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 동 한 국 사 신 영 식 신영식 해동한국사 / 붕당정치 특강 / Sunday, August 7 해동한국사 : 붕당정치 특강 1. 사림의 정치적 성장 (1) 사림의 등장 배경 1 훈구 세력 등장:조선을 건국한 혁명파 신진 사대부들의 후예, 관학파 2 훈구 세력의 실권 장악:계유정난 이후 실권을 장악 3 사림 세력의 등장:성종 때 훈구 대신들 견제 목적, 3사와 전랑직으로 활동 훈구 세력과 대립 4 사림과 훈구의 대립 배경 : 훈구 세력은 막대한 토지를 소유한 대지주층으로 농장을 확대하고 대외 무 역에도 관여 사림 세력의 정치경제적 기반 침식 사료 - 사림의 정계 진출 김종직은 경상도 사람이다. 학문이 뛰어나고 문장을 잘 지으며 가르치기를 즐겼다. 그에게 배워 과거에 급제한 사 람이 많았다. 경상도 선비로 조정에 벼슬하는 사람들이 우두머리로 모셨다. 스승은 제자를 칭찬하고 제자는 제 스 승을 칭찬한 것이 사실보다 지나쳤다. 조정에 새로이 진출한 무리는 그것을 알지 못하고 어울리는 자가 많았다. 그때 사람들이 이를 비평하여 경상도 무리 라고 하였다. - 성종실록 - 훈구와 사림의 비교 (2) 기원 정치 집권기 출신 훈구파 ( 관학파 ) 사림파 ( 사학파 ) 혁명파 신진 사대부 ( 정도전, 조준, 권근) 온건파 신진 사대부 ( 정몽주, 이색, 길재) 역성혁명 찬성( 적극적 개혁) 역성혁명 반대( 소극적 개혁) 15세기 16세기 성균관, 집현전을 통해 성장 사학을 통해 성장 성향 사장( 詞 章 ) 중시 경학( 經 學 ) 중시 사상정책 성리학 이외 불교, 도교도 수용 성리학 이외 다른 사상 배격 성격 자주적 존화주의적 계승의식 단군 중시 기자 중시 정치 모형 중앙 집권 향촌 자치 지향 부국 강병 중시 의리와 명분 중시 정치 이상 왕도 정치를 바탕으로 패도 인정 패도를 거부하고 왕도 정치 지향 성과 사림의 학풍 기술학 중시를 통해 조선 초기 문물 제도 정비에 기여 이기론과 심성론을 통한 16세기 성리학 발전에 기여 경학( 經 學 ) 중시, 향촌 자치를 바탕으로 한 백성들의 교화 강조, 중앙 정계에서 도학정치 ( 道 學 政 治 ) 실현 지 향, 왕도 정치( 王 道 政 治 ) 강조 1
(3) 사화의 발생 사림의 계보 훈구파 vs 사림파 사화( 士 禍 ) 1 무오사화 ( 연산군 4, 1498) ᄀ 원인: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 義 帝 文 ) 을 김일 손이 사초에 실음 ᄂ 경과:이극돈은 조의제문 이 세조의 즉위를 비방하는 것이라고 지목, 김종직과 김일손이 역모( 大 逆 不 道 ) 를 꾀했다고 주장 ᄃ 결과:김종직 부관참시, 김일손 등 처형 사림 크게 위축 사료 - 조의제문 정축 10 월 어느 날에 밀성( 密 城 ) 으로부터 경산( 京 山 ) 으로 향하여 답계( 踏 啓 ) 역에서 자는데, 꿈에 신이 칠장( 七 章 ) 의 의복을 입고 훤칠한 모양으로 와서 스스로 하는 말이 나는 초나라 회왕( 懷 王 ) 손심( 孫 心 ) 인데, 서초 패왕 항우( 項 羽 ) 의 죽인 바 되어 빈 강에 잠겼다 하고 문득 보이지 않았다. 역사를 상고해 보아도 강에 잠겼다 는 말은 없으니, 정녕 항우가 사람을 시켜서 비밀리에 쳐 죽이고 그 시체를 물에 던진 것일까? 드디어 문을 지 어 조( 弔 ) 한다. 사료 - 무오사화 유자광이 하루는 소매 속에서 한 권의 책자를 내놓았는데, 바로 김종직의 문집이었다. 그 중에서 조의제문 ( 弔 義 帝 文 ) 과 술주시 ( 述 酒 詩 ) 의 내용을 지적하면서 여러 추관들에게 이는 다 세조를 지목한 것이다. 김일손의 악은 모두가 김종직이 가르쳐서 이루어진 것이다 라고 하였다. 그리고 즉시 스스로 주석을 만들어 글귀마다 풀이를 하여 왕께 아뢰기를 김종직이 우리 전하를 헐뜯는 것이 이에 이르렀으니, 그 부도덕한 죄는 마땅히 대역으로 논해야 하고, 그가 지은 다른 글도 세상에 남아 있는 것이 마땅치 않으니 아울러 모두 불태워 버리소서 하니 왕이 이에 따랐다. 연산군일기 2 갑자사화 ( 연산군 10, 1504) ᄀ 배경: 언론 위축, 연산군의 폐정 재상 vs 연산군 ᄂ 원인:폐비 윤씨 사건 ᄃ 경과:연산군은 이 사건과 관련된 성종의 후궁과 그 아들들 사사 ᄅ 결과:두 차례에 걸친 사화를 겪으면서 영남 사림 대부분 몰락, 연산군은 중종반정으로 폐위(1506) 2
알아두기 - 폐비 윤씨 사건 1477 년 성종이 다른 후궁들의 침소에 자주 드나들자, 연산군의 생모 윤씨는 후궁들을 독살할 요량으로 비상을 숨겨 두었다가 발각되고 말았다. 이로 인해 왕과 모후( 母 后 ) 인 인수대비 ( 仁 粹 大 妃 ) 의 미움을 받고 빈으로 강등될 처지에 놓였으나 성종의 배려로 모면하였다. 그러나 성종의 얼굴에 손톱자국을 낸 사건을 계기로 조정에서는 폐비론이 대 두되었다. 왕과 인수대비가 격분하였고 한명회와 김종직이 폐비시킬 것을 강력히 주장함으로써, 1479년 성종은 윤 씨를 폐비시켜, 서인( 庶 人 ) 으로 만든 뒤, 친정으로 내쫓았다. 3 년 후(1482) 연산군을 세자에 책봉하는 문제가 대두되자, 신하들은 원자( 元 子 : 연산군 ) 의 어머니를 일반 백성처럼 살게 해서는 안 되며, 정부에서 경제적 지원을 해 주어야 한다는 상소를 그치지 않았다. 윤씨에 대한 동정론에 위기 를 느낀 인수대비는 후궁들과 모의를 하여 윤씨가 사가( 私 家 ) 에 나간 뒤에 자신의 행동에 대해 전혀 반성의 빛이 없 으며, 왕을 음해하려 한다는 내용을 꾸며 왕에게 고해 바쳤고, 이에 분개한 왕은 대신, 육조( 六 曹 ) ㆍ대간( 臺 諫 ) 을 모 아 논의한 끝에 좌승지( 左 承 旨 ) 이세좌 ( 李 世 佐 ) 에게 명하여 윤씨를 사사( 賜 死 ) 하였다. 알아두기 - 연산군의 폭정 연산군은 무오사화와 갑자사화를 일으키면서 많은 선비들을 희생시켰고, 자신의 행동을 비판하는 세력을 축출하였 으며, 경연의 폐지와 대간들의 직언을 금지하게 하는 신언패 ( 愼 言 牌 ) 의 실시, 도성 밖 30 리 내의 민가 철거, 언문 도서의 폐기, 사대부 부녀자의 농락, 사치와 방탕한 생활로 인한 정치의 파탄 등 수많은 악행과 폭정을 거듭하였다. 신언패 ( 愼 言 牌 ) 는 연산군 때에 관리들에게 말을 삼가도록 하기 위해 차게 한 패( 牌 ) 이다. 연산군의 구체적인 파행과 관련해서는 대표적으로 채홍사 ( 採 紅 使 ) 와 채청사( 採 靑 使 ) 를 각 도에 파견하여 미녀( 美 女 ) 와 양마( 良 馬 ) 를 뽑아 올린 사실을 들 수 있다. 그리고 원각사를 폐지하여 기생양성소로 개편하고, 성균관의 학생들을 쫓아내고 연락( 宴 樂 ) 장 소( 유흥장 ) 로 만들었다. 또한 눈에 드는 운평( 運 平 : 기생) 은 궁으로 불러 들였다. 일단 궁으로 들어오면 명칭이 흥청( 興 靑 ) 으로 바뀌며 지체가 높아졌으며, 선비들이 흥청의 가마를 메야 했다. 임금의 마음에 들어 잠자리를 같이 하면 천과( 天 科 ) 흥청이라 하여 급수를 높였고, 일반적으로는 지과( 地 科 ) 흥청에 머물렀다. 연산군은 심정, 남곤, 박원 종이 주도한 중종반정 (1506) 으로 밀려났다. 3 기묘사화 ( 중종 14, 1519) ᄀ 배경:중종 반정(1506) 반정 공신들이 주도권 장악 공신 견제 위해 사림 등용 알아두기 - 중종반정 (1506년 9 월) 박원종( 朴 元 宗 ), 유순정( 柳 順 汀 ), 성희안 ( 成 希 顔 ) 등이 모의하여 신윤무( 辛 允 武 ), 박영문 ( 朴 永 文 ) 등과 함께 무사 들을 모아 연산군 측근 세력의 대표자인 임사홍( 任 士 洪 ), 신수근( 愼 守 勤 ) 등을 제거한 후 궁중에 들어가 성종의 계비인 정현왕후 ( 貞 顯 王 后 ) 의 인허를 받아 연산군을 폐위시키고 중종을 즉위시킨 사건 ᄂ 조광조의 개혁 정치 a 급진적 개혁 추진: 조광조 등이 언관직 차지하고 왕도 정치 이념에 입각한 급진 개혁 추진 b 현량과 실시: 사림 등용 위한 천거식 관리 등용제 실시 주장 사료 - 현량과 과거의 격식은 조종( 朝 宗 ) 에서도 각각 제도가 달랐으니, 경서를 강독하기도 하고 강독하지 않기도 하였습니다. 지금 거론되는 천거로 뽑는 일은 놀랄 일이 아닙니다. 처음에 천거로 하면 덕행이 있는 자가 빠지지 않을 것 이요, 또 책으로 시험하면 그 재행( 才 行 ) 을 볼 수 있을 것이니 이는 지극히 좋은 방법입니다. c 승과와 소격서 폐지: 불교도교 행사 폐지 d 향약 시행 시도: 향촌 자치 실현과 재지사족 ( 在 地 士 族 ) 의견 수렴 목적 - 중종실록 - e 공납제의 폐단 시정:방납 폐단 개혁( 수미법 실시 주장) 3
f 소학( 小 學 ) 교육의 강화: 교육과 가정 생활에까지 유교적 가치관 확립 g 경연 강화: 군주에 대한 교육 h 위훈삭제 : 반정 공신들의 비리 척결 시도 기묘사화의 직접적 원인 사료 - 조광조의 도학정치 법도가 정해지는 것과 기강이 대강 서게 되는 것은 일찍이 대신을 공경하고 그 정치를 맡기는데 있지 않은 것 이 없사옵니다. 임금도 혼자서 다스리지 못하고 반드시 대신에게 맡긴 뒤에 다스리는 도가 서게 됩니다. 전하께서 정말로 도를 밝히고 홀로 있는 때를 조심하는 것으로써 마음을 다스리는 요점을 삼으시고, 그 도를 조정의 위에 세우시면 기강은 어렵게 세우지 않더라도 정해질 것입니다. - 정암집 - 임금 사랑하기를 어버이 사랑하듯이 하고/ 나라를 내 집안 근심하듯이 했노라./ 밝은 해가 이 땅을 비치고 있 으니/ 내 붉은 충정을 밝혀 비추리라. - 조광조, 절명시 - 알아두기 - 위훈삭제 사건 사림은 반정 직후부터 중종반정에 실제로 공( 功 ) 이 없으면서 반정공신에 책봉된 사람들을 훈적( 勳 籍 ) 에서 삭제 할 것을 건의했으나 큰 성과는 없었다. 그러나 사림의 세력이 강화되면서 1519년에 조광조가 문제를 다시 거론 하여 마침내 공신의 80% 에 이르는 76 명의 위훈을 삭탈하고 그들에게 분급한 토지와 노비를 몰수하도록 하였다. ᄃ 기묘사화의 전개: 위훈삭제 시도에 대한 공신들의 반격 주초위왕 ( 走 肖 爲 王 ) 을 가지고 왕 의 위기의식 고조시킴 조광조 사사, 사림 피해 ᄅ 결과: 공신들의 권력 강화 but 사림 세력의 중앙 진출을 막을 수는 없었음 4 을사사화 ( 명종 원년, 1545) ᄀ 배경: 중종의 후계를 놓고 세자의 외척인 윤임 일파( 대윤, 大 尹 ) 와 경원대군의 외척( 뒤의 명종) 인 윤원로윤원형 형제( 소윤, 小 尹 ) 가 갈등 ᄂ 원인: 대윤이 지지하던 인종이 재위 8개월 만에 세상을 떠나자 소윤이 명종의 보위를 굳힌다 는 명분 아래 을사사화를 일으킴 ᄃ 경과:당시 사림 세력은 왕위 계승에서 대체로 인종 옹호 을사사화에서 큰 화를 당함 ᄅ 결과:윤원형을 비롯한 척신들이 정국 주도, 사림 약화 사림 세력은 서원과 향약을 통하 여 향촌 사회에서 세력 확대 4대 사화의 발생 1 무오사화 ( 연산군 4, 1498) 김종직의 조의제문( 弔 義 帝 文 ) 발단 2 갑자사화 ( 연산군 10, 1504) 폐비 윤씨 사건의 관련자 처벌 사림파 제거 이극돈, 유자광이 사림파 제거 3 기묘사화 ( 중종 13, 1519) 4 을사사화 ( 명종 1, 1545) 중종 반정(1506) 조광조 등용 3사 중심 개혁 정치 단행 반정 공신의 위 훈삭제 조광조 등 사림 세력 제거 윤임( 대윤) 과 윤원형 ( 소윤) 간의 대립 윤임과 사림 세력 제거 척신 정치 시작 향촌을 통한 사림 세력 성장 4
2. 붕당의 출현과 발전 (1) 배경 척신 정치 잔재 청산 위해 선조 즉위 후 사림이 중앙 정계에 진출, 정국 주도 (2) 사림의 분리 1 원인:척신 정치의 잔재 청산 문제 2 분당 (3) ᄀ 기성 사림:척신 정치 개혁에 소극적 ᄂ 신진 사림:선조 대에 새롭게 정계에 등장, 원칙에 더욱 철저, 사림 정치의 적극적 실현 강조 붕당의 형성 1 배경: 16 세기에 왕권이 약화되고 공론을 중심으로 사림 정치 전개 붕당 발생, 붕당 간 갈등 전개 2 시작:신진 사림의 지지를 받던 김효원과, 왕실의 외척이면서 기성 사림의 신망을 받던 심의겸이 이조 동인과 서인의 형성 전랑직 놓고 대립 동인과 서인의 붕당 성립 출 신 척신 정치 청산 성향 대표자 동 인 신진 사림 개혁에 적극적 자기 수양에 중심, 지배자의 도덕적 절제 강조 이황, 조식, 서경덕 서 인 기성 사림 개혁에 소극적 백성 통치에 중심, 제도 개혁을 통한 부국안민 이이 성혼 3 성격:정파적 ㆍ학파적 성격 공유 4 기능:정치 참여층 증가, 정치 참여 폭 확대, 정치 세력 간의 비판과 견제, 건전한 정치 풍토 조성( 산 림의 의견 반영) 5 폐단:자기 붕당의 이익 추구 경향 등장 사림의 정치적 성장 성종 연산군 중종 명종 선조 삼사 통한 사림 진출 언론 통제 무오사화 갑자사화 사림 몰락 중종 반정 사림 등용 조광조 기묘사화 을사사화 척신 정치 사림 대거 중앙 정계 진출 척신 정치 잔재 청산 동인 남인 정국 주도 조광조의 개혁 정치 왕도 정치 이상 추구 현량과 실시 위훈삭제 수미법 시행 불교ㆍ 도교 행사 폐지 소학 교육ㆍ향약 보급 서인 정여립 모반 사건 북인 왜란후 집권 5
(4) 사료 - 이조전랑의 역할 무릇 내외의 관원을 선발하는 것은 3 공에게 있지 않고 오로지 이조에 속하였다. 또한 이조의 권한이 무거워 질 것을 염려하여 3 사 관원의 선발은 판서에게 돌리지 않고 낭관에게 오로지 맡겼다. 따라서 이조의 전랑과 좌랑이 또한 3 사의 언론권을 주관하게 되었다. 3공과 6 경의 벼슬이 비록 높고 크나, 조금이라도 마음에 차지 않으면 전랑이 3 사의 신하들로 하여금 논박하게 하였다. 이 때문에 전랑의 권한이 3 공과 견줄 만하였다. 이것이 바로 크고 작은 벼슬이 서로 엮이고 위와 아래가 서로 견제하여 300년 동안 큰 권세를 농간하는 신하 가 없었고, 신하의 세력이 커져서 임금이 제어하기 어려웠던 근심이 없었던 까닭이다. - 택리지 - 사료 - 동인과 서인의 분당( 分 黨 ) 1. 선조 대 김효원이 전랑에 추천되었다. 이때 왕실의 외척이었던 이조참의 심의겸이 거부하여 효원이 전랑이 되는 것을 허가하지 않았다. 효원은 젊은 선비들의 환심을 크게 얻고 있었는데, 이에 선비들이 의겸을 공박하 였다. 의겸도 일찍이 권력을 잡은 간사한 자를 물리치고 선비들을 보호한 공이 있었다. 이리하여 늙고 벼슬이 높은 사람들이 의겸을 옹호하였다. 처음은 하찮은 일에서 점차 커지게 된 것이다. 효원의 집이 동쪽에 있 었으므로 동인이라 하고, 의겸의 집은 서쪽에 있었으므로 서인이라 하였다. - 조선 왕조 실록 - 2. 김효원이 알성 과거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이조 전랑의 물망에 올랐으나, 그가 윤원형의 문객이었다고 하 여 심의겸이 반대하였다. 이때 양편 친지들이 각기 다른 주장을 내세우면서 서로 배척하여 동인, 서인의 말이 여기서 비롯하였다. 효원의 집이 동쪽 건천동에 있고 의겸의 집이 서쪽 정동에 있기 때문이었다. 서인의 생각 은 결코 외척을 등용할 수 없다는 것이었고, 동인의 생각은 효원의 공로가 많을 뿐더러 선비인데 어찌 앞길을 막느냐는 것이었다. - 이긍익, 연려실기술 - 붕당 정치의 개념 1 붕당 정치의 배경: 양반 수에 비해 관직 수 제한 관직쟁탈전, 붕당 간 정쟁 2 붕당 정치의 전개: 붕당이 언론활동을 통해 국정 주관 붕당 정치의 발달 선조 광해군 인조 효종 현종 숙종 동인 영남학파 북인 조식계 중립외교 서원 강화: 정치 여론 수렴 - 산림이 여론 주재 남인 이황계 견제세력 남인집권 우대 사 림 정여립 모반 사건 서인ㆍ 남인 간 상호 비판적 공조체제 유지 북학론 북벌논쟁 예송논쟁 서인 기호학파 인조반정 ( 북인축출 ) 서인집권 친명배금 호란 북벌론 견제세력 정묘호란 병자호란 붕당 정치의 변화 - 집권당 동인주도 남인, 북인 분열 남인 주도 왜란 후 북인 집권 인조반정 후 서인 집권 예송 논쟁 후 남인 집권 환국 이후 서인 집권 6
1 선조(1567~1608) ᄀ 동인과 서인의 분당: 이조전랑직을 둘러싼 김효원과 심의겸의 갈등, 이후 동인이 우세 ᄂ 북인과 남인의 분당:정여립 모반 사건( 기축옥사, 1589)과 건저문제 ( 建 儲 : 세자책봉 문제) 과정 에서 동인이 강경파인 북인과 온건파인 남인으로의 분파, 이후 남인이 주도 알아두기 - 기축옥사 (1589, 선조 22 년) 정여립이 조정에 사직하고 물러난 후, 황해도 관찰사 한준( 韓 準 ) 이 서신을 통해 정여립이 모반을 준비하고 있다 고 고변하였는데, 그 내용은 정여립이 건달, 유자( 儒 者 ), 무뢰무사 ( 無 賴 武 士 ), 승려, 그 밖의 잡배들을 모아 대동 계( 大 同 契 ) 라는 단체를 조직하고, 무예를 익히며 모반을 준비한다는 것이었다. 아울러 정여립이 木 子 亡 奠 邑 興 ( 목자망전읍흥 ) 이라는 비기참어를 유포하면서, 이씨가 망하고 정씨( 鄭 氏 ) 가 일어난다 는 설을 바탕으로 세 상을 현혹한다는 것이었다. 조정에서는 곧바로 군사를 보내어 정여립을 잡아들이게 했고, 이 과정에서 정여립은 아들 옥남( 玉 男 ) 과 함께 진안( 鎭 安 ) 죽도( 竹 島 ) 로 도망하였다가, 결국 자살하게 된다. 이 사건으로 인해 2년간에 걸쳐 무려 1,300 여 명이 화를 입게 되는데, 이 사건을 기축옥사라고 한다. 이 옥사를 맡아 처리한 서인 영수 송 강 정철은 의도적으로 사건을 확대하여 이발( 李 潑 ) ㆍ이호 ( 李 浩 ) ㆍ백유양 ( 白 惟 讓 ) ㆍ유몽정 ( 柳 夢 井 ) ㆍ최영경 ( 崔 永 慶 ) 등 대체로 동인 계열 인사들을 사사했으며 정언신( 鄭 彦 信 ) ㆍ정언지 ( 鄭 彦 智 ) ㆍ정개청 ( 鄭 介 淸 ) 등을 유배보내 고, 노수신 ( 盧 守 愼 ) 등은 파직하였다. 알아두기 - 북인과 남인 중앙에서 이발( 李 潑 ), 이산해 ( 李 山 海 ) 와 지방에서 조식 문인인 정인홍( 鄭 仁 弘 ) 을 중심으로 하는 일파를 북인이라 부르고 우성전( 禹 性 傳 ), 유성룡 ( 柳 成 龍 ) 을 따른 일파를 남인이라고 불렀는데, 우성전의 집이 서울 남산 밑에 있었 고 유성룡이 영남 출신이었기 때문에 남인으로 불리게 되었다고 한다. ᄃ 임진왜란 후 북인 주도:북인 정권은 임진왜란 때 광해군과 함께 의병 활동 주도 광해군이 집권하면서 북인은 남인 정권을 퇴진시키고, 정국 주도 왜란 후 ᄅ 북인 정권의 분열:북인은 학연ㆍ지연에 있어서 순수성이 매우 약했음 대북( 大 北 : 이산해 계열, 광해군 지지) 과 소북( 小 北 : 유영경 계열, 영창대군 지지), 대북( 大 北 ) 은 육북( 肉 北 : 이 산해 계) 과 골북( 骨 北 : 홍여순 계), 소북은 청( 소) 북( 淸 ( 小 ) 北 = 南 黨 : 남이공 계) 과 탁( 소) 북 ( 濁 ( 小 ) 北 = 柳 黨 : 유영경 계) 으로 분열 알아두기 - 북인의 분열 대북( 大 北 ) 은 이산해, 홍여순, 이이첨, 허균( 許 筠 ) 등이 연합한 정권이고, 남이공, 김신국, 유영경 계열이 소북( 小 北 ) 이다. 대북은 다시 1600 년 홍여순의 권력 확장을 둘러싸고 이산해와 홍여순이 대립하는 과정에서, 이산해를 중심으로 육북( 肉 北 ) 과 홍여순을 중심으로 골북( 骨 北 ) 으로 분열되었다. 선조 말에는 소북이 다시 남이공 계의 청 북( 淸 北 : 또는 南 黨 ) 과 유영경 계의 탁북( 濁 北 : 또는 柳 黨 ) 으로 나뉘었다. 이때 탁북은 영창대군의 세자 옹립을 지지하며 서인과 결합해 대북을 축출했으나, 대북은 광해군의 즉위와 함께 다시 정권을 장악하였다. 알아두기 - 북인의 분열 광해군은 장자 임해군을 대신하여 임진왜란 중 세자에 책봉되었으나, 선조의 정비 의인왕후 박씨가 죽고( 선조 34년 1601 년), 뒤이어 선조의 나이 54세에 계비 인목 왕후에게서 영창대군이 출생하고 당시 2세의 대군을 세자 에 책봉하려 하였으나, 선조의 급서(1608 년) 로 인해 광해군을 지지하던 이산해,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이 권력 을 장악하였다. 선조는 병세가 악화되어 거동할 수 없게 되자, 원, 시임 대신들을 모아 광해군에게 양위를 넘기 는 교지를 내리려고 하였는데, 소북 유영경은 원임대신들을 자의적으로 물리치고 광해군에게 왕위를 넘긴다는 선조의 전위교서를 자신의 집에 숨겨둔 채, 군대를 동원하여 궁궐을 포위하였다. 1608년 선조가 죽자 인목대비는 16년 동안 세자로 있었던 33세의 광해군과 강보에 싸인 3세의 영창대군이 싸우 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광해군을 즉위시킨다는 한글 교지를 내렸으며, 이를 통해 광해군이 즉위하였다. 이후 정인홍, 이이첨 등 대북세력은 선조와 인목대비 사이에 적자로 태어난 광해군의 이복동생 영 창대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반역을 도모하였다는 구실로 소북의 영수였던 영의정 유영경을 사사하는 등 소북을 몰아냈다. 7
2 광해군(1608~1623) ᄀ 광해군의 즉위:임진왜란 중 세자에 책봉된 광해군은 대북의 지지를 받으며 권력 장악( 소북의 영창대군 옹립은 실패) ᄂ 북인 정권:대북 ( 大 北 ) 이 중심이 된 북인이 정권 장악, 광해군은 대북에 대한 공격에 강경 대 응(ex. 북인 정인홍이 회퇴변척을 전개하다가 청금록에서 삭제되자, 광해군은 태학생들을 성 균관에서 축출) ᄃ 광해군의 실정:대북은 정권유지 목적에서 칠서사건 ( 七 庶 事 件 : 영창대군 옹립운동 ) 을 역모 사 건으로 발전시킨 후, 영창대군 사사( 賜 死 )(1613), 인목대비 폐위(1618) 알아두기 - 중북 폐모론에 반발하여 정온은 자신의 스승 정인홍과 사제 관계를 끊고, 정인홍을 비난하는 상소를 올렸는데, 이 상 소를 지지하는 정창연, 유몽인, 이명 등이 하나의 당파를 형성하였다. 알아두기 - 칠서사건 ( 광해군 5 년, 1613) 조령에서 은( 銀 ) 상인을 죽인 사건, 이른바 박응서의 옥사 가 일어났다. 박응서, 서양갑, 심우영, 서홍인, 박지 의, 이경준, 김경손 등 고관의 서얼들은 자신들을 강변칠우, 죽림칠현 이라고 자처하면서 여주의 강가에 무륜당을 짓고 시주를 나누며 교류하였는데, 이들은 신분적 한계로 출세의 길이 막힌 데 불평을 품고 온갖 악행 을 자행하다가 결국 이 사건을 일으킨 것이다. 이이첨, 정인홍 등은 이들을 문초할 때 김제남과 함께 영창대군 옹립을 위해 잔역을 도모하였으며, 이에 필요한 자금 조달을 위해 범행을 저질렀다고 허위 자백하도록 하여 김제 남을 죽였고, 영창대군을 서인으로 만들어 강화도에 유배사사하였다.(1614) 1622 년 범인 중 박응서만 무죄로 사 면되어 관직에 올랐는데, 박응서도 결국 1623 년 인조반정 때 잡혀 주살되었다. 알아두기 - 신경희의 옥( 광해군 7 년, 1615) 수안 군수였던 신경희가 양시우, 김정익 등과 모의하여 능창군을 추대하고 반역을 모의했다고 고변함으로써 시 작된 사건으로 신경희는 장살되었고 능창군은 강화도 서쪽 교동으로 위리안치되었다가 사사되었다. 이 사건은 대북의 무고로 시작되었다. ᄅ 광해군의 치적 a 전후 복구 사업: 임진왜란 후 양전( 量 田 ) 사업 실시, 대동법( 大 同 法 ) 시행 but 소실된 궁궐 증축 과정에서 민생 피폐 b 중립 외교 가 후금의 건국: 임진왜란이 전개되는 한편에서 후금 성장 누르하치가 후금 건국(1616) 나 명의 원군 요청: 후금의 성장에 위기를 느낀 명은 조선에 원군 요청 다 광해군의 실리 외교: 조선은 명과 후금 사이에서 중립적 외교정책으로 대처( 강홍립을 도원 수로 하여 출병 시키되 상황에 따라 대처하게 함 강홍립은 조명연합군이 패배하자 후금 에 거짓 항복, 이후 광해군은 명의 원군요청을 적절히 거절하고 후금과 친선 도모) 라 중립 외교의 결과: 후금의 침공을 예방, 왜란 후 복구 사업에 크게 기여 ᄆ 인조반정(1623) a 원인과 경과: 서인이 영창대군 ( 永 昌 大 君 ) 살해와 인목대비 ( 仁 穆 大 妃 ) 유폐를 근거로 광해군의 8
부도덕성 비판, 전후 복구 사업 과정에서 국가 재정이 악화 서인은 광해군의 중립 외교 를 빌미로 반정 단행, 능양군( 綾 陽 君 ) 이종( 李 倧, 후에 인조, 仁 祖 ) 을 왕에 옹립(1623) b 결과: 서인이 권력 장악, 이후 북인은 다시 정계에 등장하지 못함 c 영향: 서인과 남인의 연합 정권 붕당 정치가 더욱 발전, 인조반정 이전 서인은 현실적 폐단을 개혁하기 위한 개혁 성향이 강한 붕당,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에는 명분을 중시하고 반대파를 살상 3 인조(1623~1649) ᄀ 서인 정권: 서인과 남인은 학문적 입장을 인정하는 토대 위에 상호 비판적인 공존 체제 유지 붕당 정치 더욱 발달 ᄂ 붕당 정치의 전개 a 공론의 형성: 서원 중심, 자기 학파의 관리를 통해 중앙 정치에 반영 b 산림( 山 林 ) 의 강화: 각 학파에서 학식과 덕망을 겸비한 인물이 재야에서 여론 주재 산림( 山 林 ): 향촌에서 은거하는 학덕이 높은 학자 가운데 국가의 부름을 받아 특별 대 우를 받던 사람으로 각 붕당의 사상적 중심이 되었다. ᄃ 친명배금( 親 明 排 金 ) 정책:서인 정권은 의리와 명분을 바탕으로 광해군의 중립 외교 비판, 존 화주의적 명분론에 입각하여 후금에 대한 강경책 견지 ᄅ 전쟁의 발발: 후금 침공 - 정묘호란 (1627) ㆍ병자호란 (1636) ᄆ 서인 정권의 병권 장악:후금과의 항쟁 과정에서 어영청 ㆍ총융청 ㆍ수어청 등 설치 사료 - 친명배금정책 우리나라가 중국을 섬긴 지 200 여년 의리로는 군신이요, 은혜로는 부자와 같다. 임란 때 나라를 다시 세워 준 은혜는 영원토록 잊을 수가 없다. 선왕( 선조) 은 즉위하시어 40여년 동안 지성으로 사대하여 평생 등을 서쪽으로 대고 앉으신 적이 없다. 광해군은 배은망덕하여 천명의 두려움도 모르고 음흉하게 두 마음을 품어 오랑캐에게 정성을 바쳐 1617 년 오랑캐를 칠 싸움에 이르러, 정세를 보다 향배를 정하라 고 일렀다. 우리 삼한은 예의의 나라인데 오랑캐와 짐승의 나라가 되었으니 어찌 통탄할 일이 아니겠는가. 알아두기 - 인조 반정 이후 서인의 분당 1. 공서와 청서 : 인조반정에 가담했던 김류, 심기원, 이귀, 김자점을 공서( 功 西 ) 라 하고 가담하지 않은 김상헌 등 은 청서( 淸 西 ) 라고 하였다. 2. 노서와 소서 : 공서파로써 김류가 소북 남당의 남이공을 대사헌으로 추대하자, 소장파에서 이를 반대하면서 김류를 중심으로 한 노장파 노서( 老 西 ) 와 소장파 소서( 少 西 ) 로 분화되었다. 3. 원당과 낙당 : 북벌론과 청에 대한 입장 차이를 두고 원두표를 중심으로 한 원당( 原 黨 ) 과 김자점을 중심으로 한 낙당( 洛 黨 ) 으로 분화되었다. 4 효종(1649~1659) ᄀ 서인 정권: 서인 집권남인 견제, 효종은 즉위 직후 산림 영수인 김집( 金 集 ) 을 이조판서에 임 명, 송시열과 송준길로 하여금 친청 세력이었던 김자점( 金 自 點 ) 을 탄핵하게 함 김자점이 효종과 양송을 반청 세력으로 청에 고발 조선의 탁월한 외교 정책으로 무마 김자점 유배 9
알아두기 - 친청세력 김자점 김자점 ( 金 自 點 ) 은 인조반정 당시 이귀 등과 함께 일등 공신에 봉해졌던 정사공신이었다. 병자호란 후 일반 관리 들은 청( 淸 ) 에 가는 것을 꺼렸는데 김자점은 사은사 ( 謝 恩 使 ) 를 자청하여 청( 淸 ) 에 가서 청의 고관들과 친분을 쌓 았으며, 인조의 총애를 받는 후궁 귀인 조씨와 결탁하여 소현세자와 인조 사이를 이간질하기도 하였다. 또한 귀 인 조씨가 낳은 효명옹주와 자신의 손자 김세룡을 혼인시켜 왕실과 사돈이 되기도 하는 등 다양한 관계를 통해 권력을 극대화하려고 하였다. 효종 즉위년(1649) 김자점은 양송( 兩 宋 - 송시열, 송준길) 의 탄핵을 받자, 효종과 양송을 오히려 청에 고발하면서, 청과의 갈등 관계를 조성하기도 하였고, 이후 광양으로 유배되었다가, 효종 2년 (1651) 귀인 조씨와 짜고 쿠테타를 일으켜 귀인 조씨의 맏아들인 승선군을 왕으로 추대하려다 사전에 역모가 발 각되면서 귀인 조씨와 함께 사형에 처해졌다. ᄂ 북벌론의 전개 a 개념: 북벌론은 청을 정벌하여 문화가 높은 우리나라가 문화가 낮은 오랑캐에게 당한 수치 를 씻고, 임진왜란 때 우리를 도와준 명에 대하여 의리를 지켜 명을 대신하여 복수하자는 주장( 복수설치 ) b 전개:송시열, 송준길, 이완 등이 중심, 어영청을 근거지로 군대의 양성과 훈련ㆍ성곽 보수ㆍ 수리, 효종은 대부분의 국력을 군비 확충에 쏟음, 네덜란드인 하멜 등이 표류하여 오자 이 들을 훈련도감에 소속시켜 조총, 화포 등 신무기를 개발토록 함 c 결과: 궁핍한 국가 재정과 미약한 왕권 북벌 추진에 한계 : 북벌론은 실질적으로 서인이 정권을 유지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 ᄃ 나선 정벌:변급 (1 차, 1654), 신유(2 차, 1658) a 원인: 조선에서 북벌 운동이 한창일 때 시베리아 지방에서 러시아 세력이 밀려옴 b 결과: 청이 조선에 원병 요청 조선에서는 변급(1 차, 1654), 신유(2 차, 1658) 등을 지휘관 으로 두 번에 걸쳐 군대 파견 알아두기 - 한당( 漢 黨 ) 과 산당( 山 黨 ) 의 분화 대동법의 확대 실시를 주장하던 김육, 이시백을 중심으로 모두 한강 이북에 살았기 때문에 이들을 한당( 漢 黨 ) 이라고 하였고, 대동법 실시에 반대하던 김집, 송시열, 송준길 등은 모두 연산, 회덕 속 사람들이기 때문에 붙 여진 이름이다. ᄅ 대동법 확대 실시:민생 안정농민의 유망 방지 목적, 충청도와 전라도까지 대동법을 확대 실 시(김육 ( 金 堉 ) 의 주장 수용) 서인 분파 ( 대동법을 지지했던 한당( 漢 黨 ), 김집( 金 集 ) 송시열 ( 宋 時 烈 ) 송준길( 宋 浚 吉 ) 등 대동법을 비판했던 산당( 山 黨 )) 5 현종(1659~1674) ᄀ 북벌논쟁 : 서인 북벌론 vs 남인 함이 없음 ᄂ 예송 논쟁( 禮 訟 論 爭 ) 북학론 ( 청의 선진문물 수용) but 서인 우세 남인 견제에는 변 a 원인: 효종 승하 후, 인조의 계비였던 자의대비 ( 慈 懿 大 妃 ) 의 복색 문제 효종의 정통성 문 제로 확대 b 경과: 1차 예송( 기해예송, 1659) - 서인 승리, 2차 예송( 갑인예송, 1674) - 남인 승리, 남인이 정계 장악 c 결과: 남인 우세, 서인 공존 - 경신환국 때까지 지속 10
(5) ᄃ 대동법의 확대 실시( 현종 7 년, 1666):함경도까지 대동법 확대 알아두기 - 예송논쟁 예송( 禮 訟 ) 은 차남으로 왕위에 오른 효종의 정통성과 관련하여 1659 년 효종의 사망 시( 기해예송 ) 와 1674년 효종의 비( 妃 ) 의 사망 시( 갑인예송 ) 에 두 차례에 걸쳐 일어났다. 이 때 인조의 계비 자의대비의 복제( 상복) 가 쟁점이 되었다. 1 기해예송:서인은 효종이 적장자가 아님을 들면서 왕과 사대부에게 동일한 예가 적용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따라서 자의대비는 1 년 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하였다. 반대로 남인은 왕에게는 일반 사대부와 다른 예가 적용 되어야 한다며, 효종은 임금이기에 자의대비는 3 년 간 상복을 입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서인의 주장이 채택되 면서 서인이 계속 정권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갑인예송:효종 비의 사망시 서인은 같은 논리로 상복 착용 기간을 9 개월이라 주장했고, 남인은 1년 설을 주장했 다. 남인의 주장이 수용되면서 서인을 밀어내고 남인이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사료 - 예송논쟁 기해복제를 과인은 국제를 쓴 것으로 알고 있었는데, 안팎에서 다르다 하니 임금이 하는 일은 가볍고 신하가 하는 일은 가장 무겁다는 말이냐? 경들이 모두 선왕( 효종) 의 두터운 은혜를 입었는데, 감이 체이부정이라고 주장하니 신 하가 되어 임금에게 야박하게 굴면 누구에게 두텁게 할 것인가? 알아두기 - 붕당 정치에 대한 바른 이해 < 일제의 식민 사관> 1 타율적 권위에 의존하여 자기를 주장하는 정신은 독립성이 없고, 그 곳에서 사람들이 서로 의존하는 당파적 성격이 길러지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다. 유력한 권위 아래 모이고, 혹은 특수한 사회 결합에 의존하여 당파를 맺는 것은 조 선의 두드러진 국민성으로서 정치, 사회의 대립에서부터 다 같이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다. 붕당의 다툼은 스스로 의 생활 의식의 대립에서부터 일어나는 것이 아니다. 주자학의 원리, 특히 예론이 일종의 의존적 대립인 까닭에 종합 되어 앞으로 나아가는 때는 없고, 언제까지나 의미없 는 대립으로서 성과없는 항쟁을 계속한다. 그 항쟁의 길이에 있 어서는 세계적 기록이라고 하여도 과언이 아니다. - 조선사 개설 - 2 한국인은 반도라고 하는 지리적 환경 때문에 파쟁적 ( 派 爭 的 ) 인 민족성을 가졌다. 선천적인 파쟁성 때문에 한국인은 정치적 능력이 없다. 조선이 망한 것은 양반들의 당쟁 때문이다. 당쟁은 조선 건국부터 말기까지 시종 계속되었다. < 일본의 당파성론에 대한 반론> - 일본인 小 田 省 吾 - 일본의 주장 1. 조선의 당쟁은 우리의 분파적 민족성이 역사를 통하여 구체화된 형태로서, 국사( 國 事 ) 와 민생은 뒷전에 밀어 둔 채 당리당략 ( 黨 利 黨 略 ) 을 위한 치열한 경쟁만 계속하다가 끝내는 나라마저 망하게 하였다는 것 2. 당쟁을 한국인의 민족적 성격에서 비롯된 것이라 하고 당쟁의 폐단만을 제시하여 한민족의 역사는 내적 발전과 주체성이 결여되었고 왕조 교체의 악순환만 계속되었다는 것 3. 정쟁 자체를 역사적인 현상으로 보지 않고 민족성의 소산이라고 규정한 점에서 식민주의적인 의도가 있음. 일본 주장에 대한 우리의 비판 1. 당쟁은 동서고금 ( 東 西 古 今 ) 을 통하여 국가가 존재하는 한 어느 나라에나 있었음 2. 당쟁 시대에는 서로 상대방에게 약점을 잡히지 않기 위해 부정 부패를 크게 견제 3. 오히려 세도 시대에 이르러 일당 독재로 어느 누구의 견제도 받지 않게 되면서 부정 부패는 급속히 퍼져갔고 견 딜 수 없는 농민들의 처절한 항거가 재연되었음. 4. 당쟁이란 붕당 간의 싸움으로 소수 세력에 의한 권력 독점을 방지하고 공도론에 입각한 상호 비판에 의해 정치 세력의 공존 체제를 지향하려는 나름대로의 세련된 정치 형태 붕당 정치의 성격 1 붕당 정치의 배경: 훈구 세력이 붕괴된 이후 사림 자체 분열 붕당 발생, 학연지연 바탕한 붕당 간 당쟁 전개 11
2 붕당 정치의 의미: 초기 - 군자소인론 ( 君 子 小 人 論 ) 을 바탕으로, 자기 붕당을 군자당이라고 하고 상대당 을 소인당이라 하여 비판 이후에는 양시양비론 ( 兩 是 兩 非 論 ) 을 바탕으로 다른 당을 모두 군자당으로 봄 상대당에 대한 견제와 협력을 바탕으로 한 붕당 정치 전개 3 공론 중시 ᄀ 정치적 의견 수렴:의정부 ( 조선 중기까지 ) 와 비변사 ( 조선 후기) 를 통하여 의견 수렴 ᄂ 3사ㆍ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 증대:상대당을 견제하고 자기 세력을 옹호, 세력 확대 위해 3 사 언관 및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 증대 ᄃ 향촌 중심 체제:서원이나 향교 강화( 지방사족 의견 수렴), 산림( 山 林, 재야에서 공론 주도) 출현 4 붕당 정치의 한계:붕당의 공론이 민의( 民 意 ) 를 반영한 것이 아니라 지배층의 의견을 수렴하는 데 그침 3. 정쟁의 격화와 탕평책 (1) 붕당 정치의 변질 비판과 견제의 원리가 무너지면서 일당 전제화가 이루어진 상태를 의미 1) 배경 : 17 세기 후반의 사회적 경제적 변화를 바탕으로 나타남 1 사회적 변화 : ᄀ 지주제와 신분제 동요 : 일당 전제화가 진행되는 과정에서 소수의 권반 외에 다수 향반과 잔반이 나타나게 되었고, 반면, 서민 지주의 등장으로 향촌에서의 지주제와 신분제의 동요 가 일어남 ᄂ 붕당 정치의 기반 붕괴 : 사족 중심의 향촌 지배가 어렵게 됨에 따라 붕괴 됨 붕당 정치의 변질 숙종 노론( 송시열계 ) 경신환국 남인처리문제 기사환국 갑술환국 장희빈 사사 서인 집권 소론( 윤증계 ) 남인 집권 소론 집권 노론 집권 노론의 일당 독재 왕위 계승 문제 2 경제적 변화 ᄀ ᄂ 농업 생산량의 증대 : 17 세기 후반 이앙법( 모내기법 ) 견종법 등 새로운 농법의 시행으로 생산량이 증대됨 상품 화폐 경제의 발달 : 장시의 발달과 상평통보의 전국적 유통으로 화폐경제가 발달됨. 정 치 집단 사이에 상업적 이익의 관심 증가로 독점하려는 경향이 커짐. 2) 1 변질 과정 정치적 쟁점의 변질 : 예학( 禮 學 ) 과 같은 성리학적 쟁점에서 군사력, 경제력 확보에 필수적인 군영을 장악하는 등의 현실적인 쟁점으로 변질 12
2 경신환국 ( 庚 申 換 局, 1680) : 제2 차 예송(1674, 갑인예송 ) 을 통해 정권을 장악했던 남인이 기름 3 천막 유용 사건을 계기로 실각함. 이후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면서 붕당 사이의 대립 양상은 크게 달라짐 알아두기 - 경신환국 ( 庚 申 換 局, 1680) 숙종은 서인이었던 김석주에게 군권( 軍 權 ) 을 맡겨 남인을 견제하는 태도를 보였다. 이 시기에는 군권 장악이 상 당히 중요한 의미를 지니고 있었는데, 남인 윤휴는 김석주 등의 서인을 견제하기 위하여 도체찰사부 ( 都 體 察 使 府 ) 를 설치하였고, 남인 허적이 체찰사에 임명되었다. 도체찰사부는 영의정을 도체찰사로 하는 전시 사령부로서 전 국 모든 군사력이 그 통제를 받게 되었다. 총융사ㆍ 수어사도 경기도의 군사로 도체찰사가 통제하였으며, 훈련도 감과 어영청까지 장악하려 하였다. 군권을 비롯한 중앙 권력이 남인( 탁남, ) 에게 지나치게 집중되면서 숙종은 남인 견제의 필요성을 느끼고 서인들을 유배에서 풀어주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남인의 영수 영의정 허적이 가문 잔치(1680) 에 궁중의 기름 천막을 임의로 가져다 쓴 사건이 발 생하였다. 숙종은 이에 크게 노하여 군권을 서인에게 넘기는 전격 조치를 취하였으며, 사헌부와 사간원의 관원을 서인으로 교체하였다. 이 후 삼사를 통해 남인계 종실 복창군, 복선군, 복평군이 허적의 서자 허견과 함께 역모를 꾸몄다는 고변이 있었다. 숙종은 이를 통해 허적, 윤휴, 이원정, 유혁연 등 남인의 실권자들을 밀어냈고, 서인이 권력을 장악하게 되었다. 일당 전제화 추세 : 경신환국을 계기로 붕당 사이의 견제와 균형을 유지하던 붕당 정치의 정 상적 형태가 무너지고 정국을 주도하는 붕당과 견제하는 붕당이 서로 교체됨. 이후 특정 붕 당이 정권을 독점하는 일당 전제화의 추세가 대두되었음. 4 노론과 소론의 분열:경신환국 후 서인 정권은 남인 처리 문제와 국가 운영 정책을 둘러싸고 노론( 노장 세력) 과 소론( 신진 세력) 으로 나뉨. 노론 중심 인물 송시열 중심의 노장파 윤증 중심의 소장파 학통 이이를 정통으로 계승 성혼의 사상 계승 주장 소론 대의명분, 민생 안정 중시 실리, 적극적 북방 개척 주장 성격 보수적 진취적 특징 성리학의 절대화 주자 중심의 성리학 강조( 사문난적 배척) 성리학에 대한 이해의 탄력성 양명학과 노장 사상에 개방적 5 기사환국 ( 己 巳 換 局, 1689) : 소의( 昭 儀 ) 장씨( 후에 장희빈) 의 소생( 후의 경종) 을 원자로 정호( 定 號 ) 하려는 것을 송시열( 宋 時 烈 ) 을 비롯한 서인들이 반대하다가 실각하고 남인이 다시 정권을 장악한 사건. 알아두기 - 기사환국 ( 己 巳 換 局, 1689) 중전인 인현왕후가 왕자를 낳지 못한 채, 소의( 昭 儀 ) 장씨( 후에 장희빈 ) 가 아들 윤( 昀 ) 을 낳자(1688), 숙종은 윤을 원자로 삼아 명호( 名 號 ) 를 정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봉하려고 했다. 이때 영의정 김수흥 ( 金 壽 興 ) 을 비롯한 서 인 노론은 중전이 아직 젊은데 후궁 소생을 낳은 지 두 달 만에 원자로 삼는 것은 옳지 않다고 반대했다. 숙종은 이들의 반대를 묵살하고 원자의 명호를 정하여 종묘사직에 고하고 소의 장씨를 희빈으로 삼았다 (1689). 이에 노 론의 영수인 송시열이 상소를 올려 반대했다. 숙종은 이에 분노하여 송시열의 관직을 삭탈하고 제주도로 유배하 였으며, 영의정 김수흥을 비롯한 노론계 서인을 대거 파직시켰다. 반면 권대운 ( 權 大 運 ) 이 영의정에, 목내선 ( 睦 來 善 ) 이 좌의정에, 김덕원( 金 德 遠 ) 이 우의정에 오르는 등 남인계가 대거 등용되었다. 다시 집권한 남인은 서인의 죄 를 계속 추궁하여 송시열을 정읍에서 사사하였고, 서인을 중앙 권력으로부터 배제하는데 주력하였다. 숙종이 중전 민씨( 인현왕후 ) 가 원자 책봉에 불만을 품고 있다는 이유로 중전을 폐서인 시키려 하자, 이에 재야 서인 오두인 ( 吳 斗 寅 ) 등이 상소를 올려 이를 저지하려 하였다. 숙종은 상소를 올린 박태보ㆍ 오두인 등을 유배했 고, 마침내 이듬해 ( 숙종 16 년, 1690) 5 월 중전을 폐하여 서인( 庶 人 ) 으로 만들고, 6월에는 원자를 세자로 책봉한 뒤 10 월에 희빈 장씨를 왕비로 책립( 冊 立 ) 했다. 서인이 집권 10년 만에 남인에게 정권을 빼앗긴 이러한 국면을 기사환국 (1689) 이라 한다. 13
6 갑술환국 ( 甲 戌 換 局, 1694) : 폐비( 廢 妃 ) 민씨( 閔 氏, 인현왕후 ) 복위 운동을 계기로 장희빈과 남 인이 실각하고, 서인( 소론) 이 다시 집권한 사건 알아두기 - 갑술환국 ( 甲 戌 換 局, 1694) 숙종이 중전 민씨를 폐위한 일을 후회하면서 이에 앞장섰던 남인에 대해 반감을 드러내고 있었던 시기에 김춘택 ( 金 春 澤, 노론계), 한중혁( 韓 重 爀, 소론계) 을 중심으로 폐비 민씨 복위 운동이 전개되었다. 이 소식을 들은 남인 민암( 閔 黯 ) 과 이의징 ( 李 義 徵 ) 등은 서인의 재기를 봉쇄하기 위하여 김춘택 등 수십 명의 서인을 체포한 후 국문 을 시작하였다. 그러나 숙종은 폐비 민씨를 두둔하며 국문을 주관한 민암 등을 오히려 귀양 보냈다. 민씨 복위 운동을 주도했던 서인들은 기사환국 이후 줄곧 왕의 총애를 받고 있던 숙빈 최씨( 淑 嬪 崔 氏 ) 와의 연결을 이용하여 희빈 장씨와 남인계의 잘못된 점을 숙종에게 알리는 데 주력하였다. 결국 숙종은 다시 남인을 배척하고 남구만 ( 南 九 萬 ) 을 영의정, 박세채 ( 朴 世 采 ) 를 좌의정, 윤지완( 尹 趾 完 ) 을 우의정에 기용함으로써 다시 소론 정권을 성립시 켰다. 숙종은 장씨를 다시 희빈( 禧 嬪 ) 으로 강등하였고, 노론계 민유중의 딸인 인현황후 민씨를 5년 만에 중전에 복귀시켰다. 한편 송시열 ( 宋 時 烈 ), 김수항 ( 金 壽 恒 ) 등 기사환국 때 사사되었던 노론계 서인들에게 다시 작위를 준 반면, 남인측은 민암, 이의징 등이 사약을 받았고, 권대운( 權 大 運 ), 목내선 ( 睦 來 善 ), 김덕원 ( 金 德 遠 ) 등이 유배당했 다. 갑술환국을 끝으로 남인은 중앙 권력에서 완전히 도태되었다. 7 노론과 소론의 대립: 갑술환국 이후 정계에서 남인이 완전히 축출되고 소론과 노론의 쟁론( 爭 論 ) 이 시작됨. 소론은 훈련도감과 어영청을 장악하면서 군사적 기반을 강화하였고 권력 쟁탈에 성공한 정치 세력만 주축이 되어 요직을 독점하며 권력을 유지함 이를 위해 병권을 장악하 는 일이 많아짐. 8 노론의 일당 전제화:인현왕후가 병으로 죽고(1701) 무녀와 함께 인현왕후를 무고( 巫 蠱 ) 했다는 서인의 탄핵을 받고 장희빈이 사사( 賜 死 ) 되었음. 희빈 장씨 및 남인에게 우호적이었던 남구 만( 南 九 萬 ) 등의 소론도 몰락함, 이후 노론이 다시 집권하였다. 노론 이이명과 숙종 사이의 정 유독대(1717) 를 통해 경종의 대리청정이 시작됨. 9 신임사화 ( 申 壬 士 禍, 경종 1 년, 1721~1722) : 연잉군( 延 礽 君 : 후의 영조) 을 세제에 책봉하는 문 제와 대리청정 문제를 둘러싸고 소론이 노론을 제거하고 실권을 장악한 사건임. 알아두기 - 신임사화 ( 申 壬 士 禍 1721~1722) 숙종이 죽고(1720) 소론( 少 論 ) 의 지지를 받은 경종( 景 宗 ) 이 33 세의 나이로 즉위했는데, 후사가 없이 건강이 좋지 않았다. 당시의 집권 세력이었던 노론은 영의정 김창집( 金 昌 集 ), 좌의정 이건명 ( 李 健 命 ) 을 중심으로 경종의 동생 인 연잉군 ( 延 礽 君 ) 을 왕세제로 책봉하자고 주장했다. 소론측은 반대했지만, 경종은 대비 김씨의 동의를 얻어 이 를 실행했으며, 영조( 왕세제) 의 대리청정 ( 聽 政 ) 을 명했다. 그러나 소론이 극렬히 반대하여 대리청정의 명을 내렸 다 환수하기를 무려 여덟 번을 반복했다. 이 과정에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은 격화되었고, 결국 소론은 경종을 자 극하여 왕세제의 대리청정을 주장한 김창집 등의 노론 세력을 파직시켜 유배보내는데 성공하였다. 이를 통해 다 시 소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고, 그 후에도 소론 강경파가 중심이 되어 노론을 철저히 탄압하려 하였다. 1722년 3 월, 노론이 세자 시절의 경종을 시해하려 했다는 목호룡 ( 睦 虎 龍 ) 의 고변을 근거로 소론은 유배간 노론의 중심 인물들을 사사( 賜 死 ) 하였고, 수백 명의 노론을 제거했다. 10 정미환국 ( 丁 未 換 局, 영조 3 년, 1727) : 노론의 추대를 받았던 영조가 즉위하면서 탕평책의 일 환으로 노론과 소론을 함께 등용하여 당쟁을 막으려 했다. 신임사화의 진상을 규명하는 과정 에서 소론의 김일경과 목호룡이 처단되었고, 영의정 이광좌 등의 소론이 유배됨으로써 다시 노론이 정권을 잡게 되었다. 노론 정권이 왕의 탕평책을 잘 따르지 않고 소론을 공격하는 데 에만 주력하자 영조는 소론에 대한 보복을 고집하던 민진원과 정호 등의 노론을 파면하고, 이광좌, 조태억 등의 소론을 다시 정권에 참여시켰고, 이를 정미환국이라고 한다. 14
3) 붕당 정치 변질의 결과 1 일당 전제화 : 판과 견제를 통한 붕당 간의 균형이 무너지면서 특정 붕당의 독재가 시작되음 2 외척 세력, 종친의 비중 증대:환국을 왕이 직접 주도함에 따라 왕실 외척이나 종실 등 왕과 직결된 집단의 정치적 비중이 커지게 됨 3 비변사의 기능 강화:정치권력이 당상관을 중심으로 한 고위 관원에게 집중되면서, 그들의 합좌 4 기구인 비변사의 기능이 강화 3 사와 이조 전랑의 정치적 비중 감소:환국이 거듭되는 동안 3사와 이조 전랑은 자기 당의 이 익을 직접 대변하는 역할을 하여 정치적 비중이 감소함 5 양반층의 분화:환국 이후 일당 전제화가 진행되면서 소수의 권반과 다수의 몰락 양반으로 분화되었고 정쟁에서 패한 세력은 자신의 연고지를 중심으로 서원을 설립하고 지방 세력화 하였음 6 서원의 남설( 濫 設 ): 향반이 증가하는 과정에서 서원은 특정 가문의 선조를 받드는 사우( 祠 宇 ) 와 함께 도처에 세워지고 서원은 여론을 통한 붕당 정치의 중심지로서의 성격을 벗어나 붕 당의 이익이나 특정 가문의 우월성을 뒷받침해 주었음 이러한 현상은 특히 갑술환국(1694) 이후 몰락한 남인의 본거지인 경상도 지방에서 심하게 나타남 4) 붕당 정치 변질의 영향 붕당 정치가 변질되면서 공론( 公 論 ) 과 공리( 公 理 ) 보다 집권욕에만 집착하여 균형 관계가 깨져서 정쟁이 끊 이지 않고 사회가 분열되었으며, 왕권 자체도 불안하게 되었음 이에 강력한 왕권을 토대로 국왕이 정치의 중심에 서서 세력의 균형을 유지하려는 탕평론 ( 蕩 平 論 ) 이 대두됨 사료 - 붕당 정치의 폐해 신축ㆍ임인년 (1721~1722) 이래로 조정에서 노론ㆍ 소론ㆍ 남인의 삼색( 三 色 ) 이 날로 갈수록 더욱 사이가 나빠져 서로 역적이라는 이름으로 모함하니, 이 영향이 시골에까지 미치게 되어 하나의 싸움터를 만들었다. 그리하여 서로 혼인을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다른 당색( 黨 色 ) 끼리는 서로 용납하지 않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대체로 당색이 처음 일 어날 때에는 미미하였으나 자손들이 그 조상의 당론을 지켜 200년을 내려오면서 마침내 굳어져 깨뜨릴 수 없는 당이 되고 말았다. 근래에 와서는 사색( 四 色 ) 이 모두 진출하여 오직 벼슬만 할 뿐 예부터 저마다 지켜 온 의리는 쓸모 없는 물건처럼 되었고, 사문( 斯 文 : 유학) 을 위한 시비와 국가에 대한 충역( 忠 逆 ) 은 모두 과거의 일로 돌려 버리니 (5) 탕평론( 蕩 平 論 ) 의 대두 - 택리지 - 1) 탕평론의 의미 1 탕평의 의미:탕평 ( 蕩 平 ) 이란 5 경( 五 經 ) 가운데 하나인 서경( 書 經 ) 에 무편무당 왕도탕탕 무당무편 왕도평평 ( 無 偏 無 黨 王 道 蕩 蕩 無 黨 無 偏 王 道 平 平 ) 이란 말에서 비롯됨 임금의 정 치가 한 쪽을 편들지 않고 사심( 私 心 ) 이 없으며 당을 이루지도 않은 상태에서 정치적 균형 관계를 재정립해야 함을 의미 15
2 균형 방안 ᄀ 자율적 균형: 17세기 서인과 남인이 공존했던 것처럼 비판과 견제로서 각 붕당의 자 율적 균형이 유지되는 경우이다. ᄂ 타율적 균형:숙종 이후 붕당 정치가 변질되는 과정에서 자율적 견제와 균형이 무너지면서 왕권에 의해 타율적으로 균형이 유지되는 경우이다. 2) 숙종의 정치(1674 ~ 1720) 1 명목상의 탕평책:정치적 균형 관계를 재정립할 목적에서 처음으로 탕평론을 제시하였음. 숙 종의 탕평책은 상황에 따라 한 붕당을 일거에 내몰고 다른 붕당에게 정권을 모두 위임하는 편당적 조처로서 명목상의 탕평책에 지나지 않음. 2 노론의 일당 전제화:경신환국 (1680) ㆍ기사환국 (1689) ㆍ갑술환국 (1694) 등 왕이 주도하였고, 환국의 결과 노론에 의한 일당 전제화가 이루어지면서 소론이 정계에서 배제됨. 이후 경종 대의 신임사화 (1721~1722) 와 영조 대의 정미환국 (1727) 이 일어나는 계기가 됨. 3 노론과 소론의 대립 격화: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초기에는 반대파인 남인 처리 문제로 나타 났으나 남인이 정계에서 배제된 이후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주도권 장악 문제로 쟁점이 변 화되었음. 특히 숙종 말에서 경종에 이르는 동안에는 왕위 계승 문제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 론이 극단적으로 대립, 경종 대에는 왕세제 ( 영조) 가 왕을 대신하여 정무를 처리하는 문제( 세제 청정)로 노론과 소론의 대립이 심화되었음. 3) 영조의 정치(1724 ~ 1776) 1 집권 초기의 탕평책 ᄀ 정국 혼란 야기:영조는 즉위 직후 탕평교서 ( 蕩 平 敎 書 ) 를 발표하여 붕당의 균형 관계를 회복 하려 했으나 정미환국 등 단지 노론과 소론이 번갈아 등용되는 과정에서 오히려 정국을 더 욱 어지럽게 하였음. 사료 - 탕평교서 붕당의 폐해가 요즈음보다 심각한 적이 없었다. 처음에는 예절 문제로 분쟁이 일어나더니, 이제는 한쪽 이 다른 쪽을 역적으로 몰아붙이고 있다. ( 중략) 조정의 대신들이 서로 상대 당을 공격하면서 반 역인가 아닌가로 문제를 집중하니 모두가 동의할 수 있는 정책이 나오지 못하고, 정책의 옳고 그름을 판단하기 어렵다. 이제 유배된 사람들의 잘잘못을 다시 살피도록 하고, 관리의 임용을 담당하는 관리들은 탕평의 정신을 잘 받들어 직무를 수행하도록 하라. ᄂ 이인좌( 李 麟 佐 ) 의 난(1728) a 배경: 영조의 세제청정 ( 世 弟 聽 政 ) 에 반대했다가 정계에서 축출되었던 소론과 남인의 강경 파들은 정미환국 이후 소론 온건파가 집권한 이후에도 정치에 참여할 수 없었음. 이인좌 도 관찰사를 지낸 이운징( 李 雲 徵 ) 의 손자로 남인 명가 출신이었지만 중앙 관직에 진출할 수 없었음. 16
b 원인: 이에 소론 강경파와 탁남계 남인은 영조와 노론을 완전히 제거하는 것만이 자신들이 정계에 진출할 수 있는 기회라 보고, 이인좌, 정세윤을 중심으로 영조가 숙종의 친아들이 아니며, 경종을 독살했다는 등의 소문을 퍼뜨려 영조의 정통성을 부정하였고, 이러한 명분 을 바탕으로 밀풍군( 密 豊 君 ) 탄( 坦 ) 을 왕으로 추대하기로 하고, 왕권 교체를 기도하였음. c 경과 : 정미환국 이후 소론이 집권하게 되면서 조정 내부에서 영조에 대한 반대 세력의 명분이 점차 약화되었고, 새롭게 집권한 소론 온건파에 의해 정변 모의가 사전에 발각되 었음. 이인좌를 대원수로 일어난 반란군은 안성을 중심으로 진군하여 청주성을 함락(1728) 하고, 창고의 곡식을 백성에게 분급함으로써 민( 民 ) 의 참여를 유도하고자 하였음. d 결과: 영남에서는 이인좌의 동생 이웅보( 李 熊 輔 ) 가 상주에서 관군에게 패했고, 호남에서는 괘서를 살포하여 거병하는데 실패함으로써, 서울 진군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음. 결국 안 성ㆍ죽산 전투에서 관군에게 대파당하면서 이인좌의 난은 실패로 끝남. e 영향: 영조는 난을 진압한 후 노론ㆍ소론을 막론하고 당파심이 강한 자를 제거함으로써 탕평책을 펴나가려고 노력하였음. 그리하여 이인좌의 난 이후 탕평파의 활동이 더욱 활발 해졌으며 왕과 탕평파 대신에게 권력이 집중됨. 2 왕권 강화책 ᄀ 탕평파 육성:영조는 붕당을 없앨 것을 내세우며 새로운 세력 집단인 이른바 탕평파를 육 성하여 그들로 하여금 정국을 주도하게 하였음. 성균관 유생들에게는 당론( 黨 論 ) 을 금지하 도록 하였고, 영조 18 년(1742) 에는 원만해 편벽되지 않음은 곧 군자의 공정한 마음이고, 편벽해 원만하지 않음은 바로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 周 而 弗 比 乃 君 子 之 公 心 比 而 弗 周 寔 小 人 之 私 意 ) 라는 문구를 친히 지어 비( 碑 ) 에 새겨 성균관 반수교( 泮 水 橋 ) 위에 세워 탕 평비( 蕩 平 碑 ) 라 하였음. ᄂ 붕당의 기반 약화:붕당의 뿌리를 제거하기 위하여 공론의 주재자로 인식되던 산림( 山 林 ) 의 존재를 부정하였음, 붕당의 본거지인 서원을 대폭 정리하였음. ᄃ 이조 전랑의 권한 약화:붕당의 이익을 대변하던 이조 전랑이 자신의 후임자를 천거( 자대권, 自 代 權 또는 자천권, 自 薦 權 ) 하고, 3 사의 관원을 임명할 수 있게 해주었던 권한( 통청권, 通 淸 權 ) 을 폐지하였음 ( 영조 17 년, 1741). 이조 전랑의 후임자 천거권은 다시 부활되었다가 이 후 정조 대에 가서야 완전히 폐지됨. 같은 해 예문관 한림들이 모여 후임 사관을 선출하는 한림회천권 ( 翰 林 回 薦 權 ) 도 혁파되었고. 이러한 개혁은 선조 이래로 유지되어 오던 파당 정 치의 사실상 붕괴를 의미하였음. 알아두기 - 이조 전랑( 銓 郞 ) 의 권한 이조전랑이 갖고 있는 권한은 자대권( 自 代 權 ), 통청권( 通 淸 權 ), 낭천권 ( 郎 薦 權 ) 인데, 자대권 ( 自 代 權 ) 은 전랑의 임 기만료나 교체 시에 후임자를 직접 천거하는 권한이고, 통청권 ( 通 淸 權 ) 은 당하 청요직 ( 淸 要 職 ) 을 선발하는 권한 으로 사헌부, 사간원, 홍문관의 관직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말한다. 낭천권( 郎 薦 權 ) 은 전랑이 과거에 급제하 지 않은 현사( 賢 士 ) 를 추천하여 6 품 이하의 벼슬에 직통하게 하는 권한을 말한다. 이조 전랑의 권한 폐지 시점에 대해서는 견해 대립이 있는데, 자대권 ( 또는 자천권 ) 은 선조 대부터 이이에 의해 폐지 주장이 제기되었으나, 일시 적으로 폐지되었다가 다시 부활하여 그대로 유지되었으며, 숙종 11 년(1686) 기능이 크게 약화되었고, 영조 17년 (1741) 에 폐지되었다. 그러나 자천권은 정조 대 다시 부활되었다가 다시 완전 폐지된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할 듯하다. 통청권은 영조 17 년(1741) 에 폐지되었고, 낭천권은 선조 2 년(1569) 에 부여하였다가, 붕당 간의 갈등 과 정에서 선조 8 년(1575) 에 폐지되었다. 17
3 탕평책의 한계 ᄀ 탕평책의 실제:영조의 탕평책은 강력한 왕권으로 붕당 사이의 치열한 다툼을 일시적으로 억누른 것에 불과할 뿐 붕당 정치의 폐단을 근본적으로 해결한 것은 아니었음. ᄂ 노론의 우세:초기에는 탕평책을 통하여 노론과 소론이 공존하였으나 나주 괘서 사건(1755) 등 소론 강경파의 변란이 실패하면서 점차 노론이 우세하게 되었으며, 결정적으로 사도세자 의 죽음을 계기로 소론이 거의 축출되고 노론이 절대적으로 권력을 장악하게됨. ᄃ 벽파( 辟 派 ) 와 시파( 時 派 ) 의 대립: 사도세자 사건(1762, 임오화변 ) 을 둘러싸고 붕당은 다시 벽 파와 시파로 나누어짐. 시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을 인정하면서도 죽음 자체는 지나치다는 입장이고, 벽파는 사도세자의 죽음은 당연하고 영조의 처분은 정당하다고 하였음. 시파는 대개 노론의 전제화에 반대하던 남인ㆍ소론 ㆍ일부 노론 온건파였고, 벽파는 사도세자를 비 판하던 노론 강경파였음. 알아두기 - 나주 괘서 사건(1755, 영조 31 년) 소론인 윤지( 尹 志 ) 는 숙종 때 과거를 통해 관직에 올랐으나, 영조 즉위년에 노론의 공격에 휘말려 나주로 유배 되었다 (1724). 20 여 년의 귀양살이를 하는 동안 나주목사 이하징 ( 李 夏 徵 ) 등과 모의한 후, 민심을 동요시킬 목 적으로 나라를 비방하는 글을 대자보에 써서 나주 객사에 붙였다가 발각되어, 사형을 당했다 (1755). 그 후 윤지 의 일파인 심정연 ( 沈 鼎 衍 ) 이 또 영조와 조정을 비난하는 글을 써서 체포되었다. 이어 춘천에서 소론에 의한 역 모 사건이 발각되면서, 심정연은 주모자 윤혜( 尹 惠 ), 김도성 ( 金 道 成 ) 등과 함께 사형을 당했다. 결국 나주 괘서 사건을 계기로 소론은 거의 몰락하였으며, 노론이 권력을 확고하게 장악하게 되었다. 알아두기 - 사도세자 사건(1762, 임오화변) 장헌세자 ( 莊 獻 世 子, 후에 사도세자 ) 는 대리청정을 시작(1749) 하면서 노론의 일당 전제화를 비판하였고, 이에 노 론의 입장에서는 장헌세자가 왕위에 오를 경우 노론이 위태로울 수도 있다고 보아 그를 제거하려 하였다. 노론 의 지원을 받아 왕위에 오른 영조도 사실상 노론의 입장을 어느 정도는 따를 수밖에 없는 처지였다. 노론은 장 헌세자를 제거할 목적으로 나경언( 羅 景 彦 ) 으로 하여금 세자의 비행 10 조목을 상소(1762) 하도록 하였고, 이를 계 기로 영조는 세자를 뒤주 속에 가두어 죽였다. 이 사건을 둘러싸고 벽파와 시파의 분열이 있었으며, 이후 영조 는 곧 이를 후회하고 사도( 思 悼 ) 라는 시호를 내렸다. 4 재위 기간의 치적 ᄀ 제도 정비 a 균역법 시행(1750) :백골징포 ( 白 骨 徵 布 ) ㆍ황구첨정 ( 黃 口 簽 丁 ) ㆍ족징( 族 徵 ) ㆍ인징( 隣 徵 ) 등 모순을 개혁하기 위하여 양인의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이는 것을 골자로 한 균역 법을 실시함. b 청계천 정비: 조선 건국 초기부터 수해( 水 害 ) 가 극심했던 청계천의 준설 작업과 유로 변 경 사업을 통해 치수( 治 水 ) 사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음. c 군영 정비 : 훈련도감 ㆍ금위영 ㆍ어영청 세 군영이 도성을 나누어 방위하는 체제를 갖추었 음(수성윤음, 1751). d 형벌 제도 개선: 압슬형( 壓 膝 刑 ) 등 가혹한 형벌을 폐지(1725) 하고, 문초를 할 때 낙형( 烙 刑 ) 을 금지(1733) 했으며, 사형수에 대한 삼심제를 엄격하게 시행( 三 覆 制, 1729) 하였음. 18
알아두기 (1) 압슬형( 壓 膝 刑 ):무거운 목판이나 돌을 죄인의 무릎 위에 올려놓고 내리누르거나 정강이를 막대기로 찍 어 누르는 형벌이다. 심한 경우에는 죄인 아래 깨진 사기를 깔아놓아 더욱 가혹하게 시행하였다. 일반적 으로 중죄가 아닌 경우 함부로 압슬형을 쓰지 못하였다. (2) 낙형( 烙 刑 ):쇠를 뜨겁게 달구어 몸을 지지는 단근질을 말한다. 반역죄나 무고죄를 심문할 때 사용되었 다. 낙형은 원칙적으로 발바닥에만 시행하도록 되어 있었으나 사실상 거의 전 부위에 가해졌기 때문에 매우 가혹한 형벌이었다. e 민본주의의 구현: 죄인의 가족을 잡아 가두는 법을 폐지하고, 노비에 대한 상전의 사형 ( 私 刑 ) 을 철저하게 금했다(1761). 신문고를 다시 설치(1771) 하여 백성들의 억울한 일을 풀 어주려 하였음. f 속대전 편찬: 제도와 권력 구조의 개편 내용을 정리하여 법전 체계도 재정리하였음. g 노비 종모법 시행: 양인의 수를 확보하기 위하여 남자가 노비이더라도 여자가 양인일 경 우 낳은 자식은 양인으로 인정하는 노비종모법 ( 奴 婢 從 母 法 ) 이 확정(1731) 됨. ᄂ 문헌 편찬 사업: 속오례의 ( 續 五 禮 儀 ) ㆍ 속대전 ㆍ 무원록 ( 無 寃 錄 ) ㆍ 속병장도설 ( 續 兵 將 圖 說 ) ㆍ 해동악장 ( 海 東 樂 章 ) ㆍ 동국문헌비고 등이 편찬되어 흐트러진 문물이 재정비되었음. 알아두기 - 청계천( 淸 溪 川 ) 본래 이름은 개천( 開 川 ) 이며, 북악산 ㆍ인왕산 ㆍ남산 등으로 둘러싸인 서울 분지의 모든 물이 모여 중랑천과 합 쳐져 한강으로 빠져나간다. 이 하천은 자연하천이었기 때문에 조선 건국 초기부터 치수( 治 水 ) 가 어려워 잦은 물난리를 겪었으며, 태종 때 최초로 개거( 開 渠 ) 공사를 통해 정비 사업을 시작하였다. 18세기 영조 때에는 준설 작업 외에 하천 주변에 석축( 石 築 ) 을 쌓아 하천을 직선화하는 작업을 본격적으로 추진하였으며, 이후 19세기에 순조와 고종 때에도 하천 정비 사업은 계속되었다. 여기에 놓인 다리로는 수표교 ( 水 標 橋 ) ㆍ오간수교 ( 五 間 水 橋 ) ㆍ광교 ( 廣 橋 ) ㆍ영미교 ( 永 尾 橋 ) ㆍ관수교 ( 觀 水 橋 ) 등 24 개가 있었다. 일제강점기에 하천의 이름이 청계천 으 로 바뀌고, 대규모의 준설 공사가 진행되기도 하였다. 영조와 정조의 편찬사업 비교 영조 정조 속대전 조례를 모아 법전을 재정비 대전통편 국가 통치 규범을 재정비 속오례의 국조오례의를 보충하여 편찬 동문휘고 조선의 외교 문서를 정리하여 편찬 속병장도설 병장도설을 보충하여 편찬 추관지 형조의 역할과 기능을 재정리 무원록 조선시대 법의학을 정리 탁지지 징세와 관련된 호조의 기능 정리 해동악장 가사와 가곡을 정리하여 편찬 규장전운 불합리한 음운 체계를 정리하여 편찬 동국문헌비고 제도 문물을 정비한 한국학 백과사전 홍재전서 정조의 시문 교지 편지를 정리 알아두기 - 탕평 정치의 성격 탕평 정치는 왕이 중심이 되어서 붕당 정치에서 나타난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것이었다 그것은 붕당 사이의 대립을 조. 정하고 사회 경제적 변화 위에서 지배층에게 부분적인 양보를 요구하는 정책을 추진하는 등 개혁적인 측면이 있었다,. 그러나 탕평 정치는 근본적으로 왕권을 중심으로 권력의 집중과 정치 세력의 균형을 꾀하면서 기존 사회 체제를 재정 비하여 안정시키려는 것이었다 따라서 여러 정책들이 보수적인 성격을 띠고 있었고 정치 운영에서 왕의 개인적인 역., 량에 크게 의존하는 것이어서 탕평 정치가 구조적인 틀을 갖추어 안정적으로 유지되기는 어려웠다. 19
4) 정조의 정치(1776 ~ 1800) 1 적극적인 탕평책의 추진 ᄀ 탕평파 청산:영조 대에 지나치게 강화된 탕평파 대신과 척신ㆍ환관을 배제하고, 중심으로 왕권 강화를 위한 개혁을 단행함 홍국영을 ᄂ 남인의 중용:정조는 사도세자 사건에 적극적으로 개입한 벽파를 배제하고 그동안 권력에서 배제되었던 소론과 남인 계열 등의 시파를 중용하였음. ᄃ 능력 중시:당색에 구애되지 않고 인물 본위로 관리를 등용하였으며, 의리와 명분을 중시함. ᄅ 관료 정치의 강화:남인 채제공( 蔡 濟 恭 ) 을 정승으로 등용하여 노론과 균형을 이루게 했다. 정조의 탕평책은 결국 사림 세력을 중심으로 한 공론 중시의 정치가 아니고, 재상권의 강 화를 통한 관료 정치의 실현이라고 볼 수 있음. ᄆ 탕평책의 한계:붕당 자체의 해체나 붕당의 폐단을 본질적으로 해결하지는 못하였음. 2 왕권 강화책 ᄀ 장용영( 壯 勇 營 ) 설치:국왕의 친위대로써 장용영을 설치하고, 이를 점차 확대하여 모든 군문 의 기능을 병합ㆍ장악하려고 함. ᄂ 규장각( 奎 章 閣 ) 설치:기존의 여러 학문 연구소의 기능을 병합하여 일원화시키려는 의도에 서 설치되었으며, 이가환( 李 家 煥 ), 정약용( 丁 若 鏞 ) 등을 선발하여 후한 녹봉을 주고 연구에 몰두하게 하였다. 후에 이덕무 ( 李 德 懋 ), 유득공 ( 柳 得 恭 ), 박제가 ( 朴 齊 家 ), 서이수 ( 徐 理 修 ) 등 서 얼 출신으로 능력있는 자들을 규장각 검서관( 檢 書 官 ) 에 등용(1779) 하기도 하였고. 이렇게 등 용된 인물을 중심으로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의 권력을 뒷받침할 수 있는 강력한 정치 기구 로 육성하였고, 또한 당시 유행한 연암 박지원의 열하일기 에 등장하는 참신한 문장을 비 판하면서 정통적 고문을 모범으로 삼게 했다(문체반정 ). 규장각은 이러한 조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역할도 담당하였음. 알아두기 탕평책과 문체반정 문체반정은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학문 정책으로 추진되었으나, 탕평책의 맥락에서 본다면 사색당파를 서로 견제하도록 함으로써 탕평을 실현하려는 목적으로 볼 수 있다. 즉 노론을 견제하고 시파계 남인을 중심으로 한 정국 체제를 유지하고자 하는 목적에서 추진된 것이 문체반정이다. 노론의 상징적 영수인 우암 송시열을 송자 라고 하여 격상시키고, 자신들만의 틀을 구축하고자 했던 노론 의 문체가 정통적 문체와 거리가 있다 하여 비판함으로써, 결국 문체반정을 통해 노론의 입지를 약화시키고 자 했던 것이다. 규장각 원래 규장각은 역대 왕의 글과 책을 수집, 보관하기 위한 왕실 도서관의 기능을 갖는 기구로 설치되었으나, 정조는 여기에 문한( 文 翰 ) 기능을 부여하면서 과거 시험과 문신 교육을 주관하도록 업무를 부여하였다. 아울 러 국왕의 비서 기능과 기밀 관리 기능까지 담당하도록 하였다. 20
ᄃ 초계문신제( 抄 啓 文 臣 制 ) 시행:스스로 초월적 군주로 군림하면서 스승의 입장에서 신하들을 양성하고 재교육시키려 하였고, 특히 신진 인물이나 중ㆍ하급 관리 가운데 능력있는 자들을 재교육시켜 등용하였다. 통상 37 세 이하 과거급제자가 선발되었으며, 초계문신은 새로운 인 재양성을 위한 하나의 제도적 장치가 되었음. ᄅ 수원 화성 축조:수원 화산( 花 山, 팔달산 ) 아래로 사도세자의 묘를 옮기고, 현륭원 ( 顯 隆 園 ) 이 라 하였다. 정약용으로 하여금 화성을 세우도록 하여 정치적 ㆍ군사적 기능을 부여함과 동시에 상공인을 유치하여 자신의 정치적 이상을 실현하는 상징적 도시로 육성하고자 하였다. 특히 화성 행차시 일반 백성들과 접촉하는 기회를 확대하여 이들의 의견을 정치에 반영하였음. ᄆ 수령의 권한 확대:수령이 군현 단위의 향약을 직접 주관하게 하여 지방 사림의 영향력을 줄이고 수령의 권한을 강화하였고, 이로써 지방 사족의 향촌 지배력을 억제하고 백성에 대한 국가의 통치력을 강화함. ᄇ 대전통편( 大 典 通 編 ) 강화하고자 하였음. 편찬:법전 재정비를 통하여 국가의 집권 체제를 확립함으로써 왕권을 ᄉ 만천명월주인옹자서 ( 萬 川 明 月 主 人 翁 自 序 ): 정조 22 년(1798) 창덕궁 존덕정 현판에 친히 쓴 글로써 만천명월주인옹 은 정조 자신의 휘호( 徽 號 ) 이다. 이는 백성을 만천에 비유하고, 그 위에 하나씩 담겨 비치는 명월을 태극이요, 군주인 나 라고 하여 모든 백성들에게 직접 닿는 지고지순한 왕정이 자신이 추구하고 실현시킬 목표임을 밝히며 강력한 왕권을 천명한 것으로 볼 수 있음. 사료익히기 - 정조의 만천명월주인옹자서( 萬 川 明 月 主 人 翁 自 序 ) 中 달은 하나이며 물은 수만( 數 萬 ) 이다. 물이 달을 받으므로 앞 시내( 川 ) 에도 달이요, 뒷 시내에도 달이다. 달의 수 는 시내의 수와 같은데 시내가 만 개에 이르더라도 그렇다. 그 이유는 하늘에 있는 달이 본디 하나이기 때문이 다. 달은 본래 천연으로 밝은 빛을 발하며, 아래로 내려와서는 물을 만나 빛을 낸다. 물은 세상 사람이며, 비추 어 드러나는 것은 사람들의 상( 象 ) 이다. 달은 태극( 太 極 ) 이며, 태극은 바로 나다. - 홍재전서, 권 10 서인( 序 引 ) 3-3 경제의 발달 ᄀ 신해통공( 辛 亥 通 共, 1791) :영의정 채제공의 건의에 의해 신해통공을 실시함으로써 육의전을 제외한 시전상인의 금난전권 ( 禁 難 廛 權 ) 이 폐지되었고, 이로써 사상( 私 商 ) 의 자유로운 시장 활동 이 어느 정도 가능해짐. ᄂ 생산력의 증대 장려: 정조는 성리학자들이 전통적으로 주장하던 절약과 검소 등의 일시적 방책보다는 재화를 늘리기 위한 근본적 방법으로서 생산력 발달을 강조함. ᄃ 저수지의 축조: 정조는 제언절목을 반포(1778) 하여 농업 생산력 증대를 위한 저수지 축조를 장려하였다. 또한 수원 화성을 축조하는 과정에서 만석거와 축만제 등 저수지를 축조하였 고, 국영 시범농장으로써 대유둔( 북둔), 축만제둔 ( 서둔) 을 설치하였음 (1795). 4 문화의 발달:정조는 탕평의 강화를 위해 문풍( 文 風 ) 진작이라는 방법을 사용함 ᄀ 활자의 주조:임진자( 壬 辰 字, 1772) ㆍ정유자 ( 丁 酉 字, 1777) ㆍ한구자 ( 韓 構 字, 1782), 목활자 로서 생생자( 生 生 字, 1792), 구리로 만든 정리자( 整 理 字, 1795), 철로 만든 춘추관자( 春 秋 館 字, 1797) 등 도합 80 여만 자를 만들어 규장각에 비치해 서적 간행에 이용하도록 하였음. 21
ᄂ 활발한 편찬 사업:정조 대에는 서적 편찬 활동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규장각 소장 3만여 권의 책의 목록을 정리한 규장총목( 奎 章 總 目 ), 동국문헌비고 를 증보한 증보동국문헌비 고 를 비롯하여, 동문휘고 ( 同 文 彙 考 ) ㆍ 탁지지 ㆍ 추관지 ㆍ 규장전운 ㆍ 무예도보통지 ( 武 藝 圖 譜 通 志 ) 등을 간행하였다. 한편 정조 자신의 사적인 문집인 홍재전서( 弘 齋 全 書, 1799) 도 간행됨. ᄃ 천주교에 관대:정조 대에 서학( 천주교) 이 본격적으로 확산되어 사회 문제화 되었으나, 정 학( 正 學 ) 인 성리학이 제 기능을 다하면 서학은 저절로 없어질 것으로 보고 관대하게 받아들 였다. 그리하여 진산 사건( 珍 山 事 件 ) 이 일어났을 때에도 사건을 크게 확대하지 않았음. 알아두기 - 진산 사건( 珍 山 事 件 ) 1791 년 윤지충 ( 尹 持 忠 ) 과 권상연 ( 權 尙 然 ) 이 부모와 조상의 신주를 불사르고 천주교 식으로 제사를 지낸 사건 을 진산 사건이라고 한다. 정조는 이에 천주교 박해를 주장하는 다수의 의견을 물리치고, 두 사람만을 처형함 으로써 사건을 더 이상 확대하지 않았다. 알아두기 - 정조의 문물 제도 정비 정조는 민생의 안정과 문화 부흥에도 힘썼다. 정조는 서얼과 노비에 대한 차별을 완화하였으며, 재정 수입을 늘리고 상공업을 진흥시키기 위하여 자유로운 상업 행위를 허락하는 통공 정책을 시행하는 등 사회 전반에 걸쳐 제도와 그것의 운영을 개선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또한 전통 문화를 계승하면서 중국과 서양의 과학 기술을 받아들였다. 중국의 고금도서집성을 수입하여 학문 정치의 기초를 다졌고, 왕조의 통치 규범을 전반적으로 재정리하기 위하여 대전통편을 편찬하였다. 그 밖에 외교문서를 정리한 동문휘고, 국가 각 기관의 기능을 정리한 탁지지, 추관지 등과 병법서인 무예도보통지 등 을 편찬하여 문물과 제도를 재정비하였다. 붕당 정치의 변질과 세도 정치 숙종 영조 정조 편당적 조처 탕평책 대두 적극적 탕평책 노론중심 탕평교서 발표 이인좌의 난, 서원정리, 이조 전랑의 추천권, 3 사 관원의 선발관행 폐지, 국왕과 탕평파 대신에게 권력집중 균역법, 신문고, 속대전 벽파 배제, 시파 등용 왕권 강화책 : 장용영 설치, 규장각 설치, 초계 문신제 시행, 화성( 수원성 ) 축조, 대전통편 편찬, 수령의 권한 확대( 사족의 향촌 지배력 억제) 사도세자사건 소론 남인 벽파 시파 배제 우대 세도 정치 특정 가문에 의한 세력 독점 순조 헌종 철종 안동김씨 풍양조씨 안동김씨 정치 기강의 문란 민생 피폐 민란 발생 외척의 비변사 요직 독점 과거제 문란 매관 매직 수탈의 강화 삼정 문란 백성의 저항 민란 발생 22
4. 정치 질서의 파탄 (1) 세도 정치기 1) 세도 정치의 배경 정조 대의 왕권 강화는 19 세기 세도 정치의 빌미가 되었다. 모든 실권을 장악했던 정조의 갑작스런 죽음 이 다시금 권력의 균열을 가져왔고, 이 과정에서 몇몇 유력한 가문( 경화사족, 벌열) 의 인물들에게 모든 권 력이 집중되었다. 이 과정에서 중앙 관인과 재지사족 간의 연계가 단절되면서 전통적으로 유지되어 오던 사림의 공론 형성은 거의 불가능해졌음. 2) 세도 정치의 전개 1 의미:세도 정치란 붕당마저 무시한 채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비정상적인 정치 체제이다. 2 시기:순조에서 헌종ㆍ 철종을 거치는 3대 60여 년 간의 기간을 말한다. 3 전개 ᄀ 정순왕후의 수렴청정기:정조가 죽고, 11 세의 어린 임금 순조가 즉위하자, 영조의 계비 정 순왕후가 수렴청정 ( 垂 簾 聽 政 ) 을 하면서, 노론 벽파가 다시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하였다. 이 들은 신유박해(1801)를 일으켜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양성한 인물들을 대거 제거하였다. 또 한 장용영을 혁파하고 5군영을 부활시켜 이를 장악함. ᄂ 안동 김씨 세도 정치기:정순왕후가 죽자 김조순( 안동 김씨) 은 반남 박씨와 풍양 조씨 등 일부 유력 가문의 협력을 얻어 정국을 주도하였으며, 요직의 대부분을 차지하였다. ᄃ 효명세자의 대리청정기:순조와 순원왕후 ( 純 元 王 后 ) 김씨 사이에서 태어나 순조 12 년(1812) 에 세자에 책봉된 효명세자 ( 孝 明 世 子, 헌종이 즉위한 후 익종( 翼 宗 ) 으로 추존) 는 순조 27 년(1827) 대리청정을 통하여 우수한 인재를 등용하고 형옥( 刑 獄 ) 을 신중하게 하는 등 개 혁정치를 시도하였다. 그는 척신 세력을 제거하고 정권을 장악하려 했으나 4년만에 갑자기 죽음으로써 실패하고, 효명세자 사후 김조순 가문은 자신들을 중심으로 권력 집단을 재정립 하였음. ᄅ 헌종, 철종 대:효명세자와 조만영( 趙 萬 永 ) 의 딸 사이에서 헌종이 태어나면서, 헌종 때는 풍 양 조씨가 정국을 주도하였다. 그 후, 김조순의 일문인 김문근의 딸이 철종의 비( 妃 ) 가 되어 서는 다시 안동 김씨가 정권을 장악함. ᄆ 혁파:흥선대원군이 정국을 주도하면서 세도 정치가 혁파됨. (2) 1) 세도 정치기의 권력 구조 정치 참여의 폭 축소 1 정치 기반 축소:세도 정치에는 붕당은 물론 탕평파나 반탕평파 같은 정치 집단 사이의 대립 구도도 없어지고, 중앙 정치를 주도하는 정치 집단은 소수 가문의 출신으로 좁아지면서 그 기반이 축소됨. 23
2) 2 폐쇄적 정치 집단의 형성: 유력한 가문들은 왕실 외척이거나 산림 또는 관료 가문의 성격을 함께 띠고 있었다. 이들은 서로 연합하거나 대립하면서 인척 관계로 얽혀 하나의 정치 집 단을 이루어 권력과 이권을 독점함. 권력 구조의 변화 1 정2품 이상 고위직만이 정치적 기능 발휘: 종2품 이하의 관리들은 정치 기능은 거의 잃은 채 행정 실무만을 담당하게 되었음. 2 비변사의 권력 집중: 비변사의 도제조ㆍ 제조 등의 지위에는 대개 세도 가문 출신 인물들이 차 지하였고, 이들은 자신들의 권한을 사적인 이익을 추구하는 데 이용하기도 하였다. 따라서 왕권이 약화되었고, 정치 기구의 골격을 이루어 온 의정부와 6조 체제도 유명무실 하게 됨. (3) 1) 세도 정치의 폐단 국가 기강의 문란 2) 1 관리의 수탈:지방 사회에서 성장하던 상인ㆍ부농들을 통치 집단 속으로 포섭하지 못하고 그 들을 수탈의 대상으로 삼음. 2 매관매직( 賣 官 賣 職 ) 성행:세도 가문에 의하여 지방 수령의 자리를 상품화하여 팔기도 하였 다. 결국 관직 매매가 성행하면서 과거제가 문란해졌으며, 뇌물거래와 부정부패가 만연한 가운데 탐관오리의 횡포가 심화되었음. 3 삼정의 문란:향촌에서 사족을 배제한 채 수령이 절대적 권력을 바탕으로 향리와 향임을 이 용하여 조세를 징수하였으므로 이들을 견제할 만한 정치 세력이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자연 재해ㆍ기근 ㆍ질병이 널리 퍼지면서 인구가 급격히 감소하였으나, 삼정( 전정ㆍ 군정ㆍ 환곡) 문 란으로 인하여 농민의 조세 부담은 오히려 증가하면서, 민생은 파탄에 이르고 농촌 사회의 불만은 극한에 치달음. 사료 익이기 - 세도 정치의 폐단 가을에 한 늙은 아전이 대궐에서 돌아와 처와 자식에게 요즘 이름 있는 관리들이 모여서 하루 종일 이야 기를 하여도 나랏일에 대한 계획이나 백성을 위한 걱정은 전혀 하지 않는다. 오로지 각 고을에서 보내오는 뇌물의 많고 적음과 좋고 나쁨 만에 관심을 가지고, 어느 고을의 수령이 보낸 물건은 극히 정묘하고, 또 어 느 수령이 보낸 물건은 매우 넉넉하다고 말한다. 이름 있는 관리들이 말하는 것이 이러하다면, 지방에서 거 둬들이는 것이 반드시 늘어날 것이다. 나라가 어찌 망하지 않겠는가? 하고 한탄하면서 눈물을 흘려 마지 않았다. - 목민심서 - 백성의 저항 각지에서 백성들은 괘서ㆍ 벽서 등을 통해 탐관오리의 폭정을 폭로하거나 비판했으며, 적극적으로 거세나 민란을 통해 부조리한 사회 현실을 개혁하려고 하기도 하였다. 대표적인 민란으로 평안도에서 일어난 홍경 래의 난(1811)과 진주 민란을 시작으로 전국적으로 확산된 임술 농민 봉기(1862)가 있음. 알아두기 - 홍경래의 난(1811) 서토( 西 土 ) 에 있는 자 어찌 억울하고 원통하지 않을 자 있겠는가. 막상 급한 일을 당해서는 과거에는 반드시 서로 ( 西 路 ) 의 힘에 의지하고 서토의 문을 빌었으니 400 년 동안 서로의 사람이 조정을 버린 일이 있는가. 지금 나이 어린 임금이 위에 있어서 권세 있는 간신배가 날로 치성하니 흉년에 굶어 부황 든 무리가 길에 널려 늙은이와 어린이가 구렁에 빠져 산 사람이 거의 죽음에 다다르게 되었다. 24
(4) 세도 정치의 특징 1) 집권층의 폐쇄성 집권층이었던 세도 가문도 이미 사회 전반의 변화에 대해 위기의식을 갖기는 하였으나 이러한 사회적 모 순을 근본적으로 개혁할 만한 능력도, 의지도 갖고 있지 않았다. 그러므로 이들은 모순의 극복이나 개혁보 다는 새로운 사회 세력의 정치 참여를 철저하게 봉쇄하는 것으로 일관함. 2) 현실 안주적 성격 세도 정권은 19 세기의 상업적 발달과 서울의 도시적 번영에 만족하였으며, 그들에게는 어떠한 개혁도 중 요하지 않았다. 또한 수령과 탐관오리의 횡포와 수탈로 인하여 이때까지 비교적 순조로운 성장을 보였던 상품 화폐 경제도 그 성장이 둔화되었음. 3) 역사 발전의 역행 세도가들은 오랫동안 서울의 도시적 분위기에서 살면서 세련된 도시 귀족의 체질을 지녔고, 규장각에서 학문을 닦은 인물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의 학문은 권력을 잡은 후 차츰 고증학에 치우쳐 개혁 의지를 상 실하였고, 상대적으로 뒤떨어진 지방 사회의 어려운 사정을 이해하지 못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 세도 정 치기는 결과적으로 역사 발전을 저해하는 요인이 되었음. 5. 대외 관계의 변화 (1) 청과의 관계 1) 17세기 대청 관계 1 표면적 친선 사대 관계:병자호란 이후 조선은 청에 대하여 표면상으로는 친선 사대 관계를 맺고 교역을 활발하게 하였고, 청을 방문한 우리나라의 사신들은 귀국 후 기행문이나 보고 서를 통하여 변화하는 청의 사정을 전하였고, 천리경ㆍ 자명종ㆍ 화포ㆍ만국지도 ㆍ천주실의 등 여러 가지 새로운 문물을 소개하였음. 2 북벌 운동의 추진:서인을 중심으로 청을 정벌하자는 운동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북벌론은 실현 가능성이 적었기 때문에 단순히 정권을 유지하는 수단으로 이용된 측면이 있었지만, 그래도 양난 후 국방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함. 2) 8세기 대청 관계 1 청과의 활발한 교류:청은 중국 대륙을 장악한 후 국력이 크게 신장되었으며, 서양의 문물까 지 받아들여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추어 나감. 2 북학론의 대두: 우리나라에서도 청을 무조건 배척하지 말고 우리에게 이로운 것은 적극 적으로 배우자는 북학론을 제기하는 사람들이 나타남. 25
3) 간도 귀속 문제 1 배경:청은 중국 대륙을 완전히 장악한 이후에도 그들의 본거지였던 만주 지방에 관심을 기울여 이 지역을 성역화하였음. 2 국경 문제 제기: 우리나라 사람들의 일부가 두 만강을 건너 인삼을 캐거나 사냥을 하는 경우가 있었기 때문에 청과 국경 분쟁이 일어남. 대청 사행로 3 백두산 정계비 건립:국경을 명확하게 하자는 청 의 요구에 따라 조선과 청의 두 나라 대표가 모여 백두산 일대를 답사하고 국경을 확정하여 정계비를 세움(1712). ᄀ 내용:양국 간의 국경은 서쪽으로는 압록강, 동쪽 으로는 토문강을 경계로 한다( 西 爲 鴨 綠 東 爲 土 門 故 於 分 水 嶺 上 ) 고 하였음. 알아두기 - 백두산 정계비 오라총관 목극등이 국경을 조사하라는 교지를 받들어 이곳에 이르러 살펴보고 서쪽은 압록강으로 하고 동쪽 은 토문강으로 경계를 정하여 강이 갈라지는 고개 위에 비석을 세워 기록하노라. - 강희 51 년( 숙종 38 년, 1712) 5월 15일 - ᄂ 결과: 19 세기에 이르러 토문강( 土 門 江 ) 의 위치에 대한 해석상의 차이 때문에 두 나라 사이 에 간도 귀속 문제가 발생하였다. 청은 토문강을 두만강으로 해석하였고, 조선은 만주 송화 강의 지류라고 주장함. 4 관리 파견 ᄀ 서북 경략사 파견:간도 지역 관리를 위해 어윤중을 서북 경략사로 파견(1883) 하였음. ᄂ 토문 감계사 파견:청과의 국경을 확정하기 위한 회담에서 이중하를 토문 감계사로 임명 (1885) 하여, 간도가 우리 영토임을 강력히 주장(1887) 하였음. ᄃ 간도 관리사 파견: 조선 정부는 이범윤을 간도 시찰원으로 파견하고 (1902), 간도를 함경도의 영토로 편입(1902) 하였다. 이듬해 이범윤은 간도 관리사로 임명함으로써 이 지역을 직할지 로 관할하였음(1903). ᄅ 통감부 간도 파출소 설치:을사조약 이후 일제의 통감부는 간도를 조선의 영토로 관리하고 일 제는 용정촌에 통감부 간도 파출소 ( 출장소 ) 를 설치(1907) 하여 침략의 첨병으로 이용하려 함. 5 간도 협약(1909) : 우리가 불법적으로 외교권을 상실한 상태( 을사조약, 1905) 에서 청과 일본 사이의 간도 협약이 체결되면서 간도가 청의 영토로 귀속되고 말았다. 그 대가로 일본은 안봉선 철도 부설권과 푸순 탄광 채굴권을 차지하였음. 백두산 정계비 부근 지도 정계비에 서쪽은 압록강, 동쪽은 토문강을 국경으로 삼는다 라고 되어 있다. 그러나 토문강의 해석을 달리 하여 훗날 간도 귀속 문제의 쟁점이 되었다. 26
사료 익히기 - 간도협약 (1909. 9. 4) 제1 조 일ㆍ청 두 나라 정부는 토문강을 청국과 한국의 국경으로 하고, 강 원천지에 있는 정계비를 기점으로 하여 석을 수( 石 乙 水 ) 를 두 나라의 경계로 한다. 제3 조 청 정부는 이전과 같이 토문강 이북의 개간지에 한국 국민이 거주하는 것을 승인한다. 그 지역의 경계는 별도로 표시한다. 제5조 토문강 이북의 한국인과 청국인이 함께 살고 있는 구역 안에 있는 한국 국민 소유의 토지와 가옥은 청 정부가 청 국민의 재산과 똑같이 보호해야 한다. 제6조 청 정부는 앞으로 길장 철도( 吉 長 鐵 道 ) 를 연길 이남으로 연장하여 한국의 회령에서 한국의 철도와 연결할 수 있다. - 순종실록 - (2) 1) 일본과의 관계 국교 재개 1 과정 ᄀ 일본의 요청:도쿠가와 막부는 경제적 어려움을 해결하고, 선진 문물을 수용하기 위해 대마 도주를 통해 조선과 국교를 재개하자고 요청해 왔음.. ᄂ 조선의 대응:조선은 막부 사정을 알아보고, 전쟁 중 잡혀간 사람들을 데려오기 위해 사명 대사를 파견하여 일본과 강화한 후 조선인 포로 7,000 여 명을 데려옴.(1607). 2 기유약조(1609) 체결: 부산에 왜관을 다시 설치하고, 제한된 범위 내에서의 교섭을 허용하였 다. 통신사의 행로 2) 통신사 파견 1 배경:일본은 조선으로부터 선진 문화를 받아들 이고, 에도 막부의 쇼군( 將 軍 ) 이 바뀔 때마다 권 위를 국제적으로 인정받기 위해 조선에 사절의 파견을 요청함. 2 조선의 통신사 파견: 조선에서는 공식적으로 총 12 회에 걸쳐 통신사를 일본에 파견하였음. 3 통신사의 규모와 대우:많을 경우 되었고, 일본에서는 국빈으로 예우함. 450여 명이나 4 통신사의 역할:통신사는 막부 정권의 정통성을 강화해주는 외교 사절로서의 역할과 조선의 선진 문화를 일본에 전파하는 역할도 하였다. 이 과정에서 일본에서는 국학( 國 學 ) 운동이 일 어나기도 하였음. 알아두기 - 통신사 파견 일본 사람이 우리나라의 시문을 구하여 얻은 자는 귀천현우 ( 貴 賤 賢 愚 ) 를 막론하고 우러러보기를 신선처럼 하고 보배로 여기기를 주옥처럼 하지 않음이 없어, 비록 가마를 메고 말을 모는 천한 사람이라도 조선 사람의 해서( 楷 書 ) 나 초서( 草 書 ) 를 두어 글자만 얻으면 모두 손으로 이마를 받치고 감사의 성의를 표시한다. 27
3) 울릉도와 독도 1 배경:울릉도와 독도는 삼국 시대( 지증왕) 이래 우리의 영토였으나 일본 어민들이 자주 이곳 을 침범하여 충돌이 빚어지기도 함. 2 안용복의 활약:숙종 대 안용복은 울릉도에 출몰하는 일본 어민들을 쫓아내고, 일본에 건너 가 울릉도와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을 확인받고 돌아왔다 (1693). 그 후에도 안용복은 자신을 울릉우산양도감세관이라 자칭하고 재차 일 본에 건너가 울릉도ㆍ 독도가 조선의 영토임 을 확인하였음.(1696). 3 울릉도 경영:그 후에도 일본 어민들의 침범이 계속되자, 19세기 말에 조선 정부에서는 적극 적으로 울릉도 경영에 나서 주민의 이주를 장려( 개척령, 1882) 하였고, 울릉도에 군을 설 치(1900) 하여 관리를 파견하고 독도도 관할하 게함. 4 일제의 독도 강탈:일제는 독도가 프랑스 포 경선 콘스탄틴 (Constantine) 호에 의해 처음 발견(1849) 된 암초 리앙쿠르 락스(Liancourt Rocks) 로 간주하고 한일의정서(1904. 2. 23) 를 통하여 울릉도와 독도를 불법 점령하였고, 이후 러ㆍ일 전쟁 중 시마네현 고시 제40 호(1905. 2. 22) 를 통하여 자기들의 영토로 불법 편입시켰다. 일제는 이러한 사실을 을사조약 이후인 1906년 4월에야 비로소 울릉 군수 심흥택을 통해 대한제국 정부에 고지하였음. 사료 익히기 - 독도는 우리 땅 1. 신라 지증왕 13 년(512) 에 이사부가 울릉도 ( 우산국 ) 복속 - 삼국사기, 신라본기, 이사부 열전 - 2. 조선 초기에 최초로 무릉도 ( 울릉도) 와 우산도( 독도) 를 별도로 기록하였다 (1454). - 독도에 관한 최초 기록 세종실록지리지, 강원도 울진현 조( 條 ) - 3. 우산도 ( 독도) 와 무릉도( 울릉도 ) 를 강원도 울진현에 속하는 것으로 명기(1531) - 동국여지승람 - 4. 일본 은주 지방의 사이토 호센( 齋 藤 豊 仙 ) 이라는 관리가 울릉도와 독도는 고려 영토이고 일본의 경계는 은기도( 隱 岐 島 ) 까지임을 명기(1667) - 은주시청합기 - 5. 일본 외무성이 1930년대 편찬한 일본외교문서 제3 권에 수록되어 있는 조선국교제시말내탐서 ( 朝 鮮 國 交 際 始 末 內 探 書 ) 는 메이지 유신 직후 1870 년에 쓰였는데, 여기에는 당시 일본 최고 기관인 태정관( 太 政 官 ) 과 외무대신이 독도, 울릉도를 조선 영토로 인정 - 태정관문서 - 6. 세계 제2 차 대전 이후 연합국에서도 독도(Liancourt Rocks) 를 본래 한국 영토로 확인해 일본 영토에서 제 외하였다(1946. 1). - 연합국 최고 사령부 지령(SCAPIN) 제667 호, 제1033 호 - 알아두기 - 태정관 문서 조선 지도의 울릉도와 독도 부분 (18 세기, 서울대학교 규장각 소장) 큰 섬이 울릉도이고 오른쪽 우산( 于 山 ) 이라 쓰인 섬이 독도이다. 일본 국립 공문서관에 소장되어있는 태정관( 太 政 官 ) 문서에 의하면 書 面 竹 島 外 一 島 之 義 本 邦 關 係 無 之 義 卜 可 相 心 得 事 ( 울릉도, 竹 島 ) 와 그 외 1 개 섬인 독도( 송도, 松 島 ) 는 일본과 관계없다는 것 등 심득( 心 得 ) 할 것) 이 라는 부분이 나온다. 1876년 조선에 대한 침략을 앞둔 일제 내무성은 일본 자체에 대한 근대적 지도와 지적도 를 작성하는 과정에서 각 지방 현에 자기 현의 지도와 지적도를 작성하여 올리라고 훈령을 내렸는데, 이 과정 에서 시마네현 ( 島 根 縣 ) 이 동해의 울릉도( 죽도) 와 독도( 송도) 를 포함시켜 작성해야 하는가를 자문하자, 일본 내 무성이 약 5개월에 걸친 심층 조사 끝에 1877 년 공식적으로 내린 훈령이 위에 제시된 내용이다. 2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