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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 6 월 3 일공보 호이자료는 2015년 6월 3일 ( 조 ) 간부터취급하여주십시오. 단, 통신 / 방송 / 인터넷매체는 2015년 6월 2일 12:00 이후부터취급가능 제목 : 2013 년산업연관표 ( 연장표 ) 작성결과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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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어 순화의 역사와 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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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분을 그리며 나의 영원한 스승, 허웅 선생님 김차균 충남대학교 명예교수 나는 1958년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언어학과에 입학했다. 1965 년에 선생님을 지도 교수로 모시고, 국어 음운학의 양대 분야 중 하나인 성조론, 그중에서도 우리말의 성조를 연구하여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 았으며, 지금까지 51년 동안 같은 공부를 하고 있다. 언어학자로서 나 의 삶은 즐겁고 보람 있다. 그러나 선생님 가신 지 올해 11년, 해가 갈수 록 선생님을 그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게 쌓여 갈 뿐이다. 선생님은 1945년에 고등학교 교사로 부임한 이래 1947년 부산대학 교 조교수, 1953년 성균관대학교 조교수, 1955년 연세대학교 조교수 와 부교수를 거쳐 1957년에 서울대학교 전임 강사가 되셨다. 선생님의 최종 학력은 연희전문학교 중퇴였다. 1967년(50세)에 교수가 되었고, 1968년(51세)에 서울대학교에서 문학 박사 학위를 받으셨다. 선생님과 함께한 첫 원서 강독의 기억 학부 때 선생님에 대한 나의 존경심은 여느 학생보다 더하지도 덜하 지도 않았다. 영등포구 대방동에서 걸어서 통학할 정도로 빈곤했던 나 그분을 그리며: 허웅 149

는 둘째 학기 때 학과 교수님들과 학생들이 함께 가는 가을 학술 답사에 참석하지 못해, 가까이에서 선생님을 뵐 수 있는 유일한 기회를 놓치고 입대했다. 군 복무를 마치고 복학을 한 것은 4 19혁명 이듬해인 1961년 3월 이었다. 당시 대학은 학문을 하는 곳이라고 하기 어려울 만큼 뒤숭숭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셋째 학기에 복학하여 한두 살 후배인 학생들과 같이 강의를 듣게 되었다. 언어학과에 개설된 강의는 거의 모두 수강했 다. 부전공으로 독문과 강의 30학점을 합하여 185학점 가까이 이수하 고 졸업했다. 그 가운데서 허웅 선생님의 음운론 과 언어학 강독 은 가 장 열심히 공부했던 과목이었다. 선생님의 음운론 강의는 음운 이론은 물론 실질적인 음운 분석과 음 운 체계 기술의 능력을 기를 수 있을 만큼 이론과 실습을 두루 갖춘 훌 륭한 강의였기 때문에 다른 과의 학생들도 많이 수강했다. 나는 음운 변화의 원인 이라는 제목으로 졸업 논문을 써서 A학점을 받았고 허웅 선생님께 큰 칭찬을 받았다. 선생님은 언어학 강독 강의에서 트래거(G. L. Trager)와 블로흐(B. Bloch)가 지은 언어 분석의 개요(Outline of Linguistics Analysis) 라는 원서를 교재로 택하셨다. 대학에서 원서 강독은 처음이었다. 선생 님께서는 책의 내용은 물론이거니와 학생들에게 발음과 해석까지 열심 히 가르쳐 주셨다. 선생님의 원서 강독은 비교적 긴 영어 문장이라도 앞에서 뒤로, 뒤에서 앞으로 왔다 갔다 하지 않고, 적절한 지시어나 대 명사, 접속어를 사용해서 앞에서 뒤로 내려가면서 순서대로 해석하는 것이 특징이었다. 나는 1964년에 대학원 석사 과정에 입학했고, 그해에 연구 조교(봉 급이 없는 무급 조교)가 되어 학과 사무실에서 근무했다. 연구 조교에 150 새국어생활 제25권 제2호(2015년 여름)

게 주어지는 혜택은 연구 경력을 인정해 주는 것이었다. 사회적으로 무 직자라는 불명예(?)를 면하고, 교수님들의 곁에서 인간적인 사랑과 학 문적인 지도를 받을 수 있었고, 남이 할 수 없는 학문을 하는 학자라는 자부심과 보람을 느끼면서 지냈던 시기였다. 학과 사무실 생활은 열악 했지만, 그래도 일주일에 두세 번 정도 우리 선생님이 오셔서 아이고! 김 군, 이거 큰 고생하네. 건강이나 잘 챙기게. 하고 나가시면 그것으 로 피로가 다 풀렸다. 석사 학위 과정 3년 동안, 선생님께 받은 인격적 감화는 헤아릴 수 없 을 만큼 컸다. 선생님은 매우 규칙적으로 생활하시는 편이었다. 보통은 삼선동 집에서 쾌보로 30분 정도 걸어오시는데, 가끔 전차를 이용하실 때에도 혜화동에 내려서 10분 정도 걸어서 9시 30분쯤이면 학교에 도 착하셨다. 강의 시간을 제외하고는 연구실에서 연구에 몰두하시다가 12시 조금 지나서 걸어서 집에 가서 점심 드시고 다시 연구실로 돌아오 셔서 연구를 하셨다. 선생님의 퇴근 시간은 6시쯤이었다. 집에 들어가 시면 어떻게 시간을 보내시는지 확인하지는 못했지만, 저녁 드시고 다 시 밤 늦게까지 연구를 하시지 않았을까 생각된다. 그것은 문리대 동부 연구실 1층에 자리했던 선생님의 연구실과 삼선동 집의 벽면을 가득 채 웠던, 잉크로 손수 쓰신 연구 카드를 보면 잠작하고도 남는 일이었다. 컴퓨터가 없었던 당시에 카드로 자료 정리를 하지 않고는 넓고 깊은 학 문의 연구는 가능하지 않았을 것이다. 선생님은 일주일에 한두 번 정도 오후 6시 30분이나 7시쯤 뜻이 통하 는 동료 교수님과 맥주 집에 들러서 때로는 시국 담론으로, 때로는 음악 으로 기분 전환을 하셨다. 주말에는 벗들과 함께 또는 홀로 등산을 즐 기며 체력 단련을 하셨다. 선생님의 반듯한 삶은 당신에게는 일상에 지 나지 않았겠지만, 밥을 먹고, 걷고, 잠자고, 전차 타고 하는 선생님의 행 그분을 그리며: 허웅 151

동 하나하나가 내게는 감격으로 다가왔다. 당시에는 대학을 졸업하고도 계속 학문을 하겠다는 학생들 사이에서 미국이나 유럽 선진국으로 유학해 학문을 배워 와야지, 국내에서 무슨 학문을 하느냐는 심리가 큰 흐름을 이루고 있었다. 국학 계열의 학문을 제외하고 대학원 석사 과정은 외국 유학을 위한 준비 과정쯤으로 여겨 졌다. 동기생들은 물론이고 나와 같은 처지였던 조교들마저도 학위를 받기 위해 외국으로 유학 갈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런 분위기는 내게 도 갈등을 불러일으켰다. 선생님은 외국에 가야만 할 수 있고 국내서 는 못하는 학문이 어디 있느냐? 며 나의 마음을 안정시켜 주셨다. 평생 제자가 되기로 맹세하다 석사 과정 2학기를 마치고 겨울 방학 때 선생님의 저서 중세국어 연구 (정음사)를 읽었다. 그 가운데서 특히 국어 성조 연구 는 한 번 더 읽었을 정도로 인상 깊었다. 국어 성조 연구 는 중세 국어와 김해 방 언 성조 체계를 각각 공시적인 관점에서 기술한 다음에 둘을 통시적으 로 비교한 것이었다. 나는 그 논문에 크게 감동받아 선생님의 집으로 찾아가 큰절을 올리고는 목숨을 걸고 우리말 성조를 연구하여 큰 학자 가 되겠습니다. 하고 선생님의 제자가 되기를 간청했다. 선생님은 뭐 목숨까지 걸 거야 있느냐? 하고 빙그레 웃으며 허락하셨다. 그 뒤 어느 날 선생님께 저는 머리가 보통밖에 되지 않는데, 이 머리 로 선생님의 제자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고 여쭈었다. 그러자 선생님 께서는 인문학은 머리로만 하는 것이 아니다. 그보다는 기초부터 단단 히 하여 부지런하고 꾸준하게 체계적으로 쌓아 가는 것이 필수이다. 라 152 새국어생활 제25권 제2호(2015년 여름)

고 격려해 주셨다. 1966년 8월에 경남 창원 방언의 성조 체계 로 석사 학위를 받았다. 당시 일본과 미국에서는 자연 언어 운율 분야 연구가 대성황을 이루고 있었다. 한국어 연구를 위해 와 있었던 젊은 학자들에 게는 정확한 청취력으로 분석한 방언 자료가 필요했다. 나의 석사 학위 논문은 그들에게서 호평을 받았다. 학자로서 첫발을 내디딘 셈이었지만, 서울대학교 언어학과에는 그 때까지도 박사 학위 과정이 없었다. 석사 학위를 받는 날, 그때까지 언 제나 당당했던 내 마음이 끝없이 추락하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대학원 학생도 아니니 그야말로 백수건달이 되었구나. 하는 심정이었다. 그래 도 어느 중등학교에라도 취업이 될까 하고 1967년 2월까지 서울에서 버티고 있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이 보기가 딱하셨던지 김방한 선생 님께서 목포에 동광중고등학교라는 사립학교가 있으니, 교사로 가겠 느냐? 거기에 가면 자네 한 해 선배인 박양구 선생도 있으니 외롭지는 않을 거야. 라며 취업을 알선해 주셨다. 나는 학생들을 가르치는 신성 한 교직이니 어디든 무슨 상관이겠습니까? 라고 대답하고 목포로 내려 갈 준비를 했다. 작별 인사를 드리려고 허웅 선생님을 찾아뵈었더니 선 생님께서는 못내 아쉬워하시면서 박사 학위 과정을 꼭 만들어 놓을 테 니 학생들 잘 가르치고 학문을 놓지 말라고 하셨다. 그리고 건강을 잃 지 말라고도 당부하셨다. 나의 첫 직장으로 떠나는 날이 왔다. 용산역에서 완행열차로 호남선 의 종점인 목포역까지는 보통 7시간이 걸렸다. 그런데 그날은 연발과 연착이 심하여 11시간 가까이 걸렸다. 정거장마다 그 지방 특유의 억양 을 가진 방언을 쓰는 토박이들이 내리고 또 타면서 자신들의 방언을 소 박하게 그대로 들려주었다. 열차는 호남선과 전라선이 나누어지는 이 리역(지금의 익산역)을 지나서 계속 남쪽으로 내려갔다. 목포와 광주 그분을 그리며: 허웅 153

로 가는 분기점인 송정리역을 거쳐 목포역까지 가는 동안은 그야말로 방언 연구의 현장이었다. 승무원이 목포역에 도착했으니 내리라고 하 는 순간, 나는 전남 서남부 방언의 운율 체계를 환하게 깨쳤다는 확신을 가졌다. 깨달음에서 오는 희열이 얼마나 크고 오래 지속되는 것인지 직 접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에게는 말로 설명하기 어렵다. 그때 깨친 내용은 간단한 것이지만 아주 중요한 것이었다. 분절음이 운율 체계의 변천에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는 것이었는데, 우리말 방언 성조 연구사에서 처음 발견한 것이었다. 이 내용은 목포에 거주하는 18개월 동안 무안군, 해남군, 나주군, 목포시의 여러 토박이들의 방언 조사와 그 후의 6개월 동안 광주시의 방언 조사를 통해서 변할 수 없는 진리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을 논문으로 써서 1969년 9월 한글 144호에 실었는데, 허웅 선생님의 칭찬이 대단했다. 호남에 있는 동안 두 번이나 선생님께서 나에게 전화를 해 주셨다. 꿈에 자네 를 만났는데, 혹시 어디 아픈 데는 없이 건강하냐? 는 전화였다. 너무 행복했다. 1969년 3월에 서울대학교 문리과대학 언어학과에 1년 기간의 조교 자리가 났으니 와서 같이 있으면 좋겠다는 선생님의 연락이 왔다. 4월 1일에 조교 발령을 받았다. 봉급은 연구비를 제외하면 전임 강사와 맞 먹는 수준이었다. 조교 1년 근무가 끝나기 두어 달 전에 서울시 교육위 원회에서 시행하는 공립 중고등학교 교사 채용 시험을 쳐 두었다. 목 포와 광주에서 교사로 있는 동안 문교부 주관의 준교사 자격시험을 치 러 준교사 자격증 두 개[외국어과(영어), 외국어과(독어)]를 받아 두었 기 때문에, 채용시험에 응할 수가 있었다. 1970년 3월에 서울 영등포구 상도동에 있는 공립학교인 강남여자중 학교 교사로 발령 받았다. 강남여자중학교에서는 3년 동안 근무하면서 154 새국어생활 제25권 제2호(2015년 여름)

국어과 준교사 자격증을 취득했다. 여중에 근무하는 동안 학술 활동을 하는 데는 제약이 많았으나 주말이나 방학 때 한글학회, 국어학회, 서 울대학교 어학연구소 등에서 열리는 학술 발표 대회에 단순한 참가자 로, 때로는 토론자나 발표자로도 나갈 때도 있었다. 올바른 학자의 길을 몸소 보여 주시다 조교 1년과 여중 교사 3년, 합쳐서 4년 동안 허웅 선생님의 가르침은 나의 인생관과 학자로의 삶에 더없이 소중한 교훈이 되었다. 학자에게 학문은 삶 자체 이다. 학문은 명예나 재산을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다. 평생을 할 수 있는 연구의 범위를 정해 그림을 그려 놓고, 또 순서를 정해서 차례대로 완성해 나가야 한다. 자신의 업적을 남에게 알리기 위해 시간을 소모하지 말 것이며, 남을 의식하지 말고, 묵묵히 끈기 있게 일하라. 잡문을 써서 원고료 받는 일에 버릇을 들이지 말라. 학자가 잡문 쓰는 일에 맛을 들이면 학문에 큰 진전이 없다. 연구비를 타서 규격품(보고서 쓰는 일)을 생산해 내려고 하지 말라. 그러한 규격 품은 멀리 내다보면 시간을 낭비하는 일이다. 이 말씀들은 선생님께서 일상생활에서 체득한 것이기 때문에 진실하 고 힘 있는 것이었다. 선생님은 연구재단이나 연구비를 주는 국가 기관 은 연구 계획서를 심사해서 연구비를 줄 것이 아니라 연구 결과에 따라 상을 주어야 학문의 발전을 위해 바람직하다고 가끔 말씀하셨다. 나는 우리 선생님께서 돈을 받기 위해 연구 계획서를 써 내시는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했다. 선생님은 국어학의 4대 분야를 음운론, 형태론, 통사론, 의미론이라고 보고, 이들 중에서 앞 3개 분야의 연구를 시대별로 15세 그분을 그리며: 허웅 155

기, 16세기, 17세기, 18세기, 19세기, 20세기로 나누어서 진행하셨다. 공시적인 연구가 끝나면, 이들을 다시 통시적인 관점에서 연구하셔서 그 연구를 완성하셨다. 선생님의 학문에 대한 포부는 참으로 컸다. 선생님께서는 늘 언어학 은 인문학 중에서도 가장 보편적인 학문이므로 세계의 평화와 인류 행 복이 기본 목표가 되어야 하며, 그것은 겨레와 나라에 대한 사랑을 통해 서 이루어진다고 말씀하셨다. 선생님께서 국어학을 하신 이유는 겨레 와 나라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였다. 나는 1972년 3월 25일 경상대학교 외국어 교육과 영어 교육 담당 전 임 강사로 발령을 받았다. 허웅 선생님은 대학 강단에 서기 위해 떠나 는 제자에게 충고 한마디를 빠뜨리지 않으셨다. 대학에서 보직 맡는 재미를 붙이면 학문은 그것으로 더 나아가기 어려운 것임을 명심하라. 마지못해 보직을 맡아야 할 처지가 되면 사리사욕에 떨어지지 말고, 평 교수들에게 공정하게 학문할 기회를 주는 데 힘쓰고, 보직 기간은 가능 한 한 짧게 하라. 는 말씀이셨다. 나는 그 뒤 정년 퇴임 때까지 31년 동 안 교직 생활을 하면서 선생님의 이 말씀을 지켰다. 경상대학교에서는 정확하게 2년 동안 근무했다. 이 기간에 논문 국 어 성조론과 서부 경남 방언의 성조 를 써서 한글 147호에 낸 것이 중요한 성과였다. 이 논문을 보고 허웅 선생님께서는 성조를 포함하는 자연 언어의 운율에 대한 연구는 평생을 바쳐서 연구할 만한 가치가 있 는 것임 을 인정해 주셨다. 1972년은 나에게 특별한 해였다. 허웅 선생님과 김방한 선생님을 비 롯해서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교수들 모두가 바라 마지않던 언어학 전 공 박사 학위 과정이 신설된 것이다. 나는 언어학 전공 박사 학위 과정 의 첫 대학원생으로 입학했다. 석사 과정에서와 마찬가지로 박사 과정 156 새국어생활 제25권 제2호(2015년 여름)

에서도 우리말의 성조 연구를 계속했다. 선생님께서는 우리말의 성조 연구는 유럽과 미국보다 600년이나 앞 섰고, 문헌 자료도 세계에서 가장 많으니 서구 학자들이 개발해 놓은 이 론에 매이지 말고, 우선 대상 언어나 방언의 운율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 고 사색하라. 그런 다음에 특징을 제대로 이해했으면 그 특징에 맞는 이론과 체계를 세우고 논문을 써라. 는 가르침을 주셨다. 참으로 쉽고 평범하면서도 성공이 보장된 방법을 가르쳐 주신 것이다. 선생님께서 대학원에 들어온 제자를 가르치는 방법은 사람에 따라 달랐다. 아마도 사람의 됨됨이에 따라 방법을 달리하신 것으로 생각된 다. 내가 학위 논문 지도를 받은 경험을 적으면 다음과 같다. 논문을 부 분적으로 써서 선생님께 제출하면 반드시 읽어 보시되 잘못된 부분과 잘된 부분을 직접 지적하지는 않으셨다. 아무 말씀도 안 하시고 그냥 원고를 가지고 계시다가 일주일이나 열흘쯤 뒤에 더 연구하겠습니다. 라고 말씀드리면 그때서야 그렇게 하게. 하고 원고를 돌려주시고는 당신의 공부에 열중할 뿐이셨다. 그러나 반드시 가까운 시일 안에 논 문은 특별하게 쓰는 것이 아니라 남이 다 하는 방법으로 쓰되 그 가운데 서 뛰어나야지. 하는 등의 방법으로 넌지시 깨우쳐 주시고, 스스로 그 답을 찾도록 내버려 두셨다. 이러한 지도 방법은 조급함에서 오는 독단 을 피하게 하고 참을성을 길러 주는 최상의 방법이었다. 선생님의 지적은 구체적으로 무엇을 어떻게 고치면 좋겠다는 것이 아니었다. 한 예로 음조의 높낮이 자료 정리 방법을 들 수 있다. 당시 나 의 높낮이에 대한 자료 정리법은 지나치게 수리적이었다. 음조형의 기 술이 지각 심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용어도 내가 만들어 낸 것이 여러 개 있었다. 박사 과정 5학기째 초부터 논문 원고를 써서 제출했는 데, 선생님께 구체적인 지적을 받지 못하고 1년을 보냈다. 인문학, 특히 그분을 그리며: 허웅 157

방언음운론과 같은 실증적인 자료의 수집과 분석을 요하는 학문은 남 이 꿈틀하면 나는 기어가고, 남이 기어가면 나는 서서 걸어가고, 남이 서서 걸어가면 나는 뛰어가는 정도라야지, 남이 기어가는데 내가 날아 가는 것과 같이 비약하는 것은 바람직한 방법이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 데만 1년이 걸렸다. 선생님께서는 그것을 스스로 깨우치도록 하셨다. 논문 심사 과정에서 유형론을 도입하고 서술 방법도 생성음운론 식 (미국식)으로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일부 심사위원 교수님들이 희망하 셨지만 논문은 큰 수정 없이 그대로 통과되었다. 선생님은 그 후에 우 리의 인문학은 서구 학문 우월주의에서 벗어나 세계 학문의 선두에 서 서 그것을 이끌어 가야 할 책임이 있다. 라고 말씀하셨다. 선생님은 1918년에 태어나서 이 세상을 위해, 그리고 나라와 겨레를 위해 많은 일을 하시고 2004년(87세)에 돌아가셨다. 이루신 일들은 크 고도 섬세했다. 나라 안에서는 물론이고 나라 밖에서도 선생님의 명성 을 듣고 해마다 수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뵈러 다녀갔다. 선생님의 성 품은 겸손하고 덕성스러우며 자상스러웠다. 선생님을 만난 사람들은 저 마다 나 홀로 선생님의 사랑을 받은 듯이 흐뭇해하는 마음을 간직하고 돌아갔다. 1958년(41세)에서 2004년(87세)까지 46년 동안 선생님께서 나에게 베푸신 사랑의 만에 하나도 갚지 못한 것이 한이 된다. 선생님께 제자 가 되기를 맹세한 지 51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지금 나는 그 51년 동안 계속한 성조 연구를 결산하는 방점법에 바탕을 둔 우리말의 성조 라는 책의 발간을 앞두고 있다. 그 책의 교정을 보다가 이 글을 쓰기 위 해 잠시 옷깃을 여미고 선생님의 모습을 떠올리니 선생님께서 가까이 오셔서 자혜로운 마음으로 나를 살펴주시는 것 같아 즐거움과 그리움 이 강물이 되어 흐른다. 158 새국어생활 제25권 제2호(2015년 여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