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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성박씨 우당공파 밀성박씨우당공파

소개글 밀성대군 후손관련자료

목차 1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8 2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10 3 박건갑( 朴 乾 甲 ) -국조방목 12 4 박천우( 朴 天 祐 ) -국조방목 13 5 박난( 朴 鸞 ) -국조방목 14 6 박훤( 朴 萱 ) -국조방목 15 7 채지당 박구원 국조방목 16 8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17 9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송계시) 18 10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19 11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0 12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胄 27 13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近 仁 28 14 채지당 박구원 1442년(세종 24)~1506년(중종 1) 29 15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0 16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35 17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박융 37 18 심암유고(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38 19 목은시고( 牧 隱 詩 藁 ) 제31권 시( 詩 )서울에 돌아온 밀성(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朴 先 生 )을 방문하다. 40 20 순조 16년 병자(1816, 가경 21) 7월 2일(기유) 부사 박경신( 朴 慶 新 ), 고 현감 박경전(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朴 慶 胤 41 ) 21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박경인(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42 하다 22 선조 27년 갑오(1594, 만력 22) 3월 25일(계묘) 박경신 23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9월 12일(계해) 삼우정 박경신 24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4 45 46 50 25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12월 7일(임인) 의금부에서 형옥의 일로 전옥서 등의 관리에 대해 벌할 것을 청하다

26 세조 2년 병자(1456, 경태 7) 5월 21일(기축) 순라를 범한 중 지경이 태조의 원종공신 탁시준의 손자이므로 면죄하다53 27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 박홍신( 朴 弘 信 ) 54 28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왜( 倭 )를 치던 병역( 兵 役 ) 박홍신 55 29 성호사설 제19권경사문( 經 史 門 )정 대마도( 征 對 馬 島 ) 박홍신 57 30 세종 1년 기해(1419, 영락 17) 6월 29일(임인) 편장 박홍신( 朴 弘 信 ) 59 31 세종 5년 계묘(1423, 영락 21) 8월 26일(갑술) 박언충 현귀명 심도원에게 관직을 제수하다 60 32 국당유고( 菊 堂 遺 稿 ) 박흥생( 朴 興 生 ) 63 33 익재난고 제4권 시( 詩 ) 안렴사( 按 廉 使 ) 박대양( 朴 大 陽 )을 전송하다. 무술년 67 34 익재난고 제2권 오두백( 烏 頭 白 )으로 박인간( 朴 仁 幹 )을 전송하다 68 35 고려사절요 제24권충숙왕( 忠 肅 王 )을묘 2년, 원 연우 2년 박인간( 朴 仁 幹 ) 69 3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6권 밀양도호부( 密 陽 都 護 府 ) 박의신 70 37 동문선 제35권표전( 表 箋 )광주에서 사례하여 올리는 표[ 廣 州 謝 上 表 ] 의신 71 38 고려사절요 제10권 인종 공효대왕 2( 仁 宗 恭 孝 大 王 二 ) 의신( 義 臣 ) 74 39 조선왕조실록-박강생 76 40 騎 牛 先 生 文 集 卷 之 二 不 朝 峴 言 志 錄 박침 79 41 貞 齋 先 生 逸 稿 卷 之 三 杜 門 洞 言 志 錄 박침 80 42 고려사절요 제30권신우 1( 辛 禑 一 )판사 박사경( 朴 思 敬 ) 81 43 조선왕조 실록 태조 총서편 박춘 82 44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83 45 고려사절요 제27권공민왕 2( 恭 愍 王 二 ) 박춘 84 46 고려사절요 제28권 공민왕-박춘 85 47 고려사절요 제28권-박춘 87 48 고려사절요 제28권공민왕 3( 恭 愍 王 三 )병오 15년(1366), 원 지정 26년 88 49 동사강목-박춘 89 50 동사강목- 박춘 91

51 동사강목 박춘 93 52 동사강목 을사년 공민왕 14년(원 순제 지정 25, 1365) 94 53 동사강목 제15상갑진 고려 공민왕 13년부터, 갑인 공민왕 23년까지 11년간 朴 椿 95 54 一 蠹 先 生 續 集 卷 之 四 師 友 門 人 錄 四 美 亭 박형달( 朴 亨 達 ) 96 55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3월 1일(병오) 야광사를 허물고 관사를 수즙한 죄로 죽주 감무 박부에게 베 5백 필을 징99 수하다 100 56 태조 2년 계유(1393, 홍무 26) 5월 7일(신해) 박영충의 농장에 은닉한 양민을 충군시킨 죽주 감무 박부가 원한을 사 101 귀 양가다 57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제33권 화동옥삼편( 華 東 玉 編 ) 고려 말의 팔은( 八 隱 ) 58 동문선 제16권차 연상루 운( 次 延 爽 樓 韻 )박진록( 朴 晉 祿 ) 59 목은문고( 牧 隱 文 藁 ) 제20권 박씨전( 朴 氏 傳 ) 박윤문( 朴 允 文 )) 60 동문선 제85권 기 박지평시서( 寄 朴 持 平 詩 序 ) 박윤문( 朴 允 文 ) 61 동문선 제16권단양 취운루( 丹 陽 翠 雲 樓 ) 박윤문( 朴 允 文 ) 62 고려사절요 제25권 충혜왕( 忠 惠 王 )갑신 5년(1344), 원 지정 4년 박윤문( 朴 允 文 ) 63 태조 총서 우왕과 창왕을 폐위하고 공양왕을 세우다 64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연( 朴 堧 ) 65 임하필기( 林 下 筆 記 ) 제20권 문헌지장편( 文 獻 指 掌 編 )박연( 朴 堧 )의 상소 66 용재총화 제8권 박연 67 분류 오주연문장전산고 경사편 1 - 경전류 1(속) 악( 樂 ) 속악( 俗 樂 )에 대한 변증설(고전간행회본 권 19) 68 연려실기술 별집 제12권 정교전교( 政 敎 典 故 )여악( 女 樂 ) 69 연려실기술 제3권 세종조 고사본말( 世 宗 祖 故 事 本 末 ) 세종조의 명신( 名 臣 ) 70 성호사설 제5권만물문( 萬 物 門 ) 박연 악률( 朴 堧 樂 律 ) 71 사가시집 제3권세종대왕( 世 宗 大 王 )의 만장( 挽 章 ) 6수 박연 72 동문선 제10권쌍운 연화회문체 유거 작( 雙 韻 蓮 花 回 文 體 幽 居 作 ) 73 국조보감 제11권 세조조 2( 世 祖 朝 二 ) 5년(경진, 1460) 박연 102 103 105 106 107 108 109 110 111 112 116 118 119 121 124 125 133 134 74 국조보감 제9권 단종조( 端 宗 朝 ) 즉위년(임신, 1452) 박연

76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136 77 壄 隱 先 生 逸 稿 卷 之 二 137 78 - 靖 國 君 派 祖 (정국군파조) 138 79 乙 材 - 三 司 左 尹 公 派 祖 (삼사좌윤공파조) 139 80 天 翊 - 判 圖 判 閣 公 派 祖 (판도판각공파조) 140 81 元 光 - 令 同 正 公 派 祖 (영동정공파조) 141 82 良 彦 - 密 直 副 使 公 派 祖 (밀직부사공파조) 142 83 彦 仁 - 左 僕 射 公 派 祖 (좌복야공파조) 143 84 彦 祥 - 都 平 議 事 公 派 祖 (도평의사공파조) 144 85 鉉 - 糾 正 公 派 祖 (규정공파조) 145 86 陟 - 忠 憲 公 派 祖 (충헌공파조) 146 87 諱 元 - 四 門 進 士 公 派 祖 (사문진사공파조) 147 88 中 美 (중미) - 密 直 府 院 君 派 祖 (밀직부원군파조) 148 89 언부( 彦 孚 )태사공파( 太 師 公 派 ) 또는 문하시중공파( 門 下 侍 中 公 派 ) 149 90 12.임선미 [ 林 先 味, 1362~1394] 150 91 11.우현보( 禹 玄 寶, 1333~1400) 151 92 10.변안렬( 邊 安 烈 ) 1334(충숙왕 복위 3)~1390(공양왕 2) 152 93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영( 朴 英 ) 153 94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훈( 朴 薰 ) 155 95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위( 朴 ) 156 96 해동잡록 1 본조( 本 朝 )-박의중( 朴 宜 中 ) 157 97 請 額 上 言 [ 朴 時 增 ] 159 98 書 遺 事 後 [ 金 大 有 ] 160 99 遺 墟 神 道 碑 續 識 [ 皇 甫 仁 ] 161 100 立 碑 告 由 文 [ 卞 春 亭 ] 162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2009.05.11 00:47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삼가 유생 박건갑 이 상소하여 영의정 이덕형이 조식과 정인홍을 무함하였음을 논하다. 삼가( 三 嘉 ) 유생 박건갑( 朴 乾 甲 )이 상소하였는데 그 대개는 사론의 시비를 바로잡으라고 청하는 일이었다. 건갑 은 정인홍( 鄭 仁 弘 )에게 당부( 黨 附 )하여 양현( 兩 賢 )을 무함하였는데 그 말이 극히 흉악하고 패려하였다. 그 상소에 이 르기를, 삼가 생각건대, 사정( 邪 正 )이 어느 시대인들 없겠습니까마는, 신하로서 임금을 속이는 일이 불행히도 지금 있습니다. 신 이 삼가 영의정 이덕형의 차자를 보니, 그 가운데에 조식( 曺 植 )이 방울을 차고서 자성( 自 省 )했던 일을, 학문의 정도가 달 랐기 때문이라고 하면서 마치 이단으로 지목을 하는 듯한 면이 있었으니, 신은 통분스러움을 누를 길이 없습니다. 아, 조 식은 정금 미옥( 精 金 美 玉 )과 같은 자질에다 학문을 독실하게 하는 노력까지 보태어, 경( 敬 )과 의( 義 ) 두 글자를 일생동안 실천해 나가는 바탕으로 삼았고, 항시 맑게 깨어 있는 일념이, 잠시나마 태만해진 적이 없었으니, 그가 항시 금방울을 차 고 지낸 것 또한 자성을 하는 한 가지 일인 것입니다. 옛날의 송유( 宋 儒 ) 이통( 李 ) 또한 학문의 수준이 다르게 됨을 면 하지 못한다는 말입니까. 정인홍이 문학의 해로움이 홍수보다도 더 심하다. 고 한 것으로 말하면, 학자들이 완물 상지( 玩 物 喪 志 )하는 폐단이 있 게 될까 염려하는 말입니다. 그런데 이덕형은 이를 육자( 陸 子 )의 도( 道 )와 석씨( 釋 氏 )의 교( 敎 )에다 비하였습니다. 아, 성현( 聖 賢 )이 학문하는 방법은 오로지 언어와 문자 사이에만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므로 정자( 程 子 )께서, 글을 지 으면 말이 많아지고 말이 많게 되면 도에 해롭다고 경계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정자 역시 육자나 석씨로 낙착됨을 면하지 못한다는 것입니까. 김우옹( 金 宇 )과 박성( 朴 惺 )이 모두 정인홍과 논변이 같지 않은 것을 이유로 서로 절교하였 다. 고 한 것으로 말하면, 더욱 터무니없는 것입니다. 이 두 사람이 인홍에 대해서 우러러 흠모하기를 시종일관 변하지 않은 것은, 사람들이 다함께 알고 있는 일입니다. 어찌 서로 절교했을 리가 있겠습니까. 아, 지금 올바른 사람을 무함하여 헐뜯는 자들이 많습니다만, 저 어줍잖은 꼴로 덩달아 따라붙는 무리들이야 진실로 끝까 지 따져볼 만한 가치도 없는 자들이지만, 이덕형은 벼슬이 정승 자리에 있으면서 함부로 대현( 大 賢 )을 의논하여 온 나라 를 충동질함으로써 한쪽으로 휩쓸리게 하였던 것입니다. 모르겠습니다만, 덕형이 어떤 소견이기에 감히 순우( 淳 于 )가 맹 자( 孟 子 )에 대해 의논하다가 제발로 임금을 기만하고 올바른 자를 해치는 짓에 빠졌던 길을 본받는 것입니까. 신은 조식이 살던 고을에 태어나 인홍의 문하에 종유하였습니다. 비록 그 찌꺼기나마 제대로 배워 얻은 것은 없지만, 일 찍이 그 도덕이 순정( 醇 正 )한 점을 흠앙하였는데, 지금 횡의( 橫 議 )를 들으니 성미 급한 혀가 저절로 씰룩이어, 감히 몇 자 되지 않는 소를 가지고서 기만, 무함하는 죄를 변별합니다.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살펴 주소서. 하니 답하기를, 소의 내용은 잘 알았다. 인심과 사습이 날로 투박해져 오직 군부를 협박하여 제압하는 것만을 고상한 일로 여기면서 그 칠 줄을 모르니, 이는 모두가 못난 내가 외람스레 자리를 차지하여 교화가 밝혀지지 않은 탓이라고 하겠다. 비록 나라 전 체가 따지고 나서더라도 시비가 정해질 날은 당연히 있는 법이니, 그대는 이제 물러가서 부지런히 학업을 닦도록 하라.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7

하였다. 원전 31 집 633 면 분류 *정론-정론( 政 論 ) / *역사-고사( 故 事 ) / *사상-유학( 儒 學 ) / *사법( 司 法 ) [주D-001]조식(( 曺 植 )이) 방울을 차고서 자성( ( 自 省 )했던) 일 : 조식이 생전에 늘 금방울[ 金 鈴 ] 하나를 몸에 차고 지내면서 이를 성성자( 惺 惺 子 ) 라 이름을 지었고, 죽을 무렵에 그의 문인인 김우옹( 金 宇 다고 한다. 우산문집( 愚 山 文 集 ) 권2. )에게 주었 [주D-002]이통(( 李 ) : 송나라 때 남검주( 南 劍 州 ) 태생으로, 자는 원중( 愿 中 )이며 통칭 연평 선생( 延 平 先 生 ) 으로 불린다. 주자가 한때 그에게 수학한 바 있다. 그는 후학을 지도할 때, 강론( 講 論 )보다는 말없이 앉아 스 스로 터득하는 것을 중시하였다. 송사( 宋 史 ) 권428 송원학안( 宋 元 學 案 ) 권39. [주D-003]순우(( 淳 于 )가) 맹자( ( 孟 子 )에) 대해 의논하다가 제발로 임금을 기만하고 올바른 자를 해치는 짓 에 빠졌던 길 : 순우는 전국 시대 제( 齊 )나라의 변사( 辯 士 )인 순우곤( 淳 于 명예와 사공( 事 功 )을 주제로 문답을 나누었다. 맹자( 孟 子 ) 고자 하( 告 子 下 ). )을 말한다. 그가 맹자와 더불어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6월 3일(신미) 8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2009.05.11 00:39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대간은 임금을 협박하여 사심을 이루려는 자들이라고 아뢰다. 합천( 陜 川 ) 사람 박건갑( 朴 乾 甲 )이 상소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구차하게 동조할 수 없는 것이 인심이고, 으름장을 놓아 밀어붙일 수 없는 것이 공론입니다. 으름장을 놓아 밀어붙 이는 날이면 그것은 당장 공론이 아닌 것입니다. 삼가 보건대, 이무( 李 ) 등이 전현( 前 賢 )을 끼고 태학을 가차하여 처음에는 재신의 반열에 있는 사람에게 삭록( 削 錄 )을 하였고 재차 공관( 空 館 )이라는 행위를 군부에게 시행하면서 기세를 한껏 부리니, 나라 전체가 그 에 말려들고 있습니다. 신이 청컨대, 천만 사람이 앞을 막고 있어도 내 생각이 옳으면 앞으로 나아가겠노라는 의리로써, 전하를 위해 몇 말씀 올리고자 합니다. 아, 풍성( 風 聲 ) 기습( 氣 習 )이 세상을 통틀어 다들 똑같은 상황일 때에도 혼자서 특립( 特 立 )하여 자기의 소신대로 행동하며 의혹되지 아니하는 사람이 있으면, 반드시 가차없이 공박을 하려고 하는 것은 무슨 까닭입니까. 정원은 아직 아뢰지도 않은 봉서( 封 書 )를 베껴 서 사당( 私 黨 )에게 퍼뜨리고, 태학은 아직 내리지도 않은 차자를 팔로( 八 路 )에 제멋대로 돌리면서 변무해야 될 일이다. 라고 소리 치는데, 신은 무함했다는 것이 무슨 무함을 말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노( 老 ) 장( 莊 )의 사상이 학문의 병통이 되었다. 는 말이 그의 문집( 文 集 )에 분명하게 실려 있고, 왕자( 王 子 )를 죽였으면 합니 다. 는 말이 선조 때의 성교( 聖 敎 )에 있습니다. 그런데 소에 동참을 하라고 남을 협박하여 임금에게 사람수가 많음을 보이니, 팔도 의 먼 지방과 외진 시골의 만학( 晩 學 ) 중에는 애당초 그 현자의 이름이 무엇이고 그 소가 무슨 일을 논하는 것인지도 모른 채, 협박 을 받고 억지로 따른 자들이 있었던 것이 사실입니다. 강제로 인원수를 정하고 그 날짜를 못박으면서 아무 주( 州 )에는 10명, 아무 부 ( 府 )에는 10명, 모군( 某 郡 ) 모현( 某 縣 )에는 5, 6명 하는 식이었고, 삭적하겠다고 위협을 하고 정거시킨다고 겁을 주면서 마치 군정 ( 軍 丁 )을 조발( 調 發 )하여 어서 길을 떠나도록 독촉을 해대듯이 강제적이었습니다. 선현을 존숭하는 일이 과연 이와 같은 것이겠습니 까. 정원이 선구( 先 驅 )가 되고 팔로가 외원( 外 援 )이 되어 오늘 소를 올리고 내일도 소를 올리고 다시 그 다음날도 소를 올렸으며, 청금 록 에서도 이름을 지워버렸고 태학관( 太 學 館 )도 벌써 비웠습니다. 그리하여 한 시대의 입을 틀어막고 군부를 협박하면서 기어코 자 기들의 뜻을 관철시키고야 말겠다고 벼르니, 이야말로 이른바 시샘하는 여편네를 다스리지 않고 버릇없는 아이를 혼내주지 않았다가 결국에는 지아비에게 삿대질을 하고 아비한테도 욕을 하기에 이른 셈입니다. 선비들의 풍습이 이렇게 되어버렸으니, 공론이 어디로 부터 나오겠습니까. 묘당과 대각까지 덩달아서 이것이 사기이고 이것이 공론이다. 고 편을 들고 나서니, 아, 어떻게 한 시대의 입 을 틀어막고 군부를 협박하고서도 사기가 될 수 있겠으며, 공론이 될 수 있겠습니까. 신은 감히 모르겠습니다만, 태학생들이 거주하는 데가 어떤 자리입니까. 선현을 존숭하고 역적을 성토하는 두 가지를 그들이 배우는 게 아니겠습니까. 그런데 지난 무신년에 나라 안에 적( 賊 )이 있었는데 토역( 討 逆 )하자는 정론( 正 論 )을 태학에서는 못들은 체하였으니, 이들이 어째서 전일의 토적( 討 賊 )하는 일에 대해서는 수수방관하고, 오늘날 존현( 尊 賢 )하는 일에는 장황하게 나서는 것입니까. 만약 역적은 꼭 토죄하지 않아도 되고 존현은 반드시 이와 같이 해야 된다고 말한다면, 이는 단지 자기네가 존경하는 것만을 존숭하여 일 개 사심을 성취하는 것일 따름입니다. 아, 사기는 강약에 흔들리지 아니하고 정론은 중과( 衆 寡 )에 달려 있지 않는 법이니, 삼가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구차히 동조하는 것을 인심( 人 心 )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협박하는 것을 공론으로 여기지 마소서. 하였다. 건갑( 乾 甲 )은 인홍( 仁 弘 )의 향인( 鄕 人 )으로, 평소의 행실이 무뢰하여 형효갑( 邢 孝 甲 ) 유경갑( 劉 慶 甲 )과 더불어 대북 3갑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9

( 大 北 三 甲 ) 이라고 불리었다. 이 세 사람이 연이어 소장을 올려 시사( 時 事 )를 논했는데, 심지어 모후( 母 后 )를 폐하도록 청하는 등, 글의 내용이 참혹하고 잔인하기 짝이 없었다. 반정( 反 正 ) 후에 모두 유배를 당해 죽었다. 이 소는 김양선( 金 揚 善 )이 지은 것이었다. 원전 31 집 628 면 분류 *정론-정론( 政 論 ) / *교육-인문교육( 人 文 敎 育 ) / *사상-유학( 儒 學 ) / *사법-탄핵( 彈 劾 ) [주D-001] 왕자(( 王 子 )를) 죽였으면 합니다.. 는 말 : 을사 사화 때 여러 신하들이 봉성 대군( 鳳 城 大 君 )을 죽이자고 정 청( 庭 請 )하였는데, 이때 이황( 李 滉 )이 참가하였다. 연려실기술( 燃 藜 室 記 述 ) 권19. [주D-002]무신년에 나라 안에 적( ( 賊 )이) 있었는데 : 광해군이 즉위한 해에 있었던 임해군의 역모 사건을 가리킨다. 연려실기술( 燃 藜 室 記 述 ) 권19. 광해군 3년 신해(1611, 만력 39) 4월 30일(기해) 합천의 박건갑이 유생과 10

박건갑( ( 朴 乾 甲 ) -국조방목 2009.05.02 20:35 박건갑( 朴 乾 甲 ) [생원진사시] 선조( ( 宣 祖 ) 38년 (1605) 을사( ( 乙 巳 ) 증광시( ( 增 廣 試 ) 생원( ( 生 員 ) 3등( 3 ( 三 等 ) 20위 [인적사항] G002+AKS-KHF_13BC15AC74AC11B1558X0 자 응성( 應 成 ) 생년 무오( 戊 午 )/1558/ 합격연령 48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삼가( 三 嘉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사돈( 朴 士 敦 ) 관직 : 학생( 學 生 ) [부모구존] 자시하( 慈 侍 下 ) [제] 박곤갑( 朴 坤 甲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건갑( 朴 乾 甲 ) -국조방목 11

박천우( ( 朴 天 祐 ) -국조방목 2009.05.02 20:24 박천우( 朴 天 祐 ) [생원진사시] 선조( ( 宣 祖 ) 9년 9 (1576) 병자( ( 丙 子 ) 식년시( ( 式 年 試 ) 진사( ( 進 士 ) 3등( 3 ( 三 等 ) 11위 [인적사항] G002+AKS-KHF_13BC15CC9CC6B0B1546X0 자 자수( 子 受 ) 생년 병오( 丙 午 )/1546/ 합격연령 31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삼가( 三 嘉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인수( 朴 仁 粹 ) 관직 : 전부장( 前 部 將 ) 관직 : 현신교위( 顯 信 校 尉 ) [부모구존] 구경하( 具 慶 下 ) [형] 박천정( 朴 天 禎 ) [제] 박천우( 朴 天 祐 ) [제] 박천기( 朴 天 祺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천우( 朴 天 祐 ) -국조방목 12

박난( ( 朴 鸞 ) -국조방목 2009.05.02 19:58 박난( 朴 鸞 ) [생원진사시] 중종( ( 中 宗 ) 29년 (1534) 갑오( ( 甲 午 ) 식년시( ( 式 年 試 ) 진사( ( 進 士 ) 2등( 2 ( 二 等 ) 12위 [인적사항] G002+AKS-KHF_12BC15B780FFFFU9999X2 자 운경( 雲 卿 )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청도( 淸 道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맹문( 朴 孟 文 ) 관직 : 순천훈도( 順 川 訓 導 ) 관직 : 장사랑( 將 仕 郞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난( 朴 鸞 ) -국조방목 13

박훤( ( 朴 萱 ) -국조방목 2009.05.02 19:49 박훤( 朴 萱 ) [생원진사시] 중종( ( 中 宗 ) 29년 (1534) 갑오( ( 甲 午 ) 식년시( ( 式 年 試 ) 생원( ( 生 員 ) 3등( 3 ( 三 等 ) 58위 [인적사항] G002+AKS-KHF_12BC15D6E4FFFFU9999X0 자 낙이( 樂 而 ) 본관 밀양( 密 陽 ) 거주지 삼가( 三 嘉 ) [이력사항] 전력 : 유학( 幼 學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서림( 朴 書 林 ) 관직 : 습독관( 習 讀 官 ) [출전] CD-ROM 사마방목( 司 馬 榜 目 ) ( 韓 國 精 神 文 化 硏 究 院 ) 박훤( 朴 萱 ) -국조방목 14

채지당 박구원 국조방목 2009.05.02 17:37 박구원( 朴 龜 元 ) [문과] 중종( ( 中 宗 ) 2년 2 (1507) 정묘( ( 丁 卯 ) 증광시( ( 增 廣 試 ) 을과( ( 乙 科 ) 7위7 [인적사항] 자 언영( 彦 靈 ) 본관 밀양( 密 陽 ) G002+AKS-KHF_13BC15AD6CC6D0U9999X0 [이력사항] 전력 : 생원( 生 員 ) 관직 : 현감( 縣 監 ) [가족사항] [부] 성명 : 박효선( 朴 孝 先 ) [출전] 국조문과방목( 國 朝 文 科 榜 目 ) 채지당 박구원 국조방목 15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2009.05.01 14:22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공은 조선 단종선위 때의 절의신이다. 이름은 시예( 時 乂 ). 자는 덕부( 德 夫 ). 호는 돈와( 遯 窩 ), 공은 밀성박씨 행산부원군 세균의 증손이며,도은 공 문빈의 손자로 조선 태조(1392~1398) 때의 증찬성사이조판서( 贈 贊 成 事 吏 曺 判 書 ) 박신열( 朴 臣 悅 ) 의 셋째 아들로 밀양 삽포에서 출생 하 였다. 공은 자품이 빼어나고 재예를 일찍 이루어 태종(1401~1418)때 과거에 올라 벼슬이 청송부사( 靑 松 府 使 ) 안호서제학( 按 湖 西 提 學 )에 이르 렀다. 1455년 6월 단종이 수양대군에게 선위함을 보고 관복을 찢어버리고 처자들을 거느리고 고사( 姑 射 -단장면 고례리)의 극히 좁은 협곡에 숨어 살면서 다시는 세상에 나오지 아니하며 스스로 호를 돈와라 지어 부르며 그 뜻을 되새겼다. 공의 시를 보면 다음과 같다. 천년 산나무는 무능함을 부끄러워 하며 일편단심은 꿈만 같구나, 능( ( 陵 )의) 붉은 도장끈이 나타나는 새 아침에 까마귀가 모자를 벗기고, 흰구름은 옛마을에 사슴과 벗하여 앉아있는 샘과 돌의 그윽한 정을 보네. 일어나 먼 장안( 서울) 을 바라보니 방울지는 눈물은 그치지 않는데, 정성을 드리운 해바라기는 대월 남쪽에서 그치고, 한강물은 눈 속에 가득하네. 돈와공 박시예 ( 朴 時 乂 )선조님 사실 16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 송계시) 2009.05.01 05:26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송계시) 異 鄕 難 得 一 淸 遊 타향이라 풍류놀이 한 번 얻기도 어려운데, 況 是 經 旬 雨 未 收 하물며 열흘이 넘게 비가 오고 있음에랴. 早 風 吹 雲 散 盡 조만간에 바람불어 구름 다 흩어지면, 共 乘 明 月 賞 中 秋 함께 달빛 밝으며 중추 구경 합시다. 容 軒 先 生 文 集 卷 之 二 詩 次 朴 松 溪 詩 (용헌 이원선생문집권지이 시 차박송계시) 17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 贈 朴 中 書 中 美 ] 2009.05.01 04:23 곽균( 郭 ) 옛날 큰 회나무 꿈 꿀 때 / 憶 昔 夢 大 槐 문앞에는 수레 말 탄 손이 많았네 / 門 多 車 馬 賓 아무리 뿌리쳐도 끝내 가지 않고 / 揮 之 竟 不 去 문안하려고 어이 그리 머뭇거리던고 / 伺 候 何 逡 巡 귀거래사 시 지은 뒤로 / 自 從 賦 歸 來 동각에는 뽀얀 먼지 덮이었네 / 東 閣 凝 素 塵 박후는 구정을 버리지 않고 / 朴 侯 不 遺 舊 지금도 자주 찾아오나니 / 至 今 來 頻 頻 소나무 잣나무는 가을에 청청하고 / 靑 青 松 栢 秋 지초와 난초는 봄에 향기로워라 / 馥 馥 芝 蘭 春 아름답구나 그대는 군자로세 / 美 矣 君 子 哉 맑은 바람은 속된 무리 깨쳐 주네 / 淸 風 驚 俗 倫 [주D-001]큰 회나무 꿈 : 당나라 소설 남가기( 南 柯 記 ) 에서 나온 말인데, 낮잠을 자다가 꾼 꿈에, 대괴국( 大 槐 國 )에 가서 남 가태수( 南 柯 太 守 )로 영화를 누리다가 깨어서 살펴본즉, 뜰 앞에 있는 큰 괴목( 槐 木 )이 대괴국이었고, 남가군( 南 柯 郡 )은 그 괴목의 남쪽 가지였다. 동문선 제4권 오언고시( 五 言 古 詩 ) 중서 박중미에게[ 贈 朴 中 書 中 美 ] 18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2009.05.01 03:14 2009년3월 밀성대군 춘향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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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 慶 尙 道 ) 창녕현( ( 昌 寧 縣 ) 朴 胄 2009.04.30 00:40 효자 본조 박근인( 朴 近 仁 )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영락( 永 樂 ) 8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주( 朴 冑 ) 부모상을 당하여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졌다. 벼슬이 인산군사( 麟 山 郡 事 )에 이르렀다. 박운( 朴 云 ) 나이 14 세, 그 아우 운산( 云 山 )은 8세 때였다. 그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니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운산( 云 山 )과 함께 30여 보( 步 )를 쫓 아가면서 하늘을 부르며 크게 울자, 범이 버리고 갔다. 운( 云 )은 시체를 업고 운산은 도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조정에 보 고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胄 26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 慶 尙 道 ) 창녕현( ( 昌 寧 縣 ) 朴 近 仁 2009.04.30 00:35 효자 본조 박근인( 朴 近 仁 ) 부모상을 당해서 3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영락( 永 樂 ) 8년에 정문이 세워졌다. 박주( 朴 冑 ) 부모상을 당하여 3 년 동안 여막에 살았다. 일이 조정에 알려져서 정문이 세워졌다. 벼슬이 인산군사( 麟 山 郡 事 )에 이르렀다. 박운( 朴 云 ) 나이 14세, 그 아우 운산 ( 云 山 )은 8세 때였다. 그 아버지가 범에게 물려 가니 운이 조그만 도끼를 들고 운산( 云 山 )과 함께 30여 보( 步 )를 쫓아가면서 하늘을 부르며 크게 울자, 범이 버리고 갔다. 운( 云 )은 시체를 업고 운산은 도끼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다. 일이 조정에 보고되어 정문이 세워졌다. 신증동국여지승람 제27권 경상도( 慶 尙 道 ) 창녕현( 昌 寧 縣 ) 朴 近 仁 27

채지당 박구원 1442년(세종 24)~1506년(중종 1) 2009.04.29 23:02 공의 자( 字 )는 언령( 彦 齡 ). 호는 채지당( 采 芝 堂 ). 본관이 밀성( 密 城 )으로 돈와 시예( 時 乂 )공의 증손이며 진사 효선( 孝 先 )의 둘째아들로 세종 24 임술년(1442) 8월 22일 밀양시 단장면 고사촌( 姑 射 村 =고례리)에서 태어났다. 자성이 따뜻하고 일찍이 재예를 갖추었으며 배움에 부지런하 고 언행이 엄하여 어른스러웠다. 어른에게 효성을 다하고 친구를 사귐에는 돈독하였으며 부모를 섬기고 봉양함에는 항상 그 뜻을 따랐다. 부 모님 상을 당하여서는 예절에 따라 제례용구를 갖추어 장례를 치루고 슬픔이 깊어 몸을 상하게 하였으며, 형제 5명이 한방에서 같이 살았는 데 서로 네것 내것이 없고 샘하는 일이 없었다. 글을 읽음에 온 정성을 다하고 가난한 친척이나 친지들을 보면 반드시 도와줌이 그의 천성이 었다. 학문에 있어서는 모든 책을 두루 읽고 그 이치를 꿰뚫었으며, 매일 아침 가묘( 家 廟 )에 배알한 뒤에 물러나서는 책을 대하고 앉아 종일 토록 공부하였다. 사람을 대할때에는 충정이 두터웠으며 급한 일을 당하였을 때에도 내색을 하지않고 침착하였다. 그의 학문은 깊고 행실은 독실하며 성망이 높아 일찍 사마시( 司 馬 試 )를 거쳤으며 성종때(1470~1494) 벼슬에 올라 이조정랑 사헌부감찰 칠원현감( 漆 原 =함안)을 역임하 면서 백성을 다스림에 조리가 정밀하였다. 엄하고 어진 것이 각각 적절하고 또 한편으로는 부지런히 학교를 일으켜 교화를 밝혀 읍의 자제들 과 강론, 담론을 펴서 경서를 익히니 몇년안에는 군내에는 벼슬한 사람들로 가득찬 듯 하였다. 어느날 개연히 몇권의 책만을 가지고 고향으 로 돌아와 그의 증조부 돈와 박시예공이 은거하던 곳에 정자를 짓고 성령의 양성에 힘쓰고 유학을 일으키니 사방에서 학자들이 소문을 듣고 모여 들었다. 산수가 맑은 고례리 절경 아홉구비를 주자( 朱 子 )가 살던 곳과 비유하여 구곡가( 九 曲 歌 ) 시를 짓고 스스로 호를 채지당( 采 芝 堂 ) 이라 하였다. 중종 1년(1506) 병인 2월 21일 이곳 고사촌(고례리)에서 세상을 마쳤다. 그가 남긴 글과 정자 사호도( 四 皓 圖 )그림 등을 점필재 선생과 연루되었다하여 무오사화때 불살라졌으며 그 뒤에 그의 현손 낙춘( 樂 春 ) 양재( 讓 齋 ) 두 사람이 사호정( 四 皓 亭 )을 중창하였는데 한강 ( 寒 岡 ) 정구( 鄭 逑 )선생이 양송을 지었고, 13세손 재용( 在 溶 )이 연몰된 자취를 수습하여 유사 한권을 구상하고 묘갈은 고흥( 高 興 ) 이시좌( 李 時 佐 )가 지었다. 지금의 단장면 고례리 사희동( 四 熙 洞 )은 사호리( 四 皓 里 )에서 유래되었다. 채지당 박구원 1442년(세종 24)~1506년(중종 1) 28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2009.04.21 01:16 김종직( 金 宗 直 )의 자는 계온( 季 溫 )인데, 사예( 司 藝 ) 김숙자( 金 淑 滋 )의 아들이고, 호는 점필재( 畢 齋 )이며, 선산인( 善 山 人 )이다. 세 조 때에 급제하여 예종과 성종을 섬기면서, 벼슬이 형조 판서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간공( 文 簡 公 )이다. 효행이 있고 문장이 고결하여 당시 유림의 우두머리가 되었는데, 후학들을 권장하기 좋아하여, 많은 사람이 학문을 성취하였다. 정여창( 鄭 汝 昌 ), 김굉필( 金 宏 弼 )과 같은 이는 도학으로 명성이 있었고, 김일손( 金 馹 孫 )ㆍ유호인( 兪 好 仁 )ㆍ조위( 曹 偉 )ㆍ이종준( 李 宗 準 )ㆍ남효온( 南 孝 溫 )ㆍ홍유손( 洪 裕 孫 ) 같은 이들은 문장으로 드러나게 되었으며, 그 밖에도 방법을 가리켜 주어서 이름 얻은 이가 매우 많다. 연산군 때 무오사화가 일어날 때는 공이 이미 죽었으므로, 화가 저승에 미치어 관을 쪼개고 시체를 목베었다. 그의 문집이 있어서 세상에 전한다. 김일손의 자는 계운( 季 雲 )이요, 호는 탁영( 濯 纓 )이며, 집의( 執 義 ) 김맹( 金 孟 )의 아들이고, 본관이 김해( 金 海 )이다. 청도( 淸 道 )에서 대대로 살았고 김종직에게 수업하였다. 문장에 능하였고, 또 성품이 간결하며 높아서 허여하는 사람이 적었다. 벼슬이 이조 정랑에까 지 이르렀으며, 연산조 무오사화 때에 화를 입었었다. 혹자가 말하기를, 이극돈( 李 克 墩 )이 전라 감사로 있을 때에 성종의 상을 만 나 서울에 향( 香 )을 올리지 아니하고, 기생을 싣고 다닌 사실을 김일손이 사초( 史 草 )에 썼는데, 이극돈이 사사로이 이 사실을 고쳐줄 것을 청하다 김일손이 듣지 아니하므로 원한을 품고 있던 중에 성종실록 을 편수하게 되자, 이극돈이 당상관으로 있게 되어 실로 이 참화를 일으킨 것이다. 하였다. 권오복( 權 五 福 )의 자는 향지( 嚮 之 )요, 호는 수헌( 睡 軒 )이다. 상세한 것은 서문에 있다. 권경유( 權 景 裕 )의 자는 군요( 君 饒 ) 또는 자범( 子 汎 )이며, 안동인( 安 東 人 )이다. 성종 을사년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로 옥당에 들 어가서 정자( 正 字 )가 되고, 여러 차례 천거되어 교리에까지 이르렀다. 연산조 때에 시사( 時 事 )가 점차 변함을 알고 외직을 청하여 제 천 현감( 堤 川 縣 監 )이 되었다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김일손과 같은 날에 피살되었다. 추강( 秋 江 ) 남효온( 南 孝 溫 )이 말하기를, 군요 ( 君 饒 권경유)는 성품이 강직하고 지어서 꾸미는 것을 즐기지 않았다. 하였다. 이목( 李 穆 )의 자는 중옹( 仲 雍 )이며, 전주인( 全 州 人 )이다. 성품이 강직하고 곧은 말을 잘하였다. 일찍이 태학에 있을 때에 윤필상 ( 尹 弼 商 )이 대신으로서 국사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날씨가 가뭄이 들자 이목이 상소하기를, 윤필상을 삶아 죽이면 하늘이 비를 줄 것입니다. 하였다. 그 후 우연히 윤필상이 노상에서 그를 만나자, 그를 부르며 말하기를, 자네는 노부( 老 夫 )의 고기를 꼭 먹고자 하는가. 하니, 이목은 목을 꼿꼿이 세우고 전혀 개의치 않으면서 갔다. 연산군 초년에 장원으로 발탁되었는데 사화가 일어나자, 윤 필상이 당상관으로 있으면서 먼저의 감정을 가지고 이목을 김종직의 제자라고 하고서 끌어다 죽였다. 허반( 許 盤 )의 자는 문병( 文 炳 )이며, 양천( 陽 川 ) 사람이다. 추강집( 秋 江 集 ) 에 이르기를, 허반은 성리학에 뜻을 두고 진취에 힘쓰며, 일마다 고인( 古 人 )을 사모하고자 한다. 하였다. 김대유( 金 大 猷 )는 그 단아함에 감복하여 언젠가 좌상 홍응( 洪 應 )에게 말하 기를, 세자는 국가를 계승할 임금으로 만백성 우러러 보고 의지하는 바인데, 지금 환시( 宦 寺 )와 더불어 거처하는 것은 불가하다. 하였다. 무오년에 급제하였고, 이어 권지( 權 知 ) 승문원 부정자로 있다가 사화로 죽었다. 강겸( 姜 謙 )은 자가 이요, 진주( 晉 州 ) 사람이다. 경자년에 급제하여 홍문관( 弘 文 館 )에 선발되었다가 여러 차례 승진되어 정랑 ( 正 郞 )까지 되었으나, 무오사화에 연좌되어 형장을 맞고 귀양갔었다. 그 형인 강형( 姜 )은 대사간으로 있다가 갑자사화 때에 죽었 다. 표연말( 表 沿 沫 )의 자는 소유( 少 游 )요, 신창( 新 昌 ) 사람이다. 성묘 임진년에 급제하였고, 문명이 있어서 더불어 교유( 交 遊 )한 자가 모두 당시의 명사들이었다. 일찍이 한림( 翰 林 )이 되었을 때에 동료들이 우육( 牛 肉 )을 가지고 잔치한 일이 있었는데, 상왕이 이를 알 게 되어 예에 따라 파직이 된 일이 있었다. 그 후로는 연회에 금지하는 고기만 보이면 문득 치우게 하면서 말하기를, 차마 법을 범 할 수 없다. 하였다. 복상( 服 喪 )함에 예를 극진히 하였는데, 그 일이 알려지게 되어 한 계급을 가( 加 )하였고, 후에 벼슬이 동지 중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29

추부사( 同 知 中 樞 府 事 )에까지 이르렀다. 홍한( 洪 翰 )의 자는 온진( 蘊 珍 )이요, 남양( 南 陽 ) 사람이다. 을사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참의에 이르렀다. 성품이 강직하여 마음으로 허여하는 이가 적었고, 권세있고 높은 관직에 있는 이에 미움을 받아 무오사화의 화에 걸려 형장을 맞고 귀양가다가 도중에 죽었다. 중묘 때에 이조 참판을 증직하였다. 정여창( 鄭 汝 昌 )의 자는 자욱( 伯 勖 )이요, 하동( 河 東 ) 사람이며, 호는 일두( 一 蠹 )라고 한다. 효행으로 참봉에 천거되었는데, 사양하 였으나 윤허를 얻지 못하였다. 급제하고 한림이 되었으며, 벼슬이 안음 현감( 安 陰 縣 監 )에 이르렀다. 김광필과 뜻을 같이하여 김종직 에게 사사( 事 師 )하고 성리학에 전심하였다. 무오사화로 종성( 鍾 城 )에 귀양가서 졸하였으며, 얼마 후 갑자사화 때에 다시 부관참시( 剖 棺 斬 屍 )를 당하였다. 후에 우의정에 추증되었고, 시호를 문헌( 文 獻 )이라고 하였다. 무풍부정( 茂 豐 副 正 ) 총( 摠 )의 자는 백원( 百 源 )이며, 태종의 증손이다. 시에 능하고 글씨를 잘 쓰며, 또 거문고를 잘 탔다. 양화도 ( 楊 花 渡 )에 별장을 짓고 작은 배와 어망( 魚 網 )을 가지고 항상 손수 고깃배를 저어서 시인과 문사를 맞이하여 날로 시를 모은 것이 무 려 천백 편이나 되었다. 스스로 호하기를 서호주인( 西 湖 主 人 )이라고 하더니, 무오사화 때에 곤장을 맞고 원지에 유배되었다. 강경서( 姜 景 叙 )의 자는 자문( 子 文 )이요, 진주( 晉 州 ) 사람이며, 호는 초당( 草 堂 )이다. 성묘 정유년에 급제하고 또 정사년의 문과 중 시( 重 試 )에 합격하였다. 연산조 무오사화 때에 점필재( 畢 齋 )의 문생이라 하여 회령( 會 寧 )에 장류되었다가 뒤에 풀려 돌아왔다. 중 종조 때에는 벼슬이 좌부승지( 左 副 承 旨 )에 이르렀고, 초당집( 草 堂 集 ) 이 있으며, 후에 예조 참판에 추증되었다. 이수공( 李 守 恭 )의 자는 중평( 仲 平 )이요, 광주( 廣 州 ) 사람이며, 이둔촌( 李 遁 村 )의 후예이고, 영의정 이극배( 李 克 培 )의 손자이다. 성 묘 무신년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정언과 장령을 지냈는데, 간신( 諫 臣 )의 풍이 있었다. 홍문관( 弘 文 館 )에 들어가서는 교리ㆍ응교ㆍ전 한 등에 제수되었는데, 무오사화 때는 창성( 昌 城 )에 귀양갔다가 다시 광양( 光 陽 )으로 옮겼고, 갑자사화 때에 사약이 내려졌는데, 그때 의 나이 41세였다. 중묘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정희량( 鄭 希 良 )의 자는 순부( 淳 夫 )요, 호는 허암( 虛 庵 )이다. 연산군 초년에 급제하였고 예문관 검열이 되었는데, 얼마 후 무오사화 에 연좌되어 옥에 갇히었다가, 의주( 義 州 )로 귀양갔다. 점을 쳐서 길흉을 잘 알아맞혔는데, 일찍이 이르기를, 갑자년 화는 무오년보 다 더 심할 것이다. 하더니, 어느 날 자취를 감추고 도망하였는데, 그 후 어떻게 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시집이 있어 세상에 전 해지고 있다. 정승조( 鄭 承 祖 )의 자는 술이( 述 而 )이다. 연산조 갑인과에서 급제하여 한림( 翰 林 )에 뽑혔는데, 무오사화 때에 원지로 장류되었다. 이종준( 李 宗 準 )의 자는 중균( 仲 均 )이요, 호는 용재( 慵 齋 )이다. 문장에 능하고 그림과 글씨를 잘 썼으며, 성종 을사년에 급제하였 다. 일찍이 서장관( 書 狀 官 )으로 중국에 가던 도중에 어느 역에서 쉬는데, 그 역관( 驛 館 )의 병풍그림이 좋지 않은 것을 보고 붓으로 먹칠을 하여 거의 다 없애버리니, 역의 관원이 통사( 通 事 )를 불러서 괴상한 일이라고 하면서 문책을 하였다. 통사가 말하기를, 서 장관이 글씨와 그림에 능숙한데, 반드시 그 병풍의 그림이 자신의 뜻에 불만이 있으므로 그런 것이다. 하였다. 그제야 역관이 깨닫 고 수긍하였다. 돌아오는 길에 또 그 역에 들렀는데, 새로 단장하여 만든 병풍 두 벌을 쳐 놓았으므로, 이종준이 한 벌에는 글씨를 쓰고, 또 한 벌에는 그림을 그렸는데, 모두 지극히 오묘하여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감탄을 자아내게 하였다. 무오사화 때에 북계( 北 界 )로 귀양가던 도중에 고산역( 高 山 驛 )을 지나면서 이사중( 李 師 中 )은 외로운 충성으로 자처하나, 많은 사람들은 허여하지 않는다는 율시 한 수를 벽에다 쓰고 갔는데, 감사가 보고하여 연산군이 원망하는 의사가 있다 하여 잡아서 국문하여 죽였다. 홍귀달( 洪 貴 達 )이 구제하려고 힘썼으나 이루지 못하였다. 최보( 崔 溥 )의 자는 연연( 淵 淵 )이요, 호는 금남( 錦 南 )이며 나주( 羅 州 ) 사람이다. 학문을 널리 들어 알고, 또 기억을 잘하며 영걸스 럽고 구속받지 않았다. 성묘조 때에 급제하여 홍문관 교리가 되었다. 언젠가 사명을 받들고 제주도에 갔다가 배가 풍랑으로 표류되어 서 중원( 中 原 )의 절강성( 浙 江 省 ) 영파부( 寧 波 府 )에 표착하였는데, 그곳 변신( 邊 臣 )이 왜구로 의심하고 장차 죽이려고 하다가, 최보의 응답이 민첩하고 분명하므로 화를 면하였다. 성묘가 그때의 행록을 지으라고 하여서 표해록( 漂 海 錄 ) 을 지어 올렸다. 벼슬이 예빈 시 정에 이르렀다. 무오사화 때에 귀양갔다가 그 뒤 끝내 갑자사화 때에 피살되었다. 이원( 李 )의 자는 낭옹( 浪 翁 )이요, 경주 사람이며 이익재( 李 益 齋 )의 후예이다. 성묘 기유년에 급제하고, 벼슬이 호조 좌랑에 이르 렀다. 무오사화에 원지에 장류되었다가 갑자사화 때 죽었다. 중묘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추강 남효온( 南 孝 溫 )의 사우록 에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0

이르기를, 이원은 익재의 후손이요, 박팽년( 朴 彭 年 )의 외손인데, 두 현인의 집안에 오직 이 사람 하나가 맺혀 있다. 하였다. 이주( 李 冑 )의 자는 주지( 冑 之 )요, 고성( 固 城 ) 사람이며 이행촌( 李 杏 村 )의 후예이다. 문장에 능숙하고 기절이 있었다. 자호를 망헌 ( 忘 軒 )이라고 하였고, 성묘 무신년에 급제하고 정언에 제수되었는데, 무오사화 때에 점필재 문인이라 하여 진도( 珍 島 )에 귀양갔다가 갑자사화에 죽었다. 김굉필( 金 宏 弼 )의 자는 대유( 大 猷 )요, 호는 한훤당( 寒 暄 堂 )이며, 점필재를 사사( 師 事 )하였다. 동방의 선비들이 모두 문사( 文 詞 )를 업으로 하였으나, 성리학에 잠심하여 몸가짐을 예로써 하였고, 염락관민( 濂 洛 關 )의 계통을 찾은 이는 김굉필로부터 시작되었다. 천 거되어 나와서 형조 좌랑이 되었다가, 무오사화 때에 희천( 熙 川 )에 귀양가서 다시 순천( 順 天 )으로 옮겨져 극형에 처해졌다. 후에 영 의정에 추증하고 시호를 문경( 文 敬 )이라고 하였다. 박한주( ( 朴 漢 柱 )의) 자는 천지( ( 天 支 )요,) 밀양( ( 密 陽 ) 사람이며, 자호를 우졸자( ( 迂 拙 子 )라고) 한다. 점필재의 문하에서 학문을 닦았으며, 성묘 을사년에 급제하여 정언과 헌납을 지냈다. 말과 일이 확연하고 강직하였다. 일찍이 예천( ( 醴 泉 ) 군수가 되었 다가 무오사화로 벽동( ( 碧 潼 )에) 장류되었으며, 갑자사화 때 피살되었다. 중묘 초년에 도승지를 증직하였다. 임희재( 任 熙 載 )의 자는 경여( 敬 輿 )요, 풍천( 豐 川 )사람이다. 무오과에서 급제하였는데, 얼마 되지 아니하여 점필재의 문도라고 하여 장류되었다. 임희재는 임사홍( 任 士 洪 )의 아들로서 세상 사람들은 임희재가 글씨를 잘 쓴다고 하였는데, 일찍이 병풍 위에, 순( 舜 )을 조( 祖 )로 하고, 요( 堯 )를 종( 宗 )으로 하면 자연히 태평시대되는데, 진시황( 秦 始 皇 )은 무슨 일로 창생( 蒼 生 )을 괴롭혔는가. 담장 안에서 화 일어나는 것을 알지 못하고, 헛되이 되놈을 막으려고 만리장성 쌓았어라. 라는 한 구절을 썼는데, 연산군이 하루는 창졸히 임사 홍의 집에 와서 그 병풍을 보고, 누가 저 글을 썼느냐고 묻는지라, 임사홍이 사실대로 대답하니, 연산군이 노색을 띠며 이르기를, 경의 아들은 불초하다. 내가 죽이려고 하니, 경의 뜻은 어떠한가. 하므로, 임사홍이 꿇어앉아 대답하기를, 저의 아들은 원래 성 품과 행실이 불순한 것이 과연 상의 말씀과 같습니다. 신이 일찍이 아뢰고자 하였으나 아직 그렇게 못하였나이다. 하므로, 드디어 화를 당하였다. 어떤 사람은 말하기를, 임희재는 항시 그 아버지의 잘못을 간하였으므로, 임사홍이 좋아하지 아니하여 참소한 것이 다. 하였다. 강백진( 康 伯 珍 )의 자는 자온( 子 蘊 )이고, 신천( 信 川 ) 사람이며, 점필재의 외생질이다. 성묘 정유년에 급제하여 벼슬이 사간이 되었 다가, 무오사화 때 장류되었다. 이계맹( 李 繼 孟 )의 자는 희순( 希 醇 )이요, 전의( 全 義 ) 사람이다. 성묘 기유년에 급제하였으며, 그 시문은 점필재도 취택하였던 것이 다. 무오사화 때 점필재의 문생이라 하여 장류되었다가 중종조 때에 다시 등용되었다. 벼슬이 찬성( 贊 成 )에까지 이르렀고, 시호를 문 평( 文 平 )이라고 하였다. 성품이 자유스럽고 활달하며, 모든 일에 검속( 檢 束 )을 잘하지 아니하므로 처음에는 기묘 선비들에게 시원하 지 않게 보이더니, 사류( 士 類 )가 패하게 되자, 홀로 구하려고 힘써 마지아니하다가 권간( 權 奸 )들에게 미움을 받아 근심걱정으로 죽었 다. 강혼( 姜 渾 )의 자는 사호( 士 浩 )요, 호는 목계자( 木 溪 子 )이며, 진주( 晉 州 ) 사람인데, 그 문명( 文 名 )이 김일손( 金 馹 孫 )의 다음이었다. 연산 말년에 그 폐희( 嬖 姬 )가 죽자, 지나치게 애도하여 조신들에게서 뇌문( 誄 文 )을 받는데, 강혼은 제문을 지어서 극히 아름답고 고 운 것을 칭송하였다. 그리하여 연산군이 기뻐하여 이로부터 총애를 얻었는지라 사론( 士 論 )에게 천시를 받았다. 중묘조 때는 벼슬이 판중추부사( 判 中 樞 府 事 )에까지 이르렀다. 허후( 許 )는 영의정 허조( 許 稠 )의 아들로서, 대대로 충효의 집안이다. 부친이 죽고 그 모친을 공양함에 있어 어머니의 안색을 살 피면서 봉양하였다. 세종조에 벼슬하여 20여 년간 몸을 삼가고 말을 조심하였다. 갑자 을축 연간에 허후가 경기 감사로 갔는데, 그때 마침 큰 흉년이 들어서, 기전( 畿 甸 ) 간에 한 포기 풀도 없고, 백성은 아사 지경이었으나, 수령들이 구제할 도리가 없었다. 허후가 봉 사( 封 事 )를 올리어 경창( 京 倉 )의 곡식을 풀어서 구휼하자고 청하였지만, 왕이 윤허하지 아니하자, 허후는 궐정( 闕 庭 )에 엎드려 울부짖 으며 애통해 했다. 그러자 그 좌우에 있던 사람도 따라서 흐느꼈다. 고례( 古 例 )에 흉년이 들어 주현창( 州 縣 倉 )을 풀어 굶주린 백성에 게 주려면 먼저 감사가 호조( 戶 曹 )에 보고하고, 호조는 왕에게 알려서 윤허를 얻은 다음에야 곡식을 내줄 수가 있었다. 그러나 발급 의 명령을 기다리는 동안에 많은 백성이 아사하게 되는지라. 허후가 건의하기를, 감사나 호조는 모두 대신인데, 반드시 호조에 공 문으로 알리자면 백성이 그 은택을 입는 것이 더디오니, 신은 호조에 알리지 아니하고 편리한 대로 창고를 열기를 청하나이다. 하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1

니, 왕이 윤허하였다. 이에 경창의 곡식을 운반하여 들에 노적해 놓고, 겸하여 의창( 義 倉 )을 열어서 죽을 쑤어서 진휼하여 구제하였 다. 또 상서하기를, 전라ㆍ충청도의 곡식을 옮겨서 식구를 계산하고, 토지를 요량하여 양식과 종자를 주어 백성들이 힘입어서 농사 에 힘쓰게 하자. 하였고, 또, 서산 기슭의 수목이 울창한 곳에 산나물이 풍성히 나는 것을 기다려서 백성들에게 채식을 돕게 하 자. 청하였으니, 모두 허후의 힘이었다. 4월이 되어 군현( 郡 縣 )을 순행할 때에 보리가 익으려는 것을 보고 이삭을 취해 오게 하여 맛보고 이르기를, 보리가 이미 결실을 맺었으니, 너희들 백성이 살았도다. 하니, 그가 백성을 근심하는 것이 이같이 깊었다. 그 해 가을은 과연 큰 풍년이 들었는데, 백성들은 어느 집 할 것 없이 그 송덕( 頌 德 )의 노래를 부르며 즐거워하였다. 그 가사가 속되고 야비하여 기록하지 못하나, 대개 자기들을 살려준 은혜를 노래한 것이다. 이 일이 보고 되니, 왕이 듣고 감탄하여 마지아니하였다. 그 후 문종에게 벼슬하여 신하의 직책을 다하였다고 하였다. 문종이 죽을 때에 황보인( 皇 甫 仁 )ㆍ김종서( 金 宗 瑞 )들에게 유주( 幼 主 )의 보호를 부탁하였는데, 그때 허후는 우참찬( 右 參 贊 )이었다. 광묘(세조)가 수양대군( 首 陽 大 君 )으로 중국에 고하려 하자, 허후가 광묘에 게 청하여 말하기를, 지금 재궁( 梓 宮 )이 빈소에 있고, 어린 임금이 국사를 담당하여, 대신들은 아직 우왕좌왕하며 백성들도 의심하 고 있는 이때, 공자( 公 子 )는 이 나라의 종신( 宗 臣 )인데 나라를 떠나서 어디로 가시려 하십니까. 하니, 광묘가 따르지는 않았지만 마 음속으로는 그의 말을 옳게 여겼다. 계유년에 광묘는 비밀히 권람( 權 擥 )ㆍ한명회( 韓 明 澮 )와 정란( 靖 亂 )을 꾀하여 먼저 김종서를 그 집에 가서 죽였다. 그때에 왕(단종)은 부마 정종( 鄭 悰 )의 집에 있었는데, 밤에 광묘가 그 집 문밖에 가서 왕에게 고하기를, 김종서 가 모반하므로 일이 급하여 미처 알리지 못하고 삼가 이미 죽였나이다. 하니, 왕은 그때 나이가 어린지라, 놀라며 일어나서 말하기 를, 그러한 일이 있으면 어떻게 되오. 숙부는 나를 살려주오. 하니, 광묘가 대답하기를, 이는 어려운 것이 아닙니다. 신이 모두 처치하겠나이다. 하고, 즉시 상전에서 대신들을 패초( 牌 招 )하고 한편 무사로 문을 지키게 하여 입문하는 자에 따라서 그 당파를 가 려서 제거하게 하니, 영의정 황보인( 皇 甫 仁 ), 이조 판서 조극관( 趙 克 寬 ) 등이 이때에 죽음을 당하였으나, 허후는 이전에 중국에 가는 것을 만류한 일이 있으므로 이때 화를 면하였다. 허후가 불려 들어가 좌석에 얹으니 술을 내고 풍악을 연주하였는데, 그때 재상 정인 지( 鄭 麟 趾 )와 한확( 韓 確 ) 등은 손뼉을 치며 희희낙락하였지만, 허후는 홀로 초연( 愀 然 )히 앉아 즐기지 아니하고, 또 고기를 먹지 아 니하므로 광묘가 그 연고를 물었다. 허후가 조부의 기제사라고 칭탁하였는데, 광묘는 핑계인 줄을 알면서도 다시 물어보지 않았다. 이윽고 김종서와 황보인의 머리를 시중( 市 中 )에 매어 걸게 하고, 또 그 자손을 모조리 죽이려고 하자, 허후가 말하기를, 그 사람들 이 무슨 큰 죄가 있어 머리를 매고 또 그 처자를 살육하려고 합니까. 나와 김종서 사이는 교분에 신의가 있는 사이도 아니므로, 그 마음을 잘 알지 못하오나, 인( 仁 황보인) 같은 이는 제가 평소부터 그 사람을 살펴 알거니와, 결코 모반 할 리는 없습니다. 하니, 광묘가 이르기를, 네가 고기를 먹지 않은 것이 그 때문이냐. 하니, 허후가 답하기를, 그렇습니다. 조정의 원로들이 한날에 모두 죽었으니, 나는 아직 살아 있는 것으로 족하거늘 어찌 차마 고기를 먹을 수 있겠소. 하면서, 곧 눈물을 흘리며 우니, 광묘가 심히 노하기는 하였으나, 그 재덕을 사랑하여 죽이려고 하지는 아니하였는데, 이계전( 李 季 甸 )이 극구 참소하여, 허후를 외지에 귀양보냈다 가 필경은 목매여 죽였다. 허후가 죽은 후에 조정은 모두 변하였고, 함길도 절도사 이징옥( 李 澄 玉 )이 배반하여 여진족에게로 가려다 가 판관 정종( 鄭 宗 )에게 잡혔고, 또 백성들에게서는 소란한 헛소문이 떠돌았다. 한편 동서 주민과 경기도 백성들은 떼로 모여 이리저 리 뛰어다니면서 어떤 사람은 가산을 땅에 묻고, 혹은 배에 싣고서 서울로 올라가려 하니, 하루에도 네다섯 차례나 경동( 驚 動 )하나, 관리도 능히 그를 금하지 못하였다. 이에 근거 없는 말을 지어내는 자는 죽이는 데 그치고, 그릇되게 전파한 자는 나누어 귀양보낸 뒤에야 평정되었다. 처음에 허후가 승선( 承 宣 )의 배명을 받았을 때에, 사람들이 모두 와서 축하하는데, 그 부친인 허조( 許 稠 )만은 근 심하는 빛이 있고, 밤새도록 잠을 자지 아니하므로, 어떤 사람이 그 연유를 물으니, 허조가 답하기를, 천도( 天 道 )는 가득하면 덜어 냄을 부르고 겸허하면 더함을 받게 되는 것인데, 나는 세상에 공덕도 없이 지위가 인신으로서 최고의 자리에 올랐는데, 또 내 아들이 승선이 되었으니, 이는 멀지 아니하여 허씨의 집안에 화가 일어나리라. 하였는데, 이때를 당하여 허후가 죽은 뒤에 그 아우며 조카 가 모두 금고( 禁 錮 )를 당하였으니, 과연 그 말이 징험이 되었도다. [주D-001]염락관민(( 濂 洛 關 ) : 염계( 濂 溪 )의 주돈이( 周 敦 頤 ), 낙양( 洛 陽 )의 정호( 程 顥 )와 그 아우 정이( 程 頤 ), 관중( 關 中 )의 장재( 張 載 ), 민중( 中 )의 주희( 朱 熹 ) 즉 정주학( 程 朱 學 )의 정통을 말함. [주D-002]순( ( 舜 )을) 하면 : 여기는 순임금이나 요임금을 법받는다는 말이다.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2

해동야언 2 무오당적 ( 戊 午 黨 籍 ) 33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2009.04.21 01:14 홍치( 弘 治 명 나라 효종의 연호) 무오년 연산4년 7월 17일의 전지( 傳 旨 )에 이르기를, 김종직( 金 宗 直 )은 초모천사( 草 茅 賤 士 )로 세 조조 때에 급제하였고, 성종 때에는 경연에 발탁되어 오래도록 시종( 侍 從 )관으로 있으면서 형조 판서에 이르렀다. 그 은총이 조정에 서 제일이었는데, 병으로 사퇴한 뒤에도 성종은 아직도 그가 있는 고을 원을 시켜 미곡을 그가 죽는 해까지 특별히 내려주었다. 이제 그 제자인 김일손( 金 馹 孫 )이 편수한 사초( 史 草 ) 내에 무도한 말로 선왕의 조정사를 거짓 꾸미몄을 뿐 아니라, 또 그 스승인 김종직이 지은 조의제문( 弔 義 帝 文 )을 기재하였는데, 그에 이르기를, 정축년 10월 어느 날에 내가 밀성( 密 城 )에서 경산( 京 山 )으로 오던 도중에 답계역( 踏 溪 驛 )에서 자는데, 꿈에 칠장복( 七 章 服 제왕의 의복)을 입은 신인이 근심된 빛을 하고 와서 스스로 말하기를, 나는 초 회 왕( 楚 懷 王 )의 손자인 심( 心 )인데, 서초패왕( 西 楚 霸 王 항우)에게 피살되어 침강( 江 )에 버림을 받았다. 하고서, 그대로 홀연히 사라 졌다. 내가 놀라 깨어서 생각하기를, 초 회왕은 남초( 南 楚 )의 사람이요, 나는 동이( 東 夷 )의 사람이며, 남초는 거리가 여기서 만여 리나 될 뿐 아니라, 세대로 말한다 하더라도 천 년이 넘었는데, 이제 와서 꿈에 보이니 이것이 무슨 징조인가. 하고, 또 사기를 상 고하여 보니, 의제를 강에 던졌다는 말은 없으니, 아마도 항우가 사람을 시켜 몰래 죽이고 그 시체를 강물에 던진 것이었던가. 그것 은 알 수 없다. 드디어 글을 지어 조상한다. 오직 하늘이 사물의 법칙을 제정하여 사람에게 주었으니, 누가 사대( 四 大 ) 오상( 五 常 )의 존귀함을 알지 못하겠는가. 중국에는 풍요하고 이적( 夷 狄 )에는 인색할 이 없으니 어찌 옛날에는 있었고 지금인들 없겠는가. 그러므로 나는 동이 사람이며, 또 천 년이나 뒤에 났지마는, 공손히 초 나라의 회왕에게 조상하노라. 옛날 조룡( 祖 龍 진시황)이 어금니와 뿔( 牙 角 무력)을 희롱할 적에 사해의 파도가 크고 거칠었었다. 비록 전유추예( 鮪 鰍 鯢 철갑상어ㆍ다랑어ㆍ미꾸라지ㆍ도롱뇽) 같은 잔 물 고기도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고 그물에서 새어 나려고 몸부림친다. 그때 육국( 六 國 )의 유손[ 遺 祚 ]들은 결딴나고 쫓기어 겨우 평민되 는 것을 면하였다. 양( 梁 )은 남쪽 나라 대장의 후예로서 고기와 여우의 뒤를 이어 거사( 擧 事 )하였다. 왕을 구해 얻어서 백성들의 바 람을 따랐고 웅역( 熊 繹 초 나라 시조)의 제사 없던 것을 이었도다. 하늘의 옥새를 쥐고 남쪽을 향하고 앉으니 천하에 진실로 우씨( 芋 氏 초 나라 임금의 성)보다 높은 이 없었다. 장자( 長 者 )를 보내어 관중( 關 中 )에 먼저 들어가게 하였으니, 그 역시 그의 인의( 仁 義 )를 볼 수 있었다.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자 마음대로 관군( 冠 軍 총대장 송의( 宋 義 ))을 죽였으니, 어찌 먼저 잡아 도끼날에 피 묻히지 않았던가. 슬프다. 대세가 그렇지 못하였으니 나는 더욱 왕에게 황구하게 여기는 바이라, 도리어 그들에게 식혜나 초와 같 이 먹히고 말았으니 과연 천도가 거꾸로 되는도다. 침산( 山 )이 우뚝 하늘을 찌를 듯, 태양빛 어둑어둑 저물어가고, 침강( 江 )은 주야로 흘러흘러 물결이야 일어나건만 다시 오진 못하도다. 하늘같이 깊고 땅같이 오래된 한 언제나 다할쏜가. 혼백이 이제까지 아직 도 방랑하며 떠도누나. 나의 마음이 쇠나 돌이라도 뚫기로 왕이 문득 내 꿈속에 나타났다. 자양( 紫 陽 주자)의 노련한 붓을 본뜨니 마 음과 같지 아니하여 근심된다. 구름 같은 술잔 들어 땅에 부으며 영령( 英 靈 )이 와서 흠향( 歆 享 )하기 바로옵네. 하였으니, 그 말한, 조룡( 祖 龍 )이 어금니와 뿔을 희롱한다. 하였는데, 조룡은 곧 진시황인데, 종직은 진시황을 세조에게 비기었다. 또, 왕을 구해 얻어 백성들의 바람을 따랐다. 하였는데, 왕은 초 회왕( 楚 懷 王 )의 손자 심( 心 )이다. 처음에 항량( 項 梁 )이 진 나라를 치고 손자 심 ( 心 )을 얻어서 의제로 삼고자 하였으니, 종직이 제를 노산( 魯 山 )에 비긴 것이다. 또,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자가 마음 대로 관군을 죽였다. 한 것은 종직이 승냥이처럼 사납고 이리처럼 탐하는 것으로 세조를 지목한 것이고, 마음대로 관군을 죽였다 함 은 세조가 김종서 죽인 것을 지목한 것이다. 또 말한 어찌 먼저 잡아서 도끼에 피 묻히지 않았는가. 함은, 종직이 노산이 어찌하 여 세조를 잡지 않았는가라고 말하는 것이요, 또, 식혜나 초처럼 도리어 먹혔다. 는 것은 종직이 노산이 세조를 잡지 아니하고 도 리어 식혜나 초처럼 세조에게 먹혔다는 말이다. 또 자양( 紫 陽 )의 노필( 老 筆 )을 본떠서 글을 쓰려고 하나, 마음과 같지 아니하여, 근 심이 된다. 는 것은, 김종직이 주자( 朱 子 )로 자처하여, 그 마음에 이 부( 賦 )를 지어서 강목( 綱 目 ) 의 필법에 비긴 것이다. 김일손 ( 金 馹 孫 )이 그 부를 찬미하여 말하기를, 충성된 울분을 붙였다. 하였으니, 생각하면, 우리 세조대왕은 국가가 위태하고 의심스러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34

운 때를 당하여 간신들이 난리를 꾸며서 화의 기미가 거의 터질 지경이었으므로, 역도를 주제( 誅 除 )하여 나라가 위태하다가 다시 안 정되어 자손이 계승하여 오늘에까지 왔으니, 그 공업이 높고 높아 덕망이 백왕( 百 王 )의 으뜸이었는데, 뜻밖에 종직이 그 문도와 더불 어 성덕을 기롱하고, 심지어는 김일손으로 하여금 역사까지 거짓 꾸미게 하였으니, 어찌 일조일석의 일이겠는가. 몰래 불신( 不 臣 )의 마음을 품고 삼조( 三 朝 )를 내리 섬긴 것이다. 내가 이제 생각하니, 나도 모르게 처참하고 황송해진다. 그들의 형명( 刑 名 )을 정하여 아 뢰이다. 하였다. 7월 27일에 크게 사면하는 교지를 반포하기를, 삼가 생각건대, 우리 세조 혜장대왕( 世 祖 惠 莊 大 王 )은 신무하신 자 질로 국가가 위태롭고 의심스럽고 여러 간신들이 도사려 차지하고 있는 때를 당하시어, 깊은 생각과 밝은 결단으로 화란을 가라앉히 시어, 천명과 인심이 저절로 귀속된 바가 있었다. 성덕신공( 聖 德 神 功 )이 높이 백왕의 으뜸이 되시고, 조종에서 하기 어려운 일을 더 욱 빛나게 하였고, 자손을 도와 편안히 하는 계책을 끼쳐 주었으므로 계계승승하여 오늘까지 이르렀는데, 뜻밖에 간신 김종직( 金 宗 直 )이 못된 마음을 품고 가만히 당류를 모아 흉모를 성취시키려 한 지 벌써 날이 오래되었다. 항적( 項 籍 )이 의제( 義 帝 )를 죽이려는 일에 가탁하여, 문자를 만들어 선왕을 욕하고 헐뜯었으니 하늘에 넘친 죄악은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대역으로 논의되어 관을 쪼개 어 시체를 자르고 그 도당인 김일손( 金 馹 孫 )ㆍ권오복( 權 五 福 )ㆍ권경유( 權 景 裕 )는 간악한 붕당으로서 같은 말로 서로 도와가며 그 글 을 칭찬하여 충성된 의분의 격발된 것이라 하였을 뿐 아니라, 사초( 史 草 )에 써서 오래도록 전하려고 하였으니 그 죄가 김종직과 같은 것이다. 모두 능지처참하게 하고, 김일손은 또 이목( 李 穆 )ㆍ허반( 許 盤 )ㆍ강겸( 姜 謙 )들과 선왕이 하지 않은 일을 거짓 꾸미어 말을 만 들어 전파하고, 또 사초에 썼으니, 이목과 허반은 다 참형에 처하고, 강겸은 형장 1백 대에 그 가산은 몰수하고 변방의 노비로 삼으 며, 표연말( 表 沿 沫 )ㆍ홍한( 洪 翰 )ㆍ정여창( 鄭 汝 昌 )ㆍ무풍부정( 茂 豐 副 正 ) 총( 摠 ) 등은 난언( 亂 言 )을 지었으며, 강경서( 姜 景 叙 )ㆍ이수공 ( 李 守 恭 )ㆍ정희량( 鄭 希 良 )ㆍ정승조( 鄭 承 祖 ) 등은 난언을 알고도 관에 고하지 않았으니, 모두 형장 1백 대에 3천 리 밖으로 귀양보내 고, 이종준( 李 宗 準 )ㆍ최보( 崔 溥 )ㆍ이원( 李 )ㆍ이주( 李 冑 )ㆍ김굉필( 金 宏 弼 )ㆍ박한주( 朴 漢 柱 )ㆍ임희재( 任 熙 載 )ㆍ강백진( 康 伯 珍 )ㆍ이계 맹( 李 繼 孟 )ㆍ강혼( 姜 渾 )은 모두 김종직의 문도로서 붕당을 만들어 서로 칭찬하고, 혹은 국정( 國 政 )을 기롱하며 때로는 시사( 時 事 )를 조롱하였으므로, 희재와 이주는 형장 1백 대에 극변으로 부처하고, 이종준ㆍ최보ㆍ이원ㆍ김굉필ㆍ박한주ㆍ강백진ㆍ이계맹ㆍ강혼은 모두 형장 80대를 때리고 원방에 부처하라. 귀양보낸 사람들은 모두 봉수대( 烽 燧 臺 )에서 뜰에 불피우는 부역을 정하고, 수사관( 修 史 官 )으로 있으면서 김일손의 사초를 보고도 즉시 아뢰지 아니한 어세겸( 魚 世 謙 )ㆍ이극돈( 李 克 墩 )ㆍ유순( 柳 徇 )ㆍ윤효순( 尹 孝 舜 )들은 파 직하고, 홍귀달( 洪 貴 達 )ㆍ조익정( 趙 益 貞 )ㆍ허침( 許 琛 )ㆍ안침( 安 琛 ) 등은 좌천시켰다가 그 죄의 경중에 따라 모두 이미 처결하고, 삼가 이 사유를 종묘 사직에 고하였다. 생각하면, 나 같은 덕없는 우둔한 사람으로 간당을 추려서 제거하고 보니, 떨리고 두려운 생각이 깊으면서 한편 기쁘고 다행스런 마음 또한 간절하다. 이에 이번 7월 27일 새벽 이전에 강도와 절도, 그리고 강상( 綱 常 )죄인 이외에는 기결정( 旣 決 定 )이건 미결정이던 간에 모두 용서해 줄 것이니, 감히 교지 있기 전 일을 가지고 서로 전해 말하는 자가 있다면 그 죄로 써 죄를 다스릴 것이다. 슬프다. 인신은 역적하려는 마음이 없어야 하므로, 이미 무도한 죄를 처벌하였고, 과실과 죄있는 이를 용서 해주고 너그럽게 처리해야 하므로 의당 유신의 은혜에 젖도록 한 것이다. 그러므로 이에 교시를 내리나니, 모두 다 알 줄 믿는다. 하였다. 해동야언 2 무오사화 사적 ( 戊 午 士 禍 事 跡 ) 35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박융 2009.04.21 00:51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11월 25일(임오) 사냥하라고 장연에 보낸 내관 황도 등을 사간원 정언의 진언에 따라 소환하다 황도( 黃 稻 ) 등을 소환( 召 還 )하였다. 사간원( 司 諫 院 ) 정언( 正 言 ) 박융( 朴 融 )이 진언( 進 言 )하였다. 지금 내관( 內 官 ) 황도 등이 개와 말을 가지고 장연( 長 淵 )에 가서 사냥하는데, 풍해도에 실농( 失 農 )이 더욱 심하니, 불가하지 않습니 까? 임금이 말하였다. 개와 말은 여기에 있더라도 먹이가 있으니, 비록 그곳에 가더라도 더하고 덜할 것이 없다. 박융이 말하였다. 개와 말의 먹이는 그러하지마는 개와 말을 조련하고 연습시키는 때에는 장연( 長 淵 ) 사람이 어찌 수고롭지 않겠습니까? 임금이 말하였다. 말은 무용( 武 用 )에 이바지하는 것인데, 유생( 儒 生 )의 말 같으면 조련시키는 폐단이 없지마는, 봄가을로 강무( 講 武 )하는 것을 폐지할 수 없기 때문에 내가 조련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간관의 말[ 言 ]을 따르지 않을 수 없다. 임금이 이에 소환하였다. 원전 1 집 611 면 분류 *왕실-행행( 行 幸 ) / *왕실-국왕( 國 王 ) / *농업-농작( 農 作 ) 태종 11년 신묘(1411, 영락 9) -박융 36

심암유고( (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2009.04.21 00:47 행력 왕력 서기 간지 연호 연령 기사 정조 20 1796 병진 嘉 慶 1 1 4월 7일, 태어나다. 순조 10 1810 경오 嘉 慶 15 15 大 丘 徐 氏 徐 俊 輔 의 딸과 혼인하다. 순조 12 1812 임신 嘉 慶 17 17 6월, 모친상을 당하다. 순조 16 1816 병자 嘉 慶 21 21 司 馬 試 에 합격하다. 순조 22 1822 임오 道 光 2 27 3월, 金 應 根 과 驪 州 의 神 勒 寺, 大 老 祠 등을 유람하다. 순조 24 1824 갑신 道 光 4 29 舍 人 巖, 島 潭, 華 陽 洞 등을 유람하다. 순조 26 1826 병술 道 光 6 31 11월, 柑 製 에 首 席 하여 殿 試 에 直 赴 되다. 순조 27 1827 정해 道 光 7 32 순조 30 1830 경인 道 光 10 35 4월, 문과에 합격하다. 규장각 대교가 되다. 9월, 부친상 을 당하다. 陞 六 하고 홍문관 부교리가 되다. 8월, 迎 勅 問 禮 官 에 差 任 되 어 義 州 에 다녀오다. 순조 31 1831 신묘 道 光 11 36 규장각 직각, 홍문관 응교가 되다. 순조 32 1832 임진 道 光 12 37 4월, 의정부 검상이 되다. 7월, 통정대부에 오르다. ~ ~ ~ ~ ~ ~ ~ 安 岳 郡 守 가 되다. 순조 34 1834 갑오 道 光 14 39 10월, 성균관 대사성이 되다. 헌종 1 1835 을미 道 光 15 40 10월, 冬 至 副 使 로 燕 京 에 가다. 헌종 2 1836 병신 道 光 16 41 3월, 이조 참의가 되다. 헌종 3 1837 정유 道 光 17 42 헌종 4 1838 무술 道 光 18 43 6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11월, 예조 참판으로서 太 祖 의 影 幀 舊 本 을 가지러 咸 鏡 道 永 興 의 濬 源 殿 에 다녀오다. 1월, 이조 참판이 되다. 8월, 同 知 春 秋 館 事 로서 純 祖 實 錄 의 봉안을 위해 太 白 山 史 庫 에 다녀오다. 10월, 황해도 관찰사가 되다. 헌종 7 1841 신축 道 光 21 46 1월, 홍문관 부제학이 되다. 10월, 이조 참판이 되다. 헌종 10 1844 갑진 道 光 24 49 도승지가 되다. 헌종 11 1845 을사 道 光 25 50 2월, 대사헌이 되다. 5월, 공조 판서가 되다. 7월, 예문 관 제학이 되다. 9월, 한성부 판윤이 되다. 12월, 형조 판서가 되다. 헌종 13 1847 정미 道 光 27 52 9월, 호조 판서가 되다. 헌종 14 1848 무신 道 光 28 53 4월, 평안도 관찰사가 되다. 헌종 15 1849 기유 道 光 29 54 11월, 文 衡 이 되다. 심암유고(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37

철종 1 1850 경술 道 光 30 55 철종 2 1851 신해 咸 豐 1 56 철종 3 1852 임자 咸 豐 2 57 2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館 伴 으로 差 下 되다. 3월, 병조 판 서가 되다. 1월, 이조 판서가 되다. 2월, 다시 文 衡 이 되었다가 규장각 제학이 되다. 7월, 이조 판서가 되다. 10월, 판의금부사 가 되다. 4월, 예조 판서, 호조 판서가 되다. 8월, 李 若 愚, 徐 箕 淳, 金 學 性 등과 함께 日 講 官 으로 差 下 되다. 철종 4 1853 계축 咸 豐 3 58 3월, 판의금부사가 되다. 6월, 우의정이 되다. 철종 6 1855 을묘 咸 豐 5 60 철종 8 1857 정사 咸 豐 7 62 3월, 桓 祖 에게 酌 獻 禮 를 올리기 위해 咸 興 에 다녀오다. 10 월, 우의정을 사직하다. 2월, 다시 우의정이 되다. 윤5월, 熙 政 堂 의 次 對 에서 虛 司 果 의 積 滯 를 疏 通 시킬 방안을 아뢰다. 8월, 摠 護 使 에 임명 되다. 11월, 涵 仁 亭 의 次 對 에서 式 年 마다 道 臣 에게 추천하 게 하여 人 材 를 찾아낼 것을 청하다. 철종 9 1858 무오 咸 豐 8 63 4월, 좌의정이 되다. 5월, 任 憲 晦 를 천거하다. 철종 13 1862 임술 同 治 1 67 8월, 熙 政 堂 의 次 對 에서 三 政 의 改 革 에 대해 아뢰다. 고종 1 1864 갑자 同 治 3 69 6월, 영의정이 되다. 고종 2 1865 을축 同 治 4 70 耆 社 에 들어가다. 고종 6 1869 기사 同 治 8 74 致 仕 하다. 고종 7 1870 경오 同 治 9 75 10월 8일, 졸하다. 11월, 洪 州 金 井 里 에 장사 지내다. 고종 11 1874 갑술 同 治 13 12월, 文 獻 으로 諡 號 를 내리다. 권28은 序 42편이다. 壽 序 로는 豐 恩 府 院 君 趙 萬 永, 雲 石 趙 寅 永, 外 舅 徐 俊 輔, 游 觀 金 興 根, 金 錫 禧, 金 在 顯 등을 위해 지어 준 것이 있고, 文 集 序 로는 朴 天 翊 의 松 隱 集, 金 守 訒 의 九 峯 稿, 金 祖 淳 의 楓 集, 陳 의 梅 湖 集, 李 選 의 芝 湖 集, 李 彦 适 의 聾 齋 遺 稿, 李 明 五 의 泊 翁 集, 南 秉 哲 의 圭 齋 集, 蘇 斗 山 의 月 洲 集, 姜 의 對 山 集 등에 대한 것이 있다. 이 밖에 書 辛 巳 錄 序 는 醫 員 任 德 卿 이 1821년 전염병이 창궐했을 때에 鍼 術 로 많은 사람을 救 濟 한 사실을 기록한 글에 써 준 것이고, 風 謠 三 選 序 는 劉 在 建, 崔 景 欽 등이 19세기 초ㆍ중반에 활약한 委 巷 詩 人 의 詩 를 모아 엮은 風 謠 三 選 에 쓴 序 文 이며, 時 憲 紀 要 序 는 조선 후기의 천문학자 南 秉 吉 이 時 憲 法 의 요점을 기술한 天 文 書 인 時 憲 紀 要 에 대해 쓴 서이다. 심암유고( 心 庵 遺 稿 ))- 朴 天 翊 의 松 隱 集 38

목은시고( ( 牧 隱 詩 藁 ) 제31권 시( ( 詩 )서울에) 돌아온 밀성( (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 朴 先 生 )을) 방문하다. 2009.04.18 22:45 서울에 돌아온 밀성(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朴 先 生 )을 방문하다.송은,도은 선생을 칭 함.문집 참조 벽도화 만발한 그늘 아래 달이 황혼에 떠 있을 때 / 碧 桃 花 下 月 黃 昏 긴 가지 다투어 휘어잡자 눈발이 술잔에 흩뿌렸지 / 爭 挽 長 條 雪 洒 樽 당시에 함께 노닐던 분 지금은 몇이나 남아 있나 / 當 日 同 遊 幾 人 在 애달파라 그림자 끌고 나 혼자 다시 찾아가다니 / 自 怜 携 影 更 敲 門 바닷가에서 돌아온 분 귀밑머리 희끗희끗 / 海 上 歸 來 鬢 二 毛 모래톱 물새 신세 다 함께 표표히 떠도누나 / 沙 鷗 身 世 共 飄 飄 정원의 꽃나무들 새로 심은 것 많은 속에 / 園 中 花 木 多 新 種 그래도 소나무만은 역시 푸른빛 여전하네 / 只 有 長 松 獨 後 凋 흑사의 긴 냇물이 섬돌을 휘돌아 흐르는지라 / 黑 寺 長 溪 遶 砌 流 주인이 그래서 영남으로만 노닐러 가시나 봐 / 主 人 偏 愛 嶺 南 遊 돌아오니 알던 이들도 예전 모습과는 딴판 / 歸 來 故 舊 非 前 日 하기야 연소한 나도 지금 백발이 됐으니까 / 年 少 吾 今 亦 白 頭 병들어 한가히 거하며 왕래도 끊었나니 / 病 裏 閑 居 絶 往 來 창엔 가득 산색이요 뜰엔 가득 이끼로세 / 滿 山 色 滿 庭 苔 외모는 변했건만 가난한 살림은 여전해서 / 形 容 改 盡 貧 如 舊 술잔 드는 대신에 새 시만 자꾸 짓는다오 / 只 把 新 詩 當 酒 杯 [주D-001]긴 가지 흩뿌렸지 : 예전에 이 집에서 가졌던 술자리에서 복사꽃이 하얀 눈처럼 우수수 떨어지는 정취를 맛보 았다는 말이다. 소식이 달밤에 살구꽃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지은 시에 꽃 사이에 술자리 벌이니 맑은 향기 발하는데, 다투어 긴 가지 휘어잡으니 꽃잎이 눈처럼 떨어지네.[ 花 間 置 酒 淸 香 發 爭 挽 長 條 落 香 雪 ] 라는 구절이 나온다. 蘇 東 坡 詩 集 卷 10 月 夜 與 客 飮 酒 杏 花 下 [주D-002]흑사(( 黑 寺 ) : 청기와로 지붕을 덮은 사찰을 민간에서 일컫는 말이다 목은시고( 牧 隱 詩 藁 ) 제31권 시( 詩 )서울에 돌아온 밀성( 密 城 )의 두 분 박 선생( 朴 先 生 )을 방문하다. 39

순조 16년 병자(1816, 가경 21) 7월 2일(기유) 부사 박경신( ( 朴 慶 新 ), 고 현 감 박경전( (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 朴 慶 胤 ) 2009.04.18 22:36 예조의 청에 따라 정광로 이경대의 효행에 대해 정문을 세워 주다. 예조에서 영남 어사의 별단에 따라 장흥( 長 興 )의 고( 故 ) 학생( 學 生 ) 정광로( 鄭 光 露 ), 상주( 尙 州 ) 아전 이경대( 李 慶 大 )의 효행( 孝 行 ), 진주( 晉 州 ) 사인 성사해( 成 師 海 )의 아내 정씨( 鄭 氏 ), 사천( 泗 川 ) 사인 하용관( 河 龍 寬 )의 아내 김씨( 金 氏 ), 동래( 東 萊 ) 장교( 將 校 ) 손중일( 孫 重 一 )의 아 내 강성( 姜 姓 )의 열행( 烈 行 )에 대해 모두 정문( 旌 門 )을 세워 줄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정광로는 바로 단종조 때 상신( 相 臣 ) 정분( 鄭 )의 아들로 화를 만나 거짓으로 미쳐서 자취를 숨겨 제사지낼 자손을 보존한 자이다. 이조에서 어사의 별도 단자에 따라 경상도 사람 고 부사 박경신( ( 朴 慶 新 ), 고 현감 박경전(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 朴 慶 胤 ) 등에게 증직( ( 贈 職 )할) 것을 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이는 한 가문에 세 사람이 왜적을 토벌하여 공이 드러났기 때문이었다. 원전 48 집 100 면 분류 *행정-지방행정( 地 方 行 政 ) / *인사-관리( 管 理 ) / *사상-토속신앙( 土 俗 信 仰 ) 순조 16년 병자(1816, 가경 21) 7월 2일(기유) 부사 박경신( 朴 慶 新 ), 고 현감 박경전( 朴 慶 傳 ), 고 첨정 박경윤( 朴 慶 胤 ) 40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을유) 박경인( (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2009.04.18 22:32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예조에서 각 식년( 式 年 )의 경외( 京 外 )의 충 효 열의 문서 를 정부( 政 府 )에 보고했는데, 등급을 나누어 초계( 抄 啓 )하였다. 충신 정려질( 忠 臣 旌 閭 秩 ) 보은( 報 恩 )의 고 부호군 이명백( 李 命 百 )은 문렬공( 文 烈 公 ) 조헌( 趙 憲 )의 문인( 門 人 )으로 왜변( 倭 變 ) 때 창의( 倡 義 ) 하여 보은을 지키다가 적암( 赤 巖 )의 전투에서 죽었고, 청산( 靑 山 )의 고 주부 박문강( 朴 文 綱 )은 정축년 노변( 虜 變 ) 때 충청도 관찰사 정세규 ( 鄭 世 規 )를 따라 음죽( 陰 竹 )에서 죽었다. 효자 정려질( 孝 子 旌 閭 秩 ) 서울 사는 고 참봉 오재능( 吳 載 能 ) 고 교관( 敎 官 ) 홍석보( 洪 錫 普 ) 고 현령 홍헌유( 洪 獻 猷 ) 고 도정 윤면원( 尹 勉 遠 ) 고 참판 유의( 柳 誼 ) 고 학생 장후근( 張 厚 根 ) 고 생원 이광유( 李 光 裕 ) 고 학생 김치형( 金 致 亨 ) 고 생원 홍헌모( 洪 憲 謨 ), 경주부( 慶 州 府 ) 고 사인( 士 人 ) 허호( 許 浩 ), 개성부( 開 城 府 ) 고 사인 한광겸( 韓 光 謙 ), 여주( 驪 州 ) 고학생 구석의( 具 錫 儀 ), 영동( 永 同 ) 고 통덕랑( 通 德 郞 ) 이 현규( 李 顯 揆 ), 목천( 木 川 ) 고 사인 김수필( 金 壽 弼 ), 옥구( 沃 溝 ) 고 양인( 良 人 ) 정시손( 鄭 時 孫 ), 전주( 全 州 ) 고 한량 백행량( 白 行 良 ), 상주( 尙 州 ) 고 사인 홍도운( 洪 道 運 ), 금산( 金 山 ) 고 학생 조응방( 曹 應 邦 ), 안동( 安 東 ) 고 학생 금홍달( 琴 弘 達 ), 고 학생 이한오( 李 漢 伍 ), 거제( 巨 濟 ) 고 학 생 정유( 鄭 游 ), 평산( 平 山 ) 고 동지( 同 知 ) 조만길( 趙 萬 吉 ), 평양( 平 壤 ) 고 사인 김취의( 金 就 義 ), 위원( 渭 原 ) 고 사인 강건항( 姜 建 恒 ), 안변( 安 邊 )장교 신만화( 申 萬 和 ), 함흥( 咸 興 ) 고 부사 위광익( 魏 光 翼 )이다. 열녀 정려질( 烈 女 旌 閭 秩 ) 서울 사는 고 사인 강언성( 姜 彦 成 )의 처 이씨( 李 氏 ) 고 학생 이원식( 李 元 植 )의 처 최씨( 崔 氏 ) 고 통덕랑 김노직 ( 金 魯 直 )의 처 송씨( 宋 氏 ) 고 교관 홍석보( 洪 碩 普 )의 처 조씨( 曹 氏 ) 고 학생 이철운( 李 轍 運 )의 처 유씨( 柳 氏 ) 고 생원 홍헌모( 洪 憲 謨 )의 처 윤씨 고 사인 임우전( 林 雨 田 )의 처 정씨( 鄭 氏 ) 고 한량 김유항( 金 有 恒 )의 처 신씨( 辛 氏 )와 고 학생 장후근( 張 厚 根 )의 처 이씨 고 군수 정 문재( 鄭 文 在 )의 처 김씨 무의공( 武 毅 公 ) 조심태( 趙 心 泰 )의 처 송씨 고 생원 정우영( 鄭 祐 榮 )의 처 윤씨 고 헌납 정지원( 丁 志 元 )의 처 이씨 고 목사 홍술조( 洪 述 祖 )의 처 이씨 고 생원 조의철( 趙 宜 喆 )의 처 이씨 고 학생 서경보( 徐 慶 輔 )의 처 김씨 고 현령 남성로( 南 省 老 )의 처 조씨( 趙 氏 ) 양인 김세봉( 金 世 鳳 )의 처 박성( 朴 姓 ) 고 학생 박종건( 朴 宗 謇 )의 처 김씨 고 동지 이사룡( 李 思 龍 )의 처 고씨( 高 氏 ) 고 학생 이장철( 李 章 喆 )의 처 송씨, 개성부 고 학생 진득충( 秦 得 忠 )의 처 임씨( 林 氏 ), 고 사인 이영필( 李 英 弼 )의 처 김씨와 그의 종질( 從 姪 )인 이응번 ( 李 應 蕃 )의 처 김씨, 영평( 永 平 ) 고 학생 김순인( 金 順 仁 )의 처 변씨( 邊 氏 ), 안산( 安 山 ) 고 사인 이도용( 李 道 容 )의 처 김씨, 적성( 積 城 ) 고 학생 경육( 慶 )의 처 남씨( 南 氏 ), 파주( 坡 州 ) 고 사인 김한규( 金 漢 奎 )의 처 조씨( 趙 氏 ), 통진( 通 津 ) 고 주부 윤재익( 尹 在 益 )의 처 이씨, 과천( 果 川 ) 고 학생 홍유룡( 洪 有 龍 )의 처 전씨( 全 氏 ), 양주( 楊 州 ) 고 사인 홍선영( 洪 善 泳 )의 처 조씨( 曹 氏 ), 여주( 驪 州 ) 고 학생 이광모( 李 光 模 )의 처 박 씨 고사인 권순건( 權 順 健 )의 처 이씨, 연산( 連 山 ) 고 사인 백상준( 白 尙 準 )의 처 송씨, 서원( 西 原 ) 고 사인 오세환( 吳 世 煥 )의 처 김씨, 목천 ( 木 川 ) 고 사인 남섭( 南 燮 )의 처 김씨, 공주( 公 州 ) 고 부사 유회원( 柳 晦 源 )의 처 김씨와 고 사인 이익선( 李 翼 善 )의 처 한씨( 韓 氏 ), 회덕( 懷 德 ) 고 충목공( 忠 穆 公 ) 이시직( 李 時 稷 )의 처 이씨, 홍산( 鴻 山 ) 고 처녀 윤씨, 익산( 益 山 ) 고 사인 권시하( 權 時 夏 )의 처 조씨( 趙 氏 ), 창평( 昌 平 ) 고 사인 양학언( 梁 學 彦 )의 처 이씨, 남평( 南 平 ) 고 양인 박처준( 朴 處 俊 )의 처 김성( 金 姓 ), 함평( 咸 平 ) 고 부장( 部 將 ) 윤해( 尹 海 )의 처 강씨( 康 氏 ) 와 고 사인 김석규( 金 碩 圭 )의 처 진씨( 陳 氏 ), 무안( 務 安 ) 고 사인 서익천( 徐 益 天 )의 처 정씨( 鄭 氏 ), 남원( 南 原 ) 고 사인 김익( 金 )의 처 이 씨, 고부( 古 阜 ) 고 사인 김방수( 金 芳 洙 )의 처 정씨( 丁 氏 ), 동복( 同 福 ) 고 양인 정쌍룡( 鄭 雙 龍 )의 처 이성( 李 姓 ), 창녕( 昌 寧 ) 고 사인 성효열( 成 孝 悅 )의 처 손씨( 孫 氏 ), 경주( 慶 州 ) 관노( 官 奴 ) 현옥( 顯 玉 )의 처 황아( 黃 娥 ), 안의( 安 義 ) 고 사인 김세적( 金 世 績 )의 처 허씨( 許 氏 ), 영덕( 盈 德 ) 고 사인 신길환( 申 吉 煥 )의 처 권씨( 權 氏 ), 선산( 善 山 ) 사노( 私 奴 ) 복재( 卜 才 )의 처 김녀( 金 女 ), 밀양( 密 陽 ) 고 사인 이석린( 李 錫 麟 )의 처 박씨, 통천( 通 川 ) 고 사인 임붕원( 林 鵬 遠 )의 처 고씨( 高 氏 ), 원주( 原 州 ) 고 사인 권유( 權 愉 )의 처 원씨( 元 氏 ), 금성( 金 城 ) 고 사인 배정로( 裵 廷 老 )의 처 진씨( 秦 氏 ), 금화( 金 化 ) 고 사인 이한유( 李 漢 裕 )의 처 한씨( 韓 氏 ), 횡성( 橫 城 ) 고 사인 김광한( 金 光 漢 )의 처 원씨( 元 氏 ), 정선( 旌 善 ) 고 공 생( 貢 生 ) 고지걸( 高 志 屹 )의 처 김성( 金 姓 ), 삼척( 三 陟 ) 고 공생 김윤근( 金 允 瑾 )의 처 남성( 南 姓 ), 재령( 載 寧 ) 고 업무( 業 武 ) 손언장( 孫 彦 章 )의 처 한씨( 韓 氏 ), 장연( 長 淵 ) 고 사인 박한성( 朴 漢 成 )의 처 김씨, 서흥( 瑞 興 ) 고 사인 신재순( 申 在 舜 )의 처 유씨( 柳 氏 ), 해주( 海 州 ) 고 영리( 營 吏 ) 지상함( 池 相 涵 )의 처 김성( 金 姓 ), 의주( 義 州 ) 고 사인 백광련( 白 光 鍊 )의 처 최씨, 곽산( 郭 山 ) 고 학생 지덕룡( 池 德 龍 )의 처 김씨, 삼등( 三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박경인(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41

登 ) 고 통덕랑 주평( 朱 坪 )의 처 김씨, 강계( 江 界 ) 고 학생 김성삼( 金 省 三 )의 처 김씨, 평양( 平 壤 ) 고 사인 김이곤( 金 理 坤 )의 처 이씨, 개천( 价 川 ) 고 사인 이일초( 李 日 初 )의 처 김씨, 영흥( 永 興 ) 고 학생 김왕추( 金 旺 秋 )의 처 장씨( 張 氏 ), 함흥( 咸 興 )의 고 학생 이종눌( 李 宗 訥 )의 처 김 씨 고 학생 한명갑( 韓 命 甲 )의 처 진씨( 秦 氏 ) 고 급제( 及 第 ) 유혜중( 柳 惠 重 )의 처 이씨, 삼수( 三 水 ) 전 권관( 權 管 ) 김성정( 金 聖 鼎 )의 처 박 씨, 부령( 富 寧 ) 출신( 出 身 ) 이원배( 李 元 培 )의 자부( 子 婦 ) 장씨( 張 氏 ) 양씨( 楊 氏 ), 이원( 利 原 ) 고 무인 연재협( 延 再 協 )의 처 엄씨( 嚴 氏 )이다. 효부 정려질( 孝 婦 旌 閭 秩 ) 서울에 사는 고 현령 홍헌유( 洪 獻 猷 )의 처 이씨, 예천( 禮 泉 ) 고 사인 이진헌( 李 鎭 憲 )의 처 권씨( 權 氏 )이다. 충신 증직질( 忠 臣 贈 職 秩 ) 영동( 永 同 )의 고 목사( 牧 使 ) 이수( 李 洙 )는 기사년 곤전( 坤 殿 )께서 손위( 遜 位 )하셨을 때 벼슬하지 않고 스스로 폐 ( 廢 )했던 사람이다. 청도( ( 淸 道 )의) 고 만호( ( 萬 戶 ) 박경선( ( 朴 慶 宣 ) 고 장사랑( ( 將 仕 郞 ) 박경인( 朴 慶 因 )은 왜변( ( 倭 變 ) 때 의병을 일으켜 전사( ( 戰 死 ) 했던 사람이다. 안의( 安 義 )의 고 사인 김우석( 金 虞 錫 )은 무신년 역적 정희량( 鄭 希 亮 )의 변 때 창의( 倡 義 )하여 역적을 잡았던 사 람이다. 대구( 大 丘 )의 고 부장( 副 將 ) 허득량( 許 得 良 )과 그의 종제( 從 弟 ) 고 정( 正 ) 허복량( 許 復 良 )은 정축년 노변( 虜 變 ) 때 경상 병사 민영( 閔 )을 따라 쌍령( 雙 嶺 )에서 전사했던 사람이다. 고 현령 최계( 崔 誡 )와 그 아우 최인( 崔 認 )과 그 종자( 從 子 ) 최동보( 崔 東 輔 )는 왜변 때 창의하 여 공을 쌓은 사람이다. 밀양( 密 陽 )의 고 참의( 參 議 ) 손조서( 孫 肇 瑞 )는 단묘( 端 廟 ) 때 육신( 六 臣 )의 일이 있고 난 뒤 뉘우치고 스스로 폐기( 廢 棄 )했던 사람이다. 상주( 尙 州 )의 고 처사( 處 士 ) 채득기( 蔡 得 沂 )는 정축년에 남한 산성에서 내려온뒤 과거를 보지 않고 스스로 깨끗함을 지켰 던 사람이다. 효자 증직질( 孝 子 贈 職 秩 ) 서울 사는 고 지사( 知 事 ) 황운하( 黃 運 河 ) 고 학생 유해균( 柳 海 均 ) 고 남학 교수( 南 學 敎 授 ) 현계정( 玄 啓 楨 ) 고 학생 이혼( 李 混 ) 고 감역( 監 役 ) 김정주( 金 鼎 柱 ) 고 학생 심사정( 沈 師 定 ) 고 사인 홍병오( 洪 秉 五 ) 고 서윤( 庶 尹 ) 홍계서( 洪 啓 瑞 ) 고 동지 ( 同 知 ) 이사룡( 李 思 龍 ), 수원부( 水 原 府 ) 고 참봉( 參 奉 ) 윤형로( 尹 衡 老 ), 양주( 楊 州 ) 고 학생 이삼석( 李 三 錫 ), 장단( 長 湍 ) 고 사인 한광세( 韓 光 世 ), 양천( 陽 川 ) 고 통덕랑 김숭제( 金 嵩 濟 ), 부여( 扶 餘 ) 고 사인 최사백( 崔 賜 百 ), 영동( 永 同 ) 고 사인 최복원( 崔 復 源 ), 목천( 木 川 ) 고 정랑( 正 郞 ) 조명( 趙 銘 ), 공주( 公 州 ) 고 사인 윤박( 尹 搏 ), 서원( 西 原 ) 고 사인 송상휘( 宋 尙 輝 ) 홍귀서( 洪 龜 瑞 ), 진천( 鎭 川 ) 고 통덕랑 정도( 鄭 棹 ), 전주 ( 全 州 ) 고 사인 조대수( 趙 大 壽 ) 이진운( 李 鎭 運 ), 영암( 靈 巖 ) 고 직장( 直 長 ) 신사준( 愼 師 浚 ), 장수( 長 水 ) 고 동지 김성보( 金 聖 輔 ), 능주( 綾 州 ) 고 사인 박헌가( 朴 獻 可 ), 고부( 古 阜 ) 고 사인 송수현( 宋 守 賢 ), 금구( 金 溝 ) 고 사인 송정모( 宋 廷 模 ), 지례( 知 禮 ) 고 사인 이수호( 李 遂 浩 ), 함창 ( 咸 昌 ) 고 사인 조수구( 趙 守 球 ), 고성( 固 城 ) 고 사인 백봉래( 白 鳳 來 ), 영월( 寧 越 ) 고 사인 엄계태( 嚴 啓 泰 ), 강릉( 江 陵 ) 고 사인 신갑동( 辛 甲 東 ) 고 생원 최현민( 崔 顯 珉 ), 성천( 成 川 ) 고 현감 나홍점( 羅 弘 漸 ), 강서( 江 西 )고 학생 한태형( 韓 泰 亨 ), 상원( 祥 原 ) 고 학생 방덕일( 方 德 一 ), 중화( 中 和 ) 고 학생 한창대( 韓 昌 岱 ), 용강( 龍 岡 ) 고 사인 김진수( 金 震 秀 ), 삼화( 三 和 ) 고 사인 김처겸( 金 處 謙 )이다. 원전 48 집 15 면 분류 *인사-관리( 管 理 ) 순조 12년 임신(1812, 가경 17) 3월 13일(을유) 박경인( 朴 慶 因 ).예조에서 각 식년 경외의 충 효 열의 문서를 보고하다 42

선조 27년 갑오(1594, 만력 22) 3월 25일(계묘 계묘) 박경신 2009.04.18 22:22 비변사에서 경주 등지에서 적과 싸워 공이 있거나 죽은 자들을 시상할 것을 청하다. 비변사가 아뢰기를, 경상도 감사 등이 연속으로 치계한 것을 보면, 울산( 蔚 山 ) 경주( 慶 州 )의 외롭게 살아남은 백성들이 충의에 분발하여 몸을 바 치지 않는 이가 없어서 강적과 날마다 혈전을 벌여 아홉 번 죽더라도 돌아가지 않는다 하니 매우 가긍합니다. 지금 또 밀양 부사 박경신( 朴 慶 新 )이 밀양의 남은 백성 20여 명을 불러 모아 꽤 전공을 세웠다고 하는데, 다른 곳의 백성이 적에게 달라붙는 것을 달갑게 여기고 오래도록 나오지 않는 것과 비교하여 본다면, 차이가 큽니다. 이러한 무리는 조정에서 별도로 융숭하게 장려하여 어여삐 돌보아 주는 뜻을 보인 다음에야 거의 그들의 마음을 위로해 줄 수 있을 것이며 사방 먼 곳에서 소문을 듣는 이도 더욱 귀순할 뜻이 일어나게 될 것입니다. 힘껏 싸워 군공( 軍 功 )이 있는 이는 이미 논상( 論 賞 )하는 중에 있으나 그 나머지 각 인원 등은 특별히 실시할 만한 상이 없으니, 신들의 의사로는 경주 울산 밀양 등처 에 종군한 사람은 모두 10년간 복호( 復 戶 )해주고 영원히 잡역을 면제하며 비변사에게 공명첩문( 空 名 帖 文 )을 만들어 나누어 주게 하고, 동래( 東 萊 ) 장기( 長 ) 기장( 機 張 ) 부산( 釜 山 ) 김해( 金 海 ) 웅천( 熊 川 ) 등처에서 적군의 진중으로부터 스스로 빠져 나 온 이는 모두 복호첩을 줌으로써 조정의 덕의( 德 意 )를 알게 하고 그들의 친부하려는 마음을 더욱 견고하게 하소서. 이것은 조정 에서 하찮은 은혜를 행하여 한 지방의 백성을 수습하는 것이니 관계됨이 적지 않습니다. 그리고 전후로 힘껏 싸우다가 진중에서 죽은 사람은 별도로 기록하되, 만일 처자가 있는 이라면 즉시 잡역을 영원히 면제하여 수 고롭지 않게 하고, 또 장관( 將 官 )으로 하여금 한 곳에 단( 壇 )을 세워 간략하게 탁주( 濁 酒 )와 보리밥으로 초혼제( 招 魂 祭 )를 올려 충혼을 위로하게 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뜻을 경상 감사 및 좌 우 병사 수사와 도원수에게 하유하여 각 장관에게 알려서 일 제히 시행한 뒤에 계문하게 하소서. 하니, 매우 옳다고 답하였다. 원전 22 집 241 면 분류 *인사-관리( 管 理 ) / *군사-군역( 軍 役 ) / *군사-전쟁( 戰 爭 ) / *재정-역( 役 ) / *풍속-예속( 禮 俗 ) 선조 27년 갑오(1594, 만력 22) 3월 25일(계묘) 박경신 43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9월 12일(계해 계해) 삼우정 박경신 2009.04.18 22:19 간원이 황정욱 등의 일과 해주 지역 수령에 대한 가자 개정을 청하다 간원이 황정욱과 황혁 등의 일에 대해 죄줄 것을 청하고, 또 아뢰기를, 거가( 車 駕 )가 머물렀던 본읍( 本 邑 )의 수령을 으레 순서를 뛰어 넘어 승진시킨 데 대해서는 이미 옳지 않다는 의논이 있었습니다. 이번에 옮 겨와서 머무신 지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본도의 감사 병사와 본주( 本 州 )의 목사( 牧 使 ) 판관( 判 官 )에게 일시에 아울러 중가( 重 加 )를 내린 것은 너무 지나칩니다. 감사 유영경( 柳 永 慶 )과 목사 박경신( 朴 慶 新 )은 모두 개정하게 하소서. 병사 조인득( 趙 仁 得 )은 방백( 方 伯 )으로 있을 때 방어( 防 禦 )에 관심을 두지 않아 견고한 성( 城 )을 지키지도 않고 적봉이 이웃 고을에 이르기도 전에 먼저 도망하여 해도( 海 島 )에 숨어 버려 온 도( 道 )의 사람으로 하여금 소문만 듣고 흩어지게 하였고 여러 고을이 허물어지게 하였습니다. 판관 목전( 睦 詮 )은 성을 버리고 도망간 죄가 조인득과 다를 것이 없는데 아직도 관작( 官 爵 )을 보전하고 있고 이번에 또 중가( 重 加 )를 제수하셨으므로 물정( 物 情 )이 더욱 통분하게 여깁니 다. 아울러 개정하게 하소서. 하니, 답하기를, 황정욱 등의 일은 이미 하유하였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거가가 본도에 머물게 되면 방백 곤수 수령에게 가자( 加 資 )해 주는 것은 당연한 것이니 개정할 수 없다. 성( 城 )을 버린 사람이 어찌 그 사람뿐이겠는가. 진작에 그의 죄를 들어 파직시키기를 청했더라면 좋았을 것인데, 이 번에 가자를 인하여 거론하는 것은 온당치 않은 것 같으니 윤허하지 않는다. 하였다. 원전 22 집 98 면 분류 *왕실-행행( 行 幸 ) / *인사-관리( 管 理 ) / *인사-임면( 任 免 ) / *정론-간쟁( 諫 諍 ) / *사법-탄핵( 彈 劾 ) / *윤리-강상( 綱 常 ) / *군사-전 쟁( 戰 爭 ) / *외교-왜( 倭 )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9월 12일(계해) 삼우정 박경신 44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기사) 삼우정 박경신 2009.04.18 22:17 좌상 윤두수가 이 제독에게 가려하자 인견하여 위로하고 경성 수호 등을 논의하다 좌의정 윤두수가 제독의 군전( 軍 前 )에 나아가려고 하면서 아뢰기를, 신이 지금 직사( 職 事 )를 형편없이 처리했다는 것으로 군전에 나아가게 되었으니 한번 죽는 것밖에 다른 생각은 없습니다. 다만 선위( 禪 位 )하시겠다는 전교를 받고부터는 온편치 않다는 생각이 들어 염려를 금치 못하겠습니다. 지금의 국가 일을 보면 큰 병을 앓는 사람과 비슷하여 기식( 氣 息 )이 위축되고 지쳐 생사( 生 死 )를 알기 어렵습니다. 그런데 어찌 먼저 동요하여 명백( 命 脈 )을 손상 하게 할 수 있겠습니까. 십분 안정하셔서 군정( 群 情 )이 실망하거나 민심이 놀라지 말게 하시며, 또한 이 지역에 와 있는 명나라의 장상( 將 相 )들로 하여금 해괴하게 여기지 않도록 하소서. 신이 떠나면서 염려됨을 금치 못하여 감히 이와 같이 구구하게 아뢰니 황공스럽기 그지없습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나의 민망함은 경보다 심하여 하루라도 이 자리에 앉아 있을 수 없다. 이 일은 끝내 막기만 해선 안 되니, 이것이 어떠한 일인 데 말만 하고 그만둘 수 있겠는가. 다만 지금 경이 여기를 떠난다면 이곳에는 대신이 없으니 대사( 大 事 )를 거행하기가 어려울 듯 하다. 내가 우선 죽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기다리겠다. 명나라 장수의 패( 牌 )를 보니 놀라움을 금치 못하겠으며 그 까닭을 모르 겠다. 그리고 나로 하여금 안주( 安 州 )로 진주하라고 했으니 만일 빨리 진주하지 않으면 아마도 책노( 責 怒 )가 있을 듯하다. 나도 18일에는 정주( 定 州 )로 나아갈 것이다. 하고, 인해서 윤두수를 편전( 便 殿 )에서 인견하였는데 승지 유근( 柳 根 )이 입시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어제 패문( 牌 文 )은 무슨 뜻인가? 하니, 윤두수가 아뢰기를, 생각하건대, 양식과 꼴이 준비되지 못하고 적의 우두머리가 탈출하였기 때문에 이 노여움을 산 것입니다. 때문에 술을 실컷 마시며 스스로 즐긴다. 는 등의 말이 있는데, 임세록( 林 世 祿 )의 말에 대군( 大 軍 )이 전진할 때에 비자( 婢 子 )가 수행한 적이 있 었다. 고 했습니다. 군중( 軍 中 )에는 여자를 꺼리는데도 이 사람이 데리고 갔으니 매우 거리낌이 없는 것입니다. 하고, 유근이 아뢰기를, 제독의 수행인인 이연경( 李 延 慶 )이 데리고 갔다고 합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이 당시 여러 신하들 중에 마음대로 술을 마시면서 스스로 즐기며 사가에서 편안하게 지내지 않는 자가 거의 없 었다. 견책( 譴 責 )이 이르자 바로 이연경에게 죄를 돌렸는데 이연경은 일개 무지한 무부( 武 夫 )이다. 비록 실로 이런 일이 있었다 하더라도 어찌 엄하게 책망할 수 있겠는가. 애석하다. 식견이 있는 사람도 이 율( 律 )에서 벗어나지 못하는데 단지 이연경으로 책 임을 메우려 하니 원통하지 않은가. 상이 이르기를, 소모관( 召 募 官 )들도 기생을 태우고 갔다고 한다.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기타는 듣지 못했으나 허유( 許 )란 자가 기생을 태우고 다니며 여러 고을에 폐단을 끼쳤다고 합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그렇다면 어찌하여 허물을 대신에게 돌렸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책임이 대신에게 있으니 그 허물을 돌리는 것은 당연합니다.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5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준( 李 準 )이 어찌하여 영유( 永 柔 )에 누워 있는가? 하니, 유근이 아뢰기를, 병이 어떠한가는 모르겠지만 영유는 순안( 順 安 )의 직로( 直 路 )가 아니니 매우 이상스럽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우리 나라 사람들은 직접 수고하지 않으려고 한다. 심지어 양식과 꼴을 나누어 주는 것을 욕되게 여겨 직접 하지 않으니 이것 은 무슨 까닭인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신이 재상의 지위에 있으면서 잘 단속하고 경계시키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일( 李 鎰 )의 일은 알 수 없다. 평양을 토평한 뒤에 어찌 한 차례의 치계( 馳 啓 )도 없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이일은 문장이 모자랍니다. 하고, 유근은 아뢰기를, 문서로 보고하는 등의 일은 박경신( 朴 慶 新 )에게 위임하였는데, 박경신이 체임당하였기 때문에 이와 같은 것입니다.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어제 전교를 내리신 뒤로 상하의 모든 사람들이 민망하고 답답하게 여깁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상하가 어찌 간격이 있겠는가. 내가 숨기지 않고 말하겠다. 예로부터 제왕 중에 멸망하여 파천한 자가 어찌 한 둘이겠는가마는 회복한 뒤에 물러났다는 것은 듣지 못하였다. 그러나 내가 물러나려고 하는 것은 이 때문이 아니다. 나는 본래 잔약하고 용렬한 사람으로 단지 껍데기만 있고 그 속이 비어 아무리 힘쓰려 해도 할 수 없다. 지난날의 경우는 나라의 일이 마침내 어떻게 될지 몰랐기 때문에 뜻을 이루지 못했지만 지금의 경우는 회복하는 형세가 있으니 그대로 무릅쓰고 있을 수 있다. 다만 대신이 없으니 거행할 수 없어 우선 뒷날을 기다리는 것이다.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큰 난리를 겪은 뒤에 스스로 노력하신다면 위태로움을 도리어 편안하게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은 아무리 물러나려 하셔도 물러날 수 없을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이곳에 온 뒤로부터 행동거지가 전도되고 음식도 한두 숟갈만 뜨니 단지 죽지만 않았을 뿐이다. 당( 唐 )나라 일로 말하면 현종 ( 玄 宗 )이나 숙종( 肅 宗 )은 말할 것이 못되나 대종( 代 宗 ) 덕종( 德 宗 ) 희종( 僖 宗 )은 모두 파천하였으며 전조( 前 朝 )의 현종( 顯 宗 )도 파천한 임금이다. 내가 이것으로 혐의스럽게 여기는 것이 아니고 기력( 氣 力 )이 미치지 못해서일 뿐이다. 하였다. 두수가 아뢰기를, 당 태종( 唐 太 宗 )은 내가 그 수고를 담당하여 편안한 것을 네게 물려주었다. 고 하였습니다. 그러니 지금은 신민의 소망을 따 르시어 조종의 기업을 재조( 再 造 )하셔야 합니다. 만약 한결같이 사피( 辭 避 )만 하신다면 군신들이 모두 해이될 것입니다. 하니, 상이 이르기를, 조정에 대신이 한 사람도 없으니 어떻게 해야겠는가? 하자, 두수가 아뢰기를, 정주( 定 州 )에 진주하여 양궁( 兩 宮 )이 함께 모이시는 것이 옳습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이곳의 일은 비변사와 함께 의논하여 조처하고 가는 것이 가하다. 하고, 상이 이르기를, 이 지역에도 선성( 先 聖 )의 묘( 廟 )가 있으니 알현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이것은 회복하는 근본이고 군신의 의리도 여기에서부터 나올 것이다. 한 고조( 漢 高 祖 )는 전쟁하는 즈음에도 오히려 태뢰( 太 牢 )로써 제사를 지냈으니 내가 마땅히 몸소 제사를 지내겠다.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6

그리고 시재( 試 才 )하여 사람은 뽑아 먼 지방의 사람으로 하여금 향교( 鄕 校 )의 존엄함을 알게 하는 것이 어떻겠는가?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알성하고 시재하는 것은 매우 성대한 거사입니다. 하였다. 상이 이르기를, 지금 상황으로 말한다면 경성( 京 城 )을 수호할 수 있겠는가? 평소에는 단지 성자( 城 子 )만 있는데, 갑자기 변고를 만난다면 어찌 대적할 수 있겠는가? 들으니 북경( 北 京 )은 평상시에도 무기를 상설한다고 한다. 하니, 두수가 아뢰기를, 경성은 실로 수호할 수 없습니다. 하였다. 사신은 논한다. 도성은 종묘와 창름( 倉 廩 )이 있는 곳이고 백관과 군민( 軍 民 )이 모이는 곳이므로 성지( 城 池 )의 튼튼함과 갑병( 甲 兵 )의 많음이 어느 곳이 이보다 낫겠는가. 그러니 한 걸음이라도 여기서 떠나면 선인의 강토를 나에게서부터 잃어버리는 것이다. 만약 성안의 사람으로 도성을 지키며 팔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기전( 畿 甸 )에다 진을 치고 군율을 엄격하게 하여 군사들의 마음을 결집시켰다가 적이 도성을 핍박하면 기전의 군사들은 그 뒤를 의논하게 하고, 적이 기전을 나누어 공략하면 경성( 京 城 )의 군사가 그 후미를 공격하게 하여 서로 성세( 聲 勢 )를 만들어 군사를 휴식시키며 번갈아가면서 출동시킨다면 멀리서 깊숙이 들어온 적이 양식은 떨어지고 군사는 피로하여 저절로 쓰러져 죽을 것이다. 이것을 생각하지 않고 한번 충주( 忠 州 )에서 실패하자 곧 도성을 버렸고, 재차 한강에서 무너지자 곧 송경( 松 京 )을 버렸으며, 세 번째 임진강에서 패배하자 곧 기성( 箕 城 )을 버려 난여( 鑾 輿 )가 마 침내 삭막한 들판에 피했으니 땅은 이미 다하여 단지 한줄기 압록강( 鴨 綠 江 )만이 가로막아 있을 뿐이다. 다행히 저 큰 하늘이 화 란을 내린 것을 뉘우치고 귀신이 정성을 쏟아 마침내 흉악한 적으로 하여금 평양성에서 더는 진격할 수 없게 하였으니, 이것은 하늘이 돌본 것이다. 가령 적이 안정( 安 定 ) 사이에서 날뛰며 서쪽으로 향하여 곧장 진격하였다면 외로운 의주성을 공격하여 함락 시키는 것은 순식간일 것이니 난여가 한번 압록강을 건넌다면 우리의 산하는 적의 손아귀에 넘어가고 이씨( 李 氏 )의 사직( 社 稷 )도 의탁할 곳이 없게 되었을 것이다. 그러니 초야에 파천하다가 마침내 멸망당하는 것이 어찌 조종의 기업을 지키면서 국군( 國 君 )이 사직을 위하여 죽는다는 의를 따르는 것만 하겠는가. 믿을 수 없는 하늘에다 요행을 바라며, 죽을 힘을 다하고 떠나지 말라는 경 계를 준수하지 못했으니 오늘날 거가( 車 駕 )가 서쪽으로 순행한 그것도 위태로운 것이다. 이산해( 李 山 海 )가 앞서 그르치더니 윤두 수가 또 대의( 大 義 )로써 잘 변론하지 못하고 단지 상이 뜻을 따를 줄만 알아 겉으로는 비록 큰소리를 치지만 사실은 지킬 수 없다. 고 하였다. 신의 생각에는, 이 말이 만약 후세에 전하여진다면 천하의 사람들이 틀림없이 오늘날의 군신( 君 臣 )은 모두 적 을 보자마자 도망하여 피하는 것을 상책으로 삼았다고 할 것이니, 어찌 그르지 않겠는가. 사간원이 아뢰기를, 신들이 삼가 이 제독의 패문을 보니 유성룡과 윤두수로 하여금 앞으로 나아오게 하였는데, 이는 틀림없이 말먹이와 식량, 기무 ( 機 務 )를 의논하여 조처하려고 해서인 것입니다. 다만 행조( 行 朝 )에 다른 대신이 없어 지금 만약 나간다면 군국( 軍 國 )의 중대한 계책을 주장하여 결단할 사람이 없습니다. 그러니 유성룡으로 하여금 최황( 崔 滉 ) 김명원( 金 命 元 )과 함께 주선하여 잘 처리하도 록 하시고, 또 이 뜻을 명나라 조정에 이자( 移 咨 )하소서. 하니, 상이 이르기를, 명나라 장수가 부르니 가지 않을 수 없다. 하였다. 원전 21 집 606 면 분류 *왕실-국왕( 國 王 ) / *왕실-행행( 行 幸 ) / *외교-왜( 倭 ) / *외교-명( 明 ) / *군사-전쟁( 戰 爭 ) / *사법-탄핵( 彈 劾 ) / *정 론-간쟁( 諫 諍 ) / *교육-인문교육( 人 文 敎 育 ) / *인사-선발( 選 拔 ) / *역사-사학( 史 學 ) / *역사-전사( 前 史 ) / *역사-고사( 故 事 ) [주D-001]전조(( 前 朝 ) : 고려. 선조 26년 계사(1593, 만력 21) 1월 14일(기사) 삼우정 박경신 47