 제거하려는 데에 그 목적이 있었다. 한편 부적합한 자의 薦擧와 그에 따른 擧主의 처벌 문제도 논란거리의 하나였다. 이와 관련된 例를 한가지 들면, 顯宗 3년 7월에 尙州의 金鍵이 才行으로 薦擧 되어 齋郞에 제수되었으나, 人倫을 어겨 得罪한 사실 때문에 削判되는 일이 있었다. 이에 吏曹에서 本道로 하여금 擧主를 처벌토록 하고, 本道의 監司와 本州의 牧使는 不察之失을 이유로 推考토록 주청하여 재가를 얻었다.13) 이 사건을 계기로 피천자의 인원을 제한함과 아울러 피천자의 명성과 실제가 서로 다르거나 연령을 허위로 기재 한 경우 擧主를 엄히 처벌하고 守令과 監司는 罷職하도록 하는 개선책이 마련되었던 것이다.14) 이러한 개선방안은 뒤에 績大典 에 그대로 명시되었으나, 엄격한 擧主緣 坐規定에도 불구하고 문제점이 제대로 시정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리하여 급기야 는 薦擧가 사사로운 정에 따라 이루어져 仕路가 혼란스러우므로 鄕薦法을 혁파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하였던 것이다.15)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孝宗 초기에 마련된 鄕薦法은 많은 문제점이 나타나 여러 차례의 보완작업을 거친 끝에 英祖 22년(1746)에 편찬된 續大典 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으로 명시 되기에 이르렀다. 各 道의 前職官吏 生員 進士 가운데 才行이 뛰어난 자는 式年 年初마다 鄕人 이 守令에게 保證薦擧하고, 守令은 이를 觀察使에게 보고한다. 觀察使는 이들을 추려 서 中央으로 薦擧하되, 下三道는 각기 3명을 넘지 못하고, 上五道는 각기 2명을 초과 하지 못한다. 각 被薦者의 이름 아래에 그 才行을 분명하게 기록해야 하며, 生員 進 士는 30세 이상, 은 40세 이상이 되어야 薦擧를 받을 수 있으며, 前職官吏는 연 령에 구애받지 않는다. 被薦者의 명성과 실제가 부합하지 않거나 연령을 허위로 기재한 자는 처벌하되, 鄕里의 保擧人은 貢擧非其人律로 처벌하고 觀察使와 守令은 罷職한다. 서울 사람으 로서 시골을 왕래하며 因緣을 구하여 청탁을 넣어 薦擧된 자는 保擧者와 같은 처벌 12) 위의 책 권3, 원년 11월 壬戌, "侍讀官李敏敍曰 宣祖朝 以兩南人物 布列於朝 故一世稱兩南 以人才府庫 今則兩南之人 立朝者甚少 不可如是埋沒矣. 13) 위의 책 권5, 3년 7월 丙戌. 14) 위와 같은 조. 15) 肅宗實錄 권7, 4년 9월 辛亥, 權大運以爲 鄕薦別薦 率多循私 仕路混淆 職由於此 請ー併 罷之 上命只罷別薦
- 54 - 國史館論叢 第43輯 을 가한다.16) 이처럼 續大典 에는 被薦者의 신분을 前職官吏 生員 進士 으로 규정하였고, 일차적 擧主를 鄕人으로 명시하였다. 또한 薦擧인원은 忠淸道 慶尙道 全羅道의 下三 道는 3명 이하, 그 밖의 上五道는 2명 이하로 제한하였으며, 피천자의 연령은 生進의 경우 30세 이상, 은 40세 이상으로 못박았다. 특히 擧主緣坐의 규정을 좀더 구체 적이고 엄격하게 명시한 것을 중요한 특징으로 지적할 수 있는데, 처벌의 대상이 되 는 행위를 被薦者의 才行을 과장해서 기록하거나 연령을 허위로 기재한 경우로 구체 화 하였다. 또한 擧主의 처벌 규정을 엄격히 하여 保擧한 鄕人은 貢擧非其人律을 적 용하고, 守令과 觀察使는 罷職토록 하였다. 여기에서 貢擧非其人律은 大命律 에 의 하면 杖 80에 처하도록 규정되어 있었는데,17) 朝鮮時代에도 이 규정이 적용되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續大典 에는 이와 같이 그동안 문제점으로 부각되었던 부분을 대폭 손질하여, 被薦者의 人員과 年齡을 명확하게 제한하고, 가혹하다고 할 정도로 擧主緣坐規定을 강화하여 鄕薦의 保擧的 性格을 뚜렷이 하였으나, 이 규정이 그대로 지켜지지 않는 경우도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피천자의 인원에 관한 사례만 보아도, 英祖 26년 (1750)에 京幾道에서 한번에 6명을 천거하였고,18) 憲宗 7년 (1841)에는 全羅道에서 한꺼번에 5명을 천거한 일이 있다.19) 이와 같은 과다한 인원의 薦擧는 천거의 객관 성에 대해 심각한 의문을 야기하였고, 그에 따라 천거의 海雜과 循私에 따른 시비가 끊이지 않았던 것이다. 지금까지 살펴본 바와 같이 조선후기에 정비된 鄕薦法은 조선전기에 실시된 遺逸 薦擧制를 강화 발전시킨 것으로서 鄕村의 山林 등을 발탁키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제도였다. 따라서 뒤에서 밝혀지겠지만 鄕薦法이 山林의 登用에 크게 기여하였으나, 천거제의 취약점인 不公正性의 폐단을 완전히 극복하지 못한 한계를 또한 지니고 있 었다. 한편 조선전기부터 시행되었던 成均館公薦制는 조선후기에 館薦이라고도 불리워지 면서 부분적으로 정비되었다. 정비의 핵심은 鄕薦法과 마찬가지로 피천자의 인원과 연령에 있었다. 먼저 피천자의 인원에 대하여 살펴보면, 전기에는 일정한 규정이 없 16) 續大典 권 1, 吏典 薦擧條, 各道前銜及生進之才行表著者 每式年歲首 一鄕人 保擧于 守令 報觀察使抄薦 下三道無過三人 上五道無過二人 各其名下懸錄其才行 生進則年三十以上 則四十以上 前銜則不拘年歲 或所薦人名實不副 年歲冒錄者論罪 一鄕保擧人 以貢擧非其 人律論 觀察使守令罷職 京人之往來鄕曲 夤緣冒占者 與保擧者同律. 17) 大明律直解 吏律 卷2 職制(法制處, 1964). 18) 英祖實錄 권 59, 26년 3월 壬辰, 領議政金在魯曰 諸道鄕薦各有定數 京幾無過二人 則畿伯 柳嚴强援不當援之例 至薦六人. 19) 憲宗實錄 권7, 6년 2월 甲子, 全羅監司李孩淵 以才行表著人 柳光朝李秉坤徐榮孝金邦 斗尹榮大 馳啓.
- 55 - 었으나 후기에는 都目 때마다 3명 내지 4명을 천거할 수 있도록 제한하였다.20) 따라 서 1년에 6월과 12월 두 차례의 都目政이 실시되었으므로 매년 6명 내지 8명의 儒生 을 천거할 수 있었다고 하겠다. 또한 成均館公薦에 있어서 피천자의 연령은 國大典 에 50세로 규정되어 있었 으나,21) 이것이 지나치게 높다는 여론에 따라 仁祖代에 와서 40세로 낮추어 졌다 가,22) 肅宗代에 다시 50세로 환원되었다.23) 연령을 낮추어야 한다는 입장에 선 자들 은 50세에 薦擧되어 종 9품 參奉에 入仕할 경우 8,9년 뒤에야 6품직에 오르게 되는 데, 이렇게 되면 65세 이상은 守令에 임용될 수 없는 규정에 따라 守令 등의 관직에 복무할 수 있는 기간이 거의 없게 된다는 논리를 제시하였다.24) 이러한 연령규정에 도 불구하고 才行이 뛰어난 자는 연령에 구애받지 않고 천거될 수도 있었으나, 어쨌 든 50세 이상이라는 연령의 하한은 지나치게 높고 비현실적이어서 成均館公薦을 단 순히 형식적인 것으로 만들고 천거를 부진하게 한 하나의 요인이 되었다. 이와 같은 成均館公薦制도 鄕薦法과 마찬가지로 여러가지 문제점이 발생하였다. 그 하나의 예를 들면, 肅宗 36년 7월에 有學 通讀優等 累擧不中의 薦目에 해당되지 않는 자가 천거되어 관직을 제수받자, 司憲府에서 그를 파면할 것을 요구한 일이 있 었다. 이때에 司憲府의 탄핵에 불만을 품은 成均館儒生들이 집단적으로 捲堂을 단행 하는 사태로 발전하였다.25) 이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는 것이지만 公薦의 不 公正性에 대한 일단면을 엿볼 수 있게 해준다. 이러한 부분적인 문제점도 있었지만, 조선후기에 정비된 成均館公薦制는 鄕薦法과 함께 유능한 儒生들을 위한 入仕路의 하나로 자리잡고 있었다. 2. 别薦法의 整備 別薦은 式年保擧 등의 定期的 薦擧인 例薦에 대비되는 용어로서, 國王의 特命에 의하여 임시적 부정기적으로 이루어진 特別薦擧를 뜻한다. 科擧에 있어서, 정기적 과 거인 式年試에 대비되는 別試가 있었듯이 薦擧에도 別薦이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別薦은 조선전기에는 주로 權知의 去官을 위해서 시행되었다. 조선왕조에 서는 國初부터 文 武科及第者들을 모두 即叙할 수 없었으므로, 甲科及第者 3명을 제 외한 급제자들에게는 散官을 주고 臨時職 또는 待期職인 權知에 分差하였다가 차차 20) 英祖實錄 권59, 20년 4월 己酉, 持平任珣上疏論十條 且於都政時 如今日 館薦之規 各取 三四人 補初仕之棄. 21) 國大典 권3, 禮典 獎勸條. 22) 仁祖實錄 권30, 12년 10월 癸卯. 23) 肅宗實錄 권48, 36년 7월 辛巳, 以年五十以上 有學及通讀優等屢擧不中等 三條議薦事定式. 24) 仁祖實錄 권30, 12년 10월 癸卯. 25) 肅宗實錄 권48, 36년 7월 辛巳.
- 56 - 國史館論叢 第43輯 實職으로 내보내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그리하여 文科及第者는 成均館 校書館 藝文 館. 承文院의 四館의 權知로 分差하고, 武科及第者는 開國直後에는 訓鍊院 司僕寺 軍 器寺의 三館權知에 分差하였으나 뒤에는 訓鍊院에만 分差하도록 변경되었다. 散官을 받고 權知에 분차된 급제자들은 국초에는 6品에서 實職으로 去官토록 되어 있었지만, 나중에는 7品에서 去官하도록 바뀌었다. 權知의 去官人員은 文臣權知의 경 우 매년 10명 9명이었고, 武臣權知는 매년 1명 6명이었다. 그런데 太宗代 이후부터 別試의 濫設로 인해 權知의 수가 증가함에 따라 去官하지 못하고 적체되어 있는 權 知의 수가 날로 증가되었다. 즉, 文臣權知의 경우 太宗代에 는 6,7년을 경과해야 9品 實職을 받을 수 있었으며, 中宗代에는 8 10년동안 권지로 적체되어 있는 자가 많았 던 것이다. 이러한 권지의 적체를 해소하기 위하여 마련된 것이 바로 別薦이었다. 別薦은 정 기적 都目에 앞서 임시로 권지를 특별 薦擧하여 去官시키는 제도였다. 이같은 別薦 을 실시한 목적은 權知의 적체를 해소하는데 있었으나, 文 武官의 부족을 해소하기 위한 목적도 지니고 있었다. 文臣權知의 別薦은 燕山君代부터 시행되기 시작하여 中 宗代에 이르러 활성화 되어 빈번히 이루어졌다. 그러나 武臣權知의 別薦은 中宗初부 터 시행되었지만 활성화 되지 못하다가 中宗末에 이르러 거의 폐지되고 말았다.26) 이처럼 조선전기에 權知의 去官을 위해 주로 시행되었던 別薦은 權知의 급증에 따 라 그 실효성이 상실됨으로써, 후기에는 지방의 침체된 文官이나 山林 등을 薦擧하 여 승진 또는 入仕시키기 위한 통로로 변질되었다. 이에 따라 조선후기 別薦의 목적 은 뛰어난 人材를 발탁함과27) 동시에 人材의 결핍을 보충하려는28) 데에 두어졌다. 또한 別薦은 긴급한 관리의 충원에 효율적으로 대처하지 못한 例薦의 한계를 보완하 려는 성격도 지니고 있었다. 조선후기에 別薦이 본격적으로 실시되기 시작한 때는 仁祖代부터였던 것으로 보인 다. 仁祖 14년(1636) 6월에 衣冠子弟 가운데 不學無才한 자들이 여러 官職에 다수 복 무하고 있으므로, 이들을 모두 파면하고 別薦人으로 보충토록 하라는 下敎에서29) 仁 祖代에 別薦이 실시되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조선후기 別薦法의 정비과정에 대하여 검토하겠는데, 먼저 擧主의 범 위를 살펴보도록 하겠다. 別薦의 擧主는 주로 大臣이나 2품 이상의 宰相으로 되어 26) 졸고, 朝鮮前期 官吏任用制度에 대한 考察 權知의 別薦과 南行의 官界進出을 중심으로 ( 東國史學 25, 1991) 참조. 27) 孝宗實錄 권21, 10년 정월 丙辰, 正言金萬基引避曰 伊日朝家別薦之擧 實出於籲俊求才之 盛意. 28) 肅宗實錄 권5, 2년 정월 己丑, 下敎曰 人才垂乏 未有如今日 如有才學顯著 各別薦擧 以體 予 求賢之意. 29) 仁祖實錄 권32, 14년 6월 乙亥, 上 下敎曰 自今衣冠子弟 不學無才而列於庶位者頗多 其 悉汰去以今番別薦人填差.
- 57 - 있었으나, 擧主를 2품 이상으로 한정할 경우 擧主들이 被薦者를 잘 알수 없어, 奔競 과 請託이 난무하고 私情에 따라 서로 薦擧하는 등의 폐단이 일어나 薦擧의 實效를 거둘 수 없으므로, 擧主의 범위를 확대해야 한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이에 孝宗 4 년(1653)에 이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서, 擧主의 資級을 가리지 말고 비록 堂下官이 라도 三司에 출입하는 자들은 거주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下敎가 내려짐으로써 擧主 의 범위가 확대 될 수 있었다.30) 이에 따라 文班의 3품 堂下官으로서 三司의 官員을 역임한 자, 武班으로서 兵使 水使 牧使 府使를 역임한 자, 정 3품 通政官으로서 文班 의 本品實職을 역임한 자들에게까지도 薦擧할 수 있는 권한이 주어졌다.31) 결국 文 武班 모두 3품 堂下官까지로 거주의 下限線이 내려지고, 피천자 들의 자질을 좀더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는 위치에 있었던 三司의 官員과 牧使 府使 등의 守令을 역임 한 자들을 擧主에 포함시킴으로써 人材의 발탁이라는 別薦의 효과를 극대화 하려고 시도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거주의 확대는 濫擧라는 새로운 문제를 야기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하여 濫擧를 방지하기 위하여 이후부터 다시 거주의 범위를 축소하는 조치를 계 속해서 취해야만 했다. 즉 顯宗代에는 2품 이상 관원 六曹參議 三司로 축소되었고,32) 肅宗 초기에는 大臣 六卿 三司長官으로 더욱 축소되었던 것이다.33) 그러다가 肅宗 10 년 (1684)에 마련된 別薦節目에서는 거주의 범위가 大臣 六卿 監司 兵使로 규정되었 는데,34) 이후에도 이 규정이 대체로 유지되었다. 다음으로 薦擧의 인원을 보면, 후기에는 각 擧主들이 대체로 2명 내지 3명씩을 薦 擧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肅宗代의 別薦節目에는 2명으로 확정되었다. 또한 피천자가 贼汚의 죄를 범할 경우 擧主를 함께 처벌토록 하는 擧主緣坐制도 적용되었다. 그리 고 천거를 받을 수 있는 대상은 文官 武官 蔭子弟 儒生 武士 등으로 매우 광범위하여 科擧及第 여부나 官職의 有無를 막론하고 재능있는 인재는 거의 모두가 천거받을 수 있었다.35) 被薦者들은 다양한 薦擧條目 즉, 薦目에 의하여 천거되었는데, 薦目 가운데 대표적 인 것은 다음과 같은 6條의 薦目이었다. ① 潛心義理 有學行 ② 持身方正 有德行 ③ 氣節敦確 可以直諫 30) 孝宗實錄 권10, 4년 2월 庚申. 31) 위의 책 권10, 4년 2월 甲子. 32) 顯宗實錄 권20, 13년 7월 庚子. 33) 增補文歌備考 권199, 選擧考16 薦用條 2. 34) 위와 같은 조. 35) 위와 같은 조.
- 58 - 國史館論叢 第43輯 ④ 不畏强禦 奉公剛果 ⑤ 通達世務 處事明敏 ⑥ 智勇過人 可以制敵36) 위의 6조 가운데 ① ⑤조는 文士 또는 文官에게 해당되는 천목이고, ⑥조는 武士 나 武官에게 해당되는 것이다. 6조는 또한 學行 德行 直諫 奉公剛果 處事明敏 制敵으 로 요약 할 수 있는데, 이것을 통해 別薦의 목적이 6가지 才行을 갖춘 자를 薦擧, 등 용하려는데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에는 6조의 천목에 의해 이루어지는 別薦을 六條別薦이라 불렀다. 처음에 6조로 되어 있던 別薦의 薦目은 孝宗代 이후 여러 차례의 확대 축소의 과 정을 거친 끝에 顯宗 13년(1672)에는 다음과 같이 9조로 확대되었다. ① 持身方正 有才行者 ② 潛心義理 有學術者 ③ 智謀過人 可堪將領者 ④ 勇力超衆 緩急可用者 ⑤ 剛果敦確 不畏强禦者 ⑥ 留心世務 處事明敏者 ⑦ 慈詳廉謹 可合字牧者 ⑧ 居家孝友 見稱鄕黨者 ⑨ 文才優異 善於撰述者37) 여기에서는 6조 천목에 ⑦ ⑧ ⑨조의 3개조가 새로이 추가되어, 守令適任者 孝行 者 撰述可能者를 발탁하려 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肅宗 5년(1679)에는 9조에서 ①조와 ⑦조가 빠져 7조로 축소되었다가, 다시 肅宗 36년(1710)에 마련된 別薦節目에 서는 計慮 幹具 膽勇의 3조로 정리되었다. 肅宗代에는 이후에도 明行修 術 行誼 學術 行誼 學術精深 行誼純固 才識通鍊 등으로 薦目이 계속 변하였다.38) 이처럼 別薦의 薦目은 일정한 규정이 없이 당시의 정치적 필요나 시대적 상황에 따라 변천을 거듭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천목의 변화를 통해, 별천이 처음에는 學行 이 뛰어난 山林이나 守令 將帥適任者 등을 발탁하려 하였으나, 차츰 山林의 발탁을 위주로 하는 양상으로 바뀌어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위와 같은 薦目으로 薦擧된 피천자들에게는 그들의 관직 有無와 才行에 따라 다음 과 같은 여러 가지의 특전이 부여되었다. 陞進 擢用 陞州牧 直出六品 陞六品 除職 36) 孝宗實錄 권10, 4년 2월 丁巳. 37) 顯宗實錄 권20, 13년 7월 庚子. 38) 增補文獻備考 권199, 選擧考16 薦用條 2.
- 59 隨才叙用 聞見除職39) 여기에서 直出六品은 곧바로 6품직에 제수하는 것이며, 陞州牧은 縣이나 郡의 守 令을 州 牧의 守令으로 승진시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특전 가운 데 陞職 州牧 등은 주로 現職官吏에게 베풀어 졌고, 擢用 直出六品 隨才殺用의 특 전은 주로 山林 등의 未入仕者들에게 주어진 것 같다. 또한 이와 같은 특전은 備邊 司와 餘曹의 의논에 의하여 결정되었으며,40) 특히 初入仕하는 자들은 講으로 시험한 후 임용토록 규정되어 있었다.41) 지금까지 조선후기 別薦法의 정비과정 을 살펴보았는데, 이상과 같은 別薦法에 의 하여 國王들은 別薦敎令을 수시로 내려 薦擧를 촉구하였고, 이에 따라 다수의 인재 들이 薦擧될 수 있었다. 이제 別薦에 의한 薦擧 殺用의 사례를 몇가지 살펴보도록 하 겠다. 먼저, 孝宗 4년 7월에 別薦에 의해 가장 많이 薦擧된 자를 특별히 서용하라는 王命에 따라 山林인 尹宣擧가 6품직에 超救된 것을 지적할 수 있다.42) 그 후 顯宗 6 년 4월에는 別薦에 의해 薦擧된 피천자 80여 명을 서용하라는 전교가 있었으며,43) 같은 王 15년에는 李之濂 尹推 韓垽 李同揆 등 4명의 山林이 薦擧된 사례가 나오고 있다.44) 또한 肅宗代에도 즉위년에 別薦이 실시되었으며45) 7년 2월에는 別薦人 가운 데 山林 7명을 直出六品시킨 예가 있다.46) 이와 같이 別薦에 의한 薦擧 敍用의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았는데, 피천자들은 대 부분 서용의 특전을 받았으나,47) 그들 가운데는 署까지 거치고도 서용되지 못하는 자들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48) 또한 피천자들 중에는 京中의 士大夫들이 대부분이 고 外方의 才行者들은 드물다는 지적이 나오기도 했는데,49) 이는 서울에 거주하는 擧 主들이 자기와 친분이 있는 자들을 사사로운 情에 따라 薦擧한 결과였다고 생각된다. 이처럼 別薦의 시행에 있어서 가장 큰 문제는 鄕薦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천거의 不公正에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不公正 사례를 몇 가지 살펴보면서 別薦의 실태를 좀더 자세하게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別薦의 不公에 관한 類型은 私情에 따라 친인 39) 顯宗實錄 권10, 6년 4월 庚申. 40) 肅宗實錄 권10, 6년 11월 辛未, 戶曹參議尹以道上疏略曰 別薦人 令鈴曹 就議廟堂 隨才 調用 上 從之. 41) 續大典 권 1, 吏典 薦擧條, 別薦入仕之類 竝依例就講. 42) 孝宗實錄 권11, 4년 7월 壬子, 吏曹判書沈之源曰 別薦中被薦最多者 有各別超用之命矣 今則尹宣擧之薦最多 超出六品乎 上曰然. 43) 顯宗實錄 권10, 6년 4월 癸卯. 44) 위의 책 권22, 15년 7월 己未. 45) 肅宗實錄 권1, 즉위년 10월 壬子. 46) 위의 책 권11, 7년 2월 丁亥, 金壽桓言 別薦中直出六品者 多至七人." 47) 위의 책 권10, 6년 10월 己丑, 同筵李敏毅曰 今番別薦之類 幾盡調用. 48) 顯宗實錄 권9, 5년 11월 庚寅. 49) 肅宗實錄 권9, 6년 6월 癸亥, 領議政金壽桓 又以今番別薦 多京中士夫 外方人所與者絕無.
- 60 - 國史館論叢 第43輯 척이나 친한 자들을 천거하는 경우와, 피천자의 薦目을 허위로 기재하여 천거하는 두가지로 크게 나눌 수 있다. 먼저 친인척 등을 천거한 사례를 보면, 孝宗 4년에 同 知事 李元龍이 그의 姻戚인 呂爾亮을 相避를 살피지 않고 薦目을 허위로 기재하여 천거하였다가 司諫院의 탄핵을 받고 파직된 일이 있다.50) 그 후에도 六庚別薦에 있 어서 각기 친한 자를 천거하여 태반이 循私하였다는 비난이 있었으며,51) 肅宗代에도 柳椐와 李秞가 換手登薦한 사실이 발각되어 처벌하도록 조치된 바 있다.52) 다음, 피 천자의 천목을 허위로 기재한 경우를 보면, 孝宗 4년에 兵曹參議 俞榥이 奉公剛果로 천거한 金翰朝와 閔忱 등이 용렬하다는 것이 밝혀져 파직된 예를 먼저 들 수 있 다.53) 또한 孝宗 10년에는 일찍이 御史에 의하여 파직된 적이 있는 前縣監 聞照와, 鄕里에서 불미한 행동으로 물의를 일으킨 李權를 잘못 천거하였다가 薦目을 削 去당하고 擧主들이 推考된 일도 있었다.54) 이 밖에 용렬하고 연로한 자를 천거한 경 우와,55) 부적합한 자들이 천거되어 直出六品이나 陸州牧 등의 특전을 받아 물의를 일으킨 예도 있었다.56) 이러한 문제 때문에 別薦을 다시 실시하거나,57) 別薦이 일시 적으로 혁파되는 사태가 발생하기도 하였다.58) 그러나 이러한 문제점의 발생에도 불구하고 別薦이 朝鮮末期까지 부단히 시행되어, 山林의 등용과 관리의 충원 등에 일정한 기여를 한 사실을 간과할 수는 없을 것이다. Ⅲ. 山林의 薦擧와 政界進出 山林은 山林之士 山林宿德之士 山林遺逸之士 林下宿德之士 등으로 다양하게 일컬어 진 용어로서, 향촌에 은거한 채 官途를 멀리하고 儒學에 힘쓰던 學德높은 선비를 뜻 하는 말이다. 따라서 遺逸 隱逸 林下之人과 같은 의미라고 할 수 있다. 향촌에 은거 하고 있는 선비를 朝鮮時代에는 주로 遺逸이라 불렀지만, 후기에는 遺逸과 山林을 함께 사용하였다. 遺逸과 山林을 굳이 구별한다면, 遺逸은 京中에 생활근거를 둔 자 까지 포함하는 넓은 개념이지만, 山林은 지방에 근거지를 두고 있는 자만을 뜻하는 50) 孝宗實錄 권10, 4년 3월 辛卯. 51) 위의 책 권10, 4년 5월 丁亥, 大司諫洪命夏引避曰 六條別薦 乃國家莫重之擧 各擧所親 太半循麥 52) 肅宗實錄 권11, 7년 2월 甲申, 承旨李師命又言 今見別薦單子 至於柳椐居李秞 則各以所 親換手登薦 顯有行私之秘 尤涉可駭 上 命査觀科罪. 53) 孝宗實錄 권10, 4년 3월 辛卯. 54) 위의 책 권21, 10년 정월 戊戌. 55) 顯宗實錄 권13, 7년 12월 丙辰. 56) 肅宗實錄 권11, 7년 2월 丁亥 및 권13, 8년 7월 己未. 57) 孝宗實錄 권10, 4년 6월 丁未, 吏曹啓曰 以改薦與否 別爲題目 精擇以薦爲當 從之. 58) 肅宗實錄 권7, 4년 9월 辛亥, 權大運以爲 鄕薦別薦 率多循私 仕路混淆 職由於此 請併ー 罷之 上 命只罷別薦
- 61 - 좁은 개념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59)山林은 또한 大科에 급제치 않아야 한다는 전 제가 따른다. 鄕村에 은거해 있다가도 일단 大科에 급제하고 나면 山林으로서의 지 위를 잃고 마는 것이다. 山林 가운데 學行이 높아 世間의 주목을 받는 자들은 遺逸薦擧 鄕薦 別薦 등의 각 종 천거를 통하여 徵召되어 出仕의 길을 걷게 된다. 그러므로 천거는 山林의 유일한 出仕路였으며, 이에 따라 천거 외에 다른 경로를 통하여 出仕한 자들은 결코 山林이 라 할 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山林이 모두 出仕하는 것은 아니어서 천거를 받고 도 끝내 不求聞達의 지조를 지키면서 학문에만 몰두한 자들도 많았다. 따라서 被薦 이나 出仕與否가 山林을 규정짓는 기준이 될 수는 없었다. 그런데 조선말기에는 천 거를 통하여 徵召되어 관직을 除授 받은 특정한 儒賢만을 山林이라 지칭하기도 하였 으나, 이는 조선시대 전기간에 걸쳐 보편적으로 통용된 것은 아니다. 山林이 천거를 통해 政界에 진출한 것은 조선초기부터의 일이었으나, 본격적으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明宗代부터이다. 明宗 7 년 曹植 李希顔 成守深 등의 천거를 시작으로, 遺逸薦擧制의 활성화에 힘입어 山林이 본격적으로 진출하게 된 것이다. 그 러나 전기에 진출한 山林들은 정계에서의 활약이 미약하여 정치적으로 큰 비중을 차 지하지는 못하였다. 따라서 山林의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짐에 따라 그들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은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정계에 서 크게 활약한 최초의 山林은 아마도 宣祖代에 薦擧되어 入仕한 후 光海君代에 大 北의 領袖로서 政界를 주도했던 鄭仁弘이었다고 하겠다. 이후에 山林은 朝廷의 적극 적인 徵召政策에 의하여 정계에 대거 진출, 적극적인 활약을 보이게 된다. 특히 仁祖 反正 직후에 反正의 주동세력인 西人系 勳臣들이 儒林의 지지를 받아야만 정권의 지 속과 안정을 기할 수 있다고 판단하여 儒林의 대표적 인물들인 山林을 발탁, 중용하 려고 한60) 정책에 힘입어 仁祖 初期부터 山林이 대거 薦擧되어 政界에서 활약할 수 있었다. 또한 孝宗代에는 효종이 자신의 北伐計劃을 도와줄 계층으로 山林을 주목함 으로써 宋時烈 등의 山林이 薦擧되어 정계에 진출하게 되었으며, 이후 山林의 징소 는 儒賢 등용이라는 유교적 명분과 결합되어 관례화되어 갔다.61) 결국 조선후기에 山林의 진출이 활발했던 이유는 科擧의 문란과 잇따른 戰亂, 그리 고 黨爭에 의한 혼탁한 정치상황으로 인하여 官途를 기피하고 은둔하는 선비들이 많 아졌고, 朝廷에서는 鄕村에서 강력한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山林을 등용함으로써 정권의 안정과 민심의 수습을 도모하고자 했던 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山 林을 대우하는 것은 우리 列祖의 家法이니, 國脈의 유지가 儒敎의 부식에 말미암고 있다 62)라는 英祖의 말처럼 유학자인 山林을 徵召함으로써 유교를 진흥하고 이를 통 59) 위의 책 권4, 원년 9월 丙申, 玉堂官尹鑴曰 隱士非指隱於山林者 在市井亦謂之隱 60) 李佑成, 李朝 儒敎政治와 山林의 存在 ( 韓國의 歷史像, 創作과 批評社, 1982) p.259. 61) 禹仁秀, 17世紀 山林의 進出과 機能 ( 歴史敎育論集 5, 1983) pp.149 150.
- 62 - 國史館論叢 第43輯 하여 정권을 강화하려 했던 것이다. 요컨대 山林의 급증과 國王을 중심으로 한 조정 의 정치적 이해가 맞물려 山林의 대거 진출과 활약이라는 현상이 나타났던 것이다. 1. 山林의 政界進出 조선후기에 접어들면서 山林의 정계진출이 활발해졌는데, 진출은 주로 특정 관직 에의 임용을 통하여 이루어졌다. 여기에서는 이러한 특정관직을 통한 산림의 정계진 출 양상을 구체적 사례의 분석 등을 통하여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조선후기에는 山林을 특별히 우대하여 登用키 위한 방안으로 山林만이 진출할 수 있는 이른바 山林職을 특별히 新設, 運營하였다. 山林職의 설치는 상승해 가고 있던 山林의 정치적 비중을 반증하는 조처였다고 할 수 있다. 山林職 가운데 가장 먼저 등장한 것은 仁祖 1년(1623) 5월에 설치된 成均館의 司 業이다.63) 文官만을 임용토록 되어 있던 成均館에 새로운 관직인 司業을 둔 것은 뛰 어난 儒學者들인 山林을 임용하여 그들을 우대 하는 뜻을 보이고, 그들로 하여금 儒 生들을 효율적으로 교육하도록 하기 위한 의도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司業은 원래 司藝(正4品)와 直講(正5品)사이의 從4品 官職이었으나, 그 후 續大典 에는 正4品으 로 상향 조정되었다. 그 인원은 처음 에는 3명이었으나,64) 곧 2명으로 감축되었다.65) 그 후 1명이 다시 감축되어 續大典 에는 1명으로 규정되었다.66) 또한 司業은 三 望에 해당되는 자가 없을 경우 單望, 또는 二望으로도 임용이 가능하였다.67) 山林의 成均館 진출은 이미 宣祖代에 李瑪에 의하여 처음 시도되어, 成渾을 大司 成에 임용코자 하였으나 大臣들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가,68) 仁祖代에 司業 의 설치에 따라 비로소 실현될 수 있게 된 것이다. 司業의 신설과 함께 當代의 名儒 로서 薦擧를 통하여 出仕하고 있던 金長生 張顯光 朴知誠의 3명이 동시에 司業에 임 명되었다. 仁祖代에는 그 후 姜鶴年 崔蕴 鮮于決이 계속해서 司業에 진출하였다. 仁 祖代 이후에도 꾸준히 司業이 임명되어, 孝宗代 2명, 顯宗代 2명, 肅宗代 8명, 景宗代 1명, 正粗代 2명 등이 임명되었다. 따라서 조선후기에는 모두 21명의 山林이 司業에 진출하였던 것이다( 표 1 참조). 成均館에는 司業에 이어 孝宗 9년(1658) 12월에 祭酒가 설치되었다.69) 正3品 堂上 62) 英祖實錄 권21, 5년 정월 辛亥, 上曰 待遇山林 是我列祖家法 國脈之維持 實由儒扶植儒 敎矣. 63) 仁祖實錄 권2, 원년 5월 戊午. 64) 위와 같은 조. 65) 위의 책 권27, 10년 12월 己丑. 66) 續大典 권 1, 吏典 京官職條. 67) 顯宗實錄 권1, 즉위년 9월 戊辰. 68) 仁祖實錄 권2, 원년 5월 戊午.
- 63 - 官職인 祭酒는 山林을 위한 최고의 영예직으로서 山林의 대명사처럼 사용되었으며, 政治的 社會的으로 祭酒의 권위는 科擧 출신인 大司成을 훨씬 능가하였다. 祭酒의 직 함은 후세로 내려올수록 더욱 소중하게 여겨져, 祭酒를 지낸 山林은 뒤에 다른 높은 品階의 벼슬에 오른 뒤에도 직함은 보통 祭酒로 통하곤 하였다.70) 祭酒를 설치한 것은 명망있는 山林으로 하여금 成均館 儒生의 교육을 담당케함으 로써 그들을 우대함과 아울러 儒生들의 학업을 장려하려는 데에 있었다.71) 이러한 목적을 달성키 위하여 品秩에 구애받지 않고 正3品 이상의 高官들도 祭酒를 겸직할 수 있도록 그 문호를 확대하였다.72) 최초의 祭酒인 孝宗代의 宋浚吉을 필두로 하여, 顯宗代에는 宋時烈이 祭酒에 진출 하였고, 肅宗代에는 許穆 尹鑴 등 山林의 영수들이 차례로 진출하였다. 그리하여 高宗 代까지 모두 24명의 山林들이 祭酒에 진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祭酒에 임명된 山林들은 모두가 당대의 巨儒로서 조정과 儒學界의 존경을 받고 있던 인물들이었다. 成均館과 함께, 史의 侍講과 道義의 規諷 등을 통하여73) 世子의 교육을 담당한 世子侍講院에도 山林職이 特設되었다. 仁祖 24년(1646) 5월에 설치된 世子侍講院의 山林職은 贊善(正3品 堂上官) 進善(頌善의 改稱)(正4品) 諮議(正7品)로 구성되어 있었 다.74) 이들 山林職에는 學行이 뛰어난 자를 임용하되, 單望으로도 가능토록 하였으 며, 특히 諮議는 別薦으로 薦 표 1 朝鮮後期의 山林職 進出者 王代 成均館 祭酒(正3品) 仁祖 宋淡吉 孝宗 世子侍講院 司業(從4品) 贊善(正3品) 金長生 張顯光 金 集 朴知誠 姜鶴年 崔 諰 鮮于浹 趙克善 尹宣擧 宋浚吉 宋時烈 權諰 諮議(正7品) 人員 李惟泰 鄭道應 11 宋浚吉 崔 蕴 柳 楫 尹宣擧 沈光洙 趙 涑 尹 鑴 李 翔 20 徐元履 權 諰 宋基厚 尹宣舉 尹 鑴 進善(正4品) 宋時烈 69) 孝宗實錄 권20, 9년 12월 庚寅. 成均館의 祭酒와 司業은 高麗 末期에 이미 설치되어, 從 3品(1명)과 從4品(1명)의 관직으로 존재하였으나, 朝鮮初期에 관직의 정비에 따라 폐지되었다가 後期에 부활된 것이다. 70) 李佑成, 앞의 논문 p.263. 71) 顯宗實錄 권7, 4년 8월 丁酉, 禮曹判書洪命夏啓曰 設祭酒之任 通讀諸生 以施聲動之擧 72) 顯宗改修實錄 권1, 즉위년 6월 辛亥, 鄭太和沈之源以爲 祭酒 則似不當拘於品秩 使之隨 品仍帶無妨 上從之. 73) 國大典 권1, 吏典 京官職條, 世子侍講院 掌侍講史規諷道義. 74) 仁祖實錄 권47, 24년 5월 丁卯.
- 64 顯宗 國史館論叢 第43輯 宋時烈 許穆尹鑴 朴世榮 李玄逸 肅宗 尹 拯 權尚夏 李喜朝 景宗 鄭齊斗 沈 錥 朴弼周 閔遇洙 金元行 英祖 正祖 純祖 憲宗 哲宗 高宗 人員 李惟泰 鄭 瀁 朴世采 申硕蕃 李 翔 尹元擧 尹 拯 李玄逸 尹 拯 丁時翰 權尙夏 柳後章 李箕洪 權尙夏 李喜朝 金 榦 朴鐔金榦 李泰壽 尹東洙 李 諫 朴光一 朴弼周 鄭齊斗 金昌翁 尹東洙 蔡之洪 閔允昌 金 榦 沈 錥 朴弼周 尹東源 李頤根 沈 錥 魚有鳳 朴弼周 朴弼傅 尹鳳九 崔錫文 宋能相 閔遇洙 尹鳳九 金元行 洪啓能 李養源 宋明欽 宋明欽 申 暻 洪啓能 金亮行 金元行 金亮行 金鍾厚 權震應 崔載興 金履安 宋煥鏶 金履安 曺 霖 宋稚圭 李直輔 宋稚圭 吳熙常 宋稚圭 吳熙常 李友信 宋啓榦 尹元擧 申硕蕃 李惟泰 尹 鑴 李同揆 朴世采 尹 拯 李 翔 李玄逸 權尙夏 丁時翰 尹東洙 宋德相 金履安 金亮行 俞彥鏶 宋煥箕 李直輔 宋稚圭 宋啓幹 洪直弼 宋來餘 任憲晦 宋秉璿 任憲晦 宋秉璿 任憲晦 宋秉璿 宋秉璿 朴性陽 金洛兹 李象秀 24 21 28 33 35 * 이 표는 朝鮮王朝實錄 淸選考 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음. 10 31 7 31 11 8 2 1 141 擧된 자를 임용할 수 있도록 규정하였고, 에게까지도 진출의 문호를 개방하였 다.75) 또한 贊善과 進善은 他官이 겸직할 수 있도록 하였는데, 특히 贊善은 從1品 관 리까지도 겸직할 수 있었다.76) 山林職은 겸직과 함께 久任도 가능토록 하여77) 유능 한 山林의 진출을 유 도하고자 하였다. 山林職 가운데 최고직인 贊善은 世子와 揖禮를 행할 정도로 특 별한 예우를 받기도 하였다.78) 또한 續大典 에 규정된 定員은 祭酒 司業 贊善 進 75) 續大典 권1, 吏典 京官職條, 贊善進善以學行有士望者 擬差或單付 諮議用別薦 而無可合人 則 問議廟堂 勿拘差出. 76) 大典通編 권1, 吏典 京官職條, 贊善進善或以他官兼 贊善雖至從一品亦兼. 77) 仁祖實錄 권48, 25년 4월 癸未, 吏曹啓曰 世子贊善頌善諮議等官 今當差出 依輔養官例 以 兼職下批 使之久於其任 上從之. 78) 孝宗實錄 권19, 8년 10월 丙寅, 王世子請與贊善行揖禮 上許之.
- 65 - 善 諮議가 각기 1명씩이었다.79) 조선후기에 世子侍講院의 山林職에 진출한 인원을 보면, 贊善 28명, 進善 33명, 諮議 35 명 등 모두 96명에 이르고 있다. 이를 다시 王代別로 보면 仁祖代 5명, 孝宗代 17 명, 顯宗代 7명, 肅宗代 16명, 景宗代 5명, 英祖代 27명, 正祖代 6명, 純祖代 6명, 高宗 代 7명으로서, 孝宗 肅宗 英祖代에 가장 많은 진출자를 배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지금까지 조선후기에 特設된 成均館과 世子侍講院의 山林職에 대하여 살펴보았는 데, 이제 표 1 을 통하여 이를 종합적으로 검토해 보도록 하겠다. 山林職에의 진출 인원은, 祭酒 24명, 司業 21명, 贊善 28명, 進善 33명, 諮議 35명 등 연인원 141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가운데 중복 임용된 자를 빼면 山林職에 진출한 순인원은 80명이 다. 山林職에 진출한 이들 80명의 山林이야말로 朝鮮後期 山林界를 대표할 수 있는 山林의 領袖들이며, 아울러 당대의 儒學界를 주름잡았던 巨儒들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山林職 진출자를 王代別로 보면, 仁祖代 11 명, 孝宗代 20명, 顯宗代 10명, 肅宗代 31명, 景宗代 7명, 英祖代 31명, 正祖代 11명, 純祖代 8명, 憲宗代 2명, 哲宗代 1명, 高 宗代 9명으로서, 仁祖代부터 조선말기인 高宗代까지 각 國王代마다 빠짐없이 山林職 이 임명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가운데 肅宗代와 英祖代에 가장 많은 진출자가 배출된 것으로 보아, 이때에 가 장 활발하게 山林의 徵召가 이루어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孝宗代부터 英祖代 까지 진출한 자들이 전체의 70%이상을 차지하고 있어, 이때가 山林의 政界進出이 왕 성했던 山林의 전성기 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正祖代를 고비로 진출자의 수가 감소하는 경향을 나타내고 있는데, 이는 末期로 접어들수록 山林의 정계진출이 차츰 줄어들었고, 이에 따라 山林의 정치적 비중도 감소하였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조선후기의 山林은 山林職 외에 司憲府에도 활발히 진출하였다. 조선시대에는 薦 擧나 門蔭 등을 통해 入仕한 非科擧出身 官吏를 南行이라 하고, 南行으로서 司憲府 의 持平(正5品) 掌令(正4品) 執義(正3品) 大司憲(從2品)에 임용된 자를 南行臺官(臺諫) 또는 略稱으로 南臺라고 불렀다.80) 南行의 司憲府진출은 이미 조선전기부터 빈번히 이루어졌다.81) 臺諫職 가운데 司諫院에는 文官만을 임용토록 한 규정에 따라 南行의 진출이 거의 이루어지지 못하였으나, 司憲府에는 文官만을 쓰도록 하는 제한규정이 없었던 관계로 南行의 진출이 가능하였던 것이다.82) 또한 山林을 司憲府에 임용한 것은 言路를 확대할 수 있다는 기대와 山林들의 청렴결백하고 강직한 성품이 司憲府 79) 續大典 권1, 吏典 京官職條. 80) 肅宗實錄 권3, 원년 4월 丁酉, 不由科第而登仕者 俗稱南行 (許)厚南行爲臺官 故云南臺. 81) 中宗實錄 권70, 25년 12월 己未, 上曰 祖宗朝 以南行爲臺諫之事 比比有之. 82) 宣祖實錄 권17, 16년 4월 戊午, 吏批回啓 大典 司諫院則用文官云 而司憲府則別無此文. 國大典 권1, 吏典 京官職條.
- 66 - 國史館論叢 第43輯 의 직무에 부합되었기 때문이었다. 전기부터 이루어졌던 山林의 司憲府 진출은 후기에 들어와 더욱 활성화 되었다. 朝鮮王朝實錄 과 淸選考 에 의하면 표 2 와 같이 光海君代부터 高宗代까지 모두 120명의 南臺가 있었던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이들 대부분이 山林으로 확인 되고 있다. 이 南臺를 왕대별로 보면, 光海君代 3명, 仁祖代 11명, 孝宗代 10명, 顯宗 代 10명, 肅宗代 23명, 景宗代 2명, 英祖代 19명, 正祖代 11명, 純祖代 5명, 憲宗代 4 명, 哲宗代 6명, 高宗代 16명으로 되어 있다. 이를 통해 山林職 진출과 마찬가지로 肅 宗代와 英祖代에 가장 많은 南臺가 출현한 것을 알 수 있으며, 특히 末期인 高宗代 에 많은 수의 南臺가 나타나는 것은 末期까지도 지속적으로 山林의 徵召와 진출이 이어졌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또한 南臺의 대부분이 천거를 통해 入仕한 자들인 것으로 보아 南臺 역시 또 하나의 山林職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山林의 司憲府 진출은 持平으로부터 大司憲까지 고루 이루어 졌으며, 대부분의 山林이 持平을 거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司憲府의 장관인 大司憲까지 진출 한 자도 상당히 많아 26명에 이르고 있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光海君代에 鄭 逑 張顯光, 仁祖代에 金集 洪茂積 宋浚吉, 孝宗代에 李惟泰 許穆, 顯宗代에 尹拯 朴世 采 李翔 尹鑴, 肅宗代에 李玄逸 李喜朝 鄭齊斗 金榦, 英祖代에 沈錥 閔遇洙, 正祖代에 李直輔, 純祖代에 宋啓榦 宋稚圭, 憲宗代에 洪直弼 宋來照, 哲宗代에 任憲晦, 高宗代에 金洛鉉 朴性陽 宋秉璿 등이다. 이들 大司憲 진출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山林職의 최고 직 인 祭酒와 贊善을 거친 조선후기의 대표적 山林들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조선후기의 山林은 成均館 世子侍講院의 山林職과 司憲府에의 진출만이 아니라, 王 과 王世子에게 書를 講論하는 筵과 書筵에도 진출하였다. 筵은 원칙적으로 文 官을 임용하도록 규정되어 있었으나,83) 후기에 접어들면서 學行이 뛰어난 山林에게 도 그 문호가 열리게 되었다. 그리하여 光海君 즉위년 4월에 鄭仁弘과 鄭逑가 特進 官을 겸직하면서 처음으로 筵에 임명되었다.84) 그 후 孝宗代에 金集, 顯宗代에 宋 浚吉 李惟泰 李翔, 肅宗代에 許穆 尹鑴 尹拯 朴世采 등이 筵에 임명되었다. 山林은 筵과 함께 筵官에도 임명될 수 있었다. 山林으로써 최초로 筵官에 임명된 자는 顯宗代의 沈光洙였던 것으로 보여지는데, 山林의 본격적 筵官 진출은 正祖代부터 이루어졌다. 이때부터 경연은 文官만을 임용하고 筵官은 山林만을 임 용토록함으로써 筵官도 일종의 山林職으로 변모하였다. 조선후기에 筵官에 임명 된 山林의 인원을 보면, 표 3 에 나타나고 있는 것처럼 顯宗代 1명, 肅宗代 1명, 英祖代 5명, 正祖代 10명, 純祖代 5명, 83) 國大典 권1, 吏典 京官職條. 84) 光海君日記 권3, 즉위년 4월 戊寅.
- 67 - 표 2 朝鮮後期의 南臺 王代 光海 仁祖 孝宗 顯宗 肅宗 景宗 英祖 正祖 純祖 憲宗 哲宗 高宗 計 李基卨 金長生 李有養 安邦俊 許 穆 李 翔 宋基厚 金壽弘 權尙夏 羅良佐 梁得中 閔翼洙 閔遇洗 洪啓能 命彦鏶 李直輔 宋稚圭 金仁根 金炳駿 任翼常 柳重敎 張顯光 朴知誠 崔後賢 趙 洙 李惟泰 鄭 瀁 申硕蕃 李同撲 李憲祚 李世龜 崔是翁 李載亨 宋能相 金亮行 金鍾厚 鄭宗魯 金日柱 成近默 宋達洙 金博淵 金興洛 鄭逑 柳 袗 沈光洙 徐元履 尹舜擧 韓 垽 李雲徵 金 榦 尹東源 李養源 宋德相 金履安 金壽祖 宋啓榦 宋來熙 趙秉悳 李恒老 蘇輝冕 姓名 洪茂積 崔 蕴 尹 鑴 柳千之 李箕洪 金昌翕 沈 錥 申 璟 閔彛顯 金直淳 洪直弼 李敏德 宋秉璿 朴文ー 金 集 姜鶴年 宋浚吉 宋時烈 尹宣擧 權 諰 許 厚 趙克善 尹元擧 林 瑋 尹 拯 朴世采 李現寬 柳明基 李玄逸 丁時翰 李喜朝 李世弼 鄭齊斗 尹 推 尹東洙 魚有鳳 朴弼周 朴 樞 尹鳳九 朴弼傅 韓元震 宋明欽 金元行 崔載興 李鳳祥 金斗默 宋煥箕 曹 霖 洪彥燮 吳熙常 任憲晦 奇正鎭 金洛鉉 朴性陽 李象秀 俞萬柱 金鍾善 金炳昌 田 愚 鄭胤永 * 이 표는 朝鮮王朝實錄 淸選考 를 참조하여 작성하였음. 人員 (名) 3 11 10 10 23 2 19 11 5 4 6 16 120 憲宗代 4명, 哲宗代 5명, 高宗代 6명 등 모두 37명에 달하고 있다. 또한 書筵官에 진출한 山林은 肅宗代가 가장 많은 8명이었고, 그 후 英祖代에 3명, 正祖 代에 2명, 高宗代에 5명으로써, 모두 18명의 山林이 조선후기에 書筵官에 임명 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山林은 書筵官 외에 世子와 世孫의 敎導職인 輔養廳의 輔養官(正1品 正3品)에도 진출하였다. 이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光海君代에 鄭仁弘과 鄭逑를 시작으로 하여, 仁祖代의 金集, 顯宗代의 宋時烈 宋浚吉, 英祖代의 鄭齊斗 沈錥 閔遇洙 등을 들 수 있 다. 山林은 또한 世孫 敎導職인 世孫講書院의 諭善(正3品 從2品)에도 임용되었다. 諭善에의 진출은 英祖代부터 본격화된 것으로 보이는데, 沈錥 魚有鳳 宋明欽(英祖代), 李直輔(正祖代), 任憲晦(高宗代) 등이 諭善에 진출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 밖에 顯宗代의 宋時烈, 肅宗代의 朴世采 權尚夏 등이 世子傅에 임명된 바 있다. 이처럼 조선후기의 山林은 筵官 書筵官 輔養官 諭善 傅 등의 관직에 임용되어 國 王 世子 世孫의 교육을 담당함으로써 國王의 측근으로서 정치적 영향력을 강화시킬
- 68 - 國史館論叢 第43輯 수 있었던 것이다. 이것은 또한 조선후기에 山林의 비중이 얼마나 컸던가를 반증해 주는 좋은 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 山林이 활발히 진출한 관직을 살펴보았는데, 앞에서 언급한 관직 외에도 山林은 六曹의 戶 刑 工 3曹와 吏曹, 그리고 屬衙門에 빈번히 임용되었으며, 守令職 도 많은 山林이 거친 관직 증의 하나로 확인되고 있다. 표 3 朝鮮後期의 筵官 및 書运官 王代 筵官 沈光洙 顯宗 肅宗 李 柬 蔡之洪 李頤根 宋明欽 朴弼傅 英祖 韓元震 正祖 純祖 憲宗 哲宗 高宗 人員 宋德相 金亮行 俞彥鏶 金鍾安 金履安 閔彛顯 金斗默 曹 霖 李直輔 宋稚圭 金日柱 宋啓榦 金直淳 吳熙常 李友信 金仁根 成近默 宋來熙 洪直弼 金秉駿 宋達洙 趙秉悳 李敏德 任憲晦 宋秉靖 金洛鉉 李象秀 朴性錫 郭宗錫 李恒老 37 書筵官 李世弼 鄭齊斗 李喜朝 金昌翕 閔以升 李箕洪 朴 鐔 李世龜 申 暻 宋明欽 金元行 閔錄顯 金斗默 李象秀 宋秉璿 金洛鉉 朴性陽 郭宗錫 18 * 이 표는 朝鮮또朝實錄 淸選考 틀 참조, 작성하였음. 人員 1 9 8 12 5 4 5 11 55 2. 山林의 成分과 官歷 이제 조선후기 대표적 山林의 成分과 官歷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이것을 위하여 표 5 를 작성하였는데, 여기에 실린 116명의 山林은 成均館과 侍講院의 山林職 南臺 筵官 書筵官 진출자를 중심으로 하여, 朝鮮王朝實錄 등의 사료에 山林으로 확인되고 있는 자들이다. 이들은 또한 모두가 천거를 통하여 入仕하였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 따라서 이들이 조선후기의 山林을 모두 포괄하는 것은 아니지만, 當代 의 山林을 대표할 수 있는 山林의 領袖들이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먼저, 山林의 王代別 被薦人員을 보면, 宣祖代 6명, 光海君代 1명, 仁祖代 21명, 孝
- 69 - 宗代 9명, 顯宗代 3명, 肅宗代 28명, 景宗代 2명, 英祖代 18명, 正祖代 11명, 純祖代 3 명, 憲宗代 5명, 哲宗代 4명, 高宗代 5명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를 통하여 조선말기까 지 지속적으로 山林의 천거가 이루어졌으며, 仁祖代에서부터 肅宗代까지의 기간에 전체의 절반가량이 천거된 것으로 보아, 이때가 山林의 천거가 가장 왕성하게 이루 어졌던 山林의 전성기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山林의 被薦時의 연령은 20代로부터 60代까지 분포되어 있었는데, 30代가 40%, 40 代가 25%로서 대부분의 山林이 3,40대에 천거되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들의 평균 연령은 40.1세로 나타나고 있다. 천거되기 직전의 山林의 前歷을 살펴보면, 이 2/3정도, 小科合格者인 生員進士가 1/3정도를 차지하고 있어, 대부분의 山林이 과거 에 뜻을 두지 않고 학문에만 전념하다가 천거되었음을 알 수 있다. 다음은 山林의 學脈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山林은 대부분 李滉과 李珥의 계통을 이어받은 유학자들이 라고 할 수 있다. 표 4 에 보이는 것처럼 李滉의 高第인 鄭 逑를 비롯하여 鄭逑의 門下인 張顯光 許穆 黃宗海 李芬 등의 名儒들이 山林으로 薦擧 되었으며, 이밖에도 李滉의 학맥을 이은 李玄逸 申碩蕃 朴光前 등이 천거를 받았다. 또한 李滉의 문하에서 보다는 李珥의 문하에서 더 많은 피천자가 배출되었는데, 李 珥의 문인인 金長生의 문하에서 많은 피천자가 나왔다. 그리하여 그의 門人이라고 할 수 있는 金集 尹宣擧 宋浚吉 宋時烈 李惟泰 등의 朝鮮後期 名儒들이 천거되어 政 界에서 큰 활약을 보였던 것이다. 또한 李恒老 金平默 柳重敎 任憲晦 田愚 등 朝鮮末 期 유학계를 주름잡은 인물들도 천거되었다. 그리고 스승이 천거를 받은 경우 그 문하에서 많은 피천자가 배출된 것으로 나타 나고 있는데, 특히 鄭逑 李玄逸 金集 尹宣擧 宋時烈 權尙夏 金昌翕 金元行 등 당대에 山林으로서 천거되었된 名儒들의 門人 중에서 많은 피천자가 나왔다. 이렇게 스승의 대를 이어 그 문인들이 다수 천거된 것은 스승의 不求聞達의 자세에 영향을 받아 스 스로 초야에 은거하며 학문에 힘쓴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또한 당시의 정치적 상황 등으로 스승이 정계에서 물러나거나 정계를 멀리한 경우, 그 문 인들이 官界를 멀리하고 은거하는 경향도 짙었음을 암시하고 있다. 표 4 를 보면 156명의 名儒들이 포함되어 있는데, 그들의 入仕路를 文科 門蔭 薦擧의 세가지로 나누었다. 그 결과 156명 중 천거를 통해 入仕한 자가 90명으로서 과반수 이상을 차지하여 가장 큰 비중을 나타내고 있으며, 그 다음이 文科及第로서 57명이었고, 門蔭은 1명에 불과했으며, 未入仕者는 8명이었다. 따라서 朝鮮時代의 名 儒들은 일찍이 관직을 바라지 않고 초야에 묻혀 학문과 제자양성에만 힘쓰는 은거생 활을 하다가, 그 명망이 널리 알려짐으로써 山林으로 천거되어 정계에 진출하는 경우 가 가장 지배적인 현상이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名儒들 가운데는 文科에 웅시 하여 及第한 자도 많았지만, 그 비율은 천거를 받은 자에 훨씬 못 미치는 수준이었음 을 알 수 있다. 이것은 名儒들이 과거를 달갑게 여기지 않았고, 文科에 及第치 않고
- 70 - 國史館論叢 第43輯 은거하고 있던 名儒들이 거의 빠짐없이 천거를 통하여 국가의 徵召를 받았음을 나타 내주고 있다. 또한 그들 중에 門蔭을 통해 入仕한 자가 거의 없었던 것으로 보아, 그 들의 가문이 그리 뛰어나지는 못했음을 알 수 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名儒들 가운 데는 비교적 한미한 가문에서 태어나, 스스로의 노력에 의하여 학문적으로 두각을 나 타내게 됨으로써 천거를 받고 입사하게 된 자들이 많았다고 하겠다. 표 4 朝鮮時代 名儒의 入仕路 다음은 표 5 를 통하여 山林의 역관경향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먼저 初職을 보면, 山林은 천거를 통하여 入仕한 후 初職으로 屬衙門과 지방의 參奉(從9品)에 가장 많이 임명되었으며, 그 다음으로 王子師傅 童蒙敎官 諮議 등에 다수 임명되었다. 결국 山林 은 參奉 敎育機關 山林職을 통하여 官界에 첫발을 들여 놓았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 71 - 初職을 品階別로 보면, 2/3 이상이 9品職에 임명되었으나, 縣監이나 主簿 등의 從6品 職에 임명된 자들도 있었다. 이렇게 入仕한 山林들은 그후 계속적인 승진을 거듭, 正1品職인 左議政 右議政, 從1 品職인 贊成, 正2品職인 判書 參判 判尹 등에까지 오른 자들도 많았다. 이를 品階別로 보면, 堂上官에 오른 자가 56%, 參上官에 오른 자가 38%, 參下官에 그친 자가 6%정 도로서 절반 이상의 山林이 堂上官까지 승진한 것으로 나타나고 있다. 이러한 堂上官 진출비율은 文科及第者의 堂上官 진출비율인 32%85)보다 훨씬 높고, 조선전기 被薦者 의 비율보다도 높아, 山林이 파격적 대우를 받았음을 입증해 주고 있다. 이것은 또한 조선후기 山林의 정치적 위상이 매우 높았음을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데 山林들은 官職에 임명된 후 적극적인 정치활동을 전개한 자들이 많았으나, 그들 중에는 관직에 임명되고도 끝내 취임하지 않는 등 (不就 또는 不起) 소극적인 태도를 보인 자들도 많은 비중을 차지하였다. 대체로 正祖代를 고비로 그 이전의 山 林은 적극적인 활동을 보인 자들이 많았고, 그 이후에는 소극적인 활동을 한 자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경향은 正祖代 이전에는 山林의 정치활동이 왕성하여 정치적 중요성이 컸으나, 그 이후 차츰 활동이 부진해짐에 따라 山林이 상징적 존재로 변모 되어 갔음을 의미한다고 하겠다. 正祖代 이전의 山林은 國王의 不世之遇 또는 禮遇之臣으로서 國王의 지극한 신임 과 총애를 받으며 측근에서 보좌하였고, 儒林들 사이에서는 大老로 추앙받으면서 政 界의 幕前 幕後에서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며 國政을 주도함으로써 상징적인 존재 를 넘어 실질적인 政界의 실력자로 군림하였다.86) 이러한 대표적 山林으로서는 光海 君代의 鄭仁弘, 孝宗 肅宗代의 宋時烈 宋浚吉, 肅宗代의 尹鑴 許穆 등을 들 수 있다. 이들은 또한 각 黨派의 領袖로서 항상 黨爭의 한가운데 위치해 있으면서, 자기 당파 를 선두에서 이끌어 나갔기에 黨爭의 희생양이 되어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하기도 하 였던 것이다. 표 5 朝鮮後期 代表的 山林의 成分 및 官歷 番號 姓名 被薦年代 被薦時 年齡 前歷 初職 縣監 1 鄭仁弘 宣祖 6 39 從6 參奉 2 鄭逑 6 31 最高職 山林職 領議政 正1 大司憲 從2 南臺 筵官 書筵官 掌 大 大 85) 李秉热, 朝鮮初期 文科及第者의 進出에 관한 硏究 ( 啓明論叢 5, 1968) p.134. 86) 李佑成씨는 山林을 하나의 상징적 존재로 대우하였다고 하였으나(李佑成, 앞의 논문 pp.265 266), 山林 가운데는 활발한 정치활동을 보인 자들도 많았음을 감안할 때 山林을 모두 상징적 존재로만 볼 수는 없을 것 이라고 생각한다.
- 72 3 4 5 6 7 8 9 10 11 12 13 14 15 16 17 18 19 20 21 22 23 國史館論叢 第43輯 張顯光 9 金長生 11 李基卨 18 朴知誠 39 金 集 光海 2 姜鶴年 仁祖 1 洪茂績 1 趙克善 1 許厚 1 柳袗 1 趙涑 1 黃宗海 1 安邦俊 2 鄭道應 6 宋浚吉 7 徐元履 7 沈光洙 13 宋時烈 14 崔 蘊 14 權 諰 14 鮮于決 17 23 31 28 34 37 39 47 29 36 42 29 45 52 31 24 34 36 30 54 33 52 進仕 生員 生員 進仕 生員 生員 生進 生員 司馬 參奉 參奉 參奉 師傅 參奉 縣監 從6 縣監 敎官 敎官 洗馬 正9 參奉 敎官 師傅 洗馬 正9 師傅 師傅 參奉 參奉 師傅 參贊 正2 參判 從2 正 承旨 贊成 從1 掌令 正4 參贊 正2 掌令 正4 正 持平 正5 掌令 正4 別提 從6 參議 諮議 正7 參贊 正2 參判 從2 參議 左議政 正1 承旨 左尹 從2 司業 司 司 贊 司 司 持 掌 大 掌 執 掌 持 掌 執 持 掌 大 持 掌 持 掌 大 掌 持 掌 持 進 持 掌 諮 進 贊 祭 進 進 進 贊 祭 司 進 諮 進 贊 司 持 掌 執 大 掌 執 掌 持 掌 執 掌 掌 執
- 73 24 25 26 27 28 29 30 31 32 33 34 35 36 37 38 39 40 41 42 43 申硕蕃 19 尹舜擧 23 金萬榮 26 李惟泰? 鄭瀁? 許 穆 孝宗 1 尹宣擧 2 尹鑴 3 尹元擧 4 朴世采 10 宋基厚 10 李翔? 李同揆? 柳諿? 尹 拯 顯宗 4 權尚夏? 韓垽? 李玄逸 肅宗 2 丁時翰 2 尹推 3 46 50 56 42 38 53 29 39 35 50 46 司馬 生進 進士 生進 生進 進士 進士 進士 師傅 敎官 洗馬 正9 師傅 敎官 參奉 別檢 從8 諮議 正9 參奉 洗馬 正9 諮議 正7 師傅 參奉 監役 從4 掌令 正4 正 洗馬 正9 大司憲 從2 掌令 正4 右議政 正1 正 贊成 從1 正 左議政 正1 掌令 正4 大司憲 從2 承旨 察訪 從6 右議政 正1 左議政 正1 執義 從3 判書 正2 進善 正4 正 進 司 持 掌 掌 諮 進 贊 進 祭 諮 進 司 諮 進 司 祭 司 進 進 司 祭 諮 諮 進 司 司 諮 進 司 贊 祭 進 司 贊 祭 持 掌 執 大 掌 持 掌 大 持 掌 執 持 掌 大 持 掌 持 掌 大 持 掌 持 掌 執 大 持 掌 持 執 大 持 執 司 祭 贊 持 掌 大 進 司 持 掌 執 掌
- 74 44 45 46 47 48 49 50 51 52 53 54 55 56 57 58 59 60 61 62 63 64 國史館論叢 第43輯 李箕洪 李喜朝 李世弼 鄭齊斗 金昌翕 梁得中 朴鐔 金榦 崔是翁 閔以升 李世龜 尹東洙 魚有鳳 崔錫文 李頤根 李柬 蔡之洪 李載亨 朴弼周 韓元震 柳後章 6 6 6 6 10 10 20 20 20 21 21 32 32 32 32 36 42 42 43 43? 40 26 39 32 32 20 49 50 35 34 34 52 53 36 進士 參奉 參奉 參奉 別提 從6 主簿 從6 參奉 諮議 正7 參奉 縣監 進士 從6 敎官 司馬 參奉 師傅 參奉 諮議 正7 參奉 正 贊善 參判 從2 贊成 從1 進善 正4 承旨 郡守 從4 參贊 僉知 佐郞 正6 掌令 正4 參議 贊善 諮議 正7 諮議 正7 翊衛 正5 都事 從5 持平 正5 贊成 從1 執義 從3 諮議 正7 諮 持 掌 執 贊 祭 持 掌 大 掌 執 贊 祭 掌 大 進 執 掌 執 諮 諮 進 贊 執 大 持 諮 進 司 贊 諮 諮 諮 諮 掌 持 掌 執 執 持 諮 進 贊 持 掌 執 祭 掌 執 諮 書 書 書 書 書 書 書 書
- 75 65 66 67 68 69 70 71 李泰壽? 朴光一? 沈錥? 朴樞? 尹東源 景宗 2 閔允昌? 閔翼洙 英祖 1 72 朴弼傅 73 74 75 76 77 78 79 80 81 82 83 84? 13 14 15 16 17 23 26???? 尹鳳九 閔遇洙 李養源 申璟 宋能相 金元行 金履安 宋明欽 崔載興 洪啓能 宋德相 金亮行 10 師傅 師傅 38 48 44 44 31 39 26 46 洗馬 正9 洗馬 正9 洗馬 正9 進士 主簿 從6 諮議 正7 敎官 進士 都事 諮議 正7 諮議 正7 諮議 正7 祭酒 執義 從3 執義 從3 諮議 正7 掌令 正4 判決師 判書 正2 大司憲 從2 掌令 正4 參議 掌令 正4 贊善 祭酒 贊善 進善 正4 洗馬 判書 正9 正2 贊善 諮 諮 贊 祭 持 掌 執 大 掌 執 進 掌 執 諮 持 掌 進 持 掌 執 進 贊 贊 祭 諮 贊 諮 進 贊 祭 贊 諮 贊 贊 諮 贊 祭 諮 司 贊 執 執 大 持 掌 掌 執 掌 持 執 持 持 執 南 持 執 持 南 書 書 書
- 76 85 86 87 88 89 90 91 92 93 94 95 96 97 98 99 100 101 102 103 104 105 國史館論叢 第43輯 李鳳祥? 俞彥鏶? 金鍾厚? 權震應? 金斗默 正祖 7 曹霖 8 李直輔 8 民彛顯 10 朴胤源 16 宋啓幹 20 金直淳 20 宋稚圭 22 吳熙常 22 金日柱 23 宋煥箕? 洪直弼 純祖 14 李友信 18 奇正鎭 32 金仁根 憲宗 4 宋達洙 6 李恒老 6 進士 47 59 40 36 39 35 49 進士 諮議 參議 正7 掌令 正4 諮議 正 正7 參奉 持平 正5 諮議 副司直 正7 從5 監役 判書 正2 掌令 正4 監役 監役 副司勇 判尹 正2 副司勇 執義 從3 參奉 判書 正2 洗馬 參議 正9 副率 掌令 正7 正4 師傅 贊成 從1 副司勇 判尹 正2 諮議 正7 參奉 判書 從2 掌令 正4 敎官 參議 參奉 大司憲 從2 司 諮 諮 諮 贊 祭 贊 祭 持 南 掌 持 南 大 持 書 書 持 大 執 諮 進 贊 掌 大 祭 進 贊 持 執 大 掌 贊 祭 持 掌 祭 持 大 諮 持 執 掌 持 掌 持 掌
- 77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3 114 115 116 宋來熙 4 成近默? 趙秉悳 哲宗 3 任憲晦 9 李敏德 13 金炳駿? 李象秀 高宗 16 金洛鉉 17 朴性陽 17 宋秉璿? 郭宗錫? 53 48 參奉 60 監役 進士 大司憲 從2 祭 掌 執 大 參議 掌 參判 持 從2 參議 贊 祭 執 大 執義 執 從3 護軍 南 正4 執義 持 執 書 從3 進 大司憲 大 書 從2 進 大司憲 持 大 書 從2 諮 大司憲 諮 進 贊 從2 祭 持 掌 大 書 參議 書 正2 * 이 표는 朝鮮王朝實錄 國朝人物考 國朝人物志 淸選考 등을 참조하여 작성하였음. 여기에 실린 山林은 천거를 받은 후 관직에 제수된 사실이 있는 조선후 기를 대표할 수 있는 유학자들임. 사료에 不就 또는 不起로 나타나고 있는 관직도 모 두 포함시켰음. * 凡例 祭 : 祭酒, 司 : 司業, 贊: 贊善, 進 : 進善, 諮 : 諮議, 持: 持平, 掌 : 掌令, 執 : 執義, 大 大司憲, 南 : 南毫, : 筵官, 書 : 書筵官 Ⅳ. 實學者의 薦擧制論 科擧制는 朝鮮前期부터 이미 모순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으며, 특히 壬辰倭亂 이후 에는 그 모순이 더욱 심화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르러 이러한 과거제의 모순을 비롯 한 관리등용제도 전반의 부조리를 바로 잡기 위한 개혁방안이 實學者들을 중심으로 제기되었다. 實學者들 중에서 특히 柳馨遠은 科擧制를 영구히 폐지하고 薦擧制를 실시할 것을 주장했으며,87) 李翼은 科擧制와 薦擧制를 함께 시행해야 한다고 역설하였다.88) 또한
- 78 - 國史館論叢 第43輯 丁若鋪은 科擧制와 南行制를 改革하여 두가지를 함께 실시할 것을 제안하였다.89) 그 밖에 崔漢綺는 천거제를 중심으로 한 개혁안을 구상하였다. 이러한 李翼과 丁若鋪의 改案은 이른바 科薦合一論 또는 科薦併用論90)으로 불리워지고 있다. 이와 같은 實學者들의 官吏登用制度 改革案의 대부분은 이미 先學들에 의해서 그 구체적인 내용이 밝혀졌으나, 丁若鋪의 南行制에 대한 改革案과 崔漢綺의 科薦併用 論은 거의 검토가 이루어지지 못한 실정이다. 이러한 硏究現況을 감안하여 Ⅳ章에서 는 丁若鑛의 南行制 改革案과 崔漢綺의 科薦併用論에 대하여 검토해 보고자 한다. 1. 薦擧制論 撞頭의 背景 實學者들이 官吏登用制度의 改革案으로 薦擧制論이나 科薦併用論을 제시한 배경은 무엇보다 科擧制가 안고 있던 모순과 폐단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특히 科擧 시 행에 있어서의 극심한 문란상은 改革案 대두의 직접적 계기가 되었을 것으로 생각된 다. 조선후기에 科擧의 施行이 매우 문란했음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지만, 당시 草野 에 묻혀 있던 선비들의 上疏에도 이러한 문제점이 번번히 제기되고 있었다.91) 이러 한 상소들 중의 하나를 例示하면 다음과 같다. 科擧를 실시하는 것은 文武를 권장하고 人才를 鼓動시키기 위함인데, 지금은 公道 가 행하여지지 않아 名家의 자제들은 약관의 나이에 모두 大小의 科擧에 급제하지만, 草野의 文章에 능하고 재능이 있는 자들은 立身揚名한 경우를 찾아 볼 수가 없다.92) 위의 기사는 顯宗 8년에 連山에 사는 金菜가 을린 上疏 중의 일부인데, 과거 가 名家子弟들의 入仕路로 변질되어 초야의 능력있는 인재들이 등용되지 못하고 있 87) 李洪烈, 文科設行과 疑獄事件 ( 白山學報 8, 1970) p.321. 趙湲來, 實學者의 官吏登用法改革論 硏究 ( 白山學報 23, 1977) pp.277 282. 88) 韓佑劤 星湖 李潰 硏究의 一端 -그의 科擧制 是非를 中心으로- ( 歴史學報 7, 1954). 89) 李洪烈, 科弊의 末期的 樣相과 그 對備策 -특히 茶山의 科制案에 대한 檢討- 史叢 15, 16 合輯). 90) 韓祐劤씨는 科薦合論이라는 用語를 사용한데 반하여 (韓祐劤, 앞의 논문 p.345), 趙湲來씨는 科薦併用論이라는 用語가 합당하다고 주장하였다(趙湲來, 앞의 논문 p.288). 筆者는 實學者 들의 주장이 科薦制의 폐단을 제거하고, 薦擧制의 미비점을 보완한 뒤에 그 두가지를 함께 시행해야 된다고 주장한 점으로 보아 이를 科薦併用論이나 科薦併行論으로 불러야 한다고 생각한다. 91) 다음의 기사를 통하여 草野의 선비들이 科擧의 문란을 자주 거론했음을 알 수 있다. 上曰 頃見 草野之疏 多言科擧之不公 ( 孝宗實錄 권4, 원년 6월 乙酉). 92) 承政院日記 제201책, 顯宗 8년 閏 4월 10일, 忠淸道連山金菜疏曰 科擧之設也 勸獎文 武 鼓動人才也 今者公道不行 名家子弟 弱冠之年 皆登大小之科 有草野能文有才之人 未見有 立身而揚名者無也 公道之不行也.
- 79 - 음을 잘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실정이었으므로 조선후기에는 科擧制가 족벌주의 또 는 당파본위의 성격이 짙어지게 되었으며, 마침내 제도 본래의 사명에서 멀리 벗어 나 정권쟁탈의 도구로까지 전락했던 것이다.93) 이처럼 權勢家의 子弟들만 급제하는 외에 시행상의 부정행위도 큰 폐단의 하나였 다. 이제 그 부정행위의 유형을 몇가지 살펴봄으로써 科擧制의 문란상태를 좀 더 구 체적으로 파악해 보도록 하겠다. 과거에 있어서 부정행위의 첫번째 유형은 시험관이 웅시자의 시험답안지를 고쳐주 는 이른바 試卷塗改를 들 수가 있다. 그 예의 하나로, 顯宗 12년 文科殿試에서 擧者 (應試者) 朴千榮의 試卷 가운데 잘못된 부분을 그의 姻戚인 朴文道가 고쳐주어 及第 케 한 일을94) 지적 할 수 있다. 나중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朴千榮의 及第가 취소되 고 朴文道는 充軍당하게 되지만, 私情에 이끌려 試驗答案을 고쳐주었다는 사실은 과 거의 문란이 어느 정도였나를 단적으로 보여주는 좋은 例라 하겠다. 科擧不正의 두번째 유형은 시험문제를 미리 유출시키는 행위이다. 顯宗 원년 9월 에 正言 尹趾美 등이 아뢴 바에 의하면, 試官 任翰伯이 嶺南左道의 監試에서 자기와 친한 儒生들에게 미리 시험문제(試賦題)를 유출시킨 일이 알려져서, 시험문제를 바꾸 지 않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95) 이것 또한 시험 답안을 고쳐 주는 것과 함께 循私 즉, 私情에 이끌려 不正을 저지른 사례라 하겠다. 세번째 유형은 皮封 바꿔치기의 수법이다. 監試의 경우 시험답안지를 넣은 皮封(겉 봉투) 세곳에 謹封이라 써서 붙인 다음, 나중에 그것을 그대로 개봉하여 채점하게 되 어 있었으나, 이 점을 惡用하여 다른 시험답안지가 든 겉봉투로 바꿔치기 하는 일이 일어났다.96) 이와 같은 부정행위를 막기 위한 방안으로 봉투에 謹封이라고 새긴 도 장을 찍을 것을 제안하기도 하였으나,97) 미봉책에 불과한 느낌이다. 네번째 유형으로는 이미 잘 알려진 것으로서 남의 글을 베껴쓰는 借書 또는 借述 이라는 것이 있었다.98) 科擧不正行爲의 다섯번째 유형은 시험성적에 따라 合格者를 가리지 않고, 성적과 관계없이 文名이 있다고 알려진 자를 試官이 임의로 뽑는 일이다. 顯宗 원년 8월, 忠 洪右道 監試에서 試官 金往이 開場前에 미리 守令에게 웅시자들 중 文名이 있는 자를 확인한 다음, 채점할 때에 답안지의 앞부분만 형식적으로 보고 取捨를 결정한 것이99) 93) 李洪烈, 앞의 논문 p.310. 94) 顯宗改修實錄 권23, 12년 3월 壬子. 95) 顯宗實錄 권3, 원년 9월 丁巳. 96) 孝宗實錄 권4, 원년 6월 乙酉. 97) 위의 책 권4, 원년 6월 乙商, 同知筵林墰曰 若以謹封字 刻而印之 即可防雜亂之患. 98) 肅宗實錄 권6, 3년 2월 戊辰, 是日 乃文科會試終場也 儒生 多率随從而入 或有爲借書借述 之計者. 99) 顯宗實錄 권3, 원년 8월 辛亥.
- 80 - 國史館論叢 第43輯 하나의 예라 하겠다. 이러한 행위는 試官이 귀찮게 답안지를 일일이 읽지 않고 편한 데로 文名이 알려진 자를 뽑는 것으로서 試官의 職務遺棄와 無事安逸의 좋은 본보기 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렇게 될 경우 합격자가 시험보기 전에 미리 결정되는 것 과 다름이 없으므로 시험은 보나마나한 형식적인 절차에 불과해지고 마는 것이다. 여섯번째 유형으로는 試官과 擧者가 相通해서 저지르는 부정행위가 있었다. 즉 試 官과 擧者가 미리 짜고, 試官이 자기의 하인으로 하여금 儒巾을 몰래 쓰게 하여 科 場에 들여보내 擧者의 文頭를 취하게 하거나, 또 擧者가 科場의 땅을 파서 文頭를 묻은 다음 試官으로 하여금 그것을 발견케 하는 등100) 상상도 못할 부정행위가 저질 러졌던 것이다. 일곱번째 유형은 違格으로 인하여 합격될 수 없는데도 불구하고 합격을 시킨 일이 다. 顯宗 11년에 司諫 李夏 등의 상주에 의하면, 試官 李元植이 자기 아들의 시험 답 안지에 臣伏 讀 3字를 쓰지 않아 불합격되어야 함에도, 자기의 登科文을 증명으로 하여 아들을 합격시켰다는 것이다.101)이것은 父子間의 私情에 이끌려 부정행위를 저 지른 사례라 하겠다. 과거의 문란함이 여기까지 이르렀으니 과거에 있어서 勢家의 子弟들만이 합격하 고, 草野의 선비들이 낙방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또한 試官 과 결탁하기 쉬운 守令들이 대거 급제하게 되는 것도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자연스러 운 일이었을 것이다.102) 이상에서 文科의 不正行爲 事例를 살펴보았지만, 武科도 文 科에 못지않게 부정이 심각하였다. 武科不正 중의 한가지 방법은 木箭試取時에 步數 를 冒錄하여 합격한 경우를 들수 있다103) 지금까지 科擧 不正行爲의 사례를 몇가지 살펴보았는데, 이를 통하여 조선후기의 과거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문란했음을 알 수 있다. 과거의 실상이 이러하므로 과 거의 권위가 땅에 떨어져 일종의 구경거리로까지 전락했으며,104) 기개있는 선비들은 과거에 합격하는 것을 오히려 부끄럽게 여겨 科擧應試를 기피하는 자가 속출했던 것 이다. 이점에 대해서는 丁若鏞이 다음과 같이 개탄하고 있다. 科擧는 뜻있는 선비들이 매우 부끄러워하는 것이다. 中世 이전에는 科擧의 규칙이 무너지지 않아 행실을 깨끗하게 닦은 선비들이 힘써 응시했으므로 趙光祖 李珥 등의 여러 先正들이 모두 科擧로 出仕했는데, 仁祖朝 이후로는 科場이 더욱 혼잡스러워져 100) 肅宗實錄 권4, 원년 11월 乙酉, 時試官 與擧者相約 或試官使其下人 潛着儒巾 下庭取擧 者文頭 或擧者穿庭土埋文頭 令試官取見. 101) 顯宗改修實錄 권23, 11년 11월 丙子. 102) 顯宗實錄 권3, 원년 9월 丁巳, 尹絳曰 近來外方科場 甚爲冗雜 守令之參榜者 未有如今科 之多 臣意則此後守令應學者 使之來赴京試可矣 上曰 今後依此 永爲定式. 103) 위의 책 권3, 원년 9월 丁巳. 104) 肅宗實錄 권6, 3년 2월 戊辰, 林梓崔煜 稱以非随從 而爲觀光入場云.
- 81 서 자신을 사랑하는 자는 모두 科場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리하여 行의 지목은 山 林에게로 돌아갔으며 과거출신은 감히 儒者로 자처하지 못하게 되었다.105) 이처럼 科擧出身은 더 이상 儒者로 자처할 수 없을 정도로 科擧의 권위가 실추되 었던 것이다. 이에 따라 實學者를 비롯한 識者들은 대부분 科擧의 문란상을 지적하 는 등시에 그 개선책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2. 崔漢綺의 科薦併用論 여기에서는 崔漢綺의 著書인 人政 을 중심으로 그의 科薦併用論을 검토하도록 하겠다. 다른 實學者들과 마찬가지로 崔漢綺가 官吏登用 制度에 대한 改革案을 제시하게 된 이유는 무엇보다 과거의 폐단에서 비롯되었다. 그는 과거의 폐단이 가져온 병폐 를 다음과 같이 지적하고 있다. 즉 과거의 폐단은 國體를 훼손하고 풍속을 파괴하며, 요행의 문을 뚫기를 도모하게 하고, 公卿들에게 달려가 끌어주기를 요구하며, 재물을 함부로 써서 파벌을 만들도록 한다는 것 등이다.106) 崔漢綺는 이러한 과거의 폐단을 제거한 뒤 科擧와 薦擧를 함께 쓸 것을 제안하였 다. 그는 과거와 천거가 모두 폐단을 지니고 있지만 어찌 그 폐단만을 이유로 시행 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라고 반문하면서, 마땅히 그 폐단을 바로 잡아 적절히 增損하 고 잘 인도하여 완전한 법이 되도록 만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였다.107) 그는 또한 明의 太祖가 科擧制를 혁파하고 薦擧制만을 쓰다가 다시 科擧制를 부활시킨 故事를 인용 하면서, 고정된 死法을 사용하여 병폐가 잇따라 생기는 것을 막기 위해서는 과거와 천거를 융통성있게 병행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그 구체적인 방안으로 選擧의 本意 가 어진 인재를 구하고 백성을 다스리려는데 있다면, 科擧나 薦擧를 따질 것 없이 賢俊한 인재를 뽑는 것만을 위주로 해야 하며, 과거 안에 천거의 규칙을 두어서 鄕 里의 薦籍에 든 뒤에 과거에 웅시할 수 있게 하면 응시자의 操守와 培養이 수립될 것이며, 薦擧 가운데에도 科擧의 의의를 두어서 문학과 경륜이 時務에 밝고 언행이 뛰어난 자만을 뽑아 쓴다면 초야의 인재를 얻을 수 있을 것이라 하였다.108) 이처럼 그는 科擧와 薦擧의 폐단을 적절히 제거한 후 두가지를 함께 사용하는 科薦併用論을 주장했던 것이다. 그러나 그의 주장 속에는 과거보다 천거에 더 큰 비중이 두어지고 있다. 즉, 그 輕 105) 世遺表, 春官修制 選科擧之規. 106) 人政 권16, 選人門3 以薦擧除科弊. 107) 위의 책 권15, 選人門2 科擧選擧參用. 108) 위의 책 권16, 選人門3 科薦參用.
- 82 - 國史館論叢 第43輯 重을 헤아려 보면 과거는 가볍고 천거는 무겁다고 하였으며,109) 사람을 선발하는 도 리는 公議에 따라 발탁했는가에 달려 있는데, 이 公議에 의하여 증험한 것으로 본다 면 薦擧가 科擧보다 낫고, 그 폐단으로 말한다면 科擧의 폐단이 훨씬 많고 薦擧가 비교적 적다고 했던 것이다. 따라서 薦擧는 公議에서 앞서고 폐단이 적으므로 과거 의 정원을 줄여서 천거의 정원을 늘이고, 과거는 일정한 시기를 정하되 천거는 일정 한 시기를 정해 놓을 필요가 없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110) 이것을 볼 때 그가 비 록 과거와 천거를 병용할 것을 주장했으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천거를 통하여 과거 의 폐단을 제거할 것을 전제로 한 薦擧優位의 科薦併用論이었다고 하겠다. 이러한 薦擧優位의 科薦併用論완 대부분의 實學者들이 공통적으로 지니고 있던 생각이기도 하였다.111) 科擧의 폐단에 대한 인식은 識者들 모두가 가지고 있는 것이었지만, 崔漢綺의 경 우 그것은 좀더 심각한 것이었다. 그는 과거의 폐단이 예전에도 심했으나 그때에는 그래도 바로잡을 수 있는 가능성이라도 있었지만, 지금의 형편은 정말 더 이상 어떻 게 해볼 수 없는 상황까지 이르렀다고 개탄하고 있다. 그는 이어서 術과 道德은 잡된 것으로 되어 버렸고, 文章과 輪은 科擧의 문투에 매몰되어 버렸다고 했던 것 이다. 이러한 폐단을 바로잡기 위해서는 科擧制를 變通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 다음 과 같은 개혁안을 제시하고 있다.112) 崔漢綺의 科擧制改革案은 薦擧制가 가미된 것이 특징의 하나라고 할 수 있다. 즉 科擧의 응시자를 선발함에 있어서 옛날의 鄕擧里選制의 방식을 채용하여, 각 고을의 선비들에게 마땅한 웅시후보자를 薦擧할 권한을 부여하고, 선비들에 의해 薦擧된 웅 시후보자를 本道에 보고하면, 本道에서는 이들을 다시 정밀하게 뽑아 禮部에 보고토 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禮部에서는 각 도에서 보고된 응시후보자들의 言行과 才藝 를 특별히 선정된 4,5명의 관리로 하여금 심사하게 하여 200명 이내에서 응시자를 선발토록 하였다. 이때에 심사관원의 사정이나 청탁의 개입은 엄격히 금지된다. 이처 럼 까다로운 薦擧의 절차를 거쳐 뽑힌 응시자들에게 비로소 科擧應試가 허용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科擧시험의 과목은 義 策門 詩 賦 表 등의 儒敎典과 文藝로, 기존의 시험과목 과 크게 차이를 보이지는 않았다. 이 과목 가운데 義로는 人道와 學問을, 策門으로 는 政敎를 교정하고 구할 수 있는 능력을, 詩는 풍경의 감회를, 賦는 곧은 風采를, 表 로는 誠款을 각각 살피도록 하였다. 시험을 치른 다음, 사람들의 意見을 開明토록 한 109) 위의 책 권16, 選人門3 以薦擧除科弊. 110) 위의 책 권15, 選人門2 科擧選擧參用. 111) 趙湲來, 앞의 논문 p.290. 112) 人政 권15, 選人門2 科擧.
- 83 - 자를 上等으로, 事理가 활발히 움직이는 자를 次等으로, 옛날의 글을 그대로 옮긴 자 를 下等으로 한다는 것이다. 또한 시험답안지의 내용 뿐 아니라 응시자들을 직접 불 러서 辭色을 살피는 일종의 면접시험과정도 첨가되었다. 이러한 시험을 거쳐 200명 가운데 최종적으로 급제자 50명을 뽑도록 하였다. 科擧는 3년에 한번씩 실시하되(三年大比), 科擧를 자주 실시하면 합격자의 수가 늘 어나 벼슬을 못하는 자가 많아 질 것이므로 그 밖의 科擧는 설치하지 않도록 해야한 다고 하여 不定期試의 폐지를 주장하고 있다. 이러한 改革案은 試驗制(科擧制)에 薦 擧制를 혼합한 科薦合一的인 성격을 띠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지금까지 살펴본 崔漢綺의 科擧制改革案은 그가 지적하고 있듯이 薦擧制를 가미하 여 응시자의 虚實과 優劣을 정밀하게 살피고, 응시자를 200명으로 제한하며, 응시자 를 불러서 직접 면접하고, 試取期間을 십여 일 정도로 충분히 잡으며, 私情과 뇌물을 금하는 등 기존의 科擧制보다 진일보한 내용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여 기에는 시험과목이 기존의 것과 크게 다르지 않고, 채점기준이 모호하며, 私情과 뇌 물을 금할 구체적 방법이 제시되지 않고, 武科의 改革案이 결여되어 있는 등의 한계 를 또한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崔漢綺는 科薦併用論을 내세웠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薦擧 를 위주로 하는 薦擧優位의 併用論이었다. 따라서 그는 열렬한 천거제 옹호론자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점은 人政 권14로부터 권19까지의 방대한 저술 속에서 천거론을 개진한 것에서 드러나고 있거니와, 다음과 같은 말에서도 여실히 입증되고 있다. 만약 천거제를 끝없이 전달한다면 국가의 운명도 역시 무궁할 것이다. 그간의 政 敎가 쇠퇴한것은 반드시 천거가 잘못 되었기 때문이며, 국가의 운명이 중흥된 것도 역시 천거가 잘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국가의 興亡盛衰를 운수로 돌리는 자 는 薦擧의 중요성을 모르는 것이고, 治亂의 多少를 군주에게로 돌리는 자는 本義를 모르는 것이다.113) 이처럼 崔漢綺는 국가의 흥망성쇠가 천거에 달려 있다고 할 정도로 천거를 중시하 였던 것이다. 이어서 그는 漢나라 이전에는 인재의 선발에 오로지 薦擧制만을 썼으므로 인재가 넉넉했으나, 漢나라 이후에는 오직 과거만 숭상할 뿐 천거를 餘事로 여겼으므로 인 재가 수용되는 일이 드물게 되었다고 탄식하고 있다. 따라서 사람의 수와 사무와 관 113) 人政 권15, 選人門2 薦擧源委, 若薦擧之良規 傳達無窮 國祚亦致無窮 其間政敎之中衰 必 自薦擧失宜而始 國籙之中興 亦自薦擧得宜而始 興亡盛衰 歸之運數者 不知薦擧爲重 治亂多 少 屬之人主者 不識薦擧本義.
- 84 - 國史館論叢 第43輯 직이 옛날보다 많아졌음에도 불구하고, 인재를 배양하고 수용하는 것이 적은 것은 과거만 성하고 천거가 쇠하였기 때문이라고 하였다. 또한 그는 하늘이 낸 才智는 원 래 귀천과 빈부의 차이가 없는데 어찌 과거로 사람을 제한할 수 있는가라고 하면서, 천거를 한번으로 그쳐서는 않되고 영원히 常典으로 삼아야 한다고 주장하였다.114) 崔漢綺는 또 薦擧는 學問과 治國의 根本이라고 강조하였다. 즉 薦擧에 밝지 못하 면서 치국을 논하는 것은 虛影의 치국이며, 천거를 잘 알지 못하면서 학문을 논하 는 것은 바로 私用의 학문이라고 했던 것이다. 그는 더 나아가 학문과 치국의 중간 에 薦擧가 있어 그들 사이의 중계의 역할을 하는 것인데, 천거가 제대로 되면 학문 이 치국에까지 뻗쳐서 학문하는 나라가 되지만, 그것이 잘 되지 않으면 학문과 치국 이 서로 좀먹고 썩게 된다고 하였다.115) 그는 이 밖에 천거는 風俗과 敎化의 근본이라고 하면서, 薦擧가 백성을 다스리고 편안케 하는 쪽에 있으면 풍속이 순량하고 교화도 休明하게 되지만, 薦擧가 그 반대 쪽에 있으면 풍속이 혼잡해지고 교화가 혼탁하게 될 것이라고 역설하기도 하였다.116) 이와 같이 崔漢綺는 薦擧를 국가의 興亡盛衰의 근원이요, 治國 學問 敎化의 근본으로 인식할 정도로 薦擧制의 중요성을 크게 강조하였던 것이다. 다음은 崔漢綺의 薦擧에 관한 논의 가운데 鄕擧에 관한 부분을 간략히 살펴보겠 다. 鄕擧는 각 고을에서 인재를 薦擧하여 올리는 방법을 말하는데, 崔漢綺가 제시한 鄕擧의 방법은 다음과 같다. 먼저 각 고을에서 薦擧를 주관할 擧主로 덕망있는 鄕老 를 한 사람 고르고, 그 사람은 다른 鄕老들과 의논하여 文 武의 재능을 가진 인물을 薦擧하여 官長(守令)에게 알린다. 官長은 薦擧의 내용을 면밀히 살핀 뒤 被薦者를 직 접 불러서 면접한 다음, 鄕老로 하여금 다음의 規式에 따라 被薦者의 신상명세 등을 차례로 쓰게 하여 本道로 올린다.117) 某道 某官의 薦擧人 누가 어떤 사람을 천거한다고 쓰고, 그 사람의 거주지 나이 부 모를 모시는지의 여부 형제 產業 交遊 등 여섯 條目을 뿌리에서 枝葉까지 순서대로 자세히 밝힌다. 그리고 다시 禀器의 强弱淸獨과 操行의 周比雅俗 및 학식의 이해 정 도와 學 史學 禮學 數學 律學인지와 그 淺深優劣을 자세히 따져서 헤아리고, 才能을 직접 事業에 실행했을 때 物情과 화합하는지의 여부와 이웃사람들이 그 혜택을 입고 후생들이 그 법도를 본받는지의 여부를 밝힌다. 이처럼 품기 조행 학식 재능의 4條目 을 本末을 들어 논하되, 오직 人道의 당연한 행동을 취해서 다른 사람을 교화시키고 뭇 사람을 통어하는 것을 가장 높이 치고, 다음으로 혼자서 善行을 하는 것까지 언급 하되, 쓸데없는 조목이나 번거롭고 자잘한 문장을 덧붙이지 말아야 한다.118) 114) 위의 책 권15, 選人門2 离擧格式. 115) 위의 책 권19, 選人門6 選擧爲學問治國之樞. 116) 위의 책 권18, 選人門5 風俗敎化之本. 117) 위의 책 권15, 選人門2 鄕擧.
- 85 이처럼 擧主의 성명과 被薦者의 거주지 연령 가족관계 산업 친구 등을 밝힌 다음, 被薦者의 성질 행실 학식 재능을 기록해서 올리도록 제안하고 있다. 그리고 각 고을에서 本道로 천거하는 시기는 3年에 한 차례씩으로 하고, 그 인원 은 1 3명으로 한정하였다. 本道에서는 각 고을에서 천거된 被薦者 가운데 뛰어난 인재를 뽑아 중앙의 選部로 보내어 考展을 기다린다는 것이다.119) 이것이 崔漢綺가 제시한 鄕擧論의 대체적인 내용인데, 그는 원칙적으로 年齡 貴賤 貧富에 구애됨이 없이 유능한 인재를 薦擧해야 한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120) 특히 사람의 재능은 본래 貴賤의 한계가 없는데, 국가가 사람을 쓰는데 있어서 일을 완성 시키고 백성을 다스리는 것을 위주로 한다면 어찌 반드시 貴賤에 구애 받을 필요가 있겠는가121)라고 하여, 문벌이나 신분의 차별을 배격하였던 것이다. 또한 그는 公論 에 의한 薦擧를 지향하고 있는데, 이것은 현대의 여론에 의한 정치와도 일맥상통하 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에 의하면 公論이란 온 백성들이 한 가지로 추구하 는 議論으로서, 사람을 등용할 때에는 모든 백성의 마음을 헤아려서 등용하고, 내쫓 을 때에도 만백성의 뜻에 따라 내쫓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22) 이러한 취지에서 薦擧를 함에 있어, 여러 邑의 薦擧를 합쳐 그 우열을 비교하여 한 道의 뛰어난 인재 로 삼고, 여러 道의 公論을 모아 一國이 존경하는 인재를 선발해야 할 것123)이라고 했던 것이다. 薦擧에 있어서 가장 큰 한계는 사사로운 정이나 청탁 등에 의해 부적합한 사람을 薦擧하는 것이었는데, 崔漢綺도 이 점을 극도로 경계하였다. 따라서 그는 무엇보다 천거를 담당할 擧主의 자질을 크게 중시하였던 것이다. 그리하여 천거를 담당할 사 람이 어질면 능히 어진 사람을 천거하겠지만, 천거하는 사람이 속된 무리이면 천거 되는 사람도 속된 무리일 것이라고 하였으며, 또한 君子로 하여금 인재를 천거하게 하면 君子를 천거 할 것이나, 小人에게 천거를 맡기면 역시 小人을 천거할 것이라고 하였다. 이어서 그는 조정이 만약 적임자가 아닌 자로 하여금 천거토록 한다면 조정 이 스스로 천거법을 무너뜨리는 결과가 될 것이라고 경고하면서, 薦擧의 大忌라고 할 수 있는 私情에 의한 천거를 적극적으로 막아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다.124) 118) 위의 책 권15, 選人門2 廳擧規式, 某道某官 薦某稱某人 居住年紀侍下兄弟產業交遊六條 明 其幹株枝葉 禀器之强弱淸獨 操行之周比雅俗 學識之理會質測 學史學禮學數學律學 有無淺 深優劣才能之施諸事業 和合物情 隣里蒙其惠 後生效其則 四條論列源委 惟取人道常行 尤尙 敎人御衆 次及獨善自行 勿添無用條目 勿附繁文瑣語. 119) 위의 책 권15, 選人門2 鄕擧. 120) 위의 책 권14, 選人門1 人限年數限戶 121) 위의 책 권16, 選人門3 勿限貴賤. 122) 위의 책 권16, 選人門3 國心選人. 123) 위의 책 권14, 選人門1 才不難知. 124) 위의 책 권14, 選人門1 大忌私情.
- 86 - 國史館論叢 第43輯 崔漢綺는 공정한 薦擧를 보장하는 방안으로 擧主緣坐法의 적용을 또한 강조하고 있다. 즉, 천거된 자의 재능에 따라 직책을 준 다음, 직책의 수행여부를 따져서 적임 자를 천거한 자에게는 賢才를 천거한데 대한 상을 주고, 잘못 천거한 자에게는 부당 한 천거에 대한 죄를 물어야 한다는 것이다.125) 그리하여 잘못 薦擧한 자에게는 資級 을 깍아 내리거나 연좌법을 적용하고, 어진 인재를 薦擧한 사람은 자급을 올려 주거 나 큰 상을 줄 것을 제안하고 있다.126) 지금까지 崔漢綺의 薦擧制에 관한 견해를 鄕擧論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그는 열 렬한 천거제 옹호론자였으며, 薦擧制를 엄격하고 공정하게 시행함으로써 科擧制의 폐단을 제거하고 올바른 관리등용을 기할 수 있으리라 기대하고 있었다. 또한 그는 천거에 있어서 貴賤에 구애받지 말아야 한다고 하여 신분의 차별을 철폐할 것을 주 장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의 薦擧論 속에는 被薦者에 대한 대우 등이 구체적으로 제시되지 못한 점 등의 한계도 내포되어 있는 것으로 보인다. 3. 丁若鑛의 南行制論 南行이란 朝鮮前期에는 京中各司의 6품 이하의 관리, 文 武의 權知, 弘文館의 正字 를 뜻하기도 하였으나, 일반적으로는 文 武科에 급제치 않고 薦擧나 門蔭 등을 통하 여 入仕한 자를 의미 하였다.127) 그러던 것이 후기에는 科擧(文 武科)를 거치지 않고 入仕한 자 즉, 薦擧 門蔭 등을 통해 入仕한 자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일원화 되었 다.128) 따라서 후기의 南行은 文 武官에 대비되는 非文 武科出身의 蔭官과 같은 의미 로 사용되었던 것이다. 그런데 丁若鋪은 南行을 科擧 이외의 入仕路인 薦擧나 門蔭 등을 지칭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이를 종합해 볼때, 조선후기에 쓰여진 南行은 科擧 이외의 薦擧 門蔭 등의 入仕路와, 그것에 의한 入仕者를 포괄적으로 뜻하는 용어였다 고 하겠다. 南行制129)는 조선초기부터 시행되어 후기까지 이어졌으나, 후기에 이르러 科擧制의 문란과 더불어 이것 역시 폐단이 나타났다. 門蔭制는 물론 薦擧制가 權勢家 子弟들의 出仕路로 악용된 것이 그 가장 큰 폐단이었다. 丁若鏞은 바로 이러한 폐단을 제거하여 公正한 인재선발을 해야한다는 취지에서 그 改革案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여기에서는 丁若鏞의 世遺表 를 중심으로 그의 南行制 改革案의 내용을 살펴보도록 하겠다. 125) 위의 책 권15, 選人門2 坐擧主. 126) 위의 책 권14, 選人門 1 選雜嚴明. 127) 졸고, 朝鮮前期 官吏任用制度에 대한 一考察 ( 東國史學 25, 1991) pp.98 105. 128) 肅宗實錄 권3, 원년 4월 丁酉, 不由科第而登仕者 俗稱南行. 129) 여기에서 南行制란 科擧 이외의 入仕路인 薦擧制나 門蔭制 등을 뜻하는 복합적인 의미로 사용 하였다.
- 87 丁若鏞이 南行制 改革에 있어서 가장 역점을 둔 부분은 그 선발인원에 관한 문제 였다. 그가 생존하고 있던 당시에 南行으로 入仕하는 文士의 수가 文科에 의하여 入 仕하는 자의 수보다 훨씬 많았다는 것이 그의 주장이다. 즉, 南行으로 入仕하는 길이 해마다 증가하고 날마다 넓어져서 오늘날에는 官職을 맡 아서 일하는 자의 수가 文官에 비하여 3,4배가 많다.130) 라고 하여 南行으로 入仕한 관리의 수가 文科 출신보다 3,4배에 이르고 있음을 지적 하고 있다. 또한 南行에 의한 入仕者의 숫자가 文科에 의한 入仕者보다 훨씬 많았다 는 사실은 다음의 記事를 통하여 더욱 명확하게 드러나고 있다. 南行으로 入仕하는 자의 수는 1년의 두번 都目政에 적어도 2,30명 정도이고, 3년 동안에는 반드시 7,80명 가량에 이른다. 文科로는 3년마다 30여 명을 뽑는데 南行은 7,80여 명을 뽑으니 그 不 均衡이 상하다.131) 이처럼 南行으로 入仕하는 자는 1년에 2,30명, 3년 동안에 7,80명 정도여서 30여 명 을 뽑는 文科와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여기에서 언급하고 있는 것은 文士의 入仕에 한정 하고 있지만 武士의 入仕까지 따지면 그 不均衡은 더욱 컸으리라 생각된 다. 어쨌든 丁若 鏞의 주장이 式年試 급제자보다 훨씬 많았던 增廣試 別試 등 不定期 試 급제자의 수를 간과하고 있다는 점을 고려하더라도, 조선후기에 南行으로 入仕하 는 文士의 수가 文科에 의한 入仕者보다 더 많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고 하겠다. 바로 이러한 선발인원의 불균형을 시정키 위하여 丁若鏞은 다음과 같이 南行에 의 한 入仕者의 수를 文科와 武科의 入仕者와 동일하게 할 것을 제안하고 있다. 이제 文 武科는 式年마다 각기 36명씩을 뽑고, 南行은 역시 36명을 뽑아 3班으로 만들면, 選과 擧가 함께 행하여지고(文 武科는 選, 南行은 擧), 藝와 德을 서로 취하 여 用人에 法度가 서게 될 것이다.132) 이처럼 文科 武科 南行에 의한 入仕者의 수를 3년마다 36명씩으로 균등히 함으로 130) 世遺表 제 15권, 春官修制 選科擧之規2 治選之額, 南行入仕之路 歲增日廣 至於今日 其任職居官之數 視文臣三四倍. 131) 위의 책 제3권, 天官修制 三班官制, 南行入仕者一年再政 少不下二三十人 通計三年必下七八 十人 文科則取三十餘人 南行則取七八十餘人 其不均甚矣. 132) 위의 책 제3권, 天官修制 三班官制, 今文武科 每式年各取三十六人 南行亦當取三十六人 以 成三班 使選擧兼行 (文武科選也 南行擧也) 藝德雙取 庶乎其用人 有法度也.
- 88 - 國史館論叢 第43輯 써, 選(文 武科)과 擧(南行)가 아울러 시행되고 藝와 德을 갖춘 자를 함께 뽑게 되어 用人에 法度가 있게 되리라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丁若鏞이 南行制를 改革하려고 한 표면적 이유였다. 그러나 그 근본적인 이유는 南行에 의한 入仕人員을 제한함으 로써 權勢家 子弟들의 무분별한 入仕를 막고 공정한 관리등용을 가능케 하려는 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위에서 南行에 의한 入仕人員을 文士의 경우 매년마다 36인씩으로 제한해야 한다 고 주장했음을 살펴 보았는데, 다음은 南行의 선발절차에 관해 알아보도록 하겠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과 같이 제안하고 있다. 式年마다 文 武科의 급제자 발표 후, 政府 福府 六曹 三司의 관원들이 都堂에 모여, 참석자들이 각기 9명씩을 천거 한다. 그 후 政府 福府 六曹의 大夫들이 천거된 자들 가운데서 36명을 뽑아 아뢴 다음, 吏曹에 내려보내어 36개의 관직에 補任케 한다.133) 이에 의하면 文士의 선발은 式年마다 文 武科를 放榜한 후에 政府 福府 六曹 三司 의 신하가 都堂에 모여서 각기 9명씩을 천거하고, 이어서 大夫들이 천거된 자들 중 에서 36명을 뽑아 上奏한 다음 吏曹에 회부해서 36자리에 補任토록 한다는 것이다. 그런데 이렇게 선발된 36명은 3등급으로 나누어 그 補職에 차이를 두었다. 그 등 급을 보면, 1등급은 山林遺逸之士 明行修之人, 2등급은 科目游藝之士 治理才諝之 人, 3등급은 宗戚勳賢之家 席寵承蔭之人 이었다.134) 이를 풀어서 설명해 보면, 山林 에 遺逸된 선비로서 書에 밝고 行實을 닦은 사람이 1등급, 科擧공부를 한 사람으 로서 다스림에 슬기가 있는 자가 2등급, 그리고 宗戚 勳臣 賢臣 집안의 사람으로서 총애를 받고 蔭職을 받은 자가 3등급이다. 이렇게 보면 丁若鋪은 山林 또는 遺逸을 가장 높이 평가하고, 그 다음으로는 科擧 시험공부를 한 선비를 들고, 門蔭子弟는 가 장 낮게 평가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또한 遺逸之士와 科目游藝之士는 종래에 薦擧 를 통하여 선발했던 자들이며, 宗戚勳臣之家의 子弟는 門蔭으로 入仕했던 자들이므 로, 결국 南行入仕者 속에는 종래의 薦擧와 門蔭에 의한 入仕者가 함께 포함되어 있 었던 것이다. 이렇게 3등급으로 선발된 사람들은 그 등급에 따라 각기 차등있게 다음과 같은 관 직을 初職으로 除授하게 된다. 즉, 1등급 4명은 洗馬, 2명은 司識, 6명은 童蒙敎官에 임명한다. 2등급으로 선발된 12명은 모두 6部의 敎官에 임명한다. 그리고 3등급으로 선발된 사람들 가운데 2명은 敦寧府參奉, 2명은 繕工監役, 2명은 典廟參奉, 2명은 典 133) 위의 책 제3권, 天官修制, 三班官制, 每式年文武科放榜之後 政府樞府六曹三司之臣 舍于都 堂 今參坐諸人各薦九人 於是政府樞府六曹大夫 聚衆薦而合選之 共取三十六人 奏之 乃下于 吏曹 以補三十六棄. 134) 이하 모든 改革案의 內容은 丁若鋪의 世遺表 제 3권, 天官修制 三班官制를 참조하였음.
- 89 - 壝參奉, 2명은 守陵參奉, 2명은 尙衣院參奉에 각각 임명한다. 여기에서 洗馬는 世子翊 衛司의 正9品官職이며, 司誨는 宗學의 正6品 官職이고, 童蒙敎官은 어린이를 교육시 키기 위해 각 郡縣에 두었던 從9品의 官職이다. 또한 敎官과 參奉은 從9品 官職이다. 이를 통해 볼 때 각 등급에 따라 그 初職의 品階와 역할에 차이가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入仕한 官吏들은 3년만에 遞任하게 되는데, 각기 從8品 奉事로 승진하 게 된다. 또한 武士는 式年마다 200명을 뽑되, 그 중 36명은 及第出身으로 되고, 그 나머지 인 164명은 進武로 된다. 이 進武는 文科의 進士와 대비되는 것인데, 이들 중에서 才 略이 쓸만한 자 36명을 선발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武科를 실시하여 200명을 뽑아 36명을 과거의 급제자로 정하고 36명은 南行으로 한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는데, 따라서 이것은 科擧와 南行을 혼합한 형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南行 36명의 初職을 보면, 32명은 武擧院의 權知奉事에 임명하고, 나머지 4명은 撤 蓋郞에 임명토록 하였고, 이렇게 初入仕한 자들은 司門副尉(守門將)와 城門副尉에 승 진시킨다는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丁若鏞은 文士와 武士를 각기 36명씩 南行으로 선발하는 외에 별도로 庶流(庶孽) 12명을 더 선발토록 제안하고 있다. 이처럼 文 武科는 36명씩을 선발하는데, 南行은 36명 외에 별도로 서류 12명을 선발하는 이유는, 南行을 선발하는데 있어서 서류의 자리를 두지 않으면, 文 武科는 귀족들의 차별이 심하므로 그들이 참여하기가 어렵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에서 丁若鏞이 신분제한을 철폐하여 양반만이 아니라 庶孽 에게도 入仕의 문호를 개방 할 것을 주장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들 庶流의 初職을 보면, 通禮院 引儀(從6品)에 6명, 承文院 吏文學官에 2명, 禮賓 寺 參奉에 2명, 그리고 掌理署 參奉에 2명을 임명토록 하고 있다. 또한 이들은 文 武 의 南行이 있는 날 동시에 선발하고, 역시 3년 후에 승진시킬 것을 제안하였다. 丁若鏞은 文士 武士 庶流 외에 또한 技藝를 가진 자도 南行으로 선발토록 제안하 고 있다. 이는 科擧의 雜科로 뽑던 中人을 南行으로 선발하기 위해서 구상하였던 것 으로 보인다. 그 선발 방법을 보면, 內醫院에서 12명, 觀象監과 司譯院에서 각기 6명, 典醫監에서 3명, 惠民署 寫字館 圖畵署에서 각기 3명씩, 도합 36명을 각자의 本司에 서 政府에 薦擧토록 하였다. 이어서 政府의 2曹 즉, 吏曹와 兵曹가 合坐하여 그들의 才藝를 시험하여, 그 가운데 1/3을 뽑아 12명을 政曹에 회부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 들에게는 東班의 正職을 初職으로 주고, 仕滿이 되면 外官職인 察訪(從6品)이나 縣令 (從5品)으로 삼는다는 구체적인 방안을 제시하고 있다. 이상에서 丁若鏞의 南行制改革案에 대하여 검토해 보았다. 丁若鏞은 앞에서 살펴 본 것처럼 文士 36명, 武士 36명, 庶流 12명, 그리고 技藝者 12명을 式年마다 南行으
- 90 - 國史館論叢 第43輯 로 선발토록 제안하고 있다. 또한 이렇게 선발된 자들에게 줄 初職을 상세하게 규정 하고 있으며, 그들의 승진시기와 승진할 官職도 제시하고 있다. 이러한 검토를 통하여 丁若鏞은 文 武 南 3班을 동등한 위치에 놓으려고 했음을 알 수 있다. 3班의 鼎立을 통하여 南行에 의한 勢家子弟들의 무분별한 入仕를 막고 자 했던 것이다. 이렇게 3班을 정립시키는 것을 기본으로 하였지만, 丁若鏞은 庶流 (庶孽)와 技藝者(中人)에 대한 배려도 잊지 않고 있다. 이를 통하여 우리는 丁若鏞이 庶孽 및 中人에 대한 入仕의 차별을 철폐코자 의도한 것을 알 수 있으며, 더 나아가 신분차별의 철폐를 주장한 측면도 엿볼 수 있다고 본다. 바로 이 점에서 丁若纏의 南行制 改革案을 높이 평가할 수 있는 근거를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V. 맺 음 말 朝鮮後期에는 科擧制의 문란과 잇따른 戰亂, 그리고 黨爭에 의한 혼탁한 정치상황 등으로 인하여 官途를 기피하고 은거하는 선비 즉, 山林이 증가하였으며, 조정에서는 향촌에서 큰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는 이들을 등용함으로써, 이들을 포섭 희유하고 민 심을 수습하여 政權의 안정을 도모하고자 하였다. 이에 따라 薦擧制 整備의 필요성 이 대두되어 3년마다 일정 인원을 정기적으로 천거토록 하는 鄕薦法과, 國王의 敎令 에 의하여 부정기적으로 실시하는 別薦法이 새롭게 정비되었다. 鄕薦法의 대체적인 내용을 보면, 각 道의 生員 進士 前職官吏들 가운데 才行이 뛰어난 자를 式年마다 鄕人이 守令에게 保證薦擧하고, 守令은 이를 觀察使에게 보고 하며, 觀察使는 다시 중앙으로 올리도록 규정되어 있었다. 천거의 인원은 下三道가 3 명이내, 上五道가 2명이내였으며, 연령은 生員 進士가 30세 이상, 은 40세 이상이 되어야만 천거될 수 있었다. 또한 別薦法은 주로 大臣 六卿 監司 등의 擧主들이 각기 2 3명씩의 인재를 수시로 천거하도록 되어 있었다. 이러한 천거제는 그 시행에 있어 서 부분적인 문제가 발생하기도 하였으나, 이를 통하여 在野의 山林이 대거 진출할 수 있는 길이 열리게 되어 薦擧制의 비중이 전기에 비하여 한층 높아지게 되었다. 山林이 薦擧를 통하여 政界에 진출한 것은 조선초기부터의 일이 었으나, 본격적으 로 진출하기 시작한 것은 明宗代부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前期에 진출한 山林 들은 政界에서 의 활약이 미약하여 정치적으로 큰 비중을 차지하지는 못하였다. 따 라서 山林의 정치적 활동이 활발해짐으로써 그들의 중요성이 크게 부각된 것은 조선 후기에 접어들면서 부터였다 고 할 수 있다. 조선후기에 政界에서 크게 활약한 최초 의 山林은 아마도 宣祖代에 薦擧를 통하여 入仕한 후 光海君代에 大北의 영수로서 政界를 주도했던 鄭仁弘이었다고 하겠다. 이후에 山林은 조정의 적극적인 徵召政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